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5. Abend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사무실을 공유하는 1, 2팀에 정적이 흘렀다. 책상에 묶인 사람들처럼 다들 얼빠진 얼굴로 공고를 재차 확인했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출근 후 자리를 비운 정이수 팀장 대신 이시훈 팀장에게 모든 시선이 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훈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걸음은 다급했으며 열린 문을 나서는 얼굴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통해 여민준의 집무실에 도착한 시훈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비어 있는 사무실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꺼내는 그때 문을 열고 여 본부장이 들어왔다.
인사 대신 시훈을 스쳐 지나간 여민준이 소파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각오는 되어 있으니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식이었다.
“이거 뭔데.”
“너 승진? 아니면 정 팀장.”
여 본부장의 어조는 일상적이다.
“둘 다.”
눈썹을 찌푸린 시훈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일단 네 문제는, 요즘 30대에 임원 다는 일 생각보다 흔해.”
“혹시 아버지 입김이야?”
“아니라고는 말 못 해.”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대답이었다. 열이 뻗친 시훈이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지금…!”
“광고주부터 마케팅, 디자인 총괄 담당들 연령대가 다 삼사십 대야. 인사이트 임원들 평균 연령이 사오십 대고. 입장 바꿔 생각해 보자. 너 같으면 일 맡겨? 성과와 역량 기반해서 젊은 감각으로 개편하겠다는 건데 괜히 오버해서 생각하지 마. 크리에이티브 다루는 회사에서 타당해. 그리고 내 자리까지 싸잡아 말하지 말고. 나도 너 못지않게 현장에서 바닥부터 다지고 올라왔어. 놀고먹으면서 여기 앉아 있던 거 아니라고.”
여 본부장이 작정한 사람처럼 말을 쏟아 냈다. 설득을 위한 설득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김 전무며, 주 실장 애먼 짓 하는 거 다 알고 계셔도 여타 관여 없이 납득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인사이동 된 거야. 마음 같아서는 너 불러다가 지분이며 뭐든 떼서 주실 수도 있는 걸 미등기 임원으로 임명만 한 거라고. 너 말이야, 인사이트 들어와서 반년간 팀장 대행했을 때 남들 같으면 쪽팔려서 회사 뛰쳐나갔어. 근데 너 버텼잖아. 실적으로 증명했고. 이유가 뭔데…. 회장님하고 기 싸움 한 거잖아, 너도.”
시훈이 거칠게 머리를 넘겼다. 못마땅해도 여민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무슨 날이라도 잡은 모양이다.
“한마디로 회장님이 한 수 접고 가시는 거야. 당신이 졌다고, 네 손 들어 주시는 거라고. 젊은 네가 보기에는 마음에 안 들겠지만 어르신 방식까지 걸고넘어지지는 말자.”
하, 숨이 터졌다. 입을 다문 시훈도 모르지 않았을 테다. 인사이트로 이직을 결심했을 때 예상한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여 본부장의 설명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왜 지금인데…!”
“그러니까 너는 승진했는데 정 팀장은 왜 회사 나가냐고?”
“…….”
서로 더 감출 것도 더 짐작할 필요도 없었다.
“저번 달에 와서 사의 표했고, 비딩 남아 있어서 숨겨 달라고 하더라. 팀원들 동요한다고.”
“본인 선택이라고? 형은 그냥 알겠다고… 하아….”
퇴직을 종용한 시훈에게 분명 싫다고 했다.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왔는지 당신을 모를 거라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랬다. 포기할 수 없다고 놓지 않을 거라고 쉽게 떠날 수 없다고. 미간을 좁힌 여 본부장이 덤덤하게 사실을 읊는다.
“나중에라도 오해 살까 봐 말하는데 내가 예전에 정 팀장 불러서 너하고 관계 추궁했던 건 사실이야. 근데, 무슨 조화인지… 곧바로 M사 일 터지고 수습하면서 정이수 팀장 내 사이드로 불러 놓은 것도 사실이고.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정 팀장이 퇴사하겠다고 밝혔을 때 옳다구나, 내보낼 마음 없었다고 말해 주는 거야.”
시기를 거슬러 올라간 시훈의 눈동자가 더없이 흔들렸다.
“…….”
조각이 맞춰진 순간 기가 찼다. 입에서 거칠게 한숨이 쏟아졌다. 묘하게 거리를 두고 자신을 피하는 태도에 서운함을 느낀 것도 그쯤이었다. 기다리겠다고 무턱대고 답을 요구한 저는 이수에게 짐이 됐을 테다. 다시 한번 온몸으로 부딪쳐 오는 파도를 버티기에 정이수의 과거는 모질기만 했다. 어중간한 태도가 독이라는 사실도 깨달았을 테고. 그때… 인턴인 고우재에게 기회를 달라, 부탁한 이수가 느꼈을 치욕은 적어도 저보다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한테 물으면 됐잖아. 왜…! 하아….”
아무것도 모르고 이수를 다그쳤다. 차마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속이 꽉 막혔다.
“본인 결정이야. 퇴사는 통보고.”
“잡는 시늉이라도 했었어야지. 나한테 말은 해 줬어야지…!”
노기에 낮은 목소리가 떨리며 더없이 가라앉았다. 여민준 본부장의 시선이 시훈에게 오래도록 머물렀다.
“너 이럴까 봐 말 안 했어.”
“뭐?”
어이가 없어 헛웃음도 안 나왔다. 어느 때보다도 시훈에게 분명하게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앞뒤 분간 못 하는 모습에 따끔하게 호통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을 여 본부장은 간신히 내리눌렀다.
“정이수 팀장. 유진우가 내버린 오물들 죄다 치워 놨어. 본인이 일 잘 수습해 놨고, 팀 잘 꾸려 놓고. 알겠지만 너나 나한테도 쉬운 일 아니야, 이거.”
“…….”
“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지?”
어그러진 마음이 시훈의 시야를 좁혀 놓았을 게 분명했다. 퇴사를 통보한 정이수는 누구보다 편안해 보였다.
“지금 사내에서 정 팀장 추문 들먹이는 사람 있어? 수군대는 인간들 말이야.”
시훈의 눈이 뚝 떨어졌다.
“잡을 생각 하지 마. 이성 잃고 정 팀 퇴사 문제로 여기저기 엎어 놓을 생각도 하지 말고.”
“…….”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며 목에 순간적으로 맥이 풀렸다. 이어 씁쓸함을 삼킨 여 본부장이 남긴 마지막 말은 시훈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정이수 팀장. 품위 지켜 줘.”
달칵. 문이 열렸다. 자리에 우두커니 선 시훈이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인사팀과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이수에게 임순정 대리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팀장님. 이거 공지 잘못 뜬 거 맞죠?”
이수는 사무실 내 제게 쏠린 시선을 느꼈다. 임 대리와 눈을 맞춘 이수가 엷게 미소 지었다.
“미안합니다. 알리지 못해서. 제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그렇게 됐어요.”
“아….”
임 대리는 울상이 됐다. 신입 때부터 보아 온 정이수 팀장은 무책임하게 팀을 버린다거나 사직서를 제출할 사람은 아니었다. 공지가 잘못 뜨지도 않았으니 확인 사살을 받은 셈이었다.
“팀원들 모두 괜찮으면 오늘 점심 같이 먹을까요. 할 말도 있구요. 임 대리가 메신저로 공지 띄워 줄래요?”
오전 시간은 순식간에 지났다. 공고를 확인한 타 본부 팀장들과 제작실에서 줄줄이 이수를 찾았고, 이수 역시 두런두런 사정을 설명하기 바빴다. 이어진 점심시간에는 둘러앉은 테이블에서 놀라고 당황했을 직원들을 다독였다. 조만간 세부적인 조직 개편이 이루어지면 지금보다 업무 효율이 훨씬 나아질 테고, A사 비딩 결과에 따라 고생한 만큼 그만한 보상 역시 주어질 것이라 소식을 전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후에는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대리급들을 소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이동하는 중간 비어 있는 이시훈의 자리를 흘깃 넘겨봤다. 단 이틀 만에 바뀐 해처럼 그에게 평안을 바란 자리가 낯설어 보였다.
광고주 미팅이나 회의가 아닌 때에 일대일로 회사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직 사유나 이직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충 답을 얼버무리는 일은 꽤 고단했다. 식탁에 걸터앉아 물 한 병을 단번에 비웠다. 켜 둔 텔레비전에서 온 에어 되는 광고에 시선을 고정하고 매번 앉는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하체는 앉고 상체만 뉜 불편한 자세로 하릴없이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 벌써. 11시 뉴스를 알리는 시보였다. 2시간이 지나도록 그저 누워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킬 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아….”
화면을 확인하고 고민하는 사이 벨 소리는 끊기고 대신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피스텔 앞이에요. 잠깐 나와요.
창 너머 대로변에 익숙한 SUV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인영이 보닛 앞을 돌아 나왔다. 고개를 들어 아마도 제가 있을 창가를 올려 본 남자를 이수가 묵묵히 지켜보았다. 망설임이 미련처럼 들러붙어서는 안 됐다. 식탁 의자에 걸어 놓은 코트를 입은 이수가 드레스 룸에 들어가 상자 하나를 챙겨 집을 나섰다. 이시훈을 만나야 했다.
이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거리를 좁혔다. 곧 조수석 차량 문에 기대 있던 시훈이 이수를 발견하고 등을 세워 바로 섰다. 전화를 받지 않아 단념하다시피 보낸 메시지였다. 집까지 찾아가 무턱대고 문을 두드리기는 싫었고, 불 켜진 오피스텔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눈앞에 이수를 두고 초조함의 발로처럼 태우던 담뱃불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해 줄 게 있어서요.”
이수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잠시 시선을 떨군 이수가 손에 든 상자를 내밀었다. 다른 말 없이 상자를 받아 열어 본 시훈은 그제야 한동안 잊고 있었던 시계를 기억해 냈다. 전에도 이수가 말했었지. 저 때문에 고장 난 시계를 수리 중이라고.
“잊고 있었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시훈의 이마에 옅게 골이 패었다. 시계 따위가 뭐라고…. 없어도 되는 걸. 그보다는 묻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있죠. 오래 걸렸어요. 이거 주는 데…. 이렇게 간단한 걸…. 이렇게 쉬운 걸.”
시훈의 말을 자르고 공허하게 올라간 입매가 이수의 얼굴 위에 걸렸다. 지난 일이라고 다짐해도 물꼬를 트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이수가 마른 입술을 포개다 말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날이요. 우리 두 사람 상납이니 뭐니 그런 말 하던 날. 그날, 내가 차에서 이시훈 씨 손을 잡았고… 아직 돌아가지 않았으면 시계 가지고 가지 않겠냐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거기서부터 꼬였던 것 같아요.”
“…….”
“아닌가…. 그날 유진우 따라 팀 회식에 참석했으면 이 팀장님이 저 데려다줄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 그 전에… 아니면 그 전에….”
기억을 더듬어 근원을 찾고자 한 이수가 의미 없이 웃고 만다. 지금 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뭐가 됐든, 아마 지금처럼 시계만 돌려줬으면 참 쉬웠을 텐데…. 몰래 손잡은 걸 들킨 것도… 메시지 하나가 대단한 유혹처럼 보인 것도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래서 분에 못 이겨서 멋대로 지껄였고 적당히 끊어 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어요.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가라느니… 그만하라느니 이 팀장님은 매번 그랬으니까.”
“…….”
차가운 겨울 밤공기를 가르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수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긴 호흡을 내뱉었다. 말을 하는 내내 먹먹한 가슴이 아렸다.
“근데… 나 유진우한테 몸 로비 해서 팀장 자리 얻은 거 아니에요. 이용하지도 않았고. 알겠지만… 많이 좋아했어요. 처음에는 이혼했다고 했는데, 그다음에는 이혼 중이라고 했고… 마지막에는 재결합한다고. 사실은… 좋아한다는 고백도 못 해 봤어요. 그 사람은 나에게 항상 모호했거든요.”
내심 알았던 것 같다. 다 알았는데, 입 밖으로 꺼내면 다 망가질 것 같아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버틴 저에게 너무 실망할 거 같아서 아무 말도 못 했었다. 좋아한다느니, 아니면 이혼은 했냐느니… 묻는 그런 말.
말을 꺼내는 내내 이수의 시선은 시훈을 외면했다. 각오는 했지만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지금이 못 견디게 수치스러웠다.
“…….”
“마지막, 그러니까… 팀장으로 승진하던 날. 호텔까지 따라갔어요. 데이트라고 해서. 식사 자리에서 뜸을 많이 들이길래 내가 착각했어요. 기대했고 설렜어요. 그런데… 그만하재요.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한 게 없는데…. 그때쯤 이미 영국으로 갈 생각이었겠죠? 팀이야 누가 끌든 상관없었을 테니까… 뒤치다꺼리 잘하는 저한테 감투도 씌워 주고.”
“정 팀장님.”
시훈은 울컥 치미는 괴로움에 목이 막혀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과거에 이수에게 던진 말들이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지 짐작이 안 됐다. 미안하고, 속상하고, 자신을 향한 분노와 혐오가 뒤죽박죽 뒤섞인 속이 새까맣게 타올랐다.
“이 팀장님, 내 말은….”
이수가 말간 눈동자를 드러냈다.
“이 팀장님한테 무슨 자리나 대가 같은 거 바란 적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날, 내가 손잡은 건 미안했어요. 다른 건 사과 안 할게요. 시계 돌려주려다가 꽃뱀 취급 받았잖아.”
홀가분한 마음에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고였다. 짓궂은 장난처럼 내뱉은 말에 시훈의 가슴이 어릿했다.
“근데 나는 뭐 잘했나…. 오기로 이 팀장님 잡았고, 나 역시 곤란하게 했어요. 누구 잘못도 아니고… 우리 그냥… 상관없잖아요, 이제. 뭐가 됐든.”
“…….”
