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Yes, I will
-지금 근처예요. 나와 있어요?
“보여요. 길 건너지 말아요. 내가 그쪽으로 갈게.”
이수가 자신을 발견한 시훈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다소 늦은 점심시간이었다. 근처에서 미팅을 마친 이수가 점심 식사를 같이할 수 있냐고 연락을 해 왔다. 길어진 회의가 뜻밖에 도움을 주는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인도는 그 많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신기할 정도로 휑했다. 시훈이 신호를 받아 횡단보도를 건너자 이수가 가을볕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불자 앙상한 나뭇가지는 아랑곳없이 우수수 떨어진 단풍잎들이 대로며 인도에 도톰히 쌓여 갔다.
“많이 기다렸어요?”
“방금 왔어요.”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뒤집어진 시훈의 타이를 이수가 손을 뻗어 올바로 정리했다. 자연스럽게 시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랜만에 친정 왔는데, 먹고 싶은 거 있어요?”
회의만 아니었으면 예약을 해 뒀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회사로 들어가야 할 처지라 멀리 가지는 못하고 주변에서 해결해야 할 참이었다. 인사이트 주변에 직장인을 상대로 하는 식당이 많았다.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맛집도 여럿이고. 잠시 고민한 이수가 길게 뻗은 골목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순두부요.”
“아… 순두부.”
허공과 바닥을 차례로 내려 본 시훈이 과장된 탄식을 내뱉었다. 유구무언이었다. 어쩌면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수 있었을 첫 끼의 추억이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밥 한 숟가락 뜨지 못하고 끝난. 그날 이수에게 반찬 그릇을 밀어 주며…
“이시훈 취향대로 먹고 살 좀 찌우게.”
‘말랐어요. 잘 봐줄 테니까 제 취향도 존중해 줘요.’ 그렇게 말했다. 기억을 떠올린 시훈의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명치를 맞아서 숨을 못 쉬겠네.”
이수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이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가시를 세웠을까. 돌이켜 보면 그때도 이수와 마주친 순간 이상한 치기를 느꼈다. 단순히 불쾌하다 여길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차츰 마음에 스며든 상대를 알아채지 못하고 바이러스로 간주한 바보 같은 기억이었다.
“말하니까 진짜 먹고 싶다. 가요, 빨리.”
싱긋 웃는 이수가 시훈을 재촉했다.
각각의 자리에 초당순두부 두 그릇이 놓였다. 오랜만에 찾은 식당이 반갑기도 하고 더불어 과거로 돌아간 듯 하기도 했다. 이수는 인사이트에 몸담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습관적으로 메일을 확인하고, 시훈을 이 팀장님이라고 부르던 기억에 이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고였다.
숟가락이 간을 하지 않은 순두부를 휘휘 저으며 뜨거운 김을 뺐다. 가장자리에서 뜬 순두부를 한 수저 입에 넣고 뭉개자 담백하고 고소한 풍미가 입맛을 돌게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시훈이 묻는다.
“맛있어요?”
“네.”
“오늘은 많이 먹어요.”
두 사람 모두 웃고 말았다.
볕이 두 사람이 앉은 창을 향해 드리웠다. 하늘은 푸르고 거리의 가로수 잎이 노랗게 바랜 완연한 가을이었다. 씁쓸한 옛 기억을 떨쳐 버린 이수는 문득 자신이 여전히 인사이트에 남아 있었으면 어땠을까 가정을 해 보았다. 업무에 관한 미련이나 아쉬움은 아니었다. 그저 시훈과 같은 회사에 다니고 이렇게 연애를 했더라면…. 놀랍게도 실없는 생각이 뒤따랐다. 사내 연애… 그런 거.
은밀하게 시훈이 마음을 내비치던 탕비실이나 비상계단, 각자의 자리가 보이던 사무실을 떠올린 이수가 저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더워요?”
순두부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는 이수의 속내를 시훈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신 물을 따라 내밀어 주고는 주말의 계획을 물었다.
“주말에 성수동에 있는 카페 갈래요? 아는 사람이 오픈했거든요.”
커피를 즐기는 취향만은 같아 데이트 코스에 카페가 빠지지 않았다. 물고 있던 숟가락을 빼고 이수가 뜻밖에 양해를 구했다.
“미안한데 토요일은 좀 힘들 것 같고… 일요일에 가도 괜찮아요?”
“출근해요?”
“아니요. 집 보러 가야 해서요. 부동산에 말했더니 몇 군데 골라 놨다구.”
이사해야 한다고 했는데 잊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시훈이 입을 열었다.
“아… 이사. 같이 가요, 그럼.”
주말 출근만 아니면 대부분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오전부터 함께 주말을 보내는 일이 일상이었다.
“음… 공인 중개사 차 타고 이동해야 빨라요. 사람 사는 집에 여러 사람 드나드는 것도 실례구요.”
평소답지 않게 시훈의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여성 혼자 살거나 간혹 아이가 있는 집은 이수 혼자 보러 가는 데도 눈치가 보였다. 시훈과 온전히 주말을 보내지 못해 저 역시 아쉽기는 해도 집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래요.”
타당한 이유라 시훈은 딱히 우기거나 토를 달지 못했다. 평일에는 서로가 워낙 바쁜 사람들이라 주말을 고대하는 건 사실이지만 내키지 않는 이유가 단지 그 때문은 아니었다.
홀로 밥을 차리거나 먹는 건 익숙했지만 제집에서 식탁을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은 사람은 이수가 처음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 데이트 겸 식당을 이용해 밥을 먹었고, 서로의 집에서는 가끔 맥주를 기울인 정도였다. 그날, 같은 식탁에서 아침을 먹는 동안 기분이 묘했다. 널따란 식탁에 차린 수 가지 찬에도 내내 분위기가 껄끄러운 본가와 달리 차린 것 없는 식탁인데도 이수 하나로 단란해졌다.
그 때문에 집을 구해야 한다는 이수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1년 정도 마음을 졸였으니 되도록 옆에 있고 싶었다. 그저 항상 같이 있고 싶었다. 일요일 늦은 밤 이수를 오피스텔로 바래다주고 집에 오는 길이 얼마나 적적한지 부러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만약, 월요일 아침에도, 아니, 매일 같이 눈뜰 수 있으면….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답지 않게 톤을 올린 이수가 시훈을 달랬다.
“이러면 어때요? 일요일에 카페 갔다가 백화점에서 소파도 보고 근처에서 밥도 먹고. 전에 직원이 말해 줬는데 성수역 근처에 맛있는 파스타 가게가 있대요.”
그리고 토요일에 너무 늦지 않으면 연락을 주겠노라고. 머뭇대던 시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유를 말하기에는 타이밍을 놓친 것 같고, 서운함을 토로하기에는 유치했다.
“편히 봐요. 무리하지 말고.”
밥 잘 먹고 있는 식사 자리에서 불쑥 꺼낼 주제는 아니었다. 집 계약이 쉽나. 시일을 두고 이수에게 운을 떼 볼 생각이었다. 같은 반지를 끼고 있는 이수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욕심이 자꾸 눈덩이처럼 불었다.
식사를 마치고 큰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이트 사옥 앞에 당도한 이수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올려 봤다. 퇴사할 때만 해도 내 집 같던 회사가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우습게도 카페테리아에서 파는 커피는 여전히 밍밍한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만 들었다.
“택시 잡아 줄게요.”
줄지어 대기 중인 택시로 시훈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책임님!”
저 멀리 자동차 소음을 가른 목소리를 따라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인사이트 사옥 출입문에서 잘생긴 청년 하나가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고우재였다. 코앞에 다다른 고우재는 숨 쉴 틈도 없이 “시훈 님, 안녕하십니까.” 고개를 숙이고 씩씩하게 이수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책임님, 안녕하십니까. 인사이트 기획 1본부 기획 1팀 신입 사원 고우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수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는 역시. 고우재는 고우재였다. 합격자 발표 후 고우재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시훈이 말을 않기에 불합격을 예상한 이수는 소식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울먹이며 전화를 건 고우재는 타 기업 마케팅 부서에도 합격했으나 인사이트를 택하겠다 전했다. 멋진 광고인이 되겠다는 포부와 함께.
“늦었지만 입사 축하해요. 잘 지냈어요?”
“네. 여기서 만나 뵐 줄은 몰랐어요. 시간을 내서 한번 찾아봬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무슨. 적응하느라 바쁘고 정신없잖아요.”
고우재가 시훈과 이수를 번갈아 보며 조심히 물었다.
“업무차 미팅 때문에 오신 거예요?”
“…네. 겸사겸사….”
고우재는 사옥에서 회의가 있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뒤편에 선 시훈의 손이 이수의 허리에 살포시 닿았다 떨어졌다.
“담배 한 대 태우고 올게요.”
맞은편에 선 고우재가 시훈이 이동하는 쪽으로 간신히 눈동자를 굴렸다. 분명 멀리서 봤을 때는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정이수 책임님께 인사를 한 순간부터 시훈 님 미간에 골이 패었다. 지은 죄가 있고, 아직 갚을 날이 많아 슬픈 고우재였다. 사옥 근처의 흡연 부스 안에서 담배를 빼 무는 시훈의 시선을 느끼며 고우재가 고장 난 로봇처럼 이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은 어때요, 재밌어요?”
“네, 엄청요. 힘든데 재밌어요.”
“좋아 보여요.”
“신기한 게 전에 인턴 할 때랑은 다른 회사 같아요. 순정 님, 민주 님. 타 팀이라 같이 일은 못 해도 다들 잘 챙겨 주시고 격려도 많이 해 주세요.”
대리, 팀장, 본부장. 그런 직함 대신 이름 뒤에 붙인 호칭이 이수는 낯설기만 한데 고우재는 완벽히 적응을 마친 것 같다. 어려워하는 시훈에게도 ‘시훈 님’이라는 걸 보면.
“재미있는 소식은 없어요?”
음… 골똘히 생각에 잠긴 고우재가 이내 작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멀리 흡연 부스를 돌아본 뒤 부리나케 이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짙게 선팅된 흡연 부스 안에 레이저 포인트가 켜져 있는 줄 알았다.
