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2권) (6/31)

  4K(2)

“홍 감독, 나 먼저 들어갈게.”

짧으면서도 긴 침묵을 깬 건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던 체육 교사였다.

‘나만 두고 도망가지 마!’

홍인기 감독이 그런 간절한 마음을 담은 눈빛을 보냈지만, 이미 상대방은 저 멀리서 작아지는 뒷모습뿐이었다.

“…….”

학교 내부는 당연히 금연구역이다. 하지만 학교 옆에 있는 야구장은 묘하게 제재가 느슨한 곳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아예 학교 건물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태우기 귀찮은 교사들 몇몇이 찾는 공간이 되었다.

창고와 휴게실 용도의 가건물은 계단 옆에 위치했다. 그 뒤에서 홍 감독 역시 늘 그렇듯 연초를 태웠다. 오늘의 동지는 체육 교사인 고대영이었다.

담배 한 번 빨고, 다른 손에 있는 식어 빠진 믹스커피를 입에 털어 넣고. 몸에 밴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할 무렵, 홍 감독의 머리는 낯선 광경을 인지했다.

‘웬 현실감 없는 미남이 있네.’

계단을 여유롭게 내려오는 큰 키를 본 순간 가볍게 든 생각이었다. 같은 브랜드의 손목 보호대와 피케티셔츠를 매치시킨 모습은 스포츠 화보에서 본 듯도 했다.

더운 듯이 찌푸리고 있었지만 깔끔하게 떨어지는 얼굴에서 어딘지 모를 익숙함을 느낀 건 금세였다.

그사이 남자는 성큼성큼 걸었다. 1미터가 채 되지 않는 거리까지 남자가 다가왔을 때, 홍인기는 깨달았다.

‘강희찬이다.’

오늘만 해도 올스타전 관련 뉴스 화면에 비추던 얼굴이 눈앞에 실물로 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을 마주하고 난 후에야, 홍 감독은 오롯이 상황을 인식했다. 그 얼굴이 내뱉은 이름이…….

‘정이선 선생님 부탁받고 왔습니다.’

흘러나온 말은 별것 없는 내용이었음에도,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벽을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딱딱하고 건조한 목소리였는데, 이름 자체의 울림이 부드러운 편이라 퍽 곱게 느껴졌다.

며칠 전, 정이선 선생은 친구가 일하는 구단에서 봉사활동과 홍보용 촬영을 겸해, 선수 하나를 보내도 괜찮겠냐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정이선 선생의 이름은 직접 부를 일은 없었지만, 학생들을 통해 이미 들은 바 있었다. 그 이름은, 본인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단정하고 선한 울림이라고 홍인기는 생각했다.

정이선 선생은 이름만큼이나 선하고 배려가 깊은 게 분명했다. 자신이 하던 전화통화를 듣고 마음을 써준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었으니까.

야구단 프런트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보다도, 조용한 배려와 어울리지 않는 주눅 든 태도가 더욱 신경이 쓰였다.

왜 저렇게 눈치를 보는 걸까. 오히려 자신이 더 감사해야 할 제안을 해주면서도 조심스레 말을 하는 모습에 홍 감독은 의아했었다.

아마 어지간히 야구를 보는 사람들도 잘 모를 2군 선수 중 하나가 오지 않겠냐고. 홍인기는 그리 짐작했다. 묘하게 조심스러운 태도의 원인을 거기서 찾았다.

하지만 유명하든 아니든, 프로 유니폼을 입은 선수란 어린 학생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대단해 보인다. 그게 야구를 하는 어린 선수들이라면 더더욱. 홍 감독 역시 그런 유년 시절을 보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홍 감독은 어제까지도 인터넷으로 젊은 애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을 검색했다.

요새 애들은 무슨 얘기를 하나 알아보던 감독의 노력은 무의미해졌다. 어리지만 프로에 입단한 선수들은 참 대단하다. 젊은 선수를 살갑게 치켜세우려던 말은 머릿속에서 공중분해 되었다.

프로고 뭐고, 강희찬이다.

대단하다는 말은 밥 먹으라는 소리보다도 더 들었을 선수다. 아직도 만 열여덟 나이에 올림픽 결승전에 출전한 기록은 회자될 정도니 말이다.

“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홍인기는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입에 있던 담배를 땅에 버리고 비벼 껐다. 그리고 그대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이 넘게 남은 장초를 버리고 청한 악수가 무색하게도, 상대는 그 손을 멀거니 보기만 한다. 홍 감독은 머쓱해진 오른손을 거두고 허벅지 부근에 괜히 문질렀다.

“촬영하시는 분이 같이 오신다고 정 선생님한테 얘기는 들었는데…….”

“차 세우고 있을 겁니다.”

“뭐 마실 거라도……. 일단, 안에 들어가시죠. 많이 더우시죠?”

강희찬이 맞잡기를 조용히 거부한 오른손은 컨테이너 건물을 가리켰다.

나란히 붙은 두 개의 가건물 중 하나는 창고였고, 나머지 하나는 감독과 코치들의 휴게실로 이용되는 공간이었다. 적어도 강희찬이 기억하는 선에서는 그랬다.

학부모나 그 시절의 감독이 피자라도 사 오면 가끔씩 안에서 먹었지만, 좁은 공간은 어린애 몇 명만 들어가도 금세 가득 찼다.

기억을 더듬으며 감독의 뒤를 따라 가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차 종류는 녹차나 커피 있고. 시원하게 음료수로 드릴까요?”

컨테이너 안으로 먼저 들어선 감독은 황급히 에어컨을 켰다. 위쪽 벽면에 달린 에어컨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델이었다.

골드스타라는 상호를 이 나이에 볼 줄이야. 신선한 충격에 강희찬은 잠시 입을 벌리며 놀랐다. 역시 백색 가전은 금성이다.

옛날 기계들의 기술력에 감탄하는 동안 감독은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기억엔 없는 물건이었다.

소파에 테이블, 미니 냉장고까지. 그래도 예전보다 구색은 갖추었다. 이렇게 바뀌면서도 왜 에어컨은 예전에 쓰던 골드스타가 그대로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생수 있으면 주세요.”

“생수는 없어서……. 이온음료 있는데, 그걸로 드릴까요?”

“주세요, 그거라도.”

좁아서 그런지 내부는 금세 찬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문제가 있다면 찬바람과 함께 미묘하게 거슬리는 냄새가 함께 퍼지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저 에어컨은 옛날에도 틀면 냄새가 났었다. 갑자기 목이 따끔거리는 것도 같다.

강희찬은 감독이 건넨 이온음료의 입구를 따서 그대로 입에 대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홍 감독의 입에선 왠지 모를 안도의 숨이 흘렀다.

“강희찬 선수가 오실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정 선생님이 누가 오신다고는 말씀을 안 해서…….”

천장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강희찬은 앉지도 않고 서 있기만 했다. 그것이 홍 감독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정이선 선생에겐 너무 고맙지만 동시에 원망도 샘솟는다.

이 정도의 상전이 올 거라고 누가 생각을 하냐고. 강희찬이 올 거라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든가.

똑똑―

제대로 된 대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단발성 화제를 꺼내기 바쁜 홍 감독을 노크 소리가 구했다. 네.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대답하자, 열린 문 사이로 낯선 얼굴이 빠끔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여기 있었구나. 안 보여서 어디 갔나 했어요.”

송재혁은 안이 꽤 시원한지 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어깨에 둘러메고 있는 짐가방을 보고 감독은 그가 구단에서 같이 보낸다던 촬영 담당임을 깨달았다.

남자는 핸드폰 케이스에 몇 장 담고 다니는 자신의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보는 사람의 입이 다 아파질 것 같은 미소를 만면에 걸친 채였다.

“우리 강희찬 선수 오늘 잘 좀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아이고, 저희야말로 부탁드려야죠. 시즌 중인데 여기까지 다 와주시고, 이거 참, 감사해서…….”

“강희찬 선수가 모교라서 꼭 한번 와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어떻게 기회가 됐네요.”

‘내가 언제?’

사납게 치뜬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희찬과 시선이 마주친 송재혁은 자유분방하게 놀리던 입을 헙, 다물었다.

‘그럼 오늘 오는 학교가 졸업한 곳인지도 몰랐다고 할 수는 없잖냐.’

차마 속마음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오늘은 고학년들이 한 교시 늦게 끝나는 날이라서요. 이제 10분쯤 있으면 애들 슬슬 올 겁니다.”

강희찬 선수 온 거 알면 애들 엄청 놀라겠는데요. 감독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강희찬은 컨테이너를 벗어났다.

자신을 제외하고 이어지는 화기애애한 대화도 영 간지럽고 위선적이었지만, 에어컨에서 나는 냄새가 가장 큰 이유였다. 폐병이 생길 것 같은 탁한 공기보다는 차라리 쪄 죽는 게 낫다.

금세 캔 겉면에 물방울만 잔뜩 맺히며 미적지근해진 이온음료를 입에 털어 넣고, 휴게실 옆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야구공이 든 노란 컨테이너 바구니나 티배팅용 폴대가 나름 정리된 채였다.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는 피칭머신이 있고. 머신 곳곳엔 낙서와 얼룩이 있었다.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깨달았다. 이것도 자신이 어릴 때 쓰던 머신이다.

용케 지금까지 쓰고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을 무렵, 탁탁거리는 잰 발소리가 귀를 스쳤다.

“감독님!”

“…….”

“…어?”

이미 자신의 남동생은 변성기가 온 지 꽤 되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굵어졌다.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이렇게 높을 수 있다니.

오래간만에 깨달은 강희찬은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저 아래에 있는 멍한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툭,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꽤 많이 남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은 비참히 바닥을 뒹굴었다.

“…강희찬.”

“너 몇 살이야?”

야구장에 오는 불특정한 다수에겐 곧잘 호칭 없이 이름만 듣곤 했지만, 이 경우는 또 색다르다.

땅바닥에 붙어 다니는 어린애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강희찬은 인상을 구겼다.

신장 차도 그렇고 배경도 어두침침해서 퍽 험악해 보일 텐데도, 아이는 그저 입을 열고 올려다보기만 한다. 사람을 저승사자처럼 보는 건 감독이나 그 밑에 있는 애나 똑같았다.

“저, 열 살이요!”

나이가 두 자리가 되었다는 게 자랑스럽다는 듯, 양 손바닥을 모두 좍 펴 보인다.

“근데 왜 반말해.”

