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6. Dawn
“…어,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를 나눈 제작실 구영모 팀장의 삐딱한 자세가 시훈을 보고 바로 섰다. 승진 공고 후에도 구 팀장과는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어깨가 굽은 구 팀장은 어쩐지 제 눈치를 보는 모양새다.
“야근했어요?”
“아… 네.”
평소 같으면 물어보지 않아도 진행하는 프로젝트 건에 관해 푸념이라도 했을 사람이었다. 피곤해서 그러겠거니 애써 무시한 위화감은 반나절이 넘도록 이어졌다.
대부분 그랬다. 쑥덕거리거나 곁눈질하는 시선들은 카페테리아를 가거나 직원들의 보고를 받을 때 잠시 머물다 시훈과 눈이 마주치거나 사람들 사이를 지날 때면 순식간에 사라졌다.
회의가 끝난 느지막한 오후, 회의실에 신동윤 대리와 단둘이 남게 됐다. 같은 팀으로 1년 넘도록 손발 맞춰 오며 일했고, 나름 가깝다 느낀 사람이 쭈뼛대며 허둥지둥 자리를 정리하는 태도가 영 이상했다. 결국 시훈이 농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신 대리, 오늘 회의가 왜 이렇게 재미없어요?”
회의는 평이했지만 결정적인 순간 흐름이 뚝뚝 끊겼다. 본부장으로 승진했다고 눈치를 볼 거면 타이밍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어제만 해도 1팀 팀장이 시훈에게 제 의견을 더할 나위 없이 굳세게 밀어붙이지 않았던가.
“아… 글쎄요. 그냥… 음….”
신 대리는 시훈이 1팀 팀장이었을 당시 가장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던 팀원이었다. 엄연히 1팀 팀장이 있건만 일부러 자신을 불러 묻는 이유를 신 대리 역시 모르지 않아 난감함에 눈을 굴렸다. 어색하게 말을 고르는 모습도 이상하고, 평소처럼 커피라도 한잔하시지 않겠냐고 곰살맞게 굴지도 않았다. 시훈이 멋쩍게 웃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느껴 본 적 없는 이상한 거리감이었다.
“바쁠 텐데 미안합니다. 쓸데없이.”
의자에서 일어난 시훈이 신 대리를 스쳐 지날 때였다.
“그… 본부장님.”
눈을 꼭 감았다 뜬 신 대리가 어두운 낯빛으로 시훈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
막상 뒤를 돌자 붙잡은 사람은 말 대신 핸드폰을 내민 엉거주춤한 자세다. 넘겨받은 핸드폰에는 사내 익명 게시판을 캡처한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불과 두세 줄에 불과한 게시글은 누가 봐도 시훈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회사 정산 그룹, 둘째 아들, 낙하산, 최근 승진한 AE. 추측 가능한 이니셜. 내용을 확인한 시훈이 혀를 찼다.
“팀장…, 책임님!”
임순정 대리와 김민주 대리가 사옥 앞 카페에서 이수를 맞이했다. 근처에서 외부 미팅을 마치는 시각이 마침 퇴근 시간이라 미뤘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가까운 식당으로 이동해 음식을 주문한 뒤 제대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진 걸 보면 여전히 야근은 많은 모양이고, 커피가 질릴 정도면 봄이라 일이 끊이지 않는 탓일 테다.
“어, 타이 매셨다.”
김 대리가 알아보고 반색했다. 그에 이수가 타이 노트 부분을 매만졌다. 사실 생각보다 복장에 대한 규정이 까다롭지 않아 타이를 매도 그만 매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매게 되는 날에는 선물받은 타이에 자주 손이 갔다.
“자주 매요. 다들 잘 어울린대요.”
“책임님한테는 뭐든요.”
앞니를 드러내며 김 대리가 활짝 웃어 보였다. 이수는 못 들은 척 눈을 굴렸다. 사적인 대화를 많이 나눈 일이 없어 이럴 때는 웃고 말면 그만이건만 칭찬이 어색하기만 했다.
회사를 그만둔 후에 두 사람을 대하는 일이 오히려 편해졌다. 인사이트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을 함께 보낸 전우애랄까. 아마도 그런 진한 감정들이 시간이 지난 뒤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됐다.
주문한 음식이 속속 나왔다. 음료를 한 모금 넘긴 임순정 대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맞다. 그거 아세요?”
김지학이나 주현탁의 사표 문제일 거라는 짐작과 달리 임 대리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이시훈 본부장님이요.”
목소리를 낮춰 꺼낸 이름에 이수의 손이 멈칫했다.
“…….”
휘휘 주위를 둘러본 임 대리가 테이블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정산 그룹 회장 아들이래요. 둘째 아들.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거 보구, 진짜… 저희 다 뒤집어졌잖아요.”
이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맥주를 홀짝인 김민주 대리가 말을 이었다. 그녀 역시 테이블에 바짝 몸을 붙인 채였다.
“이 본부장님 승진이 좀 파격적이었잖아요. 나이도 젊은데… 그게 다 이유가…. 아무래도 그렇죠?”
방울토마토를 찌른 포크가 접시 끝에 놓였다. 이수 역시 그에게 물었었다. 왜 이런 고생을 자처하느냐, 실무 간 보는 거냐고. 하지만 이유를 알고 난 후에는 저 또한 시훈에게 얼마나 색안경을 끼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을 너무도 쉽게 추측하고 판단했다. 이수가 굳은 표정을 지워 내며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실력도 있고, 실적도 좋았잖아요. 이전에 T 기획에서 오랫동안 일하신 걸로 알아요. 요즘은 젊은 임원들도 많구요. 저희만 해도….”
저도 모르게 시훈을 거들고 나선 꼴이 됐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이수의 입이 다물렸다.
“…그렇긴 한데… 물고 태어난 수저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김 대리가 맥이 풀린 투로 턱을 괴었다.
“곤란하겠어요… 이 본부장님.”
이수가 테이블 위로 부산한 시선을 돌렸다. 한 귀로 듣고 흘려 보려 해도 자꾸만 두둔하고 만다. 임 대리가 음료에 꽂힌 빨대를 저으며 코를 찌푸렸다.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는데… 갑자기 거리감?”
이수는 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종류는 달라도 시훈이 겪고 있을 곤란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이가 제 뒤통수만 보는 느낌. 복도를 돌아 나가면 우연히 마주친 시선에 상대가 불편해하며 어설프게 머리를 숙인다.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아 입은 댓 발 나와 있으면서 정작 누구도 진실을 묻지는 않았다. 설령 누군가 묻는다고 해도 하나하나 일일이 열거하며 제 사정을 설명하기에는 이미 둘러진 벽이 너무 높았다. 사람은 그렇게 고립된다.
“사람들 줄줄이 그만두고… 아무튼 이래저래 회사 분위기가 좀 그래요. 꼭 나사 빠진 것처럼. 근데 퍽퍽하고… 또 주야장천 일은 하는데, 이래서 뭐 하나 싶기도 하고.”
김 대리의 푸념이 이어졌다. 기운이 쭉 빠진 김 대리 편에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해 줬다. 테이블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인사이트를 다니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회의감이, 이수의 마음에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
일은 어떠세요? 순간적으로 화제를 바꿔 낸 김 대리의 눈이 다시금 초롱초롱했다. 이수가 굳은 입매를 끌어 올렸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 질문이 이어졌고, 새 회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내내 이수는 두어 번 흐름을 놓쳤다.
“정산 쪽 일은 무리 없지? 정 책임이 까다로운가.”
시훈을 제외하고 팀장급 선에서 두어 번 미팅이 오갔고, 정이수 책임이 만만찮다고 전해 들었다.
“잘 진행되고 있어요. 촬영지 수배 중이구요.”
수월하지 않을 리가 있나. 누가 맡아서 하는 일인데. 시훈이 손에 든 담배를 입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나온 소리가 귀에 닿았다.
‘아니, 실무를 왜 뛴 거야? 대행은 6개월이나 하고 팀장은 꼴랑 1년 하고 그다음에 본부장? 이거 어떻게 이해해야 돼?’
목소리를 낮췄다고는 하나 비교적 말소리는 선명했다. 대체 몇 명이 모였는지 옥상 한구석에서 넘어오는 담배 연기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옆에 서 있던 여민준이 푸흡. 커피를 흘렸다.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은 여민준이 이를 꽉 깨물었다.
“아이, 씨… 업무 시간에 일들 안 하고 말이야….”
이것들이 그냥. 노기를 추스르지 못한 여 전무가 발을 막 떼려는 그때 팔이 잡혔다.
“둬요, 그냥.”
손안에서 라이터 휠이 의미 없이 돌았다. 시훈은 담배를 입술 끝에 물고만 있을 뿐이다.
그때 댓글 달린 거 보니까 T 기획에서도 다 몰랐다는데? 글쎄… 그 말이 믿겨? 난 잘 모르겠는데…. 하… 씨, 뭐가 됐든 좋겠다. 태어났더니 아빠가 재벌이야. 그럼 좋아, 안 좋아. 겁나 좋지. 부럽다. 얼마나 쉬워, 사는 게…. 아… 오늘 시간 진짜 안 간다. 날씨는 죽여주네.
그제야 시훈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런 거네.”
“어?”
여 전무가 반문하자 고개를 내젓는다. 별일 아니니 넘기라는 식이었다. 때마침 안쪽에서 소란스레 가십을 풀어낸 이들이 줄줄이 엮인 굴비처럼 좁은 틈을 빠져나왔다.
“…어,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아, 본부장님.”
줄지어 나올 때만 해도 왁자지껄 말이 많더니 여민준에게 가려 있던 시훈을 발견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머리나 뒷목을 긁는 모습들이 볼만했다.
“네.”
시훈은 가볍게 고개를 숙일 뿐이다. 가 보세요, 업무 시간인데. 심드렁한 눈짓을 보내자 하나둘 눈치를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사람이 떠난 휑한 옥상을 둘러본 여 전무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쯧, 단속한다고 했는데… 인사팀에서 샜나.”
김지학이나 주현탁이 사표를 쓰고 나가기 전 누군가에게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전전긍긍하는 여 전무가 시훈의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
…정이수는 더했겠지.
사람들이 저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 대든, 그저 시훈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쉽게 말하고 평가하고 재단한다. 시훈의 눈이 솟아 있는 마천루 어딘가를 응시했다.
세상은 변하는데 인사이트는 여전했다. 돈을 받고 일을 한다. 시간을 채우고 등 뒤에 달린 태엽이 멈추면 오늘 하루가 끝나는 것처럼.
이렇게 재미없는 회사가 광고를 만든다니…. 크리에이티브니 아이디어를 기대한다는 게 이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부러트린 시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여 있는 물은 언제고 썩기 마련이었다.
“전무님.”
전방을 주시하던 시훈이 입을 열었다. 쓴맛을 다시고 있던 여 전무의 대답이 늘어졌다.
“…어.”
“이거 좀 아닌 거 같아요.”
연말부터 바람 잘 날 없는 회사가 이제야 잠잠해졌나 했더니 하필 이 타이밍에 시훈의 정체가 드러날 건 뭐람. 언젠가 알려질 사실이지만 가십처럼 다뤄지지는 않았으면 했다. 꾸준히 자리를 다졌어야 할 시훈도, 같이 일하던 직원들도 껄끄러워졌다. 이직 온 과정이나 승진이 오롯이 재벌 3세가 낙하산을 타고 사뿐하게 내려온 거라 치부되는 현실이 씁쓸했다.
“뭐가아….”
“회사 말이에요.”
시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뚝 떨어트린 여 전무의 눈앞이 캄캄했다. 여기서 이 녀석까지 퇴사 운운하면 정말 골치였다. 자기 꼴리는 대로 사는 놈인 건 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훈아! 내가 형으로서…”
여 전무가 황급히 팔을 그러쥔다.
“퇴사 안 해요. 그러니까 나 도와주세요.”
“…어?”
시훈이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시선은 옥상 출구를 향해 있었다.
“이렇게 된 거 괜히 어설프게 틀어막지 말고, 좀 크게 보자구요.”
