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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은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강희찬의 입국 모습을 라이브로 지켜보았다. 송재혁의 고생 덕에, 이선은 이렇게 짬을 이용해 학교에서 강희찬의 영상을 볼 수 있는 수혜를 누리고 있었다. 역시 인류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희생으로 자라났다.
“아…….”
화면 속, 저 멀리 뒤에서 작게 지나가는 한 인영이 이선의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볼 것도 없이, 강희찬임을 즉시 알 수 있었다.
―걸리적거리게……. 비켜요.
카메라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강희찬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있다. 지나가며 눈웃음이라도 건네는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참 특이한 행동거지긴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 번 보고 싶지 않을 험악한 시선이었지만, 이선은 일시 정지 버튼을 눌러 영상을 잠시 멈추었다.
“…….”
저번에 뜬금없이 집 앞에서 기다리던 때처럼, 그는 정장 차림이다.
전엔 반 정도 넘겼던 앞머리도 오늘은 평상시처럼 단정하게 내려온 채였다. 그땐 스리피스에 행커치프까지 있어서 더욱 각이 잡힌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검정에 가까운 짙은 회색 역시 허전함 없이 잘 어울렸다. 큰 키와 좋은 체격조건은 유니폼 이상으로 정장에도 잘 맞았다.
출국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는 열심히 짐을 날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희찬 개인의 짐이라기엔 양이 많았다.
‘역시 어리다고 일을 엄청 시키는구나.’
공항에서 커피를 쪽쪽 빨아대는 나이 든 선수들과 비교하면, 강희찬만 지나칠 정도로 바쁜 것 같다.
이선은 화면을 지나치는 선수들의 양손을 자세히 살폈다. 짐가방이며 짐을 담은 박스며 들고 있던 강희찬에 비해, 그들의 손엔 이상하고 커다란 지갑뿐이다.
재킷 앞 단추까지 풀고서 바삐 움직이는 강희찬의 작은 모습이 보일 때마다 이선은 알 수 없는 열이 차올랐다.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영상 화면에 잡히는 강희찬이 잘 웃지 않는 이유를. 송재혁이 얼씬대며 말을 붙일 때마다 험악해지는 이유도. 혼자서 일을 몰아서 하고 있는데, 거기에 귀찮게 말까지 붙이고 있다. 화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가 이 서울 어딘가에 발을 붙이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선은 속이 울렁거렸다. 좋아하는 카레를 반이나 남겼을 정도로.
그 순간이었다.
드득.
절찬리에 농땡이를 치고 있던 이선을 나무라기라도 하듯, 핸드폰의 진동이 책상을 위협적으로 울린 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놀람을 표현한 이선은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놀란 가슴을 쓸며 확인한 순간,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발신인은 방금까지 화면에서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열심히 찾던 인물이었다.
[정 선생. 오늘 차 가지고 출근했어요?]
해외에 있는 동안 연락이 없던 것은 아니다. 두 시간의 시차가 조금은 신경 쓰였지만, 이선은 그래도 그에게 연락했다. 당장 답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냥 시간이 날 때 답을 해주면 좋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연락하고 나면, 강희찬은 꼭 답을 주었다.
언제나 그의 문자는 이선의 심장을 덜컹거리게 했지만, 오늘은 그 진도가 남다르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한국에 있다. 출근을 어떻게 했는지 묻는 이유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신은 그렇게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서 다행이라고. 한참 수업 중에 문자를 봤다면, 분명 버벅대느라 아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올해도 3학년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요새 애들은 해가 갈수록 눈치가 비상해지는 추세니까.
이선은 숨을 크게 내쉬며 답을 보낼 말을 골랐다. 문자를 보내는 건데도 괜히 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니요. 오늘 걸어서 왔어요.]
‘사실은 아니었지만…….’
이선은 학교 밖 공영주차장에 세워둔 제 차의 존재를 애써 잊었다. 어차피 내일 하루 정도는 버스를 타고 출근해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데리러 갈게요. 끝나면 연락해요.]
짧은 문장에 심장이 지나칠 정도로 쿵쿵거린다. 버거운 감각을 느끼며 핸드폰을 괜히 꾸욱 쥐었다.
…다들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 만나며, 연애로 이어지는 걸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정말 대단했다. 이렇게 호흡 곤란이 유발되는데……. 어떻게 이런 것을 견디고들 산단 말인가.
대체 언제쯤이면 문자 하나에 가슴이 뛰는 현상이 멈출지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
하지만……. 버겁지만, 이건 자신이 기꺼이 가고 싶어 하는 길이다.
이선은 바라던 문자에 대한 답을 적었다.
[네.]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그 말을.
* * *
퍽 오랜만에 보는 커다란 차는 반짝거리는 위용을 자랑하며 학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잘 빠진 차가 참 주인을 닮았다고. 이선은 그의 차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검은 차를 보고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이선은 꿈같은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운전석이 열리려는 것을 보고 호다닥 뛰어갔다.
아직 학교 주변엔 학생들이 꽤 있다. 요새는 정규 수업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더 희귀했다. 그 아이들이 오며 가며 낯선 외제 차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그 차에서 강희찬이 내린다면, 아이들은 더더욱 놀랄 거고.
그가 내릴 틈을 주지 않고, 이선은 화드득 조수석에 올라탔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운전석을 쳐다봤다. 강희찬은 문을 열려던 자세 그대로 이선을 봤다. ‘대체 왜 이래?’라는 표정을 하고서.
…저런 얼굴로 바라보면, 상당히 머쓱해진다.
“오, 오셨어요?”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멍청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희찬도 크게 다른 생각은 아니었는지, 그런 이선을 빤히 들여다보다 천천히 고개가 움직였다.
“…네. 왔습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허무한 대화다. 밀폐된 공기는 더욱 어색해진다.
“네에…….”
“…….”
“…….”
“정 선생. 잘살고 있었어요? 별일은 없었고?”
점심시간에 봤던 영상 속 모습처럼 정장을 입었을까.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운전석에 앉은 그는 크림색 겨울용 후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저번에 봤던 회색 후드티와는 색깔만 다른 같은 옷이었다.
아무래도 남들 눈에 보기 좋은 옷은 입은 본인에게는 불편하겠지.
기대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저것도 강희찬에게는 더없이 잘 어울린다. 키가 큰 탓에 이선은 위압감을 느낀 적이 훨씬 많았지만, 사실 강희찬은 생김으로만 따지면 소년 같은 느낌이 꽤 남아 있었다.
더운 나라에서 한 달이 넘도록 있었는데도, 별로 탄 것 같지는 않다. 얼굴이 탔다면, 저 크림색의 후드 티셔츠가 이렇게 잘 어울릴 리도 없었을 테니까.
이선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분명 메신저로 대화할 때는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가 호주로 가기 전만큼, 아니 그보다 더 어색했다.
“네. 저야, 늘 똑같아서……. 희찬 씨는 어땠어요?”
“나도 매년 가는 외국이라서 별거 없었어요. 외국은 정 선생도 다녀왔잖아요. 혼자서 놀러.”
“그거는……!”
반박하려 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딘지 이런 것에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니 꼴이 우스웠다.
“…….”
이선은 조개처럼 입을 다문 채로 강희찬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사실, 그는 장난 반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돈도 못 받고 일하는데 월급 받고 놀러 가서 좋아요?] 그런 메시지를 심심치 않게 받았다.
처음엔 짓궂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훈련 기간에는 구단에서 월급이 나오지 않는단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 이선은 더더욱 그의 구단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숙식을 제공하는 기간이라지만, 그는 엄연히 육체노동을 하잖아. 대체 왜 월급을 주지 않는 거지? 그런 건 근로기준법 위반 아닌가?
혼란한 기분으로 그래도 되는 거냐고 물었더니, 원래 규정이 그렇단다. 공무원인 정이선은 ‘원래 그래’라는 말에 금방 수긍하는 편이지만, 그때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야구 경기가 없으니 월급을 받지 않는 거라는 추가적인 설명을 듣고서도 찜찜할 정도로 납득하진 못했다.
어쨌든 텍스트를 보며 떠올리기만 했던 그의 모습이다. 짧은 문장을 보기만 해도 그의 목소리가 들렸고, 마치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선은 이제 곧 목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로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침을 크게 삼켰다.
“아까 공항에 들어오는 영상 봤어요.”
“난 뭐 안 찍었는데요?”
미간을 살짝 구기고는 고개가 슬며시 기울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걸 보니, 공항에서 말을 거는 송재혁을 향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눈에 훤히 그려졌다.
이선은 카메라를 든 채 구박을 당하는 제 친구의 안쓰러운 모습을 애써 지우며, 어색하게 웃었다.
“짐 옮기는 거 보였어요.”
“그게 보입니까? 멀리 있었을 텐데요?”
“그냥… 보는 김에 보여서…….”
너무 스토커 같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선은 슬며시 강희찬의 눈을 피했다. 사뭇 놀랍다는 그의 반응이 민망한 탓이었다. 이러면 왠지, 그가 외국에 가 있는 내내 그의 영상이나 뒤져보면서 하루를 보낸 사람 같지 않은가. …물론, 아주 일부는 맞는 말이긴 했지마는.
“정 선생, 학교에서 일 안 하고 컴퓨터만 해요?”
“아니에요! 아까 점심시간에 애들 나간 사이에 잠깐 본 것뿐이에요.”
“알았어요. 그냥 장난한 거예요. 교육청에 안 꼬질러요.”
놀림을 받은 거구나. 뒤늦게 깨달은 이선은 그를 향해 비스듬히 돌리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거기에 더불어 고개까지 조수석 창을 향해 비틀었다.
“…또 나쁜 말 쓰시구…….”
토라졌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몸짓에, 강희찬은 아차 싶었다.
아무리 내내 메신저를 나누었다고 해도,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조금 억울하지 않은가? 자신은 훈련하다가 물을 마시는 모습까지 인터넷에 올라갔는데, 정작 저는 이선의 머리카락 하나 볼 수 없었다.
메신저 프로필은 비어 있었고, 영상통화나 셀카는 부끄럽단다. 여행을 간 동안에는 의미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음식 사진이나 보냈고, 개학하고 나서는 새 책상을 받았다며 사무용 책상 사진이 도착했다.
얼굴 좀 보여달라고.
아주 애걸복걸했고, 휴식일에 날을 잡아서 열 번이 넘게 영상통화를 걸고 나서야 겨우 귀한 용안을 한 번 뵐 수 있었으니 말 다 했다. 그마저도 아침에 일어난 직후라 머리가 뻗쳤다면서 끊으려고 하는 걸 겨우겨우 말렸고.
아무튼, 산삼보다도 귀한 얼굴이 드디어 눈앞에 실물로 있었다. 오랜만에 봤음에도 얼굴을 돌려버리다니. 제법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지만, 토라져서는 고개를 돌리는 모양새도 귀여웠기에 원망할 수는 없다.
대신, 강희찬은 다른 것으로 이선을 꼬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뒷좌석을 향해 팔을 뻗었다.
“신발 사 왔어요.”
대충 손에 잡히는 쇼핑백 하나를 이선에게 내밀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혼자 홱 토라졌던 이선의 얼굴이 다시금 강희찬을 향했다. 저에게 장난을 쳤다는 사실을 금방 잊은 것이 분명했다. 송 PD의 말을 듣자 하니 공부는 제법 했다던데……. 생각보다 단순한 성격인지, 아니면 오래 화를 내지 못하는 건지.
어쨌든 이선이 금방 화를 푸는 건 자신에게는 나쁠 것이 없었다.
“열어서 신어봐요. 사이즈는 말해준 대로 사 오기는 했는데, 혹시 안 맞으면 다른 것들 있으니까.”
“네?”
“뒤에.”
강희찬이 고갯짓으로 뒷좌석을 가리켰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며, 이선은 뒷좌석을 가득 채우는 쇼핑백의 향연을 보았다.
“이, 이거……. 다요?”
“네.”
“다른 가족들이나 친구들 부탁받으신 거 아니라요?”
“그랬으면 여기 올 때 안 들고 왔죠. 다 정 선생 거예요.”
얼마나 많은지 뒷좌석 시트에 사람이 앉을 공간이 없다. 신발을 저렇게 들고서 입국을 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업자라고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텐데.
“이게…….”
이선의 입술이 아연히 열렸다. 그의 얼굴엔 기쁘다기보다는, 난처한 기색이 올라왔다. 강희찬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어느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해서는, 이선은 다시금 강희찬을 바라보았다.
“하나면 돼요. 이렇게 많이 필요 없어요. 대체 몇 개예요.”
“뭐가 마음에 들지도 모르잖아요. 사이즈도 안 맞을 수 있고. 이거 많아 보여도, 신어서 불편한 거 빼면 얼마 안 남을걸요?”
공용으로 나오는 250 사이즈는 남자가 신어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지. 남성용으로 나온 250은 없는 건지. 통역을 사이에 끼고 쇼핑몰의 직원에게 수없이 물어가며 산 것들이었다. 맞지 않는 것이 대다수라면 강희찬보다도 그의 쇼핑을 도왔던 통역과 직원이 더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너무 많아요, 희찬 씨. 돈 많이 쓰셨죠?”
“…….”
“이거 다 얼마예요? 돈 드릴게요.”
이선이 허둥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당장이라도 계좌이체를 할 요량인지, 은행 앱을 작동시킨다. 학교 주변이라 와이파이가 빵빵한가. 앱은 잠시의 지체도 없이 로그인 화면을 띄웠다.
‘좋다고 달려와서 안기는 것까진 기대도 안 했지만…….’
그 모습을 보던 강희찬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 선생님.”
“아……! 이런 거 쇼핑 많이 하고 오면, 관세도 내야 하는 거죠? 얼마예요? 한번에는 못 하더라도, 제가…….”
“선아.”
“…네?”
뜬금없는 호칭에 이선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얼핏 봐도 거의 스무 켤레가 아닌가? 대략 나올 금액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찰나, 강희찬은 이선을 불렀다. 오롯이 올려다본 그의 얼굴엔 어딘가 화가 난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이선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선아. 한마디의 효과는 굉장했다. 하지만 후폭풍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
“아까, 방금 뭐라고…….”
잠든 사람을 향해 몇 번 불러본 적이 있었다. 엉덩이를 주무르면서 불렀기에, 떳떳이 말하진 못했지만. 생각해 보니 예전에 누군가 ‘선이’라고 부르냐며 물은 적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마치 처음 들어본 말처럼 깜짝 놀란다.
‘저런 반응을 보일 것까진 없지 않나.’
괜한 민망함을 숨기려 강희찬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입으로 내뱉지는 못하는 말들이다. 애초부터 부모님들이 부르던 애칭을 멋대로 도둑질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목에는 걸리는 것도 없었음에도, 강희찬은 괜한 헛기침을 했다.
“그냥 내가 사 주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돈 안 받아요.”
“그치만…….”
무언가를 항변하고 싶은 이선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낯선 호칭으로 불린 놀라움은 또 금세 까먹었나 보다.
용케도 선생님을 하고 있구나. 그 모습을 보자니, 강희찬은 무언가 대견함이 차올랐다. 어지간한 고학년 야구부들 사이에 있으면 위화감 없이 같은 학생으로 오해를 받겠지.
“운동화, 원래 여러 개 돌아가면서 신어야 오래 신을 수 있어요. 하나만 주야장천 신다가 신발 빨리 망가져요.”
“그래도 이건 너무 많아요.”
“뭐가 문제예요. 애새끼들처럼 발이 클 것도 아닌데, 있으면 언젠가는 신겠지.”
“…저 다신 희찬 씨한테 뭐 사 달라고 부탁 안 할 거예요. 재혁이한테 할래요.”
“왜요? 나한테 해야지. 장비 들고 다니는 사람을 왜 번거롭게 합니까?”
“희찬 씨도 짐 많았잖아요. 이거 어떻게 다 들고 오셨어요?”
“택배로 보냈어요.”
“…….”
이선의 입술은 대답 없이 꾸욱 다물렸다. 사람이 순하게 생겨서 잘 못 느끼지만, 아마도 저것은 나름대로 불만의 표현일 것이다.
강희찬은 가만히 손을 들었다.
안 본 사이에 살이 빠졌을까? 이선의 얼굴 가까이 제 손이 다가갈 때마다, 지나치게 저의 손이 크게 느껴졌다.
만져도 될까? 혹시나, 망가지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을 담아, 강희찬은 조심히 이선의 뺨에 손을 닿게 했다. 손바닥 아래의 여린 뺨이 순간 움칫거렸다. 하지만 단단히 토라졌음을 보여주고 싶은지, 이선은 의연함을 애써 가장했다.
“돈 안 받고, 오늘 정 선생한테 밥 얻어먹고 갈 거예요. 집에도 내가 데려다줄 거고. 그걸로 신발값 퉁쳐요.”
“말도 안 돼요.”
“뭐가 말이 안 돼요.”
강희찬은 말랑한 뺨을 엄지로 살살 쓸었다. 이선은 움칫거리면서도 슬며시 강희찬의 손길에 얼굴을 더 붙였다.
“그럼… 비싼 거 사드릴게요.”
여전히 난감한 얼굴이었지만, 이선은 조용히 선언했다. 아무래도 저래야 마음이 편한 걸지도 모르지.
피식 웃으며,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손길을 거두었다. 그리고 강희찬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그것이 어딘지 모르게 저와 이선을 닮아 있었다.
강희찬은 흘끔 눈을 돌려 조수석을 바라봤다. 제가 넘긴 신발 상자를 품에 안은 이선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발 엄청 많아졌어요. 5년은 신발 안 사도 될 것 같아요.”
“안 맞는 거 있을 수 있다니까. 브랜드마다 사이즈 달라서, 점원한테 물어보면서 사긴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애매한 건 두 개씩 사서 그래요. 거기선 정 선생 사이즈는 여자용으로 많이 나오더라고요.”
저걸 사는 것도 엄청난 품이고, 여기까지 들고 온 것도 용하다.
‘다시는 뭐 사다 달라는 부탁은 하지 말아야지.’
이선은 강희찬이 절대 달가워하지 않을 다짐을 했다. 그와 동시에, 이렇게 자신을 놀라게 만든 그를 저 역시 놀라게 하고 싶다는 심술이 올라왔다.
이선은 언젠가 얼핏 들었던 말을 생각하며 운을 떼었다.
“…신발 같은 거 선물하면 도망간대요.”
