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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그러니까 온몸의 열량을 끌어모아 술에 취한 짐덩이를 옮긴 여파는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워낸 에너지를 채우지 못한 탓이었다.
분명 고시원을 나설 때만 해도, 컵라면이라도 먹고 자야겠다고 했던 생각은 집에 가까워질수록 피로감으로 뒤덮였다. 결국, 씻기만 한 채 엎드리고 그대로 아침까지 뻗었다.
그리고 깜빡 자다 깬 것처럼 아침에 눈을 뜨자, 이선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오늘은 등교 시간에 고학년 반장, 부반장들의 캠페인 활동 지도가 있었다. 깨달은 순간 벌떡 일어나 학교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취지의 문구가 다양하기도 하다. 작년에도 똑같이 썼을 캠페인 피켓을 보며 이선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불성실한 선생과는 달리, 미리 캠페인에 참여해야 한다고 안내받았던 고학년 각 반 반장, 부반장들은 한 명도 지각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등교했을 텐데 졸린 기색들도 없고. 자신보다 10년 이상은 젊다는 게 이유일지도 모른다. 성실한 아이들 서른 명과 불성실한 선생 하나는 그럭저럭 30분간의 교문 앞 캠페인을 마칠 수 있었다.
아이들을 교실로 보낸 후, 이선은 내년에나 다시 꺼낼까 싶은 피켓을 다시 체육관 창고 가장 구석에 밀어 넣었다. 체육관에선 아침저녁으로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배드민턴 교실이 열렸다. 괜히 위치가 바뀌지 않도록 배드민턴 네트와는 최대한 먼 곳에 물건을 두었다.
“안녕하세요!”
“어. 뛰면 안 돼.”
혀를 한 번 차고는 체육관 건물을 나서는데, 아이들 몇이 그의 앞을 맹렬하게 뛰어갔다.
우유 당번인 아이들이 급식실로 향하는 질주의 현장이었다.
텍사스 소 떼인가……. 저렇게 뛴다고 흰 우유가 초코우유로 변하는 것도 아니다.
젊음이란 건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었다. 저 에너지의 원료 2g만 나누어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창고 열쇠를 손끝에 걸었다. 이선이 체육관 모퉁이를 돌았을 때, 주차장엔 예상치 못한 인물이 있었다. 야구부 감독이었다.
“어… 청대 끝나고도 괜찮은데……. 어, 그래. 아니야. 어. 잘 하고……. 그래.”
감독은 트렁크를 닫고, 옆에 배트가 든 가방을 세워둔 채 통화 중이었다. 대화는 끊어질 듯하면서도 한동안 이어졌다.
“아니야, 미안하다. 너도 정신없을 텐데.”
멍하니 서 있던 이선은 별안간 감독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색한 눈인사를 먼저 건네자 감독 역시 같은 제스처로 화답했다.
이내 감독은 끊자는 말로 통화를 마치고는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안녕하세요.”
감독이 전화를 끊자 이선이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도 감독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학교 선생과 야구부 감독이란 마주할 일이 거의 없는 존재였다. 아마 저쪽은 자신이 선생인지 행정실 직원인지도 알지 못할 터였다. 누군지 모르는 상대에게 어색한 시선을 던지는 감독을 향해 이번에도 이선은 먼저 입을 열었다.
“산이는 야구부 잘하고 있나요?”
아. 그제야 감독은 이선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아, 산이 선생님이구나. 걔 야구부 때문에 공부 못 하죠?”
감독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이선의 담임 학생이 야구부 핑계를 대며 남은 공부를 매번 다 하지 못하던 걸 감독 역시 알고 있었다. 이선은 어색한 얼굴을 하는 감독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숙제 같은 건 집에서 엄마가 도와주시나 봐요. 어떻게든 하긴 해요. 야구 하는 거 많이 좋아해서요.”
“…이놈 새끼, 내가 구구단은 어떻게든 외우게 해볼게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대화하다 보니 감독과 절로 걸음이 맞춰졌다.
아이들을 통해 건너 들은 감독은 꽤 무서운 이미지였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그 역시 일반적인 젊은 학부모였다.
“원래 이렇게 일찍 오세요?”
“아니. 우리 딸이 여기 병설 유치원 다녀서. 오늘 애 엄마가 출장이라 대신 데려왔어요.”
학교 정규수업이 다 끝나야 야구부 활동이 시작한다. 감독이 이 시간에 학교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이가 병설 유치원에 다니는 걸 보면 감독은 적어도 30대 중후반 정도는 될 것이다. 운동하는 사람 특유의 단단한 체구와 그을린 얼굴이 방해였지만 이선은 대략 가늠해 봤다.
야구 배트를 나눠서 들어주겠다는 이선의 제안을 감독은 거절했다. 현재 속해 있는 사회인 야구단 선수들이 쓰는 진짜 선수용 배트라서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미덥지 않아 보이나. 그런 서운함은 이내 배트 가격이 기본 50만 원은 된다는 감독의 얘기를 듣자 사그라들었다.
“아까 전화는 무슨…….”
“아. 옛날 제자 중에 이번에 프로 지명받은 애가 있거든요. 나중에 잠깐 와서 애들한테 좋은 얘기 좀 해줄 수 있냐고 부탁하려고. 요새 애들이 꽤 늘어지길래, 그래도 프로 입단하는 형들 보면 좀 낫지 않겠어요?”
“제잔데 벌써 프로예요?”
“감독 처음 할 때 6학년이긴 했어요.”
“아아.”
잠깐 사이 높아졌던 감독의 연령대를 다시 낮추려 했지만, 역시 성인인 제자가 있다는 장벽이 작용했다. 보이는 것보다 감독은 나이가 더 있는 편인지도 모르겠다.
얼빠진 소리를 내는 이선을 보고 감독은 얼핏 웃었다.
“야구선수들은 고등학교 졸업해서 입단하는 경우도 꽤 많아서요.”
프로야구 선수. 이선에게는 익숙한 키워드는 아니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생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현직 프로야구 선수인 사람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면 그쪽도 나이가 꽤 어렸던 것 같다.
아아. 깨달음을 얻었다는 추임새를 넣으며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이제 몇 년 됐어요? 산이가 선생님 엄청 젊다고 하던데.”
“아, 저 올해가 3년째예요.”
“야아. 그럼 아직 서른도 안 됐겠네?”
멋쩍게 주억이는 이선의 고갯짓을 보더니 감독은 ‘엄청 어리네’라며 놀라워했다.
아직 나이도, 연차도 높지 못한 건 일을 할 땐 장점보단 단점으로 작용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감독은 자신의 나이를 듣고 못 미더워하는 게 아닌, 순전히 놀랍다는 반응이라 좀 나았다.
이선은 지금 감독이 대충 어떤 기분일지 감이 잡혔다. 매년 입학하는 신입생들의 생년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느꼈던 오묘한 감각일 거다.
“그럼 제자 중에 졸업한 애들은 아직 없어?”
“아니요. 작년에 5학년 담임했던 게 다라서요. 아직은…….”
“걔네들 내년에 중학교 가면, 대학 가고 군대 가는 거 순식간이에요. 애들 금방 커요.”
나중에 술 사달라고 찾아올지도 몰라. 감독의 장난조인 말에 이선은 얼핏 웃었다.
종종 인근 중학교 앞을 차로 지나가다 보면 시커먼 남학생들 무리가 있었다. 그들 중에 첫해에 체육 수업을 지도했던 학생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적은 있어도……. 그 애들이 술을 사달라고 찾아오는 건 좀 징그럽고 끔찍하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달갑지 않은 그림을 지우려 고개를 좌우로 붕붕 흔들었다. 감독은 그 모습을 보고 슬쩍 웃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다는 듯한 미소였다.
“아무튼, 걔가 이번에 1차 지명받고 기사로도 꽤 나갔거든요. 애들도 이제 프로 들어갈 형이 와서 좋은 말 좀 해주면 열심히 하지 않을까 했는데……. 바쁘다 그러네요.”
“…네.”
“원래 이맘때가 애들도 제일 풀어져요. 여름이라 운동은 힘들고, 부모들도 방학하면 애들 데리고 놀러도 가고 싶을 테고. 어차피 중학교 올라가면서까지 야구 하는 건 반도 안 되긴 해도…….”
“많이 그만두나요?”
“그렇지. 지금 하는 건 거의 취미 수준이에요. 중학교 때도 야구 하는 애들은 거의 선수로 진로 잡은 애들이고. 그것도 중간에 실력에서 밀리고 부상당하면서 그만두는 게 태반이지만…….”
운동은 재능 없으면 절대 못 해. 노력으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야.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감독의 발걸음이 약간 늦어졌다. 이선 역시 걸음을 맞추게 되었다. 저게 어떤 얼굴인지 이선은 알고 있었다.
“네에…….”
무엇이든 할 수 있던 어린아이는 자라고 어른이 되며, 본인과 현실의 한계를 깨달아간다. 그럼에도 곁에 있는 어른들은 그 현실을 미리 얘기해 주지 않는다.
지금의 감독처럼, 엄청난 재능과 경쟁을 이겨낸 특별한 한 사람을 보여주며 너희도 할 수 있다는 거짓에 한없이 가까운 용기를 줄 뿐이다. 자신이 있는 교실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현실을 보여주는 것과 희망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 어떤 게 옳은 걸까? 교단에 선 이후로 항상 고민했던 질문이다.
“…산이는 잘하나요?”
야구장과 학교로 이어지는 갈림길에서 이선은 걸음을 멈추었다.
멈춰 있는 이선을 향해 감독은 고개를 돌렸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를 자신을 향해 감독은 설핏 웃었다. 젊은 선생의 고민 따위는 쉽게 읽은 게 분명한 눈이었다.
“난 영화 같은 건 결말 알고 보는 편은 아니긴 해요. 그게 슬픈 거면 더더욱 안 봤고.”
담담한 목소리는 저 멀리서 들리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움과 뒤섞였다.
“나도 프로선수가 되고 싶어서 야구 시작했고, 대학 때 그만뒀어요. 표면상 이유는 부상이지만, 사실 부진이었지.”
그럼에도 정확히 이선에게 닿았다. 귀가 아니라, 머리로 직접 목소리가 들어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유니폼 처음 받을 때의 내가 그 미래를 알았어도 야구를 시작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어요.”
“…….”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때의 내가 야구를 했으면 좋겠거든.”
“…….”
“뭐, 그 나이엔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거 자체가 재능 아니겠어?”
선선한 말을 남기고 감독은 먼저 가겠다며, 야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뒷모습은 금세 야구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이선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겨우 한 해를 버텨내는 반편이 선생은 따라 하지도 못할 단단함이 느껴지는 등은 잔상처럼 눈에 남았다.
* * *
제대로 선발 로테이션을 돌기 시작한 후, 등판일에 기분이 좋은 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그러니 강희찬의 기분은 오늘도 좋지 못했다. 30분 늦은 아침의 기상 시간이나 갈변된 바나나 따위는 그저 거들 뿐인 요소였다.
표면장력이 느껴지도록 가득 찬 물잔에 딱 한 방울의 물방울만 떨어져도 넘치게 된다.
