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경기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이 경기장 가득 담겨 있었다. 이곳이 1군이 아닌 2군 경기장임을 실감케 한다.
강희찬을 처음 봤을 무렵.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곳이라 생각했다. 그때의 이선도 지금처럼 홀로 차 안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몽롱한 정신으로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아무런 의미 없이 밖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이번에도 이선은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현실은 꿈과 혼동이 될 만큼 믿기지 않았으며, 지금 당장 조용한 원룸에서 깨어도 이상하진 않을 것만 같다.
‘꿈인가…….’
그런 무서운 생각이 들 때마다, 이선은 왼손을 꼭 쥐었다. 반지의 존재감이 가벼운 통증을 선사했다. 그러고 나면 안도했다. 꿈이 아니라고. 꿈처럼 달콤하지만, 이게 바로 현실이라고.
“…….”
주차장에 있던 방송국의 중계차가 떠난다. 이선은 창밖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중계차가 사라지자, 흉물스러운 캐릭터가 그려진 구단의 버스가 드러난다. 존재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대체, 왜 저런 걸 마스코트로 했을까?’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대체 어떤 포유류 동물인지도 모호한 비주얼이다. 흉물스러운 캐릭터를 그려 넣은 버스가 서울 바닥을 활보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영 별로다. 대다수에게 혐오감을 줄 것 같은 캐릭터를 도대체 누가, 왜 마스코트로 삼았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구장에 걸려 있던 강희찬의 사진을 넣는 것이 훨씬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도움이 될 것이다. 이건 절대 콩깍지 그런 게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따져도 버스에 강희찬의 얼굴을 넣는 것이 나았다. 그의 생김은 이타적이었으니까.
버스에 커다랗게 프린팅된 강희찬의 얼굴을 상상하며, 이선은 운전석 창에 고개를 기대었다. 그리고 기다리는 한 사람을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반추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지금보다는 덜 더웠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건 오직 강희찬뿐이다.
처음 봤던 날부터 눈에 띄던 외모나 이질적일 만큼 표정이 없는 얼굴. 웃는다면 해사한 소년 같은 외모에 비해 언제나 고저 없이 낮은 목소리. 놀라울 정도로 직설적인 화법.
지나고 보니, 그의 모든 것이 이선에게 남아 있었다.
깔끔한 셔츠를 입고, 송재혁의 곁에서 성가심에 가까운 무표정으로 걸었던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때의 자신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그는 조수석의 뒷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오늘은 아닐 것이다. 자신은 운전석에 있었다. 그리고 강희찬은 반드시…….
이선은 번쩍 눈을 떴다. 아까부터 잘 돌아가고 있는 에어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땡볕에서 힘들게 운동을 한 강희찬이 탈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돔구장이라는 게 있다던데……. 여긴 한낮에 경기를 시키면서 왜 지붕은 없는 걸까?
자신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어깨를 짓누르는 햇살이 버거웠다. 하물며, 모래밭 위에서 공을 던졌던 강희찬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선은 가슴이 아려왔다. 강희찬이 오늘 4이닝만을 채우고 내려갔고, 그 어떤 선수들보다도 빨리 샤워를 마쳤으며, 그늘의 벤치에서 경기를 관전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날려버렸다. 삐죽. 입술을 내밀며 혼자 불만을 삭였다.
그가 스파이더맨처럼 담장을 기어오를 때. 확성기와 똑같은 얼굴색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이곳의 감독은 1군 감독보다는 좋은 사람인 게 분명했다. 그를 경기에 자주 내보내지도 않으면서, 심지어 우승하는 중요한 순간에는 강희찬을 벤치에 앉아 있게 하던 감독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
혼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게 쳐다봤던 것과는 달리, 적어도 이선이 보는 범위 내에선 강희찬은 무사했다.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포수에게서 공을 건네받던 순간에도. 감독은 ‘그거 왜?’라고 묻는 듯 공을 가리켰을 뿐이다.
그가 마운드에서 내려갔던 시점부터, 어딘가로 사라질까 봐 목을 잔뜩 빼고 더그아웃을 살폈다. 그는 그런 이선을 향해 공을 흔들어 보였다. 유니폼이 아닌, 커다란 티셔츠를 입은 채로.
