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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선이 근무하는 학교에선 1교시 수업이 끝나면 20분 정도 쉬는 시간이 있었다. ‘중간놀이’라 불리는 그 시간대는 학년과 관계없이 모두 같았다.
“산이는 선생님 잠깐 보자.”
이선의 말에, 한 손에 축구공 가방을 야무지게 쥐고 맹렬히 뛰어가려던 작은 몸이 멈칫한다.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네다섯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말을 뱉어놓고 이선은 아차 했다. 아무리 꼬마 대장이라도, 어쨌든 아이는 아이다. 이런 말투로 선생이 불러 세우면, 고등학생들도 일단 겁먹고 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더 나은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정이선은 표정이 약간 굳은 채 걸음을 멈춘 사내아이를 향해 팔을 벌려 보였다. 나름대로 위험하지 않다는 제스처였지만, 어쩐지 산이의 얼굴엔 경계심만 짙어졌다.
그래도 약간 긴장을 풀었는지, 들고 있던 축구공을 옆에 있던 친구에게 넘겼다. 대장을 잃은 무리의 얼굴엔 수심이 깊어졌다. 무슨 일이냐며, 같이 따라올 기세기에 이선은 약간 난감해졌다.
…이 인원이 핸드폰 화면 안에 있는 걸 보는 순간, 강희찬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 확실했다. 욕설이나 뱉지 않으면 고맙게 여겨야 하겠지.
“너네 먼저 가. 끝나면 나갈게.”
선생의 걱정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키가 작은 대장은 짧은 한마디로 상황을 일축했다. 무리는 자신들보다 적어도 반 뼘은 작은 대장의 명령에 순순히 수긍했다. 그 모습이 여간 믿음직한 게 아니다.
야구부에서는 형들의 보폭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는데. 아이는 동년배들 사이에선 제법 어른스러웠다. 비록 앞니는 아직도 자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지만.
이선은 제법 늠름한 대장님을 이끄는 보좌관의 심정으로 교무실에 왔다. 방석이 깔린 푹신한 자리를 수령님께 대접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9시 50분. 조금 이르긴 하지만…….
‘약속해 줬다. 분명히.’
숨을 한 번 크게 삼키고, 연락처에서 남자의 이름을 찾았다.
영상통화라니. 핸드폰을 사용한 이래로 먼저 걸어본 적도 없는 기능이었다. ‘강희찬 선수’ 낯선 호칭이 붙은 이름 아래, 영상통화 버튼을 누르기가 퍽 망설여졌다.
“선생님……. 왜요?”
이선의 부름에 교무실로 끌려와서는, 선생님 의자에 앉은 아이는 불안스레 눈을 들어 올렸다.
그 시선과 마주친 이선은 결국 본능적으로 버튼을 눌렀다. 어른이란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이 너무 많았다.
잠깐의 대기 후, 화면 가득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낯선 얼굴이 나타났다.
아무렇게나 머리를 헝클고 있는 손과 그 아래에 있는 반쯤 뜬 눈. 가장 먼저 이선의 눈에 들어왔다. 푸우, 하고 한숨을 쉬는 모습이 딱 자다가 지금 일어난 사람의 것이다.
사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어깨선과 윗가슴이었다. 이선은 움칫하며, 핸드폰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화면을 조금이라도 더 가려보려는 의도였다.
혹시라도 교무실에 있던 누군가가 화면을 봤을까. 이선은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몰래 이상한 영상을 보다가 부모님께 들키는 중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다행히 모두 조금 긴 쉬는 시간 동안 자잘한 업무나 채점을 하고 있다. 그래도 놀란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는다.
저의 우스운 모습에 대한 자각은 이제 강희찬을 향한 원망으로 번졌다.
‘…대체 왜, 벗고 전화를 받는 거지?’
아니, 분명 자기 집일 테고, 자고 일어난 것 같으니 이상할 건 없지만…….
왠지 모르게 화면을 함부로 볼 수 없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린 눈과 마주쳤다.
‘왜 그래요, 선생님?’
순진하게 묻는 눈을 보며, 이선은 고민에 빠졌다.
아이에게 외설스럽게 헐벗은 사람과의 통화를 허락해도 되나? 같은 남자라지만, 그래도 여긴 학교고, 교무실인데…….
이선의 고민은 의외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여보세요.
역시 방금 일어났구나. 제대로 들린 강희찬의 목소리는 예상대로 잔뜩 잠겨 있다.
어제 늦게까지 밖에 있긴 했지. 비록 집으로 가서 바로 잤다고 쳐도, 새벽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시간대였다.
그 순간 잔뜩 찌푸린 탓에 가늘어진 눈과 마주친 것만 같았다.
―잠깐만요.
쭈뼛대며 눈을 이리저리 피하던 걸 눈치챈 걸까. 한숨을 내쉰 강희찬이 잠시 화면에서 벗어났다.
‘바쁜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 어디에서 주워입었는지, 흰색 티셔츠를 몸에 걸친 강희찬이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 혼자 화면 상단에 붙였던 가상의 빨간 19세 미만 관람 불가 마크가 떨어진 순간이기도 했다.
벗었을 땐 보기만 해도 부피감과 무게감이 상당했던 몸이었는데, 면 하나가 걸쳐지자 위압감이 조금은 덜어졌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렀다. 항상 봐왔던 인상의 그 남자가 맞긴 했다.
운동선수인 것치고는 마른 편이 아니었나? 하지만 근육이 덮인 어깨와 가슴팍의 부피감은 또 그렇지도 않았다. 야구단의 감독이 저 몸을 봤다면 절대 조기 퇴근을 시켜주진 않을 거다.
위압감이 줄어들어 한결 시청이 편해진 화면을 보면서 이선의 가슴에서도 묵직함이 덜어졌다.
―애새끼 바꿔요.
미안함에 쉬이 용건을 꺼내지 못하던 이선을 대신해, 화면 속 그가 입을 열었다.
졸음을 떨치려는지 얼굴을 손바닥으로 마구마구 문지른다. 조금 웅얼거리는 목소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뜻은 명확히 전달되었다.
영상통화였다. 그 덕에 교무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불손한 단어 사용을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다들 모른 척을 해준다. 정이선은 여기가 교감 선생님이 계신 본 교무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게 전부였다.
구태여 험악한 단어 선택을 지적하진 않았다. 대신,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성인 남자의 손에서도 버거운 크기를 작은 두 손이 꼭 쥐었다.
“강희찬 코치님!”
―야……. 들리니까 작게 얘기해.
짜증이 묻은 말이 흘러나왔다.
이선은 화면에 잡히지 않을 곳으로 슬쩍 몸을 비켜섰다. 자리를 잃은 탓에 어정쩡히 한구석에 선 그를 향해 교무실의 눈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낸다. 정이선은 멋쩍게 웃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놀람과 신난 기색이 작은 등 위로도 느껴진다. 행여 떨어트릴까 봐 핸드폰을 꼭 쥔 두 손은 이제 하얘진 수준이었다. 흥분한 아이의 기색과는 별개로, 전화기 스피커에선 잠긴 목을 풀기 위해 맥락 없이 내는 ‘아아’ 소리가 몇 번 흘렀다.
―너, 축구부 들어갔어?
무료함에 발장난을 하던 이선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들고 작은 몸을 확인하자, 방금까지 사방으로 내뿜던 흥분감이 푹 죽는다. 그 자리에는 풀죽은 기색이 대신했다.
“…아니요. 아직 안 들어갔어요…….”
기껏 목까지 풀어놓고 저런 말이나 하다니…….
이러려고 전화를 걸라 했는지 따지고 싶었다. 그냥 공부랑 운동 열심히 하라는 적당한 말을 해줬어도 아이는 오늘 온종일 기뻐할 터였다. 그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잠깐이라도 전화기를 뺏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야구 계속해. 야구가 제일 멋있는 거야.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수 초.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부… 못 해도, 야구 할 수 있어요?”
―너무 못 하면 안 돼. 초등학교 땐 열심히 해야지. 월급 얼마 나오는지는 보고 살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러면…….”
―선생님이 숙제 내주는 것만 잘하면 돼. 그거 못 해?
불만으로 설핏 구겨졌던 정이선의 미간이 펴졌다. 통화가 시작되고, 흘러나왔던 남자의 말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소리였다.
‘…아까도 이렇게 해줬으면 얼마나 좋아.’
슬그머니 튀어나오는 불만과 함께 입도 나오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양 주먹을 꾹 쥐었다 펴보기를 반복했다. 하얗게 피가 통하지 않던 손의 색이 돌아오는 걸 몇 번이나 보는 동안에도 명치께는 간지러워졌다.
이선은 한숨을 푹 쉬어봤다. 영 나아지진 않는다. 그래도 새벽의 기억은 자꾸 떠올랐다. 덤덤하고 낮은 목소리라서, 그래서 더욱 자신을 놀라게 했던 한마디는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욱 선명하고 또렷하게 귓가에서 울렸다.
괜히 교무실의 시계를 봤다. 어제의 기억은 벗어나려 할수록 한구석에서 끊임없이 제 존재를 과시했다.
이선이 애써 집중하고 있는 작은 뒤통수는 재빨리 흔들렸다.
“아닙니다! 할 수 있어요!”
씩씩한 대답과 함께.
―그러면 됐어.
무심한 반응까지도 귀에 너무 잘 들어왔다.
이 정도 거리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법도 한데, 남자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전달력이 좋았다. 만일 강희찬이 아나운서였다면, 자신은 분명 매일 저녁 그가 소속한 방송국의 뉴스를 시청했을 거다.
―…야구 포지션, 하고 싶은 거 있어?
슬슬 잠겼던 목도 풀리는지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건조한 목소리와 어울리는 말투가 무심히 물었다.
“투수요!”
작은 뒷모습이 마치 용수철에 튕기는 양 위로 쑥 올라왔다. 의자의 바퀴가 움직이며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였다. 이질적인 소음에 이선은 잠시 멈칫했다.
투수. 피처. 포지션 번호는 1번.
고등학교 시절, 체육 시험 범위에 투수의 투구 동작이 들어간 적이 있었다.
팔로 스루니 뭐니 하는 복잡한 투구 동작을 거치면 온몸의 힘이 공에 전달되어서 구속이 나온다는 점. 그리고 일련의 동작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보크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시험 일주일 전, 하루 날을 잡아 날림 수업을 했던 체육 선생님의 말씀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이유도 모르고 외워야 하는 규칙이나 일련의 동작들이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원리도 없이 외우며 생각했다. 저렇게 복잡하면 누구도 투수는 하려 들지 않겠다고.
하지만 쨍한 목소리는 그때의 정이선의 예상과는 다른 답을 내놓았다. 생각보다 기피하는 포지션은 아닌지도 모른다.
―…너, 저번에 야구장 왔을 때, 부모님이랑 왔어?
우상과 스포츠 꿈나무의 바람직한 대화가 이어졌다. 교무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이선은 무료한 대화 흐름에 귀를 맡겼다.
작은 머리가 머뭇거리면서도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마, ‘저번’이라는 건 그날이겠지. 하루가 멀다고 신나 있는, 게다가 방학까지 해서 기분이 최고치에 달했던 열 살짜리 남자아이의 꿈과 희망을 박살 내버린 날 말이다.
2교시 수업 시작이 5분 정도 남았다. 적당히 달래주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게 해야겠다. 이선은 하나둘 교실로 돌아가는 선생님들의 동선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며 생각했다.
―친부모……. 쯧, 진짜 엄마, 아빠냐고.
지나치게 전달력이 좋은 말씨는 여전히 유효했다. 그리하여, 뜻 모를 말에 놀란 건 정이선만은 아니었다. 다음 교시를 위한 교구를 챙기던 김경원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혼란과 당혹스러움이 묻은 눈과 마주쳤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도저히 안 되겠다. 그런 생각으로 걸음을 떼었다. 더 심한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통화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입술을 깨문 정이선이 핸드폰 화면 안에 들어왔을 무렵, 스피커에선 나직한 한숨이 울렸다.
―너, 일단 편식하지 말고 많이 먹어. 투수하려면 몸 커야 돼. 안 그러면 못 해.
대화의 방향키가 다시 올바르게 바뀌었다. 소도 때려잡을 듯, 동심파괴 상습범을 현행범 체포하려던 이선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살찌면 예림이가 싫어할 텐데…….”
―야구선수 돼서 돈 많이 벌면, 예림이보다 더 예쁜 사람 만날 수 있어. 그런 거 싫다고 할 애면 그냥 지금 버려.
‘…어쩐지 멀쩡히 나간다 했다.’
이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의 입에서 나왔던 ‘예림이’는 이선의 반이 아니었다. 짐을 잔뜩 챙긴 2반 담임이자 ‘예림이’의 담임인 김경원이 알 수 없는 한숨을 쉬며 교무실을 나섰다. 면구함이 차올랐다.
‘죄송합니다. 정말, 너무 죄송합니다.’
입으로 차마 낼 수 없는 사죄가 목 언저리를 맴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자신의 잘못은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고개를 숙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의 어깨너머로 강희찬의 얼굴이 더없이 잘 보였다. 그래도 앞머리는 방금 일어난 사람처럼 살짝 들려 있었지만. 편하게 입고 있는 흰색 티셔츠가 꽤 색다르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언제나 봤던 강희찬은 야구 유니폼이 아니면 꽤 단정한 차림이었으니까.
“…크흠!”
이선은 헛기침 소리를 부러 크게 냈다. 과연 들렸을지는 모르겠지만, 화면 속의 강희찬은 눈가를 찌푸렸다.
‘좋은 말로. 제발 순화에 순화를 거친 말로 바꿔서.’
간절한 마음을 담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제발 그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길. 더 동심에 폭탄을 투여하는 건 그만둬주길. 원자폭탄도 두 번으로 끝났잖아.
간절한 바람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한숨을 내쉬었던 강희찬은 그대로 입술을 열었다.
―살 좀 쪘다고 싫어할 거면, 만나고 있을 필요도 없어. 시간 낭비야.
순화된 게 저거라니. 깊은 탄식이 흘러나오는 걸 꾹 참았다. 기대한 게 바보였지, 뭐.
“네에…….”
황당한 조언도 조언이랍시고 대답을 하는 어린 목소리가 기막히다.
이래서 사람이 성공을 해야 하는 거다. 똥만 싸도 박수를 받을 거라고 했던가. 자신은 지금 입으로 나오는 똥 같은 소리에도 고개를 끄덕여주는 모습을 직접 보고 있었다.
난감한 침묵이 이어졌다. 키가 크다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없는 옆 반 여학생에 대한 죄책감이 가중되었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선이 쓸데없는 감사함을 느끼던 차였다. 머뭇대면서도, 용건이 있는 어린 목소리가 울린 것은.
“코치님……. 다음에 또 와요?”
자신은 어쩐지 저런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약해진다. ‘남아서 공부’도 한 시간을 하기로 해놓고, 저런 식으로 말하면 이선은 30분 만에 아이를 보내주곤 했다. 별로 좋은 선생인 것 같진 않지만 보통, 사람은 이럴 거라고 애써 변명하곤 했다.
―몰라.
그런 의미에서 남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차라리 그다웠다. 쓰디쓴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저런 성격임에도 강희찬은 꽤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런 점이 참 부러웠다. 시큰둥한 얼굴로 식사 중이라며 사인을 거절해도 꾸준히 그것을 요청하는 팬들이 있다. 세상 귀찮다는 얼굴로 틱틱거려도 동경 어린 눈으로 봐주는 소년들이 있었다.
대가 없이 받을 수 있는 사랑이라는 건 정이선에게는 낯선 것이다. 완전한 타인에게 받는 조건 없는 애정이라는 건 두려우면서도, 언제나 부러웠다.
딱히 다수에게 받는 애정을 원하는 건 아니다. 그런 욕심까진 부려본 적도 없다.
단 한 명. 애정을 주고받으며, 미래에도 자연스레 곁에 있어줄 사람을 원하는 게 그리 큰 욕심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원하는 건, 항상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가는 게 아니다. 뭐, 과하게 받는 불특정 다수의 애정을 강희찬 역시 달가워하진 않을 테지만.
‘그 여자가 정 선생 좋아합니다.’
평온한 얼굴을 해서는 기가 막힌 소리나 했었지.
깔끔한 생김새 덕분인지 남자는 무슨 말을 해도 제법 믿음직하게 들렸다. 만약 그 순간 강희찬의 입에서 ‘나는 공중부양을 할 줄 압니다’ 따위의 소리가 나왔어도, 지금까지 진지하게 믿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의 진위는 정이선에겐 그리 중요하진 않았다. 김경원은 오늘 아침에도 밥 대용인지 뭔지 모를 빵을 사 들고 와서는, 이선에게도 권했다. 아침을 먹었다는 거짓말로 거절한 후, 어쩐지 풀이 죽는 기색에 조금 더 신경이 머물 뿐이다.
그저… 그뿐이다.
확인할 수 없는 남의 마음을 엿들어서 드는 불편함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뻣뻣하게 빵을 거두어가는 가는 손가락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달갑지 않다.
원하지 않는 타인의 마음이란 건 짐에 불과하다. 씁쓸한 사실만을 얻었다. 상대가 원치 않는 마음을 주고 있는 건 비단 그녀만의 일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정 선생님한테 마음이 있던 겁니다.’
듣기 좋은 헛다리였다.
아주 잠깐 혹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당장 전화를 걸고, 좁은 고시원 방에서 자고 있었을 이를 향해 두서없는 말을 꺼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울렁거리던 속은 이내 차게 식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자신을 향한 김경원의 불필요한 마음을 가정하는 순간 헛된 기대 역시 가라앉았다. 그러고 난 후 다짐했다.
평생 입 다물고 있을 거다. 그래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눈치챈 신규진이, 빵 하나조차 거치적거리게 여기는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면……. 그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제대로 펴 보인 적도 없는 마음은, 간간이 더운 바람이 스치는 새벽에 다시 한번 더 눌러 접어야만 했다.
“와주세요. 우리 아직 코치님 없어요.”
―숙제 안 빼먹으면 생각해 볼게.
심드렁히 내뱉은 말이 이선의 상념을 갈랐다. 한 박자 늦게, 입가에 둥근 호선이 그려지려는 걸 애써 누르려 했다. 하지만 입술을 감쳐 물어봐도 썩 소용은 없다. 입꼬리는 멋대로 움직였다.
제법 제대로 된 어른스러운 소리도 할 줄 안다. 본인의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의 말이 누구를 의식한 것인지는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그 순간, 딱 견딜 만함과 그 이상의 경계에 있는 간질거림이 명치께에 얹어졌다.
“…….”
어제 새벽 내내 이랬었다. 평소 같은 일상적인 무심한 얼굴로 떨군 폭탄의 의도를 머리가 빠지도록 생각했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고민하다가도, 누군가에게서 듣는 ‘만나자’는 소리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누구에게든 상관없이, 누군가에게서 들은 호의적인 말은 썩 나쁘지 않다고.
자꾸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는 핑계로 의미 없이 연락처를 들여다보곤 했다. 사람 이름 석 자. 간결한 글자들의 조합이 자꾸 싱숭했다.
정말 자야겠다고, 이러다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출근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 눈을 붙일 무렵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설렘이었다. 세상 무신경해 보이는 남자가 툭 뱉어낸, 단순한 음절이 주는 울림이 자꾸 잠들지 못하게 하는 거라고.
―너, 공부 안 하냐?
어느새 목소리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저런 종류의 피로함을 정이선은 잘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의 여름방학. 그때면 항상 실습 차 갔던 부설초등학교나 부임 후 왔던 이 학교. 거기에 담임을 처음 맡았던 작년. 그때마다 항상 새로운 수준으로 놀라운 피로감을 느꼈다. 어린애들의 넘치는 에너지는 멀찍이 떨어져서 봤을 때가 가장 흐뭇하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곤 했다.
“산이야. 이제 코치님한테 인사하자.”
이선은 아이의 어깨를 조심스레 짚었다.
“아앙. 벌써……!”
“이제 교실 가야지. 코치님도 일하러 가신대.”
“아아…….”
원망의 눈길이 뒤에서 아이의 어깨를 짚은 이선에게 향했다. ‘나쁜 사람’이 되는 걸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만큼은 어쩔 수 없다.
자다 깬, 목소리도 제대로 다듬지 못했던 시각에도 약속을 잊지 않아주었다. 그런 사람에게 악역을 시킬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야. 얼른 끊어. 밥 먹게. 배고프다.
…하지만 건성인 목소리는 기어이 정이선에게서 악역을 앗아갔다.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네에…….” 하며 겨우 수긍한다.
일어나서 아직 세수도 안 했을 것 같은 한 개인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오백 명이 조금 넘는 이 학교 학생들이 순응하는 일과 체계에 반기를 들었어도, 배고프다는 강희찬의 건성인 말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다니.
이선이 놀라는 동안에도 통화는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제 용건만 끝나면 먼저 확 끊어버릴 것 같은데 이건 또 의외다. 그리고 그다음 들려온 말은 더더욱.
―선생님 말 잘 들어. 물어봐서 말 안 듣는다고 하면, 다신 안 가.
‘영 조화롭지 못한 말과 표정인데…….’
화면 속의 강희찬은 앞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영수증 버려주세요. 표정이나 성가신 기색엔 그런 종류의 말이 오히려 잘 어울려 보였다.
