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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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나 TV, 혹은 인터넷. 그런 것들에 딱히 의존적이지 않다는 건 어린 시절부터 정이선의 몇 안 되는 장점이었다.

지금이야 학부모 연락이나 자질구레한 안내를 클래스팅에 올려야 하니 핸드폰을 항상 충전해 두지만, 대학 시절엔 충전을 잊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핸드폰이 꺼져 있어서 연락을 못 봤다고 하면, 동기나 후배들은 그게 가능하냐는 듯한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하지만 요사이, 이선은 자신의 장점에 의문이 생겼다. 특히 지금처럼 업무를 보다가도 문득 포털 사이트의 창을 열고, 검색어 순위를 살필 때는.

“…….”

딱히 할 것도, 궁금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보게 되는 버릇은 포털에 이름을 적으면 검색이 되는 누군가를 알고 생겨난 것이었다.

무심히 화면을 살피던 이선의 눈에 검색어 한자리를 차지한 문구가 들어왔다.

“아…….”

국가직 공무원 합격 발표. 몇 가지 단어의 나열이 이선의 정신을 한순간에 잡아챘다.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치러본 적 없는 시험이니 관심사는 덜했어도, 적어도 합격자 발표일은 미리 날짜를 표시했었다. 발표일에 맞추어 기분이 좋지 않을 그에게 저녁이라도 사기 위해서. 신규진은 보통 1차 시험에서 결과가 나왔었기에, 지금 시기에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온다는 사실은 올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올해는 그 시기가 다소 늦어졌다는 점이 이선의 마음 어딘가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혹시… 그래도…….’

그런 말로 시작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이선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고민하던 이선은 핸드폰을 집었다.

합격 여부를 물어도 괜찮을까? 하지만 그런 머뭇거림이 무색하게, 이미 신규진에게서는 메시지가 도착한 채였다. 이선이 한창 수업을 하고 있었던 이른 오후에.

[오늘 퇴근하고 저녁 먹자. 줄 것도 있어.] 오후 1:27

학교를 졸업한 이후, 신규진은 좀처럼 먼저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봉사활동을 갈 때마다 술자리를 갖자고 먼저 제안하던 성격이었는데. 사람은 세월에 성격도 변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꼭 세월 탓만은 아닐지도 모르지.’

입 안이 쓰게 느껴지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이선은 뒤늦은 답장을 보냈다.

[응. 내가 갈까?]

[아니. 너네 학교 주변에 순댓국집 가자. 거기 괜찮던데.]

[딴 거 먹어도 돼. 내가 살게.]

[그게 좋아. 퇴근하면 연락해.]

몇 번 더 오가던 문자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이제 더는 보내지 마.’

한 번도 그런 축객령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신규진과의 연락은 이선에겐 언제나 그런 느낌을 주곤 했다. 몇 번을 보아도 내성이 생기지 않았다. 볼 때마다 마음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만 같았다. 비록 신규진은 절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남들과의 메시지는 언제나 힘들었다. 업무 연락을 주고받을 때보다, 신규진과의 대화는 몇 곱절은 더 힘들었다. 언제까지 대화를 나누어야 적당할지, 어느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저를 귀찮게 여기지 않을지. 그런 모든 것을 신경 쓰는 이선에게는.

“…….”

뜬금없는 시점에서 랠리가 끝나고, 또 갑자기 다시 이어지는 강희찬과의 메시지와는 달랐다.

용건도 없이 쓸데없는 메시지를 보내면,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다고 오해를 할 수도 있었다. 강희찬은 자신의 성향을 알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말했듯, 일반적인 남자라면 그런 호의는 불쾌감만을 불러일으킬 테니까.

언제나 그런 방어기제를 세우는 게 우선이었다. 혼자서 벽을 세우며, 이선은 연락처에 저장된 그의 번호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멋대로 만들어낸 강희찬이다. 직접 메시지를 나눠본 그는 이선이 멋대로 그렸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정말 뜬금없이, 뜬금없는 내용으로 메시지를 보내더라도 그는 답장을 주었다. 아무리 늦더라도. 다 먹은 만두 상자 하나를 덜렁 사진으로 보내더라도. 비록 대체 그건 언제까지 먹는 거냐며 타박이 오기도 했고, 멋대로 집 주변의 피자 브랜드의 기프티콘을 보내며 닦달을 하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강희찬은 알수록 새로운 사람이었다. 몇 년째 알더라도, 여전히 문자 하나 보낼 때마다 긴장하게 되는 신규진과는 다른 의미에서.

* * *

“더 좋은 거 먹어도 되는데……. 뭐 따로 먹고 싶은 건 없어?”

사실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이선은 그리 생각했었다. 차마 가게에 들어왔을 때나 주인이 음식을 가져다주었을 때는 말로 뱉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이었다면 서슴없이 얘기했겠지.’

이선은 떠오르는 누군가의 가감 없는 대화법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방학 중에는 선생님들과 함께 나와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소중한 가게였다. 그렇다 해도, 지금은 탐탁지 않다.

어찌 됐든 이선은 언제나 신규진이 좋은 것을 먹었으면 했다. 어디서 무얼 하든, 그리고 누구를 만나고 있든. 그건 앞으로도 아마 비슷할 터였다.

“됐어.”

“으응.”

무심히 대답한 그는 물컵을 들고 입가에 대었다.

“떨어졌더라.”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다. 마치, 오늘 아침을 먹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물컵이 그의 표정을 가렸다. 그 탓에 신규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오롯이 읽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컵이 없었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선은 먼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자신이 시험에 떨어진 사람처럼.

죄인처럼 시선을 내린 채, 이제 제법 비어 있는 제 그릇을 향해 눈을 고정했다.

“그래도 이번에 면접까지 봤으니까, 다음에는…….”

“이거. 돌려줄게.”

탁. 작은 소리를 내며, 시야로 보라색 무언가가 불쑥 들어왔다. 뚝배기 그릇 옆에 놓인 것은 신용카드였다.

순간, 눈이 커졌다. 피하던 시선은 어느새 신규진을 향했다.

“…왜? 가지고 있지. 필요할 때 써.”

“됐어. 나도 알바 하니까.”

“그거… 계속하는 거야?”

“응.”

“내년에 또 시험 볼 거 아냐. 저녁 시간 매일 뺏기는 것 같은데, 그냥 그만두고 공부만 하는 게…….”

“이선아.”

이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떤 마음인지. 이선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임용 시험을 준비할 때, 과외 하나만큼은 그만두지 않았으니까. 어머니는 용돈을 늘려줄 수 있으니, 아르바이트는 그만두라고 넌지시 말했지만 이선은 결국 애매모호하게 거절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재능이나 마찬가지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똑같이 지방에서 올라왔어도 쉽게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이선은 내심 그들을 부러워했다. 물론 학교의 특성상 양친이 교직에 근무했고, 때문에 집안이 어렵지는 않은 동기들이 많았다. 하지만 딱히 그게 부러웠던 건 아니다. 힘이 들면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고민하는 게 아닌, 부모님을 찾을 수 있는 친구들의 성격이 부러웠다. 구김이 없이 자란 이들의 특징일까 궁금했다.

