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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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지내다 보면 시간의 흐름을 잊을 때가 많았다. 매년 보는 게 비슷한 크기인 어린아이들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학교를 한 번 옮겨봤다면 또 모르겠으나 이선은 아직 전근을 가본 적은 없었으니 더욱 그랬다.

교실을 듬성듬성 채운 책걸상의 높이는 어른에게는 꽤 낮다. 자신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한 반에 서른네다섯은 있었는데, 요새는 스물다섯 정도가 정원이었다. 여유가 생긴 책상 배치를 보며 세월을 느끼곤 했다.

이선을 제외한다면 너른 교실엔 남자아이 하나가 전부였다.

아이가 입고 있는, 흰색 바탕에 푸른색으로 줄무늬가 들어간 유니폼과 비슷한 색깔의 야구화가 조화롭다. 유니폼과 어울릴 신발을 골랐을 젊은 어머니의 센스가 돋보인다.

멋진 차림인 데 비해 아이는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노란 연필을 쥐고 있었지만.

“산이야. 지금 하는 쪽까지 다 풀면 확인하자. 나머지는 숙제로 하고. 이제 4학년 형들 수업 끝나겠네.”

“…네에.”

꽤 불퉁한 목소리라도 대답이 나오긴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대답부터 없어지는 고학년에 비해 저학년생들이 귀여운 점 중 하나였다.

수업 시간에 익힘책을 다 풀지 못했던 탓에 아이는 훈련이 있을 학교 야구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정식 훈련은 고학년 수업이 마쳐야 할 수 있단다. 그래도 아이는 감독님께 혼날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다른 3학년들보다 체구가 작은 탓에 아이가 입은 유니폼이 약간 헐렁했다. 체구만큼이나 작은 손이 야무지게 말아 쥐고 있던 노란색 연필이 멈췄다.

“다 했어요.”

아이는 화장실이라도 갈 것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익힘책을 들고 교탁으로 다가온다. 감독님이 많이 무서운가. 오며 가며 눈인사만 대충 나눴던 야구부 감독이 얼마나 엄한지 이선이 알 수는 없었다.

풀어온 쪽을 확인해 보니, 그래도 기초단계라 계산 실수를 제외하면 일단 다 풀기는 했다. 채점을 마친 쪽의 옆 장에 별 표시와 날짜를 적었다.

“한 쪽은 숙제.”

“늦게 끝나서 할 시간 없는데…….”

“그래도 해야지. 안 그러면 내일도 남아서 풀 텐데.”

“아, 왜요.”

또 오늘처럼 혼자 남아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못내 싫은 표정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성질에 일일이 열을 내는 것도 작년이 끝이다. 고학년의 짜증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였고.

이선은 그대로 익힘책을 덮고 아이에게 건넸다.

“남기 싫으면 오늘 TV 보지 말고 해오자. 내일은 시합이라며.”

“…네.”

‘시합’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야구부 내에서 청팀, 백팀으로 나누어서 하는 연습 경기다. 고학년 형들의 고충은 모른 채―적당히 져주지 않으면 감독님께 혼이 난단다― 저학년들은 비겼다며 좋아하곤 했다. 자신감을 키워주는 방법이라기엔 뭔가 미묘하고 아리송하다고 이선은 생각했다.

떨어진 숙제에 아이가 입을 내미는 것도 잠시였다. 여기서 칭얼거려도 시간 낭비라는 걸 깨달았는지, 급히 제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챙겼다.

책가방을 지고 손에는 옷과 신발을 담고 다니는, 책가방만큼 큰 보조 가방. 몸집에 비하면 과해 보이는 짐이다.

무겁지도 않은지. 이선의 걱정과는 달리 아이는 훌쩍 가방을 둘러멨다.

“안녕히 계세요!”

“어, 산이 내일, …보자.”

이선의 인사가 채 완성되기도 전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은 닫혔다. 끝엔 갈 길을 잃은 혼잣말이 되었다. 아무도 보지 않았음에도 괜히 멋쩍었다.

채점하고 있던 단원평가 시험지는 아직도 절반 가까이 남았다. 그래도 앞에서 아이가 공부할 때는 같이 열심히 채점했는데, 혼자가 되자마자 갑자기 하기 싫어진다.

아이 하나에 선생 하나. 방금도 소란스러운 건 절대 아니었지만, 역시 혼자가 되니까 느껴지는 적막이 달랐다. 간간이 들리는 방과 후 교실의 활동 소음이 있어도 큰 위로는 되지 못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했으니까 잠깐만 쉬자.

별 이유를 다 갖다 대며 합리화를 완성하고는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집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 헤드라인 몇 개를 훑어본 후에야 깨달았다. 별로 할 게 없다는 걸.

“…….”

얼마 전, 타의에 의해 바뀐 핸드폰의 인터페이스가 손에 익지 않은 게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부터 이선은 핸드폰으로 하는 게 없었다. 모바일 게임이라도 하면 몰라, 쓸데없이 큰 화면은 그저 핸드폰을 쥐는 손과 손목에 익숙하지 않은 뻐근함을 선사할 뿐이다.

뉴스는 제목만 훑고 포털 앱을 종료했다. 이런 주제에 고학년 담임이었을 땐 신문 기사를 읽고 발표자료를 만들라는 숙제를 냈었다. 이제는 6학년인 첫 제자들을 생각하자 괜히 양심이 찔렸다.

쯧.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이선은 메신저 앱을 열었다.

수업하느라 확인하지 못했던 채팅창 목록 중 가장 위에 있는 이름을 눌렀다.

[너 내 사정 알면서 진짜 이럴 거냐?]

[괜찮을 때 천천히 갚으라고 한 거 아니냐?]

[야, 이선아.]

[정이선 연락 좀 하라고.]

핸드폰이 바뀌느라 그 전에 했던 대화들은 다 날아간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보냈던 메시지가 뭐였더라. 돈 마련되는 대로 연락하라는 거였나.

아무래도 반응을 보면 그때 봤던 여자와는 헤어진 듯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른다. 같은 학교에 다닌 적은 없지만, 평소 행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신규진은 동성에게나 이성에게나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고, 그 ‘인기’의 원인은 적당히 생긴 외모와 잘 열리는 지갑이다. 남자 대학생의 지극히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카드가 없어진 지금의 그는 그저 평범한 노량진의 고시생일 뿐이다.

대학생 때 발급해 두고 귀찮아서 한도를 늘리지 않았던 게 다행이려나. 한도를 늘려달라는 눈치를 종종 받아도 모른 척 넘어갔던 것도 다행이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신규진에게 빌려줬던 오백은 비싼 이자를 내며 카드빚으로 남았을 거다.

저금했던 돈을 터나 카드빚이나 뭐가 그리 다르냐. 송재혁의 구박이 지척에서 들리는 것 같다. 생각은 친구에게로 닿았다.

“아, 맞다.”

전화하라는 말을 남기고 회사로 복귀했던 송재혁의 얼굴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선은 신규진과의 채팅창을 나갔다. 역시 그 아래로 송재혁에게서 온 메시지도 있었다. 날씨 알림 메시지와 붙어 있어서 절로 함께 무시했나 보다.

[정 선생 몸은 괜찮음? 자냐?]

[너 편한 시간에 전화 좀.]

하나는 병원에 함께 갔던 날이고 마지막 메시지는 오늘 아침 10시쯤에 도착했다. 확인해 보니 지금이 4시가 채 안 됐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사적인 전화를 받는 게 눈치 보이는 때였다. 하지만 송재혁은 오히려 저녁 시간대에 더 통화가 힘든 부류였다. 평일의 야구가 6시가 넘어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연락처에서 이름을 찾고 통화버튼을 누르자, 예상대로 금방 받는다.

―야, 너 주말엔 뭐 하고 이제야 전화해.

“미안. 그냥 계속 좀 자서.”

―…머리는 괜찮냐? 병원에서는 뭐래?

수화기를 통한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아마 야구장 복도나 주차장 같은 곳에서 전화를 받고 있나 보다.

“좀 지내다 어지러우면 다시 오라고, 뭐. 너 회사는 괜찮아? 한소리 들은 거 아냐?”

―들으면 듣는 거지.

그래도 이 시간에 전화도 받는 걸 보면 크게 걱정할 건 아닌가.

내년 정직원 전환 문제도 있는데 괜히 책잡힌 게 아닐까 싶은 걱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병원 언제 갈 거냐?

“…가야 돼? 별로 아픈 데 없는데.”

―문자 남겼잖아. 보험 처리 때문에 서류 필요한 거 있다고.

“아……. 핸드폰 바꿔서 아예 날아갔어. 뭐 필요한데?”

