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Falling (8/10)

외전 1. Falling

주말 오후였다. 데리러 가겠다는 시훈을 만류한 이수가 기어코 비를 맞았다. 어찌나 세차게 내리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이수에게 욕실 문을 열어 주고 시훈은 커피를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문 사이로 수증기가 새어 나왔다. 샤워를 마친 이수는 욕실 앞에 내어진 속옷과 바지를 입고 나서야 윗옷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삐쭉 고개를 내밀어 주방을 살핀 이수는 발뒤꿈치를 들고 욕실 맞은편에 있는 드레스 룸으로 훌쩍 건너갔다. 지난주 시훈이 가슴 곳곳에 남긴 자국을 보이기가 어쩐지 민망했다. 방에는 가지런히 정리돼 주름 하나 없이 걸린 옷들 옆으로 편히 입을 수 있는 티셔츠나 실내복이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그중 제일 위에 놓인 반소매 티셔츠를 꺼낸 이수가 문득 행거 가장 끝에 걸린 하얀색 티셔츠 한 장을 발견했다. 시훈이 입기에는 다소 작아 보이나 제가 입기에는 적당해 보이는 사이즈였다.

“시훈 씨, 여기 걸려 있는 하얀색 티셔츠 입어도 돼요?”

주방 쪽으로 옷걸이째 삐져나온 티셔츠를 흘끗 본 시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대답부터 해 주었다.

“네.”

늘 그렇듯 옷걸이를 쥔 손이 재빨리 자취를 감췄다. 시훈이 입꼬리를 올렸다. 저게 뭐라고 물을까. 이 집에 있는 어떤 것도 이수에게 못 내어 줄 건 없는데. 머그잔에 담긴 뜨거운 커피 한 잔과 아이스커피 한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때마침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나한테 꼭 맞아요. 내 옷 같아.”

눈을 동그랗게 뜬 이가 해맑게 웃었다. 시훈의 눈길이 자연스레 티셔츠를 향했다. 질질 끌리는 바지와는 달리 한눈에 봐도 이수의 체형에 딱 맞는 옷이었다. 그리고 제게는 작던, 오래되기는 했지만 설마 본인 옷장에 있던 티셔츠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한 모양이다.

‘빌려 간 티셔츠를 잃어버렸네요.

부득이하게 다른 옷으로 보냅니다.’

과거 옷을 선물하며 잃어버렸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으니 이수의 착각은 당연했다. 말할까 말까. 고민을 하는 사이 커피를 들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옆자리에 앉은 이수가 한 모금 마신 커피를 내려놓고 리모컨을 눌렀다. 채널이 돌아갈 때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CM송이 이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에 맞춰 편안하게 소파 아래로 쭉 늘어트린 발끝이 까딱까딱 움직였다. 본인도 알고 한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 시훈의 입가에 소리 없는 미소가 번졌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팔을 둘러 이수의 어깨를 살살 매만지던 시훈은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옷인데… 잘 어울리네요.”

이내 옷을 내려 본 이수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평범한 하얀색 티셔츠가 잘 어울리고 말고 할 만한 일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수의 어깨가 으쓱 올라가다 떨어졌다.

“근데… 시훈 씨한테는 좀 작을 거 같아요.”

심드렁한 말을 남기고 다시금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린 이수가 CM송을 흥얼거렸다.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킨 시훈은 입술을 감쳐물고 제 어깨에 기댄 이수를 내려 봤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동그랗고 예쁜 이수의 이마가 드러났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재차 넘기는 손길에 턱을 들어 올린 이수가 시훈을 올려 보았다. 곧 맑은 눈동자 위로 촘촘한 속눈썹이 드리우며 이수의 입술에 시훈이 입을 맞췄다. 아이스커피의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는 입안을 뜨거운 혀가 부드럽게 훑어갔다. 이내 몸을 기울인 이수의 등이 소파에 닿았다. 티셔츠 속으로 들어온 시훈의 손은 옆구리와 가슴 언저리를 스쳐 지나며 이수의 성감을 깨웠다.

“…하아…….”

살짝 입술을 떼자 실처럼 투명한 타액이 늘어지며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이내 가슴 위까지 말린 티셔츠에 시훈이 얼굴을 묻었다. 잠시 입었을 뿐인 티셔츠에 어느새 이수의 체향이 배어 있는 것만 같다.

슬쩍 곁눈질로 바라본 창밖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소나기인 줄 알았더니 전원을 켠 텔레비전에서 전하기를 올여름 마지막 장맛비라고 한다. 아마 장마가 지나면 더위도 한풀 꺾이고 가을이 성큼 다가올 테다. 시훈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이 다정했다. 이끌리듯 이수의 입술을 찾아든 시훈은 작년 가을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눈 키스를 떠올렸다.

“…….”

