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Double-blind
허리 높이의 식탁 위로 엉덩이를 걸쳐 앉은 이수가 몸을 뉘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 단정한 이마가 드러났다. 시훈의 손이 지나는 곳마다 셔츠 단추가 톡톡 풀어졌다. 벌어지는 그 틈에 시훈이 입을 맞춰 따라갔다. 명치 아래로 드러난 얄팍한 배 위에 혀를 세우자 가쁜 호흡이 터졌다. 허리 아래로 공간이 생겼다.
그 틈으로 손을 넣어 버클이 풀린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 내렸다. 곧게 발기한 정이수의 성기 끝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기둥을 가볍게 잡고 프리컴이 방울 맺힌 귀두 끝을 시훈은 망설임 없이 입으로 빨았다. 뜨겁고 축축한 입안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가벼운 전희처럼 쪽 입이 떨어졌다.
“하… 아….”
이수의 다리 사이에서 단추를 풀어 헤친 시훈이 탄탄한 복근을 드러내고 위에서 아래로 이수를 내려 봤다. 그동안 몸을 섞을 때마다 외로 돌린 고개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이수의 목울대가 억누른 긴장을 말해 주었다. 천천히 올라간 시선 끝에 전과 달리 끝이 발갛게 물든 눈이 시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함께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정이수가.
달아오른 뺨을 시작으로 시훈의 손이 목을 지났다. 믿기지 않는 눈앞의 실체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손짓은 다정하게 이수의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얽히고설킨 미로를 더듬는 손은 다시금 길을 그린다. 모퉁이도 막다른 길도 없이 반드시 서로가 만날 수밖에 없는 길을. 온기와 온기가 만나는 지금을 빠짐없이 느끼는 시훈의 호흡이 거칠었다. 작게 미간을 찌푸린 시훈이 너른 등을 내려 이수의 가슴 위로 얼굴을 묻었다.
“…아… 흐…!”
혀로 작은 돌기를 굴리자 미약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입술을 모아 깊게 빨아들이고 물컹한 혀를 핥아 올리는 동안 간지럽고 오싹한 감각이 밀려들어 왔다. 뾰족하게 세운 혀가 가슴을 간지럽히는 동안 시훈의 머리카락 사이로 이수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이수는 애가 타 가슴을 들썩였다.
“하아… 아… 으….”
따가울 정도로 유두를 빨아낸 입술이 점점이 가슴 언저리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는 동안 시훈의 손이 다리 사이로 옮겨 갔다. 발에 대롱대롱 걸린 속옷과 양말을 모조리 벗긴 시훈은 이수의 발목을 테이블 위에 완전히 올려놓았다. 전신이 테이블 위로 올라간 이수의 무릎 뒤를 잡아 누르자 밝은 불빛 아래 프리컴으로 질척하게 젖은 성기와 구멍이 드러났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츠리자 무릎을 움켜쥔 시훈이 가만히 사이를 벌렸다. 서늘한 공기 중에 드러난 구멍이 멋대로 벌름거렸다. 제 신체 일부임에도 마음대로 제어되지 않았다. 애써 힘을 빼 보려고 해도 엉덩이가 움찔움찔 떨리기만 할 뿐 하등 소용없는 짓이었다.
“…보지 말아요….”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구멍의 주름을 훑던 시훈이 흘깃 이수를 올려 봤다. 볼을 붉힌 이수가 눈동자를 굴려 부끄러운 안색을 감추자 시훈이 들리지 않을 욕을 짓씹었다. 곧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안 넣을 테니까 이대로 있어요.”
시훈이 제 입속에 손가락 두 개를 넣었다 뺐다. 그는 회음부를 따라 미끄러트린 손가락을 넣을 듯 말 듯 애를 태웠다. 한동안 성기가 삽입되지 않은 구멍은 손가락 한 마디만으로도 빡빡했다. 천천히 마디 끝만 드나들기를 몇 번, 곧 시훈이 벨트가 풀린 바지에서 빠듯하게 올라붙은 제 성기를 꺼냈다. 동시에 이수의 성기를 그러쥐었다.
“…으흐….”
이수의 엉덩이 골 사이에 자리 잡은 시훈의 성기 역시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미끄러졌다. 귀두가 구멍 사이를 지났다. 느껴 본 적 없는 이상한 감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배 속이 울렁거렸다. 간지러운 감각이 좋기도, 한편으로는 짜증스럽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몸을 섞은 건 오랜만이었다. 유진우가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시훈은 섹스를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밥을 먹고, 전시회를 가고, 길을 걷고, 커피를 마시는 일상을 요했을 뿐이었다. 삽입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잔뜩 이맛살을 구긴 시훈은 뱉은 말처럼 당장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수가 입술을 짓씹고 허리를 비틀었다.
“가만히 있어.”
“왜….”
하아…. 구멍과 회음부에 굵은 살덩이를 비비며 시훈이 더운 숨과 함께 냉정한 투로 속삭였다.
“…다칠까 봐 그래.”
힘이 들어간 턱 끝을 시훈의 손이 다정하게 훑고 지났다. 마음 같아서는 뿌리 끝까지 성기를 넣고 정이수의 따뜻한 안을 휘젓고 싶었다. 마구잡이로 허리를 털고 싶었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밤새 이수가 제 것을 품게 하고 싶었다.
유진우가 떠난 그날 이후, 얼마나 참았는지 모른다. 문득 눈이 마주칠 때마다, 셔츠를 입은 단정한 뒷목을 드러내고 제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웃을 때마다 불쑥 솟는 욕정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애써 무감하게 포장한 얼굴을 감추며 그간 욕구를 눌러야 했을 시훈도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키스만으로 밤새 수음했다는 사실을 정이수가 알 리 없다. 제가 사 준 니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작고 동그란 유두를 빨고 싶었다는 사실도, 길게 뻗은 다리를 감싼 바지를 당장에 벗겨 차 안에서 몰아붙이고 싶었다는 사실도, 걷는 내내 휘적휘적 앞뒤로 흔들리던 손을 잡고 싶었다는 사실도, 식사 내내 같잖은 이성을 붙들어 매느라 말이 없었다는 사실도 정이수가 알 리 없었다.
“흐으… 응….”
넣지 않고 구멍만 스칠 뿐인 시훈의 성기에 이토록 안달 낼 줄 몰랐다. 배꼽 아래 닿지 않는 그곳이 간지러워 이수가 잡을 곳 없는 테이블 위로 손톱을 세웠다.
시훈이 밀리지 않도록 이수의 골반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시훈의 성기에서 흐른 프리컴이 빠끔거리는 이수의 구멍 사이를 적셨다. 번들거리는 귀두가 파고들듯 입구 주변을 맴돌고 기둥이 비껴가며 문질러졌다.
“후우….”
이수는 집 바닥에서 홀로 한 수음을 저절로 떠올렸다. 상상만으로 도저히 채워지지 않던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이수는 시훈을 올려 보았다. 반쯤 눈이 감긴 이수의 몸이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흔들렸다. 쿵쿵 치받는 힘에 데구루루 떨어진 식기가 바닥을 굴렀다. 이수가 사 온 음식들이 머리맡에서 흩어졌다.
시훈이 하반신을 갖다 붙이며 쥐고 있는 이수의 성기를 쭉쭉 쓸어 올려 자극을 줬다. 짜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찌르르 머리를 울렸다. 입술을 깨물었다. 신음을 참아 보려는 노력이 부질없었다.
“하… 아으… 흣….”
들쑤셔지지 않은 구멍이 시훈의 물건을 찾아 허리를 흔들었다. 서툴지만 유연하고 낭창하게 움직이는 몸은 야살스러웠다. 시훈은 힘줄이 부득 서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줘 빠르게 이수의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이수가 벌린 다리 사이로 시훈의 손목을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붙들었다. 그 작은 행동이 시훈에게 더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나… 나올… 것……!”
달뜬 얼굴이었다. 이수가 드문드문 말을 토했다. 발등을 둥글게 말아 참아 보려 해도 사정 전 머리끝까지 치닫는 쾌감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수의 눈이 질끈 감겼다. 허리가 크게 휘었다. 쏟아지는 흥분을 삼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시훈의 손에 의해 사정한 정액이 배 위로 흩뿌려졌다.
“…아…! 아… 읏…!”
여운을 매단 얼굴 위로 올라온 시훈의 손이 이마를 타고 내려와 뺨을 감쌌다. 벌린 아랫입술을 가만히 누르자 이수의 혀가 딸려 나왔다. 호흡마저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채 감겨 오는 혀는 뜨거웠다.
여태껏 이수의 매끈한 구멍 사이를 비비던 시훈의 성기도 한계에 달했다. 제 물건을 잡고 손을 털었다. 탈력감에 늘어진 이수의 숨소리마저 자극적이었다. 동그랗고 예쁜 둔부를 잡아 벌어진 구멍 사이를 굽어본 시훈은 사정이 가까워지자 제 귀두 끝을 빠금 벌린 구멍에 맞췄다. 꽉 쥐고 허리를 밀어붙였다.
“읏…!”
벌어지지 않은 구멍이 간신히 정액을 쏘는 끝과 맞붙은 채였다. 뜨거운 정액이 덜컥 쏟아지는 순간 시훈의 요도 끝을 머금고 싶어 안달인 양 엉덩이에 잘게 경련이 일었다. 들어가지 못한 정액이 골을 타고 바닥에 뚝뚝 흘렀다. 엉겨 붙은 정액에 미끄러진 시훈의 성기는 여전히 단단했다.
“하아… 하….”
가쁜 숨소리가, 서로를 향한 눈빛과 작은 몸짓이 정염을 일으켰다. 짙은 어둠 속 서로를 더듬어 가는 길이 오늘만큼은 어렵지 않았다. 바짝바짝 애가 탄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불씨가 방향을 알렸다.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어깨를 내린 시훈이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이수를 일으켜 앉혔다. 이수는 뒤로 한 손을 짚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혀를 빨았다. 그리고 시훈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서로의 옷을 벗겨 내는 동안 입술은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욕실까지 가는 길목에 두 사람의 셔츠와 바지가 널브러졌다.
이수가 욕실 벽에 등을 대고 섰다. 시훈이 이수의 왼쪽 다리를 끌어 올려 허리에 감았다. 손가락은 거품이 묻은 허벅지를 지나 봉긋한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으….”
구멍 안으로 들어온 시훈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안을 쑤셨다. 이수가 어깨에 묻은 이마를 비볐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하염없이 몸을 적셨다. 욕실을 가득 메운 수증기만큼 열락이 피어올랐다. 시훈은 가볍게 귀를 빨고 입술을 관자놀이에 붙였다. 이윽고 손가락이 빠진 자리에 뭉툭한 귀두 끝이 닿았다. 천천히 삽입된 성기가 빡빡한 내부를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자 낮은 신음이 터졌다.
“하아… 읏….”
끝까지 들어차는 감각에 바닥을 지탱하던 발뒤꿈치가 들렸다. 중심을 잃을까 걱정할 틈도 없이 감고 있는 허벅지를 단단히 틀어쥔 시훈이 가볍게 허리를 움직였다. 고개를 모로 기울여 이수의 입술 사이로 혀를 넣었다. 뜨거운 입술은 여러 번 각도를 비틀어 이수의 호흡을 앗아 가기도 제 호흡을 불어 넣기도 했다.
뿌옇게 수증기가 서린 욕실에서는 모든 것이 희미했다. 비틀어진 관계도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도 그랬다. 다만 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수는 피하지 않고 남자를 응시했다. 이마를 마주한 아래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거리를 두고 시훈의 눈동자에 맺힌 제 얼굴이 보였다.
“…흑, 아… 윽….”
천천히 입구까지 빠져나간 귀두를 다시 안으로 넣을 때마다 그에 맞춰 이수가 허리를 움직였다. 시훈의 호흡이 뺨으로 쏟아졌다.
“하아….”
시훈이 바닥에 딛고 있는 나머지 다리를 단숨에 들어 올렸다. 공중에 붕 뜨게 된 몸이 벽과 시훈의 사이에 밀착됐다. 허리를 감아 발목을 교차해 걸자 굵은 성기가 깊숙이 삽입됐다.
“아…!”
파르르 몸이 떨렸다. 음습하고 습윤한 곳을 스치는 쾌감이 머리를 쭈뼛 서게 만들었다. 시훈과 몸을 섞지 않은 지난날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정도로 쩍 달라붙은 내벽이 게걸스럽게 삽입한 성기를 빨아 당겼다. 곧게 발기한 이수의 성기가 시훈의 복근에 쓸렸다. 손을 뻗어 만질 수 없는 아쉬움과 별개로 시훈의 성기가 찔러 오는 족족 이수의 내벽이 꿈틀대며 반응했다.
젖은 머리와 눈이며 뺨에까지 시훈이 입술을 묻고 비볐다.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린 물방울을 모두 핥고 나면 달아오른 귓불을 빨았다. 이시훈은 귓가에 소리 없는 밀어를 끊임없이 속삭였다.
이수는 엉덩이가 패도록 성기가 꿰뚫은 구멍을 조였다.
“하으… 윽… 읏….”
느리지만 분명하게 같은 곳을 찧어 올리는 시훈의 몸짓은 다정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거셌다. 이수도 그게 좋았다. 철썩철썩 사타구니가 맞붙는 물기 어린 소리가 욕실 안을 울렸다.
“오늘… 나한테 왜 왔어요, 왜….”
시훈이 쳐올리는 움직임에 맞춰 벽에 쑥 밀려 올라간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쾌감에 숨을 삼키는 이수를 보며 시훈은 집요하게 물었다.
“응? 대답해 봐요, 왜….”
어르고 달래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다시 한번 쾅! 위로 찧어 올리자 이번에는 참은 신음이 팍 터져 나왔다.
“…아흑!”
재촉해 봐도 굳게 다문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기묘한 희망과 절망이 시소처럼 시훈을 저울질했다. 상대가 내리면 끝나 버릴 놀이는 얄궂기만 했다. 단 한 마디라도 듣고 싶었다. 제게 의지해 매달린 이수를 독촉하는 시훈의 물음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말해요.”
아랫입술에 이를 박은 이수를 내려 봤다. 절박함이 초조하게 시훈의 머리를 달궜다. 눈가가 불그스름한 이수의 눈동자를 따라가며 느릿하게 뺀 성기를 쳐올렸다.
“…읏!”
안쪽에 삽입한 성기의 모양대로 길이 난 착각이 일었다. 아랫배가 훅 들어가며 허리를 죄고 있던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렸다. 허벅지와 둔부를 단단히 받친 시훈 역시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은 쾌감에 욕심껏 들어갈 곳도 없는 이수를 밀어붙였다.
“흐… 으…!”
그 순간 이수의 젖은 속눈썹이 들리며 툭. 아롱진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수가 목에 감고 있는 손을 뻗어 젖어 흐트러진 시훈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잘게 떨리는 엄지손가락이 반듯한 이마를 지나 코, 그리고 인중과 입술에 닿았다. 다물린 입술이 열리며 이수의 손가락을 훑어 냈다. 쪽. 빨아낸 손가락을 턱으로 떨어트린 이수가 가만히 시훈을 응시했다.
살짝 들린 턱 위의 붉은 입술이 조심히 열리며 다가왔다. 시훈의 아랫입술을 머금고 뒤로 무른 입술은 다시금 부드럽게 입속을 침범했다. 몽글몽글 명치끝에서 기포가 되어 올라오는 감정은 정이수 때문일 것이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정이수가 호흡을 앗아 갔다. 이수를 다그친 시훈의 물음은 답 없이 순식간에 휩쓸려 버렸다.
긴 입맞춤을 끝낸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거칠게 추삽질하는 몸이 한 치의 틈 없이 감겼다. 시훈은 잔뜩 힘이 들어간 허벅지를 단단히 끌어안고, 성기에 뚫린 이수의 몸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몸부림쳤다. 딱딱한 벽이 아닌 시훈의 어깨에 이마와 뺨을 비볐다.
“하… 읏! 아… 윽…! 아…!”
참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수의 성기가 정액을 쏟아 냈다. 허벅지를 잔뜩 조이기 무섭게 틈을 비집고 들어온 시훈이 크게 몸을 쳐올렸다.
“윽…!”
뜨거운 정액이 몸 안 깊숙이 쏟아졌다. 상체를 살짝 떼어 내자 여전히 꼿꼿한 성기가 빠지며 바닥에 후드득 정액이 떨어졌다. 간신히 바닥에 내린 다리는 힘이 풀려 제대로 서지 못했다. 시훈이 이수를 부축했다. 세면대에 엉덩이를 기댄 이수의 몸 위로 수건을 둘러 주었다.
“괜찮아요?”
이수는 대답 대신 시훈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 끝에서 눈물처럼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이수는 몇 번이나 끊임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고통의 싹이 솟았다. 저를 향한 이시훈의 눈빛을, 행동을 자양분 삼아 이수의 가슴속에 어느새 무성한 잎을 드리우고 있었다. 두 뺨을 감싼 손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비자 정수리 위로 시훈이 입술을 묻었다.
발 한 발자국 딛지 않고 침실로 이동한 이수는 침대에 몸을 뉘자마자 시훈에게 손을 뻗었다. 시훈이 몸을 겹쳤다. 이수는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읏….”
시훈이 제 안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몸도 마음도 이수조차 몰랐던 공간에 발을 들인 것이다. 누구의 발길도 닿은 적 없는 그곳은 끝도 없이 까마득하여 두렵고 낯설기만 했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감정들이 이수를 괴롭게 만들었다. 어쩌면, 만약에, 혹시. 하는 가정들이 내내 머리를 맴돌았다. 이시훈이 그러도록 만들었다. 밀어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수는 이를 악물고 시훈을 받아들였다.
뒤돌아 누운 이수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파도처럼 덮쳐 오는 시훈의 가슴 아래 이수의 몸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가슴과 등을 틈도 없이 맞붙인 상태로 시훈이 허리를 쳐올렸다. 숨 막힐 듯 갇혀 있는 뜨거운 온기가, 숨길 수 없는 시훈의 호흡이 귓전에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지금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겁이 나고 무서웠다.
“흡…!”
허리를 틀어 보자 단박에 턱을 감싸 쥔 시훈이 이수의 입술을 삼켰다. 질척하게 감기는 키스는 아름답지 않았다. 다만 본능에 충실할 뿐.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정사에 신음 소리와 사타구니가 맞붙는 소리만 가득했다. 시훈이 이수의 허리 아래 손을 넣어 빳빳하게 올라붙은 성기를 쥐었다. 젖은 귀두를 문지르자 사정하고 싶은 욕구에 뒤틀린 자세 그대로 시훈이 성기를 욱여넣을 것처럼 쾅 내리박았다.
“아… 흑, 흐, 아! 아!”
짧은 신음이 무게를 실어 박힐 때마다 터졌다.
깊이 더 깊이, 시훈이 이수를 가르며 들어왔다. 깊이 더 깊이, 머리 위로 정이수가 찰랑이고 있었다.
* * *
엎드려 누운 시훈이 몸을 뒤척였다. 몸은 덮은 이불이 허리께까지 내려가며 단단한 등 근육이 드러났다. 반쯤 내려간 블라인드 사이로 푸른 새벽빛이 들어왔다. 피곤을 이기지 못한 시훈은 고개만 옆으로 돌려 침실 소파에 앉은 존재를 더듬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정이수는 한쪽 다리를 소파 위에 접어 올린 채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기척에 돌아본 이수가 시훈과 눈을 맞췄다.
시훈이 말없이 손을 뻗자 천천히 몸을 일으킨 이수가 이불을 들추고 옆자리에 몸을 뉘었다.
시훈은 이수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리를 얽었다. 체온을 느끼며 마주 본 이수의 가슴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간밤 오래도록 괴롭혀 퉁퉁 부어 있는 유두를 코끝과 입술로 가벼이 스쳤다. 시훈은 그 근처에 가만히 귀를 댔다. 쿵. 쿵. 쿵. 선명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긴 숨을 내쉬자 머리맡에서 가만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더 자요. 느릿느릿 감기는 눈 위에 손이 닿았다. 나긋한 손길과 여전히 혼몽한 정신은 시훈을 훌쩍 과거로 이끌었다. 그때도 이렇게… 그때…, 그때 형이 뭐라고 했더라.
‘시훈아.’
고등학교 3학년, 모의고사를 앞둔 늦은 밤이었다. 새벽 2시. 시험 때문에 긴장한 탓인지 잠들지 못했다. S대 경영학과에 진학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번 달 치른 모의고사 성적으로는 조금 아슬아슬했다. 부모님 몰래 과외 날짜를 바꿔 가며 민준 형의 작업실에 놀러 갔기 때문인지 긴장이 풀려 있었다.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시훈이 정원으로 나왔을 때 뜻밖에 구석에 서 있는 시영과 마주쳤다. 시영은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보는 중이었다. 흡연 사실을 몰랐던 시훈이 놀란 표정을 짓자 시영은 푸흐흐 웃어 보였다. 이렇게 웃는 얼굴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가끔. 민준이가 놓고 가길래. 피워 볼래?’
시영이 건네주는 담배를 받아 들고 시훈은 망설였다. 어린 시절부터 시영을 누구보다 잘 따랐지만 불쑥 권하는 담배는 도통 믿음이 안 갔다. 시영은 손에서 타기만 하는 담배를 도로 가져갔다. 시영이 ‘아’ 입을 벌리자 따라 벌린 시훈의 입에 곧 담배가 물렸다. 한번 빨아들이자 매캐한 담배 연기에 목이 역했다. 시훈은 코와 입에서 연기를 풀풀 날리며 연신 기침을 했다.
‘…이거 뭐야. 으웩.’
시영이 콧잔등을 찌푸리며 웃었다.
‘왜 안 자고 나왔어?’
‘…그냥.’
잠 못 드는 이유를 시영은 단번에 알아챈다.
‘시험 좀 못 보면 어때. 긴장 풀어.’
‘일등 할 건데?’
‘그러시든가.’
최근 형과 웃으며 대화한 일이 까마득했다. 형은, 시영은 시훈에게 우상이었다. 정이 많고 감수성이 남다른 시영은 공부도 잘하고 재주도 많았다. 올곧은 시영은 부모님의 자랑이자 기대 역시 한 몸에 받았지만 흔히들 말하는 재벌가의 자제들과는 어린 시절부터 다른 면이 많았다. 덕분에 시훈은 시영을 통해 자전거를 배웠고, 비가 오는 날 정원을 뒹굴고, 달걀을 부화시켜 병아리가 태어나는 장면을 봤다.
시영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받은 용돈 대부분을 돌고래를 방사하는 단체에 기부한다든가, 구호 단체나 분쟁 지역에 보내는 것으로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했다. 논술 준비를 핑계로 매달 구독하는 잡지는 형이 가장 기다리는 것 중 하나였다. 형은 잡지를 읽으며 오려 낸 사진들을 방 한쪽 벽에 빼곡히 붙여 놨다. 그중에 이과수 폭포는 형이 가장 좋아하고 가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밤바람에 시영의 셔츠가 훌쩍 날렸다. 그 때문에 깡마른 몸이 고스란히 실루엣을 드러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씁쓸함을 삼킨 시훈이 시선을 떨궜다. 시영이 반강제로 집에 틀어박혀 지낸 지가 3년. 우울증을 이유로 정신과 상담을 다닌 지는 1년쯤 되었다.
‘대학 준비는 다시 안 해?’
‘아마 안 할걸.’
‘그럼 뭐 할 거야?’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 끈 시영이 시훈의 질문에 씨익 웃었다.
‘여행.’
‘어디로?’
‘몰라. 어디로든.’
