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12/31)

  9K

두 번이었나. 그것도 두 번 모두 차 안에서 건물의 외관을 보는 게 전부였던 오피스텔의 지하 주차장에서 강희찬의 차는 멈췄다.

아니, 생각해 보면 한 번이 더 있었다. 평범한 월급을 받는 자신과는 먼 존재인 이 건물과의 연은.

‘젊은 남자 혼자 살긴 좀 넓긴 해.’

지금 다니는 학교로 발령이 정해지고 한창 집을 구하러 다니던 시기였다. 공인중개사의 차를 얻어타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때, 이 건물을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땐 심지어 막 완공된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집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쳐 있던 이선은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두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신축 오피스텔을 부러워한다고 오해했는지, 공인중개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위로했다.

자신이 가진 예산으로는 턱도 없다. 건물 외부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아니라고, 그냥 피곤해서 그런 것뿐이라고 구태여 변명을 하기도 뭣하여 이선 역시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초로의 공인중개사는 좋은 사람이었다. 뒤로 갈수록 좋은 집을 보여줘서 비싼 방을 계약하게 하려는 게 그들의 영업 수완이라던가. 하지만 그는 정말 이선의 예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들을 보여주었다. 초임 공무원 월급이 얼마 되겠냐면서. 정말 한 치의 예산초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빨리 수원을 떠나버리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만 가고 싶었다. 그런 생각만으로 하루하루 버텨냈던 고등학교 시절이 어떻게 지났는지. 지금은 아득하기만 하다.

지나가는 졸업생의 아버지에게 부탁해 어머니와 교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졸업식 날. 그 이후로 시작했던 서울살이는, 열아홉의 정이선이 지레 겁먹었던 만큼 두려운 것만은 아니었다. 나쁜 순간이 없었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들도 많았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내리죠. 다 왔으니까.”

“아……. 네.”

시동을 끈 강희찬은 먼저 내리지 않고 이선에게 말을 걸었다.

강희찬 역시 그런 좋은 사람 중 하나였다.

가끔 깜짝 놀랄 만큼 직설적인 말을 했어도, 그는 대체로 배려 깊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랬다. 뜬금없이 우유를 사 오거나, 지금처럼 뒤를 따르는 자신을 종종 살피거나.

누군가의 배려가 미치는 범위에 있다는 사실은 종종 손바닥 안쪽을 간지럽히곤 했다. 물론, 지금 이선의 손바닥은 간지럽다기보다는 피가 돌지 않는 쪽에 더욱 가까웠지만.

자신의 걸음으로는 한 보가 조금 넘는 거리를 유지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몇 걸음 걷던 강희찬은 건물로 들어가는 공용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딱히 별말은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한 번 뒤로 고개를 돌려 이선의 존재를 확인했다.

“…….”

도착하고 말았다. 이선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중간에 내려달라고 애원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얼마나 한심하게 봤던 걸까?’

마음 한 자락 비추지 못할 사람을 짝사랑하는 게이라니.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으면, 강희찬이 그런 말을 했을까.

얼굴이 홧홧해졌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울음이 왈칵 터질 뻔했다. 얼마나 한심했으면…….

‘좀 더 이런 연애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의 집까지 오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머릿속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선에게 말을 걸었다.

‘정 선생은 그래야 돼요.’

웅웅. 이명처럼 맴도는 말투에서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오피스텔의 건물이 보일 즈음, 이선은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복도에서 뛰면 안 돼. 학교에서 아이들의 생활 지도를 하며 타이르는 자신의 말투와 흡사했다.

…그런 당연한 것을 자신만 몰랐던 거다.

실내에서 뛰면 안 된다는 것만큼이나, 이런 건 당연한 모양이었다. ‘이런’ 연애에 익숙해져야 하는걸. 앞으로 자신이 겪어야 할 만남이란 건, 대충 다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했던 거다.

그날……. 추운 겨울날, 독한 스킨 향과 알코올 향이 뒤섞인 등을 뒤따라갔다면. 자신은 조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신규진이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앓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어리니까 괜찮을 거다. 내년에는, 아니, 한 5년쯤 뒤에는 스스럼없이 낯선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갈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신규진에게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좋아하는 것뿐이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못할 터이니. 시간이 흐르면 자신은 이름도 모르는 게이의 뒷모습을 따라 그와 몸을 섞어야 할 테니, 혼자 좋아하는 것 정도는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그런 변명을 하며, 추운 골목길을 걷고 걸어 집에 돌아왔었다.

어쩌면 그때 남자의 뒤를 따라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랬으면, 조금 더 능숙한 사람이 되었을 터였다. 어린 남자의 입에서 나온 ‘섹스’ 소리에 벌벌 떠는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뒷모습을 차마 눈에 담지도 못하고, 질질 끄는 제 발 앞코를 보며 걷는 사람이 아닌…….

“…내 집이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호텔로 가도 괜찮아요.”

그랬다면, 강희찬 역시 자신을 향해 자꾸 뒤를 돌며 걱정 어린 눈길을 던질 필요는 없었을 텐데.

타성에 젖은 채로 살아가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익숙한 일을 하고, 익숙한 것을 먹으며, 익숙한 마음을 기억하고. 늘 비슷한 식당에 가서 비슷한 메뉴를 시키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끌어안고 있는 것은.

쉬웠던 타성을 벗어나, 궤도를 바꾸는 것은 이리도 힘든 것이다. 고작해야 송재혁에게 휩쓸려, 새로운 식당에 가서 전혀 먹어본 적 없는 메뉴를 주문해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삶이 변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막연한 두려움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남들도 다 하는 것일 뿐이라고. 섹스는 별것이 아니라는 강희찬의 말을 부적처럼 꼭 쥘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보내주세요. 이런 건 안 될 것 같아요.’

목 밖으로 흘러나오려는 말을 누르려 쉼 없이 침을 삼켰다. 언제나 겁먹었던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전환점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쥔 마지막 끈이었다. 이번에 그를 놓친다면, 또다시 누군가의 뒷모습이나 보아야 한다.

이 정도면 감사해야 한다.

