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Dear
하반기 정산 그룹에서 계획 중인 프로젝트의 브랜딩에 관한 보고가 끝이 났다. 사무실로 돌아온 팀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다독였다. 곧 복도에서 구원주 실장과 잠시 대화를 나눈 이수가 밝은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고생했어요, 다들. 구 실장님이 조만간 식사하자고 하시네요.”
팀 내에서 탄성이 터졌다. 아마도 오늘 진행된 보고가 꽤 성공적이었다는 의미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가며 이어진 보고는 발표와 질의응답, 향후 보완이 필요한 부분까지 어느 하나 쉽게 넘어가는 법 없이 진행됐다. 지난 몇 주간 프로젝트를 이끈 이수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기획자 출신에 비딩을 밥 먹듯이 치르던 과거를 생각하면 긴장할 필요는 없었으나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브랜드전략실 내에서 하반기에 진행될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고 조금 걱정을 한 건 사실이었다.
정산으로 이직을 한 뒤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한 직장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세월을 생각하면 혹여 부침을 겪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건만 그럴 틈도 없이 정산에 녹아들었다. 무엇보다 구원주 실장이 일일이 면접과 면담을 통해 꾸린 팀은 이수의 책임 아래 좋은 팀워크를 발휘했고, 광고주나 프로젝트별로 머리를 싸매거나 접대를 할 필요가 없어 부담이 줄었다. 광고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수는 행복하게 일하는 지금이 좋았다.
모니터로 눈을 돌린 이수는 얼마 남지 않은 퇴근 시간을 확인했다. 때마침 재킷 안주머니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 진동음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확인한 이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보고 잘 마쳤어요?
시훈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시간은 30분 전. 이수가 얼른 답문을 남겼다.
-메시지 이제 확인했어요. 보고 잘 마쳤어요.
읽음 표시 후 회의 중이라 끝나면 연락하겠다는 메시지가 들어왔다. 승진 이후 회의로 시작해 회의로 끝나는 시훈의 일과는 여전한 듯하다. 보낸 메시지를 보면 저녁까지 회의가 이어질 분위기라 같이 저녁을 먹기는 요원할지도 모르겠다. 아쉽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내일 하루 구원주 실장의 배려로 팀 전체가 휴가를 부여받았다. 그 덕분에 가을로 접어들기 전 본격적으로 바빠질 시훈과 휴일도 맞췄겠다, 평일 내내 야근을 한 팀원들도 오늘만큼은 빨리 돌려보내고 싶었다.
자리에 돌아온 이수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서류며 각종 자료를 정리하는 사이 누군가 책상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인기척에 시선을 올리자 조유진 대리가 웃는 낯으로 이수를 불렀다.
“책임님.”
“네, 조 대리.”
책상 한편으로 자료를 밀어 둔 이수에게 조 대리가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
“저희 오늘 이대로 퇴근하나요? 다들 맥주 한잔하는 분위기인데… 책임님 시간 어떠세요?”
조 대리 뒤로 슬쩍 고개를 기울이자 눈을 반짝이는 팀원들은 이수의 답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눈치다. 이수는 그제야 아차 싶다. 퇴근도 퇴근이지만 오늘은 시원하게 법인 카드를 긁어야 할 날이었다. 인사이트 시절, 벙개나 의미 없는 회식에 질릴 대로 질려서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미안하지만 시훈에게는 따로 연락해야 할 것 같다.
“6시 땡 하면 갑시다. 다들 준비하고 계세요.”
이수의 말 뒤로 작은 탄성이 터졌다. 팀원들을 바라보는 이수의 얼굴에도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회사 근처예요. 다들 한잔하고 싶다고 해서.”
건배사를 하고 본격적인 회식이 시작되기 전 화장실을 핑계로 식당을 빠져나온 이수는 시훈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테이블에 세팅된 술의 양을 보아 하니 조유진 대리가 말한 맥주 한잔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자발적 벙개예요?
수화기 너머로 웃음기 밴 목소리가 전해졌다.
“네. 저녁은 먹었어요?”
-먹었어요, 간단히. 늦게까지 있죠?
“아마도요. 카드만 주고 나오려니까 붙잡아서요.”
건배만 하고 자리를 비켜 주려니까 소고기를 불판에 올리던 조 대리가 재빨리 문부터 닫았다. 그리고 책임님께 오늘 꼭 이 자리에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는 이유로 이수를 딱 붙들어 놓았다. 프로젝트도 끝이 났고, 하물며 사람들 다 있는 회식 자리에서 긴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핑계가 분명한데도 시치미를 뚝 떼는 통에 이수가 결국 자리에 앉자 넉살 좋은 조 대리가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늦게까지 일할 것 같으니까 끝나면 연락해요. 데리러 갈게.
“응, 끝나면 연락할게요.”
이수와 휴가를 맞추고자 시훈 역시 이번 주 내내 바빴다. 통화를 마친 후 등대처럼 밤새 불을 밝히고 있을 인사이트를 떠올리던 이수의 뒤로 빠끔 식당 문을 연 조 대리가 손짓을 했다. 책임님, 얼른 오세요! 숙취 해소제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와 함께였다. 아마도 오늘 날을 잡은 모양이다.
이수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조 대리는 뚜껑을 딴 숙취 해소제를 내밀었다. 저희 다 마셨어요. 비장한 목소리였다. 숙취 해소제를 한입에 털어 넣자마자 직원 하나가 수순처럼 이수의 빈 잔에 소주를 기울였다. 얼마만의 술자리인지 이수도 가물가물했다. 대부분 회식은 점심 식사로 대체하고, 커피와 간식으로 회식비를 소진했을 만큼 지난 몇 주간 팀은 바쁘게 돌아갔다. 발표도 잘 끝났겠다 긴장이 풀린 팀원들의 술잔이 빠르게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반복했다.
말랑말랑 풀린 분위기 속에 얼마 전 결혼한 조유진 대리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 화면을 확인한 조 대리가 고개를 돌리고 순식간에 통화를 마쳤다.
“남편분이 오래요, 빨리?”
목소리를 죽여 묻는 박 대리와 달리 조 대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라는 건 아니고, 택시 타면 전화하라구요.”
대부분 미혼인 팀 내에서 조 대리는 유일한 기혼자였다. 이내 대답을 마친 조 대리가 소주로 입을 축이다 말고 슬쩍 이수의 눈치를 살폈다.
“근데, 책임님. 혹시 만나시는 분… 있으세요?”
“저요?”
“네.”
곤란하시면 말씀 안 하셔두…. 조 대리가 남은 소주를 홀짝이며 말끝을 흐렸다. 조금 전 식당 밖에서 시훈과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을까.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기가 어려울 뿐이지 애인 유무를 말 못 할 이유는 없었다. 이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네. 있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소고기가 올라간 불판이 지글지글 타들어 가며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묘한 기운에 눈을 데구루루 굴리는 이수를 두고 훌쩍 몸을 물린 조 대리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에이- 책임님두!”
이수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뭘….”
“책임님, 저 뚜쟁이 아니에요. 진짜 그때 딱 한 번 여쭤본 건데. 흑흑.”
우는 시늉을 하는 조 대리 때문에 이수와 나머지 직원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한 달여 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조 대리가 적잖이 난감해하며 물은 적이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책임님을 본 친구 하나가 책임님 때문에 상사병이 걸릴 지경이라며 혹시 소개팅 생각이 있으시냐고. 잠깐 스친 사이에 상사병은 무슨 말이며 여성을 상대로 소개팅이라니 말도 안 됐다. 무엇보다 제게는 시훈이 있었다.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한 이수를 두고 조 대리가 죄송하다며 발을 뺐더랬다.
“아닌데… 정말….”
당황하여 얼버무리는 이수의 모습에 애인은 없노라고 확신하는 분위기가 돼 버렸다. 이수는 설득을 포기했다. 선을 그으면 무례하게 묻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다만 애인 유무를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마는 이수를 보고 박 대리가 슬그머니 한마디를 보태어 물었다.
“아니, 조 대리님. 스타일을 먼저 여쭤보셨어야죠. 그런 의미에서… 책임님, 어떤 스타일이 좋으세요?”
평소 꾹꾹 참아 둔 질문들이 오늘에야 몽땅 쏟아지나 보다. 조 대리와 박 대리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아마 이수는 절대 모를 테지만 얼마 전 직장인들이 익명으로 글을 게시하는 앱에 등록된 글이 하나 있었다. 내용은 그러했다. 하루하루 힘든 회사 생활에 그분이 계셔 행복하다. ㅂㄹㄷㅈㄹ실 ㅈㅇㅅㅊㅇㄴ. 사랑합니다♥ 특정인을 떠올릴 만한 글은 신고 처리 되어 순식간에 삭제됐지만, 줄줄이 111, 222, 333 넘버링을 매겨 가며 몇십 개의 댓글이 달렸었다.
“음….”
생각은 당연히 한 사람으로 귀결됐다. 자신도 분명 작은 키는 아니건만 저보다 한 뼘 정도 큰 키에 날렵한 턱선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집중하며 일을 할 때면 휘는 눈썹과 웃을 때면 올라가는 입꼬리는 매번 사람을 설레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너른 가슴과 딱 벌어진 어깨, 긴 다리는 무슨 옷을 입어도 태가 났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 때는 때때로 숨이 멎었다. 담배를 태울 때는 어떠한가. 볼이 패도록 담배를 피우고 느른하게 연기를 내뿜는 모습은 시훈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장면이었다.
“저는 섹시한….”
거기까지 말하고 이수가 앞에 놓인 소주를 단번에 원샷했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단아하고 청초한 미인을 기대한 직원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평소 수수한 이수의 차림이나 얌전하고 참한 행실을 되짚어 보면 놀랄 만한 답이었다.
“오… 의외시다. 성격은요?”
오랜만에 술이 들어간 머리며 가슴이 뜨끈했다. 답지 않게 분위기에 휩쓸린 이수가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연인을 그렸다.
“음….”
언뜻 보면 차가워 보이지만, 실상 제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에게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닌 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그러나 상대의 실수나 어려움에는 넓은 아량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뾰족 튀어나온 날이 선 말들은 한때 이수의 마음에 상처를 내었지만, 지금은 돋아난 새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 평범한 말속에 녹여 낸 다정하고 달콤한 말들은 오직 이수를 향해 있었다.
이수가 부끄러운 듯 슬쩍 고개를 떨구며 미소 짓자 성화가 대단했다. 이시훈이요. 그렇게 말하면 끝날 일을 뱅뱅 돌려 말하려니 그것도 참 어려웠다.
“성격도…요.”
말을 마친 이수는 또 한 잔을 벌컥 마셨다. 오… 테이블 내의 탄성이 이어졌다. 어물쩍 넘기기는 했는데 팔불출처럼 입가에 매단 미소가 쉬이 가시지를 않아 이수는 몇 번이나 입술을 감쳐물고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뒤로 신혼인 조 대리의 연애에서 결혼까지 스토리와 연애 사업에 실패한 박 대리의 수난기, 가을 야구와 최근 개봉한 영화 등 얕고 시답잖은 대화가 줄줄이 이어졌다. 고삐 풀린 사람들처럼 신이 난 팀원들은 몇 주간 쌓인 한을 풀듯 끝이 없는 대화를 쏟아 내며 빈 소주병이며 맥주병을 살벌하게 쌓아 갔다.
술자리는 3차까지 이어졌다. 가볍게 한잔하고 끝을 내자는 말에 치킨은 손도 대지 않고 맥주만 마셨다. 결국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돼서야 우르르 빠져나온 직원들이 차례로 택시를 잡아탔다.
“책임님, 안 가세요? 먼저 타세요.”
택시 뒷문을 연 박 대리가 몸을 틀어 양보하자 이수가 손사래를 쳤다.
“먼저 가요. 전 여기서 가까워요. 집이 먼 사람이 먼저 가야지.”
안 그러셔도 되는데…. 재차 발을 빼려는 박 대리의 어깨를 두드린다. 꾸벅 고개를 숙인 박 대리가 뒷자리에 올라타자 이수가 얼른 문을 닫아 주었다. 곧 열린 창문으로 거하게 술이 취한 박 대리가 튀어나와 정수리 위로 손끝을 둥그렇게 모았다.
“책임님, 내일 잘 쉬시고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우렁찬 인사 소리와 함께 박 대리를 태운 택시가 멀어졌다. 훌쩍 몸을 돌린 이수의 몸이 휘청였다. 직원들이 다 떠날 때까지 말짱해 보이느라 잔뜩 힘을 준 다리가 맥없이 풀렸다. 승강장 벽을 간신히 붙잡은 이수가 술기운에 히죽 웃음을 흘렸다. 오늘 회식… 재밌었다. 재킷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더듬더듬 재킷을 더듬어 핸드폰을 꺼낸 이수가 시훈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회식ㅁ긏 여기 있여요
전화를 할 때만 해도 괜찮아 보였기에 위치를 보내 달랐더니 공유된 위치와 함께 오타 가득한 메시지가 적혀 왔다. 좀처럼 하지 않는 실수에 고개를 갸웃한 시훈이 골목 안으로 차를 들였다. 큰길에는 길을 따라 늘어진 택시에 차를 댈 만한 곳이 없었다. 이수가 보낸 장소를 확인하고 좁은 골목을 두어 바퀴 돌았을 때야 겨우 문을 닫은 상가 앞에 차를 세웠다.
8차선 도로가 깔린 큰길가와 다르게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오면 아직 노포나 허름한 간판을 단 식당이 많았다. 직장인들을 상대로 하는 대부분 가게는 문을 닫고, 가끔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만 불을 밝힌 채였다.
