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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을 목전에 둔 정이선은 이제 교직원으로서 세 번째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이선은 작년보다 더 부지런히 출근하고 있었다. 1월 말에 어머니와 여행을 가기 위해선, 그 전에 어지간한 귀찮은 잡무를 끝내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방학 전과 다름없는 기세로 출근하던 이선은 처음으로 평일을 집에서 보냈다. 리모델링 겸 청소를 하느라 분주한 탓에, 하루는 교무실을 비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초등 교사의 방학다운 하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이선은 오전 동안 잡무를 처리했고, 점심 이후엔 집안 정리를 했다. 집에선 그냥 잠만 잔다고 생각했는데, 베란다에 꽤 쌓여 있는 쓰레기통을 정리하다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지금껏 먹었던 즉석밥의 잔해들이 가득 담긴 커다란 봉투를 들고 현관을 나섰다. 이것만 버리면 집안 정리는 끝이다. 나간 김에 저녁으로 먹을 만한 음식도 사야지.
“…….”
알찬 계획까지 세우며 계단을 내려오고 공동현관을 나선 순간이었다. 이선의 눈엔 검은 차 한 대가 들어왔다.
독일제 검은색 대형 세단. 공무원 월급으로 살아가는 자신에게는 언감생심인 그 차는 이선의 눈에 꽤 잘 띄었다. 차에 꽤 무던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간결하면서도 특징적인 앰블럼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식별하기가 퍽 쉬웠다.
브랜드에서 꽤 가격이 나가는 라인이라고 하던데, 그래도 쓰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출퇴근할 때, 같은 모델의 차가 지나가면 이선은 괜히 그 차를 보곤 했다. 앰블럼을 보고 심장이 발치로 떨어졌다가, 번호를 확인하고 실망과 안도가 뒤섞인 숨을 내쉰 게 비일비재했다.
‘다 강희찬 씨 때문이에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투정했다. 제대로 고백도 하지 못하고 접게 되는 마음은 그의 탓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선은 그를 책망했다.
그는 있지도 않은 제 잘못을 인정했다. 아무런 변명 없이 이선을 잡아 품에 가두어주었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올 것을 알면서도, 이선은 더더욱 그를 밀쳐내려 했다.
…뒤늦게 창피함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순댓국집을 나와 집 근처의 골목 어귀로 올 때까지. 비록 멍하니 발을 질질 끌었어도, 눈물은 나지 않았었다.
그랬던 것이, 눈앞에 커다란 발이 나타난 순간. 익숙한 낮은 목소리에서 미세한 일렁임이 느껴지던 순간. 울음은 왈칵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이선은 그 이유를 알았기에 지금껏 강희찬에게 제대로 된 메시지 하나를 보낼 수 없었다.
이후로, 몇 번이나 걱정이 섞인 문자를 받기도 했다. 때로는 답이 없는 이선이 답답한지 그 사람다운 투정이 오기도 했다.
‘오징어잡이 배에 팔려갔습니까?’ 따위의.
그럼에도 이선은 답장을 보내기가 참 힘들었다.
당시에야 자신이 울고 있었으니, 당황하며 달래주었을 테지만…….
강희찬도 집에 돌아가서 되새겨보면, 아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만 영악하게 터지던 제 눈물샘을 눈치챘을 거고.
하여간 하찮은 부끄러움으로 차일피일 답장을 미루면서도, 이선은 그의 것과 같은 차를 보면 눈으로 좇았다. 아니, 굳이 같은 차종이 아니라, 같은 브랜드의 마크가 박혀 있기만 해도.
그의 연락은 피하면서, 닮은 차의 흔적을 좇는 게 우습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오늘 역시 그런 날 중 하나였다. 대한민국엔 참 외제 차가 많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날. 하지만 자주 본다고 쳐도, 비슷비슷한 원룸이나 빌라들이 밀집한 동네에 있으니 역시 위화감이 느껴진다.
발걸음은 재활용 수거함을 향하면서도 눈은 차의 옆면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주인 없이 주차된 줄만 알았던 차의 운전석 문이 열렸다.
“아……!”
같은 모델인 차를 볼 때면 언제나 그 안에 앉아 있을 사람을 상상했었다. 문을 열고, 광고로 써도 손색이 없을 한 장면을 연출하며 그가 내리는 상상을.