앞에 널린 시험지 위로 포스트잇 한 장을 붙였다. 영수증 정도 필요하려나.

이선은 버릇처럼 쓰는 특정 브랜드의 멀티 펜 색깔을 검정으로 바꾸고 볼펜 심으로 메모지를 톡톡 두드렸다. 열어놓은 창 너머로 들리는 풍물 연주 소리와 나름대로 박자가 맞고 있었다.

―핸드폰? 왜? 망가졌어, 그때?

“응. 액정만 좀 깨졌어. 근데… 그런 것도 경비 처리가 돼?”

글쎄, 하고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렀다.

―나도 회사에 물어봐야 알겠는데.

“개인 카드 긁던데, 그 사람.”

―누구? …강희찬이 바꿔줬어?

“아… 어.”

―헐…….

대화의 흐름이 아무리 봐도 병원에서 떼어 와야 할 서류와는 멀어지고 있었다. 초록색 포스트잇 위에 짧은 세로선 두 개, 그 아래로 반원을 하나 그렸다.

그림엔 영 재주가 없는 편이라 하는 거라곤 이런 게 전부였다. 대학 동안 다녔던 미술학원 수업료가 몹시도 아까워졌다.

몇 개의 스마일이 생겨날 무렵에도 전화기 속 송재혁은 몇 번이나 ‘헐’ 소리만 하고 있었다.

―…너, 자기 팬이라고 해서 잘해주나? 그 성격이 아닌데…….

“아니, 잘해줬다기보다는…….”

그걸 ‘잘해준다’라고 표현하려면, 그 전에 사전적 의미 체계부터 바꿔야 한다.

짧았던 그 날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복기했다. 평소 성격이 어떤지는 몰라도, 송재혁의 반응을 봐선 그때의 대화도 나름대로 말을 골라가며 했던 걸지도 모른다.

―먼저 바꿔주겠다고 했어?

“어… 뭐 그렇지.”

―바꿔주면서 혹시 백설……. 아니, 그놈이 뭐 다른 소리는 안 했고?

“다른 소리?”

―사람 열 받게 쏴붙이는 거. 전매특허거든. 기분 나빴어도 대충 흘려. 원래 성질머리가 좀 그래.

“아니야. 별말 없었어.”

‘나중에 시끄러운 건 질색이니까 이거 먹고 입 닥쳐라.’

간결하게 의도를 정리해 보자면 이 정도려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이어가는 친구에게 그날 있던 대화를 굳이 알릴 이유는 없다. 지금도 송재혁은 충분히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괜한 말은 삼켜야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송재혁은 그의 직장 동료였다.

―그럴 리가 있나. 그놈이 말로 조져 버린 신입 기자랑 방송국 아나운서 눈물만 모아도 생수통 큰 거 하나는 거뜬히 채울걸.

“뭐……. 성격이 참신하긴 하더라.”

성격과는 별개로 자신은 다양한 사람을 꽤 많이 만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따져보면 자신이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부모였다.

선생의 그림자도 안 밟는다던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그런 경향이 줄었지만, 아직도 학부모들은 본인보다 어린 담임교사를 향해 ‘선생님’이라며 먼저 허리를 숙인다. 그러니까, 정이선 선생이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경우가 많다는 소리였다.

뭐, 당연히 아닌 경우도 존재했다. 연차가 적고 나이가 어리며 미혼인 남자 선생이다. 트집 잡힐 부분은 차고 넘쳤다.

처음 담임을 맡아본 작년만 해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 경험의 일천함을 들먹이며 불안감을 가장한 무시를 했던 5학년들의 학부모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선생님’ 소리를 했으며, 대놓고 불쾌함을 보이진 않았다.

보수적이고 책잡히기 쉬운 교직 사회에서는 본 적 없는 남자의 태도는 어떤 의미에선 신선하기까지 했다. 화가 나기보다도 굉장히 신기하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먼저였으니까.

이선의 말을 들은 송재혁은 그 정도가 아니라며 푸념을 이었다. 썩 궁금하진 않았지만 ‘개새끼’를 활용한 남자의 별명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팬들이 부른다는, 다채로운 변형된 것에 이어 ‘참신한 개새끼’까지 붙었을 때는, 정이선도 난감했다.

…자신은 참신하다고만 했지, 거기에 ‘개새끼’ 소리를 붙인 적은 없었다.

“아무튼, 받아서 쓰고 있긴 한데……. 괜찮은가 싶어서.”

―그냥 써. 걔 돈 많아.

“야.”

스마일 입에 달고 있던 앞니 두 개의 크기가 전부 제각각이다. 그 와중에 삐끗해서 마지막 스마일의 앞니는 입보다도 커졌다. 한숨 나오는 그림 실력을 외면하며 정이선은 볼펜을 손에서 놨다.

송재혁은 내 지갑과 남의 지갑의 경계가 모호한 편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들에게만 적용되는 건 줄 알았는데…….

―뭐, 어때.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별거 아니란 투였다. 이선의 손 안에 버겁게 들어찬 물건은 보쌈 대자 정도의 가격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와닿지 않는 걸 수도 있다.

“아까 서류 필요한 거 있다며. 뭔데?”

불편하게 느껴봐야 소용없긴 하다. 이미 핸드폰은 받아서 잘 쓰고 있으니…….

숨을 내뱉자 얹힌 것 같은 부담감이 반쯤 가신다. 사람의 몸이란 건 신기했다. 아무리 힘들고 고되어도, 숨을 깊게 쉬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고통 역시 어느 정도 덜어졌다. 어린 시절 앓았다던 천식이 영향을 준 버릇인지도 모른다.

―그건 나중에 나랑 병원 같이 가고. 저번에 말했던 책, 그거 야구장에 있더라.

“그래?”

―표 끊어줄 테니까 와. 넌 내가 야구장에서 일하는데 한 번을 안 오냐.

몇 번이나 표를 주겠다고, 오라고 했던 걸 차일피일 미루었다.

으음. 이선은 미안한 마음을 숨기려고 괜히 퉁명한 얼굴을 했다. 얼굴을 바꾸면 자연스레 목소리도 그에 맞춰진다. 사람의 몸이란 건 정말 신기했다.

“요새 관중 없어? 작년엔 백만 관중 실패했다고 기사 떴잖아.”

―야, 죽을래? 아니거든?

그래도 월급 받는 직장 흉을 본다고 발끈한다. 작년엔 왜 관중이 덜 모였는지, 필사적으로 설명하는 목소리를 피해 전화기를 귀에서 멀찍이 떼었다.

멀리서 울리는 어린아이들의 고함 소리가 악기 음에 섞여들었다.

* * *

정확히 50구의 투구 수 제한을 지키느라 4이닝 중간에 내려와야 했다. 강희찬에게 투구 수 제한이 걸린 경기는 오랜만이었다.

눈을 찌푸려야 할 만큼 햇살이 내리쬐는 더운 낮 경기. 미트에 공이 꽂히는 소리가 선명히 들릴 만큼 조용한 야구장은 기억 속에선 꽤 익숙했다.

마운드 위에 있는 선수가 푸른 유니폼을 입은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점만 제외하면.

씻고 아이싱 처치를 받는 동안 제로 스코어는 어느새 2점의 차이를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누상은 가득 주자가 들어찬 상태다.

경기에서 이기지 못해도 개의치 않고, 팀의 성적보다는 선수 개인의 기량을 더 눈여겨본다. 2군은 그런 곳임을 강희찬은 꽤 오랜만에 깨달았다.

“오늘 볼 좋더라. 귀족 같은 몸뚱이네. 쉬면 바로 티가 나고.”

힘겹게 스리 아웃을 잡고 이닝을 마무리 지은 투수가 내려오며 공수교대였다. 그 잠깐 사이 이명호는 강희찬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농처럼 말을 건넸지만 사실 강희찬은 3년 연속 200이닝을 1군에서 버텼다. 그중 한 해는 아시안 게임에 차출까지 됐었고.

고등학생 시절 공공연히 소문이 날 만큼 학교에 말을 넣고 관리를 했던 선수라도, 아직 관리가 필요할 만큼 어린 축이었다. 크게 탈이 날까 봐 열흘을 말소까지 시켜가며 쉬게 해주는 감독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감독님이 살찌우라고 안 하시냐?”

“하십니다.”

“그럼 찌우라고. 아직도 먹는 걸로 까탈 부려?”

“…….”

“전날 저녁엔 밥 먹어야지. 당 떨어져서 어떻게 던지나 몰라.”

