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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라면 훈련 스케줄이 잡혀 있던 날이 갑작스레 휴식일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스트레칭을 마침과 동시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치기를 기다려보자고 잠시 지켜봤지만, 잔디에 물이 고일 정도로 쏟아져 내리자 결국 최 감독은 훈련을 취소했다.
아예 새벽부터 내렸으면 오랜만에 늦잠이라도 잤을 텐데. 운동까지 한 탓에 숙소에 돌아와서도 다시 잘 수는 없었다.
촌구석에서 운동을 하다 보면 반드시 생기는 습성이 있다. 바로 쉬는 날이면, 할 짓이 없어도 꼭 번화가로 나가려고 용을 쓰는 것이다. 2군 생활이 비교적 짧았던 강희찬은 그런 버릇이 들기도 전에 서울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한국에서도 그 지랄이었는데. 외국에 나오면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다.
살 것도 없는 주제에, 나가서 하는 거라고는 고기를 사 먹는 게 전부인데. 오늘도 인간들은 부지런히도 번화가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뭐 오늘 외출을 위해 저렇게까지 나오는 것도 대충 이해는 갔다. 오늘 향하는 곳은, 강희찬이 이름 붙인 ‘시골’도, 그냥 번화가도 아니었다. 바로 시드니다.
오늘은 특이하게도 강희찬도 그 행동에 동참했다.
“가면 점심시간 좀 애매할 것 같은데……. 희찬이 뭐 살 거 있다고? 그럼 쇼핑몰 먼저 갈까?”
주야장천 한 선글라스를 끼는 탓에 그 모양대로 얼굴이 탄 통역이 뒷좌석을 보며 물었다.
국제면허가 없는 강희찬은 얌전히 시트에 엉덩이를 붙였다.
“밥 먼저 먹으면 안 돼요? 고기 먹고 싶은데. 여긴 소고기잖아요.”
“…….”
강희찬은 말없이 창에 머리를 기댔다. 선글라스 오이맨의 목소리는 자장가라고 애써 자기최면을 걸었다.
생각해 보면, 이선에게는 자신만만하게 훈련이 끝나고 자신이 호텔로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저에게는 호주에서 운전할 수 있는 국제면허증이 없었다. 그걸 만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요샌 좀 간단하게 받을 수 있다고 하던데……. 앞으로 같이 외국에 간다면, 아무래도 필요하겠지?’
면허가 있었다면, 오늘처럼 오이와 늙은 호박이 그려진 티셔츠를 고민하는 이승주의 패션쇼를 30분 동안이나 볼 필요도 없었다. 혼자 나가면 그만일 테니까.
“…….”
들뜬 이들의 소음을 무시하는 대신, 강희찬은 핸드폰에 집중했다. 이선에게 메시지를 보낼 시간이었다.
[오늘은 뭐 시켜 먹어요? 짜장면? 아니면 정식?]
학교는 애새끼들이 없다고 방학 때는 점심밥도 주지 않는다. 중국 음식, 정식, 가끔 내키면 직접 나가서 칼국수. 단조롭기 짝이 없는 이선의 점심밥 로테이션은 이미 외운 상태였다.
사흘에 한 번씩 같은 메뉴를 먹다니,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듣는 강희찬이 다 질릴 만큼. 하지만 그는 질리지도 않고 매일 같은 질문을 했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답을 알면서도 자꾸 묻고 싶었다.
[모르겠어요. 중국 음식은 어제 먹었으니까 아마도 정식 먹을 것 같은데…….]
[근데 희찬 씨 지금 핸드폰 해도 괜찮아요? 훈련하는 거 아니에요?]
글자만 읽어도 이선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지금 비 와서 훈련 취소됐어요.]
[아아, 어제는 맑은 것 같던데…….]
[호주 날씨는 어떻게 알아요?]
[기사로 올라온 사진 봤어요. 거기 많이 덥죠?]
아무래도 방학이라 애새끼들이 없으니 하루 종일 교무실에서 잡일이나 하는 모양이다. 강희찬이 새로이 알게 된 정이선은 생각보다 인터넷 기사를 많이 찾아보는 사람이었다. 선생이란 직업이 딱히 한가로운 것 같지는 않은데, 또 마냥 눈이 빠지게 바쁜 것만도 아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사진을 봤을까?’
궁금함을 누르며 답장을 치고 있었는데, 그보다 이선의 말이 먼저 올라왔다.
[근데 희찬 씨… 거기 많이 더워요?]
[더울 땐 덥고 그늘 들어가면 살만하고 그러는데요. 왜요?]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아까 물었던 말을 또 하는 걸까? 가느스름해진 강희찬의 눈이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아니… 너무 더워도 막 옷 같은 거 벗으시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기자분들이 너무 막 사진을 찍으시는 것 같아서…….]