“화제는 있죠.”
살벌한 시훈을 곁눈질하다 말고 목소리를 낮춘 고우재의 눈썹이 들썩였다.
“시훈 님이요. 만나는 분 있는 거 알고 계셨어요?”
“…네?”
두 분 가까우셔서 아시는 줄 알았는데… 모르셨구나. 고우재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수가 재빨리 웃으며 당황한 낯을 숨겼다.
“알아요. 근데… 어떻게 알아요, 그걸?”
고우재가 눈을 반짝였다.
“얼마 전에 팀 회식이었거든요. 시훈님이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계시더라구요. 딱 봐도 네 번째 손가락에 커플링이라 다들 눈치만 보다가 동윤 님이 못 참고 물어보셨어요.”
누군가 신 대리의 옆구리를 찔렀던 것 같다. 테이블 위에서 시훈을 제외하고 오가는 눈빛들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신 대리가 총대를 멨다.
‘와아… 반지. 네 번째…. 혹시 누구….’
띄엄띄엄. 딱 잘라 무시하기 좋도록 어색하고 이상한 질문에 다 망했다 생각할 무렵, 시훈이 그동안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었더랬다.
‘만나요, 누구.’
탄성이 터졌다.
“묻는 족족 자랑 엄청 하시던데요? 예쁘고, 키도 크고, 능력도 좋고, 성격 좋고. 게다가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배울 점이 많대요.”
“…아. 네.”
이수가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훈에게 들릴 리 없건만 고우재가 한층 목소리를 낮췄다.
“결혼하실 거 같아요. 비혼주의자 같으신데 의외예요. 그렇죠?”
식은땀이 흘렀다. 벨트 아래로 손을 내린 이수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슬그머니 빼냈다. 고우재도 시훈의 반지를 본 모양인데 혹시나 오해를 살까 괜스레 이수의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사이 담배를 다 피운 시훈이 저 멀리서 되돌아왔다. 당연하게 이수의 곁에 선 시훈이 고우재를 바라봤다.
“그런데 우재 님은 왜 나왔어요?”
악의는 없지만 의도는 분명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지 이수 가까이 몸을 붙여 속닥이는 꼴에 시훈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인사이트를 그만둔 후 팀원들 모두 이수를 한층 편하게 대했지만, 역시 고우재는 남들보다 한 발 더 나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주차 문제 때문에 로비에서 클라이언트 배웅해 드렸습니다.”
씩씩한 고우재는 의도를 가뿐히 뛰어넘어 정직하게 사유를 설명한다. 낄 때 끼고 빠질 때는 빠지자. 한동안 고우재가 마음에 새겨 두었을 문장이 어느덧 마모된 모양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선을 그어 줘야 하나 생각하던 시훈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애새끼한테 뭐 하는 짓이지….
“그래요, 일 봤으면 올라가요, 그럼. 책임님도 들어가셔야 해서.”
시훈이 머리를 쓸어 올리자 가을볕에 반사된 커플링이 유난히 반짝였다. 저도 모르게 따라간 이수의 시선이 이내 인사를 전한 고우재에게 돌아갔다.
“넵. 책임님,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출입문으로 뛰어가던 고우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뒤를 돌아봤다. 이수를 향해 엄지와 새끼손가락으로 전화 모양을 만들어 귀에 붙였다. ‘전화드릴게요.’ 입 모양이 선명했다. 아무리 긍정적인 고우재라고 해도 사고를 친 회사에 들어오기가 쉬웠을까. 기업 마케팅 부서가 아닌 대행사에 입사한 선택이 고마웠다. 좋은 광고인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켜 준 것 같아서. 게다가 시훈의 앞에서 어깨가 굽어 있던 인턴 시절과 달리 기죽지 않는 모습에 안심이 됐다.
“…….”
곁을 돌아보자 고우재의 등장에 예각을 이룬 시훈의 눈썹이 여전했다. 과거 고우재를 방패 삼아 벽을 친 일은 오해를 풀었지만 서로 상성이 안 맞는 부류인 것에 대해서는 이수도 도리가 없었다. 이수가 시계를 핑계 삼아 시훈의 손목을 끌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네….”
태연하게 고개를 틀어 시간을 확인한 이수는 눈을 들어 시훈을 올려 봤다.
“…….”
손목을 잡고 살살 흔드는 모습에 날선 눈썹이 완만해졌다. 어느새 비죽 솟아난 미소가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라 시훈은 고개를 숙여 민망함을 가렸다. 도무지 당해 낼 수가 없다. 이수는 쓸데없는 감정이 소비되지 않도록 자신을 달랜다. 내면까지 성숙하고 세련된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한참 어린애에게 더 어리고 유치하게 굴었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시훈의 몫이었다.
“택시 타요. 출발하는 거 보고 가게.”
승차장에서 대기 중인 택시를 타기 전 두 사람이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봤다. 하루 이틀만 지나면 볼 사이에 왜 이렇게 애가 타는지 모르겠다. 시훈의 코트에 이수의 손이 닿았다. 깃을 잡아 가볍게 여며 주는 손길에는 연인을 향한 애틋함이 어려 있었다.
“갈게요, 그럼.”
뒷문을 닫고 인도로 올라온 시훈은 이수를 태운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벌써 보고 싶어 큰일이었다.
* * *
“나머지는 월요일 오전에 정리하죠. 오늘 고생했어요.”
“책임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금요일 밤, 퇴근 시간쯤 해외에서 넘어온 자료를 보느라 조유진 대리와 늦은 퇴근을 준비했다. 자리를 정리하던 조 대리가 달력을 넘겨 보고는 물었다.
“아, 그리고 식사 자리에 외주 제작사도 같이 부르시는 거죠?”
“촬영 때 워낙 고생이 많아서요. 후반 작업도 그렇고. 인사이트 쪽에 전달하시면 돼요. 연락 부탁한다고.”
장기 프로젝트로 기획, 제작 중인 정산 그룹의 광고가 지난주 온 에어 됐다. 고생한 만큼 내외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연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에 구원주 실장의 주도로 인사이트를 비롯한 제작사를 한데 불러 모아 조만간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금요일인데 너무 늦었네요. 남편 기다리겠다.”
결혼한 지 석 달 된 조 대리의 자리에는 얼마 전 남편이 회사로 보낸 꽃이 화병에 꽂혀 있었다.
“글쎄요. 아마 혼자 축구 보면서 내 세상이다- 그럴걸요.”
입술을 삐쭉인 조 대리가 화병에 꽂힌 꽃다발을 노려보며 불쑥 푸념을 쏟아 냈다.
“진짜… 이상해요. 저희는 연애할 때 한 번도 안 싸웠거든요? 근데 결혼하고 나서 엄청 싸워요.”
이 꽃도 싸우고 나서 보낸 거예요. 미안하다고. 조 대리가 조심히 시든 꽃잎 한 장을 떼어 냈다.
“…아.”
평소 붙임성 좋고 시원시원한 성격인 조 대리지만 이제 신혼 3개월 차인 부부의 부부 싸움 전말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발이 잡힌 이수 앞으로 조 대리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하다못해 연애할 때는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지, 양말을 뒤집어 벗어 놓는지, 설거지를 몰아서 하는지 그런 건 몰랐거든요. 알았다고 해도 안 보였거나. 근데 같이 사니까 매일매일 눈에 보여요. 게다가 싸우면 냉각기가 없어요. 둘이 한집 살면서 계속 붙어 있으니까요. 회사에서 종일 일하고 들어가면 쉬고 싶은데 원흉을 또 만나니…. 그러면 그때부터 악순환이 계에속, 계에에에속되는 거죠.”
“…….”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맞장구를 쳐 주자니 미혼인 데다 동거 경험도 없는 이수가 공감해 주기 쉽지 않은 주제였다. 그렇다고 위로가 필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멀뚱히 고개만 끄덕이는 이수를 눈치채고 조 대리는 민망한지 콧잔등을 찌푸렸다.
“제가 괜한 말 했죠? 만나시는 분 있으신데… 이런 부정적인 말만.”
시선이 이수의 커플링에 닿았다. 잠시 머뭇한 이수가 고개를 저으며 빙긋 웃었다.
“그냥 우리는… 서로 담백한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선.”
가끔 시훈을 만나는 지금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꿈이 아닐까 싶게. 그래서 자꾸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같은 동화 같은 장밋빛 미래만 그리게 된다.
조 대리에게서 슬쩍 등을 돌린 이수가 책상을 정리하는 체하며 멋쩍은 웃음을 삼켰다.
저에 대한 시훈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보이지 않는 바운더리를 가졌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애정과 별개로 사는 공간이나 그가 소유한 물건들, 라이프스타일을 보면 확고한 취향이 있었다. 그게 타협되거나 저로 인해 희석되리라는 상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수에게도 살아온 인생에 비례한 나름의 선이 있었다. 아마도 조 대리가 말한 건 그런 게 아닐까.
이수는 살며시 아랫입술을 깨물고 네 번째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를 내려 봤다. 시훈이 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던 그날, 이수는 스스로도 물질로 나누어 갖는 징표가 이렇듯 크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이 정도만으로도 이수에게는 큰 이벤트였다. 그런데 만약 시훈과 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앞서갔다.
아주 상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주말 내내 붙어 있을 때면 가끔 그런 가정을 해 봤다. 시훈과 같은 집에 살고, 더 깊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상상은 요즘 들어 마음 한구석에서 커지기도 하고 다시 작아지기도 하는 욕심이었다. 그럴 때마다 이수는 외로운 어린 시절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괜한 동경일 뿐이라고. 결국 명징하게 가족이라는 단어를 되새겨 본 이수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제 풀에 놀란 이수는 늘 그렇듯 제게는 넓은 도량을 베풀지 못했다. 의식은 불현듯 인사이트 사옥 앞에서 고우재와 마주친 상황을 떠올리는 데까지 흘렀다.
“…….”