그해 가을, 이제는 연인이 된 이수가 제 가슴을 바짝 타들어 가게 만들었다. 전시회, 니트, 커피, 레스토랑, 창에 비친 이수와 낯설기만 하던 제 얼굴, 그 얼굴로 끼얹은 차가운 물, 구겨진 페이퍼 타월, 서로가 몰랐던 첫 데이트와 애틋한 키스, 그리고… 제 이성을 앗아 간 티셔츠 한 장.

과거를 떠올린 시훈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이내 같은 색으로 끝을 물들인 단풍잎이 작년 가을 시훈이 걷던 길로 기억을 이끌었다.

하늘은 높고 가을의 정취가 수줍게 드러나는 날이었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에는 어렴풋이 색을 물들인 가로수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시훈이 횡단보도가 없는 좁은 1차선 도로를 건널 때였다. 핸드폰으로 기다린 전화가 걸려 왔다. 망설임 없이 받은 핸드폰 너머로 인사 대신 타박이 뒤따랐다.

-바빠서 시간 없다더니.

대학 선배인 김준모는 서운한 마음부터 드러냈다.

“미안해요. 갑자기.”

-됐고. 저번에는 막 비행기 타는 참이라 인사도 못 했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어?

상설 전시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전시회였다. 하물며 전시를 기획한 선배가 오픈했을 때부터 초청권을 준대도 시훈은 시간이 없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티켓을 구해 달라니. 바쁜 해외 출장길에 전화를 받은 터라 이유를 묻지도 못했다.

“궁금해서.”

-이시훈. 솔직히 뭐야, 애인이라도 데려와?

“…그런 건 아니고.”

시훈은 말끝을 흐렸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이수와 나는 무슨 관계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상납 관계… 아니, 그런 말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았다.

-썸? 작업 거는 중?

이렇게 질척거리는 사람이 아닌데 유난했다. 어쩌면 대학 시절 무던한 제 연애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니 그 역시 평소답지 않게 사정을 캐묻는 것일 테다. 대학 시절뿐 아니라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연애와 사랑을 등호로 두지 못했다. 인생을 개척해 보리라는 야망 속에 언제나 사랑은 배제돼 있었다. 시훈은 무심했고, 때로는 방만했다.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이시훈이 별일이네. 아무튼 데스크 가서 똑같이 발권하면 돼. 말해 놨어.

“고마워요, 서울 오면 연락 주세요. 제가 술 한잔 살게요.”

어느새 약속 장소에 다다른 시훈은 시간을 확인하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약속 시각이 다가오자 입이 말랐다. 유진우가 떠나고 관계를 갖던 날,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몇 종류의 리플릿을 봤다. 놀랄 만큼 텅텅 빈 집 안에서 유일하게 취향을 알 만한 물건이었다. 정이수는 프로젝트나 비딩이 끝났다고 회사 사람들과 술을 한잔하는 편도 아니었고, 주변에 사람이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또 운동을 즐기거나 음식을 챙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냉장고를 보면 말 다 했지…. 전시회 관람이라. 정이수다운 취미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엘리베이터에서 인턴과 노닥거리는 모습에 충동적으로 잡은 저녁 약속은 고심해 고른 메뉴가 무의미할 정도였다. 식사를 나눈 시간은 지나치게 짧았고 정이수는 도통 먹지를 못했다. 아마 메뉴보다는 테이블을 같이 쓰는 상대가 문제였겠지. 코로 긴 숨을 내쉰 시훈이 같은 자리를 오가며 반복해 걸었다. 물꼬를 튼 상념이 이어졌다.

어린 인턴과 대화를 나누는 정이수를 봤을 때 느낀 낯설고 생경한 기분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유진우가 떠나던 날, 제 품에 안긴 정이수는 위로… 위로라고 정의할 수 있나. 제가 한 행동을. 시훈은 혼란스러웠다. 한 번도 그 밤을 복기한 적은 없었다. 본능에 이끌렸고, 그게 뭐였건 그 후로 정이수의 몸만을 취할 수는 없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시훈이 입술을 감쳐물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말끔하게 떨치지 못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남자의 구두코가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

문득 시선 아래, 무늬 없는 구두 하나가 자신을 향해 서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인사를 전했다. 발끝부터 따라간 시선이 턱 끝, 그리고 두 눈과 마주치자 시훈은 순간 짧게 숨을 멈췄다. 설마 입고 나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다. 기분 좋은 충격에 볼 안쪽을 살짝 깨물어 당황한 낯을 감췄다. 불어온 가을바람이 나뭇잎을 그리고 시훈의 마음속 어딘가를 간지럽혔다.

“이거 전에 보내 주신 옷인데… 잘 입을게요.”

어색한지 정이수는 소매를 끌어당겨 매무새를 정리한다. 잘 어울린다, 예쁘다는 말조차 잊어버렸다. 하마터면 손을 뻗어 바람결에 흐트러진 상대의 머리카락을 넘겨 줄 뻔했다. 불시에 일어난 충동이었다.

