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Affordance
하루 연차를 냈다. 그동안 모아 놓은 연차만 해도 한 달은 족히 쉬어도 될 테지만 이수는 단 하루만 저에게 휴식을 허락했다. 더 이상 시간도 감정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입구를 봉한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창을 열었다. 여름밤 공기를 한껏 맡았다. 뭘 해야 할지 망설이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사람이 떠난 자리는 흔적을 지우고 텅 빈 마음은 음식으로 채웠다. 그리고 핏발이 선 눈은 오래도록 감아 쉬게 해 주었다. 목이 마르거나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를 빼고 이수는 하루 종일 잠을 잤다.
꿈을 꾸지 않았다.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온종일 바빴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익숙하게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을 켜 놓은 상태로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신발을 신기 전 집을 한번 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그러니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이수는 평소보다 더 일찍 집을 나섰다. 몸은 가뿐했고, 두통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도착해 제 자리를 찾아갔다. ‘기획 1본부 기획 2팀 팀장 정이수’. 책상 위에 어수선하게 펼쳐진 명함을 한쪽에 가지런히 밀어 두고 업무 준비를 시작했다.
재킷을 벗고 사원증을 목에 건 이수의 눈에 책상 너머 고우재의 컴퓨터가 보였다. 7시 반이 간신히 넘은 시각이었다. 퇴근할 때 전원도 안 끄고 가나. 김민주 대리를 통해 보안 사항을 재차 일러두어야겠다 생각하며 카페테리아로 올라갔다.
일반 사원들이 출근하는 시간보다 앞서 오픈하는 카페테리아에서는 자유롭게 놓인 테이블이 이제 막 정리를 끝낸 듯 반짝였다. 창을 향해 배치된 바 스툴에서는 해외 업무를 담당하는 몇몇 직원이 샐러드로 간단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주문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이스… 잠시만요.”
커피를 주문하려던 이수의 시야에 문득 고우재가 보였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고우재가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있었다. 괜한 오해가 순식간에 풀렸다. 고우재는 노트북을 앞에 두고 고민을 하는지 불룩하게 볼을 부풀린 채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갔는데 알아채지 못하고 집중하는 모습에 이수가 테이블을 돌아 고우재의 뒤편에 섰다.
노트북에는 이번 인턴들에게 과제로 내 준 브로슈어 디자인 시안이 펼쳐져 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이리저리 화면을 클릭하던 고우재가 인기척을 느끼고 언뜻 행동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고우재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아, 안녕하십니까!”
“시안?”
놀라서 심장을 붙든 고우재와 달리 이수는 인사 대신 턱짓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아, 네. 이거 제작실 인턴이 어제 새벽에 전달해 줘서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당황한 고우재에게 이수가 자신의 미간 사이를 짚어 보였다. 인상. 그제야 고우재가 이수를 따라 자신의 눈 사이를 만져 보고 힘이 잔뜩 들어간 걸 깨달았다.
“내용은 다 들어가 있는데… 팀장님이 보시기에는 어떠세요?”
“음, 지루해서 안 볼 것 같은데. 야마가 없네.”
요즘 같은 세상에 종이로 인쇄된 브로슈어를 누가 보겠냐마는 펼쳤을 때 빈 공간 하나 없는 레이아웃이 제일 먼저 문제였다. 시각디자인 전공인 고우재가 긍정한다. 목차부터 내용 구성과 타이포며 컬러, 종이 재질까지 일일이 열거해 묻고 답하는 시간이 조금 길어졌다. 얼추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수정 사항을 정리한 고우재가 이수에게 물었다.
“팀장님, 혹시 복수 전공 하셨어요?”
“내가 졸업한 지가 언젠데 그런 거 따져요.”
고우재가 멋쩍어하며 씨익 웃는다. 미대생 사이에서도 보는 눈이 남다른 사람들이 있다. 특출한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 노력만으로 얻을 수 없고 타고날 수밖에 없는 부분. 고우재는 정이수 팀장을 보며 분명 그런 부류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실수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팀장님, 기획이시면서 제작, 연출, 사운드까지 다 보신다더니… 와아….”
이수가 노트북을 바라보는 채로 무신경하게 입을 열었더랬다.
“제작실 인턴들이 뒷담화 해요? 나 때문에 머리 아프다고?”
고우재는 아차 싶었다. 딱 오해할 만한 상황에 이런 무례가 없었다. 인턴 찌끄레기가 뭐라고 하늘 같은 팀장님께 어쩌구저쩌구 말을 하냔 말이다. 얼른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친 고우재가 사실을 실토했다. 얼굴이 발개진 상대를 보고 이수가 한쪽 입술을 올려 웃었다. 사죄마저 열정적인 녀석을 보자니 놀리고 싶었다.
“아뇨, 아뇨…! 뒷담화 아니고, 팀장님 멋있으시다구…. 저희 단톡방에서 난리예요. 올라운더시라고….”
그제야 의자 등받이로 등을 기댄 이수가 심드렁히 말을 이었다.
“당연한 것 같은데…. 우리 프로잖아요. 돈 받고 일하는.”
이수를 보는 고우재의 눈빛에 경외심이 깃들었다. 잠은 언제 주무실까. 종일 업무에 집중하는 정이수 팀장을 보고 있노라면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것 같았다.
알림 소리에 이수가 핸드폰으로 메일을 확인하는 사이 흘끗 이수의 얼굴을 뜯어보던 우재가 잠깐 숨을 참았다. 부드러운 외모와 달리 어딘가 서늘한 인상이 묘한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붉힌 고우재가 노트북을 당겨 보다 말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십니까!”
이수가 고우재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먼 거리를 두고 이시훈이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말 밤 흐트러진 채로 저를 몰아붙인 모습과 달리 이시훈은 중요한 미팅이 있는지 타이까지 말끔하게 갖춰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진 이수의 시선이 순간 밑으로 떨어졌다. 가슴 안쪽이… 어수선하게 뛰었다. 숨을 고른 이수가 속눈썹을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시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한쪽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삐딱하게 선 시훈은 표정 없이 까닥 고개를 숙인다. 필시 마주쳐야 할 사람이지만 예고 없는 조우에 표정 관리가 잘됐는지 모르겠다. 부득불 인사를 나누게 된 이수가 가벼이 턱을 내리고 다시 메일을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정이수 팀장님. 디오건설 홍보마케팅팀 팀장 강지수입니다. 제안 주신 내용을 토대로 현재 내부에서 …]
후우. 짧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다지 길지 않은 메일 내용을 반복해 읽던 이수는 몸 안으로 들어온 시훈의 온기를 기억해 냈다. 파노라마처럼 상기된 그 밤에 저절로 열이 올랐다. …젠장. 그 바람에 이수가 곤란한 낯으로 눈을 감았다.
팀장님.
“몸은 괜찮으세요?”
눈을 뜨자 걱정 어린 고우재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네. 전에 준 비타민, 그거 효과 좋던데요.”
먹지는 않고 서랍에 넣어 두었지만 이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그날 어린 인턴이 내민 친절을 박대한 일이 마음에 걸려서다.
“그죠? 엄마가 다단계 하는 이모한테 산 건데 제가 잘 샀다고 한 유일한 물건이에요.”
진지한 고우재 때문에 이수의 얼굴에는 대번에 웃음이 번졌다. 기분이 바람을 맞은 것처럼 환기됐다.
“제가 몇 개 더 드릴게요.”
“됐어요. 말만으로도 고맙네.”
웃음기를 띤 이수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민주 대리한테 들으니까 야근 자주 하는 것 같던데, 무리하지 말아요. 회사에서 부려 먹으려고 인턴 뽑는 거 아니에요. 가르치려고 뽑는 거지.”
“네, 알겠습니다.”
머쓱한 고우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무관심해 보이지만 정이수 팀장은 업무 분장에 꽤 신경을 써 주는 편이었다. 같이 인턴 생활을 시작한 동기들은 의미 없는 야근에, 회식 때문에 피곤하다는 푸념을 늘어놓는 걸 보면 팀을 잘 배정받은 게 분명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자신이 그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눈치껏 야근을 하려고 하면 사수인 김민주 대리가 팀장님은 자리만 지키는 거 딱 싫어한다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덕분에 적당히 긴장하고 적당히 바빴다.
“먼저 내려갑니다.”
반이나 남은 샌드위치를 가리키며 천천히 먹고 오라는 당부를 주고 난 후 이수가 못다 한 커피 주문을 위해 카운터 앞에 섰을 때였다.
“주문할게요. 아이스…”
얼굴을 확인한 아르바이트생이 황급히 말을 자르며 이수의 앞으로 이미 제조된 커피를 밀어 주었다.
“좀 전에 나가신 분이 주문하고 가셨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얼떨결에 커피의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 가득 전해졌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이수에게 출근한 직원들이 가벼운 인사를 한다. 이수는 2팀 사무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시훈의 자리를 무의식 중 돌아보았다.
느긋한 평소와 달리 꼭 맞춘 정장을 입은 이시훈은 재킷에 팔을 꿰며 진지하게 신 대리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마도 미팅 장소로 이동하기 전 말을 맞춰 보는 중이리라. 잠시 핸드폰을 확인한 시훈이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며 어깨를 틀었을 때 우연히 이수와 눈이 마주쳤다.
수화기 너머에 귀를 기울이는 이시훈의 시선이 이수가 손에 들고 있는 커피에 짧게 머물다 거둬졌다. 메모를 하려 어깨와 볼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그가 책상 위로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뒤로한 이수가 자리에 도착해 커피를 책상 위에 올렸다. 차마 마시지 못하고 빨대 끝을 물끄러미 바라본 이수는 방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아마도 시훈의 입술이 얕은 호선을 그렸던 것 같다. 너무도 짧은 순간이라 확실하지 않지만.
* * *
‘시훈아, 숙모님이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하시고, 시연이는 나한테 문자 폭탄이야. 집에 가서 밥 먹는 시늉이라도 하고 와.’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리지만 전화를 걸면 몇 마디 없이 끊어 버리는 저보다 유들유들한 여 본부장이 안부를 묻기에 편할 테다. 사흘째 여 본부장의 볼멘소리가 이어지자 어쩔 수 없이 그 주 일요일 시훈은 본가로 향했다.
가족이 모두 모여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건 5년 만이었다. 5년 전,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아버지와 얼굴을 붉히고 나왔으니 그걸 식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최근 어머니가 병원을 오가는 횟수가 잦다는 시연이의 전화가 없었다면 방문하지 않았을 테다. 어머니는 가사 도우미가 반찬을 내오는 족족 시훈에게 밀어 준다. 그 가운데 묵묵히 밥을 먹는 시훈과 이중건 회장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불편한 식사를 마치고 차를 준비하는 동안 아버지는 서재로 들어가 버렸고, 시훈은 저택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2층에는 시훈과 시훈의 형 이시영의 방이 마주 보고 있었다. 시훈은 독립하기 전 자신이 쓰던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반대편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방 안 가구들은 무명천으로 뒤덮여 온통 새하얗다. 손을 스치자 테이프 자국만 남은 빈 벽의 차가운 기운이 스몄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이시영이 받은 상장들이 나란히 걸린 벽 아래 이제는 흔적만 남은 자리가 있었다.
어릴 적 시연이 가지고 놀던 스티커로 붙여 놓은 사진은 아마도 이쯤에 있었다. 부서지는 포말. 세찬 물줄기가 굽이치는 사진은 형이 매달 구독하던 잡지에서 오려 낸 것이었다.
아마도 웃고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잡지에서 오려 낸 사진과 비슷한 엽서를 발견하고 시훈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빈자리를 더듬어 본 시훈이 방문을 닫고 나왔다.
서재에서 일을 보는 아버지에게 들어가 보겠다는 인사만을 남겼다.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신고 돌아선 시훈이 인사를 하기 전 어머니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날은… 올 거니?”
“굳이 저까지 참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굳은 표정의 시훈이 거절의 뜻을 비치자 어머니 뒤에 선 시연이 한숨을 쉬었다.
“평생 안 보고 살 생각 아니면 그냥 와. 속 그만 썩이고. 아빠도 이만하면 많이 양보하신 거야.”
아무튼 둘이 똑같아. 시연이 중얼거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따뜻한 집, 편한 길 마다하고 고생을 자처한 시훈이나 어디 한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아버지나. 아무래도 시훈은 아버지를 빼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여태 누구 하나 고집을 굽히지 못했다.
근심 가득한 어머니를 보자니 시훈의 마음이 약해졌다. 근 10년 넘도록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는 최근 들어 건강이 많이 쇠약해졌다. 그나마 시훈이 인사이트에 입사했다는 소식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생각. …해 보구요.”
불분명한 대답이지만 어머니 얼굴 위로 번지는 미소에 시훈은 애써 씁쓸함을 감췄다.
“그래. 밥 잘 챙겨 먹고, 약은 일부러 환으로 지었어. 먹기 편하라고. 빠트리지 말고 먹어. 알겠지?”
“가 볼게요.”
뒷좌석에 어머니가 직접 만들었다는 반찬이며 건강 보조 식품을 싣고 나서야 시훈은 운전대를 잡을 수 있었다. 일요일 밤의 도로는 교외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차량 때문인지 정체가 반복됐다. 한 번에 넘어가지 못하는 신호를 기다리며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 DJ가 소개하는 영화 음악에 시훈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영화 춘광사설과 그녀에게 등에 삽입된 Caetano Veloso의 ‘Cucurrucucú Paloma’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편안한 밤 되세요.’
창에 팔꿈치를 걸친 시훈이 핸들 위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한결 산뜻해진 바람과 나른한 음악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본가에서 정리했어야 할 감정들이 시훈의 속내를 두드렸다. 노래가 거의 끝날 무렵 결국 시훈은 아슬아슬하게 신호를 따라 방향을 돌렸다.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프로그램 중간 광고가 온 에어 중이었다. 볼륨을 켜고 광고를 확인한 이수가 무심결에 내려놓은 컵을 재빨리 옮겼다. 얼음이 녹은 컵 때문에 전시회 리플릿 위로 동그랗게 물 자국이 남았다.
화장지로 물을 훔쳐 내는 사이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이시훈 팀장. 눈을 들어 바라본 벽시계 속 시침은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수는 잠시 망설였다. 거절할 권리는 없지만 쉽게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오늘이 일요일 밤이고 월요일인 내일을 생각하면 늦은 정사는 부담이 될 게 뻔했다.
계속 신호가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보던 이수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디예요?
느긋한 목소리였다.
“집이요.”
-주말인데 그냥 집에 있어요?
“네, 보통은요.”
차 지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운전 중이거나 혹은 정차한 차에서 통화 중인가 보다. 테이블 위 얼음만 담긴 유리컵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수는 소파 위로 두 무릎을 모아 안았다.
-뭐 하고 있어요?
“모니터링이요.”
볼륨을 줄인 텔레비전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일하는 중이라.
전혀 생각지 못한 이수의 대답에 설핏 웃음 배인 대답이 돌아온다. 다짜고짜 나오라는 말부터 할 줄 알았더니 시답지 않은 질문이 이어졌다.
-전시회 좋아해요? 테이블 위에 리플릿이 여러 가지 있던데.
“아… 그거. 시간 나면요.”
TV 안에서 쉴 틈 없이 말을 하는 연예인들과 달리 현실에서 엮이지 않는 대화는 툭툭 끊기고 건조했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질문과 대답 사이에 녹아든 익숙하지 않은 공기에 이수가 무릎을 매만지며 망설이듯 입술을 뗐다.
“이 팀장님.”
-네.
“내일 월요일이라… 아시겠지만 좀 바빠요. 그러니까,”
유진우 본부장이 떠난 날 나눈 섹스 이후로 몸을 섞지 않았다. 같은 공간을 쓰는 사무실에서 마주치거나 이동할 때 따라오는 눈길을 피했다. 나란히 걷던 길도 한 발자국 앞서거나 뒤따라 걸어가면 이시훈은 거리를 벌려 주었다. 하루, 이틀 정도 의식한 움직임은 사흘을 넘기자 익숙하게 두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만들어 주었다. 이수는 시훈이 2주가 넘도록 어느 것도 요구하지 않은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
“다른 날에 보면 좋겠어요. 제가….”
더 잘해 드릴게요? 아니면 그때는 거절 안 할게요? 덧붙일 말들은 형편없이 천박했다. 아마 이게 이시훈과 제 관계를 설명하는 꼴이겠고.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한 이수의 침묵 뒤로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상대에게서 이렇다 할 답이 없었다. 다만 담배를 태우는 듯 연기를 내쉴 때마다 낮은 한숨과도 같은 숨소리가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정적 속, 창밖으로 오피스텔 앞을 지나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그리고 뜻밖에 수화기 너머로 같은 사이렌 소리가 반복해 울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아.”
시선이 창 쪽을 향했다. 설마.
-시간이 늦었네요. 쉬세요, 그럼.
“…….”
무뚝뚝하게 할 말만 남긴 전화는 미련 없이 끊겼다.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던 이수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창밖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가 희미해졌다. 이수는 걸음을 옮겨 창문에 두 손을 붙이고 서서 아래를 내려 보았다. 익숙한 SUV 한 대가 시동을 켜고 빠르게 출발하고 있었다.
퇴근 시간을 앞둔 목요일 오후였다. 오전부터 내내 이어지는 회의에 인턴인 고우재를 남겨 두고 2팀의 사무실 인원이 모두 자리를 비웠다. 고우재는 책상 앞에 앉아 김민주 대리가 지시한 자료를 서치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진동 소리가 귀에 닿았다. 끈질긴 알림에 고우재가 소리의 진원지를 찾던 중 이수의 책상 위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발견했다. 개인 핸드폰을 함부로 받을 수 없어 난감해하는 사이 내선 전화가 울렸다.
“인사이트 기획 1본부 기획 2팀 인턴 고우재입니다.”
-어, 나 전략 주현탁 실장인데, 정 팀장 자리에 없나?
“안녕하십니까! 네, 지금 회의 때문에 하루 종일 자리 비우셨는데요.”
핸드폰도 안 받고, 뭐 하는 거야. 주 실장의 혼잣말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자 고우재가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실장님, 정 팀장님께서 핸드폰을 놓고 회의 들어가신 것 같아요. 지금 집무 책상 위에 핸드폰이 있어서요.”
-아… 거참. 알았어. 정 팀 오면 나한테 전화 달라고 해.
“넵, 알겠습니다.”
고우재가 잊지 않게 포스트잇에 메모를 적어 이수의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글씨를 너무 휘갈겨 쓴 것 같아 포스트잇을 구겨 버리고 고심해 단정한 글씨체로 용무를 적어 올려놓을 때였다.
“고우재 씨 뭐 해요?”
“팀장님.”
쓰다 만 포스트잇은 얼른 치워 버렸다. 온종일 이어진 회의 때문인지 이수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는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고우재의 모습에 이수가 의식적으로 얼굴을 폈다.
“핸드폰으로 거셨는데 안 받아서 자리로 전화하셨다구요.”
고우재가 책상 위에 붙여 놓은 포스트잇을 가리켰다. 내용을 확인한 이수가 그제야 손에 쥐고 있어야 할 핸드폰이 책상 위에 놓인 걸 알아챘다.
“그러네요. 일 보세요, 그럼.”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자마자 곧바로 이수가 메모에 적힌 상대와 통화를 했다.
네, 주 실장님. 정이수 팀장입니다. 아… 지금.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어렴풋이 들리는 대화 내용은 아무래도 주 실장의 호출인 듯했다. 간단히 자리를 정리하고 시간을 확인한 이수가 재킷을 챙겨 들었다. 책상을 돌아 나온 이수에게 고우재가 꾸벅 인사를 했다. 고우재는 바삐 사무실을 나서는 팀장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몇 가지 다짐을 했다. 저런 AE가 돼야지. 능력 있고, 멋있고, 잘생기기까지.