핸드폰으로 전송된 위치를 보면 이쯤인데 좀처럼 모습이 보이지 않아 결국 전화를 걸었다. 곧 익숙한 신호음과 함께 조용한 벨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소리를 더듬어 좁은 인도를 따라 걸었다. 인도 옆으로 주차된 차들이 죽은 듯 잠든 새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척에서 들리는 벨 소리에 담벼락 어귀를 살필 때였다. 긴 손가락 끝에 걸린 담배가 모퉁이 너머로 삐져나와 있었다. 서늘한 밤공기에 타 버린 담뱃재가 바닥에 툭 떨어질 때쯤 시훈을 등진 연인이 몸을 기울였다. 빼꼼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린 이수의 옆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또렷하게 실루엣을 그렸다.
“안…녀-엉.”
-안…녀-엉.
별안간 낯선 인사가 떨어졌다. 출발하기 전만 해도 말짱하게 들린 목소리는 아마도 긴장이 풀어지기 전 목소리였나 보다. 인사이트에서 회식이나 접대는 질리도록 했지만, 이수가 발음이 꼬일 정도로 취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마디에도 술기운이 잔뜩 묻어났다.
이수를 발견한 시훈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어린애 같은 인사에 픽 웃음이 샜다.
“안녀-엉?”
귀에서 핸드폰을 내린 시훈이 이수에게 다가갔다. 이수는 모퉁이 끝자락 오래된 시멘트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선 채였다. 시훈을 슬쩍 올려 보며 느긋하게 담배를 한 모금 빠는 이수의 표정은 장난스러웠다.
“…예쁘네.”
보자마자 저절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중요한 발표 때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써 입은 티가 났다. 감색 정장에 같은 색 타이와 시훈이 얼마 전 선물한 코트까지 맞춰 입은 이수는 한눈에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다만 이마를 덮은 흐트러진 앞머리, 위 단추가 풀린 셔츠나 매듭이 헐거운 타이는 단정한 차림의 이수에게서는 평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 좀 봐요, 많이 마셨어요?”
시훈의 손이 이수의 턱을 살짝 잡아 올렸다.
“…음… 소주 두 병, 500 두 잔.”
소주 두 병에 맥주 500 두 잔. 그동안 배운 게 있는데 소맥도 몇 잔 꺾어 마셨을 테다.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매번 정신 줄 부여잡고 술상무를 자처하던 과거와 달리 풀어진 기분에 넋을 놓고 마셨나 보다.
“주량 생각 않고 마시면 어떡해.”
시훈이 슬쩍 미간을 좁히자 아래로 속눈썹을 늘어트린 이수가 투정을 부리듯 중얼거렸다.
“…바깥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에도 시훈의 입꼬리가 비죽비죽 올라갔다.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훔치자 볼을 붉힌 이수가 손을 뻗어 시훈의 타이 끝을 매만졌다.
“…흠. 일은 다 했어요?”
“응.”
이수의 손에 힘이 실렸다. 타이를 당기는 손길을 따라 순순히 시훈이 거리를 좁혀 왔다.
“…….”
“…왜.”
서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는 나직한 목소리가 이수를 향해 부드럽고 달콤하게 묻는다. 가까이서 보니 취한 게 확실했다. 반쯤 감길 듯 말 듯 눈은 풀려 있고, 자꾸 실실 웃는 얼굴이 그랬다. 턱 끝으로 손가락에 걸린 담배를 가리킨 이수가 물었다.
“…한 대 줄까?”
“줄이라며.”
이수가 턱을 올려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빛은 받은 눈동자가 오롯이 이수를 향해 있었다. 이수는 처음 시훈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아침 일찍 사무실에 출근한 낯선 방문자는 누군지도 모를 자신을 향해 머뭇거림 없이 손을 내밀었다. 발걸음도 곧게 편 몸도, 눈을 맞추며 까닥 고개를 숙이는 모습도 색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뚜렷한 존재감이 공간을 압도했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새로울 것 없는 고인물에 누군가 첨벙 발을 담근 것이다. 이수는 시훈이 발을 담근 후에야 알았다. 제가 몸담은 바닥에 온통 오물이 고인 걸. 남자는 벼락을 치고 비구름을 몰아왔다. 태풍처럼 이수를 흔들었고, 휩쓸었고, 다 앗아 가 버린 줄 알았더니 오물이 씻긴 텅 빈 마음에 싹을 틔웠다. 결국, 사랑에 빠졌다.
“…그럼, 엄청… 참고 있겠네.”
“참고 있지, 지금도.”
담배인지, 키스인지, 섹스인지. 뭔지. 길게 담배를 한 모금 빨아낸 이수가 나머지 꽁초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시훈의 타이를 힘을 줘 끌어당기자 입술 사이에 겨우 종이 한 장만 한 틈이 생겼다. 입에 머금은 담배 연기가 시훈의 입술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이수가 손을 뻗어 목을 끌어안자 남자가 허리를 붙였다.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부드럽게 시훈의 혀를 빨았다. 농밀하게 각도를 바꿔 입을 맞출 때면 서로의 코끝이 부딪쳤다. 느리고 부드러운 키스였다. 마지막으로 젖은 시훈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인 이수가 살짝 턱을 당겼다. 맞닿은 중심부의 존재감이 묵직했다.
“사람 곤란하게 만드네…. 해 버릴 수도 없고. …잘생겨 가지고 말이야.”
이수가 부리는 주정이었다. 이마를 맞댄 이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멀쩡한 척하며 해롱거리는 이수는 차에 태우는 순간 곯아떨어질 터였다. 시훈의 입술 끝이 위로 쭉 올라갔다.
“뭘 해?”
“이시훈이를…… 화악… 잡아먹고 싶다고….”
거들먹거리며 센 척하는 표정이 볼만했다.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이 샜다. 아무래도 이렇게 붙어 있다가는 일을 내지 싶어 시훈이 몸을 물렸다. 동시에 허리를 곧추세운 이수가 사람 속도 모르고 히죽 웃음을 터트렸다. 묘하게 익숙한 그 얼굴은 백주홍이 보여 준 동영상 속 모습과 같았다. 잘 웃고, 마냥 행복해 보이던. 가슴을 찌르르 울리는 격통에 시훈은 잠시 넋을 놓았다.
“…….”
느릿느릿 감았다 뜬 눈이 빤히 시훈을 향했다. 곧 불쑥 몸을 붙인 이수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진짜 잘생겼어, 참. 새삼스럽게….”
툭. 그대로 이수의 머리가 시훈의 어깨로 떨어졌다. 제자리를 찾아든 것처럼 온전히 무게가 실렸다. 이마와 뺨을 비빌 때마다 뜨거운 숨이 코트 깃 너머 시훈의 목 언저리에 닿았다.
“와… 왜 이렇게 좋지…. 어떻게 볼 때마다 설레는지 모르겠어. 진짜… 이상해.”
등을 껴안은 시훈은 상체를 떼고 품 안의 상대를 내려 보았다. 얌전히 눈을 감은 이수는 미동도 없이 잠든 상태였다. 시훈은 이수의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나도 그래.”
그리고 이를 세워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를 살짝 깨물었다. 지금은 표현할 방법이 이뿐이었다.
어렴풋이 눈이 뜨였다. 블라인드 아래로 들이닥친 쨍한 빛이 시간을 가늠케 했다. 그에 반해 서늘한 공기와 하반신을 덮은 이불의 바르작거리는 건조함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품에 안겨 잠든 연인의 따뜻한 체온과는 비할 수 없었다.
어젯밤, 고대한 저녁 식사는 계획에 없던 회식과 야근으로 거하게 날렸고, 취한 이수를 집으로 데리고 와 침대로 뉘었을 때는 이미 새벽 3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연인과 긴 밤을 보내리라 다짐한 계획은 잠든 이수를 보고 포기했다. 집에 도착해 잠기운, 술기운이 여전한 이수의 몸을 씻기고 침대에 바로 뉜 뒤 시훈 역시 잠을 청했다. 이미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가 엄청나게 불편한 밤이었다.
손으로 머리를 괸 시훈이 이수를 내려 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살 넘겨 놓자 아름답고 단정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촘촘하고 긴 속눈썹과 반듯한 코를 지나 우물처럼 폭 파인 인중으로 시선으로 옮긴 시훈이 얼굴을 내렸다. 인중을 지나 버선코처럼 봉긋 솟은 윗입술이 괜하게 사랑스러웠다. 발간 윗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아랫입술을 머금자 이내 슬며시 입술이 열렸다. 침입을 허락한 연인의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혀를 밀어 넣었다. 머리를 괸 팔이 이수의 머리를 감싸고 아직 눈을 뜨지 않은 몸 위로 상대가 힘이 들지 않을 만큼 체중을 실었다.
이마에 도장을 찍듯 입을 맞추자 스르르 눈을 뜬 이수가 시훈을 올려 보았다.
“일어났어요? 속은. 괜찮아?”
조유진 대리가 돌린 숙취 음료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는지 속 쓰림은 없지만 대신 눈꺼풀이 무거웠다. 벽에 걸린 시계의 짧은 바늘이 9시와 10시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수는 잘린 기억을 더듬었다. 데리러 온다는 시훈을 회식 장소 근처에서 만났고, 담배를 태운 것 같은데, 어느새 욕실로 장소가 건너뛰었다. 씻을 때도 맥을 못 추는 저를 욕조에 앉힌 시훈에게 성기를 넣겠다고 우겼다가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또 기억이 뚝 잘렸다. 이수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 어제…… 하아… 미쳤….”
“주정 안 부렸어요. 주사 없던데.”
얌전하게 키스도 하고, 깜찍하게 잡아먹을 생각도 하고, 고백도 받았다. 애교라고는 없는 줄 알았더니. 뺨을 비비며 매달리는 모습이 주정이라면, 이 정도 거짓말은 사귀는 사이에 선의라고 할 수 있을 테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보인 눈이 미소를 띤 시훈과 마주했다.
“…정말요?”
불리한 기억만 남을 수도 있지 않나. 기억이 나지를 않으니 시훈의 말이 맞을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라면 저렇게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시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긴 한숨과 함께 얼굴을 가린 두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이수는 설핏 눈을 감고 느릿느릿 사정을 설명한다. 눈 위에 손만 올려놓으면 당장 잠이 들 것만 같다.
“…회식도 너무 오랜만이고, 발표도 잘 끝나서… 생각보다 많이 마셨나 봐….”
“아직 졸려요?”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에 점점 더 눈이 감겼다. 이수도 귀한 연차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평일에는 서로가 바쁜 몸이라 가끔 저녁 식사를 할 뿐 온전히 하루를 보내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지 시훈의 집에서 보내는 생활이 최근 패턴이었지만, 그마저도 출장이니 비딩으로 최근 몇 주간 얼굴만 간신히 보는 정도였다. 저는 이직 이후 바빴고, 본부장으로 승진한 시훈 역시 여름휴가는 반납한 지 오래라 간신히 날을 맞춰 낸 연차였다.
“…조금.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늘어지는 걸 보면 많이 마시기는 했나 보다. 눈꺼풀에 힘을 줘도 끔뻑끔뻑 눈이 감겼다. 그 모습을 바라본 시훈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일어나고 싶은데 눈은 감고 싶고…. 어렵네.”
“……이제 일어날 건데….”
잠에 취한 이수가 느릿느릿 말을 잇는 사이 시훈의 머리가 몸을 따라 내려갔다. 턱과 목 언저리 쇄골을 따라 입을 맞춘 입술은 예민한 성감대에서 멈췄다. 손등으로 눈을 비벼 잠을 깨워 보려는 이수의 노력이 무색할 때쯤 시훈이 서늘한 공기에 노출된 유두를 한입에 머금어 빨았다. 단번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자꾸 졸려서 어쩌지?”
걱정하는 투라기에는 어딘가 짓궂었다. 뭉근하게 번지는 쾌감을 애써 무시한 이수가 등을 돌렸다. 몸을 모로 돌린 이수는 잠기운을 몰아내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냥… 게으름 부리고 싶…… 아….”
시훈이 침으로 축축하게 젖은 돌기를 손으로 문질렀다. 피곤할 때 성감이 좋다는 통설이 틀린 말은 아닌지 시훈의 애무에 슬슬 열이 오르며 야트막하게 가슴이 부풀었다. 더운 숨을 흘리는 이수의 엉덩이에 차마 무시할 수 없는 시훈의 성기가 닿았다.
“어제부터 참았는데, 나만 그래요?”
보지 않아도 드로어즈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을 성기는 크기며 강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이미 이수의 드로어즈 밴드에 손을 걸어 놓은 시훈이 툭 허리를 치댔다.
그 때문에 중심으로 확 피가 몰렸다. 기대감에 엉덩이에 힘이 들어간 것도 같다. 결국 속절없이 엉덩이가 들리고 발밑으로 속옷이 구겨졌다.
“…….”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어앉은 시훈은 이수의 오금을 잡아 올렸다. 시훈이 굽혀 앉은 다리 위로 둥글게 몸이 말린 이수의 둔부가 올라왔다. 얼마 전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남겼던 자국은 이미 희미해진 뒤였다. 조금 더 허리를 밀어 올리자 단단히 몸을 받친 시훈에 의해 단박에 구멍이 드러났다. 자세가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왜… 이렇게….”
“…….”
저의를 알 수 없어 이유를 묻는 말소리가 잠결에 늘어졌다. 눈을 뜨기는 했어도 침대로 빨려 들어갈 듯한 몽롱한 정신에 물을 한 잔 마셨으면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이수의 정신이 번쩍 뜨였다.
“아흐…! 하…!”
