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K
“맛있어?”
이선은 이제 섣불리 닭 다리를 입에 가져다 대지 않는다. 한 번의 경험은 큰 교훈으로 인생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국물을 먼저 떠서 먹어본 후, 신규진에게 물었다. 삼계탕 위에 올라간 전복을 먼저 먹은 신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선은 그 모습을 보며, 전복을 좋아하지만 먹지 않는다던 강희찬이 문득 떠올랐다.
“맛있네. 누가 알려줬어?”
“…어?”
상념에 잠겨 있던 이선이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냥 흘러가는 칭찬으로 했던 말은 아닌지, 신규진은 질문을 바꾸며 재차 물었다.
“학교에서 회식으로 올 만한 가게는 아닌 것 같아서.”
“아니……. 학교에서 왔어. 선생님들이랑.”
신규진은 며칠 전, 이선의 곁에 있던 사람에 관해 묻지 않았다. 이선 역시 구태여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다.
이유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신규진은 어쩌면 무서울지도 모른다. 그가 누구인지 물었을 때, 혹시라도 자신의 입에서 그가 애인이라는 말이 나올까 봐.
그건 이선이 느끼는 두려움과는 결을 달리했다. 이선이 그의 곁에 있던 여자들을 볼 때마다 느꼈던 감정은 명백하게 질투였다.
하지만 신규진은 아니다. 답을 듣는 순간, 표면상으로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제 곁을 지켰던 이가 확실한 동성애자가 된다. 그냥 성향일 뿐만 아니라, 남자인 애인까지 사귀는 그런 확실한 동성애자. 그것이 가장 두려울 것이다.
멋대로 커밍아웃을 하고 군대로 도망쳤던 친구를 찾아왔던 젊은 날의 신규진은 어디에도 없다. 이선이 반했던 그 모습 그대로. 남루한 봉지에 통닭을 담아, 머리가 짧아진 이선을 찾아왔던 그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문득 그런 순간이 있었다. 온 우주에 혼자 던져진 것만 같은 순간. 요사이 그런 느낌을 너무도 자주 느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이선은 애써 국물을 삼켰다.
“면접은, 어땠어?”
부러 밝게 낸 목소리는 스스로가 듣기에도 어딘지 이상했다.
묻고 난 후에야 아차 싶었다. 오늘 신규진을 본다면, 시험 얘기는 되도록 묻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말을 돌려야만 한다는 생각에 실수하고 말았다.
하지만 예민해질 것이라는 이선의 예상과는 달리, 신규진은 선선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냥. 별로였을걸?”
“그래도 면접시험 한 번 봤으니까, 내년엔 도움 되겠다.”
“글쎄…….”
이선의 눈길이 신규진의 정수리에 닿는 사이, 정작 이선의 그릇은 식어만 갔다. 다 식어버리겠다며, 먹으라는 신규진의 말을 듣고서야 이선은 어영부영 젓가락을 들었다.
“그래도 내 선배들도 한 번 시험 보고, 다음 해엔 거의 붙었어.”
말주변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어느 순간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었을까.
합격률이 다르지 않으냐고. 언젠가 들었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환청처럼 머리를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 귀를 울린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래.”
“으응…….”
이선은 결국 삼계탕 그릇으로 도피했다. 꾸역꾸역 고기를 삼켜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단편적으로 끊어지는 대화는 새삼 고역이었다. 이런 대화가 되는 사람을 이선은 하나 더 알고 있었다.
이선은 젓가락을 그릇에 기울여 세웠다. 테이블 위에 뒤집어 두었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6시 20분. 조금 지나면 야구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이선은 다시금 포털 사이트를 열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벽면을 채우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음에도, 틀지 않는 가게 주인에 대한 이상한 불만이 함께 차오른다.
“일어나자.”
“…어?”
갑작스러운 말에 공격을 당한 이선이 깜짝 놀랐다. 신규진은 오히려 그 반응에 놀랐지만, 이내 표정을 고쳤다. 그는 턱짓으로 이선의 그릇을 가리켰다.
“다 먹은 거 아니야? 너 바쁜 것 같은데, 일어나자.”
“아니… 그냥 뉴스 좀 볼까 해서. 오늘 뭐 한다길래…….”
“나도 어차피 알바 있어. 일어나야 해.”
“…알바?”
자꾸만 야구장으로 향하려던 정신이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눈을 둥그렇게 뜨며 신규진을 봤다. 잠깐 그의 얼굴엔 난색이 지났다. 아무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이선은 일단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잠깐 스친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알바하고 있었어? 무슨 알바?”
“어. 그냥. 애들 수학학원에서.”
대체 어떤 일을, 일주일에 얼마나, 몇 시간 동안 하는 건지. 묻고 싶은 것들이 퐁퐁 샘솟았다.
신규진의 말은 대답이 되면서도, 이선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애매한 대답만을 들은 이선의 미간은 슬며시 좁아져 있었다.
“카드 거의 안 쓰더니, 알바한 거야?”
“어.”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묻는 것이 짜증이 났는지, 신규진의 미간 역시 묘하게 찌푸려졌다. 그런데도 이선은 질문 공세를 멈출 수가 없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물음이 남아 있었다.
“언제까지 할 건데?”
“그냥. 계속하려고.”
이미 아르바이트했던 시간은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달랐다. 시험을 준비하는 시간도 부족할 텐데, 대체 왜 다른 일에 시간을 쓰려 하는지.
그런 의문들은 애써 누르려 해도 흘러나오고 말았다.
“왜? 내년 봄 시험 준비하려면…….”
모호한 흐림으로 끝났지만, 신규진에게 의미는 전해졌다. 어떻게 당장 관두냐며 짜증을 내든, 아니면 다른 말을 하든. 예상답안을 펼치고 있던 이선의 귀에 울린 건 의외의 말이었다.
“일어나자.”
달래는 목소리가 이선을 조용히 종용했다. 이선의 빈 그릇을 턱으로 가리키는 그의 얼굴이 무언가 버거운 짐을 들고 있듯 벅차 보였다. 피로한 기색 앞에서, 이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후로는 순식간이었다. 둘이서 대화를 하는데, 둘 중 한 명이 대화를 원치 않는다. 결과는 너무도 뻔했다.
이선은 두 사람 몫의 식사를 계산했다. 밖으로 나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학원까지 태워주겠다고 했지만, 신규진은 거절했다. 이 동네에 있어서, 걸어가도 금방이라는 그의 말이 마치 ‘앞으로 내 인생에 신경 꺼’라고 들리는 것 같아, 다시금 권유할 수가 없었다.
조금씩 작아져 가는 신규진의 뒷모습은 그가 어느 상가 건물의 코너를 돈 순간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엔 없었다는 것처럼. 모든 것이 제가 보는 환영인 양.
―오늘 컵스의 선발투수인 강희찬 선수가 1회를 삼자범퇴 이닝으로 만들며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에어컨을 끈 대신 문을 열어둔 가게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손님 없이 빈 가게에서 야구를 보는 건 가게 주인뿐이었다.
익숙한 누군가의 이름이 온 신경을 잡아챘다. 오늘 하루 지독하게 검색어를 장식했고, 정이선이 끈질기게 외면해 온 ‘한국시리즈 1차전’이 바로 저 방송임을 직감했다.
―네. 이에 맞서는 1회 말 드래곤즈의 수비 위치 알려드리겠습니다.
카메라는 마운드를 내려가는 강희찬의 모습을 끈질기게 잡았다. 그럼에도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불펜으로 들어갔다.
꼭 닮아 있었다.
강한 악력이 남긴 통증이 채 가시기도 전, 사라져 버린 날과. 모자챙에 가려져 입술만 겨우 보였지만 서늘한 인상까지. 놀랍도록 닮았다.
불펜 입구에는 선수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강희찬을 향해 주먹을 내밀어 보였다. 하지만 강희찬은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인사를 무시당한 남자는 혼자 파이팅을 했다. 이내 외로운 주먹은 쓸쓸히 아래로 사라졌다.
무심히 사라진 강희찬을 대신해 불펜의 문을 닫는 얼굴을 본 순간, 이선은 잠시 흠칫했다.
얼굴보다도 먼저 알아본 것은 모자를 쓰고 있지 않은 선수의 고슬고슬한 파마머리였다. 강희찬과 같은 샴푸를 쓰는 후배라는 사람이었다.
일방적인 반가움을 핑계 삼아, 이선은 가게 안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파란 유니폼을 입은 외국인 투수가 화면에 들어올 때까지.
“…….”
강희찬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탓에, 방황하는 걸음은 발목에 추를 달아놓은 양 느릴 수밖에 없었다.
‘잘하고 있잖아. 큰 경기라 떨릴 텐데도, 잘했다고 방송에서도 그랬잖아.’
자신이 가지 않아도, 응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분명 잘할 거다. 언제나 정답만을 밟아왔을 테니까.
그리 되뇌었다. 어금니가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이선은 부러 손에 쥔 핸드폰에서 생각을 떼어내려고 부단히도 노력해야만 했다.
당장이라도 택시를 타지 않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 책 사이에 끼워둔 티켓을 찾지 않기 위해.
* * *
하얀 조명이 그라운드로 쏟아진다.
쏟아지는 빛 사이로, 강희찬은 제 입에서 나온 숨이 하얗게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면 풀카운트를 맞이한 타자의 얼굴이 명확해진다.
안정원의 손가락이 만드는 사인에 고개를 젓지 않으면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 되었다. 그건 배터리 합을 맞추었을 때부터 늘 그랬다. 그와 안정원은 나이 차가 조금 있었지만, 서로 1군에서 자리를 잡아야 했던 시기는 얼추 비슷했다. 피차 남의 자리를 대신 채우는 신세였던 배터리는 그래도 서로에게만큼은 솔직한 적이 더 많았다.
이제는 몸에 배어버린 와인드업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공은 손끝을 빠져나간다.
투구 동작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연속 동작이었다. 그 찰나 동안, 타자는 집요하게도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그랬기에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자가 절대 이기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공에 맞는다고 해서 반드시 안타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자신 있게 던져야 한다. 자신 있게 던져도 맞는데, 빌빌거리면 타자한테 잡아먹힌다.
탁!
방망이와 공이 만나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런 말이 뇌리를 스쳤다.
타자의 방망이가 공을 치면 관중석은 언제나 들썩인다.
이런 소리가 이어지는 대부분 결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거야 그라운드에서 직접 공이 맞는 순간을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신에게나 가능했고. 일반 관중은 일단 공에 맞는 순간 들썩이곤 했다.
예상대로 빗맞은 타구는 내야 땅볼이 되었다.
투아웃 주자 없음. 더블 플레이를 위해 서두를 것도 없다. 코스를 보니 2루수가 잡고 1루에 뿌리면 된다. 저 수비를 본능적으로 하기 위해, 내야수들은 지옥 같은 펑고를 토가 나올 정도로 한다.
초등학생들에게 시켜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동작을 이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와아아아!
원정 관중석에서 한 박자 늦은 환호가 울렸다. 타자는 1루를 향해 전력으로 뛰었고, 그가 베이스가 안착했다. 공은 아직도 1루에 닿지 못했다.
“…….”
실책이었다.
쏟아지는 원정팀의 환호성 속에서 강희찬은 깨달았다. 2루수가 땅볼을 더듬었고, 결국은 송구하지 못했다는 것을. 추가적인 실수를 막기 위한 자의적인 판단인지, 아니면 실수로 인해 몸이 굳은 것인지는 굳이 알 필요는 없지만.
허탈했다.
오늘 경기 내내, 1회에 다소 많았던 투구 수를 줄이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쏟았던가.
선발은 완급조절, 불펜은 전력투구. 똑같은 투수라도 보직마다 요구되는 소양은 달랐다. 다음 공을 생각하지 않고 전력투구를 해야 하는 불펜 투수라지만, 그건 선발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원래 운동을 할 땐 생각이 많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건 강희찬의 지론이었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오기만 하면 내려가자.’
그래도 기껏 왔는데, 등판이 끝나고 더그아웃에 처박혀 있는 꼴을 보여줄 순 없지 않은가. 다른 날도 아니고 한국시리즈였다. 본인이야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기는 했어도.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코스를 요구받을 때마다 온 감각을 쏟아 공을 뿌렸다. 공이 반 개라도 빠지면 볼 판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포스트 시즌엔 정규 시즌보다 심판의 존이 좁아졌다. 조금이라도 빠져나갔다 싶으면, 주심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다. 여차해서는 쓸데없이 투구 수를 늘리는 게 되고, 공이 채워지면 최 감독은 자신을 내릴 것이 분명했다.
그런 모든 점이 강희찬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2루수가 공을 더듬어 타자가 1루에 안착한 순간은 그런 거슬림의 끝이었다. 안전핀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
이제 주자가 된 타자는 장비를 교체한다. 그의 곁에서 장비를 받아주는 코치는 잘했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8이닝까지 팀 자체가 강희찬을 상대로 뽑아낸 안타가 세 개.
전광판의 안타 개수가 바뀐다. 아무래도 기록원은 방금 2루수의 실책성 플레이를 안타로 기록한 모양이었다.
피안타가 세 개가 되든 네 개가 되든. 그딴 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런 건 전혀 열 받는 점이 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건, 1루 주자에게 던졌던 모든 공이 아웃 카운트를 만들지 못하고 쓸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7번 타자 중견수 김종근.
다음 타자의 이름이 구장을 울렸다.
기껏 쌓아둔 투 스트라이크가 쓸모없게 되었다. 게다가 제가 아닌 다른 놈에 의해. 다시 처음부터 카운트를 쌓기 위해서 던질 공이 벌써부터 아득했다.
‘씨발, 진짜…….’
순간 차오르는 짜증을 이기지 못한 강희찬이 2루수를 사납게 돌아보았다.
시즌 후반기 타격감이 좋았던 내야 유틸 백업은 1차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본래 자신의 주 포지션이었던 2루수로. 그는 경기 후반 잠깐이라도 라인업에 들기 위해 일본에선 수비코치 곁에 붙어 있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수비에서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았다. 수비란 본래 출장 경기가 쌓이는 수에 비례하는 법이다. 백업이었던 그는 유격수, 2루수, 1루수를 번갈아가며 섰기 때문에 수비는 더욱 불안했다. 최선형 감독이라고 그걸 모른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1차전이자 땅볼 유도형 투수인 강희찬의 선발전에 이름을 올린 이유는 간단했다.
