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봄날
자수가 아름답게 수놓인 청첩장을 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슷비슷한 모양을 하고 늘어선 건물 어디에도 웨딩홀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처음 와보는 동네여서 그런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같은 서울 맞는데. 몇 번을 같은 자리에서 헤매고 보니 아직 날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음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시간은 이제 열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빨리 가서 식 시작 전에 영재도 보고, 희진이도 봐야 하고. 마음이 급해졌다. 지나가는 사람 중 아무나 잡고 물어보려 걸음을 옮기는데 손 안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어. 어디야?”
-저 지금 식장 주차장이에요. 선배는?
“나, ……모르겠는데.”
-응?
뒷머리를 긁었다. 알아서 온다고 뻗대지 말걸. 어젯밤, 집에 가지 말고 함께 있다가 예식장까지 함께 가자는 정진우의 제안을 거절한 내 언행을 후회하며 말했다.
“여기, 음. XX은행 하나 보이고, …편의점 하나 있고. 건물 이름이…….”
-XX은행? 알았어요. 거기 있어요. 주차만 해 놓고 제가 그리로 갈게요.
“응. 은행 앞에 있을게.”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투에 약간 민망해졌다. 인간 내비게이션도 아니고. 한국 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애가 길도 잘 알았다. 전화를 끊고 은행 앞에서 서성였다. 돈을 더 뽑아놔야 할까. 지갑을 한 번 들춰 보고, 맞은편에 위치한 편의점을 보며 생각에 잠시 잠겼다. 담배를, 미리 사 놓을까.
얼마 전 우리는 약속을 하나 했다. 함께 담배를 줄이기로. 이틀이면 한 갑을 다 피우는 나를 파악한 정진우가 먼저 제안을 했다. 원래 이렇게까지 많이 피우지는 않았는데, 정진우의 전시를 하면서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아 하나, 둘 늘려가던 게 어느새 고정이 되었다. 아예 안 피우는 건 둘 다 불가능할 것 같으니, 나는 하루에 반 갑 정도이던 흡연양을 다섯 개비로, 정진우는 세 개비로 줄여보기로 했다. 나보다 더 골초로 컸을 줄 알았던 정진우는 의외로 담배를 많이 피우진 않았다. 혼자 있을 땐 거의 피우지 않고, 남들 피우면 저도 피우고, 스트레스 받을 때 좀 피우고. 이런 식이었다.
두 개비가 남아 달랑달랑 거리고 있는 담뱃갑을 한 번 열어본 뒤 오늘은 이것만 피우지 뭐. 하고 괜히 손을 털었다. 사실 정진우의 정확한 흡연양을 알게 된 뒤로, 많이 반성 중이었다. 내가 너무 많이 피웠나. 하고.
어제 닦아놓은 구두에선 반질반질 빛이 났다. 오랜만에 한 넥타이가 목을 조이고 있는 게 새삼 신경 쓰여 조금 헐겁게 하고, 단정하게 모두 잠가놓았던 코트 단추를 하나 풀었다. 손목에 찬 은색 시계, 사선으로 패턴이 들어간 넥타이, 낡았지만 빛이 나는 구두. 지금까지 꽤 많은 결혼을 지켜봤지만, 오늘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서요한!”
내가 이런데 조영재 걔는 식 끝나갈 때쯤엔 광대가 터져버릴 수도 있겠다. 아니지. 분명히 터질 거야. 심장이 먼저 터지나 광대가 먼저 터지나. 뭔가 터질 게 분명해.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손목에 찬 시계가 조금 헐거워진 느낌에 시계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드니 도로가에서 정진우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하루 만에 본 얼굴이 더 잘생겨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웃다가, 바보 같을 게 분명한 얼굴을 깨닫고 입술을 물었다.
평소 아무렇게나 흩트리고 다니던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정진우가 지척에 다가와 내 어깨를 슬쩍 털었다.
“바로 앞에 예식장 두고, 그걸 못 찾네?”
“바로 앞? 어디?”
“이 건물 돌면 바로예요.”
어깨를 털던 손이 내려와 팔뚝을 살짝 잡는가 싶더니, 내 볼을 감싼다. 거칠고 찬 손바닥에 감싸인 볼이 이리저리 짓눌렸다. 내가 그러니까 오늘 같이 오자고 했죠? 말하는 목소리가 아주 유쾌했다. 다른 것보다, 얘는 틈만 나면 나를 애 취급하려고 하는 게 제일 못마땅했다.
