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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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상으로는 이제 늦봄보다는 초여름에 가깝다고는 해도, 인간적으로 벌써 저녁에도 이렇게 더우면 어쩌란 말인가.

“에이. 벌써 미지근해졌네.”

송재혁은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맥주캔의 표면을 보며 혀를 찼다.

눈은 자연히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을 편의점 유리창 너머의 내부를 향했다. 하지만 가여운 성냥팔이 소녀처럼 봐도 소용없다. 편의점 내부에서의 음주는 허락되지 않는다. 힘없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억지를 쓰는 건 나이 먹은 아저씨들이나 하는 짓이다. 한없이 아저씨에 가깝기는 하지만 아직 서른 안 됐으니까, 아저씨 아닌 거다.

“내 거 마실래? 아직 좀 시원한데.”

정이선은 순순히 제 앞에 두었던 맥주를 내밀었다.

똑같이 바깥 파라솔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홀로 더운 기색이 없었다. 그게 신기하여 송재혁은 ‘넌 안 덥냐?’라며 몇 번이나 물었다.

여러모로 불만이 많아진 송재혁은 입술을 비죽 내밀며 퉁퉁거렸다.

“웃기지 마. 너 그거 처음에 산 캔이잖아. 아주 뜨끈뜨끈하겠구먼, 어디서 약을 팔려고 그래?”

“시원한데…….”

이선 역시 친구의 박대에 입술을 비죽 내밀며 제 맥주를 다시금 앞으로 당겼다.

맥주를 따뜻하게 데워 먹는 취향이라도 있나.

송재혁은 방금까지도 홀대했던 저의 맥주가 소중해졌다. 정이선이 한 시간째 마시는 맥주 따위와는 비교도 못 할 소중한 존재다. 역시 인간 세상의 일이란 건 뭐든 상대성이었다.

“근데 오늘따라 별로 못 마시네? 그래도 원래 두 캔은 먹잖아.”

“…나 이제 술 많이 안 마실 거야.”

“왜? 술 마시고 사고 쳤냐?”

“…비슷해.”

회식하다가 토라도 했나. 제법 궁금했지만, 썩 말하고 싶은 눈치는 아니다. 아쉽지만 송재혁은 포기했다.

대신 지금껏 애써 피하기만 하던 호기심을 조심히 펴보았다.

“너…….”

“응?”

“그… 그때 이후로 연락은 해봤어?”

“…….”

목적어가 빠져 있었지만, 서로 의미는 통했다. 당연했다. 저와 이선 사이의 공통된 인간관계. 그리고 이선이 연락을 해볼 법한 사람이란 건 한 사람뿐이다.

공기는 순식간에 에어컨이 필요 없을 만큼 가라앉았다.

이선은 한참을 멍하니 파라솔 테이블을 보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인 끝에 어렵사리 운을 떼었다.

“있잖아.”

“어? 아, 어…….”

“아침에 일어나면, 혼자 내기를 해봐.”

“…….”

이제 거리를 걸을 때면 반소매를 입는 사람을 보아도 그리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해가 진 시간도, 그의 품에서 마지막으로 울었을 때처럼 시리지 않았다.

괜찮아질 거다. 절대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강희찬의 말은 맞았다.

이선은 이제 우는 날이 부쩍 줄었다. 언제까지고 괜찮아지지 않아서, 강희찬을 찾아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분하게도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수업 중 문득 본 바깥에 검은 차가 지나가기만 해도 심장이 덜컹거려도, 이제 이선은 많이 울지 않았다. 딱 견딜 수 있을 만큼 힘들었다.

“오늘 그 사람 이름을 들으면, 지나가다 그 사람의 차를 보게 되면 연락을 해봐야지.”

“…….”

“그렇게 혼자 내기를 하면 하루를 버티기가 쉬워서……. 핑계를 대고 그 사람에게 연락이라도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버틸 만하거든.”

이선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럭저럭. 단순한 말로 표현하는 데에 비해, 이선은 아직도 입꼬리를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근데…….”

“…….”

이선은 결국 테이블 위로 얼굴을 기댔다.

우는 건가? 놀란 송재혁이 얼굴을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눈물도 이제 말라버렸는지 건조한 눈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정말 소식 듣기가 힘든 사람이더라.”

“…….”

“한 번도 없었어.”

“…….”

“핑계 대고……. 한 번만이라도…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는데, 정말…….”

이선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과 그 남자는… 본래 서로 다른 평행선을 달리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고.

“이렇게 가까이 사는데……. 정말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 이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없어.”

“…….”

“인연이 아니었나 봐.”

이선은 눈꺼풀을 내렸다. 근래 생긴 버릇이었다. 무언가 속에서 울컥 차오를 때면, 이선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혼자만의 어둠으로 도망을 가곤 했다. 고치 안에 둘러싸인 채, 편한 어둠이 이선을 유일하게 품어주었다.

“인연이 아니었어.”

차 안의 적막이 싫어서 튼 라디오에선 그저 그런 연애 고민 사연이 흘렀었다. DJ는 사연자를 향해 ‘인연이면 다시 만날 거예요’라는 짧은 코멘트를 남기고 신청곡을 틀었다.

‘인연이면 다시 만날 거예요.’

참 성의도 없는 DJ의 말이 이선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참 무책임한 말이, 이선의 마음을 에는 것만 같았다.

인연이 아니야. 세상 모든 이가 저에게 그리 말하고 있었다.

다소 거칠게 라디오를 끈 이래로, 이선은 라디오가 참 싫어졌다. 채널을 돌리다 그 DJ가 출연하는 프로그램만 봐도 심술 맞게 TV를 껐다.

“그 사람 말이야…….”

맥주 한 캔도 다 마시지 않았음에도 취한 것만 같은 이선을 송재혁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마도, 그 사람은… 절벽으로 떨어지는 순간에도 나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

“…….”

“희찬 씨는 아마… 그런 사람이야.”

이선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쓸쓸하게 들렸다. 그것이 딱히 저의 기분 탓만은 아닐 거라고. 송재혁은 그리 생각했다.

들러붙어서 이리저리 이용만 하고 뽑아먹던 놈을 좋아하더니, 이번엔 정반대인 놈 때문에 마음고생이다.

이래도 고생, 저래도 고생이라니. 대체 어떤 놈과 엮여야 이선이 힘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송재혁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건 이선도 마찬가지겠지.

“…….”

그저 참 외로울지도 모르겠다고.

이선의 말을 빌자면, 강희찬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순간에도 이선이 내미는 손만큼은 잡지 않을 사람이었다. 야매 공시생 같은 놈만 아니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정이선은 또다시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 사람 다칠 때…….”

눈을 감은 채, 무언가 말을 하려던 이선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눈가에 얼핏 어린 물기가 보였다. 송재혁은 이선이 왜 입을 다물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맥주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미지근한 데다, 김까지 빠진 맥주가 불쾌하게 목구멍을 지났다.

‘…이래서야 운을 뗀 보람이 없잖아.’

주말인데 드라이브라도 가자는 핑계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강희찬의 경기에 가보자는 말은 맥주와 함께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쯧. 송재혁은 혀를 찼다.

비록 이선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이미 그는 오전 시간을 이용해 이천에 다녀왔다. 그곳엔 어느새 깁스를 풀고, 제 짐가방도 오른손으로 들고 다니는 강희찬이 있었다. 그는 내일 컨디션 체크를 목적으로 2군 경기에 선발 등판이 예정되어 있었다.

‘…….’

‘…….’

무언가 말을 걸려고 했는데, 강희찬은 송재혁을 향해 먼저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쓸데없는 말 걸지 마. 벽이 느껴졌다. 평소에도 그의 앞에서는 작아지던 송재혁은 기가 팍 죽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송재혁은 회복 후 재활을 마치고 2군에서의 등판을 준비하는 그를 찍는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했다. 이선이 느꼈을 견고한 벽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절벽에서 떨어지는 순간에도 제 손을 잡지 않을 남자라…….’

굽혀지느니 차라리 꺾이고 마는 고고한 절개도 아니고.

“다치는 영상을 봤는데…….”

이선은 어느새 울먹임을 눌러 참아냈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여전히 테이블에 엎드린 채였다. 미묘하게 늘어지는 말투는 취기가 돌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얼굴로 공이 날아오는 그 짧은 순간에, 그 사람… 왼팔을 들었다가 바로 오른손으로 바꾸더라고.”

“…….”

“왼손잡이면서……. 그 짧은 순간에…….”

“…….”

“희찬 씨는.”

결국, 눈물 한 방울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송재혁은 애써 그것을 못 본 척했다.

“희찬 씨는, 그런 사람일 거야. 자기 본능보다도… 야구선수가 먼저여야 하는 사람일 거야.”

“…정 선생.”

“그러니까, 내가 미덥지 못한 거야. 희찬 씨는……. 야구선수인 희찬 씨는 기대지 못할 사람인 거야. 내가… 너무 그 사람한테 기대기만 했거든.”

이선의 말은 초여름의 더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제 술기운이 버거운 모양이었다.

“…….”

뭐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아무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 정도는 쉬워도 될 텐데.

가만히 이선을 내려다보던 송재혁은 혀를 차고는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올려진 이선의 핸드폰을 쥐었다.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으응. 뭐야.”

뭔가 낌새를 눈치챈 이선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진다. 송재혁은 괘념치 않았다. 정이선 따위. 한 손으로도 이길 수 있다.

초기 상태 그대로인 잠금화면 배경을 손가락으로 쓸자,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화면이 뜬다. 정이선 주제에 건방지게도 잠금을 걸었어.

송재혁은 어느새 노곤노곤 잠에 빠질 기세인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이선의 얼굴이 카메라에 잘 인식되도록 비틀어 당겼다.

“아, 아아……! 왜 그래?”

이선이 눈꺼풀을 힘들게 들어 올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잠이 들려다 봉변을 당한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송재혁을 봤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제 핸드폰 역시.

“뭐 하려고 그래? 이리 줘.”

이선은 엎드린 채 팔을 뻗었다.

“아아. 검색 좀 하자.”

“네 건 어디 가고?”

“배터리 간당간당해.”

그 말에, 휘휘 휘젓던 이선의 팔이 얌전해진다.

“이상한 거 깔지 마.”

당장이라도 잠이 들 것처럼 느릿하고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핸드폰을 빼앗긴 현대인치고는 반응이 너무도 심심하다.

의외로 시시하고 일찍 끝난 실랑이에 안도감을 느끼며, 송재혁은 유튜브를 실행시켰다. 몇 번의 터치 끝에 그는 이선이 구단 채널의 구독을 끊었음을 발견했다.

“이, 치사한……!”

희번덕거리는 눈이 엎어진 채 거의 잠이 든 이선을 향해 사납게 꽂혔다.

어쩐지. 요새 구독자가 느는 속도가 예전 같지 않더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관리하는 채널인 거 뻔히 알면서, 강희찬 때문에 홀랑 구독을 취소해 버린단 말인가.

송재혁은 재빨리 컵스의 채널 구독을 돌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채널의 영상 몇 개를 눌러 재생했다.

“야, 정 선생.”

“왜애.”

그래도 아직 완전히 잔 건 아니었군. 졸린데 말을 시켜서 싫은 목소리가 착실히 대답했다.

“너, 내일 뭐 하냐? 토요일인데.”

“그냥… 집에 있겠지.”

“요샌 학교 안 가? 옛날엔 주말에도 자주 갔잖아.”

“이젠 안 그래. 보고서 써야 하는데, 그건 집에서도 할 수 있어.”

“…….”

용건을 마친 송재혁은 핸드폰을 다시 원래 자리에 두었다.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다. 하지만 인연이었다. 사람의 연이라서 인연.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지만, 사람의 일이다. 사람은 언제나 확률에 기대어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럼 내일은 좀 크게 걸어봐.”

힐끔. 정이선을 바라보았지만,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미동이 없다.

못 들은 체를 하는 건 정이선답지 않다. 하지만 송재혁은 조금 봐주기로 했다.

동전을 던져 손등으로 받아내는 내기를 할 때, 송재혁은 언제나 원하는 면이 위로 오도록 할 수 있었다. 몇 가지 안 되는 특기 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송재혁은 주사위를 던져보았다.

“아무 데도 안 가고 일만 할 거라며. 내일은 강희찬 이름 들으면 만나러 가야지, 정도는 걸어봐. 어차피 안 될 거.”

이선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 * *

‘내일부턴 용인 말고 이천으로 오라신다.’

깁스로 인해 근육이 빠졌던 오른팔이 왼쪽과 얼추 비슷한 모습을 갖출 무렵, 그 말을 들었다.

기쁜 것보다도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언젠가 가야 할 곳이기도 했다. 이천으로 가라는 말이 달가우면서도 두렵게 들린 적은 프로에 막 입단했던 시절 이후로 두 번째였다.