진지했고, 그게 뭐가 됐든 물러날 기미는 없어 보였다. 도통 짐작 못 할 말을 남긴 시훈이 성큼 앞서 걸었다.
* * *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임원 보고는 어딘가 맥이 풀려 있었다. 수습할 일들 천지였다. 윗선부터 혼란한 기운이 가시지 않아 회의실은 여전히 뒤숭숭했다.
대회의실에 시훈이 등장하자 불편한 시선들이 따랐다. 주요 임원들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건만 대외적으로 밝혀진 사실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회의 말미였다. 의례적으로 보고 회의에 참석한 문동현 대표가 크게 회의실을 훑었다. 인력 유출 및 관리에 관한 대책을 강구하겠다 의견을 모은 지 시일이 지났지만 방안은 여전히 답보 상태였다. 회의 테이블에 깍지 낀 손을 올린 문 대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 다들 분위기 처져 있지 말고, 각자 생각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논의해 봐요. 우리가 잘해 보자고 지금 하루가 멀다 하고 회의하는 거 아닙니까.”
입을 걸어 잠근 이들이 답답한지 미간에 주름이 진 문 대표가 살짝 언성을 높일 때였다.
“대표님.”
의자를 반쯤 돌려 앉아 있던 대표의 시선이 시훈에게로 돌아갔다.
“말해 봐요.”
입을 떼기 전 시훈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앞으로 피력할 의견들이 쉬운 주제는 아니었다. 저보다 이 세계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극상이라 여겨 불쾌해한다 해도 이렇게 고여 있을 바에야 판을 흔들어 놓는 편이 나았다.
“인사이트 내의 직급과 호칭을 타파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투명·공정한 인사 원칙을 공개하고 회의와 보고 문화, 하다못해 회식 문화 개선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돌려 말할 생각은 없었다. 시훈의 의견에 회의실이 잠시 술렁였다. 문 대표가 눈썹을 찡그린다. 회의실의 임원들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시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야 할 이유가 뭡니까.”
턱을 느릿하게 매만지는 행동이 긍정적인 사인은 아니었다.
“비난의 화살을 한두 사람에게로 돌리는 편이 쉽다는 거 압니다. 그대로 유지해도 회사는 돌아가죠. 하지만 지금 우리는 반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잠시 숨을 고른 시훈이 회의실 내 사람들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광고를 만듭니다. 유행에 민감하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매 순간 기민하게 촉을 세우죠. 각자의 아이디어를 쥐어짜 내고 그조차도 충분하지 않아 날을 세워 가며 회의를 합니다. 나와 동료, 나와 클라이언트,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요. 그런데 우리 조직은 지나치게 보수적입니다. 정형화되어 있고 수직적인 상하 관계는 벽을 세워 경직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어떻게 탑티어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낮고 단단한 음성이 회의실을 울렸다.
“우리는 운이 좋았습니다. 놀랍게도 능력과 실력 있는 실무진들이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이들이 이제는 인사이트를 떠나고 있구요.”
기획실뿐 아니라 제작실까지 최근 인사이트를 떠난 실무자들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김지학과 주현탁의 꾐에 사표를 제출하지 않았나. 사유는 ‘개인 일신상의 이유’였지만 우리 모두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조직이 개인의 희생을 발판 삼아 영광을 누려서는 안 됩니다. 실력 위에 다른 가치를 우선시해서도 안 되구요. 몸 갈아 일한 직원에게 보람과 의리로 버티라고 하기에는 너무 뻔뻔하지 않나요. 매년 신입 및 경력직 공개 채용을 통해 인재 영입에 만전을 기하면서 정작 회사를 위해 몸 바쳐 일한 직원들은 등한시했습니다. 네 노동을 단지 돈을 주고 샀다가 아니라, 우리가 같은 비전을 공유하고 향해 가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 줘야 합니다. 그러자면 연령, 직급을 떠나 개인을 존중하고 존중받는 평등한 기업 문화를 구축해야 합니다.”
회의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 원인과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시훈은 담담했다. 이럴 때는 그저 단순해야 했다.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인다 한들 의미가 없었다.
“제 존재가 인사이트 내부의 소란을 가져온 것도 사실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유 불문하고 사과드립니다. 직을 내려놓는 편이 합당하다고 하시면 군말 않고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집안을 배경으로 쉽게 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구요. 의심하십시오. 그 부분은 제가 감당하고 앞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강한 어조와 달리 말소리는 침착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 드려서 꼴같잖고, 오만하다 하시겠죠. 하지만 인사이트에서 평직원이라면 문 걸어 잠근 회의실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도, 열려 있는 귀도 없으니, 어쩌면 제가 말씀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대표의 손가락 끝이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미간의 골은 더욱 깊이 팼고, 꾹 다문 입술은 말이 없었다.
“…….”
의자를 물린 문 대표가 단 한마디 언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달칵. 회의실 문이 열렸다. 밖을 나서려던 문 대표가 뒤를 돌아보며 나직이 말을 남겼다.
이시훈 본부장. 집무실에서 잠깐 봅시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회의실에서 사람들이 자리를 이탈하고 시훈과 여민준 두 사람만 남았다.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은 데에 후회는 없지만 후련하지만은 않았다.
“…….”
끙 신음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여 전무가 시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대표님 뵙고 와. 나도 임원들 만나서 이야기해 볼 테니까.”
머리를 쓸어 올린 여 전무가 회의실을 나섰다. 이제 텅 빈 회의실에는 덩그러니 시훈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팀장님!
“고우재 씨.”
밝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이수는 주문한 커피를 들고 팀원들에게 먼저 가라 눈짓을 주었다. 이수가 핸드폰을 고쳐 들고 카페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한낮의 해가 쏟아지고 있었다.
“취업 준비는 잘돼요?”
-곧 인사이트 면접이거든요. 그래서 매일 악몽을…. 팀장님께 죄를 사해받고자 전화드렸습니다.
“네 죄를 사하노라. 이러면 되나?”
아멘. 고우재의 능글맞은 대답에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인사이트는 면접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에요. 올해도 지원자가 많아요?”
-면접도 걱정인데… 인사이트가 기업 문화 개선한다고 해서요. 지원자가 작년보다 더 늘었대요.
생소한 내용이라 의문을 가질 무렵 고우재가 말을 이었다.
-보도 자료하고 홈페이지에서 대대적으로 홍보 중이거든요. 그렇잖아도 김민주 대리님하고 얼마 전에 통화했는데, 지금 사내에서 호칭 공모한대요.
“호칭?”
-네. 직급 없애고 님, 프로, 영어 이름 같은 거요. 그래서 분위기가 좀 새롭다구 그러던데요?
“아… 그래요.”
-이 팀장님… 아, 이시훈 본부장님이 강력하게 건의하셨다는 후문이…. 면접 때도 들어오시려나….
“…….”
이시훈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혀 있다 생각하는 고우재가 그 뒤로 무슨 말을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팀장 자리를 이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실무도 손에 쥐고 있을 테고, 본부장 위치는 일을 만들자면 끝도 없는 자리였다.
게다가 배경까지 까발려진 마당에 회사를 바꿔 보겠다고 결심하고 나선 정도면 대체 어디까지 일을 벌여 놓은 걸까. 아무 상관도 없는 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근데 제가 이시훈 본부장님한테 시훈 님, 시훈 프로님, Sihoon? 이러면… 본부장님이 저 눈빛으로 말려 죽이시지 않을까요?
이수가 시답잖은 고민에 어설픈 웃음을 보였다.
“…무슨.”
저처럼 참고만 사는 바보는 아닐 테니 걱정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내심 임순정 대리와 김민주 대리를 만나 전해 들은 상황에 시훈이 겪고 있을 고생이 눈에 훤했다.
아무도 그 사람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모를 것이다.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위로나 격려를 해 주는 이도 없을 텐데.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수고하십시오!
전화를 끊은 이수가 카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시지 못한 커피 잔 표면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혔다. 얼음이 다 녹도록 이수는 쉽게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 * *
여민준이 시훈의 집무실을 두드렸다. 살짝 열린 문이나 집무 책상 위의 김이 오르는 커피를 보면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어휴….”
회의를 마친 이튿날, 불려 간 회의실에서 여민준 전무 앞으로 지시가 떨어졌다.
‘무례했다면 죄송하다고 머리 숙여 사과하고 용서부터 구하던데요.’
‘아… 네.’
‘…….’
앞으로 놓인 서류를 확인한 문 대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 전무가 도와서 컨설팅업체 선정하고, TF 맡아요. 시간 끌지 말고 할 거면 빨리합시다.’
TF 책임자 여민준 아래로 시훈과 선발된 핵심 인원을 주축으로 한 팀이 꾸려졌다. 본래 맡고 있는 기획 본부 업무만 해도 상당했다. 꼴을 보면 집에는 씻고 옷만 갈아입으러 다녀오는 것 같고, 잠은 자는지 마는지 모르겠다.
여 전무가 집무 책상 위에 공진단을 올려놨다. 그리고 시선이 벽에 붙은 엽서에 가닿았다. 시훈이가 제 자리에 항상 붙여 놓는 시영의 엽서였다. 시영이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뭐라고 그랬더라…. 시훈이 잘 챙겨 달라고, 시연이 남자 친구 생기면 어떤 놈인지 꼭 봐 달라고 했었지. 아이… 자식. 괜히 복잡한 기분에 여 전무 손이 엽서에 닿았다.
“…….”
달칵.
“안 갔어요? 뭐 해요?”
엽서가 내려가고 여 전무가 재빨리 보자기에 곱게 싸인 상자를 흔들어 보인다.
“이거. 와이프가 너 주란다. 고생한다고.”
시훈은 대꾸도 없이 보자기를 풀었다. 그러고는 공진단 한 알을 사탕 먹듯 입안에 넣고 풀썩 의자에 앉았다. 눈을 감고 기계처럼 약을 씹는 시훈에게서 긴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기력이 달렸다. 연말부터 빡빡했던 비딩 일정에 감정 소모도 만만치 않았고, 사내에서 저를 두고 쑥덕대는 말들을 무시한다 해도 회사 생활이 유쾌할 리는 없었다. 가만히 눈을 뜬 시훈의 시선이 엽서에, 정확히는 그 너머의 사진에 닿았다.
“골자 잡혔으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가. 주말에는 좀 쉬고. 사람이 잠을 자야지.”
“…그럴 거야….”
입을 벌리고 나온 답은 힘이 없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시훈은 두통이 이는지 관자놀이를 비볐다. 익숙하게 첫 번째 서랍을 열어 아스피린과 물 한 모금을 가뿐히 넘기고는 책상에 팔꿈치를 기댔다.
“운전하고 다니냐?”
잘 보이는 위치에 던져 놓은 키가 보였다.
“네.”
“진짜… 겁도 없이. 잠도 못 자면서 약 먹고 운전을 해. 쯧.”
여 전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오는 한숨을 삼키자 답답한 가슴에 빈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 녀석을 인사이트에 데려올 때만 해도 이런 결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일말의 죄책감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여민준이 이마를 긁적이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다.
“정산 광고 촬영일 언제야, 곧이지?”
“금요일이요.”
“가 볼 거야?”
“가야 해요. 모델도 S급에 전략실 실장도 둘러볼 생각이라니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많다 못해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스타일을 봐서 알지만, 시훈이 누구에게 일을 미루는 성미는 아니었다. 여전히 의자에 기대앉은 파리한 안색을 보고 여 전무가 일어나기를 종용한다.
“일어나, 가는 길에 떨궈 주게.”
“그냥 가요. 쉬었다 갈게.”
실랑이가 이어졌다. 결국 지금 가지 않으면 여민준 역시 소파에 몸을 뉘겠다는 말에 시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 힘든지 고개를 젓는 모습에 문을 잡은 여민준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바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시훈은 조수석에 올라타고 얼마 뒤 잠이 들었다.
회사를 빠져나온 여 전무의 차가 시훈의 집 방향이 아닌 다른 길로 향했다. 잠시 뒤 너른 주차장에 차를 세운 여 전무가 시훈을 깨웠다.
