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뼈가 울리는 감각에 감았던 눈을 떴다. 좁은 침대에 구겨져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머리카락이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찼다. 팔베개를 해주고 있던 손을 들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뒤척이는 몸이 깊게 안겨왔다. 손가락 끝이 둔하게 찌릿거렸다. 가늘고 풍성한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고 손에 닿는 날개 뼈를 쥐었다. 쌕쌕 고른 숨을 흘리며 자는 와중에도 내 움직임을 귀신같이 알아챈 정진우가 잠긴 목소리를 하고 낮게 웃었다.
“아직 해도 안 떴는데… 더 자요.”
“응. ……너도 자.”
손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맨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어깨 근처부터 허리까지, 척추 뼈를 짚어가며 내려갔다. 닿아 있는 맨살이 부르르 떨렸다. 허리께에서 움찔거리던 손가락이 엉덩이로 내려와 둔덕 사이를 느리게 문지른다. 허벅지에 느껴지는 성기가 점점 힘을 받아 단단해졌다. 뻣뻣하게 굳어가는 성기와 성기가 맞닿았다. 채 빼지 못한 정액을 헤치고 몸속으로 침투하려는 손을 잡았다. 목을 빨던 얼굴이 들리고, 턱 근처를 비비던 입술이 오물거렸다.
“…하지 마?”
동시에 아래를 쳐올리는 몸짓에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았다. 엉덩이를 제 맘대로 주무르던 손이 한껏 두꺼워진 것들을 잡고 슬슬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가에 남아 있던 졸음이 완전히 꺼지고, 탈력감이 몰려왔다. 제 손바닥을 적신 묽은 액체를 덜 뜨인 눈으로 주시하던 정진우가 느릿하게 웃었다.
“귀여워…….”
……. 뭐가? 진정되지 않는 호흡으로 급기야 제 손바닥을 핥기 시작하는 정진우를 만류했다. 입술을 가리고 있는 손바닥을 억지로 떼어내자 달빛을 받아 요사하게 빛나는 얼굴이 흰 액체를 묻힌 채로 미소 지었다. 뱃속이 조여드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내가 정진우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지지대를 잃은 정진우의 머리가 베개에 푹 파묻혔다. 머리칼이 팔랑 솟았다가 내려앉았다.
푸르게 빛나는 검은 머리, 흰 얼굴.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주제에 창피한 줄 모르고 입꼬리에 정액을 묻힌 채로 천진하게 웃는 걸 보는데, 얼굴에 열이 몰렸다.
“누워요. 이리 와요…….”
팔을 잡아끄는 정진우의 손을 잡아 내리고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잠 안 와요? 저는 졸려 죽겠다는 투로 묻는데 대답 없이 가슴만 쓸어 주었다. 힘이 들어가 있는 미간을 문질렀다. 한껏 모여 있던 눈썹이 점점 제 모양을 되찾아가는 걸 넋 놓고 바라보았다. 느리게 뛰던 심장소리가 쿵쿵쿵쿵, 귓가를 거세게 울렸다. 울컥, 눈물이 고였다.
다음 달 7일. 너는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결국 예정대로 돌아가는 너를 나는, 또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팍에서 손을 떼어냈다.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침대의 진동에 네가 뒤척거리는 기척이 났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잠든 너의 몸을 응시했다. 네 몸을 빼곡 채우고 있는 문신이 눈을 어지럽혔다. 네 앞에서 나는 언제나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한 번에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가장 좋은 질문을 고르다 보면 다른 곳으로 넘어가기 일쑤인 화제에 꿀꺽 삼킨 물음이 어느새 턱 끝까지 가득 차올랐다. 너를 밀어내고 싶은 마음을 참고 견디다 보면, 이 궁금증을 해소할 날이 언젠가 찾아올까. 너는 내 궁금증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까. 혼란스러운 감정 위로, 내가 너에 대한 미움을 키우며 되뇌던 생각이 둥실 떠올랐다. 나는, 네가 언젠가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는 말 한마디만 했다면, 언제까지라도 너를 원망 않고 기다릴 수 있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정진우의 곤히 잠든 얼굴을 지켜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희고 조막만 한 얼굴은 언제 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르도록 재미있었다. 깊게 물결치는 눈꼬리와, 풍성한 속눈썹. 곱상한 이목구비에 그나마 남자다움을 더해주는 눈썹, 반듯한 이마, 이마에서부터 매끈하게 내려오는 콧등, 서른이 가까워진 나이에도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는 볼, 도톰한 입술, 연한 빛의 입술을 가장 적당한 위치에서 강조해주는 점. 체모가 적어 매끈한 턱 선을 눈을 굴려 따라가다 보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너만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살고 싶은 마음이 지치지도 않고 차올랐다. 아침 햇빛을 받은 속눈썹이 반짝였다. 움찔 찡그리는 눈이 잘게 깜빡이더니 굳게 닫힌 눈꺼풀이 열리고, 그사이로 잠에 취해 흐릿한 눈동자가 조금씩 드러났다. 멍하니 깜빡거리던 눈이 제 빛을 찾고, 나를 담은 채로 둥글게 휘어졌다. 뻗어오는 팔에 끌려 평평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깜빡였다. 다른 선택지를 꾸준히 삭제해 나가는 감정이 절망과 같은 모양을 하고 나를 짓눌렀다.
완전히 정신이 깬 정진우가 샤워하는 동안 어질러진 집을 치웠다. 허물이 벗겨진 듯 방까지 쪼르르 이어진 옷가지를 주워 반은 욕실 앞에, 반은 내 방에 갖다 두었다. 그거 조금 하는데 허리가 울려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누워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 그만두고 방바닥에 쭈그려 앉아 정진우의 그림을 들여다봤다. 오래 지나지 않아 샤워하는 소리가 그치고, 정진우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방에 들어왔다. 분명 오늘은 제 것이 아닌 우리 집에 있는 샤워도구를 썼을 텐데도, 옆에 앉은 몸에선 항상 특별한 냄새가 났다.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팔을 둘러 귓불을 만지작대던 손이 목을 쓰다듬었다.
“갖고 있었네요.”
깨지고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를 뚫고 올라온 꽃줄기가 위태로웠다. 제대한 뒤 여기저기 맡겨놓은 짐을 찾아와 정리했을 때, 이 그림이 불쑥 튀어나왔다. 치솟아 오르는 울화에 부숴버리려고 한 게 수차례, 견디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감싸놨던 포장을 찢듯이 벗겨 그림을 확인 한 게 수차례였다. 네가 나를 생각하며 그렸을 그림이, 네가 나와 있었다는 일종의 확인 장치가 되어버린 지 어느새 수년이 지났다. 많이 뒤늦은 질문을 던졌다.
“이거, 왜 이렇게 그렸어?”
침묵을 지키던 정진우가 느리게 대답했다.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과외 끝나고 같이 나오다 저런 걸 봤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봐도 저런 걸 본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 내가 모르는 순간을 정진우가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이상야릇한 감상이 올라왔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말을 멈춘 정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기억 못 하나보네. 그냥, 같이 집 밖으로 나오다 선배가 저런 꽃 하나를 보고 이런 데도 꽃이 피네. 그랬나.”
“……응, 그게 기억에 남았어?”
목 근처를 지분대던 손을 올려 귀를 덮은 정진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상할 수도 있는데, 그때 선배가 내 눈에 처음으로 빛나 보였어요.
눈을 굴리다 기대고 있던 어깨에서 몸을 뗐다. 귀를 덮고 있던 정진우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제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정진우의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멍하니 속으로 되뇌었다. 너의 눈에 내가 빛났던 순간. 너와 함께했던 순간을 대부분 기억하는 내가 쉽사리 떠올리지 못하는, 사소한 순간. 아무리 떠올리려 노력해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가만 그림에 시선을 고정하던 정진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창피하네. 중얼거리는 등에 머리를 묻었다.
아침을 먹고 갈 줄 알았던 정진우는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좋은 나무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사용에 대해 오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고 했다. 남들 일할 땐 쉬고, 쉴 때 스케줄을 잡는 게 새삼 작가다웠다. 호텔 들러서 니시카와하고 같이 이동하려고요. 코트를 팔에 꿰며 말하는 등을 쫓았다. 같이 갈게. 함께 나가려고 야상을 둘러 입는 나를 정진우가 말렸다.
“몸 안 좋잖아요. 쉬어요.”
“좀 걷는 건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다녀와서 연락할게요. 볼을 두어 번 두드린 정진우가 쪽 소리를 내며 입 맞췄다. 현관을 나서려는 등에 대고 중얼거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구겨 신었던 운동화의 앞 코를 바닥에 대고 두드리던 정진우가 갑작스레 몸을 돌렸다. 커다란 손바닥에 잡힌 볼이 짓눌렸다. 코끝에 입을 맞춘 정진우가 연이어 나를 꽉 끌어안았다.
“솔직히 말해 봐요. 선배 그냥 학교 빨리 들어간 거 아니야? 진짜 나보다 먼저 태어난 거 맞아요?”
중얼중얼 뜻 모를 소리를 하는 정진우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무슨 소리야. 늦겠다. 가.”
아무리 봐도 내가 형인데. 한참 더 중얼거리던 정진우가 마지막으로 입술을 빨고 잽싸게 사라졌다.
메리 크리스마스. 부드러운 목소리가 현관에 남아 부엌을 둥둥 떠다녔다.
* * *
이제 좀 줄어들겠지, 했던 관람객은 새해가 가까워질수록 기세를 잃지 않고 점점 늘어났다. 포털 사이트 아무 곳이나 들어가 전시 이름을 치기만 해도 정진우에 관해 여러 글이 쏟아졌다. 내가 입사한 후 이렇게까지 화제성이 높은 전시는 처음이라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도록은 품절된 지 오래였고, 젊은 작가의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 시간 맞춰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은 이제 평일임에도 전시장 하나를 꽉 채울 정도가 되었다. 점심시간이나, 퇴근하면서 일부러 전시장에 들러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상주 직원들의 관습이 되어갈 때쯤, 정진우가 맨 처음 인터뷰를 했던 <제너럴 쿤스트>가 발간되었다.
점심을 먹고 미술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구입한 잡지를 슬슬 넘겨보았다. 사무실로 보내준다고는 했지만 내 돈으로 사보고 싶었다. 다른 인터뷰가 실린 잡지는 이달 중순, 말에 차례로 나올 예정이었다. 그것들도 다 사서, 스크랩해 놔야지. 속으로 다짐하며 정진우의 사진과 인터뷰가 실린 페이지를 찾았다. 월간잡지 중간 즈음 네 페이지를 차지한 인터뷰 내용을 정독했다. 미리 받았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첫 번째, 두 번째 장을 모두 읽고 잘생기게 나온 사진을 쓰다듬은 뒤 한 장을 넘겼다.
“…….”