문이 스윽 닫히고 난 뒤 의자에 앉으려던 고우재가 어정쩡한 기마 자세를 유지했다. 소회의실에서 나온 이시훈 팀장과 1미터 남짓한 복도를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사무실을 떠난 정이수 팀장에게 볼일이라도 있었는지 출입문을 향한 시선이 돌아오는 찰나였다. 짧은 순간 묵례하는 고우재의 인사를 받고 시훈이 신 대리의 자리 앞에 섰다.
“팀장님. 저희 계약하기로 했던 인플루언서 있잖아요, 요즘에 여기저기 문제 터지는 애들이 많아서 체크 좀 해 본다구요.”
시훈은 신 대리가 전하는 보고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핸드폰 메시지 창을 열었다. 방금 전 쌩하고 나선 정이수 팀장이 온종일 자리를 비울 만큼 바쁜 건 알았지만 점심때쯤 남긴 메시지에 여전히 답이 없었다.
-저녁에 식사 같이하죠.
창을 그대로 열어 둔 채 시훈이 액정 위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어디예요?
“얘랑 얘가 전에 모피랑 가죽 제품 가지고 언박싱하는 영상을 업로드한 적 있어 가지구…. 근데 주님 2) 딸내미가 팬이라네요? 내, 참….”
퇴근 시간에 겉옷까지 챙겨 입고 나간 걸 보면 저녁 미팅 이후로 바로 퇴근할 계획이라 짐작했다. 주소록을 열어 정이수 팀장의 번호를 찾아낸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관련 영상 링크 걸어서 담당자한테 메일 보내 놓죠. 그리고 다른 모델들도 계약서에 이 부분은 따로 명시하도록 합시다. 단발이라도 계약 끝나자마자 소가죽, 양가죽 입고 신으면 곤란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신 대리의 답이 떨어지고 시훈이 걸음을 옮기며 전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제작실 구영모 팀장이 내려와 시훈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2팀에 볼일이 있는지 반대편을 살핀 구 팀장이 덩그러니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우재를 향해 물었다.
“어? 정 팀장님 안 계시네…. 팀장님 외근 가셨어요?”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주 실장님 전화 받고 나가셨는데…. 외근이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현탁 실장님?”
“네.”
그럼 김민주 대리 오면 연락 달라고 전해 줘요. 넵,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멀지 않은 거리에 서 있는 시훈의 귀에 박혔다. 주 실장이라면 정이수를 부른 이유야 뻔했다. 시훈이 눈을 굴리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차마 사무실 안에서 내뱉지 못할 한숨을 참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급하게 집무 책상으로 돌아가 재킷을 챙긴 시훈이 연결음만 들리는 핸드폰을 살짝 떼고 신 대리의 곁을 지났다.
“먼저 퇴근합니다. 급한 일은 저한테 메시지 남겨 놓구요.”
건물을 아직 벗어나지 않았을 테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로도 연결음만 들리더니 로비에 다다라서야 정이수가 전화를 받았다.
-네, 정이수입니다.
“어디예요?”
-회사 앞이요.
“기다려요. 움직이지 말고.”
저녁을 먹자는 시훈의 메시지에 답을 하지 않았다.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아서.
주 실장의 목적은 분명했다. 광고주와의 미팅 자리가 일과 시간이 아닌 저녁 시간에 잡힌 의미를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 없었다.
‘정 팀장. 잠깐 얼굴만 비치고 가. 일 잘되면 내가 여 본한테 정 팀장이 애썼다고 말할게.’
비공식적인 접대는 전략실 안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지만 그럼에도 딱 잘라 거절할 수 없는 건, 이수가 가진 한계 때문이었다.
‘대기업 마케팅 담당들 대학이 어디야. SKY 아니면 외국에서 한 가닥 하고 온 애들이라구. 웃긴 게 걔네들이 캠페인 제안서 받으면 기획자 프로필에서 학력부터 봐요. 근데 저보다 급이 안 된다? 영업이 돼? 억울하면 대기업 마케팅 부서 들어가야지. 꼬우면 갑이 돼라 이 말이야.’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술에 취해 내뱉은 말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진우 본부장의 그늘 아래서 이수의 학력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나 보다. 그러다 팀장이 되고 프로젝트를 리드하자 불편한 민낯이 드러났다. 능력이나 실력은 논외로 하고 이수가 프로젝트 수주에 목맬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뻗은 이수 앞으로 익숙한 하얀색 SUV 차량이 정차했다. 차 주인을 모를 리 없는 이수가 난감한 낯으로 손을 내렸다. 동시에 조수석 창문이 열리며 운전석에 앉은 이시훈이 보였다.
“타요.”
“선약이 있어요. 다른 날로….”
“상관없고. 택시 기다렸잖아요. 타요, 데려다줄 테니까.”
“…….”
포커페이스의 이시훈이 말도 안 되는 기사 노릇을 자청하자 이수는 말문이 막혔다. 차마 주 실장에게 연락을 받고 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수의 난처한 얼굴을 엿본 시훈이 위아래 입술을 꽉 겹쳐 물었다. 어디로 보나 화를 참는 모습이었다. 달칵 운전석 문이 열리고 보닛 앞으로 돌아온 시훈이 이수의 핸드폰을 단번에 낚아챘다.
“이 팀장님…!”
열어 놓은 메시지 창을 본 시훈이 주현탁 실장이 남긴 상호명을 확인한다. 짐작한 바였다. 이 새끼가 진짜…. 시훈이 화를 삭이며 거칠게 머리카락을 넘겼다.
“계약서를 따로 쓸까 싶네, 이거. …하나하나 조항 만들어서.”
시훈이 나지막이 뇌까린 뒤 까슬한 입안을 혀로 밀어냈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져온 이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하나 이유를 설명해도 상대가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일전 다시는 주현탁 실장의 부름에 응하지 말라는 이시훈의 경고는 따라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시훈에게 뒤를 봐 달라고 내건 조건은 애초부터 이수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제 선택을 따랐다. 그걸 지금에 와서 홧김이었다고, 그저 스스로에게 가한 일종의 폭력이었다고 고백할 수 없었다. 단단히 틀어져 어긋난 스토리는 다시 되짚어간다 해도 의미가 없었다. 이시훈과 저 사이에는 출구를 찾기 어려운 미로가 있었다.
“허투루 들었어요, 내 말?”
시훈은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눌러 뾰족하게 날을 갈고 있었다. 시훈의 발아래로 길어진 그림자가 이수를 향했다.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회사 출입구 쪽을 흘깃 넘겨본 이수가 시훈을 지나쳐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일단 타요.”
이수를 따라 운전석에 앉은 시훈이 창을 올렸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등을 기대지 않은 걸 보면 혹시라도 구설에 오르내릴까 염려하는 티가 났다. 인상을 구긴 이수가 목소리를 낮췄다.
“고객사 잠깐 만나는 자리예요. 괜한 편견 때문에… 이상한 가정 하지 말죠.”
“편견? 어느 쪽 말이에요. 정 팀장님, 아니면 주 실장?”
남자를 좋아하고, 시훈에게 자리보전을 이유로 몸을 바치고 있는 정이수 쪽인지, 아니면 정이수를 볼 때마다 혓바닥을 날름대는 주현탁 실장 쪽인지, 이수도 알 수가 없었다. 가슴에 돌이 얹힌 듯 답답할 뿐.
징징. 연속해서 울리는 진동 소리의 출처는 이수의 핸드폰이었다. 액정 위로 선명하게 ‘주현탁 실장’이라는 이름이 뜨자 시훈이 단번에 핸드폰을 가로챘다.
“뭐, 해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당황한 이수가 손을 뻗었다. 휙 돌아본 시훈이 무섭게 인상을 구기고 이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지금 뭐가 뭔지 모르겠죠? 정이수 씨. 지금, 본인 위치 확인해요.”
“…위치?”
반문하는 이수의 입이 벌어졌다. 잘못 튄 말이 문제였다. 순식간에 오해가 엉망으로 얽혔다. 시훈이 욕을 짓씹으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말이 아니라… 씹.”
당신 기획팀 팀장이잖아.
골이 팬 채로 시작한 사이라서 하나하나 가려 가며 말을 해도 비뚜름하게 들릴 법한 처지였다. 타이밍을 놓쳐 버린 말은 다시 고쳐 쓴다 한들 구차해질 뿐이다. 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서로의 어깨를 짓눌렀다. 뾰족하게 갈린 날이 두 사람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침묵 속에 시훈의 손안에서 울린 진동은 잠시 끊기더니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시훈이 전원을 완전히 끈 핸드폰을 운전석 사이드 포켓에 넣었다.
“내일 사무실에서 받아요.”
이수가 턱이 아리도록 이를 사리물었다. 몸을 돌려 차 문을 열려 했지만 이미 차는 잠겨 있었다. 손바닥으로 문을 내리친 이수를 두고 싸늘한 얼굴의 시훈이 액셀을 밟았다. 목적지도 알리지 않고 차가 출발했다.
차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시훈은 운전석 창에 팔을 기대 있었다. 주먹 쥔 손으로 괴고 있는 얼굴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꼬리를 물고 있는 차들 사이로 옆 차선에서 끼어들기를 시도하자 시훈이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몇 번 울렸다. 차는 느릿느릿 가고 서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창밖을 보는 이수의 시야에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호텔로 향하고 있으리라는 짐작과 달리 예상을 벗어난 목적지에 이수는 당황했다. 잠시 후 차가 오피스텔 앞에 멈췄다.
“내려요. 올라가서 잠이나 자요.”
각을 세운 눈썹과 달리 무던한 말투에는 한숨이 스며 있었다. 조수석 문을 열기 전 이수가 시훈을 돌아봤다.
“제 핸드폰 주세요.”
“퇴근 시간 지났어요.”
무감한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핸들을 쥐고 있는 시훈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이대로 내려서 택시를 타려면 주 실장이 메시지로 보낸 장소를 확인해야 했다. 가지 못하면 사정이라도 설명해야 했다. 덮어 놓고 일단 핸드폰부터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수는 손을 내밀었다.
“이 팀장님. 주세요, 제 핸드폰.”
누그러진 어투에 시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달칵. 잠금장치가 풀렸다.
“던져서 깨부수기 전에 내려요.”
되는대로 뱉은 말은 아니었다. 시동을 끄지 않은 차 안에는 미미한 엔진음만 들려왔다. 한숨을 내쉰 이수가 포기하고 문손잡이를 당길 때였다.
“사람을…, 왜 이렇게 염치없게 만들어요.”
노기 어린 낮은 물음이 떨어졌다. 아마도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이수가 시훈을 돌아봤다. 전방을 응시한 채 시훈은 힘이 들어간 턱을 비틀다 말고 입을 열었다.
“우리 등가 교환 한 거예요. 나에게도 의무가 있다는 뜻이구요. 그런데 정이수 팀장은….”
정이수와 섹스를 한다. 자리를 지켜 주겠다 했다. 그런데 정이수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 이건 조건에 어긋났다. 마치 자신이 육욕에 미쳐 몸만 취하는 놈 같았다.
“본인 커리어에 확신, 없어요?”
한탄 같은 물음이 떨어졌다. 손잡이를 잡은 이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아는 듯, 그동안의 노력이, 당신이 쌓아 놓은 커리어 전부가 정이수가 만든 결과라고 인정하는 애정 어린 질책처럼 들렸다. 그래서 이수는 헷갈렸다. 질문이 내포하는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이수가 실소를 터트렸다.
“넘치도록 있죠. 그런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운동장이 기울어선. 그러니까 그게 억울해서….”
후 불면 바람에 금방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가벼운 목소리였다.
“…….”
“이 팀장님한테 착실하게 상납하고 있잖아요.”
“고작, 운동장 균형이나 맞춰 달라고?”
어이없어하는 물음이 튀어나왔다. 시훈은 도통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모로 저었다.
“네. 고작.”
실없이 중얼거린 이수가 엷게 웃으며 티 나지 않게 사리문 입술을 풀었다. 무뎌진 자존심은 아직도 깎일 구석이 남은 모양이다. 불순물이 가득 낀 붉은 하늘 아래 마지막 한 줌 햇살이 차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퇴근 시간 도로로 쏟아진 차량에 차선이 꽉 막힐 때까지 두 사람 모두 침묵했다. 지나간 꿈처럼 비가 내린 그날 나눈 애틋한 정사는 퇴색되고 착잡한 현실만 남았다. 감정의 부유물이 둘 사이에 넘실댔다.
“핸드폰 줘요.”
웃음기 가신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시훈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게 아닌 줄 알면서 오기를 부리는 이수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꾸 또 이러지. 혀를 찬 시훈이 조수석으로 팔을 뻗어 어설프게 열린 문을 세게 당겨 닫았다. 곧바로 앞뒤 할 것 없이 차량 문이 잠기는 소리에 이수가 경악한 표정으로 시훈을 쳐다봤다.
“밤새 이렇게 있어.”
단호한 목소리였다. 시훈은 전방을 주시할 뿐 문을 열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재차 손잡이를 당기고 잠금장치를 열어 봐도 꼼짝도 하지 않는 문을 두고 짧은 숨을 몰아쉰 이수가 얼굴을 구기며 씩씩댔다. 이성은 날아가고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자꾸 어깃장 놓지 마. 일하게 놔두라잖아. 빌어먹을 문 열…!”
간신히 참고 있던 시훈의 인내심이 결국 바닥을 쳤다.
“남의 술잔 채우는 게 일은 아니잖아!”
벼락같이 떨어진 고함에 이수의 목구멍이 순간적으로 조여들었다. 일일이 일깨워 주지 않아도 알고 있는 현실이 비난으로 돌아오자 입이 닫혔다.
퍽! 운전석 창을 짧게 주먹으로 친 시훈이 눈을 감고 이를 콱 물었다.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길이 거칠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냉정을 잃고, 소리를 지르고, 상대를 겁박했다. 이기지 못한 초조함에 진창에 발을 구른 기분이었다. 시훈이 시트에 뒷머리를 기대고 욕을 짓씹었다.
달칵. 잠금장치가 열렸다.
“…….”
힘 빠진 이수가 발을 내리고 조수석 문을 닫는 순간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노을을 삼킨 하늘에는 파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다음 날, 출근한 이수의 책상 위에는 어제 시훈에게 뺏긴 핸드폰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전원 버튼을 켜자 얼마나 주 실장이 전화를 했는지는 알 수 없고, 문자 메시지 몇 개가 액정 화면에 연속으로 도착했다.
-정 팀장 어디야?
-오는 거야 마는 거야
-이봐 지금 중요한 자리인 거 몰라?
-안 되겠네
이수는 생각을 정리했다. 주 실장에게 어제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업무 관련 문제가 터졌다거나, 아니면 길바닥에서 쓰러졌다거나, 타고 가던 택시가 전봇대를 박았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나. 접대 장소라도 제대로 확인했더라면 늦게라도 찾아가 일을 수습했을 테다. 이수의 시름이 더해졌다.
차마 의자에 앉지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사무실로 시훈이 들어왔다. 이수와 잠깐 눈을 맞춘 그가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는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곧 핸드폰 진동 소리에 이수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업무 보세요. 굳이 주 실장 앞으로 연락 말구요.
-부탁 아닙니다.
고압적인 메시지에는 질문도 답도 허용하지 않는 말만 적혀 있었다. 이수는 멀리 있는 시훈을 바라보다 결국 핸드폰을 덮었다. 머리가 아팠다. 미간 사이를 꾹 눌러 보았다.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몰라도 지금 와서 일을 수습해 본다 한들 주 실장이 쉽게 수긍할 리 없었다.
업무가 시작되고 오전이 지나도록 주현탁 실장으로부터 따로 연락은 없었다. 주말을 앞두고 주중 마무리 지어야 할 보고서를 체크하고 회의를 진행하느라 찜찜함은 희미해졌다. 어쩌면 이시훈의 단호한 메시지가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팀장님, 어제 대체할 모델 리스트요. 다시 넘겼는데 다음 주 초에 회신해 준다구요. 위에서 컨펌이 아직 안 났대요.”
보고를 마치고 몸을 돌린 신 대리가 막 출입문을 통과한 여민준 본부장을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시훈이 시선을 올리자 여 본부장의 손가락이 탕비실을 가리킨다. 이쪽으로.
여 본부장은 내린 커피에 시럽을 쭉 짜며 탕비실 문을 닫고 들어오는 시훈을 흘깃 돌아봤다.
“너 혹시, 어제 주 실장 만났어?”
댓바람부터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네, 뭐.”
“어디서.”
“알면 뭐 하려고.”
후룩.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여 본부장이 시훈을 가만히 쳐다봤다.
“너 그런 데 안 가잖아.”
이것 봐라. 여 본부장이 시훈을 살피다 말고 툭 말을 뱉었다.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서 술 안 마시잖아. 가라오케는 시끄럽대고, 오브리는 더 싫대고.”
“나이 들면 취향도 바뀌지. 나도 누가 따라 주는 술 마시고 싶고 그래요.”
T 기획에서 히트작을 줄줄이 남기고도 승진에 물먹은 데는 이 고집이 한몫했을 거다. 요즘 같은 때야 덜하다지만 접대니 뭐니 하며 비공식적으로 술자리를 만들면 시훈은 불편한 기색을 온몸으로 토로했다 들었다. 직장에서도 그러는 놈이 룸 방에서 아가씨를 앉혀 놓고 혼자 술을 마셨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취향 운운하는 뻔뻔스러운 변명에 진심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시훈이 룸살롱에서 술 마실 성질머리는 아니었다. 대략적인 전말은 알고 있는데 둘 다 속내를 은근히 숨기고 있는 투였다.
엊그제 주현탁 실장이 여 본부장의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시냐 묻자 실실 웃으며 ‘정이수 팀장 말이에요, 고객사하고 미리 대면 좀 시킬게요.’라고, 말하자면 업무 협조를 요청했다. 모르긴 몰라도 접대 자리가 있나 보다 내심 짐작만 하던 차에 오늘 아침 출근길에 주 실장을 만났다. 인사를 건넨 여민준을 향해 주 실장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요즘 팀장들은 룸 방에서 혼자 술 마실 시간도 있고, 우리 회사 워라밸이 좋아요, 요즘?’
‘누구요, 정이수요?’
‘이 팀장이요. 이시훈 팀장.’
어째 묘한 상황에 여 본부장이 부지런히 촉을 세웠다.
“안에 고객사도 있어 보여서 인사라도 하려는데… 못 했어요. 주 실장님이 나를 보고 껄끄러워하셔서. 근데 기운들이 넘치시나 봐. 아주 그냥… 술 한번 거하게 드시더라. 여자를 양쪽으로 둘이나 붙여 놓고.”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조목조목 말을 잇는 시훈을 바라보는 여 본부장의 입이 벌어졌다. 비공식적인 접대라고 해도 룸살롱에 접대부까지 끼고 있는 자리에 정이수를 불렀다는 것 자체가 혀를 찰 만했다.
“…아이, 거참… 주 실장도.”
“근데 나도 옆방에서 술 내놓고 여자 불러 놔서…. 좀 웃기잖아. 씨발, 똥 묻은 개끼리. 그래서 그냥 인사드리고 나왔어요. 분위기 깨기 그래서.”
실실 웃는 시훈의 음성은 산뜻했다. 그에 반해 주 실장이 얼마나 황당해했을지 보지 않아도 훤했다.
정이수에 관해 주 실장도 시훈도 말이 없는 걸 보면 그 자리에 없었던 모양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가야 할 사람은 없고, 애먼 시훈이 하필 같은 술집에 있었다니. 여 본부장이 온갖 가정을 세우는 사이 누군가 탕비실 문을 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
“어, 정 팀장.”
이수가 시훈과 여민준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사이를 지나 테이블에 정렬된 생수 한 통을 집었다. 그런 이수를 시훈이, 시훈을 여 본부장이 바라보며 시선이 줄줄이 이어졌다. 짧은 순간 두 사람 사이를 점쳐 본 여 본부장은 명확하지 않은 가설을 세우고, 가능한 추론인지, 결론인지를 셈해 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정이수가 고개를 숙였다.
