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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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가까이 이기지 못했다고 해서, 처음부터 열등감에 젖어 있던 건 아니었다. 애초부터 서 있는 위치부터가 달랐다.

동기인 1학년들과 섞여 앉은 강희찬은 무릎에 팔꿈치를 받치고, 턱을 괸 채 가만히 경기를 내려다보았다.

‘…릴리스 포인트가 너무 뒤에 있는데.’

강희찬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선수풀 자체가 좁은 신생 학교도 아니고, 지역 연고 구단에서는 성골로 쳐주는 야구 명문고였다. 그런 곳에서 본선 시합에 선발로 나오는 1학년 투수다.

턱을 괸 자세를 흩트리지 않은 채, 강희찬은 시선만을 움직이며 한 사람을 질기도록 좇았다.

1학년이라도 체구는 투수 태가 났다. 뒤에서 수비를 서고 있는 선배 내야수들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체격의 차이가 나고 있었다.

180 중반? 후반은 아직 아니려나.

강희찬은 3루 관중석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었기 때문에 모호했지만, 그 정도의 신장일 거다.

큰 키를 감안하고서도 팔다리가 긴 편이다. 가지고 있는 체격조건과 일부러 타점을 높게 잡은 투구 폼이 더해지자 공의 낙차가 상당했다. 분명 그건 상대하는 타자가 힘들어할 폼인 건 맞지만, 그만큼 던지는 본인에게도 부담이 갈 건 뻔했다.

일단 그 폼을 처음 본 강희찬의 감상은 간단했다. 아직도 저렇게 릴리스 포인트를 뒤로 두는 폼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긴 했구나. 그게 전부였다.

‘쟤가 걔네. 2층.’

‘…2층?’

1학년들의 얼굴은 전부 풀어져 있었다. 시합 전인 선배들과 불편하게 있는 것보단 백번 낫다고 강희찬은 생각했다. 옆에 앉아 있던 포수―로 중학교 때 뛰었다던― 동기인 이정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자를 벗고 부채질을 한 탓에 눈이 부신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을 잇는다.

‘별명이래. 2층에서 던지는 것 같다고. 여기서 봐도 낙차가 저 정돈데, 타석에선 더 장난 없겠다.’

‘넌 어떻게 알아?’

‘우리 사촌 형이 경원고 다니잖아. 저 학교 감독이 이제 경원고 전엔 무조건 쟤 선발로 낸단다.’

‘경원고 전을 1학년이?’

퍽!

경식구가 미트에 꽂히는 소리가 살벌했다. 그리고 심판의 삼진 콜이 이어졌다.

실내 연습장도 아니고 한낮의 야외 경기장이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여전히 그라운드에서 눈을 떼지 않던 이정민은 혀를 끌끌 찼다.

‘저 정도면 낼 만하지. 다마가 다르잖냐.’

방금 공이 포크볼이겠지. 궤적이 저렇게 나오려면 반포크도 아니고 제대로 그립을 쥐어서 던져야 한다. 학생 야구에서 저걸 던지는 놈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헛스윙을 친 타자는 외야의 전광판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더그아웃으로 발을 돌렸다. 타자가 본인 팀의 무안타 기록을 봤는지, 한 점이라도 내지 못하면 5회로 끝날 점수 차를 봤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리 몇 년 안 된 신생 학교라도, 1학년 상대로 퍼펙트로 지는 건 심하긴 하다.

경기를 뛰는 선수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승패가 거의 기울어진 경기였다. 뻔한 경기 속에서, 관중석의 몇 안 되는 관람객이 전광판을 보고 놀란 이유는 하나였다. 포크볼의 구속이 140 가까이 찍고 있었다. 강희찬 역시 그 말도 안 되는 숫자를 봤다.

‘근데 투구 폼은 왜 저래?’

부산일고 투수들이 저렇게 폼이 병신 같았었나.

작년에 중계로 봤던 봉황대기 결승전을 떠올렸다. 3학년 투수의 투구 폼은 이상한 게 없었다. 투수코치가 바뀌었는지 잠깐 생각해 봤지만, 중계 화면 속에서 공을 들고 마운드를 방문했던 코치는 오늘도 여전히 경기장 안에 있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눈으로만 봐도 힘들어 보이는 투구 폼은 원래 본인의 것이고, 저걸 보고도 코치와 감독이 교정해 주지 않았다는 거다.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하지만 모자에 가려져 있었다. 강희찬의 표정을 보지 못한 이정민은 그대로 투수의 투구 폼에 새삼 주의를 두었다.

‘좀 뒤에 있긴 하네. 그래도 저러고 잘 던지니까 됐지. 저렇게 던지니까 포크볼이 그냥 뚝 떨어지는 거 봐라.’

‘…….’

저 학교 감독이나 투수코치도 얘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

‘저 속도가 저렇게 떨어지는 건 너무 사기 아니냐…….’

옆에 앉은 강희찬에게 말을 걸고 있다기보단 혼자 감탄하듯 내뱉는 말이었다. 중얼거리는 이정민을 한 번 흘긋 볼 무렵, 뒤편에서 목소리 하나가 떨어졌다.

‘야. 내년엔 너희가 저 공 상대해야지. 뭘 벌써 우는소리 내고 있어.’

‘아, 깜짝아, 씨.’

‘…씨이?’

‘아니, 형.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 들려서요…….’

목소리의 주인은 2학년 외야수였다.

이정민을 향해 잠시 사납게 눈을 빛내던 기색은 이내 수그러들었다. 그저 장난을 걸고 싶었던 듯했다.

집합 시간이라며 일어나라는 선배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전광판 구속에만 시선이 가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미 5회 말의 아웃 카운트를 알리는 빨간 표시등이 두 개가 채워져 있었다. 점수 차와 투수의 공을 보면 이번이 마지막 이닝일 게 불 보듯 뻔했다.

‘내년엔 희찬이하고 선발 매치로 볼 수 있겠네.’

반걸음 앞서 걷는 선배의 뒤를 따랐다. 무슨 반응을 바라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본인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한 번 웃더니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서둘렀다. 이름만이라도 투수와 포수인 1학년 둘은 선배의 뒤를 따랐다.

몇 걸음을 걷지 않았을 무렵, 배트에 공이 빗맞는 소리가 울렸다.

셋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위치를 확인했다. 4번 타자가 만들어내는 파울 타구가 연속해서 관중석으로 날아들었다.

강희찬의 시선이 좌타석에 서 있는 타자를 향했다. 노리는 공이 있어서 치는 폼이 아니다. 모든 공을 일단 갖다 맞히겠다는 생각인 거다.

탁!

저 정도로 빗맞으면 보호 장갑을 끼고 있어도 제법 손이 울릴 거다. 홈런을 치겠다는 생각인지 출루를 하려는 목적인지 불분명한 타자는 이미 투수의 빠른 인터벌에 끌려가고 있다.

피칭 머신은 적어도 어떤 공이 나올지 알기라도 한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벽을 상대할 타자가 가여워질 무렵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의 삼진 콜이 신월 구장이 떠나가라 울렸다. 주심은 주먹을 쥔 오른손을 들어 보인 채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의 콜이 울린 순간 관중석에선 환호성이 쏟아졌다. 체크스윙 여부를 묻는 타자에게 주심이 직접 배트가 돌았다는 사인을 주었다.

타석에 섰던 타자야 억울한 것 같지만, 배트는 뒤에서 봐도 티가 날 정도로 돌았다. 아쉬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을 숙이고 타자는 더그아웃을 향했다. 심판 판정에 불만을 내색해서는 좋을 건 없었다. 내일도 경기는 있고, 한 시리즈는 한 팀의 심판진이 쭉 담당한다.