이미 불쾌함이 가득 들어찬 기분을 넘치게 만든 건 매일 막히는 서울의 도로 상황도, 이상적으로 더운 초여름 날씨도 아니었다.
카메라를 들고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홍보팀 직원인 송재혁이었다.
“훈련 끝났나 봐요? 밖에 많이 더웠죠?”
“…….”
오전에 올스타전 참가 선수 명단이 발표됐다. KBO 홈페이지에 공개되자마자 그와 관련한 기사들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매년 있는 일이었다. 기어코 선발투수 부문에서 팬 투표 1위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인상을 와락 구기긴 했어도 참지 못할 것도 아니었고. 축하 문자로 핸드폰이 자꾸 울리는 것도 귀찮긴 했지만 견딜 만했다.
하지만 투표 감사 인사를 찍겠다고 설쳐대면 당연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등판일에는 홍보팀장도 인터뷰하자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컨디션 조절 차 외야에서 짧은 러닝을 하고 들어온 강희찬을 향해 송재혁은 뻣뻣하게 굳은 미소만을 지었다.
“내일 찍어요.”
끓어오르는 짜증에 찬물을 붓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직원이 그의 인내심을 알아채진 못한 듯했다. 먼저 걸음을 떼려는 강희찬의 앞을 묘하게 몸으로 가로막았다.
“아……. 그, 오늘 클리닝 타임에 전광판으로 내보낼 거라서요.”
웃는 얼굴을 해서는 짜증 나는 소리만 해댄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은 틀렸다. 술을 마시다 시비만 붙어도 신문에 이름이 실릴 처지만 아니었으면, 두세 번은 족히 팼을 거다.
쌍소리를 삼키며 강희찬은 입을 열었다.
“…그럼 어제 찍었어야죠.”
“어젠 선수단 투표 결과를 제가 모르잖아요.”
선수단 투표 결과에 상관없이 참가가 확실한 선수들은 이미 어제 촬영을 마쳤다.
그러니 왜 괜히 외국인 선발과 경합을 벌여서 사람을 피 말리게 만드는 거냐. 송재혁이 직원이 아니라 팀장쯤이었다면 그렇게 타박했을지도 모른다.
강희찬이 입 안 가득 바람을 집어넣다 뱉는 소리가 구장 복도를 울렸다.
송재혁은 눈치가 없는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꽤 빠른 축에 속했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 빠르게 강희찬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다. 숨소리며, 자신을 향해 지그시 향한 시선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개짜증이 난 거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짜증은 부당한 일이었다. 땡볕 아래서 그라운드 훈련을 마친 사람이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부당하다.
훈련이 힘들거나 올스타전에 뽑힌 건 송재혁의 탓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이란 부당함의 연속이었다. 어쨌든 오늘 전광판으로 영상을 내보내려면 지금 당장 찍어야 한다. 편집 시간을 고려해 보면 지금 찍어도 촉박했다.
송재혁은 신경질적으로 땀을 닦아내는 선수를 흘긋 올려다봤다.
“씻고, 회의실에서 찍어요. 5분도 안 걸릴 거예요. 응?”
아마도 개짜증의 8할은 미쳐가는 한국의 더위 탓일 거다. 주말에도 6시로 경기 시간을 늦춰봐도 덥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훈련 시간엔 오죽하랴.
잠실 경기가 있는 오늘 역시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아오.”
송재혁의 짐작이 맞아들었는지 강희찬은 한숨을 내쉬고는 로커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2년째 보고 있으면, 짜증 난 표정 아래에서도 구분할 건 할 수 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저건 승낙의 ‘아오’였다.
송재혁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한껏 밝은 목소리를 쥐어짰다.
“2회의실에 있을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커룸 문이 쾅 닫혔다. 갈 곳을 잃은 말만이 홀로 공중을 떠다닌다.
쩝. 사무실에서 마셨던 믹스커피의 맛만이 입 안에 텁텁하게 남은 채였다.
* * *
세상에 어느 구단 프런트가 등판 당일에 선발을 귀찮게 하냐.
반쯤 말린 머리를 털어내며 로커룸을 나서자 더운 기운이 훅 끼쳤다.
복도 끝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두 번째 문. 2회의실까지 향하는 동안 더위가 눅눅하게 희찬의 몸에 들러붙었다. 씻은 보람을 느낄 새도 없다.
신경질적으로 회의실 문을 열어젖혔을 때, 내부에는 카메라와 노트북 한 대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어디 갔어…….”
그나마 에어컨은 돌아가고 있다는 게 다행인가.
한숨을 내쉬며 삼각대 위에 세팅된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보기에는 많이 크진 않은데, 막상 들어보니 예상보다 무게가 제법 나간다. 강희찬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뭘 눌러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버튼이 잔뜩인 기계를 이리저리 돌렸다. 카메라 렌즈 부분을 제외하고는 뭔지도 모르는 것뿐이었다. 이건 마이크인가.
폭신한 스펀지에 감싸진 채 툭 튀어나온 부분을 검지로 톡톡 쳐볼 무렵, 문소리가 귀에 걸렸다.
“어? 와 있었어요?”
“한참 전부터 있었는데요.”
뻥 치시네. 한참 전의 기준이 대체 뭐냐?
송재혁은 속으로 이죽거렸다. 더운 공기가 더 들어오지 못하도록 재빨리 회의실 문을 닫았다. 생수와 함께 들고 온 두유 한 팩을 강희찬의 옆에 놓았다. 뭐냐는 듯이 두유와 송재혁을 번갈아 보던 강희찬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거 찾고 오느라고. 등판 전엔 커피는 잘 안 마시죠?”
“유제품도 안 먹는데요.”
잠깐 두유에 머물렀던 시선이 홱 하고 돌아간다.
“예? 아…….”
난감함에 송재혁은 목 뒤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보통은 성의를 봐서라도 그냥 받기라도 할 텐데……. 성질머리 한 번 꾸준도 하지. 선발의 미덕은 꾸준함이라지만 이런 건 좀 변해도 괜찮은 요소였다.
멋쩍음에 입맛을 다시는 송재혁을 향해 강희찬은 눈을 치켜떴다.
“그거 물 주세요.”
턱짓으로 가리키며 하는 말에 송재혁은 테이블에 두었던 두유와 손에 있던 생수병의 위치를 바꾸었다.
“배고프지 않겠어요?”
쓸데없는 물음이 덧붙었지만, 강희찬은 구태여 대꾸하지는 않았다. 등판 전에 식사 관리를 해온 게 한두 해 일도 아니었다.
“어제저녁도 아예 안 먹었을 거 아니에요.”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팩에 붙어 있던 빨대를 꽂은 두유를 쭉 빨아 삼킨 송재혁은 생각 없이 말을 이었다. 강희찬은 무슨 참견이냐며 쏘아붙이고 싶은 걸 눌러 참았다.
“…….”
직원의 달갑지 않은 염려는 꼭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리라. 불편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한 친구를 눌러 앉히며 식사를 챙기는 걸 보면, 그냥 송재혁은 버릇에 가까울 정도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일 터였다.
그 사람은,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챙겨 먹이고 싶은 쪽에 가까운 느낌이긴 했다. 하지만 송재혁의 배려 아닌 배려가 무색하게도, 그 친구는 풀만 뜯어 먹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건 모르겠지.
카메라 렌즈를 검지로 만지는 강희찬을 향해 송재혁은 ‘아…….’ 하며 난색을 표했다. 그 반응을 알아채고도 강희찬은 렌즈에 지문을 남기는 걸 멈추지 않았다. 카메라에 손을 뻗는 송재혁을 향해 힐끔 던지던 시선을 거두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에요?”
“네? 누구요?”
“어제 친구요.”
단둘이 있는 테이블인데도 잔뜩 불편하다는 표정을 짓고 오이를 씹어대던 얼굴을 떠올렸다.
송재혁과 자연스럽게 하던 반말이 아니라면, 그쪽이 몇 년 정도 후배라고 생각할 게 당연할 외모였다. 아니, 솔직한 말로 송재혁과 반말을 하는 것도 강희찬의 눈에는 어린 후배가 버릇없이 말을 놓는 것과 비슷하게 보였다.
‘저도 인터넷에 함부로 글 올리면 곤란한 입장이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직업’이라는 것 탓인지, 송재혁의 단속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다행히 귀찮은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인터넷에 함부로 글을 올려서는 안 되는 직장이란 대체 어디인가.
확실히 주차장에 혼자 가만히 서 있던 모습이나 전체적인 느낌만 본다면 멀끔하고 곱게 생기긴 했다. 하지만 연예인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요새 야구장에 시구를 오는, 생기다 만 아이돌들보다는 훨씬 나은 외모였긴 해도……. 아닐 거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다. 연예인이 경호 하나 없이 야구장 주차장에 멍청하게 서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정치인인가?’
짧게 한 생각에 스스로도 기가 차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치판과 어울리지 않을 젊은 나이가 문제는 아니었다. 선거철마다 가끔 지나치게 어리다 싶은 후보도 본 적은 있었다. 관심 없는 분야였으니 후보에 나갈 수 있는 나이 기준이 어떤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성향 문제였다.
낯선 사람 하나가 있어도 불편한 티를 팍팍 내는 성격이 정치판에 있을 리가 없다. 언젠가 시구를 왔던 시장을 떠올리며 두 번째 가설에도 빨간 빗금을 그었다.
하나둘 선택지를 소거해 감에 따라, 의문은 더욱 커졌다.
북파공작원이라도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럼 대체 뭐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궁금증은 금세 해결됐다.
“걔 학교 다니는데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학교에 다녀요? 그쪽이랑 동갑 아니에요?”
강희찬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의아한 듯 되묻는 그를 향해 송재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학교에서 일한다고요. 애들 가르쳐요. 초등학교에서.”
국정원이라도 다니나 했네.
짧은 실소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다. 묘하게 그 나이대의 사회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분위기가 덜한 이유였다. 그렇게 듣고 떠올려보니 꽤 어울리는 직업이기도 했고.
“근데 정 선생은, 왜요?”
잠깐 멈칫한 말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경계가 묻어났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짧은 생각을 마쳤다. 아니, 머리로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그냥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건 투수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었다.
“그 사람 남자 만나요?”
질문과 동시에 눈만 돌려 송재혁의 얼굴을 봤다. 숨을 들이마셨는지 커진 콧구멍과 비례한 눈 크기의 조화가 상당히 우습다.
“…아니요. 아닌데요.”
이렇게 빤히 들여다보여서야 떠보는 이쪽이 더 미안해진다.
“누가 그런 소리 해요?”
되묻는 목소리는 한 박자 늦게 흘러나왔다. 이제 와 속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이 굳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쯧쯧. 강희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누가 했을 것 같은데요.”
시선만 흘리던 사람의 고개가 이제는 완전히 송재혁을 향한 채였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냐. 마주한 얼굴은 딱 그렇게 말했다.
송재혁의 필사적인 표정 관리는 딱 그 순간까지였다.
여전히 카메라를 만지작대면서도―제발 렌즈는 손으로 만지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자신을 향해 뱀처럼 들러붙는 시선까지 갈 정신도 없다.
