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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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꼽을 수는 없었지만, 마운드에 서면 항상 서늘했다.

지글대는 태양 빛과 달궈진 모래로 뿜어져 나오는 열기 탓에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여름도, 공 하나를 던질 때마다 곱아들 것 같은 손에 입김을 불어야 하는 늦가을도. 언제나 그랬다.

손끝으로만 로진을 만지고 다시 바닥에 던져 놓았다. 풀풀 날리는 하얀 송진 가루가 이쪽으로도 옅게 퍼지자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그사이, 응원석 앰프에선 한 번 더 노래가 바뀌었다. 앰프가 터져라 나오는 반주는 이제 막 타석에 들어오는 용병 타자의 등장곡이다.

야구팀이 시즌 중 용병선수를 바꾸는 건 그다지 별난 일도 아니다. 컵스는 대략 4, 5년째 용병 투수 둘이 자리를 지켜왔지만, 타자의 경우는 강희찬이 1군에 있는 동안은 매해 얼굴이 바뀌었다. 오늘의 상대인 이 팀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즌 중에 새로 바뀐 저 용병 타자가 입국한 게 2주 전이었나?

한증막 같은 더위가 일상인 대구의 날씨 탓에 턱 밑으로 땀이 주룩 흘렀다. 팔로 땀을 훔쳐내며 강희찬은 생각했다.

아직 한국 생활과 팀 적응이 덜 되어서, 감독은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첫 주엔 7번 타순에 넣었다. 얼마 후엔 6번으로 넘어왔고, 오늘은 5번에 이름을 올렸다. 감독의 배려 덕에 하위타순에서 머물렀지 사실은 4번 타자감이다. 뭐, 용병 타자를 하위타순에 세울 생각으로 데려오는 구단은 없긴 하겠지.

잠시 주심 뒤편의 전광판에 눈을 두었다. 7회 말까지 나란히 점수를 내지 못한 공평한 스코어가 그곳에 있었다. 구태여 외야 전광판까지 보고 싶진 않다. 이미 6회에 0이 열두 개가 연달아 박힌 것을 보고 질려서 눈을 뗀 바가 있었다.

강희찬이 기억을 떨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안정원은 주심에게 타임 요청을 하고 마운드를 향해 걸음을 뗐다.

잠깐 눈을 뗀 사이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던가?

고개를 돌려 3루 더그아웃을 봤지만, 투수코치는 감독의 옆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어느새 안정원은 마스크를 위로 올리며 그의 앞에 섰다.

“거르자.”

미트로 가린 입이 짧게 뱉었다. 뭔가 상당히 문장요소가 부족했지만, 투수는 단번에 그 의도를 파악했다.

‘한국 적응’을 이유로 하위타순에 섰지, 사실 용병 타자의 컨디션은 당장 지금 4번에 서도 이상할 게 없다.

그를 상대했던 앞선 두 타석의 기억을 떠올렸다. 첫 타석엔 풀카운트까지 갔던 삼진, 두 번째엔 중견수가 처리한 외야 플라이. 점수로 연결되진 않았지만, 중간중간 나왔던 파울 타구는 모두 포수 후면으로 넘어갔다. 뭐, 똑같은 구장에서 똑같은 타구를 봤으니, 포수 역시 지금쯤이면 큰 거 한 방을 맞을지도 모른다고 느꼈을 거다.

강희찬은 다섯 살 많은 선배를 내려다보며 글러브로 입을 가렸다.

어차피 지금 타이밍에 포수가 올라온 거다. 마운드 방문 이유 따위야 야구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을 가리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한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입을 가려봐야 할 말은 별거 없긴 했다.

“쫄려서요?”

“오냐. 쫄려서 똥 나오겠다, 새끼야.”

“치질은 계속 병원 간다면서.”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툭 뱉은 말에 안정원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구장 곳곳마다―심지어 마운드까지 걸어오던 길 어딘가에도 초소형 카메라가 심어져 있을 거다― 있는 촬영용 카메라 하나가 안정원의 눈에 들어왔다.

이 타이밍이면 얘기를 나누는 배터리의 모습이 클로즈업되고도 남았겠지. 정작 입을 가리고 똥이니 치질이니 하는 대화나 나눈 걸 알면 당장 전파 낭비라고 생각하고 카메라를 돌릴 테지만.

안정원이 미트 안에서 씁쓸히 웃는 걸 볼 수 있는 사람은 눈앞의 어린 투수뿐이다.

포수의 자의적인 판단만으로 타자에게 고의사구를 주는 게 가능한 일일까?

적어도 강희찬이 본 범위 내에선 없었다. 갓 1군에 올라왔던 신인 시절에 배터리 합을 맞춰봤던, 지금은 2군 배터리 코치를 하는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역시도 벤치 지시가 없다면, 신인 투수였던 자신에게조차 고의사구 사인을 내지 않았다.