분명 혀였다. 물컹하고 뜨거운 혀가 점막을 핥았다. 부드럽게 입술로 빨아들이는가 싶더니 거세게 빨다 못해 뾰족하게 세운 혀가 구멍 사이를 향했다. 시훈은 뻗어 온 이수의 손목을 잡아 시트 위로 굳세게 눌렀다. 시트를 그러쥔 이수의 손이 힘을 주었다 풀었다 하며 긴장과 쾌감을 삭이는 동안 여린 점막 역시 시훈의 혀가 드나들 때마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흐으… 응…….”
몸 위에는 창 모양으로 뻗은 햇살이 당도해 있었다. 블라인드를 조금만 올리면 싱그러운 아침이었다. 남들은 출근하고 학교에 가고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부터 섹스라니, 이미 붉힌 얼굴이 더욱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시훈의 콧대가 회음부를 누르며 욕심껏 안쪽을 파고들었다.
“…하… 으응….”
이미 발기한 성기 끝에 고인 체액은 조금만 건드리면 뚝뚝 배 위로 떨어질 기세였다.
“좋아?”
이수의 매끄러운 회음부에 혀를 세운 남자가 눈을 맞추며 그렇게 물었다. 차마 답할 수가 없어 이수는 이를 사리물었다. 묘한 배덕감에 더 흥분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반듯하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남자가 제 구멍을 핥고 있는 사실이 말이다. 어딘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기분이었다.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는 이수와 달리 남자는 여유롭기만 했다. 울상이 된 이수를 확인한 시훈은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이내 시트를 틀어쥔 연인의 손을 풀고 시훈이 손가락을 얽었다. 예민한 점막을 시훈이 빨아들이자 어김없이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
물론 손을 잡아 인도하는 이가 시훈이라면 불구덩이라도 같이 뛰어들 생각이지만 이렇게 저 혼자만 미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한쪽에 옅은 선이 그려진 눈이 원망을 담아 시훈을 바라보았다.
“…아흐…… 그만…!”
간신히 삐져나온 소리 뒤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홀린 사람처럼 얼굴을 파묻은 시훈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맞추며 여린 회음부에서 고환과 기둥까지 이어진 가벼운 입맞춤은 귀두 끝을 입에 물고야 끝이 났다. 쭙 소리가 나도록 빨아낸 귀두를 두고 시훈이 이수의 얼굴 옆으로 팔을 세워 눈을 맞췄다. 원망이 깃든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때까지도 힘껏 깨물고 있는 이수의 아랫입술을 시훈이 엄지 끝으로 훑어 냈다. 손길에 풀린 아랫입술은 한눈에 봐도 도톰하게 부풀어 있었다. 이내 미간을 좁힌 남자의 낮은 음성이 이수에게 떨어졌다.
“깨물지 마.”
“…….”
“상처 내지 말자. 누가 보기만 해도 아까울 지경인데.”
정작 당사자는 던져 놓고 만 말이지만 화르르 얼굴에 열이 올랐다. 발개진 얼굴을 감추기도 전에 구멍 입구에 뭉툭한 끝이 닿았다. 밤새 참은 시훈의 욕구가 이수를 두드리는 순간이었다. 조심스럽게 끝을 잡아 누르자 입구가 벌어지며 구멍 안으로 귀두 끝이 들어왔다.
…아. 시훈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몸이 반절로 접힐 듯 무게가 실릴수록 꾸역꾸역 진입하는 시훈의 성기를 따뜻한 내벽이 감싸 왔다.
“하아….”
살짝 턱이 들린 이수가 꼴깍 침을 삼켰다.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시훈의 허벅지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몸 안을 가득 채워 들어오는 순간이 좋았다. 빡빡한 내벽에 느리게 삽입한 시훈이 몸을 겹쳐 왔다. 살포시 눈을 뜨자 살짝 벌린 입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길고 진득한 키스가 이어졌다. 성기의 이물감이 익숙해질 무렵 남자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린 다리 사이로 힘이 실릴 때마다 얕은 쾌감이 서서히 머리를 치들었다. 이미 발기한 이수의 성기가 단단한 복근에 스치며 고여 있던 프리컴이 기둥을 따라 흘렀다.
“흐으… 읏….”
입매에 남긴 입맞춤을 끝으로 시훈은 이수의 머리 양옆으로 손을 짚었다. 느릿하게 구멍 입구까지 아슬아슬하게 뺀 성기를 퍽 소리가 나도록 단번에 삽입했다.
“아흑…!”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다. 닿을 듯 말 듯 애를 태우며 짓눌러진 성기가 뿌리 끝까지 박히자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반사적으로 구멍을 잔뜩 조여들자 시훈에게서도 나지막한 신음이 이어졌다. 다시 한번 뒤로 물린 성기에 뻑뻑하게 달라붙은 내벽이 딸려 나갔다. 머리가 쭈뼛 설 만큼 야릇한 감각이 일었다. 별수 없이 잘게 떨리는 허벅지를 오므리자 시훈이 몸을 내려 관자놀이에 입을 붙였다.
“뺄 때가 좋아요?”
더운 숨을 머금은 목소리가 어쩌면 이다지도 다정한지, 목을 울리는 웃음소리에 결국 귀 끝이 발개졌다.
“으흣….”
놀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궁금해서 묻는지 모를 투였다. 재차 허리를 치대며 묻자 이수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들은 시훈은 느리게 빼고 내벽을 짓이기듯 빠르게 안을 쑤셨다.
“흐읏…, 아…!”
고개가 훌쩍 넘어가며 발기한 이수의 성기가 크게 꺼덕였다. 슬슬 불을 피운 몸에 기름을 끼얹은 것 같은 열기가 일었다. 순간 시훈의 미간에도 주름이 졌다. 꽉 죄는 구멍에 속도를 조절해 보려던 계획이 희미해졌다. 허리를 세운 시훈이 이수를 내려 보며 본격적으로 속도를 더해 갔다.
“하… 으….”
밑동까지 완전히 들어간 성기는 빠지기 무섭게 곧장 깊숙이 박혔다. 딱히 들어오고 나가는 순간을 굽어볼 여지도 없이 시훈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립선을 지난 성기가 파고들 때마다 발끝부터 저릿한 감각이 온몸을 관통했다.
몇 번이나 몸을 섞었지만,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한 느낌만은 좀체 적응할 수 없었다. 통제를 벗어난 쾌감에 이수가 허리를 휘었다.
“아…! 하… 윽! 흣…!”
쑤실 때마다 터지는 신음에 시훈이 설핏 미소 지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이수의 숨결이 시훈의 인내심을 앗아 갔다. 있는 힘껏 허리를 치댈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눈매나 베개에 짓이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혀로 핥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이수의 안은 축축하고 따뜻했다. 시선을 내리자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은 꼭 제 성기의 모양대로 벌어져 있었다. 거세게 맞붙을 때마다 굵은 기둥을 씹어 대는 구멍에 온종일 넣고 있는 불순한 상상을 떠올렸다.
예쁘게 모양을 세운 이수의 성기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시훈이 손을 뻗어 요도 위로 손바닥을 붙이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줄줄 정액이 흘렀다.
“으…! 흐응……! 하아…!”
바르르 떨리는 몸이 쾌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세게 뒤척였다. 시훈의 성기가 빠지는 줄도 모르고 웅크린 몸이 모로 뉘였다. 시훈이 이수의 뒤로 몸을 붙여 누웠다. 무릎이 접힌 이수의 다리를 가슴에 닿을 만큼 밀어 올린 시훈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구멍 안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흐읏….”
시훈의 허리 짓이 느릿느릿 이어졌다. 엉덩이가 시훈의 하체와 맞붙을 때마다 철썩철썩 낯부끄러운 소리가 났다. 사정의 여운에 한껏 예민해진 내벽은 넣기가 무섭게 제 것인 양 물어 오다 조금만 빼내려 하면 욕심껏 잡아당기며 시훈을 붙들었다. 이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과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뒷구멍으로 느끼는 쾌감을 쫓아 온 신경이 한곳에 집중된 탓이었다.
“으… 응….”
달싹이는 입술과 시트를 부여잡은 손은 분명 시훈을 갈구하는 몸짓이었으나 두 번은 솔직해지고 싶지 않은지 이수는 좀처럼 입을 떼지 않았다. 깊이 파고든 성기가 울퉁불퉁한 내벽에 쓸리며 애가 타도록 느리게 빠져나갔다. 이수가 별수 없이 꽉 입술을 깨물자 이를 박은 입술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입구 끝까지 몸을 뺀 시훈이 단번에 허리를 쳐올리고 뚝 움직임을 멈췄다.
“흐으… 왜….”
몸을 틀어 시훈을 뒤돌아보는 이수는 울상이었다. 눈매와 코끝이 발갛게 물든 이수를 보고 순간 몸속의 좆이 꺼덕였다. 시훈이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후우. 정말….”
이수의 난처한 얼굴을 볼 때면 가끔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다. 평소 이지적이고 차분한 모습과 다르게 머뭇대거나 애걸하는 정이수 사이의 갭이 너무 컸다. 시시각각 변하는 이수의 낯을 내려 보던 시훈이 제 아랫입술 깨물어 보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하지 마. 상처 나잖아.”
흡사 세 살 어린애를 다루듯 이참에 버릇을 고쳐 놓겠다는 다짐처럼 들렸다. 이수는 슬쩍 울화가 치밀었다. 시훈이 놀리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섹스할 때만큼은 매번 시훈의 페이스에 말리는 제가 문제였다.
“자꾸… 하아….”
베개에 얼굴을 묻은 이수는 아랫입술을 풀지 않았다. 입술을 풀기만 하면 시훈이 얼마든지 파고들 걸 알면서도 괜한 오기가 일었다.
이수가 접혀 올라간 다리를 들어 시훈의 엉덩이 위에 걸쳤다. 비스듬히 몸을 뉜 이수의 체중이 조금 시훈에게 실렸다.
“…하아…….”
나지막한 신음은 시훈에게서 쏟아졌다. 햇살 아래 하얗고 늘씬하게 뻗은 몸이 유연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앞뒤로 엉덩이를 당기고 물릴 때마다 벌어진 구멍이 부드럽게 시훈이 좆을 삼키고 내뱉었다. 골반을 안쪽으로 둥글게 말아 풀어내는 움직임은 지나치게 야살스러웠다.
파르르 눈을 감은 이수가 입술을 가린 제 손등을 잘근잘근 깨물며 가득 삼킨 좆을 조였다 풀었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허리부터 뾰족하게 서 있는 유두와 뺨을 붉게 물들인 모든 것이 자극적이었다. 끙끙대며 참는 신음이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아흣… 하… 아… 아….”
시훈이 발기한 이수의 성기를 쥐었다. 그러자 이수가 앞으로 골반을 움직여 시훈의 손에 허리를 털고 뒤로는 구멍 속 성기를 쥐어짰다.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쾌감뿐이었다. 따뜻하고 큰 손이 압박하듯 성기를 쥔 채 낭창하게 흔들리는 몸을 관조했다.
“아… 흑! 흡….”
움직이면 곧 사정할 걸 알지만, …부족했다. 안쪽에서 절절 끓어오르기만 할 뿐 쉬이 해갈되지 않는 욕망에 미칠 것 같았다. 주도권을 빼앗으려는 패기는 어디 가고 점점 패색이 짙게 드리웠다.
“흐… 으….”
손을 뻗어 몸을 뒤튼 이수가 물기 가득한 눈으로 시훈을 돌아봤다. 화답하듯 가볍게 허리를 치대자 애가 탄 이수가 머리 뒤로 손을 뻗어 왔다.
“이시훈….”
“…….”
길게 뻗은 목이 당장 숨이 넘어갈 듯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내 눈을 맞춘 이수가 속삭였다.
“…이제, 박아 줘…… 세게… 빨리….”
오기를 버린 목소리가 파드득 떨렸다. 그래. 다정한 대답과 함께 단번에 성기가 깊숙이 박혔다.
“…아!”
이수에게 환희와 같은 쾌감이 찾아왔다. 몸을 일으켜 앉은 시훈은 제 하체에 호기롭게 발을 건 이수의 다리를 끌어 어깨에 걸쳐 놓았다. 매끈하게 근육을 늘인 허벅지를 붙든 시훈이 이수의 아래로 무릎을 꿇어 앉았다.
“…사람을 좀… 엉망으로 만드는 것 같아, 정이수는.”
정상위가 아닌 모로 누운 제 몸에 엇갈려 들어오는 생경함은 제가 허리를 움직일 때보다 한층 자극적이었다. 시훈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이수가 느끼는 지점을 집요하게 짓이겼다. 반복해서 들이닥치는 쾌감에 허리를 휘기 무섭게 배가 움푹하게 파였다. 제 몸인데도 멋대로 쾌감에 반응하며 몸을 뒤틀었다. 생생히 느껴졌다. 울퉁불퉁한 내벽이 시훈의 성기로 가득 찬 빠듯함, 뛰는 심장, 거친 숨소리, 옴찔거리는 구멍과 자신을 향한 열기까지.
시훈이 빠르게 허리를 털었다. 찌걱이는 소리와 더불어 거친 움직임이 이어졌다.
“아…! 흐윽…!”
또다시 이수의 아랫배가 경련했다. 시훈의 어깨에 걸쳐 있는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시훈과 손바닥을 맞잡고 깍지를 낀 손이 더없이 세게 맞물렸다. 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시훈의 허벅지 위로 손톱을 세웠을 때 단단한 성기가 가장 깊숙한 곳에 닿았다.
“으… 읏……! 하윽…!”
“윽…!”