선발 등판일에 맞춘 식사 조절을 이제 와 바꿀 수는 없었다. 몇 년에 걸쳐 생긴 습관이다. 투수의 루틴을 바꾸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지는 이명호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해도 의미 없는 말을 하던 이명호는 손에 들고 있던 초코바를 두 입 만에 없앴다. 당이 떨어지네, 어쩌네 하는 건 오직 본인이 초코바를 먹기 위해 두는 포석에 불과했다.

강희찬은 중3 때 얼추 지금의 키까지 자랐다. 키가 빨리 자라서 좋은 점은 고등학생 때 갑작스러운 성장으로 인해 투구 밸런스가 깨질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신장이야 투수 평균치였지만, 체중이 빨리 느는 편은 아니었다.

본인은 선천적인 체질 문제라고 생각해도, 코치나 감독들은 항상 예민한 성정 탓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물론 강희찬은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 송 PD 친구는 어떻다던? 별일 없대?”

갑자기 말을 건 이유가 있었다. 강희찬은 나직이 숨을 뱉었다.

이런 말을 물어도, 저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붕대 하나 감지 않고 나왔고, 핸드폰을 바꾸는 데 필요한 서명도 잘만 했다.

강희찬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선 별 이상 없었습니다.”

그때 의사가 뭐라고 했더라?

마른 뒷모습 너머로 보이던 의사의 얼굴은 친절한 듯 무심했다. 마치 이런 사고로 병원을 찾는 사람이 흔하다는 것처럼.

그건 아마 맞는 말일 거다. 의사가 가장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순간은 남자를 따라 자신이 진찰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다 큰 성인 남자가 보호자를 대동해서인지, 그 보호자가 야구선수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남자는… 홍보팀 사원의 친구라기엔 몇 년 후배 정도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로 반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착각을 했을 것이다.

남자가 동안인 편이었지만 꼭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평범한 직장에 다니는 그 나이대의 사내라기에는 묘하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날 차에 앉았던 것처럼 벤치에 등을 푹 기대앉았다.

시트는 불편하고, 옆자리엔 짐이 실려 있었다. 전날 밤을 새워 술을 마셨어도 잘 수는 없었을 조건이었다. 눈만 감은 채로, 듣기 싫은 얘기를 듣고 있던 약 한 시간이 떠올랐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답답해지는 광경이 그게 처음은 아니었다. 꼭 이런 공기에 둘러싸인 야구장에 서 있던 모습을 자신은 알고 있다. 그것을 보면서 느꼈던 감상과 비슷했다.

대략 30㎝. 작지 않은 신장에 마운드 높이까지 더해진 선수는 당연히 눈에 쉽게 들어온다. 자신이 불펜에서 몸을 푸는 동안에도, 투구 수를 채워 마운드에서 내려온 후에도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볼 때마다 병신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적어도 그건 납득할 만한 이유라도 있었다. 아버지가 야구계에서 이름 좀 날리는 경우라면 몰라도, 결국 감독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고등학생 선수는 없다.

그 시절, 본선 경기가 열리던 구장에서 마주친 적 있던 부산일고 감독은 보기에도 뜻을 굽힐 타입은 아니었다. 연고 구단과 그 구단이 내미는 돈에 움직이던 휘정고의 고 감독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어쩌면, 일찍 큰 키보다 더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다녔던 학교의 감독이 구단과 학부모로부터 뒷돈을 받고 라인업을 짜던 사람이었다는 건.

자신이 구단의 엄청난 관리를 받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최대어가 서울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학교의 유니폼을 입었다면. 같은 연고지에 소속됐다면.

이런 가정으로 시작하는 생각의 끝은 언제나 단순했다. 고교리그에 어울리지 않는 등판일 제한이나 투구 수 관리는 자신의 몫이 아니었을 게 분명했다.

“…….”

뻔한 생각 탓에 이어진 침묵을 가르고, 두꺼운 손이 뻗고 있던 강희찬의 오른쪽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라운드는 신월이 아닌 이천으로 변해 있었다. 어느새 5회의 공격 기회도 순식간에 스리 아웃이 잡히며 끝났는지 또다시 공수교대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감독님이 그거 아셨어. 너 올라가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고 ‘죄송합니다’ 한마디만 해. 나한테 하듯이 말대답했다가, 그 성질에 귓방망이부터 날아온다.”

“…네.”

“너도 봤지? 벤클 하면 그냥 레슬링 기술로 넘겨버리던 거.”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최 감독의 선수 시절 벤치 클리어링은 스포츠신문 1면으로 나기까지 했다. 야구판에서는 안 본 사람이 더 드물 거다. 아무 말 없는 강희찬의 반응은 이명호에겐 중요한 게 아니었다.

“벤클 터지면 그때 감독이 가서 저것부터 말리라고 쌩난리 아니었냐. 힘은 어찌나 센지, 선수 셋이 붙어야 겨우 말리고……. 내 진짜, 그 인간 말리다 맞은 덴 아직도 비 오면…….”

숨도 쉬지 않고 이어지던 말이 문득 멈췄다. 정신을 차린 이 코치는 무릎을 몇 번 더 두드리더니 이내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수비 이닝이었다. 투수코치는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갓 스물이 된 어린 투수의 볼을 체크해야 한다.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이 장비를 챙기고 필드로 나가도, 등판이 끝난 선발투수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켰다. 동료들을 응원하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주변은 좀 더 적막해졌다.

투수코치 시절에 비하면 많이 죽었다는 평을 들어도 결국 최 감독의 본래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았다. 진짜 귓방망이를 맞아본 적은 없어도, 데뷔 시즌부터 경험했던 감독의 성정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공에 맞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다른 데서 화풀이를 듣게 생겼다. 감독의 얼굴은 이내 자신의 뒤에서 한 걸음 정도 떨어져 걷던 사람의 것으로 바뀌었다.

…별 탈이 없으니까 연락도 없는 거겠지.

유니폼을 갈아입기 전 확인했던 핸드폰 최근 기록에 모르는 번호는 없었다.

‘저도 인터넷에 함부로 글 올리면 곤란한 직업이라,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화를 내는 거라고 하기도 애매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말 한마디 못 하고 멍청하게 버티는 것보다는 그거라도 하는 게 살아가는 편엔 좋을 거다.

손톱 주변에 올라오는 거스러미를 보는 것과 비슷할까?

문득 든 생각은 상대 팀의 4번 타자가 첫 구를 받아치며 만들어 낸, 깔끔한 홈런의 아치를 보자 흐려졌다.

* * *

[선아, 올해는 방학 언제부터라고 했지? 주말에 와서 반찬 좀 챙겨가.]

무음으로 설정했어도 화면이 큰 핸드폰은 메시지가 온 순간 존재감을 뿜어냈다. 검사를 위해 아이들이 놓고 간 영어 교과서를 훑어보던 이선은 화면이 다시 까맣게 될 때까지 핸드폰에 손을 대지 않고 멀거니 보았다.

‘좋은 아들’이라는 게 어떤 건지 이선은 항상 궁금했다.

가끔 채널을 돌리다 보던, 드라마 속 자식들은 멀끔한 양복을 입고 부모님을 찾아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게 성공한, 좋은 자식의 표본인가 싶은 마음에 아주 잠깐 따라 해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양복은 면접 때 입었던 것과 경조사를 대비해 하나 더 장만한 게 전부였다. 애초에 직장도 정장을 입는 곳이 아니었고.

‘5월엔 부모님 드리는 용돈이랑 경조사비가 너무 많이 나가서 힘들어.’

공식적으로 ‘선생님’ 소리를 들은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을 때. 회식 자리에서 푸념하던 선배 교사의 말을 듣고 이선은 아차 했다.

혼자 운영하고 계시는 가게가 어머니의 수입 원천이었다. 보통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부모님께 용돈을 드린다는 사실을 이선은 그때 깨달았다.

월급이 많지는 않은 탓에, 적은 돈을 어머니의 계좌로 말없이 보냈다. 공과금이 나가는 날 통장을 확인하신 어머니는 됐다며, 다음부터는 보내지 말라 하셨다.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형편이 되면 좀 많이, 되지 않으면 적게나마 넣었던 돈은 일종의 면죄부였다. 입금을 하고 나면 조금 덜어지는 죄책감에, 그날은 왠지 아버지를 생각하기도 했다.

남들이 하는 ‘좋은 자식’ 흉내나 어설프게 따라 하는 정이선 선생은 의외로 실상과는 다르게 주변에선 꽤 다른 평을 받곤 했다.

학교에서 만난, 특히 이선보다 나이가 있는 교사들은 이선의 인적사항 몇 가지를 묻고 나면 꼭 붙이는 말이 있었다.

‘정 선생님이 엄청 효자네.’

