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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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 있을 때만 하더라도, 돌아오는 날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니, 지방으로 갔던 며칠보다 더욱 시간이 더뎠다. 그건 월요일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시계가 있었다면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렸을 적막이 공간을 내리눌렀다.

한낮의 햇살이 남향 창을 통해 쏟아지고 있음에도, 거실은 적당히 시원하다. 하지만 한 면을 차지한 소파에 앉은 강희찬의 얼굴은 전혀 쾌적하지 못했다.

‘시간 더럽게도 안 가네.’

강희찬은 고개를 젖혀 소파 등받이에 목을 기댔다. 어느 공간에 있어도 튀지 않을 상아색 천장 벽지가 멍한 눈에 들어찬다.

강희찬은 멍하니 더듬던 천장 벽지의 무늬에서 눈을 떼었다. 푸우, 하는 입바람 소리를 부러 내며 젖혔던 고개를 바로 했다. 그제야 정서불안처럼 떨어대던 다리를 인지했다.

아침에 피트니스 센터에 갈 때 대충 주워 입었던 트레이닝복 바지 대신, 검은 바지가 그 자리를 채웠다. 헬스장을 나서기 전 대충 땀을 씻어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제대로 샤워를 마친 후 챙겨입은 옷이었다.

강희찬은 제 무릎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무릎이 우스꽝스럽게 늘어나거나 하지는 않아 보인다. 강희찬은 뾰족한 눈길을 그대로 들어 집 안을 훑었다.

룸메이트가 없는 호텔 방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공간이었다. 물론 그보다야 넓고 방도 많았지만, 1년의 절반 정도를 지내는 공간이다. 딱히 ‘내 집’이라는 감흥은 전혀 없다. 실제로 계약한 것도 강희찬의 모친이었고.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던 공간은 일주일 전을 기점으로 변하고 말았다.

현관을 지날 때면, 품에 안긴 채 낑낑거리며 신발을 벗는 이가 있었다. 침실엔 여전히 누군가의 향기가 빠져나가지 못한 채 고여 있었고. 욕실에선 삶은 달걀 같은 엉덩이를 다 내놓고, 꼼지락거리며 샤워를 하는 사람을 그렸다. 물이라도 마셔보려 주방에 가면, 선생은 아일랜드 바에 앉아 제가 하는 양을 멀거니 지켜본다.

서울에 도착한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강희찬은 집 이곳저곳에서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의 흔적을 찾아댔다. 이제 이 집은 오롯한 자신만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기억 속의 이선은 체세포 분열을 하듯 개체를 늘려가며 강희찬의 눈에 아른거렸다.

…그나마 거실이 제일 안전하다.

거실엔 얌전히 제 옆에 누운 이선이 없다. 물을 마시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지도 않고, 샤워 부스 안에서 훌렁 벗고 있지도 않았다.

거실이 유일했다. 괜한 짓을 해서, 아랫도리를 뻣뻣하게 만드는 사람의 기억이 묻어 있지 않은 곳은.

그리하여 제집의 유일한 방공호에 틀어박혀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알림음도 울리지 않는, 시계일 뿐인 핸드폰을 구명줄 삼아.

“씨발.”

도저히 못 견디겠군.

욕설과 함께 한숨을 짓씹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차 키와 핸드폰, 지갑을 챙기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소리에 맞추어 주방에서, 안방에서, 하다못해 거실에 붙어 있는 화장실에서까지 맹한 얼굴이 빠끔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이선은 그새 또 증식해 있었다.

‘어디를 가는 거야?’

‘나갈 거야?’

둥그렇게 뜬 눈과 호기심 어린 표정들이 강희찬에게 그리 묻는다.

“…….”

드디어 미쳐가고 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집을 잠식해 버린 선생의 환영을 뒤쫓는 것보다, 차라리 나가는 게 백배는 나을 거다. 아니, 분명했다. 어차피 정신을 못 차릴 거라면, 환영 따위보다 실물을 보고 미치는 게 나았다.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고 급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문밖으로 몸을 반쯤 뺀 순간, 문득 집 안을 살폈다.

온갖 곳에서 이선이 고개를 내밀었다. 특유의 궁금한 표정으로 갸웃대고 있다.

안방 문 옆에는 이불로 몸을 둘둘 감싼 이선이 있었다. 덩그렇게 큰 눈이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곱게 접혔다. 이불 밖으로 무언가가 삐죽 나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팔이었다. 야구방망이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것 같은 팔이 가만히 흔들린다. 하얀 얼굴만큼이나 하얀 손바닥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다녀오세요.’

“…….”

마치 그리 말하는 것 같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강희찬은 쾅 하고 문을 닫았다.

* * *

유독 그런 날들이 있었다. 어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안절부절못하는 그런 날이.

이선은 교사용 책상 위에 널린 매직과 네임펜, 색연필을 한 세트씩 바구니에 넣는 일에 온 신경을 쏟았다. 하지만 단순 노동은 사람의 집중력을 오래 붙잡아두지 못했다.

“…….”

유독 오늘이 심하긴 했지만, 꼭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전히 책상 한구석에서 존재감을 뿜어대는 핸드폰의 커다란 화면은 일주일 내내 이선을 괴롭혔다.

수업 시간에, 무음으로 두었던 핸드폰 화면이 밝아지기만 해도 이선은 화드득 놀라기 일쑤였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은 슬그머니 핸드폰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8할은 광고문자였고, 나머지는 지방으로 출장을 간 송재혁이 보낸 음식 사진들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리만치 실망은 컸다. 그러면 얼굴에 티가 많이 났는지도 모른다. 그런 저를 가만히 보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칠 때도 더러 있었다.

저번 월요일 이후로, 아이들은 이선에게 ‘선생님, 아파요?’라고 물을 때가 많았다. 김경원에게 ‘누구한테 맞고 왔느냐’라는 질문을 들은 날이었다.

아니라고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급하게 억지로 만든 웃음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걸까. 그런 날엔 이파리처럼 작은 손들은 이선에게 사탕이며, 초콜릿 같은 주전부리를 몰래 건넸다.

걱정을 해주는 게 퍽 귀여운 한편, 미안하기도 했다. 그 덕에 제대로 혼내지도 못하고, 고맙게 받으면서 ‘학교에 먹을 걸 들고 오면 안 돼’라고 말미를 붙이는 게 전부였다.

[그래요.]

어느새 버릇처럼 움직인 손은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강희찬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를 얼마나 들여다봤을까. 이게 핸드폰이 아니라 종이였다면 뚫렸을 게 분명했다.

보낸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간결한 문자를 볼 때마다, 이선은 알 수 없는 심술에 휩싸였다.

왜 연락이 없는 걸까. 약속한 걸 까먹은 게 분명하다. 파전, 파전. 그렇게 노래를 했지만, 어쨌든 그의 인생에서 자신과의 약속은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아니겠지.

부러 심술 맞게 생각하면서도, 이선은 며칠 전엔 그와 가기로 한 파전집에 전화를 걸어 월요일에 영업하는지 묻기도 했다.

‘그럼, 장사하죠, 왜 안 하겠어요.’

웃음기 어린 주인의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월요일에 그 가게 문 연대요.]

‘그래요’라는 심드렁한 문자 아래로, 이선은 메시지를 쳤다. 부지런히 움직이던 엄지는 이내 문장을 완성한 순간 얼음이 되었다. 당연히 전송할 순 없었다.

‘그래서… 뭐?’

폐업하지 않은 집이니, 장사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 당연한 소리를 보내면, 대체 무슨 말을 답장으로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겪어본 그의 성격상, ‘어쩌라고’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무시할 가능성이 컸다.

이선은 뒤늦게 깨달았다. 파전집이 그날 영업을 하지 않아야, 핑계를 대며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꽤 내키는 대로 장사를 쉬는 것 같은데, 하필이면 왜…….’

성실한 자영업자를 향한 불만이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요 며칠, 핸드폰을 쥘 때마다 이선은 냉할 정도로 간결한 문자를 보고 한숨을 내쉬길 반복했다.

몇 번의 한숨이 겹치며, 시간은 빠르고 느리게 흘렀다. 종종 멀미가 일 것처럼 월요일이 가까워 버거울 때도 있었고, 달력을 보고 아직도 지나지 않은 주말에 막막하기도 했다.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의 끝은 언제나 ‘당일이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였다. 하지만 막상 그 월요일이 되어도, 어떻게든 되는 건 아니었다.

…차라리 수업하고 있을 때가 나았다.

이선은 매직 한 세트를 더 넣어버린 바구니에서 그것을 꺼냈다. 생각이 딴 곳에 있으니, 자꾸 실수했다.

‘그래요.’

언제나 일정한 톤을 유지하는 이의 목소리가 이선의 귀를 울린다. 그 순간이었다.

드드득―

“아!”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의 진동에 이선이 화들짝 놀랐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화면을 확인했다. ‘그래요’ 짧은 메시지 아래로, 같은 색의 말풍선에 둘러싸인 흰 글씨가 이선의 눈에 들어찼다.

[저번에 정 선생 주차했던 공영주차장에 차 있어요. 끝나면 거기로 나오세요.] 오후 16:33

‘그래요’보다는 훨씬 긴 문장이, 마찬가지로 강희찬의 목소리로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제 차 안에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문자를 보냈을 그의 모습이 금세 눈앞에 차오른다.

이선은 의자를 넘어뜨릴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악!”

급하게 움직인 탓에, 책상 아래 서랍에 무릎이 부딪혔다. 내일이면 멍이 들지도 모른다. 이선은 본능적으로 어정쩡히 허리를 굽혀 무릎을 감싸 쥐었다. 여유롭게 아파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4시 30분. 보통은 5시 정도에 퇴근하지만, 30분 먼저 나간다고 해도 상관은 없을 테다.

“해, 핸드폰…….”

지갑은 교무실 책상에 있고. 이선은 책상을 죽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숨이 점점 가빠진다. 고작해야 자리에서 일어난 것뿐인데, 마치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지나치게 심장이 쿵쿵거렸다.

학교 밖 공영주차장까지 뛰어야 하는 건 지금부터인데도.

* * *

[저지금나다고잇어요]

“…….”

띄어쓰기 하나 없는 한 줄짜리 문장을 3초 정도 본 후에야, 강희찬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았다.

저 지금 나가고 있어요. 아마 하고 싶은 말은 그거겠지.

급하게 문자를 치고, 교무실에서 허둥거리며 짐을 챙기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두 시간을 차 안에서, 재미없이 알록달록할 뿐인 초등학교 건물을 보며 일던 짜증도 그 순간 사그라들었다.

[방금 왔으니까 천천히 나오]

거기까지 치던 메시지가 중간에 멈추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대신, 신경질적인 엄지는 문자 내용을 지우는 것을 택했다.

두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는 아니다.

어차피 막연히 선생을 기다린 것도 아니었다. 저번처럼 운동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진 않았지만, 내려서 학교 주변을 돌아다녔다.

어릴 적 향수에 젖은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학교 본관의 2층 창문을 보며, 익숙한 머리통이 지나가지 않을까 살핀 게 끝이다. 뭐, 본 거라고는 뛰어다니는 애새끼들의 머리 꼭대기가 전부였지만.

어차피 자신이 선택한 기다림이었다. 이선을 책망할 수도,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다만, 답장을 포기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도 허둥대며 문자 한 줄 제대로 못 보내는 이선이 또다시 제게 답장을 보낼까 봐. 앞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걷다가 어디 부딪힐까 봐. 그것이 오롯한 이유였다.

요 일주일을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할 게 뭐란 말인가. 게다가…….

“…….”

멀리서부터, 다급하게 지면을 박차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봐도, 웃기기만 한 문자에서 떼지 못하던 눈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붉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태양빛을 등진 옅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색이 옅은 머리카락 아래로, 더욱 색이 옅은 얼굴이 입을 벌린 채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다.

저를 향해 달려온다. 팔을 벌리면, 힘껏 달려온 마른 몸이 제 품에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상상과는 달리, 이선은 자신의 차를 보더니 뛰던 걸음을 멈칫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느려진 발걸음으로 거북이처럼 다가왔다. 반팔 소매를 입은 팔을 들어, 여전히 밤껍질을 얹은 양 잘 정리된 머리를 의미 없이 슥슥 매만지기도 했다.

‘빨리 오라고.’

답답할 정도로 느린 걸음을 목전에 두는 건, 두 시간의 기다림보다도 힘들었다. 하지만 참지 못할 것도 아니다. 무서워하는 이선을 어떻게든 달래가며, 그 몸에 손끝을 대던 즐거움과도 결을 같이했다.

강희찬은 문을 열고 운전석에서 나왔다. 여전히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따가운 햇볕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얼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선의 걸음엔 더욱 망설임이 짙어졌다.

쯧. 혀 차는 소리를 속으로 삼키며, 그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저도 모르게 들어 올리려는 양팔을 겨우 가라앉힌 후에야 그는 입술을 열었다.

“빨리 안 와요? 왜 사람을 봤는데, 더 늦게 와요? 뛰어요. 왜 걸어요?”

“아…….”

당장이라도 품에 안길 듯 뛰던 이선의 걸음이 어느새 경계하듯 멈춘다. 멈추기만 하면 다행일까. 슬슬 발을 끌며 뒷걸음도 치려고 했다.

쭈뼛거리는 얼굴을 보자, 그제야 내뱉은 말이 좋지 못했음을 한탄해도 이미 늦었다.

지금도 충분히 먼데 대체 여기서 더 거리를 벌려서 뭘 어쩌란 말인가.

강희찬의 미간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그 모습을 가감 없이 지켜보는 이선의 어깨 역시 동시에 움칫한다.

“가까이 좀 와봐요. 목소리도 안 들릴 것 같은데.”

“잘 들리는데…….”

이선은 중얼거리면서도 슬금슬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미적거리는 움직임에 인내심이 끊기기 직전인 강희찬은 팔을 잡아채고, 당기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꼭 5시 아니라도 퇴근할 수 있나 보네요? 저번엔 퇴근 5시라고 하더니. 정 선생 진짜 벌구예요?”

“저번에도 물어봤는데…… 벌구가 뭐예요?”

“입만 벌리면 구라라고요.”

“아니……! 오늘은, 좀 빨리 나온 거예요.”

거짓말쟁이로 오해를 받은 이선이 재빨리 정정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개의치 않고, 제 손목에 찬 시계를 흘긋 봤다.