그에게선 좋은 향이 났다. 잠시 겹쳐 봤던 입술은 기억에는 잘 남지 않았지만, 적어도 불쾌하진 않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을까 불안했지만……. 그건 불쾌하다는 감정과는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말없이 뒤를 돌아 자신을 살펴주었다. 좋은 사람이다. 주문처럼 속으로 되뇌었다.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의 배려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럴 자신은 없다.

이것이 최선이라고. 그는 아마 자신의 인생에서 만나볼 사람 중에서, 몸을 섞어볼 사람 중 가장 근사한 사람일 테니.

이상하게 긴장할수록 바싹 말라가는 손바닥을 말아쥐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 서 있는 그의 뒷모습과 점점 거리가 좁혀졌다. 대리석 바닥과 신발이 마찰하는 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타죠.”

“…….”

긴 손가락이 문이 닫히지 않도록 버튼을 누르고 있다. 이선은 그 틈을 타 숨이 턱 막히는 작은 상자에 몸을 실었다.

가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벽에 파고들듯이 몸을 기댔다. 멀찍이 거리를 벌렸어도 그의 존재감은 이선을 숨 막히게 했다. 거울도 없는 회색 공간은 실제 면적보다 훨씬 작게 느껴졌다. 아마도, 이선이 먼저 몸을 실은 후에 엘리베이터에 오른 커다란 몸집 때문이겠지만.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말처럼 이런 것쯤은 남들도 다 한 번쯤은 거쳐 가는 과정일 터였다.

숫자판 앞에 선 강희찬의 뒷모습이 지나치게 가깝다. 그제야 이선은 자리를 잘못 잡았음을 깨달았다.

이쪽이 아니라, 저 왼편 구석에 섰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몰래 조금씩 자리를 옮긴다면, 뒤를 돌아 있는 강희찬이 과연 알아챌 수 있을까. 눈을 조심스레 굴리며 강희찬과 가장 멀어질 곳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19라고 써진 동그란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커다란 뒷모습 너머로 숫자가 바뀌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봤다.

19층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고집스레 뒷모습만을 보여주었다. 무언가 말을 걸 법도, 어딘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댈 법도 했는데 꼿꼿한 등은 흐트러짐 없이 이선의 앞에 벽처럼 서 있을 뿐이다.

‘…무섭다.’

냄새가 난다는 선배의 폭언에 화를 내던 브로콜리에게서 자신을 숨겨주던 따뜻한 등이 아니다. 마치 언젠가 영상에서 봤던 것처럼. 이국의 야구장에 서 있던 지나치게 어린 선수의 뒷모습이었다.

이선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영상을 돌려보곤 했다. 약관도 되지 못한 어린 선수가 온 국민의 관심을 받던 그때. 멍하니 영상을 돌려 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그의 이름과 번호가 새겨진 등에 대어보기도 했다.

결과를 알고 있는 시합인데도, 그 순간의 강희찬이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나. 아니면, 나도 당신처럼 뭐든 자신 있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나.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등은 화면 속 소년의 등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년도 되지 못한 어린 선수의 몸 위로 강희찬이 걸어온 선수의 세월만큼이나 단단함이 쌓인 거다.

“…….”

가까이에서 보면, 지나치게 큰 몸은 여전히 무섭다. 내쉬는 숨소리조차 너무 크게 들릴 것 같아서 두 번에 한 번은 참아야 하는 정적이 서럽다.

오는 내내 자신을 꺼져가는 촛불처럼 조심스레 대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선은 강희찬의 뒷모습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말 한마디 걸지 않은 그가, 지금 이 순간을 불편해하고 있는 자신을 향한 배려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서러웠고 외로웠다.

과할 정도의 배려를 받고 있음에도, 자신은 욕심을 내고 있었다. 이 결핍의 원인은 그가 아닐 텐데. 마치 지금까지 인생에서의 부족함을 그에게서 다 보상받겠다는 듯 투정을 부리는 제가 한심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당장 자신이 등에 기댄다면, 강희찬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 보는 자신도.

결국, 문은 열렸다.

분명 승강기는 부드럽게 멈추었을 텐데도, 이선은 엘리베이터가 선 순간 이유 없이 휘청거렸다. 강희찬의 등 대신, 손은 벽면의 바를 내리누르듯 꾹 잡았다.

“정 선생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이선은 질끈 감았던 눈을 그의 얼굴이 있는 곳으로 겨우 들었다. 어떤 표정이 자신을 향하고 있을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호텔로 가도 괜찮아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시야는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올라갔다.

쌀쌀한 날씨 속에서 아늑하게나마 몸을 데워주던 공인중개사의 차 안이 아니다.

거울 하나 없어서 더욱 숨이 막히는 엘리베이터의 안. 정면엔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회색이 아닌 너른 등이 여전했다.

강희찬은 말을 걸기 위해 고개를 약간 튼 상태였다. 그나마도 완전히 뒤를 돈 것이 아니다. 옆선이 겨우 보일 정도로 슬쩍 눈길을 돌린 채였다.

길게 뻗어 있어서 셔츠가 잘 어울리는 편인 목선과 울대를 지나, 갸름하게 떨어지는 턱 끝이 있다. 거기서 유려히 연결되는 입술의 굴곡과 뻗어나가는 콧날.

거기까지가 정이선의 한계였다. 더 이상 눈을 들 자신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우습게도 목이 멘 소리가 나올까 봐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어딘지 균일하지 못했다. 그가 들으면, 울고 있다고 오해를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래요.”

쩍 하고 벌어졌던 괴물의 입이 다시 다물렸다. 몸을 움츠러들게 하던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복도가 사라졌어도, 여전히 두려움은 잔상처럼 남았다.

어둠은 그의 입술과 닮아 있었다. 무서웠다.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부의 말 한마디를 완성할 수도 없을 만큼.

…조금만. 조금만 기대게 해달라고.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내게 시간을 달라고. 아직 나에게 이런 속도는 따라가기가 너무 버겁다고.