큰 탑처럼 차곡차곡 쌓아 둔 응어리가 녹아내렸다. 발아래 웅덩이를 만들었지만, 이 또한 언젠가 흔적 없이 말라 사라질 것이다. 이수의 얼굴에서 서서히 사라진 미소는 마치 모래성 같았다.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덮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유진우와 무슨 사이였건 의미는 없었다. 위태로운 정이수를 보면 위험하다는 경고가 사이렌을 울렸다. 자신을 자꾸만 안달 나고 흔들리게 해서였다. 구실을 만들려고 했을까. 무시할 수 있는 걸 부득부득 찾아가 젠체했다. 고결한 척 원칙을 들이대며 혼내고, 벌주고. 서툴렀다고 인정해야 했다. 더 이상의 변명은 의미가 없었다.
하얗게 부서진 입김이 자취를 감추고 맑은 밤하늘 아래 바람 한 점 없었다. 시훈은 고개를 들어 이수를 응시했다.
“…내가.”
“…….”
말갛게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이수에게 시훈이 이윽고 변명 대신 사실을 고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이수가 작게 입을 벌렸다. 가슴속으로 시훈의 말과 차가운 공기가 뒤섞여 들어왔다. 떨리는 눈이 바닥으로 한순간 떨어졌다. 아슬아슬하게 유지한 평정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아랫입술을 급히 깨물어 엉망이 된 표정을 지워 본다. 아무래도 방향을 상실했다. 여기까지는 예상에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됐다.
이수는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저어 다급하게 부정했다.
“…아니, 우리 사이에… 애틋하고 구구절절한 서사 같은 거 부여하지 말자구요. …이상한 감정, 억지로 밀어 넣지 마요.”
“이상한 감정이 뭔데요.”
시훈은 물러나지 않았다. 매번 그랬다. 뿌리를 단단히 박고 서서 흔들리지 않았다. 눈가를 좁힌 시훈이 이수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그만큼 물러난 이수가 몸을 돌리며 허겁지겁 걸음을 뗐다.
“…이만 가요.”
시훈은 치미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충동은 매번 정이수를 매개체로 했다. 부채질했고 끊임없이 정이수를 향하게 만들었다.
뒤돌아가는 이수를 지나쳐 앞을 가로막은 시훈이 두 어깨를 붙들었다. 애달픈 고함이 사람 하나 지나지 않는 텅 빈 거리를 울렸다.
“말하면 되잖아. 그냥…!”
“…나는…… 힘들어…!”
억눌린 소리가 거세게 튀어나왔다. 참아 내려 억지로 크게 뜬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리 입술을 짓이겨 보아도 터진 울분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맺힌 눈물이 기어코 후드득 떨어졌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발개진 눈가에서 터진 눈물은 쉴 새 없이 볼 위를 흘렀다.
“이시훈 당신한테… 뭐 하나 굽히기 싫어서 몸이나 팔겠다는 그딴 말을 하고…! 그래, 이상한 감정… 그거 느꼈고, …흔들렸어. 근데… 거기까지 다 말해 버리면… 다… 말해 버리면…!”
울음 섞인 말들은 한 점 남아 있는 너절한 자존심처럼 볼품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비참한 관계를 맺은 이시훈에게 기대고 싶은 현실을, 초라한 제 품에 안긴 남자에게 흔들리는 마음을. 속절없이 무너지는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또다시 불행을 자초하는 제게 빚이 쌓였다. 이수는 절망했다.
“…이제 눈치 보고… 마음 졸이는 거 싫어.”
이수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나는… 잠깐이라도… 숨 쉴 틈이 필요해. 그러니까….”
눈물로 흥건한 얼굴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다. 아릴 정도로 이를 문 이수의 고개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흐윽….”
이수의 뒷머리에 남자의 손이 닿았다. 시훈은 그대로 겨울 공기를 잔뜩 머금은 코트로 이수를 끌어당겼다. 이마가 시훈의 어깨 위에 간신히 닿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검은 그림자 두 개가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알았으니까… 이대로 잠시만 있어요.”
안개가 걷히면 당신이 걸어온 발자국이 다 보일까. 어디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온전히 정이수 발아래 찍힌 발자국을 볼 수 있을까.
먼 곳에서 불어온 차가운 겨울바람이 맞붙지 못한 두 사람 사이를 지났다. 멀리 사람 하나 지나지 않는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는 시훈의 눈빛이 흐릿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기댄 몸이, 이수를 품은 온기가 서로 발을 물렸다. 이수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남기고 시훈이 이수를 지나쳤다.
…들어가서 쉬어요.
엔진 소리가 들렸다. 곧 조용한 도로 위로 시훈의 차가 멀어졌다. 까만 밤이었다.
날이 참 좋았다. 아침 버스를 타고 매번 내리는 정류장에 발을 딛고 언제나 그렇듯 로비를 가로질렀다. 출입 태그를 찍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익숙한 층을 누르고 카페테리아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는 여전히 맹맹하지만, 물처럼 커피를 마시는 쪽이었으니 오늘 역시 불평은 접어 두었다.
지나치게 깨끗하다 못해 허전한 책상에 앉아 형식상 작성해야 하는 업무 인수인계서를 마무리하고 미처 소식을 전하지 못한 고객사에 메일을 보냈다.
이후 직속 상사인 여민준 본부장의 집무실로 올라가 인사를 나누었다. 덕담은 짧지만 진솔했다. 시작은 썩 좋지 않았으나 아마도 이수에게 가장 상사의 면모를 보인 사람이었을 테다.
사무실로 내려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건물 외벽의 멀티비전에서 재작년 이수가 진행한 고객사의 광고가 송출되고 있었다. 여성 모델이 태양을 향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장면으로 유명한 광고였다. 매출이 올랐다며 기뻐한 고객사로부터 극진한 식사 대접을 받았다. 한우는 맛있었지만 굽는 솜씨가 형편없었던 임순정 대리가 땀을 뻘뻘 흘렸던가….
퇴사를 준비하는 일주일 동안 이시훈을 보지 못했다. 인사이동으로 인한 보고 회의가 온종일 이어졌고 이수 역시 아직 인계되지 못한 업무로 격무에 시달렸다. 아니, 어쩌면 사실은 서로를 피했던 것 같다.
“팀장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2팀의 직원들이 이수의 자리 앞으로 모여 서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멀리서 시훈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퇴사를 준비하는 일주일 동안 이시훈을 보지 못했다. 인사이동으로 인한 보고 회의가 온종일 이어졌고 이수 역시 인계되지 못한 업무로 격무에 시달렸다. 아니… 어쩌면 사실은 서로를 피했던 것 같다.
재빨리 감춘 시선이 김민주 대리가 이수에게 내민 작은 상자 하나에 머물렀다.
“별거 아니지만, 팀장님께 꼭 드리고 싶어서 저희가 준비했어요.”
“…….”
이수가 선물을 전해 받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자 김 대리와 임 대리가 풀어 보기를 소망한다. 망설임 없이 뜯은 포장지 속 상자 안에는 감청색 타이가 들어 있었다.
“고심해서 골랐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저하고 막내랑 정말 백번을 왔다 갔다 했어요.”
고마워요.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이수가 곧 제 목에 걸린 타이를 풀었다. 팀원들 앞에서 선물 받은 타이를 훌쩍 목에 두르고 익숙하게 노트를 만들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려 깊은 행동에 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제가 좋아하는 색이에요. 잘 어울려요?”
“잘 어울리세요. 잊지 말고 꼭 매 주셔야 해요.”
네. 고개를 끄덕인 이수가 잠시 입을 떼기를 주저했다. 타이 끝을 단정하게 정리한 손을 내리고 아쉬움이 묻은 인사를 전했다.
“…그동안 저 못지않게 힘들었을 텐데, 이탈 없이 함께 일해 줘서 제가 참 든든했어요. 앞으로 또 만날 날이 있겠죠.”
“팀장님,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눈가를 붉힌 임 대리가 대표로 화답했다.
“다들 건강해요.”
재킷과 코트를 걸친 이수가 팀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고 슬프지 않은 즐거운 인사였다. 어느새 반대편 1팀의 팀원들이 이수를 향해 서자 안 돌아볼 수가 없게 됐다.
짧게 인사를 마치고 양쪽으로 선 사람들 사이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 끝에는 책상 어딘가에 시선을 돌린 이시훈이 있었다. 걸음을 옮겨 책상 앞에 당도하자 시훈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이수를 마주 보았다.
겨우 일주일. 제대로 보지 못한 얼굴은 날카롭게 살이 내렸다. 습관처럼 이지러진 눈썹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저미어 왔다.
“…….”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힘껏 주먹을 쥔 시훈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셔츠 아래로 익숙한 시계 초침이 돌아가고 있었다. 어떤 감정인지, 어떤 기분인지 생각해 볼 용기는 없었다.
“정해진 곳은… 있구요?”
“아직이요. …아마 일하다 보면 다시 볼 수도 있겠죠.”
예의를 갖춘 희미한 미소였다.
“…기대해도 됩니까.”
“…글쎄요.”
“…….”
침묵이 버겁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슬펐을 뿐. 눈을 맞춘 이수가 이내 덤덤한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승진 축하드립니다. 이시훈 본부장님.”
팀장 나부랭이. 언젠가 정이수가 뱉은 말이었다. 같은 직급을 달고 있는 신분이나 위치를 꼬집은 단순한 조소라고만 여겼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만약 이수가 인사이트에 남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난 일주일간 시훈은 상상해 보았다. 결국 휘어지고 흔들렸을 테다. 초조함과 조바심 때문에 무너지고 있는 자신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회사를 그만두라 했고, 싫다는 이수를 몰아붙였다. 그런 자신이 실수하지 않게 잡아 준 이는 정이수였다. 그리고 지금은 권력을 손에 쥔 자신이 시시한 월권조차 행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수의 퇴사는 그런 의미였다.
시훈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두와 악수를 했지만 이수는 시훈에게만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시선을 외면한 이시훈을 뒤로하고 이수가 몸을 돌렸다. 사무실 출입문 앞에는 조금 전 내려온 인사과 직원이 이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을 뺐다. 그걸 직원의 손에 들려 주고 나자 무거운 어깨가 신기하리만큼 홀가분해졌다.
인사이트는 첫사랑 같은 곳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었고 온몸을 다 바쳤다. 처음 배정받은 자리, 제 손에 주어진 명함과 목에 건 사원증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치고 힘들어 죽을 것 같다가도 온 에어 되는 광고를 보면 혈관을 바로잡아 피를 수혈받은 사람처럼 심장이 펄쩍 뛰었다. 아마도 그 희열에 중독되었다. 그러니 아쉬워서 자꾸 이별을 미뤘다.
사랑 역시 그랬다. 아둔하고 실패한 사랑은 남은 비난처럼 이수를 사지로 내몰았지만 제 몫이라 여기며 누군가를 비난하고 원망하지는 않았다. 죄를 갚을 수 있다면 말이다. 모든 것이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너무 멀고 먼 길을 돌아왔다. 스물넷 그즈음. 처음 입사했을 때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킨 그날도 이렇게 밖에서 긴 빌딩을 올려 봤었다.
그때에는 어딘가에 있을 제 자리를 그렸지만, 지금은 누군가의 자리를 셈해 본다.
길게 내쉰 한숨이 먹먹하게 아린 가슴을 달래 주었다. 폐부에 가득 찬 공기가 퇴사를 실감케 했다. 내뱉은 입김이 자취를 감추자 이수의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핸드폰이 울렸다.
“네, 선배.”
수화기 너머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백주홍이다.
-요즘 잘 지내?
일상적인 안부 전화였다. 잘 지내요. 대답 대신 이수가 인도 옆으로 줄을 선 택시를 바라보았다.
“저 지금 퇴근했는데. 점심 같이 드실래요? 갈게요. 그쪽으로.”
-정말? 나야 좋지. 어서 오시라.
백주홍은 버선발로 마중 나올 기세였다. 이수에게서 그제야 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인사이트에서의 마지막 퇴근길이었다.
* * *
“엄청 바쁘지?”
“비슷해요.”
시훈의 입에서 나온 담배 연기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여민준 역시 품에서 전자 담배를 빼 물었다. 절정인 한파가 한풀 꺾이고 쾌청한 겨울 하늘 아래 햇볕이 드리운 날이었다.
연초 인사이동에 인사이트 내부는 한동안 술렁였다. 그간 사내 분위기를 고려하면 파격적인 승진임은 분명했다. 주변에서 이를 두고 설왕설래 오고 가는 말들이 많았지만 당분간 1, 2팀 팀장을 겸직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시훈은 평소와 같았다. 보다 못한 여민준이 늘어난 업무에 조정이 필요하지 않느냐 물었지만 내색 없이 일을 소화했다.
“조직 개편 새로 하면 좀 나을 거야. 그리고 AE 중에서 누구 하나 뉴욕 지사로 보낸다는데 팀장급으로 보내고 싶다나 봐. 1본부에도 혹시 지원자 있나 물어봐. 아이, 씨… 이거 주현탁이가 저질러 놓구 마무리를 안 해. 쯧….”
뉴욕 지사를 인수한 뒤로 연말에 사람을 보내야 하니 말아야 하니 난리를 치더니 말이 쏙 들어갔다. 생각만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요즘 김지학하고 주현탁이 왜 이렇게 밖으로 도는지 몰라. 일도 내팽개치고 말이야… 하아….”
인사 공고 이후 김 전무나 주 실장은 도통 회사에 붙어 있지를 않았다. 둘이 무슨 작당 모의를 하는지 번갈아 가며 자리를 비우다가 한 번씩 마주치면 여전히 속을 뒤집어 놨다.
여민준이 별 반응 없는 시훈을 곁눈질했다. 바빠서인지 아니면 마음고생 탓인지 본래 타고난 성질머리 때문인지 시훈의 얼굴이 퍽 날카로워 보였다. 잠은 자고 밥은 챙겨 먹는지 모르겠다. 여민준이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뜸을 들이다 부러 가벼운 소리를 내었다.