지금은 홀어머니 밑에 있는 외아들이라거나, 시험에 한 번에 붙었다거나. 이런 얘기가 왜 그런 결론으로 귀결되는지 모르는 이선은 어색하게 웃곤 했다.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사실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말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로, 자신은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좋은 자식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탓이라 돌리기 싫었던 어린 시절엔, 이렇게 일찍 돌아가실 거면서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나,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회사에서 주는 합의금을 받은 후 어머니는 시댁과의 연락이 끊겼다.

‘남편 잡아먹은 년 주제에 앞으로 내 아들 제사는 지낼 생각도 마라.’

아버지의 제사 때 집에 들이닥쳐 악귀처럼 외치고 간 할머니의 비명이 지금은 아버지의 얼굴보다 생생하게 남아 있다.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이선은 울지 않으려 했다. 노력했지만 결국 그릇 치우는 소리와 함께 묻어나는 여자의 나직한 울음을 듣자 끝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탓이었다. 어머니도 자신이 없었다면 회사에서 적선하듯 내미는 합의금 따위는 받지 않으셨을 테니까.

고우시고, 충분히 사랑스러운 분이다. 분명 옛 남편의 기억을 점점 흐리게 해줄 좋은 사람을 만나실 수 있었을 거고, 그랬어야 했다. 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그리운 사람과 겹쳐 보이고, 악몽 같은 기억이 밀려오는 아들만을 보고 살아야 하는 건 서른 중반인 여자에겐 너무한 일이었다.

사춘기 시절엔 어렴풋이 했던 생각이, 지금 나이가 되어서 학부모들의 얼굴을 마주하다 보면 더욱 확신으로 변했다. 그때의 어머니는 정말 젊으시고, 어리기까지 했다는 걸.

항상 일하시느라 바쁘셨던 어머니는 이선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오신 적이 없었다. 그랬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학교에 왔던 날, 이선 역시 처음으로 아프지도 않은데 조퇴를 해봤다.

자신이 들어서자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반에서 가방을 챙기고, 어머니의 뒤를 따라 학교를 나섰다. 집으로 가는 내내 이선은 어머니의 곁에서 걸을 수 없었다.

두어 발 뒤에서 발소리도 내지 못하고 걷는 아들을 어머니는 자꾸 돌아보셨다. 집에 도착했을 땐 말없이 찬과 국을 데워 밥을 차리실 뿐이었고.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밥을 모래처럼 씹어 삼킨 이선을 향해 어머니는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밥 먹고, 오늘은 공부하지 말고 푹 쉬라고. 겨우 밥공기만 비워낸 이선은 방에 들어가 교복도 벗지 못하고 침대에 엎드렸다.

…딱 이대로 죽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이 들면 내일이 오지 않기를. 자고 일어나면 다 없던 일이 되기를, 시간이 되돌려져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소문이 돌며 반 아이들이 저를 보고 수군댈 때도, 함께 교무실에 불려온 김은호의 원망 어린 시선을 받을 때도 아니었다. 그런 건 이선에게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 말없이 걷기만 하는 마른 등을 본 순간 정말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건 영화나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날 밤, 간절히 바라던 인생의 리셋 버튼은 당연히 나타날 리가 없었다.

새벽까지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버거워 잠들지 못하다, 푸르스름한 여명이 창을 넘어올 때 잠깐 눈이 감겼다 뜨였다.

주무시지 않았던 건지 이른 새벽에 깨어 있던 어머니는 금요일이니 하루 더 쉬어도 된다 했지만, 이선은 하루 새 커지고 무거워진 교복을 새로 걸치고 학교에 갔다.

집에 있는 것이, 그래서 어머니를 향한 죄책감에 짓눌리는 것이 학교보다 더욱 지옥이었다. 예상대로 김은호는 그날 등교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잘려도, 잘린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아물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건 그 자리에 새 손가락이 생긴다는 말은 아니었다.

상처는 어떻게든 흉터로 남는다. 흉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보지 않고, 덮어두며 살아갈 수 있다.

두 사람밖에 남지 않은 소박한 가족은 또 하나의 흉터를 지닌 채, 애써 보지 않으려 하며 살아왔다.

“…….”

꺼진 핸드폰 화면에 다시 손가락을 조심스레 가져다 대었다. 메시지 알림이 눌리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 닿자, 화면이 다시 밝게 켜진다. 어딘가 산에서 찍으신 것 같은 꽃 사진 옆에 있는 문자 내용에 눈을 두었다.

어차피 집에선 하루에 한 끼, 주말엔 두 끼 정도 먹는다. 사실 그마저도 나가서 먹는 게 설거지도 그렇고 여러모로 편했다. 그래도 먹지 않으니까 챙겨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익숙함과 그렇지 못한 손맛이 느껴지는 반찬들은 다 먹을 때도 있고, 결국 버리게 될 때도 있었다.

가끔 낯선 손맛―이지만 사실 객관적으로는 꽤 좋은 솜씨―이 묻은 음식의 출처를 먼저 물을까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번번이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부모님의 ‘부모가 아닌 인생’에 대해 말하는 건 어려웠다. 특히 살갑지 못한 자신에게는 더욱.

외동이 아니라 다른 형제가 있었다면……. 아마 자신은 진작 집과는 연락을 끊었을 터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이고 과정적인 의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문득 생각해 본 미래의 자신이 그랬다. 좋은 사람의 곁에 서 있는 어머니는 웃을 수 있었다.

흉터로 남은 상처도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잊고 살 수 있다. 노트 정리를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리는 것처럼. 항상 버릇같이 버리고 새로 쓰던 노트와 삶이 같지는 않을 테지만.

하지만 어머니는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다고 해서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이선이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서울로 대학을 오고, 막 첫 시험을 마쳤을 때였다.

따져보면 고등학교 때의 공부량이 그보다 훨씬 웃돌았을 거다. 하지만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시험이 끝나자 몸과 정신은 축났다. 이선은 금요일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수원에 내려갔다.

차려진 식탁을 내려다보자 문득 깨달았다. 어머니를 따라 일찍 조퇴하고 집에 돌아왔던 그 날과 비슷하다고.

잠이 부족한 탓에 대충 이어지던 숟가락질을 멈추고 이선은 ‘엄마’라고 멍하니,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나 고등학교 때.’

스스로 내뱉는 소리가 이명처럼 머릿속을 가득 울리는 것 같았다. 기묘한 감각이 낯설어 잠깐 멈추었던 말을 이었다.

‘걔랑 만났던 거 맞아요.’

‘…….’

‘나 혼자 착각한 거 아니었어요. 같이 만났어요.’

잠과 피로에 취해서 내뱉은 말을 깨달은 순간에도 후회하진 않았다.

어머니에게 다시 상처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은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면, 앞장을 찢어버린 노트처럼 아무렇지 않게 새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작해야 대학에 들어가서 첫 시험을 치른 스무 살 철부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화를 내셨다면,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소리라도 치기를 원했다. 그러면 미련 없이, 그 핑계를 대고 수원으로는 발길도 돌리지 않을 각오였다.

잠에, 피로에, 혹은 또 다른 무언가에 취해 내뱉은 말 이후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 이선의 앞에 어머니는 금방 만든 소고기뭇국을 두었다. 같이 식사를 하시겠다며 반 공기만 채웠던 어머니의 밥그릇은 그마저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선아.’

‘…….’

‘엄마가, 만나봐서 아는데…….’

조심스레 들어 올린 시선은 이내 어머니의 것과 얽혔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이선은 재빠르게 다시 고개를 국을 향해 내렸다.

잠깐 동안 마주했던 어머니의 얼굴엔 노기도,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그냥 선이 좋다는 착한 사람 만나는 게 최고야.’

‘…….’

‘엄마가 아빠를 그래서 많이 좋아했어. 알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가 처음으로 ‘아버지’를 언급한 순간이었다.

흔히 하는,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한 번도 믿어본 적 없었다. 새벽과 늦은 밤에만 볼 수 있던 어머니의 등은 너무 작고 말랐다. 자신의 어머니는 겨우 버틸 뿐이지, 결코 강한 게 아니었다.

항상 했던 생각은 스무 살, 봄에 깨졌다. 흉터에서 눈을 돌리며 애써 모른 척하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흉터를 눈앞에 두고 보듬어오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 * *

“너 2군에선 뭐 한 거냐?”

음료수를 챙겨오려는 이승주에게 가는 김에 글러브도 같이 가져와 달라 했더니, 글러브는 쏙 빼먹고 음료수만 열심히 챙긴 채 실내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새대가리라고 하는 것도 새한테 미안할 수준이다. 강희찬은 말을 아끼고 직접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글러브를 찾고 있던 차에 등 뒤에서 감독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물건을 찾느라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고 뒤를 돌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감독은 벤치에 앉은 채였다.