목 끝까지 차오른 그런 말을 뱉을 순 없었다. 당장 그의 옷자락을 쥐고 그리 말한다면, 어쩌면 강희찬은 말할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의 1층 버튼을 눌러주며, 이대로 내려가라고. 그렇다면 자신은 엄마를 잃은 어린애처럼 어깨를 잔뜩 옹송그리고 이곳을 나설 것이다. 느림보처럼 걷지도 못해서 멈춰 있기만 했던 자신의 걸음을 그가 배려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잇새로 투정이 흘러나올까 봐 입술을 악물었다. 슬슬 아랫입술에 감각이 없다 싶을 무렵, 벽 같은 뒷모습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야구공을 쥐는 것이 더없이 어울릴 기다란 손가락이 다시 한번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망설임 없이 눌렀다. 미세한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온몸에 흘렀다.

“그럼 내리죠. 다 왔는데.”

침식당할 것 같은 어둠이 다시 입술을 벌렸다.

엘리베이터에 탈 때와는 달리 그는 먼저 어둠 속으로 발을 내뻗었다. 순간 확 하고 밝아지며 그의 주변의 어둠이 물러났다. 그의 얼굴이 예고도 없이 망막에 들어왔다.

비웃고 있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지도 않았고. 그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 그곳에 있을 뿐이다. 냉랭해 보이는 얼굴 아래로, 그는 이선을 향해 왼손을 뻗고 있었다.

어둠과 닮았던 입맞춤을 할 때도 꼭 저런 얼굴이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크지만 둔해 보이지 않는 손에 온 시선이 향했다. 흰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선은 저도 모르게 머뭇대며 제 손을 들어 올렸다.

한 뼘. 그의 손과 딱 한 뼘 정도의 거리가 남았을 때, 이선의 손은 잠시 멈추었다.

서른 해 가까이 망설이며 살아왔다. 이번에도 망설이는 그를 승강기의 문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누구도 기다릴 리가 없었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멍하니 멈춰 있던 이선의 손을 무언가가 잡아챘다.

“아……!”

뜨겁다 싶을 정도로 따뜻한 손의 온기를 인식하기도 전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단단한 어딘가에 얼굴이 부딪혔지만, 딱히 아프진 않았다. 정수리를 누군가의 숨이 간질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서야 그의 품 안으로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다정한 말 따위 없었지만, 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기대어보니 확실히 너른 품도 자신을 내치지 않고 있었다. 이선이 가만히 있는 동안 그 역시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센서등이 꺼지며 복도엔 다시 한번 어둠이 내리깔렸다. 누군가의 온기가 지척에 있었다. 무서울 리가 없는데도, 이선은 어둠이 더욱 두려워졌다.

…다시 한번 휩쓸렸다. 또다시 휩쓸리고야 말았다.

보기엔 시커먼 어둠이 끝없이 이어지는 통로는, 강희찬이 비어 있는 오른팔을 들면서 다시 밝아졌다.

단단한 손가락이 등 뒤에 닿았을 무렵. 이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쭈뼛거리며 그의 왼손에 붙잡힌 제 손도 떼었다. 자신의 체온에는 부담스럽게 뜨거운 온기는 쉬이 떨어져 나갔다.

예전에도 대충 느꼈지만, 그는 생김과는 어울리지 않게 체온이 높았다.

“죄, 죄송합니다.”

“가죠.”

“…네.”

외간남자에게 억지로 손목을 잡힌 조선 시대 아낙처럼. 이선은 그에게 잡혔던 손을 쥔 제 모습이 퍽 우스워졌다.

일부러 의연함을 가장해 손을 놓았지만, 여전히 뜨거운 불의 잔열이 남은 듯 오른손이 홧홧했다. 당장이라도 다시 제 손을 잡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 강희찬의 뒤를 따랐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일정 간격으로 있던 천장의 센서등에 불이 들어왔다. 이선은 또다시 그의 뒷모습을 밟았다.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할 때, 강희찬은 복도 끝에 위치한 문 앞에 섰다.

1901.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에는 19보다 큰 숫자는 없었다. 1층엔 외제 차 브랜드의 매장이 통으로 들어와 있었고, 2층부터는 병원과 약국들이 있었나. 주거 공간은 몇 층부터인지 감을 잡을 순 없었지만, 19층인 그의 집은 이 오피스텔의 꼭대기 층이었다.

‘꼭대기 층의 가장 구석이라니…….’

사는 집의 위치조차도 주인과 꼭 빼닮은 뾰족한 느낌을 주었다.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강희찬의 등 뒤에서, 이선은 문패의 숫자를 보며 혼자 삐딱한 생각을 했다.

할 것이 없는 이선은 자연스레 삑삑 울리는 버튼음의 숫자를 세었다. 일곱 자리? 아니면 여덟 자리인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기분이 나쁠 정도로 수상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선은 홀로 핫, 하며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이런 속담이 있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비밀번호를 훔쳐본다는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진 않았다.

순간 강희찬의 고개가 이선을 향해 돌아왔다.

“…….”

뭘 하고 있는 거냐. 그리 묻는 듯한 무언을 향해 이선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태연과 결백을 가장했다. 학부모들과 상담할 때 짓는 미소 2번. 수상하지 않은 공무원 웃음.

번호키 소리는 들리니까 들은 것뿐이라고. 번호는 아직 모른다는 것을 열심히 어필했다.

강희찬은 이선의 얼굴을 잠시 보더니 혀를 츳, 하고 찼다. 제 나름대로는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의 미소였지만, 보는 쪽에게는 어떨지 모를 일이다.

최선을 다한 이선의 공무원 미소도 자신감을 잃었다.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항복의 의사를 표한 이선의 정수리 위로 옅은 한숨이 붙었다.

“들어오세요.”

도어 록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동시에 이선의 고개 역시 반사적으로 들렸다.

여전히 그림처럼 표정이 없는 그의 뒤로 다시 한번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너머로 보였던 어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심연과 비슷했다.

왈칵 겁이 났다. 문 안으로 들어간다면, 무언가 변할지도 모른다. 저 어둠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지금까지의 자신은 사라질 것만 같았다.

다른 누군가와 몸을 섞고 난다면, 볼품없이 홀로 키워온 마음조차 접어야 하는 걸까. 그냥 좋아하기만 하는 것도 안 되는 걸까.

익숙한 타성에 젖어 사는 자신은 습관처럼 겁을 먹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순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서웠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표정이 없는 강희찬의 얼굴은 조금의 위로도 되지 못했다.