제 상처는 치유됐다지만 저로 말미암아 시훈이 곤란에 빠지지는 않아야 했다. 괜한 말이 돈다든지, 혹은 앞길에 저해가 된다든지. 아찔한 순간을 되새긴 이수는 두 눈을 꼭 감고는 쓸데없는 생각을 짓이겼다. 만에 하나 모종의 이유로 시훈과 멀어지는 일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그를 사랑하고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면 역시 욕심을 덜어 내야 하지 않을까.
“저희 둘 다 일찍 독립해서 그런지 꽤 혼자 살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싸우나 싶기도 하고. 책임님도 독립하신 지 오래되셨죠?”
다시 조 대리를 마주한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주저하는 이유를 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저도 혼자 사는 게 익숙해요.”
망설임은 어디 가고 순식간에 낯을 바꾼 이수가 가뿐한 대답을 내뱉었다. 어쩐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난 이수에게 조 대리가 먼저 가시라 인사를 전한다. 업무가 아닌 잡무가 남았단다.
“그럼, 월요일에 봐요. 좋은 주말 보내요.”
“네, 책임님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
출입문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내일 공인 중개사와 잡은 약속 시각을 확인했다. 최대한 빨리빨리 본다고 해도 토요일에 시훈을 만날 수 있을지는 내일이 돼 봐야 알 것 같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을 때 조 대리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사무실을 들어가는 조 대리의 손에는 깨끗하게 물갈이를 한 화병이 들린 채였다. 조 대리는 시든 꽃잎을 떼어 내고 가지가 흩어지지 않게 모양을 잡아 놓고 있었다.
조금 전 사무실에서 나눈 대화를 상기한 이수는 어릿한 마음 한구석을 애써 무시해 본다. 오늘 조 대리와 나눈 대화 덕분에 기준이 생겼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불편하지 않게. 지금도 시훈의 곁에서 충분히 행복했다. 이게 이수의 결론이었다. 옳은 답을 했노라고 애써 수긍한 이수가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어제 새벽부터 내린 비가 아침까지 이어졌다. 이수가 보내 준 장소 앞에 차를 대기 중인 시훈은 시간을 확인하고 손끝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곧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수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많이 기다렸어요?”
우산을 접는 사이 내리는 비에 머리와 어깨가 금세 젖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비가 거세질 양상이었다.
“얼마 안 됐어요. 뛰었어요?”
“요 앞에서 조금요.”
시훈이 이수의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미간을 좁혔다.
“왜 뛰어와요. 늦으면 기다리면 되는데.”
“…그냥, 시간이 아까워서.”
단정한 외모는 언제 봐도 빛을 발하지만 시훈은 지금처럼 눈을 접어 웃는 얼굴을 제일 좋아했다. 이내 시훈이 몸을 기울여 이수가 앉은 시트 뒤로 손을 뻗었다. 몸을 기울인 두 사람은 살가운 인사처럼 입술만 닿는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물방울을 보고 시훈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건넸다.
“집은 다 봤어요?”
“계획했던 곳은 다 봤어요. 다 이 근처였거든요.”
젖은 얼굴을 눌러 닦는 동안 히터 방향이 이수 쪽으로 고정됐다. 곧 차가 도로를 달렸다. 늦은 가을장마인지 전방 유리 너머로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비 오는데 고생 많았네요.”
“마지막 장마인가 봐요. 나뭇잎이 다 떨어졌어.”
이수가 발치에 접어 놓은 우산을 정리했다. 이동이 번거롭기는 했지만 가을도 다 지나는 마당에 더 미루기가 힘들었다. 전세가 씨가 말랐다며 부동산에서 어찌나 호들갑인지 마음에 드는 집을 계약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배경이 필터를 씌운 그림처럼 뭉개져 보였다.
“마음에 드는 집은… 있었어요?”
조만간 이수의 의중을 떠볼 생각이라 별거 아닌 질문이 늘어졌다. 이수의 방향으로 틀어 놓은 히터에 젖은 머리카락과 티셔츠는 채 10분도 안 돼 바짝 말랐다. 마른 앞머리를 정리한 이수가 오늘 본 집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음… 한 곳은 같은 오피스텔 저층이고, 한 군데는 연식이 좀 오래된 아파트랑 또 다른 곳은 신축 빌라하고 구축 빌라였어요. 아파트는 수리도 필요하고 옵션이 없어서 거긴 빼고, 나머지 셋은 나쁘지 않았어요.”
이수는 핸드폰을 열어 ‘방2화장실1/옵션o/이사날짜 협의가능/보증금 …’ 등등 집을 둘러보며 메모해 놓은 조건을 다시 한번 살펴봤다.
“…조금 더 봐요. 한두 번 본다고 되나.”
“조만간 출장이 잡혀서 그 전에 계약해 둬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흠. 괜스레 목소리를 가다듬은 시훈은 손끝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타이밍을 엿보는 중이었다. 당황할까, 아니면 흔쾌히 허락할까. 이수와 보내는 주말은 당연한 일상이 됐다.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지 온전히 제 품에 있는 이수가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시훈은 매번 야속했다.
시훈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집 계약에 관해 대화를 나눌 때마다 이수에게 성실한 답을 주기가 어려웠다.
“같은 동네에서 구하는 거예요?”
“네.”
이수가 찍힌 사진을 차례로 넘겨 보며 답을 하는 사이 시훈의 입이 말랐다.
“그럼 몇 군데 더 봐요. 당장 나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매매도 아닌데요, 뭘. 회사하고 가깝고 불편하지만 않으면 돼요, 나는.”
넌지시 던진 시훈의 권유에도 이수는 웃으며 무신경한 답을 한다. 이러다가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집들이 선물을 골라야 하는 건 아닐까. 시훈은 문득 초조해졌다.
층별로 표시된 안내를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갔다. 백화점은 인사이트 시절 일 때문에 방문한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생활이라 쓰인 층에 도착하자마자 이수는 잠시 그 앞에서 머뭇댔다. 시훈이 옆에 있어도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일전에도 시훈을 따라 몇몇 쇼룸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백화점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어디를 봐도 신혼부부로 보이는 커플들이 눈이 닿는 곳곳마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매장을 돌아다녔다. 시훈이 앞서 걷다 말고 이수를 돌아봤다.
“가요.”
가구 브랜드를 찾기 전에 거쳐 가야 할 관문처럼 시훈은 자연스럽게 전자 기기 매장에 발을 들였다. 멀뚱멀뚱 서 있는 이수의 등에 방향을 일러 주듯 시훈의 손이 닿았다. 친절하게 응대하는 직원을 따라간 곳은 최신식 텔레비전이 전시된 곳이었다. 인치별로 해상도나 기능 등을 꼼꼼히 따져 물은 시훈은 문득 이수에게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는지 물었다. 생각지 못한 질문에 이수는 시훈의 광고주인 L사 제품을 떠올렸다.
“글쎄요, L*?”
“외조 좋네요.”
남사스럽기가 그지없었다. 그것과 별개로 말려 올라간 시훈의 입꼬리에 이수 역시 그저 웃고 말았다. 얼결에 전달받은 책자를 손에 말아 쥐고 반보 뒤에서 시훈을 따라 걷는 모습은 매장 내 여느 커플들과 다르지 않았다.
디귿 자형으로 돌아 나오는 길에는 냉장고가 비치돼 있었다.
“이 제품은 올해 나온 신제품이구요, 아시겠지만 고객님이 원하시는 컬러로 조합이 가능합니다. 기능적인 면에서도 에너지 효율 등급이 …”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제법 진지하게 냉장고를 살피는 시훈을 이수는 잠자코 지켜봤다. 집에 있는 냉장고를 매번 외롭게 만드는 자신과 달리 시훈의 냉장고는 주인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는 쪽이었다.
“냉장고 바꿀 거예요? 집에 있는 거 작아서?”
“…그냥요.”
가전제품 매장을 나오며 묻자 시훈은 어깨를 들썩이기만 할 뿐이다. 착각하는 건가. 커피를 마실 때부터 시훈은 종종 넋을 빼고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평소처럼 다정하고 배려하는 모습은 같은데 겉도는 시선이 어딘가 할 말을 감추는 것 같았다.
당장 사람이 들어와 살아도 될 만큼 스타일링된 가구 매장에서 시훈은 조금 더 신중했다. 디스플레이된 소파가 가죽인지 패브릭인지 묻고 일일이 이수를 앉혀 봤다. 인터넷에서 의자를 살 때 후기란조차 꼼꼼히 읽지 않고 덜컥 사 버린 과거와 달리 그 덕분에 이수 역시 신중해졌다.
지금 사용하는 소파는 스프링이 수명을 다해 앉을 때마다 쿠션이 꺼졌다. 역사가 담긴 소파라 창피함을 무릅쓰고 세탁으로 연명해 왔지만 이제는 떠나보낼 때가 됐다.
“요즘은 패브릭 원단이 신소재로 개발이 돼서 스크래치나 오염에도 강하고 생활 방수도 가능해요.”
“생활 방수….”
중얼거린 시훈에게 의도가 있지는 않았을 테다. 다만 얼마 전 시훈의 집에서 거하게 치른 소파 위의 정사를 떠올리는 바람에 이수의 귀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자리를 옮겨 가며 매장 내의 소파에 앉았을 때도 이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시훈이 손을 끌어 착석감을 묻는 소파, 냉장고, 텔레비전이 죄다 큰 평수에 어울리는 제품이라는 사실을.
“침대도 그대로 가져갈 거예요?”
어쩌다 침대까지 왔는지. 이수가 대답하기 전 때마침 직원이 다가와 사이즈며 디자인, 기능 등을 설명했다. 그저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수를 보고 시훈은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드리겠다며 직원을 정중하게 돌려보냈다.
그럼 편하게 둘러보세요. 인사를 한 직원이 멀어지자 이수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쇼핑은 체질이 아니었다.
곧 전시된 침대에 걸터앉은 시훈이 이수의 손목을 끌었다. 권하는 상대를 따라 앉기는 했다만 매트리스 타입이나 사이즈에 크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곧 곁에 앉은 이수가 애꿎은 시트만 문지르는 모습에 시훈이 먼저 몸을 뉘었다. 매트리스에 한 팔을 짚고 누운 시훈을 돌아보자 씨익 웃는 남자가 반쯤 몸을 일으켰다.
