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K(2)
안정된 걸음이 주방으로 들어오는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을 향했다. 그의 걸음은 성인 남자의 체중을 오롯이 받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에게 안겨 옮겨지는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주방과 거실이 이런 식으로 확실히 분리된 집 구조를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어디쯤일까.
호기심이 피어올라 실눈이라도 떠볼까 생각했지만, 그런 무모한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눈을 뜬 순간 그와 시선이 마주칠 것 같아서. 그 대신 이선은 더욱 질끈 눈을 감으며, 입술이 주는 감각에 집중했다.
그의 혀가 아래에서부터 밀고 들어온 탓에 입술을 다물 수 없다.
딱 견딜 수 있을 만큼 버겁고,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수치심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버텨낼 수 있을 만큼의 수치와 자극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니, 확실했다.
언제나 사람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이런 것까지도 능숙하단 말인가…….
지나치게 더워지는 체온을 의식하지 않으려, 이선은 괜한 투정을 속으로 집어삼켰다. 더워지는 온도도, 벅찬 숨도. 전혀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체향이 지나치게 짙어졌다 싶을 무렵, 몸이 기울었다.
‘떨어지는 게 아닐까.’
그런 반사적인 두려움으로 눈을 반짝 떴을 땐, 이미 등이 푹신한 무언가에 파묻힌 채였다.
“아팠어요?”
입술을 뗀 그가 걱정스레 내려다봤다.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민망한 탓에, 이선은 괜히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다. 자신의 얼굴 양옆을 받친 강희찬의 팔 너머로 언뜻 침대 헤드가 보였다.
헤드가 왼쪽에 보인다는 건 침대에 제대로 누워 있지 않는다는 소린데…….
자신의 원룸에 있는 싱글 침대에 이런 식으로 누웠다가는 벽에 머리가 부딪히기 십상이었다. 문득, 머리 위로 얼마나 공간이 남았는지 궁금해졌다. 이선은 고개를 쭈욱 뻗으며 위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턱을 가볍게 잡아 쥔 강희찬에 의해 좌절되었다.
“뭐 해요.”
다시 한번 마주한 그는 슬쩍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마치 정신 산만한 어린애를 보는 듯한 한심한 눈길이 쏟아졌다.
주눅이 든 이선은 한 번 입술을 합, 하고 감쳐물었다가 풀며 고개를 약하게 저었다.
“아, 아니요.”
돌침대도 아니고, 빨려 들어갈 것처럼 푹신한 침대에 눕히면서 괜한 질문이다. 유일하게 불편했던 건 눕혀지는 순간 뒷머리를 감싸 쥔 그의 커다란 손이었다. 단단한 손이 아니라, 그냥 침대에 바로 닿는 게 더 나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선은 그런 구태의연한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나 머리를 감싸주는 커다란 손은 배려와 염려가 확실했다.
그의 체온이 몸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몸을 일으킨 그가 팔을 뻗어 침대 옆 조명을 켰다. 따뜻한 빛이 방 안을 채웠다. 천장만 살펴도 방의 넓이가 가늠되었다.
어스름한 조명 불빛처럼 누군가의 체향이 좁지 않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야구장에서 만난 그의 후배와 냄새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의 공간에 담뿍 담긴 채로 느껴보는 향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온전히 한 사람의 체취로만 가득한 공간이 지나치게 넓다. 이제 다른 누군가의 향기가 끼어들 여지를 남겨둔 것처럼.
“…….”
어지러워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이선은 침대 밖으로 나온 채 공중에 달랑 떠 있는 종아리를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앉아서 뒤를 돌아 침대를 바라봤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아니 그보다도 훨씬 컸다.
하긴. 이렇게 키와 체구가 큰 사람인데, 자신의 원룸에 있는 싱글 침대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몸이 중요한 직업이니만큼, 먹고 자는 것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송재혁의 말이 떠올랐다.
‘…그뿐이다.’
이선은 팔꿈치를 무릎에 받치고, 고개를 숙이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짚었다.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자도 충분할 공간의 침대의 가치는 지금의 강희찬에게는 그뿐일 테다.
머지않은 미래에, 오롯이 그의 체취가 담긴 공간에 누군가의 향이 섞인다. 대부분의 선수들, 아니, 보통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눈가를 짚고 있는 손 위로 단단한 온기가 맞붙었다. 이내 그것은 이선의 손목을 그러쥐고, 제지하듯 얼굴에서 손을 치우게 했다.
“왜. 어지러워요?”
침대에 앉은 이선의 앞에 나타난 남자는 무릎을 꿇은 채였다.
이선은 시선이 낮아진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언제나 이선보다 눈높이가 높았던 사람의 얼굴을 이 각도에서 보다니. 새로웠다. 올려다보는 걱정 어린 얼굴이 꽤 귀여워서, 어리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요.”
이선은 고개를 저으며 팔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놓아주는 대신,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며 튀어나온 손목뼈를 슬슬 쓸 뿐이다.
…닮겠지. 그의 얼굴 위로 그를 닮은 아이의 모습이 언뜻 그려졌다.
아마 아들이 하나 정도는 있을 것 같다. 왠지 모르게 그럴 것 같았다. 야구선수 아빠니까, 그 옛날 자신의 아버지가 꿈으로 여겼던 아들과의 캐치볼도 잘 해주겠지. 어릴 적부터 야구공과 친하게 지내고, 아버지의 커다란 유니폼을 원피스처럼 입으며, 선수인 아버지를 누구보다도 자랑스레 여기는 아들이겠지.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자상하고 멋진 아빠라니. 자신은 이제 가질 수도, 될 수도 없는 존재였다.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우습기만 하다. 미래에 제 아이에게 다정히 웃어줄 그를 상상한 순간 쓸쓸해지다니. 그의 아이 너머로 누워 있을 여자를 상상하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지다니.
제 미래는 짙은 안개에 둘러싸인 듯 형체조차 보이지 않아도, 강희찬의 미래는 이리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게 억울하기까지 했다.
다른 세계를 살고 있고, 다른 세계에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이다. 아무리 이어도 만나지 못할 평행선처럼.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자신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주어도, 그는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 남겨질 사람이 아니었다.
고집스레 강희찬을 외면했다. 시선을 돌린 이선의 고개를 억지로 제 쪽으로 향하게 하는 대신, 강희찬은 이선의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
당황으로 뒤집힌 이선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울렸지만, 강희찬은 개의치 않았다. 대신, 양손을 이선의 뒤로 둘렀다. 허리 아래, 지금의 당혹감으로는 엉덩이라고 쳐도 좋을 만한 부분에 델 듯한 열기가 닿았다. 강희찬은 힘을 실어 이선의 몸을 제 쪽으로 당겼다. 반항 한번 해볼 새도 없이 쉽게 끌려가는 몸에 이선이 주먹을 내려 시트 자락을 쥐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점점 노골적인 부분과 남자의 단정한 얼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선의 손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아래에 있는 강희찬의 어깨를 양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꾸욱꾸욱, 힘을 주며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저… 저, 씻으면 안 될까요?”
“왜요?”
우스운 힘겨루기의 균형을 맞춰주던 강희찬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풀렸다. 고개를 든 그가 호기심 어린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왜냐고 물은 건가?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말을 잃은 이선은 잠시 무언가에 맞은 양 멍해졌다.
본인이야 야구장에서 씻고 나왔을 테고, 평소에도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이니 이런 곤란함을 못 느낄지 몰라도 보통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이기적일 수가 있다니…….
묵언을 다른 의도로 해석했는지 그는 이선을 무시하고 다시금 고개를 파묻으려 했다. 그의 몸짓에 이선은 다리를 버둥거렸다.
누군가의 팔 사이에 갇힌 채 앉혀져 있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잘 느껴졌다. 그의 깨끗한 얼굴이 제 몸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으로 향한다는 건 수치심을 더할 뿐이다. 이선은 급해졌다. 본능적으로 뒤트는 몸은 쉬이 그의 팔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 강희찬 씨는……! 야구장에서 씻고 나오셨잖아요…….”
“…….”
“강희찬 씨만 좋은 냄새 나고…….”
엉덩이를 뒤로 물리려는 몸짓과 그에 반해 침대 가장자리로 끌어당기려는 힘이 서로 대치했다. 괜한 반항이 귀찮았는지 강희찬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정 선생은 안 씻어도 괜찮아요.”