강희찬은 출근하는 이른 오전, 잠실에서 버스를 탔다.

철심 제거 수술은 비시즌 기간으로 잡자는 의사의 말에 강희찬은 동의했다.

전반기는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케줄을 치르겠다는 최 감독의 말은 기사를 통해 보았다. 누군가에겐 다소 야멸차다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건 최 감독 나름의 배려였다. 강희찬은 대강 알 수 있었다.

‘너 없어도 팀 안 망하니까 재활이나 잘하고 와.’

시큰둥한 얼굴로, 속말을 잘 하지 못하는 건 운동선수 특유의 성정일지도 모른다.

강희찬은 무심한 얼굴로 버릇처럼 핸드폰의 문자함을 살폈다.

[야 내일 너 등판맛냐?]

“쯧.”

강희찬은 문자를 보자마자 매섭게 혀를 찼다. 이정민 이 새끼는 유치원을 검정고시로 통과한 게 분명했다.

이정민. 간단히 저장된 이름이 가장 위에 있었다. 그것을 누르자 어느새 또다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문자 보면 답장좀 빨리해라 전화도 받고]

“…….”

연속으로 이어진 메시지를 봤지만, 영 답장할 기분은 들지 않는다. 강희찬은 그것을 이정민의 좆같은 문자 탓이라고 애써 변명했다.

핑계를 마친 남자는 미련 없이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 평소에도 꽤 메시지가 쌓여 있는 축에 속했지만, 몇 달 새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발신인 옆에 푸른 점이 가득한 메시지의 목록을 보며 강희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 퇴원하셨다면서요? 애들이랑…….]

[연락 좀 ㅂㅏㄷ아라 뭐가 그렇게 바쁘냐]

[새끼 혹시 번호 바꿨냐?]

파란 점 세상은 메신저에서도 비슷했다. 눈치가 둔한 이승주마저도 이제는 그가 의도적으로 연락을 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처음보다는 문자가 덜했다.

“…….”

적어도 자신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자신은 너덜거릴 때까지 깨지더라도 부딪히는 타입이라고. 그런 줄만 알았다.

이선이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며 걱정하던 송재혁을 보며, 저만큼은 절대로 그런 타입의 인간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함께 야구부에 입단했던 친구가 먼저 유니폼을 벗고 난 후, 졸업할 때까지 저에게만큼은 말을 걸지 않았던 이유를. 유니폼을 벗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기로 결심한 선배의 소식이 왜 전해지지 않는지도.

그간 숱하게 저의 곁을 떠나간 이들……. 그리고 ‘남겨진 쪽’이었던 강희찬은 처음으로 그 반대의 편에 서게 되었다. 선을 넘어간 곳에 처음으로 서게 된 것이다.

새삼스레 신세를 생각하면 영 입맛이 쓰다. 애써 생각을 지우고, 훈련복으로 갈아입었다.

어제는 송재혁이 자신을 촬영하기 위해 이천에 왔다. 외야에서 러닝을 하고, 라이브 피칭까지 소화하는 모습을 집요할 정도로 찍었다. 그 정도로 끈질기게 사람을 찍어댔다면, 평소의 강희찬은 분명 한소리를 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어떠한 말도 걸지 않았다.

…물을 것만 같아서.

그 누군가의 안부를. 잘 있는지. 날이 더워지는데 잘 챙겨 먹는지. 집에서 즉석밥이나 뜯어 먹고 살지 않게 종종 밖에서 밥을 먹이라고.

그리고 가끔은 웃고 있는지도.

둑이 터지듯 질문이 쏟아져 나올까, 강희찬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송재혁을 외면했다. 그리고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물론, 마음먹을 일은 없겠지만― 이선은 저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그건 좀 불공평하지 않은가.

속으로 불평을 삼키며 로커에 짐가방을 두었다. 물 흐르듯 밖으로 향하던 걸음을 변덕스레 멈춘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가방을 뒤졌다.

가방 안을 몇 번 휘저으면, 늘 가지고 다니는 자그마한 육면체의 케이스가 손에 잡혔다. 강희찬은 조심스레 그것을 꺼냈다. 얼마 전, 백화점에서 산 반지였다.

“…….”

반지 사이즈고 뭐고. 그런 게 존재하느냐는 듯한 백지상태로 와서는, 제 사이즈도 아닌 다른 이의 반지를 골라야 한단다. 동료가 식사하러 간 사이 한산한 매장에 홀로 있던 백화점의 직원은 황당한 상황을 마주했다. 프로인 그녀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는 커플 단위의 고객들을 주로 만나본 여자는 난감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부모님 선물용으로 사러 온다고 쳐도, 동행을 하거나 적어도 사이즈 정도는 알아보고 오던데…….

강희찬은 그 모든 ‘평균치’를 비껴갔다.

할 줄 아는 소리라고는 ‘말랐어요’와 ‘손이 되게 가늘고 예뻐요’ 뿐이다. 남자의 앞에 각각 다른 사이즈의 반지 러시 하기를 몇십 분. 결국 그녀는 자신의 손을 희생했다.

‘고객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손을 기준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평소의 강희찬이었다면 여자와의 쓸모없는―쓸모가 있어도 싫다― 접촉은 피했지만, 그때만큼은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직원이 내민 왼손을 잡고 손가락을 신중히 만져갔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직업이라서 그런가. 이 손보다는 훨씬 곱고 예쁘게 생겼지.

옅은 색 매니큐어가 단정히 칠해진 그녀의 손가락을 보며, 강희찬은 대강의 평가를 마쳤다. 하지만 그리 도움 되는 정보는 아닐 터였다.

‘…….’

자꾸만 시각적인 정보가 정확한 측정을 방해한다. 결국 강희찬은 눈까지 감았다. 야구공 실밥에 거는 미세한 힘 하나로 볼 판정을 받고 사는 투수의 예민함을 경기할 때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발휘했다.

결정을 마친 후에는 속전속결이었다.

고급화 전략을 내거는 브랜드에서도 플래티넘 라인의 가장 상위에 있는 반지는 어지간한 직장인들의 연봉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매장에는 샘플도 없었지만, 남자는 브로슈어의 이미지로만 본 물건을 일시불로 결제했다.

‘얜 뭐지? 젊어 보이는데? 학생 아닌가? 아니, 그렇다 쳐도 반지 사이즈도 모르는 상대에게 이 비싼 걸 턱턱 사주나? 보통은 같이 오지 않나?’

오히려 카드를 내민 쪽보다 받아 든 쪽이 몇 번이나 머뭇거리면서 눈치를 봤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파문이 해일처럼 커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꽤나 능숙하게 젊은 남자에게서 자신의 속내를 숨겼다.

절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고객의 사생활을 궁금해해선 안 된다.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은 그 말을 되새기며 마음속 풍랑을 잠재웠다. 그리고 오간 금액에 비해 너무도 간단히 결제를 마친 카드를 강희찬에게 돌려주었다.

들어왔을 때도 혼자였던 매장을 홀로 나설 땐, 딱 반지 무게만큼의 외로움이 더해졌다.

강희찬은 한참을 케이스만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가죽 케이스를 차마 열지도 못한다. 멍하니 보고 나면 소중히, 마치 보물처럼 가방의 가장 안쪽에 다시 두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걸 팔았던 직원은 대체 어떤 용도로 구입을 하는지 퍽 묻고 싶은 눈치였다. 그게 궁금한 건 강희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절대 주인을 만나지도 못할 반지 따위. 무슨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를 비웃으며 애써 반지를 두고 집을 나서려 한 적도 많았다. 괜한 오기가 가득 실린 발걸음이 갈 수 있는 곳은 딱 엘리베이터까지였다. 결국은 다시 돌아와 반지 케이스를 챙기고 나서야 강희찬은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반지가 꼭 언젠가의 이선인 것만 같아서. 소주병을 친구 삼아 길가에 위태롭게 웅크린 모습과 겹쳐서 도무지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웃기지도 않아서. 고작해야 이딴 것에. 그렇게 서럽게 우는 사람을 결국 모질게 끊었던 게 누구인데. 그런 주제에 무슨…….

“…….”

그리움은 언제나 죄책감이 된다. 마지막. 그저 자신을 향해 힘들지 말라는 말을 했었다. 저보다 더 힘들었던 건 그였다. 그렇게 울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을 홀로 매정하게 보냈던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되었다.

멋대로 물건에 의미나 부여하면서 그것이 끼워졌을 누군가의 손을 상상해 보는 것이 전부였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뜬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일상적인 소음이 강희찬을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언제까지고 깨지 못할 악몽 같은 현실로.

여전히 같은 세상이었다. 여전히 정이선은 없다. 손에 남겨진 건 온기 하나 없이 차갑게 빛나는 것이 무서워 쉽게 열어보지도 못하는 반지뿐이었다.

이제 다시 가방에 들어가야 할 반지 케이스는 도무지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던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빛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보석은 언제나 영롱하다. 반짝거리며 저를 올려다보던 누군가의 눈동자와 참 닮아서, 볼 때마다 마치 반지가 자신을 책망하는 것만 같았다.

돌이켜보면 자신은 언제나 그 말간 눈에 약했던 것 같다. 마지막 순간을 제외하면.

“…….”

이번에도 지고야 말았다.

강희찬은 가방을 뒤져, 얇은 목걸이 줄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반지를 조심히 걸었다.

강희찬은 스스로 목걸이를 처음 하는 서툰 손길로 그것을 목에 걸었다. 동시에 로커룸의 문이 벌컥 열렸다.

“어? 형. 안 나오고 뭐 하세요?”

“…….”

방에서 혼자 이상한 짓을 한 사춘기 소년인 양 움칫한다. 기이한 광경에 후배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이, 강희찬은 표정 관리에 능한 투수답게도 어느새 당황을 지웠다. 그리고 반작용으로 더욱 퉁명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제 나가. 왜.”

목걸이는 어느새 유니폼 안으로 숨어들어 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의 목에 가는 목걸이 줄이 있는 것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저 형이……. 셀프로 목이라도 조르고 있었나?’

이상한 곳에서 멈추었던 선배의 양손을 후배는 아직도 미심쩍게 바라보았으나,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아, 왜. 짜증이 섞인 강희찬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대답을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아, 밖에요. 방송국에서 인터뷰 딸 수 있냐고 물어보시는데요. 할 수 있으면 오늘 중계 중간에 넣을 것 같다고.”

“안 한다고 그래.”

“그거… 형이 조연출한테 직접 얘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안 할 것 같다고 하니까, 자꾸 부탁하셔서…….”

“…….”

주둥이가 없는 것도 아니고. 왜 말을 못 해?

투수의 한심한 시선이 포수를 향한다. 하지만 강희찬은 이내 후배의 얼굴에 얼핏 남은 여드름 자국을 발견했다.

아직도 얼굴에 저런 흉이 남아 있을 만큼 어리게 보이니, 2군에 온 중계팀도 우습게 아는 거다. 조연출인지 뭔지 하는 놈이 눈치 없이 구는 걸 보니, 신입인가.

웃대가리인 PD가 암묵적으로 시킨 것일 테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다. 등판을 앞둔 선발투수에게 인터뷰를 시도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삼대가 알도록 해야지.

아무래도 1군 등판이 없는 사이, 강희찬은 꽤 좋은 사람이라는 헛소문이라도 난 게 분명했다. 하여간 방송국 새끼들은 한 번씩 개지랄을 떨어줘야 적당히를 아는 종자들이었다.

“알았으니까 먼저 나가 있어.”

“네.”

“그리고.”

문을 닫고 나가려는 후배는 선배의 말에 빠끔 다시 목을 내밀었다.

“네. 왜 그러세요?”

“타격 훈련 대충 끝나면 라이브 피칭 한 번만 하자.”

“아, 네. 어제처럼 유성이로 세울까요?”

“그냥 아무나 상관없어. 시간 되는 애로 해.”

방송국에 주식 투자를 했다가 쫄딱 망하기라도 했는지. 참으로 별난 선배는 별날 정도로 방송국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대한단다. 그것이 바로 아직 입대도 하지 못한 어린 포수가 강희찬을 데리러 온 이유였다.

‘네가 가. 너 포수잖아.’

그런 등쌀에 밀려 공 하나 받는 것도 믿기지 않을 까마득하고 대단한 선배 투수를 데리러 왔다. 하지만 포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닫았다. 의외로 싱겁고도 순순하게 상황이 끝난 탓이었다.

‘뭔가……. 평소보다 아주 조금이지만, 기분이 괜찮아 보였지?’

경험이 적고, 아직은 앳된 기가 얼굴에 남아 있어도 포수는 포수였다. 새끼 포수의 추측은 아주 조금은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었다.