“누워 볼래요? 앉아서는 잘 모르잖아.”
“아…!”
잠시 망설이는 이수의 어깨를 잡아당기자 중심을 잃은 몸이 순식간에 뒤로 넘어갔다. 포근한 침대에 등이 닿았다. 스프링처럼 바로 일어나려던 마음과 달리 몸이 쑥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남자 둘이 이러는 거 부끄럽지 않나…. 기우는 어디 가고 솔직히 편했다. 점심 이후로 집을 보고 시훈을 만나고, 평소에 오지 않는 백화점에 들러 둘러보고 따져 보는 일은 체력뿐 아니라 정신적인 소모가 컸다. 나름대로 짜 본 데이트 코스였는데 이번에는 망한 것 같다. 시훈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어느새 푹신한 매트리스에 몸을 맡긴 이수가 멍하니 백화점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에 집어 둔 소파를 떠올렸다.
“아까 그 소파가 마음에 들어요. 아이보리색 엄청 푹신했던 거. 근데 집에는 좀 클 거 같은데….”
“…….”
“크겠죠? 물어봐야겠다. 2, 3인용도 있는지.”
“…….”
말이 없는 시훈을 돌아봤다. 언제부터였는지 한참을 보고 있었나 보다.
“…왜요?”
소란스러운 백화점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말없이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훈의 눈빛은 진지하기도,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하다. 커피숍에서부터 따라온 불안함은 괜한 착각이 아니었다. 무슨 일일까. 그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것도 이상했다.
때마침 이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미안, 나 전화 좀….”
액정 화면을 확인한 이수가 훌쩍 몸을 일으키고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네. 처음에 본 오피스텔이요. 제가 지금 사는 곳. 아, 그래요? 잘됐네요. 네. 주말로 조정해 주시면 이사 날짜는 큰 문제 없어요. 제가 내일 저녁에 도장 들고 부동산으로 갈게요.”
이수를 따라 침대에 걸터앉은 시훈이 통화 내용을 짐작했다. 현재 사는 오피스텔의 공실이 마음에 들었고, 이사 날짜는 주말만 아니면 상관이 없으니 내일 당장 계약을 하겠다. 요지는 그랬다. 시훈이 아랫입술을 혀로 훔쳤다. 걱정대로 무던하고 때때로 무신경한 이수는 집을 구하는 일도 일사천리였다.
“이수야.”
통화를 마친 이수가 전화번호부를 스크롤하고 있다. 이사 철이라 빨리 계약하지 않으면 집이 나갈 거라고 부동산에서 으레 그렇게 말했을 테다.
“집주인이….”
“…….”
“…아, 여기 있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뒤쪽에서 들려왔다.
“같이 살자.”
“…….”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손이 뚝 멈췄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이수의 몸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주말 지나면 보내는 거… 싫어, 나는.”
무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사정을 살펴 이수를 의중을 물으려던 계획은 초조함 앞에 무너졌다.
“…너무, 갑자기….”
핸드폰을 뒤집어 놓은 이수가 자세 그대로 읊조렸다. 시훈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시선은 바닥 어딘가를 향한 채였다.
“알아요, 아는데….”
“…….”
매장은 막바지 주말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가운데 시훈과 이수 두 사람의 주변만 정적이 흘렀다. 시훈에게 상처나 실망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무슨 답을 해야 할까. 혼란스럽기만 했다.
욕심을 덜어 낸 마음에 덜컥 걱정이 자리를 차지했다. 함께 살면서 다투기 시작했다는 조 대리의 푸념도 지레 겁을 먹은 이수도 한구석에 자리를 틀고 있었다. 스스로 결론지은 사안이 단 하루 사이에 헤집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엊그제 다짐한 결심처럼 나는 너무 행복하다고, 우리 지금도 너무 좋지 않으냐고. 나는 이걸로도 충분하다고. 그런 말을 줄줄이 하고 싶은데…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 곁으로 매장 직원이 다가와 폐장 시간을 안내할 때까지도 막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
“…가요, 오늘은 소파 못 사겠다.”
슬쩍 뒤를 돌아본 이수가 애써 입매를 끌어 올렸다. 어설픈 미소 아래 덕지덕지 묻어난 난감함은 지우지 못한 채였다. 이수가 뻣뻣한 몸을 일으켜 매장을 나섰다. 대화는 없었고, 설렘은 고민으로 뒤바뀌었다.
뒤죽박죽 복잡한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백화점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무렵 뒤에서 다가온 손이 조심스레 이수의 팔꿈치를 붙들었다.
“뭐가 이렇게 급해요. 우리 백화점 탈출하는 거 아니잖아.”
시훈은 조금 전 동거를 제안한 부분만 잘라 낸 사람처럼 굴었다.
“…시훈 씨, 나는….”
입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 말문이 막혔다. 거기서 당황하지나 말걸. 불에 덴 사람처럼 서툴렀다. 그저 조금 더 생각해 볼 문제라고 하면 될 것을. 이수의 흔들리는 동공이 맥을 못 추었다. 이내 팔꿈치를 놓은 손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슬쩍 몸을 물렸다. 고작 한 걸음. 떨어진 거리는 그 정도뿐인데 갑자기 서로가 외떨어진 곳에 서 있는 양 멀게 느껴졌다.
“배고프다. 파스타 가게가 성수역 쪽이라고 했죠?”
백화점에서 나와 저녁을 먹는 동안 동거나 이사, 하다못해 소파에 관한 이야기조차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나눈 대화 대부분은 두 사람과 일절 연관 없는 주변인들과 함께 본 전시회나 영화, 지긋지긋한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얕고 무난한 주제에 대화는 묘하게 이어지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집까지 바래다준 시훈은 오피스텔 앞에 차를 세우고 평소처럼 잘 자고, 내일 출근도 잘하라는 말을 전했다. 이수 역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피스텔로 올라온 이수는 당연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시훈은 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고개를 떨군 채 제자리를 느릿느릿 걷는 그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차마 전화를 걸지 못한 이수 역시 그러했다.
전화번호를 화면에 띄워 놓고 망설이기를 몇 번, 울리는 핸드폰 액정 화면에 연인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응.”
전화를 받자 창 너머의 시훈이 오피스텔을 올려 봤다.
-왜 전화 안 해요? 거기 서서 아직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짧은 웃음소리 안에 어색한 간극을 메워 보려는 티가 났다.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그가 차에 기대어 섰다.
“…….”
두 사람답지 않은 어색한 통화였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시훈이 털어 내듯 가볍게 운을 뗐다. 얼굴을 마주 보며 말하기보다 지금은 이편이 훨씬 수월했다.
-말 괜히 꺼냈나 봐. 부담스럽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사해야 한다고 해서… 어쩌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
“아니에요. 부담스럽고 그런 것보다… 그냥, 동거는… 맞춰 가야 할 게 많다고 하니까.”
시원찮은 대답이었다. 시훈의 불안을 잠재우지도 못하고, 거절의 이유라기에도 어딘가 옹색한 변명. 이수가 허공에 눈을 굴렸다.
-……그건 그렇지.
잠시간 도로를 지나는 차 소리만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근데, 나는 이미 그러고 있는데….
시훈이 씁쓸함이 밴 웃음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훌쩍 차체로 몸을 돌린 남자의 얼굴을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이수의 마음 한구석이 우지끈 무너졌다.
“…시훈 씨.”
-늦었는데 이만 쉬어요. 이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해요.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였지만 시훈은 어쩔 수 없는 조바심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다음에는 꼭 전화해 줘. 안 해 주니까 사소한 걸로 마음 졸이게 되네.
겸연쩍게 웃고 있을 표정이 한눈에 그려졌다.
“응… 미안.”
-이만 갈게요.
시훈은 오피스텔을 올려 보지 않았다. 남자의 차가 떠날 때까지 이수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 *
“책임님.”
“…….”
“책임님.”
“…네?”
멍하니 모니터 한 귀퉁이를 보고 있던 이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조유진 대리가 놀란 얼굴로 이수를 들여다봤다.
“어디 안 좋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세요.”
“아니에요. 어제 잠을 조금 설쳐서.”
냉큼 고개를 저은 이수는 용무부터 물었다.
“오늘 식사요. 장소하고 시간 인사이트 쪽에 다시 한번 고지했고, 구원주 실장님께도 전달드렸습니다.”
“네. 고생했어요.”
조 대리가 돌아간 뒤 이수는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눌렀다. 며칠째 한쪽 눈에 진 쌍꺼풀이 없어지지를 않았다. 출장을 다녀오기는 했으나 무리할 만한 일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침대에만 누우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불편하고 무언가 어긋난 느낌이 수면을 방해했다.
시훈과는 변함없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역시 바쁜 일정 중에도 꼬박꼬박 아침저녁으로 이수의 안부를 물었다. 이수는 괜찮다고 잘 지낸다고 답을 했지만 사실은 괜찮지만은 않았다. 겉으로 평온해 보일 뿐 수면 아래의 발은 허우적대며 방향조차 잡지 못한 채였다.
관계자 열댓 명이 모인 한정식 테이블 위에 코스별로 음식이 차려졌다.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며 초대된 인원이 자리에 앉았을 때, 바깥에서 구원주 실장과 간단한 대화를 나눈 시훈도 룸 안에 발을 들였다. 찾지 않아도 한눈에 보이는 이수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시훈의 시선이 선을 그린 이수의 한쪽 쌍꺼풀을 더듬었다. 이어 두 사람 모두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를 이어 갔다.
열흘 전,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시훈은 신제품 론칭 행사가 열린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고, 이수 역시 출장길에 올랐다. 그리고 다가온 목요일, 공석에서 겨우 눈을 맞췄다.