더 이상의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말이 공기를 울렸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표정이야 그대로 헌법재판소에서 판결문을 읽고 판결봉을 두드려도 되겠지만, 뱉는 말만큼은 이선을 어처구니없게 만들었다.
“…….”
…대체 뭐란 말인가. 서러워지는 마음을 누르려고 입술을 꾸욱 물었다.
그러면서도 저 자신이 우스웠다. 남자와 잔다는 것이 무섭다든가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아직, 그런 건 묘하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라도 자신이 우는 순간, 강희찬이 혀를 끌끌 차고 멈추면서도 제집의 현관문을 열어서 보내줄 것이라는 묘한 신뢰감이 있었다.
이선을 멈칫하게 만든 건 다른 이유였다.
아주 먼 훗날. 강희찬의 기억에 자신이라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남아 있다면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야구장에서 몇 시간이나 앉아 있느라 옅게 땀까지 배어났을 체취가 아니라. 그처럼, 그의 방처럼 좋은 냄새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고. 남자와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역겨웠다거나 토할 것 같은 기억으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상했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가 비웃을 것만 같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울 뿐인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이선은 모른다. 그래서 입술을 꾸욱 물고, 그의 어깨를 짚은 팔에서 긴장을 풀지 않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강희찬은 지나치게 힘을 주고 있느라 떨리기까지 한 이선의 손을 흘끔 봤다. 마음만 먹으면 그냥 무시하고 밀어붙일 수도 있는 힘이다. 아니, 마음을 먹을 것도 없다. 아마 어린애 팔을 비틀어버리는 것보다도 쉬울 것이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은 강희찬을 제대로 막고 있었다. 우습지도 않게 가드를 세우는 팔을 무시하는 대신, 강희찬은 입술을 열었다.
“정 선생, 왜요.”
“…….”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꾸욱 다물린 입술 덕분에 양쪽 뺨이 다소 봉긋하게 올라왔다. 운동하는 놈들이 저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당장 귓방망이가 날아와도 할 말이 없을 테지만……. 정말 다행히도 선생은 운동선수가 아니었다.
선생은 직접 말로 자기주장을 하는 경우는 적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가 자신의 호오에 대한 표현이 적은 만큼, 강희찬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지금 그는 이선의 온 신경과 불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최대한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어디를 만져도, 선생의 몸은 자신, 혹은 매일 보는 동료들의 몸과는 구조 자체가 달랐다. 키를 고려했고, 이선이 일반인이라는 사실도 염두에 두었다. 비슷한 키의 선수들보다 한참 가벼울 거라고. 그랬음에도, 강희찬은 너무 쉽게 들어 올려졌던 그의 무게에 놀랐다.
일반인 기준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강희찬의 기준에선 말라도 너무 마른 몸은 직접 손바닥으로 만져봐도 마찬가지였다. 얇은 피부 한 겹이 덮인 무릎뼈. 다리 사이로, 더 깊은 곳으로 향하고 싶었던 코끝을 물렸다.
“…저 밖에 계속 있어서 땀도 났는데…….”
“안 씻어도 좋은 냄새 난다니까요? 몰라요? 자기 냄새.”
대충 되는대로 입 밖으로 뱉은 말이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차 안 방향제가 방해했던 옅은 향. 날 듯 말 듯 코끝을 스치던 냄새는 이선의 무릎에 얼굴을 가까이하는 순간 짙어졌다. 조금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셔 본다면. 체향의 진원지인 무릎 안쪽은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양 강희찬을 부르고 있었다. 바들대며 거부의 의사를 비치는 주인과는 달리.
선생에게선 좋은 냄새가 난다. 길을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들 그리 말할 터였다. 훈련 후 몸을 씻어서 여러 가지 제품 냄새가 날 자신과는 달랐다.
하지만 정작 체향의 주인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울상을 짓기만 했다.
“땀 냄새랑… 이상한 냄새 날 텐데…….”
힘으로 누르지 않는 한, 내일 아침까지 저 소리를 할 기세다. 결국, 졌다는 듯 고개를 든 강희찬이 양손에서 힘을 빼며 항복을 표시했다.
이선은 그의 손힘이 약해짐과 동시에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지금 기분 같아서야 당장 그의 팔이 미치는 범위에서 벗어나 방구석으로 후다닥 숨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대신 최대한 엉덩이를 뒤로 물려서 다리 사이가 그의 얼굴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강희찬은 잠시 말이 없었다. 견적을 내보는 사람처럼 이선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저런 식으로 자신을 쳐다봤었지…….’
반가운 기시감이 들려는 무렵, 강희찬은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이선의 몸이 달랑 들어 안아 올려졌다.
“으앗……!”
실없는 비명이 잇새로 흘렀다. 집에 손님용 실내화가 없어서 이러는 걸까. 난감한 친절은 영 익숙해지질 못하겠다.
계속 귀찮게 굴면 그가 자신을 창밖으로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근본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의 방에 들어올 때처럼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하지만 염려와는 달리, 강희찬은 침실을 나가지 않았다. 성큼성큼 몇 걸음을 걸은 후, 어느 문 앞에 이선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샤워부스 안에, 제일 아래 선반에 샴푸 있어요. 그 위가 몸이고.”
그는 말과 동시에 이선의 뒤에 있는 문을 열었다. 바로 바닥에 타일이 깔린 욕실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네.”
지금 밟고 있는 침실과 바닥이 동일하다. 대신, 어떤 연유인지 커다란 거울과 거울의 위아래로 수납공간이 있는 대리석 바가 있었다. 드라이기와 남성용 화장품 몇 가지가 그 위에 있는 걸 보면, 아마 화장대로 사용하라고 만든 공간이겠지.
이선은 흘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희찬이 말하는 샤워부스는 저 안쪽의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에 있을 것이라고 대충 짐작이 갔다.
“욕조는 물 온도 조절하려면…….”
“아, 아뇨.”
“…….”
이선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냥 샤워만 하면 돼요.”
제 말을 끊기까지 하며 손사래를 치는 이선을 그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다소 실례인 것도 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가는 직접 욕실에 들어와 물을 받아줄 것만 같아서,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손과 고개를 동시에 젓는 바보 같은 꼴을 뒤늦게 인식하고서야 이선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시선을 피한 이선의 얼굴 위로,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드리웠다. 그리고 갓난아기를 만지기라도 하듯 조심스레 손길이 붙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뿌리칠 수 없는 힘이 얼굴을 매만졌다.
“뜨거운 물에 좀 담그고 있으면 얼굴도 좀 나아지지 않겠어요?”
“…네?”
이선의 손이 강희찬의 온기가 닿지 않은 반대쪽 뺨을 본능적으로 짚었다.
그가 대체 어떤 얼굴을 보고 있는 건지. 그건 먼 훗날, 그가 자신을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과 비슷했다. 자신은 실제로는 좋은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남이 보는, 특히 그가 보는 나 자신이 조금은 괜찮았다면……. 조금쯤은 좋게 보였으면 하는 마음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체향과 더불어 안색에도 자신감을 잃었다. 이선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싶었다. 하지만 강희찬의 손이 그것을 막았다.
“왜. 실망했어요? 몰래 도망가려고 했는데, 욕실 여기로 쓰라고 해서.”
“…도망 안 가요.”
이선의 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소년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비춘다. 이선은 뾰족하게 눈을 치켜떴다.
…그런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는 못 하겠지만, 저리 나오면 자존심이 상한다.
키득거리는 웃음이 어울릴 장난기 어린 표정은 여전했다. 그의 시선은 주먹을 말아 쥐고, 도망가지 않는다며 호승심을 발휘하는 이선을 내려다본다. 그 아래에 어떤 생각이 깔려 있는지는 너무도 자명했다. 듣는 둥 마는 둥. 대충 고개를 끄덕인 강희찬은 그대로 제 할 말만을 이었다.
“그러면 다행이네요.”
얼굴에 닿아 있는 손가락이 미묘하게 움직인다.
누군가 뺨을 쓰다듬는다. 성인이 된 이선에게는 영 생경한 감각이었다. 강희찬의 손은, 높이가 낮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제 손길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자신은 어른의 손에 거부감이 없는 열 살이 아니다. 이선은 고개를 슬쩍 비틀었다. 커다란 손에서 벗어나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금세 부질없어진다. 위협적일 만치 커다란 손은 여전히 이선을 그의 범위 안에 두었다.