크게 뜬 눈이 시려질 무렵 송재혁은 정신을 차렸다. 붕붕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다고 해서 무언가 속에서 정리되는 건 아니었다.
송재혁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채 강희찬을 내려다봤다.
“…진짜요? 그럴 리가 없는데?”
기침 한 번만 하면 심장을 뱉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적정 온도 따위는 개무시한 설정으로 돌아가고 있는 에어컨 바람이 회의실에 가득해도, 온몸에는 식은땀이 옅게 배어 나왔다.
…고기 좀 먹으라고 남겨뒀더니. 정 선생, 이 새끼가 고기 말고 더위를 먹은 게 분명했다.
정이선은 불편한 자리에서 밥 먹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요새야 학교 회식은 그럭저럭 잘 가서 술도 마시는 모양이지만, 그것도 발령 첫해에는 꽤 힘들어했고.
…너무 불편한 나머지, 그 반작용으로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지껄인 걸까?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지?’
대체 왜 자신이 아웃팅을 당한 것처럼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급한 불은 끄고 봐야 했다. 송재혁은 잠깐 동안 꾹 감았던 눈을 떴다.
정 선생은 이제 정년퇴직을 하는 날까지 월급날엔 꼬박꼬박 보쌈을 사야 한다. 꼭 받아먹고야 말 거다.
다짐을 마친 송재혁은 몇 번 머뭇대던 입을 어렵게 뗐다.
“저기, 강희찬 선수.”
성질을 낼 때를 제외하고는 변화가 없는 얼굴에서 눈만 슬쩍 치켜 올라갔다.
뭐요. 항상 똑같은 표정인데, 말 대신 의사소통이 된다는 점은 봐도 봐도 신기했다. 사실 본인의 능력이라기보단, 저 성질머리 때문에 주변에서 예민하게 살펴주는 걸 테지. 지금의 자신처럼 말이다.
사주팔자에 금칠했다며, 옛날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황제를 했을 거라는 윤태성의 평가는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친구를 보는 눈이 칼날같이 정확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선수는 선수다. 흘긋 쳐다보기만 할 뿐인데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위압감이 묻어나왔다. 송재혁은 ‘아무것도 아니에요’라며 꼬리를 말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입을 뗐다.
“정 선생이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
“걔가 직장이 직장이라, 그런 말이 돌면 많이 곤란하거든요.”
일반 회사에서도 돌면 큰일 날 소리인데 보수적인 공무원, 그것도 교육공무원 사회였다.
정이선은 부임을 하고 난 후, 휴일에 동네에서 편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다. 동창회에서 들었던, 교육청 운운하던 머저리 새끼들의 얘기는 좆같긴 해도 현실감이 높은 소리였고.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정이선 선생은 뒤도 돌지 않고, 이번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을 곳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미 겪어봤던 일을 예상하는 건 너무도 쉽다.
송재혁은 눈앞에 그려지는 외로운 광경을 애써 지우며 한 곳에 눈을 두었다.
시선의 끝에서 강희찬은 여전히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이제는 손끝으로 렌즈를 톡톡 두드리기까지 한다. 이리저리 신경에 거슬리는 것투성이인 송재혁과는 달리, 강희찬은 지그시 눈길만을 보냈다.
잠깐 생각을 하듯 옆으로 향했던 눈동자가 송재혁에게 돌아왔다.
“어디에다 얘기해요?”
“…네?”
“내가 그 선생이 남자 만나는 걸 누구한테 말하고 다니냐고요.”
성가신 목소리가 덧붙이는 설명을 듣자, 송재혁은 잠깐의 텀을 두고 깨달았다.
…그렇긴 하네.
할 말을 잃은 송재혁은 과부하라도 걸린 듯 입술을 달싹였다.
강희찬은 가끔 사람이 허무해질 정도로 당연한 소리를 해서 얼을 빠지게 만든다. 주둥이가 험해서 그렇지 대체로 하는 말들은 맞는 소리기도 했고.
“어…….”
“…….”
“그렇죠.”
늘어지던 목소리는 결국 멍청한 대꾸로 마무리되었다.
지금처럼 묻는 게 특이한 경우지, 사실 강희찬은 남의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오죽하면 벤치 클리어링 때 그라운드에서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이 찍혔을까. 벌금 조항 아니었으면 더그아웃에서 구경했을 새끼라는 댓글이 영 현실성 없지만은 않았다.
아마 정 선생에 대해 묻는 것도 사람 자체에 대한 궁금증은 아닐 거다. 그보다는 처음 보는 성향에 대한 호기심에 가까울 관심일 터였다.
송재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사람이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그렇게 큰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존재였다. 열아홉 고등학생이나 스물다섯 운동선수나 생각하는 건 거기서 거기다.
불쾌한 관심이다.
그렇게 쏘아붙이지 못하는 건 단순히 강희찬이 카메라를 들고 렌즈를 괴롭히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송재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구단에서 월급을 받는 계약직인 건 똑같은 ‘을’ 처지인데, 왜 쟤는 ‘슈퍼을’일까. 두유가 남은 탓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텁텁한 입맛을 다셨다.
“많이 친해요?”
떨떠름한 그의 기분은 괘념치 않는 목소리가 물었다. 송재혁은 정신이 지쳐 있는 탓에 잠시 아래로 두었던 눈을 들어 올렸다.
남에겐 꽤 치명적인 질문을 해놓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표정이 없다는 건 투수에게는 더없는 장점이겠지만, 인간적으로는 참 별로였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본인의 성에 차는 답을 다 들어야 카메라를 돌려줄 생각이다.
반쯤 포기한 송재혁은 삼각대를 설치해 둔 옆자리의 의자를 빼고 앉았다. 쿠션 하나 없는 회의실 의자였지만 몸을 기대기엔 더없이 편했다.
마음만큼이나 지친 몸은 쉬이 입을 열었다.
“뭐… 고등학교 동창이긴 한데, 그땐 말도 안 해봤어요. 같은 반인 적도 없었고. 정 선생은 전교생이 다 알만큼 유명해도, 저는 그냥 평범했거든요.”
“왜 유명했어요? 게이라서요?”
무심히 던져진 말을 듣자 송재혁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숨을 쉬는 것도 잠시 잊었다는 사실을 몇 초 후에 깨달았다.
언젠가 정 선생은 이 성격에 대고 ‘참신하다’는 표현을 썼다. 한결같은 개새끼나 지조 있는 개새끼, 팬들이 농담과 악의를 반씩 섞어 부르는 별명보다 더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남의 인생의 약점이 되는 부분을 건든다는 자각조차 없어 보이는 얼굴은 차라리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정도로 시원시원하게 생각이 없으면, 오히려 화를 낼 기운도 빠진다. 악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라리 낫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한숨처럼 터지는 지친 호흡에 옅은 실소가 섞였다.
“그렇기도 했고요. 그 나이 애들은 남녀가 사귀어도 말이 돌았을 텐데……. 남학교였으니까요.”
일어선 채로도 낮았던 송재혁의 눈높이가 더욱 낮아졌다. 강희찬은 이제 완전히 그를 아래로 내려다봐야 했다. 대답을 해도, 피하고 있는 시선은 누가 봐도 화제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의 것이다.
남의 생각을 읽는 것 따위는 몸에 익을 대로 익었지만, 강희찬은 그것에 맞춰주는 데에는 흥미도 재능도 없었다.
“여자라도 만나보라고 하지 그랬어요.”
“강희찬 선수.”
책상으로 끈질기게 향하던 눈길이 확 올라붙었다. 렌즈를 톡톡 두드리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눈을 마주하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다. 한 번 내쉬는 숨과 동시에 송재혁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미안한데, 제가 손이 느려서 편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
“인터뷰, 지금 찍어도 되죠?”
어색하게 올리는 입꼬리에 비하면 눈은 전혀 아니었다.
여기서부터는 네 영역이 아니다.
투구 수를 채우기 무섭게 고교 시절의 투수코치는 공을 들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때가 됐구나 싶던 순간도 있었고, 내려가는 게 죽도록 억울할 때도 있었다. 딱 한 타자만 더. 타석에 있는 타자가 아닌, 상대 팀 투수를 이기려 드는 투수의 고집은 그 시절에도 통할 리가 없었다.
공을 놓은 투수가 파울라인을 넘어가고 나면, 경기에선 철저한 외부인이 된다.
선 밖에 있다는 것. 그건 강희찬에게는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다. 먼저 전광판에서 이름이 사라졌던 그 시절의 열등감과 함께.
* * *
일주일에 두 번 있는 교무 회의를 마치고 2층 교무실로 돌아왔을 때, 이선의 핸드폰에는 두 통의 부재중 알림이 있었다. 5분 전과 3분 전. 시간 간격을 보면 연달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꽤 급한 일인 걸까?
최근 통화목록의 가장 위에 있는 이름을 누르려고 할 때 이선의 손가락은 멈칫했다. 걸려고 했던 번호에서 다시 한번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손 안에서 득득거리는 진동이 오늘따라 자신을 요란스레 재촉하고 있다.
“어, 여보세요.”
―야! 네가 뭐 제갈량이냐? 전화를 하면 왜 한 번에 안 받아?
스피커폰이 아니었음에도 목소리는 크게 흘러나왔다. 그 탓에 이선뿐만 아니라 옆자리의 김경원도 함께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런 식으로 윽박지르는 유비라니. 자신이 역사 속의 제갈량이었다면, 세 번이 아니라 서른 번을 찾아왔어도 모른 척했을 거다. 게다가 정사에 의하면 유비는 직접 제갈량을 찾아가지도 않았다고 하고.
이선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하느라 핸드폰 두고 갔어.”
―회의를 뭐 이렇게 오래 해?
핸드폰의 음량을 줄이며 교무실을 나섰지만, 이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었을 게 분명하다. 바깥의 더운 공기와 함께 당황이 단번에 밀려들었다.
소음이 적은 미닫이문을 닫고 나서야 이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3-3. 익숙한 문패가 보이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번 주에 공개 수업 있어서 그래. 근데 전화는 왜? 보니까 아까도 했던데.”
교실로 들어서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복도에는 더운 바람이나마 불었는데. 교무실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옅게 땀이 배어 나왔다. 아직 8월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서워지는 더위다.
이선은 적당히 가까이 있는 학생용 의자 하나를 빼서 앉았다. 삐걱대는 소리가 영 불안했지만, 애써 통화에 신경을 돌렸다.
―너 어제 술 얼마나 마셨어?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이선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평일의 오후 4시. 이선에게는 조금 특이하게 느껴지는 일터였지만, 어쨌든 송재혁 역시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얘야말로 지금 술을 먹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정이선은 다시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안 마셨는데.”
―똑바로 말 안 할래?
이제는 거의 윽박지르는 수준이다. 억울하게 추궁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아니라는 항변만이 본능적으로 나왔다.
“진짜 안 마셨어. 왜? 누가 나 술 마셨대?”
―…진짜 안 마셨어?
“진짜라니까. 어제 너 남기고 갔던 사이다도 안 마셨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난 후에야 전화기 속 송재혁의 재촉은 잦아들었다. 몇 초의 침묵을 사이에 두고, ‘…진짜?’라는 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진짜라고.”
―…씨발, 양아치 같은 새끼가.
“어?”