손 하나 닿지 않은 채로 이수가 묽은 정액을 쏟았고, 수축한 구멍이 시훈이 성기를 꽉 죄었다. 더없는 만족감과 함께 몸속에 더운 액체가 울컥 쏟아졌다.
시훈의 어깨에 걸쳐 있던 다리가 시트 위로 내려왔다. 내내 벌어져 있던 다리와 골반이 얼얼했다. 연결된 채로 이수의 뒤쪽에 몸을 뉜 시훈은 이수의 허리를 끌어당겨 틈 하나 없이 몸을 밀착했다. 따뜻한 시훈의 체온이 좋았다.
후희는 길었다. 시훈은 오랫동안 성기를 삽입한 채 느릿느릿 움직이며 이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안쪽에 고인 정액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밀려 나왔다. 질척이고 낯부끄러운 소리도 함께였다. 그제야 스스로 허리를 흔들었다는 부끄러움이 와르르 밀려왔다. 이수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무작정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는 눈을 감았다.
“괜찮아요?”
이수의 뒷덜미에 코를 세워 가볍게 입맞춤한 시훈은 머리카락과 귀에도 입술을 묻어 왔다. 더없이 행복하고 나른한 목소리에 긴장이 풀어졌다.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더 자요. 늦으면 깨워 줄게.”
어깨 위로 이불이 덮였다. 구멍에서 천천히 성기를 뺐다. 그때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이수가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시훈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었다. 탈력감에 반쯤 눈이 감긴 채였다. 빼지 말까. 시훈이 웃음기 밴 목소리로 물었는데 아마 고개를 끄덕인 것 같다. 이 또한 게으름 때문이라 변명하고 싶었다. 기분이 좋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밝히는 것 같아서.
2시간 뒤 잠에서 깬 이수가 욕실에서 몸을 씻고 나오자 시훈이 입을 옷을 내어 줬다. 도톰한 니트와 면바지가 조금 크기는 했지만, 현관을 나서기 전 전신 거울에 비춘 모습은 그럭저럭 봐 줄 만했다. 집 근처에서 해장 겸 점심을 먹고 난 후 시훈은 무작정 이수를 차에 태웠다. 데이트를 하러 가자는 명목이었으나 평소와 다르게 서두르는 모습이 역력했다.
“우리, 어디 가요?”
차에 탄 이수가 목적지를 감춘 시훈을 바라봤다.
“가 보면 알아요.”
데이트를 계획한 시훈은 애초에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내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지는 주소로 입력된 탓에 강원도로 추측될 뿐 정확한 도착지를 알 수는 없었다.
평일이라 서울 시내를 지나자 막히는 곳 하나 없이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빠르게 도로를 질주했다. 언뜻언뜻 보이는 노랗고 빨간 나뭇잎들이 산이며 나무를 물들이고 있었다. 이수는 넋을 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여행이라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그동안 회사와 집만을 오가는 생활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삶이었기에 출장이나 경조사가 아니면 좀처럼 타 지역으로 이동할 일이 없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여행을 간 일이 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아마 대학교 졸업 여행이 마지막이었나….
출발한 지 1시간쯤 지나 휴게소에 정차했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 차에 올라타자 기다리고 있던 시훈이 호두과자 봉투를 내밀었다.
“이런 거 잘 안 먹어요? 심심할까 봐 샀는데.”
고소한 빵 냄새가 차 안을 메웠다. 호두과자는 방금 구웠는지 따뜻했다.
“언제 사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촬영 갈 때 직원들한테는 종종 사 줬던 것 같은데.”
촬영 당일에는 식사를 거르는 일이 습관처럼 굳어진 탓에 간식도 입에 대기를 주저했었다.
“기분 내려고 샀어요. 서로 바빠서 여름휴가도 못 가고.”
대신 여름 내내 한강을 많이 찾았다. 늦은 밤 저녁을 먹고, 길을 따라 걸으면 선선한 밤바람을 맞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다가 손을 잡고, 사람들 눈을 피해 키스도 했다. 심야 영화관이나 야외 영화관도 몇 번 갔는데, 데이트로 영화를 보러 간 건 시훈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이수가 봉투를 열어 호두과자를 한 입 깨물었다. 소가 입안에서 뭉개지며 예상대로 달달한 팥과 고소한 호두가 씹혔다. 뻔히 아는 맛인데도 시훈의 말대로 기분 때문인지 맛있었다. 단 음식은 안 좋아했는데 이수는 저도 모르게 취향이 바뀌었나 싶었다.
시동을 켜기 전 시훈은 볼이 볼록 튀어나온 이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느새 나머지 호두과자를 입에 넣은 볼이 양쪽으로 빵빵해졌다.
“맛있어요?”
오물오물 동그란 입술이 멈추더니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 여기요.”
권할 생각도 못 한 자신을 탓한 이수가 얼른 호두과자 봉투를 내밀었다.
“아.”
“…….”
이수는 시훈이 생각보다 뻔뻔한 구석이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몸을 기울여 입을 벌리는 모습에 이수가 내민 봉투를 도로 품에 안고 전방으로 눈을 돌렸다. 비실비실 새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시훈은 대놓고 조금 더 입을 벌렸다. 그저 장난일 뿐인데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에 호두과자를 쉽게 포기하기가 힘들어졌다.
“연애하자며.”
태연한 태도에 이수는 고민에 빠졌다. 분명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데 쉽게 응수를 못 하겠다. 아… 원래 시훈은 이런 스타일을 좋아했나. 아니, 연애하면 이런 일도 하고 그러는 건데 제가 너무 뻣뻣하게 구는 건 아닌지 찰나에 오만 가지 생각이 우후죽순 솟아났다.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기는 했다. 과정 없이 숭덩숭덩 구멍 난 관계만 맺어 본 이수에게 갑자기 큰 숙제가 떨어진 느낌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예의나 기본적인 매너를 갖추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연인을 대하는 일에는 이렇듯 한 번씩 버퍼링이 걸렸다. 오늘 새벽에 시전한 취중 진담이 기억에 없는 이수로서는 더 그러했다.
“…….”
얼어 있는 이수를 보고 결국 시훈이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 먹어요. 괜히 놀리고 싶었어. 안 해 줄 것 같아서.”
시훈은 깔끔한 이실직고 후 이수의 볼록 튀어나온 볼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꾹. 이수가 눈을 굴려 사이드 미러에 비친 얼굴을 봤다. 출근할 때와 달리 말끔히 넘기지 못한 앞머리가 덥수룩하게 이마를 덮은 것도, 양 볼이 호두과자로 동그랗게 부푼 모습도 먹을 만치 먹은 나이에 안 어울리지 싶었다. 그건 그렇고… 고작 호두과자를 두고 무슨 생각이 이리도 많을까.
“아마 40분 정도면 도착할 거예요.”
기분 좋은 눈웃음을 남기고 시훈이 다시 핸들을 잡았다. 휴게소를 빠져나온 차가 길게 뻗은 도로를 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쑥 시훈의 입 앞에 반으로 가른 호두과자가 내밀어졌다.
“…아. 해요.”
곁눈질로 옆을 살피자 시선을 떨군 이수가 밉지 않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오기 생기게 왜 그래요? 안 해 줄 것 같다느니….”
이번만은 의도와 무관하게 말린 이수를 보고 시훈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내 벌린 입으로 호두과자가 들어왔다. 작은 조각을 시훈은 참 여러 번 씹었다. 그리고 따뜻한 목소리로 짧은 감상을 전했다.
“내가 먹어 본 호두과자 중에서 제일 맛있어.”
“…….”
순간 열이 올랐다. 이수는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나머지 반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수 역시 살면서 먹어 본 호두과자 중에 제일 맛있었다.
시훈의 말대로 휴게소에서 40분, 서울에서 2시간을 달려 차가 도착한 곳은 야트막한 산 정상에 위치한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은 해외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곳으로 일찍이 여러 매스컴에 소개된 곳이었다.
“아… 여기.”
한 달여 전, 오피스텔에서 시훈과 함께 여행 프로그램을 봤다. 별생각 없이 채널을 돌려 보다 미술관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봤다. 지나가는 말로 가 보고 싶다고 중얼거린 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둘러보고 근처에서 저녁 먹고 가요.”
날이 좋은 평일의 미술관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주말에는 관람객이 많은 모양이지만, 평일 낮의 미술관에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없었다. 주차장부터 입구를 지나 산책로를 따라 올라갔다.
이윽고 마주한 본관은 건축 재료를 고스란히 노출시킨 미니멀한 형태로 중앙에 자리해 있었다. 본관을 중심으로 각각의 주제를 가진 별관이 연결된 구조였다. 발길과 시선이 닿는 족족 아름다웠다. 미술관을 감싼 산의 능선이 그림 같았고, 건물 밖으로 두른 수변이 맑은 하늘과 자연을 거울처럼 투영했다.
코스를 따라 미술관 밖을 둘러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공간 안으로 쏟아지는 빛에 작은 감동을 받았다. 마치 명상을 요하듯 정적인 공간은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단둘만 있는 공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작품을 감상했다. 관람하는 내내 대화는 없었지만, 가끔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쥐거나 등 뒤로 손을 뻗어 손가락을 걸었다.
본관과 별관을 차례로 둘러본 두 사람은 미술관과 카페가 연결된 테라스에 마주 앉았다. 곧 각자의 취향을 반영한 커피 두 잔이 놓였다. 하늘과 숲을 제 것처럼 머금은 수변에 바람이 불 때마다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얼음이 가득 든 커피로 목을 축인 이수가 핸드폰으로 뭔가를 검색했다. 딱히 감출 생각이 없는 액정 화면 위로 특산물을 검색한 화면이 떠올랐다.
“…복숭아 빵. 이거 사 가야겠다.”
어때요? 이수가 화면을 돌려 시훈에게 찾아낸 이미지를 보여 줬다. 보송보송한 복숭아 모양의 빵은 선물용으로 돌리기 적당해 보였다.
“예쁘네요. 회사 사람들 줄 거예요?”
“네. 다들 여름휴가 다녀올 때마다 뭘 사 와서요.”
인사이트 시절을 생각하면 의외의 모습이었다. 이수는 이직을 하고 난 후에 날개를 단 것 같다. 봄부터 시작된 정산 캠페인은 이수의 책임하에 인사이트 기획팀과 더불어 순항 중이었다. 기획부터 촬영, 시사를 마치고 마지막 온 에어 되는 과정까지 이수는 과연 대행사에서 바라는 이상적인 광고주였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거나 소위 갑질을 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제안에 대해서는 열린 시각으로 귀를 기울였다.
일도 일이지만 무엇보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도 잘 지내는 듯 보였다. 가끔 식사 시간이나 커피 타임에 전화를 걸면 수화기 너머로 함께 있는 이들이 꼭 이수를 찾았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좋아요. 즐거워 보이고.”
“나이대하고 성향이 비슷해서 좋아요. …가끔 난감하기는 해도.”
기념품을 판매하는 위치를 검색하며 답을 하던 이수가 말꼬리를 줄였다.
“왜?”
대번에 걱정하는 목소리가 이유를 물었다. 핸드폰을 밀어 놓고 턱에 손을 괸 이수가 빨대로 얼음을 헤집었다. 괜히 말을 꺼냈나 후회를 하는 기색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뭉뚱그려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애써 가벼운 투로 입을 뗐다.
“그냥… 우리 나이에 묻는 말들 있잖아요.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 결혼 생각은 있는지….”
대체로 젊은 인력으로 구성된 팀 특성상 종종 결혼이나 연애에 관한 질문이 따랐다. 어제 회식만 해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그리 흘렀다. 우습지만 업무에 관한 한 막힘없이 답을 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질문에는 시원시원하게 답을 할 만한 소질도 없거니와 능력도 순식간에 소멸했다. 이수가 애매하게 말꼬리를 늘이자 시훈이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음, 혹시 나 없는 사람 만들었어요?”
이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니요, 있다고 했는데 다들 안 믿어요. …내가 좀 재미없어 보이나 봐.”
‘에이- 책임님두!’ 터무니없는 고백을 들은 것처럼 손을 내젓던 조 대리가 떠올랐다.
시훈은 사실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대도 그리 서운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서 애인이 남성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난처한 표정을 보고 시훈은 대충 상황을 짐작해 봤다.
“누구 소개해 준다고 해요?”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말하다 보면 꼭 나와요.”
이수가 고개를 저었다. 제게 말을 하지는 않지만 분명 소개팅 제안이 줄줄이 이어졌을 테다. 아니, 어쩌면 사내에서 누군가 이수를 흠모하고 있다고 해도 딱히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얼마 전 인사이트를 방문한 포스트 프로덕션 감독을 떠올린 시훈이 얼굴을 찌푸렸다. 시훈과는 T기획 시절에도 몇 번 일을 한 전적이 있고, 인사이트에서는 이수와도 캠페인 촬영을 경험한 감독이었다. 미팅을 마치고 우연히 로비에서 만난 감독과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이수의 퇴사 소식을 접한 그가 미련 그득한 얼굴로 시훈에게 물었다.
‘혹시…, 정이수 팀장님이요. 연락처 바뀌시고 그런 건 아니죠?’
‘무슨 일로.’
‘아… 인사도 못 드리고 아쉬워서요.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은데.’
촉이 왔다. 일그러진 표정을 순식간에 갈무리한 시훈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했다.
‘정 책임님, 사적인 연락은 답신 잘 안 하세요.’
…같은 말도 안 되는 답을 줬더랬다. 한마디로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차라리 ‘내가 정이수 애인입니다.’ 소개하든지 아니면, 이수의 등 뒤에 ‘애인 있습니다.’라고 써 두고 싶은 바보 같은 욕망이 불쑥 치솟은 날이었다.