야구는 어쨌든 점수가 나야 이길 수 있는 게임이다. 투수가 기가 차게 잘해봐야 점수를 주지 않는 게 최선이다.
게다가 불완전한 수비수를 굳이 세운다면 투수가 강희찬인 게 나았다. 가장 낼 만한 선수가 강희찬이었다. 외국인 용병 둘은 나이가 들며 성격이 다소 유해졌지만, 아직도 내야수의 잔실수에 퍽 예민했다. 이러나저러나, 그나마 가장 무난한 놈이었다. 강희찬은.
평소라면 그런 최 감독의 의도는 정확히 들어맞았을 것이다. 자신 역시 동의했을 터였고.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강희찬의 시선은 여전히 2루수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실책을 저지른 야수는 투수를 바로 보지 못한다. 그건 고참 야수들도 비슷했다. 핏줄을 터트려가며 던지는 투수의 한 구 한 구는 그의 선수 생명과 맞바꾸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젊은 야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괜찮다는 유격수의 위로에 겨우 얼굴을 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운드 위의 투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희찬아!”
안정원의 목소리가 환호성을 갈랐다.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신기하게도 포수의 목소리는 언제나 잘 들린다. 쓸데없이.
고개를 돌려보면 전광판 아래, 마스크를 벗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는 미트를 끼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를 세워 사인을 보냈다.
투아웃이다. 잡을 수 있어. 괜찮다. 8회 투아웃이다.
그런 의도일 테지만, 전혀 와닿진 못했다.
처음 한국시리즈에 서는 신인이 본인의 실책과 투수의 질책에 주눅이 들면 그걸로 선수 생활은 끝이다. 강희찬을 진정시키면서도, 상대 팀 팬들이 연호하는 제 이름을 듣는 2루수 보호가 안정원의 목적이었다. 포수는 투수와 함께 배터리를 맞추지만, 결국엔 그도 투수가 아닌 야수였다.
빤히 들여다보이는 속내를 외면했다. 안정원이 던진 공이 제 글러브로 넘어왔다. 강희찬은 잠시 그 공을 바라봤다.
또 다음 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어깨를 갈아가며 공을 던지는 건 투수다. 당장이라도 최 감독은 마운드에 오를 기세였다.
시즌 중에 늘려봤던 한계 투구 수가 몇이었더라? 120구? 숫자가 완성되는 순간 최 감독의 결단은 눈에 보였다.
마운드에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강짜를 놓을 수 있는 것도 시즌 경기, 그것도 코치를 상대로 할 때뿐이다. 그조차도 최 감독의 암묵적인 동의가 깔려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한계 투구 수에 다가가는 만큼, 저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절실히 느꼈다.
“…….”
강희찬은 안정원의 사인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야수들끼리는 같은 사인을 보내주는 모양이지만, 배터리 사이에선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허리를 굽혀 바닥에 두었던 로진을 매만지는 그를 보며, 안정원은 캐처 박스에 몸을 앉혔다.
그가 앉고 나면, 유난히도 중앙석은 눈에 잘 들어왔다.
한국시리즈 기념으로 나온 후드티셔츠를 입고 경기를 관람하는 대통령 내외와 그의 수행원들. 같은 라인의 테이블엔 경기 시작 전,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었던 새한의 오너 가족들이 있었고.
중앙 테이블석은 1차전인 오늘은 대부분 관계자나 선수들의 지인으로 채워져 있었다.
…단 한 테이블을 제외하고.
“…….”
주인 없이 텅 빈 테이블이 지나치게 허했다. 오롯이 그 한 자리만이 시야에 남았다.
그것은 혈관이 다 터진다 해도 공을 뿌릴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조금만 더 버티자. 제발. 올 때까지만.’
경기장에 들어오는 순간, 홈런을 처맞고 꼴사납게 강판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올 때까지만.
* * *
잠실에서 2승으로 기울었던 승리의 무게 추는 어느새 2승 2패로 균등해졌다. 홈에서의 연승으로 균형을 맞춘 드래곤즈는 프런트 직원들마저도 사기가 오른 채였다. 우승해도 보너스를 받는 건 선수들뿐이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다. 그건 아래 직원 없이 직함만 ‘주임’인 운영팀의 막내 사원도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홈에서 경기를 이겼다. 게다가 오늘 시구로 온 여배우는 눈이 돌아갈 만큼 예뻤다. 무명이 조금 길다가, 서른 언저리에 연속극의 여주인공 언니 배역으로 이름을 알렸다던가.
‘이렇게 예쁜데 왜 그동안 안 떴지?’
주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너무 작다. 여백의 미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막만 한 얼굴인데, 그 안을 차지하고 있는 이목구비는 크다. 서울의 인구 밀도를 닮은 생김새를 보자, 주임은 넋을 빼었다. 역시 배우는 배우라고.
그녀의 숨소리 하나에도 고개를 끄덕이던 막내 직원은, 결국 해서는 안 될 부탁까지 수락해 버린 것이다.
‘제가, 강희찬 선수랑 좀 아는 사인데… 볼 수 있을까요? 오늘 상대 팀이 아마 컵스라고 들었는데…….’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대 팀 투수를 데려와 달라니. 게다가 그냥 투수도 아니고, 오늘 선발인 선수였다.
자팀 선수였어도 거절했어야 할 부탁이었지만, 이미 홀려버린 직원의 고개는 선선히 위아래로 흔들렸다. 연습구를 받아주던 드래곤즈의 불펜 포수는 ‘저래도 되나?’라고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이미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가련한 남자의 발걸음은 용맹했다. 그는 입사 이래 가장 당차게 구장을 거닐었다.
복어의 배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던 용기는 원정팀 로커룸의 문을 연 순간 푹 꺼졌다.
강희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있어서. 게다가 컨디션 조절 차 잠깐 쉬는지, 소파에 가만히 기대어 앉아 있기만 한 그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
‘뭐 하러 왔냐?’
그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막내 직원은 드디어 제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무리 홈구장이라도 원정팀의 로커룸은 적진이나 마찬가지였다. 옥상으로 따라오라고 할 기세로 들이닥친 상대 구단 직원. 그게 바로 자신의 처지였다.
“…….”
…나가야 한다. ‘아, 참. 길을 잘못 들었네?’라고 지껄이며 문을 닫고 나가야 한다. 비록 남은 선수들이 ‘저 미친 새끼는 대체 뭐냐’라고 황당하게 생각해도, 그랬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여배우의 얼굴을 1미터 안에서 본 막내 직원은 여전히 꿈을 꾸는 양 홀려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똥 먹는 똥개처럼 보던 강희찬을 향해, 그는 어렵사리 사정을 설명했다.
“…뭐요?”
되묻는 말투가 퍽 양아치스럽다. 가느스름히 떠진 눈매를 보자, 막내 직원은 마치 어린 시절 형들에게 돈을 뜯겨본 경험이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그런 기억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포심은 쉽게 기억을 조작했다.
“아니, 그게……. 강희찬 선수랑 아는 사이라고 하던데…….”
기세에 확 밀린 직원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알든 말든. 시구 온 딴따라가 오늘 등판하는 상대 팀 투수랑 안다는 말 하나 믿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딴따라라니……. 얜 대체 어느 시대 사람인 거지?’
그런 의문 다음으로, 주임은 뒤늦게 아차 했다. 이건 구단에서 정식으로 항의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컵스에서 항의가 들어온다면, 시말서를 쓴다고 해도 입 하나 꿈쩍하지 못할 터였다.
컵스가 강팀인 이유가 있었다. 저런 성격을 에이스랍시고 데리고 있어야 하니, 선수단이나 직원들의 멘탈이 강할 수밖에 없다.
“…….”
채 소리가 되지 못하고 의미 없이 입술을 벙긋거리던 직원을 강희찬은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그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앞장서세요. 부른다면서.”
“…네?”
저승사자가 말했다. 평온한 표정이 더더욱 공포스러웠다. 그건 굳이 주임뿐만은 아니었다. 함께 로커룸에 있던 선수들 역시 ‘말려야 되지 않을까?’라며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시비를 걸 곳을 찾는 거다.’
1차전 이후, 기분이 더럽지만 차마 어디 화풀이할 곳을 찾지 못한 놈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합법적인 화풀이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승주가 몸을 사렸다. 새끼, 너 걸리기만 해봐라. 강희찬이 그런 뾰족한 눈으로 이승주를 바라본 게 몇 주째. 생존본능이란 게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 앞에서 혼날 짓을 하지 않는다.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던 놈이 드디어 화풀이할 대상을 찾아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승주 데려와. 승주는 무슨 죄라고. 여자는 무슨 죄냐? 전 여자친구니까 감당해야지. 그 성격 알면서 만났으니까 익숙할 거 아니야.
그런 수군거림이 무심히 직원의 귀에 꽂혔다.
…좆됐다고밖에 할 수 없다. 헤어진 연인들의 사랑싸움에 고래 등이 터지게 생겼다고.
오늘 점심으로 먹은 식당 밥이 모양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울렁임을 느끼며, 직원은 구장을 걸었다. 두 걸음 뒤엔 인간 폭탄을 달랑달랑 달고서.
투구 연습장까지 돌아가는 내내, 직원을 향해 인사했던 이들은 뒤를 따르는 강희찬을 보고 모두 경악했다.
‘왜? 대체 왜?’
혼란스러움이 묻은 시선을 받으며 주임은 연습장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강희찬을 먼저 들여보냈다.
여전히 연습 중인지 경식구가 미트에 들어가는 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하지만 강희찬이 들어선 순간, 그 소리는 뚝 멈추었다.
강희찬의 뒤로 들어온 주임은 안을 흘긋 보았다. 시구자의 공을 받아주던 불펜 포수마저 이제 없다. 평소라면 경기를 준비하느라 먼저 갔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다가올 폭풍을 미리 피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대신 구단 직원이 마스크를 쓴 채―참고로, 낭심 보호대도 한 모양이다― 여배우의 공을 받고 있었다.
경악과 혼돈이 적절히 뒤섞인 얼굴들 사이. 유일하게 태연한 건 여배우 하나였다. 이제 주임은 그녀의 얼굴이 마냥 곱게는 보이지 않았다. 콩깍지가 어느 정도 벗겨졌다.
“와줬네? 안 올 줄 알았는데.”
“왜 있어?”
“보면 몰라? 시구 왔잖아. 오늘 큰 경기라며?”
“인천까지 오겠다는 연예인이 없었나 보지.”
와들와들. 당장이라도 떨어져 나갈 낙엽처럼 떨기만 하던 직원들의 눈이 한순간 뾰족해졌다.
‘저 새끼가… 감히 우리를 무시하다니.’
하지만 그건 고래 사이에 낀 새우로서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말이 심하네. 그래도 나 이제 꽤 유명해졌던데.”
“1차전 시구 대통령이 왔다. 그 급이냐?”
스물다섯의 운동선수와 그보다 네 살이 많은, 뒤늦게 명성을 얻는 여배우. 도저히 접점을 찾기 힘든 두 사람의 대화는 묘하게 친근하면서도 살벌했다.
도록도록. 직원들의 수많은 눈이 테니스 경기의 랠리를 지켜보듯 움직였다. 그들은 저 둘이 사귀었다는 게 인터넷 언론사의 카더라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시각적으로만 보면 천생 어울린다고 생각하다가도, ‘설마…….’라며 여지를 남겨뒀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저 성질머리를 감당할 여자가 세상에 과연 존재할까? 그런 근본적인 물음 탓이었다.
헤어진 연인이 좋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기는 힘들겠지. 그래도 저렇게까지 독을 품고 말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두 사람의 반경 5미터 안. 이른 겨울이 온 것처럼 서늘해진 온도에 직원들은 점퍼를 입었음에도 팔뚝을 슬슬 쓸어야만 했다.
“왔으면 얌전히 공이나 던지고 갈 것이지, 딴따라 주제에 왜 바쁜 사람 오라 가라야?”
노골적이고 신경질적인 말이 다시금 그녀를 향했다. 태연함을 가장하던 그녀의 표정에도 미세한 실금이 갔다.
그녀가 늦게나마 명성을 얻은 이유는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의 언니 역을 맡으면서였다. 햇살같이 웃다가도 한순간 서늘해지는 미친년다운 역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미모에 취해 있던 직원들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것이 아예 연기만은 아니겠다고. 사이코패스처럼 표정이 바뀌는 얼굴은 사람의 표정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입을 꾹 다물고 숨소리를 죽이는 것에 집중했다. 왜 인간에게는 스텔스 기능이 없는가. 아니, 뭐. 지금 저 두 사람에게 자신들은 없는 존재이긴 했지만. 그런 쓸모없는 고민을 하며.
“…예상보다 반응이 좀 세네.”
“모르고 불렀냐?”
“만나는 사람 있어?”
말을 툭 던지는 순간, 그녀는 기민하게 강희찬의 얼굴을 훑었다.
제아무리 표정 관리가 중요한 투수였어도, 알맹이는 스물다섯짜리 남자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서 질문이 그를 찌르자, 한순간이나마 기색이 변했다.
여자는 그것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가 뒤늦게 표정을 감추어도, 순간적으로 지나간 당황을 읽어냈다. 서로 지인 소개를 통해 짧게 만났고, 헤어졌다. 제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강희찬은 그녀의 애인이었던 사람이다.
“…무슨 상관이야?”
“아니라고는 안 하네?”
그녀는 볼 장 다 봤다는 듯, 포수 마스크를 쓴 직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며칠 동안 숱하게 반복했던 와인드업 자세를 취했다.
“과민반응인 거 보니까, 그나마 공은 좀 들이고 있는 건가 봐?”
“…….”