요기 베라가 지금 한국에서 뛴다면 가능하려나. 그런 생각을 할 만큼, 강희찬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뻔히 사정을 알고 있는 어린 투수의 실없는 소리에 안정원은 맞춰주었다.

“뒤돌아 있어서 안 보이시나 본데요. 3루에 주자가 있습니다, 대투수님.”

이죽거리는 투로 긴장을 풀어주는 말에 강희찬은 흘긋 3루 베이스를 훑었다.

주자 뒤엔 주루코치가 지박령처럼 붙어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주루코치의 시선은 각자 입을 가린 배터리를 향한 채였다. 어차피, 5번을 거를 거라는 소리나 하고 있을 거다.

‘투아웃까지 잡혀 있는데 굳이 그래야 하나…….’

잠깐 들었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선수는 판단하지 않는다. 결정은 언제나 벤치에서 이루어진다.

안정원은 강희찬의 등을 미트로 두어 번 두드리고 돌아갔다. 포수가 홈 플레이트 뒤편에 앉고, 벤치에 있던 감독이 주심에게 사인을 주고, 타자는 장비를 풀고 1루로 걸어 나갔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마운드 위에서 지켜봤다.

마스크를 다시 내려쓴 안정원은 오른손을 잠시 들었다. 검지와 새끼손가락만이 들려진, 투아웃 신호를 보였다. 혹시라도 1, 3루를 채운 투수가 신경을 쓸까 봐 해주는 행동이었다.

강희찬은 입꼬리 하나 올리지 않고 수신호를 무시했다.

사인으로만 해도 되는 걸 굳이 마운드 방문 기회를 써가면서까지 포수가 올라왔다. 이유가 대충 짐작은 됐다. 잠실 시리즈를 마무리하고 인천에 갔다가 대구로 내려온 일정이었다. 6일 연속으로 이어지는 원정경기 중 오늘이 다섯 번째 경기였다. 그 기간 내내 안정원은 자신의 기분을 조심스레 살폈다.

눈치를 밥 말아 먹은 이승주조차 요 일주일은 야식을 먹자는 소리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숨만 쉬며 살고 있었다. 항상 배터리 호흡을 맞추는 주전 포수와 후배 투수가 보이는 이상 행동의 원인을 강희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

행정 구역상 자신이 사는 동네는 맞았지만,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보다 더 뜬금없는 축객령을 남기고, 비율이 좋은 뒷모습은 망설임 없이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강희찬은 선생이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봤다.

화가 나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는 건지. 그도 아니면 둘 다인지.

무어라 한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은 그저 헛웃음의 형태로만 입 밖으로 나왔다.

망부석처럼 서 있는 것도 우스워서, 택시를 잡을 만한 길가로 걸어 나갔다. 눈치가 좋은 택시 하나가 그의 앞에 정차할 무렵, 빠른 걸음으로 다시 골목 안으로 돌아갔다.

파란 차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아직 가진 않았구나. 그 생각 후엔 당연한 물음이 이어졌다. 그래서 왜 다시 여기로 돌아온 건데?

열 받는―그러나 당연한― 소리나 내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라진 뒷모습이 향한 곳을 따라 들어가려는 건 아니었다. 술 마시고 깽판 부리지 말라는 에이전트 대표의 당부가 ‘그럼 술 안 먹고 부리는 깽판은 된다’는 소리는 아닐 터였다.

그 잔소리가 아니더라도 구태여 저 아래로 내려간 사람을 따라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바람 난 애인을 잡으러 가는 꼴도 아니었다.

…차 타이어라도 걷어차면 경보가 울리려나.

잠깐 했던 쓸모없는 생각을 접었다. 타이어를 걷어차는 대신 푸른 차체의 조수석 문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싸구려 티가 나는 조명이 비추는 입구를 응시했다.

자신도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당연히 저 위로 나란히 올라올 남자 둘을 보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확인’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눈 한 번 떼지 않고 보내던 시선의 끝에 검은 무언가가 잡혔다. 지하에서부터 올라오는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쾅쾅대는 발소리는 골목 너비만큼 떨어진 강희찬에게도 선명히, 불쾌하게 닿았다.

저 새끼다.

적당히 살집이 있는 풍채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느꼈다.

적당한 인상에 적당한 풍채. 걸치고 있는 티셔츠와 청바지마저도 어디 하나 딱히 모자라진 않고, 적당하다는 인상을 줬다.

얼굴은커녕 이름 한 번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다. 확신하는 것도 우습지만, 단언할 수 있었다. 마운드에서 보는 타자가 과연 다음 공에 배트를 낼지를 예측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했다.

어린애들에겐 다정히 웃어주는 게 버릇인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화난 행세나 했다. 그러고서 만나러 간 것이 저 사람이다.

‘…….’