“수고.”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는 정이수에게 별다른 징후는 없지만, 뒷모습에서 시선을 말끔하게 떨치지 못한 시훈도 그런 줄은… 잘 모르겠다. 여 본부장이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눈썹께를 긁다 말고 바 테이블 위에 오른팔을 뻗어 기댔다. 이 바닥에서 구른 짬이 있는데… 촉이 아직 살아 있다면, 단 1프로라 할지라도 확률은 존재했다.
저를 바라보는 줄 뻔히 알면서 시훈은 먼저 가요. 인사를 한다. 그에 여 본부장이 테이블 구석에 놓인 일명 악마의 잼이라 불리는 초콜릿 잼을 시훈 쪽으로 힘을 줘 밀었다. 쓰윽- 플라스틱 통 바닥이 미끄러지며 거친 소음을 냈다. 이내 테이블 끝까지 밀린 잼이 아슬아슬하게 시훈의 손안에 안착했다.
“이 팀장. 이거 한 번만 찍어 먹어 봐야지, 한 번 더 먹어 봐야지… 그러다가, 바닥 거덜 난다.”
가설은 불확실하지만 설령 아니라도 미리 선을 그어 줘야 했다. 시훈이 플라스틱 잼 통을 들어 안전한 구석에 옮겨 놓는다. 걱정이 내려앉은 여 본부장을 마주 본 시훈이 탕비실 문을 열고 대수롭지 않게 답을 남겼다.
“나 단거 안 좋아해. 걱정 마세요.”
어우. 자식이 그냥. 얄밉기까지. 해소되지 않은 의문만 남긴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회의실 테이블 위로 자리마다 자료와 커피가 가지런히 세팅됐다. 곧 대형 모니터와 노트북 연결 상태를 체크한 고우재가 테이블 밑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10분 전부터 분주하다 했더니만 자신이 참석하는 첫 아이데이션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재 씨, 센스 있네요. 혹시 커피 취향까지?”
사수인 김민주 대리며 다른 팀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뒤따라 들어온 이수도 자리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발견하고 눈썹을 올렸다.
“그건 시간이 없어서 아·아로 통일했습니다. 대신 시럽은 여기에.”
팀의 분위기는 리더에 따라 좌우된다지만, 막내의 역할 역시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고우재는 팀에 존재감을 뚜렷이 나타냈다. 자연스럽게 활력을 준달까. 온종일 이어지는 회의가 지루할 때쯤 오늘 오후의 첫 회의는 시작이 좋았다.
K사 비딩을 준비하며 광고주가 사전에 고지한 제품의 스펙과 컨셉을 공유하고, 각자 생각한 아이디어를 풀기 시작했다. 초반 아이디어 회의는 무겁지 않다. 최신 유행 하는 트렌드나 스크랩해 온 기사를 읽기도 하고 가끔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면서 서서히 윤곽을 잡아 나갔다. 그러니 깐깐한 이수도 아이디어 회의만큼은 되도록 발을 빼고 관망했다.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도록 풀어 두는 것이다.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이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 횟수가 늘었다.
고우재는 요 며칠 새벽 퇴근을 하더니 찾아온 자료를 PPT며 키노트로까지 만들어 정리해 왔다. 장장 10여 분 동안 이어진 발표는 PPT의 마지막 장에 쓰인 ‘감사합니다.’라는 다섯 글자 뒤로 막을 내렸다.
“발표… 끝났습니다.”
고우재가 부리나케 출입문 쪽에 있는 버튼을 눌러 형광등을 켰다. 정적이었다. 팀원들 모두 이수의 눈치를 살폈다. 이수가 의자까지 돌려 고우재의 프레젠테이션을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바짝 긴장한 고우재가 물음을 마치는 순간, 이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수를 시작으로 다른 팀원들 역시 참은 웃음을 터트렸다. 곧 자리에 앉은 녀석에게 김민주 대리가 무어라 속삭였다. 그제야 고우재가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아마도 아이데이션 회의의 취지를 전달한 거겠지. 이수가 미소를 머금고 고우재를 바라봤다. 콧잔등을 찌푸리며 웃은 고우재는 이내 우는 시늉을 하며 공손한 말투로 애교를 부렸다.
“…노력만은 귀엽게 봐주십시오.”
소리 내 웃어 본 게 얼마 만인지. 아무리 인턴이라지만 준비해 온 결과물 앞에서 웃음을 터트린 건 실례였다. 하지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아이디어 회의에 전의를 불태우는 열정이라니. 기특하고, 못내 귀여웠다. 고우재는 야근을 하느라 푸석한 얼굴에도 여전히 생기가 돌았다.
“고생했습니다. 신선하고, 재미있게 잘 봤어요. 당장 쓸 만한 건 없지만.”
이수의 들었다 놨다 하는 감상 평 때문에 고우재의 심장 박동도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싹싹하게 “고맙습니다.” 머리를 숙인다. 실패를 끌어안는 자세가 의기양양했다. 그건 미래에 자신 있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자세였다.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자, 그럼 회의 시작할까요.”
이수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회의실을 울렸다.
“광고주 쪽에서 제시한 가이드라인은 없습니다. 다만 현재 시장에서 …”
인사이트에 입사한 뒤 첫날부터 앞만 보고 달린 어린 정이수도 그랬다. 자료실에서 날을 새우며 외국 잡지며 영상 자료를 훑던 기억이 영사기가 돌아가듯 머릿속을 스쳤다.
“우리는 인턴 안 들어오나. 팀 분위기가 다르네.”
누군가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커피를 들고 자리 사이를 지나가던 시훈이 직원을 따라 몸을 돌리자 회의실 문을 열고 2팀이 나왔다.
정이수는 손짓까지 동원하여 설명하는 인턴에게 소리 없는 미소를 자꾸 흘렸다.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파티션을 넘어 잡음처럼 웅웅 울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해사한 웃음을 터트린 이수가 시선의 방향을 바꿨을 때 불현듯 시훈과 눈이 맞았다. 얼굴 위로 잔향처럼 남아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휘발됐다.
묵례를 하고 이동하는 이수의 옆으로 인턴 역시 얼른 시훈에게 고개를 숙였다. 피부 아래 미처 깨닫지 못한 감각들이 시훈의 신경을 긁었다.
이수는 조금 전 회의에서 고우재가 일목요연하게 A안, B안… 붙여서 설명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문이 스르륵 다시 열렸다. 고우재였다.
“죄송합니다.”
옆으로 비켜서 설 자리를 만들어 줬다. 자료실에 가는 길인지 품 안에 대여한 잡지가 한가득이었다. 인터넷 서치만도 엄청났을 텐데 잡지 또한 후루룩 넘겨 봤대도 만만한 양이 아니었다.
“화면 안 보고 말 잘하던데요. OJT 할 때도 인상적이었다고 들었어요. 인사팀 통해서.”
고우재가 슬쩍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웃음기 있는 목소리를 냈다.
“저, 사실은… 어제 혼자서 리허설도 했습니다.”
그 바람에 이수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서렸다.
엘리베이터는 바로 아래층에서 멈췄다. 곧, 문이 열리고 이수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며칠 전 주 실장 일로 서로 얼굴을 붉힌 시훈이 서 있었다. 정통으로 마주친 건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네.”
고우재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시훈이 이수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이수의 오른편에는 시훈이 왼편에는 고우재가 서 있었다. 문이 닫히고 층이 바뀌고 난 뒤 고우재가 이수 편에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팀장님. 전에 드렸던 피로 회복제 어떤 건지 알려 드릴까요?”
“비타민.”
“네. 그거 약국에서도 팔아요. 비싸도 성분이 좋대요.”
알아도 몰라도 그만이지만 이수는 알겠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시시콜콜한 고우재의 질문에 답을 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몇 번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층층이 이동하는 동안 올라간 입꼬리를 스스로도 느낄 무렵이었다.
“정이수 팀장님.”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무도 타지 않는 층이었으나 닫힘 버튼을 어느 누구도 누르지 못했다. 고우재의 두 손은 무겁고, 이수는 손을 뻗을 위치가 아니었다. 끊긴 대화 속 이시훈이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금요일 저녁에 일정 있으세요?”
순간 이수가 스르르 닫힌 문에 비친 시훈을 바라보았다. 타이밍도 질문도 저 혼자만의 오해일까. 당황스러웠다.
“2팀에서 미디어 파사드로 라이브하신 광고, 퇴근길에 같이 현장 답사 가능하신지 해서요.”
싸늘한 얼굴과 달리 업무 협조를 구하는 어조는 예사로웠다.
“와… 팀장님 기획이셨구나.”
고우재가 혼잣말을 곱씹는다. 건물 외벽에 조명이나 영상을 쏘아 구현하는 방식은 일반적이지 않지만 주목성이 큰 미디어 매체였다. 반년 전 이수가 기획한 광고는 시청 모 빌딩을 통해 일정 시간 노출되는 중이었다. 재계약을 한 L사 아트 시리즈와 부합하는 기획이라 1팀의 제안을 광고주 쪽에서 수용했다고 건너 듣기는 했었다.
그렇다고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있나. 즉답을 피하는 사이 고우재가 이수에게 공손히 물었다.
“팀장님. 혹시,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불금 퇴근길을 상사와 함께할 생각이라니. 주는 대로 전부 받아먹겠다는 각오가 거짓은 아닌지 녀석은 떨어진 이삭도 한 톨 한 톨 주울 기세였다. 문제 될 건 없었다. 어차피 광고는 이삼 분이면 플레이되고 끝이 난다.
“그래요, 고우-”
흔쾌히 수락하는 이수의 답을 자른 이는 이시훈이었다.
“거참… 인턴이 따라올 만한 자리는 아니구요.”
시훈이 주름진 미간 사이를 누르며 슬쩍 볼 안으로 혀를 굴렸다. 한숨과 함께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는 모습에는 냉정함이 배어 있었다. 더 묻지 말라는 듯, 명확한 부정의 의미였다.
“…넵, 죄송합니다.”
고우재는 즉시 몸을 사렸다. 실망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열정이 과해 눈치가 없었다 스스로를 책망할 뿐.
바로 아래층, 자료실에 다다르자 고우재가 허리를 굽힌 인사 뒤로 발을 내렸다. 이제 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침묵 속에 층 표시기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고작 로비로 가는 길이 이렇게 더딜 줄이야. 이시훈은 등 뒤에서 봐도 어딘가 골이 난 기색이었다. 이수는 짧은 순간 피로감이 몰려왔다. 매번 서로 부닥치고 난 뒤가 개운하지 못했다. 주 실장 건으로 얼굴을 붉히고 난 후 마주친 오늘도 생략된 언어가 너무 많았다. 회의를 마친 뒤 유쾌했던 기분이 삽시간에 어그러졌다.
“같이 협업한 업체 연락처 공유드릴게요. 저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네요.”
로비에 다다를 때까지 시훈은 말이 없었다. 핸드폰으로 전송한 업체 이름을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곧 문이 열리고 시훈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 이수를 돌아봤다.
“일하자는 거 아닙니다. 퇴근하고 보죠.”
이시훈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익선동의 금요일 밤은 분주했다. 근처 사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이동한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골목에는 고즈넉한 한옥을 리모델링한 식당과 카페가 즐비했다. 가끔 근처 미술관에 갔다 즐겨 찾는 카페도 이 근처였다. 익숙하지만 낮과 밤은 꽤 다르다. 그리고 혼자인 것과 둘도 다르고.
저녁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묵살하고 도착한 식당에서 이시훈은 자연스럽게 두 사람분의 식사를 주문했다. 좌석 수가 많지 않은 아담한 식당은 예약한 손님만 받는 듯 보였다.
코스로 나오는 요리는 하나같이 담백했다. 음식이 놓일 때마다 재료와 요리 과정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 곁들여졌다. 전통 발효 장으로 간을 하고, 계절에 어울리는 신선한 식재료가 쓰인 음식은 대부분 소화에 좋다고 했다. 테이블 위로 제철에만 맛볼 수 있는 향긋한 나물이 놓이고, 당일 바다에서 가져온 민어가 메인 요리로 올랐다.
“민어는 여름에 보양식으로 많이 드세요. 그럼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그럼에도 더딘 이수의 젓가락 앞에서 시훈은 묵묵히 식사를 했다. 마치 서로를 모르는 두 사람이 식사를 위해 테이블을 공유한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붉힌 며칠 전 상황을 도려낸 사람처럼 이수도 시훈도 그렇게 굴었다. 주현탁 실장 건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이수는 입을 다물었다.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시훈의 핸드폰이 드르륵 연속으로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시훈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내일까지. 곧 사무실로 들어가요. 2시간 뒤죠? 네, 제가 제작실로 올라갈게요. 식사를 한 후 다음 행선지가 호텔일 거라 생각한 이수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엊그제 엘리베이터에서 서늘하게 통보한 시훈을 생각하면 갑자기 일이 끼어든 건지 일 사이에 계획 없는 식사 자리를 끼워 넣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미적미적 먹다 만 음식을 두고 시훈이 통화를 마친 시점에 이수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업무 때문에 들어가셔야 하면 이만 가죠.”
시훈이 이수 앞에 놓인 그릇을 슬쩍 내려 봤다. 언뜻 실망한 빛이 비치다 이내 사라졌다.
“별로, 입에 맞지는 않았나 보네요.”
“…….”
겨우 먹은 티만 나는 그릇을 두고 이수가 입술을 곱씹었다. 맛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 문제라는 걸 아마 시훈도 알고 있을 테다.
“…가죠.”
차마 말을 고르지 못하는 이수를 두고 시훈은 재킷을 손에 들고 일어났다. 식당 밖, 양 갈래로 나뉜 길에 섰다. 왼쪽으로 가면 주차장이, 오른쪽으로 가면 큰길이 나왔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고개를 숙이자 불붙이지 못할 담배를 손에 들고 있는 이시훈이 입을 열었다.
“데려다줄게요.”
“택시 타면 돼요.”
“어차피 굴리는 차, 그냥 타요.”
이시훈은 제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는지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거절은 말라는 의미였다.
주차장으로 가는 골목에는 식당에 들어갈 때보다 지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금요일 밤은 앞뒤로 간격을 벌려 걷는 두 사람을 제하고 누구나 쉽게 취하고, 가볍게 어울리는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처서도, 여름이 끝나는 마지막 장마도 지났건만 여전히 더운 바람이 무겁게 내려앉은 골목에는 열기가 고여 있었다. 재킷을 손에 들고 소매를 올린 시훈과 달리 정이수의 셔츠는 언제나처럼 목과 소매 끝까지 단추가 죄 잠겨 있었다. 게다가 재킷까지. 단정하게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이수의 어깨에 눈길이 닿은 시훈은 일전 티셔츠를 빌릴 때 열어 본 옷장에 듬성듬성 걸려 있던 무채색 옷들을 떠올렸다.
정이수는 타고난 얼굴이 아니었다면 어딘가에 묻혀 지내도 아무도 모를 사람 같다. 너무하다 싶을 만큼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비슷비슷한 셔츠나 바지, 아무 개성 없는 구두가 그랬고, 시계 같은 액세서리는 착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텅텅 빈 집과 냉장고를 보면 말마따나 관심이 없다고 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아마 선인장을 키워도 일주일 안에 죽이겠지.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사는 집도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과 다른 그런 사람이었다. 정이수는.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웃는 소리며 노랫소리가 한데 엉켜 두 사람이 걷고 있는 거리를 메웠다. 시훈은 나란히 걷는 이수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이 골목에서 유일하게 표정이 없는 사람은 정이수 하나였다. 길을 더듬어 걷는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
좁은 길 때문에 마주 오는 남자와 어깨가 부딪쳤다. 몸이 밀린 정이수가 가벼운 충돌에 그제야 바닥에 고정된 눈을 들었다. 자칫하면 앞에서 진을 치고 걸어오는 무리에게 다시 한번 어깨가 치이기 딱 좋았다.
“잠깐 이리 서 봐요.”
팔꿈치를 잡아끌자 순순히 따라온 이수가 가로등 아래로 섰다. 의문을 담은 눈은 시훈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달싹이는 입술이 전하는 숨, 피곤을 담은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가 초가을 밤에 녹아들었다. 시훈은 그런 이수를 가만히 내려 보았다.
“이 팀장님, 왜….”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형광등이 들어온 사람처럼 이수가 눈을 들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묻는 얼굴이었다.
“…….”
상대가 뜸을 들였다. 한 걸음을 사이에 두고 이시훈의 검은 동공과 눈을 맞추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시훈의 뒤로 오가는 사람들이 빛에 번져 한데 뭉개져 보였다. 소매를 걷은 시훈의 팔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가 살짝 얼굴을 기울였다. 이수는 마른 입술의 틈을 벌려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뻗은 손은 잠시 허공에 머무르다 시야 아래로 떨어졌다.
“좀…, 답답해 보여서요.”
툭. 끝까지 잠긴 셔츠의 위 단추가 풀어지고 길고 하얀 목이 드러났다. 그 순간 이수가 고개를 외로 돌렸다. 멍하게 막힌 귀를 뚫고 주변의 소음이 쏟아졌다. 그게 할 말의 전부였는지 이시훈은 먼저 등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이수는 시훈이 키스를 하려 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수가 홧홧한 열이 오른 제 얼굴을 손등으로 쓸어 냈다.
만차인 주차장에서 주차 요원이 가지고 나오던 시훈의 차가 이상하게 멈췄다. 당황한 주차 요원이 즉시 내려 시훈에게 달려왔다.
“저, 손님. 죄송합니다…! 제가 문을 긁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변상해 드릴게요.”
이수와 약간 떨어져 담배를 태우던 시훈이 저벅저벅 긁힌 차 옆으로 걸어갔다. 하얀색 차 문에 20센티는 족히 돼 보일 흠집이 길게 나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주차 요원은 이제 갓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녀석의 아르바이트비 절반이 변상 비용으로 날아갈 게 분명했다. 말없이 허리를 숙여 살핀 시훈이 담배를 끼운 손으로 긁힌 부분을 가볍게 쓸었다.
“얼마죠?”
“…네? 아… 그건 공업사에서 처리 후에 영수증 보내 주시면 제가 계좌 이체로….”
“아니요, 주차 비용 말입니다.”
“그, 만 2,000원인데요… 그냥 가셔도 돼요…!”
무감한 물음에 아르바이트생이 손사래를 쳤다. 시훈이 바닥에 버린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별로 티 안 나네요. 신경 쓰지 말고 주차 비용만 계산하세요.”
“아… 네.”
주차 비용을 계산한 알바생은 운전석에 탄 시훈에게 카드를 전달한 뒤 몇 번이나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는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시립미술관 앞길에서 빽빽하게 밀린 차는 떨어진 신호가 무색하게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조용한 차 안에서 시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긁힌 차는 안중에도 없이 꽉 막힌 길 때문에 짜증이 나 보였다. 집으로 바래다주는 게 벌써 몇 번째더라. 내비게이션 기록에 남은 주소지와 제게 맞춰 조정된 카 시트가 제법 익숙해 드는 생각이었다.
조수석 창밖을 바라보던 이수가 하릴없이 핸드폰을 켰다. 이리저리 어플을 넘겨 보다 무심코 켠 SNS 친구 추천 카테고리에 고우재의 이름이 떴다. 무심결에 클릭해 들어간 사진 목록 상단에는 사옥 출입구에서 찍은 고우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슥슥- 손가락이 의미 없이 사진을 넘겼다. 책상 위, 일하는 모니터, 회의실, 구내식당, 카페테리아, 복도, 옥상.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올린 사진에는 구석구석마다 고우재의 웃는 얼굴이 셀카로 찍혀 있었다. 팔로워 수가 많다고 하더니 아래로 달린 댓글과 좋아요 수가 어마어마했다.
“업무 사진을 그렇게 올리면 쓰나.”
쯧. 시훈이 낮게 중얼거렸다. 남자의 눈초리가 핸드폰 액정에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화면 속에는 사원증을 걸고 있는 고우재의 셀카가 있었다. 보안을 염려하는 투였으나 어딘가 삐뚜름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걔는 몇 살이에요?”