현실은 언제나 씁쓸했다. 강희찬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작을 법한 아저씨가 내리기도 했고, 아이와 외출한 젊은 엄마가 내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선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실은 상상보다도 더욱 극적이었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내렸다. 누군가가 머리를 만져준 듯, 앞머리를 넘긴 그는 몸에 맞춘 듯한 스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선은 그림 같은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남자의 모습을 구경한 후에야 깨달았다. 강희찬이었다.
그 누군가가 강희찬임을 알아챈 순간, 이선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심장이 발치에 떨어졌음을 느꼈다.
“이 동네는 기지국이 없어요? 하도 연락이 없길래 새우잡이 배라도 탄 줄 알았더니.”
“…….”
“출근했을 줄 알았는데. 학교 쨌습니까?”
삐딱한 말본새로 남자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했다.
“…….”
하지만 이선은 잠시 말을 하는 법을 잊은 듯 멍한 채였다.
처음 봤던 순간엔 훈련복이었고, 함께 송재혁의 차를 탈 땐 셔츠를 입고 있었다. 젊은 남자들이 편하게 입을 법한 스트라이프 셔츠였다.
이후로 이선이 본 그의 옷차림은 대개 유니폼 아니면 가볍게 입는 여름용 티셔츠였다. 스포츠 브랜드의 피케티셔츠나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검은 티셔츠를 입은 모습도 본 적이 있었다. 저번엔 조금 도톰한 후드티셔츠를 입었고.
하지만 정장을 입은 모습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동영상 사이트 속의 앳된 그가 입은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실물의 타격감은 상당했다. 화면 속 스무 살의 그보다 눈앞의 스물다섯의 강희찬은 더욱 정장과 잘 어우러졌다. 멍하니 시선과 정신을 빼앗길 만큼.
그는 아무 말이 없는 이선을 향해 걸음을 뻗었다. 급하지 않은 걸음이었음에도, 너른 보폭은 금세 거리를 좁혔다.
“아…….”
이선은 순간적으로 흠칫거리며 뒷걸음을 쳤다. 즉석밥의 잔해가 가득 담긴 세탁소 비닐을 뒤로 숨기며.
물론 깜짝 놀란 탓에 몸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뒷걸음은 채 한 걸음도 멀어지지 않았고, 쓰레기가 가득 담긴 봉투는 제 몸으로 가릴 수 없는 크기였다.
그럼에도, 강희찬은 이선의 작은 움칫거림을 기민하게 잡아냈다. 앞머리를 살짝 넘긴 탓에 평소보다 더 잘 드러난 그의 이마가 구겨지는 것이 오롯이 보였다.
“귀신 봤어요? 왜 사람을 보고 피해요?”
“아, 아니…….”
…아직 안 피했다. 피하려고 하긴 했고, 몸이 조금만 더 날랬어도 계단을 뛰어 올라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실현한 적은 없었다. 상상은 죄가 아니다.
이선은 여전히 그의 앞에서 몸이 굳은 채 서 있었다.
게다가 도망을 친다고 해도, 강희찬만큼은 자신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던 날. 의도적으로 그의 어깨에 눈물만을 묻혔다고 기억을 편집하였지만, 생각해 보면 침도 묻혔다. 사람의 눈과 입으로 추정할 수 있는 자국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여러모로 부끄러운 기억이 한가득했다. 그날은.
이선이 홀로 머뭇거리는 사이,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은 강희찬은 거리를 좁혔다.
이선과 가까워진 그가 손을 내밀었다. 팔을 뻗자,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에 둘린 메탈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쓰레기 버리러 가요? 주세요. 저 공원 앞에다 버리면 되죠?”
그렇게 말한 강희찬은 멋대로 이선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앗아갔다.
“아……!”
뒤늦게 만류를 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손이 비었다.
드라마 촬영을 하다가 뛰쳐나왔다고 해도 믿을 법한 사람의 손에 즉석밥 용기가 잔뜩 들어간 쓰레기봉투라니…….
창피한 일이 하나가 더 적립되었다. 강희찬의 앞에선 참 부끄러운 일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지, 넓은 보폭을 활용하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수거함은 또 언제 봤을까?’
이선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어딘지 왕자님의 뒤를 따르는 시종이 된 것만 같았다.
“왜, 왜 여기 계세요? 옷은 왜 그렇게 입으시고…….”