“포기해. 어차피 너, 사람한테 상처 주는 말밖에 못 하잖아.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느릿하지만 이어지는 동작은 제대로 단계를 밟는다. 운동과는 인연이 없던 사람치고는 자세가 제법 좋다. 그녀와 사귀는 내내, 강희찬은 야구와 관련된 것을 말하거나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일단 퇴근을 하면 끝이다. 일반 직장인들도 퇴근 후 업무와 관련된 생각은 하기 싫다는데, 아무리 개인 사업자 신세여도 그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가르쳐 달라며 그녀가 연식 야구공과 글러브를 구해왔을 때도, 강희찬은 매몰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시구가 결정되고 엄청날 정도로 연습한 티가 났다. 쓸모없는 부분에서 성실한 건 딱히 달라지진 않았다.
“그냥 나로 해.”
포수의 미트를 바라보며 내뱉는 그녀의 말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
자신 역시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저의 빈자리를 채워주길 바랐지만, 끔찍하게도 고개를 돌려주지 않는 사람을 향해. 자존심, 연민, 동정. 그리고 애정이라고 불러도 딱히 반박할 생각은 들지 않는 무언가를 담아.
여름밤, 공원에서 모기한테 뜯기던 추억이 떠오르자, 강희찬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나야 겪어봐서 어느 정도 알잖아.”
물론, 현실을 깨닫자 금세 평소대로 돌아왔지만. 그는 한껏 성가신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겪어봐서 아는 내 성질머리를 또 감당하고 싶을 만큼, 날 좋아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어머. 난 너 꽤 마음에 들었는데? 몰랐어?”
둥그렇게 뜬 눈이 과장되게 느껴졌다.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장난기 섞인 말투에, 강희찬은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저 여자랑 헤어졌던 강희찬은 다른 강희찬이란 말인가.’
새삼 그녀와의 마지막을 반추해 봤다. 제 성병 검사서를 보여줬고, 그 이후엔 돈을 떼먹은 원수처럼 굴지 않았던가? 저와 헤어지고 나서, 동명이인인 강희찬과 사귀었다가 헤어진 게 아닌 이상 저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남자의 생각을 쉬이 짐작했다.
“네 성질머리에 화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성격이면 다른 여자한테 꿀 발린 소리도 못 할 거 아냐. 바람은 못 피우겠다 싶어서 마음에 들었지.”
“먼저 나랑 못 만나겠다고 했던 건 너 아니었어? 늙어서 치매 왔냐?”
짜증스러운 표정과 함께 강희찬은 손으로 앞머리를 헝클었다. 당장이라도 뒤를 돌아서 밖으로 나갈 기세였다.
여자는 저 때의 강희찬을 잘 알고 있었다. 미련 없이 저에게 등을 보였던 전적이 꽤 화려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아쉬운 건 나란 소린가. 그녀는 고소를 애써 눌렀다.
“지금도 그렇긴 한데.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암만 봐도 네가 더 유명했잖아. 그때 내 소원이 뭐였는 줄 알아?”
“…….”
“네가 경기하는 팀에 시구로 들어가는 거.”
턱.
힘껏 팔을 휘두른 여자의 손에서 공이 빠져나갔고, 그건 꽤 경쾌한 소리를 냈다.
‘요 며칠 반짝 연습한 건 아니겠군.’
그녀가 투구를 연습한 건,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얼핏 그런 생각이 스쳤다.
“스캔들 터져도 네 이름이 검색어에 오르겠고, 그러면 난 몇 년이 지나도 ‘강희찬 여친이었던 걔’ 정도로 기억될 것 같았어. 심지어 너랑 헤어진다고 해도. 좀 비참하잖아.”
“…….”
“그래도 너희 팀에서 부를 정도면, 너만큼은 아니라도 나도 유명해졌을 거라고. 네가 설 마운드에서 나도 공을 던져 보는 게 그때 내 목표였거든.”
“…….”
“그래서… 도저히 네 옆에 있기가 싫었던 거야.”
말을 하는 여자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처음엔 제법 괜찮다 싶던 자세가 약간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힘에 부친 거다. 힘이 떨어지니까, 자연히 팔과 어깨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고 자세도 깨지고 있었다.
강희찬은 본능적으로 파악했지만, 그녀에게 말을 할 순 없었다. 아마도 그건…….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어. 내가 좀 유명해지면. 그래도 포털 사이트의 내 프로필에 그럴싸한 작품 하나 정도는 필모로 걸리면 만나달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어.”
“…….”
“그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거든.”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는 힘껏 공을 던졌다. 자세는 한참 전에 무너졌다. 던진 공은 땅바닥에 부딪혀 튀어 올랐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무릎을 짚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자존심. 단어마저도 얼마나 얄팍하기 짝이 없는가.
남들에게 내뱉는 순간, 얼마나 비웃음을 살지 자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럴 것으로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스무 살부터 승승장구해 온 스포츠 스타. 이미 20대 초반에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어지간한 영예는 다 누려본 사람은 모를 터였다. 이렇다 할 작품활동 없이 서른을 향해가는, ‘여배우’라는 수식을 붙이기도 뭐한 사람의 인생은.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지레짐작은 또 하나의 자존심이었다. 마지막까지 그에게만은 모양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
그랬기에 여자는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미련이 생겨 또다시 지지부진하게 만날까, 부러 모진 말을 하면서까지 뒤를 돌았다.
자존심. 그 얄팍한 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 얄팍한 자존심을 포기했다. 전혀 관계없는 이들이 보는 앞에서 남자에게 매달렸다. 다시 만나보자고. 얼굴이 화끈해질 것이 들킬까 봐, 일부러 더 힘껏 공을 던지며.
가쁜 숨을 고르고, 허리를 겨우 들어 올렸다. 여전히 표정이 없는 강희찬이 그곳에 있었다. 절망했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가웠다. 그대로였다. 자신이 아는 그 남자는 여전했다.
그렇다면 저에게도 승산이 있지 않겠는가. 비록 끝이 좋지 않았어도, 분명 좋았던 순간들도 있었다.
여자는 희망을 품었다. 이렇게까지 여자가 굽히고 있었다. 보통 남자라면 마음이 약해졌을 상황이라는 계산도 함께였다.
속을 알 수 없도록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얘기 다 끝났어?”
하지만 강희찬은 제가 아는 ‘보통’ 남자는 아니었다.
얼핏 스친 고민의 기색에 가졌던 희망은 부서졌다. 여자는 사귀는 내내 보았던 그의 심드렁한 표정이 이제는 철옹성처럼 느껴졌다. 그의 경계 안에 들었다고 생각했던 때에는 더없이 든든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했던 얼굴이, 지금은 똑같이 그녀에게도 벽을 치고 있었다.
그녀의 자존심은 바닥에 버려졌다. 자존심을 버렸지만, 그에 상응하는 건 얻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여자는 남자가 몹시도 낯설어졌다.
“너… 정말 연애해?”
“…….”
“정말 그 사람 때문이라고? 이렇게 빨리 생겼다고?”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전화로 해. 내가 공 하나 대충 던지고 서울 가는 사람인 줄 알아?”
“…….”
잔뜩 가시를 박은 모진 말은 회피였다.
여자는 저런 남자는 몰랐다. 어느 순간이든, 숨기는 것 없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 지금 대화를 피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경계 안에 들어간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돌아선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악만 남은 사람처럼 그녀는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상처 주기만 할걸?”
순간, 강희찬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남자의 뒤엔 ‘강희찬’이라는 이름과 함께 등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저런 남자 따윈 모른다. 연인을 옛사람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자리를 피하는 저런 남자는 알지 못했다.
“…….”
그녀가 만났던 강희찬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것도 제 속이 빤히 보이면서까지 뻔한 수법으로.
그간 그리워했던 남자는 이제 없다. 낯설어진 뒷모습에 여자는 신경질이 돋았다. 때문에, 날카로이 흐르는 말을 멈출 이유는 없었다.
“그 사람, 앞으로 더 상처만 받아. 넌 누굴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니까. 아껴주는 연애 같은 건 네 적성 아니니까 집어치워.”
어릴 적 동화를 원작으로 하던 영화에 나오는 마녀의 저주와 닮아 있었다.
‘꼴에 배우라고.’
단어 하나 허투루 흘러나가지 않고 오롯이 귀에 꽂힌다. 주박처럼 온몸을 휘감는 목소리에 강희찬의 몸이 천천히 돌려졌다.
“…….”
…언제나 제 앞에선 웃지 않았다.
물기가 어린 커다란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하찮은 뒷모습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하찮은 뒷모습보다도, 제가 더 형편없는 존재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남의 입을 통해 귀에 꽂히는 사실은 기분을 더럽게 만들 뿐이다.
“너…….”
‘그딴 건 내가 더 잘 안다.’
그리 말하지 않는 건 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자존심처럼.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제 주변엔 사람이 퍽 없었다.
농구부 감독의 끈질긴 스카우트 제의가 짜증이 나서, 반 친구 녀석을 따라 충동적으로 야구부에 들어갔다. 녀석의 아버지는 골수 야구팬이었고, 녀석도 비슷했다.
같은 날 유니폼을 받았지만, 녀석은 5학년 여름방학이 끝나자 야구부를 나갔다. 지역 야구대회에서 강희찬이 먼저 스타팅에 이름을 올린 이래로 어딘지 서먹해졌다.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비슷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채 일렬로 서서 처음 감독과 선배들에게 인사를 했던 녀석들은 정신을 차려보면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프로에 가면 덜해질까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비교적 최근 깨닫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녀석이 왜 자신에게 데면데면하게 굴었는지.
그렇게 좋아하던 야구를 포기한다. 그리고 상처를 입은 짐승들처럼, 자존심을 다친 채 어딘가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거다.
‘난 아직도 걔가 어디로 사라질 것 같거든요.’
하나 있는 친구를 걱정시키는 이선도, 유니폼을 벗었던 녀석들도, 그리고 지금 눈앞의 옛 인연까지.
머리로는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은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차라리 몇 번이고 무모하게 달려들어서 몸이 너덜거릴 때까지 깨지는 쪽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제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고.
강희찬의 냉랭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한때는 좋았고, 끝은 나빴으며, 이제는 아무런 값어치를 가지지 못할 옛 기억에게로.
이제는 절대 만나지 못할 평행선이었다. 자신도, 여자도. 서로가 이해하지 못할 자존심보다 못한 존재가 된 채.
굳게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망설이듯 천천히 열렸다.
“너 앞으로 운동하는 새끼 만나려면 검사받고 진단서 떼오라고 해라. 아무 데서나 몸 굴려 먹지 말고.”
철저하게 외면받는다고 하더라도 저의 마음은 다시 그녀를 향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이선 역시 마찬가지겠지. 아무리 투아웃에게 외면받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흘려줄 마음 따윈 없었다.
다 그런 거였다.
알기 싫은 사실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기 싫은 것에서 도망치듯, 강희찬의 걸음은 투구 연습장을 벗어났다.
남겨진 건 마지막 자존심을 내던지고 매달렸지만 외면받은 여자와,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어버린 사람들뿐이다.
전혀 모르는 뒷모습이 떠나버린 문을 보던 여자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여자로서의 패배감과 질투를 감추고, 그녀는 미소를 뒤집어썼다. 돌아본 그곳에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것을 후회하는 직원이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녀는 직원의 목에 걸린 직원증을 흘긋 봤다.
“김성환 주임님?”
“…네? 아, 네?”
30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야구장의 모든 이를 홀리게 만들던 미소가 어딘지 섬뜩하다. 직원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맺힌 착각이 들었다.
“사람이 들어선 안 될 걸 들으면, 입은 무겁게 가져가는 게 좋다더라고요.”
“아……. 네. 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합니다.”
“제가 왜 남들 다 보는 데서 이런 얘기 했을까요?”
“…네?”
‘그러고 보니… 왜지?’
호기심이 일었다. 햇살 같은 미소가 여자의 얼굴 위로 퍼졌다. 그와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일렁인 것도 사실이었다.
“소문 돌면, 출처가 너무 뻔하잖아요.”
고급 아파트 광고에서나 볼 법한 오만한 미소가 연습장을 훑었다.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는 뒤늦게 말의 뜻을 알아챘다. 아……. 터져 나오는 신음과도 같은 울림이 잔상처럼 실내를 돌아다녔다.
“연습은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그녀는 한 사람 한 사람 빠짐없이 시야에 담았다. 노골적으로 이름까지 보인 김 주임의 본능은 뒤늦게 사원증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이름까지 불린 마당에 소용없는 일이다. 그저 먼저 가보겠다고 연습장을 빠져나가는 빈틈없는 뒷모습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성질머리는 똑 닮았다.’
대체 어떤 여자가 강희찬의 성질머리와 사귀는지 궁금했는데, 아주 똑같은 것들끼리 만났다. 저렇게 천생연분인데 헤어졌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서로서로 감싸고 책임을 져야지 않겠는가? 아주 똑같은 인간들인데.
“…….”
학을 떼는 시선을 뒤로한 채 여자는 강희찬이 나섰던 문을 똑같이 나섰다.
여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하나로 간단히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그래도 좀 예뻐 보이면 후회하지 않을까. 물론, 내가 잘못한 게 맞지만, 그래도 눈이 돌아갈 만큼 예뻐 보인다면.
얄팍한 마음으로 세팅했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며 헝클어진다. 디자이너가 봤다면 소리를 질렀을 광경이지만,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터벅터벅. 매니저도 없이 홀로 야구장 안을 걷는 여배우를 보고, 선수들은 뭔가 싶은 눈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들은 지켜보기만 할 뿐 따로 말을 걸지는 못했다.
여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
그 남자는 이제 없었다. 인생에 다시 없을 만큼 완벽한 왕자님이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몇 개월간 좋은 것을 보고 먹으면 꼭 생각나곤 했다.
조금만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면. 누군가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작품으로 기억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런 쓸모없는 자존심을 이루는 동안, 남자는 사라졌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자존심보다 소중했어야 할 사람을 잃었다. 자신이 모르는 낯선 남자가 자리를 대신했다.
누군가를 마음에 둔 채로. 누군가를 저의 뾰족한 시선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너 앞으로 운동하는 새끼 만나려면 검사받고 진단서 떼오라고 해라. 아무 데서나 몸 굴려 먹지 말고.’
꼭 그런 식으로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가시를 세우는 말뿐이었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저를 걱정하는 소리임을 이제야 깨달아버렸다.
