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8/31)

  6K

운전대를 잡고 음악도 없이 얼마간 도심의 풍경을 스치다 보면, 어느 순간 정반대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

낮은 건물조차도 있을까 말까 한 수준으로 드문드문했다. 밭밖에 없는 풍경은 서울에서만 살았던 강희찬에게는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물론 학생 시절에 전지훈련을 갔던 곳도 많이 외졌지만, 적어도 그땐 주변에 밥을 먹을 식당 정도는 있었다.

한국 땅이 좁다고 하지만 또 이렇게 노는 공간이 있는 걸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밭을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라도 지으면 서울의 교통체증이 조금 덜어질까?

어린애도 코웃음을 칠 생각을 할 무렵. 강희찬의 눈에 저 멀리 번쩍이는 커다란 건물이 들어왔다. 시골이라고 하기도 미안한 휑한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인 건물이 이질감을 주었다. 이 역시 몇 년째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천 구장의 주차장은 세 칸을 차지하는, 초보운전자도 안 할 멍청한 주차를 해도 아무도 지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새한그룹에 돈이 남아돌았는지 설계자가 생각이 없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희찬은 단 한 번도 이 주차장에 차가 가득 채워진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강희찬은 한적한 주차공간을 무시하고 정상적인 사회인처럼 주차를 마쳤다. 주차장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서 있던, 연습복을 입은 선수 하나가 그의 차를 향해 다가왔다.

“왔냐?”

이정민은 오래간만에 본 동기 겸 고교 동창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강희찬이 1군으로 복귀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으니 과연 ‘간만’이라는 수식을 다는 게 합당한가. 이곳에서 흘러가는 이정민의 시간은 빠르면서도 느렸기 때문에 더욱 애매했다.

강희찬은 부모님 두 분 모두 서울 출신인 서울 토박이였다. 이천에 오는 게 아니라면 직접 운전을 해서 서울 밖으로 나올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친구는 익숙하지 않은―나름대로― 장거리 운전을 했다. 걱정과 고마움이 섞인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강희찬은 인사도 없이 대뜸 트렁크를 열고 안에 있던 커다란 배트 가방 두 개를 꺼냈다. 묵직한 가방은 이정민의 손으로 넘어왔다.

“고맙다, 야. 매번…….”

“들키면 네가 훔쳤다고 해.”

시큰둥하게 말하며 강희찬은 트렁크 문을 소리가 나게 닫았다. 순간적으로 묵직한 것을 들어서 뻐근했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한다. 이정민은 그 모습을 보며 낮게 웃음을 삼켰다.

운동선수들의 연봉은 철저히 성적에 기반한다. 그 ‘성적’이라고 하는 건 당연히 1군에서의 성과였다. 아직까지 한 번도 1군 구장을 밟은 적 없는 이정민은 몇 년째 기본 연봉을 받고 있었다.

‘구단에서 숙소 제공해 주고 삼시 세끼 밥도 챙겨주는데 돈이 들어갈 일이 뭐가 있냐?’

속사정을 모르는 친구나 친척들은 그리 말하곤 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선수 생활을 위해선 장비가 필요했다. 특히 타자에겐 시합과 연습마다 부러지는 나무 배트의 가격은 부담이 상당했다. 다행히도 경기 중 손상되는 배트는 구단에서 변상을 해주지만, 연습 중 부러진 배트는 오롯이 선수 본인이 부담한다. 몇 자루 부러지고 나면 2군 선수의 월급 따위는 금세 뛰어넘고 만다. 하지만 배트값이 아깝다고 타격 연습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2군에서 한솥밥을 먹던 고교 동창이 성공적인 1군 데뷔전을 마친 후, 이정민은 넌지시 부탁을 했었다. 혹시 남는 배트가 있다면 좀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고. 처음 한두 번은 강희찬도 정말 구단의 배트를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소리를 들었는지 본인의 판단인지, 이후로는 강희찬이 직접 배트를 사서 가져다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투수 주제에 어떻게 아는지. 방망이가 떨어질 시기는 귀신같이 맞히고 찾아온다. 성격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도무지 종잡기가 힘들었다. 물론, 이정민 자신은 꽤 오래전에 이 성격에 대한 판단을 마쳤다.

정말 미안했지만, 이정민은 모른 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나면서 친구의 연봉의 단위가 바뀌어도 미안함과 고마움, 창피함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은 비슷했다.

이정민은 늘 그랬듯 다섯 자루씩 나누어 담겼을 가방을 양쪽 어깨에 각각 멨다. 어깨에 올라온 묵직함에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한동안 장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비참한 안도감이었다.

“온 김에 감독님한테 얼굴이나 비춰.”

“됐어.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강희찬은 검은 차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이정민이 처음 이 차를 봤을 때가 스무 살이었다. 구단주를 겸하는 새한그룹 회장의 의전용 차량과 동일한 모델이었다. 기가 막힘과 동시에 부러웠다.

계약금으로 차를 뽑았다는 친구를 향해 느끼는 감정은 온전한 부러움만이 아니었다. 계약금을 받지 못하고 신고선수로 입단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씁쓸함과 함께였다. 그 차의 트렁크에서 나온 야구 배트를 받아 들었을 땐 더욱 비참했고.

뭐, 그때야 똑같이 기본 연봉을 받는 스무 살 선수라고 위안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자신과 강희찬은 처지가 너무 다르다. 부러움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손에 잡히는 범위에 있어야 생길 수 있는 감정이었다.

이정민은 이른 오후의 경기가 끝난 후 친구가 올 시간에 맞춰 씻었던 머리를 쓸었다. 완전히 다 말리지 못한 물기가 땀으로 변해가는 착각이 일었다. 방금 전까지 차 안에 있었던 강희찬과는 달리 10분 전부터 밖에서 서성였기 때문이다. 젖어 있는 머리 따위야 익숙했다. 이정민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배트를 두고 오겠다던 이정민은 커피 두 잔과 함께 돌아왔다. 둘은 어느새 강희찬의 차에 나란히 기대었다.

“배트 고맙다. 아직 몇 자루 남았는데…….”

“연습 안 하냐? 왜 아직도 남아?”

“하고 있어.”

퉁명한 말을 뱉은 입은 이내 쭉, 하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커피를 빨아 마셨다. 강희찬은 과장이 섞인 행동을 곁눈질로 유심히 살폈다.

타격 연습을 성실히 하는 선수에게 배트가 남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자신만 하더라도 매일같이 배트를 꺾어 먹는 타자들을 보고 산다. 게다가 여기엔 이정민보다 연차가 높은 선배들도 당연히 있었다. 자신이라면 쪽팔려서 안 할 것 같지만, 후배의 배트를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인간들은 흔했다.

투수인 강희찬조차 악명을 들었을 정도로 심한 선배 하나가 있었다. 자신이 이정민에게 배트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더욱 거리낌 없이 ‘빌린다’는 명목으로 강탈을 한 모양이었다.

“민권 선배, 딜러 한다더라.”

그래, 이름이 분명 그따위였지.

가물가물했던 선배의 이름을 들은 순간, 머리는 또 다른 정보를 인지했다.

인지했다는 것이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커피를 마시려던 손을 멈추고 멀거니 돌린 시선의 의미를 이정민은 알아챘다.

“그 형 얼마 전에 방출됐어. 나가고 나서 연락 안 되길래 독립구단에라도 들어갔나 했는데……. 외제 차 딜러 일 시작한다더라. 너 나중에 차 바꿀 일 있으면 그 형한테 해줘라.”

“갑자기 무슨……. 어디 아픈 사람도 아니었잖아.”

“같이 살던 여자 있었잖아. 애 생기고, 그러니까 더 운동하기도 힘들 만하지. 나도 코치님한테 전해 들은 거라 자세히는 몰라. 우리랑은 아예 연락 안 되거든. 번호를 바꿨는지 전화를 안 받는지…….”

찬 것을 갑자기 들이부은 탓에 느껴지던 고통은 금세 잊혔다. 대신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멍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런 건 이미 충분히 익숙해지지 않았었나?’

함께 야구부에 입단하고 운동을 하다, 6학년 때 야구를 관둔 녀석이 있었다. 3학년부터 자신을 찍어놓은 농구부 감독을 피해 야구부에 입단했던 저와는 달리, 친구는 당시 컵스의 4번 타자를 좋아해서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 녀석은 야구부를 관둔 이후에는 강희찬과는 졸업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같은 반이었음에도. 무릎 부상을 이유로 유니폼을 벗었던 중학교 시절의 동기도 비슷했다.

고비가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초등학교 시절처럼, 투수를 하고 싶은데 시켜주지 않는다며 관두는 유치한 경우는 사라졌다. 대신 철저히 피지컬과 실력 차이에 좌절하고 울며 유니폼을 벗던 뒷모습들로 채워졌다. 중학교에서 난다 긴다 하는 녀석들도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다시 또 밑바닥부터 경쟁이었다. 사실, 그 시기가 되면 실력도 부족하지만 이제 와서 공부를 할 자신이 없어서 어영부영 야구부에 적을 두던 놈들도 많아졌다.

마치 체에 걸러지는 모래알이었다. 강희찬은 매 순간 어제까지 옆에 있던 동료가 오늘은 사라지는 경험을 해왔다. 함께 졸업장을 받았던 휘정고등학교 야구부 동기 중 유일하게 연락이 닿는 건 이정민뿐이다.

“…….”

방금까지 시럽으로 달착지근했던 입 안이 씁쓸해졌다.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몸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주차 구역을 나눈 흰색 선과 아스팔트 바닥의 규칙성을 눈으로 좇았다.

누군가 야구부를 관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남은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머리로만 따져보면 경쟁자가 하나 줄어서 좋아해야 할 게 분명한데도, 누구 하나 웃지도,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아니, 꼭 야구장만의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곁에 있던 친구가 내일 당장 사라질까 걱정하던 송재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딱히 과보호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 포지션 바꾸기로 했다. 외야로.”

“…뭐?”

땅으로 떨어지듯 흘러나온 목소리가 전한 내용은 강희찬의 고개를 다시 옆으로 향하게 했다.

이번엔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잔뜩 구긴 인상과 함께였다. 이정민은 그저, 예상했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그 반응에 강희찬은 더욱 기가 막혔다.

“코치님이랑 얘기해서 한번 바꿔보기로 했어. 1군엔 정원이 형도 있고, 그나마 외야는 좀 널널한 편이니까 할 만할 거라고…….”

“주전 포수 없는 구단도 있어?”

낮은 목소리는 얼음이 다 녹은 커피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차가웠다. 힐난의 어조에 이정민 역시 열이 올랐다. 눈을 돌렸을 때, 이정민이 바라봤던 에이스의 얼굴엔 기가 차지도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이 더욱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너 포지션 바꾸는 게 무슨 장난인 줄 알아? 포수만 했던 놈이 설 만큼 외야는 만만해? 몇 년을 해서 못 올라간 1군을 포지션 바꾼다고 뚝딱―”

“강희찬.”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숨과 함께 뒷말을 삼켰다.