“…이 동네는 정 선생이 전세 냈습니까? 나도 이 동네 살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대체 연락도 없이 왜 남의 집 앞에 있었는지. 질문의 의도를 모를 것 같지 않은데. 괜히 딴소리다.
이선이 있는 방향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고 뚱하게 내뱉는 말이 추측에 힘을 실었다.
“시상식 끝나고 할 것도 없어서 한번 들러봤어요. 그래도 세수는 했는데, 이상해요?”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가 불편한지 그는 머리를 헝클 기세로 손을 들어 올렸다. 안 돼! 완벽한 피조물을 망치려는 손짓에 이선의 눈이 둥그레졌다.
“아, 아! 안 돼요!”
“…네?”
낮 시간대의 주택가의 적막을 울리는 고함에 강희찬의 손은 멈추었다. 이선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세팅한 앞머리를 딱 5㎝ 정도 남긴 채.
“머리, 멋있다고……. 이상해서 물어본 거 아니었어요. 잘 어울리세요.”
“…….”
쓸데없는 이유로 목소리를 높인 이선이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며 눈을 도록 굴렸다. 얼음 땡 놀이를 하는 것처럼 딱 멈춰 있던 강희찬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다행히 머리를 망치지 않은 채로.
“시상식이면, 오늘 상 받으셨어요?”
“아니요. 그냥 초대만 받은 거예요. 자리 채우는 용도로.”
“…….”
말을 하던 강희찬은 얼굴이 불편한지 몇 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세수했다는 본인의 말에 따르면, 세수하기 전엔 이 차림에 어울리도록 화장 역시 했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치장을 하는 건 상상도 되지 않고, 세팅된 머리 역시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연예인들처럼 숍에서 머리를 했을 테고, 그곳에서 메이크업도 했을 가능성이 컸다.
보송함이 느껴지는 맨얼굴은 정신을 놓는 순간 손을 대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일게 했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이선은 궁금했다. 화장기가 얹어졌을 그의 얼굴도.
본래도 피부가 희고 좋은 사람인데, 굳이 화장이 필요할까? 하긴. 생각해 보면 여배우들도 화장은 하지. 아니, 그래도…….
돌아가서 포털 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아마도 사진 한 장 정도는 나올지도 모른다. 가서 검색해 봐야지. 이럴 땐 유명인인 그의 처지가 참 편리했다.
강희찬은 몰래 계략을 꾸미는 이선의 속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봉투를 들지 않은 커다란 손으로 제 맨얼굴을 한 번 쓸었다.
“출근 안 했어요? 방학해도 그냥 평소처럼 출근한다면서요.”
“가끔 평일에 돌아가면서 쉴 때도 있어요. 그래도 방학이니까.”
봉투 안에 있던 내용물이 플라스틱 수거함에 와르르 쏟아진다. 끝을 모르고 우수수 쏟아지는 즉석밥 용기를 본 그가 한심한 표정으로 잠시 이선을 내려다보았다.
“…….”
할 말이 참 많지만 참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조금 창피해진 이선은 괜히 곁눈으로 시선을 피했다.
…저렇게 쓰레기가 쌓일 때까지 버리지 않는 더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려나? 아니면 저걸 한 번에 다 먹었냐고? 그건 좀 억울하다.
“퇴근 시간까지 기다릴 각오 하고 있었는데, 빨리 보니까 반갑네.”
“오셨으면 전화라도 주시지……. 왜 밖에 계세요. 그리고 저 오늘 출근했으면 어쩌려고…….”
“학교로 갈지 잠깐 고민했는데.”
“…….”
“…이러고 가면 쪽팔리잖아요.”
비닐봉지까지 알맞은 곳에 버리고서야 강희찬은 손을 마주치며 탁탁 털었다. 그러고는 이것 보라는 듯이 제 팔을 약간 벌렸다. 덕분에 그의 차림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짙은 남색의 정장에 안에는 조끼. 행커치프까지 제대로 있는 차림은 자신이 하기에는 부담스러워도 어울리는 사람이 하고 있으니 보기엔 더없이 좋다. 잠깐이라도 눈을 떼기 아까울 만큼.
“왜요? 멋있는데…….”
마지막 말을 할 땐 목소리가 중얼거리는 수준으로 잦아들었다. 강희찬은 잠시 이선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동그란 가마가 눈에 들어왔다.