얇은 줄에 걸린 작은 금속의 존재감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아주 조금씩 기분이 괜찮아졌다. 평생을 장신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무엇을 몸에 걸더라도 구속감에서 오는 불쾌함만 느껴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거치적거리는 구속감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꼭 이선이 저를 응원하는 것만 같았다. 힘내라고. 힘내서 좆같은 요구나 하는 조연출을 조져 버리라고. 말간 얼굴이 저를 북돋아주고 있었다.

서늘한 시베리아 벌판에 불어오는 미약한 봄바람처럼, 개미 눈물에 비견될 만한 너그러움도 생겼다. 강희찬은 핸드폰을 찾아 이정민이 보냈던 메시지에 답을 했다.

[ㅇㅇ]

간결한 자음 두 개만이 외로운 남자의 변덕스럽고 얄팍한 너그러움을 대변하고 있었다.

* * *

―야, 너 뭐야! 오늘 집에만 있겠다며? 출근 안 한다고 했잖아!

고함이 핸드폰을 뚫고 나올 기세다. 핸드폰을 귀에서 멀찍이 떨어트리며 청력을 보호했다. 자동으로 스피커폰 기능을 실행하는 데시벨을 견디기엔 이선의 고막은 그다지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통화음도 제일 줄인 건데…….’

토요일이라 교무실에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다. 뒤늦게 스피커폰 기능을 실행했다. 그리고 여전히 통화 중인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고 양손을 키보드에 두었다.

“그럼 어떡해. 파일을 메일로 보낸 줄 알았는데, 안 보냈는걸.”

이제 거의 두 시간을 투자한 동아리 활동 보고서는 슬슬 완성을 향해 막판 스퍼트를 달리고 있었다.

―뭘 그렇다고 주말에 출근까지 해?

“월요일까지 제출이라서 그래. 근데, 왜? 밥 먹으려고? 나, 이거 금방 끝나. 너 퇴근하고 저녁에…….”

―몰라!

뚝. 엄마의 질문에 방문을 쾅 닫는 10대 청소년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송재혁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

이선은 어느새 메인 화면으로 바뀐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뭐란 말인가? 송재혁은 사춘기가 한 20년 정도 늦게 찾아온 게 분명했다.

“뭐야…….”

이선은 다시금 보고서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저녁에 한번 연락해 봐야지. 그러고 보니 오늘이 토요일이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라 밥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했던 걸까?

이선은 포털 사이트에서 야구경기 시작 시간을 확인했다. 주말엔 이르게 시작했던 것 같은데, 날이 더워져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 경기는 오후 5시에 시작이었다.

‘저녁 먹을 수 있는데, 대체 뭐에 삐친 거지?’

어차피 송재혁은 지금 업무 중이 아니었던가.

이제야 겨우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교무실의 벽시계를 보며, 이선은 갸웃했다.

어쨌든 연락을 하는 건 아무래도 늦은 저녁 정도가 적당하겠지. 밥을 사겠다고 하면, 송재혁의 기분은 대체로 풀렸다.

생각을 마친 이선은 기지개를 쭉 켰다. 아침부터 나와서 홀로 교무실을 지킨 보람이 있었다. 보고서는 월요일에 마지막으로 한번 확인하고 결재를 올리면 될 것 같았다. 예상보다 빨리 끝난 일 덕분에 아침 겸 점심으로 가져온 샌드위치는 계륵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선은 베이커리에서 사 온 계란 토스트의 포장을 조심히 벗겼다. 다소 딱딱하고 차가운 토스트를 한입 물었다. 사람도, 말소리도 없이 빵 씹는 소리만 공기를 울리는 것이 어딘지 민망해진다.

결국, 공간과 이질적인 적막을 견디지 못한 이선은 인터넷 창을 열었다. 재밌는 영상이나, 아니면 적당한 음악을 발견하길 바라며 즐겨찾기에 저장된 영상 사이트를 열었다. 거의 핸드폰으로만 확인하던 사이트를 컴퓨터로 보니 참 정신이 없다.

혼란스러운 섬네일들의 홍수 속에서 눈도 정신도 피로해질 무렵이었다.

드륵.

짧은 진동이 이선의 핸드폰을 울렸다. 송재혁인가. 별 기대 없이 슬쩍 고개를 빼며 확인했다, 이선은 멍해지고 말았다.

화면 상단에는 이선이 지금 보는 사이트의 알림이 와 있었다. 이선은 어지간한 알람은 전부 꺼두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놀란 이유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컵스 인사이드 - 우리의 에이스가 오고 있습니다.]

절대로 받을 수 없는 알람이었다.

“…….”

곁에 남아 있는 그의 흔적을 느낄 때마다 이선은 때때로 그가 얄미워졌다.

나는 퇴근을 하다가도, 당신이 차를 세웠던 자리만 봐도 심장이 덜컹대는데…….

그 사람은 아닌 것만 같아서. 어느새 훌쩍 잊고 잘살고만 있을 사람이 미워서, 이선은 분풀이로 유튜브의 채널 구독을 취소했다. 송재혁의 얼굴이 생각나서 다소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핸드폰 조작이 서툰 탓에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까지 굳이 취소 버튼을 눌렀었다. 텅 빈 채널 목록만큼 마음도 텅 빈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다시는 이 알림을 받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야만 했고.

알림을 마주한 이선은 화면이 다시 검게 변할 때까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화면처럼 암전이 된 정신을 뒤늦게 차리고, 겨우 눈을 컴퓨터로 돌렸다.

방금까진 의식하지 못했는데, 눈을 어지럽히는 섬네일 사이엔 야구와 관련된 영상들도 몇 있었다.

“이게, 왜…….”

한동안 의식적으로 피하기까지 했다. 스포츠 뉴스가 나올까 봐 무서워서 차에서 라디오 뉴스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떠한 원리로 이 영상들이 뜨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선의 손은 반사적으로 마우스를 잡았다. 그리고 한동안 이선의 유일한 구독 채널을 장식했던 이름을 클릭했다.

송재혁이 목표로 하는 구독자 수에 가까워질 기미가 전혀 없는 숫자. 그 아래로, 가장 최근 올라온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 역시 이선의 눈을 잡아챘던 그대로였다.

이선은 홀린 듯 영상을 클릭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보다도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심장에 비해, 영상은 평온히 재생되었다.

“…….”

눈이 쨍할 정도로 푸른 하늘 아래. 햇살이 오롯이 떨어지는 운동장의 모래를 밟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린다. 탁탁. 일정한 소리에 맞추어 이선의 심장 역시 공명한다.

홀로 외야의 담장을 따라 달리는 사람을 눈으로 좇았다. 반팔의 훈련복, 새겨진 50이라는 숫자, 그리고…….

어느새 팔을 감던 붕대는 없다. 햇빛을 가리려는 용도인 선글라스와 모자 때문에 얼굴은 오롯이 볼 수 없지만, 굳게 다물린 입매는 여전하다.

처음 듣는 가요가 조용히 배경에 깔렸다. 밥을 먹는 모습, 실내 운동을 하는 모습,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관람하며 손톱을 다듬는 모습.

이선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를 빠짐없이 지켜봤다.

[에이스는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짧게 지나가는 자막 이후, 오늘 날짜와 14:00이라는 시각이 떴다. 영상의 목적은 육군 야구단을 상대로 하는 강희찬의 2군 경기 날짜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

언젠가……. 그가 부상을 당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이선에게는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을 누군가 느리게 편집까지 해서 올린 탓이었다. 왜 올렸는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원망이 일면서도, 당시의 이선은 무엇에게 홀렸는지 영상을 재생했다. 그 사람이 아팠던 순간이다. 홀로 모른 채로 넘어갈 수 없다는 비장함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하지만 영상을 봤던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핸드폰을 뒤집어버렸다.

어떠한 짓을 해서라도 강희찬을 좇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은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끄고야 말았다. 그때의 이선이 봤던 영상을 지금의 정이선은 견딜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선은 다시금 그 영상을 찾아 재생했다.

―강희찬 선수가 초구를 아주 신중하게 가고 있어요. 계속 주자를 견제하고 있죠?

―네, 말씀드리는 순간 초구 던졌……! 아, 투수강습!

―퍽!

중계진의 말소리는 어느새 들리지 않는다. 느린 화면 속 강희찬은 얼굴을 향해 오는 공을 확인하고 본능적으로 글러브가 없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순간 멈칫하더니 재빨리 오른손으로 바꾸었고, 그 팔에 공이 맞았다.

―공에 맞았어요! 얼굴 쪽이었나요?

음향 기술은 왜 쓸데없이 좋은지, 맞는 소리까지 제대로 잡혔다. 이선은 또다시 도망치듯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 처음부터 다시 재생되는 영상 속 강희찬은 또 외야를 달리고 있었다.

“…….”

처음 영상을 봤던 순간, 이선은 강희찬이 왜 자신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고 사라졌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강희찬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본능을 누르고, 주로 쓰는 팔을 지켜야 하는 야구선수의 본능이 우선이어야 한다. 언제나 자신의 앞에서는 평범했지만, 강희찬은 사실 그런 사람이었다.

절대 만나지 못할 평행선처럼. 정이선은 그의 아픔을 오롯이 이해해 줄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영상에선 아까 보지 못했던 그의 인터뷰가 흘렀다.

―재활 마치고 훈련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내일 등판 준비 많이 해서, 복귀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사람치고는 말이 꽤 길다. 번쩍번쩍한 건물 내부에서의 인터뷰로 영상은 끝이 났다.

이선은 다음 영상으로 넘어갈 때까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끝나버린 영상이 마치 그와의 인연인 것만 같았다.

문득, 오늘 아침 양치를 하던 제 얼굴을 보며 걸었던 내기가 떠올랐다.

‘오늘, 어딘가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들려온다면…….’

누군가의 작은 핸드폰 화면 속에서라도 그가 보인다면……. 그러면, 만나러 가야지.

송재혁에겐 스스로 거는 내기라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사실 겁쟁이의 바리케이드였다. 일부러 그와 관련된 것들은 모두 피하는 주제에, 이선은 홀로 내기를 걸었다. 스포츠 뉴스는 눈에도 띄지 않을 정도로 탭을 없앴고, 유튜브도 거의 들어가지 않는 주제에.

그러면서도 ‘혹시’나 ‘만약에’로 시작하는 공상을 하곤 했다. 영화 같은 우연을 바보처럼 바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우연을 지금 만났다.

“…….”

화면 너머의 강희찬을 만난 순간, 이미 마른 줄 알았던 눈앞이 흐려졌다. 아직도 눈물이 차오를 수 있었다니. 이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손에 남은 토스트를 입에 욱여넣었다.

“…욱……!”

무턱대고 욱여넣느라, 토스트의 뾰족한 부분이 목구멍을 찔렀다. 아찔한 감각이 방해했지만, 이선은 끝까지 눈을 꾹 감았다.

‘괜찮을 거예요.’

‘너는 아마 정년까지 모를 거야.’

‘오늘까지만… 여기까지만…….’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들이 머릿속에서 엉킨다. 토스트를 전부 입에 넣은 이선은 볼이 볼록한 채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전투적으로 컴퓨터를 끄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비장하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입을 가득 채운 토스트 때문에 양 볼이 볼록해서 모양은 나지 않았지만.

“…….”

…가자.

그 한마디만을 머리에 남겼다.

* * *

교무실에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안은 안이었다.

정오를 넘긴 시각의 쨍한 초여름 햇빛이 머리 위로 뚝 떨어졌다. 홀로 오롯이 태양을 받는 이선은 중앙현관 앞에 세워둔 차로 걸음을 서둘렀다. 학교 내부에 주차하는 것도 주말 출근의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별로 누리고 싶은 특권은 아니지만…….’

생각을 애써 지웠다. 오늘의 날씨. 한산한 학교 주변. 멀리서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 애써 그곳으로 감각과 인지를 보냈다. 그렇지 않으면, 자그마한 불씨처럼 꺼져 버릴 저의 용기를 이선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학교 정문을 나서면 바로 좁은 일차선 도로에 진입한다. 스쿨 존 제한 속도에 아슬아슬하게 미치지 않는 속도로 이선이 차를 몰고 있을 때였다.

“뛰지 말고 줄 서야지. 문 열어줄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선은 화들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들려온 목소리가 신규진의 것과 몹시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이선은 목소리가 들린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평범한 학교 주변이다. 이 근방은 피아노 교습소나 작은 학원들이 자리했다.

몇 번이나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이선은 반대편 차선의 길가에 세워둔 노란 스타렉스 하나를 발견했다. 용인 태권도. 전국에 수백 개는 있을 법한 이름이 새겨진 차 위로, 누군가의 머리끝만 살짝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얼핏 보이는 머리카락 역시 누군가와 겹쳤다. 그것이 더욱 이선의 눈길을 잡아챘다. 차의 속도는 어느새 스쿨 존임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느려진 채였다.