“좀 이른 것 같은데, 시간이. 어차피 거기 술 파는 데 아니에요? 술집이 지금 장사를 하나?”

“아…….”

“뭐 간단하게 좀 먹죠. 어차피 저녁도 안 먹었을 거 아니에요.”

파전을 먹을 건데, 그 전에 또 뭔가를 먹자고?

고개를 갸웃하며 강희찬의 말을 이해해 보려던 이선을 남기고 그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곧은 걸음은 망설임 없이 운전석을 향해 뻗었다.

“일단 타요. 가면서 정 선생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정해봐요.”

이번에도 이선에게는 언제나 어려운 퀘스트가 함께였다.

차마 다른 걸 먹자는 말은 예상치 못했다. 요 일주일 사이, 파전집 메뉴만을 연구한 이선은 퍽 당황하고야 말았다. 강희찬의 눈빛에 이끌려 조수석에 오른 후에도, 이선은 속으로 ‘어쩌지’라고 되뇌며 강희찬을 향해 무언의 간절한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런 쪽에선 늘 이선에게 부담만 주는 그는 이번에도 간단히 무시하며, 구체적으로 제 지시사항을 피력한다.

“나야 상관없는데, 너무 배부른 거 먹으면 정 선생이 싫을 것 같으니까. 이런 건 원래 입맛 까다로운 사람이 정해야 돼요.”

“저, 입맛 까다롭지 않아요.”

“그럼 그 안 까다로운 입맛으로 정하세요.”

눈길도 주지 않은 강희찬은 무심히 시동을 걸었다. 유려히 흐르는 동작에는 파고들 틈이 없다. 이선의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저는, 그냥 바로 파전 먹어도 괜찮은데요.”

“거기 술 파는 데 아닙니까? 지금 가면 싫어할걸요. 준비도 다 못 했을 텐데 쳐들어가는 손님을 어느 사장이 좋아합니까.”

시동이 걸린 그의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차를 탔다는 사실조차도 잊을 만큼 안정적인 움직임 속에서 불안한 건 이선의 눈동자뿐이었다.

이선은 이제 아예 몸을 운전석을 향해 비틀어 앉았다.

‘제발 도와주세요. 우리 같이 정해요.’

할 수만 있다면, 강희찬의 팔을 붙잡아 흔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간절한 기도는 여전히 철옹성인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서행하는 차 안에서 이선은 문득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강희찬 씨는 뭘 좋아하세요? 지금 먹고 싶으신 거나, 그런 거.”

“저번에 얘기했잖아요. 음식 가리는 거 없다고. 회만 아니면 상관없는데, 그것도 정 선생 먹고 싶으면 먹어요. 난 가서 적당히 다른 메뉴 찾아도 되니까.”

“…회는 간단한 게 아니잖아요.”

협조할 기미는 영 보이지 않는다. 이선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패잔병처럼 몸을 정면으로 돌렸다. 예상치 못한 과제까지 떠안은 이선은 기분이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저녁을 두 번 먹으려는 그의 식습관에 궁금증이 도졌다.

“근데… 파전 먹을 건데 굳이 밥을 먹어요?”

“파전이 밥이에요?”

“…….”

대답 없이, 서로의 질문으로만 이루어진 대화는 어색한 침묵으로 끝났다.

운전하던 강희찬은 흘끔 이선을 훔쳐보았다. 통통하게 부어오른 입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일주일 전, 제가 하도 빨아댄 여파로 부었던 것과 닮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물기가 어린 통통한 입술은 그에게 빨아보고 싶은 충동을 선사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를 유혹하려는 게 아닌, 저녁 메뉴를 고르라는 말에 토라졌음을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얼른 정해요. 음식점 좀 보이는데.”

앞 유리 너머로 드문드문 카페 따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보는 척 자꾸 조수석을 곁눈으로 보았다. 입맛이 까다롭다는 말 때문인지, 아니면 저녁 메뉴를 고르라는 말 때문인지. 이선의 입술이 들어갈 줄을 모른다.

애새끼처럼 토라진 모습이 웃겨서 일부러 방치하는 건 아니다.

자신은 뭐든 대체로 가리지 않고 먹었다. 그렇다면 웬만하면 선생이 좋아하는 걸 먹게 해주고 싶었다. 저야 입에 뭘 집어넣든 비슷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강희찬의 의도를 읽을 여유 따윈 없는 이선은 수심의 기색이 깊어갔다.

“이 동네에 먹을 만한 게, 좀 내려가면 칼국수 있고…….”

간단한 거.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거.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시끄럽다.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걸 애써 누르며, 바뀐 신호에 맞추어 차를 멈추었다.

“아!”

동시에 고민하던 이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반색이 만연한 얼굴이 휙 강희찬을 향해 돌았다. 드물게도 이선의 기세에 밀린 강희찬은 무언으로 그의 말을 재촉했다.

“큰길에 병원 건물 옆에 죽집 있는데, 거기 가실래요?”

반짝이는 눈동자가 올곧게 강희찬을 향했다. 마음에 들 거라고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하지만 티 없이 웃는 이선의 얼굴에 비교해, 강희찬의 얼굴은 와락 구겨졌다.

“…죽이요? 지금 죽이라고 그랬어요?”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기세다. 신호가 바뀌며 차가 출발하지 않았으면 한 대 맞지 않았을까. 이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가 죽은 이선이 “아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기름진 음식을 먹기 전, 가볍게 먹을 만한 식사. 햄버거나 삼각김밥은 좀 그렇고. 혼자였다면 흔쾌히 먹었을 터였다. 하지만 다른 이와 특히 강희찬과 함께 먹긴 좀 그렇다.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부모를 죽인 원수의 이름이라도 들은 듯한 얼굴을 보니, 이선의 자신감은 풍선처럼 훅 꺼졌다. ‘죽이요?’라고 묻는 그의 입 모양이, ‘죽을래?’라고 들린다면 미친 소리겠지.

“아니, 안 좋아하시면…….”

“정 선생, 혹시 어디 아파요?”

이선의 앞으로 커다란 손이 드리웠다. 운전 때문에 정면을 보면서도 자신을 때리려는 걸까. 크기만으로도 위협적인 손아귀에 이선은 움칫했다.

예상과는 달리, 강희찬의 손바닥은 이선의 이마에 조심히 와 닿았다. 평열일 터인 자신의 체온보다도 뜨거운 손바닥의 온기가 퍼진다.

막상 열을 잰다고 쳐도, 재는 이의 손이 더 뜨거워서야 잴 수 있을 리가 없다. 본인도 헷갈리는지 강희찬은 한참을 이선의 이마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제대로 말해주지 않으면, 이 온기가 다 옮아질 때까지 손을 떼지 않을 심산인 듯하다. 이선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뇨, 저 괜찮아요.”

“근데 왜 갑자기 죽을 먹겠다고 그래요? 아픈 사람도 아니면서.”

천천히 그의 손이 이마에서 떨어진다. 그러고도 미련을 못 버렸는지, 강희찬의 검지와 중지가 이선의 뺨에 닿았다. 이번에도 강희찬의 체온이 더 높다.

“…아파야 죽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이선은 손가락에서 슬그머니 얼굴을 떼며 되물었다.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밀려드는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다. 이선은 자신이 그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한 꼴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고개를 갸웃했다.

“죽 먹는 거 좋아해요?”

운전이 대화를 방해하는 게 못내 짜증인지 강희찬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모른다. 그 역시, 이선의 질문엔 대답이 없었다. 서로를 향해 질문만을 내뱉는 우스운 대화는 잘도 이어진다.

결국, 지는 건 여전히 이선이었다. 이선은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먹기도 편하고, 소화도 잘되는 것 같아서 좋아해요.”

“…….”

“아침에 죽 먹으면 좋아요. 평일엔 출근 때문에 못 먹지만.”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대답하던 이선의 말은 끝으로 갈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무슨 죽 홍보대사도 아니고. 제가 생각해도 웃기긴 했는지, 더 이상의 죽 찬양은 이어지지 않는다.

크흠. 하고 멋쩍음을 숨기는 헛기침이 흐른 후, 이선은 민망한 표정을 감춘 해 강희찬을 올려다봤다.

“죽은 아플 때만 드세요?”

“난 아파도 죽은 안 먹어봤어요.”

“…….”

죽 따위. 냄비 통째로 먹어도 도무지 먹은 기분조차 안 들던데.

쓸모없는 사족은 삼켰다. 구태여 죽을 좋아한다는 사람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이선이 말했던 종합병원 건물을 찾았고, 그 옆에 빼꼼 보이는 죽집 간판을 목적지로 삼고 있다면 말이다.

“정 선생이 말한 가게, 저기 맞아요?”

“싫으시면 다른 거로 먹어요.”

다급한 시선이 강희찬의 옆얼굴에 붙었다. 강희찬은 고개를 슬쩍 틀고, 곁눈으로 이선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똥 마려운 개새끼같이 처량한 얼굴이 있었다.

대체 이딴 게 뭐가 중요하다고 눈치를 그렇게 본단 말인가. 조용히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안 싫어요. 싫다고 한 적 없어요. 내 앞에서 싫은 거 많은 건 정 선생이지.”

차는 조용히 속도를 줄였다. 적당한 주차공간이 보이지 않는 터라, 한 바퀴를 돌아 병원 뒤편의 골목에 차를 세웠다.

“내리죠.”

강희찬은 먼저 안전벨트를 풀었다. 조금 전까지 안절부절못하던 이선은 그의 묘한 말이 신경 쓰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별로요.”

무심한 말을 남긴 그는 끈질길 정도로 이선을 향해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강희찬을 따라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차체만큼 벌어졌던 거리는 그가 한 걸음을 옮기는 순간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조급한 발걸음으로 그의 뒷모습을 어느 정도 따라잡자, 이선의 입에선 슬며시 거친 숨이 흘렀다.

“아까 하신 말씀…….”

“여긴 종합병원이라면서 주차장은 손바닥만 하네.”

이선의 질문을 가로막듯이 그가 투덜거렸다. 묘하게 빠른 걸음을 옆에서 따라잡느라 벅찬 와중에도, 이선은 가만히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평소라면 한 번쯤은 봐줄 법도 한데. 여전히 강희찬의 시선은 정면을 향할 뿐이다. 그는 이선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슬쩍 틀고 있었다. 덕분에 눈에 들어오는 건 아직도 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따뜻한 햇살이 스치는 오른뺨이 전부였다.

‘기분이 상한 걸까?’

굳게 다문 그의 입술 끝이 ‘더는 말하기 싫다’라는 뜻으로 보여, 이선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

어차피 종합병원 주차장이 러시아만큼 넓었어도, 그건 병원 이용객들을 위한 공간이다.

구태의연한 말은 삼켰다. 대신, 이선은 안타까울 정도로 얼굴을 보이지 않는 이를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매끈하게 내려오는 얼굴선 아래로 시원하게 목이 뻗었다. 그와 밤을 보내던 순간, 숱할 정도로 매달리던 목덜미였고, 눈물을 비벼댄 뺨이기도 했다.

멍하니 보던 발끝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선은 장애물이 있나 확인하고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걸음이 부쩍 느려진 강희찬의 등이 있었다.

원체 걸음이 빠른 사람이다. 처음 그의 뒤를 따랐을 때 이미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선은 그와 함께 걸을 때, 따라가기 벅찬 적이 별로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종종걸음으로 강희찬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것도 잠시였다. 어느새, 그는 자신이 머리를 부딪칠 것 같은 만큼 거리를 좁히지 않았는가.

“죽 먹으러 자주 가요? 방학 때 학교에서 밥 시켜 먹는다면서요.”

병원 건물 모퉁이를 틀자 작은 간판이 보인다. 그것을 흘긋 봤던 강희찬이 흘리듯 물었다.

“아니요. 보통 시켜 먹을 땐 정식이나 중국집 시켜요.”

“그럴 것 같아요. 누가 끼니로 죽 먹는 거 좋아해요.”

“…지금이라도 칼국수로…….”

“뭐야. 죽인데 매운 것도 있어?”

죽에 대한 타박이 자신을 향하는 것으로 들린다. 인내심의 막을 슬며시 찢고 나오는 이선의 불만은 차마 완성되지 못했다.

여전히 남의 말에는 별 관심이 없는 남자는 가게 밖에 붙여진 메뉴 사진을 보며 혼자 신기해한다. 병원 옆 건물의 죽 가게에서 매운 메뉴를 파는 것을 보고,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본 것처럼 떨떠름한 인상으로 바뀐다.

그의 표정이야 영 마뜩잖아 보이지만, 이선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강희찬은 저것을 주문할 거라고. 그가 지금 시즌에는 가려 먹는다는 해물 대신 자연산 송이가 들어 있었다. 대체 왜 비싼 버섯에다 김치를 버무렸는지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옆에 ‘best’라는 마크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꽤 잘나가는 메뉴임은 분명했다.

…이런 모습은 스물셋의 정이선은, 아니 고작 일주일 전의 정이선도 상상하지 못했다.

평생을 남자와는 만날 생각이 없던 사람이다. 그리고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지대했다.

당연히 없었던 일이 되는 거라고. 첫날엔 숨만 쉬어도 느껴지던 둔통이 요 일주일 사이에 옅어진 것처럼, 이선에게 온기를 나누어 준 남자의 흔적은 점점 사라진다. 핸드폰에 저장했던 그의 번호가 어느 순간 바뀌었다는 걸 몇 년 뒤에 문득 깨달을 테고.

처음부터 물과 기름처럼 섞일 일이 없는 두 사람은 그렇게 다시 모르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서로의 인생에서 지워져 나가는 거다. 그럴 거라 생각했었다.

어느 날 동네를 돌아다니다 검은 차만 보더라도 흠칫거릴지도 모른다. 가끔 송재혁을 만나러 야구장에라도 가면, 어느새 자신은 모르는 여자가 그의 곁을 걷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그런 순간,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강희찬은 과연 자신을 향해 어떤 얼굴을 지어줄지.

요 일주일 사이,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이선을 덮쳐 왔다. 하지만 오랫동안 상념에 빠질 새는 없었다.

그의 집에서 도둑처럼 빠져나온 날부터, 강희찬은 이선에게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갑자기 학교로 들이닥친 그의 차를 끌어내야 했고, 일주일 내내 그가 만족할 만한 파전집 메뉴 조합을 맞춰봤다. 이선의 일주일은 오롯이 강희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래 이런 걸까?’

