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5
야구장이란 야구 경기가 끝나도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은 아니었다.
“사인해 주세요!”
“사진 한 번만 찍어주세요.”
퇴근하는 선수들이 한 명씩 나올 때마다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모였다. 선수 한 명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원의 크기는 제각각 달랐다. 잘 모르는 이선이라도 그 이유는 알 수 있다. 아마도 인기에 비례하여 원의 크기가 커지겠지.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다.
“죄송합니다. 선수들 지나갈게요.”
그들 곁에는 선수들만큼이나 풍채가 건장한 형님들이 함께였다. 왠지 형님은 아닐 것 같지만, 그래도 이선은 그들을 형님이라 부르기로 했다.
주차장 기둥에 기대어 정신없는 광경을 한참 보던 이선은 쥐고 있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3분 전에 받았던 메시지가 그대로였다.
[금방 나갈게요.]
그는 언제나 이렇게 자신의 동선을 알렸다. 귀찮을 법도 한데. 물어보기도 전에 먼저 말을 해주는 배려는 명치께를 간지럽혔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괜한 말을 하면서도 이제는 미리 말해주지 않으면 서운할 것 같다. 너무 다정한 강희찬 때문에 자신은 점점 못 쓸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조를 하면서도 미소가 번질 무렵이었다.
“강희찬이다!”
저 멀리서 누군가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흘러왔다.
이선은 고개를 반짝 들었다. 큰 키를 가진 사람이 막 입구를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흔들리다 제자리를 찾았다. 광고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에이씨, 강희찬이네.”
“…한번 가볼까?”
“됐어. 어차피 보지도 않을 텐데.”
이선은 날카로운 눈썰미로 대화가 흘러나오는 곳을 찾아냈다.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두 명. 둘 다 컵스의 홈경기 유니폼을 입고 야구공과 매직을 들고 있었다.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누가 또 나오는지 출입구를 지켜보는 사이.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아…….”
그리고 위화감의 정체를 금방 깨달았다.
‘…없다.’
어떤 선수가 나오든 그 주변에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둘린 원이 강희찬의 주변에는 없었다.
“…….”
왜? 대체 왜? 왜 희찬 씨 주변에는 사람이 없지? 아까 방금, 고릴라를 닮은 커다랗고 험악한 선수의 곁에도 엄청난 동심원이 그려졌다.
강희찬의 외모는 아무리 낮게 평가를 해도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종류가 아니었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그리고 야구가 끝나고 나오면 갓 씻은 뽀송뽀송한 모습이 소년 같기도 하다. 그런 희찬 씨에게 대체 뭐가 부족해서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 거기 있었어요?”
겨우 이선을 발견한 강희찬이 보폭을 넓히며 다가왔다.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피케티셔츠. 거기에 청바지. 왼쪽 손목에는 보호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착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당연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
“배고프죠? 아까도 보니까 뭐 안 먹는 것 같던데.”
“…….”
“선아?”
이선은 말없이 강희찬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팀은 강희찬이란 사람을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고 있었다. 우리 희찬 씨는,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희찬 씨가 얼마나 멋진데!
마치 ‘우리 애도 남들만큼은 해야 해!’라는 학부모의 마음이었다. 어디 가서 남들에게 지고, 꿀리면 안 된다고. 정이선의 인생에서 호승심이 발휘되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늦게 나와서 화났어요?”
그저 이선의 기분만을 살피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목전에 둔 채, 이선은 다짐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 * *
“저기… 있잖아요, 희찬 씨.”
쭈뼛쭈뼛. 양손을 등 뒤로 감춘 이상한 자세를 한 이선이 소파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꼼지락대며 가져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하기에,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강희찬은 직감했다. 드디어 궁금증이 풀릴 순간이라고.
사실 이 집에서 이선이 머물 때 필요한 어지간한 물건은 다 있었다. 잠옷에, 얼마 전 커플용 세트로 나온 전동칫솔, 그리고 여분의 속옷까지.
처음엔 백화점에서 부끄럽다고 싫다던 이선도 이젠 서랍에 나란히 자리한 저와 강희찬의 속옷을 그리 이상하게 보지는 않았다. 다만, 불가피하게 이런저런 것들이 묻었을 때는 기어코 세탁기를 돌리는 모습을 봐야 안심했다.
“네?”
어쨌든 강희찬은 시치미를 뗀 채 고개를 돌렸다.
이미 이선의 동선 따위야 다 알고 있었다. 이제 강희찬은 정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시야각을 넓혀 이선의 동태를 살필 수 있다. 주자를 견제할 때나 사용하던 능력이 이선에게까지 마수를 뻗친 것이다.
“저… 이거. 희찬 씨 거예요.”
이선은 어렵사리 손을 내밀었다. 저게 뭐지? 그렇게까지 숨겼던 정체는 코팅까지 해둔 종이 한 장이었다. 언젠가 봤던 포도송이가 예쁘게 프린팅된 채였다.
“뭐예요?”
“우, 우리 반 애들이 모으는 건데, 다 모으면 희찬 씨 선물 줄게요!”
“이거… 작년에 한라산인지 뭔지도 했었죠? 똑같은 그림으로?”
“어떻게 아셨어요?”
실내화며 칫솔이며. 잡동사니가 가득한 가방에서 구태여 꺼내서 보여주었던 기억이 났다.
한라산이 보여줬던 것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원래는 이런 그림이었군. 속이 빈 포도알을 본 감상은 별것 없었다. 작년에 한라산이 썼던 양식과 똑같다니. 이선은 역시 공무원이 맞았다.
“한라산이 보여줬어요.”
“산이 이름 박산이에요.”
“거기서 거기죠. 근데 이게 왜요? 이걸 내가 왜 모아요. 애새끼들이나 하는 거.”
팔랑팔랑. 아무것도 없는 앞뒤를 몇 번이나 뒤집어가며 봤다. 포도알과 ‘강희찬’이라고 박힌 이름뿐. 아무것도 없다.
심드렁한 기색인 강희찬에 비해, 이선은 눈에 띄게 어깨가 축 내려왔다.
“희찬 씨. 있잖아요……. 희찬 씨는 왜 사인 잘 안 해요?”
“그게 왜요?”
대체 뭐가 문제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이선은 포도알 판을 잡은 강희찬의 손을 꼭 붙들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강희찬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희찬 씨가 제일 멋지고, 야구도 잘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그 브… 아니, 후배분한테만 가니까…….”
“…….”
…그래서, 뭐?
당황과 의문이 뒤섞인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 반응에 이선은 오히려 더욱 기세를 굳혔다. 양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쥐었다.
“희찬 씨가 팬서비스해 주면, 사람들이 더 좋아할 거예요.”
“난 별로 필요 없는데요.”
“그, 그래도……!”
“이거랑 상관있어요?”
가늘게 뜬 눈이 포도알 스티커 판을 향했다. 차마 제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이선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는 탓이었다.
이선은 반색했다. 시큰둥한 기색인 강희찬에게서 조금의 틈이 보였기 때문이다.
“희찬 씨, 팬서비스 잘 해주면 하나씩 붙여요. 다 모으면 제가 선물도 드릴게요.”
“뭐… 딱히 필요한 거 없는데.”
“희찬 씨…….”
이선이 간절하게 강희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안 돼. 양아치를 개과천선시키는 은사님 같은 간절함이었다. 잠깐 포도알을 심드렁히 내려다보던 강희찬의 눈이 순간 빛났다.
“그럼, 소원 하나 들어줘요. 내가 이거 다 모으면.”
“…똑같은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선은 의심스레 몸을 슬쩍 물렸다.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했던 강희찬이 의외로 순순하게 나온 탓이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할 리가…….
강희찬은 기저에 깔린 의심의 기색을 기민하게 읽어냈다.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밀고 당기기다. 정확히는 ‘밀기’였다.
박신우의 지인이 대표인 에이전트에 투수진과 섞여 우르르 들어가기 전까지, 강희찬은 직접 연봉 협상을 했다. 첫 시즌이 끝나고, 신인 연봉 상승률로는 구단 최고 기록이라는 생색을 내며 내밀어지는 가계약서 앞에서도 그는 절대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뭐, 그때야 아무 생각이 없었을 때고.
강희찬 역시 이선과 마찬가지로 상체를 뒤로 뺐다. 그와 동시에 어깨를 으쓱했다.
‘난 아쉬울 거 없어요. 먼저 하자고 한 건 정 선생이에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기색에 오히려 조급해진 것은 이선이었다. 연봉 협상이라는 것 없이, 월급도 보너스도 나라에서 주는 대로 받아온 공무원은 협상 능력이라는 것이 전무했다.
“아, 알겠어요! 소원, 하나 들어드릴게요. 그럼 희찬 씨, 앞으로 사인 잘 해주실 거예요?”
“근데 내가 사인을 잘 해주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서? 매번 와서 볼 수도 없잖아요.”
“아… 그러네.”
“…….”
멍한 이선의 얼굴이 강희찬을 올려다보았다. 어떡하지. 고민하던 이선은 이내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크게 떴다.
“아! 그럼, 사인 말고 사진으로 해요.”
“네?”
“희찬 씨가 같이 사진 찍어주시면, 사람들이 SNS에 올리잖아요. 검색해서 나오면 스티커 하나씩 붙여요.”
이선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한 자신의 재치를 칭찬해 달라고 꼬리를 흔드는 것만 같았다.
“…….”
평소라면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며 머리를 쓰다듬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더 귀찮은 거잖아.’
사인이야 하루 날 잡고 갈겨버리면 하루만으로도 포도알을 다 채우고 남았다. 하지만 사진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일단 찍어주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게다가 찍어줘도, 인터넷에 올리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 아니던가. 어떻게 봐도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러면 되겠다. 그쵸?”
하지만 기쁘게 웃는 이선을 보자 불만은 목 안으로 밀려갔다.
…해야지, 뭐. 자신은 언제나 저 얼굴에는 약하지 않은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네.”
떨떠름한 기색을 한껏 숨긴 채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와 환한 미소를 짓는 남자.
협상 타결의 순간이었다.
* * *
“여기도 있네. 빨리 하나 더 내놔요.”
“아! 희찬 씨. 마음대로 뺏어가면 안 돼요.”
커튼을 활짝 열어둔 덕에 침실에는 한낮의 햇살이 듬뿍 내렸다. 침대 위엔 두 사람이 나란히 엎드려 있었다. 하나의 개체처럼 몸을 붙인 채, 그들은 강희찬의 핸드폰을 보았다.
휙휙. 재빠르게 넘어가는 화면에 이선이 정신없는 사이, 강희찬은 이선의 손에 있던 스티커 하나를 강탈했다. 그리고 재빨리 자신의 앞에 있던 스티커 판에 붙여버렸다.
“아… 희찬 씨.”
이선은 불퉁한 표정을 지은 채 강희찬을 흘겨봤다.
“왜요. 이 여자랑 여기. 또 있잖아요.”
