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4 (29/31)

  외전4

―김상태 홈런!

홈팀 응원석에서부터 우레와 같은 응원 구호가 밀려들었다. 소리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홈런, 짝짝짝. 김상태 홈런. 이 일정한 규칙은 중간에 들어가는 선수의 이름만 다를 뿐, 한 시간이 넘도록 변하지 않았다.

언젠가 잠실에서도 이 리듬을 들은 적이 있었다. 기억 덕분에 괜한 반가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속상했다. ‘김상태 선수’를 향해 공을 던지고 있는 투수.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해 주지 않는다. 외로운 싸움을 하는 그 투수가 강희찬이라는 사실이 이선은 참 속상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이곳은 강희찬의 홈구장인 잠실이 아닌, 수원이었다.

“…….”

응원석에서 영 올 생각이 없는 맥주보이 때문에 이선의 앞에 있는 플라스틱 컵은 빈 지 오래였다. 이선은 이 상황에 대해 새삼 되새겼다.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는 지금 타석에 선 3번 타자 김상태가 팀에서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선의 반대쪽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남자친구인 아저씨에게서 말이다.

“4번 타자감이야.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딱 알아봤다고. 마린스에서 데려갈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신성고 투수 데려가서 저 선수가 1차 지명받았지.”

“오. 정말요?”

다소 마음의 거리를 둔 세월이 있지만, 그래도 아들이었다. 이선은 어머니의 저 ‘정말요?’라는 말이 궁금함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닌, 그저 맞장구를 쳐주는 것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저의 관심사에 함께 해주는 여자의 반응에 신이 난 것인지 더욱 자랑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암, 그럼요! 아까 첫 타순 돌 때도, 쟤 혼자만 공도 보고 들어갔잖아요. 싹부터가 달라요, 달라.”

어머니의 너머에서 들리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된다.

그가 현재 배우자가 없으며, 과거에도 결혼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아마 이선은 오해했을 것이다. 아저씨가 김상태라는 선수의 아버지가 아닐까, 하고.

이선은 이미 이 조합으로 함께 밥을 먹었던 공식적인 첫 만남부터, 그에게 의도치 않은 무례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다음엔, 자제분도 함께 식사했으면 좋겠다는 이선의 말에 남자는 잠깐의 공백을 두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내가, 다들 그렇게 안 보는데, 사실은 쭉 싱글이었어.’

‘아… 죄, 죄송해요.’

‘어머, 미안해요. 내가 선이한테는 따로 말을 한 적이 없어서……. 얘가 오해했나 봐요.’

‘에이, 뭘. 아냐, 괜찮아.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이렇게 늦게라도 인연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이야?’

‘어우. 웃는 거 봐. 능청스러워.’

멀쩡한 총각을 결혼 경력이 있는, 그것도 자식까지 있다고 오해한 이선의 미안함이 채 가시지도 않았다. 어머니와 연인은 익숙하게도 그들 둘만의 세상으로 빠져, 연인들의 투닥거림을 이어갔다.

의도치 않게 어머니의 닭살 행각을 목격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던 저녁 식사 이후 며칠이 지났던가. 막 방학을 맞이한 이선에게 어머니의 연락이 왔다. 언제쯤 수원으로 올지. 그리고 왔을 때 하루 정도는 아저씨가 함께 야구장에 가기를 원한다는 말도 함께였다.

마침 강희찬의 구단 역시 수원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자주 경기에 출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랬기에 이선은 따로 말은 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야구를 보러 가는데, 경기에 나오지 못한 채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면 그가 얼마나 속상하겠는가.

그냥 조용히 와서, 아주 조금이나마 그의 구단, 더 나아가 그의 급여에 기여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자.

그런 생각이었다. 아저씨의 차를 타고 경기장에 도착하고, 그가 호기롭게 결제하는 선수의 유니폼을 세 사람이 한 가족처럼 입는 순간에도. 이선은 몰랐다. 오늘의 선발투수가 강희찬이라는 사실을.

세 사람이 먹기에 과연 적합한가 싶을 정도로 음식을 바리바리 들고 테이블석에 앉았을 때. 이선은 봤다.

P. 강희찬.

전광판에 있는 다른 기호들은 잘 몰라도, 이제 이선은 P가 Pitcher, 즉 투수임을 알고 있다. 참고로 SP는 Starting Pitcher. 유튜브를 통해 그럭저럭 얻는 잡지식은 투수에 관한 것으로 편향되었다.

1회 초가 끝나고 마운드에 오른 강희찬이 연습구 두 개를 던지고 난 후. 이선은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갑자기 모자를 벗은 그는 평소에도 큰 눈을 더욱 크게 하고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빤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입은 유니폼을 본 순간 미간이 팍 구겨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윽. 괜히 추운 것처럼 양팔로 몸을 감싸며 유니폼을 가려봐도 소용없었다.

‘이게 대체 뭐야?’

그리 묻는 것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던 강희찬은 심판의 주의와 함께 다시 모자를 뒤집어썼다.

‘이따 두고 봐요.’

짧은 순간 마주친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희찬 씨는 참 편하겠다. 음성이란 매체 없이, 이렇게 원거리에 있는 사람에게도 본인의 의사를 전할 수 있다니. 진화된 신인류라고 할 수 있었다.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선은 그가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잔뜩 움츠린 몸을 당당하게 펼 수가 없었다. 그는 자꾸만 자신이 입고 있는 유니폼을 찢어버릴 기세로 봤다.

“두고 봐요. 우리 상태는 절대 그냥 들어가지는… 아.”

“스트―라이크, 아웃!”

아저씨의 말이 채 완성되기 전.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르기라도 하듯, 우렁찬 심판의 콜이 쩌렁쩌렁 울렸다. 박력에 밀렸는지, 응원석에서 귀가 터질 듯 울리던 응원 구호 역시 주춤했다.

강희찬이 다섯 번째 마운드에 오르고 세 번째 아웃 카운트를 잡은 후. 보란 듯이 느긋한 걸음으로 이선을 빤히 보며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이선은 치킨 상자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앞섶을 슬며시 가렸다.

“선아. 뭐 또 먹고 싶은 거 있어? 엄마, 가서 저거 음료수 사 올게. 술인가? 맛있어 보인다.”

어머니는 옆 테이블 사람들이 마시고 있는 영롱한 빛깔의 음료수를 보며 말했다.

“같이 가, 그럼.”

몸을 일으키는 어머니를 따라 남자 역시 함께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의 어깨를 살포시 눌렀다.