‘…집에 가고 싶어.’

그냥 오늘 하루 따위는 없던 것으로 치고, 들어내 버릴 수만 있다면…….

복도를 향해 열린 문이 닫히지 않도록 잡은 채, 그는 이선이 먼저 들어가기를 종용했다.

비슷한 광경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기억을 오래 더듬을 것도 없었다. 편의점에 들어가기 전. 그는 이렇게 문을 받치고 이선이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런 무표정이었던가?’

표정이 다채로운 편은 아닌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무심한 배려가 기저에 깔렸다. 지금처럼,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위압적인 분위기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옆에 선 그의 앞을 지나쳐 현관으로 발을 내뻗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처럼 먼저 들어가서 기다려주는 배려는 없었다. 들어가라고. 당장이라도 온몸을 집어삼킬 듯한 어둠의 입 안으로 이선이 스스로 머리를 들이밀기를 기다린다. 마치 사냥 전의 포식자 같았다.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비척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단단히 자신을 붙들어주는 온기 없이 오롯이 제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이 이리도 힘이 들다니. 딱 한 번 기대어본 온기에 그새 익숙해진 저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몸이 닿지 않아도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질질 끌던 자신의 것과는 달리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멈추고, 현관문이 닫힌다. 불길이 다가오는 양 등 뒤가 점점 뜨거워졌다.

…안 된다. 이런 건……. 이런 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쉰 이선이 겨우 입을 떼었다.

“…강희찬 씨……. 저, 그냥…….”

보내주세요. 가고 싶어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은 차마 완성되지 못했다. 어깨에 더운 체온이 닿았다. 델 것 같다. 아니, 그것을 인지했을 때에는 이미 딱딱한 벽에 등이 밀어붙여진 채였다. 어깨를 움켜쥐었던 체온은 어느샌가 얼굴을 옭아매고 있었다.

“…읏…….”

커다란 손아귀에 턱이 붙잡혔다. ‘닿았다’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강하지 않은 힘이었지만, 위압적인 손의 크기는 닿기만 해도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그의 손아귀에 의해 고개가 슬쩍 들려진 채로, 입술에 더운 숨이 붙었다. 이내 온 입술이 먹힐 것처럼 그의 숨 안으로 빨려들었다.

아프다. 차갑고 딱딱한 벽에 등이 짓눌렸다. 앞을 버티고 선, 그래서 자신의 몸을 벽에 누르고 있는 온기는 ‘뜨겁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더웠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이선의 체온보다 더욱 뜨거운 혀가 헤집었다. 입술을 부드럽게 덧그리다가도 이선이 숨을 쉬기 위해 조금이라도 느슨해진 순간 잇새를 가르고 들어오려는 의도가 너무 뻔히 그려졌다.

이선은 마치 상황을 피해 보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 그의 집, 아니, 하다못해 그의 품에서라도 벗어나고 싶어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무르디무른 어린애 같은 생각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끈질기게 들러붙은 온기가 물러서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에서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양팔을 들어 올렸다. 잡히는 대로 그의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점점 게걸스러워지던 입술이 멈춘 것도 그 순간이었다.

숨통을 틀어막던 입술이 떨어졌다. 그래 봐야 그의 얼굴은 한 뼘도 멀어지지 못했다.

이선은 입술이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반짝 눈을 떴다. 좁은 시야엔 아직도 지나치리만치 가까이에 얼굴이 있었다. 결국 이선은 다시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이선의 얼굴을 가볍게 쥐고, 슬쩍 들어 올린 채로 그가 짧게 물었다.

“…왜요.”

단 한 마디로 그는 이선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질문의 유일한 대상인 이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니. 지금 왜냐고 묻는 건가? 그것도 강희찬이?

대체 무엇에 대한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연하지 않은가. 뜨겁다. 숨도 막혔고. 이런 걸 어떻게 견디란 말인가.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이는 노골적인 시선을 이선의 얼굴에서 치우지 않는다.

슬그머니 눈을 뜬 이선은 차마 정면을 바라보진 못했다. 강희찬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껐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센서등이 묘하게 신경이 쓰인다. 그럼에도 이선은 꿋꿋하게 왼쪽 허공 어딘가를 향한 눈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했다는 게 좀 더 정확했다.

엄지와 검지, 그리고 중지. 세 개의 손가락이 닿은 볼 부근이 지나치게 뜨겁다.

절대 강하지 않은 힘이다. 그런데도 이선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그가 틀어쥐어서 튀어나온 입술이 너무 우스워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그가 보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쯤은 괜찮기를 바라고 있었다. 무섭고 벗어나고 싶은 와중에도 자신은 강희찬이 바라보는 정이선이 꽤 괜찮은 사람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이선은 저 자신이 퍽 우스웠다.

눌린 얼굴이 너무 이상하지 않기를. 어렵게 내쉬고 있는 제 숨이 그에게 불쾌감을 유발하지 않기를.

그런 자신을 비웃으며, 이선은 최대한 강희찬의 손에 더운 숨이 닿지 않도록 조심히 말을 뱉었다.

“숨이…….”

문장은 차마 완성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선의 목소리에, ‘하’ 하고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그의 숨소리가 울렸다. 이선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입을 열어요, 그럼.”

“…….”

“조개처럼 다물고 있으니까 숨이 막히지.”

입술을 뗀 순간 어떤 짓을 할지 눈에 빤히 보이는데, 대체…….

이선의 눈이 억울함을 한껏 담아 강희찬을 향했다.

제 입술도 이렇게 빨지는 않겠다 싶을 정도로 삼키더니. 끈질기게 입술을 덧그리던 혀끝과 아직도 양 볼을 누르는 손가락. 그것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였다가는 입술이 아니라 입 안을 모두 내어주었을 테다. 나도 내 입술을 이렇게 세게 빨아본 적이 없다고. 그런 항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의 손아귀에 잡혀 오리처럼 입을 내밀지만 않았어도, 한두 마디 정도는 불평의 말을 꺼냈을지도 모른다.

이선의 눈빛은 이제 불신을 가득 담고 있었다. 강희찬이 얼핏 웃었다.

