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K
‘유튜브에서 봤어요.’
요새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물으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업무도 슬슬 지루해졌고, 한번 보자는 기분으로 인터넷 창을 열었다. 페이지에는 야구와 관련한 영상들만 가득하다.
그럴 만도 했다. 이선이 유일하게 구독 버튼을 누른 건 송재혁이 관리하는 야구단 채널이다. 화면만 보면 답이 없는 야구팬으로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동영상 섬네일과 제목을 훑으며 이선은 볼만한 게 있나 찾았다.
영상을 보며 이선이 안 건, 야구선수들은 매일 경기 전 훈련을 한다는 점뿐이다. 그럴 때 카메라를 가져다 대면 반응은 보통 두 가지였다. 카메라를 향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주거나 죽일 듯이 노려보거나.
며칠 전 학교에 왔던 강희찬은 후자임이 틀림없었다.
강희찬. 도쿄올림픽.
단어 두 개를 검색창에 쳐봤다. 관련된 영상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가장 위에 있는 영상이 조회 수가 가장 높다.
강희찬 올림픽 결승전(vs·일본) 8이닝 9K.
연결된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꽂고 영상의 섬네일을 눌렀다. 15초짜리 광고 후 이어진 영상은 클로즈업된 투수의 얼굴과 좌측의 기록표로 시작했다.
화면에 처음 등장한 강희찬은 어렸다. 지금도 객관적으로 어리고, 어려 보이는 축인 것 같은데 이때는 거의 고등학생 같은 인상이다.
긴장이 이유인지 굳어진 얼굴. 요즘과 달리 화질이 낮은 영상 속에서 더욱 위태로워 보였다. 화면의 좌측 상단에 있는 ‘한국―일본’이라는 글자가 더욱 그렇게 만들고 있는 듯도 했다.
―오늘 강희찬 선수가 상대할 일본 국가 대표팀 타순은 1번 사카모토, 2번 나카다, 3번 이시이로 출발합니다.
―좌완인 강희찬 선수가 선발로 나온다는 게 알려졌지만, 요시무라 감독은 준결승전과 완전히 같은 라인업을 들고 나왔네요.
짧은 중계 멘트 후에는 연속으로 삼진, 삼진 소리만 나온다. 빠른 편집 영상이었다. 공이 어떻고 구종이 뭐고. 이런 건 문외한인 자신에겐 어려운 소리다. 차라리 보기 쉬운 영상이었다.
H.C.KANG
50번과 함께 등에 짊어진 영문 이니셜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니셜에서 연상되는 이름 석 자. 그것이 요 며칠 전 직접 얼굴을 봤던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짧은 영상의 마지막 구간이 되자 중계진의 멘트가 다시 들렸다. 좌측 상단에 있는 스코어 아래로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 불이 나란히 두 개씩 켜져 있다.
―아마도 이번 이닝까지 강희찬 선수가 책임지지 않을까 싶은데요.
투수의 손끝에서 공이 던져지고 타자의 방망이가 헛돌고. 그런 순간은 모두 찰나의 시간이라 눈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정이선의 감각을 가장 먼저 때린 건 누군가의 비명 같은 함성이었다.
―삼진! 기나긴 승부는 결국 열세 번째의 공을 던진 투수가 웃었습니다!
―떨어지는 공으로 결국 배트를 끌어냈어요. 사실 강희찬 선수가 잡은 그립을 보면 스플리터에 가깝겠지만요. 그래도 91년 한일 슈퍼게임에서 우리 선수들이 포크볼에 고전했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네. 오늘 우리는 일본 야구의 심장, 도쿄돔에서 메달보다 값진 한국 야구의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광고 후, 9회 초로 이어집니다.
벅찬 목소리에 어우러진 화면 속 남자는 모자를 벗으며 걸음을 떼었다.
봉긋이 솟은 흙 언덕에서 한 걸음씩 내려오는 뒷모습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도쿄돔을 울리는 함성과 넘실대는 대형 태극기가 화면에 잡혔지만, 앳된 느낌이 짙은 얼굴은 그쪽으로 시선조차 던지지 않는다.
2 대 1로 마무리된 경기. 올림픽 결승. 그것도 한일전.
약관의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일 텐데도, 그 얼굴은 지금이나 어릴 때나 웃음 한 자락 비추지 않는다. 강희찬이 선수들의 과한 환호를 받는 것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
생각보다 심심한 마무리다.
사실 이 이후로 한 회를 더 진행하고 금메달을 땄으니, 경기는 아직 끝난 상태가 아니긴 했다. 진짜 끝은 이선이 과방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봤던 화면이었으니까. 비명을 지르는 중계진이고 물병을 들고 그라운드로 뛰어오는 선수들이고 난리였던 그 순간 말이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더니, 보통 이런 걸까? 그래도 축구는 골 넣을 때마다 세리머니도 하던데.
화면을 끄지 않고 있자 금세 관련 영상이 정지된 채로 떴다. 배경이 야구장이 아니라 광고인가 했더니 시상식장이다. 영상의 주인공은 당연히 강희찬이었다.
강희찬 신인왕 3초 소감.
이런 데 올라오는 영상들은 하나같이 제목이고 섬네일이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하는 데 썩 관심이 없는 이선도 휴일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세 시간 동안 영상만 본 적도 있었다. 확실히 이런 걸 보면 애들이 모든 지식을 유튜브에서 보는 것도 이해한다.
생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손가락은 본능적으로 화면 가운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올 시즌 가장 빛났던 별의 이름이 제 손 안에 있습니다.
영상 속 시상자로 나온 중년 배우는 노련하게도 농담과 함께 잠깐의 간격을 두었다. 꽤 많은 시상식을 경험해 본 관록이 묻어난다. 관객들의 기대를 받는 시상자는 봉투를 열며 장난스레 싱긋 웃었다.
―축하합니다. SH 컵스, 강희찬 선수.
화면은 이내 정장을 입은, 체구가 큰 선수들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로 잡혔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무대로 걸어간다. 그라운드에 있을 때와는 달리 단정하고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시상자가 건네는 꽃다발과 트로피를 받았다. 클로즈업으로 잡힌 옆얼굴은 지금보다는 확실히 아까 봤던 올림픽 영상에 더 가까운 분위기였다. 그러고 보면 스무 살에 올림픽으로 국제무대 데뷔를 했다니까, 신인상을 받은 이때와 같은 나이일 확률이 높았다.
고등학생처럼 앳된 얼굴이지만 진짜 고등학생이라기엔 관리가 잘 된 느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어린 인상이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완전히 뒤로 넘기지 않고 반 정도 앞으로 내려온 머리가 자연스럽다. 하지만 저것도 어차피 한 듯 안 한 듯 티 나지 않는 화장처럼, 전문가의 영혼 가득한 손길이 붙었을 거다.
선수의 기록과 득표 결과를 설명하는 여자 사회자의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렸다. 총 투표인단 104명 중 97표의 1순위 표 획득. 오랜만에 등장한 고졸 신인 투수의 신인왕 수상 기록이라는 설명 속에서 강희찬은 무던한 얼굴로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내부를 울리던 박수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완전히 소리가 멎자 저 나이에도 똑같은 얼굴을 했던 선수는 잠깐 간격을 두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오른쪽 하단에는 스톱워치처럼 시간이 표시되었다.
―과한 상을 받았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확히 3.82초.
미스코리아 수상 소감처럼 미용실 원장님한테까지 감사 인사를 하는 걸 바라진 않아도, 저건 심했다. 잘 모르는 이선도 알 수 있었다.
3초 만에 소감을 마친 누구 덕분에 순식간에 영상은 끝났다. 강희찬이 주인공이라는 제목에 비해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가장 많이 들었다.
그는……. 의외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꽤 겸손한 성격인 걸까?
몇 번 실제로 본 적 있는 얼굴을 떠올려봤다. 겸손한 성격인지를 판단하기 이전에, 이선이 그에게서 본 것은 짜증이나 성가심이 가득한 표정뿐이었다.
“이선 쌤, 뭐 보세요?”
“아, 그냥요.”
간식 쇼핑을 끝냈는지 김경원은 이선의 자리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이제 SH 모터스의 신차 광고가 재생되고 있는 인터넷 창을 껐다. 이어폰을 빼자 교내를 울리고 있는 단소 연주 소리가 들렸다.
커피라도 마셔볼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이선은 교무실 문에 누군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흠칫한 이선과 시선이 맞은 건 야구부 감독이었다.
누구를 찾아온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이선을 향해 감독이 반색하며 손짓을 했다.
“…네?”
이쪽으로 오라는 신호였다. 들어오시면 될 텐데, 왜 굳이 저러는 걸까. 커피를 잠시 미룬 이선이 교무실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감독님, 들어오시지 왜 밖에 계세요?”
문을 연 이선의 팔을 잡은 감독은 그를 복도로 꺼내다시피 잡아당겼다. 그리고 직접 교무실 문을 닫기까지 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리면 안 될 얘기라도 할 기세라, 이선은 덩달아 당황했다. 수상한 기색인 감독은 이선을 잡지 않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정 선생, 이거 받아.”
백화점 이름과 마크가 가운데에 새겨진 봉투를 보자 이선은 몸을 굳혔다. 감독이 내미는 봉투를 본능적으로 막아내듯 양손으로 몸 앞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감독님. 저 이런 거 받으면 큰일 납니다.”
사색이 된 이선을 보던 감독은 잠시 멍한 채 말이 없었다. 이내 곤란한지 으으, 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게 아니라, 강희찬 선수한테 좀 전해줬으면 해서. 진짜 얼마 안 들었어. 십만 원이야, 십만 원.”
내용물의 가벼움을 얘기했지만, 이선에게는 매한가지였다. 여기에 백만 원이 들어 있어도 느끼는 난감함은 변함이 없을 터였다.
“이러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 어차피 구단에서도 필요한 영상이었다고 해서요.”
“정 선생. 오늘 나 밥 먹고 출근해서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모르는 소리를 한다는 한심한 표정에 이선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감독의 입에선 한숨과 섞인 탄식이 섞여 나왔다.
“피칭머신하고 에어컨 왔더라. 산 적 없다고 하니까, 주문자 이름이 강희찬이야. 정 선생은 알고 있었어?”
“아, 아니요.”
“그럼 구단 말고 진짜 개인적으로 보낸 건가…….”
혼자 고민을 하는 것처럼 머리를 긁어대던 감독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재차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아까 급하게 사 오느라 진짜 얼마 안 해. 그때 회식비도 다 계산하고 가더니……. 미안하잖아. 부탁 좀 할게, 정 선생.”
“아…….”
“정 선생도 나중에 밥이든 술이든 먹고 싶은 거 정해놔. 거하게 한번 쏠 테니까.”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정해놔. 알았지?”
‘어른이 주시면 사양하는 거 아니야.’
예전에 학교를 마치고 어머니 가게에 가면, 단골들이 종종 용돈을 하라며 만 원, 이만 원씩 주시곤 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중간고사 시험을 잘 봤다든가, 어머니를 도와줘서 기특하다든가. 아니면 정말 술에 취해 기분이 좋으셨든가.
사양하는 이선을 향해 아저씨들은 제법 엄한 목소리를 내며 저렇게 얘기하셨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비슷한 나이셨을 터였다. 아버지도 밖에서 술을 드시면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저렇게 용돈을 주셨을까?
그때의 아저씨들과 꼭 닮은 목소리를 듣자, 교복을 입었던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듯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은 어깨를 두드리며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계단으로 향하는 감독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손에 든 봉투는 오롯이 부담스러운 과제가 되었다.
이걸 어떻게 준담.
슬리퍼를 질질 끌며 교무실로 들어가기 전, 이선은 아차 싶어 재빨리 봉투를 뒷주머니에 넣었다. 옆자리의 김경원이 그게 뭐냐고 물어온다면 구구절절 설명할 자신도 없었고, 괜한 오해를 사는 것도 사양이었다.
다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일반 직장에서도 십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으로 덜덜 떨어야 하나. 대체로 불만을 가져본 적 없는 공무원 사회는 가끔 피곤했다.
* * *
감독은 구단 직원과 친분이 있는 자신이 그곳의 선수와도 대단히 친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이선은 강희찬의 전화번호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 재차 깨달았다. 그때 찍어줬던 번호를 날려먹지만 않았으면, 지금 덜 곤란했을까?
“하…….”
잠실 구장의 직원과 선수용 주차장에서 이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아니면 저번에 왔던 것을 기억하는지 가드들은 출입구 근처에 서 있는 이선을 그냥 두었다.
문에서 조금 떨어진 벽에 몸을 기댄 채 이선은 다리를 덜덜 떨었다. 오른쪽, 왼쪽. 번갈아가며 떠는 모습을 누군가 정신 사납다고 타박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
저번에 경기가 끝나던 시간에 맞춰 도착했더니 어쩐지 한산했다. 입구에서 선수로 추정되는 덩치 큰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이선은 흠칫하며 그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나온다면 뭐라고 하며 얘기를 꺼내야 하지?’
저번처럼 먼저 알은체를 해주는 건 너무 요행을 바라는 거겠지. 차라리 나오지 않았으면…….
차에서 내리기 전, 무심함 사이로 짜증을 눌러 담은 얼굴이 무어라 했는지 가물가물했다. 병신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던 건 정확히 기억나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문장이었는지는 애매했다.
아무래도 쉬는 날 반나절을 아이들에게 휩쓸려서 어지간히도 피곤했을 거다. 아이들을 상대하며 돈을 받는 직업인 자신도 가끔은 피곤하고 짜증이 났다. 애들이 익숙하지 않은 미혼인 젊은 남자라면 충분히 이해 가는 심정이었다.
그때 일로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면 단번에 보일 성가신 기색. 벌써부터 이선에겐 마음의 상처였다.
‘그러니까 왜 에어컨은 보내서…….’
괜하게 흐르는 생각을 자각하고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학교에서도 해주지 않는 것을 개인이 한 거다. 기부를 하고도 사진 한 장 찍지 않는 걸 보면, 송재혁은 모를 확률이 더 높았다. 알았으면 진작 학교에 찾아와 강희찬과 교장 선생님을 정상회담하는 국가 수장들처럼 찍었을 게 분명했다.
‘…송재혁 때문에 조용히 보낸 걸까?’
뭐가 됐든 의외의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면 짜증을 냈지만, 애들의 온갖 야구용품에 사인을 해줬고, 심지어 야구부와 관련도 없는 사인 부탁도 들어줬다.
송재혁에게서 건너 들은 남자의 준공식적인 별명은 어쩌고저쩌고하는 개새끼라도, 그 정도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무슨 개새끼더라. 참신한 개새끼였나?
“야!”
어깨에 툭, 하고 닿은 손길 탓에 몸이 얼었다.
기억 속에 있는 남자는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는 접촉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아도 몸은 본능적으로 굳었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고개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기름칠을 하지 못한 로봇같이 삐걱거렸다.
“너 여기서 뭐 해? 전화도 없이.”
“아… 재혁아.”
눈을 둥그렇게 뜬 송재혁의 얼굴을 본 순간, 마음에서 퍼지는 안도감은 입 밖으로까지 나왔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 문으로 나오는 강희찬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고.