있는 대로 자신을 당황스럽게 만들면서도 태연하기만 한 강희찬이 얄미워진 탓이었다. 그래서 이선은 괜한 심술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누가 그래요?”
운전하느라 정면을 향하고 있는 강희찬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선은 그것을 보면서도 애써 보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저 역시 믿지 않는 미신을 그가 믿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술은 멋대로 움직였다.
“재혁이가요. 애인 같은 사람한테 신발 선물하면 도망간대요. 그래서 선물로 주는 거 아니라고…….”
강희찬과의 사이를 어렴풋이 말한 이후로, 송재혁은 가끔 뜬금없는 문자를 보냈다.
[애인한테 신발 선물하면 도망간대.]
그중 하나였다. 당시에야 ‘애인 아니야’라는 말로 답장을 보냈지만, 지금의 이선은 그 말을 빌려 강희찬에게 장난을 걸고 있었다.
‘정 선생은 그런 걸 진심으로 믿습니까?’ 혹은 ‘정 선생이 내 애인은 아니잖아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며 말할 줄 알았는데. 이선의 예상을 엎고, 그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내놔요.”
운동선수, 특히 투수를 하기에 최적화된 길이의 팔이 위협적으로 이선의 앞으로 다가왔다. 운전하느라 시선은 앞을 두고 있었지만, 이선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목표는 제 품에 있는 신발 상자를 빼앗아가는 것이었다.
이선은 양팔로 상자를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아, 안 돼요! 제 거예요! 주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다시 내놔요. 안 줄 거니까.”
“시, 싫어요. 그리고 희찬 씨는 가져가 봤자 신지도 못해요.”
이선은 운전석 아래의 발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큰 신장에 어울리는 발은 단정한 흰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저의 발을 내려다보는 이선의 시선을 느낀 강희찬은 여전히 꼬인 심사를 여지없이 발휘했다.
“엄지발가락 접어서라도 내가 신을 거니까, 내놔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신호에 걸린 사이, 그는 본격적으로 이선의 신발을 뺏으려 들었다. 그가 진심으로 힘을 쓴다면, 자신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의 팔 하나에 이선은 아나콘다와 싸우는 인디아나 존스가 되지 않았는가.
결국, 이선은 다소 비겁한 술수를 써야만 했다.
“희찬 씨, 신호, 신호!”
이선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앞차를 가리켰다. 저거 보라고. 숨까지 헐떡이며 다급히 말하자, 강희찬은 정면을 볼 수밖에 없다. 이선의 말대로 신호가 바뀌었고,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학교 근처라 뒤차는 아직 경적을 울리진 않았지만, 한국인의 인내심은 언제 끊겨도 이상할 건 아니었다.
결국, 강희찬은 손을 멈추었다. 아나콘다를 잠재운 이선은 홀로 승리를 향해가는 순간을 만끽했다.
“…….”
“여기 스쿨존이라 운전 조심하셔야 해요.”
무적의 방패다. 제아무리 제멋대로인 남자라도 아이들의 생명 앞에서는 멈칫하는 모양이었다.
신발 상자에서 떨어지는 그의 손을 보며, 이선은 속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다소 비겁한 승부였어도, 어쨌든 이긴 건 이긴 거였다.
“…식당 도착하면 봅시다.”
“…….”
훗날을 도모하는 악당 같은 대사다. 이선은 내심 우쭐했다.
‘어차피 안 그럴 거면서 말만.’
강희찬의 귀에 거슬릴 만한 말을 삼키며, 이선은 물러나는 그의 굳센 팔을 보았다.
가뜩이나 근육이 덮인 팔인데, 왠지 더 커진 것 같기도 하고…….
다소 험악한 언행과는 달리 부드럽게 달리는 차 안에서, 이선은 그의 팔을 멀거니 보았다. 그러고 보니 헐렁한 후드 티셔츠 아래로도 근육의 팽창이 느껴졌다.
이것이 오랜만에 운동선수를 목전에 둔 까닭인지, 아니면 그의 몸이 정말 더 커진 것인지. 이선은 정말 궁금했다. 그리고 이선의 호기심은 이상하게도 강희찬의 앞에서는 참을성을 누를 만큼 강해지곤 했다.
“희찬 씨, 키 컸어요?”
“…앉아 있는데 어떻게 알아요?”
“아니, 그냥… 좀 커진 것 같아서요.”
“키가 아니라 살이 찐 거겠죠.”
창밖을 살피며 적당한 식당을 찾는 시선과 닮은 무심한 말을 툭 뱉는다.
“아아…….”
저걸 살이 쪘다고 표현하는 건가? 아무리 봐도 몸에 ‘살’의 느낌이라고는 없었다. 차라리 ‘근육이 쪘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뭐하러 고생스럽게 외국까지 가서 운동을 하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가뜩이나 한국 사회에서는 위화감을 조성할 체구다. 거기서 더 커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이선은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본인은 그 어떤 감흥도 없이 ‘살이 찐 거다’라고 얘기나 하고.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이 절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운동 많이 하셨어요?”
“네, 뭐. 운동하려고 말 안 통하는 외국 나갔으니까요. 왜요?”
“아, 아니요.”
차마 그의 몸을 의식하고 있다고. 언젠가 느껴봤던 강희찬의 맨살이 주던 온기에 버거운 무게가 더해질 것을 상상했다고. 그런 말을 솔직히 할 수는 없다.
얼버무리는 이선의 행동을 강희찬은 달리 오해한 모양이었다.
“살쪄서 이상해요? 근데 이거 시즌 시작하고 봄 좀 지나면 금방 빠지긴 해요. 지금 벌크업 시켜놓으라고 해서 그런 거고. 난 5월 말만 돼도 빠지는 편이니까…….”
“아니, 이상한 거 아니에요. 몸이 멋있으셔서 그런 거예요. 이상하지 않아요.”
마지막엔 거의 혼잣말처럼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강희찬을 꼼꼼하게 눈에 담던 시선이 어느새 조수석 창문을 향해 돌려졌다. 마치 고치를 만들고 그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 같다.
강희찬은 고개를 슬며시 앞으로 숙이며 이선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그것을 눈치챈 이선은 더더욱 고개를 불편할 정도로 돌렸다.
“외국에 있을 때도 손에 꼽을 만큼 보여주던 얼굴인데, 한국에서도 못 봐요? 고개 안 아파요? 이제 이쪽으로 좀 돌려요.”
아직까진 서로가 서로의 옆자리가 어색했다. 곁에 있는 이가 지나치게 의식되어 가끔은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어떤 표정으로 웃었는지도 헷갈렸다.
하지만 분명 익숙해질 터였다.
“…….”
저를 향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오는 얼굴이, 거기에 어린 조금은 미안한 기색이 깜짝 놀랄 정도로 사랑스럽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언젠가 익숙해질 것이 분명하고, 그래야 했다.
“…….”
커다란 손이 그보다는 작은 손을 향해 끌려가듯 움직였다. 하지만 조수석을 넘어가려는 순간 멈추고 만다.
삐걱거리는 첫걸음마 중인 두 사람을 앞 유리로 쏟아지는 저녁의 태양이 응원했다. 두 사람의 붉은 얼굴을 감추어주며.
* * *
강희찬은 지금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시범경기 일정을 소화 중이다.
‘…아무리 야구가 보고 싶다고 말이지.’
컵스의 첫 시범경기 중계 영상 속의 장면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했다. 날짜상으로는 초봄이지만, 그래도 거의 겨울이나 다름없었다.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는 그라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던 강희찬이 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입김을 불었다. 덕분에 무슨 용도인지 잘 모르겠는 하얀 가루가 입술에 묻어서 찌푸리는 얼굴까지. 포털의 중계 창으로 빠짐없이 지켜보던 이선은 점점 불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겨우 한국으로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대체 왜 사람을 쉴 시간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내돌리지 못해서 안달인지. 성냥팔이 소녀도 아니고. 대체 손을 호호 불면서까지 밖에서 운동을 시키는 이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점수로만 그의 팀 경기를 확인하고, 이번 주 마지막 교무회의를 마쳤다. 오늘은 어지간하면 다들 일찍 가자는 교장 선생님의 기분 좋은 말에, 이선은 4시 30분이 되기도 전에 학교를 나설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발견한 것이다. 학교 정문 밖. 주차 단속 카메라가 찍지 않을 묘한 사각지대에 세워진 검정 세단을.
강희찬이 호주에서 사다 준 것 중 하나인 흰 운동화를 신은 발이 급한 걸음을 시작했다. 발길은 차를 향해 망설임 없이 이어진다.
번호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강희찬의 차가 맞는 모양이었다. 이선이 가까워지자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선은 탑승을 허락하는 기분 좋은 소리에 힘이 난 손길로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벌써 오셨어요? 오늘 지방에서 경기한다고 기사에서 봤는데…….”
강희찬은 이제 제법 자연스레 조수석에 오르는 이선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옅은 미소가 얼굴에 번지는 것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대전이잖아요. 경기 일찍 끝난 거 생각하고도 좀 늦게 올라왔어요. 중간에 버스 기름 떨어졌다고 주유소 들러서.”
“아…….”
깜빡해서 주유를 미리 하지 못한 탓에 버스 기사는 퍽 미안한 얼굴을 했다. 투수들은 옆을 쌩 지나가는 1호 차를 창문에 매달려서 부러운 눈으로 봤다.
선수들의 앓는 소리를 듣는 기사는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동승했던 이강혁 코치가 뛰어가서 호두과자를 잔뜩 사 왔다. 호두과자를 한 봉지씩 손에 쥐고서야 녀석들은 잠잠해졌다.
물론, 강희찬의 호두과자는 ‘형, 이거 안 좋아하죠?’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며 뻗어오는 이승주의 손으로 넘어갔지만.
어쨌든 아름답지 못한 광경을 잔뜩 편집했다. 다행히 이선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오늘 칼국수 사준다고 했잖아요. 귀국한 날 내가 계산했다고 징징대면서. 정 선생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얻어먹으러 와야지.”
“저는 항상 계산하려고 했어요. 자꾸 강희찬 씨가 못 하게 하는 거면서…….”
“알았어요. 올 때 보니까, 간판 팥죽색인 집 하나 있던데, 거기 맞아요?”
“아,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기다릴 때 여기 차로 한 번 돌아봤어요. 동네 어떻게 생겼나.”
강희찬의 말을 가만히 듣던 이선은 무언가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약간은 멍해 보이는 표정과 어울리는 느릿한 말투가 조심히 흘렀다.
“희찬 씨, 되게 똑똑하신 것 같아요. 길도 잘 찾으시고.”
강희찬은 슬며시 곁눈으로 이선을 봤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운동선수에게는 연이 없는 소리나 태연히 한 이는 어느새 기대감에 눈을 별처럼 반짝였다. 방학 내내 지겹게 먹었을 칼국수가 그렇게 기대가 되는 모양이었다.
“…네?”
결국, 강희찬은 멍청히 되물었다. 무슨 뜻이냐고. 하지만 눈을 마주해 온 이선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왜요, 희찬 씨?”
올려다보는 표정만으로도 목소리가 전해진다.
가끔 이선은 저를 물 먹이는 건가 싶은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다른 새끼들이 했다면 바로 갈궜겠지만, 상대는 정이선이었다. 악의를 가지고 남을 조롱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라나는 미래의 새싹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왜, 예전엔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지. 그런 이선의 말이니, 당연히 옳을 것이다. 정 선생이 하는 말은 다 맞다. 이 얼굴 앞에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무조건적인 수긍뿐이다.
“…그래요.”
어쩐지 이선의 앞에선 반편이가 되는 기분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반편이가 되더라도 단 한 사람의 눈에만 잘 보이면 그만일 테니.
* * *
“…….”
만두 정도는 곁들여 먹는 용으로 시킬 것은 예상했지만…….
이선은 족히 여섯은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 접시들을 보며 조용히 놀랐다. 칼국수는 물론, 만두에 수육에 굴이 잔뜩 들어간 부추전까지. 이 가게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모두 있었다.
TV 프로그램에서나 이렇게 시켜서 먹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니.
하지만 제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이선은 놀라지 말자고 끊임없이 되새겼다.
가뜩이나 열량이 많이 필요한 운동선수다. 게다가 오늘은 지방에서 시합까지 하고 왔다. 물론 중계에 나온 강희찬은 나무의자에 앉아서 손톱을 정리하는 게 전부였지만.
이제 이선은 안다. 꼭 경기에 나가지 않더라도 선수들은 매일매일 경기 전에 훈련하고 있다는 것을. 강희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선은 조금 화가 난 채였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속이 상했다는 게 더 정확했다.
가게에 도착하기 전, 배가 고프다는 강희찬의 말에 이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점심을 먹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하며.
‘먹긴 먹었는데……. 김밥 두 줄 먹었어요.’
‘네?! 왜, 왜 그런 거 줘요? 그 야구장엔 식당이 없어요?’
‘아니, 있어요. 근데 거긴 홈팀 선수들 밥 먹는 데라서, 우리는 못 먹죠.’
‘…….’
먹는 거로 사람을 차별하는 게 제일 나쁘다.
다 같이 운동하는 선수들인데……. 누구는 식당에서 따뜻한 밥을 먹는데, 왜 강희찬은 김밥이나 먹으면서 운동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두 줄이라니……. 두 줄은 자신도 중간에 질리지만 않으면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눈이 시큰해지는 탓에 이선은 강희찬을 보던 고개를 돌렸다. 코끝이 찡해지고, 창밖의 광경을 담는 시야가 미세하게 흐려졌다. 점심으로 나온 감자탕을 나 혼자만 너무 열심히 먹은 것 같아서. 이선은 너무 미안해졌다.
‘…가면 희찬 씨 드시고 싶으신 거 다 시켜요.’
이선은 고개를 돌린 채로 단호히 중얼거렸다. 심정으로는 제2금융권 대출을 받아서라도 강희찬에게 만한전석을 대령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강희찬은 이선의 진심은 몰라주고, 그저 재밌다는 기색을 보였다.
‘부자 됐어요? 로또 당첨됐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 이번 달 말에 성과급도 나와요.’
‘선생님들도 그런 거 받습니까? 우승 보너스 비슷한 거죠?’
‘네. 그래도 희찬 씨 받는 만큼 큰 건 아닌데……. 오늘은 드시고 싶은 거 다 사줄게요.’
‘내가 얼마나 먹을 줄 알고 그런 말을 해요?’
강희찬이 서울 토박이라서 그런가. 저렇게 뭘 모른다는 투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선은 괜히 자신이 갓 상경한 시골 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연봉부터가 억 소리가 나고, 보너스도 그와 비슷한 단위로 받는 사람이니 제가 받을 상여금은 ‘고작해야’ 몇백인 수준이겠지. 게다가 아직 입금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이선은 자랑스럽게 핸드폰 뒷부분에 꽂아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저, 카드 한도 생각보다 높아요.’
‘허…….’
그가 무어라 대꾸를 하려는 순간, 차는 칼국수 가게에 도착했다.
사실, 지방에서 고생하고 온 사람이다. 더 비싼 것을 사주고 싶었지만, 강희찬은 굳이 이 가게로 들어왔다. 방학 동안 이선이 먹었던 맛이 궁금하다면서. 그냥 평범한 칼국수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강희찬은 벽에 걸린 메뉴판을 훑더니 주인아주머니가 함박웃음을 지을 법한 구성으로 주문을 마쳤다.
수라상처럼 한꺼번에 나온 메뉴를 보고 입을 벌리는 이선과는 달리, 강희찬은 놀라운 기세로 칼국수의 바지락조개 껍데기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이선은 아차 했다.
“아, 희찬 씨……! 해산물 안 드신다고 하셨잖아요.”
자리에서 튕길 기세로 화들짝 놀란 이선이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바지락에 집중했다. 면을 먹을 때, 조금의 귀찮음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의 굳은 다짐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직 시즌 시작 안 했잖아요.”
“아…….”
…그런 건가?
자신의 상여금 입금 시기와 비슷할 때 개막하는 것 같은데……. 며칠 남지 않았지만, 강희찬에게는 꽤나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왠지 저에게는 ‘12시가 넘었으니, 새로운 날짜에 먹는 거야’라며 야식을 먹는 송재혁과 비슷한 그림이었지만.
그럭저럭 납득하며, 이선은 자신의 쪽에 조금 더 가까이 있던 굴 부추전을 그의 앞으로 슬며시 밀었다.
“그럼 많이 드세요.”
“정 선생이나 많이 먹어요. 잘라줄 테니까.”
그러고는 그는 젓가락을 한 짝씩 잡더니, 능숙하게 부추전을 잘라냈다. 가위 없이 전을 자르는 모습이 어머니가 해주시던 때와 똑같아서 이선은 또 한 번 놀랐다.
저런 건 고수들만 쓸 수 있는 스킬인 줄 알았는데…….
“먹어봐요. 좀 크면 더 잘라줄 테니까.”
순식간에 조각이 난 전을 바라보던 이선은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미 충분히 먹기 좋을 크기였고, 또 조금 크더라도 음식물이 목에 걸릴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아니, 사실은 자주 이런 식으로 걱정을 보일 때마다 이선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아기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까 싶다가도, 그러면 걱정을 해주지 않을까 또 고민이었다. 결국 간지러운 손바닥을 쥐었다가 펴거나, 바지에 슥슥 문지르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강희찬은 이선이 좌식 테이블 아래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바지락과 함께 칼국수를 가득 담은 앞접시를 한참이나 후후 불더니 이선의 앞에 두었다.
“식히긴 했는데, 그래도 조심하면서 먹어요.”
“…저 아기 아니에요.”
이선은 볼멘소리를 했다.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요? 뜨거운 거 식혀주는 거잖아요.”
“저도 할 수 있는데 자꾸 그러시니까…….”
“저번에 김이 펄펄 나는 닭 다리 씹었다가 뱉어낸 건 다른 사람이었습니까.”
“…….”
씹진 않았다고. 입술에 아주아주 조금 닿았다가 떨어트린 것뿐인데…….
역시 강희찬은 자신을 입에 넣었던 것을 뱉어낸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큰 오해였다. 이 기회에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입술을 벌린 찰나였다. 강희찬이 입바람을 불며 식힌 부추전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아……!”
“진짜 아기처럼 먹여줘요?”
협박성이 짙은 그의 말에, 이선은 황급히 젓가락을 집었다. 입식 테이블이 있는 홀과는 분리된 방 안이었지만, 미닫이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다신 이곳에 오지 못한다.