소중하게 손에서 떼어놓지 않던 공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그랬기에 이선은 입술을 물 수밖에 없었다. 내내 시야를 방해하던, 고마우면서도 성가신 존재인 헬멧과 고글을 그에게 주던 순간에도. 야구공을 손으로 받자, 이선은 기쁘면서도 그가 퍽 원망스러운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왼손엔 그가 끼워준 반지, 오른손엔 야구공. 이선은 야무지게 양손을 쥐고 주차장까지 걸어왔다.
손가락에 자리한 익숙하지 않은 거슬림은 자꾸만 이선을 일깨워주었다. 꿈이 아니라고. 언제나 지독한 현실로 끝나곤 했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라고.
“…….”
괜히 핸들을 꽉 쥐어보았다. 손가락 위의 존재를 눈에 담았다. 동료 선생님들의 손가락을 자세히 살핀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큐빅이 반짝반짝 박힌 반지를 보자 뒤늦게 걱정이 올라왔다.
‘…남자가 쓰기엔 좀 화려하고 여성스러운 디자인이 아닌가?’
남자의 손에 끼워진 반지라고는 선생님들의 결혼반지나, 종종 신규진의 손가락에 있던 커플링을 본 게 다였다. 그건 되게 심플하던데……. 그럼 강희찬도 자신과 같은 디자인으로 끼게 되는 걸까?
그의 손가락을 장식할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떠올렸다. 길고 곧게 뻗은 그의 손에는 더없이 잘 어울릴 거다. 길쭉길쭉하고 피부가 흰 편인데도 절대 유약하지 않고 남자다운 손가락이었다. 그 손가락에 있을 화려한 반지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리 여성스럽지만도 않았다.
이선은 손가락에 있던 반지를 빼서 안쪽을 확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봤지만, 역시나 브랜드명은 없었다. 그가 낄 반지는 자신이 사주고 싶었다.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은데……. 어디에서 샀는지는 그에게 지나가듯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시무룩해진 기분에 맞추어 이선의 어깨가 처졌다. 다시 홀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다소 급한 걸음으로 주차장에 들어선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아…….”
강희찬은 너른 주차장을 빙 둘러 살폈다. 이선의 차를 발견했는지 보폭을 넓히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에 맞춰 이선의 심장도 고동이 커졌다. 기다릴 때는 얼른 나오기만을 바랐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어쩌지’ 싶은 걱정이 앞섰다.
‘이제부터… 그와 연인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직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기존에도 애매모호했던 관계였다. 갑자기 정의가 내려지자 이선은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지부터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강희찬이 그런 속사정을 알 리 없다. 그는 미리 잠금을 풀어두었던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더운 공기와 함께 그의 향기가 차 안으로 가득 밀려들었다. 이선은 고개를 홱 돌려 핸들을 봤다. 마치, 그가 오는 것을 쳐다보지 않은 것처럼.
“오래 기다렸죠? 자꾸 피칭 영상 보고 가자고 잡아서.”
“아니, 많이 안 기다렸어요.”
이선은 뻣뻣하게 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심장의 고동은 더욱 커졌다.
“자꾸 잡으려는 거 영상 보내달라고 하고 겨우 나왔어요. 먼저 쌩 도망갈까 봐.”
“저는, 도망 안 가는데…….”
조심스레 붙은 ‘저는’에 강희찬이 슬쩍 이선을 바라봤다. 어딘가 뻣뻣한 채로, 어색하게 핸들을 양손으로 부여잡은 것이 꼭 처음 도로연수를 나온 운전자였다.
강희찬은 말없이 이선의 옆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스캔하듯 노골적으로 살폈다.
“…….”
왼손에 반지는 잘 있고, 콘솔박스에 야구공도 잘 있고. 딱 하나 이상한 것이라고는 정이선뿐이다.
‘…설마, 아까 혼자 세웠던 걸 들켰나?’
따져보니, 자신은 거기를 세운 채 사귀자는 말이나 하는 더러운 놈이었다. 아니. 잘 생각해 보면 ‘사귀자’고 말을 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럴 수가.