다들 모두, 섹스하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보며, 아무래도 좋은 메뉴 따위의 시답잖은 말을 하는 걸까. 그때 일은 서로 없었던 거로 하자는 말이 아니라.

혼란스러웠다. 보통 이런 거냐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거냐고 강희찬에게 묻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역시 처음이었을 테니.

“들어가죠.”

매장에서 먹는 사람보다는 포장 주문이 많은 곳이다. 한산한 가게 내부를 잠시 보던 강희찬은 오른팔을 뻗어 출입문 버튼을 눌렀다. 열리는 문 사이로 한 발을 먼저 넣은 그가 몸을 틀어 이선을 살폈다.

한 단 아래에서, 이선은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게이가 아닌 남자와도 잘 수 있었다. 이건 상정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아니었어도 되었을까?’

이선은 등받이가 편한 안쪽 자리를 비우고 맞은편에 먼저 앉은 강희찬의 모습을 보았다. 양면 가득한 죽 사진을 보고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

몸을 섞은 게 이 사람이 아니라, 신규진이었다면…….

단 한 번도 해볼 수 없었던 허무맹랑한 상상이다. 이제껏 남자와의 경험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남자와 입을 맞대고 몸을 섞었다. 까무룩 정신을 놓기 전의 강희찬의 얼굴에 다른 얼굴을 대어보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다.

온기도, 목소리도, 손길도. 강희찬은 언제나 강희찬이었다.

“빨리 앉아서 골라요.”

무심하게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시큰둥하게나마 저를 봐주는 사람의 얼굴은, 상상 속에서도 여전했다.

* * *

“해가 늦게 지는 것 같은데, 그래도 금방 어두워지네요.”

느슨한 속도로 달리는 차 앞 유리를 멍하니 보던 이선이 중얼거렸다. 라디오도 노래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던 내부의 정적을 깬 유일한 소음이었다.

“죽집에서 오래 있기는 했어요.”

그렇다고 정적이 불편하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이상하게도 타인과 있을 때의 어색한 침묵에 죄책감을 느끼곤 하는 정이선이지만, 오늘 그의 앞에선 그렇지 않았다.

한참을 타박한 것치고는 순식간에 그릇을 비워낸 그가 자신의 먹는 모습을 지켜봐도, 예전만큼 불편하진 않았다. 빤히 바라보는 눈길이 신경 쓰여 크게 입을 벌리지 못했을 뿐, 이선 역시 열심히 그릇을 비웠으니까.

종종 그의 주의를 돌리고자 뱉어낸 말에도 강희찬은 착실히 대답을 해주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주에 강희찬 씨 경기하는 거 봤어요. TV로.’

‘저번 주엔 경기 두 번 나갔는데요. 언제 거였어요?’

‘재방송이라 그건 모르겠고. 검은 옷 입고 계셨는데.’

‘내내 원정이라, 검은 옷은 둘 다 입고 있었을 텐데요’

‘아…….’

TV에 아는 얼굴이 나와서 괜히 반가운 마음을 강희찬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저쪽이야 당연히 보는 것보다는 찍히는 게 익숙하니.

시무룩해지면서 점차 느려지는 이선의 숟가락질을 보고, 강희찬은 되는대로 움직이던 입을 멈추었다.

‘아니. 화요일 경기 봤나 보네요. 일요일 경기야 재방송으로 봐도 오늘 봤을 테니까.’

‘아, 그런 것 같아요. 한 수요일쯤에 봤을 거예요. 카레 나온 날!’

‘…카레 좋아해요?’

오른손으로 턱을 받친 그가 물었다. 이선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레는 맛있으니까. 항상 같이 나오는 밍밍한 맛의 포도 음료수도 다른 선생님들은 별로라고 하지만, 이선은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우리 학교 카레 맛있어요.’

‘학교 카레가 어떻게 맛이 있어요? 하긴. 정 선생 입맛 좀 이상하죠? 죽이나 먹고.’

탐탁지 않아 하는 뾰족한 눈이 반 정도 남은 이선의 죽그릇을 노려보았다. 마치 자식이 해코지를 당할까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이선은 제 죽그릇을 스윽 앞으로 당겼다.

‘강희찬 씨, 죽 별로라고 하셨으면서 10분 만에…….’

죽이 채 식기도 전에 다 드시더군요.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는 관운장처럼. 그런 말은 내뱉어지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마주친 눈에 기백이 밀린 탓이었다.

‘뭐요.’

‘…….’

‘얼른 먹어요. 반찬도 좀 먹고.’

테이블 위 받침대에서 쉬고 있던 이선의 젓가락이 강희찬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는 장조림을 집더니, 이선의 숟가락 위에 멋대로 얹어버렸다.

광고의 한 장면처럼 예쁘게 올라간 장조림. 멍하니 보던 이선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중요한 결전을 앞둔 장수와 같은 비장함이 강희찬을 향했다.

‘이거, 제가 살 거예요. 계산하지 마세요.’

‘마음대로 해요.’

평소와 같은 시큰둥한 어조가 답했다. 무심히 내뱉어지는 말과 다르게, 그는 이선의 젓가락을 놓지 않았다.

식사를 먼저 마친 남자가 일행인 남자의 수저에 반찬을 올리는 게 신기한 건지, 그가 강희찬인 걸 알아본 건지. 젊은 여자인 아르바이트생은 핸드폰을 보는 짬짬이 유일한 손님인 이선의 테이블 쪽을 살폈다.

등을 돌리고 앉은 강희찬과는 달리 자신은 종종 그녀와 눈을 마주치곤 했다. 퍽 민망하여 그에게서 강제로라도 젓가락을 뺏어올까 생각했지만 그만뒀다.

앞으로 이 가게에는 자주 오진 못할 거다. 그래도 퍽 아쉽진 않았다. 그건 아마도, 이선이 그릇을 전부 비울 때까지 젓가락을 놓지 않았던 사람 덕분일 것이다.

그는 지금 이선의 옆자리에 앉아 늘 짓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가게에 너무 오래 있어서 싫어했겠네요. 넓지도 않았는데.”

이선의 말을 들은 남자의 입에선 가벼운 숨결이 스쳤다. 순간, 비웃음으로도,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를 향한 웃음으로도 들렸다.

“아르바이트생 같던데, 그럼 오히려 좋아했을걸요? 새로 손님 들어오면 테이블 차려야 되니까. 앉아서 핸드폰 하고 있었잖아요.”

“아. 그래요?”

다시 보니, 처음으로 상경한 시골 쥐를 비웃는 웃음이 확실했다.

촌스러운 시골 쥐의 입술이 비죽 나왔다. 그 무렵, 강희찬의 차가 골목에 접어들며 점점 속도를 줄였다. 그런데도 목적지인 주점과 어울리는 어둠은 너무도 빨리 주변을 스쳐 간다.

드디어 약속을 지킬 수 있다. 후련할 줄만 알았는데, 마음 한구석은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오늘이 지나면, 이런 식으로 그와 함께 식사할 일도, 이유도 없어지겠지. 뜬금없이 학교에 나타나 밥을 사라면서 닦달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그의 차를 보기만 해도, 다른 선생님들의 눈에 보일까 얼른 밖으로 보내기 바빴는데. 생각해 보면, 내심 반가웠던 기억도 있었다. 찾아왔던 그에게 반갑다는 인사 한 번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정 선생은 아르바이트 같은 거 안 해봤어요? 대학생들 많이 한다던데.”

차를 세운 강희찬은 먼저 내렸다. 그는 한 박자 늦게 차 문을 여는 이선을 기다렸다.

“아, 전 과외 같은 것만 해봤어요. 과사무실로 그런 자리 좀 들어오는 편이거든요.”

이선의 보폭으로 대략 다섯 발자국 정도. 강희찬은 이선이 보닛을 돌아 가까워지는 순간을 오롯이 기다렸다. 어깨선이 맞은 순간, 강희찬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요?”

일단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요샌 다들 대학에 들어간다지. 이선 역시 평범하게 말하고 있었다. 대화 상대가 대학은 문턱도 밟아본 적 없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강희찬 역시, 자신처럼 고등학교까지 마치는 경우가 오히려 특이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구태여 제 학력을 공개하며 기껏 괜찮아진 분위기를 초 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대체 왜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좋아하는 걸 먹였다. 언제나 제 앞에선 어딘지 모르게 버겁게 먹던 이선이었다. 무얼 먹여도 꾸역꾸역 억지로 먹더니. 좋아하는 걸 먹여줬더니, 저렇게 티가 난다. 왠지 반들거려 보이는 흰 얼굴을 곁눈으로 훔쳐봤다.

선생이 어디 아픈 게 아니면 됐다. 좋아하진 않지만, 어쨌든 죽 좀 먹는다고 어디 손가락이 부러지는 것도 아니다. 맞춰주지 못할 건 없다.

그런 마음으로 들어갔던 추천 가게는 정말이지 이선과 딱 어울렸다. 작아도 깔끔했고, 음식은 놀라울 정도로 담백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죽 한 그릇을 다 비워도 도무지 먹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까지. 빨아도 빨아도, 주린 기분만 느끼게 하던 입술과 꼭 닮았다.

이선은 대화 내용과는 동떨어진 강희찬의 추잡한 생각을 절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가게 일은 하지 말라고 하시거든요. 가게 좁다고.”

말을 하는 중간에도 종종 저를 올려다보는 오롯한 시선을 느꼈다. 강희찬은 별다른 말 없이 이선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잘 듣고 있음을 알렸다.

역시 좋아하는 걸 먹인 게 다행이다.

이선은 묘하게 기분이 들떠 있었다. 앞으로 무언가를 먹여야 한다면, 죽을 선택할 일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기름 냄새가 비어져 나오는 가게 문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었다. 도저히 만지고 싶지 않을 만큼 연식이 오래된 나무문의 손잡이가 눈에 들어왔다.

강희찬은 그곳에 망설임 없이 손을 뻗으며 문을 열었다. 몸을 조금 비켜서니, 이선이 먼저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생겼다.

“어차피 정 선생, 할 줄 아는 것도 없잖아요. 장사에 방해나 되지.”

“무슨. 저도 설거지 정도는 할 줄 알아요.”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끝이 조금 올라갔던 입술이 금세 통통하게 부풀었다. 입술과 함께 통통하게 부푼 볼이 금세 색이 약한 뒷머리로 바뀐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뭘 잘하냐고 추궁당하면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걸 실토해야 함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샐쭉하게 얼굴을 피한 이선이 들어갈 수 있도록 허름한 나무문을 당겨 열었다. 기름 냄새가 코끝에 훅 끼쳤다. 평소라면 느글거리는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을 테지만, 안 먹느니만도 못한 죽 한 그릇을 담은 게 전부인 위장은 음식을 요구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입구 옆 카운터에 앉아 노트북을 하던 투실한 남자가 슬금슬금 일어났다.

“두 명이요.”

“편한 데 앉으세요.”

강희찬은 이선의 너머로 어두침침한 가게의 전경을 훑어봤다. 그래도 죽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온 보람은 있는 모양이었다. 두세 테이블 정도 손님이 있었다.

음침하고 어두운 가게의 내부는 내일 망해도 이상하지 않다. 강희찬은 혀를 차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았다. 음식 맛이 정말 엄청나지 않은 이상, 선생에겐 다른 파전 가게를 알아봐서 추천을 해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올랐던 식욕이 반쯤은 떨어진다. 떨떠름한 얼굴을 하며 벽에 붙어 있는, 색이 바랜 메뉴판을 보던 강희찬의 걸음이 멈추었다. 앞에 있던 무언가에 부딪힌 탓이었다.

“아.”

‘무언가’라고 할 것도 없다. 열 명도 없는 이 가게에서, 제 앞에 서 있는 건 이선이 전부였다.

가볍게 부딪힌 것뿐인데 너무 크게 휘청거린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이선의 팔을 붙잡았다. 종잇장처럼 땅바닥에 처박힐 것 같은 몸이 너무도 쉽게 제 쪽으로 당겨졌다. 선생은 분명 일반인이라는 걸 감안하고도 마른 편이었지만, 본인의 체중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갑자기 서면 어떡해요. 아팠어요?”

다른 새끼들이었다면, ‘오버하지 말라’고 한소리를 했을 만큼 너무 심하게 휘청였다. 순간적으로 차오른 미안한 마음은 이선을 향한 타박이 되었다. 제 말을 들은 이선이 또다시 의기소침하지 않을까. 강희찬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하지만 책망에도 불구하고, 이선은 여전히 뒷모습만을 보여주었다. 강희찬은 잠시 이선의 뒷머리를 살폈다. 세게 부딪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많이 아팠나. 새삼 자신의 몸무게를 되새겼다.

“…정 선생?”

“…….”

강희찬은 이선의 얼굴이 보이도록 고개를 기울였다.

어스름한 주변의 어둠에 먹혀버릴 것 같다. 전체적으로 색소를 덜 받고 태어난 듯한 이는 언제나 그런 인상을 줬다. 해가 좋은 날 밖에 서 있으면 금세 흐려지며 아지랑이처럼 사라질 것 같았고, 까만 어둠 아래에서는 금방이라도 먹혀버릴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이선의 눈동자는 멍하니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강희찬은 본능적으로 그곳을 찾았다.

푸른 배경을 두고, 소주잔을 든 여자의 포스터.

‘저걸 보는 건가?’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아래. 에어컨 바람이 제법 잘 들만한 테이블에 앉은 남녀가 정답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웨이브 진 뒷머리만 보여주는 여자 너머의 남자. 그 얼굴이겠지만.

강희찬의 눈에도 익었다. 눈에 익기만 할까. 확신할 수 있었다. 늙어서 치매가 오는 한이 있어도, 저 연놈들의 얼굴은 절대 잊지 못할 거라고.

“…….”

눈이 마주쳤을 게 분명한 이선을 한 번, 그러고서 옆에 있는 자신을 보고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눈이 나빠질 것 같은 조명 아래에서도 기묘할 정도로 투아웃의 시선은 확실히 느껴졌다.

저 멍청한 얼굴이 자신을 뭐라고 기억할까. 야구선수 강희찬? 그것도 아니라면, 남의 차에 대고 소유권을 주장하던 미친놈? 그것도 아니라면, 선생이 새로 만나는 애인으로 오해할까?

‘세 번째였다면 좋겠는데.’

