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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오리 토끼 (2)(2권) (3/10)

Part 2. 오리 토끼 (2)

여름이 지속되고 있었다. 해는 뜨겁고, 비는 마르고, 날은 흘렀다.

그나마 비수기인 여름은 여유가 있는 편이나, 팀원들이 돌아가며 휴가를 내고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도 이수와 시훈은 사무실을 지켰다.

슈퍼 을 운운하며 속을 뒤집어 놓았던 그날 이후, 시훈과는 말을 섞거나 따로 만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한편으로 상대의 공간을 까맣게 칠해 놓은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때때로 이시훈과의 관계가 애초에 없는 일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잘못 본 줄 알았어. 어떻게 거기서 만나니.

외근 후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친 이수가 로비를 가로지르며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백주홍의 밝고 활기찬 목소리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늘 프로덕션을 방문하고 나오는 길에 누군가 ‘정이수!’ 이름을 불렀다. 프로덕션이 모여 있는 강남 일대에서 종종 협력업체 직원을 만난 적은 있으나 직함 없이 이름을 부를 사람은 없었다. 놀란 눈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백주홍이 손을 흔들었다.

B 대학에 출강하던 백주홍은 이수가 졸업할 때쯤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선수는 필드에서 뛰어야지. 그게 백주홍이 남긴 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에서 강사님이나 교수님 대신 선배라는 호칭이 좋겠다고 거리를 좁혀 주었다.

“저도 놀랐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업체 미팅을 가는 백주홍과 급히 연락처만 교환한 탓에 안부 인사가 늦어졌다. 이수가 인사이트에 입사하고 일이 년간 근근이 이어지던 연락은 바쁜 회사 생활에 점점 뜸해졌다. 와중에 핸드폰까지 분실하고 연락처가 통으로 날아간 일이 있었다. 고객사를 제외하고 백업조차 안 해 놓은 연락처가 드문드문 메꾸어지는 동안 일이 바빠 백주홍 선배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럭저럭. 돈 버느라 바빠.

“회사 차리셨다면서요. 얼마 전에 기사는 봤는데…. 그게 선배 회사인 줄은 몰랐어요.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얼마 전, 해외 광고제에서 수상한 업체에 관한 기사를 보고 동명이인이라고 넘겨짚었다. 설마 회사를 차렸으리라는 생각은 못 했다. 알았더라도 연락할 만한 정신도 없었지만…. 미안했다.

-운이 좋았지. 언제 한번 놀러 와.

대학 시절 내내 공모전에 목을 맨 이수는 백주홍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백주홍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을 해 주거나 이수가 활동하는 동아리에도 참고하라며 각종 자료를 공유해 준 이였다.

“네. 꼭 갈게요. 날 더운데 건강 잘 챙기시구요.”

상대 역시 좋은 하루가 되라는 인사를 건넨 뒤로 전화가 끊겼다. 반가운 전화 통화를 마친 이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입매가 굳어졌다.

게이트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당도한 이수는 유진우 본부장과 인사팀 팀장을 발견하고 머리를 숙였다. 영국행이 결정된 후 여름휴가 겸 잠시 런던에 가 있던 유 본부장이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유 본부장은 인사팀 팀장과 식사를 마치고 들어오는 길 같았다. 이수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한 발 뒤로 자리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서울 집은 다 정리하시구요?”

“네, 결혼하고 계속 살았던 집인데 아쉽게 됐어요.”

“이번에 건너가시면… 몇 년 만이시죠, 4년, 5년?”

“5년이요.”

귀를 막고 싶어도 들리는 소리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수의 시선은 엘리베이터 숫자에 매여 있었다. 그러다 인사팀장의 다음 말에 이수의 시선이 뚝 떨어졌다.

“말씀하신 서류는 퇴근 시간 전까지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요번 달 말이면 못 뵙는다니…. 본부장님 가시면 서운해서 어떡해요. 아, …잠시만요.”

네, 인사팀장 김정윤입니다. 통화를 위해 멀리 거리를 벌린 인사팀장이 여 본부장에게 실례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였다. 때마침 로비에 도착해 열린 엘리베이터에 유 본부장이 올라탔다. 곧 닫히는 문을 잡은 유 본부장이 넋을 놓고 있는 이수를 깨웠다.

“정 팀장, 올라가는 거 아닌가?”