뜬구름 잡는 계획에 시훈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싫어하실 거 같은데.’
‘아마… 평생 좋아하실 수 없을 것 같아. 그치?’
자랑스러운 맏아들 노릇은 수능까지가 마지막이었다. 부모님의 열망에 걸맞은 점수였다. 형은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하며 독립을 선언했다. 여행을 가겠다는 계획에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아직 미래를 알 수 없어 세상을 경험하겠다는 형과 정해진 미래를 차 버린 자식을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 사이의 간극은 더없이 벌어졌다. 그 뒤는 매일이 반복이었다. 윽박지르다 싸우고 달래고 어머니의 눈물 바람으로 끝이 났다.
반강제로 집에 묶인 형은 입과 귀를 닫았다. 다만 모두가 잠든 새벽, 시훈이 방문을 두드리면 형은 매번 시훈에게 책과 음악을 권했다. 대입에는 상관없는 것들이었지만 즐겁고 행복했다.
‘아직도 우울해?’
하늘을 올려 보던 시영이 눈을 맞췄다.
‘시훈아, 심장이 엔진이라면 말이야. 나는 껍데기만 멀쩡한 박제된 자동차 같아. 엔진이 멈췄어.’
들어 봐. 시영이 가슴을 내밀자 시훈이 쭈뼛거리며 귀를 댔다. 쿵. 쿵. 쿵. 분명히 뛰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시영이 말했다.
‘시훈아, 너는 이렇게 살면 안 돼.’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차가웠다.
‘모의고사 끝나면 영화 보러 갈래? 내가 잘 말해 볼게.’
‘고작 영화를 보려고 탈출을 감행할 순 없지.’
심장에 귀를 대고 있는 시훈과 눈을 맞춘 시영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날 형은 오래도록 하늘을 보았다. 별도 없는 하늘을. 몇 달 뒤, 말 그대로 탈출을 감행한 형은 인터넷 기사 속에 있었다. 한국계 미국 국적의 청년이 이과수 폭포에 뛰어든 것으로 추측된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유서는 없었고 시신은 찾지 못했다.
시영은 없는 아들이 됐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타국 유학 생활 중 병으로 사망했다, 라는 단신이 며칠 뒤 조간신문 부고란에 짧게 실렸다.
형의 엽서가 도착한 건 수능을 한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결심을 하고 난 뒤 폭포로 향하기 전 엽서를 적어 보냈으리라. 시훈은 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폭포에 뛰어든 이유만은 어림짐작할 뿐이다. 삶에 있어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 건 그뿐이라고,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버렸을 테다. 그쯤엔.
시훈은 형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신을 찾지 못했고, 죽은 시점은 특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바다로 흘러 원하는 곳곳을 누비고 있으리라 믿기로 했다. 시간도 경계도 없는 그곳에서.
‘우리 그때 재밌었는데… 비 오는 날 진흙에 막 뒹굴었을 때. 형은 그냥 그렇게 살고 싶어.’
그날 밤 맡은 새벽 내음을 여전히 기억한다. 시간을 건너뛰어 원서를 내러 가던 버스 안에서 본 큰 옥외 광고도 사진처럼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꿈속에서 형은 아직 살아 있다. 가묘에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면 형은 아마 소리 내어 웃을 것 같다. 내가 지금 큰 바다를 얼마나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는지 아느냐고 잡지 말라고 매어 놓지 말라고 멀리 달아날 것 같다.
형이 살고 싶어 한 삶을 그대로 살 수는 없다. 다만 스무 살, 시훈은 시영이 독립을 선언한 나이가 됐을 때 형처럼 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집을 나오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원하는 대로 살아도,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도 잘살 수 있다고. 그렇게 증명하겠다고. 시훈이 형을 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이후부터 단 하루도 열심히 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알아주려나. 나중에 형을 다시 만나면 웃어 줄까. 고생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흐릿한 옛 기억이 아스라이 의식 너머로 사라질 때쯤 시훈은 가늘게 뜨인 눈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습관적으로 협탁 위의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 9시가 막 지난 시각이었다. 팔을 뻗어 옆을 더듬어 본다.
“아….”
짧은 탄식과 함께 침대에서 다리를 내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손에 쥐고 있었는데 사라진 정이수는 마치 신기루 같았다. 새벽까지 분명 온기를 느꼈다. 대체 얼마나 몰아붙였는지, 시트 위의 체액이 눈을 돌리는 족족 보였다. 바지를 꿰어 입은 시훈이 심란한 마음을 다잡고 방을 나섰다.
“…일어났어요?”
뜻밖에 정이수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치 시훈이 나오기를 기다린 사람처럼 의자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킨다. 일찍이 씻고 단정하게 옷을 입은 이수가 재킷을 팔에 걸고 시훈을 바라봤다. 예상하지 못한 탓에 시훈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넘겨 짚다 문득 이수의 안색을 살폈다.
“잠… 못 잤나 봐요.”
붙잡아 놓고 밀어붙인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붉어진 눈매와 희미하게 한쪽에 선을 그은 눈꺼풀을 보자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두고 이수가 눈을 내렸다. 드러난 시훈의 어깻죽지에 손톱으로 빨갛게 긁은 흔적이 남았다. 내리깐 긴 속눈썹 아래로 곤란한 듯 눈이 굴렀다.
“저는… 이만 가려구요.”
이수가 밤과 아침을 구분 짓고 슬며시 낮은 담을 세웠다. 아무 말 없이 갈 수 있었을 테다. 그런데 해가 뜨고 자신이 일어나기를 기다린 이수를 보고 아침 식사를 하고 가라거나 아니면 잠깐 쉬고 가라는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었다.
“…잠깐 기다려요. 데려다줄 테니까.”
“혼자 갈게요. 좀 더 쉬어요.”
이수가 테이블을 돌아 나오며 거절했다. 거리를 좁힌 시훈은 이수가 팔에 걸어 놓은 외투를 들어 의자 위로 옮겨 놓았다.
“앉아 있어요.”
어깨를 감싸 쥔 손이 등을 따라 내려갔다. 허리를 살짝 감싸 안고 떨어진 손길에는 진득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외투와 키를 든 시훈을 따라 이수가 집을 나섰다.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날이 쌀쌀했다. 조수석에 이수가 올라타자 때맞춰 히터를 튼 차 내부가 따뜻한 온기로 훈훈해졌다. 준비는 모두 끝났지만 시훈은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가만한 엔진 소리가 울리는 차 안에서 시훈도 이수도 어젯밤 수놓인 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핸들을 느긋하게 잡은 손에 힘을 준 시훈이 언뜻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나는… 우리가.”
“…….”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시훈이 나머지 말을 이었다.
“조건 없이 보면 좋겠어요.”
혼란스러운 말을 남기고 시훈은 액셀을 밟았다. 주말 아침 한가한 도로를 달리는 차 안은 침묵이었다. 태풍이 지난 후 잔잔한 바다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사람은 없고 잔해만 남은 마을 같기도 했다.
오피스텔 앞에 당도한 차 안에서는 여전히 정적이 이어졌다. 아마도 복잡한 심경일 이수를 다그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바심이 들었다. 어젯밤 왜 왔느냐 몇 번이나 묻는 시훈에게 이수는 끝끝내 답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이어 온 관계를 가위로 잘라 놓고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정의 내릴 수도 없는 문제였다. 풀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건 반대쪽 끈을 붙잡은 이수의 허락이 떨어져야 비로소 가능했다. 밤을 넘기고 아침을 맞이한 이수는 둘 사이에 연장선을 긋고 있었다.
흐릿하지만 쉬이 넘을 수가 없다. 입을 꼭 다문 이수가 안전벨트를 풀어내고 문손잡이를 그러쥘 때였다. 시훈이 마른 입술을 훑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나지막한 시훈의 물음은 초조한 기색을 담고 있었다. 시트에서 등을 뗀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문을 쥔 이수의 손 역시 다시금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내내 침묵한 조금 전과 달리 뜸을 들인 이수가 차분히 운을 뗐다.
“시계요.”
“…….”
이수가 전하는 이야기는 시훈의 예상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이 팀장님 시계. 제가 가지고 있어요. 일전에 회사 주차장에서 저랑 실랑이하는 바람에 떨어져서.”
종종 피곤할 때면 책상 위나 차에도 시계를 풀어 두니 어딘가에 있겠거니 딱히 찾아볼 생각을 안 했다.
“전에 돌려주려고 했는데….”
좀처럼 맺는 말이 단단하지 못했다. 시훈은 이수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를 짐작해 봤다. 에둘러 즉답을 피하는 것이라. 머리끝까지 벽을 둘러 치는 대신 다행히 낮은 담을 세웠으나 혼란함을 지우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무턱대고 상대를 재촉할 수 없었다. 이수의 얼굴에 언뜻 씁쓸한 미소가 번지다 금세 사라졌다.
“…….”
“여하튼 그게 고장이 나서 수리를 맡겼는데 시간이 제법 걸린대요.”
“그런가요.”
시훈의 순순한 대답이 떨어졌다.
“별로… 중요한 물건은 아니었나 봐요.”
왜 서러움이 덜컥 밀려왔는지 이수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숨겨 둔 서운함을 전하지 못했다. 문득 떠올린 기억에 어슴푸레했던 미소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 그날도 이렇게 분명하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이시훈 당신은 지금처럼 흔쾌히 제 말을 긍정했을까. 그런 우스운 가정들. 말을 마친 이수가 외투를 손에 들고 운전석에 앉은 시훈을 흘깃 돌아봤다.
“그럼 회사에서 뵐게요.”
한결 가벼운 목소리였으나 환한 얼굴은 보여 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안으로 발을 들일 때까지 이수는 시훈을 돌아보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고 발을 물린 이수가 양쪽 벽에 걸린 거울 속 제 모습을 훑었다. 그리고 어젯밤 시훈의 질문을 떠올렸다. 왜 갔냐면, 왜 갔냐면…. 거울 안 수십 명의 정이수가 끝도 없이 서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해 수십 개로 갈라진 마음만큼이나 낯선 얼굴들이었다.
* * *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손가락에 걸린 불붙은 담배 끝 재가 바람에 날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며 빌딩 아래를 내려 봤다. 지나는 사람도 자동차도 지나치게 작아 보여 현실감이 없었다.
이수는 지난 주말 시훈의 집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계속 심란했다. 최근 그나마 나아진 불면증이 도질까 봐 겁이 났다. 잠들기 전 이수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인물은 이시훈이었다. 그동안 미처 신경 쓰지 않은 시훈의 행동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느라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전시회, 아이스 아메리카노, 옷, 앞서 걸어가 일부러 활짝 열어 두던 문, 등에 닿는 손, 주 실장과의 해프닝, 술, 담배, 눈빛, 입술, 키스, 섹스. 어쩌면 이전부터 눈치채지 못한 소소한 행동들과 그리고,
‘나는 우리가 조건 없이 보면 좋겠어요.’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가 입새로 흘러나와 공중에 흩어졌다.
시계. 시훈은 기억조차 못 하는 걸 보면 그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나 보다. 그날 차 안에서 이수가 몰래 잡은 손처럼 모른 척 지나갔으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텐데. 씁쓸했다. 아마 제가 인사이트를 다니는 이상 추문은 잊히지 않을 테다. 버티고 버텨 공적을 쌓고 승진을 한다 해도 이수는 흠집 난 트로피를 가질 뿐이었다. 그리고 유진우의 망령이 여전히 주위를 맴돌고, 이시훈이 드리운 그림자로 인해 제 빛은 또다시 가려질 것이다. 그 모든 걸 다시 이길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은 매년 결심만 하고 끊지 못하는 담배 같았다.
“…….”
언제나 그렇듯 사실 답은 알고 있다. 이수는 몇 번 피우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바로 아래층부터 사람이 차기 시작하더니 두어 층 내려갔을 무렵 문이 열렸다. 곧 이수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시훈이 제작실 사람들과 이동 중이었다. 네다섯 명이 한꺼번에 올라타자 쉽게 움직일 수 없이 엘리베이터가 꽉 들어찼다. 그 와중에 시훈이 공교롭게 이수의 뒤편에 자리한 탓에 괜히 작은 움직임마저 신경이 쓰였다.
이수는 층 표시기를 올려 보며 내려가는 층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문득 왼쪽 벽에 어깨가 닿을 정도로 붙어 선 이수의 허리에 낯선 손길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그것이 시훈의 손이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살짝 제 쪽으로 끌어당겨 날개 뼈가 가슴팍에 닿도록 유도하는 행동은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이수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표정은 감춰도 귀는 벌겋게 달아올랐을 게 분명했다. 좌우를 둘러볼 여유조차 없는 공간에서 모두 핸드폰을 보거나 내려가는 층수만을 응시하는 줄 알면서도 이수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꿈지럭 팔을 올려 허리를 감고 있는 시훈의 손을 붙잡았다. 은근히 버티는 힘과 씨름한 이수가 시훈의 손을 힘주어 잡아 내렸다. 민망함에 곁눈질로 시훈을 살폈다. 여상한 얼굴로 정면만 바라보던 눈길이 잠깐 이수에게 떨어지다 말았다. 한눈에 봐도 몸을 잔뜩 굳힌 모습을 시훈이 모를 리 없었다.
“…….”
이수의 손등에 시훈의 손바닥이 닿은 건 그때였다. 토닥토닥. 그리고 아프지 않을 만큼 손을 쥐고 떨어졌다. 마치 안심하라고 다독이는 것처럼.
“이 팀장님, 프로덕션에서 지금 참조로 메일 보냈대요.”
“네. 자리 가면 확인할게요.”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소회의실이 있는 층에서 시훈과 제작팀 몇 사람이 한 번에 내릴 준비를 했다.
실례합니다. 잠시만요. 사람들을 가르고 앞으로 서는 구영모 팀장 뒤로 시훈이 모로 비틀어 섰다. 이수를 가린 채였다. 그에 굽은 제 어깨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시훈이 내리기 전 이수의 등을 쓸어내렸다.
묘한 친밀감이 습자지 같은 셔츠를 뚫고 밀려들었다. 심장까지 닿은 소소한 행동들은 이수의 가슴에 싹을 틔운 고통에 또 다른 자양분이 되었다.
9시가 넘은 시각. 자료를 서치 중인 고우재가 기지개를 켰다. 핸드폰 앱을 켜고 찰칵, 사진을 찍은 뒤 SNS에 업로드한 사진 밑으로 해시태그를 잔뜩 달았다.
#광고회사 #인사이트 #인턴 #야근 #커피만한가득 #AE #일단퇴근 …
고우재가 가방을 챙기고 업무 중인 이수의 자리로 다가갔다.
“팀장님.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고생했어요.”
가방을 훌쩍 둘러멘 고우재가 곧 넙죽 허리를 숙이고 퇴근을 했다. 적막한 사무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을, 본격적인 비딩 시즌이 시작되기 전 숨을 고르듯 오늘따라 야근을 하는 인원도 없었다. 반대편 1팀의 사무실은 시훈의 책상 위에만 조명이 켜져 있었다. 늦은 오후부터 보이지 않았으니 외근 후 곧바로 퇴근을 했나 보다. 마른 입술을 축이려고 습관적으로 뻗은 손에는 얼음이 녹아 버린 밍밍한 커피만 잡혔다.
탕비실로 들어간 이수가 한쪽에 쌓여 있는 생수 뚜껑을 열었다. 바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뒤를 돌아보자 창문 너머 블라인드 사이로 이시훈의 자리가 보였다. 그리고 파티션에 붙여 놓은 작은 엽서도.
‘떨어졌는데, 사고인지 아니면 자살인지… 아무도 몰라요. 뛰어내린 장면을 본 사람이 없으니까. 자리에는 가방 하나만 덩그러니 남겨 놓구요. …얼마 뒤에 제 이름 앞으로 엽서 하나가 도착했어요. 다른 말은 없고 시 하나가 적혀 있더라구요.’
그날 밤, 시훈은 잠들기 전 숨겨 둔 과거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싶은데, 그럴 틈을 안 줘요. 누구도.’
입이 말랐다. 도련님이 편한 세상을 살아왔다 쉽게 단정했다. 가족을 잃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훈은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 밤, 이수는 어떤 식으로든 위로해 주고 싶었다. …위로. 위로. 위로. 이 소란한 마음이 그 한 단어로 설명이 될까. 입안에서 마뜩잖은 단어가 구르기만 할 때, 달칵 문이 열렸다. …시훈이었다. 몸을 돌린 이수가 헛도는 뚜껑을 쥐고 급히 입을 열었다.
“퇴근 안 하셨네요.”
반면 열린 문을 닫은 시훈은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
“근처에서 고객사 미팅이요.”
이수를 지나 생수 하나를 집어 든 시훈에게서 향수와 익숙한 담배 냄새가 날렸다. 오랜 시간 이어진 회의에 지쳤는지 단추를 풀어낸 차림새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이수를 두고 시훈이 출입문을 등졌다.
“퇴근해요?”
“네.”
“난 아직 일이 남아서요.”
드문드문 말과 말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들어찼다. 시훈이 마신 물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이수를 가로질렀다. 탕비실 창문에 걸린 블라인드 사이를 열어 슬쩍 밖을 내다본 그가 손을 떼자 휘어 있던 날개가 퉁겨졌다.
“다들 퇴근했네요.”
평이하게 읊조린 이시훈이 블라인드 줄을 당겼다. 당연하게 벌어진 날개 사이가 촘촘히 메워졌다.
“먼저… 가 볼게요.”
부산스럽게 눈을 굴린 이수가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서자 어느새 등 뒤로 시훈이 바투 섰다. 어쩔 줄 모르는 저와 달리 상대의 행동은 한가하고 느긋하기만 하다. 졸지에 문과 시훈의 사이에 갇힌 이수가 몸을 굳혔다. 시훈이 손을 뻗어 달칵 출입문을 잠갔다.
“오늘은 보내 줄 테니까… 잠깐 여기 봐요.”
목 아래서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부탁을 해 오자 망설임의 발로처럼 서서히 몸을 돌린 이수가 이윽고 시훈과 마주 섰다. 시훈이 시선을 외면하는 이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여기 회산데요.”
입술을 붙이려 들자 이수가 살포시 고개를 외로 돌렸다. 완곡한 거절에도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다만 시훈은 이수의 턱을 가볍게 잡아 부드럽게 당겨 올 뿐이었다.
“그래서 참잖아요.”
살짝 닿았다 떨어진 입술 뒤로 뜨거운 혀가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타액이 섞였고 호흡을 나눠 가졌다. 살짝살짝 턱이 들리면 반드시 찾아와 입술을 맞붙였다. 마지막으로 입술 끝에 가볍게 입맞춤하고 난 후에야 시훈이 고개를 물렸다.
뒷머리를 받친 손이 미끄러져 이수의 드러난 목을 거치고 떨어졌다. 시훈의 손길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뒷목이 뜨끈할 정도로 뺨을 붉게 물들인 이수가 한 팔로 시훈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거리요. 지키세요.”
목덜미에 손을 올린 이수의 눈동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힘없이 흔들렸다. 시훈은 키스의 여운보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상대를 더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때마침 시훈의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입은 맞췄지만 다소 냉랭한 반응에 시훈은 아쉬운 기색을 누르고 거리를 벌렸다. 닫혀 있는 문을 밀었다.
“늦었네요. 가요, 이만.”
담백하고 다정한 어조였다. 이수는 마치 때를 기다린 사람 같다. 열린 문을 향해 매정하게 몸을 돌린 상대를 보며 시훈은 남은 미련을 애써 걷어 내려 했다. 그런데 한 걸음도 떼지 않고 멈춰 선 이수가 망설이듯 시훈을 향해 돌아섰다.
“…….”
마른 입술을 적신 이수가 손을 뻗었다. 가슴 앞에서 주춤한 손이 안쪽으로 말린 시훈의 셔츠 깃을 바르게 매만졌다.
“옷이….”
변명처럼 덧붙인 말 뒤로 바지에 내려 붙인 손끝이 떨렸다. 머리 위의 시선을 느낀 이수는 이내 몸을 돌렸다.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훈이 눈을 내리감고 숨을 삼켰다. 인내심이 바닥을 보였다.
그때였다. 재빨리 걸음을 옮기는 이수의 앞으로 누군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시훈아. 왜 이렇게 전화를….”
“…안녕하십니까.”
여민준 본부장이었다.
“…어, 정 팀… 이제 퇴근해?”
“네.”
탕비실 밖으로 삐쭉 나온 시훈의 발끝부터 위를 훑은 여 본부장이 이수 쪽으로 눈을 굴렸다. 시훈이 이맛살을 구기며 턱을 비틀었다.
“…들어가 봐요, 그럼.”
등을 쭉 펴고 선 여 본부장의 낮은 침음이 적막한 공간을 울렸다. 자리에서 옷을 챙긴 이수가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까지 여 본부장의 시선이 줄곧 따라붙었다. 이윽고 존재가 사라지자 단박에 눈초리는 시훈을 향한다. 할 말을 부러 꺼내지 않고 주시하는 이유를 두 사람 모두 짐작한 바였다.
“계약서.”
침묵 뒤 가지고 온 서류를 건넨 여 본부장은 자리로 이동하는 시훈의 뒤를 천천히 밟았다. 곧 책상 위에 계약서를 올리고 재킷을 벗을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삐딱하게 노려보는 여 본부장에게 시훈의 퉁명스러운 물음이 떨어졌다.
“왜요.”
피어난 의심이 퍼즐처럼 끼워 맞춰졌다. 가능성을 점치며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넘겨 버린 지난날을 빠르게 곱씹어 봤다. 그래, 서른 넘어 룸살롱에 갈 수 있고, 양주병 쥐고 자작하는 게 싫을 수 있다. 뭐, 주현탁 실장의 입을 꿰매고 싶은 건 저도 매한가지라 술로 조져 버린 회식 날 쌤통이다 싶었다. 가능성이 한 칸 한 칸 차오를 때마다 부정해 봐도 아귀가 맞지 않았다. 정도를 벗어나면 광고주도 치받는 놈이 머리 굴려 가며 에둘러치는 것 자체가 이시훈답지 않았다. 결국, 정이수를 길목에 기워 넣지 않고는 설명이 안 됐다.
“내가 지금 너한테 실수할까 봐 입 다물고 있는데….”
조금 전 탕비실에서 나오는 둘을 보고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뒷골이 쌔했다. 여 본부장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뭘요.”
기가 찬 여민준이 입술을 삐뚜름하게 만들었다. 평소 유하게 시훈을 달래던 모습과 달리 오늘만큼은 쉽게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 좋아하는 계단 밟아 가는 건 좋은데, 안 굴러떨어지게 조심해. 팀장 자리 하나 보고 온 거 아니잖아.”
“…….”
“핏줄이랍시고 나대지 말래서 너 하자는 대로 맞춰 주고 있으니까 너도 나한테 최소한 성의는 보이자.”
이제 시훈이 인사이트에 자리 잡은 지도 1년. 실적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쌓아 가고 있건만, 시훈과 아버지인 정산 그룹 회장님 사이에 좁혀지지 않은 골은 여전히 문제였다. 제아무리 회장님 아들이라 한들 추문이 터진다면 그 또한 미래에 걸림돌이 될 건 분명했다. 시훈을 데리고 온 여민준 역시 운명 공동체로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나 하나만 말할게. 너 문제 생기면 나도 옷 벗는 거야.”
싸늘한 여 본부장의 경고 아닌 경고가 떨어졌다.
“들어가세요. 형수님 기다리셔.”
“너, 진짜…! 어휴.”