순간 정이선은 멈칫했다. 명치께를 손으로 문지르거나 괜히 손가락을 접었다가 펴고 싶은, 어제 새벽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모호한 감각이 다시 몸에 번져 온다. 명치께를 손으로 벅벅 긁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의 호의가 미치는 범위 안에 한 발짝이나마 들어갔다는 것을. 그리고 그걸 의식하는 건 퍽 설레는 일이라고.
비록, 남자의 ‘만나자’는 말이나, 어린애에게 놓는 엄포는 얄팍한 호의일 테지만. 처음으로 받아본 낯선 것은 그리 불쾌감을 유발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
“…응?”
묘한 기분은 잠시였다. 작은 몸이 홱 돌더니, 뒤에 서 있던 이선을 향해 의심과 원망이 섞인 눈길을 보냈다. 한 박자 늦게 눈빛의 의도를 알아챈 이선은 지레 억울해졌다.
‘난 그런 치사한 고자질 안 했어!’
정이선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붕붕 흔들며 작은 몸을 향해 결백을 주장했다.
진실한 결백 주장에도 원망 어린 눈빛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아직 하지도 않은 고자질을 책망받다니. 이미 아이에게 자신은 동경하는 선수에게 제 흉이나 보는 못된 어른이었다.
“나, 말 잘 듣는데…….”
―어디서 개구라를…….
“…….”
―…알았으니까, 너 이제 공부나 하러 가.
“네에. 코치님, 밥 먹을 거예요?”
휘휘. 손을 내젓는 동안 화면이 약간 흔들렸다.
저렇게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 않아도, 아이의 대답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마무리되는 대화를 듣자, 통화가 정말 끝나간다는 걸 실감했다.
어떤 표정을 지은 채로, 어떤 말을 해야 하지?
문득 그런 걱정이 스쳤다. 아이의 손에서 자신에게 다시 핸드폰이 왔을 때, 어떤 인사를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보통의 음성통화도 아니고, 영상통화다. 당연히 감사하단 말이 우선이겠지만, 그런 어색한 대화가 오가고, 어떤 말을 하며 통화를 마무리해야 할지는 난감했다. 업무 통화가 아닌 전화는 생각해 보면 이선에겐 언제나 낯설었다. 물론 처음 해보는 영상통화는 더욱 그렇고. 그가 자신을 향해 던질 시선도 걱정되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다면, 시야 밖에서라도 명치를 벅벅 긁는 추태를 보일 순 없었다.
어린애를 동네 똥강아지 대하듯 했던 태도를 자신에게도 보이려나? 그 정도까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정이선은 이 고민이 처음부터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끊어.
단조로운 말이 흐르고, 아이가 “네”라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앱이 깔린 화면을 보고서야 이선은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챘다.
약간의 민망함과 허무함. 괜한 서운함. 그런 것들이 뒤섞인 무언가가 가슴에 얹혔다. 아이에게서 받아 든 핸드폰의 무게감과 비슷했다. 어젯밤 내내 이선을 괴롭혔던 감정과도 퍽 닮았고.
…서운할 필요 없다. 이선은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산이야. 들어가자.”
언제나 진동 모드로 설정해 두는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네!”
마지막은 동네 똥강아지처럼 귀찮게 여겨져도, 그래도 전반적으로 좋았나 보다. 작은 몸이 답하며, 행동이 느린 선생을 기다리지 않고 교무실을 뛰쳐나갔다.
이 학교의 수업 종은 정시보다 1분 정도 일찍 울린다. 그러면서도 수업이 마치는 알림은 정시에 울렸고.
이선은 걸음을 서둘러 교무실을 나섰다. 이미 복도엔 놀이를 마치고 급히 들어오는, 벌겋게 달아오른 땀 범벅인 얼굴들이 가득했다. 3반 소속인 녀석 몇은 이선의 얼굴을 보고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더욱 걸음을 서둘렀다.
“뛰면 안 돼.”
맹렬히 옆을 스쳐 지나가던 아이 중, 누구도 이선의 말에 대답하진 않는다. 어차피 크게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딱 이 정도겠지.’
그가 이른 아침에 다 풀리지도 않은 까슬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거나, 썩 관심 없는 어린아이에게 ‘선생님 말을 잘 들으라고’ 하는 것. 그런 건 정이선이 학교에서 얼굴만 아는 아이들에게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말과 비슷할 터였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별것 아닌 행동. 굳이 ‘호의’라고 붙이기도 모호한 적선.
자신은 언제나 타인의 별것 아닌 호의를 크게 받곤 했다.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엔 선생님이 머리를 한번 쓸어주기만 해도 괜히 싱숭생숭했었다.
조금 더 큰다고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수행평가였던 영어 소설을 해석해 주고 들은 김은호의 ‘고맙다’라는 말과 이온음료. 그 이후로 이어진 이야기는, 그저 의미 없이 늘어난 드라마의 연장 회차였다.
유년 시절과 10대를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뀐다고 사람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자신은 누군가가 지어주는 웃음이나 커다란 손길에 약했다. 크게 의미를 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혼자 잘도 커갔다.
남자는 ‘투아웃’이라고 했다. 당시엔 조금 분했지만, 역시 정답만을 고르는 사람다웠다.
두 번이나 겪어봤으니, 이제는 안다. 크게 생각할 것 없다. 특히, 이 사람의 경우에는.
어차피 만나자는 소리도 큰 의미를 두고 했을 말은 아니었다. 강희찬은 원래 그런 사람일 거라고. 쉬이 연애하고, 쉬이 헤어지는 부류라고. 생전 처음 보는 동성애자가 신기했을지도 모른다. 어린 사람에게 어울리는 호기심이었다.
그의 차를 타고 돌아온 집에서, 이선은 불을 끄고도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강희찬 선수.
그렇게 저장된 연락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수십 분이 훌쩍 지났다. 그러다가도, 머릿속엔 달걀귀신처럼 얼굴이 없는 여자와 딱 산이 또래의 아이가 있는 먼 미래의 그의 가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자신이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지하면, 어딘지 추워서 이불을 몸에 꽁꽁 말았다. 울적해지는 마음을 스스로도 알 수 없어서. 이선은 토라진 듯 핸드폰을 손에서 떼었다.
안 볼 거라고. 이제 진짜 잘 거라고.
저렇게 어린 운동선수가, 그것도 남자는 만나본 적도 없는 남자가 진심일 리가 없다.
눈을 꾹 감고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던 머리는 금세 다시 빠금 밖으로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이선의 손은 또다시 핸드폰을 쥐었던 거다.
몇 번이나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다, 동이 틀 무렵에야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진심일 리가 없다.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고 끊임없이 마음을 향해 속삭였다.
…정말 좋아했다면…….
‘그 여자가 정 선생 좋아합니다.’
정말 그 남자에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연애 대상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자신은 단 한 번도, 괜찮은 분위기라며, 여자 후배와의 메시지 대화를 보여주는 신규진을 향해 ‘걔도 너한테 마음이 있다’는 종류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알면서도 끝까지 얘기해 주지 못했다.
저의 목 안에선 끝내 나오지 못했던 말이, 남자의 입에선 지나치게 쉬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했던 거다.
‘나랑 만나죠.’
남자를 연애 대상으로 삼는다고 해도, 자신은 어쨌든 때와 상황에 맞는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다섯 글자를 이해하는 방향은 너무 뻔했다.
‘아, 네. 언제요?’
쉬는 날이 하루밖에 없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월요일이려나. 그런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황당하다는 기색이 어린 강희찬과 눈이 마주친 것은.
‘…네?’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하는 거예요?’
‘아…….’
그제야 이선은 ‘만나자’는 말의 또 다른 의미를 이해했다. 아니, 그러고도 한참을 고민했다. 과연 지금 자신이 알아들은 뜻으로 그가 말한 것이 맞는지. ‘만나자’라는, 우리나라 말과 발음만 같은 외국어가 있는지.
한참을 고민하는 동안 이선의 어깨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것만은 아니겠지. 간절한 바람은 슬프게도 이선을 배신했다.
강희찬은 어떤 기준에서 봐도 표준 정규분포표의 끝자락에 위치할 사람이었다.
원래도 특이한 사람의 입에서 더더욱 특이한 소리가 나왔다. 비록 말 자체는 분위기라는 걸 모르는 보통의 남자가 뱉을 법한 평범한 고백이라도, 그 사람에겐 정말 특이했다.
그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이선은 굳은 채 입을 벌리기만 했다.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그 표정은 뭡니까? 이 주먹은 또 뭐고.’
‘아…….’
저도 모르게 몸 앞으로 세운 가드를 뒤늦게 깨달았다. 양팔은 공격에 대비하듯 잔뜩 올린 채였다.
이선은 어설프게 얼굴이 가려지는 위치에 두었던 팔을 내렸다. 그러자 어처구니가 없다는 강희찬의 표정이 가감 없이 눈에 들어왔다.
민망한 마음에 괜히 헛기침했다. 미세먼지도 없는 날이라 얼마나 진정성 있게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똑바로 앉지 그래요? 내가 때리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 주는 펀치력 자체는 비슷한 수준인데.
쉬이 거두어지지 않는 한심한 얼굴엔 이유가 있었다.
주먹을 치워도, 이선의 몸이 묘하게 강희찬을 피하듯 그가 없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이래서야 가드를 내렸어도 변한 게 없는 꼴이었다.
그런데도, 자세를 바로 할 순 없었다. 차라리 운동선수인 그에게 ‘한 대 맞아볼래?’ 소리를 듣는 게 훨씬 덜 무서울 테니까.
말과 그 말을 내뱉은 인물과 말이 향하는 사람. 삼박자가 모두 따로 놀고 있었다. 불협화음 수준이 아니라, 아예 엉망진창이었다.
제대로 못 들은 것 같으니까, 다시 말해줄래요?
그렇게 되묻기도 무서웠다. 그래서 입 하나 벙긋하지 못하고 굳었다. 그런 저를 향하던 시선은 다행히도 다시 앞을 향했다. 그의 눈길이 떨어지자 조금 더 숨을 쉬기가 편해졌다.
‘어차피 투아웃은 가망 없는 거 아닙니까? 내가 봤을 땐 타이밍 놓쳤으니까, 혹시라도 잘해볼 생각이면 꿈 깨세요.’
‘…….’
‘그리고 뭐로 보나, 내가 투아웃보다는 좀 더 나은 새끼고.’
…어떤 점이?
멍한 의식 사이로 의문 하나가 눈치 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이었다. 자신은 강희찬처럼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사는 입을 가지지 못한 게.
물론, 혼신의 눈치와 힘을 다해 말을 막은 건 아니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생각의 속도를 몸의 반응속도가 따라주지 못했다. 그게 이 순간만큼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남자가 원체 남의 말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아도……. 자신은 사람의 면전에 대고 예의 없는 말이나 하는 사람은 아니어야 한다.
흘러가는 이선의 사고 흐름과는 별개로, 남자의 말 역시 유려히 흘렀다.
‘사람 만나서 연애하는 게, 정 선생이 생각하는 것보다 별거 아닐 겁니다. 투아웃은 그것보다 훨씬 별거 아닐 거고.’
‘…….’
‘가지지 못해본 거라 괜히 오기를 부리는 거예요.’
…조금 분했나?
항상 무섭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미로를 남자는 위에서 내려다본다.
사람이란 게 참 웃겼다.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구태여 남의 입을 통해 들으면, 어쩐지 수긍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남자가 조금이라도 한심한 기색을 보였더라면,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자리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얼굴에는 비웃음도, 깔보는 기색도 없었다. 나직한 목소리는 체념에 가까웠다.
마치, 남자도 아주 예전엔 무언가를 포기해 봤던 것처럼.
정말 이상한 일이다. 모든 걸 다 가져봤을 것 같은 사람이, 이런 얼굴을 지어 보이다니.
부조화는 정이선의 입을 가로막았다. 미묘한 동질감을 구태여 깨고 싶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정 선생님도 잘 알고 있잖아요. 그 정도 연애에 만족해야 한다는 거.’
나직한 말을 듣는 순간, 더운 여름은 턱이 빠질 듯한 추위로 바뀌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나이 든 뒷모습을 따라나서고, ‘시작’을 의미하는 구태의연한 말 따위는 생략하고. 그런 것들이 반복될 자신의 연애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지.
다른 사람은 모르겠으나, 자신의 앞엔 그런 연애밖에 없을 거다. 그도 아니라면, 마음 한 자락 비추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거나.
그렇게 큰 것을, 과분한 애정을 바란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남들만큼만.
백을 주어서 백을 받겠다는 것도 욕심이었음을, 세 살이 어린 남자의 입을 통해 깨닫는 순간은 서글펐다. 그 목소리에 아무리 친절이 묻어 있다 해도, 비참함이 덜어지는 건 아니었다.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짧게 잘랐음에도 제법 아플 정도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통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술기운을 빙자해서 서러움이 복받쳐 오를까 봐.
‘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볼게요.’
나직한 목소리는 차라리 달래는 것이었다. 나쁘진 않을 거라고. 영화에서나 나올 운명은 아니라도, 그렇더라도…….
‘쉬는 날도 하루밖에 없지만, 정 선생이 야구장으로 와주면 좀 더 자주 볼 수 있을 거고. 그것도 아니면, 퇴근해서 내가 집으로 가도 괜찮아요.’
‘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 말만 뱉어내던 남자는 이선의 멍한 소리에 잠시 말을 끊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냐. 그렇게 묻는 건조한 눈은 도저히 누군가에게 만나는 사이가 되어보자 청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멍하니 휩쓸려서는 안 되는 순간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선은 황급히 입술을 떼었다.
‘나, 남자… 만나보셨어요?’
‘아니요. 없는데요.’
‘그럼… 왜…….’
머릿속이 뱅뱅 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서 무슨 말을 했더라. 과자가 마음에 안 든다더니, 갑자기 그의 키 자랑을 들었다. 남의 이상형을 삥이라도 뜯는 것처럼 묻다가 갑자기 만나보잔다.
어떤 흐름으로 이어지는지, 범인은 가늠조차 하지 못할 특이한 화법이었다.
변칙적인 대화 흐름에 능해 보이는 그에 비해 자신은 평범했다. 뻔한 인풋과 아웃풋. 그것이 익숙한 정이선이 물을 수 있는 것 역시 뻔했다.
‘저… 좋아하세요?’
묻고 나니, 예상보다 훨씬 우습고 같잖았다. 빤히 바라보는, 옅은 쌍꺼풀이 진 눈을 보자 더욱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어졌다.
어색한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 선생은…….’
‘…….’
‘아까 내가 했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나 보네요.’
…다행이다.
남자의 말을 듣고, 헛다리를 짚었다는 수치심보다 먼저 퍼진 건 안도감이었다. 적당히 색이 올라온 입술에서 ‘그렇다’는 말을 듣는 건 또 다른 공포일 터였다.
안도감이 퍼지자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빠졌다.
긴장이 풀린 몸을 벤치 등받이에 기대었다.
‘뭐예요, 그게.’
속마음은 쉬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저… 불쌍해 보여요?’
‘…안 불쌍해 보이는 건 아니에요.’
이중부정인가. 썩 좋은 것 같진 않은 화법의 이유는 자신의 기분을 나름대로 살피고 있기 때문일까.
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 덕에 불만과 수치심이 조금은 옅어졌다.
이런 걸 배려라고 해야 할지. 강희찬은 대체로 배려가 없으면서도, 이상한 곳에서 사려가 깊었다. 결과가 병 주고 약 주는 격이 되는 게 문제였지만.
…생각보다 귀엽다.
스스로가 했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떨치려, 이선은 숨을 들이쉬었다. 산소가 돌자 머리는 한결 가벼워졌다.
아주 잠깐이라도 혹하지 않았다면, 그건 당연히 거짓말이다. 남자는 뭐가 어쨌든, 물건으로 따지면 괜찮은 디자인을 가진 셈이었다.
살면서 봤던 사람 중 외모로는 손꼽을 수 있는 유명인이 말했다. 자신도 노력해 볼 테니, 연애 흉내라도 내보자고. 몇 초나마 설렜다는 사실은, 분했어도 인정해야 한다.
앞으로 어떤 연애에 익숙해져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일 테다.
행복으로 벅차서, 입꼬리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할 정도로 좋아서 입술을 깨무는 것 따윈 없다. 그런 사람의 얼굴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양 감싸줄 커다란 손도 욕심이다.
가엽다. 혹은 나쁘지 않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하는 연애에 감사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적어도 마음 한 자락, 속 얘기 한마디 할 수 없는 짝사랑보다는 나을 테니까.
최선을 선택할 수 없기에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
마치 그때와 닮아 있었다. 나잇살이 오른 게 티가 나는 풍채를 따라 바의 계단을 오르던 겨울날.
비록 지금의 자신이 보고 있는 건 저보다 세 살은 어린 젊은 사람이었지만……. 그리고 남자는 때때로 귀엽기도 하지만, 그리 크게 다를 것도 없겠지.
‘…싫어요.’
말과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꽤 선해 보이는 눈이 사납게 치켜졌다.
순간적으로 이선은 무릎 위에 두었던 주먹을 다시금 꾹 쥐었다. 또다시 얼굴 앞으로 세워질 뻔한 가드를 간신히 참아내기 위함이었다.
‘왜요?’
지금 왜냐고 물은 건가. 너무 의아한 기색이라, 오히려 싫다고 했던 정이선이 혼란스러워졌다.
물론, 잠깐이나마 흔들렸다. 어쨌든 외적으로나마 개인의 능력으로나마 근사한 사람이었다.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손가락 하나 움직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자신에게 말했다. 그 역시 이선을 향한 노력을 해보겠다고. 가끔 짬이 날 때 무엇을 하느냐는, 별거 아닌 일상을 묻고 답할 수 있다. 때때로 시간이 맞는 날엔 함께 밥을 먹을 수도 있을 거고.
남들이 보기엔 시시할 정도로 별것이 아닐 그런 행동들의 교환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관계는 흐지부지될 테지. 그런 얄팍한 것이라도 탐이 났다. 비록 찰나라 하더라도.
아주 먼 훗날, TV에서 그의 모습을 보며 추억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저런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 내게 만나보자 말한 적이 있다고. 정도를 벗어나지 않아봤을 사람의 첫 일탈이 자신이라고. 그런 작은 위안을 양분 삼는 날에도 자신은 혼자일 거다.
하지만…….
‘저는…….’
말없이 대답을 종용하는 시선을 오롯이 받으며, 이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의 공백 동안 용기를 끌어모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착하고, 저 좋다는 사람 만날 겁니다. 그러랬어요.’
‘…….’
‘강희찬 씨는, 둘 다… 아니잖아요.’
지긋한 시선이 달라붙는다. 아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표정이 괜히 무서웠다. 당장이라도 마지막 말의 의미를 물을 것만 같다.
깊이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잔뜩 긴장한 이선의 등 뒤로 남자의 팔이 둘렸다. 혹시나 맞을까 봐 몸은 자연히 움츠러들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의 팔은 이선이 기대고 있는 등받이를 잡을 뿐이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앞에는, 어느새 얼핏 웃고 있는 강희찬의 얼굴이 있다.
‘봐요. 정 선생 싸가지 없다니까.’
중얼대는 말에도 그저 옅은 웃음기만 묻어 있었다.
반박하고 싶은 내용이다. 그래도 굳이 이 안정된 분위기를 깨고 싶진 않았다. 등받이에서 치워지지 않는 팔은 닿아 있지 않아도 온기를 나눠 주고 있었다.
‘누가 그런 얘기 했어요?’
지긋한 시선이 퍽 가깝다. 어린애를 보는 것 같은 눈길이 자꾸 뺨에 닿아서, 이선은 간지럽지도 않은 얼굴을 슬슬 문질렀다.
‘…강희찬 씨 얘기요?’
‘말고요. 착한 사람 만나라고.’
‘어머니가…….’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 뱉고 보니, 왠지 요새 초등학생들도 하지 않을 법한 유치한 말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적어도 연애의 시작을 제안하는 말이, 이런 우스운 대화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며, 다시 한번 강하게 밀어붙여 온다면……. 아마 고개를 끄덕이겠지. 원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강희찬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대신, 만지면 봄볕이 묻어날 것 같은 미소가 가벼이 떠올랐다.
‘엄마 말 잘 듣게 생겼어요.’
강희찬은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백이라고 할 수도, 하기도 민망한 우스운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그것 보라고. 그렇게 대단한 호의도 아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 가슴 한쪽에선 허함이 번졌다.
…나빠. 거짓말을 한 거야.
어젯밤. 밤새 이선을 뒤척이게 했던 감정은 설렘만이 아니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는 서운함이 함께였다.
그리고 지금. 서운함은 어느새 풍선처럼 부풀었다.
이렇게 짧은 대화도 없이 전화를 끊을 거면서. 무슨 야구장에 오면 더 자주 보고, 늦은 밤에 찾아오겠다는 거야. 하지도 않을 거면서.
이선은 슬리퍼를 신은 발을 질질 끌었다. 서운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진심이 아니라고. 복도 바닥을 끄는 소리가 재차 그리 말하는 듯했다.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이 거두어지지 않길 바랐다. 서운하다고 말하면, 그것이 사라질까 봐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켜야 했다.
새벽에 귓가를 울렸던 그 말. 조금이나마 진심이 있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전화를 끊지도 않았겠지.
‘잘한 거다.’