내가 제 손을 채 때어내려 하기 전 재빨리 손을 물린 정진우가 늦겠다. 가요. 말하고 몸을 돌렸다. 아래로 늘어뜨린 하얀 손등 위로 코트 소매가 보기 좋게 덮여 있었다. 훤칠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뒤를 쫓았다.
정진우의 말처럼 예식장은 정말 코앞에 있었다. 8층에 위치한 예식장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정진우는 답지 않게 조금 부산스러웠다. 곱게 넘긴 머리를 쓸더니 나를 툭 치고, 저 어때요? 묻기도 했다. 어떻긴 뭘 어때. 너야 항상 잘생겼지. 생각만 했다. 우리와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 벽에 붙어선 정진우가 내 손을 슬쩍 잡아왔다. 고개를 틀어 눈앞에 놓인 입가를 바라보았다. 옅게 미소 지은 입술이 말했다.
“저 정말 가도 되는 자리겠죠.”
긴장한 게 맞는지 마주 잡은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와 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손바닥을 쓸었다.
“응. 영재가 너 오라고 한 거야. 말했잖아.”
가볍게 목을 울린 정진우가 속삭였다. 결혼은 영재 선배가 하는데, 왜 내가 뭔가 허락받으러 온 기분이지. 사실 나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어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조영재가 우리 사이를 알고 있다는 걸 정진우는 바로 어제 알았다. 정진우가 돌아오고 며칠 후, 조영재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달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하다가 얼굴 본 지 일주일 만에 전화가 와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중언부언 이상한 말을 주워 담으며 빙빙 돌던 조영재가 ‘정진우랑 같이 와라.’하고 툭 말했다. 나는 순간 할 말이 없어져서 이마만 문지르다가, 고맙다는, 이상한 인사를 건넸다.
정진우에게 조영재의 결혼식에 같이 가자는 문자를 보내면서, 나는 뭐라 쉽사리 칭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괜히 심장이 뛰고, 손이 떨렸다. 뒷목이 찌르르 울리는 기분에 정진우에게서 온 답장을 들여다보며 심호흡을 몇 번 했던 것도 같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 타인에게 처음으로 정진우와 나의 사이를 인정받았던 거였다. 항상 정진우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든 감당하기 위해 휘청거리기만 바빴던 나는 누군가가 우리 사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에 대해 한 번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겁이 나기도 했고, 우리 둘의 중요하지 굳이 남 생각이 필요한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그때 나는 숨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벅차올랐다. 그냥 같이 오라는 말 한마디였음에도, 무언가 위로받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 대상은 내가 정진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지난 세월이기도 했고, 정진우가 최상의 환경을 포기하고 나에게 돌아온 것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타인의 말 한마디는, 나에게 앞으로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앞으로도 내가 정진우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그때는 괜히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봤다. 쌕쌕 숨을 흘리고 있는 거울 속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깨달았다.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마음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나는, 그럼에도 인정받고 싶었구나. 누구에게라도.
정진우의 커밍아웃 이후 머리와 마음, 온갖 곳에 넓게 깔린 불안감을 헤치고 불쑥 치밀곤 했던 기대감을 나는 기억했다. 왜 정진우의 행동에 화만 나지 않았는지, 왜 좋기도 했는지, 어디에 기대를 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사람 사이의 관계와 감정에 관해 아직도 이렇게나 서투른 게 어이가 없어서 그날은 하루 종일 다른 일을 하다가도 헛웃음을 흘리고는 했다.
정진우에게는 이 마음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서 미루고 미루다, 어젯밤 저녁을 함께 먹으며 말했다. 영재가, 예전부터 우리 사이 알고 있었어.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 걔는, 우리가 만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더니 결혼식엔 너랑 같이 오라고 해서 좀 놀랐어. …기쁘기도 했고. 말을 하는 내내 귀가 화끈거렸다. 꼭 집에 와서 친구랑 화해했다고 부모님께 미주알고주알 제 기분을 늘어놓는 초등학생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자코 늘어난 치즈를 포크로 끊으며 내 말을 듣던 정진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선배 지금 엄청 행복해 보여요.’
그때, 나는 오랜만에 정진우의 앞에서 엄청난 부끄러움을 느꼈다.