“그나저나 연락해? 뭐… 어디로 간단 말은 없고?”
“…….”
시훈에게서는 가타부타 답이 없이 없다. 여민준이 수증기 같은 연기를 뻐끔뻐끔 내뿜으며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하긴, 좀 쉬겠지. 한 회사를 그렇게 오래 다니고 연말까지 바빴는데….”
“…….”
재주가 없기는 했으나 위로라 하기에는 시훈의 표정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씨알도 안 먹힐 말을 주절주절 잇는 갸륵한 정성은 잠시 후 단박에 막을 내렸다.
“근데 정 팀 정도면 어디든 잘…”
“연초 줘? 전자 담배 무슨 맛으로 피워.”
불쑥 앞으로 내민 연초에 여민준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겉보기에 괜찮아 보여도 속이 어떨지는 짐작이 안 됐다. 고인 감정이 많을수록 입을 다무는 버릇은 여전했다. 돌이켜 보면 제 형인 시영이 죽고 난 뒤에도 그랬다. 때마침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여 전무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 먼저 가야겠다. 여민준이 화면을 확인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후우….”
홀로 남은 시훈은 담배를 끼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툭툭 짧게 이마를 두드려 정신을 가다듬어 본다. 단순한 피로 때문은 아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데다 퇴근은 늦고 출근은 일렀다. 침대에 누우면 밤마다 이수가 속삭인 말이 떠올랐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전하던 목소리가.
‘…나는… 잠깐이라도… 숨 쉴 틈이 필요해.’
당장 이수를 찾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절규와 같은 눈물을 생각하면 차마 이수 앞에 쉽게 얼굴을 들이밀 수 없었다. 내 마음을 알아 달라고 섣부른 투정을 부려서는 안 됐다. 시훈은 답을 구해야 했다. 허락을, 사랑을, 정이수를.
품을 파고드는 바람은 따뜻한 볕에도 여전히 차가웠다. 언제쯤 봄이 올까. 그때는 이수를 만날 수 있을까.
회의실 문을 열어 둔 채 막내 사원과 커피를 세팅 중이었다.
“와… 정 팀장님, 다시 봐도 대단하다. M사 데일리 리포트, 언제 이렇게 정리해 놓으셨지.”
자리마다 놓인 페이퍼를 살핀 임 대리가 후루룩 종이를 넘겨 보았다. 퇴사하는 전날까지 야근하기에 빨리 들어가시라 말한 기억이 생생했다.
M사 쪽에서도 이수의 퇴직에 적잖이 당황하며 서운해했다 들었다. 그 바람에 당시 여 본부장까지 나서 고객사에 연락을 할 정도였으니 남아 있는 팀원들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도록 나름대로 신경을 써 둔 것이다. 퇴사를 앞두고 이렇게 정리를 해 두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당장 눈앞의 보고서만 봐도 그랬다. 김민주 대리가 턱을 괴고 임 대리를 올려 봤다.
“근데 정 팀장님 어디로 가시려나… 이야기 들은 거 없죠?”
임 대리는 고개부터 저었다.
“저번에 안부 인사 겸 연락드렸는데 이직 이야기 없으시던데…. 먼저 여쭙기도 뭐해서 그냥 말았어요.”
“저한테도 따로 말 없으시긴 했어요. 당분간 쉬려고 그러시나.”
“글세… 쉬는 거랑 팀장님이랑 안 어울리는데….”
임 대리가 아는 한 이수는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정이수 팀장만은 무턱대고 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그때 김민주 대리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음… 혹시 그건 아니겠죠? 사규에 있기는 하잖아요. 1년 이내 동종업계 이직 금지.”
입사하고 계약서를 쓸 때와 신입 사원 OT 때 듣기는 했다. 업계에서 사람 돌려쓰는 거야 뻔한 일이건만 키워 놨다 싶으면 뜨내기처럼 훌쩍 떠나는 직원들 때문에 괜스레 강조하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그냥 사규에만 있는 조항 아니에요?”
임 대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기억 안 나요? 일전에 제작팀에서도 그거 때문에 인사팀이랑 큰소리 난 거로 아는데…. 왜, 다른 대행사에서 스카웃 제의 받았다가.”
지랄맞은 사규를 들먹이며 괘씸죄라는 죄명을 붙였다나.
“아… 맞다. 아오, 이놈의 회사는….”
임 대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치를 떨고 있을 때 회의실 문 앞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잡담은 이만하죠.”
시훈이 회의실 문을 닫았다.
“…네.”
소회의실이 잠잠해졌다. 자리에 앉기 전 시훈이 복잡한 심경을 갈무리했다. 이수가 회사를 떠나고 난 일주일간은 부재를 실감하지 못했다. 긴 휴가를 갔다고 여기면 참을 만한 시간이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 했던가. 회의하거나 보고서를 훑을 때나 고객사를 만나는 자리에서 때때로 이수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자료실에서 본 정이수의 역사처럼 남아 있는 흔적이 너무 많았다.
외부 일정을 마친 시훈은 백주홍의 사무실을 찾았다. 한번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한 지 반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백주홍이 어제 연락 왔었어. 걔가 정 팀장 출신 대학 강사였대. 둘이 꽤 친했다네. 최근에도 몇 번 만났다는데… 알고 있었어? 백이 정이수 팀장 탐내는 것 같던데….’
출근길에 여민준이 전한 뜻밖의 소식에 시훈은 없는 시간을 쪼갰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커피를 내어 준 백주홍이 창가를 가리켰다.
“화분 봐, 어찌나 잘 자라는지 나무 되겠어.”
사무실 한구석에 가지를 드리운 화분은 추운 날에도 잎이 푸르렀다. 그동안의 안부와 며칠 전 통화한 여민준과의 회사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백주홍이 불쑥 물었다.
“전에 이수도 다녀갔는데, 알고 있지?”
시훈이 마시던 커피 잔을 테이블에 도로 두었다. 튀어나온 이름에 커피를 넘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네.”
“민준이가 그러더라. 정 팀장 잘 챙겨 달라고.”
지가 뭐라고. 웃겨, 진짜. 백주홍이 코웃음을 쳤다. 진한 과거가 있는 두 사람이라 주고받는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수의 거취가 궁금한 시훈이 뜸을 들였다. 그사이 먼저 말을 늘어놓는 쪽은 백주홍이다.
“퇴사했대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연초 가벼운 안부 전화 한 통에 연남동까지 건너온 이수를 떠올렸다. 외근을 했냐 물었더니 퇴사를 했다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너야 여민준 따라 제자리 찾아갔다지만, 나는 이수가 요전에 연락 올 때까지 인사이트 다니는 줄은 몰랐어. 보통 중간에 한 번 정도는 몸값 올려서 이직하잖아.”
이수의 사정을 곱씹은 시훈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마도 작년 이맘때쯤 유진우의 방해만 없었다면 이직을 했을 테고, 그랬으면 지금 같은 고생도 없었을 걸 생각하니 심경이 복잡했다. 백주홍이 김이 오르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출강할 때 이수가 4학년이었거든. 나를 잘 따랐어. 나도 잘 챙겨 줬고. 졸업하고도 교수님이라고 부르길래 내가 선배 하라고 그랬지. 입사하고 난 뒤로 한 3년인가… 연락 주고받긴 했었는데, 어느 순간 끊겼다가 요전번에 다시 연락이 닿아서 말이야.”
“바쁘잖아요. 삼사 년 차에는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니까.”
일 머리가 생길 때라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딱 좋은 연차였다. 수긍하며 가볍게 웃은 주홍이 지난 기억을 자연스럽게 되살려 냈다.
“정이수 학교 다닐 때 엄청 날렸는데. 과탑에, 나가는 공모전마다 줄줄이 입상하고. 인사이트 가서 걔가 기획한 거 보니까 역시가 역시인가 싶더라.”
백주홍이 불편함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인 시훈이 여상하게 물었다.
“같이 일하기로 했어요?”
백주홍은 입에 댄 머그잔을 내리고 픽 웃기부터 했다. 몰랐나 보네?
“사실은 우리 쪽으로 모셔 오려고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까였고, 지금 대기 상태.”
여전히 미련을 못 버렸는지 콧잔등을 찌푸린 얼굴에서 진한 아쉬움이 읽혔다.
“무슨 뜻이에요?”
되묻는 시훈에게 백주홍은 그녀답지 않게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확한 이유를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향을 좀 바꾼 것 같아. 얼마 전에 들으니까 이야기 오가는 데가 있는 모양인데… 너한테 말하기는 좀 그렇고.”
눈을 굴리다 말고 슬쩍 눈치를 살핀 백주홍이 저버리지 못한 기대를 털어놓았다.
“안 되면 우리 쪽으로 오라고 했어.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만 이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대고.”
시훈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직장 동료가 할 만한 적당한 반응이었다.
“잘할 거예요. 뭐든.”
아, 맞다. 사정을 모르는 백주홍이 사무실 한편의 서랍장에서 박스 하나를 꺼냈다. 어느새 한결 높아진 목소리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만둔다고 해서 아쉬웠겠네? 너하고 친했다며.”
백주홍의 성격이라면 이수에게도 지금처럼 물었을 공산이 컸다. 확신 후 던져 놓는 식 말이다.
“네, 뭐….”
떨떠름한 대답에 백주홍이 어깨를 으쓱였다. 상자 뚜껑을 열고 꺼낸 물건들은 제법 시간이 지난 것들이었다.
“왜, 팀장이라 무게 잡고 그랬어? 걔 놀리면 되게 재밌는데. 술 취하면 가끔 헤 풀어지고.”
“그건 잘….”
시훈이 제 귓불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요령 좋게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백주홍에게 오해를 사지 않은 이유는 관심 없는 상대에 대해서라면 딱 잘라 모른다, 가깝지 않다 말하는 시훈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었다.
“전에 이수한테 주려다가 못 찾았거든.”
이걸로 충전이 되려나…. 박스 안에서 꺼낸 구식 핸드폰을 배터리에 연결한 백주홍의 표정에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배어났다.
“얌전해 보이는데 유들유들한 데가 있어. 학교 다닐 때 걔만큼 부지런했던 애도 없지. 과대에, 동아리 회장에, 1년 내내 공모전이며 방학 때는 교수님 밑에서 아르바이트도 종종 했을 거야.”
충전한 핸드폰 화면이 켜지고 사진첩 아이콘이 눌렸다.
“이거 볼래? 이게 언제야….”
시훈의 앞으로 핸드폰이 방향을 틀었다.
“이수 4학년 때. 공모전 대상 받았대서 내가 동아리 애들한테 술 한잔 사 줬거든?”
동영상 플레이어 안에서 정이수는 자료실에서 본 사진에서처럼 청바지에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 더 긴 머리를 찰랑거리고 있었다. 무리가 연호하는 이름은 정이수였다.
‘정이수! 정이수! 정이수! 정이수!’
‘정이수 또, 15초짜리 CM송 부르기만 해 봐라!’
대학가에서 흔히 볼 법한 좁은 삼겹살집이었다. 열다섯 명은 족히 돼 보이는 사람들이 따닥따닥 궁둥이를 붙여 앉은 방 가운데 홀로 선 정이수의 손에는 소주병에 꽂힌 숟가락 마이크가 들려 있었다. 난감해서 딱 죽겠다는 표정이면서 만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노래… 노래.’
취기에 홍조로 물든 뺨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며 배시시 웃는다.
‘에이… 최소한 1절까지는 가 보자!’
백주홍이 웃는지 화면이 웃음소리와 함께 들썩이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면…! 못하지만… 한번… 해 볼게요.’
사람들의 계속된 채근에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이수가 노래를 시작했다. 두 손으로 소주병을 꽉 잡고 드문드문 입술을 깨물며 부끄러움을 애써 참아 본다. 여기저기서 호응과 잔잔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쑥스러워 노래 중간중간 흘리는 미소나 동기들과 눈을 맞춰 들썩이는 눈썹.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넘겨 짚는… 그런 작은 몸짓에 시훈의 가슴이 숨 쉴 수 없을 만큼 꽉 죄어 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수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화면 속 이수가 환한 웃음을 보일 때마다 그리움이 산처럼 쌓였다. 시훈의 한쪽 입매가 어설프게 이수의 미소를 훔쳤다.
노래가 후렴구에 다다르자 술에 거나하게 취한 모든 사람이 합창하기 시작했다.
‘I love you, baby! …I need you, baby! …I love you, baby! …Oh, pretty baby!’
얼굴을 붉히고 목청이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는 정이수는 천진했다. 정이수는 모든 중심에 있었고, 티 없이 맑았다.
머리에 뭐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화면 속 이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훈을 백주홍이 깨웠다.
“보여 준 거 알면 싫어하려나? 내가 아는 이수는 그냥 웃고 말 텐데.”
뚝 끊긴 영상을 밀어 놓고 백주홍이 웃었다. 얼떨떨한 기분이 가시지 않은 시훈의 앞에 폴라로이드 사진 두 장이 놓였다. 강의실로 보였다. 백 선배가 꽃다발을 들고 단체로 찍은 사진 한 장과 아무래도 잘못 찍힌 듯 이수가 멀거니 웃고 있는 초점 나간 사진이 다른 하나였다.
“둘이 만날 일 있으면 가져가서 전해 줘. 아무래도 오며 가며 만나기로는 네가 편하지.”
백주홍이 박스 안에 도로 구형 핸드폰을 넣고 지나가듯 부탁했다.
“…….”
시훈은 아무 말도 없이 사진 두 장이 담긴 봉투를 챙겼다. 백주홍과 인사를 나눈 뒤 터덜터덜 사무실을 내려온 시훈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예정된 회의에 참석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러나 차는 한동안 출발하지 못했다. 시트에 머리를 기대 있던 시훈은 결국 조수석에 내려놓은 봉투를 열었다.
“…….”
