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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 훈련 후, 로커룸에 들러 핸드폰을 확인했다. 몇 개의 광고문자만이 쌓여 있었다. 순간적으로 혀를 찼지만, 그렇다고 없는 연락이 생기진 않는다.
“오. 안에 있었네?”
다시 로커 한구석에 핸드폰을 처박아두고 나오는데 목소리 하나가 강희찬을 멈춰 세웠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어색하게 웃고 있는 홍보팀장이었다.
“잠깐 나 좀 볼까?”
뒤따라간 끝엔 홍보팀의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요새 기사는 보고 있느냐는 말로 운을 떼었다. 무슨 일인가 싶던 의문이 풀렸다.
그날 강희찬은 이강혁 코치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호텔 로비에서 박신우에게 받은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강희찬입니다. 아깐 죄송했습니다. 간단한 두 문장을 뱉어내자, 전화기에선 그의 스무 배는 족히 될 말들이 쏟아졌다.
이강혁 코치의 예측은 적중했다. 김명진은 아깐 미안했다며, 슬럼프에 대한 푸념까지 늘어놓았다.
‘희찬아. 먼저 전화해 줘서 고맙다.’
영문을 알기 힘든 말에 강희찬은 의미를 두지 않고 대꾸했다. 기나긴 통화는 그제야 끝이 났다. 호텔 로비에서만 20분을 서 있었지만 어쨌든 일은 해결됐다. 대대손손 쪽팔릴 사진을 찍는 꼴은 면했으니.
그렇게, 그날의 해프닝은 당사자들끼리는 넘어간 이야기였지만, 제삼자들에겐 아니었다.
여전히 포털의 스포츠 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가장 많이 본 영상의 순위권 안에 있단다. 첫 이틀만큼은 아니라도, 대구에서의 시리즈가 끝난 지금까지 종종 기사가 났다.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남의 얘기, 특히 분란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도 잊을 만한 타이밍에 장작을 넣듯 기사를 내는 기레기들의 행태까지 이해하고 싶은 건 아니다. 요새 기자들은 월급제가 아니라 조회 수당 인센티브제로 봉급을 받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도 조금 참아야지……. 오늘 아침에도 기사 하나 떴어. 확인했어?”
“아니요.”
홍보팀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던 강희찬의 귀에 노크 소리가 걸렸다. 똑똑. 문이 울리는 소리엔 조심스러움은 있지만, 머뭇대는 기색은 없었다.
문소리를 듣고 바로 뒤를 돈 강희찬의 시야엔 익숙하면서도, 이 장소엔 낯선 얼굴이 들어왔다.
“어, 감독님.”
최 감독은 자신을 향한 홍보팀장의 부름에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그 앞에 서 있는 강희찬을 향한 채였다.
“박 코치가 찾던데. 너, 불펜피칭 해야 한다며.”
“죄송합니다.”
“왜? 강희찬이, 무슨 일 있어, 조 팀장?”
다른 선수의 피칭을 보고 있을 투수코치 대신 일이 없는 감독이 직접 움직인 건가. 괜히 민망해지는 상황이다.
가보라며, 강희찬에게 눈짓하면서도 최 감독의 질문은 팀장을 향했다. 감독님, 기사 좀 보세요, 로 시작하는 투정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정확히 자신이 들었던 말과 한없이 같을 내용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지는 뻔한 소리다. 강희찬이 느릿하게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최 감독이 목덜미를 슬슬 문지르던 손을 뗀 것은.
“겨우 그거 때문에 선수를 여기까지 불러다 세운 거야?”
“네?”
강희찬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그대로 멈춰라’인 팀장과는 달리 최 감독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햇수로 6년을 보면, 똑같은 표정을 짓는 감독의 얼굴에서 나름의 희로애락을 파악할 요령이 생긴다. 특히 화가 나는 기색은 귀신같이 알아챌 수 있다.
그 때문에 강희찬은 깨달았다. 최 감독은 지금, 머리 어딘가의 퓨즈가 나갔다고. 사람이 참 싫게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말투는 더 차분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선수가 시합하다 보면 벤클 좀 날 수도 있지. 고작 그거 기사 떴다고 지금 선수를 불러 세웠어?”
“감독님, 그게…….”
“조 팀장, 젊은 선수들 가끔 불러다 이런 식으로 구는 거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내가 아무 말을 안 해도 듣는 귀는 있으니까.”
“…….”
“기사를 막았어야지 뭐 했어? 그게 홍보팀 하는 일이지. 기자들 밥 먹이고 술 먹여서 입 막으라고 구단에서 돈도 나오잖아.”
최 감독이 들어온 이후로 사무실 내엔 그의 것을 제외한 말소리가 사라진 채였다. 이젠 간간이 들리던 업무용 소음조차도 없었다.
괜한 난감함에 나가지도 못하는 강희찬 역시 말을 잃었다. 말할 틈이 없다고 보는 게 더 정확했다. 옆얼굴만으로도 최 감독의 노기는 충분히 전해졌다.
“강희찬이 예전부터 팬서비스로 뒷말 나는 거, 나야 감독이니 한소리 해도, 조 팀장은 그러면 안 되지. 기사 막아야 할 거 아냐. 팬서비스 안 하는 게 강희찬 하나야? 구단에 속해 있는 동안은 관리해 줘야지. 프런트는 뭐하러 있어?”
“…감독님…….”
“남들은 한국에서 뛸 때 별소리 없다가, 메이저 가고 은퇴해서야 말 나오는데, 5년 동안 구단 홍보팀 일 못하는 것만 동네방네 소문을 냈어.”
높낮이 한 번 바뀌지 않고 일정한 톤이 유지됐다. 그것이 더 소름 끼친다.
저런 투로 얘기하다가 어느 순간 확 소리가 높아진다. 아직 감독에게 직접 맞았다는 선수는 없지만, 손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성질머리였다. 선수에게 손을 대지 않는 것도 최 감독의 성격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당장 매일 훈련을 하는 선수의 몸이 중요해서 꾹 참는 것일 뿐이다.
…말려야 한다.
최 감독이 팀장을 향해 손찌검이라도 하면, 온몸을 던져서라도 말릴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언제라도 돌발 행동에 대처할 수 있도록 몸에 절로 긴장이 들어갔다.
“조 팀장이 기자들이랑 잘 지내는 건 좋지. 근데 월급 신문사에서 받는 거 아니잖아?”
비꼬는 투가 역력했다. 그것도 이내, 다음에 이어지는 싸늘한 목소리에 덮였지만.
“강희찬 인터뷰 싫어하는 거 뻔히 알고 있을 거 아냐. 그럼 알아서 적당히 쳐내. 그러면 돼. 선수한테 징징대지 말고.”
“…….”
“어디 감히 이런 시답잖은 일로 에이스 투수를 오라 가라 해. 이런 구단이 세상에 어딨어?”
서릿발 같은 최선형의 말에 강희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다.
선수 시절엔 웃고 있다가도 기자나 카메라만 보면 인상을 굳히고 자리를 떴다. 투수코치였을 때는 들어오는 인터뷰는 거절하지 않는 수준이었고. ‘감독’이라는 이름을 달자 먼저 웃으며 기자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정도가 되었다.
요샌 선수 시절보다 팬서비스가 좋아졌다는 평을 받을 뿐이지, 사실 그의 본질이란 여전했다. 그 시절에야 돌아오는 뒷말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지만, 감독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로인 건 팬서비스에 대한 본인의 마음가짐뿐만은 아니었다.
“…….”
벤치 클리어링이 터졌을 때, 달려오는 타자를 둘러메고 업어치기를 시전한 사진이 떠올랐다. 최 감독은 야구를 시작하기 전까진 유도를 했던 사람이었다.
강희찬은 잠시 그에게서 눈을 떼고 한동안 말이 없는 홍보팀장을 봤다. 작은 체구에 배만 나온, 전형적인 아저씨 체형을 가졌다. 평범한 40대 중년 남자 따위는 최 감독이 나이를 먹은 지금도 쉬이 들어 올릴 수 있을 거다.
문득 머릿속에선 최 감독이 조 팀장을 들어 올리고 벽으로 던져 버리는 기괴한 광경이 그려졌다. 그 모습이 영 현실성이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슬펐다.
“죄송합니다.”
다행히도 상상은 상상에만 그칠 듯했다. 자존심이 꽤 상할 만한 말을 들었을 텐데도, 조 팀장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조금 묻은, 부하직원들 앞에서 한소리를 듣는다는 분함은 어쩔 수 없을 테지만.
“프런트 일에 참견할 권한 없는 거 아는데, 내가 조 팀장보다 먼저 잘릴 거 아냐. 그동안은 조심 좀 해줘.”
“감독님, 무슨 그런 말씀을…….”
그래도 다혈질인 사람이라 한 번 화를 내고 나면 금방 가라앉기는 한다.
한숨을 뱉던 최 감독이 고개를 돌린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 모습에 강희찬은 몸을 더욱 굳혔다.
피할 새도 없이 고함이 들이쳤다.
“너, 박 코치가 찾는다니까 왜 아직도 뭉그적대고 있어?!”
“아…….”
평소―라고 해봐야 기자들 앞에서만―에는 웃는 상으로 접혀 있는 양쪽 눈이 형형하게 빛난다.
쌍욕 좀 들어먹는 건 등판이나 훈련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 사실은 최 감독 역시 알고 있을 거다. 체면 때문에, 혹은 보는 눈 때문에 조 팀장을 향하지 못한 쌍욕이 자신에겐 비교적 쉽게 향할 수 있다.
“빨리 안 튀어가?”
괜히 있다가 화풀이만 받는다.
생각을 마칠 여유도 없었다. 강희찬은 재빨리 걸음을 옮기고, 사무실의 문을 잡아 비틀었다.
* * *
아이들이 점심 식사를 마칠 때쯤 출근을 한 야구부의 홍 감독과 마주쳤었다.
고개를 까딱 숙이며 인사하는 이선을 보며, 평소라면 손을 흔들어주거나 눈인사를 했을 그는 이선이 서 있던 수돗가 근처로 다가왔다. 그리고 꺼낸 말은 정이선 선생이 개학 후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고민을 꿰뚫는 것이었다.
‘혹시 말이야, 산이… 집에서 야구 하는 거 싫어해?’
질문 자체는 어불성설이었다. 산이는 2학년 때부터 야구부에 들어가고 싶어서 떼를 쓰다가, 겨우 나이가 되자마자 입단했다. 보통의 부모라면 운동 때문에 학업 시간이 부족하다 느끼면 관두는 것도 생각할 텐데, 아직까진 그런 기색은 없었다.
고개를 젓는 이선을 보고, 홍 감독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는 전혀 의외의 말을 꺼냈었다.
‘아직 집에는 전화 안 해봤는데……. 며칠 전에 축구부 감독이 얘기하더라고. 걔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지금 축구부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대.’
‘…네?’
‘몰랐지? 나도 황당해요. 야구부 유니폼 입은 애가 갑자기 찾아와서 저러니까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대. 그래서 엄마 허락받고 오면 들어올 수 있다고 했더니, 갑자기 엉엉 울어서 거기 감독도 진땀 좀 뺐다더라. 나한테 엄청나게 혼나서 야구부 관두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잖아.’
‘아…….’
‘근데 내가 방학 때 혼낼 틈이 없었거든. 걔 부모님하고 놀러 다니고 그래서 훈련 자체를 몇 번 못 왔어. 정 선생은 뭐 아는 거 있어?’
‘아니요. 요새 좀 기분이 안 좋은 것밖에는…….’
속으로 아차 했다. 기분이 좋지 못한지 몇 번 신경이 쓰였지만, 그래도 점심시간이나 놀이 시간엔 여전히 사내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랬기에 며칠 후면 괜찮아지겠지 싶어서 두었던 것도 있다.
‘제가 한번 어머니한테 전화드려 볼게요.’
무슨 정신인지도 모를 상태로 교무실로 돌아와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눌렀다. 몇 번 울리지 않아 전화를 받은 상대는 평일 오후임에도 흔쾌히 통화가 가능하다며 반색했다.
‘그러게요. 요새 기분이 안 좋은 건 저희도 좀 느끼고는 있었거든요.’
전화기로 건너오는 목소리는 처음의 반가운 기색과 달리 한 꺼풀 처지기 시작했다.
‘방학 때, 애 아빠랑 휴가 맞춰서 여기저기 다녔는데, 그쯤 해서 애가 좀 이상하긴 했어요. 근데 물어봐도 딱히 얘기를 안 해주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죄송한데, 선생님도 한번 물어봐 주시면 안 될까요?’
결국, 통화는 퀘스트를 부여받으며 종료됐다.
어떤 해결책도 얻지 못한 정이선 선생은 결국 어영부영 하루를 보내고야 말았다. 하기 싫은 일은 뒤로 미루는 편이지만, 남의 돈 받으며―그것도 자신의 경우는 나랏돈이다― 사는 사회인으로서 그럴 수는 없었다.
“…….”
이선은 홀로 남아 여전히 익힘책을 풀고 있는 작은 정수리를 물끄러미 봤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아이는 더욱 연필을 그러쥐고 몸을 웅크린다. 책에 고개를 박다 못해, 빨려갈 것만 같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선은 아이의 앞자리 의자를 빼고, 비스듬히 몸을 틀어 앉았다.
“이거 두 개 먼저 해볼까?”
이선은 빨간 볼펜으로 숫자 두 개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어차피 저학년의 계산 문제다. 이제 다음 문제를 풀려는 아이를 보며 이선은 운을 떼었다.
“산이, 요새 무슨 일 있어?”
…자신은 아무리 포장을 하려고 해도 절대 좋은 상담가는 아니다. 이렇게 물으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심한 질문에 이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순간마다 느끼곤 했다. 자신은 역시 이 직업과 그다지 맞는 편은 아니라고.
“아니요.”
아이는 처음엔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작은 몸을 더욱 웅크려 책 앞으로 가져간다. 아니라고 중얼거리던 말소리도 이내 잦아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눈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니, 익힘책 한 페이지가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이미 울고 있었다.
“아……! 잠깐만.”
이선은 재빨리 교탁에 있던 각 티슈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손으로 벅벅 문지르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에 티슈 몇 장을 갖다 댔다. 이내 물기로 젖어 들어간 티슈는 제 역할을 다한 채 책상 한구석에 버려졌다.
“산이가 요새 힘이 없어서 부모님이 걱정하시더라. 선생님도 그렇고, 친구들도 산이 아프냐고 많이 물어봤어.”
말없이 들썩이기만 하는 등을 살살 두드렸다. 끅끅거리며, 그나마 참아보려던 울음은 이러다 숨이라도 잘못 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감독님도 선생님한테 물어보셨어.”
그 말을 뱉었을 때, 와앙 하고 울음은 완전히 터졌다.
‘감독님’이란 말이 자극제였다. 아이의 입에선 울음과 섞인 몇 마디가 겨우 나오기 시작했다. 그 말들이, 정이선에게는 꽤 낯설었다.
“야구, …으윽……. 야구 하지 말고, 흑, 축구부… 끄윽, 들어가라고…….”
“…감독님이?”
“강… 강희찬, 코치님이…….”
낯선 이름과 호칭이 결합된 조합에 이선은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멈추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몇 초가 지난 후에야 그 이름을 가진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
…그렇다고 해서 의문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이 상황에 그 이름이 왜?’라는 질문은 여전히 입 안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와앙!’ 하고 한 번 더 터지는 울음소리에 고민은 이어지지 못했다. 연신 ‘강희찬 코치님’만 찾는 입에선 다른 실마리를 얻을 수 없었다. 눅눅해지는 티슈를 재차 바꿔주며, 울지 말라고 등을 두드려주는 게 담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다가도 거세지곤 하는 여름철 빗줄기처럼, 높낮이를 반복하는 울음소리. 그 속에서 이선은 잠시 숨을 돌렸다. 지쳐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복도 창밖에서 눈을 크게 뜬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에요?’
그렇게 묻는 김경원의 얼굴을 보며, 이선은 어색한 미소로 결백을 주장했다.
‘내가 울린 거 아냐!’
고함이라도 치며 변명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어른이란 이렇게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미심쩍음과 걱정이 반씩 섞인 김경원의 얼굴이 사라지고도, 이선은 한참을 우는 마른 등을 쓸기만 했다.
…제발 교장 선생님이나 교감 선생님이 지나가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며.
* * *
하늘에서 내려온 게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알면서도 잡는 심정이 이럴까?
동화 속 호랑이야 썩은 줄인 걸 몰랐다지만, 지금의 자신은 아니었다.
“…….”
이선은 숨을 내쉬며 주차장, 정확히 말하면 잠실 구장의 주차장의 모습을 훑었다.
이 짓도 몇 번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자신은 이제 혼자 인터넷 검색으로 강희찬의 팀이 오늘 어디에서 시합하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차장에서 선수들의 퇴근을 돕는 경호원들도 이쯤 되면,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시겠냐는 권유의 말을 건넨다. 물론, 송재혁을 찾아온 건 아니었기에 제안은 거절했지만.
무료함을 달래려, 혹은 꽤 오래 서 있느라 조금 아픈 다리를 달래려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툭툭 찧었다.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마치 남이 하는 발장난을 보고 있는 착각이 든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내 금세 질렸다.
이미 대부분의 선수가 다 퇴근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경호원들보다도 덩치가 좋은 남자들, 그리고 중간중간 외국인들이 차에 타고 야구장을 떠날 때마다 주차장의 인파도 점점 줄어든다.
문득 불길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저번처럼 이른 퇴근을 했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진작 생각하지 못한 멍청함을 깨닫는 순간,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선뜩함이 몸을 스쳤다. 몇 시간을 허공에 날렸을지도 모른다는 허탈감도 함께였다.
지금이라도 송재혁에게 전화해서 물어볼까……?
이선은 뒷주머니에 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채 연락처까지 보지도 못하고, 시간만 확인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얼마 전의 일로 인해 아직은 좀 껄끄러웠다.
방학 중의 교사는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마냥 한가롭진 않다. 하지만 역시 3년째쯤 하다 보면 요령껏 평일에 쉬기도 할 수 있는 시기였다.
여름이라 이젠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밤에 퇴근하게 된 송재혁을 만나러 갔다. 이선은 그에게 저녁―이라기 보다는 사실 야식― 메뉴 선택을 일임했다. 여전히 부담스러움을 모르는 위장은 저번처럼 중식을 골랐다.
저녁때를 건너뛰고 일하는 직장인답게 허겁지겁 먹는 그를 물끄러미 봤다. 앞에 둔 볶음밥에 숟가락을 몇 번 찌르던 이선은 그대로 입을 열었다.