인턴이나 씨라는 호칭마저 생략된 물음이었다. 혹시 고우재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엘리베이터에서 고우재에게 대놓고 무안을 준 시훈이었다. 반면, 일면식도 없는 알바생에게는 호의를 베풀고.
“스물다섯…. 아마 그럴 거예요.”
시훈은 팔꿈치를 창에 올려 이마를 괸 상태였다. 곧 옆에서 끼어들기를 시도하는 차를 향해 시훈이 빠앙-! 하고 클랙슨을 세게 눌렀다.
“…어리네, 너무.”
이시훈이 읊조렸다. 아무래도 긁힌 차 때문인 것 같다. 저조한 기분은.
* * *
이른 퇴근이었다. 오늘은 그동안 2팀이 고생하여 준비한 K사 비딩 결과가 통보됐다. 여 본부장이 예산 책정에 까다롭게 굴던 고객사의 광고 수주를 성공한 것이다. 제안서와 프레젠테이션은 과감한 강수를 두었다. 고객사 산하의 인하우스 대행사가 기존 마케팅 전략을 답습하여 시리즈를 구상한 것과 달리, 이수의 팀은 고객사 제품의 본질부터 따지고 파헤치는 내용을 주로 삼았다. 프레젠테이션 내내 광고주가 느낄 불편함에 수위를 조절해 가며 방향을 제시하는 과정은 살벌했으나 결국 이수가 이끄는 기획 2팀이 일을 가져왔다.
오피스텔 근처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길에 백주홍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번 K사에서 발주한 제작물 중에 백주홍이 이끄는 백기획이 한 꼭지를 맡은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안부도 물을 겸 겸사겸사 이수를 찾은 듯했다.
-축하드려요! 고생 많으셨어요. 조만간 그쪽으로 외근이에요. 시간 괜찮으면 한번 찾아갈게요.
이수가 메시지를 보내자 언제나 환영이라는 답문이 도착했다. 기분이 좋았다. 원하는 일도 잘 마무리됐고, 백 선배와 서로 축하를 나눈 메시지도 반가웠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숫자를 올려 보는 이수의 입술 사이로 철지난 CM송 몇 개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장을 본 봉투를 들고 거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이수는 잠시 생각을 더듬었다. 문 앞에 배송된 택배 상자 때문이었다.
“주문한 적 없는데….”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긴 해도 정기적으로 받는 생필품이 도착할 때는 아니었다. 예전에 해외 배송 상품을 주문했나. 기억을 되짚으며 상자 겉면을 확인했다. 주소도 정이수라는 이름도 확실한 걸 보면 제 앞으로 온 물건이 분명했다.
택배 상자는 씻고 간단한 요기를 할 때까지도 테이블 위에 놓여 있을 뿐 관심 밖이었다. 이윽고 이수가 리모컨을 쥐고 소파에 앉았을 때야 비로소 테이프가 뜯겼다.
겉면의 상자를 열자 예상외로 리본에 묶인 또 다른 상자가 들어 있었다. 명품 브랜드 로고에 다시금 택배 박스 겉면을 확인했다. 확실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확인한 이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리본을 풀었다.
박스 안 미색의 포장지를 한 꺼풀 벗겨 내자 은은하게 핑크빛이 도는 니트와 회색 팬츠 한 벌이 접혀 있다. 이거 뭐지…. 다시 한번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 봐도 발신인란에는 매장 이름만 적혀 있었다. 난감함에 뒷목을 훑는 사이 박스 속지 사이에 접힌 메모지를 뒤늦게 발견했다.
[빌려 간 티셔츠를 잃어버렸네요.
부득이하게 다른 옷으로 보냅니다.
미안합니다.
이시훈.]
“…….”
메모지를 내려놓은 이수가 눈을 굴렸다. 그제야 비가 쏟아지던 그날 흠뻑 젖은 이시훈이 입고 간 티셔츠를 기억해 냈다. 이수는 손도 대지 않은 새 옷을 밀어 두고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얼마간 울리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네.
“제가 택배 하나를 받았는데요. 이 팀장님이 보내신 거요.”
-네.
설명조차 없는 단답이 이어졌다.
“안 돌려주셔도 되고, 이거 받은 물건이 과해서요.”
-…….
끊긴 전화처럼 아무런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 이시훈이 곧장 제 의사를 밝혔다. 딱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냥 입으세요.
“이 팀장님.”
-회의 있어요. 이만 끊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핸드폰을 놓고 내용물을 물끄러미 내려 본 이수는 오늘 오후 시훈과 나눈 짧은 대화를 떠올렸다. 이런 상자를 보냈다는 말은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는 대화였다. 대회의실에서 열린 정기 회의를 마치고 공교롭게 단둘이 타게 된 엘리베이터에서 1층 버튼을 누른 시훈이 불쑥 물었더랬다.
‘주말에 보통 집이라고 했나요?’
전후 맥락 없는 물음에 눈만 깜박인 이수가 일전 시훈과 나눈 통화를 기억해 냈다. 그리고 오피스텔 앞에서 출발한 시훈의 차도.
‘네, 보통은요.’
‘…….’
숭덩 잘린 대화가 이상하다 느낄 무렵 사무실에 당도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딱히 반문할 생각도, 더 할 말도 없는 것 같아 예의 묵례를 하고 몸을 기울인 이수의 팔꿈치를 시훈이 살짝 잡아끌었다. 잡힌 팔에서 시훈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자 다시 한번 물었다.
‘일요일만 아니면. 괜찮아요?’
무슨 말이지. 또다시 앞뒤가 죄다 잘린 물음에 이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섹스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오피스텔로 찾아온다는 건지…. 뜻을 알려 달라는 의미였는데 이시훈은 발을 물렸다.
‘그때쯤 다시 이야기하죠.’
무뚝뚝하게 떨어지는 말 뒤로 문이 닫히며 대화는 그렇게 종료됐다.
“…흠.”
시훈의 입장을 고려해 보자면 마트에서 산 티셔츠를 곧이곧대로 돌려주기는 손이 민망했을지 모르겠다. 같은 직급이라고 해도 배경만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온 환경이 다른 사람이니. 아마 매장 내의 직원에게 적당한 물건으로 보내 달라 부탁했을 테다. 설마 시훈이 직접 골랐을 리 없었다. 어렴풋한 생각을 몰아내며 숨을 내쉰 이수가 도로 닫은 상자를 드레스 룸 서랍장 위에 올려 두었다. 곧 불 꺼진 방 문이 닫혔다.
“와….”
뒤따르는 고우재가 터트린 감탄에 김민주 대리가 입 앞으로 손가락을 세웠다.
“촬영 중에 소리 내거나 돌아다니지 말구요. 그리고 사진 조심.”
“넵, 알겠습니다.”
고우재가 핸드폰을 무음 처리 하고 촬영장 여기저기로 목을 빼며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이수는 광고주, 촬영 감독과 차례로 인사를 마치고 촬영장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김민주 대리가 실무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고우재가 이수의 뒤쪽에 바짝 붙어 눈을 반짝였다.
촬영 내내 고우재는 열심히 두 사람을 쫓아다녔다.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고 기민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고우재는 긴장으로 조금 얼어 있었다. 그럼에도 핸드폰을 가지고 곳곳을 누비며 사진과 영상을 부지런히 찍는 모습은 딱 고우재다웠다.
새벽까지 이어진 촬영이 마무리되고 이수는 조수석과 뒷자리에 각각 김민주 대리와 고우재를 태웠다. 차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서울 외곽에 사는 김민주 대리를 집 앞에 내려 주고 다시 시동을 거는 동안 뒷자리에서 내린 고우재가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저도 여기서 택시 타고 가겠습니다.”
큰길가로 나간다고 택시가 잡힐 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 시간에 택시 잘 없어요. 기사들 교대 시간이라.”
무턱대고 기다리거나 앱을 통해 부른다 해도 차고지로 들어가는 기사들을 기다리다 지하철이나 버스보다 늦지 싶었다. 이수가 타라는 신호를 줬다. 어차피 막히는 시간도 아니라 금방 찍고 들어갈 요량이었다.
“…음. 한 대 정도는….”
“없어요. 강동이라고 했죠. 가는 길이니까 태워 줄게요.”
“팀장님, 그럼 제가 운전할게요.”
은근한 실랑이가 이어졌다. 기색을 보면 쌩쌩해 보이기는 하나 딱히 운전대를 넘겨줄 만한 이유는 없었다. 번거롭게 자리를 바꾸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면허 있어요?”
“네.”
“경력 얼마나 되는데요.”
고우재가 손가락 하나를 폈다.
“1년?”
“아니요.”
“한 달?”
“…조금 더….”
“일주일?”
“네. 말하자면 신상이요.”
하. 고우재의 밑도 끝도 없는 당당함에 웃음이 터졌다. 정적이 가득한 골목에서 창을 열어 둔 채 웃던 이수가 조수석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까불지 말고 타요.”
허세를 부렸다가 괜히 모양만 빠졌다. 조수석에 얌전히 올라탄 고우재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이수 때문이었다. 출근 첫날 긴장한 탓에 냅다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세웠을 때 약간 당황했더랬다. 젊은 상사를 마주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미남이라기보다는 미인에 가까운 외모 때문이기도 했다.
막힘없이 쭉 뻗은 서울 시내를 달리며 점멸하는 신호등을 지날 때쯤 고우재에게 물음이 떨어졌다.
“고우재 씨, 그렇게 좋아요?”
“네?”
운전하는 이수의 모습을 창을 통해 보던 고우재의 목소리가 불쑥 튀었다.
“촬영장이요.”
“아아… 네. 저 사실은, 어제부터 잠을 못 잤어요. 설레서요.”
“카메라 돌아가면 한고비 넘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때부터 또 시작이에요. 기획자는 온 에어 되고 난 후에도 일이 끝났다고 할 수 없구요. 말이 좋아 열정이고…. 과로사하기 딱 좋지. 그래도 이 일이 좋아요?”
“그래서 제가 보조 식품부터 운동까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사람이 체력이 달리면 쉽게 지치잖아요. 정신도 무너지고…. 그래서 단단히 다지는 중이에요.”
확실히 고우재는 여러모로 건강한 면이 있었다. 사람 말을 꼬아 듣지 않고 제 장점을 어필하는 데 주저함도 없었다. 그래서 신선했다. 매번 감추고 사는 일이 일상이 된 자신과 너무 달라서.
지나는 서울 야경이 퍽 보기 좋았다. 걸리는 신호 없이 조용하고 느긋하게 달리는 차 안이 편안했다. 고우재를 흘깃 바라본 이수가 미소를 띠었다.
“일해 보니까 어때요?”
가벼이 묻는 질문이지만 받는 쪽에서는 부담이 될 법했다. 하물며 팀장이 묻는데 오죽할까. 그런데 고우재는 망설이는 기색 없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진짜 어려워요. 엄청 어려워서 괜히 덤볐나 싶기도 한데….”
고우재가 잠시 뜸을 들이다 이수 쪽을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그만큼 매일매일이 설레요.”
예상한 답이었다. 고우재 같은 녀석이라면 아마 그러리라 짐작했다. 녀석을 보면 그 나이 때의 자신을 떠올리고 만다. 수많은 자료를 찾아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를 기획하고, 대입했다. 사례를 찾는 일도 모두 즐거웠다. 하다못해 그 시절에는 이른 아침 본부장이 사 주는 해장술마저 치열한 광고인의 상징이라 여겼다. 낭만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던 때였다.
“인사이트에 신입 사원으로 지원할 생각도 있어요?”
“무조건. 무조건 1순위요. 채용 공고 언제 뜨는지만 기다리고 있어요.”
각오를 다지는 고우재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회사에 출근하는 매일매일이 즐겁다고, 일개 인턴인 지금부터 애사심이 퐁퐁 솟는다는 고우재의 말은 그냥 하는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졸업한 선배들이 다들 그러던데요. 사회생활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구요. 그럼 저는 단춧구멍까진 잘 찾은 것 같긴 해요.”
잘 끼워야 하긴 해도요. 덧붙이는 말에 은근한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그렇겠죠? 이제부터는 인턴십도 이력서란에 쓰일 테니까.”
신입 사원 채용이 매년마다 줄어 가는 추세에 인턴십 경력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에게 중요한 이력이었다. 이번 연도에 개최된 인사이트 광고 공모전 참가자 수가 예년에 비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도 수상자에게 인턴십 기회가 부여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팀장님, 저는 목표가 딱 하나예요.”
고우재가 비장하게 운을 뗐다.
“어떤 광고는 10년, 20년이 지나도 사람들 뇌리에 계속 박혀 있잖아요. 모델, 카피, 배경 음악, 메시지. 그렇게 안 잊히는 15초짜리 광고를 만드는 게 제 목표예요.”
“전통적인 매체로 접근하는 방식이 요즘 대세는 아닐 텐데?”
“사람들이 요즘 광고는 쌍방향 소통이 대세라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결국에는 기획하고 의도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순간 거기에 모순이 생긴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저는 정공법. 고전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 싶어요. 일방향이되 잊힐 수 없는 광고를 만드는 거죠. 그렇게 되면 단발성 마케팅이 아니라 20년, 30년 동안 광고가 이어지는 거잖아요. 광고가 15초의 예술이라면 저는 얼마든지 15초에 헌신할 기운도 각오도 있구요.”
어쩌면 고우재의 대답은 어떤 광고를 만들고 싶냐는 물음에 대한 흔한 답일 수 있었다. 그러나 말에 담긴 힘이나 전해지는 진심이 기특했다. 젊은 패기가 이수를 자극했다.
팀에 혹처럼 달려 온 화분을 창가에 두고 가끔 물만 한번 주는데도 쭉쭉 자라 잎이 무성해졌다. 고우재는 그런 녀석이었다. 이수의 가슴이 빠듯해지는 이유였다.
“평생 광고 한 개 만들고 끝나겠다. 고우재 씨는.”
푸흡. 고우재도 이수도 편하게 웃음을 터트릴 때였다. 내비게이션 용도로 올려 둔 이수의 핸드폰으로 갑작스러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토요일 4시. 안국동 H 미술관 앞에서 보죠.
이시훈 팀장이라고 뜬 이름이 명확했다. 운전 중이라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화면에 뜬 메시지가 사라졌다. 난처함이 낯으로 드러날 정도는 아니나 이수는 괜스레 두 입술을 잠시 말아 보다 풀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뜻하지 않게 메시지를 보게 된 고우재가 가벼운 감상을 털어놨다.
“두 분 친하신가 봐요.”
“그냥요….”
같은 본부 팀장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딱 잘라 아니라고 할 수도 없어 둥글게 넘어가려 한 말이었다.
“그게, 제 자리 방향이 그래서 그런지 이시훈 팀장님하고 저하고 눈이 마주칠 때가 많아서요. 팀장님 보시다가 항상 저랑….”
다 뱉어 놓은 문장을 맺지 않은 고우재가 고개를 비틀며 중얼거렸다.
“그냥… 4시 44분. 이거랑 비슷한 건가….”
무슨 의미인지 이수가 의아해했다.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때마침 울리는 안내음에 대화는 그대로 마무리됐다. 고우재가 가족과 함께 산다는 아파트 출입구에 차를 세우자 조수석에서 내린 녀석이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문을 닫기 전 가방을 뒤적였다.
“팀장님, 경쟁사 제품이라 주님이 아시면 안 될 것 같지만….”
창 너머 이수의 앞으로 가방에서 꺼낸 비타민 드링크를 내민다.
“고마워요.”
“팀장님, 화이팅입니다.”
고우재는 환하게 웃으며 앞머리가 풀썩이도록 다시 한번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이수가 운전대를 잡고 차를 출발했다. 고우재의 에너지 때문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벼운 새벽이었다.
* * *
-토요일 4시. 안국동 H 미술관 앞에서 보죠.
이수가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지상으로 올라오며 다시금 시간과 장소를 확인했다.
“와….”
곧 지하도 밖으로 나온 이수는 하마터면 어제가 여름이고 오늘이 가을이라 여길 정도로 너무 다른 풍경에 깜짝 놀랐다. 해 뜨기 전 출근하고 해가 지면 퇴근이라 계절이 지나는 줄도 몰랐다.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푸른 잎 사이로 드문드문 진 단풍이 눈에 띄었다. 약속 장소까지 남은 시간을 셈해 본 이수가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대부분 퇴근 후 호텔로 이어진 과거와 달리 굳이 시간과 장소까지 잡아 가며 만나는 이유는 최근 이시훈의 주말 출근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얼마 뒤 뉴욕 출장이 계획된 터라 이시훈은 꽤 바빠 보였다. 표면적으로는 타 팀이 담당한 브랜드 론칭 행사에 여 본부장은 책임자 자격으로 참석하고 이시훈은 참관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최근 인사이트에서 인수한 뉴욕 에이전시가 목적이라는 건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자주 가는 호텔이 이 근처라 아마도 이쯤에서 픽업하기가 편할 테다. 미술관 근처에 다다랐을 때 어느쯤에 서 있어야 할지 가늠해 본 이수가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차량으로 픽업할 만한 적당한 위치를 고민한 행동이 무색하게 이시훈이 본관으로 향하는 앞길에 서 있었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끼운 채로 느릿느릿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확실히 평소에도 말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오늘 시훈은 소매를 둘둘 말지도 위 단추를 풀지도 않았다. 얇은 하프넥 폴라 위에 날렵한 코트를 걸친 모습이 계절에 잘 어울렸다.
“일찍 오셨네요.”
이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훈의 시선이 발끝에서 머리까지 따라 올라왔다.
“…….”
언뜻 옷을 훑어보는 기색에 이수가 겉옷을 걸친 오른손으로 왼팔을 슬쩍 움켜쥐었다.
“이거 전에 보내 주신 옷인데… 잘 입을게요.”
받을 때만 해도 다시는 열어 보지 않을 것 같던 옷을 두고 아침 내내 고민했다. 환불은 시기를 놓쳐 버렸고, 티셔츠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고가의 답례에 성의를 보이는 의미로 입기는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평소 무채색의 셔츠나 세트로 입는 정장에 익숙한 몸은 니트며 턱이 없는 바지가 어색하기만 했다.
이시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괜하게 바닥을 한번 내려 본 시훈이 쌩하게 말을 남기고 먼저 몸을 돌렸다.
“네.”
목적지도 알리지 않고 훌쩍 걸어가는 시훈 때문에 이수가 홀로 서 있자 성큼 돌아온 그가 등 위로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채근하는 손길이었다.
“좀 걸어야 해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토요일 오후는 날이 좋아 사람이 많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초록 잎 사이로 드리운 노랗고 빨간 나뭇잎 색깔이 또렷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왠지 한 해가 다 지난 기분이 든다. 아직 낙엽이 떨어지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한복을 입은 학생들의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고 팔짱을 낀 커플들이 무성하게 길을 지났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풍경을 감상하느라 어색함도, 어디로 이동하는 중이냐고 묻는 것도 잊어버린 이수는 슬쩍슬쩍 닿는 시훈의 어깨마저 눈치채지 못했다.
모퉁이를 돌고 쭉 뻗은 길을 지나길 10여 분. 한 건물 앞에 당도해 떨어진 물음에 이수는 대답보다 건물 외벽에 걸려 있는 전시회 포스터부터 확인했다.
“본 적 있어요?”
이수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수가 거리를 지나다 가져온 리플릿에 소개된 전시회 중 하나였고, 리플릿은 오래전부터 오피스텔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우연일까. 하지만 전시회장은 어쩌다 지나는 길에 들를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영문도 모르고 외관만 살피던 이수가 이미 건물 안으로 이동 중인 시훈을 만류했다. 체험형 전시라 시간에 맞춰 티켓을 예약해야 하고 입장할 수 있는 사람 수도 제한적이었다.
“여기 예매해야 해요.”
“했어요.”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이수가 눈을 키웠다. 시훈은 엷은 웃음을 띠고 거리에서처럼 이수의 팔꿈치를 부드럽게 잡아 이끌었다.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전시는 가이드를 따라 앞이 보이지 않는 내부를 일정 시간 동안 이동하는 식이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으로만 체험하는 전시를 마치자 100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더듬거리며 길을 찾거나 소리로 달라지는 환경들을 체험하면서는 경험한 지난날을 떠올렸고, 시각이 배제된 상황에 틀을 벗어난 생각은 이면을 드러냈다. 그리고 관람이 끝날 무렵 그 너머에 존재하는 의미를 찾게 만들었다.