우습게나마 그의 제안을 거절한 건. 그렇지 않았다면……. 더 우스워졌을 테니까.
교실 앞문을 대략 세 발짝 정도 남기고, 이선은 두고 온 것이 없나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어차피 교구들이야 교실에 이미 있었으니 그저 습관적인 움직임일 뿐이었다. 그 순간, 뒷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짧은 진동이 온몸으로 퍼졌다.
핸드폰을 꺼내 보자,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선 이름이 보낸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다.
그것을 누르자, 내용은 더욱 아리송했다. 처음 보는 열한 자리의 휴대폰 번호. ‘강희찬 선수’라는 이름 아래로 있는 유일한 내용이었다.
“…….”
…잘못 보냈나? 알려줘야 하는 걸까. 그런 고민도 잠시였다.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이 번호로 연락 가면, 괜찮은 날짜 말해요. 홈경기 티켓 보내줄 겁니다.]
이 기묘한 메시지의 수신자가 자신인 건 맞았나 보다.
핸드폰을 쥔 쪽의 손목이 왠지 모르게 간지러웠다. 강희찬은 특이한 화법만큼이나 문자 생활도 본인 위주였다.
전화해서 물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왠지 그것은 부끄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는 어제의 대화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게 분명했다. 혼자 잔뜩 신경 쓰는 것을 들킬 것만 같았다.
[갑자기 무슨 일로 그러세]
2교시 수업 시작 시간도 있고, 부지런히 문장을 완성하려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지만 다 완성하기도 전,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마치 자신이 보내려던 말이 무엇인지 알기라도 하듯.
[나도 아침부터 애새끼 쨍쨍 대는 목소리 들었어요. 정 선생도 하나는 양보하세요.]
언제부터 문자 메시지가 음성 서비스까지 지원됐을까. 마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듯했다.
‘손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문자도 엄청 빨리 치는구나.’
감탄할 새도 없었다. 어떤 답을 보내야 하는 걸까. 그렇게 고민하다, 이선은 수업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겨우 ‘네, 알겠습니다’ 따위의 문장을 보냈다.
조금 딱딱해 보이는데, 다른 말을 더 보냈어야 했나. 아니면, 이모티콘이라도 섞어서 보냈어야 했을까.
어딘지 뒤숭숭하고 울렁거리는 속을 다잡으며 교실 문을 열었다. 어제의 기묘한 대화 탓이 아니라고. 수없이 되뇌며.
* * *
경기 시작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외야에선 캐치볼을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며 가벼이 몸을 푸는 선수 몇이 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그라운드를 눈으로 훑었다.
가끔 경기 중간에 들어갈 리포팅을 찍기 위해 아나운서와 촬영팀이 들어가는 경우는 있지만, 지금은 없다. 기본적으로 잔디를 밟을 수 있는 건 선수와 심판, 구장 관리인 정도일까.
그런 이유로, 오늘도 여전히 사내놈들이 가득했다.
‘키가 큰 게 좋다고 했었지?’
선수가 아니라면 남의 몸무게는 종종 틀려도, 키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었다. 피자 조각 중 가장 큰 것을 골라내는 이승주처럼 가늘게 뜬 눈이 어느 한 곳에 멈추었다.
1번이 새겨진 연습복을 입은 선수 하나와 볼 보이 하나. 강희찬은 입단 동기인 윤태성의 뒷모습을 가만히 살폈다.
저 정도 키면, 자신에게는 ‘투수치곤 작은 편은 아니네’ 정도지만, 일반인에게는 확실히 크다 여겨지겠지.
일단 키는 통과고, 투아웃과는 달리 벌어 먹고살 직업은 있다. 연봉이 얼마였는지는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봐야겠지만, 어쨌든 적은 편은 아닐 터였다.
은퇴가 빠른 운동선수라는 게 흠이었고, 거기에 불펜투수라는 것도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선생은 공무원이니 늙으면 연금도 나올 텐데…….
평범한 광경을 보며, 강희찬은 새삼 입단 동기의 스펙을 따졌다. 머릿속에서 동기와 선생을 나란히 세워보았다.
‘…별로다.’
그래도 농구부였던, 그래서 지금은 선수로 뛰고 있는 같은 학교 동창들보다는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선생이 아무리 키가 큰 게 좋다고 했어도, 190보다 2미터에 가까운 신장을 선호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늦은 새벽 공원에서 만났던 날부터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강희찬이 아는 범주의 모든 남자와 선생을 세워보았다. 선생이야 ‘키만 크면 좋아요’ 따위의 멍청한 소리를 했지만, 안 될 말이다.
어떤 놈은 너무 키가 컸고, 어떤 놈은 하고 다니는 짓이 더럽다. 괜찮은가 싶으면, 올해 스물이라 너무 어렸고. 강희찬은 며칠 새 제가 아는 모든 얼굴 위로 가상의 빨간 빗금을 좍좍 쳤다.
동기의 얼굴 위로 빗금을 칠지, 세모를 그릴지 고민하던 차였다.
캐치볼 상대를 해주던 볼 보이가 사인을 요청하듯 공과 매직을 내밀었다. 매직은 본 체도 하지 않고 공만 받아 든 윤태성은 이내 관심 없다는 듯 휙, 하고 야구공을 관중석으로 날려버렸다.
그 순간 강희찬의 얼굴도 팍 찌푸려졌다.
‘…안 된다. 저 미친놈은 안 된다.’
그래도 캐치볼 상대를 해준 정성이 있는데, 사인 하나 안 해주다니. 아니, 사인을 안 해줄 거면 곱게 거절하지, 공은 왜 던지는데?
강희찬이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쉬었다. 외야를 돌던 스태프가 공을 다시 그라운드 안으로 던져 주었다. 볼 보이는 그것을 집어 들고는, 다시 똥개 새끼처럼 윤태성을 따랐다.
“…….”
빗금이 뭐냐. 아예 엑스 표를 그어버렸다.
그래도 선생은 초등학교 선생이었다. 일을 잘하고 있는지는 자신이 알 수는 없었지만, 어린애들을 위한다는 건 충분히 느껴졌다. 선생의 애인이라도 어린애들을 좋아해 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애들이 내미는 야구공을 관중석으로 던져 버리는 못된 새끼여서는 안 된다.
저놈은 그냥 돈 많이 버는 투아웃이다. 안 봐도 뻔했다. 저런 무신경하고 쌀쌀맞은 놈이 선생의 짝이 된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강희찬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직 운동장엔 선수가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우뚝 선 외국인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2미터가 넘는 게 패트릭이었는지 맥커친이었는지 언제나 헷갈린다. 둘 다 5년은 보고 있는데도, 강희찬은 종종 미국 출신인 두 용병 투수의 얼굴이 헷갈렸다. 유니폼 넘버가 없는 사복 차림으로는 구분도 하지 못했다.
뭐, 그래도 둘 중 작은 쪽이 195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정도 키라면 선생도 마음에 들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두 사람 모두 기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한국에 와서 결혼한 것도 아니다. 애초부터 둘 다 처자식을 달고 한국에 처음 입국했었다.
하여간, 운동판엔 영 쓸 만한 게 없다. 극악의 확률로 쓸 만하다 싶으면 이미 임자가 있고.
강희찬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슬쩍 젖어 있는 머리를 손으로 헝클었다. 불편한 기색을 읽었는지, 아이스박스를 끌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이승주가 슬쩍 그의 눈치를 본다.
“형, 왜 그래요?”
하지만 짜증스러운 손길이 멈춘다고, 얼굴까지 무마되는 건 아니었다.
강희찬은 고개를 들고, 아이스박스를 들고 온 이승주를 올려다봤다. 대꾸도 없이 가만히 보는 것에 겁을 먹었는지 이승주는 잠깐 멈칫했다. 그러더니 박스를 벤치 곁에 얌전히 둔다.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가만히 하는 양을 지켜보는 강희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도 어쨌든 제 밥벌이는 하고 사는 운동선수였다.
“야. 너 몇 살이야.”
“네?”
“너 지금 몇 살이냐고.”
선배인지 동기인지 후배인지. 운동판에선 딱 거기까지만 알면 된다. 몇 살이 많고 적고는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선배면 좆같아도 그냥 입 다물고 고개를 숙이면 되고, 후배면 대충 무시하고 살면 된다.
“아……. 저, 스물둘이요.”
단순하게 분류된 카테고리 안에서, ‘후배’에 속해 있던 이승주의 나이를 정확히 듣는 순간 강희찬은 꽤 놀랐다.
선생이 분명 20대 후반이었다. 액면가로 따지면 비슷하거나, 이놈이 더 많아 보이지만……. 너무 차이가 나게 어리다. 서너 살도 아니고 다섯이 넘게 차이가 나는 어린애라니.
강희찬은 흘러나오는 한숨을 굳이 숨기진 않았다. 그 때문에 이승주는, ‘내 나이가 뭘 잘못한 건가’라는 걱정과 함께 몸이 바싹 굳었지만.
“너, 지금 얼마 벌어? 1억은 버냐?”
뜬금없는 질문을 듣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이승주의 얼굴도 찌푸려진다. 대뜸 개인정보를 묻는 것도 기가 차는데, 눈빛은 무슨 국세청 직원의 그것이었다.
형만 아니었어도, 진짜, 확.
그래도 사회생활이란 건, 특히 운동부는 연차가 갑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늦게 한 탓에 이승주의 불만을 대변하는 건 튀어나오는 입술이 전부였다.
“저 작년에 기본연봉 받고 뛰었는데요.”
이제 2년째 1군에 겨우 붙어 있는데, 1억은 버냐니. 아, 본인은 신인 투수 연봉 상승률로 구단 기록도 가지고 계시다 이건가.
이승주는 로열로드를 밟아온 선배에게 대부분 선수들의 현실을 알려주었다. 1억은 누구네 집 강아지 이름이 아니다.
하지만 선배는 현실을 깨닫기는커녕, ‘쯧’ 하고 혀나 찼다. 그러더니 파리라도 쫓아내듯 손을 휘휘 저었다.
“너, 가. 서 있지 말고. 어두워.”
실컷 묻더니 귀찮은 거 떼어내는 태도에 이승주의 얼굴엔 불만이 어렸다. 하지만 그건 강희찬이 알 바가 아니다.
많이도 처먹는 새끼가 연봉이 1억도 안 된다니. 그래서야 둘이 손잡고 굶어 죽기 딱 좋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저 새끼도 안 된다. 가당치도 않았다. 더 볼 가치도 없었다.
꺼지라는 축객령을 들은 이승주는 결국 입을 열지도 못한 채로 더그아웃을 나와야만 했다.
뭐야. 자기 돈 많이 번다고 자랑하는 건가. 하지만 나이도, 연봉도 밀리는 후배는 힘이 없다. 심지어 내일 경기의 선발이었다. 억울하고 억울해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등판일 이틀 전부터 강희찬의 예민함은 감독도 알아서 한 수 접는 수준이었다.
퉁퉁거리는 발걸음으로 이승주가 사라지자, 다른 인기척이 더그아웃을 채웠다.
“애한테 또 뭔 소리 했어?”
옆으로 훅 밀려오는 누군가의 체온과 함께 시야에 초코바 하나가 들어왔다.
‘더워 죽겠는데, 왜 하필 옆에 앉는 건데…….’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내젓자, 간식은 미련 없이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할 것도 없었다. 매년 겨울이면 학교 후배들이나 보러 가자며 닦달을 하는 박신우였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더운 날씨다.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자신에게 내밀었던 초코바를 까서 우물거리는 선배가 귀찮기만 했다.
흘긋 곁눈으로 얼굴을 확인했지만……. 유부남이다. 쓸모없다.
눈길을 줄 가치도 없었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가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눈을 꾹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무 덥다. 이 형, 살이 쪄서 그런지 옛날보다 더 체온이 올라간 것 같다.
“지금 쟤, 너한테 감자 먹이고 있는데?”
새카맣게 탄 퉁퉁한 손가락이 강희찬의 뒤편을 가리켰다. 이승주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비틀었다.
더그아웃에서 구장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 그곳에 서 있는 이승주와 눈이 딱 마주쳤다. 둥그렇게 커지는 눈을 봄과 동시에, 강희찬은 옆에 있던 페트병을 쥐고 던졌다.
텅!
음료가 반절 정도 남았던 페트병이 벽과 만나며 요란한 소음을 냈다. 하지만 목표물은 쥐새끼 같게도 이미 안으로 도망간 후였다.
‘…왼손으로 던졌어야 했는데.’
후회를 속으로 삼켜도 늦은 일이다. 나중에 보이면 조져놔야 정신을 차리지.
“그러니까 왜 애보고 돈 못 번다고 구박하고 그래.”
갑작스러운 소음 탓인지, 박신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귓가를 문질렀다. 그렇다고 해도 딱히 강희찬의 행동에 대해 한소리를 하는 건 아니었다.
“구박 안 했어요.”
“뭘 안 해, 내가 다 듣고 있었는데.”
다 들었으면서 그럼 왜 묻는데.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 짜증을 삭이려 눈을 감고 다시 몸을 기댔다.
숨만 쉬고 있어도 더워 뒤지겠는 지금과는 달리, 기분 좋게 선선한 새벽.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일었던 짜증이 다소 누그러졌다.
‘어머니가…….’
만나보자는 누군가의 제안을 ‘엄마’ 핑계를 대며 거절하는 성인은 살면서 처음 봤다. 앞으로 한 30년쯤 더 살아도 그런 인간을 또 볼 일은 요원할 거다. 장담할 수 있었다.
선생의 핑계는 같잖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 말, 잘 듣게 생겼어요.’
진심이었다. 바람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나, 낳아준 사람의 진심 어린 충고는 정확했다. 결국, 낳은 사람이 제일 잘 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 아들이 밖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다니는 바보 호구임은.
선생의 입에서 ‘그러자’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엄마 핑계나 대지만, 결국 선생은 마음에 둔 놈을 두고 다른 이와 적당한 연애조차 할 줄 모른다는 소리였다. 강희찬은 그것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아무리 곱게 잘 낳아놓은 자식이라 아깝긴 하겠지만…….
만약 제 아들이 되지도 않는 놈을 좋아하고 다닌다면, 강희찬은 당장 머리를 밀어버리고 집 안에 가둬둘 의향도 있었다. 저 집 어머니는 아들을 너무 착하게만 키웠다. 이해는 해도 착하다 착하다 하니까, 정말 애가 바보 등신처럼 착해진 거 아니냐고.
‘꼭 들으세요. 엄마 말.’
뱉고 보니 어쩐지 양아치같이 말꼬리를 붙잡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심 어린 충고였다. 정말 혈육의 충고는 흘려듣지 말아주었으면. 저 좋다는 사람들이 한 트럭일 텐데, 그중에서 잘 고르진 못해도 어디서 이상한 거나 줍고 다녀서는 안 된다.
‘…죄, 죄송합니다.’
선생은 가뜩이나 웅크린 어깨를 더욱 옹송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방금까지 가드나 세웠던 양팔은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쥔 채 바들대고 있었다.
‘뭐가요?’
‘아니… 그…….’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기억을 더듬어도, 저렇게 오들거리는 반응을 봐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뭘 어쨌길래 떨어요.
그리 묻고 싶은 말은 삼켜야 했다. 주눅 든 반응은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자신이 내쉰 한숨 소리 하나에도 꺾일 듯 숙어지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얼굴도 영 탐탁지 않다.
조금 전까지 의식적으로 확인하지 않았던 시간을 봤다. 이제 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새벽 시간대였다.
이 시간에,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밖에 있는 것은 또 새롭다. 하지만…….
‘…….’
강희찬은 드러난 목덜미를 물끄러미 봤다. 그리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뱉기 싫었던 말을 해야만 했다.
‘이제 가죠. 공무원은 아침에 출근하죠?’
그제야 정수리만 보이던 머리가 들리고, 얼굴이 드러났다. 슬쩍 벌어진 입 안의 작은 치아까지도 지나칠 정도로.
애써 눈을 돌렸다. 조금 더 그 얼굴을 보았다가는, 나는 내일 쉬는 날이니 더 있자고 할 것 같아서. 그래 달라고 부탁할 것 같아서.
조금 더 앉아 있으면 싶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집 어디에요. 이 동네 사는 것 같은데.’
‘아, 아뇨. 혼자 갈 수 있어요. 가까워서요.’
선생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봤다. 붕붕 흔들리는 손이 필사적으로 의견을 피력했지만, 강희찬은 가볍게 무시했다.
‘가까우니까 놓고 가겠다는 거 아니에요. 운전하려고 술도 안 마셨으니까.’
‘…정말 괜찮은데…….’
꾸물거리며 일어나는 것도 답답한데, 입에서 나오는 건 더 답답한 소리다.
선생은 알아야 한다. 저렇게까지 집을 알려주기 싫어하면, 오기로라도 더 알고 싶어진다는 걸 말이다.
해피, 물어와. 강희찬은 개를 쫓아내는 사람처럼 턱 끝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빨리 앞장서요.’ 그런 말을 하며 한 걸음 뗄 때마다, 선생은 무언가에 떠밀리기라도 하듯 비실대며 걸음을 옮겼다.
‘똑바로 걸어요. 자빠지면, 저번에 공 맞았을 때처럼 머리통 터지니까.’
‘…안 터졌어요.’
삐죽삐죽 내밀어지는 입술은 더 이상의 불만을 토로하진 못한다.
강희찬은 평지에서는 두어 걸음 떨어졌던 거리를 티 나지 않게 좁혔다. 자신이 팔을 뻗으면 언제든 선생의 몸을 잡아챌 수 있을 정도로.
설마 맥주 한 캔을 마셨다고 취할 만큼은 아니겠지만. 선생에게는 혹시나 한 강희찬의 불안감은 전해지지 못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자꾸 뒤에서 걷는 자신을 돌아보는 꼴이 불안불안했다.
‘정 선생, 계단 걸을 땐 잘 보고 걸으라고 애새끼들한테 말 안 해요?’
그런 말을 듣고서야, 선생은 난간을 제대로 붙잡고 돌계단을 한 걸음씩 조심히 내려갔다. 그마저도 평지를 밟고선, 강희찬의 차가 세워진 곳까지 몇 번이나 또 뒤를 돌았지만.
…개 산책도 이것보단 쉬울 것 같군.
강희찬은 조용히 한숨을 삼키며 차의 잠금을 풀었다.
‘정말 괜찮은데…….’
그 소리는, 차에 오르고 내비게이션에 찍은 주소가 코앞인 골목 어귀까지 와서도 들었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세간의 평을 듣는 강희찬도, 이쯤이면 이선의 화법엔 어느 정도 적응을 마쳤다. 답답하다고 하나하나 화를 내다간, 이쪽의 기력이 남지 않는다. 결국, 목소리는 듣기 좋은 카페 배경음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아, 이쯤에 세워주시면 될 것 같아요. 저 건물이거든요.’
가는 손가락이 앞 유리 너머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거기서 거기일 것 같은 원룸이나 빌라가 밀집한 지역이다. 그래도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물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주차한 차들 때문에 여기선 못 돌려요. 그냥 집 앞에서 내리세요.’
‘…죄송합니다.’
저놈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리 없이 말해보라고 하면 제대로 의사소통을 못 하려나. 제대로 말을 못 해서 곤란해하는 모양을 보고 싶지만……. 손가락이 가리켰던 건물은 지나치게 빨리 다가왔다.
한숨을 삼키며, 3층짜리 건물 입구에 차를 댔다. 연식이 오래된 건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원룸이에요?’
‘네.’
‘…현관에 보안장치 없는 것 같은데?’
‘아, 그래서 동네치고 월세가 좀 쌌어요.’
본인이 이 집을 얻기 위해 얼마나 발품을 팔았는지 어필하고 싶은 듯 눈이 반짝였다.
…뭘 저렇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거지? 장난하자는 건가.
머리까지 차오르는 화를 누르기 위해, 입을 앙다물었다. 강희찬의 노력을 몰라주는 선생은 버릇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일… 꼭 전화 드릴게요. 진짜 좋아할 거예요, 산이.’
‘…….’
또다. 또 애새끼 얘기를 하니 웃는다.
소개팅이었다면 여자에게서 애프터를 받아낼 거고, 결혼 인사를 간다면 처가의 사랑을 따내겠고. 면접이었다면 무리 없이 합격.
어느 상황에서든 호감을 끌어낼 웃음은 볼 때마다 미묘한 감정을 유발했다. 비틀어버리고 싶고, 울리고 싶은… 정말 운다면 그건 또 입이 쓰겠지만.
‘정 선생님.’
조수석의 잠금을 풀지 않았다. 땅꼬마 생각으로 풀어져 있는 맹한 인간은 그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강희찬 역시, 이선이 얘기하기 전까진 미리 문을 열어줄 의향은 아직 없었다.
‘반 애새끼들, 다 공부 못하죠?’
‘…네에?’
인생이 편해질―그러나, 본인은 잘 활용하지 못하는― 미소에 쩍, 하고 균열이 일었다.
거봐라. 애새끼 일 아니면, 웃는 꼴을 본 적이 없다니까. 아, 투아웃도 있었나.
삐딱한 마음은 결국 겉으로 흘렀다. 강희찬은 시트에 몸을 푹 기댔다. 자신과는 달리 몸을 앞으로 당겨 앉은 이선은 그를 보기 위해 조금 더 고개를 틀어야 했다.