사람 면전에 대고 ‘너는 우선순위가 아니다’라는 웃기지도 않는 말이나 하고서 택한 게 저거란다.

건물을 빠져나온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강희찬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남자를 바라봤다. 선생을 마주했을 때보다는 눈높이가 맞을 듯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남자가 눈가를 슬쩍 찌푸리고 쭈뼛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적당할 정도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남자의 눈이 있었다.

‘저… 이거, 혹시 본인 차예요?’

남자는 자신이 기대고 있는 파란 차를 반쯤 구부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정답을 빤히 알면서도 묻는 말이었다. 강희찬은 속으로 고소를 터트렸다. 무릎 높이의 안쪽 아래. 모서리에 딱 걸치게 들어가는 스트라이크. 그것을 던지고 심판의 팔이 올라올 때와 정확히 일치하는 감정이었다.

강희찬은 남자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예. 그런데요.’

‘…네?’

뻔뻔하게 흘러나온 거짓말에 남자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무어라 대꾸를 하려는 듯 벙긋거리던 입을 빤히 바라봤다.

‘…네.’

결국, 남자는 강희찬의 거짓말을 지적하지 못했다. 그는 다가올 때와 비슷한 어정쩡한 걸음으로 길을 떠날 뿐이다.

골목을 나가는 동안, 몇 번이나 이쪽으로 돌아보는 시선을 무시했다. 어스름히 도로의 불빛이 넘어오는 곳으로 뒷모습이 사라졌을 무렵, 실소는 다시 한번 터졌다.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선생은 딱히 대단한 사람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저런 별거 없는 인간과 엮을 만큼 후진 것도 아니었다. 고작 저런 것과 자신을 비교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모진 소리나 내뱉고 간 거다.

‘하…….’

헛웃음이 터졌다. 찌질한 녀석이 걸었던 방향으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강희찬은 몇 번이나 웃어야 했다.

희로애락의 진폭이 적다는 평을 듣곤 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렇긴 했다. 물론 ‘좋음’보다는 ‘나쁨’에 치우쳐진 상태였지만, 어쨌든 그랬다.

항상 기분이 나쁜 채로 살아가던 강희찬은 깨달았다. 사람은 기분이 나빠도 웃을 수 있다. 그것도 꽤 여러 번.

그 이후였다.

그날 이후로, 이승주는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은―물론 평소에도 좋진 않았지만― 선배의 눈치를 살폈다. 층층시하 살얼음판으로 입궁한 조선 시대 세자빈의 기분으로 일주일을 버텨야만 했다.

사서 욕을 번다는 선배들의 타박과는 달리, 이승주는 제법 눈치껏 행동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팀 내 투수 중에서, 유일하게 강희찬의 쌍욕을 대놓고 받을 수 있는 짬이었기에 더욱 그의 기분을 살펴야 한다.

하지만 요 며칠 새 카드를 달란 말도 없이 얌전히 구는 이승주의 노력과는 별개로, 강희찬의 기분은 나아지지 못했다. 결국엔 선배이자 포수인 안정원까지 눈치를 살피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난스레 마운드까지 올라와서 고의사구를 하자 얘기하는 이유도 그것의 연장이었다.

어느새 스트라이크와 볼이 하나씩 잡힌 전광판을 봤다.

“…….”

첫 구는 바깥쪽 꽤 먼 코스에 방망이가 맥없이 따라왔고, 두 번째엔 같은 공을 던졌지만 속진 않았다. 6번 타자의 전 타석 성적이 어땠더라. 처음엔 삼진, 전 타석에선 포수 플라이였던가.

타자의 슬럼프가 길어지자 이제 슬슬 스포츠 채널이나 기사에서도 언급이 되기 시작했다.

타자의 슬럼프란 텍사스 안타든 바람의 신이 도운 홈런이든 어느 한 계기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사실 타자가 아닌 강희찬에게는 와닿지 않는 소리였다. 그저, 어쨌든 6번 타자의 슬럼프 극복의 계기가 오늘은 아니겠거니 하는 강한 예감이 들 뿐이다.

볼이 되어도 상관없을, 높은 코스로 들어가는 슬로커브.

미트 아래의 손가락이 낸 사인을 확인했다. 그리고 흘러나오려는 비릿한 웃음을 눌렀다.

아예 칠 것 같은 꼬락서니가 아니라는 건가.

타석 뒤에 앉은 포수에게는 더 잘 보이는 모양이다. 여유가 있는 카운트일 때 최대한 공을 쳐보며 타이밍을 맞추려는 생각인지 폼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18미터 앞에 떨어진 마운드 위에서도 알 수 있었다.

‘글렀군.’

익숙한 투구 폼의 끝.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포수의 미트 안으로 들어가는 걸 강희찬은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어지간히 느린 공을 던졌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주심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스트라이크 판정이었다.

82㎞/h

정면의 전광판에 뜬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이었다.