“나비넥타이 할 뻔했어요. 턱시도 입고 가라고. 그딴 거 입힐 거면 안 가겠다고 지랄하느라……. 아, 됐어요.”
“…….”
지랄하느라 무얼 했다는 건지. 궁금하면서도, 판도라의 상자처럼 알아선 안 될 법한 내용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다음 주를 기약하는 드라마처럼 궁금한 곳에서 내용을 끊은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을 씻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이들도 잘 오지 않는 작은 공원엔 음수대조차 없다.
“뭐, 아무튼… 할 말 있으니까 저기 좀 앉죠.”
결국, 그는 포기한 채 공원 안으로 걸음을 돌렸다. 우스운 쓰레기봉투도 없이 완벽한 뒷모습을 보며 이선은 심장 소리가 커짐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선은 심장을 부여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 적당한 벤치에 먼저 몸을 앉힌 그는 뭉그적거리는 이선을 가만히 보았다. 영문도 모르고 어떤 거리감으로 앉아야 적당할지 잠시 고민하며 앉았다.
‘어떡하지?’
대체 무엇에 대한 걱정인지. 이선의 본능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낯선 차림의 그는 존재만으로도 이선의 마음을 들쑤신다. 할 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선의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뛰어댔다.
잔뜩 겁을 먹은 채 긴장한 이선의 귀에 강희찬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다음 달 말에 출국합니다.”
“…네?”
한 대 맞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꾹 감고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스프링 캠프 간다고요. 겨울 동안 외국 가서 운동하는 거.”
“아…….”
단어의 뜻을 모를 거라 생각했는지, 친절한 설명이 덧붙는다. 하지만 이선에게는 그저 맥이 탁 풀리는 소리였다.
“호주에서 한 달 정도 보내고, 일본 가서 2차 캠프 하면 한 2월 끝날 때쯤 귀국해요. 아마 중간에 한국 안 들어오고 바로 일본으로 갈 겁니다.”
“…….”
결국, 한 달이 넘도록 외국에 나간다는 말을 하려고…….
연락도 없이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던 행동이나 눈을 잡아채도록 잘 차려진 차림까지도. 이선은 그의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비록, 운동선수가 비시즌 기간 외국으로 합숙 훈련을 나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홀로 토라진 채, 이선의 입술이 슬며시 나왔다.
“정 선생, 호주 관광비자 없죠?”
“…네?”
그러니까, 돌아올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사다 줄 테니까.
그런 뻔한 말들을 상상했던 이선의 목소리가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이선의 당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희찬은 부지런히 핸드폰 화면을 조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항공사 앱과 영어로 된 사이트가 번갈아가면서 나왔다.
“거긴 여행도 비자 있어야 들어갈 수 있더라고요. 사이트 주소 링크로 보내줄 테니까, 보고 신청해요.”
“아, 아니…….”
“정 선생 괜찮은 날로 말해주면 출국할 비행기랑 호텔은 내가 예약할게요. 우리 훈련하는 캠프지는 촌구석이라 재미없고, 좀 시내로 잡아줄 테니까.”
“희찬 씨, 잠시만…….”
홀로 토라졌던 것도 잠시다. 이선은 혼자 무언가를 착착 진행하는 강희찬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캠프 동안 낮엔 정 선생 보고 싶은 데 관광해요. 저녁엔 내가 정 선생 있는 데로 갈 테니까…….”
그는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얼핏 보기에도 영어로만 되어 있는 사이트였다. 강희찬이 알아볼 것 같지는 않은데. 신기하게도 그는 링크를 복사해 이선에게 메시지로 보내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결국, 이선은 목소리를 높이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멀뚱멀뚱한 얼굴이 이선을 향하며 묻고 있었다. 왜?
“저, 저 호주 못 가요.”
“…왜요.”
“출근해야죠. 방학이라고 쉬는 거 아니라고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안 해도 되는 것 같은데? 오늘도 평일인데 집에서 놀고 있잖아요.”
…놀진 않았어. 아침엔 일도 했다고.
반박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험악한 시선이 이선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조폭들 저리 가라 싶을 정도로 험악하고 덩치가 큰 사람들 사이에서 일해서 그런가……. 강희찬은 시선만으로도 사람의 기를 죽이는 재주가 있었다.
