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6
9회 초의 세 번째 아웃 카운트가 잡힌 순간. 관중석 곳곳에서 올라간 폭죽이 검은 하늘에서 터졌다. 너른 그라운드에 퍼져 있던 선수들이 다들 마운드로 달려왔다.
응원팀이 자력으로 시즌 우승에 달성한 순간. 관중석에선 비명이나 다름없는 환호가 터졌다.
와아아!
주변에서 터지는 환호성으로 귀가 먹먹해지는 동안, 이선은 폭죽이 쉼 없이 터지는 그림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학 시절, 축제에서 소소하게 터트리던 폭죽과는 차원이 달랐다.
포스트 시즌이라는 순위 결정전이 남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즐거운 걸까? 아직도 이선에게 야구팬들의 마음이란 이해하기 힘들었다.
폭죽이 지겨워질 무렵, 다시 그라운드를 내려다봤다. 선수들이 달려 나오고 있었다. 기쁜 날이니만큼, 이선은 눈을 크게 떴다.
‘희찬 씨는 어디 있을까?’
다 똑같은 옷에 모자까지 써서 찾기 힘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선은 대단한 속도로 강희찬을 발견했다.
그는 브로콜리 남자와 함께 더그아웃에서 그라운드로 향하고 있었다. 선수들 틈에 섞여 있어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남들과는 다른 느슨한 걸음걸이. 그리고 그의 곁에 있는 범상치 않은 헤어스타일의 후배는 빈 생수병을 마치 응원봉처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
후배는 기뻤는지 빈 생수병으로 강희찬의 등을 통통 두드렸다. 아무런 타격감이 없을 터치였다. 강희찬은 그저 뒤를 돌아 브로콜리 남자를 한 번 흘긋 보더니 무시했다.
현수막 뒤에서 도열 인사를 마친 선수들이 고개를 들었을 무렵이었다. 이선은 후드티에 점퍼까지 챙겨입은 강희찬과 눈이 마주쳤다.
“…….”
언젠가처럼 양손을 조금 위로 들어 살며시 흔들었다. 그때와는 달리 이번엔 자신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강희찬은 쓰고 있던 고글을 위로 올려 머리에 걸쳤다. 앞머리가 들려 올라갔지만, 꼴이 우습진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 머리를 넘긴 모습조차도 소년처럼 느껴졌다. 그는 소년다운 외모에 더없이 어울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붕붕. 머리 위에서 양손을 힘껏 휘젓는다.
‘희찬 씨도 참.’
괜히 민망해졌다. 정말 드문 행동에 주변의 관중석이 술렁였다.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든 이선은 흔들던 양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그러자 강희찬은 더욱 보란 듯이 팔을 붕붕 휘둘렀다. 결국 이선은 지고 말았다. 숨겼던 손을 다시 테이블 위로 꺼내 소심하게 그의 인사에 응답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만족한 웃음을 지은 그의 곁에 직원이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자세히 보니 핸드폰이었다. 정규 시즌 우승을 기념해, 그라운드에서 기념 샷을 찍는 다른 선수들처럼 그 역시 사진이라도 찍으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선의 예상은 빗나갔다. 사진을 찍는 대신,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올려두었던 이선의 핸드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출입증 있다고 했죠? 나가지 말고 안에 들어와서 기다려요.]
이선이 야구장에 들어왔을 무렵 잠깐 이어졌던 메신저의 대화 아래로 새로운 말풍선이 생겼다. 네, 알았어요. 차가운 밤공기에 얼어버린 손가락이 느릿하게 문자를 완성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아까 왜 인사를ㅇㅎㄹㄴ오]
어딘지 이상한 문자가 다시 한번 도착했다. 뭐지? 의아한 이선이 고개를 들었을 때, 어렵지 않게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응원단처럼 물병을 들고 있던 브로콜리 남자가 여전히 강희찬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핸드폰을 하느라 방심했던 그는 속절없이 브로콜리의 공격을 받았다. 홱 고개를 튼 그는 브로콜리를 사납게 노려봤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내놔.’
마치 수업시간에 핸드폰을 하던 학생에게 하듯.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손짓이었다. 하지만 브로콜리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제 의사를 표시했다.
빨리 내놔. 싫어요. 이걸로 때리실 거잖아요.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전개되었다.
강희찬의 인내심이 끊긴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위협을 느낀 브로콜리 남자가 도망을 친 것이 먼저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느새 추격전을 시작했다.
“하하. 저거 뭐야.”
“존나 웃긴다. 빨리 찍어. 올리게.”
“강희찬 개빠르네.”
브로콜리 남자는 이선의 예상보다는 훨씬 발이 빨랐다. 물론, ‘예상보다는’이었다. 그는 어느새 더그아웃 근처까지 도망친 채였다.
‘희찬 씨, 병으로 사람 때리고 그러면 안 되는데…….’
카메라가 점점 많아질수록 이선의 걱정 역시 깊어졌다.
아직도 밤하늘엔 폭죽이 쏘아 올려지고 있었다. 펑펑. 주변 아파트의 항의가 걱정될 무렵. 안타깝게도 브로콜리 남자는 강희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간 순간, 강희찬은 어렵지 않게 브로콜리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선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조용히 관중석을 나섰다.