“시훈아, 이시훈. 눈 좀 떠 봐.”
어깨를 가볍게 흔들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느릿느릿 눈을 깜빡인 시훈이 시간을 확인하고 좌우를 살폈다. 대기 중인 구급차의 사이렌 불빛이 어른어른 자동차 앞 유리를 비추었다.
“올라가서 수액 맞고, 좀 자.”
예약해 뒀다며 접수처에 이름을 말하면 안내해 줄 거란다. 시훈이 허리를 세워 바로 앉으며 짜증을 쏟아 냈다.
“가, 그냥. 뭐 하는 거야.”
T 기획 시절 대리쯤이었나. 겹겹이 겹친 비딩에 당시 프로젝트팀장이 팀원을 반반씩 나누어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오라 명한 일이 있었다. 6인용 병실에서 동기 하나가 어찌나 코를 고는지 잠은 다 달아났고, 혹시 몰라 챙겨 간 노트북으로 제안서만 주야장천 쓴 기억이 떠올랐다. 일을 두고 잠이 오나.
차를 타자마자 여민준이 하던 잔소리는 그랬다. 총대를 메도 총알받이 할 각오로 해서 되겠냐, 왜 아주 회사 그만둔다고 하지 그랬냐 등등. 뻔히 눈을 감은 줄 알면서 그동안 참은 말을 풀어놓았다.
“이러려고 그 잔소리를 했어?”
웬만하면 져 주는 사람이지만 오늘만큼은 억지로라도 끌고 갈 생각인지 안전벨트를 풀고 나섰다. 운전석에서 내리기 전 여 전무가 몸을 비틀고 인상을 확 구겼다. 뜸을 들인 그가 마음속에 있는 말을 푸념처럼 늘어놓았다.
“너… 솔직히 관둔다고 해도 내가 뭐라 그러겠냐. 할 말 없지.”
“왜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해요. 안 어울려. 그리고 다시 말하는데 안 그만둬.”
시훈은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습관처럼 찾은 담배는 돛대마저 없이 비어 있었다. 확답이었지만 여민준의 얼굴에는 개운함 대신 의문이 서렸다. 그러잖아도 피곤한 사람 붙잡고 왜냐고 묻지 못했다. 이내 조수석 밖으로 시선을 돌린 시훈이 중얼거렸다.
“…못 그만두지.”
여민준은 부러 시훈을 닦달했다.
“…아무튼 말 들어. 주말에는 보고서 올라갈 것만 확인하면 돼. 네가 무슨 생각으로 지금 이러는지 아는데, 너 쓰러지면 꼴 우스워져.”
“…….”
운전석에서 내린 여민준이 보닛을 돌아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 준다. 터덜터덜 병원 입구까지 걸어가는 내내 혹시 어디로 샐까 싶어 팔을 부여잡은 손에 시훈이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으니까 놔요.”
“수액, 잠, 밥, 화장실. 이 네 가지만 해. 병원 밥 먹기 싫으면 말하고. 뭐라도 사다 줄게.”
시훈은 대답조차 귀찮은지 가라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입맛이 없어 죽도 안 넘길 표정이었다. 이러다가 진짜 쓰러지지 싶어 여민준의 표정이 자못 어두워졌다. 접수대에서 이름을 말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확인한 여 전무가 ‘쉬어. 병원에 전화해 본다.’ 말을 남기고 뒤를 돌았다.
“으이그… 어지간해야지.”
한참을 주차된 차 앞을 서성이다 핸드폰에서 찾아낸 연락처를 두고 여민준은 한동안 망설였다.
‘정이수 팀장’.
시훈이 저러는 건 처음 봤다. 누구를 언제 만나고 헤어졌는지 모르게 지난 연애들은 그늘과 흔적이 없었고, 스쳐 갈 뿐인 인연에 진심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사무실에서 시훈이 부적처럼 모셔 둔 엽서 아래에 붙은 사진만 안 봤어도 애당초 고민은 안 했을 텐데…. 업보다, 업보. 연락을 해, 말아.
“…….”
슬쩍 눈을 치뜨자 병원 앞 불을 환하게 켠 약국에 붙은 문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약은 약사에게.
그럼 이시훈은. 여민준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다 자판 위로 툭툭 손가락을 움직였다. 단문의 메시지를 적은 여민준이 눈을 질끈 감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정이수에게.
저녁 회식 후 돌아온 집에서 커피를 내리는 중이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털 때쯤 시침이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저녁쯤 배터리가 방전되어 충전 중인 핸드폰 액정이 때마침 번쩍였다. 달리 연락 올 곳이 없어 눈을 텔레비전에 고정한 상태로 무신경하게 메시지를 열었다. 그러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 팀장. 오랜만이에요. 시훈이가 무리해서 지금 병원에 있어요.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어 줘요. E 병원 110병동 105실.
“손님, 다 왔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택시 안이었고, 빨리 가 달라고 했던가.
룸 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살핀 택시 기사가 이번에는 고개를 빼고 뒤를 돌아봤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재촉을 하던 사람이 여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으니 의아해할 만했다.
“…아, 죄송합니다. 여기요.”
이수가 황급히 카드를 내밀었다. 결제 알림음이 곧 이어졌다.
택시에서 내린 이수의 시야에 멀리 응급실로 들어가는 구급차 한 대가 보였다. 병원 로비에서 한동안 망설인 이수가 곧 걸음을 옮겼다. 새벽인 데다 1인실만 나열된 밤의 병동은 매우 조용했다.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복도를 걷는 내내 고민만 쌓였다.
지나는 동안 호수를 확인한 이수가 이윽고 ‘이*훈’이라 이름이 적힌 병실에 다다랐다. 채 닫지 못한 문틈으로 병실 안이 보였다. 누운 흔적만 있고 사람이 없어 머뭇대는 사이 소매가 둘둘 말린 환자복을 입은 그가 침상 위로 셔츠며 바지를 훌쩍 던져 놓았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벽 뒤에 몸을 감췄다. 병실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발 옆으로 경계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괜찮은가. 지금 나가려는 건가. 아프다면서 왜.
오만 가지 생각에 이수가 핸드폰에서 급히 번호를 찾아 눌렀다. 신호는 길지 않았다. 두어 번 울리기가 무섭게 전화가 연결됐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선명했지만,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시훈의 목소리는 희미했다.
-아… 웬일이에요?
“…여민준 전무님이 연락하셔서요. 이시훈 씨… 병원이라고.”
상대는 잠시 당황한 듯 말이 없다.
-별거 아니에요. 감기 기운 때문에 약만 처방받고 가는 길이에요.
짧은 침묵 뒤에 시훈은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이수가 병원까지 왔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 한 눈치였다.
-이런 거로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바닥으로 눈을 굴렸다. 시훈은 아무래도 내색하기 싫은 투다. 자존심인지 아니면 걱정을 끼치기 싫은 건지…. 망설인 이수가 병실로 향한 발끝을 돌렸다.
“사실은… 얼마 전에 임 대리하고 김 대리를 만났어요. …들었어요. 사람들이 이시훈 씨 관해서… 알게 됐다고.”
가벼운 탄식이 터졌다.
-그렇게 됐어요.
별일 아닌 듯 가벼운 웃음과 함께였다.
“…곤란하죠? 그런….”
동료라는 핑계도 댈 수 없었다. 이수는 어설프게 단념한 문장 끝을 맺지 못했다. 불이 꺼진 어두운 복도 끝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간헐적으로 깜박였다. 정적을 덧그린 시간이 흐르고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잠잠한 목소리는 마치 시훈의 독백 같았다.
-…많이 힘들었겠다.
나긋했다. 이수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모를 그 말이 가슴을 훅 파고들었다. 쥐어짜듯 심장이 아팠다. 아마도 옆에 있었다면 제 뺨을 쓰다듬거나 혹은 어깨 위로 따스한 손을 둘러 주었으리라.
-힘들었을 텐데 잘 버텨 줬구나. 미안하고 고맙고. 강한 사람이구나. 새삼 또 느꼈어요. …근데, 그런 사람이 묻어 두고 갔잖아. 본인 세월이며 노력이며 열정이며. 그럼 누군가는 알아주고 지켜 줘야죠. 그리고…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는데… 내팽개칠 수가 없어요.
자료실에 남아 있는 이수의 과거는 누군가가 다시 한번 짚어 주고 먼지를 닦아야 했다. 그에 어울리는 자리에서 빛나도록 말이다.
이수의 눈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울컥 치미는 기분을 애써 삼켜 보려 해도 쉬이 갈무리되지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잘했다고 등을 다독여 주는 기분이 생소하기만 했다.
“…본인 몸이나 신경 써요.”
결국 냉랭하게 내쏜 말에 시훈이 목 아래로 소리 죽여 웃었다.
-걱정해 주는 거예요? 이거… 기분 이상하다.
동그란 초침이 무심하게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이수의 마음에 수많은 감정이 흘렀다.
“…….”
-며칠 뒤면 촬영일이네요. 업무 차질 없이 진행할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쉬어요.
시훈이 담담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묻고 싶은 것도, 답지 않게 부리고 싶은 투정마저 모두 감출 수 있는 적절한 인사였다.
전화를 끊은 뒤 열린 문틈으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환자복을 벗고 셔츠를 손에 쥔 그가 침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굽어 있는 너른 등과 처진 어깨 위로 얼마나 많은 짐이 쌓여 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얼굴을 쓸어내린 그는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고독이 그림자처럼 시훈의 발아래에 고여 있었다.
깜깜한 복도를 걸어 나오며 이수는 벽에 손을 뻗었다. 우둘투둘한 표면이 손끝에 닿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아도 그릴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촉각, 냄새, 귓전을 맴도는 목소리. 거리와 방향을 가늠해 발을 딛고 빛 한 점 없는 제 마음속에 손을 뻗었다. 그러면 아무런 가식 없이 실재를 마주할 수 있을 테다. 새벽이 머지않은 시간이었다.
* * *
간밤 긴 꿈을 꾸었다.
여섯 살쯤 CM송을 따라 부르며 과자를 먹고 있는 자신의 뒷모습이 첫 장면이었다. 만화 영화가 막 시작하려는 순간, 끼익- 바람 때문에 문이 열렸다. 매번 바깥에서 굳건하게 잠겨 있는 문이었다. 손에 잔뜩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윗옷에 문질러 털고, 발가락이 튀어나오도록 슬리퍼를 신은 어린 이수가 조심히 문을 열었다. 계단을 따라 오르자 올라오는 길이 험한 만큼 신나게 뛰어 내려갈 수 있는 골목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얘가 어딜 갔어….’
집에 돌아온 엄마와 반지하 창문 창살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정이수!’
이름을 부른 엄마 목소리는 방아쇠가 되었다. 어린 이수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뗐다.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골목을 따라 신나게 내달려 동네 어귀에 있는 놀이터에 도착했다. 그네가 하늘까지 닿도록 발을 힘껏 굴리고, 정글짐의 맨 꼭대기까지 차근차근 오르고 내려왔다.
어린 이수는 여전히 내리막인 긴 골목을 내려가 정류장에 다다랐다. 그리고 막 도착한 버스에 훌쩍 몸을 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교복을 입은 정이수가 있었다. 집과 거리가 먼 학교에 지각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 이수가 교문을 지나 교실까지 숨을 헐떡대며 도착했다.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훌쩍 자란 몸에 손목까지 올라온 소매를 습관처럼 내렸다.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무리를 지났다. 아르바이트에 늦지 않으려고 도착한 버스에 간신히 뛰어올랐다.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이 어찌나 노곤한지…. 잠깐 존 것 같은데 버스에서 내린 이수는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다.
‘공모전 마감 얼마 안 남았어. 졸업 과제도 해야 하는데, 죽겠다… 진짜.’