과거의 정이수가 지금의 정이수가 되기까지, 티 없이 웃던 얼굴이 조소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테다. 냉대하는 세상에 발맞춰야 하고, 옆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겠지….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다 문득 넋을 놓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그럴 때면 어느새 사방이 안개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흐릿한 존재가 저보다 앞서 걷고 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실루엣을 쫓는 시훈 앞에 한순간 안개가 걷히고 민낯의 정이수가 힐끗 뒤를 돌아본다. 웃고 있는지 아니면 울고 있는지 모를 상대를 향해 손을 뻗지만 잡히지 않았다. 지척에 두고도 손 한번 잡을 수 없는 현실에 무능한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두 장의 사진 중 한 장은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을 한참 동안 바라본 시훈은 재킷 안주머니에 초점이 어긋난 사진을 넣었다. 미간에 미미한 골이 팼다.
“…흠.”
시훈이 가라앉은 목을 풀고 시동을 걸 때였다. 후우…. 핸들을 잡은 손 위로 이마가 쿵 받혔다. 쿵, 쿵, 쿵 손등 위에 몇 번이나 이마가 닿는 동안 깊은 탄식이 흘렀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때때로 오피스텔 앞을 찾아가 불이 꺼진 창을 보거나 이수가 습관처럼 보고 있을 번쩍이는 텔레비전 불빛을 벗 삼아 줄창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죽였다. 유일한 낙이고, 위로였다.
시훈은 그저 이수가 보고 싶었다.
* * *
테이블 위로 포장된 음식이 먹기 좋게 놓였다. 이수가 수저를 엄마 쪽으로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엄마, 그리고 내가 작은아버지 찾아서 돈 다 받았어. 걱정하지 마, 이제.”
저번 주만 해도 영 서투른 거짓말에 반신반의하던 엄마가 반색하며 이수의 볼로 손을 뻗었다.
“정말? 아이, 고생했다. 우리 이수. 다행이다. 정말…!”
웃는 엄마 얼굴을 보고 이수도 입 끝을 끌어 올렸다.
인사이트를 퇴사한 후 일주일은 출근 시간이 되면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뜨였다. 다음 날은 심지어 욕실에서 샤워 도중 퇴사를 자각했다. 오전에는 침대에서 눈을 감고라도 있었지만, 오후가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흐르는 시간이 오히려 답답했다.
그래서 두 번째 주부터는 부지런히 전시회를 보러 다녔다. 자주 가는 종로를 찾았지만 도드라진 기억에 금세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무심코 생각난 얼굴이 둥둥 천장을 떠다녀서 밤새워 뒤척였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무료함에 하루는 집에서 밥을 차려 먹을 요량으로 장을 봤지만 2시간 동안 장조림 하나를 만들지 못하고 포기했다.
다음 날은 계란 한 판을 샀다. 계란 프라이로 시작해 3일째 계란 한 판을 투자하고서야 얼추 계란말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잠은 자면 잘수록 더 온다는 말도 실감했고, 온종일 예능 프로그램과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규칙적인 회사 생활이 막을 내리자 시간이 마구 뒤섞였다. 이수 삶에 있어 가장 나태하고,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엄마, 밥 먹자. 근처에서 되게 유명한 집인데 몸에도 좋고 소화도 잘된대.”
“너도 먹어. 혼자 밥은 잘 챙겨 먹는 거야?”
“응.”
엄마는 숟가락을 이수 편에 들려 준다. 평일 오후, 요양원에서 보내는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같이 식사를 하고 엄마를 두꺼운 외투와 담요로 중무장시켜 짧게 정원을 산책했다. 엄마와의 대화는 여전히 막막했지만 조급하지는 않았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이미 지나서 소용없는 이야기도 끝까지 들어 주고 걱정을 덜어 줄 여유도 생겼다. 그러다 보면 어떤 날은 정신이 멀쩡하게 돌아와 이수의 손을 끌어 주기도 했다. 꼭 오늘처럼.
“근데… 저번에 같이 온 사람은 누구야?”
“어?”
흘러내린 목도리를 재차 고쳐 매 줄 때였다.
“보호사님이 그러더라. 밤이고… 눈 오는 날이라 운전하느라 고생했겠더라고. 친구야?”
하필 엄마의 기억에 남은 사람이 이시훈일 줄이야.
“친구는 아니고….”
“그럼?”
“그냥… 좋은 사람.”
번지는 미소가 휠체어 뒤로 서자 일그러졌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아직도 서툴고 어설프기만 한 제게 솔직한 감정을 보인 이시훈은 여전히 한 발짝 앞서 걷는 사람이었다. 이미 뒤틀린 채로 시작된 관계였다. 그 속에서 자란 감정은 바람이 지나는 듯 스쳐 갔으면 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고백에 이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마지막까지 담담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고개를 풀썩 떨어트린 이수가 자세를 낮춰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엄마, 나 사실은… 회사 관뒀어.”
퇴사를 핑계로 소리를 죽인 목소리가 저미는 마음에 떨리고 말았다. 서른이 훌쩍 넘은 아들의 고백에 엄마는 마치 학교를 그만둔 아들을 보는 양 놀라서 왜냐고 괜찮은 거냐 되묻는다. 슬쩍 눈가가 발개진 이수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흔적을 감추었다.
“…좀 속상했는데, 후회는 안 해.”
아이러니하게도 주현탁의 제의가 결정을 도왔다. 주 실장이 선의랍시고 내민 뉴욕행 제안에 유진우가 저에게 씌워 준 팀장 자리가 떠올랐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지워지지 않고, 오해와 편견으로 빚어진 오물통에 몸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 사살처럼 자각했다. 양심마저 팔아 버리는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각오를 다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수는 단단해지고 싶었다. 그동안 버텨 온 10년이 헛되지 않으려면, 시훈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무력한 자신이 인사이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긴 터널을 지나면 빛이 보일까.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린 저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숨을 쉬고 주위를 둘러보고 온전히 나를 마주 볼 용기가. 그러자면 시훈을 놓아야 했다.
엄마를 부축해 베드 위에 눕히고 자리를 봐 드렸다. 이불 아래로 따뜻한 온기를 확인한 이수가 몸을 일으킬 무렵 때마침 벨 소리가 울렸다.
“네, 정이수입니다.”
내용은 간결했다. 일시와 장소를 고지한 상대는 당일 로비에서 연락을 달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통화를 마친 이수가 끊긴 전화를 내려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단한 얼굴로 눈을 깜박인 엄마가 이수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얼른 가. 날 추워져. 서울 가면 해 지겠다.”
목까지 꼼꼼하게 재차 이불을 올려 준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다음 주에는 주말에 올게. 평일에 일이 있어서 준비를 좀 해야 해서.”
“면접… 그런 거 가는 거야?”
응. 이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수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 엄마의 병환이 심해졌다. 그래서 엄마는 그때 이수가 서울을 오가며 취업을 준비하는 줄도 몰랐다. 그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다 늦어 아들의 뒷바라지라도 하려는지 오히려 긴장하는 엄마 앞에서 이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두 참… 바쁘면 오지 마. 뭐라더라… 떨리면 청심환 같은 거 먹는다더라.”
진지한 조언에 이수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어. 너무 떨리면 사 먹을게.”
가려는 이수를 붙잡은 엄마가 서랍 속에서 5만 원권 한 장을 손에 쥐여 주었다.
“가지고 가.”
이수는 마다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접어 넣는 것까지 확인한 엄마와 인사를 나누고 다시 서울을 향했다.
버스에 올라타자 노을이 졌다. 황량한 늦겨울 들판에 드리운 한 줌 빛이 제법 따뜻해 보였다. 정말 엄마 말처럼 떨릴까. 이수의 머리가 천천히 창으로 기울었다.
요즘 불면은 나아졌지만, 가끔 꿈을 꾼다. 내용은 짧고 단편적이다. 깍지를 껴 잡고 있는 손이나 너른 어깨에 기댄 머리, 등에 이마를 대고 있는 제 모습이 조각조각 잘려 나왔다. 익숙한 담배 냄새와 목 아래로 웃는 소리가 지나치게 생생할 때는 잠결에 저도 모르게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다 상대가 누구인지 드러나려 할 때마다 현실을 일깨우듯 잠에서 깨어났다.
서른이 넘도록 서툴고 어려운 건 사랑뿐일까. 불쑥 찾아오는 그리움에 이수가 하릴없이 고개를 저었다.
“…….”
아무래도 시훈이 보고 싶은 것 같다.
* * *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날이 궂은 정도였다. 어둑어둑한 사위에 무심코 올려 본 하늘은 검은 구름이 잔뜩 껴 당장 비가 쏟아질 기세였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이수가 때마침 김민주 대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 인사이트 사옥으로 발을 들였다. 퇴근 시간이 지난 로비는 한가했다.
-팀장님. 로비에 계시죠? 지금 내려갈게요!
연말 갑작스러운 퇴사에 미처 전달받지 못한 서류가 있었다. 정책상 꼭 서면으로 가져가야 한다기에 마침 근처에서 일을 마친 이수가 김 대리를 통해 서류를 전해 받기로 했다.
매일매일 10여 년간 드나든 곳이 게이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제 남의 집이 됐다. 로비 사이드에 쉼 없이 돌아가고 있는 멀티비전 앞에서 뻐근한 목을 늘이자 풀린 긴장이 일시에 어깨로 내려앉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입게 된 정장마저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팀장님!
김 대리가 사원증을 달랑이며 뛰어오는 중이었다. 반가움에 손 따로 머리 따로 흔드는 모습이 귀여워 이수가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갑자기 고객사에서 전화가 와서요.”
“바쁜데 미안해요. 이런 부탁 해서.”
“저는 좋은데요. 겸사겸사 얼굴도 뵙고.”
김 대리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웃는 얼굴을 보니 이수도 마음이 놓였다. 임순정 대리도 복귀하고, 좋은 일도 많았는데 그 후에 조금 더 같이 일했으면 좋았을 걸 아쉬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김 대리가 서류를 건네며 물었다.
“어? 근데 오늘 어디 다녀오셨어요? 복장이….”
대답 대신 조용히 웃어 보이자 김 대리의 목소리가 한 톤 더 높아졌다.
“혹시 면접…. 어디요? 어디로 가세요?”
화등잔만 하게 눈을 크게 뜬 김 대리가 재차 물었다. 이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어디라고 말하기 좀 그래요. 확실한 것도 아니고….”
소문대로였다. 면접관은 입사에 성공한다면 이수의 직속 상사가 될 사람이었다. 포트폴리오를 바탕으로 한 전반적인 마케팅, 최근 트렌드에 관한 물음은 까다로웠고, 면접 시간은 예상 시간을 훌쩍 넘겼다. 만반의 준비는 했지만, 광고주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마무리 인사를 할 때쯤에는 목이 잠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위안이 있다면 핑퐁처럼 오가는 대화의 질이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의례적인 물음에,
‘저는 오늘 나눈 대화가 즐거웠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도 귀한 시간 내서 만나 볼 정도는 됐어요. 레퍼런스 체크니, 인·적성이니… 사실 진부하고 쓸데없지. 흠.’
이미 공석인 자리를 채우기도 바쁠 텐데 상대는 신중했다. 인사과 개입을 최소로 본인 재량껏 채용을 한다고 하니 더 그럴 테다. 서류를 천천히 내려 보던 면접관이 과거 경력을 되짚으며 두 손을 깍지 껴 잡았다.
‘혹시라도 입사하면 문제 되지 않겠어요? 한국은 일하는 방식이…, 그렇잖아요.’
‘아니요. 일은 일로 대합니다.’
‘확실해요? 나는 오늘 정이수 씨 이력서는 처음 봤어요. 연차하고 직무 관련 경력만 확인하고 들어온 거라 내가 이렇게 묻는 이유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요.’
답을 기다리는 시선이 매서웠다.
‘답은 직접 보여 드리는 수밖에 없겠죠. 업무 능력으로 판단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미 도박 같은 도전이었다. 이수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도 남을 후회도 없었다. 다만 이직이 처음이라 도대체가 결과를 가늠할 수 없을 뿐. 신입 사원으로 취업을 준비하던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여기도 공채 시즌이죠?”
로비 한쪽에 크게 걸린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네.”
“고우재 씨도 입사할지 모르겠네.”
빙긋 웃는 이수에게 김 대리가 소식을 전했다.
“그렇잖아도 고우재 씨한테 팀장님 퇴사하셨다고 하니까… 이거 좀 보세요.”
메신저를 통해 주고받은 대화 아래 한 페이지가 넘어가도록 우는 이모티콘이 줄줄이 이어졌다. 설 명절에 답지 않게 얌전하게 안부 전화를 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뜸을 들이며 좀체 말을 못 한 걸 보면 이수 쪽에서 퇴사에 관해 말해 주길 기다렸나 보다.
“뭐… 듣기로는 대행사는 인사이트하고 T 기획만 넣고, 나머지는 기업 마케팅 부서로 지원한다구요. 정산 브랜드전략도 넣는 것 같구…. 배짱 하나는 여전해요.”
광고 시장은 경기가 나쁘면 기업이 가장 먼저 허리띠를 졸라매는 분야다. 요즘은 점점 채용 규모도 줄어 가는 추세라 신입이 지원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다행히 고우재에게 인사이트에서 경험한 인턴 경력은 괜찮은 스펙이 될 테다. 잠시였지만 다 같이 일했을 때가 즐거웠다. 팀 분위기도 제일 좋았었는데…. 다 털어 버렸다고 생각해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버린 회사 로비에서 함께 일한 팀원을 만나자 아쉬운 마음은 들었다.
“근데 정말 고우재 씨 앞에서 PT해야 하면 어떡해요?”
쓸쓸한 마음을 다잡기도 전에 김 대리가 내뱉은 말에 두 사람 모두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고우재가 참석한 첫 아이데이션 회의를 떠올린 탓이었다. 잠시 당시의 기억을 주고받는 동안 김 대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고객사 연락일 게 분명했다.