“됐어요. 기다리다 보면 경기 시작할 것 같은데.”

“에이, 그게 뭐. 하는 꼴 보니까 홈런 칠 것 같지도 않은데.”

김상태 선수의 삼진 이후, 남자는 급격히 경기에 흥미를 잃었다. 0 대 1. 한 점의 리드를 허용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아슬아슬한 격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데 슬슬 염증이 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런 야구팬도 여자친구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 그냥 있어요. 나, 화장실도 다녀올 거란 말이야.”

“아니, 그럼 뭐 어때서. 같이 가요.”

“싫어, 나는. 선아, 엄마 다녀올게. 치킨 하나 더 먹을까? 아님, 딴 거 사 올까?”

“난 아무거나 괜찮은데. 엄마 먹고 싶은 거로 드세요.”

“그럼 보면서 사 올게. 닭은 남문에서 먹는 게 낫겠다. 아까 보니까 쫄면 같은 것도 있던데.”

“혼자 갈 수 있겠어요?”

여자가 자리를 나서는 순간에도 남자는 질기도록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작은 손가방을 들고 관중석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을 네 개의 눈동자가 끈질기게 뒤따른다. 장내 아나운서인 남자의 호탕한 목소리가 울렸다. 막간을 이용해 관중을 대상으로 한 댄스 타임이 진행 중이었다.

전광판 속, 머리가 긴 여자가 도발적으로 춤을 추는 도중 이선은 남겨진 아저씨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

잠시 어색한 기색이 스쳤지만, 그는 연장자답게도 먼저 표정을 감추었다.

“거 참. 혼자 잘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직원들한테 표 보여주면 다들 잘 말해주더라고요.”

“오. 야구장 많이 와봤어? 엄마가 이선이는 야구 잘 안 본다고 했는데.”

“많이는 아니고……. 친구가 구단에서 일하거든요. 홍보팀이요.”

“어이고. 프런트야? 어느 팀?”

“이 팀이요. 컵스.”

“정말?”

야구단이라는 직장이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저 구단 홍보팀 직원인데. 반응은 마치 단장이나 구단주가 친구라는 말을 들었을 법했다.

별 내용도 아닌 것에 추임새를 넣으며 과장되게 호응을 하는 것이 딱 어색한 사이답다. 화장실을 가겠다는 어머니야 아무 의도가 없었을 테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쯤은 해주셨다면 좋을 텐데.

이제 최후의 보루뿐이다. 막 두 번째로 만나 말을 섞고 있는 어색한 사이라는 걸 잊지 말아주기를. 그래서 어머니가 빨리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때였다.

―아, 이번엔… 우리 아버님이랑 아드님이시네요!

―와아아!

경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함성이 터진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은 마음에 이선의 눈은 본능적으로 전광판을 향했다. 화면엔 가운데 자리를 비워둔 채, 나란히 앉아 있는 자신과 아저씨의 모습이 기묘한 하트모양 안에 있었다.

“아…….”

그제야 이선은 이미 댄스 타임이 지나고, 키스타임이라는 낯부끄러운 게임으로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이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 아니……!”

이선은 눈이 화등잔만치 커다래진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관중석의 환호는 줄어들지 않았고, 장내 아나운서 역시 이선의 곤란함을 알아채 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식상한 연인의 투 샷이 아니라는 점에 열광하고 있었다.

이분은 저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이분이 함께 키스타임을 하실 상대는 지금 화장실에 가 계십니다.

그런 말을 전할 수단도, 용기도 이선에게는 없었다. 어느새 그를 제외한 다수는 멋대로 아버지와 아들의 다정한 모습을 원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선의 오른뺨에 낯선 감촉이 슬쩍 붙었다 떨어졌다.

―와아아!

―야아, 우리 아버님이 굉장히 다정하시네요!

깜짝 놀라 옆을 봤을 때, 이미 남자는 잔뜩 미안한 얼굴을 한 채 몸을 멀찍이 물렸다. 결혼도 해본 적 없음에도 장성한 남자의 ‘아버님’이 되었다는 사실에는 별 불쾌감은 없어 보였다.

이선은 한 박자 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구장에 들어오고, 자신과 어머니에게 여러 유니폼을 입혀보며 어울리는 것을 적극적으로 고르던 남자. 그를 보며 느꼈던 기묘한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마… 아버지도 이런 것을 바라셨겠지.’

차멀미 때문에 칭얼거리는 아들을 태우고 도착한 광주의 구장.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온 가족이 맞춰 입고, 나란히 경기를 본다. 어머니는 열정적인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을지도 모르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을 자신은 야무지게 닭 다리 하나를 들고 열심히 먹었을 것이다.

“…….”

때로는 간절히 바라던 풍경은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위로가 되었다. 간절히 바랐던 것과 다른 모습이 우리를 살게 했다.

광주가 아닌 수원에서. ‘가족’은 새로운 모습으로 이선의 곁에 왔는지도 모른다.

* * *

경기는 결국 홈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어머니가 쫄면과 군만두를 사서 자리로 돌아온 순간, 강희찬이 6회 첫 타석에 들어온 선수에게 홈런을 허용한 탓이었다. 그 이후 세 번 연속으로 안타를 허용하자 감독은 투수를 교체했다. 아저씨는 ‘어쩐 일로 강희찬이 이렇게 빨리 내려가냐’며 반색했지만, 이선은 못내 걱정되었다.

‘어디 아픈 걸까?’

아니면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거나. 그러지 않고서야, 5회까지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던 안타가 홈런 이후 연달아 나올 리가 없었다. 야구는 멘탈 스포츠라고 말하던, 유튜브 화면 속 어느 기자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이선은 강희찬이 내려가고 초조한 얼굴로 포털 사이트의 중계를 틀었다. 혹시 잠깐이라도 강희찬의 얼굴이라도 잡아줄까. 그런 기대를 하며 한순간도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이선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홈팀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다.

동점을 허용하고 강희찬이 내보냈던 역전 주자가 홈에 들어왔다. 경기 후 강희찬의 이름 곁엔 ‘패전투수’라는 무서운 말이 붙고야 말았다.

패전투수라니. 그렇게까지 말할 것은 없지 않은가.

그게 꼭 강희찬이라는 사람 자체가 패배자로 불리는 것 같아서. 이선은 오히려 제 심장이 벌렁거려 혼나는 줄 알았다. 잔뜩 흥이 오른 아저씨의 차를 얻어타고 집에 돌아오면서도, 제대로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희찬 씨… 속상하겠지.’