친구의 푸념이 이어질 때쯤 이대로 가다가는 수업에 늦지 싶어 무조건 뛰었다. 늦은 밤 야작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큰 빌딩을 올려 보니 늦은 시간에도 불이 켜진 창가를 누군가 지났다. 깜박 눈을 감자 사무실 한구석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정이수가 보였다. 지치고 피로한 모습은 놀이터를 향해 신나게 달리던 때와는 달랐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없는 사무실의 불을 끄고 퇴근길을 재촉했다. 가로등만 총총 켜 있는 길을 터덜터덜 걷는 제 마음은 마치 큰 구멍이 뚫려 있는 듯했다. 지나는 세찬 바람이 텅 빈 속을 할퀴었다. 시선을 들어 보니 멀리서 이수가 타야 할 버스가 오는 중이다. 놓칠까 봐 초조함에 막 발을 떼려는 그때, 뒤에서 누군가 이수의 손을 맞잡았다. 따뜻한 손바닥을 비벼 온기를 나누어 준 사람이 제 옆에 나란히 섰다.
‘…….’
손을 내려 본 이수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확인했다. 매번 제 꿈속에서 조각조각 잘려 나오던 그가 온전한 모습으로 곁에 서 있었다.
‘같이 가요. 나하고.’
‘…….’
‘우리, 좀 걷죠.’
웃었나. 고개를 끄덕였는데 눈이 뜨였다.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이수가 발을 내렸다. 꿈속에서 불이 나도록 내달린 발바닥이 건조한 촉감을 느끼고야 현실임을 깨닫는다. 걸음을 옮겨 거실로 나온 이수는 거실 창 너머 부유스름히 떠오른 여명을 바라보았다. 해가 뜨면 제 마음까지 당도할 빛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세팅하는 데만 오전을 보내고 오후가 되어서 리허설이 진행됐다. 촬영지를 수배하느라 애를 먹었다더니 영상과 사진으로 본 것보다 실제로 보는 풍경이 훨씬 아름다웠다. 길게 이어진 강가의 모래톱이 햇살에 부딪쳐 반짝였다.
하루 안에 TVC와 온라인 매체에 올라갈 바이럴까지 촬영해야 할 형편이라 시간이 촉박했다. 밤샘 촬영이 예고된바 해가 뜨면 하루를 기다렸다가 추가 촬영을 해야 하니 촬영장 스태프부터 광고주, 대행사까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지금 보이세요? 안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오시면 주차하실 수 있어요.
“본부장님. 지금 광고주 도착했다구요.”
점심 식사를 마친 후였다. 아래 직원과 함께 내리막길을 따라 촬영장에 도착한 이수가 오 팀장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거리를 좁혀 시훈의 앞에 서자 묵례가 뒤따랐다.
“고생하십니다. 리허설 중인가요?”
“네. 촬영본 보시고 같이 모니터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 팀장이 이수를 모니터 앞으로 안내하는 동안 시훈과는 짧은 눈인사를 나눴다. 며칠 전 나눈 통화는 깨끗이 지워진 사람처럼 사무적인 태도였다.
감독과 인사를 나눈 이수는 제 안방처럼 모든 일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갔다. 콘티와 의상이며 소품을 확인하고 이미 안면이 있는 감독과 CG를 담당할 프로덕션과도 진담 반 농담 반 섞어 가며 리허설한 촬영본을 확인했다. 전반적인 프로세스를 알고 있는 광고주는 설득과 이해가 빨랐다. 말하자면 눈이 부셨다.
바이럴 촬영이 마무리되고 잠깐의 대기 시간이 주어졌다. 노을이 떨어지는 시간대를 기다리며 장비가 세팅된 주변으로 스태프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시간을 죽이는 사이에도 이수는 콘티를 살피며 감독과 대화를 나눴다.
“컬러 그레이딩 할 때가 제일 좋아요. 순식간에 그림이 확 살잖아요.”
“편집실에서는 이제 못 뵙겠네요.”
“아쉬우시면 찾아갈까요?”
감독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광고주가 무슨 편집실까지 오세요. 그럼 우리 너무 힘들어져요. 농담 같은 푸념이 이어지고, 감독은 담배를 태우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다. 그때 홀로 남은 씬을 체크하는 이수 앞으로 불쑥 생수 한 병이 내밀어졌다.
“식사는 하고 왔어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겨를이 없었어요. 그리고 촬영일에는 잘 안 먹어요. 불편해서.”
느슨해진 분위기 때문인지 누그러진 어투였다. 시훈은 테이블 위로 생수를 놓아둔다.
“내일 새벽까지 갈 거 같은데, 시간 날 때 뭐라도 먹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구요.”
촬영지가 산골 오지는 아니지만, 안쪽으로 들어오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필요한 걸 구해 달라고 하면 시훈은 직접 차를 몰고라도 다녀올 생각인가 보다. 잠자코 있던 이수가 무심히 말을 흘렸다.
“광고주 케어하는 거예요?”
“둘 다요.”
제법 뻔뻔하게 느껴질 법한 대답을 이시훈은 담백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본인 몸이나….”
설핏 날이 선 말투였다. 말을 맺지 못한 이수의 귓가가 햇볕 때문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책임님!
멀리서 브랜드전략실 직원이 용무가 있는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확실히 날이 더웠다. 타이는 하지 않았지만 익숙하게 갖춰 입은 셔츠는 여전히 목 끝까지 잠긴 채였다. 손을 뻗어 풀어 주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시훈의 얼굴에 잠시 씁쓸한 웃음이 배다 사라졌다. 일 봐요, 그럼. 말을 남긴 시훈이 이수를 스쳐 지났다.
노을 지는 배경을 뒤로하고 모델이 연기에 임하는 동안 전 스태프가 소리를 죽였다. 단 한 컷이지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찰나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야 하는 야외 촬영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쉼 없이 밤 촬영이 이어졌다. 낮과 달리 쌀쌀한 강가에서는 촬영팀의 조명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저녁께 업무를 마치고 촬영장에 들렀다는 구원주 실장은 이수와 시훈에게 전반적인 상황을 보고받고, 아래 직원과 함께 서울로 돌아갔다. 실장을 만났으니 시훈으로서는 오 팀장에게 현장을 맡기고 떠나도 되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이수를 두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걷다가… 하나, 둘, 셋, 시선- 앞으로, 좋습니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테이크가 반복됐다. 모래톱 위로 모델이 지나고 NG 후 다시 카메라가 돌아갈 때마다 현장 스태프가 빗자루로 발자국을 쓸어 없앴다. 그 때문에 알게 모르게 소요되는 시간이 상당했다.
온종일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며 뜨거운 조명 아래서 버틴 스태프의 긴장이 살짝 풀어질 때쯤, 팟! 퓨즈가 나가는 소리와 함께 현장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여기저기 쏟아지는 한탄과 함께 조명 감독과 조감독이 현장 내 인원을 통제했다.
“위험하니까 이동하지 마시고요!”
하나둘씩 각자의 자리에서 핸드폰 라이트를 켰다. 드문드문 짜증 섞인 얼굴이 보였다. 시훈 역시 자신의 핸드폰 라이트로 주변을 살폈다. 어리둥절한 모델 옆으로 매니저와 함께 신 대리가 뛰어갔다. 언덕 위쪽으로 자리한 발전차를 확인하기 위해 몇몇 인원이 급히 이동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조 전기가 돌아가는지 빼곡하게 둘려 있는 조명 중 하나에만 열악하게 빛이 들어왔다. 발전차에서 뛰어온 조감독이 말하길 정상화되려면 10여 분 정도 시간이 걸릴 거란다. 그 말에 감독은 담배를 물고, 모델은 차로 이동해 대기하기로 했다.
“10분 정도 쉬겠습니다!”
조감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장시간 서 있던 스태프들은 각자의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을 돌린 시훈의 시야에 강기슭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수가 보였다. 달빛과 희미한 조명을 의지한 채였다.
이수의 뒤로 시훈 역시 기슭에 다다랐다. 새까만 하늘에는 총총 별이 떠 있었고, 강 주위를 두른 산들은 먹을 칠한 병풍 같았다. 날이 조금 쌀쌀했지만 춥지는 않았다. 사위가 잠잠한 강가에 물 흐르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시훈이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걸 아는 눈치였지만 이수는 가라는 말을 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묵묵히 걷는 이수를 뒤따르던 시훈이 어느 순간 불쑥 팔을 뻗었다.
“젖어요. 조심해야지.”
“…….”
어느새 이수의 신발이 잔잔하게 들이치는 강물에 닿아 있었다.
“한두 컷만 찍으면 되는데 먼저 올라가요. 잘 마무리할 테니까.”
팔꿈치를 힘을 줘 잡아당기자 넋을 놓은 이수가 그제야 몸을 물린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저들끼리 부딪친 나뭇가지 소리가 적요한 공간을 메웠다. 홀린 듯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이수의 머리카락도 밤바람에 날려 흐트러졌다. 곧 머리를 가만히 쓸어 올린 이수의 입술이 나직한 물음을 건넸다.
“가면… 좋겠어요?”
설핏 온화한 미소가 얼굴 위로 스미다 사라졌다. 위태롭고, 불안하고, 처연하기만 하던 과거와 달리 오늘 눈앞의 정이수는 느긋하고 편안해 보였다. 시훈은 그런 모습이 조금 생경하게 느껴졌다.
“피곤할까 봐요.”
시훈이 타이르듯 답을 건넨 후에는 또다시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수가 다음 말을 이었을 때 시훈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험하더라구요. 보이지를 않아서.”
까만 강물에 제 모습을 비춰 보던 이수가 초연한 태도로 눈을 맞췄다. 달을 등지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짐작 못 할 모호한 말에 숫기 없고 어리숙한 사람처럼 시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초조함과 비슷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고요 속 두 사람 모두 어둠을 뚫고 서로를 또렷하게 마주 본 상태였다. 찰박찰박. 조용하고 느리게 밀려오는 물이 이번에는 시훈의 발끝을 적시고 있었다.
“…….”
그 순간 섬광이 터졌다. 저 멀리 일시에 켜진 조명이 한낮처럼 주위를 밝혔다. 촬영을 준비하는 스태프들의 고함이 들리고 촬영장 주변에서 대기하던 신 대리가 시훈을 향해 머리 위에 원을 그렸다. 촬영을 재개할 거라는 사인이었다. 어느새 몸을 돌린 이수는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은 어슴푸레한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준비하고 계획한 대로 잘 마무리된 촬영에 조명이 꺼진 불상사는 가벼운 해프닝으로 남았다. 오 팀장이 현장을 정리 중인 감독 및 매니저와 마무리 인사를 하며 편집, 녹음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한 발자국 떨어져 주위를 살피던 시훈이 결국 부재중 통화만 남긴 핸드폰을 바라보다 오 팀장을 불렀다.
“혹시 정이수 책임님 못 봤어요?”
방금 전만 해도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이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여기 계셨는데….”
목을 빼고 주변을 둘러보던 오 팀장에게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어, 지금 책임님 전화 왔는데… 잠시만요.”
시훈에게 양해를 구한 오 팀장은 오늘 고생하셨다, 마지막까지 자리 지켜 주셔서 고맙다, 향후 일정은 월요일에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다 등의 대화로 끝을 맺고 핸드폰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혹시 전할 말씀이 있으시냐는 뜻이었다. 이미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라 짐작한 시훈이 고개를 내저었다.
“네, 들어가십시오.”
촬영팀은 장비를 나르는 중이었고, 모델을 태운 밴은 일찍이 이곳을 빠져나갔다. 그럼 이수는 촬영팀과 함께 이동할 생각인가, 아니면 다른 차가 있는 건가. 생각이 미칠 때쯤 앞서 걷던 오 팀장이 여전히 제자리인 시훈을 돌아봤다.
“본부장님, 안 가세요?”
“먼저 가요. 나는 잠 좀 깨고 갈게요.”
이런 곳에 대리운전을 부를 수도 없고, 차를 놓고 갈 수도 없었다. 오 팀장은 주말에도 편집실에 가야 할 형편이라 시훈이 퇴근을 재촉했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조심히 올라오세요.”
“고생했어요.”