대신 가벼운 실랑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순간 강희찬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어디 하나 모난 구석 없이 현실감 없게 완벽한 얼굴은 저런 웃음을 지으면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미술학원의 석고상이 갑자기 웃는 것처럼. 아니면, 이선의 본능이 감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잘생긴 남자가 저런 웃음을 지을 땐, 외적 조건으로도 감출 수가 없는 끔찍한 말만 한다는 것을.
삐뚜름한 호선을 그린 입술이 열리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
“한밤중에 남자 강간하려고 잡으러 가는 모양새는 좀 그렇잖아요.”
“강희찬 씨.”
이선이 눈을 질끈 감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말이 주는 충격 탓에 파르르 떨리는 이선의 입술 위로 긴 손가락이 닿았다. 이선은 반항하듯 입술을 감쳐물며 그의 손가락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조금은… 화가 나는 건가.’
아까부터 이런 식이었다. 강희찬은 여기까지 스스로 걸어 들어온 이선의 의지를 무시하고 있었다. 마치, 언제라도 가겠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을 꿰뚫어 본다는 걸 알려주듯이.
꾹 다물린 입술 위로, 손가락과는 다른 습한 온기가 붙었다. 쪽, 하고 장난스러운 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몇 번이나 울렸다.
마음이 상한 이선은 그런 장난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피해보려 고개를 비틀었다. 이번에도 허사였다. 이제 양손으로 틀어 쥐어진 얼굴은 꼼짝도 할 수 없다.
“…….”
언제라도 도망갈 틈을 줄 것처럼 헐렁하다가도, 이런 순간 이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가 이선의 마음을 꿰뚫어 볼 때마다, 이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부탁의 말이 입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이것을 노리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라면, 지독할 정도로 사람을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제발 그렇지 않았으면 하지만…….
멋대로 입술을 쪼는 입맞춤이 멈추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강희찬은 이선의 뒤에 있는 문을 손수 열어 틈을 크게 만들었다.
“들어가세요.”
울렁거리는 자신의 기분과는 다르게 평이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선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몸을 돌렸다.
“정 선생님.”
그의 손이 받치고 있는 문틈으로 들어가려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절반 정도 그에게서 돌아섰던 이선의 고개가 다시 강희찬을 향했다. 얼핏 어린 불만스러운 표정을 강희찬은 구태여 지적하진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이번에도 비슷한 위치에서, 하지만 조금 가깝게 이선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네?”
강희찬은 무언가를 고민하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사이에도 시선은 집요할 정도로 얼굴에 머무르는 탓에, 이선은 괜히 민망해져 눈을 굴렸다. 얼마간 말이 없던 그는 문을 받치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려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한숨과 함께, 단정한 이마가 드러났다가 가려졌다.
“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그냥 호텔로 간다고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정 선생 집이나, 그 남자 집 말고.”
“…….”
“…그게 좋을 겁니다.”
불쾌한 상상이라도 하는 듯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선은 차마 그에게 ‘그건 그쪽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니다’라며, 매정하게 말하진 못했다. 다른 생각이 멍한 이선의 머리를 채웠다.
“…….”
…다른 사람과 또 이래야 하는 거다. 그 사실이 이선의 머리를 때렸다.
상상할 수 없는 미래다. 다른 남자를 만난다. 이런 식으로 입술을 맞대고 온기를 느끼고. 지나치게 뛰는 심장 소리가 전해질까 긴장하고, 타인에게 느껴질 자신의 체취가 좋았으면 하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런 걸 다시 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의 자신은 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 한다.
자신에게는 견디고 서 있기도 힘든 순간이, 강희찬에게는 그저 지나면 아무것도 아닐 순간이다. 강희찬이 아닌 다른 남자의 온기에 닿을 자신처럼, 강희찬 역시 이 집에 누군가를 데려올 터였다.
모든 것이 처음투성이다. 다시 누군가와 살을 맞댈 자신이 상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강희찬에게는 아니다. 그에게 자신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인연 중 하나다. 그것이 이선을 멍하게 만들었다.
“저… 씻을래요.”
얼굴을 더듬는 손을 피했다. 서운할 필요가 없다고 되새겼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이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서 강희찬이 모르는 여자와 아이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당연한 일인데도 서운해하는 자신이 퍽 우스웠다.
“…….”
강희찬은 묘하게 삐딱해진 이선의 태도를 책망하진 않았다. 대신 이선이 들어갈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가면 제 손으로 직접 문을 닫아야 만족할 기세기에 이선은 포기했다.
‘하긴, 이제 더 우스울 것도 없지.’
이런 순간에도, 그의 체온과 입맞춤에 정신을 놓고 있는 순간에도, 이 앞으로의 일이 두려운 순간에도 자신의 땀 냄새를 걱정했으니까.
좋은 사람이 아닌 주제에, 그의 기억 속에 남을 자신은 좋은 사람이었으면 했으니까.
* * *
달각.
문이 열리는 소리가 괜히 더 크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너무 소리가 큰 탓에, 이선은 순간 어깨를 떨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문을 열기 전부터 이선의 눈은 이미 아래를 향한 채였다. 눈을 조심히 들었다. 머뭇머뭇 올려지는 시야엔, 여전히 침대 옆 조명 하나만 밝힌 어둠 속 남자가 드리웠다.
이 집에 들어온 이선은 누워 있거나, 눕지 않았다면 강희찬의 몸에 매달려 있었다. 그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방의 전경이 그제야 눈에 찼다.
허할 정도로 너른 침대에 위화감이 들 만큼 가구가 적은 방. 이곳은 순전히 자는 용도로만 사용하겠다는 집주인의 의지를 철저하게 대변했다.
욕실에 들어가기 전, 이선이 눕혀진 자리에 강희찬이 앉아 있었다. 눈썹을 들어 올린 남자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여전히 욕실 문 앞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선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이선의 발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쳤다. 미세한 움직임을 보기라도 했는지, 강희찬의 미간이 잠시 구겨진다. 실제로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은 것이나 마찬가진데……. 이선은 어쩐지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했다.
“삶아져서 나오는 줄 알았어요.”
“아…….”
시간이 대체 얼마나 지났는지. 삐딱한 책망에 이선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내가 씻으면 얼마나 씻었다고. 그런 모난 반발심이 들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남의 집에서 씻어본 적이 없는 이선은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실례가 될 정도로 오래 씻은 걸까?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시계를 찾았다. 하지만 조명을 올려둔 협탁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서랍장 하나 보이지 않는 방이다. 벽시계라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점점 거리를 좁히는 강희찬을 향해 온 신경이 쏠렸다. 이선은 아닌 척 일부러 더 시선을 돌렸다. 그런 행동을 막기라도 하듯,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사람의 손이 뺨에 올라붙었다.
“밖에, 내가 샤워가운 둔 건 못 봤어요?”
강희찬의 눈이 이선을 위아래로 훑었다. 수건으로 털었지만, 여전히 젖은 티가 나는 머리나 맨발. 그것만 아니었다면 씻으러 들어가기 전과 다른 게 없는 차림새다. 알맹이가 되는 사람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 강희찬의 눈엔 탐탁지 못했다.
기껏 씻겠다고 앵앵대며 들어가 놓고, 옷을 다시 다 챙겨입고 나오다니. 쓴소리를 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
허무하지 않은가. 핸드폰의 시계와 들어오지 말라는 누군가의 무언의 외침이 뿜어 나오는 꼭 닫힌 문. 이선이 샤워를 하는 동안, 강희찬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두 곳에 시선을 번갈아 두는 일뿐이었다.
그러다 아차 싶었던 거다. 이선에게는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것을. 그대로 벗고 나와준다면 수고도 덜 들고, 시각적 즐거움도 누릴 수 있겠지만……. 절대 그럴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결국 조용히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서랍장에서 샤워가운을 찾아냈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경계를 한 선생이 문을 걸어 잠글지도 모른다고. 그런 허튼 생각을 하며, 도둑고양이처럼 가운을 찾아두었던 강희찬의 보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
양말은 신지 않은 걸 고맙게 여겨야 하나?
강희찬의 한쪽 입매가 비틀리며 피식 웃음이 새었다. 사람의 성의를 무시한 선생은 망부석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고개를 숙이며, 씻은 주제에 꽁꽁 다시 싸매고 나온 제 차림을 살폈다.
강희찬은 손을 뻗었다. 제 손이 부주의하게 만졌다가는, 크게 다칠 것만 같은 얼굴이 손바닥 아래에 닿는다. 부드럽게 힘을 더하면, 착하게도 얼굴이 자연스레 들린다. 시야에 들어오는 이선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현관에서는 당장이라도 얼어 죽을 것처럼 파리하게 질렸던 얼굴에 혈색이 돌고 있었다.