반지를 손에 끼워주고, 야구공을 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귀자’고 말을 하지 않았다면 결혼했어도 사귀었던 것이 아니라는, 어딘가에서 들었던 농담이 서늘하게 머리를 스쳤다. 맹한 이선이라면 언젠가 깜짝 놀랄지도 몰랐다. 우리가 사귀는 사이였어요?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입을 벌릴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저기…….”
확실한 관계 선언을 위해 강희찬이 운을 뗀 차였다.
“근데, 이렇게 일찍 먼저 가도 괜찮으신 거예요?”
이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구단 버스와 강희찬을 번갈아 보았다. 강희찬 역시 웬 짐승 새끼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구단 버스의 꽁무니로 시선이 갔다. 그리고 인상이 확 구겨졌다. 하여간 저 털북숭이는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까 상대 팀 선수들 말고는 간 사람은 못 본 것 같은데. 먼저 갔다가 혼나면 어떡해요?”
애새끼들을 과보호하는 버릇이 여기서도 발휘되는 것인가. 아무래도 상관없을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먼저 간다고 다음 날 갈군다면, 대가리 좀 박고 있으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그리 말했다가는 이선은 호들갑을 떨며 자신을 다시 야구장 안으로 들여보낼 것이다. 더는 시커먼 남자들을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이선을 보기에도 한참 모자란 시간이었다.
“원래 버스 좀 늦게 출발해요. 훈련하다 가는 사람들 있어서. 거기다 여기 숙소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많고.”
“아, 그러시구나…….”
어색한 추임새가 흘렀다. 이선은 눈을 도록도록 굴렸다.
목욕탕을 같이 간다는 친구들처럼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원래도 강희찬과 단둘이 있을 때는 이토록 어색했던가?
똑같은 사람이 이토록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깁스를 풀거나, 머리를 자른 그가 어색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달라진 저의 마음이었다.
명목상으로나마 신규진을 향해 있던 마음이 오롯이 강희찬을 향해 키를 돌린 순간. 그리고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닌 서로를 보기로 한 순간은 제겐 너무도 낯설었다. 이선은 이제 망망대해에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만 했다.
“혹시 어디 아파요? 몇 시간 동안 땡볕에 있었잖아요.”
“아니……!”
갑작스레 얼굴로 다가온 손이 피할 새도 없이 이선의 이마를 짚었다. 숨을 헙, 하고 삼켰다. 동시에 얼굴로 열이 확 몰렸다. 당장 심장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선에 비해, 강희찬의 얼굴엔 순수한 걱정뿐이었다.
“열 있는 거 아니에요? 따끈따끈한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열 없어요.”
“…그래요?”
강희찬은 미심쩍은 눈을 하며 손을 거두었다. 이선은 혹시나 손에 바람이라도 스칠까 참고 있던 숨을 그제야 내쉬었다.
“적당히 하고 내야로 들어오지, 뭐가 재밌다고 계속 외야에 있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혼자 풀 뽑으면서 놀던데.”
아이싱을 하고 돌아왔을 무렵. 잘 있나 궁금해서 살펴본 외야에서 이선은 엄청난 기세로 잔디를 뽑아댔다.
은근히 과격한 구석이 있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아끼고 보듬을 것처럼 생겼으면서. 의외의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재미도 없는 야구장에서 혼자 즐거움을 찾아낸 이선이 기특했다. 물론, 뽑혀나간 잔디나 구장 관리인의 입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거기, 잡초가 있어서…….”
비루한 변명이다.
나무 하나까지도 허투루 심지 않은, 조경에 대단히 신경을 쓰는 곳에서 어떤 잡초가 살아남겠느냐마는. 그래도 이선은 심심해서 천연 잔디를 마구마구 뽑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잔디밭을 굉장히 아끼시는 교장 선생님 때문에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상한 곳에서 욕망을 분출하던 자신의 모습을 그가 봤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다소 황당한 변명에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이선은 어색하게 손을 뻗어 기어를 바꾸었다. 그 순간, 조수석에 등을 편하게 기댄 강희찬이 이선을 향해 물었다.
“운전할 수 있겠어요? 서울까지.”
“저, 여기까지 혼자 왔는데요? 내비게이션 틀고.”