사람이 모두 떠난 강가는 처음 발을 들였을 때처럼 한적하고 고요했다. 아침 이슬에 젖은 모래톱이 단단했고, 밤을 지난 새벽은 온통 푸른빛이었다. 자욱한 안개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물 흐르는 소리만이 강이 있는 사실을 알려 줄 뿐이다.
시훈은 강을 따라 천천히 길을 걸었다. 아침 이슬이 머리와 어깨 위로 습하게 내려앉아 그동안의 피로를 더욱 짓눌렀다.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막상 목소리를 듣고, 눈을 마주치고 그 얼굴을 바라볼 때면 어쩔 수 없는 욕심과 조바심이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미래를 바라면서 과거를 곱씹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초라해질 때도 더러 있었다.
잠들기 전 때때로 해 보는 가정들은 수 갈래로 갈라졌다. 그때 이수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이수를 그렇게 이해했다면, 그의 주변을 살폈으면 어땠을까. 오직 품 안에 안고, 마음을 얻을 생각만 했지 그간 이수가 앓아 온 고민을 헤아려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다리고, 거리가 필요하다면 잠시 떨어져 있어도 결국 내게로 돌아오면 된다고 확신만 주면 됐을 것을. 뒤늦은 후회를 세어 보다 밤을 지새우고, 그리는 마음만 점점 깊어졌다.
걸음을 멈추고 표면에 안개가 서린 물속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아득하여 깊이를 알 수 없고, 손을 넣어 휘휘 저어 본다 해도 손안에 가둘 수 없는 사람. 이수가 떠올랐다. 이슬에 젖은 머리를 넘긴 시훈의 미간에 슬며시 주름이 졌다. 쓸쓸함과 채우지 못한 그리움. 허탈함이 한순간 밀려왔다.
“…….”
어디서 떨어졌는지 떠밀려 온 꽃잎이 무심한 강을 따라 흘렀다. 근원지를 찾아 시훈이 시선을 끌어 올린 때였다. 짙푸른 빛에 섞인 새벽안개가 마치 꿈같았다. 그 사이를 가르고 인영 하나가 시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내딛는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드러난 실루엣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순간 시훈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머뭇거림 없이 제 앞으로 다가온 사람은 숨을 고르고 떨리는 손을 천천히 시훈의 어깨에 올렸다. 코끝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나직이 내쉬는 숨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서서히 들렸다. 한쪽 눈꺼풀에 얕고 긴 선이 그어진 눈 아래로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고스란히 시훈을 향해 있었다.
“…정이수…….”
청산유수처럼 내뱉은 고백은 어디 가고 시훈의 입에서는 겨우 상대의 이름만 흘러나왔다. 화답은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당신이….”
“…….”
“…내 전부를 알아주면 좋겠어.”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아직도 목구멍을 통해 나오지 못했다. 애정의 깊이나 너비를 잴 수 있다면 아마도 이 정도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말은 어떻게 소리 내는지 알지 못했다. 여전히 비겁하지만 시훈이 알아채 주길 바랐다.
부탁일지 애원일지 알 수 없는 고백은 초라했다. 믿어 주길 바라며,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시훈의 입술 사이로 차마 내뱉지 못한 사랑을 제 호흡과 함께 밀어 넣었다. 떨리는 입술이 목석처럼 굳은 시훈에게 닿았다.
시훈의 집에서 밤새 함께 있었던 그날, 어스름한 빛을 띤 창밖을 바라보며 새벽인지 저녁인지 순간 가늠하지 못했다. 아마 시훈을 마주할 때마다 경계가 흐려진 제 마음 같아 우울했던 것 같다. 위로를 핑계로 그를 끌어안고 사실은 애정을 갈구했노라 자괴감이 저를 짓누르는 새벽이었다.
그러다 잠에서 깬 시훈이 제게 손을 뻗었을 때 얼마나 부질없는 고민이었는지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을 끌어안은 온기에 그저 시간이 멈추기만을 바랐으니까.
시훈은 제 심연이 깊이를 더해 갈 때마다 매번 그 안에 불꽃을 피웠다. 어두운 마음속, 유일하게 불을 켤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소년처럼 어설픈 키스를 마친 이수의 아랫입술이 떨어졌다. 눈앞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선이 낱낱이 이수를 덧그렸다. 차가운 뺨을 감싸자 발간 눈매가 자신을 올려 본다.
“이번엔… 안 헤맸어요. 제대로 온 거 같은데….”
입매를 끌어 올려 봐도 눈안에 고인 눈물이 가시지를 않았다. 새까만 어둠이 드리운 어젯밤, 여기까지 오는 길이 험했다는 이수의 말이 이제야 절절하게 와닿았다. 따스한 손이 이슬에 젖은 이수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고개를 내린 시훈이 이마를 맞대고 낮은 목소리로 용서를 구했다.
“혼자 오게 해서 미안해요. 마중을 못 나갔어.”
내내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이내 시훈의 두 팔이 이수의 허리와 머리를 거세게 끌어안으며 뜨거운 입술이 맞닿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온전히 끌어안은 자세였다. 호흡이 달려 가쁜 숨을 쉬면서도 이수 역시 떨어지고 싶지 않아 시훈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입을 벌려 시훈이 마음껏 저를 헤집도록 두었다. 턱을 치들 때마다 따라오는 입술은 기다림에 대한 보상 같았다.
“하아… 하….”
부어오른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닿은 채로 잠시 숨을 골랐다. 시훈의 입술이 뺨으로 미끄러졌다. 차례로 눈과 코, 턱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친애를 담은 키스가 이어졌다. 시훈은 손을 들어 흐트러진 이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주었다. 확신을 담은 속삭임이 귓속에 다다랐다.
“이수야,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래,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장 확실한 답이었다.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저절로 올라간 입술 끝은 내려올 기미도 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알면서 이수는 시훈의 뺨을 감싸고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눈동자 속 울고 웃는 제 모습이 가득했다.
* * *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두 사람은 긴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저 시훈은 이수의 손을 잡은 채 운전했고, 이수 역시 그러도록 두었다. 차가 정차한 곳은 이수의 오피스텔이 아니었다. 시동을 끈 시훈이 안전벨트를 풀지 않고 앉아만 있는 이수 쪽을 바라보았다.
“주말에 같이 있어요.”
다정하지만 거절은 들어줄 생각 없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출근 시간이 지난 아파트는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바에 엉덩이를 기대선 시훈 앞으로 이수가 어정쩡하게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층마다 올라가는 속도가 실상 더디지도 않은데 어찌나 느리게 느껴지는지 이수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긴장과 약간의 어색함이 그렇게 만들었다. 앞으로 모은 두 손 중 왼쪽 손가락을 오른쪽 손가락이 짓이기고 있을 때 몸이 가벼운 힘으로 당겨졌다. 한 발자국 뒤에 선 시훈이 이수의 재킷 끝자락을 손에 쥐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리네.”
당장 끌어안고 싶지만 참는 중이라는 걸 눈빛이 말해 주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로 들어선 이수의 뒤로 문이 닫혔다. 주말 오전,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의 평화로운 풍경과 달리 눈에 띄게 긴장한 손끝이 멋대로 떨렸다.
“…….”
고요했다. 이수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훔치는 사이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이 와 닿았다. 느리게 입술을 스치고 어깨 위로 이마를 비비는 행동은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 같았다. 동시에 절절한 애욕을 눈치 못 챌 바보는 아니었다.
“…씻어야….”
만 하루를 밖에서 지새웠건만 아랑곳 않고 뒤통수며 목덜미에 코를 세운 시훈이 가볍게 턱을 당겨 입을 맞췄다. 비교적 얌전하게 시작된 키스는 단숨에 이수의 위아래 입술을 머금었다. 입속에서 맞물린 혀는 강가에서 나눈 키스보다 뜨거웠다. 신발을 어떻게 벗었는지 재킷을 어떻게 벗었는지 모르게 그대로 복도를 따라 침실에 딸린 욕실까지 키스가 이어졌다.
“하아… 흐….”
시훈은 숨이 차면 고개를 비틀어 틈을 만들어 줬지만 도망가게 두지 않았다. 욕실 샤워 부스 안으로 이수를 밀어 넣은 시훈이 눈앞에 있는 상대의 셔츠 단추를 급하게 풀었다. 명치께까지 인내심을 가져 본 손은 나머지 두 개를 남겨 두고 결국 앞섶을 억세게 쥐어 잡아 벌렸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든 어디든 차를 세워 키스를 퍼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수를 속박하고 싶었다. 시훈은 그 절절한 욕망을 잡은 손 하나로 참아 낸 자신이 기특할 지경이었다.
“읏…!”
뜯어진 단추가 도르르 바닥을 뒹굴었다.
“난, 참느라고 미치는 줄 알았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평온해.”
습한 기운에 차마 내려가지 못한 셔츠를 팔에 걸어 두고 집요하게 입술을 빨아 당겼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남자의 손이 정장 바지에 감싸여 있는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터트릴 것처럼 쥐어 보다 순식간에 벨트를 풀어 헤쳤다. 무릎 아래로 내려간 바지가 셔츠며 양말과 함께 바닥에 허물처럼 늘어졌다. 밴드 사이로 시훈의 손이 들어와 속옷마저 끌어 내리자 이미 발기한 성기가 퉁겨져 나왔다. 프리컴으로 번들거리는 귀두를 손으로 말아 조금 자극을 줬을 뿐인데 예쁜 얼굴에 난감함이 덧씌워졌다.
“…아……!”
뜨거운 숨을 토해 낸 이수를 두고 시훈이 몸을 물렸다. 타이를 풀고 셔츠를 벗는 손 아래 이수가 시훈의 벨트를 풀었다. 평온하기는 누가…. 이수의 귀가 새빨개졌다. 단단한 가슴 근육이 단추를 푸는 셔츠 사이로 드러나자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킨 사실을 시훈은 모르는 것 같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이 버클을 풀고 지퍼와 남자의 속옷까지 내렸다. 당연하게 단단한 성기가 배까지 올라붙어 있었다. 마저 양말까지 벗어 낸 시훈이 샤워기 레버를 올리자 따뜻한 물이 쏟아졌다.
“씻어야겠다며.”
순순히 요구에 응해 주겠다는 말과 달리 손에 쥔 비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배수구로 미끄러졌다. 미끌미끌한 손은 이수의 몸을 훑어갔다. 몸 위로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이 거품과 함께 등과 엉덩이를 따라 흘렀다. 이수의 목덜미를 따라 미끄러진 손이 엉덩이 골을 스쳤다. 오랜 시간 삽입하지 못한 구멍은 얕은 손짓에도 움찔댔다. 느리게 문지르다 손을 뺀 시훈이 불쑥 벽에 등을 대고 선 이수의 앞으로 몸을 붙였다. 시훈이 몇 가닥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매끈하게 뒤로 넘기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하아… 잡아 봐.”
숨과 함께 토해 낸 말은 평소와 다르게 급해 보였다. 시훈이 이미 한계까지 발기한 성기 위로 이수의 손을 끌었다. 이수가 순순히 제 것과 시훈의 물건을 손에 쥐고 느리게 흔들었다. 적나라할 정도로 핏줄이 불거진 성기가 움직이는 족족 손안에서 느껴졌다.
“생각보다 손이 작네.”
귓전에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어 이수의 손 위를 제 손으로 감싸 쥔 시훈이 속도를 높였다. 습관처럼 시선을 떨군 이수를 향해 시훈이 고개를 비틀어 눈을 맞췄다. 표정을 볼 수 있도록 이마를 맞댄 상태였다. 엄지손가락으로 이수의 요도를 문지르자 몸을 뒤척이는 이수에게서 헉 하는 신음이 터졌다. 그런 이수의 허리를 시훈의 팔이 단단하게 감았다. 물에 젖어 엉켜 있는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거품이 묻은 성기에 속도를 더해 가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흉흉하게 크기를 키운 기둥에 제 성기를 문지르며 이수가 얕게 허리 짓을 했다. 프리컴이 질질 새는 요도를 매만지는 손길에 이수가 결국 어깨 위로 이마를 짓이기며 애원했다.
“…빠… 빨리….”
“…이렇게, 응?”