‘너, 얘기했어?’
‘…무어?’
‘나 남자 좋아한다고. 강희찬한테.’
쨍그랑!
쇠젓가락 한 세트가 바닥과 만나는 소리는 얼핏 들으면 유리의 파열음과 비슷했다.
요란스러운 소리가 울리고도 수저통에서 새것을 꺼내지 않는 걸 보았는지, 여주인은 새 젓가락을 직접 가져다주었다. 그동안 송재혁은 볼 한쪽에 들어찬 음식을 삼키지도 못하고 눈만 덩그러니 뜨고 있었다.
…너무 알아채기 쉬운 반응이라 오히려 물은 쪽이 미안해진다.
‘미안…….’
더 물을 것도 없이 명백한 자백이나 마찬가지인 답이었다.
그래도 열 살짜리 애들도 거짓말을 하면서라도 변명이란 걸 한다. 바로 수긍한다는 태도를 보며 이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착하다는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이선의 상념은 금세 쓸모없어졌다.
‘그, 근데… 나도 억울해!’
‘네가 뭐가 억울해.’
‘내가 얘기를 한 게 아니라, 강희찬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난 네가 걔한테 먼저 말한 줄 알아서…….’
거짓말을 하지 않다니, 정직하구나. 너에게 금도끼와 은도끼를 모두 주마.
전래동화 속 산신령 흉내를 낼 필요도 없었다. 이선은 밀려드는 한심함을 굳이 얼굴에서 거둬내려고 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나 지껄인다. 송재혁이 줍지 못한 젓가락을 허리를 굽혀서 주웠다.
‘네가 내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다 했으니까 알겠지.’
테이블 위로 고개를 들었을 때, 여전히 송재혁은 음식엔 손도 대지 않은 채 억울한 얼굴이나 했다.
‘아니라니까?’
이미 다 들킨 마당에 별 핑계를 대고 있다.
자신의 변명은 귓등으로도 듣는 체도 하지 않는 이선을 향해 송재혁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정이선은 눈으로 끌끌거렸다. 그 얼굴에 기가 죽으면서도 송재혁은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억울한 건 있었다.
‘하여간에 그 새끼가 눈치만 귀신같이 빨라가지고…….’
본인이 들어도 구질구질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나 보다.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지만. 종국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답지 않게 귀여운 행세라도 하려는 모양인가. 송재혁의 머릿속에선 자신이 옛 애니메이션에 나오던 고양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정말 끔찍하다.
‘정 선생, 화 많이 났어?’
당연한 소리를 묻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선은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렸다. 오히려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일었던 짜증이나 불만 역시 흩어졌다.
그래도 이렇게 쉽게 화가 풀린 걸 티 낼 순 없었다. 이선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송재혁은 잠깐이나마 풀어지려는 얼굴이 애매하게 굳었다. 아직 혼자 살아 있는 입이 열리는 걸 막진 못했다.
‘너 그렇게 표정 막 바꾸지 마. 진짜 선생 같잖아. 나 중학교 때 학주도 멀쩡히 웃으면서 수업하다가 갑자기 돌아서는 ‘연필 내려놔’ 하면, 존나 무서웠다고. 너 그거 같았어, 지금.’
‘…젓가락 내려놔.’
투덜거리면서 조심스레 젓가락을 집던 움직임이 멈칫했다. 이제 괜찮아진 건가 싶어서 음식을 탐하려던 사람은 다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뻥이야.’
콧방귀 같은 숨을 내쉬며 정이선은 중얼거렸다. 그제야 송재혁은 그것이 친구의 단순한 심술임을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해도 따질 입장은 아니었다.
‘잘못했어, 정 선생…….’
눈치가 가득한 젓가락이 새우를 이선의 앞접시로 옮겨왔다.
사고를 쳐놓고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는 어린애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화가 풀리기를 바라는 그 몸짓이 우스웠다.
앞으로 옮겨진 새우를 집었다. 이쯤 해둬야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정이선은 송재혁을 봤다.
‘동파육도 시켜.’
물론, 아주 약간의 뒤끝이 붙었지만.
오늘은 송재혁이 오랜만에 말도 없이 야구장까지 찾아온 이선을 위해 밥을 사겠다는 말을 했다. 지금도 둘이 먹기엔 과한 조합들이 올라와 있는데, 여기에 요리를 하나 더 시키겠단다. 심지어 정이선은 밤에는 부담스럽다고 식사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송재혁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아까부터 잘 먹지도 않으면서…….’ 따위의 말을 중얼댔다. 마지막 반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이선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깜빡이는 커다란 눈을 앞에 두자, 나오려던 말은 어물어물 입 안으로 사라졌다.
‘그치……. 먹다 남으면 싸 가면 되지. 시키자.’
송재혁은 벨을 누르지 않고 직접 손을 들어 여주인을 불렀다. 아까부터 기색이 이상했는지 자꾸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던 여자가 주문을 받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동파육 하나. 야심한 시각에 비하면 기름진 주문을 받고 그녀는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송재혁은 잠깐 그곳을 보다, 다시 화가 풀렸는지 모호한 친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서 그런 말이나 하고 다닐 성격은 아닐 거야, 걔가. 남한테 관심이 영 없거든.’
‘어.’
‘정 선생……. 화, 더 안 내?’
꼬리를 그냥 먹어버릴까. 젓가락으로 어떻게든 새우 꼬리를 잘라보려 사투를 벌였다. 메뉴 선택을 일임해도 역시 먹기 귀찮은 건 싫다. 그래도 많이, 혹은 맛있게 먹는 쪽이 송재혁이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지만.
‘별로.’
겨우 꼬리를 잘라내며 이선은 중얼거렸다.
‘어차피 그 사람은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뭐.’
어딘가에 묻히기 싫어서 새우 몸통을 한입에 넣었다. 잠시 가득 찬 입을 비우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송재혁과 눈이 마주쳤다.
방금 전, 젓가락을 떨어트릴 때와 비슷한 얼굴이다.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자신을 보는 그를 향해 이선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무엇에 그리 놀랐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
혹시… 송재혁은 이렇게 될 상황을 미리 알기라도 했던 걸까?
‘어차피 그 사람은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뭐.’
이선이 중얼댔던 그 말은 한 계절이 지나기도 전에 틀렸음이 증명됐다.
역시 사람 일이란 건 아무도 모른다.
야밤에 길바닥에 사람을 두고……. 아니, 버리고 올 때만 하더라도 자신이 다시 이곳에 서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그것도 송재혁을 찾아온 것도 아니고, 다신 보지 않을 각오로 심한 소리나 하고 떨어내려던 사람을 제 발로.
이래서 사람이란 건 착하게 살아야 한다.
이선은 ‘멍청이’라고 소리치며 제 뺨이라도 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혼자 있는 집이었다면 한두 대 정도는 때렸을지도 모르겠으나, 여긴 그래도 밖이었다. 수상한 남자로 보이는 건 사양이다.
개미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는 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무료했다. 이제 정말 모든 선수가 다 퇴근을 한 게 아닐까 싶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누군가 남아 있긴 했는지, 이선은 ‘사인해 주세요’라는 높은 톤의 목소리에 반응했다가 실망했다.
강희찬은 아니었다. 신장이야 그 정도로 큰 편이긴 했지만, 검정 일색인 옷을 입고 모자까지 뒤집어쓴 사람은 강희찬이 아니었다.
“윤태성 선수.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주변에 서 있는 팬들보다 훌쩍 큰 뒷모습과 어울리는 이름이네.
한 귀로 남의 이름을 흘려들으며 정이선은 벽에 뒤통수를 기댔다. 조금 올라간 시선을 정처 없이 두고 입술 사이로 바람을 뺐다. 푸우우. 입술이 떨리며 나는 우스운 소리가 공기를 울린다.
같은 행동을 몇 번 반복하는 사이 밝은 빛이 어스름히 시야로 다가왔다. 찬 벽에서 머리를 뗐다.
그 순간 자신의 앞으로, 라이트를 켠 검은 자동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다. SUV인 덕에 운전석과 바로 높이가 맞았다. 올라가는 운전석 창 너머로 하얀 얼굴이 보였다.
얼굴 주인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큰 손 하나가 붙어 있었다. 손이 큰 건지 얼굴이 작은 건지. 아마 둘 다에 해당할 수도 있다.
차와 똑같은 검은색으로 몸을 두른 운전자는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뒤통수만 보였다. 알 수 있는 건 운전자가 남자라는 사실뿐이다. 커다란 손은 아마도 그의 것이리라.
“…….”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손에 감싸인 얼굴이 왜 그렇게 잘 보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다만…….
입술을 꾹 물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명백하게 처음 보는 사람이다. 길거리에서라도 지나쳤다면 깔끔하게 배치된 이목구비에 한 번 정도는 돌아볼 법도 했을 거다. 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양팔 가득 끌어안아도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랐고, 여전히 받는 티가 나는 인상이다.
학교에서 어린아이들을 보다 보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깨닫게 되는 사실들이 있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어떻게든 티가 난다.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 머뭇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줄도 알고, 항상 환히 웃고 있다. 설령 거절을 당한다 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고 자신을 찾는 다른 곳으로 뛰어간다.
혹시 아직도 어딘가에 불행한 티가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억지로라도 웃지 않으면 자연스레 약간 아래로 처진 입꼬리가 신경 쓰였다. 멍하니 거울을 보며 억지로 양 뺨을 들어 올렸지만, 손을 떼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적당한 호감을 불러일으킬 웃음기가 걸릴 눈.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미소를 참기 위해 꾹 물고 있는 아랫입술. 억지로 기쁜 기색을 참고 있어도, 잠깐 봤던 자신의 눈으로도 명백했다. 남자는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
체하기라도 한 듯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올랐다. 정이선은 다시 고개를 뒤로 기대고 눈을 감았다.
순간적으로 지나간 검정 SUV의 잔상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야구장 곳곳에 켜진 조명만이 감은 눈 틈으로 비집고 들어올 뿐이다. 애매한 어둠 속에 있자 올라오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억울함. 질투. 시기. 열등감.
그런 단어들의 교집합이면서도 전체.
우스운 일이다. 생전 처음 보는, 시간으로 따지면 5초 남짓 본 남자에게 느끼기에는 너무 황당한 감정이었다. 뒤통수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다. 무엇을 향한 질투인지는 너무도 명백하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건 자신이 사는 세상에선 있어선 안 될 것이었다. 넘치는 사랑이 버거워서, 행복한 미소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 모습은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적어도, 자신과 같은 처지라면 절대 손으로 잡아보지도 못할 것이라고.
앞서 걷는 뒷모습을 조용히 따라가거나, 누군가와 헤어지고 힘들어하는 순간에 거짓된 위로를 해주거나. 그러면서 곁에 있는 게 지금의 자신에게는 최선이었다.
아주 먼 훗날. 볕이 좋은 주말 오후에 느지막이 같이 산책을 나가, 책에서 본 좋은 글귀를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런 바람을 가져보지만, 말 그대로 ‘바람’일 뿐이다.
어두운 지하 계단 아래의 바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대답을 하고. 나가자는 말에 뒤따르고. 20대의 자신이 혼자 겪어본 ‘연애’에 가장 가까운 모습은 고작해야 그딴 것들이었다.
…저런 모습은 상상 속에서도 없었다.
섣불리 만지면 다치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붙어오는 커다란 손의 배려도, 눈가에는 웃음을 잔뜩 묻히고 있으면서도 억지로 참아보려고 볼을 부풀리는 얼굴도. 모두 자신의 인생에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들이다.
문득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던 순간이 겹쳤다. 예쁜 식물을 찍으려는 어머니와 그녀를 찍는 남자. 땀과 미풍에 헝클어진 머리를 조심스레 빗겨주던, 서툴고 투박한 손.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야구장으로 떠났던 이유가 명백해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빵!
도로가 아닌 곳에선 꽤 낯선 클랙슨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눈을 번쩍 뜨자, 순간적으로 빛이 확 들어온다. 그 탓에 잠깐 어질했지만, 이선은 고개를 흔들며 초점을 맞췄다.
SUV가 지나갔던 그 지점. 자신과는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정면에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누가 나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모양이었다. 출구로 향하는 진입로로 고개가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거기서 뭐 해요?”
운전석의 창이 단조롭게 내려가며, 안에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방금 스쳐 지나갔던, 기쁨을 눌러보려고 웃음을 꾹 참는 얼굴이 아니다. 항상 표정이 없어도 깔려 있는 짜증 어린 기색. 이젠 익숙하고 반가울 지경이었다. …물론, 진짜 반갑기도 했고.
“아…….”
이선은 저도 모르게 멍한 소리를 냈다.
차 자체로만 본다면, 연배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이 선호할 스타일인데, 운전석에서 드러난 얼굴이 앳되다. 하지만 그 조화로운 부조화에 멈칫한 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어떻게 말을 걸까 고민하게 했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게다가 며칠 전엔 명백히 자신의 실수로 인해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도 했고.
주인공이 예고도 없이 나타나자, 머릿속에서 조금이나마 연습했던 말들도 금세 휘발되었다.
이선이 말을 꺼내지 못하는 동안, 강희찬은 사이드미러로 뒤에서 차가 오나 확인했다.
“송 PD 기다려요? 요새 눈치 보느라 퇴근 늦게 할 텐데요.”
최 감독의 한바탕 이후로 프런트, 특히 홍보팀은 눈으로만 봐도 바짝 얼어 있었다. 강희찬은 늘 있는 오후 훈련을 찍으면서도 슬슬 감독의 눈치를 보던 송재혁의 모습을 떠올렸다.
“…네?”
“전화라도 해보세요. 무턱대고 여기에 서 있지 말고.”
“아니요, 저…….”
이제 점점 사라지고 있어도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저편을 곁눈질하던 강희찬은 고개를 조금 더 왼편으로 틀고 이선을 보는 것으로 재촉을 대신했다.
“그쪽……. 강희찬 씨 만나러 왔습니다.”
전자의 호칭도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후자는 낯선 거부감이 일었다.
‘선자리도 아니고…….’
강희찬이 눈썹을 찌푸리자, 말을 하던 이선의 입은 다시 꾹 물렸다. 저렇게 입을 조개처럼 다물면 볼이 통통해지고 입이 튀어나오는 게 꼭 애새끼들 같다.
허튼 생각을 멈췄다. 안 그래도 이제 뒤에서 박신우가 차에 오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기만 한 사람을 아래위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차 가져왔습니까?”
“아, 아니요. 지하철 타고 와서…….”
“그럼 일단 타세요.”
탑승을 허락하는 말이 떨어지자, 이선은 재빨리 걸음을 떼었다.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검은 차의 조수석을 향해 부지런히 보폭을 넓혔다.
“정 선생님.”
물론, 비아냥처럼 붙어오는 호칭에 잠깐 걸음을 삐끗할 뻔도 했지만.
생전 처음 타본 외제 차에 대한 감상을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해줄 말은 없었다. 원래 승차감이 어떻고, 이런 말들을 하는 듯했지만 사실 정이선은 꽤 둔한 축에 속했다. 차라는 건 앉아서 어딘가로 굴러가고 안전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 가지 느낀 건, 역시 대형 세단이라 그런지 자신의 차보다 조수석 공간이 넓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넓은 만큼 벌거벗고 허허벌판에 서 있는 듯한 어색함 역시 최대치였다.
이선은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안전벨트를 꾹 말아 쥐었다.
“저기…….”
주차장을 미끄러져 나가고, 익숙하게 큰길에 진입하는 남자를 볼 자신까지는 없었다. 이선은 어색하게 정면, 그것도 자신의 무릎을 보며 말을 꺼냈다. 강희찬은 그 모습을 곁눈으로 흘긋 보다가 다시 앞을 향했다.
“일전엔 제가 경솔한 말을 해서…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정 선생이……. 정 선생님이 나를 길바닥에 버리고 애인한테 간 날요?”
이선은 이미 쥐고 있던 안전벨트를 더욱 꽈악 잡았다. 그러다, 주름이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핫 하며 주먹에 힘을 풀었다. 이걸 물어내라고 하면 과연 자신의 월급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본능적인 두려움이 함께였다.
‘…두 번째다.’
일부러 틀리고 고치는 건지 모를, 괜히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호칭을 듣자 깨달았다.
이선은 낮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역시 성격이 좋은 사람은 절대 되지 못한다.
“…죄송합니다.”
앉아 있느라 정면을 향했던 몸은 틀려고 해봐도 거기서 거기였다. 애매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자신의 모습이 꽤 우스울 것 같았다. 간간이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는 걸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저녁 먹었어요?”
뜬금없이 묻는 말이 건너왔다. 이선은 잠깐 대답을 잃었다. 신호에 걸려 정차한 사이, 강희찬은 완전히 고개를 조수석으로 돌렸다.
나이대와 전혀 어울리진 않지만, 거짓말을 하면 ‘이놈’ 소리칠 것만 같았다. 멈칫한 이선이 “빵…….”이라는 단어를 중얼대자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그거 먹고 돼요?”
“두 조각 먹었어요. 교무실에 롤케이크 선물로 들어와서요.”
신호가 바뀌자 차는 바로 출발했다. 눈가가 가늘게 찌푸려진 건 옆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냥 같이 먹어요. 가는 김에.”
가끔 이선은 자신이 사회적 신호에 둔감한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곤 했다. 멀쩡한 어른인 체하고 있지만, 역시 이런 면에서 티가 나는 건 숨길 수 없었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에도 차는 어딘지를 모를 곳을 향했다.
“강북으로 넘어갈 거예요. 괜찮아요?”
“아, 네. 괜찮습니다.”
“밥 먹으러 가겠다고 했다가 취소하면 뭐라고 할 것 같아서요.”
예약이라도 했었구나. 이선은 구태여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진 않았다. 대신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제가 저녁 살게요. 저번 일도 있으니까.”
“…그러세요.”
항상 직선처럼 뻗는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잠깐의 공백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금세 잊혔다.
고작 저녁 한 끼로 죄책감을 어느 정도 덜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얹힌 듯 마음을 누르던 무언가가 반쯤 덜어진 기분이었다.
삶이란 건, 의외의 순간엔 예상보다 너무도 간단했다.
* * *
세 마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지 못하는 산발적인 문답이 오고 갔다. 어색한 시간을 이겨낸 이선이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잠시 멍해졌다.
한눈에 봐도 한정식당이다.