‘주전으로는 작년부터 뛰었나?’

이미 더그아웃으로 들어간 상대 팀 2번 타자의 뒷모습을 보며 강희찬은 문득 떠올렸다.

같은 팀도 아닌 선수가 언제부터 스타팅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는지는 큰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선수 본인의 이름보다는 선수 출신인 유명 해설위원의 아들이란 별명이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프로 선수로 데뷔하기 전인 휘정고 시절엔 더 심했고.

객관적으로 보자면 강희찬 본인도 어디 가서는 ‘좀 산다’라는 말을 듣겠지만, 어차피 사는 동네 자체가 부촌이었다. 그래 봐야 한정식당이나 임대업을 하는 집의 아들이었고.

자신의 부모님은 평범하게 아들을 키우는 분들이었다. 열 살까지는 외동이었던 강희찬이 운동으로 진로를 잡은 것 외에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가정이다.

부부는 젊은 시절,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처음 소개를 받을 때 외국의 인기 스타를 닮았다는 지인의 거짓말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는 우스운 다툼이나 하는 속 편한 양반들이기도 했고.

강희찬은 종종 서로를 향한 부부의 투정을 들어주는 방청객이 될 때가 있었다.

‘옛날부터 그 가수 좋아하는 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좋으면 좋은 거지, 뭐가 창피하다고 그러는지, 원. 희찬이, 넌 아빠처럼 크면 안 된다. 좋으면 좋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도 알아야 해.’

‘…아빠도 그 소리 하던데.’

아들이 밥을 먹는 테이블을 제외하고 홀의 테이블을 정리하던 여자의 손길이 멈췄다. 행주를 손에 들고 ‘어머’ 하는 표정을 짓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희찬은 후식 대신 나온 삶은 달걀을 깠다.

‘엄마는 이제 장국영 좋아한다고 다 얘기한다, 뭐. 웃기는 양반이야, 진짜.’

그녀의 투정에 강희찬의 시선은 홀 한구석에서 돌고 있는 턴테이블을 향했다. 이젠 세상에 없는 홍콩 배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여자인 원곡 가수가 부른 버전을 더 자주 들었다.

항상 노래를 들을 만큼 좋아하면서도 라이벌쯤 되는 다른 가수를 좋아한다고 핑계를 대는 남편이나, 쑥스러워서 장국영의 LP판은 숨겨둔 채 등려군의 노래나 듣는 아내나. 결국, 둘 다 마찬가지인 사람이었다.

부부는 놀랍도록 같은 소리를 했다. 희찬이 너는 절대 저런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진 말라고. 우스운 충고였다.

원체 닮은 사람끼리 만난 건지 아니면 살아온 세월 탓인지 강희찬은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잠시 멈춰 있던 행주질을 다시 시작했다.

‘근데, 너희 아빠 장국영 닮지 않았어? 아직도 잘 보면 얼굴에 남아 있어.’

‘…….’

벗겨낸 삶은 달걀을 한입에 넣었다. 다행히 그의 모친은 입 안 가득 음식이 차 있는 아들을 향해 대답을 종용하진 않는다.

항상 그런 시답잖은 소리나 하는 평범한 부부다.

프랜차이즈 선수 출신인 아버지나, 감독에게 라인업을 미리 보여달라고 하는 어머니를 두지 않아도 썩 괜찮은 삶이었다.

“…….”

말도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2년 선배를 아직도 기억하는 건 단순히 아버지가 대단한 야구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아버지의 선수 경력이 그 자식과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학교에 바보는 많았다.

청룡기 본선 때였나. 강희찬은 외야에 있는 불펜 대신, 더그아웃 앞에서 캐치볼을 하는 선발투수 선배의 가드를 하고 있었다. 마운드엔 황사기에서 한 번 상대한 적 있는 부산일고의 1학년 투수가 있었다.

내쉬는 숨조차도 뜨거운 한여름. 그라운드에서 가장 뜨거운 열기가 지글거리는 마운드에 선 투수는 전혀 더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만 보면 서늘한 감각을 주었다.

그래도 30도가 넘는 날씨에 아예 덥지 않을 수는 없었는지, 간간이 모자를 벗고 유니폼의 팔 부분으로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모자를 다시 뒤집어쓴 순간부터는 다시 서늘한 입매만 보일 뿐이다.

저기가 지금 꽤 시원한가, 라는 멍청한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손짓 하나에 1학년 후배 녀석 하나가 대기 타석으로 이온음료를 대령했다. 그 모습을 보던 투수는 손 안에서 로진을 매만지던 행동을 잠시 멈추었다.

로진백을 발치로 떨어트리고, 오른손에 묻은 가루를 불어 털어낸다. 후, 하는 숨과 함께 공중으로 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투수는 웃고 있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지랄을 한다.

글러브로 막기 전, 찰나의 순간 중얼거린 입 모양을 강희찬은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목소리까지 들린 듯했다.

같잖다는 웃음을 서늘한 얼굴로 숨기고, 투수는 다시 타석에서 준비를 마친 타자에게 집중했다. 팔자 좋게 이온음료나 마시는 대기 타자가 그걸 눈치챌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순간, 강희찬의 얼굴엔 열이 확 올랐다.

한낮의 복사열 때문이 아니었다. 쪽팔렸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어디에 숨고 싶을 만큼 쪽팔렸다.

보는 사람이 더 쪽팔린 기억은 물의 신이 루킹삼진을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루킹삼진에서 지금은 체크스윙이면, 그래도 고등학교 때보다는 발전했다고 봐야 하나.’

내야플라이로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채워지며 잠실 구장의 경기는 끝이 났다. 경기를 끝낸 마무리 투수는 도열 인사를 위해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모자를 벗는 윤태성의 모습을 보는 순간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비웃던 대기 타석의 타자가 방금 전, 어이없는 체크스윙으로 삼진을 당했던 선수와 동일인이라는 걸 아는지.

“오오, 20세이브.”

“아, 쫌.”

하이파이브를 하는 선배가 장난스레 머리를 때리려 하자 짜증이 가득 묻은 얼굴로 손길을 피한다. 무신경한 얼굴을 보면 대충 예상은 간다.

아마 기억하지도 못할 거다.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을 주목하고 기억을 해주는 건 한정된 존재들뿐이다. 그 시절의 강희찬은 아직도 관중석에서 함성을 보내는 저 사람들과 비슷했다.

한참을 이어진 도열 인사가 끝났다. 강희찬은 한숨을 내쉬고 재빨리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등판하지 않은 덕에 얼른 챙기고 나섰는데도 이미 주차장엔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잠시만요, 밀지 마세요. 미시면 안 됩니다.”

알 수 없는 고함에 뒤섞인 경호원들의 목소리가 귀와 머리를 울렸다. 빨리 시끄러운 곳에서 나가기 위해 항상 차를 세우던 곳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 순간이었다.

왜 갑자기 눈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흰색 홈 유니폼과 검정 원정 유니폼들이 불규칙하게 뒤섞인 공간에서, 남자가 입은 하늘색 남방이 꽤 튀는 색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옛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는, 이천행으로 인한 이상 현상의 연장일 수도 있다.

“…….”

어린 날의 누군가와 비슷한 색깔의 옷을 걸친 남자는 멍하니 발치를 내려다보다가, 지친 듯 눈을 감고 기둥에 등을 기댔다. 그 동작조차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벽 같은 투수는 언제나 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럼 뭐지?’