* * *
8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코너를 돌자 웨딩홀 안 바글바글한 사람들 사이로 혼자 두리번거리는 김수현이 보였다. 정진우의 팔을 잡고 말했다.
“내 동기들이랑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같이 있을래?”
“선배 안 불편하겠어요?”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괜히 속이 쓰려서 정진우의 얼굴을 확인했다. 태연한 낯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네가 같이 있으면 나야 좋지.”
“그럼 저도 좋아요.”
잡고 있던 정진우의 팔을 끌고 김수현에게 다가갔다. 나를 발견한 김수현이 실실 웃다가 정진우를 보고 멈칫하며 손가락질을 했다.
“어, 너. 정진우?”
넉살 좋게 웃으며 안녕하세요. 하는 얼굴을 멍하니 보던 김수현이 어,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얼굴이었으나 모르는 척했다.
“영재는?”
“조영재는 저기, 입구 근처에. 희진이부터 보고 와. 희진이 장난 아니더라.”
지금까지 본 김희진 중 최고. 김수현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김수현의 말대로 희진이부터 보고 올 생각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김수현이 내 팔을 잡아챘다. 귓가에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영재가 쟤 안 좋아할 텐데. 쟤는 왜 온 거야?”
“…올 만하니까 왔지.”
“그으래……?”
김수현이 영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조영재가 정진우의 이야기가 나오면 욕부터 했다는 걸 알았다. 나에게 붙어 정진우를 힐끗거리는 김수현의 이마를 밀었다.
“나 희진이부터 보고 올게. 너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아니. 나 이제 식장 들어가 있으려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정진우를 잡았다. 약간 긴장하고 있던 등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의 관계를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건 아니었지만, 정진우와 함께 우리를 아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일은 나에겐 아직 조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신부 대기실까지 정진우와 함께 걸어가며 마주친 동기들, 선배, 후배들과 인사했다. 신기하게도, 아직 미술 쪽에 있는 애들은 정진우를 바로 알아보았지만, 전공을 살리지 않고 취직한 애들은 정진우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보나, 잘 기억을 못 하나, 반응은 전부 비슷하긴 했다. 어, 그래.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하나같은 반응에 나중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웃음이 터졌다. 뒷목을 뻣뻣하게 만들던 긴장감이 다소 해소되는 것이 느껴졌다.
신부 대기실에서 행복이 가득한 얼굴로 웃는 희진이는, 김수현의 장담대로 지금까지 본 김희진 중 가장 예뻤다. 대기실에 막 들어선 나를 발견한 희진이가 가는 팔을 벌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요한아!”
“희진아, 너 진짜 예쁘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예쁘다는 말만 반복했다. 조영재는 앞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희진이한테 큰절부터 하고 살아야 돼.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제일 예쁜 사람은 엄마와 정진우였는데, 그 자리를 희진이가 위협했다. 고운 손을 들어 올려 입가를 가리고 호탕하게 웃은 희진이가 손짓했다.
“친구분이랑 같이 온 거야? 친구분도 너무 잘생겼다.”
“응. 인사해. 나랑 영재 후배야.”
이리 와요. 잘생긴 후배도 같이 사진 찍자. 와 줘서 고마워, 정말. 나와 정진우를 양옆에 둔 희진이가 우리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이런 애들을 두고 나는 왜 영재한테 시집가나 몰라. 괜히 하는 말인 걸 알아서 귀여웠다.
희진이의 넓게 펼쳐진 웨딩드레스를 정리해 가며 몇 마디 축하한다, 고맙다 하는 의례적인 말을 나누다 나 이제 가 볼게. 인사했다. 너무 예쁜 희진이는, 예쁜 것만큼이나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덩달아 나도 정신이 없어져서 정진우를 끌고 나오며 머리를 털었다. 희진이와 내가 나누는 얘기에 적당히 맞장구만 치며 분위기를 맞췄던 정진우가 작게, 머리 아파요? 하고 물어왔다. 아니. 너 괜히 여기까지 와서 고생한다. 이따 밥 많이 먹어. 팔을 툭 치니 웃는다. 입가에 통통하게 뭉친 볼살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축의금을 이제야 전달하고 근처에 서서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영재를 쳐다보았다. 멀끔하게 턱시도를 차려입고 하하 웃으며 고개를 돌린 조영재와 눈이 맞았다. 내 얼굴에 멎은 시선이 느리게 사선으로 올라간다. 조영재 앞에 나란히 서니 괜히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이제 와서 소개시켜주러 나온 것도 아니고. 그것도 새신랑 앞에서. 유난이었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나눈 조영재가 인사를 꾸벅 하더니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를 지나쳐 정진우에게 악수를 청한다. 조영재가 내민 손을 정진우가 붙잡았다. 진짜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나는 찡하게 달아오른 코를 씰룩거리며 내 표정을 들키지 않게 노력해야 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정진우를 말없이 응시하던 조영재가 말했다.