차갑게 사람의 성의를 무시한 주제에. 호구 주제에, 자신에게는 묘하게 차가운 호구의 온기가 가까워진다. 손바닥에 닿은 얼굴은 씻기 전보다는 따끈따끈한 채였다. 그나마 이건 좀 마음에 든다. 삐딱해지려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손바닥 위에서 말랑해진 뺨이 벙긋거리는 입술을 따라 머뭇머뭇 움직였다.
“아, 그거, 입어도 되는 줄 몰라서…….”
이건 또 뭔 소리람. 입으라고 일부러 거울 앞에 개어두었더니.
황당함이 번졌다. 따지고 싶었지만, 가까이서 흔들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책망은 목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
하지만 이선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 데서나 제집처럼 편하게 지낼 사람인 그와는 달리, 자신은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욕실에서 나온 순간, 들어가기 전에는 없던 하얗고 폭신한 수건과 마주한 이선은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것이 수건이 아니라 샤워가운임을 알아챘다.
저런 건 고급호텔에나 있는 줄 알았더니, 일반 가정집에도 있는 모양이구나. 수건을 손에 쥔 이선은 경계하듯 생소한 아이템을 보기만 했다.
강희찬의 화장품 옆으로 얌전히 있던 샤워가운을 보며, 이선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입어야 하는 걸까? 내가 입으라고 둔 것이 맞겠지?’
수건으로 닦아내어 물기가 마른 알몸은 금세 차가워졌다. 재채기를 하다가,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했다. 다 벗고 있는 제 모습. 헐벗은 몸을 거울을 통해 적나라하게 본 이선은 흠칫 놀랐다.
결국, 이선이 선택한 건 샤워를 하기 전 입었던 자신의 옷이었다. 제 옷을 선택한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샤워가운 아래에는 속옷을 입어야 하는지 벗어야 하는지.
일어날 일을 생각해 보면 벗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남의 집에서 속옷까지 벗은 채로 있는 건 말도 안 됐다. 이런 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혼란스러움을 안은 채로 속옷을 입었다. 씻기 전 입었던 옷을 또 입는다는 찝찝함과는 별개로 마음만큼은 한결 든든해졌다. 그런 까닭에 손은 자연히 제가 입었던 바지로 갔던 것뿐이다. 사용해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폭신하고 도톰해 보이는 가운이 아니라.
‘그래도 가운을 입고 나와야 했나…….’
여전히 강희찬의 손은 이선의 얼굴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옷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앞에 서자 선택에 후회가 생겼다.
“뭐, 상관없어요. 벗기면 그만이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 내뱉은 냉한 한마디는 이선의 모든 고민과 후회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뿌리가 박힌 듯 문 앞에서 굳어버리는 몸까지도.
그의 손이 조금은 억세게 이선의 고개를 들었다.
“…네?”
물음은 뒤늦었다. 숨을 채 들이쉬기도 전에 입술이 닿았다. 아니, 이건 ‘닿았다’라고 할 수도 없었다. 따뜻하고 습한 타인의 숨 안으로 먹혀들어 갈 것처럼 빨렸다.
지나칠 정도로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어느새 뒷머리를 받친 강희찬의 손 사이로 젖은 머리카락이 엉켰다.
입술은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지금 숨을 섞고 있는 것이 남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 체온이 높은 사람의 열기가 이선의 아랫입술을 힘주어 빨았다. 많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아…….”
엄살처럼, 혹은 투정처럼 신음이 흘렀다.
목을 타고 넘어오는 신음이 입술을 더 열게 만든다. 마치 무언가가 들어오기를 바라듯 열린 잇새로 젖은 혀가 파고들었다.
가만히 주먹을 쥐던 양손을 강희찬의 허리 뒤로 둘렀다.
그냥 막연히 상상했던 두께감이 아니다. 기사에 나오는 연예인들처럼 군살 하나 없이 들어간 허리일 것이라 상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반만 맞았다. 여분의 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허리는 이선의 예상보다 빨리 팔 안쪽에 닿았다.
옷 매치를 잘하는 편인지 생김새 때문인지, 평소에 멀리서 보면 그는 꽤 날씬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 팔이 둘린 허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두꺼운 나무처럼 단단했다. 유니폼을 입지 않으면 그저 건장한 젊은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몸은 보는 것과 실제로 만지는 것의 괴리감을 주었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운동을 하며 지낸다. 지금 학교의 야구부 학생들은 이선이 성인이 되기 전엔 만져본 적도 없는 추같이 생긴 기구로 근육운동을 했다.
강희찬도 아마 비슷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테지. 친구와 군것질을 하며 놀이터에서 노는 것이 아닌, 흙바닥을 달리며 훈련을 했을 거다. 저와는 모든 것이 다른 몸 위에는,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있었다.
땡볕에 새카맣게 탄 어린아이가, 선배들의 꾸지람을 견뎌내는 사춘기 소년이, 온 국민의 관심을 받던 앳된 청년이. 그의 모든 순간이 녹아 있는 근육이, 그 온기가 퍽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과거 어느 순간의 그를 만나더라도, 끌어 안아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선이 슬쩍 닿기만 해도 힘이 느껴지는 단단한 허리를 바투 끌어안으려는 순간이었다.
“아……!”
제자리에서 발이 떴다. 처음 겪는 것도 아니다. 본능적인 두려움과는 별개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 건 너무 쉬웠다.
질끈 눈을 감은 채로, 이번에도 강희찬의 목에 팔을 감았다. 스스로 걷는 것보다 안전하고 곧은 걸음이 이선의 몸을 옮겼다. 그리고 조금도 익숙해지지 못할 포근함에 눕혀졌다.
눕혀진 몸 위로 무게가 실리는 순간까지. 내내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에게 옮겨지는 동안 이선이 숨을 쉬려고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입술은 아프게 빨렸다. 위치적 유리함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선은 그에게 입술과 입 안을 모두 내어준 채로, 결국 아래에 깔리기까지 했다.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다리가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아마도 이번엔 제대로 눕혀준 듯했다.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발을 시트 위에서 버둥거렸다. 무거운 철근이 올라온 양 몸은 꼼짝도 할 수 없다. 와중에 발만 움직여봐야 시트에 주름을 만들 뿐이다.
이선이 목적도 없이 다리를 휘젓는 사이, 그는 수월하게 벌어진 다리 틈새로 제 몸을 맞추었다. 힘이 들어간 허벅지가 이선의 다리와 닿는다. 제 것과는 확실히 다른 다리. 매일 보는 아이들의 몸통보다 더 두꺼울 다리는 성이 난 것처럼 근육이 서 있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며 그의 몸 아래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다리를 움직이는 일조차도 여의치 않다. 가까이 맞붙은 그의 하체 중심이 더욱 이선을 굳게 만든다. 몇 겹의 천을 사이에 두고 이선의 중심과 닿아 있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열기와 부피감을 더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침대에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선은 왈칵 겁이 차올랐다.
“입, 좀 더 벌려봐요.”
온전히 제 몸을 누르는 체중은 그런 감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숨이 벅찼다. 강희찬의 입술이 떨어져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숨을 내쉬지 못했다. 얼굴로 몰리는 열기 위로, 더운 말이 내려왔다. 이미 혀뿌리가 아플 정도로 빨고 얽어대고 있으면서도 그는 탐욕스러운 말을 씹어뱉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손가락 하나가 이선의 입을 파고들었다.
아, 하는 신음과 함께 입술이 좀 더 벌어졌다. 벌어진 입가로 침이 흘러내리지 않을까, 하는 철없는 걱정을 할 새도 없었다.
“안에도 작네…….”
이미 한 번 들은 바 있는 불만이다. 이렇게 남의 입 안을 제 것처럼 쑤셔대면서……. 이선은 그런 투정을 뱉고 싶었으나, 입 안에는 누군가의 길고 굵직한 손가락이 들어차 있었다.
끙끙거리며 겨우 눈을 떴다. 그의 팔꿈치가 받치고 있는 높이. 딱 그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더운 얼굴을 보고, 이선은 다시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모로 틀었다.
왼편으로 보이는 문 틈새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머리는 뒤늦게야 그곳이 자신이 나온 욕실과 연결되는 문임을 깨달았다.
“…….”
손등 아래로 하얀 침대 시트가 스친다. 집보다는, 호텔에서나 쓸 것 같은 촉감이었다. 그의 취향인 걸까?