같잖다는 건가. 아니면 얼굴을 잡힌 채 입술만 툭 튀어나온 모습을 비웃는 건가. 어느 쪽이든 유쾌하지 않았다. 이선은 묘하게 반발심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거야, 강희찬 씨가…….”

이렇게 누르고 있으니까 숨이 막히는 거지.

말은 중간에 끊겨 이어지지 못했다. 사납게 눈치를 주는 그 덕분에 이선의 기가 죽은 건 아니었다.

마치 틈을 보이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입술이 열린 순간이었다.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이 자신을 덮어온 것은.

“…흐읏…….”

그리고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잇새를 가르고 침입한 살덩이는 노골적이었다. 노골적으로 이선의 혀에 닿아왔다.

혀끝에 닿은 낯선 체온에 놀라 입술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뒤로 빼는 몸 뒤엔 단단한 벽이 가로막았다. 꼼짝없이 입 안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선의 볼을 누르고 있는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이 실리자, 자연히 눈이 찌푸려졌다. 그의 손아귀에 의해 고개가 들려지고, 침이 흐를 것처럼 입이 벌어졌다.

잠깐만. 잠깐만 입술을 정리할 수 있도록 틈을 달라고. 그런 의도를 담아, 이선은 강희찬의 옷자락 끝을 잡고 있던 손을 더 올렸다. 하지만 옷의 허리께를 쥔 이선의 손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의 입맞춤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으응…….”

타인이… 이렇게까지 깊이 들어와도 되는 것일까?

처음으로 한 입맞춤은 그런 의문을 안겨주었다. 입 안으로 다른 사람의 체온을 느낀다는 건 이런 걸 의미했다. 숨 하나 제대로 내쉴 수 없다. 조금의 틈을 찾아 고개를 틀어보려는 순간, 단단한 손가락과 젖은 입술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대로 입술부터 먹히는 게 아닐까. 벅찬 숨 사이로, 그런 바보 같은 생각만이 머리를 스칠 뿐이다.

멋대로 이선의 자유를 빼앗고 있는 혀는 더욱 방종하게 혀뿌리를 훑었다. 이젠 입가로 침이 흐르지 않을까, 하는 체면 차린 염려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그에게 매달리듯 몸에 힘을 뺐고, 유일하게 의지할 구석인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줄 뿐이다.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온몸의 자유를 빼앗듯 입 안을 잠식하던 젖은 살덩이가 물러났다.

“입술, 좀… 벌려봐요.”

계절을 착각할 만큼 뜨거운 온기가 가신 건 아니었다. 짧은 말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살짝 붙어 있는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멍청하게 벌리고 있는 입술 위로,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느껴지는 울림과 떨림이 오롯이 전해졌다.

“흐읏…….”

이 남자는……. 화가 난 걸까?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는 욕망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느라 소리에만 의지하는 이선에게는 마치 예민해진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울음처럼 들려왔다. 이선은 갓 태어난 어린 동물처럼 눈도 뜨지 못한 채, 그저 “아…….”라며, 이도 저도 아닌 소리를 내는 것이 전부였다.

“더 벌리라고.”

싫다고 고개를 저을 수조차 없다. 창피하다고. 당신이 이렇게 한 손으로 얼굴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은 다물지 못하고 있지 않으냐고.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나름대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조금 더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은지,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만이 울릴 뿐이다.

“입이, 왜 이렇게 작은데.”

불만스러운 중얼거림이 울렸다. 이선의 입 크기를 탓하는 말인 듯했지만, 딱히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씨발.”

욕설을 짓이기는 그의 입술은 다시 한번 이선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고작해야 혀끝 하나로 자신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온몸을 샅샅이 발라먹을 기세로 입술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었다. 차에서 다가왔던 숨결이, 닿았는지 의심해야 했을 정도로 부드럽게 닿았던 입맞춤은 전부 허상이었다.

거짓말쟁이. 이런 키스를 할 것이라면, 미리 알려주었어야 했다. 그렇게 다정한 입맞춤으로 사람을 홀렸으면 안 된다. 이렇게 창피할 정도로,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혀를 섞어야 한다고 미리 말해주었야 했다. 그랬다면 분명…….

“팔, 내 목에 감아요.”

숨을 틀어막을 듯 자유를 빼앗던 강희찬의 커다란 손이 이선의 얼굴에서 떨어졌다. 대신, 허리춤의 옷을 간신히 잡고 있는 이선의 팔을 쥐고 제 목을 감게 만들었다. 어정쩡히 둘리는 팔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다시 한번 낮게 읊조렸다.

제대로 들이쉬지 못한 탓에 모자란 숨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로, 그대로 팔에 힘을 주었다. 길게 뻗은 목은 볼 때와는 달리 단단하고 억셌다. 좀 더 확실히 그의 몸에 닿은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오래된 나무와 같은 느낌이라고. 지금 온몸의 힘을 빼고 그에게 기댄다고 하더라도,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체중을 받아내 줄지도 모른다고.

“읏……!”

상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팔 힘이 이선의 허리를 강하게 둘러안았다.

강희찬이 무릎을 굽혔다고 느낄 무렵, 팔은 그대로 자신을 들어 올렸다. 양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이선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 의해 몸이 들어 올려지는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로 처음이었다. 아니, 이천의 야구장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둘러업었겠지만, 그런 건 누구 덕분에 기억에 없었다.

불안했다. 달랑 몸이 들어 올려진 탓에 왈칵 겁을 먹은 이선은 좀 더 팔에 힘을 주었다. 덕분에 입 안을 파고든 그의 혀가 목구멍까지 들어올 것 같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제 발로 땅을 딛고 섰을 때보다 더 확실하게 그와 맞닿았다. 몇 장의 천을 사이에 두고 그의 하반신이 다리에 닿았다.

자신이 끌어안은 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단단한 허벅지가 다리를 스쳤다. 불필요한 지방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새삼 직업을 느끼게 하는 허벅지 사이로 이질적인 존재가 느껴졌다.

근육의 단단함과는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화들짝 놀란 이선은 급히 입술을 떼었다.

“아……!”