“와 줘서 고맙다.”
“네. 결혼 축하드려요, 선배님.”
조영재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정진우의 손을 놓고 내 어깨를 툭 쳤을 뿐이었다. 희진이는 보고 왔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해 바쁜 조영재를 기다리다가 한 번 더 인사를 나누고, 오랜만에 뵙는 조영재의 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렸다. 식장에 들어가기 전 누군가와 함께 있는 조영재의 형을 발견하고 형에게도 인사했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인사를 한 삼백 번은 한 것 같았다. 형, 안녕하세요. 곁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영호 형이 나를 보고 손을 들다 멈칫했다. 미간이 찌푸려진 남자다운 얼굴을 보다가, 깨달았다. 아, 저 형도 정진우를 기억하겠구나. 나와 정진우를 번갈아 보는 형의 시선을 모르는 척 정진우를 끌었다.
식장은 이제 곧 시작할 예식으로 인해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다양한 꽃과 천으로 장식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김수현과 승원 형, 혜연 누나의 머리가 보였다. 식장 벽에 정진우와 나란히 기대서 승원 형 쪽을 가리켰다. 승원 형 쪽을 보고, 식장을 장식한 크리스털과 꽃을 둘러본 정진우가 속삭였다.
“한국에서 누구 결혼식 온 거, 아주 어렸을 때 빼고는 처음이에요.”
“…진짜?”
고개를 끄덕인 정진우가 어둑해지는 예식장을 한 번 더 둘러보더니 웃었다.
“영재 선배 앞에서, 나 엄청 긴장했는데. 티 났어요?”
“……. 아니.”
사실 나도 긴장하고 있느라 몰랐어. 작게 중얼거린 말에 웃음을 터뜨린다. 저에게로 집중된 시선에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숙인 정진우가 갑자기 으, 앓는 소리를 냈다. 왜 이러지. 정진우 쪽을 보려는데 사회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식장을 울렸다.
“선배.”
조명이 번쩍번쩍 빛나며 식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옅은 입김이 귀를 간질였다.
정진우가 가진 것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말했다.
“오늘은 나랑 같이 있어요.”
입김이 닿는 귓가가 화끈거렸다. 어둠을 틈타 벽과 엉덩이 사이에 두었던 손에 차가운 손이 끼어들었다. 내 손을 잡고 느리게 깍지 끼는 손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이제 막 화촉을 밝히는 중인 정면을 바라보았다. 등 뒤로 돌린 손에 힘을 주고, 맞닿은 손바닥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조영재와 김희진의 결혼식은 다른 수많은 결혼식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10년 열애 끝에 결혼한 연인은, 여느 새로이 시작하는 연인처럼 울고 웃었다. 입장할 때부터 광대가 터질 것 같았던 조영재는, 축가를 열창하며 내가 예상했던 심장과 광대 대신 본인의 노래 주머니와 함께 듣는 이의 고막을 터뜨렸고, 정신이 많이 없어 보였지만 그만큼 예쁘고 환했던 희진이는, 막상 식이 시작되자 눈물을 흘리기 바빴다. 희진이의 눈물에 안절부절못하던 조영재가 장갑 낀 손으로 희진이의 얼굴을 부비는 바람에 화장이 번지는 소란이 잠시 일기도 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신랑 신부를 앞에 두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등 뒤에 숨긴 손으로 정진우의 손을 땀이 맺힐 때까지 부여잡고, 가만히 내 주위를 감싸는 정진우의 숨소리를 들었다. 아이가 우는 소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소리로 우리 주변은 앞쪽과 다르게 북새통이었지만, 우리를 두르고 있는 공기는 고요했다. 결혼하는 연인의 지난 10년을 보여주는 영상을 주시하며 나는 우리의 지난 한 달을 생각했다. 커다란 걸 숨기기 급급해 오히려 파악하지 못했던 작은 것들을 알아가고, 주변을 돌아볼 수 없었던 날들과 달리 함께하며 시야를 조금씩 넓혀 갔던 지난 한 달을. 울면서 웃는 희진이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젊은 부부의 앞날을 축하하는 폭죽이 터졌다. 우리 앞까지 날아온 꽃가루를 한 손에 쥔 정진우가 나를 보고 웃었다.