마지막은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는 언제 해도 늦었다.

쓸데없는 말을 왜 하느냐던 고등학교 때의 감독이 떠올랐다. 자신은 언젠가 분명 주둥이를 잘못 놀려서 망할 거다. 확신할 수 있었다.

원망과 노기가 섞인 이정민의 시선을 피했다. 손에 축축한 물기만을 남기는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

이미 뱉은 말이 미안하다는 소리로 수습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이정민에게 오해 없이 받아들이게 할 자신도 없다.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머리를 헝크는 강희찬을 향해 이정민은 입을 열었다.

“민권이 형, 여기 나가기 전에 울었다더라. 다섯 살만 어렸어도 야구 계속해 보고 싶다고. 와이프랑 애만 없었어도, 독립구단에라도 들어가서 계속 야구 하고 싶다고 울었대, 그 형이.”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적막하고 한적한 곳이었다.

저녁 시간에 시작하는 경기, 그라운드로 떨어지는 터질 것 같은 함성. 그런 것들에 익숙해진 강희찬에게는 낯선 것이 더 많은 공간이었다.

그래. 학생 때도 비슷했다. 단체로 로드워크라도 나가면 꼭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어린 학생들이 기특하다’며 웃어 보이곤 했다. 바깥에서 보는 것만큼 평화롭고 희망 가득한 곳이 아니었다. 그라운드는 언제나 그랬다.

“나도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1군에서 네 공 받아보고 싶었어. 여기 입단하고 한동안은 그 생각으로 버티기도 했으니까.”

스무 살의 5월. 이정민이 컵스의 유니폼을 입고 지금까지. 이곳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강희찬은 이해하기 힘들다. 같은 유니폼을 입었던 배터리 사이에 이제 너무 많은 간격이 있었다.

“너도 알잖아. 내가 그나마 고등학교 때 괜찮은 포수였던 이유가 너 때문이었던 거. 네가 나랑 배터리를 맞추고 싶어 했으니까 내가 좋은 평가를 얻었던 거지……. 사실 예전에도 잘하는 건 아니었어.”

“…….”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볼 거야. 최 감독님, 포지션 바꾸는 거, 스위치 히터 다 어영부영한다고 싫어하시는 거 아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난 너처럼 가진 게 많지 않잖아.”

포수는 투수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3학년 포수가 1학년 투수에게 나이를 앞세워 화라도 내는 순간, 배터리 코치는 달려와 포수의 뺨을 갈긴다.

어느새 노기가 사라지고, 체념과 미약한 의지가 느껴지는 웃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꽤 포수에 어울린다고.

한 번도 직접 말을 꺼내본 적은 없지만, 예전부터 생각했었다.

먼저 가보겠다며 이정민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클럽하우스의 건물을 바라봤다. 힘이 빠진 무릎이 땅에 처박힐 것 같았다. 겨우 차에 타고도 강희찬은 시동을 걸지 못한 채 또 한참을 앉아 있기만 했다.

이미 태양빛으로 덥혔을 내부의 공기는 빈말로라도 시원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추웠다. 열아홉에 섰던 필리핀의 마운드처럼.

마운드를 오를 때마다 곁에 있던 사람이 하나씩 사라졌다. 책임져야 할 무게에 눌려 유니폼을 벗은 선배도, 미트를 버리고 글러브를 쥔 채 제 갈 길을 가보겠다고 하는 동기도. 저마다 각자의 인생 궤도를 찾아서 갈 뿐이다.

‘가는 길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제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곳, 혹은 그렇지 못한 곳에서 각자 달라지는 거다. 주문처럼, 수도 없이 되뇌었다. 단지 그뿐이라고.

얼마나 공을 뿌려야 익숙해질지 막막했다. 차량 전면 유리로 타는 듯이 붉은빛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아직도 걔가 말도 없이 사라질 것 같거든요.’

비단 자신만의 일은 아닐 거다.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는 ‘달라진 사람’이었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자신에게 이곳은 ‘있을 곳’이 아니었다. 달라진 궤도를 따라 천천히 검은 차가 속도를 높였다.

* * *

여름이라 해가 길어진 것 같아도, 막상 석양이 지기 시작하면 어둠은 금방 내렸다. 강희찬이 서울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릴 무렵. 이미 피를 뿜는 것 같던 태양은 흔적도 없었다.

문을 닫고, 4층짜리 건물을 올려다봤다. 어두워진 시간대에 봐도 역시 초등학교의 벽면을 칠한 페인트의 색은 영 조화롭지 못했다. 8시가 넘은 시각에도 의외로 건물로 들어가는 중앙현관의 문은 열려 있었고 군데군데 불이 켜진 창문도 있었다.

이젠 꽤 익숙해진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벗어나 방향을 튼 건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가 이곳에서 버벅이며 길을 헤맸던 것이 생각났다.

좌회전하고 조금 더 들어가면 어린이 보호 구역 표지판이 있다. 큰길에서와는 달리 꽤 낮아진 속도로 달리던 차는 결국 학교 정문 안으로 빨려들었다. 차를 세운 곳은 저번에 송재혁이 주차한 곳과 정확히 일치했다. 문득 깨달은 쓸모없는 사실이었다.

‘왜 여기로 왔느냐?’고 물어도 할 말은 없었다.

불 꺼진 집에 가서 혼자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게 귀찮았다. 기왕 휴일에 외출한 김에 조금 더 밖에 있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주민으로서, 동네에 있는 공공시설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겠고. 그도 아니라면…….

“…….”

누군가를 향하는지 모를 변명 같은 생각을 멈추고, 중앙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서자 허리께에 채 닿지 못하는 갈색 문이 달린 신발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 자체는 중학교라고 해도 될 만큼 컸지만, 학생 수는 적은 걸까? 전부 다 해서 신발이 쉰 개는 들어갈까 싶은 신발장 구역을 지나쳐, 계속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피트니스 센터의 전면 거울로 봤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양각 무늬가 새겨진 검은 틀에 갇힌 거울 안의 자신은 어색했다. 아마 뒤로 함께 비치는 어린애들의 동시나 그림 따위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배경이 어울리는 20대 남자는 강희찬이 아는 범위 내에선 딱 한 명뿐이었다.

커피가 올라간 쟁반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왔던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라면 어린애들의 서툰 그림이나 시를 배경으로 두고도 꽤 어울릴 거다. 그도 아니면, 높이가 낮은 어린애들에게 둘러싸여 있거나. 실제로 선생이 담임을 맡았다던 시끄러운 꼬마는 꽤 키가 작았던 거로 기억했다.

‘…3학년이라고 했었나?’

미혼인 강희찬은 어린애들의 크기로 나이를 가늠하는 재주는 없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을 두긴 했지만, 동생의 초등학교 시절을 눈여겨볼 만큼 강희찬은 한가하진 못했다.

특히 본인 자체는 이미 초등학교 때 어지간한 성인 남자만큼 키가 자랐으니. 3학년부터 학교의 농구부 감독은 키 하나만을 보고 강희찬을 스카우트하겠다며 수차례 이야기한 바 있었다. 4학년이 되면 바로 시합에 내보내줄 테니, 나가서 몸빵만 하라는 이상한 소리가 붙기는 했어도.

본인도 그렇고, 주변의 운동부들도 그랬고. 커다랗고 키가 큰 체구에 눈이 익은 강희찬이 바닥에 붙어 다니는 사내아이의 학년을 3학년이라 짐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보통 초등학교의 야구부 입단이 가능한 나이가 3학년부터였다. 유니폼을 입을 수 있는 가장 어린 나이로 대충 찍어 맞혔을 뿐이다.

매일 똑같이 보는 얼굴을 오래 보고 있을 이유는 없다.

거울에서 눈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홀 가운데에서 걸음을 다시 세웠다. 홀을 기준으로 좌우로 쭉 뻗은 복도를 번갈아 봤다.

왼쪽으로는 불이 켜졌지만 아무도 없는 행정실이 있었고, 그 너머로는 2학년 1반부터 시작하는 문패들이 보였다. 보지 않아도 깜깜한 오른쪽 복도엔 1학년 교실이 있을 터였다. 아마 저학년들이 아래층을 쓰고,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위층을 사용하는 듯했다. 그건 강희찬의 오래된 기억과도 일치했다.

서 있던 바로 정면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1, 2학년 교실이 1층에 있으니 2층엔 3, 4학년 교실이 있을 거다. 예측은 반은 맞고 반은 빗나갔다.

전반적으로 전기를 낭비하는 학교인지, 올라가면 바로 보이는 2층 교무실 역시 인기척 없이 불만 켜진 채였다. 계단을 기준으로 오른쪽―그러니까, 1층에 있는 1학년 교실의 바로 위―엔 예측대로 3학년 교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엔 어쩐지 5학년 교실들이 죽 이어졌다.

‘대체 무슨 기준이냐.’

속으로 이죽거린 발길을 왼편으로 돌렸다.

교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교실의 문패엔 ‘3-1’이라는 숫자가 있었다. 멀어질수록 2반, 3반이 있을 거다.

아주 어릴 때 잠깐 숫자 대신 꽃 이름 따위로 반을 정했던 것도 같은데……. 이젠 그런 구역질 나는 짓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깥보다 더 짙은 어둠이 깔린 학교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왁스 코팅이 된 타일 바닥과 신발이 만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3반? 4반? 끝쪽 교실 하나엔 불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목적지는 아니었다.

애초에 공무원의 퇴근 시간은 훌쩍 지났다. 학교 안엔 드문드문 불이 켜진 곳이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드문드문’이다. 실내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사람 하나 보지 못했다. 그런 시간에 그 선생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

“…….”

검은 복도를 어스름히 밝히던 빛에 도착한 순간 예측은 다시 한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1층의 행정실이나 2층 교무실이 불만 켜진 채 아무도 없던 것과는 달리, 안에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교실의 뒷문께에 서 있던 강희찬의 눈에 기척을 내는 사람의 모습은 쉽게 들어왔다.

칠판이 있는 교실 앞편의 왼쪽 끝. 선생들이 평소에 앉는 듯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고개를 내린 채 부지런히 오른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넘기고 있는 책은 어린애들의 교과서인 듯 색색이 화려하다. 보고 있는 책 외에도, 선생의 곁엔 똑같은 책들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고개가 숙어져 있어 이목구비를 완전히 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저녁이라지만 한여름에 에어컨도 틀지 않은 교실이었다. 열어놓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형광등 불빛 아래에 있는 사람의 얼굴로 스쳤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거슬리는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몇 번 옆으로 넘기지만, 힘이 약해 보이는 머리카락은 살랑이며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 정적인 광경을 얼마간 엿보다, 문득 깨달았다.

첫사랑.