“씨발. 야, 이 새끼야. 똑바로 안 던져?”

헬멧을 벗은 타자의 눈엔 분한 기색이 어렸다. 강희찬의 입매가 비틀리며 웃음이 샜다. 명백한 비웃음임을 숨기겠다는 의도조차 없었다.

“그럼 쳐.”

야구장이란 언제나 신기했다. 귀가 떨어지도록 시끄러운 함성과 앰프 소리가 가득해도 10미터도 훨씬 밖에 있는 사람에게 목소리가 전해진다.

당연히, 18미터 앞에 있는 선수의 낮은 목소리라도.

뒤에서 붙잡으며 말리는 안정원의 손을 힘겹게 떨쳐낸 타자는 마운드를 향해 한 걸음을 떼었다. 웃음이 터진 강희찬은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마운드를 내려가기 위해 발걸음을 앞으로 틀고 걸었다.

“뭐, 왜? 뭐 하는 건데?”

영문도 모르고 마운드를 향해 달려오는 1루수와 3루수. 그 이후엔 뻔했다.

벤치 클리어링. 지금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는 투수를 제외한 양 팀의 모든 선수가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왔다.

“야, 이 씨발새끼야! 뭐? 그럼 쳐? 너, 씨발, 이리 안 와? 너 이거 안 놔?”

“사인 내가 냈다고!”

“아, 좀 놔, 새끼야!”

한 덩어리처럼 뒤엉킨 포수와 타자가 혼잡한 선수들 사이로 보였고.

“뭔데? 왜? 왜 싸우는 건데?”

“더운데 왜 싸우냐, 진짜.”

쓸모없는 기 싸움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들은 그저 구단 자체 벌금을 피하고자 그라운드로 나온 수준이었다. 쌍욕과 동네 마실이 공존하는 기묘한 광경이 마운드와 타석의 정 가운데에서 펼쳐졌다. 강희찬은 정신없는 풍경에 한숨을 쉬었다.

포수는 자신의 앞에 있는 타자를 몸을 날려 붙잡고, 1루수와 3루수는 마운드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온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자팀 투수 보호. 따로 벤치 클리어링을 대비한 훈련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환상의 호흡이었다.

전부 올라온 선수들의 한참 뒤로 밀려난 강희찬은 짧게 평했다.

대체 왜 싸우는 거냐는 눈치 없는 물음도, 당사자보다 더 목소리를 높이는 선배들의 고함도. 여름밤의 공기와 뒤섞인 그것들은 모든 것을 더욱 답답하고 무겁게만 만들고 있다.

중계방송이나 인터넷 기사에서야 요란법석을 떨어대지, 사실 한국에서 벤치 클리어링의 실상은 별거 없다. 스파이크를 신은 발로 이단 옆차기를 날리는 것도 아니다. 뭐, 그건 미국에서도 문제가 됐지만.

적당히 모여 있던 인파는 심판과 코치의 중재를 거쳐 해산됐다. 사람이 줄어드는 동안, 마운드에 끝까지 남은 건 안정원과 강희찬뿐이었다.

주심의 경기 재개 사인과 함께, 포수는 강희찬을 한 번 올려다보며 등을 두드리곤, 홈 플레이트로 돌아갔다.

몸을 틀며 미트를 피한 강희찬은 그제야 홀로 마운드 위에 설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외야에 있는 전광판을 바라봤다.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벤치 클리어링을 해도 볼카운트는 변하지 않는다. 방망이를 쥔 타자도 아직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이런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는 건, 아마도……. 슬럼프를 이길 계기 따위로 삼으려는 얕은 생각일까.

무른 사고방식이다.

숨을 내쉬며 타자를 향했던 시선을 마운드 정면으로 비틀었다. 여전히 그곳엔 포수가 있다. 하얀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가락이 미트 아래로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을 들은 이후로, 항상 안정원은 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랐다.

손가락은 짧은 순간 정확히 말했다. 사인을 해석한 강희찬은 세트 포지션을 취하기 전, 잠시 글러브로 얼굴을 가렸다.

…성격 좋은 야구선수란 없다.

‘투수만 성질 더러운 거 아니라니까.’

당연한 사실을 재차 깨닫는 순간이다. 익숙한 동작 후 손에서 빠져나간 공이 방망이를 지나치는 것을 확인했다. 그 이후는 간단하다.

“스트-라이크!”

트레이드마크인 주심의 삼진아웃 콜이 다 끝나기도 전. 강희찬은 먼저 더그아웃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이후는 간단했다.

8회에 홈런으로 겨우 얻은 한 점을 지키기 위해 마무리 투수가 등판했고, 네 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으며 경기는 끝.