‘…귀신도 아니고, 발소리는 왜 안 내고 다니는 건데?’

속으로 불평을 삼킨 강희찬은 앉아 있는 최 감독 앞에 섰다.

2군 등판도 나쁘지 않았고, 외국인 선수의 등판일을 미뤄가면서까지 루틴에 맞게 날짜를 조절했다. 팀 동료를 타석에 세워서 했던 라이브 피칭도 괜찮은 편이었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말소 직전엔 밋밋했던 체인지업의 각도 커졌다.

어떤 지점을 보고 감독이 말을 꺼냈는지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강희찬은 그저 글러브를 쥔 손을 등 뒤로 돌리고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운동선수가 선배나 감독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가장 편한 자세였다.

그래도 제삼자가 보기엔 꽤 불편하긴 할 거다. 체중계를 들고 더그아웃으로 누군가를 찾듯이 들어오던 투수코치는 강희찬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다시 안으로 사라졌다.

뻐근한지 목덜미를 손으로 받친 최 감독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병원 같이 갔다며.”

…그 얘기였냐.

“네. 죄송합니다.”

아예 잊고 있었다. 최 감독이 자신의 실수를 알았다는 사실은 이명호 코치에게 전해 들었지만.

핸드폰엔 모르는 번호로 남겨진 문자나 부재중 알림 하나 없었다. 자신이 직접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찍어줬다는 사실 역시 지금 떠올랐다. 택시 사이드미러로 보이던, 한참이나 대리점 앞에 멀거니 서 있던 답답한 모습은 그다음이고.

이명호 코치의 조언을 먼저 기억해 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감독이 앉아 있는 위치상 귓방망이보다는 발이 먼저 날아오기 좋았다. 물론 오늘 등판인 선발투수를 그라운드 훈련 중인 원정팀 선수들 앞에서 때릴 감독은 요새 없긴 해도.

“다친 건 어떻다는데? 송 PD 친구라며.”

“…….”

이미 내야에서 타격 훈련을 하던 원정팀 선수들의 기합 소리가 전보다 작아졌다. 티는 내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그들은 보기 불편한 장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채였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는 없을 거다.

평소 최선형 감독은 등판 전인 선발투수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복귀전, 그것도 시합 시작이 두 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뜬금없이 시작한 대화가 강희찬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아무 말 하지 않는 강희찬을 올려다보던 감독은 그대로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귀찮은 일 생기게 하지 마라.”

얼굴은 정면인 필드를 향했지만, 시선만큼은 강희찬을 향하고 있었다.

“너 없이 열흘 살았어. 한 시즌이라고 못 버틸 거 없다.”

말 내용에 비하면 지나치게 차분한 목소리가 훈련 소리를 뚫고 닿는 듯했다.

당연한 소리였다. 할 수 있는 말도 간단하다.

“네. 알겠습니다.”

“달아라.”

웨이트 훈련장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투수코치인 박승일 코치는 강희찬의 발 앞에 체중계를 두었다. 매번 보는 광경임에도 이승주를 비롯한 후배 몇몇의 눈에는 여전히 재밌는지 슬금슬금 다가온다.

꺼지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리엔 박신우가 있었다. 여덟 살이나 많은 투수조 조장이었고, 강희찬에겐 휘정고 동문 선배이기도 했다. 그걸 믿고 단체로 구경 오는 게 분명했다.

“85 나왔습니다.”

아침에 쟀던 무게를 말해봐도, 박 코치의 얼굴엔 쓸데없는 소리를 들은 양 귀찮은 기색이 어렸다.

“잔말 말고 올라가. 맨날 하면서 뭐 이렇게 튕겨.”

“…….”

장난스러운 코치의 말에 구경하던 선수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작 강희찬 본인은 체념한 채로 체중계에 오를 뿐이었지만.

“오오.”

84와 85에서 바뀌기를 반복하던 숫자의 앞자리는 결국 84가 되었다. 84.3. 혀끝으로 입천장을 튕기는 소리를 내던 코치는 결국 혀를 찼다.

“아……. 이 새끼, 날 더워지니까 바로 티 나는 거 봐라.”

아이고. 역할을 끝낸 체중계를 다시 집기 위해 코치는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혔다.

구경거리가 사라진 후배들 몇은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도 이승주와 박신우는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였다. 둘 다 어지간히 웨이트 훈련을 싫어했다.

“꼭 성질 더러운 두 놈만 살 못 찌우고 있잖아. 친구라고 닮는 거냐?”

갑자기 허리를 굽혔다가 펴느라 어지러운지 박 코치는 인상을 팍 구겼다. 그걸 따라 하듯 강희찬 역시 얼굴을 구겼다.

이건 체질 탓이지 성격과 전혀 상관없는 문제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남들이 2군에서 증량을 할 20대 초반에 1군에서 뛰느라 찌울 시기를 놓친 탓도 있었다.

“승주 봐라. 착하니까 살도 금방금방 붙잖아. 잘 먹고 아무 데서나 잘 자고 그래야지. 성질 더럽고 예민한 놈들만 살 못 찌우는 거야.”

“…….”

“차에서 못 자는 버릇은 언제 고칠래?”

점점 범위가 넓어지는 코치의 잔소리에 강희찬은 시선을 돌렸다. 오른쪽에 있던 후배의 몸을 새삼스레 봤다. 헐렁한 연습복 아래로도 퉁퉁한 몸집이 느껴진다.

구단이 신인 투수들을 입단시키고 나면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바로 살을 찌우는 것이다. 착실하게도 이승주는 그 의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증량에 성공했다.

2군에서 지내던 선수가 1군에 오면 가장 힘들어하는 게 바로 체력 관리였다. 똑같이 훈련하고 먹는 것 같은데, 1군에서 버틴다는 것만으로도 몸이 축나기 마련이었다. 강희찬 역시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승주는 그런 고충과는 거리가 멀었는지, 시즌 중에도 살이 찌는 희한한 체질이었다.

살이 잔뜩 올라서 터질 것 같은 얼굴이 살가운 표정을 지은 채 강희찬을 향했다. 살이 잘 찐다는 코치의 말은 젊은 선수에겐 아직까지는 칭찬이다.

“형도 오늘 끝나고 저녁 먹으러 같이 가요. 코치님이 사 주신대요.”

“인마, 희찬이는 집에 가면 더 맛있는 거 먹지. 어머니가 거의 수라상처럼 차리실 거 아니야.”

후배를 타박하는 박신우의 목소리를 듣자, 강희찬의 고개는 반사적으로 삐딱해졌다.

부모님이 식당을 하신다고 말하면 흔히 받는 오해 중 하나였다. 파는 음식이야 비싼 돈 받으니 보기에도 감탄이 나오는 거지, 실제 집에선 평범하게 밥에 반찬을 해서 먹는다.

그래도 여덟 살이 많은 선배의 말에 딴지를 걸며 면박을 줄 수는 없었다. 입을 다물고 있자니, 이승주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희찬이 형 이제 자취해요. 맞죠?”

“어.”

“언제 독립했어? 여자 생겼냐?”

그럼 집에 밥이 없어도 일찍 들어가야지. 은근한 목소리와 웃음기가 묻은 박신우의 의도를 모를 사람은 여기 없었다.

미혼인 후배를 놀리는 기혼자 선배들의 패턴은 다 비슷했다. 이승주 역시 갓 1군에 올라왔을 땐 저런 농담에 얼굴을 붉혔던 것 같은데, 요샌 꽤 태연한 반응이다.

‘시시하긴.’

스물두 살짜리한테도 통하지 않는 농담이 스물다섯인 강희찬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여전히 심드렁한 반응인 사람을 대신해 이승주는 입을 열었다.

“저번에 우리 원정경기 길게 갔을 때, 형네 어머니가 오피스텔 계약 다 하고 짐까지 옮기셨대요.”

“…왜 갑자기 쫓겨났어? 용돈 안 드렸냐?”

당사자는 지방 원정경기를 할 동안 이사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 신종 독립 방법이었다. 아니, 저걸 독립이라고 칭해도 괜찮은 걸까…….

박신우가 기억해 본 후배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꽤 이리저리 신경을 쓰는 분이었다. 강희찬이 나이치고는 연봉을 제법 받고 있었지만, 그 집 부모님들은 아들이 주는 용돈보다도 본인들이 버시는 수입이 틀림없이 많았다.

오답인 걸 알면서도 대충 던진 박신우의 말에 강희찬은 역시나 고개를 저었다.

“동생 방 때문에요.”

“영찬이? 영찬이가 그 집에서 방이 없었어?”

고급 주택이 즐비한 동네에서도 노른자 땅에 있는 2층짜리 주택이었다. 외관상으로는 손님 방만 두어 개가 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곳이었다.