“같은 사람이잖아요.”
“이 여자는 얼굴이 이만하잖아요.”
강희찬의 손이 얼굴 옆에서 움직였다. 얼굴이 저만하다고 어필을 하는 손짓이지만, 이선의 눈엔 그저 뻔뻔했다. SNS에서 해시태그 검색으로 찾은 그의 사진보다도 이러한 억지가 얻어낸 스티커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희찬 씨, 이렇게 그냥 막 가져가시고…….”
“나 진짜 사진 많이 찍어줘요. 출근할 때 주차장 한 번 와봐요. 거기서 30분 넘게 붙들려서 하는 게 사진 찍는 거예요. 근데 안 올라오는 걸 어떡해.”
한껏 억울한 기색에 이선의 마음도 다소 풀렸다.
그의 고생은 인정해 줘야 했다. 그는 이선과의 약속을 위해 평소보다 이르게 집을 나섰다. 오직 이 목적으로만 만든 SNS 계정으로 검색을 해보면, 점점 강희찬이 팬과 찍은 사진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건 이선 역시 뿌듯했다. 한편, 내심 궁금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모아요?”
커다란 포도송이 하나가 그려진 종이를 집문서보다도 더 자주 들여다본다. 그것도 모자라, 야구장에 갈 때도 들고 다녔다. 기겁한 이선이 왜 가지고 가냐고 물었다.
‘정 선생이 마음대로 스티커 떼버릴 수도 있잖아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불퉁하게 대답했지만, 이선은 속으로 뜨끔했다. 그가 출근했을 때, 저 스티커 판을 어디에 두었을까 찾은 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딱히 불순한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양심이 아팠다.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이제 추석 수당 나오니까 그냥 사줄게요.”
“그거 몇 푼 된다고.”
일반 회사처럼 들으면 입이 떡 벌어지는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받으면 삶이 윤택해진다. 물론, 강희찬과 만나게 되며 이선의 카드가 활약할 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긴 했지만.
직장인의 1년의 낙인 보너스가 가소로운 남자는 여전히 포도알 판을 소중히 쥐고 있었다. 완성까지 몇 칸 남지 않은 포도송이를 이선 역시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
역시 그랬다. 무언가 바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아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쥔 사람이 대체 무엇 때문에 포도알을 저리도 열심히 모은단 말인가.
“섹스 엄청 해야지.”
“네?”
이선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스치고 지난 말이 지금의 따뜻하고 밝은 햇살 아래 강희찬의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도, 참. 잘못 듣고 말이야. 이런 대낮부터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선은 편한 검은 티셔츠를 입고도 왕자님 같다고 생각했던 그의 얼굴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응. 그렇지. 애써 마음을 다잡은 이선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지듯 선포했다.
“섹스 존나 할 거라고요.”
“헉…….”
이선의 눈동자가 커졌다. 숨이 멈춤과 동시에 얼굴이 붉어졌다.
두 사람밖에 없었지만, 이선은 괜히 한 번 주변을 살폈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그의 침실이 지나치게 넓어서 더욱 민망하다.
그다음에는 괘씸함이었다. 이선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 침대 위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희찬 씨, 그런 마음으로……! 그런 생각으로 이거 모으고 있었어요?”
“네. 왜요.”
“어떻게 그런……. 저, 안 할래요. 돌려주세요.”
“그런 게 어딨어요. 계약서까지 썼으면서.”
“익…….”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맞는 말을 들으면 어딘지 화가 난다. 지금처럼, 강희찬이 여유롭게 몸을 뒤집으며 한쪽 팔로 제 머리를 받치며 편하게 눕는다면 더.
처음 포도를 모으기로 했던 날. 이선이 내민 새끼손가락에 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했던 후, 그는 재빨리 밖으로 나가 노트북을 가져왔다. 그리고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다.
‘이거…….’
‘계약서로 남겨놔야죠. 나중에 딴소리하면 어쩌려고.’
‘희찬 씨. 저 약속 잘 지켜요.’
계약서라고는 자취방을 옮길 때 봤던 게 전부다. 젊은 교사에게 ‘계약서’라는 물건은 별세계의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 차가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약속은 확실히 해야 한다는 그의 설득에 넘어갔다.
‘정 선생 말고 나요. 내가 나중에 딴소리할 수도 있잖아요.’
‘전 희찬 씨 믿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선은 그의 노트북 화면을 기웃거리며 적히는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말만 하더니, 나중엔 이런 말도 넣으면 어떨지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초봄 날씨보다도 변덕스레 바뀌는 태도에 강희찬은 아무 말 없이 이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계약서는 그가 어딘가에서 출력까지 해왔다. 차마 출처를 묻지도 못했다. 그저 제발 구단 사무실에서 몰래 뽑아온 것만은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
계약서에 각자 사인을 하고 한 부씩 보관했다. 이선의 계약서는 아직도 싱크대 서랍에 잘 있었다.
“이러려고 계약서 쓰자고 했죠?”
“글쎄요.”
“주세요!”
“어허.”
이선은 그의 몸 위로 다이빙을 하듯 몸을 날렸다. 포도 판을 빼앗을 목적이었다. 나름대로는 재빠른 동작이었으나, 강희찬은 여유롭게 팔을 뻗어 포도 판을 침대 밖으로 던졌다. 대신 제 위에 올라온 이선의 몸을 양팔과 양다리로 구속했다.
“놔, 놔주세요! 놔요! 희찬 씨, 나빠요.”
“정 선생님이 더 나쁘잖아요. 지금 뺏어서 버리려고 했죠?”
“윽. 희찬 씨. 왜 그런 말 해요.”
“내가 뭘? 하여간 저거 다 모으기만 해봐요. 못 해봤던 거 다 할 거니까.”
“…….”
팔다리가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계약서란,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인생의 진리를 배우는 대가는 몹시도 컸다.
* * *
“…….”
“빨리 붙여요. 뭐 해요?”
“…….”
당당하게 스티커 판을 내밀며 요구하는 모습이 꼭 작년의 산이 같았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참으로 닮은 구석이 많았지.
이선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면서도 결국 포도송이의 가장 끄트머리의 한 칸을 채웠다. 지금까지 정당하지 못하게 포도를 채웠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해시태그와 함께 그의 이름을 적어 검색했을 때 나온 사진들이 퍽 많았다.
“엄청 많잖아요. 그냥 봐도 스무 장이 넘겠네. 빨리.”
강희찬은 의기양양하게 직접 포도알을 채워달라 요구했다. 이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새끼들이나 모으는 포도를 이 나이 먹고 모으기 위해 얼마나 개같이 노력했던가.
처음 주차장 데뷔를 했던 날이 떠올랐다. 평소엔 파죽지세로 돌파하던 구간이었다. 햇수로만 7년째 다니는 직장이 몹시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왜 아무도 사진 찍어달란 말을 하지 않는 것인가.
차에서 내린 강희찬은 주차장을 둘러봤다. 익숙한 왕대가리가 언제나처럼 있었다. 이승주는 사인을 해주며 받는 군것질에 눈이 멀어 출근을 30분이나 일찍 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주제에 부지런도 하지. 그럴 거면 그냥 돈 주고 사 먹으면 그만인 것을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어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처음으로 이승주가 부러웠다. 저 근처에 있는 인간들이랑 사진 한 방씩 찍고 나면, 포도 한 줄은 그냥 채워지겠군.
강희찬에겐 사람을 세는 새로운 셈법이 생겼다.
그는 결국 먼저 움직였다. 찾는 선수가 아직 오지 않은 듯 두리번거리는 여자 둘에게 다가갔다.
‘헉! 아, 안녕하세요.’
‘헐.’
한 명은 애써 인사까지 했지만, 나머지 한 명은 뒷걸음을 치며 제 일행에게 꼭 붙었다.
‘…….’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사람을 봐놓고 마치 저승사자라도 마주한 것처럼. 빈정이 상했다.
당장이라도 출입구로 들어가 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강희찬은 입을 열었다.
‘사진 찍어줘요?’
‘…네?’
‘사진 찍어주냐고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매일 찾아오던 선수를 기다리다 폭탄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매번 쌩 지나가는 모습을 볼 뿐인 선수였다.
이곳 주차장엔 일종의 불문율이 있었다. 바로 강희찬에게 말을 걸지 않기. 숱한 이들이 상처를 받아오며 후세에 전한, 온돌에 버금갈 선조들의 지혜였다.
그 강희찬이 먼저 다가와서는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고 했다. 구단에 말해야 하나?
‘핸드폰 줘요.’
강희찬이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차마 제 손에 있는 핸드폰을 선뜻 내밀 수가 없었다. 주변을 살피니 모두가 이곳을 주목하고 있었다. 양손에 주렁주렁 간식 가방을 든 이승주까지 입을 벌린 채였다.
‘…….’
저건 대체 무슨 광경인가.
평소라면 진작 들어가서 로커룸까지 가고도 남았을 사람이 아직 주차장에 있었다. 게다가 선량한 시민에게서 핸드폰까지 강탈하려 하다니. 남의 핸드폰을 부수기라도 할 셈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한 번 주차장에서 어린애 하나를 울린 적이 있었지. 1년에 한 번 주차장에서 깽판을 부리는 루틴이라도 생겼나.
온 세상 사람들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희찬은 손을 약간 흔들며 재촉했다. 결국, 여자는 자신의 핸드폰을 희생했다.
‘…여기요.’
대체 뭘 하나 했더니, 강희찬은 대뜸 제 얼굴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의 주인도, 그녀의 일행인 여자도, 그리고 이승주까지. 그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
남의 핸드폰을 강탈해서 하는 짓이 셀카를 찍는 거였다. 이승주는 드디어 미쳐 버린 선배의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저 화상이 하는 짓을 똑바로 구단 사무실에 전해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화상의 진상 짓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올려요.’
‘네?’
여자들은 이제 울기 직전이었다. 야구장에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 오는 것이 이토록 큰 잘못이란 말인가.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 올리라고요. SNS에.’
‘…….’
‘해시태그 달아서.’
주차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 구단에서 이 새끼한테 팬서비스로 옵션질을 했구나. 사진이 올라올 때마다 십만 원씩 받기로 조항을 걸었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궁금해졌다. 그 연봉 협상의 신이 대체 누구인지.
어쨌든 그날 이후로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갔다. 인터넷에 우스갯소리로 올라오던 ‘옵션설’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팬들에겐 일종의 챌린지가 되었다. 강희찬에게 가서 사진을 요청하는 것으로 그날의 운을 점쳐 보는 사람도 있었다.
…포도송이는 그런 피눈물로 완성된 것이다. 이선은 모르겠지만. 그러니 강희찬에게는 정당하게 소원을 요구할 자격이 있었다.
“…….”
비장한 기세로 떼어낸 스티커가 결국 빈 곳에 붙여지며, 포도가 완성되었다.
“다 모았네요.”
“네. 소원… 말하세요.”