선생은 무언가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빈천한 자신의 표현력은 차치하고서라도, 묘한 구석이 있었다.

‘어려 보인다’고 단순히 말하기엔 어딘가 우울하고 지친 분위기가 있었다. 그를 두고 송재혁은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다’고 말했었다. 강희찬 역시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바였다.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 색이나 얼굴빛. 타격코치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가볍게 업어 들던 마른 몸.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주는 흐릿한, 혹은 아련한 느낌이 있었다. 호텔 외부를 밝히던 인공적인 조명을 정면으로 받는 얼굴을 보는 동안엔 더욱 확실히 와닿는 소리였고.

그 모든 걸 한마디로 정의할 단어를 겨우 떠올렸다. 첫사랑. 남자는 첫사랑과 닮아 있었다.

강희찬 개인의 첫사랑이 아니었다. 실제 자신의 인생에서 그딴 게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첫사랑’이라고 하는 말이 주는 이미지가 형상화된 사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흔히 연예인을 보고 첫사랑 같은 이미지를 가졌다 평하는 말을 하곤 했다. 강희찬은 그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몇 해 전, 이승주가 영화 하나를 보며 난리를 피울 때도, 강희찬은 대놓고 비웃었다. ‘네 첫사랑이 저거랑 닮았냐’고. 선배의 칼날 같은 직언에 이승주는 입을 비죽였지만, 강희찬은 굳이 뱉은 말을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기억하기로, 이승주에게 있어서 가장 ‘첫사랑’다운 추억은 초등학교 야구부 시절 단체로 갔던 야구장에서 막대풍선을 주워 준 치어리더 누나였다. 자신의 첫사랑이 영화배우와 닮았다니. 미화도 작작 해야 한다.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던 강희찬을 향해 이승주는 튀어나온 입술을 열었다.

‘생긴 게 닮았다는 게 아니라, 느낌적인 느낌이요. 딱, 하면 빡, 하고 알아듣잖아요?’

딱이든 빡이든.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강희찬의 삐딱한 생각은 교실 안의 남자를 본 순간 다소 옅어졌다.

첫사랑 같은 사람이다. 저 생김이라면, 일찍 철이 든 체하는 고학년 여자애들이 남모르게 좋아할 수도 있다. 실제로 선생의 동료 교사도 관심을 두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첫사랑.’

정확히 말하자면, 마치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흐릿한 기억 같은 사람이다.

어릴 적, 혹은 철이 덜 든 시기에 경험한다는 첫사랑을 이룬 사람은 극히 드물 거다.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할 테고. 본인의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영화배우와 겹쳐 보는 우스운 짓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확인할 수 없는, 머릿속에만 남은 기억은 얼마든지 편할 대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나는 걔가 언제든 사라질 것 같거든요.’

미닫이문의 창틀 너머 풍경 속의 사람을 보는 동안, 눈꺼풀 한 번을 깜빡일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남자는 사라졌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강희찬은 계속 한곳을 응시했다. 숙이고 있느라 뻐근했는지 남자가 고개를 든 순간에도, 자신을 보고 놀라 눈이 둥그렇게 커지고 입술이 멍하니 벌어지는 순간에도.

“아…….”

평소에도 하얀 얼굴이 더욱 질려가는 것 같은 순간에도, 침음하듯 목을 울리는 멍한 소리가 자신에게 닿은 순간에도.

* * *

‘학교’라는 공간은 언제나 괴담과 함께다. 동상이 움직인다느니 책장을 넘긴다느니, 학교가 예전엔 공동묘지 터였다느니. 어릴 적의 정이선 역시 그런 소문을 제법 진지하게 들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학교를 직장으로 둔 지금은 우습지도 않은 소리였다. 가끔 반 아이들이 진지하게 호들갑을 떨며 하는 말에 그러냐며 놀란 체 반응해 주고는 한 귀로 흘리기 바빴다. 그저, 주변에 아파트가 가득한 동네라 그런지 공동묘지였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색달랐을 뿐이다.

그러니까, 정이선은 저녁 늦게 학교에 혼자 있다고 해서 겁을 먹을 나이도, 직업도 아니란 말이다. 뭐……. 늦은 시간까지 직장에 있는 건 다른 의미에서 공포이긴 하지만.

검사를 하겠다고 걷었던 교과서가 아직 남았다. 내일은 숙제로 나가야 할 부분이 있었으니 오늘까지 부지런히 검사를 마쳐야 했다.

커다랗고 삐뚤빼뚤한 글씨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가 있는 책장을 넘기고, 마지막 진도가 나갔던 페이지에 사인. 간단한 과정도 스무 번쯤 하다 보면 정신이 피곤해졌다. 물론 몸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같은 자세로 있던 고개를 든 순간 뚜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뻐근한 몸이 내는 앓는 소리가 살벌했다. 하지만 정이선이 놀란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

…귀신인 줄 알았다.

뒷문 너머로 있는 얼굴이 희었다. 검은 복도 배경에, 심지어 입고 있는 옷도 검어서 처음엔 얼굴만 둥둥 떠 있는 줄 알았다. 놀라도 소리를 내지 않는 편이었기에 망정이지. 놀란 정도로 목소리가 나왔다면 1층에 있던 행정실장이 뛰어 올라왔을지도 모른다.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이선은 자신이 숨을 멎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 안에 산소를 공급하며, 얼어 있던 몸을 움직였다. 철제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꽤 존재감이 크다.

“여, 여기… 어쩐 일로…….”

나름대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더듬는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퍽 멍청했다.

헛기침으로 목을 몇 번 가다듬는 동안, 남자는 뒷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어쩐지 이질적이었다. 남자가 열 살짜리 아이들보다 체중이 몇 배는 더 나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자가 신고 들어온 검은 운동화를 보고, 이선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저기… 죄송한데, 신발은 1층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들어오셔야 하거든요.”

본인의 운동화를 한 번, 그리고 책상 아래로 실내화를 신은 채인 이선의 발을 한 번. 번갈아가며 보는 움직임이 제 나이답게 퍽 귀여웠다. 하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자신의 허리께에 닿을까 말까 하는 1학년 아이들을 혼내야 하는 심정으로, 이선은 제법 엄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렇게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됩니다. 들어오시려면 행정실에서 출입증 받고 들어오셔야 해요.”

“여기 졸업했는데요.”

“작년에 졸업해서 옆 중학교로 간 애들도 학교 안으로 들어올 때는 출입증 다 끊고 들어오고 있어요.”

초등생 납치니 살인이니. 흉흉한 뉴스가 날 때마다 학교에선 비상이 걸린다. 낯선 사람이 뭘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된다는 당연한 소리부터, 애들 가방마다 방범용 호루라기를 달아주기도 하고. 말마따나 나쁜 놈이 작정하고 나쁜 짓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무슨 도리로 막을 수가 있을까마는…….

졸업생들도 선생님을 보겠다고 함부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행정실에 학생증을 보이고, 방문록에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야 교무실이든 교실이든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갓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도 그러는데, 시커먼 어른이 함부로 초등학교 안에 들어온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게다가 오늘은 심지어 입고 있는 옷조차도 수상한 검정 일색이다.

학교 교칙과 선생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어설프게 두른 이선의 말을 듣고 남자는 잠시 동안 잠잠했다. 본인의 부주의함을 반성하는 건 아니었음을 이선은 이내 깨달았다.

“행정실에 아무도 없던데요?”

“…네? 그럴 리가……. 아, 배드민턴 치러 가셨나?”

자주 늦게까지 남아 있던 행정실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해가 진 저녁에 초등학교에 무단으로 침입한 검은 괴한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허술한 방범 관리를 지적당한 순간, 이선은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이러면 할 말이 없었다.

“퇴근 안 해요? 애들은 진작 갔을 텐데.”

“코팅기 써야 할 일이 있어서 남았다가…….”

질문의 화살은 이선을 향했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은 애들이 그려놓은 미술 작품이나 창가에서 키우는 봉숭아 화분 따위를 훑었다.

부동산 업자와 찾아온 사람에게 집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괜한 민망함이 일어 허벅지께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저녁은 먹었어요?”

건조한 눈으로 교실을 훑는 남자가 뱉듯이 말을 건넸다. 아까부터 왜 여기에 왔냐는 자신의 물음에는 답이 없는 채였다.

“…아니요.”

이선의 간단한 대답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문과 가장 가까운 책상에 걸터앉았다.

아이들에겐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저 덩치를 어린애들이 앉는 걸상에 앉히는 게 더 걱정스럽다.

“지금까지 저녁도 안 먹고 뭐 했어요?”

책상 옆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친 남자는 이제야 자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이선은 어정쩡히 선 채였다.

“그냥… 일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먹으려고 해서요.”

“그것만 다 끝나면 되죠? 대충 끝내고 밥이나 먹고 들어가요.”

설마. 이 시간에, 학부모도 아닌 주제에 초등학교에 들어온 게 밥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라고?

가능성이 낮은 가정 하나를 속으로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수원에서도 혼자 밥 먹기 싫다며 설렁탕집에 자신을 데리고 갔었다.

하지만……. 오늘이야 일이 남아서 늦게까지 있던 것뿐이지 평소라면 학교에 아무도 없을 시간이었다.

미심쩍은 이선의 눈빛을 받은 남자는 반응하지 않은 채 턱짓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정확히 말하면 책상 위에 쌓여 있는 국어 교과서를 향해 있었다. 이선의 앞에 펼쳐진 책이 서너 권. 그 옆에는 덮인 책들이 스무 권 넘게 쌓여 있었다.

…역시 눈치가 제법 좋은 편이다.

이제 남자는 다시 교실 이곳저곳을 훑기 시작한다. 장학사가 오기 전, 청소검사를 하는 교감 선생님 같았다. 갑자기 남의 학교에 들어와서는 상사처럼 구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선은 짧게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의자의 쿠션이 푹 꺼지는 소리가 한숨을 대신하는 듯도 했다.

책상 한쪽에 두었던, 오후 내내 마셨던 음료수통을 집어 드는 순간. 강희찬의 시선이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떨어졌다.

“식혜 좋아해요?”

“네? 아……. 예, 뭐. 맛있으니까요.”

“…….”

“드, 드실래요?”

반도 채 남지 않은 페트병을 남자의 앞으로 슬쩍 내밀었다. 그래 봐야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터라 ‘주겠다’는 의도로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내밀고 난 후에야 이선은 문득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 먹던 음료수를 주겠다고 해봐야 좋아하는 건 체육활동이 끝난 후의 반 애들뿐이다.

한심하다는 남자의 시선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숨처럼 옅은 한숨이 전부였다.

“말고. 따뜻한 거 없어요?”

이선은 잠시 앉혔던 몸을 재빨리 일으켰다. 아차, 하는 생각은 그 뒤였다. 저녁보다는 이제 밤이라고 해야 할 시간에 들이닥친 괴한이라도, 일단 학교에 방문한 손님이었다.