어려운 일에서 도망가는 성격은 10대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 * *
평소보다 경기가 일찍 끝났다며 송재혁은 이른 퇴근을 자축했다. 프로야구 출범 이래로 짧게 끝난 경기 시간 기록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 거라나.
생각해 보면 야구는 농구나 축구처럼 시간제한을 두고 진행하는 경기가 아니었다. 끝나는 시간이 매번 같지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서 좋다며, 송재혁은 이선에게 밥을 사기를 종용했다. 평소였다면 너의 퇴근과 내가 밥을 사는 게 무슨 상관이냐며 말이라도 했을 테지만, 얼마 전의 고생을 생각하니 순순히 지갑을 열 수밖에 없었다.
중식당에 들어와 메뉴를 고르는 순간까지도 송재혁은 어깨에 담이 생기지 않을까 싶게 들썩였다. 먼저 나온 냉면을 흡입하는 정수리를 바라보다 이선은 운을 뗐다.
“강희찬은 갔어?”
“히에에 아어.”
“…삼키고 말해.”
젓가락질 두 번에 냉면의 반이 사라지는 건 대체 무슨 경우냐. 가슴팍을 퍽퍽 치면서까지 면을 삼켜내는 모습에 이선은 제 속이 다 답답해졌다.
“7회에 갔다고. 강희찬.”
“그렇게 먼저 퇴근해도 돼?”
“감독이 허락하니까 가는 거지, 뭐. 내일 등판이라 컨디션 조절하라고.”
“원래 다들 그래?”
“선발은 귀족이야. 근데 선발치고도, 뭐… 정자 시절부터 관리받으신 분이라서.”
그새 다 먹고 없는 면을 대신해 방울토마토를 건져 먹는 송재혁의 말이 묘하게 뾰족했다.
배 속에 음식이 들어갔음에도 답지 않게 심술이었다. 자신보다 먼저 퇴근한 사람에 대한 시샘인지, 오늘도 카메라를 들이댔다가 한소리 들어서 삐졌는지 알 수 없었다.
주방장인 남편과 둘이서만 가게를 운영하는 아주머니가 깐풍기와 볶음밥을 들고 왔다. 입에 넣는 순간 입천장이 홀랑 까질 것처럼 김이 나고 있었다. 음식을 보자 비죽 튀어나왔던 송재혁의 입도 조금은 들어갔다.
“뭐, 정자 시절은 모르겠고, 고등학교 때부터 관리는 엄청나게 받았으니까. 봄가을엔 이 정도는 아닌데, 여름엔 체중 때문에 그래.”
“어어.”
깐풍기가 보이니 사람이 좀 너그러워졌다. 송재혁을 보던 이선은 밥이 한 김 식은 걸 확인하고 짜장 소스를 섞었다.
“근데 강희찬은 갑자기 왜? 오늘 강희찬 만나러 온 거였어?”
깐풍기를 향하던 매서운 눈빛이 그대로 자신을 향하자 손이 반사적으로 멈췄다. 딱히 잘못한 것 같진 않은데 왠지 모르게 찔렸다.
“그게…….”
숟가락을 그릇에 두고, 의자에 걸어둔 가방에 손을 넣었다. 지난 겨울방학 때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사두고 아직도 1권을 채 읽지 못한, 유명 작가의 신작이 손에 잡혔다.
지하철에서 읽으며 문학소년 기분을 내려고 가져온 건 아니었다. 하드커버 표지를 열고, 그 아래 있던 봉투를 송재혁에게 건넸다.
“이거 그 사람한테 전해줘라.”
“뭔데? 상품권?”
봉투를 앞뒤로 뒤집어보는 기색이 영 마뜩잖아 보인다.
“에어컨이랑 무슨 기계였는데……. 애들 연습할 때 쓰는 거.”
“피칭머신?”
“어, 그거였던 것 같다. 아무튼, 그거 보내주셨대. 그때 와준 것도 그렇고. 고맙다고 감독님이 전해달라고 하셨거든.”
“…강희찬이?”
끄덕. 이선이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자, 송재혁의 눈이 더 커졌다.
지금까지 너랑 내가 한 대화의 소재라고는 경기 시간과 깐풍기를 제외하면 강희찬밖에 없었다. 그리 타박하고 싶었지만, 저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자신도 감독 앞에선 저런 얼빠진 표정을 지었으려나…….
“이름 비슷한 다른 사람 아니야?”
“…우리 학교 출신 중에 강희찬 씨랑 이름 비슷한 야구선수 있어?”
이내 송재혁의 미간이 마치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와락 구겨졌다. 자신도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로 공포스러운 반응을 보일 일인가 싶었다.
“그때 애들 밥 먹은 것도 다 계산하고……. 밥은 원래 감독님이나 내가 샀어야 했던 것 같아서.”
아무리 초등학생이라지만 운동부가 서른 명쯤 되다 보니 한 끼 값이 백 단위는 가볍게 찍었다. 자신의 몇 달 치 봉급이 순식간에 일시불로 결제되는 것을 보고 이선은 속으로 조용히 경악했다.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옆모습에 두 번 놀랐고.
그 사정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여전히 송재혁은 별말 없이 인상만 구겼다. 깐풍기를 집던 손이 멈춘 것을 보면 나름대로 심각하게 놀라기는 한 것 같은데…….
“좀 전해줘. 내가 이것도 사주잖아.”
이선은 테이블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하지만 송재혁도 대번에 정색을 했다.
“웃기지 마. 이건 그때 밥 못 먹은 거 대신이라며. 어디서 약을 팔아.”
먹을 거에 정신이 팔린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날카롭다.
“하는 김에 좀 해줘. 넌 출근하면 맨날 보잖아.”
“나도 촬영 아니면, 그렇게까지 엮이고 싶진 않거든.”
“…치사한 거 봐라.”
“밥 사면서 직접 줘. 오늘 강희찬 만났으면 그랬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
중얼거리는 이선의 말을 찰떡같이 들은 송재혁은 그거 보라는 얼굴을 했다.
송재혁은 다시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갑자기 머리를 굴린 탓인지 배가 고팠다. 충격을 받느라 식어버린 깐풍기가 못내 아쉬웠으나, 원래 닭은 식어도 맛있다.
“나 보면 싫어할 것 같으니까 부탁하는 거잖아. 그때… 내가 사인해 달라고 했거든. 한 스무 장.”
“그건 맨날 싫어하니까 상관이 없어.”
나름대로의 위로였다.
정이선은 이제 김은 보이지도 않는 볶음밥엔 손도 대지 않은 채 한심한 얼굴을 했다. ‘왜 저러나’ 싶은 표정은 오늘 내내 강희찬의 얼굴에 떠 있던 것과 한 80퍼센트 정도 일치했다.
“그리고 너 안 싫어할걸? 강희찬 봉사활동 간 것도, 생각해 보면 너 때문인 것 같거든.”
송재혁은 접시에 고인 소스를 깐풍기의 튀김옷에 탐욕스럽게 묻히는 데 집중했다. 눈물을 머금고 고기 회식 자리를 떠났던 날이 떠올랐다.
분식점에서 사 간 떡볶이와 맥주를 친구 삼아 편집을 했다. 그러던 중 송재혁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새 이선이 찍었던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어이고. 찍은 거 봐라.’
어차피 대단한 걸 바라고 카메라를 맡기진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이라도 얼굴만 크게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워킹은 도무지 써먹을 구석이 없다.
공부만 하던 놈이라 그런지 이런 쪽으론 센스가 전무했다. 그도 아니라면, ‘좋은 건 크게 보자’는 흔한 팬심을 잘못 이해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
카메라 처음 만져보는 어린애도 아니고.
줌 버튼이 신기한 듯 점점 가까워지는 화면 속 강희찬의 얼굴을 보던 송재혁은 어느 순간 혀를 차는 것을 멈추었다. 햇빛을 맞으며 운동하는 사람의 얼굴이 6㎜ 캠코더 화질에서 살아남는 걸 놀라워하는 것도 2년째라면 식상하다.
10초마다, 라고 하면 좀 과장이겠지만, 그와 비슷한 주기로 강희찬의 시선은 카메라를 향했다. 아니, 시선이 약간 어긋나 있었다. 아마도 카메라 렌즈가 아닌, 그 뒤에 있는 사람을 보는 게 분명했다.
평소 카메라를 든―사실 들지 않았어도― 자신이 시야에 들어오기만 하면 매섭게 눈을 부라리던 얼굴이 아니다. 생글생글 웃는 건 아니라도 흘긋거리는 시선엔 적대감이나 짜증은 묻어나지 않는다.
강희찬이 운동선수가 아니고 자신이 그가 속한 구단의 직원이 아니었다면. 거기에 나이가 한 다섯 정도 적었다면, 전화해서 왜 차별하냐고 따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송재혁은 그가 그 전화를 얌전히 받아줄 인사가 아님을 알고 있다.
강희찬의 얼굴이 최대치의 줌으로 가까워졌다. 아이들의 타격 폼을 보던 그 얼굴은 자꾸만 카메라가 있는 쪽으로 시선이 돌아왔다.
자연히 강희찬이 보고 있었을 얼굴이 떠올랐다. 카메라 뒤엔 정이선이 있었다.
‘…정 선생이랑 강희찬?’
무의식적으로 묶어본 조합은 조화로운 듯 기괴했다.
송재혁은 한 번도 이런 종류의 상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상상이 딱히 필요하지도 않았다. 김은호도 있었고, 사진으로만 본 적 있는 그 공시 준비생도 있었다.
하나같이 갑갑한 추억들이다. 뭐, 본인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역시 정이선은 그런 한심한 놈들만 꼬이는 팔자인 건 분명했다.
거기까지 하던 생각을 멈추고 송재혁은 고개를 저었다. 떡볶이를 입에 밀어 넣었음에도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을 기세로 맥주도 욱여넣었다.
‘…….’
그러고 보면, 강희찬이 봉사활동을 가겠다 뜬금없이 말했던 것도 대충 맥락이 생긴다. 정 선생이 야구부 담당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정 선생이랑 강희찬. 강희찬이랑 정 선생…….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을 머리로 되새겼다.
‘좋다.’ 혹은 ‘호감이 간다.’
이런 감정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확신한다. 강희찬의 뭘 알아서 그렇게 확신하냐고 누군가 물어도 확신할 수 있었다.
강희찬은 남을 그런 눈으로 볼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어쩌면 스물다섯 인생에서 처음 본 동성애자가 신기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열아홉의 자신도, 말 한번 섞어본 적 없는 정이선에 대한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끼기도 했었으니까.
강희찬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유 없는 상대적 친절은 그와 비슷한 얄팍한 동정심에 기인했음이 분명했다.
―이선 쌤!
멀리서 들리는 젊고 밝은 여자의 목소리와 동시에 화면이 심하게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느라 화면엔 신경도 못 쓴 모양이었다.
흔들리는 화면 속의 강희찬은 먼 곳에 시선을 던지더니, 이내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들고 있던 배트로 앞에서 타격 폼을 잡던 아이의 등을 툭, 하고 친다. 허리 펴. 입 모양만 봐도 목소리가 자동으로 음성지원 된다.
기묘한 조합에 대한 감상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강희찬 하나만 놓고 본다면 정 선생이 너무도 가여워서 미안해도, 김은호나 대학 때 만났다던 신규진 따위에 비하면 차라리 나아 보인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어차피 묶일 일이 없는 조합인데.
식어버린 탓에 짜게 느껴지는 떡볶이와는 달리, 결론은 몹시도 당연하고도 싱거웠다.
송재혁은 들고 있던 상품권을 볶음밥 옆으로 밀었다.
“왜?”
“어? 뭐가. 왜?”
“왜 나 때문이냐고.”
순수히 궁금하다는 의도가 담긴 눈이었지만 송재혁은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정 선생은 만만하다고 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만만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나라 녹을 먹으며 선생 짬이 차는지 저런 눈을 할 때가 있었다.
잘못했어, 안 했어?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까랑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것만 같아 소름이 다 끼쳤다. 게다가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꼬리까지 잡혔다. 혹시나 강희찬에게 불지 말아야 할 것까지 불어버린 게 들통날까, 송재혁은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아니, …너 머리통 터트려놔서 미안했나 보지, 뭐.”
깐풍기. 마음의 안정을 주는 깐풍기. 이 집 깐풍기는 이름만 깐풍기인 양념치킨이 아니라 마음에 든다.
“머리 안 터졌어. 그리고 그런 걸로 미안해할 성격 아니라며.”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다. 아니, 저걸로 임용도 통과했을 테니 영 쓸모없진 않은가.
사고를 치고 한 적이 없다 발뺌하는 열 살짜리 어린애처럼, 송재혁은 깐풍기를 쿡쿡 찔렀다.
그러고 보면 정 선생네 반 애들이 지금 열 살이랬지. 거짓말도 함부로 못 할 어린애들이 가여웠지만, 지금은 제 코가 석 자였다.
“야, 멀쩡한 남의 머리통을 야구공으로 터트려놨는데, 측은지심이 안 생기면 그게 사람이냐.”
“안 터졌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거 되게 까탈스럽네.”
억울한 표정을 하는 이선을 향해 송재혁은 손짓했다. 얼른 볶음밥이나 먹으라고. 웬일로 밥을 시키나 했더니, 역시나 이미 식어 빠지고 짜장 소스도 굳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 정이선은 식욕이 싹 달아날 것 같은 음식을 그제야 한술 뜬다.
“오늘이나 저번처럼 갑자기 찾아오지 말고, 나한테 물어보고 와. 약속이라도 잡아줄 테니까.”
“너도 가, 그럼?”
“…내키면.”
“왜 비싸게 굴어.”
“난 너와는 달리 애인이 있는 몸이잖냐. 저녁은 나만의 시간이 아니지.”
기괴한 조합을 붙여서 잘 성사시켜 보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심하게 몇 년째 시험 준비를 핑계로 뾰족한 소리나 해대고, 돈이나 보내달라고 하는 놈 말고, 다른 사람과 밥도 먹고 얘기도 해보고. 그렇게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 선생도 눈이 새롭게 뜨이지 않을까.
단골 식당에서 고르는 점심 메뉴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익숙한 타성에 젖어 같은 곳을 맴돌 수는 없었다.
정이선은 낯선 것에 대한 내성이 생겨야 한다. 한 번 정을 주면 그것만 파고드는 성격이 용납되는 건 10대, 적어도 20대 초반에서는 멈춰야 했다.
“너, 하나 더 시켜서 먹어.”
“그래도 되냐?”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중식 냉면으로 개운해진 입 안은 마치 아무것도 먹지 않은 듯했다. 송재혁은 막 나왔을 때, 김이 모락모락 나던 볶음밥의 자태를 떠올리며 추가 주문을 넣었다.
“밥도 먹고, 사는 얘기도 좀 하고…….”
그렇게 살다 보면, 당장은 아니라도 아주 나중엔 정 선생 옆에도 누군가 생기겠지. 자신의 입에서 ‘신규진’이라는 이름만 나와도 곤란한 듯 화제를 돌려야 하는 상대가 아니라, 정이선이 먼저 같이 밥이나 먹자며 인사를 시켜줄 만한 상대로.
그런 상대가 나타난다면 정말 딱 한 번쯤은 자리를 함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니,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 * *
송재혁에게 했던 부탁이 거절로 돌아오고,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방학을 열흘 앞두고 있었다.