모두 이서정이 보내왔던 원고와 일치했으나, 마지막 장은 그 내용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순서가 뒤바뀐 질문과 답변이 마지막 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동석했던 자리에선 나누지 않았던 말들까지. 한 번 읽어나갔던 부분을 다시 읽었다. 세 번째 읽었을 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마지막 장의 반 정도는 정진우의 개인사로 채워져 있었다.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었던 문신에 대한 것이 주를 이뤘다. 편집자의 손을 거친 활자가 정진우의 목소리로 읽혔다. 거짓말과 진실이 반쯤 섞인, 정진우의 과거가 정제된 문장으로 잡지 위를 떠돌았다. 학창 시절 처음으로 깨달았던 성 정체성, 그 뒤에 겪었던 가족과의 갈등. 우울. 우울을 타파하려 시도했던 문신. 정신없이 글을 읽다가 자리를 비웠던 신예림이 자리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잡지를 덮었다. 자리에 앉으려던 신예림이 의아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표정이 왜 그래. 괜찮아?”
표정이, 왜……. 얼굴을 쓸어내리려다 떨리는 손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신예림을 보지도 않고 말을 던진 뒤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뒤뜰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 정리되지 않는 머리로 손에 익은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온한 목소리가 들렸다.
-점심 맛있게 먹었어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연기를 잘못 마시고 콜록거렸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빠르게 고인 침이 바닥에 떨어졌다. 수화기 너머의 음성이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왜 그래, 괜찮아요?
타다 남은 담배를 끄고 입술을 타고 흐르는 침을 닦았다. 침이 묻은 손등이 차게 식어갔다.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가만 기다리던 정진우가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물어왔다.
“……너.”
앞머리를 쓸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뭘 물어야 하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모르나. 그럴 리가 없었다. 머리를 흩트리다 입술을 쓸고 손가락을 꺾었다. 마디에서 뚝, 뚝 뼈 울리는 소리가 났다.
“…….”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저앉았다. 구두에까지 묻은 침을 엄지로 문질러 닦아냈다. 정말 나는, 정진우를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점심 먹고 오는 길에, 서점에 들렀어.”
뜨뜻해진 핸드폰을 타고, 아. 짧은 탄성 소리가 들려왔다. 땀이 축축하게 배어난 손으로 핸드폰을 꾹 쥐었다. 등 뒤를 타고 땀이 주륵, 흘렀다. 한겨울임에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언제 이렇게. 머리를 떠도는 물음들은 저들끼리 얽히고설켜 도무지 속 시원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회색 정장바지의 무릎 부분이 축축한 입김에 짙게 물들었다. 젖은 부분을 의미 없이 문지르는 동안 함께 침묵을 지켰던 정진우가 물어왔다.
-제너럴 쿤스트 사러 갔던 거예요?
“……응.”
-인터뷰는 이미, 읽었겠고.
미리 말 안 한 거, 미안해요. 부드럽게 사과하는 목소리에 바지 자락을 쥐었다. 후끈거리기 시작하는 핸드폰을 떼어내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별다른 일정 없지.”
-네.
“퇴근하고 바로 호텔로 갈게.”
맛있게 먹었던 점심이 가슴 한가운데를 꽉 막고 내려가지 않았다. 가슴 부근을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뭐라고 말도 못 꺼내겠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요한 선배.
“……. 이따 보자. 끊을게.”
주름이 간 바지를 탁탁 털어내고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일하는 동안이라도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반 페이지 분량의 인터뷰를 털어내려 고개를 저었다. 전시장을 빙빙 돌아 사무실로 들어섰다. 기분 탓인지 전시장을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설마. 오늘 나왔는데. 도착한 사무실 문가에 서서 제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천천히 주시했다. 책상 서랍에서 과자를 꺼내던 하선재가 나를 보고 입을 뻐끔거렸다. 왜 그래? 턱을 문질렀다. 아니야.
다음 주 수요일에 철거되는 정진우의 전시품과 맞물려 들어오는 스크린의 셋업용 도면을 확인하면서, 덮어놓은 잡지를 힐끔거렸다. 이럴 줄 알았지만 역시 집중이 전혀 되지 않았다. 까만 화면을 마우스 커서가 의미 없이 돌아다녔다. 정진우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겁이 나는 건지, 다 덮어놓고 좋은 건지, 화가 나는 건지. 셋 중 지금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간단한 도면을 한 시간에 걸쳐 들여다보며 수정사항을 기입하다가 에러가 나는 바람에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달칵거렸다. 스페이스 바와 엔터키를 연달아 내리치다가 몰려오는 자괴감에 머리를 감쌌다.
아직 잡지가 발간된 첫날이라 그런지 사무실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종종 작가 융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던 탓에 잡지에 대한 이야기가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여서 일하는 내내 긴장을 유지해야 했다. 뒷목이 뻐근했다. 퇴근할 때쯤엔 오늘 설마 잡지를 나만 읽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눈을 뜨고 짬짬이 들어가 봤던 정진우의 팬 사이트도 잠잠했기 때문에 모니터 옆, 파일 사이에 꽂아둔 잡지를 내가 정말 오늘 사서 본 게 맞나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크리스마스 이후 다시 바깥으로 나도는 나를 두고 음흉한 표정을 짓는 승원 형도, 하선재도,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퇴근하며 정진우의 작품을 구경했다. 미술관을 나서기 전 흡연자끼리 모여 담배를 피우면서 아무거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질문하고 싶은 걸 몇 번이고 삼켜야 했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것 같지. 하긴 오늘 나온 잡지를 굳이 발간 일에 맞춰 서점까지 가서 사 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내일은, 모레는. 언제까지 나는 긴장하고 있어야 하지. 객실로 오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카드 키를 찍고 객실에 들어섰다. 창가에 나를 등지고 선 정진우가 누군가와 한창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간간히 독일어가 들렸다.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간이의자에 앉았다.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깍지를 꼈다. 어느새 거스러미가 일어난 손톱 주변을 긁어내렸다. 따끔했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통화를 이어가며 내 앞에 멈췄다. 까만 슬리퍼가 뒤로 조금 물러나는가 싶더니 무릎을 땅에 대고 꿇어앉은 하얀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고개를 모로 꼰 정진우가 전화기를 떼지 않으며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 좋아요. 그럼 다음 주에 봐요. 인사를 남기며 전화를 끊은 정진우가 내 무릎에 손을 대고 바닥에 앉은 채로 몸을 붙여왔다. 다리를 뒤로 조금 물렸다. 소파에 단단히 붙은 다리를 보던 정진우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화났어요?”
입술을 물고 생각했다. 내가 화가 났나. 화가 났다. 정진우의 경솔한 행동에. 걱정스럽기도 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그리고.
“……. 내가 화가 난 건가.”
“선배.”
커다랗고 마른 손이 무릎을 꽉 쥐었다. 뼈가 드러난 손등을 응시했다.
“너 진짜 잡지, 왜 그랬어. 아니 그보다 언제, 나도 원고 확인했는데. 너, 개인사는 다 삭제해달라고 처음에……. 갑자기 커밍아웃을, 너 그런 얘기는 하지도 않았잖아. 아니 이게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정리한 뒤 만나고 싶었는데, 단 한 문장도 정리가 안 됐다. 눈을 내리깔고 오물거리던 입술이 말했다.
“……. 선배랑 얘기하고 떨어져 있는 동안 혼자 많이 생각해 봤다고 했잖아요.”
무릎을 문지르는 손이 허벅지로 올라왔다. 맘대로 움직이는 손을 잡아 소파로 내렸다.
“……. 그래서. 많이 생각해 봐서 낸 결론이 이거야?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곳에 다짜고짜 커밍아웃하는 거?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고등학교 때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깨달았어? 네가 게이라고? 그거 아니잖아.”
분명 침착하게 이야기하려고 전화도 무른 거였는데, 안 됐다.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던 정진우가 말했다.
“……. 선배, 화내지 말아요.”
“화내는 거 아니야. 그냥 나는, ……. 묻고 싶은 거야.”
혼란스럽던 감정이 호흡을 고르고, 말을 이어가며 조금씩 차곡차곡 정리되기 시작했다. 화가 나고, 속상하고, 걱정스럽기도 했고, 남들 다 보이는 곳에 정진우가 커밍아웃을 했다는 점이 다 덮어놓고 좋기도 했다. 모두 맞았다. 그리고 그중 마음을 가장 커다랗게 차지한 것은.
“왜 너는 나한테 먼저 의논하지 않아?”
“미리 말 안 한 건… 정말 미안해요. 나는,”
“혼자 생각하고, 쌓아놓고, 다 정리하고, 갑자기 미안하다고, 아니면 화내고, 나한테 통보하고, …떠나버리고. 그러면 나는…….”
또다시 아무 말도 없었던 정진우에 대한 두려움.
“너를 따라가기가 너무… 벅차고. 가끔은, 불안하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흰 얼굴이 고개를 들고 나를 마주했다. 까만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무릎 뒤쪽으로 파고든 손이 움푹 파인 부분을 꾹 눌렀다. 다리를 끌어안은 정진우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다리 사이에 갇혀 뭉개진 목소리가 빠르게 무릎 주변을 돌았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선배한테 얘기하면 어떻게든 말리려 들 거라는 생각 때문에…….”
“…….”
“저는 그냥, 선배가 가장 불안해하는 것들을 어떻게든 없애고 싶어서… 선배가 나를 당장이라도 포기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하면 선배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잠시 말을 멈춘 정진우가 닿은 자리에 입술을 비볐다.
“내가 또, 실수를… 한 거예요?”
한숨이 나왔다. 대답 없는 나를 흘깃 올려다본 정진우가 더욱 깊게,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선배. 뭐라도 얘기해줘요. 내가 또, 실수를 했다면.”
“…….”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선배가 나를, 다시 예전처럼…….”
마른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진우의 수그린 몸을 볼 때마다 종종 들곤 했던 생각이 스쳤다. 얘가 이렇게 작았나. 내 기억 속의 정진우는 항상 빛나고, 크고, 자신감이 넘쳤다. 뭐든 능숙해 보였고, 그게 부러웠다. 나는 뭘 하든 덤벙대고, 서투른 구석이 많아서 항상 여유로운 정진우를 동경했다. 그런데 그런 너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이렇게 약한 너만 남았을까. 마음 한구석에 스산하게 깔려 있던 불안함도, 화도. 저런 태도를 보고 있다 보면 도무지 끝까지 가져갈 수가 없었다.
스물아홉의 정진우는, 스무 살의 정진우보다 사람을 몰랐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천성은 변하지 않았지만, 제 감정에 급급하고, 나를 보지 못했다. 대체 스무 살의 너는, 어디로 갔을까. 너는 대체 어떻게 살아왔을까. 해소되지 않은 채로 쌓이기만 반복하는 궁금증이 턱 끝을 타고 올라왔다. 어깨를 쥐었던 손을 움직여 뒷목을 감쌌다. 급하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혹시 기억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머리를 역방향으로 쓸어 올렸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내 손이 지나는 자리마다 멋대로 쓸렸다.