한옥을 모티프로 한 식당들의 인테리어야 흔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면 보이는 건물의 크기부터 ‘식당’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너무 컸다. 딱 봐도 내부에 단순히 좌식 테이블 몇 개와 창호지 문으로 꾸며내는 곳과는 달라 보였다.
당장이라도 한복을 입은 노비가 나올 것 같은 한옥 대문 너머에는 3층짜리 현대식 건물이 있다. 그 뒤로는 기와지붕이 빠끔 보인다.
기묘한 광경에 이선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조화가 맞는 게 신기하다.
외부 주차장에서―아마― 식당 본채로 들어가는 길은 자갈이 깔려 있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떼는 강희찬의 뒤를 따랐다. 단화의 밑창으로 우둘투둘한 감각을 느끼며 이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경에 대단한 신경을 썼다. 거기에 밤이라 켜진 조명이 더해지자, 정말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의 한 장면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두리번대는 동안 이선은 걸음이 한 번 삐끗했다. 다행히도 남자는 뒤에 있던 이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자갈길을 걷고 나면, 한옥보다는 조금 더 앞에 있는 3층짜리 현대식 건물이었다. 이미 현판이 걸린 대문을 지날 때부터 벌어졌던 입은 건물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입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카운터가 있었고, 그 안으로는 홀이 이어진다. 늦은 시간이라 정리를 마친 테이블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있었다. 밀대로 청소를 하던 종업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영업이 끝난 가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아, 안쪽 구관에 준비하신 것 같더라고.”
영업을 마쳤다는 소리를 들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개량 한복을 입고 있는 중년의 종업원은 손끝으로 다른 통로를 가리켰다. 강희찬은 대꾸도 없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다시 뻗었다.
‘흰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가 이랬을까?’
이선 역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신기하게도 어느새 밖에서는 지붕만 보이던 한옥 건물 안이었다. 아마 두 건물이 통로로 연결된 듯싶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개량 한복을 입은 종업원이 있었다.
안내를 받아 어느 구석의 방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선은 괜히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메뉴판을 집었다.
모자 장수의 티 파티에 비하면, 여긴 직접 메뉴를 골라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곳이었다. 펼쳐 본 메뉴판에는 항목 자체가 많지 않았다. 이것저것 참 많기도 한 어머니 가게의 메뉴판과는 대비되었다. 송, 죽, 매라는 이름이 붙은 코스요리와 점심, 저녁 시간대의 특선메뉴가 전부였다.
심플한 메뉴판 디자인만큼이나 코스요리의 가격대 역시 심플하다. 심플하게 ‘비싸다’는 감상 외엔 할 말도 없었다.
일단 건물을 본 순간부터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높은 가격에 이선은 속으로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적당히 주세요.”
손에 있던 메뉴판이 확 빠져나갔다. 깜짝 놀라서 앞을 보자, 강희찬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본인의 메뉴판과 함께 종업원에게 넘기고 있었다.
종업원은 ‘적당히’라는 말의 정확한 해석을 요구하진 않았다. 그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그대로 방을 나섰다.
이게 소위 말하는 그거였다. ‘늘 먹던 거로.’ 강희찬은 이 식당의 단골인 듯했다.
얼마나 단골이었으면 누가 봐도 영업이 끝났을 시간에 코스요리를 ‘적당히’ 주문할 수 있을까. 먹는 게 중요한 직업은 전부 이러고 사나.
둘만 남겨진 공간에서 이선은 흘긋 앞자리에 앉은 사람을 곁눈질했다.
도자기로 된 물잔을 쥔 손이며 옷깃이 있는 흰색 피케티셔츠를 입은 모습. 시큰둥해 보이지만 깔끔히 배치된 이목구비는 조명 아래에서도 여전했다. 좌식 테이블에 앉은 그 모습을 보며 정이선은 새삼 깨달았다.
20대 남자 중에 한옥 배경에 이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 거다.
전통적인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은 일상적인 차림임에도 조금의 어색함 없이 배경에, 그리고 창문 너머의 풍경과 어울렸다. 남자는 뚱한 얼굴로 창밖을 보다 이선을 향해 눈을 돌렸다.
“왜 왔어요?”
지나치게 중후한 배경이 이질적이지 않은 남자가 갑작스레 물었다. 훔쳐보는 걸 들키기라도 한 듯 이선은 놀랐다. 뭐, 사실 좀 빤히 보고 있던 것도 사실이긴 했다.
“나한테 사과나 하자고 야구장까지 왔을 것 같진 않은데요.”
강희찬은 턱을 괴는 와중에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표정이 항상 거기서 거기인 얼굴은 이제 그리 차갑게 느껴지진 않는다.
사람에게 무신경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겪어보니 아니었다. 남자는 생각보다 남의 반응에 예민했고 예리한 축이었다.
“그…….”
갑작스레 찔러 들어온 공격에 이선은 숨 대신 들고 있던 물잔의 따뜻한 물을 마셨다. 으음. 어떻게 운을 떼야 하는 걸까. 잠깐의 고민은 그다지 효율은 없었다.
“혹시… 방학 때 산이 만나셨어요?”
“…그거였어요?”
남자의 입에선 픽, 하고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이 터졌다.
괜히 말했다. 이선은 바로 후회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올라간 한쪽 입꼬리가 그리 말하고 있다.
…그래도 몇 번 아니라고 발뺌이나 해봤다면 좀 덜 민망했을까? 민망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잔을 다시 입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이미 반도 남지 않았던 물은 금세 동이 났다. 친절하게도 강희찬은 직접 찻잎이 우러난 물병을 집어 들고 물을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선이 그런 말을 중얼거릴 무렵, 이선의 잔을 채운 물병은 그대로 그의 잔을 향했다.
“실례합니다.”
애매한 순간에 노크 소리와 함께 똑같은 옷을 입은 종업원 둘이 들어왔다. 그들은 빠르면서도 절대 급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금세 테이블을 음식으로 가득 채웠다. 이선은 그 모습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차림에 방해가 될까 봐 테이블 위에 두었던 핸드폰을 무릎 위로 옮겼지만, 그리 쓸모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코스메뉴라더니 음식 자체는 한꺼번에 차려져서 나오는 건가. 그도 아니라면 단골인 남자의 취향에 맞춰져 내온 걸 수도 있다. 뭐가 됐든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가짓수였다.
음식에서 잠깐 눈을 떼고 남자를 보자, 그 역시 인상을 슬쩍 구기고 있었다.
“밥 이거밖에 없어요?”
물론, 그가 인상을 찌푸린 것은 다른 이유였다.
제 앞에 나온 대나무 통밥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종업원은 당황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숯불 위로 신선로를 올렸다.
“일부러 그걸로 준비하신 것 같은데.”
“…그쪽은 죽순 알레르기 같은 거 없어요?”
갑작스레 표적이 바뀌었다.
대나무 위를 감싸고 있던, 거즈쯤 되는 천이라고 생각했던 흰 물체는 만져보니 종이였다. 신기한 사실에 홀로 감탄하던 이선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다.
“아, 아니요. 저 알레르기는 따로 없습니다.”
쯧. 대답하기가 무섭게 혀 차는 소리가 떨어졌다.
그제야 이선은 깨달았다. 본인이 대통밥을 먹기 싫으면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지, 남 핑계를 대려고 했던 거다. 어쩐지 급식지도를 하는 점심시간의 풍경과 겹쳐졌다. 하지만 남자는 열 살짜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안 먹겠다고 떼를 쓰거나 몰래 잔반을 비우는 철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남자의 앞에 있는 두 개의 밥에서 하나의 한지를 벗겨낼 뿐이다.
“맛있게 드세요.”
두 명의 종업원 중 좀 더 나이가 있는 쪽이 이선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선이 얼결에 고개를 얕게 끄덕여 보이는 동안, 강희찬은 “밥에서 냄새나”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알레르기 여부는 본인의 편식을 위해 물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애매한 부분에서 대화가 끊겼다.
온전히 일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온 게 아니었음을 들킨 셈이었다. 더 말을 이어봐야 자신에게 유리할 건 없었다.
정이선은 밥 위에 있던 은행을 집어먹은 후에도 젓가락을 어디로 둘지 고민했다. 이렇게까지 가짓수가 많은 밥상은 처음이었다. 자취를 시작하기 전엔 당연히 집밥을 먹었지만, 그때도 이렇게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차림을 보긴 힘들었다.
반찬이 많은 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도저히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왼쪽부터 오른쪽. 열 명도 앉을 수 있을 테이블을 훑었다. 몇 가지 눈에 띄는 메뉴를 보니, 이건 코스메뉴 중에서도 ‘매’였다. 계절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작은 설명 위로 적혀 있던, 코스의 주요 메뉴 몇 가지를 기억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있던, 살벌한 메뉴판 속에서도 가장 살벌했던 가격도 함께 떠오른다.
…어차피 음식은 나온 거다. 두 명의 한 끼 밥값이 사는 집의 월세보다 많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도 이상한 나라를 단골집으로 둔 남자 덕에 자신도 색다른 경험을 한다. 나중에 어머니의 생신엔 무리해서라도 와볼 만한 곳이었다. 누군가를 대접하기 좋은 장소를 안다는 건 사회인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단순한 무늬가 새겨졌지만, 딱 봐도 비싼 게 느껴지는 유기그릇들을 보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두 개의 전복이 올라간 그릇이었다.
“이 코스에 전복이 있었던가…….”
정처 없는 젓가락을 쥐고 이선이 중얼거렸다.
“팔다 남았겠죠.”
강희찬은 그 모습을 흘끔 보고는 다시 시선을 내리며 툭 뱉었다. 밥에서 냄새가 나서 싫다더니 벌써 반을 비워냈다.
황당한 대꾸에 이선은 잠시 그를 봤다. …단골 서비스인 건가. 그도 아니면 유명인 서비스일지도 모른다.
“네에.”
이도 저도 아닌 대꾸를 한 이선을 보지도 않고 그는 턱짓했다.
“그거 그쪽이 다 드세요. 안 먹으니까.”
“전복 안 좋아하세요?”
“아니요. 좋아해요.”
‘…대체 뭘까?’
여긴 원더랜드인 게 분명하다. 갈피를 잡기 힘들기로는 루이스 캐럴이 만들어낸 세계에 버금간다. 좋아하면서 왜 먹지 않는 거냐고 물어야 할까. 아주 조금 궁금했지만 물었다간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이나 할 것 같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다. 이선은 질문을 밥알과 함께 삼키며, 소금구이처럼 보이는 전복 하나를 앞접시로 가져왔다.
그사이 강희찬은 새로운 밥을 제 앞에 두었다.
“애새끼가 왜요?”
애새끼라니……. 툭 뱉은 말에서 호칭을 정정해 줘야 할까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이름을 몰라서 저러는 건 아닌 듯했다. 이선은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혹시 산이한테 야구부 관두라는 말 하셨어요?”
“네.”
동치미 무 조각을 와작 씹으며 간단히 대답한다. 마치 ‘그게 뭐?’라고 묻는 얼굴이었다.
지나치게 태연하다. 그래서 정이선은 따질 말을 잃었다. 잠깐 사이 부당하게 누군가를 책망하는 것인지 생각해 봤다. 뭐, 담임 교사로서 물어보지 못할 말은 아니었다.
이선은 야구장 밖에서 내내 생각했던 가설 하나를 확인하기 위해 용기를 내야 했다.
“…저한테 화나서 그러셨어요?”
애꿎은 전복만을 쿡쿡 찔렀다. 눈을 들고 남자를 볼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요?”
“제가 저번에…….”
“정 선생님이 애인 만난다고 선약 팽개치고 간 거랑 애새끼랑 무슨 상관이라서요. 애새끼 잘못도 아닌데.”
지당하신 말씀이다. 기저에 깔린, 그날의 자신을 향한 비아냥은 차치하더라도.
책망의 말을 듣고서야 이선은 전복에서 눈을 떼고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 탓하는 말이었는데도 어쩐지 그 말 덕에 남자를 대하기가 더 편해진다니.
“그럼 대체 왜 그런 말을 하셨어요.”
“애새끼 아직도 공부 안 해요?”
이선은 잠시 대화의 흐름을 놓쳤다. 자신의 질문에 대해 질문으로 대답이 돌아와서는 아니었다. 질문이 너무 뜬금이 없었다.
강희찬은 멍한 이선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잘게 흔들며 젓가락으로 밥을 떴다.
“솔직히, 그렇게 말해도 공부 안 하는 건 답이 없어요. 그쪽이 선생이니까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공부 대가… 머리는 타고나야 하는 거.”
찌푸린 미간이 진실을 말했다. 운동은 재능과 피지컬이 전부라던 그의 옛말이 떠올랐다.
…혹시 그때 자신의 고민을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인가.
가능성이 낮은 가설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대놓고 물을 수는 없었다. 어쩐지 지난번의 행동을 사과하는 것보다 훨씬 부끄럽고 간지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애가 많이 우울했어요. 방학 중간부터 계속 그런 상태라서 부모님도 많이 걱정하셨고……. 반 애들도 프리미엄 카드 팩을 줘도 잠깐 웃고 만다고 걱정했거든요.”
“…신용카드요?”
찌푸려진 미간 아래로 있는 두 눈이 둥그레졌다. 이선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만화영화에 나오는 캐릭터 카드 있어요. 남자애들이 모으는 거.”
잠깐 커졌던 눈에서 힘이 빠졌다. 아, 그거냐. 흘러나오는 한숨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요새 애들도 그딴 거 가지고 놉니까? 핸드폰 하는 거 아니었어요?”
“뭐, 애들은 애들이니까요.”
카드 팩을 사는 아이들의 씀씀이를 본다면 ‘그딴 거’라는 말을 하기도 힘들 텐데. 아침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몇만 원어치씩 사 오는 녀석도 있었다. 그 탓에 이선의 반에는 카드 금지령이 내려졌다.
좋지 못한 추억을 떠올리는 동안 강희찬은 이미 식사를 마쳤다. 저번에 설렁탕을 먹을 때처럼 밥을 더 시켜서 먹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얌전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마 밥을 시킨다면 또 대통밥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주문을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이선은 숟가락에 먹던 양보다 좀 더 밥을 봉긋하게 떴다.
“사람이 살면서 좀 우울할 수도 있지,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직접 찾아옵니까?”
좌식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가 말했다. 건네는 ‘말’이라고 하기엔 ‘중얼거림’이나 ‘탄식’에 가깝기도 했다. 이선은 입에 담았던 밥을 꿀꺽 삼켰다.
“…방학 중간부터 몇 주째 기분이 좋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 정도는 기분 안 좋을 때 있어요. 애새끼라고 항상 조증처럼 즐거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치만.”
강희찬은 이선의 앞에 놓여 있는 밥을 보고 있었다. 저거 하나를 내일 아침까지 먹을 생각인 걸까.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듯한 그릇을 보면 속으로 탄식밖에 나오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밥그릇에서 눈을 떼고 이선을 바라봤다. 그 순간 선생은 기세가 눌린 듯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린애들한테 몇 주는 길잖아요. 제 나이 정도야 몇 주 우울한 게 별일 아니라도, 애들 시간은 느리게 가니까요.”
“경험담입니까?”
“네? 아……. 뭐, 초등학교 다닐 때가 가장 시간이 늦게 가잖아요, 보통.”
6년을 한곳에 다녀서 그런지도 모른다. 흐릿한 인상이나 냄새. 그 시절은 흔적만 있는 아버지의 기억과도 닮았다. 남아 있는 기억은 몇 없지만, 유달리 시간이 길었던 감각만이 선명했다.
잠깐 상념에 빠지려던 정신이 돌아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희찬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얼굴에 닿아 있었다. 얼굴에 머무는 눈길을 피할 곳이 없다. 이선은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런다고 빤히 바라보는 눈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속으로 고민할 무렵, 타이밍 좋게도 익숙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까 이선을 향해 미소를 지었던 종업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후식으로 나올 차를 미리 묻기 위함이었다. 매실차와 수정과. 선택지가 참으로 한정식당다웠다. 이상한 나라라도 이런 건 이선의 예상 범주 내였다.
이선이 혼자 빙긋이 웃는 동안, 강희찬은 등받이에서 몸을 떼지도 않고 종업원을 봤다.
“식혜는 없어요?”
“식혜는 요새 안 만든 지 꽤 됐어. 손님들 매실차 많이 찾으시는데, 그걸로 해. 밤이니까 따뜻하게 타줄게.”
‘주는 대로 먹지.’
예전엔 생긴 것에 비하면 꽤 가리는 게 없구나 싶었는데. 오늘따라 남자는 주문이 많았다. 여전히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종류였다. 이런 원더랜드에 걸맞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자신을 앨리스에 나오는 하얀 토끼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걸 강희찬이 알 리가 없었다. 그는 그저 종업원의 추천을 따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 역시 메뉴 통일에 익숙한 직장인답게 같은 것으로 주문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에어컨이 있는 실내에 몇 시간을 있다 보니 따뜻한 음료가 그리운 것도 있었다.
종업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남자는 그곳에서 눈을 떼고 이선을 바라봤다.
“천천히 먹어요. 후식 그렇게 금방 안 나오니까.”
밥만 급하게 먹어 치우려는 이선의 행동을 만류하는 말과 함께.
부모님들이나 할 것 같은 소리다. 어린데 가끔 하는 말들이 앳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이선은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누르고 대화를 이었다.
“저, 혹시…….”
강희찬이 말없이 눈을 치떴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느린 건지 자리가 가까운 건지, 눈동자 위로 속눈썹이 내려왔다 올라가는 모습이 지나치게 선명하다.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간단한 물음은 목에 턱 걸려서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당연히 물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쩐지 손바닥 아랫부분부터 간지러움이 올라오는 것 같아 손톱으로 꾹 눌렀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나치게 경직된 말이 나왔다. 잘 쓰지 않아서 입에 익지 않은 종결어미가 우습다. 하지만 강희찬은 딱히 그것을 지적하진 않았다. 대신, 삐걱삐걱 관절에서 소리가 날 것 같은 어색한 수저질을 이었다.
확실히, 혼자 집에서 먹을 때와는 달랐다. 찬이 많은 밥상은 보기엔 좋고 신기했지만 역시 뭘 먹어야 할지 젓가락을 들 때마다 고민이 일었다. 여기 나온 찬들을 한 번씩은 먹어보는 소박한 목표를 가졌지만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벌써부터 명치께는 체할 것처럼 묵직했다.
“내일 1시 전까지 전화해서 애새끼 바꾸세요.”
이선은 지금까지도 불성실했던 젓가락질을 멈췄다.