강희찬은 걸음을 돌렸다. 항상 차를 세워두는 곳과는 반대편인, 구단 직원들이 주차하는 곳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른 동선에 당황한 경호원은 어어, 하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사인을 받으려는 무리와는 동떨어져 있는 남자와 한 걸음씩 가까워졌다. 그때마다 머릿속의 장면도 선명해진다.

더운 그라운드. 열기가 피어오르는 마운드.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철벽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전력 분석을 위해 찍어온 영상 속 장면은 현실감이 없었지만, 지독하게도 현실이었다.

“…….”

정면에서 남자를 내려다봤다. 중간에 걸리는 것 없이 매끈하게 내려오는 얼굴선, 무표정하게 눈을 감고 있어도 전혀 딱딱해 보이지 않는 유순한 인상이다. 흰 티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푸른 남방까지 걸쳐 입은 차림은 당장 지하철역에만 가도 제법 보일 평범한 스타일이었고.

굳이 닮은 걸 하나 억지로 찾아보자면……. 지친 기색이려나?

남자를 내려다보는 동안, 남자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왔다. 평소라면 사진이나 사인 요청은 무시한 채 차에 오르기 바쁘던 사람의 이상 행동 때문에 주위는 웅성대고 있었다.

마주한 검은자가 생각보다 컸다. 남의 눈동자는커녕 자신의 눈에도 큰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눈을 감았다가 뜨니 갑자기 사람이 앞에 있다. 놀랄 만한 상황이었고, 당연히 남자는 놀랐다. 요란스레 호들갑을 떨지 않고 멍하니 입을 가르고 나오는 소리가 인상과 어울렸다.

절대 크지 않은, 꺼질 것 같은 중얼거림은 신기하게도 그 순간 강희찬의 귀에 정확하게 날아 박혔다.

* * *

지하철을 탄 잠깐 사이 몸이 에어컨에 적응된 건지, 내렸을 때는 유독 더 공기가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에어컨 바람 때문에 걸친 남방을 벗을까 싶었지만, 그러면 더욱 불쾌할 것 같아서 그만뒀다. 애매한 더위를 참고 도착한 잠실 구장 주차장엔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 너덧 명이 있었다.

일반 관람객은 잠실 구장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 없다. 뜬금없이 나타나, 주차장 한구석에 선 이선을 향해 경호원은 친절을 가장하여 신분을 물었다. 무슨 일이시냐고. 구단에서 일하는 직원을 찾아왔다, 그 사람이 홍보팀 송재혁이라는 말까지 하고서야 경호원은 수상쩍은 눈을 거두었다.

“프런트 직원들은 저쪽에 주차합니다. 이쪽은 선수들 공간이라서, 경기 끝나면 팬들 많이 밀릴 겁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어쩐지 세워진 차들의 앰블럼들이 심상치가 않더라니.

여러 브랜드의 외제 차가 한자리에 있는 특이한 광경을 흘긋 돌아봤다가, 퉁퉁한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몇 걸음 걷고 도착한 곳엔 익숙한 국산 브랜드의 차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익숙한 것이 주는 익숙한 안정감이다. 이선은 아는 번호판이 붙은 은색 중형차 옆 기둥에 기대섰다.

포털 사이트에서 확인해 보니 경기는 9회 초였다.

짧은 진동과 함께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송재혁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30분 뒤에 나갈 테니 편한 데 있으라는 내용이 오타 범벅인 채다.

이미 학교에 있을 때부터 송재혁이 관리한다는 유튜브 채널의 영상 알림은 부지런히 울려댔다. 경기 내내 정신없이 편집하고 올리고 있을 거다. 구독자 수를 올려달라는 강요로 이선 역시 보고 있는 채널이었다. 그래도 가끔 보면 웃긴 영상들도 꽤 많았다.

[괜찮아. 천천히 나와. 차 앞에 있을게.]

문자를 보낸 순간 구장 안쪽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파도처럼 흘러넘쳤다.

경기가 끝났거나, 누군가 홈런을 쳤거나. 야구장이 직장인 친구는 함성만 듣고도 어떤 상황인지 맞히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10초 정도가 지나고서야 이선은 함성의 정체를 깨달았다. 포털 사이트의 문자중계가 업데이트됐다.

경기 종료. 승리투수 이승주.

아는 야구선수라고는 어릴 적 ‘코리안 특급’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신문에 오르던 메이저리거밖에 없다. 그조차도 당시 이선에게는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야구를 즐겨 보시던 아버지는 애국심인지 뭔지, 꼭 그 선수의 이름을 딴 아이스크림을 사 주시곤 했다. 차라리 팥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울면서 졸라도 소용없었다. 지금은 기억조차도 흐릿해지는 추억이 됐지만.

이제는 방송에 가끔 얼굴을 비추는 그때의 선수를 보면,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씁쓸한 사실만을 깨달을 뿐이다.

그러니까,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의 야구선수가 송재혁의 팀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하지만 가장 위에 커다랗게 뜬 스코어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홈팀이 이겼다는 것을.

“…….”

말은 30분이라고 해도 그보다 더 걸릴 게 분명하다. 대충의 기억으로, 송재혁이 올리는 영상은 진 날보다 이긴 날이 훨씬 많았다.

이선은 한숨을 뱉어내며 기둥에 몸을 더 기대었다.

텁텁한 공기와는 상반된 서늘한 온도가 등에서부터 번져온다. 눈을 감자 감각은 더욱 선연해진다. 그리고 깜깜한 의식 속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지쳤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자동차 대신 타고 온 지하철 때문일까. 아니면 하는 일도 없이 학교에서 허비했던 시간에 물린 걸까.

‘둘 다 아니겠지.’

가장 지치고 힘이 드는 건 지금이었다. 송재혁은 좋은 사람이고 유일한 친구였지만, 그래서 더욱 대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알아채지 못하는 게 더 힘들다.

어그러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도 없을 곳으로 도망칠 궁리를 했던 열아홉의 자신은 여전했다. 그랬기에 송재혁은 틈만 나면 연락을 했고, 밥을 사 달라는 핑계로 자신을 불러냈다. 모든 인간관계를 버리고 시작한 스무 살처럼, 또다시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아서.

좀 더 나은 사람이기를 바란 적은 많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에게서 결혼 소식을 듣거나,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며 넌지시 얘기를 하거나.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며 진지하게 집안에 인사를 가고, 평범하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 아주 늙었을 땐 그래도 주변엔 사람이 몇 있는.

어릴 적 얼핏 그려본 미래의 자신은 그리 특출나진 않아도 모난 곳도 없는 적당한 남자였다. 마치 아버지들처럼.

도망치듯 끊어온 인간관계는 해가 갈수록 얄팍해진다. 평범하게 남들처럼 적당히 지내고 싶지만, 그것조차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자신에겐 그만한 에너지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급류를 이겨내지 못하고 저만치 뒤에 있었다. 비교하다 보면, 평범하게 살아오지 못한 인생의 궤적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알고, 이런 성향이 있는 이를 살뜰히 챙기는 친구는 고마우면서도 버거웠다. 송재혁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조차도 금세 지워졌을 흐린 연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

그러니 더운 날에 밖에서 친구의 퇴근을 기다리는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곁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유일하게 남은 가족도, 한 번도 같은 반을 해본 적 없는 동창도 아니었다. 그래도 좀 더 나이를 먹은 자신의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고, 있어주었으면 했던 건 공익 근무를 하던 신규진이었다.

끝이 났음에도 묘하게 현실감은 없다. 아마 제대로 시작이란 걸 한 적도 없기 때문일 거다. 지나서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없는 관계였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했던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온몸엔 한기가 돌았다. 시원하다 느꼈던 시멘트 기둥이 이젠 차가울 지경이었다.