이선 역시 각오는 마친 채였다. 어쨌든 그는 내키지 않을 요구를 성실하게 이행해 주었다. 무서운 말로 사람을 겁주지만, 바라는 게 정말 그것이라면 못 해줄 것도 없었다.
강희찬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었다. 그가 어떤 것을 요구할지 몰라 인터넷에서 알아본 섹스에 대한 정보들이 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강희찬이 함께였다. 그것이 이선에게는 유일한 위로였다.
각오를 마친 이선이 눈을 질끈 감고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강희찬의 말을 기다렸다.
“나…….”
“…….”
“집에 한번 데려가 줘요.”
“…네?”
숨까지 참고 있던 이선의 맥이 탁 풀렸다. 저게 무슨 소린가. 자신의 집이라면 엊그제도 다녀왔는데. 며칠 전 충동적으로 사고 방치했던 이불 커버를 바꿔준 것도 바로 그였다.
“그거… 지금도 가잖아요.”
“말고. 수원 집이요.”
“…….”
“어머니… 뵙고 싶은데.”
이선은 말문이 막혔다. 한순간 들이닥친 침묵이 방 안을 감돌았다. 들리는 것은 흐트러진 숨소리뿐이었다.
“희… 희찬 씨, 그거…….”
순간 멈추었던 심장이 삐걱대며 다시 뛰었다.
“아, 안 그러셔도 돼요. 안 돼요.”
“선아.”
“희찬 씨가… 희찬 씨가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안 해주셔도 돼요.”
빠르게 내뱉어지는 말은 이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쥔 양 주먹이 이선의 불안한 상태를 대변하고 있었다.
“선아. 잠깐만.”
강희찬은 이선의 손목을 슬며시 잡고는 품으로 당겨 안았다. 심장이 터지는 게 아닐까. 고동이 온몸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제 샴푸 향이 풍기는 이선의 머리칼에 턱을 괴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마른 등을 안심시키듯 조심히 쓸었다.
“왜요. 어머니 소개해 주기 창피해요? 잘 꾸미고 갈게요.”
“그런 거 아니에요!”
이선의 목소리가 순간 높아졌다. 가당치도 않다고.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고. 품에 파묻히고도 격렬하게 흔드는 고개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희찬 씨가 왜 창피해요. 희찬 씨, 안 창피해요. 멋있어요.”
“그럼 왜. 난 뵙고 인사드리고 싶은데.”
“…….”
“우리 선이 고생 안 시키고 잘 데리고 살겠다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그 옛날, 조그만 강아지만 봐도 아빠를 찾으며 엉엉 울던 이선의 귓가를 스치던 목소리와 꼭 닮은…….
이선은 조심히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강희찬은 이선의 눈 밑을 엄지로 조심히 쓸었다. 물기가 묻어나왔다. 이선은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서워요.”
“왜. 뭐가 무서워요.”
잔뜩 겁을 먹었다는 사실은 이미 봐서 알고 있다. 하지만 이선의 입을 통해서 어렵사리 나온 진심을 강희찬은 비웃지 않았다.
“우리 엄마도, 그냥… 그냥 옛날 어른이세요.”
“…….”
“희찬 씨가 상처받는 거 싫어요. 희찬 씨가……. 저 싫어하게 되는 것도 싫어요.”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이번엔 조금 더 깊숙이 이선을 품에 넣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작은 몸은 언제나 불안으로 떨었다. 이럴 때마다 강희찬은 조금 더 이선을 일찍 만났다면 어땠을까, 라며 무의미한 가정을 했다.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예쁜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학창시절, 혼자 다녔을 이선의 곁에 서 있을 수 있다면. 그런 이룰 수 없는 바람은 강희찬을 무력하게 만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더 좋은 남자가 되게 했다.
“상처 안 받아요. 혹시 어머니가 막 욕하시더라도 괜찮아요. 우린 2 대 1이잖아요.”
“그게 뭐예요.”
생각해 보니 웃겼는지 이선의 어깨가 슬며시 흔들렸다.
이선은 쉽게 눈물이 맺히는 여린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또 자신의 곁에선 많이 웃는 사람이기도 했다. 좋지 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다 덮어버릴 거다. 먼 훗날이 되었을 때, 그런 상처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다고 했는데.”
“…….”
“하긴. 엉덩이에 뿔, 이미 났었잖아요. 난 게 아니라 박힌 거긴 해도.”
“희찬 씨는… 가끔 변태 같을 때가 있어요.”
“한 번에 알아듣는 쪽도 정상은 아니거든요. 나 몰래 이상한 거 막 보고 그러죠?”
“아, 아니에요! 안 그랬어요!”
파악. 강희찬을 힘껏 밀어낸 이선이 과할 정도로 부정했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정곡을 찔렀구나. 대체 뭘 본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했지만 그건 조금 미루기로 했다. 대신 강희찬은 이선의 손을 가만히 맞잡았다.
“자리 만들어줘요.”
“…….”
“나 소원인데. 이거, 포도 모으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
이선의 고개가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끄덕여졌다. 남은 불안을 해결하는 것은 오롯이 강희찬의 몫이었다.
“나, 안 싫어해요. 내가 왜 우리 선이를 싫어해요.”
“응…….”
“내 편 들어줄 거죠? 엄마가 나쁜 놈이랑 만나지 말라고 했다고, 거기에 쌩 붙어버리지 말구.”
“희찬 씨 나쁘지 않아요.”
“그래도. 내 편 할 거죠?”
어느새 기운을 차렸는지 이번엔 확실히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늘 경기 일찍 끝날 것 같으니까 대충 7시 8시 정도면 갈 수 있을 거예요.]
[희찬 씨, 근데 지금 시합 중 아니에요? 티브이에서 하고 있는데…….]
[네.]
[핸드폰 해도 돼요?]
[당연히 안 되죠. 지금 화장실 간다고 하고 로커룸에 몰래 와서 보내는 거니까 어디 소문내지 마요.]
“헉…….”
어쩐지 더그아웃을 찍는 중계 화면에 안 보이더라니…….
규칙과 규율이 엄격한 사회라고 했다. 공무원인 이선조차도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규칙이 있었지만, 강희찬은 그저 ‘원래 그래요’라며 받아들였다. 아마도 그게 인생의 절반 이상을 유니폼을 입고 살아온 선수의 숙명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어쨌든 그런 무서운 세상에 사는 강희찬이 이렇게 규칙을 어길 때마다 이선은 제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이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가구 배치 하나 바뀌지 않은 수원 집의 제 방이었다.
이선은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주방으로 향했다. 한 주를 통째로 가게를 쉬고 있는 어머니가 한창 저녁 준비 중이었다.
“엄마. 있잖아요.”
“응?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니. 이따 친구가 좀 늦게 올 수도 있다고 해서…….”
“응. 그래?”
이선의 어머니에겐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바로 아들이 휴가를 내어 집에 내려올 때는 가게를 쉴 것. 그리하여 어찌 보면 대목이라 할 수 있는 명절 연휴를 집에서 보낸 것이다.
월급은 비록 많진 않아도 어엿하게 자립한 아들을 둔 어머니의 새로운 결심이었다. 어릴 적부터 가게에만 매달리느라 아들에게 소홀했던 것을 보상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이렇게 쉬면 그만인 것을. 얼마나 돈을 벌겠다고, 외롭게 만들었을까. 그래도 여자는 늦은 시간 이선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일이 즐거웠다.
“그리고 고기 좀만 더 해주면 안 돼요? 불고기 있잖아요.”
정말 드문 요청에 잡채를 만들던 바쁜 손이 잠시 멈추었다가 아차 했다. 아들은 많이 먹는 편이라고는 절대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대놓고 음식에 투정하진 않았다. 오히려 먹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남기는 스타일이었지.
드물게도 오늘따라 이걸 해달라, 저걸 해달라. 함께 장을 보러 가자고까지 하는 통에 여자의 궁금증도 커졌다.
“누군데. 누가 오는데 우리 아들이 이렇게까지 해. 재혁이야?”
“재혁이 아니에요. 그, 그냥 친구…는 아니고, 후배 같은 사람.”
“어떤 후배길래 선이가 이렇게 신경 쓸까? 학교 사람?”
“아니요. 그냥 재혁이 통해서 아는…….”
남자친구. 그 한 단어는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강희찬에겐 자리를 만들어보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이게 한계였다.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고 말고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미리 알게 된 어머니가 혹시라도 강희찬에게 좋지 못한 소리를 하실까 봐.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했다. 아무리 자식이 게이라고 하더라도, 직접 집에 남자인 애인을 데리고 오는 것은 부모로서는 다른 차원의 충격일 테니까.
결국 이선은 식사 후, 강희찬이 돌아가면 어머니에게 말씀드릴 각오를 다졌다. 이것이 그가 생각한 최선책이었다. 자신이야 피를 나눈 어머니이니 어떤 말을 듣더라도 감내할 테지만, 강희찬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다.
“아무튼 맛있는 거 많이 해줘요. 운동해서 배 많이 고플 거야. 도울 거 있어요? 잡채 내가 섞을게요.”
“됐어. 이거 뜨거워. 이따 만들면 간 좀 봐줘. 엄마 요새 간을 잘 못 보는 것 같아. 선이, 과일이나 꺼내 먹어. 아저씨가 멜론 주셨어.”
“밥 먹고 먹을래요.”
“친구 줄 것도 있으니까, 그냥 먹고 있어. 잘라서 통에 담은 거 있어.”
“네.”
대학이 결정되는 순간부터 자취를 시작한 세월에 비해, 이선의 살림 솜씨는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다. 주방에선 가만히 있어주는 게 돕는 셈인 아들은 결국 홀로 식탁에 앉아 멜론을 먹는, 효와 불효의 그 사이의 역할에 충실했다.
냉장고를 열고 바로 보이는 곳에 있는 밀폐 용기를 꺼냈다. 식탁에 앉아 포크를 꺼내고 뚜껑을 열어 멜론 하나를 찍어 먹었다.
자취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과일과 멀어지게 된다. 기분으로 한 번 샀다가 나중에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냉장고에서 썩어갔던 과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아들의 반찬을 걱정하는 어머니도 차마 이 부분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가끔 수원에 내려오면 과일을 잔뜩 먹이곤 하셨다.
과육이 잇새에서 물러지며 달고 시원한 즙이 퍼졌다. 자취생에게는 먹을 기회가 드문 고급 과일을 즐기던 때였다. 바지 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이선은 포크를 입에 문 채로 핸드폰을 꺼내어 확인했다.
[지금 경기 끝났어요. 물건 받으면 바로 출발하니까 차 안 막히면 한 시간 안에 도착할 것 같은데.]
“…….”
심장이 제 존재를 알아달라며 고동을 키우기 시작했다.
“아, 차 진짜 막혀서. 늦었죠? 많이 기다렸어요?”