* * *
관계자 외 출입금지.
대다수 사람에게 행동의 제약을 주는 문구였다. 특히 야구장에선 저런 문구가 붙는 공간은 관중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다. 손에 하나씩 노트북을 든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는 기자실, 직원들의 사무실, 그리고 경기장으로 연결되어 있는 선수들의 공간.
하지만 붉은 글자는 이선에게 어떠한 제약을 주지 못했다. 오관을 돌파하는 관우처럼 파죽지세로 입구를 넘어선 이선은 망설임 없이 선수들의 로커룸이 있을 방향으로 척척 걸음을 옮겼다. 그 누구도 이선에게 신분을 묻지 않았다. 경기장에 들어오기 전, 송재혁에게 받았던 출입증 목걸이 덕분이었다.
암행어사의 마패보다 든든한 출입증이 있었지만, 사실 이선이 이리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늘은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다. 선수들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엄마와 아이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혼자 거닐었다면 잔뜩 어깨를 움츠렸겠지만, 오늘은 이리도 동지들이 많았다.
홀로 내적 친밀감을 느끼며 걷던 이선은 저 멀리 벽에 기대 서 있는 강희찬을 발견했다.
“아, 희찬 씨!”
브로콜리와의 장렬한 싸움에서 당당히 이겼을 사람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머리칼이 흠뻑 젖은 그는 유니폼의 소매로 얼굴을 벅벅 닦고 있었다.
언제나 강희찬을 발견한 순간, 이선은 그를 향해 달려갔다. 비교적 최근 깨달은 자신의 버릇이었다. 자꾸 뜬금없이 자신을 데리러 와서 깜짝 놀라게 하는 그의 탓이라고. 그리 핑계를 대도, 반가운 마음에 빨라지는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헉.”
이번에도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를 향해 뛰려던 이선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강희찬의 미간도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뭐야. 왜요. 왜 안 와요?”
“희, 희찬 씨. 바지…….”
“아…….”
가는 손가락이 강희찬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강희찬은 대수롭지 않게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빨리 벗어버릴 셈으로 풀어헤친 벨트가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이선은 부자연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강희찬의 곁으로 다가왔다. 벨트는 고사하고, 유니폼 바지도 벗은 채 돌아다니는 선수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나. 이선은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도록 강희찬의 앞을 막아섰다. 어차피 이런 몸으로는 가려지지도 않는다.
의미 없는 몸짓에 강희찬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벨트를 매는 대신 바지 안으로 담아 입었던 유니폼 상의를 꺼내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상의로 풀어헤친 바지를 가렸다.
이선은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몸을 뒤로 물렸다. 여전히 ‘왜 바지를 똑바로 입지 않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기저에 깔린 채였다.
“샤워 좀 하고 나올게요. 도저히 그냥은 못 가겠어요.”
“왜, 왜 이렇게 젖었어요?”
“잡았더니 음료수 뿌리고 도망쳐서. 아무튼, 좀 씻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아, 네.”
“차에 먼저 타고 있을래요? 키 가지고 나왔는데.”
“저…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될까요? 재혁이한테 이것도 돌려줘야 하고.”
이선은 목에 걸린 출입증을 강희찬에게 내보였다. PRESS. 익숙한 단어가 눈을 스쳤다. 출입증에 새겨진 영단어의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그라운드에 들어오는 기자들의 출입증에 항상 쓰여 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정식 기자들의 야구장 출입증은 구단이 아닌 협회에서 나온다. 구단 마크가 새겨진 저 출입증은 구단에서 대학생 마케터나 학보사에서 나오는 학생들을 위해 따로 만든 것이다. 오늘은 한없이 겁박에 가까운 강희찬의 부탁을 받아, 송재혁이 사무실에서 몰래 슬쩍 해왔다.
어쨌든 얼른 들어가서 샤워하고 나와야지. 바지를 안 입고 다니는 놈이 지나간 게 벌써 다섯 번째였다. 이런 흉흉한 공간에 혼자 오래 둘 수는 없었다.
“그럼 여기 잠깐 있을―”
“야! 희찬아!”
묵직한 목소리 하나가 불청객처럼 끼어들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단 점퍼를 지퍼까지 채워 입은 강진호 단장과 그 뒤로 얼핏 보이는 인영. 송재혁이었다.
‘뭔 조합이야?’
야구단을 이끄는 단장과 말단이나 다름없는 직원. 생선회와 그 언저리에 항상 있는 알 수 없는 장식을 연상케 하는 조합이었다.
떨떠름한 표정인 강희찬을 향해 송재혁이 부쩍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자신을 찾는 강진호 단장을 직접 데려온 모양이었다. 쯧. 속으로 혀를 차는 강희찬에 비해, 이선은 처음 보는 거대한 중년 남자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강 단장은 어느새 강희찬의 앞까지 다가왔다.
“희찬이, 너. 혹시 포스팅은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
“그걸 왜 지금 물어보세요. 오늘 시즌 끝났는데.”
“그러니까 지금 물어보지. 너 이제 신청할 수 있잖아. 직원들은 눈치 본다고 말도 못 꺼내겠다길래 내가 대신 왔다. 에이전트는 보내고 싶어 할 거고……. 너는? 생각해 봤고?”