놀란 박신우를 향해 강희찬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자는 데 말고요. 공부하는 데.”

동생은 과학고인지 수학고인지를 준비한다며, 학원을 그만두고 개인 과외를 몇 개 받고 있었다. 강희찬이야 들어도 잘 모르는 고교 입시 준비였다.

과외 수업을 받는 데 공부용 책상이 좁다는 동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친은 집 안의 리모델링을 계획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행하기 어려웠다. 이제 와 중3인 아들의 방 공사를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결국, 두 형제의 어머니는 결단을 내렸다. 성인이 된 지 5년째인 큰아들은 오피스텔을 얻어 강제로 독립시키고, 그 방을 작은아들의 공부방으로 쓰기로 했다.

모친은 결정 후의 실행력이 누구보다 빠른 사람이었다.

“영찬이가 벌써 내년에 고등학교에 가? 걔 4학년인가 5학년 때 우리 어린이날 행사 왔었는데…….”

“애들 금방 커요, 진짜.”

놀란 얼굴을 하고 중얼거리는 코치의 말에 공감하는 건 직접 아이를 키우는 박신우뿐이다. 미혼 남자 둘이 동의를 하든 말든, 코치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지 형은 선발이라고 애가 눈치 보느라 말도 못 붙였잖아. 내가 직접 영찬이 손잡고 다니면서 원정팀 선수들 사인까지 다 받아줬는데……. 기억나지, 너?”

형이 프로야구 선수면 뭘 하나. 그 연줄을 써서 어린이 팬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라운드 행사에 들어와도, 정작 잔뜩 예민한 상태였던 친형에게는 말도 걸지 못했다.

안경을 끼고, 바가지 머리를 한 아이는 처음 보는 코치의 손을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마른 손아귀로 꾹 쥐었다. 그때도 똘똘해서 공부를 꽤 잘할 것 같은 인상이긴 했지.

박 코치는 옆에 서 있던 이승주의 팔을 툭 쳤다. 추억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듯했지만, 고른 상대는 그저 난감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코치님, 저 그때 고등학생이었어요.”

“…너 그렇게 어렸냐?”

“네. 저 지금 스물둘인데요.”

고개를 끄덕이는 이승주를 보며 박 코치는 당황했다. 대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강희찬의 얼굴과 번갈아 보니, 당황은 점점 그 진폭을 키웠다.

“몇 년 사이에 왜 이렇게 늙었냐? 난 너 희찬이랑 동갑인 줄 알았다, 야.”

“맨날 형이라고 부르는데…….”

실외 스포츠를 하는 운동선수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갓 스물을 넘긴 나이였다.

시무룩하게 내려오기 시작하는 이승주의 어깨를 박신우가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괜찮아. 승주 귀엽지.”

적선하듯 뱉은 박신우의 말은 그래도 효과가 있었는지 처지던 어깨가 다시 올라왔다.

“자취하면 너 밥은 어떻게 하냐? 사 먹어?”

“해주러 오실 때도 있고, 사 먹을 때도 있습니다.”

코치의 질문은 결국 뻔한 결론에 도달했다. 얼른 결혼해라. 중계팀이나 다른 팀 코치진을 만나면 인사처럼 하루에 한 번은 듣곤 했다. 얼른 결혼하라고. 동의하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반응이 없었다.

“그럼 끝나고 희찬이도 가자. 등판 끝나면 밥 먹지? 먹고 들어가.”

“네.”

“오늘 투수조 다 모일까? 신우는?”

“코치님, 전 일찍 들어가 봐야 해서…….”

모임의 크기를 키우려는 코치의 의도는 박신우의 난감한 웃음으로 저지당했다.

박신우는 아닌 척해도 결혼하고서 아내에게 꽤 잡혀 사는 유부남이 되었다. 2군 시절부터 함께 살며 내조를 받아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대충 알아들은 코치와는 다르게 미혼이며, 애인도 없는 이승주는 열한 살이 많은 유부남 선배를 향해 눈을 흘겼다.

“집에 맛있는 거 있어요?”

혼자만 맛있는 거 먹으려고. 그런 의심이 잔뜩 배인 눈빛을 받은 박신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후배를 비웃었다.

“…김치찌개 먹을 거다. 아침에 먹던 거.”

“아…….”

애를 보느라 늦게 잤다거나 여름이면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게 고역이라거나.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승주는 다짐했다. 최대한 결혼은 늦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 * *

송재혁이 속해 있는 홍보팀은 운영팀의 절반 정도인 인원으로 꾸려졌다. 덩치가 큰 운영팀과 사무실을 같이 써야 했기 때문에, 가운데 파티션을 기준으로 오른쪽이 홍보팀의 구역이었다.

야구단이라고 하면 별난 직장이라고 여겨지지만, 출퇴근 시간이 조금 특이한 걸 빼면 하는 일의 원리는 일반 회사와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그건, 상사의 눈치를 보며 사는 것도 똑같다는 말이 된다.

점심시간임에도 기분이 썩 좋지 못한 홍보팀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느라, 팀원들은 모두 업무를 보는 척하고 있었다. 한 신문사에서 나온 ‘구단별 유니폼 판매 순위 BEST 3’를 주제로 한 기사가 원인이었다.

“진짜 우리뿐이야? 순위에 토종 에이스 없는 게?”

“…네.”

인터넷으로 혼자 기사를 보기만 했으면 됐을 것을…….

쓸데없이 입을 놀린 탓에 막내 사원 김정규는 팀장의 질문 세례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송재혁은 옆자리에서 PC용 메신저 앱에 글을 썼다. 최대한 업무용 타자 소리처럼 들리도록 조심하며.

[책 언제 받으러 오냐? 오늘 와. 표 끊어줄게.]

[오늘은 안 돼.]

[야. 넌 맨날 안 되잖아.]

전화통화가 아니라 이 분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밥상을 들어 엎는 이모티콘을 첨부해도 메신저 속 정이선은 뭐가 즐거운지 웃는 얼굴만 보냈다.

노란색 동그라미에 갖가지 표정이 있는 저 이모티콘을 요새도 쓰는 사람이 있다니……. 충격적인 사실에 송재혁은 한 번 흠칫했다.

“그, 4등까지는 기사에 나오지 않아? 거기도 없었어?”

간절히 김정규를 향하는 조경식 팀장의 눈빛은 한물간 멜로드라마 남자주인공의 그것이었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 간절하기까지 한 눈을 피하며 김정규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네에.”

어차피 유니폼 판매량 자료는 이쪽에서 넘겼다. 판매량 추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홍보팀장이 열을 내는 이유는 하나였다. 베스트 3위 안에 토종 에이스의 이름이 없는 유일한 구단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른 팀 중 하나는 비슷한 처지가 있을 줄 알았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프런트 경력이 오래된 홍보팀장이 더 잘 알 터였다.

뻣뻣하게 굳은 채 팀장의 기색을 살피는 김정규가 안쓰러웠지만, 괜히 황금 같은 점심시간에 쓸데없이 입을 놀린 업보였다.

송재혁은 그저 업무를 보는 척, 노트북으로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늘 에이스 선발 매치다. 너, 이런 거 미국에선 티켓값 더 받는 경기야.]

[안 돼. 오늘 결혼식 있어.]

[누구?]

[학교 선생님.]

[끝나고 와.]

[식이 5시야. 오늘 2시 경기라며.]

[무슨 일요일 5시에 결혼식을 해.]

[둘 다 교회 다니는 집안이라 그럴걸?]

애매한 시간대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정이선은 인간관계가 넓은 편은 절대 아니었지만, 직업적 특성 탓인지 경조사의 황태자라도 되는 양 꽤 자주 참석했다.

몇 년 동안 연락도 안 했다던 대학 동기의 결혼식까지 가서 부조를 내는 걸 송재혁은 본 적이 있었다.

어차피 나중에 거둬들이지도 못할 거. 뭘 그리 열심히 다니느냐고 타박해도, 돌아오는 건 순한 얼굴에 올라온 웃음뿐이다.

[다음 주 평일 경기로 갈게.]

[그때 고척 간다고.]

[갈게. 서울이네.]

[내가 고척 티켓을 어떻게 주냐? 그리고 거기 자리 비싸.]

테이블석으로 빼주겠다고 1년이 넘도록 말했다. 그래도 정이선은 송재혁이 입사한 후, 단 한 번도 야구장에 오지 않았다. 야구에 관심이 없으니 친구 덕을 볼 줄도 모른다.