“그럼 뭐라고 불러야 돼요? 이제 우리 감독님이에요?”

“…코치님이라고 해, 일단.”

비시즌에 갔던 어린이 야구 교실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강희찬은 말했다. 오늘도 일일코치 어쩌고 하는 자격일 테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이제 우리 코치님이에요? 코치님, 이제 야구 안 해요?”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하이 톤의 목소리에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다.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한 걸음씩 다가오는 아이를 피해 창고를 나섰다. 떨어진 아이스크림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아이는 그런 강희찬의 뒤를 졸졸 따랐다. 창고 밖엔 송재혁과 감독이 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자신을 찾으러 나온 게 분명했다.

강희찬이 동네 똥강아지를 대하듯 피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감독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남은 공부는 다 하고 왔어? 또 선생님한테 떼썼지? 가겠다고.”

“아닙니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달리 감독의 목소리는 제법 엄했고, 아이 역시 어설프지만 제대로 답한다.

이런 걸 보면 일단 야구부가 맞긴 했다. 공부를 따라가지 못한 탓에, 늦게까지 보충을 하다 왔다는 처참한 대화 내용까지 포함해서.

“오늘은 쉬운 거 했어요. 감독님, 강희찬 코치님 있어요! 앞으로 우리 코치님 해요?”

“아니야. 오늘만 오신 거야. 너희 선생님이 부탁하셔서 바쁘신데 특별히 오신 거니까, 말 잘 들어야 돼.”

감독은 험악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인내심이 제법이었다. 잇따른 질문에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대답해 주는 모습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코치님, 우리 선생님 친구예요?”

꼬마는 눈을 빛내며 강희찬을 올려다봤다.

“…어.”

하는 말로 봐선 땅꼬마는 그 선생의 반 학생인 듯했다. 얘 하나만으로도 피곤한데 이런 것들이 적어도 스무 명 넘게 한 교실에 있겠지.

강희찬의 생각을 읽지 못한 아이의 얼굴엔 슬슬 흥분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지만 일단 꿈은 아니라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신이 난 아이는 멋대로 입을 놀렸다.

“우리 선생님 엄청 어려요.”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아이의 말에 강희찬은 무심히 속으로 선생의 나이를 더듬었다.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카메라맨과 동갑이었지? 스물여덟이었나 아홉이었나. 조금 헷갈리긴 하지만 어쨌든 서른은 아직 안 된 거로 기억한다.

물론 남자인 걸 감안하면 사회인 중에선 어린 나이일 거다. 그렇지만 운동선수인 강희찬에게는 ‘어린가?’ 정도로 여겨지는 나이였고, 보통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렇게까지 어리게 느껴질 연령도 아니다.

대꾸가 없는 강희찬을 대신해 송재혁은 허리를 굽혔다. 그 역시 대화를 통해, 이 아이가 친구의 제자임을 깨닫고 흥미를 느낀 상태였다.

“선생님은 몇 살인데?”

미혼일 남자치고는 제법 아이들에게 살갑게 굴 줄 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운동부 소속이었던 강희찬에게는 듣기만 해도 토 나오는 말투였다.

“우리 선생님… 스무 살!”

아이는 잠시 속으로 숫자를 생각하더니 크게 답했다. 말도 안 되는 숫자를 듣고, 송재혁은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 선생님이 그랬어? 자기 스무 살이라고?”

“애들이요. 어린 어른은 스무 살이래요.”

“아저씨가 선생님이랑 동갑이야. 스무 살 친구.”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하는 송재혁의 말에 아이는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대놓고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아닌데. 아저씨 나이 많아 보이는데.”

“아저씨 몇 살 같은데?”

“30살?”

같은 나이인데 하나는 스무 살이고 하나는 서른이란다.

어린애의 가감 없는 대답을 듣자, 객관적으로 서른이 다 되어가는 송재혁은 꽤 억울해졌다. 너희 선생님도 이제 서른 살 될 아저씨거든? 감독만 없었다면 유치하게 따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서른이면 많이 어리게 봐준 거예요. 저는 백 살이에요.”

“아…….”

해맑은 대답에 상처받은 송재혁을 위로하듯 감독은 말을 걸었다.

역시 어린애들이 어른들의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쉽지 않겠지. 기분이 풀어진 송재혁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켰다. 아이의 앞에 쭈그리고 앉자 눈높이는 오히려 더 낮아졌다.

친구의 제자는 자신을 찍으려는 렌즈보다는, 송재혁이 들여다보고 있는 쪽을 궁금해했다. 손길을 능숙하게 피한 송재혁은 아이의 얼굴이 잘 나오도록 화면에 담았다. 역시 어린애들이란 어떻게 찍어도 화면이 잘 받는다.

“그럼 강희찬 코치님은 몇 살 같아?”

송재혁의 물음이 떨어지자 카메라를 향하던 아이의 관심은 뚝 멈췄다. 맞혀보겠다는 듯 옆으로 돌아간 고개는 목이 빠질 듯이 위로 향했다.

강희찬은 어린애를 위해 키를 낮추는 배려를 보일 인간은 아니었다. 한참을 올려다보며 ‘음…….’ 하고 고민했던 아이는 다시 말간 얼굴을 카메라를 향해 돌렸다. 이젠 자신을 찍는다는 데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30살?”

간결한 대답이 울리자 송재혁의 입에선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큼,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강희찬의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엔 시작도 하지 않은 봉사활동에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뭘 했다고 벌써 저러는지. 하지만 어차피 아이들이 모이면 상대해야 할 건 강희찬이었다. 그전까지는 자신이 최대한 놀아줘야지.

선수의 컨디션을 최우선으로 삼는 모범적인 프런트 직원의 마음이지 않은가. 송재혁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선생님은 스무 살인데, 코치님은 서른 살이야?”

“크잖아요.”

꼬마는 머리 위로 팔을 쭉 뻗었다.

일관되지 못한 기준으로 어른들의 나이를 가늠하던 아이는 이내 다시 강희찬의 곁으로 다가갔다.

살갑게 웃어주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아도 신기하고 가까이서 보고 싶은 인물이긴 한가 보다. 특히 야구 소년들에게는 꿈과 같은 존재일 테니까.

작년 드래프트로 뽑힌 투수들이 가장 워너비로 꼽은 이름이 바로 강희찬이었다. 부상 경력 없지, 신인상 받았지, MVP 수상했지. 거기에 올림픽 출전 경력까지 있었다. 연차를 5년까지 위로 잡아도 누적 스탯으로 강희찬을 이길 수 있는 현역 투수는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고등학생들도 대단하다 여기는데, 하물며 초등학생들에게는 오죽할까.

‘제발 성질머리만은 워너비로 삼지 말아다오.’

송재혁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무심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아이는 자신의 눈높이에 있는 강희찬의 손에 주목했다. 정확히는 팔목의 보호대를 보고 있었다.

사흘 굶은 개새끼가 고기를 쳐다보면 저런 눈이겠지. 문득 스친 강희찬의 생각을 알지 못할 아이는 입을 열었다.

“아대 주면 안 돼요?”

뜬금없고, 맥락까지 없는 소리였다.

작년 비시즌에 구단에서 주최한 어린이 야구교실에서 시달린 기억이 떠올랐다. 학년이 어리면 더 편하겠거니 싶어 저학년부를 선택했다가 큰 낭패를 봤다. 이런 헛소리를 하는 어린애들 대여섯 정도에 둘러싸여 반나절을 시달렸으니 말이다.

어린애들이 피곤한 건 비단 생각이란 걸 거치지 않고 바로 내뱉는 아무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지고 싶다.”

자신의 앞으로 불러서는, 버릇없이 굴면 안 된다는 감독의 엄한 주의 때문에 아이는 부쩍 기가 죽었다. 직접 달라는 말 대신 혼잣말을 하듯 ‘가지고 싶다’ 타령이 시작되었다.

강영찬도 저 정도 크기였을 때, 저딴 식으로 굴곤 했다. 어린애들이란 하나같이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면 주위에서 뭐든지 들어주는 줄 아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게 분명했다.

핏줄에게도 너그러운 어른은 되지 못했던 강희찬은 절대 원하는 바를 들어준 적이 없었다. ‘사고 싶다’든 ‘먹고 싶다’였든. 직접 ‘주세요’라고 요구하기 전까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강영찬은 어릴 적 자신의 눈치라도 보는 편이었지. 처음 보는 꼬마는 고장 난 오디오처럼 ‘가지고 싶다’는 말을 연신 주워섬기고 있었다.

대충 스무 번 정도까지가 인내심이 미치는 순간이었다.

“야. 와봐.”

높은 음색에 절로 피곤해진 귓가를 문지르며 강희찬은 뱉듯이 말했다.

본인의 명치께에도 닿지 않을 어린애에게 쓰기엔 꽤 껄렁한 말투였다. 쭈뼛거리며 강희찬의 앞에 다시 선 아이는 더 이상 ‘가지고 싶다’ 소리는 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희찬은 왼팔에 하고 있던 보호대를 풀었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내밀었다.

“너 이거 줄 테니까 5분만 입 다물고 있어.”

“와! 진짜 줄 거예요?”

…입 다물고 있으라니까.

자신이 제시한 조건은 듣지도 않는다. 아이는 보호대를 팔목에 차보면서도 연신 재잘거렸다. 다행이라면 그것을 자랑하겠다고 다시 감독의 앞으로 간다는 점이었다.

햇살과 닮은 쨍한 목소리에 피로감이 짙어졌다. 강희찬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앞으로 몇 시간을 더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지?’

눈앞이 깜깜했다. 이 정도면 등판해서 120구를 던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훨씬 낫다.

눈을 가린 채 서 있는 강희찬이 염려됐는지 송재혁은 아이로 향했던 카메라를 잠시 껐다. 누구의 손이든 맨살에 닿으면 기분이 나쁠 날씨였다. 송재혁은 스포츠 브랜드 티셔츠의 어깨선 부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안에 들어갈래요? 덥잖아요.”

“에어컨에서 냄새나요.”

피곤한 듯 얼굴을 양손으로 문지르는 통에 발음이 뭉개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충분히 전달된 뜻을 이해하고 송재혁은 ‘아’ 하며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하여간에 까탈스럽다. 투수는 다 그런다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유난스럽기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괜찮던데. 에어컨에서 다 그런 냄새 나잖아요.”

“…….”