주택의 단점은 아무래도 아파트보다 상대적으로 외부 소음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조용한 골목에 위치해서 학생 때는 잘 의식하지 못했지만, 가끔 밖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말소리들을 그대로 집에서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선에게만큼은 장점이었다. 밖에서 뭔가 차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그런 예감에 이선은 호다닥 달려 나왔다. 그리고 빙고였다.
그의 세단이 바로 보였다. 차 안에 타든 밖에 있든 소음이라고는 듣기 힘든 차였는데, 신기하게도 이선은 그의 차가 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강희찬 역시 놀란 얼굴을 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는 뒷좌석을 열어 커다란 보자기에 싸인 짐을 내렸다.
“이거… 뭐예요?”
“그래도 오는데 선물 하나는 들고 와야죠. 낮 경기라 시간 없어서. 다른 것도 사고 싶었는데…….”
“그냥 와도 괜찮은데……. 시합 끝나고 백화점 간 거예요?”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아침에 가서 계산만 해놓고 매니저 형한테 갖다 달라고 했지. 고기예요. 어머니, 좋아하세요?”
“좋아하시기야 한데……. 진짜 괜찮은데…….”
“나 옷이나 좀 봐줘요. 괜찮아요? 원래 이런 거, 정장 입고 와야 하나?”
어쩐지. 평소라면 반팔 티셔츠나 피케티셔츠를 입고 다녔던 것과 달리, 깔끔한 베이지색 얇은 니트를 입고 있다. 팽팽히 늘어난 어깨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엔 잘 입지 않았던 스타일이 다부진 체구를 더욱 강조했다.
“멋있어요. 희찬 씨는 항상 멋있어요.”
초등학생들에게나 할 법한 단순한 칭찬법은 이선의 전매특허였다. 평소라면 그게 뭐냐며 멋쩍게 웃기라도 했을 텐데, 지금 강희찬의 얼굴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잘 좀 말해주지. 어머니, 이런 거 좋아하세요?”
“희찬 씨, 그게…….”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그렇다는 말은 그에겐 단지 변명일 뿐이니까. 자신을 위해서 저런 결심까지 해준 사람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그가 상처받지 않을까. 난 당신에게 확신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고. 그저, 그저…….
“선아? 밖에서 뭐 해?”
“어, 엄마?”
“어머?”
아들을 찾아 밖으로 나왔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혼자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아들의 곁에 낯선 차와 사람이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강희찬이라고 합니다.”
“어? 어어. 반가워요. 선이 친구? 아, 후배라고 그랬나?”
“네?”
되묻는 강희찬의 사이로 이선이 손을 휘저으며 끼어들었다.
“으, 응! 지금 막 도착했어요.”
“어머. 진짜 잘생겼네. 배우 같다.”
어머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갔다. 재혁이를 볼 때보다 입꼬리가 더 올라간 것 같다고. 이선은 누군가 들으면 속상할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아, 네. 감사합니다.”
“어, 엄마… 일단 들어가요.”
“아, 그래. 얼른 들어와요.”
“네. 이거…….”
강희찬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들고 있던 한우 세트를 내밀었다. 닦달에 못 이겨 백화점에서 음속 배송 수준으로 가져온 매니저의 애환이 서려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알 리 없는 여자는 그저 묵직한 선물을 받았다.
“어린 친구가 무슨 이런 걸 다 챙겨와. 그냥 오면 되지. 고마워요.”
“아닙니다.”
“얼른 들어와요. 선이가 저녁 안 먹었을 거라고 하도 뭐라고 하길래. 급하게 준비했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이선이는 먹어도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몰라서.”
송재혁이 집에 올 때와는 달리 어머니는 제법 말이 많았다. 그거야 당연했다. 송재혁은 누가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 혼자 잘도 떠들었으니까. 과묵한 미남의 방문에 어머니도 제법 동요한 기색이었다.
“…….”
어머니가 먼저 현관으로 들어선 순간, 강희찬은 이선을 노려봤다.
‘똑바로 말 안 했어요?’
눈빛으로도 제 뜻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다웠다. 아까부터 쭈뼛거리기 바빴던 이선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희찬 씨.”
“나중에 봐요.”
낮은 목소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짧은 한마디에서도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실망했겠지.
“…….”
어머니를 따라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선은 후회했다.
그러지 말걸. 설령 어머니가 그에게 손을 올리신다고 해도, 자신이 앞을 막아주면 그만이 아닌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그가 했던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나았을 거라고.
“입맛에 좀 맞아요? 갈비찜은 오랜만에 해봐서, 잘 됐나 모르겠네.”
“맛있습니다.”
“잘 먹으니까 너무 보기 좋다. 아, 밥 더 먹을래요?”
“아, 네. 한 공기만 더…….”
어머니는 강희찬이 내미는 밥그릇을 기꺼이 받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보다 너른 거실의 테이블이 그릇으로 가득했다. 음식 가짓수만으로도 질려버릴 만도 했는데, 강희찬은 기특하게도 밥공기를 금세 비웠다. 눈치를 보느라 깨작거리는 이선에 비해 어머니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그는 잘 먹었다.
“여기. 많이 있으니까 편하게 많이 먹어요.”
어머니가 종종걸음으로 주방에서 돌아왔다. 아직 반도 비워지지 못한 그녀의 밥그릇은 오늘 내로 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 그럴까? 내가 선이 친구는 재혁이밖에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아는 후배야? 대학 후밴가?”
“…엄마. 다 먹고 얘기해요.”
식사는 아예 뒷전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향해 이선이 말했다. 그제야 여자는 자신이 잘 먹는 사람을 붙잡고 귀찮게 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 미안해요. 선이가 운동하고 왔다고 배고플 거라고 했는데, 내가 눈치가 없었네. 얼른 먹어요.”
“네.”
다행히 어머니는 이제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호기심 어린 눈은 거두진 못했다.
밥과 반찬이 들어가서 볼록 튀어나온 매끄러운 볼. 단정한 차림이었지만 그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몸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나란히 앉은 제 아들과 함께 번갈아 봤다. 평소에도 아주 잘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잘 먹지 못하는 아들이 새삼 마른 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은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선이가 저런 후배는 어디에서 알고 데려왔을까? 대학 후배인가?
‘아니면, 혹시…….’
홀로 궁금증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 잘생긴 청년은 입을 채우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이선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냥 말씀드리죠. 어차피 아시는 것 같은데…….”
“…….”
강희찬의 말에 이선은 눈만 키웠다. 당황으로 일렁이는 아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 여자는 마음 깊은 속에서 ‘혹시’라는 말로 시작했던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느꼈다.
강희찬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는 곧게 폈던 허리를 깊게 숙였다.
“강희찬입니다. 선이… 이선 씨랑 만나고 있습니다.”
“아, 맞지? 내가 물어보고 싶었는데.”
“네. 죄송합니다.”
“아냐. 고개 들어요. 선이, 너 왜 미리 얘기 안 해줬어.”
여자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강희찬을 만류하듯 손을 내저었다. 기분 좋은 예감이 들어맞은 미소가 만면에 가득했다.
“응. 죄송해요.”
환히 번지는 어머니의 미소를 본 순간. 이선은 깨달았다.
자신은 열아홉이 아니다. 스물아홉이었다. 스물아홉 자신의 곁에는 이리도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뿐이었다.
* * *
“엄마…….”
손님의 여파가 가득한 싱크대를 등진 여자가 멜론을 자르기에 한창이었다. 설거지를 돕겠다는 강희찬을 억지로 2층으로 보내고 남게 된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이선은 주방 입구 벽에 매달린 채 여자를 불렀다. 그녀는 2층에 갔다가 홀로 내려온 아들을 보며 눈을 흘겼다. 그러면서도 입가의 미소는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선이, 왜 얘기 안 해줬어? 남자친구 데려온다고. 미리 알았으면 더 신경 썼을 거 아냐.”
“나중에 말하려고 했어요.”
“왜. 엄마가 희찬이한테 뭐라고 할까 봐?”
“…….”
인생의 삼분의 일은 떨어져서 살았다고 해도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여자는 쉽게 아들의 마음을 알아챘다.
“죄송해요…….”
벽 뒤에 몸을 숨기고는 쭈뼛거리며 말하는 모습에 여자는 웃음이 번졌다.
어릴 때도 꼭 저랬다. 애가 그럴 수도 있다고 감싸기 바빴던 아버지에게 안겨 있다가도, 꼭 먼저 다가와서 저렇게 미안하다고 말해주는 예쁜 아들이었다. 보기만 해도 든든한 연하의 청년을 데려온 아들을 보며, 여자는 일찍 세상을 뜬 남편이 떠올랐다. 언제까지나 젊고 활기찰 그녀의 울타리가.
선이가 애인을 데려왔다고. 그 옛날, 교복을 입은 채 한참 먼 뒤에서 겨우 자신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던 아들이 이렇게 컸다고. 상처받았을 아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못난 엄마에게 당당히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었다고. 제 엄마가 싫은 소리를 할까 봐, 그게 걱정스러울 만큼 소중한 연인이 선이에게도 생겼다고. 힘들 수 있는 길을 같이 걸어줄 사람이 생긴 것 같다고.
여자는 글썽거리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한 통을 다 잘라버린 멜론 더미가 쌓인 접시를 이선에게 내밀었다.
“다음에 또 데려와. 그땐 더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응. 고마워요, 엄마.”
“희찬이 많이 좋아? 엄마한테 혼날까 봐 꼭꼭 숨길 만큼?”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여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얼굴만 보아도 속내를 알 수 있는 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선 역시 알고 있었다. 지금은 확실히 답을 해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응. 희찬 씨 좋은 사람이에요. 많이 좋아해요. 희찬 씨, 많이 좋아해요.”
직관적인 아들의 대답에 여자는 빙긋 웃었다.
“올라가서 둘이 먹어. 희찬이 심심하겠다.”
고개를 끄덕인 이선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쌓인 멜론 더미를 든 채 조심히 뒤를 돌았다. 홀로 좁은 방에서 어색하게 있을 강희찬을 향해 한 걸음을 떼었다.
“2층에서 뽀뽀해도 돼.”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이선은 움칫 몸을 떨었다. 멜론이 쏟아질 뻔했지만 순발력을 발휘하여 대참사를 겨우 면했다.
어머니의 장난에 벌렁거리는 심장을 끌어안은 이선이 조용히, 하지만 주방에 들릴 만큼 중얼거렸다.
“뽀뽀 안 해요.”
달칵.
문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순간, 강희찬은 눈을 들어 올렸다. 유일하게 앉을 수 있는 자리인 의자 대신 침대에 앉아 있던 그의 눈엔 발간 이선의 눈가와 산처럼 쌓인 멜론 더미가 함께 들어왔다.
울든가 웃기든가.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멜론 먹으래요, 엄마가.”
멜론은 어머니의 하해와 같은 사랑을 상징한다. 저 쌓여 있는 멜론이 자신을 향한 호감이라면 강희찬은 기꺼이 전부 배 속에 밀어 넣을 자신이 있었다.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멜론에 대한 평을 바꿔버린 강희찬은 받은 멜론을 책상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이선을 당겨 제 곁에 앉혔다.