[그런 거 허락받고 찍은 것 같지는 않은데.]
“…….”
‘뭔 소리야.’
미간을 찌푸린 강희찬은 기억을 더듬었다. 오늘 비가 오려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제는 심각할 정도로 더웠다. 더운 나라라는 걸 알면서 찾아오긴 했어도,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더웠다. 그 때문에, 강희찬은 러닝을 하다 말고 한 장 입고 있던 훈련복 상의를 벗고 뛰었다. 껴입고 있다가는 뒈질 것 같아서.
그 모습이 아마도 기자들의 카메라에 찍힌 모양이었다. 답지 않게 연속으로 오는 메시지의 이유를 뒤늦게 파악했다. 그와 동시에, 강희찬의 입술이 옅은 호선을 그렸다.
[정 선생 학교에서 그런 사진이나 찾아봅니까?]
장난스레 물은 말에 답장은 금방 왔다.
[아니에요!]
[그냥 기사 사진 넘기다가 우연히 봤어요!]
[일부러 찾지 않았어요.]
‘문자가 얼마나 빠른 건데.’
동시에 도착한 거나 다름없는 메시지가 연속으로 강희찬의 핸드폰을 울리게 만들었다.
토끼처럼 화들짝 놀란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뒤늦게 다른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겠지만, 아마도 딴짓을 하는 중이라는 걸 들키겠지.
[강희찬 씨가 기분 나쁠 것 같아서 알려드린 것뿐이에요.]
다소 토라졌는지 ‘희찬 씨’에서 ‘강희찬 씨’가 되었다.
화드득 반응하는 게 퍽 귀엽고, 놀리는 맛도 있지만 적당히 해야 한다. 토라져서는 ‘지금 부장 선생님이 회의하신대요’라는 말로 내빼면, 자신만 손해였다.
[알았어요. 그럼 앞으로 사진 찍지 말라고 할까요?]
[그건 좀 그렇고. 더워도 조금만 참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막 다들 함부로 찍으니까…….]
[사진은 보고 싶어요.]
…사진이 찍히는 게 싫은 건 아닌 모양이네?
영 종잡기 힘든 사람이다. 이선의 모습을 가만히 그려봤다.
다소 크기가 큰 핸드폰을 양손에 꼭 쥐고, 누구보다 성심껏 문자를 적는 그의 모습을. 자신이 조금이라도 놀리면 처진 눈에 억울함이 담겨서 핸드폰을 바라볼 터였다.
실제로 저의 팔이 닿을 법한 거리에 있는 이선을 상상해 봤다. 볼을 통통하게 부풀리고 비죽 내밀어지는 입술이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토라지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리는 습관까지. 한국에 두고 온 것이 너무 많았다.
‘강희찬 씨가 기분 나쁠 것 같아서 알려드린 것뿐이에요.’
“…….”
그래도, 역시 저런 말은 직접 들려주었으면 좋을 텐데. 하물며 영상통화였으면, 이렇게 아쉽지만은 않았을까? 떠올려보지만, 여전히 영상통화를 부끄러워하는 이선 덕분에 상상은 힘들었다.
퍽 아쉽기는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있겠지. 날은 많았다. 제 눈앞에서, 혹은 품 안에서 서운하다고 옹알거리는 모습을 볼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한순간도 서운하지 않도록, 웃게 만들고 싶지만 조금쯤은 토라진 모습을 보고 싶은 것도 진심이었다.
[희찬 씨, 저 근데 이제 회의 가야 할 것 같아요.]
[왜요. 회의 월수에 하잖아요.]
역시 삐친 거 맞잖아.
[그렇긴 한데 이제 애들 반 편성이랑 담임 배정 때문에요. 다음 주엔 연수 가시는 선생님들 많거든요.]
강희찬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조금만 놀려먹을걸. 삐친 게 분명했다.
영상통화를 걸려던 참이었다. 답이 없는 자신을 향해, 이선이 또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퇴근하고 다시 연락할게요.]
그 말 아래로 못생긴 갈색 개새끼가 손을 흔드는 이모티콘이 바로 올라온다. 평소 쓰던 노란 대가리에는 ‘안녕’을 표현할 만한 게 없어서 특별히 쓴 모양이었다.
…삐친 게 아니라 진짜 회의가 잡히긴 한 건가?
의심을 풀지 못한 표정 그대로, 강희찬은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내가 다시 연락할게’라는 말 이후로 영영 연락 없이 전화번호가 바뀌었다던 누군가의 이별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들었을 당시야 ‘세상에 별 미친년이 다 있구나’ 정도로 넘어갔지만……. 아니, 그래도 이선이라면 절대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즐겁게 이어지던 대화의 흐름이 뚝 끊긴 탓에, 강희찬의 기분은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처럼 한숨에 우중충해졌다.