“자, 천천히. 한 명씩 올라가. 가방 조심하고.”

남자는 태권도장의 차량을 운전하는 기사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탄 아이까지 확인하고는 차의 문을 밀어 닫았다.

“…….”

단순히 ‘닮았다’라고만 하기엔 너무도 같은 목소리다.

차를 세워 정확히 확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선은 그러지 않았다.

언젠가 신규진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전광판에 찍혔던 여자.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그땐……. 그때에도 도망치듯 고개를 숙여버린 탓에, 이선은 신규진의 곁에 있었던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에 담지도 못했다.

‘그 사람일까?’

신규진이 함께하고 싶다던 사람은. 꼭 완벽한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라면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다던. 함께하고 싶다던 그 사람일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자신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던 신규진의 연인을 부러워했던가? 정이선의 20대 한가운데를 덜어간 남자를 차지할 여자를 원망했던가?

‘잘 모르겠다.’

흐릿한 기억 너머로 사라진 감정을 반추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선연한 감각으로 남은 것은, 울고 있는 자신을 옭아매던 누군가의 단단한 팔 힘이었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그랬다. 바라던 것은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엔 다른 형태의 무언가가 남아 이선을 위로해 주었다. 그것은 기억으로 남아 오래도록 저를 살게 했다.

‘선이는 안 돼. 여보, 당신 정말 나한테 이러면 안 돼요. 나 어떻게 살라고. 선이는 안 돼…….’

남편을 허무하게 잃은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쓰러진 아들을 둘러업고 응급실로 가야만 했던 어머니. 여자의 흐느낌이 이선의 귀를 맴돌았다.

병원에서 눈을 떴던 어린 이선의 눈에 비친 사람은 단 하나였다. 장례식 때보다 더욱 상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어머니를 보며 들었던 생각도 하나뿐이었다.

‘…아버지는 없다.’

모든 것이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악몽이기를 바랐지만, 꿈보다 더 잔인한 건 현실이었다. 여태껏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계셨다. 신규진의 마지막 뒷모습을 봤던 날, 이선에게 품을 허락했던 것은 강희찬이었다.

언제나 바라던 것은 저를 스쳐 지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저의 곁에 소중한 이들이 남아 있었다.

“…….”

…잘살겠지. 아마도,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함께하고 싶다는 그 사람과.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기를, 지금의 정이선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조금 부족하더라도. 그래도 좋으니 저의 곁에 있어달라고.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저에게도 그런 말을 해주길, 그리고 하고 싶은 사람은 있다. 세상 사람들에겐 미덥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그 사람만큼은, 조금쯤은 제 어깨에 기대기를 바랐다.

이선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호기심에 비틀었던 고개를 다시금 정면을 향하도록 했다. 느슨히 쥐었던 핸들을 고쳐 잡았다. 느려졌던 차에 속도를 더했다.

멈춰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저에게는, 호기심을 채우는 것보다 우선인 이가 있었다.

이선은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를 외면했다. 그리고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설정했다.

―경로를 탐색합니다.

언젠가 그 사람을 향했던 것처럼, 내비게이션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마치 정답을 알리는 것처럼.

아직 늦지 않았다는 응원과도 같이.

* * *

저번에 왔을 때도 느꼈는데, 이곳의 야구장엔 나무가 참 많다. 아무래도 조경에 각별한 신경을 쓴 게 분명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푸릇푸릇한 식물들을 보며 선수들의 정신 건강을 챙겼거나.

서울의 야구장과는 달리 여긴 꼭 야구 관람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산책하기에도 나쁘지 않을 곳이었다. 물론 가벼운 산책을 목적으로 삼기엔 이곳은 너무도 교통이 불편한 곳에 있긴 하지만.

입구에 진입하고도 한참을 차로 들어가야 한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재벌가의 저택. 아니면 보통 대학들의 캠퍼스와 퍽 닮았다. 어지간한 고등학교 정도로 아담한 교대를 나온 정이선에겐 둘 다 막연한 이미지일 뿐이었다.

이럴 거면, ‘SH CUBS PARK’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힌 입구를 좀 더 안쪽에 두었어야지.

입구에서부터 안으로 한창 이어지는 길을 달리며, 작은 불만을 속으로 주워섬겼다.

이제 완연히 우거진 녹음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떨어진 길가를 조금 더 달리면, 선수들이 묵는다는 커다란 클럽 하우스 건물이 나타난다. 주차장은 바로 그 옆에 있었다.

종종 잠실에 갈 때 보았던 커다란 버스가 오늘은 이곳에 있었다.

‘대체 저 털북숭이를 누가, 왜 마스코트로 디자인했지?’

그런 물음이 절로 드는, 도무지 이유를 모를 캐릭터가 그려진 대형버스. 그 옆에는 이선 역시 알고 있는 공중파 방송국의 중계차가 있었다. 오늘 경기를 중계하러 온 모양이었다.

커다란 차 두 대를 피하듯 가장 구석진 곳에 차를 세웠다. 이선은 차에서 내린 후 주차장을 쭉 둘러봤다.

기둥 하나 없이 탁 트인 실외 주차장. 강희찬의 차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 말고 주차장이 하나 더 있거나, 아니면 저 기괴한 캐릭터가 그려진 버스를 타고 출근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부러 생각의 꼬리를 이어가며 이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공명하듯 쿵쿵 심장이 울리는 것만 같다.

볼 수 있을까? 마주치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기기나 할까? 혹시라도 마주친다면,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하지?

그런 생각이 슬금슬금 밀려들 때마다, 이선은 일부러 발끝에 집중했다.

‘…그냥, 멀리서라도 좋으니 얼굴만 보고 오는 거다.’

그런 핑계를 댈 때까지 한참을 걸으면, 드디어 야구장의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선의 눈엔 들어오지 못했다.

“나이스!”

더운 공기를 가르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만을 좇아 계속 걸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이선의 앞에는 너른 야구장이 나타났다.

밖에서 보면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여 반드시 실내를 통과해야 진입할 수 있는 1군 구장과는 달리, 이곳은 군데군데 있는 그물망을 제외하면 어떠한 장애물도 없다.

형식상으로나마 관중석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따로 존재했다. 하지만 이선이 송재혁과 왔을 때는 일반 관람객이 진입할 수 없는 입구를 통해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커다랗게 있는 관중석 입구를 찾지 못하고 길을 헤매고야 말았다.

…나도 저 그늘이랑 의자가 있는 자리로 들어가고 싶은데…….

“…….”

길도 없는 방향을 통해 외야로 들어와 버린 이선이 도움을 요청할 이는 어디에도 없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왔나 봐.’

뒤늦은 깨달음은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

반쯤 포기한 채로 터벅터벅 다리를 움직였다. 그래도 야구장은 대충 둥그니까, 계속 걷다 보면 저 자리로 갈 수 있겠지. 느릿느릿 걸으며 이선은 경기장을 살폈다. 담장의 높이 빼고는 1군과 모든 것이 동일한 규격이라는 야구장이 커다란 그릇처럼 햇살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탁. 타악!

내야에서 배팅 훈련을 하는 선수들의 유니폼은 이선이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이 뒤섞여 있었다.

국군 야구단이라고 했던가? 정말 군인들이 야구를 하는 건지, 아니면 시청 소속의 역도선수들처럼 군대에 소속된 선수들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중에 송재혁한테 물어봐야지.

소소한 각오를 마치고, 이선은 외야 담장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 순간이었다. 모래 바닥을 딛는 누군가의 신발 소리가 귀를 스친 것은.

“…….”

고개를 들었다.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내야에서 서로에게 공을 던져주며 배팅 연습을 하는 선수들과는 달리, 흰색 연습복을 입고는 외야의 흙길을 달리는 남자. 그는 이선이 있는 반대쪽을 향해 등을 보인 채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선의 발걸음은 점점 늦춰졌다.

반소매가 거슬리는지 올려서 민소매처럼 입은 팔에는 이제 깁스가 없다. 언제 다쳤었냐는 듯, 어느새 부상을 당하기 전보다 더 커진 부피감이 이곳에서도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에 맞추어 쿵쿵거리는 심장은 어느새 남자의 발걸음과 맞추어졌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마른침과 함께 애써 삼켜 눌렀다. 좌석이 있는 내야석과는 달리, 잔디로만 이루어진 외야 담장을 따라 걸으며 이선은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푹신한 잔디가 신발을 스친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그가 사 준 신발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흔적을 남겼던 남자의 뒷모습은 여전히 커다랗고 든든했다.

느릿한 이선의 걸음과는 달리 어느새 남자는 외야의 끝을 찍은 후, 방향을 틀었다. 뒤를 돌아 이선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오는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이선은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는 제가 알던 그대로였다.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기분을 짐작할 수 없는 무표정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이어폰도 없이 달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

아무렇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면 화가 날 줄 알았다. 혼자만 이리저리 흔들렸던 사실이 비참하고 분해서 엉엉 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부상의 흔적 없이 일어선 강희찬의 모습을 본 순간, 숨이 찰 만큼 벅차올랐다.

“…….”

하나, 둘, 셋.

그의 발걸음이 땅을 딛는 순간마다 이선은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서른이 조금 넘었을 무렵, 이선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강희찬 선수, 사인해 주세요!”

* * *

러닝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싫다. 러닝 좋아하는 투수가 세상에 어딨단 말인가. 그딴 변태 새끼가 있다면 얼굴이나 좀 보고 싶을 정도다. 그저 해야 하니까, 그냥 하라니까 입에서 단물이 나올 정도로 뛰는 것뿐이지.

웨이트는 차라리 낫다. 무게를 높이거나 개수를 늘릴 때의 보람이라도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러닝은 그딴 보람도 없다. 심지어 노래를 듣는 것에도 별 흥미가 없는 강희찬에게, 외야 러닝은 그저 흙바닥을 보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3루 더그아웃 앞에서 국군팀 선수들이 토스 배팅을 하는 동안 외야에서 뛰어도 되느냐는 강희찬의 부탁에 상대 팀 감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로 8년째 국군 야구단을 맡고 있는 감독 역시 알고 있었다. 강희찬이 오늘 경기에 등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팀도 아닌, 군팀을 상대로 강희찬을 등판시키려는 이명호 감독의 의도 역시.

정확히 말하자면 야구단 소속 선수들은 군인 신분이었다. 군 복무 2년 동안 국군 소속으로 2군 경기를 소화하는 것이다.

선수들은 2군 리그에 속해 있지만, 사실 거의 절반 정도는 원 소속 팀에서 적어도 1.5군 정도의 실력을 보이는 수준이다. 강희찬의 컨디션 체크용 스파링 상대가 되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오늘따라 이정민의 연습 타구가 날카롭다.

같은 고교 동창에, 3년 내내 배터리를 맞췄던 친구의 공을 치고 말겠다는 의지가 노골적이다. 감독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포수에서 외야수로. 포지션을 바꾸고 입대한 이정민에겐 새로운 변화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부쩍 자신감이 붙은 타격감에 공을 던져주는 코치도 신나 하고 있었다.

‘…그래도 동기 사랑이라고, 강희찬이 안타 하나 맞아주면 참 고마울 텐데 말이지.’

감독의 시선은 어느새 저 멀리서 러닝을 뛰는 강희찬을 향해 있었다.

내심 탐이 났던 선수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구단 하나가 고1 때부터 찍어놓고 관리를 하는 재능이었다. 가뜩이나 한국은 야구부가 적다. 선수 풀부터가 적으니 재능이 있는 선수를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처음 감독에 부임하던 시절부터 내심 탐이 났던 선수였지만, 스무 살에 군 면제를 받은 강희찬에 대한 욕심은 버려야 했다. 한국 시리즈 경기를 준비하는 컵스의 스파링 상대가 되어줄 때 몇 번 보는 것이 인연의 전부였다.

1군 생활이 길고, 퍽 젊을 때부터 에이스로 살아온 녀석이다. 거들먹거리고 차가울 거라는 일반인의 편견을 감독 역시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지만, 녀석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착실했다. 본인 팀의 홈구장인데도 상대 팀 감독에게 찾아와 러닝을 해도 괜찮냐는 양해를 구하는 세심함에는 다소 놀랐다.

‘그래. 공 맞아도 우리 책임은 아니다.’

장난기가 다분히 섞인 말에도 강희찬은 입꼬리 하나 올리지 않고 고개를 숙이더니 외야로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저렇게 착실히도 러닝 중이었다.

새끼, 러닝을 저리도 좋아하다니. 역시 잘 던지는 애들은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제 감독이 보아야 할 선수는 백 년을 기다려도 군에는 들어올 일이 없는 강희찬이 아니다. 포지션을 바꾸고, 잘해내가는 모습을 친구에게 보일 각오를 다지는 이정민이었다.