“뽀뽀는 왜 안 한다고 해요.”
“드, 들려요? 여기서?”
“계단에서 들었어요.”
“왜, 왜 엿들어요!”
이선이 당황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은 어느새 눈과 비슷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이유를 강희찬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뒤에서 고백을 하면 화도 못 내잖아요.”
울고 놀라고. 참으로 바쁘기도 한 이선의 얼굴을 품에 묻으며 끌어안았다. 뽀뽀는 안 하겠다고 선포하더니, 안기는 것은 괜찮은가 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희찬 씨, 많이 좋아해요.’
계단에서 도둑처럼 엿들었던 이선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처음엔 화가 났던가? 아니면 허탈했던가? 어머니의 입에서 나왔던 ‘후배’라는 말에 강희찬은 마치 제 존재가 부정당한 것만 같았다.
혼자 너무 일렀나. 아직 이선에게 자신은 그만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처음 어머니를 소개해 달라고 했던 날. 곤란해했던 이선의 얼굴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선과 어머니의 대화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오히려 이선은 저를 위해서 그랬다는 것을.
자신이 상처받을까 봐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할 생각이었음을 안 순간, 불안감은 사라졌다. 대신 자리한 것은 이선을 향한 미안함과 넓지 못한 도량을 가진 저에 대한 원망이었다.
“어머니가… 나 좋아해 주실까요?”
“엄청 마음에 드셨을 거예요.”
“정 선생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우리 엄마, 잘생긴 사람 좋아해요.”
언젠가 야구장 전광판으로 봤던 어머니의 연인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
미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흔들렸지만, 강희찬은 애써 의문을 지웠다. 어쨌든 결론은 그거였다. 이선의 어머니가 자신을 적어도 나쁘게 보지는 않는다는 것. 앞으로 얼굴도장을 더 자주 찍고 더 점수를 딴다면, 나중에 ‘아드님을 데리고 살겠습니다’라는 말을 해도 난색을 보이지는 않을 거라고.
“고마워요, 걱정해 줘서.”
“응…….”
“아까 왔을 때 무섭게 봐서 미안하고.”
“으응.”
그래도 내심 서운했던 모양인지 이선의 목소리에 물기가 번졌다. 마른 몸을 둘러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렇게 작은 몸이 자신을 지켜보겠다고 혼자 힘냈을 것을 생각하니, 기특하면서도 웃겼다. 만약 자신이 얘기하지 않았다면, 이선이 나중에 어머니에게 저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해 줬을까? 그건 또 들어보고 싶기도 한데…….
성공적인 수원 데뷔를 마친 커플의 곁에서 멜론 더미는 잊히고 있었다.
둘이서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던 걱정은 기우였다. 그렇게 밥을 먹고도 과일이 저만큼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이선은 홀로 입을 벌린 채 놀라워했다. 그런 이선의 입 안으로 강희찬이 한 번 더 포크로 쪼갠 멜론이 쏙쏙 들어왔다.
둘이 끌어안고 멜론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 강희찬은 방에 있던 앨범을 찾아냈다. 이선 역시 언제부터 방에 있었는지 모를 얇은 앨범이었다.
이선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기세로 사진을 보는 강희찬의 곁에서 민망해하느라 혼났다. 평범하게 집에서 고깔모자를 쓰고 초를 부는 모습이나 학예회에서 물고기 탈을 쓰고 용왕님 곁에 서 있는 모습. 그런 것들을 보며 강희찬은 자꾸만 ‘가져가면 안 되겠죠?’라며 이선을 간절히 봤다.
결국, 그는 앨범 한 권의 사진을 모조리 사진으로 찍어 데이터로 남겼다. 놀라운 집착을 보이는 강희찬의 입에 멜론을 넣어주며, 이선은 응원 아닌 응원을 했다.
앨범 하나를 통째로 백업한 그는 가봐야겠다면서 직접 그릇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빈 접시를 보고 어머니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깜짝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설마 다 먹을 줄은 모르셨구나. 이선은 보기와는 달리 무엇이든 잘 먹는 그가 몹시도 자랑스러웠다. 대궐 같은 한정식당의 아들인데,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는데 열심히 먹어준 것만 같아서 마음 한편이 간지러웠다.
벌써 가는 거냐고 아쉬워하는 어머니에게 ‘다음에 꼭 오겠습니다’라며 인사하는 강희찬을 보며, 이선은 그가 다시 이곳을 찾을 날이 머지않음을 느꼈다.
언제나 함께일 것이다. 서로의 얼굴에 주름이 하나씩 질 때도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겠지. 그러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간 그의 차가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선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고만고만한 주택이 모여 있는 텅 빈 골목을 볼 때도, 조금은 쓸쓸한 발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자신의 손을 어머니가 감싸는 순간에도.
“선이 얼른 서울 가봐.”
“…….”
“희찬이 기다리겠다.”
여전히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그녀는 왜 아들이 어딘가 넋을 빼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응!”
진심은 담아두기만 해서는 안 된다. 진심이 향할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이 더 잘 알지 않은가.
이선은 씩씩한 한 걸음을 떼었다. 그를 좇기 위한 한 걸음이었다.
간소하게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급하니 자꾸 손이 어긋났다. 이선은 옷을 입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명절인데도 신기할 정도로 차가 많은 밤거리를 달려 서울에 도착하는 내내. 이선은 그에게 전화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번에도 그에게 기댈 것만 같았다. 늘 먼저 다가오고, 손을 내밀어주고, 사랑을 속삭여주는 사람이었다. 혼자인 밤거리가 외롭다고 말하자마자 고속도로 한가운데라도 당장 찾아올 사람이었다. 이선은 조수석 좌석에 던져둔 핸드폰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번엔 자신이 먼저 가야 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길을 따라 그의 오피스텔을 찾고, 외부인에게도 허용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입구에 도착한 이선은 그에게 현관을 열어달라고 전화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때마침 오피스텔을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틈을 노려 재빠르게 들어가는 이선을 수상하게 여길 법도 했지만, 그는 이미 이 오피스텔 입주민에게는 얼굴이 나름대로 알려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19층으로 가는 내내 아무도 타지 않는 승강기 안에서 이선은 또다시 깨달았다. 언제나 그와 함께 탔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그랬다. 느린 저의 걸음 따위는 기다리지 않겠다고 매몰차게 돌아설 수 있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누군가와 함께 밤을 보내는 것에 겁을 먹고 덜덜 떠는 덜 자란 어른 따위는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선의 걸음에 맞추어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리고 혼자 떠내려갈 수도 있었던 이선을 꺼내주었다.
“…….”
문이 열렸다. 꼭 그때처럼.
하지만 이선을 꺼내줄 단단한 손길은 없다. 자신만이 앞으로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선의 길은 이미 예전에 정해졌다.
한 걸음을 내디뎠다. 제 걸음에 맞추어 복도 천장의 센서등이 하나씩 들어왔다. 마치 응원을 해주는 것 같았다. 힘내라고.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마침내 도착한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인터폰에서 들려야 할 목소리 대신, 쿵쾅거리는 소리가 안에서부터 울렸다.
그리고―
“선아? 언제 여기……!”
깜짝 놀란 얼굴로 직접 문을 열고 나타난 그의 품에 이선은 막무가내로 안겼다.
“희찬 씨. 많이 좋아해요.”
“…….”
“희찬 씨가, 제일 좋아요. 많이 좋아해요.”
멍한 채 눈만 크게 뜨고 있던 강희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따뜻한 손이 이끌리듯 이선의 등에 얹어졌다.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입술이 포개졌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순간이었다.
* * *
“응…….”
현관에서부터 이어져 온 입맞춤은 이선이 아일랜드 바에 몸을 앉힐 무렵엔 버거울 정도로 깊어져 있었다.
이선은 강희찬의 목덜미에 두른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입 안을 들쑤시는 혀끝이 조금 더 깊이 들어와 주기를, 그리고 다른 무언가 역시 몸을 채워주기를 바라는 본능이었다.
강희찬은 입을 맞추는 동안 손을 아래로 내렸다. 앉아 있는 이선의 바지 앞섶에 손바닥이 닿았다. 입맞춤만으로도 성기는 옷 밖으로 티가 날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거칠게 그 위를 더듬자, 바지 아래에서 움칫 떨리는 성기가 그대로 손바닥에 전해졌다.
“으, 으음…….”
신음을 흘리는 이선의 입술을 아쉽게 놓아주었다. 대신, 강희찬은 갈급한 손길로 이선의 바지를 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하얀 허벅지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위로 앞이 잔뜩 젖은 파란색 팬티까지.
“냄새 맡고 싶어…….”
강희찬은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는 무릎을 꿇어 이선의 아래로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이선이 채 말릴 새도 없이 속옷을 입은 샅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 아, 희찬……. 으응!”
마치 숨이 모자란 사람인 양 강희찬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속옷 아래로 불룩 튀어나온 부분에 얼굴을 문질렀다. 우뚝 솟은 콧날이 속옷을 사이에 두고 성기에 비벼졌다.
“흑……. 읏, 희찬 씨… 변태 같아요, 그런 거.”
생경한 감각이 주는 쾌감을 느끼면서도 이선은 그리 말했다.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말마따나,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변태 같은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질러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강희찬에게 그런 말은 아무런 타격이 되지 않았다. 그는 문지르던 얼굴을 조금 떼어내더니 고개를 들어 이선을 봤다.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였다.
“저번에도 그런 말 하지 않았어요?”
그의 입매가 삐뚜름히 올라갔다.
“진짜 변태 본 적 없죠?”
동시에 그는 이선의 팬티를 내렸다. 젖은 성기가 바깥 공기를 만나며 튀어 올랐다. 이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치심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딱히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고 방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 행동을 자각한 이선은 내젓던 고개를 멈추었다. 오늘만큼은 그의 모든 것을 오롯이 받고 싶었다.
“빨고 싶어요.”
어느새 음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이선의 성기를, 그리고 얼굴을 향했다. 이선의 얕은 결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 안 돼요!”
이선은 양손을 내려 드러난 성기를 감추었다. 입맞춤만으로도 잔뜩 발기한 채, 붉은 귀두에서는 쿠퍼액을 흘리던 야한 좆이 하얀 손바닥 아래로 감추어진다.
흥이 깨져야 정상인 것 같은데, 그 모습이 오히려 더욱 성감을 자극했다. 저따위로 나오면 억지로 손을 치우게 하고 싶어지는 게 사내라는 걸 이제는 본인도 좀 알아야 했다.
“왜. 왜 안 돼. 빨게 해줘요.”
“흑……. 희찬 씨, 우리 변태 되면은…….”
“그럼 한 번만. 딱 한 번만 빨아보게 해줘. 응? 그만하라고 하면 바로 그만할게요.”