얼마 전, 이선은 뜬금없게도 웬 음식 사진 하나를 보내왔다. 강희찬은 이선과의 메신저 대화창을 한참이나 올려 그때의 사진을 찾아냈다.
[뭡니까?]
[완탕면이래요. 엄마랑 야식으로 먹었는데 맛있었어요.]
[이딴 거 말고 얼굴 나온 사진 없어요? 엄마랑 같이 찍은 거.]
[어머니 찍어드린 건 있는데 보내줄까요?]
[남의 엄마 사진을 내가 왜 봐요? 그럼 지금 셀카 하나 찍어서 보내봐요.]
[그거는 좀…….]
완탕면인지 뭔지 하는 국수 말고, 그냥 얼굴 사진이나 찍어서 보내줄 것이지. 하여간 쓸데없는 짓이나 하는 모습이 답답하면서도 내심 귀여웠다. 그래도 얼굴이나마 한 번 보려고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부끄럽다는 이유로 받지 않은 건 별로 안 귀여웠고.
오늘 구태여 냄새나는 새끼들 사이에 끼어서 번화가로 나가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선이 부탁한 운동화를 사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수업할 때 신을 용도라고, 싸고 튼튼하기만 하면 괜찮다고 말했지만 어림도 없다. 오늘 하루 시드니를 이 잡듯 뒤져서라도 어울리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프롬 오스트리안지 오스트레일리아인지. 아무튼. 호주에서 살 수 있는 것으로.
“쇼핑몰 먼저 들러요.”
도착을 하자마자 식당부터 가려는 녀석들의 의사를 누른 채, 강희찬은 첫 목적지를 통역에게 전했다.
이승주와 나이가 비슷비슷한 새끼들은 각자 찾아낸 맛집이 있다고 앙알거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해가 지나고, 스물여섯이 된 강희찬은 다시 한번 진화해 있었다.
* * *
규모로만 따지면 어지간한 중학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외벽의 알록달록한 페인트 빛깔은 이곳이 초등학교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알록달록 파스텔 색조의 건물과 위화감이 없는 남자 하나가 중앙현관을 나서는 중이다. 교직원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고 실내화를 넣는다. 밖으로 나와 신발에 발을 넣고 앞코를 콩콩. 신발을 신는 모습을 빠짐없이 보았다.
정이선이었다. 방학이라 그런지, 아니면 오늘은 그 까다롭다는 교감이 출근을 안 한 모양인지. 짙은 색의 민무늬 맨투맨을 입고, 그 위에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최대치가 니트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군.
송재혁이 남자 교직원들의 옷차림에 대해 생각을 하는 사이, 이선은 그가 차를 세운 쪽으로 우다다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보며, 조수석의 잠금을 풀었다.
“벌써 퇴근해도 돼?”
“응. 다 같이 일찍 나가기로 해서 괜찮아.”
아무리 방학이라도 3시가 공무원이 퇴근하기에 적합한 시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출장을 가기 전, 밥이라도 먹자고 만났으나 시간은 애매했다. 결국, 차가 있는 자신이 이선의 동네로 가서 대충 커피로 때우자고 서로 합의를 마쳤다. 겨울임에도 드물게 햇살이 좋은 오후를 놓치기는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제 계절이 반대인 탓에 더운 나라로 가게 될 송재혁에게는 더더욱.
“여기 괜찮더라. 저번에 와보니까. 조용하고, 그늘 없어서 따뜻하고.”
한 손에 커피를 든 이선이 자신 있는 걸음을 척척 옮긴다. 그러고는 공원 가장자리의 벤치 하나를 가리켰다. 저쪽에 정자도 있는데 왜 굳이 벤치에 앉나 싶었지만, 이선의 말대로 그늘이 없어서 오늘처럼 따뜻한 해를 즐기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학부모들 만날까 봐 밖에 잘 안 나가는 줄 알았더니. 혼자 산책했어?”
“어? 어……. 으응.”
홈쇼핑의 간판 쇼호스트처럼 자신 있게 가리키던 손길이 쭈뼛거린다. 시선을 피하더니, 이선은 도망을 치듯 벤치에 앉았다. 다급히 커피를 마시려다 뜨거워서 허둥거리는 꼴까지.
“아, 뜨……!”
…저래서야 여기에 누구랑 왔는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지 않은가.
“쯧. 야, 닦아라.”
“아……. 고마워.”