강희찬의 화법은 항상 특이했다. 먼저 본론부터 툭 하고 꺼내두고, 그 이후에 필요하다면 설명을 붙이는 방식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네?” 하며 되묻는 이선을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 짧은 사이, 옅은 한숨도 함께 새어 나왔지만.
“공부 그만하고 야구부 열심히 하라고 하면 되는 일 아니에요?”
“…그건 안 되는데요!”
물잔으로 향하던, 하얗고 긴 손이 멈칫했다. 이제껏 내내 시큰둥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어렸다.
단정한 얼굴 위에 올라온 둥그런 눈과 마주하고서야 이선은 아차 했다. 약간 커진 목소리가 당황스러워, 혹시라도 누가 봤을까 봐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편의 장지문은 닫힌 상태였고, 오른편에는 유리 너머로 보이는 정원뿐이다.
이선이 혹시나 누군가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을 하는 사이, 강희찬 역시 잠깐의 당황을 추슬렀다.
공중에서 하염없이 멈춰 있던 손이 유기잔을 집고 입가로 가졌다. 선생은 민망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은 눈가의 뺨을 제 손가락으로 슬슬 쓸었다.
“요, 요새 숙제도 잘 해오고, 공부도 좀 하려고는 하고 있어서……. 굳이 공부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하셔도 괜찮을 텐데요.”
“보통과 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운동부들은 빡대가리라서 한 번에 두 개 못 해요. 그리고 뭐든 정확히 얘기해 줘야 돼요.”
“…그래도, 나중에 운동 관두면 공부라도 해야 할 텐데……. 벌써부터 손 놓으면 나중에 더 고생할 것 같아서요. 힘들잖아요.”
하아. 흘러나오는 한숨이 백 마디를 대신한다.
“그럼 수학 하나만이라도……!”
집게손가락 하나가 어정쩡히 펴져 있다. 그 옆으로는 본인이 생각해도 민망한지 어색한 표정을 짓는 얼굴이 함께였다. 강희찬은 잠시 그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앳되다고만 생각했다. 직업이 주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었다. 피아노를 치며 동요를 부르는 모습. 그게 강희찬이 초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에 가지고 있던 한 모습이었다.
선생은 그런 직업적 이미지와는 한 발 정도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애들 한 번 제대로 혼내지도 못할 것 같은 앳된 얼굴이었다. 10년 정도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학교 선생보다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인상이니까. 아마 학부모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
그 얼굴이, 놀랍도록 지금은 선생 같았다. 어느새 민망함에도 면역이 생겼는지, 하나를 펼쳤던 손가락을 접고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산이 알파벳도 잘 모를 텐데.”
“…….”
“국어랑 사회랑 과학도…….”
“정 선생님.”
탄식처럼 터지는 비웃음과 함께 나오는 말에 이선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적당히 좀 해라. 남자의 얼굴과 기색이 말하고 있었다. 비언어적 표현은 생각보다 많은 의사를 전달한다. 이선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아까 내 말은 안 들었어요? 운동부는 멍청해서 한 번에 여러 개 못 한다고 했잖아요.”
“…….”
“중요한 것만 말해봐요. 얘기는 해볼 테니까.”
물잔에 잠시 가려졌던 입가가 드러났다. 물이 들어가서 그런 걸까. 말투는 평소와 똑같았지만 뱉는 말은 퍽 상냥한 축에 들었다.
이선은 잠깐 그를 바라보느라 멍해졌다. 밥을 사주면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는구나. 인풋과 아웃풋이 대단히 확실한 사람이었다.
이선은 잠깐의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왼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렸다가는 변덕스러운 남자가 ‘싫으면 말고’ 따위의 말을 하며 친절을 접을 것만 같았다.
“국영수사과요.”
“…….”
물론, 친절하다는 것도 강희찬의 기준에 빗대었을 때의 얘기였다. 서늘한 눈이 자신의 왼손을 죽일 것처럼 바라봤다. 초봄의 날씨도 이렇게 널을 뛰진 않을 텐데…….
이선은 기가 반쯤 죽었다. 그리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접었다.
“그럼 국영수요. 정말 이 이하로는 안 돼요. 국영수는 진짜 기초가 중요한 거라서, 고학년만 돼도 아마 바로 티 날 거예요.”
‘…학교 공부가 국영수 아니었나?’
강희찬은 한참 전에 식사를 마친 덕에 놀고 있는 왼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선은 ‘정말’이나 ‘진짜’를 말할 때 말이 조금 늘어진다. 눈도 함께 꾹 감았다가 떴다. 선생 딴에는 ‘정말’, ‘진짜’ 중요한 문제인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강희찬은 빠져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부러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까 내일 전화하세요.”
“저희 1교시 끝나고 10시 정도에 아이들 놀이 시간이 있거든요. 그 시간에 걸어도 괜찮을까요?”
“그러세요.”
10시 정도면 어쨌든 깨어 있을 때가 많은 시간이긴 했다. 강희찬은 대충 대답하며 맞은편에 있는 밥그릇을 봤다. 은행이나 밤은 바로 건져 먹더니 대추는 남아 있다. 먹는 둥 마는 둥 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부지런히 먹고는 있었다.
자신의 그릇을 보는 깐깐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이선은 어느새 표정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기뻐하는 걸 알아챌 만한 웃음이 입매에 걸려 있었다. 개새끼였다면 꼬리라도 붕붕 흔들었을 기세다.
…제 새끼도 아닐 텐데, 저렇게 좋아할 것까지야 있나.
끈질기게 얼굴에 붙어오는 반짝이는 눈빛이 슬슬 간지러워진다. 괜한 민망함에 ‘얼른 먹으라’며 주의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대충 식사를 마칠 것 같아서 그것도 여의치 않다.
여름이라 풀이 자란 별채의 정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아줌마가 어느새 바깥 조명까지 다 껐다. 전기세를 아끼려는 모친의 노력 덕에 밖은 시커먼 어둠뿐이다.
“저… 영상통화로 걸어도 될까요?”
“…….”
억지로라도 바깥에 고정해 두던 고개가 다시 한번 홱, 하고 정면을 향했다.
사람이란 게 원래 하나를 들어주면 끝을 모른다. 지금껏 방송국 인터뷰에 시달려온 패턴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5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 따위로 시작해, 결국 마지막엔 사인볼이며 이상한 메시지까지 요구했다.
“…….”
순간적으로 울컥 올랐던 짜증이,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 빛이 반사되는 눈과 마주하자 멈칫했다. 그리고 꽤 맥없이 풀렸다.
강희찬은 잠깐 눈을 들고 천장을 봤다. 아무리 개량을 했다지만 좌식으로 꾸며진 한옥 실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샹들리에 조명이 거기에 있었다.
낮에는 태양빛에 밤에는 조명. 전반적으로 옅은 인상은 빛 주위에 있으면 흐드러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다는 언젠가의 말을 다시 한번 이해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대로 하세요.”
눈을 깜빡이면 사라질 것 같은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원래도 선한 인상이지만 저렇게까지 환하게 웃는 건 처음이었다.
강희찬은 그 이후에야 깨달았다. 사고를 거치지 않은 말이 나갔다는 사실을.
* * *
15세기 조선 시대의 어느 양반가에 온 것 같은 곳에서도 식사가 끝나면 나와야 한다. 이선은 또다시 하얀 토끼를 추격하는 앨리스가 되어 이리저리 통로를 거닐었다.
들어올 때는 정신없이 넓은 등에만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통로의 창을 통해 본 식당 터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이선이 식사를 한 구관 건물에는 몇 개의 별채가 있었다. 날씨가 적당한 날에는 야외의 공기와 정원의 풍경을 함께 감상하기 좋을 것 같았다.
‘땅값만 해도 엄청나겠다.’
잘 꾸며진 조경을 보며 한다기엔 너무 세속적인 생각이었다.
이선은 흰 토끼를 놓칠세라 보폭을 넓혔다. 지금이야 불빛 하나 없지만, 낮에 온다면 한참 넋을 빼고 볼 것 같은 정원을 지나면 조금 더 큰 한옥 건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서부터 이어지는 복도를 거닐면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신식 건물에 도착한다.
‘…어쩌다가 이런 구조가 되었을까?’
처음엔 한옥으로만 출발했던 가게가 커지자 새 건물을 올린 걸까. 테이블보가 깔린 홀의 자리들을 지나며 이선은 서울의 원더랜드가 된 이유를 추리했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홀에는 노래가 울리고 있었다. 외국 노래였지만 이선 역시 제목은 알고 있는 곡이었다. 월량대표아적심. 장국영이 부른 버전이다.
한옥이 기본인 한정식집의 전형적인 현대식 건물. 그 안에서 울리는 홍콩 영화배우가 부른 노래. 원더랜드는 한층 더 기묘함을 더해간다.
혼란스러움과는 별개로 노래 자체는 좋았다. 중국어는 한 글자도 모르지만,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선은 여전히 곧은 걸음을 뻗는 뒷모습을 따랐다.
카운터로 향하는 길목 어귀에 작은 탁자 하나가 있다. 탁자 위, 돌아가고 있는 턴테이블이 소리의 진원지였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소리가 좀 고풍스럽더라니.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아무래도 요즘 세상엔 취미를 둔 마니아들만 가지고 있을 물건이었다. 턴테이블을, 그것도 엘피판이 직접 돌아가고 있는 걸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선은 뱅글뱅글 돌아가는 검은 판을 향해 저도 모르게 발길을 돌렸다.
무엇에 홀린 듯 얼마간 바라보다, 턴테이블 뒤에 있던 특이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LP 버전의 앨범 재킷에 있는 여자의 사진이었다.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특이한 스타일의 단발과 큰 눈이 인상적이다. 앨범 재킷만 봐도 알 수 있다. 요새 노래는 당연히 아니겠지. 애초에 LP판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예전 노래란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우리 아저씨가 좋아해요.”
목소리가 이선의 뒤편에서 넘어왔다. 해독할 수 없는 글자와 대치하던 이선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익숙한 디자인의 한복이 거기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입은 중년 여자였다. 이제 눈에 익은 디자인의 생활한복이었지만, 종업원들이 입고 있던 것과는 저고리 색이 달랐다.
아마 여자는 상급 종업원이거나…….
“매일 노래 들으면서, 하여간 솔직하지를 못해가지고……. 젊을 때부터 내가 계속 좋아하냐고 물어봐도, 무조건 아니래.”
“아, 네.”
알기 힘든 소리다. 이선은 그저 어색한 대꾸와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사이, 앞서 걷던 강희찬 역시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이쪽으로 향했다.
‘뭐 하는 거야.’
돌아본 얼굴이 그렇게 말했다.
이선은 재빨리 그의 등에 달라붙다시피 다가가고 싶었다. 둘 다 내키진 않지만, 사실 생전 처음 보는 중년의 여자보다는 강희찬 쪽이 친근감이 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친절히 말을 걸어준 종업원에게서 매정하게 발을 돌리기도 어려웠다. 아니, 아마 상급 종업원보다는 여주인일 가능성이 컸다. 식당에 개인 물품을 마치 인테리 소품처럼 비치해 뒀으니 말이다.
머뭇거리는 이선의 발걸음을 본 강희찬은 짧게 입을 열었다.
“잘 먹었어요.”
툭 말을 내뱉고는 먼저 입구의 자동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같이 나가주지.’
괜한 서운함이 차올랐다. 닫힌 문을 조금 더 바라보다, 이선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LP판에선 여전히 장국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자신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선은 재빨리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카운터 앞에 섰다. 한 끼 밥값을 일시불로 계산할까 할부로 계산할까. 그런 고민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 혹은 장국영 목소리에 홀려서.
이상한 나라 같은 식당이라도 계산은 포스기로 하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카드를 꺼내고 서 있어도 사장으로 추정되는 여자는 카운터로 오지 않는다. 이선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가 있는 곳을 봤다. 뒷정리를 하고 있던 여자는 그 자리에 선 채, 이선을 향해 눈을 둥그렇게 떠 보였다. 그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
“저, 계산할게요.”
“어?”
“계산…….”
“희찬이가… 장난치는 것 같은데?”
“네?”
“혹시 희찬이 동창이에요? 나 걔 친구는 운동하는 애들 말고는 본 적이 없어서. 직접 누구 데려온 것도 처음이고. …운동선수는 아니지?”
이선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여자의 눈에 호기심이 번져간다. 그 눈이 위아래로 이선을 한 번 훑었다.
누군가와 참 닮은 행동이었다. 사람과의 접촉이 잦은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해사한 미소가 올라온 얼굴 역시 어딘가 낯이 익었다. 물론, 겹쳐지는 얼굴의 주인은 절대 저런 식으로 웃지 않는다.
“아니, 저는……. 어쩌다가 그냥…….”
뜻밖의 혈연관계를 깨달았다. 이선이 당황한 사이에도 여주인은 그저 웃기만 했다. 어쩌면 당황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선한 인상에 올라온 미소를 너무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걸까.
“가봐요. 늦게 나가면 쟤 성격에 또 뭐라고 할 것 같은데.”
“아, 네.”
“다음에 또 와요.”
“자, 잘 먹었습니다.”
행주를 쥐지 않은 손을 흔드는 여주인을 향해 이선은 과하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도망을 치듯 자동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별채와는 달리 아직 정문께의 조명은 꺼지진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자갈길을 걷고, 한옥 대문을 넘자 익숙한 검은 차가 있었다. 보기 좋게 긴 신장이 차체에 기대선 채였다.
핸드폰을 만지는 대신 하고 있던 발장난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치뜬 눈과 딱 마주쳤다.
“뭐 하느라 이렇게 늦게 나와요?”
이선의 얼굴에서 출발한 눈길이 위아래로 훑었다. 같은 행동이고 비슷한 느낌을 주는 얼굴인데, 이렇게도 다르다니……. 슬쩍 벌어진 잇새로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남자가 서 있는 차를 향해 한 걸음을 떼었다.
“계산, 안 해도 괜찮아요? 그쪽이야 모르겠지만 저는…….”
“팔다 남은 거 먹는데 계산은 무슨. 얼른 타요. 넘어가는 데 또 한참 걸리겠는데.”
팔다 남은 거, 라고 아들이 툭 뱉는 말을 듣는다면 여주인이 기함하겠지.
그대로 메뉴판에 코스메뉴로 올려서 팔아도 무색할 정도로 정성껏 유기그릇에 올라온 차림을 떠올렸다. 아니, 어쩌면 메뉴에서 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만 내놓았을 확률이 더 높았다.
차에 먼저 오르는 그를 따라 이선 역시 문을 열고 몸을 실었다. 꽤 더울 줄 알았는데 아직 내부엔 냉기가 어렴풋이 남아 있다.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작동시키는 유려한 손에 눈이 갔다. 어둠을 가르고 들어오는 도심의 야경 덕인지 평소보다 푸르스름하게 희었다.
“배 안 고파요?”
“네?”
목소리가 뒤집혔다. 뒤늦게 알아채고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을 동안에도 당황스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선은 곧은 손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황당한 물음이나 한 주제에, 강희찬의 얼굴은 지나치게 일상적이었다.
이건 혹시 그런 건가. 점심을 다 먹고 난 후, 교무실에 오자마자 남은 롤케이크가 있는지 묻던 그거.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간식 배는 따로 있다’라는 농이 섞인 진담을 한다기엔, 남자의 얼굴은 진지했다.
이선이 그를 바라보는 동안, 차는 부드럽게 밤거리를 향해 출발했다.
“아까, 밥 그거 하나 먹은 게 전부잖아요.”
“뭐, 그냥…….”
밥이야 한 공기를 먹었어도―게다가 양은 보통 식당에서 나오는 공깃밥보다 많았다― 워낙 찬이 많았다. 젓가락을 한 번씩만 갖다 대도 꽤 배가 부를 지경이었으니까.
“으음…….”
대답을 고르고 있는 이선을 향해 잠깐 눈길이 붙었다 떨어졌다.
“정 선생이, …정 선생님이 산다고 했잖아요.”
“…….”
일단 자신은 계산하려고 했다. 여의치가 않았던 것뿐이지.
이선은 해봐야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말은 삼켰다. 그 대신―
“저기, 제가 찾아봤는데……. ‘선생’이라는 게 그 자체로 존칭이 담긴 호칭이더라고요. 말 자체가 옛날엔 관직에 있던 사람을 높여 부를 때 썼대요.”
“…….”
큰길에 들어선 차는 금방 신호에 걸렸다. 정차한 동안, 강희찬은 조수석에 앉은 사람을 슬쩍 봤다.
어느 순간부터 말을 하는 내내 이선의 고개는 고집스레 정면을 향한 채였다. 어색함마저 느껴지는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뗐다.
“혹시, 저번 일 미안했다는 얘깁니까?”
이선의 어깨가 움칫 떨렸다. 쯧. 혀를 찼다. 못마땅하면서도, 어쩐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어느새 신호는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강희찬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미안하다는 소릴 되게 힘들게 하네요.”
“…생각해 보니까, 송재혁은 졸업 전부터 그렇게 부르고 있더라고요.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사는 게 참 피곤할 성격이다. 그거 좀 모진 소리를 했다고 마음에 걸려서 굳이 단어까지 인터넷에 검색했다니.
홱 돌아섰던 주제에 며칠을 전전긍긍하며 지냈던 거다. 안절부절못하며 지냈을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한쪽으로 올라간 입꼬리에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물론, 민망함 탓인지 뭔지 고개를 꼿꼿이 앞으로 향한 이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선이…….”
“…네?”
“누가 그렇게 불러요?”
하얗게 질린 듯한 얼굴에서 제일 튀는 건 둥그렇게 뜬 눈이다. 잘하다간 눈알이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강희찬은 곁눈으로 훔쳐본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 배가 고프냐고 물었을 때보다 더 놀란 얼굴이다. 소름 끼쳐. 얼굴 뒤로 만화책처럼 말풍선이 있다면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들어갔을 거다.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굳이 표정을 지적하지 않았다.
“예전에 물어봤잖아요. 집에서 ‘찬이’라고 불리냐고. 바로 아는 거 보면, 누가 그렇게 부르고 있는 거 아닌가 해서요.”
설명이 덧붙자 굳었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눈으로도 보인다. 이선은 유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뭔가 좋은 냄새가 번져 오는 것도 같았다. 그럴 리가 없었지만.
“네. 어릴 적에는요. 요새도 가끔 어머니가 그렇게 부르세요.”
잔뜩 어색하게 굳어 있던 얼굴도 그제야 풀어졌다. 그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었지만, 운전 중이다. 아쉽게도 눈을 정면으로 두며 강희찬은 꽤 귀여운 호칭을 속으로 되새겼다.