“결혼식이 엄청 화려하네. 무빙라이트가 여섯 대나 달려 있었어. 예식장인데. 재밌다. 폭죽에 꽃가루에……. 이거 봐요.”
스물아홉의 너는, 스물여덟의 너와 같이 소년처럼 웃을 줄 알았다. 넓게 펼쳐진 손바닥 위로 뭉친 꽃가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마른 손바닥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꽃가루를 툭 건드렸다. 내 손짓에 우수수 흩어져 휘날리는 것들을 눈으로 따라가던 정진우가 또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한 편의 통속극 같았던 식이 끝나고, 친구들이 모여 사진을 찍는 동안 정진우는 홀 바깥에서 나를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정진우는, 식이 끝나고 나서도 내가 친구나 동기들과 인사를 나눌 때마다 나를 끊임없이 기다렸다. 점점 어색하게 웃는 모양으로 굳어가는 얼굴을 볼 때마다 괜히 데려왔나,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긴장감이 얼추 풀리자 공식적인 자리에 애인을 데리고 와 소개시키는 것같이 혼자 뿌듯한 마음이 솟아나기도 했다.
정진우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한 화장실 근처 소파로 걸어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다 대고 속삭였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나랑 같이 있어요. 섹시한 말투를 생각하자 귓가에 저절로 열이 올랐다. 그새 뜨끈해진 귓바퀴를 슬쩍 잡았다. 하여간 음란한 자식. 그럼 오늘은 집으로 안 가고 호텔로 가려나. 생각하다가 만지작거리던 귀를 마구잡이로 비볐다.
정진우가 한국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차를 사고,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저번 주 한창 인테리어 공사를 진행 중인 집에 가 봤을 땐, 새삼 느꼈다. 얘 돈 많이 벌었지. 땅값 비싼 동네에, 지하 1층 지상 2층, 총 3층짜리 집을 일주일 만에 구한 데다, 리모델링까지 휘뚜루마뚜루 진행하려면 대체 얼마를 써야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물어보기가 무서워서 어질러진 짐을 정리하고, 어, 좋다, 진짜 좋다. 소리만 하다 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내가 일 안 하는 정진우를 먹여 살리려면 대체 얼마를 벌어야 하는지 혼자 계산해 보기도 했다. 답이 안 나왔다. 작품 계속 잘되기만을 빌어야지. 하나 마나 한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보름 정도 미술관 근처 호텔에 머물렀던 정진우는 대강 공사가 끝나가는 집에 짐을 풀었다. 지상 층 작업실 공사만 남겨두고 있는 정진우의 집은, 아직 많이 어수선했지만 꽤 구색을 갖추고 있어서, 집 주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아직 휑한 지하층과는 달리 꼭대기 층은 화초를 키우는 걸 좋아하는 집 주인 덕에 이곳이 밀림인지 서울 한복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무와 꽃, 베를린에서 날아온 각종 종이 뭉치, 책 등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공간을 보며, 나는 얘가 대체 베를린에서 어떻게 살았던 건지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했다.
넓은 잎사귀를 닦고 있던 등을 떠올리다 소파에 앉아 쭉 뻗은 다리를 발견하고 바닥을 응시하던 눈을 들었다. 핸드폰을 보고 있는 하얀 얼굴이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 하나, 가서 보니 요즘 한창 빠져 있는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키를 하나 조작할 때마다 가볍게 다물린 입술에 꾹, 꾹,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저게 그렇게 재밌나. 게임 재미있는 줄은 아무리 해봐도 모르겠어서 옆에 앉아 한 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맞닿은 어깨가 움찔거렸다. 핸드폰을 대차게 누르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잦아들고, 호흡하는 것도 잊고 있었는지 훅, 숨을 길게 뱉은 정진우가 드디어 나를 응시했다.
“다했어?”