“으… 팀장님. 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어쩌죠. 오랜만에 뵙는데 이래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난감해하는 김 대리를 이수가 다독였다.
“전화 불난다. 가 봐요, 얼른.”
“임 대리가 오늘 팀장님 오시는 줄 알았으면 외근 안 갔을 거라고, 다음에는 꼭 같이 뵙자구요.”
“그래요, 그럼 다음에….”
인사를 하려는 이수의 위쪽으로 문득 김 대리가 시선을 가져갔다. 로비를 한눈에 내려 볼 수 있는 2층 난간 방향이었다.
“어?”
이어지는 묵례에 무슨 일인지 슬쩍 눈썹을 올린 이수에게 김 대리가 목소리를 죽였다.
“…본부장님이 위에 계셔서.”
여민준 본부장… 으레 그렇게 짐작하고 어깨를 돌렸을 때 이수의 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
아… 본부장 이시훈.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꼼짝없이 시선이 마주쳤다. 시훈이 이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로비를 울리는 벨 소리는 끊길 기미가 없었다. 울상이 된 김 대리가 팀장님, 그럼 가 볼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를 남기고 게이트를 향해 뛰어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확인하고 위를 올려 보자 시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찰나의 시간이 영겁 같았다. 인사이트를 그만두고 만난 건 처음이었다. 치켜올린 눈썹과 그 아래로 꾹 다문 입술이 여전해서 이수는 저도 모르게 조각난 꿈들을 떠올렸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 로비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올 수 있을 테지만 이시훈이 잠자코 있는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이제 함부로 친절을 베풀어서도 거리를 좁혀서도 안 되는 관계였다. 마치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며 나란히 길을 걷는 사람들처럼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웠다. 이수는 떠나올 때의 결심을 안고 무던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사위를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굵은 빗줄기가 창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전면이 유리로 된 1층 사옥 외벽을 따라 흐른 빗물에 거리가 흐릿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시훈을 향해 이수는 턱을 당겨 인사를 남겼다. 사옥을 빠져나오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는지 장대비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서 있는 택시는 없고 있었대도 비에 홀딱 젖을 게 뻔했다.
이수의 시선이 바닥을 빼곡히 메워 놓은 빗방울에 멍하니 멈췄다.
“…….”
투둑. 홀리듯 뻗은 손바닥 위로 떨어진 차가운 빗물이 비로소 이수를 깨웠다. 손을 기울였다. 고인 빗물이 후드득 땅으로 떨어진다. …타이밍 참 짓궂다. 입가에 머물던 쓴웃음이 금세 자취를 감췄다. 머리를 손으로 가리고 막 뛰쳐나갈 때였다. 누군가 이수를 불러 세웠다.
“실례합니다.”
로비 1층을 담당하는 보안 요원이 장우산을 내밀었다. 생각지 못한 친절에 눈만 동그랗게 뜬 이수에게 보안 요원이 이유를 설명한다.
“이시훈 본부장님이 부탁하셔서요. 반납은 안 하셔도 됩니다.”
“…….”
떨리는 손이 우산을 받아 들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인사를 마친 보안 요원이 사옥으로 되돌아갔다. 빗소리와 젖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그제야 선명하게 이수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 * *
장마 같은 비가 사나흘은 족히 내렸다. 비가 그친 후에는 두꺼운 코트가 얇아졌고, 종종 외근을 하며 지나가는 광화문 서점의 대형 간판에는 봄을 알리는 문구가 내걸렸다. 움트지 못한 꽃망울이 간신히 기지개를 켜는 계절이었다.
“2본부의 마 팀장 뉴욕 건 승인됐죠?”
시훈과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 여민준 전무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인사팀장에게 말을 붙였다.
“네.”
“조정을 또 하게 생겼네. 조직 개편하는 데 머리 좀 아프게 됐어요. 그런데 지원자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쉽게 결정됐네. 그죠?”
팀장급 인사가 졸지에 셋이나 비게 된 터라 조직 개편에 이래저래 시일이 걸렸다. 인사팀장이 특유의 심드렁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출국 기일도 촉박하고… 그리고 저는 내정자가 있는 줄 알았거든요.”
“내정자?”
내정자라니 무슨 소리인가 싶다. 그런 두 사람 앞으로 더 뜻 모를 답이 이어졌다.
“정이수 팀장이요. 작년 말에 주 실장님이 이것저것 여쭤보셨거든요. 결격 사유는 없는지… 그런 거요.”
당시 기획 본부장이었던 여민준도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뜬금없이 뉴욕이라니. 갈 수만 있다면 좋은 기회기는 했지만, 거기에 정이수라니. 게다가 그걸 주 실장이 왜 물어? 여민준이 옆에 선 시훈을 올려 봤다. 표정을 보아 하니 역시 처음 듣는 눈치였다.
때마침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는 뜻밖에 주현탁 실장이 타고 있었다. 삐딱하게 고개만 숙일 뿐 피차 생략한 인사가 불편한 사이를 가늠케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팀장이 내린 공간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전에는 넉살 좋게 안부를 묻던 여민준도 연말부터 난동과 같은 기괴한 딴지에 마음이 틀어졌다. 더군다나 인사이동 이후로는 더더욱 밑질 게 없다 싶은지 입을 꽉 다물었다. 그 가운데 침묵을 깬 사람은 주현탁이었다.
“요즘 이 본부장이 바쁘겠어.”
“할 만합니다.”
냉랭한 시훈의 대답에 주 실장이 고까운 티를 냈다.
“2팀까지 커버하려면 만만찮겠네. 얼른 조직 개편이 끝나야지, 원…. 정 팀이 그만둬서 이 본만 고생이다. 응?”
마음에도 없는 걱정은 꼭 상대의 속을 뒤집기 전에 하는 예고였다. 뻔히 알고 있지만, 귀를 틀어막을 수가 없어 미리부터 신경이 사나워졌다.
“…….”
“정이수 어디 들어갔대요? 나 아는 대행사들 물어보니까 아주 말이 없든데. 하긴…, 작은 회사 들어가서 보람 찾아, 워라밸 찾아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들 합디다.”
주 실장이 느물대며 성의 없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양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자세가 거만했다. 남은 뒤끝이 쇠심줄처럼 어찌나 질긴지 퇴사한 직원에게 심술을 부리는 주 실장이 시훈은 딱해 보일 지경이었다. 크게 숨을 몰아쉰 시훈이 입안으로 혀를 굴렸다.
“급 떨어지는 데로 들어가면 다시 올라오기가 영 힘들잖아요. 갑·을·병·정. 이 중에서 그러잖아도 을인데 병하고 정까지 밀려난다? 쯧쯧.”
“…….”
이러다가 주먹이라도 나가지 싶어 시훈이 바지 옆에 붙여 둔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어디 작은 기획사라도 소개해 주면 좋은데… 연락이 없네, 쓰읍.”
입을 나불대는 이유는 하나같이 유치하고 졸렬했다. 연초에 제대로 한 방을 맞은 후유증이 제법 길었다. 정이수의 퇴사와 여민준, 이시훈의 승진으로 계획은 어그러지고 김지학 전무와 더불어 사내 입지가 적잖이 좁아졌다. 힘이 실린 여민준 전무나 잘나가는 이시훈을 보자면 배알이 꼴렸다. 정이수가 뉴욕행 티켓만 잡았어도 입맛대로 돌아갔을 회사가 엉망진창이 됐다. 그러니 두고두고 아쉬울밖에.
“거참, 없는 사람 이야기를 왜 해요? 그만 좀 해요!”
여민준이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낮춰 다그쳤다. 그에 주 실장이 코를 찡그렸다. 불쑥불쑥 쳐들어오던 회의도 마다하며 조용히 지내기에 기가 죽었나 했더니만 이건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걱정해 주는 걸 가지고 왜 혼을 내세요. 참.”
곁눈질로 두 사람을 살피는 주 실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비틀린 입술은 비웃음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여민준이 이를 콱 깨물었다. 이미 연말부터 사내에서 완력 다툼하는 거냐 양쪽에서 한 소리씩 들은 터라 더는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데 혼자만 그러면 뭘 하나.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을 붙잡고 우리 한번 잘해 봅시다 내미는 손에 주 실장은 따귀를 때릴 놈이었다. 느물대는 행동이 하루 이틀도 아니건만 금세 꼬리를 내리는 모습이 탐탁잖았다.
“아… 영 쌔하네.”
집무실로 들어오기 전만 해도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씩씩대던 여민준이 이마를 짚었다. 원래 업무상 외부로 도는 사람이긴 했지만, 연초에는 출근을 하는 둥 마는 둥 내내 밖으로 나돌다가 회사만 들어오면 얌전을 빼는 모습이 이상했다. 가만 보면 잊을 만하면 벙개를 외치던 김지학 전무 역시 잠잠했다.
잘 손질된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집어넣다 말고 여민준이 찜찜한 기분을 접어 뒀다. 뒤통수 맞아서 몸을 사리나 보다 정도로 정리를 해 둬야 뒤집힌 속이 그나마 가라앉았다. 곧 열린 문으로 뒤따라온 시훈을 돌아보며 애써 분위기를 환기했다.
“정산 OT, 곧이지?”
“네.”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여 전무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 팀장은 운이 좋네. 작년에 2본부 마 팀장이 진행한 정산 쪽 프로젝트 결과가 별루였어. 브랜드전략실 실장이 미팅할 때마다 뜯어 발기느라 마 팀장이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나 봐.”
업무 관련해서 딱히 잔소리하자고 부른 건 아니었다. 모기업인 데다 한 해 매출액을 보장하는 가장 큰 광고주이다 보니 돌아가는 분위기나 흐름을 짚어 줄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 정산 브랜드전략실이 개편이 됐어. 힘 좀 실어 주나 보지? 전에도 말해서 알겠지만, 실장이 하나하나 사람을 가려 뽑았대. 담당자도 새로 들어오고 말이야. 원래 비딩해서 대행사 선정해야 한다고 난리였다가 비용도 그렇고, 무엇보다 중장기 프로젝트에 보안 유지 때문에 계열사인 우리한테 일 떨어진 거니까 신경 좀 쓰자.”
“들었어요. 실장이 기획자 출신이라고.”
“어, 정산 그룹 스카우트 아니었으면 한국 들어올 일 없었다나 봐. 이쪽에 연이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튼, 본부장까지 가는 건 좀 그렇긴 한데 실장도 참석하는 모양이니까 급은 맞춰 줘야지. 상견례 한다 생각하고 다녀와.”
작년 여민준 전무가 식사 자리에서 주 실장과 푸념 섞인 불평을 늘어놓던 기억이 떠올랐다. 새로 임명된 실장이 어찌나 까다로운지 타 본부에서 맥을 못 춘다고 했던가.
“네.”
여 전무가 다리를 꼬아 몸을 틀었다. 입술을 비죽이며 시훈에게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시훈이 네가 회장님하고 사이만 좋았어도 거기가 원래 네 자린데… 좀 아쉽다, 야. 정산으로 갔으면 좀 좋아. 그럼 우리가 김지학이나 주현탁 때문에 머리 아플 일도 없고.”
“그런 말은 왜 해. 쓸데없이.”
시훈이 냉랭하게 타박했다. 이미 정산 그룹은 작년부터 동생인 시연에게로 승계가 준비 중이었다. 애초부터 정산을 운영하는 데 관심이 없는 시훈과 달리 다행히 시연은 제 역할을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니 곧 일선에서 물러날 이중건 회장의 입김이 인사이트까지 닿는 건 이번 승진이 마지막일 것이다. 여민준에게도 딱히 부름이 없는 걸 보면 이대로 지켜볼 생각이 분명했다.
“아무튼, 회장님 이겨 먹은 놈은 대한민국에 너밖에 없어. 너두 참….”
여 전무가 기가 질린 투로 입꼬리를 내렸다.
집무실을 나와 사무실에 당도한 시훈이 다음 주 미팅에 앞서 간단한 지시를 내리고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보고를 기다리는 서류들과 오늘 중으로 부러뜨려야 할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늦은 오후의 사무실에서는 직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분주하게 업무를 보고 있었다. 키보드 소리와 간간이 울리는 전화 소리, 데시벨을 낮춘 통화 소리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
손가락으로 미간 사이를 문지른 시훈이 돌연 의자를 돌려 비어 있는 이수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뉴욕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안이 주 실장과 엮인 문제인 건 알고 있지만, 설마 이수가 가겠다고 했을까. 아프신 어머니를 두고? 아니면 그저 단순한 고민이었을까. 그럼 왜 퇴사를 했지…. 해소되지 않은 의문만 첩첩이 쌓였다.
시선을 끌어 내린 시훈은 파티션에 붙어 있는 엽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매번 하루가 너무 길거나 짧게 느껴질 때 마음을 다잡는 익숙한 방법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펜으로 엽서 끝을 들어 올리자 시영의 글씨로 쓰인 익숙한 글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
시선은 글귀에 닿지 않았다. 시훈은 엽서 아래 감춰 붙여진 작은 폴라로이드 사진 하나를 응시했다. 초점이 나간 사진 속 정이수가 웃고 있었다.
당분간은 요양원을 방문하기 힘들지 싶어 필요한 물품도 넉넉하게 사 두고 온종일 시간을 보내고 왔다.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한 이수가 세탁소에 맡겨 놓은 옷을 찾아 식탁 의자에 걸어 놓는 동안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문자에 답을 하는 사이 요양 보호사 편에서 전화가 왔다.
-이수 씨, 늦은 시간에 연락해서 미안해요. 봉투를 이제야 확인해서…. 무슨 돈을 주고 갔어, 미안하게.
“얼마 안 돼요. 명절 때 드리려고 했는데 못 드렸어요. 앞으로도 어머니 잘 부탁드려요.”
-어휴… 믿어 줘서 고마워요. 내가 더 신경 쓸게요.
창가로 걸음을 옮긴 이수가 드문드문 불 켜진 도시 전경을 훑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도로 위의 차들이 거북이걸음이었다. 어느새 올려 본 하늘에는 손톱달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제가 평일에 가기가 힘들어요.”