지금은 이렇게 사용감이 덜해도, 나중엔 달라지려나……. 문가의 벽면을 보는 이선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부옇게 흐려진 시야가 바뀌었다. 강희찬의 손이 그대로 이선의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게 했다. 방금 전의 정념은 그대로였지만, 위엔 감출 수 없는 걱정이 올라와 있었다.
“왜. 숨쉬기 힘들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이선의 눈동자에 맺힌 옅은 물기를 염려하는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입이 자유로워졌음에도 이선은 그저 꼭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다시금 고개를 틀려 했지만, 강희찬의 손바닥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강희찬 씨…….”
…자신이 없다. 그는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이렇게 뜨거운 체온을 느끼고 나서, 먼 훗날 TV에서 나오는 그를 보며 울지 않을 자신이 없다. 섹스는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자신은 아닐 터였다. 그때에도 여전히 빛나는 그를 보며, 코끝이 시큰해질 자신을 그리는 건 너무도 쉽다.
이선은 아까부터 주변만을 에두르던 눈을 강희찬의 눈동자에 두었다. 강희찬은 대답이 없었다. 이선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 대답을 대신했고, 닿아 있는 하반신은 무서울 정도로 묵직했다.
그의 온 신경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아는 건 너무도 간단하다. 이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안 되겠어요.”
“…….”
“…못 하겠어요.”
이선의 안색을 살피던 까만 눈이 한층 짙어졌다. 넘어진 어린애를 살피듯 염려하던 얼굴이 한순간 온도를 달리했다. 표정은 놀랍도록 똑같았지만, 기저에 깔린 감정의 지축이 뒤흔들렸다.
이선은 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고. 이건 좋지 못하다고, 부족한 말을 채우듯 고개가 흔들릴 때마다 강희찬의 손바닥은 멀어졌다.
“이런 건… 안 좋은 것 같아요.”
이선의 고개가 저어질 때마다, 강희찬의 발아래에선 무언가가 무너진다. 디딜 곳을 잃고, 이제 떨어질 일만 남은 채, 공중에 떠 있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왜요? 처음인데 막상 마음에도 없는 새끼랑 하려니까 구역질 나서? 아까워요?”
“강희찬 씨…….”
이선을 내리누르던 무게가 멀어진다. 불편하게 헐떡거리던 숨을 한 번에 내쉬었다. 호흡은 한결 수월해졌지만, 그렇다고 마냥 편한 건 아니었다.
몸을 일으킨 강희찬은 이제 팔꿈치가 아닌 손바닥으로 이선의 얼굴 옆을 받치고 있었다. 그만큼의 틈을 두고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높아진 만큼 한층 서늘하고 위압적이었다.
그의 말은, 마치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삐딱했다.
“강희찬 씨.”
이선은 이번에도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이 잘못할 때마다 이름을 부르는 탓에 몸에 밴 직업병이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선생님에게 혼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아는 열 살짜리 꼬마들이 아니다.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걸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희찬이었다.
“억울해요?”
삐뚜름한 물음이 이선을 재촉했다.
이선이 떨쳐 냈던 손바닥이 다시금 얼굴에 감겨들었다. 방금까지 닿았을 때보다 손바닥은 더 뜨거워져 있었다. 자신을 달래고, 안심을 시켜주던 온도가 아니다. 그건 그의 체온이 변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얼굴이 차게 식었는지도 모른다고. 이선은 생각했다.
평이한 어조로 물은 짧은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어딘지 조금 화가 난 이선이 말없이 강희찬을 노려보았다.
“…….”
“왜. 대답 못 하겠어요?”
TV야 보지 않으면 그만이고, 스포츠 뉴스는 애초에 별로 관심도 없다. 강희찬은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감기 한 번 걸렸다고 신문에 기사가 나는 슈퍼스타는 아닐 터였다. 노력하면 얼마든지 그의 소식은 듣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 거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그런 안일한 생각은 언젠가 머릿속에 그려봤던, 강희찬과 똑같이 생긴 아이를 떠올림과 동시에 깨졌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입학식에 온 강희찬을 마주한다. 다정하고 서로를 똑 닮은 부자.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한 순간, 속은 처음 배를 탔을 때처럼 울렁거렸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이를 향한 죄스러움이 밀려들었다.
이선이 입술을 악물었다. 그 위로 커다란 엄지가 붙어왔다. 그러지 말라는 듯이, 아랫입술을 빼내려는 듯. 손가락에 적당한 힘이 실린다. 강희찬의 목소리는 손가락의 압력과 무섭도록 닮아 있었다.
“나랑 처음인 게 그렇게 억울해요?”
“그게, 그게 아니라…….”
강하게 문 탓에 잇자국이 팬 아랫입술이 슬슬 쓸렸다.
처음이라서 아깝고 그런 게 아니다. 이게 뭐라고. 그의 말마따나, 남들도 다 하고 사는 일인데 아까울 게 무어란 말인가. 게다가 제 첫 경험이라니. 그런 건 어디에 가서 대단한 가치를 받을 만한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가 얼마나 믿어줄까.
영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입술을 지그시 보던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사이에도 이선의 멍한 시선은 강희찬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눈썹을 들어 올린 강희찬과 마주쳤다. 마주한 눈에는 잔상처럼 열감이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이선을 안심하게 했다.
우스운 일이다. 그와 잘 수 없다고 말하는 주제에, 자신을 향한 그의 정념이 거두어지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새삼스레 느껴본 자신은 너무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억울하게 생각할 건 없어요. 나도 처음이니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의 입술을 가르고 나온 소리는 꽤 오래 지나서야 이선의 머릿속에서 문장이 되어 의미를 전할 수 있었다.
…이건 상상의 범주에 없는 일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남의 입술을 잡아먹을 듯 헤집고, 숨을 삼키다니. 능숙할 정도로 익숙하지 않은가.
멍청히 벌어진 입술에 머물던 강희찬의 눈이 휘었다. 비릿한 웃음이나 짓던 입매가 드물게도 양쪽 똑같은 둥근 호선을 그렸다. 소년 같은 얼굴과 더없이 잘 어울릴 미소였다.
광고의 한 컷 같은 모습을 본 순간, 이선은 그 얼굴이 퍽 귀엽다고 느껴졌다. 분위기와는 영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뒤늦게 그의 얼굴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열기가 닿기 직전. 귀여움에 방심했던 이선은 그제야 입술을 악물고 몸을 뒤틀었다.
그의 몸이 틈을 벌리고 차지한 만큼 벌어진 다리를 힘겹게 움직여봤다. 왼쪽 다리를 접고 그의 몸에서 벗어나고자 용을 썼다. 하지만 그 힘겨운 노력은 강희찬의 손아귀가 발목을 움켜쥐며, 다리를 제 몸에 단단히 감기면서 부질없어졌다.
이선은 포기한 채로, 상체만을 뒤틀어 누웠다. 이상한 자세를 한 탓에 허리가 아팠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모로 고개를 돌린 이선의 귓가로 한숨 같은 옅은 웃음소리가 걸렸다.
“하긴. 정 선생 입장에선 억울하긴 하겠네요.”
그런 게 아니라고. 첫 경험이 아깝거나, 그가 첫 상대라서 억울한 게 아니라고. 이선은 차마 그런 말은 내뱉지도 못했다.
“…….”
오히려 이선은 강희찬에게 궁금해졌다. 그쪽이야말로, 처음을 나 같은 사람으로 괜찮은지. 그거야말로 정말 아깝고 억울하지 않을까. 걱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이 역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먼 훗날. 그의 기억 속에 남겨진 자신이 적어도 후회스러운 순간만은 아니었으면 하지만…….
만약 ‘그렇긴 하다’라며, 지극히 강희찬다운 대답이 돌아온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일정 수준 이상으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이 다시금 이선의 얼굴을 저를 향하게 만들었다. 강희찬과 눈을 마주한 후에도, 이선은 고집스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지 못했다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는 모르겠지.
덕분에 오해를 끌어안은 채로, 강희찬은 “그러면.”이라며 말을 이을 뿐이다.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웃음과 달리, 지극히 단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난, 남자는 그쪽이 마지막입니다.”
“…….”
판결문을 읽어주는 판사, 혹은 손쓸 도리가 없는 불치병을 알리는 의사의 선고였다.
“이거면 대충 수지가 맞겠어요?”