“네.”

‘오늘은 발송이 어렵고, 내일 저희 매장 영업 시작하는 대로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펜하고 메모할 종이 좀 주시겠어요?’

세탁한 정이수의 티셔츠를 드레스 룸에 걸어 두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한 결과였다. 정이수는 티셔츠가 없어졌대도 신경 쓰지 않을 사람 같지만, 막상 옷을 빌려 간 시훈의 고심은 길었다. 티셔츠 한 장 사겠다고 백화점 매장을 일일이 드나든 것도 우스웠고, 늘어놓을 변명도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몇 시간을 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우연히 한 매장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옷을 보자 입고 있는 정이수의 모습이 그려졌다. 따뜻하고 은은한 색감의 니트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결국 이끌리듯 구매해 포장까지 순순히 맡겨 둔 뒤에야 시훈은 가장 적당해 보이는 몇 마디 말을 적고 접은 종이를 매장 직원에게 건넸다. 복잡한 마음을 감춘 성의 없는 메시지였다.

사람을 예기치 않게 들어다 놨다 하는 건 정이수의 취미인가. 시훈은 당혹감에 앞서 걸었다가 다시금 이수의 어깨를 끌어 방향을 알려 주었다. 좀 걸어야 해요. 아마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지만 코트 옆으로 내린 다섯 손가락에 불이 난 듯 시훈은 가볍게 주먹을 펴고 쥐었다.

전시회장 안은 암흑천지라 상대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볼 수 없었다. 홀로 왔으면 딱히 감흥이 없었을 전시 체험하는 내내 웃거나, 놀라거나 혹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평소와 달리 천진하고 경계 없는 목소리는 시훈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정이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체감상 30분 정도 지났을 때,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전시회장 내부에 설치된 벤치에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나란히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이수가 막막한 침묵을 깨고 조용히 입을 뗐다.

“이 전시, 보고 싶었던 전시예요. 관람객이 많다고 해서 포기했었는데…. 고마워요.”

저도 모르게 입매가 올라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바로 옆에 정이수가 있었다. 애써 표정을 갈무리한 시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빛 한 점 없는 공간이었다. 서로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볼 수 없는 이곳에서 굳이 감출 이유가 없었다. 시훈의 소리 없는 미소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이내 막막한 어둠 속에서 시훈의 시선은 줄곧 이수를 향했다. 숨소리, 그가 움직이면 들리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출구에 다다를 때까지 정이수의 뒤를 따랐다.

전시회장 밖으로 나왔을 때 잠시 눈을 감고 가슴을 부풀린 정이수의 곁에서 시훈은 그를 감상했다. 환한 오후의 햇살 아래 정이수는 유난히 더 반짝였다. 좋아하는 걸 볼 때는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경계가 느슨해진 정이수가 보인 또 다른 이면이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커피를 주문하고 뒤를 돌자 어정쩡한 위치에서 기다리는 정이수가 보였다. 때마침 걸려 온 전화에 시훈이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아닙니다. 네, 출장 전에 마무리 지으시죠. 어차피 본부장님 확인하셔야 하니까요. 네.”

번잡한 매장을 지나 정이수의 곁에 선 시훈은 전화를 받으며 야릇한 시선들과 몇 번 눈이 마주쳤다. 대부분 이수 쪽을 한번 보다가 제 쪽으로 눈길이 왔다. 그러다 시훈과 눈이 마주치면 모르는 척 재빨리 고개가 돌아갔다. 확실히 제 곁에 선 이가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기는 했다. 시훈은 통화를 이어 가며 저보다 한 걸음 앞에 자리한 정이수를 응시했다.

연한 핑크색과 잘 어울리는 깨끗한 목덜미가 먼저 보이고, 그다음은 색이 고운 니트 아래로 길게 뻗은 등을 따라 시선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매장 내 소음과 뒤섞이며 점점 뭉그러졌다. 예민하게 상대를 더듬어 가는 시선과 달리 청력이 소실된 듯 시훈은 눈앞의 남자를 낱낱이 훑는 데에만 몰두해 있었다.

시훈은 알고 있었다. 도드라진 척추뼈를 따라 내려간 손이 움푹 파인 등허리를 누르면 기어코 신음이 터져 나왔다. 팔을 둘러 등을 감으면 이내 정이수가 목을 끌어안으며 얼마나 사랑스럽게 안겨 오는지. 시훈은 경험해 봤다. 정이수가 제 품에 안겼을 때 피어오른 불꽃을. 그건 장소와 시간을 통보하고 의무처럼 치른 섹스와는 전혀 달랐다.