2년 동안 충분한 경험이 되도록. 2군의 목적은 바로 그것에 있었으니.

“…….”

푸른 하늘. 그 아래의 잔디. 그리고 야트막한 외야 담장을 따라 뛰는 젊은 선수. 그 투수를 상대로 안타를 하나라도 뽑아내기 위해 날카로운 연습 타구를 만드는 다른 선수.

모든 것이 보는 이에게는 그림 같다. 하지만 정작 뛰는 강희찬에게는 미세한 불쾌감뿐이었다.

날이 맑다 못해 건조하다. 더워서 반바지인 훈련복을 입었더니 뛸 때마다 다리에 모래 알갱이가 날아든다. 하지만 멈추긴 싫다. 한 번 러닝을 시작하면 정한 횟수만큼은 채우는 것이 강희찬 나름의 규칙이었다.

‘…생각하지 말자.’

어떤 것도. 그 누구도. 목에서 느껴지는 금속의 감각만이 자신이 욕심낼 수 있는 전부였다.

가뜩이나 비어 있는 머리를 더욱 비우며 속도를 붙일 무렵이었다.

“…사인해 주세요!”

미풍 같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외야에 온 누군가가 저에게 한 말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

또 어디서 좆같은 중딩이나 하나 왔구만.

속으로 한숨을 삼킨 강희찬은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제 거의 단물 좀 빠진 줄 알았더니, 아직도 저런 멍청이가 남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외부인 출입을 제한하는 트레이닝 센터를 벗어나 이천으로 막 왔을 땐 제법 사람이 많이 찾아왔다. 사지 멀쩡하고 나름대로 정신이 건강할 때도 하지 않던 사인이다. 부상 재활을 할 때 받겠다는 생각은 대체 어느 머리에서 나온단 말인가. 찾아오면 고마워서 눈물이라도 줄줄 흘릴 거라는 생각인가.

쌓여가는 읽지 않은 메시지 수에 비례하여, 마음이 삐뚤어가는 각도도 커졌다.

삐뚤어진 남자는 발걸음에 더욱 힘을 실어 스퍼트를 올리려 했다. 좆같은 중딩새끼가 부모라도 소환하면 존나 귀찮아질 테니.

“아, 싸가지 정말 없어.”

살면서 욕을 처음 해본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다. 26년간 충분히 많이 듣고 살아온 말이지만, 저렇게 어색하고 어눌한 말투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강희찬은 러닝을 멈추었다. 저렇게 웃기게 욕을 하는 새끼는 어떤 상판대기를 가졌는지 문득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을 발원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홈런을 최대한 유도하여 선수들의 자신감을 북돋을 요량인지는 모르겠지만, 2군의 야구장은 양익으로 갈수록 담장의 높이가 낮아졌다. 3.5미터 정도 되는 중간에 비해, 좌우의 끝으로 갈수록 펜스는 2미터를 겨우 넘기는 높이였다. 외야에 좌석이 꾸려지지 않은 만큼 그물망도 거의 없다.

기껏해야 2미터를 약간 넘는 높이의 펜스다. 그리 고개를 많이 들지 않아도, 위에 서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오를 넘긴, 이른 오후의 부서지는 햇살. 그 아래의 부서질 것 같은 정이선.

“…….”

“…….”

또 꿈을 꾸는 건가?

이런 순간은 있었다. 있기만 할까. 심지어 퍽 많기까지 해서, 강희찬은 이제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릴 정도였다.

꿈과 현실은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 같았다. 흐릿한 경계 속에서, 이선을 참 많이도 만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백일몽에서 깨고 나면, 강희찬은 깨닫곤 했다.

어딘가에 이선이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주저앉으려는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전의 강희찬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해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매 순간, 모든 이가 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예전 강희찬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고등학생 시절, 저의 메디컬 리포트를 훑던 구단의 스카우트 팀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언제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생각했었다. 연필을 쥐는 것 대신, 까맣게 흙먼지가 묻은 야구공을 쥐겠다 선택한 순간부터. 유니폼을 입은 선수란 언제나 갈림길에 서 있는 존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오만이었다.

자신은 그저 잘 닦인 외길만을 걸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형식적으로나마 다른 길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길도 닦여 있지 않은, 강희찬에겐 존재조차 인지되지 못했을 길이.

오롯한 갈림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두가 실망할 준비를 마친 채로 보고 있다. 예전의 강희찬이 될 수 있는지.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겠지만, 사실 강희찬은 결말을 알고 있었다. 이미 누군가를 통해 깨닫지 않았던가. 스물둘의 어느 날, 광주에서. 24번을 달았던 윤태성을 통해,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설 수밖에 없었다. 외길이나 다름없을 갈림길이라도, 결국엔 설 수밖에 없었다.

이 갈림길에 서기까지, 수없이 떠올렸던 정이선이다.

사방이 탁 트인 야구장에서, 어디까지고 이어질 하늘을 본다. 이 끝이 닿는 어딘가에 이선이 있다.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 제 욕심을 조금 더 부려보자면, 제법 자주 웃으며. 입이 조금 쓰긴 해도, 그 곁엔 사랑스러운 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볼 사람도 함께였다.

정이선은 어딘가에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강희찬을 살게 했고, 버티게 했다. 그랬던 이의 환영이 또다시 나타났다. 볼 때마다 숨을 삼킬 정도로 현실 같은 환상이.

“…….”

강희찬은 한동안 말없이 이선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많이 놀랐음에도, 어릴 적부터 지나칠 정도로 잘 되는 표정 관리 덕에 비록 냉랭한 무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강희찬은 지금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놀란 채였다.

그것에 환상인 정이선이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오, 오늘… 경기 있다고 영상이 올라와서…….”

“…….”

“그게… 제가, 아침에 내기를 했거든요. 아니, 다른 사람이랑 한 게 아니라 혼자……! 그러니까…….”

이선은 이리저리 손짓까지 하며 열심히 말을 했다. 하지만 정작 강희찬에게 이해가 되는 문장은 하나 없었다.

“…선이야?”

대가리를 쓸 일이 없어서 더 멍청해진 건지, 아니면 꿈인 건지.

여전히 가늠되지 않는 강희찬은 꿈속에서처럼 이선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이선의 눈에선 언젠가처럼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제야 강희찬은 아차 했다.

“정 선생님?”

퍼뜩 정신이 들었다.

환상 속의 이선은 언제나 자신이 부르면 예쁜 웃음을 보여주었다. 이기적인 남자가 멋대로 그리던 이선은 지금처럼 울지 않았다.

놀란 강희찬이 이선을 확인하기 위해 고글을 벗었다. 그러자 한낮의 직사광선이 강희찬의 눈을 직격했다. 순간 인상을 팍 구긴 사이, 이선은 뒤를 돌아 몰래 눈물을 훔쳐냈다.

“잠깐만요. 왜, 여기……. 무슨 일 있어요? 어? 정 선생, 왜 울어요?”

“아니… 그냥…….”

“그냥 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아, 진짜!”

마음 같아서는 어깨를 돌려세워서 묻고 싶었다.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붙잡은 채로, 제대로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2미터가 넘는 펜스가 방해였다.

혀를 찬 강희찬은 팔을 뻗어 펜스의 위를 붙잡았다. 다행히 중앙이 아니어서 팔을 뻗어 붙잡을 수 있는 높이였다.

윗부분을 잡은 강희찬은 그대로 펜스에 발을 올렸다. 펜스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이 다치지 않도록, 매트리스보다 더 폭신한 소재였다. 푹푹 발이 빠지는 탓에 다소 애를 먹긴 했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강희찬이 거의 담장을 넘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야, 인마! 강희찬!”

확성기를 거친 목소리가 쩌렁하게 구장을 울렸다.

딱 발을 뻗기만 하면 담장을 넘을 수 있는 강희찬은 뒤를 돌았다.

1루 더그아웃 앞. 이명호 감독이 빨간 확성기를 들고 서 있었다. 오늘의 상대인 국군팀 선수들 역시 토스 배팅 훈련을 일시 정지한 채 강희찬을 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었지만, 1.5 이상의 시력을 가진 강희찬에겐 확실히 보였다.

‘대체 저 새끼는 왜 저 지랄이지?’

그런 표정인 이정민과 눈이 마주쳤다.

“희, 희찬 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뒤를 돌아 손등에 눈물이나 찍고 있던 이선이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마주한 광경에 깜짝 놀랐다.

강희찬을 부르는 누군가의 고함에 놀라 뒤를 돌았더니, 강희찬은 중력을 거스르며 스파이더맨처럼 담장에 달라붙어 있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깁스를 했던 사람이, 이게 대체……. 경악을 한 이선은 발을 동동 굴렀다.

“너 이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야? 안 내려와?!”

소리를 지르는 이명호의 얼굴이 확성기 색과 점차 동화된다. 황당함에 더해, 오늘 선발투수의 개지랄을 상대 팀에게 보여주고 있는 쪽팔림도 한몫하고 있었다.

지랄스러운 건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저딴 종류의 지랄은 처음이었으니 이명호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씨발.”

욕설을 씹어뱉은 강희찬은 그대로 발을 뻗어 담장을 넘어갔다. 당장 내려오라는 감독의 명령에 불복한 셈이다. 하지만 내려가는 것보다 차라리 올라가는 게 덜 위험할 거라고. 애써 변명했다.

2미터가 넘는 높이를 받침대도, 도약도 없이 넘어온 그는 태연하게 손을 툭툭 털고는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꾸벅. 이명호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이선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일단, 따라와요.”

“아, 아니……!”

“길도 안 났는데, 여기는 무슨 재주로 들어온 거야.”

외야의 구석으로 흘러들어 온 이선을 황당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본 것도 잠시. 강희찬은 성큼성큼 걸음을 떼었다.

“야, 인마! 어디 가?!”

이제 확성기보다도 붉어진 얼굴을 한 이명호의 고함을 뒤로했다. 이선은 자신이 울던 것도 잊은 채 그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 * *

201호니까. 0201.

클럽 하우스의 숙소는 1인 1실을 기본으로 한다. 방마다 도어 록을 설치해 두었지만, 비밀번호는 방의 번호와 동일하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2군 생활이 길지 않은 강희찬 역시 그 암묵적 규칙을 알고 있었다. 이러면 기껏 돈을 들여서 도어 록을 설치한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열린 문소리는 반갑다.

단순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강희찬은 이선을 먼저 방 안에 넣다시피 들여보냈다. 그리고 뒤이어 따라 들어갔다.

“여, 여기 막 들어와도 괜찮아요? 아, 희찬 씨 지내시는 방이에요?”

“빈방이에요. 뭐 해요? 신발 벗고 들어와요.”

“아…….”

먼저 방에 들어왔음에도 이선은 출입문 근처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강희찬의 말을 듣고서야 뒤늦게 꾸물꾸물 신발을 벗고, 어색하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이선의 원룸보다는 공간이 다소 작았지만 깔끔했다. 벽걸이 TV도 있고, 짙은 원목색의 책상에 자그마한 냉장고, 침대까지.

한 사람이 묵기에는 딱 좋고, 성인 남자, 그것도 한쪽이 운동선수인 둘의 조합은 다소 벅차 보이는 방이기도 했다.

강희찬은 익숙하게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고 책상 위에 던지듯 두었다.

“왜 울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안 울었는데요.”

“…….”

토끼같이 눈 주변까지 빨개져서는, 무슨.

어처구니없다는 강희찬의 얼굴에 이선은 도로록 눈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여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를 발견하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만 것이다. 충동적으로 그에게 말을 걸긴 하였으나, 이렇게 둘이, 그것도 낯설고 밀폐된 공간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울었다는 추궁을 더 받기 전, 이선은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희찬 씨… 아까 소리치시던 분, 코치님이세요?”

“2군 감독님입니다.”

“헉. 그, 그럼 더 큰일인 거 아니에요? 얼른 가셔야…….”

“내가 가길 바라면, 왜 울었는지 얘기해 주면 되는데요.”

중간에 말을 자르며, 단호히 말한 강희찬은 무릎 높이의 냉장고를 열어 생수 한 병을 꺼냈다. 그는 꺼낸 생수를 이선에게 먼저 권했다. 도리도리. 작은 고갯짓으로 거절하자, 강희찬은 미련 없이 생수병을 열고 목을 축였다.

‘여기가 빈방이 맞았던가?’

이선에게는 자신 있게 말했지만, 큰 확신은 없었다.

3년 차 이상, 연봉 1억 이상, 셔틀버스로 출근이 가능한 곳에 집이 있다면, 클럽 하우스에 방을 배정받을 수 없다. 구단 규칙이었다.

강희찬은 어떤 조건으로 따져도 방을 배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누가 사용하는지 모를 방에 멋대로 들어온 상태였다. 그런 주제에 당당하게도 이선을 내려다보았다.