차마 입으로 나오지 못한 답을 대신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목 아래서 울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시훈은 때를 기다린 사람처럼 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한순간 훅 몸이 굽었다.
“아… 흑…!”
“아….”
두 사람의 성기에서 터진 정액이 손과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평소보다 빠른 절정이었다. 이수가 쥘 것도 없는 벽 위로 손톱을 세웠다. 뒤로 휜 허리를 잡아챈 시훈은 손에 붙들린 성기를 쥐고 후희를 즐기듯 느릿느릿 기둥을 훑었다. 예민한 귀두를 쥐어짜듯 당길 때마다 차가운 타일 벽에 뒷머리가 짓이겨졌다.
“하아… 하….”
손 위에 묻어난 정액이 거품과 물에 씻기는 동안 감은 눈을 뜬 이수가 눈앞의 시훈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미간에 주름이 진 남자 역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넋을 빼고 그 모습을 지켜본 이수가 다급히 남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고 가시지 않은 흥분을 나누고 싶었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고, 이걸 없애 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이시훈뿐이었다.
정오도 지나지 않은 오전, 환한 빛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침대 헤드를 등지고 앉은 시훈의 다리 위로 이수가 마주 앉았다. 시선 위의 이수가 감싼 두 뺨에 온기가 돌았다. 이마에서 뺨, 입술로 이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은 서툴지만 진한 애정을 담고 있었다.
살짝 휘어 있는 얇은 허리부터 드러난 갈비뼈까지 부드럽게 쓸어 올리자 이조차도 자극이 되는지 언뜻 평온해 보이는 몸이 흔들렸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유두 끝에 아롱아롱 매달렸다. 몸을 추어올려 허리를 끌어당긴 시훈이 유두를 혀끝으로 핥아 올리자 앓는 소리가 잇새로 흘렀다.
“……흐으….”
입속에 작은 돌기를 물고 빠는 힘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야릇한 감각이 본능을 이끌었다. 허벅지를 세워 빨기 편하도록 가슴을 내어 준 이수가 침대 헤드를 붙잡아 몸을 지탱했다.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시훈은 혀끝을 세워 얕은 쾌감을 주었고, 나아진다 싶으면 다시 거세게 빨았다. 오싹오싹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아…, 흐….”
그즈음 무릎을 딛고 선 허벅지를 타고 올라간 손이 엉덩이를 살살 움켜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몸을 편하게 늘어트려 여유 있는 자세로 이수의 몸을 자극한 손가락이 구멍 주변을 살살 굴렸다. 시훈이 제 마음에 길을 만든 것처럼 몸에는 우리가 나눈 관계의 흔적을 저 몰래 남긴 모양이다. 부지깽이로 남아 있는 불씨를 뒤적이는 기분이었다. 닿는 족족 찌르르 저릿한 감각이 수시로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유두에 가해지는 자극뿐 아니라 뒤로 느끼는 쾌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
침대 위를 구르는 젤을 손가락에 바른 시훈은 주름을 문지르다 구멍을 눌렀다. 닫힌 입구가 열리기 무섭게 밀려 들어온 손가락이 느리게 안을 쑤셨다.
“…아, 읏…!”
내벽을 벌리고 들어오는 행위는 조급한 감이 없지 않았다. 휘젓다가 좌우로 뭉근하게 터는 손길에 몸이 부들 떨렸다. 예민한 부위를 피해 손가락 하나를 더 욱여넣고 벌리는 느낌이 선연했다. 혀로 살살 굴린 유두를 촉촉한 입술 사이로 쭉 잡아당겨 놓았을 때는 결국 신음과 함께 시훈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좋아요?”
“으… 흣….”
“응?”
다정하지만 짓궂은 물음이었다. 반드시 답을 듣고 싶은 사람처럼 응? 그래? 하고 채근하자 이수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한 얼굴을 올려 본 시훈이 소리 없이 웃었다. 풀이 죽은 이수는 사람의 음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시훈은 이럴 때마다 이수를 한껏 놀리고 싶었다. 아마 어느 누가 본대도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아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어야 한다. 힘이 빠진 이수가 몸을 기대 왔다. 옆구리를 타고 올라온 손이 유두를 스치자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제 뺨에 이마를 비볐다.
“버텨야지. 왼쪽은 아직 안 빨아 줬잖아.”
촉촉한 점막을 벌리고 느릿느릿 안을 쑤시는 손가락에 물처럼 녹은 젤이 찰박였다. 시훈이 왼쪽 돌기를 가볍게 깨물었다. 쉽게 흥분했고, 침으로 흥건한 양 유두가 뾰족했다.
“흐… 으…… 응….”
어느새 손가락 세 개를 무리 없이 품은 구멍에 시훈의 손이 속도를 더해 갔다. 허벅지와 엉덩이에 절로 힘이 들어가다 말기를 반복하며 이수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조였다. 시훈은 쾌감을 부채질하기만 할 뿐 직접적인 자극을 가하지 않았다.
“흐으… 읏….”
이내 느끼는 부분을 족족 빗나간 손가락이 빠지고 시훈이 이수를 시트 위로 눕혔다. 가슴이 맞닿기 무섭게 빠끔대는 구멍 앞에 뭉툭한 귀두가 닿았다.
“아….”
두 사람 모두에게서 낮은 신음이 쏟아졌다. 힘겹게 귀두를 삼킨 구멍은 나머지 기둥을 어렵지 않게 집어삼켰다. 깊숙이 자리 잡은 성기에 이수가 바르작댔다. 퍽. 느리지만 불시에 내벽 안쪽이 눌리며 펄쩍 몸이 튀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세게 누르자 무릎을 세운 두 다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헉… 너무…! 흐읏….”
손으로 풀어 준 내벽이 좆에 쩍 달라붙었다. 시훈이 천천히 허리를 쳐올리자 내벽이 밀려 올라갔다 내려가며 아득한 쾌감을 끌어냈다. 시훈 역시 여유가 없어졌다. 넣기만 했는데도 쥐어짜듯 내벽이 움찔댔다. 사춘기 시절에도 느껴 본 적 없는 욕구가 절절 끓었다. 슬슬 허리를 치대며 안쪽을 파고드는 움직임에 무너진 이수가 시훈을 끌어안았다. 거세게 올려붙인 성기가 이윽고 손가락이 비껴간 부분을 스쳤다. 소름이 일었다.
“아… 앗! 읏…!”
오랜만의 정사에 부드럽게 끌어가리라는 다짐은 순식간에 휘발됐다. 내내 괴롭힌 유두가 제 피부에 닿는 느낌과 울먹이는 신음도 자극이 되었다. 시훈은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결박하듯 이수를 감싸 안았다. 상체가 완전히 맞붙은 채로 아래서 위로 쳐올리는 힘이 거세졌다. 배 속에 가득 찬 빠듯함이 쾌감으로 바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발가락이 곱아들었고, 상대의 목을 껴안은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아…! 흣… 으…!”
이수가 시훈의 어깨에 이마를 짓이기는 순간 구멍이 좆을 끊어 먹을 듯 조여 왔다. 더 들어갈 공간도 없을 내벽에 시훈이 거세게 제 성기를 쑤셔 넣으며 사정했다.
“아흑…!”
“아…!”
배에 닿아 움직일 때마다 비벼진 이수의 성기에서 줄줄 정액이 샜다. 쾌감에 허리가 반대로 휘었다 돌아오며 잘게 떨리기를 반복했다.
“……하아… 하…….”
시훈이 붙어 있는 몸을 떼고 이수를 일으켜 안자 성기가 빠진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품 안에 안겨 숨을 고르는 이수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시훈은 몇 번이나 드러난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졸린 건 아니죠? 이제 겨우 아침인데….”
시훈이 농담조로 속삭였다.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시훈은 햇빛에 반사돼 반짝이는 이수의 몸을 천천히 쓸었다. 무릎을 접어 앉은 허벅지부터 엉덩이를 지난 손이 허리의 움푹 파인 지점을 살살 쓰다듬었다. 정사에 지친 이수를 달래는 것 같기도, 또다시 자극하는 것 같기도 한 묘한 손길이었다.
“…….”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은 이수가 시훈의 가슴을 짚고 느릿느릿 허리를 세웠다. 눈이 부시도록 깨끗한 피부 위로 내내 빨린 유두가 빨갛게 도드라졌고, 매끈한 복부에는 사정한 정액이 길게 늘어졌다. 볼을 물들인 이수가 작게 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괜찮아요?”
“…….”
다정하고 염려가 깃든 물음에 이수는 대답 대신 허리 뒤로 손을 뻗어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시훈의 성기를 잡았다.
“…괜찮아요. 나는 괜찮은데….”
살짝 엉덩이를 들어 녹진하게 풀린 구멍에 성기 끝을 맞춘 이수가 몸을 내렸다. 이내 이수를 올려 보는 시훈의 미간에 깊게 골이 패었다. 울퉁불퉁한 내벽이 마치 제 것처럼 시훈의 성기를 빨아 당기고 있었다.
“……하… 정이수.”
아…. 이수의 입에서 낮게 흐른 신음이 끓어오른 흥분을 여실히 방증했다. 곧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과감한 이수의 행동에 탁한 탄성과 함께 시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입을 벌린 채 살짝 턱을 치든 이수의 요요한 눈동자가 이윽고 시훈을 내려 보았다. 몸 안의 정액을 윤활제 삼아 뭉근하게 골반을 앞뒤로 흔들자 성기를 삼킨 구멍 입구가 밀려 나온 정액과 체액으로 질척였다.
그간 몸을 섞을 때와 달리 이수 역시 애가 탔다. 떨어져 있는 동안 잊혔다 싶은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누군가의 품이 그리웠고, 그게 시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훈을 더 빨리 만났어야 했다. 더 빨리 그를 끌어안았어야 했다.
“근데….”
…이수야. 그렇게 부르는 남자의 시선은 오롯이 저를 향해 있었다. 이수는 잠시 벅찬 마음에 숨을 멈췄다. 시훈이 겨우 이 정도로 기꺼워한다면 못 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시훈 씨는… 괜찮구요?”
한쪽으로 슬쩍 올라간 입매가 기어코 시훈의 이성을 잘라 냈다. 얄망궂은 질문에 시훈이 이를 악물고 이수의 골반을 틀어쥐었다. 벌린 다리에 팽팽하게 당긴 근육과 흡사 자위라도 하는 몸짓에 인내심을 갖기 힘들었다. 기댄 몸을 세워 마주 앉은 자세로 시훈은 이수와 눈을 맞췄다.
“적당히가 안 되게 만드네….”
한숨처럼 느른한 혼잣말이었다.
“아…! 흐… 읏….”
단번에 허리를 쳐올렸다. 가만히 있어도 저를 들어다 놨다 하는 정이수가 움직이는 모습은 확실히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잔뜩 예민해진 내벽은 어디를 찔러도 쾌감이 일었다. 빠르고 강하게 쑤신 시훈이 한순간 속도를 늦추고 골반을 움직여 안쪽을 파고들었다.
반쯤 일어난 이수의 성기를 흔들었다. 성기에 금세 피가 몰렸다. 프리컴이 새는 요도를 손가락으로 쓸어 주자 툭툭 몸이 튀었다.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 귀두부터 뿌리까지 압박했다. 그럴 때마다 구멍이 조였다. 이수는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착실하게 성기로 시훈의 손을 쑤셨다.
굵고 긴 성기가 불뚝 튀어나온 곳을 스칠 때면 참지 못할 쾌감이 일었다. 절정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찾아왔다.
“…아… 윽…!”
사정한 것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지. 물 같은 정액이 배 위를 적셨다. 탈력감에 곧 쓰러질 듯 앞으로 기운 몸이 숨을 몰아쉬었다. 도리 없이 파들파들 떨리는 허벅지를 매만지는 시훈의 손을 급하게 붙잡았다.
“…읏…… 하지….”
사정의 여운이라기에 잠자코 있는 모습이 이상했다. 다급히 무릎을 모아 뭔가를 참는 모습에 시훈이 슬며시 웃었다. 곧 이수의 성감대인 유두를 침이 묻은 엄지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시훈의 어깨를 밀어낸 양팔 사이로 고개를 숙인 이수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애원했다.