이선은 일부러 입에 아직 남은 전을 삼키기도 전에, 새로운 조각을 들었다.
“먹을 때 진짜 산만하네. 나랑 먹을 때만 자꾸 딴짓하는 거예요, 아님. 평소에도 이래요?
“집에서는 가끔……. 다른 사람들이랑 먹을 때는 잘 안 그래요.”
“어릴 때 안 혼났어요? 아니면, 귀여워서 그냥 오냐오냐 컸습니까.”
이선은 그의 말에 화를 내야 할지, 창피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사람을 퍽 당황스럽게 하는 화법은 여전히 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런 주제에 정작 말을 뱉은 본인만은 태연하다는 게 언제나 불공평했다.
하지만 앞으로 익숙해져야겠지. 이선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저 어머니 일 가셔서 거의 밥 혼자 먹어 버릇해서 그래요.”
저녁 장사를 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저녁에 일을 나가시는 건 아니었다. 오후 시간대에 가게에 나가 밑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선이 고학년이 되면서는 빈집의 문을 직접 열던 날이 훨씬 많았다.
어떤 날은 카레였고, 또 어떤 날은 꼬마 돈가스를 튀겨주셨다. 매일같이 냉장고에 있는 찬을 꺼내서 먹으라는 쪽지가 남겨 있었지만, 이선은 그냥 가스레인지 위에 있던 음식만을 먹었다. 귀찮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손도 대지 않은 냉장고 속 반찬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선이 편식했어?’
‘으응……. 편식한 거 아니에요.’
거실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던 이선이 얼핏 깨면, 어머니는 장난스럽게 말을 걸곤 했다. 자라고 있는 아들의 식사를 직접 챙기지 못하는 미안함은 숨기지 못한 채.
아직도 휴일에 집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 지나칠 정도로 천천히 먹거나 중간에 딴짓을 했다. 책을 보기도 하고, 요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강희찬의 영상을 찾아서 볼 때도 많았다.
어쨌든 밖에서는 절대 하지 못할 습관이나 반찬이 많이 나오는 상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멍해지는 버릇 등. 그런 것들의 원인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정 선생 운동부 했으면 밥 다 뺏겼을걸요?”
“설마요.”
이선은 가만히 웃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강희찬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설마가 뭐예요. 저번에 애새끼들 고기 먹는 거 못 봤습니까? 익기도 전에 입으로 가져가던 거.”
핏물이 맺혀 있는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으려고 하기에, 질겁하며 직접 구워주었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에 이선은 할 말이 없어진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강희찬이 제대로 식사를 하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먹는 수밖에 없다. 이선은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젓가락을 들고 칼국수 면을 건져 먹었다. 강희찬의 시선은 그것을 집요하게 훑었다.
“…….”
주인장이 직접 면을 뽑았는지 불규칙한 굵기의 면발들이 입술을 지난다. 입이 작은 탓인지 몇 가닥도 안 되는 면인데도 다소 버거워 보인다. 그 모습을 한참 보던 강희찬은 그제야 면을 집어서 먹었다.
“아…….”
오물거리며 입 안에 있던 면을 씹던 이선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멍하니 입술을 열었다. 대답이 여의치 않은 강희찬은 눈길을 주는 것으로 물음을 대신했다.
“저… 희찬 씨, 캠프 다녀오면은 하실 말씀 있다고… 압!”
이선의 말이 이어지던 순간이었다. 두툼한 굴이 그대로 느껴지는 전이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온 것은.
“…….”
깜짝 놀란 이선은 씹지도 못한 채 눈을 둥그렇게 떴다. 범인은 그저 태연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하고만 있었다.
“부지런히 먹어야지 뭐 해요?”
“…아이…….”
“아니긴 뭐가요. 심심하면 먹기나 해요.”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이선은 부당한 탓을 하는 그를 멍하니 보기만 했다. 마치 본심을 숨기려고 일부러 툴툴거리는 것만 같았다.
‘호주에 다녀오면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건 분명 자기면서…….’
한마디 따지기 위해서라도 입 안을 점령하고 있는 방해물을 제거해야 했다. 오물오물.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부지런히 입을 움직이며, 겨우 전을 삼키던 찰나였다.
“…이거. 받아요.”
몸을 기울며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 강희찬이 그것을 그대로 이선의 옆으로 밀어두었다. 왜 하려던 말을 막느냐는 불만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였다.
이선은 멀건 눈으로 제 칼국수 그릇 옆의 봉투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무광 봉투에 야구단의 마크가 인쇄되어 있었다.
언젠가 봤던 거다. 자신은 강희찬으로부터 이와 비슷한 물건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거…….”
강희찬은 표정 없이 제 앞의 음식으로 시선을 내렸다.
봉투를 열자 그때와 마찬가지로 티켓 한 장이 나왔다. Invitation. 자꾸만 시선을 붙잡는 단어와 강희찬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코시 때 뺐던 자리랑 같은 데예요. 주말 개막전이라 코시만큼은 아니더라도 암표 비싸니까 그냥 그걸로 들어와요.”
여전히 강희찬은 제 시선을 피하며, 젓가락으로 칼국수 그릇을 젓고 있었다.
“시합… 나가세요?”
“네.”
“저, 꼭 갈게… 아……!”
토요일 14시. 이선은 순간적으로 말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강희찬의 눈길 역시 사납게 이선을 향해 올라왔다.
“왜요. 뭐요.”
눈빛만큼이나 사나운 말투다. 잘못 걸리면 조지겠다는 기세였다. 알리바이를 확인하는 형사 앞에 발가벗겨진 용의자가 된 것만 같아, 이선은 움찔했다.
“아… 이날, 방과 후 수업 봐주기로 해서…….”
“아니, 씨… 방과 후 수업하는 선생들 다 따로 있다면서요. 공무원이 왜 주말에 출근해요?"
…‘씨발’이었을 거야. 분명 씨발이라고 하려고 했어.
중간에 겨우 멈추기는 했지만, 이선은 그가 뱉으려던 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평소였다면 ‘희찬 씨, 또 나쁜 말 썼어요’라고 한마디 보태기라도 했겠지만, 지금의 정이선은 죄인이었다. 죄인은 입이 없다. 없어야 했다.
그래도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중간에 멈춰주었으니까.
그런 면죄부를 부과하며, 이선은 강희찬의 험악한 언행을 눈감아주었다.
“그, 그렇긴 한데… 플로어 볼 선생님이 이번에 부친상을 당하셔서요. 고향이 대구라서, 이번 주말에만 제가 대신하기로 약속한 거라서요…….”
“그거, 그거죠? 짝퉁 아이스하키.”
역시 운동선수라서 그런가. 이쪽으로는 박식하다. 하지만 이선은 기특함을 애써 누르며, 제법 엄한 선생님의 얼굴을 했다.
“희찬 씨,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희찬 씨도 야구보고 짝퉁 크리켓이라고 하면 기분 나쁘시잖아요.”
그가 없는 사이, 이선은 야구에 대해 많은 지식을 얻었다. 지식백과를 보니, ‘야구’는 영국의 크리켓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있단다. 그래서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검색을 해봤다. 그랬더니 나온 경기 영상은 나무배트로 공을 친다는 것 말고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이제야 포지션 넘버와 선수의 백넘버가 다른 것임을 겨우 깨달았지만, 뭐든 기초가 중요하다. 기초과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말해도 모자라지 않다잖은가.
하루하루 이선에겐 경기를 볼 땐 하등 쓸모없는 잡지식만 늘고 있었다.
“크… 그게 뭔데요?”
“…….”
순간 때 묻지 않은 소년 같은 얼굴로 되묻는 강희찬의 말에 이선의 머리 역시 새하얗게 물들었다. 둘의 머리 뚜껑을 열어서 안을 본다면, 지금만큼은 퍽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이선은 가만히 생각했다.
…그렇지. 희찬 씨는 운동선수지 만물박사가 아니다. 한국에선 대중성도 없는 스포츠를 그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선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3시 전에는 끝나니까, 끝나고 갈 수 있어요! 아마 처음부터는 못 보겠지만…….”
이선의 어깨가 미묘하게 축 늘어졌다. 장례를 치를 동료 선생님의 대타를 승낙해 준 것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 순간만큼은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날짜가 딱 겹칠 것이 무어란 말인가. 뒤늦게 후회해도, 이제 와서 약속을 미룰 수도 없었다.
그저, 강희찬의 일정을 미리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는 수밖에.
“희찬 씨는 언제 나오세요? 혹시 처음에 나오시면…….”
…그러면 좀 곤란한데…….
전에 봤던 그의 선배 투수와 순번을 바꿀 수는 없나? 작년에 중계로 보니, 우승하는 순간 선수들이 몰려가 그 투수에게 헹가래를 쳤다. 많은 이들에겐 감동이었을 순간을 이선은 뾰족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구단은 강희찬을 너무도 푸대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정에 대한 걱정이 그의 구단에 대한 불만으로 서서히 번지고 있던 찰나였다.
“기다릴게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이어지던 이선의 말을 낮은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중간에 말을 끊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선을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이선은 차마 들지 못하던 고개를 겨우 들었다. 방금까지 자신이 무슨 말만 해도 툴툴거리던 소년 같은 남자는 없었다. 대신, 무표정하지만 그리 차가워 보이지는 않는 단단한 사내가 있었다.
“기다릴게요, 올 때까지.”
“…….”
옅은 쌍꺼풀이 진 눈이 천천히 내려왔다 올라온다. 이선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부드럽게. 하지만 확실한 쐐기가 다시 한번 저를 꼼짝도 못 하게 박혔다.
“정 선생 올 때까지 던질 테니까…….”
“…….”
결정구.
강희찬의 영상을 보다 보면, 심심치 않게 들리던 말이었다. 아직 야구가 어려운 이선에게는, 어렴풋이 느낌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단어이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결정구의 의미를.
“오기만 해요.”
이선은 마치 삼진으로 돌아서는 타자가 된 것처럼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꼭 갈게요.”
묵직한 결정구는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어떻게 식사를 마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다리겠다는 강희찬의 한마디가 자꾸 머리에서 웅웅거렸고, 그 여파인지 속도 울렁였다. 자꾸만 저의 앞으로 음식 그릇을 끌어다 놓는 강희찬을 향해 몇 번이나 배가 부르다는 말을 했지만, 그는 의미 있게 들어주는 편은 아니었다.
멍한 정신 속에서도 이선은 강희찬이 내밀었던 티켓을 꼼꼼히 챙겼다. 구겨지지 않도록 소중히 봉투에 넣고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강희찬은 흘긋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선은 강희찬이 먼저 나가 카운터에서 계산을 해버릴까 봐 재빨리 신발을 신고 그를 앞질렀다.
평소에 쓰던 카드였는지, 아니면 신규진에게서 돌려받은 보라색 카드였는지. 무엇을 내밀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이선은 어느새 강희찬의 차를 타고 있었다.
“그건 좀 집어넣지, 계속 쥐고 있을래요?”
학교 인근임을 감안해 서행하던 강희찬이 툭 뱉었다. 이선은 흠칫하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강희찬은 어느새 정면을 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봤지?’
사람의 시야각이 생각보다 넓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선은 조심히 가방에 티켓을 넣었다.
“구겨질까 봐…….”
“구겨져도 다 들여보내 줘요. 정 선생은 암표로만 들어와서 모르는 모양인데.”
“…그거 암표 아니에요. 왜 자꾸 암표라고 하세요.”
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 다소 높은 가격으로 중고 티켓을 구매했던 것을 아직도 얘기하고 있었다.
암표라니. 이름부터가 너무 검지 않은가. 마치 공무원 신분으로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만 같아서, 이선은 강희찬의 입에서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뜨끔거렸다.
“암표를 암표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요? 그거 알아요? 나 캠프 동안 암표 근절 캠페인 영상 찍은 거.”
“네?”
대체 언제까지 기억할 셈인지. 속으로 한숨을 삼키던 이선은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홱 돌렸다. 여전히 정면 유리창을 향하고 있었지만, 강희찬의 얼굴엔 재밌다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누구 때문에 나온 아이디어겠어요? 그거 아마 시즌 중에 전광판에 나올걸요?”
“재혁이가… 만들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강희찬에게 놀림을 받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동영상 콘텐츠감 신세가 되었다.
이선의 얼굴에 아연함이 번졌다. 강희찬은 그런 이선을 바라보기만 했다. 낮은 웃음을 흘리는 건 덤이었다.
“네. 팀장님한테 한소리 들은 것 같던데? 왜 친구 티켓 안 챙겨줘서 암표로 들어오게 하냐고.”
“어후…….”
인천에서 강희찬을 만났던 때. 그의 옆에서 대화에 끼어들며, ‘요새 암표는 얼마나 하냐’고 물었던 남자의 둥근 얼굴이 떠올랐다. 학생주임 선생님처럼 강희찬을 잡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그는 송재혁의 상사가 되는 사람이었다.
‘강희찬한테 공 맞아서 병원 실려 간 그 선생’에서 ‘야구단에 지인이 두 명이나 있는데도 암표를 사서 경기를 보러 오는 그 선생님’이 되어버린 이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거 했어요. ‘암표, 사지도 팔지도 맙시다’ 그거. 주먹도 쥐고.”
“…….”
“내가 원래 돈 안 주면 카메라 앞에서 안 웃거든요. 그런 쪽팔린 영상도 찍었으니까, 앞으로 이상한 표 사서 들어오지 마요. 보고 싶은 경기 있으면, 내가 챙겨줄 테니까.”
티켓을 집어넣으라는 강희찬의 말을 들은 것은 정답이었다. 만일, 지금 손 안에 티켓이 있었다면 분명 잔뜩 구겨졌을 테니까.
이선은 티켓을 대신하여, 간단한 소지품들이 들어간 백팩을 꾹 쥐었다. 자꾸 간질거려서 몸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저의 처지를 그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얼굴로 몰리는 것만 같은 열을 그가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며, 조수석 창문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제법 튀는 색의 간판이 이선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
“왜요?”
강희찬은 슬쩍 고개를 틀어 조수석을 봤다. 고작해야 직장 주변일 텐데, 뭐가 저리 신기해서 뒤통수만 보여주고 있는지. 슬금슬금 피어나는 불만을 누르며, 제법 다정한 남자의 목소리를 내었다.
효과가 있는 모양인지, 이선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고개를 돌리며 눈을 반짝였다.
“희찬 씨,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가는 손가락이 창밖을 가리킨다. 따라간 시선의 끝엔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있었다.
이선의 학교에 가는 것이 이 동네를 오는 주된 목적이긴 했지만, 대충 동네의 모습은 머리에 남았다. 기억하기로는 학교 근처에 이런 가게는 없었다. 강희찬이 멈칫한 사이, 이선은 그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 방학 동안 새로 생겼대요. 저도 커피 심부름 하다가 알았어요.”
“초등학교 근처에 생겨봤자 장사가 된답니까? 애새끼들은 그냥 쭈쭈바 먹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고학년 여자애들은 자기들끼리 돈 모아서 사 먹는 것 같더라고요. 근처에 여고도 하나 있잖아요.”
“가요.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강희찬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선선히 대답했다.
‘밥 먹고 얼마나 지났다고 아이스크림을? 아까 분명히 배부르다고, 더는 못 먹겠다고 했던 건 다른 정이선입니까?’
그런 말을 들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선이 기억하는 강희찬은 그런 사람이었다. 말로는 온갖 구박과 타박을 하면서도, 그래도 차를 세워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선선한 반응은 어딘지 모르게 한 단계를 건너뛴 것만 같다. 타박을 듣지 않은 이선은 잠시 어딘가가 허해졌다. 그리고 소년처럼 툴툴거리지 않는 그를 더욱 남자로 의식하게 된다. 이선의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아니, 딱히 먹고 싶은 게 아니라고.’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자꾸만 그가 이상한 말을 해서, 어색하고 뻣뻣해지는 행동을 숨기려고 되는대로 뱉은 말이라고는.
“희찬 씨, 아이스크림 좋아하세요?”
“먹으면 먹죠. 난 가리는 거 없어요.”
하지만 강희찬이 방금까지 ‘더는 못 먹는다’라며 울상을 짓던 이선의 행동에 의문을 보이지는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어쨌든 이선은 많이 먹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선은 너무 마른 편이다.
겨우내 벌크업을 잔뜩 한, 새카맣게 탄 사내들이나 보다가 이선을 본 탓만은 아니었다. 분명 그런 상대성도 영향은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따져도 이선은 앞으로 많이 먹어야 한다. 안 먹는 게 문제지, 먹겠다고 먼저 나서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강희찬은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이선과 함께 내려 걸음을 옮겼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가게 특유의 번쩍거림과 부담스러운 핑크가 눈에 들어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낯이 익은 브랜드였다.
“어서 오세요.”
기억 저편에 남아 있던 찜찜함을 안은 채, 강희찬이 들어섰다. 유니폼을 입은 아르바이트생의 인사가 자동 반사처럼 흘렀다.
“희찬 씨, 뭐 드실래요? 여기 제가 살게요.”
이선이 호기롭게 카드를 꺼내 들었다. 두 번째로 보는 광경이지만, 다시 봐도 참 같잖고 귀엽다. 강희찬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비웃는다고 오해해서 삐치면 곤란했다.
“난 잘 모르니까 정 선생이 먹고 싶은 거로 골라요. 여기 계산 먼저 할게요.”
갑자기 늘어난 선택권에 이선은 정신이 멍해졌다. 여전히 ‘선택’에는 취약했다. 그사이 강희찬의 걸음은 이선의 허락도 없이 성큼성큼 계산대로 향했다. 그는 이선이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제 카드를 유유히 내밀었다.
“이게 제일 큰 거 맞습니까?”
“아, 네.”
“그럼 이걸로 하나 주세요.”
강희찬의 손가락이 가장 아래의 통을 톡톡 두드렸다. 그 광경에 이선은 경악했다.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희, 희찬 씨! 잠시만요!”
“…왜요?”
아르바이트생에게 카드를 건네던 그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왜요, 라고. 물어보는 얼굴이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라 이선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애써 정신을 차렸다.
저걸 사려고 하다니. 사람이 왜 저렇게 손이 크단 말인가? 실제 그의 손의 크기는 큰 편이었는데……. 설마 상관관계가 있는지 이선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왜 그렇게 큰 거 사세요?”