송재혁은 카페에서 한 움큼 훔쳐 온 냅킨을 내밀었다. 정이선은 그중 하나를 세심히 집어 입가를 꼼꼼히 닦고, 남은 뭉텅이를 어찌할까 고민했다. 결국, 벤치 위에 두는 것이 최선인 모양이다.
느릿한 움직임을 보며, 송재혁은 벤치에 등을 기댔다.
“…….”
‘정 선생, 좋아하는 색이 뭐예요? 신발 같은 거 고를 때.’
강희찬이 출국하던 날,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물었다. 카메라를 들고 오들거리던 송재혁은 전후사정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놈의 정 선생, 보이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둬야지.’ 혹은 ‘대체 어쩌다가 강희찬이랑 엮이게 된 거냐?’ 그런 생각뿐이었는데…….
따끈한 볕이 몸을 감쌌고, 그럼에도 코끝을 스치는 공기는 상쾌할 만큼 찼다. 기분이 좋아지는 곳에 몸을 편히 기대니, 마음 역시 누그러졌다. 저보다 강희찬이 먼저 이 안락함을 누렸다는 사실에는 다소 심술이 돋긴 했지만.
‘…그래. 생각해 보면 정 선생이 뭘 잘못했다고.’
잘 모르겠으나, 언제나 그랬듯 강희찬의 탓일 거다. 사건 현장에 강희찬이 있다면, 높은 확률로 그가 원흉이었으니까. 바보 같은 정 선생은 또 ‘어어어’ 하다가 홀랑 넘어간 모양이지.
“…….”
‘뭔가…….’
나란히 이러고 있자니, 볕을 쬐는 할아버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인데. 이선은 조용히 웃었다.
“내일 호주 가는데, 뭐 필요한 거 있어? 그래도 한 2주는 머물다 들어올 거라서 바로 필요한 거는 말고.”
“아니야. 괜찮아.”
선선히 고개가 가로저어진다.
정 선생은 잘못이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앙큼하게 나온다면 괜한 심술이 돋는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마치 친구들과 1박으로 여행을 간다고 해놓고, 나중에 알고 보니 남자친구와 갔다는 걸 알았을 때의 부모 마음이 이렇겠지.
송재혁은 이 심술을 숨길 생각이 사라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가 강희찬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로도 이길 수 있는 정이선이었다. 강약약강은 생명체라면 본디 가지고 있는 공통의 본성이었다.
“왜? 강희찬한테는 신발 사다 달라고 부탁한 거 아니야?”
테이크 아웃용 종이컵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송재혁은 아무렇지 않게 툭 뱉었다.
“컥! 콜록, 콜록……!”
그와 동시에 이선의 입에선 다시금 기침이 터졌다. 커피가 어디로 잘못 들어갔는지, 쿨럭거리는 모습이 무슨 폐병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송재혁은 흠칫거리며 옆을 보았다.
“야, 괜찮냐?”
살포시 내려두었던 카페의 냅킨이 다시 이선의 손에 들어갔다. 정이선은 냅킨 뭉치로 입을 틀어막고서도 한동안 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어린 시절에 천식이 있었다고 했던가? 지금 이렇게 죽을 정도로 기침을 하는 게,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이선의 기침은 겨우 멎었다.
송재혁은 왠지 모르게 강희찬의 얼굴이 생각났다. 이렇게 심하게 기침을 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가는,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영문을 알 수 없는 한기가 돋았다. 강희찬은 남이 기침을 좀 한다고 해서 신경도 쓸 캐릭터가 아님을 알았음에도, 송재혁은 왠지 두려움이 느껴졌다.
“물이라도 마실래? 사다 줘?”
“아, 아냐. 괜찮아.”
“…그래?”
“응…….”
다시 쓰진 못할 것 같은 냅킨이 이선의 손 안에서 뭉쳐 있었다. 마치 동아줄을 잡은 듯 쓰레기를 잡은 손은 뼈가 튀어나와 있었다. 저의 얼굴색을 살피는 이선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떻게 아는 건지. 혹시나 불쾌할까 생각하는 건지.
그렇게 자신의 기분을 살피는 얼굴이 여실히 느껴지는 탓에, 송재혁은 한숨을 뱉었다. 번듯한 직업이 생기고 이래저래 사회인의 탈을 뒤집어썼지만, 여전히 친구는 고등학생 시절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그 사실이 송재혁의 입을 쓰게 만들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네가 어떤 성별을 만나서 불쾌한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 자체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뿐이라고.
그런 조리 있는 설명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신, 다정한 설명이 익숙하지 않은 사내의 입에선 일부러 더 틱틱거리는 말이 나왔다.
“넌 왜 그런 부탁을 거기에 하냐?”
“…어?”
“나한테 말하면 되지.”