“…….”

이선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서 있었다. 꼼지락. 발가락을 괜히 움직여보기도 했다.

“…응?”

강희찬은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낮추었다. 얼굴을 맞추려는 탓에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선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 그냥…….”

어물어물. 도망가고 싶으면서도, 그러고 싶지 않다. 모순된 마음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본능은 알고 있었다. 지금만큼은 도망가면 안 된다고. 다시 이 남자를 어디에서 볼지 알 수 없었다.

운에 기대어 만난 이 순간을 이선은 운명이라고 믿고 싶었다.

“희찬 씨.”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다정하고 걱정이 가득한 눈이 이선의 앞에 있었다.

“희찬 씨… 오늘 경기 나가시잖아요.”

“네.”

“그…….”

이선의 입술이 열리다가도 다물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다. 달싹거리는 입술이 답답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몇 번 달싹이던 입술을 가만히 보던 순간, 조심스러운 손길이 강희찬의 훈련복 자락을 슬쩍 잡았다. 마치 도망가지 못하도록. 이렇게 잡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는.

“희찬 씨… 혹시, 아직… 남자 좋아하시면…….”

“난 남자 좋아한 적 없어요.”

단호한 음성에 이선의 심장이 멈추었다.

“난 남자 안 좋아해요. 정 선생이라 좋아한 거지.”

“아…….”

멈추었던 심장이 뒤늦게 세차게 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분명 몇 초간 멈추었다가 뒤늦게 아차, 하며 뛰는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잠시 멈추었던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튀어나올 듯한 맥동에 이선은 순간 다리의 힘이 풀릴 뻔했다. 휘청거리는 이선을 향해 강희찬의 오른팔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그의 오른팔엔 옅게나마 수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선의 눈이 멈춘 곳을 깨달았는지, 강희찬은 머쓱한 얼굴을 하며 팔을 감추듯 거두었다.

“근데, 왜 울었어요? 진짜 말 안 해줄 거예요?”

그는 저에게만은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정이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얗게. 정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상처가 있었는지도 모를 자국을 보면서도 울 것 같은 얼굴이나 하는데. 그런 사람의 무엇을 믿고 기댈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은 그의 말이 기폭제가 되어 둑이 터지듯 터지고야 만다.

“희찬 씨 때문이잖아요! 왜 자꾸 당연한 거, 물어보세요!”

이선은 이제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주먹까지 꼭 말아 쥐고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마치 털을 바짝 세운 작은 동물이었다.

“…….”

하지만 순간적으로 강희찬은 흠칫했다. 눈까지 빨개서는, 정말 토끼 같은 꼴이었지만, 맹세할 수 있었다. 심판에게 화가 난 최 감독에게도 이만큼 기가 죽어본 역사가 없었다.

순간 ‘얼음’이 되어 눈만 껌뻑이는 강희찬을 향해 이선은 몇 초간 빨간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또다시 손등으로 벅벅 눈을 닦는다. 뒤늦게 재빨리 손을 잡아챘지만, 이미 피부는 자극으로 인해 짓무른 것 같은 꼴이었다.

“자꾸 눈 비비면…….”

“희찬 씨. 오늘 시합 나가세요?”

“네? 아, 네.”

아까 분명 시합 나간다는 거 알고 찾아왔다고 그러지 않았나?

강희찬은 속으로 물음을 삼켰다. 상대가 이선이 아니었다면, 벌써 치매가 왔냐고 한 번 쏴댔겠지. 하지만 지금 공기를 채우는 건 그런 날 선 말이 아닌 어색한 적막이었다.

왜 이천에는 왔는지, 왜 울었는지. 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마른 것 같은지. 안 보이는 곳에서 계속 울었는지.

묻고 싶은 말은 차고 넘쳤다. 따지듯,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이선을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궁금증을 꾹 눌러 참는 동안, 이선은 언제 뾰족하게 눈을 흘겼냐는 듯 화가 누그러져 있었다. 아니, 그걸 화를 냈다고 표현하기도 참 애매했다.

어느새 이선은 저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이 나올 듯하면서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는 입술을 강희찬은 인내심 있게 지켜보았다. 물론, 제 의지와는 다른 인격을 지닌 하반신으로 피가 몰리고 있었지만.

“희찬 씨, 아직도 많이 힘드세요?”

이선은 어느새 제 발끝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면, 동그란 가마가 눈에 잘 들어온다. 그 아래로 얼핏 보이는 하얀 목덜미. 입술에서 눈을 돌린 보람은 딱히 없었다. 한껏 기가 죽은 듯 움츠러든 어깨조차도 자극적이었으니까.

상상이 아니다. 현실이라는, 진짜 이선이라는 존재는 그 어떤 상상보다도 더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사람을 앞에 두고 세울 순 없지 않은가. 깜짝 놀라 토끼 같은 눈을 둥그렇게 뜨면, 강희찬은 정말로 자신이 싫어질 것만 같았다.

온 힘을 다해 시선을 올렸다. 십자 모양으로 배치된 전등에 붙은 먼지에 신경을 쏟았다.

…먼지가 눈으로 보이다니. 더러워 죽겠다.

오늘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전등 위를 청소해야겠다는 쓸모없는 마음을 먹을 무렵이었다.

깃털보다 가벼울 힘이 강희찬의 훈련복 아래를 조심히 쥐었다. 옷이 흔들렸나? 반사적으로 아래를 보자, 이선은 어느새 한 뼘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온 채였다.

“정 선생님.”

“파, 팔도 많이 좋아지신 것 같고, 운동도 하시는데…….”

“…….”

“이제… 조금 덜 힘드신 것 같은데…….”

가까이서 바라보는 눈동자는 역시 색이 옅다. 눈물이 또다시 옅게 그 위를 덮자, 물을 많이 섞은 수채화의 느낌을 주었다.

또. 또 울고야 만다.

세상 누가 울든 웃든 상관없지만, 그래도 단 한 사람은 예외였다. 이 사람만큼은 어디에서든 웃고 있어야 했다.

제 앞에서의 이선은 참 많이도 울었다. 정이선 자신보다 이선이 웃기를 더 간절히 바라는 건 저일 텐데.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 어딘가를 쥐어뜯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다. 강희찬은 가까이 있는 이를 품에 넣어버렸다.

“오늘, 라이브 피칭 했는데…….”

낮은 목소리는 떨림이 되어 이선의 온몸으로 전해졌다. 손끝까지 느껴지는 진동에 이선은 눈을 꽉 감았다. 얼마 만에 느껴본 다른 이의 온기였다. 그것도 가장 바라던 품이었다.

헛소리라도 하다가 꿈에서 깰까 봐, 이선은 대답은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것을 강희찬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앞에 타자 세워놓고 공 던지는 거 했다고요.”

“…저도 뭔지 알아요.”

이선이 부루퉁한 목소리를 내며 품에서 꼼지락거린다. 괜히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몰랐을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강희찬은 구태여 지적하진 않았다. 그저 소리를 죽여 웃을 뿐이다.

“경기 들어가면, 공 하나 못 던지고 내려올지도 몰라요. 라이브 피칭 땐 앞에 세워둔 타자가 안 칠 걸 아니까 던지지만, 실전은 아니니까.”

“…….”

“얼굴로 공 날아오는 게 무서워서 공 못 던지는 순간, 야구선수는 못 해요.”

서보지 않으면 모른다. 라이브 피칭에서 구속이 얼마가 나오든 제구가 얼마나 잘 되든 다 소용없는 일이다. 정작 마운드에서, 상대 팀 타자를 향해 공을 던지지 못하는 투수는 존재 가치가 없다.

‘그래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을 이으려던 순간이었다. 강희찬의 몸이 뒤로 밀려나며 기울었다.

“아…….”

풀썩. 침대에 다리가 걸리고, 결국은 그 위에 주저앉듯 몸이 앉혀진다. 오른팔은 본능적으로 침대를 짚었다. 그의 왼팔은 어느새 이선의 등을 감싼 채였다. 강희찬을 밀어낸 장본인은 그의 무릎 위에 있었다.

기술명을 굳이 붙여보자면, ‘몸통 박치기’ 정도려나.

어디 가서 운동선수가 일반인, 그것도 정이선 같은 체형의 사람에게 뒤로 밀렸다고 말한다면 창피하다 소리를 듣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이란 게 예상치 못한 공격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무릎 위에 올라온 이선의 무게는 보는 것보다도 가벼웠다. 그 점이 운동선수로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애써 변명을 붙였다.

기르는 강아지의 몸통 공격을 당한 주인처럼 멍한 강희찬을 향해, 이선은 잔뜩 결연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희찬 씨, 야구 하지 마세요. 오늘 시합 안 나가셔도 돼요.”

“…네?”

‘아니, 안 될 텐데…….’

엉뚱한 소리에 강희찬은 뒤로 몸이 넘어갔을 때보다 더욱 당황했다. 한동안 고장 난 인형처럼 움직이지 못하던 그는 겨우 입술을 뗄 수 있었다.

“안 나가면 두들겨 맞을 텐데. 밖에 중계차 오지 않았어요?”

“윽. 괘, 괜찮아요.”

정작 말하는 본인의 얼굴은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인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강희찬은 이선을 놀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욕망을 아주 조금쯤은 실현하고 있었다.

“희찬 씨 야구 안 해도 괜찮아요. 야구 못 해도 괜찮아요. 저는… 저는…….”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어느 쪽으로 가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지만, 어쨌든 숱한 눈들이 저의 첫걸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지 않는 곳으로 한 걸음을 뗀 순간, 가차 없이 외면할 준비를 마친 채.

당연했다. 선수의 가치란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

지극히 보통 사람이 될 강희찬의 손을 기꺼이 잡겠다고. 그런 호구 같은 소리나 한다.

누구나 부러워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저 성격이 좋지 못한 남자일 뿐인 자신에게 내밀어지는 고운 손. 갈림길 앞의 강희찬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바보같이……. 저 힘들다고 도망을 가버린 사람을 따라와서는.

“저, 나중에 연금도 받을 수 있어요.”

눈치를 살피고 있지만, 그 안에는 제법 호기로운 기운도 함께였다. 제법 호기로운 기색을 강희찬은 느낄 수 있었다.

“그거 다 희찬 씨 드릴게요.”

“무슨…….”

결국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호구 같은 소리나 하는 호구는 왜 웃냐며 불만스레 저를 보았다.

강희찬은 여전히 변함없는 호구의 기질을 발휘하는 이선을 품에 당겼다. 조금 전보다 더 강하게, 그리고 확실히.

“그 연금, 한 30년 뒤에나 받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머리카락을 살랑이는 목소리에 이선이 움칫 떨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숨결에 대한 내성이 없기도 했지만, 말의 내용도 한몫하고 있었다.

제대로 반박을 하지 못하는 이선은 어느새 또다시 기가 죽는다.

마음 같아서는 남자답게 ‘너 하나쯤은 책임질 수 있어!’라며 멋있게 그를 끌고 나가고 싶은데. 4년 차 시교육청 소속 공무원에겐 현실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그치만……. 그래도…….’

제 가슴팍에서 꼬물거리는 움직임에 강희찬은 그 부근이 간질거렸다. 간지러움과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에게 다소의 용기를 주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나직한 목소리에 이선은 다시금 긴장했다. 꼭, 아직은 해가 지면 쌀쌀했던 그때처럼. 한쪽 팔에 깁스를 둘렀던 강희찬이 꼭 이런 다정한 목소리를 했다.

이선의 불안을 깨듯, 그의 팔은 더욱 강하게 이선을 품에 넣었다. 이선 역시 얼굴이 다 눌리면서도 단단한 가슴에 더욱 얼굴을 묻었다.

“나, 데리러 와줘서……. 잡아줘서 고마워요.”

“…희찬……. 윽…….”

“울지 말자, 선아.”

커다란 손이 어느새 이선의 뒷머리를 덮는다. 손가락에 스치는 힘이 약한 가는 모발. 한참을 매만지며, 이선을 달래던 그는 정수리에 입술을 대었다.

마지막이라고, 이번 생은 다시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날처럼. 차가운 원룸 앞의 골목이 아닌, 따스한 초여름의 햇살이 작은 창문을 통해 넘어오는 침대 위에서.

“으…으윽……. 너, 너무 무서웠어요.”

“…….”

“얼마나… 내가, 얼마나 겁났는데…….”

“내가 잘못했다, 선아. 응? 그만 울자. 울면 머리 아프잖아.”

한참을 울었던 그날의 이선은 결국 비척거리며 원룸 계단을 올랐다. 당장 쓰러질 듯 휘청이며, 이마와 눈을 짚는 모습에 강희찬은 따라 들어가고만 싶었다.

지금의 이선은 그때만큼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내가 평생 빌게. 울지 마라, 선이야.”