보통이었다면 승리 투수가 되었으니 인터뷰를 하자는 말을 한 번이라도 들었을 텐데, 오늘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벤치 클리어링의 당사자가 되면 방송국도 조금 눈치를 보는 걸까. 어떤 곳은 오히려 더욱 불러내 곤란한 질문을 해보기도 하니, 그것도 방송국마다 성향 차이겠지.

‘매번 벤클을 일으키면 인터뷰에서도 벗어나는 건가?’

강희찬은 아주 잠깐 했던 안일한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만큼 경기 시간이 늘어날 테고, 퇴근도 늦어질 거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반드시 있다. 불변의 진리였다.

승리 투수이자 분란의 주인공을 대신하여, 팽팽한 균형을 깼던 홈런 타자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강희찬은 짐을 챙겼다.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주차장엔 구단 버스가 대기 중이다.

버스 안은 에어컨을 최대한으로 틀어놓아도 감춰지지 않는 땀 냄새가 가득하다.

경기 중 원정팀의 구장에서 샤워할 수 있는 선수는 극히 드물었다. 몇 안 되는, 샤워를 마친 선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늘 앉는 자리에 몸을 앉혔다.

두 대가 있는 이동용 버스 중 2호 차. 그곳엔 투수들과 불펜 투수코치 한 명이 함께 탑승한다.

항상 1호 차의 운전기사 뒷자리에 앉아 있는 감독의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오늘만큼 그 생각이 간절한 적은 없었다.

땀 냄새에 코는 금세 무뎌진다. 시트에 몸을 푹 기대고 자는 척을 하려 했다. 하지만 틈을 주지 않고 앞자리에 있던 불펜코치가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왔다. 별나게도 오늘은 2호 차에 탄 안정원도 함께였다.

“아아주 훌륭하십니다. 너 지금 아이돌 열애설 터진 거 누르고 실검 1위 찍은 거 알고 있냐?”

이강혁은 과장되게 엄지를 두 개나 치켜들었다. 반응할 건수를 찾지 못해 묵묵부답인 강희찬을 대신하여, 통로 건너편 옆자리에 앉은 박신우가 코치를 향해 입을 뗐다.

“희찬이 처음 벤클 하는 거라 더 그런가 봐요.”

“그러게. 나도 아까 기사 보고 알았어. 1년에 한 번은 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얌전하게 살았더라, 너.”

“…….”

턱 끝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코치를 향해 강희찬은 별수 없이 고개를 까딱 숙였다.

달리 보일 반응이 없었다. 다행히 코치는 다른 타박을 두지 않았다. 대신 타이르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따 전화해서 그냥 ‘형, 죄송합니다’ 한마디 해. 명진이도 잘 안 맞으니까 날카로웠겠지, 원래 안 그러잖아. 신우, 너 전화번호 알지? 얘한테 보내줘라.”

“네.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박신우는 바로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옆자리 후배에겐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 역시 조금 전까지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던 차였다. 터지기 직전의 댓글 창을 황급히 끄고, 메신저를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희찬의 곁에 둔 가방에 짧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

핸드폰이 울린 것을 알고도 확인하지 않는 그를 코치는 얼마간 보았다. 그리고 기색을 눈치챘다.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왜? 싫으냐?”

“…아닙니다.”

“싫으면 내일 기자들 카메라 앞에서 명진이랑 끌어안고 사진 찍으셔야지, 별수 있습니까. 참된 약속, 업데이트할 때 됐지? 안정원 이후로 없잖아.”

코치의 말에 옆에 있던 안정원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왜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지 원망스레 코치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순간은 짧지만, 기록은 영원했다. 강희찬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기사 사진 하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안정원이 몸쪽에 잔뜩 붙이며 공을 던지는 외국인 투수에게 어필하다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호기롭게 마운드로 향한 그는 결국 도미니카 출신이라던 용병 투수에게 선빵 한 번 날리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돌덩이 같은 주먹에 얼굴이 눌리는 순간이 기자의 카메라에 절묘하게 찍히고 만 거다.

벤치 클리어링 자체야 흔하진 않아도, 그렇게 별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주먹질까지 오고 간 여파가 큰 모양이었다. 결국 며칠 후 안정원과 용병 투수가 따로 만나서 화해를 했다는, 당연히 구단끼리의 말이 맞춰진 거짓 기사까지 내보내야 했다. 그러고 야구장에서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서 어색하게 포옹하는 사진까지 찍은 거다.

오바마와 푸틴이 같이 사진을 찍어도 저거보다는 덜 어색할 거라고. 당시의 강희찬은 짧게 비웃었다.

‘어쨌든, 그 짓을 해야 한다는 건가…….’

사진을 찍는 기자들도 웃음―혹은 비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실실 웃어대는 그 앞에서, 어색하게 입꼬리만 올리고 정상회담을 하는 국가 수장들처럼 악수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좆같다.’

좆같다는 말 외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딴 일을 자신에게 구단이 시킨다면, 진심으로 운동을 관두는 것도 고민해 볼 정도로 싫다.