이선은 침대에 앉아 꼭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겨우 시선을 떼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거의 사용한 일이 없던 방의 모습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침대 곁에는 책장 하나와 그와 연결된 책상. 검정과 연두색이 섞인 학생용 의자. 전형적인 학생 방의 구조는 변함없었지만, 침대의 이불은 청결했다. 이선이 며칠 묵을 시기에 맞추어 어머니는 미리 방을 정리해 두었다. 언제나 괜한 핑계로 하루 만에 돌아갔지만, 이번엔 모처럼 어머니의 노력이 빛을 보았다. 비록, 그녀는 지금 연인과 맞춘 휴일을 마저 즐기기 위해 집을 비웠지만 말이다.

“…….”

지금 어디일까?

내일도 컵스는 수원에서 경기가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오늘의 경기 내용 때문에 실망한 그의 감독이 강희찬을 먼저 서울로 보내버릴 수도 있다. 이선은 이제 ‘1군 말소’라는 무서운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

‘먼저 전화를 해볼까? 그치만, 경기 끝나고 피곤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애먼 핸드폰만 만지작거릴 무렵이었다. 이선의 손바닥 안에서 핸드폰이 무섭게 떨어댔다.

헙. 숨을 삼킨 이선이 화면의 이름을 확인했다. 내내 전화를 할까 고민케 했던 이름이 그곳에 있었다.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 와중에도 진동이 점점 거세지는 것만 같았지만, 아무래도 기분 탓일 거다. 아아.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직접 확인한 후, 이선은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

―대문 무슨 색이라고 했었죠?

대뜸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이선은 당황했다.

전화 속 주인공은 발신자를 알면서도 꼭 ‘여보세요’로 시작하는 이선의 통화 습관을 놀리곤 했다. 말을 중간에 자르며, ‘여보입니다’라는 장난을 칠 때도 있었다. 처음 얼굴을 붉혔던 이래. 강희찬의 전화를 받을 땐 의식적으로 ‘희찬 씨’라는 말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장난은 없었다. 그는 딱 제 용건만을 먼저 물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급하다는 듯, 이선의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아파트 단지 돌아서 골목으로 들어오는 쪽. 맞죠? 파란 대문.

“아… 네. 어떻게 알았어요?”

―나와요. 밖이니까.

“네?”

깜짝 놀란 탓에 목소리가 삐끗했다. 뒤늦게 목을 가다듬은 이선이 벌떡 일어나 창밖을 확인했다. 대문 앞엔 인영은 없었다. 대신, 처음 보는 흰색 차의 윗부분이 보였다.

“저 차예요? 흰색?”

―네. 나와요.

“여, 여기 어떻게 아셨어요?”

―전에 서울 갈 때 근처로 데리러 온 적 있었잖아요.

“그래도 정확하게는 몰랐잖아요.”

―몇 바퀴 도니까 금방 찾겠던데. 일단 나와요. 나와서 얘기해요.

“아, 잠깐……!”

전화는 멋대로 끊어졌다. 그게 오히려 ‘당장 나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그럴 터였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은 하지도 못했다. 대신, 이선은 재빨리 저의 행색을 살폈다.

이대로 잘 것을 염두에 둔 편한 티셔츠가 갑자기 후줄근해 보인다. 오전엔 이 옷으로 어머니와 마트에도 다녀왔다는 사실은 이미 머리에 없었다.

재빨리 옷장을 뒤져 새로운 흰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누군가 봤다면, 흰 티셔츠를 똑같은 흰 티셔츠로 갈아입는 기묘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새는 없었다.

거울을 봐야 한다. 헝클어졌을 머리는 대충 매만지고 있지만, 걱정이 덜어지진 않는다. 어머니의 힘 있는 모발과는 달리, 자신의 머리는 항상 뜬금없는 부분이 생각지도 못하게 뻗쳤다.

“아……!”

이선은 한동안 동동거리며 방을 살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고등학생 때도 그랬지만, 이 방엔 원래 거울이 없다는 사실을.

빵!

바보짓을 꾸짖기라도 하듯, 밖에서 경적이 크게 울렸다.

아무리 낮이라지만 주택가에서 클랙슨을 울리다니. 도심 한가운데의 주상복합 오피스텔에서 사는 사람다웠다.

결국, 거울 보기는 포기했다. 혹시라도 그가 또다시 경적을 울릴 것을 걱정하며, 이선은 재빨리 1층으로 내려갔다.

몇 번을 와도 적응되지 않는 1층은 사실 예전엔 집주인이 살던 곳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이선과 어머니는 2층에 세를 내고 살았다. 몇 해 전, 자식 부부를 따라 집주인이 이민을 했다. 그때 어머니는 이 주택을 매입했다.

하나 있는 자식은 가깝다고는 해도 타지에서 공직생활을 하고 있다. 이 기회에 조그만 아파트나 빌라로 옮기시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예상과 달리 어머니는 이곳에 남는 것을 택했다. 철마다 손이 많이 가고 중년 여자 혼자 살기엔 불안한 주택. 어머니의 이유는 이선에게 의외였다.

‘이 집, 아빠 같지 않아?’

‘네?’

아버지와 살던 시절엔 단지 안에 놀이터가 몇 개가 있는 아파트에 살았다. 이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부부가 살던 곳이었다.

대체 이 주택이 아버지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런 생각으로 눈만 멀뚱히 뜨는 이선을 향해, 어머니는 빙긋 미소 지었다.

‘아빠처럼 지켜주는 것 같잖아.’

가게를 내고 이 집으로 이사 왔던가, 아니면 그 반대였던가. 어렸던 이선에게는 이미 희미해진 기억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겐 매 순간 뼈에 새겨진 세월이었다.

전업주부였던 여자가 한순간 가장이 된 이래로, 그녀를 감싸줄 보호막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어린 아들의 유일한 그늘이 되어야 했다.

그제야 이선은 이해했다. 아마도, 홀로 일구어낸 가게와 이 집은 어머니의 보호막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좀 더 보안이 잘되는 아파트로 가자 강력히 권할 수가 없었다. 세를 들어 살 땐 막혔지만, 지금은 뚫려 있는 내부의 계단은 아직도 순간순간 낯설었다.

하지만 당장 그런 감상을 느낄 새가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후다닥 소리를 내며 구르듯 계단을 내려갔고 현관을 박차고 나섰다. 2층에도 바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었지만, 대문으로 직접 나가기엔 이곳이 빨랐다.