―아니. 너 말하는 거 아니야.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똑똑히 들었다. 아까부터 겉돌던 대화는 다시 어색하게 멈췄다.
세 사람이 밥을 먹었고, 그중 하나는 일찍 나갔다. 그럼 자신이 술을 마셨다는 말을 할 사람은 남은 하나였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시큰둥한 얼굴을 해서는 장난을 친 걸까? 거기에 홀랑 넘어간 송재혁이 어쩐지 가여워졌다.
“근데, 어제 그 사람이 계산하던데.”
시큰둥한 얼굴이 어제도 카드를 꺼냈었다. 운동선수가 벌이가 좋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 젊은 선수에게도 해당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게다가…….
―…강희찬이?
“응. 그 사람 하나도 안 먹더니 돈 내더라. 나중에 돈 드리려고 했는데 먼저 가시더라고.”
나이가 어린―게 분명할― 사람을 향한 기묘한 존대를 송재혁은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냅둬. 걔 돈 많아.
“…야.”
대신 흘러나온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이선은 할 말을 잃었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송재혁은 본인과 남의 지갑의 경계를 애매하게 생각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인 자신과의 일이어야 한다.
설마 나한테나 하고 다니는 짓을 직장에서도 하는 건 아니겠지. 이선은 문득 친구의 직장 생활이 몹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무튼, 네가 돈 줄래? 내가 나중에 너한테 현금으로 줄 테니까.”
―정이선 선생님.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 너 지금 포털 들어가서 강희찬이라고 검색해 봐라.
“왜.”
―빨리해.
왜 또 귀찮게.
중얼거린 이선은 통화 중인 핸드폰으로 포털 사이트의 앱을 실행시켰다. 항상 듣기만 했던 이름이 정확히 ‘이찬’인지 ‘희찬’인지 헷갈렸지만, 금방 해결되었다. ‘강’까지만 적어도 아래에 완성되는 검색어 목록 중에 ‘강희찬(야구선수)’라는 이름이 떴기 때문이었다.
자동 완성이 되는 걸 보면 검색하는 사람이 꽤 많은지도 모르겠다. 자주 경기에 나가지 않는 선수라도 포털에선 검색어가 완성될 정도라니. 확실히 야구는 한국에서 인기 스포츠가 맞긴 하다.
―검색했어?
“어. 프로필 뜨는데?”
―프로필 맨 밑에 연봉 나오지? 그거 봐라.
고작 이런 거 보라고 이 귀찮은 짓을 시킨다. 얼른 맞춰주고 통화를 마무리 지어야 교무실로 돌아갈 수 있을 듯했다.
한숨을 내쉬며, 얌전히 시키는 대로 연봉 항목을 봤을 때 이선은 약간 주춤했다.
―봤지? 걔 한 달 월급이 우리 연봉보다 높다.
…만원 단위 앞에 숫자 다섯 자리가 붙으면 얼마인 거지?
전화기를 잡지 않은 왼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속으로 셈하고 난 후에야 정확한 단위를 깨달았다.
교실이 조용한 덕에 쩌렁쩌렁 흘러나오는 송재혁의 목소리는 마치 ‘네 표정은 안 봐도 뻔하다’는 톤이다.
프로필 사진 속 얼굴은 평소의 무표정에서 심드렁한 기색이 빠진 채였다. 이 표정이라도 찍으려고 사진기사는 ‘살짝만 웃으실게요’를 골백번을 외쳤을지도 모른다.
사진 속 얼굴이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이선은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웃었다면 좀 더 잘 어울릴 텐데.
야구선수가 아니라 연예인 같은 것을 했다면, 억지로라도 생글거리며 얼굴에 어울릴 웃음을 지었겠지. 기껏 부모님께서 잘나게 낳아주신 얼굴이 다 아까울 정도였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차던 이선은 이름 아래에 있는 생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입을 벌려야 했다. 자신의 것보다 3년이 늦었다.
스물다섯에 억대 연봉이라니. 2년이 모자란 서른 해를 살아온 3년 차 공무원인 정이선의 금전 감각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현실이다.
야구는 확실히 인기 스포츠가 맞았다. 경기에 자주 나가지 않는 후보 선수의 연봉이 억대라면, 매일 경기에 출전하는, 자신도 이름을 알 정도의 선수들은 얼마를 받을지 가늠되지 않는다.
이내 이선은 부러움도 들지 않는, 현실성 없는 숫자가 주는 충격에서 겨우 벗어났다.
“근데 이거랑은 상관이 없잖아. 내가 사겠다고 해서 데려간 건데. 나중에 따로 식사 대접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솔직한 말로 다시 그 불편한 자리를 만드는 건 영 내키지 않는다. 그런 마음이 십분 담긴 탓에 이선의 말끝은 흐려졌다. 송재혁이 그 속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간 무언가를 고민하기라도 하듯 긴 숨소리만을 내뱉었다.
―야, 됐어. 내가 나중에 고맙다고 말이라도 할게. 그리고 따지고 보면, 너도 머리 터졌잖아.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안 터졌거든.”
멀쩡히 잘 있는 남의 머리를 터트리다니.
괜히 그때 다친 부위부터 찌릿한 감각이 번져온다. 뒤통수보다 살짝 옆에 있는 애매한 부분을 슬쩍 손바닥으로 감쌌다.
야구공에 맞고 난 며칠 동안은 혹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조차도 지금은 사라지고 매끈해졌다. 대신 아침에 제대로 말리지 못해서 멋대로 뻗친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이 머리 때문에 오늘 하루 종일 아이들이고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들이고 할 것 없이 한마디씩 건넸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아버지를 닮은 생머리란다. 생머리인데 왜 한 번 뻗치면 도저히 수습이 안 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번 억지로 가라앉혀보려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지만, 두피만 아파오는 통에 포기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퇴근할 시간이기도 했고.
이선은 풍물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져서인지 아직도 정규수업을 할 때처럼 밝았다. 익숙한 민요 가락 중간마다 깡깡거리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섞여든다.
처음엔 누군가 깡통을 세게 차나 싶었지만, 이내 그것이 야구부의 배팅 연습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학교에 처음 부임했을 땐 저 소리를 듣고 이선은 감독이나 코치가 시범을 보여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고학년 정도만 되어도 힘과 요령이 붙어서 제법 매섭게 방망이를 돌릴 수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적 있었다.
날도 더운데 고생이겠네.
짧은 감상은 이내 여름이면 야구부 학생들이 슬슬 늘어지기 시작한다고 걱정하던 감독의 얼굴로 이어졌다.
“혹시, 요새 야구 하는 고등학생들 많이 바빠?”
―요새? 그러겠지. 청룡기 시즌인데.
“프로 지명받았는데도?”
―1차 지명? 야, 그거랑 상관없어. 지명받을 정도면 감독이 더 굴리지.
프로 지명을 받아도 입단을 하지 않았으니 아직 고등학교 소속이라는 송재혁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선은 어렴풋이 감을 잡았다.
―근데 그건 왜?
“우리 학교 야구부 감독님 제자가 이번에 지명받았나 봐. 와서 애들 좀 만나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시는 것 같은데……. 계속 바빠?”
―전국대회 더 있어. 그거 다 끝나도, 1차 지명받을 정도면 청대 뽑히겠고.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선은 ‘으응’이라며 대답도 추임새도 아닌 맞장구를 넣었다.
송재혁은 이렇게 야구에 문외한인 자신이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물론 그건 야구에 흥미가 없는 이선이 적당히 알아들은 척 넘어간 탓이지만.
―누군데? 우리 구단이 뽑은 앤가? 서울 아냐?
“제일 먼저 뽑혔다던데, 이름은 모르겠다.”
―그럼 KC에서 뽑은 애겠네. 우리 구단에서 뽑았으면 내가 물어보기나 하려고 했는데……. KC면 구단도 허락 안 해줄걸.
“그래?”
―원래 뽑히고 나면, 봉사활동이고 뭐고 다치지 말고,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주는 게 최고거든. 괜히 입단도 전에 술, 여자 문제 터지면 피곤하다.
“고등학생이 무슨 술, 여자야.”
기가 막힌 이선을 향해 전화 속 송재혁의 목소리는 뭘 모른다는 듯이 끌끌 혀를 찼다. 운동부 학생들의 사생활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대신 정이선은 경험해 보지 못한 신인 야구선수들의 향후 일정을 줄줄 읊어댔다.
대회가 다 끝난다고 한가해지는 건 또 아니란다. 입단 후 구단에서 실시하는 테스트에서 눈도장을 찍기 위해 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코치들의 눈에 들고, 운이 정말 좋으면 1군 캠프에 따라가서 감독에게 이름이라도 한 번 알릴 기회를 얻는단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한 시기부터 감독 한 사람의 눈에 들어야 하는 경쟁 체제는 확실히 이선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아무튼, 차라리 아예 프로선수한테 부탁하는 게 나을걸. 2군이라도 잠깐 쉬는 시기 있으니까. 초등학교 봉사활동이면 구단이 허락할 만한데……. 프로 중엔 제자 없으셔?
“응. 이번에 걔가 첫 제자래.”
―아. 그럼 좀 힘들겠네. 황사기 때부터 그 학교 감독이 어떻게든 걔만 써보려고 별 개지랄을……!
한숨에 섞인 송재혁의 목소리가 중간에 뚝 멈췄다.
전화가 끊긴 건가 싶어서 이선은 슬슬 뜨거워지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확인했지만, 통화 시간은 착실히 올라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다시 귓가로 가져간 핸드폰에선 나지막이 중얼대는 듯한 송재혁의 목소리가 다급히 흘러나왔다.
―야. 내가 나중에 다시 걸게.
뚝.
그와 동시에 끊긴 통화에, 이선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한참 화면을 바라봐야 했다.
* * *
“내가 나중에 다시 걸게.”
래퍼에 빙의라도 된 기분으로 빠르게 말을 뱉어냄과 동시에, 송재혁은 통화종료 버튼을 무자비하게 눌렀다. 촬영 때만 하더라도 연습복을 입고 있더니, 어느새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강희찬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어차피 유니폼 입을 거면 아까 촬영할 때도 입어주면 좀 좋냐.
차마 입으로는 뱉을 수 없는 불만의 말을 삼키며 송재혁은 핸드폰을 손 안으로 감추었다. 정이선. 단순하게 저장된 친구의 이름을 저 양아치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다.
비록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친구의 중요한 사생활을 까발린 격이 되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저 약아빠진 양아치와 마주칠 일이 없게 하면 된다.
본인의 말마따나 강희찬이 이리저리 소문을 내고 다닐 타입은 아닐 터였다. 그래도 간악한 어린놈의 수작질에 넘어간 분이 영 풀리진 않는다.
눈빛에서부터 적대감과 경계를 잔뜩 보이는 송재혁의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희찬은 태연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강희찬은 선발 등판을 하는 날이면 항상 이 시간에 타자를 세워놓고 라이브 피칭을 하곤 했다. 지금의 송재혁은 그 규칙적인 일상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 죄책감이 없는 얼굴로 말을 걸기까지 한다.
“그 친구예요?”
“…네.”
쌩까려는 마지막 자존심은 서늘한 시선 앞에 덧없이 무너졌다.