익숙하게 블라인드 줄을 당기던 이수의 손이 순간 멈췄다.
-그래요?
“…….”
차가 드문드문 지나는 거리를 내려 본 이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동시에 수화기 너머로 되묻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이수 씨.
“…앞으로 전처럼 주말에 갈게요.”
-네, 알겠어요. 그럼 쉬어요.
떨리는 눈꺼풀이 마음을 다잡듯 아래를 향하다 서서히 뜨였다. 오피스텔 아래 어둠이 내린 황량한 도로 양쪽으로 셔터를 내린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그 가운데 조수석 문에 등을 기대선 시훈이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손바닥에 담뱃갑을 두드린 그가 연초를 빼 무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몇 번인가 제자리를 오가는 느릿한 걸음은 추를 매단 듯 무거워 보였다. 이내 담배를 태우다 이마를 문지른다. 곧 망설인 그가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이수는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숨 쉴 여유조차 없이 이수의 핸드폰에 익숙한 이름이 떴다. 이시훈 팀장. 바꿔 적지 못한 직함을 자각하기도 전에 이름 석 자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조용한 집을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는 마치 애절하게 이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고민하던 이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전화를 받을 거라고 예상을 못 했는지 상대는 말이 없었다. 곧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냈어요?
“네.”
건조한 대답에 수화기 너머로 씁쓸함을 감춘 엷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잘 지냈어요. 아무래도 묻지는 않을 것 같아서.
“…….”
침묵에 상대는 발을 멈추고 잠시간 말을 골라 본다.
-당분간 내가 1, 2팀 팀장직도 겸직하고 있어요.
“저 때문에 고생 많으시네요.”
문득문득 밀려오는 감정을 거세해 적당한 답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직 밤이 추운 계절, 조수석에 몸을 기대 있는 시훈이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 다들 정이수 팀장님 보고 싶어 해요. 잘 지내는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그런가요. 이수가 시선을 내려 바닥을 훑었다. 무심히 대하리라, 그럴 수 있다는 의지와 달리 자꾸 손바닥 안으로 손가락이 굽어 닿았다. 결국 애꿎은 손바닥에 꾹꾹 손톱을 세우던 손가락이 어쩔 수 없이 창을 더듬었다.
“…….”
-왜, 백 선배 회사로 안 갔어요?
앞뒤 재지 않은 담백한 질문에 이수 역시 쉬이 답을 주었다.
“인사이트나 백기획이나 뭐가 다를까 싶어서요.”
-같이 일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들 내 걱정 많이 하나 봐요.”
-…….
이수가 웃음기 담아 냉소 없는 농담을 가볍게 흘렸다. 어쩐지 다음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른 입술을 훔친 이수가 창 위로 올라간 손가락을 세심하게 움직였다.
“회사 그만둘 때… 어중간한 마음으로 그만둔 거 아니에요.”
느릿느릿 고백이 이어졌다. 인사이트를 나올 때 이수가 다진 결심은 유효했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시훈을 위해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몸을 돌려 차체에 팔을 뻗어 선 시훈이 고개를 떨궜다. 그리움과 절망이 시훈의 어깨 위로 무겁게 자리를 틀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그릴 수가 있었다. 그가 느끼는 절절한 마음을.
-…….
“그게 궁금했어요?”
느리게 움직인 이수의 손가락이 차가운 유리창 한 곳에 멈춰 섰다. 시훈이 발을 딛고 선 자리. 이수의 손이 손바닥보다 작아 보이는 시훈을 감싸고 있었다. …아직 날이 추우니까.
발아래로 다 태운 담배를 짓이긴 시훈이 잠시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그냥… 회사 왔을 때 쌍꺼풀 없는 걸 오랜만에 봐서요.
“…….”
-생각해 봤는데 어느 쪽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왼쪽이었는지, 오른쪽이었는지….
장난 같은 시훈의 실없는 말에 감출 수 없는 그리움이 이수를 짙게 물들였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을 물음에 당연한 정적이 흘렀다. 시훈은 미동도 없었다. 깊은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질 뿐. 포개어 힘을 준 입술이 형편없이 떨렸다.
“…끊을게요. 그리고…,”
눈을 감고 창 너머로 상대에게 덧씌운 손을 내렸다. 이어 가느다랗게 새어 나온 인사는 매정했고, 상대를 놀라게 하기에도 충분했다.
“…자꾸 오지 말구요.”
블라인드를 내리는 순간 시훈이 통화 중인 귓가의 손을 떨어트리는 모습이 보였다. 급히 오피스텔을 올려 보는 그가 무슨 표정이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하….”
벽 뒤로 몸을 숨긴 이수가 참은 숨을 토해 내며 주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무릎 위에 묻은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졌는지 저조차도 알고 싶지 않았다.
* * *
알람을 5분 간격으로 세 번씩 맞춰 놓지만 대체로 첫 번째 알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이불 위에서 비비적거리며 시간을 죽이면 몸만 무거웠다. 밤새 이루지 못한 잠에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털었다. 상의를 벗은 몸이 익숙하게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셨다. 간밤의 찬 기운이 남아 있는 거실을 둘러보다 해가 들어오는 집 안 한 귀퉁이를 눈으로 훑고는 욕실로 들어섰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채 마르지 않은 머리 그대로 드레스 룸으로 걸어가 익숙하게 오늘 입을 옷을 꺼냈다. 중요한 미팅이 있으니 타이를 선택하는 일은 신중했다.
이제 완연한 봄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에 재킷이 훌쩍 바람에 날렸다.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드는 하루는 여느 때와 같았다.
월요일 아침, 출근 후 익숙하게 사무실로 들어간 시훈이 입구를 통과하고 잠시 주춤했다. 조직 개편 후 주말 동안 자리 이동 및 재배치가 되었고, 시훈 역시 개인 집무실로 책상을 옮겼다. 정신을 어디에 놓고 다니는지 민망한 실수에 혀를 찼다. 익숙한 제 자리에는 1팀으로 발령된 팀장이 자리해 있었다.
“…….”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신동윤 대리가 시훈에게 고개를 숙이고 머무는 시선을 따라갔다.
“오랜만에 자리 바꾸니까 새로워요. 팀장님도 새로 오시구요.”
그동안 비어 있던 이수의 자리에는 새 주인의 화분이며 컬러풀한 피규어가 곳곳에 놓여 있다. 위치도 분위기도 완전히 탈바꿈됐다.
“네, 그러네요.”
사무실을 들어올 때마다 이수의 자리를 확인하는 버릇은 주인이 떠난 뒤 알았다.
“정산 OT가 2시 반이니까, 오 팀장님하고 넉넉하게 1시간 전에 로비에서 대기할까요?”
“그렇게 하죠.”
이수의 자리는 차라리 비어 있는 편이 나았다. 돌아올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으니. 멀리 2팀으로 발령된 팀장이 시훈을 발견하고 묵례를 했다. 인사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오는 동안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다.
10여 년 전 현재 부지에 신사옥을 올린 정산 그룹 본사를 시훈은 처음 방문했다. 압도적인 규모와 고가의 미술품이 설치된 로비가 인상적이었다. 정산 사옥에 도착해 방문증을 받고 미팅 룸으로 올라가는 동안 긴장이 되는지 신동윤 대리의 발끝이 산만하게 바닥을 두드렸다. 곁에 선 오준희 팀장까지 눈치를 채고 시선을 따라 내렸다.
“신 대리.”
시훈의 눈짓에 신 대리가 얼른 두 발을 붙여 섰다.
“아, 죄송합니다.”
멋쩍어하는 상대를 다독인 시훈이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외부 미팅 때면 늘 갖춰 입는 정장이 오늘따라 왜 이리 답답하게 느껴지는지 OT가 끝나면 타이부터 풀어낼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브랜드전략실 직원이 세 사람을 준비된 미팅 룸으로 안내했다.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룸에는 오후의 긴 햇살이 바닥에 너른 창을 만들어 놓았다.
“죄송하지만 실장님께서 참석하신 회의가 길어져서요. 미팅 중간에 참석하시겠다고 하세요. 브리핑은 책임님께서 진행하실 겁니다.”
“네.”
미리 준비한 자료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시훈의 핸드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액정 화면에 ‘여민준 전무’의 이름이 떠 있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는 타이밍에 거절 버튼을 누른 뒤로 부리나케 메시지가 들어왔다.
-지금 전화 못 받아?
이유를 확인할 길 없는 다급한 문자에 답문을 보내려는 사이 미팅 룸과 복도를 가른 불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어렴풋한 실루엣이 멈춰 섰다. 들어서기 전 마주친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는지 가볍게 주고받는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미팅 룸 내의 모니터를 세팅하는 직원이 고개를 빼고 밖을 확인했다.
“책임님 지금 오셨네요.”
아마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1팀과 가장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을 사람이었다. 긴장한 신 대리가 말아 쥔 주먹 안에 몇 차례 헛기침을 했다. 곧 세 사람 모두 때를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린 문으로 회색 정장에 감긴 다리가 경계를 넘었다. 모퉁이를 돌며 재킷을 여미는 손끝은 차분했다. 단정하게 매무새를 정리한 담당자는 감청색 타이를 매고 있었다. 긴 목과 귀 끝까지 올라간 턱선을 시훈의 시선이 홀린 듯 따라갔다.
공간 안에 발을 들인 이가 아래로 내린 고개를 끌어 올렸다. 여유 있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얀 바탕 위에 단정하게 그려 놓은 미려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길게 늘어뜨린 속눈썹이 들리며 두 눈이 상대를 마주했을 때 찰나에 바뀐 공기가 모든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사뿐히 내디딘 발이 소리도 없이 테이블 앞에 멈췄다.
그리고, 턱을 당겨 예의를 차린 그가 인사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단조롭고 나지막한 목소리는 분명하게 제 소속을 말한다.
“정산 그룹 브랜드전략실 IMC 1팀, 정이수 책임입니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릿한 감각이 한순간 시훈을 관통했다. 둥, 둥, 둥. 어디선가 불규칙하게 뛰는 맥박만이 물먹은 듯 먹먹한 귓전을 또렷하게 울렸다. 박동은 귓전에서 시작해 몸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뒤죽박죽 섞인 혼란을 머금은 정적 속, 누가 쥐고 있었는지 모를 펜이 데구루루 테이블을 구르며 작은 소음을 만들었다.
“…팀, 아….”
신 대리의 턱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곧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실수를 인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인사이트에 있는 구성원 대부분이 정이수를 알고 있고 정이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 현실이 됐다지만, 못 박힌 편견이 그를 제자리에 머물도록 만들었다. 정이수의 자리는 이쯤, 정이수가 오를 수 있는 위치는 저쯤이 끝이라고. 어차피 다 버릴 각오로 나온 거라면 끝까지 가 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바친 인사이트에 남은 미련은 없었다. 광고를 여전히 좋아했지만, 한계가 명확하다면 그 또한 버릴 각오가 필요했다.
부드럽게 눈을 휘어 신 대리와 오 팀장을 바라보는 정이수는 차분했다.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도 없었다. 인사이트에서 일할 때와 달리 쓸쓸함은 한 조각도 배어 있지 않았다. 오후의 햇살이 원래의 주인을 찾아든 것처럼 정이수를 향해 있었다.
“이렇게 뵈니 새롭네요.”
침착한 눈동자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그리고 시훈을 향했다. 당황으로 눈을 찡그린 신 대리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놀란 이들이 멍하게 눈만 뜨고 있는 사이 낮은 음성이 주위를 깨웠다.
“오랜만입니다.”
“…….”
“인사이트 기획 1본부 본부장 이시훈입니다.”
세밀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에 이수가 침착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갑과 을을 따지자면 이제는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대행사와 광고주로 변모한 관계는 얄궂은 신의 장난 같았다. 이를 악물고 자신을 얼마나 담금질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시훈은 어중간한 마음으로 그만두지 않았다는 이수의 말뜻을, 백주홍이 머뭇댄 이유를 그제야 이해했다.
‘방향을 좀 바꾼 것 같아. 얼마 전에 들으니까 이야기 오가는 데가 있는 모양인데… 너한테 말하기는 좀 그렇고.’
테이블 맞은편으로 서로가 명함을 주고받았다. 이어 이수가 훌쩍 고개를 들어 미팅을 주도했다.
“사적인 대화는 미팅 후에 할까요.”
의자 등받이를 당겨 앉은 이수가 눈짓으로 인사이트 편에 편히 앉기를 주문한다.
“내용은 조유진 대리가 미리 공유해 드린 자료에 나와 있지만, 직접 설명하는 편이 이해가 쉽겠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공유한 자료와 미팅 룸 한편에 설치된 모니터를 보며 정이수는 능숙하고 막힘없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새로운 회사, 새로운 직함, 새로운 자리에서 정이수는 위화감이 없었다. 다만 한 박자 늦게 미팅 내용을 메모하기 시작한 신 대리나 오 팀장, 그리고 시훈만이 생경한 상황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을 뿐이다.
“아시겠지만 B2B 기업들은 재료나 소재를 다루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무겁고 친근한 이미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업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도 목적이 있지만 젊고 유능한 핵심 인재 유치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자면 젊은 세대에 역량과 비전을 대외적으로 알려야 할 테고요. 한마디로 ‘일하고 싶은 회사’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는 게 가장 큰 목적입니다. 단발성으로 끝날 마케팅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브랜딩이 이루어져야 할 거고, 접근하는 매체 역시 꼭 ATL로 국한될 필요 없습니다. 지루하고 빤한 거 말고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해요.”
가끔 시선이 부딪쳤다. 짧았고,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실무진인 오 팀장과 신 대리의 질문이 이어지고 그에 이수는 명료하게 답을 내어 준다.