대문을 열자, 역시 흰색인 RV 차량 한 대가 서 있다. 2층에서 볼 땐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차의 옆부분엔 컵스의 구단 마크가 크게 있었다.

달칵.

안에선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선은 머뭇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그 안에는 편한 차림의 강희찬이 있었다.

그는 이선이 문을 여는 순간을 눈으로 집요하게 훑었다. 시트에 몸을 기대앉아 고개만 돌려 쳐다보는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딘가 심통이 난 소년처럼 보였다. 가볍게 입은 검은 반팔 티셔츠가 더욱 그를 어려 보이게 했다. 매번 비슷한 스타일로 입는 이선에 비해, 그는 자의든 타의든 과하지 않으면서도 다채로운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때마다 다른 느낌이 이선을 설레게 했다.

몇 시간 전에 씻은 티가 나는 뽀송뽀송한 얼굴과 머리카락. 방금 씻긴 아기들을 보면 뺨에 입을 대고 싶은 것처럼, 강희찬 역시 그런 충동을 부추겼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희찬 씨. 이 차 뭐예요?”

“일단 타요. 타고 얘기해요.”

“아, 네.”

어색하게 차에 오르고 문을 닫자, 얼마 없던 외부의 소음이 차단된다. 마치 세상에 그와 단둘이 남겨진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강희찬은 시트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까 그거!”

“차, 이거…….”

어색한 적막이 이어지길 몇 초. 서로의 말이 공중에서 부딪쳐 중간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입을 연 이선은 꼬리를 말은 겁먹은 강아지처럼 입을 꼭 다물었다. 그 모습에 강희찬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결국 양보했다.

“먼저 해요.”

“아, 아니에요. 희찬 씨 먼저…….”

“…….”

강희찬은 손사래를 치는 이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이선은 그가 원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느껴졌다.

“그게… 차, 이거 회사 건가 궁금해서요.”

“원정경기 올 때 구단 직원들이 타고 오는 거예요. 선수들이랑 같은 버스 탈 수는 없으니까.”

“아, 그렇구나. 이렇게 빌려서 탈 수도 있나 봐요.”

여전히 강희찬은 이선을 빤히 바라봤다.

‘대체 왜 보는 거지?’

이선은 까만 그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머리 모양이 이상한가? 아님, 아까 잠깐 누웠을 때 얼굴에 베개 자국이라도 난 건가? 아무리 급했어도 거울이라도 한 번 보고 나올 걸 그랬나.

당황하던 이선이 손을 들어 제 뺨을 매만질 때였다. 한숨이 강희찬의 입술을 가른 것은.

“당연히 선수들한테는 절대 안 빌려주죠. 원정경기 와서 술 처먹고 운전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막 빌려줍니까.”

“그, 그럼 이거 어떻게 타고 오셨어요?”

“그냥 키 들고 나왔는데요.”

이선의 눈이 빠져나올 기세로 커졌다. 강희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네에?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초등학교 선생이라 그런가. 생각도 딱 초등학생 수준이다.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바들거리는 모습이 평소라면 그저 귀여웠을 테지. 물론, 그건 지금도 비슷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귀엽다고 실실 웃으며 이선의 뺨을 콕콕 누르며 장난을 칠 기분은 아니었다.

“문자 보냈으니까 됐어요. 내가 가져간 거 알고 있어요.”

강희찬은 대시보드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핸드폰을 흘끔 봤다.

[제발]

[음주운전은 안 돼]

[그건 제발]

[희찬아, 문자 보고 있지?]

차 키를 도둑맞은 운영팀장이 뒤늦게 보내는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혹시라도 차를 가지고 나간 강희찬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열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팀장 역시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다.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보내고 있을 메시지 폭탄은 이선의 눈에도 역시 들어갔다. 둥그렇게 뜬 눈이 핸드폰과 강희찬을 번갈아 본다. 테러를 받는 핸드폰을 보며, 오히려 이선이 더 겁을 먹고 있었다.

“쯧.”

혀를 찬 강희찬은 결국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얼른 뒤집었다.

오매불망. 선수와 차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어떠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기를. 단 한 마디 답장을 바라고 있을 한 남자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요원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내가 물어봐도 되죠?”

강희찬은 다시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여전히 이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그라운드에서 기 싸움을 하며 지낸 사람이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압도되는 눈빛에 이선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정좌했다.

“아, 네.”

“왜 말도 없이 여기 있어요? 아까 그건 누구고. 정 선생, 나 몰래 뒤로 딴짓합니까? 바람피우고 있어요?”

‘묻는다’라는 건 기본적으로 대답을 원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는 이선이 답을 할 틈도 없이 질문을 연발했다. 질문 세례에 정신을 빼고 있던 이선이지만, 한마디는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바람이라뇨…….”

허업. 숨을 들이삼킨 입이 다물어지지 못했다. 가당치도 않은 모함에 놀랐고, 그 말이 강희찬의 입에서 나왔기에 더욱 억울했다.

“애인한테 일정 숨기고 다른 놈이랑 쪽쪽 대는 걸 줄이면 ‘바람피운다’고 그래요.”

“쪽쪽……. 저 그런 적 없어요!”

이선은 양 주먹을 말아 쥐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결백을 주장했다. 마치 털을 바짝 세운 동물 같은 모양새였다. 평소라면 귀엽다고 얼러댔을 강희찬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전광판에서 봤던 건 다른 사람입니까?”

“아…….”

이선은 아차 했다. 그가 무슨 일로 자신을 추궁하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주먹까지 말아 쥐고 결백을 주장하던 기세가 꺾였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민망함이었다.

“거기서도… 보여요?”

“그럼 화면이 그렇게 큰데, 안 보이겠어요? 내 눈은 무슨 옹이구멍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아니. 그게, 아니고…….”

의미 없는 논쟁은 지은 죄가 있는 쪽의 패배로 끝난다.

용맹하게 말아 쥐었던 이선의 양손은 어느새 자신 없게 꼬물거렸다. 형사의 취조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 직전의 범인처럼. 그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결국 아슬하게 붙어 있던 강희찬의 안전핀이 떨어졌다.

“…….”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딱 그 한마디만 하라고. 이선을 기다리는 내내 간절히 빌었다.

어떤 우스운 변명을 해도, 모른 척 넘어갈 자신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아직 이선에게 저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존재일 테니까.