“응. 이거 진짜, 한번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멋쩍게 웃으며 괜한 변명을 하는 얼굴이 귀여웠다. 갑작스레 어디든 만져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배고프지. 빨리 가서 밥 먹고, 애들이랑 인사만 재빨리 하고, 둘만 있을 수 있는 데로 가야지. 야심찬 계획을 세우면서 엉거주춤 나를 따라 막 일어난 정진우를 끌었다.
밥 먹는 내내 나는 정진우를 만지고 싶은 생각에 휩싸여 정신을 팔고 있었다. 식장을 잡을 때 가장 고려했다는 식사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스물하나 때나 서른이 된 지금이나, 정진우에 한해서 나는 불쑥 들곤 하는 충동을 자제하지 못했다. 다 같이 맥주나 한잔하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영재와 희진이의 등을 번갈아 두드려 주고, 바람같이 식장을 벗어나 정진우의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지 않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뺨을 슬쩍 밀었다. 부드러운 볼이 손바닥에 찰싹 감겼다.
“…뭘 봐.”
“아니. ……. 지금 나랑 같은 생각인가 해서.”
“무슨 생각?”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아니었나. 잠시 나를 뚫어져라 살피던 정진우가 씩 웃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에 짙은 기운이 서렸다. 입가에 맺힌 점이 호선을 그리는 입술의 움직임을 따라 불쑥 들렸다.
“내 문신. 오늘은 어디서부터 알려줄까.”
……. 여우같은 정진우. 자연스레 따라오는 생각에 화끈거리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정면을 주시했다. 시동이 걸린 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진우와 함께 하룻밤을 묵을 때마다 나는 정진우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문신 중 하나를 잡고 언제, 왜 새겼는지 따위를 물었다. 벗은 몸을 빼곡 채운 문신은, 내가 아무리 물어도 줄어들 것 같지 않았다. 어째 독일에 다녀오는 동안 더 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묻다, 묻다, 언젠가는 근데, 너 베를린에 있는 동안 타투 또 했어? 하고 물었더니, 아무렇지 않게 여기, 여기. 하는데, 그 손짓과 목소리가 너무 태연해서 입을 딱 벌리고 있어야 했다.
모두 각각의 의미가 있을 거라고 여겼던 정진우의 문신은, 의외로 별 의미가 없는 것들이 많았다. 나를 생각하며 새겼다는 것들은 웃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별로 물어볼 생각은 안 했다. 작품 번호를 새긴 것들 외의, 매끈한 몸의 대부분을 차지한, 낙서 같은, 그때그때 하고 싶을 때 별 생각 없이 새긴 종류의 문신들은, 관리도 제대로 안 했는지 자세히 보니 대부분이 파랗게 번져 있었다. 그것은, 관리도 안 된 제멋대로의 모양이 아닌 그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어린 정진우는 물리적인 고통으로 찾았다. 어린 정진우가 안쓰러워 머리를 쓰다듬다가도, 그럼 지금은 왜 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엔 등짝을 짝 소리가 나게 내리쳤었다.
결국 정진우는 나와 약속했다. 더 이상 문신을 늘리지 않기로. 정말 하고 싶으면, 내 허락을 받기로. 알몸으로 침대 위를 뒹굴다 말고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걸린 손가락을 당겨 나를 끌어안은 정진우가 귓바퀴를 씹으며 이렇게 말했던가.
‘Johann이라고는 새기면 안 돼?’
그건 나도 좀 끌리는 제안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안 된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 집엔 승원 형이 있고, 정진우의 집은 아직 정리가 제대로 안 된 탓에 우리는 함께 밤을 보낼 때면 호텔을 이용했다. 내 성격 탓이 컸다. 정진우의 집에 갔을 때 두 시간을 물건 정리하는 데 쓴 나를 보고 정진우가 질린 얼굴로 말한 것이 이유였다. 여기 공사 끝날 때까진 선배 데려오면 안 되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을 정리했지만 전혀 정리되지 않은 꼴을 둘러본 나도 바로 동의했기 때문에 우리의 행선지는 오늘도 호텔이 되었다.