이선은 급히 몸을 움직였다. 실내화용 슬리퍼가 질질 끄는 소리를 내며 앞문으로 향했다.

“믹스커피나 차 종류 있을 텐데……. 어떤 걸로 드릴까요?”

“커피로 주세요.”

주문을 받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복도를 걷는 동안 이선은 생각했다. 저렇게 당당하게 차 대접을 받아내는 것도 재주라고.

온 동네 공공기관에서는 다 마실 것 같은 익숙한 노란 커피 포장지의 입구를 뜯었다. 잠시 고민하다 이선은 냉장고 옆에 있던 종이컵 하나를 꺼냈다.

종이컵을 쓰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익숙한 변명을 속으로 삼키며 커피 가루를 부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 포트는 물이 다 끓었다는 요란한 소음을 내며 전원이 내려갔다. 팔팔 끓는 물을 적당히 넣었다.

평소였다면 남자가 커피믹스를 옅게 마시는지 진하게 먹는지 고민했겠지만, 편하게도 물 높이가 표시된 종이컵이었다. 어정쩡한 사람답게도 정이선은 ‘medium’에 딱 맞도록 물 높이를 맞추고 빈 커피 봉지로 휘휘 내용물을 저었다. 버릇처럼 젓고 난 후에야 테이블 위에 있던 티스푼이 눈에 들어왔지만……. 이런 데 와서 대접받는 차에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된다.

교무실을 둘러본 이선은 불을 켠 채 그대로 나왔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듯, 자신의 자리를 제외한 두 곳에 가방이 남아 있었다. 아마 두 사람 역시 행정실장의 꼬임에 넘어가 배드민턴 교실에 간 모양이었다.

교무실과 3학년 3반 교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의지하며 조심히 걸음을 떼었다. 커피에 같이 먹을 간식이라도 갖다 줘야 할까? 고민했지만 사실 정이선 선생은 차 종류나 비타민 음료가 아니라면, 교무실에 무슨 간식이 있는지 잘 몰랐다.

아니, 애초에 김경원이 먹는 게 아니라면 교무실에 간식이 존재하기나 한 걸까? 그렇다고 해서 저번처럼 아이들에게 주고 남은 사탕이며 비타민을 내밀기도 좀 그렇다.

…이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업무가 끝난 공공기관에서 대단한 대접을 바라면 안 된다.

다시 한번 핑계 같은 생각을 마친 이선은 조용히 걸음을 이었다.

“…….”

아깐 정말 저승사자라도 본 줄 알았다.

아무리 보기 좋은 미남이라도 T.P.O가 있음을 깨달았다. 오페라의 유령을 실제로 봤다면 이랬을 거다.

흰 편인 얼굴에 검은색 옷까지 두르고 있으니, 처음엔 정말 얼굴만 동동 떠 있는 유령인 줄 알았다. 아까 봤던 광경을 되새기자 순간적으로 끼쳤던 소름까지 재현되려고 했다. 서늘해지는 기분 탓에 이선은 커피를 들지 않은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정말 밥을 혼자 먹지 못해서 이 시간에 여길 온 걸까?’

자신의 호기심은 전혀 해소해 주지 않은 채, 태연히 차나 요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두운 복도에 서 있을 때만 하더라도 소름 끼치던 무표정은 형광등 아래에선 또 해사한 인상이었다. 호텔 야외 조명을 받던 얼굴도 기억의 한 곳을 차지했다.

그 유순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놀랐다니. 이선은 솥뚜껑을 보고 놀라기라도 하듯 괜히 억울했다.

그렇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묘한 승부욕이 든 이선은 슬리퍼 소리를 죽인 채 교실 앞문 가에 섰다. 책상에 얌전히 걸터앉아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남자는 자신의 자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제발 이쪽을 봐라.’

그리고 너도 나처럼 놀라라. 승부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복수심에 더 가까웠다.

반은 심술이고 반은 장난으로, 이선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남자가 책상에 있던 얇은 책 한 권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내 기색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눈이 큰 편일 거다. 하지만 언제나 시큰둥한 무표정만 지어서인지 그 눈을 크게 뜬 경우를 본 건 드물었다.

지금도 여전한 표정이었다. 밖에 말없이 서 있는 이선을 향해 ‘거기서 뭐 하는 거냐’ 싶은 한심한 시선이 닿았다.

‘…괜히 했어.’

멋쩍게 시선을 피하며, 이선은 미닫이문을 열었다.

* * *

전반적으로 어설픈 사람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강희찬은 그리 생각했다. 저렇게 어설프게 굴어서야, 이 동네의 약아빠진 애새끼나 피곤한 학부모는 어떻게 상대하는지. 그런 걱정이 일었다.

호구가 잡히는 건 비단 애인―인지 뭔지 모를 놈―뿐만은 아닐 거다. 원래 인간이란 건 본능적으로 만만한 상대를 알아본다. 그래서 하나 있다는 친구도 벗겨 먹으려 들고, 감독도 이용해 먹는 걸 테지.

고개를 젓고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교실 앞쪽의 왼쪽 끝. 고정적으로 초등학교 교사들의 자리는 저곳이었다. 어린애들의 교과서나 스티커가 있는 걸 제외하면 책상은 깔끔했다. 그 덕에 위에 무엇이 있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연필꽂이 대용으로 쓰는 듯한 검은색 머그잔. 그 안에는 동일 브랜드의 멀티 펜 몇 자루만이 꽂혀 있었다. 구단 사무실에만 가도 흔히 굴러다니는 사무용 볼펜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가격대가 있을 듯했다. 아마 개인의 선호도가 큰 영향을 미친 구성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거다.

그것을 보자, 미간이 찌푸려졌다.

‘…좁은 나라에 정신병자들이 차고 넘치네.’

혀를 차는 동안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만 한 크기인 얄팍한 책은 초보자를 위해 쉽게 쓰인 야구 규칙 설명서였다.

강희찬은 책을 집어 들고 훑듯이 책장을 넘겼다. 촤라락 넘어가는 페이지들 사이마다 볼펜이나 연필로 체크를 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크게 신경을 써본 적 없는 야구 규칙들이 새삼 눈을 스쳤다.

‘멀쩡한 직장을 놔두고 심판 자격증 준비를 하는 건 아닐 테고.’

공 한 번만 맞아도 크게 다칠 것 같은―그리고 전적이 있는― 인상이 심판 마스크를 쓰는 건 영 어울리지 않는다.

진지하게 전직을 생각하는 거라면 주변에서 직언을 해줘야만 한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이라기엔 조금 어리고 어설픈 인상이라도, 차라리 그쪽이 더 어울린다고.

책에는 눈길만 둔 채, 한창 다른 곳에 두던 정신이 문득 말했다. 이상한 기색이 느껴진다고.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느껴진다는 예감은 들어맞았음을 깨달았다.

교실의 앞뒤로 있는 미닫이문에는 애들 머리 높이 정도까지 흰색 시트지가 붙어 있었다. 그 위로는 투명하게 복도의 풍경이 다 비추어 보인다. 그곳에 하얀 얼굴 하나가 있다.

“…….”

놀랐냐, 라고 물으면 전혀 아니었다.

야구 방망이를 쥐여 줘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할 것 같은 생김이다. 교실 밖, 어두운 복도에서 종이컵 하나를 들고 있든 말든,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 손에 식칼 정도는 들고 있어야 조금 놀랐으려나. 그저, 왜 저러고 있는 건가 하는 호기심만이 강하게 일었을 뿐이다.

말없이 건네는 시선에 선생은 기가 죽은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가르치는 반 애새끼들이나 할 법한 짓이었지만, 나름대로 어울렸다.

영문 모를 행동을 관둔 인간은 앞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쭈뼛거리는 걸음을 보니, 뭔가 수상한 생각이라도 한 모양이다.

가까이 다가와 종이컵을 건네는 사람에게선 묘하게 따뜻하고 상큼한 냄새가 풍겼다. 이미 식어 빠진 게 눈으로도 보이는 믹스커피의 냄새는 아니었다. 비누 향이나, 과일 향 같으면서도 어딘가 묵직하다. 사내새끼한테서 난다기엔 기분 나쁠 정도로 좋았지만, 생김과 비교하면 그럭저럭 어울렸다.

조금 더 맡으면 어떤 냄새일지 감이 잡히려나…….

아쉽게도 그에게 커피를 건넨 이선은 한 발 뒤로 물리고 거리를 두었다. 집요하게 냄새를 알아내려는 자신의 속내를 알아차린 탓은 아니었다. 방금 전이 물건을 건네느라 지나치게 가까웠던 것뿐이지, 지금이 훨씬 일반적인 타인과의 거리감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거리감이 실제보다 퍽 멀게 느껴졌다.

“규정집은 왜 봐요?”

다시 제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을 향해 들고 있던 책을 건네며 물었다. 바로 눈앞에 사람이 서 있는 탓에, 앉지도 일을 시작하지도 못하던 이선은 그가 건네는 책을 받아 들었다.

“아, 체육 선생님 출장 가셨을 때, 고학년 애들 발야구 수업하기로 했거든요. 보면 좀 도움이 될까 해서요.”

“글쎄요. 딱히 비슷한 것도 없는데요.”

“…정말요?”

발야구라니. 기껏해야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해봤던가. 그조차도 운동부 소속이었던 강희찬은 직접 경기에 참여하지 않고, 심판을 보거나 룰을 모르는 여자애들에게 경기 지도를 했었다.

유치하고 시시한 체육활동은 이름만 ‘야구’가 붙었지 별 비슷한 점도 없었다. 스트라이크, 볼, 홈런이 있다는 것뿐일까. 베이스를 돈다는 것도 포함이려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던 같은 반 여자애에게 뒤에서 ‘공 오는 거 보면서 차면 될 거 아니냐’고 했다가 울렸던 기억밖에 없다. 그 뒤에 훈련보다 가벼운 운동장 돌기를 벌이라고 받은 추억은 덤이고.

앵앵이는 울음소리가 귀에 울리는 듯한 착각에 고개를 잘게 저었다. 그럼에도 데시벨이 높은 울음소리는 이명처럼 귀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기합이랍시고 담임이 돌라고 했던 운동장 스무 바퀴보다 그 울음소리가 유발하는 짜증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운동장을 종일 돌라고 하는 게 나을 정도로.

좋지 못한 추억을 다시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선생은 열심히 보고 있던 책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름의 친절을 발휘해 입을 열었다.

“진짜 야구에선 홈런 치면 좋아하지만, 발야구 땐 홈런 치는 새끼 있으면 줘 패야 돼요.”

“왜요? 홈런 치면 좋잖아요.”

“직접 수업해 보세요, 그럼.”