“예전에, 내가 지금처럼 너에게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아서 참을 수가 없었을 때… 네가 나한테 그랬어.”
우리 궁금한 거 하나씩 물어보고, 대답해 주고. 지금부터 할까? 정진우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하나도 똑같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들리고, 나를 담아낸 일렁이는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나는, 지금도 항상 너한테 궁금한 게 너무 많아. 너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나는 어떤 것부터 물어봐야 할지 도저히 감이 안 잡혀서, 입 다물고 있었지만.”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른 치아가 드러났다. 뻐끔 입을 다무는 정진우의 볼을 감쌌다.
“너는 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니에요. 나도…….”
무릎 뒤에서 손가락이 꼬물거리는 게 느껴졌다. 간지러웠다. 손가락 끝에 닿는 귀를 지분거렸다. 하얀 귓바퀴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심호흡을 했다.
“그럼 나부터 물어볼까. 너 군대 안 갔다 왔지.”
“…어?”
“군대. 갔다 올 시간이 없었을 것 같은데.”
입을 딱 벌리고 나를 보는 볼을 세게 꼬집었다. 눈가가 조금 찌푸려지는 걸 확인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너도 좀 아파 봐야 돼, 인마. 군대도 안 갔다 온 게. 쭉쭉 늘어나는 살을 한가득 잡고 거칠게 흔들면서 말했다.
“너 군대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분위기를 조금 완화시키려 던진 말이긴 하지만, 사실 정진우를 만나고부터 군대는 계속 궁금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학력과 이력을 봤을 땐 군대 다녀 올 시간이 안 됐을 것 같아서. 분명히 정진우가 면제 대상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작가에게 따로 특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얘는 대체 언제까지 미룰 생각인가, 말하고 보니 조금 더 궁금해졌다. 설마 내가 이 나이 먹고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려야 하나. 새삼 실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볼을 잡힌 채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정진우가 이거, 좀 놔 줘요……. 중얼거렸다. 격해졌던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아서 찹쌀떡 같은 볼을 놓아줬다. 빨갛게 달아오른 곳을 문지르던 정진우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그대로 말했다.
“저 면제예요. 군대 안 가도 돼요.”
“……어?”
멍청하게 반문하는 나를 본 정진우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 이제 제 차례죠.”
되게 당한 느낌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대답해주고 왜 면제냐고 물어봐야지. …….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덜컥 걱정이 들었다. 아직 볼이 아픈지 얼굴을 감싼 채로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정진우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렇게 돌아가신 거… 정말 괜찮아요?”
잡지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또다시 멍청해진 채로 정진우를 내려다 봤다. 눈을 깜빡였다.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이런 패륜아가 있나, 싶었지만 정말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아직 실감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버지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모의 부재는 항상 나에게 실감나지 않는 일이었다. 없어도 있는 것 같고, 있었던 적이 희미해진, 그 정도의 일. 그럼에도 이상하게 목이 잠겼다. 거친 목을 억지로 울려가며 대답했다.
“괜찮아.”
“…….”
“정말이야.”
울컥 눈물이 났다. 입가를 씰룩이며 눈물을 참았다. 여기서 울면 괜찮지 않다고 하는 것 같았다. 정진우가 나를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괜히 헛기침을 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말했다.
“너 왜… 면제야. 어디 다쳤어?”
상처투성이의 몸은 어딘가 면제를 받을 정도로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확신했다. 다쳤구나.
“말해 봐. 솔직하게.”
“…….”
“진우야. 또 그렇게 아무것도…….”
“팔 개월 정도, 우울증 치료를 받았어요.”
어쩐지 정진우가 말을 꺼낼 때마다 점점 더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귓가까지 멍했다. 새카만 머리꼭지를 멍하니 바라보다 마른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진우야, 나 봐봐. 고개를 모로 꼰 정진우의 턱을 쥐었다. 억지로 눈을 맞췄다. 내켜하지 않는 얼굴을 단단히 고쳐 잡고 물었다.
“언제?”
“질문 하나씩…….”
“언제, 왜?”
쳐들린 얼굴이 곤란한 표정을 띠었다. 잘근잘근 씹힌 입술이 붉게 물들었다. 폭 한숨을 쉰 정진우가 말했다.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서 언제.”
“…….”
“……스무 살 때?”
입술을 한참 달싹이던 정진우가 작게 긍정했다. 네.
그때부터는 일방적인 질문과 답변이 지속되었다. 하나씩, 내가 몰랐던 스물여덟까지의 정진우를 알게 되면서 나는, 사정없이 몰아치는 감정을 참기 위해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저를 잘못 키웠다며 서슴없이 눈앞에서 자해하는 어머니, 고등학교 때부터 정진우를 없는 사람 취급했던 아버지가 청순한 입에서 담담히 흘러나왔다. 어머니의 습관적인 자해를 결국 견디지 못해 자진해서 집에 갇히고, 몇 개월을 말을 잃은 채 살던 것을 보다 못한 정진우의 형이 유학을 제안했다고 했다. 스무 살 시월에서 스물하나의 겨울, 독일로 떠날 때까지 정진우의 시간이 채워지고, 스물둘, 스물셋, 우리가 다시 만난 스물여덟까지 정진우의 정보가 하나씩 쌓였다. 혼란스러웠다. 정진우의 정보를 받아들일수록 오랜 시간 켜켜이 쌓아왔던 정진우에 대한 미움이 갈 곳을 잃고 날뛰었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지났고, 질문과 답변을 반복하던 것도 조금씩 지쳐갈 즈음 내 얼굴을 확인하던 정진우가 표정이 어땠는지 슬쩍 웃었다.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
“안 그래도 나는, 선배한테 켕기는 짓을 많이 했는데. 나 살기 바빠서 다 버리고 도망가고, 다 모르는 척하고, 이제 와서 억지 쓰고, 그런 게 맞는데. 구질구질한 얘기까지 다 해버리면 선배가 무슨 생각을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답답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어떤 말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을 얽어오는 마르고 거친 감촉에 눈물이 났다. 참았다. 빠르게 깜빡이는 눈에 초연함을 되찾은, 어딘가 후련하게까지 보이는 정진우가 맺혔다. 견디지 못하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너희 가족은……. 그럼 너 인터뷰 이런 거, 다 알고 계셔?”
고작 나온다는 말이 이런 거였다. 정진우를 서툴다고 욕할 계제가 아니었다. 나도 똑같았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손이 내 손을 더욱 꽉 잡고, 서늘한 손바닥이 내 머리통을 감쌌다.
“형은 아까 연락이 왔고, 아버지는 관심이 없으실 거고. 어머니는… 아직 모르시는 것 같은데.”
“…….”
“아신다고 해도, 어쩔 수 있나. 이미 발간된 잡지는 계속 팔릴 거고. 제일 무서워하시는 남의 눈은 더 이상 가릴 수 없을 텐데.”
안 그래도 지금까지 우울증 핑계대고 멋대로 살았는데, 없는 자식 취급 안 하셨던 게 용해요. 아. 혹시 모르니까 며칠 다른 데서 봐요, 우리.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울컥 자꾸만 이유 없이 날뛰던 화가 다시금 솟았다. 제 어머니를 바투 끌어안던 표정이 생각났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정진우는 제 어머니를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숨을 쉬었다. 머리 위로 태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베를린에서 작가가 게이인 건 굉장히 흔한 일이에요.”
대꾸하고 싶지도 않아서 침묵을 지키는 내 머리를 다정한 손길이 토닥였다.
“선배가, 좀 편하게 웃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터졌다. 나는 서른이 되도록 나잇값을 못했다. 그것도 모르고 정진우만 욕했다.
“나 걱정하지 말고.”
“…….”
“끝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나잇값을 못한 채로 떨리는 등을 정진우가 느리게 쓰다듬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격해졌던 내가 어느 정도 감정을 다스린 뒤 우리는 남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정진우를 만나고 처음으로, 온전한 정진우를 알게 된 기분에 휩싸였다. 어리고, 다정하고, 감정에 약하고, 서툴고, 바보 같고, 나를 사랑하는, 정진우. 그것은 나를 속이 텅 빈 것처럼 두렵게도 만들었고, 맛있는 음식을 가득 먹은 것처럼 충만하게도 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이야기가 끝이 나고, 품 안에서 잠든 정진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창밖을 바라봤다.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이 두근대는 바람에 무거워진 눈을 감아도 심장소리만 들렸다.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정진우가 해주었던 이야기들을 되새기다가 오늘 있을 퍼포먼스를 생각했다. 이제 몇 시간 후, 그리고 토요일. 토요일이 지나면 정진우의 퍼포먼스는 완전히 끝이 난다. 2회 남은 퍼포먼스가 주는 두려움에 일요일에 떠나는 정진우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갔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나의 한정된 세상에선, 한 사람이 게이라는 사실이 주는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자연재해와 같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네가 떠난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날 정도로. 너는, 정말 괜찮을까. 내쉰 한숨에 턱 근처에 닿아 있던 앞머리가 휘날렸다. 하얗게 드러나는 이마에, 또다시 채 가시지 않은 미움이 불쑥 솟아나고, 눈물이 났다.
결국 눈이 부었다. 출근하는 나를 두고 실실 웃으며 놀리는 정진우의 입을 때려주고 호텔을 나섰다. 정진우가 건네준 음료수 캔을 눈가에 대고 문지르며 미술관으로 걸었다. 자칫하면 늦게 생겼다. 걸음을 재촉해 미술관에 가까워질수록,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잡지가 돌덩이라도 된 것처럼 점점 무거워졌다.
도착하고 보니 늦지는 않았지만, 내가 꼴찌로 출근했다. 사무실 한편에 자리한 테이블에서 누군가 사온 빵을 깔아놓고 먹던 사람들이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보고 손짓했다. 요한 씨, 와서 빵 먹어. 가방을 대충 내려놓고 자리를 정리한 뒤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에는 다양한 종류의 빵과 음료수, <제너럴 쿤스트>의 이달 호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비어 있는 하선재의 옆자리에 앉으려다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모서리에 걸려 있는 잡지를 보고 몸이 굳었다. 자연스레 의자 등받이를 잡았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굳은 목을 억지로 돌려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태연한 안색들이었다. 등골이 서늘하게 식었다. 테이블 모서리에 걸쳐진 모양대로 휘어 있는 잡지를 쥐었다. 잡지를 쥔 손가락이 곱아들고, 귓가가 멍해졌을 때, 하선재가 어깨를 두드렸다.
“형, 뭐해. 빨리 먹어. 이따 바로 내려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 퍼포먼스 있잖아. 단팥빵을 집어 입가에 내미는 하선재의 손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 형 왜 이래 오늘. 빵을 쥔 손을 슬슬 흔들던 하선재의 시선이 내 손 안에서 사정없이 구겨지고 있는 중인 잡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뭐야, 잡지는 왜 그렇게 구기고 있어. 빵 먹으라니까?”