“나빠요. 너무, 너무 나빴어요.”

그간 꾹 눌러왔던 둑이 펑 터지기라도 한 걸까.

훈련복 앞섶이 눈물로 젖어갔다. 하지만 걱정인 것은 딱 하나였다.

‘젖은 천에 그렇게 마구 얼굴을 문지르면 안 될 텐데…….’

TV 옆에 있는 티슈를 가져다주려고 조금 몸을 움직였지만, 이선은 그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강희찬에 비하면 한없이 유약한 팔은 덜덜 떨릴 정도로. 다시는 제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것만 같아서, 강희찬은 잠시라도 모질게 이선을 떼어낼 수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울지 마라, 선이야.”

한참을 울던 이의 울음이 옅은 호흡으로 변할 때까지, 강희찬은 끝없이 속삭였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이선은 몇 번 코를 훌쩍이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떼었다. 그리고 눈물로 남겨놓은 흔적을 보며 홀로 민망해하기 시작했다.

…조금 괜찮아졌을까?

이선의 얼굴을 흘긋 본 강희찬은 냉장고에서 새 물을 꺼내오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냉장고로 향한 시야에 전자시계의 시각을 알리는 숫자가 들어왔다. 경기 시작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가면 뒤지겠군.’

벌게진 이명호 감독의 얼굴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는 언제나 최 감독의 성질머리에 대고 혹평을 아끼지 않았지만, 솔직히 보는 입장에선 도긴개긴이었다.

그래도 오늘 등판인 선수를 때리진 않겠지. 차라리 맞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의 잔소리가 예상되지만, 그것도 경기 후의 일일 거다.

이선은 어느새 잔뜩 얼룩이 번진 앞섶을 손으로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그런다고 물기가 닦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 무의미한 몸짓마저 안아버리고 싶었다.

이 사람은……. 가장 보통 사람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특별할 필요가 없다고. 갈림길의 앞에서, 강희찬은 그 손을 맞잡는다.

혼이 나기 직전 어린애처럼 잔뜩 눈치나 보며 눈을 굴리는 이선은 알고 있을까? 당신이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는 것을.

강희찬은 이선의 얼굴에 조심스레 손을 대었다. 그리고 유리를 만지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난 말이에요.”

“…….”

“정 선생님만 있어주면, 좀 더 괜찮은 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희찬 씨는 다 완벽해요. 제일 멋있어요.”

얼마나 창피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는 전혀 자각이 없는 기색이다. 오히려 부끄러워진 강희찬이 먼저 눈을 피했다.

“오늘, 선발 내려오면… 공 줄게요. 저번에 못 줬던 거 대신해서…….”

“싫어요!”

답지 않게 중간에 말을 자르며 들어온다. 의외의 격한 반응에 강희찬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랐다. 하지만 이선은 털을 잔뜩 세우고, 주먹까지 말아 쥐고는 미간도 찌푸리고 있었다.

“공 안 받아요! 안 받을래요.”

“…정 선생님?”

“공 필요 없어요. 희찬 씨, 야구 하지 마세요. 그거 안 해도 되니까…….”

말은 채 이어지지 못한다.

아무래도 야구장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썩 좋진 않았을 테지. 사람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봤을 테니까.

‘대충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이렇게 품에 안겨서는 어디에도 보내지 않겠다는 자세로 끌어안으면, 강희찬으로서는 기쁘면서도 조금은 난감해진다. 경기 시작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게다가……. 이선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하반신도 빠듯했다. 소재가 얇은 운동복 바지를 입은 탓에, 이선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눈치챌 것이 분명하다.

천장을 보며 몰리는 피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강희찬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이걸 어쩌나.’

고민하던 강희찬은 이선의 동그란 머리를 봤다. 여전히 색이 옅고, 힘이 약한 머리카락이 가마의 모양을 따라 뱅글뱅글 돌며 자라난 방향이 사랑스럽다.

그 너머로 보이는, 제 몸에 얹힌 마른 몸을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티셔츠로 가려질까 말까 한 곳. 이선의 엉덩이가 있을 곳에 눈길이 머물고, 손이 뻗어나갔다.

“팬티 무슨 색 입었어요?”

“…헉!”

파드득.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붙어 있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침대 끝으로 몸이 멀어진다. 구석에 몸을 말고는 잔뜩 경계심을 보이는 불신의 시선이 강희찬을 향했다. 조금의 과장을 보태면, 길 가다 만난 변태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원하던 결과이긴 했지만, 어딘지 가벼워진 무릎이 허전하고 서운하긴 하다.

“왜, 왜 그런 거… 궁금해하세요.”

“궁금하잖아요.”

“…장난치셨어요?”

미심쩍은 눈이 전혀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거기에 대고, 절반 이상은 진심이었다고 말했다가는 도망갈 기세였다.

강희찬은 슬쩍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목에 걸려 있던 줄을 옷 밖으로 꺼내어 풀었다. 가느다란 줄에 달려 있는 반지는 매장의 조명이 아닌 창으로 들어오는 태양빛 아래에서도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이제 주인을 만나는 것에 신난 것처럼.

강희찬은 이선의 왼손을 조심히 당겼다. 그리고 네 번째 손가락에 맞추어 반지를 조심스레 끼웠다. 중간에 걸리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었지만, 기우였다. 반지는 맞춘 듯 이선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지났다.

“이거…….”

“지금은 이걸로 좀 참아주면 안 될까요? 더 늦었다간 대가리 박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게… 왜, 이거……. 네?”

제 손에 끼워진 반지와 강희찬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이선의 표정이 혼란을 지나 경악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주인을 찾은 반지는 기쁘다는 듯 빛나고 있었지만, 막상 주인이 저 반응이다.

혼란스러운 이선을 향해 강희찬은 나직이 말했다.

“정 선생 물건을 하나 가지고 싶었거든요. 그냥…….”

“…….”

“그냥, 하나만 있었으면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나한텐 정 선생 물건이 없더라고요.”

“그, 그렇다고 이런 걸 막…….”

“소주병 들고 다니긴 좀 그렇잖아요.”

“…네?”

갸웃. 이선은 의아한 기색을 비쳤지만, 강희찬은 대답하진 않았다. 대신 반지를 낀 이선의 손을 제대로 만지지도 못한 채, 가만히 손에 얹어 들여다보았다.

“오늘, 승 못 딸 수도 있어요. 승리투수 요건도 못 채우고 내려올지도 몰라요.”

꿈에서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을 멍하니 보다, 손가락으로 이선의 약지를 조심스레 쓸었다. 장신구가 주는 이물감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 온기를 굳게 쥐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 공…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그저 보통 사람들이다.

평범히 노력을 하고, 평범히 넘어졌을 때 묻은 흙을 털어야 한다. 누구나 부러워할 특별한 재능도,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인간 승리의 서사도 없다.

일어서야 하고, 계속 걸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이전과는 다를지라도.

어린 시절 봤던, 특별한 사람이 특별한 행복을 이루는 동화의 결말을 주고 싶었다. 공주님과 왕자님은 결국 행복하게 지냈다는 뻔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처럼. 저 자신이 이선에게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특별하니까. 특별한 사람인 이선은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특별한 사람의 완벽한 행복을 주겠다는, 낭만이라는 이름의 오만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저 보통 사람이었다. 왕자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인 저에게 손을 내미는 이선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저에게만큼은 백마 탄 왕자일지라도.

우리 모두와 같은 보통 사람은 서로에게만큼은 가장 특별한 이가 된다.

다치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그래도 넘어진 상처를 지니고 살아갈 그런 보통 사람들.

기록을 세우고 나면, 언제나 마지막으로 던졌던 공은 기념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공이 기록의 전부는 아니다. 숱한 공들이 타자의 방망이에 맞아 나가고, 흙먼지에 구르고 긁히고, 버려진다.

그런 평범하고 지극히 보통 사람들다운 공들은 반드시 서로만의 특별함으로 이어진다. 그럴 수 있었다.

예쁜 눈동자에는 여전히 엷게 물기가 맺혀 있다. 가슴 언저리를 아릿하게 만드는 예쁜 얼굴. 강희찬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완봉구가 아니라도……. 꼭 정 선생, 아니, 이선 씨가 받아줬으면 좋겠는데.”

당신과 있으면, 당신에게만큼은 난 좋은 남자가 되고 싶어진다.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반드시 그럴 것이다.

한없이 보통 사람인 강희찬의 손을 덥석 잡는 당신이라면.

“응?”

장난스레 물으며 강희찬은 손을 내밀었다. 이선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지만, 절대 울지 않겠다는 굳센 얼굴로 조심히 제 손을 얹었다.

반지의 무게가 더해진 묵직한 애정이 저의 손 위로 떨어졌다. 강희찬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쥐었다.

꼬물꼬물. 침대 한구석에서 웅크렸던 몸을 일으키는 이선을 차분히 기다렸다. 기다림은 힘들지 않다. 이선은 아마도 더 긴 시간 동안 저를 기다렸을 테니.

“희찬 씨, 도망가면 안 돼요.”

오히려 애정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손가락에 채운 것이 누구인데. 이선은 그를 올려다보며 제법 엄포를 했다.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돌풍 속 들꽃처럼 쉬이 지고 말 것이라고. 마운드에서 맥없이 쓰러졌던 선수처럼, 이선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이선은 강하다. 정이선은 푸른 유니폼의 선수가 아니었다. 마운드에서 무너진 채 아스라이 사라진 선수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만의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는 사라지지 않을 존재가 되어.

“네.”

언젠가,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 더 익숙해졌을 때. 나는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르지.

그 순간은, 강희찬 인생에 다시 없을 최고의 결정구였다고.

* * *

방을 나서고 계단을 내려오던 순간, 이선은 잡힌 손을 자꾸만 꼼지락대더니 기어코 빼냈다. 강희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유를 물었더니, ‘남들이 볼지도 모르니까’라는 시시한 답변이나 돌아왔다.

‘대체 뭔 상관이라고.’

여태껏 지은 죄가 있으니 얌전하게 굴던 강희찬이 볼멘소리를 하려던 참이었다.

“형! 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부지가 넓어서 인구 밀도는 심각하게 낮은 것 같은데, 새끼들은 어디에서나 불쑥불쑥 잘도 튀어나온다.

강희찬은 퍽 못마땅한 얼굴로 오늘 그의 공을 받아줄 포수를 봤다. 옆에서 ‘그것 봐요. 제 말이 맞죠?’라며 우쭐하는 기색인 이선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빨리 안 가면, 감독님 화내실 것 같은데…….”

이명호 감독이 직접 오는 것보단, 그래도 얘가 오는 게 낫나. 강희찬은 혀를 차며 이선을 보았다.

“가요. 관중석 들어가는 길 알려줄 테니까.”

“형, 지금 빨리 뛰어가야 한다니까요?”

“희찬 씨…….”

안절부절못하는 네 개의 눈동자가 한 사람을 향했다. 하지만 정작 중간에 낀 강희찬만은 태연하다.

자신에겐 도망가지 말라고 해놓고, 곤란해진 이선은 당장 혼자 차를 타고 서울로 갈 기세였다. 강희찬은 죄 없는 후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감독님한텐 나 화장실에 있다고 그래.”

“아, 그게 뭐예요. 밥도 안 먹어놓고 뭘 싼다고.”

“너, 이……! 빨리 안 꺼져?”

끈질기기가 진드기 부럽지 않다. 목소리를 잔뜩 낮춘 강희찬은 이를 악물며 후배를 위협했다.

졸지에 애인과 감동의 1일에 추접스러운 기억이 덧붙게 생겼다. 러닝화를 신은 발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목적지는 딱 한 군데였다. 포수의 약점인 말 못 할 부위. 스파이크로 갈아신고 왔어야 했는데. 후회는 언제 해도 늦었다.

“저, 희찬 씨…….”

이선이 저의 훈련복을 조심히 당겼다. 포수라면 언제나 고통받는 부위를 향해 위해를 가할 기세인 발놀림이 멈춘 것도 그때였다.

강희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심스럽게 이선을 내려다보았다.

“왜요?”

목소리가 바뀌는 것이 가증스럽다. 손으로 엉덩이를 보호하던 후배는 눈앞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야구장과는 퍽 이질감이 드는 남자는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더욱 웃기는 건, 강희찬은 그 답답한 모습에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경청을 한다는 점이다.

“저, 아까 거기에서 구경할래요.”

“거기? 외야?”

“네.”

“거기 너무 위험한데. 의자도 없이 잔디 바닥이고, 그물도 없어서. 그냥 앞쪽에 앉죠?”

사실상 반대나 다름없는 제안에도 이선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좀 무서운가?’