이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차를 산 것은 몇 년 되지 않았어도, 적어도 면허는 남들을 따라 수능이 끝나고 바로 취득했다. 그것도 1종 보통으로. 열아홉에 땄으니, 이제 10년째인데.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이선의 의아함에 강희찬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멀거니 핸들을 쥔 이선의 왼손을 지그시 보았다. 뒤늦게 이선이 시선을 따라 제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왠지 모르게 떨고 있는 낯선 제 손이 있었다.
“…….”
앞 유리로 쏟아지는 부서지는 햇살과 그림자가 손등에 모자이크를 만들었다. 낯선 풍경 속, 낯선 반지가 끼워진 손이 안쓰럽게 떨리고 있었다. 이선은 결국 차를 세웠다.
“저…….”
목소리가 떨렸다. 이 떨림의 원인이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갑자기 손가락 사이에서 느껴지게 되는 이물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를 곁에 태우고 서울로 가는 예상치 못한 결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숨 고를 틈도 주지 않고 저를 바라보는 이 사람 때문인지.
오늘부터 이선과 함께 걸음을 맞출 남자는 선선히 물었다. 걱정이 어린 다정한 물음이었지만, 어쩐지 이선은 벌거벗겨진 것만 같았다.
“대리 불러줄까요?”
손 하나 대지 않고 남을 알몸으로 만드는 시선을 겨우겨우 피하던 차였다. 이선은 의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대, 대리요? 낮인데, 여기까지 대리기사가 와요?”
순수한 호기심이 일었다.
아직도 차 할부금이 꼬박꼬박 나가는 입장에서, 회식이 잡히면 그 날은 무조건 걸어서 출근하는 공무원의 입장에서. 단 한 번도 이용해 본 적이 없는 대리운전 서비스에 대한 궁금증은 벌거벗고 운전을 하는 듯한 창피함을 잠시 누를 정도는 되었다.
“글쎄요. 한 오십 준다고 하면 오지 않겠어요?”
강희찬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자꾸만 시선을 피하고 뻣뻣하게 구는 주제에. 이상한 곳에서 호기심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이선이 귀여우면서도 심술이 났다. 눈치가 없는 이선은 여전히 대리운전의 가격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오십…만 원이요?”
“네.”
“헉. 대리비 그렇게 비싸요?”
이선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아무리 월급 빼고 물가는 다 오른다지만, 저렇게 비쌌다니. 충동으로나마 술을 마시고 대리운전을 불러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
이선은 머리를 굴렸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그것도 곁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는 사람을 태우고 서울까지 운전할 자신이 있는가? 아니, 없다.
그렇다면 한 시간을 남에게 운전을 맡기고 오십만 원을 쓸 자신은? 당연히 없다.
선택지를 제외하자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이선은 제삼의 선택지를 향해 눈을 돌렸다. 여전히 사람을 시험 기간 족보 쳐다보듯 꼼꼼하게 보는 중인 강희찬과 시선이 맞닿았다.
“희찬 씨… 팔, 아직 다 안 나으셨어요?”
이선은 강희찬의 오른팔을 봤다. 깁스 없이 자유로운 그의 팔은 다쳤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단단한 근육이 덮여 있었다.
“아니요. 다 나았어요. 오늘 공도 던졌는데요. 왜요?”
“운전, 부탁드려도 될까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요.”
“네?”
거절이었다. 부탁하면 당연히 들어줄 것이라는 도둑 심보를 가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강희찬의 입에서 나온 거절의 말은 이선에게는 단순한 거절만은 아니었다. 깜짝 놀란 이선에 비해 그는 여전히 심드렁히 입을 열었다.
“내가 운전대를 잡으면 앞만 봐야 하잖아요. 싫어요.”
새침한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거절에 상처받았던 마음은 달래졌지만, 뒤에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민망함 역시 오롯이 제 몫이었다.
“옆자리 앉으면 한 시간 내내 쳐다볼 수 있는데, 내가 왜 바꿔줘요.”
“…자꾸 쳐다보시면, 더 운전 못 할 것 같은데.”
면허를 딸 때, 옆자리에 동승했던 강사도 이렇게까지 쳐다보진 않았다. 여전히 역지사지가 되지 않는 한결같은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난감했다.