오늘도 열흘만 있으면 방학이었음에도 기록적인 폭염 덕에 휴교령이 내린 특이한 날이기도 했다. 어차피 나중에 겨울방학 하루가 줄어든다지만, 그래도 남들 다 일하는 평일에 쉬는 건 좋은 일이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이선에게 전화를 했던 어머니는 늘어지게 자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임시 휴일임을 아셨다. 휴일인데도 연락 한 번 없던 것이 못내 서운한 기색이었다. 학기 중엔 학교 핑계를 대며 주말에도 수원에 가지 않던 외아들 정이선은 쿡쿡 찔리는 양심 탓에 결국 일어났다.
‘밥은 가서 먹을게요.’
그 한마디에 다시 반색이 도는 목소리를 듣자 이선은 정말 양심이 아팠다.
수원으로 향하는 차 안은 지독히도 무료하다. 이선은 이런 순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갑자기 이 시간에 왜?
“나 지금 수원 간다.”
송재혁의 물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선은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혀 차는 소리와 한숨뿐이었다.
―난 1년에 여덟 번은 무조건 수원 가거든? 지금도 수원이다.
“어? 진짜? 넌 왜?”
―내가 여기 올 일이 뭐가 있다고. 저녁에 할 거 없으면 야구장 오든가. 여긴 직원이랑 친해서 부탁하면 자리 빼줄 수 있는데.
“수원에서도 야구를 해?”
―…너 진짜 어디 가서 수원 출신이라고 하지 마라.
끌끌거리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차 내부에 울렸다. 확 끊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이선은 신호에 멈춰 있던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근데 벌써 방학했냐? 수원 되게 빨리 가는 것 같은데?
“아니야. 오늘 더워서 휴교령 내렸거든.”
―야아. 공무원 만만세다, 진짜. 교대 들어가려면 공부 잘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
“야구는 안 쉬어? 저번에 미세먼지 많다고 쉬었다며.”
―저녁 경기라 상관없어. 덥기는 똑같은데 해 진다고 그냥 하라는 거지. 여름이라 해도 늦게 지는데.
선팅된 앞 유리 따위는 우습다는 듯 가볍게 뚫고 들어오는 직사광선이 눈 위로 내리꽂혔다. 가늘게 뜬 눈 틈새로 번화가인 남문의 풍경이 들어왔다. 평일의 이른 오후 시간은 번화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차도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눈을 찌푸리게 하는 햇살은 거슬렸지만, 차는 기분 좋은 속도를 유지했고 에어컨 바람은 시원했다. 바깥의 폭염으로부터 몸을 지켜주는 요새 같은 쾌적한 공간이었다. 유일하게 이질적인 건 이제 융통성 없는 시즌 운영을 한다며 협회의 욕을 하는 송재혁의 목소리뿐이었다.
지금이야 경기 취소를 하지 않는다며 성질을 내고 있지만, 분명 작년엔 부산까지 갔더니 비 때문에 경기가 취소되었다며 열을 냈었다. 거리가 얼만데 나중에 한 번 더 오게 생겼다며, 안개비가 조금 날린다고 취소를 때린 감독관을 욕했다.
송재혁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이쯤이면 그냥 무언가 욕을 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이선은 결론을 내렸다. 야구단에 취직한 이후로 친구는 점점 화가 많아졌다.
―너 근데 방학은 안 했는데 용케 내려가네? 방학 때 안 내려가고 버티다 명절 때 겨우 갔잖아.
“반찬 좀 가져가라고 하셔서. 택배로 보내시기 번거로우시대. 너 좀 줄까? 전에 아저씨가 만든 반찬 맛있다며.”
―그 선술집인가 오뎅바였나 하는 아저씨? 아직도 만나시냐?
“그런 것 같은데……. 직접 물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내가 가서 직접 봐야 하는데. 그 아저씨 너무 소도둑같이 생겼어.
“…아들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넌 왜.”
20년이 넘게 어머니의 손맛에 익숙해진 입맛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반찬을 만드는 솜씨는 어머니보다 나았다. 커다란 덩치와 약간은 험악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손은 꽤 야물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머니의 인생에 나타난, 가장 좋은 남자일 것이다. 세상에 없는 아버지와도, 어린 시절부터 젊은 어머니에게 고생만 시킨 아들과도 달랐다.
―식은 안 올리시냐? 만난 지 꽤 되신 것 같은데……. 그 아저씨 뭐냐?
“나이가 몇인데. 그냥 나중에 같이 사시거나 그러시겠지. 그리고 아직 딱히 그런 말씀은 하신 적 없고.”
―무심한 새끼야. 아줌마가 너 때문에 결혼 안 하시는 거 아니냐?
“…뭐?”
황당하기까지 한 소리에 이선은 마치 눈앞에 송재혁이 있는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부모님’들의 새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는 흔치 않지만, 이선에게는 의외로 자주 있었다.
요새는 결혼이 늦어지는 추세였다. 그래도 초등학교 저학년을 담당하다 보면 이선과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거나, 심지어 어린 학부모도 만나곤 한다. 입학식을 할 때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얼굴을 비추셨다가, 점점 학교를 오는 건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대신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어른들의 사정을 예측하고 이해할 수 있다. 휴가를 낸 어머니가 애인인 아저씨와 함께 놀러 갔다는 말을 반 아이의 입에서 듣는 순간, 이선은 대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난감했었다. 제 딴에는 담임교사인 이선이 편해서 거리낌 없이 한 말이었지만, 아직도 초보 태가 나는 교사는 정말 난감했다.
요새 열 살이 아닌 이선이 과연 과거에 같은 일을 겪었다면 그렇게 태연하게 남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뭐, 겪어보지 않았던 일이라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의 정이선은 열 살짜리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연애를 응원하면 응원했지, 싫어하는 쪽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결혼하시면 좋지, 왜 나 때문이야. 그런 말 해본 적이 없는데.”
―너 지금도 이렇게 띄엄띄엄 수원 가는데, 어머니 결혼하시면 더 안 찾아갈 거 아니야. 아줌마도 그거 걱정돼서 따로 사시는 거 아니냐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어? 아줌마 결혼해도 너 눈치 안 보고 수원 갈 수 있다고?
“…….”
당연히 결혼을 하게 되면 전 배우자의 장성한 자식과는 미묘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어릴 때야 귀엽다, 귀엽다고 말이라도 하며 같이 지낼 수 있지. 스물이 훌쩍 넘은 전 남편의 아들과 어머니의 새 남편이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낸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선술집 아저씨와 자신이 어깨동무를 한 채 어색하게 웃는 그림을 잠깐 그려보다 머리를 흔들었다.
잠깐의 침묵은 그 때문이었지, 송재혁의 말에 완전히 수긍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스피커에선 송재혁의 거 보라는 거만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아줌마도 불쌍하시지. 하나 있는 아들 새끼가 이렇게 무심하고 말이야. 넌 여차하면 나하고도 연락 끊고 살 놈이야.
불똥이 왜 또 이렇게 튀는데. 부당한 공격을 받았지만, 아니라고 해봐야 되로 주고 말로 돌아올 것이 눈에 훤했다.
저 멀리 아파트 단지가 보이자 이선은 주차 공간을 찾으며 속도를 늦췄다.
이름이 다른 여러 아파트 단지를 요새로 삼은 듯, 한가운데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얼마 전 공사를 하고 학교 주변으로 산책로를 내어서 정말 예쁘다며, 한번 구경을 오라고 했던 어머니의 전화가 생각났다.
녹색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지만, 괜한 구박을 받은 지금의 이선에게는 해당하지 못했다. 그래도 말로 당하기만 하는 건 영 억울해서 겨우 공격거리를 찾아냈다.
“너도 몇 년째 수원 집에 안 내려오잖아.”
―내가 야구단 입사해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 그거야. 명절 때 못 간다는 핑계가 딱 생기잖아.
추석 때는 시즌 경기, 설 때는 스프링 캠프. 완벽한 핑계 덕분에 명절 잔소리로부터 해방되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도저히 이 뻔뻔함은 못 이긴다. 이선은 한숨을 쉬며 낡은 푸른색 철 대문 앞에 차를 댔다.
―저녁에 야구장 올래? 표 받아둘까?
“됐어. 너 때문에 안 가.”
―우리 정 선생은 애들이랑 눈높이가 같아서 참 잘 지내겠어.
유치하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돌려서 한다. 하지만 스스로 내뱉고도 유치했다는 걸 깨달았기에 이선은 반박 없이 무시했다.
“내일 출근하잖아. 어차피 저녁엔 서울 갈 거야.”
―맞다. 아직 방학 아니랬지? 야, 나중에 가게 한 번 들른다고 아줌마한테 말이나 전해드려라. 아줌마 파전 먹어본 지 오래됐는데.
“…너 다 먹어서 가게 망하니까 제발 오지 마.”
탁.
조용한 골목에 차 문을 닫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괜한 데 화풀이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차를 괴롭혀선 안 된다. 할부도 끝나지 않은 차. 아직까지 없고, 앞으로도 아마 없을 자식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다.
―야! 아줌마는 나 좋아해. 아무 때나 와도 좋다고 하셨거든?
징징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핸드폰을 귀에서 멀찍이 떼고, 이선은 현관의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아’라는, 기쁨을 숨기지 못할 목소리가 흘러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다.
* * *
익숙한 반찬이 반, 익숙하지 않은 반찬 반으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거하게 먹고 난 후, 이선은 소파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자취 집에선 혼자 아무리 배달 음식을 많이 먹어도 잠이 오는 경우는 드문데 꼭 집밥을 먹으면 이랬다.
한 번 마음 먹고 오기까지가 힘들어서 그렇지, 막상 오면 몸도 입도 편한 곳이었다.
“가게 나가셨나…….”
부스스 일어난 이선은 조용한 집을 둘러보았다.
3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저녁 식사부터 영업을 시작하는 이선의 어머니는 이 정도의 시간부터 가게를 열 준비를 하셨다. 아르바이트를 쓰지 않고 혼자 작게 하시는 가게라 이리저리 손이 갈 게 많았다.
시계를 보고 얼핏 든 생각을 이내 스스로 부정했다. 오늘은 아들이 온다고 아예 하루 동안 가게 문을 닫으신다고 하셨다. 멍한 정신으로 아무도 없는 집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엄마.”
기척 하나 없는 집 안을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묘했다. 부른 주제에 어딘가에서 대답이 돌아올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우스웠다.
“쓰레기라도 버리러 가셨나.”
괜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현관 입구를 봤다.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있던 가득 찬 종량제 봉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자신이 신고 온 운동화 한 켤레가 덩그러니 있는 입구를 보고 생각이 미치는 곳이 있었다. 마트라도 가신 것 같다.
내일 출근 때문에 저녁은 먹지 않고 출발할 거라고 얘기했는데…….
들은 체 만 체더니 기어코 장을 보러 가셨다. 아까 점심에도 식탁 가득 찬을 차려놓으시고도, 고기가 없다며 아쉬워하시던 모습을 떠올리자 가정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선은 종량제 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차를 몰고 올 때 얼핏 봤던 마트의 위치를 떠올렸다.
항상 똑같은 모습인 것 같아도 동네는 올 때마다 조금씩 변했다. 달라진 마트의 위치를 가늠하며 쓰레기를 버렸다. 들고 오지도 못하게 많이 사신다 싶으면 말려야지.
골목 어귀를 나서고, 다섯 걸음쯤 걷고서야 차를 포기한 제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오늘은 폭염 때문에 휴교령이 내린 날이었다. 찜질방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잠깐 걸은 것뿐인데 땀이 나기 시작했다. 호기롭게 출발했던 걸음은 그늘을 찾아 비척비척 걷는 수준으로 변했다. 차를 가져왔어야 했다. 지금 돌아가서 차 키를 들고나오기엔 애매해진 거리를 원망하며 이선은 최대한 나무나 건물 그늘을 찾으며 걸었다.
“저녁 못 먹을 텐데…….”
혼잣말을 중얼거려도 더위가 가시는 건 아니다. 제 목소리에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사람 소리가 섞여들었다.
“…….”
말의 내용 따위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음에도 즐거워하는 대화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더위에 녹을 것 같은 머리가 가장 먼저 인식한 건 기억에 남은 차림이었다. 기억에 남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몇 시간 전에 점심을 차려주시던 어머니가 입고 있던 차림은 머리보다 눈에 익은 상태였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와 함께 서 있는 남자가 누군지를 깨달았다. 오늘 하루 쉰다며, 가게 앞에 메모를 붙여달라는 부탁을 누군가에게 하는 전화 소리를 들었다. 상대가 누구였는지 대충 예상이 가는 대목이었다.
“이거 너무 예쁘다. 찍어야지.”
꽃이 피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기엔 그게 그거인 초록빛인데. 그것을 보는 어머니의 얼굴엔 미소가 꽃처럼 한가득 피어 있었다.
어머니는 핸드폰을 들고 나무 가까이 향했다.
‘초등학교 옆에 산책로가 너무 예뻐. 선이 다음에 수원 오면 한번 가자.’
전화로 들었던 말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나이를 먹으면 식물을 좋아하게 된다고 하던데. 그와는 별개로 좋은 사람과 봐서 더 예쁘게 보였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선에게는 와닿지 않는 감정이긴 했다.
이파리를 찍는 어머니를 카메라 렌즈가 향했다. 남자는 비싸 보이는 DSLR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렌즈는 단 한 순간도 녹음을 향한 적이 없었다. 인물 하나를 부지런히 따라가는 모습에 이선의 입에선 얼핏 웃음이 터졌다. 서로 목적이 다른 출사였다.
“잠깐만.”
“어, 왜?”
남자는 들고 있던 카메라를 잠시 손에서 놓았다. 카메라 대신 양손은 늘어진 긴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텁텁한 습기와 미풍으로 슬쩍 엉킨 머리를 투박한 손이 정성스레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리 공예품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충분히 어설프고 충분히 조심스럽다. 머리카락이 당겨져서 아프기라도 할까. 그런 걱정이 손길에 묻어나고 있었다.
결국, 긴 머리를 묶듯이 하나로 꽉 잡은 후 그 아래에서 손가락으로 빗어 내린다. 긴 머리가 익숙하지 못한 남자의 어설픈 솜씨에도 머리는 얼추 정리되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이선은 방향을 돌려 걸음을 떼었다.
‘이 더운데 어디 들어가 계시지…….’
괜한 투정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한숨을 내쉬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갈 때쯤 핸드폰을 꺼냈다.
[나 오늘 수원에 재혁이 경기 있다고 해서 거기 들렀다가 집에 갈게요. 반찬은 방학하면 챙기러 올게요.]
얼른 챙기고 나가야지.
혹시라도 문자를 보시고 급하게 들어오시는 어머니와 마주칠까 이선은 걸음을 서둘렀다.
* * *
오늘 폭염주의보가 내렸으니 훈련은 조금 줄이자는 감독의 결정이 있었지만, 강희찬은 평소처럼 운동장을 돌았다.
매일 경기에 나가는 타자들이야 경기 전 더위로 인해 체력이 떨어지는 게 무서워도, 투수인 자신에게는 루틴에서 벗어나는 일이 더 거슬렸다.