‘공부 안 하면 패서라도 시켜야지, 이렇게 오냐오냐하면 어떤 놈이 말을 들어요. 애새끼들이 만만하게 보고 있을걸요.’
공원을 떠나기 싫었는데, 지금도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다. 바깥 공기가 차단되어 타인의 향기가 코끝에 감돈다.
‘그러니까 투아웃도…….’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공간에 있다는 안정감 때문일까. 멋대로 말이 흘렀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입을 다물었다.
선생의 기분을 거슬리게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냥, 이 순간 쓸데없이 입을 놀려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선생에게 상기시킨 자신의 멍청함에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다행히 선생의 주의는 그쪽으로 향하진 않았다.
‘…저희 반 애들 다 착해요. 공부도 잘하고.’
‘그럴 리가요.’
한라산인지 금수강산인지 하는 새끼부터가, 딱 봐도 못돼 처먹게 생겼는데.
저를 보고 호구니 왕따니 소리를 해도 허허 웃더니. 애새끼들 흉을 보는 건 싫었는지, 이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말 하면 혼나. 교실에서 애새끼들을 저런 얼굴로 혼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새 학교에서 애들한테 함부로 매 들면 큰일 나고.’
‘머리로 못 알아 처먹으면 몸이라도 고생해야지. 그러니까 점점 싸가지가 없어지잖아요.’
‘그러는, 강희찬 씨는……!’
친구랑 말다툼하는 초등학생처럼 비죽 나온 입이 제 이름을 뱉었다.
호칭은 몇 번을 들어도 낯간지러웠다. 저 목소리를 통해 듣는 자신의 이름이 퍽 생경하면서도 듣기 좋았다. 그래서 강희찬은 이선의 말이 중간에 묘하게 흐려졌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내가 뭐요?’
‘아, 아니요. 아무것도…….’
듣는 사람 궁금하게 말을 하다가 만다. 어째 표정이 아까 엄마 어쩌고 할 때와 비슷한데. 조금 더 추궁해 볼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또 무슨 잘못을 한 어린애처럼 무릎 위 양손이 주먹을 말아 쥐었으니까.
이런 사람도 선생을 할 수 있나. 아니면, 자신이 알던 선생들도 스물여덟 때는 이렇게 어리바리했던 걸까. 이 선생도 나이를 먹으면 조금 더 믿음직해지려나.
그런 궁금증을 안은 채, 강희찬은 조수석을 향해 몸을 비틀었다. 쳐다보기만 했는데, 선생은 뭐가 찔렸는지 움칫거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나였으면 어림도 없어요.’
불신의 눈길이 강희찬의 얼굴에 머문다.
선생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땅꼬마가 야구부에선 빠따로 심심찮게 맞을 거라 얘기해 주면 어떨까. 그럴 리가 없다면서, 와들거릴 바보 같은 얼굴을 잠시 상상했다.
‘그렇게라도 공부시켜 주면, 내가 부모면 엎드려서 절을 할 겁니다.’
‘…네?’
‘정 선생님이 혹시라도 나중에 내 자식새끼 담임이면, 난 아무 소리 안 하겠다고요.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요새 부모들도 참, 바라는 것도 많지.
애새끼 공부 잘하게 만들어주세요. 근데 때려서 안 돼요, 라니. 그러니 새끼들 상태가 점점 이상해지는 걸 부모들은 모른다.
역시 몇 번을 봐도. 길을 제대로 정해주지 않는 부모란 영 성미에 맞지 않는다. 강희찬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다른 곳에 두었던 눈을 옆자리로 향했다.
간단하다. 사람이란 게, 기본적으로 예쁘고 좋은 것들을 보면 기분도 좋아진다. 선생의 말간 얼굴은 보기도 좋고 심신에도 좋은 건 당연했다.
어차피 애새끼 얘기를 할 때 짓는 미소를 바란 것도 아니다. 애새끼들에게 싫은 소리 좀 했다고 짓던 불만 어린 얼굴도 괜찮다. 이상한 표정을 지어봐야,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니.
하지만…….
‘…왜 그래요?’
그러나, 이건 예상한 범주 내에 없었다.
무언가에 머리라도 얻어맞은 양, 혹은 엄마에게 버림받은 어린애처럼. 얼이 빠진 얼굴은 강희찬의 상상 속엔 없었다.
‘정 선생?’
자신의 목소리에도 멍한 채 반응이 없다. 왼손을 뻗었다. 아침저녁으로 조금 서늘해도, 낮엔 한여름이다. 아직은 계절감과 비교적 어울리는 얇은 반팔 티셔츠 아래의 마른 어깨가 손바닥에 감겼다.
온 세상에 홀로 남겨지기라도 한 것 같은 사람은 그제야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두둥실 떠 있던 선녀의 양발을 겨우 잡아 땅에 딛게 한 것이다.
‘…어디 아파요?’
맥주 한 캔인데…….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인 건가.
손은 본능적으로 이선의 이마를 향했다. 하지만 얼이 빠진 얼굴이 강희찬의 손을 피하는 게 먼저였다.
‘저, 내릴래요.’
‘…….’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강희찬 씨도 얼른 들어가셔야 하고…….’
피하는 눈이, 이유를 나열하는 말이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얘기했다. 하지만 집요하게 잡아서 물을 수는 없었다.
‘그래요. 가서 얼른 자요.’
결국, 강희찬은 조수석의 잠금을 제 손으로 풀며 백기를 들었다.
‘…….’
‘내일, 전화 꼭 하고.’
‘…감사합니다.’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에도. 끈질기게 바라보던 자신만큼이나 선생은 집요하게 시선을 피했다.
뒤를 돌아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하도 미덥지가 못해서, 차를 출발시킬 수 없었다.
사람에 반응하는 센서등이 켜지는 순간도, 가장 꼭대기 층의 끝 방 하나에 불이 켜진 순간에도. 불이 꺼진 순간이 한참 지나서까지.
강희찬은 한참을 그곳을 바라봤다. 보기만 했다.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휘청휘청. 쓰러질 것 같은 뒷모습이 불안해서 그날 꿈에 나올 지경이었다.
선생의 곁엔 휘청거리면 단단히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적당한 놈은 절대 안 된다.
고르고 골라서, 선생이 아깝지 않을 만한 놈으로.
사지 멀쩡해야 하고, 정신 똑바로 박혀야 하며, 공무원은 벌이가 좋은 직업이 아니니 돈도 많이 벌어야 한다. 선생이 좋아한다니 키도 커야겠지. 운동선수는 리스크가 큰 직종이니 어지간한 커리어 정도는 있어야 수지가 맞고. 아, 적어도 애새끼를 병적으로 싫어하진 않아야겠고.
그러니까, 야구선수로 따지면 선발급, 그것도 외국인 용병 정도의 커리어나 벌이는 돼야 선생이 아깝지 않다. 그렇다고 언어의 장벽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한국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장 조건에 부합하는 건 한 사람밖에 없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선.
“…….”
청순가련함을 무기로 삼는 옛날 여배우 같은 미소를 지은 선생이 있다. 그 옆으로 웃음기 하나 없는 자신을 세워보았다.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세모 정도는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기에 선생에게 만나보자 얘기했던 거고.
“아으…….”
오랜만에 굴린 탓인지 골이 띵해진다. 강희찬은 눈가를 손으로 짚었다. 허리까지 숙이자, 손바닥에서부터 조금 서늘한 기운이 번져왔다.
“왜? 어디 아프냐?”
“아니에요.”
“트레이너 불러다 줘? 지금 밥 다 먹었을 것 같은데.”
“됐어요. 안 아프다고요.”
저리 가. 휘휘. 방금 전 이승주에게 했듯, 파리를 쫓는 손짓을 할 순 없었다.
눈을 짚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러면, 선생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진다.
커다란 눈은 끝이 조금 처져서, 입꼬리만 올려 웃으면 웃다가도 어딘지 왈칵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다.
애새끼 얘기를 할 때가 아니면, 자신의 앞에선 언제나 그따위로만 웃는 얼굴. 세상 모든 인간에게 뜯어먹히는 호구인 주제에, 자신에게만은 꼴같잖게 벽을 세웠다.
우스운 놀란 얼굴 앞에 세워진, 더욱 우스운 가드처럼.
엄마가 어쩌고 했던 말이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곱씹을수록 이해가 갔다. 얼굴도 모르는 아주머니의 말은 더할 나위 없이 맞는 소리였다.
선생에겐 그런 사람이 제격이었다. 착하고, 그러면서도 선생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거기에 다른 조건들도 좀 봐야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도 아무런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야, 너 가서 과일이라도 좀 받아먹어. 머리 아픈 거, 그거 당 떨어지는 거야. 늙으면 다 그래. 손도 막 벌벌 떨릴걸?”
“…알았다고요.”
끝까지 잔소리를 놓지 않는 박신우가 더그아웃을 나간 후에야 강희찬은 눈가에서 손을 떼었다. 여전히 쨍한 햇살이 내리쬐는 그라운드가 눈앞에 있었다.
“…….”
나쁘지는 않게 해줄 자신은 있었고, 지금도 충분히 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바라시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게 없어도 된다는 걸 느끼게 해줄 각오였다.
선생이 만약 같잖은 놈에게서 바라는 애정을 포기한다면, 자신은 그것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 모든 것을 주어야만 한다.
적어도 선생의 입에서 끝을 바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할 각오로 말했다. 하지만 선생이 택한 건 애정이 없는 자신의 최선보다는 홀로 키우는 쓸모없는 마음이었다.
그랬기에 뒤를 돌아 외면할 수도 없다. 옆에서 더 나은 것을 골라줘도, 굳이 제 손으로 썩은 것을 골라 쥐는 모습이 너무 불안해서. 적어도, 자신의 눈에 차는 누군가가 그의 곁을 채우기 전까지는 선생은 자신의 시야에 있어야만 한다.
어설픈 고집에 한숨이 나온다. 뭘 자꾸 제힘으로 해보겠다고 움직이는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퍽 답답하다.
…어차피 골라봐야, 제대로 된 걸 집지도 못할 거면서.
* * *
“아, 혹시 강희찬 선수……?”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이름을 들은 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엔 안도의 미소가 퍼졌다.
“아, 맞구나. 한참 찾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목표물을 설정한 그는 금세 거리를 좁혀왔다. 구단 마크가 새겨진 흰색 피케티셔츠와 걸고 있는 사원증. 그것들이 누가 봐도 남자가 잠실 구장의 직원 신분임을 알게 했다.
송재혁이 나올 거라는 예상이 깨졌다. 그보다 열 살은 족히 많을 듯한, 초면인 남자의 알은체에 이선은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렸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직원증에 새겨진 그의 이름―조 씨였다.― 곁에 있는 ‘팀장’이라는 직급이 부담스레 커지고 있다.
“아이고, 이거 제일 더울 시간에 오시느라 고생하셨겠네.”
친근하게 어깨를 두드려주는 손길이 퍽 부담스럽다. 이선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다. 당황한 티가 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노력이 얼마나 빛을 보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제 상사도 아닌데, 이선은 괜히 친근히 구는 남자의 곁에 다가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괘념치 않는지 앞서 걸으면서도 뒤따라오는 이선을 착실히 살폈다.
“희찬이가 생전 안 하던 부탁을 해서. 많이 친하신가 봐요?”
“네? 아…….”
‘…딱히?’
밥을 몇 번 같이 먹었고, 일전엔 공원에서 캔맥주를 마셨으며, 어디 가서 말하지 못할 자신의 비밀을 알고.
이렇게만 보면, 사회에서 만난 사람치고는 ‘친하다’는 수식을 붙여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왠지 그에게 감히 그런 수식을 넣기가 퍽 어색했다.
대답을 망설이는 이선을 남자는 미심쩍은 눈으로 봤다. 가늘게 접힌 눈이 마치 무언가를 캐내겠다는 의도로 느껴져서 괜스레 거북했다.
“혹시… 연예인이에요?”
“…네?”
당황스러운 말에 이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니까, 가끔 편의점에 맥주를 사러 갔을 때. 누가 봐도 한참 어려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신분증 좀 확인할게요’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와 비슷한 당황이었다. 신분증을 요구하는 아르바이트생이야 직업에 충실한 질문일 뿐이지. 팀장의 물음은 의도를 알기가 힘들었다.
이건 어색함을 깨려는 농담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사람 좋은 웃음이 수상쩍어하던 얼굴을 덮었다. 매우 중년 직장인다운 얼굴이라고 이선은 생각했다.
“희찬이 지인들이라고 해봐야, 다 운동선수였거든요. 다 같은 학교 나온 농구선수나 아이스하키 선수들. 그쪽 지인은 아닌 것 같아서요.”
이런 말을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강희찬은 정말로 운동선수 말고는 지인이 없는 듯했다.
이래서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공무원이 없다는 소리를 했구나. 좁은 인간관계가 어쩐지 귀여워서 설핏 웃음이 났다.
“아뇨. 저는, 그냥 학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학교?”
이건 또 무슨 소리람? 그리 말하는 듯한 팀장의 얼굴을 향해 정이선은 겨우 ‘사회인의 탈’을 썼다. 구태의연한 감사 인사와 거짓된 친절 미소가 익숙한 공무원의 얼굴.
“저번에 저희 학교에 강희찬 선수가 오셔서, 애들 만나고 가셨거든요. 밥도 사주셨고. 그때 애들이 야구공 선물 되게 좋아했어요.”
“아! 희찬이 촬영 갔던 그 학교? 재혁 씨 친구였어요? 그 선생님?”
“예에…….”
걸음을 멈추기까지 해서는, 연이어 질문을 쏟아낸다. 대체 ‘그 선생님’이라는 게 어떤 선생님인지 궁금했다. ‘2군 구장에 구경 왔다가 머리에 공 맞아서 우리 구단에서 병원비 내준 선생님’의 줄임말은 아니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쪽 친구구나. 근데 왜 희찬이가 부탁하는 거지? 원래 알아요?”
“아뇨,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것도 희한하네. 아, 내가 홍보팀이에요. 재혁 씨랑 같은 팀.”
중년의 남자는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딴에는 친근해 보이기 위해 하는 말일 테지만, 친구의 직속 상사와 대화라니. 더 불편하기만 했다.
먼저 계단을 오르려던 남자가 ‘아’ 하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희찬이 만나고 들어갈래요?”
“…네?”
“지금쯤이면 쉬고 있을 것 같은데. 오늘 등판도 아니고, 아직 행사는 시간 좀 남았거든요.”
그가 팔을 뻗은 곳에는 구단 마크가 대문짝만하게 그려진 문이 있다. 그 아래로 무서운 붉은 글씨도 함께였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이선은 팀장을 보며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팀장은 별소리 없이 계단을 올랐다.
팀장의 뒤를 따르다 보니, 어느새 동굴 같은 통로에 다다랐다. 사이즈를 축소해 놓은 터널 같은 통로를 몇 걸음 걸었다. 그러면, 끝에는 일요일 낮에 더없이 어울리는 푸른 하늘과 초록빛 그라운드가 나타난다.
“…….”
야구장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와봤지만, 이 광경이 이선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한 번 걸음을 멈추고, 숨을 내쉬고 싶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아주 어릴 적, 아버지가 자신의 손을 잡고 꼭 보여주고 싶어 했던 건 선수가 뛰는 그라운드가 아닌, 이 통로의 끝일지도 모른다.
“어으, 오늘도 덥네.”
물론, 여기가 직장인 팀장에게는 매일 보는 식상한 광경이라 별 감흥이 없을지 몰라도. 자신 역시 누구나 감상에 젖는 초등학교의 담과 정문을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선은 통로를 벗어나고, 햇빛이 얼굴에 드리우자마자 인상을 찌푸린 팀장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이쪽, 테이블석에 앉으시면 됩니다. 세 자리 다 뺐으니까, 아마 많이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이선보다 반보 정도 앞서 걷던 팀장은 빈 좌석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 입장객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시간대는 아닌지, 자리의 특성인지 퍽 한산했다.
“뭘요. 어차피 희찬이 월급에서 까이는 건데.”
“…….”
…농담인 건가?
사람 좋은 웃음은 말의 진위 여부 파악에 어려움을 준다. 이선은 고개를 갸웃하며, 어정쩡히 자리를 잡았다. 앉으려고 보니, 세 자리나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엉덩이는 세 개가 아니었으니까.
“지 부모님들 코시 티켓도 안 챙기던 놈이…….”
묘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팀장은 다시 가면 같은 웃음을 둘러썼다. 표정 변화가 기괴해서, 이선은 움칫 몸을 뒤로 물렸다.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오늘 선수들 사인회 있어서, 그것 때문에. 동선 좀 맞춰야 하거든요.”
“네, 감사합니다.”
“혹시 사인받고 싶은 선수 있어요? 응원석 티켓 남는 거 하나 줄까요? 그거 있으면, 사인받으실 수 있는데.”
“아, 아뇨. 괜찮습니다.”
팀장은 자신의 엉덩이를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걸까……. 작년에 구단이 흥행몰이에 실패했다던데, 그래서 이렇게 티켓을 마구 뿌리는 걸까?
이선은 난감함을 감추며 손을 내저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남자답게 몇 번 더 권할 줄 알았더니, 팀장은 의외로 선선히 이선의 거절을 받아들였다.
“하긴, 오래 기다려야 되고. 힘들기만 하지.”
“…네.”
“받고 싶은 사인 있으면, 강희찬한테 부탁.”
“…….”
“아…….”
이어지던 말이 묘한 부분에서 흐려진다.
이선은 팀장과 눈을 마주한 순간,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팀장과 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흠, 하는 헛기침이 마른 공기를 갈랐다.
“재혁 씨 시간 되면 한번 와보라고는 할게요. 사인회 영상만 찍으면 짬 좀 날 것 같은데.”
그럼 먼저 가보겠다며, 까딱 고개를 숙여 보였던 인사에 이선 역시 꾸벅 인사를 했다. 선수들만큼이나 야구장이 더없이 익숙해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
홀로 남겨졌다. 그런 생각이 들어도 썩 쓸쓸하진 않았다.
강희찬이 이 구장 어딘가에 있다. 운동장엔 이선이 잘 모르는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뿐이지만, 이곳엔 반드시 그가 있을 터였다.
어딘가에 있을 그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으로, 세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있다는 외로움은 덜어졌다. 마치 그가 곁에 있는 것처럼.
* * *
선수가 사인회의 대략적인 시간을 듣고, 경호원들과 동선을 맞추고 있는 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사무실의 원형 테이블에서 행사의 일정을 듣고 있는 것이 다른 이도 아닌, 강희찬이라면 얘기는 달랐다.
“오늘은 사진 촬영은 안 할 겁니다. 카메라 주면서 셀카 찍어달라고 해도 해주지 말고. 특히, 승주. 아무리 누나들 예뻐도, 해주지 말고.”
지겨워하는 선수들의 주의를 환기할 셈인지, 과장이 장난스레 막내 투수의 이름을 직접 불렀다. 사인회 줄이 밀리게 하는 상습범은 ‘제가 언제 그랬어요’라는 억울한 얼굴을 했다.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강희찬은 제 손톱이나 바라보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
세상이 망할 징조인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인회 참가를 거절하는 안정원 대신 강희찬이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다.
‘나가는 건 상관없어요, 래.’
‘…네?’
안정원 대신 강희찬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들고 온 팀장은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하기 싫단 소리보다 더 무서워. 그 망나니가, 사인회에서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순순히 나가겠다는 거야…….’
오랑캐를 오랑캐로 막기. 혹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계약한 인간인 양.
몇 시간 사이 확 늙은 팀장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물론, 지금은 사인회 내내 ‘선수 보호’라는 명목으로, 망나니가 망나니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해야 하는 자신이 더 안쓰럽지만 말이다. 망나니는 남의 속도 모른 채 여전히 손톱만 들여다보는 중이다.
“선수들 지금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운영팀 사원 하나가 얼굴을 빠끔 내밀며 시간을 알렸다.
팬 사인회 하나 참여하는 거로 온 구단의 걱정을 사고 있는 인간은 태연히 고개나 꺾으며 걸음을 떼었다.
* * *
구단에서 준비한 사인 종이와 일인당 최대 한 번인 개인 물품에 사인을 한다. 어차피 다 각자 물품을 챙겨왔으니, 사인은 머리당 두 번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료하게 단순 반복 작업을 하는 것도 대략 15분이면 집중력이 바닥난다.
대체 줄이 얼마나 남은 건데…….
할 때마다 어딘지 모양이 묘하게 다른 것 같은 사인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 가끔씩 대기하는 사람들의 잡담이 귀에 걸리기도 했다. 이승주 머리 뭐야. 10분 전쯤 그런 말을 들었을 때가, 강희찬이 유일하게 웃은 때였다.
“우리도 공 사 올걸. 다들 공에 많이 받는다.”
“팔기가 좋잖아.”
“아, 진짜?”
“그럼. 사인은 공에 받아야 제일 비싸게 팔려.”
남녀의 대화가 문득 귀에 들어왔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 스치는 것보다, 강희찬의 고개가 올라오는 것이 먼저였다.
눈을 들어 올린 순간, 이제 막 강희찬의 앞에 선 얼굴 하나가 시야에 걸렸다.
“저기, 강희찬 선수. 사진 한 장만……!”
“죄송합니다. 사진 촬영은 안 됩니다.”
“아, 네…….”
아까부터 직원은 자신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부리나케 다가와 귀찮은 일을 처리했다. 덕분에 강희찬은 쓸모없는 언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신, 모든 신경을 자신의 앞에 선 남자의 얼굴에 집중했다.