마치 단체 합숙에서 음식에 까탈을 부리는 녀석을 보는 듯한 말투다. 송재혁의 대꾸에 강희찬은 얼굴을 문지르던 손을 떼고 그를 바라봤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여실했다.

문득 생각은 오늘 얻어타고 왔던 흰색 차에 이르렀다. 손톱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차 안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 것도 같았다.

“…차 에어컨 청소 언제 했어요?”

“모르겠는데. 전 주인이 팔 때 하지 않았을까요?”

의심은 높은 확률로 현실일 때가 많다. 정말 슬프게도.

“언제 샀는데요.”

“2년 좀 안 됐나?”

차는 본인이 샀을 텐데, 왜 그딴 걸 자신에게 묻는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강희찬은 갑자기 목이 따끔거리는 착각이 일었다. 갈 때는 반드시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시작하지도 않은 봉사활동 후의 귀가 방법에 대해 생각할 무렵이었다. 저편의 돌계단에선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를 하나씩 문 놈들 네댓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보호대를 뺏어간 땅꼬마보다 크기는 더 크다. 아마도 저 정도면 고학년일 거다.

강희찬의 걸음으로는 금방 내려왔던 계단이지만 아이들은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딱히 계단이 가파르거나 긴 탓은 아니었다.

“아…….”

가장 앞에서 내려오며 놈이 멍한 소리를 내며 음료수를 떨어트린 후, 나머지 놈들도 비슷한 반응을 연달아 보였다.

이미 한 번의 경험으로 녀석들의 걸음이 멈춘 이유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강희찬!”

그중 가장 덩치가 큰 녀석 하나는 저를 향해 소리쳤다. 건방지고 무례한 삿대질과 함께였다.

감독이 버릇없는 행동을 주의 주기도 전에, 강희찬의 입에선 오늘 여러 번 흘러나온 한숨이 다시 흘러나왔다.

땅값이 비싼 동네라 그런지 전반적으로 학교가 싸가지가 없다. 이런 동네에서 자라서는 멀쩡한 어른이 될 리가 없다.

“감독님, 강희찬 왜 있어요?”

…얼른 집에 가고 싶다.

마음의 소리가 문득 입으로 나왔는지도 모른다.

* * *

‘커피 좀 갖다 주면서… 사인 좀 받아주면 안 될까?’

고대영의 부탁을 받은 이선은 한숨을 푹 쉬며 들고 있는 쟁반에 집중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동안 교감 선생님과 마주쳤다. 강희찬을 데려왔느냐는 질문도 함께였다. 이 학교에 야구를 보는 사람이 많은 건지, 강희찬이 유명한 선수인 건지. 이선은 문득 궁금해졌다.

경기도 많이 나가는 선수가 아닌데 왜 유명할까? 본인의 성격이 십분 활용하지 못하는 얼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름의 결론을 내리며 야구장에 도착했을 땐 얼음은 거의 반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 더위에도 야구부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둘씩 짝지어서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을 유니폼 차림의 감독이 지켜본다. 그 옆에 서 있는, 검은 옷을 걸치고 있는 커다란 뒷모습이 낯익었다.

이선은 마지막 장애물을 넘는 심경으로 조심히 돌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지금 걷는 게 아니라 미끄러지며 앞으로 가는 거다. 속으로 되뇌며 조용히 걷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허사였다.

“어?! 체육 쌤이다!”

자신을 알아본 6학년 녀석 하나가 알은척했다. 그 바람에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쏠렸다.

“커피 드세요.”

들고 있는 커피 때문인지 주목을 받는 탓인지 팔이 후들거렸다. 어색하게 올리는 입꼬리도 함께 바들거리는 것만 같다.

“세상에, 정 선생 이걸 다 타왔어? 잘 마실게.”

감독은 반색하더니 커피 두 개를 집어 들고 하나를 자연스레 강희찬에게 건넸다. 감독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앳된 얼굴은 커피를 받아 들고 빨대를 입에 가져다 댔다. 누군가가 곁에서 챙겨주고 대접을 해주는 것에 조금의 어색함도, 거부감도 보이지 않을 자연스러움이다.

과연 이런 인스턴트 커피를 마실까? 왠지 입도 대지 않게 생겼는데.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강희찬이 마시는 믹스커피는 사라졌다. 괜히 고민한 시간만 아까워졌지만, 남는 커피는 자신이 마시면 된다.

“우리 거는요? 우리도 주세요!”

스트레칭을 하던 아이 몇이 더위에 지쳤는지 이선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감독의 ‘시끄럽다’ 한마디에 금세 조용해졌지만.

그럼에도 애처로운 시선들은 여전히 자신을 향했다. 마주하기가 마음 아파서 이선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엔 더한 게 있었다.

카메라를 든 채, 땀을 줄줄 흘리며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는 송재혁이었다. 이선은 얼른 걸음을 옮겼다.

“커피 뭐로 줘?”

“설탕, 설탕 들어간 거.”

설탕을 향한 갈급함이 흡사 급식에 요구르트가 나온 날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커피를 내민 이선은 이내 송재혁의 양손이 카메라와 장비로 인해 묶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 더위에 이 고생을 하는데…….

서비스를 해주자는 생각으로 이선은 커피를 그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송재혁은 거부감도 없이 빨대로 쭉쭉 빨아 마신다. 마치 사지를 못 가누는 환자의 간병을 간접 체험하는 느낌이다.

…이렇게 더워하는 줄 알았으면 좀 일찍 나와보는 건데. 고대영의 말이 아니었다면 아마 자신은 나와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이런 면에서 이선은 종종 자신의 무신경함을 통감하곤 했다.

송재혁은 머리가 아프지도 않은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켠 후, ‘으어’라며, 아저씨 같은 추임새를 뱉었다.

“단 거 들어가니까 좀 살겠다, 야.”

“너 오늘 쉬는 날이잖아. 나 때문에 괜히 고생하는 거 아니야?”

“나중에 휴가 하루 더 빼준대. 걱정 마라. 야, 근데 선수들도 이 날씨엔 훈련 줄이는데 애들 엄청나네.”

송재혁은 스트레칭을 마치고 장비를 꺼내고 있는 아이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폭염 주의보니 경보니 문자가 오는 날씨 속에서 매일같이 훈련했을 얼굴들은 하나같이 새카맣다. 그러는 중에도 감독이나, 곁의 선수는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이선이 유난스럽게 생각하는 고생을 어릴 적의 저 사람들도 겪어봤을 것이다.

짐을 나른 아이들 몇은 이내 강희찬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누군가 매직 하나를 건네고는, 유니폼에 사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등판이며 글러브를 들이대기 시작한다. 감독이 제법 엄한 소리를 내고 있지만, 난리통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보기만 해도 더운 광경보다 더 놀라운 건, 송재혁까지 카메라를 들고 그 무리 가까이 향한다는 점이었다.

커피와 쟁반을 덩그러니 들고 서 있기도 애매해진 탓에 이선은 걸음을 뗐다. 질서 없이 달려드는 아이들 틈바구니에 있던 선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씨발. 좆같네.’

읽어낸 입 모양에 이선은 순간 멈칫했다.

아마 목소리로 내지는 않았을 거다. 그랬다면 애들도 저 난리를 멈추었을 테니까. 뭐가 됐든, 남자 나름대로는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 집에 있는 글러브에 사인받아야 하는데…….”

“감독님, 왜 어제 말 안 해줬어요!”

“얼음, 남은 거 주세요!”

요구 조건은 다양했다. 유니폼 등판에 사인을 받은 녀석들은 양반이었다. 몇몇은 사인을 받을 개인 물품을 챙기지 못한 게 아쉬웠는지 감독에게 투정을 부렸고, 사인에 큰 관심이 없는 특이한 부류 몇은 강희찬이 남긴 얼음에 달라붙었다.

강희찬은 귀찮았는지 컵을 통째로 넘기고 파리라도 쫓아내듯 손짓한다. 휘휘. 저리 가.

“야, 나도!”

“다 먹지 말라고!”

더운 날씨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먹다 남은 얼음에 홀린 아이들은 썰물처럼 강희찬의 곁에서 멀어졌다.

어린애들의 집중력이란 딱 저 정도지. 적어도 쌍욕을 실시간으로 듣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라고 이선은 가슴을 쓸었다.

솔직히, 강희찬보다 감독의 표정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송재혁이 들고 있는 카메라만 아니었다면 당장 ‘뻗쳐’ 소리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정신없이 뛰어대는 아이들의 머릿수를 셌다. 나중에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올 요량이었다.

얼음은 이미 다 없어졌을 컵에 붙어 있는 아이들을 힘겹게 세고, 남은 사람은 없나 야구장을 둘러봤다. 세지 못한 마지막 한 명은 강희찬과 감독 앞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희찬과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감독 앞에 있었다.

“너 코치님이 이것도 주셨는데 떼쓰면 되냐?”

“…아닙니다.”

익숙한 목소리는 산이의 것이었다.

이선은 가슴이 철렁했다. 애들이야 어디서든 혼나는 게 일상이라지만, 그래도 담임 반 학생이라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 다른 아이들처럼 사인을 해달라 투정을 부린 듯했다. 하지만 그 요구가 조금 과했을 거다. 평소 교실 생활을 할 때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기분 나쁜 티를 잔뜩 내곤 했으니까.

‘외동이라 그런가…….’

가족관계가 특이한 편인 이선은 이런 종류의 편견을 어릴 적부터 좋아하진 않았지만, 역시 어떤 부분에선 티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담임교사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는 송재혁은 뭐가 웃긴지 실실대며 아이와 감독을 찍는다. 더욱 놀라운 건 저 난리에도 감독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강희찬이었다.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어서는, 질렸다는 얼굴로 멀리 있는 아이들 무리를 보고 있었다.

‘…대단한 신경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선은 걸음을 옮겼다.

너무 심하게 떼를 쓰면 주의를 줘야 할까? 아니면 담임은 자리를 비워주는 게 감독이 훈육하기에는 나으려나.

복잡한 심경으로 송재혁의 뒤에 섰을 때, 심드렁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위아래로 자신을 훑는 눈이 별 의도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신경이 쓰인다. 자신이 남자였기에 망정이지. 사실 오해받기 딱 좋은 습관이었다.

“…….”

사람을 스캔이라도 하듯 아래위로 지나치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멎었다. 뭐지,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 입은 열렸다.

“그거 뭐예요?”

말을 들은 순간 무심한 시선이 어디에 멈췄는지 깨달았다. 왼손에 있는 커피 아니면 오른손에 있는 쟁반. 눈높이는 딱 그쯤이었다. 설마 쟁반이 뭔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거다.