개막전 날, 이선은 아마 경기가 시작하고 한참 뒤에나 들어왔을 터였다. 본 기억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이선이 경기장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에 맞았겠지.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 이선을 덜렁 두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불안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해도 외야로 갈 거죠?”

강희찬이 물었다. 끄덕끄덕. 눈을 반짝이며 힘차게 고갯짓했다.

세상 착하고 순한 얼굴을 해서는, 은근히 고집이 세다.

물러터진 새끼야. 스스로에게 욕을 해봐야, 앞으로 더욱 이선에게는 약해질 제 미래만 선명히 그려질 뿐이다.

“그럼 헬멧 줄게요. 그거 경기하는 동안 벗으면 안 돼요. 그리고 공 잘 봐야 하고. 옛날처럼 공 안 보고 한눈팔다가 머리 깨지니까.”

“…머리, 안 깨졌어요.”

부정하면서도 이선의 손은 반사적으로 그때 다쳤던 곳을 감싼다. 그 모습에 강희찬은 저절로 웃음이 샜다. 물론 곁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후배를 볼 때는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박한 웃음이기도 했다.

“야, 여기 하이바 어디서 받냐?”

“…무슨 하이바요?”

바르고 고운 말을 쓰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아는 초등학교 교사를 앞에 둔 남자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관중들한테 빌려주는 거 있잖아.”

“그런 게 어딨어요. 여기에 익사이팅 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어?”

“없어요.”

역시. 이 형이 1군에서만 지내던 티가 이렇게 나는군.

괜한 심술에 후배는 이죽거렸지만, 그 역시 강희찬이 딱히 악의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내보니, 이 형은 듣는 것보다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가서 하이바 가져와. 네 걸로.”

“…네?”

“네 거 가져오라고. 빨리 뛰어.”

아니, 취소. 나쁘다. 이 형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 맞다.

“희찬 씨!”

“그, 그거 가져오면, 전 뭐 쓰고 경기해요.”

“여분 있는 거 다 아니까, 새 걸로 가져와.”

“어……. 아니…….”

못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귀신같기까지 한 선배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얼굴로 단호히 명령했다. 어떻게 좀 말려줘요. 간절한 눈으로 선배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남자를 보려 할 때였다.

“빨리 다녀와라. 감독님이 나는 안 굴리시겠지만, 넌 구르지 않겠냐?”

오늘 등판을 끝으로 1군에 등록되어야 하는 선수. 게다가 포지션은 투수다.

길을 걷다 강희찬이 혼자 돌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이명호 감독은 기꺼이 제 몸을 쿠션으로 희생할 값어치가 있는 선수였다.

…아, 젠장. 이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을 하는구나. 정민이 형은 보살인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성질을 고등학생이 3년이나 감당했단 말인가.

억울했지만 포수이며, 짬에서도 밀리는 선수는 뛰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살벌할 더그아웃에서 떨고 있는 동료들을 구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강희찬은 후배가 개처럼 헥헥대며 가져온 헬멧의 냄새를 맡았다. 새것이라고. 그런 항의의 눈길을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미심쩍은 기색을 보이더니 결국 이선의 머리 위에 얹는다.

“이게…….”

헬멧을 씌우자마자 강희찬의 입에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대야를 머리 위에 올려둔 웃긴 꼴이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옆에서 앵앵이며 시끄럽게 구는 녀석은 ‘5분 안에 뛰어가겠다’라는 얄팍한 약속을 받고서야 경기장으로 사라졌다.

경기 끝나고 제법 한소리 듣겠군. 이명호의 잔소리가 벌써부터 귀를 울리지만, 이선에게만큼은 온화한 웃음으로 안심시켰다.

“희찬 씨, 많이 혼나실 것, 같은데…….”

이번엔 엉뚱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강희찬은 직접 외야에 관중석 대용으로 마련된 잔디밭에 이선을 제대로 데려다 놓았다.

걸을 때마다 맞지 않는 헬멧이 눈을 가리는 탓에, 이선은 자꾸만 헬멧을 고쳐 썼다.

아무리 그물망이 있는 구역이라지만, 여기에 혼자 두기는 불안해서 몇 번이나 내야로 가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이선의 굳센 도리질은 그의 결심이 깨지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제가 여기서 공 다 막아드릴게요. 희찬 씨 점수 못 뺏기게.”

“난 그럼 외야수 네 명 두고 공 던지는 거예요? 엄청 든든하네.”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니에요. 홈런 맞을 것 같으면 정 선생이 인정 2루타로 만들어줘요.”

“…어? 아, 네에.”

이선은 금세 모르겠다는 얼굴을 해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헬멧을 겨우 쓰고 빨빨거리며 외야 관중석을 이리저리 뛰어다닐 모습을 상상하니, 웃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기왕 그런 귀여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괜히 제 생각을 하지 말고 얌전히 공이나 피해주시길.

간절한 바람을 속으로 삼켰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수비수가 생겼으니, 오늘은 반드시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아까 말한 건 농담이고. 진짜 공 잘 보고 있어야 돼요. 이거 쓰고.”

강희찬은 제 손에 있던 고글까지 이선의 얼굴에 씌웠다. 정말 아이템들이 하나같이 안 어울릴 수가.

아이가 부모 옷을 얻어 입어도 이것보다는 위화감이 덜 생길 것 같은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으며, 강희찬은 전력을 다해 뛰었다.

이제 폭발 직전이라는 게 여기서도 보이는 이명호가 있는 더그아웃을 향해.

* * *

“야아. 요놈 새끼. 요 귀하신 몸을 내가 어찌해야 쓰냐, 희찬아.”

이명호 감독은 최선을 다해 화를 눌러 참고 있었다. 먹은 것도 없는 새끼가 화장실을 핑계로 미적거리며 돌아오지 않을 때도, 뜬금없이 외야에서 중학생과 노닥거릴 때도. 그리고 눈썹 휘날리게 달려와 사과를 해도 모자랄 시간에 가장 먼저 포수에게로 가서 오늘 경기 끝난 후의 공을 챙겨달라고 말할 때도.

이명호는 참고 또 참았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다며, 참고 참고 또 참는다는 옛날 만화영화의 주제가가 생각났다. 그 계집애는 여간 독한 게 아니다. 죽으면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사리가 나올 사람은 여기 또 하나 있었다. 필사적으로 안면 근육을 다잡는 이명호의 얼굴을 보며, 강희찬은 발이 날아와도 불평하지 않을 각오를 다졌다.

“죄송합니다.”

“대가리를 박게 할 수도 없고, 러닝 시키면 좋다고 그냥 뛸 거고.”

‘…아니, 좋다고 뛰진 않아.’

경기 시작 30분 전. 마지막으로 구장 관리인이 마운드를 다듬고 있는 평화로운 광경 속 오점처럼, 강희찬은 정석의 ‘열중쉬어’ 자세로 이명호의 눈앞에 섰다.

더그아웃 벤치에 앉아 있는 그는 서 있는 선수를 올려다보던 눈을 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부터 점심 빨리 먹고 애들 밥 퍼줘라. 벌이야.”

“저, 그냥 러닝하면 안 됩니까?”

“쓰읍. 토 달래?”

“…죄송합니다.”

졸지에 1군에 빨리 올라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내일부터 쪽팔린 꼴을 겪을 투수를 보며, 포수는 마스크로 실실 웃는 얼굴을 감추었다.

정신적 타격이 상당한 벌을 내린 이명호 감독은 “요구르트 막 훔쳐먹고 그러면 안 돼”라는 엄포를 남겼다.

이제 불펜으로 가봐. 이명호의 짧은 고갯짓이 그리 말했다. 먼저 불펜으로 들어간 포수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맞다. 야, 근데 왜 울든? 너 뭐라고 했어?”

“네?”

뒤를 돈 강희찬이 되물었다. 이명호의 얼굴엔 가벼운 궁금증이 번져 있었다.

“아까 말이야. 우는 것 같던데? 아직도 외야에 있잖아. 쟤.”

이명호의 턱 끝이 외야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남자를 향했다.

“왜. 사인 안 해준다고 하니까 울더냐?”

“…….”

“그래도 한 중학생은 됐을 거 아니야. 뭐 그런 걸로 사내새끼가 짜고 그런대?”

“…….”

“그래서, 사인 해줬냐?”

“아… 네, 뭐…….”

애매한 대답에 이명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마. 너도 그냥 적당히 해주고 넘겨 버릇도 해야 돼. 잘했어.”

끌끌. 혀를 차던 이 감독은 이번에야말로 강희찬을 향해 가보라고 짧게 말했다. 이제부터 불펜피칭을 시작해서 어깨를 데워두어야 한다. 돌발 상황 탓에 상당히 시간이 지체되었다.

“아…….”

이번에는 이명호 감독이 아닌 강희찬이었다. 돌아서서 더그아웃을 향하려던 강희찬이 걸음을 세웠다. 이명호 감독은 기민하게 그 기색을 알아차렸다.

“혹시, 저 오늘 몇 이닝 던지는지 여쭤봐도 괜찮습니까?”

“이미 물어보면서 뭘 ‘괜찮습니까’야?”

“…….”

“한 50구 보기로 했잖아. 그 정도면 4이닝 던지지 않겠냐? 왜? 줄여줘?”

“아니요.”

“그럼 왜 물어? 혹시 더 던지게? 그러지 말지.”

생전 그런 걸 묻지 않을 녀석의 뜬금없는 말에 이명호는 순간 덜컥했다. 혹시 뭔가 컨디션이 불편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요. 그냥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살피는 감독의 눈에도 강희찬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숨기거나 거짓을 말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명호는 그제야 안심했다.

“싱거운 새끼가…….”

역시 승리투수 요건은 갖추지 못한다. 강희찬은 당연한 사실을 이명호의 입을 통해 다시금 확신했다.

“…….”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긴 하다. 그래도……. 2군 시합이고, 컨디션을 확인하기 위한 등판이란 걸 알고 있지만. 그럴싸한 이름이라도 붙는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강희찬은 알고 있다. 거기에서 욕심이 멈추지 않을 것임을.

승리, 완봉, 노히트 노런. 그 모든 이름이 붙은 공을 강희찬은 이선의 손에 쥐여 주고 싶을 것이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하자.’

저의 자리는 찾았다. 오롯이 저만을 위한 자리는 바로 이선의 곁이었다. 이 자리만큼은 그 누가 오더라도 이제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만큼은 누군가의 대신으로 서게 된 자리가 아니다.

설령 존재만으로도 자신을 압도하는 푸른 빛의 에이스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저의 자리였다.

“야.”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바로 불펜으로 가려던 강희찬의 걸음을 이 감독은 다시 한번 세웠다.

“너, 뭐 좋은 일 있어? 왜 실실 웃어?”

툭 던지는 말에 강희찬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제 뺨을 쓸었다.

웃고 있었나? 뺨을 쓸어내리며 뒤늦게 표정을 굳혀보았지만, 이 감독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연애라도 하냐?”

느물거리는 얼굴의 이 감독이 물었다.

반은 농담으로 던진 소리였다. 아무리 개지랄을 떨었다고 해도, 오늘 등판하는 선발이었다. 그런 선수를 경기 전에 불러다 한소리를 했다는 게 내심 걸린 탓이었다.

투수란 예민한 종자였으니, 이게 원인이 되어 컨디션 난조를 보인다면 그의 1군 복귀에도 차질이 생길 터였다. 전화할 때마다 최 감독은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지만, 다소 처진 팀의 순위는 에이스의 부재를 증명하는 척도가 되었다.

‘없습니다. 안 웃었습니다.’

표정을 싸악 굳히고, 시큰둥하게 그런 말을 할 것을 상상했다. 강희찬 본인은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놀리는 맛이 제법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감독의 귀엔 전혀 다른 말이 스친다.

“네.”

“뭐?”

선선한 미소가 번져간다. 그럴 일은 없지만, 혹시라도 야구를 그만두게 된다면 배우의 길을 걸어보라 조언할 만한 미남의 얼굴이었다. 평소엔 시큰둥한 표정만 지어서 다소 아쉽기만 하던 그 얼굴에 번진 웃음을 본 순간, 이 감독은 몸이 굳었다.

‘…새끼, 왜 웃지?’

완벽한 미소를 본 사람답지 않은 생각이 피어올랐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보기만은 참 좋은 얼굴은 경기장 너머 저 먼 곳 어딘가를 향했다.

어디서 구해서 쓰는지 모를 것을 뒤집어쓴 학생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외야를 향해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의 얼굴엔 더더욱 확실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제, 누가 봐도 명백히 웃고 있는 남자는 뒤늦게 찾아온 봄에 쐐기를 박았다.

“합니다, 연애.”

첫걸음.

함께 발을 맞추기 시작한 연인들을 축하하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그리고,

“연애해요.”

쏟아지는 햇살을 꼭 닮은 해사한 미소는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한 남자의 것이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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