이선은 슬며시 엉덩이를 떼며 그에게서 몸을 멀리했다. 그의 손에 있던 온기가 손바닥에 잔열로 남았다. 이선은 괜스레 왼손을 쥐었다 펴봤다. 그럼에도 열은 끈질길 정도로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은 학교 청소한다고 쉬는 거뿐이에요. 그리고 쉬어도 그렇게 오랫동안 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생들도 방학 때 여행 정도는 하고 살 거 아니에요. 정 선생은 모르겠지만, 다들 여행 갈걸요?”
“저도 가요, 여행. 휴가 받아서.”
어쩐지 무시를 당한 기분에, 이선의 입술이 다시금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물론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아니라면 해외로 나가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지만, 그래도…….
하지만 강희찬이 신경 쓰는 건 그게 아니었다. 다소 심드렁했던 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
“…여행을? 정 선생이요?”
“네.”
나는 뭐 여행을 가면 안 된단 말인가.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질문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여행을… 누구랑 가는데요? 혼자 갑니까?”
“아니에요. 저도 같이 갈 사람 있어요.”
“송 PD면 겨울에 바빠요. 작년에도 전지훈련지마다 카메라 들고 출장 왔는데.”
“재혁이 말고 있어요.”
순간 강희찬의 미간이 구겨졌다. 바로 전까지, 핸드폰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사람이 이제는 이선을 무서운 목소리로 추궁하고 있었다. 뭔가……. 텔레비전에서 보던 불륜을 들킨 남편의 심정이 이럴지도 모른다.
기세에 눌린 이선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강희찬의 미간은 더욱 구겨졌다.
“정 선생이 무슨 여행을 누구랑 갑니까? 송 PD 말고 친구도 없는 사람이.”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기분이 나빠진다.
저렇게 나온다면, 괜히 진실을 내뱉기 싫어진다. 가상의 친구라도 만들어볼까 잠시 고민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지금 강희찬의 기세로는 당장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불라며 생떼를 부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따져보면, 대뜸 찾아와서는 호주의 관광비자를 받으라는 것부터가 생떼였고.
결국, 질 수밖에 없는 이선은 그의 눈을 피하며 몸을 앞으로 바로 돌렸다. 이선의 마지막 자존심이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불퉁하게 답하기를 명령했다.
“엄마랑 갈 거예요. 홍콩에…….”
“엄마…….”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를 잡을 듯 잔뜩 인상을 쓰던 사람의 맥이 순식간에 탁 풀렸다. ‘엄마’라는, 탄식이 절반 이상인 짧은 단어가 강희찬의 잇새를 흘렀다.
“…….”
힘이 쫙 빠졌다. 엄마. 속으로 되새겨보니, 더 우스웠다. 방학 때 엄마랑 해외로 여행 갈 거예요. 그래서 강희찬 씨는 못 따라가요.
‘무슨 초딩도 아니고…….’
하지만 이성은 금세 돌아왔다. 상대가 어머니라니, 오히려 다행이지 않은가.
며칠 전만 해도 투아웃과의 문제로 질질 울더니. 그 새끼와 다시 잘된 건지, 아니면 이제 실연의 아픔을 달래겠다고 저 좋다는 새끼 중 골라 만나라는 제 충고를 들은 건지.
이선의 여행 상대에 관한 상상이 아우토반을 달리려 하던 차였다. 확 올랐던 열은 급속히 가라앉았다.
여행 계획이 없다면 모를까, 있다면 더욱 일은 수월하다. 강희찬은 순식간에 산뜻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모시고 호주로 와요, 그럼. 티켓이랑 호텔은 내가 잡을 테니까. 관광비자 받기 복잡하면, 내가 에이전트한테 부탁해서 어머니 것까지…….”
“자, 잠깐만요!”
“왜요?”
다시금 부지런히 움직이는 강희찬의 손가락 위로 조금은 찬 체온이 덮였다.
‘손이 꽤 찬 편이네…….’
그런 멍한 생각을 하며, 강희찬은 제 손을 다 덮지 못한 가는 손가락을 한 번, 눈을 들어 이선의 얼굴을 또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뼈마디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손이 안타까우면서도, 이선이 다시금 스스럼없이 저에게 닿았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그런 복잡한 감정이었지만, 이선은 그의 얼굴을 달리 해석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과 비슷하게 화들짝 놀라며 또 손이 멀어졌다.