신규진도 따져보면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그런 쪽에 속했다. 이번 달엔 과 모임이 너무 많아서 돈이 부족하다고 부모님께 전화하던 모습도 심심치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후로 몇 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신규진 역시 이렇게 변해버렸다. 그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퍽 많아졌다. 그 사실이 못내 씁쓸했다.

“안 보려고, 시험.”

“…어?”

이선은 순간적으로 놀라 되물었다. 잘못 들었나? 신규진의 얼굴을 살폈지만, 놀랍도록 평이한 표정만이 그곳에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단호했다.

“이제 시험 안 보려고. 일도 계속할 거야.”

“왜, 왜? 그래도……!”

“이번에 합격 못 하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어.”

“…….”

이선은 멍하니 신규진을 보았다.

처음 듣는 말이다. 대체 언제부터 저런 결심을 했던 걸까? 자신은 알지 못했다.

요즘따라 신규진은 너무 낯설기만 했다. 자신이 모르는 모습들이 너무 많았다. 몇 개월 전에 만난 강희찬보다도. 훨씬 멀고 낯설게 느껴져, 이선은 혼란스러웠다.

“만나는 사람 있어. 너도 저번에 봤지?”

“…….”

“좋아. 나름대로. 앞으로 별일 없으면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

“…그러고 싶고.”

심장이 발치로 떨어졌다. 낯설다. 이런 신규진은 알지 못한다. 그를 알았던 세월 어디에도, 이런 사람은 없었다. 처음 보는 남자는 익숙한 얼굴을 했지만, 너무도 낯설었다.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한 이선의 입술은 사고를 거치지 않고 열렸다.

“그럼… 나는?”

“…….”

호흡을 멈추었다가 내쉬는 것처럼, 신규진의 숨소리가 깊게 흘러나왔다. 그것을 듣고서야, 자신이 어떤 말을 꺼낸 건지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선은 허둥거렸다.

이런 말은 절대 제가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부당한 책망을 하는 것인지.

황당한 말을 들었을 신규진보다도 제가 더 당황했다. 말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쏟아진 마음을 그러담을 수는 없었다.

신규진은 그런 이선을 얼마간 보았다. 가만히 보던 시선은 이내 국물이 약간 남은 그릇 안으로 향했다.

“너 좋은 사람이야.”

“…….”

“그래서 나도 좋아했고……. 너랑 같이 살고 싶을 때도 있었어.”

…처음이었다, 저런 말을 듣는 건.

이선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하지만 신규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오롯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 하나의 거리가 이리도 멀었다.

“너보다 대단하진 않아도……. 그냥 둘이서 비슷하게 벌고 비슷하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 그래서 분수에도 안 맞는 공부 계속했고.”

“…….”

“근데… 지금은 아니야. 다른 사람이랑 살고 싶어.”

그의 시선이 이선을 향했다. 무언가를 다짐하듯. 이선은 저런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는 얼굴이었다.

자신 역시 언젠가 갈림길을 선택하겠다 마음먹었을 때, 강희찬에게 저런 얼굴을 보였을까? 저렇게 보는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얼굴을.

“그 사람이랑 비슷하게 일하고 살면서……. 그러고 잘살 수 있을 것 같아.”

…이번은 달랐다.

숱하게 만나왔고, 때가 되면 가볍게 헤어졌다. 그는 힘들어할 때도 있었고, 어차피 헤어지려 하던 거 잘 되었다며 후련해하기도 했다. 그런 신규진의 앞에서 마셨던 술은 유달리 썼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이선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왜… 왜, 미리 얘기해 주지 않았어? 알았으면… 내가…….”

“내가 먼저 말하긴 억울하잖아.”

정리되지 않는 말만큼이나 흔들리던 이선의 눈동자가 멈추었다.

“…뭐?”

“너 때문에 공무원시험 쳤고, 합격하면 너랑 같이 사는 생각을 수없이 했어. 대단하진 않아도, 좀 더 나은 새끼가 되면 옆에 있을 때 쪽팔리진 않았으면 했고.”

“…….”

“한 번도 같은 거 달린 새끼한테 그런 마음 먹어본 적이 없어.”

‘화가 난 걸까?’

이선은 씹어 뱉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가 대체 무엇에 화가 난 건지.

남자를 상대로 그런 마음을 품은 것? 그게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무엇이 되었든, 이선은 가늠할 수 없었다. ‘보통’의 남자가 아닌 이선으로선 가늠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근데 억울하잖아. 넌 내가 뻔히 다른 여자를 만날 때도 한마디를 안 해줬어.”

“그건…….”

늦었다. 자신은 언제나 느림보였다. 정신을 차려보면, 소중한 것은 언제나 저 멀리 손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아버지처럼. …지금처럼.

“유치하지만 번듯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면, 네 옆에 있고 싶었어.”

거짓말이다. 저런 건……. 저런 건 거짓말이어야 했다.

그저 아무 말도 없이 저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던 기분 나쁜 남자에게 보일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그 언젠가, 커밍아웃을 하고 도망가듯 군대로 떠났던 자신을 찾아왔을 때처럼. 끈적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식어빠진 치킨 정도의 값어치일 것이라고. 분명 신규진에게는 그 정도의 선의일 뿐이라고.

이선은 수없이 속으로 되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저를 원망할 것만 같아서.

“근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이야. 내가 딱히 괜찮은 놈이 아니라도… 그냥 그러고 싶어.”

“…….”

“어떻게든 둘이 잘살 수 있을 것 같아.”

지독하게도 하나만 본다는 외골수라고. 그렇게 자신을 평하던 송재혁의 말은 틀렸다. 그저 자신은 뭐든 느리기만 했다. 지난 후에도, 미련을 버리는 것조차 너무 느릴 뿐이었다.

“…가볼게.”

신규진의 모습 뒤로 또 한 번 남겨지는 건, 이번에도 느리기만 했던 정이선이었다.

* * *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귀가 떨어질 것 같은 환호성도, 언제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축제 같은 분위기도. 모든 것이 사라지면 적막은 지나칠 정도로 몸을 덮쳐 오곤 했다. 유명인들이 겪는 우울증의 근본이 그것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런 격차에 우울감을 느끼기엔, 강희찬에겐 연차가 제법 쌓였다.

우승 후 여러 행사에 불려 다니는 피로감이나, 그걸 회복하기 위한 개인 훈련 스케줄. 이제 구단에서도 슬슬 FA를 신경 쓰는 연차가 되면, 모두 익숙한 일들이다.