“대리 부르자니까요. 그러면 둘 다 뒷좌석에 앉아서 갈 수 있잖아요.”
“그, 그건 더 안 돼요.”
“뭐가 안 됩니까?”
“아니, 막……. 다른 분도 계시는데 그러는 건 좀…….”
“…….”
“막 그렇게, 옆에 앉고 그러면… 안 될 텐데…….”
대체 벌건 대낮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탓에, 보이는 것은 발갛게 달아오른 귀 끝뿐이다.
모든 것이 하얀 사람이다. 보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햇빛에 흐려질 만큼 온몸이 하얀 사람도, 몇 군데는 색을 가진 구석이 있었다. 코를 파묻으면 햇살 향기가 날 듯한 가는 머리카락이나 눈동자처럼 갈색도 좋다. 하지만, 가장 자극적인 것은 역시 붉은색이 감도는 곳이었다.
부끄러우면 물드는 뺨이나 귀 끝은 귀엽고. 추운 겨울날에 시려서 빨개진 손끝은 손을 잡아주고 싶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을 때 물드는 눈가의 붉은기는 안아주고 싶고. 한계까지 몰아 붙여진 탓에 발기한 것도 겨우인 좆의 끄트머리가 붉은 것은…….
아니지, 씨발. 왜 갑자기 이딴 추악한 생각을. 그것도 이렇게 예쁘고 순진한 정 선생을 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대리기사에게 운전을 시키고 뒷좌석에 둘이 앉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하는데.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홀딱 벗긴 채 울리던 추억이나 곱씹다니.
양심이 마구 찔렸다. 평소 양심이란 말의 존재 가치도 모르고 살았던 강희찬으로서는 이례적이었다. 오히려 그랬기에 얼굴만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강희찬은 얼굴을 굳힌 채, 지금 속으로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는 무표정을 가장했다.
“아니, 다른 짓 안 하고 그냥 옆에 앉기만 하는 것도 안 돼요?”
“두, 둘만 있을 땐 괜찮아요.”
어정쩡하게 펴진 두 개의 손가락이 조금 떨리는 듯한 건, 부정한 생각을 한 자신의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앞에 대리기사를 앉혀놓았을 때보다, 둘만 있다는 게 더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것도 모른 이선은 혼자 부지런히도 창피해하고 있었다.
“…….”
어쨌든. 갈 길은 구만리였고, 시간은 많다. 자신은 서울까지 차가 아니라 걸어서 가라고 했어도, 이선만 있다면 가능한 남자이기도 했다. 물론, 이선을 등에 둘러업은 채겠지만.
“그냥… 그냥, 희찬 씨가 운전해 주시면 안 될까요?”
“…….”
“저, 사고는 안 낼 건데……. 그래도…….”
동글동글. 애새끼처럼 귀여운 정수리에서부터 둥글게 자라나는 가는 모발. 어느새 이선의 얼굴로 바뀌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당장 콜업이 될 날짜조차도 이 감독은 확신을 주지 못했다. 내일이 될지, 이번 주가 될지. 그것도 아니라면 영영 아닐지.
불확실한 것투성이지만,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도 희찬 씨… 몰래 보면서 가고 싶어요.”
아무래도, 자신은 이 얼굴에 평생 지고 살 것이라고. 그 미래 하나만큼은 너무도 명확히 그려지고 있었다.
* * *
그가 다시 돌아와 준다면. 그런 말로 시작하는 무의미한 가정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을 돌이켜보면……. 온기가 가득한 팔에 옭매여 안겨 있었어도, 본능은 깨닫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절대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강희찬은 제법 ‘정이선’이라는 사람에게는 약하게 굴어주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선 그랬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울어도 원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홀로 비척거리며 원룸 계단을 오르던 순간에도 끝끝내 따라와 붙잡아주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선을 사납게 할퀴었다. 상처가 난 마음이 아파서 한참을 울고, 우는 것도 지쳐서 흐느끼는 소리를 내기도 버거울 즈음. 이선은 깨달았다.
조금만 더. 마음이 닿는 대로, 마음껏 좋아해 볼걸.
언제나 느린 자신에게는 충분히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고. 항상 지나고서 후회하는 것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로 익숙하지 않았던가.