둥근 눈이 끈질기게 얼굴에 붙었다. 평소라면 뭘 보냐는 소리가 한 번쯤은 나왔을 법도 한데,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딱히 붙어 있는 시선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때문에, 뭐든 직접 겪어봐야 안다는 평소의 지론을 관철하며 입을 다물었다.

“근데 운동장에서 하는데 홈런이 나올 수 있을까요?”

“내가 옛날에 했을 땐 보통 외야수 키 넘기면 홈런이라고 정해놓고 했어요.”

“아아… 그럼 되겠구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손에 들고 있던 식어 빠진 커피를 들이켰다. 왠지 모르게 밖에서 멍하니 서 있던 선생 덕분에 이젠 식다 못해 차가울 지경이었다. 애매한 맛의 믹스커피는 두 모금이면 끝났고, 남는 것 텁텁한 뒷맛뿐이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궁금증을 해결한 정이선은 바로 허리를 숙이고 연필꽂이로 손을 뻗었다. 똑같은 브랜드에, 심지어 볼펜 두 개와 샤프 하나가 합쳐진 색깔만 다른 멀티 펜. 정신병이 생길 것 같은 다발에서 나름대로 하나 골라 집고는 샤프를 뺀다. 이내 책 한편에 동글한 글씨로 메모를 하고 다시 책을 덮었다.

보지 않아도 메모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외야수 키를 넘기면 홈런, 따위의 말이었겠지. 대체 그게 뭐라고 메모씩이나 하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샤프를 제자리에 두고, 책을 덮는 일련의 과정을 눈으로 좇았다. 반지든 시계든. 일체의 액세서리 하나 없는 하얀 손이었다. 본인 자체의 생김과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분홍색 손톱 위로 자란 부분이 별로 없다. 자신에게는 상상만 해도 불편한 길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저게 평범한 것임을 알고 있다. 어쩌면 어린애들을 상대하는 직업이라 더욱 손에 신경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어정쩡히 교과서 위를 배회하던 손은 결국 책 사이에 볼펜―그 똑같은 여러 개의 것 중 하나―을 끼우고는 책을 덮는다.

강희찬은 손에서 시선을 떼고 눈을 치켜떴다. 자신의 손을 기준으로 두 뼘이나 그보다 좀 더. 보통 사내새끼들 사이에 취하기에는 기분이 나쁘다고 여길 수 있는 거리에 어색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있다.

“밥, 먹으러 갈까요?”

‘밥’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동안 입술이 입 안으로 숨어 들어가듯 감춰진다. 손가락으로 복도 어딘가를 향하는 어색한 몸짓이 함께였다.

“…그래요.”

특이한 버릇이다. 짧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이선은 예전부터 남들이 쳐다보면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애초부터 남들의 시선을 각오한 일이라면 어느 정도는 괜찮았다. 학예회라든가 상을 받으러 구령대에 올라간다든가. 하지만 혼자 집중을 해야 하는 작업에 타인의 시선이 얽히는 건 영 마땅치 않았다. 공부나, 오늘처럼 단순한 확인 작업이든.

‘대체 선생은 어떻게 하고 사는 거냐?’

송재혁은 종종 묻곤 했다. 임용 시험에 합격하고 자원했던 육군 제대 후 발령받기 전까지, 자신 역시 그런 고민을 했던 것도 같다. 이런 성격으로 교단에 서서 정년까지 버티는 게 과연 가능한지.

하지만 기우였다. 돈을 벌고 살아야 하는 어른의 입장은 많은 것을 가능케 했다. 보통의 정이선과 학교에 있는 정이선은 다른 존재라고 송재혁에게 에둘러 설명했다. 비웃음만 날아왔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어머니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장사’와는 거리가 먼 인간상이었으니까.

본래의 성격을 고쳤다고 생각하는 3년 차 교사의 건방을 꺾은 건, 스무 명 넘는 어린애들이 아니었다. 선이 고운 쌍꺼풀이 진 강희찬의 눈이었다.

고작해야 책 네 권을 확인하는 시간은 길어야 20분이다. 하지만 깔끔히 내일로 넘겼다.

장학사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일하는 걸 쳐다보고 있지는 않는다. 아무리 보기 좋은 얼굴이라도 저런 행동까지 포장해 주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식사 얘기를 하다 보니,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식혜 한 병만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애매하게 놓친 밥때를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 선택이었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 봐야 간단한 즉석식품으로 때우거나 가는 길에 포장한 음식들을 먹을 테니까.

교실 문단속만 하면, 나머지는 행정실장이나 교무실의 선생님들이 배드민턴을 마치고 한 번 확인해 줄 거다.

짐을 챙기고, 계단을 내려가고. 학교 정문을 향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남자는 말없이 이선의 곁을 따랐다.

이선은 침묵이 꽤 무겁게 느껴졌다. 중앙현관과 정문의 딱 중간쯤. 거기에 세워진 검정 외제 차가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

부정축재만 아니면 공무원이라고 비싼 차를 타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보는 눈이라는 게 있었다.

이선이 근무하는 학교는 제법 규모가 있는 편이다. 예전에 비하면 학생 수 자체가 많이 줄어들었다지만, 주변 초등학교들에 비하면 시설로나 인원으로나 꽤 컸다. 그 말인즉, 일하는 교직원의 숫자도 많다는 소리였다.

정이선 선생은 매년 바뀌는 학교 동료 교사들의 얼굴을 겨우 익히는 수준을 유지했다. 주말에 챙기는 경조사에서, 겨우 눈인사나 해보는 다른 교무실의 선생님들보다, 매일 아침 주차장에서 보는 그들의 차가 더 눈에 익었다.

요샌 열 살짜리 어린애들도 비싼 걸 알 만한 유명 외제 차 브랜드의 앰블럼이 눈에 들어온다. 번쩍이는 외관의 검정 세단은 브랜드의 여러 라인 중에서도 가장 비싸다고 알고 있는 종류였다. 아마도 배드민턴을 치러 왔다던 사람 중 한 명의 차일지도 모른다. 행정실장의 대학 동기였나 하는 분이 꽤 큰 학원을 운영한다는 말을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주인이야 누가 됐든, 초등학교에는 영 어울리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위화감은 금세 다른 곳으로 생각을 이어지게 한다. 정이선은 느릿하게 잇던 걸음을 멈추고, 반보 정도 뒤에서 걷고 있던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혹시 차 가져오셨어요?”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던 걸음 소리가 잠시 멈추었지만, 이내 다시 울렸다. “아니요”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걸어오셨어요?”

“…가깝잖아요.”

“아, 그랬지, 참…….”

이제 남자는 이선보다 앞서 걸었다.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자신의 목적지가 학교 바깥의 공영주차장임을 알고 있는 듯한 걸음걸이가 다소 신경 쓰였지만, 이내 생각을 비웠다. 그리고 발걸음과 함께 예전에 직접 그를 데려다주었던 오피스텔 위치를 대신 떠올렸다.

본인에게 직접 들은 바로는 강희찬은 혼자 산다고 했었다. 젊은 남자의 자취 집으로는 위치 조건이든 평수든 과한 감은 있지만, 이것도 본인 벌이의 범위 내일 테니 신경 쓸 건 아니다. 일전에 봤던, 남자의 포털 프로필에 적혀 있던 숫자를 떠올렸다. 게다가 남자는 차 하나를 살 때도 주변 눈치를 봐야 하는 보수적인 직장 소속도 아니었고.

공영주차장으로 거침없이 향하던 뒤통수가 막상 주차장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 가까워졌다. 잠깐 늦춰졌던 걸음은 이내 다시 목적지를 찾은 듯 이어진다. 남자의 발길이 향하는 끝엔 푸른색 차가 있었다.

차종 자체는 흔해도 색은 그렇게 흔치는 않다. 은색 아니면 검정. 그 사이에 있는 자신의 차는 민망할 정도로 튀었다. 얘기를 해주지 않아도 남자가 자신의 차를 찾아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폭이 넓을 뿐이지, 사실 걷는 속도 자체는 빠른 건 아니었다. 그 발끝이 차에 닿기 전, 이선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고 차의 잠금을 풀었다.

“…….”

제 차에 누군가 타는 일이 극히 드물다. 자신 또한 가끔은 차를 두고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조수석에는 사람 대신 수업자료나 노트북, 혹은 전날 장을 봤던 물건이 놓여 있을 때가 많았다. 무언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을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오늘은 아니었다.

조수석 문을 연 남자는 거리낌 없이 차 안으로 사라진다. 이선 역시 뒤늦게 차에 오르고, 시동을 켜고, 서서히 주차장을 나섰다.

‘노래나 라디오라도 틀어줘야 하는 걸까?’

어색한 시간에 대한 고민은 차가 큰길로 진입할 무렵 하나 더 늘어났다.

“저기,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잠시 신호에 걸린 동안 이선은 조수석을 흘긋 봤다. 남자는 뭔가가 불편했는지 한참 동안 이리저리 고개를 꺾고 있었다.

“아니요, 딱히.”

무심한 대답은 슬쩍 찌푸린 얼굴에 더없이 어울렸다.

“이번엔 정 선생이 고르세요.”

맞은편에서 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와 앞 유리를 넘어온 주황색 야경이 깨끗한 얼굴에 묻어난다.

하얀 얼굴은 어느 배경에 갖다 놔도 조화로웠다. 쨍하고 푸른 하늘 아래에 있는, 잔디가 깔린 야구장이든 크리스마스라도 되는 양 화려한 호텔의 조명 아래든.

잠시 멍한 사이 신호는 파란 불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선의 차는 출발하지 못했다. 익숙함과 위화감이 섞인 기묘한 감각 덕에, 뒤에서 클랙슨이 울려서야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아니, 위화감이야 둘째 치고…….’

이런 걸 고르라고 하는 건 자신에게는 언제나 익숙해지지 못한 일이었다. 같은 교무실 선생님들끼리 회식이라도 가면 듣는 ‘뭐 먹고 싶냐’ 소리는 언제나 난제다. 그저 형식적으로 한 번 물어보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곤란하긴 매한가지였다.

결국 다 좋다고 웃어넘기지만, 지금 옆에 앉은 남자는 정말 자신에게 메뉴 선택권을 넘겼다.

“으음…….”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머리를 굴렸다.

저번에 수원에서 했던 것과 정확히 동일한 고민이다. 그때도 나름대로 골라서 유명한 통닭집을 추천했는데, 됐다며 설렁탕집으로 갔던 건 본인이었지. 남자는 잊은 게 분명했다.

이번에도 그럴 것 같은데, 대체 왜 나한테 묻는 거야.

투덜거리는 중에도 머릿속으로는 빈천한 식당 리스트를 더듬었다. 주로 학교 회식 때 가본 곳들이 먼저 떠올랐지만……. 이내 이선은 그 목록들을 지웠다. 학부모라도 만날까 봐 주말에도 포장해서 집에 돌아와 식사를 했다. 어떻게든 동네를 벗어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근린공원 쪽으로 가도 괜찮겠어요? 여긴 학부모들도 있고 그래서…….”