이 각도는 이선에게는 참으로 낯설었다. 거의 모든 순간 자신은 강희찬보다 아래에 있었다. 가끔 무릎에 앉혀주거나 몸 위로 올려줄 때가 있었지만, 이렇게 차이가 날 정도로 그가 아래에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저 아래에서 애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본다. 사람이란 처음에 약했다. 그리고 이선 역시 사람이었다. 내성이 없는 애교스러운 모습에 이선은 결국 못 이기는 척 손을 떼었다. 그사이에도 흘러나온 탓에 더 젖어버린 귀두 끝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 강희찬은 한입에 이선의 귀두를 머금었다.
“아! 아, 아읏……!”
순식간에 성기의 절반 이상이 그의 입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이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으니 성기가 마치 다른 곳으로 빨려들어 간 것만 같았다. 사람의 입 안이 이럴 수는 없었다. 성기의 표피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마치 다디단 사탕이라도 빠는 것처럼 강한 압력이 기둥을 모두 집어삼켰다.
“아, 안……. 아응, 으, 읏! 하으……!”
성기의 끝이 그의 목구멍을 건드렸음을 깨달았다. 공기 하나 남지 않은 입 안에서 혹시 성기가 터지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을 할 때쯤, 그는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쭙, 쭙. 빠는 소리가 천박할 정도로 귓가를 울리는 탓에 이선은 차라리 울고 싶었다. 하지만 몸을 압박하는 쾌감은 우는 것은커녕 말 한마디를 완성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감각은 여전했다. 강희찬의 손이 이선의 양 허벅지를 틀어쥐었다. 언제부터 쥐고 있었는지는 이선 역시 알 수 없었다. 다만 붉어진 피부에서 느껴지는 그의 악력으로, 그가 얼마나 지금 욕망을 누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으응, 흣! 아…….”
무릎에 자연스레 힘이 잔뜩 들어갔다. 허벅지를 슬슬 쓸어주는 뜨거운 손길이 있었지만, 그리 도움이 되진 않았다. 강희찬은 아예 허벅지를 제 어깨에 하나씩 올렸다. 이선은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려 했다. 하지만 완전히 다리를 오므릴 수는 없었다. 대신, 그 사이에 있는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다리로 조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 아아……! 아, 안 돼! 나, 나… 나와, 으읏, 흐으…아아…….”
이선의 다리가 배배 꼬였다. 이미 입맞춤으로도 민감해진 성기였다. 처음 느껴보는 자극에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선이 먼저 사정했다. 그는 이선이 사정하는 순간에도 끝까지 입을 떼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받아먹겠다는 듯 집요하기까지 한 혀끝이 요도 구멍을 샅샅이 핥았고, 한 방울이라도 남기지 않을 기세로 성기를 죽죽 훑으며 모든 정액을 받아 마셨다.
“흐……. 흐윽…….”
처음 겪어본 펠라티오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정액을 남이 먹었다는 것 때문인지. 머릿속을 공황상태로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힘이 쫙 빠졌다. 이제 아일랜드 바에 겨우 걸터앉아 있었다. 아니, 강희찬이 밑에서 받쳐 준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더 옳았다.
꿀꺽.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울리고 나서야 강희찬은 겨우 성기를 놓아주었다. 천 년 묵은 여우에게 정기를 잃은 선비처럼 축 처진 기둥은 번들거리고 있었다.
“씨발, 좆물도 맛있으면 어떡해.”
음험하게 빛나는 두 눈이 사납게 이선의 성기를 향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일었다. 이선의 두 다리가 뒤늦게 버둥거렸다. 하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강희찬은 망설임 없이 축 처진 성기 아래의 음낭에 혀끝을 대었다.
“응, 아……. 흐읏!”
순간적인 감각에 이선이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이선의 허벅지를 더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기둥을 삼킬 때와 마찬가지로 바짝 얼굴을 붙였다. 혀가 무자비할 정도로 음낭을 마구잡이로 비벼댔다.
“흑……. 아으으… 제, 제발…….”
“더 조여봐. 응? 선이야. 다리, 더 해봐.”
꼭 무언가에 취한 것 같았다. 몇 번 없는 경험 속 강희찬은 언제나 이선의 쾌감을 어루만지면서도 선을 유지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역시 어딘가 안전핀이 나가버린 듯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흐으…….”
수치스러운 요구였지만 이선은 순순히 허벅지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아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말을 할 때마다 내뱉어지는 숨이 너무 더웠다. 뜨거운 열기가 닿는 곳마다 성기가 녹는 것만 같았다.
강희찬은 더욱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다. 이선은 필사적으로 바를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것을 놓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아, 아응……. 흣! 희, 아, 아, 거기……. 하…….”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굴어요. 어? 나한테, 어? 미안해서 그래? 미안해서, 예쁘게 대주고, 있어?”
달뜬 신음이 중간중간 끊겼다. 숨을 제대로 들이쉬기도 버거웠다. 혀가 마치 뱀처럼 마음대로 움직였다. 끈질길 정도로 핥아대던 고환을 지나 회음부를 스쳤을 때, 이선은 거의 자지러질 뻔했다. 주륵. 팔이 미끄러졌지만 단단하게 아래를 받친 강희찬 덕분에 다시 겨우 몸을 세웠다.
“아, 아니……. 흑……! 으… 희, 희찬 씨 좋으니, 아앙!”
거친 혀끝이 회음부를 파버릴 기세로 강하게 눌러왔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번지는 열기가 더 아래의 구멍을 향했다. 기대감에 젖은 구멍은 본능적으로 뻐끔거렸다.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이선의 하반신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말랑한 허벅지에 눌리는 강희찬의 옆머리도 함께 헝클어지고 있었다.
“아, 희찬 씨……! 뒤에, 안……. 아, 아아! 흐윽……!”
“젤 없잖아. 이렇게, 적셔야지.”
뭉개진 발음이 아래를 직접 울렸다.
노골적으로 축축한 소리가 점점 뒤를 향했다. 이선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내저었다. 뒤늦게 강희찬을 밀어보려 했지만, 수단이 없었다. 양팔은 몸을 지탱하고 있기도 버거웠다. 허벅지를 비비 꼬며 버둥거려도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이 스치며 성기를 자극할 뿐이었다.
이선은 속수무책으로 젖은 혀에 뒤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거의 강희찬의 얼굴 위에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습한 소리가 더욱 가속했다. 그와 비례하여 이선의 허리도 마음대로 튀었다.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자극이 들이닥칠 때마다 뒤채는 허리나 이미 손 하나 대지 않고 서버린 채 물을 흘리는 성기는 이선의 의지가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었다.
혀끝이 섬세하게 구멍 주위를 적셨다. 그의 말대로, 아래를 적실 요량인지도 모른다. 잠시 그런 순진한 생각을 했다. 젤이 있는 침실로 함께 가도 괜찮은데 굳이 그곳에 혀를 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이미 할 수 없었다.
그런 가느다란 희망도 젖은 혀가 구멍을 파고들 때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아, 아아……! 아, 안에 으응……. 시… 시러……. 아, 아응!”
겨우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강희찬에게 의미 있게 닿지는 못했다. 처음엔 얕게 들어오던 혀가 점점 더 깊이 들어올 때마다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성기를 받는 것처럼, 이선의 구멍은 뻐끔거리며 조금 더 안을 채워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발딱 선 성기가 애처로이 흔들렸다. 가끔씩 잠들기 전 그에게 애무를 받을 때면 눌러주던 자극점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입구 근처를 채우기만 해도 이선의 감각은 마치 깊은 곳까지 성기를 받은 것처럼 흥분으로 물들었다. 이미 머리가 알고 있는 쾌감이 실현된 것처럼 몸이 반응했다.
“아, 아아……. 하, 으, 아아…….”
결국 이선은 그의 얼굴에 몸을 앉힌 채 사정했다. 튀어 오른 성기 끝에서 새어나간 정액이 강희찬의 머리를 적셨다.
“아… 흐……. 으윽…….”
망연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이선의 눈에 점점 눈물이 차올랐다.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무슨 짓을 당하면서 사정을 한 것인지. 너무도 노골적으로 흔적이 남았다.
강희찬은 겨우 입술을 떼고 이선을 올려다보았다. 양 뺨이 붉어진 채 눈물을 가득 달고 있는 이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좀 심했나. 실낱같은 이성이 잠시 그런 고민을 했지만, 본능은 알고 있었다. 이선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처음 당해본 경험에 놀라 울지도, 화를 내지도 못한 채로 입술만 바들바들 떨며 강희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앞에 빨릴래, 뒤에 빨릴래.”
선택지란 때때로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평소라면 모두 싫다며 단호히 거절했을 이선이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강희찬은 그 기회를 제대로 이용할 셈이었다. 충격으로 인해 이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덜덜 떨리면서도 뻐끔거리는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결국 이선은 한참의 망설임 끝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 앞에요.”
모든 선택지를 경험했다. 성기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빨리는 것과 혀로 뒤가 쑤셔지는 것. 둘 중 어느 것도 이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후자의 충격은 말할 수 없었다.
이선은 허리를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서 빨아달라고 하는 것 같아 더없이 야하게 느껴졌다.
강희찬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야하기만 한 연인이 때때로 원망스러웠다. 쓸데없이 하얗고 예쁘고 빨개서, 어디에서 험한 꼴을 당하지나 않을까 불안한 제 심정을 이선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리라.
심술이 돋은 강희찬은 사정한 후에도 반쯤 서 있는 이선의 성기를 단번에 입으로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짓궂게도 손가락을 뒤로 가져가 안을 파고들었다.
“아, 아, 으응! 뒤, 뒤에는, 안 한다고… 하, 으응!”
대체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강희찬은 말없이 손가락을 하나 더 깊이 찔러넣었다. 충분히 적신 보람이 있는지 콘돔도 젤도 없음에도 손가락은 수월하게 들어갔다. 움찔거리는 입구를 열고 들어서면 따끈한 내벽이 손가락을 기분 좋게 조인다. 입에 머금은 성기를 강하게 빨 때마다 내벽 역시 강희찬의 손가락을 조여댔다.
안으로. 더 안으로. 욕심껏 손가락을 뿌리 끝까지 넣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빼고 들어가고 싶어 사납게 커진 좆을 대신해 화풀이라도 하듯 이선의 자극점을 사정없이 눌렀다.
“으응! 아, 아아! 하, 읏……!”
구멍 안을 빠듯하게 채운 채로 진동하듯 손목을 떨었다. 이선의 허리도 맞추어 불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잔뜩 휘어진 허리가 마치 좆을 더 깊이 먹여달라는 몸짓이었다. 강희찬은 기꺼이 분부를 받들었다.
이선은 이제 바를 잡고 있던 손을 강희찬의 머리 위에 두었다. 격해지는 자극을 피하기 위해 그의 머리를 밀어보았지만, 결국 앞을 빠는 힘만 강해졌다. 죽을 것 같다. 사람이 이렇게 느껴서는 안 된다. 앞과 뒤에서 동시에 들이닥치는 쾌감 속에서 이선은 전율에 몸을 떨었다.