이수가 시훈의 눈치를 살폈다. 망설이듯 입술을 감쳐물기를 몇 번, 말이 나왔으니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정산 그룹이 시훈의 동생인 시연에게 승계될 예정이고 수순을 밟아 가는 중이라는 기사가 얼마 전 발표됐다. 일개 직원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기사에는 이시연 상무의 약혼 소식과 함께 재벌가 혼맥이 언급됐다. 저야 홀어머니를 부양하는 형편이라 닦달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시훈에게는 집안이 기대하는 바가 있으리라.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평범한 집안은 아닌 탓에 팀원들에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혹시라도 제 존재가 시훈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당연하게 그런 생각이 스쳤다.
“시훈 씨는… 집에서 안 여쭤보세요?”
“뭘요?”
웃고는 있는데 이수의 표정이 영 어색했다.
“…상무님, 결혼 준비하신다고 해서요. 그러면 보통 윗사람이 먼저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어른들은 그런 말씀 하시잖아요. 하다못해 만나는 사람은 있느냐고….”
“아… 재벌가 혼맥.”
의미를 이해한 시훈이 혼잣말을 내뱉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커피를 마신 시훈은 잔잔히 물결이 이는 수변을 내려 봤다. 가만한 정적이 흘렀다.
이수는 후회스러웠다. 괜히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는 불편하더라도 털어 버리자는 마음이었는데, 어쩐지 분위기만 이상해졌다.
서운하고 무례하다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귀는 상대가 할 질문이라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정산에 이직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시훈을 단념했었다. 포기해야 할 사람이라고. 그가 제게 길을 만들어 주고 품을 내어 주기 전까지 그랬다. 시훈은 알면 알수록 소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매일 이수의 하루를 물어 주고 세심하게 주위를 살폈다. 시훈을 만나기 전에는 느끼지 못한 편안함과 안정감이 하루하루 쌓여 갔다.
그런데 이수는 시훈이 제 사람인 걸 알면서도 가끔 사옥에서 회장님을 뵙거나 회의실에서 이시연 상무를 대면할 때면 어쩔 수 없이 그의 배경을 떠올리고 만다. 이직을 한 후 곤혹스러웠던 순간이었다.
시훈이 이수의 손을 내려 봤다. 아무래도 실수를 했다 느끼는지 초조한 손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빨대를 빼고 남은 종이 껍질을 두 번째 손가락에 둘둘 감았다가 차례로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에 감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시연이가 자식 노릇을 엄청 잘하고 있어요. 형이나 나하고 다르게 기대만큼 욕심도 있고. 충분히 누리고 살 생각도, 자격도 있는 애예요. 부모님도 그렇게 이해하고 계시구요. 그리고….”
“…….”
잠시 뜸을 들인 시훈이 담담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 만나는 거 알고 계세요. 모르는 척, 말씀 안 하시는 거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명절이나 생신 때도 찾아뵙지 않을 정도로 반목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비슷했다. 경로는 알 수 없지만 독립 후 종종 시훈의 생활이 보고된 걸로 안다. 물론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부모의 불안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걸 알아 시훈은 이를 묵인해 왔다. 이는 부모님과 시훈 사이에 타협점이 되었다.
그러니 이수와의 관계 역시 알고 계시리라 짐작은 했지만 2주 전, 한남동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시훈은 조금 당황을 했다.
시연의 결혼 문제로 본가에서 저녁을 먹던 날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서재로 등을 돌린 아버지와는 회사에 관한 표면적인 대화만 나누었다. 내심 시훈은 결혼에 관해 말이 나오지 않을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간 참이었다.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는 시훈에게 어머니는 건강 보조 식품이며 직접 만든 반찬을 식탁 위로 밀어 주었다.
‘힘드니까 하지 마세요.’
무뚝뚝한 아들의 염려에 반찬이 담긴 종이 백을 재차 여민 어머니가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시훈아. 넉넉히 만들어서 넣었어. 그… 같이 밥 챙겨 먹으라고.’
‘…….’
‘데려오라거나… 편하게 보자고는 말 못 해. 지금은… 그래.’
아무 말도 못 하는 아들에게 어색하게 팔을 둘러 안는 어머니의 등을 시훈은 그저 안아 드렸다. 이수에 대해 아버지와 시연이도 알 만큼은 알고 계시겠구나. 그런데도 모르는 척, 그렇게 살아가는 게 서로를 위해서 최선의 방법이라고 이해, 아니, 그냥 인정하기로 한 것 같다.
이수의 눈동자가 시훈과 마주했다. 아… 작게 입이 벌어졌다. 시훈이 손끝을 테이블로 가만히 두드렸다. 무턱대고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덮어 두고 싶지는 않았다. 이수가 혹시 다른 오해를 하지 않도록,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설명하고 싶었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이런 배경이 이수에게 부담이 돼서는 안 됐다.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아요. 근데, 형 그렇게 가고… 스무 살 이후로 나도 거의 연 끊다시피 살았잖아. 뭐랄까… 어떻게 해야 서로 숨 쉬고 살 수 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거 같아요. 특히 아버지는… 자식 이기시려다, 잃으신 분이니까.”
“…미안해요.”
상대의 아픈 구석을 들춘 꼴이었다. 시훈은 오히려 담담했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지금처럼 나만 봐요. 그런 문제로 힘들게 안 할 거고, 지켜 줄 자신 있어요.”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린 시훈이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이수의 손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혹시 드라마 찍을까 봐 걱정한 건 아니죠?”
“…….”
내뱉은 농담에 이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고개를 틀어 감추자 시훈이 따라와 눈을 맞췄다.
“정말, 걱정했어요?”
웃음기 밴 목소리가 놀리는 투라 이수는 조금 약이 올랐다. 아침부터 속수무책으로 백전백패였다. 손가락에 둘둘 감은 종이 껍질을 빼고, 이수가 의자를 물렸다.
“…가요, 복숭아 빵 사러.”
성큼 앞서 걸으며 손부채질로 열을 식혔다. 빠른 걸음으로 테라스를 벗어난 이수가 뒤를 돌아봤다. 뒷주머니에 뭔가를 챙겨 넣은 그가 한걸음에 이수를 따라잡았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이수의 어깨에 팔을 두른 시훈이 살포시 머리를 끌어당겼다. 옆머리에 시훈의 작은 입맞춤이 떨어졌다. 밖에서 할 만한 스킨십으로는 아슬아슬했지만, 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제가 떠올린 상상들이 창피해서 남은 자괴감을 떨치지 못한 탓이었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드라마를 찍을까 봐 걱정을 했다. 혹시 집무실로 호출돼 봉변을 당하려나…. 그러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대응 가능한 시나리오를 세워 봤었다.
먼저 사귀냐고 물으면 네, 라고 솔직하고 당당하게 대답하고, 싸대기나 물세례가 날아오면 싸대기는 손으로 막고, 물세례는… 치욕적이기는 하나 상처가 나지는 않을 테니 참아 볼 요량이었다. 돈 봉투를 들려 주면 놓고 오면 되고, 혹시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이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더랬다. 그동안 바득바득 자존심을 세우며 살았던 날이 우스웠다.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구나. 이시훈을.
“…….”
곁에서 걷는 시훈을 흘깃 올려 본 이수가 귓속말을 전하는 이처럼 손을 올려 벽을 세웠다.
“왜?”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멀리 카페에서 일하는 이들뿐이라 시훈이 눈썹을 들썩였다. 그리고 다른 설명 없이 여전히 고개를 뺀 이수를 향해 귀를 내주었다. 이수가 시훈의 귓가에 손을 붙이자 작은 비밀 공간이 생겼다.
쪽. 볼에 입술이 닿았다.
“…….”
“…안 가요?”
“…….”
가끔 가슴이 한껏 부풀어 숨을 쉬기 힘들 때가 있다. 시훈이 저를 말없이 바라보거나 귀를 기울이며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웃을 때, 사랑을 나눌 때면 그러했다. 만약 마음에도 크기가 있다면 이수는 제 마음이 우주만큼 끝이 없었으면 했다. 시훈에게 받는 사랑이 벅찬 이유였다.
이수가 우뚝 길 한가운데 멈춘 시훈의 팔을 끌었다. 곧 보폭을 맞춘 그의 손이 이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조용하고 한가한 길에서 새소리와 바람이 지나는 소리만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차에 올라탈 때쯤 산 너머 노을이 지고 있었다. 환상적으로 드넓게 펼쳐진 자연의 색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이수가 감탄을 자아내며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와… 예쁘다.”
계절이 바뀌나 보다. 그래서 높은 하늘을 물들인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운 모양이었다. 은은한 엔진 소리마저 없는 차 안은 정적이었다. 응시하는 시선을 느낀 이수가 시훈을 마주 봤다.
“…….”
다정한 손길이 귓가를 부드럽게 매만지고 볼을 스친 뒤 목덜미를 가볍게 감쌌다. 노을을 담은 그윽하고 온화한 눈빛이 한동안 이수에게 머물렀다. 이윽고 몸을 기울여 살포시 입을 맞춘 시훈은 마치 닿으면 깨지기라도 할 듯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이수의 눈과 뺨, 귓가에 몇 번이고 입맞춤을 이어 갔다.
입술을 떼어 낸 시훈이 드물게 눈을 피했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키스나 침대에서 몸을 맞추는 일보다 가벼운 입맞춤이 그의 가슴을 간지럽힌 탓일 테다. 시훈이 이마를 맞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이수야.
어떤 말보다 사랑이 느껴지는 신비한 주문이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소불고기를 먹었다. 돌아가는 길에 운전을 하겠다고 하니 좀처럼 차 키를 내줄 생각이 없어 보여 결국 고기는 이수가 굽는 걸로 타협을 봤다. 혹시 타거나 질기지는 않을까 잘 살펴 구워 그릇 앞에 놓아 주자 시훈은 마다치 않고 먹었다. 식사할 때마다 느끼지만 정갈한 젓가락질이며 마주 앉아 먹는 사람과 속도를 맞추는 몸에 밴 습관들이 보기 좋았다.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한밤중 서울에 도착한 차는 이수의 오피스텔 앞으로 향했다. 고단했지만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시훈과 나누는 대화가 즐거워 눈이 감기지 않았다.
이수를 따라 내린 시훈이 보닛을 돌아 인도에 올라섰다. 기껏해야 커피숍에 가거나 영화를 보며 휴일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야근에, 마중에, 여행까지 계획한 시훈에게 고마움이 샘솟았다. 서늘한 밤공기에 시훈이 이수의 팔을 몇 번 쓰다듬어 열을 내었다.
“차 한잔하고 갈래요?”
“그럴 생각이었으면 지하 주차장에 댔어요.”
애정 어린 눈빛이 이수를 향했다.
“피곤할까 봐요. 조금 쉬었다 가면….”
어김없이 시훈도 이수도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야속했다.
“같이 따라 올라가면 나 집에 못 가. 넌 출근 못 하고.”
바람에 날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시훈은 힘을 빼고 웃었다. 볼과 턱 사이를 가볍게 매만지고 떨어진 손끝에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쉽게 등을 돌리지 못하는 이수에게 시훈이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아쉬워요?”
“응. 휴일이 너무 짧아서.”
주말이 아닌 애써 평일에 이동한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볼 거 없이 번잡하게 치이지 말라고 다녀왔다는 걸.
“연말에 계획 세우자. 국내도 좋고, 해외도 좋고.”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기대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뒷좌석에서 기념품이 담긴 종이 백을 꺼내어 양손에 들었다. 무겁지도 않은데 집 앞까지 들어 주겠다는 걸 마다했다. 여기서 헤어지는 게 낫지, 정말 문 앞까지 따라오면 시훈의 말처럼 차마 보내지 못할 것 같다.
“올라가요. 내일 출근 잘하고.”
“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요. 운전 조심하구요.”
선선한 날씨에 많지는 않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련 가득한 인사를 남기고 곧 이수가 오피스텔 안으로 사라졌다.
“후우….”
시훈은 그제야 긴 숨을 몰아쉬었다. 무심결에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불이 꺼진 오피스텔을 올려 봤다. 잠시 뒤, 까만 창에 은은한 불빛이 비쳤다. 불붙지 않은 담배를 담뱃갑에 도로 집어넣은 시훈은 정차한 차에 등을 기댔다.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여행에 대한 아쉬움보다 이렇게 이수를 돌려보내고 홀로 남은 쓸쓸함에 매번 발길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이수를 몰랐던 과거에는 어떻게 살았나 모르겠다. 즐겁고 행복한 시절은 형 시영이 죽기 전의 일이고, 그 후에 제가 걷고자 계획한 길에는 기쁨, 행복, 사랑 같은 감정들은 당연하게 배제돼 있었나 보다. 시훈은 앞만 보고 달린 삶의 방향이 미묘하게 바뀐 사실을 깨달았다.
“…하.”
시훈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관문을 열자 깜깜한 집이 이수를 맞았다. 머리 위로 불을 켠 입구 등을 의지해 부엌으로 걸어간 이수는 식탁 위에 종이 백부터 내려놓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거실을 가로질러 창문 앞에 섰다. 이수는 아직 출발하지 않은 시훈을 발견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상대는 통화 연결음이 두 번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어. 이수야.
“정말 괜찮아요? 피곤한 거 아니고?”
오피스텔을 올려 본 시훈이 살짝 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담배 한 대 피우려고 잠깐 있었어. 그나저나 자꾸 고민하게 만드네.
시훈의 웃음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내려갈까? 길 건너 카페는 아직 문 열었을 텐데.”