확 열이 받쳤다. 이 이상 말해 봤자 들을 위인도 아니었다. 여 본부장은 시훈을 노려보다 빠르게 사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확인하던 시훈이 마우스를 거칠게 밀어냈다. 힘이 쭉 빠져 의자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대고 뻑뻑한 눈을 지르감았다. 예기치 못한 여 본부장의 등장이 피로를 안겨 줬다.
“후우….”
의자를 빙글 돌렸다. 빌딩이 수놓은 야경을 배경으로 창에 비친 제 모습과 마주했다. 문득 손을 올려 바르게 정리된 셔츠 깃을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시훈의 입술이 잔잔한 호선을 그렸다.
* * *
점심 식사를 예약했다는 시훈의 통보 아닌 통보에 회사 근처 한정식집으로 발을 들인 건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오늘따라 회의도 올릴 보고도 없었다. 그런고로 거절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한 이수는 결국 시훈을 따라나섰다.
식당에 막 들어설 때였다. 요란하게 진동하는 핸드폰 액정에 요양 보호사라는 이름이 떴다. 이수는 시훈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멀찌감치 떨어져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안녕하세요. 통화 괜찮아요?
“네, 그럼요.”
통화 중인 이수를 기다리며 시훈은 담배를 빼 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흘깃 바라본 이수가 핸드폰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님께서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여러 번 말씀하셔서요. 맑은 정신은 아니신 거 같은데… 그래도 통화를 하고 싶어 하세요.
“네, 바꿔 주세요.”
-잠시만요. 여사님. 말씀하세요. 아드님이에요.
“엄마.”
-이수니?
기운은 없지만 다급한 목소리였다.
“응, 밥은 먹었어?”
-엄마가…, 엄마가 찾은 거 같아. 그… 작은아버지 있잖아. 어디 있는지.
핸드폰 너머로 떨림이 느껴졌다.
“…엄마. 이제 안 찾아도 괜찮아.”
이수가 달래 보아도 내내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그래도… 그래도….
제자리를 맴도는 말에 요양 보호사가 핸드폰을 넘겨받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곧 낮잠 주무실 시간이라 이만 끊을게요.
“…네, 고맙습니다. 조만간 찾아갈게요.”
일주일 전에도 업무 시간 중 난데없이 걸려 온 전화에 속을 끓였다. 작은아버지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다행히 요즘 들어 밖으로 뛰쳐나가지는 않는다지만 몇 주 전 요양원을 방문했을 때 엄마는 이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여름, 등나무 아래서 이수를 쓰다듬은 손은 다시 시트 위에 늘어졌고,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조만간 찾아갈 날을 헤아려 보았다. 날이 추우니 내의도 몇 벌 더 챙겨야 할 테고, 도톰한 이불도 한 채 가져가야겠다. 운이 좋으면 단풍을 같이 보면 좋겠다. 이수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느새 이시훈이 거리를 좁혀 서 있었다.
“어머니예요?”
“…어떻게. 들렸어요?”
표정을 구분할 정도는 되지만 통화 내용이 들릴 만한 거리였을까.
“아니요. 분위기상. 저도 어머니한테 전화 오면 딱 그 얼굴이라…. 어머니는 지방에 계세요?”
곤란한 듯 입매를 굳힌 이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프세요, 좀…. 그래서 요양원에 계세요.”
이수의 오피스텔에서 본 사진을 떠올린 시훈은 왜 액자를 세워 두지 않았는지 이유를 짐작해 봤다. 시훈은 말도 없이 앞서 걸어가는 이수의 뒤를 따랐다.
복도식으로 방이 나열된 한식당에 들어가자 예약을 확인한 직원이 두 사람을 안내했다. 늦된 시간에 식당은 한가했다. 잠시만요. 문 열어 드릴게요. 그때 좁은 대청마루 위를 올라간 직원 뒤에 대기한 두 사람 앞으로 옆방 미닫이문이 열렸다.
“정 팀장?”
타이밍이 참으로 공교로웠다. 문이 열린 옆방에서 여민준 본부장, 주현탁 실장이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시훈과 이수가 나란히 인사를 올렸다. 그 뒤로 합석하시겠냐는 직원의 물음에 누군가 그러겠다 하는 바람에 다음부터는 내내 불편한 시간이 이어졌다.
“식사를 늦게들 하네?”
“네, 좀 늦었습니다. 두 분도 늦으셨네요.”
시훈이 주현탁 실장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건성으로 답을 했다.
“정 팀은 왜 안 먹어. 먹어.”
“네, 먹고 있습니다.”
네 사람이 둘러앉은 테이블 위로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시훈을 옆자리에 앉힌 여민준 본부장이 눈알을 굴렸다. 하필이면 이렇게 만나냐. 답답한 마음에 대작하는 상대도 없이 반주를 비웠다. 맞은편에 앉은 주 실장의 시선이 부지런히 돌아갔다. 영 달갑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여 본부장이 짐짓 과장하여 화제를 전환했다.
“정산 주요 보직들 하나둘씩 물갈이되는 모양인데…. 브랜드전략실도 새로 온 실장이 대행사 출신이래요. 해외에서 영입한 모양인데 애가 좀 마이 웨이인가 봐. 국내에 연줄이 없어 그런가 막 날뛴대요. 예민하고 까다롭기도 보통 아니고.”
“그래요?”
주현탁 실장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으며 심드렁한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시훈을 향해 슬쩍 턱을 올렸다.
“유행인가…. 요즘 대행사 출신 광고주가 많네. 안 그래, 이 팀장?”
너도 정산으로 적당히 빠지면 좀 좋아. 이런 뉘앙스였다.
“그런가요.”
합석했을 때부터 표정을 굳힌 시훈은 그에 걸맞은 단답을 내놓았다. 눈치를 살핀 여 본부장이 자연스럽게 뒤를 이어 수습했다. 되도록 불똥이 안 튀게 고만고만한 주제로 대화를 풀어놓고 얼른 자리를 정리해야지 싶었다.
“조만간에 자리 한번 만들까 싶어요. 아무래도 내년도부터는 1본부에서 정산 쪽 캠페인만 전담하지 싶은데.”
업무 관련한 의미 없는 대화가 여 본부장과 주 실장 사이를 오고 가는 동안 각각의 옆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식사를 먹느니 마느니 한다. 주 실장은 여 본부장의 말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새였다. 대신 젓가락으로 앞 접시에 담긴 무조림을 쿡쿡 찔러 보며 이시훈과 정이수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주 실장의 젓가락 방향이 이수와 시훈을 번갈아 가리킨다.
“두 사람 친해?”
정말이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에 시훈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 바람에 여 본부장은 심장이 졸아드는 듯했다. 최근 주 실장이 임원 회의 때마다 삐뚜름하게 구는 일이 잦았다. 일전 시훈과 크게 마찰이 있었던 업체를 들먹이지 않나, 사사건건 로열패밀리 운운하는 바람에 매번 쌩한 찬바람이 들었다. 쳐 내고 싶어도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주 실장을 달랠 요량으로 마련한 식사 자리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두 사람과 맞닥뜨릴 게 뭐람. 내심 혀를 찬 여 본부장이 재빨리 대답을 가로챘다.
“같은 본부인데…, 당연하지. 뭘 그런 걸 물어요. 열두 살짜리 애들도 아니구.”
“아니, 우리 정 팀장이 회사 사람하고 밥 먹는 꼴을 본 적이 없어서… 좀 신기하네.”
“에이, 한 잔 드셔요.”
눈치로 따지면 뱀 같은 주 실장 역시 여 본부장 못지않았다. 그걸 알고 있으니 여 본부장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오늘 주 실장은 작정을 했는지 채운 잔을 들이켜지 않고, 뜬금없이 이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다. 유진우 본부장하고는 제법 먹었잖아. 유 본이 이 근처 맛집 잘 알거든.”
수저를 들고 있는 이수의 손이 멈췄다. 맞은편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본 시훈 역시 미간이 티 나게 좁아 들었다.
“유 본이 요전번에 연락을 해 왔는데 아주 죽겠대요. 손발 맞는 사람이 없다나.”
이수와 시훈을 향해 눈초리를 돌린 주현탁 실장이 실실 쪼갰다.
“해외 지사 근무하면 다 그렇죠.”
얼추 맞장구를 쳐 준 여민준을 가볍게 지나친 화살이 이수를 향했다.
“우리 정 팀하고 일할 때는 훨훨 날아다녔는데 말이야. 정 팀장은 유 본하고 연락해?”
이수가 숟가락을 고쳐 잡았다.
“아니요.”
도저히 눈을 들지 못하겠다. 난감했고, 유진우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의식한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그렇게 일을 오래 했는데… 참, 정 없이 군다. 아직 서운하지? 그렇게 가 버려서.”
주 실장의 손이 이수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손길은 노골적으로 이수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주물렀다. 언뜻 보면 막역한 사이에서나 할 법한 스킨십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실장님…”
목덜미에 올라간 손에서 몸을 빼는 이수의 말을 가르고 시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주현탁 실장님, 한 잔 하시죠.”
비우지 않은 주 실장의 잔 위로 시훈이 술을 내밀었다. 한눈에 봐도 불만 가득한 인상이었다. 능글맞은 주 실장이 시훈을 흘겨보고 보란 듯이 이수의 어깨를 툭툭 감싸 쥔다.
“이 팀장. 요즘 내가 정 팀장하고 말 좀 섞으려면 왜 이렇게 심지가 서? 내가 정 팀장 괴롭혀? 못 할 말 해?”
“주 실장님, 손 내려 주…”
이수가 불편한 기색을 토로한 순간이었다.
“성희롱입니다. 하시는 행동.”
시훈의 낮고 단호한 음성이 방 안을 한순간 정적으로 만들었다.
“뭐어?”
“이 팀장!”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달아오른 주 실장이 씩씩댔다. 여 본부장은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놀란 건 이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수는 재빨리 평정심을 붙들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한순간 밀려든 수치를 이런 자리에서 들추고 싶지 않았다.
“보기 불편합니다.”
시훈이 주 실장을 노려보았다. 제아무리 회장 아들이라도 주 실장의 캐릭터상 바짝 자세를 낮춰 가며 손을 비빌 인간은 아니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으려는 행동에 여 본부장이 다급하게 중재를 하고 나섰다. 반쯤 몸을 일으켜 주 실장 쪽을 잡고 선 여 본부장이 이수를 다그쳤다.
“정 팀장, 뭐 해! 이 팀장하고 먼저 나가요!”
시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로 이수 역시 다급하게 식당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시훈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욕을 짓씹는 소리가 막 식당을 나온 이수에게 들렸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본 이수가 인사도 없이 곁을 지났다.
“왜요.”
팔목이 잡혔다. 돌아선 이수가 싸늘한 얼굴로 상대를 올려 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던 이수의 입이 열렸다.
“내가 뭐가 돼요.”
“뭐가 되냐니.”
시훈이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올렸다. 성마른 채근 뒤에 시훈의 손을 뿌리친 이수의 시선은 날이 서 있었다.
“바른말 하고 나니까 속 시원해요? 지금 주 실장이 일부러…! 하아….”
주 실장은 뱃속에 구렁이가 열 마리는 들어 있는 사람이었다. 여러 사람 둘러앉은 흐지부지 묻힐 만한 회식 자리도 아니고, 눈만 돌리면 순식간에 바뀌는 표정이 낱낱이 보일 만한 거리였다. 시훈이 어떻게 반응할지 확인하고 싶어서 유진우를 끌어들이고 일부러 저를 만진 게 분명했다.
“하지 말라는데 계속하잖아. 그리고 정 팀장님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어요.”
이수 눈에도 참고 있는 시훈의 모습이 보였다. 주 실장에게 술을 권했을 시점이 인내심의 마지노선이었다는 것도. 하지만 그보다도 이시훈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인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그래요. 그랬겠죠.”
최소한 당사자인 저에게 먼저 기회를 줬어야 했다. 싫은 티를 내는 일도, 그만두라는 말도. 흠집 난 자존심이 따끔하게 아팠고, 그다음은 무력감이 밀려왔다. 일이 어그러지면 매번 입에 오르내리는 쪽은 이수였다. 그저 지나가고 잊히면 좋으련만 언젠가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올지 모를 막막한 현실이 두려웠다. 유진우가 떠난 뒤 그나마 잠잠해진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난했던 세월이 머리를 스쳤다. 제 위치를 상기한 이수의 착잡함이 가시지를 않았다. 엉망이 된 식사 자리와 너저분한 감정만 남은 대화는 더 이상 무의미했다. 침음한 이수가 나지막이 시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람 하찮게 만들지 말아요. 결정하고 행하는 행동은 내가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이수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맺지 못한 말이 공허하게 흩어졌다.
“우리가 뭐.”
뱉지 않은 말미를 기어코 들으려는 시훈이 이수의 팔꿈치를 잡아끌었다. 불안이 똬리를 튼 남자의 초조함이 잔뜩 힘을 준 손끝에 모여 있었다. 다소 거칠게 돌아간 몸이 휘청거리다 중심을 잡았다. 잠시 시훈의 손을 내려 본 이수가 차갑게 눈을 치켜떴다.
“이 팀장님은….”
“…….”
“이 팀장님은 아니겠지만, 이런 행동도 나한테는 소문이고 추문이 돼요. 거리 지켜 달라는 거… 그거 어려운 부탁이었어요?”
이수가 딱 잘라 내뱉은 말에 시훈의 말문이 막혔다. 그래, 자신이 알고 있는 이시훈이라면 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든 그럴 사람인 건 알고 있다. 그리고 뒷감당을 할 만한 자신이 있다는 것도. 근데 난 아니잖아. 두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좁힌 거리가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시훈이 쥐고 있던 손을 말없이 떨어트렸다. 한데 뭉그러진 감정이 뜨겁게 속을 달궜다. 화가 났다가 서운했다가 이제는 속이 상했다. 분노에 눈이 돌아가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자책감이 폐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
“먼저 갈게요.”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이수를 바라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 * *
“M사는 아직도 꼭꼭 감추고 일하네. 핸드폰이 이제 새로울 것도 없잖아. 제안은 죄다 까 대구 말이야…. 얘네 온 에어 일정은 차질 없죠? 그리고 다른 이슈 사항은?”
“일정대로 진행되고 있구요. 병가였던 임순정 대리가 곧 복귀할 것 같습니다.”
잘됐네. 업무 보고는 끝났지만 여 본부장이 무턱대고 시간을 죽였다. 곧 서류를 훑는 그가 문득 입을 뗐다.
“정이수 팀장은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요?”
“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주제에 어긋난 사적인 질문은 처음이라 당황해서 튀어나온 반문에 여 본부장이 보던 서류를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아니, 뭐…, 주변에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두 사람 사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제였다. 당황스럽기만 할까. 그간의 소문을 모르는 척 시치미를 잡아떼는 여 본부장의 태도에 이수가 잠시 넋을 뺐다.
“시훈이도 그렇고…. 아, 정 팀장 몰랐죠? 시훈이랑 내가 같은 집안 사람이에요.”
내가 사촌 형. 이번에는 입이 벌어지다 다물렸다. 막역하다는 인상은 받았지만 핏줄인 사실은 미처 몰랐다. 이수가 짐짓 당황한 기색을 감췄다.
“…그러셨습니까. 몰랐습니다.”
“그래도 시훈이가 회장님 자제인 건 알고 있었죠?”
“…….”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정 팀장.”
여 본부장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으라는 말 알죠?”
“…….”
“한 번은 그럴 수 있어요. 사회생활 하다 보면 힘들고 지쳐서 누구든 붙잡고 싶었을 테고, 다들 라인 만들고 무리 지어 다니는데 정 팀장이라고 안 그럴 수 없지.”
어설프게 몸을 사린 과거가 다시 한번 드러났다. 여 본부장은 가만가만 풀어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이수의 치부를 들추기 바빴다. 모멸이 명치를 찌를수록 이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수는 턱이 아릴 정도로 이를 사리물었다.
“…….”
“이시훈은 안 돼. 이거 하나예요.”
허벅지 위의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까지 까발려진 마당에 더 이상 참고 말고 할 이유는 없었다.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분노했지만 이성만큼은 또렷했다.
“본부장님.”
이수는 흔들림 없이 여민준 본부장과 눈을 맞췄다.
“한때 제가 유진우 본부장님… 마음에 품었던 거 사실입니다. 잘못된 행동이었고,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혹여 이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면, 지겠습니다. 하지만 생각하시는 것처럼 선 넘은 적 없고, 단 한 번도 사적인 감정 이용해서 업무 수행한 적도 없습니다. 또 그런 이유로 유진우 본부장님을 이용한 일도 이득을 취해 본 일도 없구요. 제가 팀장 자리 못 얻을 만큼… 일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충분히 회사에 기여했고, 제 커리어에 대한 자신도 있습니다.”
이수가 조목조목 반박했다. 예상외의 반응에 여 본부장이 인상을 구겼다.
“거기까지는 알고 싶지 않고….”
“아니요, 아셔야죠.”
단호한 이수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하… 참. 그럼, 지금 시훈이하고는 대체 뭐라는 건데?”
여 본부장이 혀를 차며 물었다. 단번에 치워 버릴 생각이었는데 변명이라고 치부하기에 정이수의 말은 헛수가 아닌 듯 힘이 실려 있었다. 정이수는 공격적이었지만 냉정을 잃지는 않았다.
“이시훈 팀장과 저 사이의 일은 본부장님이 관여하실 일…, 아닙니다.”
“정 팀장, 지금….”
황당함에 여 본부장의 말허리가 잘렸다. 시훈이가 약점이라도 잡혔나. 오만 가지 상상이 더해졌다. 여태껏 숨죽인 정이수가 꺼낸 발언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다.
“소문이 무서우세요? 이시훈 팀장이, 정산 그룹 회장님 아들이 정이수하고 붙어먹는다더라. 그런 소문이요.”
“말이면 다야?”
언뜻 악에 받친 고집이 비쳤다. 정이수의 입술 새로 사실일지 소문일지 짐작도 못 할 말들이 튀어나오는 동안 여 본부장은 입이 바싹 말랐다. 정이수는 칼을 쥐고 상대를 찌르면 제 손에 생채기가 날 줄 뻔히 알면서 상관 않는 무지렁이처럼 보였다.
“저야 이미 검댕 묻은 사람이라 뭐 하나 더 묻는다고 티도 안 나겠지만, 이 팀장님은 아니겠죠. 본부장님은 그게 싫으신 거구요.”
여 본부장이 기가 찬 헛웃음을 쳤다.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얼얼함에 뒷목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연애를 한다는 가정은 애초부터 해당 사항에 없었다. 그러면 한 가지밖에 없지 않나. 여 본부장은 유진우 자리에 시훈을 대입해 봤다. 말이 되나. 시훈이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싶다가도 머리가 아팠다. 도무지 이시훈답지 않았다. 단순히 정이수의 몸만 취한다 하기에 이 녀석 하는 짓거리가 가볍지만은 않은 탓이었다.
“그리고 궁금하시면 이시훈 팀장한테 여쭈세요. 저 같은 사람 들쑤시지 마시구요.”
대학을 졸업하고 거의 10년을 몸 바쳐 일한 회사에서 받는 대우가 형편없었다. 누구 하나 진실을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결론을 내린다. 다른 건 몰라도… 일은, 일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그러면 누구 하나 알아주겠지.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더라 하는 해프닝쯤으로 치부될 날을 기다리며 절치부심하여 스스로를 담금질했다. 아마 마지막 남은 순수함이 있다면 그 정도였을 테다. 미련하게.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바지에 양손을 붙여 머리를 숙였다. 살벌하게 되받아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예의를 갖춘 자세였다. 여 본부장의 시름이 깊어졌다.
점심시간이 지난 카페테리아는 한산했다. 제작팀과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 소요됐다.
“일전에 저희가 컬러 콘티로 가져갔을 때도 광고주가 이해를 못 했어요. 요즘은 애니메틱을 대부분 선호하니까요. …의미가 없죠. 예산 문제는 일단 차치하구요, 네. 다시 논의하시죠.”
여전히 미적지근한 제작팀 태도에 진이 빠졌다. 결국은 시간과 예산 문제였다. 설득과 설득이 이어진다. 치열해서 가슴을 뛰게 한 일들이 요즘 들어 버거웠다.
“팀장님.”
생각에 잠긴 이수가 곁에 선 이를 올려 봤다. 고우재가 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제 거 주문하면서 같이 샀어요.”
뜨거워요. 아메리카노가 이수 앞에 놓였다.
“고마워요. 리플릿?”
“네, 방금 인쇄소에서 가지고 왔대요. 이것도 뜨끈뜨끈해요.”
뿌듯해 보이는 고우재의 표정이 고무되어 있었다. 업무 때문에 미뤄지고 미뤄지더니 간신히 마무리 지었나 보다.
“벌써 SNS에도 올리고?”
“앗, 네.”
화면이 꺼지지 않은 고우재의 개인 SNS에 업로드된 인사이트 리플릿이 보였다. 한 귀퉁이만 겨우 보이는 정도였지만 배포 전이라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구영모 팀장님은 확인하시고요?”
“아직….”
“뭐가 그렇게 급해서요. 사적인 영역이니까 터치는 안 하겠지만 이런 건 조심해야죠.”
“넵. 조심하겠습니다.”
들뜬 마음에 태그를 잔뜩 붙여 올린 사진이 민망했다. 고우재의 난처한 낯을 본 이수가 당황한 기색을 덜어 주려 리플릿을 펼쳤다. 제작팀이 바쁘게 돌아가는 바람에 한참 뒤에나 인쇄한 리플릿은 고심한 만큼 깔끔하게 완성되었다. 구 팀장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제작팀 인턴보다 더 인쇄소를 들들 볶아 댔다 들었다. 옛날 고우재처럼 인쇄소며 프로덕션 녹음실까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쫓아다닌 기억에 이수의 얼굴 위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고생했네요.”
“팀장님 덕분이에요.”
첫 단추를 끼울 구멍은 잘 찾은 것 같다더니 차차 꿰어 가는 손놀림이 좋았다. 이어 고우재가 인쇄소에서 있었던 자잘한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중 문득 이수의 앞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였다.
“…어,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어설프게 몸을 일으킨 고우재가 인사를 대신 했다. 이수 앞에는 고우재가 내민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시훈이 내민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였다. 호의라고 생각하면 편했을 일이지만 딱 잘라 생각되지 않았다. 뜻밖에 시훈이 비어 있는 고우재의 옆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자 반쯤 기마 자세였던 고우재 역시 착석했다.
“통화 중이던데요. 여러 번 전화했는데.”
고우재는 안중에도 없는지 시훈이 뚫어져라 이수를 바라봤다. 일하는 사이에 거리낄 것 하나 없는 말에도 난감한 쪽은 이수뿐이다. 작정하고 앉은 건 알겠는데 고우재까지 있으니 더 입을 떼기가 어려웠고 싫었다.
“몰랐네요.”
부재중 목록이 남아 있을 핸드폰은 보지도 않았다. 막막한 적막이 흘렀다.
지난 며칠 동안 복도에서 마주치면 겨우 묵례를 했다. 같은 회의에 들어가도 냉랭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차갑고 무감한 이수의 태도에 하루에 두어 번 식사니 커피니 이시훈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수는 읽고 답을 하지 않았다. 식당에서의 일뿐 아니라 여민준 본부장과의 대화도 이수에게 쉬이 걷힐 수 없는 여파를 남겼다.
둘 사이 묘한 분위기를 느낀 고우재가 얼른 눈치를 살폈다. 낄 때 끼고 빠질 때는 빠지자. 마음에 콕 새겨 놓은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저…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두 사람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의자를 물렸다. 할 말이 없는 이수 역시 고우재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들고 테이블을 돌아 나가는 순간 등받이에 털썩 등을 기댄 시훈이 발길을 잡았다.