단 하나. 뜬금없이 보게 되는 핸드폰 문자함을 제외하고는.

“…….”

운동을 끝내고 피트니스 센터를 나올 무렵, 트레이너는 개인 훈련 일정을 물었다.

늘 있는 일이었다. 대체로 12월 초에는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끝나고, 성탄절을 전후로 선수단 봉사활동이 마무리된다. 그즈음에 강희찬은 괌으로 출국했다. 그래도 지금보다 신인 축에 들던 시절에는 봉사활동에 잡혀 1월 중순쯤이 되어서야 출국을 했는데. 요새는 눈치도 보지 않는지, 잔소리를 할 직원이 없는지. 1월 초부터 날라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정확한 일정을 묻는 트레이너에게 강희찬은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비행편을 예약해야 한다면서 일정을 묻던 에이전시의 매니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보통은 언제쯤 출국을 하고 싶으니 비행편과 호텔을 잡아달라는 말을 먼저 했었는데 말이다.

“…….”

개인 훈련 일정을 잡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 상황에서, 출국 일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미묘한 주기로 미묘한 내용의 문자나 주고받는 이의 얼굴이 떠올라서.

이대로 출국을 하면 어영부영 이어져 있던 끈마저도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차일피일. 이유도 모른 채 비행편을 언제로 잡아야 할지. 난감한 에이전트의 마음은 강희찬의 고려 대상에 들어올 수조차도 없었다.

“골든글러브도 안 끝났는데 무슨 벌써 물어봐요.”

이번에도 정확한 일정을 어영부영 피한 뒤, 강희찬은 피트니스 센터를 나왔다. 문득 5시를 향해가는 시간을 확인하고 핸들을 돌린 건, 반쯤은 충동이었다.

이 원룸에 해가 떠 있을 때 도착한 건 처음이었다. 해가 졌을 때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던 외관에 붉은 노을빛이 끼얹어지니, 한숨이 나올 만큼 연식이 느껴졌다.

…하긴, 애초에 공동현관에 보안장치조차 없는 곳에 무얼 바라느냐마는.

강희찬은 한숨을 쉬며 운전석에서 찬찬히 동네의 외관을 살폈다.

CCTV도 많은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아기자기하게 예쁜 맛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올 때 보니, 조그마한 동네 마트도 걸어서는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고, 파출소도 마냥 가깝지만은 않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저의 오피스텔과 같은 동에 속했지만, 영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아무리 남자라도 혼자 살기에는 영 별로다. 수원에 계신다는 선생의 어머니는 아무래도 아들의 자취방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아니면, 선생이 의외로 고집이 세다거나. 이선은 안 그렇게 생겨서 은근히 제 주장이 있었으니, 후자가 더 가능성이 클지도 모른다.

보면 볼수록 한숨만 나오는 동네에서 눈을 떼었다. 대신 몇 번이나 봐서 닳기 직전인 핸드폰의 문자함으로 돌렸다.

[만두인간이 될 것 같아요.]

만두를 들려 보냈던 다음 날. 학교에 출근하기 전에 아침으로도 만두를 먹었다며, 선생은 메시지를 보냈다.

만두 한 상자에 몇 개나 들어 있다고, 그걸 다음 날 아침까지 먹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선은 더욱 놀랄 소리를 했다. 아직 여덟 상자가 남았으니, 앞으로 일주일은 저녁으로 먹을 수 있다고.

강희찬은 질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난해요? 버려요. 썩으니까.]

[안 썩었는데… 아깝잖아요.]

[그래도 버려요. 먹고 탈 나면 어쩌려고.]

[냉동실에 넣어두고 나왔어요.]

…그러고 보니, 고집이 장난이 아니었지. 게다가 냉동실에 두면 시간이 가지 않는다는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진 모양이었다.

먹지 말라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해도, 이선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냄새를 맡아보고 괜찮으면 먹으면 돼요. 그런 말로 마지막까지 속을 뒤집으면서.

[정말 가지고 싶은 거 없으세요? 하다못해 먹고 싶은 거라도…….]

[봉사활동 힘드시겠어요. 추운데 왜 밖에서 음식을 팔아요?]

이대로 자연히 소멸되는 게 아닐까 걱정될 때쯤이면, 선생의 문자는 도착했다. 가끔씩, 정말 뜬금없는 내용을 보내기도 했다. 제 딴은 인터넷 기사에 뜨는 자신의 근황을 보고 문자를 하겠지만, 어쩔 땐 너무 뜬금없기도 했다.

강희찬은 슬슬 손가락을 움직이며 이선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중고등학교 선생들처럼 제가 들어가는 수업마다 반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애새끼들이 하교할 때까지 계속 붙어 있어야 한다. 게다가 듣기로는, 담당도 아닌 고학년의 체육수업에까지 보조로 들어간다지?

하여간 어리고 만만하다고 벗겨 먹는 건 어딜 가나 똑같다. 게다가 공무원이라, 나이가 어리면 월급도 적게 받을 텐데.

얼마 전, 우승 보너스 명목으로 통장에 들어온 금액을 기억해 냈다.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 시기에 통장에 억 단위의 금액이 꽂히면 나쁠 건 없다. 우승하면, 상을 달라고 이선을 닦달하긴 했어도 선생은 돈도 없고, 월급도 적으며, 얼마 전엔 암표상에게 뜯기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에게 뭔가를 얻어내는 건 역시 못 할 짓이었다.

‘이래저래 통장을 노리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멍청한 얼굴로 통장을 든 무방비한 얼굴의 이선을 상상할 무렵이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골목 저편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가로등이 비추는 그림자의 끝에는 느리게 걷는 이선의 모습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탁.

강희찬은 반사적으로 차에서 내렸다.

질질 끄는 발걸음과 비척대는 몸짓은 그 소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걸음이 성큼성큼 거리를 좁히며, 바로 앞까지 왔을 때도.

“아…….”

부딪히기 직전, 이선은 뒤늦게 강희찬의 발을 깨달았다. 토끼처럼 놀란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보자, 핏기가 없는 안색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종잇장처럼 하얀 얼굴에 눈만 덩그러니 크다. 거기에 맺혀 있는 물기나, 주변의 붉은기를 모를 만큼 둔하진 않았다.

“왜 울어요?”

본능적으로 이선의 손목을 붙잡았다. 홱 고개를 내리고, 자신을 피해서 돌아가려는 몸짓을 보니 적절한 선택이었다. 미약한 이선의 움직임은 봉쇄되었다.

“아니…….”

이선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리자, 그는 재차 제 얼굴을 푹 숙인다. 그래 봐야 소용없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맺혀 있는 눈물까지 각인된 듯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자꾸만 도망치고 싶은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이선을 재차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왜 우냐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왜 우는데.”