이선의 입술은 필요 이상으로 앙다물려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도록도록 소리를 낼 것만 같다. 아직도 저의 기분을 살피는 게 분명했다.
송재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 중간에 한국 오는데, 받아다 줄까?”
대체 누구에서 무엇을. 중요한 말들이 쏙 빠져 있었지만, 정이선이라면 알아들을 것이다. 이제 저의 기분 따위나 살피지 말고,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이나 해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송재혁의 장난기 어린 얼굴을 보던 이선은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그러고는 몸을 다시금 정면으로 돌렸다.
“…아니. 괜찮아.”
―라는 간단하지만 제법 단호한 말과 함께.
“…….”
요것들 봐라?
송재혁은 시선을 피하며 뻣뻣하게 앞을 보는 이선의 옆얼굴을 빤히 봤다. 간신히 내리눌렀던 심술보가 피었다.
“왜? 우리 호주캠프 끝나면 한국 안 거치고 바로 일본으로 가. 2차 캠프 끝나고 한국 와도 일주일도 못 쉬고 바로 시범경기 일정 잡힐 거고.”
“…….”
“서울은 추우니까 고척 아니면 거의 지방에만 있을걸? 너, 신발 4월에 개막해야 받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아.”
중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워낙 근거리였다. 작지만 확실한 목소리가 송재혁의 귀를 파고들었다.
‘허, 참.’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담. 손바닥이 다 근질거리는 탓에, 송재혁은 제 청바지의 허벅지 부근에 슥슥 문질렀다.
역시 강희찬과는 달리, 정 선생은 놀리는 맛이 있다. 강희찬에게 이랬어 봐라. 네 신발도 아닌데, 뭔 상관이냐고. 길가에 뿌려진 토사물을 보듯 하며 무시했겠지.
하지만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움찔거리는 모습도 슬슬 안쓰럽다. 송재혁은 제 친구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던 눈길을 거두었다.
네 애인의 내리 지랄의 화풀이라며 달게 받으라기엔, 정 선생은 불쌍했다. 대체 강희찬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순진하게 홀랑 넘어간 죄밖에 없다. 적당히 하자. 강희찬이 알면 날 가만두지 않을 것 같으니.
“신발은 꼭 애인이 갖다 줘야 되는 거냐? 완전 웃기네.”
“어?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만나는 거 아니야? 그래서 강희찬한테 부탁한 거잖아.”
“아니……. 그러자고 한 적 없는데…….”
어물어물. 다시금 뭔가를 숨기는 양 머뭇거리는 입술이 의외의 말을 뱉었다.
뭐야. 아직 사귀는 건 아니었나? 이게 썸이란 거구나. 송재혁은 비통한 심정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래 산 것 같진 않은데, 아니었다.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나. 강희찬과 정 선생이 썸을 타고 있었다.
뭔가 가슴 한편이 뿌듯하면서도 허한 느낌에 송재혁은 식은 커피를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정 선생이… 그런 수작질도 부릴 줄 아는구나.”
“아냐! 나는, 수작이 아니라 정말 필요해서……!”
“…….”
양 주먹을 말아쥐고 항변하듯 발끈하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뚝 멈추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어깨가 추욱 내려온다.
“…별로지?”
“…….”
“좀 번거롭다고 생각하려나? 희찬 씨, 출국하는 거 보니까 짐도 엄청 많던데……. 근데, 왜 희찬 씨만 짐을 날라? 다른 사람들은 다 커피 마시던데.”
“허…….”
‘…대꾸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
역시 연애란 백해무익했다. 콩깍지가 저런 식으로 덮이다니. 강희찬의 곁에서 열심히 함께 일을 하던 다른 선수들에게 스텔스 기능이 있었나 보다.
송재혁은 ‘희찬 씨’라는, 소름 돋도록 간지러운 호칭은 애써 무시했다.
“아, 뭐… 그래. 그럼 그 나이롱 공시생은 이제 쫑이고?”
“으응……. 그냥, 뭐. 원래도 끝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서…….”
“강희찬한테 말해라. 좋아하겠네.”
“희찬 씨, 아는데?”
“…안다고?”
귀여워서 차마 두고 보기도 힘든 썸을 종결시킬 방책을 내놓은 송재혁은 의외의 답을 들었다. 의아한 눈으로 이선을 보니, 이선 역시 비슷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강희찬이 안다고?”
“응.”
이선의 고개가 대답보다 먼저 끄덕여졌다. 목소리는 한발 뒤였다.
“어쩌다가?”
“그,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렇다면 커플로 향해가는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길을 가는 중인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 선생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좀 별로라고 생각하겠지? 그때 달래주기는 했는데. 희찬 씨, 착하시니까…….”
“…….”