문신을 보여 주네 어쩌네 했던 것과 달리, 막상 객실에 도착하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피곤에 절어 코트만 대충 벗어둔 채로 침대에 나란히 눕기부터 했다. 시트를 더듬으며 내 쪽으로 다가온 손이 팔을 쓸고 올라왔다. 어깨를 지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푸는 손길을 내버려두며 하얀 천장을 응시했다. 오늘 하루 종일 긴장했다가, 찡했다가, 정진우를 어떻게든 하고 싶은 욕정이 들끓었다가, 뭉클했다가, 몇 시간 동안 하도 감정 노동을 했더니 매트리스가 찰떡같이 들러붙어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진우는 그것 좀 누워 있었다고 기운을 차렸는지 금세 일어나 나를 덮어 눌렀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고, 귓가에 느린 호흡이 쏟아졌다. 허벅지를 누르는 성기가 약간 힘을 받은 게 느껴졌다. 가만히 나를 안고 있는 등을 쓰다듬다가, 이맘때쯤 내가 묻곤 하는 물음을 던졌다.
“어머니는 어때?”
잠시 대답 없이 내 귀를 깨물고 장난치던 정진우가 말했다. 뭐, 비슷해요.
정진우는 일주일에 한 번 가족을 찾았다. 말로는 그냥 밥 먹고, 제가 들어가는 날이면 늦게라도 얼굴을 비추는 형과 얘기하다 온다고는 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그 시간을 보내고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커밍아웃 이후 정진우의 어머니는 어느 정도 정진우를 포기한 것도 같았다. 단지 식사를 종종 거르시고, 가끔 주무실 때, 화병을 이기지 못해 본인의 가슴을 멍이 들 때까지 두드리곤 하신다고 했다. 정진우가 일주일에 한 번 집을 방문하는 게 얼마나 제 어머니와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몰랐다. 도저히 정진우를 포기할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매일 아침 정진우가 전화로 확인하는 제 어머니의 상태를, 덩달아 묻는 것밖에는 없었다. 응. 작게 대답하고 귀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머리를 헤집다가 평소의 손안에서 흐트러지던 머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말했다.
“씻고 올래?”
나를 누르고 있는 채로 본인의 머리를 쓰다듬은 정진우가 몸을 일으켰다. 입고 있던 니트를 벗어서 소파에 대충 던져 놓으며 욕실로 사라지는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오늘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정진우와 함께 하면서 나는, 많이 익숙해진 우리의 관계에 감격하기도 했고, 더 서로에게 스며들기 어려운 현실에 우울하기도 했다. 그들을 아는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서로의 사랑과 미래를 약속하는 부부를 보며 뭉클하다가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우리가 아쉬웠다. 어떻게 하면 너와 나는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고민했다. 아직 정진우가 돌아온 지 한 달이었다. 나는 급했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마음이 급해졌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정진우가 아무렇게나 벗어 소파 위에 던져 둔 니트를 개어 두었다. 소파에 앉아서 정진우가 풀다 만 셔츠 단추를 반쯤 채우고, 머리를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락모락 김을 두르고 나타난 정진우가 젖혀진 내 얼굴을 잡고 키스했다. 젖은 머리가 턱 끝에 닿았다.
“많이 피곤해요?”
“음, 조금. 너는?”
“나도. 엄청 당당하게 오늘은 가지 말라고 잡았는데. 들어오자마자 둘 다 이러고 있네.”
턱 끝에 입 맞춘 정진우가 맞은 편 소파에 앉아 머리를 털었다. 목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내며 고개를 바로 했다. 머리를 털던 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정진우가 나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오랜만에 좀 긴장하고 있었더니.”
씻고 와 더 뽀얘진 얼굴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정진우가 식 내내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은 굉장히 의외였다. 호텔로 오는 차 안에서 근데, 너는 왜 그렇게 계속 긴장하고 있었던 거야? 하고 물었더니 정진우가 되게 당연한 것을 말한다는 투로 그랬다. 선배한테 제일 가까운 사람, 그것도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아는 사람을 처음 보러 가는데 그럼 안 긴장해요? 생각해 보니 정말로 너무 당연한 일이라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신기했다. 그리고 생각해 본 적도 없던 너의 의외의 태도는, 나를 조금씩, 조금씩 급해지게 만들었다.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이만큼씩은 가까워져도 되지 않을까. 너와 조금 더 닿아도 되지 않을까. 나는 종종 발견하곤 하는 너의 색다른 면에 조금씩 조심성을 잃어갔다. 내가 마구잡이로 나를 들이밀어도 너는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어떤 문제가 닥쳐도, 네가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가만히 정진우와 눈을 맞추다 손짓했다. 소파 옆 남은 공간을 두드렸다. 얌전히 다가온 정진우가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마디가 두드러진 손가락을 슬쩍 잡았다. 곧장 마주잡아오는 손에 나는 또다시 두려움 한 움큼을 덜어냈다.