“아, 안 돼, 으… 으으응!”
자신의 집에서 애무를 받았던 날. 아무것도 모른 채 주어지는 쾌락에 몸을 내맡기던 이선의 아랫배를 스치는, 요의와도 닮은 감각이었다. 이 감각의 끝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선은 더욱 거세게 그의 머리를 밀어내며 다리를 버둥댔다. 심해진 이선의 반항을 눈치챈 남자는 벌을 주듯 손가락을 더 빠르게 떨었다. 진퇴 운동을 하며 자극점을 누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뭉개질 대로 뭉개진 그곳을 빠르게 스치며 쉴 틈 없이 쾌감이 쏟아졌다.
이미 그는 자신의 정액을 삼켰지만,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소변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이선이 아는 범위 내에선 이곳에서 나오는 건 정액과 소변뿐이었다. 정액이 아니었다. 그럼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아, 안 돼! 히, 희찬……. 으, 으읏…….”
“싸. 그냥 싸.”
고환까지 다 집어삼킬 기세로 성기를 머금은 그의 입에서 불분명한 발음이 새었다.
“흐으……. 응, 아, 안……. 하, 하응, 응, 아!”
그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고목처럼 단단한 몸은 아무리 힘을 주어 밀어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간 온몸에 힘이 들어가며 경련이 일었다.
“아, 아아……!”
성기에서 무언가 나온다는 감각을 느꼈다. 무엇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그것은 강희찬의 목구멍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목울대가 울릴 때마다 입 안의 압력이 더욱 거세지는 것을 느꼈다. 모조리 삼키고, 심지어 입 안에서 혀를 굴려 귀두 끝까지 샅샅이 핥고서야 강희찬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이선은 이제 완전히 몸을 강희찬에게 지탱한 채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한 번만… 한 번만 더 싸줘, 선이야. 어?”
“희찬… 희찬 씨……. 윽…….”
“왜. 선이, 왜. 마음 다쳤어?”
어느새 그의 눈동자엔 약간이지만 이채가 돌았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그는 이선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 아래로 빠듯하게 일어선 트레이닝복 바지가 들어왔다. 회색 반바지의 앞섶이 젖어 색이 변해 있었다.
이선은 깨달았다. 이 사람은 언제나 이런 사람이었다. 심하게 구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배려해 주었다. 이성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저렇게 젖을 정도로 자신의 욕망을 참아 누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언제 흘렀는지도 모를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겨우 팔에 힘을 주어 눈물을 슥슥 닦아냈다.
“희찬 씨도… 희찬 씨도 같이…….”
“…….”
“희찬 씨 걸로… 할래요.”
순간 강희찬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그는 몸을 일으켜 이선을 제대로 들어 바에 앉혔다.
“그렇게 쌌으면서 아직도 부족해?”
“읏, 아니……!”
“아니면, 나만 먹어서 그래요?”
그는 이선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편하게 입고 있는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벗겨줘, 선아. 선이가 벗겨줘.”
흥분으로 인해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평소보다 낮고 거친 목소리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이선 역시 고취되었다. 천천히 그의 바지와 속옷을 함께 내렸다. 속옷이 떨어져 나가며, 진한 쿠퍼액으로 만들어진 실이 성기와 속옷 사이를 진득하게 연결하고 있었다.
“흐윽…….”
절로 숨이 삼켜졌다. 차마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둥에 잔뜩 묻어 있는 질척한 백탁액 때문일까.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흉흉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이선은 겁을 먹으면서도 조금씩 흥분이 일었다. 그가 이렇게 될 때까지 흥분했다는 사실이 정신적인 만족감을 주었다.
“왜 놀라. 혼자 좋아서 싸는 동안 나만 이렇게 됐잖아요.”
“…….”
“내 건 선이가 먹어줘야지. 여기로.”
강희찬의 양손이 엉덩이 아래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이선의 몸이 쉽게 올려졌다. 그는 단단히 엉덩이를 쥐고는 넓게 벌려 구멍이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드러난 입구에 젖은 귀두의 끝이 맞춰졌다. 동시에 이선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손가락이 들어왔을 때. 성기를 받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은 큰 착각이었다. 대체 예전엔 어떻게 이것이 들어왔던 건지. 찢어질 게 분명했다.
겁을 먹은 이선에 비해 강희찬은 잔뜩 젖은 귀두를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 아, 너무 커……. 아, 안 돼요, 흣…….”
“아냐. 들어갈 수 있어요. 씨발, 이렇게 다 녹았잖아.”
“으응…….”
“선이 거 내가 다 먹었잖아. 내 것도 먹어줘야지, 그럼.”
수치스러운 소리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새 귀두는 입구를 빠듯하게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숨이 턱턱 막혔다. 마치 주먹이 들어온 것만 같아, 이선은 신음 소리 하나 내기도 버거웠다.
“하아…….”
정신이 없는 것은 강희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 섹스를 한 이후. 이선의 안에 좆을 밀어 넣은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몇 번의 애무를 하며 서로의 것을 만지기는 했지만, 이선의 몸이 익숙해지게 하는 것이 언제나 우선이었다. 이선은 생각했던 것보다 쾌감에 약했다. 말간 얼굴이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오산이었다.
손가락으로 느끼는 것에 만족했던 내벽이 좆머리를 꼼꼼하게 감싸는 순간,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한 번 감각을 맛본 좆은 사납게 욕심을 채우라며 아우성쳤다.
강희찬은 이선의 엉덩이를 잡아 그대로 아래로 내렸다. 반쯤 걸터앉았어도 바 위에 얹혔던 몸이 공중으로 뜨며 그대로 강희찬의 몸과 맞붙었다.
“아. 아읏!”
말랑한 구멍은 순식간에 기둥 뿌리까지 삼켰다. 음모가 엉덩이를 스쳤다. 갑자기 깊어진 삽입에 이선이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성을 붙들고 있는 것도 거기까지였다.
이선의 팔이 본능적으로 강희찬의 목을 감았다. 매달릴 곳이 거기뿐이었다. 이제 완전히 공중으로 들린 이선을 강희찬이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으읏, 아, 아아, 하, 으……. 희, 희찬 씨, 나, 떨어……! 읏!”
“괜찮아. 선아, 괜찮아.”
지금 당장 이선이 팔을 내려도 잡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강희찬은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온 힘을 다해 제 몸에 매달리는 이선이, 그리고 조였다 푸는 내벽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아기처럼 제 몸에 엉겨붙는 이선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떨어질까 봐 불안한 탓에 구멍이 바짝 조였다. 그 순간이었다.
“읏……. 크…….”
잔뜩 조여진 따끈한 몸 안에서 강희찬은 사정했다. 진한 백탁액이 안을 적시다 못해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선의 성기와 닿은 아랫배 역시 척척해진 것을 느꼈다. 강희찬은 제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린 이선의 귀를 깨물었다.
“아……!”
“나, 조루 됐나 봐요.”
“응, 잠깐, 나… 나, 아직, 으응!”
아직 사정을 마치지 못한 이선을 달랑 안은 채, 강희찬은 허리를 움직였다. 이 정도로 한 번에 많이 사정을 하면, 쾌감은 오히려 고통이었다. 사정으로 예민해진 몸에 또다시 열기가 얹혔다. 강희찬은 이선의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단단한 복근에 젖은 성기가 닿았다. 혼자 질금거리는 가여운 좆을 도울 셈이었다.
“조루 돼도, 나, 책임져 줄 거예요?”
“아, 아……. 아앙, 읏!”
“평생 조루랑 살아야 돼, 우리 선이.”
허튼소리! 세상에 어떤 조루가 사정을 하고도 이렇게 흉물스럽게 서 있단 말인가.
이선은 목을 감은 채 양손으로 주먹을 쥐어 휘둘러봤다. 등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매달린 처지에서 그럴 수가 없었다. 반격 같지도 않은 반격은 강희찬에겐 그저 웃음거리였다.
“아, 아앙, 앗! 안 돼, 응, 움직이면……!”
강희찬은 크게 한 걸음을 떼어 침실로 향했다. 그가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뭉툭한 귀두 끝이 극점을 파고들었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두툼한 끝이 목 안까지 차오르는 듯했다. 그는 일부러 더 이선의 몸을 흔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매달린 이선은 침실까지 옮겨졌다.
풀썩.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이 뉘었을 때도, 여전히 그의 물건은 이선을 채우고 있었다. 이선의 몸을 완전히 덮은 그의 등 근육이 사납게 움직였다.
“아, 아응, 읏, 하아……!”
겨우 보이는 하얀 손이 단단한 등을 긁어댈 때쯤. 달뜬 신음 소리는 뜨거운 입술에 먹혔다. 대신 척척거리며 살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울 뿐이다.
“아, 아응… 응……. 흐음…….”
그만, 그만. 몇 번이나 그 말을 내뱉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그저 힘이 빠진 신음뿐이다.
조루가 되었다느니, 좆을 잘라줄 테니 엉덩이에 넣고 다니라느니. 말도 안 되는 추잡한 소리를 하며 그는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이번이 끝이라는 희망이었고, 그다음은 혹시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싶은 의심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평생 이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이었다. 구색을 갖출 용도인지, 꺼내놓은 콘돔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채 침대 한구석을 뒹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사정을 했는지 세기도 두려워질 때쯤. 그는 이선의 몸을 옆으로 돌리고는 한쪽 다리를 팔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백탁액으로 사납게 젖은 성기를 다시 구멍에 맞추었다. 그 순간 이선은 와앙 하고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몸에 기력만 남아 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나란히 옆으로 누운 두 사람의 몸이 딱 붙었다. 한쪽 다리가 들린 제 모습이 마치 짐승이 흘레붙는 모습이었다.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침대 매트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이선은 감각의 해일에 온몸이 내던져졌다.
“응, 앗, 으응… 아…….”
쉬어버린 목소리가 은근한 신음을 내었다. 강희찬의 성기는 아무리 깊어도 반 이상을 들어오지 않았다. 얕게 입구를 드나드는 성기에 애가 탔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밑이 찢어질 걱정을 하며 느끼는 쾌감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알면서도 못되게 굴고 있었다.
사정하고 싶다. 이제 제대로 된 사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아, 아……. 희찬 씨, 나…….”
이선의 손이 슬금슬금 아래를 향했다. 말간 물이 맺힌 귀두 끝이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곳을 쥐고, 그의 혀가 했던 것처럼 요도를 엄지로 누른다면…….
그 순간이었다.
“아……!”
“누가, 앞에 만지래.”
“아, 응! 아, 놔, 놔줘, 아앙!”
강희찬의 손이 거칠게 이선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러곤 양손을 틀어쥐어 머리 위로 올렸다. 순식간에 사정의 기회를 잃은 이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제 허리를 흔들었다.
“으응! 읏, 나……. 나…….”
“왜. 싸고 싶어요?”
“응, 응! 흐으…….”