깜깜한 내부와 달리 늦은 오후 햇살이 내리쬐는 밖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가슴 깊이 남은 여운에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이수를 깨운 이는 시훈이었다.
“커피 마시면서 걸을까요.”
시훈은 커피 전문점 문을 활짝 당겨 고정해 두고 걸음을 옮겼다. 그보다 한 박자 늦게 들어간 이수는 곧장 커피를 주문하는 시훈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옆에 서기를 망설였다. 조금 늦었더니 이미 몇 사람이 대기 줄을 섰고,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 또한 여럿이었다. 매장 안이 분주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시훈이 이수의 근처로 돌아와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닙니다. 네, 출장 전에 마무리 지으시죠. 어차피 본부장님 확인하셔야 하니까요. 네.”
한 발자국 떨어져 주변으로 눈을 굴린 이수는 묘한 시선들과 마주했다. 재빨리 넘겨 보는 시선들은 시훈에게 닿고 있었다. 이수 자신도 작은 키는 아니건만 저보다 큰 키에 균형 잡힌 몸은 수영이나 러닝을 즐기는 타입 같았다. 자칫 차가워 보일 인상은 날렵한 콧날이나 턱보다는 아마도 무감한 표정이 더해졌기 때문이리라. 말하자면 이시훈은 서울 같은 도시와 잘 어울리는 부류였다. 거기에 더해 사람에게서 풍기는 아우라가 있었다.
객기와 오기로 이시훈을 도발하고 원치 않은 껍데기를 자처해 쓴 저와는 근본부터 다른 사람이었다. 위선과 가증을 떨 이유가 없기 때문일까. 나고 자라면서 단단하게 살을 붙였을 자기 확신과 자존감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다. 부러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녹아든 확고한 외양과 때때로 툭 내뱉는 말들이 이시훈을 완성하는 조건이었다. 그건 이수에게 매번 등을 돌려 달아나기만 하는 것들이었다.
‘A-19번 고객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호명에 이시훈이 걸음을 옮겼다. 어깨와 볼 사이에 핸드폰을 끼워 두고 여전히 통화 중인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홀더를 끼워 이수에게 넘겨주었다. 어쩐지 입이 말라 받자마자 빨대를 꽂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이시훈이 저에게 묻지 않고 커피를 주문하고 넘겨주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였다. 복잡한 커피숍에서 나올 즈음 통화를 마친 시훈이 이수에게 가벼이 물었다. 번잡한 거리를 벗어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땠어요, 전시는?”
“좋았어요. 신선하고.”
무엇보다 사진이나 그림이 걸린 일반적인 전시와 확연히 다른 기획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팀 전체가 신경 쓴 비딩이 얼마 전에 끝이 났고, 최근 주말 출근마저 다반사라 근래에 본 전시가 가물가물했다. 관람 중 고맙다는 말을 전해서 다행이었다. 밝은 곳에서는 도통 전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전시 많이 보세요?”
이시훈 역시 못지않게 바빴을 텐데 일부러 시간을 낼 정도면 의외로 맞는 지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요.”
그다지 즐긴다는 의미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요즘 바쁘지 않아요?”
“지인이 기획한 전시예요. 평이 좋다더니 다행이네요. 마음에 들어서.”
지인이 기획한 전시라고 하니 예매까지 해 가며 결코 편할 리 없는 상대와 관람한 이유를 대충 헤아릴 만했다.
“아… 그래서….”
차라리 좋아한다거나 아니면 자주 본다고 하면 말을 붙여 볼 구실이라도 생길 텐데 도무지 생기지 않는 접점에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곧 신호를 바꾼 횡단보도에서 걷는 속도가 엇갈렸다.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니구요.”
시훈이 걸음을 내디디며 남긴 말이 바람처럼 이수를 스쳐 지났다.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며 밝은 대낮에 걷는 일은 어색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번화한 거리의 소음과 풍경이 벌어진 간격을 적절히 메워 준 덕분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은 두 사람이 어느새 광화문 앞에 다다랐을 때 시훈이 문득 멈춰 서 위를 올려 봤다. 한 대형 서점의 외벽에 걸어 놓은 간판에 가을에 어울리는 시구절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시훈은 한 구절 한 구절을 곱씹으며 읽는 중인 듯했다.
“무슨 글이었어요? 감화돼서 대학 원서 썼다고 했잖아요.”
이수를 돌아본 시훈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한 발자국 뒤에 선 정이수가 같은 방향을 올려 보고 있었다. 아, 그거요. 금세 표정을 감춘 얼굴 위로 가늠하기 힘든 미소가 떠올랐다.
“메리 올리버, 기러기라는 시요.”
“…….”
“형이 그 시를 좋아했었는데, 원서 쓰러 가는 길에 여기서 본 거예요, 그걸.”
형이 있었지. 외동인 이수는 잘 모르지만 주변에서 흔히들 형제끼리는 말도 잘 안 섞는다던데, 우애가 좋은 형제인가 보다. 꿈까지 바꿀 정도면…. 시훈의 집안을 생각하면 좀 의외이긴 했다.
“제 자리에 붙어 있는 엽서 뒷면에도 같은 시가 적혀 있어요. 형이 보낸 건데… 뭐….”
어설프게 잘린 문장을 두고 시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어조와 어울리지 않게 그의 낯에는 그늘이 졌다. 길지 않은 시간 침묵한 시훈의 뒤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총총 불을 켜는 가로등을 배경 삼아 걷는 두 사람 사이에는 늘 그렇듯 많은 대화가 생략됐다.
호텔로 들어가기에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차가 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갈 때 시간을 셈해 본 이수의 기분은 순식간에 침전했다. 조금 전 길을 걸을 때만 하더라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소소하게 나눈 대화들이 싫지 않았다. 한때 이수가 이시훈과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여긴 시간이었다. 가라앉은 기분 때문에 프런트로 가는 대신 엘리베이터로 곧장 이동하는 줄도 모르고 이수는 섭섭한 기분을 애써 달랬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직후예상과 다른 목적지에 도착한 사실을 알게 됐다.
“안녕하십니까. 예약하셨습니까.”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장소에 이수가 한 박자 늦게 걸음을 뗐다. 전면에 서울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 안내를 받고 내어 주는 의자에 마주 앉을 때야 이수는 저녁 식사 시간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양식, 별로예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럼 됐구요.”
당황한 표정을 오해한 시훈에게 이수가 가만한 답을 주었다. 앉아 있긴 하지만 눈동자가 부산스럽게 좌우를 살폈다. 은은한 조명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초나 작은 꽃송이는 꽤 로맨틱했고, 가족 내지는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이 식사 중인 주변 테이블은 다정하고 화목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셰프가 추천한 메뉴와 와인이 세팅됐다. 시훈은 그때까지도 물로만 목을 축이는 이수에게 식사를 권했다.
“들어요.”
권하는 투는 여상했다. 어쩌면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더라도 똑같은 투였을 테다. 그래서 이수의 경계가 조금 무너졌다. 이시훈의 식사 시간에 저 하나가 껴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이수는 뾰족해진 생각을 둥글게 만들어 놓고 눈앞에 놓인 애피타이저를 입안에 넣었다. 이수가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훈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왜요?”
“아니요.”
이내 시선을 떨궜다. 식사 시간은 조용했다. 레스토랑 내에 흐르는 음악이 아니었다면 식기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종종 들릴 정도로 두 사람은 묵묵히 식사만 했다. 코스대로 내오는 요리와 간간이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 묻는 매니저가 없었다면 각자 다른 테이블을 이용하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디저트가 놓이고 여전히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이수는 고개를 돌려 야경을 바라봤다. 오늘은 평소처럼 옥외 간판을 찾지 않았다. 대신 반짝이는 도시 전경을 느긋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뒤 침대로 올라가 하게 될 섹스 생각은 미뤄 뒀다. 맑은 밤하늘에 걸린 손톱달이 예뻤다.
실내가 비치는 유리를 통해 슬쩍 시훈을 바라봤다. 조금 전 자리를 비우고 돌아온 그는 테이블 위에 한 손을 올린 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오늘 이시훈은 전시회장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눈을 감은 듯 깜깜한 암흑 속에서 이시훈도 어둠 너머 이면을 바라보려고 했을까. 전시회장에서 가이드가 안내하며 건넨 말들이나 전하는 메시지들을 자신이 느낀 만큼 이시훈도 느꼈을지 이수는 조금 궁금해졌다.
요즘 이시훈과의 관계가 어떤 색을 띠고 있는지 이수는 가끔 혼란스러웠다. 따지자면 갑과 을로 칭할 수 있는, 편하게 몸만 취하면 그만인 저와 이시훈 사이에는 최근 ‘이외의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유기물처럼 변화무쌍하게 모양을 바꿨다. 때문에 이수는 때때로 당황했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만약 이시훈에게 ‘상납’을 그만하겠노라 전하면 팀을 지켜 주고, 자리를 보전해 주겠다 걸었던 거래 역시 없어진다. 그렇게 단념하면 좋으련만 요즘 들어 이수는 이시훈이 정말 그런 사람인지 의문이 들었다. 여 본부장이 팀을 파투 내고, 귀책 사유를 만들어 이수를 팀장 자리에서 끌어내도록 둘 사람인지… 그런 의문 말이다.
‘이 팀장님은, 좀… 함부로 친절하신 것 같아요. 솔직히, 기분은 나쁜데… 꼬박꼬박 데려다줘… 성희롱이라고 화내질 않나… 츤, 츤, 츤. 아닌가….’
언젠가 술기운을 빌려 이시훈에게 한 말을 떠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시훈은 부당한 일에 화를 내고, 유진우와의 관계를 다그쳤다. 게다가 입사 이래로 다른 직원들과 하등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재벌가 아드님이 자신과 맺은 부적절한 관계는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효용성을 따진다면 제 가치가 그 정도로 클는지도 모르겠다. 고작 섹스 따위로.
언젠가 끝을 맺을 테다. 아마도 둘 중 한 사람이 인사이트를 퇴사하거나 시훈이 저에게 질리는 순간. 경우의 수는 두 가지 정도였다.
“피곤하지는 않아요?”
긴 상념이 찻잔에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시훈이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할 기색이었다.
“네, 괜찮아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잘려 차라리 다행이었다. 머리가 아팠고, 이수는 답이 없는 서술형 답안지를 채울 수 없었다. 즐기지 않는 차를 입에 기울이는 이수를 흘깃 바라본 시훈은 다시 말이 없었다.
이수가 입술이 닿는 찻잔 부분을 손가락으로 둥글게 따라갈 때였다. 창밖 너머를 보는 시훈이 마른 입술을 축이다 말고 문득 입을 뗐다.
“생각보다 더….”
그가 뜸을 들였다.
“…옷이 잘 어울리네요.”
“…….”
“다 먹었으면 가죠.”
소리 없이 밀린 의자를 두고 코트와 계산서를 챙긴 시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파악한 이수가 넋을 빼고 있다 뒤를 따랐다. 이미 계산을 마친 그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버튼을 누르는 동안 이수의 머릿속에 남자가 남긴 말이 맴돌았다. ‘생각보다 더 옷이 잘 어울리네요.’ 심심한 말 한마디와 함께 미간에 골이 팬 얼굴이 잔상처럼 남았다. 그건 오늘 오후, 미술관 앞에서 만났을 때 지은 표정과 꼭 같았다.
층을 이동하며 낯설고 간지러운 기분에 시선은 내내 바닥을 향했다. 토요일 오후 4시나 만난 장소, 목적지, 식사 자리도 모두 예상을 빗나갔는데 도착 층이 호텔 룸이 아닌 지하 주차장인 사실에 이수는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다려요. 차 가지고 올 테니까.”
“…네.”
조수석에 올라타 이동하는 동안 허벅지에 올려놓은 손이 좀체 가만있지 못했다. 이수가 제 바지 표면을 티 나지 않게 문질렀다. 머릿속에 생경한 생각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차지했다. 처음 보는 녀석들은 툭툭 튀기도 하고, 이수의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뛰어다니는 통에 잡을 수가 없었다. 그에 집중하느라 창 너머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를 가는지 묻지 않아도 익숙한 길로 내달린 차는 곧 이수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입구로 들어가기 좋은 자리에 정차해 시동을 끄자 음악 소리 하나 없는 차 안이 지나치게 조용해졌다. 가라 마라 아니면 어떤 인사를 나누기에는 묘하게 버거운 공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누구 하나 입을 떼지 못할 때 손끝으로 바지를 움켜쥔 이수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 팀장님. 오늘은 이대로….”
당연히 섹스라는 목적 없는 만남을 상상해 본 적 없는 터라 반쯤 체념하고 나선 오늘이었다. 입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 사이 달칵 잠금장치가 열렸다.
“들어가요, 그럼.”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
정면을 향한 시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의 운운하기에 이수도 이 분위기가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라 얼른 차에서 내리기를 택했다.
지하 주차장과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간신히 머릿속에서 요란을 떠는 녀석들을 빗자루로 쓸어 냈다. 오늘 하루를 빠르게 곱씹어 보았다. 이시훈은 그저 약간의 변주를 했을 뿐이다. 크게 의미를 둬야 할 이유는 없었다. 죄 없는 아랫입술이 잘근잘근 깨물렸다.
미술관 앞에서 저를 돌아보던 얼굴, 등 뒤로 와 닿던 손길, 투박하게 건넨 칭찬이나 간간이 내비치던 미소… 그런 것들. 눈을 질끈 감은 이수가 휙 머리를 저었다. 그렇게 한다고 털릴 리 없는 미련한 행동인 줄 알면서도 반응하는 몸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끈질기게 남아 있는 생각이 내내 머리를 헤집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
등 뒤의 자동문이 열렸다. 저벅 바닥을 울리는 구두 소리에 귀가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 한순간 어깨가 돌아갔고, 눈앞에 서 있는 이시훈을 발견했다.
“이 팀….”
인지한 순간 이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시훈의 혀가 파고들었다. 한 손은 이수의 뒷머리를 그리고 나머지 한 팔은 허리를 감아 틈 없이 당겼다. 코끝에 이시훈의 향수 냄새가 스쳤다. 입안을 훑는 혀는 격정적이지만 거칠지는 않았다. 고개를 비틀어 한 치도 떨어질 수 없게 입을 맞췄다. 치켜든 턱을 물릴 때마다 얼굴을 기울여 집요하게 따라오는 입술은 숨을 쉬는 시간마저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파고든 손이 부드럽게 이수를 움켜쥐며 벗어날 수 없도록 붙들었다.
“하으….”
시훈의 팔을 붙들어 간신히 흔들리는 몸을 버텨 냈다. 입안으로 밀려 들어온 혀가 마비된 이수의 혀를 훔쳤다. 눈을 떴다 감았다 점멸하는 시야 사이로 슬라이드 필름처럼 눈을 감은 시훈이 사진처럼 찍혔다.
둔탁하게 밀린 몸에 버튼이 눌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동시에 시훈이 입술을 떼자 두 사람 모두 갈무리하지 못한 호흡이 마주한 코끝에서 섞였다.
하아… 하아….
뜨거운 몸과 달리 손끝이 차가웠다. 속눈썹을 더디게 들어 올리자 눈앞에 선 시훈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단단한 어깨를 밀어냈다. 더듬더듬 뒷걸음질 치자 이수는 엘리베이터 안에, 시훈은 경계 바깥에 서게 됐다. 부푼 입술을 손등으로 가린 이수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슴팍이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슬쩍 올려 본 시훈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어떻게 버티고 있었는지 이수는 다리가 풀려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한 손으로 눈을 덮어 가렸다. 믿기지 않게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컸다.
얼굴에 끼얹은 물이 멋대로 튀어 소매와 니트 앞섶을 다 적셨다. 세면대에 머리를 박고 찬물로 열을 식힌 이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거울 속 제 모습과 눈이 마주치자 흔들리던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옷. 이 망할 놈의 옷부터가 문제였다. 처박아 두면 나았을걸.
벨트를 풀어내고 버클을 내렸다. 손이 떨렸다. 니트를 죽죽 잡아당겨 팔을 빼내려 해도 물에 젖은 소매가 헛손질에 늘어지기만 할 뿐 마음처럼 벗겨지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욕실을 박차고 나간 이수의 발등이 문턱에 걸렸다.
“…아!”
속절없이 두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쿵 둔탁한 소리 뒤로 이수는 무릎을 꿇어 엎드린 자세로 고꾸라졌다. 골반까지 내려간 바지와 다 벗지 못한 니트가 굽은 몸을 간신히 가렸다. 마치 누구에게 빌기라도 하는 꼴은 혼자 있는 집에서도 충분히 수치스러웠다.
벽에 걸어 둔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적요한 공간을 울렸다. 욕실 문틈으로 비치는 빛이 어둠 속 이수의 몸 아래 더 깊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대고 5분, 10분이 흐르도록 이수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력하게 감은 눈과 다문 입. 그리고 의미 없이 쥐고 있는 주먹은 달걀을 쥔대도 깨트릴 수 없을 것 같다.
서늘한 공기 중에 드러난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삼킨 것도 없는 목울대가 움직였다. 집에 들어올 때부터 저를 좀먹고 있는 생각이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이길 수 없는 본능이 잦아들기는 애초부터 글러 먹었을지 몰랐다.
숨을 죽인 머리맡의 손이 서서히 미끄러졌다. 파들 떨리는 손으로 버클이 풀린 바지를 내리고 드로어즈 안으로 손을 넣자 여태까지 가라앉지 못한 발기한 성기 끝이 번들거렸다. 드로어즈 밖으로 퉁겨져 나온 성기를 붙잡아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이 속도를 더해 가는 동안 뇌 한 귀퉁이가 기능을 멈춘 것처럼 모든 행동이 통제를 벗어났다. 제게 입을 맞추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흐, 으….”
벌어진 허벅지 안쪽을 스쳐 간 나머지 손이 구멍을 더듬었다. 뻑뻑한 내부로 겨우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성기를 감싸 쥔 손에 속도를 높였다. 의식 사이로 남자의 손을, 온기를 그렸다.
“하아… 읏….”
바닥에 이마를 비볐다. 넣어 봤자 닿지 못할 그곳에 손가락을 찔러 넣으며 흥분을 감출 길 없었다. 움찔움찔 간헐적으로 몸이 떨렸다. 간질간질한 감각에 발가락을 딛고 세운 발바닥 근육이 뻣뻣하게 늘어졌다. 얕은 신음을 끊임없이 토해 낼 때마다 기둥을 쓸어 올리는 힘도 속도도 빨라졌다. 어둠 속에서 형체를 더듬었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반듯한 이마, 곧은 코를 따라 내려가면 굳게 다물린 입이 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그 틈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자 단숨에 감아 온다. 단단한 어깨를 끌어안고 허리를 감싼 손에 몸을 내맡기자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으… 읏….”
이성을 마비시킨 충동이 이수를 재촉했다. 바지가 허벅지까지 내려가고, 날개 뼈까지 올라간 니트 아래로 길게 뻗은 척추뼈가 유연하게 움직였다. 깨문 입술에 더 깊이 이를 세웠다. 눈을 질끈 감고 쾌감을 쫓아 손을 잔뜩 죄었다.
“흐읍…!”
후드득 바닥으로 정액이 쏟아졌다. 잔뜩 힘을 준 어깨와 몸이 굽어졌다. 확 좁힌 허벅지가 푸들푸들 떨리고 하얗게 변한 발가락 끝이 바닥을 밀어내며 풀썩 떨어졌다. 질끈 감은 눈에 서서히 주름이 펴지며 번쩍 쏟아진 빛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옹송그린 어깨가 맥없이 풀어졌다. 꿇은 무릎에도 서서히 고통이 찾아왔다. 오락가락하던 이성에 형광등처럼 불이 켜졌다. 끈적한 제 정액과 욕정을 짓누른 손이 잡을 것 하나 없는 바닥에 손톱을 세웠다.