‘선이.’
퍽 어울린다.
원체 울림이 부드러운 이름이기도 했다. 부모는 아들이 이렇게 순한 생김새로 클 것을 미리 알고 이름을 지었으려나? 이런 멀쩡한 이름을 두고, 선생의 친구는 꼬박꼬박 ‘정 선생’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꼬박꼬박 ‘이선이’라는 호칭이 송재혁의 입에서 나왔어도, 그건 그거 나름대로 기분이 나빴을 거다.
낯간지러운 호칭의 출처가 부모님이라면 그럭저럭 용납할 수는 있다. 적어도, 화날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의 입에서 나온 게 아니면 됐다.
차는 조금 더 한산해진 도로를 시원하게 뻗었다.
“어울려요.”
강희찬은 뜬금없는 감상을 중얼거렸다. 진심이기도 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선은 뻣뻣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우스운 대꾸와 함께. 해는 동쪽에서 뜬다. 그 정도의 당연한 소리였다. 그러니, 강희찬의 입장에선 감사의 인사를 들을 이유 따윈 없었다.
입을 다물어버리는 강희찬의 곁에서, 이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설마 저 호칭으로 부르겠다는 소리인 줄 알고 깜짝 놀랐던 가슴을 쓸었다. 너무 끔찍한 일이다. 이선은 조심히 숨을 뱉었다.
몇 번의 신호에 걸리고 출발하기를 반복할 무렵, 검은 물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이든 집어삼킬 것 같은 물의 색은 검은 하늘과 같았다. 어차피 하늘의 색이 반사된 것이 물의 색이었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멍하니 물인지 하늘인지 모를 곳을 보고 있을 무렵,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귀에 걸렸다. 정이선이 당황한 얼굴을 하는 것도 벌써 차에 타고 세 번째였다.
이선은 들려오는 소리의 진원지를 가만히 봤다. 늘 짓는 시큰둥한 얼굴을 해서는, 입에서 나오는 멜로디는 꽤 밝았다. 조화롭지 못한 광경에 이선이 눈만 끔뻑거렸다. 어느새 강희찬은 시선을 눈치챘다.
“…….”
“뭘 봐요?”
뭐냐고 묻는 얼굴에선 이선의 것과는 달리 당황한 기색이 없다.
“노래…….”
“…내가 지금 노래 불렀어요?”
본인은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나. 이선은 잠시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차 안은 다시 적막에 잠겼다.
…말해주지 말걸. 나름 듣기 좋았는데. 늦은 후회를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내심 아쉬워하는 이선의 귀에 노래 대신 듣기 편한 목소리가 뱉는 말이 울렸다.
“아까 거기 LP판에 있는 노래예요.”
“장국영이요?”
“말고. 여자가수 거. 아버지가 좋아하시거든요.”
“아, 아까 그 말이…….”
이선은 손가락으로 뒷좌석을 가리켰다. 이미 출발한 지 오래였다. 가리키는 곳엔 식당이 없을 게 당연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의미 없는 행동을 구태여 지적하진 않았다. 대신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혹시 그 소리 했어요? 그 가수 좋아하면서 아닌 척한다고.”
“아… 네.”
아까 언뜻 이해하기 힘든 말의 꼬리를 이제야 잡아챘다. 이선은 슬쩍 웃었다. 누군가와 공통의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는 건 이선에게는 항상 기분 좋은 일에 속했다. 특히 자신에게 별다른 악의가 없는 사람과는.
“지겹지도 않나.”
역시 가족이 맞긴 했다. 중얼거리는 옆모습의 고운 선이 아까의 여주인과 비슷하다.
“둘이 똑같아요. 거기 장국영 LP 둔 지 얼마 안 됐어요. 원래는 여자가수가 부른 원곡으로만 틀어놨거든요. 장국영 건 어디 숨겨놨다가 혼자 몰래 듣고.”
“아…….”
“뭐 하는 짓들인지.”
절레절레. 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딱 화목한 가정에서 장성한 아들이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면을 보인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정이선에게는 몇 곱절 더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남들에게 자랑스레 내보이기엔 하나같이 떳떳하진 못한 면면들만 가진 이 특유의 성정이라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랬기에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내보이는 사람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고마웠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의무감처럼 이선은 제 얘기를 꺼내곤 했다. 다시 돌아올 부메랑이 되지 않을 선을 계산하며.
“부모님들은 다 그런 거 있나 봐요. 애창곡 같은 거. 저희 어머니도 좋아하는 노래 있거든요.”
“뭔데요?”
“‘백만 송이 장미’라고 아세요? 심수봉.”
“들어본 거 같아요.”
한 손으로는 핸들을 쥐고 운전을 이으면서도 강희찬은 착실히 대답했다. 미간은 슬쩍 찌푸린 채였다.
아마 모르는 노래일 수도 있다. 나이가 스물다섯이라고 했다. 어린 사람이 알고 있기엔 너무 예전 노래긴 했으니까.
이선은 창에 머리를 기댔다. 고작해야 운전석과 조수석일 텐데, 차 자체가 대형 세단이라 그런지 약간만 몸을 오른쪽으로 물려도 거리감이 느껴졌다.
눈을 창밖으로 두자, 마치 검고 텅 빈 곳에 홀로 남은 것 같았다. 익숙한 감각이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 계약한 자취방에 들어섰을 때. 한창 사이가 좋은 여자친구 얘기를 하던 신규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군 제대 후, 며칠을 힘들게 돌아다니며 계약했던 지금 집에 들어올 때마다. 눈을 감기만 해도 들이닥치는, 친숙하면서도 두려운 감각이었다.
언젠가는 혼자 남겨질 거다. 다들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주고, 곁을 허락받는 때에도 자신만은 혼자일 거다.
문득 이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건 어린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소박해진 가정을 홀로 꾸리는 어머니는 어렵사리 가게를 냈다. 항상 귀가가 늦는 어머니를 기다리느라 이선 역시 취침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먼저 자라는 말에도, 숙제를 다 끝내지 못해서 일어나 있었다는 핑계를 대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렇지 않으면 열 때마다 덜걱거리는, 소음이 심한 대문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봐. 그것을 여는 사람이 돌아오지 않을까 봐.
깜빡 잠이라도 들면, 다음 날 이선은 눈을 뜨자마자 어머니의 방으로 뛰어갔다. 새벽까지 일했던 피로를 아침 햇살 아래에서 풀고 있는 얼굴. 그것을 보고 나서야 이선은 학교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거실 바닥에 엎드려서, 금방 끝낼 수 있는 숙제를 일부러 마치지 않는 이선의 곁에 어머니가 앉았다. 그녀는 바닥이 차니까 들어가서 자라는 말을 하면서도, 연필을 쥔 아들의 머리를 끊임없이 쓸었다. 손에선 술 냄새가 풍겼다.
이선은 차마 인상을 찌푸릴 순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셨을 때와는 다르게 너무 독한 냄새였다.
아들의 머리카락을 쓸며,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 제대로 부르지 않는, 음정이 거의 없는 노랫말이 그녀의 잇새로 흘러나오곤 했다.
옛 가수의 히트곡 따위. 그것도 노래의 후렴 부분은 이선 역시 TV를 돌리다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술에 취해, 음정도 박자도 없이 중얼거리는 노래는 차라리 기도문이나 주문처럼 들렸다.
꽤 훗날에야 그 노래가 주기도문도, 주문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나이까지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나라로 가버릴까 졸린 눈을 비비던 어린아이는, 이제 먼저 별나라로 떠날 채비를 마친 못난 자식이 되었다. 해사하게 웃는 중년 여자를 보며 부러움을 느끼는 자신처럼, 어머니 역시 살갑진 않아도 차려주는 밥을 묵묵히 비워내는 강희찬을 부러워할 거다.
이선은 눈을 감았다. 눈을 뜬 채 창밖을 보던 때와 그리 다를 게 없는 어둠이 드리웠다.
자신은 듬직하고 ‘좋은’ 아들이 되기는 글렀다. 이선의 몸이 커지면서 한 해 한 해 어머니의 얼굴에 짙어지던 고된 흔적도 사라지진 않는다. 잘못 쓴 노트는 찢거나 버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른다.
시트에 묻힐 듯 꺼져가던 무렵이었다. 얼굴에 닿은 누군가의 손길이 이선의 꺼져가는 의식을 붙잡았다. ‘누군가’라고 할 것도 없다.
이선은 눈을 번쩍 뜨고 그대로 눈알만 왼편으로 굴렸다. 차는 서행 중이었다. 그 덕에 여유가 있는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 강희찬과 시선이 맞닿는다.
“자고 있어요?”
“…아, 아니요.”
“운전하는 사람 있는데 자요?”
“눈, 눈만… 감고 있었어요…….”
뺨에 붙은 온기는 그제야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이선은 숨을 내쉬었다.
“이쪽 맞아요? 저번에 가려던 파전집. 반대 방향으로 들어와서 헷갈리는데.”
“아, 네. 저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될 거예요.”
눈을 감고 있느라 몰랐는데, 주변이 익숙했다. 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강희찬의 말대로 반대로 들어왔지만, ‘그’ 동네였다. 오늘 정이선이 사과를 할 일을 만들었던 문제의 사건 현장.
“이 차 들어가긴 좀 좁을 것 같은데. 옆에 주차한 차들 많아서. 그냥 여기 세우고 걸어가죠. 내려요.”
시원시원하게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린다. 망설임이라고는 없는 움직임을 따라 이선 역시 후다닥 내렸다. 어느새 어두운 골목 안으로 큰 키가 걸음을 뻗었다.
“…….”
이선은 남자의 손길이 머물렀던 뺨을 짚으려던 제 손바닥을 멈추었다. 스스로가 하려던 행동에 흠칫 놀랐다. 고개를 잘게 흔들고는, 남자가 사라진 어두운 골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의외로 손이 따뜻하다.’
생김새로만 봐선 한여름에도 얼음장처럼 찰 줄 알았는데…….
주인은 빈티지풍의 인테리어를 지향한다고 변명처럼 말하지만, 역시 오래된 태가 나는 가게 앞에 섰다. 옆에 있던 강희찬은 낮게 혀를 찼다. 그 소리에 이선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까다롭기로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것 같은 외모를 가진 남자가 ‘이런 가게엔 한 발짝도 못 디딘다’라고 버티는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금일 집안 사정으로 쉽니다. -주인 백]
A4용지에 매직도 아닌 볼펜으로 갈겨 쓴 글자 때문이었다.
“…정 선생님이랑 뭐 하나 같이 먹기 되게 힘드네요.”
밤거리, 게다가 인적도 드문 골목이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너무도 잘 들렸다.
남자에게 비꼬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선은 절로 고개가 숙어지는 걸 애써 막아야 했다. 방학 전, 이 동네에서 남자와 벌였던 언쟁이랄지, 다툼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정이선에게도 억울한 점은 있었다.
“보쌈은… 강희찬 씨가 안 드신 건데요.”
자기가 안 먹어놓고 왜…….
표정에서 바로 불만의 말이 읽힌다. 강희찬은 잠시 이선의 표정을 감상하다 주위를 살폈다.
시커먼 골목에서 장사가 되는지 의문이었지만, 편의점 하나가 있긴 하다. 말없이 먼저 걸음을 뗀 그의 뒤를 이선이 착실히 따랐다.
‘개새끼… 아니, 강아지 같다.’
뒤에서 들려오는 얌전한 발소리를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배, 많이 고프세요? 이 근처에 먹을 만한 게…….”
“아니요. 내가 언제 배고프다고 했어요?”
둥그렇게 뜬 눈이 자신을 향했다. 이선은 당황스러움에 걸음을 멈췄다.
“아까 물어보셨잖아요. 배고파서 여기 오신 거 아니에요?”
“안 고파요. 부르지도 않지만.”
남자와의 대화는 가끔 원더랜드의 티타임보다 혼란스럽다.
다시 결 좋은 뒷머리를 보여주며 앞서 걷는 사람의 뒤를 따랐다. 뒷모습은 대화의 차단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난 뭐 먹고 배불러 본 적이 거의 없어요. 배가 안 고프니까 그만 먹는 거지.”
‘…무슨 차이지?’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고, 부르니까 식사를 그만두는 게 아니었나. 이선은 새삼 지금까지 자신이 이어왔던 섭식 활동의 체계를 되새겼다. 그럴수록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혼란스러운 이선을 둔 채, 강희찬은 편의점 문을 밀었다. 딸랑이는 종소리에 이선이 정신을 차렸다. 앞엔 문을 받친 채 자신이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얼굴이 보였다. 이선은 재빨리 그가 받치고 있는 문을 넘어섰다.
“아, 감사합니다.”
“마실 거든 먹을 거든 고르세요.”
남자는 짧게 고개를 숙이는 이선을 지나쳤다. 핸드폰을 하다 황급히 어서 오시라는 인사를 건네는 아르바이트생 역시 무심히 스치고, 강희찬은 냉장고 앞에 섰다. 정확히 말하면 맥주가 가득 꽂혀 있는 칸이었다.
망설임이 없는 성향은 무언가를 고를 때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선호하는 제품인지는 모르겠지만 긴 손가락이 그보다 더 긴 맥주 하나를 집었다.
선택을 마친 사람은 뒤를 돌고 가만히 이선을 바라봤다. 급작스레 떨어진 퀘스트에 이선은 여전히 응답하지 못하는 채였다.
“같은 걸로 마실래요?”
맥주캔을 잘 보이게 들며 남자가 말했다. 이선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어기적어기적 편의점 내부를 돌았다.
‘밥 먹은 지 한 시간이 좀 지난 건가?’
그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먹으라는 소리를 들으면, 딱히 고를 만한 게 없다. 고민하던 이선은 결국 커피 우유 하나로 손을 뻗었다. 이선이 우유를 집은 순간, 남자는 어느새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이선은 깜짝 놀랐다.
…역시 키가 크다.
평소엔 적당히 떨어진 거리감과 선이 유려한 얼굴에 가려지지만, 신장이 확실히 큰 축이었다. 가까이 붙어 있는 까닭에 눈높이는 어색할 정도로 높아졌다. 괜히 다른 곳으로 눈알을 옮겼다.
“저는, 이걸로 할게요.”
“애새끼예요? 초코우유나 마시게.”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미약하게 귓가를 울렸다.
커피 우유다. 이선은 정정의 말을 삼켰다. 대신, 비웃음이나 보이고는 뒤를 돈 사람을 따랐다.
‘커피 우윤데, 왜. 아니, 초코우유라면 또 뭐 어때서.’
바닥으로 고개를 내리고 불만을 속으로 꿍얼거렸다. 복어처럼 얼굴에 바람을 집어넣던 이선의 정수리가 어딘가에 부딪혔다.
“으악!”
순간적으로 우스운 소리가 나왔다. 재빨리 걸음을 물리고 고개를 들자 앞엔 익숙한 등이 있었다. 아마 높이상 남자의 어깨에 부딪혔을 가능성이 컸다.
“과자라도 골라봐요.”
죄송하다는 이선의 말보다 남자가 먼저였다.
뭐 하는 거냐고, 앞을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눈을 험악하게 뜰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강희찬은 인상 하나 구기지 않은 채, 턱으로 과자 진열대를 가리켰다.
…두 번째 퀘스트다.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예전부터 무언가를 고르는 건 항상 힘들었다. 방학 때 출근한 교사들끼리 시켜 먹는 점심 메뉴나 회식 메뉴를 골라보라고 할 때. 하다못해 아이들에게 선물로 줄 간식을 선택할 때도 이선은 항상 고민했다. 혼자 먹을 저녁 메뉴 선정은 금방 하면서도, 거기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든다면 난감함은 등가속도 운동의 그래프를 그렸다.
그리고… 지금은 딱히 먹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이선은 알록달록한 과자 포장들을 훑었다. 한번 슥 둘러본 후, 강희찬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뭐’라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버릇인 양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쌍꺼풀은 더욱 도드라졌다.
객관적으로만 보자면 유순한 눈을 피했다. …스물다섯이라고 그랬다. 스물다섯이 이렇게 고압적이면 나중엔 대체 어떻게 된단 말인가.
문득, 숱이 많은 로맨스그레이가 인상적인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눈가의 주름이 질 만큼 웃는 게 잘 어울리는 분이라도, 예전엔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했단다.
하지만 사람의 성정이 변하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거다.
이선은 숨을 내쉬고 다시 과자를 살폈다. 이건 단맛, 저건 짠맛. 대강 예측 가능한 과자를 살펴보는데 보라색, 초록색, 주황색 포장지가 연달아 있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똑같은 과자를 맛에 따라 겉 포장의 색만 다르게 해둔 거였다. 이선은 그중 보라색 과자를 집었다.
제품명이 잘 보이도록 과자를 들고, 강희찬의 눈앞에 가져갔다.
“야구 과자 먹을래요?”
귀여운 소년 캐릭터가 그려진 겉 포장으로 무심한 시선이 내려온다. 이내,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강희찬은 그대로 인상을 구겼다.
이선은 잠시 주눅이 들었지만, 과자의 대변인이라도 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맛있어요. 소풍 때, 우리 반에서 다섯 명이나 가져왔거든요. 조금 얻어먹었는데, 꽤 맛있더라고요.”
말을 마친 후 한 박자를 쉬고, ‘제 입에는…….’이라는 사족이 자신 없게 붙었다. 남자는 잠시 눈을 가늘게 접었다.
“먹고 싶으면 먹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계산대를 향했다. 한발 늦게 계산대에 도착한 이선은 쥐고 있던 물건들을 내려놓았다. 손이 빠른 아르바이트생은 이미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이선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카드를 집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먼저 계산대에 서 있던 사람보다 늦었다. 직원은 눈에 익은 회색 카드를 받고 결제를 진행했다.
“오늘… 제가 사는 거 아니었어요?”
“아무리 팔다 남은 거라도, 편의점 간식들로 퉁칠 만큼은 아닐 텐데요.”
계산을 마친 카드를 지갑에 넣는 강희찬이 나직이 뱉었다. 그 말을 듣자 이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억울했다.
“아까도, 저는 계산하려고 했어요. 근데…….”
“네. 과자 먹을 거면 들고나와요.”
얘기를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남자는 제가 고른 맥주 한 캔만을 홀랑 집고 걸음을 떼었다.
‘들은 체도 않다니.’
괜한 핑계나 댄 처지인 이선은 하릴없이 과자와 우유를 챙겼다.