“진우야.”
정진우를 불러놓고 생각했다. 왜 승원 형이 그렇게 장가가고 싶다, 노래를 불렀는지. 누군가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사람들은, 보다 짧은, 결혼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이상한 감상에 젖어 맞잡은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정진우의 머리가 조금 더 깊게, 내게로 파고들었다.
“진우야,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잠자코 나를 기다려주는 정진우의 고른 호흡에, 나는 또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었다. 다만,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네가 온전한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가 한 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말로, 행동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걸 한창 배워가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너무나 어려워서. 너에게 내 마음을 가감 없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어느 때나 나에게 아주 어려운 일이라.
나는 쉽사리 할 말을 정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괴롭히며 계속해서 말을 골랐다.
“나는…….”
문득, 뜬금없는 타이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사실 나는 정진우가 집을 구했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정말 좋은 순간일까. 내가 너무 감상에 젖진 않았나.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가만 내 하는 양을 기다리던 정진우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나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귓가에 옅은 호흡이 닿았다.
“……. 왜 웃어.”
“지금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짧게 속삭인 정진우가 내 어깨를 잡아 저에게로 끌어당겼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정진우를 깔고 소파에 누웠다. 젖은 머리가 흰 얼굴 주변을 감싸고, 소파 위를 덮었다.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빛나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정진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요한.”
“……. 응.”
“요한아.”
괜스레 초조하던 마음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금세 가라앉았다. 턱 끝에 쪽 소리를 내며 입 맞춘 정진우가 공단을 두른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사 다 되면 말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아까부터 자꾸 말하고 싶은 거야.”
“……. 응.”
팔꿈치로 지탱하던 몸에 힘을 풀었다. 저에게 바투 붙은 몸을 바로 끌어안는 손이 느껴졌다. 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던 손이 셔츠 안으로 파고들고, 맨 등을 쓸어내렸다.
“아직 공사도 다 안 끝났고, 선배 집 계약기간도 남았는데 좀 그런 얘기일 수도 있지만.”
입술이 닿아오는 귓가와 목에 소름이 돋았다. 귓불을 슬쩍 깨문 정진우가 촉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내가 자꾸 급해져서. 혹시 안 맞고,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얼굴 보고,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요.”
나와 너는 정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아교 칠을 한 듯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입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생각이 많고, 정작 행동 없이 정진우의 이야기에 대답만 하고 있는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소파 아래로 늘어져 있던 손이 내 머리를 슬슬 헤집었다.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살 냄새를 한껏 들이켰다.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더 좋은 말은 못하겠지만.”
“……. 같이 살까, 우리.”
마음을 먹자, 다짜고짜 요점부터 쏟아져 나왔다. 동그래진 눈으로 내 얼굴을 잡고 나를 한참 보던 정진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잽싸게 말을 가로챈 게 창피했지만 붉어졌을 게 분명한 얼굴을 숨기진 않았다. 불긋불긋하고 촌스럽게 달아오른 얼굴도, 너는 사랑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꼭 끌어안은 정진우가 목에 입을 맞췄다. 목선을 따라 입 맞추며 올라온 정진우가 턱을 지나 내 입술을 머금었다. 까만 속눈썹이 볼을 간질였다. 입술을 붙인 상태로 가만히 온기를 느꼈다. 한동안 같은 곳에 닿은 채로 멈춰 있던 통통한 입술이 움찔, 움직였다.
“좋아요.”
손을 들어 뒷머리를 감쌌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촉촉했다. 정진우가 한 번 입을 열 때마다 뜨거운 온기가 입 안으로, 마음속으로, 거침없이 침입했다. 약간 갈라진 목소리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요한아.”
“……. 응.”
“나랑 살자.”
거듭 말하며 한가득 안겨오는 몸을 끌어안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정진우에게 가지고 있었던 가장 깊은 욕망. 항상 뭔가 부족해 허덕이던 욕심이 조금씩 채워졌다. 언제나 나는, 정진우의 손을 잡고 끝없는 미래를 걷고 싶었다.
아랫입술을 입 안에 넣고 굴리던 정진우가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이 내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수많은 시간을 함께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