하선재가 소란을 떤 탓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마저 나에게 꽂혔다. 나는 도무지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손에 쥔 잡지를 놓을 수도, 아직 입 근처에 머물러 있는 빵을 받아먹을 수도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신예림마저 요한 씨, 빵 맛있는데. 하고 거들었다. 억지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니야, 나 별로 입맛이 없네.”
“아침 먹고 왔어?”
응.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에게서 금세 관심을 돌린 사람끼리 저들끼리 빵과 음료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제 마지막 화가 방영된 월화 드라마, 타 미술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전시, 올해 초 육아를 이유로 그만둔 홍보팀 직원, 직장을 옮긴 코디네이터에서부터 각종 작가들의 소식이 끊김 없이 여러 사람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언제부터 이 잡지가 여기에 놓여 있었는지, 누군가 잡지를 본 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나는 등줄기를 뻣뻣이 굳히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간단히 다과나 하자고 한 것 같은데, 자리는 한 시간여 동안 지속되었다. 다음 작품이 들어오는 문제로 바쁜 시기였는데도 사람들은 일부러 신경을 안 쓰려 노력하는 건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며 꽤 오랜 시간을 자리에 부비고 앉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정진우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던 어깨를 돌리며 테이블을 적당히 치운 뒤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 켜지도 않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다. 커피를 타서 자리로 돌아오는 신예림이 내 표정이 웃겼는지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나는 약간 어리둥절해진 기분이 되었다. 대체 뭐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컴퓨터를 켰다. 화면이 밝아지자 가장 먼저 뜨는 검색 창에 정진우의 이름을 쳐봤다. 작품과 전시, 정진우의 이력, 사진이 화면을 채웠다. 손 가는 대로 글을 클릭해서 읽어봤다.
모두 내가 본 적이 있는 글들이었다. 새로운 글은 없었다.
“…….”
이번에는 정진우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다. 업데이트가 중지된 지 몇 달이 지난 채 그대로였다. 볼 것도 없어서 정진우의 에이전시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복잡한 머리에 외국어가 들어오지 않아 바로 나왔다. 대충 봐도 정진우에 관한 소식은 한국 전시와 다음 달 중순에 있을 베를린 전시에 관한 것밖에 없긴 했다. 이젠 긴장보다 궁금함이 앞서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분명 정진우는 커밍아웃을 한 게 맞는데. 여기저기 클릭해서 각종 자료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 계속해서 뒤로 미뤄놓고 있던 정진우의 팬 사이트를 들어가 봤다. 이제 회원 수가 막 100명이 넘은 소규모 사이트였지만, 나와 가장 비슷한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이어서 반응이 겁나 망설이고만 있었다.
익숙해진 사이트의 화면이 뜨자마자 첫 글을 클릭해 들어갔다. 역시 이곳엔 <제너럴 쿤스트>에 실린 인터뷰가 올라와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인터뷰 내용은 빠르게 내리고 세 개의 코멘트를 확인했다.
“……. 예림 씨, 바빠?”
옆자리에 있는 신예림이 어, 왜? 하고 물어왔다.
“담배 안 피우러 갈래?”
나 진짜 바쁜데……. 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신예림이 담뱃갑을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일함으로 모니터 화면을 바꿔놓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를 보던 하선재가 나도, 중얼거렸다. 결국 셋이 사이좋게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 큐레이터님이 사무실을 나서는 우리의 등 뒤에 대고 우리 팀은 아주 나만 빼고 담배 피워서 팔자 좋아, 하고 뼈 있는 말을 던졌다.
뒤뜰에 도착하자마자 담배를 문 신예림이 나 라이터 좀, 하며 손을 내밀었다.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건네고 나도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밝은 갈색의 고수머리를 긁적이며 함께 불을 붙인 하선재가 연기를 뱉으며 우리를 쳐다봤다.
“오늘따라 일하기 진짜 싫은데, 그죠.”
“어. 오늘따라 집에 가고 싶다…….”
매일매일 하는 얘기를 답습하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연기를 뱉었다. 남은 빵과 함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잡지를 떠올렸다. 헛기침을 큼, 했다.
“아까 제너럴 쿤스트 이번 거 있던데, 누가 사온 거야?”
어색하게 꺼낸 이야기에 하선재와 신예림이 의아한 표정을 하고 나를 잠시 쳐다봤다. 말없이 둘과 시선을 맞추는 와중에 신예림이 담배를 끼운 손을 약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 내가. 어제 잠깐 볼일 있어서 서점 갔는데 있더라고. 거기 이번에 우리 미술관 실렸잖아. 궁금해서 사왔어.”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잡지가 있나 했는데. 너였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하게 묻는다고 했는데, 담배를 쥔 손이 잘게 떨리는 걸 보고 급하게 주먹을 말아 쥔 채 등 뒤로 숨겼다. 잘못 움직이는 바람에 담뱃불에 손가락을 데였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뜨거움에 담배를 버리며 손을 털었다.
“아, 뜨…….”
“괜찮아? 다쳤어?”
“괜찮아? 아까부터 왜 이래 형?”
아직 불꽃이 남아 있는 담배를 발로 비비며 손가락을 문질렀다. 화끈거리는 게 물집이 잡힐 것 같았다. 나를 요상하게 쳐다보며 안 다쳤냐고 묻는 둘에게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아까부터 꼴사납게 굴고 있는 걸 알았다. 도무지 진정이 안 되는 내가 이제는 짜증이 났다.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손가락을 문지르며 말했다.
“우리 미술관 실린 거면, 융 인터뷰?”
“응. 그건 자꾸 왜? 손가락 괜찮아 진짜? 찬물이라도 적셔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그거 읽어 봤어?”
“어. 오는 길에 읽어 봤는데?”
자꾸 왜 그래.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신예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짜증으로 미간이 찌푸려진 얼굴과 역시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하선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아니야, 중얼거렸다. 한참 나를 보며 담배를 태우던 신예림이 짧아진 꽁초를 비벼 끄며 말했다.
“뭐야, 요한 씨 알고 있었어?”
“뭘?”
긴장이 이상하게 풀리는 감각에 진이 다 빠져버린 몸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신예림이 지나가듯 말했다.
“융 게이라던데.”
빈속이 울렁거렸다. 태연하게 말하는 얼굴을 쳐다봤다. 내 표정을 마주보던 신예림이 아무렇지 않게 요한 씨, 알고 있었구나? 하고 물었다. 하선재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아, 형 그거 때문에 아까부터 그런 거야? 그거 형 오기 전에 우리끼리 얘기 엄청 했는데. 형은 알고 있었을 줄 알았어. 진우 형이랑 친하잖아. 하선재와 신예림의 태도에 적응할 수 없었다.
약간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둘을 따라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제 곧 전시장으로 내려가 봐야 했다. 셋업 수정사항에 관련된 메일을 클릭해 자료를 받아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끼리 얘기를 엄청 했다고. 가장 구석에 앉은 큐레이터님부터 사람들의 면면을 천천히 훑었다. 차갑게 식은 얼굴을 훔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손가락에 완전히 자리 잡은 물집이 얼굴을 스쳤다.
오늘은 평일이어서 주말만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통제된 전시장에서 정진우가 여느 날과 같이 몸을 푸는 모습을 지켜봤다. 완전히 아문 발바닥의 상처가 정진우가 다리를 풀 때마다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를 반복했다.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까지 올라가 있는 긴 상처에서 올라붙은 엉덩이를 가리고 있는 얇은 천을 지나 상체를 덮은 문신이 시작되는 허리, 날개 뼈가 두드러진 등을 응시했다. 곧게 뻗은 어깨와 목을 지나 가늘게 팔랑이는 머리칼까지 훑었다. 그래도 어셔 인원 보강을 했어야 했나. 생각하다 맞은편에 서서 카메라를 들고 정진우 쪽을 보고 있던 니시카와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눈을 맞추던 니시카와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웃어 오는데 나만 무표정으로 있을 수는 없어서 함께 입꼬리를 올리다가, 니시카와도 우리 사이를 알고 있었지. 생각했다. 내 감정을 추스르기 바빠 니시카와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나를 보는 시선에 사감이 하나도 섞이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서 있는 정진우 앞에서 쳐놓은 바리케이드를 열고, 밀려드는 관람객을 주시하고, 미리 안배된 동선에 대기하고 있다가, 퍼포먼스를 마치고 나에게 다가오는 정진우를 보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왜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지. 정진우는 놀랍도록 아무 일 없이 퍼포먼스를 끝냈고, 뒤뜰에서 추위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옷을 입고,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말없이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끈 정진우가 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도 모르게 버석거리는 손을 세게 쳐냈다. 짝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진우가 손목을 주무르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미안. 갑자기 이러니까…….”
뭔가 말하려는 듯 깊게 호흡하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괜찮아요. 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어색해진 분위기에 허벅지를 문질렀다. 운동화를 신은 발로 바닥을 툭 차던 정진우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점심 같이 할까요.”
시간 괜찮으면. 덧붙이는 말에 그럴까, 하다가 뒤늦게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며 말했다.
“네 전시 철거 때문에 좀 바빠서 시간이 안 될 것 같은데.”
“아…… 네.”
“니시카와는? 먼저 갔으려나?”
“그렇지 않을까요.”
흰 얼굴이 되게 괜찮아 보여서, 또다시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너는, 괜찮을 수가 있지. 나와 시선을 맞추던 정진우가 몸을 약간 정면으로 돌렸다.
“저녁은 같이 못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오늘은 이게 마지막이네.”
어제까진 아무 일정이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지. 정진우의 옷가지를 담아놓았던 박스를 챙겨들며 물었다.
“왜? 무슨 일 생겼어?”
“집에 좀 가보려고.”
굽혔던 허리를 피다 멈칫했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 완전히 일어서 정진우를 바라보았다.
“무슨 연락이라도, 왔어?”
“……. 네. 형한테.”
주변을 두리번대던 얼굴이 손을 들어 내 볼을 슬쩍 감쌌다. 자연스럽게 뿌리치려고 했던 걸 누르고 정진우의 손길을 받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뽀뽀 많이 해놓을걸.”
“…….”
기가 차서 얼굴을 뒤로 뺐다. 너는 이 와중에 농담이 나오냐. 나는 하하 호호 웃으며 농담 따먹기를 할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이마를 문지르는데 큰 손이 내가 든 박스를 빼앗아갔다.
“사무실까지 같이 가요. 저녁때 연락할게요.”
“……아니야. 여기서 헤어지는 게 낫겠다.”
박스를 다시 빼앗아들고 인사하려는데 정진우가 내 팔을 잡아챘다. 그새 진지해진 얼굴로 입술을 슬쩍 깨문다.