“…….”

평소에도 이선의 얼굴을 오롯이 보기란 힘든 일이었다. 마주 보고 서 있으면, 그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들어주어야만 볼 수 있었다. 하물며 이선의 성격상 제게 궁금한 것이 있을 때가 아니라면 그래 준 적은 없었다.

이렇게 얼굴을 숨기려 든다면, 강희찬에게 보이는 건 힘이 약한 머리카락이 전부다.

강희찬은 남은 손으로 이선의 고개를 들어보려 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뺨에 손가락이 닿자마자, 이선은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었다. 완강한 거부에 강희찬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선의 손을 끌고, 제 차를 향했다.

“…보내주세요…….”

걸음 중간마다 이선은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대꾸 없이, 그저 손목을 틀어쥔 손에 힘을 조금 더 가했다.

조수석에 이선을 밀어 넣고 차 문을 닫았다. 제가 운전석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 사이에 도망이라도 칠까 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강희찬이 운전석에 탈 때도 이선은 고개를 푹 숙이고 훌쩍거리고만 있을 뿐, 도망가진 않았다.

“…왜 울어요.”

조수석을 향해 몸을 튼 강희찬이 재차 물었다. 여전히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돌아왔다.

“…….”

눈물을 보는 순간, 화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애써 눌러야만 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화를 내어봤자,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 것이 눈에 보였다.

한숨을 흘려내며 강희찬은 겨우 입술을 떼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왜요. 애새끼들 엄마가 와서 지랄합니까?”

“…….”

대답 대신, 이선의 고개가 미약하게 흔들린다. 그럼 애새끼들이 괴롭혔단 말인가?

예전부터 땅값만 비쌌지, 애새끼고 학부모고 영 별로인 동네였다. 게다가 요새는 학교에서 체벌도 못 한다니, 애새끼들이 선생을 얼마나 만만히 볼까.

이선의 머리카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강희찬은 다시 한번 이선의 얼굴을 향해 조심히 손을 갖다 대었다.

“고개 좀 들어봐요.”

“…하지 마세요.”

단호한 거부다. 고슴도치처럼 세운 가시에 찔린 듯 손끝이 조금 아렸다.

“알았어요. 안 할게요.”

하지만 어쨌든 이선이 원하는 바였다. 강희찬은 어느새 물기에 젖은 뺨에서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

차마 엉엉 울지도 못하고, 끅끅 넘어가는 숨소리가 울린다. 그게 못내 답답해졌다.

차라리 그냥 시원하게 울기라도 하지. 무엇 하나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게 없었다.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차였다.

“아니었잖아요…….”

잔뜩 메인 이선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잘되지 않았잖아요. 다른… 윽, 사람이랑 살고 싶다고…….”

머리보다도 감각에서부터 본능적으로 전해졌다. 약아빠진 애새끼도, 지랄스러운 학부모도 아니다. 투아웃이다. 한참 부족한 설명으로도 강희찬은 눈물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

아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선생을 이렇게까지 뒤흔들 수 있는 건, 좆같지만 그놈 하나일 테니까.

“강희찬 씨, 때문이에요. 강희찬 씨가 그런 말을, 하니까…….”

울지 말라고. 제발 울지 말아달라고. 원한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제발 그만 울어달라고. 원하는 걸 발밑에 가져다 바칠 자신도 있었다.

강희찬은 그런 상대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이의 몸은 쉽게 기울어지며, 품 안에 떨어진다.

어깨에 묻힌 얼굴에서부터 애처로운 울음이 비어져 나왔다. 울음은 귀보다 심장에 먼저 와닿았다.

“잘못했어요.”

무작정 뱉었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본능에 가까운 말이었다.

“흐으…….”

“정 선생님……. 내가 잘못했어요.”

점점 거세지는 들썩임에, 강희찬은 좀 더 이선을 바싹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냄새가 날 것 같은 머리카락이 턱을 스친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울지 말아요. 응?”

“…….”

“난, 정 선생이 울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작정 빌었다. 그냥 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 따위는 없다.

투아웃 때문에 울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선이 울고 있었다. 이유 따윈 필요하지도 않았고. 그저 품 안의 사람의 눈에서 서러운 눈물만 그치면 되었다.

쉼 없이 끅끅거리는 숨이 안타까웠다. 강희찬은 조심히 제 어깨에 파묻힌 이선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주인을 닮아 힘이 약한 머리카락이 입술을 간지럽혔다.

머리카락에서 이마로, 눈물이 잔뜩 맺힌 눈가로. 쉼 없이 입술을 내렸다. 이선은 중간마다 저를 뿌리치려고 미약한 반항을 했다. 하지만 강희찬의 손길은 잔뜩 힘이 빠졌으면서도, 끈질기게 이선을 놓지 않았다.

“잘못했어요, 내가. 내가 미안해요. 그런 말 해서.”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가장 힘들 때 치고 들어가라고 했던가?’

언젠가 이승주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그 ‘힘들 때’라는 게 아마 이런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겠지. 다른 이로 인해 울 때, 그 틈을 노리라고.

하지만 막상 닥쳐보니, 그런 약아빠진 생각은 불가능했다.

‘이렇게까지 숨도 못 쉬고 우는데…….’

그런 치사한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투수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타자의 방망이를 만나면, 공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던진 투수라고 하여 그런 위험에서 빗겨나 있는 건 아니었다.

중학교였나 고등학교였나. 어쨌든 그 시절, 타 학교와의 경기 중 같은 팀의 타자가 상대 팀 투수를 맞힌 적이 있었다. 고의가 아니었기에 녀석은 투수가 제 타구에 맞고 쓰러지는 순간 패닉에 빠졌다. 정신을 빼고 1루로 가지 않았다며, 그날 경기가 끝난 후 감독은 야구부 전원에게 기합을 내렸다.

머리를 박느라 얼굴로 피가 몰리는 감각 속에서, 강희찬은 생각했다. 아마 프로에 간다면 그런 순간 녀석은 망설임 없이 1루로 향해야만 할 거라고.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우는 사람을 달갑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우는 순간에도. 제 눈물에도 너그럽지 못한데, 하물며 타인의 눈물방울이라고 달가울까.

누군가 우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가차 없이 뒤를 돌아 자리를 뜨면 그만이다. 눈물이 무기라는 소리는 강희찬에게는 개소리나 다름없었다.

“이선아……. 응? 그만 울어. 선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말의 의미를 처절하게 통감할 수 있었다.

눈물은 무기였다. 적어도 이선이 보이는 눈물은 저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임은 확실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호흡도, 눈가가 짓무를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이렇게 우는데……. 그것도 우는 방법도 제대로 모르는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죽여 눈물만 흘리는데 대체 어떻게 뒤돌 수 있단 말인가.