“야, 희찬, 아. 야……. 이제 들어, 들어가자. 아오, 더워.”
턱 아래로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박신우가 말했다.
뛰던 걸음을 멈추고 강희찬은 뒤를 돌았다. 다섯 걸음쯤 뒤에 있는 선배는 허리를 굽힌 채 헉헉대고 있었다. 마치 더위를 견디는 털북숭이 개처럼 혀를 쭉 뺀 채로.
‘…덥긴 한가.’
폭염주의보가 대체 몇 도부터 발효되는 건지 모르는 강희찬이라도 문자 안내 정도는 받았다. 물을 자주 마시고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어쩌고.
“먼저 들어가세요.”
강희찬은 죽어가는 선배를 심드렁히 내려다보았다.
“같이 가. 멍청하게 혼자 있다가 쓰러진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먼저 걸음을 옮기는 박신우의 뒤를 따르며 헛웃음을 뱉었다.
선배의 멍청한 룸메이트와는 다르다고. 그리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지금의 박신우는 더그아웃으로 가는 것 외에 별 관심이 없었다.
제 몸에 둔한 선수는 절대 좋은 선수가 아니다. 아픔에 민감하고, 변화에 예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넘어질 수밖에 없다.
아마추어 야구를 했던 세월만큼 프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꽤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는 경우도 이제는 종종 보이지만, 극히 일부였다.
불펜투수, 그것도 어깨와 팔꿈치에 한 번씩 칼을 댔던 선수가 롱런을 할 가능성은 어깨 수술을 받고 프로 무대에 선 것만큼의 기적일 거다.
“…….”
아직도 의문이었다. 선발로 보직을 전환하자는 감독의 말을 고작 체인지업을 던지면 밸런스가 깨진다는 이유로 거절한 일은.
어지간한 천재가 아닌 이상 새로운 구종을 장착하는 일에는 당연히 시행착오가 따른다. 밸런스가 깨지면 맞추면 되는 일이다. 아무리 감독이 신경 써서 관리를 해준다고 해도 불펜과 선발은 보직 자체만으로도 관리를 받는 정도가 달랐다.
스물둘. 시즌이 끝나가는 그 시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드물었다. 말을 섞으면 언제나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들킬 것 같아서. 그런데도 어처구니가 없는 사실을 들은 순간 먼저 윤태성에게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선발 안 한다고 했다며.’
다음 시즌용으로 스폰서 패치가 바뀐 유니폼을 선배들의 로커에 넣던 윤태성은 눈을 치켜뜨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선발로 바꿔. 어차피 감독님도 너한테 4일 휴식 시키진 않을 거 아냐. 불펜으로 뛰는 것보다 훨 나아.’
‘불펜은 뛰어본 적도 없는 새끼가 말은 잘 하네.’
‘코시 때 릴리프 해봤어.’
언더셔츠와 유니폼, 연습복 위로 새 모자를 쌓고 그 위에 일본에서 주문 제작을 했던 글러브를 올린다. 규칙적인 손길은 대화 중에도 흐트러짐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게 왠지 분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뒤에서 타자 선배들의 물품을 정리하는 동기들은 말소리를 죽인 채였다. 듣지 않는 척, 투수조 막내들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여차해서 싸우면 바로 말려야 했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가서 선발 하겠다고 해. 어차피 밸런스는 공 던지다 보면 어떻게든―’
‘강희찬.’
고2. 청소년 대표팀에서 처음 말을 텄을 때부터 자신을 ‘희찬아’라고 불렀다. 생김과 영 어울리지 않게 남을 부르던 놈이 처음으로 성을 다 붙이고 불렀다.
내심 놀랐지만, 놀란 티를 내는 것은 자존심이 퍽 상했다.
‘왜.’
‘일해. 남은 건 네가 하고 나와.’
투수조 로커를 막내인 두 사람이 채우고 있었다. 그래 봐야 남은 곳은 예닐곱 정도였지만 강희찬은 순간적으로 억울해졌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만 나불거리고 있었어도, 어쨌든 억울한 건 억울했다. 로커를 채우고 나면 물품들이 담겨 있던 박스를 정리하는 건 제 몫이 되는 셈이었다.
그딴 게 어딨냐고. 따질 새도 없이 뒷모습이 훌쩍 사라진 곳을 보고 있자니, 일을 마친 동기 하나가 도와주겠다며 손길을 뻗어왔다. 온실 속 화초보다 더욱 귀하신 에이스는 이런 잡일이 익숙하지 않을 터이니.
선발을 거절한 이후. 윤태성은 마무리 보직을 받고, 나름대로 단기간에 100세이브도 챙겨본 것 같지만 옆에서 지켜본 강희찬은 단칼에 얘기할 수 있었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불펜 보직으로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관리였다.
단순히 한 번 등판해서 100구를 던지는 게 부담스러워서 언제나 불펜에서 공을 던지며 대기해야 하는 보직을 선택한다는 건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가는 길이 달라진 거다. 그걸 인정하는 데 지금까지의 시간이 걸렸다.
이제 머리로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마운드 위에서 뒤를 돌아 태극기를 보는 게 익숙해졌지만, 윤태성은 도열한 선수들 사이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게 몸에 익은 거라고.
자청해서 가시밭길을 간 주제에, 종종 버릇처럼 둔했다. 배가 부를 줄도 모르고 생각 없이 먹다가 스트레칭을 하는 내내 소화가 되지 않는다며 끙끙거리는 모습만 봐도 짜증이 치밀었다.
그렇게 크게 한 번 넘어져 봤음에도, 2년에 걸쳐 겨우 일어난 주제에. 망가진 어깨를 시한폭탄처럼 안고 살아가는 주제에 남이 불안할 정도로 예전만큼 둔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썼던 모자를 벗었다.
땀에 엉겨붙은 천이 머리에서 사라지자 더운 바람도 순간적으로 제법 시원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말 순간이었다. 모자를 펄럭이며 바람을 만들어봐도 팔만 아파오는 탓에 그만뒀다.
“난 먼저 씻는다. 방송국 인터뷰 있어서.”
“그러세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돈 박신우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강희찬의 뒤로 햇빛이 강하게 있는 탓이었다.
보폭을 넓히고 선배의 옆으로 향했다. 대충 위치가 맞춰지자 박신우의 걸음 역시 내야 흙을 밟았다.
“너도 인터뷰 좀 해라. 같이 할래? 너 데려가면 피디가 좋아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좀 해. 나중에 나이 먹으면 안 찾아줘서 은근히 서럽다?”
퍽이나. 박신우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옛 구장에서 리모델링으로 환골탈태를 한 이곳 수원 구장은 좌석 수에 비하면 내야에 테이블석이 꽤 많은 축이었다.
평일 저녁 경기의 지방 원정. 사람이 많이 오는 경기는 아니다.
그래도 신기한 경험이긴 했다. 남들 다 평범하게 입고 다니는 검정 티셔츠를 입은 남자 하나가 눈에 딱 띈 것은.
“…….”
그 블록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기껏 테이블석에 앉아놓고도 앞에 마실 것 하나 없는 모습이 특이하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는 얼굴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남자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야구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라운드를 향하기도 했고, 저 멀리 앰프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홈팀 응원석을 자주 흘긋거리기도 했다. 예전 유행가 멜로디에 맞춰 손가락과 고개를 까딱까딱 거리기도 한다.
그 모습이 묘하게 어린애 같았다. 먹을 걸 사러 가신 부모님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열 살짜리 애. 실상은 그런 열 살짜리들을 가르치는 직장인이지만.
어쩐지 눈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이 돌아온 건 박신우의 말소리 덕분이었다.
“송 PD, 오늘은 그라운드로 안 나오네? 우리 찍을까 봐 계속 저기서 뛰고 있었어.”
평소라면 선수들이 한두 명은 있는 더그아웃도 이 더위에는 지쳤는지 아무도 없다. 벤치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송재혁을 향해 박신우는 장난스레 말했다.
더위 탓에 게을러졌던 송재혁은 능청스레 웃으며 삼각대 위에 있던 카메라를 가리켰다.
“카메라 좋아서 줌 당기면 다 보입니다. 러닝 하시는 거 잘 나왔어요.”
“꼭 올려. 남들 다 쉴 때도 훈련을 하는 박신우와 강희찬 선수. 자막도 꼭 넣고. 확인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럼, 한마디만 해주세요.”
“라이브야?”
“아니요. 라이브 아닙니다.”
“그럼 됐어. 지금 땀 흘려서 못생겨졌어.”
평소랑 똑같은데, 뭐. 냉장고를 열고 아래 칸에서 물을 찾아 마시던 강희찬은 낮게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대화가 조금 더 이어지더니, 박신우는 씻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말 상대를 잃은 송재혁은 다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냉장고 문을 탁, 하고 닫는 소리에 송재혁의 어깨가 움칫했다. 내가 대체 뭘 어쨌다고. 카메라 거치대는 항상 저따위 반응이다.
생각해 보면, 저런 반응은 학교에 다닐 때부터 익숙했다.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무리에게 ‘뭐’라는 한마디만 해도 감독에게 혼이 났다. 왜 공부하는 애들을 괴롭히느냐고. 말만 걸어도 괴롭히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아야 했다. 말대답을 했다가 처맞을 게 뻔했으니까.
하여간 운동부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혼이 났던 예전 기억이 떠오르게 하는 찌질한 몸짓이다.
강희찬은 닫았던 냉장고 문을 다시 열었다. 총 다섯 칸 중 위에서부터 세 칸은 이온음료가 채워져 있었다. 눈높이와 가장 가까운 것 두 개를 꺼내고 문을 쥔 손을 놓았다.
한 손에 쥔 음료수를 송재혁이 앉은 벤치 옆자리에 두었다. 왜? 라고 묻는 시선이 귀찮게 붙었지만 피했다.
“수원 티켓도 줘요?”
“네?”
“친구. 저기 있던데요.”
강희찬은 3루 테이블석이 있을 방향으로 턱짓했다. 더그아웃에선 보이지 않을 테지만, 송재혁은 그가 말하려는 곳이 어디인지를 바로 깨달았다.
“으어엉?”
이상한 소리를 내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더그아웃 밖으로 호다닥 걸음을 옮긴다. 평일 경기였다. 3루 응원석도 빈 곳이 많은 시간대였기 때문에, 송재혁은 어렵지 않게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뭐야, 안 온다더니…….”
황당한 듯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강희찬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귀는 여전히 열어둔 채.
“야!”
하지만 들을 수 있는 건 송재혁의 목소리뿐이었다. 그마저도 금세 노래에 묻히고 마는.
* * *
“야.”
뒤에서, 그것도 예고 없이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정이선은 숨을 들이마셨다. 놀란 숨이 헛기침과 함께 튀어나왔다. 몸을 틀어 뒤를 돌자, 그곳엔 카메라를 손에 든 송재혁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아직은 비어 있는 이선의 옆자리에 몸을 앉히며, 테이블 위에 이온음료 두 병을 두었다.
“표 주겠다고 할 때는 안 온다더니 갑자기 뭐야? 이럴 거면 나한테 전화라도 하지. 여기 평일 할인도 안 되는데, 테이블석을 쌩돈 다 주고 들어왔냐?”
야구단에서 일하는 주제에, 송재혁은 야구장 티켓값을 가장 아까워했다. 특이하다고 이선은 생각했지만, 송재혁은 생돈 주고 복장이 터져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로 일축했다. 이선은 가만히 웃었다.
“잘 마실게. 근데 두 개씩이나 가져왔어.”
물기가 맺힌 페트병의 입구를 열었다.
더위 탓에 이슬이 맺혔지만 마셔보니 꽤 시원하다. 편의점 봉투가 없는 것을 보아, 더그아웃 냉장고에서 훔쳐 왔을 가능성이 컸다.
…크게 보면 이것도 횡령이 될까? 정당하지 못한 경로로 재화를 획득한 죄책감을 이온음료와 함께 꿀꺽 삼켰다.
“세 시간 동안 있으려면 그 정도는 마셔야 한다. 넌 무슨 야구장에 오면서 먹을 거 하나를 안 사냐. 야구도 모르는 주제에 먹기라도 해야지, 뭔 재미래.”
언젠 야구장에서 사 먹는 거 아니라더니……. 도무지 장단을 어디에 맞추어야 할지 모르는 인사였다.
“여기 와도 돼? 놀고 있다고 한소리 듣는 거 아냐?”
“뭐래. 응원하러 온 팬들 찍는다고 하면 되지.”
아하. 대꾸할 의지를 잃은 이선은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장도 2년째 다니다 보면 어떻게든 농땡이를 피우는 요령만 늘기 마련이다. 슬쩍 웃고는, 앞에 남은 새 음료수 하나를 송재혁의 앞으로 밀었다.
“하나 마셔.”
“…됐어. 둘 다 네 거 같은데.”
“어?”
저 멀리 1루 응원석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홈팀 응원가의 멜로디는 하도 들어서 이제는 귀에 익었다. 귀로는 송재혁의 말을 들어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그 멜로디를 곱씹는 덕분에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
송재혁은 어느새 묵직한 카메라를 테이블 위에 두고 멍하니 음료수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선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정이선은 움칫하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렇다고 해서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었다.
미간에 선명하게 잡힌 두 줄의 주름과 함께, 송재혁은 취조하는 형사라도 되는 양 눈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런 버릇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를 정이선은 알고 있었다.
“너, 냉장고에 있던 음료수가 맛있단다.”
물론 그 사람은 이렇게 눈을 앙칼지게 뜨고, 애기동자가 들린 것 같은 목소리를 내진 않는다. 예전 국어책에서나 봤을 법한 대사를 따라 하지도 않을 테고.
“…갑자기 뭐야?”
떨떠름한 저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었다. 옛날 흑백영화에 나오는 어린 여자애들이나 할 법한 이상한 말투를 집어치우고는, “딱 이런 느낌이었어”라며 중얼거릴 뿐이다.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대화다. 이번엔 이선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송재혁은 가끔 저렇게 혼자만 아는 말을 하지만, 오늘따라 더욱 심했다.
“그니까 뭐가.”
“별로. 아무것도 아니야.”
몇 번 벙긋대던 입은 그저 대화를 종결하는 말만을 뱉었다.
남이 하는 얘기에 큰 관심이 없는 정이선이라도 이런 건 조금 짜증이 난다. 하지만 이미 다물어버린 입을 열게 할 재주는 없었다. 결국 이선 역시 포기했다. 이온음료 한 모금과 함께 짜증과 미약한 호기심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관중석은 여전히 한산하다. 아직 경기 시작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건지, 평일 이 시간에는 원래 야구를 보는 사람이 적은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와 와봤던 것을 제외하면 야구장은 처음이었으니까.
멍하니 필드를 내려다보다, 문득 잊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 너 잠깐만 여기서 기다릴래? 상품권 금방 가져올게. 좀 전해줘라.”
“상품권? …강희찬?!”
뒤집히는 목소리가 일어서려는 이선을 막았다.
기왕 만난 김에 귀찮은 일을 해결하려 했지만, 힘들어 보인다. 구겨진 송재혁의 오만상이 말해 주고 있었다.
“안 돼. 나 이제 들어갈 거야.”
“금방 다녀올게.”
“뭘 금방 다녀와. 주차장까지 다녀오려면 한참일 텐데.”