상석에서 구원주 실장과 마주 앉은 시훈의 대각선 위치에 이수가 있었다. 식사를 함께하는 인원과 대부분 구면인 이수는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구 실장의 감사 인사로 시작한 식사 자리는 분위기가 좋았다. 그룹 내부의 평가도 긍정적이었고, 무엇보다 리서치로 분석한 결과가 매우 뚜렷한 성과를 보였다. 회의실에서 머리를 싸맨 시간은 뒤로하고 술잔과 함께 덕담이 오갔다. 수고하셨고, 앞으로도 잘해 보자는 격려도 이어졌다. 편하게 풀어진 분위기 덕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식사 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시훈과 대화를 주고받던 구 실장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아무리 편한 자리라지만 갑은 갑이고 광고주는 광고주였다. 구 실장이 나간 뒤 작게 한숨을 내쉬던 시훈과 이수의 눈이 언뜻 마주쳤다. 지난 열흘간 평소처럼 전화를 하고 바쁜 서로의 안부를 물었지만 딱 부러지게 정리하지 못한 문제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 있었다.
“…….”
“정 책임님.”
시선을 떨군 이수를 부른 이는 후반 작업을 담당하는 김 감독이었다. 이수와는 인사이트 재직 시절 여러 번 작업한 이력이 있는 이였다.
“오늘 저희까지 불러 주시고, 고맙습니다.”
캡 모자를 눌러쓴 그가 호방한 미소와 함께 술병을 기울였다.
“감독님도 고생하시는데 당연히 와 주셔야죠.”
잔을 받은 이수 역시 술병을 돌려 김 감독의 잔을 채웠다. 광고주가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챙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수가 대행사에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이 만든 배려였다. 잔을 받은 김 감독이 모자 뒤쪽을 당기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이직하신 줄 몰랐어요. 어쩐지 저희 편집실에도 안 오시고… 괜히 서운하더라구요.”
“제작실 통해서 들으신 줄 알았어요.”
“아… 팀장님이 전해 주시긴 했는데….”
시훈은 말끝을 흐리는 김 감독을 흘깃 바라봤다. 이수를 향한 김 감독의 사심을 모를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자리에 앉으며 이수의 위치를 확인한 것도, 오버스럽게 악수를 하는 모양새나 옆자리에 앉은 이수를 흘끔흘끔 살피는 모습도 점점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일전에 이수의 안부를 물으며 안절부절못하던 기억을 떠올린 시훈이 볼 안으로 혀를 굴렸다.
“책임님, 연락처… 그대로시죠?”
“네.”
“근처 지나시면 연락 주세요. 커피 사 드릴게요. 편집실 오시면 회사 앞에서 커피 드셨잖아요.”
“아… 기억나요.”
젓가락을 내려놓은 시훈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훔쳤다. 이내 김 감독과 술잔을 맞춘 이수가 막 잔을 비웠을 때였다.
“정이수 책임님.”
낮은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네, 본부장님.”
익숙한 이름 대신 직함이 불리고 상대 역시 그리 불렀다. 시훈이 불쑥 부른 이유를 짐작도 못 한 이수는 공사를 구분해 지켜 온 익숙한 행동이 오늘따라 무정하게 느껴졌다. 저는 시훈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면서.
“제 잔도 한 잔 받으세요.”
웃고는 있는데 눈썹이 묘하게 비뚤어져 있다. 심기가 언짢을 때마다 각을 이루는 눈썹이었다. 이수가 빈 잔을 내밀었다.
“…….”
미미하지만 술병의 주둥이가 멈칫하다 다시 잔에 기울어졌다. 술을 따르는 시훈의 시선이 이수의 잔을, 아니,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향했을 때 이수의 눈이 당황하여 빠르게 깜빡였다.
“…….”
끝까지 잔을 채운 시훈이 술병을 내려놓았다. 조금 전만 해도 날카로이 올라가 있던 눈썹은 완만해졌고, 차분한 얼굴로 시훈은 테이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 참석하기 전 이수는 고민했다. 어쩔 수 없이 같은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인사이트 기획팀에서도 시훈을 따라 몇몇이 한 테이블에 앉을 테고, 브랜드전략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군가 알아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처 시훈에게 곤란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노라고 미리 말하지 못했다. 백화점에서 시훈이 동거를 제안한 이후 둘 사이에 미묘한 거리감이 생겼다. 상대방의 애정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자책과 자괴를 단번에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소란스러운 자리에서 딱 두 사람만 입을 다물었다.
“두 분이 같이 일하시다가 이렇게 뵈니까 또 새롭네요. 본부장님.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게요.”
상황을 모르는 김 감독이 테이블을 가로질러 술병을 기울였다. 굳게 입을 다문 시훈이 술잔을 뒤로 뺐다.
“운전을 해야 해서요.”
싸늘한 답변에 김 감독이 머쓱해하며 잔을 물렸다.
“…그러시구나. 그럼 책임님.”
이수가 쥐고 있는 소주잔에 김 감독이 제 잔을 붙였을 뿐 건배라고 하기에는 민망했다. 시훈이 그 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정식집 뒤편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만한 골목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앞뒤로 주차된 차 뒤편에서 시훈은 담배를 피웠다. 가로등 불빛 아래 짙은 그림자가 시훈의 이목구비를 따라 드리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 나온 이수를 눈치채고 시훈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는 손을 뺐다.
“왜 나왔어요?”
“…….”
눈썹에 날을 세우지도, 인상을 쓰지도 않은 시훈이 다정한 목소리로 이수를 타박했다. 그가 내뱉은 담배 연기가 차가운 밤공기에 흩어졌다. 이수의 시선은 시훈의 구두 끝을 향해 있었다. 짐짓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 시훈은 말을 아꼈다. 한번은 어물쩍 넘겼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수습해도 이미 쏟아 버린 물처럼 이수에게 제 감정을 고스란히 보인 뒤였다. 마른침을 삼킨 이수가 가만히 입을 뗐다.
“반지… 한자리에 있으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잠깐 빼 뒀어요.”
어쩔 수 없이 한 테이블에 묶여 있어야 할 형편에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 상황을 구태여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시훈은 입술을 맞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인지 아니면 납득을 위한 행동인지 스스로도 아리송했다.
“그래요.”
“미안해요. 기분… 많이 상했죠?”
“아니. 이해해.”
“…….”
엷은 미소와 함께 시훈이 고개를 내저었다. 좀처럼 감춰지지 않는 씁쓸함에 무력감이 찾아왔다. 이렇게 제어가 안 돼서야.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춘 시훈은 손끝에 걸린 담뱃재를 털어 내고 한탄 같은 웃음을 내비쳤다.
타이를 끌어 내리자 서늘한 바람이 목에 와 닿았다. 시훈은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미안한데, 오늘은 내가 다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해요. 바래다주면 좋은데.”
시훈의 앞에서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이수가 허전한 네 번째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괜찮아요. 저, 시훈 씨….”
때마침 이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안쪽에서 이수를 찾는 전화였다. 끈질기게 울리는 진동 소리에 이수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감독님. 잠깐 앞이에요. 곧 들어갈 거예요.
시훈은 전화한 상대를 추측하고 담배를 깊게 빨았다. 호르몬이 날뛰던 사춘기 시절에도, 폭풍 같던 20대에도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이런 자신이 생소했고, 솔직히 말하면 보기 딱할 정도로 유치했다. 저조차도 그러한데 이수가 보기에는 오죽할까. 동거 문제와 맞물려 정말이지 모양 빠지는 모습만 보이는 것 같다.
“먼저 들어가요, 찾는 모양인데.”
이수를 향해 웃어 보이며 시훈은 벽에 담배를 비벼 껐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다시금 새 장초에 불을 붙였다.
“다 피우면… 들어올 거예요?”
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
낭패감이 뒤죽박죽된 이수는 때를 놓친 말을 묻어 두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고민이 깊어졌다. 스스로 되묻고 결론짓지 못한 질문도 실타래처럼 얽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외로 돌린 시훈의 손끝에는 발갛게 불이 오른 담배가 홀로 타고 있다. 제 마음처럼 까맣게 탄 재가 바닥에 툭 떨어졌을 때 이수가 등을 돌렸다.
“피우고… 들어와요, 그럼.”
“…잠깐만.”
방향을 달리한 발을 내딛기도 전에 강하게 손목이 잡혔다. 한 모금도 빨지 못한 시훈의 담배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다시 막막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조금 전 이수를 향해 미소를 보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미간 사이에 깊게 주름이 진 시훈이 보였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이수를 피해 내리깐 남자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눈을 깊게 지르감은 시훈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제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냈다. 시훈은 이수의 왼손을 끌어 빼낸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밀어 넣었다.
“내가 뺄 테니까 당신은 끼고 있어.”
“…….”
시훈은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였다. 차마 못 할 말을 하는 이처럼 마른 입술을 적신 그는 몇 번이나 뜸을 들였다. 빵- 골목 옆으로 경적을 울리며 지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시훈의 얼굴이 하얗게 드러났다. 순식간에 빛이 사라지고 어둠만 남았을 때 들추고 싶지 않은 비밀을 속삭이듯 시훈이 낮은 목소리로 제 속내를 꺼냈다.
“누가 너한테 관심 보이는 거 싫어. 맴도는 것도 싫고. 그러니까 앞으로 절대… 절대 빼지 마.”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지만 차마 인정하기 싫은 감정을 두고 시훈이 조금 더 얼굴을 찌푸렸다. 부담 갖지 말라고, 그저 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자연스럽게 건넨 반지가 이제는 족쇄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속에 있는 감정을 다 까발려 전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는 정말 멋없어질 것 같아 간신히 참고 참은 게 이 정도였다.
“…있잖아, 내가… 점점 유치해지는 것 같아.”
멋쩍은 미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인내심과 자제력은 아마 이수를 곁에 둔 뒤로 애정과는 반비례하는 모양이다. 멀리 보고 느긋하고 여유 있게 이수를 끌어안고 싶은데 실상은 무릎 위에 앉히고 옭아매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
평소와 다른 기색에 이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항상 저보다 한 발자국 앞서 저를 끌어 주던 사람이었다. 감정을 감추고 쌓아 두는 것에 익숙한 이수가 문을 열 수 있게 이끌어 주는 일이 자연스러운 사람.