하지만 말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망설이는 모습에 강희찬은 눈가를 짚었다.

“누구예요.”

낮은 목소리가 마치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의중을 알기 힘든 행동 변화에, 이선은 잔뜩 눈치를 살피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아저씨예요.”

흠잡을 데 없는 무난한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가를 손으로 짚던 강희찬은 손을 내리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딴 건, 씨발, 눈으로 보면 알아요!”

요사이 강희찬은 이선의 앞에서만큼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언행을 유지했다.

당연했다. 조금만 거친 단어를 써도 속상하다는 얼굴로 저를 봤고, 욕이라도 하는 날엔 당장 눈물을 쏟아낼 기세로 울먹거렸다.

‘희찬 씨, 그런 말 쓰면 안 돼요.’

말랑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들어주지 못할 건 세상에 없었다.

때문에, 욕설에 대한 면역이 현저히 낮아진 이선은 놀랐다. 갓 입학한 1학년들 교실에서 욕설을 들었을 때보다도 훨씬.

씨발이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

“아니, 왜 하필이면 그런 늙은……! 아, 진짜.”

하지만 강희찬은 이선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이미 그는 억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선아……. 바람을 피울 거면, 좀 젊고 괜찮은 놈으로 해야지, 왜 대체…….”

그는 이제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이선은 종잡을 수 없던 그의 감정을 뒤늦게 따라잡았다. 그리고 당황했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일단 지금의 강희찬에게 자신은 연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파렴치한이었다. 차라리 불같이 화를 낸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반응은 뭐란 말인가. 마치 바람을 피우라 등을 떠미는 꼴이 아닌가.

기분이 묘했다. 서운함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선은 불만이 잔뜩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람 아니에요. 엄마 애인 아저씬데…….”

“내일 당장 관뚜껑 열고 드러누워도……. 네?”

“엄마… 남자친구 아저씨.”

“…….”

창작의 고통에서 몸부림치는 예민한 음악가처럼. 앞머리를 거칠게 헝클던 손이 딱 멈추었다. 그리고 강희찬의 눈이 이선을 향했다.

‘다시 말해볼래요?’

그렇게 말하는 듯한 강희찬의 커다랗고 까만 눈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이선은 그에게 진실을 전했다.

“아저씨, 엄마보다 어리세요.”

“그…….”

“…….”

“일단, …미안해요.”

아저씨가 올해 마흔다섯이 되었던가 되지 않았던가. 아직 살날이 한참 남은 이를 내일 당장 관짝에 들어갈 노인네로 만든 탓일까? 강희찬은 답지 않게 당황했다.

출력 알고리즘에 문제가 생긴 기계처럼 입술만 달싹인 후에야 겨우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완성했다.

그는 언제나 멋지고 완벽한 남자였다. 조금 부끄러운 말로 표현해 보자면 왕자님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이의 의외의 모습이 퍽 귀여운 탓일까. 서운한 마음은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자신이 다른 이를 만나길 바라는 건 아닐 터였다. 그 역시 애정이라는 이름의 한 부분이겠지.

보이는 행동에 서운해하지 말자. 자신은 이미 손바닥 위에 올려둔 것처럼 그의 진심을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정리된 머릿속과는 달리, 이선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그를 골려주고 싶었다.

“제가 왜 바람을 피워요.”

“아…….”

불퉁한 이선의 표정에 강희찬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졸지에 연인을 믿지 못한 옹졸한 남자가 되었다는 자각이 일었다. 당장이라도 이선이 뒤를 돌아 집 안으로 들어가도 할 말이 없었다.

붙잡아야 한다. 파란색의 철문은 연식이 느껴지고, 담장은 언젠가 넘어봤던 야구장의 그것보다 훨씬 낮았지만 그래도 이곳은 강희찬에겐 철옹성이었다.

손을 뻗었다. 오해라고. 마음을 다친 이선을 달래주고 제대로 사과를 해야 한다. 조수석에서 내릴 생각조차 없는 이선이 그에게는 지금 당장 바람처럼 홱 돌아설 사람으로 느껴졌다.

잡아야 한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 생각만을 남긴 채, 강희찬이 이선의 손을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가느다란 양손의 온기가 먼저 강희찬의 오른손을 어설프게 감싼 것은.

“저는… 하나도 충분한데.”

이선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저런 말을 하면서도 잔뜩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강희찬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이선의 손을 끌어당겼다.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쉬이 끌려오는 몸을 품에 넣었다. 본능은 상상 속에선 이미 저만치 멀어졌던 이선을 오롯이 느끼고 싶어 했다.

마른 몸을 끌어안으면 언제나 입술 언저리에 가는 머리카락이 닿는다. 이제는 몸이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마치 긴 원정에서 돌아온 것만 같은 익숙함이지만, 여전히 설레는 순간이기도 했다.

강희찬은 눈을 감고, 코끝을 머리카락에 문질렀다. 온 세포의 긴장이 풀리고, 이대로 잠이 들 것만 같은 감각에 빠질 무렵이었다. 가만히 감겼던 강희찬의 눈이 반짝 열렸다.

“근데, 왜 나한텐 얘기 안 했어요? 야구장 오는 거.”

품에 기댄 이선을 떼어놓은 그는 이선의 양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물었다. 따뜻한 품을 만끽하고 있던 이선은 새로이 시작된 2차전을 직감했다.

“그게… 희찬 씨, 시합 나가는 줄 몰라서요. 안 물어보기도 했고.”

“내가 안 물어봤어도! 그래도 수원에 오면 알려줘야지. 내 기분이 어땠겠어요? 서울에 잘 있을 애인이 원정경기장에, 그것도 상대 팀 유니폼을 입고 앉아 있어. 근데 웬 산도적……!”

“…….”

“아니, 웬 남자한테 얼굴부터 먹히고 있으면…….”

“미안해요, 희찬 씨.”

이선은 귀를 스쳐 지나간 ‘산도적’이란 단어는 애써 무시했다. 언젠가 송재혁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뭐더라? 소도둑이었던가? 처음 어머니와 아저씨의 관계를 눈치챘을 무렵. 자신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실은 애써 머릿속에 묻어두었다.

“어디에요?”

“네?”

강희찬이 형형한 눈빛으로 이선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쪽 얼굴이냐고. 근데 그 아저씨란 사람도 이상하네. 엄마 남자친구면 남자친구지, 애도 아니고 다 큰 남의 아들한테 막, 어? 그런 짓을 해요?”