타박이 섞인 송재혁의 말에 이선은 일으켰던 몸을 다시 쭈뼛대며 앉혔다. “좀 해줘…….”라고 미련이 남은 양 말이 나왔다. 하지만 송재혁은 눈썹 하나 까딱도 하지 않는다. 들어가 봐야 한다면서 움직이지도 않는 궁둥이를 포함해, 여러모로 단호했다.
“직접 줘. 너도 너희 학교 감독님한테 부탁받은 건데, 몇 사람 손을 거치는 거야.”
“그거야…….”
뭐, 홍 감독이야 당연히 자신이 직접 주기를 바랐겠지만…….
대꾸하지 못하는 이선을 향해 송재혁은 거 보라는 얼굴을 했다.
“경기 끝나고 원정 호텔로 와. 강희찬 불러줄 테니까.”
“됐어. 시합 밤에 끝날 거 아니야. 서울 가야지.”
“왜 벌써 올라가? 그래도 한번 오면 좀 있었잖아.”
“내일 출근한다고. 아직 방학 아니라니까…….”
“아, 맞다. 그랬지, 참.”
요샌 젊은 층의 치매 증상도 무시하지 못한단다. 이선은 멍청한 소리나 하는 송재혁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대학을 졸업한 지도 몇 년째였다. 이제 학교와 인연이 없는 송재혁은 여름과 겨울엔 무조건 방학이라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의 방학이란 그렇게 긴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송재혁은 날이 조금만 더워지면 이선에게 방학을 했냐며, 쉬고 있냐고 묻곤 했다. 게다가 방학이라고 내내 다 쉬는 것도 아니다. 첫해엔 이틀이었나를 쉬고 나머진 전부 출근했다. 그때는 왜 방학을 했는데도 매일 출근 도장을 찍냐며 경악하더니, 몇 년 새 잊은 게 분명하다.
“그냥 오늘 주고 올라가. 그거 감독한테 받은 지 좀 됐을 거 아냐.”
“그건 그런데…….”
흐리는 말끝에 시선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묻고 있는 눈길을 피하며 테이블 앞으로 몸을 쭉 당겼다.
물론 낯선 사람과의 불필요한 만남은 편하진 않다. 정이선은 특히 그런 자리를 즐기는 부류는 절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도의마저 저버리는 타입은 더더욱 되지 못했다.
감독에게 전해 받은 상품권을 건네며, 자신 역시 밥이라도 한 끼 사야 할 거다. 아니, 사실 꽤 당연한 예의였고, 그렇게 했을 거다.
상대가 볼 때마다 냉한 표정이나 지으며 단답에 가까운 말이나 하는 사람만 아니었다면……. 적어도 식사를 앞에 두고 젓가락에 손 한 번 대지 않는 사람만 아니었다면, 이선은 빈말이나마 식사 자리를 요청했을 거다. 일단 공무원인 자신은 어디서 얻어먹고 다니는 게 문제였지, 청탁성이 아니라면 사는 건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바싹 마른입을 음료수로 축였다. 그렇다고 해서 말이 유려히 나오는 건 아니었다.
이선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송재혁의 인상은 점점 구겨졌다. 몇 초 더 머뭇대다가는 빨리 말을 하라며 윽박지를지도 모른다. 그제야 이선은 겨우 입을 열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린애 같은 소리지만.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고…….”
열 살 먹은 어린애도 하지 않을 소리가 다시 한번 입 밖으로 나왔다. 말하고도 창피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번에 중국집에서와는 달리, 벌건 대낮에 사방이 뚫린 곳이라 창피함은 배가 되었다. 조도가 낮은 중국집 조명과는 달리, 자연광 아래에선 송재혁의 미묘한 표정도 더욱 잘 보였다.
“백설공주가 너 안 싫어한다니까? 왜? 그때 쌍욕이라도 하든?”
비슷한 표정을 해선 비슷한 말을 두 번이나 묻는다. 두 번이나 들었지만 딱히 이선에게 와닿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 건 아닌데…….”
쌍욕까진 아니었지만, 비속어까진 들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문장이었는지는 기억에 남지 못했다. 그저, 초면과 진배없는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온 ‘병신’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머릿속을 울릴 뿐이다.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비난이나 조롱의 의도가 보였던 건 아니었다.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자신이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다. 정이선은 예전부터 남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부정적인 감정을 잘 잡아내는 편이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자신을 향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의 멍한 시선도 이선의 추측에 한몫했다.
뭐, 그렇다고 이 나이 먹고 ‘그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나보고 병신이랬어’라며, 친구에게 고자질하기도 뭐하다. 선생님을 찾으며, 찡얼거리며 들어오는 초등학생도 아니었다.
스물보다는 서른에 가까운 나이인 정이선은 직업적, 사회적 체면을 고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3년째 어린애들을 상대하며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는 요령이 붙기도 했다.
고자질 대신, 이선은 꽤 예전부터 궁금했던 호기심을 충족하기로 했다.
“근데 왜 백설공주야? 하얘서?”
확실히 실외 스포츠를 하는 남자치고는 피부가 흰 편이다. 동화 속 공주님 같다는 요란스러운 수식어가 붙을 만큼은 아닐 테지만……. 아니, 붙어도 괜찮으려나?
잔디가 깔린 그라운드나 햇살이 내리쬐는 주차장. 그런 곳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은 눈처럼 희다는 뻔한 수식과도 제법 어울리긴 했다. 성격과는 정반대인, 해사한 인상에 하얀 얼굴도 한몫하고 있을 거다.
애나 어른이나, 별명을 만드는 원리는 간단하다. 이름이나 생김새의 특징을 활용한다. 조금 간지럽기는 해도 본인 자체와는 꽤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이선은 새삼 자신의 추론 능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채,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송재혁의 얼굴은 빨간 사이렌을 울리며 틀렸다는 효과음을 내고 있다.
“백설공주가 그래서 백설공주가 아니거든.”
“그럼 왜?”
자신만만한 미소가 떨어지지 않는 입이 다시 한번 열렸다.
“백만 인을 설설 기게 하는 공포의 주둥아리.”
“…….”
정이선은 잠시 입을 벌린 채 말을 잃었다.
“지옥에서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런데, 그래서 주둥이도 지옥 출신이야.”
송재혁의 말이 덧붙을 무렵에야 이선은 정신을 차렸다. 헛웃음과 함께.
조금 오버스럽기는 하지만, 확실히 납득이 가는 이유다.
이선의 헛웃음을 다른 이유로 착각했는지 송재혁은 아까의 미소를 지웠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오버스러웠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요새 직장에서 힘들어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사실 이선이 아는 범위 내의 송재혁은 남의 뒷말을 하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백만 인까지는 모르겠고, 백 명 좀 넘는 우리 직원들은 다 그렇게 불러. 아무리 그래도 팀 선수한테 개새끼 어쩌고 할 수는 없지 않겠냐.”
글쎄. 어원을 들어보면, 한결같은 개새끼나 지조 있는 개새끼와 뭐가 그리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이선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선수를 향해 개새끼라고 할 수 없다는 말에 대한 동의인지, 괴상한 별명의 뜻풀이에 대한 동의인지는 스스로도 헷갈렸다.
“아무튼, 백설공주한테 뭔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원래 말하는 본새가 좀 그래. 쌍욕을 한 거 아니면 그냥 그러려니 넘겨.”
“…….”
병신은 과연 쌍욕인가 아닌가. 당연히 쌍욕이겠지? 요샌 고학년들은 물론이고, 저학년들의 입에서도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말이라 욕이라는 감각이 둔해지곤 했다.
상념으로 잠시 말이 없는 이선을 보며, 송재혁은 확신했다. 기어코 쌍욕을 했다고. 감독이나 코치, 선배가 아니라면 자유분방하게 놀리는 입이라는 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대단하다.
순수한 존경심까지 들 무렵, 송재혁의 머릿속엔 어떤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강희찬은 정 선생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자체적인 성향이, 그리고 본인의 입으로도 말했듯, 남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전 처음 본, 혹은 봤을 특이한 성향은 그 모든 걸 이기고 호기심을 일게 했다. 고등학생들처럼. 그리고 호기심의 끝엔 이유를 모를 반감과 혐오감이 있다.
혹시 하는 생각이 다 완성되기도 전에 입술이 먼저 열렸다.
“왜? 다른 말 했어?”
“아니야. 그냥 피곤해서 그랬나 봐. 애들도 많고 늦게까지 있었잖아. 밥도 사셨고.”
선선한 표정에서 거짓을 꾸며내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정 선생이 속을 잘 감추는 편이었던가? 송재혁은 적지 않은 시간을 알고 지낸 친구를 살폈다.
기억 속에 남은, 교복을 입었던 정이선은 언제나 비슷했다.
이동수업을 할 때 문과반을 지나다 보면 정이선은 항상 공부를 하고 있거나,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무언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출석부를 손에 들고 체육관으로 향하기도 했고, 적지도 많지도 않은 양의 급식을 조금 느릿하게 비우는 편이었다.
온 학교에 ‘정이선’이라는 이름이 실시간 검색처럼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뭐……. 이동수업을 할 때 혼자라거나, 급식을 혼자 먹거나, 그마저도 나중엔 급식실에서 보이지도 않거나. 그런 사소한 것들은 제쳐둬야겠지만.
그 시절의 정이선은 와닿지 않는 성적을 포함해, 송재혁의 눈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를 종류였다.
전교생이 저를 보고 수군거려도 학교 한 번 빠지지 않고, 모의고사 성적은 요만큼도 변동이 없었다. 그것을 듣고, 송재혁은 어떤 의미에선 정이선이 살아 있는 벽이라고 느꼈다. 사람이 저 정도는 돼야 공부를 잘하는 거다. 큰 깨달음과 함께, 송재혁은 오르지 않는 자신의 모의고사 성적을 합리화하기도 했다.
교복을 벗고 재회했을 땐 약간이나마 그 얼굴에서 변화를 감지할 만큼은 성장했다고 스스로 느꼈다.
1학년 1학기에,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갔던 봉사활동 처에서 얻은 얄팍한 인간관계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냉정할 정도로 인간관계를 끊어버리고 사라질 수 있는 주제에, 정이선은 꽤 사람을 그리워하는 편이었다. 아니, 그래서 더욱 사람을 찾았을 거다.
교복을 벗고 서울에 가면, 좋은 대학을 다니며 잘살겠지. 공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던 놈이니까, 적어도 직장은 멀쩡히 다니면서 그래도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겠지.
아주 가끔 했던 생각은 틀렸다.
정이선은 대학에 가서도 외로워했고, 쉽게 호의에 빠졌다. 그 시기에 만난 신규진이 남자 따위엔 관심도 없고, 여자친구마저 있는 사람이라는 건 그리 중요하진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본인 성격과 똑같이 한다. 송재혁은 속으로 낮은 한숨을 삼켰다. 중학생도 저렇게 풋내나게 누군가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송재혁이 신규진을 지칭할 때 ‘애인’이라는 말을 썼던 이유는…….
“정 선생.”
“응?”
정이선은 조금씩 마시던 이온음료를 테이블 위에 두었다. 어느새 반이 조금 되지 않게 줄어들었다. 두 개를 어떻게 다 마시느냐고 하던 걱정은 역시 뭘 모르고 하는 쓸모없는 소리였다.
“이따 서울 가기 전에 호텔 들러. 정 안 된다고 하면 내가 전해줄게.”
“응. 들어가게?”
“어, 편집해야겠다.”
일어선 자신을 향해 올라붙는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발길을 잡았다.
전까지는 응원가를 들으면서 혼자 잘 있더니, 이제 집에 혼자 남겨지는 어린애처럼 기가 죽는다.
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일을 시작하셨다던가? 정말 어릴 땐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남은 삶이 정이선에겐 익숙했을 거다.
“간다. 이따 연락하고.”
이선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 그대로 뒤를 돌았다.
계단을 오르며 송재혁은 몇 번이나 돌아봤다. 몸을 틀고 자신을 봤고, 그다음엔 핸드폰을 쥐고 있다가, 결국 봐도 모를 전광판을 향해 눈을 돌린다. 송재혁이 뒤를 돌 때마다 정이선의 행동도 시시각각 바뀌었다.
“…….”
‘넌 그 새끼랑 연애를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면,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는 거냐?’
물음조차 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말은 칼이었다. 길게 산 건 아니었지만 송재혁은 알고 있었다.
상처가 되는 말은 대단한 악의를 가진 게 아니다. 취직은 언제 하느냐는 조심스러운 물음이나, 돈이 필요하다는 말에 돌아오던 부모님의 짧은 침묵과 한숨. 그 모든 것들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마음엔 따끔하고 말 잔가시도 칼처럼 다가온다.
정 선생은 절대 단단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가정사나 고등학교 때의 일은 안타깝지만, 그것을 제외한다면 꽤 물렀고, 온실 속 화초같이 취약했다.
자신의 별것 아닌 물음은 정이선에겐 질책이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시는 보이지 않을 곳으로 사라질 거다.
이번엔 ‘어딘가에서 잘살겠지’ 정도로 연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송재혁에겐, ‘친구’라는 이름이 붙은 범주 내의 사람 중에선 가장 소중한 연이었으니까.
* * *
정이선은 야구엔 관심이 없지만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소리는 아니다.
기본적인 룰은 주워듣기는 했다. 스트라이크가 세 개면 아웃. 아웃이 세 개면 공수교대. 구종이 어떻고 코스가 어떤지는 방송으로 볼 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절한 방송국의 아나운서와 해설은 하나하나 전부 말해주니까.
TV로는 볼만하다고 생각했던 게, 현장에선 전혀 달랐다.
일단 투수의 뒷모습이 아닌 정면으로 보고 있는 구도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투수가 던지는 공이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온 건지 아닌지도 모른다. 눈치껏 몇 번 보다 보니, 포수의 뒤에 선 주심의 손이 올라오면 전광판의 등이 하나 늘었다.
너른 그라운드나 하늘에 비하면 하얀 공은 너무도 작아서 금방 놓치기 일쑤였고, 평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정적이다. 역동적이고 즐거워 보이는 분위기는 응원석만을 잡는 방송국 카메라의 역할이 컸다는 걸 이선은 깨달았다. 응원석은 여기보단 흥겨워 보이지만 어차피 자신은 응원가를 모른다. 저곳에 있었어도 별다를 건 없을 거다.
야구도 야구장도 익숙지 않은 정이선은 집중하지 못하는 초등학생처럼 이제 공이 아닌 다른 걸 눈으로 좇았다.
―파울 타구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타자가 공을 빗겨 칠 때마다 장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이선은 지리한 수 싸움을 하는 투수와 타자 대신, 꽤 가까운 3루 더그아웃 앞을 봤다.
투수 하나가 포수를 저 앞에 앉혀두고 피칭을 한다. 이선이 앉은 자리에선 등번호 1번이 새겨진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포수와 투수의 곁에는 글러브를 낀 선수들이 각각 하나씩 붙어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호라도 하는 양 파울 타구가 뜰 때마다 그라운드와 공을 주시했다. 가끔 공을 주고받는 투포수의 주변으로 공이 날아오면 대신 잡아주기도 했다.
“…….”