“정 팀장님. 저 아직 용건이 남았는데… 많이 바빠요?”
“이 팀장님.”
낮게 가라앉은 경고가 떨어졌다. 삽시간에 일그러진 표정이 제어가 안 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훈이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세웠다. 톡톡.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손끝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이수가 찌푸린 눈살을 펴고 의아한 표정의 고우재를 향해 입을 뗐다.
“고우재 씨, 먼저 가요.”
고우재가 카페테리아를 나선 뒤 시훈이 여태 서 있는 이수의 앞으로 손도 대지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밀어 놓았다.
“뜨거운 커피 안 마시잖아요.”
“일부러 그래요? 인턴까지 있는…,”
느릿하게 감겼다 뜨인 시훈의 눈 위로 날선 눈썹이 들렸다.
“어린애가 뭘 오해하겠어요. 잠깐 앉아요. 길게 이야기하진 않을 테니까.”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 나왔다. 지끈 머리가 아팠다. 넘기지 못한 앞머리를 그러쥔 이수가 천장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체념한 기색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정작 사람을 붙들어 놓고 시훈은 말이 없었다.
오후 햇살이 통유리 창 너머로 길게 드리워졌다. 시훈이 조심스럽게 침묵을 갈랐다.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주 실장과 있었던 일. 난 후회하지는 않아요.”
이시훈다웠다. 그러나 침착을 망각하고 인내심을 컨트롤하지 못한 건 그답지 않았다. 짧은 정적 이후 그가 말을 이었다.
“다만…, 곤란하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이수가 고개를 모로 돌렸다. 예상치 못한 사과였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좋을지 좀처럼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런 이수를 바라본 시훈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손을 가만히 주먹 쥐었다.
“내가,”
“…….”
“뭘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미간에 잡힌 주름과 달리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뭘, 어떻게. 막연한 물음이 품은 함의는 분명했다. 조건 없이 보자는 제안은 여전히 유효한지 시훈은 한 발 물러나 이수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었다. 입을 다문 이수를 바라보는 낯에 언뜻 초조함이 비쳤다. 주먹 쥔 손이 다시금 테이블을 소리 없이 두드렸다.
“…시간. 필요해요?”
“…….”
마뜩잖은 기색을 애써 숨기며 시훈은 애꿎은 주먹을 다시 말아 쥐어 본다. 이수를 흘깃 바라본 시훈이 다물린 입을 확인했다. 이 자리에서 절대 열리지 않을 테다. 억지로 앉혔으니 반발심만 더했으리라.
“대답… 기다릴게요.”
“…….”
여기까지였다. 머리를 굽힌 자존심이 정수리를 보일 즈음 시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2주간 사무실과 복도, 회의실에서 이수는 시훈을 만났지만 미묘한 거리를 두었다. 빈 공간에 우연히 두 사람만 있게 되면 번번이 시훈을 덩그러니 홀로 남겨 둔 채 자리를 떴다. 시선을 마주하면 역시 먼저 눈을 돌렸다. 그럼에도 시훈은 이수를 잡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거리를 지켜 달라는 이수의 부탁에 시훈은 제자리를 지켰다. 이수가 한 발 물러난 거리만큼 앞으로 두 발 성큼 다가올 것이라 믿었다. 함께 나눠 가진 밤들은 꿈이 아니었으므로.
#실수 #대형사고 #징계 #해고각 #퇴사각 …
줄줄이 달린 해시태그를 김민주 대리가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세상 사는 일도 컨트롤 제트를 누르고 재생 버튼을 왼쪽으로 드래그해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민주 대리가 머리를 쥐어 싸매며 삭제된 고우재의 SNS 계정을 노려보다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놨다.
“나 년아… 죽자… 죽어.”
어젯밤, 자정을 앞둔 시간 M사의 광고주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출시 대기 중인 제품 스펙이 떠돌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냐, 지금 SNS상에서 캡처된 이미지가 있는데 이게 인사이트 직원의 계정이 맞느냐 묻는 두 가지 질문이었다. 메신저로 전달된 이미지를 보는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야근하는 책상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고우재의 모니터 위로 핸드폰 제품명과 스펙이 떠 있는 창이 보였다. 언뜻 텀블러에 가려 있어도 확대해 보면 유추해 볼 정도는 되었다.
김민주 대리는 그 즉시 고우재와 정이수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날이 밝은 오늘, 정이수 팀장은 내내 자리를 비웠다.
* * *
“참, 나….”
여민준 본부장과 정이수를 앞에 두고 김지학 전무가 헛웃음을 쳤다. 집무 책상 위로 던져 놓은 태블릿 PC 위에 M사의 주가와 실시간 검색어 순위가 띄워져 있었다.
“뭐래요, 그쪽에서.”
“본사 들어갔을 때 법무팀까지 대동하지는 않았고, 수습부터 하자고 합니다.”
이수는 김 대리의 전화를 받고 새벽 급히 회사로 호출돼 여 본부장과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둘은 날이 밝자마자 광고주 사옥으로 이동했다. 참담한 심정으로 마주한 고객사와의 자리에서 이 사달의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공식적인 사과와 더불어 계약 재검토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수위로 마무리된 게 다행이었다.
“그래서.”
“일단 정이수 팀장이 대응 전략을 간략하게 설명했고 다행히 광고주 쪽에서 받아들인 상황입니다.”
모바일 기기의 경우 시장 초기와 다르게 디자인이나 기능적인 면에서 혁신은 줄어들고 소비자 관심이 현저하게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유출된 스펙은 밤새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 유명 IT 전문 업체의 온라인 매체에까지 포스팅됐고, 결론적으로 돈 한 푼 안 들이고 대대적인 홍보가 됐다. 이럴 경우 주가에 따라 고객사 반응이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장이 열린 9시, M사의 주가는 가파르게 우상향했다. 김지학 전무가 이수를 흘깃 바라봤다. 듣자 하니 일부러 장이 열리는 시각까지 버텼다고 들었다. 미팅을 한결 매끄럽게 마무리 지으려는 의도였다.
“회의 언제야.”
“대회의실에서 15분 후에 시작합니다.”
“나가 봐요. 회의실에서 봅시다.”
주요 팀이 소집된 회의 분위기는 무거웠으나 경위에 관한 비난은 오가지 않았다. 위기가 닥쳤을 때 지양해야 할 비생산적인 일이었다. 리스크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위기를 극복할 방향은 구체적이고 일관돼야 했다. 이수는 오전 중으로 취합한 리포트를 내밀며 새벽 내내 여민준 본부장과 새로이 수립한 방향을 제시했다.
출시일 전까지 공개되지 않은 제품의 스펙 및 디자인을 점진적으로 노출하여 이슈를 확대 재생산 시키는 방안이었다.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인 유출 마케팅은 M사가 근 20년 동안 제품 공개일까지 보안에 철통을 가한 과거와 확연히 다른 전략이었다. 그러나 전작들의 연이은 실패가 뼈아픈 M사로서는 단 하루 동안 불러 모은 관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지표를 들이민 후에는 더욱이 납득할 수밖에 없는, 현재로서는 가장 합당한 전략이었다.
결정은 군더더기 없이 이루어졌다. 손바닥을 뒤집듯 새로운 판이 깔렸지만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위기를 각자의 자리에서 헤쳐 갈 뿐이었다.
대회의실에서 우르르 쏟아지는 사람들 한편에 바삐 걸음을 옮기는 여민준 본부장의 뒤로 이수가 따라붙었다. 자연스럽게 집무실까지 함께 이동하며 급하게 몇몇 사항을 검토했다.
“정 팀, 데일리로 리포트 올라가야 하지 싶은데.”
“네, 물론입니다.”
문을 닫고 들어서자 집무 책상에 곧장 앉은 여 본부장이 손에 든 서류를 훑었다.
“그리고 인턴 있죠.”
“…네.”
“금주 내로 업무 정리하라고 하세요. 뭣하면 내일부터 안 나와도 상관없고.”
무감한 통보였다.
“본부장님. 제 관리가 소홀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다급한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급히 넘기며 여 본부장이 이수를 흘깃 올려 봤다.
“인턴은 정식 직원 아니잖아. 그러니까 정이수 팀장이 책임질 일은 없어요. 현재 상황에 집중해서 리스크 관리나 제대로 합시다.”
“본부장님. 다시 한번… 재고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친구….”
이수가 재차 여민준 본부장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해가 뜨기도 전에 출근한 고우재는 해맑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새하얗게 질린 채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곧 죽을 얼굴이요. 그나저나 인턴십 이대로 끝나면 대미지가 클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잘리겠죠? 사유는…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을 테구….’
이수가 고객사로 이동하던 중 핸드폰 너머로 상황을 전하던 김민주 대리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첫발부터 창창해야 할 앞길에 가시밭이 드리워졌다.
다시 한번 부탁이 떨어지기 전에 여민준 본부장이 이마를 찡그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책임자 따지고 들면 어디까지 올라가. 나까지 멱살 잡고 끌고 가?”
여 본부장은 김지학 전무 라인이 아니니 일이 잘못 수습될 경우 입지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여전히 쉽게 수긍하지 않는 이수를 보며 여 본부장은 가슴을 크게 부풀려 숨을 내쉬었다.
“터놓고 말합시다. 내가 지금 좋아서 정 팀 방패막이 돼 준 거 같아요?”
여 본부장으로서는 이수의 징계를 막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을 테다.
“…….”
“이봐요, 정 팀장.”
“…네. 본부장님.”
“폭탄 끌어안는 심정. 알아요? 언제 터질지, 뭐가 터질지 모르는데… 일단 안고 간다잖아요.”
리스크 관리는 상급자가 지녀야 할 중요한 능력이었다. 지난 새벽 머리를 맞댄 여민준 본부장은 정이수가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고민에 빠졌다. 일 머리나 아이디어,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기막혔다. 광고주와의 미팅 전까지 현 상황과 대응 가능한 전략을 뒷받침할 사례를 줄줄 읊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여 본부장이 키 방향을 달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이수를 내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툭 밀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지지 싶었는데 묻힌 땅 아래 견고한 아랫돌이 정이수를 받치고 있었다.
막말로 사람은 미운데 정이수를 단번에 내치기에는 좀… 아까웠다. 결국 고객사를 방문하기 전 급하게 대면한 김지학 전무 및 대표에게 이번 M사의 일이 틀어질 경우 여 본부장 자신 역시 각오를 하겠다는 취지로 정이수의 징계 철회를 설득한 참이었다.
기억하기로 인사이트에 임원으로 자리를 틀기 전 타사 재직 시 유진우와 비딩에서 만난 일이 몇 번 있었다. 초반 평이했던 유진우의 기획이 승승장구하며 두각을 나타낸 시점을 거슬러 보면 아마도 정이수가 팀에 합류한 때일까. 색안경을 벗고 보니 새로 보이는 것도 있더라, 이건데…. 그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한때는 그 역시 같은 직군의 실무자였다. 산전수전 겪으며 헤쳐 온 지난날을 그려 보면 오늘 같은 사고는 뼈아프지만 인간적으로 공감하고 이해하는 바가 있었다. 이 건으로 정이수에게 트집을 잡을 수는 있지만 댐이 무너지는 마당에 구멍을 막을 손 하나가 절실했다. 그러니 자를 수 있는 꼬리는 자르고 로스를 막는 데 집중했다.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고심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나도… 적잖이 고민한 거라고.”
복잡한 감정이 한데 엉킨 목소리가 이수 앞으로 떨어졌다. 후우… 나가 봐요. 집무 의자에 털썩 앉은 여 본부장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의자를 돌려 앉았다.
“…….”
이수가 묵례를 올린 후 집무실을 나섰다. 얼마 전 시훈의 문제로 각을 세웠고, 대화는 두 사람 모두에게 불쾌함만 남겼다. 그러니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자신을 끌어안은 여 본부장을 더 설득하기란 불가능했다. 이수가 가진 한계는 너무도 명확했다.
여민준 본부장의 집무실을 나와 이수는 좀처럼 이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재차 눌렀다.
“이게…, 왜….”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누른 이수가 결국 비상계단 출입문을 열었다.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가 문을 열었다. 죄어 오는 느낌을 참을 수가 없어 넥타이를 헐겁게 잡아 내리고 급하게 셔츠 위 단추를 두어 개 풀어냈다. 세찬 바람이 온몸 구석구석 들이닥쳤다. 난간 앞에 바투 선 이수는 뭍으로 막 나온 사람처럼 파앗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아….”
핏발 선 두 눈이 빽빽한 빌딩 숲과 길 위로 지나는 사람들을 어지럽게 훑었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도 셔츠를 뚫고 들어오는 찬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쁜 숨을 내쉰 이수가 손등에 입술을 비볐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자 잔상 같던 풍경도 차츰 또렷해졌다.
“…….”
숨을 고른 이수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언제 다 피웠는지 마지막 한 개비만 덜렁 남아 있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술 사이에 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칼 같은 찬 바람이 가슴속에 작게 불을 지핀 감정을 도려냈다. 싸늘하게 식은 이수의 눈빛이 눈 아래 모든 것을 살폈다.
…역시 작다. 시선 아래로 사람들과 빠르게 지나는 차들 그리고 집마저도 장난감처럼 하찮고 작아 보여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이 세상에 사는 저 역시도 한낱 미물에 불과했다.
그 순간, 이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흐르는 시간이 적당한 때를 알려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어쩌면 지금이 그런 때라고. 복잡한 속내가 말했다. 답을 말하라고. 알고 있으니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이건 좋은 기회였다. 답에 대한 변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긴 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혼란한 감정을 열거할 필요도 상대를 설득할 이유도 없는 어쩌면 가장 완벽한 기회였다. 씁쓸한 탄성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아….”
그리고 약속처럼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과 직함이 떠 있다. 이시훈 팀장. 손바닥 한 뼘 정도의 아슬아슬한 난간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은 이수는 긴 시간 동안 그 이름을 외면했다. 이윽고 부재중 기록을 남긴 액정 화면의 불빛이 죽은 듯 꺼졌다. 마천루 사이로 노을마저 자취를 감추고 공허한 밤하늘이 맨얼굴을 드러냈다.
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옮겨 쥔 이수가 툭 허리를 분질렀다.
“…정말 끊어야겠네. 이제….”
허탈한 웃음이었다. 두 동강 난 담배를 내버리자 빌딩 아래 그 어딘가로 흔적 없이 자취를 감췄다. 아, 저렇게… 저렇게 순식간에 지나갔으면 좋겠다.
이수가 다시금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몇 층일지 모를 층계참에 우뚝 발을 멈췄다. 그 상태로 몇 걸음 걷지 못한 이수는 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시나리오를 그려 봤다. 좋은 구실이 제 입에 붙을 수 있도록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리허설처럼 여러 번 읊조렸다.
눈을 뜨고 시선을 흘깃 돌려 보자 내려가는 계단에 슬라이드처럼 지나간 장면들이 그려졌다.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져 큰일이었다.
* * *
-시간 괜찮아요?
시훈은 외근으로 종일 자리를 비운 탓에 회사로 복귀한 저녁에서야 난장판이 된 2팀 상황을 전해 들었다. 비어 있는 이수의 자리를 보고 전화와 메시지를 남겼다. 회신은 없었지만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퇴근을 앞두고 도착한 뜻밖의 메시지에 시훈이 지하 주차장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서늘한 주차장 한편에 시훈의 차 옆으로 이수가 비켜서 있었다.
“일단 차에 타요.”
날이 추웠다. 조수석에 탄 이수를 두고 시훈이 차 온도를 높였다. 단 하루 사이에 외꺼풀진 눈과 한눈에 봐도 핼쑥한 얼굴이 말도 못 하게 피곤해 보였다.
“전해 듣기는 했어요, 고생이네요. 식사 못 했죠?”
손을 뻗은 시훈이 이수의 턱을 제 쪽으로 돌렸다. 좀처럼 눈을 맞추지 않는 이수가 시훈의 손을 가만히 잡아 내렸다. 다른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묘한 분위기의 이수를 두고 시훈은 애써 벌어진 거리를 무시했다. 밥 먹일 시간은 없고, 커피는 지겹도록 마셨을 테다.
손등으로 가볍게 뺨을 쓸어내리자 이수는 슬그머니 조수석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만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
“30분이라도 눈 붙여요. 깨워 줄 테니까.”
조수석 각도를 조정하려 버튼을 누르는 시훈을 향해 이수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 팀장님. 인턴…, 고우재 씨.”
목구멍이 막혀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한 박자 숨을 고른 이수가 사무적인 투로 말을 이었다.
“기회가 필요합니다. 여 본부장님께서 완강하세요.”
“…….”
“고우재 씨 인턴십 마칠 수 있게 이 팀장님께서 의견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훈이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이수를 바라봤다. 부탁이었다. 아마 관계를 엮어 온 지난날 정이수에게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제 커리어를 뺏기든 말든 성희롱을 당하든 말든 안중에도 없던 정이수가 고작 인턴 때문에…. 시훈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흔들리는 눈빛이 사방을 배회했다. 곧 느릿느릿 낮은 물음이 입새로 흘러나왔다.
“지금… 그 문제 때문에 보자고 했어요?”
“…네.”
눈 한번 맞추지 않은 정이수는 고개를 숙이고 제 허벅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이수를 향해 앉아 있던 시훈 역시 시트에 등을 대고 정면을 바라봤다. 이제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시훈은 짐짓 무너지는 감정을 다잡아 본다.
“배우는 게 있겠죠. 미안하지만 부탁 못 들어줍니다. 들어주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
얼굴이 멋대로 뒤틀리는 것 같았다.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찡그린 것도, 아니, 실망한 것 같기도 한 제 모습을 시훈은 통제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 안 되죠, 이러면.”
부정했다. 너무 절박해서 저에게 털어놓은 것뿐이라고. 그러니까 이 정도로 정리하면 넘어갈 생각이었다.
“…이 팀장님.”
“근처에서 잠깐 커피라도….”
차 시동을 켜고 핸들을 잡은 시훈에게 절망이 떨어진 건 직후였다.
“호텔… 예약했습니다.”
시훈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순간 힘이 들어간 턱은 아플 정도였다. 그러니까 부탁을 하고 응당한 대가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처음 약속한 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삽시간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손끝은 차갑고 이미 귓전에 닿은 말을 무를 수도 없었다. 시훈이 더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만해요.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처음 자세 그대로 앉아 있는 정이수의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걸린 마른 입술로 건조하고 단조롭게 전하는 말들은 하나같이 시훈의 가슴에 구멍을 내었다.
“저는 지금 이시훈 팀장님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이 팀장님은 그걸 해 줄 수 있구요. …미안하지만, 이 팀장님이 원하는 관계는 우리 사이에 안 어울려요.”
차라리 뺨을 맞는 게 나았을 테다.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음 이수가 제 책상 앞으로 걸어와 프로젝트를 거절해 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만 해도 분노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다. 자신을 배경으로 재단하고, 당연하게 체계마저 무시할 만한 재벌가 자제쯤으로 여긴 정이수에게 화가 났다. 유진우와의 추문은 차치하고 적어도 정이수를 직급자로서 존중했던 데서 오는 실망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밑바닥부터 피어오르는 감정은 모멸과 배신이었다. 함께 나눈 밤과, 뜨거운 온기, 같은 속도로 서로의 가슴을 울린 박동 소리도 모두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인턴 하나 살려 보겠다고….”
“전에 물었잖아요. 원하고 바라는 거 없느냐고. 필요하면 하지 말래도 부탁하겠다고 했어요. 지금… 난, 이걸 원해요.”
또박또박 말을 뱉는 이수에게서 망설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수가 준비한 말들을 줄줄 내보내는 동안 입안으로 혀를 굴린 시훈이 툭 고개를 떨궜다. 하. 체념 섞인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뭘 기대했을까. 정이수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모든 예상이 빗나가며 정이수를 품에 안은 그날처럼 다시 그는 훌쩍 등을 돌리고 있었다.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정이수와의 관계를 곱씹어 보던 시훈이 서늘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이게 답이에요?”
“…네.”
“…….”
차 시동이 꺼졌다. 미미한 엔진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침울한 적요만이 공간을 내리눌렀다.
“호텔까지 가기 싫으면 여기에서…,”
“…가.”
한숨처럼 무거운 목소리가 말을 잘라 냈다. 한쪽 손목을 핸들 윗머리에 올린 시훈은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주먹을 쥔 손이 작게 떨렸다.
“…….”
“사람… 바닥까지 끌어 내리지 말고… 그냥 가.”
이내 문이 열리고 굳게 닫혔다. 답을 기다린 질문은 막다른 벽에 가로막혀 시훈의 발치에 돌아와 있었다.
“실수는 누구나 해요.”
이수가 말했다.
낯빛이 하얗게 질린 고우재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고우재가 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
“아직 고우재 씨는 배우는 사람이고, 책임은 윗사람들이 지는 겁니다.”
“…….”
바보 같았다. 김민주 대리가 같이 진행해 보자고 공유해 준 업무에 잔뜩 들떠 있었다. 그동안 자료를 찾거나 서포트하는 업무만 하다 한 발 더 나아간 기분에 감히 우쭐댔다. SNS에 야근이니 회의니 늘어놓은 푸념마저 사실은 은근한 자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동기나 후배들이 이마저도 부럽다는 댓글을 달 때는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다 사리 분별 못 하고 저지른 실수가 대형 사고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밤중 김민주 대리의 전화를 받고 그 즉시 계정을 삭제했지만 이미 포털이며 커뮤니티에 너무 많은 게시물이 떠돌고 있었다. 밤새 핸드폰을 쥐고 있을 수도 안 볼 수도 없어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아침 해를 맞았다. 초토화된 사무실에서 제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고작 인턴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는… 제가 이렇게 멍청한 놈인 줄 몰랐어요…. 허세만 가득해서는….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고우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옹송그린 어깨가 더욱 굽었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 여겼으니 실망도 클 테다. 바닥끝까지 떨어진 자존감이 한눈에 보였다.
“…저는… 인턴십 잘리는 거죠?”
이번에는 이수가 쉬이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인사이트를 희망한다 했다. 그리고 광고인을 꿈꾼다고 했고, 첫 단추를 잘 꿰고 싶다 했다.
“아직 결정된 바 없어요.”
“…아마, 신입 사원… 지원도 못 하겠죠? 아닙니다…. 이런 때 그런 걱정이나 하고…. 죄송해요.”
고우재가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씁쓸하게 웃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수는 절망하는 고우재를 바라봤다.
이수는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일부러 보려 하지 않아도 고우재에게 제 신입 시절을 대입하는 일이 잦았다. CM송이 재밌어서 광고를 시작했다는 계기나 차고 넘치는 열정과 아이디어가 즐겁고 벅차서 매일매일 설레 하던 모습도, 욕심껏 쫓아다니며 일을 배우던 모습까지도 비슷했다. 그래서 마음이 더 갔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녀석이 첫 단추가 잘 꿰어진 옷을 입고 인사이트를 휘젓고 다니는 상상을 했더랬다.
“밥은 먹었어요?”
고우재는 말이 없었다. 물은 한 모금이나 마셨으려나. 이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업무에 관한 짧은 통화를 마칠 때쯤 고우재가 이수를 불렀다.
“…팀장님.”
“네, 고우재 씨.”
고우재가 마른침을 삼키고 이수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하셔도 할 말 없지만…, 뭐라도 맡겨 주시면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할게요. 다시 한번…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책상 위로 머리가 닿을 때까지 고우재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는 말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고우재 씨.”
다만 이수 역시 고우재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나도… 나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당치도 않은 사과를 받은 고우재가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게요.”