어디서 봤는데, 라는 생각을 할 것도 없다. 강희찬은 그가 투아웃이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혈연관계로는 보이지 않는 외모에, 나이 차이가 나는데도 서로 말을 놓는 사이.
그 정도의 친밀함이 어떤 관계를 의미하는지는 눈치를 갖다버린 인간도 알 수 있겠지. …애들보다도 영악하지 못한 선생이라도 말이다.
재수가 없는 날이다.
주말이라 너도나도 쉬는 날이니, 선생도 오늘로 날짜를 골랐겠지만…….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남자, 아니 언젠가 길거리에서 봤던 투아웃이 강희찬을 향해 유니폼을 내밀었다.
방금 구장 내의 매장에서 산 태가 나는 유니폼을 한 번, 멍청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한 번. 번갈아 봤던 강희찬은 들고 있는 매직을 손 위에서 두어 번 돌렸다.
이미 옆에 있는 후배가 사인을 했던 곳 옆, 최대한 눈에 덜 띌 만한 자리에 매직을 가져갔다.
“앞쪽에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미 했는데요.”
“아, 네…….”
모자를 쓴 것도 아닌데, 이 거리에서도 못 알아볼 줄이야. 허탈한 웃음이 새었다.
자신은 어디를 가면 그래도 알아보는 경우가 많은 축에 들었다. 그게 익숙하기도 했고.
하지만 대화까지 나눠놓고 이러는 건 또 색다르다. 자신에게는 두드려 맞고 1회부터 강판당하던 경기만큼이나 거지 같던 기억이, 멍청한 투아웃에게는 사인의 위치보다도 신경 쓸 게 아니란 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산 넘어 산. 줄줄이 소시지인 양, 꼴 보기 싫은 놈이 사라지자 바로 뒤를 여자가 잇는다.
이미 이승주에게 사인을 받느라 정신을 팔고 있는 놈과 앞에 있는 생각 없는 어린 여자. 누가 봐도 일행일 두 사람의 조합을 눈으로 훑어봤다.
끼리끼리. 그 나물에 그 밥. 좀 유식하게 말해보자면, 유유상종.
아무리 객관성을 가져보려고 해도, 이것이 한계치다. 구장 내에서 파는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머리에 달고, 유니폼에도 이상한 와펜을 꽂아두었다. 여자의 안쓰러운 꼴을 얼마간 바라봤다.
이게 선생보다 나은 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모르겠다.
과연. 코앞에서 봤던 사람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옹이구멍 급의 눈이 고를 만했다. 주제 파악에 능한 걸지도 모르겠고.
여자가 건네는 핸드폰 케이스 뒷면을 받아 들었다.
“애인이에요?”
사인할 적당한 구석을 찾는 것보다도, 입이 먼저 열렸다.
“네……?”
둥그렇게 커지는 눈을 마주 봤다. 눈알 빠지겠네. 한 번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꼴이 영 갑갑하다. 귀가 먹었냐고 쏘아붙이고 싶은데……. 어쨌든 궁금한 게 있으니 일단 참아야 했다.
“사귀냐고요.”
이제 마지막 선수의 앞자리까지 간 투아웃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아, 하고 여자의 입이 벌어졌다.
“아, 네에.”
“왜요?”
“네?”
일부러 두 번 물어보게 하는 건가. 점점 인내심의 한계치에 도달할 것만 같았다.
이렇게 자꾸 설명을 요구하는 반응을 가진 또 다른 이를 알고 있긴 했지만……. 유발하는 감정은 전혀 달랐다.
“왜 만나냐고요.”
여자의 핸드폰 케이스를 돌려주지 않는 탓에, 뒤에 늘어선 줄은 출퇴근길 한남대교처럼 꽉 막혔다. 어느새 강희찬의 뒤에 선 경호원의 기색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자를 보내야 하긴 할 텐데, 줄이 길어진 원인은 그녀가 팬서비스를 요구해서가 아니다. 무슨 변덕인지 예정에도 없는 대타로 나온 에이스 투수가 그녀를 잡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호업체의 막내 경호원은 간절한 눈으로 운영팀장을 바라봤다. 그 역시 난감한 기색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원래 가장 곤란할 땐 지시를 내리는 이에게 눈이 가는 건 본능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런 메시지는 애석하게도 닿지 않는 건지, 팀장은 강희찬의 뒤통수와 여자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경호원은 한숨을 삼키며, 정면에 있는 여자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보다 볼이 좀 붉은가? 달아오른 뺨의 원인이 뒤에서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한 사람들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는 강희찬의 시선인지. 사실 너무 뻔한 일이다.
‘…좋은가 보구나.’
당장이라도 “사실 그렇게 오래 만난 건 아니에요”라며 소리칠 기세였다. 여자를 향한 한심스러운 눈길을 들킬지도 모른다. 막내 경호원은 눈을 돌렸다. 그곳엔 이미 8할은 차인, 그녀의 남자친구가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시방석도 이것보단 아늑하겠군. 눈을 둘 곳이 없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거였다.
단기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게 된 막내 경호원의 갈 곳 없는 두 눈이 결국 제자리를 찾았다. 오늘 행사 시간 동안 그가 몸을 바쳐 안전히 지켜야 할 보호 대상으로. 강희찬의 앞에 서 있는 헌팅 상대는 덤이다.
“응원석에 앉아요?”
멀쩡히 야구장 데이트를 온 선량한 커플을 저승사자 한 마리가 처참히 갈라놓는다. 죄책감조차 없는 평이한 목소리라는 게, 같은 남자로서 더욱 마음이 아파지는 순간이었다.
간이 크게도 애인 앞에서 여자친구에게 집적대다니.
경호원은 여자의 남자친구가 몹시 가여워졌다. 물론, 그 상대가 강희찬이라는 사실까지 포함해서.
상대가 운동선수라면 열 받는다고 호기에 취해 주먹을 날릴 수도 없는 일이다. 만약 그런다면 자신은 망설임 없이 강희찬의 앞을 막고 서야 한다.
“네. 앞줄에요.”
여자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풋 끄덕였다. 이미 한없이 타인에 가까워진 애인의 구겨진 미간은 보이지도 않나 보다. 본인이 앉을 좌석 번호까지 강희찬에게 얘기해 주고 있었다.
경호원은 다시 한번 저 앞의 남자친구에게 애도를 표했다. 솔로 만세. 형님, 힘내십시오.
하지만 지금은 업무 중이다. 여기서 더 노닥거린다면, 저 성질머리를 각오해서라도 제재를 가해야지. 그런 생각을 팀장 역시 하고 있던 차였다.
방금까지 능숙하게 헌팅하던 강희찬은 미련 없이 핸드폰을 여자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녀가 옆으로 가기도 전에, 손을 뻗어 다음 사람의 손에 있던 글러브를 받아 사인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축객령이었다.
“아…….”
방금 전까지 취한 듯 올라 있던 여자의 입꼬리가 내려온다. 짐짝처럼 옆으로 치워진 여자가 이승주의 앞에 서는 순간까지도, 강희찬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뭐지. 마음에 들어서 열심히 집적댔던 거 아니었나?’
환절기 일교차만큼이나 변덕스러운 에이스 투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인을 생산하며 늘어선 줄을 처리했다.
결국, 모처럼 야구장에 놀러 온 젊은 커플 사이의 균열은 그의 알 바가 아니란 소리다.
* * *
국민의례를 하기 전, 응원석을 봤다.
혹시나 해서 봤던 응원석은 선생에게 티켓을 주었던 테이블석과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들어가는 입구조차도 달랐었지.
우중충한 투아웃이나, 그와 햄버거 세트처럼 어울리는 여자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산 좌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인물은 그보다 배는 더 마음에 들었다.
‘다행이다.’
혹시라도 선생이 직접 표를 예매하고 들어왔다면……. 그래서 행여나 응원석에 있을 그들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시작하는 상상은 너무 끔찍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강희찬은 경기 시작 직전까지 그라운드에 서 있었다.
불안했다. 여기가 일단 국내에서는 가장 좌석 수가 많은 구장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응원석과 테이블석은 그리 쉬이 오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안해서 그라운드를 떠나기가 퍽 어려웠다.
강희찬의 시선이 향하는 내내. 이선은 자리 한 번 뜨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위치에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면서도, 그 앞에 여전히 음식 하나 없는 게 또 걸렸다.
지금이라도 조 팀장에게 부탁해서 간단한 주전부리라도 사 가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외로이 3인용 테이블석을 혼자 차지한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
관중석에서 그라운드를 볼 일은 자신에겐 없었다. 그래서 와닿진 않는 소리지만, 저곳에서 보이는 운동장 안의 사람은 참 작단다. 여기에서는 벌어지는 입술도, 그 안으로 슬쩍 보이는 작은 이도 제법 잘 보이는데 말이다.
누가 봐도 자신을 알아봤음을 온 기색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비어 있던 오른손을 들었다. 한여름의 잔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열기를 그나마 막아주던 모자챙이 손에 잡혔다. 그것을 그대로 위로 들어내었다. 방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태양빛이 그대로 얼굴로 떨어진다. 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애써 눌러 잡았다.
“…….”
그리고 모자를 위아래로 조금 흔들었다.
바람이 느껴지지만, 과연 저기서 보였을까. 그런 의문이 번진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선생은 제법 수선스럽게 고개를 홱 뒤로 돌렸다.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부산스러운 몸짓이 여실히 얘기했다. 자신의 인사를 선생이 보았음을. 그리고 그 인사의 주인이 본인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도.
‘…너라고, 너.’
가까이 있었다면 귀에다 대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진짜. 지금 저 자리에 앉은 게 누구의 이름을 대고 온 건지 잊은 듯한 맹한 꼴이다. 한숨이 터졌다.
못 알아들었으면 됐다. 그리 가벼이 여기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면 그만일 텐데.
어쩐지 손은 다시 한번, 그러나 이번엔 좀 더 큰 포물선을 그렸다. 한 뼘 정도의 거리를 왕복한 모자가 팔락였다.
그와 동시에, 가까이 있었다면 “아…….” 하고 박 터지는 소리를 수반한 표정이 번졌다.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라 있던 두 손이 어정쩡한 높이로 들렸다. 가는 손가락이 단풍잎처럼 펴지고, 양손이 미약하게나마 움직였다.
저 소심한 손동작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겠지.
…조금 더 크게 흔들면 그와 어울릴 반응이 돌아오는 걸까?
머리 위로 양손을 붕붕 흔들어주는 꼴을 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백 텀블링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물론, 최 감독의 호통은 각오해야겠지만.
“뭐 하냐?”
텀블링 대신, 모자를 좀 더 흔들어보려던 차였다. 갑작스러운 손길이 뒤에서 강희찬의 등을 툭, 하고 쳤다.
투수를 생각하는, 같은 투수만이 할 수 있는 배려가 섞인 미약한 힘. 강승호였다.
“누구 왔어? 애인?”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아무것도 안 하긴. 풍차 돌리고 있었잖아.”
내가 언제?
기분 좋은 미풍 같은 미소가 번져 있던 얼굴이 어느 순간 시베리아 벌판이다. 하지만 강희찬보다 두 살이 많은 투수 선배는 후배의 표정에 섭섭함을 느낄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여친? 어디?”라고 열 번 정도, 고장 난 오디오처럼 반복할 뿐이다.
“아니면 연예인 있어? 어디? 같이 보자.”
“…없어요.”
“에이씨. 오늘 남자 시구라서 가뜩이나 기분도 좆같은데.”
좆 달린 새끼가 오니까 기분도 좆같아지는 거라며, 마찬가지로 좆이 달린 인간은 라임이 죽인다고 낄낄댄다.
‘진짜 좆같이 좆같네.’
선배만 아니었으면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았다.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시선을 다시 관중석으로 돌렸다. 잠깐 눈을 떼면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다행이었다.
강승호와의 허접한 투닥거림을 본 건지, 아까보다 어린애의 장난을 보는 듯한 웃음기가 작은 얼굴 위를 덮었다.
“…….”
저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국민의례가 마지막이다. 등판일이 아닌 선발 투수가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는 순간은.
운동장 따위 경기가 끝나는 게 아닌 이상 굳이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불펜이 외야에 있었다면, 더그아웃 앞에서 몸을 푸는 투수의 가드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긴 그럴 일도 없는 곳이고, 게다가 지금은 경기 초반이었다.
딱 그 순간까지다.
혼자 헐렁하게 앉아 있는 선생을 보다 애국가 1절을 듣고, 벤치에 들어와 좆 달린 놈이 한 좆같은 바운드볼 시구를 봤다. 그 이후로 강희찬은 오른팔을 턱에 괸 자세 그대로, 5회까지 식물처럼 한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
5회 말이 끝나면, 그라운드를 정비한다. 그 틈을 타, 긴 휴식 때문에 몸이 식을까 선수들은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기도 했다. 오늘 등판이 없는 강희찬 역시 틈바구니에 섞여 그라운드를 밟았다. 스타팅에 이름을 올린 타자 몇이 왜 나오냐고 물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강희찬은 무성의하게 관중석을 보며 몸을 움직였다.
경기가 쉰다고 해서 다 같이 멍하니 있는 건 아니다. 그때를 이용해 구단은 막간의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잠시라도 관람객을 지겹게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시끄러운 진행자의 목소리가 앰프를 타고 울렸다. 무슨 타임 하는, 관중들이 전광판에 잡히는 시간이었다. 기가 막히게 지루하고, 구장마다 다를 것도 없는 행사다.
화면에 잡힌 여자가 예쁘거나, 춤을 잘 추면 ‘오오’, 평범하면 더그아웃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차다. 남자끼리 댄스 배틀이라도 잡힌 순간엔 ‘씨발’ 소리는 애교였고.
놀러 왔다는 흥분감에 젖어 다소 유해지는 관람객에 비해, 더그아웃의 선수들은 한창 이익 창출을 위한 경제 활동 중이었다. 강희찬은 언제나 칼 같은 선수들 반응의 이유를 그곳에서 찾곤 했다. 일하는 중인 사람이 너그러울 수는 없다. 물론, 이들이 농구를 보러 간다고 남자에게 너그러워질 것 같진 않지만.
―자, 첫 번째 커플부터 만나볼까요?
춤을 추는 건 다 끝이 난 모양이었다.
이젠 낯간지러운 배경과 함께 중년 부부의 투 샷이 잡혔다. 여자는 남편으로 보이는 사내의 뺨에 입술을 댔다. 관중들의 환호 사이로, “어머님이 화끈하시네요” 따위의 저렴한 멘트가 섞였다.
명목상 그리고 관중석을 볼 핑계로 구태여 그라운드에 나와서 하던 스트레칭도 멈춘 지 오래였다.
중년 부부란 언제 봐도 분위기가 거기서 거기다. 길바닥에서도 흔히 볼 투 샷을 무심히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아니, 그곳에 닿기도 전에 고개는 이미 테이블석으로 향해 있었다.
“…….”
선생은 의외로 전광판 속 부부를 보며, 혹은 사회자의 값싼 멘트에 즐겁게 웃고 있었다.
‘시무룩했을 줄 알았는데…….’
자신의 생각을 선생이 알아챈다면, 또 그렇게 말하려나. 그런 건 편견이라고. 편부모 가정에서 자랐다고, 저런 모습을 보면서 우울해하는 건 아니라고 말이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깃털처럼 말간 웃음이다. 마음 어딘가를 불편하게 누르던 죄책감을 가볍게 날리는 웃음이기도 했다.
한겨울에 가까워지는 시기의 한국시리즈 저녁 경기. 옅게 나던 땀이 날아가면, 공기가 더욱 선득해지고, 손이 곱아들 것만 같은 그때. 로진이 묻은 것도 신경 쓰지 못한 채 입김을 불어 손을 녹여가며 공을 던져야만 한다. 그러다 이닝을 마치고 불펜에 들어가면 자그마한 난로가 있다. 그것을 쬐었을 때와 겹쳐지는 감각이었다.
지금 이대로 끌어안고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안락함. 웃어도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미소 말고, 저런 거.
‘조금만 더 웃어봐라. 조금만 더…….’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하얀 얼굴에 걸린 미소는 어색하게 굳었다.
왜? 라는 생각보다, 귓가에 울리는 듣기 싫은 요란한 환호가 유독 불길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돌린 고개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음을 알려주었다.
유니폼을 입은 남녀. 화면에 잡힌 남자는 양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잡고, 그녀의 입술에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춘다. 그 순간 설핏 찌푸려지는 여자의 얼굴이 망가지는 화장 탓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딴 건 알 바도 아니다. 호승심마저 느껴지는 남자의 과장된 행동이 누구를 의식한 것인지까지. 그딴 건 강희찬에게 요만큼도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저… 멍청이처럼 입술에 빨간 게 묻은 놈이 투아웃이라는 게 문제였다.
‘하필이면……!’
전석 매진이라고 했다.
시즌권 좌석은 뺀다고 쳐도, 만 명은 훌쩍 넘었을 관중 중에서, 이 많고 많은 인간 중에서 하필이면 저것들을 잡은 카메라맨의 목을 비틀고 싶어졌다.
고개를 돌리고, 다시 선생을 봤다. 다행히 아직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 중년 부부의 주책을 봤을 때처럼 웃고 있진 않았지만…….
아니, 어떤 얼굴을 했는지 표정조차 짐작되지 않는다.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그라운드에 있는 강희찬에게 보이는 거라고는 머리꼭지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우는 것 같아서 더욱 눈을 뗄 수가 없다.
뭘 잘못했다고 저러고 있는 건데.
당장이라도 저 위로 올라가, 힘없이 처진 어깨를 잡아채고 끌고 나가주고 싶었다. 하지만 강희찬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이토록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순간이 있었던가. 이토록 그라운드를 벗어나고 싶은 순간이 인생에서 과연 있기나 했던가.
―아, 우리 선남선녀 커플. 오래오래 만나서, 나중에 결혼해서도 야구장 왔으면 좋겠어요!
저급한 멘트보다 더 최악이었다. 짜증 나는 소리에 왠지 모르게 마른 어깨는 더욱 웅크려졌다. 마치 화면 속 커플에게 자신의 모습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갈까?’
당장이라도 없어질 듯, 어깨를 잔뜩 옹송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버릴까?
“야, 안 들어가고 뭐 해?”
툭, 하고 배려 없이 자신의 어깨를 건드는 손길에 신경이 미치진 못했다. 그저 치열한 갈등이 깨질 뿐이다.
1루수는 이제 경기가 시작한다며, 들어가라는 눈짓을 했다.
발을 질질 끌면, 신발에 자디잔 흙이 긁히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한 걸음이면 떼었을 거리를 몇 번이나 짧게 끊어가며 걸었다. 그사이에도 여전히 눈은 한 곳을 향했다.
‘…가지 마라. 그래도 가지 마라.’
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데. 그렇게 소리친다면, 언젠가처럼 자신의 발 앞에 선이나 그어버리고 뒷모습을 보일 테지.
혀끝이 쓰다.
인정해야 했다. 선생에게 자신은 지금 발아래에서 끌리는 모래알갱이만큼 작은 사람이라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가지 말아달라고. 계속 눈에 보이는 곳에만 있어달라고. 뭐든 해줄 테니까, 제발 가지 말아달라고.
* * *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잡히고 도열 인사가 끝나자마자, 강희찬은 누구보다 먼저 걸음을 떼었다.
번잡스러운 더그아웃과 아직은 한산한 로커룸을 지나면, 이제 슬슬 내려오는 기자들이 몇몇 보인다. 그들은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차마 자신에게 ‘어딜 가느냐’고 말은 걸지 못했다.
어차피 그들의 인터뷰 대상자는 승장인 최선형 감독과 오늘의 선발투수, 그리고 결승타를 친 타자일 테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깨에 부딪히는 인파들을 헤쳤다. 그들은 갑작스레 부딪혀온 무게감에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그 대상을 확인한 순간 시간이 멈춘 양 멍청히 입을 벌릴 뿐이다. 뒤편에서 구단 직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남자가 “희찬아!”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냥 무시했다.
유니폼을 입은 무리가 보일 즈음, 숨이 찼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찬다는 건 강희찬에게는 꽤 생경한 감각이었다.
2층 계단의 끝에서, 중앙석으로 들어갈 통로를 찾았다.
야구장에 매일 와봐야 들어가는 곳은 그라운드다. 6년째 다니는 직장이라도, 강희찬은 관중석의 구조를 알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입구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 아직도 엉덩이가 무거운 기자 몇이 그곳에서 느릿한 걸음으로 나오고 있었다.
잠시 길을 찾느라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잠시만요, 미시면 안 됩… 어?”
튀는 계열의 조끼를 입은 스태프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퇴장하는 관람객의 안내를 돕던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운동장에 있던 차림 그대로 이곳에 나타난 선수를 보고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건 흐름과 반대되는 방해에 짜증을 내던 퇴장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강희찬은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들을 헤쳐가며 스태프를 향했다.
“중앙석, 이쪽으로 들어가는 거 맞죠?”
“네? 아……. 아, 네. 이쪽요.”
유니폼을 입은 선수야 야구장에서 보는 게 당연하다 해도, 거기가 그라운드가 아니라면 얘기는 다르다.
강희찬이다. 뭐? 강희찬? 진짜 강희찬 맞아, 저거?