그것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이선의 양팔이 자꾸 같잖은 반항을 계속해도, 품에 넣어 어깨에 얼굴을 묻게 하고. 자잘하게 입맞춤을 내리는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

대체 왜 우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지. 가슴이 먹먹할 만큼 답답한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가슴 안쪽의 무언가가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미어질 것 같은 그 소리는 강희찬의 품 안에서 점점 잦아들었다.

우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소모되는데, 중간마다 강희찬과 실랑이 아닌 실랑이까지 했다. 결국엔 힘없이 품에 축 늘어진 이선의 몸을 강희찬은 조심히 떼었다. 눈물이 가득 번진 얼굴에 순간적으로 혀를 찼다. 그것을 의식한 이선이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려 들었다. 강희찬은 재빨리 콘솔박스에 두었던 물티슈를 찾아내 이선의 얼굴을 조심히 닦았다.

힘없이 시트에 기대어 늘어진 이선을 태우고 강희찬은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선은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고 싶은 것 같았지만, 목적지는 금세 도착했다. 근처의 편의점이었다.

“잠깐만 타고 있어봐요.”

울어버리느라 수분이 빠져나갔을 텐데, 이온음료가 좋으려나. 고민을 하며 강희찬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 순간 이선의 팔이 힘없이 그를 향해 뻗어왔다.

“왜요?”

“…….”

무언가가 걸리는 듯, 자신의 어깨 주변을 보는 이선의 입술은 달싹이기만 한다. 결국 그는 조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차에서 내려 가게를 향했다.

“어서 오세요. 아……!”

아르바이트생은 들어선 강희찬을 본 순간 멈칫했다.

자신을 알아보고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젠 그리 낯선 일만은 아니다. 강희찬은 아르바이트생을 가볍게 무시하며 안쪽의 냉장고로 성큼성큼 걸음을 뻗었다.

어둑해진 바깥과는 달리, 편의점 내부는 밝고 깨끗하다. 도난 방지 목적인지 내부 곳곳엔 거울이 있었다. 그 덕에 강희찬은 제 어깨 위의 눈물 자국을 눈치챘다.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찍혀 있다. 우는 사람의 얼굴이 여기에 있었다는 걸. 사람의 눈과 입으로 보일 법한 자국. 아무래도 회색 옷이다 보니, 자국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아르바이트생이 놀랐던 건, 아마 자신을 알아봐서가 아니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자국을 보고 놀란 거였다.

어쩌면 이선이 차에서 내리려는 자신에게 손을 뻗은 것도 이것 때문이었나? 이런 자국을 자신의 옷에 남겼다고. 그리 말하고 싶었던 걸까?

정신없이 울던 와중에도 이상한 거나 신경 쓴다. 하여간 희한한 성격이었다. 웃음이 옅게 비어져 나왔다. 다소 풀어진 표정과 함께 커다란 이온음료를 계산대에 두자 아르바이트생은 긴장이 풀린 기색을 보였다.

“할인이나 적립카드 있으세요?”

“됐어요.”

“네. 카드 받았습니다.”

커다란 이온음료 한 통을 손에 덜렁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이선을 무작정 차에 태우고,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출발했었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이선은 확실히 울고 있었지만.

차 문을 열었을 때, 이선은 차 안에 그대로 있었다.

다행히 도망가진 않았다. 자꾸 품을 벗어나려고 했기에, 편의점에 간 사이 도망을 쳤다 해도 놀라진 않았을 터였다.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강희찬은 차에 오르고, 말없이 이선에게 음료를 넘겼다. 커다란 음료 통과 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선이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러고도 한참을 멍하니 음료수를 바라보기만 한다.

‘마시지 않고, 왜…….’

모습이 퍽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희찬은 조심히 차를 몰았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대로 혼자 두면, 또 한참을 아까처럼 울기만 할 텐데. 그렇다고 제집으로 데려간다면, 그건 또 싫어하겠지.

결국 포기하고, 이선의 원룸으로 돌아갔다. 차가 멈추고, 강희찬이 시동을 끄자 이선은 꾸물거리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히 가세요…….”

꺼질 듯한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작은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울음의 후유증인지 잔뜩 메어 있는 것이 더욱 듣기 거슬렸다.

차 문을 열고 내린 이선을 뒤따라 강희찬 역시 내렸다.

“정 선생님.”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뒷모습을 붙잡고, 조심히 돌려세웠다. 돌아보는 이선의 얼굴에는 자신은 모르는 물기가 또 묻어 있었다. 분명 잘 닦아줬는데. 아마 편의점에 들렀던 사이 또 질질 짰나 보지.

강희찬은 손을 들고, 눈물로 젖어 붙은 뺨을 조심히 쓸었다.

“…제발, 안 보이는 데서 울지 마요.”

결국, 제가 바랄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였다.

고작해야 다른 놈 때문에 울지 말란 말도, 차라리 소리를 내어 엉엉 울라는 말도 제게는 할 자격이 없었다.

안쓰럽게 뺨을 쓰다듬는 강희찬을 이선은 끝까지 바로 보지 않았다. 그는 작은 뒷모습이 들어간 원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불이 켜질 생각이 없는 창을 오래도록.

* * *

대학을 다니며,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신규진을 알고 나서 깨달은 바가 하나 있었다. 자신은 꽤 어리광을 부린다.

딱히 타인에게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신규진이 누군가와 잘 되고 있다는 느낌만 받아도, 자신은 앓았다. 울적해진 기분으로 홀로 자취방에 틀어박혀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 자신의 컨디션은 신규진에 의해서 좌우되었다.

그런 것도,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으면 내성이 생기는 걸까?

“…….”

강희찬의 품에서 엉엉 울다가, 말도 안 되게 커다란 음료수를 손에 들고 집에 돌아왔던 날. 이선은 울었다.

‘대체 이런 커다란 이온음료를 사주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하면서도, 꾸준하게 훌쩍거렸다. 그러는 와중에 배가 고파서 레토르트 미역국을 데워 밥도 먹었다. 중간에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그가 줬던 만두도 한 상자 데워서 곁들어 먹었다. 강희찬이 줬던 이온음료를 홀짝거리며.

그 덕분인지 몰라도, 다음 날 눈이 조금 부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컨디션은 멀쩡했다. 몇 시간을 울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이들과 놀이수업도 했고, 학예회 연습도 했으며, 심지어 선생님들과 커피 내기까지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니, 오히려 더 괜찮게 지내고 난 후에야 이선은 문득 쓸쓸했다. 신규진이 떠났다는 사실보다는, 이제 자신에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은 그리 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앞으로 저를 가장 중하게 여겨줄 사람은 찾지 못하겠지. 자신 역시 사랑이 그리 중요하진 않은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문득문득 울적해졌다. 그럼에도 이선의 일상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갔다. 학예회가 끝나는 바로 오늘까지.