“마음대로 하세요.”

“파전 먹을래요, 그럼? 예전에 아는 사람이랑 자주 갔었는데 맛있었어요.”

갑자기 생각난 예전 기억이 순식간에 입 밖으로 나갔다.

신규진이 갓 공무원 준비를 시작할 때였나, 아니면 자신이 발령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나. 이제는 시기를 기억하기도 까마득했다.

자신의 퇴근 시간에 맞춰 학교로 찾아왔던 때에 갔던가? 그도 아니면……. 어둡고 컴컴한 조명이 내린 지하의 술집에서, 주변에 있던 남자들을 조용히 비웃다 취한 그를 급히 데리고 나가던 중에 알게 되었던가.

검색해서 찾아낸 맛집도 아니었다. 허름한 간판이 객을 부르는 게 아닌, 오히려 쫓아내는 듯한 가게인데 파전의 맛은 좋았다. 기분이 우울했던 신규진 역시 한 입 먹고 눈을 둥그렇게 떴을 만큼. 그 반응에, 이선은 예상치 못한 선물이라도 받은 양 기뻤다.

이후, 가게는 정이선과 신규진의 준단골집이 되었다. 대략 신규진이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혼자서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지만, 파전 같은 종류는 역시 누군가와 함께 먹는다는 인상이 강했다. 겸사겸사, 라는 표현은 우습지만 추억의 맛을 느끼기에는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이미 반쯤은 그곳을 목적지로 삼아 차를 몰던 이선은 다음 순간 아차 싶었다.

‘그래도 밥으로 먹는 게 좋으려나?’

설렁탕을 특으로만 다섯 그릇을 시켜 먹었던 사람이다. 저녁으로 파전은 내키지 않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옆에서 넘어온 건 의외의 말이었다.

“아는 사람 누구요?”

“…네?”

남자는 이상한 방향으로 대화를 잡았다.

전방을 주시하는 게 도로 위 운전자의 미덕일 테지만, 자꾸 얼굴을 옆으로 향했다. 이상한 질문을 하고 있을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여의치는 않았다.

자신이 의중을 파악하는 것보다 남자의 입이 한 번 더 열린 게 먼저였다.

“송 PD요?”

방금 전의 질문을 더 줄여서 묻는 것에 불과했지만.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걸 받아내기 전에는 뜻을 굽히는 타입은 아니었다. 뜬금없이 학교로 찾아와 저녁을 먹자는 소리만 할 뿐이었지, 제대로 된 설명을 이선에게 해주지는 않았다.

이선은 남자가 교사를 했으면 잘 해냈을 거라는 예전의 생각을 고쳐먹었다.

뭐, 정작 입에서 나온 건 불만도, 제대로 된 추궁도 아닌, “아니요”라는 단순한 대답이지만.

“그럼 누구요?”

“그냥… 다른 아는 사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고등학교 동창도, 대학 동기도 아닌 신규진은 카테고리가 애매하다.

“…….”

말끝이 흐려졌지만, 어쨌든 대답은 됐을 거다. 그런데도 조수석에서부터 넘어오는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내뱉은 말의 진실 여부를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조수석에서 넘어오는 눈길에 쏠려 아슬아슬하게 운전을 하고 있을 때, 차 안 가득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항상 예고 없이 걸려오는 학부모들을 응대하기 위해서 자동으로 연결하게 둔 것이 떠올랐다.

이선은 도망이라도 치듯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8할 정도는 몸이 굳을 정도로 불편한 대화와 남자의 시선에서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야, 퇴근했냐?

술이 들어간 듯 늘어지는 굵직한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인지하고서야 화면을 확인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지. 뭐, 신규진이 직접 온 건 아니라도 뜨끔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선은 재빨리 블루투스 연결을 해제하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조금 술을 마신 건가 싶었는데, 막상 이어지는 말을 듣다 보니 생각보다 더 많이 마신 것 같다. 글로 썼으면 지렁이 글씨로 써야 할 듯한 목소리가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어디냐? 한잔 마시자. 너네 동네 왔는데.

“…웬일이야? 여기서 다 마시고. 약속 있었어?”

―어. 씨발, 진짜……. 아버지 빽으로 들어간 주제에 말이 많아…….

대학 동기들이라도 만난 걸까. 몇 마디 듣지 않았음에도 초저녁부터 취한 이유가 대충 짐작이 됐다.

동기 중 하나가 지방의 도의원인 아버지를 두었단다. 아버지가 선거에서 밀리지만 않으면, 지역의 공사 하나 정도엔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뻐기던 모습을 흉내 냈었다. 실제 신규진의 동기가 어떤 말투로 이야기하는지는 모르지만, 과장되게 짓던 멍청한 표정과 어눌한 투가 그의 최대한의 복수였을 것이다. 결국, 성대모사의 마무리는 입에 털어 넣은 소주 한 잔과 혀 차는 소리였으니까.

사립학교에 기부금을 내고 임용이 된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정이선에겐 낯선 세계의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식견과 상식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제법 흔한 일이었나 보다.

결국, 그 얘기가 현실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온 순간, 이선은 확신했다.

“미안……. 오늘은 좀 그런데.”

―왜. 집일 거 아냐.

“아니, …밖이야.”

머뭇대는 대답을 하며 이선은 조수석을 흘끔 봤다.

블루투스 연결을 해제한 덕에 남자는 자신의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들릴 반쪽짜리 통화에는 관심 없는 듯 왼손 손톱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남의 통화에는 제 손톱보다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에 안도해야 하는지……. 기분이 묘해졌다.

“…미안.”

잠시 망설였지만, 신규진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쐐기를 박듯 중얼거렸다.

옆자리에 누군가가 있지만 않았어도 목적지는 쉬이 바뀌었을 것이다. 늘 그래 왔으니까. 집에 있다가도 전화 한 통에 나간 것도 비일비재했다.

향하고 있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호했다. 신규진이 아마도 혼자 있을 곳과 파전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욱 곤란했다.

‘그냥 당장 여기로 와.’

한마디라면 충분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옆에 타고 있는 젊은 운동선수에게로 향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 말 한마디를 내심 바라고도 있다는 걸 부정할 순 없다.

―됐어.

하지만 한숨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는 역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얼른 들어가라는 말이 완성되기도 전에 통화는 종료됐다. 콘솔박스 위에 핸드폰을 두어도 묵직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단순히 핸드폰이 주는 무게감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차가 없던 시절엔 택시를 탔고, 비교적 최근엔 직접 운전을 해서 왔던 동네다. 나름대로 익숙한 골목으로 진입하자, 한구석에 있는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눈을 끌었다. 정확히는 그 아래에 있을 광경이 온 신경을 잡아챘다.

결국, 서행하던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익숙하게 습관처럼 해왔던 행동은 사람을 참 어쩔 수 없게 만든다. 도착한 줄 알았는지 먼저 차에서 내리는 강희찬을 따라, 이선 역시 내렸다. 넓은 등 너머로 골목길의 너비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계단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이선은 발을 질질 끌며 차 보닛 앞을 돌았다. 길지 않을 그 거리는 생각을 정리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술집밖에 없는 것 같은데……. 어디에요?”

강희찬이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저…….”

주변을 두리번대는 뒤통수와 얕게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이 멈추었다. 먼저 걸음을 옮기려는 듯 두어 발자국 앞에 있던 강희찬이 고개를 돌린다. 왜 부르냐는 평온한 시선이 더욱 마음을 불편케 했다.

“저 앞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보이거든요. 기와지붕이라 금방 찾으실 텐데……. 먼저 들어가서 드시고 있으시면 제가 조금 이따가…….”

큰길을 달릴 때만 하더라도 따뜻한 불빛이 묻어났던 얼굴엔 어느새 골목길의 어둠이 배어 있었다. 밝은 곳에서는 꽤 옅은 느낌을 주던 눈동자가 어느 순간부터 새카맣게 내려앉았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내쉬는 숨과 보내는 시선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있는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선은 내려오는 눈길을 피하며 땅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에게도 일말의 양심 정도는 있었다. 혼자 밥 먹는 걸 싫어하는 사람에게 볼일이 있으니 먼저 먹고 있으라는―심지어 파전을― 소리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심했다.

자신의 하얀 캔버스화보다 사이즈가 큰 검은 운동화가 있다. 정이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차피 생각은 진작 정리된 채였다.

“아니… 죄송한데, 다음에 살게요. 오늘은 일이 생겨서…….”

“내가 선약입니다.”

목소리는 눅눅하고 텁텁한 여름 공기를 갈랐다.

도덕책에 나올 만큼 간략하고 당연한 소리에 이선은 할 말을 잃었다. 한마디는 지금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지를 일깨워주는 효과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교과서와는 달리 실제 삶이라는 건 언제나, 누구에게나 옳은 선택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선은 자신이 잘 쓰지 않는 카드 하나를 떠올렸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거의 써본 적 없던 카드였다. 그것을 이선보다 더 자주 사용했던 건 신규진이었지만, 지금 카드는 그에게 없었다.

얼마 전에―라고 해봐야 좀 됐지만― 책장 사이에 끼워주고 왔던 현금이 얼마나 덧없이 사라졌을지는, 직접 수험 생활을 해봤던 자신에게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지금의 신규진에게 여윳돈이 있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돈에 대한 감각이나 성품이 넉넉한 편인 노량진 포차집 사장과는 달리, 이곳의 주인은 신규진이 술값도 내지 않고 뻗으면 경찰을 부를지도 모른다. 술집을 운영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깨달은 바였다. 업장의 특성상 경찰을 부르는 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겠지만.

“그, 죄송해요. 그래도, 안 가면 가게에도 민폐라…….”

“선약도 팽개치고 갈 만큼, 애인이 그렇게 중요해요?”

곤란함에 머리를 흩트리던 이선의 손이 멈추었다.

시작이 어디인지 모를 소름이 온몸으로 퍼졌다. 팔을 내리지도 못한 채 이선은 눈을 들어 올렸다. 그 앞엔, 본인이 내뱉은 말의 파괴력보다 미약한 짜증이 일어 있는 얼굴이 있다.

“무슨, 무슨 말을…….”

“어차피 다 알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느라 시간 쓰지 말죠.”

평소에도 하얗던 얼굴이 이젠 창백하다 싶을 정도다. 얼굴만 본다면 한여름이 아니라 목도리라도 둘러줘야 할 것 같은 계절감이 느껴졌다.

“…….”

저런 반응의 원인을 잠시 더듬었다. 그리고 스치듯 지나간 자신의 말이 원인임을 깨달았다. 강희찬은 혀를 찼다. 어디서 본 얼굴이다 싶었는데, 딱 제 친구가 보였던 멍청한 반응과 일치했다.

나름대로 위로의 말이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로 보이는 사람을 놔둔 채, 강희찬은 몸을 돌렸다.