“…….”
이수가 전한 사과의 의미를 모르는 고우재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고우재가 허리를 한껏 숙이고 소회의실을 나섰다. 문밖으로 나선 녀석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볍게 내쳤다. 정신 차리자 스스로를 깨우는 의식이었다. 이내 고우재는 제자리로 돌아가 김민주 대리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멀리서 일을 하는 팀원들이 분주했다. 이수는 밖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홀로 앉아 있는 테이블 위 그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이수의 어깨가 미약하게 주저앉은 건 한순간이었다.
책상 위로 모아 올린 손바닥에 손톱이 박혔다. 주체할 수 없이 잘게 떨리는 몸이 무너져 흔들리는 감정을 대신 토로하고 있었다. 흐느낌 같은 한숨이 어쩔 수 없이 흘러나왔다.
“…아흑….”
제게 주어진 문제지는 익숙하지 않았다. 사랑에 휘둘려 당하기만 한 이수에게 남겨진 질문은 전부 풀어 보지 못한 문제였다. 결국 답을 고민하며 매일을 지새웠다.
시훈으로 인해 차곡차곡 쌓인 감정들은 정리해 두지 않고 한편에 가득 쌓아 놓은 물건 같았다. 어디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모르고, 대체 어떤 감정이 한데 뭉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사이사이 진득한 감정이 파고들수록 현실은 수렁에 빠졌다. 인사이트, 유진우, 여민준 본부장, 주현탁 실장 등등… 가혹했던 과거와 한데 묶여 덩치를 키워 갔다.
그런 자신에게 답을 써 달라 막상 펜을 들려 주자 그곳에는 눈을 굴리는 겁쟁이가 넝마가 된 욕심을 들고 서 있었다.
오늘 이수는 대회의실에서 저를 마주한 사람들의 눈빛을 보았다. 유진우의 누군가가 아닌 팀장 정이수, 기획자 정이수로서 바라보는 시선들을. 직속 상사인 여민준 본부장과 밤새 의견을 조율하며 몰두한 시간과 팀원을 위한 좋은 선배이자 리더로서의 역할까지. 이수가 바란 대로였다.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묘한 기시감과 불안을 느낀 이유는 아마도 과거의 정이수를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선택에는 대가가 따랐다. 이수는 일찍이 그걸 경험해 봤다. 반짝이는 청춘을 바쳐 사랑을 했지만 빛은 상대를 비추었을 뿐 제 몸이 녹아 문드러지는 줄도 몰랐다. 눈을 피하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지쳤고, 언젠가 드러나면 얼룩이 남을 사람은 저뿐인 것도 불 보듯 뻔했다. 다시는 그런 불안함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남은 상처들과 오해 역시 무턱대고 덮어 놓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여태 갈리지 못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니 고우재는 상대를 기만하기 좋은 구실이자 시훈의 열망을 꺼트릴 수 있는 냉혹한 핑계가 됐다.
“…흐…….”
차마 두 손 위에 얼굴을 묻을 수 없어 고개만 숙인 이수가 아프도록 이를 사리물었다. 명치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 왔다. 수만 갈래로 갈라진 마음이 종내에는 찢겨 피를 흘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상처받은 시훈을 감히 바라볼 수 없어 몇 번이고 되뇌어 연습한 말만을 기계처럼 늘어놨다. 고우재, 인턴, 부탁, 호텔. 그런 말들. 이시훈은 저 같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호텔과 섹스를 운운하며 모욕을 줬다.
언제나 사랑받고 싶었지만 온전하지 않았다. 이번이라고 다를까. 우리 사이가 어떻게 시작됐는데…. 결국 이수는 홀로 남기를 택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토록 가슴이 미어질까.
똑똑.
“팀장님. 지금, 어… 괜찮으세요…?”
급하게 반쯤 문을 연 김민주 대리가 어깨를 굽힌 이수를 보고 놀랐다. 눈꼬리가 발간 이수의 낯은 상황을 모르는 김 대리에게는 피로의 잔재처럼 보이는지 많이 피곤하시냐 묻는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눈을 감았다 뜬 이수가 김 대리를 마주했다.
“지금 위에서 전화가 와서요. 그리고 미디어팀하고 바로 회의요.”
이수가 자리 앞에 놓인 서류를 한데 갈무리하며 습기가 묻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 지금 가죠.”
손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아프지 않았다. 그럴 만한 자격도 없었다.
소회의실 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소름 끼치도록 밝은 형광등이 사무실을 밝히고 있었다.
* * *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M사의 제품은 론칭 행사 직후 단 하루 만에 기록적인 판매고를 세웠다. 이슈 역시 현재까지 뒤를 따랐다. 인사이트 내에서 준비한 ATL(Above the line, TV, 라디오, 신문, 잡지 등) 기획은 수정이 불가피했으나 시행된 마케팅에 발맞춰 순차적으로 온 에어 되었다.
론칭 행사를 앞둔 며칠 전 웃지 못할 기사가 실리기도 했는데 실상 신제품 스펙 유출은 의도적인 마케팅이 아니었느냐는 의혹이 담긴 기사였다. 2030을 메인 타깃으로 설정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규정하여 고우재의 신분을 인턴으로 섭외된 인플루언서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이에 기사 말미에는 M사의 마케팅을 담당하는 대행사 인사이트가 언급되었고, M사에서 뚜렷한 답을 얻지 못한 기자들에게서 후속 기사를 싣기 위해 사실 여부를 묻는 전화와 메일이 도착하기도 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꼭 맞았다. 벼랑 끝까지 몰렸던 2팀의 선전으로 인사이트는 업계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인사팀의 계약 종료 승인만 기다리던 인턴 고우재에게도 운이 따랐다. 일련의 기사들로 인턴으로 둔갑한 인플루언서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글이 화제가 되었고, 이를 인지한 윗선에서 고우재의 잘못을 묻어 두기로 한 것이다.
인본주의를 경영 철학의 한 축으로 삼고 청년 실업을 타파하는 데 일조하겠다는 문동현 대표의 최근 대학 강의와 부합했지만, 실상은 결과 중심주의의 산물로서 고우재의 거취가 그렇게 결정됐다.
여민준 본부장에게 M사와 구두로 오간 재계약 건 보고를 마친 이수가 인사팀에 들렀다. 몇 가지 서류를 제출하고 난 후 사무실을 나서는 인사팀장과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임순정 대리 다음 주 복귀죠? 인턴십도 곧 마무리되고요.”
“네.”
“정 팀장님. 근데… 나간다는 사람 붙잡고, 나가야 할 사람 잡아 두면… 안 힘들어요?”
최근 잦은 면담으로 지친 인사팀장은 다소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감정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전자는 임순정 대리를 후자는 인턴인 고우재를 빗대고 있었다.
“인턴. 지금이라도 다른 부서로 돌리지 그래요.”
인사팀장이 이수의 의중을 떠본다.
“팀 내부적으로 잘 봉합됐어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난, 정 팀이 이렇게 무른 타입인 줄 몰랐는데….”
“제가… 그랬나요?”
인사이트 내에서 이수에 대한 평은 대체로 그랬다. 퇴근길에 마주친 사람들과 맥주 한잔을 기울인 건 아마 대리로 진급하기 전이 마지막이었을 테다. 그때쯤 입사 동기들 몇몇이 견디지 못하고 이직과 퇴직을 했고, 자신은 유진우와 엮이고 일 때문에 미쳐 돌아가던 때였으니까. 그래서 정이 없는 축이라고 여겼나 보다.
이수의 멋쩍은 웃음에 오히려 인사팀장이 두 눈썹을 들썩였다. 아마도 이수의 말갛게 웃는 모습이 낯설어서였다. 좀처럼 못 보는 얼굴이었다.
“어쨌든,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에요. 사실… 일 커지는 줄 알고 우리도 긴장했거든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무슨…. 원래 그렇잖아요. 결과가 좋으면 과거는 잊고 영광만 남을 뿐이죠.”
그럼 수고하세요. 앞서가는 인사팀장이 코너를 돌자 아무도 없는 긴 복도에 홀로 남았다. 과거는 잊고 영광만 남는다, 라…. 과연 제게도 그럴까. 습관처럼 외꺼풀진 눈을 이수가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졸작은 얼추 마무리됐는데… 브로슈어 때문에 단체 사진을 찍어야 한대서요.”
오후,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탄 고우재가 내일로 예정된 반차의 사정을 설명했다. 지난 몇 주간 고우재는 겉으로는 여전히 밝고 씩씩했지만 철들기 시작한 사춘기 아이처럼 때때로 몸을 사렸다. 치기와 열정만으로 뛰어들기에 사회와 회사는 훨씬 냉혹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에 대한 송구함과 감사 역시 잊지 않았다.
이수는 고우재를 가능한 팀 내 모든 회의에 참석시키고 김민주 대리에게 되도록 구체적인 업무를 내리도록 주문했다. 사람이 손을 놓고 있으면 잡생각이 많아지기 십상이라 이수가 내린 처방이었다. 기가 죽은 신입은 의견을 묻어 두고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 고우재는 그런 신입이 되어서는 안 됐다. 다행히 타고난 성정 때문인지 기운을 차린 얼굴이 요전 날부터 맑게 개었다.
“벌써 시즌이 그러네요.”
이수가 쌍꺼풀진 한쪽 눈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곧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코앞이었다. M사의 일이 성과를 보여 안도하자 다음 비딩을 준비하는 일정이 이어졌다. 여민준 본부장이 직접 이수에게 하달하는 일이 많아졌고, 예산 책정과 업무 보고 및 제안서를 확인하는 과정이 무리 없이 이어졌다.
“저희 졸작 사이트 오픈하기는 했어요. 티징이긴 하지만.”
“시각디자인과라고 했죠? 광고 만들었어요?”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뜻밖에 이시훈이 서 있었다. 최근 이시훈 역시 비딩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사무실에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짧게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인 시훈에게 이수 역시 간신히 예를 차렸다. 이어 고우재가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그런 고우재에게 한동안 시선을 고정하던 시훈이 버튼을 누르고 이수의 뒤편으로 한 발자국 비켜섰다.
껄끄러웠으나 감정이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다. 문이 닫히고 층을 이동하자 핸드폰을 꺼낸 고우재가 이수 쪽으로 액정 화면을 내밀었다. 오픈 날짜를 공지한 사이트의 메인 화면을 올리는 손이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이게 저희 사이트거든요. 이벤트도 해요. SNS에 공유하기 하면 저희가 추첨해서…”
그 순간, 시훈이 말을 자르고 고우재를 불렀다.
“고우재 씨.”
“넵. 팀장님.”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우재가 재빨리 핸드폰을 내리고 몸을 돌렸다. 감흥 없는 표정으로 층 표시기의 층수를 올려 보는 시훈이 서늘한 충고를 전한다.
“회사에서 업무만 하세요. SNS 그런 거 하지 말고.”
따끔했다. 아니, 따끔하다 못해 가슴을 훅 후벼 파는 주의에 고우재가 크게 당황하며 핸드폰을 얼른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적막이 흘렀다. 고우재는 의기소침해져 입을 다물었고, 이수는 티 나지 않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내쉬지 못한 한숨이 가슴속에 꽉 들어차 답답했다. 자료실에 당도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우재가 두 팀장에게 꾸벅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내렸다. 간신히 기운을 차린 고우재는 뾰족한 충고에 다시 기가 팍 죽어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있어요?”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게 되자 이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고우재의 잘못은 모르는 바 아니나 직속 상사가 있는 자리에서 타 팀의 팀장이 할 발언으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회사 들어먹을 뻔했는데 이 정도 충고는 감사하게 받아야죠.”
등 뒤에서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감으로 대하지 말아요.”
둘 사이의 일 때문에 불똥이 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되받아치는 이수의 말들은 하나같이 힘이 없었다. 불편함이 주변을 맴돌았다. 밑질 것 하나 없었던 전과 달리 마음의 무게가 버거울 지경이었다.
“누굴 감싸요, 지금.”
“…….”
“일말의 예의 같은 거 없어요?”
시훈이 머리카락을 넘기며 고개를 비틀었다. 문에 비친 이수를 삐딱하게 바라본 시훈이 내려가는 층수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무심하게 혼잣말을 뇌까렸다.
“아, 혹시 이것도 부탁… 뭐, 그런 거예요?”
“…이 팀장님.”
감았다 뜬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수가 메마른 아랫입술을 한껏 깨물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흥미가 없는데… 이거 상황이 영 안 맞네.”
빈정대는 시훈의 어조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만… 그만하죠.”
한숨처럼 중얼거린 소리가 입 밖으로 간신히 흘러나왔다.
고우재를 구실 삼아 시훈에게 가한 상처는 부메랑이 되어 서로를 끊임없이 내치고 있었다. 처음은 시훈이 이수에게, 다시 이수가 시훈에게. 뫼비우스 띠에 올라탄 상처가 돌고 돌았다.
그날 이후, 이시훈은 식사를 같이하자는 제안도 하지 않았고 몸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성립되지 못한 조건 속에 엉망이 된 관계는 진창을 굴러 어디를 향하는지 두 사람 다 알지 못했다. 복도나 사무실에서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업무로 말을 섞을 때면 여상하게 대화를 이어 갔지만 미묘하게 틀어진 말투와 눈빛들이 달라진 상황을 말해 줬다.
사람이 타지 않는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두어 번 열리는 동안 등 뒤에 선 시훈의 핸드폰에서 메신저 알림음이 여러 번 울렸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옅은 담배와 향수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그건 시훈에게 안겼을 때 또 그를 끌어안았을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
기억에 침전하지 않으려 가까스로 붙잡은 이수의 신경이 툭 끊어진 건 메시지를 확인하던 시훈이 이수의 옆으로 팔을 뻗을 때였다.
“…아….”
순간적으로 반응한 몸이 본능적으로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눌린 층을 취소하고 로비 버튼을 누른 시훈의 손이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외로 돌아간 이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흘깃 문에 비친 시훈에게 닿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시훈은 자신과 달리 별다른 동요 없이 핸드폰에 메시지를 입력하는 중이었다. 홧홧한 얼굴은 좀체 가라앉지 못하고 뛰는 가슴 역시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내린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상야릇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고정 중인 시훈이 무신경한 말투로 입을 뗐다. 얼핏 냉랭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 팀장님. 운동하세요.”
“…….”
맥락 없이 떨어진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수 앞으로 로비에 다다른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원래 체력이 약하면 사람이 쉽게 예민해지거든요.”
카운슬링처럼 어조는 담백하고 진지했다. 이수를 지나 밖으로 내린 시훈이 이내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한 것도 없는데 자꾸 의식하지 말죠. 서로 민망하잖아요.”
시훈이 헛웃음과 함께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여전히 볼이 상기된 이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넋을 빼고 있는 이수를 향해 바깥에 선 시훈이 로비 쪽으로 턱짓을 했다.
“안 내려요?”
“…….”
상처로 갈아 낸 긴 송곳이 불시에 이수를 향했다. 뒤죽박죽 섞인 기묘한 위화감이 이수를 죄어들었다. 그러니까… 가벼웠다. 이시훈답지 않게 이수를 대하는 모든 것이 그랬다. 과거 회식 자리에서 내쏘던 충고나 술에 취한 자신을 집에 바래다주며 속을 긁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무게감이 훌쩍 멀어진 사이를 가늠케 했다.
이 팀장님, 여기요! 멀리서 이시훈을 부르는 소리가 로비를 가로질러 울렸다. 문을 잡은 손이 떠나며 이시훈과 이수 사이에 벽이 드리웠다. 버튼을 누르지 않은 엘리베이터는 지하를 향한다. 이수의 마음처럼 볕 한 줌 없는 곳이었다.
* * *
오후 회의에 들어가기 전 여민준 본부장은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시훈을 발견했다. 곁에 선 여 본부장의 어깨가 추운 바깥 온도에 절로 움츠러들었다.
“늦게까지 마셨어?”
어제 회사 근처에서 고객과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는 길이었다. 우연히 바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시훈을 만났더랬다.
“적당히.”
시훈이 태우는 담배 연기가 찬 바람에 이는 입김과 함께 순식간에 날려 사라졌다. 여 본부장이 알기로 시훈은 홀로 술을 마시는 타입은 아니었다. 의아하기는 했어도 고객을 대동하고 지나가는 길이라 눈인사만 하고 말았다. 그런데 몰골을 보아 하니 한 잔 정도로 끝나지 않았나 보다. 한 대만. 여 본부장이 안주머니에서 전자 담배를 꺼내다 말고 시훈에게 연초를 빌렸다. 오랜만에 태우는 연초에 깊게 숨을 들이쉰 그가 가볍게 질문을 날렸다.
“이 프로. 너 요즘 왜 그러냐?”
“뭘요.”
“몸 갈리는 거 한순간이야. 하루 종일 일하고 남는 시간에는 쉬어야지, 무슨 술이야… 술은.”
하는 말마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던 입은 묵묵부답이고 나오는 건 담배 연기뿐이다. 여 본부장은 곁눈질로 시훈을 바라보다 저 혼자만 알도록 작게 혀를 찼다. 근래 들어 둘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지 싶은 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를 때가 나았다. 알고 나니 눈에 보이고, 그 뒤에는 심란함이 뒤따랐다. 두 사람을 대동하고 회의에 참석할 때나 우연히 탕비실에서 마주칠 때면 쌩하게 찬바람이 불었다. 시훈이 어차피 충고를 들어 먹을 녀석은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제 충고를 따라 몸을 사린다기에는 지나치게 경직된 말투나 시선들이 예전 같지 않았다.
“시훈아. 거… 내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딱 하나만 물어보자.”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여 본부장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둘이… 그러니까 너하고 정 팀하고…. 이걸 뭐라 그래야 돼….”
딱 집어 입에 올리지를 못하겠다. 자칫 선을 넘을까, 한편으로는 예상보다 더 깊게 알게 될까 두렵기도 했다. 그렇다고 눈치만 볼 수는 없지 않나. M사의 프로젝트를 수습한 이후 자의든 타의든 정이수는 여 본부장 사이드로 분류됐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입을 닫고 있으니 여 본부장만 속이 탔다.
“뭘 알아야 나도 대응을 하지. 너 저번에 주현탁한테 깽판 쳐서 그날 수습하느라고 속 터지는 줄 알았어.”
에이, 쯧. 존심 상하게 말이야. 한정식집에서 노발대발하던 주 실장을 생각하니 담배 맛이 똑 떨어졌다. 그 뒤로 무슨 작정을 했는지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통에 만날 때마다 신경이 서 있는 참이었다.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흠칫 몸을 움츠린 이수가 조각난 파편처럼 떠올랐다. 아마도 그게 지금 정이수와 저와의 거리, 혹은 사이를 설명할 수 있는 단편적인 장면일 테다. 시훈이 손끝으로 길게 재가 핀 담배를 가볍게 튕겼다.
“정의 내리는….”
거리낄 것 없다 생각하고 쉽게 털어 버리려고 해도 한순간 답이 목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그런 사이 아니야.”
씁쓸함이 혀끝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아리송한 대답에 여 본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있네, 진짜.
“그럼 뭔데. 어? 둘이 뭐 어뜩하다가… 어휴… 씨.”
공식에 대입해 봐도 좀처럼 답이 없는 수학 문제를 둔 심정이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을 벅벅 긁어 댄 여 본부장의 핸드폰 알림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급히 통화 버튼을 누른 그가 손짓으로 먼저 가겠다 제스처를 취한다.
홀로 남은 시훈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모르지… 시발. 그걸 알면….”
조소도 뭣도 아닌 미소에 턱이 비틀렸다. 형편없는 답이었다. 어쩌면 비겁했을까. 정이수에게 주도권을 줬지만, 결국 오만한 기대로 빚은 선심일 뿐 머릿속에 답을 정해 놓고 시기를 가늠할 뿐이었다. 너는 그래, 무조건 나를 따라올 거야, 그럴 수밖에 없다고. 여기에서 네 곁에 있는 건 나뿐이라고.
시훈의 지난 연애는 정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사람을 만났고 나쁘지 않았고 바쁘다는 핑계와 시들해진 상대를 비난하다 그저 멀어졌다. 그 정도가 연애의 마지노선이었다. 감정은 소비될 뿐, 본인 혹은 상대의 감정을 공유하고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정이수에게 거절당한 후에도 솟구친 맹렬한 욕구는 생소하기만 했다. 생소하여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 치기 어린 저열한 감정이 불쑥불쑥 저를 옭아맨다. 아무렇지 않게 사무실을 지나고 복도를 지나고 일을 하는 정이수를 볼 때면 과거의 그날처럼 바닥까지 무너져 저에게 먼저 손을 뻗기를 갈망했다. 상대의 불행을 기도한다. 그게 지금 시훈의 조악해 마지않는 바람이었다.
관계 사이에 필요악이 돼 버린 ‘조건’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다. 버리면 정이수를 잡을 수 없고, 가지고 있다 한들 엉망인 관계는 곪을 뿐이었다. 허울뿐인 관계를 붙잡아야 하는 사실이 지독히도 모순적이었다.
서른이 넘으면 일이든 사랑이든 뭐든 하나 정도는 궤도에 오르리라 막연한 기대를 했다. 긴 시간 어른인 체하고 어른처럼 구는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불쑥 제 삶에 뛰어든 존재가 그 모든 노력을 와르르 무너트렸다.
시훈이 필터까지 욱여 피운 담배꽁초를 내버렸다. 씁쓸함만 남은 손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전에는 이보다 적은 예산 가지고도 진행했잖아요.”
외부 사업 건을 주로 다루는 주현탁 실장의 회의 참석은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회의 내내 여민준 본부장과 각을 세우는 상황 역시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김지학 전무가 회의 도중 외부 일정으로 먼저 자리를 뜨자 회의 말미 주 실장이 뜬금없는 사업 건을 들이민 것이다. 이맘때쯤 김 전무가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업무 의뢰였다. 돈 안 되고, 고생만 좆 빠지는.
“그때는 그때고요. 연말에 사이즈 큰 비딩들 줄줄이 엮여 있는데 뻔히 알면서 끌고 오면 어떡합니까. 거참….”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일 여 본부장이 예의를 차려 설득하기를 몇 번. 결국 의자를 홱 돌려 앉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당장에 논의해야 할 연말 일정은 답보 상태였다. 두 사람의 기 싸움에 다들 말 한마디 못 하고 냉랭한 분위기가 지속됐다.
“아니, 전무님하고 말 다 맞춰 놨다니까 그러시네. 딱 보면 몰라요, 당장 영업 이익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포텐이 있어요, 얘네가.”
새로운 미래 사업을 구상하는 전략실에서 고민할 사안은 맞으나 ATL을 중심으로 기획하는 기획 1본부와는 결이 다른 문제였다. 신규 팀이나 TF를 꾸려야 할 판에 자꾸 억지를 부리니 여 본부장은 짜증이 났다.
“다른 업체 리스트 넘겨 드릴 테니까 직접 컨택하셔요. 아니면 다른 본부하고 상의하시든가. 우리 말고 다른 본부도 역량이 훌륭해요들.”
“왜 이렇게 자빡을 대시나…. 2팀 안 돼요? 정이수 팀장 요새 타율 좋던데. 넘어져도 떡함지에 넘어지신다며.”
“주 실장님.”
“것도 안 되면… 여기 1팀은.”
그에 세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 1, 2팀장을 제외하고 그 외의 팀장들까지 있는 중에 두 팀만 꼭 집어 말하는 모양새가 불안불안했다. 시훈이 손에 쥔 펜을 던져 놓듯 떨구자 데구루루 펜 구르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을 울렸다. 그 모습을 보고 미간에 심지를 세운 여 본부장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 실장님. 저희 본부 업무는 본부장인 제가, 승인을 하여서, 제 입으로, 하달합니다. 저희 회의해야 됩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시면 회의 끝나고 차 한잔하세요.”