“아이스크림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집에 가져가서 먹어요.”
4인 가족도 일주일은 거뜬히 먹을 수 있을 법한 통을 턱으로 가리키며 그는 태연히 답했다. 이선은 재빨리, 그리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열흘 동안 끼니로 아이스크림만 먹는 신세가 되는 건 사양이었다.
“제일 위에 있는 통이면 돼요.”
“저걸 누구 입에 붙여요.”
“둘이서 충분히 먹을 수 있어요. 같이 먹어요.”
“저 작은 걸 또 둘이서 먹는다고요? 1인분 같은데? 한 사이즈 큰 거 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선을 미심쩍게 바라보던 강희찬이 점원을 향해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무어라 답하기 전, 이선은 인간 용수철이 된 것처럼 튀어 오르며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충분히 먹을 수 있어요.”
이선은 드물게도 강력히 제 의견을 피력했다. 우물쭈물 휩쓸리는 건 저의 주특기이긴 했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저녁밥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드문 것은 이선뿐만이 아니었다. 강희찬 역시 드물게도 이선의 기세에 눌려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거, 제일 작은 거로 주세요.”
“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카드 받았습니다.”
한순간에 결제 금액이 팍 줄었지만, 아르바이트생은 딱히 싫어하는 기색은 없다. 아마도 아이스크림을 퍼내는 고생이 덜어져서 속으론 기뻐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강희찬에게 카드를 돌려주고, 가게 내부를 잠식한 색과 같은 핑크 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세 가지 맛 골라주세요.”
아르바이트생의 시선이 이선을 향했다. 강희찬의 카드로 결제를 마친 그녀였지만, 본능적으로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느낀 까닭이었다.
학교 선생님들이나 송재혁. 그것도 아니면 가끔은 신규진. 이선이 누군가와 함께 식당에 가는 경우는 그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메뉴를 결정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선은 언제나 그들에게 귀찮은 선택을 떠넘기고, 한 발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익숙했다.
때문에, 캡모자를 쓴 여자가 저를 오롯이 본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선은 계산을 마치자 남의 일이라는 듯 제 카드만을 집어넣고 있는 강희찬의 팔을 손가락으로 조심히 두드렸다.
톡톡. 꺼질 듯한 감각이었지만, 강희찬은 기민하게 반응하며 이선을 봤다.
“희찬 씨. 같이 골라요.”
“난 잘 몰라요. 그냥 정 선생이 좋아하는 거로 다 담아요. 난 다 잘 먹으니까.”
“그래도…….”
“골라요. 괜찮으니까.”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결국 도와주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이선의 어깨가 눈에 띄게 추욱 처졌다.
“혼자 다 못 먹으니까, 같이 먹어줘야 해요.”
“알았으니까 골라요. 기다리잖아요.”
계산으로 제 할 일을 마친 강희찬은 이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턱 끝으로 스쿱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을 가리켰다. 얼른 하라고. 마치 처음 가게에서 직접 계산을 해보게 시키는 부모님과 같은 눈빛이라고 생각하며, 이선은 유리 너머의 아이스크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많기도 하지.’
그래도 세 가지 맛을 골라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가 처음 하려던 것처럼 가장 큰 통을 샀다면……. 정말 아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거, 초코랑 요거트랑…….”
그래도 가장 대중적인 맛과 자신의 취향이 조금 반영된 맛. 그리고…….
가만히 고민하던 이선의 마지막 선택을 아르바이트생은 가만히 지켜봐 주었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는 압박감에 더더욱 신중해지던 이선의 눈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초록 바탕에 검은색 점이 박힌, 기괴한 색감의 아이스크림은 다른 것들에 비해 스쿱으로 퍼낸 흔적이 적었다.
이선은 조심스레 뒤를 돌았다. 핸드폰이라도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강희찬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선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저… 이거, 좋아하세요?”
“뭐요?”
“이 맛이요.”
이선은 손가락으로 유리 너머의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강희찬은 잘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빼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봤을 순간에도,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
“…희찬 씨?”
침묵을 이상하게 여긴 이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희찬은 아차 했다.
“…가리는 거 없어요. 정 선생 먹는 거면 나도 먹으니까, 그냥 다 사요.”
강희찬은 정신을 차리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평정을 되찾았다.
“그럼 이것도…….”
이선은 피날레를 장식할 선택을 직원에게 알렸다.
“네. 혹시 가시는 데 몇 분 정도 걸리세요?”
“아…….”
재빠른 손놀림으로 숟가락을 챙기며 아르바이트생이 물었다. 이선은 전쟁터에서 대장의 판단을 찾는 졸병의 심정으로 강희찬을 바라봤다. 그대로 이선의 집으로 향할지, 아니면 어딘가로 또 갈지. 이후의 둘의 일정은 운전대를 잡은 강희찬에게 달려 있었다.
아르바이트생 역시 기묘한 남자 두 명 중에서 결정권자를 알아챘는지, 어느새 강희찬을 보고 있었다. 타인으로부터의 시선에 익숙한 강희찬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답했다. 조금 전의 당황한 기색은 이미 사라진 채였다.
“차에서 바로 먹을 겁니다. 그냥 스푼만 챙겨주세요.”
그의 말을 듣고서야 이선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바로 저 답을 바라고 있었음을.
“너무 많은데…….”
이선은 조용히, 그러나 한 차에 탄 사람이라면 충분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중얼거렸다.
시골 장터의 인심도 아니고. 아르바이트생은 뚜껑에까지 아이스크림이 가득 묻을 만큼 꾹꾹 눌러 담았다. 아니, 요새 시골은 예전의 시골이 아니랬지. 요즘 장터에서도 이렇게 가득 덤을 주지는 않을 거다.
“뭐가요. 그 작은 걸 왜 혼자 못 먹어요.”
하지만 강희찬은 간단히 불만을 일축했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여전히 이선을 보지도 않은 채였다.
“같이 먹어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운전하고 있잖아요. 손이 안 비는 걸 어떡합니까?”
얼른 먹으라는 듯. 강희찬은 이선이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향해 턱짓했다.
이선은 아까와는 말이 달라진 강희찬을 향해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보란 듯, 뚱한 표정을 짓고는 일회용 숟가락의 비닐 포장을 뜯었다. 그러고는 가장 윗부분에 있는 초록색 아이스크림을 양껏 떠서 강희찬의 입가에 가져갔다.
“…….”
뭐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강희찬은 한 번 아이스크림을 보더니 흠칫하는 게 전부다. 이선의 손길이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그는 입을 벌렸다. 양껏 담은 녹색 아이스크림이 크게 벌려도 우습지 않고 보기 좋은 그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헤.”
마치 작은 동물에게 처음으로 먹이를 준 것 같은 뿌듯함이었다.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낸 이선은 용기를 내어 이번에도 같은 맛의 아이스크림을 그에게 내밀었다. 강희찬 역시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것을 받아먹었다.
“정 선생도 좀 먹어요. 먹으라고 사주니까 왜 나만 먹여요.”
“먹고 있어요.”
몇 번이나 먹어도 적응되지 않는 아이스크림은 오롯이 강희찬의 입에만 들어왔다.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강희찬은 한마디 했다. 그제야 이선은 하얀 아이스크림을 뜬 숟가락을 제 입에 가져갔다. 점원이 넣어주었던 다른 하나의 숟가락은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였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습을 보니, 대체 왜 홍콩으로 여행을 가서는 살이 찌지도 않고 돌아왔는지 대충 예상이 갔다.
“희찬 씨, 맛있어요?”
이번에도 초록색 아이스크림을 살살 긁어 강희찬의 앞에 가져다 댄 이선이 물었다.
…정확히 ‘맛’에만 기초해서 대답하자면, 아이스크림은 강희찬의 취향은 아니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기가 먹을 때는 흰색이나 아래의 초콜릿 맛을 먹는데, 자신에게 줄 때만 저 맛을 골라서 주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네.”
영 취향이 아닌 아이스크림과 함께 밀려드는 누군가의 타액이 닿았던 흔적을 의식하자, 강희찬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렸다. 변태 같기도 하지. 양심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힐난은 애써 무시하며.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선의 손에서 넘어온다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입 안으로 넣었겠지만.
대체 왜 그 맛만 골라서 내 입에 넣는 건지. 불쾌함이라기보다는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물었다가는 움츠러든 이선이 더는 먹여주는 호사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강희찬이 어떠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사이, 차는 익숙한 골목 어귀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연식이 느껴지는 원룸이다. 그것을 보자 원인을 알 수 없는 짜증이 슬슬 차올랐지만, 탓할 사람은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건 자신이었다.
골목길에서도 느리다 싶을 정도로 서행을 하던 차를 겨우 이선의 집 앞에서 세웠다.
“정 선생……. 정 선생님.”
“네?”
이선이 마지막으로 싹싹 긁은 초록색 아이스크림을 강희찬의 입에 넣었다. 묵묵히 그것을 받아먹은 강희찬은 이선을 불렀다. 이제는 제가 좋아하는 맛을 먹으려던 모양인지 하얀색 아이스크림을 살살 긁던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혹은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순진한 표정이다. 강희찬은 슬그머니 눈을 핸들로 돌리는 것으로 양심의 외침에 화답했다.
“별로, 수상한 짓은 안 할 테니까…….”
“…네?”
몸을 굽힌 강희찬이 핸들을 팔로 받치고, 그 위에 턱을 올렸다.
“그거 다 먹을 때까지 있다 가죠?”
별로 볼 것도 없는 동네인데. 끈질기게도 앞 유리창 너머를 보고 있는 것이, 꼭 시선을 피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마냥 헛다리를 짚는 것은 아닐 거라고 이선은 생각했다.
“…….”
야무지게 퍼낸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에서 반쯤 덜어냈다. 그리고 미묘하게 시원한 맛과 섞여 있는 아이스크림을 합, 입에 넣었다. 꿀꺽. 양이 적은 아이스크림은 입 안에 몇 초 머물지도 못하고 사라지고야 만다.
이선은 반밖에 남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물끄러미 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큰 거 먹자고 하던 그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하지만 후회를 해봐야 늦은 일이다. 이선은 이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맛을 한가득 숟가락에 떴다. 그리고 제 입이 아닌, 핸들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강희찬을 향했다. 그는 얌전히 먹이를 받아먹는 동물원 맹수처럼 분홍색 숟가락을 삼켰다.
아이를 키우는 것 같아. 이선은 알 수 없는 뿌듯함을 재차 느꼈다.
“저, 오늘 되게 시간 많아요.”
“…….”
강희찬은 대답 대신 고개만을 슬쩍 틀어 이선을 보았다.
그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너무 이상하지만 않았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자꾸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입꼬리를 붙잡는 게 힘들어서 자꾸 애꿎은 아이스크림을 괴롭혔다.
“많이 놀아도 돼요.”
혹시라도 그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덧붙이는 말도 잊지 않으며.
* * *
멀리 본다면, 개막전은 숱한 시즌 경기 중 하나일 뿐이다.
언젠가 최 감독에게 개막전 선발로 나가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개막전 선발투수. 당시에는 부담감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상상 못 할 풋내기 같은 짓이었다.
어쨌든 백 경기가 넘는 시즌 경기 중 하나일 뿐이다. 이겨도 시즌 경기 중 하나를 이기는 것뿐이고, 지더라도 그저 1패의 가치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 구단에게 ‘개막전’이라는 의미는 남달랐다. 같은 1승, 1패의 무게라도 비시즌 내내 얼마나 준비를 했는지 보일 수 있는, 일종의 쇼케이스였다.
쇼케이스의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진열을 허락받은 강희찬은 늘 비슷한 패턴으로 경기를 준비했다. 경기 전날 저녁부터 금식했고, 낮에 간식으로 바나나 하나를 먹은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힘이 빠진다는 느낌은 없었다. 괌에서 몸을 만들지 못하고, 호주에서 속성으로 준비한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완봉. 아니, 잘하면…….’
돌이켜서 따져보면, 대체로 완봉을 했던 날은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늘 좋지 못하던 컨디션이 그날도 좋지 못했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6회까지 버티기나 하면 다행이네.
스스로에게 그런 우는소리를 하며 마운드를 올랐고, 어찌어찌하다 보면, 마지막 회까지 남아 있었다. 작년 개막전에서 무사사구 완봉을 했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더럽게 춥다. 뒤지게 춥다. 손 시리다. 이승주 저 새끼는 엔트리에 이름도 없는 새끼가 불펜에서 난로나 쬐고. 협회 새끼들은 기상청에 물어봐서 존나 추운 날로만 골라서 개막전을 열게 하는 게 분명하다. 씨발, 로진 입에 들어갔어.’
속으로 온갖 개 같은 상황에 대한 불만을 씹어 삼키며 공을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되는 공을 잡은 안정원이 웃으며 마운드로 뛰어왔다.
인터뷰해야 한다는 말에 씻지도 못한 채로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무사사구 완봉을 기록했다며, 컨디션이 좋았냐는 아나운서의 질문을 듣자 짜증이 팍 밀려왔다.
‘좋았겠냐. 너 같으면 추워 뒤지겠는데 세 시간 동안 공 던지고, 지금 씻지도 못하고 너랑 이러고 있는데.’
사회인으로서의 굴레가 겨우 막은 말을 대신해, ‘네. 시즌 초라서 좋은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겨우 뱉은 추억이 있었다.
컨디션이 구린 때도 완봉은 할 수 있었다. 하물며 오늘은 1년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컨디션이 괜찮은 개막일이었다.
“야, 희찬아. 식당 이모가 이거 너 주라고 챙기던데.”
더그아웃 벤치에 앉아 원정팀의 훈련을 보고 있던 강희찬의 곁에 박신우가 앉았다. 내미는 손에는 바나나 세 개가 있었다. 아마도 아까 식당에 가서 하나 가져다 먹는 것을 본 누군가가 더 먹으라고 챙겨 보낸 모양이었다.
강희찬은 가만히 고개를 젓는 것으로 가볍게 거절했다. 박신우는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바나나 하나를 까서 제 입에 넣었다.
“오늘 좀 살만한가 보다?”
이번 삼연전 경기에 나가지 않는 선발투수는 미리 개막 엔트리에 이름을 넣을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이승주와 박신우는 엔트리에 이름이 없는 채로 훈련을 소화하고 있었다.
아직 첫 등판이 많이 남은 선배는 무서운 속도로 바나나 두 개를 해치우며 후배의 얼굴을 살폈다.
“뭐가요.”
“원래 개막일에 제일 까칠했잖아. 밥도 잘 안 먹으려고 해서 얼굴도 해골 같고.”
아무리 운동선수들만 보고 산다고 해도, 다소 뺨의 살이 빠진 것을 ‘해골 같다’라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강희찬은 정정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선배의 말을 무시하며, 제 컨디션의 9할을 책임진 이를 떠올렸다.
“…….”
신발은 잘 신고 다니는 모양인지, 아침에 일어나보면 어김없이 ‘신발이 너무 많다’라는 투정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개막전 티켓을 줬던 날에도, 이선의 발엔 새 신이 예쁘게 신겨져 있었다. 불편한 건 없냐는 강희찬의 질문에 이선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다신 희찬 씨한테 뭐 사 달라는 부탁 안 할 거예요. 재혁이한테 할래요.’
라는 이상한 다짐과 함께.
‘나한테 부탁해야지 그걸 왜 남한테 합니까?’
‘그렇게 많이 사 오시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다시 부탁을 해요.’
아이스크림은 바닥이 뚫릴 기세로 깨끗하게 해치웠다. 그럼에도 이선은 한참을 자신의 차에서 나가지 않았다. 새로 담임을 맡은 반의 아이들의 이야기를 해주었고―강산인지 한라산인지 하는 놈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교무실의 새 자리에 햇빛이 들어와서 조금 불편하다는 평도 들었다.
물이 흐르듯 이어지던 대화도, 소재가 떨어지는 순간의 정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선은 먼저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강희찬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선이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 교육 공무원 신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이제 들어가서 쉬라는 말이 나오지는 못했다.
‘신발, 작은 건 없었어요? 새것 잘못 신으면 발에 상처 날 텐데.’
‘신었던 건 다 잘 맞아……. 아, 잠깐만……!’
결국, 강희찬은 뜬금없는 억지를 부리기에 이르렀다.
‘봐요. 솔직히 신발은 신어보고 사야 하는데, 직원한테 물어보기만 해서.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억지로 신지 말고 그냥 버리든가 다른 사람 줘야 해요.’
‘다친 데 없어요. 엄청 멀쩡해요!’
‘믿을 수가 있어야지. 빨리.’
강희찬은 거의 힘으로 이선의 왼발을 억지로 제 무릎에 올려놓았고, 덕분에 이선은 몸이 기울어 조수석 창문에 등을 기대야만 했다.
‘아, 안 돼……!’
쑤욱. 운동화는 너무도 허무할 정도로 이선의 발에서 떨어져 나왔다. 마지막 저항인지, 이선은 이리저리 발을 비틀었지만, 썩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발이 작긴 하네. 여자 신발도 잘하면 들어가는 거예요?’
‘…공용으로 나왔으면, 가끔가다 맞을 때도 있긴 한데…….’
‘…….’
발의 상처를 보겠다는 초기의 목적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강희찬은 그저 저의 것보다 크기가 작은 발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감상하기만 했다.
발도 귀엽다. 남자치고 조금 작다고 해도 그래 봐야 남자 발인데, 그래도 귀엽다. 하물며 신고 있는 양말도 어디 애새끼들이나 신을 것처럼 발가락과 뒤꿈치 부분만 색이 다르다. 대체 이런 양말은 어디서 구해서 신고 있는 건지…….
이선은 제 발로 떨어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발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강희찬의 손아귀는 이선의 발을 틀어쥐었다. 결국, 양쪽 발을 모두 강희찬의 손 위에 올려둔, 밖에서 누가 본다면 괴이하게 생각할 자세가 되어 이선은 끙끙거렸다.
‘희찬 씨……. 이제 됐죠?’
‘잠깐만요. 양말 어디서 났어요?’
‘이거, 아마 옷 살 때 서비스로 받은… 아!’
이선이 기억을 더듬느라 방심하던 차였다. 강희찬의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양말의 목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선의 오른쪽 발이 드러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상황 파악보다도 감각이 먼저였다.
‘아, 아! 간지러워요!’