“…….”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시훈의 시선이 이내 하얀 얼굴에 머물렀다. 동그란 귀와 유려하게 떨어지는 턱선, 그러다 단정히 맞물린 입술이… 눈에 걸렸다. 차가워 보일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일을 하고 사람을 대하는 저 입술이 불시에 웃을 때면 신기하게 정이수는 다른 사람이 됐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네, 그 부분은 출장 후에 전달드릴게요.”

자꾸만 시선을 채 가는 정이수가 문제였다. 통화에 도통 집중을 할 수 없었다.

‘A-19번 고객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커피가 나오는 타이밍에 맞춰 자연스럽게 시선이 떨어졌다.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받아 넘기는 순간에도 자꾸만 대화를 놓치는 바람에 별거 아닌 통화가 길어졌다.

대형 서점 앞에서 짧은 대화를 나누고 주차장까지 가는 길을 지날 때쯤에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형에 대한 그리움에 헛헛한 마음을 익숙하게 지워 낼 때쯤, 먼저 횡단보도 앞에 당도한 정이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점멸하던 초록색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아마 걸음을 재촉했더라도 건널 수 없었을 정도로 짧은 신호였다.

“…….”

그 순간 노을빛을 머금은 정이수를 보고 이상하게 조금 웃었던 것 같은데, 정이수 역시 잠시 입술 끝이 올라가다 말았다. 놓친 건널목 신호 때문일 수도 있고, 그저 거울처럼 무의식에 따라 웃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리를 좁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을 때 손등의 열기가 지나는 바람처럼 시훈을 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뀐 신호를 따라 걸어가는 정이수의 뒤를 밟으며 시훈은 주먹을 꽉 쥐다 못해 결국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이러다가는 손을 잡을 것 같아서. 이유는… 그뿐이었다.

“와인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호텔로 들어오는 로비에서부터 레스토랑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가라앉은 정이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동안 저지른 짓이 있으니 오해를 할 만했다. 호텔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망연히 저를 따라오던 정이수는 자리에 앉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을 때야 굳은 표정이 풀어졌다.

가벼운 애피타이저 다음 메인 요리가 나올 때까지 여전히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코스대로 음식이 나오고 매니저의 간단한 설명이 곁들여질 때나 네, 혹은 고맙습니다, 같은 말들을 내뱉을 뿐이었다. 식사는 생각이 없다고 포크며 나이프를 밀어 놓지는 않을까 시훈의 염려와 달리 식사는 조용하게 이어졌다. 생각보다 음식을 가리지는 않는지 꼭꼭 씹어 넘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와인, 더 드릴까요?”

매니저가 다가와 묻자 시훈이 거절을 표했다. 식사를 마치면 집까지 바래다줄 생각이었으니 더 마실 생각은 없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정 팀장님은요?”

“저도 그만 마실게요.”

고개를 저으며 정이수가 예의상 입술 끝을 올렸다. 의사를 묻느라 서로를 외면하던 시선이 그렇게 마주쳤다.

“…….”

매니저가 테이블을 벗어난 뒤 시훈은 곧장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편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정이수는 디저트를 기다리는 동안 불빛이 반짝이는 서울 시내를 내려 보고 있었다. 시훈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내면 깊숙이 온종일 참아 온 혼탁한 욕구가 파도처럼 들이치다 빠지기를 반복하며 슬금슬금 시훈의 간을 봤다.

…그러니까 본능대로라면 식사를 마친 뒤 이대로 룸을 잡아 올라갈 수도 있을 테다. 아마도 룸에 들어가면 꼼짝달싹 못 하게 정이수를 문에 밀어붙여 놓고, 밖을 보느라 길게 뻗은 저 목에 자국부터 남길 터였다. 그리고 녹녹한 입술에 입을 맞출 테다. 눈을 감고 코로 숨을 쉬는 법도 잊어버린 정이수가 고개를 돌리면 그때는 조금 웃을지도 모르겠다. 매번 다 해 본 사람처럼 초연하고 무심해 보여도 침대 위에서 정이수는 누구보다 쉽게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이 좋았다. 호승심도 뭣도 아닌 이상한 고양감이 찾아왔다.

유리창에 드리운 레스토랑 조명이 시훈을 또렷하게 반사했다. 자신의 욕망을 직시한 시훈은 설핏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운 낯선 상상만큼이나 생소한 이시훈, 자신을 마주한 탓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시끄러운 머릿속과 달리 의자가 조용히 뒤로 밀렸다.

시훈은 세면대 앞에 서자마자 레버를 올렸다. 콸콸 물이 쏟아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남자는 결국 소매를 걷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턱으로 고인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려 물기를 훔쳐 낸 시훈은 차마 거울을 보지 못한 채 페이퍼 타월을 신경질적으로 뽑아냈다.

“…미쳤지, 지금.”

얼굴을 닦지 못한 페이퍼 타월이 손안에서 구겨졌다. 불쑥 튀어오른 욕정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정이수를 곁에 둔 온종일 그러했다.