도가 넘는 참견에 여 본부장의 심기가 불편해지다 못해 불쾌해졌다. 주현탁 실장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뒤로 밀린 의자가 회의실에서 외떨어졌다.
“아이구… 무서워서 제안을 못 드리겠네.”
주 실장이 나간 뒤에도 냉한 분위기가 여전히 회의실을 맴돌았다. 여 본부장은 시훈과 정이수를 눈동자만 굴려 흘깃 바라본다. 금세 낯을 바꾼 여 본부장이 심란한 분위기를 잘라 냈다.
“자, 정 팀장.”
“네.”
“일정, 이슈 브리핑하지.”
이수가 브리핑을 하기 전 잠시 숨을 골랐다. 유진우 본부장 밑에 있을 때는 어떻게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저 하나였다. 직속 상사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고, 매번 고립되어 섬 같던 과거와 지금은 확연히 달랐다. 여전히 저를 향한 여민준 본부장의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산하의 팀장으로서 소속감이 느껴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수는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연말 비딩의 경우 내년 매출액을 결정짓는 연간 단위 계약이 많다. 그만큼 중요도를 따질 수 없는 비딩이 스케줄 표를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유독 시간이 금과 같은 때라 회의는 짧고 굵게 진행됐다.
“그럼 정리되는 대로 다시 보고 올리시고, 회의 여기서 마칩시다.”
여 본부장이 회의 종료를 알리자 각 팀장들이 분주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시훈과 이수 역시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뒤늦게 일러둘 사항이 기억나 이수를 불러 세운 여민준 본부장이 황급히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예. 전무님. 아…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오해가 있으신… 네. 제가 10여 분 내로 집무실로 찾아뵙겠습니다.”
대답만으로 내용을 간단히 유추할 수 있었다. 주현탁 실장이 김지학 전무에게 득달같이 상황을 전달했을 테다. 매년마다 기획팀을 괴롭히는 버릇을 끝끝내 포기 못 한 모양이다.
“거… 고약하네.”
여 본부장이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이수에게 못다 건넨 지시 사항을 열거했다.
“이거 예산 좀 더 채워요. 걔네한테는 깎일 거 생각하고 버짓을 크게 잡아 넣어야 된다고. 그리고 정산 그룹 말이야. 말 돌아서 알겠지만 새로 앉은 브랜드전략실장이 외국물 먹은 대행사 출신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기려 들더라고. 지 밑의 책임급하고도 손발이 안 맞는지 부담스럽게 OT까지 들어오구 말이야…. 저번에 2본부에서 미팅 들어갔다가 신나게 깨지고 왔다 그러더라고.”
모기업인 정산 그룹의 하반기 인사이동이 대체로 파격적이었다 들었다. 아마도 이중건 회장의 삼녀를 중심으로 승계 작업이 물밑에서 진행되는 탓이었다. 2본부 마 팀장에게 지나는 소리로 듣자 하니 책임급들 공석이 많아 미팅 때마다 애를 먹는다 했었다.
“요는, 내년 상반기에 1팀이든 2팀이든 정산은 우리 본부에서 잡고 들어가야 할 거 아냐.”
“네, 맞습니다.”
“이 팀한테는 언질 줘 놨으니까 정 팀도 미리 케이스들 봐 둬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E사 광고주도 대행사 출신이라네. 뭐 좀 안다고 까다로운 모양인데 적당히 장단 맞추면서, 일단 수긍해 주고 다음에 제안 들어가게끔.”
마케팅팀 만들어서 직접 굴리느라고 애들 쓴다. 광고는 결국 기획하고 크리에이티브 싸움 아니야? 예산 줄여 보려고 근시안적으로다가… 필드에서 뛰는 애들 다 빼 가구 말이야. 돈을 아끼면 쓰냐고. 으휴….
연말을 앞두고 영업 이익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여 본부장의 두서없는 푸념이 이어졌다.
“아무튼 무슨 말인지 알죠?”
“네.”
말을 마친 여 본부장이 여전히 곁을 지키고 서 있는 이수를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뭐 할 말 있어요?”
“저… 주 실장님이 말씀하신 업무 말입니다. 곤란하시면 다른 업체 붙여서 초반 핸들링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회의 테이블에서 서류를 챙긴 여 본부장이 잘라 대답했다.
“안 곤란해요.”
“네?”
“까놓구 말해서 뭐, 유진우 본부장이야 김 전무 라인이었으니까 예의 차렸다 치지만… 난 아니잖아.”
무심하게 여민준 본부장이 과거를 되짚는다. 딱히 이수를 감싸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직속 상사의 시의적절한 개입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마땅히 당연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팀 회식이죠?”
임순정 대리가 금주 월요일부터 복귀를 했고, 고우재는 오늘이 인턴십 마지막 날이었다.
“네. 혹시 참석 가능하십니까?”
“됐어요. 젊은 애들 사이에서 치이는 거 싫어.”
핸드폰으로 들어오는 메시지를 확인하는 여 본부장은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한다. 모를 때는 그러려니 한 행동이 문득 이시훈과 비슷한 모습으로 비쳐졌다. 갑시다. 이수가 여 본부장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지나 멈춘 두 사람이 곧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였다. 닫힌 문이 다시 열리고 시훈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이 프로. 아직 안 갔어?”
“구 팀장하고 잠깐 이야기하느라요.”
바깥쪽에서 열어 놓고 꾸역꾸역 대답만 하고 있자 여민준 본부장이 비켜서며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뭐 해, 타. 얼른.”
“…….”
시훈의 시선이 여 본부장 어깨 너머의 정이수에게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의도적으로 눈을 피한 이수가 고개를 떨궜다. 이내 스윽 발을 물린 시훈이 버튼에서 손을 뗐다.
“먼저 내려가세요. 회의실에 문서를 놓고 와서.”
가볍게 묵례를 하는 모습은 문이 닫히며 사라졌다. 여 본부장이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었다.
“…정 팀장.”
“네.”
“내가 요즘 일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지친다. 그, 둘이 말이야….”
“…….”
“…아니다…. 됐다, 됐어….”
그나마 참고 참은 말에도 뼈가 있었다. 후우… 속에 쌓인 말은 많은데 차마 내뱉을 수가 없는 여 본부장이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주말 여민준 본부장은 한남동에 다녀왔다. 집에서 조촐하게 식사나 하자는 초대에 찾아갔더니 자리가 마무리될 때쯤 이중건 회장이 에둘러 시훈의 회사 생활은 어떤지 물었다. 질문은 언뜻 싱거워 보였으나 의도는 명확했다.
최근 회사가 굴러가는 상황을 보면 그때 정이수를 내치지 않은 건 잘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시훈이를 생각하면 옳은 결정이었는지 확신을 못 하겠다. 여 본부장이 긴 숨을 토해 냈다.
* * *
2팀의 저녁 회식은 오랜만이었다. 오늘 회식은 팀으로서 의미가 깊었다. 복귀한 임순정 대리와 인턴십을 마무리하는 고우재 때문이기도 했고, 최근 쉽지 않은 비딩에서 성공을 거둔 2팀에 여민준 본부장이 법인 카드를 쥐여 준 것이다.
예약한 횟집에 자리를 잡고 앉자 준비된 음식이 세팅되었다. 제철을 맞은 신선한 회에 간단히 술을 들기로 했다. 건배를 하기 전 팀원들이 인턴십을 종료하는 고우재에게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사무실에서 자리를 정리하고 발급된 사원증을 인사팀에 반납하고 돌아올 때도 씩씩했던 고우재는 상자를 끌어안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가만 보니 곧 울 것처럼 눈이 새빨갰다.
“고우재 씨, 한마디 해요.”
고우재의 사수인 김민주 대리가 소감을 권했다. 와락 터질 듯한 울음을 간신히 참아 낸 고우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진짜… 사고만 치고… 그런데도 이렇게 보듬어 주셔서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저… 격려해 주셨던 마음 안고 더 열심히, 더 잘해서 좋은 광고인이 될게요. 선배님들, 정말 죄송하고, 감사… 감사했습니다… 으… 흡….”
“울면 이거 찍어서 SNS에 다 퍼트릴 거예요.”
김민주 대리의 사진 찍는 시늉에 와르르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고우재가 쏘아 올리고 이수와 팀원들이 수습한 M사와는 내년도 연간 계약까지 끝마쳤다. 선회한 전략이 주요했고, 현재까지 후속 광고가 제작, 온 에어 되는 중이었다. 이제는 웃으며 말한다지만 당시에 얼마나 애를 썼는지. 큰 고비를 함께 헤쳐 나간 팀에는 단단한 결속력이 생겼다.
이수가 그동안 꿈꿨던 순간이었다. 온전히 능력으로 인정받고, 마음껏 일할 수 있는 배경과 구성원 모두의 톱니바퀴가 맞아 돌아가는.
그러니까 순조로웠다. 아마… 저 하나만 빼고. 잠자리에 들면 가지런히 오와 열을 맞춰 놓은 감정이 기다렸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통통 튀는 구슬처럼 온 마음을 부산하게 굴러다녔다. 의식 속에 불쑥 찾아들어 구슬을 헤집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매일 밤 부러 모른 체했다. 결국 사방으로 퍼진 구슬을 한 번에 잡을 수 없으니 쫓다가 밤을 지새웠다. 다시 불면이 시작됐다.
“임순정 대리는 술 괜찮아요?”
식사 중 이수가 옆자리에 앉은 임순정 대리를 돌아봤다.
“네, 맥주 한두 잔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럼 한잔할래요?”
임 대리가 이수의 술잔을 채우고 잔을 받들었다.
“팀장님.”
“네.”
“그때…, 잡아 주셔서 감사해요. 쉬면서 생각해 보니까 당시에 제가 너무 매몰됐던 것 같아요. 저한테 기회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앞으로 팀장님 밑에서 재밌게 일할게요. 그리고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승진하시고 축하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어요. 앞으로 인사이트에서 본부장, 전무로 승진하실 때는 제가 꼭 거하게 축하 인사 올릴게요.”
병가 전 이수를 향해 지친 얼굴로 울먹이던 임 대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임순정 대리는 이수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한 이였다. 아마 유진우와의 추문 역시 다 알고 있었을 테지만 임 대리만은 이수에게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홀로 식사를 챙기거나 야근하는 이수에게 쭈뼛 인사를 건넨 이도 임 대리 하나뿐이었다. 팀장을 달고 나서부터 좌우 살피지 못하고 매몰된 사람은 임 대리뿐만이 아니었다. 이수의 가슴이 빠듯하게 저려 왔다.
“다시 와 줘서 고마워요.”
이수와 임 대리가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팀장님, 거국적으로 건배사 한번 하시죠!”
김민주 대리가 다들 잔을 채웠는지 확인하고 이수에게 건배사를 제의했다. 당황한 낯도 잠시 이수가 잔을 들자 모두 이수를 따라 잔을 올렸다. 따뜻하고 열의에 찬 시선들이 이수를 향했다.
“오늘… 참 기쁘네요. 모두 열심히 해 줘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잘해 봅시다.”
네! 환하게 웃는 얼굴들이 이수에게 귀를 기울였다.
“건배.”
건배! 한 사람 한 사람 이수는 자신을 향해 술잔을 기울이는 팀원들과 눈을 맞췄다. 그동안 서로에게 드리웠던 장막이 한 꺼풀 벗겨진 듯 홀가분했다.
기분 좋게 잔을 비우고 임 대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쉬는 동안 무얼 하며 지냈는지, 심리 상담이 지치지는 않았는지 등등. 소란한 대화들이 오가며 본격적인 회식이 시작되려는데 옆방과 경계를 나누어 놓은 미닫이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구, 죄송…
“어? 여기서 회식하세요?”
1팀의 신동윤 대리였다. 신 대리의 뒤로 이제 막 세팅된 테이블이 보였다. 1팀의 팀원들이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엉거주춤 인사를 했다. 김민주, 임순정 대리와 동기인 신 대리가 붙임성 좋게 2팀 팀원들과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막 신발을 벗은 이시훈이 들어오고 있었다.
“테이블 붙여 드려요?”
서빙하는 직원이 대답도 전에 허리를 숙여 테이블 귀퉁이부터 잡았다. 두 팀장의 의중을 살피는 팀원들은 하나같이 합석을 기대하는 표정이다. 여민준 본부장 아래 작년 의례적으로 치른 회식 이후로 두 팀이 함께한 자리는 처음이라 다들 상기된 분위기였다. 시훈도 이수도 딱히 거절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신 대리가 직원을 도와 테이블을 딱 붙여 놓았다. 어느새 길게 늘어진 테이블에서 각 팀 대리들의 주도로 1팀과 2팀이 섞여 앉았다.
이제 인턴십 과정을 끝마친 고우재는 자신의 죄를 실토하며 울다 웃기를 반복하면서 선배들에게 예쁨과 지나간 원망을 듣는 중이었고, 평소 조용한 사원들도 긴장을 풀고 왁자지껄 떠들며 술잔을 기울였다.
“팀장님.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게요.”
잔을 비운 이수 곁에 어느새 바투 앉은 고우재가 술병을 기울였다.
“아쉬워요?”
“…네에… 엄청요. 아마 못 잊을 거 같아요. 팀장님 덕분에…. 고맙습니다.”
“내 덕분은 아니고…. 열심히 해요.”
씁쓸함이 입안을 맴돌았다. 이수가 잔을 기울이며 맞은편에 앉은 존재에 시선을 가져갔다. 이시훈은 막 소주를 입속에 털어 넣는 중이었다. 조민희 대리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시훈은 잔이 채워지자 또다시 단번에 술을 넘겼다. 짧은 시간 동안 대체 얼마나 마셨는지 시훈과 조 대리의 앞에는 빈 소주병이 줄을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술을 주고받는 속도가 좀처럼 줄지 않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꺾어 마신 빈 술병이 테이블 위에 차고 넘쳤다. 왁자지껄한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쾌활한 김민주 대리가 이시훈을 향해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 팀장님은 만나는 분 없으세요?”
얼큰하게 취한 김 대리의 잔을 받은 시훈의 낯은 평소와 달리 술기운에 헤 풀어져 있었다.
“…왜요?”
시훈이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세웠다. 담뱃갑에서 담배를 빼 들고 느른하게 되묻자 김 대리가 토끼 같은 앞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소개해 드릴까요?”
술자리를 빌려 운을 뗐지만, 본인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도 모를 만큼 김 대리는 취해 있었다.
“…제 취향이 좀 까다로워요. 김 대리가 맞출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붙여 기댄 시훈이 슬쩍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에 김 대리가 자신 있게 말씀해 보시라 종용한다. 가볍게 흘려 넘기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불을 붙이지 못한 담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시훈이 몇 번 헛손질하는 모습에 이수가 애써 붙들리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답지 않게 취한 모습이 역력했다.
정작 질문을 던진 김 대리의 신경이 어느새 곁에 앉아 울먹이는 고우재에게 얼렁뚱땅 넘어갔다. 그걸 알면서도 시훈은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나이에 사람 만나려면 이것저것 따지게 돼서….”
빈 잔에 스스로 소주를 채워 든 시훈이 이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안 그래요, 정 팀장님?”
난장인 테이블 위로 정확하게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글쎄요.”
잔은 부딪쳤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 이수는 영양가 없는 대답을 남겼다.
“난 그러던데….”
읊조린 입술 위로 잔을 댄 시훈이 뚫어져라 이수를 바라봤다. 술을 비우는 짧은 시간 동안 마주친 눈빛이 정제되지 않았다. 누가 귀를 막기라도 했는지 소음이 가렸다. 이내 이수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단번에 술을 털어 넘긴 시훈이 테이블에 빈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시끄러운 룸을 뒤로하고 문을 연 시훈은 잠시 벽을 짚고 멈춰 섰다. 훅 올라온 술기운이 만만찮았다. 정신을 차릴 만한 찬 바람이 필요했다.
한 주가 끝나 가는 목요일의 골목은 시끄럽다 못해 어지러웠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간판 아래 한데 뭉그러져 길을 걷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좁은 골목길 가로등 아래에서 시훈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헛손질이 문제인지 아니면 가스가 닳았는지 좀처럼 켜지지 않는 라이터를 흔드는 시훈의 앞에 불쑥 불 켜진 라이터가 나타났다. 정이수였다.
입에 문 담배를 갖다 대는 대신 시훈은 말썽인 라이터로 다시 불을 켜길 시도했다. 단번에 불붙은 담배를 머금자 정이수가 라이터를 들고 있는 손을 거뒀다.
“불도 켜 주시려고…. 서비스 좋네요.”
길게 연기를 내뿜은 시훈이 픽 웃음을 흘렸다. 술에 찌든 몸이 흐물거렸다. 전봇대에 한쪽 팔을 뻗어 짚은 시훈이 마주 서 있는 이수를 슬쩍 올려 봤다. 모멸감에 치가 떨릴 법한데 정이수는 기분이 상한 기색조차 없었다.
“이 팀장님, 많이 취했어요.”
“…….”
시훈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안에서 자리 정리하고 2차 갈 모양인데… 오늘은 그만 마시고 이만 들어가세요.”
내내 대꾸가 없던 시훈이 바닥을 구두로 쓸어 냈다.
“정 팀장님.”
“…….”
시훈이 굽어 있는 어깨를 펴고 정이수를 바로 봤다. 한쪽만 올라간 입술 사이로 나른한 질타가 쏟아졌다.
“정 팀장님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해요? 당신은 그럴 자격 없잖아.”
“…….”
비틀어 호선을 그린 시훈의 입매가 뚝 떨어졌다. 담배를 끼운 손가락 끝이 이수와 자신을 차례로 가리켰다. 참으로 지리멸렬했다.
“그럴 자격은… 나만 있어. 당신하고 나, 우리 사이에.”
정이수를 향한 분풀이였다. 상대를 자극하고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어서 내는 생채기. 이토록 무심한 정이수의 낯을 마주할 때면 못난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이렇게 속이 뒤집히는데 잘 살고, 잘 해내고, 무던하게 살고 있다니 울화가 치밀었다. 원망도 미움도 한 끗 차이였다. 널뛰는 마음이, 혼탁한 시야와 좁고 어두운 내면이 점점 늪을 만들었다.
“택시 부를게요. 운전 못 할 거 같은데.”
속을 바득바득 긁는 시훈의 말에, 상대는 외면하기를 택했다. 핸드폰을 손에 든 이수를 보고 시훈은 쓴웃음을 흘리며 투덜댔다.
“함부로 친절하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었네.”
“고깝게 듣지 말구요, 이 팀장님 아니어도 이렇게 했어요.”
술에 취한 사람을 두고 회식 중인 식당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포개다 만 이수가 감정 한 줌 없이 비꼬는 시훈을 무덤덤하게 바라봤다.
“나… 아니어도…?”
“…….”
시훈이 전봇대에 기댄 팔을 내렸다. 숙인 고개가 훌쩍 들리며 이수를 응시한다.
“밤새 같이 있어 달라고 하면… 그것도 그래? 키스는, 섹스는… 그냥 막 퍼 줘?”
낮은 목소리로 함께 보낸 밤들을 되새긴 비난 속에는 초조함이 고여 있었다. 속눈썹을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이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내 무심하게 정돈된 시선이 시훈을 향했다.
“그날 힘들어 보였고… 또 위로가 필요해 보였어요. 나라도….”
요란하게 번쩍이는 네온사인 불빛이 시훈의 얼굴 위로 덧씌워졌다. 색이 다른 불빛이 덧입혀질 때마다 이시훈답지 않게 복잡한 심경이 만면에 드러났다.
“거기서….”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짓씹듯 말을 잘랐다.
“…한마디만 더 해.”
이를 갈아 낸 시훈이 눈을 감았다. 이수에게 유치하고 매몰차게 던진 말들은 방향을 바꿔 제 상처만 들춘 꼴이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가 찬 바람에 필터까지 타올랐다. 외투도 입지 않은 정이수의 재킷이 훌쩍 날렸다. 정이수는 닿지 않는 거리를 벌려 놓고 시훈을 목도하고 있었다.
시훈이 담배를 끼운 손으로 미간 사이를 짚었다. 상처받은 얼굴이 거울처럼 서로를 비췄다. 그게 자신인지 아니면 상대인지 따져 볼 겨를도 없이 한숨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사람 흔들어 놓고, 동정이니 위로니… 그런 말로 끊어 내면… 다야?”
시끄러운 골목의 소음 속 쓰디쓴 감정을 삼킨 나직한 목소리였다. 다만 중간중간 깃든 원망과 혼란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
잠잠했다. 답하기 싫은 걸까, 아니면 정말 동정이니 위로 같은 한낱 일회성 감정을 기꺼이 나누었을 뿐일까. 적어도 그깟 단어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참함에 구겨진 자존심과 신의가 바닥을 쳤다.
“신 대리한테 부축해 달라고 전달할게요. 대리 기사라도 불러요. …읏!”
몸을 돌리던 이수의 손목이 붙잡혔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단번에 잡아챈 손목에 중심을 잃은 몸이 시훈의 바로 앞까지 끌려갔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담배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
“…….”
당황한 것도 잠시 이수가 고개를 돌려 시훈을 외면했다.
“…놓죠, 이거.”
가로등 불빛을 등진 시훈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불안과 고민을 떠안은 침묵이 이어졌다. 곧 눈을 지르감은 시훈의 입이 싸늘하게 열렸다.
“회사, 그만둬.”
이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권유가 아닌 명령에 가까웠다. 거부는 본능처럼 튀어나왔다.
“싫어.”
단박에 내놓은 이수의 답은 들을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일방적이었고 다급했다. 화를 참아 내듯 짓씹은 말들이 서늘하게 귀에 꽂혔다.
“싫어? 설마하니 뭣 같은 애사심 때문에 붙어 있는 거 아니잖아.”
이수의 입장은 안중에 없었다. 오직 뒤틀린 관계를 잘라 버리고 싶은 생각밖에는. 둘 중 한 사람이 인사이트를 나가면 조건이고 뭐고 이미 너절해져 형체조차 없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종지부를 찍는다. 정이수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됐다. 아무 조건도 없는 관계 말이다. 억지스럽고 절박한 소망이 날것 그대로 이수를 쑤석였다.
“…이 팀… 하!”
“…….”
손목을 당겨 빼는 이수를 단단히 붙들어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 틈으로 밀어 넣었다. 둔탁한 벽에 이수의 등이 닿았다. 충격에 등이 튕기기 무섭게 시훈이 어깨를 밀어 도망갈 수 없도록 이수를 고정했다.
“…읏…!”
아슬아슬하게 코끝이 스쳤다. 서로의 입김이 얽혔다. 숨을 고르는 이수에게 얼굴을 들이민 시훈이 쓴물을 삼키듯 이내 참아 낸 말을 기어코 끄집어냈다. 이를 깨물어 소리를 죽인 말끝 하나하나에 차마 이기지 못한 투정과 이기가 들러붙어 있었다.
“내가… 얼마든지 그렇게 만들 수 있어. 그렇게 할 거야. 그러니까 기회 줄 때…!”
그 순간 이수의 손이 시훈의 가슴팍에 닿았다. 시훈은 말을 맺지 못했다. 밀어내지 않았으나 단호한 의지를 담고 있는 행동은 날아간 이성에 제동을 걸었다.
“아니….”