당황 어린 웅성거림이 강희찬을 둘러쌌지만, 정작 직접적인 방해는 하지 못했다.
“…….”
덕분에 관중석에는 수월히 진입했다.
선수를 붙잡아 사인을 요청하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집단의 힘을 빌리지 않았을 때 사람의 용기란 대체로 형편없기도 하고. 같잖은 호승심이나 쓸데없는 용기가 말을 걸지 못하는 이 순간 더욱 빛났다. 5년에 걸쳐, 인터넷이며 코치며 심지어 구단 직원에게까지 잔소리를 들어가며 뿌리쳤던 사인 요청들이 말이다.
혹시나 그사이에 선생이 갔을까, 강희찬은 놀람과 멍청함이 뒤섞인 얼굴들을 하나하나 뜯어봐 가며 지나쳤다.
통로를 지나면, 어둠이 내린 까만 하늘을 야구장 조명이 밝히고 있다. 입구 안은 시간에 비해 꽤 밝았다.
야구선수인 그가 이 각도에서 보는 그라운드의 모습에 새삼 감탄할 새도 없었다. 눈은 부지런히 오늘 봤던 푸른색 남방을 찾았다.
유니폼들 사이에 섞여서 벌써 나가버린 건지. 설마 다른 출입구를 이용한 건가.
그런 걱정을 할 무렵이었다. 작은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운영팀장에게 몇 번이나 물어가면서까지 골랐던 자리에 앉아 있는.
절반쯤은 빠져나갔고, 지금도 다들 일어서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혼자 시간이 멈춘 양 움직임이 없는 모습이 몹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강희찬의 시간 역시 그 순간 멈추었다.
너무 시끄러운 소리는 차라리 아예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라운드에서 심심치 않게 경험했던 감각이다. 소리를 볼 수 있다면 겪어본 적은 없지만, 화이트 아웃과 비슷할 것이다.
동시다발적으로 귓전을 때리는, 제 이름이 섞인 소음들이 아득히 멀어졌다. 모든 것이 차단된 것만 같았다.
머릿속으로 단 한 음절도 들어오지 못하는 소음을 헤치고, 걸음을 떼었다. 중간에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손이 붙잡은 것도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면, 가까이에서 봐도 여전히 유약해 보이는 목덜미가 있다.
손을 내뻗었다.
여전히 낙엽처럼… 손만 대면 바스러져서 사라질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이 강희찬의 손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정 선생님.”
닿았다고 하기도,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한 손길이 마른 어깨 위에 붙었다.
조금만 더 세게 만지면 망가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도망가려 한다면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감정이다. 애매한 손힘을 알아챈 건지, 흰 목덜미가 천천히 돌아온다.
야구장에 세 시간이 넘도록 앉아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핏기가 없는 하얀 뺨. 그리고 그 위로는, 오늘따라 먹을 칠한 듯 초점이 없는 검은 눈이 드러났다.
“아…….”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귀에 꽂힌 작은 침음까지. 모든 것이 슬로 모션 같기만 했다.
“강희찬 씨…….”
목소리에 형체가 있었다면, 이 말은 당장 스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느리게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을 듣고서야, 주변의 소음이 지나치게 작게 느껴졌다. 마치 커다란 유리 덮개가 그와 자신을 덮어둔 듯했다. 아주 얇은 막 하나를 두고 이 세상에 그와 둘만 남겨진 듯한 착각이 몸을 뒤덮었다.
어딘가로 둥둥 떠서 가버릴 것 같은 사람도, 자신도 이곳에 있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고.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귀신이나 허깨비 따위가 아닌, 체온을 가진 실체라고.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 음소거 버튼을 해지한 양 높아지는 데시벨과 불쾌지수는 비례했다. 하지만 함부로 얼굴을 찌푸릴 순 없었다. 그저…….
“밥, 먹으러 가죠.”
깜빡, 깜빡. 그리고 또 한 번 더 깜빡.
마치 무언가를 정리하듯, 긴 속눈썹이 올라 있는 눈꺼풀이 조금 더 오래 감겨 있다. 강희찬은 그 모습을 보며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을 붙잡을 확실한 말 따위는 생각나지 않는다. 머리를 쳐버리고 싶었다.
회전이 빠른 머리는 가지지 못했지만, 적어도 강희찬에겐 직업병의 일종인 귀신같은 눈치가 있었다. 선생이 지금 밥을 먹으러 가자는 자신의 제안을 썩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음… 저기, 제가 오늘은…….”
겨우 다시 나타난 눈이 벽을 쌓는다.
‘익숙하다. 이따위 것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다. 몇 번이고 속으로 주문처럼 되새겼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벽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약속했어요, 오늘 밥 사준다고.”
“아… 네, 근데…….”
야구장 조명 탓인지, 혹은 낮보다 더 떨어진 밤공기 탓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것 때문인지. 오늘따라 무서울 정도로 희게 보이는 손이 피곤한 듯 눈가를 덮었다.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아무 데서나 맹하게 끄덕이는 고개는 유독 자신에게는 박했다.
벽을 치듯, 최대한의 성가심을 표현하는 손을 억지로라도 잡아떼고 싶었다. 그리고 직접 물어보고 싶다. 대체 왜 유독 나에게만 이러냐고.
하지만 얼굴을 가리는 손을 치워내지도, 다른 데선 호구처럼 굴며 왜 유독 내게만 이러냐고 따지지도 못한다.
선생이 내놓을 답은 너무도 명확했다. 그것을, 그 당연한 말을 또다시 듣는다면…….
웃음이 날 정도로 기가 찼던 그날 밤으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다시 한번 망설임 없이 뒤를 돌 수 있을까. 멍청한 호구 따위, 알 바 아니라며 돌아설 수 있나.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답은 너무 뻔하지 않은가.
“정 선생이…….”
‘…없다.’
넘어져도, 혼자 소리도 못 내며 울 게 뻔한데. 그걸 어떻게 다시 놓고 간단 말인가.
이를 악물었다. 화가 났다. 본인의 한계점도 모르고, 혼자 참으며 눈물이나 흘려댈 선생에게 화가 나는 건가. 아니면 이 답답한 꼴을 무시하지 못하는 저 자신에게 화가 나고 있는 건지.
뭐가 되었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멍하니 다른 곳에 생각이 있는 것 같은 눈이 아닌, 초점이 제게 맞은 눈동자를 본 순간 느껴졌다. 자신은 이 선생에게 소리 하나 높이지 못할 거라고.
인정하는 건, 이토록 쉽다.
“정 선생님이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
“…….”
“먹고 싶은 거든, 갖고 싶은 거든. 뭐든 다 괜찮으니까.”
물기가 어린 것 같으면서도 건조한 눈동자가 올라온다. 느릿하게 눈꺼풀이 그 위를 지나는 모습이 답답하다.
선생의 어린 시절이야 당연히 모르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뭐든 다 골라봐’라는 얘기를 들으면 오히려 난감해하는 타입이겠지.
딱 그런 질문을 들은 꼬마처럼, 난감한 기색이 오른 얼굴이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딱히 저는 필요한 게 없는데…….”
“…….”
말끝이 흐려졌다.
그런 거 물어보지 말아주세요. 간절히 부탁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지금 여기에서 저 얼굴에 넘어간다면, 결과는 너무도 뻔했다. 밥은 다음에 사겠다는 예의 차린 말을 하고, 선생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야구장 입구를 나설 것이다.
‘얘기해 봐라. 뭐든 들어줄 테니까.’
하다못해, 투아웃을 바란다고 해도. 그래도 당장 멱살이라도 잡아다 옆에 데려놔 줄 자신이 있었다.
어려울 건 없다. 정말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 얘기하라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좆같아진다. 하지만 욕심이 없어 보이는, 혹은 욕심을 내보이는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했다.
“먹고 싶은 건…….”
“…….”
없는데…….
차마 나오지 못한 말을 읽는 건 너무도 쉽다. 남의 자리를 뺏어내기는커녕, 손에 쥔 것도 다 뺏길 멍청한 얼굴이다.
이건 선생이 욕심이 없다고만은 할 수 없다. 강희찬 자신이 그의 욕심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더 정확했다.
무엇을 갖다 바친다 하더라도, 내미는 손이 자신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선생에게는 가치가 없었다. 호구 같으면서도 묘하게 차갑고 벽이 느껴지던 이유도 바로 그것일 테지.
감쳐물었던 입술이 드러났다. 침이 얇게 발려 있는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그 입술에서 다시 한번 거절의 뜻이 나올 것만 같았다.
강희찬은 성급히 먼저 목을 울렸다.
“저번에 먹자던 통닭. 그거 먹으러 가요.”
“…네?”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렇게까지 좋아서 얘기한 건 아니었는데…….”
살래살래. 얕게 고개가 흔들리는 중에도, 혼란스러운 듯 갈 곳을 잃던 눈동자가 멈추었다. 빤한 시선이 강희찬의 얼굴에 붙어왔다.
무슨 생각인지 더듬어보려는 하찮은 속셈인지, 얼마간 머물던 이선의 눈이 곱게 접혔다. 푸, 하는 이상한 소리를 인지하고서야 강희찬은 그게 웃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가게 수원에 있는데, 지금 어떻게 가요.”
“차 타고 가면 되잖아요.”
“…닭 한 마리 먹으러 수원에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리 묻는 얼굴이 갸웃, 기울어진다. 만화책이었다면 그 얼굴 뒤로 물음표가 그려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도착하면 영업시간도 거의 끝났을 것 같은데…….”
강희찬의 손은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찾기 위해 바지 주머니가 있을 곳을 더듬었다. 하지만 손에 감기는 익숙한 재질이 유니폼임을 알려주었다. 옅은 웃음이 번져가는 얼굴에 집중하느라 제 차림을 잠시 잊고 있었다.
문득 주변을 보면, 이쪽을 흘긋거리며 나가는 사람이 반, 그리고 대놓고 멀리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 반이었다. 그 와중에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지 않아주는 게 퍽 고마웠다.
한숨이 잇새를 흘렀다. 내쉰 숨을 머쓱함으로 오해했는지, 선생의 입꼬리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올라간다.
마치 이가 없는 땅꼬마를 보는 듯한 시선이 양가감정을 느끼게 했다. 애새끼한테 하듯 말라고 쏴붙이고 싶다가도…….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경기 내내 정수리만 보일 정도로 고개나 푹 숙이더니.
괜한 불만의 말은 삼켜야만 했다. 대신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한참 아래에 있는 머리통에 그것을 푹 씌웠다.
“아…….”
“몇 번 안 쓴 건데, 그래도 지금은 좀 참아요.”
“…네?”
모자가 저렇게 될 일인가 싶을 정도로, 선생의 얼굴을 푹 가렸다. 내려온 모자챙을 치우고 싶은지 이선의 손이 반사적으로 올라왔다. 강희찬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나가요. 언제까지 앉아 있을 건데요.”
피가 돌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손목을 그러쥐었다. 움켜쥔 손목의 온도가 제법 서늘하다. 여름날, 그것도 장시간 밖에 앉아 있던 사람의 것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조금 더 힘을 준다면 바스러질 것 같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건조함은 현실감이 없었다. 조금 힘을 주어 당기면 너무 쉽게 일으켜지는 몸의 무게까지 포함해서.
“아, 저기……!”
강희찬은 쉽게 풀리지 않을 정도로만 느슨히 잡은 손에 집중하며 뒤를 돌았다. 일으키기도 쉬웠던 몸은, 그것을 끌고 걸음을 떼게 만드는 건 더욱 쉬웠다.
“저, 혼자 걸을 수 있는데……!”
“…….”
애새끼를 보듯 자신을 보면 열이 받다가도, 어린애처럼 돌봐주려는 우스운 손길을 얌전히 받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 정도의 애 취급은 참아줄 만했다.
어차피 같잖기만 하다. 선생은 꽤 어른인 체하는 모습조차 아버지 옷을 입은 꼬마인 듯 어설펐다. 어쩐지 눈에서 떼지 못하고 지켜줘야 할 것만 같았다.
제 앞으로 숱하게 있는 인파와 닿지 않도록 헤쳐줘야 하는 지금처럼.
* * *
‘그럼 야구 경기는 다 공짜로 볼 수 있겠네?’
친구가 야구단에서 일한다는 얘기가 학교에 퍼지고, 이선은 간혹 그런 질문을 받았다. 혹은 ‘친구 따라서 선수들 로커룸 같은 데도 가봤어?’라든가.
티켓이야 공짜로 줄 수도 있는 것 같으니 그렇다 치지만, 후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단다. 기자들도 선수들 로커룸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배려라는 게 송재혁의 말이었다.
물론, 구경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이선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었다. 어차피 씻고 옷을 갈아입는 공간이다. 구경해서 뭘 한단 말인가. 그런 건조한 감상을 솔직히 뱉었다면, ‘이래서 알못은 안 된다’며 송재혁이 혀를 찼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방금 전 강희찬이 “혹시 들어와서 구경하고 싶어요?”라며, 로커룸의 입구를 가리킬 때도 이선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저… 저는 그냥, 다들 나가는 출입구로 나가면 안 될까요? 여기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일 텐데…….’
‘일 텐데’가 아니라,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 맞다. 이선은 이미 팀장의 뒤를 따라 야구장에 들어설 때, 한 번 봤었다. 게다가 강희찬의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고서야 사실, 새빨간 그 글자를 못 볼 리도 없었다.
‘그럼 내가 한참 찾아야 하잖아요.’
‘…….’
대다수 사람들이 지키는 규칙과 약속을 존중하는 이선의 곤란함은 소용이 없었다. 미간을 구기며, 짜증이 났음을 숨기지 않는 강희찬의 한마디가 쓸모없는 논쟁을 종결시켰다.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오니까, 여기 그냥 있어요.’
그러고서 쾅 문을 닫고 들어간 거다. 일반 관람객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공간과 이질감을 내뿜는 정이선을 남겨둔 채로 말이다.
본인이야 여기가 몇 년째 일을 하는 직장이니까 편하겠지. 좌불안석인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역지사지가 되지 않나? 아, 돌이켜보면 저 사람은 방문록도 안 쓰고 신발을 신은 채 남의 학교에 잘 들어왔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정이선의 어색함을 느낄 리가 만무했다.
“…….”
이선은 로커룸 옆의 벽에 몸을 기댔다.
좋은 냄새를 풍기며 들어간 강희찬은 여전히 나올 기미가 없다.
물론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겠지만, 정이선의 체감은 그가 안에서 옷을 만들어서 입고 나오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까 강희찬이 홱 하고 뒤를 도는 순간, 코에 닿은 냄새가 낯익었다. 학교에 찾아왔던 그의 뒤를 따를 때 코끝에 감기던 향과 비슷했다. 머리카락이 움직일 때 퍼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샴푸 냄새인 듯했다. 그땐 아마 본인 특유의 체향이 더 섞인 냄새였겠지.
‘…어땠더라?’
이선은 눈을 감고 코끝과 기억에 집중했다.
훈련이 끝나고 샤워했을 때 썼겠지. 좋아하는 제품인 걸까. 아니면, 자신처럼 동네 마트에서 행사하는 거로 아무렇게나 집어온 걸까. 그렇기엔 냄새가 고급스러웠는데…….
“저기요.”
향기를 추리하던 이선의 귀를 어린 목소리가 때렸다. 순간적으로 눈을 반짝 떴다.
‘…바오밥나무?’
시야를 가리는 모자챙을 가르고 나타난 얼굴을 본 순간, 그런 낯선 식물의 이름이 스쳤다.
미용실에 브로콜리 사진을 들고 가서 똑같이 해달라고 말을 했나.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유발하는 남자의 파마머리에만 눈이 갔다. 눈을 뗄 수 없는 파마머리 아래엔, 벌겋게 달아오른 빵빵한 볼이 있었고.
남자는 챙 아래에 있는 이선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네?”
뒤늦은 대답이 이선의 입에서 흘렀다. 사람을 너무 신기한 것을 대하는 눈으로 봤을 거란 자각은 그다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선의 실례되는 시선은 괘념치 않았다. 다행히 아이스하키복처럼 커다란 티셔츠를 입은 그는 뾰족한 성격은 아닌 듯했다. 같은 팀 선수인 누군가와는 다르게.
대신, 그의 질문이 재차 이선과 남자의 좁은 거리를 채웠다.
“혹시, 기자세요?”
물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명치께를 살폈다.
이유는 대충 예상이 갔다. 송재혁이 야구장에서 항상 하고 다니는 직원증이나 그 비슷한 것이 없음을 눈치채고, 이선에게 다가온 것일 테다.
바오밥나무는 친절하고 선한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이선은 그것이 에두르는 축객령임을 날카롭게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원래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기운을 잘 집어내는 편이었다.
“아, 아뇨. 저는, 그냥…….”
“여기가 선수들 공간이라서, 일반 관람객은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안 되거든요.”
“아, 네. 죄송합니다.”
친절한 브로콜리 남자가 말을 하는 동안 익숙한 냄새가 옅게 번졌다.
꾸벅 고개를 숙인 순간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다. 바오밥나무의 머리에선, 아까 강희찬이 풍기고 사라졌던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전혀 다른 머리 스타일인데, 왜 같은 향기가…….’
위화감으로 혼란스러운 이선에게서 브로콜리는 눈을 떼지 않았다. 커다란 눈이 부담스럽게 깜빡거리고 있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스타일과 얼굴이었지만 이선은 대충 느낄 수 있었다. 브로콜리 남자는 생각보다 어릴지도 모르겠다고.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남자가 저런 귀여운 행동을 했다면, 어디 가서 욕을 먹기에 십상이었다.
얼른 출입금지 구역에서 벗어날 생각도, 자신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있는지 설명할 겨를도 없었다. 옆에서 들려온 문소리가 상황을 정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소리와 함께 등장한 의아한 표정의 강희찬이.
“뭐야?”
“아, 형. 아직 퇴근 안 했어요? 아까 제일 먼저 나가더니.”
자신보다 어릴 거라는 예상은 했는데, 강희찬보다도 어리다는 건 좀 놀랍긴 하다.
이선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잔뜩 들이밀었던 얼굴이 물러졌다. 덕분에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브로콜리의 정신은 이제 오롯이 선배―로 추정되는― 강희찬에게로 향했다. 강희찬이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 역시 위화감이 일었다.
이선은 조용히 눈을 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흘끔거렸다. 얼마를 주고 한 걸까 싶은 파마머리와 커다란 손이 탈탈 털면 보기 좋게 흩어졌다 제자리를 찾는 깔끔한 스타일.
바오밥나무는 대체 몇 살이지? 강희찬보다 몇 살이나 어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강희찬과 눈이 마주쳤다. 뭐든 시시하다는 듯 보는 눈이 드물게 둥그렇다. 그리고 슬쩍 미간이 찌푸려져 있다.
‘난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어. 시키는 대로 여기 가만히 있었는데…….’
부쩍 억울해진 이선이 그런 변명을 하기도 전에, 강희찬의 눈이 브로콜리를 향했다.
“…왜 뽀뽀하려고 했어?”
제 앞머리를 쓸던 강희찬의 손은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그 아래로 있는 찌푸린 미간이 미심쩍다. 그제야 이선은 바오밥나무 남자와 자신의 거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30㎝ 자로 잴 수 있는 거리. 확실히 그리 깨닫고 보니,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취하기에는 부쩍 가까운 거리감이었다. 획기적인 헤어스타일에 감탄하느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이선의 얼굴을 보기 위해 들이밀었던 얼굴을 물린 브로콜리는 인상을 팍 구겼다. 아무래도 선배의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한몫한 듯했다.
“무슨, 언제 그랬어요. 잘 안 보이니까 그랬지.”
“네 얼굴은 외야에서도 다 보이는데.”
“…제 얼굴 말고요!”
단순히 파마머리 때문에 부피감이 더해 보이는 줄 알았다. 하지만 본인 자체는 얼굴이 크다는 것을 콤플렉스로 여긴 모양이었다.
강희찬에겐,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상처를 후벼팠다는 자각은 없었다.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는지, 찌푸려졌던 미간이 조금은 펴지고, 이마께에 있던 손은 내려왔지만.
“씻지도 않은 얼굴은 왜 들이밀어? 냄새나잖아.”
“아까 선발 내려오고 씻었어요! 머리 젖은 거 보이잖아요!”
왠지 습해 보이는 브로콜리의 얼굴이 불그죽죽하다.
“…땀 아냐?”
브로콜리는 망설임 없이 제 정수리를 강희찬을 향해 들이밀었다.
정이선 역시 그의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가 땀이라고 생각했었기에, 조금은 미안해졌다. 머리를 감아서 젖은 것임을 알았어도, 그가 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강희찬에게 들이미는 모습은 역시 미심쩍고.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아.’
이선은 저도 모르게 강희찬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반보 정도 옮겼다. 슬금슬금. 어느새 몸의 절반은 그의 뒤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숨어들었다.
군기가 세다는 운동선수 사회다. 바오밥나무 남자가 강희찬에게 존대를 한다는 건, 분명 나이가 어리단 소리였다. 생긴 것과는 다소 이질감이 드는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럴 터였다.
그 말인즉, 분명 자신보다는 한참이 어리다는 소린데……. 안 씻었냐는 말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왠지 모르게 무섭다.
두려움을 느끼며 쭈뼛대는 이선의 모습을 강희찬이 흘끔 봤다.