강희찬은 침음하듯 한숨을 쉬었다.

“…호텔 가면, 전화하겠습니다.”

씹어 뱉는 듯한 말에 코치는 비식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어지간히도 싫었나 보네.’

두고두고 회자할 사진 한 방 정도는 남긴다면, 이 녀석의 평생 약점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이강혁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먼저 사과하는 게 사과받는 거야. 네가 먼저 전화해서 죄송하다 그러면, 아마 명진이가 더 미안해할 거다. 요새 방망이 안 맞아서 너한테 화풀이한 거 걔가 더 잘 알 거 아니냐.”

“가만 보면 욕은 희찬이가 다 들어먹는데, 네가 제일 못됐어, 새끼야. 거기에 대고 바로 다음 구를 벤클 낸 공이랑 똑같이 던지라고 사인을 주냐.”

코치의 잔소리 이후로, 박신우가 안정원을 타박하는 말이 덤처럼 붙었다.

강희찬은 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야구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텔이 저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지방 번화가 특유의, 낮은 건물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신축 호텔의 경관이 어딘가에서 본 듯 익숙했다.

“…….”

주차장에 들어가기 위해 버스는 호텔 앞을 스쳤다.

삭막한 입구 어딘가에 누군가가 서 있을 것만 같다. 밖을 더듬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밝은 빛을 한가득 받는 게 더없이 잘 어울릴 누군가가 자꾸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아서.

* * *

흔히들 선수들은 홈구장이 편하다는 인터뷰를 하곤 했다. 당연히 1년 동안 절반의 경기를 치르는 곳이 익숙하고 편한 건 사실일 거다. ‘익숙함’은 ‘편안함’의 일부였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잠실 구장은 넓기로는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한국에서는 가장 투수 친화적인 구장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강희찬은 낙후될 대로 낙후된 구장에 어느 정도는 가산점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넓은 구장이 주는 특유의 안정감과는 달리, 강희찬의 실제 기록은 조금 다른 말을 했다.

잠실에서 홈런을 가장 많이 맞았고, 좁기로 유명한 인천 구장에서 방어율과 피안타율이 낮은 걸 보고 안정원은 말하곤 했다.

‘잠실 넓은 것만 믿고 대충 던지다가 홈런이나 처맞는 거지.’

하지만 농 섞인 타박은 강희찬에게 아무런 타격감을 주지 못한다. 당연히 경기를 많이 하는 곳이니까 홈런도 많이 맞는 거라는, 지극히 당연한 소리나 하는 후배를 안정원은 못마땅히 봤다.

어쨌든, 구장의 넓이로 모든 투수에게 가산점을 받는 잠실 구장이라도, 그 장점을 모두 깎아 먹고도 남는 단점 역시 존재했다.

홈구장이다. 당연히 선수들의 출근 시간도 훨씬 전부터 주차장에서 사인을 받기 위해 공이며 매직을 들고 대기하는 사람들을 지나쳐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익숙한 곳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오늘도 여전히 비슷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평일이었다. 경기 시작 시각은 분명히 6시 반인데, 1시도 되지 못한 시간부터 유니폼을 챙겨 입고 있다. 평일 이맘때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지. 드는 의문 역시 항상 같았다.

“형, 안녕하세요.”

젊은 여자 몇몇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 사진을 찍어주던 이승주가 그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몇 년 동안의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유지해 온 행실 덕에, 이젠 어지간하면 강희찬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피사체가 잠시 딴짓을 하는 사이에도 여자들의 카메라 공세는 한결같았다. 저딴 얼굴을 찍어서 뭐가 즐거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강희찬은 짧게 고갯짓으로 후배의 인사를 받고, 걸음을 시원하게 뻗었다. 저기 보니, 입구 옆엔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는 직원도 있다.

“…….”

저 카메라는 볼 때마다 발로 걷어차고 싶은 충동이 인다. 또 무슨 쓸데없는 영상이나 올리겠다고 들이밀겠지. 강희찬은 카메라에 최대한 덜 노출되기 위해 빠른 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코치님.”

높은 목소리는 빠르게 스치는 풍경을 지나던 강희찬의 귀에 닿았다.

자신과는 거리가 먼 호칭에, 강희찬은 그저 다른 사람의 대화 중 흘러나온 단어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래에서 올라오는 앳된 목소리는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려주었다.

“강희찬 코치님!”

‘강희찬 선수’, 혹은 ‘강희찬’. 어디 병원에라도 간다면 ‘강희찬 님’. 이 정도가 익숙하게 들어본 수준이다. 자신의 이름과 뒤에 붙은 호칭이 영 낯설었다.

걸음을 멈추었다. 두리번대며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좌우로 고개를 돌려도 알 수 없던 목소리의 주인은,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눈에 들어왔다.

“…….”