뭐가 되었든 맞춰줄 수 있었다. 대체 그 세 가지 중 어떤 것이 저 연놈들의, 특히 투아웃의 기분을 잡치게 할 수 있는지 계산이 서지 않을 뿐이다.

“쯧.”

낮게 혀를 찬 강희찬의 고개가 다시 한번 이선의 얼굴을 향했다.

이번엔 멍한 눈동자를 볼 순 없었다. 동그란 뒷머리가 푹 숙어진 채 흰 목덜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술집 조명 특유의 붉은 빛이 끼얹어지자, 기묘할 정도로 살갗은 더욱 희게 느껴졌다. 마치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이미 팔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더 힘을 주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팔이, 마치 모래처럼 변할 것만 같다. 세게 쥐면 쥘수록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였다.

바스러질 듯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이대로 자신이 손을 놓친 순간,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지금도 겨우 서 있는데 목덜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무언가가 차올랐다.

…일단 가자. 가면 무슨 소리든 지껄이겠지.

생각 없이 지껄이는 건 자신의 특기였고, 게다가 그 생각 없는 소리의 8할은 남을 불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정 안 되면, 상이라도 엎어서 이 화를 풀어야 할 것만 같다.

아주 잠깐 술 마시고, 사고 치고 돌아다니지 말라던 에이전트의 말이 떠올랐다. 아주 잠깐. 하지만 지금은 음주 상태가 아니었다. 술 안 먹고 치는 사고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없는 끈적함이 손에 묻어날 것 같은 나무 테이블 따위. 좀 엎으면 물어주면 그만이다. 일이 좀 커지면 에이전트에 전화하면 그만이고. 만에 하나 사고를 치면 재깍재깍 전화하라고 했으니, 어쨌든 그 정도 선은 수습해 줄 것이다.

그러나 평소라면 어느 정도 했을 영특한 생각은 뒤로 밀려난 채였다. 발걸음은 이미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려고 하고 있었다.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아직은 얄팍한 옷의 두께가 겹쳐져 더욱 가늘게 느껴지는 팔을 조심스레 놓고, 한 걸음을 옮긴 순간이었다. 선득할 정도로 찬 온기가 강희찬의 손바닥을 파고든 것은.

“강희찬 씨…….”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차가운 감각이었다.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돌아본 그곳엔, 힘겹게 고개를 든 이선의 얼굴이 있었다. 누가 봐도 힘들게 입꼬리를 겨우 올리며. 먹먹한 두 눈에 간절함과 함께 강희찬을 담은 채로.

“…….”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다. 이선의 앞에서는 제대로 내본 적 없던 것 같긴 하지만, 화가 난 적도 분명히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제 손을 채 쥐지도 못하고, 그저 피부가 닿은 게 전부일 정도로 잡은 손길은 너무도 강했다. 강희찬의 모든 것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 만큼.

옅은 물기가 어린 눈동자 앞에선, 자신은 너무도 무력하다. 언제나 그랬듯이. 한 걸음 너머의 사람이 되고 있었다.

술집의 붉은 조명 아래서도 더욱 희게 보이는 얼굴. 위태로운 눈동자는 강희찬을 향하면서도, 묘하게 이곳엔 없었다.

“여기, 좀 바쁜 것 같은데… 다른 데 갈까요?”

색이 옅은 눈동자가 유독 반짝인다. 불안하게 흔들리다, 툭 치는 순간 물방울이 와르르 떨어질 것처럼.

“강희찬 씨. 해산물 못 드시잖아요.”

대체, 왜. 뭘 잘못한 게 있다고. 왜 이 사람이 죄인처럼 도망가야 한단 말인가.

밀려오는 짜증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일 신문에 나든 인터넷에 동영상이 퍼지든. 그딴 것에까지 미칠 신경은 없다. 그저 하다못해 저 꼴 보기 싫은 연놈을 쫓아내야 한다고. 선생이 죄인처럼 나갈 게 아니라, 저것들을 내보내야 한다고.

투아웃의 멱살이라도 잡아서, 가게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기묘할 정도로 몸은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데려가 주길.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을 잡고, 싫고 힘든 것들로부터 멀리멀리 도망쳐 주길 바라고 있다. 그런 눈이 강희찬을 옭아맸다.

“…그래요.”

목으로 쓴맛이 올라왔다.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키며 그것을 겨우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야 입술을 뗄 수 있었다.

야구장을 빠져나올 때처럼 단단히, 그러면서도 차마 아플 만큼 잡지도 못한다. 여전히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 것처럼, 바스러질 것 같은 손목이 강희찬의 손 안쪽에 감긴다.

슬며시 당겼다. 그러면 너무도 쉽게 이선의 몸은 따라왔다. 차라리 울어라 싶을 정도로 유약한 얼굴도.

그날도, 지금도. 변한 건 없었다. 그 무엇도.

제 행동 하나가 타인에게 큰 의미를 지닐 순 없다. 자신이 그리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고. 그런 건 야구부에 들어갔던 순간부터 이미 깨달았다. 저 하나는 특별할 것도 없고, 대체할 이도 발에 챌 정도로 많았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처음으로 다른 이와 몸을 섞은 후 맞이했던 아침. 새삼스레 깨달은 사실은 강희찬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저 역시 누군가와의 첫 경험 정도는 당연히 있을 테지만, 다음 날의 아침까지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랬기에, 홀로 침대에 남아 오롯이 느껴야 했던 선득한 냉기가 더욱 아팠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체향이 흠뻑 밸 만큼 몸을 맞대었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모든 게 마치 꿈이었던 양 몸은 허했다.

‘섹스는… 자는 거, 별거 아닐 겁니다.’

선생에게는 그리 말했지만, 어쩌면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섹스가 별거였던 쪽은.

저 혼자만 변했던 거였다.

여전히 이선은 다른 이와 함께 앉아 있는 투아웃을 봐도 당장 울 것 같은 얼굴을 한다. 에어컨 하나 없는 야외에 앉아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찬 손을 잡고, 사람들을 헤쳐 나가던 날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섹스가 별것인 양 구는 건 여전히 저 하나였다. 좆같지만,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

이선은 강희찬의 손에 붙들린 채 무력하게 걷고 있었다. 가게 문을 나서고, 가로등이 듬성듬성 있는 골목을 걷는 순간. 그 걸음도 점점 멈추어졌다. 앞서 걷던 강희찬의 손에서, 차디찬 손은 모래 알갱이처럼 사라졌다.

강희찬은 뒤를 돌았다. 그의 보폭으로 두 걸음 뒤, 이선은 허리를 숙인 채 무릎을 받치고 있었다.

“정 선생님.”

한숨을 내뱉은 강희찬이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여전히 이선은 바닥으로 고꾸라지지 않는 게 용할 정도였다.

“…네.”

“다른 데. 가자면서요.”

“아……. 네.”

느릿한 대답이 땅으로 떨어졌다.

전혀 대화가 되지 못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선의 정신은 아직도 역한 냄새가 떠다니는 가게 안을 헤맸다.

강희찬은 손을 뻗었다. 여전히 고개를 들 생각이 없는 이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분을 이기지 못해 지나치게 들어간 힘이, 이선을 너무도 쉽게 들어 올렸다.

“고개 똑바로 들어요. 허리 펴고.”

망가진다. 분명 망가질 거다. 이런 사람은, 무너지는 순간 바로 망가지고 만다. 그리고 다신 일어나지 못한다.

허리를 굽힌 이선의 위로, 누군가가 겹쳤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아래. 열기가 고여 있는 야구장의 흙바닥. 그 가운데에서, 너무도 쉽게 쓰러지던 사람. 그리고 태블릿 화면 너머로 그것을 지켜보았던 철저한 외부인인 자신까지.

윤태성과 정이선. 어느 한 군데 닮은 것 없이 대척점을 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은 공포였다.

한때, 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노력하면 그 끝에서 기다리는 건 반드시 해피엔딩일 거라고 믿던 순진한 시절이.

…할 수 있다. 다시 볼 수 있는 거다. 아무렇지 않게 150을 넘겨버리는 그 공을. 그런 믿음은, 관중이 대거 빠져나가고 있는 어수선한 야구장에서 무참히 깨졌다.

전광판에 찍히는 구속은 140 중반이 최고였다.

이미 기운 경기에 패색이 더해진다. 더그아웃에서 의미 없는 경기를 다시 없을 슈퍼매치처럼 보던 강희찬은 결국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없다. ‘그’ 윤태성은 이제 다시 없다.

태블릿 화면 속에서 쓰러졌던 선수는 이제 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다시는 이겨볼 수 없는 상대가 되었다. 비참히 얻어터지고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력을 다해 겨루어보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선수는 이제 없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엉망이 된 공으로, 절름발이처럼 남은 야구 인생을 이어갈 선수뿐이었다.

“…….”

그 대단한 선수도 결국 일어서지 못했다. 하물며 한 손에 다 잡히는 이런 팔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말은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토기가 차올랐다. 무언가 속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강희찬은 필사적으로 신물과 함께 그것을 눌러 참았다.

“강희찬 씨. 그, 죄송한데, 다음에 제가…….”

“차라리 좋다고 말을 해요. 말을 해야 차이든, 잘 되든 할 거 아닙니까.”

“…….”

“죄지은 거 있어요? 뭘 잘못했다고 도망을 나와요?”

마른 어깨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넌 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될 수 없어. 쓰러질 것 같은 뒷모습이 이번에도 그리 말하는 것 같아, 강희찬의 머리엔 열이 올랐다.

“게이 새끼가 말도 없이 혼자 자길 좋아하는데, 그 입장은 생각도 안 해봤어요? 정 선생 혼자 좋아하는 것도 이기적이란 생각 안 해봤냐구요.”

“…강희찬 씨.”

이선의 몸이 천천히 올라왔다. 먹먹한 눈은 여전히 강희찬을 향해 벽을 세우고 있었다.

다를 게 없었다.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몸 따위를 섞는다고 해서, 우선순위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섹스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원인을 모를 노기가 강희찬을 덮었다.

“가서 깽판이라도 부리든가, 뭐든 해보라고!”

결국, 치밀어오른 말이 뱉어지고 말았다. 소리는 어둠이 깔린 골목을 부유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이선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언가 막이 쳐진 듯했다.

“강희찬 씨가…….”

“…….”

“그쪽이 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얌전하게 처진 눈꼬리는 유독 저에게만 차가운 눈길을 보낼 줄 알았다.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어차피 없는 놈 취급은 익숙하다.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오늘따라 익숙하지 않은 화가 치밀었다.

“그럼 좀 똑바로 살아봐요.”

“…….”

똑같다. 결국, 이선은 저 투아웃 새끼를 보겠다고 이 골목에 저를 버리고 갔던 날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좆같은 기분에도 쉴 새 없이 웃음이 나왔던 그날처럼.

그렇다면 자신 역시 그날처럼 뒤를 돌아 홀로 골목을 나설 수 있을까.

강희찬은 잡고 있던 이선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놓았다. 그리고 그대로 제 앞머리를 짜증스레 헝클었다.

“자꾸 보는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말고.”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이 뒤를 돌아버리는 순간, 땅바닥으로 고꾸라질 사람을 혼자 두고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꾸라져 넘어질 이가 이선이었다. 모른 척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앞으로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선생은 수없이 아웃 카운트를 쌓아갈 거다. 무릎과 손발에 피가 철철 넘치도록 까인 채로, 주저앉을 테지. 먼 훗날, 그런 이선을 보면……. 그러면 자신 역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게 분명했다.

소중히 여겨져도 모자랄 시간에, 구르고 굴러 상처 나고 깎여나간 모습을 본다면. 그건 도저히 맨정신으로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닐 터였다.

“강희찬 씨는 어차피…….”

이선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소리가 되진 못했다.

강희찬의 추궁이 이어지기도 전, 이선은 눈동자를 돌리며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깊게 감았다 뜨이는 눈이, 마치 무언가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쪽이랑은, 상관없어요. 강희찬 씨랑은.”

억울함으로 가득한 눈이 강희찬을 올려다보았다. 똑바로 살란 말 때문인가. 무엇에 화를 내는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원래 힘들 때가 제일 약해진다고 하니까…….’

이승주의 어물거리는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그가 말했던 순간이 바로 이럴 때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했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저에게 마음 한 자락 주지 않는 이를 바라보는 선생을 보는 것만으로도, 강희찬은 숨구멍이 막혔다. 힘든 순간을 이용해, 제 곁에 주저앉히라는 영악한 생각을 할 틈 따위는 없었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순간을 노리고 손을 뻗는다 해도, 선생은 과연 제가 내민 손을 잡아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그럴 리 없었다. 선생은 자신이 주는 모든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니까. 내미는 손이 저의 것이라면, 무엇을 내밀든 이선에겐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하물며, 제 손이라고 뭐가 다를까.

“…….”

이선은 두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말아 쥔 손은 바들거리며 떨린다. 그것으로 유일하게 고꾸라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떨리는 목소리가 겨우 인사를 뱉었다. 이선은 강희찬을 스쳐 지났다.

대체 어떻게 집에 가려고. 짜증이 치밀어올라 강희찬은 손을 뻗었다. 그러나 뻗어나간 손은 미풍만을 스치고 지났다.

“…….”

공허한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점점 작아지는 이선의 뒷모습을 봤다.

뒤따라가 억지로 차에 태우는 건 어렵지 않다. 아주 잠깐, 들어 업고서라도 이선을 차에 집어넣는 제 모습을 상상했다. 아마 택시를 잡을 만한 큰길이 아닌, 파전집으로 향했다면 그리했을 거다. 들어 업기만 했을까. 투아웃 새끼한테 가겠다고 했다간, 엉덩이를 두들겨서라도 끌고 갈 셈이었다.

하지만 그만두었다. 곁에 두면 짜증을 이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어차피 더 미움받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가울 것도 없었다.

“씨발, 진짜…….”

얌전히 돌아왔던 앞머리를 다시 한번 헝클었다. 그리고 까만 어둠 속으로 걸음을 떼었다.

누가 선생 아니랄까 봐, 그 와중에 꼬박꼬박 인사는 한다.

* * *

밑바닥이라고 생각한 곳이 꼭 밑바닥만은 아니다. 바닥에는 끝이 없었다.