반지를 내려 보는 이수의 아래로 긴 그림자가 졌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기는 했지만 결국 도로 다물렸다. 다시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시훈의 핸드폰이었다.
“…먼저 들어가요.”
여전히 울리는 핸드폰을 꺼낸 시훈이 발을 물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묘하게 선을 긋는 것 같다. 먼저 갈게요, 그럼. 맞물린 입술을 떨어트린 이수가 이내 발을 돌렸다.
이수가 골목을 빠져나간 뒤 시훈의 머리가 담벼락에 뻗은 팔 옆으로 풀썩 떨어졌다. 눈을 감은 상태로 여전히 진동이 끊이지 않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네. 이 앞이에요. …곧 들어가요. 네, 그래요.”
이미 불씨가 꺼진 담배를 시훈이 구두코로 짓이겼다. 평소와 다름없이 통화를 마친 시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했다.
시훈이 다시 식사 자리로 되돌아갔을 때 이수 옆에 앉아 있던 김 감독은 멀찍이 떨어진 자리로 옮겨 기획팀 AE와 대화 중이었다. 일일이 이수의 행동거지를 살피는 스토커처럼 구는 자신이 마뜩잖아 시훈은 일부러 마주 앉은 구원주 실장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조만간 계획된 촬영이 쉽지는 않겠지만 잘해 보자는 그저 그런 예의 바른 말만 연거푸 튀어나왔다.
한정식집에서 우르르 빠져나온 인원 중 시훈과 이하 기획팀이 능숙하게 광고주를 배웅했다. 수평적인 파트너십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모셔야 할 고객사였다. 구원주 실장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이윽고 이수 앞에 선 시훈이 손을 내밀어 인사를 청했다.
“책임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마주 잡은 두 손의 온기가 멀어졌다. 시훈은 정작 끼워 준 반지도, 택시를 타고 떠난 이수의 얼굴도 바로 보지 못했다.
“서초동 사거리로 가 주세요.”
목적지를 말한 이수는 털썩 시트에 등을 기댔다. 이제 막 출발한 택시 밖으로 길가의 상점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는 모습이 보였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이수의 손이 조금만 건드려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반지를 매만졌다. 이수는 회식 내내 사이즈가 큰 시훈의 반지가 혹시 빠지지는 않을까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이제 이수에게는 두 개의 반지가 있었다.
지나가는 길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시훈과 함께한 일들이 이수의 기억을 스쳐 갔다. 처음 만났을 때 한 악수, 그의 기억에 없을 새해 인사, 서로를 향한 오해, 빗속에서 저를 이끌어 주던 손길과 잊지 못할 밤, 시훈이 들려준 고백, 안개 속 그를 향한 바람.
마음의 빗장을 하나씩 풀어놓는 순간에는 시훈이 있었다.
‘주말 지나면 보내는 거… 싫어, 나는.’
주말 지나면….
일요일 밤, 시훈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 시간이 참 더디게 흘러간다. 텅 빈 집의 문을 열고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설 때면 주말 동안 잊고 있던 외로움이 불현듯 밀려온다. 익숙하게 불을 켜고 쿠션이 꺼진 소파에 앉아 1시간 정도 멍하게 앉아 있는 일은 일종의 습관이 됐다. 주말 내내 시훈의 곁에서 느낀 안온함을 뒤로하고 홀로 머무는 공간에 익숙해지려면 분위기를 전환할 시간이 필요했다. 애써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어도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 출근 전까지가 일주일 중 가장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눈을 뜨면 무슨 생각을 하더라….
이수는 시훈이 곁에 없는 상황을 가정해 봤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창문 조금만 내릴게요.”
열린 창문으로 차가운 밤바람이 이수의 뺨을 스쳤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질 듯 저릿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큰 숨을 토해 낸 이수가 심장 부근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또렷하게 울리는 박동이 이보다 선연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
오늘 시훈이 다시 반지를 끼워 주었을 때 이수는 깊은 내면으로부터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열기를 느꼈다. 지난 열흘간 시리도록 냉기를 내뿜던 곳이었다. 유치하다 스스로를 폄하하면서도 기어코 당부를 전하는 연인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순간 욕심을 비워 낸 마음에 욱여넣은 불안이 한순간에 걷혔다.
뻔히 가야 할 길을 알면서도 그동안 그래 왔으니까, 정이수는 겁쟁이니까, 그런 안일함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고비 고비마다 그가 따라오라 이끄는데도 버릇처럼 홀로 단정 짓고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이수는 한탄했다. 뒤늦은 책망과 탄식은 모두 제게 쏟아 낸 것이었다.
“바보네… 정말.”
과연 살면서 확신할 수 있는 감정이 얼마나 될까. 하물며 그게 평생의 사랑이라면.
어쩌면 시훈보다 제가 더 앞서간다고 한들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혹시 그가 주저하면, 그러면 그때는 제가 시훈을 기다리면 되니까. 가진 걸 다 버려도 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기사님.”
신호가 바뀌고 앞쪽에 정차한 차들이 슬슬 움직이는 참이었다. 룸 미러로 눈을 마주친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서초동 말고, 삼성동으로 가 주세요. 빨리 좀 부탁드릴게요.”
주말 지나면 보내는 거… 아니, 주말 지나면 헤어지는 거 싫었어, 나도.
시훈은 복도가 훤히 보이는 집무실 벽에 블라인드를 내렸다. 벗은 코트를 걸어 두고 익숙하게 책상 위의 스탠드 불빛을 켰다. 업무를 핑계로 회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앉은 시훈은 결재가 필요한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배터리가 닳아 꺼진 핸드폰 역시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의자를 돌려 도시의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훈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서로 낯을 붉히며 싸웠다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누구 하나가 마음이 상한 것도,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이었다. 지난 며칠간 알맹이가 쏙 빠진 대화는 어딘가 겉돌았고, 오늘은 이수에게 투정 같은 이기를 내보였다.
‘별거 아니에요. 주고 싶었어.’
반지를 주며 그런 말을 했다.
“아니잖아….”
사실은 누가 널 보는 것조차 싫다고, 넌 내 사람이라고 이렇게라도 묶어 두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깊게 내쉰 한숨에도 속이 답답했다. 제게 오기까지 이수가 얼마나 큰 결심을 해야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고 언제나 기다려 주겠다고 했는데 이 얼마나 오만방자한 약속이었나.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무시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공식적인 업무는 끝이 났고 이 시간에 결재니 보고를 올리겠다고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아마 철야를 하는 제작실에서 불이 켜진 집무실을 보고 들렀을 가능성이 컸다. 다시 한번 울리는 노크 소리에 시훈은 다소 신경질적인 대꾸를 했다.
“뭡니까.”
달칵. 문이 열렸다.
“…어떻게 왔어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시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뜻밖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이수였다. 이수가 줄이 둘둘 말린 방문증을 들어 보였다.
“보안 허술하네요. 이 시간에 신분증 하나 맡겼다고 방문증, 내주고.”
“…….”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지워 보려고 던진 농담이 허사로 돌아가자 이수가 사실을 실토했다.
“…우연히 고우재 씨가 퇴근 중이더라구요. 말해 줘서 올라왔어요.”
비몽사몽 좀비처럼 로비를 가로지르던 고우재에게 급한 일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기는 했으나 몽롱한 눈을 보면 딱히 분명한 상황 판단은 못 하지 싶었다. 예전처럼 이수에게 팀장님이라고 하는 걸 보면. 시훈의 핸드폰은 꺼져 있지, 마침 제 핸드폰 배터리도 나가 버릴 건 뭐람. 보안 요원은 요지부동인 상황에 때마침 나타난 고우재가 은인이 되었다.
이수는 처음 보는 시훈의 집무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모던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집무실은 꼭 시훈의 집을 작게 축소해 놓은 것 같다.
한쪽 벽에 설치된 모니터 아래 하얀색 회의 테이블과 의자가 배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그가 즐겨 마시는 생수가 책상 한가운데 둘씩 짝을 지어 놓여 있었다.
다른 쪽 벽면에는 각종 상패와 즐겨 보는 서적, 인테리어 소품들이 오픈형 선반에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그리고 일하는 책상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어 있는 엽서 역시 이시훈다웠다.
눈을 굴려 사무실을 훑은 이수가 엷은 미소를 띠며 평소답지 않은 너스레를 떨었다. 어색함을 상쇄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광고주 왔는데 물 한 잔도 안 내줘요?”
“…….”
시훈답지 않게 조금 전부터 아무 말이 없었다.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책상을 돌아간 이수는 모서리에 엉덩이를 기대앉아 시훈을 내려 봤다.
“시훈 씨. 나 좀 봐요.”
스탠드 불빛에 고스란히 표정을 내보인 시훈의 얼굴에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기대와 실망, 설렘과 무력감, 희망과 절망들이 시소처럼 시훈을 저울질했다. 검은색 머리카락 위에 이수의 손이 닿았다. 상냥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은 손이 뺨을 감싸자 시훈이 옅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
시훈이 살짝 턱을 돌려 뺨을 감싼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이수의 손길 한 번에 서운하고 이지러진 감정이 눈 녹듯 사그라졌다. 그때 머리 위로 이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겁이 났어요. 지금도 너무 좋은데 괜히 욕심 부리다가 체하는 거 아닌가. …그런 거.”
훌쩍 손바닥을 뒤집는 듯 성정이 쉽게 바뀔 리 없었다. 한 발자국 다가오면 두 발자국 발을 물리고 턱부터 당기는 습성이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이수의 고백이 이어졌다.
“우리 나이에… 같이 살자 그러면, 연애로만 생각하기에는….”
동반자. 반지와 함께 살 집 그리고 매일 아침 같이 눈을 뜨고 매일 밤 잘 자라고 속삭일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이수에게 그런 의미였다. 살면서 지레 포기해 버린 꿈이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해.”
시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포하고 있는 진심을 이수도 어렴풋이 느꼈을 테다. 그러니 반지를 주며 부담 갖지 말라던 사람의 동거 제안이 이수에게 얼마나 느닷없이 느껴졌을까.
