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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루틴과 징크스(1권) (1/23)

프롤로그 : 루틴과 징크스

젊은 피, 국내에 몇 없는 유럽 리그 유경험자, 내리꽂는 힘이 워낙 좋아 대학 시절 일찍이 국가대표로 차출됐던 될성불렀던 떡잎.

좀처럼 쉽게 볼 수 없었던 파워풀한 경기력과 그런 플레이 스타일 덕에 몇 년 전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배구 금메달 획득에 크게 공헌했던 레프트 공격수.

탄탄한 실력에 더 짙은 후광을 제공하는 빼어난 외모는 덤. 그러니 아마도 높은 확률로 차세대 국내 배구의 간판이 될 스타 플레이어.

“…….”

이 모든 화려한 수식어를 차지하는 주인공, 승의 희고 긴 손가락이 왼쪽 복숭아뼈를 스쳤다. 흔들림 없는 눈빛은 정확히 발등의 정 가운데를 향했다. 리본 모양의 매듭을 풀어내는 손길엔 거침이 없었다.

멀쩡해 보이는데 저걸 왜 다시 풀어? 작은 구멍을 쑥쑥 빠져나가는 끈을 보고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불과 이틀 전 멀쩡히 잘 있던 걸 죄다 풀어내 공들여 길이까지 맞춰 가며 빡빡하게 꿰어 묶은 매듭이었다.

다 큰 어른이 웬 실없는 장난질을 다 하네. 언뜻 봐서는 덜 자란 아이들의 심술처럼 보였지만 멀쩡한 줄을 죄다 풀어내는 승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장난기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경기 시작 20분 전의 라커룸. 승은 언제나처럼 경기 때 신을 운동화의 신발 끈을 풀어 처음부터 다시 묶어 나가기 시작했다.

왜냐고? 이렇게 하면 그날 경기가 잘 풀리고 종국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물론 여기에 이론적으로 검증된 어떤 논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스스로가 그렇게 느낀다는 심증만이 있을 뿐.

발등을 기준으로 정확히 반으로 나뉜 채 거울로 비춘 듯 똑같이 줄어드는 양쪽 끈을 보고 있자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작은 구멍에 끈을 꿰어 넣는 마음은 흡사 비단 위에 무명실로 자수를 놓는 듯 경건하기만 했다.

“승아, 너 너무 꽉 묶는 거 아니냐. 서브 넣다 발등에 금 가겠다.”

반대편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승이 하던 걸 지켜보던 진석이 허허 웃으며 말을 걸었다.

“형, 오늘 이겨야죠.”

씩 웃으며 답하는 목소리가 다분히 천연덕스러웠다. 어차피 같은 선수끼리 다 알면서 뭘 새삼스럽게.

아니나 다를까 여태 쭉 뻗고 있던 허벅지를 가볍게 몇 번 주무른 진석이 옆에 있던 가방 앞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 빼놓지 않고 특정 브랜드의 초콜릿을 챙겨 먹는 걸 보면 진석의 사정 역시 말하지 않아도 알 만했다.

한입 크기의 바삭한 초콜릿 과자는 진석의 입 안으로 쏙 들어가 우적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 최승. 의지가 장난 아닌데?”

대학 졸업과 함께 야심 차게 시작했던 2년간의 해외 생활을 끝내고 국내 복귀를 결정한 게 불과 넉 달 전, 거기에 세부 계약사항들을 조정하느라 걸린 시간이 한 달 하고도 반 정도. 몇 번의 심사숙고를 거치고 협회가 정한 이적 규정을 착실히 따르며 앞으로 함께할 새로운 소속팀을 정한 게 바로 지난달의 일이었다.

“하긴 오늘 저쪽에서 너 하는 거 엄청 지켜볼 거니까….”

오늘은 승이 새로운 소속팀 세계건설에 입단한 이후 처음으로 경기를 뛰는 날이었다. 물론 지금은 비시즌이니 공식적인 전력으로 기록되는 경기는 아니고, 일종의 친선게임 같은 건데 솔직히 그것도 다 듣기 좋은 허울이었다. 두 달 지나 정규리그가 개막되면 곧바로 적이 될 경쟁팀 사이에 친선은 무슨.

“윤규석 감독이 너 견제하는 거 벌써 소문 다 났더라.”

“누가 그래요?”

“야, 그걸 누가 몰라. 인터뷰 때마다 입 털고 다니는 것만 봐도, 어후….”

오늘 경기는 승에게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 들어온 후 처음 하는 시합이니 일종의 첫 단추라고나 할까.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는 오래된 속담은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첫 단추를 잘 꿰매는 건 승에게 언제나 중요해 마지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중간 단추나 끝 단추에는 욕심을 덜 부리느냐. 당연히 아니었다. 승에게는 각양각색의 단추들에 모두 동일한 딱지를 붙이는 공평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잘해야죠.”

쉽게 말해 언제나 이기고 싶었다. 뭐가 됐든 결과에 승패가 달린 이상 승에게 져도 되는 게임이란 건 있어 본 역사가 없었다.

‘오늘 느낌이 좀 괜찮네.’

신발 끈을 다 묶은 승은 이번에는 신고 있는 양말을 정리했다. 어젯밤 깔끔하게 정리해 여전히 조금 날카로운 손톱 끝이 쫀쫀한 양말목을 가뿐하게 잡아 늘였다. 갑자기 괴한에게 습격당하는 불상사 따위가 생기지 않는 한 승은 경기가 있는 전날 저녁에는 빼먹지 않고 손톱을 정리했다.

왜냐고? 매끈하게 정리된 손끝으로 공을 만지면 경기가 잘 풀리고 종국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이번에도 검증된 논리 같은 건 없었다. 손톱의 길이가 승패를 좌우하는 큰 요인 중 하나라거나 손톱이 길면 리시브 범실률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 같은 걸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다. 이 또한 그저 스스로가 그렇게 느낄 뿐이었다.