허리께에도 채 닿지 못한 땅딸막한 신장의 아이와는 인연이 없다. 강희찬은 재빨리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이쪽을 향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강희찬은 낮게 혀를 찼다.

저런 부모들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키워주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이렇게 우리가 가정교육을 똑바로 하고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은 마음인지는 모르겠으나, 본인도 받지 못할 사인을 애 하나를 보내서 받게 하다니…….

물론 강희찬은 그런 부모의 의도 따위에는 한 번도 부응한 적이 없었다. 가족이 단체로 오든, 애새끼 혼자서 오든. 공식적인 사인회가 아닌 곳에서의 요청은 전부 거절이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무시하고 들어가려 했지만, 어쩐지 아이의 입에서 나온 호칭이 기묘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내렸다. 아이는 어느새 강희찬을 올려다보며 입을 벌린 채였다.

빠진 것보다 남아 있는 이를 세는 게 더 빠를, 듬성듬성한 앞니들은 어딘가의 기억 한편에 남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을 더듬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 속에선, 아이의 입에서 나온 호칭도 존재했다.

“너…….”

“…….”

잔뜩 찌푸린 눈가를 손바닥으로 짚다가, 문득 생각난 이름을 뱉었다.

“…강산?”

“박산인데요!”

1초도 지나지 않아 아이의 입에선 오답을 정정하는 대꾸가 흘러나왔다. 쨍한 목소리를 듣자 기억은 확신으로 변했다.

봉사활동 때 봤던 그 녀석이다. 더럽게 아이스크림을 줄줄 흘렸고, 사인을 받고 싶다고 시끄럽게 앵앵 울었으며, 제 담임 선생을 시켜 옥수수 하나를 다 뜯어 먹었던 버릇없는 땅꼬마였다.

자신을 알아봤다는 사실에 기뻤는지 슬슬 목소리의 주파수가 높아졌다.

“알았으니까 작게 말해.”

“네!”

“작게 말하라고.”

귓가를 몇 번 벅벅 문지르는 강희찬의 타박에 아이는 겨우 흥분의 기색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아까부터 들고 있던, 신장에 비하면 과하게 긴 선수용 방망이를 내밀었다.

“그때, 사인해 주신다고 약속했어요!”

“…….”

…했지. 했다. 원치는 않지만, 똑똑히 기억났다.

존재감을 너무 드러내는 울음소리에 짜증이 올라 반쯤은 억지로 약속했다. 게다가, 애새끼 하나 우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선생도 못마땅했고.

‘그렇다고 진짜 여기까지 사인을 받으러 올 줄이야.’

이 정도 정성이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방망이를 받아 들었다.

“매직은.”

짧은소리에 아이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벗고 지퍼를 열었다.

가방은 눈으로만 봐도 더럽고 엉망이었다. 더러운 꼴에서 고개를 돌렸을 때, 이승주와 시선이 맞닿았다. 못 볼 거라도 본 듯 눈을 둥그렇게 뜬 얼굴이 한층 멍청했다.

‘뭘 봐.’

중얼댄 강희찬의 입 모양을 알아듣고 재빨리 이승주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자꾸 눈알을 굴리며, 시선은 이쪽을 향했다.

강희찬은 반쯤 포기하고 아이가 건네는 매직을 받아 들었다.

“…너 학교 안 가냐? 공부 안 해?”

어센틱 유니폼도 그렇고, 프로야구 선수들이나 쓸 법한 방망이도 그렇고. 아이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하며 사인을 휘갈겼다.

똑같이 둥근 면이 있지만, 한 손에 그러쥘 수 있는 공에 비해 배트에 하는 사인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게다가 어디 받칠 공간도 없다.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며, 삐끗하지 않도록 느리게 사인을 하며 강희찬은 물었다.

“방학이에요!”

아…….

이제는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낯선 단어에 잠시 말을 잃었다. 방학을 한 자식과 휴가를 맞은 부모들이 함께 야구장을 찾는 건 이제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부러운 직업이다. 애새끼와 더불어 방학을 즐기고 있을 누군가가 떠올랐다.

말없이 눈을 빛내며 방망이와 자신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

…딱 말도 안 듣고 공부도 더럽게 못하게 생겼다. 언젠가 수원에서 아이의 담임 선생이 하던 고민도 있었고. 그렇게 틀린 추론은 아닐 거라고 강희찬은 확신했다.

“공부 안 하냐? 너 공부 잘해?”

“네!”

“…진짜?”

“포도도 다 모았어요!”

“…포도?”

뜬금없는 청과물 등판에 강희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녀석은 어른이 무엇에 의문을 가지는지 바로 알아챘다.

“수업 잘 들으면 선생님이 주는 거 있어요. 다 모아서 방학식 때 선생님이 선물도 줬어요.”