OT가 진행되는 중간, 브랜드전략실 구원주 실장이 회의를 마치고 미팅에 합류했다. 간단한 인사 후 이수의 이야기를 보충하여 현재 기업 내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 보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고, 정확한 의견 피력을 위해 결정권자인 본인이 OT까지 올 수밖에 없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회의가 마무리되고 양쪽 모두 자료를 정리하는 동안 미팅 룸 밖에서는 구원주 실장과 시훈이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머지 자료는 메일로 전달드릴게요. 메일 주소는 그대로죠?”
이수가 눈웃음을 지어 오 팀장과 신 대리 편에 물었다. 회의 내내 광고주와 대행사 사이에 감돌던 긴장이 일시에 녹아내렸다. 신 대리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그제야 편하게 숨을 쉬었다.
“네. 근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대체 언제 입사하신 거예요?”
들어올 때 심장이 발밑에 떨어지는 줄 알았다는 둥, 하마터면 팀장님이라고 부를 뻔했다는 너스레가 덧붙었다.
“얼마 안 돼요. 저도 오자마자 프로젝트 투입돼서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출근하자마자 구원주 실장이 업무를 하달해서 거의 한 달을 정신없이 보냈다. 면접 시 까다롭고 어려운 질문만 골라 하던 구 실장은 막상 일을 하고 보니 업무 외의 영역에서는 유한 사람이었다. 입사 후 구 실장이 일대일로 청한 점심 식사 자리에서였다.
‘뉴욕에서 일할 때 다 좋았는데, 내가 딱 하나 못 참았던 문제가 인종 차별이었어요. 내가 거기서 20년을 넘게 살았는데 아직도 아시아인한테는 무슨 잣대가 그렇게 까다로운지…. 그런데 피부색 같은 한국으로 들어왔더니 이번엔 학연, 지연이 말썽이네? 일만 하면 안 되나.’
학연, 지연, 혈연이라면 이수도 할 말이 없었다. 뭐 하나 가진 게 없었으니까. 구 실장이 면접 당시를 회상했다. 기존 구성원들이 대폭 물갈이되며 소위 제 사람으로 쓸 만한 사람을 뽑는 데 꽤 공을 들였노라고.
‘내가 면접에서 왜 그렇게 물었는지 이해되죠? 입사하면 문제 되지 않겠냐고, 한국은 일하는 방식이 그렇잖냐고 물었잖아요.’
그나마 가진 이력이 정산 그룹 계열사인 인사이트에서 근무한 경력 하나인데 당시 한참 예민했던 구 실장은 그마저도 인맥이라 여겼다고 했다.
‘네.’
‘대답이 마음에 들었어요. 구구절절 변명이 없어서. 그리고 요즘 같은 때 한 대행사에서 10년을 일했으면… 뭐.’
기존 정산 그룹 브랜드전략실 구성원과 달리 자신처럼 대행사 AE 출신으로 같은 길을 걸어온 이수와 대화가 통했다는 점도 채용의 이유라고 했다.
미팅 룸 밖에서 대화를 마친 구 실장이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이수는 층 로비까지 이시훈보다 앞서 걸으며 등 뒤로 꽂히는 시선을 느꼈다. 어쩐지 팔도 다리도 삐걱거리는 느낌에 조금 전 미팅을 어떻게 마쳤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제 팀의 직원과 나란히 선 이수가 인사이트 편에 고개를 숙였다.
“스케줄은 다시 한번 정리해서 공유 부탁드립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넉살 좋은 인사를 남긴 오 팀장과 신 대리가 올라탔다.
“저… 본부장님.”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고 박힌 듯 자리에 서 있는 시훈을 오 팀장이 불렀다.
“…….”
시훈이 이수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실무진에 모든 의사 진행을 미루어 놓고 브리프 내내 자리를 지킨 시훈은 회의 말미가 되어서는 초연해 보였다. 인사를 할 때 보인 당황한 낯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정이수 책임님.”
“…….”
“오늘 뵙게 돼서… 기쁘네요.”
시훈이 손을 내밀었다. 인사이트를 나오던 마지막 날에도 하지 않은 악수였다. 이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물러날 기색이 전혀 없는 시훈의 뒤로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고, 이수의 뒤에도 소속 직원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팅 룸에서의 똑 부러진 정이수는 어디 가고 요동치는 감정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입가에 맴도는 인사를 건넬 만한 용기마저 건조한 공기 중에 바스러져 사라졌다.
예의상 거절할 수 없는 악수에 이수가 시훈의 손을 맞잡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손바닥의 열기는 여전했다.
“…….”
시훈의 엄지손가락이 힘을 주어 스치듯 손등 주위를 덧그렸다. 의미를 내포한 작은 움직임에 부득이 이수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럼.”
묵례를 남긴 두 사람의 손이 각자의 바지 옆으로 떨어졌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시훈은 틈이 사라질 때까지 이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수는 하마터면 터질 뻔한 숨을 겨우 삼켰다. 남몰래 시훈과 맞잡은 손을 쥐었다 폈다. 손바닥 가득 전기가 흐르는 저릿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와… 이거 진짜, 저 귀신 본 기분이에요.”
“그러게요. 생각도 못 했는데… 이거, 기분 이상하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두 사람을 뒤로하고 시훈은 보일 듯 말 듯 엷은 웃음을 지으며 작게 머리를 털었다. 종잡을 수 없고, 쉽게 잡을 수도, 단정할 수도 없는 정이수. 당신의 물길은 이제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1층 로비에 도착한 시훈이 꺼 놓은 핸드폰을 켜자마자 밀린 전화와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발신자는 여민준 전무였다. 급히 남긴 메시지들은 대체로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전화를 했지만 상대는 도통 받지를 않았다.
잠시 후, 인사이트의 사옥에 도착할 무렵 겨우 여 전무와 전화가 연결됐다. 흥분했고, 다소 정신없어 보였다. 여 전무는 막 대표실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 프로, 지금 어디야?
“지금 회사 앞이에요. 무슨 일이에요?”
땅이 꺼질 듯 한숨 소리가 거칠었다.
-하아… 씹. 김지학하고 주현탁이 사표 냈다. 둘이 회사를 차리는지, 다른 기획으로 옮기는지…! 아무튼 그만둔대. 시발… 기획자 몇하고 제작실 CD까지 데리고. 거기다가 재계약 앞둔 광고주들 만나고 다니면서 말 맞췄나 봐. 우리하고 재계약 안 하면 단가 낮춰서 지들이 광고 만들어 준다고.
수화기 너머로 잔뜩 화가 난 여민준 전무가 욕을 내질렀다.
“올라가서 봐요.”
1층 로비에서부터 뒤숭숭한 기운이 한눈에 보였다. 김지학과 주현탁의 거취를 소리 죽여 수군대는 무리가 여기저기 한둘이 아니었다.
여민준의 집무실로 올라가니 김지학 전무와 독대 중이라고 했다. 복도를 나오자 때마침 제 집무실로 들어가던 주현탁 실장이 보란 듯이 시훈에게 조소를 날렸다.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집무실에서 주 실장은 느긋하게 상자에 물건을 담고 있었다.
“소식 빠르네. 퇴사 축하해 주러 왔어?”
허튼소리도 유분수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얼굴이 기도 안 찼다. 이삿짐 싼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시훈이 열린 문을 닫고 주 실장의 집무실로 발을 들이며 뇌까렸다.
“사람이고 광고주고, 다 빼 가면 어떡합니까.”
턱이 아릴 정도로 힘을 줘 이를 악문 시훈은 부릅뜬 눈으로 주 실장을 노려봤다. 주 실장이 손안의 펜을 성의 없이 상자에 던지고 비릿한 헛웃음을 쳤다.
“빼 가길 누가아- 결정을 내가 해? 본인들이, 고객사가 하는 거지.”
꼭지가 돌아 버릴 분노에 시훈이 눈을 지르감았다. 주 실장을 향해 한 자 한 자 짓씹는 말소리는 더없이 서늘했다.
“꼭 그렇게… 나간다 상스럽게 티를 내셔야겠어요?”
보기 좋게 뒤통수를 쳤다 해도 주 실장의 밑바닥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열패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리 훌쩍 저리 훌쩍 뛰는 성질머리가 드러나는 건 순간이었다.
“상스러? 나이도 어린 놈이 말 막 하지? 하… 씹. 너나 정이수나 아주 그냥….”
“뭐?”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시훈이 이맛살을 구겼다. 주 실장이 코웃음을 치며 눈을 치떴다.
“정이수 봐. 네가 정이수 건드린 건지 아니면 그 자식이 너한테 엉덩이를 흔들었는지 내 알 바는 아닌데, 정이수한테 너한테 당했다고 한마디만 하라니까 죽어도 입을 안 열어. 기회를 준대도… 내, 참. 다 내팽개치고 회사는 뛰쳐나가고 말이야. 어디서 뭘 하는지… 참, 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주 실장의 나불대는 입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회장 아들이라고 여기가 다 네 맘대로 될 거 같지? 너도 말이야, 적당히 고개 숙이고 처신 잘했으면… 지금 같은 회사 꼬라지는 안 됐을 거 아니야. 너도 정이수처럼 사표 쓸래? 고객사 영업 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게 무슨….”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이성을 간신히 붙든 시훈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그따위로 협박해서… 뉴욕 보내 주겠다고 했어요?”
“지 복 지가 찼지.”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시훈의 버석하게 마른 손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수가 느꼈을 모멸감은 짐작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씨발. 짓이긴 욕이 거칠게 떨어졌다. 의기양양한 주 실장이 어깨를 으스댔다.
“대행사도 못 들어가, 어디서 노는 모양인데 정이수한테 연락 오면 전해 줘. 내가 작은 기획사라도 하나 소개해 준다고.”
분노마저 싸늘하게 식어 버린 시훈이 긴 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피떡이 될 때까지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금니 안쪽으로 혀를 굴린 시훈이 자세를 바로 해 주 실장을 마주 보았다. 힘주어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은 말들이 주 실장 앞에 날을 세웠다.
“매년 똑같은 광고 같아도 왜 그만한 돈 주고 만드는지 이해 못 하시죠? 그러니까 단가 후려쳐서 업계 사람들 쪽팔리게 만들고, 책임도 못 질 거 사람들 사표 쓰게 만들구요.”
“뭐어? 쪽이 팔려?”
주 실장은 이게 문제였다. 뭐든 안다고 생각해서 모든 계획이 맞아떨어질 거라 과신하는 면 말이다. 그러니 상대가 반발하거나 계획이 틀어지면 쉽게 흥분을 했다.
“좋은 광고는, 좋은 광고주가 만들어요. 알 만한 분들로 잘 골라서 데리고 가셨을 거로 생각할게요. 다행이네요. 골칫거리를 을이 솎아 낼 수는 없잖아요.”
단가 후려쳐서 브랜드 캠페인 만들겠다고 결정한 광고주라면 안 봐도 훤했다. 서로에게 득이 될 수 없는 협력 관계가 분명했다. 시훈은 이 점이 두렵거나 걱정되지는 않았다. 지금에야말로 김지학과 주현탁이 부르짖던 당장의 영업 이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한 과감한 결정이 필요했다.
시훈이 고개를 돌려 주 실장의 집무실을 천천히 훑었다.
“그리고 아시죠? 1년 내 동종업계 이직 금지.”
“…야… 그걸 누가….”
“누구는 예외 있어요? 귀에 걸리고 코에 걸리면 얼마나 좆같은지 한번 보세요.”
주 실장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사납게 눈을 부라린 주 실장이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지금 말이면 다야? 너…! 내가 여기 어떻게 굴러가나 지켜볼 거야…!”
걸음을 옮겨 집무 책상 앞으로 바투 선 시훈이 고개를 기울이며 나지막이 입을 뗐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네….”
“…….”
“인사이트나 제 걱정은 하지 마시구요.”
시훈이 품 안에서 꺼낸 명함 한 장을 주 실장의 집무 책상 위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회사 옮기시면 광고주 한번 잘 모셔 보세요.”
명함을 내려 본 낯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주 실장은 입만 뻐끔댔다.
[정산 그룹
브랜드전략실 IMC 1팀 정이수 책임]
고고하게 턱을 올려 내리깐 눈이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주현탁 실장을 응시했다.
“사람을 엿 먹이고 싶으면 좀 멀리 보세요. 눈앞에서 알짱대지 마시고.”
뭐든 시작은 쉽다. 마무리하는 과정이야말로 사람의 진가를 보여 주는 법이다. 살뜰하게 챙기지 못한 제 남은 흔적이 흉이 될까, 혹시 남은 이들에게 누가 될까 퇴사 직전까지 고민했을 한 사람을 생각하면 시훈의 억장이 무너졌다.
서늘하게 힘주어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에 시훈의 진심과 결기가 실렸다.
“법무팀 동원해서, 끝까지 가자고 할 겁니다.”
시훈이 등을 지고 나오는 주 실장의 집무실에는 이제 정적만이 맴돌았다.
아무도 없는 긴 복도를 걷던 시훈이 울컥 치미는 감정을 참을 수 없어 비상계단을 뛰쳐 올라갔다. 옥상 문을 벌컥 열고 난간에 가슴을 걸쳤다. 거친 숨이 한 번에 쏟아졌다.
“헉….”
그러니까, 정이수 때문에 아무래도 편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 *
회의가 소집되고 현 상황에 관한 설왕설래가 며칠간 오갔다. 제 라인이었지만 미처 두 사람의 돌출 행동을 감지 못 한 문동현 대표는 말을 아꼈고, 이하 다른 임원들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객사도 아닌 광고 대행사 내에서 도떼기시장인 양 가격 흥정을 논한 작태부터가 문제였다. 쉬쉬해도 한동안 업계 내에서 충분히 쓴소리가 나올 법했다. 당사자가 인사이트 임원 출신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때를 놓치지 않은 여민준은 시훈과 함께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회의는 무거웠다. 단가 후려치기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한목소리로 공감한 사안은 직원 빼내기 문제였다. 일괄적으로 제출한 사표에 업무는 제동이 걸렸고, 사내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산만했다. 견고한 조직으로 보인 인사이트에 미세한 균열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해 향후 인사이트 내 인력 유출 및 관리에 관한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는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아… 쌔하다 했더니만 결국 이렇게 터지네.”