안 그러려고 하지만, 운동선수들이란 체격에서 주는 압박감부터가 장난이 아니었다. 튀어나온 입만이 유일하게 송재혁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었다.
“술, 안 먹었다는데요.”
따지는 말은 스스로가 듣기에도 허접했다.
여기가 야구장 복도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 구단의 직원만 아니었다면, 깽값을 받아낼 각오를 하고 한마디 쐈을지도 모른다. 아니, 꼭 그래야 했다.
“먹었다고 얘기한 적 없어요.”
태연히 붙는 대꾸에 송재혁은 순간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렸다.
딱 한 대만 치고 싶다. 열 대를 처맞는 한이 있어도 딱 한 대만 때릴 수 있다면, 인생의 후회 한 점 없을 텐데……. 물론 후폭풍은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스파이크를 신은 상태라 평소보다 약간 더 높아진 얼굴을 향해 시선을 흘긋 던졌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표정이 설마 웃는 건 아니겠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계속 보는 대신 송재혁은 눈을 깔았다.
정이선이 술을 마신 게 아니라면 더더욱 이 귀신같은 놈이 어떻게 알았는지 출처가 궁금해진다.
몇 년을 알아온 송재혁에게도 아직 제대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꺼리는 놈이다. 조심스러운 성격은 공무원이 되고 난 후 더욱 심해졌고.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겁 없이 털어놓기에는 너무 이야기의 충격파가 크지 않은가.
‘…정 선생이 게이처럼 생긴 스타일이었나?’
10년 가까이 봐온 친구의 얼굴을 새삼 떠올렸다.
사내놈들 얼굴 따위야 주의 깊게 보고 싶진 않아도, 둘이서 술을 마시다가 문득 놀란 적이 있었다.
눈 위에 옅게 그려진 쌍꺼풀의 두께마저도 양쪽이 같을 만큼 섬세하게 대칭을 잘 이룬 얼굴이었다. 정작 본인이야 얼굴은 다들 양쪽이 똑같이 생긴 것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하긴, 말 한번 섞어본 적 없는 고등학생 시절에도, 남학교가 아니었다면 제법 인기가 많았을 거라 생각한 적 있긴 했다.
호리호리하고 얌전한 분위기가 요새 젊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 아닌가? 아, 여자들 눈에 괜찮으면 게이한테도 인기가 많을 상인 건가. 어차피 보는 눈이야 게이든 여자든 두 개 달려 있을 테니.
‘그래도 ‘그런 쪽’의 분위기는 안 나는 것 같은데…….’
커밍아웃을 한 할리우드 스타가 아닌 이상, 송재혁이 아는 게이는 한 명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제법 확신을 하고 말할 수 있다. 정 선생은 그냥 보기에도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굳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같은 학교 동료인 여교사와 얌전히 연애하다가 결혼할 것 같은 스타일에 가까웠다.
“간다고 해요.”
“…네?”
영양가 없는 생각을 멈추게 한 건 건조하고 간단한 한마디였다. 그조차도 제대로 듣지 못해서 되묻는 송재혁을 향해 짜증스러운 시선이 붙었다.
“학교. 월요일이라도 상관없으면.”
강희찬에게 더 설명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에이스 투수의 라이브 피칭을 도와줄 오늘의 타자가 직접 투수를 찾으러 왔기 때문이었다. 땡볕에 서 있었던 모양인지 새카맣게 탄 앳된 얼굴엔 벌써 땀이 줄줄 흐른다.
타자 하나와 투수코치. 강희찬은 본인이 바깥에서 기다리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느릿한 걸음을 떼었다.
“…뭐라는 거야.”
뜻 모를 소리만 멋대로 내뱉고는 사라진다. 거기에 대고 송재혁은 허벅지 근처에 있던 오른손 중지를 소심히 날렸다. 이내 구장 복도를 울리던, 스파이크 밑창과 바닥이 만나며 내는 소리가 멈추었다. 뚝 멈춘 걸음에 송재혁은 가운뎃손가락을 갈무리했다.
송재혁이 손가락을 접음과 동시에 강희찬은 다시 걸음을 떼고 복도의 코너를 돌았다.
‘새끼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식겁했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송재혁의 의문이 풀린 건 금방이었다. 강희찬이 향하던 길목에 있는 창문.
“…아씨, 창문…….”
그곳에 온전히 비치는 자신의 인영을 확인하고 송재혁은 머리를 헝클었다.
* * *
팀은 주중 원정경기를 다녀오고 오랜만에 잠실에서 금요일을 맞이했다. 송재혁은 그제야 맥락 없는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의 짧은 노크 후, 바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두 사람의 조합이 색다르다. 아니, ‘색다르다’고 하면 좀 이상하려나.
강희찬과 윤태성. 동갑내기 선발투수와 마무리 투수였다.
그들을 향해, 옛날 일본 야구만화 같은 조합이라고 송재혁은 속으로 평하곤 했다. 그런 생각은 자신만 하는 건 아니었다. 윤태성이 재활을 마치고 1군에서 경기에 나가기 시작할 때부터 구단이고 방송사고 저 조합의 인터뷰를 하려고 난리였으니 말이다.
‘별로 할 말 없는데요.’
‘뭐 한다고 그럽니까.’
물론, 똑같은 얼굴을 해서는 둘 다 퇴짜를 놓기 바빴지만.
…그래서 저 둘은 사이가 좋은 거냐, 좋지 못한 거냐? 그렇게 물으면 상사인 홍보팀장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뭐, 나름 잘 지내는 것 같지 않아?’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을 덧붙이며.
학교마다 반드시 누군가는 ‘에이스’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좌완인지 우완인지. 구속이 130인지 150인지는 둘째 문제다. 무리 중 잘하는 누군가는 에이스라는 감투를 쓰고 마운드에 올라야 한다. 상대에게 철저하게 두들겨 맞으며 마운드에서 눈물을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짊어져야 하는 역할이었다.
‘에이스’라는 호칭에 누구보다 어울리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게 익숙한 인생들이었을 거다. 학교에서든 입단도 하지 않은 연고지 구단으로부터든.
가장 닮은 모습으로 살았던 인생들의 궤도가 한순간에 틀어졌다. 그 기구한 삶의 모습을 직접 봤기에 팀장은 말을 아꼈는지도 모른다.
“둘이 웬일이야? 송 PD 영상 찍어?”
‘설마, 그럴 리가!’
프런트 사무실에 온 두 선수를 향해 홍보팀장이 서글하게 말했다. 송재혁은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카메라를 든 자신을 보면 피하거나 눈으로 쌍욕을 하거나 입으로 성질을 내거나. 셋 중 하나였다. 자진해서 촬영을 온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사복을 입을 때도 모자를 자주 쓰는 윤태성은, 버릇처럼 쓰고 있던 모자를 슬쩍 벗었다가 다시 썼다.
“올스타 경기 참가, 어디 말합니까?”
“아, 그거? 저기에. 신 대리, 여기 선수들 좀.”
팀장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쭉 빼더니 운영팀의 대리를 불렀다. 이쪽으로 오라는 신 대리의 말에 윤태성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둘 다 투수니까 작년처럼 퍼펙트 피처에 나가는 거 아닌가?
인터넷 서핑을 위해 마우스를 달칵거리면서도, 송재혁의 귀는 저절로 파티션 너머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희찬이도 바꾸는 거 아냐?”
홍보팀장의 질문에 강희찬은 본인의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보더니 인상을 팍 썼다. 마치 어딘가 몸이 아픈데, 어느 병원을 가야 할지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본인을 흘긋거리는 직원들의 시선이 짜증 났는지 강희찬은 인상을 더욱 구기기 시작했다. 이내 모자를 쓰지 않은 탓에 얌전히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봉사활동 해야 하는데, 어디에 말해요?”
뚝, 하고 공기가 끊긴 듯한 소리가 들렸다면 드디어 미친 거겠지.
저편 원탁에서 들려오던 운영팀 대리와 윤태성의 말소리도 어느 순간 멈췄다. 둘 다 고개는 이쪽을 향한 채였다.
한 단어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적정 온도로 틀어놓은 까닭에 미지근한 실내 온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으니까.
그중 홍보팀장의 얼굴은 굳어지다 못해 허옇게 질리기까지 했다. 그것뿐일까. 당이 떨어진 사람처럼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잇새로 바람 빠지는 풍선인 양 숨이 몇 번 튀어나오더니, 팀장은 겨우 운을 떼었다.
“너, 봉사를…….”
“…….”
“네가 미리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사회봉사 명령 떨어지면, 가라는 데 가서 해야지…….”
힘이 쫙 빠진 목소리는 차라리 떨림이었다. 본인의 책상을 짚은 양팔이 아니었다면 이미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을 게 뻔했다.
팀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무실엔 짧은 타자 소리가 울렸다. 사람 이름 석 자와 엔터키를 누르자, 포털 사이트는 이내 검색 결과를 토해냈다.
송재혁은 뉴스 탭을 누르고, 기사를 최신순으로 정렬 후 스크롤을 쫙 내렸다. 혹시 몰라 다른 포털 사이트에도 똑같이 검색했지만, 나오는 건 저번 주 등판 결과와 짧은 경기 후 인터뷰가 실린 기사들뿐이다.
…일단 정식 기사는 아니구나.
구단과 관련된 보도자료의 대부분은 홍보팀을 통해서 나간다. 하지만 요새 기레기들이란 엠바고가 뭔지도 모를 것들이 수두룩했다.
‘그러고 보니 요샌 본인들 SNS에 까던가?’
“너 내가 옛날부터 얘기했잖아. 사고를 치면 재깍재깍 보고해야, 기사를 막든가 변호사를 부르든가 한다고!”
“…….”
“무슨 짓 했어? 음주운전? 사람 팼어? 여자 문제야?”
앞에 두 개는 소름 돋는데, 마지막 건 그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끔찍하다.
“사고 안 치는 게 유일한 장점인 놈이…….”
여자 문제.
팀장이 뱉은 마지막 선택지를 떠올린 송재혁은 재빨리 컴퓨터와 핸드폰에 깔아둔 SNS를 실행했다. 그거라면 정식 기사보다는 이쪽에 먼저 뜨겠지.
해시태그와 함께 ‘SH컵스강희찬’이라는 글자를 재빠르게 치던 도중, 옆자리의 사원과 눈이 마주쳤다. 이미 김정규는 어지간한 SNS는 다 탐방을 마쳤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걸리는 게 없다는 소리였다.
뭐가 됐든 아직 안 터졌으면 됐다. 지금부터가 문제긴 하지만.
먹었던 점심이 뒤늦게 체한 듯 명치께가 콕콕 아파온다. 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릴 생각에 벌써부터 진이 빠진다. 의자에 몸을 기대려던 송재혁은 순간 자신을 향한 시선을 깨달았다.
강희찬이 이쪽을 향해 사납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눈빛으로 자신에게 쌍욕을 날리고 있었다. 뒤로 기대던 몸이 애매한 위치에서 멈췄다. 어정쩡하게 멈춘 자세 탓에 등과 배에 담이 올 것 같다.