아이는 기다려보라며 다시 가방을 끌렀다. 저 가방은 학기 중엔 책가방이었고, 나들이 땐 잡동사니를 들고 다니는 외출 가방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요새 강희찬은 만져볼 일도 없는 갱지 몇 장과 함께 코팅된 예쁜 종이가 나왔다. A4용지 한 면 가득 채워진 포도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칭찬 도장과 비슷한 용도임을 금세 깨달았다.

자랑하듯 내미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3학년 3반. 딱 초등학교와 어울리는 귀여운 글씨로 인쇄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 옆에 아이가 직접 매직으로 쓴 것이 티가 나는, ‘17번 박 산’이라는 글자는 엉망진창이었고. 포도알이 가지각색의 스티커로 다 채워졌다.

“스티커, 뭐 하면 받는 건데? 백 점 받으면?”

“우유 다 먹는 거랑 의자 잘 들여놓고……. 중간놀이 끝나고 수업 종 치기 전에 교실에 들어오면 줄 때도 있어요!”

“…….”

…온종일 스티커만 뿌리고 사는구나. 속으로 혀를 낮게 찼다.

게다가 들어보자니, 그다지 공부와도 관련 있는 얘기들도 아니었다. 빈 설렁탕 그릇을 앞에 두고, 어렵게 얘기를 꺼냈던 젊은 얼굴이 아이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너 공부 잘해? 받아쓰기 백 점 받은 적 있어?”

“…아니요.”

포도알을 돌려주며 묻는 말에 아이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자신이 없는 분야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 탓에 좀 전의 흥분한 기색은 확 죽었다. ‘공부를 잘하느냐’는 질문만을 던졌을 땐 자신 있게 거짓을 내뱉더니, 객관적인 사실에는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순진함이다.

강희찬은 새삼스레 아이가 걸치고 있는, 기장이 긴 어센틱 유니폼을 봤다. 거의 원피스처럼 입고 있는 유니폼은 아마도 아이가 고집을 부려서 산 것일 테다.

어센틱 유니폼, 선수용 글러브나 방망이.

야구부였긴 했지만, 실제 프로야구엔 크게 관심이 없던 저와는 달리 친구들은 열광하는 물품들이었다. 그것을 갖고 있기만 해도 프로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최면 효과라도 있나. 진지하게 프로선수가 될 생각을 하는 녀석일수록 그런 물품들에 대한 애정도 높았다.

유니폼을 거의 원피스처럼 입고 있는 아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강희찬은 생각을 정리한 듯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야구선수 할 거냐?”

“네!”

“공부 못하는 빡대가리는 야구선수 못 해. 축구부나 들어가.”

그 순간, 절대 크진 않지만, 전달이 잘 되는 선배의 목소리가 이승주의 귀에 확 꽂혔다.

‘저게 대체 무슨…….’

당황이 가득한 얼굴로 선배가 있는 쪽을 봤다. 하지만 축협에서 고소나 당할 법한 소리를 하는 옆모습은 지독히 태연하다.

야구소년의 가슴을 후벼 파는 소리다. 자신이 만약 어린 시절, 현역 선수에게 저런 소리를 들었다면 야구 따윈 관두고 사흘은 울었을 거다. 다행히 어린애는 울지 않았지만, 사실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6학년 형들이 공부 안 해도 괜찮댔는데…….”

“너, 6학년 형들이 야구선수야, 내가 야구선수야.”

“…강희찬 코치님이요…….”

“그럼 누구 말이 맞아.”

“…코치님 말이 맞습니다.”

저번에 봉사활동인가 뭔가를 갔다더니, 거기서 만난 꼬맹인가?

어울리지 않는 선배의 호칭을 들으며 이승주는 짧게 이유를 추리했다.

그동안 강희찬은 주눅이 바짝 든 작은 몸에 대고, “야구선수는 시험 보고 뽑는다”는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나 했다. 아이의 얼굴은 어느새 폭격이라도 맞은, 폐허가 된 집터를 바라보는 재난민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승주가 황당한 투 샷을 감상하는 사이, 강희찬은 손에 들고 있던 배트를 아이에게 건넸다. 강희찬이 쥐고 있을 땐 적당한 길이의 배트가 아이의 손에 넘어오자 확실히 어색했다.

아이는 몸이 휘청했다. 그게 단순히 과하게 긴 배트 길이 때문인지 누군가의 말 때문인지는 사실 생각하는 게 무의미하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캐치프레이즈가 이승주의 머리를 스쳤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는커녕, 동심에 원자폭탄이나 떨어트리는 인간은 손이 비자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떼었다. 뒷모습은 서너 걸음 만에 구장 내부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입구를 바라보며 이승주는 되새겼다. 차라리 저게 낫다고. 추욱 처진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달려온 부모에게 쌍따귀를 맞아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다.

이승주는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 그래서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서둘러 구장 안으로 몸을 피했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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