“생각 없습니다.”
“생각을 안 해봤다는 거야, 아니면 갈 마음이 없다는 거야?”
“갈 생각 없습니다.”
이 짧은 대화에 ‘생각’이라는 단어가 대체 몇 번이나 나온 걸까. 잠깐이나마 강희찬은 정신 붕괴가 오는 줄 알았다.
“왜 생각이 없어? 너 지금 스카우트 몇 팀이 호텔 잡은 줄 알아? 걔네 미국에서 비행기 잡고 단체로 날아오는 수준이야. 혹시 최 감독 때문에? 눈치 볼 거 없어. 얘기해 보니까, 아예 너 내년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떨떠름했던 강희찬의 얼굴이 점점 구겨진다. 대화가 황당하기가 이를 데 없다.
같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쳤을 때, 투수의 가치는 타자의 그것보다 높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투수의 성장 속도는 타자의 성장보다 느리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타자야 방망이가 맞지 않으면 천 번이고 이천 번이고 휘두를 수라도 있다. 하지만 투수는 실력을 올리고 싶다고 몇 번이고 공을 던질 수는 없었다. 섀도우 피칭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당연히 그 어떤 구단이든 투수는 귀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처럼 야구판이 좁은 나라에서는 더더욱.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강희찬은 남에게 엄격한 것 이상으로 본인에게는 더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좌완투수. 뭐 그딴 거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구단에서 먼저 보내고 싶은 위치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선수는 옮길 생각이 없다고 하고, 오히려 단장은 보내지 못해서 안달이다. 뭐 이딴 대화가 다 있단 말인가.
“…왜 보내려고 하세요? 안 가는 게 좋은 거 아닙니까?”
황당한 기색인 강희찬에 비해, 강진호 단장은 단호했다.
“당연하지! 넌 한국에선 다른 팀에서 못 뛴다. 그래도 미국은 가. 거기면 보내줄 테니까.”
“…….”
“설마 나중에 FA로 가려고?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어떻게 네가 그럴 수가 있어. 단호했던 얼굴에 슬슬 배신감이 차오른다. 피곤해지겠군. 좋지 못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이런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얼른 수습하고 자리를 피해야 한다.
“시즌 끝나고 에이전트랑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래. 너 진짜 팀 옮길 거면 해외로 가. 한국에서 팀 옮기면 우린 구단 버스, 재만 남아.”
나름대로 유머러스한 농담을 했다고 착각한 걸까? 강 단장은 홀로 껄껄거리며 사라졌다. 그 뒤에 남은 건 이도 저도 아닌 표정인 송재혁과 아무것도 모르는 이선, 그리고 피곤해진 강희찬이었다. 그는 씻고 나오겠다는 말을 이선에게 남기고 로커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송재혁을 한 번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재혁아. 이거.”
이선이 목에 걸고 있던 출입증을 빼내고 송재혁에게 건넸다. 아무래도 나올 때까지 이선과 함께 있어달란 얘기겠지. 송재혁은 멋대로 강희찬의 사인을 이해했다.
“근데… 희찬 씨, 팀 옮겨?”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단장과 에이스 투수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송재혁이야 전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선은 아니었다.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지만 대충 알아들은 바로는 강희찬의 팀 이적과 관련된 것만 같았다.
송재혁은 기지개를 쭉 켜며 벽에 기대었다. 내내 영상 편집과 업로드와 싸우던 피로가 뒤늦게 몰려왔다.
“포스팅? 그렇지, 뭐. 해외 진출할 거면 이제 할 수 있어.”
“포스팅……. 좋은 거야?”
“당연하지. 야구선수들 꿈 아니냐. 메이저 진출. 너, 축구 잘하면 유럽리그 가지?”
스포츠 신문을 따로 챙겨 보지 않아도, 뉴스에서 종종 들리던 스포츠 스타들의 이름 정도는 들은 바가 있었다.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랑 똑같은 거야.”
“아…….”
“일단 메이저리그에 한번 서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건데.”
“그럼… 가면, 보통 언제 와?”
“선수마다 다르지. 근데 누가 갈 때부터 돌아올 생각 하고 메이저 가겠냐. 거기서 아예 뼈를 묻고 은퇴할 각오로 가야지.”
“…….”
“야, 근데 벌써 강희찬이 포스팅을 쓸 수 있네.”
포스팅을 신청할 수 있다는 건 이제 얼마 지나면 FA 자격도 취득한다는 소리였다. 한국 나이로도 서른이 되기 전에 FA를 취득하는 좌완투수라니. 하나만 해야 좀 공평하지 않은가.
“거기서 4, 5년 버티고 온다고 해도 서른 언저리니까 한국 돌아와도 한창 전성기지. 진짜 고졸 신인이 깡패는 깡패……. 정 선생?”
에이스 투수의 나이와 경력을 새삼스레 되새기던 순간이었다. 홀로 중얼거리던 송재혁은 지나칠 정도로 이선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잘 못 알아듣더라도, 듣는 시늉이라도 하는 이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홀로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복도 바닥의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송재혁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이런, 씨발. 이놈의 주둥이는 진짜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몰랐다.