“저녁 때, 연락할게요.”
“그래. 무리는 안 해도 돼.”
“연락할게요.”
얘가 또 왜 이러지. 고민하다 정진우가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지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우는 지금 나에게 이제 스무 살 아니에요. 하고 말하고 있었다. 잡은 팔을 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소리 내 알았어. 기다릴게. 말했다.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하루 종일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집에 돌아와 아직 미술관에서 야근하는 형을 기다리며 집안일을 하면서도, 몇 번이고 생각했다. 왜 괜찮지. 집에 간다던 정진우에게선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었으나 그걸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오늘 하루가 너무나 이상하게 다가왔다. 라면을 먹으며 벌써 천 번은 생각한 것 같은 생각을 또 했다. 어째서 아무 일도 없는 거지.
할 말이 있어서 형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하루 종일 긴장했다 풀어졌다 하는 바람에 피로가 쉽게 몰려왔다. 꾸벅꾸벅 핸드폰을 쥔 채로 식탁에서 졸고 있다가 진동이 느껴져 눈을 번쩍 떴다. 정진우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잤어요?
잠긴 목소리를 듣더니 대뜸 물어온다.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잠깐 졸았어. 너는, 집이야?”
-네.
“……. 괜찮아?”
정진우가 옅게 웃었다.
-괜찮아요.
“부모님은?”
-아버지는 지금 안 계시고, 어머니는, 안 괜찮으신 것 같은데.
선배는 신경 안 써도 돼요.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말에 미간을 짚었다.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 그러게. 내가 또 말실수를 했네.
미안해요. 잠시 말을 끌던 정진우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방인지 어딘지 사위가 고요했다. 수화기 너머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그냥, 많이 우시더라고. 아프지도 않은지, 가슴에 멍이 들 때까지 세게도 두드리시고, 형이랑 나랑 그거 말리느라 연락이 늦었어요. 나야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데, 형은 무슨 죄야. 안 그래도 애기 때문에 힘든데. 한참 우시더니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지금은 주무세요.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게 맞는 일일까. 부모한테 그렇게 상처를 줘 놓고, 너는 아직도 나와 만나고 싶니. 속으로만 물어봤다. 정진우에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만나고 싶다는 대답을 들으려고 하는 말인 걸 알았기 때문에.
침묵을 지키는 나를 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진우가 말했다. 저희 어머니도, 나이가 많이 드시긴 했나 봐요. 벌써 예순일곱이시니까, 그렇긴 하다. 저는 오늘 새삼 깨달았어요.
정체 모를 것이 치밀어 올라오는 걸 참고 있는데 귀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어요.
피곤할 텐데 얼른 자라는 말과 함께 끊긴 전화를 쥐고 장판 무늬를 의미 없이 눈으로 쫓았다. 정진우를 만나고 처음으로, 우리가 아예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내가 네 입학 전 승원 형과 함께 군대를 갔다면. 네가, 계획했던 대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유학을 갔다면.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너를 만나고는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 아예 만나지 않았더라면. 부질없는, 일종의 자위에 가까운 생각이 꼬리를 이었다. 고개를 털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마셨다. 맥주를 다 비워낼 때쯤 승원 형이 지친 기색을 하고 현관을 열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형.”
식탁에 가방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는 형을 불렀다.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는 형에게 손짓했다. 잠깐만 앉아봐. 내 기색에 왜 그래, 덩달아 얼굴을 굳히며 형이 의자에 앉았다.
“형도 오늘 제너럴 쿤스트 봤어?”
“제너럴 쿤스트? 잡지?”
“응.”
그건 왜. 물어오던 형이 아,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우? 인터뷰 때문에?”
“응.”
들고 있던 맥주 캔을 꽉 쥐었다. 빈 캔이 우그러졌다. 형이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나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근데 그건 네가 왜?”
“어?”
“아니 걔 일에 네가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그러고 있냐고.”
그야…….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딱 다물었다. 형이 혀를 쯧쯧 찼다.
“뭐 별것도 아닌 걸로 이러고 있어, 피곤해 죽겠는데. 난 큰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정진우가 잡지에 커밍아웃을 한 게 별것도 아닌 일이라며 단정 짓고 일어서려는 형을 잡았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별게 아니야?”
“뭐? 야 나 피곤해 죽겠다니까.”
“형은, 걔가 남자가 좋다는데 그게 별거 아니야?”
이상할 정도로 따지려 드는 나를 알고 있었지만 말을 멈출 수 없었다. 형에게 화내는 꼴이 되어 버린 상황에 잡은 팔을 놓고 사과하려는데 형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 뭐 그럼 내가 아이 무서워, 해야 되냐? 아니면 걔가 게이라는데 와 장난 아니네, 이러면서 너 잡고 호들갑 떨어야 돼? 야 그래, 놀랍긴 하더라. 걔는 그 얼굴로 왜 남자 좋아하는 취미가 있대냐. 얼굴이 아깝다.”
멍청해진 나를 두고 뭐. 어쩌자는 거야. 짜증 낸 형이 발을 구르며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식탁 위에 자리한 가방을 든 형이 나에게 말했다.
“너… 많이 충격 받았냐? 걔 인터뷰 보고?”
“…엉?”
“내가 지금 진짜 피곤해서 너 생각을 못 했는데, 너는 걔랑 친하니까 모르고 있었으면 그럴 만하긴 하다. 참 나는 가끔 작가들 생각을 알 수가 없어. 아니 그런 거면 그런 거지 걔는 뭐 그렇게 갑자기 그런 데서 그런 걸 밝히고 그런대.”
대명사로만 이루어진 문장을 한참 읊던 형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요한아, 좀 충격적이고 거북해도 진우한테 티 내지 말고. 내가 말 안 해도 네가 잘하겠지만, 어쨌든. 나 혜연이랑 전화 좀 하고 씻을 거니까 너 안 씻었으면 그러고 앉아 있지 말고 빨리 먼저 씻어.”
닫힌 방문 틈으로 형이 혜연 누나와 통화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멍청하게 샤워를 하고, 들어와 누워 멍청하게 천장을 봤다. 오전에 본 정진우의 팬 사이트에 남겨진 코멘트 세 개가 눈앞에서 둥둥 떠다녔다. 모두 정진우의 문신에 관한 내용이었다. 다른 내용은 없었다.
* * *
하루 머물고 나올 줄 알았더니 이틀을 더 집에 머무른 정진우와 연락을 이어가느라 나는 오랜만에 핸드폰을 시도 때도 없이 붙잡고 살았다. 본인 말로 안 어울리는 효자 노릇을 이틀간 한 정진우는 금요일 오후, 퇴근하는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함께 퇴근하던 승원 형이 진우야, 하고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주에 두 번은 여기 오는데 마주치질 않네. 잘 있었어?”
“네. 많이 바쁘시죠.”
“뭐, 그렇지. 너 인터뷰 잘 봤어.”
여상하게 말을 건네며 정진우의 어깨를 두드린 승원 형이 요한이 보러 온 거야? 하고 물었다. 정진우가 네, 하고 대답하는 걸 들으며 나는 이 이상한 상황에 적응하느라 굉장히 애를 쓰고 있어야 했다.
형은 자리에 서서 오 분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누다 집으로 향했다. 정진우의 커밍아웃 이후 하루에 만 번도 넘게 되묻곤 하던 말이 오늘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왜, 이렇게 아무 일도 없는 거지. 내 중얼거림을 들은 정진우가 응? 하고 반문했다. 아니야. 고개를 젓고 소매를 끌었다.
호텔로 돌아가면서 전화로 나눴던 얘기를 다시 나눴다. 집에 머물렀던 이틀 동안, 정진우가 이제 와서 제 어머니를 설득하려 든 건 아니었다. 그냥 정진우는 집에 있었다고 했다. 밥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나와 통화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모자란 나는, 아직까지도 어떤 말을 꺼내는 게 정답인지 알 수가 없어 정진우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꽤 지친 얼굴로 잠든 정진우를 쓰다듬으며, 차마 못 한 말을 했다. 너는 괜찮니.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헤어지는 게 정답이 아닌가 싶은데, 너는 한 번도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니. 정진우가 깊게 잠든 걸 몇 번이고 확인하고서야 질문을 꺼내는 내가 한심했다.
티는 안 내도 많이 피곤하긴 했었는지 정진우가 덜 뜨인 눈으로 침대에 파묻혀 출근하는 나를 배웅했다. 오늘은 마지막 퍼포먼스가 있는 날이었다. 오늘 퍼포먼스가 끝나고, 정진우는 내일 오후 한 시 비행기로 출국한다. 출국장까지 배웅할 수 있게 되어 이제는 내가 의전을 맡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참 간사해서 비행기 표를 확인하다가 잠깐 웃었다.
어제 저녁, 밥을 먹던 정진우가 갑자기 말했다.
‘선배.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재빨리 이어 말하는 귓가가 불긋했다.
‘아니에요. 자꾸 이상한 말을.’
입가에 붙은 빵 부스러기를 떼어주며 나는, 나이를 다 어디로 먹었는지 스무 살 때보다 어려진 네가 안쓰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너는 내 안색을 조금 살피더니 한 번 더 네 진심을 이야기했다.
‘지금은 무리겠지만, 언젠가 선배 미술관 일이 질리면.’
너는 참 세상 물정 모르는 작가 같은 소리를 자주 하곤 했다.
‘나 어디도 너 따라갈 생각 없어.’
침묵하는 너를 두고 나는 내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웃음이 너에게 정말 웃는 것처럼 보였을까.
‘대신, 너를 기다릴 수는 있어.’
서늘한 머리카락과 뜨뜻한 귓가를 쓰다듬었다. 약간 벌어진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와.’
예약해놓은 항공권 스케줄을 출력하면서 중얼거렸다. 돌아와.
사람으로 꽉 찬 미술관을 바리케이드 너머로 잠시 내려다보다 준비 중인 정진우를 돌아봤다. 깨끗한 얼굴과 상반된, 거친 몸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잠시 생각했다. 네가 너무 예뻐서, 신도 너를 결국엔 사랑할 수밖에 없진 않았을까. 팔불출 같은 생각인 건 알고 있었으나, 너무나 무난하게 지나간 일주일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네가 나와 만나서 악운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걸 수도 있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결코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동선을 앞서 밟으며 사람들을 우르르 이끌고 오는 정진우를 힐끗거렸다. 마지막까지 너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일주일 동안 정진우를 둘러싼 일을 겪으며 이상한 믿음마저 생겨난 기분이었다. 벽 뒤에 숨어서 정진우의 퍼포먼스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관객이 몰려 있는 계단 위쪽이 웅성웅성거렸다. 무슨 일이지. 고개를 빼고 봐도 벽에 가려져서 뭐가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퍼포먼스를 끝내고 나에게 다가온 정진우가 대뜸 벽 뒤에 숨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정진우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 장비를 챙기는 니시카와가 보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순간엔 나도 약간 감상에 젖어 정진우의 등을 끌어안아 주었다. 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손바닥에 느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추위에 떠는 몸을 이끌고 재빨리 뒤뜰로 향했다.