이마를 문지르며 고민하는 시훈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후 한숨을 내쉰 시훈은 곧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이내 고개를 젓는다.
-음… 오늘은 아껴 둘게. 어제까지 무리했잖아. 걱정돼서 그래.
“…응.”
내려오라거나 아니면 당장 올라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른 대답이었다.
-가야겠다. 나 때문에 못 쉬는 것 같은데.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창가에 서 있는 이수에게 시훈이 손을 들어 인사를 전한다. 전화를 끊고 시훈의 차가 출발하기까지 이수는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분명 짧은 여행에서 오는 아쉬움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이수는 옷도 벗지 않고 소파에 털썩 몸을 뉜 채로 당장 텔레비전부터 켰다. 채널을 몇 번 돌려 보던 이수는 리모컨을 테이블 위에 대충 밀어 놓고 도통 흥미가 생기지 않는 광고며 뉴스를 그저 눈에서 흘려보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일요일 밤, 불과 며칠 전 주말간 시훈의 집에서 지내고 돌아온 직후에도 딱 이 자세 그대로 텔레비전을 켰나 보다.
얼마나 지났는지 집에 도착했다는 시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괜찮다고 하지만 목소리에 스민 피곤을 모르지 않았다.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통화를 마치고 종료 버튼을 누르자 오늘 다녀온 미술관 전경이 핸드폰 배경 화면에 저장되어 있었다. 저절로 이수의 손가락이 사진첩 폴더를 열었다.
사진첩에는 오늘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들이 빼곡했다.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미술관의 전경을 찍은 사진과 자신의 연인의 모습이 여러 장 담겨 있었다. 앞서 걷는 시훈의 뒷모습이나 턱을 괴고 웃는 얼굴, 반사되는 외벽에 두 사람이 웃으며 나란히 찍힌 사진들. 비단 오늘뿐 아니라 사진을 앞으로 휘휘 넘겨 보며 그동안 시훈과 나눈 일상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러다 몇 달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 사진을 본 이수는 조금 놀랐다. 무슨 이런 걸 찍었지 싶은 사진들이 너무 많았다. 업무차 확인용으로 찍은 미디어 월이나 지나면서 본 전시회 포스터, 인터넷 서치로 찾은 자료를 캡처한 화면들. 날짜를 보니 시훈과 만나기 전 사진들이었다.
이수가 한숨과 함께 탄식을 내뱉었다. 재미없는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이수는 시훈과 만나는 몇 달 동안 순식간에 변한 일상이 믿기지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창가에서 시훈을 배웅하며 사실은 기대를 했나 보다. 그러고는 왜 시훈의 출근 복장이나 속옷을 옮겨 놓지 않았을까 후회를 했다. 아마 오늘 밤 같이 있었으면 연말 계획은 어떻게 세울지 주말에는 어디를 갈지 그런 이야기를 밤새 나눴을 텐데… 아쉬웠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이수가 단번에 몸을 세워 앉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두 뺨을 가볍게 때렸다.
“후우… 왜 이러냐, 정말.”
저답지 않게 왜 이렇게 욕심을 부릴까. 최근에 저는 더 원하고 바라기만 한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이수가 마른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수는 옷을 벗고 샤워기 아래에 섰다.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머릿속에 고인 욕심이며 아쉬움이 배수구로 다 씻겨 내려가기를 바랐다.
* * *
오후 3시를 막 넘긴 시각, 집무실에서 보고서를 검토 중인 시훈의 핸드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이수였다.
-회의 중이라 전화 못 받았어요 일 잘하고 내일 봐요 :)
이수나 저나 야근이나 밤샘은 이전보다 줄었다지만 종종 이렇게 바쁜 날이면 밤이 되어서야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답신을 보내고 난 시훈의 핸드폰에 곧 다른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고객님. 주문하신 제품이 완성되었습니다. 편한 시간에 매장 방문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예정된 외부 일정을 마치고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시훈이 오전 중 기획팀에서 올린 보고서를 확인하고 메모한 내용을 첨부했다. 귀퉁이를 맞춰 정리한 서류를 들고 일어나기 전 부적처럼 벽에 붙은 엽서를 들췄다. 형이 적어 놓은 익숙한 시 구절 아래에 웃고 있는 이수 사진이 당연하게 자리해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에는 이 사진만 보면 매번 마음이 아팠다. 오해와 편견으로 내버린 지난 시간이 야속해서 절대로 볼 수 없을 이수의 과거처럼 아련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수가 제 곁에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대학 시절 이수를 만날 수 있다고 해도 미래를 함께할 연인이 곁에 있는 지금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시훈의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시훈이 기획팀 사무실에 발을 들였을 때 마침 소회의실을 나온 신동윤 대리와 마주쳤다. 휴가를 떠난 오 팀장 대신 신 대리가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동윤 님. 서류요.”
“고맙습니다. 팀장님 오시면 전달드릴게요.”
“저는 오늘 외부 일정 마치고 바로 퇴근할게요.”
새로운 호칭이 도입되고 조직이 재정비된 인사이트는 최근 활기가 돌았다. 외부 업체와의 미팅 및 회의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 ‘님’으로 통일된 호칭은 걱정이 무색하게 금세 안착했다. 직업 특성상 야근은 피할 수 없는 문제지만 벙개나 1차 이외의 회식도 지양하도록 권고가 내려진 터라 업무 외의 피로가 많이 줄었다.
“시훈 님. 저희 조만간 점심 회식 있는데 식사 같이 드세요.”
“눈치 안 줄까요?”
시훈은 팀장으로 있을 때도 신 대리를 비롯한 팀원들과 좋은 팀워크를 자랑했었다. 본부장으로 승진한 후 바쁜 몸이 된 터라 제대로 된 식사 자리 한번 갖지를 못했다.
“에이… 무슨요.”
신 대리라면 감정이 고스란히 보이는 사람이라 예의상 하는 빈말은 아닌 것 같다. 아직 누구의 아들이라는 편견은 여전히 남아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함께 일했던 기획 본부 팀원들은 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시훈을 대했다.
“그럼 날짜하고 시간 정해지면 알려 주세요. 참석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다른 이슈는 없구요?”
의례적인 질문 후 시훈이 사무실을 둘러봤다.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하게 일을 하는 직원들 너머 소회의실에서 열변을 토하는 사람 하나가 눈에 걸렸다. 설명하는 손짓이 어찌나 화려한지 저절로 시선이 모였다. 때마침 소회의실 안쪽에서 시훈과 눈을 마주친 이가 가볍게 묵례를 해 왔다. 신 대리의 시선이 시훈을 따라갔다.
“우재 님, 완전 물 만났어요. 성실한데 재밌고, 엉뚱한데 기발해요.”
“그런가요.”
인턴 기간에 고우재가 사고 친 기억을 까맣게 잊은 듯 신 대리의 칭찬이 이어졌다.
“전에 정이수 팀장님이 왜 예뻐하셨는지 알 거 같아요.”
“…….”
신 대리에게는 죄가 없다. 다른 것보다 이수가 예뻐했다는 말이 거슬려 어색하게 끌어 올린 입매가 금세 꼬리를 내렸다.
운이 억세게 좋다고 해야 하나. 이력서를 어떻게 냈고, 면접을 어떻게 봤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임원 면접에서 부대표가 매년 묻는 광고에 대한 열정이니 하는 질문을 고우재에게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뻔하고 고리타분하기는 하나 부대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질문이라 했다.
고우재의 이력서에는 다른 지원자들과 비교 불가한 이력과 수상 경력이 기재돼 있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질문을 던진 면접관들에게 완벽에 가까운 답을 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부대표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뜻이었을 테다. 인턴 시절 대차게 친 사고를 덮어 줄 정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인사이트의 연혁까지 줄줄 꿰고 있는 고우재는 어쨌든 아슬아슬하게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럼 먼저 가 볼게요.”
“네, 들어가십시오.”
신입 사원 합격 공고 이후 기획 본부 내에서 한동안 이수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고우재 합격은 정이수 팀장이 M사 일을 수습해 놓은 덕이라고. 더불어 이수가 퇴사 전까지 비딩이며 광고주 관리를 착실히 해 준 덕에 올해와 내년도까지 영업 이익을 보장해 놓은 캠페인이 적지 않았다. 이수를 둘러싸고 있던 오해들을 일일이 짚어 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눈가림만 없앴을 뿐인데 먼지 쌓인 트로피가 어느새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인사이트를 떠난 이수에게는 이제 영광만 남았다.
외부 일정을 마친 시훈은 백화점 1층 로비로 발을 들였다. 차에서 내릴 때부터 두 번째 손가락 마지막 마디에는 끝이 꽈배기처럼 꼬인 얇은 종이가 감겨 있었다. 명품관이 즐비한 로비에서 시훈이 매장을 찾아 걸어가는 중 액정 화면에 여민준 전무의 이름이 떴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별스러운 인사가 들려왔다.
-시훈 님, 하이염.
“뭐야, 언제 적이야.”
배경으로 들리는 소리를 보면 짐작건대 공항인 듯했다.
-내일 잡힌 회의가 있는데 깜박해서. 참석만 하면 되니까 시훈 님이 나 대신 자리 좀 채워 주라.
“자리만 채우면? 월급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니에요?”
-너두 지금 회사 아닌데, 뭘. 어디야?
“일 있어서.”
-일? 연애 사업?
“…….”
시훈이 대꾸를 하지 않자 수화기 너머 여민준이 키득대며 웃었다. 급히 잡힌 런던 출장에도 여 전무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오히려 신이 났다. 사나흘 전, 급히 소집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여민준은 오랜만에 담배나 피우자며 옥상으로 시훈을 데리고 갔다. 전자 담배가 아닌 시훈의 연초를 빌린 여민준은 맛있게 한 모금을 피우고는 뭐가 좋은지 실실 웃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고작 담배 한 대 빌리자고 일하는 사람을 끌고 오지는 않았을 텐데 여민준은 웃기만 할 뿐 도통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공중으로 후- 기분 좋게 연기를 내뱉은 그가 물었더랬다.
‘시훈아. 너 조지 마이클하고 휴 그랜트하고 공통점이 뭔지 아니?’
‘넌센스예요?’
시답잖은 질문이었다. 자꾸 뭐라도 말해 보라 답을 종용하는 여 전무에게 결국 시훈이 심드렁한 답을 뱉었다.
‘영국 남자?’
‘그럼, 조지 마이클하고 휴 그랜트하고 유진우 공통점은.’
일주일 전, 일신상의 이유로 사표를 낸 유진우의 이름이 거기에 낄 이유가 뭔가. 뜻 모를 질문에 시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담배를 빼 물었다. 이름만 들어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개새끼.
‘뭔 소리야.’
여민준이 시훈의 쪽으로 눈을 가늘게 뜨다 말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길에서 사랑을 나눴다는 거 아니니. 아주 불끈불끈해…!’
‘무슨 말이에요, 그게?’
유진우가 런던 지사로 건너간 후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반년쯤 지나자 당장에 몇몇 재계약이 무산됐고, 영업 이익이 곤두박질쳤다. 서울과 런던의 환경적 요인이라고만 보기에는 영 미덥지 않은 상황이 이어 발생했다. 그 때문에 해를 넘기고 서울에서도 유진우의 거취를 논의하던 차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사표를 냈다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쳤나 보다.
공공장소 음란 행위 죄. 휴 그랜트, 조지 마이클과 같은 유진우의 죄명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 등으로 시작한 궁색한 변명은 유진우의 뒷배가 없는 사측에 통할 리 만무했다.
‘사고 쳐 놓고 사표를 내구 말이야. 너무 후지지 않니? 까발려지기 전에 사표 수리되면 퇴직금 타 먹으려고 말이야. 그런 놈한테 돈 못 주지. 쯧.’
여민준이 그토록 부득부득 이를 가는 모습을 시훈은 처음 보았다.
-아무튼 일도 사랑도 열심히 하시고, 수고해라! 다녀와서 보자!
수습을 위해 당장에 런던행 비행기를 타야 할 여민준의 목소리는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네, 수고하세요.”
이수에게는 유진우에 관해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미움이나 원망 같은 티끌만 한 감정도 소모하지 말았으면 했다. 그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듣고. 이수는 그래야 했다. 시훈이 매장에 들어서며 손끝에 두른 종이를 습관처럼 몇 번이나 매만졌다.
주말 아침. 어젯밤 침대에서 나눈 섹스의 여파로 늦잠을 잔 이수가 눈을 번쩍 떴다. 홱 고개를 돌린 이수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확인하고 시계부터 봤다. 아… 오늘도. 집에서 혼자 잘 때는 알람 소리 없이도 눈이 뜨이는데 시훈의 집에서만 자면 왜 이렇게 침대에 파묻히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섹스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저질 체력 아닌가.
이수가 훌쩍 몸을 일으켜 씻고 침실을 나섰다. 이내 부엌에 발을 들인 이수는 식탁을 둘러보고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정갈하게 그릇에 담긴 대여섯 가지 반찬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이며 잡곡밥이 차려져 있었다.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가정식을 차렸을 줄이야.
“이걸 언제 다 했어요?”
이전에도 시훈이 간단한 토스트나 샐러드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만드는 걸 봤지만 소고기뭇국을 본 이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반찬은 본가에서 주시고, 내가 한 건 밥하고 국밖에 없어요.”
외모나 분위기로만 보면 이수 쪽이 차려 먹는 데 더 익숙할 사람이고, 시훈은 에스프레소나 블랙커피 한 잔으로 아침 식사를 끝낼 사람인데 실상은 반대였다. 이수 앞으로 물을 따른 컵과 수저, 젓가락을 나란히 내려놓으며 시훈이 의자를 가리켰다.