“고생하셨습니다.”

“잘들 들어가세요.”

리모델링을 했지만, 이름만은 ‘가든’이 붙여진 채라 연식이 보이는 고깃집 앞에서 사람들은 인사를 나누었다. 누가 봐도 회식이 끝나고 헤어지는 모양이구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리 생각할 터였다. 덧붙여 중간중간 나오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통해, 주변 학교의 회식이라는 것도.

슬슬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이선도 인사를 하고 빠질 준비를 했다. 까닥하다가는 아직 집에 가기 아쉬운 무리에게 잡히기에 십상이었다.

슬금슬금. 경계하는 동물처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선 쌤!”

역시 교사답다 싶은, 발음이 좋은 쨍한 목소리에 이선은 아차 했다. 진작 재빨리 귀가조에 끼어서 같이 인사를 해야 했는데. 이러다 꼼짝없이 카페조에 끼게 생겼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무슨 핑계를 대야 하나 고민하며 뒤를 돌자, 유성희가 이선을 보고 있었다. 곁에 있는 김경원의 팔을 단단히 잡은 채로.

“쌤, 집으로 갈 거지? 미안한데, 가는 길에 경원 쌤 좀 데려다줄래요? 둘이 비슷한 방향이잖아.”

“아니, 저는……!”

김경원은 퍽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저런 모양을 이선은 대충 본 적이 있었다. 무슨 무슨 데이라며, 아이들이 학교에 간식을 가져오는 날. 이선에게 과자를 건네주던 고학년 학생들의 모습들이 저랬다. 네가 가. 싫어, 너 먼저 가.

“해도 졌는데, 불안하잖아. 난 커피도 마시고 들어가려고.”

유성희는 그녀를 이선을 향해 끌었고, 김경원은 제 팔을 빼내려 낑낑거린다. 2인조의 기괴한 몸짓을 보며,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김 선생님, 여기 길 건너서 택시 타는 게 편하시죠?”

“뭘 택시를 타. 집도 가까운 사람들이. 걸어서 가.”

택시를 잡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이선을 향해 유성희는 타박했다. 분명 자신 혼자 돌아간다면 걸어서 갈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건 아마도… ‘그런’ 의도가 맞는 거겠지?

“…네.”

그리 따져보니, 김경원이 난색을 보이는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갔다. 잠시 고민하던 이선은 결국 유성희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저의 고민이 그리 유의미한 상황은 아니었다.

“김 선생님. 가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어엉. 잘 가요.”

뭔가 그녀의 얼굴에선 천 피스짜리 퍼즐 조각을 완성시킨 이의 뿌듯함이 느껴졌다.

유성희에게 등이 떠밀린 김경원이 잰걸음으로 이선의 곁으로 다가왔다. 교장 선생님에게 맥주를 몇 잔 받아 마셔서인지 얼굴이 살짝 붉었다.

“죄송해요. 혼자 걸어가도 괜찮은데…….”

“괜찮아요. 김 선생님이 저 사거리 쪽 아파트에 살았죠?”

“아, 네.”

이선은 먼저 걸음을 옮기며 운을 떼었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 건 불편하다. 특히 두 사람이라면. 화제가 끊기지 않도록 관심도 없는 대화 주제를 찾아내고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런 것에서는 서투른 사람이었다. 느릿한 제 걸음을 맞추어주고, 먼저 말을 걸어주는 이를 올려다보는 것에 익숙해진 탓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학교랑 집이 꽤 가깝네요.”

“그래서 발령받고 부모님이 더 좋아하셨어요. 학교 옮기는 걸 벌써 걱정하신다니까요.”

이미 해가 진 시간대의 서늘한 바람이 달아오른 두 사람의 뺨을 적당히 식혀주고 있었다. 김경원과 같은 테이블에서, 교장 선생님의 술잔을 받은 건 이선도 매한가지였다.

“그럼 김 선생님은 원래 살던 동네가 여기겠네요?”

“네. 저 선영여고 다녔어요.”

행정구역으로는 동이 다르지만, 지금 이선의 초등학교와 퍽 가까운 곳에 여학교가 하나 있다.

“집이 서울인데 대학을 인천에서 다니셨어요?”

“좀 점수가 아슬아슬했어요. 안정권으로 들어가고 싶어서요. 교대 못 가면 재수시킬 거라고 하시길래요. 재수는 진짜 하기 싫었거든요. 결국 임용 볼 때 하긴 했는데…….”

“아아.”

그러고 보니, 김경원은 양친이 모두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고 했던 것 같다.

교사 부모를 둔 교사 자녀. 그림으로 그린 듯한 교육자 집안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오늘 그녀에게 끈질길 정도로 지인의 아들을 소개받아 보지 않겠냐는 말을 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대학병원의 레지던트 4년 차라며, 이제 고생은 거의 끝났다고 강권하는 교장 선생님을 향해 그녀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남자친구가 아쉬울 나이가 아닐 거라는 유성희의 중재로 교장 선생님은 겨우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지만.

“이선 쌤!”

상념에 빠져 걷던 이선을 김경원의 목소리가 일깨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보다 반보 정도 앞서 걷고 있었다. 걸음이 빠르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여자와 함께 걸을 일이 많지 않다 보니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김경원의 용건은 그게 아니었다.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자그마한 손가락의 끝이 가리킨 곳에는 익숙한 간판의 편의점이 있었다.

이선은 잠깐 망설였다.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김경원은 재빨리 먼저 걸음을 편의점 방향으로 틀었다. 이선은 씩씩한 그녀의 걸음을 따라 편의점 안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대학 다닐 때, 뒤풀이하면 1차 끝나고 노래방 가기 전에 꼭 누가 아이스크림 사 오지 않았어요? 근데 여기 선생님들은 카페 가는 거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 이선 쌤 꼭 아이스크림으로 안 드셔도 돼요.”

“아, 네.”

요구르트 맛과 콘 아이스크림 사이에서 갈등하는 손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이선은 안쪽의 음료 냉장고를 향했다.

신규진만큼 활달하진 않았겠지만, 이선에게도 대학 시절의 사소한 추억쯤은 있었다. 김경원의 말처럼, 호프집을 나서면 어딘가에서 검은 봉지에 잔뜩 하드를 담아서는 하나 고르라며 내밀던 이들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던 그런 일을 자신은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런 배려심도 타고나는 성격에 들어가는 걸까?

괜히 울적해지는 기분을 다잡으며 냉장고 앞에 섰다.

언제 봐도 결정장애를 불러일으키도록, 다양한 브랜드의 갖가지 음료들이 즐비해 있다. 길을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먹기 귀찮았을 뿐인데.

또 다른 귀찮음이 목전에 나타나서 이선은 얕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렸다.