이선의 말 사이사이로 웃음이 터졌다. 간지러움에 약한 모양인지 이선은 몸을 뒤틀었다. 뒤늦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게 민망한 듯 이선이 화들짝 놀라며 제 발을 물렸다. 그리고 강희찬이 말릴 새도 없이 그의 손에 있던 양말을 빼앗듯 가져갔다.
짧은 찰나, 강희찬은 매끄럽고 상처 하나 없는 발을 확인했다. 남은 건 왼발인데……. 과연 순순히 보여줄지는 의문이다. 아니, 이선의 모습을 보아하니 불가능에 추가 기울었다.
이선은 양 무릎을 바싹 세워 몸을 웅크리며 양말을 신는다. 강희찬을 흘겨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잔뜩 털을 세운 작은 동물 같다고 하면, 아마도 더 화를 냈겠지.
이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학창 시절 드물게 깨어 있었을 때 들었던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교과서에 나왔는지, 아니면 선생이 따로 만든 자료에 나왔는지. 만둣가게 주인에게 손목을 잡힌 여자의 이야기가 얼핏 귀를 스쳤다. 물론, 이야기 속 여자는 지금의 이선처럼 파드득거리진 않았던 것 같지만.
‘미안해요. 그냥 해보고 싶었어요.’
‘왜, 남의 양말을 벗겨보고 싶어 하세요…….’
양말을 다 신었는데도 몸은 여전히 잔뜩 웅크리고 있다. 게다가 경계를 하듯 강희찬에게 등도 조금 보였다.
저러면 더 장난을 치고, 양말이 아니라 다른 것도 벗기고 싶다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불퉁하니 나온 이선의 입술이 여기서도 보였다. 죄인은 그저 ‘잘못했어요. 내가 미안해요’라는 말이면 충분했다. 입고 있는 걸 벗기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냐는 소리를 했다간, 이선은 분명 제 원룸으로 쪼르르 달려갈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풀어주고서야 이선은 다시금 헤, 웃으며 사 온 신발을 얌전히 신어주었다. 꼼지락대며 신발에 발을 넣으면, 강희찬은 예쁘게 모양을 잡아 신발끈을 새로 묶었다.
‘희찬 씨, 리본도 잘 묶네요. 파는 것 같아요.’
무얼 신어도 잘 어울려서 문제였다.
이승주가 같은 것을 사려고 탐을 내던 신발 역시 이선의 발에는 딱이다 싶을 정도였다. 눈이 있으면 보라고. 네가 신었으면 크고 징그럽기만 했을 신발이라고.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주고 싶었지만, 강희찬은 리본을 꽉 묶으며 겨우 참았다.
‘손재주가 좋으신가 봐요.’
‘…운동화 리본 하나 묶는 거로, 무슨.’
초등학교 선생이라 그런가. 별것도 아닌 걸 매우 크게 칭찬하는 버릇이 있다.
괜히 머쓱해지는 얼굴을 숨기려, 강희찬은 일부러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개막전 티켓 누구한테 빼앗기지 말고, 저번처럼 암표 사서 들어오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늦어도 꼭 간다니까요.’
이제 그만 놀리세요. 조금 토라진 듯 말하는 이선은 몇 시간이고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할 사람을 자정을 넘겨서 집에 들여보내고야 말았지만.
“박신우 선수, 오늘 시구자 도착했답니다. 사진 찍고 연습하려면 지금 내려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곁에서 거치적거리던 박신우는 운영팀의 대리가 데려갔다. 시끄러운 방해꾼이 사라지자, 강희찬은 한숨을 내쉬며 벤치 등받이에 푹 기댔다.
‘…아직도 학교겠지. 주말인데 뭔 고생이야.’
이선은 오늘, 무슨 선생의 대타인가로 학교에 출근했을 거다. 하여간 어리고 순진하다고 벗겨 먹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투아웃 하나를 처리한다고 해서 이선이 호구의 처지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었다.
홈에서 개막전이 열리기 때문에 호텔 합숙은 없었다. 덕분에 그는 요 며칠 내내 이선의 퇴근 시간에 맞춰 학교에 차를 몰고 데리러 갔다. 학교 밖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워두면, 이선이 급한 걸음으로 뛰어왔다.
뛰다가 자빠질까 봐 걱정되어 한소리를 하지만, 사실 오롯이 저를 향해 달려오는 이선은 몇 번을 보아도 벅찰 만큼 새로웠다. 이젠 저를 봐도 예전처럼 잔뜩 경계하며 다가오기를 꺼리는 모습은 없었다. 커다란 눈동자에 담긴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은 기록을 세웠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뿌듯했고.
그래서 자꾸만 데리러 갔다. 이선 역시 바쁘지 않으냐는 걱정 어린 말을 하면서도, 눈치가 좋게도 차를 타지 않고 출근을 했다. 손발이 슬슬 맞아가는 느낌에 강희찬은 괜히 힘이 약한 이선의 머리카락을 헝클기도 했다.
‘온다. 꼭 온다고 했다.’
몇 번이고 장난스레 시비를 걸어가면서까지 들었던 말이다. 이선은 분명히 말했다. 아무리 늦어도 올 것이라고.
“…….”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것은 하나뿐이다.
사람의 가치에 빗대어 본다면, 완봉도 초라하다. 오늘 어떻게 해서든……. 퍼펙트를 안겨도 초라할 그 손에, 저의 손에서 넘어간 공이 쥐어질 것이다.
투아웃이든 뭐든. 자신이 제일 나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랬다.
되자. 되어야 한다. 이선의 남은 인생에서, 가장 이선을 소중히 대할 사람이.
세 번째 아웃 카운트로 이닝이 끝나지 않도록.
* * *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인생으로 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운도 따라주어야 한다. 실력이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강희찬은 운마저 타고났다고 자신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편이다.
학생 시절, 투수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폄하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구단 하나가 나서서 애지중지 관리를 할 정도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강희찬은 거기에 대해선 다소 부정적이었다.
잘한다. 고만고만한 고교 투수들 사이에서는 인정할 수 있었다. 구속도 잘 나왔고, 무엇보다 좌완이라는 메리트가 분명히 있었다. 밥 먹는 손이 왼손이라는 건 야구판에서는 그 자체로 연봉의 앞자리가 달라질 수 있는 요소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같은 연고지에 비슷한 실력의 왼손잡이가 하나 더 있었다면, 자신은 분명 그런 칼 같은 관리에서는 멀어졌을 터였다.
그런 점에서 강희찬은 운마저도 타고났다.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들의 손을 잡고 야구부를 체험시켜 줄 아버지가 있었다. ‘운동 여덟 시간 할래, 공부 여덟 시간 할래?’라는 물음에, 전자를 택한 아들을 존중할 수 있는 집안 환경도 거머쥐고 태어났다. 강희찬 역시 재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포수 뒤 심판의 삼진 콜이 상당히 요란스럽다. 본인만의 개성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구릴 때는 상당한 개지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8번 타자 유격수 이동호.
결정적인 순간의 운은 좋았다. 지금의 누적 스탯을 쌓은 것은 오롯이 실력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관중들이 내지르는 소음은 팽팽한 투수전에 대한 불만과 악이 절반이었다. 환호성을 가장한 비명이 그라운드로 쏟아지는 중이다. 강희찬은 슬며시 뒤를 돌아 전광판을 확인했다.
R, H라고 쓰인 알파벳 아래의 숫자가 ‘0’으로 표기된 채였다.
그것의 의미를 강희찬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
타자는 타격 준비를 마치고 자세를 잡았다. 저 순간부터 타자는 투수에게서 절대 눈을 떼지 않는다. 그 손에서 공이 벗어나는 순간까지.
안정원이 사인을 준 곳은 몸쪽. 볼이 되어도 상관없으니 몸에 맞을 기세로 최대한 안쪽으로 붙이기를 요구했다.
하위타순, 그것도 작년 후반에야 겨우 출장 기회를 잡기 시작했던 젊은 유격수다. 최대한 투구 수를 아껴서 맞춰 잡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니지.’
강희찬은 생각을 멈추었다. 선수는 생각하지 않는다. 판단은 벤치에서 하는 것이다. 경기를 진두지휘하는 것은 더그아웃에 서 있는 최 감독이다. 안정원의 손가락은 그런 벤치의 지시를 염두에 둔 것이다.
강희찬은 와인드업 준비 자세를 취했다.
현재 야구선수를 지망하는, 그것도 좌완 투수를 꿈꾸는 소년들에게 그의 투구 폼 영상은 정석 그 자체였다.
‘올바른 자세가 부상을 예방한다.’
그런 멘트와 함께 유소년 좌완 투수들의 교보재가 되는 깔끔한 투구 폼 이후. 경식구는 일반인들의 눈이 잡아낼 새도 없이 투수의 손을 떠났다.
“볼, 사이드!”
대충 각오는 했지만, 오늘따라 좌우의 존이 지나치게 좁다. 강희찬은 잔뜩 입에 머금은 바람을 후, 하고 뱉어냈다. 막상 초구부터 볼 판정을 받으니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이 좁은 것도, 안정원이 생각하는 볼 배합도. 평소라면 그러려니 넘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도 쓰이지 않을 것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강희찬은 마운드에 다시 오르며 외야 전광판을 바라봤다.
런득점(R), 안타(H), 볼넷(B) 모두 없음.
상대 팀 타자들의 기록은 오롯이 저의 기록이 된다.
7회 초의 투아웃 상황. 현재까지의 기록만 따져본다면 퍼펙트였다. 관중석, 아니, 하물며 벤치에 앉아 있는 녀석들도 절반 정도는 ‘혹시’, 나머지 절반은 ‘에이, 그래도 설마…….’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미신을 맹신하는 스포츠판답게, 방송 중계로는 차마 ‘오늘 퍼펙트를 볼지도 모르겠네요’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혹시나 실패라도 하면 입이 방정이라는 욕만 들을 것이 뻔했다. 그저 ‘강희찬 선수의 기록이 매우 좋습니다’ 정도로 돌려 말하겠지.
지금 여기에 없는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꾸만 반복적으로 ‘기록이 아주 좋아요’ 소리를 하는 해설위원들의 참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이선이.
“…….”
맹한 모습을 상상하자 기분이 다소 풀어졌다. 미약하게나마 호선을 그린 강희찬의 입꼬리를 보고, 1루수는 검지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원아웃 사인이었다.
‘그렇게 좋냐?’
아마도 그는 자신이 대기록에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강희찬은 다시금 마운드 위에 자리를 잡았다.
시선을 올려 중앙석을 한 번 훑었다. 날이 추운 탓인지 평소라면 노트북을 테이블에 두고 있을 기자들은 거의 없다. 비어 있는 자리가 그의 눈에 확 들어왔다.
“…….”
…온다고 했다. 꼭 온다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통에 시선을 푹 내리고 옹알거리듯 말했지만, 강희찬은 분명히 들었다. 그건 환청이나 허상이 아니었다.
아이스크림이 바닥을 드러낸 후에도 한참 동안 이선은 저의 차에 있어주었다. 사 준 신발이 불편하지 않냐며, 발에 상처가 나지 않았나 보겠다고 강희찬이 신발과 양말을 억지로 벗겨도 이선은 나가지 않았다. 비록 부끄럼을 타며 ‘괴롭히지 마세요’ 소리나 했지만.
일찍 해가 떨어지는 것이 그리도 아쉬웠다. 이선의 입에서, ‘저 이제 가볼게요’라는 말이 나올까 봐 강희찬은 무슨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깜박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너무 예쁘고 좋아서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집 구경을 시켜달라는 구실로 이선의 방에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것도 알았다. 강희찬이 다가간 순간, 빈 아이스크림 통을 꼭 잡으며 눈을 감던 이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차 안에서 할 수 있는 범위의 행위는 허락할 것이라고.
하지만 키스는 아니어도 어린아이에게 하기엔 지독히도 성적인 입맞춤으로 끝냈다. 그리고 먼저 이선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할 수 있었던 것을 안다. 이선 역시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도.
하지만 아직 자신은 이선에게 ‘시작’이 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순서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진 않다. 누구보다도 아껴주고 싶고, 잘해주고 싶다. 함부로 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이선은.
강희찬은 새하얗게 질린 사람을 몰아붙여 몸을 맞춘 기억은 잠시 외면했다.
“…….”
짧은 순간 느꼈던 젖은 감촉은 마치 조금 전의 일처럼 선연하다.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아래는 묵직해졌다. 고작해야 뽀뽀에.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강희찬은 그때를 떠올리며 제 성기에 손을 갖다 대 욕망을 풀기도 했다. 그것도 꽤 자주.
종만 울려도 먹이를 주는 줄 알고 헥헥대는 개새끼도 아니고.
어딘가로 피가 몰리려는 기색에 강희찬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경기 중이라고. 1루수가 원아웃 사인과 함께 보냈던 ‘정신 차려’는 헛소리가 아니었다.
강희찬은 재빨리 홈플레이트 너머 안정원의 모습을 봤다. 그러자 마치 마술처럼 특정 부위로 향하려던 피가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효과는 직방이었다.
투수가 제 얼굴을 욕정 조절용으로 썼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안정원은 마운드에서 허리를 굽히며 제 사인을 기다리는 강희찬을 응시했다.
안정원은 타석의 선수에 집중했다.
삼타수 무안타. 볼넷 없이 땅볼, 땅볼, 땅볼. 3땅, 유땅, 1땅이었던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한 타구의 궤적을 보며, 안정원은 생각했다.
‘얜 오늘 텄다.’
도무지 칠 기미가 없는, 타격감이 재수가 없을 정도로 구린 유격수. 생각을 정리하고, 사인을 냈다.
운이 좋아 친다고 해도, 여기는 잠실이다. 구장 크기로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다. 정말 운이 좋아 안타가 된다고 해도, 다음은 9번이다. 더블 플레이라는 수가 남았다.
바깥쪽 코스에 공을 요구하고, 안정원은 미트를 들었다. 다소 불만인 기색이 느껴진다. 그래도 강희찬은 사인에 고개를 젓지는 않는다.
대충 납득한 모양인지 그는 와인드업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턱!
정타로 맞았을 때의 기분 좋은 타격음이 아니다. 둔탁한 소리가 안정원의 귀를 스친 순간이었다.
강희찬 역시 그것을 들었다. 그는 바로 뒤를 돌아 내야수를 확인했다. 2루수가 가볍게 잡아, 1루로 처리하는 플레이. 유소년 시절부터 신물이 나도록 반복한 훈련이다.
익숙한 장면의 끄트머리를 상상했지만, 눈에 들어온 광경의 타이밍은 너무 늦었다. 2루수는 지금에야 1루에 송구를 시작하고 있었다.
와아아아!
하지만 배터리의 예상을 깨고, 3루 응원석에서 터질 듯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1루를 살폈을 때, 이미 1루심의 양팔은 세이프 판정을 낸 상태였다.
―9번 타자, 2루수 김명주.
여전히 두 번째 아웃 카운트 등은 채워지지 못한 채였다.
1루 베이스에 무사히 안착한 타자의 얼굴엔 화색이 퍼졌다. 무안타로 오늘의 경기를 끝내지 않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씨발, 진짜……!’
반면, 강희찬의 기분은 추락했다. 전광판을 통해 확인해 보니, 안타로 기록되었다. H라고 쓰인 알파벳 아래, 0이었던 숫자가 순식간에 1로 바뀌었다.
…노 히트가 깨졌다.
기록원은 조금 전, 강하게 튀어 오른 타구를 정상적인 수비로는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2루수 실책이 아닌, 투수의 피안타로 기록이 올라갔다.
평소라면 가볍게 넘어갔을 일이, 지금의 강희찬에겐 더없이 타격이 컸다.
점수를 내어주지 않고 7회까지 이어져 온 경기다. 선발투수가 맞은 안타 하나 따위야 누구에게도 중요할 건 없는 기록이었다. 하물며, 이곳에 없는 이선에게도.
“…….”
강희찬의 매서운 시선이 순간적으로 2루수를 향했다. 서늘한 살기를 2루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차마 강희찬이 있을 곳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공들인 모래성이 무너졌다. 그것도 저의 탓이 아닌, 다른 새끼의 손에 의해서. 손을 써볼 새도 없이.
무너진 모래성은 마치 이선과 자신의 사이처럼 느껴졌다. 기시감이 일 정도로 닮았다. 언제나 자신이 아닌 이유로 울고 웃던 이선을 봤을 때. 그때의 무력감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제 기록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딴 건 알 것도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 세상 모든 귀한 것만 들어가야 할, 봄볕이 묻어날 것 같은 그 손에 쥐여 줄 공이 고작해야 완봉구가 되었다. 퍼펙트를 쥐여 주어도 모자라는데, 하물며 노 히트도 깨지는 바람에. 이젠 정말 남은 것은 완봉뿐이었다. 재수가 없어서 실점이라도 하면 완투가 될 테고.
“…….”
강희찬은 글러브로 얼굴을 덮었다.
고작 이런 것을 주려고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닌데…….
‘고작 이딴 걸.’
이 세상의 누구보다 가장 빛나는 시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이선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그런 이에게 고작 완봉구를 주며, 저와 만나달라는 말을 하려고 이토록 오래 기다리게 한 것은 아니었다.
눈을 반짝이며, 캠프에서 돌아오면 할 말이 무엇인지 묻고 싶어 하던 이를 더 기다리게 만든 이유가 고작…….
글러브를 떼어내어도 경기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도망갈 순 없었다. 망쳐 버린 경기라도, 야구는 아웃 카운트를 다 잡아야 경기가 끝난다. 흔히 야구를 인생에 비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 순간,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었다.
주심은 안정원에게 경기 속개를 재촉했다. 퇴근을 빨리 안 하면 대가리에 붙은 털들이 날아가기라도 하는지. 한창 삐딱한 생각을 하며, 강희찬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더블 플레이를 잡지 않는 이상, 적어도 1번 타자까지는 상대해야 한다.
공을 던지기 전, 강희찬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마치, 아직도 비어 있는 두 번째 아웃 카운트 등처럼.
“…….”
안정원은 최대한 낮게 공을 던지라고 사인을 보냈다. 더블 플레이를 잡겠다는 의도였다. 그건 강희찬도 찬성한다. 개막전부터 선발투수에게 많은 부담을 줄 리가 없다. 투구 수가 채워지면 바로 올라올 기세인 투수코치의 기색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해야지, 뭐.’