…내가 뭘? 왜 그렇게 보는데? 송재혁의 억울함이 채 닿기도 전에, 강희찬은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애라도…, 뭐?”
어금니를 물고 씹어뱉는 듯한 강희찬의 말에 팀장의 기세는 한 꺼풀 꺾였다.
“음주운전 안 했고, 사람 안 쳤습니다.”
“…….”
“인터넷에 쓸데없이 사생활 올리는 여자는 만나본 적 없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 강희찬의 말에 팀장은 얼빠진 표정을 유지했다. …그럼 왜? 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홍보팀장의 멍한 혹은 멍청한 얼굴을 보는 직원들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친구라 그런지 윤태성만은 조금 덤덤했지만, 기본적으로 깔린 불신은 마찬가지였다.
“아는 사람 있는 초등학교 야구부, 가도 됩니까?”
“…초등학교?”
말을 마친 강희찬의 시선이 다시 한번 송재혁을 향했다. ‘이다음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라.’ 마치 그렇게 말하는 눈이다.
의아함으로 가득한 팀장의 얼굴은 이제 송재혁을 향했다. 조 팀장과 눈이 마주치자 송재혁은 아차 싶었다.
“아, 저기……. 제 친구 중에 학교 선생님이 있는데, 괜찮으면 거기 야구부 애들이랑 하루 정도…….”
“송 PD 친구?”
“네. 시즌 중이라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요.”
‘너희는 대체 무슨 조합인데?’
강희찬과 자신을 바라보는 팀장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봐도 송재혁 역시 대답할 말은 없었다. 자신이야말로 묻고 싶었으니까.
언젠가 홍보팀장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강희찬이 사고를 치지 않는 이유는 봉사활동을 하기 싫어서일 거라고. 우스갯소리였지만 아예 아니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고등학교 동문들이 기부를 할 때 이름 몇 번 올리는 걸 제외하면, 사적으로는 모교에도 가지 않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휘정고도 아니고 뜬금없이 초등학교에 가신단다. 며칠째 이어지는 폭염과 열대야 탓에 미친 게 분명했다.
“가도 됩니까?”
톤이 일정한 목소리를 듣고, 팀장은 고개를 몇 번 잘게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이내 가로젓던 고개가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재빨리 멈추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말릴 이유는 현재까진 없다.
“뭐… 쉬는 날이면 딱히 상관은 없지. 너만 괜찮으면…….”
팀장의 말은 제대로 끝나지도 못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걸음을 돌렸다. 스무 명이 넘는 사무실 직원들의 혼란스러움은 안중에도 없는 시원스러운 보폭이다.
투수치고는 조금 말랐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뒷모습이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송재혁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모니터 아래로 내렸다.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안 가?”
그러나 강희찬의 목적은 자신이 아니었다. 함께 들어왔던 제 친구를 향해 재촉 아닌 재촉을 했다. 신 대리와 몇 마디를 더 나눈 윤태성이 걸음을 옮기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저 새끼 저거, 제 손으로 문 열기 싫어서 기다린 게 분명하다.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여러 사람이 동시에 터트리는 이산화탄소가 사무실을 채웠다.
“뭐야, 뜬금없이. 온도 좀 내리자. 땀 난다.”
홍보팀장은 입고 있는 구단 반소매 셔츠의 목 언저리를 팔락이며 말했다. 김정규는 리모컨을 집더니 권장하는 실내 적정 온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버튼을 연타했다.
“뜬 거 있었어?”
“아니요. 일단 없었습니다.”
리모컨을 내려놓은 김정규가 대답하자, 팀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강희찬의 말은 믿지 않았다. 쿠션이 푹 꺼지는 소리가 방금까지 내쉰 한숨과 꽤 비슷하다.
멍하니 정통으로 오는 에어컨 바람을 쐬던 팀장은 갑자기 몸을 펄떡였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이 송재혁을 향한다.
“송 PD가 강희찬한테 부탁한 거야?”
“네? 아, 뭐… 네.”
부탁 같은 건 한 적도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긍정뿐이다. ‘그럼 저놈이 왜 저러느냐’고 물으면, 자신 역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기에 대답할 말도 없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사무실의 모든 관심은 송재혁을 향했다. 강희찬이랑 언제부터 그런 부탁을 하고, 들어줄 만큼 친했느냐는 부담스러운 호기심이다.
“웬일이래. 봉사활동 하기 싫어서 사고도 안 치는 놈이. 그런 부탁을 다 들어주네.”
팀장은 골백번은 더 했을 말을 중얼거렸다. 2년째 그의 밑에서 일을 하는 송재혁 역시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바였다.
김정규는 리모컨을 내려놓은 손이 심심했는지 책상을 몇 번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이내 답은 하나라는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그 선생님이라는 친구가 엄청 예쁜 거 아니에요? 떨어질 떡고물을 기대하니까, 저 성격에 초등학교까지 가겠죠. 구단에서 주최하는 리틀야구 개막 행사도 어떻게든 빠지려고 하는데.”
김정규의 말에 송재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희찬은 ‘봉사’라든가 ‘나눔’ 같은 이타적인 말을 들으면 알레르기 반응이라도 오는 인종임이 분명했다. 매년 겨울마다 하는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도 홍보팀장이 직접 아침부터 집까지 잡으러 가야 참석하는 수준이었다. 올해는 이사했다니까 본가 말고 삼성동 오피스텔로 모시러 가겠지.
“설마. 전 애인이 배우였는데. 걔 요새 드라마에 나오더라. 여주인공 동생인가 언니로. 더 이뻐졌던데.”
“팀장님도 그거 보세요?”
“마누라랑 딸이. 난 걔 얼굴 보면 희찬이 생각만 나서 영 집중 안 되더라.”
강희찬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그의 옛 애인이 헤어졌다는 소식은 이승주의 입을 통해 온 구단 관계자가 알게 되었다. 물론, 그 헤어짐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도.
“…기사 터지기 전에 헤어진 게 낫죠. 그래도 여배운데.”
“TV 나오는 사람이라, 그렇게 헤어졌어도 인터넷에 글 하나 안 올리고 얼마나 고마워. 일반인이었다고 생각해 봐.”
끔찍하다, 끔찍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팀장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어컨 때문에 추워서인지 아찔한 생각 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연상이고, 초등학교 선생님이면 딱 좋죠. 강희찬도 슬슬 나이 됐잖아요.”
“내가 강희찬이면 결혼 안 하고 그냥 혼자 살아. 뭐가 아쉬워서 결혼을 하겠어?”
조 팀장은 김정규를 향해 혀를 끌끌 찼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얼굴은 덤이었다.
요새 부인과 그 부인의 말투를 똑 닮은 4학년짜리 딸에게 금연을 강요받고 있는 팀장의 답은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기호품을 빼앗긴 사람은 저리도 예민해진다.
하지만 김정규는 개의치 않는지 연신 조잘거렸다. 산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심드렁하던 송재혁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예뻐요, 그 친구?”
김정규의 말에 송재혁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여교사인 친구를 두지는 못했지만, 연예인 운운하다가 갑자기 물어보면 쓰나.
예쁘다고 하기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기도 애매한 질문이었다. 기대로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김정규의 입은 쉴 줄을 몰랐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 같은 거 없어요? 궁금한데…….”
사진이라. 정 선생의 대학 졸업반 시절에 재회해 번호를 교환한 이후로, 송재혁은 그의 프로필에 본인의 사진이 올라오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작년엔 운동회 때 반 아이들이 단체로 춤을 추는 사진이 잠깐 올라왔었나.
누군가 보기라도 할까, 그래서 자신의 근황을 알기라도 할까 봐 염려하듯 정 선생은 자기 셀카 한 번 프로필에 걸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게 있다고 해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당연히―
“남자예요. 고등학교 동창.”
“아…….”
빔이라도 쏘는 듯이 반짝이던 눈망울에서 이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변 공기마저도 실망으로 그득한 반응에 송재혁의 입에선 헛웃음만 나왔다.
“그런 건 좀 빨리 말해주세요. 괜히 기대했잖아요.”
…기대하라고 한 적 없다.
한마디 하고 싶은 걸 참으며 송재혁은 팀장의 자리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강희찬 선수, 어떻게 할까요? 너무 바쁘면 시즌 끝나고도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뭔 소리야, 송 PD. 저거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보내야지.”
팀장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을 했다. 눈길은 이미 직원들 책상마다 하나씩 있는 탁상달력으로 향했다.
“당장 다음 주 월요일에 간다고 학교에 얘기해. 잠실 경기네, 화요일.”
“…그렇게 빨리요?”
“변덕이 얼마나 심하시냐. 커피도, 씨발, 3분 전엔 설탕 들어간 거 먹겠다고 하다가 갑자기 싫다고 하는 놈인데. 질질 끌었다간 나중에 그딴 말 한 적 없다고 한다. 말 바꾸기 전에 빨리 데려가.”
팀장은 강희찬과 다른 추억이 있는 게 분명했다. 말을 들어보니, 커피 셔틀이라도 당했나 보다.
저 에이스 선발투수에게 인터뷰 요청을 할 수 있는 건 구단에선 홍보팀장이 유일했다. 그 말인즉, 직원 정도가 한 번만 방송사나 신문사 인터뷰를 하자고 말해서는 끄떡도 없다는 소리였다.
강희찬은 팬서비스를 하면 화병이 나거나, 머리가 빠지거나. 하다못해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불같기로 유명한 최 감독이 그 꼴을 참고 있다는 게 프런트 직원들 사이에선 정설이었다.
봉사활동에 갔다가 화병 나서 드러눕는 건 아니겠지.
말이 안 되면서도 의외로 현실감이 느껴지는 생각에 송재혁은 슬쩍 혼자 웃었다.
“송 PD.”
“…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때문에 송재혁은 생각을 들킨 것처럼 뜨끔했다.
“미안한데, 월요일에 같이 가서 좀 찍자. 친구 학교라며.”
팀장의 얼굴은 어느새 미안함이 반, 면구함이 반이었다. 일주일에 딱 하루 있는 휴일에 일하라고 얘기하는 건, 아무리 상사라도 미안한 일임은 틀림없다.
기름칠이 덜 된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송재혁을 보더니 팀장은 입을 열었다.
“기사로 내보내는 건 너무 요란스럽고, 속 보인다고 할 것 같고……. 조용히 영상으로만 올리면 그래도 이미지 괜찮지 않겠어? 애들한테는 잘해준다고.”
“아…….”
‘퍽이나 조용한 방법이다.’
송재혁은 이죽거림을 애써 삼켰다.
강희찬이 봉사활동 한다고 온 신문사에 보도자료를 내보내는 거나 구단 채널에 영상 올리는 거나,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어떻게든 땅에 떨어진 이미지를 쇄신해서 유니폼 판매량에 일조해 보겠다는 의지가 눈물겨우면서도 귓가가 홧홧해질 지경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은 모르게 하라던데. 이 정도면 왼손뿐만 아니라 북한까지 소문이 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평소에 얼마나 거지같이 하고 다녔으면 초등학교에 행차하신다고 구단 카메라가 붙어, 붙기를.
“나중에 휴가 하루 더 빼줄게. 하루만 고생해 줘.”
“아, 네. 그럼요.”