이마를 바닥에 짓이겼다. 아무래도 정신이 나가서… 이런 역겨운 짓을 했나 보다. 부끄러움도 수치도 없이.
* * *
이수는 퇴근을 준비하며 며칠째 비어 있는 시훈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주말이 지나고 출근하는 월요일이 되어서야 내내 비어 있는 자리를 보고 이시훈이 여민준 본부장과 열흘간 뉴욕 출장길에 동행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밤, 이시훈이 수음한 사실을 알 리 없건만 이수는 상대의 부재에 안도했다. 그리고 이시훈이 다시 돌아올 때쯤에는 잊힐 거라고 그렇게 위안했다.
-나야 좋지. 세상에 이게 몇 년 만이야.
외근 후 잠깐 들르겠다는 이수의 연락에 백주홍의 상기된 표정이 수화기 너머로 떠올랐다. 햇수로는 아마 6년 만이었다. 층계를 오르기 전 건물을 올려 봤다. 손에는 백주홍이 좋아하는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5층짜리 건물의 1층은 커피숍으로, 나머지 층은 사무실로 쓰는 듯했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2층까지 오르자 백주홍이 이수를 맞이했다.
“정이수.”
“선배!”
와락 서로를 껴안은 두 사람이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만 남아 있는 백주홍은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이수를 맞았다. 케이크를 전하자 백 선배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냥 오라니까 뭘 사 왔어.”
“케이크 좋아하셨잖아요.”
대학 시절, 혼자서도 홀 케이크를 다 먹을 수 있다고 조각으로 파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열변을 토하던 기억이 생생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잠시 후, 접시에 놓인 케이크와 함께 백주홍이 직접 내린 커피를 건넸다.
“사무실 멋있는데요.”
“인사이트에 비하면 구멍가게이지요.”
백주홍은 너스레를 떨었다. 집무 책상 뒤로 나열된 상패와는 어울리지 않는 겸손이었다. 백주홍의 광고 회사는 자유분방해 보였다. 오픈형 공간에 널찍하게 배치된 직원들 책상이나 시사를 하는 회의실 역시 그러했다. 게다가 최근 인터뷰나 매스컴에 노출되는 빈도만 봐도 규모는 작지만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회사임은 틀림없었다.
밖이 훤히 보이는 집무실에 앉아 동기들의 근황을 나누는 중 백주홍이 문득 이수를 향해 물었다.
“이시훈. 같이 일하지?”
“어떻게 알아요?”
커피를 마시던 이수가 뜻밖의 이름에 되묻자 단번에 끈을 잇는 답이 나왔다.
“대학 후배야. 민준이, 여 본부장이지? 나하고 동기고.”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러게. 또 이렇게 연결되네. 나도 시훈이가 인사이트로 이직했다는 건 한참 뒤에 알아서. 시훈이도 한번 온다 온다 하면서 못 오네. 화분만 보내고 말이야.”
집무실 한편 가장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대형 화분 하나가 잎을 드리우고 있었다.
“여 본부장님 아래 같은 본부에 있어요. 이 팀장이 1팀. 제가 2팀.”
“그럼 둘이 친하겠다. 같이 모시는 상사 욕하면서 모두 하나 되고 그러는 거잖아. 시훈이도 일 잘하지?”
시원하게 내지른 백주홍의 말솜씨에 이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시훈을 떠올리면 치미는 복잡한 감정은 미뤄 두었다. 뭐라도 있는 낌새를 내비치면 그건 그것대로 설명을 해야 했다. 그러자면 가장 심플한 답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편이 편했다.
“네. 잘해요.”
거리낄 것 없는 대답 후에 커피를 마시는 척 얼굴을 가렸다. 말과 달리 쉽게 표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그런 이수의 행동이 여민준 때문이라고 백주홍은 착각한 모양이다.
“여민준이 괴롭혀? 내가 전화 한번 해 줄까.”
“아니요.”
이수가 손사래를 치자 백주홍이 개구지게 웃는다.
“일은 어때, 메이저 회사는 어떻게 일하는지 들어 보자.”
“일하는 거 똑같아요. 빡세요, 그냥.”
크든 작든 회사 대표만 하려구요. 씨익 시원하게 입술을 끌어 올린 백주홍이 이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못 다니겠으면 우리 회사 올래? 이시훈 화분 옆에 자리 보이지. 저기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일 햇빛이 잘 드는 곳이거든. 거기 정이수 자리 해.”
괜한 주접인 줄 알면서 내심 싫지 않았다.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도 오랜만, 누군가와 아무런 계산 없이 대화를 나눈 것도 오랜만이라 며칠 전부터 끙끙 앓던 속에 숨이 트였다.
“나인 투 식스는 보장 못 해도 성과급이며 휴식은 완전 보장해 준다. 무엇보다 가좆같이 아니고 정말 가족처럼. 우리 되게 재밌게 일하거든.”
직원들이 나 막 업신여기고 그래. 어때? 훌훌 날리는 말 같아도 백주홍이라면 본인이 데리고 있는 직원들을 어떻게 아낄지 눈에 선했다. 출강하던 시절에도 담당 교수보다 학생들을 챙긴 그녀였다.
“말만 들어도 고마워요.”
“에이… 구멍가게라 이거지?”
“아니요. 인사이트도 백기획도 클라이언트 앞에선 같은데요, 뭐.”
“음. 을이 싫으시다?”
회사를 차리고 여러모로 주목받는 과분한 실정이지만 제 오른팔이 되어 줄 사람 하나가 필요했다. 믿고 턱턱 일을 맡길 사람. 이수는 대학 시절부터 성실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데다, 기획한 광고들을 보면 매번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눈에 훤했다. 그러니 이수에게 권한 말은 그냥 뱉고 마는 공수표는 아니었다.
수습하려다 백주홍에게 말이 물린 이수가 볼을 부풀리자 와르르 웃음이 쏟아졌다. 예나 지금이나 난감해할 때면 언뜻 튀어나오는 애 같은 얼굴 때문에 자꾸 놀리고 싶어진다.
늦은 오후 백주홍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어쩐지 비빌 구석 하나가 생긴 듯 긴장이 풀렸다.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 백주홍이 채 정리하지 못한 사무실 서랍을 뒤졌다. 한참 만에 허리를 편 백주홍은 대학 시절 찍은 사진을 못 찾겠다며 아쉬워했다.
“이 구실로 다시 놀러 오라고 해야겠다.”
백주홍은 언제 봐도 에너지가 넘쳤다. 건물을 나와 골목을 걸어가던 이수가 뒤를 돌아보자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민 백주홍이 긴 머리카락을 귀에 꽂고 손을 흔들었다. 기다린다, 연락해!
출장에서 돌아온 이시훈의 자리는 아침부터 비어 있었다. 타 팀에서 기획한 국내 자동차 브랜드 론칭 행사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여 본부장과 함께 행사를 참관한 시훈은 돌아오자마자 밀린 보고서를 작성하고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점심시간을 코앞에 둔 시각. 회의를 마치고 화장실로 들어간 이수는 뜻밖에 이시훈과 마주쳤다.
막 세수를 했는지 페이퍼 타월로 얼굴을 눌러 닦던 시훈도 거울을 통해 이수를 발견한 참이었다. 한눈에 봐도 피로해 보였다. 그동안 야근이며 철야를 해도 딱히 빈틈없어 보였던 모습과 달리 오늘 이시훈은 시차조차 적응이 안 돼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가라앉아 갈라진 목소리가 피곤을 방증했다.
“출장 다녀오셨다구요. 고생하셨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친 이수가 나머지 세면대 앞에 서서 커피가 흐른 손을 씻었다. 이미 시선을 거둔 이수와 달리 시훈의 눈길은 거울에 비친 이수에게 줄곧 머물러 있었다.
레버를 내린 이수가 시훈을 가로질러 페이퍼 타월을 당겼다. 빠듯한 공간 덕에 몸이 거의 닿을 뻔한 시점에 시훈이 입을 열었다.
“점심 먹죠, 같이.”
핑계를 댈 만한 선약은 없고 마주 앉아 밥 먹기에는 어딘가 불편했다. 지난 주말을 지우려 부단히 애를 썼고, 결론적으로 이시훈의 거만한 친절이 만든 하루였다고 단정 짓기로 했다. 일하고 섹스하고 사이에 약간 낯간지러운 짓을 했다고 한들 첫 단추가 잘못 꿰인 옷이 올바로 입힐 일은 없을 테니까.
“다음에요. 오후 회의 시간이 빠듯해서.”
숨도 쉬지 않은 거절 뒤로 변명하듯 이유를 덧붙였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이 술술 나왔다. 물기 하나 없는 손안에서 페이퍼 타월이 형편없이 구겨지는 동안 머리 위에서 낮은 물음이 떨어졌다.
“보는 눈 때문에 그래요?”
같은 본부 팀장 둘이 애먼 곳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밝은 대낮에 회사 근처 식당에서 밥 좀 먹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자빡 댈 일인가. 시훈의 말에 은근한 날이 서 있었다.
“이 팀장님. 그런 말 좀… 하지 말구요.”
이수가 쥐어짜듯 한숨 같은 목소리를 죽였다. 회사, 화장실 칸칸이 열어 누가 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공간에 둘만 있는 건 뻔히 알았다. 하지만 한 번씩 불쑥 튀어나오는 말이 이수의 불안을 들쑤셨다. 화가 난 건지 서운한 건지 모를 얼굴이 흘깃 본 거울로 비쳤다. 자못 긴 시간 동안 이시훈은 말없이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이쯤이면 괜한 걱정을 한다는 둥 시훈이 내쏠 말을 곱씹던 이수를 향해 뜻밖에 누그러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불편하면,”
“…….”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한 시훈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자리마다 분리된 곳으로…”
“팀장님! 어…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고우재였다. 회의실을 정리하고 나온 모양인지 품 안에는 노트북과 프린트된 서류가 들려 있었다. 시훈은 턱을 당겨 인사를 대신한다. 방해받은 상황에 미간이 구겨졌다. 상황을 알 리 없는 고우재가 손안에 들고 있던 마시다 만 커피를 세면대에 붓고 이수를 향해 물었다.
“팀장님, 바로 가시는 거죠? 오늘 점심 메뉴 쌀국수래요.”
“…….”
회의에 들어가기 전 점심을 어떻게 하실 거냐 묻는 고우재에게 구내식당에서 먹을 예정이라고 했더니 두말 않고 ‘저도요.’를 외치기는 했다만, 그게 같이 먹자는 의미인 줄은 몰랐다. 의도치 않게 오해를 사고 말았다. 당황한 이수가 티 나지 않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 혹시 팀장님도 식사 같이… 드실래요?”
고우재가 아차 싶은 생각에 얼른 시훈에게 의중을 물었다. 이내 고우재를 사이에 두고 거울 안에서 이시훈과 짧게 시선이 부딪쳤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이수의 고개가 떨어졌다. 여러모로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고우재가 틀어 놓은 물소리가 세차게 떨어지다 뚝 끊김과 동시에 시훈이 이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식사 맛있게 드세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어깨를 돌려 나가는 무표정한 시훈의 뒤로 고우재가 어정쩡하게 머리를 숙였다. 무거운 마음을 매단 이수의 가슴에 묵직한 타격음이 울렸다.
* * *
-오빠 메시지 보면 답 줘
-서울이라며 왜 전화도 안 받고 답을 안 해
-엄마 봐서라도 와
[김지학 전무] 오늘 업무 끝나고 가볍게 한잔하실 분들 뒷골목 족발집으로 오세요^^
[여민준 본부장] 네 가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정이수 팀장]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이시훈 팀장] 가겠습니다
시훈은 연속으로 도착한 동생 시연의 메시지 뒤로 오늘 속을 뒤집어 놓은 사내 메신저를 훑어봤다. 뾰족한 시선은 이내 여민준 본부장을 향한다. 여 본부장의 메시지만 아니었다면 당연하게 시훈과 이수가 참석하지는 않았을 테다. 직속 상사가 참석하는 자리를 피곤하다는 핑계로 뺄 수는 없었다. 출장을 다녀온 지 3일째가 돼서야 겨우 밀린 보고와 결재를 마친 시훈은 오늘만큼은 일찍 귀가할 생각이었다. 내일로 잡힌 촬영도 문제였지만 다음 날 본가로 들어가 봐야 하는 일정에 귀국할 때부터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때마침 들어온 문자에는 약속이라도 했는지 광고주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여자 모델일 때만 행차하신다며. 그럼 내일 촬영장 오겠네?”
“그럼 오지, 안 와요.”
시훈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은 여 본부장이 왜? 입모양을 보인다. 선택적으로 눈치를 넣었다 뺐다 하는지 꼭 이럴 때만 모르는 척 군다.
“이 팀장님, 쏘맥 드실래요?”
구영모 팀장이 맥주잔에 소주병을 기울이자 시훈이 잔 위를 막았다.
“천천히 마실게요. 잠을 못 자서.”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되셨죠? 어쩐지 피곤해 보이시더라.”
구 팀장이 병을 무를 때 김 전무 주변에서 왁자지껄 웃음이 터졌다.
“우리 팀 인턴은 자기 사수하고 밥 먹기도 싫어하던데, 쟤는 되게 신기하다. 그죠?”
시훈이 물로 입을 축였다. 멀찌감치 떨어진 김 전무 주변을 살핀 구 팀장은 푸념을 늘어놨다.
“미디어도 그렇고 우리 실도 회식은 빠지면서 인턴이 브이로그니 뭐니, 카메라를 돌려서 제가 얼마 전에 한 소리 했어요.”
요즘은 SNS나 개인 방송이 너무 흔한 시대지만 업무 집중도가 떨어지거나 회사 보안 구역까지 노출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 때문에 직급자 사이에서 종종 말이 돌았다.
시훈이 실내에서 태우지 못할 담배 필터를 툭툭 테이블 위로 두드렸다. 피로도 피로였지만 오늘 술자리는 유난히 심기가 거슬렸다. 정이수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턴인 고우재가 불쑥 나타나 넙죽 올린 인사가 첫 번째 이유였고,
‘안녕하십니까! 기획 1본부 기획 2팀 인턴 고우재입니다. 지나다 보니까 다들 모여 계셔서요. 인사드리려고 잠깐 들렀습니다.’
아들 손주 재롱 잔치라도 보고 싶은지 만면에 미소를 띤 김지학 전무가 고우재를 의자에 앉혔다. 그 바람에 부산한 틈을 타 주현탁 실장이 턱 하고 정이수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게 두 번째 이유였다.
다른 테이블이지만 사선으로 자리한 두 사람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 밥 한번 먹자는 제안을 칼같이 거절당한 서운함이 여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고우재의 등장에 굳은 표정과 옆자리에 터를 잡은 주 실장 때문에 하얗게 질린 얼굴은 무시할 수 없었다.
“팀장님.”
고우재가 식당 술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내 가며 이수에게 인사를 속삭였다. 여느 때와 달리 고우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시선을 돌린 이수가 난감함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곧 고우재가 어르신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술을 돌렸다. 이수는 앞에 놓인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정이수 팀장, 오늘 왜 이렇게 말이 없어. 피곤해? 아우, 어깨 뭉친 거 봐라.”
주 실장이 이수의 목과 어깨 사이를 가볍게 주물렀다. 제법 거센 악력에 이수의 몸이 얼핏 흔들리다 이내 중심을 잡았다. 이수의 찌푸린 미간을 보고 조소한 주 실장이 스윽 손을 거뒀다.
“하… 씨발….”
그 꼴을 본 시훈이 나지막이 욕을 짓씹었다.
“쓰읍… 들린다. 욕을 왜 해. 이 프로, 지금 시위하냐, 끌고 왔다고?”
회식도 업무야, 업무. 몸을 돌리고 앉은 여 본부장이 깜짝 놀라 소리를 죽여 입단속을 했다. 시훈이 입을 꾹 다물고 코로 긴 숨을 내쉬었다. 역시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켜며.
술자리의 주인공은 단연 고우재였다. 저보다 많으면 나이가 두 바퀴나 차이 날 상사들 앞에서 녀석은 기꺼이 분위기 메이커가 됐다. 짓궂은 물음에도 싹싹하게 대답하고 주는 족족 술잔을 받는 고우재는 호기심 질문 왕이었다. 인사이트의 꼰대들이 줄줄 읊는 역사며 지난 영광에 귀 기울이는 태도는 가식 한 점 없이 순수했다. 소음을 뒤로하고 무리를 슥 뒤돌아본 주현탁 실장이 바람 새는 웃음을 흘렸다. 웃기는 놈이네, 저놈.
“정 팀장. 어린애 데리고 있대서 내가 고생 좀 하겠다- 했더니, 아주 야무지게 키워 놨네.”
이수의 빈 잔으로 주 실장이 쪼르르 소주를 따랐다.
“부지런한 친구라 곧잘 따라옵니다.”
이수는 주 실장을 따라 한 번에 잔을 넘겼다.
“흐으응. 그래서 바빴나 보다, 우리 정 팀장이.”
주 실장이 업무 협조의 탈을 씌운 그날을 들먹였다. 빈정댄 말끝에 가늘게 뜬 눈이 이수를 주시했다. 맞은편에서 이야기를 들은 여민준 본부장이 흠. 낮은 헛기침을 했다. 빈 잔을 쥐고 있는 이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물을 마시고 내려놓은 시훈 역시 이마를 구겼다. 주 실장에게 따로 연락하지 말라는 시훈의 메시지 뒤로 변명도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이수에게 뒤끝이 남은 게 분명했다.
‘전무님, 제가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어어, 그래. 요즘에도 이런 친구가 있네?’
고우재가 자리마다 돌아다니며 인사와 함께 잔을 채우는 중이었다. 화기애애한 다른 테이블과 달리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상황을 알 리 없는 구 팀장만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릴 뿐이다.
위화감이 내내 이수를 맴돌았다. 유진우와 틀어지고 벼랑 끝에 선 지난날, 부단히 다진 각오가 휘발됐다. 유진우 따위가 아니라도 결국 나는 증명해 보일 거라고. 그러니 틈바구니에서 살아 보려고 자존심이니 뭐니 갈려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회식마다 술상무를 자처했고 조롱이나 성적 희롱을 일삼아도 아무렇지 않게 시시덕댔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도무지 참기가 힘들었다. 같은 팀에서 일하는 인턴에게 이런 하찮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시시한 자존심이 불쑥 머리를 쳐들었다.
“…….”
입술을 꾹 다문 이수가 문득 시선을 올렸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이시훈과 시선이 맞부딪쳤다. 남자의 눈빛이 더없이 날카로웠다. 모든 것이 불편했다.
“아이구, 무겁다. 찬 바람 나니까 뼈에 바람이 드네. 응? 정 팀장.”
주현탁 실장이 들다 만 소주병 바닥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제법 크고 둔탁했다. 과장되게 어깨를 돌리는 시늉까지 더해지자 족발을 씹던 구 팀장이 눈치를 살피며 얼른 손을 뻗었다.
“실장님, 제가 한 잔…”
턱. 팔을 뻗은 구 팀장 앞으로 주 실장의 손날이 병 앞에 벽을 세웠다.
“구 팀장은 너-무 멀다. 따르다가 다 흘리시겄어. 아까운 술을.”
노골적이었다. 이수에게 술을 따르라는 주 실장의 언사는. 감추지 못한 모멸감이 이수의 얼굴에 드러났다. 물컵을 쥔 이수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참다못한 시훈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목부터 벌겋게 달아오른 열이 여민준 본부장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시훈의 시선을 따라가자 못된 버릇이 튀어나온 주현탁 실장이 들어왔다. 옆자리에 앉은 여 본부장은 목소리를 낮춰 시훈을 단속한다.
“야, 야… 분위기 봐 가면서. 어르신들 계셔.”
전에도 이런 상황에 얼굴을 붉혔다 들은 여 본부장이 여차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기세인 시훈의 팔을 테이블 아래로 꽉 쥐었다.