정면엔 건조한 느낌의 건물 하나가 있었다. 혼자 지나다니다 봤다면 저기가 술집인지도 모를 만큼, 업장은 영업 의지와는 거리가 먼 외관이었다. 이미 강희찬은 선생이 어딘가를 자꾸 보는 눈치를 통해 저곳이 목적지임을 깨달았다.

“저기죠? 들어가요. 일만 보고 바로 나오면 그만이니까.”

한 걸음 앞으로 뗐다. 아니, 떼려고 했다. 좁은 골목길의 너비만큼을 두고 있는 거리를 금세 좁히고 계단을 내려갔을 것이다. 뒤에서 옷자락을 붙잡는 손길만 아니었다면.

“이봐요.”

제법 엄한 느낌을 내려 했겠지만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다. 강희찬은 뒤를 돌았다. 여전히 추워 보이는 듯 하얀 얼굴이었지만, 입술을 꾹 물고 있었다.

버릇없는 애새끼를 훈육할 때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얘기를 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쥐뿔도 소용없을 거라고.

“뭐예요?”

검은 티셔츠 자락을 붙잡고 있던 손은 강희찬이 완전히 몸을 돌리자 떨어졌다. 약간 실려 있던 무게감이 떨어지는 순간이 옷자락을 통해서 전해졌다.

“그쪽이 왜 저기를 들어갑니까?”

평소엔 잘 써본 적 없던 뾰족한 말끝은 스스로 듣기에도 이상했다. 이선은 남자의 옷자락 없이 빈손을 꾹 쥐었다.

혼란스럽다. ‘난 그런 사람 아니다’라고 변명을 할 틈도 없었다. 이미 남자는 자신의 이상한 취향을 알고 있었고, 그 상대가 저 아래에 있을 신규진임을 파악한 채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물음을 하고 답할 새도 없이, 남자는 일사천리로 그다음을 진행하려 했다.

아니라고 해야 한다. 과연 이 사람이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해야 한다.

이미 한 번 해보지 않았던가. 그때야 간절한 눈으로 ‘아니지, 이선아?’를 되뇌며 자신을 보던 젊은 담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정도였지만. 어쨌든 경험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아닙니다. 난 그런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난 지금 단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뿐입니다.

생각해 본 어떤 말들도 하나같이 변명 같았다. 아니, 변명이고 거짓말이니, 그리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뱉으려는 어떤 말도 결국 단발성으로 내뱉는 숨으로 그쳤다.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 어질한 눈가를 짚었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렇지 않게 남의 비밀을 알고 있다 실토하는 남자나, 열등감을 풀어낼 방법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나.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까맣게 내린 어둠 뒤에 눈을 떴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틀어박힐 수 있는 집이었으면 싶었다.

이것도 예전에 했었던 생각이다. 이선은 쓰게 웃었다. 이미 겪어본 적 있지 않은가. 제발 지나갔으면 했던 시간을 직접 몸으로 견뎌내야만 넘길 수 있었다.

“아무튼… 오늘은 내가, 좀…….”

길바닥이든 뭐든,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남자를 보내고, 계단을 내려가기만 한다면 바로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주저앉아 버릴 것이다.

‘여기선 안 된다.’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이 자신의 목줄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약점이라는 걸 들켜선 안 될 일이다.

정이선의 해결 방식은 간단했다. 언제나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은 당연히 회피였다.

한참을 대고 있었음에도 눈가를 누르는 손은 시원했다. 점점 차가워지는 것도 같다는 착각이 들 무렵이었다.

“정 선생은 애들한테도 그렇게 가르칩니까? 이따위로 선약 팽개치라고.”

이 자리에서 도망가기를 바란 정신이 그 순간 돌아왔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어딘가 한 군데에서부터 차가운 심이 생겼다. 그 부분을 중심으로 온몸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선은 눈을 짚고 있던 손을 슬쩍 떼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여전한 표정이었다. 아까와 다를 바도 없는 얼굴이 어쩐지 몹시도 고까워졌다.

“강희찬 씨.”

지긋한 시선이 대답을 대신했다. 당장이라도 다시 눈을 짚고 싶었다.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선은 손을 내리고 주먹을 쥐었다. 잠깐 그 손에 남자의 시선이 붙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어느새 검은 눈은 자신을 올곧게 향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이 보통 행정직 공무원이랑은 환경이 달라서, 딱히 계급이 구분되는 건 아니지만……. 1정 연수를 못 받아서, 아마 보통 공무원 7급 정도 대우일 겁니다.”

“…….”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이 지금 예순쯤 되셨을 거예요. 교장은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4급 대우를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찡그린 미간이 묻고 있었다. 갑작스레 흘러나오는 공무원 계급 체계가 대체 무슨 맥락인지를.

“…….”

이선은 한숨을 뱉고 잠시 시간을 두었다.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와 언쟁을 벌여본 일이 없는 자신에게는 낯설었다.

대체 타인과 다퉈서 얻는 게 뭐가 있다는 걸까. 특히 남자는 이선에게 더욱 그런 범주의 사람이었다.

남자의, 혹은 쌍방의 과실로 인해 병원에 함께 갔었고, 핸드폰을 받았으며, 밥도 몇 번 먹은 적 있다. 남자에게는 자신이, 자신에게는 남자의 직업이 접하기 힘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아마 보통 사람들에게는 흔하디흔한 인간관계일 것이다.

그저 넘기면 된다. 조금만 참고 넘기면 지나갈 일이었다. 그런데도 머리에 오르는 열이 익숙하지 못한 정이선은 자신이 낯설었다. 참는 건 익숙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분도 자식뻘인 저한테는 꼬박꼬박 ‘선생님’ 소리 붙여서 부르세요.”

“…….”

“…넌 뭔데 정 선생이야?”

올려다보는 시선과 함께 이선은 내뱉었다.

송재혁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혹시라도 양아치 같은 말투는 쓰지 말라고. 교직원으로서의 품위 유지 따위의 이유는 아니었다. 어울리지 않는단다.

당시야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문득 깨달았다. 남자를 향한 반말은 정말 스스로가 듣기에도 어설프고 우습기만 했다. 몇 년 동안 쓸 일이 많지는 않아서 그렇기 때문이라는 위로는 소용이 없었다.

“하…….”

남자의 입꼬리가 한쪽만 말려 올라갔다. 무엇에 대한 비웃음인지는 모호했지만, 비웃음인 것만은 명확했다. 송재혁의 말마따나, 어울리지도 않는 자신의 말투 때문일 수도 있고, 아웃팅을 당한 주제에 멋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탓일 수도 있다.

비틀려 올라갔던 입꼬리 그대로 남자는 말문을 열었다.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요? 약속 팽개치고 가겠다는 사람이.”

이선은 입술을 꾹 물고 눈을 돌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도, 인정해야 했다.

말투나 태도야 어쨌든, 항상 정답만을 내뱉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내뱉은 말의 본론은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정이선은 치사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이 남자를 뿌리치고 저 건물 아래로 들어갈 수 있다.

“그쪽도 알 거 아닙니까. 우선순위가 있고, 중요한 일 먼저 챙겨야 하는 거.”

“…….”

“안녕히 가세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가 든 후, 그대로 남자의 옆을 지나쳤다. 뒤에선 기가 찬 헛웃음이 들려온 것도 같았지만, 이선은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익숙했다. 사람을 떨궈낼 각오로 살았던 정이선에게, 이 정도의 인간관계를 끊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 * *

신규진에게 자신은 봉사활동에서 만난 조금 말이 통하는―혹은 입 다물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였다. 그걸 알면서도 멋대로 혼자 키우던 마음은, 그에게서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또 멋대로 상처를 받았다.

신규진은 여자친구를 만나고, 언젠가는 지금의 여자친구가 아닌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자신 말고도 많은 친구들을 만나며 평범한 삶을 누릴 것이다. 마치 어린 기억 속 자신의 아버지처럼.

‘그러면, 나는?’

10년, 20년. 혹은 그 이후에도. 외로운 건 싫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되겠다고 꿈꾼 적은 어머니의 키를 넘길 무렵부터 하지 않았다. 그냥 남들처럼. 남들만큼만.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쉽진 않았다.

많은 걸 바라진 않는다.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때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원했다. 서로의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 줄 수는 없더라도, 아플 땐 누워 있는 상대의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걱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문득 커지는 생각은 언제나 자신을 춥고 어두운 벌판 한가운데에 서 있게 만들었다.

선이 좋다는 착한 사람.

스무 살 초에 들었던 말은 언제나 어려웠다. 일단 첫 번째 조건부터 충족시킬 수 없었다. 나이가 정말 많아도, 성격이 나빠도 상관없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며 원하는 사람만 나타난다면 덜 외로울 자신이 있었다.

눈이 뻑뻑해지도록 검색을 해서 겨우 알아낸 가게였다. 위치를 알고도 한참 컴퓨터 화면을 보기만 했었고, 며칠을 가게 앞까지 갔다가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다…….

입김이 하얗게 일 정도로 추웠던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귀가 떨어져 나가도록 추웠는데, 이상하게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추위, 혹은 다른 무언가에 등 떠밀리듯. 핑계를 대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한 단씩 내려갔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훈기와 조화된 적당한 높낮이의 말소리가 자신의 등장과 함께 뚝 멈추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잔잔한 음악에 비해, 낯선 사람을 경계하듯 쏟아지던 시선. 이선은 몸을 움츠렸다. 기가 눌려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바에 앉은 손님을 위한 온더록스를 준비하고 있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슬쩍 숙여 보이는 행동에 이선은 마음이 조금 풀렸다. 바깥이 너무 추운 탓이라고 핑계를 대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 바의 가장 구석에 몸을 앉혔다.

목도리를 푸는 동안 주인은 이선의 앞으로 다가왔다. 처음 오는 거냐는 그의 물음에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따뜻한 물과 함께 건네는 메뉴판은 집어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술은 잘 모르니, 도수가 약한 거로 적당히 해달라는 말을 겨우 뱉었다.

손이 커다란 주인이 만들어낸 건, 이선도 대학 동기들과 신입생 시절에 마셔본 적이 있던 칵테일 한 잔이었다. 이온음료와 비슷한 푸른색을 내는 잔을 멍하니 보던 이선의 곁에 누군가 자리를 옮겨왔다. 온더록스의 주인이었다.

묻는 말에 단답 이상의 말을 하지 못하는 이선의 곁을 그는 꽤 오래 앉아 있었다. 어차피 이 정도일 것이다. 대단한 운명이나 사랑 놀음을 바란 적은 없었다.

‘그래도…….’

이어지는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얕게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낮은, 그러면서도 나이 든 태가 묻어나는 묵직한 웃음이 귓가에 걸렸다.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스킨 향이 너무 독했다.

아버지도 예전에 이런 냄새가 나셨던가?