어쩔 수 없다. 힘이 쫙 빠졌지만, 어쨌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선에게 내밀기에는 조금 부족해도 어차피 자신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가.
저 역시 이선에게는 부족했지만, 어쨌든 그나마 가장 나았다. 어디에서 이상한 녀석들을 만나고 눈물이나 흘리고 다닐 바에야, 자신인 편이 나았다.
자세를 취한 강희찬은 1루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더블 플레이를 피할 요량으로 리드를 잔뜩 늘린 주자가 신경에 거슬려, 두세 번 정도 1루로 견제구를 던졌다. 주자의 유니폼 앞부분이 흙먼지로 더러워지지만,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제 슬슬 타자를 상대할 차례였다. 괜한 짓을 하다가 보크 판정을 받으면 원아웃에 주자만 두 명으로 늘어날 뿐이다. 모가 되든 도가 되든, 아웃 카운트를 늘리는 것이 먼저였다.
“…….”
투수가 일단 투구 동작에 들어가면, 그 공은 반드시 타자를 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타자를 기만하는 행위가 되어 보크 판정을 받게 된다. 때문에, 더블 플레이를 노린다면 투수가 공을 던지는 시간조차도 줄여야 했다.
시야의 가장자리로 1루수가 2루를 향해 출발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 공은 반드시 홈플레이트를 향해야 한다.
탁!
마찬가지로 정타가 아닌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저의 앞으로 다가왔다. 강희찬은 본능적으로 올라가는 왼손을 애써 누르고, 글러브를 들고 있는 오른손으로 그것을 막았다.
“악!”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강희찬은 뒤늦게 깨달았다.
“희찬아!”
타자의 배트가 공에 맞은 것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구장. 웅성거리는 관중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안정원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잘 들어왔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지른 비명은, 저의 것이다.
하지만 통증을 느끼고만 있을 여유는 없었다. 강희찬의 눈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흙바닥을 구르고 있는 공을 찾아 왼손으로 집어 들었다.
타임을 외치기 위해 더그아웃을 나왔던 최 감독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그는 강희찬의 의도를 파악했다.
마우스피스가 없는 탓에 맨 이빨을 악물었다.
2루는 이미 늦었다. 히트 앤 런 작전이 나왔던 탓에 주자는 이미 2루 베이스가 안착해 있었다.
“…….”
남은 건 1루. 불행 중 다행인지, 타구로 투수를 맞혀 당황한 타자는 출발이 늦었다. 아직 1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퍼스트!”
타구에 팔을 맞았을 때보다 커다란 고함이 흘렀다.
강희찬의 목소리에, 마운드로 오기 위해 베이스에서 떨어졌던 1루수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아직 타임은 울리지 않았다. 1루수는 다시금 걸음을 뒤로 물려 베이스에 발을 붙였다.
턱!
미트 안에 공이 정확히 들어가는 깨끗한 소리. 그와 동시였다.
“아웃!”
1루심의 오른손이 주자를 한 번 가리킨 후 주먹을 쥐어 보인다. 동시에 전광판엔 붉은 등 하나가 더 채워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강희찬은 온전히 고통을 느낄 것을 허락받았다.
“강희찬! 타임, 타임!”
조금만 움직여도 살갗 안쪽에서부터 칼로 찌르는 것만 같다. 통증을 견디며 겨우 글러브를 빼냈다. 흙바닥에 머리가 닿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새도 없었다. 강희찬은 이리저리 몸을 뒤틀다, 감독인지 코치의 것인지도 모를 누군가의 다리를 본 순간 왼손으로 그것을 부여잡았다.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장면들 속에서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지나칠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본 것만 같았다.
“…….”
기록을 바랐을 땐, 단 한 번도 이룬 적이 없었다.
등판 전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도 오래된 저의 징크스가 반갑지 않은 오랜 친구처럼 손을 흔드는 순간이었다.
* * *
다급한 발걸음이 구장 내부를 채우는 소음에 파묻혔다. 이선은 이미 주차장에서부터 한참을 뛰느라 숨이 찼지만, 멈추지 않았다.
관람객은 구장에 있는 주차장을 이용할 수 없다. 하도 오래전에 와본 터라, 그 중요한 사실을 잊은 자신을 원망해도 늦었다. 아침에 차 키를 들고 나왔던 자신을 원망하는 것도 소용없었다. 역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정말 옛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포털 사이트의 중계로는 아직도 강희찬은 출전 중이었다. 하지만 겨우내 홀로 야구 공부를 한 이선은 이제 알았다. 강희찬 같은 ‘선발투수’는 보통 5회까지 나온다는 것을. 중계 화면 속 아나운서도 7회까지 게임을 소화하고 있는 강희찬을 향해 ‘컨디션이 좋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희찬 씨는, 정말 대단한 경기를 하고 있었다.
얼른 가야지. 얼른 가서, 공 하나만이라도 던지는 모습을 봐야 한다. 꼭 그래야 했다.
이선은 출입구에 서 있던 스태프에게 초대권을 보여주었다. 봉투째로 넘긴 탓에 아차 했지만, 스태프는 익숙하게 봉투를 열어 그 안의 티켓을 확인했다.
―9번 타자 김명주.
흘러나오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이선은 움칫했다. 하지만 직원은 당황하지 않고 티켓을 확인한 후 이선에게 넘겼다.
“네, 확인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입장을 허락받은 이선은 통로로 한 발 내디뎠다. 첫걸음. 의미를 부여하고 홀로 감탄할 여유는 너무도 짧다.
‘저 너머에 그가 있다.’
앰프를 찢고 나올 것만 같은 응원단장의 목소리와 사람들의 소리. 그리고 긴장된 분위기까지. 그 모든 것이 저 입구 너머에 있다. 이선의 눈에는 그저 푸른 하늘만 보이는 공간 안에.
튕겨 나오듯 구장 안으로 들어선 이선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전광판이었다.
직접 강희찬이 있을 마운드를 봐도 되겠지만, 이선은 아직도 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을 멀리서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체형이 특이할 정도로 크다면 모르겠지만, 투수 중에는 그런 이는 또 드물기 때문이었다.
전광판에는 여전히 강희찬의 이름이 있다. 그제야 이선은 벅찬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안도감이 묻어나는 한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내렸다. 드디어 눈에 담을 수 있는 경기장을 보니, 익숙한 실루엣이 여전히 흙 언덕 위를 지키는 중이다.
“…….”
늦지 않았다. 안도감이 온 마음으로 번져갔다.
―안!타! 김명주!
상대 팀의 응원석에서 커다란 응원 구호가 들려왔다. 이선은 뾰족한 눈으로 그곳을 흘겨보았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으나, 들리는 이름은 강희찬이 지금 상대하고 있는 타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희찬 씨는… 왜 아무도 응원을 안 해주지?’
이선은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는 강희찬을 조금 더 눈에 담았다.
강희찬의 모습은 저의 상상이 아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환상이나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이선은 뛰어오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티켓의 자리를 확인했다. 잠실 중앙석은 두 번째였던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첫 기억이 벌써 아득하다.
강희찬이 아직 출전 중임을 확인하니 다소의 여유가 생겼다. 눈을 잠시 돌리며, 파노라마 사진처럼 관중석을 쭉 살폈다. 응원석은 사람들이 가득 찬 데 비해, 이곳은 듬성듬성 빈자리도 꽤 있었다.
비교적 앞줄인 자리를 찾기 위해 이선이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악!”
양쪽의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응원 소리를 누군가의 비명이 갈랐다. 스피커가 터질 것 같은 소리에도, 확성기 하나 없는 누군가의 비명은 또렷이 들렸다.
이선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눈은 경기장을, 정확히 말하면 강희찬을 찾았다.
“…….”
응원도 앰프 소리도 멎었다. 흐르는 것이라고는 오직 관중들의 웅성거리는 소음뿐이다. 혼란한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이선의 시선이 흙 언덕 위, 부자연스럽게 몸을 굽힌 이를 좇았다.
“퍼스트!”
강희찬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저의 곁에 떨어진 공을 주워 1루로 던졌다. 1루수가 그것을 받는 순간, 전광판의 빨간 등 하나가 더 채워졌다. 그리고 강희찬은 마치 제 임무를 다했다는 듯이 오른팔을 감싸며 흙바닥 위로 쓰러졌다.
그 순간, 심판은 경기를 중지시켰다.
강희찬과 같은 유니폼을 입은 중년의 남자들이 그라운드 안으로 급히 걸음을 옮긴다. 마운드 위의 강희찬은 홀로 고통스러워하다, 제 곁에 다가온 코치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구급차! 씨발, 구급차 빨리 들어오라고!”
코치의 큰 목청은 이선에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SH 컵스의 투수 교체입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아직 이닝은 끝나지 않았다.
이선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입술을 틀어막는다고 눈물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이선의 눈에선 결국 방울진 눈물이 툭툭 떨어지고 말았다.
그라운드 안으로 구급차가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평소라면 야구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어 신기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경기 후 만난 그에게 운동장 안으로 구급차가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얘기했을 테고, 강희찬은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여줬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만은 그럴 수 없었다.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는 차에 오른, 아니, 들것으로 실려 간 사람이 강희찬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선은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이선은 손등으로 제 눈가를 벅벅 닦았다.
강희찬이 떠난 야구장. 주인을 잃은 마운드 위에 새로운 투수가 올라왔다. 이선은 몹시도 분했다.
‘사람이 다쳤는데, 어떻게…….’
사람이 공에 맞아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며 떠났는데, 정작 경기는 아무렇지 않게 진행되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어수선한 분위기 위로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응원가가 덮였다.
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질려버린 이선은 결국 뒤를 돌아 관중석을 빠져나왔다.
도저히 있을 수 없다. 이미 자신은 저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강희찬이 없는 야구장은, 저에게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이선은 그가 향했을 병원으로 가기 위해 큰 걸음을 떼었지만, 이내 뚝 멈추고 말았다.
“병원…….”
멍하니 흘러나온 단어가 머릿속에서 분해되었다가 다시 조합되었다.
그리고 이선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은 방금 전 강희찬을 실은 구급차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급할 테니, 무작정 가까운 병원을 갔을까?’
불확실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사실 이 근방엔 꽤 큰 대형병원이 몇 있었다. 어디가 더 가깝냐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모여 있었으니, 이선은 구급차가 어느 병원으로 갔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이선의 머리를 반짝 스쳤다.
이선은 급히 뒷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살폈다. 한참이나 스크롤을 내리고서야 ‘송재혁’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무작정 그의 이름을 눌렀다. 긴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끝에,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어, 야! 나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내가 다시 연락할게!
“아니, 재혁아……!”
이선의 다급한 부름은 완성되기도 전. 전화는 무참하게도 연결이 끊어졌다. 마지막 잡고 있던 동아줄마저 떨어진 셈이었다.
이선은 이미 메인 화면을 띄우고 있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희찬 씨…….”
주저앉고 싶다. 울고 싶다. 울고 있으면, 그가 달려와서 왜 우냐고 안아줄 것만 같다.
“…….”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이선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
그는 올 수 없다. 다쳐서 구급차에 실려 간 그가 우는 자신을 위해 달려올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야 한다. 그의 곁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주저앉아서 우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
굳은 결심을 누군가가 기특히 여기기라도 했을까. 그 순간 어느 초여름의 일이 떠올랐다.
강희찬이 장난삼아 배트로 친 공에 머리를 맞았던 날. 이천에서 송재혁의 차에 몸을 싣고 도착한 병원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세브란스 병원.’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분명히 그곳은 구단의 선수들이 다치면 가는 곳이라고 했다. 강희찬 역시 지금 그곳으로 향했을 터였다.
“……!”
이선은 통로 한가운데에서 멈추었던 걸음에 힘을 실었다.
아닐 수도 있었지만, 맞을 수도 있다. 확률에 기대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선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목적지가 정해진 사람 특유의 단호한 걸음이었다. 그리고 걸음은 점점 빨라지더니 결국은 뜀이 되었다. 중간마다 사람들과 부딪히기도 했지만, 이선은 죄송하다는 말을 할 새도 없이 그저 뛰는 것을 이어갔다. 빨리 이 의미 없는 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제발 있어달라고. 제가 생각하는 그곳에, 제발 있어주기를.
* * *
주차장까지 가는 것은 포기했다. 이선은 구장을 나와 한참 걷다, 옆을 스치는 택시를 급하게 잡아 올라탔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빨리 가달라는 말은 자꾸만 중간에 끊겼지만, 다행히도 기사님은 바로 알아들었다.
“누가 아파요?”
신호가 잠시 멈춘 틈을 타 택시 기사는 넌지시 물었다. 뒷좌석에서 홀로 안절부절못하며 핸드폰을 보는 사내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조심히 묻는 말에 이선은 대답보다도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사고 났어요?”
“비슷…해요.”
목이 메어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가 뒤늦게 차 안을 울렸다.
“아이고. 오늘따라 다치는 사람이 많네.”
한숨 섞인 말과 함께 기사는 내비게이션으로 보던 TV 화면을 껐다. 화면이 꺼지기 전, 이선의 눈엔 얼핏 초록색 잔디가 들어왔다.
“괜찮을 거예요. 울지 말고.”
“네.”
“도착했는데, 어디 세워줄까요?”
“저기, 응급실 입구 가까이…….”
다친다고 해봐야 군대에서 발목 한번 삐끗했던 게 전부였다. 어릴 적 어머니를 고생시킨 것에 비해, 의외로 이선은 자라면서 튼튼해졌다. 때문에 공에 팔이 맞아서 구급차에 실려 간 사람이 병원에 도착하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대충 저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상상에 기대어 내릴 곳을 정했다. 카드를 내밀어 계산하는 이선을 향해 기사님은 마지막까지 ‘괜찮을 거예요’라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선은 거기에 대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입술을 떼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 나올 것만 같아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택시를 보낸 후, 이선은 뒤를 돌아 응급실 안으로 달려갔다.
이선은 일자로 이어진 복도를 뛰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하나 더 있는 문을 열자, 응급실 특유의 번잡스럽고 부산한 소음이 온몸을 때렸다.
아버지의 장례식. 울다가 기침이 심해지는 바람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 갔던 곳이었다. 혼절하기 전, 어렴풋한 기억이 있었다. 언제나 바쁘고,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고, 바쁠 텐데도 피로감 탓인지 목소리는 건조할 정도로 차분한 의사들.
새벽 응급실 특유의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낮에도 그리 다를 것은 없었다. 이곳은 24시간 비슷한 분위기였다.
“저, 저기……!”
이선은 환자의 링거를 확인하고 돌아서는 간호사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상당히 오래전 유행했던 사각의 뿔테안경 탓에 얼굴이 다소 가려졌지만, 얼핏 자신과 비슷한 또래일 것 같았다.
이선은 저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를 동아줄처럼 부여잡았다.
“여기 강희찬 씨… 아니, 강희찬 선수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나요?”
“…….”
남자는 순간적으로 이선을 위아래로 훑으며 확인했다. 노골적인 시선을 느끼면서도 이선은 불쾌할 새도 없었다.
잠깐의 공백을 깨고, 남자는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선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새하얘졌다.
‘무슨… 관계인 거지?’
가족도, 동료도, 하다못해 그의 연인도 아니다. 바보같이 아무 생각 없이 달려왔지만, 자신은 허락이 없이는 그의 곁에 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이선은 비로소 이곳에서 자신은 강희찬을 찾을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다.
남자에게는 일상적이고 지극히 업무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선을 현실이라는 나락으로 밀어버리기에는 충분했다.
대답이 없는 이선을 보며, 남자는 제 안에서의 판단을 마쳤다.
“죄송하지만, 방침상 환자 개인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
“그리고…….”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에는 눈물만 그렁그렁 달려 있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결국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이 사람이 기자는 아니기를 바라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다들 저 할 일 하느라 바빠 이쪽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간호사는 이선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강희찬 환자, 아마 지금 면회 금지일 겁니다. 가족이라도 지금은 면회 안 되실 거예요.”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그의 말이 위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간호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선은 이동식 침대가 늘어져 있는 응급실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어머, 죄송해요.”
우는 아기를 안아서 달래는 젊은 엄마에게 부딪혔다. 등 뒤에서 부딪혀 온 사람을 확인할 새도 없었다.
이선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미 경기장에서 풀렸어야 할 다리가 용케 지금까지 버텨왔다.
“희찬 씨…….”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부름은 금세 응급실의 소음 사이로 파묻혀버린다.
* * *
“뼈가 말이죠.”
직접 강희찬의 수술을 마친 정형외과 담당의는 둥그런 얼굴의 중년 남자였다.
이곳은 매번 컵스의 다친 선수들이 찾아오는 병원이었다. 야구란 경식구를 가지고 하는 경기다. 가장 많이 다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뼈였으니, 정형외과장이라는 의사는 이제 컵스의 어지간한 직원들 사이에서는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지저분하게 부러졌으면 수술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을 텐데, 아주 예쁘게 똑 부러졌어요.”
아무렇지 않게, 양손을 들어 분필이라도 부러트리는 것처럼 똑 하고 분지르는 시늉까지 한다. 누워 있는 강희찬은 속으로 ‘장난하나’ 싶어 기가 찼다.
‘이 야매 돌팔이 같은 게…….’
하지만 멀쩡한 의자를 두고, 침대 곁에 서 있는 부모님들은 마치 사이비 교주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경청 중이다.
믿습니다. 오오. 서로의 양손을 얽어 가슴 높이에 둔 모양새를 보자, 강희찬은 그냥 눈을 돌렸다.
그렇게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아들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니. 사람 팔뼈가 예쁘게 부러졌다는 말이나 하는 의사 놈은 신뢰가 가는 모양이었다.
교주는 믿음이 충만한 부부의 기대를 충족시킬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수술이 아주 잘됐습니다. 붙이기도 쉬웠어요. 회복되고 물리치료 꾸준히 받으시면 차차 괜찮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두 개의 가지가 하나로 엮인 것만 같은 꼴이 된 부부는 드디어 정신까지 하나의 개체가 되었다.
감사하다는 말은 이미 수술을 끝냈던 날에도 지겹도록 들었다. 부분마취를 했기 때문에 잠들지 않은 채였다. 회복실로 갔던 강희찬은 뒤늦게 간호사를 통해서 부모님이 많이 기뻐하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강희찬 선수.”
의사의 부름에 강희찬은 허공을 향했던 시선을 움직였다.
“…….”