그를 원망하다가도, 언제나 끝은 자신에 대한 후회였다.
먼저 손을 잡아볼걸. 언제나 안아주는 품에 기대지만 말고, 너른 등을 나도 마주 끌어안아 볼걸. 조금 부끄럽다는 이유로 눈을 돌려버리지 말고, 나 역시 그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지금은 좀 덜 아팠을까?
그런 생각은 이내 헛된 망상이 되곤 했다.
‘만약, 다시 곁에 와준다면…….’
그러면 먼저 사랑한다고 말할 테다. 그가 손을 내밀기도 전에 먼저 그의 손을 쥘 것이고,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은 솔직히 하여 우리의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게 해야지.
이루지도 못할 꿈에 불과했다. 꿈에서라도 이루었으면 좋았겠지만, 단 한 번도 이루진 못했다. 참 얄궂게도 꿈속의 정이선 역시 정이선이었다. 사람은 참으로 변하기가 쉽지 않은 생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
“…….”
신기하게도 강희찬은 내비게이션의 도움 없이 서울에 도착했다. 그것도 이선이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이천으로 갔을 때보다도 조금 이르게.
출퇴근할 때마다 자지 않고 길을 잘 봐둔 것일까?
남들에게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지만, 강희찬은 의외로 참 성실한 선수였다. 막간을 이용하여 쪽잠을 잤어도 괜찮을 텐데. 버스에서도 다른 것을 했던 것이 분명했다.
성실한 청년의 표본이었지만, 지금의 이선에게는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서울에 도착한 차가 점점 익숙한 길을 타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설마… 지금 정말 나를 데려다주는 것이 목적인가?
그런 의문이 점차 커지면서, 이선의 말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월세를 내고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만은 ‘즐거운 나의 집’인 원룸의 외벽이 보일 시점부터는 티가 날 정도로 뚱한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차 한 잔 마시자는 말도 안 해주고 바로 집으로 데려다줄 수 있지? 무, 물론 아침부터 훈련하고 땡볕에서 경기를 뛰었다지만……. 그래도……! 말은 한번 해줄 수 있지 않은가.
“…….”
그를 다시 만나면, 감추지 않고 마음을 다 보여주겠다던 언젠가의 다짐은 꼬리를 말고 도망간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어색한 초보 연애자들은 말없이 원룸 건물 벽을 공공의 적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그…….”
동시에 나온 말은 한마디가 채 이어지기 전에 꼬리를 말았다. 같은 타이밍에 말을 했던 두 사람은 같은 타이밍에 입을 꼭 다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선이 강희찬을 쳐다보았다. 희찬 씨 먼저 말을 하라고. 그런 말을 해야 하는데. 이선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의 머뭇거림을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과 정확히 같은 감정을.
그리고 깨달았다. 언제나 누군가를 이끄는 것이 익숙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강희찬은 저보다 세 살이 어렸다.
스물여섯. 운동선수라는 직업은 일반인보다 시간이 빨리 가는 사람들이라지만, 그래도 강희찬은 아직도 두 뺨이 보송보송했다. 대학생, 아니, 교복을 입히면 고등학생으로도 보일 만큼.
‘내가… 형이지?’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선은 제법 놀랐다. 놀랄 일이 전혀 아니었음에도 놀랐다는 사실에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감추기 위해, 굳세게 다짐했다.
말하자. 커피 한잔하고 가라고. 멋진 형처럼. 근데……. 형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더라?
기억에 남는 형들은 거의 멸종 위기인 판다 수준으로 손에 꼽혔다.
교대에선 공대의 여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자가 참 드물다. 졸업 후 입대하는 특성상, 형이라고 해봐야 나이도 다 거기서 거기였고. 몇 안 되는 그들은 대체로 압도적인 수를 자랑하는 여자 선배들에게 기가 눌려 살고 있었다.
게다가……. 피곤하다고 거절하면 어쩐단 말인가? 기억 속의 형들처럼 무심하게 말해야 하나? ‘그래, 가라.’ 그건 싫은데…….