“아, 이건 설탕 안 들어간 거요.”

“…….”

“괜찮으시면, 드실래요?”

팔을 내밀기가 무섭게 그는 커피를 낚아챘다. 허해진 한쪽 손에 남은 건 커피의 냉기뿐이다.

이선은 물방울이 맺힌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몇 걸음 떨어진 송재혁의 곁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아가며 말이나마 하는 ‘고맙다’는 소리가 없는 것에 놀라진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나왔다면 더 놀랐을 거다.

그저, 매섭게 낚아채 간 커피를 쭉쭉 빨아 마시는 속도에 이선은 놀랐다. 다섯 번쯤 목울대가 움직이더니 이내 컵엔 얼음만 남는다.

‘저렇게 찬 걸 한 번에 마시면 머리 안 아플까?’

물음은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역시 머리가 아팠는지 강희찬은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으으’ 하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게 왜 급하게 마셔서는…….

생긴 게 이온음료 모델을 할 것처럼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이라 땀 한 방울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표정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역시 덥긴 했나 보다. 강희찬의 턱 아래로 뚝 떨어지는 땀방울 하나가 지금까지의 더위와 그의 고생을 대변하고 있었다.

거칠게 턱을 훔쳐낸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이선은 움칫했다.

“…….”

…냉커피가 차가운 건 내 탓이 아니다. 얼음이 가득 들어간 걸 눈으로 봤으면서 무식하게 한 번에 마신 사람이 잘못이지.

화풀이를 당하는 건 억울하다. 게다가 사람 머릿수대로 있던 커피를 한 잔 더 마신 건 본인이면서…….

저런 표정이나 짓고 다니라고 부모님이 저 얼굴로 낳은 건 아닐 텐데. 냉한 표정은, 강희찬의 유전자에는 먼지 한 톨만큼도 기여하지 못한 자신이 더 아까워질 정도였다.

입으로 뱉지 못할 억울함을 삼키는 동안 이선은 깨달았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아니었다. 그의 싸한 시선을 오롯이 받는 건 이선의 앞에 있던 송재혁이었다.

까딱.

도무지 연장자를 부르는 태도라고는 할 수 없는 손짓이었다. 하지만 송재혁은 속도 없이 ‘네?’ 하며 걸음을 옮긴다. 이선 역시 자연스레 뒤를 따랐다.

“공 있어요?”

아직도 골이 띵한지 왼쪽 관자놀이를 짚고 있다.

“네. 트렁크에 있어요.”

송재혁의 대답에, 두통 탓인지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왜 있어요?”

자기가 먼저 물어봐 놓고 왜 있냐고 하는, 남자의 대화 방식은 특이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당황한 이선에 비해 송재혁은 태연했다. 여전히 카메라를 든 채 답했다.

“팀장님이 챙겨가라고 하셨거든요. 기념으로 애들한테 하나씩 주자고.”

잠시 송재혁, 혹은 그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지그시 보던 눈은 이제 작은 몸을 향했다.

“…야, 너.”

동네 똥강아지를 불러도 저것보단 다정할 거다.

일반 운동화와는 달라 보이는 신발은 아이가 흙바닥에 발을 질질 끌자 특이한 소음을 냈다.

“네, 코치님.”

교실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운동부다운 딱딱한 말투가 이선에게는 낯설었다.

“이따 공 들고 와. 해줄 테니까.”

“…….”

“왜. 뭐가 불만이야.”

“…아닙니다.”

“짜지 말고 똑바로 말을 해.”

어느새 열중쉬어 자세를 취한 아이의 모습에도 목소리는 여전히 고압적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다른 고학년들은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정도야 늘 있는 일이라는 태도다. 운동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남의 일엔 관심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거친 말을 서러워하는지,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 상황으로 서러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선에게 보이는 건 들썩이는 작은 어깨였다.

“집에… 아빠가, 사준 글러브……. 거기에…….”

하. 묵직한 한숨 같으면서도 비웃음 같기도 한 탄식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강희찬은 앞머리를 헝클었지만, 결이 좋아서 금세 제자리를 찾는다.

“야구장 와서 받아.”

“…코치님 사인, 안 해주잖아요.”

“해줄 테니까 주차장으로 와. 출근할 때.”

“진짜요?”

“그만 물어보고, 그쳐라.”

머리 울린다. 눈을 감으며 내뱉는 말은 더운 공기에 섞여들었다.

“약속해 주세요.”

“해준다고.”

“종이에 적어주세요.”

“…….”

강희찬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선이 남자를 본 건 오늘로써 세 번째였다. 많이 봤다고 하긴 힘들 거다. 하지만 적은 만남의 빈도 속에서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남자는 절대 표정이 많은 축이 아니다.

표정이란 게 생기는 몇 안 되는 순간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기가 막히거나, 이 셋 중 하나였다. 지금은 세 번째였다.

혀로 볼 안쪽을 밀어내느라 불룩했던 남자의 오른뺨이 꺼졌다.

욕할 거다, 분명. 아까는 음소거로―하지만 정확한 입 모양으로― 중얼댄 ‘씨발’ 소리에 이제 음성이 덮일 거다.

이선은 재빨리 걸음을 옮겨 아이의 뒤에 섰다. 여차하면 입을 막을 생각으로 부드러운 뺨에 오른손을 두었다.

“난 계약서 함부로 안 써. 내 계약서 받고 싶으면 에이전트한테 말해.”

“어떻게 얘기하면 돼요?”

어떻게 봐도 이제 강희찬의 얼굴엔 귀찮음을 넘어, 기가 막힘뿐이다. 이선은 황급히 작은 몸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산아.”

닿지 않는 팔 대신 먼저 나간 건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보통의 3학년보다 작은 아이와 한국인 평균 키를 웃도는 남자의 시선이 이선을 향했다. 당연히 눈높이가 비슷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남자의 멀건 시선이 몇 초가 지나도 떨어지지 않는다. 왜 쳐다보는 거지?

물음에 대한 답 하나를 금방 가정할 수 있었다. ‘강희찬.’ 생김과 어울리는 남자의 이름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아……!”

이선은 재빨리 아이를 끌어당겼다. 오해를 하는 남자의 시야에 들어가도록 아이의 얼굴을 양손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산이요. 박산. 얘 이름.”

변명처럼 붙은 이선의 말에 남자의 시선은 그제야 거둬졌다.

선이. 이선은 외자 이름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꽤 외자 이름처럼 불렸다.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아직도 어머니는 그렇게 부르곤 했다.

이제 슬슬 그만 놀고 훈련을 시작하자는 감독의 말에 아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얼음이 동나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감독과 더불어 남자 역시 집합한 아이들 앞에 섰다. 정식으로 소개를 하고 훈련을 시작하기 위함이었다.

“…….”

이선은 아이를 부르려던 자신의 말을 듣고 반응하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냉한 얼굴만 짓는 사람도 집에선, 혹은 친밀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불리나 보다. 이선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리쬐는 햇살을 막는 것뿐이라고. 이선은 괜히 번지는 미소를 손바닥 안으로 더욱 밀어 넣었다.

* * *

준비 스트레칭을 마친 아이들의 기본 훈련 메뉴를 보다, 어느 순간부터 투구 폼을 체크해 주기 시작했다.

야구를 하는 대부분의 어린애들은 투수를 지망한다. ‘전부’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정도로 그 비율은 절대적이다. 포지션을 돌아가면서 맡더라도, 누구나 선호하는 순간은 투수로 설 때였다.

“어깨에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잖아.”

“더 빨리 던지고 싶은데…….”

“더 먹어. 몸 커지면 공에 힘이 붙으니까.”

아무래도 정식 시합에선 투수로 뛸 일이 더 많은 고학년의 폼을 봐주게 된다. 형들이 코칭받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던 저학년들은 그 후에야 기회를 얻었다. 그조차도 사실 강희찬의 눈치를 살피던 감독이 생략하려 했지만, 찡찡거리기 시작하는 모습에 결국 먼저 자진 납세를 했다. 변성기도 오지 않은 애새끼들이 징징거리는 소리는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코칭이 반이고, 시답잖은 소리가 나머지 반이었다. 그가 달갑든, 달갑지 않든 피칭교실도 얼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코치님. 저희 폼 좀 봐주세요.”

“아까 다 봐줬잖아.”

“말고요. 치는 거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고등학교 때까지는 치셨잖아요.”

아무래도 애새끼들은 오늘 하루용 일손의 뽕을 뽑으려는 게 분명했다.

강희찬이 땅꼬마―산, 이라고 했던가―와 있는 동안 송재혁은 감독과 함께였다. 기자들을 상대하는 특유의 넉살이 장착된 홍보팀 직원은 어색함도 없이 감독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곳의 코치는 얼마 전 독립구단에 입단 테스트를 받고 들어갔단다. 현재, 이 학교 야구부의 가장 큰 특징은 시설도, 우승 경력도 아니었다. 서른 명이 좀 되지 않는 아이들을 감독 혼자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니까 코치가 관두는 거다.’

차마 입으로 뱉을 수 없는 소리 대신, 강희찬은 잠깐의 텀을 두고 말을 골랐다.

“삼진왕이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 경기권에서 3년 내내 삼진왕 타이틀을 놓쳐 본 적 없었다고 해야겠지만.

시큰둥한 답에 아이들은 잠시 주춤했다. ‘싫다’ 혹은 ‘귀찮다’는 말보다도 효과적이었다고 강희찬은 생각했다. 아무리 프로선수라도 삼진왕한테 타격을 배우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서울, 경기권의 삼진왕 타이틀 효과는 금세 사라졌다.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은 송재혁의 중재 때문이었다. 애새끼들과 더불어, 오늘 하루 자신의 본전을 뽑아 먹으려는 감독은 덤이었다.

“아까처럼 다는 말고, 한 명만 앞에 나와서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요? 다른 애들은 앉아서 설명 들으면 되고.”

“아, 그러면 되겠네요.”

되긴 뭐가 되냐. 저의 속내와는 별개로 두 사람의 대화는 멋대로 흘러갔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아이들은 모래밭에 엉덩이를 붙인 채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감독이 건넨, 자신의 신장엔 전혀 맞지 않는 유소년용 알루미늄 배트를 손에 쥐었다. 결국,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아이들 너머 저 뒤에서 송재혁은 연신 빙글거렸다. 송재혁의 곁엔 아직도 그의 친구가 함께였다. 선생이란 건 애새끼들 수업이 끝나면 많이도 한가로운 직업인가 보다.