언제부터 알았을까. 정이수가 마시는 커피 종류나, 피곤할 때면 한쪽 눈에만 쌍꺼풀이 지는 소소한 것들. 사무실을 들어설 때면 출근 도장을 찍듯 자연스럽게 정이수의 자리를 확인했다. 왔는지, 갔는지,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러다 정이수가 멀건 얼굴로 저와 시선을 마주칠 때면 도통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없어 조바심이 일었다.

아마 그래서, 오늘 같은 약속을 잡았을 테다. 정이수와 걷고, 보고, 말하고, 밥이라도 한 끼 먹으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까 싶어서. 호기심. 말하자면 그런 이유였지만 제 얼굴을 직면한 이후에는 순수한 의도였는지 혼란이 일었다.

유진우가 떠난 후, 무너진 정이수가 어깨에 뺨을 묻고 눈물을 흘렸을 때 분명한 변곡점이 생겼다. 변화한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지 시훈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실패한 사랑을 모욕하기보다 그저 궁금했다. 이제는 괜찮은지, 여전히 미련이 남았는지. 혹시 저 혼자만 그 밤을 기억하는지.

약속을 잡을 때부터 전시회를 보고 식사를 마치면 돌려보낼 생각은 확고했다. 하지만 이토록 망설이게 될 줄은 몰랐다. 조소를 삼킨 시훈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이 얼마나 우습고 같잖은 결심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로 돌아온 시훈 앞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잘 마시지도 않는 차를 주문한 줄도 몰랐다. 시훈은 피어오르는 충동을 누르며 침묵을 택했다. 원래 전시회 보는 걸 좋아했는지, 오늘 식사는 먹을 만한지… 제 앞에 광고주나 클라이언트가 있었다면 영혼 없이도 두어 시간을 너끈하게 보낼 만한 대화들은 순식간에 소멸됐다.

뜨거운 차의 열기가 식어 갈 때쯤 시훈이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고 상대를 향해 물었다.

“피곤하지는 않아요?”

“네, 괜찮아요.”

한 모금 차를 마신 이수의 손가락이 찻잔을 따라 움직였다. 창에 비친 이수의 모습을 지켜본 시훈은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온종일 정이수에게 하고 싶었던 말 한마디가 툭 떨어졌다.

“생각보다 더… 옷이 잘 어울리네요.”

음습한 상상을 감추고 체면을 차릴 만한 인사였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까지 침묵이 이어졌다.

“들어가요, 그럼.”

의식적으로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은 인사를 뒤로하고 정이수는 단 한 번 망설임도 없이 자동문을 지났다. 핸들을 붙잡은 손이 저릿저릿했다. 부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격렬하게 충돌하는 욕망에 무력한 저항이 뒤따랐다. 운전석 문을 열고 정이수의 뒤를 밟을 때까지 번잡한 생각이 줄을 이었다. 그냥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것뿐이라고 변명을 해 볼까. 아니면 오늘 즐거웠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이 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시훈을 열린 문 너머 정이수가 놀란 눈으로 돌아봤을 때 모든 고민이 물거품처럼 허사로 돌아갔다. 피가 몰린 붉은 입술을 순식간에 삼켰다. 내내 끌어안고 싶었던 허리에 팔을 감고,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카락을 손바닥 가득 담았다. 입안에 남은 허브차 향이 은은했다. 그것마저 그동안 몰랐던 정이수 같아 애가 탔다. 달아나려고 하면 반드시 방향을 틀어 숨마저 앗아 갔다. 암흑 속, 전시회장 안에서 느낀 정이수의 호흡과 같았다. 아무런 조건이나 단서가 없는 정이수를 향한 열망은 순수했고, 뜨거웠다.

어깨를 밀친 정이수가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몸을 물렸다. 시훈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직 잦아들지 않은 욕망이 들끓었다. 자각한 감정이 마구잡이로 넘실거렸다. 시훈은, 당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 그대로 황급히 차에 올라탔다. 구겨진 미간이 좀체 펴질 줄을 몰랐다. 아파트까지 오는 동안 신호 앞에서 몇 번 넋을 놓았다. 시끄러운 경적 소리마저 먹먹하게 들려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옷부터 벗었다. 기능을 멈춘 듯 더디게 돌아가는 머리며 몰아치는 열기가 도저히 가시지를 않았다. 욕실로 들어간 시훈은 샤워 부스 안에서 찬물을 끼얹었다. 제대로 닦지 못한 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욕실 앞 허물처럼 벗어 놓은 옷을 뭉치째 들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실내복을 입는 순간에도 좀처럼 찌푸린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손길이 거칠어지는 그때, 문득 하얀색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

외떨어져 옷걸이에 걸어 둔 티셔츠는 구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시훈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이딴 걸!”