이수의 손을 감싼 시훈이 가만히 눈을 들어 올렸다. 그윽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없이 따뜻했다. 이수가 잠시 뜸을 들였다.
“…나하고 같이 살 수 있겠어요?”
“응.”
시훈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하지 말라는 듯.
“…있죠, 전에 서점에서 한번 찾아본 적 있어요. ‘기러기’라는 시. 나는 시 잘 안 읽거든요. 아마 그때 처음으로 시집을 샀나 봐요. 그리고 커피를 사는데 궁금하더라고요. 왜 그 사람은 한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만 마실까. 나랑 취향 되게 다르다. 매일 앉아 일하는 책상도, 집도 다르고…. 나는 취향이랄 것도 없지만 시훈 씨는 먹는 거, 입는 거, 자는 거. 다 하나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잖아. 나는 그런 거에 영 젬병이고.”
시훈과 공유하는 사랑은 취향 따위가 아니지 않나. 바람이 분다 하여 쉽게 꺼져 버릴 것도, 비나 눈이 온다고 해도 바뀌지 않을 텐데 이수는 사소한 걱정을 줄줄이 늘어놓게 된다.
“요리는… 계란말이도 잘 못 해.”
“…….”
“…근데, 설거지도 잘 못 하고, 빨래는 무조건 세탁기에 다 넣고, 청소는 그나마 좀 나은데….”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흠결을 들추는 이수의 무릎 위로 시훈이 고개를 파묻었다. 가만 내려다보니 웃음을 참고 있는지 어깨가 들썩였다. 본인은 심각한데 상대의 반응에 긴장한 이수의 맥이 순식간에 풀려 버렸다. 도르르 눈을 굴린 이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런 분위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택시를 돌려 여기까지 달려왔을 때 이수는 결심했더랬다.
이수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반지를 꺼냈다. 시훈의 손을 잡아끄는 이수의 손에는 이미 제게 꼭 맞는 반지가 끼워진 채였다.
어둠 속 두 사람을 비추는 조명 아래 창밖에는 도시의 불빛이 별처럼 일렁였다. 어릴 때부터 혼자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사람이 없는 집에 들어가고 사람이 없는 집에서 나오는 일이 너무 익숙해서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시훈의 집에서 돌아오면 홀로 멍하게 앉아 있는 이유를 저조차도 몰랐더랬다. 결핍이 당연한 삶의 기준이 된 제게 시훈은 너는 얼마든지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노라고 매순간 일깨워 주는 사람이 됐다.
시훈의 곁에서 잠이 들 때면 꿈 한번 꾸지 않고 아침을 맞이한다. 온전히 저를 지탱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쉬이 잠이 들고 늑장을 부릴 수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시훈 씨.”
시훈에게 반지를 끼워 주며 이수가 속삭였다. 앞으로 살아갈 날 이수가 시훈에게 바라는 것들은 너무나 익숙하고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평범한 약속이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곁에 있어 줘야 해.”
“응. 항상.”
더없이 진중하고 진실한 대답이었다.
“나도….”
“…….”
“검은 머리가 새하얗게 될 때까지….”
울컥 치미는 감정에 이수는 잠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
“…당신 곁에 있을게.”
이수가 몸을 기울였다. 이마에 한 번, 눈에 한 번, 그리고 입술을 열어 제 사랑을 다시 한번 고백했다. 몸을 일으킨 시훈이 이수의 두 뺨을 감쌌다. 높이가 뒤바뀌어 이제는 자신을 올려 보는 연인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은 상냥한 키스가 이어졌다. 뺨과 코끝, 얼굴 곳곳에 시훈이 남기는 짧은 입맞춤을 받으며 이수가 입술을 달싹였다.
“시훈 씨가 길 만들어 줬잖아. 나 잘못 가지 말라고. 맞지?”
코끝을 맞댄 시훈의 눈빛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응.”
“…….”
“그러니까 그 길로만 쭉 걸어와. 나만 따라서. 절대 손 놓지 마. 알겠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시훈의 목을 끌어안자 목 아래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넋두리를 늘어놓은 조 대리가 소중히 들고 있던 화병이. 이수는 조 대리의 푸념이 사랑에 빠지고 서로를 단단히 여민 관계 속에서 부릴 수 있는 여유였음을 깨닫는다. 아마 우리도 그렇게 될 테지.
이수가 시훈을 올려 보며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앞으로 감추지 않을게. 걱정하면 하는 대로, 무섭고 두려우면 그건 그것대로 다 말할게.”
시훈이 저를 알아주기를 바라던 이전의 고백에서 이수는 한 발 더 발을 내디뎠다. 서로를 상처 내며 돌아온 시간이 애달파서 옳고 예쁘고 반듯한 마음만 보이려 했나 보다.
“나도 그럴게.”
“그리고.”
이수가 머뭇대며 시훈의 타이 끝을 만지작거렸다. 부끄러움이 스민 미소가 얼핏 얼굴 위에 떠올랐다.
“이시훈 질투하니까… 그것도 기분 나쁘지는 않더라.”
민망해서 차마 제 머릿속에서도 꺼내지 못한 단어를 이수에게서 듣고 나자 시훈은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반지 빼지 말라는 거야. 사람 속도 모르고.”
모르는 모양이지만 따지고 보면 투기가 처음도 아니었다. 이수가 시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응, 절대 안 빼. 다짐을 하며.
살짝 상체를 떼고 시훈을 올려 본 이수는 촉촉이 젖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빨리 둘만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일 많이 남았어요?”
게다가 허벅지 사이로 들어온 시훈의 왼쪽 다리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아니. 첫날밤을 회사에서 치를 수는 없지.”
살가운 연인의 목소리가 귀를 지나 이수의 심장 부근을 간지럽혔다.
“…뭐래.”
이수가 싫지 않은 웃음을 터트렸다.
“가자, 우리 집으로.”
그날 밤, 두 사람은 대화하는 동안 웃고, 울고, 다시금 서로의 입술을 찾아들다 끊임없이 몸을 맞췄다. 누구 하나 먼저랄 것 없이 체온과 체액을 섞으며 같은 온도로 녹아든 상대를 갈구했다. 서로가 내보인 육체와 영혼이 온전히 상대에게 깃든 밤이었다. 이수를 품에 끌어안은 시훈은 이 순간을 진부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단언했다.
이제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 * *
“고생하셨어요, 고맙습니다.”
문이 닫혔다. 어수선한 거실을 가로지른 시훈이 창밖을 바라보는 이수를 뒤에서 껴안았다. 환기를 시키느라 열어 놓은 창으로 춥지 않은 겨울 내음이 물씬 풍겼다. 리모델링을 끝마친 집은 방 하나와 거실을 틔워 답답한 구석 없이 시원시원했다. 아직 배송되지 않은 전자 제품이나 소파가 들어오지 않아 거실에는 시훈의 집에서 옮겨 온 의자와 벽에 걸지 못한 액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안 피곤해?”
“응. 생각보다 빨리 끝난 것 같아.”
1톤 트럭에 실어 온 이수의 짐은 옷과 간단한 가재도구뿐이고 이삿짐센터에서 옮긴 시훈의 짐은 배치를 따져 볼 물건이 대부분이라 오늘은 자기 전까지 드레스 룸만 정리해 두기로 했다.
이수는 집을 보러 왔을 때 마음을 사로잡은 전경을 내려다봤다.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변에는 차츰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집을 계약하고 이사를 준비하는 한 달여간 두 사람 모두 파김치가 될 만큼 피곤했지만 하루하루가 즐겁고 설레었다. 이수의 어깨에 턱을 올린 시훈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저녁 메뉴를 권했다.
“저녁은 짜장면 먹자. 이사했는데 먹어야지.”
잔금 치르랴 이삿짐을 옮기는 데 신경을 쏟느라 점심도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응. 점심때 못 먹어서 괜히 서운했어.”
참 별것 아닌 것들. 그래서 해 보고 싶었던 일들을 시훈과 경험하고 있다.
“노을, 진짜… 예쁘다.”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는 이수의 입에서 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지는 노을이 이다지도 포근하게 느껴질 줄이야. 순간 명치 아래가 울렁거렸다. 이런 기분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잠결에 몸을 뒤척인 시훈이 곁으로 팔을 뻗었다. 시트 위로 손을 더듬어 봐도 닿지 않는 온기에 눈을 뜨니 옆자리는 텅 비어 있다. 침대 아래에 놓인 티셔츠를 꿰입은 시훈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 창가 옆에 뜻밖에 이수가 앉아 있었다. 거실에 걸린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동안 시훈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이수가 거리를 좁히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어… 나 때문에 깼어요?”
“보니까 없길래. 잠이 안 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이수가 의자에 세워 올린 무릎 위로 턱을 괴었다. 시훈이 이수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고 의자를 끌어 앉았다. 걱정 어린 눈길이 이어지자 이수가 잠 못 드는 사정을 부끄러운 듯 털어놓았다.
“불면증 아니고, 좀… 설레서. 이렇게 반듯한 집에서 살아 보는구나. 기특하고 좋아서.”
달빛이 어스름하게 거실을 비췄다. 창 너머 점점이 불 켜진 건물들이 도시에 뜬 별처럼 낭만적인 새벽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굽어본 도시는 어린 시절 이수가 보던 세상과도, 회사나 홀로 살던 오피스텔에서 보던 것과도 또 달랐다.
“처음에 서초동 오피스텔 들어가던 날 엄청 좋아했어요. 그때도 이렇게 잠을 잘 못 잤거든. 설레서.”
“…….”
“근데, 오늘은 그거보다 열 배는 더 그런 것 같아.”
부끄러운 듯 속눈썹을 내리깐 이수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시훈이 손을 뻗어 이수의 뺨을 감싸자 그 위로 이수가 손을 겹쳐 쥐었다. 곧 손바닥 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제 무릎 위로 맞잡은 시훈의 손을 내려놓았다. 미소 끝에 남은 씁쓸함이 자꾸만 눈에 걸렸다.
“복잡해 보이는데… 정말 괜찮아?”