당황으로 호흡도 잊은 이선의 눈 아래에는 여전히 태연한 강희찬의 얼굴이 있다. 자신의 중심이 타인에게 닿은 데서 오는 수치심 따윈 그 얼굴엔 없었다. 그래서 이선은 차마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이선은 불편하게 닿아온 그의 욕망에서 떨어지고자 몸을 물리려 움칫거렸다. 하지만 애초에 그의 팔에 의지한 채 들려 있는 신세다. 아무리 몸을 물리려 해봤자 그의 품 안이었고, 다리를 움직여봐야 그의 하반신과 멀어질 일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이선의 움직임이 자극된 것인지 그의 중심은 천 너머에서 착실하게 커지고 있었다.

‘…왜……. 대체 왜…….’

놀라서 눈만 끔뻑이는 이선을 향해 침에 젖은 입술이 열렸다.

“떨어지기 싫으면 다리라도 감아요.”

“아, 잠깐만……!”

들어 올려진 덕분에 강희찬의 얼굴은 한 뼘 정도 아래에 있다. 새삼 높이를 깨달은 이선이 내려달라는 의미로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런 미약한 움직임 따위, 그는 거절의 의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강희찬은 그대로 자신의 신발을 벗었다. 잠깐이라도 틈을 보이면 당장 입술을 붙여올 것처럼 이선을 향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몸을 물리고 싶다. 어떻게든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싶다. 하지만 다 큰 성인 남자가 누군가에게 들어 올려졌다는 불안감은 여전히 강희찬의 목을 끌어안은 팔을 풀지 못하게 만들었다.

“저, 저도 신발!”

“…….”

운동화에서 발을 뺀 그는 당장이라도 너른 보폭을 뻗어 집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이선은 입술이 막힐세라 다급히 말을 뱉었다.

어떤 핑계라도 상관없다. 이 불안한 자세에서 벗어나고 싶다. 지푸라기를 잡은 심정으로 꺼낸 말에도 이선의 허리 아래를 휘감은 팔은 풀어지지 않았다. 낯선 각도로 바라보는 강희찬의 얼굴도 여전했다.

평소와 비슷한 무표정이지만, 그 아래로 느껴지는 더운 온도는 부담스럽다. 이선은 말없이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에서 도륵 눈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벗어요.”

“…네?”

“신발. 벗으라고요.”

낮은 목소리가 말했다. 이선은 잠시 몸이 굳었다. 여전히 서술어부터 뱉는 그의 화법 덕에 심장이 멈추었다 다시 뛰는 듯했다.

조금 더 명확한 설명이 붙고서야, 이선은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자신의 체중을 받치고 있는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득 엘리베이터에서 그의 뒷모습을 볼 때와 같은 서러움이 솟아났다. 이건 제 마음을 몰라준다고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이선은 허공에 떠 있는 두 다리를 미약하게 버둥댔다.

“내려주셔야, 벗을 수 있는데…….”

“그냥 벗을 수 있잖아요.”

“…….”

더 이상 타협의 여지는 없다.

그가 움직일 때 켜졌던 센서등은 시간이 지났는지 다시 암전되었다. 내리깔린 어둠은 공간이 완전히 강희찬의 통제하에 있음을 상기시킬 뿐이다. 완벽한 타인의 영역. 그 한가운데에서 결국 이선은 그의 몸에 매달린 채로 두 발만을 사용해 신발을 떨궈냈다.

툭, 하고 신발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강희찬은 다시 걸음을 떼었다. 이번엔 버둥거리지 않고 얌전히 그의 품에 기댔다.

‘어떡하지…….’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내렸다. 역시 이 사람이 주인이다 싶은 향기가 코끝에 감겼다. 그의 체향에 취해 고민 따윈 잊고 싶었지만, 그렇진 못했다. 이제 정말 다른 사람과 자게 되는 것일까. 남들처럼 여자가 아니라, 남자와. 그것도 강희찬과.

몇 번이나 입술을 겹쳐도, 옷 너머로 일어서 있는 그의 중심을 느껴도 묘하게 현실감은 없었다.

무력하게 그에게 매달린 채로 달랑이며 짧은 복도를 지났다.

현관에 들어선 순간 한눈에 공간이 다 들어오는 자신의 원룸과는 구조가 달랐다. 침실로 가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어딘가에 엉덩이가 앉혀졌다.

마치 커다란 짐을 안아 옮긴 듯한 그가 드디어 이선의 몸에서 떨어지고서야,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주방이었다.

“뭐 좀 먹을래요? 배 안 고프다고 해서 집으로 왔는데. 바나나라도 먹을래요?”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그래요.”

어색한 대화가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식탁을 겸하는 듯한 아일랜드 바의 위. 그곳에 앉혀진 이선은 어색하게 사위를 훑었다.

아일랜드 바 앞의 공간이 덩그러니 비어 있는 것이 묘하게 어색하다. 본래라면 이 앞에 식탁이 있어야 하겠지. 역시 혼자 사는 사람보다는, 가족이 함께 지내는 게 어울릴 집이었다. 너른 가족용 식탁이 들어갔어야 어울릴 공간을 멍하니 보자, 이선은 점점 더 앉아 있는 곳이 불편해졌다.

바닥에 내려놓아도 되었을 것을, 대체 왜 여기에 사람을 두는 걸까?

마치 마트에서 온 짐덩이가 된 기분으로 이선은 제가 앉은 바의 양옆을 보았다.

식탁이 없으니, 분명 이 위에서 밥을 먹기는 할 텐데. 주방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한쪽 구석에는 노트북과 필기구 몇 개뿐. 이런 것을 보면, 아마 이 바는 식탁 겸 강희찬의 책상일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으나, 야구선수도 나름대로 공부가 필요한 직업일지도 모른다.

이선은 몇 달 전, 다소 무리를 해서 샀던 제 노트북보다 사양이 좋은 최신형 기기에서 눈을 뗐다.

이선의 신경을 잡아챈 것은 그 옆에 있는 물건이었다. 아까부터 기름칠이 덜 된 인형처럼 뻣뻣한 손가락은 멋대로 한 곳을 향했다.

“이거…….”

투명한 일회용 플라스틱 컵 안에 2/3 정도 차 있는 검고 갈색의 알맹이들.