“야……. 그, 근데 아까 보니까 강희찬은 별생각 없어 보이던데, 뭐. 걱정 마.”
“…….”
“그리고 메이저리그는 우리나라보다 시즌도 빨리 끝나니까, 한국 들어와서 만나면……. 아니, 내 말은……!”
수습되지 않는다. 표정을 최대한 숨기려고 하고 있지만, 이선의 표정 역시 점점 어두워졌다.
적어도 어른이 되어서 만난 정이선은 기분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편이었다. 송재혁은 말을 하면 할수록 구렁텅이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발버둥을 칠수록 더 깊이 빠지는 늪이 이런 것이었다.
그때였다. 로커룸의 문이 열렸고, 지금 상황에서 가장 반갑지 않은 얼굴이 나온 것은.
“뭡니까? 아직 있었어요?”
왜 아직도 안 꺼지고 여기서 버티고 있는 거냐. 설마 같이 갈 셈은 아니지? 짧은 순간,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기색이 정확히 송재혁을 향해 꽂혔다.
녀석. 아까 쳐다본 건 같이 있어달라는 게 아니라 빨리 꺼지란 뜻이었구나. 그럼 분부 받잡는 수밖에 없지.
“아, 아니요. 이제 가려고요. 정 선생. 나 먼저 간다?”
“어? 왜? 밥, 같이 먹…….”
“네. 안녕히 가세요.”
이선의 말을 자르듯 강희찬이 끼어들었다. 드물게도 공손한 인사로 대화를 차단한 사람은 노골적인 축객령을 내리면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
“…….”
참으로 일관적이고 한결같은 녀석이었다.
* * *
먼지 하나 없는 좌식 테이블 위에 테이크 아웃 해온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이선은 집에선 흔한 믹스커피 하나도 마시지 않았다. 그런 건 학교에서 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왠지 건강이 신경 쓰여 우유라도 마실까 싶어 사면, 한참을 방치하다 반 넘게 버리기 일쑤다.
자취 경력이 쌓이면서 는 것은 살림 솜씨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였다.
가끔 강희찬이 냉장고를 채워줄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이선이 신경 써서 냉장고에 채워 넣는 것은 생수가 전부였다. 지극히 일반적이고 평범한 독거 남성의 특성이 아니던가.
하지만 강희찬은 언제나 이선의 냉장고를 열며 한숨을 쉬었다. 직접 잔소리를 하진 않지만, 백 마디의 말보다 한숨과 함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많은 말을 했다.
어쨌든 믹스커피도 없는 남자의 집에서 함께하기 위해, 두 사람은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왔다. 카페는 얼마 전 근처를 산책하다 두 사람이 함께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주변 아파트 아줌마들이 실내를 점령하고 있어서 언제나 테이크 아웃만을 이용했다.
그래도 이선은 가게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랬기에 강희찬은 흔쾌히 사인을 쾌척했다. ‘맛있습니다’의 통산 2호 사용도 함께였다. 1호는 물론 이선의 어머니 가게였다.
퍽 좋아하는 맛의 커피를 이선은 가만히 손에 쥔 채였다. 그저 멍하니 테이블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왜 그래요, 아까부터?”
휙휙. 커다란 손이 이선의 눈앞을 휘저었다. 깜짝 두 눈에 뒤늦게 이채가 돌아왔다.
“오늘 이상한데. 어디 아파요?”
“아니…….”
크기만으로도 위협적인 손바닥이 조심스레 이선의 이마에 올라왔다. 따뜻한 온기도 함께였다. 그는 언제나 이선보다 체온이 높았다. 항상 따뜻한 온기만을 나눠 주는 그의 손은 이선이 지금 열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혼자 고개를 갸웃하는 강희찬을 향해, 이선은 괜찮다며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억지로 웃는 것 같은데……. 미심쩍으면서도 얄팍한 미소에 안도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참으로 물러터졌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내일 끝나는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게요. 아침에도 내가 태우러 갈까요?”
“희찬 씨, 이제 합숙하지 않아요?”
“사흘은 쉬어요. 그다음부턴 호텔 들어가야 하지만.”
“그렇구나…….”
“이 얘기 아까 식당에서도 물어봤는데.”
“아, 미안해요.”
숨을 들이켠 이선이 잔뜩 울상이 되었다.
식당에서도 뭔가 이상하다고는 느끼고 있었지만, 아예 정신을 빼고 있었을 줄은. 어린애들의 쓸데없는 소리에도 허리까지 숙이며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강희찬은 불쾌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이 될 뿐이다.
“미안하라고 한 얘기는 아니고.”
“…….”
“진짜 무슨 일 있어요? 걱정되는데.”
이마를 짚던 손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으로 넘어갔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더욱 조심스럽게 머리를 매만졌다.
이선은 그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가 좋았다. 어릴 적, 아버지가 쓰다듬어주셨을 때 감각이 이랬던가? 체온이 높은 커다란 손은 언제나 그에게 기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했다. 온 얼굴을 그의 손바닥에 마구 비비적거리고 싶었다. 종종 그러긴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이선은 어른스럽지 못한 충동을 겨우 참았다.
“응?”
다정한 채근이었다. 이선의 마음이 그 한마디에 눈이 녹듯 풀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가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은 이선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으니까.