핸드폰에 비하면 덜 부담스럽지만, 확실히 이것도 빚의 일종이다. 내일은 아침에 영상통화까지 해주겠다는 사람인데, 너무 얻어먹고만 있었다.
불편한 마음만큼 무거운 문을 밀어 열었다. 후덥지근한 바깥엔 초록색 파라솔과 테이블 하나가 있었다. 가게에 들어갈 때만 해도 없던 두 명의 객이 자리를 차지한 채였다.
“…….”
큰 뒷모습이 담배를 태우는 중년 남성 둘을 보고 있다.
‘설마…….’
무엇에 대한 ‘설마’인지는 모를 일지만, 그 말만이 머리를 채웠다. 설마 아버지뻘의 남자에게 비키라고 패악을 부리진 않겠지, 의 ‘설마’이려나?
내딛는 곧은 걸음이 그들을 향하는 것 같다. 이선은 황급히 손을 뻗었다. 셔츠 자락이 손바닥에 꾹 감겼다.
“…….”
뭐야. 뒤를 돈 얼굴은 살풋 구겨졌지만, 이선은 꼭 잡은 그의 티셔츠 자락을 놓지 않았다.
“저기, 근린공원에 벤치 있는데……. 거기 가실래요? 여기보다 조용하고 알아보는 사람도 적을 것 같아서요.”
순간, 구겨졌던 미간이 예쁘게 펴진다. 순순히 끄덕이는 고개와 함께 앞머리가 얕게 흔들렸다.
착하다.
닿기 쉬운 높이였다면, 이선은 손을 뻗어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쓸었을지도 모른다.
* * *
“이거 좀 올라왔다고 숨이 차요?”
공원의 분위기와 맞는, 잘 닦인 돌계단을 오르면 산책로가 있다. 그 중간마다 마련된 벤치로 향하기 전, 남자는 뒤를 돌아 이선에게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자 난간을 붙잡고 있던 이선은 조금 민망해졌다. 헉헉거리는 호흡이 말 사이마다 자꾸 섞였다. 하지만 저쪽은 세 살이나 어린 운동선수였다. 이게 당연하다고 속으로 핑계를 대며, 이선은 무릎에 손을 두고 잠시 굽혔던 허리를 폈다.
“야구부들이 그쪽 체육선생이라고 하던데…….”
“초등학교 과목은 그런 거랑 상관없어요. 체육 전담 교사는 연수받으면 할 수 있거든요. 전 전담도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
내려다보는 눈빛엔 불신이 한가득하다. 이선은 그의 눈을 애써 피하며 먼저 벤치에 몸을 앉혔다. 하아. 뱉어낸 숨이 더운 여름 공기에 섞인다. 이선이 헉헉대지 않을 무렵, 옆자리도 채워졌다.
칙.
밤이라 맥주캔을 따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이선은 우유 팩을 열고 있던 손을 멈췄다. 물끄러미 긴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사실이 있었다.
“차 가져오시지 않으셨어요?”
뭐, 집도 가까우니 맥주 한 캔 정도는 마시고 운전을 하려는 걸까? 아니면 차를 이곳에 두고 가려는 계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기다란 맥주캔을 땄던 손이 멈칫한다. 이내 곧은 손은 이선에게 있던 우유와 제 손의 맥주를 바꿔갔다.
“아…….”
“맥주 안 마셔요?”
“아뇨. 그건 아닌데…….”
“아니면 그쪽이 운전할래요?”
조금 부담스러운 크기의 맥주캔을 보던 이선은 재빨리 그것을 마저 열었다. 그리고 입에 갖다 댔다.
…문짝 하나만 긁으면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지. 상상하기도 싫다.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등줄기가 선득해졌다. 냉기가 남은 맥주가 몸에 돌았는지도 모른다. 이선이 두 모금 정도 삼키고 입을 뗐다.
강희찬은 커피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초코라고 생각했는지 한 모금 입에 넣은 채로 바로 우유 겉면의 이름을 확인한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아홉을 못되게 굴던 애가 한 번 착하면 기특하게 느껴지는 것과 결이 같았다.
이선은 웃음을 누르고 과자 봉지를 뜯었다. 과자가 알알이 들어 있는 플라스틱 용기를 그의 앞에 가져갔다.
“먹어볼래요?”
옆에서 넘어온 과자를 보며 한숨을 쉬더니, 그래도 별소리 없이 하나를 집었다. 입으로 동그란 과자가 들어가자 볼이 우물거린다.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그를 빤히 보던 이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맛없어요?”
“먹을 만합니다. 이름만 덜 재수 없으면 좋을 텐데.”
“이름이 왜요?”
이선은 나중에 버리기 위해 따로 옆에 두었던 과자 포장지를 집었다. 귀여운 야구소년의 곁엔 과자의 이름이 있었다.
“홈런, 제일 좋은 거잖아요.”
“…팬 아니죠, 그쪽.”
홱 돌아온 곁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이선은 뜨끔했다. 뭔가를 잘못 얘기한 건가. 귀신이 따로 없다.
대답을 회피하며 맥주캔으로 입가를 숨겼다. 술이 한 모금 들어가자 덜컥했던 마음도 조금은 진정됐다. 올림픽에 나오던 거 잘 봤다는, 아무리 들어도 공치사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을 주절거릴 여유는 생겼다. 강희찬은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편집 영상으로만 대충 본 게 티가 많이 나는 건가?’
이선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름, 더 좋은 게 있어요? 야구에.”
“…내야 땅볼?”
“그게 뭐예요.”
되게 먹기 싫은 이름인데.
대화의 의지를 잃은 이선은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차 소리를 그제야 인지할 수 있었다. 기묘한 시선이 붙었지만, 이선은 애써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수원엔 왜 왔어요? 잠실에도 안 오는 사람이라고 그러던데, 송 PD는.”
“집이 거기 있어요. 어머니는 아직 거기 계시거든요. 근데 걔는, 무슨 그런 얘기를…….”
“웃기는 새끼랬어요.”
“그래도 제가 걔나 강희찬 씨 월급에 조금은 보탰을걸요. 20퍼센트는 원정팀이 가져간다면서요?”
하. 기가 막힌 웃음이 터졌다. 어디서 저딴 건 주워들었을까. 투수한테 홈런이 제일 좋은 거 아니냐는 질문이나 하는 주제에 아는 척이다.
평소라면 같잖은 소리라고 무시하거나 닥치라는 말이 나오고도 남았다. 하지만 ‘맞지 않느냐’고 눈을 반짝이며 묻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순 없었다. 순수히 기대로 물든 얼굴을 실망으로 망가뜨리고 싶진 않았다.
“관중 수익으론 선수 월급 못 줍니다.”
그래도 결국 입은 자유분방하게 열렸지만.
선생에게는 마치 꼬리가 있는 듯했다. 방금까지 방방이다가, 추욱 처졌을지도 모른다. 더 어깨가 처지기 전에 말을 돌려야 했다.
“오랜만에 고향 집인데, 왜 야구장엔 갔어요?”
최선을 다해 말을 돌렸다. 착하게도, 선한 얼굴은 그런 희찬의 의도를 착실히 따라주었다.
“강희찬 씨는 자취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죠?”
“네. 왜요?”
“오랜만에 본가에 가도, 별로 할 거 없어요. 엄마 가게 간다고 해도 쉬라고만 하시고……. 그땐 뭐, 만나시는 분 눈치 보여서 일찍 나왔지만요.”
무언가를 생각하듯 강희찬의 눈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어머니가 가게를 운영하냐고 물어야 하겠지만, 생각은 오히려 ‘만나시는 분’에 머물렀다. 그의 낌새를 알아챈 이선은 빙긋 웃어 보였다.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아버지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어요.”
“아니라고 해도, 무슨 할 말이 있어요. 본인들 인생인데.”
추임새랍시고 넣은 말이 좋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은 너무 늦었다. 차라리 혀라도 씹어버리면 닥치고 있으려나. 강희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뺏긴 것 같아서 도망 나왔어요?”
뒤늦게 이를 꽉 물었다. 언젠가 이 주둥이로 망할 거다. 또 무슨 헛소리가 튀어나오기 전에 도망갈 곳이 필요했다.
주황색 가로등이 비추는 얼굴에서 어이가 빠졌다.
“제가 열 살짜리 초등학생은 아니라서요.”
“글쎄요. 그 학교 열 살 애들이 정 선생보다 훨씬 영악할 겁니다.”
“설마요.”
웃음은 미지근한 미풍보다도 기분이 좋게 공기를 탔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곁눈으로 흘긋 봤다.
역시 세상 물정에 좀 둔해 보인다. 본인이 호구인 사람들은 남들도 다 자기처럼 호구인 줄 아는 모양이다. 우습다.
강희찬은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한 얼굴을 무언가 예상외의 것으로 물들이고 싶은 비릿한 욕망이 차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이 야구부에 입단했던 녀석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니 뭐니 하면서 야구부를 나갔었는데, 그 녀석 어머니가 두 달도 지나지 않아서 재혼하셨어요. 그맘때쯤 걔도 다시 야구부에 돌아왔고.”
“…네에.”
“동기 하나가 눈치 없이 ‘새 아빠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말하던데요. 엄마가 아저씨랑 결혼해서 자기가 야구부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고.”
“…….”
멍하니 크게 열리는 동공과 입술. 강희찬은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건 흡사 그거였다. 산타를 철석같이 믿던 박신우의 딸에게 ‘산타는 너희 아빠다’라고 말하던 순간의 즐거움과 결이 같았다.
“거봐요. 정 선생보다 훨씬 야무지죠?”
삐뚜름히 웃는 낯이 멍한 이선의 눈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가로등 빛이 닿아서 얼굴 자체는 굉장히 따뜻한 인상이었다. 어머니처럼 해사하게 웃으면 참 예쁠 텐데. 기껏 저 얼굴에 올라오는 건 지금과 같은 비웃음뿐이었다.
이선은 잠깐 멍했던 정신을 차렸다. 어쩐지 못 미더운 인간이라고 무시를 당한 것 같았지만, 부정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실이니까. 자신은 여러모로 미덥지 못한 축에 속했다.
“저도 어릴 때 야구라도 해볼 걸 그랬나 봐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강희찬은 눈을 찌푸리며 이선을 바라봤다. 곁눈으로만 시선을 던지던 강희찬은 완전히 고개를 틀었다.
뜬금없는 소리나 뱉은 선생은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을 입에 대고 기울이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볼 때만 하더라도 적당하다 느껴졌던 크긴데, 남이 들고 있는 걸 보니 과하게 크긴 했다. 들고 있는 사람이 문제인지 맥주의 용량이 문제인지. 벅차 보이기까지 한다.
강희찬의 속내를 아는지 이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가 젖혀진 각도를 보아선, 어느새 절반 정도는 마셨는지도 모른다. 가득 맥주를 머금었던 볼이 푹 꺼진다. 볼을 눌러보는 장난이라도 쳐볼까. 강희찬이 잠깐 망설이는 사이 기회는 사라졌다.
“그냥… 부러워서요. 강희찬 씨는, 제가 부러워하는 성격이에요.”
“내가 어떤데요?”
“어… 다들 좋아하고, 착하시고…….”
“그딴 소리 처음 들어보는데요.”
이건 설마 먹이고 있는 건가.
의중을 파악하려 얼굴을 자세히 살펴도 딱히 악의는 느껴지진 않는다.
말갛고, 술기운이 오르는지 볼이 약간은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졸린 듯 눈이 천천히 감겼다가 뜨이고, 그 아래 있는 입술은 술 때문에 젖어 있다.
“…….”
선생도 얼굴 덕을 좀 보고 살 거다. 이런 얼굴로는 쌍욕을 한다고 해도, 덜 기분이 나쁠 테니까.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챈 이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역시 술기운이 조금씩 오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붕붕 젓는 고개의 움직임이 일반적인 범위보다 컸다.
“아닌데. 되게 친절하신데. 밥도 사 주셨고, 핸드폰도 바꿔주셨잖아요.”
요컨대 돈 쓰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란 소리였다. 강희찬은 중얼거리는 주정뱅이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영양가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필요는 없다. 그리고 화풀이처럼 손 안의 커피 우유를 한 번에 비웠다.
“운동하면, 자신감이 생긴다고 하잖아요.”
“그런 것도 취미로 다니는 태권도장에서나 하는 소리지, 프로 되려는 엘리트 체육이면 자신감이랑 제일 거리가 멀걸요.”
“…그래요?”
“운동 관두는 순간까지 남하고 비교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실수 한 번에 자리 뺏기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일상이었고요. 남의 자리 차지하고서 먹고사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빈 우유팩을 든 오른손이 허공을 휘둘렀다. 맑은 소음을 내며, 열 걸음쯤 떨어진 휴지통 안에 정확히 들어갔다.
대단하다. 이런 감탄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막상 옆에 있는 그에게선 아무 표정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데에 정신이 가 있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 일이다.’
남자는 정이선이 아는 범위 안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었다. 성격이 다소 좋지 못한 걸 알면서도, 사인이라도 한번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사랑받는 존재였다.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을 수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젠가 영상으로 봤던 그의 앳된 모습이 떠올랐다.
스물. 만으로 따지면 열여덟. 어린 선수는 모두가 주목하는 무대를 버거워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자리인 양, 더없이 잘 어울렸다.
앳되지만 표정이 없는 얼굴에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선은 깨달았다. 이런 자신감은 아마 타고나는 거라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 걸어온 길.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어느 여름날의 새벽. 연일 지속되던 열대야가 한풀 꺾인 특별한 밤공기 속에서, 남자는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 곁에 앉아 있는 남자가 한없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정면을 향했던 두 눈이 이선을 향했다. 환한 낮엔 다갈색으로 보였던 눈동자가 지금은 한없이 검은색으로 침잠한 채였다.
“…아닙니다. 됐어요.”
이선은 신기루처럼 사라진 남자의 말을 추궁하지 않았다. 이어지지 못한 말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무 말이 없는 지금도 나쁘진 않았다. 누군가와 말없이 있다는 게 더없이 편한 순간이었다.
쥐고 있던 맥주를 마셨다. 이선이 손에 들고 있던 과자는 어느새 강희찬에게 넘어간 채였다. 이름이 싫다느니 재수 없다느니 하더니, 입에 맞았는지 혼자 거의 다 먹고 있었다.
과자가 그의 입 안으로 쉴 새 없이 들어간다. 얼굴이 작은 편인 것 같은데, 어떻게 저런 공간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어릴 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크고 보니까 제가 샘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요? 잘 모르겠는데. 그쪽 정도면 욕심도 보통 이하 아닙니까?”
“난 다 부러워해요. 강희찬 씨 돈 많이 버는 것도 부럽고…….”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연예인을 해보는 게 낫지 않나. 어느 정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은데.
“엄마랑 아저씨랑 만나는 것도 부럽고…….”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상념이 넘어지듯 한 군데에 멈췄다. 말을 꺼낸 장본인은 여전히 옆얼굴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하진 않게 오뚝하게 서 있는 코와 아래로 도톰하게 나온 입술 선 위로 가로등 빛이 오롯이 끼얹어진다.
하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혹시 연상이 취향이에요?”
“네?”
벽을 치듯 옆모습만 보여주던 얼굴이 제 쪽을 향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적어도 선생이 일하는 학교의 시끄러운 애새끼들보다는 높은 점수를 줄 만했다.
“그런 생각은 딱히 해본 적은…….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세요?”
“아빠 같은 사람, 뭐 그런 게 타입인가 해서요.”
도록도록. 소리가 들릴 것같이 굴러다니던 눈이 딱 멈췄다. 그리고 평평히 잘 펴졌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겼다.
“…그거 편견인데요. 아빠 없는 애들이라고 다 아버지 같은 애인을 바라진 않아요.”
“그럼 뭐가 부러운데요.”
이선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그의 얼굴을 봤다. 숨이 턱 막혔다. 학년 초에, 시계를 아예 볼 줄 모르던 아이를 봤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서 벌어졌던 입은 다시 다물렸다.
“그냥……. 됐어요. 말해도 강희찬 씨는 모를 겁니다.”
교육 공무원인 정이선 선생이 담당하는 건 대략 8세부터 13세까지의 아동이다. 스물다섯인 성인에게까지 닿을 에너지 따윈, 퇴근 후의 직장인에겐 없었다.
대화를 차단한 이선을 향해 다시 한번 비릿한 웃음이 붙었다.
“그쪽, 싸가지 없다는 소리 많이 듣고 살았죠?”
“아닌데요. 저, 착하단 말 많이 들었는데……!”
이선은 대번에 부정했다.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가늘게 뜬 강희찬의 눈에선 의심의 빛이 짙어졌다.
“누가 그래요?”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애들이요.”
‘그거야 숙제나 보여주니까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거지.’
강희찬 역시 예전에 수행평가를 위해 반장의 과제를 베껴 쓰며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한 적이 있었다. 안경을 썼다는 것밖에 특징이 없는 놈이었지만, 보여줄 당시엔 정말 고맙기도 했고.
미심쩍은 강희찬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이선은 다시 입을 어물어물 열었다.
“지금 학교 선생님들도 가끔은 해주세요.”
눈치를 보고 있는 얼굴이 퍽 가여울 지경이다.
본인도 선생이긴 하지만, 확실히 선생이나 어른들이 보면 착하다고 여길 만한 외모나 성격을 가졌다. 그 말인즉슨, 일 시키기 만만하고 호구 같다는 소리였다.
더 있다가는 사는 집주인이나 그 잘나신 ‘애인’ 얘기까지 나올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듣는다면 아마 자신의 입에선 좋은 소리는 나가지 못하겠지.
강희찬은 짜증의 원천을 차단하기 위해 먼저 말문을 열려 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뭘요. 정 선생 싸가지 없는 거요?”
“아니요. 저… 남자, 좋아하는 거요.”
무언가 따지고 싶었지만, 이선은 말을 아꼈다. 생전 처음 들어본, 자신의 성격에 대한 평가는 무시하기로 했다.
과자까지 다 비워낸 남자는 이제 손이 비었다. 공통점도 없고, 친하지도 않은 재미없는 연상 남자와의 시간이었다. 지겨워서 손에 핸드폰이라도 쥘 법도 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벤치에 등을 기대고 두 팔은 팔짱을 낄 뿐이었다.
“내가, 감이 빠른 편이거든요.”
꽤 거만해 보이는―그러나 어울리는― 자세와 중얼거리는 말은 제법 조화롭다. 하지만 이선은 맥이 탁 풀렸다.
‘진지하게 묻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남자가 읽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흘끔, 자신을 향했던 시선이 정면의 쓰레기통으로 옮겨갔다.