“주 실장님! 요 앞의 한의원 괜찮아요. 다음에 내가 소개해 드릴게. 잘해요, 거기. 원장이 침놓는 게 예술이야.”
그래요? 심드렁한 대답이 싸했다. 오늘 주 실장은 바람맞은 값을 어떻게든 받을 생각이었다.
‘인턴 열심히 마치고 나면 꼭 인사이트 공채 신입 사원으로 입사하고 싶습니다. AE 희망합니다. 정이수 팀장님 같은.’
‘AE 좋지. 열심히 해 봐.’
등 뒤로 고우재가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이수 역시 고우재 같을 때가 있었다. 눈앞에 놓인 술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수가 씁쓸함을 삼켰다. 아등바등 버티고 있는 팀장이라는 직함이 오늘따라 한없이 비루하고 초라했다.
“정 팀장.”
재촉하는 주 실장의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고개를 떨군 이수가 착잡한 속을 다잡고 병을 잡을 때였다.
와장창!
바닥으로 떨어진 맥주잔이 산산조각 났다. 유리 조각과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씨….”
잔을 떨어트린 시훈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실수를 자책하는 투였다. 이 팀장! 괜찮아? 놀란 여 본부장이 고개를 뺐다. 족발을 먹고 있던 구영모 팀장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자리 간 폭이 좁아 구 팀장이 앉은 의자가 밀리며 테이블이 흔들렸다.
“아이구, 이 팀장님, 발 조심해요.”
순식간에 뚜껑을 따 놓은 소주병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고꾸라진 병에서 흐른 술이 이수의 허벅지를 적시자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소란에 식당 내 이목이 집중됐다. 멀리서 주거니 받거니 술 인사를 다니던 고우재 역시 허리를 일으켰다.
“어어…, 정 팀장님. 옷이!”
구 팀장이 급하게 뭉텅이로 들려 준 냅킨으로는 수습이 여의치 않았다.
“…잠깐 실례할게요.”
급히 화장실로 이동하는 이수의 뒤로 젖은 손을 털고 일어난 시훈이 무감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잔을 놓쳐서.”
“우리 이 팀장이 피곤했나 보네. 천천히 마셔. 천천히.”
멀리서 속없는 말만 던진 김지학 전무에게 시훈이 여상하게 네. 고개를 숙였다. 발아래 떨어진 유리를 발로 슥슥 밀어 모으며 빗자루를 들고 온 직원에게 미안하다 사과하는 모양새가 느긋했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 실장이 비릿한 기분을 삼켰다. 이렇게 타이밍이 좋아서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고개를 빼고 있던 목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술잔을 기울이고 부딪치는 소리도 관성처럼 이어졌다. 여 본부장 역시 그때까지는 그러는 줄 알았다.
더러운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낸 주현탁 실장이 혀끝으로 어금니를 찼다. 아직까지 비어 있는 빈 잔에 빈정이 상했다.
“…내 참.”
발아래 깨진 유리를 식당 직원이 다 치울 무렵 머리 위로 음영이 드리웠다.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옆자리에 앉은 이는 이시훈이었다.
“뭐야.”
화장실을 가느라 이수가 자리를 비운 의자였다. 드르륵 주 실장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은 시훈이 뚜껑을 딴 소주병을 내밀었다.
“저 때문에 술맛 떨어지신 것 같아서요. 사죄의 의미로요.”
“아이구… 술 따르시게?”
“네.”
시훈은 주 실장에게 소주를 따르고 비어 있는 이수의 잔을 털어 내밀었다. 예의를 차리고 있으나 힘을 뺀 몸짓이 어딘가 삐딱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이 새끼가 되바라졌네. 주 실장이 작게 헛웃음을 쳤다. 시훈의 잔에는 넘칠 만큼 소주를 가득 채웠다. 시훈은 술을 받자마자 단번에 잔을 넘긴다. 그 모습을 본 주 실장 역시 시훈을 흘기며 원 샷을 했다.
테이블 위에 빈 잔이 놓였다. 시훈은 다시 소주병을 들어 주 실장의 잔과 제 잔을 채웠다. 때마침 이수가 술 자국을 달고 돌아왔다. 구 팀장이 얼른 손짓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정 팀장님, 이쪽으로 오세요. 시훈이 왜 주 실장과 나란히 앉아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안하다 재차 사과를 건넨 구영모 팀장이 영문 모르는 이수에게 목소리를 죽였다.
“갑자기요. 두 분이.”
안경 너머로 눈썹을 들썩인 구 팀장은 이유를 모르겠단 얼굴이다.
흐트러지지는 않았으나 시훈의 안색을 보면 누적된 피로가 한눈에 보였다. 두 사람이 다시 한번 술을 비웠다. 테이블에 소주잔을 내려놓자마자 시훈이 다시 저와 주 실장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주 실장이 이죽거리며 잔을 들었다. 다시금 두 사람 모두 원 샷이었다. 말 한마디 없이 순식간에 소주 한 병을 비운 후에 시훈은 새로이 병을 땄다.
“주 실장님, 술 약하세요?”
“위장 빵꾸 나도 마시지, 나는.”
“저도 그래요.”
농담답지 않은 서늘함이 핑퐁처럼 오고 갔다. 쪼르르. 빈 잔에 다시 소주가 차올랐다. 이시훈이 신경을 살살 긁고 있었다. 낙하산 새끼가 어디서 주인 행세를 하려고. 인사이트에 자리 박고 편하게 살아 보나 했더니만 새파랗게 젊은 놈이 회장 아들이랍시고 틀어 앉았다.
무슨 술수인지 몰라도 실무부터 차곡차곡 계단 밟아 간다는 꼬락서니도 영 마음에 안 찼다. 차라리 같은 검댕 묻는다 생각하고 구르면 좋으련만 깨끗한 척 구는 꼴이 주현탁 실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일전 룸살롱에서 만난 날도 스윽 룸 안을 살피는 눈초리가 그랬다.
이 나이에 젊은 놈한테 머리 숙이게 생겼으니 생각할 수 있는 옵션은 둘 중 하나였다. 콧대를 꺾어 놓든지, 그도 아니면 제 발로 뛰쳐나가든지. 주 실장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주현탁 실장이 시훈을 노려보며 채운 술을 단숨에 비워 내자 시훈도 지지 않고 잔을 비웠다.
“아니, 쟤가 왜 저래….”
인사팀장과 대화 중이던 여 본부장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대작 상대가 주 실장인 데다 이건 뭐 네가 죽니, 내가 죽니, 딱 그 자세다. 너 뭐 때문에 이러냐. 어? 그렇게 묻고 싶은 입이 댓 발 나오다 말고 합 다물렸다. 눈을 굴리자 불편한 기색을 띠고 있는 한 사람이 걸렸다.
맞은편에 앉은 이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주고, 받고, 따르면 마시기만 하는 기이한 술판의 원인을 짐작해 본다. 이시훈의 발밑에서 때마침 부서진 유리잔과 제 자리에 대신 앉은 상황을 보니 머지않아 답을 내기에 충분했다. 이수가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금세 소주 두 병이 비워졌다. 세 병째는 주 실장이 땄다.
“씨… 목 타네. 여기! 맥주 시아시 든 걸루다가 줘 봐요.”
주 실장은 글라스 잔 두 개를 나란히 두고 거의 일대일 비율로 맥주와 소주가 섞인 잔을 내밀었다. 단박에 소주 반병이 비워졌다. 후우. 씨바. 주 실장이 입술을 비죽이며 팔꿈치를 테이블에 가져다 대고 훌훌 머리를 털어 댔다. 어디 가서 주량으로 밀려 본 적 없건만 급히 마신 술에 취기가 돈 게 분명했다.
“드려요?”
눈이 팽팽 돌았다. 말짱하게 앉아 글라스 잔에 맥주와 소주를 재차 섞은 시훈이 스윽 잔을 밀었다.
“아이, 씨… 이 샛….”
열이 팍 받친 주 실장이 자칫 실수할 뻔한 말을 멈추고 손에 담배를 들었다. 라이터 휠이 헛바퀴를 돌았다. 라이터를 터는 주 실장의 품에서 때마침 요란하게 핸드폰이 울렸다. 아이… 씨팔. 이 시간에 뭔 전화야.
“…뭔데, 야,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하라는 거야. 고객사 시간에 맞춰야지, 한국 시간 어쩌구 이 지랄 할래. 아오. 기다려!”
통화를 마친 주 실장이 물로 입을 헹구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기를 죽여 놓을 계획이 틀어지자 약이 바짝 올랐다. 어쩔 수 없이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 김 전무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손을 휘휘 저어 가 보라는 신호가 이어졌다.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온 주 실장은 말아 놓은 소맥 잔을 넘기는 시훈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핑 도는 이마를 부여잡은 주 실장은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 알림음에 한층 더 신경이 사나워졌다.
“들어가세요.”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차리는 시훈을 보자 말렸다는 어렴풋한 짐작이 깃들었다.
“…하, 씹.”
낮게 욕을 짓씹은 주 실장이 그대로 가게를 빠져나갔다.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이 건물 사이 벽에 기대 있는 이시훈의 몸을 절반만 비췄다. 주 실장이 떠나고 곧바로 가게를 나간 시훈이 담배를 태우고 있으리라는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괜찮아요?”
손등으로 입을 가린 시훈이 눈앞의 이수를 바라봤다. 급히 마신 술에 몸이 푹 퍼지는 기분이었다.
“…….”
답 대신 시훈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걱정 어린 눈빛이 시훈의 얼굴에 머물다가 이내 뚝 떨어졌다. 답지 않게 여기까지 쫓아 나온 이유가 있을 텐데 정이수의 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단정하게 내린 손 옆으로 젖어 있는 이수의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찝찝해서 못 있지 싶은데 뭐가 그렇게 대단한 자리라고 지키고 앉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시훈이 작게 인상을 썼다.
“피울래요?”
이수가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시훈이 중얼거렸다.
“…한 번을.”
서운함이 묻은 말과 달리 경쾌한 웃음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지친 몸을 깨워 볼 요량으로 시훈은 재차 머리를 쓸어 올리거나 눈을 감고 머리를 털어 본다. 소용없기는 매한가지지만.
“좀 전에… 술을 너무 많이 들던데요.”
“그렇게 됐어요.”
부산하게 움직이는 눈동자와 함께 이수가 말을 골랐다.
“…저 때문에….”
뒤통수를 벽에 기댄 채 담배를 입에 가져간 시훈의 시선은 내리깔듯 이수를 향해 있었다. 이수는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내내 맴도는 말을 끝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고민은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결국 흔해 빠진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일찍 들어가세요. 전무님도 방금 가셨어요.”
말을 마친 이수가 반쯤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거기에,”
“…….”
“…이거 한 대 태울 동안만 서 있죠.”
말을 마친 이시훈은 깊게 담배를 빨았다. 찰나의 정적은 뒷골목의 소음마저 삼킨 듯했다. 후우 연기를 뱉은 이시훈이 무거운 어깨를 늘어트리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할 거잖아. 그러니까, 잠깐만 있으라구요.”
순간적으로 숨이 가빴다. 들이쉰 호흡을 내뱉지 못한 이수의 눈동자가 더없이 흔들렸다.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구두 밑창이 미끄러지며 바닥을 긁었다. 적막 속에 이수가 천천히 몸을 제자리로 돌이켰다. 두어 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좁은 담벼락 반대편에 시훈을 마주해 섰다. 어둠에 반쯤 가린 시훈의 담배 연기가 공기 중에 부유하다 흐트러졌다. 짙게 드리운 그림자 아래 또렷한 눈빛이 이수를 응시했다. 볼이 움푹 패도록 느른하게 담배를 빨았다가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는다. 명백하고 노골적인 시선은 이수의 단정한 이마부터 눈, 코, 도드라진 인중과 입술, 그리고 마른침을 삼키는 목젖의 움직임마저 낱낱이 살폈다.
팔을 뒤로한 이수의 손가락 끝에 닿은 담벼락 표면이 우둘투둘 거칠었다. 애써 외면하는 남자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까발려지는 상상이 뒤따랐다.
‘우리 제작 본부로 지원하지 왜 안 했어요?’
‘말씀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말소리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시훈은 담배를 쥔 손바닥으로 미간 사이를 꾹 누른 뒤 꽁초를 벽에 비벼 껐다. 미련 없이 내버린 담배처럼 이수에게서 거둔 눈빛 역시 그랬다. 기댄 몸을 일으킨 시훈은 눈길 한번 없이 이수를 스쳐 지났다. 약속처럼 모퉁이를 돌아간 시훈의 뒷모습이 단숨에 사라졌다.
“…하아.”
이수가 뒤로 돌아 벽에 팔을 뻗었다. 맥이 풀린 몸을 간신히 지탱해 버텼다. 눈을 감고 온몸을 휘감은 저릿한 감각을 떨쳐 보려 애를 썼다. 무력했고, 소용없는 짓이었다.
“들어가십시오!”
막 출발한 택시에 인사를 한 고우재의 몸이 갸우뚱 기울었다. 간신히 중심은 잡았지만 수순처럼 헛기침을 토했다. 콜록콜록. 인사를 하고 자리에 합석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잡혀 있을 줄은 몰랐다. 술이 제법 세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에서는 기준이 다른 건지 속이 울렁거렸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볍게 두드린 고우재가 구부린 허리를 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다가 저를 보는 시훈을 발견하고 눈이 크게 뜨였다.
“…팀장님!”
시훈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우재와 거리를 좁혔다. 술을 얼마나 받아 마신 건지 얼굴이며 눈이 울긋불긋 난리였다. 치기에 뛰어들었다가 된통 당한 몰골이었다. 임원들이 빠진 가게 안쪽에서 살판난 간부들이 고우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우재 씨, 얼른 와! 한잔해요! 가게 쪽으로 네, 네, 머리를 숙인 고우재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시훈을 흘깃 올려 봤다.
“저… 안으로 안 들어가세요?”
평소에도 대하기 편한 상사가 아니기는 했지만 오늘은 완벽히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말 한마디 없이 서 있는데도 그랬다. 그래서 저답지 않게 넉살을 부릴 생각조차 못했다.
“집 어디예요.”
“강동입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시훈이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대충 가늠해 봐도 출근 시간을 따져 보면 겨우 눈만 붙이고 나올 만한 늦은 시간이었다.
“남아 있는 사람 수대로 숙취 해소제 사서 돌려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90도로 머리 숙이시고, 이만 퇴근해요. 그 정도면 사람 잡고 늘어질 진상들은 아닙니다.”
택시비 결제는 이걸로 같이 하구요.
“아….”
단호하게 해야 할 일을 일러 주는 목소리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고우재가 얌전히 카드를 손에 들었다. 이 이상 술자리에 남아 있다가는 내일 일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
“임원이나 간부들만 참석하는 자리는 이유가 있겠죠.”
“다른 뜻은 없구요. 인사만 드리려고 했던 건데….”
카드를 내려 보는 고우재가 눈을 들어 다급하게 제 사정을 설명하려 했다. 돌려 말해서는 영 못 알아먹지 싶은 고우재의 표정이 미미한 짜증을 불렀다. 정이수는 어떨지 몰라도 시훈은 고우재에게 베풀 아량이 바닥난 시점이었다.
…하아, 참. 발을 뒤로 빼 짝다리를 짚고 선 시훈이 눈썹께를 검지로 긁었다.
“고우재 씨.”
“넵.”
“낄 때 끼고 빠질 때는 좀 빠지자.”
담백하게 힘을 뺀 말이 툭 떨어졌다. 언뜻 고우재의 어깨가 튀었다.
“…넵.”
푹 고개를 숙인 고우재를 지나친 시훈은 가게 문을 열고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대충 고개를 숙였다. 몸이 들이부은 술 때문에 천근만근이었다. 골목을 벗어나 잡아탄 택시 뒷좌석에 몸을 기대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이름을 확인한 시훈이 망설이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시훈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수화기 너머로 시연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오느니 안 오느니, 얼굴 비치는 게 뭐가 어렵냐, 그딴 식으로 반항하지 말라는 이맘때면 매년마다 반복되는 설교였다. 건성인 시훈의 대답에 일방적인 통화가 매섭게 끊겼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달리는 차창 밖을 바라봤다.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과 마주한 시훈이 허탈하게 자조했다.
열심히 산다. 그치?
물을 수 없는 말이 내내 가슴속을 맴돌았다. 시훈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자 비로소 긴 하루가 암전됐다.
* * *
회의를 마친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층마다 내렸다. 썰물처럼 사람이 빠진 공간에 어제와 같은 옷을 입은 주현탁 실장이 올라탔다. 여민준 본부장과 인사를 나눈 주 실장은 이수의 인사를 설렁설렁 받으며 한 공간에 섰다. 세 사람뿐이었다.
“어제 잘 들어가셨습니까.”
주 실장이 뻐근한 목을 돌렸다.
“아으… 회사 와서 좆 빠지게 일하다가 지금 퇴근해. 해외 지사 만들어 놓으면 이게 문제야. 미국 애들은 지들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아요.”
“고생하셨습니다.”
이수가 무미건조하게 예의를 차렸다.
“뉴욕 지사 말이죠? 이번 출장길에 보니까 정신없더만요.”
여 본부장이 말을 거들었다. 인사이트가 몸집을 불리며 런던에 이어 뉴욕에까지 지사를 세운 요즘 숱하게 이슈가 발생했다.
“그나저나 속은 괜찮아요?”
여 본부장의 염려를 흘려들은 주 실장이 문에 비친 이수를 흘깃 돌아봤다.
“쓰려요. 나이 먹었는지.”
여 본부장의 물음에 이수가 허벅지 옆에 붙인 주먹을 말았다. 드러나지 않는 표정 대신 몸이 회식의 기억을 떠올린 탓이었다. 아직까지 숙취로 고생하는 사람이 주 실장만은 아니었다. 오전, 밤샘 촬영이 예상되는 광고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이시훈의 낯빛을 보았다. 수면 부족과 숙취로 평소답지 않게 어수선해 보였다.
시훈과의 대작이 유쾌하지 않았을 주 실장이 삐뚜름한 입을 열었다.
“거, 이 팀은 술 좀 줄여야겠어요. 전에두 말이야, 평일에 룸 방에서 혼자 마실 정도면… 쓰읍.”
“…….”
전후 사정을 모르는 이수의 생각을 깨운 건 주 실장이 덧붙인 말이었다.
“우리 정 팀이 나 바람맞힌 날.”
“…….”
못 오면 못 온다고 연락을 주든가. 주 실장이 문에 비친 이수를 향해 이죽댔다.
“술 마시는 게 뭔 자랑이라고 방문 열고 꼬박꼬박 인사는 해 대는지.”
쯧. 주 실장이 구시렁댔다. 앙금이 남은 기억에 어제의 일까지 더해져 한층 모가 났다. 뻔히 여민준 본부장이 이시훈과 혈연 사이인 걸 알면서 주 실장은 말 한마디를 가리지 않았다. 확실히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흠흠. 여 본부장이 목을 가다듬었다. 접대부를 부른 이야기만 쏙 빼놓은 뻔뻔함에 기가 차다가도 정이수에게 가거라 등을 떠민 공모자가 본인이라 눈치를 살폈다. 다 지난 이야기는 왜 또 꺼내나… 이 양반이. 확 걷어차고 싶어도 당장 도리가 없으니 때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살살 달랠 수밖에. 여 본부장이 속으로 혀를 차고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주 실장님, 복국으로 속 풀구 가세요. 해장하셔야지.”
“사 주시게?”
“어휴, 그 얼마나 된다고. 지금 바로 가셔요.”
여 본부장이 집무실 층 버튼을 끄고 1층을 꾹 눌렀다. 유들유들 분위기가 풀렸다. 냉한 공간에 훈풍이 불었다. 한 사람에게만 빼고.