선득함에 눈을 떴을 때, 정수리에서부터 소름이 번졌다.

“…….”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사람이 눈앞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건 꽤 무서운 경험이었다. 아무리 그게 초면이 아닌 사람이라도 말이다.

웃는 얼굴이 더없이 잘 어울릴 미남이라도, 무표정한 얼굴을 해서는 그 얼굴도 소용없다. 전에도 느꼈지만, 배치가 좋은 이목구비는 표정이 없으면 조각상 같은 느낌을 주어 더욱 서늘했다.

숨을 들이켰던 이선은 속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학교로 왔던 성범죄자 알림 전단에 있던 얼굴을 실물로 마주해도 이것보단 덜 놀랐을 거다.

그래도 꼴사납게 소리는 지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놀랐다는 사실을 남자에게 들키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아, 안녕하세요.”

어릴 적부터 정이선은 놀라도 소리를 내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래서 주변에선 종종 담이 세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놀라긴 했는지 말을 뱉어내는 순간 목소리가 뒤집혔다.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그저 대꾸 없이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

그 모습이 교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의 인사를 받는 중년의 학생주임 선생님과 비슷했다. 뭐로 보나 이쪽이 연상이다. 마른 입 안이 씁쓸해졌다.

“오랜만에 뵙네요.”

왜 이쪽으로 왔을까. 영 내키지 않는 해후에 마뜩잖음을 숨긴 채 이선이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묵묵부답과 냉한 시선뿐이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직원들이 차를 세운다는 곳에 굳이 선수가 올 이유는 없을 터였다.

혹시 이 차가 남자의 차인가 싶어 이선은 다시 한번 번호를 확인했다. 번호를 하나하나 새겨 봐도 송재혁이 올해 중고로 장만한 차였다.

어색한 침묵만을 만들며 남자가 자리를 뜨지 않는 탓에, 이선은 굳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남자의 시야에 들어가도록 보였다.

“핸드폰… 잘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건 어색한 상황에선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말이 나오기 마련이다.

스스로 내뱉고도 공치사로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사실 잘 쓰고 있었으니 아예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지금 퇴근하세요?”

“네.”

짧게 흘러나온 남자의 목소리가 꽤 생경하다.

퇴근한다는 말은 사실인지 선수로 보이는 덩치의 남자들 몇이 입구를 통해 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주차장은 경호원의 말대로 팬들로 들어차 있었다.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에서 그들을 막는 경호원들. 선수 몇몇은 야구공이나 유니폼에 사인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몇은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차에 오르기도 했다.

정말 특이한 건, 여기에도 선수가 있음에도 이쪽으로는 팬들이 단 한 명도 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제발 한 명이라도 와줬으면 싶지만,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의외로 남자는 인기가 없는 선수일지도 모른다. 겉모습이야 젊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미남이라도, 일단 운동선수는 운동을 잘해야 할 테니까.

이선은 퇴근을 하는 선수들에 비하면 늘씬한 축인 남자의 몸을 슬쩍 훑어봤다.

정이선의 안에선 이런 외모는 운동엔 엄청난 재능이 있지는 않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TV에서 종종 보던 유명하다는 야구선수들의 체형이 각인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와는 달리, 운동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연예계 쪽을 알아봐도 괜찮을 외모였다.

“…혹시, 직원들은 언제 퇴근하는지 아세요?”

“아까 경기 소감 찍고 있었으니까, 금방 나올 겁니다.”

이선이 송재혁을 찾아왔다는 걸 알아챈 남자는 그게 맞는 대답을 했다.

남자는 이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하기도 하면서, 또 의외였다. 그는 보이는 만큼 무신경한 타입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자의 시선이 위아래로 붙었다. 어색함이든 내려다보는 게 익숙한 고압적인 자세든 답답한 건 매한가지다.

적당히 사회생활을 하는 20대 남자가 이런 상황에서 꺼낼 만한 말은 별로 없었다. 시커먼 하늘과 텁텁한 공기 속에서 ‘좋은 날씨네요’라며 이야기를 꺼내기도 뭐하지 않은가. 필요한 말조차도 꺼내지 않는 남자 때문에 이선은 불필요하게 입을 놀려야 했다.

“혹시 식사하셨어요? 안 하셨으면 저희랑 같이…….”

지금은 전근을 가신, 당시에는 쉰을 갓 넘긴 남자 선생님은 교무실로 찾아온 젊은 학부모에게 식사는 했는지 물으며 자연스레 말문을 열었다. 오후 4시라는, 식사 여부를 묻기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건 이선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자신도 따라 해봐야겠다는 다짐 이래로, 정이선 선생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강희찬이 식사 초대에 응하기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짧게 겪어본 남자의 성격상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제안하는 자리를 갈 것 같지도 않았고.

하지만―.

“네.”

…잘못 들었나?

“…네?”

피하지 않고 시선을 내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이선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잠깐의 침묵 이후,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에게는 꽤 의외였고, 대단히 충격이었다. ‘네’보다는 ‘에’에 가까운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였으니까.

“가겠다고요.”

확인사살처럼 남자의 입에선 긍정의 말이 덧붙었다.

한숨처럼 크게 숨을 내뱉은 남자는 이내 송재혁의 차체 뒷부분에 몸을 기댔다. 어색함을 극복해 보려 던진 아무 말 때문에 어색한 시간만 더 늘었다.

…훌륭한 자승자박이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이선은 핸드폰을 쥐었다. 겨우 손에 익숙해진 크기가 다시 한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답이 없는 송재혁의 대화창을 보다가, 그 아래에 있는 이름을 누르고 순간적으로 아차 했다. 읽지 않고 두었던 신규진과의 메시지 창이었다.

[정이선. 연락 좀 받아라.]

오늘 오전에 도착한 마지막 메시지였다. 이제 신규진에게는 ‘읽음’ 표시와 함께 보일 거고.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화풀이처럼, 신경질적으로 앱을 종료시키고 기둥에 다시 몸을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쥐고 있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저만치 멀리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야, 어디 들어가 있지, 이 더운데 여기……. 어?”

말과 동시에 손 안에서 울리던 진동도 한 박자 늦게 멈췄다. ‘얘가 여기 왜 있어?’ 목소리가 직접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송재혁의 시선이 머문 끝에서 남자는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쓸데없는 설명을 하는 타입은 아닌 게 분명했다. 핸드폰을 사 줬던 날,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대던 모습이 이례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뭘 보느냐는 듯한 시선을 송재혁에게 던지는 남자 대신, 정이선이 입을 열었다.

“식사, 같이 하러 가실 거야. 핸드폰 일도 있고, 내가…….”

“아, 그래?”

별일이네, 라는 끝맺음이 생략된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어색한 자리에서의 식사를 싫어하는 자신과는 달리 송재혁은 음식이 앞에 있으면 뭐가 됐든 좋은 타입이었다.

송재혁은 이내 직장 동료인 선수를 향해 말을 걸었다.

“혹시 위치 알아요? 박 코치님 자주 가시는 삼성동 보쌈집, 거기 갈 건데.”

“모르는데요.”

“아… 그럼 주소를…….”

“뭐 하러 그래요. 한 차로 가면 되지.”

차 주인이 와도 기대던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던 남자는 이제 뒷좌석의 문을 당당히 열었다. 그는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뒷자리에 널린 잡동사니를 보며 혀를 찼다.

“내일 출근할 때 불편할까 봐 그러죠.”

“됐어요.”