작은 오해로 인한 투닥거림. 화해 이후의 달콤한 시간. 그런 흐름을 예상했지만, 어느새 고전파 소나타처럼 약간의 변주만 준 도돌이표였다.

“키스타임이니까……. 그런 거 해야 카메라 치워주잖아요.”

눈을 몇 번 깜빡인 이선은 뒤늦게 변명했다. 퉁퉁거리다 못해 불어터질 기세로 입술을 댓 발 내미는 강희찬을 가만히 달래며.

하지만 강희찬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하악질을 하는 고양이처럼 예민하게 반응했다.

“키……! 그딴 말 하지 마요. 기분 나쁘니까. 키스는 무슨 키스야.”

“아니, 제가 했다는 게 아니잖아요. 이름이…….”

“생각해 보니까 웃기네. 애새끼들 다 들어오는 데서 왜 그딴 문란한 짓이야? 내일 가면 뭐라고 해야지.”

얼굴만 파랗게 칠하면 투덜이 스머프 그 자체였다. 너른 품에 저를 기대게 해주던 다정한 남자는 어느새 정면으로 몸을 튼 채 삐죽빼죽했다. 전국 야구장에서 명절 윷놀이처럼 이어지는 막간 게임에 대한 반감이 가득 드러났다. 그로 인해 입술도 뺨도 퉁퉁거렸다.

‘아기 같아…….’

삐죽거리는 그를 보던 이선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강희찬이 안다면 그리 좋아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진심이었다. 그는 가끔 매일 보는 아이들보다도 더 아이 같을 때가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를 꼭 안아주고 싶다는 건 혼자만의 비밀로 해야겠지.

한숨에 마음을 숨긴 이선은 운전석을 향해 팔을 뻗었다. 단단한 어깨를 잡고, 운전석을 향해 몸을 쭉 뻗었다.

쪽.

보드라운 뺨과 입술이 닿는 마찰음이 조용한 차 안을 울렸다.

“…….”

강희찬의 두 눈이 이쪽을 향했다. 하지만 이미 이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시침을 떼며 앉아 있었다.

“이, 이러면 됐죠?”

이선은 앞 유리 너머, 평범한 주택가의 골목에 고집스레 시선을 던진 채였다.

뺨에 닿았던 감촉은 마치 꿈처럼 덧없다. 강희찬은 본능적으로 제 손을 들어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짚었다. 그리고 멍청이처럼 이선을 멍하니 바라봤다. 옆모습뿐이었지만 부끄러움으로 인해 달아오르는 귀 끝이나 뺨은 확실히 느껴졌다. 초보 연인들에겐 아직도 입맞춤은 할 때마다 부끄러운 의식이었다.

생전 처음 입맞춤을 해본 것처럼 굴던 강희찬은 뒤늦게 정신 차렸다.

“되긴 뭐가 돼요. 내가 해야지. 봐요. 어느 쪽이었어.”

“아……!”

커다란 손이 이선의 얼굴을 감싼다. 커다란 손아귀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운 힘이 이선을 당겼다. 고개는 고집과는 다르게 너무도 쉽게 그를 향했다.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그런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입술 위로 젖은 온기가 짙게 붙었다.

금세 떨어질 것을 예상했던 이선은 강하게 빨리는 입술에 몸을 움칫했다. 흐트러진 호흡마저도 남김없이 강희찬의 입 안으로 빨려든다.

“읏…….”

아직도 보통의 연인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맞댈 수 없었다. 그와 자신이 둘 다 남자인 탓만은 아니었다. 둘만 있는 곳에서도, 이선은 여전히 입맞춤이 벅찼다.

지금처럼. 혀를 얽지 않아도 모든 것이 삼켜지는 것만 같았다. 내쉬는 숨결 하나까지 샐 것 없이 그의 입 안으로 사라지는 걸 느끼다 보면, 입술에서부터 온몸이 삼켜질 것 같았다. 왈칵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이대로 먹히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거라는 이중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

입술이 아쉽다는 듯 천천히 멀어진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거리만큼 그가 멀어졌을 때. 이선은 벅찼던 숨을 내쉬었다.

붉어진 얼굴을 보이는 건 언제나 부끄러웠다. 그는 언제나 이선을 배려했다. 그럴 때면, 강희찬은 몸을 완전히 물리지 않았다. 대신 눈을 도록도록 굴리는 이선을 꼭 품에 넣어주었다.

꼭 지금처럼.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마음껏 문댔다. 기분 좋은 근육이 오롯이 느껴졌다. 사람의 어깨에도 이렇게 근육이 발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선은 그를 통해 처음 알았다.

단단하고, 두꺼우며, 가끔은 무섭기도 한 다른 곳과는 달랐다. 이곳의 근육은 강인하면서도 섬세했다. 강희찬과 닮아 있었다.

헤. 이선은 제게 허락된 온몸에 마음껏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웃었다.

“입에 안 했는데.”

이선은 장난스레 말했다. 야구장에서 아저씨에게 뽀뽀를 받았던 쪽은 여기가 아니라고.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더그아웃에서 지켜봤던 강희찬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모르는 양 시침을 떼었다.

“그럼 어디 했어요?”

“으음… 여기?”

잠깐 고민하던 이선은 일부러 반대쪽 뺨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머무는 곳에 강희찬의 입술이 갈급하게 붙었다.

아기의 보드라운 뺨에 하듯 조심스럽게 입술을 붙였다. 그리고 장난스레 이를 세워 슬쩍 깨물기도 했다.

“으응…….”

그러면 이선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반응한다. 혹시라도 연약한 피부에 상처가 날까. 언제나 노심초사하는 강희찬은 황급히 세웠던 이를 감추었다.

아픈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놀란 것임을 안다. 하지만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강희찬에게 이선은 언제나 그런 존재였다. 처음 보는, 도저히 주변에서 본 일이 없는 사람이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순간적인 충동을 감추고 몸을 물린 강희찬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팠어요?”

“아니. 안 아파요.”

“조금 빨개진 것 같은데.”

“이건 아까 뽀뽀 세게 해서 그런 거예요.”

“멍들면 어쩌려고.”

걱정스러운 손길이 이선의 뺨을 조심히 쓸었다. 손길만큼이나 염려가 가득한 눈길이 찬찬히 얼굴을 더듬었다. 강희찬은 언제나 자신을 유리구슬처럼 다루었다.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명치가 간지러운 느낌에, 더더욱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자신이었다.

“뽀뽀 좀 했다고 무슨 멍이 들어요.”