“고생 많았어. 큐레이터님이 시간 괜찮으면 잠깐 사무실로 올라왔으면 좋겠다는데.”
신발을 꿰어 신던 정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우를 데리고 사무실로 올라가는 동안 몇몇 팬을 만났다. 익숙해진 상황에 정진우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걸 한 걸음 뒤에서 멀뚱히 보고 있었다. 앞으로 한국에서 언제 또 전시를 할지 모르겠다, 아쉽다. 등등의 말이 들렸다. 이것저것 말을 나누더니 쇼핑백 하나를 거절하고, 하나만 받아든 정진우가 나에게 손짓했다.
“지금까지 저 계속 도와주신 코디님이에요.”
얘 왜 이러지. 정진우의 행동에 비롯된 뻘쭘한 상황에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정진우를 보고 큐레이터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빠서 오늘은 확인도 못 했네. 잘 끝냈죠?”
“네. 감사드려요.”
“첫 전시인데, 별 탈 없이 끝나서 다행이에요.”
정진우의 등에 손을 올린 큐레이터님과 정진우가 나란히 문 밖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운영 팀 자리에 앉은 이정현을 불러냈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이정현을 데리고 비상구에 들어와 문을 굳게 닫았다. 아래위 모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는 나를 이정현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요한 씨 왜 그래요?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아니, 아까 융 퍼포먼스 끝나갈 때쯤에 계단 쪽에서 소란이 있는 것 같아서. 정현 씨 거기 있었죠?”
미술관 어셔의 총 책임자인 이정현이 거기 없었을 리가 없었다. 역시 이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그냥 거기 있던 누가 작가 욕을 좀 해가지고. 크게 번지진 않았고, 바로 조용해졌는데. 요한 씨 엄청 예민하네.”
“작가 욕?”
“네. 뭐, ……요즘 이슈가 있었잖아요.”
머리를 긁적이던 이정현이 작게 말했다. 작가 커밍아웃.
“어디서 또 알고 왔는지, 그거에 대한 욕을 좀 했다더라고.”
“…뭐라고?”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겠고. 어쨌든 그랬어요.”
어깨를 으쓱한 이정현이 말했다.
“그래도 무난히 전시 끝나서 다행이에요. 작가 커밍아웃하고 나서는 심지어 관람객도 늘었어.”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번 주 내내 엄청 늘어서 우리는 작가한테 고맙다고 해야 될 판이야. 중얼거리는 이정현을 데리고 자리에 들어왔다. 내가 못 들었으면, 비슷한 자리에 있었던 정진우도 못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속이 상했다. 괜히 하지 않아도 될 얘기를 해서, 정진우가 듣지 않아도 될 욕을 듣는 게 화가 났다. 이런 생각을 평생 안고 가야 한다는데 속이 꽉 막혔다. 마우스를 거칠게 딸깍거리며 최종 철거 스케줄을 공유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저 이야기 다 했는데, 잠깐 얼굴 볼 시간 있어요?]
지금은 내가 평온한 낯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메시지를 치는데 오타가 자꾸 났다. 몇 번을 지웠다 다시 써야 했다.
[미안, 그냥 가는 게 낫겠다. 퇴근하고 호텔로 갈게. 호텔에 있을 거지?]
네. 짐 싸고 있을게요. 이따 봐요.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이 정도면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속이 상했다.
가라앉은 기분은 정진우를 볼 때까지 다시 나아지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무슨 안 좋은 말이 있을까 일도 바쁜데 인터넷을 찾아보고, 팬 사이트를 들어가 보고, 별 난리를 부렸다. 가끔 나는 내가 정진우의 애인인지 팬인지 분간할 수가 없을 때가 있었는데, 혹시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무슨 글이 있을까 들어가 봤던 팬 사이트에서 새로 업데이트된 사진을 구경하고 있는 나를 새삼 발견하면서 더욱 그랬다. 언제 기분이 안 좋았냐는 듯 실실 웃고 있었던 것까지 알아채고는 급격하게 창피함이 몰려와 담배를 한 대 피워야 했다.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객실 구석에 세워놓은 정진우에게선 옅은 땀 냄새가 났다. 왔어요? 하고 해맑게 웃는 얼굴에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키스를 퍼부었다. 네가 너를 모르는 남들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듣고 다니는 것도 짜증이 났고, 내일 아침이면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을 해야 한다는 것도 짜증이 났다. 아무것도 못 하고 너를 보내고, 혹시 어딘가에 네 욕이 있을까 찾아보는 것밖에 못 하는 나에게 가장 짜증이 났다. 나를 받아내며 뒷걸음질 치는 몸을 있는 힘껏 밀어붙이며 침대로 넘어졌다. 티셔츠를 벗기고 문신을 하나하나 짚으며 키스해 나갔다. 아래에 깔린 몸이 내 머리를 부여잡고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움찔 떨었다. 나른한 목소리가 작게 신음했다. 버클을 입에 물고 바지를 벗긴 뒤 고무줄까지 입으로 벗겨 완전한 알몸을 만들었다. 흥분해 끝부분이 젖은 것을 한가득 물고 열심히 빨았다. 정진우는 흥분해 뱉는 신음소리도 노래하는 것 같았다.
내가 다짜고짜 달려든 탓에 상황이 역전되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날이 밝을 때까지 섹스를 했다. 바로 비행기 타야 하는 애가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나를 몰아붙이는 바람에 허리가 울릴 때까지 정진우를 받아냈다. 배가 고파서 빵 쪼가리를 씹으며 몸을 섞었으니 그 게걸스러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내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에 한참 웃던 정진우가 나간 사이 나는 엉망이 된 시트를 정리했다. 그거 움직였다고 죽을 것같이 울리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금방 돌아온 정진우가 찬바람을 묻힌 채로 떠 먹여주는 죽을 받아먹었다.
공항까지 가는 길 내내 엉망진창 와장창이 따로 없었다. 정진우는 본인이 내 의전을 맡은 것처럼 내 수발을 들기 바빴고, 그러느라 짐을 하나 호텔에 두고 와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어제의 내 행동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했다. 나라도 나잇값을 해야 하는데, 둘 다 정신 못 차리고 있으니 일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관인 일투성이였기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부랴부랴 다시 짐을 챙겨와 체크인을 하고 짐을 모두 부치고 나니 담배 한 대 피울 시간도 없이 헤어져야 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애를 보내면서, 나는 내가 많이 울 줄 알았다. 정진우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눈물 참는 연습도 몇 번 했다. 아무 소용없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정진우가 혹시 비행기를 놓칠까 등을 떠밀기 바빴다. 니시카와와 마지막으로 악수하고, 나를 깊게 끌어안은 정진우의 귓가에 속삭인 게 오늘 우리가 유일하게 진지한 시간이었다.
정진우와 니시카와를 무사히 보낸 뒤 출국장 벤치에 앉아 숨을 조금 고르다 리무진 버스를 타고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은 되어야 도착했다고 연락이 올 것이다. 자식을 유학길에 보내는 부모 마음이 이 비슷한 건가. 생각했다. 이미 수년을 살다 온 애를 두고 나는 별 걱정을 다 했다. 정진우를 두고 나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과 미움을 배워왔다. 정진우는 나에게 어느 때는 철천지원수가 되기도 하고, 세상 다시없을 천사가 되기도 했다. 미워 죽겠는 형제 같기도 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되기도 했다.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던 바람에 종일을 정신없이 보내고, 깜깜한 방 안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내일은 휴관일인데, 형도 나가고. 집에서 청소나 할까. 생각하다가, 그제야 눈물이 났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끝도 없이 쏟아졌다. 알지도 못하고 보냈을 때와는 달리,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상실감이 나를 덮쳤다. 이불을 끌어안고 몸부림쳤다. 돌아온다고 말했다. 그게 일주일이 될지, 한 달이 될지, 일 년이 될지. 아무도 몰랐다. 나는 또다시 기다림을 반복해야 했다. 기다릴 수 있었다. 나는 너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내 발짓에 매트리스에 씌워놓았던 시트가 점점 밀렸다. 미친놈같이 몸부림을 치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쏟아지는 햇빛에 눈물이 말라붙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떴을 땐, 베를린에 도착한 정진우에게서 온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불안하게 술렁였던 마음이 급격히 진정되었다. 잠긴 목을 큼큼 울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소 피곤한 듯 거칠어진 목소리가 들렸다.
스물하나에도, 서른에도. 정진우가 떠났다고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울기는 했지만 나는 서서히 일상에 적응해 갔다. 스물하나에는 군대에 갔고, 서른에는 직장에 갔다. 가끔 가시지 않는 상실감과 싸워야 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괜찮았다. 스물하나보다야, 모든 것이 나았다.
열 시 전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집에 들어와서, 열한 시가 되면 형과 술을 마시다가도 기다렸다는 듯 방에 틀어박혀 이, 삼십 분간 통화를 하고 나오는 나를 두고 형이 혀를 끌끌 찼다. 자꾸 추궁하는 통에 그냥 애인이 외국 유학 갔다고만 둘러댔다. 형은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장거리 되면 어차피 헤어질 거 더 정 붙이기 전에 빨리 정을 떼라는 말을 했다. 그게 됐으면 내가 지금까지 이러고 있을까. 웃고 말았다.
정진우의 전시 철거와 다음 전시 셋업까지 무사히 마친 상황에서 이제 우리 미술관은 새로운 전시 오픈 준비로 한창이었다. 나무뿌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던, 정적인 느낌의 전시장을 스크린과 영상, 화려한 디지털 기기가 채웠다. 순식간에 정반대의 분위기로 바뀐 미술관을 둘러보다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야근이 확정이라, 자정 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메시지를 하나 보내 놨다. 오늘은 연락 길게 못 할 수도 있어.
저녁에는 강현이 미술관을 찾았다. 다음 주에 출국이라고 했다. 원래 약속대로면 술이라도 한잔해야 맞았으나, 강현을 제외한 미술관 직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에 없던 일이 되었다. 대신 미술관 근처 소담한 밥집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보는 강현은 여전히 남자답고,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항상 강현은 절로 부러움이 일게 만들었다. 밥을 한 술 뜨다가 농담을 던진 하선재의 머리를 흩트리는 손을 보면서, 내가 저렇게 단단한 느낌의 사람이었으면 정진우와 나는 조금 더 달라졌을까. 하나 마나 한 생각을 했다.
어제, 강현과 함께 저녁을 먹을 것 같다는 내 말을 듣던 정진우가 혀를 찼다. 그 사람 다음 주에 뉴욕 간대. 변명을 주워 삼키는 나를 두고 정진우가 말했다. 선배한테 화내는 거 아니에요. 잠시 망설이다 한마디를 붙이기도 했다. 그래도 밥만 먹고 들어가요.