“왜? ‘왕’ 자 들어가면 좋은 거 아니야? 홈런왕 비슷하게…….”

선생의 멍청한 소리가 얼핏 귀를 스쳤다.

황당하다는 제 친구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선생은 이내 눈치를 보며 입을 감쳐물었다. 한물간 개그 프로에서 노인 흉내를 내는 개그맨들이나 하는 짓인 줄 알았는데……. 입술을 감춘 채 악물고 있는 얼굴이 제법 우습지 않고 어울렸다.

홈런왕과 삼진왕이 비슷한 거라니……. 뭐, 클린업과 삼진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어쩌면 맞는 말이기도 했다.

강희찬은 잠깐 올라왔던 한쪽 입꼬리를 다시 내렸다.

“아무나 한 명 앞으로 나와봐.”

올려다보는 어린애들로 시선을 돌렸을 땐, 이미 건조한 말투와 어울리는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채였다.

일대일 타격 코칭의 기회를 얻은 건, 손을 들고 얌전히 지목받기를 기다린 놈들이 아닌,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희찬의 곁으로 달려나간 5학년 녀석이었다.

아직은 사춘기, 혹은 건방진 물이 덜 들어서 얌전히 손을 들었던 3, 4학년들은 입을 벌린 채 놀라기만 했다. 교실에선 분명히 손을 들고 선생님의 지목을 기다려야 했는데……. 성실한 학교생활이 실전 사회생활인 운동부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걸 배운 순간은 뼈아팠다.

“너 한번 공 온다고 생각하고 스윙해 봐.”

녀석을 향해 알루미늄 배트를 건넸다. 키와 배트의 길이가 잘 맞는 아이는 익숙한 손짓으로 배트의 적당한 부분을 말아 쥐었다. 시합에 제법 출전해 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야무진 폼에 감격한 건 아니었다. 녀석은 오른손으로 배트의 아랫부분을 쥐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강희찬은 머릿속에 든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너… 우타냐?”

“네.”

타격 폼을 잡느라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고 녀석이 답했다. 명료한 말에 잠시 기가 막혔다.

우타 새끼가 왜 기어 나왔냐고 쫓아낼까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고등학교 때 좌타에 섰는지, 우타석에 섰을지 녀석들이 알 리가 만무하다. 포털이나 스탯 사이트에는 표기가 되는지도 모르겠으나, 어차피 이 나이 애들이 남에게 관심을 가질 리도 없다.

“…….”

다시 폼을 잡고 스윙을 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두어 번 스윙을 하고는, 녀석은 더 해야 하는지 눈치를 본다. 강희찬은 배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볍고, 짧은 배트가 다시 그의 손으로 넘어왔다.

“너, 다리는 원래 들고 쳐?”

“아니요. 요새 좀 들고 해보고 있어요.”

이건 좀 편하네. 강희찬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 강희찬은 방망이를 쥐고 타격 폼을 취했다.

시합에서 제대로 타석에 들어서고 타격 훈련을 한 건 중3, 길게 잡아봐야 고1 초반까지다. 어쩌면 이 꼬맹이보다 폼은 더 후질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누가 누굴 가르치는지. 쓴웃음을 애써 누르고 입을 열었다.

“일단, 고개는 더 돌려서 완전히 투수를 봐야 돼.”

야매 강의를 하던 희찬의 시야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송재혁이 옆에 있던 제 친구에게 카메라를 넘기고 있었다.

평소 야구장에서와는 달리 오늘은 기동성을 고려했는지, 6㎜ 캠코더를 챙겨왔다. 성인 남자의 손엔 부담스러울 크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익숙지 않은 기계인지, 선생은 양손으로 조심스레 쥐었다.

“이 상태로 잘 나오게 들고만 있어. 금방 다녀올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향해 조용히 전하는 송재혁의 말소리는 그보다 앞에서 웅성대는 어린애들의 목소리보다 더욱 뚜렷했다.

“그냥 내가 다녀올게. 키 줘.”

불안하게 카메라를 쥔 사람의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는 더욱 잘 들렸고.

“좀 찾아야 해. 애들 생각보다 많다, 야.”

강희찬의 손에 있는 야구 배트만큼이나 선생이 쥔 카메라는 어색했다. 어설프게, 혹은 불안정하게 쌓인 짐덩이를 보는 것만 같다.

덕분에 눈이 떨어지지 못했다. 송재혁이 뜀박질에 가까운 잰걸음으로 야구장을 빠져나간 후에는 강희찬의 시선이 머무는 빈도와 시간은 더욱 늘었다.

사인을 하겠다는 각서를 받아내겠다며 에이전트를 찾던 땅꼬마도 아니었다. 그보다 배는 나이가 많을 담임 선생이다. 그런데도 카메라를 쥐고 있는 사람에게 자꾸 눈이 갔다.

그건 아마도…….

“…….”

아마도 제가 담임을 하고 있을 그 반의 꼬맹이들보다 더 무를 거다. 건방진 땅꼬마는 구두 약속보다는 서면 계약서를 받아내려는 똘똘함이라도 갖췄다. 애인인지 뭔지도 모를 놈팡이에게 카드나 주고 다니는 제 선생과는 달리.

“…코치님?”

잠깐 말이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향하자, 의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고구마 같은 얼굴 하나가 있다. 바닥에 앉아 있는 녀석들과 비슷한 낯빛이다.

땅에서 갓 캔 고구마들이 자신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묻는 강희찬에게 일어서 있는 고구마는 재빨리 이야기가 끊긴 부분을 알렸다.

“투수를 정면으로 안 보면 갑자기 시야 밖에서 공이 튀어온다고. 우투수가 너한테 몸쪽 붙여서 던진다고 생각해 봐.”

붉고 검은 얼굴에서 유일하게 번쩍이는 게 눈이었다. 그 눈이 잠시 위로 향했다가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타이밍 보면서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둘지 뒤에 둘지 생각해야지. 난 보통 최대한 앞에서 쳤어.”

“그러면 잘 맞아요?”

“뒤에서 치면 이미 변화구는 휠 대로 다 휘어서 더 못 쳤어. 너도 쳐보면서 타이밍을 봐야 돼. 파울 타구 날아가는 거 보면 알잖아.”

운동부는 대체로 빡대가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머리를 쓰지 않고 사는 건 아니다. 그냥 치지만 말고, 공 날아가는 걸 보면서 생각을 해야지. 어린 시절부터 지겹도록 들은 말이다. 아마 이놈들도 감독에게 매일같이 듣고 살 거고.

“근데 공 보면 항상 스트라이크가 잡혀요.”

“공을 왜 타석에서 봐? 타석에선 쳐야 할 거 아냐. 공은 더그아웃이랑 대기 타석에서 미리 보고 들어와야지.”

미간을 찌푸린 강희찬의 얼굴에 아이의 기가 팍 죽었다.

“공격이든 수비든, 무조건 투수를 보고 있어야지. 1번으로 첫 타석에 들어간 게 아닌 이상 무조건 공 하나는 보고 들어가는 거잖아. 1번에 첫 타석이라도 연습 타구라도 봐야 하고.”

“…….”

“투수도 공 하나 허투루 안 던지지만, 치는 놈도 똑같은 거야. 공 던지는 거 하나 그냥 흘리면 바로 진다고.”

“네.”

“…너 타석에서 공 보고 있으면 투수가 비웃는다.”

검은 모자챙 아래로 올라가던 한쪽 입매. 잊히지도 않고,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은 끈질겼다.

“…진짜요?”

“싸가지 없는 새낀 그러지 않겠냐.”

조금 누그러진 강희찬의 기색을 느꼈는지 녀석은 금세 얼굴에 장난기가 피었다. 애초에 지목도 없이 뻔뻔하게 앞으로 나온 놈이었다. 기가 죽어봤자지. 강희찬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럼 형도 웃어요?”

“이우진.”

감독의 엄한 목소리에 녀석은 장난기를 지웠다. “죄송합니다” 소리는 자동이었다.

섀도우 피칭도 아니고, 실전 경기에서 투수는 거울을 보면서 던지는 게 아니었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자신이 웃는지 마는지는 강희찬이 알 리 만무하다.

우습다는 생각은 몇 번 정도 한 적 있었지만……. 그래도 대놓고 비웃진 않았겠지. 적어도 자신이 서 있던 마운드에선 대기 타석에서 굳이 물이나 처마시던 포세이돈을 본 적은 없었다.

티볼 막대만 두고 스윙을 해보라며, 강희찬은 배트를 건넸다. 이 더위에서 더 탄 것 같은 작고 까만 손이 그것을 쥐었다.

“이선 쌤!”

초등학교 야구장과 어울리지 않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그때였다. 강희찬은 스윙을 하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엔 검은 막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파라솔처럼 큰 검은 골프우산. 우산이 그늘을 만드는 범위 안에는 여자 두 명이 있다. 전형적인 중년의 옷차림 하나와 나머지 하나는……. 눈에 확 들어오는 푸른색 치마를 입은 채였다. 아마 목소리의 주인은 젊은 쪽이겠지.

‘저 지랄을 할 거면 차라리 밖에 기어 나오지를 말아야지.’

강희찬은 이제 두 시간째 밖에 서 있었다. 떨어질 줄 모르고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과 비례하여 삐딱한 생각이 샘솟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선생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탓에 조심스럽게 고개만 꺾었다. 손을 흔드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태어나서 시력이 1.2 밑으로는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강희찬은 확실히 봤다. 그 숫기 없고 맹맹한 반응에도 젊은 여선생의 얼굴엔 미소가 확 번지는 것을.

우산을 쥐지 않은 팔이 방금 전보다 더 붕붕거리며 흔들린다. 이쯤이면 학교보다는 소개팅에 더 어울릴 차림이 누굴 의식한 건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여자가 관심이 있네.’

생각이 완성된 순간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자한테 관심도 없을 사람을 혼자 좋아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연민은 아니다. 오히려 우습기만 하다. 게다가 옆에 있는 중년 여자는 아마 호시탐탐 두 사람을 이어주려 하겠지. 접붙이기라도 하듯 주변을 이으려는 건 나이 먹은 사람들의 특징인 게 분명했다.

그늘도 없는 땡볕에 있느라 올라온 짜증이 한풀 꺾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야구장에 선선한 미풍이 이는 것도 같았다.