“저번에 내가 잡아서 허벅지에 멍들었잖아요. 그때 얼마나 놀랐는데.”

자기 전, 어쩌다 묘한 분위기로 흐를 때. 이선은 그의 힘에 밀려 자꾸만 침대 헤드로 향하기 일쑤였다. 그런 이선을 잡아 내리는 것은 강희찬의 손길이었다. 당시엔 의식하지 못했지만, 다음 날 헐렁한 반바지를 입은 이선을 보고 경악했다. 양 허벅지의 바깥쪽으로 크게 자리 잡은 멍 때문에.

충격에 빠진 강희찬을 향해 이선은 ‘가끔 모기에 물려 긁어도 멍이 든다’라며 달랬다. 하지만 소중하고 연약한 다리에 시퍼런 멍이 들게 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강희찬은 그 순간, 자신이 정말 몹쓸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떠올려보면, 처음 이선과 몸을 겹쳤을 때도 자신은 이선의 몸에 손자국을 냈다. 신경 써서 힘을 뺐어도 무의식적인 순간마다 손길이 닿았던 곳은 여과 없이 붉어졌다.

그다음 단계가 시퍼런 멍이 되는 거였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강희찬은 한동안 이선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처음엔 답지 않게 조심스럽고 쩔쩔매는 모습이 이선 역시 재밌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단하게 솟은 아랫도리에도 ‘열중쉬어’를 유지하는 모습에 이선이 먼저 그의 속옷 안으로 손을 넣고야 말았다.

그날 밤. 마치 그간 참았던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이선의 온몸엔 울긋불긋 그의 손자국이 생겼다. 그것도 모자라 새카만 멍을 남겼던 주제에. 그런 사람이 여전히 뺨을 조금 깨문 것에 하나하나 겁을 먹고 조심하고 있었다. 마치, 첫 실습을 하던 해 눈으로 본 초등학생들이 너무 작아서 가까이 가기도 겁이 났던 저의 모습이 겹쳤다.

하지만 자신은 갓 입학한 초등학생이 아니다. 강희찬은 그것을 알아야 했다.

“여기도.”

여기도 뽀뽀해 줘. 뺨을 가리키는 이선의 손가락이 그렇게 말했다.

당당한 요구다. 강희찬은 냉큼 그곳에 입술을 내렸다. 쓸데없이 커다랗고 화질이 좋은 전광판 속 중년 남자가 마음대로 입술을 갖다 붙였던 곳이기도 했다.

입맞춤은 뺨을 다 빨아먹을 기세로 이어졌다. 이선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던 중 마치 전기라도 맞은 사람처럼 몸을 파드득 떨었다.

“아! 이, 이거……! 블랙박스!”

한순간에 낯빛이 공포에 질렸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룸미러 아래의 작은 기기를 향했다.

“이제 와서요?”

놀란 이선과 동시에 함께 놀랐던 강희찬은 뒤늦게 맥이 탁 풀렸다.

“벌써 메모리카드 다 빼놨어요.”

“아…….”

“그런 생각도 안 하고 남의 차 가져왔을까 봐요?”

“희찬 씨, 되게 똑똑하시네요.”

멋있어요. 대단해요. 똑똑해요.

이선의 입에선 종종 이런 일차원적인 칭찬이 나왔다. 대뜸 흐르는 칭찬을 들으면, 꼭 자신이 대단한 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선에게만큼은 반드시 그런 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새삼 다짐했다.

처음엔 도무지 적응되지 않던 저 ‘똑똑해요’ 역시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도 한몫했다.

“이리 넘어와요. 신발 벗고.”

툭툭. 강희찬이 제 허벅지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소 대담한 요구에 이선은 선팅된 창 너머로 보이는 주변을 미어캣처럼 살피며 망설였다.

“아니, 여기는 좀…….”

“선팅 잘 됐어요. 밖에서 봐서 알고 있잖아요.”

알고 있지. 안에 사람의 형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시커먼 창문을.

결국, 이선은 못 이기는 척 슬리퍼를 발에서 뺐다. 어느새 시트를 잔뜩 뒤로 빼서 공간을 확보한 강희찬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엉덩이 아래로, 그의 다리와는 다른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애써 모른 척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 위로, 강희찬의 웃음이 스친 듯했다.

“아저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머리카락에 입술을 댄 그가 나직이 물었다. 낮은 목소리와 어울리는 떨림이 이선의 온몸을 통해 전해졌다.

“잘 모르겠는데. 제대로 말해본 것도 오늘이 두 번째라서요.”

“그래도.”

“음… 엄마보다 어리세요. 결혼은 아직 안 하셨다고 들었고. 만드시는 반찬들은 다 맛있어요.”

조곤조곤. 딱 기분 좋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자세가 편한 건지 이선은 마치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아이처럼 말이 느릿해졌다. 강희찬은 가만히 이선의 등을 쓸었다.

“엄마가 좋으시다면 난 다 좋지만, 그래도 아저씨는 좋으신 분 같아요.”

아빠 같아요. 그 말은 목에 걸린 듯 딱 거기에서 멈추었다.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마치 아버지를 잊을 것만 같았다. 아직 자신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신, 이선은 따뜻한 품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매일 보는 동네의 풍경이 뭐가 그리 신기하다고 찍는 어머니. 조심스럽고 서툴게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는 투박한 손.

그 모습에, 애정 어린 손길에 눈을 돌려버린 자신은 이제 없었다. 저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건들면 부서질세라 유리처럼 다루는 답답한 사람은 제게도 있었다.

“그래도, 아저씨 너무 좋아하지 마요. 질투 나니까.”

“희찬 씨가 제일 좋아요.”

이선은 시트 사이로 손을 넣어 커다란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희찬 씨도… 다른 사람 만나라고 하지 마세요. 섭섭했어요.”

강희찬의 품에 얼굴을 한껏 묻은 채. 이선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을 내뱉는 짧은 와중 이선은 감은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리 그에게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내심 서운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라…….”

강희찬은 조금씩 물기가 어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이선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바라는 것은 이선이 행복에 겨워 웃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저의 서투름은 이선의 마음을 다치게 했고, 이렇게 울렸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이선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가만히 달래는 손길이지만 이선의 서운함을 풀기엔 부족하리라.

“정 선생은 나한텐 과분하니까. 예쁘고, 착하고.”

“그게 뭐예요.”