조심스레 물었다. 이수는 입매를 끌어 올려 보다 어색한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곧 이수의 시선이 벽에 걸린 액자에 닿았다. 엄마와 졸업식 날 찍은 사진이 그 안에 걸려 있었다.
저녁을 먹고 드레스 룸을 정리하고 나오자 한참 동안 거실을 둘러보던 시훈이 이쯤이 좋겠다며 벽 한쪽에 걸어 놓았다. 인사이트 시절 엄마를 발견하고 요양원까지 모셔다드렸지만 시훈은 이수의 가족 관계나 어머니의 병환, 과거 이수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물은 적은 없었다. 궁금할 테지만 아마도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해 주리라, 기다렸겠지.
잠자코 곁을 지키는 시훈을 두고 앞뒤 없는 고백이 흘러나왔다. 시점을 정확하게 특정할 수 없는 뭉뚱그려진 회상이었다.
“어릴 때, 아빠 돌아가시고 반지하에서 엄마랑 오래 살았어요. 부엌하고 화장실만 방하고 분리된 곳이었는데, 어둡고 좁고…. 거기에서 혼자 엄마 기다리면서 텔레비전을 엄청 많이 봤어요. 덕분에 CM송도 다 그때 외운 거고.”
반지하에서 살 때는 사람들의 발을 많이 봤었다. 하얀색 양말 아래 새로 산 운동화를 신은 교복 입은 형, 누나들, 할머니 손을 잡고 삑삑 소리 나는 신발을 신고 걸어가는 아기, 또각또각 어떤 누나의 구두 소리, 뚜벅뚜벅 바삐 걸어가는 아저씨의 발소리. 그러다가 피곤에 젖어 질질 신발을 끄는 익숙한 발소리를 들으면 후다닥 달려가 엄마가 왔는지 창 아래에 붙어 위를 살피고는 했다.
“나중에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사 가기는 했는데, 이상하게 그 집이 제일 기억에 남더라고. 사진처럼.”
아직도 큼큼한 반지하의 냄새가 코끝에 박혀 있었다.
“서울 올라와서 회사 입사하고, 엄마 요양원 모시고… 나는 오피스텔로 이사하고 나서 우연히 그 동네에 간 적이 있어요. 근데 아직 그 집이 남아 있었어.”
담담하게 이어 가는 이수의 말이 뚝 끊겼다. 의자에서 다리를 내린 이수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목구멍에서 울컥 치미는 열감을 가까스로 내리누른 이수는 고해 성사처럼 탁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불 지르고 싶었어. 너무 싫어서.”
“…….”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고, 보니까 마음이 미어져서….”
씁쓸한 웃음이 샜다. 그 시절만 생각하면 항상 철창이 덧대진 창문 너머로 텔레비전을 보는 어린 이수가 눈에 아른거렸다. 외로움과 쓸쓸함을 너무도 일찍 알아 버린 어린 이수가 불쌍해서 그때를 다 지워 버리고 싶었다.
시훈이 바짝 의자를 끌었다.
“지금도 아파?”
결 좋은 머리카락이 좌우로 돌아가는 방향을 따라 스르르 흘러내렸다. 아마 지금이 불행했다면 꺼내지 못했을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는 뒤에 오는 말이 진짜배기니까.
“이제 다시 가면 괜찮을 것 같아서 말한 거예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또 길게 숨을 내뱉은 이수가 이내 시훈과 눈을 맞췄다. 손을 당겨 허벅지 위로 이수를 끌어앉힌 시훈은 연인의 허리를 단단히 당겨 안았다.
“…하긴, 불 지르고 싶었다고 누구한테 말해.”
달빛에 반사된 이수의 얼굴에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밤이 되면 아침까지 이어지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뜬눈으로 지새울 생각에 지레 겁을 먹었던 날들이 있었다. 약을 먹어도 쉽게 잠들지 않는 밤에는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일하고 있다 착각을 했다.
“시훈 씨.”
“응.”
이수가 시선 아래에 있는 시훈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 주었다. 어둠 속에서도 저를 한가득 담은 눈동자가 또렷했다. 이내 이수가 시훈에 물었다.
“바쁜 일 지나면… 엄마 뵈러 같이 갈래요? 우리 같이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
“이번 주 주말에 다녀오자. 집 정리는 천천히 하고.”
이수는 아무 말 없이 시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조금 울었다. 어린 이수를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이수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시훈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히 팔을 들어 시트 위에 옮겨 두고 발을 내딛고 문을 여닫는 일에도 신중을 기했다. 부엌에 간 이수는 비장한 자세로 조리대 앞에 섰다. 밥을 차리는 일도 생각해 보면 일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전반적인 흐름을 살피고, 해결 가능한 일부터 하나하나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이수는 즉석 밥과 레토르트 국을 찬장에서 내어놓고 냉장고에서 차곡차곡 정리된 반찬 통을 꺼냈다. 그리고 유일하게 조리 가능한 계란말이를 위해 달걀 네 개를 굴러떨어지지 않게 한편에 놓아뒀다. 준비는 끝났다.
시훈이 알람 소리를 듣고 방을 나왔을 때 이수는 식탁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는 중이었다.
“와….”
애당초 콩깍지가 씐 시훈의 눈에 초토화된 조리대며 인덕션 위에 추상화처럼 흩뿌려진 계란물과 소금은 말끔히 지워져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상을 차리는 이수를 보고 양쪽으로 입이 찢어졌다.
“앉아요.”
시훈이 의자를 끌어내 앉는 동안 식탁 위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요리가 놓였다.
“…모양은 좀 그런데, 계란말…”
“스크램블드에그. 맛있겠다.”
계란말이라고 명명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싱거울 것 같은데… 케첩 뿌릴까.”
조리대 위에 눈처럼 흩뿌려진 소금은 다 어디로 간 건지 싱겁다는 말에 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꺼내 놓은 케첩을 손바닥에 두드렸다. 이수는 하트를 그리는 낯부끄러운 짓을 할까 싶다가 무난한 스마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릇 위를 조준했다. 점 두 개, 반달 모양 곡선 하나면 충분하건만, 이렇게 긴장이 될 줄이야.
“…아….”
튀어나온 탄식 끝에 결과물을 내려 본 이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망했다. 누가 봐도 망했다. 계란말이도 망하고, 점 두 개, 곡선 하나만 그리면 끝나는 스마일도 망했다. 흡사 조커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모양의 스마일을 본 시훈은 움찔움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 내리며 흠. 헛기침했다. 앞에서 사색이 된 이수는 서 있는 그대로 쩍 굳은 채 그릇을 내려 보는 중이었다. 차마 결과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약간 경고… 같은 거야? 잘못하면 알아서 해. 그런.”
솟아오르는 미소를 참기가 힘들었다.
“…스마일인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귀까지 빨개진 이수가 결국 그릇 귀퉁이를 잡아끌었다. 아침부터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광대가 올라간 시훈이 그릇을 제 쪽으로 옮겨 놓았다.
“나 계란으로 만든 건 다 잘 먹어요. 고마워, 잘 먹을게.”
결론적으로 말하면 계란 요리는 아주 짰다. 시훈은 내색하지 않고 밥과 국에 요령껏 짠 스크램블드에그를 배분해 먹으며 싹싹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식사를 마칠 때까지 요리의 정체가 계란말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출근 준비를 하며 욕실에서 같이 이를 닦고 셰이빙 폼을 올린 시훈의 턱을 면도해 주었다. 그러다 결국 눈이 맞아 세면대 앞에서 서로의 성기를 붙잡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겨울로 접어든 날씨는 제법 도톰한 코트를 필요로 했다. 앞으로 퇴근은 힘들어도 출근은 꼭 같이하고 싶다는 시훈의 바람을 따라 이수를 태운 차가 정산 사옥 앞에 멈췄다. 창밖으로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출근을 재촉하고, 이미 도로에는 차량이 빼곡했다.
“일 잘하고, 점심 잘 챙겨 먹어요.”
시훈이 단추를 잠그지 않은 이수의 코트 깃을 여며 주며 당부했다.
“시훈 씨도 바빠도 점심 거르지 말구요.”
“응.”
그러마 고개를 끄덕인 후에도 이수는 바로 내리지 않고 창 너머를 살폈다. 길이 막힌 도로에서는 경적을 울리기 바쁘고 인도에는 핸드폰을 보며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잠시 머뭇대던 이수가 시훈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한다.
“잠깐, 이쪽으로….”
아, 그제야 의미를 알아챈 시훈은 가만히 이수에게 귀를 대었다. 귓속말을 전하는 이처럼 손을 세운 이수의 입술이 볼에 닿을 무렵, 쪽. 고개를 돌린 시훈과 정확히 입술이 맞닿았다.
“…….”
눈을 동그랗게 뜬 이수가 얼른 턱을 당겨 조수석에 바짝 몸을 붙였다. 시훈의 웃음소리에 얼굴이 새빨개진 이수가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었다. 반쯤 열린 문으로 찬 바람이 밀려오자 아침부터 무슨 부끄러운 짓을 이다지도 많이 했는지… 불쑥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시훈이 다급하게 연인을 불러 세웠다.
“이수야.”
멈칫한 이수가 고개를 돌리자 핸들에 몸을 기댄 시훈이 나지막한 인사를 전한다.
“…….”
“집에서 봐.”
순간 이수는 어젯밤 노을을 보며 가슴속에 뜨겁게 맺힌 덩어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제게 오롯이 녹아든 행복이었다. 일평생 생소하고 아득해 보이던 행복이 차곡차곡 가슴에 차올라서 일렁이는 물결을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조수석 문을 닫기 전 시훈과 눈을 맞춘 이수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복이 저절로 내비친 미소였다. 이수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다녀올게. 그리고….”
다른 수식어로 대체하려 해 봐도 결국 상대에게 진심을 전할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사랑해.”
시훈이 반듯하게 길을 만들어 주었다. 모난 길을 걷지 말라, 아픈 길을 걷지 말라, 잘못 가지 말라고. 그리고 옆을 돌아보자 이제는 길 위에 손을 맞잡은 그가 있었다. 이제 어디든 같이 가자는 약속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