뭘 하는 짓이냐고 야멸차게 제 등 뒤에서 쫓아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이선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게다가 뒤로 넘어온 왼팔이 더욱 이선을 그의 뒤로 밀어 넣었다. 덕분에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은 붉은 얼굴이 이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형, 아는 분이세요?”
맡아본 적 있는 체향이 느껴지는 단단한 등. 그것이 시야와 소음을 한 번 걸러주었다. 이선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새삼 큰 체구에 멍하니 눈을 두었다.
화면으로 볼 땐 꽤 슬림한 축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사복을 입으면 그보다 확실히 체구가 크게 느껴진다. 몸 위에 천이 없다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고.
헐렁한 티셔츠 위로도 잘 잡힌 등 근육이 보인다고 하면 이상한 일일까?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낯선 이의 체향은 여러모로 상상력을 증폭시켰다.
“어. 왜.”
“아니요. 저, 기자님인가 해서요. …죄송합니다.”
강희찬의 어깨너머로 겨우 보이는 파마머리가 꾸벅 숙어진다. 이선 역시 그를 따라 얼굴을 내렸다. 넓은 등이 장애물이었기 때문에 과연 그가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런 사회인의 매끄러운 인사치레를 할 기회는 없었다.
“너, 로커에 있는 모자 빌린다. 새 거.”
“네? 저 여분 없어요.”
“내일 사주면 될 거 아냐.”
이선의 머리 위에 있던 모자가 휙 벗겨졌다. 머리가 흐트러지는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강희찬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이선의 얼굴을 한 번 훑더니, 가격표를 갓 뜯어낸 모자를 머리 위로 씌웠다. 아니, ‘씌웠다’기보다는, ‘덮었다’에 가까웠다.
순식간에 시야가 확 줄어드는 바람에 불안감이 몸을 뒤덮었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강희찬뿐이었다.
“뭐야. 너, 대가리 왜 이렇게 커?”
늘 일정한 톤을 유지하는 목소리가 답지 않게 높아졌다. 본인이 씌워놓고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모자가 다시 사라졌다.
본의는 아니지만 남의 것을 강탈한다는 죄책감도 있고, 시야 확보라는 안전상의 문제도 있다. 이대로 모자는 다시 브로콜리 남자에게 돌려줬으면 좋았으련만.
이선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강희찬은 그대로 캡모자 뒤편의 끈으로 사이즈를 조절했다.
강희찬이야 자신을 향해 있으니 모르겠지. 가뜩이나 불그죽죽했던 남자의 불만 어린 시선이 붙어오는 것도 조금은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는데…….
누가 봐도 나이 때문에 참고 있는 바오밥나무 남자는 잔뜩 튀어나온 입을 비죽였다.
“그럼 돌려주세요. 따로 주문해야 한단 말이에요.”
“신우 형한테 하나 빌려.”
죄책감도 미안함도 없어 보이는 강희찬이 그대로 대화를 종결시켰다. “안 맞을 텐데…….” 곤란한 듯 중얼거리는 후배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 들어오지 못함이 분명했다.
내일 그가 모자 없이 생활할지, 아니면 맞지 않는 작은 모자 안에 브로콜리를 욱여넣을지 조금 궁금해진다. 나중에 물어본다면, 강희찬은 대답해 주려나.
바보 같은 상상을 가르고, 강희찬의 손이 다시금 이선의 팔목을 약하게 쥐었다. 줄여졌음에도 챙 부분이 과하게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이 불안했다.
분명 본인의 원래 악력이 아닌 조심스러운 힘이 이선을 이끌었다.
강하지 않지만, 단단한 힘이다. 이선을 숨겨주었던 배려가 묻어나는 그의 등과 비슷했다.
언제나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 하는 정이선에게, 그의 모든 것은 무서울 정도로 안락했다. 당장이라도 보이는 등 뒤에 얼굴을 파묻어 기대버리고 싶은 충동을 눌러야만 했다.
“가죠.”
절대 아프지 않은 힘에 의해 몸이 이끌렸다. 오늘 하루의 우스운 상념도, 쓸데없는 불안감도 날려버리기에는 충분했다.
* * *
‘이선 쌤은 왠지 어릴 때 잔병치레가 많았을 것 같아요.’
김경원이 갓 부임했던 학기 초였나. 아니면, 그로부터 두어 달 지났을 때였나.
누군가 가져온 홍삼 원액을 물에 타던 그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친하지 않은 사이에 이게 웬 막말이람.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이선을 향해 그녀는 ‘칭찬이에요’라는, 설상가상인 말을 덧붙였던가.
홍삼액과 꿀이 거의 같은 비율로 섞인 그녀의 컵을 보며, 이선은 여러모로 황당함을 느꼈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튼튼했다며 그녀의 오해를 정정했지만 말이다.
사실 자신은 소아천식을 앓았던 것에 비해 어릴 적에도 감기에 자주 걸리는 편은 아니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잔병치레가 많지 않은 대신, 한 번 크게 앓는 축에 가까웠다.
신규진을 알아온 동안, 이선은 크든 작든 종종 앓곤 했다.
학교의 후배가 괜찮은 것 같다며 메신저를 보여주던 날. 그 후배와 약속이 생겼다며 자신과의 선약을 급히 취소했던 날. 이선과도 함께 봉사활동을 했던 사범대의 여학생과 술자리에서 연락처를 교환하던 때. 고시원 로비에서 위아래가 세트인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의 입에서 ‘오빠’라는 소리가 나왔던 때.
돌이켜 보면, 그런 날엔 신기할 정도로 빠짐없이 앓았었다. 그래도 몸이란 것도 학습 능력이 있는지, 내성이 생기는지 처음에 비하면 아픔은 점점 약해졌다.
어쨌든 그런 날이면 이선은 직감할 수 있었다. 아프겠다고. 몸살에 걸린 양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공벌레처럼 말아서 달달 떨어야겠다고.
신규진을 알지 못하던 때에도 종종 열병을 앓았다. 기억하는 범주 내에서 가장 크게, 그리고 가장 처음으로 아팠던 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몸이 겪어온 습성이면, 지금쯤 적응될 법도 했다.
그러니 전광판의 커플을 본 순간 이선은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었다. …오늘도 아프겠다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서 공벌레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장례 중, 정신없이 자신을 돌봤던 어머니는 없다. ‘선아.’ 물기 어린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며, 이마를 쓸어주는 시원한 손도 없다. 20대가 된 정이선은 그렇게 버티는 법밖에 알지 못했다.
‘가서, 자야지. 내일 출근인데…….’
아이들 앞에서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저조한 티가 나선 안 된다. 어린애들은 생각보다 예민하고, 날카로이 어른의 기분을 살피는 능력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멀쩡한 얼굴로 월요일, 새 마음으로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웃어주기 위해선 당장이라도 집으로 도망치듯 숨어들어야 했다.
“…….”
이선은 또다시 제 손목을 끌고 가는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이렇게 생판 남의 팔을 보는 감각으로 보니, 제 손목을 그러쥔 큰 손이 위협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몸이 느끼는 악력은 미약했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지금의 자신이라도, 마음먹고 뿌리친다면 얼마든지 내칠 수 있을 만큼.
‘…답지 않다.’
강희찬의 답지 않은 악력은 오늘따라 이상한 그와 닮았다.
자신이 거절할 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 조금 더 세게 잡는다면, 뿌리칠 자신을 의식한 손힘.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저의 기분을 살피며 붙잡는 강희찬과 몹시도 닮아 있었다.
‘그래서 뿌리칠 수가 없는 건가?’
그건 정말 이상했다. 좀 더 제멋대로 구는 것이 어울릴 사람인데. 그러지 않는 그도,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도 무어라 설명할 수 없었다.
뭐가 되었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의 팔을 잡고 부주의하게 구장 통로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것 같아도, 아까부터 그는 누구 한 사람과도 부딪치지 않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건 아까 관중석에서 나와 이곳으로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배려임이 지나치게 잘 느껴져서 차마 뿌리칠 수 없다.
그러니……. 그러니 괜찮겠지. 도망치듯 이불 안으로 들어가는 건 한두 시간 뒤로 미루어도 충분하겠지.
평소보다 보폭을 좁게 걷는 듯한 그를 따라 주차장으로 나왔다. 강희찬의 차에 오르기 전, 주차장에 있던 팬들과 경호원의 의아한 시선을 받아내야 하는 관문이 남아 있었다. 이선은 이번에도 그의 뒤에 숨는 것으로 위기를 피했다. 너른 등은 그런 점에선 편리했다.
강희찬은 자신이 먼저 조수석에 오르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문을 열어주는 지나친 행동을 하진 않았다. 다만, 빤히 쳐다보는 눈짓이 종용했다. 얼른 타라고.
쭈뼛거리며 먼저 차에 올랐다. 문을 열어주진 않았던 강희찬은 이선이 손을 뻗기도 전에 제 손으로 조수석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깨달았다. 누군가가 자신이 탄 차의 문을 닫아준 것이 처음이었음을.
퍽 생경한 경험을 선사해 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차 앞을 돌며 운전석으로 향했다.
이선은 창 너머로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유니폼을 입고, 선수들에게 사인을 받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아도, 강희찬은 괘념치 않아 보였다.
역시 시선을 받는 데 익숙하다. 이선은 이런 순간마다 그가 유명인임을 느끼곤 했다.
포털에 이름을 검색하면 프로필이 뜨는 사람의 차에 탄 자신이라니. 새삼 떠올리는 지금의 광경은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듯 낯설 때가 있었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거나, 같은 글자를 계속 보다 보면 느끼는 어색한 감각과도 비슷했다.
물론, 그건 강희찬이 문을 열고 차에 오름과 동시에 흩어지는 상념이지만 말이다.
잠시 멀어졌던 그의 체향이 다시 코끝에 감겼다. 좋은 냄새를 맡으면 사람이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지만, 이선은 걱정이 앞섰다.
‘또, 뭘 먹고 싶냐고 묻겠지…….’
자신은 아직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충격적인 헤어스타일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메뉴 선정을 하지도 못했고.
천천히 주차장을 벗어난 차 안에서 이선은 나직이 한숨을 삼켰다. 그렇다고 해서, 없던 메뉴 선정 센스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어색한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혹은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피하고 싶기도 했다. 도피하는 마음으로 코끝에 온 신경을 두었다. 아직까지 잔향으로 남은 브로콜리 남자의 향기와 비슷한 향이 차 안 가득 퍼져 있었다.
“혹시, 샴푸 같은 것도 구단에서 다 나오나요?”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차와는 달리, 그것을 운전하던 강희찬의 고개가 홱 돌았다. 여전히 펴질 생각이 없는 미간이 이선의 눈에 완전히 들어온다.
“…….”
한심하다는 기색까지 보일 건 없지 않은가. 말없이도, 꾹 다물린 입술이나 숨소리 하나까지도 “뭐요?”라고 묻고 있다.
꼬리를 말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사실 정말 궁금했다. 아까부터 자꾸 눈앞으로 내려오는 모자의 주인과 왜 비슷한 향이 나는 건지.
눈빛에서 느껴지는 황당한 기색과는 별개로, 남자는 한 박자 늦게 입술을 떼었다. 마치 무언가를 눌러 참는 듯한 목소리였다.
“…스폰서 회사 물품이 들어오는 것 같은데, 보통 다들 개인 물품 씁니다.”
“근데, 아까 그 후배분이랑…….”
이선은 손가락으로 괜히 뒷좌석을 가리켰다. 진작 빠져나온 야구장이 있을 방향이었다. 이미 지금 거리에서는 손바닥으로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멀어졌지만.
하지만 강희찬의 시선은 끈질기게 이선의 얼굴만을 향했다. 그는 황당함과 기가 막힘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결국, 호기심이 부풀린 용기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대체 왜 아까의 브로콜리와 같은 냄새가 나는지. 그 이유를 물을 원동력도 거기까지였다. 이선은 입을 합 다물며 앞을 보는 것으로 백기를 들었다.
운전하는 중에도, 그의 시선은 자꾸 이선의 얼굴을 향했다. 찌푸려진 미간이 말하고 있었다. 헛소리는 이제 집어치우고 메뉴나 말하라고.
꼬리가 없는 이선은 대신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강희찬과 함께 식사를 해봤던 순간들을 되짚었다.
어떤 날은 신기할 정도로 식사를 하지 않았으며, 또 어떤 날엔 경악할 정도로 많이 먹는다. 정상적인 성미를 가진 사람들과의 식사 조율도 힘들어하는 자신이었다. 이선은 이렇게 까다로운 남자가 만족할 만한 메뉴를 알지 못했다.
결국, 경험에서 얻은 데이터를 기준으로 답을 내놓는 것이 최선이었다.
“설렁탕 먹을까요? 설렁탕 좋아하시잖아요.”
“됐어요.”
한숨 같은 숨과 함께 씹어 뱉는 말이 흘렀다. 영 협조적이지 않은 반응이다.
…아까 무엇이든 해주겠다던 감언이설을 했던 사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로커룸에서 옷을 바꿔입고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뀐 수준이었다. 자상히 말을 걸었던 선수는 유니폼과 함께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괜한 서운함을 삼키었다. 이런 건 부당하다고. 자신의 서운함을 그가 안다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자신은 그에게 서운함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오늘 자신은 강희찬을 대접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 얼굴을 운전석 방향으로 돌렸다.
“아, 운동했으니까 고기 먹어야 되나?”
“시합은 나가지도 않았어요. 그쪽이야 안 봤으니까 모르겠지만.”
말이 묘하게 날카롭게 들렸다. 경기에 집중하지 못했던 불성실한 관람객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래도 스코어는 아는데……. 물론, 소리만 듣다시피 했던 경기에 그가 출전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긴 했다.
“…죄송합니다.”
다음 시합에 출전하는 날에는 구경을 오겠다는 말을 할까 하다 입을 다물었다. 운동선수가 시합에 나가는 건 본인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쉬이 약속할 수도 없었다.
“어디 가지 말고, 잠깐만 있어보세요.”
도로를 잘 내달리던 차가 길가에 멈춰 섰다. 벨트를 푼 강희찬은 얇은 지갑 하나만을 챙기고 차에서 내렸다.
“저도 같이…….”
반사적으로 벨트를 풀려던 손이 뒤늦게 멈추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그의 말을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어디를 가는 거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강희찬은 보폭이 넓었고, 걸음도 빠른 편이었다. 균형이 잘 잡히게 뻗었다 싶은 뒷모습이 편의점을 향했다.
담배라도 사러 갔나. 그러고 보니, 자신은 강희찬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흡연자가 맞긴 했나 보다.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나는 게 신기했지만.
홀로 갸웃대던 이선의 시야에 다시금 그가 들어왔다.
익숙하게 담배 포장을 뜯으며 나올 것을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손에는 우유와 빨대가 들려 있었다. 담배 한 개비를 문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기대가 깨진 것이 다소 아쉬웠다. 물론 건강을 챙겨야 하는 운동선수니, 흡연은 피하는 편이 여러모로 좋다. 그래도 보이는 모습만을 상상한다면, 퍽 설레는 광경일 터였다.
이선의 상상 속 모습과 달리, 현실의 강희찬은 그저 곧은 걸음을 뻗었다. 순식간에 돌아온 그는 차 문을 열고 자연스레 운전석을 채웠다.
“마셔요.”
안전벨트를 매는 것보다 먼저, 그의 손이 이선의 앞으로 뻗어왔다.
“…네?”
“좋아하잖아요, 이거.”
반사적으로 내민 이선의 손 위에 찬 기운이 올랐다. 언젠가 자신이 편의점에서 골랐던, 하지만 그에 의해 강제로 맥주로 바뀐 커피 우유였다.
“…….”
멍하니 우유를 쥐다, 문득 시선 하나가 자신의 손끝에 집요히 머물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선은 앗, 하고 숨을 삼키며 손가락을 움직여 우유의 입구를 열었다.
“잘 먹겠습니다.”
빨대의 포장을 벗기고, 우유에 꽂았다. 우유를 한 모금 쭉 마시고서야, 애처럼 빨대로 마시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평소엔 이렇게 생긴 우유는 빨대로 먹는 사람이 아니다. 강희찬에게 그런 변명을 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렀다. 정말 변명처럼 보일 게 너무도 뻔했다.
“맥주 마실래요? 저번 공원에 가서.”
입 안에는 커피 우유가 과할 정도로 들어차 있었다. 강희찬은 그런 이선의 대답을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정 선생님, 궁상스러운 거 좋아하잖아요.”
기묘한 일이다. 강희찬을 안 것이 얼마나 된다고 사람을 판단할까 싶지만, 이런 건 그냥 악의가 없는 소리임을 이제는 안다.
저녁을 사달라 끈질기게 청하는 것도, 굳이 뜬금없는 타이밍에 사온 우유도. 방금 전의 말까지. 깔끔한 차 안은 언젠가 그의 등을 바라보며 들어갔던 서울의 원더랜드와 비슷했다.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입 안에 들어찼던 우유를 삼키고 겨우 항변했다. 제 목소리가 꽤 불만스레 들려서 이선은 흠칫 놀랐다.
그때 공원에 갔던 건 딱히 내가 궁상스러운 걸 좋아해서 간 게 아니었다고. 멀쩡히 편의점 파라솔에 자리를 잡은 연장자에게 못된 짓을 할까 봐 임시방편으로 데려간 것이지, 자신은 무언가를 먹을 땐 지붕 아래에서 먹는 걸 선호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구구절절한 변명은 속으로 삼켰다. 아무래도, 방금까지 메뉴 하나 정하지 못한 주제에, 그것도 기껏 선수가 표를 줬는데도 경기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주제에. 너무 건방진 태도였다.
커피 우유도, 그땐 고를 때까지 계속 쳐다볼 것 같아서 아무거나 집었던 것뿐이라는 덧붙임도 삼켰다.
이선이 입을 합 다물고 있는 동안에도, 차는 출발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곁눈질을 하다 강희찬과 눈이 마주쳤다. 낮,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그나마 해사한 청년처럼 보이는 선한 눈은, 어두운 곳에서는 위압감이 들 정도로 검고 깊었다.
이선은 음료를 쭈욱 빨던 것을 멈추었다. 혼자 먹는 것이 퍽 눈치가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한 입 먹어볼래요?’라고 제가 쭉쭉 빨던 빨대를 들이밀 용기도 없었다.
“정 선생…….”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듯 내려앉던 침묵을 가르고, 깊은 한숨이 흘렀다.
“정 선생님, 나랑 자볼래요?”
낮은 목소리가 누군가의 체향으로 가득한 공기를 울렸다. 우유를 쥔 채 애매한 높이에 떠 있던 양팔이 그 순간 굳었다.
우유를 마시겠다는 것도, 두겠다는 것도 아닌 이상한 자세를 인식할 여력이 없었다.
‘…잘못 들은 건가?’
이선은 그대로 눈알을 도록 굴렸다. 지나치게 큰 모자챙이 방해되었지만, 강희찬은 여전히 이선을 향해 몸을 틀었다는 건 알 수 있다.
“…….”
차마 되묻기도 겁난 질문이다. 시야를 방해하는 모자를 들어 올리고, 강희찬의 얼굴을 볼 자신은 더더욱 없었고.
쉬이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대신해, 굳어 있는 몸이 강희찬에게 대신 질문을 한 모양이었다. 보이지 않는 시야에서 그가 비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자자고 했어요, 나랑.”
“…왜…….”
목이 멘 것처럼 꺼칠한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평소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였다. 아니,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그가 뱉어내는 모든 말까지.
표정 없이 굳게 다물린 남자의 입매는 그런 비현실감에 박차를 가했다.
“말했었잖아요. 정 선생은 이런 거에 좀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
“손이나 잡고 다니는 중학생 같은 연애를 바라는 것 같은데…….”
이선은 용기를 내어, 얼굴을 조금 더 들어 올렸다.
“좆 달린 새끼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어요. 본인이 더 잘 알 거 아닙니까.”
“…….”
때에 따라서는 곱다고 해도 무방할 얼굴이 완연히 시야에 들어왔다.
내뱉는 노골적인 소리가 주는 이질감이 더욱 증폭되었다. 그의 뒤에서 누군가 대신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 들어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일정한 목소리는 반박할 여지 없이 강희찬의 것이다. 낮고,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조심스러운 듯한. 그러면서도 묘한 확신에 차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게 익숙한 사람의 것이 맞았다.
몹시 추웠던, 그러면서도 눈 하나 내리지 않던 이상한 겨울날. 그날의 정이선을 만나기라도 한 듯, 강희찬은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앞으로… 좀 더 ‘이런’ 연애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깊은숨이 흘렀다. 반사적으로 이선의 양손이 경련하듯 떨렸다. 잠시 그의 눈길이 우유팩에 머물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유를 쥔 양손에 닿았다.
“…….”
“정 선생은 그래야 돼요.”
커다란 온기가 자신의 손을 덮었다. 손을 내리누르는 힘이 다정하다. 우유팩의 차가운 온도가 허벅지에 닿은 순간, 묵직한 배려는 사라졌다.
“정 선생이 꼭 게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냥, 이런 거예요. 남들 다 이런 식으로 연애하고 살아요. 남자든, 여자든.”
“…….”
“그냥 한 번 자보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닐 거예요. 마음 없는 사람이랑 잔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강희찬 씨…….”
“한 번 겪고 나면… 정 선생도…….”