쭉 잡아당긴 티셔츠가 옷걸이에서 튕겨 나오며 보기 싫게 늘어졌다. 한 손에 잡힌 티셔츠가 와락 구겨지다 내쳐지기 전이었다.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시훈은 턱이 아릴 정도로 세게 이를 물었다. 그리고 거세게 줄을 당긴 듯 팽팽했던 이성이 그대로 끊어졌다.

“…하아….”

내팽개치지 못한 티셔츠에 시훈은 와락 얼굴을 묻었다. 정이수의 향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건만 맹목적이고 무지한 짐승처럼 한 점 남아 있을 체취를 찾았다. 티셔츠를 쥔 손이 겨우 벽을 짚고 섰다. 그 위로 이마를 기댄 시훈은 나직이 욕을 짓씹었다. 발기한 성기를 쥐는 데 일망의 망설임도 없었다.

빠르게 되돌린 시간이 시꺼먼 어둠 속에서 한 줌 빛과 함께 펼쳐졌다. 시훈의 그늘진 욕망을 먹고 자란 상상이 재생됐다.

‘생각보다 더… 옷이 잘 어울리네요.’

‘…….’

‘다 먹었으면 가죠.’

상상 속 이시훈은 이성 대신 욕망을 뒤따르기를 선택했다. 시훈이 지하 주차장이 아닌 룸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층이 점점 위로 올라가는 동안 흐릿한 상상은 점점 선명해졌다.

고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저보다 앞서 복도를 걸어가는 정이수는 마치 구름 위를 걷듯 가볍고 가볍게 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종종 내비치던 망설임과 걱정 따위 없는 산뜻한 움직임이었다. 예약한 룸 앞에 당도한 정이수에게 문을 열어 보이자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선 정이수의 시선이 문득 아래쪽을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반쯤 발기한 성기를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여태 본 적 없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정이수 얼굴에 떠올랐다.

‘세수한다고 그게 가라앉혀져요?’

“…하아….”

비웃나 했더니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가 놓은 정이수는 새침하게 자신을 올려 보며 묻는다.

‘…근데, 오늘 왜… 손 안 잡았어요? 기다렸는데….’

“…정이수.”

돌덩이처럼 뻣뻣하게 굳은 저를 향해 이윽고 정이수가 자비로운 두 팔을 뻗었다. 목을 끌어안은 정이수의 허리를 감싸 쥔 순간 허상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룸 안으로 정이수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닫힌 문에 정이수를 밀어 놓고 혀를 밀어 넣었다. 더운 숨과 함께 새어 나오는 신음, 그리고 제 목에 두른 정이수의 팔이 음욕을 자극했다. 종일 꿈꾸고 바라던 감각이었다. 뺨과 턱, 길고 하얀 목을 따라간 입술이 종착지를 찾아들었다. 이수의 피부색과 잘 어울리는 니트였다. 오늘 이후로 다시 입지는 못할 테지만.

‘흣…!’

부드러운 니트 아래로 머리를 넣었다.

‘하아…….’

채 끌어 올리지 못한 니트 아래서 봉긋 솟은 유두에 혀를 세웠다. 뒤척이는 몸을 다시 한번 벽에 밀어 놓고 세차게 빨아들이자 이수가 니트 속 짐승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천천히, 쉬이….’

욕심껏 유두를 빨고 혀로 짓이겼다. 한 번씩 ‘살살… 조금만, 천천히.’ 그렇게 달랠 뿐 이수는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니트를 끌어 올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줄 뿐이다.

‘흐으….’

머리가 겨우 니트 아래서 빠져나오자 다리에 힘이 풀린 이수가 카펫 위로 미끄러졌다. 이수의 허벅지를 쭉 잡아 끌어 내리고 바지를 찢어발길 듯 헤쳐 놓았다. 입술을 끌어 올린 이수가 핏줄이 불거진 팔을 붙들었다.

‘오늘…! 아흑…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지?’

두 손목을 단단히 그러쥐고 대답 대신 벌린 이수의 입술 사이로 혀를 넣었다. 숨을 몰아쉬느라 바짝 마른 입안이 제 타액으로 젖어 드는 순간 제 목덜미를 이수가 끌어당겼다. 목이 말라 다급한 사람에게는 해갈이 필요한 법이었다. 양쪽으로 쭉 찢어진 입술이 주체가 안 됐다. 눈을 마주치자 다시금 이수가 제 품에 안겨 왔다.

‘이시훈, 안아 줘….’

열락에 겨운 정이수가 야살스럽게 속삭였다. 애원하는 정이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울렸다. 머리가 쭈뼛 설 만큼 강한 만족감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툭툭 끊긴 필름이 멋대로 이어지다 잘리기를 반복했다. 성기를 붙잡은 손이 속도를 더해 갈수록 머릿속을 빼곡히 채운 이수는 점점 시훈을 깊은 못으로 끌어당겼다.