“아…….”
순간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실내가 지나치게 서늘했다.
이제 그리워했던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서. 외로움에 눈을 질끈 감아버려야 했을 만큼.
* * *
유독 운이 없었다.
어젯밤 늦도록 핸드폰을 하느라 아침엔 늦게 일어났고, 겨우 아이들과 같은 시각에 등교했다. 지각을 아슬아슬하게 면했다고 안도할 새도 없이, 중앙현관에서 교장 선생님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수난은 끝이 아니었다. 넋을 빼다 무릎을 수도 없이 박았고, 점심시간엔 교무실에서 스포츠 뉴스를 훑다가 종이 울리고서야 교실로 뛰어가야 했다.
완봉. 그 말의 의미를 인생 처음으로 깨달았다.
강희찬이 홀로 경기를 마무리 지었단다. 그리고 흔히 볼 수 없는 대단한 기록이라고도 했다. 기사의 문구는 이선에게 안도를 주었다.
그것 보라고. 자신 따위 없어도 언제나 혼자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저의 도움이 필요한 순서대로 줄을 세워보면 가장 끄트머리에 설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경기에 나간다는 강희찬의 기사를 찾아봤다. 서울보다는 구장의 크기가 작아서 그에게 불리할 거라는 말에 심장이 뛰다가도, 상대 전적에서는 강희찬이 우세하다는 구절에는 또다시 안도의 숨을 쉬기를 반복했다.
퇴근길인 지금도 매한가지였다.
그의 경기를 외면하기 위해 학교에서 뭉그적거리며 잔업을 하는 것도 6시가 한계였다. 그냥 다 같이 퇴근해 버리자는 교감 선생님의 말씀에, 이선 역시 일어서야만 했다.
신호에 걸리기가 무섭게 몇 번이고 손은 핸드폰을 향했다. 뒤차의 경적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출발하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지금 도로 위의 많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결국, 길가에 차를 세운 이선은 핸들을 꾹 쥐었다.
“…….”
길을 선택했으니 걸어야 한다. 몸이 두 갈래가 될 수 없으니, 결국 하나를 버려야만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꼭 인생의 갈림길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그저 아침 산책길을 선택하는 것뿐이라 해도.
새로이 학교에 적을 두고, 새 학년을 담당하고 한 달 정도. 그 기간이 지나면 이제 적당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다가올 월요일에 한숨을 쉬기보다는, 적막한 주말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그즈음이면 동네엔 벚나무가 예쁘게 핀다. 주말의 이른 오후, 적당한 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하고 돌아오는 길에 핀 벚나무가 예쁘다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짧은 대신 삭막한 가게가 즐비한 길을 걸을지, 아니면 조경이 잘된 아파트의 산책로를 즐기며 조금 돌아서 갈지. 이선은 언제나 고민했다. 풍경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엔 유독 아쉽기도 했고, 벚나무 사진이라도 찍고 돌아온 날엔 식은 음식을 겨우 해치우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어떤 길을 걸어도, 결국엔 한 번은 뒤를 돌게 되었고 후회는 남는다. 언제나 그랬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길을 걷는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걷지 않은 다른 길에 대한 미련은 남는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꽃비가 내리는 길을 즐기고도 후회는 남았다.
무언가가 항상 뒤통수를 잡아끌 것이다. 처음엔 일부러 보란 듯이 성큼성큼 걸었던 길도, 후에는 미련이라는 추가 매달린 양 발걸음이 느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
멈춰 선 이선의 차 옆으로 다른 차들이 잘도 추월했다.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워진 이선은 핸들로 고개를 파묻고 말았다.
저들은 향할 목적지가 어쩜 저렇게 뚜렷할 수 있을까? 망설임이라고는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그들이 부러웠다. 늘 헤매기만 하고, 느리기만 했던 자신과는 다른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조금 돌아가도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걸음이 느렸다. 걷지 않을 길의 초입을 조금쯤 둘러보고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핸들을 쥐고 있는 이선의 손이 점점 하얘졌다. 손에 힘을 더 줄수록 색은 더욱 옅어졌다.
제 곁을 떠난 숱한 차들처럼, 거침없이 향해갈 곳이 자신에게도 생긴 것만 같았다.
‘그냥… 조금만 보기만 하자.’
그냥 멀리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지켜보기만 하자. 그 사람의 눈에 들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그래야 후회가 덜 남을 테니까. 온전히 자신을 위함이었다.
이제 저녁엔 꽤 쌀쌀한 날씨답게도,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선이 핸들로 파묻은 고개 위로 붉은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
핸들에 이마를 파묻었던 이선은 다시금 힘껏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딜러의 꼬임에 넘어가 옵션을 추가했던 내비게이션을 작동시켰다.
인천. 야구장.
정확한 이름은 몰라도, 키워드 몇 개만으로도 기계는 ‘인천 문학 이룸야구장’이라는 결과물을 뱉어냈다. 괜한 돈을 쓰지는 않았다. 의미 없는 자부심이 이선을 위로했다.
쓸 일이 많지 않아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이선의 차는 힘껏 움직였다. 처음으로 실력 발휘를 하게 되는 차도 신이 난 것만 같았다.
―경로를 탐색합니다.
경쾌한 여자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린다. 그 목소리가 마치 정답을 알려주는 실로폰 음처럼 들렸다.
* * *
비교적 출퇴근이 짧은 축에 속하는 정이선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의 예상보다 서울의 교통체증은 심했고, 그건 퇴근이 시작되는 저녁 즈음엔 더욱 심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초조하게 다리를 떨어대던 이선이 겨우 야구장에 도착했을 무렵엔, 시간은 8시를 훌쩍 넘겼다.
경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더욱이 최악인 건, 매표소와 무인 발권기에 붙여진 문구였다.
[오늘 경기는 전석 매진되었습니다.]
“아…….”
이선은 멍해진 채로 침음했다. 아직 숨도 다 고르기 전인데도 허탈감이 몰려왔다.
대체 왜 생각하지 못한 걸까. 이선은 키오스크 모니터에 붙여진 문구에서 미련을 떼지 못했다.
매진이라니. 너무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잘 모르지만, 송재혁은 올 한 해 가장 상위 성적을 보인 두 팀끼리 하는 마지막 시리즈라고 말했다. 올해에 볼 수 있는 마지막 야구경기라고. 그런 경기라면 사람들이 많이 와서 보는 게 당연했다.
인천에 왜 이렇게 야구를 보는 사람이 많은 걸까? 그런 물음을 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본다고 하니, 작은 구장이라면 자리가 금방 찼을 것이다.
‘…어떡하지?’
고민하던 이선은 하릴없이 핸드폰을 꺼냈다.
송재혁.
순간적으로 그의 이름이 머리를 스쳐 갔다.
구단 관계자인 그라면, 어쩌면 남는 티켓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좋은 자리도 필요 없다. 그냥 강희찬의 뒷모습이라도,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작게 보이는 자리라도 괜찮다. 다치지 않고 잘하고 있다는 것만 눈에 담을 수 있으면…….
그런 생각에 부지런히 연락처를 뒤지려던 손가락은 멈칫했다.
“…….”
여기는 잠실이 아니다. 일전에 같은 서울에 있는 고척 야구장의 티켓도 구해줄 수 없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인천 경기의 티켓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혹시 저번에 받았던 1차전의 티켓을 아직 쓰지 않았다면, 오늘 쓸 수는 없는 걸까?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 티켓은 집에 있었다. 송재혁이 줬던 티켓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희찬의 초대권은 아직도 책 사이에 잘 끼워진 채였다.
혹시 하는 마음에 서울에 갔다가 다시 인천에 돌아올 때까지. 갔다 오면 대체 몇 시가 될까? 다녀온다 치더라도, 그것으로 경기를 볼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으으…….”
서늘한 손으로 눈가를 짚은 채, 아파지는 머리를 겨우 버티고 있던 차였다.
톡톡.
무언가가 이선의 어깨를 슬며시 두드렸다. 깜짝 놀라 황급히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누르고 있느라 흐릿해진 시야가 천천히 선명해진다. 보인 것은 경량 패딩 조끼를 입은 한 중년 남자의 은근한 얼굴이었다.
“학생. 표 필요해?”
“…네?”
실내조명 아래에서도 거무튀튀한 얼굴이 옆으로 바싹 다가온다. 굳이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하지 않아도 잘 들리는데. 게다가 들리지 않는 게 걱정이라면, 목소리를 키우면 되는 일 아닐까?
근본적인 궁금함이 일었지만, 굳이 묻고 싶지는 않았다. 이선은 목캔디와 믹스커피가 섞인 냄새가 풀풀 나는 남자를 피하려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끈질기게도, 그는 더욱 몸을 붙여왔다.
“표 필요한 거 같아서. 아니야?”
‘학생’이라니…….
이제 스물여덟으로 살 날이 두 달도 남지 않았다. 내년이면 스물아홉이 될 이선은 의외의 호칭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선은 잠시 멍했던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다시금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얼굴엔 왠지 모를 벅찬 설렘마저도 묻어 있었다.
“아, 네. 근데 매진이라서…….”
“그럼, 잠깐만 이쪽으로 와봐.”
남자는 이선의 팔꿈치를 잡더니 한구석으로 이끌었다. 구장 내부를 흘긋거리며 무언가를 신경 쓰는 모습이 무척이나 수상하게 느껴진다. …대체 뭘 경계하는 걸까?
본능적인 경계심에 이선은 남자의 시선이 스친 곳을 따라 훑었다. 아이들에게 먹을거리를 사주기 위해 함께 나온 부모들이나, 직원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점퍼를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종종 이선의 팔을 잡은 남자와 비슷한 차림을 한 중년 남녀들도 보였다. 그들은 이선을 보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선을 붙들고 가는 남자를 선망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대체 왜?’
호기심을 해결하기도 전, 이선은 남자의 손에 이끌려 기둥 뒤편의 후미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제야 남자는 속삭이지 않고 또렷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나한테 표가 있는데, 학생이 살래?”
“아, 정말요?”
이선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반색했다.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오늘 하루 이선이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기쁜 말이었다. 이런 고마운 말을 대체 왜 남의 눈을 피해 기둥 뒤에 숨어서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선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중년 남자의 얼굴에도 만족의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는 금세 아쉬움을 가장한다.
“응. 테이블석이야. 괜찮지?”
“아, 네. 한 자리 있어요?”
“우리 식구들이랑 보려고 했는데, 다들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 학생 운이 좋은 줄 알아.”
“…….”
함께 왔다는 가족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야구 유니폼도 입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런 팬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선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의 얼굴엔 만족이 퍼졌다. 그리고 금세 목소리는 다시 부담스러울 정도로 은근해졌다.
“원래 테이블석 비싼 거 알지?”
남자의 괜한 소리에 이선은 핸드폰 케이스에 비상금 조로 끼워두고 다니던 현금이 얼마 남았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남자는 패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고는, 몇 번의 터치로 화면을 조작했다. 그리고 마치 불건전한 돈 봉투를 건네는 로비스트처럼 은근한 기색으로 핸드폰을 이선에게 슥 내밀었다. 얼간이처럼 눈을 둥그렇게 뜨는 이선을 향해 그는 턱짓으로 가리켰다. 핸드폰을 보라고.
“…네에?”
목소리가 순간 뒤집혔다.
“이것도 싼 거야. 한국시리즈 경긴데 이 값에 구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그것도 테이블석인데?”
아니.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선의 짧은 되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꿰뚫기라도 한 양, 남자는 도리어 역정을 냈다. 마치 선수를 쳐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듯. 기세에 밀린 이선이 몸을 움칫했다. 기민하게 기색을 파악한 남자는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우승을 언제 할 수 있을 줄 알고? 오늘 못 보면 팀이 앞으로 10년 동안 코시 못 갈 수도 있어? 아니지, 10년이 뭐야? 미국엔 백 년 넘게 우승 못 한 팀도 있었어.”
“네에…….”
“잘 생각해. 지금 보는 우승이 사는 동안 볼 팀의 마지막 우승이 될 수도 있어.”
비장하기까지 한 남자의 말이 주문처럼 울렸다. 마치 그거였다. 홈쇼핑에서, ‘이런 구성 다신 없습니다’라고 유혹하는 쇼호스트의 멘트. 그보다 열 배는 더 비장미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야구에는 관심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크게는 없을 이선이었지만 혹했다. 물건의 가치도 모른 채 그저 좋은 거겠거니 짐작하는 호구의 기질이 이번에도 발휘되고 있었다.
“아, 싫음 말어! 나도 우리 식구들이랑 들어가려고 했던 거 일 있어서 좋게 넘기려고 했더니, 이거 원.”
“아니요, 아니요! 살게요. 그 자리 저한테 팔아주세요.”
이선은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뭔지는 몰라도 되게 좋은 표다. 지금 이 야구경기를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게 분명했다. 대충 여든까지 산다고 쳐도, 앞으로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후회를 한다고 가정한다면 야구장 티켓이 얼마든 그리 비싼 것은 아닐 테다. 만족감이 50년 할부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간절해진 이선을 보자, 남자는 다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거, 진작 그럴 것이지. 지금 인터넷 중고카페 뒤져봐. 표 구할 수 있나. 내가 양심적으로 파는 거야.”
“네. 감사합니다.”
저번에 수원 구장에 들어갔을 때 냈던 값의 몇 배인 거지? 이선은 본능적인 계산에서 정신을 돌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어쨌든 자신의 비상금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 어서 이선의 손에서 현금이 뱉어지기를 기다리는 남자를 향해, 이선은 어렵사리 입술을 열었다.
“근데, 제가 지금 현금이 없어서요.”
“우리 계좌이체로도 받아. 번호 지금 불러줄게.”
“아……. 네에.”
‘철저하시구나.’
어딘지 모르게 프로페셔널함을 느끼며, 이선은 은행 앱을 눌렀다. 혹시나 업데이트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는 사이 남자가 또 역정을 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앱은 최신판이었다. 어차피 신규진이 쓸 대략적인 카드값과 이리저리 나갈 공과금을 가늠해 보느라 통장 잔액조회를 자주 했다. 부지런히 최신 버전을 유지 중인 앱이 고마우면서도 퍽 아쉽기만 하다.