의사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 의료인으로서의 믿음이 전혀 가지 않는 자세로 강희찬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강희찬의 오른팔 깁스를 바라보았다.
“이건 강희찬 선수가 투수니까 하는 걱정인데…….”
“…….”
“이게 아무래도 원래 몸에 없던 보정물을 집어넣은 거라서, 예민하신 분들이 아니라도 거슬림을 느끼실 수는 있어요. 분쇄골절은 아니라 많이 들어가진 않았어도, 일반인들도 이걸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꽤 되거든요. 운동하시는 분이니까, 그건 염두에 두고 재활에 들어가야 할 겁니다.”
“…….”
“뭐… 잘하시겠지만, 수술 전과 아주 똑같을 순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내일도 한 번 들를 테니까 불편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해주세요.”
이 병원 의사들은 다 신고 다닐 것 같은, 구멍이 숭숭 뚫린 괴상한 신발을 질질 끌며 의사는 1인실을 나갔다. 미닫이문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닫힐 때까지 부모님은 끊임없이 ‘감사합니다’를 연신 되뇌었다.
하여간…….
“이제 됐죠? 가게 가보세요.”
강희찬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양친을 향한 말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어느새 포지션을 싹 바꾸며 아들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 당신은 가봐. 종식이 형님, 며칠째 혼자 힘들 텐데.”
부자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젊은 시절, 여자를 설레게 했던 쌍꺼풀이 진 남편의 눈을 그대로 물려받은 큰아들의 눈. 네 개의 눈동자가 여자를 향했다.
어린 시절에는 어디를 데리고 나가면 ‘엄마랑 똑같아서 예쁘게 생겼네’라는 소리를 심심찮게 듣던 장남은 커갈수록 점점 아버지의 느낌도 섞여갔다. 남편을 닮은 아들을 키우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지금은 그 재미보다도 서운함이 앞섰다.
의사를 향해 머리를 조아릴 기세는 사라지고, 여자는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왜 자꾸 나보고만 가라고 해! 당신은! 당신은 주유소 안 가요?”
“…나는, 원래 잘 안 가잖아.”
변덕스럽기가 초봄 날씨와 진배없다. 급변한 분위기에 두 남자는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여자의 집중포화를 받는 부친 쪽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안 가! 내가 정말……. 저번에 주유하러 갔더니, 알바생 중에 내가 사장 사모란 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얼마나 안 간 거야? 집 근처를 가도 그런데, 멀리 있는 애들은 아예 당신이 사장인 것도 모르지?”
“…….”
‘나는 당신 태워주러 다니잖아……. 그리고 내가 평소에 주유소랑 건물에 관리인 두고 안 나가는 거 뭐라고 한 적 없으면서…….’
턱 밑까지 차오른 남자의 변명은 차마 흘러나오지 못했다. 주관적,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금실이 좋은 부부’였지만, 그렇다고 아예 싸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년이 넘도록 한 여자의 남편으로 살아왔다. 세월의 관록까지 쌓인 남자는 이제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입을 여는 것은 긁어 부스럼을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입이 없다. 내 입은 먹을 때만 존재하는 거다.
20년 이상 이어온 금실의 비결은 자기최면이다. 이번에도 남자가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 모습을 그와 똑같은 아들의 두 눈이 지켜보고 있었다.
‘부부싸움 하실 거면 나가서 하세요.’
젊은 아들의 눈이 말했고.
‘시끄러. 너도 조용히 있어. 엄마 화났으니까.’
아버지가 화답했다.
“어휴, 정말! 속상해 죽겠어. 찬이라도 기숙사 들어가서 다행이지, 있었으면 정신없어서 어쨌을 거야.”
성적에 돈을 있는 대로 바르더니, 강영찬은 기어코 과학고인지 수학고인지에 들어갔다.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동생은 주말에만 집으로 돌아온단다. 줄곧 캠프에 있었고, 주말엔 오전 출근을 하는 강희찬은 아직 집에서 마주친 적은 없었다. 어제 겨우 병원에 온 모습을 본 것이 다였다.
‘못 본 사이에 더 징그러워졌군.’
고등학생이 된 동생에 대한 감상은 그게 끝이었다.
“가보세요. 어차피 좀 있다가 구단에서 온다니까.”
“경기 있을 거 아니야?”
“오늘 월요일이잖아요.”
“아, 그랬지.”
아들의 말에 여자의 화는 다소 누그러졌다. 남편과 닮았지만, 그래도 아들은 아들이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게 자식인데, 하물며 금지옥엽보다 더 귀히 키운 자식이 다치기까지 했다.
운동선수로 키우겠다고 다짐한 이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지만…….
화가 솜사탕처럼 녹는 대신, 그 자리는 안쓰러움으로 가득 찼다. 깁스한 팔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누워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럼 엄마 잠깐만 가게 갔다 올게. 먹고 싶은 거 있어? 전복죽 해서 퀵으로 보내줄까? 너 그거 잘 먹잖아.”
“나오는 죽 먹으라잖아요. 됐어요.”
“그 간도 안 된 멀건 흰죽? 그거 대체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 거래? 먹는 게 시원찮으니 나을 것도 안 낫는 것 같아, 정말.”
“저녁부터는 밥 나온다고 했어요.”
“어휴.”
여자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평생 해왔고, 할 줄 아는 것이 음식을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친 아들에게는 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노크도 없이 환자의 병실 문이 열렸다.
면회 금지가 풀리자마자, 프런트 직원들은 저들끼리 순번을 정한 듯 돌아가며 얼굴을 비췄다.
전해 듣기로는, 주말에 경기가 끝난 후 안정원을 필두로 한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간호사가 진땀을 뺐단다.
‘면회 금지가 풀렸어도, 면회 가능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몰려오시면 수술 끝난 지 얼마 안 된 환자의 안정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런 당연한 소리를 덩치만 크고 이해력이 모자란 무리가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겉모습만 따지면, 조폭과 다를 것도 없는 무리는 결국 ‘안 됩니다’를 연발하는 간호사 한 명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단다.
오전, 오후로 상태를 파악하러 오는 간호사는 한참을 강희찬의 곁에서 푸념하다가 나갔다. 별 대꾸도 없는 이를 상대로 떠든 이유는 간단했다. 너의 그 시끄럽고 커다란 동료들이 몰려와서 병원에 위화감을 조성하지 마. 그런 의도를 알아들었지만, 강희찬은 알겠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진리를 겪은 무리는 이제 ‘문병은 순번을 정해서 온다’라는 문화시민의 자세가 생긴 모양이다.
드디어 발휘되는 문화 시민적 소양의 첫 타자는 윤태성이었다.
“그건 뭐냐.”
“귤. 먹어라.”
검정 일색인 차림으로 검은 봉지를 대뜸 건넸다. 과일 바구니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박스도 아니고 봉지라니. 하고 있는 꼴도 집에서 늦게까지 잤다가 그대로 얼굴만 씻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온 모양새였다.
“과일 바구니 없어? 월급도 반 토막 나게 생겼는데, 그거라도 사 와야 할 거 아냐.”
흘끔. 봉지를 쳐다보기만 하더니 외면하는 강희찬을 보며, 윤태성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새끼가 다쳐도 정신 못 차리고 까탈스러운 건 여전했다.
“다친 걸로 월급 안 깎인다. 다쳐 본 적이 없으니, 알겠나.”
“그러냐?”
아무래도 고액 연봉자의 월급 삭감 조건은 부진으로 인한 2군행이었을 때만 해당인가 보다.
강희찬은 침대 헤드에 기댄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앉으라는 말은 따로 하지 않았는데도, 윤태성은 봉지를 협탁에 두더니 냉장고를 멋대로 뒤져 음료수를 꺼내 마셨다.
“야. 귤이나 까봐.”
“뭐? 새끼야, 손이 없어 발이……. 아.”
가만히 있어도 험악해 보이는 얼굴이 인상을 쓰니 더욱 험악해진다. 하지만 저 얼굴을 고등학생 시절부터 봐왔던 강희찬에게는 어떤 타격도 되지 못했다. 중간에 말을 멈춘 윤태성에게 깁스를 한 저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안 보이냐? 손 없는 거.”
“아, 씨발. 손도 드럽게 가네.”
“…….”
“도마도나 사 올걸.”
중얼거린 윤태성은 귤 하나를 집어 들어 반으로 쪼갰다. 그러고는 반씩 나눠진 귤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야. 한 번 더 쪼개.”
“죽인다. 그냥 주는 대로 처먹어.”
“아 씨발. 안 먹어.”
“먹지 마, 그럼. 내가 다 먹을 거니까.”
해가 넘어, 이제 둘의 나이를 합쳐도 명백히 오십이 넘었다. 하지만, 스물여섯이 아니라 열여섯의 대화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내 걸 왜 네가 다 처먹어? 왜 왔어?”
강희찬은 기어이 문병을 온 동료 1호에게 축객령에 가까운 타박을 했다.
직원들은 며칠째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었다. 홍보팀장과 함께 따라온 송재혁을 본 것이 이틀 전이다. 누군가의 안부를 물을까 고민도 했지만 그만뒀다. 같이 있는 홍보팀장의 시선도 있었고, 다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어? 애새끼들이 겁난다고 지들끼린 못 오겠다고 하니까 먼저 온 거 아니야.”
하여간 성질머리.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윤태성은 쪼개놓은 귤 두 개를 입에 한 번에 넣었다. 귤 하나를 입에 넣은 것치고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턱을 움직이더니 금세 꿀꺽 삼킨다.
“여기가 경찰서냐? 뭐가 겁나?”
토를 달았지만, 사실 대충 짐작은 간다.
아무래도 첫 부상을 당하고 수술까지 받은 자신의 기분을 살피는 것이 분명했다. 직원들이야 기자들을 상대해야 할 테니 찾아올 정당한 명분이 있지만, 동료 선수들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문병을 왔다가 심기를 건들까. 면회 금지가 풀렸어도 차마 개인적으로 오지 못하다가 선발대로 윤태성을 보낸 모양이었다.
“몰라. 새끼들한테 물어보든가.”
그렇다고 해도, 안정원까지 그 무리에 끼어 있는 것은 다소 의외이기는 했다. 그와 배터리 합을 맞추었던 몇 년의 세월이 머리를 스쳤다.
“깁스는 언제 푼대?”
“그런 걸 어떻게 벌써 알아? 풀 때 되면 풀겠지.”
무심히 답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묻고 싶은 것은 제 쪽이었다.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과연 이게 나을 수는 있는지. 의사의 말대로라면, 철심은 적어도 반년은 박은 채로 지내야 한단다. 그 상태로 운동을 해도 과연 자신이 이전의 기량을 보일 수 있을지. 아니, 과연 그라운드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수술 전과 아주 똑같을 순 없어요.’
의사는 에둘러 말했지만, 강희찬은 참뜻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수술을 받기 전의 강희찬이 될 수는 없는 거였다. 어떠한 재활을 하고, 훈련한다고 해도. 메스를 대기 전의 강희찬은 이제 없었다.
한없이 그에 가까워진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한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니.
“너…….”
“…….”
“…아니. 됐어.”
턱 밑까지 차올랐던 말은 다시금 삼켜졌다.
‘너는 대체 어떻게…….’
어떻게 오른팔을 다치고도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갈 생각을 했는지.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닐 텐데도, 어떻게 그라운드에서 버틸 수가 있는지.
“…….”
그런 의문은 무엇 하나 말이 되지는 못했다. 몸까지 멀쩡하지 못한 자신에게 이제 남은 것은 얄팍한 자존심뿐이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저에겐 여전히 자존심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은 팀 동기가 되어버린 선수 앞에서는.
“…….”
그리고…….
아직 고등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도 전, 먼저 부상을 경험했던 팀 동기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그것도 윤태성에게만큼은.
* * *
‘VIP 병동은 분명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1, 2인실만 있다는 층은 VIP 병동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경계가 삼엄했다. 실제로는 사람이 적어 조금 한산한 분위기였지만, 이선에게는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죄를 짓고 온 자 특유의 자격지심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강희찬(26, 남)’
겨우 그 이름을 찾았을 때, 이선의 입에선 절로 한숨이 터졌다.
사고가 났던 그 날 이후로, 마치 저의 인생에선 없었던 사람이 된 것처럼 증발해 버린 이름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증발.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였다.
뛰지 않고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지나치게 뛰어서, 마치 입 밖으로 나올 것만 같다.
“…….”
있는 거다. 이 안에. 미닫이문 하나를 열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가 있다.
마치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처럼,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저의 인생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사라지고, 연이라는 것이 이렇게 쉽게 끊길 수 있다는 사실에 이선은 왈칵 울곤 했다.
그리고 문득 떠올랐다. 시험이 끝나고, 커밍아웃한 후 어머니의 앞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스무 살의 여름날. 저는 얼마나 못된 마음을 먹었던 걸까?
처음으로 떠날 이가 아닌, ‘남겨진 이’가 된 이선은 모든 것이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이러다가는 어느 순간, 핸드폰에 저장된 강희찬의 연락처도 갑자기 사라질 것만 같았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제 머릿속에서도 점점 강희찬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그런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이선은 다시 병원을 찾고 말았다. 언젠가 송재혁의 입에서 나왔던 병동 숫자를 기억하며, 미로 같은 커다란 건물을 헤맸다.
‘나빠. 아무리 다쳤지만……. 그래도 너무하잖아.’
재혁이는 이미 두 번이나 얼굴을 봤고, 수술을 잘 마친 모습도 봤다는데……. 메시지에 답장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아, 혹시 병원이라 핸드폰 사용이 안 되는 건가?
아무리 봐도 거기서 거기인 병동을 찾느라 이선은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이를 수상히 여기는 간호사들의 눈총을 받을 때면, 누군가와 연락하는 척, 황급히 엘리베이터로 도망쳤다.
다 말할 거라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찾아왔는지, 다 얘기하고 투정 부릴 거라고.
“…….”
그런 굳은 다짐을 했건만, 막상 그 사람의 이름을 보자 다짐은 눈처럼 녹았다.
“희찬 씨…….”
이선은 차마 들어가지도 못하고 명패의 이름을 손끝으로 더듬어봤다.
강희찬. 26세. 그러고 보니, 희찬 씨가 이제 스물다섯이 아니었다. 해가 넘어가서 한 살을 더 먹었다는 사실을 4월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물론, 자신의 나이 역시.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벅찬 마음을 겨우 버티고 서 있을 때였다. 며칠이 걸려서 겨우, 그것도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설 수 있는 문 너머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어렴풋이 울렸다.
‘…재혁인가?’
이선은 바짝 긴장한 채로 문 가까이에 귀를 갖다 댔다.
송재혁이 있는 거라면 빨리 어딘가로 숨어야 했다. 기자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강희찬은 귀찮게도 구석진 곳으로 병동을 옮겼다. 지금은 식사하러 갔는지 농땡이를 피우는지 안 보이지만, 사설 경호원 한두 명이 병동이 있는 층을 순찰하고 있었다.
이곳까지 들어오기 위해 이선은 간호사에게 송재혁의 이름을 팔아넘겼다. 만약 마주친다고 해도 송재혁은 크게 책망하지는 않겠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상사나 구단에 문책을 받을 수도 있었다. 저번에, 이천에 갔을 때처럼.
이선은 얼굴을 바짝 붙이고 귀를 세웠다.
누가 봐도 수상한 모양새에 물을 뜨러 가던 간병인이 흰 눈을 했다. 하지만 이선은 괘념치 않았다. 저의 인생에서 이렇게 뻔뻔한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잘 들어보니 구단 관계자 같지는 않다. 편하게 반말을 하는 강희찬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터넷에서 제멋대로라느니 황제라느니 하는 평을 받는 모양이지만, 이선이 본 강희찬은 절대 구단 직원들에게 무례하게 군 적이 없었다. 그는 늘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물론, 존댓말을 쓰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구단 직원이 아니라면 안심이었다.
가족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마 강희찬이 적당히 둘러대 주지 않을까.
긴장이 다소 풀리며, 이선은 먼저 온 객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중간에 다리가 아파져 문에 기대어 쪼그려 앉았다. 요새 매일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다가 비몽사몽으로 아침에 출근하고, 주말에도 그의 연락이 혹시라도 올까 봐 핸드폰을 보며 지내던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쭈그려 앉는 게 의외로 되게 편하구나…….’
지나칠 정도로 깨끗한 병원 바닥에 드러누우면 시원하지 않을까 생각할 무렵이었다.
병실의 미닫이문이 이선의 팔과 옆구리를 강타했다.
“……!”
사람이 너무 깜짝 놀라고 아프면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한다. 이선은 그 말에 새삼스레 공감하며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통증을 호소했다.
문이 다시 거칠게 열렸다. 매끄럽게 열려야 할 병실 문이 장애물에 걸린 것에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이선은 또다시 공격이 오기 전, 겨우 몸을 굴리며 미닫이문을 피했다.
그 순간, 이선은 새카맣고 매우 큰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물론 남자 역시 병원 바닥을 구를 기세인 이선과 눈이 마주쳤다.
“…….”
크다. 검다. 그것이 남자를 본 이선이 처음 한 생각이었다.
“…….”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왜 자신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원인을 제공한 게 누구인지 지금쯤이면 눈치를 챘을 법도 한데…….
상당히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남자의 시선은 그저 냉랭하기만 했다. 뭐야, 대체. 수상함과 한심함이 뒤섞인 눈이 한참이나 이선을 향하고 있을 때였다.
“뭐 하냐? 안 나가? 추워. 문 닫아.”
익숙한 목소리가 이번에는 또렷이 들렸다. 이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픔도, 무례한 남자가 문짝으로 두 번이나 자신을 치려고 했던 기억도 싹 날아갔다.
주인을 찾은 강아지처럼 병실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응하는 이선을 남자는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리고 4월인데도 히터를 한겨울처럼 틀어둔 병실에서 화초처럼 지내는 제 친구를 번갈아 보았다.
“…….”
모자부터 신발까지. 온통 검은 것으로만 두르고 있는 남자는 이선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선은 그것이 대체 사과인지 인사인지 구분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자는 보폭이 큰 걸음을 시작했다.
“야! 문 닫고 가라고!”
짜증이 팍 섞인 강희찬의 말소리가 쩌렁하게 복도를 울리는데도, 검은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
이선은 그제야 자신에게 들어가라는 의미로 그가 문을 열어둔 것임을 이해했다. 사복을 입고 있어서 헷갈리지만, 언젠가 경기장에서 봤던 강희찬의 선배라는 사람이었다.