자꾸 그곳으로 시선이 가는 이유는 하나였다. 1번 투수의 가드를 하던 선수의 옆태가 낯익다. 아니, 사실 모자로 반쯤 가려진 얼굴이 낯익고 말고를 이선이 알아챈 건 아니었다. 선수의 유니폼에 새겨진 번호와 이름 석 자를 보고 누군지 깨달았으니까.
강희찬. 주인과 몹시도 잘 어울리는 이름 석 자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5회가 끝나고, 그라운드를 정비하는 긴 휴식 동안 이선 역시 화장실을 한 번 다녀왔다. 그 이후부터였다. 묘하게 저 아래에 있던 선수 하나의 고개가 자꾸 이쪽을 향하는 걸 느낀 것은.
날아오는 공을 잡아주느라 심심했나? 아니면 관중석에 있는 예쁜 여자라도 구경할지도 모르지.
꽤 어려 보이는 얼굴선을 몇 번 볼 무렵 이선은 시답잖은 결론을 내렸다. 송재혁의 말에 따르면 운동선수라도 어차피 그 나이의 평범한 사내새끼들이란다.
의외로 경기장에선 내야의 관중석이 꽤 잘 보인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이선의 뒤에선 아까부터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 치면 쌍욕을 날리는 걸쭉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만 들려오지만, 조용히 경기를 보는 여자들도 많을 거다. 저쪽 홈팀 응원석만 해도 꽤 보였다.
야구선수나 일반 직장인이나, 일할 땐 딴짓을 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재차 깨달을 무렵이었다. 이선은 왠지 모자챙 아래로 가려진 눈과 시선이 맞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 번 의식한 젊은 선수의 움직임에 자꾸 눈길이 갔다. 그가 제대로 파울 타구를 잡아주는지, 관중석을 몇 번이나 보는지 묘하게 신경이 쓰인 탓에 7회부턴 경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는 이름이, 한 번이라도 말을 섞어본 사람이 야구장 그라운드에 있는 건 꽤 색다른 경험이었다. 유튜브에서 그의 첫 올림픽 등판 영상을 볼 때와 비슷했다.
과연 저 50번의 선수가 자신에게 핸드폰을 사 주고, 얼마 전 학교로 봉사활동을 와줬던 그 사람이 맞는 걸까? 자신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에 있는 그가 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9회 초, 원정팀의 공격이 진행될 무렵에도 강희찬은 여전히 1번 선수의 가드 중이다.
이선은 컵스가 한 점 차로 리드하고 있는 경기에선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이제 그의 정신은 온전히 그라운드 위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을 향했다.
컵스의 원정 유니폼은 강희찬이 봉사활동에 입고 온 것과 같은 검은색이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같은 색의 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전혀 느낌이 달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인상을 쓰지 않으면 꽤 유해 보이는 얼굴이 모자에 가려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유니폼을 입은 강희찬은 정말 ‘선수’였다.
물론 봉사활동 때도 당연히 신분은 선수였다. 하지만 아이들이 편히 말을 걸고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던 그때의 강희찬보다 선수인 그는 훨씬 크고 위압적이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선수와 실제로 보고 있는 인물의 괴리감에 빠져 있을 때였다. 나무 배트와 공이 빗맞는 소리와 동시에 꽤 가까운 곳에서 텅, 하는 굉음이 이어졌다.
“으아!”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난 건지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이선의 옆 테이블에 공이 날아와 부딪혔다.
주먹만 한 야구공과 테이블이 만나서 내는 소리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잠시 정신이 멍한 사이 글러브를 손에 낀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서는 바닥에 떨어진 공을 줍고 저들끼리 싸우며 돌아간다.
…자기들이 알아서 집어 가는구나.
이선은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들을 바라봤다. 지금이라면 한 해 농사를 다 털어먹는 메뚜기 떼에게 당한 농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선이야 지척에 떨어진 야구공이 내는 굉음에 놀랐지만, 경기는 금방 재개되었다. 파울 타구가 관중석으로 날아가는 것 따윈 경기 진행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직접 파울 타구를 경험해 본 이선은 깨달았다.
―파울 타구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와서! 타구에 주의하라는 장내방송은 쓸모가 없다.
공이 날아들고 한 박자 늦게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선은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모자로 가려진 시선을 혼자 상상하는 게 아니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강희찬의 머리에 얌전히 씌워졌던 모자는 이미 그의 왼손에 있었다. 모자를 벗자 훤히 드러난 얼굴은 황당하고 기막힌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왼손의 쥐고 있던 모자가 글러브로 옮겨졌다. 순식간에 빈 왼손이 그대로 위를 향했다. 손의 높이가 그의 눈높이와 비슷해질 무렵, 검지와 중지만을 남기고 접힌 손이 그의 눈을 한 번 가리킨다. 그리고 연이어 반대쪽을 향한다.
‘…눈알을… 파버리겠어?’
행동의 의미를 추론한 이선은 뒤를 돌았다.
듬성듬성 채워진 테이블석에서 이선의 뒤로는 거의 사람이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향하고 강희찬을 봤다. 그는 여전히 이선을 향한 채였다. 눈을 파겠다는 살벌한 손짓은 없었지만.
‘설마 나보고 한 건가? 대체 왜?’
기가 죽을 무렵, 다시 한번 파울 타구가 나왔다. 이번엔 다행히도 이선이 있는 쪽으로 향하진 않았다. 공은 그라운드의 파울라인 바깥에 있던, 투수와 포수의 사이를 지나치며 3루 더그아웃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까 바로 옆에서 들렸던 텅 소리가 작게 울린다. 아마 더그아웃 안에서도 야구공과 무언가가 부딪힌 듯했다. 그와 동시에 1번 선수는 강희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선의 시선에 그의 옆모습이 들어오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모자를 벗는 선수의 손이 신경질적이다. 드러난 1번 선수의 얼굴은 손짓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짜증스럽게 구겨진 채였다. 1번은 강희찬을 향해 무언가 이야기를 한다. 아니, ‘이야기’라기보다는 짜증이나 성질에 가까울 말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을 표정이었다.
“…….”
1번 선수는 강희찬보다 선배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럴 거다. 무뚝뚝하게 뚝 떨어지는 얼굴이나 전반적인 분위기, 대놓고 짜증을 내는 태도를 통해 이선은 알 수 있었다.
운동선수의 세계는 군기가 세다. 운동과는 인연이 없는 정이선도 그건 알고 있었다. 멀리 갈 것 없이, 강희찬이 왔던 날 함께 구경했던 자신의 학교 야구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야구부도 그 정도였는데 프로 선수들은 오죽할까.
한소리를 들은 강희찬은 글러브에 걸치듯 올려두었던 제 모자를 다시 눌러쓰고 그라운드로 몸을 돌렸다. 아무리 제멋대로 사는 것 같은 남자라도, 선배가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가드를 시작했다. 유려한 옆모습을 보며 이선은 슬쩍 웃었다.
* * *
경기가 끝날 무렵에 걸려온 학부모의 전화에 이선은 남들보다 일찍 경기장을 나섰다. 빠르게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야구장 특유의 웅웅거리는 소리와 소란을 알아챘는지 학부모는 쉬는 날에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산이가… 야구부 들어간 건 되게 좋아하는데, 공부에는 영 관심을 두지 않아서요.
…이럴 땐 조금, 아니 조금 많이 곤란했다.
‘우리 애가 학교 공부를 따라가는 데 힘들어하더라구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런 종류의 상담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일단 정이선은 초중고교의 교육과정을 통틀어 학습 내용 자체로 따라가기 어려움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학년이 높아지고,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체력적인 문제 때문에 힘들기만 했지.
하지만 기초적인 산수를 힘들어하거나, 문제를 읽지 않고 답을 찾으려고 하는 희한한 습성에 대해서 ‘그런 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교장실이든 교육청이든 전화가 가도 할 말이 없으니까.
선배 교사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학교에 있는 그 누구도 초등 교과과정의 학습을 힘들어했을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직장이란 비슷한 경력을 가진 비슷한 무리가 모이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교직 사회가 가장 그 유사함이 강할 거라고 이선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합격률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 어차피 다 공부하고 교대에 들어갔고, 시험을 봐서 학교에 배정받은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그냥 하면 되잖아’라는 답만 해줄 종류란 소리다.
―그렇다고 야구부를 그만두라고 하기도 좀 그렇거든요. 애가 워낙 좋아하니까.
“네에…….”
특히 이런 경우는 더욱 난감하다.
정이선은 초중고교를 통틀어 동아리로라도 ‘운동’과 관련된 부에 이름을 올린 적이 없었다. 대부분은 영화감상반이었고 무슨 과학반, 어쩌고 영재반이라는 정체를 알기 힘든 곳에도 들어가 본 적은 있지만 축구부나 육상부는 근처에도 가본 적 없었다.
‘이런 얘긴 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걸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야구부 홍 감독의 얼굴이었다. 이선의 주변에서 어릴 적부터 운동부에 소속됐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지웠다.
홍 감독은 이선의 제자가 야구부 활동 때문에 담임의 속을 썩인다고 생각했는지, 얼마 전 산이와 구구단을 함께 외웠단다. 그것도 얼마 못 가 제 성질을 못 이겨 홍 감독은 속이 터졌고, 애는 울음보가 터졌다. 다음 날 호빵처럼 불어터진 얼굴로 등교한 아이에게 이선이 들은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얼핏 자신의 눈치를 보는 감독에게 그런 것까지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방과 후의 활동 때문에 학습에 지장이 간다. 하지만 방과 후 활동을 그만둘 수는 없다.
도돌이표 같은 대화는 놀랍게도 이선이 차에 도착하고도 20분을 더 갔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이선은 기운이 쭉 빠진 탓에 시동을 걸지 못한 채 핸들에 고개를 파묻어야 했다.
“…….”
산이의 학업 능력은 야구부 활동의 영향은 아닐 거다. 2학년 때도 학업 성취나 담임의 평가는 썩 좋지는 못했으니까.
정신을 놓고 그 말을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고개를 잘게 흔들며 정신을 챙긴 이선은 조수석 시트에 있던 책을 집었다. 단 한 장도 읽지 않은 책은 그저 상품권을 빳빳하게 보관하는 용도였다. 상품권이 잘 있나 확인을 할 무렵 대시보드에 대충 던졌던 핸드폰의 진동이 다시 울렸다.
설마 또 상담인가. 머리카락이 바싹 섰다. 다행히도 전화가 아닌 문자였다. 발신인은 송재혁이었다.
송재혁이 주소를 보내준 호텔은 야구장에서 차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했다.
차가 생기고 나니 거리감의 개념이 달라졌다. 예전이라면 택시를 타야 할지 고민했을 애매한 거리도 꽤 가깝게 느껴졌다. 차를 사고 난 후의 수원은 꽤 좁아서 이선은 종종 웃음이 나곤 했다.
생각해 보면 차를 산 것 자체는 충동구매나 다름없었다.
이선이 첫 발령을 받은 삼성동의 초등학교 주변엔 젊은 남자가, 그것도 초임 공무원이 혼자 살 만한 가격대나 평수의 적당한 집이 없었다. 결국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범위를 넓혀 집을 구했지만 그래도 꽤 가까운 축이었다. 조금만 일찍 일어난다면 걸어서 출근할 수도 있는 거리였다. 출근 인파에 짓눌릴 것만 각오한다면 버스를 타도 금방이었다.
그런데도 차를 샀던 이유는 꽤 단순했다. 항상 노량진이나 대학 시절에 다니던 단골집만을 전전하는 신규진 때문이었다.
둘 중 하나라도 차가 있다면 편하겠지. 가끔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어딘가 멀리 나갈 수도 있을 테고, 한번 술을 마시면 끝을 보는 신규진을 옮기느라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을 일도 없을 거다.
송재혁이 듣는다면 소리라도 지를 법한 차량 구매의 목적은 단 한 번도 달성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이선이 차를 사고 난 후, 가장 좋아했던 건 이선의 어머니였다.
뭐, 누가 되었든 한 사람이라도 기뻐했다면 됐다. 이선은 그리 생각했다. 아직도 꼬박꼬박 나가고 있는 차 할부금은 은근히 부담되었지만.
도착한 호텔은 컵스 구단에서 수원에 오면 항상 이용하는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고등학교 야구부가 있었다. 그 덕에 오늘도 야구부의 운동장을 빌려서 선수들은 오전에 부족한 훈련을 했단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이선은 송재혁의 문자를 확인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향했다.
[곧 나감.]
마지막으로 송재혁이 보낸 문자엔 주어가 없었다. 대체 ‘곧 나간다’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좀 밝혀줬으면 좋을 텐데…….
이선은 한숨을 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적당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섰다.
서늘한 벽에 몸을 기댔다. 손에 달랑달랑 들고 온 백화점 상품권의 봉투가 영 모양이 좋진 못했다.
귀찮더라도 가방에 챙겨서 나올걸. 아니, 이거야 감독의 선물이니, 자신도 역시 적게나마 무언가 사 들고 와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의 흐름 속에서 이선은 점점 초조해졌다.
강희찬이 나오지 못한다면 송재혁이 대신 받아서 전해주겠다고 했다. 끊임없이 사람이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노려봤다. 제발 송재혁이 나오기를……. 그 까탈스러운 성격에 선물 하나 받자고 직접 내려오는 것도 어울리진 않았다.
‘제발 어울리지 않는 짓은 하지 말고, 송재혁보고 받아오라고 시켜라.’
마음속으로 양손을 꼭 모으며 빌었다. 간절한 기도의 결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위층에서 내려온 승강기의 문이 열리며 드러났다.
호텔 방에서 샤워를 했는지 약간 젖은 기가 남아 있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털어내던 남자가 안에 있었다.
“아…….”
인사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쭈뼛거렸다. 그런 이선을 향해 남자 역시 까딱 고개를 숙였다.
눈알을 파버리겠다는 손짓을 할 때와는 달리 회색 반팔 티를 입은 모습이 앳돼 보였다. 이천에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유니폼을 입었을 때와 사복을 입었을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른 축이었다.
이선이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남자는 이선의 팔을 기준으로 하나 반 정도의 거리 앞에 섰다.
그제야 인사도 없이 뻣뻣하게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아까 경기 잘 봤어요.”
물론, 경기에서 남자의 팀이 이겼는지 졌는지는 모른다. 일단 나오기 전에는 이기고 있긴 했지만…….
이선의 말에 남자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면 저 표정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겠지만, 보송보송하게 씻고 난 후라 그런지 그다지 타격은 없었다.
“그쪽은 왜 야구장에서 공을 똑바로 안 봅니까?”
“…네?”
“파울 타구 날아가는데 왜 다른 데를 보고 있냐고요. 맞아봤으면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아……. 네. 죄송합니다.”
야구장에서 봤던 의문의 제스처는 눈알을 파버리겠다는 게 아니라, 공을 똑바로 보라는 거였나.
공에 맞은 관람객 때문에 시간이며 돈을 낭비했던 경험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남자의 성가심에 적지 않은 일조를 했던 이선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에도 관람객이 공에 맞으면 공을 친 선수가 병원까지 따라가야 하는 걸까? 아마 다친 사람도 썩 반기진 않을 거다. 이선은 조용히 생각했다.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이선의 정수리에 옅은 한숨이 붙었다. 고개를 들자 남자는 이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로 눈을 깔고 내려다보는 얼굴은 유니폼을 입었을 때나 사복을 입었을 때나 똑같이 잘 어울린다. 그게 세 살이나 어린 사람의 얼굴이라는 걸 잊게 할 만큼.