프로그래밍 된 로봇처럼 네, 아니오만 얘기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라 이건가. 자신과 있었을 때보다 남자의 말이 길어진 걸 이선은 깨달았다.

허락 없이도 남의 차를 자신의 것처럼 탄 남자는 이내 뒷좌석의 문을 쾅 닫았다. 요란한 소음을 내며 닫힌 씽씽이―애칭이다―의 뒷모습을 잠시 보던 송재혁은 곧이어 타자며 고갯짓으로 조수석을 가리켰다.

“야, 난 무슨 조합인가 했다. 같이 갈 거면 문자라도 미리 주든가.”

“미안. 방금 만나서…….”

“네가 내는 자린데, 나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 얼른 타.”

“응.”

차에 오르자 공기는 한층 더 텁텁했다. 내내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을 실내 공기는 바깥보다 답답하다.

어색함과 더위가 뒤섞인 좁은 공간은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 *

보쌈 대자 세트와 사이다 한 병.

남자 셋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올라오기엔 소박하고 건전한 차림이라고 이선은 생각했다. 다시 야구장으로 돌아가서 영상 편집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송재혁 덕분이었다.

벌써 10시가 다 되어간다. 앞에 붙은 회사 이름만 ‘새한’이었지, 이 정도면 거의 블랙기업이다. 야구장은 문을 닫지 않느냐는 이선의 불평이 섞인 물음이 이어졌다.

“선수들 연습하고 갈 때 많아서 늦게까지 열어.”

“아무리 그래도 무슨 이 시간에 다시 들어가. 그냥 집에 가서 해.”

“집에 가면 무조건 자서 그래.”

“그럼 다음에 보지…….”

“그놈의 ‘다음’ 소리 하다가 내년에야 잠실 올 놈이야, 넌.”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야구장에 오라는 말을 듣고도 차일피일 미루던 게 작년부터였다.

가슴에 찔리는 말을 한 송재혁은 공격적으로 배추쌈 위에 고기를 얹었다. 김치까지 야무지게 얹은 고기탑은 무너지지도 않고 입 안으로 들어갔다. 아삭거리는 소리까지 듣고 나면 없던 입맛이 절로 돈다. 마이크를 입에 물고 먹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식욕이 돋는 소리는 옆에 앉은 이선에게까지 들렸다.

맛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괜찮은 음식 맛이었지만, 그래 봐야 보쌈이다. 막상 느껴지는 맛은 삶은 고기에서 예상되는 맛의 범주를 벗어나진 않았다. 그런데도 저렇게 잘 먹는 걸 보면, ‘내가 먹는 거랑 다른 맛인가’라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선은 친구를 따라 배추쌈 위에 고기 두 점과 김치, 마늘을 차례로 얹어 입에 넣었다. 고기를 두 개나 얹어서 씹기 힘들다는 것과 배추가 아삭거린다는 점. 그 두 개가 느껴지는 감상의 전부였다.

‘얜 왜 이렇게 맛있게 먹는 걸까?’

힘겹게 입속 음식물과 씨름하며 송재혁이 있는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많이 배고팠었는지 보쌈이며 국수가 입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기왕 사는 입장에선 보는 사람의 입맛까지 떨어지게 먹는 것보단 저쪽이 나았다. 어릴 적부터 조금이라도 불편한 자리에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어머니의 걱정을 샀던 자신보다는 훨씬 복스러울 거다.

사실 블랙홀처럼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들을 흡입하는 친구가 문제는 아니었다. 먹는 거로 부모님의 걱정을 샀더라도, 지금의 이선은 20대 후반이고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이다. 송재혁만큼 넉살 좋게 먹지는 못해도 세월이 주는 요령은 생겼다. 그런데도 지금 상황은 체할 만큼 불편했다.

“…….”

이선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와 마주쳤던 눈을 후다닥 아래로 깔았다.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자세가 언젠가 봤을 정도로 눈에 익었다.

식당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남자는 물컵 하나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 채로 시선은 맞은편에 앉은 이선을 향해 두고 있었다.

불편했다. 이보다 더 불편한 상황을 인생에서 찾기가 힘들 정도다. 교장 선생님과 독대로 식사를 하는 게 이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10초 정도는 직접 쌈을 싸서 입 앞에 대령하라는 무언의 시위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정면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선을 대신해 말을 꺼낸 건 송재혁이었다.

“안 먹어요?”

“내일 등판입니다.”

“아, 맞다. 그랬지.”

짧은 한마디로 납득한 송재혁은 다시 보쌈에 집중했다. 혼란스러운 건 이선뿐이다.

내일 등판입니다. 이 일곱 글자가 식당에 와서 밥을 먹지 않은 채, 남이 먹는 모습만 보는 행동의 이유가 되는 걸 처음 알았다.

너희끼리만 납득하지 말고 나한테도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밥을 먹지 않을 거라면 대체 왜 남자가 자신의 식사 제안에 응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선이 반쯤 체한 기분으로 있는 동안, 테이블 위에 있던 송재혁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한 송재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야. 나 먼저 일어날게.”

“왜, 왜. 더 먹지.”

부산스레 핸드폰을 챙기며 일어서는 친구를 이선은 간절한 마음으로 잡았다. 이렇게 갈 거면 뭐하러 밥을 먹느냐는 말까지 하기엔, 송재혁의 얼굴엔 미안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여기서 더 먹으면 가서 자. 많이 남았는데 더 먹어. 거의 손도 안 댔잖아, 너.”

“아니야. 나도 많이 먹었어. 같이 나가자.”

일어서려는 이선의 어깨를 송재혁의 손이 가볍게 눌렀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시선이 간절해서 송재혁은 차마 걸음을 떼기가 미안해졌다. 하지만 편집 금방 하고 올 테니 한 시간만 먹으면서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가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시체처럼 질릴지도 모른다.

사실 강희찬이 갑자기 식사 자리에 끼어든 게 문제였다. 그만 아니었어도, 정이선에게 30분 정도 사무실 안에서 기다리다 같이 나가자는 얘기를 할 셈이었으니.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 겹쳤다.

하지만 이선의 어깨를 짚은 순간 깨달았다. 날이 더워서 옷이 얇아지니 바로 뼈가 만져진다. 일단 뭐가 되었든 먹여야 한다.

게다가 등판 전날이면 저녁부터 굶기로 유명한 사람이 부러 여기까지 따라온 거다. 남이 먹는 걸 구경하는 변태 같은 취미가 있던 게 아니라면, 강희찬은 정이선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왔을 터였다.

백설공주가 그래도 핸드폰까지 안겼다. 아마도 팬이라는 자신의 변명도 어느 정도는 통한 것 같았다.

병원비도 보험 처리로 깔끔히 해결됐고, 정이선은 인터넷에 글을 올릴 인종도 아니다. …설마 나쁜 소리는 하지 않겠지.

“…….”

송재혁은 눈짓으로 맞은편에 있는 강희찬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랑 둘이 있을 생각에 사색이 되어가는 내 친구를 잘 부탁한다는 뜻이었다.

상대방이 그 의중을 알아차려 주는지는 모호했다. 강희찬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었으니까.

어쨌든 평소보다는 기분이 좀 괜찮아 보인다. 안심한 송재혁은 그대로 이선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더 먹어.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는 소린 매일 할 놈이.”

“…안 하거든, 그런 말.”

요샌 소풍에 가서도 도시락 남기지 말란 소리는 안 한다. 위장이 작은 어린애들이 억지로 먹다가 토라도 하면 그게 더 귀찮으니까.

이선은 미간을 찌푸리며 더 잇고 싶은 말을 삼켰다.