그렇다고 기억 속의 또 다른 존재였던, 술자리마다 이선을 잡았던 다른 선배처럼 굴기는 싫었다. 그가 자신을 아주 조금이라도 성가시거나 싫은 존재로 느끼는 것은 싫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조금만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는데…….
“정 선생님.”
치열한 내적 갈등을 벌이고 있던 이선의 얼굴 앞으로 커다란 손이 드리웠다. 생각하느라 초점이 흐려진 이선의 눈앞에서 손이 몇 번 흔들렸다. 깜짝 놀란 이선이 정신을 차리고 강희찬을 보았다.
“아… 네?”
“내일 출근하냐고요. 일요일에.”
“아, 아니요. 일요일인데 왜 출근을 해요.”
“오늘은 갔다면서요? 학교에서 야구장 왔다고 아까 얘기해 줬잖아요.”
“아, 그거. 보고서 때문에 갔어요. 학교에 파일이 있었거든요. 근데 다 했으니까, 내일은 안 가도 돼요.”
“…그래요?”
예전의 강희찬은 공무원이란 존재를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바로 퇴근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런 오해도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주일 내내 출근을 하는 상사맨 같은 존재로 알아도 곤란했다. 자신은 그렇게까지 직장에 뼈를 묻고자 한 적이 없었다.
“그럼… 가서 필요한 것들 챙겨올래요?”
“네?”
시선을 돌리고, 핸들을 빤히 보며 그가 뱉어내듯 말했다.
언제나 딱 필요한 부분만을 내뱉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화법은 여전하다. 그것은 지금이 꿈이 아님을, 눈앞에 있는 남자가 진짜 강희찬임을 증명해 주었다.
가장 기다리던 사람. 언제나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결국 다시 보지 못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다시 제 손으로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다. 정이선이 알았던 그대로였다.
자신이 알았던 그는 언제나 이선에게는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갈아입을 옷이나 뭐, 그런 거.”
“…….”
“별로, 나쁜 짓은 안 할 테니까……. 괜찮으면 우리 집으로 가자고.”
“…….”
“내일 난 아침에 야구장 가야 하고, 월요일엔 정 선생이 출근하니까. 같이 있을 시간도 별로 없잖아요.”
이선은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말이 없는 이선을 대신해 그는 부지런히 입을 놀렸다.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불필요할 정도로 얘기하는 그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변명하는 꼬마애들처럼 귀여워서 이선은 홀로 웃음을 삼켰다.
정점을 넘어간 태양빛이 유려한 옆선에 부딪힌다. 정면으로 볼 땐 온화하고 조화가 잘된 그의 얼굴은 옆에서 보면 제법 굴곡이 느껴졌다.
“무슨… 나쁜 짓이요?”
어디부터가 바다고 하늘인지 구분이 모호한 수평선처럼. 빛이 번져가는 그의 콧날에 눈을 둔 채, 이선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당연히……!”
순진함을 가장한 물음을 강희찬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설명을 위해 입을 열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마주한 것은, 꾹 눌러 참아도 눈과 입에 묻어나는 웃음기를 띤 이선의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당했구나. 뒤늦게 강희찬은 아예 운전석 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싫으면 됐어요.”
가는 자신의 것과는 달리 검고 힘이 느껴지는 직모 아래. 곧게 뻗은 흰 목덜미가 이선의 눈에 들어왔다. 강희찬 역시 자신처럼 피부가 잘 타지 않는 타입인 듯했다. 아무래도 저런 부분까지 선크림을 바르는 사람은 드물 테니 말이다.
이선은 손가락을 들어 그의 상완을 콕콕 찔렀다. 움찔하는 순간 근육의 갈라진 선이 움직이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삐치지 마세요, 희찬 씨.”
“안 삐쳤어요. 내가 뭘 삐쳤다고 그래요?”
“근데 왜 고개 돌리세요.”
“목 스트레칭하고 있어요. 정 선생도 해요. 컴퓨터 많이 보는 사람들은 이거 자주 해야 된다니까.”
“희찬 씨 보고 싶은데…….”
중얼거리는 말에 강희찬은 냉큼 스트레칭을 관두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홱 돌아오는 얼굴에도 이선은 놀라지 않고 배싯 웃었다.