“…….”
목소리를 높인 여민준 역시 사태를 진화하느라 고됐는지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시훈 역시 사내외로 돌아가는 분위기나 본부 내의 어지러운 상황을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간신히 오늘 회의로 방향은 잡았지만, 아직 해결 못 한 일들이 첩첩산중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시훈의 표정을 살핀 여 전무가 김지학, 주현탁 문제와 더불어 내내 인사이트를 들썩이게 만든 뉴스를 슬쩍 던져 놓았다.
“…들었다.”
“…….”
“정산 브랜드전략실에 가 있다며, 정 팀장.”
후우- 여민준이 복잡한 기분을 달랬다. 듣자 하니 블라인드 채용에 면접도 엄청나게 까다로웠다는데 그걸 뚫어 버리네. 하… 참. 놀랍고 당황한 마음과 별개로 묘한 씁쓸함이 맴돌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아쉬움…? 이미 지나서 소용도 없을 후회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네.”
지나치게 단답인 시훈을 올려 봤다. 회의실에서 나온 순간부터 녀석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너, 괜찮아?”
회사 때문인가, 정이수 때문인가. 어느 쪽도 편할 리 없었다. 가라앉은 시훈은 어쩐지 평소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일이 터진 시점부터 제대로 잠을 잤는지도 모르겠다.
“몸을 좀 아껴 가면서…”
시훈이 운을 떼는 여 전무의 말을 끊어 냈다.
“죄송한데 먼저 내려갈게요.”
집무실로 내려온 시훈은 다른 생각 없이 밀려 있는 일을 처리했다. 확인하고 승인하고 회의하고…. 해가 기울어 이윽고 밤이 될 때까지 하루가 그렇게 흘렀다.
늦은 밤, 집무실 창 앞에 선 시훈이 타이를 풀어 집무 책상 위로 던져 놓았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늘리며 어두운 시내를 내려 본다. 도시는 외롭다. 아니, 그저 제 생각일 뿐이다. 이수가 인사이트를 그만두기 전에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괴롭고 아플지언정 고독이 폐부에 와닿지는 않았다. 유리창에 비친 집무실을 응시한 시훈은 씁쓸함을 삼켰다. 적막한 공간에는 이제 제 자리 하나뿐이었다.
시훈은 어느새 환멸이 이는 이곳에서 무의식중에 이수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연결되는 통로와 사무실로 이어지는 복도, 문을 열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보이던 이수의 자리, 혹은 이마를 대고 잠시 쉬었을 층계참. 멋없고 무드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칙칙한 회색의 공간에서 단 하나 색이 있다면 그건 정이수였다.
자정이 멀지 않은 시각, 시훈은 책상 위를 밝힌 전등을 끄고 며칠 만에 귀갓길을 재촉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깨끗한 옷을 챙길 필요가 있었다.
“책임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조 대리의 밝은 인사에 이수가 고개 숙여 화답했다. 이른 퇴근이었다. 해가 길어진 계절이었고 봄바람이 살랑거려 걷기 좋은 저녁이었다. 익숙하게 지하철역을 향한 발걸음이 충동적으로 역을 지났다. 퇴근 시간에 사람이 쏟아진 거리를 지나는 이수의 걸음은 어느새 대형 서점 앞에 다다라 있었다. 떨어지는 꽃잎에도 웃음을 터트릴 고등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엄마는 고사리 같은 손을 붙잡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광장에서 이수는 서점에 걸린 대형 간판을 올려 보았다. 봄이구나.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간 기억이 익숙한 시 구절 하나를 저절로 떠올렸다.
“…….”
작년 가을과 이번 봄 사이의 겨울은 어느 때보다 혹독했다. 내 마음에는 봄이 왔나…. 한참 동안 자리에 머문 이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H 미술관에서 표를 끊었다. 폐관까지 시간이 빠듯했지만 전 층을 둘러볼 생각이 아니라면 메인 전시관은 관람이 가능해 보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벽을 가득 채운 사진들이 걸린 전시회장이 보였다. 관람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창문 없이 조도가 낮은 전시회장 내부는 시공간을 초월한 다른 세계 같았다. 눈바람이 불어도, 백 년 정도 시간이 흐른대도 알아챌 수 없을 것 같은 적막이었다. 고요한 공간 속 이수가 발을 디딜 때마다 구둣발 소리가 텅 빈 전시회장을 조용히 울렸다.
쉬는 동안 전시회장을 자주 찾았다. 고요한 공간 속을 거닐며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복잡한 생각을 그나마 정리할 수 있었다.
해가 떠 있을 때 들어갔다가 해가 질 때쯤 거리를 나오면 같은 하늘인데도 생경하게 느껴져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한 번도 쉬어 본 적 없고, 그래야겠다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모든 것이 어색했다.
사랑 역시 그랬을까. 주는 사랑만 알고 받는 사랑은 알지 못해 상대의 마음을 더듬어 보지 못했다. 직장이라는 좁은 우물 안에서 몸을 사리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갑옷처럼 두른 정장이나 직함 아래 가면을 쓴 얼굴이 차라리 편했다. 그런데 아무 소속도 없는 정이수로 살아가는 동안 이수는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매는 심정이었다.
“…….”
자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발소리를 인지한 건 출구를 앞둔 마지막 코너에서였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전시장을 거닐던 이수의 걸음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흑백 사진 앞에 멈춰 섰다. 자신을 따라 모퉁이를 돌아 나온 발소리 역시 같았다. 멈춰 선 이수는 마치 시간과 공간이 박제된 사진 속을 거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뒤를 돌아보지 않은 이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평이하게 전시회장을 빠져나와 미술관 앞 광장을 가로질렀다. 어둠이 내려앉은 번화가를 지나는 동안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씩 빛을 발했다.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들, 열기를 내뿜는 버스와 바쁘게 퇴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로 이수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길을 걸었다. 횡단보도를 몇 차례 지났고, 저녁 장사를 시작하는 가게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를 뒤로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초등학교를 지나 고궁으로 연결되는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택가와 인접한 한가한 골목이 이어졌다.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그곳에서 이수의 걸음이 차차 느려졌다. 이윽고 가만히 두 발을 멈춘 그대로 그림자처럼 제 뒤를 밟는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 따라와요. 할 말 있으면… 빨리하구요.”
열 걸음 남짓한 거리를 두고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이내 바닥으로 떨어진 시선을 들어 무심한 등을 바라보는 시훈이 예사롭게 사실을 고했다.
“주현탁 실장이 회사를 그만뒀어요.”
“…….”
이수는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시훈이 전말을 알고 있으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입술을 짓이긴 이수가 하늘을 올려 보며 짧은 숨을 내쉬었다. 언젠간 알더라도 스쳐 지나간 과거 일로 치부되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나면 그럴 수 있을 테니까.
“나한테… 왜 말 안 했습니까.”
이수는 떨리는 눈을 가만히 내렸다. 동요 없는 차분한 목소리가 조용한 골목을 지나 시훈에게 다다랐다.
“웃기잖아요, 애 같고. 일러바치는 거 같잖아. 그런 거 하나 스스로 해결을 못 해서….”
“혼자서 해결할 만한 일이 아니었잖아요.”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묻어난 탄식과 같은 책망이었다. 뒤돌아 서 있던 이수가 옆으로 몸을 돌리자 실루엣이 도드라졌다. 가볍게 치부될 리 없건만 애써 그렇게 들어 달라 간청하듯 이수의 목소리는 봄바람 같은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우리….”
머뭇대는 이수의 입매가 옅은 호선을 그렸다.
“…참 이상해요. 나는 소파 승진 같은 소문에 치를 떨고, 이시훈 씨도 본인 신분이나 위치 이용해서 대가 주는 사람 아니잖아. 근데 우리가 서로에게 저지른 짓이 제일 모순됐어요.”
골목길 바닥 위로 자잘하게 갈린 알갱이가 구둣발을 스치자 미세한 소음을 내었다. 애달프게 웃는 이수가 바닥 그 어딘가를 바라보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뭐 하나 고백할까요.”
담벼락 아래 깨진 화분에 핀 들꽃들이 밤중에도 선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꽃을 내려 본 이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내가 얼마나 구차하고 찌질한 짝사랑을 했는지, 내가 얼마나 불행한 가정사를 가졌는지…. 내 밑바닥을 전부 본 사람. 그거 당신, 이시훈 씨였어요.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요. 숨을 수 있다면 그랬을 거예요. 근데… 그것보다 내가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아랫입술을 잠시 깨문 입에서 툭 남겨진 말이 떨어졌다.
“그런 나에게 가장 친절했던 사람이, …당신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중심을 잃고 이성을 잃었다. 받아 본 적 없는 사랑을 밀어내고 상대의 진심을 난도질해 가며 제 상처를 기워 냈다.
지금의 이수는 큰 파고를 넘긴 잔잔한 바다 같았다.
“그러니까, 주 실장 일로 나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거든요.”
말을 마친 이수가 시선을 내렸다. 담담해 보여도 가느다란 떨림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가장 낮고 어두운 내면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있죠, 나는 세상이 나에게 얼마나 엄격한지 알고 있어요. 가질 수 없고,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너무 많아서 체념에 익숙하고 실패가 두려워요. 내가 가진 감정들이나… 이시훈 씨도 나에게 그런 존재예요.”
“…….”
한 번도 많은 선택지를 가져 본 적 없었다. 열심히 달려도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른 사람처럼 절박함에 매일을 버티며 살아왔다. 행복한 기억을 조금씩 나누어 남은 불행을 위로할 여유조차 없었다. 크기를 키워 온 제 안의 결핍이 진심 앞에 자꾸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이수가 목구멍을 꽉 막고 있는 열감을 힘겹게 넘기며 어렵사리 입을 뗐다.
“난… 불안을 안고, 살고 싶지 않아요.”
담을 따라 뭉근한 바람이 밀려왔다. 이제 고우재를 핑계 삼아 모진 말로 시훈을 끊어 내려는 머저리 같은 연기는 소용없었다. 나는 포기가 빠른 겁쟁이라고 고하고 나니 후련했다.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진솔하지만 애처로운 고백이 이어졌다.
“설마… 아직도 내가 좋아요?”
코웃음과 함께 실려 나온 물음은 다시 체념이었다. 제 주위로 뾰족하게 둘러놓은 담이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뻔뻔하게 이타심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어둠 속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있는 시훈은 미동조차 없다. 두 발을 딛고 단 한 번 흔들림도 멈춤도 없이 이수의 말을 고스란히 다 듣고 난 뒤였다. 그것이 대답이리라. 더 가까워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됐다. 이쯤에서 이수 자신이 거리를 벌리는 편이 옳았다.
일하며 서로 마주치게 되더라도 그런대로 살아갈 수는 있을 테다. 시간은 모든 걸 잊게 하니까. 어설픈 미소가 걷히고 이수가 등을 돌렸을 때였다.
“언제쯤,”
낮고 다정한 음성이 등을 통과해 심장을 두드렸다.
“나한테 와 줄래요.”
“…….”
숨이 멎었다. 어느새 멀리서 들려오던 주변의 소음도 코끝을 지나는 봄밤의 공기도 일시에 사라졌다. 이수의 뒤로 새까만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나도 고백 하나 할까요.”
그윽하고 평온한 말소리가 비워 낸 마음에 슬며시 찾아들었다.
“내가… 정이수 씨 당신 마음에 길을 만들었어요.”
“…….”
“당신이 문을 열고 걸어오면 길이 될 테고, 그렇지 않으면 풀이 자라 못쓰겠지만, 나는 기다릴 거예요. 내가 잡초 하나 자라지 못하게, 그 길이 없어지지 않게 주변에 있을게요.”
이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에 비친 골목 끝 어딘가가 희뿌옇게 보였다.
가을쯤, 함께 관람한 전시회에서 서로의 위치를 더듬어야 했던 아득함, 눈을 감으면 드넓은 암흑 속 매일 밤 떠오르던 단 한 사람. 저를 숨 막히게 한 까마득한 어둠이… 아, 사실은 우주였구나. 그래서 잴 수도, 감히 크기를 가늠할 수도 없는 그곳에서 오늘처럼 길을 잃었나 보다.
시훈의 진심이 담담히 전해졌다.
“길을 따라오기만 해요. 그러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내가 잘 알아챌게요.”
아침에 일어나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을 썼다. 이수의 곁에 어울리려면 그렇게 해야 했다. 마주 보게 될지 아니면 등을 돌릴지 알 수는 없지만 만나러 오는 길이 두렵지 않았다.
어떤 답을 주더라도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였다. 방향을 헤매고 있는 이수에게 당신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노라, 내가 그 이정표가 되겠노라고.
형편없이 떨리는 입술을 몇 번이나 고쳐 문 이수가 간신히 입을 뗐다.
“…이시훈 본부장님.”
비겁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수가 시훈을 끊어 내려 호칭을 힘주어 말했다. 이미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에 눈물이 아롱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와요, 나한테. 내가 반드시 기다릴 테니까.”
모든 고백에 시훈이 종지부를 찍었다. 곧게 뻗은 마음이 한 사람을 향했다.
“…….”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뿐이었다.
어둑한 골목길은 고요하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처연한 뒷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안아 주고 싶고 달래 주고 싶지만 시훈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동안 당신의 행동이 잘못되거나 섣부르지 않았다고, 당신의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는 격려와 확신을 주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수가 떠난 골목에서 시훈은 그제야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뿜은 담배 연기가 아스라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무심코 올려 본 하늘에는 어느 집 담장에서 넘어왔는지 모를 나뭇가지 끝에 이제 막 잎을 틔운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옅은 미소가 배다 이내 사라진다.
“하….”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었다. 기다림을 견디는 이유는 하나였다.
정이수를 사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