그 순간, 냉장고의 맨 아래 칸에 얌전히 정렬된 대용량 음료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쏟아버린 눈물 대신 꾸역꾸역 몸에 채워 넣었던 음료였다.

그러고 보면, 이선은 당시에도 강희찬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왜 음료수를 이렇게 큰 걸 사 오는 거냐고. 페트병 하나를 덜렁 끌어안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원룸의 계단을 오르며 훌쩍대는 제 모습은 다시 생각해 보면 우습기만 했다. 원래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는 하지만.

강희찬이 용케도 당시에 웃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며, 이선은 같은 종류의 캔 음료를 찾아 집어 들었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사람이다.

서러움에 훌쩍거리던 와중에도, 종종 미친 사람처럼 웃을 때가 있었다. 왼쪽 어깨에 사람 얼굴 같은 눈물 자국을 묻힌 주제에 한껏 심각했던 강희찬의 얼굴. 그가 아무렇지 않게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음료수병이 넘어오는 순간 힘이 빠져 휘청거리던 우스운 저의 꼴.

그런 것들은 종종 이선을 웃게 했고, 목이 칼칼할 때마다 음료수를 바라보게 했으며, 심지어 배고픔까지 느끼게 했다.

아니, 그런 건 핑계일 것이다. 자신은 어렴풋이 그가 제게 보여주는 다정함을 눈치채고, 기댈 언덕이라고 여기는 약은 구석이 있었다. 그가 알아채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싫은 구석이.

“다 고르셨어요?”

이선의 옆에서 김경원의 얼굴이 빼꼼 나왔다. 결국 요구르트 맛 바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이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계산대를 향했다.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그녀의 아이스크림은 지금도 열심히 봉지 안에서 녹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김 선생님, 계산 제가 할게요.”

“왜요. 이선 쌤, 괜히 저 때문에 돌아서 집에 가시는데, 이거라도 사야죠.”

결국 김경원이 자그마한 카드지갑에서 카드를 먼저 빼냈다. 쓸모없는 소모전은 시작도 되기 전에 끝이 났다. 취객들의 계산 실랑이가 또 시작되는 거냐며, 귀찮은 기색이 슬슬 올라오려던 아르바이트생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멤버십 할인 카드 있으세요? 영혼이 요만큼도 없는 기계적인 목소리 사이로, 이선은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날. 강희찬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역시 택시 기사님이 좀 싫어하시더라도, 택시를 타는 편이 나았나…….

체육활동이라고 해봐야 아이들과 일주일에 서너 번 있는 체육수업이 전부인 이선의 숨이 조금 가빠질 무렵, 김경원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어딘가 이름이 익숙하다 싶었더니, 단지는 달랐지만 산이가 사는 아파트였다.

몇 층까지 있는지. 밖에서는 층수를 세기도 까마득한 외관으로 향했던 눈이 다시 김경원을 향했다.

“김 선생님, 그럼 들어가세요.”

머뭇머뭇. 김경원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마치 인사를 할 타이밍을 재는 것 같았다. 공동현관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돌아설 셈이었던 이선을 다급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저기……!”

아직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이선은 괜히 몸이 굳은 채 눈을 둥그렇게 떴다.

“주말에…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평정을 가장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만 같았다. 이선은 그것이 갑자기 스치고 지나간 바람 탓이라고 애써 여겼다. 하지만 안일한 생각이 본능적인 긴장감까지 누를 순 없었다.

“…네?”

“아는 지인이 신인 작간데, 대원 미술관에서 다른 화가들이랑 전시회가 있다고 해서요. 이선 쌤, 미술관 가는 거 괜찮으시면…….”

“…….”

그녀는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던 앞머리를 몇 번이나 매만졌다.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저건 그녀가 제법 당황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김 선생님.”

“네.”

잠깐의 틈이 두 사람을 갈랐다. 망설인 끝에, 이선은 겨우 목소리를 내어 그녀를 불렀다.

김 선생님. 학교엔 적어도 다섯 명의 김 선생이 있었지만, 이선은 단 한 번도 그녀를 ‘경원 쌤’ 같은 친근한 호칭으로 부른 적은 없었다. 문득 그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녀를 부른 방금 전의 제 목소리도 바람에 떨린 것만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갈 곳을 헤매던 그녀의 까만 눈이 이선을 향했다.

순간, 이선의 눈이 오히려 그녀의 시선을 피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제가… 주말에 약속이 있어서요.”

한마디를 뱉어낼 때마다 목 어딘가에 모래가 낀 듯 까끌했다.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것만 같았는데. 그래도 의미는 전해진 모양이었다.

앞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김경원의 손이 분주히 허공을 휘젓는다. 그렇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의 삐걱거리는 공기가 완화되는 건 아니었다.

“아, 그럼 다음 주에는 어떠세요? 전시 기간이 생각보다 길더라고요.”

“아니요.”

신규진의 인생에서 잘라 내어지던 그 날. 울면서도 밥을 먹었고, 잠도 잘 수 있었던 건, 이제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게 그리 비중이 큰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주는 이가 있었다. 시작은 언감생심이던 마음이 비참하게 끝을 맺을 때도, 그런 자신을 괜찮게 여겨주는 이가 이 세상에 하나는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책망을 하더라도 품에 넣었고, 제 옷에 우스운 눈물 자국을 만들었어도 타박 하나 없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커다란 이온음료를 품에 안겼으며, 결국엔 제발 울지 말아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 자신이 퍽 괜찮게 느껴지던 밤이었다. 우는 와중에도 가끔은 웃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을 또 한 명을 눈앞에 둔 순간. 그때처럼 웃을 수는 없었다.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지며, 숨을 쉬기가 조금은 곤란할 정도로 답답해지고 있었다.

“다음 주말에도…….”

“…….”

“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해요.”

차마 김경원을 보지도 못한 채였다. 시선을 신발 앞코에 두고 중얼거리는 말 사이로, 제법 쌀쌀한 초겨울의 공기가 스쳤다.

길이를 재본다면 서너 뼘 정도 앞에 보이는 그녀의 신발 역시 미동이 없었다. 이러다 감기에 들지도 모른다. 이선은 불편한 공기를 피하고 싶은 제 마음에 구실을 붙였다.

어떻게든 정리를 하고 그녀를 집으로 들여보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이런 게 아니에요.”

“…네?”

당장이라도 땅으로 꺼질 듯한 작은 목소리에 이선의 고개는 반사적으로 들렸다.

몇 초 전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푹 숙인 김경원이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숙인 탓에, 얼굴 대신 가르마만 보였다.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어요…….”

한숨과도 비슷한 목소리는 자신에 대한 책망에 가까웠다. 이선은 점점 움츠러드는 그녀의 어깨를 안아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김 선생님.”

“오늘 일하느라 옷도 이렇게 입었는데. 머리도… 하필 오늘…….”