앞에서 스윙하는 고구마의 폼은 처음보단 한결 나아졌다. 괜찮냐는 꼬마의 물음에 고개를 몇 번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신이 났는지 방망이를 힘껏 휘두른다.

조금 더 봐주다가, 그마저도 금세 질렸다.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두었을 때, 저 뒤에 있는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구경을 나온 동료들과의 인사는 마치고, 카메라를 양손으로 꾹 쥐고 있다. 미동도 없는 그 모습은 흡사 얼굴이 달린 삼각대였다.

그리고 카메라 화면에서 잠시 뗀 눈과 시선이 얽혔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움칫거리는 어깨를 보면 맞는 것도 같다.

무언가 잘못을 들킨 어린애처럼, 카메라의 버튼 하나를 꾹꾹 누른다. 그러고는 쭈뼛대며 눈을 피했다. 가만히 하는 양을 지켜보던 강희찬은 불쾌해졌다.

…사람의 기분 좋은 얼굴을 보고 저따위 반응이다.

하여간에 땅값만 비싸지 동네 터가 영 안 좋다, 예전부터. 애새끼나 감독이나 선생이나. 사람 알기를 귀신처럼 한다.

* * *

손을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은 여러모로 낯설었다. 키가 작은 아이들에게 맞춰져 있는 세면대 높이나 널브러진 어린이용 치약.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화장실 냄새에 강희찬은 눈을 찌푸리고 물을 틀었다.

‘애새끼들이 오줌을 춤추면서 싸기라도 하나.’

거울 아래에 있는 물비누 통은 장식인 양 텅 비었다. 결국 물로만 손을 씻고, 옷에 대충 물기를 닦아내며 학교 본관 건물을 나섰다.

5시가 훌쩍 넘었지만, 여름이라 어두워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아이들과 함께 식당으로 먼저 출발했다. 학교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듯했다. 같이 가자는 말에 울상을 지으며 송재혁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내젓던 선생은 결국 교무실에 있을 제 짐을 가지러 본관 건물로 향했다.

전에 보쌈집에서도 먹는 둥 마는 둥 풀이나 씹어대던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 선생의 식사량은 고학년 운동부의 그것보다 한참 미치지 못할 거다.

혀를 끌끌 차며 교내의 외부인 주차장을 향해 걷던 강희찬은 농구부 무리와 마주쳤다. 그렇게 잠시 농구공 몇 개에 사인을 했더니 손이 다시 더러워졌다. 직원의 차에 물티슈라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없을 확률이 더 높다. 한숨을 쉬며 작은 화단이 꾸며져 있는 건물 모퉁이를 돌았다.

외부인용 주차장에 세워진 유일한 흰색 차 앞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이 방향에서 보이는 건 송재혁의 얼굴뿐이다. 강희찬은 걸음을 늦췄다.

“난 그냥 집에 가서 라면 먹을래.”

“공짠데 좀 가서 먹어라. 오늘 점심 맛있는 거 나왔냐?”

“산채비빔밥.”

“어으, 풀떼기. 야, 고기 먹어, 고기.”

송재혁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풀떼기만 들어간 메뉴가 어지간히 끔찍한 모양이었다.

강희찬은 새삼 동갑이라는 두 사람의 전체적인 체형을 살폈다. 매일같이 눈에 보이는 체격들이 있어서, 둘 다 마르게 보이는 축이었지만, 아마 보통 체격일 거다. 둘 다 기성복 정도는 사이즈 고민 없이 사 입을 수 있겠지.

그래도 뒷모습만 보이는 쪽이 조금 더 가는 느낌은 든다. 저건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도 마른 축인가?

“…….”

보쌈집에서도 그랬지. 쓸데없이 채소만 먹거나, 먹는 도중에도 가끔 어딘가를 멍하니 보거나. 국수 위에 올라간 오이만 골라 먹기도 했다. 꼴을 보고 정신없이 먹던 송재혁이 종종 고기를 앞접시에 가져다줄 정도였다. 평소의 식습관은 알 만했다.

“난 야구부 담당도 아닌데 왜 회식에 껴.”

“가서 고기 구우셔야죠, 정 선생님. 애들끼리 어떻게 먹으라고.”

“아…….”

낮은 탄식과 함께 어깨가 추욱 내려간다. 고개를 숙이자, 순간 흰 목덜미가 길게 드러났다. 강희찬은 그 광경을 집요하게 눈에 담았다.

대답이 없어도 포기의 의사임을 알 수 있다. 지극히 선생다운 수긍의 이유다. 속으로 웃는 동안, 숙어졌던 뒷머리가 다시 동그랗게 올라왔다.

“너는? 너도 가지?”

“난 강희찬 데려다주고, 사진만 잠깐 찍은 다음에 사무실 가야 돼. 편집하러.”

“…내일 해. 오늘 쉬는 날이라며.”

“오늘 밤에라도 올려놔야 내일 아침에 기자들이 보고 기사 쓰지. 휴일 다음 날이라 기삿거리도 없을 텐데 바로 쓰지 않겠냐?”

결국 낮은 실소가 터졌다. 굳이 쉬는 날에 카메라까지 들고 남의 개인 스케줄에 나타난 이유였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기가 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나마 밥 먹는 모습까지 찍겠다고 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가만히 이야기를 엿듣던 강희찬은 신발 끄는 소리를 부러 크게 냈다. 동그란 뒷머리만 보여주던 사람의 얼굴을 다시 본 것도 그와 동시였다.

“왔어요? 출발할까요? 정 선생도 같이 타고 가.”

“아니, 오늘 차 있어. 따로 갈게.”

“어딘지는 알고?”

“응. 우리도 거기서 회식한 적 있어.”

눈이 마주쳤다. 뒷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다고 해도, 막상 까만 눈과 시선이 맞은 순간 강희찬은 당황했다. 좋아하는 선생님을 훔쳐보다 들킨 애송이처럼.

멍청히 있는 사이, 이선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강희찬은 저도 모르게 똑같이 따라 했다. 의식을 거치지 않은 행동이었다. 자신의 행동을 자각했을 때, 이미 곧은 걸음은 학교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교직원들은 옆에 공영 주차장에 세운대요.”

송재혁의 목소리가 멍했던 정신을 깨웠다.

“…네.”

“타세요. 아, 손 왜 그래요? 씻고 온다더니.”

말을 듣자 잊고 있던 찝찝함이 다시 밀려들었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 제 두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흙먼지가 묻은 농구공을 만지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뒤늦게 한숨을 쉬어도, 손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물티슈 있어요?”

“아니, 없는데요. 식당 가면 물수건 주지 않을까요?”

차 문을 열며 하는 말에 한숨이 절로 새었다. …어차피 바라지도 않았다.

* * *

보쌈집에서와는 달리 선생은 꽤 적극적이고 부지런했다. 물론, 그건 자신이 먹기 위함은 아니었다. 정말 고기 굽는 역할에 충실하기로 한 건지, 좀 먹으라는 감독의 말에 대충 대답하며 열심히 갈비를 구워댔다.

어차피 애들도 다 팔이 달렸고 손가락 멀쩡히 붙어 있다. 저들끼리 고기가 익었다는 둥, 열심히 얘기하며 구워 먹고 있는데도 선생 습성인지 남자는 계속 다른 테이블을 살폈다.

한 번 구워서 나오는 가게인데 걱정도 많다. 타면 타는 대로, 덜 익으면 덜 익은 대로 어련히 알아서 잘 먹을까.

어느 정도 먹고 나자 선생의 관심은 이제 옆에 앉은 담임 반 어린애에게 집중되었다.

“산이, 옥수수 싫으면 억지로 먹지 마. 남겨도 돼.”

야구부 감독은 식당 주인과 친분이 있었다. 오랜만에 왔다며 반가운 인사를 건네던 여자는 강희찬을 보고는 새로 온 코치냐며 물었다.

‘우리 코치님이에요!’

시끄러운 아이들의 자랑스러운 대답을 주인아주머니는 곧이곧대로 믿었다. 굳이 정정하기도 귀찮은 터라 강희찬은 가만히 있었다.

식사 자리가 어느 정도 끝날 즈음 여자는 옥수수 한 바구니를 들고 왔다. 강원도 시댁에서 보낸 찰옥수수가 맛있다며 먹어보라는 말과 함께였다.

욕심껏 옥수수 하나씩 손에 집고 씹는 아이들에 비해 선생의 옆에 앉은, 즉 강희찬의 맞은편에 있는 아이는 좀체 먹지 못했다. 입에 맞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정면에서 보이는 아이는 누구보다 열심히 옥수수를 쥐고 더럽게 핥아대고 있었으니까.

“먹을 건데…….”

아이는 혹시라도 더러운 옥수수를 빼앗길세라 손으로 틀어쥐며 대답했다.

“먹고 있는 거야?”

“잘 안 씹혀요.”

“왜? 안 익었… 아.”

고개를 튼 아이와 시선을 마주하자 선생은 이유를 깨달았다. 위에 하나, 아래 두 개. 정상적이라면 있어야 할 앞니가 듬성듬성 빠져 있다면 옥수수를 먹기는 힘들 거다.

선생은 손을 들어 아이의 얼굴을 살짝 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유리 공예품을 만지기라도 하는 듯한 섬세한 손놀림이었다. 보기만 해도 손아귀에서 힘을 한껏 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의 입 안을 들여다보던 이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이가 이렇게 많이 빠졌어? 앞니가 이제 빠지는 거야?”

“애들마다 다르지. 정 선생님, 이갈이하는 거 처음 봐?”

눈을 둥그렇게 뜬 사람을 향해 감독은 웃음을 지었다. 손에는 유혹을 힘겹게 이겨내고 맥주 대신 마시는 사이다가 들린 채였다.

“아, 네. 앞니는 어릴 때 다 빠지는 줄 알아서…….”

“산이 좀 작잖아.”

감독의 말에 선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아직 애가 없어서 그래요.”

숭숭 빠져 있는 앞니를 한 번 더 들여다본 선생은 아이가 핥던 옥수수를 맨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 순간 강희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테이블에 자신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는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선생님이 뜯어줄게.”

고기를 굽는 데 쓰던 집중력은 이제 옥수수 알맹이를 뜯는 데 쓰고 있다. 어느 쪽으로 봐도 ‘식사’라는 행위 자체에는 건성이다.

‘죽어도 운동선수는 못 하겠군.’