직원들 책상마다 하나씩 비치된 구단 달력을 확인했다. 하나에 만 원이 훌쩍 넘는 이 달력에는 컵스의 정규시즌 경기 일정과 장소가 날짜마다 적혀 있다. 일반 달력에 경기 일정과 선수들 사진을 몇 장 넣은 것뿐인데도, 인터넷에 풀리자마자 다섯 시간 만에 완판되었다.

다음 주말이 잠실 경기네.

금요일과 토요일 중 어느 경기가 적당할지 고민이었다. 컵스의 선발 로테이션을 속으로 세어보던 차에, ‘재혁 씨’ 하며 자신을 부르는 팀장의 목소리가 귓가로 꽂혔다.

멍하니 볼펜을 들고 달력을 보던 송재혁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네?”

“영상으로 좀 내보낼 거 없어? 보기만 해도 팬심이 막 차오르는 거. 저번에 이천에서 찍어온 거 괜찮았잖아. 후배들 공 정리하는 거 돕던 거.”

“아… 네에.”

‘…그거 찍은 날 무슨 사달이 났는데.’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삼키기 위해 송재혁은 텀블러에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대선 후보처럼 시장에서 국밥 먹는 모습이라도 찍어다 내보내야 하는 걸까? 국밥을 먹든 짬밥을 먹든, 일단 강희찬은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 사납게 보기 일쑤였다.

이천에서 훈련을 하러 나가던 강희찬과 마주쳤을 때, ‘여기까지 왔느냐’는 눈으로 자신을 보던 그 얼굴은 아직도 상처로 남았다.

어쨌든 좋은 거든 나쁜 거든 찍은 영상이 있어야 내보낼 것도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건 대머리가 미용실에 가서, ‘앞머리는 눈썹 밑으로 내려오게 남겨주세요’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 영상 회장님도 보셨대.”

적당히 대화에서 발을 빼려던 송재혁의 귀에 낯선 호칭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협회나 선수협 회장직을 맡은 얼굴들이다. 하지만 본인들 앞도 아니고, 그 사람들에게 ‘님’ 자까지 붙여서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무슨 회장님이요?”

“우리한테 회장님이 또 있어? 구단주님이지. 그룹 회장님.”

“…그분이 보셨다고요?”

“사장님이랑 단장님은 가끔 점심 같이하시잖아. 야구 엄청나게 좋아하시는 양반이라, 올라오는 거 재밌다고 자주 보셨대.”

송재혁의 벌어진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옆에 앉은 막내 사원 역시 비슷한 얼굴이었다.

“PJ 박 회장이랑 만나면 매번 야구 얘기한다잖아. 거긴 매번 강희찬한테 지니까, 박 회장은 희찬이 팬서비스 안 좋은 걸로 살살 긁고.”

잠깐이나마 했던 몰입이 깨졌다. 무슨 컴프야 하는 아저씨들도 아니고…….

송재혁은 팍 죽은 대화 의욕을 숨기기 위해 어색하게 웃었다.

“…팀장님,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너무 유치한데.”

김정규의 의심에 팀장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진짜라니까? 금일봉 주러 직접 오실 때마다 강희찬 얘기는 빼지도 않고 하시잖아. 인기 더 많아져야 한다고.”

갑자기 이야기의 신뢰성이 확 떨어짐과 동시에 송재혁의 주의력도 바닥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MSG가 과하다. 팀장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돌리자, 모니터 화면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다음 주에 보자. 저번에 말했던 보쌈집 내가 살게.]

보쌈을 먹기로 했던 그 날의 약속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동안 자꾸 머릿속에서 어른거리는 보쌈 때문에 송재혁은 한 번 집에서 시켜 먹은 적도 있었다. 혼자서 국수까지 다 먹은 주제에 조금 민망했지만, 역시 맛집의 맛은 아니었다.

배달은 하지도 않는 고고한 영업 방식을 고수하는 삼성동의 보쌈집. 그곳의 상호만 떠올려도 입에 침이 고이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20분 전에 식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바쁘다며 야구장에는 잘 오지 않아도 정이선은 결국 배려가 많은 놈이었다. 밖에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는 놈이 여기까지 오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착한 놈이니까 제일 재밌을 만한 경기로 줘야지. 야구는 잘 모르는 편이니 투수전보다는 타격전이 그나마 재밌게 볼 만하려나?

“아니, 왜 강희찬이 이름이 없지? 희찬이 잘생기고, 성적도 좋고……. 뭐가 빠져?”

송재혁이 조심스레 손가락을 뻗어 대답을 치는 동안에도 조 팀장은 한탄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매번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강희찬에게 직접 가서 ‘한 번만 하자’고 사정하던 기억은 머릿속에서 날려버린 게 분명했다.

‘뭐가 빠지긴. 결정적인 팬서비스가 아주 많이 빠졌지.’

안타깝게도 텀블러에 있던 물은 이미 다 마신 상태였다. 송재혁은 속마음을 입으로 내뱉지 않기 위해 다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웃음을 무엇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팀장은 결연한 얼굴이었다.

“아무튼, 송 PD. 뭐 좋은 영상 좀 더 찍어봐. 팬 많이 생길 만한 걸로.”

“…예.”

다음 주에 먹을 보쌈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 그건 퓰리처상 받은 기자도 못 찍을 거라고.

* * *

퇴근 후 도착한 양곱창집은 대단한 맛집이 아님에도, 구장 주변에 있어서인지 꽤 자주 오는 곳이었다. 초벌구이한 곱창이 나오고 있었지만 선수들이 먹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선수 다섯과 코치 하나. 테이블에 곱창을 가져다주던 주인의 입에서 ‘죽겠다’라는 소리가 나올 무렵, 강희찬은 뜨거운 불판을 피해 가게 밖으로 나왔다.

눅눅한 여름 밤거리엔 선객이 있었다. 담배를 태우고 있던 박 코치였다.

“…너도 피웠냐?”

“아닙니다. 더워서 나왔습니다.”

“에어컨을 내려달라고 하지.”

“그럼 추워요.”

“까다로운 새끼.”

괜찮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 코치는 반 넘게 남아 있던 담배를 간이의자 옆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이러니저러니 말로는 타박해도 코칭스태프의 기본적인 생각은 선수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쯧, 하는 소리가 더운 밤거리를 울렸다. 혀를 차는 소리인지 담배를 끈 코치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건지 모호했다.

“나올 때 계산했냐?”

“아니요. 아직 안 했습니다.”

“하지 마라. 전에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어른이랑 밥 먹을 때 계산하는 거 버릇없는 행동이야. 너 잘 버는 거 아는데, 그래도 사 주면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먹어.”

“…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사는 것도 아니고.”

강희찬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엔 태연한 코치의 얼굴뿐이었다. 역시 들어갈 땐 계산을 하고 가야겠다. 잡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여전히 골목길을 보고 있는 코치의 입이 열렸다.

“감독님이 카드 주셨다.”

“…….”

이내 강희찬 역시 코치와 마찬가지로 차가 서행하는 골목길로 시선을 돌렸다. 나란히 앉은 코치는 별말 없이 강희찬의 무릎을 두어 번 쳤다. 버릇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도 오래 봤으니까, 그 성격은 알 거 아니냐.”

‘코치님’이라고 부른 게 1년, ‘감독님’으로 부른 게 올해가 5년째였다. 그걸 ‘오래 봤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쨌든 최 감독의 성격을 모르지는 않았다.

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강희찬을 곁눈질로 본 코치는 이내 투박한 손을 무릎에서 떼었다.

“모기 많다. 대충 있다 들어와.”

일어나는 동안 아이고, 하며 앓는 소리를 내던 박 코치는 식당 내부로 사라졌다.

“…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최 감독이 코치에게 전한 카드로 밥을 먹은 건.

3년 차일 때였나? 팀에 오래간만에 생긴 10승 좌완 선발투수라는 점이 이목을 끌었는지는 몰라도, 그 무렵 방송사의 인터뷰는 항상 훈련의 맥을 끊게 하곤 했다.

그런 평범한 날 중 하루였다. 날씨가 어땠는지, 인터뷰를 진행하는 현장 아나운서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에 남지도 못했다. 타인이란 건 언제나 딱 그 정도의 존재감을 준다.

‘강희찬 선수. 저번 주 등판에선 100구 넘게 던졌는데, 어제 경기에선 88구를 던지셨더라고요. 혹시 컨디션이 조금 좋지 않았나요?’

진행하는 아나운서는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된 생초짜였다.

질문을 듣는 순간 기가 찼다. 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변화구 구사율이 높았다는 이유만으로, 평소보다 자신감이 떨어진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미 한 번 참고 넘겼다. 야구를 보는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질문이 다시 한번 입에서 나왔을 무렵, 강희찬은 아나운서의 손에 있던 수첩을 빼앗듯이 집었다.