“그쪽이나 송 PD나, 좀 조심하고 사는 게 좋을 겁니다. 적어도 뒷자리에 있는 사람이 진짜 자는지 정도는 확인해야죠.”
“아…….”
바보같이 벌어진 이선의 입이 한동안 다물리지 못했다. 한껏 억울한 얼굴을 해서는 절대 말한 적 없다던 송재혁의 변명이 떠올랐다.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하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던 게 아주 조금은 미안해졌다.
하지만…….
이선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제가, 그때 이상한 소리를 했어요? 어떻게…….”
“뭐, 여자한테라고 염병할 새끼 소리 못 할 건 아닌데.”
그날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걸까. 시선은 멍하니 어느 한 곳을 향했다. 이선은 그 얼굴에서 쉬이 눈을 떼진 못했다. 홱, 하고 돌려진 고개가 자신을 향할 때도. 덕분에 눈을 피할 새도 없이 계속 보고 있었다는 걸 들켰다. 남자는 개의치 않아 보였지만, 이선은 괜히 민망해졌다.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아까도 얘기했잖아요, 감이 좋은 편이라고.”
“아, 네. 그러시구나.”
영혼 없는 중얼거림이 밤공기를 갈랐다.
“정 선생님, 친구 없을 것 같은 타입이잖아요. 돈 뜯기고 다닐 게 애인밖에 더 있겠어요?”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자 이선은 기어코 인상을 썼다.
친구 있다. 하지만 대놓고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누가 있냐고 따져 묻기라도 한다면, 답으로 내놓을 만한 인물이 송재혁뿐이다. 비웃음만 당할 빈천한 교우 관계를 대놓고 들키는 건 사양이었다.
대신, 이선은 말머리를 돌렸다.
“재혁이가 애인…이라고 하던가요?”
“뭐, 대충.”
흘긋. 강희찬은 곁눈으로 왼편을 봤다.
선하고 유순한 얼굴은 표정이 없으면 묘한 분위기를 내었다. 사람 자체가 어딘가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이대로 둥둥 떠갈 것 같은 사람을 묶어둘 수 있는 건 대화밖에 없었다. 강희찬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근데, 송 PD도 눈치채고 있을걸요. 정 선생이 그 남자 혼자 좋아하는 건.”
“…그런가요. 걔가 알고 있다니, 좀… 창피하네요.”
“나한테 들킨 건 안 창피하고요?”
“네. 그러게요. 왜 강희찬 씨한테는 괜찮지?”
이선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새삼스러운 걸 깨달은 듯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마…….”
“네?”
“아마, 정 선생님은 날 다시 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죠. 원래 속 얘기는 생판 남한테 털어놓기가 더 쉽다고들 하니까.”
공기는 이전보다 서늘했다. 딱히 이제 새벽으로 넘어간 시간대 탓만은 아니었다.
어색함 속에서도 이선은 깨달았다. 한없이 정답에 가까운 말이었다. 계속 생각나지 않던 연예인의 이름을 누가 말해주기라도 하듯 명쾌한 순간이었지만, 좋아하는 티를 낼 순 없었다.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난감한 부근에서 대화는 끊겼다. 이선은 도망치듯 손에 있던 맥주캔을 입에 대고 마셨다. 의외로 어색한 순간을 가르고, 강희찬은 먼저 대화를 이어주었다.
“다 마실 줄 알았으면 차라리 거기나 갈걸. 정 선생이 나 버리고 혼자 들어간 술집이요.”
“…뒤끝 되게 기시네요.”
웅얼거리는 타박이 닿았다. 하지만 강희찬은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내리는 거로 미미한 공격을 튕겨냈다.
여유로운 몸짓을 보인 그는 갑자기 팔로 주변을 휙, 휘둘렀다. 공기를 휘어잡듯 쥔 주먹을 그대로 이선의 앞으로 가져왔다.
“손.”
뜬금없는 그의 말이 적막을 갈랐다.
‘…왜?’
그렇게 묻고 싶지만, 짜증을 낼지도 모른다. 설마 법치국가에 사는 사람인데, 내 손을 물어버리진 않겠지.
이선은 ‘개새끼’라는 단어를 다양하게 활용한 남자의 별명을 애써 외면했다.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양손을 내밀었다. 내밀고 나서야 이 자세가 어릴 적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기 전 했던 자세와 닮았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이선은 두 눈까지 감고 있었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밤공기를 날카롭게 울렸다.
“…….”
괜히 머쓱해진 이선이 실눈을 떴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이선의 양손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무언가를 쥔 주먹이 펴지자, 제 손의 상당 부분이 가려졌다.
“선물.”
그는 담담하게 말하며 손을 치웠다. 남자가 손을 물리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이선은 무게감 하나 없는 손바닥 위를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아니, 그건 아니었다. 거기엔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강희찬의 손에서 압사당한 게 분명한 모기의 사체가. 피가 없는 것을 보니, 먹지도 못했는데 죽어버린 걸까. 괜히 성격 나쁜 사람 주변에서 왱왱거렸다는 이유만으로.
“…….”
이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손바닥 위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뭐해요? 버려요.”
양손으로 모기 사체를 받들고 있던 이선의 손 위에 거친 힘이 닿았다. 손바닥끼리 강하게 스쳤다. 따뜻한 온기는 더러운 것을 털어주는 부모님의 손아귀처럼 억세면서도 다정했다.
“아…….”
묵직한 따뜻함이 휩쓸고 가자, 이선의 손바닥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못했다.
‘자기가 선물이라고 줘놓고는, 왜…….’
이선은 인상을 팍 쓰고 있는 옆모습을 곁눈으로 살폈다. 나름대로 장난을 친 걸까? 장난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물어봐도 되려나?
찌푸린 얼굴이 혹시 머쓱함을 감추려고 하는 것인지. 제 나이다운 행동을 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하지만 어린 옆모습은 금세 선수의 세월이 덮인 표정으로 변했다. 장난 어린 소년의 얼굴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어느새 선수인 강희찬이 그 자리에 있었다.
“선수들한테는 보통입니다. 이래야 매일 경기할 수 있어요. 오늘 홈런 맞더라도, 다음엔 한 타석도 출루시키지 않겠다고 생각해야, 져도 잊고 잘 수 있거든요.”
나쁜 성격에 별 핑계를 다 댄다.
야구소년들이 들었다면 감탄했을 말이지만, 일반인인 정이선은 삐딱한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괜히 말꼬리를 잡진 않았다. 대신 벤치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별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도심의 밤하늘이 조금 더 넓게 눈에 맺혀왔다.
“어쨌든, 안 가길 잘하셨을걸요. 강희찬 씨는 저한테 고마워하셔야 해요.”
“길바닥에서 바람맞았는데 내가 왜요?”
“거기가… 보통 술집은 아니니까요. 아예 노골적으로 이름이 붙은 건 아닌데, 사장님 성향 때문에 입소문은 그런 방향으로 났거든요.”
길게 에둘러 말했지만, 강희찬은 단번에 이해했다. 그의 얼굴에 깨달음이 번져가는 동안 이선의 얼굴엔 거 보라는 미소가 피었다. 웃음은 부드럽게 벽을 치고 있었다.
묘하게 신경에 거슬린다. 그때와 같았다. 노골적이지 않은 것뿐이다. 여기부터는 네 영역이 아니다. 웃음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책상 선을 넘어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던 초등학교 때 짝의 짹짹거리던 목소리보다도 더 짜증이 났다. 아니, 그건 절대 넘어갈 일이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강희찬은 표정을 굳혔다.
“그런 가게는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인터넷에서 봤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맹한 사람을 호시탐탐 노릴 불특정한 누군가들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검은 무리 가운데서 멍청하게 서 있던 선생의 얼굴은 간단한 대답 한마디에 사라졌다.
몇 날을 컴퓨터 앞에서 앉아 있을 뒷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눈가가 발개서는, 덜덜 떨면서 인터넷에 게이바니 뭐니 검색을 했을까?
상상해 본 어린 뒷모습은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안쓰러웠다. 비록 지금은 잔잔한 물처럼 순한 얼굴을 해서는 벽이나 치는 인간으로 자랐지만.
“난 별로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래도 안 돼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밤공기를 단호히 울렸다. 강희찬은 고개를 틀고 옆을 봤다. 순한 눈이 제법 단단하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강희찬 씨야 호기심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
“거기 있는 사람들, 항상 문만 열리면 하던 얘기도 멈추고 다 쳐다봐요. 아는 얼굴이라도 들어올까 봐.”
애매하게 웃는 얼굴을 해선 공을 들고 그라운드에 발을 들이는 투수코치 같았다. 쥐고 있던 공을 놓고 파울라인 밖으로 걸음을 딛고 나면, 더는 강희찬은 투수코치의 시야에 들지 못한다.
그런 선이 그어져 있었다. 순하고, 누구에게나 잘 웃어줄 것 같은 얼굴은 이렇게 부드럽고 냉정하게 선을 그을 줄 안다. 여기부터는 네 영역이 아니라고. 혼자 남겨진 채, 계단 아래를 바라보던 그날과 완전히 같았다.
억지로라도 넘어보고 싶었다. 그 선이라는 걸.
“너무 선생 같은 소린데요.”
곱게 나가지 못하는 소리에도 선생은 빙긋 웃는다. 평소 다른 누군가가 저런 얼굴을 했다면 입을 양옆으로 찢어버리고 싶었을 텐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웃었으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는 게 아니라 정말 행복해서, 주체할 수 없어서 터지는 웃음이 번지는 걸 보고 싶었다.
“선생이니까요.”
선생. 그 범주 안에 들어간 존재들은 사실 강희찬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수업을 빠지기 일쑤였던 초, 중학교 시절은 물론, 오전 시간에만 교실에서 머릿수를 채운 채 앉아 있던 고교 시절에도.
매점에 가기 위해 복도를 지나다 보면 모르는 어른들이 참 많았다. 행정실 직원인지 선생인지도 모르는 그들을 향해 강희찬은 일단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하지 않으면 어딘가에서 귀신같이 지켜보던 고 감독이 훈련의 시작을 엎드려뻗쳐로 장식했으니까.
딱 그 정도였다. 운동장이 아닌 ‘학교’라는 공간에서 보던 연장자들은 항상 뿌연 필터가 낀 듯 얼굴조차 선명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의 영어 선생 역시 마찬가지다. 들고 다니던 영어 교과서가 아니면, 강희찬은 그녀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아마 졸업한 지 시간이 꽤 흐른 지금은 길거리에서 스쳐도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얼굴조차 없는 타인에 대한 기억은 순간의 단편들의 모음이었다. 언젠가의 학교 시험일도 그런 파편적 기억 중 하나였다.
첫 과목 시험을 다 풀고―정확히는 강희찬 혼자 다 찍고 난 후― 남는 시간 동안 자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가 빼앗겼다. 감독으로 들어왔던 영어 선생은 시험이 끝난 후 강희찬을 밖으로 불렀다.
‘너, 운동부라서 시험 중요하지 않은 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다른 애들한테까지 방해되면 안 돼. 교칙이잖아.’
높은 통굽 슬리퍼를 신어도 여자의 머리꼭지는 강희찬의 턱 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압박감은 고 감독의 것과 비슷했다.
물론, 몰랐다고, 죄송하다는 말을 하자 금세 눈이 둥그레졌다.
‘그걸 몰랐어?’
뭐, 보통 성격 좀 있다 하는 남자 선생이었다면 웃기지도 않는 소리라고 일축했겠지만, 정말 몰랐다.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은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왜 그걸 모르지……. 놀랍다는 듯, 혼자 중얼거리는 그녀의 앞에서 강희찬은 다시 한번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까의 서늘한 냉기가 금방 사라진 얼굴로, 그녀는 교무실을 향해 뒤를 돌았다.
‘유니폼, 갈아입어야 합니까?’
교내에선 교복을 입어야 한다. 강희찬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교칙 중 하나였다.
몸을 틀어 뒤를 돈 여자는 강희찬이 입고 있던 훈련용 유니폼을 위아래로 슥 봤다. 그리고 인지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음……. 잘생겨서 유니폼도 잘 어울리는데, 그냥 입고 있자.’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좋을지 모르겠는 말을 남기고, 작은 몸은 교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그때의 작고 단단해 보이는 인상과 겹쳐진다.
주제에 ‘선생’이라는 거다. 휘청휘청.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이었다. 어딘가 맹하고, 세상 물정에도 어두운 전형적인 젊은 공무원이라도, 어느 한구석은 단단한 모습도 있었다.
‘다른 곳에서도 나한테 하는 것처럼 똑 부러지게 굴었으면 좋으련만…….’
강희찬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됩니까?”
무심한 질문이 던져진 순간, ‘네?’ 하고 되물은 사람은 경계하듯 몸을 옆으로 물렸다. 추행을 당한 것도 아니고, 저 경계하는 얼굴은 대체 뭐란 말인가.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잘 기억하고 있다가 얼추 비슷한 놈 보이면 소개시켜 줄지도 모르잖아요.”
지나치게 평이한 어조였다. 마치 남자에게 남자를 소개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투에 이선은 기가 막혔다. 해주지도 못할 거면서. 괜한 심술이 솟은 이선의 입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디카프리오가 좋다고 하면 소개해 주시게요? 타이타닉 때로.”
하지만 그는 심술로는 이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강희찬의 입술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죽었죠? 마지막에.”
“…….”
마치 죽어서 통쾌하다는 듯. 비릿하게 웃는 모습에 이선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열 번 넘게 봤지만 모두 울었던 명장면을 앞으로는 다른 감정으로 보게 될 것만 같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가 다른 영화에 나오는 디카프리오에게도 해코지를 할 것만 같다. 타이타닉에 나왔던 여주인공의 약혼자보다 더 무서웠다.
덜덜 떨고 있는 이선을 대신해 강희찬이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어떤 게 좋은데요. 연예인? 운동선수? 평소에 타입이 어떤 건데요?”
나직한 목소리가 대답을 종용했다. 어느새 남자의 얼굴엔 내려앉은 가로등 불빛만큼 다정한 온기가 번져 있었다.
철벽과 같은 경계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대신, 그 자리엔 허탈하다는 기색이 어렸다.
“…운동선수는 저 좋다고 안 할 텐데요.”
“얘기나 해봐요.”
“그냥… 전, 저 좋다는 사람이면 돼요.”
잠시 입을 다물고 경청하던 강희찬은 미간을 와락 구겼다. 그 뒤의 말을 기다렸으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게 끝입니까? 더 없어요?”
“네? 아……. 네.”
“그쪽 야구선수 안 하길 잘했네요.”
허무한 대화다. 강희찬은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이선은 갑자기 튀는 대화의 종을 잡을 수 없었다. 이상형을 말하라고 들볶더니, 또 딴소리였다.
“왜요? 저도 잘했을 수도 있어요. 뭐 못한 적은 없었어요.”
이선은 꽤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비웃지도 않았다. 대꾸도 안 해주다니.
“야구는 공 하나 골라내는 싸움이에요. 정 선생처럼 그렇게 ‘아무거나 다 좋아요’ 했다가는 스윙 삼진 먹고 끝. 너무 뻔해요.”
“그런가요…….”
“사람 만나는 거라고 다를 거 없어요. 고쳐서 쓰겠다? 웃기지도 않는 소립니다.”
세 살이 어린 인생 선배는 딸 가진 아버지라도 되듯 단호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골라야 돼요. 생긴 것도 멀끔해야 하고, 성격도 좋고, 제 살길은 찾아 사는지도 봐야 하고. 하나하나 그렇게 따져야 합니다. 알겠어요?”
속사포처럼 나온 말의 끝은 당부였다. 이렇게 길게 입을 여는 건 처음이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멍했던 이선에게도 근원적인 물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저를 좋다고 할까요?”
괜찮은 남자는 죄다 임자가 있거나 게이라는 농을 종종 듣곤 했다. 하지만 그거야 당연히 농담이다. 멀쩡한 여자가 살다 게이인 남자를 좋아할 확률은 게이가 일반적인 성향의 남자를 보고 반할 확률보다 현저히 낮다.
이선은 씁쓸하게 웃었다.
“커쇼, 범가너도 실투는 던져요. 살다 보면 그런 미친놈이 하나 정도는 있겠죠.”
“…좋은 말 아니죠?”
인상을 쓰고 고개를 홱 돌린다. 강희찬은 그 새침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인간이란 게 자기 욕하는 건 척척 알아듣는다. 야구에는 관심도 없을 주제에, 커쇼나 범가너는 들어보지도 못했을 사람에게도 의도는 전해지나 보다. 이 얼마나 기특한가.
“잘 알아들었으면 더 얘기해 봐요. ‘아무거나 다 좋아요’ 따위 소리나 하지 말고.”
“그렇게 물어보셔도, 보통 이상형이라는 걸 생각하고 살진 않잖아요.”
말에는 묘하게 투정기가 섞여 있었다. 그게 또 묘하게 어울렸다. 어린애의 애교를 보는 기분으로 넘어가 볼까 잠깐 생각했지만, 그래도 강희찬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만을 종용했다.
결국, 이선은 한숨과 함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그렸다.
“그래도… 키는 좀 컸으면 좋겠네요. 아버지처럼 키 큰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아요.”
‘아깐 아저씨 좋아하는 거 아니라더니.’
말꼬리를 잡으려다가 입을 꾹 눌러 닫았다.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선생이 삐치기라도 한다면, 대화가 끊길지도 모른다. 선생은 생각보다 애새끼 같은 구석이 있었다. 강희찬은 앉아 있는 이선의 몸을 훑으며 신장을 가늠했다.
“아버지는 키가 컸어요?”
“음… 사실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잘 기억이 안 나요. 결혼사진 보면, 아마 저만 하셨을 것 같은데…….”
“그게… 큰 편이에요?”
운동선수, 그것도 투수를 기준으로 둔 자신이 일반인의 체구를 가늠하긴 힘들었다. 야구선수가 아닌 지인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시절 안면을 텄던 농구부들이고. 그러니, 강희찬은 본인의 기준으로 일반인의 키를 평가하는 게 정확하지 않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혼란으로 인해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선은 미심쩍은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전반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은 사람을 다소 짜증 나게 만들곤 한다. 이선의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아버지 세대에서는 조금 큰 편 아니었을까요?”
“아아.”
지옥의 주둥아리라기보단 진실의 주둥아리로 바꿔야 한다. 저런 솔직한 반응을 보이니 주변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거다.
“그럼 투아웃은 왜 좋아했어요?”