“알았어. 아무튼, 다 먹어라. 인증샷 시키게 하지 말고.”

…말 같지도 않은 으름장이다.

송재혁은 정말 가게 문을 나섰다. 전화하라는 말을 듣자 기시감이 일었다. 병원에서도 이와 비슷했다. 설마 진짜 갈까, 라는 생각은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잦아진 순간 현실이 되었다.

“아…….”

…진짜 갔다. 보쌈 대자 세트의 반을 혼자 처먹고는, 볼일이 끝나니까 간 거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황망해진 이선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장난이었다며 다시 문을 열고 송재혁이 들어올 것 같았지만, 정작 들어온 건 밖에서 담배를 태운 듯한 아저씨 둘이었다.

포기하고 손에 들고 있던 오이를 씹었다. 아그작. 생각보다 씹는 소리가 커서 괜히 놀랐다. 멋쩍은 마음에 이선은 씹던 오이를 한쪽 볼로 밀어 넣고 입을 열었다.

“…안 드세요?”

어느새 남자는 팔짱을 풀고 바지 주머니에 엄지손가락을 걸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식당에 들어와 지금까지 젓가락 한 번 손에 든 적이 없는 건 신경이 쓰인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걸까?’

이선은 남자의 뒤편에 있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와서도 이미 한 번 봤지만, 보쌈과 국수, 공깃밥 추가와 음료수 가격이 있는 단순한 메뉴판이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시켜도 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 다시 시선을 내린 순간,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하려던 말은 씹던 오이와 함께 목 안으로 꿀꺽 넘어갔다.

마주친 남자의 눈에 이해하기 힘들다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아까 얘기했는데요. 내일 등판이라고.”

“아… 네.”

왜 두 번 말하게 하느냐는 표정에 이선은 절로 기가 죽었다. 들고 있던 오이를 마저 먹는 일밖에 할 것이 없었다.

야구경기는 월요일을 제외하면 일주일 내내 있다. 경기가 있어서 밥을 먹지 않는 거라면, 남자는 일주일에 6일을 굶고 있다는 소리였다. 운동선수한테, 아니 사람한테 그게 가능한 일인가.

미약한 성가심이 배인 얼굴에서 시선을 내렸다.

흰색 피케티셔츠 아래에 있는 몸집은 컸지만, 확실히 주차장에서 봤던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좀 마르다 싶었다. 뭐, 어디까지나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였지, 객관적으로는 ‘마르다’는 수식어와는 붙어 다니긴 힘들 몸이긴 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이선은 남의 몸을 불쾌하게 훑어봤을 거라는 자각이 들었다.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남자의 기색은 여전했다. 오히려 자신의 몸을 훑는 애매한 시선 탓에 더 불쾌했는지도 모른다. 이선은 재빨리 테이블 위로 눈을 돌렸다.

…어색해 죽을 맛이다. 물만 마셔도 체할 것 같다.

이미 미지근해진 고기를 집어 입에 넣으며 이선은 생각했다.

얼른 다 먹으면 나갈 수 있는 걸까? 식사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과의 자리는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 강희찬 선수, 맞죠?”

반경 5미터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체하게 할 것 같은 남자에게 누군가 용감하게도 말을 걸었다.

가게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 무리였다. 귀찮게도 저 구석에 앉아 있다가 이 테이블까지 와서는 남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네.”

말을 건 여자를 한 번 흘긋 본 남자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며 짧게 답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댄 몸을 한층 더 뒤로 빼고 앉는다. 그사이 여자의 가느다란 검지가 올라왔다.

“저, 죄송한데, 사인 한 장만 해주시면…….”

“식사 중이라서요.”

문장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남자는 말을 잘랐다. 이미 입 안에 들어간 고기를 씹는 것도 민망해지는 공기로 변했다.

젓가락 한 짝도 들고 있지도 않으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식사 중이라니…….

자신 이상으로 사인 요청을 했던 여자 무리 역시 난감해하는 게 느껴졌다. 예에. 멋쩍은 대답을 하고 돌아선다.

그녀들의 얼굴에 불만이 올라오는 걸 본 사람은 맞은편에 앉은 이선뿐이었다. 여자들이 자리로 돌아가서도 저들끼리 이쪽을 보며 수군거린다.

저런 시선을 받으면 뒤통수가 따가울 법도 한데, 남자는 그저 주머니에서 왼손을 꺼내고 손톱을 보고 있었다.

“혹시…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내가 왜요.”

왼쪽 검지 손톱이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코앞까지 가져가 보던 사람은 신경질적인 말을 뱉었다.

‘내가 왜요.’ 혹은 ‘뭐라는 거야.’

눈빛에서 느껴지는 본심을 읽고 이선은 입을 다물었다.

사인 요청 거부는 한 테이블에 있는 사람이 멋쩍어질 것을 배려한 게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짚은 헛다리를 누군가가 크게 비웃는 것 같았다.

드드득―

테이블 위에 뒤집어 두었던 핸드폰 진동이 오늘따라 더욱 크게 느껴졌다. 사 준 사람의 성향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이선은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화면을 확인했다. 도착한 문자의 발신자는 신규진이었지만, 내용은 아니었다.

[여기 거래처입니다. 친구분이 많이 취하셨는데, 와주셨으면 합니다.]

아마도 말투를 봐선 단골 술집의 아르바이트생일 게 분명했다. 가게 이름이 ‘거래처’인 술집의 사장님은 이선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 먹었으면 일어나요.”

한동안 화면 위에서 멈추었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움칫 떨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어어, 하며 이선이 황급히 일어나도 이미 늦었다. 영수증은 버려달라는 말을 남긴 남자는 가게의 문을 밀고 나갔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이선은 당황했다.

“저, 저기……!”

뒤늦게 주방으로 들어가려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물었다. 아까 계산을 취소하고 자신이 현금으로 계산할 수 있느냐고. 빨간 앞치마를 한 아주머니의 얼굴이 괴상한 소리를 다 들어봤다는 표정으로 물들었다.

“할 수야 있는데. 그러면 아까 총각이 계산했던 카드를 가져와야 취소를 해주지.”

“아, 네.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서둘러 가게 문을 나섰을 때 남자는 밖에 선 채였다.

옷깃에 단순한 선으로 디자인이 들어간 하얀색 피케티셔츠. 옷차림만큼이나 깔끔한 옆얼굴은 여름밤에 제법 잘 녹아들었다.

가게 건물 벽에 등을 기댄 모습은 딱 담배를 태우기에 적절해 보였지만, 남자의 손엔 핸드폰이 전부였다.

“계산, 제가 하려고 했는데…….”

딱 감상하기 좋은 풍경을 제 손으로 깨트리는 꼴이지만 이선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게 뭐 어쨌다고.’

심드렁히 고개만 돌린 남자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절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카드를 빌려줄 기색은 아니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이선은 지갑의 현금 칸을 확인했다. 쓰지도 않으면서 버릇처럼 담고 다니는 오만 원권 몇 장이 있었다.

“아까 얼마 나왔죠? 돈 드릴게요.”

“전화 왜 안 했어요?”

동시에 얽힌 말 때문에 이선은 남자가 했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하고 되묻는 이선의 반응에 남자는 선선히 입을 열었다.

“전화요. 하라고 번호 줬잖아요.”

보쌈 세트 대자에 사이다가 한 병. 오만 원이 넘었던가 넘지 않았던가.

애매한 음식 가격을 계산하며 고민하던 이선과는 달리 남자가 뱉은 말은 뜬금없었다. 그래서 이해가 한 박자 늦었다.