“근데.”
이선이 아까 남자의 핸드폰에서 봤던 액수를 이체 금액에 적었을 무렵이었다. 그는 불길하게 말문을 열었다.
“…….”
“거기가 가족석이라. 한 자리가 아니라, 통째로 사야 하거든.”
“…예?”
“4인 기준으로. 아까 거기에 곱하기 4.”
“아까 그게… 한 테이블 가격이 아닌 건가요?”
“당연하지.”
아까 봤던 숫자도 한 달 월급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거기에 4를 곱한 숫자는 이선을 기함케 했다.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들이켜는 이선을 보며, 남자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의자가 네 개라도 테이블은 하난데, 학생이 앉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사겠어?”
“아……. 네.”
…원래 티켓도 그런 식으로 파는 건가?
수원에서 들어갔던 테이블석도 오만 원 안쪽이었다. 그땐 한 자리만도 팔았는데. 불만이 퐁퐁 샘솟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와아아!
구장 안에서 함성이 울렸다. 이선은 순간 움칫했다. 저 함성의 원인이 무엇인지. 강희찬이 잘하는 건지, 아니면 못하는 건지. 경기 내용을 알 길이 없으니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이선은 약간의 망설임도 지워버리고 순식간에 숫자를 적고 이체 버튼을 눌렀다.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르자, 몇 초 만에 쉽게 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남자는 제 통장으로 들어온 금액을 확인하고는 이선에게 티켓을 넘겼다.
패밀리석(4인).
적힌 문구가 못내 아쉽긴 했지만, 네 사람분만큼 강희찬을 응원하면 되는 일이다.
지나간 금액을 애써 머릿속에 지우고, 이선은 남자에게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래. 후회 안 할 거야. 지금 안 보면 앞으로 늙어 죽을 때까지 우승을 못 볼 수가 있어.”
짧고도 미묘한 덕담과 함께 그는 바람처럼 야구장을 빠져나갔다.
처음 와본 야구장 안을 둘러봤다. 내부는 선수들의 얼굴이 실린 현수막이 가득했다. 초조하게 구장을 둘러보던 이선은 형광 조끼를 입은 스태프 하나를 발견했다. 이선은 재빨리 그를 뒤쫓았다.
“저기.”
“아, 네.”
응대가 익숙한 친절한 미소다. 표를 팔았던 중년 남자와는 다른 서비스맨의 미소였다.
“이 자리로 들어가고 싶은데, 입구가 어딘지 몰라서요.”
“아, 네. 홈팀 패밀리석이네요? 혹시 가족분들은 나중에 오시나요?”
“아니요. 저 혼자예요.”
“…네?”
멈칫한 직원이 수상한 자를 보듯 이선을 훑었다. 이선은 그것이 못내 불만스러워졌다. 1인 가구라는 말도 있는데. 패밀리가 한 명일 수도 있지, 뭘 저렇게 볼 것까지 있단 말인가.
이선의 불만이 전해진 듯, 직원은 뒤늦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가면 같은 웃음을 뒤집어썼다. 저런 얼굴도 자신이 자주 하는 짓이었기에, 이선은 금방 알아챘다.
“아. 1층 패밀리석은 이쪽 입구로 들어가시면 돼요. 자리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그냥 입구만 알려주시면 안에서는 제가 찾을게요.”
“네. 그럼 입구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저, 근데…….”
이선은 직원의 반보 정도 뒤에서 그를 따랐다. 직원을 따라 걸을수록, 어딘지 처음 보는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의 사진이 너무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직원이 얘기했었다. ‘홈팀 패밀리석’이라고. 그렇다는 건 여기는 인천 팀의 홈구장이란 말이었다.
“혹시 이 티켓으로는 드래곤즈 쪽으로 들어가나요?”
“네? 아, 네. 당연히 홈팀 응원석 쪽으로 들어갑니다. 홈팀 티켓이라서요.”
“그럼… 컵스 쪽으로는 못 가는 거죠?”
“네에. 거기로 들어가려면 원정팀 티켓으로 들어가야 하니까요.”
몇 번이나 반복되는 같은 대화에 직원의 걸음이 느릿해졌다.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역시 이 남자는 암표상한테 티켓을 잘못 산 호구라는 것을. 젊은 남자 혼자서 패밀리석 티켓을 내밀었을 때부터 뭔가 수상하더니.
‘대체 이 호구는 티켓을 얼마에 샀을까?’
문득 밀려오는 호기심을 애써 누르며, 직원은 관중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서늘한 냉기와 응원 열기가 뒤섞인 기운이 좁은 야구장 통로 밖으로 밀려 나오고 있었다.
“바로 저쪽에 보이는 자리가 8구역 패밀리석입니다.”
자리를 가리키는 직원의 손끝을 확인한 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팀을 응원하는 자리로 들어가지 못하는 건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저번에 수원에 갔을 때처럼 원정경기를 오는 팀도 어느 정도의 관중 수익을 보장해 준다면 좋을 텐데.
한 걸음을 떼었다. 검은 하늘과 하얀 조명만이 보이는 입구 너머로 들어섰을 땐, 전혀 다른 세상이 열렸다.
다시 한번 흰 토끼가 있는 원더랜드였다.
* * *
발을 들인 별세계에서 이선이 가장 먼저 찾은 건 강희찬의 존재였다.
선수들의 이름이 적힌 전광판에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아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찾는 이름은 가장 아래에 있었다.
P. 강희찬
짧은 글자에 이선은 안도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이선은 표에 적힌 자리를 찾아 한참을 내려갔다. 패밀리석이라는 이름에 맞게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이 테이블에 먹을거리를 펼쳐 두고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이선은 제 자리를 발견했다. 어린이용 유니폼을 입은 아이 둘과 부부. 그들의 테이블 바로 옆이었다.
네 개의 의자가 주르륵 이선을 맞이한다.
대체 어느 의자에 앉아야 자연스러울까? 잠시 고민하다, 옆자리와 두 번째로 먼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입은 유니폼 색들이 다양했다. 꼭 홈 경기라고 응원하는 팬들도 홈 유니폼을 입고 오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낯선 장소를 살피는 이선의 귀로 악에 받친 목소리가 꽂혔다.
“아오, 쫌! 1점만 내라고, 새끼들아악! 오늘까지 저 새끼 완봉을 만들어주려고 용을 쓰고 있어!”
‘가족끼리 야구장에 오면… 좀 평화로운 분위기 아닌가?’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선수의 유니폼을 입고 나란히 앉아 응원하는 모습. 마스코트의 얼굴이 달린 귀여운 머리띠를 한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 엄마. 평화롭게 주전부리를 먹으며 즐기는 게 가족들의 야구장 나들이가 아니었던가?
이선은 옆 테이블을 곁눈으로 살폈다. 홀로 악을 쓰고 있는 아버지와 심드렁하게 치킨 다리를 뜯는 그의 자식. 어린아이들이 보는데 험한 소리는 하지 말라고 말릴 법도 한데, 부인 쪽은 포기한 건지 그저 아이들의 입가를 닦아주기만 할 뿐이다.
“아오, 씨발. 저 멍청이들이. 여친 왔다고 가오 세워주는 거 봐라!”
“여친? 누구?”
“아까 시구 왔잖아. 못 봤어?”
“저 둘이 사귀어? 강희찬이랑?”
지겨운 야구장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여자의 눈이 빛났다. 모처럼 흥미가 이는 소재인 듯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저 맥주가 살짝 남은 플라스틱 컵을 병적으로 잘근잘근 물어대고 있었다.
“소문 돌았을 땐 헤어졌다고 했는데. 아직 경기 보고 있네.”
“어, 진짜네?”
“이런 정신병자 같은 구단이 어디 있냐고. 상대 팀 투수 여친을 시구로 불러주다니, 제정신이야?”
“근데 이런 경기는 구단에서 시구자 잡는 거 아니라며.”
“…그럼 협회가 새한한테 돈 받아먹었나 보네.”
이선은 멀거니 옆 테이블의 부부를 보았다.
꼭 제 옆 테이블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족들이 앉는 좌석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분노가 느껴졌다. 게다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자를 비롯한 이쪽 관중의 분노 원인이 강희찬이라는 걸.
“…….”
…언제나 이랬을까? 타지로 경기를 가면, 잘해도 상대 팀 팬들에게 이런 모함을 듣는 걸까?
제 일을 잘하는데도, 이렇게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험한 말을 듣다니. 그렇다면 야구선수라는 직업은 너무 가혹했다.
이선은 포털 사이트에 적혀 있던 강희찬의 연봉이 더는 높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받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매번 이렇게 부당한 욕을 들어야 한다면.
이선은 부루퉁해진 채, 부부가 가리킨 방향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
그들의 말대로, 정말 중앙 가운데의 테이블석엔 연예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팬들과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조금 더 무슨 얘기를 하지 않을까. 신경이 자꾸 쓰여, 이선은 노골적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남편 쪽을 향해 가자미같이 눈을 흘기며.
남자는 저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은 아니었다. 아직 네 살도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아이는 야무지게 닭 다리를 빨고 있었다. 저의 눈빛을 오해했는지, 아이는 제가 핥아대고 있던 닭 다리를 이선을 향해 내밀었다.
‘아니,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이선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딱히 먹고 싶어서 네 아빠를 본 게 아니라고. 네 아버지가 자꾸 잘못이 없는 선수에게 화를 내고, 모함하기에 본 것뿐이라고. 그리 말을 해도 아이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졸지에 아이가 먹는 것을 더럽게 탐하는 몹쓸 어른이 된 이선은 경기장에 집중하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7회가 끝나서 공수교대를 하는 선수들 사이에서 강희찬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선은 순간적으로 덜컹했다. 이쪽을 향한 그의 얼굴이 마치 자신을 발견한 것만 같아서,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강희찬은 제 머리에 있던 모자를 들췄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난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양 인상이 잔뜩 구겨진 채였다. 지금껏 본 적 없는 그의 표정이 기괴할 지경이었다.
‘혹시… 날 보는 건가?’
이선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 혹은 그의 상대 팀인 드래곤즈 선수들에게 잔뜩 화가 난 팬들이 가득하다. 군중 속의 고독이 느껴졌다.
움츠러든 이선이 다시금 강희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기묘한 얼굴을 한 그가 서 있다. 심지어 글러브를 끼지 않은 왼팔을 들어 올려 손가락질까지 하고 있었다. 이쯤이면 자신을 알아본 게 분명했다.
“저, 저놈이 왜 우릴 손가락질을 해?! 야아! 빠따새끼들이 병신인데, 왜 우릴 업수이 여겨!”
다만……. 옆 테이블의 남자를 비롯한 드래곤즈의 팬들은 그가 자신들을 조롱한다고 여기는 것 같지만.
“…….”
그가 자신을 봤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심장은 지나칠 정도로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냥 보기만 하는 거다. 그건 역시 핑계에 불과했다. 은연중에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뛰는 심장이 증명했다.
몇 초 만에 순식간에 통장을 빠져나간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유니폼을 입어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라, 제가 있을 방향을 향했다는 것만으로.
* * *
더그아웃은 핸드폰을 비롯한 전자기기의 반입이 금지된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규칙이 오늘처럼 신경에 거슬렸던 적이 있던가.
최선형 감독은 8회 말 원 아웃까지 잡은 강희찬을 교체했다. 주자가 나간 것도 아니고, 점수가 접전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최 감독은 보통 이닝 종료와 함께 투수를 교체하는 걸 선호했다. 하지만 투수코치가 굳이 중간에 심판에게 공을 받고 올라온 이유는 간단했다. 투구 수가 100개를 넘겼다.
1차전에서 완봉을 하느라 던진 공의 개수가 113개였다. 누군가에게는 완봉한 것치고는 적은 편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투구 수였지만, 어쨌든 완봉을 한 투수다. 아무리 오늘이 시리즈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라고 해도, 무리를 시킬 이유까지는 되지 못한다. 올해까지만 쓰고 말 투수가 아니었다.
강희찬은 내려가자는 투수코치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홈팀 관중석에 앉아 있는 이선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둘러보던 관중 틈바구니. 그 속에서 허연 얼굴을 발견했을 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집에서만 보이던 헛것이 드디어 야구장에까지, 그것도 원정구장에까지 침범했다고. 그리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제 주변을 둘러보는 맹한 태도나, 널찍한 테이블 위에 마실 것 하나 없는 모습까지. 수원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저건 정이선이 맞았다. 제집에서 엉덩이를 다 내놓고 다니는 선생이 아니라, 진짜 정이선.
‘대체 왜 왔단 말인가?’
오라고 티켓까지 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하필이면 평일에 인천에 나타난 의중이 뭐란 말인가? 게다가 앉아 있는 자리도 이상하다.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 사이에서 덜렁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본인은 멍청하게도 ‘어떻게 알았지?’라는 얼굴이나 해댔지만.
이닝을 마치고, 원정팀 로커룸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동료들은 빨리 샤워를 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강희찬은 로커룸을 열자마자 제 가방 구석에 박혀 있던 핸드폰을 꺼내 쥐었다.
연달아 문자를 쳐서 보내고, 한참을 기다려도 답은 오지 않는다. 땀으로 젖은 몸의 찝찝함과 알 수 없는 짜증이 뒤섞였다. 짜증을 가득 담아 연락처에서 선생의 이름을 찾아 통화를 누르려던 때였다.
“어? 뭐야. 아직 안 씻었어? 아이싱 해야 하는데, 뭐 하고 있어?”
“…지금 씻어요.”
트레이너의 재촉 아닌 재촉에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래. 뭐, 일단 도망만 안 가면 된다. 아니, 가더라도 상관은 없지.’
오늘 경기가 끝나면 자신 역시 서울로 간다. 선생이 도망가봐야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제집뿐이다. 원래 고향이 수원이라니 그쪽으로 갈 수도 있지만, 평일이다. 다음 날 서울에 있는 학교로 출근을 할 인간이 그럴 수는 없을 거다. 선생은 꽤 고지식한 인간이었으니까.