그날 불같이 화를 낸 시훈이 설마 주 실장을 쫓아갔을 줄은 몰랐다. 몰랐으니 그렇게 뾰족하게 굴었다. 내버려 두라고 소리를 질렀다. 납덩이가 주저앉은 양 가슴이 무겁고 답답했다. 등 뒤로 손을 돌려 엘리베이터 안전 바를 꽉 쥐었다. 소리 없는 침음이 하마터면 입술 새로 튀어나올 뻔했다.
“몰랐나 봐?”
갑작스레 떨어진 물음에 넋을 빼고 있던 이수가 고개를 홱 올렸다.
“네?”
주현탁 실장이 반쯤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날, 이 팀장 만난 거 말이야.”
“아… 네.”
입을 삐죽인 주 실장이 빤히 이수를 주시했다. 뱀처럼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이 창백하게 얼어붙은 이수를 관찰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수고하시라고.”
아이… 참 재밌다. 주 실장이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어울리지 않는 코웃음을 쳤다.
찜찜하게 떨어진 인사를 뒤로하고 사무실 층에 도착한 이수가 닫히는 문 앞으로 묵례했다. 뺨을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함이 가시지 않았다. 이시훈 때문이었다.
“이거 저작권부터 해결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내줄까 모르겠어요.”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를 고우재가 본인 자리의 모니터에서 반복해 돌렸다. 고우재의 자리로 목을 뺀 김 대리부터 이수를 비롯해 같은 모니터를 보는 2팀 내에서 의견이 오고 갔다. 고인이 된 건축가의 인터뷰 영상이었다.
“전에 영화사에서 컨택했다가 대차게 까였대요. 유족들이 완강하다구.”
“트라이해 보죠.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다음 진행이 되지. 메일이나 전화 한 통으로 쉽게 가지 말고 성의 있게 가자구요. 덜컥 돈 이야기부터 꺼내는 실수도 말구요. 허락 구하고 직접 찾아가는 방향으로 고려해 봐요.”
광고 한 편을 만드는 과정마다 AE의 역할은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해도 무방했다. 상업 광고를 집행하는 입장에서 난관이 예상됐지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각자 방안을 생각하여 내일 오전에 회의를 다시 열기로 정리할 무렵이었다.
파티션으로 나뉜 복도 맞은편 1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시훈과 함께 광고 촬영장으로 이동한 인력을 제외하고 드문드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직원들 몇몇이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싸움이요? 네, 네…! 괜찮아요? 그럼 촬영은…,”
전화를 받은 조민희 대리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촬영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당황한 조민희가 전화를 끊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여민준 본부장이다. 한걸음에 내달려 온 여 본부장이 조민희와 목소리를 죽이고 상황을 공유했다. 거칠게 머리를 넘겨 짚은 여 본부장은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일단은 내가 지금 현장 가 볼 테니까 급한 일은 연락 줘요. …씨발. 이게 무슨 일이야.”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이수 역시 허리를 펴고 복도 너머의 상황을 헤아려 봤다. 여 본부장이 나간 뒤 조 대리가 급히 전화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팀에서 내려온 인사팀장이 조민희 대리에게 정황을 듣고 난 후에는 분위기가 조금 더 심각해졌다. 주변을 살핀 인사팀장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밖을 나섰다.
다음 날, 당일 계획된 본부 기획 회의가 대부분 취소됐다. 2팀은 어제와 다름없이 업무를 행했지만 파티션 너머 1팀의 가라앉은 분위기는 투명한 막이 씌워진 듯 걷히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촬영장으로 이동한 이시훈과 신동윤 대리는 출근하지 않았다.
비어 있는 이시훈의 자리를 바라본 이수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일인지 묻는 한마디가 어려웠다. 손가락은 액정 위를 맴돌기만 할 뿐이다. 결국 이수는 핸드폰 대신 보고서를 들고 여 본부장의 집무실로 향했다.
“말이 돼요, 그게?”
“쉿. 목소리, 낮춰요.”
집무실로 가는 길목이었다. 평소 소리를 높이는 법 없는 인사팀장의 목소리가 크게 튀었다. 그 때문에 모퉁이 너머 이수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기가 차다 못해 바람 빠지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인사팀장과 여 본부장이 복도에서 소리를 죽여 대화를 이어 갔다. 아무래도 나중에 보고를 해야 할 것 같아 몸을 돌렸다. 그런데 때마침 들리는 내용에 엿들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닿지만 않았지, 이 팀장 얼굴에 손이 올라왔네 마네 그러더라구요. 씨발, 개새끼들. 돈줄 쥐고 있다고 말이야…. 현장 보러 와선 모델 허벅지에 손을 올리구 지랄이니 시훈이가 빡이 안 쳐요?”
화를 삭이지 못한 여 본부장의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무리 갑이라고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요, 씨발 새끼들.
“혹시 회장님도 아세요?”
인사팀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시훈이 가진 배경을 생각하면 기업 대 기업으로 문제가 생길 불씨를 제공할 만한 사건이었다.
“말하지 말래요. 회사 내에서 대응해서 끝내 달래나. 말만 들은 나도 미치겠는데 어제 가 보니까 수습해서 촬영하고 자빠졌더라고. …어후, 이사님하고 고객사 들어가서 계약을 파기하네 마네 그러는 마당에, 그 꼴을 당하고도 새벽까지 현장 지키고 앉아서 마무리를 해 놨더라구요.”
“이 팀장도 참…. 그럼 일은 진행이 되긴 돼요?”
“출근 시간 맞춰 와서는 대표님하고 독대한 걸로 아는데… 말을 안 해 봐서 다음은 모르겠어요. 일단 들어가라고는 했는데.”
한숨이 말끝마다 붙었다.
“아이… 참, 신 대리도 그렇고 주말 동안 잘 추스르고 왔으면 좋겠네요.”
“나 이 바닥, 갑자기 신물 나네….”
들어가세요, 그럼. 머리를 쥐어 싸맨 여 본부장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간을 두고 문을 두드리자 여 본부장은 손을 휘 저으며 다음 주 월요일에 보고받겠다고 이수를 돌려세웠다.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이수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이수는 보고할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비어 있는 시훈의 자리를 건너보았다.
이시훈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악착같이 살아 보려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는 저처럼 이시훈도 그럴 필요가 있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재벌가에서 태어나 단지 시구절 하나에 감화되어 진로를 결정했다는 이야기나, 임원직도 아닌 실무로 뛰어들어 볼 꼴 못 볼 꼴 다 봐 가며 일하는 이유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눈가림으로 기획팀 팀장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시훈은 모든 일에 진심이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알 수밖에 없었다. 쉽게 가늠이 안 되는 남자였다. 이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곧 손에 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
-괜찮아요?
커서가 깜박이는 창을 바라만 보던 이수는 그대로 핸드폰을 뒤집었다.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았다.
* * *
“왜 또.”
소파에 가로누워 눈을 감은 시훈이 그대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또 전화가 걸려 왔다.
-본가 다녀왔어? 시훈아…, 너라도 말을 좀 해 주지. 면목 없게 이게 뭐냐. 다들 쉬쉬하니까 자꾸 나도 잊어버리잖아.
뒤늦게 생각이 난 모양이다. 여 본부장의 씁쓸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지난 몇 주간 출장이니 보고에 회의까지. 여 본부장 역시 강행군이었다. 1년 중 하루. 싫어도 매년 돌아올 텐데 잊어버렸다고 한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다.
“됐어요. 좋은 자리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말을 해도 꼭. …가서 별일은 없었고?
“있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자리 지키다 오는걸.”
시훈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여 본부장이 말을 얼버무렸다. 툴툴대는 말투가 건조했다. 귀찮고 치워 버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여 본부장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몸은.
“그럭저럭.”
잔소리가 이어졌다. 밥을 꼭 챙겨 먹어라, 지금은 괜찮아도 갑자기 화가 도질 수 있다는 둥, 화병 날 것 같으면 술 마시지 말고 상담받을 병원을 추천해 준다는 둥. 도돌이표 같은 여 본부장의 걱정은 불과 3분 전에 했던 것과 같았다.
“…형, 할 말만 해요.”
빙빙 말을 돌리던 여 본부장이 시훈의 짜증을 뒤로하고 결국 본론을 물었다.
-그… 아침에 대표님하고 어떻게 정리했어? 대표가 입을 안 열던데.
“해당 광고주 계약 갱신 취소 및 향후 의뢰 금지.”
-허.
입을 떡 벌린 얼굴이 그려졌다.
-너 쎄게 나갈라구 깨끗하게 현장 정리하고 나왔냐?
“네.”
즉각 떨어지는 말에 여 본부장은 기가 질렸다. 누군들 그렇게 안 하고 싶어서 안 했나. 지를 자신이 없어서 못 했지. 이럴 때는 회장 아들내미처럼 구는 모습이 밉지 않았다. 여 본부장이 곰살맞은 애교를 부렸다.
-너어 무섭다?
“아… 이상한 말 하지 말구.”
자식, 진짜. 암튼 주말에는 쉬어. 응? 네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며 말이 많았다. 소파에 누워 건성건성 대답만 하는데도 지쳤다. 시훈은 끊고 난 전화를 가슴팍에 올려놓고 머리를 짚었다.
출장 이후 제대로 쉬지 못한 몸도 몸이지만 촬영장에서 일어난 사고에 정신적인 소모가 너무 컸다. 술이라도 마실까 싶다가 그마저도 생각이 달아났다. 이맘때 도는 찬 바람은 시훈을 침전시켰다. 내내 내리누르고 살던 상실이 누르고 눌러도 자꾸만 떠올랐다.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 휠이 자꾸만 헛돌았다. 피로 때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짜증을 삼킨 손이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잡아 바닥에 내던졌다.
“시발….”
자리만 지키고 온 본가에서 인사를 올리고 식사하는 동안 발아래 드리운 어둠이 시훈의 발목을 붙잡았다. 사진 속 얼굴은 웃고 있는데 가족들 누구도 눈을 맞추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남은 추억은 각자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았고 외면한 상흔은 여전히 곪고 있었다.
‘시훈아, 너는 이렇게 살면 안 돼.’
그 말에 최소한 부끄럽지 말아야 했다. 그러니 누구 집 아들이 아닌 이시훈으로 열심히 살다 보면 웃어는 주겠지. 그런 꿈을 꾼다. 이마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손아래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언젠가 귀를 기울여 들은 심장도 이렇게 뛰었는데, 그랬는데…. 숨을 고를 때 잠잠한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수신인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형, 나 이제 누웠는데… 좀 쉬자.”
-…….
상대는 말이 없다. 눈을 감은 시훈이 한숨 뒤 전화를 끊을 때였다.
-정이수입니다.
“…….”
뜻밖의 전화에 시훈은 감은 눈을 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아 벽을 올려 본다. 정면에 걸린 시계의 시침이 숫자 8을 가리키고 있었다. 잘못 걸린 전화처럼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시훈의 노곤한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퇴근하는 길인가 봐요.”
-…….
그다음에는 더 길어진 침묵이 자리했다. 시간만 속절없이 흘렀다.
“피곤할 텐데…,”
말을 자르고 이내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댁 앞이에요.
시훈이 인터폰 앞으로 이동해 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정이수가 모니터 화면에 떠올랐다. 복도를 지나 급히 현관문을 밀어내자 종이 백을 들고 있는 정이수가 서 있었다. 시훈도 이수도 서로를 확인하고 소리 없는 핸드폰을 내렸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들고 온 음식만 전달해 주고 갈 계획이 틀어진 건 시훈의 몰골 때문이었다. 한눈에 봐도 살이 내린 얼굴이나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몸이 지쳐 보였다. 게다가 검은색으로 맞춘 정장과 타이는 누가 봐도 상갓집에 다녀온 차림새였다. 셔츠 단추와 타이만 대충 내리고 누워 있을 정도면 얼마나 피곤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인사를 못 하고 머뭇대는 사이 시훈이 몸을 비켜섰다.
“미안할 건 없고. …여기까지 왔는데, 잠깐 들어와요.”
아니요, 라는 말이 딱 걸려 나오지 않았다. 얼마 전 회식 자리에서 그깟 담배마저 거절한 자신을 보고 씁쓸해한 이시훈이 떠올라서였다.
집에 대한 첫인상은 이시훈의 사무실 외양과 비슷했다. 조명들, 유명 디자이너 제품과 모던한 가구, 그림과 사진을 끼운 액자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세련된 취향을 알 수 있는 안락한 집이었다. 문을 닫고 들어온 시훈이 거실과 이어진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피 마셔요? 아니면 차?”
“그냥 물이요.”
눈을 굴려 집 안을 둘러본 이수가 식탁 위에 종이봉투를 내려놓았다. 그 옆으로 이수를 지난 시훈이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
“이거요. 죽인데….”
이시훈의 집에 오면서 뭘 사야 할까 고민을 거듭한 끝에 죽을 사 왔지만 상복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식사를 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손만 부끄러운 상황이라 내심 후회가 됐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은 시훈은 포장된 용기를 테이블 위에 차려 놓았다.
“상갓집 다녀온 거 아니에요? 식사했으면… 됐어요.”
“상갓집은 아니고…,”
평소 이시훈답지 않게 말끝을 흐린다. 수저를 끌어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올려놓은 시훈이 털어 버리듯 가볍게 말을 이었다.
“기일이요. 형.”
“아….”
당황한 이수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시훈이 둘째 아들이고 위아래로 형제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어디서도 형이 죽었다는 말은 들은 적 없었다. 일전 전시회를 보던 날도 형에 관해 언급만 했을 뿐이었기에 설마 짐작도 못 한 사실이었다.
“죄송해요. 돌아가신 줄 몰랐어요.”
시훈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기일이라기엔 이상한데… 그렇게 하기로 해서요. 이런 옷 입고 만나서 시신 없는 봉분에 절하고, 꽃다발 놓고. 그로테스크하죠?”
슬픔이나 그리움 없이 이어 가는 말은 마치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수는 잠자코 물컵을 손에 쥐고 서 있을 뿐이다.
“수능 보기 전이었으니까. 꽤 오래됐네요.”
뚜껑을 열어 놓은 그릇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시훈은 식탁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았다. 원서를 내러 가는 길에 감화됐다느니 하는 듣기 좋은 말 아래 감춘 이야기는 이수가 생각한 만큼 낭만적인 스토리는 아닌 것 같다.
가볍게 시작한 이야기는 그 뒤로 이어지지 못했다. 수저를 들고 생각에 빠진 시훈은 이제껏 이수가 본 적 없는 얼굴로 테이블 어딘가를 응시한 채였다. 어쭙잖은 위로를 건넬 수도 없었다. 이제껏 쉽고 평탄한 인생을 살아왔을 거라 멋대로 재단하고 치부한 터라 처음 알게 된 사실이, 그늘진 남자의 모습이 낯설었다.
걱정 어린 위로 대신 이수는 어설프게 대화의 물꼬를 틔웠다.
“…촬영장에서 일이 있었다구요.”
“네. 어쩌다 보니.”
촬영장에서의 일을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감흥 없는 어조가 뒤따르자 정이수의 손끝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컵 언저리에 닿았다. 매끈한 표면을 만지작거리는 엄지손가락은 지금 정이수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시훈은 자신의 공간 안에 발을 들인 정이수의 안절부절 망설이는 미묘한 기척을 느꼈다. 말을 뱉는 중간 멈춘 호흡들이, 자신을 비껴가는 시선들이 그랬다. 시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마 이수를 마주 보지 못하고 주저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묻고 싶었다.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정이수였다. 그런 그가 왜 저를 찾아온 건지… 이유를 듣고 싶었다.
“여기까지… 왜 왔어요?”
“…….”
째깍째깍 초침이 돌아갔다. 움직이는 건 그뿐이었다.
“식사하세요,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무심한 낯으로 속내를 감춘 이수가 물이 담긴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릇 안에서 의미 없이 움직이는 수저질을 멈춘 시훈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지금 운전이 힘들어요.”
“택시 타고….”
당연하게 시훈의 차를 타고 귀가할 생각 따위 없었다. 이수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대꾸를 하다 말이 막혔다.
“내일 아침에 데려다줄게요.”
“…….”
서로 마주 보지 않는 시선은 내내 어긋난 채였다. 말을 마친 시훈은 의자에 털썩 등을 기댔다. 혼란스럽고 당황한 이수를 두고 시훈의 한쪽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시신 없는 무덤이라는데 안 궁금해요? 들어 보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거든요.”
궁금하지도 않은가 보네. 중얼거리며 타이를 풀어내는 손길이 축축 처졌다. 흥미로운 소재에 관심 없는 이수를 도통 이해 못 하겠다는 식이었다. 나사가 풀린 사람처럼 삐딱한 시훈의 모습은 하나같이 생소했다.
“오늘은 이만…,”
자리에 못 박혀 서 있는 이수에게 시훈이 다시 한번 물었다.
“왜 왔어요?”
“…….”
“회식에서 고작 술 몇 잔 마셔 줬다고 술병 났을까 걱정한 건 아닐 테고, 싸움박질 나서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라도 했나 구경 온 것도 아닐 텐데.”
듣고 싶고, 알고 싶은 초조함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왔다. 호흡마저 정지된 듯 두 사람 모두 숨을 죽였다. 이수가 상대를 타일렀다.
“이 팀장님.”
“…내가 지금.”
“쉬세요.”
벽에 가로막힌 말에는 짜증이 서려 있었다.
“가지 말라고 몇 번 말할까요.”
깊게 눈을 감았다 뜬 시훈의 입에서 성마른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덤덤하게 풀어낸 말에 가려진 쓸쓸함과 외로움이 희미하게 얼굴을 보이다 사라졌다. 오늘 밤 같이 있자는 말 한마디가 버거운 초라한 관계였다. 이수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시훈이 본 적 없는 제 그늘을 드러냈다. 위로받아 본 적 없는 상실을 여실히 드러낸 채였다.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말하기까지 지나온 시간이 시훈의 두 어깨에 쌓인 듯 무거워 보였다.
“이건….”
타인의 슬픔과 절망을 위로할 자신은 없었다. 다만 이수 역시 묻고 싶었다. 입술이 달싹이기만 몇 번. 고민하던 이수는 입안에서 맴돌던 질문을 한참 후에야 속삭이듯 물었다.
“부탁인가요, 아니면….”
적요 속, 시훈이 창에 반사된 이수를 응시했다.
“그냥 내가 원하는 거요.”
유진우가 떠난 다음 날, 시훈이 사 놓은 죽을 먹을 때 비어 있던 제 식탁 맞은편 자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역시 비어 있는 시훈의 맞은편 자리가 마음에 걸렸다.
의자를 뒤로 당겨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비로소 같은 눈높이의 이시훈과 마주했다. 제대로 입에 넣어 보지 못한 죽은 이미 식어 버렸다.
“…….”
그 순간 시선을 떨어트린 시훈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자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약한 마음 한 귀퉁이에 정이수를 기워 넣고 밤새 몰아붙일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시훈은 아무렇지 않은 척 짧은 연기를 했다. 점잖은 척, 같잖은 이성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차라도 마셔요.”
티백을 찢는 소리와 물이 담기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이수 앞에 내려놓은 머그잔에서 조용히 김이 올랐다.
모든 건 자연스러웠다. 의자 등받이와 테이블 위로 손을 지탱한 몸이 울타리를 만들었다. 드리운 그림자가 누구 것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수는 피하지 않았다. 곧 남자의 입술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그가 귀밑 턱을 따라 입을 맞췄다. 이수는 눈을 감고 목을 늘여 더운 숨을 내쉴 뿐 시훈을 밀어내지 않았다.
감은 눈이 뜨였다. 눈을 맞춘 이수의 얼굴은 투명하고 맑지만 속을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정이수는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오늘 밤 당신과 함께 있겠노라 무언의 답을 줄 뿐이다.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춘 시훈이 눈과 코, 뺨, 그리고 순순히 열린 입술 사이를 침범했다. 눈을 감았다. 빛 한 줌 없는 어둠이 드넓게 펼쳐졌다. 가식도 거짓도 편견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이수는 제 속마음을 살포시 풀어놓았다.
“이시훈….”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어 어깨를 그러쥔 이수가 그대로 시훈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