네모난 손톱 아래 살짝 솟아오른 하얀 반달과 거스러미 하나 없이 잘 정돈된 손끝이 마음에 평안을 선사했다. 승은 오늘 시합이 원하는 방향대로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한층 더 짙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갑시다!”

우렁찬 목소리의 주장 진석이 제일 먼저 문을 열고 나섰다. 다가온 코치가 다른 선수들을 따라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승의 어깨를 작게 다독였다.

“뭐야. 카메라는 왜 있어?”

“형, 몰랐어요? 감독님이 오늘 뛰는 거 기록용으로 찍어서 양 팀 공유할 거라고 하시던데.”

경기 장소는 소속팀 세계건설 클럽하우스 내에 마련된 실내 연습장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감독을 중심으로 둘러 모인 상대 팀 선수들이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마지막으로 파이팅을 다지고 있었다. 비공개로 진행되는 비공식 시합이었기에 관중은 없었다. 차지한 인원에 비해 넓고 높은 공간에서는 모든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울렸다.

“일단은 연습 경기지만 연습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런 데서 보여 주는 게 결국 다 실전으로 연결되는 거야, 알지?”

“네!”

“넵!”

감독의 작전 지시에 짧고 낮은 대답이 여기저기서 다발적으로 들려왔다. 간략하게 되짚어 주는 초반 경기 전략을 들으며 승은 들고 있던 수건을 갰다. 팀 로고가 크게 박힌 남색 수건은 세트가 끝나거나 작전타임으로 소환됐을 시 선수들이 땀을 닦기 위한 용도였다.

코칭스태프와 후보 선수들을 위해 코트 밖에 쭈르륵 열 맞춰 놓인 간이 의자 위에는 승이 들고 있는 것과 동일한 수건이 벌써 몇 개나 널브러져 있었다. 쫑긋 세운 두 귀로는 감독이 하는 말을 경청하며 승은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스포츠 타월을 가로 방향으로 두 번 포개어 접었다.

왜냐고? 이렇게 반듯하게 접은 수건을 의자에 두고 시합에 임하면 경기가 잘 풀리고 종국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여기에도 논리적으로 검증된 어떤 논리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승이 확신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경험을 통해 얻은 지극히 개인적인 심증이 전부였으니.

네 귀퉁이가 모난 곳 없이 딱 들어맞는 모습에 묘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승은 그걸 네트와 가장 멀리 떨어진 의자 등받이에 가지런히 걸어 두었다.

“실수하지 말고, 범실 줄이고, 부상 없이, 알겠지?”

둥그렇게 모인 선수들이 중앙으로 손을 모았다. 순위에 반영되는 정식 경기가 아니라 그런지 분위기가 확실히 유했다. 길이가 짧동한 유니폼 바지에 손바닥을 몇 번 문지른 승 역시 살짝 웃으며 다른 선수들과 함께 손바닥을 겹쳤다. 목표를 되새기며 결의를 다지는 목소리들은 의외로 심플했다.

“저거 카메라 되게 잘 찍히는 거 알아?”

“진짜요? 생긴 건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

“이번에 저거 산다고 프런트에서 돈 많이 썼대. 저걸로 찍고 나중에 분석 프로그램으로 돌려 볼 거라고 하더라.”

이어서 양 팀 선수들이 하나둘씩 코트 안으로 발을 옮겼다. 텅 빈 좌석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카메라를 두고 동료들이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누었지만, 승은 카메라 대신 바닥을 주시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새하얗고 곧은 선이 코트와 바깥을 구분하고 있었다.

“…….”

승은 바닥에 칠해진 흰 선을 조금도 밟지 않으며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경기를 위해 맨 처음 코트에 들어설 때는 무조건, 무조건 아주 조금도 구분 선을 밟지 않아야 했다.

왜냐고? 시작할 때 금을 밟지 않고 코트에 입장하면 경기가 잘 풀리고 종국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놀랍게도 이번 역시 논리적으로 검증된 어떤 증거 같은 건 조금도 없었지만, 승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건 경기가 있을 때면 늘 그렇게 해 왔다는 사실뿐이었다.

자, 다시 처음부터.

젊은 피, 국내에 몇 없는 유럽 리그 유경험자, 내리꽂는 힘이 워낙 좋아 대학 시절 일찍이 국가대표로 차출됐던 될성불렀던 떡잎. 국내에서는 좀처럼 쉽게 볼 수 없는 파워풀한 경기력과 그런 플레이 스타일 덕에 몇 년 전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배구 금메달 획득에 크게 공헌했던 레프트 공격수.

탄탄한 실력에 더 짙은 후광을 제공하는 빼어난 외모는 덤. 그러니 아마도 높은 확률로 차세대 국내 배구의 간판이 될 스타 플레이어.

그리하여 경기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이상한 집착의 소유자.

“…….”

그게 바로 승이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제대로 세어 보면 수십 가지쯤 되려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버릇처럼 해 온 것들에 그날그날 컨디션을 따라 수시로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단발적인 것들까지 다 합하면 잘은 몰라도 아마 오십 개 정도는 거뜬히 넘을 거였다.

‘안 헷갈려?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만약 이처럼 황당하고 어이없는 규칙들을 알게 된 누군가가 아연실색한 낯을 하고서 제게 묻는다면 승은 아마 아래처럼 답할 터였다.

‘난 그냥 이기고 싶어.’

날카로운 휘슬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서브권을 따낸 상대 팀의 센터가 첫 세트 첫 서브를 넣기 위해 코트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나, 둘, 셋. 속이 뻥 뚫리는 타격 소리와 함께 공이 공중에 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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