“스무 살 때부터 나와 살았으니까 기본적인 건 해요.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이고.”
“…….”
이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이수 역시 스무 살 때부터 나와 살았지만 할 수 있는 요리를 대라면 형체를 잃어버린 계란말이 정도와 요리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라면밖에 없었다. 집에 있는 전기밥솥은 전기 코드를 빼놓은 지 오래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계란말이도 몇 개월 전에 만들어 봤다고 하면…. 시훈에게 이만한 밥상을 차려 줄 날이 올까. 그러면 반나절 정도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먹어요. 배고플 텐데.”
“잘 먹을게요.”
이수가 소담하게 담긴 밥 한 숟가락과 소고기뭇국을 입에 넣고 난 뒤에야 시훈 역시 식사를 시작했다. 간단히 차린 밥상에도 이수는 밥이며 반찬이며 골고루 잘 먹었다. 예전에는 입이 짧다고 여겼는데 막상 가리는 음식도 없고, 새로운 음식도 곧잘 받아들이는 편이라 먹이는 보람이 있었다.
“…왜요?”
이수가 먹지 않고 수저만 들고 있는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요.”
젓가락으로 밥을 한 번 먹고 시훈은 다시 이수를 살폈다. 입을 오므려 꼭꼭 씹는 모습에 시훈의 얼굴 위로 소리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어, 의자 샀어요?”
이수의 시선이 거실 한편에 놓인 의자에 닿았다. 선명한 코발트 컬러가 오늘따라 유난히 도드라졌다.
“원래 있던 건데.”
“올 때마다 발견하는 기분이에요.”
이수가 멋쩍게 웃었다. 시훈의 집에는 각기 다른 의자가 여러 개 있었다. 침실만 해도 1인용 소파가 창가에 놓여 있고, 드레스 룸에도 마찬가지였다. 식탁 의자만 해도 세트가 아니라 각기 모양이 달랐다. 본격적으로 사귀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시훈은 건축이나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고, 가구를 좋아하고, 요리를 곧잘 했다. 인사이트에서 같이 일할 때도 느꼈지만 화려하지는 않아도 본인에게 어울리는 옷이나 액세서리를 골라 착용할 줄 알았다.
“70년대 디자인이에요. 마음에 들어요?”
얼마 전 이수가 물었다. 집 안에 놓인 의자에 다 앉아 보느냐고. 몇 개는 그저 마음에 들어서 샀다고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히 더 캐묻지는 않았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은 분명했다.
“나는 그런 거 잘 몰라요. 집에 있는 소파도 인터넷으로 30분 만에 샀는걸.”
인터넷을 열어 랭킹순으로 정렬해 두고 그중에서 색깔만 골라 샀다. 결제하고 배송일을 지정하는 일이 소파를 고르는 일보다 오래 걸린 기억에 이수가 피식 웃었다.
“곧 이사 가야 하는데 버릴까 봐요, 쿠션이 다 꺼져서.”
“이사?”
이수가 국을 한 입 떠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세 만기라…. 집주인 자제분이 들어온대서요.”
정든 곳이라 가능하면 연장을 하려던 계획이 날아갔다. 입사하고 몇 년 동안 월급과 인센티브로 집안에 쌓인 빚을 다 갚고 난 뒤 처음으로 얻은 반듯한 집이었다. 작은 원룸에 살 때도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반지하나 달랑 한 칸짜리 방이 아닌 곳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조금 무리해서 얻은 집이었다.
“그럼 언제 빼야 돼요?”
“편의 봐주신다고 했으니까 집 구하는 대로 나가야죠. 괜히 얼굴 붉히기도 싫고.”
“…….”
무슨 생각인지 시훈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젓가락으로 반찬을 한 입 집어 먹고는 이수를 향해 물었다.
“오피스텔 선호해요? 아니면 아파트?”
“글쎄요. 생각을 안 해 봐서. 지금 사는 곳하고 비슷하면 오피스텔도 괜찮겠죠? 회사하고 멀지만 않으면 아파트도…. 요즘에는 소형 아파트 많잖아요.”
어느 정도 집에 대한 욕구가 해소된 지금의 기준은 ‘적당히 괜찮은 집’이 됐다. 시훈이 던지는 질문의 의미나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수가 성실한 답을 이어 갔다.
“소파는 꼭 있어야 해요?”
한국인답게 바닥에 앉으면 등을 받칠 소파가 있어야 했다.
“네. 바닥에 앉아도 소파는 있어야 해요.”
지금 사는 오피스텔은 죄다 옵션으로 채워진 곳이라 가진 짐이 많지 않은 이수에게 이사는 큰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몸만 비워 집을 얻는 일에 익숙했다. 회사와의 거리가 적당하고 옵션만 잘 붙어 있는 곳이면 금방 구할 수 있을 텐데 어쩐지 이사 갈 사람보다 듣고 있는 사람이 더 고민하는 것 같다. 데이트할 시간도 없는데 집까지 구해야 한다고 하니 서운해서 그러는 걸까. 시훈의 눈치를 살피던 이수의 머릿속에 때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음… 소파 살 때 같이 갈까요? 나는 잘 몰라서 도와주면 좋겠는데.”
생각에 잠겨 있던 시훈은 제안을 듣자마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그럼.”
시훈이 설레어 보여 이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만하면 제법 괜찮은 데이트 코스 같았다.
식사를 한 뒤에는 설거지를 내가 하느니 마느니 하며 몇 번의 실랑이가 있었다. 결국 이수가 염치 운운하며 고무장갑을 사수했다. 거품을 내 그릇을 닦고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헹군 이수가 뽀드득 소리가 나는 그릇을 정리해 두고 마지막으로 손을 털었다.
“…끝.”
개운한 마음에 혼잣말을 하고 돌아서자 조리대에 엉덩이를 기대서 있던 시훈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고무장갑을 벗어 두고 주뼛대는 이수를 시훈이 품에 끌어안았다. 무슨 큰일을 했다고 이렇게 뿌듯한 표정으로 사람을 보는지 모르겠다.
“누가 알면… 전쟁 치르고 온 줄 알아요.”
이수는 조금 민망했다.
“사투 정도라고 하죠.”
손을 들어 뺨에 튄 거품을 닦아 주는 시훈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시선을 내려 보자 설거지를 하며 튄 물에 티셔츠 아랫단이 다 젖어 있었다. 흘끗 눈을 돌리자 조금 전 시훈이 닦아 놓은 식탁은 물기 하나 없이 말끔하다. 비교하자면 설거지를 한 싱크대는 여기저기 한강이 따로 없었다. 이수가 그제야 작은 한탄을 내뱉었다.
“다 튀었네….”
시훈이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요즘 이수를 보면 이렇게 웃는 일이 잦았다. 정산에서는 인사이트 때보다는 유해진 것 같지만 실무진을 통해 듣게 되는 정이수 책임님은 여전했다. 꼼꼼하다느니 차분하다느니. 이수의 빈틈을 보는 사람이 저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시훈은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집밥을 자주 해 먹어야겠네. 맨날 설거지도 시키고. 나중에는 요리도 해 달라 그러고.”
장난처럼 이수에게 말을 건네는 시훈의 가슴에 몽글몽글 기대감이 차올랐다.
“음… 설거지는 괜찮은데, 요리는 좀.”
연습한다고 해도 요리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다리 사이에 선 이수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긴 시훈은 짐짓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런데 우리 둘이 서니까 좁은 것 같아. 주방이.”
“그런가?”
딱히 불편하지는 않는데…. 이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좁아, 확실히. 시훈이 단정했다. 하기는 혼자 사는 집에 주말마다 찾아오는 객식구가 생겼으니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커피 마시러 가요.”
시훈이 이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조금 전 찌푸린 표정은 어디 가고 입술을 끌어 올린 표정이 묘하게 들떠 보였다.
커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노을이 지고 난 후였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거실에 내려앉자 시훈은 거실 곳곳에 놓인 조명을 켰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일요일 저녁, 노곤함이 몰려왔다. 소파에 앉은 연인의 어깨에 이수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기댔다. 프로그램 사이에 온 에어 된 중간 광고를 확인하고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본 적 없는 예능 프로그램을 방영 중이었다.
마시다 만 캔 맥주 두 개가 소파 앞 테이블에 나란히 놓였고, 열린 창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왔다. 은은하게 조명을 켠 시훈의 거실은 따뜻한 주홍색이었다.
“누울래요?”
“응.”
이수가 시훈의 다리 위로 머리를 뉘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스르륵 눈을 덮자 다정한 손길이 이마를 쓸어 주며 가린 눈을 드러냈다. 텔레비전을 보는 이수의 입꼬리가 한 번씩 올라갔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예능 프로그램이 재밌었던 건 대학 시절 동기들과 밤샘하며 본 기억이 마지막인가 보다. 그때도 같이 봐서 재미있는 거라고 했었지. 혼자가 아니라.
시훈의 손이 티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을 가볍게 쓸었다.
“쌀쌀하면 문 닫을까?”
“지금이 좋아.”
서늘한 맨살에 닿는 시훈의 온기가 좋았다. 팔이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매만지는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럽고 애정이 가득했다. 그 바람에 잠시 눈을 감았다. 포근한 이불을 덮은 듯 그런 안정감이 이수를 감쌌다. 텔레비전 볼륨이 줄어들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텔레비전 소리마저 자장가처럼 느껴지는 날이었다.
팔을 따라간 시훈의 손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이수가 평온한 행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시훈이 들어 올린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제 손가락에 닿은 낯선 촉감에 이수가 감은 눈을 살포시 떴다. 눈앞에 펼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처음 보는 반지가 있었다.
“…이거….”
주홍빛 조명이 반사된 반지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깨끗한 링 중앙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말문이 막힌 이수는 제 가슴 위에 놓인 시훈의 왼손을 내려 봤다. 그 역시 네 번째 손가락에 같은 모양의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시훈 씨….”
놀라고 당황한 표정을 숨길 새도 없이 몸을 일으키려는 이수의 가슴에 토닥토닥 시훈의 손길이 와 닿았다. 반쯤 일으킨 몸을 그대로 뉘자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시훈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에요. 주고 싶었어.”
“…….”
“주변에서 안 믿는다면서.”
이수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확신은 없었다. 먼 길을 돌아 서로를 만나는 과정이 고되고 애달팠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연인에 대한 애정과 열망을 이깟 반지로 전할 수는 없었다. 다만, 미술관에서 이수가 조심스레 전한 고민을 덜어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부담스럽지 않게, 진부한 약속이 아닌 일상적인 선물처럼 전해야 했다.
“…….”
침묵 속에 시훈은 여전히 이수를 바라보지 못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시훈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울까. 주절주절 말이 길어지려 했다.
“꼭 하고 다니라는 건 아니야. 우리 사이에….”
말없이 손을 뻗은 이수가 시훈의 목덜미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고개를 내려 보자 더없이 행복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이수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내린 시훈은 홀린 듯 이수와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아 있는 그대로 매달리듯 몸을 일으킨 이수가 시훈의 허벅지 위에 마주앉아 고개를 비틀었다. 시훈의 두 뺨을 감싼 이수는 다급하게 시훈의 혀를 찾았다. 아마도 이건… 이수의 답이었다.
가쁜 숨이 몰아쳤다. 엉덩이 사이에 닿은 남자의 묵직한 성기를 이수가 모를 리 없었다. 이마를 맞댄 이수가 시훈의 아랫입술을 쪽 빨았다. 턱과 목을 따라 내려간 입술이 티셔츠 위로도 선명한 굴곡을 나타내는 단단한 가슴을 지났다. 시훈의 다리 위에서 소파 아래로 발을 디딘 이수는 시훈의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탄탄한 근육을 매만졌다. 내려간 속눈썹이 들리며 이수의 시선이 시훈에게 닿았다. 곧 다리 사이로 바짝 당겨 앉은 이수가 불뚝 솟은 바지 위로 얼굴을 묻었다.
“……하아….”
시훈에게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과거 호텔에서 이수에게 오럴을 강요한 이후 처음이었다. 이수가 버클을 풀고 지퍼와 속옷을 내리자 빳빳한 성기가 튕겨 나왔다. 긴 손가락이 성기 밑동을 한 손에 쥐었다. 혀를 내어 뿌리부터 선단까지 천천히 핥아 올리며 이수가 시훈을 올려 봤다. 치뜬 두 눈은 순진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아찔할 정도로 요사스러워 보였다. 보란 듯이 귀두를 제 아랫입술에 문지르던 이수는 단번에 입을 열었다. 목구멍에 닿을 정도로 성기를 밀어 넣은 이수는 다시금 볼이 오목해질 정도로 빨아올리며 제풀에 신음했다.
“읏… 이수야.”
시훈의 허벅지를 꽉 잡은 이수의 손에서 반지가 반짝였다. 훤히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쓰다듬은 손이 귓불에 닿자 이수가 흠칫 몸을 떨었다. 명백한 흥분의 증거였다. 발갛게 물들인 입술로 기둥에 점점이 입을 맞추다 다시 입안 깊숙이 넣고 빨았다. 성기를 살살 흔들어 가며 삿갓 모양의 뭉툭한 귀두를 사탕이라도 삼키는 양 쪽쪽 빠는 이수의 눈빛이 몽롱했다. 코에 음모가 닿을 정도로 깊게 고개를 파묻고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시훈의 배에 닿았다. 입안은 축축하고 습했다.
“……우읍….”
성기가 목젖을 지나자 움츠러든 목구멍이 죄어들었다. 동시에 산소가 차단된 이수의 몸이 바르작댔다.
“시발….”