한숨을 뱉은 강희찬은 손을 뻗어 이선이 잠시 놓은 집게를 집었다. 옥수수를 뜯던 손이 멈추고, 둥그렇게 뜬 눈이 이쪽을 보았다.

강희찬은 시선을 내린 채 고기를 집고 대각선 앞접시에 놓았다. 두어 번 반복하자 불판 위의 고기는 절반쯤 이선의 앞으로 덜어졌다.

“…….”

여전히 옥수수만 멍하니 잡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조명이 세지 않은 실내에서도 갈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과 비슷한 눈동자 색이다.

전반적으로 ‘옅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사람이다. 자신은 사람의 생김과 성격 따위는 하등 관련이 없다고 믿는 편이지만, 이 선생은 본인의 온순한 성향이 그대로 외모에 반영되는 게 분명했다.

계속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눈동자 위로 몇 번 눈꺼풀이 지나갔다. 깜빡. 깜빡. 깜빡. 세 번이었는지 다섯 번인지 헷갈릴 무렵, 강희찬은 그 눈에 담겨 있는 의도를 파악했다.

“…탈 것 같아서요.”

“아……. 네, 감사합니다.”

표정은 영 감사하지 않은 것 같은데.

예전에 할머니가 서울에 와서 밥이라도 차려주면 강영찬이 짓던 얼굴과 똑같았다. 산처럼 쌓인 밥을 보며 근심스러워하는 열 살 아래 동생을 향해 강희찬은 먹다 자신에게 덜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그제야 동생은 안심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 수 있었다.

“…….”

하지만 그거야 일고여덟 살 먹은 어린애한테나 어울리는 짓이고. 다 큰 성인 남자가 하는 편식을 받아줄 사람은 부모나 애인밖에 없을 거다.

사탕 바구니에 있는 박하사탕의 씨를 말려버리는 어린애들 사이에서 강희찬이 카드를 꺼냈다.

그제야 주인아주머니는 그가 코치가 아님을 깨달았다. 누군지는 잘 몰라도 유명한 사람이라면 사인을 좀 해달라며 가져온 종이에 카드 서명 때보다 무성의하게 사인을 갈겼다.

가게 밖으로 나온 후, 감독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제가 대접을 해드려야 하는데……. 처음 두 번 정도는 ‘괜찮습니다’라고 대꾸하던 강희찬은 그 이후로는 시큰둥하게 ‘네’ 하고 적당히 넘겼다.

동네가 떠나가라 인사를―‘잘 먹었습니다’와 그놈의 ‘효도하겠습니다’― 한 야구부는 이제 친한 녀석들, 혹은 집 방향이 같은 놈들끼리 무리 지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7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여전히 해는 질 줄을 몰랐다.

초등학교 주변에 택시가 다녔던가…….

어느 쪽으로 가야 택시를 잡을 수 있을지 두리번대던 강희찬의 눈에 이선과 그의 제자가 들어왔다.

“…….”

결국 저 애새끼는 제 손 하나 쓰지 않고 옥수수 하나를 다 먹어 치웠다. 딱 어린애들 버릇 버려놓기 좋은 선생이다. 강희찬은 한숨을 쉬면서도 그 꼴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리고 과보호 기질은 여전히 절찬리에 발휘 중이다.

“산이, 집 어디지? 선생님 금방 차 가져올 테니까 타고 가자. 늦었다.”

“걸어갈 수 있어요.”

“여기서 좀 멀지 않아? 꽤 늦었잖아.”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강희찬뿐만이 아니었다. 감독은 피우던 담배를 벤치 옆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무슨. 다 걸어갈 수 있어요.”

“아, 그래도 찻길도 있고 해서…….”

끝이 흐려지는 말을 듣지 않은 감독은 그대로 강희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죠?’ 간단한 한마디의 의미를 파악하는 건 쉬웠다.

어차피 운동부에게는 익숙했다. 강희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선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를 대신해, 감독은 제법 엄한 표정으로 얼굴을 덮으며 아이를 내려다봤다.

“박산, 걸어서 갈 수 있지?”

“네!”

“차 조심하고.”

어차피 이 동네에 살 텐데 선생이나 감독이나 유난은. 아, 땅값 비싼 동네라 부모들이 극성을 떨어서 그러나?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아이는 익숙한 인사―효도하겠다는―를 큰 소리로 외쳤다.

“어.”

어차피 보는 것도 마지막이다. 네가 효도를 하든 말든 내 관심사는 아니라는 삐딱한 소리는 속으로 삼켰다.

제 짐가방을 야무지게 고쳐 메고서도 아이의 시선은 몇 번이나 강희찬을 향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물으려는 순간, 저편에 무리 지어 있던 고학년 중 하나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박산! 빨리 와!”

마지막으로 희찬의 얼굴을 쳐다본 아이의 입에서는 결국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직은 조금 큰 모자가 벗겨질까 봐 손으로 잡고, 키가 큰 형들 무리를 향해 뛴다.

슬슬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타는 듯한 붉은 태양빛이 방해가 되어 눈이 찌푸려진다. 그런데도 그 뒷모습에서 쉬이 눈을 뗄 수는 없었다. …유난도 옮는 게 분명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정 선생. 형이랑 같이 가잖아.”

식당에서 뽑아온 믹스커피를 다 마신 감독은 종이컵을 재떨이용 항아리에 버렸다.

“산이가 형이 있었나요? 외동인 줄 알았는데…….”

“아니. 쟤가 같은 아파트 살아. 저기 제일 키 큰 애. 설마 어린 애 데리고 이 시간에 피시방에 가진 않겠지.”

애들을 모두 보낸 감독은 몇 번 더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한 후에야 학교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희찬은 유니폼 태가 나지 않는 뒷모습을 아주 잠깐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네 시간 정도인가. 체감상으로 나흘은 시달린 것 같은데…….

강희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택시를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저기……!”

크지 않은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솜털 같은 작은 소리에 강희찬의 걸음이 딱 멈췄다.

팔 하나 정도 떨어진 거리. 그곳엔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있다. 내내 햇볕 아래에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희고 깨끗한 얼굴이.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오늘 와주시고, 고생하셨는데…….”

“…….”

“바로 뒤에 주차해서, 차 금방 가져오거든요.”

말을 할 때마다 이리저리 허공을 휘젓는 정신없는 손짓에 눈이 갔다.

여기서 됐다고 거절하며 뒤를 돌면……. 옷가지를 붙잡아주려나?

왠지 모르게 그럴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꼭 대낮에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아니면 여우에게 홀렸는지도 모르지.

“네.”

무언가에 홀린 양, 강희찬의 입에선 대답이 흘렀다. 그리고 먼저 남을 홀려낸 멀건 얼굴은 어처구니없게도 토끼 눈을 했다.

“…네?”

“가져오세요, 차. 여기 있을 테니까.”

귀엽게 매달려올 모습이 궁금하지만, 고작 그거 하나 보자고 수고를 하고 싶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당황한 마음에 자신의 옷을 붙잡아올 확률보다 아무 소리 못 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쳐다보기만 할 확률이 더 높았다.

가능성이 낮은 쪽에 무언가를 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27%와 30%의 차이를 뼈저리게 알아온 세월은 인생의 반이 넘었다.

특히 오늘은 택시를 잡으러 동네를 걸어 다니기엔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많이 지쳤다.

“그, 금방 올게요.”

선생의 손은 식당 주차장이 있는 방향을 어정쩡하게 가리킨다. 대꾸 없이 보고 있자니, 머쓱한 얼굴을 하고는 이내 뒤를 돌았다.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애매한 걸음이 이어졌다.

재떨이 주변에 앉을 만한 의자가 있나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담배는 적당히 피우고 매상이나 올리라는 주인의 검은 속내가 엿보였다.

결국, 가게 벽면에 등을 기대고, 양쪽 다리에 똑같이 두던 무게를 왼쪽에 실었다.

힘이 빠진 오른 다리를 쭉 펴자, 무릎에선 ‘뚝’ 하는 소리가 난다. 3% 확률의 차이를 알아오는 시간 동안 익숙해진 몸의 불편함이기도 했다.

사람이 사라졌던 방향에서 새것 티가 나는 파란색 중형차 하나가 다가왔다.

짙은 선팅 탓에 내부는 보이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차주를 알 수 있었다. 색깔만 아니라면 젊은 공무원이 탈 만한 전형적인 차종이었다.

짧은 감상평을 내리는 사이, 차는 강희찬의 앞에 멈추었다. 그리고 운전석의 창이 천천히 내려왔다. 예상대로, 그곳엔 선생이 있었다.

“타세요.”

다시 보니까 본인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쓸데없는 생각을 갈무리하며 강희찬은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무릎에선 소리가 났다.

스무 살 때 맡아본 적 있는 새 차 냄새가 안에서 옅게 풍겨 나왔다. 조수석 문을 연 강희찬을 반긴 건 냄새와 함께 시트 위에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컵이었다. 안에는 음료 대신 사탕이 가득했다.

“아, 치워드릴게요.”

하얀 손이 컵을 집어갔다.

“…….”

탁. 시트에 몸을 앉히고 차 문을 닫자 방향제 냄새가 짙어졌다.

검은색이나 갈색 사탕이 가득한 컵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강희찬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저어…….”

컵을 쥐고 있는 손이 하얗고 긴 편이지만, 어쨌든 운동에 적합해 보이진 않는다. 피아노를 치거나 샤프를 들고 수학 문제를 푸는 게 더 어울릴 손이다.

강희찬은 이선의 손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드실래요?”

“…….”

맥락 없이 건네진 물건을 무방비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잠깐 손가락이 닿았다.

컵을 쥔 악력은 예상보다 강했지만, 이기지 못할 것도 아니다. 시선을 든 자신과 잠깐 눈이 마주치자, 선생의 입이 슬쩍 벌어지며 손에서는 힘이 풀렸다.

사탕이 가득 든 컵을 온전히 손에 쥔 강희찬은 내용물을 찬찬히 확인했다. 계피 맛, 흑사탕, 커피 맛. 어디서 누가 먹다 남기기라도 했는지. 한숨이 나올 만큼 칙칙한 것들뿐이었다.

개중 가장 무난한 커피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는 순간까지도 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사탕을 오른쪽 뺨으로 밀어 넣은 강희찬은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게도, 이선과 눈이 마주쳤다.

조수석을 바라보던 눈동자는 피할 타이밍을 놓친 듯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안 가요?”