“아, 죄송해요.”
“…….”
굳이 죄송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순간적으로 강희찬의 손가락이 움칫 떨렸다. 멀어지는 찬 기운이 퍽 아쉬워, 잡아채려 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상한 상황에서만 재빠른 이선의 손은 이미 멀어진 채였다.
“…그건 됐고. 왜요.”
“아……. 왜, 왜 강희찬 씨가 그걸 신경 쓰세요?”
“뭐요?”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말투가 퍽 거칠어졌다. 이선도 눈치챘는지 순간적으로 어깨가 움칫했다. 하지만 억지로 용기를 내는 작은 동물처럼, 이선은 강희찬을 올려다보았다.
“엄마랑 저랑 여행 가는데……. 티켓도 제가 살 거예요. 그리고… 예약도 이미 다 했고.”
“…홍콩으로?”
“…네에.”
이선의 고개가 머뭇거렸지만, 확실히 한 번 끄덕여졌다. 어릴 적, 아마도 지나다니면 동네 어른들이 귀엽다고 간식을 손에 잔뜩 쥐여 줬을 거다. 지금도 퍽 귀여운데, 작기까지 했을 테니까.
하지만 유순한 움직임도 지금의 강희찬에겐 화딱지가 나는 원인일 뿐이었다.
연락도 없이 혼자 틀어박혀서 대체 뭘 하나 했더니, 뒤로 호박씨나 까고 있었다. 누구는 자기 때문에 괌도 못 가고 한국에서 버티고 있었는데.
밀려드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강희찬은 제 앞머리를 헝클었다.
“엄마랑 친해요?”
“…네에?”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이선은 당황했다. 하지만 애초에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강희찬은 제 할 말만을 이었다.
“정 선생은 엄마랑 천년만년 살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가 그렇게 좋으면 직장도 수원에서 다니지, 왜 서울에서 학교에 다녀요?”
“…….”
유독 삐딱한 언사는 그의 짜증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이선은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봤다. 그러면 안 돼. 엄한 얼굴로 그를 보고 싶었지만, 결국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동시에, 강희찬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웃어요? 웃었습니까, 지금?”
“…아니요. 안 웃었어요.”
“거짓말하지 마요. 지금 쪼갰잖아요.”
“쪼개지 않았어요. …희찬 씨, 그렇게 나쁜 말만 쓰면 안 돼요. 저번에 보니까, 사인받는 아이들도 많은 것 같던데…….”
이선은 새삼스레 열 살짜리 아이의 앞에서도 필터가 없던 그의 언어생활을 반추했다.
아무래도 선수 생활을 하다 보니 언행이 거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겠지. 그래도 이선은 엄한 표정을 지어보려 노력했다. 비록, 자꾸 약해지는 마음과 함께 표정이 풀리고 있지만.
잔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강희찬이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정장인데……. 하지만 본인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을 할 뿐이다.
“정 선생은 놀러도 가고 좋겠습니다. 누군 더운 나라로 일이나 하러 가는데. 월급도 못 받고.”
“…아까는 방학 때도 학교 가냐고 그러시더니…….”
“…….”
이선이 조심히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 앉은 탓에 다 들었는지, 그는 이선을 노려보았다. 반 정도 넘긴 앞머리 때문에 평소보다 짜증 어린 표정이 더 잘 드러난다. 하지만 지금의 이선에게는 마냥 귀엽기만 한 모양새다.
아까부터 자꾸 삐딱선을 타는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갔다.
이대로 출국을 하면, 어영부영 모르는 사이가 되지 않을까? 길거리에서 눈이 마주쳐도 서로 선뜻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속으로 어색하게 고민이나 하고……. 결국엔 스쳐 지나가겠지. 부질없는 인연이 되겠지.
그런 염려를 이선 역시 하고 있었으니까.
“희찬 씨…….”
이선은 가만히 입술을 열었다.
아마도 연애를 한다면, 이 사람과일 것이다. 고작 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와 나란히 서 있는 자신을 쉽게 그릴 수 있었다.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기만 하더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그런 기색을 보이기만 한다면, 강희찬은 저를 향해 손을 뻗고 잡아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다른 사람이 이유가 되어 그의 품에서 눈물을 보였다. 신규진에게 미련이 남았느냐 묻는다면, 그런 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냥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을 정도로 당연한 끝맺음이었다.