…시발,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이선은 곁에 있는 자신을 안중에 두지 않은 듯, 홀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 같은데, 그딴 건 송재혁에겐 듣고 싶으면서도 듣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저 자신의 청력을 의심하게 하는 말이 뇌리에 박혔다. 착한 강희찬이라니. 이건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냐? 누가 착하다고?”
“왜. 희찬 씨 착해. 너는 매일 같이 일하니까 알잖아.”
“뭐래는 거야.”
몇 년째 나름대로 직장동료로 지내온 자신은 발견하지 못한 ‘강희찬의 착함’을 대체 어떤 방식으로 발견한 건지. 역시 초등학교 교사였다. 영 글러먹은 초등학생들에게서도 칭찬할 거리를 찾아내는 능력은 강희찬에게도 발휘되는 모양이었다.
“야구 할 때도 남들보다 공도 많이 던지는데 상도 잘 못 받고…….”
“야, 그건……. 아, 됐어. 뭔 말을 못 하겠네.”
더 말을 섞고 싶지 않다. 콩깍지가 쓰인 정이선은 영 못 써먹을 인간이 되었다. 야매 공시생에게 홀려서 돈을 갖다 바칠 때도 대충 느꼈지만, 인간이 참 한결같았다.
벗어나고 싶은 주제에서 탈출하기엔 말을 돌리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송재혁은 어쩌다가 얘기가 이리로 빠지게 되었을까 더듬었다.
“뭐, 아무튼. 싫을 게 뭐가 있겠냐? 춤을 추지. 썸 타는 사람이 짝사랑 접었다는데.”
“…그런 거 아니야.”
“뭘 아까부터 그런 거 아니래. 그리고 신발 셔틀도. 강희찬은 좋아하겠지. 나한테 너 무슨 색 신발 좋아하냐고 물어보던데.”
“어? 정말?”
“그럼 네가 운동화 사달라고 부탁한 걸 내가 무슨 수로 알았겠냐?”
“아…….”
멍청하게 박이 터지는 소리나 하고. 멍한 소리를 들으며, 송재혁은 끌끌 혀를 찼다.
그래. 생각해 보면 정 선생이 연애와 관련하여 해봤던 건 혼자 임자가 있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전부였다. 고등학교 때도 있었겠지만, 그래 봐야 김은호의 숙제를 도와주거나 연애 흉내를 내봤겠지.
이쪽으로는 그 시절에서 전혀 성장할 기회가 없었던 친구였다. 그러니 다소 닭살이 돋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자. 송재혁은 마음의 평수를 넓히기로 했다.
“너 생각을 해봐라. 자기 좋다고 뻔한 수작질이나 부리는데, 싫어할 남자가 어딨냐?”
“…수작질 아니야. 진짜 운동화 필요해. 체육수업 때 신을 거야.”
“아, 예. 그러십니까. 그래서 학기 다 시작하고 4월에나 신발 받겠다고?”
“…….”
“…귀엽게들도 논다. 그러면 재밌냐?”
“뭐.”
하는 짓들이 하도 귀여워서 이젠 보기가 힘들다. 쩝. 송재혁은 커피로 인해 텁텁해진 입맛을 다셨다.
아까부터 제 눈을 잘 보지 못하는 이선을 살피니, 어느새 귀 끝이 발개져 있었다. 겨울이긴 하지만, 추워서는 아니겠지.
“흥.”
송재혁은 시선을 거두어 이선에게 자유를 주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꼬마애 하나가 전동 킥보드를 타며 공원 안을 뱅글뱅글 돈다. 잠시 보다가 금방 질려버린 송재혁은 시선을 조금 들어 올렸다. 역시 한낮과 어울리는 청명한 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해는 좋았다. 푸른 하늘을 보며, 송재혁은 이것이 이제 막 시작을 하는 어느 연인들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그리고 그것을 비추는 눈이 시릴 정도로 반짝이는 햇살. 지금처럼, 누군가와 나란히 서툰 한 걸음을 시작하는 이를 따뜻하게 비춰주기를.
“…나중에 셋이 밥이나 먹어.”
“응? 아…….”
“불편하면 말고.”
“아니야. 너만 괜찮으면…….”
“…….”
조금 분하지만……. 자신은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언젠가 이선의 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래도 강희찬은 정이선에겐 분명 좋은 경험이 될 테니. 그렇지만 너무 빨리 이선의 곁을 떠나지는 않아주었으면 좋겠다고.
기회가 된다면 강희찬을 향해 진심으로 부탁할 각오를 할 만큼, 저는 응원하고 있었다.
막 시작하는 친구의 걸음마를 보며.
* * *
‘덥다, 씨발…….’