“희찬 씨.”
이름을 부르고도 말은 쉽게 나오지 못했다. 몇 번이나 달싹이는 입술을 강희찬은 인내심 있게 지켜보았다.
“희찬 씨… 미국 가요?”
“…그거였어요? 혹시 아까 계속 이상했던 것도 그거 때문에?”
이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내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던가. 속으로 제 인생을 반추하던 강희찬은 맥이 탁 풀렸다.
“…….”
“별거 아니에요. 그냥 햇수 채우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미국, …왜 안 가세요?”
다정하게 이선을 달래던 강희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공기마저도 얼어붙은 착각이 일었다. 서늘할 정도로 표정이 없는 강희찬이란 다른 이들에게는 익숙한 존재였지만, 이선에게는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움칫 몸을 떨었다.
강희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등 뒤의 침대에 삐딱하게 몸을 기대었다.
“질문이 뭐가 그래요. 왜 내가 갈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하는 것은 이선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자, 동글동글 귀여운 가마가 눈에 들어왔다.
“야구선수들은 다들 가고 싶어 한다고 그래서……. 꿈이라면서요.”
“누가 그래요?”
“…….”
“…카메라나 잘 들고 다니지, 뭘 아는 척이야.”
누구라고 말한 적 없는데……. 강희찬은 너무도 쉽게 이선의 정보통을 알아챘다.
“난 진짜 메이저 가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요. 나 같은 선수가 갈 곳도 아니고.”
“…왜요?”
“정 선생은 그럼 지금 교장 하고 싶어서 선생 하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왜 미국 안 가고 싶냐고 물어봤자 대답할 말이 없어요. 그냥 그런 거예요.”
“…….”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다. 강희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이선의 몸을 당겨 품에 넣었다. 꼭 맞춘 듯 쏙 들어오는 몸은 저에게 모든 것을 기대는 것 같으면서도, 강희찬이 모든 것을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턱 아래로 스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내가 왜 야구 시작했는지 말해준 적 있었어요?”
“아니요.”
“어릴 때, 키가 빨리 컸어요. 농구부 감독이 3학년 때부터 나이 되면 농구부 들어오라고 했거든요. 그게 귀찮아서 야구부로 갔어요.”
“…네?”
깜짝 놀란 이선이 고개를 들었다. 혼란스럽다는 얼굴이 강희찬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희찬 씨. 듣지도 않은 말이 자동으로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강희찬은 웃음을 누르며, 이선의 뒷머리를 조심히 쓸었다.
“어차피 그런 거예요. 남들보다 노력 안 했다고는 말 못 하겠는데, 그래도 메이저까지 바랄 만큼 간절하게 야구를 했던 것도 아니에요.”
“희찬 씨…….”
“정 선생 때문에 미국 안 가고, 그런 거 아니에요. 난 거기 갈 깜냥도 아니고.”
당장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만 같은 손길이었다. 말이 서툰 남자는 이런 식으로 이선을 달랬다. 그럴 때면 이선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제 의견을 관철하는 것 같으면서도, 강희찬이 언제나 먼저 살피는 것은 자신이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갈림길. 이선은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랬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강희찬에게 어쩌면 갈림길일지도 모르겠다고.
“희찬 씨. 그래도, 미국 가는 거…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선은 말했다. 말로 직접 꺼내봤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 말을 과연 자신이 하기를 원했는지는.
“그게 무슨 뜻인데요.”
“…….”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거예요?”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굳은 표정이 이선을 향했다. 이선은 강희찬에게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강희찬은 별다른 제지 없이 이선의 몸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낮은 목소리의 기저에는 감출 수 없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헤어지자는 말이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같은 말이에요. 내가 미국 가서 야구 한다는 게 그 뜻이에요.”
“왜 그렇게 말하세요. 저는 희찬 씨 미국 가도…….”
“뭐. 장거리 연애라도 하자고? 1년에 한 번 한국 들어오면 그때 만나요? 시차 따져가며 연락하고, 그마저도 휴식일엔 이동하느라 못 볼 때가 더 많을 텐데? 그러자고?”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과묵한 편인 사람답지 않았다. 인간관계가 좁은 정이선은 갈등에 취약했다. 누군가와의 갈등, 그것도 강희찬과 이런 대화는 버거웠다. 언제나 자신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니만큼 이선은 지금의 상황이 힘들었다.
“난 못 해요.”
씹어뱉는 말은 강희찬 자신을 향한 결심이었다.
“난 장거리 같은 건 안 해요. 내가 미국을 가면…….”
“…….”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말이 뚝 멈추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멈추었지만, 이선은 차마 그가 내뱉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미국을 간다면, 헤어지고 가는 거다.
가정이나마 이선에게 그 말을 하지 못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져서, 이선은 마냥 서러워할 수 없었다.
열 평도 되지 못하는 원룸에 앉아 있는데도, 그와의 사이엔 커다란 균열이 간 것만 같았다. 어떠한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던 때. 강희찬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내일 출근하죠? 데리러 올게요.”
“희찬 씨, 저 그냥 혼자…….”
“태우러 올게요.”