정진우의 당부가 아니었어도 우리는 밥만 먹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다들 밤을 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선재와 승원 형을 일별한 강현이 나를 돌아보았다. 내미는 손을 잡았다. 이제 언제 볼지 모르겠네요, 요한 씨. 아쉽다. 몇 번 보지 않은 사람이지만, 막상 떠난다는 걸 보니 나도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시 뵐 수 있으면 봬요. 크고 고운, 다갈색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융 작가님은 베를린으로 가셨죠?”
“네. 얼마 전에 퍼포먼스 끝내고 갔어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무언가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깐 강현이 웃었다.
“작가님 인터뷰 잘 봤다고 전해주세요.”
“아…… 예.”
정진우의 인터뷰는,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전시가 끝나고 나서야 소소하게 화재가 됐다. 우리나라 미술계는 아직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안 그래도 얼굴로 떴다는 말이 도는 정진우는 얼굴에 더해 성 취향도 팔아서 뜬 작가가 되었다. 우리 미술관에서는 직접적으로 그런 이야기까지 나오진 않았지만, 몰라도 몇몇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만큼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하지만 좋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다시 이 정도 규모의 전시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미술계에서 정진우의 평판은 바닥을 쳐 갔다. 잡지에서 밝힌 본인 작품에 대한 해설이 다른 것들보다 큰 이유를 차지하긴 했지만, 커밍아웃도 완전히 무시를 할 수는 없었다.
정진우가 베를린으로 돌아간 이후 처음으로 미술관에서 하게 된 전화에서, 조심스럽게 전한 제 소식에 정진우는 가볍게 웃기만 했다. 얘는 뭐가 이렇게 태평해. 베를린이 그렇게 좋은가. 굳이 한국에서 다시 전시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이러나. 정진우가 제 기반이 모두 닦여 있는 곳으로 돌아가 여유를 찾은 것만 같아서 신경질이 났다. 걱정은 모두 접고 툴툴거리는 나에게 정진우가 말했다.
-제 작품이 좋으면 다 해결될 일이에요. 걱정 말아요.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한 번 더 정진우에게 사랑에 빠졌다.
한 달여간 매일같이 삼십 분씩, 통화를 이어가며 우리는 서로를 조금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붙어 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정진우를 여덟 시간이나 차이 나는 곳에 보내 보니,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작업을 시작했다는 정진우는 학부생일 땐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모든 걸 미친 듯이 귀찮아했다. 아, 붓 빨아야 돼. 아, 저거 한쪽으로 치워놔야 되는데.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전부 뭐 하기 싫다는 종류의 말이었다. 종국에는 작업실 상태가 궁금해진 내가 사진을 찍어 보내보라고 했다. 스튜디오 전체가 아닌 구석구석만 찍어서 보낸 사진은 그것만으로 가관이었다. 저기서 계속 작업하고 살다시피 하다 보면, 병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귀찮아도 좀 치우고 살아라. 잔소리를 했다가 가볍게 싸웠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별것도 아닌 일에 싸울 정도로 어느 정도 서로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만질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게 우리를 더 불편하고, 초조하게 만들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정진우가 손 닿는 거리에 있을 때는 쉼 없이 긴장하곤 했던 나는, 한 달 동안 동일한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에 침대에 드러누워 뒹굴거리며 의미 없는 말을 뱉게 되었다. 내 눈치를 보기 급급했던 정진우는, 작업이 잘 안 풀릴 때면 괜히 나에게 짜증을 냈다. 정진우가 내는 짜증에 함께 짜증을 내다가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한 우리의 관계가 신기했다.
작업 중엔 귀찮음과 함께 각종 희로애락이 폭발하는 정진우는, 성욕 역시 함께 폭발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억눌린 신음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함께 자위를 했을 때는, 밀려오는 수치심과 허무함에 딱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정진우는 폰섹스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서 대단했다. 점점 대담해지기도 했다. 선배, 선배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가득 찰 때까지 싸면, 선배 얼굴 빨개져서 엄청 흥분되는 거 알아요? 선배 엄청 힘들면, 몸은 축 늘어지는데 구멍이 미친 듯이 조여서, 내 거 끊어지는 줄 알았어. 처음에 나는 정진우가 작업이 잘 안 풀려서 미친 줄 알았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흥분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성기를 쥐고 굳어서 입만 뻐끔거렸던 게 얼마 전이었다. 지금은 이상한 소리를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다정한 목소리가 속삭이는 다양하고 음란한 말들에 나도 함께 흥분하기도 했다.
전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따로 퍼포먼스도 없고, 영상 위주의 전시여서 셋업을 하고 보면 신경 쓸 게 덜해서 그런지, 여느 때보다 순조로운 느낌이었다. 나는 1월 중순과 말에 발간된 정진우의 인터뷰가 실린 미술 잡지와, 일반 잡지를 다섯 권씩 구매했다. 서정적인 색감의 작은 바다 옆에 똑같은 이름을 한 잡지들이 각각 다섯 권씩, 열다섯 권이 꽂혔다. 함께 대청소를 하다가 내 방에 들어온 승원 형이, 첫 번째 고난을 보고는 야 이거 뭐야? 진우 그림 아니야? 했을 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이거, 어, 어… 나, 그 진우 그림이 너무 좋아서 모작했어. 너 시간 많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가는 승원 형의 뒷모습에 쿵쿵 뛰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한동안 정진우는 하던 작업을 끝낸 뒤 베를린에서 일주일 뒤 있을 전시를 준비하고, 나는 바빴던 일이 정리된 미술관을 출퇴근 하는 일상이 지속됐다. 바쁠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렇게 빈정이 상해서 싸웠는데, 한가해지니 오늘 밥은 뭘 먹었고, 이 반찬이 맛있었으며, 이건 더럽게 맛이 없더라. 하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로 나누게 되었다. 오늘도 씻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잡고 뒹굴거리다 퇴근하고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너 내 동기 영재 기억한다고 했지.”
-네.
“걔 곧 결혼한다고 했잖아. 청첩장 나왔다, 오늘.”
빠르게 시집간 여자 동기들 몇을 제외하고 남자 동기 중에 처음으로 장가를 가는 거여서 그런지, 그 사람이 조영재여서 그런 건지, 매번 헷갈렸지만 오늘 만나서 청첩장을 받았을 때는 정말로 마음이 찡했다. 살이 조금 오른 조영재는 광대가 반질반질 빛나는 게 희진이와 평생 함께 살 생각을 하니 갈수록 행복한 듯했다. 별 생각 없이 말을 꺼내는 동안 조영재의 행복에 겨운 얼굴이 떠오르며, 기분이 우울해졌다.
정진우가 떠난 지 고작 한 달 하고 일주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이마를 문지르다 툭 말했다.
“생각은, 해보고 있니.”
-……. 선배.
“그렇게 불러도 나오는 거 없어. ……. 나도 재촉하고 싶지 않은데.”
뒷말은 아주 작게 흘러나왔다. 그냥, 영재가 부럽다.
정진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아무런 말이나 주워 삼키던 우리는 결국 한 달 만에 크게 싸웠다. 내일 교외로 나가게 되어서 전화 못 하게 될 것 같아요. 라는 정진우의 말이 도화선이 되었다. 화가 나고, 서운했다. 나는 지금까지 할 일이 없어서 열한 시만 되면 전화 붙들고 대기하고 있었나. 아니었다. 자연스레 말이 불퉁하게 나왔고, 어느 포인트에서인지 모르게 열 받은 정진우가 내 말투를 지적하던 게 커다란 싸움으로 번졌다. 일곱 살 난 애같이 유치한 말싸움을 반복하다 인사도 없이 뚝 끊어버린 전화를 붙잡고 앞머리를 넘겼다. 뭘 잘했다고 나한테 성질이야. 생각하다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사실은, 이럴 때 가장 정진우가 보고 싶었다. 좋을 때 말고, 화가 나고, 속상할 때. 서운한 마음이 들 때 가장 정진우를 끌어안고 싶었다. 화면 속 말고, 실제의 정진우를 만지고 싶었다. 코끝에 정진우의 냄새가 맺혔다가, 금방 사라졌다. 냄새, 목소리, 온기. 정진우를 이루는 것들을 모두 단단히 잡아놓고, 내 곁에 가두고 싶었다.
둘 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빈정이 상한 싸움을 한 탓에 하루 종일 기분이 우울했다. 요 근래는 일이 잘 안 돼도, 바빠도, 밤에 정진우의 목소리를 들으면 모든 게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을 게 뻔했다. 집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아무리 신호가 울려도 정진우는 받지 않았다. 빈정이 더 상했다. 거칠게 침대 한쪽에 뒤집어 놓은 핸드폰을 들어 올려 진동에서 소리로 상태를 변경했다. 영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고 있는데, 푸릇푸릇한 새벽에 벨소리가 크게 울렸다. 부리나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이름을 확인했다. 정진우였다.
“여보세요?”
-잤어요?
잠겨 있는 목소리에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응. 너는.”
잠시 침묵했던 정진우가 말했다.
-이제 베를린으로 돌아왔어요. 제가 간 데가, 인터넷이 잘 안 터지는 지역이라. 연락 온지 몰랐어요.
“……응.”
-다짜고짜 연락 못 한다는 말 말고, 이유부터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우울한 목소리에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니야, 화부터 내서 나도 미안해. 김빠진 사과를 나눈 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얼마 후 머쓱한 웃음소리를 낸 정진우가 천천히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무거웠던 머리가 정진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점점 가벼워졌다. 잠이 솔솔 왔다. 드문드문 이야기를 이어가던 정진우가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졸려요? 하고 물어왔다.
“음, 조금 졸리다. 너는? 밥시간 아니야?”
-네. 거기 새벽인데, 내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죠. 자요.
“응……. 갑자기 엄청 졸리네. 너도 저녁 잘 먹고, 잘 자고.”
-응. 내일 연락할게요.
전화를 끊으려는데 정진우가 잠깐, 하고 말을 걸어왔다. 약간 떼어냈던 수화기를 귀에 붙였다. 왜? 하고 물으니 뜸을 들인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붙잡고 있다가 결국 포기했다. 귀를 덮은 핸드폰에서 한동안 짙은 호흡만 들렸다. 뭐라고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정신없이 잠이 드는 바람에 듣지 못했다.
한 번 크게 싸운 뒤여서 그런지, 애매하게 풀다 만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우리는 예전처럼 편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정진우가 많이 바빠진 탓도 컸다. 우리가 전화를 이어가던 시간은 나에겐 밤이었지만, 정진우에겐 한창 활동시간이기도 했으니까. 삼십 분이 넘어가던 통화기록이 이십 분, 십 분으로 줄어들었고, 정진우의 전시가 삼 일 남은 시점에는 안부만 겨우 물을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과 함께 작업장에 있어서인지 시끌시끌한 곳에서 정진우가 뭐라고 이야기를 했다. 딴 생각을 하고 있다가 잘 못 들어서 반문하니 잠시 침묵하고 아니에요, 한다.