카운터 펀치. 결정타를 얻어맞은 이선은 잠시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누구보다 능숙한 남자의 입에서 ‘나 역시 이런 건 처음이다’라는 말이 나왔을 때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놀랐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이라는 말이, 마치 사랑 고백처럼 들려서……. 이선은 영원을 약속하는 프러포즈를 받은 사람인 양 멍해졌던 정신을 뒤늦게 차렸다.
머리로 하는 그 어떤 생각도 제대로 입 밖으로 내밀 수가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었다. 홧홧해지는 뺨을 그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타인에게 무심해 보여도, 그는 의외로 남을 면밀히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제가 하는 생각을 들킨다면, 정말 부끄러워서 혀를 깨물고 죽고 싶어질 거다.
이선은 황급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안 될 것… 같아요.”
멍청히, 바보처럼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그런 이선을 보던 강희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딱 봐도 불편한 자세인 이선에게서 몸을 물렸다.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거리만큼 몸을 물려주자 이선의 다리가 그의 몸에서 멀어졌다. 마른 몸이 애새끼들이 나뭇가지로 쿡쿡 찌른 공벌레처럼 둥그렇게 말린다. 이선은 무릎을 가슴께에 대고 팔로 끌어안기까지 한다.
‘이대로 집어 들어서 캐리어에 넣으면 들어가겠네.’
그러면, 스프링캠프에도 몰래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어이없는 상상을 하느라 말이 없는 강희찬을 향해, 물기 어린 눈이 슬쩍 눈치를 봤다. 이제는 그놈의 ‘안 되겠어요’ 타령은 멈춘 채였지만, 그러면 뭐 하나. 온몸을 저렇게 돌돌 말아서야 소용없었다.
강희찬은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모로 누운 공벌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디를 만질 수 있는 건지. 잠깐 고민하던 그의 손은 이선의 머리로 향했다.
공기에 노출된 탓에 식은 적당한 습기가 머문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감겼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 식은 두피에 엉겨 붙는 따뜻한 손길은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이선은 이대로 온 머리를 그의 손에 비벼대고, 양손으로 해달라고 떼를 쓰고 싶을 정도였다. 손의 온도와 닮은 목소리가 물었다.
“무서워요? 남자랑 막상 해보려니까.”
당연했다. ‘대체 남자끼리 어떻게?’라는 어리숙한 궁금증에서 오는 두려움은 아니다.
남자와 입을 맞추고 살을 맞대야 한다. 앞으로 자신이 어떤 섹스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은 이미 20대 초반에 해결했다. 물론, 안다고 해서 두려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어도…….
‘남자와 섹스를 한다.’
간단한 문장이 주는 파급력은 아마 제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마지막 보루였다. 아무리 남자를 짝사랑 상대로 보고 있다고 해도, 아직 자신은 남자와 자본 적이 없다고. 바에 있는 이들을 보며, 아직은 저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신규진과 뭐가 그리 다를까.
한 걸음을 넘는다. 이 선을 넘고 나면, 자신은 영영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살지 못한다. 상냥히 말을 걸어주는 학교 선생님들도 하루아침에 자신을 무시할 거다. 출근길에 만나면 저 멀리에서부터 ‘선생님!’이라며 실내화 가방을 흔들며 달려오는 아이들도 없다. 마치, 유령처럼 지냈던 열아홉처럼.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선을 외롭고 쓸쓸하게 만드는 건. 온기 하나 없는 침대가 지나치게 넓게 느껴지게 하는 건…….
“그게 아니라…….”
“아. 투아웃 새끼가 눈에 밟혀서 못 하겠어요?”
이선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다정함을 뒤집어쓰고 있는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냉정했다.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강희찬은 조금은 화가 난 기색으로 이선을 내려다봤다.
“아니면, 여자랑 자볼래요? 한번 해서 확인하고 싶어요? 자기가 게이인지 아닌지.”
“…강희찬 씨.”
이선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부러 자신이 견디기 힘든 말을 골라 뾰족이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도망가고 싶냐는 물음도, 도망간다면 강간을 한다는 으름장도. 주춤거리고 망설이기를 버릇처럼 하는 정이선을 재촉하는 말임을 알고 있다.
떼를 쓰는 아이를 향해 엄한 표정을 짓는 부모들처럼. 무섭다는 이유로 다시 주저앉아버리면, 언제까지나 제자리를 맴돌 정이선을 걱정하는 것임을.
그랬기에 이선은 다소 험악한 강희찬의 말을 견뎌냈다. 뾰족한 말 기저에 깔린 것이 바보 같은 저를 염려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참을 수 있었다.
강희찬의 입에서 나온 끔찍한 말을 듣는 순간, 순하게 내려갔던 이선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날카로이 세운 눈초리는 그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다.
“그럼 가서 자고 와봐요. 저번에 봤던 선생한테 가서 자자고 말해봐요. 그 여잔 정 선생한테 마음 있으니까. 입술 빨고, 가슴 빨다가 넣고 싸면 섹스한 거지. 남자랑 하는 것보다 더 쉽겠네.”
“…….”
“여자랑 섹스할 수 있으면 잘 된 거 아닙니까. 결혼도 하겠네요. 많이들 한다면서요. 선생들끼리, 결혼. 나한테도 청첩장 보내줘요. 축의금 많이 들고 갈 테니까.”
“그…….”
이선은 흘러나오려던 목소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말보다 먼저, 욕지기가 목구멍을 타고 흐를 것만 같았다. 이선은 재차 입술을 악물었다. 화가 났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이러다가는 그의 침대에 토를 해버릴지도 몰라서…….
“아, 돌잔치도 불러줄래요?”
“그만하세요.”
끔찍하다.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이선은 원망 가득한 얼굴을 돌리고, 제 무릎 사이로 파묻었다. 목 끝까지 차오르려는 토기를 억누르려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나쁘다. 정말 나빴다. 어떻게 저렇게 말을 할 수가 있지?
일부러 머릿속으로 그를 향한 원망을 되새겼다. 그렇지 않으면, 빈틈을 열고 정말 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았다.
사실은 알고 있다. 가장 나쁜 사람은 자신을 향해 부러 독한 말을 하는 강희찬이 아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직장동료와 제 모습을 그려보고, 그러고서 억지로 토기를 참고 있는 자신이 위선자였다.
‘김 선생님은 그렇지 않아요. 함부로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리 따지지도 못한다. 이선은 손을 내려 침대 시트 위를 더듬었다. 더 이상은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그런 간절한 기도를 하며, 잠깐 사이 너무도 낯설어진 온기를 찾았다.
몇 번의 더듬거림 끝에 손끝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닿았다. 굳은 얼굴로 이선을 내려다보는 강희찬은 이선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이선은 구원줄이라도 되는 양 온기를 그러쥐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뭐가 그런 게 아닌데요. 정 선생님 말이 그거예요. 내가 싫거나, 좆 달린 내가 싫다고.”
계산하겠다며 카드를 건네거나, 마실 것을 건네거나. 혹은 기어를 바꿀 때나. 그나마 가까이에서 봤던 그의 손가락은 보기엔 그저 길다 싶었다. 하지만 직접 만져보니, 예상외로 굵기가 느껴졌다. 아까 끌어 안아봤던 그의 몸과 비슷했다. 골격 자체가 두꺼운 편일까? 얇은 피부 아래의 단단함이 오롯이 이선의 손바닥에 감겼다.
손을 마주 잡을 용기까진 없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쥐듯, 이선은 그의 손가락 두 개를 손바닥 아래로 말아 쥐었다. 무릎 아래로 파묻었던 고개를 빠끔 들고 강희찬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무표정인 얼굴이었지만, 강희찬은 이선의 손을 내치지 않았다.
“싫은 거 아니에요.”
“…….”
“싫지 않아요.”
제발 알아달라고. 정리되지 못한 말에 간절함을 담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만, 강희찬도 자신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있지도 않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상대의 미래 연인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그의 경우엔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이선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과 정반대의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가끔 이선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오래된 기억은 아니었다. 언젠가 공원에서 강희찬의 취향인 맥주를 마셨을 때. 그때도 그는 이선에게 몹시도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화를 내며, 자신을 몰아붙이는 강희찬을 보며 조금 용기가 난 것은.
“싫어서가 아니라, 나중에, 강희찬 씨 보면 미안하니까…….”
나도 내가 없는 당신이 행복한 모습을 상상한다고. 그건 몹시도 쓸쓸하고 외로울 것 같다고. 많이 행복한 당신의 기억에, 나란 사람이 좋은 기억으로만 남았으면 좋겠다고.