몸을 돌려 엎드린 이수가 두 어깨를 바닥에 붙이고 엉덩이만 올린 채 뒤를 돌아봤다. 쌕쌕 숨을 쉬는 정이수는 마치 기대하듯 눈을 맞춰 온다. 골반을 단단히 잡아 끌어 올리자 날개 뼈까지 흘러 내려간 니트 아래로 곧게 뻗은 척추 뼈가 도드라졌다. 손을 뻗어 오돌토돌 올라온 뼈를 하나하나 훑어 움푹 팬 곳까지 쓰다듬자 이수가 약속처럼 신음을 터트렸다.

벌린 다리 사이에 혀를 가져가 구멍을 핥았다. 충격적인 쾌감에 이수가 숨을 헐떡이며 카펫 위로 이마를 비볐다. 이내 매끈하게 뻗은 이수의 성기 끝에서 질질 흐른 프리컴이 카펫 위로 진한 자국을 남겼다. 괴악한 힘이 얇은 허리를 쥐고 벌름대는 구멍에 좆을 가져다 댔다. 축축이 젖은 점막에 귀두가 닿는 순간 이수의 입에서 환희를 담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성기가 남은 부분 없이 안쪽을 꿰뚫자 이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이 감겼다. 거칠고 배려 없는 삽입이었지만 이수의 붉은 입매가 요사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꽉 찼어. 하아….’

만족해 마지않는 목소리도 함께였다.

“…씨발.”

거칠게 몰아붙일수록 무릎이 밀렸다. 카펫 위로 손톱을 세운 이수가 이마를 바닥에 짓이기는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아윽…! 미친 듯이 박아 풀썩 쓰러진 이수의 가슴을 붙들어 연결된 채로 들어 올렸다. 까치발을 들고 겨우겨우 콘솔 앞으로 이동한 이수를 그대로 엎드려 기대게 했다. 한쪽 무릎을 콘솔 위로 접어 올리자 접합 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에 제 성기가 딱 맞게 삽입돼 있었다. 사타구니를 턱턱 부딪치는 힘에 콘솔이 밀리며 덜컹대는 소리가 거세게 이어졌다.

정이수의 등에 키스를 퍼붓고 목덜미를 빨아들였다. 콘솔을 짚고 있던 이수가 허리 뒤로 손을 돌려 단단한 허벅지를 붙들었다. 더, 더… 이시훈, 더… 세게. 갈구하는 손길에 더욱 허리를 쳐올렸다.

거울에 반사된 이수의 얼굴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격한 허리 짓을 받아 내면서 젖은 앞머리 사이로 샐쭉 웃는 눈이 거울 속에서 시훈을 부추겼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상이 빚어낸 정이수였다.

‘하아… 좋아, 너무 좋아…. 더 깊이… 해, …응?’

정갈하게 정리된 이수의 손톱이 시훈의 허벅지에 박혔다.

이수야, …정이수. 풀어진 내벽에 성기를 박아 넣고 입술을 묻었다. 매달리고 안아 달라고 우는 이수의 허리가 잘게 경련했다. 뒤꿈치가 들린 발가락 끝이 바들바들 떨리며 간신히 바닥을 지탱한 채였다.

“…하아…… 이수야.”

이시훈, 이시훈, 이시훈… 뜨거운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졌다. 손안에서 멋대로 구겨진 티셔츠에 더 깊이 코를 묻었다.

‘…키스해 줘.’

절정을 향해 가는 마지막 순간 귓전에 또렷하게 들이박힌 이수의 속삭임을 들었다. 성기를 쥔 시훈의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정이수…… 읏!”

하아… 희미하게 사라진 정이수의 몸 안에 성기를 박아 넣고 사정하는 찰나, 손안에서 정액이 터졌다. 끝을 향해 치달은 상상이 현실을 마주한 것도 그때였다.

“…하아… 하….”

머릿속을 맴도는 목소리도 정이수도 허망하게 사라졌다. 현실로 돌아오는 길을 지우기 위해 다시금 눈을 감고 티셔츠에 코를 묻었다. 여전히 빳빳한 성기를 쥐고 숨을 골랐다. 정이수를 밤새 지워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혀끝에 붙어 버린 이름이 또다시 잘린 시훈의 필름을 간단하게 엮어 놓았다.

다시 시작된 이야기는 엘리베이터 앞, 키스한 직후부터 이어졌다. 문이 닫히기 직전 엘리베이터 안으로 시훈의 손목을 끌어당긴 정이수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현실의 정이수가 절대로 행하지 않을 모습은 갖가지 탈을 쓰고 시훈을 깊은 못으로 빨아들였다. 충동과 열망, 온종일 인내한 정이수를 향한 욕망이 진흙처럼 뒤섞인 늪이었다. 발을 뺄 수가 없다. 더운 숨을 내뱉은 시훈이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와… 일만 하다 끝났네… 정말.”