분을 이기지 못해 심한 말을 할까 봐 이선을 길바닥에 두고 먼저 등을 돌린 이래로, 강희찬은 최악의 저기압을 연일 갱신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요새 이승주는 정말 숨만 쉬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저번처럼 벤치 클리어링 사태가 터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은 이승주를 넘어, 슬슬 선수단 전체에 퍼져 가고 있었다. 에이스 투수는 절찬으로 팀의 분위기를 망쳐대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에이스 투수가 철저히 팀의 분위기를 망치고 있어도, 리그 일정은 한 개인을 배려해 주지 않는다. 강희찬은 제 기분과는 별개로, 정규 시즌의 남은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최 감독은 강희찬에게 한 시리즈 정도는 등판이 없으면 서울에 남아 컨디션을 조절해도 된다고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강희찬은 거절하고, 모든 원정경기에 따라갔다.

이유는 별것 없었다. 서울에 있고 싶지 않았다.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을 의미 없이 바라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된 훈련이라도 하는 게 나았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그런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시간은 의외로 느리면서도 빨리 흘렀다. 우천 취소로 미뤄졌던 경기를 모두 치르고, 팀은 어느새 정규 시즌의 마지막 경기만을 남기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컵스는 여전히 순위를 결정짓지 못했다. 한국시리즈에 직행할 수 있느냐,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하느냐. 중요한 분수령을 목전에 두고 마주한 마지막 결정전이었다.

안정원은 요사이 급격하게 가라앉은 강희찬의 기분을 거기에서 찾았다. 팀의 순위 확정에 기여하지 못한 에이스의 책임감 따위로. 웃기지도 않아서 차마 부정할 기운도 들지 않았다.

저기압의 아우토반을 달리던 강희찬의 기분은 나락으로 처박혔다. 양손으로 배를 슥슥 문지르면서 다가오는 운영팀장에 의해서.

복도를 걸어가던 강희찬은 마치 못 들을 소리를 들은 양 고개를 돌렸다. 처참할 정도로 구겨진 인상은 덤이었다.

“…뭘 하라고요?”

다시 말해봐, 개새끼야. 강희찬의 짧은 되물음은 마치 그렇게 들렸다.

팀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 쫄았다는 자존심은 진작에 사라졌다. 야구단에 입사한 이후로 보는 건 저런 덩치들뿐이다. 그 앞에서 남자의 자존심을 챙기는 건 바람 앞의 등불보다도 더 부질없는 일이다.

더 번잡스럽게 배를 쓰다듬는 팀장의 손 위로 강희찬의 불쾌한 시선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어쩔 수 없잖냐. 오늘 남는 투수가 너랑 패트릭이야. 패트릭보고 시구 지도하라고 할 수는 없잖아. 외국인인데.”

“…….”

땀으로 살짝 젖은 머리를 터는 강희찬의 손길이 더욱 거칠어졌다. 하지만 운영팀장은 애써 그것을 모른 체했다.

“그냥 옆에서 대충 폼만 봐줘. 어차피 잔디 위에서 던질 텐데, 뭐.”

“그것도 못 알아먹으니까 하기 싫다는 거 아니에요.”

“에이, 요샌 다들 알아서 연습 많이 하고 와. 옛날이랑 달라서. 하이힐 신고 운동장 들어오던 시대가 아니야.”

팀장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전혀 위로는 되지 못했다. 와인드업 자세를 가르쳐야 하는 건 매한가지일 테니. 머릿속으로 갑갑한 광경이 훤히 그려졌다.

“그냥 조금 봐주는 척만이라도 해줘. 그렇다고 시구 왔는데, 봐주는 선수 하나 없이 혼자 덜렁 연습장에 두기도 그렇잖아. 인터넷에 글이라도 쓰면 어쩌려고.”

이놈의 구단은 누가 인터넷에 글만 쓴다고 하면 전염병처럼 무서워한다.

“아, 진짜…….”

그 이유의 8할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은 대놓고 혀를 차더니, 로커룸 안의 샤워실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거절이구나. 얼른 통역을 불러다 패트릭에게 부탁해야 할까. 패트릭보다는 그래도 맥커친이 좀 더 살가운데, 하필 오늘 등판이라니…….

고민하는 팀장을 향해, 강희찬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씻고 나갈 테니까, 그 전에 도착하면 연습이라도 좀 하고 있으라고 하세요.”

쾅!

안전장치가 되어 있을 유리문에서 이례적으로 큰 소음이 들리고 나서, 수 초 후. 팀장은 그제야 강희찬의 말이 승낙이었음을 깨달았다.

땀을 씻어냈으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겠지. 지도 사람이니까.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40대 보통 남자들이 그러하듯, 정상 체형에 홀로 불룩 나온 배를 문지르는 것이 그의 난감함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팀장의 양손은 투구 연습장에 들어온 이래로 배를 떠나지 못했다.

“자세 기억하기 어려우면 세트포지션으로 던지세요.”

한참 와인드업의 순서를 설명하던 강희찬은 모자를 한 번 벗었다가 눌러쓰는 것으로 짜증을 표현했다.

나란히 선 아이돌의 개인 매니저와 운영팀장과 대리. 그리고 계단 위에 매달려 옹기종기 구경하는 젊은 선수들. 그들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면 사이에 신문사 기자들도 껴 있었다. 큰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대체 누가 기자들의 출입을 허락한 걸까?

백설공주의 악명을 모르는 이는 이 구단에 없다. 제아무리 신입사원이라도 사흘만 근무하면 뼛속까지 느낄 수 있는 게 저놈의 성정이었다.

단장님만 아니라면 범인을 발본색원하여 한소리를 하겠노라 다짐했다. 대부분의 소시민이 그러하듯, 근본적인 원인인 강희찬에겐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강약약강의 자세라고 자조하지만 말이다.

“옆으로 서서 이렇게 던지라고요.”

세트포지션을 알지 못하는 여자를 내려다보는 강희찬의 목소리에 짜증이 오롯이 실렸다.

결국, 와인드업은 포기했는지, 강희찬은 세트포지션 자세를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쓰는 손이 반대였다. 오른손잡이에게 왼손잡이가 보여주는 투구 폼 자세는 와인드업이든 세트포지션이든 헷갈리기 마련이었다.

반대쪽 다리를 드는 것만으로도 버벅대는 모습을 보자, 강희찬의 입에선 한숨이 흘렀다. 그녀는 화면에 나와야 하는 직업이다. 가뜩이나 마른 체형인 여자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어깨를 움츠렸다.

잔뜩 의기소침해진 연예인을 보던 매니저는 안절부절못했다. 좀 살살 가르쳐 달라고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할 무렵, ‘윤지’라는 익숙한 이름이 매니저의 귀에 걸렸다.

“저, 잘 배울게요. 걔는 자세 제대로 잡고 했잖아요.”

“못 합니다. 보통 여자들.”

강희찬의 저기압을 과소평가했던 운영팀장은 현재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패트릭을 데려왔어야 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큰 장점이란 말인가.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니, 저렇게 개짜증이 났음이 비언어적 표현으로도 쉽게 전달되는 거다. 숨겨지지 않는다. 게다가 요새 아이돌들은 다 영어를 잘하지 않는가. 한국인인 강희찬보다 훨씬 말이 잘 통했을 수도 있었다.

하필이면 강희찬의 손을 끌고 온 저 자신의 뺨을 쳐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아이돌이 돌아가는 차 안에서 SNS에 “강희찬 개싸가지였다”라고 올려도 할 말이 없었다.

저번 벤치 클리어링 때도 그렇고, 요새도 그렇고.

늘 기분이야 좆같은 채로 사시는 에이스지만, 구태여 따져보면 꼭 쉬는 날 다음부터 사달이 나곤 했다.

대체 남들 잘 쉬는 날, 그것도 딱 하루 있는 휴일에 무슨 짓을 하길래 이 지랄이란 말인가. 본인 기분만 나쁘다면 상관없겠지만, 꼭 피해는 방사능처럼 전 범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승주는 먼지가 될 기세로 몸을 사리고 다닌 지 오래다. 이승주가 눈치를 보니, 화풀이할 대상도 없었나 보다. 결국, 시구 한 번 왔다가 애먼 꼴이나 당하는 이 아이돌이 당첨이었다.

“체중이 얼맙니까?”

입꼬리 한 번 올리지 못하는 여자의 마른 몸을 냉한 눈동자가 위아래로 훑었다. 순간, 팀장은 다시 한번 아차 했다.

‘저 눈깔을 좀…….’

사내새끼를 저런 식으로 본다면 싸움밖에 더 나겠냐만, 상대가 여자라면 더욱 곤란했다. 성희롱이 된다고 주의를 꽤 줬던 것 같은데. 버릇은 쉬이 고쳐지지 못했다.

하지만 시선을 받는 당사자는 딱히 성희롱임을 인지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저런 길가의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눈이다. 도저히 그런 쪽으로는 해석될 여지가 없었다.

“45…요.”

운동부 문화에 젖어 있는 사내 특유의 무뚝뚝함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한 성질머리에 몇 분째 노출되어 있었다. 잔뜩 언 그녀의 입에선 순순히 대답이 흘렀다.

직접 밝힌 체중의 사실 여부를 파악하려고 했을까. 강희찬의 냉랭한 시선이 다시 여자를 훑었다.

박신우였다면 “뻥이죠?” 혹은 “너무 말랐는데요?”라는 넉살 좋은 말로 분위기를 풀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여기 있는 건 강희찬이었다. 그런 해피엔딩 따위는 처음부터 선택지에 없었다.

“그럼 70까지 찌우세요.”

빠른 공을 던지려면 어떻게 하냐는 인풋에 가장 적합하고 정도인 아웃풋이 산출되었다.

상대가 야구소년이라면 가슴에 새겨둘 충고라도, 지금 이곳에 있는 건 허리둘레가 선수들 허벅지보다도 가는 여자 아이돌이었다. 진심과 사실만을 담았을 충고라도, 그녀에게는 그저 오늘 내내 보여주었던 짜증의 연장선상일 뿐이다.

“…….”

글썽거리며 맺혀 있던 눈물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팀장과 매니저는 동시에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여전히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무표정인 건 강희찬 하나였다. 그는 혀를 쯧 하고 차더니 팀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내가 자세 더 보여줘도 의미 없을 것 같은데요.”

“어? 아……!”

제발, 이 새끼야!

팀장은 이제 쥐구멍이 있다면 숨어들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여자의 눈물은 무기로도 비유가 되던데. 지금은 그저 핵무기 앞에서 쥔 돌도끼의 위력만도 못했다. 저놈은 인류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핵무기와 결을 같이했다.

인간 핵무기는 팀장을 향해 무심히 시선을 던졌다. 이제 그의 안중에는 연예인도, 그녀의 매니저도 없는 게 분명했다.

“상체 웨이트 마저 해야 합니다. 이딴 일에 쓰고 있을 시간 없어요.”

하지만 그의 안중에 없다 해도, 엄연히 이 자리에 존재하는 이들이다. 멀쩡히 두 귀를 달고서.

믿을 수 없을 만치 가식 없는 문장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 무렵엔, 강희찬은 유유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 * *

저기압이기로는 에이스 투수와 으뜸을 다투던 최 감독의 얼굴은 순위가 확정된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활짝 펴졌다.

최 감독의 기분이야 변덕스러운 겨울 날씨처럼 금세 봄날 같아졌지만, 에이스 투수는 여전히 시베리아 벌판을 유지했다. 절대 녹을 것 같지 않을 만년설을 매일 보는 이승주는 거의 한계치에 다다랐다.

시즌이 끝나고 호텔 합숙에 들어가기 전. 며칠 쉬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리 생각했던 안일한 예상은 캐리어를 끌고 구장에 나타난 강희찬의 얼굴을 본 순간 깨졌다. 그리고 다시 시작될 층층시하, 구중궁궐 세자빈 생활을 직감했다. 더 끔찍한 건, 합숙이라 퇴근을 해도 도망칠 곳이 없다는 소리였다.

‘대체 왜? 쉬는 동안 잘 먹고 잘 자고 왔을 거 아냐. 대체 뭐가 불만인 건데?!’

그런 이승주의 불만 역시 최고조에 달했지만, 강희찬에겐 알 바가 아니었다.

후배가 제 눈치를 보느라고 숨만 쉬든, 숨도 못 쉬든. 그의 고려 대상에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는 이승주의 체감과는 달리, 시간은 빨랐다. 여전히 기분이 더러운 강희찬을 둔 채, 일본으로 출국하는 날은 다가왔다.

내일 당장 출국이건만, 짐을 싸는 손길들은 여전히 분주했다. 특히 며칠 전부터 출발 일정을 몇 번이나 얘기해도, 짐을 싸는 건 귀찮은지 대부분 출발일 전날 저녁에야 난리가 나곤 했다. 매번 짐을 꾸릴 때마다 고생하는 박신우는 더더욱.

“희찬아, 너 가방에 공간 좀 남냐?”

호텔 로비의 소파에 살벌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강희찬을 향해 그가 다가오며 물었다. 정말 달갑지 않게도, 기분 나쁠 정도로 살가운 미소를 띠며.

“왜요.”

하여간 어딜 갈 때마다 저 난리다. 강희찬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불길한 예감이 번졌다. 경계하는 강희찬의 기색을 박신우는 기민하게 잡아냈다.

“가방에 이거 좀 넣자.”

박신우는 그의 앞으로 불쑥 홍삼 브랜드의 종이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틈새로 슬쩍 안이 들여다보였다.

통조림, 햄, 과자, 그리고 레토르트 식품까지. 오색찬란한 물건들을 본 순간, 강희찬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저러니까 매번 어딜 갈 때마다 짐가방이 터지는 거다. 박신우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디 피난 가요?”

“이렇게 챙겨가야지. 안 그러면 그 깡촌에서 주는 세끼 밥만 처먹고 살아야 하잖아. 하여간 이래서 애새끼들은 안 된다니까.”

박신우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끌끌댔다. 그 모습을 보니, 대꾸할 힘도 사라졌다.

주는 거 먹으면 되지.

됐다고 할 셈이었다. 며칠 내내 기분이 불쾌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잡고 조져 놓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기분은 침잠되듯 가라앉기만 했다. 학생 시절 시합이었나, 전지훈련이었나. 언젠가 갔던 이국의 날씨와 닮아 있었다.

하루 종일 비가 오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문득 몰아치곤 했다. 그런 순간이면, 그냥 다 잊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불로 둘러싸인 누군가의 체온을 그리워했고, 그걸 깨달은 순간마다 강희찬은 오히려 더 훈련을 찾았다. 몸을 움직여야 머리가 안 돌아간다. 그리 수없이 되뇌며.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가면 좀 나눠 줄게.”