굳이 손에 쥐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학교로 봉사활동을 왔던 날, 차에서 줬던 남은 사탕들을 모아뒀던 컵. 아이들은 절대 좋아하지 않는 계피 맛, 커피 맛, 흑사탕. 그것들이 가득했던 컵은 그때와는 달리 약간의 공간이 생겼다.

마지막 기억과는 다른 모습에 이선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의 집에 들고 갔다면, 몇 날을 냉장고 한구석에 두었다가 결국 버렸을 터였다.

“마셔요.”

이선의 뒤에서 무언가를 달그락거리던 강희찬이 다시금 곁으로 오며 유리컵을 건넸다.

사람을 마트에서 사 온 라면처럼 이상한 곳에 올려두더니, 잊지는 않았나 보구나.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들자, 다시금 손에서 기분 좋은 온기가 퍼져 나갔다. 그러니까, 강희찬의 몸처럼 지나치게 뜨거운 것이 아니라, 미지근할 정도의 안락한 온도.

‘왜 자꾸 마시게 하는 걸까…….’

딱히 목이 마르진 않았다. 그래도 거절하기가 뭐해서 이선은 유리컵을 입가에 가져갔다. 손으로 느꼈을 때보다 조금 더 찬 것 같은 온도가 입 안을 채웠다. 물을 머금은 제 입 안이, 방금까지 타인의 체온이 가득 채웠던 곳임을 새삼 깨닫자 이선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

이번에도, 강희찬은 물을 마시는 이선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제대로 마시지 않으면 한소리를 할 것처럼.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이선은 차마 눈을 마주하진 못했다. 그저 뚫릴 듯 뺨으로 향하는 뱀 같은 시선을 모른 체 두어 모금 더 물을 삼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먹고 싶으면 하나 정도는 꺼내서 먹어도 돼요.”

“…네?”

꿀꺽. 물을 삼키느라 한 박자 늦은 대답과 함께 이선은 고개를 돌려 강희찬을 보았다.

주방에는 센서등이 없는지 그를 비추는 건 창 너머로 흘러드는 도시의 야경뿐이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보면,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잘 빚어놓은 조각품을 보는 것 같은 이질감을 주곤 했다.

“사탕.”

여전히 냉한 표정의 그가 턱짓으로 이선의 왼손을 가리켰다. 사탕이 들어 있는 플라스틱 컵. 그것을 본 후에야, 이선은 강희찬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깨달았다.

…남이 준 거로 생색을 내다니. 어둠 속에서 이선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이거 내가 준 것이 아니냐고, 그리 따지고 싶었으나 이선은 대신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딱히 사탕이 먹고 싶은 건 아니다. 거무튀튀한 사탕을 즐겨 먹는 듯한 강희찬처럼, 자신은 특이한 입맛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 사탕을 아이들에게 나눠 줄 때, 자신 역시 몰래 푸른색 요구르트 맛을 꺼내어 입에 넣었으니까.

이선은 조심히 사탕컵을 원래 자리에 두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행동을, 누군가의 시선이 진득할 정도로 훑었다. 손이 이상하게 생겼던가……. 빤한 시선에 민망함이 차올랐다. 이선은 비어 있는 왼손을 허벅지 옆에 숨기듯 두었다.

그 모습을 보던 강희찬의 입에선 얼핏 한숨과도 비슷한 숨이 흘렀다.

“더 안 마셔요? 물.”

어두운 와중에도 거리가 가까운 탓에 강희찬의 표정이 지나치게 눈에 잘 들어찼다. 흘긋. 그가 시선으로 가리킨 곳에는 유리잔이 있었다. 반절이 넘게 남은 물컵. 이선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은 것 같은데…….”

이제 더 이상 뭔가를 마시는 건 사양이다. 찬 것부터 따뜻한 것까지. 종류별로 자꾸 제 입에 마실 것을 집어넣으려는 심산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배가 고프지 않다는 사람에게 유제품을 먹이는 이유도 포함해서.

하지만 남의 속내를 읽을 필요가 많지 않을 강희찬에게 이선의 간절한 바람이 전해지진 못했다.

“밥, 진짜 안 먹어도 괜찮아요? 이 주변에 죽 배달해 주는 가게 있는데, 그거라도 좀 먹지 그래요?”

강희찬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덕분에 이선의 다리가 조금 벌어졌다. 식사를 권유하기엔 불필요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감이 아닌가……. 괜히 민망해진 탓에 다리를 추스르려 했지만, 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강희찬은 그 사이에 제 몸을 끼워 넣었다.

결국 어디로 도망가지도, 다리를 제 마음대로 모으지도 못한 채. 이선은 어색하게 그와 눈을 맞추었다.

“저, 혹시… 배고프세요?”

“…….”

“드시고 싶으시면, 저는 그냥…….”

“정 선생은 지금 자기 얼굴 모르죠?”

커다란 손이 올라와 이선의 얼굴께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위협적인 손 크기인데, 막상 얼굴에 닿아온 건 어린아이의 힘보다도 못할 만큼 부드러운 온도였다.

그가 배가 고프다면, 어쨌든 식사 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서 가게를 물색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남자는 집요할 정도로 집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도저히 먹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식사를 하겠다고 얘기하는 편이 나을까. 그러면 배가 불러서 너그러워진 강희찬이 순순히 자신을 보내줄 것도 같았다.

그런 생각이 퍼뜩 머리에 스치는 순간, 오른뺨을 조심스레 쓸고 있는 온기가 입술을 멈추게 했다. 한순간 머리가 비워졌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곤 한다.

손가락 하나의 힘은 대단했다. 그저 멍하니, 지나치게 가까운 위치에 있는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게만 만든 것이다.

“호랑이한테 잡아먹힐 토끼 새끼 같잖아요.”

“…….”

야구를 하면, 다 이런 걸까. 아니면 강희찬은 유달리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인 걸까?

언제 들어도 고저의 변화가 없는 일정한 톤이었다. 누군가를 비웃거나 한심하게 쳐다보는 게 아니라면, 과연 희로애락을 느끼긴 하는 걸까 궁금증을 유발하는 목소리는 이번에도 이선을 한심하게 보고 있을 터였다.

이런 것도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입맞춤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입술을 떼어주며 내려다보는 시선이 기분 나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몇 번이나 겁을 먹고 페달에서 발을 떼어버리는 아이의 자전거를 잡아주는 젊은 아버지 같았다. 자꾸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는 것까지 포함해서.