“하…! 하지… 마….”
부탁에 손을 움직이지는 않고 대신 보란 듯이 쾅 허리를 쳐올렸다.
“아…! …안, 하…지 마…!”
“…하아… 왜요.”
낮은 목소리로 물으며 몇 번이나 거세게 쳐올리자 엉덩이 근육이 떨리며 성기를 죄었다.
“……흐… 으….”
안쪽으로 허리를 둥글게 만 이수의 성기에서 쪼르르 투명한 액이 떨어졌다. 막아 보려고 해도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흐른 체액은 시훈의 복근에 고이다 시트 위로 떨어졌다. 짧은 도발을 행한 용기는 어디 가고 순식간에 얼굴과 귀, 목을 붉힌 상대가 못내 사랑스러웠다. 시훈이 한 마디도 되지 않을 거리에서 눈을 맞췄다. 부끄러워 차마 들 수 없는 눈꺼풀이 밑을 향해 있는 동안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다가온 시훈이 작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월요일에 연차 내야겠다. 일이 중요한 게 아니네, 지금. 응? 책임님.”
얼굴이 화끈거려 미치겠는 이수를 두고 시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아…!”
시훈이 이수를 단번에 넘어트렸다. 포근한 침대 시트에 등이 닿자마자 뒷무릎이 잡혀 올려갔다.
“으….”
허리를 뒤로 물러 입구 끝까지 빼낸 성기를 진득하게 찔러 넣으면 달라붙은 내벽이 움직임에 따라 밀려 올라갔다. 생생한 감각에 이수의 발끝이 곱아들었다. 시훈은 허리를 움직이며 뺨을 붉게 물들인 이수를 살폈다. 시트를 그러쥔 이수가 손을 뻗어 틈 하나 없이 성기 모양대로 벌어진 구멍의 이음매를 매만졌다. 사정 시간을 조절하는 느긋한 허리 짓이었다. 성기가 손가락 사이를 스쳤다. 이수의 탄성 같은 신음이 쏟아졌다.
“하아… 더 세게….”
돌겠네….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나마 붙들고 있던 이성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녹진하게 풀려 있는 안쪽에 퍽. 퍽. 퍽. 거세게 성기가 짓이겨졌다.
“흐으… 읏…!”
등을 타고 올라온 쾌감에 머리가 쭈뼛 섰다. 조금 전 오르가슴을 기억하는 안쪽이 경련했다. 정작 당사자는 알 리 없는 유혹이었다. 시훈이 움직일 때마다 찔꺽대는 소리가 숨소리와 함께 녹아들었다. 턱턱 치받는 힘이 무정하게 느껴질 만큼 하체가 강하게 붙었다 떨어졌다. 시훈은 홀린 사람처럼 이수를 내려 보았다.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찡그리는 얼굴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신음에 깊이 박힌 성기가 멋대로 꺼덕였다.
깨물고 있는 아랫입술 위로 시훈이 입을 맞췄다. 들어온 혀가 부드럽게 입안을 유영하며 정신을 빼놓는 동안 시훈은 쉼 없이 허리를 쳐올렸다. 저도 모르게 터지는 숨이 다시 시훈의 입속에 삼켜졌다. 내장 깊숙이 굵은 성기가 꽉 들어찼다. 그리고 그걸 느끼기도 전에 다시 끝까지 빠져나간 성기가 점점 빠르게 안을 쑤셨다. 성기를 휘감은 내벽이 경련하며 눈앞이 번쩍번쩍 튀었다.
“아… 앗! 아흑, …아! …아 …윽!”
손을 뻗어 나올 것도 없는 이수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집요한 시선이 이수를 낱낱이 살폈다. 온전히 정이수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욕망, 제 모든 걸 욱여넣고 싶고 또 안고 싶었다.
사타구니가 거세게 맞붙은 엉덩이는 어느새 발갛게 색이 올랐다. 얼굴 옆으로 지탱한 시훈의 팔에 핏줄이 섰다. 야릇한 소유욕에 이를 악문 시훈이 체중을 실었다. 퍽퍽 새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제 좆 모양으로 길이 났을 이수의 내벽이 떨렸다. 튀어나온 지점을 짓누를 때마다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뒤챈다. 구멍 사이를 비집고 성기가 안쪽을 꿰뚫을 때마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구멍이 움찔거렸다. 단번에 올라갔다 순식간에 내려오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머리가 새하얗게 날아갔다.
“…아흐, 윽…!”
이수의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졌다. 시훈이 붙들고 있는 성기에서 묽은 액이 줄줄 흘렀다. 동시에 고환까지 욱여넣을 태세로 뿌리 끝까지 처박힌 시훈의 성기가 내벽 깊숙한 곳에 질척한 정액을 뿌렸다.
“하아… 하아….”
시훈의 정액을 받은 엉덩이가 여운으로 바르르 떨렸다. 시훈이 거세게 숨을 몰아쉬는 가슴에 가벼운 키스를 여러 번 내려찍었다. 사정은 했지만 여전히 빽빽하게 자리한 시훈이 잘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얕은 쾌감이 파도처럼 배꼽 아래를 간지럽히다 사라졌다. 연거푸 절정에 이른 몸을 쉬이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이수는 간신히 두 팔을 올려 부끄러운 눈부터 가렸다. 어느새 제가 행한 도발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를 세워 동그란 턱을 살짝 깨물었더니 스스러운지 슬쩍 고개를 외로 돌리고 만다. 맞붙어 있는 하체가 엉망이었다. 욕정에 이성이 날아간 지 오래지만 정도는 알아야 했다.
“씻겨 줄게요.”
시훈이 시트 위로 힘없이 늘어진 허벅지 잡아 몸을 물리려 할 때였다. 가린 눈 아래로 입술이 달싹였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빼지 마.”
늘어진 두 다리가 힘겹게 시훈의 허리를 감았다. 힘이 들어갈 리 만무하건만 발목을 교차해 놓지 않겠다는 의지만은 분명했다. 손등을 잡아 내리자 홍당무처럼 발간 얼굴에 젖은 눈동자를 한 이수가 차마 시훈을 바라보지 못하고 한탄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미쳤나 봐. 그냥… 이렇게 있는 게 너무 좋아.”
원초적이고 천박한 방법이래도 좋았다. 연결된 지금이 너무 좋아서, 이 사람이 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시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대로 이수를 들어 품 안에 가득 안았다. 시훈의 성기가 더욱 깊숙이 들어왔다. 이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목에 팔을 감아 시훈을 끌어당겼다.
“…하… 좋아.”
이수야. …정이수.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제 이름에 실려 마음 깊숙한 곳까지 당도했다. 차곡차곡 차올라 어느새 빈틈없는 마음은 이제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다. 시훈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 알 수 있었다. 절절한 진심과 사랑을. 시훈은 한참 동안 입을 맞추고 이수의 머리부터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눈이 맞을 때면 뺨과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녹아내린 몸은 하나가 된 것 같다. 누구에게서 흘렀는지 모를 체액이 체온과 함께 섞였다. 시훈의 몸에 온전히 기댄 몸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다. 그럼에도 풀린 손이 상대의 온기를 더듬었다. 어느새 침대 모퉁이로 찾아온 햇살이 발끝에 닿아 있었다.
자는 게 좋겠어요.
시훈의 너른 품에 기댄 이수가 눈을 감았다. 곧 소리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등을 감싼 팔이 단단하게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숨이 더디게 쉬어질 정도의 압박감이 들었지만 풀어 달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지금 잠이 든다면 꿈을 꾸지 않을 테다. 아니…, 현실이 꿈처럼 달콤하여 잠들고 싶지 않았다. 이시훈이 좋아서. 지금이 좋아서.
* * *
블라인드를 내린 방 안은 빛이 들어오긴 했으나 제법 어두웠다. 샤워를 하고 쓰러지듯 침대 위로 몸을 늘인 이수는 엎드린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간 이불을 끌어 올린 시훈이 팔을 괴고 이수를 감상했다. 아마 만난 이래 가장 편안한 모습이었다.
처음 정이수를 만난 때를 기억한다. 이직 이튿날, 이른 출근으로 텅 빈 사무실에서 마주쳤을 때 예의상 짓는 미소인 줄 알면서도 웃는 얼굴이 미인이라고 생각했었다.
‘안녕하세요, 이시훈입니다.’
‘1팀 정이수 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고 평범한 인사를 나눴지만 어딘가 묘한 기분이 잔향처럼 남았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뒤척이는 몸이 바로 돌아 품을 파고들었다. 팔을 내어 주고 등을 쓸어 주는 손길에 이수가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가만히 모습을 내려 본 시훈 역시 눈을 감았다. 입가의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이수가 깨어난 시각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느리게 눈을 뜬 이수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봤다. 둔통이며 내내 벌리고 있었던 허벅지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
열린 문틈으로 커피 향이 났다. 옆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보면 이 집의 주인이 커피를 내리는 모양이다.
알몸 상태로 밖을 나갈 수 없어 주위를 둘러보자 침대 끝에 무지 티셔츠와 새 속옷, 베이지색 면바지가 곱게 접혀 있었다. 셔츠며 바지가 별수 없이 크기는 했지만 흥건하게 젖은 옷을 입을 수는 없었다. 옷을 입고 가만히 문을 열자 시훈이 이수를 돌아봤다.
“일어났어요?”
청바지에 소매를 걷은 셔츠를 입었을 뿐인데 타고난 골격 때문인지 그 자체로 멋이 났다.
“네. 언제 일어났어요?”
“30분 전?”
머그잔을 싱크대에 놓은 시훈은 불 없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 피우려면 1층까지 내려가야 했으나 자리를 비우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 아니면 커피 줄까요?”
“물이요.”
형편없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시훈이 다가와 물이 담긴 컵을 내밀고 테이블 모서리에 엉덩이를 기대앉았다. 그리고 이수가 한 번에 비운 물컵을 테이블 귀퉁이에 올려놓고 허리를 훌쩍 껴안았다. 졸지에 다리 사이에 갇힌 꼴이 됐다. 훤한 대낮에 할 말 못 할 말 다 해 가며 몸을 맞췄건만 상대의 어깨에 손을 올리기가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미미하게 발개진 볼이 티 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자는 동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져 준 시훈이 물끄러미 이수를 응시했다.
“…….”
그가 가슴 위로 조용히 얼굴을 묻었다. 이수가 품에 안긴 남자의 뒷머리를 쓰다듬자 시훈이 혼잣말을 읊조렸다.
“…믿기지가 않네, 정말.”
생생하게 들리는 심장 소리가 의심을 거두라 말한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고, 품에 안을 수 있고, 만질 수가 있다. 티셔츠 안으로 들어온 손에 맨살이 닿았다. 움푹 파인 등을 따라 오르는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 되물었지만, 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시훈이 손을 빼고 별달리 정리할 필요 없는 티셔츠의 매무새를 만졌다.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
피로보다 내내 성기를 품고 있었던 엉덩이 사정을 물은 것이리라. 뭉근한 손길이 허리와 엉덩이 사이를 오가기는 했지만 아래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이수의 시선이 좀처럼 한곳에 머물지 못했다.
“음… 앉을 수 있을 정도.”
“그럼 밥 먹으러 가요. 뭘 좀 먹어야지.”
거의 이틀간 속을 비웠으니 확실히 배가 고팠다. 시훈이 뒤로 손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차 키를 들었다. 이수가 현관 앞에 서자 발아래로 스웨이드 재질의 슬리퍼 하나가 내어졌다.
“좀 클 텐데 신을 만할 거예요.”
시훈의 말대로 조금 크기는 했지만 편안했고, 매일 신는 구두나 운동화보다 발이 가벼웠다. 앞코가 둥그렇게 막힌 발을 내려 본 이수가 시선을 끌어 올리자 문고리를 잡은 시훈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할 말이라도 남은 걸까, 아니면 몰골이 우스운가. 괜스레 조금 전 시훈이 매만진 티셔츠의 어깨선을 쭉 내려 본다.