이수의 입술이 달싹였다. 골목 너머 소음을 뒤로한 고요가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느리게 천천히 고개를 저어 부정하는 이수의 몸짓은 어딘가 애처로워 보였다. 드리운 속눈썹 아래로 긴 그림자가 졌다. 엷게 호선을 그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질책은 힘없이 보드라웠다.
“…이시훈 씨는 그런 일 하는 사람 아니잖아. 그렇게 해서도 안 되구요.”
“뭐가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닌데.”
계약이니 상납이니 하는 관계를 받아들인 당사자였다. 그런데도 정이수를 견주어 비난하고 고결한 인간인 척 굴었다. 어쩌면 정이수의 도발은 좋은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 뛰어들어 판을 벌여 놓은 건 누구지? 도무지 시작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만한 목소리가 달래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는 이 팀장님한테 실수고…, 예외고…, 그렇게 해요. 아무도 몰라요, 나만 눈감으면.”
“자꾸 말 돌리지 마.”
시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목을 틀어쥔 시훈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놔주지 않으리라…. 거센 욕망이었다. 얼마나 손에 힘을 주고 있는지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말 돌리는 거 아니야. 그날… 이 팀장님이 말해 줬어요.”
담담하게 읊조린 이수가 눈을 들고 시훈을 마주 봤다. 그의 말처럼 원한다면 그는 자신을 인사이트에서 내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훈에게는 쉽게 저버려서는 안 될 사람이 있었다. 감히 내내 지켜 온 믿음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았다.
“…….”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훈의 손등 위로 온기가 더해졌다. 이수가 시훈의 손을 감쌌다.
“그러니까 고작 나 때문에… 신념 버리지 말아요.”
“…….”
“사람이….”
이수가 고개를 아래로 풀썩 떨구었다가 이내 시훈을 향해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멋…,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내려앉은 손가락이 어색하게 손등 위를 두드렸다. 다독이는 의미였는데… 이해할는지 잘 모르겠다. 저는 그랬었는데…. 찬 바람이 골목을 지났다. 바닥을 도르르 구른 전단들. 점멸하는 가로등 아래 정이수의 외꺼풀진 눈을 바라본다.
“…….”
시훈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수의 손목을 잡은 손을 떨구고 그대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돌아온 이성이 조금 전 이수에게 가한 말과 행동을 돌아 살폈다.
“많이 취했어요. 들어가요, 이만.”
조용하게 타이르는 이수의 목소리가 닿았다. 외투도 없이 겨울바람에 코끝과 귓불이 발개진 이수의 몰골이 그제야 시훈의 눈에 들어왔다.
“…….”
시훈의 시선이 갈피를 잃었다. 입술은 굳게 다물렸다. 인사는 없었다. 훌쩍 몸을 돌려 그가 멀어졌다.
시훈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수의 허리가 앞으로 꺾였다. 아릿한 고통에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일과 삶의 균형은 언제쯤 맞춰질까. 불행과 행복이, 안정과 불안이 매번 저울질하며 중심을 잡아 보라 시험하는 것 같다. 나태해지지 말라, 안심하지 말라. 부산물들에 쉽게 잠들지 못한 눈이 뻑뻑했다. 아마도 주름이 져 있을 한쪽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꾹 눌러 본다. 어둠 속, 비틀거리며 걷던 시훈의 등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수가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식당에서 나온 무리가 맞은편 거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정 팀장님! 같이 가실 거죠?
웃어 보려고 해도 쉽게 되지 않았다. 이수는 그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늦은 오후, 이수가 카페테리아 한편에서 통화가 끊긴 핸드폰 화면을 뒤집었다. 아들이 보고 싶다고 하셔서 전화했다는 요양 보호사의 말은 온데간데없고 엄마는 또 작은아버지 타령이었다.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가 봐야겠다느니,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찾아낼 거라는 소리에 내내 미덥지 못한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심란한 마음을 털어 내려 습관처럼 마른세수를 하고 난 이수의 시야에 저 멀리 타 기획 본부 팀장과 대화 중인 주현탁 실장이 보였다. 오늘 오전에도 어김없이 여민준 본부장과 각을 세웠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마주쳐 봤자 기분 좋을 리 없는 상대였다.
그때 주문한 커피를 들고 자리를 피하려는 이수를 주 실장이 발견했다. 멀리서 손을 든 주 실장이 어느덧 거리를 좁혔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많이 바쁜가 보네.”
하루 정도는 그냥 지나치면 좋으련만 눈동자가 이수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 냈다.
“연말이라서요.”
주 실장이 피곤하겠다느니 밥은 챙겨 먹냐느니 되지도 않는 걱정을 늘어놓는 사이 2본부 마 팀장이 인사를 하고 카페테리아를 나섰다. 오늘은 날이 궂다. 그치? 시시한 날씨 이야기나 하자고 이수를 붙들어 놓을 사람은 아니었다. 주 실장과 나란히 선 이수가 구름이 잔뜩 낀 겨울 하늘을 확인했다.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주 실장이 커피를 후룩 삼켰다. 솟아 있는 마천루 어딘가를 바라보며 그가 불쑥 이수를 향해 몸을 틀었다.
“1본부, 여 본이 정산 그룹 신경 많이 쓰나 봐? 내년 상반기부터 벼르는 모양인데.”
“네. 우선순위요.”
말을 섞지 않으려 짧게 답하는 이수를 두고 주 실장은 주저리주저리 할 말이 많았다.
“지금 2본부 말이야. 마 팀장이 정산 일 진행하는데, 쓰읍… 돌아 버리나 봐. 까다롭기도 까다롭고… 부서 사람들 죄다 물갈이됐는데 새로 온 실장이 일일이 사람을 골라 뽑는다나. 어렵게 모시고 와서 누가 건드리지도 못하나 보지? 인사팀하고도 큰소리 몇 번 냈대고. 대행사 출신들이 마케팅 부서 광고주가 되면 이런 게 귀찮아. 좀 안다고 말이야, 이래라저래라…. 뭐, 그러니 이시훈이도 혈연 이런 거로 못 비비지 싶은데…. 여 본 발등에 불 떨어졌지. 정산 계열 대행사라고 몰아주지도 않는 모양인데, 수주를 못 한다? 쯧… 쪽팔리지.”
이수를 곁눈질로 살피는 주 실장은 쉼 없이 말을 이었다.
“전 같으면 여 본이 뒷구멍으로 이시훈이가 누군지 언질이라도 주면 게임 끝인데, 근데 쉽지가 않다. 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표정을 감춘 이수가 딱 잘라 답하자 주 실장의 눈썹이 휘었다. 유진우가 떠나고 한눈에 봐도 혼란 속에 허덕이던 정이수가 요즘 들어 단단한 갑옷을 꿰입은 양 도통 틈을 보이지 않았다. 일만 하던 숙맥이 사회생활 해 보겠다고 회식 자리에서 꼬박꼬박 술잔 들이밀던 때가 편하기는 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한바탕 난리가 난 M사 일 이후로 여민준이 제 수족처럼 정이수를 회의마다 데리고 다니는 꼴도 영 같잖았다. 그 와중에 이시훈과는…. 머리를 굴리던 주 실장이 이수 쪽으로 어깨를 붙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
“정 팀장도 상황을 보라는 말이야. 유진우한테 당하고도 몰라? 잡는 라인마다 정 팀장이 복이 없다. 응?”
이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 실장님. 저 사내 정치 같은 거 관심 없습니다. 이런 말씀 저에게 왜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화를 누르고 꼭꼭 씹어 낸 말이 차분한 목소리에 실렸다. 주 실장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아이, 참… 나 서운하려 그런다. 이시훈이 정체 알려 준 게 누군데….”
이수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라인이니, 이시훈의 정체를 운운하는 주 실장의 태도는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여민준 본부장이 눈치챘다면 주현탁 실장 역시 분명하지 않지만, 추측까지는 할 수 있었을 테다. 이수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 주는 척 떠보는 것일 테고.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근데 말이야, 내 이야기 허투루 듣지 말고. 길게 보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돼요.”
그럼 수고해. 주 실장이 남긴 말이 뱀처럼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드문드문 사람이 남아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이수가 피곤을 죽이듯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회식 이후 시훈은 달리 이수의 행동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무심했고, 우연히 시선이 얽히면 먼저 고개를 돌리는 쪽은 시훈이었다. 팀원들을 대동한 회의에서 업무로 말을 섞을 때면 때때로 풀어지는 분위기에 웃기도 했지만, 이수에게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제 저만 잘하면 되는데….
산 넘어 산이었다. 꼬리는 잡히지 않고, 끊어지지도 않았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어제저녁 날린 첫눈은 보지도 못하고 녹아 버렸다. 출근하며 입은 두툼한 코트가 이수의 자리에 걸렸다.
올해 마지막 비딩을 앞두고 어젯밤에도 사무실에 남은 이수가 눈을 붙인 시간은 2시간에 불과했다. 지긋지긋한 불면증에는 피로도 소용없었다.
“…하아….”
점심 식사 후 먹은 두통약이 약발이 다했나 보다. 지끈대는 머리와 눈가로 몰린 열기에 이수는 결국 머리에 손을 짚었다.
미디어월은 이번 달 삼십 날까지는 설치된다 그러니까요…
“팀장님, 괜찮으세요?”
“…미안해요. 뭐라고 했죠?”
요 며칠 함께 철야를 강행한 임순정 대리가 한눈에 봐도 파리한 안색의 이수를 살폈다.
“이거 제작실하고 확인만 하면 되는 거라서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시는 게 어떠세요? 방금 퇴근 시간 지났어요.”
저도 모르게 아니라는 말 대신 신음이 흘러나왔다. 불규칙한 수면과 식사, 스트레스까지 겹친 몸은 탈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럼 이 건만 부탁해요. 다른 이슈 생기면 메시지 보내구요.”
“그럼요. 걱정 마세요.”
프레젠테이션하는 날 쓰러지면 핑계도 못 댄다. 컨디션 조절도 능력의 일부분이라. 메신저와 메일을 재빨리 확인하고 회신 가능한 내용은 간단히 처리했다. 올해 마지막 비딩일 A사 업무는 복귀한 임순정 대리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다. 다행히 업무 적응도 빨랐고, 과거 손발 맞춰 일했던 때처럼 이수와의 합도 좋았다. 이수가 팀의 전반적인 스케줄과 업무 진행 상황을 체크하면 실무선에서 임 대리가 굵직한 틀을 잡아 준 덕분에 제안서 준비가 훨씬 수월했다.
모니터를 끄고 당부의 말을 남긴 이수가 사무실을 나설 때였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은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저 쉬고 싶었다.
“후우….”
긴 한숨과 함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이수의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단조로운 벨 소리가 울렸다.
‘요양 보호사’.
지난주 없는 시간을 쪼개 겨울 이불과 도톰한 내의 몇 벌을 가지고 엄마에게 얼굴만 보이고 왔다. 오늘도 작은아버지의 행방을 알겠다는 전화일까. 짧은 신음을 목구멍으로 삼킨 이수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비명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이수 씨! 어휴, 어떡해. 어머니가 지금 사라지셔서…! 경찰에 신고는 했는데…!
“…네? 그게 무슨 말씀….”
점심 식사 후에 누워 계셔서 주무시는 줄로만 알고 내내 확인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석식 시간에 맞춰 침상으로 다가가니 이불만 둘둘 말려 있었다고. 경찰에 곧장 신고는 했는데 아직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말에 이수의 발이 얼어붙었다. 드문드문 엮인 말들을 도통 이해할 수 없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갔다.
“제가…, 제가… 일단 그쪽으로 지금 갈게요.”
다급한 손길이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결국 비상구로 뛰어간 이수가 속도를 높여 계단을 내려갔다. 가쁜 호흡에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상황 판단을 더디게 만들었다. 차를 탔다가 무턱대고 내리면, 혹시 사고라도 당하면, 나쁜 사람들한테 해코지라도 당하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불안을 곱하여 나쁜 상상을 더해 갔다.
“아흑…!”
바쁘다 핑계 대지 말고 뵈러 갔을 때 이야기를 들어 줘야 했다. 마음에 병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사는 게 힘들다고 다음에… 다음에… 하며 미뤘다. 처음도 아니었다. 어릴 적 이수에게 그런 것처럼 문을 잠그는 버릇도, 요양원 어귀까지 걸어 나간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왜 이다지도 안일했을까. 그러지 말걸…. 잠깐 바깥 구경이라도 같이 했으면 좋았을걸. 후회가 밀려왔다.
발에 감각이 없었다. 계단을 밝힌 비상구 표시등이 얄궂게 느껴졌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출입구가 나오지 않았다. 이수는 속이 타다 못해 손이 벌벌 떨렸다.
“하아…! 윽…!”
코너를 돌다 층계참 벽에 어깨를 부딪쳤을 때 들고 있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액정 화면이 번쩍였다. 요란한 벨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조용한 비상계단을 울렸다. 아픈 어깨를 쥘 여유조차 없는 이수가 발신인을 확인하지 못 하고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나중에…! 전화드리겠습니다. 죄송…”
-이시훈입니다.
“나중에요, 나중에…”
-지금 정 팀장님 어머님, 저하고 같이 계세요.
“…아….”
무릎에 힘이 풀린 이수가 간신히 벽에 등을 기대섰다.
-듣고 있어요?
“…어떻게… 거기… 거기가 어디예요?”
깜박이는 형광등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수가 더듬거렸다. 낮고 가만한 음성이 장소를 말한다. 고개를 끄덕인 이수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 * *
어둠이 내린 거리를 달려 카페에 도착한 이수는 매장 안쪽에서 이시훈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숨을 몰아쉬며 테이블 사이를 지나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다가서자 감색 코트를 어깨에 두른 엄마가 머그잔을 쥐고 있었다.
“…엄마.”
스스럼없이 다정한 이수의 목소리가 엄마를 불렀다. 평이하게 골라낸 목소리엔 떨림이 묻어났다.
“이수야…!”
낯선 사람 앞에서 기가 죽은 엄마는 이수를 보자 반색했다. 의자를 끌어다 바짝 붙어 앉은 이수가 부지런히 상태를 확인하다 테이블 아래를 내려 봤다. 슬리퍼만 신은 발을 꽁꽁 감싼 담요부터 눈에 들어왔다. 속상한 마음에 이수의 목구멍이 아려 왔다.
“발… 안 추웠어?”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엄마에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혹은 왜 이런 행동을 했느냐 묻는 게 무슨 소용일까. 차마 원망할 수도 없어 놀란 속을 감춘 이수에게 엄마가 눈을 번뜩였다.
“이수야, 작은아버지…! 작은아버지 있잖아.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아.”
“…엄마.”
“이거 봐라. 여기 있어. 내가 이제야 이걸 찾아서는…!”
주먹 쥔 손안에 빼꼼 끝이 드러난 종이 한 장을 이수에게로 내민다. 얼마나 쥐고 있었는지 구깃구깃한 종이를 펴 보자 뜻밖에 익숙한 명함 한 장이 모습을 보였다.
[인사이트
기획 1본부 기획 1팀 사원 정이수]
“여기 있는 거 맞겠지? 서울로 간다 그랬거든. 예전에 이수 네가 줬는데 그걸 잊어버리고 말이야…!”
“…….”
이수가 두 입술을 포갰다. 인사이트에 입사하고 난 후 받은 첫 명함이었다. 아… 그때도 그랬지.
“엄마….”
이수의 손을 꽉 붙든 엄마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차마 그 얼굴을 보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명함을 쥐고 있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내가… 한번 가 볼게. 있겠지…. 걱정하지 마.”
이시훈 역시 내보이지 않지만 이쯤이면 엄마가 아픈 곳이 몸뿐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테다. 왜 또 하필 그일까. 왜 이런 모습까지 보여야 하지. 이시훈이 엄마를 발견해서 그나마 다행인 걸까. 동정이나 연민을 느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안대도 이시훈에게 드러난 치부가 못내 밉고 싫었다. 착잡한 심정을 갈무리한 이수가 시훈을 향해 물었다.
“…근데 어떻게….”
“회사 로비에서 실랑이하고 계셨어요. 전에…, 오피스텔에서 사진으로 뵀구요.”
외근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회사 로비에서 슬리퍼를 신고 외투조차 제대로 입지 않은 중년 여성이 보안업체 직원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들어가겠다는 여성과 막아서는 직원 사이에 이목이 쏠릴 무렵이었다. 여성의 얼굴을 확인한 시훈은 이수의 오피스텔에서 보았던 사진을 기억해 냈다. 분명 교복을 입은 정이수와 나란히 웃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확실했다. 손에 꼭 쥐고 있는 명함과 앞뒤가 좀체 맞지 않는 이야기에 이수가 액자를 엎어 놓은 것도, 어머니를 언급하고 싶지 않아 한 이유도 어림짐작되었다.
고개를 푹 숙인 이수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었다.
“…죄송해요. 바쁠 텐데 먼저 가세요.”
짧은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한눈에 그려질 정도로 이수의 얼굴은 여전히 혈색이 없었다. 카페 밖으로 작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도로로 쏟아진 차들은 어느새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수가 카페에 들어왔을 때부터 허전한 목덜미에 시훈의 시선이 닿아 있었다. 곧 눈길을 거둔 시훈이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요양원으로 모셔야 하면 지금 내 차로 이동해요.”
“택시 부를게요.”
거절을 표하는 이수에게 시훈이 상황을 정리해 설명했다.
“밖에 눈 쌓여 있어요. 오늘 같은 날, 더구나 이 시간에 시 외곽이면 가려고 하지도 않을 거구요. …그러니까 고집 피우지 말죠.”
집으로 엄마를 데려갈 수 없었다. 밤을 향해 가는 시각에 거절은 쉽지 않았다. 이수가 망설이며 피로와 추위에 축 처진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고개를 끄덕인 이수를 두고 시훈이 차를 가지러 자리를 떴다. 엄마의 어깨 위에는 이시훈의 코트가 여전히 남아 있는 채였다.
요양원에 도착해 신고를 접수한 관할 경찰과 신원 확인을 마치고,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는 요양원 측에 적잖은 화를 냈다. 마지막으로 잠든 엄마를 죄스러운 마음으로 보고 나오는 길, 하늘에서는 얼음 같은 눈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날리는 눈이 이수의 머리며 어깨 위로 떨어지기 무섭게 녹아 버렸다.
“하아….”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숨에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날려 사라졌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자 주차장 한편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시훈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자갈이 깔린 길을 지날 때마다 데굴데굴 발바닥 아래 밟히는 소리가 불편한 제 속마음 같다.
“코트요.”
시훈이 담배를 끄고 이수가 내민 코트를 건네받았다.
“주무세요?”
“…네. 저기… 오늘요, 이 팀장님.”
이렇게 당치도 않은 신세를 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목구멍이 뜨거워 쉬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시훈이 훌쩍 뒤로 돌았다.
“서울까지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차에 타서 말해요. 할 말 있으면.”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어둡고 긴 터널처럼 느껴졌다. 사위는 조용했고, 날리는 눈발이 차창에 부딪히는 것 외에는 지나치게 적막했다. 타이밍을 놓친 이수는 침묵했다. 운전만 하는 시훈과 조수석 밖으로 시선을 돌린 이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피로로 엉망인 컨디션이 엄마의 실종으로 모습을 감췄다가 긴장이 풀리자 다시 느껴졌다. 가물가물 눈이 감겼다. 잠들기 전 시훈이 괜찮으냐 묻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귓전에 닿았다. 무거운 눈꺼풀 아래로 소실점을 그린 길을 더듬어 본다. 눈동자를 굴려 여전히 운전 중인 시훈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바람이건대, 이수는 이 길이 차라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렴풋이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이수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집까지 제 발로 걸어온 기억은 없었다. 가로등 불빛 하나 없이 달린 어두운 길과 자라는 낮은 목소리가 까무룩 눈을 감기 전 이수가 마지막으로 기억한 것들이었다.
작게 열린 문 사이로 텔레비전 불빛이 화면에 따라 번쩍였다. 이마를 짚고 거실로 발을 내디딘 이수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아….”
시훈이 소파에 가로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이시훈 역시 연말 내내 저 못지않게 야근과 철야를 했다. 거기다 예기치 않은 조우로 장거리 운전까지 한 상황이니 말도 못 하게 피곤했을 테다. 헐겁게 잡아 내린 넥타이나 단추를 풀어 놓은 셔츠가 피로를 방증했다.
이수는 핸드폰을 조용히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천천히 시훈이 누운 소파로 다가갔다.
“…이 팀장님.”
…….
“…이시훈 팀장님.”
…….
“…이시훈….”
목소리가 커지기는커녕 얼버무리고 말았다. 결국에는 이름만 간신히 부르다 머리맡 소파 밑으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한쪽만 세운 무릎을 감싼 두 손 위로 턱을 괴었다. 그렇게 잠든 시훈을 바라보았다.
이마를 가린 손 아래로 진실한 눈과 곧고 길게 뻗은 코, 그리고 매번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만든 입술이 주홍빛 불빛 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살 넘겨 줘도 깊이 잠든 모양인지 시훈은 미동조차 없었다.
쇠약해진 몸은 마음마저 갉아먹는다. 기대고 싶고 안기고 싶고 혹은 남자에게 뺨을 비비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달리는 차에서, 우리 두 사람만 있는 차에서 느낀 기이한 안정감은 이시훈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이시훈이 제 가슴속을 멋대로 유영하고 있었다. 너무 깊었다. 너무. 걱정과 시름을 먹고 자라난 나무가 멋대로 가지를 뻗어 댔다. 잘라 내야 하는데 바람이 불면 살랑거려 방향을 일러 주고, 뜨거운 해가 비치면 그늘을 만들어 주는 탓에 이수는 여전히 나무를 자르지 못했다.
“…….”
이수가 무릎을 바닥에 딛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드럽게 넘어간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이수는 언젠가 시훈이 그랬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남자의 심장에 귀를 가져갔다. 무게를 싣지 못한 머리는 미약하게 들리는 심장 소리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얇은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넘어가며 이수의 감은 눈을 가렸다.
“지금 뭐 하는데.”
싸늘한 목소리에 심장이 뚝 떨어졌다. 퍼뜩 눈을 뜨자 자세 그대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시훈이 이수를 깔아 보고 있었다. 감정 한 점 없는 얼굴이 서늘하게 경계를 그었다.
“무슨 의미든 뭐가 됐든 하지 말아요.”
“…….”
몸을 물리기 무섭게 시훈은 단번에 소파에서 일어난다. 그가 목덜미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고개를 털어 냈다.
“피곤했는지 정 팀장님이 일어나지를 못했어요. 혹시나 해서 기다렸던 거고. 괜한 오해 하지 말아요.”
마땅히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이수의 두 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훈을 거부하고 밀어내 놓고 힘들고 지친 마음을 기대려 했다. 남자의 힐난에 마치 벌을 받는 심정이 됐다.
“…미안합니다.”
“뭐가요.”
“…….”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민망했고, 시훈에게 더없는 무례였다.
“설마 기사 노릇 한 대가는 아닐 테고.”
시훈은 식탁 의자에 걸쳐 놓은 코트를 입는 중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미안해요. 나는 그냥….”
민망함을 감추려는 미소가 이수 얼굴에 소리 없이 번졌다.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충동이라는 변명은 지나치게 우습고 가벼웠다. 입 앞에서 맴돌기만 할 뿐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심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할 필요는 없구요.”
시훈에게는 빈정대거나 무안을 주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작년, 이맘때와 같았다. 그는 여전히 친절했고 봉해 놓은 가정사까지 드러낸 이수를 별달리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감정적 교류도 없이 서로를 모를 때처럼 의미 없는 질책이었다. 코트의 매무새를 가다듬은 시훈이 단호하게 경고했다.