폐가 익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제법 현실감 있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숨을 쉬어도 오히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묘한 감각이 몸을 덮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죽을 것 같은데, 심지어 러닝 중이었다.
훈련복을 펄럭였다. 하지만 불어오는 더운 바람에 더 짜증이 난다. 결국 강희찬의 발걸음은 더그아웃을 향했다.
“왜 러닝 땡땡이 치냐.”
최 감독이 기자들에게 우글우글 둘러싸인 채 물었다. 색깔만 다른 피케티셔츠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에서 눈을 떼며 강희찬이 말했다.
“…물 가지러 왔습니다.”
“승주가 아이스박스 챙겼잖아?”
“음료수밖에 없어서요.”
“아무거나 마셔. 까탈스러운 새끼야. 너, 캠프 전에 몸도 안 만들고 와서 미워, 인마.”
호주로 출국하던 날. 겨우내 개인 훈련을 가지 못하고 한국에서 어영부영 훈련했던 강희찬을 본 순간, 최 감독은 드물게도 경악한 표정을 지었었다.
‘너 이 새끼, 괌 안 갔어?’
정장에, 그 위에 코트까지 걸치고 있었는데도 최 감독은 한눈에 강희찬의 몸 상태를 알아보았다. 칼같이 개인 훈련을 떠나서 어느 정도 몸을 만들고 올 것이라 당연히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가서 빨리 만들겠습니다.’
‘빨리가 아니라……! 뭐 한다고 겨울 동안 띵까띵까 놀아서, 그 꼴로 와? 드디어 미쳤나, 이게…….’
사람이란 게, 원래 이유를 제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면 화가 나기 마련이다. 최대한 눈에 덜 띄도록 최선을 다한 자신의 노력 덕분인지. 어느 순간, 최 감독은 화가 누그러져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이렇게 ‘올해는 왜 괌을 안 갔다 왔느냐’며 종종 시비를 걸기도 하지만.
“그거 안쪽에 있는 걸로 마셔. 아까 채워 넣을 때 보니까, 새 거 바깥에다 그냥 넣더라.”
시비를 걸다가도, 저렇게 필요한 건 말해주는 화법도 대충은 익숙해졌다. 그런 최 감독을 향해 ‘감독님, 자상하시네요’라고 말하는 기자 새끼의 말은 어처구니가 없었고. 최 감독만 없었어도, 자상이 다 얼어 뒈졌냐고 따지고 싶었는데. 천추의 한이었다.
“…네.”
생소한 외국 브랜드의 생수병을 보던 강희찬은 한숨을 쉬었다.
어떤 빡대가리 같은 새끼가 개념 없이 냉장고를 채웠는지. 잡아다 족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누르며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선수들 이번에 결혼 많이 했는데, 컵스가 제일 많았다고 기사도 났잖아요.”
“말도 마. 돈도 안 들어오는데 나가기만 해서 마누라 눈치를 얼마나 봤다고.”
최 감독의 우는소리에, 뭐가 재밌는지 웃음소리가 울린다.
저건 진심으로 재밌어서 웃는 건지, 아니면 비위를 맞춰주느라 억지로 웃는 건지. 후자라면 정말 기자들도 대단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며, 강희찬이 물병을 꺼낼 무렵이었다.
“다들 신혼여행도 못 갔겠네요.”
“그거 서운할 거면 야구선수랑 결혼 안 하지. 그러니까 결혼하자고 할 때, 죄인이야. 명절 때는 아예 없는 사람이고, 애 낳을 때도 옆에 못 있어주고.”
“감독님도 청혼할 때 엄청 로맨틱했다고 하던데요? 첫 완봉구 드리셨다면서요?”
게임을 잘하게 생긴 안경잡이는 아무래도 로맨스 영화를 제일 좋아할 거다. 장담할 수 있었다.
“누가 그래?”
“박 코치님이요. 그리고 저번 한국시리즈에 사모님 오셨을 때 저희 선배도 들었답니다.”
“그 사람은 경기 보러 와서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민망한 기색의 최 감독은 괜히 모자를 벗었다가 썼다.
최선형 감독의 프러포즈의 내막을 박승일 코치가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내들끼리 여고 동문이라 제법 친하기 때문이다.
“낭만적이잖아요. 첫 완봉구 주면서 청혼하셨다면서요. 앞으로 내 인생에 이거 이상으로 야구 잘하는 날은 없을 거라고.”
“…별 얘기를 다 하고 다니네.”
민망한지 최 감독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꼬질꼬질. 흙먼지가 묻은 공을 받은 순간, 남자는 정말 대뜸 식을 올리자고 했다. 앞으로 자신의 야구 인생엔 내리막길뿐이고, 선수 유니폼을 벗은 후엔 너덜거리는 어깨밖에 남는 건 없을 거라고. 그런 끔찍한 말이나 한참 늘어놓은 직후에.