강희찬의 말이 답지 않게 중간에서 흐려졌다. 그 역시 어딘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건, 저의 마음이 투영된 탓인가. 이선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온전한 마음을 받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 주름이 져가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늙어가는. 그런 평범한 연애를 원해왔다. 그게 과한 욕심은 아니라는 변명과 함께.
그러나…….
“…….”
어쩌면 자신이 ‘평범하다’고 여겨야 할 만남이란 오로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 만나는 누군가가 보여주는 미소에 만족하고 그의 뒤를 따라나서야 한다.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 사는지. 하다못해 강아지를 키우는지. 이런 것들보다도 먼저, 담배 향이 풍기는 입맞춤을 느껴야 한다.
그런 공허한 순간이, 그의 입에서 너무도 쉽게 나왔다. 듣는 것만으로도 정이선을 온 우주에 혼자 남겨버리는 말이. 몸 한구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잔인한 소리가 너무도 덤덤했다.
그런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항상 정답만을 밟아온 사람에 의해 자신의 인생에 점수가 매겨진 듯했다.
유일한 위안은, 그저 자신만이 이런 것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는 그의 말이었다. 누구나… 누구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한단다.
이선은 동아줄을 잡은 양 우유팩을 꼭 쥐었다.
“…….”
분명 똑같은 하루였다. 같은 시간을 보내면 지날 오늘일 텐데. 유독 하루가 길었다. 방전 직전의 핸드폰이 된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일까. 이 차에 타지 말았어야 했나. 실례가 되더라도, 다음에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집에 갔어야 했나. 아니면, 차라리 야구장에 오지 말았어야 했을까?
시간을 대체 어디까지 돌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전광판에 비쳤던 남녀의 모습도, 오늘따라 유독 자신을 잡고 있는 강희찬도. 하나같이 벅차고 버거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구태여 다른 이의 입으로 들었다. 정이선의 힘든 하루를 봐주지 않는 결정타였다. 힘든 오늘 하루에 대한 원망은 참으로 부당하게도, 오롯이 강희찬만을 향하게 된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나는 오늘 충분히 힘들었단 말이야. 그런 소리까지 할 건 없잖아. 당신이 뭐라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울고 싶었다. 그러는 동시에 울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문제는 아니었다. 언제나 깨지지 않는 무표정을 한 어린애 앞에서 열을 내고 싶지 않다는 오기도 아니었다.
‘오늘 하루가 지난다면, 또 언젠가처럼 지독히 앓겠지.’
신규진을 알아온 동안, 크고 작게 아팠다. 절기상 가을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밤공기가 더운 오늘도, 유난히 추운 이유를 알고 있다.
“내가 나아요.”
강희찬의 눈이 감기면서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마치 스스로 무엇인가 생각을 정리하기라도 하는 양.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검은 눈동자엔 어떠한 혼란도 없었다. 대체 짧은 순간 어떤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지났는지 정이선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헐렁한 모자가 벗겨졌다. 판결문을 읽어주듯, 검은 눈이 차분히 이선과 눈을 맞추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랑 자는 것보다, 내가 나아요.”
“…….”
“섹스는… 자는 거, 별거 아닐 겁니다. 연습이라고 쳐요.”
너무 쉽다.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어려워서 한 발 한 발 떼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러고도 결국 아버지와 닮은 냄새가 나는 뒷모습을 따라가진 못했다.
그렇게도 어려웠던 것이, 그에게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너무도 쉬워 보였다.
“강희찬 씨는… 왜…….”
“나는…….”
나직하게 흐르던 말이 무엇에 걸린 듯 멈추었다. 거침없이 정답만을 뱉는 사람답지 않게도.
잠시 무엇에게 맞은 것처럼, 멍했던 얼굴에 비릿한 비웃음이 번졌다.
“나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
“이게 도대체 뭔지…….”
먹이 칠해진 것처럼 까만 눈은 오롯이 정이선을 향했다. 눈을 마주한 순간 겁이 더럭 났다.
강희찬은 대체 자신을 통해서 무엇이 알고 싶은 건지. 강희찬의 질문이 끝나는 곳에, 자신과 그 사이에는 대체 어떤 결말이 남겨질지.
“보통…….”
“…….”
“보통, 이런 건지.”
“강희찬 씨…….”
자꾸 끝이 흐려지는 말을 대신해, 얼굴이 가까워진다. 깨달은 순간엔 이미 따뜻한 손이 부드럽게 오른뺨에 감겨 있었다.
“아니면 그쪽이…….”
나긋하면서도 단단한 온기는 뒤로 물러날 수 없도록 퇴로를 막았다. 신기루처럼 흐려지는 뒷말을 추궁할 재간 따윈 없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고작해야 할 수 있는 반항의 전부였다.
아니, 이것이 과연 반항인지 정이선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입 맞출 겁니다, 지금.”
“…….”
“싫으면 피해요. 문 열려 있으니까 뛰쳐나가도 되고. 지금은 안 잡을 테니까.”
“…….”
“안 피하면, 이대로 나랑 자겠다는 소리로 알아들을 거예요.”
비겁하다. 결정을 떠넘기는 건 너무도 비겁한 일이었다. 심지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의사 따위는 묵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입술이 달싹였다. 싫다고, 이러지 말아 달라고.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그의 말대로, 이대로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아니, 않을 것이다.
비겁하게 허락도, 거부도 하지 못하는 이선의 입술 위로 젖은 온기가 닿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타인의 더운 열기였다.
단단하고, 그러면서도 부드럽다. 강압적이진 않지만 쉽게 뿌리칠 수 있을 만큼 유약하지도 못했다. 꼭 강희찬다웠다.
우유를 쥔 손을 떠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견디듯 눈을 꾹 감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입술은 금세 떨어졌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 아직 그곳에 있는 누군가의 열기가 조용히 숨을 뱉었다.
“…내 집으로 가요.”
쿵쿵대는 심장이 점점 위로 올라온다. 이러다 정말 심장을 토할 것 같아서, 이선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은 답을 찾아내는 건 힘들어해도, 휩쓸리는 것에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
얼굴을 받쳐 주는 손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마주한 입술에선 적어도 담배 맛이 아닌, 옅은 치약 향이 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거면… 됐다.
섹스를 하자.
강희찬은 명확한 의사 표현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말까지 노골적으로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남들처럼, 남들이 하는 만큼만.
적당히 돌려서 의사를 전달하고, 적당한 눈치로 알아듣고. 그런 뻔한 그림에 자신을 그려 넣곤 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섹스하자는 말에 핏기가 사라지는 얼굴 따위, 그려본 적도 없었다. 그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제 취향의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온 바가 없었다.
이런 순간, 어떻게 말을 해야 했을까. 어떤 말로 구슬렸어야 핏기가 사라진 얼굴에 그나마 긴장이 덜어졌을까.
고민해도 소용이 없었다. 시간은 이미 흘렀다. 시간을 돌린다고 해서, 없던 말주변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뭐로 보나 의미 없는 고민일 뿐이다.
그렇지만…….
“…….”
아까부터 마시지도 못하고 우유를 꼭 쥐고 있는 손을 흘겨보았다.
유독 희다. 피가 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이 신경 쓰여서, 신호가 걸릴 때마다 자꾸 조수석을 살폈다. 손만큼이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며 절로 나오는 한숨을 꾹 참아야 했다.
‘말을 알아듣고 따라오는 건 맞긴 하나?’
대답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것이 의심스럽긴 했는데. 또 저렇게 질린 걸 보면 아예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닌 듯했다.
한숨을 쉬고 싶었다. 하지만 좁은 차 안이다. 제 숨소리 하나에도 선생이 몸을 굳히며 경계를 할 것이 너무도 뻔했다.
강희찬은 속도를 줄이고 도롯가에 차를 댔다. 방금 저 망할 커피 우유를 샀던 편의점과는 다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말없이 차를 세우고 내렸다. 목적은 하나였다. 편의점을 향하려 몇 걸음을 걷다가 멈추었다.
“…….”
문득, 손바닥에 물이 맺혀도 닦아내지도 못하고 우유를 쥐었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강희찬은 그대로 제 차로 돌아갔다. 톡톡. 손가락이 강하지 않은 힘으로 조수석 창문을 두 번 두드렸다.
선팅이 되어 있어서 어두운 유리 너머로 허둥거리는 모습이 훤히 그려진다. 몇 초 후 창문이 내려가며, 여전히 희게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네?”
“따뜻한 거, 커피, 두유, 탄산.”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편의점에 항상 있을 법한 것들을 나열했다. 불안한 듯 선생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뭐가 좋아요?”
“네? 저, 이거… 마시고 있는데…….”
커피 우유를 꼭 쥔 양손이 뻣뻣하게 올라왔다. 아까도 저랬었지. 멍청해 보이는 자세라는 자각은 없는 게 분명했다.
한 번에 알아들을 거라는 기대는 어차피 하지도 않았다. 강희찬은 앞머리를 흩트렸다.
“콘돔 사러 가는데, 그것만 사고 나오기 그래서요.”
“…….”
“두유 같은 거 못 먹는 건 아니죠? 알레르기 있어요?”
고개가 붕붕 저어졌다. 저기서 얼굴이 더 하얘질 수가 있었나 보군. 핏기가 사라지고 있는 꼴이 이제는 우습기까지 했다.
조용히, 그러나 격하게 가로젓는 고개를 보다 강희찬은 뒤를 돌았다. 편의점 문을 향할 때마다 점점 멀어지고 있을 위태로운 모습이 걸음을 잡아끌었다. 차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 자꾸만 느려지는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얼른 사고 나와야 한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겁을 집어먹은 선생이 호닥 도망가 버릴 게 분명했다.
방금까지야 내려도 잡지 않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수룩하게 도망이라도 친다면 SNS에 영상이 올라오는 것쯤은 각오해서라도, 한밤의 추격전을 벌일 마음 정도는 먹었다.
“어서 오세요.”
강희찬은 무미건조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인사를 무시하고, 바로 구석 선반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이런저런 잡다한 물품들 사이, 딱 두 종류의 콘돔이 있다.
‘대단한 걸 바란 건 아니라도, 그래도 이건 좀 심한데…….’
이런 걸 써도 되는 건가. 강희찬은 오늘따라 유독 희었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냥 척 보기에도 튼튼한 타입은 절대 아니었다. 이딴 곳에서 파는 콘돔을 썼다가 탈이 날 것 같은데. 게다가 더욱 최악인 건, 콘돔만 있을 뿐이지 젤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
아르바이트생이 핸드폰을 열심히 하고 있는 계산대를 흘끔 봤다. 요샌 편의점에서 두통약도 팔면서 대체 왜 젤은 팔지 않지. 튀어나오려는 욕을 삼키는 대신 혀를 찼다.
이 밤에 성인용품점을 찾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호텔을 가는 게 품이 덜 들었다. 일단 컨시어지 서비스가 있는 호텔에 간다면, 그 이후는 강희찬이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절대 고객에게 ‘안 된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능력을 여러모로 호텔 생활이 몸에 익은 강희찬은 퍽 잘 알고 있었다.
뭐, 고민이야 어쨌든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투덜거려봐야 포기할 건 얼른 포기해야 한다.
강희찬은 그나마 나아 보이는 브랜드의 콘돔을 한 상자 집었다. 지금 당장 컨시어지 서비스를 할 만한 서울 시내 호텔 몇 군데가 머리에 떠올랐지만, 일종의 유비무환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발길로 걸음을 돌리고 계산대 옆에 있는 온장고에 섰다. 자그마한 문을 열고, 음료들을 하나하나 만지며 온도를 확인했다.
사람이 들어올 때도 열심히 핸드폰만 하던 아르바이트생은 그 행동에 눈치를 주지 않는다. 애초에 그는 강희찬이 무엇을 하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덕분에 골라낸 가장 따뜻한 음료와 함께 계산을 마쳤다.
조금 더 따뜻한 것을 먹이면, 그 허옇게 질린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오려나.
어쩐지 담배를 사러 왔다가 애인의 간식거리를 챙기는 모양이었다. 낯선 제 행색을 의식하지 않으려, 온기가 감도는 왼손에 부러 집중했다.
가장 따스한 온기를 뿜어내는 음료 한 병과 콘돔 한 상자. 물건을 고른 짧은 시간에 어울릴 간소한 것들이 계산대 위에 올랐다. 아르바이트생은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것들의 바코드를 찍는다.
“봉투 필요하세요?”
“됐어요.”
배려인지 검은 봉투를 꺼내려 했던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아르바이트생은 내밀었던 회색 카드를 다시 강희찬에게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손은 자동으로 다시 제 핸드폰을 향했다.
중학생도 아니고, 핸드폰이 없으면 죽기라도 하나. 오히려 아르바이트생의 본체는 인간 쪽이 아니라, 저 작은 기계인 게 확실했다.
허튼 생각을 하며 안녕히 가시라는 성의 없는 인사를 무시했다. 편의점을 나서기 전, 콘돔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보여서 부끄러울 건 없고, 요즘 세상엔 미성년자도 구입 가능한 물건이다. 구태여 손에 들고 가도 괜찮은 그것을 신경 써서 보이지 않게 한 이유는 자신의 수치심 때문이 아니었다. 이런 물건에 내성이 없을 누군가가 떠올랐다.
누군가 본다면, 평범하게 차 안에 있을 애인이 마실 음료를 산 모양새로 편의점 문을 밀고 나섰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차들이 내달리는 도로 가장자리에 유일하게 멈춰 있는 차. 검게 선팅된 창이 황급히 올라갔다.
무서워서 몰래 도망이라도 갈 줄 알아서 서둘러 나왔는데. 한밤의 추격전은 의외로 괜한 걱정이었다.
까만 창 너머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몸을 움츠리고 있을지 너무도 상상이 잘 갔다.
일단, 지금 뭘 하러 간다는 건지는 알아들었다는 소리다. 기껏 집에 데려다 놨더니, 보드게임이나 하는 줄 알았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또 힘이 빠졌을 터였다.
어쨌든 알아들을 눈치는 있다는 게 신기하다. 엉엉 울며, 이럴 줄 몰랐다는 선생에게 ‘너랑 섹스할 생각으로 데려왔다’는 노골적인 말을 할 일이 없다는 것도 다행이었고.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막힌 공간 안에서 안절부절못할 모습이 선연해졌다. 늘 봐왔던 익숙한 차가 이상하게도 낯설다. 마치 거울로 제 얼굴을 오랫동안 볼 때처럼. 그 안에서 잔뜩 몸을 굳히고 있을 누군가의 존재가 특별함을 더하고 있었다.
차체는 누군가의 긴장을 함께 내뿜고 있다. 강희찬은 운전석 앞에 걸음을 멈추고 잠시 어두운 창 안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 사람만의 긴장은 아닐지도 모른다.
영 익숙지 않은 감정에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만 난다. 숨을 내뱉고, 문을 열었다.
익숙하게 번지는 방향제 냄새 사이로 묘한 향이 섞여 있다. 그것이 지금 차 안에 얌전히 들어 있던 사람의 체향임을 쉬이 알아챌 수 있었다.
우산부터 온갖 잡다한 물건까지. 굿즈를 팔지 못해서 안달인 프런트 직원들은 틈만 나면 구단의 상품을 안겼다. 협찬을 받는 아이돌이 아니라고. 야구선수가 구단 물건을 쓴다고 해서, 따라 사는 멍청이가 세상에 있긴 한지. 그들은 지치지도 않은지 여러 물건을 안기곤 했다. 꼭 쓰고 다니라는 말과 함께.
그중 하나였던 방향제의 향이 오늘만큼 거슬렸던 적이 있던가.
이딴 시트러스 냄새만 아니었어도, 좀 더 명확하게 느껴졌을 옅은 향이 퍽 안타깝다. 운전석에 앉고, 차 문을 닫으며 공기를 차단해도 체향은 주인을 꼭 닮아서 안쓰러울 만치 연약하다.
“마셔요. 그건 나 주고.”
안전벨트를 매는 것보다도 먼저, 어정쩡히 쥐고 있던 우유를 빼앗았다. 대신 그 손에 유리병을 쥐여 주자, 손 모양이 병에 맞게 좀 더 오므라든다.
“아, 그거 제가 먹던 거……!”
유리병을 꼭 쥔 손이 마치 자신의 행동을 막기라도 하듯 가까워졌다.
강희찬은 바보 같은 행동을 무시하고 선생이 먹다 남긴 커피 우유를 빨대로 쭉 마셨다. 입 안이 가득 차도록 두 번 정도. 삼키고 나면, 우유갑이 텅 빈다. 고작 이거를 내일 아침까지 마실 기세로 깨작대고 있던 거다.
우유갑을 대충 두고, 안전벨트를 맸다. 그러는 동안, 뻣뻣하고 추워 보이는 손이 유리병의 마개를 땄다. 뻥. 울리는 소리가 어색했는지 선생은 멈칫하며, 강희찬의 눈치를 봤다.
느릿느릿. 답답하다 싶을 정도로 유연하지 못한 동작 후에야, 선생은 겨우 한 모금을 마셨다.
그래도 좀 따뜻한 게 들어갔는데도, 여전히 얼굴은 질린 채다. 그게 묘하게 거슬리지만, 선생을 탓할 순 없었다. 얼굴색을 본인 마음대로 조절하는 요령이 없는 사람을 볶아대 봐야 소용없을 테니.
차를 출발시키려다, 잠깐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무언가에 겁먹은 것같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의 모습은 사냥에서 크게 다쳐 본 어린 동물이었다.
굳은 모습을 보자, 역시 뒷맛이 쓰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데려다가 못된 짓을 시키는 양. 무언가 찔리기까지 했다.
긴장한 나무줄기 같은 몸에서 도저히 시선이 떼어지지 않는다. 핸들을 쥐려던 강희찬의 손이 다시 멈추었다.
“혹시, 호텔로 가고 싶어요?”
“…네?”
울기라도 한 것처럼 목이 잔뜩 메어 있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냐. 그리 따지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했다. 어찌 되었든 속되게 말해보자면, 잡아먹는 꼴은 맞았으니까.
강희찬은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들리기를 바라며 조금이라도 덜 떨어주기를.
그런 간절한 바람을 담아 입술을 떼었다.
“호텔. 가고 싶냐고요.”
“…….”
일단 자신의 집에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호텔이 더 편하다는 건 당연했다. 적어도 그곳엔 까다롭게 러브젤을 갖다 달라고 부탁해도 될 컨시어지가 있다.
“호텔이 여러모로 편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쪽 집도 상관없어요. 나야 아무 데나 괜찮으니까, 정 선생이 편한 데로 고르세요.”
여자였다면 전혀 상관없었다. 하지만 일단 선생은 남자다. 훨씬 까다로울 게 분명했다. 생긴 것도 어쩐지 잘 다치게 생겼고.
“…….”
‘…호텔이 낫겠군.’
강희찬은 말없이 고개를 슬쩍 내린 옆모습을 보며 결정을 마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얼굴이 사는 집에 젤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있다면 그건 또 나름대로 열 받는 소리고.
점점 더 질려가는 얼굴에서 눈을 뗐다. 머릿속엔 이미 이 주변에 있는, 컨시어지 서비스를 갖추었을 호텔의 위치를 목적지로 삼은 채였다.
그 순간이었다. 기어를 조작하려는 팔 위로 부러질 것 같은 손가락이 머뭇대며 드리웠다.
손은 강희찬의 손을 잡지도, 어딘가에 쉬이 닿지도 못했다. 어딘지 안쓰럽기까지 한 움직임이 겨우 강희찬의 손목께에 닿아온다. 그것도 제대로 쥐지도 못하고 검지 하나가 닿은 정도로.
스치는 체온이 퍽 애가 닳았다. 강희찬은 그대로 눈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만큼이나 툭 부러질 것 같은 얼굴이 그곳에 있다.
“그냥…….”
말이 느린 걸까. 아니면……. 자신의 눈에만 이렇게 보이는 걸까.
눈꺼풀이 마치 효과를 건 듯 느릿하게 올라왔다. 느리지만, 명확히 그것의 목적지는 자신의 얼굴이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어딘가가 뻐근해졌다.
“집이 좋아요.”
“…….”
“강희찬 씨만 괜찮으시면……. 강희찬 씨 집이…….”
…이런 건 취향이 아니다.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한 건.
갓 태어난 병아리도 아니고. 잘못 만지기라도 하면 툭 무너질 듯한 위태로운 분위기는 차라리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었으면 했다.
일부러 자신을 홀리려고 이러는 거라고. 선생에게 그런 주변머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차라리 그랬으면 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도 아쉬운 이유가. 그게 차라리 선생이 영악한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부러 홀리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홀려줘야지.’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하는 눈을, 앞 유리 너머로 흘러들어 오는 빛에 바스러지고 있는 얼굴선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
누구라도 이런 사람을 보면, 안아주고 싶을 거다. 온기를 나누고, 제 손이 닿는 범위에 두고 싶을 거라고.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거라고.
“…가죠.”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몇 번이나 삐끗하려는 손을 멍청이처럼 더듬으며 기어를 찾았다. 여전히 하얀 얼굴이 사라질 것 같아서, 애송이처럼 실수까지 해가며 기어를 바꾸었다. 도저히 눈을 떼기가 힘들어서 차라리 질끈 감아버렸다. 모질게 아이를 버리는 부모가 된 것처럼 겨우 고개를 정면으로 틀었다.
까만 밤보다 더 칠흑 같은 차는, 그제야 서툴게 도시를 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