생각이 미치는 순간, 마음은 안정되었다. 당장 홈팀 관중석으로 들어가야 하나 싶던 고민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투수코치에게 공을 넘겼을 때보다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땀에 젖은 유니폼을 벗었다.
* * *
[인천언제왔어요 학교쨌어요?]
[왜거기앉아잇]
[집에가지말고 끝나면]
“…….”
강희찬이 경기장에 나오지 않는 사이, 이선은 연달아 문자 세 개를 받았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작성되다가 만 메시지들이 그의 이름으로 연달아 왔다.
역시 강희찬은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게다가 홈팀 관중석으로 들어와서 원정팀보다 더욱 많은데도, 눈이 참 밝은 사람이었다.
주체가 되지 않을 만치 뛰는 심장을 무시하려, 괜히 시답잖은 생각을 억지로 했다. 가만히 핸드폰 메시지를 보다가, 하나씩 착실히 답을 적기 시작했다.
[학교 안 쨌어요. 퇴근 마치고 와서 8시 넘어서 도착했어요. 그리고 표를 이쪽 자리로 잘못 사서.]
쭉 그의 질문에 대답을 치던 손이 멈추었다.
‘…끝나면?’
끝나면 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지금 경기가 끝난 게 아닌가?
이선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아직 작성 중인 채로 보내지지 못한 제 문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8회 중간에 강희찬과 교체되어 나온 선수가 공을 던지는 사이, 문자는 하나 더 도착했다.
[대답을해요 핸드폰 보면서 왜 쌩까요?]
[사람 하나 보내니까 집에 가지 말고]
왠지 모르게 그의 목소리로 음성지원까지 된다.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메시지를 보고서, 이선은 그나마 쓰던 문자를 보냈다.
‘자기도 일본에 있는 동안 내 문자에 대답 안 해줬으면서, 왜…….’
솟아나는 불만에 혼자 입술을 비죽 내밀어보기도 했지만, 긴장을 풀면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홀로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표정을 관리할 때쯤엔, 경기는 끝이 났다. 자신이 앉는 편이 아닌, 원정팀에서 폭죽과 함성이 터지는 순간. 이선은 겨우 핸드폰에서 얼굴을 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팀이 이긴 모양이다. 축포와 함께 음향장치 없이 사람의 목소리가 부르는 응원가가 시작됐다.
승리투수 강희찬.
포털의 문자 중계창에 올라온 그 짧은 한마디가 이선을 안도하게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름이 꽤 멋지고 남자다워서 그런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한 한 단어처럼 조화로웠다.
욕설과 한숨을 내뱉으며 경기장을 떠나고 있는 드래곤즈 팬들의 틈바구니에서, 이선은 홀로 웃다가 정색하기를 반복했다.
이런 적진 한가운데서 그의 승리 기사를 보며 웃다가 험한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이선의 옆 테이블을 채우던 가족들은 뒷정리가 다 끝나지 않고 있었다.
“저…….”
톡톡. 누군가 이선의 어깨를 슬며시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정이선은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들킨 사춘기 남학생처럼 핸드폰 화면을 확 껐다.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눈에 익은 얼굴이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이선은 엉거주춤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 잠실 구장을 방문했을 때, 이선에게 안내를 해주었던 직원이다. 아마도 송재혁의 상사라는.
어정쩡한 모양새로 인사를 하는 이선을 보며, 남자는 손가락으로 제 뒤편의 출구를 가리켰다. 그리고 아까 이선에게 표를 팔았던 남자 못지않게 바싹 다가와 은밀한 목소리를 건넸다.
“강희찬 선수가, 잠깐…….”
“…네?”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애가 여기 들어오려고 하길래요. 인터뷰 쌩까겠다고 해서 우리도 얼마나 난감했다고요.”
“아, 네에…….”
같이 가자는 소리구나.
이선은 먼저 걸음을 떼는 남자의 뒤를 따랐다. 그의 부하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급한 일이 있는지 먼저 뛰어갔다.
직원 아냐? 혹시, 아까 당신이 막 소리 지른 거 저 사람으로 오해받았나? 쉿. 조용히 있어.
옆 테이블의 부부는 직원에게 불려가는 이선을 보고 오해를 단단히 했다. 그들의 수군거리는 말소리를 들었지만, 딱히 정정해 줄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선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중년의 가장이 얼마나 부당한 이유로 부당하게 강희찬을 헐뜯었는지.
이선은 오히려 부부가 오해할 수 있을 만큼, 한껏 죄스럽게 어깨를 웅크리고 팀장의 뒤를 따랐다.
이선은 제 앞을 걷는 남자를 가만히 보며 오늘 지켜본 경기를 떠올렸다. 분명히 강희찬은 공을 백 개가 넘도록 던졌는데, 그의 다음에 나온 남자는 서른 개도 던지지 않았다.
역시 어느 조직이든 나이가 어리고 연차가 적은 사람들이 더 바쁜 모양이다. 그래서 강희찬도 경기를 오래 뛰는 걸까?
‘…어리다고 일을 더 시키다니.’
게다가 고생이란 고생은 다 시켜놓고, 결국 마지막 순간에 환호를 받은 건 다른 선수였다. 방송국 인터뷰를 위해 간이 세트가 준비되고, 카메라 앞에 홈런을 쳤다는 선수가 아나운서와 함께 섰다. 그 광경은 이선의 추측에 힘을 실었다.
“아니, 그놈이 인터뷰도 안 하고 째겠다고 해서 얼마나 난감했는데요. 아무리 MVP가 따로 있다지만, 선발이 어떻게 기자 인터뷰를 안 할 수가 있냐고요. 저번엔 무슨 변덕인지 얌전히 사고 안 치고 잘하더니, 어떻게 바로……. 관중석 갔다가 누가 뭐라도 던지면 어쩌려고, 겁도 없어가지고.”
남자는 복잡한 구조의 야구장을 마치 제집인 양 익숙하게 지났다.
남자가 입은 야구점퍼 뒷면에는 SH CUBS라는 글자와 함께 구단의 마크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뒷모습을 보는 이선의 시선이 조금은 뾰족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단이 곱게 보이진 않는 탓이었다.
“여자친구… 보러요?”
“누가요? 강희찬이?”
이선은 조심스레 물었다. 작은 목소리에도 남자는 예민하게 반응하며 홱 돌았다. 그러고는 금세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경계하는 모양새가 미어캣 같았다. 다행히 주위는 이미 관계자만이 접근 가능한 공간이었다.
“아니. 아까 관중석에서 들어서요. 여자친구 오늘 왔다길래…….”
“아이고, 진짜로. 하필 시구를 와도 오늘 와서.”
남자는 골이 아프다며 이마를 짚었다. 손이 작은 편인지 손바닥에 닿지 못한 얼굴 공간이 꽤 남는다.
“아무튼, 그 얘긴 오늘 희찬이한테는 안 하는 거로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이선의 손을 부여잡을 기세로 다가왔다.
“…네?”
“오늘 그것 때문에 경기 망치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그 여자도 그 여잔 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선발로 나갈 놈을 따로 부르냔 말이에요. 헤어지면 헤어진 거지. 그놈 성질 더러워지면 뒷감당을 누가 하는 줄 알고.”
“저기…….”
“어느 관종 같은 기자 새끼가 다 쉬어 터진 열애설 떡밥을 이제야 물어가지고. 헤어졌으니 기사로는 못 내고, 어디 인터넷 게시판에다가 올리는 거지. 누군지 대충 예상은 가는데. 하여간 그놈의 관종병은 나이 먹어도 못 고치나 봅니다. 얼굴 까고 유튜브라도 하면 고소라도 때릴 텐데.”
“누가요.”
대뜸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끊임없이 주절거리며 하던 불평을 뚝 멈추고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그곳엔 강희찬이 심드렁한 얼굴로 있었다.
홍보팀장은 시체라도 발견한 것처럼 놀랐지만, 사실 이선은 이미 뒤에서부터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다만, 강희찬이 오고 있다고 말해주기에는 남자의 말이 끝나지 않아서 여의치 않았던 거지.
“…….”
수상스럽게도 하던 말을 뚝 멈추자, 왠지 모르게 홍보팀장과 둘이서 강희찬의 뒷말을 하다가 걸린 모양새다. 그런 거 아닌데.
이선은 괜히 억울해지며 강희찬을 슬그머니 보았다. 난 아니라고. 그런 간절한 눈으로 봤지만, 강희찬은 이선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문자 답은 왜 안 합니까? 핸드폰 보고 있으면서. 일부러 그래요?”
“아, 아니……. 하려고 했는데, 강희찬 씨가 먼저 보내신 거예요.”
“웃기지 마요.”
저렇게 말할 거면서 대체 왜 묻는단 말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불만도, 험악한 인상 앞에서는 풍전등화였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표는 정 선생 퇴근 전부터 다 팔렸을 텐데. 송 PD한테 부탁했어요?”
“아니요. 인천 경기라서. 밖에서 파시는 분 있더라고요.”
“…암표 샀어요?”
경기장에 서서 자신을 보던 때보다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이선은 그의 말에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암표라니. 순간 머릿속에서는 아까의 중년 남자가 검정 봉지에 마약을 넣어 자신에게 건네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런 말만 들어도 불법과 탈법의 어느 중간일 법한 수상한 것을 자신이 샀을 리가 없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가족들이랑 보려고 했는데, 못 본다고 저한테 파신 거예요!”
“얼마에 샀는데요? 원래 값보다 비쌌죠?”
“그야……!”
“그게 암표지, 다른 게 암표인 줄 알아요? 얼마에 샀어요? 호구처럼 보이니까 혼자 온 사람한테 가족석을 팔아치우지.”
“뭐야. 암표 사셨어요? 요새 암표 얼마 해요?”
잠시 한구석에 밀려나 있던 팀장이 슬그머니 대화에 끼었다. 대체 표를 얼마에 샀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고개를 들이민 팀장을 향해 탐탁지 않은 시선이 떨어졌다.
“…일하러 안 가요?”
왜 끼어들고 지랄이야. 그런 험한 말이 제법 사회적인 탈을 쓴 채였다.
“나야, 딱히. 너랑 가지, 뭐.”
“…….”
안 갈 거라는 말을 부드럽게 돌려 말하자 강희찬은 더욱 표정이 험해진다. 하지만 팀장은 다시금 모른 체 고개를 돌렸다. 눈빛으로 보내는 축객령은 이미 익숙한 모양이었다. 능숙한 대처에 이선은 속으로 감탄했다. 결국 강희찬도 포기했는지, 그는 다시금 저를 향해 주의를 돌렸다.
“인천까지는 어떻게 왔습니까? 택시비 엄청나게 깨졌을 것 같은데.”
“차 몰고 왔어요.”
“위험하게 여기까지요? 정 선생, 장거리 운전해 봤어요?”
“수원 갈 때 제가 운전해서 가요. 그리고 인천이 장거리도 아니고…….”
“고속도로 타면 장거리지.”
뭔가 되게 혼나는 기분인데. 딱히 기분 탓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고속도로를 타면 장거리라는, 서울 쥐 같은 강희찬은 미간에 딱 인상을 쓴 채 트집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선도부를 거느리고 교문에서 복장 지도를 하던 학생부 선생님도 이만큼 까다롭진 않았다.
“키 주세요.”
강희찬이 대뜸 손을 내밀었다.
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명확했다. 이선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더듬어 키를 찾았다.
“야! 안 돼. 넌 버스 타고 가야지.”
이미 몇 번의 축객령을 받았지만, 팀장은 이번에도 끼어들었다. 짓밟아도 꿋꿋이 다시 일어서던 민초들의 근성과도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어차피 서울로 갈 거예요. 딴 데로 안 샙니다.”
“장난하냐? 잔말 말고 버스 타. 감독님 알면 또 무슨 꼴을 당하려고.”
“아, 진짜.”
목소리에 잔뜩 짜증이 배었다.
이선은 강희찬에게 거의 넘길 뻔한 차 키를 제 주먹 안으로 단단히 말아쥐었다. 뭔가… 주면 큰일 날 것 같다.
그 모습을 흘긋 본 강희찬의 얼굴엔 더욱 불만이 깊어갔다.
“이러니까 팀이 망조인 거예요. 원래 못하는 팀들이 단결이니 단합이니 좋아하는 거 몰라요?”
심드렁한 강희찬의 말에 팀장은 발작을 일으켰다.
“왜 우리가 망조야! 망조 아니야! 너, 재수 없는 말 하지 마! 이 새끼가, 부정 탈까 우린 빤쓰도 이긴 날이랑 똑같은 무늬로 입고 오는데!”
“…….”
강희찬이 슬그머니 팀장에게서 몸을 떨어트린다. 남의 속옷 사정 따위 알고 싶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팀장은… 언젠가 봤던 강희찬의 후배와 몹시도 닮았다.
“아무튼, 너, 절대 따로 못 간다. 내가 너 버스에 담을 거야.”
남자는 엄포를 놓았다. 비장한 기세에 강희찬은 고집을 꺾었다. 사실 그의 설득에 넘어갔다기보다는, 애초에 본인도 무리수라는 걸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럼, 송 PD한테 운전시켜요. 지금 밤인데, 운전 위험하잖아요. 송 PD는 따로 가도 되죠? 어딨어요?”
짧은 시간, 강희찬은 재빠르게 대안을 생각해 냈다.
어차피 구단 직원용 차를 타고 왔을 테니, 한 명 정도는 이탈해도 상관없을 거란 계산이다. 그게 선수의 부탁이라면 더더욱.
송재혁의 상사인 홍보팀장 역시 그것에 대해선 딱히 반대 의견을 던지지는 않았다.
“너 버스 타시는 거 찍겠다고 밖에서 카메라 들고 서 있잖아. 빨리 가서 버스 타. 너 때문에 애들은 씻지도 못하고 기다릴 거 아냐.”
“알았어요, 좀 있어봐요.”
팀장과의 협상을 마친 강희찬은 다시금 이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송 PD한테 연락해요. 차 운전해 달라고. 밤 운전 위험해요. 장거린데.”
“저 운전해서 서울 갈 수 있어요. 여기도 혼자서 왔는데…….”