덧붙이는 박신우의 말은 강희찬에겐 전혀 유혹이 되지 못했다. 필요 없어. 강희찬은 종이가방에서 심드렁한 시선을 치워냈다.

“룸메이트 있잖아요. 왜 나한테 그래요.”

“걔 가방엔 이미 넣었어. 더 넣겠다고 했다간 죽일 것 같던데.”

진짜 가지가지 하네. 아예 이민을 가지그래.

짜증이 차오른 순간이었다.

지잉.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강희찬은 앉아 있던 몸을 슬쩍 기울이며 핸드폰을 꺼냈다. 길게 울리지 않고 금세 끊어진 것을 보면, 메시지인 듯했다.

예상대로 화면엔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떠 있다. 메신저가 아니라 문자라서, 또 무슨 광고일 것이다.

핸드폰 화면을 눌렀다. 강희찬의 예상을 깨고, 그의 눈엔 간결한 한 줄이 들어왔다.

[다치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오후 19:48

‘정이선’이라는 이름은 그다음이었다.

읽음 여부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메신저가 아니었다. 이미 이선은 제 번호를 저장하고 있었다. 분명 메신저로도 보낼 수 있는데도, 왜 문자일까?

언제나 궁금했지만, 그냥 선생이 더 선호하는 모양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

지난 일에 대한 사과도, 구태의연하게 에두르는 말도 없다. 간결하게 용건만 있는 문장이었다.

남들이 봤다면, 대체 뭔가 싶을 정도로 맥락이 없는 내용이 이상하게도 눈을 잡았다. 습하고 추운 곳에 홀로 던져진 것만 같던 몸이 기분 좋게 더워진다. 손끝까지 피가 도는 감각은 언제나 강희찬을 설핏 웃게 했다.

출국 일정은 어떻게 알았을까. 야구도 잘 모르는 사람이. 굳이 관심 없을 포털의 스포츠 탭을 눌러봤을까? 아니면 시끄러운 지인의 입을 통해 들었을 수도 있겠다.

뭐가 됐든, 눈에 선히 그려졌다. 먼저 뒤를 돌아 매몰차게 가버린 주제에, 안절부절못하며 문자를 쓰다 지우기를 반복했을 이선의 모습이.

메신저로 보낼지, 문자로 보낼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 겨우 적은 한 줄일 터였다.

답장하기 위해 핸드폰을 양손으로 제대로 쥐었다. 호기롭게 내용을 적으려던 기세에 비해, 엄지손가락은 쉬이 움직여지지 못했다.

…왜 굳이 문자로 보냈는지 알 것 같다.

상대가 확인했는지, 아닌지. 그걸 알았다면 더욱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을 보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이 순간이, 이선에게는 제가 메시지를 읽어놓고 무시한다고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박신우는 핸드폰을 쥐고 ‘그대로 멈춰라’ 상태인 강희찬을 얼마간 봤다.

“어? 야, 공간 남으면 좀 넣자고. 넌 가방 크잖아.”

그의 손이 강희찬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얘가 안 된다고 하면, 또 누가 있지? 몰래 삥땅 처먹지 않을 만한 놈이 누가 있을까? 일단 이승주는 열외였다.

박신우가 고민하는 사이, 강희찬은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팔을 툭툭 쳐서, 평소라면 미간이라도 찌푸릴 법도 했는데. 늘 비슷한 무표정은 묘하게 온화했다. 눈은 여전히 핸드폰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여기 두세요. 가져가서 넣을 테니까.”

강희찬이 고개를 슬쩍 틀며 턱으로 제 옆을 가리켰다. 그 와중에도 눈은 핸드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의외였다. 어차피 들어줄 거라도, 지랄스러운 말 몇 마디는 할 줄 알았더니. 의외의 공격을 받은 박신우는 “어…….” 하며, 한동안 멍했다.

“…진짜?”

“싫음 말고요. 가방 다시 열기 귀찮은데.”

“아냐, 아냐, 아냐! 안 싫어!”

금세 말을 물릴세라, 박신우는 비상식량이 든 종이가방을 강희찬의 곁에 착 붙였다.

하여간에 새끼가 성질은 더럽게도 급했다. 다행히 개차반은 이미 버스 떠났다면서 종이가방을 쳐내는 무뢰배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강희찬은 무언가를 와다다 칠 기세로 핸드폰을 쥐고 화면을 빤히 쏘아보다가, 분을 못 이기는지 제 앞머리를 헝큰다.

박신우는 후배의 미친 짓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는 짓이야 또라이 같고, 이승주가 봤다면 500미터 밖으로 도망갈 행동이었지만 박신우는 대충 느낄 수 있었다. 저래 보여도, 저놈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아니, 오히려…….

“갑자기 왜 기분 좋아졌어? 기분 나쁘게.”

약간의 장난기를 누른 박신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강희찬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곁에 앉은 선배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박신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빙실빙실 웃었다.

“어? 나도 좀 알자.”

능글맞은 웃음에 강희찬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을 돌렸다.

에이스는 에이스였다. 한국시리즈가 다가오니 귀신같이 기분이 나아지는 후배의 모습을 보며, 박신우는 부모라도 되는 양 뿌듯해졌다.

역시. 휘정인치고, 나쁜 녀석은 없다.

박신우의 얼굴에 흐뭇함이 더해졌다. 드물 정도로 훈훈한 광경이었다. 후배 녀석의 ‘왜 재수 없게 쳐다보는 거야’ 싶은 표정만 아니었다면, 공익광고 캠페인으로 내보내도 될 정도라고 확신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이제 와 표정을 한껏 굳힌 강희찬이 대꾸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뭐가. 핸드폰 보고 쪼갰잖아.”

“안 쪼갰습니다.”

“웃기지 마. 혼자 변태같이 실실 웃었어. 뭔데? 같이 좀 보자.”

“안 웃었다고요.”

변태 같은 적은 더더욱 없었고. 강희찬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박신우의 집요한 마수는 핸드폰을 향했다.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시큰둥하기만 한 녀석의 얼굴을 저렇게 만들다니. 뭔지는 몰라도 엄청난 게 분명했다.

남자의 호기심이 응축된 손길이 우악스럽게 티셔츠를 잡는다. 당장 내다 버려야 할 정도로 티셔츠를 잡아 늘이는 손힘을 겨우 피하며, 강희찬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박신우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기분 나쁘게, 남의 트레이닝복 바지 주머니를 보는 시선과 함께.

강희찬은 이미 목이 늘어나서 불편해진 티셔츠를 갈무리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걸음을 떼는 강희찬을 올려다보며 박신우가 물었다. 뒤를 돈 강희찬은 입을 벌리고 저를 올려다보는 선배의 멍청한 얼굴을 잠시 보았다.

“방에요.”

쌩 까고 가버릴까 하다가, 짧게 답했다. 뭐가 어쨌든 선배는 선배였다.

“이거 가져가야지.”

박신우는 제 소중한 식량이 담긴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강희찬은 그의 손에 잡힌 홍삼 브랜드의 쇼핑백을 물끄러미 봤다. 캐리어에 충분히 들어가고, 무게도 얼마 되지 않을 짐이다.

무심히 던지던 시선은 금세 멀어졌다. 키에 어울리는 시원한 보폭과 함께였다.

“자리 없어요.”

“아, 왜! 아깐 넣어준다며!”

“생각해 보니까 없었어요.”

“이… 치사한 새끼야!”

‘예외’가 존재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그것이 한없이 백에 가까워도, 완전한 백은 될 수 없다. 확률은 언제나 그랬다.

…휘정인 중에 나쁜 인간은 없다. 아마도 저놈 빼고.

붉은색 종이가방을 끌어안은 박신우는 제 신념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야만 했다.

* * *

교과서였나, 아니면 따로 풀었던 문제집이었나. 걷지 않았던 또 하나의 길에 대한 회고를 노래한다는 시를 본 적이 있었다.

시에는 딱히 흥미가 없고, 그것도 외국 시라면 더더욱 관심이 덜한 이선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였다.

교복을 입던 시절. 처음 그 시를 읽었을 때, 이선은 시인이 꽤 나이가 지긋한 노신사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얼굴엔 지금까지의 인생에 대한 만족과 본인이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한 미련이 주름과 함께 뒤섞여 있을 거라고. 그렇게 멋대로 생각했었다. 시간이 흘러서, 그 시를 썼을 당시의 시인은 20대 중반 정도였다는 사실에 퍽 놀랐지만 말이다.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시는 지금까지도 종종 이선의 머리를 스치곤 했다. 바로 요 며칠이 그런 순간 중 하나였다.

“이선 쌤. 나, 먼저 가볼게요.”

톡톡. 유성희가 책상을 두드렸다. 멍하니 시선만 핸드폰에 두고 있던 이선은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 네. 내일 뵙겠습니다.”

“이선 쌤도 적당히 하고 그냥 퇴근해. 벌써 7시 반인데.”

“네. 이제 갈게요.”

유성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핸드백을 챙기고 교무실을 나섰다.

탁. 문소리를 끝으로, 홀로 적막에 감싸였다. 새삼스레 주위를 빙 둘러봐도 역시 교무실엔 저 혼자다.

이선은 별 소득도 없이 키보드 위에 두었던 손을 떼었다. 그리고 의자의 등받이로 몸을 쭉 기댔다. 오래된 의자 특유의 끽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순간의 버거움에 취약한 건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나이를 먹고, 직장을 가지고, 그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어른이 되는 게 아니었던가.

이제 얼마 지나면 또 한 번 나이의 앞자리가 바뀔 것이다. 그럼에도 알맹이는 여전히 아버지의 목말을 타고 개를 피하던 때와 요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

기름진 파전과 막걸리가 담겼을 양은 주전자를 사이에 둔 남녀. 여자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신규진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얼굴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를 보며 웃던 얼굴. 저와 눈이 마주한 순간 어색하게 무너지는 표정은 이선을 퍽 비참하게 만들었다.

익숙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다. 신규진의 곁에 누군가가 서 있던 모습을 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멍청이처럼 몸이 굳었다. 신규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분명 제 뒤에 서 있을 강희찬의 얼굴이 스친 탓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여자와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강희찬의 모습을 그리는 순간, 이선은 숨을 쉬기가 버거워졌다.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외로움이 덮쳐 와,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졌다.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려 하는 자신을 단단히 받쳐 주는 팔 힘 같은 건, 몇 년 후엔 없다.

저 앞에서 자신을 못 본 체하는 신규진보다도, 상상 속의 강희찬이 이선을 힘들게 했다.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강희찬을 또 한 번 길에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던 날. 이선은 온몸의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방전된 것처럼 피곤한 와중에도, 신기하게도 잠은 오지 않아 더더욱 괴로웠었다.

‘그래도 그렇게 두고 오지는 말걸.’

그런 후회를 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와의 모든 순간은 이선에게는 현실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 있던 자신은 외롭지 않았고, 자신의 성향을 기분 나빠 할까 봐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데도.

이상적일 정도로 꿈같으면서도, 또 묘할 정도로 현실감이 있었다. 꿈과 현실이 기분 좋을 정도로 뒤섞인 나날이었다. 강희찬의 곁에 있던 순간들은.

그의 곁에 있다 보면 자신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마치 선호하는 과자의 제품명을 말하듯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건 비현실적이면서도, 놀랍도록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뒷모습과 한 테이블을 공유하며 앉아 있는 신규진을 본 순간, 이선은 진짜 이선의 현실로 쫓겨나야만 했다.

‘강희찬 씨도 어차피 결혼하실 거잖아요.’

그런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가 자신의 좁은 속마음을 알면, 얼마나 우습다고 생각할까? 바보 같다고. 주제도 모르는 게이라고 여겨도 할 말이 없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제 곁에는 누구도 없이. 그것이 저의 현실이었다. 자신의 곁에 서 있던 강희찬도 어차피 사라질 사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노선을 정한 정이선은 퍽 냉정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송재혁은 그런 저의 성격을 두고, 외골수라고 칭했다. 딱히 인정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멍하니 생각한 순간도 있었고.

하지만 그건 자존심을 지키는 저만의 마지막 방법이었다. 적어도 나는, 쉬이 다른 누군가에게 가버릴 마음은 가지지 않았다고. 그게 스물 하고도 여덟 해를 더 살았던 자신의 유일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정말 바보 같게도.

즐거운 시간은 끝났다. 바라보고 싶은, 그리고 익숙해질 정도로 바라봐왔던 등은 신규진의 것이다. 강희찬의 옆모습이 아니라.

주기도문처럼 백만 송이 장미의 가사를 읊던 어머니. 자신은 그녀와 몹시도 닮아 있었다.

“…….”

이선은 마지막 생명줄인 양 자꾸 핸드폰을 쥐었다. 아무것도 오지 않는 메시지함을 확인하고, 오히려 제가 실망하기를 반복하면서. 퍽 우스운 일이었다.

학교 업무를 보는 사이마다, 습관적으로 포털 사이트의 스포츠 뉴스란을 들어갔다. 메인 화면 귀퉁이에서 그가 속한 구단이 일본으로 출국할 예정이라는 작은 기사를 발견했다. 편명과 시간까지 자세히 나온 기사를 보고서도, 이선은 송재혁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초콜릿을 면세점에서 사 와달라는 핑계를 붙여가며.

그가 한국을 떠난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은 그의 팀은, 이제 한국시리즈에 출전하기 위해 일본까지 가서 훈련해야 한단다.

성적이 좋았다는데 경기는 제일 늦게 끝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가장 추울 때까지 야구를 하게 되는데, 과연 선수들은 동기부여가 되는 걸까.

“…….”

결국, 출국을 하루 앞둔 저녁.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학교에 남았던 이선은 충동적으로 핸드폰을 쥐었다. 광고문자를 한참 내리고 나서, 그와 주고받았던 이력을 찾았다.

화가 난 그는 자신의 문자를 무시할 거다. 언제나 최악인 상황을 그리면, 현실은 그보다는 나았다. 그건 정이선이 자존심을 지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선은 ‘게이새끼’라고 말했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언제나 이랬다. 핸드폰에서 그의 연락처를 찾아낸 순간, 화가 난 강희찬의 목소리가 귀를 울린다. 그러면 이선은 결국 핸드폰에서 손을 떼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내일의 그는 한국에 없다. 불쾌한 문자를 받더라도, 바다를 건너서 올 수는 없었다. 낯선 곳에서 사람은 감성적으로 변한다니, 조금쯤은 너그럽게 생각해 줄지도 모르고.