다 망쳐 버렸다고. 그리 말하는 것만 같은 목소리에 이선의 마음에선 죄책감이 퍼졌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속상해할 이유는 없었다. 이선이 그녀의 마음에 응해줄 수 없는 건, 학예회를 준비하기에 적합한 편한 복장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제 앞에 있었어도, 자신은 그녀가 바라는 답을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김 선생님…….”

당신이 지금 좋다고 하는 남자는 게이입니다. 이렇게 슬퍼할 가치도 없어요.

한껏 힘이 빠져 있는 어깨를 보며, 이선은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김경원은 당장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슬퍼하지도 않아도 될 것이고.

하지만……. 눈앞의 여자가 저로 인해서 속상해하는 걸 알고 있지만, 이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유 선생님은 하필 오늘 그러셔서…….”

물기가 어린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에, 이선은 가슴 어딘가가 아렸다.

‘너랑 같이 살고 싶을 때도 있었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말도 못 하고 끙끙거리며 저를 보기만 하던 기분 나쁜 남자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적선일 뿐이라고.

잔뜩 삐뚤어진 그때의 자신은 그리 생각했었다. 아집으로 저를 꽁꽁 둘러 싸맨 채. 스스로에게 먼저 상처를 내어, 다른 이가 주는 상처에 익숙해지도록.

하지만…….

‘유치하지만 번듯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면, 네 옆에 있고 싶었어.’

하지만 거짓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온 마음을 다한 진심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신규진은.

그저 불쌍하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던 게 아니라, 정말 최선을 다한 자신의 진실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하필 이런 날…….”

물기가 어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작은 어깨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

눈앞의 이 여자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모습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비록 자신은 그녀에게 어떠한 연애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진심이었다.

“김 선생님…….”

‘난 정 선생이 울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난처해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그의 말을 이런 식으로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울던 자신을 기꺼이 품에 넣어 달래주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변명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는 비겁한 인간이었다.

“선생님이 이러실 만큼… 제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아니에요.”

이런 순간까지. 중요한 말은 숨긴 채, 허울 좋은 말로 덮는 자신과는 달랐다. 신규진이야말로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언제나 무서워하며 피하고 숨기만 하던 자신과는 달리. 오히려 저를 똑바로 바라봤던 건 신규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조차도 뒤늦게 알아채는 건, 역시 저답다면 저다운 일이었다.

* * *

‘넌 좀… 돌다리가 부서질 때까지 두드려보는 성격이지.’

송재혁은 저를 그리 평가하곤 했다. 흘려들으면서도 이선은 그리 좋은 쪽으로 말한 건 아니었음을 당시에도 알아챘다.

하지만 신중함과 결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신중함이라기보단, 느린 것에 가깝기도 했고.

게다가 질릴 정도로 고민을 했던 때보다, 한순간의 충동이 더 나은 결과를 낳을 때도 있었다. 특히 요새는 더욱 그것을 실감했다.

학예회가 끝나고 회식까지 마쳤던 날은 목요일이었다. 고작해야 학예회 다음 날이라는 핑계로 교장 선생님이 재량 휴일을 주실 리는 없었기에, 당연히 이선은 출근을 했다.

의외로 김경원은 먼저 출근해 있었다. 대략 1년을 채워가는 동안 그녀를 봐왔지만, 이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안경을 얼굴에 얹은 채로.

“좋은 아침입니다.”

메어 있는 김경원의 목소리가 출근한 이선을 향해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네에.”

오히려 이선이 어색한 채로 쭈뼛대며 자리에 앉아야 했을 만큼.

조회를 위해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그녀의 시선이 이선을 향하는 일은 없었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묘한 서운함이 이선의 가슴을 스쳤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실례일 것이다.

괜히 서늘해지는 건, 아무래도 쌀쌀해진 날씨 탓일 뿐이라고. 이선은 교무실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히터의 존재를 부정한 채,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외투를 걸치지 않으면 어색한 온도였지만, 복도의 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은 봄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운동장 잔디 위로 햇빛이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던 이선은 충동적으로 핸드폰 번호 하나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아, 전화기는 금세 원하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어, 선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엄마.”

―학교 아직 안 끝났을 시간 아니야?

“수업만 끝났어요.”

―아아……. 근데 무슨 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하고. 반찬 필요해?

걱정과 함께 내심 반가운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마음의 허함을 채웠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죄책감이 가슴에 얹혔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실 만큼, 자신은 용건이 없으면 전화를 먼저 걸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못된 아들은 괜히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반찬 아직 많이 남았어요.”

―그거 아직도 먹고 있어? 얼른 부지런히 먹어버리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엄마가 해둘게.

“지금 있는 것도 잘 먹고 있어요. 더 안 필요해요.”

이러다가 또 주말에 반찬이 담긴 통을 한가득 받아서 올지도 모른다. 아직도 냉동실에서 만두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만두의 이웃 주민을 더는 늘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선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다른 게 아니라……. 엄마, 혹시 겨울에 가게 쉬실 수 있나 해서요. 한 일주일쯤.”

―가게? 가게는 왜?

“그냥, 방학하면 여행이라도 갈까 해서요.”

―…….

무언가 잘못을 한 어린애처럼. 쓸데없는 변명을 주절거리는 기분이었다.

‘괜한 짓을 한 건가.’

그저 계절치고는 볕이 좋고 날이 따뜻했다. 이런 날, 이선은 누군가를 떠올리곤 했다. 대부분이 신규진이었고, 요새는 강희찬이었고.

하지만 오늘은 그 두 사람 다 아니었다.

언제나, 울지 않고 웃기를 바라는 여자가 있었다. 아마 저의 인생에선 오직 하나뿐일. 언제나 이선을 위했던 이는, 이번에도 이선이 바라는 답을 주었다.

―엄만, 선이만 괜찮으면 좋지. 가게야 미리 쉰다고 써 붙이면 되고.

아마도……. 아마도 가장 가까운 미래에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건 강희찬이 될 것이다. 그런 미래가 확실한 상으로 그려졌다.

가장 바란다고 생각했던 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또 다른 무언가가 항상 이선의 손 안에 남아주었다.

아버지가 떠났다는 슬픔에 마냥 울기만 하다 쓰러진 이선을 업고 응급실로 달렸던 건 어머니의 마른 몸이었다.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났던 마음을 달랬던 건, 강희찬이 주었던 바보같이 커다란 음료수였다.

비록 간절히 원하던 것과는 형태가 다르더라도, 그들은 모두 이선을 아껴주는 이들이었다. 제게는 언제나 그런 이들이 있었다.

“응. 비행기 알아보고 날짜 대충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엄마 괜찮은 데로 골라줘요.”

그럼… 나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지.

언제까지나 옛 기억에 허덕이며 우는 사람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강희찬의 곁에 서도 부끄럽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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