“줄 거 있다면서요.”
“아, 네. 여기…….”
핸드폰과 함께 쥐고 있던 봉투를 건넸다. 이선이 내민 봉투를 받아 든 남자는 거리낌 없이 내용을 확인했다.
보통 이런 종류의 선물을 받으면 확인은 나중에 할 텐데…….
거침없는 행동에 이선은 잠시 당황했다. 물욕이 많다기보다는, 오히려 산뜻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는 행동임을 이제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에어컨이랑… 어……. 그 야구 기계…….”
“피칭머신이요.”
“아, 그거. 감독님이 정말 감사하다고 그러셨어요. 많지는 않다고, 꼭 받아주셨으면 하시더라고요.”
“네. 그런 것 같네요.”
평이한 조로 나온 말에 이선은 다시 말을 잃었다.
과연. 백만 인을 설설 기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송재혁이 속한 야구단 직원과 함께 자신 역시 벌벌 떠는 인원에 기꺼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남자의 말을 들을 때마다 놀라운 점은, 남들이 깜짝 놀랄 소리를 본인은 조금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남자는 에어컨과 피칭머신의 가격에 비해 한참 모자랄 상품권 액수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그대로 상품권을 봉투째로 접고, 본인의 검은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한동안 책 사이에 끼워서 새것 같은 빳빳함을 유지했던 노력이 무색해졌다.
“나가죠.”
척추―라고 할 수 있으려나―가 완전히 접힌 봉투가 사라졌을 부근을 멍하니 보던 눈을 들어 올렸다. 핸드폰 하나를 달랑 손에 쥔 남자는 이미 출구를 향해 몸을 돌린 채였다. 이선 쪽으로 비튼 고개는 슬쩍 턱짓한다. 그 제스처가 한 번 더 얘기하고 있었다. 나가자고.
이선의 입에선 “…네?” 따위의 얼빠진 소리만 나왔다. 답답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남자는 이제 완전히 몸을 틀었다.
“그쪽이 밥 사는 거 아니에요? 이런 거 줄 땐 보통 밥 사잖아요.”
남자의 당연한 소리에 이선은 잠시 멈칫했다.
10시 40분. 호텔 주차장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시간이 대충 그 정도였다. 지금은 아마도 11시에 더욱 가까워졌으리라. 내일 출근을 해야 하고, 지금은 수원에서 서울까지 올라가야 하지만 그게 오롯한 문제는 아니었다.
의외로 이선보다 세 살이 어린 사람은 상식적인 인사치레나 형식을 챙길 줄 아는 이였다. 밥을 사겠다고 해도 됐다며 거절할 거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하긴, 전에 보쌈을 먹을 때도 손 하나 대지 않음에도 부득불 따라왔었지.
솔직한 말로, 오늘도 남이 먹는 걸 구경만 할 생각이라면 거절하고 싶었다. 그때야 송재혁이라도 있었지. 식사 대접을 핑계로 출근 전날 체하고 싶은 직장인은 세상에 없었다.
밤 11시가 과연 인사치레로라도 남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적당한 시간인가.
고민할 무렵이었다. 남자는 습기와 함께 차분히 가라앉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며 드러났던 깨끗한 이마는 이내 다시 가려진다. 그러고 보면, 인터넷에서 봤던 시상식 영상에선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겼었다. 그것도 꽤 어울렸지.
이선의 쓸데없는 생각을 알아채지 못한 남자는 그대로 손을 목덜미로 넘겼다. 목이 뻐근한지 고개를 좌우로 비트는 행동과 함께였다.
“밥 먹는 줄 알고 애들보고 먼저 나가라고 했는데요.”
남자의 말을 듣고 이선은 결정했다. 이 정도면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며, 다음에 보자고 할 수도 없다.
“그럼… 가, 가실까요?”
엄청 밟으면 오늘 안에는 도착할 수 있겠지.
이루어질 희망이 낮은 가능성을 속으로 삼키며 이선은 남자의 몸이 앞선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다. 드시고 싶은 게 있냐는 말을 덧붙이며.
* * *
정이선은 인간관계가 협소한 편이었다. 주말마다 말도 제대로 섞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경조사를 챙겨야 하는 직장이나 ‘친구’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갈 송재혁, 어느 곳에 분류해야 할지 모호한 신규진. 그 정도가 정이선의 인간관계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송재혁을 제외하면 전부 20대에 생겨난 인맥뿐이고.
사귐의 범위가 좁은 건 정이선 개인에게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이선 쌤은 주말에 친구들 만나요?’나 ‘주변에 만나는 좋은 사람 없어?’ 따위의 질문엔 답하기 조금 곤란하다는 것을 빼면.
하지만 이런 순간엔 확실히 난감했다. 도저히 스물다섯짜리 남자와 11시에 무엇을 먹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저어…….”
학교 회식으로 가는 고깃집이나 카페. 송재혁이 데려가는 잠실 주변 식당. 그도 아니면, 아주 예전 신규진과 갔던 대학가 주변 술집이나 파전 가게. 이 정도가 정이선이 가봤던 외식 코스였다. 어느 쪽이든 누군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대접’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곳들이었다.
호텔 입구를 나설 무렵 이선은 생각을 포기했다.
도저히 손댈 수 없는 문제에 좌절하고 도와달라 눈빛을 보내는 반 아이들이 된 것처럼, 혹은 메뉴 선정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회생활의 패잔병이 된 것처럼 이선은 그에게 공을 넘겼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여긴 잘 모르겠는데요. 그쪽이 더 잘 아는 거 아닙니까? 수원사람이라면서요.”
‘수원 사람’인 정이선은 그 말에 더욱 난감해졌다.
지방 출신이라고 지역의 맛집이나 명소는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오해를 흔히 받았다. 대학에 가고, 종종 방학 시즌이 되면 받았던 질문에 이선이 제대로 답한 적은 없었다. 뭐, 이 동네에 대체 뭐가 볼 게 있다고 놀러 오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차치했다.
“그럼… 통닭 드실래요?”
이선은 조심스레 물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정이선의 기억상 가장 유명했던 남문의 통닭집 이름이 가장 최선이었다. 결과 산출은 빨랐다.
“등판 다음 날이라 튀긴 거 말고 밥으로 먹고 싶은데요.”
“그럼…….”
“저기 설렁탕 집 가죠.”
“…….”
이렇게 알아서 정할 거면서 자신에게 왜 물었는지 모르겠다. 여기 사람이 아니냐는 소리는 왜 했는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고.
이선은 반보 정도 앞서는 남자의 걸음을 따라 신호등을 건넜고, 규모가 큰 설렁탕 집에 들어섰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가게는 주문을 하자 햄버거보다 빠른 속도로 음식이 나왔다.
설렁탕 특사이즈. 남자를 따라 시킨 음식이 앞에 나오고서야, 이선은 오후 무렵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사골 국물에 밥, 설렁탕 집 특유의 맛이 나는 깍두기. 배가 고플 땐 단순하고 상상이 가는 맛의 조합이 가장 타격이 크다.
이선이 설렁탕을 반쯤 비울 무렵, 남자는 직원을 불러 빈 그릇을 치우고 같은 음식을 주문했다. 같이 시키겠냐는 물음에 이선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공복인 상태가 길었어도 이 시간에 배가 부를 때까지 먹기는 힘들었다.
이선의 그릇이 비워지고도 남자는 한참을 식사에 몰두했다.
“…….”
이 정도로 식사 속도가 차이 날 줄 알았다면 자신도 작은 거로 더 시켰어야 했나. 고민을 해봐야 이미 이선은 빈 그릇을 앞에 두고 남이 먹는 것을 몇 분째 지켜보고 있었다. 신경이 쓰일 법도 한데, 남자는 그런 기색도 없이 추가 주문을 해가며 잘도 먹었다. 역시 저번에 보쌈집에서 남이 먹는 걸 빤히 지켜볼 때도, 시선으로 인해 남이 불편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결국 이선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뭉그적거리며 손을 씻고 다시 가게 안으로 올 무렵, 남자가 홀로 앉은 테이블 곁엔 직원이 함께였다. 무서운 속도로 비워진 깍두기 항아리를 채움과 동시에, 직원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게 멀리 떨어진 이선에게도 전해졌다.
“저기… 죄송하지만 사인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과연 아르바이트생이 본인의 의지로 사인을 요청하는 것일까?
잠깐의 의문은 금세 해결되었다. 매직과 종이를 들고 쭈뼛대는 여자의 뒤편으로 카운터에 있는 사장이 주시하고 있었다. 남의 돈 받고 사는 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
“…….”
이선의 시야에는 뒤통수만 보여주던 남자가 아르바이트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룩하게 올라온 뺨의 곡선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이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는데…….’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도 전에 볼록 튀어나왔던 흰 뺨은 사라졌다. 보이는 건 다시 결이 좋아 보이는 머리카락뿐이다.
“밥 먹는 중인데요.”
거절의 말조차도 정확히 이전과 일치했다. 전과는 달리, 진짜 남자가 진짜 식사 중이라는 차이점이 있긴 했지만.
아르바이트생은 민망한 얼굴을 해서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빈 깍두기 항아리를 든 채 카운터로 향하고는, 사장을 향한 소리 없는 투정을 한다. 중년의 사장은 자식뻘인 아르바이트생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철없는 아버지와 일을 돕는 딸 같기도 한 풍경을 보며 이선은 설핏 웃었다. 역시 자발적으로 사인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었다.
잠깐 멈췄던 걸음을 옮겨 다시 자리로 갔을 때, 남자는 여전히 첫술을 뜨는 듯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체 언제면 가게를 나설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경악을 애써 숨기고, 이선은 남자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네 그릇인가 다섯 그릇째인 따끈한 설렁탕이 담긴 뚝배기 그릇이 이젠 물릴 지경이다.
‘차라리 다른 음식을 시켜 먹지…….’
보는 것만으로도 더부룩해진 속을 알지 못하는 남자는 잠시 숟가락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선의 앞에 있던 핸드폰을 가리켰다.
“문자 왔어요. 박산모라는 사람한테서.”
“네?”
남자는 두말없이 턱짓으로 이선의 앞을 가리켰다.
직장과 관련한 게 아니라면 정이선의 핸드폰 연락처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학교와 관련한 곳까지 범위를 넓혀도 저런 이름이 자신의 연락처에 등록된 적은 없었다.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박산(모).’
…이걸 저런 식으로 읽을 줄이야.
당황한 이선의 기색은 개의치 않는 듯 남자는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정이선은 오늘 제법 호리해 보여도 운동선수는 운동선수임을 철저히 깨달았다.
저런 식으로 몰아서 먹고 예전처럼 끼니를 거르는 걸까? 어떻게 보든 썩 좋은 식습관은 아닐 터였다. 운동선수라면 하루 세끼를 규칙적으로 꼬박꼬박 챙겨 먹을 거라던 편견 역시 깨졌다.
남의 식습관에 대한 걱정을 대충 마친 이선은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알림창에 뜬 이름만으로, 방금 전까지 기분 좋게 먹었던 음식이 어딘가에서 턱 걸린 듯했다.
[선생님 쉬는 날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산이 좀 잘 부탁드릴게요.]
잠깐 답장을 할까 고민하던 이선은 결국 한숨을 쉬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그러고도 자꾸 화면에 신경이 쓰였다. 핸드폰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자 그나마 속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한숨에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이미 볼 한쪽이 불룩하게 튀어나올 만큼 음식을 씹고 있던 강희찬은 깍두기를 집던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밥 먹는데 뭐냐고 묻는 듯 치켜뜬 눈과 마주쳤다.
“…뭡니까?”
마치 어른이 ‘밥상머리에서 한숨 쉬는 거 버릇없는 짓이다’라고 타박을 하는 것만 같다. 시선을 피하려던 이선은 순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깨달았다.
현직 프로야구 선수니 당연히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했을 거다. 홍 감독처럼 담임 반 학생의 학업 고민을 듣는다고 해서 선생의 눈치를 볼 입장도 아니고.
강희찬은 말이 없는 이선을 잠시 봤던 시선을 내렸다. 직원이 한 번 채워줬던 깍두기 항아리는 벌써 반이 비워진 채였다.
저 깍두기를 또 채워서 먹을 셈인가. 김 첨지 아내가 환생한 것도 아니고.
이선은 남자가 그렇게 먹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리겠다고 다짐했다. 눈앞에서 같은 음식을 계속 먹다가 죽는 사람을 보고 싶진 않았으니까.
낮게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은 이선은 “저기…….” 하며 입을 열었다. 깍두기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줄 알았던 남자는 의외로 바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한쪽 뺨은 불룩한 채였다.
“혹시 야구는 언제부터 하셨어요?”
“4학년이요.”
남자는 식당에 들어오고 단 한 번도 만지지 않았던 플라스틱 물잔을 들었다. 이선이 채워 넣었던 양 그대로 있는 물컵을 입에 가져다 대고 꿀꺽꿀꺽 삼켰다. 물컵이 반 정도 비워지자 불룩하게 올라섰던 남자의 뺨도 다시 매끈하게 떨어졌다.
음식을 삼킨 수고로움에 비하면, 한 박자 늦은 대답은 지나치게 짧았다. 하지만 이선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면, 초등학교 때 공부는 얼마나 하셨어요?”
“…….”
남자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눈을 크게 뜨지 않았다. 적어도 이선이 봤던 범위 안에서는.
항상 시큰둥해 보이는 시선이 3초 정도 자신의 얼굴에 머물렀을 때. 이선은 제가 했던 질문의 무례함을 깨달았다. 테이블 위에서 놀고 있던 양손을 휘저었지만 남자의 입이 먼저 열렸다.
“빡대가리라 공부는 항상 못했는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
“저희 반 학생 중에 올해 야구부에 들어간 애가 있거든요. 저녁마다 운동해서 힘든지 숙제도 잘 못하고, 학교 수업도 못 따라와서요. 어머니도 많이 걱정하시는데, 저는 운동부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이선을 향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강희찬은 몸을 뒤로 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미 뚝배기 안에서도 식어 있는 설렁탕에는 흥미를 잃은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설렁탕을 특으로 몇 그릇이나 해치우고도, 배가 불러 죽겠다는 기색 하나 없다는 게 이선은 신기했다. 이선은 가만히 강희찬의 입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엄마는 뭐라고 하는데요? 선수로 키울 생각이래요?”
“아직 3학년이라……. 그런 생각까지는 안 하실 것 같은데요. 야구부도 올해야 나이 기준 채워서 들어간 거라서요.”
“요샌 리틀야구단도 취미랑 선수 대비반으로 나눠서 운영해요. 3학년이면 몇 살이에요? 열 살? 열한 살?”
“…열 살이요.”
“야구선수들은 고3 여름에 드래프트 나갑니다. 걘 야구를 계속할 생각이면, 앞으로 프로 지명까지 10년도 안 남은 거예요.”