“나중에… 학교에서 보면 어떡해요.”
떨리는 목소리가 이선의 무릎을 스쳤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듣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희찬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이선은 더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그때도 저는 이렇게 살고 있을 텐데…….”
“…….”
“강희찬 씨는… 결혼도 하시고, 아이 입학식도 오시면…….”
“정 선생님.”
거의 울고 있는 목소리에 집중하면 할수록 강희찬의 얼굴은 되돌릴 수 없을 만치 굳어만 갔다. 그에 비례하듯 이선의 몸은 점점 작아졌다. 이러다가 허리에 무리가 오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일었지만, 우는 목소리가 뱉는 말은 공벌레의 허리를 펴줘야 한다는 생각마저도 잊게 할 만큼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는, 그 아이 얼굴 볼 자신도 없고…….”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주절거린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 아니던가. 강희찬은 대체 왜 이런 대화 흐름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입학식이라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이라, 순간적으로 자식이 있었나 호적 관계를 되새겨보기까지 해야 했다.
‘머리 아파…….’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직전이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싫다고 길바닥을 뛰어다니는 선생을 잡으러 다니는 게 훨씬 낫겠다고.
대가리를 굴려야 하는 일엔 예전부터 젬병이다. 강희찬은 이선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을 들고 눈가를 짚었다.
“이러면 나중에 되게 후회할 것 같아요…….”
힘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강희찬의 정신을 다잡게 했다.
눈가를 짚었던 손을 떼고, 그대로 이선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무릎에 파묻은 얼굴을 억지로 들게 하자, 울상인 공벌레는 아픈 건지 더욱 울상이 되었다. 강희찬은 저도 모르게 들어간 손아귀의 힘을 뒤늦게 풀었다.
“정 선생… 아니, 정이선 씨.”
“…….”
“…씨발, 뭐 선 자리도 아니고.”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강희찬은 말을 뱉음과 동시에 쯧, 하고 혀를 찼다. 혼자서 멋대로 주절거리던 이선은 하던 말을 잊었다.
뾰족한 성정과는 달리, 의외로 그가 욕을 하는 순간은 정말 드물었다.
저런 건 이제 저학년 아이들의 입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는 말이다. 그의 입에서 다시 나온 욕설은 이선을 굳게 만들었다.
욕설의 여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이, 강희찬은 모로 누운 이선을 제대로 눕혔다. 그뿐이 아니었다. 허리가 접힐 것처럼 둥그렇게 말려 있는 이선의 몸을 직접 일으켰다. 으억. 제 의지 하나 없이 타인의 양손에 의해 몸이 일으켜지자 이선의 입에서 우스운 소리가 흘렀다.
“내 가족관계증명서 떼면, 부모님 이름밖에 안 나올 텐데요. 나한테 내가 모르는 자식새끼가 있었어요?”
“아니…….”
팔 하나보다도 짧을 거리. 그 앞에 강희찬이 있다. 누워 있는 탓에 체구가 주는 위압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는데, 눈높이가 비슷하게 앉아 있어도 별다를 건 없었다.
이선은 바리케이드를 치듯 제 몸 앞으로 무릎을 세웠다. 그의 물음에 고개를 미약하게 저었지만, 여전히 미간에 잡힌 주름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서워. 본능적으로 무릎으로 파묻으려는 고개를 제지하듯 강희찬의 손이 얼굴을 향했다.
“그럼 왜 있지도 않은 애새끼 핑계를 대요. 그냥 처음은 투아웃 새끼랑 하고 싶다고 하든가.”
“…핑계 아니에요. 그런 생각 안 했어요.”
“거짓말. 지금 나 싫다고 질질 짜고 있는 거잖아요. 솔직하게 말해요. 어차피 예상 못 한 것도 아니니까. ‘처음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어요’라면서 우는 거.”
“…….”
중간에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늘어지고 앵앵댔다. 설마 저건 자신을 따라 한 건가…….
‘내가 대체 언제 저렇게 말했다고.’
억울해진 이선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따져보면 자신이 했던 상상이 더욱 현실적이지 않은가. 멀쩡한 게이를 여자와 결혼시켜서 돌잔치까지 치르게 만드는 강희찬의 상상력보다는 훨씬 개연성이 있었다.
이선은 얼굴을 파묻는 대신 무릎 위에 두었던 양손을 그러쥐었다. 그 모습을 본 강희찬의 입에선 같잖다는 듯 픽, 하고 숨이 새었다.
“이게 뭔 짓이야.”
어떤 상황에도 숙이지 않을 것 같던 그의 고개가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한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문지르는 탓에 말이 뭉개졌지만, 이선은 중얼거림을 온전히 들었다. 한숨 섞인 투정처럼도 들리는 말과 고개를 숙이느라 보이는 그의 정수리의 가마가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가마를 제대로 본 건 처음이구나.
동그란 가마에서부터 빙글빙글 머리가 자라난 모양까지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키가 몇이라고 했더라……. 아무튼 180보다는 190에 더 가까울 사람의 머리 꼭대기는 흔한 구경거리는 아니다.
이선은 방금 전까지 빨리느라 슬쩍 부어오른 입술의 아픔도, 강희찬에게 들었던 부당한 책망도, 서운함도 잠시 잊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던 오른손을 들어 그의 머리로 향했다.
‘만져보고 싶어…….’
그런 충동적인 욕망이 강희찬을 향한 반사적인 두려움을 이겼다.
이선의 손이 그의 정수리를 향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무언가를 감지하기라도 하듯 팍, 하고 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이선은 핫, 하며 숨을 들이켰다. 그 탓에 반 뼘 정도 목표를 남겨둔 손은 그 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건.’
도를 아시냐며, 길가에서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이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 허공에 뜬 이선의 손에 붙었다. 민망해진 손은 다시 주먹을 말아 쥐고 패잔병처럼 무릎으로 돌아왔다.
대체 뭘 하려고 했는데. 얼마간 강희찬은 수상한 기색으로 이선을 훑어봤다. 하지만 이내, 묵비권을 행사하는 이선의 대응에 옅어졌다.
“…진심이에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침대 시트 위로 시선을 두던 그가 다시 이선을 향해 눈을 들었다.
무슨 말이지. 이해하지 못한 이선은 되묻지도 못한 채 멀거니 그를 보기만 했다. 말이 없어도 의도는 전해진 것인지, 강희찬은 다시금 입술을 떼었다.
“그냥 무섭다고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혹시 알아요? 무섭다고 하면, 내가 마음 약해져서 보내줄지.”
“…….”
“내가 싫다고 해요. 그게 제일 확실하니까.”
“강희찬 씨, 안 싫어요.”
“눈물이나 닦고 얘기해요.”
그가 이죽거리며 타박했다. 그 말에 이선의 손이 반사적으로 눈가를 쓸었다. 그리고 뒤늦게 억울해졌다. 슬쩍 물기가 묻어나기는 했지만, 이걸 눈물이라고 부를 순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의 눈이 이 정도는 습한 게 당연했다.
울지 않았는데, 매도하다니. 속았다는 생각에 괜한 심술이 피어오른 이선은 몸을 굽혀 무릎 위에 턱을 대었다. 슬쩍 튼 고개가 삐뚤어진 마음을 대변했다.
“저, 강희찬 씨 싫어한 적 없어요.”
“웃기지 말아요. 나랑 있기 싫다고 온몸으로 시위했던 주제에.”
“제가 언제……! 강희찬 씨가 저를 싫어하니까, 그렇게 느끼시는 거예요. 전 싫어한 적 없어요.”
언제 그랬냐고 따졌다가는 어쩐지 그의 페이스에 휘말릴 것 같아서 중간에 말을 삼켰다. 커지는 억울함과 함께 훌쩍 커졌던 이선의 앉은키가 다시 가라앉는다.
내 잘못 없어. 네가 나쁜 거야. 그런 말을 하듯, 정면을 향했던 이선의 고개는 다시 새침하게 돌아갔다. 암묵적으로 누가 누구를 싫어했네, 따위를 주제로 한 청문회가 종결된 셈이었다.
애새끼랑 지내다 보면 닮아가는 건가. 강희찬은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내가 싫어서 못 하겠다고 하는 편이 나아요.”
“안 싫어한다고…….”
“지금 못 자겠다는 이유가 있지도 않은 내 애새끼면…….”
“…….”
“내가 그냥 보내줄 리가 없잖아요.”