규칙적이었지만 절대 무심하지 않은 손길이 여전히 이선의 등에 머물렀다. 그는 언제나 이선을 달래주었지만, 사람을 달래는 것에는 서툰 사람이기도 했다.

“그럼, 진짜 제가 다른 사람 만난 거면 어쩌려고 했어요?”

“그럼…….”

등을 쓸던 손길이 느려지더니 멈춘다. 서러워서 비어져 나오려던 눈물은 어느새 멈춘 채였다. 이선은 귀를 세우고 강희찬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그래도 옆에 있어달라고 했겠죠. 있어주기만 하면, 어떻게든 노력할 테니까.”

강희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참으로 답지 않았다. 그와 절대 어울리지 않는 저자세에 이선은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기대고 있던 제 몸을 그의 품에서 떨어트렸다. 불만이 가득 어린 눈이 강희찬을 향했다.

“그러면 어떡해요! 어떻게든 안 된다고, 나를 말려야죠!”

“무슨 수로 말려요. 뭐… 막, 학교도 못 나가게 집에만 가두고?”

“네!”

이선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안 돼. 어린아이를 훈육하는 게 익숙할 선생님다운 단호함이었다. 확고한 모습에 강희찬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순진함을 몹시도 사랑했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진짜 그러면 어쩌려고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해요.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괜찮아요. 저는 바람 안 피울 거니까.”

아, 그렇군. 명쾌하게 흐르는 결론이다.

강희찬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말을 꺼낸 이선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버리려고 했어.”

당장 뺨을 흘러도 이상하지 않을 눈물이 커다란 두 눈에 글썽거렸다. 강희찬은 아차 했다. 그리고 재빨리 이선을 품에 끌어안아 가두었다.

“울지 말아요.”

자신의 선택이었다. 이선이 웃기를 바라고, 언제나 행복하기만을 바라면서 했던 선택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강희찬의 곁이 아닌,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이선은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이선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도 변함없었다. 한번 다친 마음은 공에 맞은 팔이 아니었다. 아직도 아물지 못한 마음을 엿볼 때마다 강희찬은 심장이 아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선이 대체 어떤 밤을 보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혼자 이불에 들어가서 눈물을 흘렸을 이선을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또 그런 말 하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

“…….”

“차라리 그냥 나한테 나쁜 새끼라고 해야지. 그렇게 말하면 또 속상해서 마음 다치잖아.”

지은 죄가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강희찬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평생 바가지를 긁히더라도 기어이 몸을 낮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며 이선이 마음을 다치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허리를 세우고 이선의 정수리에 턱을 올렸다. 조금 더 조심스럽고 따뜻한 손길이 마른 등허리를 쓸었다. 그 손길에 이선은 설움을 마음껏 발산했다.

“그럼, 다신 그런 말 안 한다고 약속해요. 그런 말…….”

“응. 약속. 각서 쓰고 공증도 받을까요?”

손가락이라도 걸려는지. 강희찬의 손이 이선의 손을 찾았다. 이선은 허리에 두른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뜻을 이해한 강희찬은 억지로 손가락을 걸진 않았다. 대신 버릇처럼 이선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안 지키면, 날 팬티만 입히고 쫓아내도 돼요.”

“…그런 짓 안 해요.”

그런 짓을 하면……. 오히려 제 손해다. 이선은 홀로 생각을 삼켰다. 대체 누구 보기 좋으라고 이런 몸을, 그것도 다 벗겨서 밖으로 내보낸단 말인가.

하지만 속내를 모를 강희찬은 그저 순하고 여리기만 한 소중한 이를 보듬었다. 여전히 이선은 제 안의 모순적인 욕망을 동시에 들쑤시는 존재였다.

항상 웃게만 하고 싶지만, 저로 인해 우는 얼굴도 보고 싶다. 세상 모든 나쁜 것들로부터 온실 속 화초처럼 지켜주고 싶으면서도, 마음대로 해버리고 싶은 가학심도 일었다.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면서도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의 남은 인생을 다 걸 수 있다. 이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손끝을 떠난 공이 1초가 되기 전, 어느 코스로 들어갈지 모르는 불확실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너무도 쉽고 명확했다.

강희찬은 이선을 바투 끌어안았다. 답답한지 바르작거렸지만, 오히려 팔에 힘을 더해 확실히 옭아맸다. 아직은 순진하고 여리기만 한 연인에게는 대놓고 보여줄 수 없는 음습한 욕망을 슬쩍 꺼내보았다.

“아저씨든 누구든. 다른 사람이랑 뽀뽀하지 마요.”

“…네.”

“학교 선생들이랑 애새끼들한테도 너무 잘해주지 말고.”

이선은 가만히 강희찬의 억지를 들었다. 어느새 기분이 풀렸는지, 강희찬의 품에서 ‘헤’ 하고 조용히 웃는 소리가 번졌다. 세상 사람들이 다 저 같을 거라 생각하는 건 이선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학교도 다 관두고, 나만 봐줬으면 좋겠어요.”

섭섭한 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함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선은 아무런 경계도 없이 몸을 내맡겼다.

아마, 이 순진한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테지. 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길 바라는 비틀린 욕망을. 화장실 하나도 자신 없이는 가지 못한 채, 자신만을 기다리며 바라봐주길. 깊숙이 숨겨진 그것을 알아챈 순간, 이선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저를 두려워할 테다.

그저 연인의 기분을 착실히 풀어주는 좋은 남자로 봐준다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강희찬은 얼굴에 낮게 깔렸던 짙은 욕망을 감추었다. 그와 동시에, 이선에게는 버거운 팔의 힘을 풀었다. 어느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을 무렵, 이선의 눈에 비친 것은 연인의 다정한 얼굴뿐이다.

아직도 눈물이 달려 있는지. 눈가가 짓물러서 빨개지지는 않았는지. 강희찬은 이선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부끄러움과 열기로 붉어진 뺨을 제외하면 멀쩡한 이선의 얼굴을 확인하고, 강희찬은 이선을 향해 얼굴을 붙였다.

“뽀뽀.”

귀여운 요구였다. 무게에 눌리는 와중에도 터질 듯 부푼 아랫도리를 한 사람답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쭉 내밀며 재촉했다. 뽀뽀. 짧은 단어만으로 재촉하는 몸짓이 세 살 연하다웠다.

“얼른 뽀뽀해 줘요.”

이선은 언제나처럼 강희찬을 이길 수 없었다.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기고, 창문이 습기로 가득 찰 때까지. 연인들의 입맞춤은 깊어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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