싸늘한 시선이 마지막으로 이선에게 떨어졌다. 더는 말하게 하지 마. 느껴지는 벽이 이선을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갈게요.”
결국, 그는 뒷모습만을 남긴 채 문을 나섰다.
끝까지 단 한 번을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을 보며, 이선은 차마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
서툴렀다. 자신은 언제나 서툴렀다. 그 서투름이 이번에도 상처 주고 말았다. 가장 상처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을.
* * *
초보 연인들의 첫 다툼이었다. 남들이 봤을 때야, ‘좋을 때네’라며 웃어넘길 수 있지만, 본인들은 한참 심각하여 매일 밤 베개를 눈물로 적시게 만드는 첫 경험이었다.
싸늘하게 돌아섰던 이후, 강희찬은 약속대로 다음 날 아침 집 앞에 나타났다. 주인을 꼭 닮은 완벽한 세단에서 내리는 완벽한 모습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려는 이선에게 그는 말을 막듯 거대한 빵 봉지를 건넸다.
‘가서 선생들이랑 먹어요.’
조금 딱딱한 말투였지만 이선은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갈등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이선과의 다툼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은 거라고.
강희찬은 꼬박꼬박 이선의 출퇴근을 담당했다. 이제 곧 호텔 합숙에 들어갈 거라고. 미안해하는 이선을 향해 말했지만, 미안함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긴 합숙을 앞두고 그가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이선은 차마 강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이선은 학교에서 짬이 나는 대로 야구 기사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스카우트 몇 팀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이 몇 명의 선수를 염두에 두고 한국의 포스트 시즌에 맞춰 입국했다는 관계자의 인터뷰가 기사 중간에 짤막하게 있었다. 하지만 댓글에서 나오는 이름은 오직 하나였다.
[몇 명이라니 그냥 강희찬 보러 왔다고 해라. 보니까 다들 선발 약한 팀들만 줄줄이던데.]
[강희찬 몇 살인데 벌써 포스팅이야. 스물여섯 아니었나?]
[1군 데뷔를 스무 살 때 했어요. 그때부터 풀로 규정 이닝 다 채웠음.]
[역시 될놈될. 선발 보장해 주는 데로 골라 가도 될 듯.]
요 며칠, 틈만 나면 스포츠 기사를 읽은 이선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강희찬은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대단한 선수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메이저리그는 자신이 체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무대라는 것도.
대단한 선수였다. 스무 살. 젖살이 채 다 빠지지 않은 어린 시절에도 모두가 지켜보는 무대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능력을 보였던 사람이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 하는 곳이 더없이 잘 어울렸다. 아직도 이선은 잘 체감되지 않지만, 주워들은 바로는 강희찬은 참으로 대단한 선수란다.
그곳이었다. 강희찬이 있어야 할 곳은. 그는 자신이 설 만한 무대가 아니라고 했지만, 이선은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만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떠한 기사를 보고, 영상을 보든. 그 끝은 언제나 같은 곳으로 귀결되었다. 온 우주에 홀로 남겨진 외로움이 이선을 덮쳤다.
미국에 가지 않는다고. 간다면 자신과 헤어지는 거라 엄포를 놓던 강희찬의 얼굴을 떠올려도 외로움이 걷어지진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강희찬의 합숙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날의 다툼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두 사람은 여전히 이선의 퇴근 이후 저녁을 먹었고 늘 가던 카페에서 커피를 샀다. 그리고 언젠가 왔던 원룸 근처의 공원에 나란히 앉았다.
“안 추워요?”
이선을 따라 시킨 단맛이 나는 따뜻한 커피를 한 입 마시던 강희찬이 물었다. 아무리 10월 초라지만 밤이 되자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반팔 티셔츠 위에 하늘색 남방만 덜렁 걸친 이선의 차림이 못내 신경 쓰였다.
뭔가 걸칠 것을 주고 싶은데……. 강희찬은 자신 역시 반팔 하나만 입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이런 병신같은 경우가.
“차에 담요라도 있나 찾아볼게요.”
“아, 아니! 괜찮아요. 하나도 안 추워요.”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강희찬의 옷자락을 이선이 급하게 붙잡았다. 물론 밤공기가 차가워서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 건 사실이었지만, 굳이 담요까지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강희찬은 미심쩍은 얼굴을 하며 이선의 차림을 살폈다.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요.”
“낮에는 더워서요.”
“그래도. 내일부터는 따뜻하게 입고 다녀요. 내가 아침에 데리러 가지도 못하잖아요.”
자신이 데려다주기 전에도 이선은 알아서 출퇴근을 성실히 했던 공무원이다.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강희찬은 괜히 이선이 입고 있던 하늘색 남방을 잘 여몄다. 아이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듯한 손길이었지만, 이선은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가만히 그의 손길에 몸을 내맡겼다.
“희찬 씨. 내일부터 호텔 가죠? 언제 가세요?”
“오후에 짐 들고 구장 가서 훈련한 다음에. 아침엔 시간 있는데, 내일 데리러 갈게요.”
“아니, 괜찮아요. 희찬 씨 좀 더 자요. 자꾸 저 데리러 오신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잖아요.”
열심히 숨기려고 했지만, 이선이 보지 않을 때마다 했던 하품을 들킨 모양이었다.