구구절절한 핑계를 댄 이선은 한참의 고민 끝에 겨우 문장다운 문장을 완성했다.

[다치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이모티콘을 붙여야 할지. 사과를 먼저 해야 하는 건지. 숱하게 고민했지만 재주가 없는 말솜씨와 엄지손가락은 초라한 결과를 낳았다.

문자를 완성하고도 핸드폰 시간이 꽤 바뀌었다. 그러고서야 겨우 전송 버튼을 눌렀다.

차라리 보내버리고 나면 후련할 줄 알았다. 막상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아니었다. 그에게서 답장이 오길 바라면서도,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이렇게까지 혼자 휘둘릴 건 뭐란 말인가. 그 사람은 언제나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데.

갈 곳이 없는 제 마음은 꼭 자그마한 호의에도 반응하고 그것을 향했다. 정말 바보같이.

탁.

이선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뒤집어 책상에 두었다.

예상보다 살벌한 소리가 마음을 덜컥이게 했지만, 애써 핸드폰에서 고개를 돌렸다. 액정이 신경 쓰인다고 재빨리 확인하는 건 어딘가 자존심이 상했다. 비록 교무실에 혼자 있다 하더라도.

분명히 자신이 잘못했고, 사과도 저의 몫인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상할 정도로 그 남자의 앞에선 쉽지 않았다.

어렴풋이 이유는 짐작이 갔다. 자신은 언제나 그의 앞에선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으니까. 그 사람이 한심하게 저를 내려다보고 불쾌함을 내비친 순간. 이선의 자존심은 고슴도치처럼 마음을 보호했다.

저를 엉망으로 만들고, 우스운 사람이 되게 했다. 고작 머릿속에서 그려보기만 했던 강희찬은. 저는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함께 있던 그는.

그 사실이 퍽 분해서, 이선은 주저 없이 뒤를 돌았다.

그리고 강희찬이 없는 지금도 자신은 똑같았다. 여전히 그날 밤, 추한 모습을 들킬까 두려워 도망쳤던 골목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선은 고개를 붕붕 거세게 저어댔다. 순간적으로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강희찬이 사라졌다. 그러자 시선은 모니터로 도망칠 수 있었다.

손가락은 며칠 새 버릇처럼 들어가게 된 포털의 스포츠 뉴스란을 향한다. 헤드라인의 절반은 무슨 소리인지 모를 것 같은 기사들이 의미 없이 이선의 눈을 스쳤다.

[SH 컵스, 세이신 레인저스와의 경기 위해 日출국 …강희찬 등 선발진 컨디션 체크.]

누군가의 이름을 찾고 나면, 자연히 클릭할 수밖에 없다. 이선은 강희찬의 사진이 실린 기사를 눈에 담았다.

언젠가 경기에서 찍힌 사진인지, 강희찬은 흰색 유니폼을 입고 공을 던지고 있었다.

“…….”

늘 이랬다.

언젠가는 제 인생에서 사라질 사람이다. 그러니 너무 정을 주지 말자고 해도, 정신을 차려보면 그 사람의 흔적을 찾았다. 도망치듯 입대했던 자신을 찾아와준 신규진의 망령을 좇을 때처럼.

이번에도 언젠가 사라지고 없을 환상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제 삶이 영화였으면 했다. 끝만 좋으면 해피엔딩인 싸구려 로맨스 영화라도 말이다.

싸구려 영화 같은 자신의 끝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했다. 상상력이 부족한 탓에, 그 얼굴은 언제나 신규진이었다.

하지만 지금 떠올려본 남자는, 어딘지 얼굴에 안개가 낀 듯 흐릿했다. 키가 아주 커서 자신이 한참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얼핏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가벼운 미풍에도 해일에 떠밀리듯 술렁이는 제 마음이 향할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마음을 인정하는 순간, 저 자신이 싸구려가 되는 것만 같아 고집스러울 정도로 외면했을 뿐이지.

제 몸은 두 갈래로 나뉠 수 없었으니, 걸어갈 곳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게 주어진 끝도 하나밖에 없었다. 어느 길도 평탄하지 못하고 외로울 테지만 말이다.

기사를 읽은 이선의 시선은 자연히 댓글란으로 향했다. 스포츠 기사를 보게 된 이후로 새로 들게 된 버릇이었다.

가장 위에 올라온 베스트 댓글 하나가 이선을 멈칫하게 했다. 몇 년 후, 메이저에 진출한다면 그가 옛 연인과 재결합을 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이선은 자신의 새로운 버릇을 원망해야만 했다. …보냈던 문자를 취소하는 기술은 대체 왜 없는 걸까?

“…….”

어쩌면, 갈림길을 선택할 시간은 너무도 빨리 왔는지도 모른다.

* * *

장거리든 단거리든. 비행기를 타면 이유 없이 피로감이 몰린다. 어지간해서는 탈것 안에서는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강희찬은 더더욱 그런 편이었다.

이유가 명확한 그와는 달리, 비행기에서도 잘만 퍼 자는 새끼들이 꼭 시차 때문이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괌이나 호주로 캠프를 갔을 때야 그러려니 하지만, 일본을 다녀와도 저딴 소리를 하니 말 섞었다간 같은 병신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었다.

[다치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아직 답장을 보내지 못한 메시지는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어떻게 답을 보내야 할지 고민한 것도 사실이었다. 고작 몇 주를 일본에 있었지만, 구태여 로밍을 해갔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답장을 보낼 순 없었다.

저딴 실없는 말에 대체 무어라 답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네’, 그것도 보내면 대화는 뚝 끊겨버린다.

하다못해 면세점이나 일본에서 무언가를 사달라고 하든가. 그래야 대화라는 게 생기지 않겠는가. 물건을 줄 때 볼 수도 있고. 사과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도무지 손발이 맞지 않는 이선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강희찬은 결국 문자를 보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 답장을 보내버리면 아예 끝이 날 것 같아서. 끊어질 것 같은 동아줄을 겨우 붙들고 있는 것처럼 지냈다.

귀국일 하루를 호텔에서 쉬었고, 다음 날은 또다시 잠실로 출근을 했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로커룸을 나설 무렵이었다.

“아!”

목에는 사원증, 손에는 클립보드와 볼펜을 든 프런트 직원이 로커룸을 열고 들어왔다.

“잘됐다. 너 보려고 왔는데.”

운동장까지 찾으러 가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의 손 안에서 달깍하는 명쾌한 소리와 함께 검은 볼펜의 심이 튀어나왔다. 강희찬의 미간이 미묘하게 좁아진 순간이기도 했다.

“1차전. 부모님 자리는 저번처럼 테이블석이면 괜찮지? 너 나가는 날만 티켓 빼놓으면 되겠지?”

“어차피 가게 때문에 못 올 텐데요.”

고개를 이리저리 비트는 강희찬은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뭔 소리야. 매년 가게 쉬고 다 오셨는데. 저번에 음식 해주셨을 때도, 아버님은 오셨어.”

그랬던가.

“하여간, 무심해 가지고.”

질린다는 얼굴이 강희찬을 올려다봤다. 아들 새끼, 좋은 것만 먹이면서 야구 시켜놨더니 저럴 수가 있을까. 그런 의도가 여실히 보이는 얼굴이 짜증 나서, 강희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미리 말씀드려야 그날 예약 손님을 안 받으실 거 아냐, 이 무심한 아들놈아.”

“알아서 해주세요, 그럼.”

집도 아니고.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낼 기세기에 대충 무마하고 운동장으로 나가려던 차였다.

“아…….”

강희찬은 걸음을 멈추었다. 강희찬의 이름 옆에 ‘1차전, 테이블석3’이라는 짧은 메모를 남긴 직원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혹시, 1차전 자리 더 빼줄 수 있어요?”

“왜? 어머니, 아버지, 영찬이. 테이블 하나면 되지 않아? 옆 테이블 하나 더 잡을까?”

볼펜을 쥐고 있는 손이 차례로 세 개가 접혔다.

“거기 말고, 테이블석 하나 더 뺄 수 있나 해서요.”

웬일이지? 제 부모님 한국시리즈 티켓도 안 챙겨서 구단 직원이 일일이 보내는 처지에, 강희찬이 직접 자리를 요구하다니. 직원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왜? 애인 부르게?”

그러고 보니, 시즌 막판에 대뜸 관중석에 난입하느라 홍보팀장의 전화기가 온종일 먹통이었던 적도 있었지?

장난 반으로 툭 던져 봤지만, 의외로 빙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인상을 팍 구긴 강희찬이 삐뚜름히 대꾸했다.

“누군지 말하면 알아요? 아무튼… 있어요, 없어요?”

좀 더 떠보면 누군지 알지 않을까. 전적이나 나이를 보아하니, 이번에도 유명인일 것 같은데.

하지만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다. 그 귀여운 고양이도 죽는데, 하물며 인간이라고 오죽할까. 더욱이 고양이조차 귀엽게 여기지 않을 놈의 앞이었다.

직원은 재빨리 주제를 파악했다.

“될걸? 근데, 1차전이라 회장님 가족들도 오실 거라서. 테이블이라도, 자리가 그렇게 좋지는 않을 수도 있는데. 2차전은 안 되고?”

“2차전 티켓을 뭐에다 써요. 필요도 없는 거.”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긴 강희찬이 타박의 말을 던졌다.

필요가 없다니. 말하는 것 좀 보게.

직원은 눈알을 흘긋 돌려, 복도 한구석에서 간식으로 김밥을 나눠 먹던 젊은 선수들을 살폈다. 못 들은 체하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티가 났다.

그렇다면 원하는 소스를 캐줘야지. 알 수 없는 용기가 직원의 입을 열게 했다.

“애인이지?”

“알아서 뭐 하게요. 그게 중요해요?”

자리나 빼줄 것이지, 말이 많다. 게다가 지금 받고 있는 티켓도, 엄밀히 따져보면 전부 자신의 월급에서 나가는 것이 아닌가.

강희찬의 짜증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다. 직원은 총 앞에서 백기투항을 하는 사람처럼 양손을 제 가슴께에 펼쳐 보였다. 역시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 저보다 강한 자의 기색을 살필 수 있는 건, 생존본능을 가진 동물의 필수 교양이었다.

“그럼 부모님 옆자리로 해도 돼?”

직원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이 저를 떠보고 위함이라는 걸, 강희찬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

“응?”

“…좀 멀리 떨어진 데로요.”

“그래그래.”

직원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사무실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전해줄 핫한 소식을 가장 먼저 물었다는 설렘이 슬슬 얼굴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강희찬의 얼굴엔 점점 구름이 졌다. 차라리 대놓고 웃는 게 낫지, 저렇게 웃음을 참는 얼굴은 더 꼴도 보기 싫다.

“테이블 하나 더 빼면 되지?”

“…네.”

강희찬은 한숨을 내쉬고 발걸음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 * *

해가 진 후에야 퇴근하던 이선은 중앙현관을 나선 순간 깜짝 놀랐다.

눈에 익은 앰블럼이 달린 검은 차가 그 첫 번째 이유였고, 그 차에서 내린 남자의 모습이 두 번째 이유였다.

“아…….”

무심하게도 이선의 문자를 무시한 장본인이었다. 화가 많이 난 그가 드디어 자신에게 따지러 온 것일까? 은은히 퇴근의 기쁨이 묻어나던 이선은 걸음을 멈칫거리며, 현관의 낮은 계단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더니, 강희찬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뭐 이렇게 퇴근이 늦어요?”

“…….”

“늙은 선생들은 한참 전에 먼저 가던데. 정 선생 혼자 독박 씌워요? 짬밥 딸린다고.”

‘생김새는 퍽 고급스러운데.’

가끔씩 내뱉는 말은 온화한 생김새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말버릇을 듣다 보면 이선은 강희찬의 나이가 어린 편임을 느끼곤 했다.

혹여나 듣는 이가 있을까 뒤를 돌아봤다. 배드민턴을 치다가 가끔 화장실이 급하다고, 동호회 사람들이 들어오곤 했다. 다행히 본관 건물엔 아무도 없었다.

이선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월요일에 오셨다고… 음, 기사로 봤어요.”

혼자 잔업을 하느라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선은 뒤늦게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뜬금없는 말이 어색한 인사와 미묘한 원망의 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구태의연하게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라며 이선을 민망하게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굳이 대답은 없었지만, 고개가 잘게 끄덕여지며 그의 머리카락이 약하게 흔들렸다. 이선은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밥은 먹었어요? 저녁밥도 안 주면서, 왜 늦게까지 일은 시킨대요?”

늘 그랬지만, 오늘따라 불만이 거세다. 불퉁한 그의 모습이 만화영화에 나오는 투덜이 캐릭터 같다.

“…….”

이선은 대답 없이 투덜이 스머프를 올려다보았다.

원망하기도 했고, 후회가 일 때도 있었다. 그가 한국에 없는 몇 주는. 그리고 기사로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 아래, 송재혁에게 언젠가 들었던 여배우와 이름이 나란히 적힌 댓글을 보는 순간엔 알 수 없는 배신감도 느꼈었고.

결혼하지 않겠다고. 적어도 자신의 눈앞에서는 하지 않겠다는 말은 분명 사탕발림이었다. 자신 역시 사내였으니, 이해하지 못할 마음도 아니었다. 정욕에 잠긴 남자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걸 진심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전 여자친구와 재결합 후 미국 진출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댓글을 볼 때마다 손끝이 얼어붙었다.

그의 초대로 경기를 보러 오고, 시합 후 직접 에스코트하러 관중석까지 왔다니. 자신이 봐왔던 강희찬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포츠 뉴스 댓글 하나를 읽은 순간, 정말 우습게도 온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피가 통하지 않는 양손을 쥐었다 펴며, 이선은 되새겼다.

‘어차피 먼 훗날에는 제 곁에 없을 사람이다. 조금 일찍 끊어내는 것뿐이다.’

그리 생각하다가도, 답장도 오지 않는 문자를 볼 땐 화가 나기도 했다. 먼저 내민 손이 바보 같게만 느껴져서.

하지만 어둠이 깔린 학교에 서 있던 그를 본 순간 원망도, 후회도 사라졌다. 오롯이 남은 건 강희찬뿐이었다.

이선은 마치 달빛 아래의 여우에게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입술을 떼었다.