기다란 손가락이 얼굴을 슬쩍 건드렸다. 토라진 듯 고집스레 옆을 향한 고개를 대신해 눈동자만이 도록 강희찬을 향했다.
“결혼…하실 거잖아요.”
“정 선생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장담해요? 나도 모르는 걸.”
“선수들은 다 한다고 그러던데.”
“안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같이 살 사람 필요 없으면 안 하는 거지, 운동선수라고 꼭 결혼하란 법이라도 있어요? 정 선생, 아는 운동선수 몇이나 돼요?”
“…….”
“촬영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다녀.”
사납게 치켜뜬 눈동자가 이선을 위아래로 훑었다. 하지만 그가 이를 갈고 있는 상대가 자신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재혁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송재혁의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아니면 송재혁이 매우 아끼는, 팀장을 몇 달이나 설득해서 샀다는 고가의 촬영 장비에 해코지하고도 남았다.
아니라는 말로 친구의 안위를 지켜줄까. 고민하며 벙긋거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누구냐, 라고 집요하게 물어대면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에게 운동선수들의 결혼 여부를 말해준 건 정말 송재혁이었으니까. 어쩐지 빈천한 인간관계를 강희찬에게까지 들킨 것 같아 입맛이 썼다.
내일은 월요일이니, 제발 출근을 하지 않는 동안 강희찬이 잊어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게 최선이었다.
마치 이선의 곁에 송재혁이 있기라도 한 양 때려죽일 듯 번쩍이던 눈빛이 다소 누그러들었다. 오롯이 자신을 향한 시선이었다. 그 변화의 간극이 이선을 어찌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이 그의 팔 안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정말 나랑 못 자겠는 이유가 그거면.”
“…….”
“내가 결혼 안 하면 되겠어요?”
착각에 불을 지피듯, 그의 손가락이 얼굴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세게 만지면 깨지는 유리공예를 다루는 손놀림에 시선을 어디에 둘지 난감해졌다. 민망함을 감추려, 이선은 부러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안 해요.”
“…….”
“결혼 안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에요. 어차피 딱히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검은 눈동자는 그의 등 너머의 어둠보다도 더 짙다. 그 눈을 마주하자, 이선의 입에선 차마 그런 농담은 그만하라는 말조차 나오지 못했다. 사람의 진심이란 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정 선생이 원하면, 못 할 것도 없어요.”
묵직한 진심은 이선에겐 몸이 굳을 만큼 버겁기만 했다.
막연히 누군가의 진심을 원했다. 평생을 누군가에게 만나는 사람이라며 소개를 해줄 수도 없다. 연인과 손을 잡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순간 사직을 권고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인생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만큼, 자신은 그에 상응하는 누군가의 진심을 바라고 있었다.
내 인생이 망가질 테니, 보답을 받아야 한다고. 은연중에 그리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무도 쉽게, 아무런 계산 없이 제 진심을 뱉는 그를 본 순간 깨달았다.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이었는지. 그리고 자신은 저런 오롯한 진심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
이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고여 있었던 건지, 넘쳐나온 물기가 눈가를 적셨다. 강희찬의 손가락이 물기를 훔치려는 듯 조심스레 눈가 위를 움직였다.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못 믿어요?”
시야를 가로막아 그를 외면해도, 끈질기게 얼굴에서 머무는 온기가 강희찬의 존재를 지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믿어요?”
“…….”
“만약 결혼해도, 여기선 안 한다면 되겠어요?”
“강희찬 씨…….”
“정 선생이랑 마주칠 일 없게 한다고.”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남의 인생을 저당잡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다. 저는 그럴 자격도, 가치도 없다. 아무리 지금의 그에게 결혼이라는 선택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지만 그는 이선의 심정을 헤아려주진 않았다.
“팀 바꾸면 그만이에요. 어차피 몇 년 안 남았기도 하고.”
“…….”
“부산이든 어디든, 정 안 되면 대만으로라도 가줄 테니까…….”
올라온 뺨을 덧그리고, 콧날을 만지다 그대로 위로 올라간다. 눈썹을 매만지던 손이 어느새 앞머리를 이리저리 쓸어 넘긴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그 덕에 힘이 부족한 직모인 이선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간지러운 손길에 이선이 미간을 슬쩍 찌푸리자, 장난기가 묻어나던 손가락이 멀어졌다. 대신, 커다란 손은 이선의 얼굴 앞에서 멈추었다.
“약속?”
고개를 들고 있는 새끼손가락이 눈을 사로잡았다.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인 손. 손등만 봤을 땐 그저 길고 곧게 뻗은 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까 그의 손을 만져봤을 때도 얼핏 느꼈지만, 그 안쪽은 운동을 해온 그의 세월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이선은 홀린 듯 오른손을 들어 하나만으로도 굳세어 보이는 손가락에 제 것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강희찬의 입매에 완만한 호선이 그려졌다.
“울지 말고.”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무표정으로 지내지 않았을까. 무심한 얼굴은 표정이 올라오면 묘하게 소년 같은 분위기가 났다. 하다못해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리는 비열한 웃음을 지을 때조차도.
이선은 새끼손가락이 서로 얽힌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그 너머엔 옅은 미소가 떠돌아 제 나이다운 분위기를 내는 강희찬의 얼굴이 있다.
그의 표정에서는, 어쩔 줄 모르는 서투름이 느껴졌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그가 말했다.
“난… 그쪽이 울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뭐든 쉬워 보이는 사람이 엄살인 소리를 낸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곤혹스러움이 잠시나마 이선을 웃게 만들었다.
귀여웠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서, 실제로 볼 수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미남이겠지.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고. 당연히 어디에 가서 소문을 낼 순 없지만, 자랑할 만한 기억이 될 거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괜찮을 거다.’
거짓이나마,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걸고 지금의 자신을 위해 저런 말을 해준 사람이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겠고, 아니어야 한다. 그의 약속은.
말이나마, 너를 위해 그럴 수 있다고. 그것은 이선에게는 유일한 위안이기도 했다. 별이라도 따다 주겠다는 사탕발림보다 더 허황된 약속은 마음을 잘도 녹였다.
자꾸만 수그리려는 얼굴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는 손이 차지 않다. 점점 다가오는 눈과 숨결이 뜨겁다. 당장이라도 델 것처럼 더운 온도에, 이선은 자꾸만 무릎으로 고개를 파묻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야만 했다.
…이것이면 될 터였다. 이 정도면 된다.
이선은 손등으로 눈을 세게 비볐다.
“그러지 말아요.”
중간에 강희찬의 손이 제지하며 손목을 붙잡았지만 이미 눈가에 붙어 있던 물기는 모두 훔친 후였다.
이 집까지 올라오기 위해 몇 번이나 속으로 삼켰던 말을 다시금 되새겼다.
이리도 뜨거운 열망이 자신을 향한 적은 인생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마음 한편에나마 그려봤던 누군가와의 처음은 아니지만, 분명 강희찬과의 처음은 자신에게는 최선이 될 테다.
이선은 어정쩡히 무릎 위에 두었던 팔을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 강희찬의 목덜미가 있다. 이선은 몸을 바투 당겨 앉으며 단단한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잠깐이나마 그에게서 흘러나왔던 뜨거운 숨이 멈춘 것도 같았다. 뻣뻣해진 강희찬의 몸에 제 몸을 조금 더 붙여봤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신을 받아주던 온기가 다시금 여기에 있었다.
“싫지 않아요. 싫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도망도 안 가니까…….”
“…….”
“그러니까 자꾸 무섭게, 말하지 마세요. 심한 말 하지 말아주세요.”
자신의 등을 감싸야 하는지 고민하는 강희찬의 손. 닿지 않은 온기가 너무도 선연히 느껴졌다. 이선은 용기를 내어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불규칙했던 호흡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떨리는 입술을 그의 숨 앞으로 가져갔다.
“저도, 다른 사람 말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습기를 더해가는 온기 너머. 아플 정도로 이선의 입술을 탐욕스레 빨았던 입술은 미동이 없었다. 입술이 닿기 직전, 이선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 있는 모든 말을 어떻게 하면 조리 있게 그에게 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무의미했다.
말은 생각을 추월했다.
“처음 하는 건, …강희찬 씨가 좋아요.”
성급한 말이 지나간 자리를 뒤따르듯, 이선의 입술이 타인의 온기에 내린다. 멍하니 벌어져만 있던 입술이 잡아먹을 듯한 키스로 변하는 건, 너무도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