“안 가요?”
“…가야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오며 스치듯 몇 번 손이 닿았다. 결국 사람이 없는 지하 주차장에 당도해 차에 올라타자마자 시훈이 몸을 기울였다.
“여차하면 못 나왔을 것 같아.”
“…아.”
현관 앞에서 머뭇댄 이유를 태연하게 실토한 시훈이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자신의 옷을 입은 이수가 침실에서 걸어 나올 때 느낀 이상야릇한 기분은 한마디로 설명이 안 됐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나 품이 큰 옷차림이 그동안 보던 모습과 갭이 큰 탓이었다. 차를 타기는 했지만 굳이 밖에서 늦은 저녁을 먹어야 할까. 시훈은 고민스러웠다.
“그냥, 가지 말까 봐요.”
핸들에 기대어 이수를 바라본다. 집에서 간단하게 해 먹을 만한 재료는 동이 났고, 레토르트나 일회용 용기에 나오는 배달 음식을 먹이고 싶지는 않아 밤길을 나섰지만 아무래도 좋은 결정은 아닌 것 같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민의 원인인 이수가 시간을 확인하고 시훈을 재촉했다.
“배고픈데…. 가요, 빨리.”
무심하기도. 결국 이수의 입술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춘 뒤에야 시동이 걸렸다.
테이블이 몇 개 놓이지 않은 소담한 식당은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노상에 내어 놓은 테이블에서는 가볍게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격자무늬 창문 너머의 골목길은 주홍빛 가로등이 운치 있었다.
운 좋게 비어 있는 2인석 자리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이 덮밥 종류의 식사를 주문했다. 메뉴판을 물리고 이수의 앞으로 숟가락이며 젓가락을 내어 주던 시훈이 어쩐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왜요?”
“조금 어려 보여서.”
하얀색 티셔츠와 자연스럽게 내려온 머리카락 때문에 엽서 아래 고이 붙여 놓은 대학 시절 정이수가 떠올랐다.
“잘 모르겠는데….”
서른을 넘기 전에는 들어도 감흥이 없었고, 서른을 넘긴 후나 팀장을 달고 난 후에도 종종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시훈에게 듣는 말은 한층 더 낯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민망함에 나란히 놓인 젓가락 끝을 맞추고 있을 때 시훈에게서 물음이 떨어졌다.
“연차 냈어요?”
“…아.”
‘아무래도… 월요일에 연차 내야겠다. 일이 중요한 게 아니네, 지금. 응? 책임님.’
낮의 정사를 떠올리는 질문에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턱을 괴는 척 손안에 숨겼다. 반면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고 답을 기다리는 눈치다.
“안 냈으면요.”
눈을 흘겨 묻자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월요일이 기대된 적 있어요?”
깊은 생각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1년 중 연차를 소진 못 한 해가 더 많았고, 간혹 공휴일이 월요일이라도 쉬는 날이라고 쾌재를 부른 적은 없었다. 밀린 잠을 자거나 요양원을 가거나 쉬는 것만 해도 바쁜 몸이었으니까.
“아니요.”
“그럼 내요. 연차. 설레는 월요일도 한 번은 있어야죠.”
그저 시훈은 태연하게 답했을 뿐인데 얼굴에 열이 올랐다. 별 뜻 없이 툭툭 내뱉는 말이나 행하는 몸짓이 근사해 보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중증이었다. 이수가 물을 마시는 척 냅다 붉어진 얼굴부터 가렸다. 인정하기 시작하니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마도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는 생각에 쉽게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딱 난감하던 차에 테이블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덮밥과 사이드 메뉴가 나왔다. 이수는 텅 빈 속에 따뜻한 미소국부터 삼켰다. 이내 혀끝에 식욕이 돌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잔잔한 대화가 이어졌다. 어쩔 수 없이 나온 인사이트의 근황은 놀라웠다. 아마도 일이 주 내로 새로운 호칭이 도입될 테고, 회의는 간략하게, 보고 라인은 줄여 효율을 높일 거라 했다.
“그리고, 좆같은 벙개니… 회식도 없을 거구요.”
내내 바른 말을 이어 가던 입에서 삐뚜름하다 못해 짓씹은 욕이 나오자 밥을 먹는 이수의 입이 꾹 다물렸다.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는 자리였다.
“…….”
“여하튼, 신입 사원 입사 전까지는 체계가 더 잡힐 거예요.”
문득 얼마 전 전화를 걸어 온 고우재가 떠올라 숟가락으로 덮밥을 뜨다 말고 물었다.
“면접 들어가요?”
“아니요. TF 때문에 여유가 없어서. 왜요?”
그냥…이라며 이수가 말을 얼버무렸다. 고우재가 인턴 기간에 친 사고를 덮어 놓고 뽑느냐, 마느냐가 합격을 판가름할 테다. 입사를 하게 되면 시훈의 앞에서 기죽어 살다 머지않아 스프링처럼 되살아날 고우재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그것도 볼만하려나. 이수가 홀로 웃음을 삼켰다.
그 후로 시훈은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더 더워지기 전에 같이 가서 뵈면 좋겠다고 했다. 무심한 듯해도 사람을 챙기는 씀씀이가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어제 촬영 장소가 참 예뻤다느니 길이 좁아 운전하기가 어려웠다느니, 언제 다시 한번 가 보면 좋겠다는 그런 이야기들. 지난 시간 나누지 못한 대화들은 평범했다. 그런데도 별것 아닌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즐거워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테이블 아래로 이수가 자연스럽게 시훈의 발과 제 발을 하나하나씩 교차해 놓았다. 남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발을 물리고 넣을 때마다 복숭아뼈가 닿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가게 앞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담배를 태웠다. 간판에 불이 꺼지고 지나는 차량이나 사람이 없는 골목은 고요했다. 건물 사이의 좁은 틈에 등을 기댄 이수를 두고 시훈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내뿜은 연기가 공중에 흩날리다 사라졌다. 시훈은 말없이 저를 응시하는 이수에게 태우던 담배 끝을 돌려 주었다.
“피울래요?”
찬 바람이 쌩쌩 불던 그날처럼 빠끔 벌린 입술 사이로 불붙은 담배가 닿았다.
“…….”
그날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이시훈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도 웃는 얼굴이 멋졌는데…. 담배를 내버린 손이 시훈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담배보다는 키스가 좋았다.
바람이 좋은 밤이었다. 달빛에 반사된 강이 잔잔하게 흘렀다. 건너편에서는 아파트며 빌딩 첨단의 불빛이 반짝이고, 너른 공원에서는 늦은 시간에도 연인이나 친구로 보이는 무리가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수와 시훈 역시 커피를 손에 들고 천천히 강을 따라 걸었다.
“안 피곤해?”
시훈이 이수의 뒷덜미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괜찮은데, 누우면 바로 잘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왜 반말해요?”
동갑에,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에 따져 물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존대를 했다가 반존대를 했다가 맨정신에 불쑥 반말로 물으니 묻고 싶었다. 기준이 있나. 시훈이 입에 가져간 컵을 내리고 이수를 돌아봤다.
“같이 반말해, 그럼.”
마치 호의를 베푸는 투였다. 인사이트 화장실에서였지, 아마. 빈정이 상할 대로 상해서 왜 반말을 하느냐 쏘아붙인 그날이 떠올라 결국 웃음이 터졌다.
“…이시훈. 건방지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눈을 휘어 함박웃음을 짓는 이수를 보자니 시훈의 마음 한구석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무표정하거나 업무를 신경 쓰느라 미간에 주름 진 모습이 대부분이었던 과거는 세상이 만들어 낸 이수의 단면이었다. 아마 그 이면을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테다.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맑고 투명한 사람인지.
그때 휘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며 작은 노랫소리가 귀를 스쳤다. 이수의 입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으음- 음음음- 음-
익숙한 CM송은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이어지고, 또 다음으로 이어졌다.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은 이수가 눈을 맞추며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노랫소리를 배경 삼아 나란히 길을 걸었다. 인적이 드문 지점에 이르러 좀 전부터 손등이 스친 이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자 머뭇대지 않고 자연스럽게 깍지를 낀다.
“…….”
이 작은 몸짓이 얼마나 시훈에게 크게 다가오는지 작은 노래를 부르는 이는 모를 테다.
사랑을 전시하듯 프레임 안에 욱여넣고, 몇 마디 언어로 포장하여 시대의 유행처럼 소비했다. 일과 삶을 구분 짓는 경계는 없었으니 아마 광고에 박아 넣은 카피 몇 줄과 잘 닦아 놓은 비주얼로 설명 가능한 것이 사랑이라고 오만하게 정의 내렸다.
그러나 정이수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고, 눈을 바라볼 때면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사랑이라고 규정한 것들은 모두 잘못됐다.
대교 근처, 지나는 사람이 없는 곳에 걸음을 멈췄다.
“기다리는 동안… 힘들었어요?”
난간에 팔꿈치를 올린 이수가 반짝이는 강물을 내려 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응당 그래야 하는 길을 따라 물이 흐르고 있었다.
“네.”
시훈답게 담담한 답이었다. 이런 점이 이수에게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요란하거나 과장된 설득을 하지 않아도 믿기는 묵직함 말이다. 이수가 멀리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열어 놓은 마음은 흐르는 강물이나 지나는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시훈에게 제 속내를 털어놓게 만들었다.
“나도… 힘들었어요. 사실은 많이 보고 싶었는데 용기가 안 났어. 나를 이 정도로 누가 사랑해 준다는 게 가당키나 한지, 믿어도 되는지, 내가 그런 자격이 있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 물어보고 물어보다가…,”
짧은 침묵 후 차분한 목소리가 묻어 둔 진심을 내보였다.
“그냥 결론은,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나. 그거밖에는 없더라고.”
“…….”
제가 서 있는 자리는 매번 황무지 같아 뭔가를 찾으려고 목적지도 없이 달리기만 했다. 발바닥이 죄 까여도 넝마가 된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라도 말이다. 멈춰도 된다고, 걸어도 된다고 말해 준 이는 없었다. 그런 저에게 시훈은 길과 목적지를 만들어 주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놓은 답이 너무 시시한 듯해 이수는 아랫입술을 깨물다 말고 멋쩍게 웃었다.
“쉬운 답인데 너무 오래 걸렸다. 그렇죠?”
“원래 주관식은 어려워. 찍을 수가 없잖아.”
심드렁한 대꾸는 결국 제게로 와 준 상대에 대한 배려였다. 이수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시훈이 몸을 돌려 난간에 등을 기댔다. 빛을 받아 또렷한 이수의 옆모습이 그림 같았다.
그런 연인을 가만히 바라보며 시훈은 두 사람이 이어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나란히 한 그림자는 나뉜 경계가 없어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 같다.
“이수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나는 언제나 네 곁에서 너에게 안달하고, 널 쫓을 거야. 어쩔 수가 없어.”
의지로 안 되는 것들이었다. 사무실을 들어갈 때마다 이수의 자리를 찾고, 움직이는 길목마다 눈길이 따르고, 웃을 때면 따라 웃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면 화가 나고 미어지던 제 마음이 그랬다.
“…….”
이수가 가까이 거리를 좁혔다. 몸에 비해 큰 티셔츠가 펄럭 날렸다. 코끝이 스치는 가까운 거리에서 긴 속눈썹을 들며 시훈과 눈을 맞췄다. 눈앞에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이수가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접어 웃는 이가 더 이상 슬프거나 애처롭지 않은 사랑을 전했다.
“나도, 이시훈 씨 사랑하고 있어요.”
“정이수.”
이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닿은 아랫입술을 살며시 떼어 낸 이수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시훈아, 그러니까 이제 연애하자.”
아침에 일어나 당연하게 전화를 하고, 퇴근하는 연인과 함께 밥을 먹고, 사랑을 나누고, 베개맡에서 오늘 하루를 늘어놓다 잠이 들 때면 연인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릴 테다.
두 사람이 서로를 단단하게 껴안았다. 품 안의 이수가 웃고 있었다.
〈더 짙은 블루〉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