최신형 기종을 사 주고 그 자리에서 제 번호를 찍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푸른색이나 흰색. 단순하면서도 청량한 느낌이 옷을 입은 본인과 잘 어울렸다. 비록 그 위에 있는 얼굴엔 짜증과 성가심이 가득했어도, 생김새 자체는 어딘가 대학의 홍보모델로 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남자가 직접 찍었던 번호는 결국 저장하지 못했다. 괜한 오기에 일부러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핸드폰이 처음 만져본 기종인 탓에 조작을 잘못해서 번호가 날아간 것뿐이었다.

그 순간엔 아차 싶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다시 볼일도 없는 사람의 연락처 같은 건, 날아가도 크게 아쉬울 게 없는 것이다.

“아…….”

그러니 지금 이선은 당황했다. 이천에서 봤던 얼굴을 잠실에서 마주친 것도 모자라, 직접 그때의 일을 언급하는 건 예상 밖이었다. 현금을 추리던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입을 열었다.

“병원을… 안 가서요.”

“안 갔어요?”

남자가 눈을 치켜떴다. 거짓말은 모두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이다.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니, 가긴 했는데 진료를 받진 않았거든요. 보험 처리에 필요한 서류 받으러 간 거라서…….”

“…….”

“재혁이한테 얘기했는데……. 괜찮다고.”

변명하는 초등학생처럼 말끝은 흐려진다.

자신이 아는 바로는 보험 처리는 제대로 됐고, 송재혁도 잠깐 상사에게 잔소리를 들었다는 것 정도였다.

구단 자체가 인터넷에 소문이 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지 송재혁의 당부가 좀 붙긴 했지만. 잘 마무리됐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문제가 있었던 걸까…….

남자는 이선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그를 감싼 뾰족한 공기도 한 꺼풀 누그러든 것 같았다.

“감독님께서 물어보셨습니다.”

“아…….”

“…….”

“곤란하셨겠네요. 죄송합니다.”

남자가 등을 떼지 않은 채 툭 뱉는 말에 이선은 난감해졌다.

2군 구장에서 관람객 하나가 다친 일은 의외로 프로팀에선 감독이 언급할 만큼 큰일이었다. 자신에게 말했던 것 이상으로 송재혁은 회사에서 문책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선은 그 사실이 굉장히 미안해졌다.

“근데 진짜 괜찮았거든요. 병원에서도 어지러우면 오라고 했는데, 딱히 그런 증상은 없어서…….”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왜 스스로가 듣기에도 변명처럼 들리는지 모를 일이다.

남자는 구태여 이선을 탓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냉한 얼굴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얼마 먹지도 않은 음식이 위장 어딘가에서 막혀 소화되지 않은 채 머물렀다.

강희찬의 고개가 아주 잠깐 위아래로 움직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끄덕였는지도 모를 찰나의 움직임이었다.

수긍인지 인사인지 모를 모호한 몸짓 이후, 그는 미련 없이 기대던 몸을 떼더니 뒤를 돌았다. 유려한 옆얼굴이 결 좋은 뒷머리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저……!”

급한 마음에 입에서 튀어 나간 작은 소리에 남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반쯤 고개를 돌리고 이쪽으로 향한 얼굴엔 여전히 뭐냐고 묻는 듯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잠깐 망설이며 입술을 벙긋거리던 이선은 이내 마음을 굳혔다. 반은 충동이고, 나머지 반은 미안함이었다.

“저 이제 택시 탈 건데, 괜찮으시면 가는 길에 내려드릴게요. 차 두고 오셨죠?”

“…….”

“같이 타세요. 아니면 야구장으로 다시 가도…….”

“집으로 갈 겁니다.”

됐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거절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식사 제안과는 달리 지금의 것은 정말 진심을 담은 청이었으니까.

많이 보진 않았지만, 그 몇 안 되는 순간마다 남자는 자리에 앉아 있거나 어딘가에 기댔다. 많이 움직이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과연 운동선수에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건 그것 때문이겠지.

시선이 마주쳤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다 멈춘 멍청한 자세인 이선을 향해 남자의 입이 열렸다.

“잡으세요.”

표정만큼이나 평온한 말투였다. 덕분에 이선은 자세만큼이나 멍청한 소리를 내며 되물어야 했다.

“네?”

“택시, 저기 오는데요.”

이선이 뒤를 돌았을 때 이미 개인택시 하나가 길가에 정차한 상태였다. 눈치만으로도 승객임을 알아채다니. 기사님의 경력이 꽤 될지도 모른다.

이선은 택시가 다시 출발할세라 재빨리 뒷좌석 문을 열었다. 예상에 응답이라도 하듯, 운전석엔 나이가 꽤 든 기사가 있었다. 뒷자리에 먼저 오른 이선을 향해 중년의 택시 기사는 먼저 말을 걸었다.

“어디 가십니까?”

왠지 앞자리에 탈 것 같았던 남자는 이선의 옆에 올랐다. 탁, 하고 문을 닫는 소리와 동시에 한 오피스텔 건물명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차를 출발시키려던 기사는 ‘어엉?’이라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뒷좌석으로 고개를 틀었다.

“…저거 아니에요?”

이선은 그제야 왜 기사가 당황했는지 깨달았다.

팔토시를 낀 기사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엔 방금 전 남자가 말했던 건물이 있었다.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바로인 곳에.

“네.”

심드렁히 말하는 남자의 기세에 밀려 차는 출발했지만, 기사의 입에서 나오는 불만까지 막을 순 없었다.

길 하나만 건너면 가는 데를 택시를 타냐며 투덜거리는 말이 이선의 귀엔 ‘재수 없게 웬 미친놈들이 타고 지랄이야’로 들리기 시작했다. 정작 장본인은 그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당연하게도 택시는 움직인 지 5초도 지나지 않아 길 건너에 정차했다. 오피스텔 입구에 차가 멈춘 순간, 남자는 미련 없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라는 이선의 인사가 완성되기도 전에, 이미 택시에서 내린 상태였다. 남자가 내리는 것을 룸미러로 확인한 기사는 츳, 하고 혀를 찼다.

“요금 반만 받을게. 다음부턴 이러지 말어.”

“아, 기사님. 저는 노량진으로 갈 거라서요.”

“…에이, 유턴 한 번 더 해야 되겠네.”

“죄송합니다.”

멋쩍은 이선의 웃음소리는 한 박자 늦게 닫히는 요란스러운 문소리에 섞여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죄송하다는 소리에 기사도 더 이상 불만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아니면 변경된 목적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더운 밤공기가 차단되었다.

유턴을 또 해야 한다는 불만과는 달리 기사의 운전은 부드러웠다.

일정하게 전해지는 시트의 진동을 느끼며 이선은 몸을 푹 기댔다. 점점 작아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확인하자 입에선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

저번에도 느꼈지만… 꽤 나이가 어릴 텐데도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 * *

택시에서 내린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열대야 탓보다는 이 동네가 주는 특유의 답답함 때문이었다.

이선의 목적지가 노량진 고시촌임을 들은 기사는 자신의 아들도 작년까진 순경 시험 준비를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2년 바짝 공부하고 올해 발령을 받았다는 소리에 자연히 신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험 준비를 시작한 게 대학 졸업반 때였고, 노량진으로 온 건 재작년이었다. 자신이 치렀던 초등 임용시험과는 합격률이 달라서 섣불리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수험생활이란 건 길어서 좋을 게 없다.

유명한 고시학원 건물 앞에서 택시는 멈추었다.