민망해진 강희찬은 괜히 손에 있던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 없이 기울인 종이컵에서 뜨거운 음료가 왈칵 쏟아졌다.
“아, 뜨……!”
입을 덴 강희찬을 향해 이선이 재빨리 티슈를 건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인 애새끼들을 돌보는 능숙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희찬 씨. 저번에… 미안했어요.”
후후. 누군가의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은 건지, 신중하게 커피를 식히고 한 모금 마신 이선이 어렵게 운을 떼었다.
“…….”
‘저번’이라는 게 굳이 언제인지 물을 것도 없다. 여전히 서로가 귀하고 소중한 연인들이 종종 어색하게 삐걱거리던 원인은 단 하나였다.
강희찬은 커피를 동아줄 삼아 도망쳤다. 학습능력이란 게 존재하는 영장류라 이번엔 한꺼번에 들이켜는 못난 짓은 하지 않았다.
“희찬 씨, 근데…….”
비어 있는 오른손 위로 조금은 싸늘한 기운이 덮였다. 가로등 빛이 번지는 이선의 손이었다. 낮은 체온을 알고 있는지, 날씨가 싸늘해지면서 이선은 강희찬에게 닿을 때마다 흠칫거리며 몸을 물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배려였다. 강희찬은 더욱 보란 듯이 이선의 손을 강하게 잡아채어 제 손아귀 안에 두었다.
드물게도 먼저 다가온 이선의 손이 얌전히 강희찬의 손을 잡았다. 크기 차이가 나는 탓에 ‘잡는다’기보다는 손을 얽는 쪽에 가까웠지만, 무엇이든 강희찬은 기꺼웠다.
“미국 가는 거, 포기 안 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얘기만 아니라면.
“이 얘기 저번에 끝난 거 아니었어요? 아직도 해야 해요?”
“화내지 말고 들어주세요.”
“화날 소리를 해놓고, 화내지 말라는 건 무슨 경우예요. 저번에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다시 말 꺼내는 건 무슨 뜻인데요. 장거리 연애라도 하자고요?”
“…….”
“나 내일부터 합숙해요. 몇 주 있으면 코시고. 정 선생이 이러면 나 진짜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 해요. 밤마다 호텔 나오는 꼴…….”
“같이 있고 싶어요.”
“…….”
“같이 가고 싶어요.”
보통 사람보다 색이 옅은 눈동자가 간절히 강희찬을 올려다보았다. 진심을 알아달라고. 표현이 서툴고 느린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하고 있었다.
기다리겠다고. 타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장거리 연애를 해보자고.
꿈속에서 만났던 이선은 언제나 그런 말을 했다. 꿈이라고. 그냥 꿈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이선의 얼굴을 보고 나면, 깨고 난 후에도 불쾌감은 퍽 오래갔다. 당장 이선의 집으로 달려가 얌전히 집에서 나오는 이선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런 말은 그 어떤 상상 속에서도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한 강희찬은 몇 초 동안 무방비한 채였다. 멍하던 정신을 뒤늦게 다잡았다.
“내가… 잘 몰라서 물어보는데요.”
“네에.”
“혹시 공무원이 휴직을 몇 년이나 할 수 있어요? 육아휴직, 그런 거 말고.”
연봉이 조금 높을 뿐인 비정규직인 자신과는 달리, 공무원은 이런 쪽으로 복지가 좋은 편인가. 강희찬의 궁금증은 금세 해결되었다. 이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동시에 강희찬의 미간 역시 구겨졌다.
“그럼… 무슨 수로 같이 오겠다고?”
“…….”
“…….”
이선은 말을 내뱉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는 강희찬을 향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육아휴직은 개뿔.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 교사였다. 그런 이선이 자신을 따라 미국에 올 방법은……. 머리에 남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학교 관두겠다고? 지금 그 얘기 하는 거예요?”
끄덕. 이번엔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아니길 바랐지만, 예상 그대로인 대답이 나오자 강희찬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소 껄끄럽다는 이유로 그날의 화제를 피했더니, 이렇게 될 줄이야. 손은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이마로 향했다.
“무슨 말을…….”
“…….”
“혼자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요? 내가 그때 말했잖아요, 난 미국 갈 생각 없다고. 몇 번이나 더 얘기해야 믿어줄 건데요?”
“나중에…….”
가라앉은 밤공기는 그 어떤 작은 소리라도 방해하지 않는다. 당장 꺼질 것 같은 이선의 목소리 역시 어떤 방해 없이 강희찬의 귀에 꽂혔다.
“진짜 나중에… 희찬 씨가 나 때문에 미국 못 갔다고 생각하면, 너무 미안할 것 같아요.”
“…….”
“희찬 씨가 야구장 볼 때마다, 후회하는 거 아닐까. 조금이라도 원망하지 않을까. 그러면 저는…….”
“정 선… 선아. 선이야.”
어느새 커다란 눈에 물이 고였다. 당장이라도 바닥으로 툭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다.
강희찬은 재빨리 이선의 어깨를 잡았다. 가뜩이나 마른 몸에서 며칠 사이 더 살이 내린 듯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왜 혼자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요.”
“…….”