“왜, 무슨 얘긴데?”
-아니에요. 못 들었으면 됐어요. 선배 모레 어머니 뵈러 가는 거, 맞죠? 아침에? 몇 시쯤?
“응. 아마 여덟 시? 아홉 시? 모르겠네.”
말을 이으려다 정진우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멈칫했다.
“너 바쁜 거 아니야? 많이 바쁜 거면 끊어도 돼.”
-……좀 바쁘긴 해요.
“그럼 끊자. 내일 연락,”
-저 내일은 평소 하던 시간 말고, 한국 시간으로 두 시쯤엔 연락 가능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두 시. 내일은 회의가 잡혀 있었다. 이상하게 크게 싸우고 타이밍이 영 안 맞았다. 덜컥 드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말했다.
“내일 나 한 시부터 회의야. 연락 못 하겠다.”
-그래요…….
“응. 모레는 되지? 모레 엄마 보러 갔다 오고 나서는 계속 한가하니까 너 좋은 시간에 연락해.”
-……. 알았어요.
끊으려는데 정진우가 나는 분명히 얘기했어요. 못 들은 건 선배예요. 하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뭐? 질문과 동시에 끊어진 전화기를 붙잡고 멍하니 누워 있었다. 뭔 소리야. 아까 정진우가 하는 소리를 못 들어서 반문했던 게 생각났다. 지금이라도 다시 전화해서 뭔 말이냐고 재촉해볼까 했지만, 바쁠 때 쓸데없는 걸로 전화하면 나도 짜증이 났기 때문에 그만 뒀다. 전시 오픈하면 한가해질 테니 그때 물어봐야지. 전시 오픈까지 3일 남았다. 조금 불안했지만, 짧은 기간이었다. 3일 후에는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괜히 찝찝하게 남은 앙금을 모두 풀어버릴 것이다.
회의실에서 진행사항에 관한 보고를 하며 시계를 힐끗거렸다. 막 두 시가 지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바빠서 하루 종일 통화를 못 한다는 거지. 하긴. 곧 전신데 바쁘긴 하겠지. 걔는 나한테 뭘 두 번이나 말했다는 거지.
딴 생각이 반이었던 회의가 끝나고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비척비척 사무실로 돌아갔다. 결국 성공적으로 끝나긴 했지만, 진행하는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정진우의 전시와는 달리 이번 전시는 오픈을 하고 난 뒤에도 무난하게 흘러가 거의 세 달에 가깝게 바싹 긴장하고 있었던 미술관의 전 상주직원이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퇴근 전엔 관례처럼 정진우의 팬 사이트에 들어갔다. 전시가 끝나면 바로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래도 몇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소규모로 단란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나도 가끔 글을 올렸다. 예전 정진우의 행적을 쫓으며 번역해 두었던 독일 잡지의 번역문을 올리거나, 정진우의 거의 모든 문신을 맡아 시술했던 베를린에 거주하는 타투이스트의 정보를 올리곤 했다. 아마 이 공간에서 나만 남자이지 싶은데, 가끔이나마 글을 올릴 때마다 따라오는 반응이 아주 귀여웠다.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하는 나를 두고 승원 형은 간단히 짐을 챙겨 혜연 누나네로 갔다. 우리 집 계약 기간도 이제 이번 년도가 마지막인데, 아마 형은 계약 기간이 끝날 때쯤 장가를 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도 슬슬 독립할 방법을 강구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언제 시간이 나면, 형을 붙잡고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엄마의 꿈을 꾸지 않게 되었으나, 오랜만에 꿈속에 엄마가 나왔다. 자기 생일이라 그런가. 오랜만에 보는 엄마는 머리가 다 빠지고, 이가 삭은 모습이 아닌 가장 예쁠 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실 엄마는 많이 아파서 입술이 다 부르트고, 얼굴이 탱탱 부었을 때도 예쁘긴 했다. 나는 꿈인 걸 알고 있는 상태로 엄마의 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항상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머리카락이 손에 한가득 들어왔다. 무언가 익숙한 감촉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숨이 크게 쉬어졌다. 눈을 번쩍 뜨고 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 십 분 전이었다.
알람을 맞춰놓은 시간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창밖으로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겨울의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인데 뒤늦게 함박눈이 내렸다. 길이 많이 막힐 것 같았다. 괜히 잘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산뜻하게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겼다. 납골당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역시 꽤 막히는 것 같은 길을 살피며 일찍 일어나길 잘했네.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납골당으로 올라가며 숨이 차는 걸 견디느라 몇 번 가던 길을 멈춰야 했다.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요 몇 년 이 정도 언덕을 오른다고 힘이 들었다. 아무래도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미술관 출퇴근 시간이 불규칙적이어서 쉽게 뭔가를 시작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정진우는 따로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온몸에 근육이 잡혀 있었다.
정진우의 몸은, 문신으로 가려져 있기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참 아름다운 몸이었다. 그 몸에 상처와 문신이 가득한 게 새삼 애석했다.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가며 이런저런 정진우의 생각을 하다가, 우리가 이맘때 처음 만났지. 생각했다. 갓 스물하나가 되었던 2월 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봤던 정진우의 첫 인상은 아직까지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까만 후드에, 이어폰을 꼽고 있던 하얀 얼굴. 스무 살의 정진우를 떠올리니, 스물아홉의 정진우가 보고 싶었다.
엄마의 사진을 쓰다듬기도 하고, 꽃을 갈아주기도 하고, 그냥 앉아서 유골함을 보고만 있기도 하며 한 시간 정도를 보냈다. 엄마한테 하는 이야기는 항상 대중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이야기들이 이곳에만 오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오늘의 주제는 역시 정진우였다. 엄마, 내가 언제 여기 다 정리하고 독일로 갈지 몰라. 십오 년이 넘도록 안 갔는데, 거기다 예전에 살던 데랑은 완전 다른 베를린인데, 나 독일어도 거의 다 까먹었는데. 내가 가서 잘 살 수 있을까. 정진우 하나만 보고 거주지를 바꾸는 게 정말 맞는 일일까. 여기서 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꼭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것 같아.
두서없이 속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다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주 올게. 항상 말뿐인 인사를 남기며 소매를 늘려 사진을 쓱쓱 닦았다. 엄마가 예쁘게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건물 안에 있는 매점에 들러 따뜻한 음료수를 하나 샀다. 손이 시려서 따지 않은 병을 손안에 넣고 굴리며 건물을 나섰다. 아침나절부터 내렸던 눈이 꽤 쌓인 채로 얼어 있었다. 넘어지지 않도록 땅바닥을 주시하며 한적한 언덕길을 내려갔다. 중간쯤 갔을까. 움츠리고 있던 허리와 어깨가 아파와 구부리고 있던 몸을 쭉 피고 정면을 응시했다.
“…….”
눈을 비볐다. 날리는 눈발 사이로 짧게 늘어선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던 인영이 슬그머니 일어나는 게 보였다. 독일에 있어야 할 얼굴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내가 시간 맞춰서 잘 와 있었네.”
“…….”
“요한 선배.”
하얀 눈밭에 눈처럼 흰 얼굴이 나를 불렀다. 나는 잠시 싸락눈으로 변해 우리 사이에서 휘날리는 눈 줄기에 시선을 돌렸다가, 너를 확인했다. 주춤, 한 걸음 다가갔다. 네가 나에게 손짓하는 게 뚜렷하게 보였다.
“이리 와요.”
한 걸음, 두 걸음. 조금씩 다가갈수록 네가 커져 갔다. 네가 조금씩 커다래짐과 동시에 얼떨떨하게 붕 뜬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 열 발자국 남짓 남은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잠겨버린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전시는?”
정진우의 전시는 내일 오픈이었다. 내 얼빠진 물음에 정진우가 슬며시 웃었다.
“선배 그때 조느라 내가 하는 얘기 못 들었죠.”
“어?”
“내가 계속 오늘 온다고 얘기했는데, 얘기할 때마다 못 듣고. 심술이 났어요.”
정진우와 나눴던 얘기를 되짚어보다 그제 전화를 끊기 전 뜬금없이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분명히 얘기했어요. 라고 그랬나.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나를 보던 정진우가 민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음먹고 한 얘긴데, 계속 못 들으니까. 좀 놀래 주고 싶기도 했고.”
정진우가 내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내 뒷걸음질에 정진우가 당황한 낯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옅게 한숨을 쉰 정진우가 나직하게 말했다.
“선배랑 떨어져서 베를린에 있으면서, 또 한 번 느꼈어요.”
“…….”
“저는, 이제 선배가 제 곁에 없는 게 무엇보다 무서워요.”
비와 같이 내리는 눈이 얼은 땅을 축축하게 적셨다. 입고 있던 코트가 점점 무거워졌다.
“선배가 필요해요.”
얼굴에 고인 물기를 닦아냈다. 몇 걸음 앞, 깊은 눈이 나를 옭아맸다.
“같이 있어줘요.”
시선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얼마가 지났는지도 모르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던 정진우가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코트 깃 위로 나와 있는 후드 모자가 어깨에 비뚤게 걸쳐졌다.
“선배가, 그랬잖아요.”
“…….”
“돌아오면 놔주지 않을 거라고. 충분히 생각한 뒤에,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가지 않을 용기가 생긴다면, 그때 와도 된다고.”
공항에서 정진우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던 말이 그대로 정진우의 입에서 나왔다. 주춤주춤 움직이던 발을 빠르게 옮겼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만지고 싶었던 얼굴이 코앞에 자리했다.
“나 받아줄 거죠.”
손을 들어 작은 얼굴을 감쌌다. 급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옅게 감긴 눈을 촘촘하게 장식한 속눈썹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흰 눈과 꼭 맞춘 듯 어울리는 얼굴이 다시금 미소 지었다. 색소 옅은 입술이 달싹였다.
“사랑해요.”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섬세한 입술이 내뱉은 사랑고백이 머리를 흔들었다. 정진우는 여기에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물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현실감이 알 수 없는 형태로 나를 잠식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흰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너는, 돌아왔구나.
들고 있던 음료수 병이 바닥에 떨어졌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차가운 뺨을 마저 감쌌다.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변한 건 없었다. 말없이 나를 떠난 스무 살의 정진우가 9년의 시간을 넘어 성숙해진 얼굴로 여기에 서 있었다. 물기가 맺힌 손바닥의 온기가 온몸을 데웠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장 내일 우리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미처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우리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의심과 불안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요소 중 하나였고, 어쩌면 나는 정진우를 만나는 평생 이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뺨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이번에는 돌아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참고 있던 숨을 깊게 내쉬었다. 뻑뻑한 눈을 한 번 더,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 손안에.
정진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