“그렇다고 해도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아요.”
“…이 팀장님.”
“나 역시 정 팀장이 필요할 때, 그때 찾을 테니까.”
“…….”
울컥 서러움이 치밀었다. 뜨거운 기운을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킬 때마다 불덩이가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이러다가 정말 까맣게 타 버리겠구나.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보일 바닥이 없는 줄 알았는데 기어이 땅까지 파선 밑천을 드러냈다. 흔들리는 사람은 이시훈이 아니었다. 바로 저였지.
시훈이 걸음을 옮겨 현관에 다다르자 머리 위로 등이 켜졌다.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관계에 대한 제 몫의 책임을 지고 서로의 사이에 물려 있는 쐐기를 빼내야 했다. 그동안 운 좋게 유예 기간을 벌었을 뿐 자연스럽고 합당한 결정이었다.
문고리를 잡은 시훈은 인사를 하지 않았다. 달칵. 문이 닫히고 현관 위의 등 역시 새까맣게 꺼졌다.
온기가 없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언제 보아도 삭막하고 버석한 제 책상 같은 집이었다. 천천히 소파에 올라앉은 이수가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휙휙 넘어가는 광고를 하나하나 모니터링했다. 2팀에서 진행한 광고가, 이수가 기획했던 광고가 온 에어 될 때 어렴풋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우르르 딸려 나왔다. 이수의 얼굴에 어슴푸레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밤. 잠 못 들던 어제와 달리 오늘만은 아쉬움에 잠들고 싶지 않았다.
* * *
거리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렸다. 겨울이면 익숙한 풍경이었다. 인사이트 로비 중앙에도 큰 트리가 우뚝 섰다. 연이틀 함박눈이 내린 서울 시내에는 변덕처럼 비가 왔고 소담하게 쌓인 눈들은 어느새 녹아 질척이고 지저분해졌다. 겨울이 오면 매번 업무에 치여서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모를 하늘이 요즘따라 변화무쌍해 보였다.
맑았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 서 있는 상상만으로 담배를 태우고 싶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이수가 하등 쓸데없는 생각을 뒤로하고 자신의 집무 책상을 제 어깨 너머로 흘깃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단출했다.
어제까지 늦은 야근을 한 팀원들이 오랜만에 정시 퇴근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이수의 자리에 내선 전화가 울렸다. 주현탁 실장의 호출이었다. 집무실로 올라오라는 부름에 다른 용건은 없었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주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앉아. 차 줘?”
“아니요. 괜찮습니다.”
접대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주 실장과 마주 앉았다. 김이 오르는 커피를 놓고 주현탁 실장은 급히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뉴욕 지사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뤘고, 길지 않은 통화가 이어졌다. 곧 통화를 마친 주 실장이 느리게 커피를 마시며 이수를 슬쩍 바라봤다.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이수가 노곤한 얼굴로 시간만 재고 있을 때 테이블 위로 잔과 함께 뜬금없는 질문이 놓였다.
“정 팀장. 뉴욕 갈래?”
영문 모를 제안에 이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자 주 실장이 씨익 웃으며 본색을 드러냈다.
“이시훈이 나한테 길길이 날뛰는 이유가 뭘까… 내가 내내 생각을 해 봤단 말이야. 확률은 반반이긴 한데… 생각해 보면 뭐 상관없나 싶기도 하고. 유진우하고도 우리가 뭘 봐서 말 나온 건 아니잖아.”
이수의 얼굴이 점차 굳어 갔다.
“…….”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뗀 주 실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수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둘이 빨아 먹고 빨아 주고… 난 그런 건 상관없고, 백년해로할 사이는 아니잖어. 그럼 좀 영리하게 굴자고.”
“실장님…!”
이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주 실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건조한 사무실의 공기가 꽉 막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실실대는 주현탁 실장이 웃음을 거뒀다. 차가운 침묵을 가른 본론이 이수 앞에 떨어졌다.
“이시훈하고 사이 인정해. 위력에 의한 추행 정도로 가자구. 그러면 정 팀 뉴욕으로 보낼 명분은 충분하지.”
“넘겨짚지 마세요.”
“그쪽에서는 서울하고 브리지가 필요한 상황이라 정 팀장 정도면 믿고 일 맡길 수 있지 싶은데. 당장 인사이트급 대행사로 이직하기 힘든 건 본인이 더 잘 알잖아. 뉴욕 다녀와. 시간이나 경력 쌓이면 다 잊혀.”
유진우가, 그리고 제가 만든 결과였다. 그렇다고 해도 주 실장에게 목줄을 쥐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정리.”
“…….”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면 되겠어? 다 정해진 자리가 있는 건데. 내가 띠동갑 차이 나는 상사 모시고 회사 생활 하기는 좀….”
“…….”
“생각 잘해 봐. 기회는 있을 때 잡는 거야. 지나면 후회뿐이지. 안 그래?”
헛웃음이 나왔다. 치욕과 모욕을 감당하는 일은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좆같은 상황이 들이닥칠 때마다 메운 상처에 또 흠이 패었다. 저는 지치고 지겨운데 남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주 실장님.”
“시기만 정하자. 신년에 터트리자고.”
사람 목줄 잡고 흔들고 싶다는 거지? 이수의 머리가 차갑게 식어 갔다. 꼬박 새운 지난밤을 그렸다. 어차피 막다른 길이었다.
한쪽 입술 끝을 끌어 올린 주 실장은 퍽 여유로워 보였다. 생각에 잠긴 이수가 상대와 눈을 맞췄다.
“뭘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말소리는 더없이 냉랭했다.
“뭐?”
황당한 주 실장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이수는 단호했다. 픽 새는 웃음이 나왔다. 실장님도 참…. 고개를 돌린 뒤 이수가 나긋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주저함도 없이 의자가 드르륵 뒤로 밀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가 주 실장을 깔아 봤다.
“이시훈 팀장하고 엮지 마세요. 증명하고 싶으시면 증거 가져오시구요. 소문내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허.”
얼빠져 구겨진 얼굴이 이수를 올려 보았다.
“저도 주현탁 실장님과의 비공식적인 미팅이며 외근 다니면서 여기저기 드나들었다고 떠들 겁니다. 법인 카드로 옷이며 접대 자리 긁으셨잖아요. 백화점 명품관에서 옷 사 주셔서… 제가 좀 설렜어요, 그날. 저한테 문자도 보내셨잖아요. 룸살롱 위치까지 박아서. 아시죠? 주 실장님하고 저하고 직접적인 업무 연관 없는 거. 부재중 전화도 어찌나 여러 번 남기셨는지…. 유진우 본부장은 개인 카드로 긁기라도 했는데 실장님은 그것도 아까우셨나 봐요. 그리고 회식 자리에서 저 주무른 건 다 알잖아요, 사람들이. 제가 유부남이 취향이라고 말하면 그게 더 설득력 있지 않겠어요?”
어떤 관계에도 물리적인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소문이란 오해와 의심을 먹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너 막캥이처럼 굴래?”
“누가 막캥이예요. 사모님하고 자식까지 있으신데 꼭 봉변을 당하셔야겠어요?”
씩씩대는 얼굴이 볼만했다.
“너 지금 기회 차 버리는 거야. 잠 오겠어?”
“네. 잠 잘- 잡니다.”
몸을 사리던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따박따박 대꾸를 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실장님. 예의는 여기까지 차릴게요. 협박하지 마세요. 그리고 한 번만 더 제 몸에 손대시면 이제는 인사과 아니라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의자를 걷어차듯 밀어낸 이수가 집무실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야, 너 지금 막가자는 거야? 뭐 믿고 이래?”
성질을 참지 못하고 높인 언성에 복도에 사람이 있었다면 들여다볼 정도였다. 문득 이수가 행동을 멈췄다. 체념하듯 흘러나온 말소리는 재미없는 농담 같았다.
“아무도 안 믿어요. 믿을 게 없으니까… 막가죠.”
하… 참. 주 실장은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 얼굴색을 달리하며 좀처럼 진정을 못 했다. 곧 넘어갈 사람인 양 입만 어어 벌리는 꼴이 가관이었다.
“주 실장님. 제가 진흙탕에 굴러 봐서 아는데요. 생각보다 오래가요, 자국이.”
“야!”
하찮았다. 폭탄을 내돌릴 생각만 했지, 그게 발밑에서 터질 줄 생각도 못 했겠지.
“자리보전하시는 데 도움 못 돼서 죄송합니다. 가 보겠습니다.”
벌어진 재킷을 단정하게 정리한 이수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수가 집무실을 나서자 문 뒤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핸드폰이 바닥에 깨지는 소리였다. 이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진 각오가 더욱 단단해졌다.
“요즘 여민준하고 주현탁하고 둘이 왜 그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데.”
“모르겠네. 뻑하면 회의 들어가서 걸고넘어진다는데. 이번에 그것 때문에 김 전무도 한 소리 했다는데? 부대표까지 싫은 소리 해 댄대고.”
“아이 씨, 올해는 연차도 다 못 쓰겠다. 며칠 안 남았는데.”
멀어지는 말소리가 모퉁이 너머로 들려왔다. 걸음을 멈춘 여민준 본부장의 한숨에 바닥까지 꺼질 지경이었다. 반보 뒤에 선 이수 역시 내보이지 못할 한숨을 삼켰다.
이수와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여민준 본부장이 창문 앞에서 전자 담배를 빼 물었다. 뿌연 수증기가 답답한 요즘 같았다. 주현탁 실장과 대립하며 지난 몇 주간 회의는 엉망이 되고 업무 효율은 뚝 떨어졌다.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주 실장과의 설전이 결국 윗선까지 올라갔다. 김지학 전무는 일방적으로 주 실장의 편에서 여 본부장을 압박해 왔다. 정황상 최근 물어 온 업무를 거절한 데 따른 보복성 문책이었지만 불안함이 엄습했다. 라인인 부대표는 설전의 연유를 쉽게 납득하지 못했고 여 본부장 역시 정이수와 이시훈,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지난 주말 여민준은 이중건 회장이 재차 초대한 저녁 자리에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할 수 없었다. 일전 시훈의 회사 생활을 짧게 언급했던 날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 회장은 인사이트 내부의 크고 작은 완력 싸움을 아는 눈치였다.
‘정산의 브랜드전략실장이 만만치가 않아. 계열사라고 일감 몰아 주기니 그런 기대는 꿈도 꾸지 마.’
결국 대화의 말미에 흘리듯 인사 발령에 관한 언질을 받고서 저택을 나섰다.
시훈은 제 형의 죽음을 계기로 오랜 기간 가족과 관계를 단절했고, 아버지에게 제 삶을 증명해 보이려 치열하게 살았다. 여민준은 그 모든 걸 지켜본 사람이었다. 이중건 회장이 최근 들어 여 본부장을 두 차례나 불러들인 걸 보면 모르기는 몰라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 맞지 싶었다.
그러니까 이 판국에 딱 하나 꼬이는 지점이 있다면…. 모든 화살이 한 사람을 향했다. 저 하나야 눈감고 모른 척하면 끝이지만 인사이트 내에 적이 너무 많았다. 서로를 위해서도 파국에 이르지 않을 적절한 타협안을 고심해야 했다.
“…정 팀장. 후우….”
안으로 들어서자 여 본부장이 이수에게 앉으라 자리를 권했다. 업무에 관한 질문이나 보고가 이어져야 했지만, 머리가 복잡했다. 막상 사람을 불러 놓고 등을 보인 채로 하염없이 창밖만 보고 있는 여 본부장의 침묵이 이어졌다. 창 너머에는 해가 없는 짙은 회색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이리저리 판을 짜 봐도 내키지 않았다. 예전처럼 정이수가 유진우 밑에라도 있었으면 감정 한 톨 없었을 테다. 1본부 본부장을 맡으며 나중에 찢어 놓기 좋게 제 밑으로 넣은 수가 폐단이었다. 좋든 싫든 제 사이드라 생각하니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써 머리를 털어 버린 여 본부장이 차마 내비치지 못한 속내를 감췄다. 이놈의 잔정이 문제였다.
“…아니다. 얼마 안 남았죠, A사 비딩?”
“네. 올해 말일입니다.”
“잘돼 가요? 올려 둔 거 봤는데 어수선해 보이는 것만 어떻게 정리해 보면 좋겠어.”
전자 담배를 내려놓은 여 본부장이 이상하게 잠잠한 이수를 올려 보았다.
“본부장님.”
“어, 왜.”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드릴 부탁도 있구요.”
맞은편에 앉은 여 본부장에게 전한 내용은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길지도 않았다. 이수가 근래에 정리한 생각이 차례로 열거되었다.
정적 후 이수는 여 본부장에게 올해 마지막 비딩에 관한 브리핑을 했고, 스케줄을 보고했다. 자연스럽게 여 본부장 역시 알겠다는 답을 하며 모든 대화가 마무리됐다. 침묵이 긍정의 의미라는 사실을 서로가 받아들였다. 새해를 일주일 앞둔 평범한 월요일 오후였다.
* * *
올해의 마지막 날, 2팀의 마지막 비딩이 예정된 날이기도 했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 되자 열린 사무실 문으로 임순정 대리가 정장을 입고 들어섰다.
“타이 컬러 맞췄네요?”
이수의 눈이 휘어졌다.
“네. 물론입니다.”
김민주 대리도 같은 컬러 셔츠 입는다구요. 브랜드 심벌 컬러였다. 두 사람 모두 이수를 도와 밤새 제안서를 검토했다. 주축이 된 세 사람 모두 제안서 내용을 달달 외울 지경이었으니 지난 한 달여 동안 얼마나 지독한 시간을 보냈는지 부러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이런 소소한 정성에 광고주들의 마음이 기울기도 한다. 주님이라 일컫지만 결국 그들도 인정에 끌리는 사람이었다.
“팀장님도 준비하셔야죠.”
“그래요. 움직이기 전에 본부장님 뵙고 가죠.”
“네, 준비해 놓겠습니다.”
며칠간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다. 업무에만 매진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완전히 일에 파묻혀 다른 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수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꽤 오랜만에 겪는 기분이었다. 꽉 막힌 것 같다가 갑자기 눈앞에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동시에 두세 가지 일을 처리해도 머릿속 회로가 제대로 돌아갔다. 몸이 저절로 순서를 기억하고 하나하나씩 해결될 때의 쾌감,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지는 짜릿함 속에 이수가 있었다. 결과는 따라올 뿐 이수가 인사이트에서 수행한 일들이 모두 그러했다.
고객사의 사옥에서 진행된 올해 마지막 비딩은 굵직한 대행사들이 입찰에 참여했다. 발표는 순조로웠고, 까다롭고 허를 찌르는 질문에도 이수는 막힘없었다. 발표장을 나오며 세 사람 모두 결과를 짐작했다. 아마도 2팀의 승리로 끝나리라.
끼니를 거른 세 사람이 근처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창가에 때가 지난 크리스마스 장식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이수는 그제야 생일이 지난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한테 전화라도 했으면 좋았을걸.
“팀장님, 뭐 드실래요?”
김민주 대리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내가 살게요. 제일 비싼 걸로 먹어요. 고생했는데.”
식사하는 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주제에 올랐다. 신년 계획이나 못다 이룬 올 계획이 우스갯소리처럼 테이블 위를 이리저리 굴렀다. 긴장이 풀어지고 두 사람이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곁에서 잠자코 대화를 듣던 이수 역시 몇 번 웃음을 터트렸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온 세 사람이 헤어지기 전이었다.
“…어? 눈 와요. 와… 올해는 눈이 참 예쁘게 내리는 거 같아요.”
김 대리가 눈을 보며 짧은 감상을 흘렸다. 끔벅끔벅 눈이 감기는 모습에 이러다가 길에 쓰러져 잠들 기세였다. 이수는 피곤으로 몽롱한 두 사람을 먼저 택시에 태우고 코트 깃을 여몄다. 팀장님! 잘 쉬시고 월요일에 봬요! 임순정 대리가 택시 뒷좌석 창문을 열고 머리를 숙였다. 이수가 가만히 손을 들어 화답했다. 곧 택시는 빠르게 도로에 섞여 들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 거리에는 어딜 가도 사람이 많았다. 거리 너머에는 새해 타종을 위한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리저리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가는 인도 한복판에 선 이수가 무심코 하늘을 올려 봤다. 콧잔등과 뺨으로 떨어진 눈송이가 차가웠다. 이수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이수가 해가 다 저문 느지막한 시간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비딩으로 초토화된 2팀의 자리는 일찍이 모두 빈 채였다. 건너편 1팀 역시 마지막 휴가를 몰아 쓴 직원들의 빈 책상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직 퇴근하지 않은 시훈의 집무 책상 위 스탠드가 덩그러니 빛을 내고 있었다.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본 이수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빈 화면에 깜박이는 커서 옆으로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글귀가 한 자 한 자 자리를 메꾸었다.
손목시계 속 시침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최종 PPM에 관한 조율이 길어진 탓에 시훈은 온종일 회의에 붙들려 있었다. 무사히 임원 보고까지 마친 후 프로덕션에서 이뤄진 시사에 하루가 길었다. 올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자각도 못 했다.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요즘이었다. 메마른 가슴은 바짝 타 갈라지고 매일 목이 말랐다. 그런 건조한 삶이 재미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부터 사무실까지 소등된 껌껌한 어둠이 시훈을 반겼다. 익숙하게 엘리베이터 불빛에 의지해 희미하게 불을 밝힌 사무실 출입구를 열고 시훈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정면으로 보이는 제 집무 책상 뒤로 등을 진 정이수가 창밖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마치 시훈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제 자리로 이동하는 동안 시훈은 복잡한 속내를 애써 감췄다. 창에 비친 존재를 알아챈 이수가 어깨를 돌려 시훈을 마주했다.
“늦으셨네요.”
“내 자리에서 뭐 해요?”
이수를 지나 코트와 재킷을 벗은 시훈이 의자에 앉으며 싸늘하게 물었다. 앉은 시훈의 뒤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이수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궁금해서요. 이 팀장님 자리에서 제 자리가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보였는지.”
“겨우 그것 때문에 이 시간까지 있어요?”
의자를 당겨 앉으며 되받아치자 이수의 음성이 자리 뒤쪽에서 전해졌다.
“기다렸어요. 사실은.”
“…….”
시훈의 입이 다물렸다. 발밑으로 정이수가 다시금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오다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듯했다. 단둘만 있는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이수는 시훈이 내쏘는 말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냥… 오늘이 올해 마지막 날이라 인사를 하고 싶어서요.”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해가 바뀐다 해도 평범한 날 중 하나였고 그동안 이수 역시 큰 감흥을 느낀 적은 없었다.
“굳이 왜요.”
시훈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차갑게 반문한다. 그에 모로 서 있던 이수가 멋쩍은 시선을 떨구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수는 보이지 않는 시선 아래 차가운 손을 가만히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자꾸만 빠져나가는 용기를 이렇게나마 붙들어 보았다.
“보기 싫어도 자비를 베풀어 주면 좋겠는데… 연말에는 다들 그러잖아요.”
후우… 이미 느슨하게 풀어진 타이를 재차 끌어 내린 시훈이 느른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상한 굴레 속에 갇힌 관계는 피로감을 안겨 주었다. 매번 결론지을 수 없는 의문이 파문을 일으켰다. 파동은 마치 진자 추 같아서 멈추지 않았다.
“적선이라도 해요?”
“…네, 이를테면.”
의례적인 말 한마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시훈에게 이수는 딱히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는 상대의 모습에 기꺼워 보였다.
헛웃음 터트린 시훈이 담뱃갑을 책상 위로 툭 던져 놓고 눈을 감았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손을 내어 주지도 않으면서, 품에 안겨 들지도 않으면서…. 세 살 어린애 같은 원망이 지친 시훈의 몸과 마음을 들쑤셨다. 그러면서 곁에 느껴지는 정이수를 좇지 않으려 인내하는 자신이 우습고 가련하기까지 했다. 양극으로 치닫는 감정은 최근 정이수를 마주할 때마다 겪는 일이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한 눈송이들이 마천루 사이를 스쳐 지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이수에게 싸늘한 물음이 떨어졌다.
“인사, 안 끝났어요?”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 있는 시훈이 한 손으로 피곤한 눈을 덮어 가렸다.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더 이상 정이수로 인해 흔들리거나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
두어 걸음 다가온 발소리가 시훈의 뒤로 멈춰 섰다. 어둠에 가린 시야에 다른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정이수를 더듬었다. 가만한 목소리였다.
“오늘 꼭… 이 말을 해 주고 싶었어요.”
“…….”
그때도 눈이 왔었나… 가물가물했다. 기억이 나는 건 추웠던 바람, 매년 실패하는 금연 계획에도 담배를 사지 않아 텅 빈 호주머니의 감촉과 예기치 않은 어색한 인사, 모퉁이 너머 저를 비난하는 무리를 흠씬 짓씹던 욕. 동그랗게 피어오른 담뱃불. 바람에 순식간에 날린 매캐한 담배 연기와 휘어진 눈썹. 퉁명스러운 위로. 눈을 내리깔며 웃던 얼굴. 온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그림은 모두 이시훈뿐이었다.
“이시훈 팀장님.”
시훈의 두 어깨를 감싸듯 이수의 손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차마 내치지 못할 만큼 조심스럽고 따뜻한 온기가 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느껴졌다. 책상 위 스탠드 조명에서 산란한 빛들이 서로를 비추어 옅은 그림자를 엮어 놓았다. 시훈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비를 허락한 자신을 책망하는 사이 뺨 가까이 이수가 허리를 숙였다. 멈춘 호흡과 짧은 정적을 뒤로하고 마른 입술이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불면에도 차마 읊조릴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의미를 알지 못할 시훈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고, 누구에게나 해도 좋을 만한 적당한 인사였다. 우리 사이가 뭐가 됐든 이 정도로는 미움을 사지 않을 테니까. 사뿐하게 내려앉은 인사는 다정했다.
허리를 세운 이수가 시훈의 책상을 돌아 나갔다.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고 시훈은 약속처럼 의자를 반대로 돌려 앉았다. 유리창에 두 사람의 형상이 비쳤지만, 서로를 마주 보지는 못했다. 허상을 쫓는 사람들처럼 창에 비친 서로의 형체를 겨우 더듬었을 뿐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수의 구둣발 소리가 고요한 로비를 가로질렀다. 때가 지난 트리를 올려 보니 첨단에 걸린 별이 반짝였다. 시선을 틀어 보자 로비에 걸린 시계는 이제 막 자정을 지났다.
“…….”
소망한다. 부디 나 없이, 그대 없이 평안하길.
새해 1월 첫째 주 월요일. 인사이트.
출근으로 분주했던 로비가 한산하게 비었다. 엘리베이터 역시 각층의 자리를 지키고, 사무실에서는 맑게 갠 겨울 하늘보다 환한 형광등이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업무를 준비하며 새해 덕담과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 가는 인사이트는 여느 때와 같았다. 누군가가 방금 출근하고도 오늘의 퇴근 시간을 가늠해 보려 흘깃 시간을 확인할 무렵 숫자가 바뀌고 각각의 PC와 핸드폰으로 알림이 도착했다.
9시 정각. 인사이트 그룹웨어에 인사 발령 공지가 게시되었다.
[인사발령공고] 제2021-00001
-제목 : 인사발령
-발령 일자 : 2021년 1월 10일
기획 1본부 본부장 여민준 ▶ 전무 여민준
기획 1본부 기획 1팀 팀장 이시훈 ▶ 기획 1본부 본부장 이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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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본부 기획 2팀 팀장 정이수 ▶ 퇴사
위와 같이 인사발령 되었음을 공고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