‘슈퍼을’도 아닌 가장 보통의 을인 송재혁의 대답도 하나뿐이다.
“와, 좋겠다.”
태평한 말이나 하는 김정규의 얼굴을 보며 송재혁은 영혼 없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딱 한 번만 죽여봐도 되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일단 나쁜 애는 아닌데 한 번씩 좆같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송재혁의 속을 모를 김정규는 그저 팀장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도 이 주제가 마음에 드나 보다.
송재혁은 이미 폭염에 의한 이상 행동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김정규는 아직도 원인을 찾고 있었다.
“여자 목적도 아니면… 왜 갑자기 가죠? 애들 좋아했나?”
김정규의 새로운 가설에 팀장의 입에선 픽, 하고 바람 새는 소리가 울렸다.
“우리 강희찬이의 장점이 뭔 줄 알아? 남녀노소 안 가리는 공명정대함에 있어. 사인도 여자한테만 해주면 좆같은 새끼라고 소문날 텐데, 여자고 어린애고 똑같이 안 해주니까 차라리 한결같고 대쪽 같은 새끼라고 하잖냐.”
“…진짜 사고 친 거 아니에요?”
숱한 가정들이 차례로 부정당했다. 김정규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에 팀장은 작년에 비해 허전해진 이마를 한 번 쓸었다.
“…그런 무서운 소리는 하지 말아주라, 정규 씨.”
송재혁 역시 속으로 동감을 표했다. 팀장은 한참을 고민하듯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송 PD. 일단 학교엔 강희찬이 간다는 말은 하지 말자. 저거 또 마음 바뀔 수 있으니까.”
이 역시 동감이었다.
* * *
“드세요. 식사 못 하셨죠?”
웃을 때마다 곱게 눈이 접히는 얼굴은 칙칙한 무채색도 제법 잘 소화를 한다. 이선은 반은 제정신이 아닌 채로 입을 겨우 열었다.
“아, 네. 잘 먹을게요, 김 선생님.”
“엄청 많이 오셨나 봐요. 이선 쌤이 제일 늦게 끝났어요.”
에너지바 반 개가 들어찬 덕분에 이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이런 날이면 꼭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아홉 살 때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신 이후로, 이선에게 공개 수업이나 학예회는 영 달갑지 못한 행사가 되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하면서 학교에서 어머니를 볼 일은 없어졌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고 해서 서운함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둘뿐인 사진은 셋이었던 시절에 비해 공간이 너무 많이 남아 보였다. 아무리 글자를 크게 쓰려고 해도 엄마와 자신의 얘기만으로는 넓은 공간을 다 채우지 못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셨지만, 아버지의 빈자리는 작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었기에 더 크게 느껴졌다.
참는 데 익숙한 정이선이 울음을 터트린 건 게시판을 보며 ‘이선이네 아빠 없어?’라고 수군거리던 여자아이들의 목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학예회 무대에서 오롯이 자신만을 향한 카메라가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도 아니었다.
더운 여름날, 어릴 적 억지로 사 주셨던 아이스크림이 문득 생각나 슈퍼에 갔을 때, 더는 그 상품은 팔지 않는다던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운동화 앞코로 툭 떨어진 눈물에 아주머니는 이선보다 먼저 놀라셨다.
‘애기 왜 울어. 응? 아줌마가 초코 맛으로 줄게. 호박보다 초코가 더 맛있는 거야. 응?’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어쩐지 어머니를 향한 죄책감과 항상 함께였다.
높이 이선을 들어 올려주던 아버지의 애정표현을 마른 체구의 어머니가 해줄 수는 없었다. 공원에서 캐치볼을 할 일이 없어진 탓에, 아버지가 쓰시던 글러브는 이사를 다니던 어느 순간 사라졌다. 목이 빠져라 고개를 들면 뜨거운 햇살에 섞여 보이던 미소 역시 점점 흐릿해졌다.
어릴 적부터 이어져 온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보통 남자들과는 다른 성향으로 변질된 걸까?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니었으면 싶기도 했다.
‘나는 왜 남들이랑 같지 못한 걸까?’ 질문을 던질 때마다 차라리 이유가 있었으면 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홀로 남들과 다르다는 건 너무도 억울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엔, 항상 못난 성향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만 남는다.
끅끅거리는 울음을 그치지 못한 탓에, 쭈쭈바를 쥐여 주고도 아주머니는 한참을 밖에서 이선이 가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집으로 오며 반은 먹고 반은 흘렸던 아이스크림은 손을 씻어도 한참이나 끈적함이 남았다. 아버지를 향한 기억은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이선 쌤.”
이선의 책상을 주먹으로 톡톡 두드리는 김경원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핸드폰이 울렸다며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진동으로 돌린 탓에 책상 위에서 득득거리던 소음을 이선을 제외한 교무실에 있는 모두가 듣고 있었다.
메시지가 연속으로 오고 있다. 인간관계가 얄팍한 정이선의 주변에서, 이런 패턴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인간은 한 명뿐이다.
이선은 재빨리 핸드폰을 들고 잠금을 풀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학교 몇 시에 끝나냐?]
[야구부 몇 시쯤에 시작하지?]
[맞춰서 갈게.]
급한 성격 탓인지 몰라도 송재혁은 메시지를 한꺼번에 보내는 게 아닌, 한 문장씩 짧게 끊어서 보내는 편이었다. 비단 지금뿐만 아니라 한창 바쁘던 이른 오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주 월요일에 선수 하나 데리고 야구부 갈게. 혹시 촬영 괜찮냐?’
청소 구역을 확인하던 이선은 송재혁이 와다다 보낸 문자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들려온 말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뜻으로 물어봤던 건 아니었다고,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송재혁은 막무가내였다.
‘정 선생. 지금은 너 말고 학교랑 감독님 의견이 중요한 순간이거든. 미안한데 좀 물어봐 줘.’
그 덕에 이선은 청소지도를 했고, 교감 선생님을 만나 촬영 허가를 받았으며, 일찍 출근한 야구부 감독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생각해 보면 오늘 이선의 진이 빠진 가장 큰 원인은 수업도 상담도 아닌, 송재혁이었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덕분에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한 경험을 해야 했으니까.
선수 이름 하나 말해주지 않아도 야구부 감독은 연신 이선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야구선수는 어떻게 아는 거야?’
신기한 듯 묻는 감독을 향해 친구가 야구단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을 세 번쯤 뱉어도, 들은 체를 하지 않았다.
시간표를 확인한 이선은 검게 변한 화면을 한 번 눌렀다. 그리고 나타난 채팅창 위에 답을 쳤다.
[우리 학년은 1시 조금 넘어서 끝나는데, 고학년은 3시 거의 다 돼야 정규수업 마칠 거야. 고학년들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훈련 시작하는 것 같더라고.]
[ㅇㅇ]
길게 이어진 자신의 메시지 아래로 빠른 대답이 올라오자 이선은 얼핏 허무해졌다. 용건이 끝났다 이건가.
그래도 자신의 얘기를 듣고 직장에 부탁까지 해준 녀석이었다. 자음 두 개가 아니라 욕이 날아왔어도 고마운 건 변하지 않았다.
“…….”
이선은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응시했다.
인생의 리셋 버튼을 간절히 찾던 순간들이 있었다. 게임처럼 다시 시작하는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디로 갈지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게임이 아니었다. 리셋 버튼이란 애초부터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 시작한 20대의 시간 속에서, 리셋 버튼을 누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긴 건 딱 한 순간이었다.
‘…안녕?’
어느 추운 겨울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서 익숙한 듯 낯설었던 송재혁을 봤던 그때.
* * *
[야, 너네 학교 혹시 옛날에 중앙초였냐? 이름 바꿨어?]
[그럴걸? 연혁에서 봤던 것 같다.]
며칠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탓에 불지옥이 된 날씨 속에서 씽씽이는 열심히 구워지고 있었다. 송재혁이 타고 있는 차량 내부야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어도, 쏟아지는 햇빛은 선팅한 유리창 정도는 우습게 뚫고 들어왔다.
운전석에서 20분째 햇빛과 씨름하며 잔뜩 찡그리고 있던 송재혁은 룸미러로 문득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자 기분이 잡쳤다.
개 같은 햇빛새끼. 못생김까지 선사하고 있다.
메신저 앱을 종료한 핸드폰을 대시보드 위에 두었다.
팀장에게서 받은 강희찬의 새 주소를 보며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땐, 시곗바늘은 오후 3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밖엔 가끔 돌아다니는 경비원을 제외하면 사람 하나 없었다.
‘그 성격에 미리 출발했을 리는 없고…….’
10분 더 기다려봐도 안 나오면 전화라도 해야겠네.
그런 생각을 할 무렵, 20대 남자 혼자 자취하기엔 위치적으로나 외관상으로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오피스텔 입구에서 인영 하나가 나왔다.
스포츠 브랜드의 피케티셔츠와 손목 보호를 위한 건지 왼손에 하고 있는 보호대가 세트처럼 똑같은 검은색이다.
햇빛을 가리려는 손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순식간에 찌푸려진다. 애석한 건 방금 전 봤던 자신의 얼굴처럼 못생김이 묻어나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좆같은 햇빛새끼가 사람까지 차별하고 있다.
“강희찬 선수!”
송재혁은 황급히 운전석에서 내렸다. 자신의 외제 차에 타려던 강희찬은 뒤를 도는 순간, 이미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더욱 구겼다.
돈을 떼어먹힌 것도 아닌데, 저런 반응이라니. 하지만 송재혁이 의기소침해질 새도 없이 강희찬은 사나운 얼굴을 하고 이쪽으로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왜 왔어요.”
대뜸 건네는 말도 이 정도면 양호하다.
“제 차 타고 가세요. 운전 번거롭잖아요.”
“왜 왔냐고 두 번 물어봐야 돼요?”
위협적인 눈은 지글거리는 오후의 태양과 닮았다.
어떻게 팀장님은 봉사활동 때마다 이런 거를 데리러 왔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그땐 본가라서 부모님들이 같이 계셨으니까 괜찮았으려나. 이 망나니가 부모님이 있고 없고를 딱히 따질 것 같진 않지만.
“혼자 가면 민망하잖아요. 나도 오랜만에 정 선생 좀 보고, 겸사겸사.”
“카메라 가져왔어요?”
“뭐… 그것도 겸사겸사.”
송재혁은 유들유들한 직장인의 거짓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다시 들어갈까.’
직장인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본 순간 강희찬은 짧은 충동에 휩싸였다.
일단 직접 뱉은 말이 있었기에 나오긴 했지만, 오전에 피트니스 센터에 들렀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더웠다. 거기에 밖에서 기다리는 카메라맨의 꼴까지 보자니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야구장에 있을 때야 적당히 참아 넘긴다고 쳐도, 휴일 개인 일정까지 나타나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마음대로 찍어도 돼요?”
“정 선생이 일단 학교 허락은 받아줘서 괜찮을 거예요.”
…내 허락은 어디 팔아먹었는데.
일부러 핵심을 피하고 있는 상대와의 대화는 불쾌지수만 높인다. 강희찬은 포기한 채로 손을 휘휘 젓고 뒤를 돌았다.
“일단 타세요. 덥잖아요.”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가려던 걸음을 순간 멈췄다.