강희찬이 냉담히 물었다. 사탕 덕에 발음은 다소 뭉개진 채였지만.

“네?”

“출발 안 하냐고요.”

아. 눈이 커지며 황급히 핸들을 잡은 손에서 뼈마디가 튀어나온다.

핸들을 터트리기라도 할 셈인가. 점점 더 하얘지는 양손을 보다가 문득 얼굴을 봤다.

“…….”

입술을 감쳐물고 있는 탓에 뜨고 있는 눈은 더욱 둥그레졌다. 객관적으로 나이가 많은 축은 아니겠지만, 저렇게 보니 한층 더 어려 보였다.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옆얼굴에 있는 눈이 꾹 감긴다. 이내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눈을 번쩍 뜨더니, 고개를 이쪽으로 홱 돌렸다.

‘대체 뭘 하는 건데?’

가만히 지켜보던 강희찬은 이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놀랐다. 딱히 훔쳐본 것도 아닌데 괜히 찔렸다.

“저기, 죄송한데요.”

“…….”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맥이 탁 풀렸다. 강희찬은 잠시 동안 자신이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는 걸 깨달았다.

입에선 참았던 날숨과 한숨이 섞인 채 나왔다.

‘…그거 때문이었냐.’

태워주겠다는 호의의 이유를 뒤늦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이선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희 선생님들이 많이 좋아하셔서요.”

“…….”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개가 살짝 숙어졌다.

‘이런 걸 언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강희찬은 기시감의 정체를 금세 깨달았다. 뭐, 기시감이랄 것도 없다. 야구공에 머리를 맞은 날도,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보쌈집에 데려갔던 날도 이랬다. 말마다 미안하다는 사족이 붙는 건 원래 성격인지 민원인을 상대하는 공무원의 습성인지 모를 일이지만.

뭐가 됐든 호구 같기만 하다. 젊은 선생이라 만만하게 보는 감독에게 부탁을 받고, 동료 선생들의 사인 배달까지 하고. 애인인지 뭔지도 모를 인간에게는 돈도 뜯겼다고 했었나.

감탄이 나올 만큼 일관적인 삶의 모습이다.

“…어디에 하면 되는데요.”

어차피 오늘 하루 어린애들 글러브나 유니폼에 잔뜩 사인을 했다. 몇 번 더 한다고 해서 손가락이 부러지는 것도 아니었다.

반쯤은 포기인 허락이 떨어지자 이선은 재빨리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냈다. A4용지가 가득 꽂힌 클립보드와 매직 한 자루. 호구같이 부탁을 들어주려고 제대로 준비를 한 모양새였다.

비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가 종이와 펜을 받고서야 차는 출발했다.

“몇 장 하면 돼요?”

서행하느라 느리게 지나가는 풍경을 스쳐보며 강희찬이 물었다.

“아, 개수 맞춰서 왔어요.”

“이거 서른 장은 될 것 같은데요.”

“…죄송합니다.”

도로에 진입하고 슬슬 속도가 높아지는 차의 움직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와 퍽 닮았다.

손가락에 쥐 나겠네.

매직 뚜껑을 여는 순간 다시 한번 운전석에선 ‘죄송합니다’ 소리가 나왔다. 그제야 속으로 하는 생각이 입으로 나왔음을 깨달았다.

“…….”

괜히 아무 잘못 없는 놈을 괴롭힌 것 같은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이내, 라디오 하나 틀지 않은 차량 내부엔 매직 스치는 소리만 가득 찼다.

“받는 사람 이름은 따로 안 적어도 됩니까?”

무성의한 사인을 휘갈기던 강희찬은 슬쩍 느끼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가뭄에 콩이 나는 빈도로 사인을 하는 탓에 뒤늦게 떠올랐다. 보통 받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준다는 사실이.

“아, 네. 너무 수고스러우실 것 같아서요.”

지금도 충분히 수고스럽다. 1년 동안 할 사인을 오늘 다 하고 있었다. 매직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잠시 손을 멈추고 팔을 쓸었다. 차는 이미 큰길에 진입해 있었다. 저번에 택시로 갔던 자신의 집을 기억하고 있는 듯, 운전자는 내비게이션도 사용하지 않고 익숙하게 방향을 잡았다.

생김으로만 따지면 면허도 없을 애새끼처럼 보이지만, 성인이 맞긴 했나 보다.

“그쪽 건 이름 써줘요?”

“네?”

순간적으로 자신 쪽을 향했던 고개는 운전 중임을 자각하고 다시 앞을 향했다. 다시 한번 물을세라 강희찬은 재빨리 덧붙였다.

“사인. 그쪽 이름 써주냐구요.”

“아,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안 받아요?”

팬이니 죄송하다 소리 몇 번 하면 일은 커지지 않을 거라던 이명호 코치의 말이 떠올랐다. 일주일에 딱 하루 있는 휴일을 반납한 것도 어찌 보면 반은 그 말의 영향이었다.

나머지 반은…….

“네. 숫자 맞춰서 온 거라서요.”

담백한 대답이다. 매정할 정도로.

깔끔하게 끊어지는 결론에, 오히려 강희찬이 다시금 입을 열게 되었다.

“다른 데라도 해줘요?”

“괜찮습니다.”

깨끗하게 떨어지는 옆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친구도 호구, 호구 했지만 정말 제 실속은 챙기지도 못하는 호구다. 하긴, 제 이득을 챙기고 살면 호구 소리를 들을 리가 없겠지.

“…….”

기억 속엔 비슷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아직도 10대의 얼굴로, 푸른 유니폼을 입은 채 제 기억에서만 존재하는 선수가. 그래도 그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라도 있었다. 적어도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에게 감독의 명령이란 절대적이니까.

운이 좋던 자신은 그 자리에 서지 않은 것일 뿐이다. 만약 자신이 그 시절, 윤태성이 있던 마운드에 서야 했다면, 어쩔 수 없다. 선수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강희찬이 직접 두 눈으로 봤던 선수 중 가장 강했던 사람은 이제 기억에서만 볼 수 있다. 푸른 벽 같은 존재감을 주던 선수는 이제 없다.

“여기에서 꺾었었나…….”

신호에 걸린 틈을 타 중얼거리는 옆모습을 흘긋 봤다.

전에도 느꼈지만, 전혀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체격부터 분위기까지. 정반대되는 대척점에 두어도 무방할 존재들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노량진 살아요?”

질문을 한 자신의 목소리가 꽤 이질적으로 들렸다. 두리번대며 보쌈집을 찾던 얼굴은 멀겋게 강희찬을 향했다.

마주쳤던 시선은 신호가 바뀌었음을 알려주는 뒤차의 재촉에 다시 어긋났다.

“아니요.”

“…….”

“그건 갑자기 왜…….”

강희찬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대신, 사인을 휘갈기는 데 집중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싶었는지 선생의 고개는 몇 번이나 이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고집스레 시선을 외면했다.

매직 소리가 커짐과 동시에 하나하나 완성되는 사인의 상태는 처참해진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 사인을 받을 사람 중, 정말 자신의 팬은 한두 명이 될까 말까다. 분위기에 편승해서, 혹은 ‘안 되면 말고’ 식으로 한 부탁을 성실히 수행하는 건 옆에 앉은 선생만으로 충분했다.

정확히 스물네 장을 마지막으로 사인을 마무리했을 때, 차의 속도는 서서히 늦춰졌다.

“아, 저기 있다.”

지난번 갔던 보쌈집의 입간판을 보고 선생은 웃기 시작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혼자 속으로 길을 헤맨 모양이었다. 내비게이션을 장식으로 두는 차주는 강희찬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차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어느 쪽이죠?”

“그냥 저 앞에 세워주세요.”

“아… 네.”

매직과 클립보드를 대시보드 위에 던지듯 두었다. 도르륵 굴러간 매직이 앞 유리 쪽에 박혔지만 굳이 꺼내진 않았다.

적당히 세울 만한 지점을 찾는 동안 차는 점점 속도가 떨어졌다. 차는 오피스텔 입구 바로 앞에 멈추었다. 강희찬은 콘솔박스에 잠시 두었던 컵을 챙겼다.

“오늘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애들이 엄청 좋아했을 거예요.”

“…….”

“사인도 그렇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이미 드셨―”

“이봐요.”

강희찬의 목소리에 혼자 열심히 떠들어대던 이선의 말이 멈추었다.

시선이 얽혔다. 제 손으로 세 뼘 정도의 거리. 얼굴은 오후에 받은 햇빛 탓인지 고기 불판 때문인지 약간은 상기되어 있었다.

내뱉은 말이 진심은 아닐 거다. 보쌈집에서 풀만 뜯던 모습이나 집에 가서 라면을 먹겠다고 제 친구에게 하는 투정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이 선생은 잘 모르는 사람과의 식사를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는 타입이었다.

그럼에도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아마 빚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겠지. 이리저리 감당하지도 못할 부탁들을 받고 다니면서도, 남한테 받은 도움은 제때제때 갚고 싶어 한다. 정말 훌륭한 호구였다.

“…네?”

능력이 닿는 범위라고 생각했었다. 손끝에서 뿌려지는 공을 딱 한 번만이라도 눈으로 본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이름 옆에 붙는 ‘초고교급’이라는 말이 언론에서 예의상 붙이는 수식어가 아니라는 걸 공 하나로 보여줄 수 있었다.

그랬기에 믿었다. 저 정도의 능력이라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이기는 게 너무나 익숙한 투수들에게도 당연하다는 듯이 열패감을 안기는 선수라면, 그 정도는 견딜 거라고…….

애매한 순간이었다. 스물다섯의 강희찬의 세포 하나하나에는 각인이라도 된 듯 열아홉의 시간들이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종이에 떨어진 잉크처럼. 번져가는 그때의 기억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입이 열렸다.

“사람 병신 되는 거, 한순간입니다.”

열아홉 여름에 처음 깨달았다. 10인치 태블릿 화면 속에 남아 있는 비현실적인 광경은 아직도 순간순간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대단한 선수도 무너지는 게 금방이었다. 멍하니, 무슨 말이냐 되묻지도 못하고 입을 달싹이는 얼굴은 그만큼 단단하지 못했다. 이런 사람은 한 번 넘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

강희찬은 끝내 풀리지 않는 조수석의 잠금을 직접 열고 내렸다. 저녁 시간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더운 바람이 몸을 스쳤다.

오피스텔 입구까지 들어서는 동안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입구로 들어서서, 큰길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차가 출발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