“학교 관두고 나 따라오면. 그러면 나는 안 미안해요? 직장 관두고, 나만 보고 미국 가겠다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해요. 미국 간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고.”
“…….”
“지금처럼 1군 보장받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여기서야 강희찬이지 거기 가면 그냥 신인이에요. 주는 기회 못 잡으면 마이너 강등돼서 언제 올라올지도 모르고.”
그 어떤 신문기사도, 댓글도 이야기해 주지 않은 사실이었다. 현실은 잔혹했다. 이선을 겁주려고 일부러 과장하여 말할 필요도 없었다. 빅 리그의 현실이 지독히도 잔인한 것이었으니.
“메이저에서 버틴다고 해도 지금처럼 자주 볼 수 있는 줄 알아요? 휴식일엔 무조건 이동이에요. 몇 주 동안 집에 못 들어오는 일도 다반사예요. 나 따라서 미국 간다는 게 그런 뜻이라고.”
“그래도……!”
“…….”
“그래도… 같이 있고 싶어요. 희찬 씨랑.”
투둑. 결국, 아슬하게 걸려 있던 눈물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가슴이 아리는 광경을 오롯이 눈앞에 둔 강희찬은 말을 잃었다. 여리디여린 이선은 주먹까지 꼭 쥔 채, 온 힘을 다해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희찬 씨랑 같이 있을래요. 윽……. 희찬 씨랑…….”
결국, 울먹거리는 이선을 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선의 얼굴을 제 가슴에 파묻고 강희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걸 다 버리고, 저 하나만을 보고 함께하겠다는 사람의 진심은 저에게는 너무 과분했다. 어떤 고생을 할지도 모르는데. 법으로 묶일 수도 없는 남자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이선의 말에 가슴이 아렸다. 눈가가 흐릿해졌다.
“왜 내 생각은 안 해요?”
“흐으… 윽…….”
“학교 관두고 나 따라오게 하면. 그러면 나는 안 미안해요? 나는 뭐 괜찮을 것 같아요?”
“그, 그래도……. 윽… 희찬 씨가, 참아주세요.”
품에서 뭉개지는 소리였지만, 뜻은 정확히 전달되었다. 어느새 강희찬의 등에 팔을 두른 이선은 눈물이 쏟아지는 얼굴을 강희찬의 품에 마음껏 비비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래도… 이번에는 희찬 씨가……. 희찬 씨가 져주세요.”
눈물을 다 훔쳐낸 것인지, 이선이 품에 안긴 그대로 고개만을 들었다. 마주한 두 눈이 토끼처럼 발갛다. 자신의 눈도 별반 다르지는 않으리라.
방금까지 훌쩍거렸던 주제에, 이선은 강희찬과 눈을 마주치자 ‘헤’ 하고 멍한 웃음소리를 냈다.
“…….”
초여름의 내리쬐는 햇살. 적막이 감도는 그라운드. 그 중심에 섰던 푸른 유니폼의 사내는 무력한 삼진으로 강희찬을 돌려세웠다.
도무지 떨쳐 낼 수 없었던 열패감의 시작.
모자를 눌러쓴 탓에 입매만 겨우 보이는 사내의 얼굴이 이선의 얼굴 위로 겹친다. 하지만 이내 사라지고야 만다.
‘삼진…인가.’
이번에도 삼진아웃이었다. 하늘색 셔츠 위로, 발개진 눈과 물기가 이리저리 번진 말랑한 뺨이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그렇군. 삼진이었다. 이번에는 열패감과는 전혀 다른, 인생의 전부가 될 삼진아웃이었다.
“미국…….”
“…….”
“올해 말고, FA 따면. 그때도 정 선생 생각이 변한 게 없으면, 그땐 같이 가요.”
“희찬 씨…….”
“한국에 있는 동안 매일 만나고, 정 선생도 학교 열심히 다니고. 그리고…….”
“…….”
“은퇴하면 내가 정말 잘할 테니까…….”
고집스레 매달려 있던 눈물이 결국 강희찬의 뺨을 타고 내려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봤다는 듯. 이선의 눈이 커다래졌다.
언젠가, 이선에게 자신과 함께 평생 있어달라는 말을 하는 자신을 상상한 적은 꽤 있었다. 상상 속의 자신은 품에 그러안기도 힘든 꽃다발을 내밀기도 했고, 한물간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이선의 앞에 무릎을 꿇기도 했다.
어떠한 상상 속에서도, 이렇게까지 꼴사나운 자신은 없었다. 평생 잊지 못할 만큼 멋있기는커녕 질질 눈물방울이나 짜며 하는 말이라니. 이렇게까지 폼이 안 날 수가 있다니.
하지만 본능적인 감각으로 살아온 강희찬은 지금 이 순간임을 깨달았다. 지금이었다. 비록, 평생에 걸쳐 이선에게 놀림을 받더라도……. 지금 해야 할 말이었다.
“나랑 같이 가줄래요?”
당신의 인생에 나란 사람을 넣어달라고.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이선의 얼굴에 어느새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이번엔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눈물로 얼룩진 프러포즈의 밤이 깊은 입맞춤으로 번지는 것도 금세였다. 아무도 없는 두 사람만의 밤. 앞으로도 이어질 서로만이 존재할 미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