“시끄러운 소리 할 거면 지금 키 나한테 주든가.”
“…….”
이선의 주먹을 억지로 열고 열쇠를 가져갈 기세다. 팀장은 슬그머니 난색을 보였다. 이선 역시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았다.
어딘지 그의 팀이 서울로 가지 못하는 상황의 원흉이 된 것만 같다. 그냥 알겠다고 하고 혼자 운전해서 갈걸. 그래 봤자 이 사람이 알 것 같진 않은데.
“아, 얼른 가자니까.”
팀장은 뒷머리를 몇 번 헝클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반짝 떴다.
“너 그럼, ‘망조’가 원래 사자성어로 뭔 줄 아냐? 맞히면 따로 가게 해줄게.”
“…뭐요?”
순간 당황한 듯,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실내라 울리는 공간에서 이선은 쉽게 변화를 잡아챘다.
강희찬의 눈동자가 그의 목소리처럼 떨리더니, 슬그머니 이선을 향한다.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움칫 놀란 이선은 본능과 계산이 뒤섞인 채로 입술을 열었다.
“망징…….”
“하나, 둘, 셋. 자, 몰랐지? 가자. 승주가 네 가방까지 버스에 싣느라 얼마나 고생했겠냐. 얼른 가자.”
“아, 진짜로! 귀는 왜 잡는 건데요!”
“잡아도 되는 데가 귀밖에 더 있어? 팔이랑 어깨 건들면 싫어할 거면서.”
마치 말을 듣지 않아 교무실에 끌려가면서도 입을 놀리는 사춘기 학생처럼. 강희찬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팀장과의 키 차이로 인해 허리를 잔뜩 숙인 뒷모습이 퍽 귀여웠지만, 아쉽게도 점점 작아졌다.
“송 PD한테 전화해요! 운전해 달라고! 그리고 양재동 웨일스 호텔로……! 아니, 송 PD 우리 합숙 호텔 어딘지 아니까, 그쪽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고……! 아, 아프다고요!”
“…….”
쩌렁하게 내부를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꽤 오래 남았지만.
* * *
그가 말한 양재동 웨일스 호텔은 정식 명칭이 아니었다. 호텔 이름이 왜 ‘고래 호텔’일까 궁금했던 이선은 내비게이션에 찍어본 후에야 이유를 깨달았다.
정확한 이름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텔’이었다. 자동완성 기능은 참으로 대단했다. 정확한 이름을 적지 않아도 목적지를 금세 찾을 수 있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이선은 송재혁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을 테니 말이다.
수원으로 갈 때나 가끔 써보는 똑똑한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이선이 한참을 달렸을 무렵이었다. 조수석에 두었던 핸드폰의 살벌한 진동 덕분에 이선은 깜짝 놀랐다.
강희찬 선수.
발신인을 보니, 평소와 다른 진동의 세기가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핸드폰엔 발신인의 성향에 따라 진동의 세기가 조절되는 기술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원래 과학기술이란 저를 기다려주지 않았으니까.
이선은 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딥니까? 집으로 튀었어요?
무슨 말을 할 틈이 없다. 무섭게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이선은 마치 대화 상대가 앞에 있는 것처럼 절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호텔 가고 있어요.”
―송 PD는 왜 안 불렀어요? 전화도 안 받았다던데?
“일하는 중인데 어떻게 그래요. 저도 운전 중이고.”
그래서 아까 송재혁한테 몇 번이고 메시지가 도착했구나. 운전 중이라 확인하지 못했던 문자 내용이 대강 짐작 간다.
―정 선생 차는 뭔데 버스보다 늦게 도착하는 겁니까? 벌써 도착하고 20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 안 와요? 집으로 튀었다가 전화 받고 지금이야 출발했어요?
“…….”
오늘따라 타박이 장난이 아니다. 아마 며칠 전의 일로 자신에게 불만이 많은 상태겠지만 이쯤 되면, 이선도 억울했다.
직접 그를 봤다면 내뱉지도 못할 대꾸가 눈앞에 없으니 제법 쉬이 목을 통과했다.
“저는 주차장까지 걸어갔잖아요. 강희찬 씨는 바로 야구장에서 버스 타셨겠지만.”
―그러니까 왜 오랄 때는 안 오고, 괜히 생고생해요? 언제 도착하는데요.
“…지금 호텔 정문 앞에 강희찬 씨 보여요.”
검정 유니폼 대신 회색 후드티를 입은 그가 고개를 돌린다. 이선의 차를 발견했는지, 그는 말도 없이 전화를 먼저 끊었다. 대신 차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을 향해.
톡톡.
긴 손가락이 창문을 두드렸다.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외제 차를 쓰는 사람이라 조수석의 위치를 착각한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몇 번 타본 적 있는 그의 차는 일반적인 국산 차처럼 핸들이 왼쪽에 잘 붙어 있었다.
이선은 의아해하며 창문을 내렸다.
“내려요.”
“…네?”
눈을 아래로 내린 그가 짧게 내뱉었다. 설명이 참 부족한 화법은 여전했다.
“운전 내가 할 테니까, 정 선생은 옆에 타라고요.”
차 탈취하는 게임의 현실 버전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차 보험을 어떻게 들어놨더라?
하지만 고민이나 변명을 할 시간은 없었다. 이미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한 그는 밖에서 억지로라도 운전석 문을 열 기세였다. 이선은 차마 이 차의 보험 상태를 말하지 못한 채, 순순히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망설임 없이 운전석에 오르는 그의 오른손엔 얼핏 책처럼 보이는 것이 들려 있었다.
‘…망징패조를 몰랐던 수모를 만회하기 위해 독서를 시작한 걸까?’
이선은 무례한 제 추측을 애써 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내비에 찍어주시면 제가 운전할 수 있어요.”
이선이 조수석에 오르며 묻는 사이, 강희찬은 운전석 시트를 뒤로 밀고 있었다. 죄스러움과 동시에 불만이 차오른다.
저런 불상사가 생기니까 자신이 운전하겠다는 건데. 굳이 일을 번거롭게 만든 그는 시동을 걸며 대답했다.
“정 선생 집으로 갑니다. 인천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집까지는 운전해 줄게요.”
“안 그러셔도 괜찮은데…….”
이선의 말과는 별개로 천천히 차는 출발했다. 남의 차를 몬다는 불편함이나 긴장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본인의 차를 많이 몰아본 사람의 여유로움일지도 모른다.
“…….”
호텔 정문을 빠져나가고 도로에 진입하자, 이선의 쓸모는 더욱 0에 수렴했다. 적막한 침묵이 괜히 긴장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이선은 겨우 입술을 열었다.
“호텔에서 지내세요?”
“네. 합숙한다고 저번에 말 안 했던가요?”
“아. 서울에 계실 때도 호텔에서 지내시는 줄은 몰랐어요.”
이선은 가만히 대답했다. 괜히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만 같아, 그를 바로 볼 수 없었다.
“강희찬 씨는 야구장 가까이에 사시는데, 호텔에서 지내시는 거예요? 호텔이 더 먼 것 같던데…….”
스스로가 듣기에도 변명처럼 들렸다.
어쩔 수 없었다. 호텔에서 그를 기다리던 고운 연인의 얼굴을 그리던 자신의 모습이 새삼 창피했다. 얼굴이 가물가물한 여배우 대신 그를 기다린 건 화면에 잡혔던 무서운 선글라스 감독님이었겠구나. 열심히 일하느라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을 오해하다니.
민망해지는 탓에 이선은 제 무릎 위에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곁눈으로 이선을 흘긋 바라보던 강희찬은 옅게 한숨을 쉬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를 포기한 강희찬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살폈다. 두리번대는 그의 모습에 이선의 호기심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뭐 찾으세요?”
“먹을 만한 게 안 보여서요. 장사하는 가게가 없네.”
당연한 일이다. 11시가 넘은 시각에 장사하는 곳은 24시간 운영하는 해장국 집이나 술집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아, 식사 못 하셨죠?”
“내가 아니라 정 선생이 문젠데요. 야구장에서 뭐 안 먹었죠?”
또다시 그의 입에선 질책이 흐른다. 강희찬의 입에 맞을 만한 음식점을 찾던 이선의 어깨가 움츠렸다.
“나야 게임 하니까 못 먹지만, 정 선생은 왜 아무것도 안 먹습니까? 학교에서 저녁밥도 안 준다면서요.”
“…….”
오늘따라 불만이 참 많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이선은 가만히 들었다. 강희찬은 그렇게 한참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묻는다.
“혹시, 만두 못 먹어요?”
“네? 아니요. 좋아해요.”
만두는 맛있으니까. 당연한 것을 물은 강희찬은 길가에 차를 세웠다.
“저거 먹을 만해요. 여기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지금 막 간판의 불이 꺼진 만둣가게가 목표였다. 가뜩이나 보폭이 큰 사람이 걸음까지 서두르자 정말 순식간에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아……!”
제 차였지만 한 번도 앉아본 적 없는 곳에서 보는 광경은 기묘하다. 언젠가 그가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 오던 모습과도 겹쳤다.
정말 먼 시절처럼 느껴지는 때를 떠올리는 사이에도 그는 한참이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혹시 안에서 혼자 먹고 있는 걸까?’
일반 사람들의 상식적인 행동과는 다소 동떨어진 사람이니, 그가 자신을 여기에 남겨두고 혼자 만두를 먹고 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건 아니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차에서 내려 살펴봐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강희찬은 커다란 비닐봉지를 손에 쥔 채 가게를 나왔다. 들어갈 때보다도 급한 걸음이 순식간에 이선의 차에 다다르고, 문이 열렸다.
“좀만 늦었으면 아예 문 닫을 뻔했네.”
그는 중얼거리면서 만두 상자가 잔뜩 든 봉투를 뒷자리에 두었다. 아마도 이미 마감을 시작한 가게에 부탁해서 음식을 포장한 듯싶었다.
과연 강희찬이 어떤 태도로 부탁을 했을까? 참으로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고 싶지 않은 기묘한 감정이 일었다.
따끈한 만두 냄새가 풍기는 차는 이제 익숙하게 이선의 집을 향했다.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강희찬은 제집으로 가는 최단 거리를 알고 있었다. 그가 모는 이선의 차는 능숙하게 작은 도로를 지났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지나면 익숙한 건물 외벽이 보인다. 차는 이선의 원룸 바로 앞 주차공간에 멈추었다. 보통 절대 비어 있지 않은 자리였는데, 오늘은 특이하게도 남아 있었다.
노래 하나 틀지 않은 차 안은 시동이 꺼지자 더욱 적막해졌다.
“…….”
멈춰진 차 안에서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선은 먼저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면 강희찬이 먼저 가겠다고 할 것 같아서. 훌쩍 떠날 것만 같아서 미리 아쉬워하고만 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이선의 무릎 위에, 짙은 색의 무언가가 놓였다. 호텔에서부터 그가 들고 있던 물건이었다.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책이 아니라 정사각형의 상자다.
“…네?”
이선은 고개를 돌리며 강희찬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고집스럽게도 정면을 향했다. 이선에게 보이는 건 가로등 조명이 닿는 옆얼굴뿐이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하면 되지, 왜 송 PD한테 부탁합니까? 카메라랑 장비 들고 다니는 사람한테.”
“아…….”
이선은 상자 가운데에 박힌 브랜드의 이름을 뒤늦게 알아챘다. 사실 처음 보는 브랜드였기에, 그 아래에 있는 CHOCOLATE라는 글자가 이해를 도왔다.
“이거 먹고 싶었어요? 면세점에서 사던데.”
고집스레 눈을 피하던 남자는 이제야 이선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송재혁의 얼굴과 의문의 초콜릿 상자가 합쳐지자 이선은 뒤늦게 깨달았다.
팀의 출국 일정을 알아내기 위해 송재혁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송재혁이야 구단 관계자이니 일정을 알아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상대였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왜 물어보냐”는 질문은 피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할 수가 없었기에, 둘러댄 변명이었다. 출국하는 김에 초콜릿 좀 사다 줄 수 있겠냐고.
전화 너머의 송재혁은 잠시 의아함을 보였지만, 선선히 그러겠다 답해주었다.
일본 출장에서 돌아온 후, 깜빡하고 사 오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선은 뒤늦게 깨닫기도 했다. 자신이 그런 부탁을 했었다는 걸.
샀으면서 왜 사지 않았다고 말했을까? 그리고 왜 강희찬에게 이게 있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강희찬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의 굳은 옆얼굴은 쉬이 답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선은 가만히 초콜릿 상자를 매만졌다.
“일본에는 잘 다녀오셨어요?”
“너무 빨리 물어봐 주는 거 아닙니까?”
괜한 소리를 한다는 한심한 눈길이 이선을 스쳤다. 머쓱해진 이선은 초콜릿 상자를 동아줄처럼 잡았다.
“그런 데 가면… 훈련하느라 바쁘시죠? 재혁이 말로는 되게 시골 같은 곳에서 훈련한다던데.”
“뭐가 묻고 싶어서 빙빙 돌아가요?”
“아니, 그냥…….”
결백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에겐 그다지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빨리 말해.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말하자, 이선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적셨다.
“그냥, 문자 답이 없으셔서……. 많이 바쁘신가 보다 했어요.”
그의 답이 올까 무서워서 핸드폰을 쳐다보지도 못하거나, 괜히 관심도 없는 게임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최근 연락 목록을 봤을 때, 여전히 아무런 답신 없이 뒤로 밀려나는 그의 이름을 보면서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고는 결국엔 깨달았다. 이렇게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라고. 길가에서 마주쳐도 아무런 인사 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되는 거라고.
그런 고뇌의 흔적들은 모두 생략해 버린 이선의 말을 듣자, 강희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문자요?”라고 물었다.
“…….”
역시 그리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 자질구레한 것을 마음에 담아두는 건 저 혼자였다. 고작 연락에 답장 좀 하지 않았다고 따져 묻는 좀스러운 사람이 된 것 같아 이선이 황급히 말을 돌리려던 차였다.
기억이 난 듯 “아.” 하는 침음과 함께 강희찬이 몸을 홱 돌렸다.
“정 선생은 무슨 문자를 그런 식으로 보냅니까?”