이선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씨발, 진짜 성질머리 개 같아서…….’ 험악한 말이 새어 나오는 병실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섰다. 직접 문을 닫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려던 강희찬과 눈이 마주친 것도 그 순간이었다.
“…….”
“…….”
강희찬 역시 몸을 일으키려던 자세 그대로 멈춘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
“저… 아마, 저 보시고 문 안 닫으신 것 같아요.”
어색하다. 그것도, 마치 있어선 안 될 곳에 들어온 죄인이 된 것처럼 이선은 공기가 따끔거렸다.
“…….”
꿈을 꾸곤 했다. 꿈에서의 자신은 다시 만난 강희찬에게 왜 연락을 안 해주냐며 엉엉 울며 따지기도 했다. 그는 잘못했다고 말하며, 달래주었다. 너른 품에 안겨 우는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그의 팔이 하나뿐이라,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깨고 나서도 울적한 기분이 종일 갔다.
그리고 아무런 연락이 없는 핸드폰을 확인하면, 차라리 꿈이 더 나았다는 지독한 현실만이 남았다.
“…….”
하지만 이런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저를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보는 강희찬은 너무도 낯설었다.
“…문, 닫을까요?”
이선은 어색하게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강희찬의 눈동자는 그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가 다시 이선의 얼굴로 돌아왔다.
“안 들어오고 닫게요?”
“아…….”
“들어와요.”
들어올 것을 허락하는 말이었다. 이선은 마냥 기쁘진 않았다. 요 며칠 동안, 자신이 느껴야만 했던 위화감의 원인을 깨달았다.
허락이 있어야 한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는, 허락 없이 병실을 찾거나 멋대로 들어오는 일은 아직 용납되지 않는다. 자신은 병원에 입원한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무슨 관계인지. 간단한 질문에도 저에게는 답을 할 말이 없었다.
며칠 동안 연락 하나 없던 그에게 화를 낼 자격도 없었다는 사실을 지금 깨달았다.
이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쨌든 지금 자신의 눈앞에 강희찬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팔…….”
눈은 자연스레 어깨까지 깁스가 둘러 있는 그의 오른팔로 갔다.
멍하니 중얼거리는 이선을 보며, 강희찬은 머쓱한 얼굴로 제 팔을 한 번 슥 봤다.
“좀 요란스럽게 감아놓기는 했어요.”
“골절이라고, 기사에서…….”
“아아. 수술 금방 끝나던데요. 부기 안 빠져서 수술을 늦게 들어갔지, 막상 하니까 금방 끝나더라고요.”
목소리엔 장난기가 묻어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통증이 전해지는지 강희찬은 중간에 한 번 인상을 썼다.
이선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침대 옆 보호자용 의자에 몸을 앉혔다.
“골절이면… 그거 뼈 부러진 거잖아요. 어떡해요…….”
“철심 박아놨다니까, 이제 붙기만 하면 된대요.”
“철심…….”
채 완성되지도 못하는 이선의 말끝이 떨렸다. 골절. 뉴스 기사로만 봤던 말의 의미를 철저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이 다친 줄도 모르고…….”
“많이 다친 거 아니라던데? 의사가 그랬어요. 뼈 부러진 거 붙여본 것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수술 시간 짧았다고.”
통깁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선을 향해 강희찬은 재차 변명했다. 하지만 이선의 눈에 점점 반짝이는 물기가 차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저는 이런 것도 모르고……. 연락 안 된다고, 막…….”
“…….”
“다쳐서 힘드셨을 텐데…….”
팔이 저렇게 된 사람이었다. 본인 혼자서는 세수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할 모양새였다. 누군가가 씻는 것을 도와준 듯 그의 머리에는 물기가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에도, 이선은 그의 모습을 하나라도 담으려 꼼꼼히 살펴봤다. 며칠 내내 꿈속에서만 봤던 남자를.
“핸드폰이야, 뭐…….”
“…….”
손 하나만 있어도 할 수 있는 건데.
차마 하지 못한 말은 이선이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강희찬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대신, 다른 곳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귤 먹을래요? 다 까놓고 가서.”
“아…….”
침대 옆에는 가정에서 쓰는 것보다 큰 협탁이 있었다. 그 위에, 그릇도 없이 검은 봉지 위에 껍질이 다 벗겨진 귤들이 놓여 있었다.
‘설마, 아까 나간 선배가 저래 놓고 간 건 아니겠지…….’
대체 저렇게 큼직한 귤을 어떻게 먹으라고. 손도 부자유스러운 사람이라 직접 쪼개서 먹을 수도 없는데, 저렇게 두고 가면 어쩌란 말인가.
이선은 불만을 삼켰다. 먹기 싫게 생긴 귤 무더기에서 가장 윗부분에 있는 것 하나를 집었다. 큼지막한 귤을 집어 들고 잠시 고민하다, 이선은 그것을 반으로 쪼갰다. 그래도 크다.
“희찬 씨, 하나 드실래요?”
이선은 눈치를 보며 귤을 강희찬의 얼굴 높이로 가져갔다.
“…….”
강희찬은 아무런 말 없이 그것을 손으로 받았다. 아이스크림을 거침없이 받아먹었을 때와는 달랐다. 이선은 가슴 어딘가가 욱신거렸다.
“…맛있다.”
사실 맛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제 4월인데 아직도 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네. 그러네요.”
이선이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에 강희찬이 건조한 맞장구를 쳤다. 그럼에도 어딘지 삐걱거리는 어색함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어떠한 말 한마디 없이 그의 차에 몇 시간이고 있던 때가 아득히 옛일처럼 느껴졌다. 마치 다른 이의 병실을 찾아온 것처럼. 이선은 그가 몹시도 낯설었다.
편하게 입으면서도 언제나 단정해 보이는 사복도,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잘 어울리는 유니폼도 아니었다. 환자복을 입은 탓이라고.
그렇게 애써 저 자신을 달래며, 이선은 제 손가락을 못살게 괴롭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강희찬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술을 닫았다. 그리고 말과 함께 마른침을 삼키며 이선을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앞에서 확인해야 들여보내 줄 텐데.”
“그… 명함 주고 들어왔어요.”
“명함?”
강희찬의 물음에 찔린 이선이 저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엄마에게 추궁을 받는 아이처럼 손가락을 더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강희찬은 손을 뻗어 이선의 손을 잡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이선의 말을 가만히 재촉했다.
“선생님들도 명함이 나와요?”
“아니…….”
“…….”
“재, 재혁이 명함이요. 입사할 때 기념으로 준 적 있거든요. 그걸로…….”
결국, 이선의 고개가 푹 숙어졌다.
“허…….”
집으로 숨어버리는 달팽이 같은 모습에 강희찬은 기가 찬 소리를 냈다.
기자들의 쓸데없는 출입을 막기 위해 병동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병실을 옮겼다. 그마저도 강희찬의 병실이 있는 라인에는 다른 환자들이 없는 빈 병실이었고. 밖으로 멀리 나가본 적이 없기에 모르지만, 이쪽 라인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일단 입구의 간호사부터 제제를 넣는단다. 그 이후에 경호원들이 한 번 더 신분 확인을 요구하고.
“…….”
무슨 수로 들어왔나 했더니……. 용케 그 모든 과정을 뚫고 들어왔단다. 그것도, 남의 명함을 내밀며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강희찬은 이선의 정수리를 가만히 봤다. 이 순진한 얼굴로 그런 대담한 짓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여전히 부끄러운지 고개를 들지 못하지만, 이선의 귀 끝은 어느새 보기 좋을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 정도면 얼굴은 안 봐도 가늠이 되었다.
“공무원 사칭죄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공무원이 일반 직장인 사칭하는 건 뭐에 걸려요?”
“자, 잘 계신지 궁금해서……!”
반짝하니 들렸던 이선의 고개는 다시 스르륵 내려갔다.
“다치신 날… 응급실에 갔는데, 가족이나 구단 직원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응급실에… 왔었어요?”
이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떤 모습일지 눈에 선연히 그려졌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허옇게 질렸겠지.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했지만, 사람은 팔 하나가 부러진 거로 기절을 하진 않았다. 때문에, 강희찬은 그날, 병원에 왔던 일을 오롯이 기억했다.
응급실로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진을 찍었다. 뼈가 부러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부기가 빠져야 수술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병실로 옮겨졌다.
그러니 강희찬이 막상 응급실에 있던 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이선이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신호와 속도를 무시할 수 있는 구급차보다 빨리 도착할 수는 없었다. 그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자신은 병실에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병원은 어떻게 알고? 송 PD한테 물어봤어요?”
“…….”
이번에도 이선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고집스레 푹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자 눈가에는 또다시 말간 액체가 고여 있었다.
서러웠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걸까? 강희찬은 부자유스러운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냥…….”
“…….”
“그냥, 여기일 것 같았어요. 저 다쳤을 때도 여기로 왔으니까……. 아마도 이 병원이 아닐까 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여기가 아닐까’ 하는 불확실한 기대 하나로 무모하게 병원 응급실의 문을 열었단다.
무모하고, 대단하고, 안쓰럽다.
낯선 곳에서 홀로 저를 찾아 헤매는 모습. 하지만 이선에게 저의 위치를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이번에는 강희찬의 고개가 숙어질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아플 정도로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자, 눈가로 몰렸던 뜨거움이 천천히 퍼져 나갔다.
“아, 희찬 씨. 혹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마실 거라도 사 올까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이선은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핸드폰을 들고 어정쩡하게 일어나려는 다리가 느껴졌다.
강희찬은 고개를 저으며 뒤늦게 대답했다.
“됐어요. 다들 사 오는 게 음료순데.”
“아…….”
“냉장고에 많으니까 꺼내 마셔요.”
넓은 병실 한구석에는 성인 남자의 가슴께까지 올 만한 냉장고가 자리했다. 강희찬이 턱짓으로 가리키는 냉장고를 한 번 본 이선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금 눈을 강희찬에게 두었을 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낯설기만 한 강희찬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음에 올 땐 맛있는 거 사 올게요.”
“송 PD 명함은 한 열 장 가지고 있어요?”
“아…….”
호기롭게 말했지만, 막상 거기까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재혁이에게 사정을 잘 설명하면 괜찮으려나? 하나 있다는 강희찬의 남동생을 사칭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이 들었지.
고민하는 이선의 어깨가 점점 처졌다.
‘오늘 이렇게 들어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다음에 다시 오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자신은 이곳에 들어올 어떠한 명분도, 자격도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코끝이 시큰했다. 다시금 응급실에 홀로 남아 주저앉을 때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거는…….”
어디에 있는지. 잘 있는 건지. 한 번만이라도 대답해 주면 안 되냐고. 그를 원망하던 요 며칠의 정이선이 되고 있었다.
“뭐 좋은 데라고 또 오려고 해요. 됐어요.”
“…네?”
날이라고는 서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선의 심장은 순간 멈추었다 다시 뛰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마음만 먹으면 그에게 닿을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데도 상상 속의 강희찬보다도 멀었다.
낯선 감각의 정체가 슬슬 형체를 갖춰왔다.
‘다른 사람 같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기분 탓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이선을 강희찬은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피하려는 사람처럼 왼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이제 상태 좀 보다가 금방 퇴원할 텐데요, 뭐. 안 와도 돼요.”
“아…….”
‘…기분 탓이겠지.’
그러고 보면, 강희찬은 저런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 가게에 갔을 때, 한참 위의 어른을 향해 축객령을 내리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퇴근을 하라 배려를 보인 적도 있지 않았는가.
다소 오해를 부를 수 있는 화법은 그의 특성이었다.
이선은 돌멩이가 떨어진 호수처럼 파문이 번져가는 제 마음을 애써 눌렀다.
불안하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을 것만 같다. 다른 화젯거리. 다른 거로. 허둥거리며 입술을 떼었지만, 머리는 몸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고를 거치지 못한 이선의 입술은 가장 최악의 소재를 뱉어냈다.
“그,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하실 말씀 있으시다고 했던 건…….”
“…네?”
“아니……. 개막전 끝나면…….”
이어지는 말이 점차 잦아들었다.
“할 말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냥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선은 뒤늦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 들어와서는 안 될 늪에 발을 집어넣은 꼴이었다.
바보같이 제 발로 늪에 들어간 이선을 강희찬이 가만히 보았다.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곤 했다. 가만히 다가오는 시선이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때마다, 이선은 명치 어딘가가 울렁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눈길을 받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벅차올라 도망가고 싶으면서도, 그러고 싶지 않은 양가적인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였다. 도망가야 한다고. 평생을 그래 왔던 것처럼, 어디론가 도망가 둥그렇게 몸을 말고 피해야 한다고.
지금… 이 사람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지만, 이선의 몸은 따라주지 못했다. 전의를 상실한 병사처럼 힘이 빠져, 등받이도 없는 스툴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잊어버렸어요.”
“…….”
“잊어버렸어요. 정 선생님도 잊어버려요. 별로 중요한 말 아니었을 테니까.”
“희찬 씨.”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이선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사람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온 건 낯선 시선뿐이었다. 가만히 바라보는 까만 눈은 이미 결심을 마친 채였다.
“잊어버릴 정도면, 별것도 아니었을 거예요. 신경 쓰지 마요.”
“희찬 씨, 우리…….”
또 하나의 벽이 생겼다. 그가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이선은 그의 경계 안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마지노선까지 쫓기고서야 이선은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껏 느낀 위화감을.
지금 이 순간, 그가 대체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우리, 있잖아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이선은 몰랐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시작을 청하며 손을 내밀어본 일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협소한 인간관계조차 저는 누군가 내민 손을 잡았을 뿐이다. 송재혁도, 신규진도. 자신은 먼저 누군가에게 용기를 내어 손을 내민 적이 없었다.
그것이 미치도록 후회가 되었다. 조금만 더 능숙했다면……. 어떤 말을 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어야 그가 마음을 바꿔줄지 이선은 알지 못했다.
울고 싶었다. 지금 내밀 수 있는 것이라고는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처럼 초라한 마음뿐이었다. 그조차도 오롯이 표현할 말을 이선은 알지 못했다.
“…….”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못한다. 그제야 이선은 그가 자신에게 하려던 말의 무게를 실감했다. 가만히 그의 손을 기다리기만 하던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도.
이렇게 힘든 것을 하려고…….
“정 선생님.”
강희찬이 부드럽게 이선의 말을 끊었다. 흔들리는 이선의 눈이 그를 향했어도, 여전히 단단한 고치 안에 들어간 강희찬은 미동도 없었다.
그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조금만 시무룩한 기색을 보여도 무슨 일이냐고 걱정하며 보듬어주던 그 남자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강희찬은 이선의 손을 향해 왼팔을 뻗었다. 앉아 있는 자리가 먼 탓에 몸까지 움직이려고 하기에, 이선은 그를 만류하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마주한 온기가 너무도 따뜻했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터질 것처럼. 깊어가는 밤이 다가오는 아침을 의미하는 것처럼, 따뜻한 그의 손길이 의미하는 것은 너무도 명확했다.
“희찬 씨……. 저,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일이 있어서…….”
이선이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강희찬은 그것을 놓지 않았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벗어날 수는 없도록. 딱 그 정도로 이선을 옭아매는 그의 손길도 여전했다.
“정 선생님은… 내가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착하고, 예쁜 사람이에요.”
“…….”
“난 거짓말은 못 하는 편이니까, 믿어도 돼요.”
툭. 바지 위로 떨어진 물방울이 점점 번져갔다.
손목을 잡은 강희찬의 손끝이 잠시 떨리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또다시 차오른 눈물 탓에 그리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사랑받을 거예요. 그럴 수 있어요.”
나직한 목소리는 벽을 그었고, 그와 동시에 최면을 걸었다.
“정 선생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니까. 꼭 내가 아니라도, 누구든 아껴줄 거예요.”
“희찬 씨, 이러지 마세요…….”
“그냥,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이러시면 안 돼요. 이러지 말아주세요.”
투둑.
눈물은 서로의 자리를 밀어내며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말간 뺨을 안쓰러울 만치 적시는 모습을 보며, 강희찬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 뜻을 오해했는지 이선의 손이 다급히 그의 손을 붙들었다.
“이러지 마세요. 그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다 강희찬 씨 때문이에요.’
휘청휘청. 항상 어딘가로 휙 사라질 것처럼 불안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이선은 잘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의 기억에서는 언제나 말갛고 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사실 이선이 우는 모습을 본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멍하니 걸어오다가, 제 앞에 도착한 순간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이 툭 떨어졌다. 차마 더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품에 넣어버렸던 그때의 이선이 지금처럼 울었을까?
“희찬 씨… 이러시면 안 돼요.”
처음 제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그날보다 더 서글퍼 보이는 건 지극히 저의 기분 탓이리라.
그럴 리가 없었다. 몇 년을 혼자 마음에 두었던 짝사랑이었다. 고작해야 몇 달일 저를 향한 마음이 그와 같을 리가 없었다. 그래선 안 되었다.
달래고 싶다.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품에 넣고, 내가 다 잘못했다고 빌고 싶었다.
하지만 강희찬에겐 이선을 끌어 안아줄 양팔이 없었다. 그날처럼 도망치려 해도 강하게 안아버릴 수가 없었다.
그냥 나로 하라고. 차라리 내가 낫다고.
그런 호기로운 말을 내뱉을 용기도, 자격도 이제는 없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저는 아마도 처음부터, 감히 이선에게는 어울릴 사람이 아니었다고.
그걸 지금 깨달은 거다.
“잊어버릴 거예요. 할 수 있어요. 나도 했으니까, 정 선생도 할 수 있어요.”
“이러지 마세요. 제발……. 제발…….”
강희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제 손을 양손으로 붙잡아온 이선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러지… 윽, 말아주세요…….”
눈을 감으면 울먹이는 소리는 어느새 흐느낌으로 바뀐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닐 거다. 이선에게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저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았다.
아직은 저도, 이선도 흐르지 않은 시간 속에 있었다. 괜찮아질 거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적어도… 적어도 이선에게만큼은.
“…….”
“이러지 마세요, 희찬 씨…….”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끝없는 다짐을 했다. 뜨거운 것이 떨어질 것만 같아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강희찬은 제 손을 간절히 붙잡는 연약한 온기만큼은 차마 뿌리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