자신의 차는 이 땡볕에 생각 없이 두 시간이 넘도록 바깥에 주차해 뒀다. 타지 않아도 이미 그 안은 뜨거워졌을 게 뻔했다. 그건 외제 차라고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생각을 마친 강희찬은 두 번 타본 적 있는 흰색 승용차의 외관을 살폈다. 이내 군소리 없이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찰나로 스쳐 간 의심의 눈빛을 송재혁은 이미 한 번 경험한 바 있었다. 정 선생 역시 자신이 처음 중고차를 산 후, 태워주겠다는 말을 듣고 저런 얼굴로 물었다.
‘이거 주행거리가 몇이야?’
솔직하게 주행거리와 매입가를 불자, 드물게 인상을 구긴 정이선은 그렇게 비싸게 샀냐며 타박했다. 좋지 못한 기억이 살짝 있긴 했지만, 어쨌든 씽씽이는 철마 부럽지 않게 잘만 달린다.
씽씽아, 기뻐하렴. 네가 100년 가까운 역사의 독일 차 브랜드의 메인 모델을 이겼단다. 아빤 네가 무척이나 자랑스럽구나.
더위 탓에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을 방치한 채, 송재혁은 운전석에 올랐다. 시원한 실내에서 강희찬은 나지막이 욕을 뱉으며 시트를 뒤로 밀고 있었다.
운동선수는 운동선수였다. 준중형차의 조수석이 묘하게 좁아 보였다. 아주 잠깐 그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는 몹쓸 생각을 떨치려 송재혁은 고개를 돌렸다.
“말하세요.”
“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킨 순간 강희찬의 목소리는 뜬금없이 박혀들었다. 오피스텔 입구를 서행으로 빠져나가며, 흘긋 본 옆얼굴은 늘 그렇듯 시큰둥했다.
멍한 소리를 낸 송재혁의 반응에도 강희찬은 여전했다.
“할 말 있으니까 억지로 태운 거 아니에요?”
뭘 또 억지로 태웠다고…….
지루한 듯이 손톱을 보고 있는 모습에 송재혁은 기가 막혔다.
키로 보나 덩치로 보나 성질로 보나, 내가 널 어떻게 차에 억지로 태운다는 거냐.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게 더 쉽지.
억울함이 샘솟았지만, 어쨌든 저 말의 절반은 맞았다. 그러니까, ‘억지로 태웠다’는 부분 말고 ‘할 말이 있다’는 쪽 말이다.
“졸업하고 오랜만에 가는 거 아니에요? 학교.”
어렵지 않게 진입한 도로는 확실히 출퇴근 시간보다는 한산한 편이었다. 이선의 학교는 이곳과 멀지 않았다.
에두르는 말에 강희찬은 보고 있던 왼손 검지 끝에 더욱 집중했다.
저번에 다듬었다고 생각했는데 묘하게 검지 끝만 손톱이 더 자라 있었다. 콘솔박스를 향하려던 무의식적인 손길은 자신의 차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짜증을 애써 외면하려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작년 비시즌에 갔는데요. 애새끼들 있는 데.”
“아니, 말고…….”
…너 졸업했던 학교잖아.
아무리 친구의 직장이라도 아직 미혼인 송재혁이 초등학교에 갈 일은 없었다. 강희찬을 기다리는 동안 송재혁은 미리 포털에 학교의 위치를 검색했다. 놀랍게도 학교의 연관 검색어에 ‘강희찬’의 이름이 함께였다.
설마 봉사활동은 가지도 않았는데 설레발 기사부터 낸 건 아니겠지. 본인은 지금 나올 생각도 안 하는데…….
송재혁은 자판기 커피를 마실 때면 항상 미리 종이컵을 잡던 팀장의 급한 성질머리를 떠올렸다.
강희찬과 정이선이 근무하는 학교의 상관관계를 알아차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중간에 이름을 한 번 바꾸었다는 초등학교는 강희찬의 모교였다. 야구부가 제법 유명한 초등학교라, 강희찬 말고도 유명한 프로선수 몇을 배출한 곳이기도 했다.
‘설마 그래서 가겠다고 했나?’
짧은 생각은 본인에 의해 직접 부정당했다. 오늘 갈 곳이 본인이 졸업한 학교라는 사실조차도 모른다. 대충 예상했지만 역시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송재혁은 한숨을 삼키며 신호에 맞춰 차를 세웠다.
“정 선생한테는 말 안 했어요, 그 얘기. 알면 괜히 불편할 것 같아서요.”
“네.”
“강희찬 선수도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평이하면서도 제법 단단한 목소리였다.
“…….”
걸렸던 신호가 풀리자 차를 출발시키는 옆모습이 제법 결연해 보인다. 어린애한테 못된 걸 보여주지 않으려는 어른도 아니고. 과보호라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었다.
스물여덟? 아홉? 그 나이대의 동성 친구를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인가, 이게?
강희찬은 자신의 팀 메이트인 동갑내기들을 떠올렸다. 하나는 1군, 하나는 2군에 있다. 그 때문에 하나는 휴식일이 아니라면 매일같이 봤고, 나머지 하나는 분기마다 한 번씩 보면 자주 보는 인간이었다.
‘윤태성은, 혹은 이정민은 좋은 사람 만나야 돼요.’
어느 이름을 갖다 붙여 봐도 ‘알 게 뭐야’ 이상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마디로 엿 같기만 하다.
…그럼 설마 이 직원도 그쪽 성향인가?
“…….”
문득 미친 생각에 스스로가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고 정정했다. 운전대를 잡은 송재혁의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가 그 선생이란 사람의 손에는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희찬은 기억하고 있었다. 날아드는 공에 반응해 카메라를 챙기던 송재혁의 모습을. 고작 카메라가 얼마나 한다고 애인 대신에 먼저 챙길 리는 없다.
멍청하게 피하지 못하고 있다가 공에 맞으며 쓰러지던 모습을 떠올리자 얼핏 웃음이 새었다.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똑같이 교복을 입고 다니는 놈들 사이에서, 유명할 수 있는 요인은 몇 없다. 그것도 한 학년의 인원이 다 알 정도라면 더더욱. 강희찬은 몇 년 전, 학교에 다닐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버지가 선출인 멍청이. 3선인가 했다던 국회의원 할아버지를 둔 놈. 대회에서 상을 받아오는 농구부나 아이스하키부. 대학과는 연이 없는 자신도 이름을 알고 있는 명문대에 들어간 놈들.
아마도 가장 마지막 카테고리에 들어갔겠지.
초식동물처럼 앞니로 오이를 잘게 끊어 먹던 모습을 떠올렸다. 안경을 쓰지 않아도 공부를 잘할 수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고등학교랑… 대학도 같이 나왔어요?”
“아니요. 정 선생은 교대 나왔잖아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 고졸이었지…….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던 송재혁은 혼자 깨달음을 얻었다.
생판 남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를 내가 왜 알고 있어야 하냐? 강희찬의 옆모습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굳이 대한민국의 교육공무원 선발 체계까지 설명해 줄 배려는 없었다. 한다고 해도,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고. 송재혁은 입을 다무는 거로 대화를 종결했다.
“…….”
큰길을 달리던 차가 좌회전을 하자 강희찬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이내 그것이 기시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사 먹을 수도 없는 불량식품을 파는 문구사나 피아노 교습소, 태권도장 통원 차량.
초등학교 주변이란 바뀌는 것 같으면서도 그 특유의 분위기는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10년 전에 이미 초등학교는 졸업했지만 이 동네로 돌아온 순간 느껴지는 감각은 기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여기…….”
완성하지 못한 희찬의 뒷말을 송재혁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차는 어느새 어린이 보호구역의 규정 속도를 정확히 지키고 있었다.
“강희찬 선수 졸업하고 몇 년 있다가 학교 이름이 바뀐 모양이더라고요.”
어릴 땐 책가방과 실내화가 든 보조가방. 거기에 야구부 유니폼을 담고 다니던 가방을 하나 더 들고서 걸어 올라갔던 길이 차를 타니 금방이었다. 아마 직접 걸었어도, 지금이라면 그때보단 수월히 정문에 도착했을 터였다. 명패가 바뀐 초등학교 정문의 높이가 기억보다 많이 낮다.
외부인용 주차 공간에 들어선 차에선 이내 시동이 꺼졌다. 차에서 내리자 분홍, 노랑, 하늘색이 칠해진 건물 외벽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조화고 뭐고, 그냥 예쁜 것 같은 색은 다 갖다 칠하고 본 느낌이 역력했다.
당황과 향수가 뒤섞인 오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강희찬 선수.”
카메라를 챙기느라 한발 늦게 내린 송재혁의 목소리는 더위 탓인지 평소보다 작게 들렸다. 강희찬은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정 선생 다시 본 건 한 5년쯤 전이에요. 정 선생 졸업반일 때. 그전까진 주변에서 소식 들었다는 사람 하나 없었고, 지금도 제대로 연락하고 지내는 건 나밖에 없을 거예요.”
항상 무언가를 부탁하던 유들한 목소리는 나지막하지만 확고하다. 그리고 아래 깔린 의도는 명확했다.
“설마 공무원씩이나 돼서 그러겠느냐마는……. 난 아직도 가끔씩 걔가 말도 없이 또 사라질 것 같거든요.”
“…….”
“행정실에서 주차증 받아야 한다던데, 여기 잠깐 있을래요?”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라는, 유순한 경고를 내뱉던 목소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먼저 가 있겠습니다.”
강희찬의 말에 송재혁은 괜찮겠냐는 물음을 덧붙였다. 꼭 그 선생만은 아닌 듯했다. 정도의 차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송재혁은 주변을 신경 쓰는 편임을 깨달았다.
“어딘지 압니다.”
투수코치가 공을 들고 올라오고, 손에서 공을 놓은 투수는 파울라인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한 번 밖으로 나간 걸음은 다시 그라운드 안으로 들일 수는 없었다. 이미 내려온 경기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선 밖에 있다는 것.
그라운드가 아닌 곳에서는 오랜만에 느껴본 감정이었다.
* * *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추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린 시절엔 뜀박질로도 한참 걸렸던 야구장이 지금의 보폭으로는 느리게 걸어도 금방이었다.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야구장은 초등학생들이 쓰는 것 치고는 그 시절에도 그라운드가 꽤 괜찮았다. 고만고만한 초등학교 야구부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던 이유였다.
야구장 입구로 향하는 야트막한 계단은 머리보다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계단을 끝까지 내려오자 눈에 익은 가건물이 있다.
페인트가 벗겨진 부분을 칠한 듯했지만 낡은 티는 여전하다. 그 앞에는 남자 둘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한 사람은 유니폼 차림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계단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둘 다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아마도 유니폼을 입은 쪽은 선생을 볶아대는 야구부 감독이겠지.
“…….”
눈이 마주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둘 다 물고 있던 담배가 아슬아슬하게 떨어질 듯이 입을 벌렸다.
“…아.”
결국, 트레이닝복은 담배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강희찬을 향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둘 다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오는 게 나았나.
숨을 내쉰 강희찬은 그대로 입을 열었다.
“정이선 선생님 부탁받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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