싫은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그의 눈은 숨이 돌 때마다 진폭이 작아지는 이선의 가슴께를 면밀하게 살폈다.

“잡아먹을 게 맞긴 해도, 이렇게 쳐다보면 좀 미안해지긴 하거든요.”

거짓말. 그런 불평은 차마 입 밖으로도 나오지 못했다.

입술이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는다. 현관에서처럼 조급하지도, 잡아먹을 듯이 헤집는 입맞춤도 아니다. 가만히 맞대기만 하는 타인의 더운 열기는 소란스러웠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괜찮을 거라고. 다 괜찮다고. 체온은 구태의연한 그런 말을 모두 담고 있었다. 그 덕에 이선 역시 잔뜩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풀렸다.

다정한 사람이다. 제 다정함을 알아볼까 봐 굳이 입으로는 가시를 세우지만, 사랑 넘치는 부모님들이 정성으로 키운 자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들은 사랑을 줄 줄도 안다.

다행이지 않은가. 자신의 처음이 이런 사람이라는 게. 살아오며 보았던 어떤 남자들보다 가장 근사한 사람이 첫 상대다.

굳은 마음을 먹으며,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는 몸을 버텼다.

가볍게 붙었던 입술이 떨어지고,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자신 역시 피하지 않았다.

부끄럽고,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고. 그런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피하기 바빴던 눈을 오롯이 마주하자, 언젠가 머릿속에 들어왔던 궁금증 하나가 살풋 고개를 든다.

“저기…….”

“…….”

“…병원…….”

지금까지의 인생을 걸고 자부할 수 있었다. 정이선은 그리 호기심이 많은 축은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릴 적에도 괜한 것을 만져서 몸에 상처가 나는 일도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세상에 무심한 타입은 또 아니었지만. 어쨌든 점점 나이가 먹을수록 사회적 체면이나 주변의 분위기, 개인의 눈치가 가뜩이나 부족한 호기심을 누르곤 했다.

인터넷 환경이 좋지 못한 곳에서 재생되는 동영상처럼 중간중간 끊어지는 말을 강희찬은 가만히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병원’이라는 알 수 없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미간이 설핏 구겨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아무리 가깝다 해도, 눈이 적응되었다고 해도 어두운 공간이다. 이선은 차마 구겨진 인상을 알아채진 못했다. 대신, 단순한 궁금증으로 시작한 의문이 이제는 정말 걱정거리가 될 뿐이다.

남자에게 얼른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런 생각이 삐걱거리는 이선의 뇌를 지배했다.

“그, 그거는… 진료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자꾸 무슨 딴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무리 같은 남자라고 하더라도 이건 지극히도 개인적인 일이다. 남자끼리 뭘 그러냐. 그런 말을 하며 서로의 속사정을 꿰고 있는 친구 사이도 있겠지만, 적어도 자신에겐 없었다. 제 인간관계에서 가족을 제외하면, 아니, 어쩌면 가족을 포함해도 가장 친하다 할 수 있는 송재혁에게도 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냥 빨리 알아들어줘.’

그런 간절한 마음을 담아 강희찬을 올려다봤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물기가 맺힌 눈동자에 강희찬의 미간이 잠시 풀어졌다. 저런 얼굴을 하면 마음이 약해지는 걸 알고 하는 걸까. 차라리 그렇게 영악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입은 꾸욱 다물고 우는 표정을 지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광고 문구도 다 옛날얘기니까. 짜증이 한풀 꺾인 강희찬의 입에서 한숨이 새었다.

똑바로 말을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실린 양손이 이선의 엉덩이 옆 탁자를 짚었다. 앞으로는 강희찬의 몸이, 양옆으로는 그의 손에 가로막힌 상태에서 이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말아 쥐며, 이선은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진단서… 필요하시다고 들어서…….”

“…….”

정적이 흘렀다. 지금까지도 절대 소란스럽진 않았지만, 정적에 정적을 제곱한다면 나올 듯한 정적이 깔렸다.

아무 말 없이 끈질기게 이선의 얼굴을 보던 강희찬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이선은 몸을 확 움츠렸다.

“…인간들이, 주둥이를 안 놀리면 죽기라도 하나.”

나직한 짓씹는 소리는 이선의 어깨가에서부터 울렸다. 그제야 이선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

본의 아니게 그의 뒷말을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지 않나. 수습하기 위한 이선의 말은 다시 한번 강희찬이 고개를 들면서 흩어졌다.

“누구한테 들었어요?”

“…….”

본능이 이선의 입을 다물게 했다. 말하면 안 된다. 절대 말해주면 안 된다고. 괜찮으니까, 선생님한테만 말해봐. 자신 역시 자주 쓰는 수법이긴 하지만, 그런 속삭임에 넘어가서 좋을 건 없었다.

동료를 지키는 민주투사가 된 양, 이선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강희찬은 얼마간 자신이 하는 양을 보더니, 같잖다는 듯 픽 웃었다.

“어차피 말 안 해도, 정 선생이 들을 구석이 하나밖에 더 돼요?”

가혹한 고문 대신, 비릿한 웃음을 담은 입술이 다시 한번 다가왔다. 잔뜩 숨긴 입술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쪽, 하고 장난스러운 입맞춤이 붙었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장난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어린애들이 장난치기라도 하듯 쪽쪽거리던 소리가 열 번을 채울 무렵, 이선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고 감쳐물었던 입술을 푸는 순간, 강희찬은 장난을 그만두었다.

그가 입술을 뒤덮듯 베어 무는 순간 이선은 강희찬의 목에 팔을 감아 그를 끌어안았다. 내 친구를 너무 괴롭히지는 말아달라고.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강희찬이 얼마나 알아줄지는 모르겠지만.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목을 꼬옥 안았다. 거추장스러울 팔을 강희찬은 구태여 치우지 않았다. 대신, 화답이라도 하듯 앉아 있던 몸을 달랑 들어 올릴 뿐이다.

“아……!”

깜짝 놀란 이선이 순간적으로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진 않는다.

대신, 눈을 꼭 감고 그의 목을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