이상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잔소리하며 싫어하셨지만, 이선은 회식 후 술 냄새를 붙이고 들어오셨던 아버지의 체취조차 좋았다. 꼭 빼먹지 않고 자신을 위한 간식을 쥐고 오셨던 손이 다소 거칠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감각과 맞닿는 냄새였다.

그것과 비슷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남자의 냄새는 멀미가 날 정도로 힘들었다.

다른 걸 시키겠냐는 남자의 제안을 본의 아니게 붕붕거리는 고갯짓만으로 거절했다. 남자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는 자신을 향한 호의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본심이야 어쨌든 웃음만큼은 어린애나 작은 강아지를 보며 귀여워해 주는 것과 닮아 있었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가겠느냐는 그의 질문에 이선은 홀린 듯 일어섰다.

…어차피 이런 것일 테다. 이성애자라고 술집에서 짝을 만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남자는 충분히 자신을 향한 관심과 호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할 거다. 남자는 본질을 숨기지 않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해주는 사람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끝을 보며 되새기던 생각은 선득한 공기에 고개를 들고, 남자의 뒷모습을 본 순간 멎었다.

척 보기만 해도 비싼 것임을 알 만큼 고급스러운 코트였다. 거기에 누군가의 꾸준한 관리가 더해지자, 더욱 입고 있는 주인에게 어울렸다.

이선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마흔도 되지 않으셨다. 젊었던 아버지에겐 어울리지 않을 코트를 입었음에도, 어쩐지 그 순간 보이는 뒷모습은 아버지의 것과 몹시도 닮았다.

계단을 다 오르고, 이선은 남자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을 사람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도 있지만, 아버지의 뒷모습에는 항상 자신보다 앞서 걸었던 사람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규진과 아버지는 키가 크다는 것 외에는 닮은 점이 없었을 텐데. 이선은 종종 그에게서 아버지를 찾곤 했다.

좋아한다. 그 한마디 말조차 꺼내보지 못할 마음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앞으로의 인생에서, 무엇 하나 가리지 않은 정이선을 향한 호의를 받을 자신이 없었다. 사람이란 게 다 연이 있고 짝이 있다는, 중년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아침 시간대의 프로그램 멘트 같은 소리는 언제나 와닿지 못했다. 아주 잠깐 누군가와 쌍방의 호의를 주고받았다 착각한 적도 있었다. 평생을 자신과 함께해 달라는 소리는 하지 못할 철없는 마음이었다.

단정한 코트를 걸친 뒷모습을 따라가는 걸 망설이는 이유치고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억울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국 정이선은 끝까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건물 앞을 벗어나지 못했다.

낯선 이를 향한 호의는 금세 바닥이 난다. 목적이 있는 호의란 늘 이랬다.

코트를 걸친 뒷모습이 사라진 검은 길가를 보다, 결국 시선을 발끝으로 내렸다. 얇은 재질의 스니커즈를 신은 발이 시려질 무렵에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특이한 날이라고 생각하며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려는 순간, 이선의 시야에는 전혀 의외의 것이 들어왔다.

‘…아, 안녕?’

목이 멘 건지 더듬는 목소리가 처음엔 아예 기억에 없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건너온 인사에 대꾸하지 않고, 이선은 머릿속에서 소거법을 이용해 열 걸음쯤 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추려냈다. 좁디좁은 대학에선 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 조금 더 시간을 뒤로 돌렸을 때, 어렴풋이 남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은 정확히 모른다. 김 씨였나 박 씨였나. 건너건너, 친구의 친구의 친구 정도인. 점심시간엔 항상 족구를 하던 이과 무리 중에 저 얼굴이 있었던 것도 같다.

‘안녕.’

과연 들렸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거의 중얼거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말에, 이름도 모르는 동창의 뒤로 팔랑이는 강아지 꼬리가 보이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어쨌든 나쁘진 않은 선택이었다.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전까진 단 한 번도 믿어본 적 없던 말이 사실이라는 걸, 턱이 빠질 듯이 추운 어느 날 깨달았다.

그때의 기억은 몇 년이 지나도 인테리어 하나 바뀌지 않는 가게에서 얻은 유일한 좋은 추억이라고. 이선은 생각했다.

“존나 쳐다보네, 진짜. 저것들도 직장에선 다 멀쩡한 척하고 살겠지. 징그럽게.”

무알코올로도 나오는 몇 가지 종류의 칵테일 중 하나에 두고 있던 눈을 들어 올렸다. 주변을 흘긋거리며 인상을 찌푸린 신규진의 얼굴이 앞에 있었다.

“…….”

상대성은 무언가를 측정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물론, 사람에게 와닿기 쉬웠고. 쉬운 예로만 들어도, 자신 역시 숱한 상대적 평가를 거쳐오며 산 인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종일 피곤함에 찌든 수험생이나 고시원의 벽면만을 마주하던 신규진의 곁엔 더 이상 비교우위를 통해 제 행복을 찾을 대상이 없었다.

처음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의 말대로, 남자를 좋아한다는 충격적인 커밍아웃이나 하고 입대한 친구에게 짝을 지어주고 싶었을 거다. 남자는 원래 남자가 봐야 한다며―이선은 자신도 남자라는 당연한 사실은 구태여 지적하진 않았다― 호기롭게 앞서 걷던 뒷모습을 따랐었다.

신규진은 ‘좋은 사람’이 될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았다. 성적 취향이 특이한 친구에 대한 배려보다는, 이해심이 깊은 자신에게 취했던 거라고 지금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얄팍한 마음마저도 자신에게는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배경으로―라고 신규진은 주장하는― 입사한 그의 친구도, 몇 주 전까지 트레이닝복을 입었던 여자와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신규진도. 결국,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타인을 통해 얄팍한 안도감을 얻고 싶은 것뿐이다.

술집 특유의 어둑한 조명이 내려앉은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사람이 열등감에 묻혀가는 과정을 몇 년째 지켜보는 건 썩 유쾌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정이선은 그에게 무언가를 해줄 순 없었다.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던 사실이 오늘만큼은 지쳤다.

손대지 않았던 유리잔에 잠깐 눈길을 가져갔다가, 다시 신규진을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 늘 불평만 나오던 입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건 무언가를 마실 때뿐이었다.

“…중요한 얘기 있는 거 아니었어?”

“일 없으면 부르지도 못하냐? 뭘 그렇게 바쁜 티를 내.”

“밖이었다고 했잖아. 급한 것도 아니고, 그런 얘기나 할 거면서 왜…….”

차라리 기분이라도 처진 채였다면 애써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술이 떡이 되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평소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스물한 살의 신규진과는 달리, 열등감은 스물여덟인 그에게는 언제나 익숙한 일이었다. 그건 정이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입에서 한숨이 나오는 건 별난 일이었다. 아마도 어두운 복도에 서 있던 하얀 얼굴이, 자신의 차에 얌전히 타 있던 모습이 자꾸 기억난 탓이었다.

“씨발, 수업 끝났을 거 아냐.”

“그게 아니라…….”

“하여간에 새끼들이 돌아가면서 사람을 무시하지.”

저 ‘새끼들’에 자신과 누가 포함되는지 이선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차오르는 무언가를 삭이려 칵테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알코올이 없는 칵테일은 어딘가에서 마셔본 아이스티의 맛에 한없이 가까웠다. 달큼한 그 맛도 상황까지 달게 만들어주진 않는다.

“그게 아니라니까.”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은 순간 의자가 대리석 바닥을 끄는 소리가 울렸다. 이선은 손을 떼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느새 신규진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나갈 채비를 한 채였다.

“어디, …카드 가져가. 어?”

이선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허겁지겁 꺼내고 익숙한 색의 카드 하나를 집었다. 내미는 카드를 보는 얼굴의 한쪽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어딘가에서 봤던 표정이다, 라는 생각이 완성되기도 전에 신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 보자마자 카드부터 가져갈 땐 언제고 왜 주는데?”

“없으면 오늘처럼 불편하잖아. 내가 미안하니까 그냥 가져가. 다신 안 그럴게.”

“씨발, 사람을 그지 새끼로 아나.”

필요 없어. 짧은 한마디가 완성되는 것보다도 신규진의 뒷모습을 보는 게 먼저였다. 붙잡을 새도 없이 뒤를 돌고, 입구로 향한다.

뒤를 따라 붙잡을 힘도, 이름이라도 불러볼 여력도 없었다. 신규진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자동문이 닫히자마자 이선은 끈 떨어진 인형이라도 되듯 의자에 다시 몸을 떨궜다. 쿠션이 푹, 하고 꺼지는 소리가 마음 한구석에 얹혔다.

조금 전 마셨던 음료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그 옆에 있는 작은 물잔을 집었다. 한 모금 물을 밀어 넣어도 입 안에 텁텁하게 남은 단맛은 여전히 옅게나마 남아 있었다.

“…….”

좋았던 기억이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한 걸음 뒤에서나마 웃었고, 자신은 아니었지만, 에너지가 가득하게 빛나는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얻은 적도 있었다. 자신은 절대로 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자꾸 눈이 갔다.

좋은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웃어주었다. 타인이 보여주는 호의에 약한 마음이 훌쩍 기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멋대로 주었던 마음을, 이제는 빛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둔다는 건 너무 가혹했다. 신규진을 향한 가혹함이 아니었다. 열등감에 한없이 작아진 상대를 저버렸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은 자신을 향한 가혹함이 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은 아무런 장점도 없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그리 생각했던 사실에 금이 가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견뎌야 할 때가 있다. 어느 유명인의 자서전에나 나올 것처럼 참고, 인내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건 정말 많은 힘이 든다. 힘들이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은 현실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보잘것없는 것이 아닌, 상상 속의 혹은 어느 미래의 자신을 지금의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단 신규진만은 아니었다. 자신 역시 그런 현실도피와 인연이 깊었으니까.

가망이 없는 도전을 지켜보면서도, 머리 한편에는 아주 나이가 들었을 때 그의 곁에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때의 신규진이 어떤 사람이 되었든, 자신을 향해 웃어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족하다. 아무리 물을 삼켜도 옅어지기만 할 뿐 입 안에 텁텁하게 남는 단맛처럼 언제나 답답한 삶이었다.

이선은 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는 내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이쪽을 흘끔대던 주인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카드를 내밀었다. 신규진에게 건넸던 보라색이 아닌, 자신이 주로 쓰는 카드였다.

결제를 마친 카드를 내민 주인은 무언가 말을 걸려는 듯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이선 역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짧은 고갯짓으로 마무리했다.

안녕히 가시라는 형식적인 인사를 뒤로한 채, 입구를 나서고 계단을 올랐다. 어느 겨울날처럼 무서운 곳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언제나 외로움과 닿아 있었다.

건물 입구에 서자 골목 건너편에 바로 파란 차가 있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골목 양옆을 번갈아가며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

그 순간 이선은 궁금해졌다. 자신이 찾고 있는 인영이 누구인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