“…네?”
“앞으로 나한테 문자 보낼 땐, 뭘 물어보기라도 하세요.”
“…….”
불만이 가득한 강희찬의 얼굴이 다시 정면을 향한다. 그는 허리를 숙여 핸들에 턱을 기댔다. 유니폼을 입지 않으면 어린 청년, 혹은 소년 같은 느낌을 주는 불퉁한 얼굴이 이선의 눈에 오롯이 담겼다.
평소라면 넋을 빼고 지켜보았을 광경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문자를 무시당한 건 자신인데. 구시렁거릴 건 분명 자신인데도, 이상하게 강희찬이 그러고 있었다.
“하여간 연애 안 해본 티를 다방면으로 내지.”
…혼잣말이라기엔 너무 크다.
이선은 삐딱해졌다. 주황빛 가로등에 비춘 얼굴의 옆선이 눈이 시리고 부서질 것 같아도, 지금 듣는 비난은 부당하다.
이선의 용기는 복어처럼 부풀어 올랐다.
“제 문자가 왜요? 남들처럼 핸드폰으로 보냈는데, 뭐 어때서요.”
이선 역시 운전석을 향했던 몸을 정면으로 돌렸다. 강희찬은 고개만 돌려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딴에는 삐뚤어진 모양이지만, 그냥 옆에서 보기엔 입술만 삐죽빼죽 내밀고 있었다. 나빠. 무시한 건 자기면서, 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마음의 소리가 아주 노골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강희찬은 피식 웃었다.
“정 선생은 그런 문자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 줍니까?”
“그야……!”
누그러진 강희찬의 목소리에 이선 역시 고개를 돌려주었다. 뭔가 자신 있게 대답을 해보려던 기세였지만, 본인 역시 딱히 답은 찾지 못했다.
‘잘 다녀오라고 하면… 알겠다고 대답해 주면 되지 않나?’
이선은 잠시 갸웃했다.
“하다못해 뭘 사달라고나 하든가.”
어쩐지 그게 더 미안한 일이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원래 강희찬은 짐작하기 힘든 속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답장 좀 보내지 않았다고 홀로 원망이나 하던 꼴이 된 이선은 그에게 퍽 미안해졌다. 아까부터 손에서 만지작거리던 초콜릿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선은 조심스레 그것을 강희찬을 향해 내밀었다.
“이거… 가지실래요?”
“먹고 싶어서 굳이 사달라고 부탁한 거 아니었어요? 왜 날 줘요?”
강희찬이 숙였던 허리를 바로 세우며 물었다. 미간도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의아하다는 얼굴에 이선은 조심히 입술을 떼었다.
“오늘 경기 잘하셨으니까요. 근데 상은 다른 분이 받으시더라고요. 강희찬 씨가 제일 오랫동안 뛰었던 것 같은데, 왜 마지막에는 빠지나 해서…….”
“MVP 대신 주는 거예요?”
강희찬은 상자를 받아 들었다. 됐다고 거절해도 어쩔 수 없었는데, 그는 순순히 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초콜릿 싫어하시는 거 아니면…….”
“1차전은 오늘보다 더 잘했어요. 정 선생은 안 와서 모르겠지만.”
또 저 얘기를 꺼내다니…….
이선은 생각보다 긴 그의 뒤끝을 새삼 깨달았다. 이래저래 무심한 얼굴을 해서는, 그는 생각보다 꽁해 있는 시간이 길었다.
인천으로 가서 직접 표를 사서 봤다는 건 그에게 있어서 면죄부는 아니었나 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이선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기사로 다 봤어요.”
상자가 사라진 탓에 손이 허했다. 이선은 의미 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적막한 공기를 스치는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그건 상 안 줍니까? 오늘보다 더 팔이 빠져라 던졌는데.”
“저, 지금 딱히 드릴 만한 게 없는데……. 혹시 가지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이런 걸 꽤 중히 여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강희찬은 저보다 몇 배는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도, 이선이 보답으로 사겠다던 밥을 꼭 얻어먹으려 했던 사람이었다.
뭔가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에게 선물 하나 정도는 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게라도 그의 인생에 무언가 흔적을 남기는 것도.
비록 1분도 되지 않아 통장을 빠져나간 돈은 뼈가 아프지만, 자신에겐 마지막 무기가 있었다. 신용카드 무이자 할부가.
“상은 주는 사람이 생각해야죠.”
그는 가만히 이선을 보았다. 이선 역시 죄책감과 얄팍한 자존심 사이에서 삐죽거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편의점 몇 개가 간간이 보이는 주택가는 해가 지면 금세 어두워졌다. 유일하게 의지할 곳이 되는 가로등의 불빛이 오늘따라 눈이 시릴 만큼 밝다. 불빛은 저를 바라보는 강희찬의 얼굴에 부딪히며 굴곡진 음영을 드러냈다.
빛과 어둠이 묘하게 뒤엉킨 남자의 얼굴을 보던 이선은 홀린 듯 손을 올렸다. 느릿하고 망설임이 가득한 손길이 닿은 곳은 그가 입고 있는 맨투맨의 소맷자락이었다.
“…….”
이런 사람은 과연 무엇을 원할까? 아니, 무언가를 원해본 적이 있기나 할까?
부족함 하나 없이 자랐을, 그래서 언제나 결핍과 갈망이 가득했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남자의 얼굴을 오롯이 보았다.
항상 모른다고 외면했다. 서툴고 빈천한 인간관계를 탓하며, 자신은 항상 고개를 돌리고 한발 물러서기만 했다.
하지만 본능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강희찬이 제게 보이는 호의. 닿기만 해도 손이 델 것만 같았던, 정염으로 녹아 있던 체온. 언제나 오롯이 저를 보던 시선.
그 모든 것을 진작 알아채고, 그를 기댈 언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고 알게 된 저는 몹시도 약아빠진 인간이었다.
…키스할 거다. 강희찬이 바란다고 여기지만, 스스로 역시 바라는 대로.
“…….”
눈꺼풀에 서서히 덮인다. 그의 얼굴, 길지만 유약해 보이지 않는 목, 옷 아래로도 근육이 느껴지는 상반신. 차례로 훑어 내려간 시야는 결국 암전이 되었다.
눈 틈으로 비집고 밀려오는 옅은 불빛을 차단하기 위해 이선은 더욱 꼭 눈을 감았다. 지독할 정도로 느껴본 적 있는 뜨거운 온기. 제 울음조차도 쉽게 삼켜버리던 덥고 강한 온기를 기다릴 무렵이었다.
잡아먹을 것 같은 키스 대신, 이선의 입술엔 옅은 한숨이 스쳤다.
“난 대체… 정 선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한숨 같은 목소리에 이선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분명 코앞까지 그의 얼굴이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더운 열기가, 숨결이, 점점 짙어지는 어둠으로 알 수 있었다. 입을 맞추려 했다고.
하지만 눈을 떠보니, 어느새 그의 얼굴은 멀어진 채였다. 분명히 느꼈던 더운 온기가 마치 꿈이라도 된 양.
“…….”
“안 합니다.”
“…네?”
이선이 바보같이 되물었다.
왜? 침묵은 그런 노골적인 물음을 대신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강희찬은 답을 주었다.
“입술 한 번 대주면, 정 선생 편하게 도망갈 거 같아서.”
그의 말엔 허탈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저는…….”
“고민해 봐요. 나한테 뭘 줄 수 있는지.”
손끝 하나 닿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온몸을 들쑤시는 키스를 받은 것처럼 힘이 빠졌다.
“내리죠.”
멍청히 있던 이선을 잠시 보던 그는 짧게 말한 후 차 문을 열었다. 뒷자리에 두었던 봉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이선이 뒤늦게 차에서 내렸다. 그는 봉투와 함께 차 열쇠를 이선에게 건넸다.
“가서 저녁 먹어요.”
“…이거, 다 제 거예요? 같이 먹는 거 아니었어요?”
“집에 남자 들이려고 수작질 부리는 겁니까?”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이선은 재빨리 부정했다. 이 시간에 하는 말이 그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방금에야 깨달았다.
절대 아니라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이선을 강희찬이 무심히 보았다. 아무래도 장난인 모양이다.
“들어가요.”
그가 턱짓으로 이선의 뒤편을 가리켰다. 그 말에도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선은 미적거렸다.
“호텔에는 어떻게 가시게요?”
“택시 타죠, 뭐.”
이선은 초콜릿 상자가 덜렁 들려 있는 그의 손을 보았다. 눈을 조금 내려 그의 트레이닝복 바지를 살폈다. 오른쪽에 핸드폰 하나가 들어간 만큼 부피감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지갑은 없는 것 같은데…….
“택시비 제가 드릴게요.”
이선의 말에 강희찬의 입가가 삐뚜름히 올라갔다.
“새한 오너가 김가(家)인 줄 알았는데, 정 씨였나 보네요.”
“네? 무슨 말이에요?”
이해하지 못한 이선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와 비례하여, 강희찬의 입꼬리 역시 올라갔다. 그것도 한쪽만.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소리는 아니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정 선생, 재벌 4세쯤 되나 싶어서 물어본 거예요.”
“…….”
“백만 원 넘는 티켓으로 야구 봐서 돈 감각이 없어졌어요?”
“백만 원은… 안 넘었어요.”
…사실 조금 넘었지만.
괜한 자존심을 지키려 이선은 티켓값을 조금 낮추어 불렀다.
아까부터 꼬투리를 잡아대던 불만이 저도 모르게 터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저 얘기를 하려고. 그런 원망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강희찬은 이선을 보며 피식 웃었다.
“돈 있어요. 없어도 호텔 앞에 누구 하나 나오라고 하면 돼요. 들어가요.”
이번에야말로 정말 이별의 시간이다. 이선이 쓸모없는 잡담을 하며 시간을 끌 수 있는 것도 여기가 한계였다.
이선은 고개를 슬쩍 숙여 보이고 뒤를 돌았다. 온 정신을 쏟고 있는 뒤에서 그가 걸음을 돌리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 못내 신경 쓰였다.
커다란 봉투를 들고 걷는 자신의 뒷모습이 그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평소 저의 걸음걸이가 어땠는지, 뒷머리가 이상하게 눌려 있지는 않은지. 그런 것들이 몹시도 마음에 쓰였다.
멀어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느려지고 좁아졌다. 참지 못하고 돌아보았다. 여전히 강희찬은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저를 향한 노골적인 시선 역시 같았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았다.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고작 몇 미터 사이. 자꾸만 돌아보는 이선을 향해 강희찬은 짜증 섞인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어디까지 하나 보자’라는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결국, 이선은 굳게 결심하고 우다다 건물 안으로 뛰어올랐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탓에 계단을 단숨에 올랐다. 집에 도착하고, 이선은 그가 보일 만한 창을 조금 열어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여전히 강희찬이 있었다.
그때였다. 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뭐 해요? 만두나 먹어요.]
문자 내용을 확인한 이선은 흠칫 놀라며 몸을 숙였다. 나름 몰래 본 건데. 그가 서 있는 각도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건가?
창문 아래로 홱 몸을 숨겼던 이선은 얼마 뒤 미어캣처럼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걸음이 되게 빠르구나.’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은 이선은 바닥에 두었던 봉지에서 상자 하나를 집었다. 세어보니 딱 열 상자가 있었다.
“하아.”
이선은 동봉된 나무젓가락의 포장을 뜯으며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이 한 상자를 1인분으로 팔겠지.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만두가 여덟 개가 있었다. 그렇다면 총 80개의 만두가 지금 이선의 집에 생긴 셈이다.
막막해지는 마음을 누르며, 이선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목소리와 얼굴이 생생히 느껴지는 짧은 말을 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만두가 너무 많아요.]
[뭐가 많아요. 저녁 밥인데.]
[그래도 많은데…….]
[먹으려고 노력을 해봐요.]
뭔가 강압적이다. 훈련소 교관 같은 말투에 이선은 그가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답장을 잠시 미루었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다. 언제라도 다시 보내면 되는 일이었다. 새삼 간단한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이선은 만두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연락처를 찾았다. 송재혁. 이선은 메시지를 작성했다.
[초콜릿 샀으면서 왜 깜빡했다고 그랬어? 잘 먹을게.]
문자를 보내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송재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선은 입 안 가득 들어 있던 만두를 힘겹게 삼키며 전화를 받았다.
―뭔 소리야? 초콜릿이라니?
“강희찬 씨한테 받았는데……. 전해달라고 한 거 아니었어?”
―그럴 리가 있나. 미친 새끼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오만 원짜리 두 장 주면서 멋대로 집어갔는데?
“…….”
멋대로 남의 초콜릿을 뺏어가는 강희찬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선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평소의 대화법도 설명이 상당히 생략되었다. 아마 저 때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제 딴에는 돈을 주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남이 면세점에서 산 초콜릿을 가져가는 행동을 “내가 정 선생한테 전해주겠습니다”로 알아들어 주기를 바라다니. 의사소통에서 지나칠 정도로 경제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떠오르는 그의 모습이 난처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대체 뭐야? 넌 왜 그걸 강희찬한테 받아? 너 오늘 심지어 인천도 왔었다며? 맞아?
“으응…….”
혼란스러워하는 송재혁에게 이선이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강희찬도 강희찬이다. 송재혁이 친구를 주겠다면서 초콜릿을 사는 모습을 본다 치자. 그 친구가 자신일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인간관계가 몹시도 협소한 자신과는 달리, 송재혁은 동창회에 얼굴도 비추고, 대학 동기들과도 아직도 연락하며 지냈다. 게다가 여자친구까지 있었으니, 그 초콜릿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었다면 참으로 끔찍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야. 너 혹시, 강희찬이랑…….
“…응?”
무언가 운을 떼었던 송재혁의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이선은 순간적으로 뜨끔했다.
이어질 말이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다. 제 발 저린 이선이 숨소리도 죽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니다. 쉬어.
추궁을 종결시키는 송재혁의 말에 이선은 안도했다. 다행히 이상함을 눈치채진 못하고 있었다.
이선은 상자에 남은 마지막 만두를 입 안에 넣었다. 이제 빈 상자를 찍어서 그에게 보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