시훈이 욕을 짓씹었다. 야했다. 야해 빠진 정이수. 어디서 이런 모습이 나오는 걸까. 꽁꽁 감춰 두었다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면 그 모습이 사람을 돌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 사랑스러웠다. 움찔움찔 몸을 떠는 이수의 입안에 꽉 찬 성기는 더 들어갈 곳도 없어 보였다.
“컥…! 하아… 흐….”
이수가 몸을 무르자 선단에서 흐른 프리컴과 섞인 침이 턱을 따라 흘렀다. 좆과 입술 사이에 길게 이어진 실이 툭 끊겼다. 이내 눈을 감았다 뜬 이수가 사정을 앞둔 좆을 얕게 삼키고 속삭였다.
“…싸 줘. 입에다가.”
이수는 꺼덕이는 성기를 잡아 흔들며 길게 내민 혀끝에 요도를 문질렀다. 시선을 올려 흥분한 시훈을 바라봤다. 핏대를 세운 이마며 검은 동공, 우뚝 솟은 코와 날렵한 턱, 매번 시선을 앗아 가는 입술 사이로 내쉬는 뜨거운 숨에 이수의 가슴팍이 흥분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후우….”
시훈이 이수의 손 위로 제 좆을 쥐었다. 이미 한계에 도달해 아랫배가 빠듯할 지경이었다. 눈과 코가 붉게 물든 얼굴을 시훈은 홀린 듯 바라보며 성기를 빠르게 흔들었다. 살짝 올라간 눈매는 빨리 달라고 앙탈을 부리는 것 같기도 처연해 보이기도 했다. 금욕적이고 단정한 외모와 그렇지 못한 행동이 이성을 배신케 만들었다.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저를 올려 보는 이수가 빨간 혀를 내밀었다. 자리를 알려 주는 것처럼.
“읏…!”
곧 이수의 얼굴과 혀 위로 사출한 정액이 떨어지자 곧장 입안으로 성기가 빨려 들어갔다. 착실하게 좆을 머금은 입안에서 토해 낸 정액을 이수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삼켰다. 이수는 반쯤 정신이 혼미해졌다. 목구멍도 좆을 빨고 있는 입안이나 입술도 모두 성감대 같았다. 이수는 응당 그래야 할 의무처럼 뿌리 끝까지 성기를 머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깨끗하게 귀두를 핥은 뒤 시훈을 올려 봤다.
여운으로 그 역시 살짝 입을 벌리고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살짝 땀이 맺힌 이마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
시훈은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이수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눈썹 사이를 찡그린 그는 이수를 삼키고 있었다. 낱낱이 이수를 발라 먹을 태세로.
“으… 흡!”
어마어마한 힘에 두 어깨가 잡힌 이수의 등이 순식간에 소파에 닿았다. 거칠게 이수의 바지를 끌어 내린 시훈의 행동은 지난 섹스들에서와는 사뭇 달랐다. 무릎 뒤를 밀어 공기 중에 환하게 드러낸 구멍 위에 시훈이 입에서 침을 모아 떨어트렸다.
“으… 흐….”
급했다. 거칠었고, 뒷덜미가 순식간에 달아오를 만큼 수치스럽고 조금 두려웠다. 그런데 시훈의 손이 닿는 족족 흥분에 몸이 떨렸다. 아랫입술을 깨문 이수가 손을 내려 빠끔 벌어진 구멍을 문질렀다. 새 나오는 신음이 아득해서 마치 제 목소리라고 믿기지 않았다. 빨리, 빨리….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이 입을 벌리라 재촉했다.
“하아… 흐…….”
그때 이수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시훈이 귀두 끝으로 구멍을 툭툭 문질렀다.
“후우… 쯧.”
꼭지가 돌 만큼 흥분한 중에도 혹여 다칠까 되잖은 염려에 시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뭉툭한 끝이 구멍에 닿으면 움찔움찔 주름이 오므라들었다.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이수가 둥그렇게 몸을 말아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여전히 단단한 시훈의 성기를 붙들어 제 손으로 구멍 가까이 좆 머리를 맞췄다.
“…흐… 으… 넣어….”
구멍은 벌렁거릴 뿐 쉬이 벌어지지 않았다. 마음처럼 되지 않아 야속했다.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훈이 강한 악력으로 손목을 붙들었다. 일주일을 마감하는 일요일 밤이었다. 이수를 다시 집으로 보내야 하는 사실만 빼면 완벽한 주말이었다.
“…이수야. 너….”
“하… 으….”
울상이 된 이수의 눈꼬리가 애처로운 물기를 담고 시훈을 올려 봤다. 이내 양 손목을 한 손에 틀어쥔 시훈이 구멍 안으로 귀두 끝을 뻑뻑하게 밀고 들어왔다. 가슴까지 닿은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 위로 바짝 몸을 붙여 온 시훈이 체중을 싣자 깊은 곳까지 굵은 성기가 가득 메웠다. 질끈 감은 눈 위에 시훈의 입술이 떨어졌다.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에 입맞춤한 시훈이 목을 긁듯 이수에게 속삭였다.
“하아… 오늘 집에 못 가겠다. 회사는 연차 내.”
오늘 안 재울 거야.
퍽! 더 들어올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더 안쪽으로 성기가 박혔다.
“아흐… 흑!”
고통이 무색하게 이수의 성기 끝에서 픽 정액이 샜다. 시훈이 허리를 뒤로 뺄 때는 감은 눈꺼풀 위로 목 아래서 웃는 울림이 느껴졌다. 뻑뻑한 내벽이 좆을 물고 내주지를 않았다. 저 역시 그걸 느낄 정도인데 시훈은 오죽할까. 다시 한번 세게 성기가 박혔다. 대번에 느끼는 지점을 찾아 스치며 꿰뚫을 때마다 이수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하… 윽!”
중간은 없었다. 자리를 잡고 나자 이수의 정수리를 감싸듯 바짝 몸을 붙인 시훈은 정말 미친 듯이 허리를 털었다. 성기를 팽팽하게 물고 있는 주름이 귀두가 아슬아슬하게 빠지고 다시 벌리며 들어올 때마다 유연하게 벌어졌다. 성기를 감싼 내벽이 우물대며 기쁘게 성기를 죄었다. 그 와중에 눈을 맞춘 제 연인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수의 눈동자가 시훈의 얼굴을 붙들었다. 뺨과 턱에 입을 맞추려 턱을 치드는 모습은 그 어떤 모습보다 사랑스러웠다. 유두를 잡아 비틀자 몸서리를 쳤다. 펠라티오를 할 때부터 흥분한 이수의 몸은 좆을 삼킬 때 이미 정액을 싸질렀다. 그럼에도 다시 징징 허리가 울리는 사정감이 조금 전부터 혼을 빼놓았다.
“가… 아니, 아니… 쌀 것 같아…! 잠깐…만!”
한데 틀어잡힌 손이 주먹을 쥐었다 한순간 펼쳐졌다. 이수의 몸이 파르르 떨리다 못해 배가 훅 꺼졌을 때 몸을 뺀 시훈의 성기가 쑤욱 밀려 들어왔다.
“하윽…! 헉…!”
쪼르르 이수의 성기에서 물이 나왔다. 감당 못 할 쾌감에 입이 벌어지고 팽창한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때를 맞춰 느릿느릿 굵고 긴 성기가 이수의 안쪽을 드나들었다. 번쩍 눈앞에 섬광을 터트린 오르가슴이 더없이 길게 이어졌다. 배려라기에는 짓궂고 벌이라기에는 지독한 쾌감이었다. 이수의 배에 고인 체액이 주르륵 흘러 소파에 자국을 남겼다.
“어쩌지.”
“…….”
“나도 소파 다시 사야겠다. 그치?”
“으… 응….”
탈력감에 늘어진 이수의 반지 낀 손에 깍지를 낀 시훈이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부드럽게 풀어진 내벽이 때에 맞춰 알맞게 조였다 풀어졌다. 신음처럼 시훈의 나직한 한숨이 떨어졌다. 이수가 잠시 숨을 쉴 시간을 기다린 시훈은 점점 속도를 더해 하반신을 쳐올렸다. 엄청난 속도와 힘 때문에 고환이 엉덩이를 때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성기가 맞붙고 떨어질 때마다 부딪치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으… 으…! 갔는데… , 갔…는데….”
난감함에 이수가 입술을 짓이겼다. 성기를 쥐어짜듯 흔드는 시훈 때문에 어느새 다시 발기한 성기 끝이 발갰다. 다시 성기 끝에서 줄줄 물이 흘렀다. 시훈에 의해 몸이 흔들릴 때마다 가슴팍으로 물이 튀었다. 그걸 알아챌 새도 없이 내벽이 안쪽에서 경련했다.
“하아….”
시훈이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이를 악물고 이수의 몸속 가득히 박고 또 박았다. 더 붙을 수 없을 만큼 구멍 속에 성기를 짓눌렀다. 이윽고 이수의 몸속 가장 깊은 곳에 정액을 토했다.
소리 없이 입을 벌린 이수의 턱이 들렸다. 치솟은 몸이 끝이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아찔함에 전율이 일었다. 시훈의 좆을 품은 아랫배가 경련하며 움푹 패었다. 사정은 고사하고 뒤로 느낀 오르가슴과 요도 끝에 맺힌 물기에 쉽사리 헤어 나올 수 없는 자괴감이 일었다.
“…하아…… 하….”
시훈이 이수의 품 위로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땀에 흠뻑 젖은 티셔츠 위로 도드라진 유두를 입술로 지분거리자 이수가 몸을 뒤척였다. 날카로운 콧날이 가슴 주변을 배회했다.
“그만…해요. 정말… 집에 가야지.”
이수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더 못 해. 타박은 안중에도 없이 시훈은 넣고 있는 채로 살짝살짝 허리를 털었다. 티셔츠 아래로 손이 들어왔다. 촉촉한 살성이 손에 착착 감겼다. 뾰족한 유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아….”
나지막한 신음이 이수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돌기를 꼬집는 손길도 성기를 넣은 구멍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너무 좋아서 걱정이었다. 주홍빛 불빛 아래 가슴에 입을 맞춘 남자를 굽어봤다.
시훈이 손에 끼워 준 반지를 봤을 때,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당황했고, 놀랐다. 그리고 저변에 깔린 기묘한 설렘과 솟구치는 애정은 이수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덤덤한 척해 봐도 드물게 긴장한 시훈의 모습이 당혹스러운 감정을 순식간에 희석해 버렸다. 언제나 그랬다. 시훈은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아… 흐….”
눈을 맞춘 시훈이 허리를 붙이며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이수야. 그리고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인 남자가 다음 말을 이었을 때 이수는 귀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고 있어.
연차 사유란에 ‘개인 사정’이라고 작성한 문구가 이렇게 화끈거릴 수가 없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침실의 어둠을 가까스로 밀어낼 때쯤 이수 역시 등 뒤에 달라붙은 시훈을 살짝 밀어냈다. 샤워하며 또 눈이 맞을 건 뭐람. 몸이 흐물거려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모로 누운 시훈이 물기 어린 이수의 어깨에 몇 차례 입을 맞췄다.
“더 못 해요…. 손 떨려서 클릭도 못 하겠어.”
시훈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이수가 핸드폰을 협탁에 올려 두고 네 번째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봤다. 팔을 세워 머리를 받친 시훈이 같은 반지를 낀 손끝으로 이수의 반지를 툭 가리켰다.
“디자인은 마음에 들어요?”
“응.”
엄지손가락으로 반지를 매만지던 이수의 머릿속에 문득 의문이 생겼다. 어떻게 손가락 둘레를 알았을까? 특별히 그가 손가락을 유심히 살폈다거나 만진 기억은 없었다. 옷 사이즈나 시계처럼 눈으로 짐작할 수도 없었을 텐데….
“근데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요?”
이수가 고개를 돌려 묻자 시훈은 대수롭지 않아 하며 이수의 머리 아래로 팔을 넣었다.
“알게 됐어. 어떻게.”
“더 궁금하네, 그러니까.”
“나 눈썰미가 제법 좋아요.”
“반지 사이즈를 눈대중으로 짐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수가 눈을 비비며 시훈을 추궁했다. 몇 번 이리저리 떠보던 이수의 말소리가 졸음 때문에 늘어졌다. 이마에 닿은 시훈의 손이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자요, 얼른. 귓전에 속삭인 말소리를 뒤로하고 곧 잠든 이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의도치 않게 이수에게 밝히지 않은 비밀 하나가 더 늘었다. 엽서 아래의 사진과 백주홍이 보여 준 동영상, 그리고 반지.
디자인은 이수처럼 단정한 것이면 했다. 하나하나 살펴 깨끗한 모양의 화이트골드 링 위에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디자인을 보자 바로 결정했다. 제 손에 끼울 반지 사이즈를 확인한 시훈에게 상담을 돕는 직원이 물었다.
‘나머지 링은 사이즈 조절을 어떻게 해 드릴까요?’
‘이걸로 가능한가요?’
시훈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끝이 말린 고리 모양의 종이를 내밀었다.
‘아, 가능하실 것 같아요. 잠시만요.’
얼마 전, 함께 다녀온 강원도 미술관에서 이수가 애인이나 결혼 같은 민감한 질문을 던진 직후였다. 말실수를 한 건 아닐까 이수가 초조해할 때, 시훈은 이수의 네 번째 손가락에 감긴 빨대 껍질 보았다. 그때 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수처럼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그때 말린 빨대 껍질을 챙기느라 한발 늦게 일어난 사실을 이수는 짐작조차 못 할 테다.
잠든 이수의 손등을 어루만진 시훈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얽었다. 같은 모양의 반지가 나란히 자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