건물 뒤편에 있는 작은 포차집이 신규진의 단골 가게였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와본 적 없던 동네를 오히려 졸업하고서 더 자주 왔다. 이제 이 술집의 주인은 이선의 얼굴을 알아보기까지 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테이블에 손님이 있었다. 여긴 올 때마다 다섯 테이블 이상 채워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중 하나엔 엎드려 있는 신규진이 있었다.

나란히 앉아 축구 중계를 보던 사장과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동시에 출입구에 있는 이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르바이트생은 쓰지 않는 게 가게 재정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만……. 그래도 월급을 줄 수 있으니 사장도 사람을 쓰겠지.

“왔어? 오늘 안 좋은 일 있나……. 완전 뻗더라고.”

“죄송합니다. 얼마 나왔죠?”

결국 계산은 보쌈집이 아니라 여기서 하게 생겼구나.

지갑을 연 순간, 이선은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택시 안에서 강희찬에게 돈을 주려고 했는데 워낙 타고 있던 시간이 짧아서 타이밍을 놓쳤다.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키며 이선은 냉랭한 얼굴을 애써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냈다.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 현금 계산을 선호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 가게에선 예외였다. 괜한 미안함 때문에 카드 결제는 하지 못하는 버릇이 든 탓이었다. 올 때마다 재정 상태를 걱정하게 만드는 한산함도 한몫 거들기도 했고.

거스름돈을 대충 정리하고 신규진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어깨를 몇 번 흔들어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중간에 치운 게 아니라면 오늘 마신 건 소주 두 병일 거다. 확실히 평소 주량을 생각해 보면 이례적으로 취하긴 했다.

단단한 팔을 어깨에 둘러메고 일으킨 순간 입에선 욕이 나올 뻔했다. 술 취한 사람이 몇 배는 무거워진다는 속설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게 분명했다. 사장은 인상을 와락 구긴 이선을 걱정스레 봤다.

“혼자 갈 수 있겠어? 진석이 좀 보내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어어. 조심히 가.”

아주 잠깐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허옇게 질리는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을 보고 생각을 고쳤다.

신규진은 키가 큰 만큼 조금만 살이 붙어도 무게가 확 늘었다. 보기 나쁘지 않을 정도라도 옮기는 입장에선 죽을 맛이다.

가게를 나서고 골목 끝자락까지 갔을 땐, 이미 이선의 걸음 역시 취한 사람인 양 휘청이고 있었다.

…고기를 세 조각만 더 먹고 왔어야 했다.

저 앞에 있는 고시원 건물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다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전신에 맡겨두었던 에너지를 추심하는 채권단의 기분으로, 이선은 다리에 힘을 주며 걸음을 디뎠다.

“아… 놔, 더워…….”

“나도 더워. 말 걸지 마.”

한번 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겨우 고시원 건물에 도착했다. 문소리에 컵라면을 먹던 여자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주인 부부의 딸이라고 했었나. 안으로 들어선 일행의 꼴을 보더니, 여자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시끄럽게 하시면 안 돼요. 같은 층에서 항의 들어오니까.”

“예. 죄송합니다.”

오늘따라 죄송한 게 참 많았다. 가자미같이 눈을 흘기는 여자에게 고갯짓으로 사과를 건넸다. 그럼에도 불만스러운 기색은 거둬지지 않는다. 평소엔 수더분한 주인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있는 거로 아는데, 하필이면……. 운이 좋지 않은 날이다.

3층을 무슨 정신으로 올라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신규진이 술에 취해서 입이라도 다물어주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3층의 가장 끝 방.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층의 다른 방보다 월세가 2만 원 정도 비싼 방이었다. 올해 1년 치의 방세를 계산하며 이선이 새롭게 안 사실이었다. 휴게실이나 공동주방과 거리가 멀어서 소음이 덜하다는 장점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신규진을 현관문에 반쯤 기대게 만들고 손을 뻗어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잠금이 해제되는 맑은 소리가 복도를 울리자 이선의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두 달 전 마지막으로 눌러봤던 번호가 바뀌지 않은 채였다.

“…아으…….”

180이 넘는 장정을 침대에 던지다시피 내려놓자 매트리스가 푹 꺼지는 소음이 꽤 크게 울린다. 죽을 맛이다.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불을 켠 이선은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 작동시켰다. 찬바람을 조금 쐬고 나니 그래도 몸에 기운이 돌았다.

에어컨을 취침 설정으로 맞춰두고―어차피 중앙난방식이라 새벽에 주인이 알아서 꺼버린다지만― 리모컨을 책상 위에 두었다.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자 정체 모를 끈끈함에 들러붙은 먼지가 묻어나왔다. 손가락 끝에 얇게 옮겨붙은 불쾌한 감각을 옷에 문지르며, 이선은 쌓인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무원 준비는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는 이선이라도 한 가지는 표지만 보고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작년에 나온 책이었다.

표지를 넘기고 목차를 제외한 페이지를 두어 장 더 넘기면 금세 새것 같은 장이 나온다. 엄지손가락으로 책의 옆면을 잡고 촤르륵 넘겨봤다.

대충 봐도 끝장까지는 그런 모양새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래 깔려 있는 나머지 두 권의 책은 볼 것도 없었다.

두 달 전 이선이 이곳에 왔을 때도 책상 위엔 이 책들이 놓여 있었다. 순서마저도 똑같이.

“…….”

뒷주머니에 쑤셔둔 지갑을 꺼냈다. 반으로 접힌 지갑을 열고 현금 칸을 보며 이선은 잠깐 망설였다.

송재혁이 중간에 가버렸지만 어차피 오늘 쓰려고 했던 돈이다. 비록 젓가락에 손 한 번 대지 않아도, 운동선수도 동석했었고. 보쌈 대자 하나가 뭐란 말인가. 서너 번은 시켜서 먹었겠지.

누구를 향한 변명인지 모를 합리화를 마친 이선은 지폐를 모두 꺼냈다. 방금 펼쳐 봤던 책 표지 아래에 가지런히 지폐 뭉치를 두었다. 책장을 덮자 마치 책갈피처럼 노란 지폐들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이상에야 못 보기가 더 힘들 거다.

“…이선아.”

찬 공기 탓인지 낮게 깔린 목소리가 갈라진 탓인지, 순간적으로 이선은 덜컹했다.

뒤를 돌았을 때 신규진은 팔로 눈을 가린 채 누워 있었다. 불빛이 방해돼서 깼는지도 모른다. 왜, 라고 물으려는 이선보다도 먼저 신규진의 입이 열렸다.

“걔랑 이제 안 본다.”

짧은 말에 대한 대답은 여의치 않았다.

정리를 한 건지 당한 건지 모호했지만, 그런 걸 물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어. 대답도 추임새도 아닌 애매한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올 뿐이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시선이 얽혔다. 신규진이 팔을 치워내자 보이는 눈은 반쯤 뜬 상태였다. 취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제정신인 것도 같았다.

“…….”

이런 순간들이 있었다. 신규진은 종종 이런 눈빛과 말을 건네곤 했다. 마치 자신에게 어떤 결정을 하길 바라는 것같이. 답이 정해진 문제에 익숙한 정이선에게 이런 순간들은 항상 난감했다.

“…얼른 자. 내일 일어나야지.”

손을 내려 반쯤 뜬 눈 위를 덮었다. 술기운 탓에 오른 체온이 손바닥에 감겨들었다. 슬쩍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대로 눈꺼풀은 손바닥을 따라 아래로 향한다. 얌전하게 내려온 속눈썹이 눈 아래에 그늘을 만들었다.

벽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세 평 남짓한 고시원 방이 어둠으로 잠기는 건 금방이다.

…답을 피하는 건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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