“저, 밥 먹었어요. 선생님들이랑 햄버거 배달시켜서.”

“그걸로 저녁이 돼요?”

“강희찬 씨, 저녁 안 드셨으면 간단하게 먹어도 될 것 같은데…….”

‘먹었다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햄버거만 먹기 허하다며, 이것저것 시켜보라는 고대영의 말 덕분에 여러 사이드 메뉴를 함께 먹었다.

방금까지 배 속을 채우던 밀가루며 패티가 스스로 움직이며 공간을 만들었다. 생각해 보니, 햄버거는 식사가 아니다.

사람의 몸은 정신이 지배하는 게 분명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이선이 뒤늦게 긍정하려 했지만, 강희찬의 턱이 차를 가리키는 게 먼저였다.

“정 선생 먹었으면 됐어요. 어차피 호텔에서 몰래 나온 거라서. 타요.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몰래?’

이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오피스텔을 두고, 왜 호텔에서 지낸단 소린가? 그리고 몰래 나왔다는 건,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얘기일까?

호기심이 체세포 분열을 하듯 몽글몽글 불어났다. 하지만 강희찬은 그저 먼저 등을 돌리고, 제 차의 운전석을 향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르다, 문득 궁금한 것이 하나 더 늘었다.

“근데, 저 차 없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공무원들은 먼지 많은 날엔 차도 못 가져오게 한다면서요. 먼지가 많으면 차를 쓰게 해줘야지, 왜 길바닥을 걷게 만들어요? 이해를 못 하겠네.”

“…….”

이번에도 투덜이다.

그나저나, 저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지 퍽 신기했다. 아는 공무원이 없다고 했으면서.

더 이상 그의 입에서 투덜대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조수석 문을 열었다. 내부는 몇 번 타봤다고 안락하게까지 느껴졌다.

간사하기까지 한 제 마음이 우스워서 이선은 몰래 혼자 웃었다.

“근데 햄버거로 진짜 저녁이 돼요?”

시동을 건 강희찬이 부드럽게 차를 움직였다. 이선은 안전띠를 마저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드 메뉴 많이 시켜서 같이 먹어서 괜찮을 것 같아요. 강희찬 씨는, 혹시… 저녁 안 드신 거예요?”

“먹었어요. 호텔 밥.”

“그러시구나…….”

오랜만이라고, 혹은 훈련은 고되지 않았는지. 문자는 왜 대답을 해주지 않았는지. 그런 말들은 목에 턱 걸린 채로 나오지 못했다. 이선은 다시금 부족한 제 말주변이 원망스러워졌다.

이선의 말주변과는 다르게, 그의 차는 부드럽게 학교를 빠져나갔다. 학교 주변의 좁은 차도를 지나 큰길로 나서니, 저번에 그와 함께 갔던 죽집도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학교에서 애매하게 멀다고 느껴지던 게 제 자취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강희찬이 운전하는 차를 타니, 오늘따라 유독 가까웠다. 신호에 걸리지도 않는 차가 큰길을 몇 번 꺾자, 금세 이선이 사는 동네로 바뀐다. 지나칠 정도로 규정 속도를 지키고 있는 차가 빠르게 느껴졌다.

골목에 들어서자 차는 서행을 시작했다. 이선의 집이 가까워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근데, 오늘 왜 오셨어요?”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이선은 문득 그와 함께 파전집에 갔다가 나왔던 일을 떠올렸다.

기분이 많이 상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강희찬은 평소와 비슷했다. 그래서 사과를 늘어놓기도 애매해졌다.

그가 이선의 원룸에 데려다준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길을 잘 찾는 편인지, 그는 남의 동네인 골목을 익숙하게 잘 돌아 이선의 원룸 앞에서 차를 정차했다.

그리고 그가 손을 뻗어왔다. 이선의 몸이 잠시 굳었지만, 그의 손이 향한 곳은 조수석 앞의 글러브 박스였다. 그곳을 열고, 그는 봉투 하나를 꺼냈다.

“혹시 송 PD한테 받았습니까?”

이선은 그가 내미는 봉투를 멀거니 보았다.

“…….”

무광의 검은 바탕에 구단 마크. 그리고, ‘SH 컵스 프로야구단’이라고 쓰여 있었다.

‘봉투’다. 그랬기에, 공무원 신분인 이선으로서는 움칫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세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딘지 모를 좋지 못한 예감과 더불어.

잔뜩 긴장한 손끝이 강희찬이 내민 것을 쥐었다. 그리고 ‘SH 컵스 프로야구단’이라는 문구와 구단의 앰블럼이 박힌 봉투를 열었다.

“이거…….”

이선은 말을 잇지 못했다. 멍한 눈은 안에서 나온 두꺼운 질감의 종이에 머무르기만 했다. 그 모습을 흘긋 본 강희찬이 입술을 열었다.

“송 PD한테 받았으면 그 티켓은 그냥 다른 사람 주든가 팔아버리고, 이 자리로 들어오세요.”

“…….”

“원래 1차전엔 대통령 시구 오고, 오너 가족들이랑 그 밑에 직원들 줄줄이 들어와서 중앙 테이블석 빼기가 쉽지 않거든요. 송 PD 이름으로는 못 구할 겁니다.”

Invitation

연도가 적힌 숫자나, ‘한국시리즈’라는 단어보다도 더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짧은 영단어였다. 수원에서 제가 직접 결제를 해서 받았던 티켓에는 없었던 말이기도 했다.

“저기…….”

이선은 티켓을 쥐지 않은 손을 꾹 말아 쥐었다. 1차전 경기 하루만 사용 가능하다는 작은 설명을 본 순간 이선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강희찬의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난 첫날 나가요. 금요일에. 6시 반 시작이니까, 정 선생 퇴근하고 와도 충분할걸요?”

입술을 꾹 물며 눈을 감았다. 마치, 두 갈래의 길 앞에 서서 고민을 하는 시인이 된 것처럼.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고민하고 길을 택했는지, 시에는 나오지 않았다.

“저… 그날 못 갈 것 같아요.”

말을 뱉어내는 게 이렇게 어려워도 되는 것일까. 이선은 마치 앞으로 연을 끊자는 말을 하는 것처럼 힘겹게 말했다.

비장하기까지 한 이선을 곁눈으로 바라본 강희찬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낮은 목소리가 끈질기게 이유를 추궁한다.

이선은 제 무릎으로 시선을 내렸다. 가죽 시트와 천이 마찰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강희찬이 제 쪽을 향해 몸을 틀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말해야 한다는 것을. 미루고 미뤄왔던, 갈림길을 택할 순간은 지금이었다.

“그날… 시험 있어서요.”

“무슨 시험이요?”

목소리는 초겨울의 새벽 공기처럼 선득하게 가라앉았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강희찬이 이미 이유를 알아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눈동자는 여전히 무릎과 글러브 박스 사이를 헤맸다.

한참 다물렸던 입술이 겨우 떼어졌다.

“공무원 시험이요. 국가직.”

“…….”

말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끝내는 공기 중으로 흐려진 것 같았다.

이선은 아무 말 없는 강희찬을 용기 내어 올려다보았다. 예상대로, 그의 목소리보다도 가라앉은 눈이 저를 향해 있었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잠시일 테지만 이선에게는 억겁보다도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강희찬은 한숨과 함께 제 앞머리를 헝클었다.

“선생 그만두고 공무원을 또 하겠다는 건 아닐 테고…….”

“…….”

“어차피 시험 다 끝났을 시간 아닙니까? 끝나고 와요. 그래도 되잖아요. 야구시합 그렇게 빨리 안 끝나요.”

공기는 헝클어져도 금세 제자리를 찾는 그의 머리카락과는 달랐다.

무언가를 누르는 대신, 한숨처럼 흐르는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밀실을 갈랐다. 그것을 듣고 있자니, 이선은 죄책감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딱히 기분 탓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

“그래도 안 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숲속의 갈림길을 만났던 시인도 분명 고민했을 거다. 그 역시 선택을 미루고 미뤘을 테지. 하지만 결정의 순간은 언젠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이선은 머릿속으로 신규진과 강희찬의 곁에 모르는 이를 세워보았다.

신규진의 경우는 상상할 것도 없었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그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바뀔 때마다 이선은 꼭 한 번씩 눌러보곤 했었으니까.

강희찬은 메신저의 프로필에 사진을 걸어두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의 프로필을 이선은 이따금 눌러봤었다. 빈 공간은 이유를 모를 안도감을 주면서도, 언젠가 이곳에 누군가의 모습이 채워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일으켰다.

이선은 모르는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나, 혹은 시간이 더 흐른다면 누워 있는 아기가 들어오겠지.

그건 이상하게도 신규진이 그의 여자친구와 있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도 이선을 힘들게 했다. 실제로 보는 것도 아닌, 상상일 뿐인데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모습을 실제로 볼 자신은 없다. 내성이 생기지 못한 아픔을 견딜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익숙하고, 무뎌진 아픔이 나았다. 얼마나 아플지 미리 알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이선이 갈림길을 선택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은 지금이 마지막이다. 이선은 그리 정했다.

시험이 끝난 아들을 위해 한 상을 차리고 기다리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다시 보지 않을 각오로 말했던 스무 살의 어느 날처럼. 이선은 다시 한번 결심을 해야만 했다. 그때와는 달리, 강희찬에게 등을 돌려야 하는 순간은 이상하게도 몸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착각일 것이다. 잘려 없어진 팔이 아프다 느끼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결국은 적응하는 것처럼, 이선 역시 언젠가는 그를 생각해도 코끝이 시큰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게 대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중물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이선은 마른침을 삼켰다.

“티켓은… 다른 필요한 분한테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머뭇거리는 목소리만큼이나 더딘 손이 티켓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처음부터 열리지 않았다는 듯 빳빳한 봉투는 콘솔박스 위에 놓였다.

멋지게 시합을 마친 그가 모자를 벗어 관중석을 향해 인사를 한다. 그의 시선 끝에는 프로야구 선수의 곁에 세워도 더없이 잘 어울릴 미인이 있었다. 서로를 향해 눈빛을 주고받는 여배우와 야구선수의 투 샷을 숱한 카메라들이 찍겠지.

그런 광경이 머리를 스쳐 지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선은 눈을 깊이 감았다, 천천히 떴다.

어차피 제가 이 티켓을 손에 쥔다고 해서, 그의 미래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미래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건 강희찬이 걸어갈 옳은 길이 아니었다.

“그럼, 먼저…….”

할 일을 마친 손을 말아 쥐고, 이선은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행동이 빠릿빠릿하지는 않았다.

빠릿빠릿한 편은 아니었지만, 굼뜬 것도 아니다. 이선은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그리 내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들어 올려 차 밖으로 내었다. 차 문을 닫고, 걸음을 떼는 순간마다 이선은 속으로 되뇌었다.

이게 맞는 거라고.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라고.

언제나 갈 곳을 찾기만 하는 자신의 마음이 더 정을 주기 전에, 지금 이렇게 서로의 길을 가는 게 맞는 거라고.

수없이 되뇌며,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끌고 있을 무렵이었다.

쾅.

이선이 조수석 문을 닫을 때보다 거친 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머리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팔이 거센 힘에 부여 잡혔다. 놀랄 새도 없이, 몸이 강제로 돌려졌다.

“아……!”

뒤늦은 통각이 머리에 도착했다.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이선은 눈을 움직이며 시야를 다잡았다.

눈앞엔, 미련 없이 차를 출발시킬 줄만 알았던 강희찬이 있었다.

“이거.”

그의 손이 이선의 손을 억지로 끌었다.

봉투째로 구겨진 티켓이 이선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강희찬은 억지로 이선의 손을 쥐게 만들었다. 꽉 쥐어지는 주먹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이선의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악력은 그대로였다.

“저……!”

손이 아프다고. 아픔을 피하려는 본능이 강희찬을 올려다보게 했다. 하지만 다시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서늘했다. 괴담에 나올 법한 조각상 같은 무표정함에 이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특이할 정도로 표정 변화의 폭이 좁은 편이었는데도, 지금은 달랐다. 언제나 지어 보이던 무표정 아래로, 끓는 듯한 열기가 느껴진다.

싸늘한 표정 아래로 노기를 겨우 누르고 있는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한번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그의 입술이 열렸다.

“어차피 필요 없으니까, 정 선생이 버리든 남을 주든 마음대로 하세요.”

억지로 티켓을 쥐여 준 강희찬은 거칠 정도로 팔을 뿌리쳤다. 순간적으로 몸을 휘청거린 이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자신을 대할 때, 이렇게 거칠었던 적이 있던가? 이렇게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힘을 줬던 적이 있었나?

막연히 운동선수이니 힘이 센 편일 거라고.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선은 딱히 체감할 순 없었다. 그 이유를 지금 알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힘을 의식하며 이선을 배려했던 것이다. 어느 순간이든. 하물며, 사내로서의 열기에 몸이 뒤덮인 순간에도, 강희찬은 자신을 배려했었다.

그걸 지금 깨달은 거였다. 하필이면 지금. 이미 그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순간.

“…….”

등을 보인 강희찬이 차를 향해 걸었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따라가기도 벅찬 보폭과 걸음 속도였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이선의 두 눈은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너무도 빨리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이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흐릿해지는 시야가 짜증스러웠다.

지독할 정도로 제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는 눈매도, 방금까지 제 손을 움켜쥐었던 큰 손도.

괴물처럼 커다란 검은 차는 순식간에 그를 삼켜냈다. 마치 이선이 그를 눈에 담고 기억에 넣을 시간을 주고 싶지 않은 것처럼.

쾅!

자동차의 문소리가 적막한 어둠이 깔린 골목길을 울렸다. 이선의 귀는 차 안에서 기어를 바꾸는 소리마저도 예민하게 잡아냈다.

…자신은 언제나, 무엇이든 느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소중한 사람은 너무 멀리 떠나 있었다. 언제나.

그리고……. 느릿한 자신과 함께 어깨선을 맞추어주던 사람에겐, 아마도 저것이 원래 본인의 속도였을 것이다.

툭-

더운 물방울이 뺨을 스쳐 지났다. 운동화 앞으로 툭 떨어진 물방울이 처음엔 비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남자의 뒷모습을 담는 걸 자꾸만 방해하던 것. 흐려지던 시야가 무엇이었는지 그제야 알아챘다.

“…….”

검은 차가 순식간에 좁은 골목을 빠져나간 순간, 이선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번에도 또 늦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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