손에 쥔 맥주캔을 구긴 순간, 이선을 향해 그가 물었다. 오늘따라 말도, 질문도 많았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 ‘대화’라는 걸 해본 건 극히 드물었다. 아니, 있긴 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오롯이 자신의 얘기만 꺼내고 있었다. 듣는 게 익숙한 정이선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우울하고, 심심하며, 밋밋하기만 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말해본다는 건 생각보다 많이 창피한 일은 아니었다.
“키 큰 편이에요. 186 정도 될걸요? 강희찬 씨보다 조금 작나?”
이선은 엄지와 검지 사이에 대략 엄지손가락 길이 정도의 틈을 만들었다. 조금의 기준이 뭐야. 손가락 틈새로 비웃음이 지나갔다.
“아닐걸요. 내가 87이에요.”
“어? 진짜요? 아닐 텐데…….”
“국제대회 나가면 꼬박꼬박 쟀어요. 투아웃이 키 속인 겁니다.”
손은 내리지 못한 채 공중에 멍청히 떠 있었다. 강희찬은 직접 그 손을 잡았다. 검지와 중지. 손가락 두 개에 타인의 체온이 얽힌다. 손가락을 조금 더 안으로 말아 쥐자 체온이 닿는 부분은 조금 더 많아졌다. 그는 그대로 이선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놨다.
선생이 보여줬던 손 틈의 간격이나 저번에 이 동네에서 투아웃과 마주쳤을 때. 모두 고려해 본다면 대략 80이 조금 넘거나 간신히 되는 수준이겠지.
‘…인심도 후하다. 어떻게 저렇게 크게 속이고 다니는지.’
그걸 믿는 선생도 어지간히 눈썰미가 없었다. 뭐, 매일 운동선수를 보고 사는 자신처럼, 선생 역시 매일 땅꼬마들만 보고 있을 테지. 뭐가 됐든 기준이 이상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선생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혼자 고개를 갸웃대고 있었다. 그러다 무엇이 이상했는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만약 키가 어쩌고 따위 소리를 계속한다면, 내일 야구장에서 직접 키를 재고 사진을 보내야지.
순진한 사람을 오래도록 속여먹은 투아웃을 욕하고 있던 때였다. 이선은 희찬을 향해 고개를 틀고 입을 뗐다.
“…근데, 왜 투아웃이에요? 투아웃이라고 하니까, 원아웃도 있는 것 같…….”
“…….”
“아…….”
선생은 질문하는 동안 스스로 답을 깨우쳤다. 이런 점은 또 똑똑한 선생다웠다.
“입을 안 다물면 죽나…….”
답지 않게 험한 말이다. 중얼대는 말을 들어보니, 선생은 제대로 정답의 방향을 잡았다. 강희찬은 웃음이 나오려는 입가를 한 손으로 눌렀다.
“나중에 친구 많이 사귀면, 송 PD는 버려요. 좋은 친구 아닌 것 같은데.”
“예. 그러려고요.”
물론, 단호하게 나오는 대답 소리에 입술 끝이 올라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기특하다. 선생이 몇 살 정도만 어렸어도, 뒷머리에 손을 갖다 대고 몇 번 쓰다듬었을지도 모른다. 가는 머리카락이 덮고 있는 작은 머리를 세게 문지르면 햇빛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시답잖은 농담의 연속이었다. 평소라면 두 마디 이상 이어지면 금세 질리고야 말았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선생은 아주 능숙한 달변가도, 개그맨도 아니다. 묻는 말엔 성실히 대답해 주지만, 그게 다였다. 툭 던지는 질문 하나에 열심히 생각하고 입을 연다. 바보 같을 정도로 착실한 사람과의 대화는 예상보다 좋았다.
조금 더 무언가를 물어서, 저 입이 움직이는 걸 보고 싶었다. 자신의 질문에 꼼꼼하게 답하는 동안 선생은 오롯이 그의 옆에 있었다.
“그럼 투아웃은 왜 좋아했어요? 키가 다예요?”
“무슨 그런 걸 물어보세요. 기억도 잘 안 나는데……. 강희찬 씨는 여자친구 왜 만났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으세요?”
“소개받아서 만났고 지금은 헤어졌습니다. 됐죠? 난 대답했으니까 정 선생도 하세요.”
속사포같이 쏘아지는 신변잡기를 채 이해할 시간도 없었다. 강희찬은 대답을 종용하다 못해 삥을 뜯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선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강희찬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게 송재혁이 저번에 얘기했던, 진단서 어쩌고 하던 그 엄청난 일의 장본인일까?
하지만 물어볼 자신은 없었다. 만일 저걸 묻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비밀을 내어놓으라며 자신을 협박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확률이 한없이 1에 수렴했다.
정이선은 굳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타입이 아니었다. 대신, 오래된 잡동사니가 담긴 상자들을 여는 기분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냥… 그냥 좋았던 것 같은데…….”
“뭡니까, 그게. 그냥이 어딨어요.”
굳이 따지자면…….
눈을 감으면, 항상 햇살 가득한 날이 선명해진다. 햇살은 기분 좋지만, 아직 꽃샘추위가 오락가락하던 3월 중순쯤이었다. 막 새내기 태를 벗을 스물하나의 정이선은 이제 제법 학교가 익숙했다.
오전 강의만 있던 어느 날, 이선은 1학년 때 교직과목으로 갔던 적 있는 특수학교에 갔다. 대단한 봉사 정신 때문은 아니었다. 봉사활동을 오는 스무 살짜리 대학생들에게는 응당 보이는 정도의 얄팍한 친절. 그 호의에 기대어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렇게 같은 과목을 이수하는 인근 대학의 사범대 학생들과 섞여 봉사활동을 했다.
무리와 쉽게 어울리지 못하던 자신과는 달리, 그곳에서 근무하는 공익근무요원 하나는 누구와도 친했다. 스스럼없이 누구에게나 말을 걸었고,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휴게실 한쪽에서 외딴 섬같이 앉아 있던 이선의 앞으로 왔다.
‘너도 가자. 알았지?’
내려다보며 웃는 얼굴이 햇살 같았다. 이선의 뒤에 있던 창에서 넘어오는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게 시작이었다. 웃어주기만 해도 좋고, 얘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정이선이라도, 그의 앞에선 그럴듯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마음은 점점 변한다. 어느새 그가 학교의 신입생과 연락을 나누는 것을 보며 기분이 가라앉았고,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이틀을 앓았다.
그 정도면 인정해야 했다. 좋아한다고.
3년. 어영부영 흐르는 시간 속에서 착실히 커진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그의 앞에서 이선은 입을 열었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차마 너를 좋아한다고, 온전히 전하지도 못한 마음이었다.
브레이크를 걸듯 커밍아웃을 하고, 졸업 후 입대를 했다. 의경이 아닌 육군 현역으로. 어머니는 제법 놀라셨지만, 시기가 맞지 않았다는 핑계를 댔다.
다시 한번 도망친 곳에서의 일상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마음도 정리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식어 빠진 치킨을 테이블 위에 두고 재회한 얼굴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감정의 크기는 몸집을 불렸다. 그것이 두려워서, 이선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을 마주치면 들킬까 봐. 그래서 그가 자신을 혐오스럽게 여길까 봐.
‘넌, 그런 말 하고 그냥 이렇게 입대해서 끝이야?’
‘…….’
‘나 평생 안 보려고 했어?’
나긋한 책망은 브레이크를 가볍게 부수었다. 그 이후로 마음은 느리든 빠르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달려왔다.
대단한 감정이 아니다. 5년을 이어온 마음이라고 하면 얼핏 절절해 보이겠지만, 실상은 관성에 가까웠다. 어쩌다 10년 넘게 알아오는 송재혁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자신은, 10년도 채 살지 못한 남편과의 추억을 양분 삼아 그보다 더 긴 세월을 버텨온 모친이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기시감을 느꼈다.
홀로 젊은 세월을 보낸 어머니를 닮고 싶어 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종종, 백만 송이 장미를 흥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알아채고, 이선은 놀라곤 했다.
“…웃는 게 멋있었나 봐요. 키가 커서, 내려다보면서 웃으면 잘생겼거든요.”
“좋아한다는 말은 해봤어요?”
송재혁조차 이렇게 직접 물은 적은 없었다. 뜻밖의 공격에 이선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고개를 좌우로 느릿하게 흔들었다.
“말해보지 그랬어요. 잘됐을 겁니다.”
“…아닐 거예요. 여자친구 있었거든요, 계속.”
“정 선생은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여자 좋아하는 남자면 동성애자를, 달갑게 여길 리가 없어요.”
말을 듣는 사이, 강희찬의 눈이 이선을 향했다. 나름대로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쪽이 남자 좋아한다는 거 알면서도 계속 옆에 두고, 심지어 게이들 있는 술집까지 들어갑니다.”
“…….”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예요.”
나직한 목소리는 선고와도 비슷했다. 이런 말투는, 그러니까, 뭐든 본인이 내뱉는 것이 정답이라는 확신에 찬 말투는 남자와 참 잘 어울렸다.
“…그렇군요.”
“안 믿어요?”
“네. 뭐. 그렇죠?”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규진이 자신과 함께 가게를 찾은 건, 쉽지 않은 인생을 살 친구를 살뜰히 챙긴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 시절―그리고 아마도 지금까지도―의 신규진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 이후는… 본인이 상대적인 다수에 속하는 것을 증명받고 싶을 뿐이고.
햇살같이 웃을 줄 알던 사람의 얼굴에서 지독한 열패감만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건 정이선에게도 썩 유쾌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돌릴 순 없었다.
반짝이지 않는다는 걸 이유로 마음을 저버릴 순 없었다. 배신이다. 자신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이미 시원찮은 인생에서, 하나 더 하자가 늘어가는 걸 원치 않았다.
“그쪽…….”
상념에서 이선을 꺼낸 건 나직한 목소리였다. 이선은 멍했던 눈의 초점을 맞추었다.
“학교에 젊은 여자 있죠?”
“…네?”
여자야 많다. 대학부터가 대표적인 여초 학교였으니까. 그 사람들이 졸업장을 받고, 자격증을 받아서 교단에 서는 사회다. 당연히 학교 자체에도 남자보다는 여자 선생님들이 많았다. 게다가 졸업 후 발령을 바로 받으면 나이도 꽤 젊고. 그가 말하는 ‘젊은 여자’를 다섯쯤 떠올릴 수 있었다. 이선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물은 건 그런 불특정 다수가 아니었다.
“저번에 훈련 중에 구경 나왔던 여자 있잖아요. 좀 더 젊은 쪽.”
“아, 경원 쌤이요?”
“이름이… 경원이에요?”
차분했던 목소리가 확 뒤집힌다. 과자 봉지를 보여줬을 때보다 더욱 미간이 구겨졌다. 뭘 잘못 말했나. 이선은 기세에 밀려 쭈뼛대며 긍정했다.
“그 여자, 정 선생님한테 마음 있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예?”
이선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오늘 들었던 소리 중에 가장 뜬금없었다.
“아까 얘기했잖아요, 감이 좋은 편이라고.”
“그냥 같은 교무실 쓰는 선생님이라서 그러시는 거예요. 김 선생님, 안 그러세요.”
“그걸 정 선생이 어떻게 압니까?”
그럼 너는 어떻게 아냐.
반발심이 비죽 고개를 밀었다. 하다 하다 별소리까지 다 듣고 있었다. 정이선은 문득 시간이 궁금했다.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엔 이미 2시에 가까운 시간이 찍혀 있었다.
…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듣자고 지금 시간까지 밖에 있었다. 옅은 한숨이 밤공기를 갈랐다.
“됐습니다. 이 얘기 그만할래요. 아까부터 제 얘기만 하고 있잖아요.”
“그럼 정 선생도 물어보세요, 나한테.”
“별로 궁금한 거 없어요.”
“솔직히 말해봐요. 학교 다닐 때, 애들이 욕 많이 했죠? 싸가지 없다고.”
자꾸 근거 없는 추측이다. 이선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재차 결백을 강조했다. 그런 얼굴을 보고서도 강희찬은 가소롭다는 듯 픽, 하고 웃었다.
“왕따를 재수 없어서 당했을 겁니다. 남자 좋아해서가 아니라.”
“…왕따까진 아니었어요.”
이 정도로 지내봤으면 대충 안다. 말 자체에 악의는 없다. 그랬기에 이선 역시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약간 표현의 오류를 정정하는 수준으로.
“원래 호구랑 왕따한테는 너 호구, 왕따라고 얘기 안 해줘요. 그래야 계속 벗겨 먹을 수 있으니까.”
“…이 얘기 안 한다고 했잖아요. 재미없어요.”
이선은 강희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다. 꽤 어린애 같은 행동인데, 그게 또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
하지만 선이 예쁘게 떨어지는 옆모습도 아니고, 오른뺨이나 겨우 보여주는 각도가 안타깝기만 했다. 정수리를 손으로 잡아채서, 얼굴이 보이도록 억지로 잡아 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힘 조절이 없는 잽의 연속이다. 전의를 상실한 정이선은 다시 입을 다무는 거로 백기를 들었다. 반응을 기대했지만 돌아오지 않으니 강희찬은 괜히 심심해졌다.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초등학생 남자애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대화가 이어져야 재밌다.
“궁금한 거 없으면 내가 계속 물어봐야지.”
“또 뭘…….”
“전화번호나 좀 압시다.”
불평하면서도 반은 포기 상태였던 정이선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남자의 입에선 의외의 말이 자꾸 쏟아졌다.
멍한 채, 말이 없는 이선의 얼굴을 잠시 보더니, 강희찬은 재차 입을 열었다.
“정 선생은 내 번호 아는데, 나는 모르잖아요. 그리고 내일 애새끼랑 통화하려면 번호는 알고 있어야 받든 말든 할 거고.”
“아…….”
“전화 좀 걸어봐요.”
강희찬은 바지 주머니에 얌전히 들어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앉은 채로 앞주머니에서 물건을 빼느라 잠시 시선이 떨어지는 동안, 이선의 얼굴은 뻣뻣하게 굳었다.
당연히 없었다, 번호 따위.
“주, 주세요. 찍어드릴게요.”
어색하게 내민 손 위로 표정이 없는 강희찬의 눈길이 닿는다. 잠시 어색했지만, 곧 손 위로 핸드폰이 올라왔다.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삼킨 이선은 매끈한 기계를 가볍게 쥐었다. 자신의 것은 아니었지만 익숙했다. 그가 이선에게 사줬던 것과 동일한 기종이었다. 비록 색은 달랐지만.
잠금이 풀리고, 키패드가 띄워진 화면 위에서 이선은 조심스레 번호를 찍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그에게 넘겼다. 혹시라도 남의 물건을 떨어트릴까 봐 주의 깊게 번호를 찍던 자신과는 달리, 긴 엄지손가락 두 개는 재빨리 저장에 필요한 칸을 채웠다.
옆에서 흘긋 엿본 이선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자, 잠깐만요. 지금 ‘공무원’이라고 저장하셨어요?”
“네. 왜요?”
고개를 순순히 끄덕이는 모습만 본다면, 세상 착한 어린아이와 견주어도 될 정도다. 하지만 그런 예쁜 모습이라도 지금은 이선의 미간을 구겨지게 할 뿐이었다.
“뭐예요, 그게. 저도 이름이 있고, 한국에 공무원이 저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는 공무원은 그쪽 하나예요.”
“제가 강희찬 선수를 ‘야구선수’라고 저장하면 기분이 좋지는 않으실 거잖아요.”
항변하는 이선을 그가 빤히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이 쭉 유지되더니, 이내 그는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가락을 움직였다.
지이잉.
옆에 두었던 자신의 핸드폰이 울리자 이선은 반사적으로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내 긴 손가락이 이선의 손에서 그것을 앗아갔다. 앗, 하고 놀랐을 땐 이미 늦었다.
“저장, 아예 안 됐는데요?”
자신의 방향에서 제대로 보이도록, 얼굴 옆에서 핸드폰 화면을 보인다. 그 모습이 마치 예전 핸드폰 CF의 한 장면 같다. 물론, 광고라기엔 너무도 무서운 순간이긴 했지만.
“아, 제가… 처음 써보는 기종이라서, 그때 잘못 눌러서 번호가 날아갔었거든요…….”
이선은 기가 죽은 채 쭈뼛댔다. 그의 손에서 묵직한 핸드폰을 가져왔을 때, 이제껏 익숙해졌던 핸드폰이 다시 한번 불편해졌다.
…귀신이 따로 없는 수준이다.
자기는 저장도 하지 않았으면서 감히 나보고 뭐라고 해?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뚱한 얼굴을 보며 이선은 침을 삼켰다.
이렇게 귀신같은 사람인 줄 미리 알았다면, 송재혁을 좀 덜 구박했을 거다. 남의 비밀을 까발린 탓에 미안해서 오버하는 줄만 알았는데, 직접 겪어보니 남자는 확실히 귀신같은 구석이 있었다.
이선은 눈치를 보며 재빨리 부재중이 뜬 번호를 저장했다. 강희찬 선수.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이름을 치는 동안 그의 시선이 자신의 손끝에 머물렀다. 저장을 마친 이선은 흘끔 옆의 핸드폰으로 눈을 두었다. 유려한 손놀림은 ‘공무원’이라고 저장됐던 연락처의 이름을 수정하고 있었다.
“됐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저장을 마침과 동시에, 강희찬은 핸드폰을 이선의 쪽으로 보였다.
같은 기종인 핸드폰은 자신의 손에선 묘하게 커 보였는데, 이 손에 있으니 딱 알맞게 어울린다. 역시 키가 큰 편이라서 손도 큰 걸까. 크기가 크면서도 둔해 보이지는 않는 게 참 신기했다.
정이선이 아는 손 중 가장 큰 손을 보다 보니, 자연히 생각은 가장 작은 손을 가진 사람에게로 향했다. 새 연필을 쥐면 묘하게 버거워 보이고, 그래서 야구공도 자주 놓친다는.
“그것도 감사합니다. 산이가 되게 좋아할 거예요.”
“정 선생님.”
분명 좋아할 거다. 기뻐할 얼굴을 떠올리던 이선의 얼굴엔 절로 웃음이 번졌다. 아직 설레발이기는 하지만, 강희찬이 이만큼 신경을 써준다는 걸 아이가 안다면 기뻐할 것이 틀림없었다.
강희찬은 대충 봐도 기쁜 게 티가 나는 얼굴을 응시했다. 고작해야 애새끼가 뭐라고. 그런 말이 속에서 차올랐지만, 정작 나온 건 전혀 다른 소리였다.
“나랑 만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