그의 마음도, 제 마음도. 모든 것이 확실해도 시작을 먼저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강희찬이 아닌 다른 이에게 받은 상처가 다 아물고, 그의 곁에 서도 괜찮을 만큼 좋은 사람이 되자.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그마한 애정이라도 타인에게 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고 나면, 그의 얼굴을 보며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을 알리는 그의 제안을.
이선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눌러 삼켰다.
“제가… 내년에도 체육수업 보조를 할 것 같은데요.”
망설임 탓인지 말끝은 늘어졌다. 이선이 짐작하는 평소 성격과는 달리, 인내심 있게 자신을 기다려주는 강희찬의 탓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어리광이었다. 표정 없이 가만히 저를 지켜보며 제 말을 기다려주는 강희찬은 언제나 가슴 어딘가를 간질였다.
우물우물. 쉽게 말을 내뱉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입술을 수 초간 바라보던 강희찬은 결국 먼저 운을 떼었다.
“원래 담임 맡으면 그런 거 안 해도 된다면서요?”
“보통 그렇긴 한데……. 시간표 맞는 남자 교사가 저밖에 없어서요.”
“체육수업을 여선생이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웃기는 학교네.”
“그런 건 아닌데……. 보통 싫어하세요. 옷 갈아입어야 한다고.”
이런 말을 듣자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이선은 여전히 불만에 가득 찬 강희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퉁거리는 모습에 평소라면 잔뜩 쫄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 나이처럼 귀엽기만 했다.
마치 잔뜩 철이 든 체하며 부모님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조숙한 초등학생처럼. 그는 귀엽게도 이선을 혼내고 있었다.
“월급을 더 받으면 일을 더 해야지, 왜 일을 떠넘겨요?”
“다들 바쁘세요.”
“웃기지 마요. 저번에 보니까, 학교 밖에서 커피 사 들고 노가리 까다 들어가는 것 같던데.”
으음……. 강희찬은 이러다 익명으로 교육청에 민원이라도 제기할 기세였다. 왠지 성격이 철두철미하니 사진이라도 찍을지도 모른다.
현실성이 상당히 짙은 상상에 이선의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이선은 황급히 지금 대화 소재에서 멀어질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말머리를 돌려주는 건 의외로 강희찬이었다.
“근데, 왜요? 체육수업 하는데?”
“아, 그게…….”
맞다. 할 얘기가 있었지. 그의 질책을 듣느라 정신이 쏙 빠지는 바람에 머리에서 날아갔던 용건이 떠올랐다.
“희찬 씨, 외국 가시잖아요.”
“…….”
“그… 내년 수업 때 쓸 운동화가 하나 필요할 것 같은데……. 외국엔 괜찮은 거 많다니까, 혹시 괜찮으시면 부탁해도 될까요?”
“…….”
“아, 돈은 제가 드릴게요.”
“사이즈 뭔데요.”
가만히 이선을 내려다보던 그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250이요. 근데 좀 커도 상관은 없어요.”
그가 돌아왔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 더욱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지. 온전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도록.
“정 선생님.”
“네?”
핸드폰에 짧게 메모를 마친 그는 정면을 향한 채 툭 말을 뱉었다. 유려하게 떨어지는 그의 옆모습에 빼고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캠프 다녀오면, 할 말 있어요.”
“…….”
마치 굳은 각오를 하듯. 강희찬은 이선을 바라보지 않았다. 고집스레 앞을 향해 있는 옆얼굴을 보던 이선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
…이건 햇빛 때문이다. 아무리 겨울이라 하더라도,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지만……. 이 열기는 한낮의 태양 때문이라고.
이선은 그리 변명하며, 강희찬을 따라 몸을 정면으로 돌렸다. 어색하게 정면을 보는 두 사람의 사이를 이선의 손이 가만히 지났다.
벤치의 나뭇결을 더듬어 얼마나 나아가면, 따뜻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이선의 손가락 끝에 닿는다.
“…….”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이선은 다짐하듯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그리고 단단한 손가락을 쥐었다.
“…네.”
기어들어 갈 것처럼 작았지만, 단 한 사람에게는 확실히 들렸을 대답이 어색한 두 사람의 사이를 채웠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