여민준이 호텔 로비로 들어오자마자 어깨와 머리 위로 떨어진 빗방울을 털어 냈다. 귀국을 앞둔 하루 전날, 뉴욕에서 열린 론칭 행사에 참여한 광고주와 식사를 마친 뒤였다. 타임 스퀘어니, 센트럴 파크니, 유명 스팟은 고사하고 한국에도 널린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 한잔할 여유조차 없이 오늘로써 모든 일정이 마무리됐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여민준은 시훈의 안색을 살폈다.

“너 괜찮아?”

출국하던 날에는 답지 않게 넋이 나가 있다가 뉴욕에 도착한 후에는 각성한 인간처럼 미팅이며 타 팀의 업무까지 자처하고 나선 시훈이 걱정스러웠다.

“…괜찮아요.”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는 시훈이 심드렁한 대답을 건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일은 또 서울이네. 아무튼 쉬어.”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여 본부장이 휘휘 손을 흔들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온 시훈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 위에 엎드렸다. 무거운 몸은 침대에 당장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긴 숨을 내쉰 시훈이 느릿느릿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온 도시의 불빛이 어두운 룸을 어슴푸레하게 비췄다.

불쑥 몸을 일으켜 창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에 젖은 도시를 내려 보며 시훈은 한낮일 서울 하늘을 떠올렸다. 이내 정반대의 색채를 띤 하늘 아래 저절로 맞물린 기억이 머릿속에 스며든 정이수를 기어코 끄집어냈다. 아마… 지금쯤이면 홀로 앉아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늘 그렇듯 얼음이 가득 들어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테고. 그리고….

매듭이 풀린 타이의 한쪽 끝을 잡아 내린 시훈이 털썩 창가에 몸을 기대앉았다. 하. 깨닫고 나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잘하는 짓이네, 정말.”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나 분 단위로 이동하는 출장 중에도 머릿속을 빼곡히 채운 사람이 정이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품에서 꺼낸 핸드폰을 열어 이름을 찾아냈다.

‘정이수 팀장’.

메시지 창 위로 깜박이는 커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시훈은 신경질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 바람에 날아간 핸드폰이 카펫 위에 나동그라졌다.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은 바람과 천박한 상상을 이끌어 낸 자괴감이 한데 뭉쳐 소용돌이쳤다.

“후우….”

무슨 말을, 어떻게, 왜. 지난 열흘간 자문한 질문에 대한 답을 여전히 찾지 못했다. 냉소가 뿌리내린 제 감정이 들쑥날쑥 경계를 넘나드는 이유는 오로지 정이수 때문이었다. 그 점이 시훈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뉴욕에 머무는 열흘 동안 몸이든 정신이든 몰두하고 갈리다 보면 잊힐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흐르는 빗물에 일그러진 도시는 뉴욕인지 아니면 서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염없이 흐린 전경을 바라보던 시훈은 반쯤 열려 있던 커튼을 쳤다. 이제 호텔 룸은 온통 어둠이었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깜깜한 밤. 빗소리만이 혼란에 휩싸인 시훈의 귓가를 두드리던 날이었다.

툭.

투둑.

툭.

1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내린 비와 꼭 닮은 비가 불규칙적으로 창을 때렸다. 천천히 눈을 뜬 시훈은 이수의 체향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번민한 과거가 이제는 추억으로 변모한 순간이었다.

쿠션을 댄 소파 팔걸이에 반쯤 기대 누운 이수는 제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포갠 시훈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가사 없이 작게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도 함께였다. 이수의 다정한 손길을 받으며 섹스 후 나른함에 젖어 있는 시훈의 귀에 이내 나지막한 탄식이 들려왔다.

“아… 티셔츠 벗을걸.”

소파 밑으로 떨어진 속옷이나 바지와 달리 정사 내내 입고 있던 티셔츠에 이리저리 튄 체액이 도드라졌다. 무엇보다도 티셔츠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 시훈 때문에 다 늘어진 옷감이 문제였다.

“그것보다 뭘 좀 먹는 게 좋겠어요. 배가 홀쭉해.”

시훈은 배를 덮은 티셔츠를 살짝 끌어 올리고 드러난 맨살 위로 사뿐히 입맞춤을 남겼다. 흘긋 시선을 들어 올리자 배시시 웃는 이수와 눈이 맞았다. 그 순간, 시훈은 소소한 계획을 떠올렸다. 비가 그치고 가을이 오면 작년 가을과 같은 데이트를 해야겠다. 전시회를 보고, 식사를 하고, 키스한 그날처럼.

…그리고 티셔츠에 얽힌 비밀은 계속 묻어 두어야겠다는 다짐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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