역시 꿈이 아니다. 고개를 돌렸던 강희찬의 얼굴이 언젠가 마주친 브로콜리 남자로 바뀌는 끔찍한 일은 없었다. 꾸었던 꿈은 정말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이선은 그의 커다란 손을 저의 양손으로 가만히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근데 왜… 저희 집으로 안 가고 희찬 씨네로 가요? 바로 올라가면 되는데.”
“합법적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정식으로.”
뜬금없는 말에 이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들어가도 불법은 아닌데요?”
“너무 빠르잖아요. 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집 가는 게요?”
“정 선생님 집이잖아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
…대체 어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설마, 저번에 마주쳤을 때 자신이 들고 있던 엄청난 양의 즉석밥 쓰레기를 기억하는 것인가?
집 안이 쓰레기장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면, 이선은 그 오해를 빨리 풀어야 했다. 비록 이번 주말에 돌리려고 마음먹었던 세탁기에는 세탁물이 반 정도 차 있었지만, 쓰레기는 없었다. 어제 다 치웠으니까.
“집, 안 더러워요.”
“알아요. 깨끗하게 해놓고 살겠죠. 그래서 안 된다고요.”
“네?”
“설레서 잠 못 자요. 오늘 경기 뛰어서, 잘 자야 회복이 되는데. 저기 들어갔다간 밤 꼴딱 새고 아침에 버스 타러 나가야 돼요.”
“저, 저도… 희찬 씨 집에 가는 거 떨리는데요?”
“그래도 정 선생은 한 번 해봤던 거잖아요.”
매우 명쾌하고 합리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이유의 명쾌함은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강희찬의 손을 조물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던 이선의 고개가 미약하게나마 끄덕였다.
이유는 하나다. 저 역시 그러고 싶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도. 오늘의 여운을 안고 집으로 들어가, 충전기에 연결된 전화기와 함께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붙잡고 있을 자신은 없었다.
심장이 터지더라도, 이 사람의 곁에서 터지고 싶다. 그의 이유만큼이나 저의 것도 명쾌했다.
“안 가도 돼요. 아깐 좀 쪽팔려서 얼굴 못 본 거지, 삐친 거 아니었어요. 정 선생 불편하면 들어가도 되니까…….”
쪽.
이어지던 강희찬의 말은 뺨과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마찰음과 동시에 멈추었다.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강희찬의 오른손을 쥐고 놀던 가느다란 온기는 어느새 사라졌다. 달칵.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지만, 이미 이선은 문밖으로 한 발을 뺀 상태였다.
얼굴이 붉은가? 아마도, 앞으로 몇 초 뒤라면 명확하게 달아오를 것이 분명할 발그레한 얼굴 위. 웃음기를 잔뜩 머금어서 곱게 휘어진 눈동자가 오롯이 강희찬을 담는다.
“내일, 제가 아침에 희찬 씨 이천까지 데려다줄게요.”
그리고 쾅.
조수석 문이 닫히고, 정말 말 그대로 ‘종종종’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만큼 총총 뛰어갔다.
이선의 뒷모습이 건물 안으로 사라질 무렵. 그는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 곧, 갈아입을 옷을 챙긴 이선이 잔뜩 부끄러워하며 계단을 내려올 것을. 내일 아침이면 얌전히 저의 곁에서 자고 있는 이선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란 사실도.
비록, 연인을 깨우고 싶지 않아 몰래 출근해 버린 그를 향한 원망의 전화를 받게 될 것은 예상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첫걸음.
혼자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발걸음에 맞추어야 할 초보 연인들의 첫걸음이었다. 허둥거리며 짐을 챙기고 있을 이선을 상상하며 강희찬은 확신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이선이 없을 때도 자신을 살게 했던 유일한 빛은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나의 모든 것은 당신이라고.
이선이 이내 다시 원룸의 입구를 나섰다. 티를 내지 않고 있었지만, 숨을 조금 할딱거린다. 급하게 짐을 챙기고 뛰어서 계단을 내려왔으면서 애써 태연함을 가장한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이선이 달려온다. 강희찬의 모든 것이 밀려오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첫걸음. 당신과 나의 앞으로 모든 것이 이곳에서부터 시작하기를.
첫 연애, 첫사랑을 시작한 남자는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