일정한 톤으로 내뱉는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이 서늘히 다가왔다. 마치 자신이 운동하는 자녀를 둔 부모가 되어 혼이 나는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중학교 야구부라도 보낼 생각이면 공부는 포기하라고 하세요. 절대 같이 못 합니다. 한국에서 엘리트 체육 하려면 다 그래요.”
“그렇기야 하겠지만, 아직 너무 빠른 것 같아서…….”
“그쪽은 공부해서 대학 갔죠?”
갑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에 이선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전까지 자식 교육에 대한 타박을 듣는 부모가 된 기분이었는데……. 이선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그쪽이 반 애새끼 나이일 때, 학교 끝나서 8시 넘게까지, 주말엔 아침부터 해 떨어지기 직전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 공부했어요?”
질문을 던진 남자는 물잔에 남은 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더니 긴 손을 뻗어 물통을 집는다. 단순한 동작이라도 길고 곧게 뻗은, 게다가 흰 편인 손이 수행하자 꽤 유려하고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가 물컵에 다시 물을 채워 넣은 순간이었다. 이선은 그가 봉사활동을 제외하고 가장 말을 오래, 그리고 길게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단답형의 대답으로 뚝뚝 끊기는 게 아닌, 두세 마디의 질문과 답이 오가는 정상적인 대화.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노력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정이선의 학업 성취엔 요령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는. 원래 그 나이 때야 학교에서 수업 멀쩡히 듣고 숙제나 잘하면 중간 이상은 가는 법이다. 안 해서 문제였지.
이선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비웃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런 기색은 없었다. 그저 “그러면…….” 하고 말을 이을 뿐이다.
“그렇게 공부하고서 운동이라도 하라면, 할 수 있겠어요?”
취조처럼 날아오는 질문 공세였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나 보던 취조와는 달리 답은 간단했다.
정이선이 저 정도로 공부를 했던 건 중학생 정도가 되어서였다. 그것도 시험 기간에만 해당했고. 게다가 공부를 하고 나면 피로감에 허덕여 자기 바빴다. 당연히 열 살의 정이선은 저렇게 공부를 하지도, 공부 후에 다른 활동을 하지도 못했다.
“…아니요.”
이선은 이번엔 고갯짓이 아닌, 제대로 된 대답을 했다. 갑자기 자신을 소재로 한 대화의 의도를 깨달았다.
‘모른다고 하면 짜증을 낼 줄 알았는데…….’
봉사활동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남자는 의외로 교사직에 어울릴지도 모른다.
“본인이 진로를 정하든 부모가 시키든, 얼른 결정하는 게 애들한테도 편할 겁니다. 이건 내가 경험해 봤으니까 알아요.”
자신을 향한 남자의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몇 번을 봤고, 식사 내내 앞에 있던 사람을 향해 낯이 익다고 하긴 우습지마는.
당연한 정답을 말하는 듯한 얼굴을 보던 이선은 금세 무엇과 겹치는지 깨달았다. 교무실 컴퓨터로 봤던, 영상 속 어린 선수의 얼굴이었다.
만 열여덟. 어떻게 봐도 지나치게 어리고 앳된 선수는 온 국민이 주목하는 무대에 서서 태연히 공을 던졌다. 마치 게임의 결과를 미리 알기라도 하듯.
“…….”
…정답을 미리 알고, 정답만을 선택해 온 인생이었겠지.
그제야 이선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에 비해 묘하게 고압적인 분위기도, 사람을 내려다보는 게 어울리는 인상도. 항상 옳은 길만을 걸어온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거, 얻을 수 있는 걸 빨리 구분해야 돼요. 그쪽은 모르겠지만, 운동선수들은 시간이 없거든요.”
모든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어른이 될 수는 없다. 외고나 과학고에 원서를 넣어보자던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의 제안에 고개를 저을 때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떨어지면 지방대를 가겠다던 소리에 아연했던 고3 담임의 얼굴을 볼 때도 이미 깨달은 바였다.
“그렇다고 해서… 다 프로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확신할 수 있는 결말이 끝에 있다면, 얼마든지 그곳을 향하라고 등을 밀어줄 것이다. 가늠할 수 없는 인생에서, 더더욱 힘든 결말만이 보이는 길이었다. 험한 길을 향해 걸어가기를 바라는 선생이나 부모는 없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정이선 선생의 무책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자는 그걸 꿰뚫어 볼 듯 이선을 향해 끈질기게 눈을 붙였다.
“어쩔 수 없어요.”
입술을 가르고 나온 목소리는 차분하고 온화했지만, 그러면서도 차가웠다.
“운동 관두면 노가다 판 가서 힘쓰는 일이라도 해야죠. 나도 예전엔 그 각오로 살았어요. 아마 다들 그럴 겁니다.”
알고 있다. 어린애들은 생각보다 강하다. 그래야 하고.
이번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깐 동안 다른 곳을 향했던 남자의 눈이 어느새 자신의 손가락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선은 손톱 옆의 살점을 뜯던 움직임을 멈추고 양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기색으로 눈을 올렸다.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요.”
이선은 생각보다 크다 싶은 남자의 검은 눈동자를 봤다. 자신의 고민 따위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뻔했다.
이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쉬울 거다. 스물에 올랐던 올림픽 결승전이나, 누구나 받고 싶어 할 상을 얻기 위해 올랐던 무대나.
저에게는 언제나 힘들고 어려웠던 세상살이였다. 스물다섯 어린애에게는 쉽다는 것에 억울함을 느낄 건 없다. 이런 건 애초부터 능력의 차이였다.
“어차피 고학년만 돼도 운동은 금방 기량 차이 납니다. 피지컬 차이, 실력 차이 나면 자연히 관두고 싶어 할 거예요. 그땐 어쩔 수 없이 공부하겠죠.”
역시. 머리로 대충 예상하던 답이 정확히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
“부모들도 애들이 그 나이쯤 되면 자연히 깨달을 겁니다. 자기들이 낳아놓은 게, 그렇게까지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거. 그럼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돼요. 공부든, 운동이든.”
“…….”
“뭐… 요샌 실력 없다고 해서 바로 관두게 하진 않겠지만.”
사족처럼 덧붙는 말이 걸렸다. 의외로 남자는 이선의 궁금증을 선선히 해결해 줬다.
“애들 머릿수 하나가 다 감독, 코치 월급이거든요. 함부로 관두게 못 해요.”
남자의 얼굴엔 맑은 웃음기가 느껴졌다. 산타는 없어. 철없는 삼촌이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 어린애의 동심을 파괴하는 순간 지을 법한 웃음이었다.
…단정하고 배치가 조화로운 얼굴에 비해, 내뱉는 말은 지독히 현실적이었지만.
“아, 계산 제가 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성큼성큼 계산대로 걸음을 먼저 옮길 때 이선은 허둥댔다.
분명 밥을 사 달라는 말을 듣고 왔는데, 결국 남자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있었다. 보쌈집에서도 그렇고 봉사활동 후의 회식에서도 그렇고. 강희찬은 스물다섯이라는 나이에 비해, 무언가를 계산하는 모습이 퍽 익숙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얻어먹을 수는 없다.
이선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핸드폰을 챙겼다. 하지만 이미 카드 단말기는 영수증을 뱉어내는 소음을 내고 있다. 목소리를 다소 높인 탓에 홀 안의 이목이 이선을 집중했다. 계산대 앞에서, 방금 꺼낸 자판기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고 있는 남자를 제외한다면.
이래서야 차라도 대접하겠다는 마음에 없는 소리조차 하지 못한다.
이선이 강희찬의 곁으로 다가갔다. 쓰레기통에 종이컵을 구겨서 버리는 그를 향해 주인이 여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주인장의 입이 열렸다.
“저기, 강희찬 선수. 괜찮으시면 저희 사인 좀 해주고…….”
물론, 쓰레기까지 처리한 남자가 미련 없이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는 게 문제였지만.
못 들은 건지, 듣고도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지금까지의 경험상 후자일 거라고. 이선은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있었다.
남자가 나가기 위해 문을 밀고 나갔을 때, 더운 바깥바람이 훅 끼쳤다.
이선은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주인을 봤을 때, 주인장은 기분이 나쁠 틈도 없이 한 대 맞은 양 서 있었다. 이선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이런 표정을 지었겠구나 깨달았다.
쉬이 보기 힘든 성품을 목전에 두고 감탄이 나올 만도 하다.
주인의 얼굴을 보던 이선은 그대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도망치듯 문을 열고 가게를 나섰다.
…왜 내가 민망하고 겁을 먹어야 하는 걸까?
마치 신규진이 잔뜩 취해서 데리러 갔을 때와 비슷했다. 아니, 이쪽은 맨정신이라는 점이 더욱 놀라웠다.
“…….”
마치 튕기듯 가게 밖으로 나왔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엔 고개를 돌리고 식당 입구를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이선이 나옴과 동시에 남자는 걸음을 떼었다. 길 건너편에 있는 호텔이 거침없는 걸음의 목적지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선은 보폭을 넓혀 남자의 뒤를 밟았다.
“계산은 제가 하려고 했는데요.”
“그거 먹고요?”
신장을 고려해도 긴 다리 길이에 어울리는 남자의 보폭이 점점 줄어든다. 짧은 대화가 끝날 무렵엔 걸음이 빠른 편이 아닌 자신에게도 편하다 싶은 정도의 속도로 변했다.
이선은 처음으로 남자와 어깨선을 맞추고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는 배가 부른 덕에 조금은 너그러워졌는지도 모른다.
느릿한 걸음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었다. 오늘도 열대야일 게 뻔한 더운 공기와 도로 위를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의 노랗고 빨간 불빛들이 뒤얽혔다.
“…….”
더위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조금 더 밖에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여전히 붉은 빛을 내는 신호등 속 사람을 보다 고개를 내렸다. 남자가 신고 있는 운동화는 저번 봉사활동 때 신고 왔던 것과 달랐다.
눅눅하고 더운 공기, 자동차의 소음. 머릿속의 허튼 생각을 가르고 잔잔한 목소리가 흘렀다.
“어차피 혼자 먹기 싫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은 운동화 한 쌍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선은 고개를 들어 길 건너를 확인했다. 위층에 있던 빨간 아저씨 대신, 아래층의 남자가 초록 불빛을 내고 있었다.
거리낄 것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것 같은 남자도 기본적인 교통 수칙은 지키며 살고 있었다. 당연한 사실에 얼핏 웃음이 났다.
오늘의 강희찬은 말이 많았다. 밥도 많이 먹었고, 걸음도 느렸다. 사인에 인색한 면을 제외하면 이선이 지금까지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의외의 순간에 발견하는 의외의 모습은 긴장을 풀게 했다. 여름밤이었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따뜻한 식사와 함께 풀린 긴장은 쉬이 입을 열게 만들었다.
“사인, 아까 왜 안 해주셨어요? 주인아저씨가 많이 팬이었던 것 같은데.”
“꼭 해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전이라면 날카롭게 들렸을 대답도 이 순간엔 꼭 그렇진 않았다. 더운 공기는 남자가 풀어내는 온화함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착각이 일었다. 식당 주인의 사인 요구는 들은 체도 않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라도, 어린애들에게 줄 야구공에 일일이 사인했던 사람임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선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없던 호텔 건물이 점점 가까워 왔다. 그럴수록 이선의 걸음은 어쩐지 느려졌다. 그럼에도 남자와 맞춰진 어깨선은 변화가 없었다.
“어차피 내가 사인 안 해주는 건 그쪽이 다니는 학교 애새끼들도 다 아니까 상관없어요.”
“그래도… 아르바이트 학생한테까지 부탁하실 정도면, 정말 팬이실 것 같은데요.”
“정말 사인이 받고 싶으면 구단 행사라도 와서 받겠죠. 나도 거기선 사인해요. 어차피 그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예요.”
흘긋 올려다본 옆모습에선 짜증이나 귀찮음이 없었다. 여러 번 느끼는 바였지만, 아무 표정이 없다면 꽤 온순한 이목구비였다.
“안 좋은 소리 돌지 않을까요?”
“신경 안 씁니다.”
고집스레 앞을 향하고 있는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호텔 안의 분수에 조명이 부딪혀 흩어진 빛무리가 남자의 얼굴에 닿고 있었다.
뚝뚝 끊어지는 대화가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아마 남자는 불쾌한 게 아닐 거다. 파란 불에 길을 건너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을 뿐이겠지.
순간적으로 남자의 눈이 이선을 향했다. 빛을 받은 눈동자는 꽤 색이 옅어졌다.
“아까도 말했죠? 할 수 있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걸 구분해야 한다고. 어차피 사인 좀 안 해준다고 인터넷에서 욕하는 것밖에 못 하는 사람들입니다. 얻는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세금 낸다고 치면 되고요. 뭐, 있는 말을 하니까 상관없고, 없는 말을 지어내서 욕하면 변호사 부르면 그만이에요.”
간단한 일 아니냐. 갈색 눈동자가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이내 남자는 다시 옆모습만을 보여준다.
이런 사람이 된다면, 사는 게 조금은 편했을까? 남의 평가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이 사람의 자신감은 오롯이 그의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누구보다 높은 곳을 오를 줄 아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여유일 테고. 그러니 자신이 그것을 부러워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쪽도…….”
이선이 차를 세운 주차장으로 갈라지는 입구에서 남자는 발길을 멈췄다. 시선이 다시 한번 느릿하게 떨어진다.
“구분하면서 사는 게 좋을 겁니다. 아무 데나 고개 들이밀지 말고.”
말은 어딘지 한숨과 닮았다. 나직한 목소리를 끝으로 남자는 몸을 틀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엔 뒷모습을 향해 이선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럼, 얻는 게 뭔데요?”
인공적인 조명이 환히 비추는 밤거리를 가르고 이선의 목소리는 남자에게 닿았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햇살이나 호텔 주변을 밝히는 조명이나. 뭐가 됐든 빛을 받으면 남자는 꽤 따스해 보이는 인상을 주었다.
이선은 멀거니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느끼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인터넷에서 욕을 먹으면서, 그쪽이 얻어내는 게 대체 뭔데요?”
다소 추상적인 질문을 구체화했다. 남자의 눈이 둥그스름해진다. 아까 설렁탕 집에서, 초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의 미래를 가차 없이 말하던 때와 같은 웃음이 빛처럼 얼굴에 번졌다.
“정 선생도 직장 다니는 사람이니까 알 거 아니에요. 출퇴근할 때 사인하느라 쓸데없는 시간 안 써서 좋습니다.”
삐뚜름한 웃음이 오롯이 시야를 채웠다. 그 순간, 이선은 남자를 표현할 한 단어를 떠올렸다.
‘썩은 배.’
동료 선생님에게 받고 한참을 냉장고에 두었다가 썩어버린 배. 겉은 너무도 멀쩡했으면서, 그 안은 끔찍할 정도로 암흑이었다. 시커멓게 썩어버린 속을 보고 충격 반, 배신감 반인 감정을 느꼈었다. 울기 직전인 얼굴로 배를 버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눈앞의 남자는 겉은 멀쩡하고 속은 곪아버린 썩은 배와 몹시도 닮은 사람이었다.
봄볕을 닮은 남자의 미소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썩은 배는 멀거니 서 있는 이선을 남겨둔 채 걸음을 떼었다.
당연한 거 아니냐. 그런 투로 말을 내뱉고 등을 돌린 강희찬이 호텔 입구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이선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