“사모님 감동받으셨겠어요.”
박승일 코치는 틈만 나면 최 감독의 프러포즈 일화를 떠들고 다녔다. 1군에서 한 시즌을 보낸 선수라면 한 번쯤은 들었을 만큼. 그건 이제 햇수로 7년째 1군에 적을 둔 강희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야구공을 주면서 청혼했다는 것만 알았지, 자세한 내막까지 들었던 건 아니었다. 저딴 소름 끼치는 남의 연애사 따위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 적도 없었고.
“…….”
본인 인생에서 가장 절정의 기록을 낸 공을 내밀며 청혼했던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남자는 제가 내밀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밀었다. 그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상대에게. 감히 자신에게 인생을 맡겨달라고. 아니, 오히려 반대겠지.
무엇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상대가 눈앞에 있다. 하지만 자신의 손 안에는 앞으로 내리막길만 남은, 은퇴 후엔 몸 하나조차도 성치 않을 미래뿐이다. 그럼에도 말했던 거다.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로 결혼을 ‘해달라고’.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은, 강희찬에게도 있었다. 무엇을 내밀어도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내밀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은 이곳과는 계절이 틀어진 그곳에 있을 터였다.
“…….”
‘서울 가면…….’
반 정도 남은 물병의 뚜껑을 꽉 닫았다. 그 순간, 다짐 역시 단단해졌다.
어차피 이선에게 내밀어봐야 무엇이든 부족하다. 그렇다면 가장 최선을 다한 것을 내밀 수밖에 없다. 그것이 꼬질꼬질하게 먼지가 붙은 야구공일지라도. 비록 받는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퍼펙트를 이루어낸 공도, 이선의 손에 들어간다면 초라하겠지. 하지만 강희찬은 생각을 정리했다.
개막전. 무슨 짓을 해서라도 컨디션을 유지해서 선발로 나가야 한다. 퍼펙트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완봉이라도 해야 한다. 개막전 완봉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짧은 순간, 남자는 머릿속에서 결심을 마무리 지었다.
역시 이선과의 시작이었다. 맹숭하게 ‘나랑 만나요’ 따위의 소리는 이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고작해야 신발 몇 켤레를 주면서 저와의 시작에 함께해 달라는 말을 하려던 과거의 생각을 꾸짖었다. 어딜 감히. 정 선생은 그보다 훨씬 더 귀한 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손에 물병을 달랑달랑 든 채 더그아웃을 나섰다. 너른 보폭이 성큼성큼 땡볕이 쏟아지는 외야를 향했다.
어느 순간, 남은 이들의 대화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하지만 대화는 강희찬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이어졌다.
“하이고. 김 기자가 뭘 모르네. 결혼 아직 못 했지?”
“…네?”
“야구공이 무슨 가치가 있어. 그것도 야구 모르는 여자한테. 그다음에 반지 사다가 바쳤어.”
“정말요? 사모님께선 그 얘기는 안 하시던데…….”
“아니 왜? 웃기는 사람이네? 반지 받을 때 울어놓고, 왜 그 얘기는 안 해? 내가 그거 우승 보너스로 받은 돈 다 털어서 산 반진데.”
야구 만화도 유니폼 입고 연애하는 내용을 제일 좋아하는 기자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어린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연애를 만화로 배운 남자를 향해, 최 감독은 심술이 다분한, 그렇지만 지극히 현실을 인지해 주었다.
“원래 여자한테는 금은보화가 최고야.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야구공이 다 뭐야. 비싼 거 안겨주는 게 제일이지.”
로맨스 마니아의 황망한 표정을 보며, 최 감독은 킬킬거렸다.
하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인생 선배의 조언이 가야 할 곳은 따로 있었다. 비록, 그는 이미 외야에 도착하여 러닝을 재개하고 있었지만.
삑!
투수코치의 호각 소리가 푸른 하늘을 갈랐다. 누군가를 향해, 틀렸음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모르지만, 그 누구도 눈치챌 수는 없었다.
“야, 다음!”
출발했던 선수들이 목표선에 닿을 즈음. 투수코치는 다음에 뛸 선수를 대기시켰다. 뒤에 있던 두 사람이 열을 맞추어 출발선에 선다. 햇빛 탓에 고글을 쓴 두 사람 중 한 명은 상의를 벗은 채였고, 다른 한쪽은 50번이 새겨진 훈련복을 꼭 챙겨 입었다. 누군가의 분부대로.
삑!
50번 투수는 호각 소리에 맞춰 전력으로 뛰었다.
마치 그 앞에 바라는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그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