“선이, 싸고 싶어?”
“으… 으응, 흐읏, 선이, 아, 아……. 싸고, 싶… 흐윽!”
손목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하지만 이선의 양손을 잡고 있는 강희찬의 오른손은 밧줄처럼 단단했다. 의미 없는 반항을 하면서도 잔뜩 애원했다. 그가 원한다는 것을 이선의 본능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혼자 안 만지고 잘만 쌌잖아.”
“아, 아… 안 돼, 흐응, 모, 못 해……. 아, 안에… 으응…….”
“안에 찔러달라고?”
강희찬은 말과 동시에 크게 허리를 움직였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감질나게 만든 보람이 있었다. 그는 이선의 팔을 결박한 오른손에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반 이상 나와 있던 좆을 한 번에 밀어 넣었다.
“하, 아앗!”
동시에 이선의 성기에선 물이나 다름없는 묽은 백탁액이 새었다. 이선은 잘게 고개를 저으며 보채기까지 했다.
“더, 더어……. 응, 하아…….”
“이제, 안에 안 쑤시면, 자위는 못 하겠네, 우리 선이. 깊은 데 있는데, 어떻게 혼자 쑤셔.”
“아, 우… 으응……! 나, 하, 할 것 같……. 으응!”
“이미 싸고 있잖아.”
이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축 처져 있으면서도 움칫거리는 성기에서 투명한 물이 튀었다.
“아……. 흐읏, 응… 읏!”
그와 동시에 이선의 눈이 감겼다. 폭력 같은 쾌감과 동시에 찾아오는 반가운 어둠이었다.
* * *
의식보다도 먼저 이선이 맞이한 것은 끊어질 듯한 둔통이었다.
눈을 뜨는 것도 버거워 한참 동안 씨름을 하다 겨우 눈을 떴다. 누군가 친 암막 커튼이 있었지만, 차마 닫히지 못한 부분에서 내려오는 하얀 햇살이 바깥의 시간을 가늠케 했다.
“으으…….”
아무도 없는 넓고 어두운 침실에서, 이선은 혼자 서러웠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으면서, 날 버리고 가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주말엔 꼬박꼬박 쉬는 자신에 비해, 그는 출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잠시 밀어두었다.
“…….”
이선은 꼼꼼히 이불이 둘린 채 도록도록 눈만 굴렸다. 하나씩 어제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애인을 보러 밤 운전을 하는 아들을 걱정스레 보는 어머니의 눈. 편한 옷을 입고 놀란 얼굴로 자신을 맞이한 강희찬. 무릎을 꿇고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강희찬.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낯뜨거운 기억에 이선이 고개를 저었다.
“윽……!”
하지만 손가락 하나만 까딱거려도 둔통이 허리를 덮쳤다. 대체 사람을 이렇게 만들고 어디를 갔단 말인가.
처음엔 그런 원망이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다행이었다. 그런 짐승 같은 짓을 하고도 이선은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일주일에 6일을 출근하는 그의 직업이 처음으로 감사한 순간이었다.
이선은 시간을 한참 들여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중간에 눈물이 질끔 새어 나왔지만, 다시 누웠다가는 또 이 과정을 반복할 것이 아득했다. 방을 둘러봐도 옷을 찾을 수 없어, 대신 덮고 있던 이불을 짊어지고 문까지 엉금엉금 향했다. 아무리 느려도 결국 결승선에 도착한 거북이가 된 심정으로 이선은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딘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아직 덜 돌아가는 머리로 이선은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주방에서 손에 쟁반을 든 강희찬이 나온 것은.
“헉…….”
“아, 일어났… 선아?”
이선은 방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쏟아지는 둔통을 참으며 문에서 가장 먼 곳인 침대 쪽으로 재빨리 향했다. 급한 슬리퍼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숨어야 한다.’
머릿속엔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단조로운 침실 안에선 숨을 곳이라고는 욕실이 전부였다. 이쪽이 아닌 욕실 문이 있는 곳으로 갔어야 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너무 늦은 일이었다. 대신 이선은 침대 너머의 빈 구석에 숨을 셈이었다.
“선아, 일어났으면……. 어어?”
“으악!”
침대를 타 넘으려던 이선은 결국 두르고 있던 이불을 밟았다.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쾅 하고 살벌한 소리가 울렸다.
“선아!”
강희찬은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재빨리 협탁 위에 내려놓고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이불로 둘러싸인 흰색 덩어리가 혼자 “으으…….” 하며 아파하고 있었다. 그는 이선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덩어리진 이불을 풀어내려 했다.
“하, 하지 마세요!”
“머리 박은 거 아니에요? 소리 엄청 크게 났는데.”
“읏……. 아, 아니에요.”
“아니긴. 얼른 봐요. 이불 좀 치워봐요.”
“안 돼요!”
이불을 벗겨내려는 강희찬의 손길에 덩어리는 더욱 웅크렸다. 결국 포기한 그가 얼굴이 있을 만한 부분을 살짝 열었다. 그 정도는 허락해 줄 셈인지, 눈물이 맺힌 이선의 얼굴이 금세 드러났다.
“머리 아파서 우는 거 아니에요? 조금만 치워봐요. 응?”
“…윽……. 옷 주세요. 옷 어딨어요.”
“세탁기 돌리는 중인데요?”
“왜, 왜 맘대로…….”
“…….”
“…집에 갈래요.”
머리를 박은 게 창피해서 우는 게 아니었다. 짐작 가는 이유가 있었다. 대충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다.
강희찬은 한숨을 내쉬며 이선의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 덩어리는 움칫 떨면서도 고맙게도 피하진 않았다.
“어제 많이 놀랐어요?”
“…….”
“선이, 마음 다쳤어?”
눈물을 쓸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가슴께가 있을 만한 곳에 손바닥을 가져갔지만, 정작 닿는 것은 무릎이었다. 아무래도 이불 안에서 몸을 공벌레처럼 말고 있는 듯했다. 이선은 코를 훌쩍였다.
역시 짐작한 이유가 맞았다.
‘이렇게 예쁘니 앞이든 뒤든 좀 빨 수 있는 것 아닌가.’
강희찬의 입장에서야 그랬지만, 이선은 아니었다. 특히 처음 뒷구멍을 남에게 빨렸다는 정신적 충격이 상당한 듯했다. 어느새 닦았던 눈가에는 다시 방울방울 눈물이 흘렀다.
“으… 그, 그런 거, 하지 마세요. 흐으…….”
“왜요.”
“그런 거, 변태들이나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안 돼요, 희찬 씨.”
서러움이 뚝뚝 묻어나면서도 단호했다. 과연. 변태들이나 하는 거란 말인가. 어차피 자신은 변태가 맞았으니 아무런 타격이 되지 못했다.
“자꾸, 그런 짓 하면……. 윽, 장가 못 가요.”
하지만 이 말은 제법 타격감이 있었다.
장가라니. 어젯밤, 남자한테 안긴 채로 몇 번이고 좋다고 싸놓고 어디의 누구한테 장가를 든단 말인가. 상상만으로도 불쾌했다.
“장가를 왜 가. 누구한테 장가들려고. 정 선생, 장가들 데 있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덩어리 속 얼굴은 어느새 당황으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또 저런 얼굴을 하면 약해지는 게 자신이었다.
“그리고 장가 나한테 들면 되잖아요. 다른 사람이 뭐가 중요해. 우리끼리 좋으면 되지.”
“…그래도…….”
“응?”
“그래도 다신 안 한다고 약속해 주세요.”
덩어리 안에서 하얀 팔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새끼손가락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해달라는 몸짓이었다. 강희찬은 시치미를 떼었다.
“뭐를.”
“뒤, 뒤에… 막 입으로…….”
잘 얼버무려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맹한 호구 주제에. 꼭 제 앞에서만 야무진 행세를 했다. 그게 조금 원망스러웠지만, 어쨌든 이것도 앞으로 같이 해결할 문제였다.
그는 이선의 팔을 이불 안으로 꼭꼭 숨겨 넣었다. 마치 몸이 식을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그리고 능청스럽게 말을 돌렸다.
“과일 좀 씻었는데, 먹을래요? 먹기 힘들면 갈아줄게요.”
“…뭐 있는데요?”
결국 이 순진한 사람은 홀랑 넘어가고야 만다. 호구가 아무리 야무진 체를 해봐야 거기까지였다. 강희찬은 속내를 숨긴 채 빙긋 미소 지었다.
“파인애플이랑 복숭아. 아침에 마트에서 사 왔어요. 침대에서 먹어요. 옮겨줄까요?”
“…….”
이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혼자 움직이면 많이 힘들 것 같다. 게다가 그에겐 아니라고 했지만 부딪힌 머리가 아직도 아팠다. 이불 위라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통증이 꽤 갔다.
강희찬은 이불째로 이선을 들어 올렸다. 어디도 붙잡을 수 없어서 잠깐 불안했지만, 이내 침대에 등이 닿은 것을 느낀 이선은 안도했다. 보기와는 달리, 정말 힘이 센 사람이구나. 새삼스럽게 운동선수의 근력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는 협탁에 올려두었던 접시를 가져왔다. 먹음직한 크기로 자른 파인애플을 포크로 찍어 이선의 입에 넣었다.
“좀 있다가 밥 먹고 야구장만 잠깐 다녀올게요.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어요. 자도 되고.”
‘잠깐’ 다녀온다니. 요 앞에 마트라도 다녀오는 투로 말하고 있지만, 오늘은 엄연히 그가 출근하는 날이었다. 이선은 무언가 대꾸라도 하고 싶었지만 바로 밀려오는 파인애플 조각에 입이 막혔다.
“내일 일요일이잖아요. 집에 가지 말고 나랑 밥도 먹어주고 해야지.”
“으, 응. 히찬 씨.”
우물우물. 입 안을 채우는 파인애플즙이 흘러나올까, 이선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주말이야 여기서 보낸다고 쳐도 아직 곤란한 게 하나 남아 있었다.
“나, 옷 하나만…….”
그가 없는 내내 벌거숭이로 집 안을 활보할 순 없었다. 거북이처럼 이불을 지고 다니는 위험성은 아까 직접 몸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입을 옷을 부탁하는 이선이 강희찬은 마뜩잖았다. 각자 샤워를 하는 날엔 꼭꼭 옷을 챙겨입고 나오는 버릇에 쌓인 것이 많았다.
좀 벗고 다니면 뭐 어떻다고. 상상 속의 이선은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 채 잘도 집 안을 활보했다. 아, 그렇지.
“이것만 먹고, 티 하나 찾아서 줄게요.”
“으응. 근데 바지는……. 아.”
“복숭아도 먹어봐요. 잘 익은 것 같은데.”
여전히 깐깐한 척하는 이선의 입을 다디단 복숭아 조각이 틀어막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선을 향해 강희찬이 싱긋 웃어 보였다. 바지를 얻지 못할 이선이 따라 웃었다.
여전히 평화로운 주말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