쭉 훑어본 질문을 보고 답이 나왔다. 이 아나운서는 야구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다. 볼 가치도 없는 수첩을 돌려주었다. 앞에는 하얗게 화장을 한 건지 질린 건지 모를 얼굴이 있었다.

‘화요일에 등판하면 로테이션상 그 주 일요일에도 나가야 합니다. 등판 간격 고려해서 일찍 내리셨을 겁니다.’

‘…아, 네.’

‘그리고 거기 두 번째하고 네 번째 질문은 아예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는데요.’

‘…….’

‘아무 말이나 던지고 나면 제가 알아서 정리하고 대답까지 해 줘야 됩니까?’

튀지 않는 색의 립스틱이 칠해진 입이 벌어져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뻐끔거리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답답한 광경을 대략 3초 정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영상을 찍던 카메라맨이 화면에서 눈을 뗐다. 수첩을 꾹 쥔 손이 파리한 채로 부들거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연출이 그제야 사이에 들어와 중재를 시도했다. 조연출은 아나운서의 수첩을 확인하더니, 페이지를 넘기고 본인이 직접 질문을 몇 가지 적기 시작했다.

조연출은 수첩을 아나운서에게 쥐여 주고는 미안하다며, 금방 끝내겠다는 말과 함께 다시 카메라 뒤로 향했다. 인터뷰는 삐걱삐걱 다시 시작되었다.

‘네……. 강희찬 선수, 지난번 등판에서 본인 최다… 어, K 기록을 경신하셨는데…….’

‘삼진이요.’

‘네?’

‘K가 아니라 탈삼진이라고요.’

‘…….’

‘수첩 주세요.’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이미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기본적인 공부도 하지 않고 현장에 투입되면서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나. 나이브한 성격인 건지, 본인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 힘들었고, 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다만 후자라면, 조금은 그 자신감을 나눠 받고 싶다는 약간의 존경심이 생기긴 한다.

눈물이 맺힌 얼굴을 무시하고 하얀 손에서 수첩을 다시 한번 뺏듯이 가져왔다.

야구 용어가 익숙한 조연출은 급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질문에 현장에서나 쓸 법한 은어나 약자를 마구 사용했다. 확실히 야구를 모르는 사람이 왜 삼진을 K라고 부르는지 알긴 힘들 터였다.

‘이거 질문 보고 대답하면 되죠? 어차피 편집하실 거잖아요.’

강희찬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조연출을 올려다봤다. 그 질문에 더더욱 조연출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기, 우리 아나운서가 질문하면…….’

‘시간 없는데요. 오늘 러닝만 하는 날이라서요.’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시간을 확인한 조연출은 이내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세수 좀 하고 오라는 조연출의 말에 아나운서는 미적대더니 자리를 떴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편집하기 쉽도록 치워버리는 의도였다.

아나운서가 더그아웃을 나가고 5분도 지나지 않아 인터뷰는 마무리됐다. 결국, 아나운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조연출의 뒤편엔 최 감독이 있었다.

인터뷰를 빨리 마치고 얼른 그라운드에서 러닝을 마저 하겠다는 계획은 무산됐다. 항상 고생한다며, 조연출과 카메라맨에게 웃음을 짓던 감독은 중계팀이 사라지자마자 강희찬을 감독실로 불렀다.

감독을 독대한 건 2년 차 선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너 그거 뭐냐? 인터뷰를 왜 그따위로 해?’

더그아웃에서 중계팀에게 고생했다 말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톤을 높이고 있지 않지만, 필사적으로 눌러 참는 게 티가 나는 목소리였다. 좁은 공간에는 에어컨도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지.’

그럼에도,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에 소름이 올랐다. 팔을 한번 쓸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고 열중쉬어 자세를 유지했다.

‘놔두지 그랬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든 말든. 방송 나가면 어차피 준비 못 한 사람이 욕먹을 텐데.’

비슷한 눈높이에 있던 감독의 얼굴이 내려갔다. 푹신한 의자에 체중이 실리는 소리와 한숨과 닮은 숨소리가 섞였다.

감독실은 창문 하나 없는 답답한 공간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공기가 희박하게 느껴졌다. 크게 숨을 들이쉴 수 없는 상황은 답답함을 더욱 가중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를 내뱉는다면 해결되고 벗어날 수 있는 상황임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투수코치를 하던 시절에 비하면 대외적인 평은 꽤 좋아졌지만, 여전히 최선형 감독은 예민하고 성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선수들의 ‘죄송합니다’ 소리를 듣는 순간 화가 누그러지는 무른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너한테 뭐 대단한 걸 시켜? 기본만 하라고 했잖아!’

최 감독이 벗어 던진 고글과 모자가 책상 위를 뒹굴었다. 노기 어린 고함이 좁은 실내에 쩌렁하게 울렸다. 가볍게 주먹을 쥔 자신의 손이 등 뒤에서 떨리고 있다는 걸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그거 하나 못 참아? 너 1군 밥 몇 년째 먹어? 기자나 아나운서들 저러는 거 하루 이틀 봤냐고.’

‘…….’

‘봐, 너 성질 못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일 하나 똑바로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네가 욕먹게 생겼잖아. 어? 대가리는 키 커 보이려고 달고 다녀?’

‘…….’

‘주둥이 찢어버리기 전에 입 못 열어?’

단 한 마디면 됐다. 한마디를 하는 순간, 얼굴이 벌게지도록 폭언을 붓는 최 감독의 화도 한 꺼풀 누그러질 것이다. 그런데도 그 말은 목을 울리며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감독님, 윤태성한테는…….’

‘뭐?’

첫 승, 20년 만에 기록한 구단 좌완 선발 10승, 바들거리며 올라간 한국시리즈 4차전 선발승.

단 한 번도 쉽지 않았던 그 모든 것을 죽을힘을 다해 이루어도 감독은 같은 얼굴이었다. 한 번도 ‘잘했다’라거나 ‘고생했다’는 말조차 없었다. 응당 해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얼굴이었다.

‘윤태성한테는 안 그러셨습니다.’

등 뒤에서 떨리는 양손과 진폭을 같이 하는 듯 바들대는 목소리가 다섯 평 남짓한 감독실을 울렸다.

당장이라도 손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도 아니라면 쌓이고 쌓인 서러움이었나. 모호한 감정들은 스스로도 무어라 칭할 수 없는 덩어리였다.

최 감독은 화를 내지 않았다. 얼마간 선수를 올려다보던 그 얼굴엔 기가 찬다는 기색이 어렸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이내 웃음으로 번졌다. 노기는 한순간 떼를 쓰는 어린애를 보는 한심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같이 취급해 주랴?’

‘…….’

‘한 달 패전처리로 굴리다 버릴 각오로 뽑은 놈이랑 똑같이 대했으면 좋겠냐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던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소리를 내지르던 방금과는 달리 놀랍도록 가라앉고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떨림이 멎었다.

감독에게 대거리한다는 긴장감으로 인해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쭉 빠졌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머리로 이해를 하는 건 그 뒤로도 한참 후였다.

‘구단에서 너 하나 관리시키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 너 휘정고 다니는 3년 동안, 매년 그 학교 출신 신고선수로 하나씩은 받았어.’

가슴 부분에 ‘부산일고’라고 커다랗게 글자가 새겨진 푸른 유니폼과 P자가 있는 검은 모자. 기억 속의 선수는 다른 누구보다 그 차림이 잘 어울렸다.

투구 수가 채워지면 고의사구를 주던 와중이라도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던 자신과는 달랐다. 학교마다 하나씩은 있는 게 ‘에이스’였지만, 누구보다 그 호칭과 잘 어울렸다.

언제까지고 마운드에서 버티고 버텨내는 에이스.

자신이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벽과 같은 투수.

이제 그 존재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미 알고 있었다.

10점이 넘는 점수 차가 나던 광주 경기. 원정 응원을 왔던 팬들조차 포기하고, 서울에 가기 위해 자리를 뜨고 있던 어수선한 구장에서 이미 한 번 깨달았다.

…그때의 윤태성은 없다고.

‘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나가. 꼴도 보기 싫어.’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왼쪽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최 감독은 오른손을 휘저었다. 축객령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감독실을 나서는 도중에도 최 감독의 말은 멍한 머리를 울렸다.

한 달 패전처리로 굴리다 버릴 각오로 뽑은 놈.

푸른 유니폼을 입고, 열기가 올라오는 마운드 위에 서 있는 소년이 있다. 검은색 모자챙 아래로 굳게 다물려 있는 입꼬리가 올라간다.

‘너는 절대 나를 못 이긴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소년의 웃음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떨어질 듯 절대 낫지 않는 감기와 지독한 열패감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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