영국행이 확정된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구체화된 일정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당황한 시선이 얽히다 고개를 떨궈 낸 이수가 유진우의 한 보 앞으로 섰다. 유 본부장의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가슴이 꽉 죄어 왔다. 과거를 불러온 향기에 자신과 팀을 버린 유 본부장에 대한 원망은 한편에 미뤄지고 파블로프의 개처럼 끝맺지 못한 미련이 불쑥 머리를 쳐들었다. 남은 감정이 찌꺼기뿐인 오물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가늘게 눈을 뜬 유진우가 단정한 이수의 뒷모습을 훑었다. 팔목까지 내려온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여느 때와 같았다.

대리 시절 무채색 무지 티에 색이 짙은 청바지만 주야장천 입고 다니던 정이수와 프로덕션을 방문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변변찮은 옷차림이 신경 쓰여 차를 돌려 백화점에서 슈트 한 벌을 선물해 주었다.

‘우리 같은 AE는 사람 만날 일이 많잖아. 보자, 잘 어울리는지.’

‘팀장님, 너무… 과분한데요.’

‘이수 덕분에 옷이 사네. 정 민망하면 셔츠 정도만 입고 다녀.’

정이수를 달래 탈의실에서 옷을 바꿔 입힐 때마다 거울 앞에 선 녀석의 뒤에서 어깨를 가만히 쓸어 주면, 발개진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가늘고 긴 팔다리와 늘씬한 몸은 입히는 족족 잘 어울렸다.

그 뒤로 정이수는 청바지와 슬랙스를 번갈아 입고 단추가 달린 셔츠만큼은 꼭 갖추어 출근했다. 그리고 팀장 승진을 앞두고는 제 취향과 엇비슷한 옷을 갖춰 입게 되었고.

“출국 날짜 잡혔어.”

“…네.”

일상적인 물음처럼 유진우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이시훈이 잘 챙겨 줘?”

“…대답할 이유,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감추고, 혼자 한 이별에 끙끙대고, 구멍 난 마음을 메꾸는 이수를 유진우는 여전히 흔들고 싶어 했다.

“나는 이수가… 아니, 정 팀장이 꽤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이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유 본부장과의 관계에서는 추문이 따랐을지언정 제 순수한 애정에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시훈과의 관계야말로 몸 팔아먹는 상납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갈아탔느냐 물었던 유 본부장의 말을 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잘못 보셨나 보죠.”

애써 감정을 내리누른 이수는 서늘한 투로 절망을 감추었다.

“그래, 나보다야 이시훈이 더 확실하지.”

조소하는 유진우 본부장이 미간을 좁혔다.

원석을 발견해 다듬는 과정은 즐거웠다.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고 흘리면 흘리는 대로 주워 뒤를 쫓아오던 정이수는 가꾸는 맛이 있었다. 반짝이며 일을 하던 눈이 처연함을 담아 자신을 바라볼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일었다.

생각보다 길어진 추문이 귀찮아질 때쯤, 영국행이 가시화되었다. 가지고 놀던 정이수와의 관계를 차분하게 털고, 여지없는 끝을 맺어야 후환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니 섹스를 하지 않은 엔딩은 당연한 결과였지만, 요즘 들어 껍질을 벗겨 보지 못한 그날이 조금 후회가 됐다.

“본부장님, 저는….”

저는 본부장님 이용하려는 마음 같은 건 없었어요.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입속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냥 좋아했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폐수 같은 고백은 악취만 남길 뿐이었다.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유 본부장이 코웃음을 쳤다.

때마침 이수의 사무실이 있는 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추스르지 못한 감정을 만면에 드러낸 이수가 힘없이 발을 내디뎠다. 차마 뒤로 돌아 묵례조차 못 할 만큼 표정 관리가 되지를 않았다.

“…….”

마른 입술을 감쳐문 이수가 그렇게 머뭇대는 사이 반대편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너무 돌아가지 말자구요, 메시지가 좀 더 간결하게….”

고개를 들자 먼저 정이수가 보였다. 그리고 어깨 너머의 유진우가 보통 때와 다름없이 여유로운 얼굴로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었다.

불편한 삼자대면에 슬며시 인상을 쓴 시훈은 잠시 핸드폰을 떼고 뒤편의 유 본부장에게 묵례를 한다. 간격을 넓게 벌린 샌드위치처럼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이수의 뒤로 스르르 문이 닫히며 짧은 만남은 그렇게 막이 내렸다.

“…내가 다시 전화할게요.”

이시훈을 바라보던 이수의 시선이 부지불식간 아래로 뚝 떨어졌다. 어지러운 감정과 거세게 솟아오른 긴장이 이수를 압박했다. 건물 내 서늘한 공기가 몸을 지날 때마다 텅 빈 가슴에 숭숭 구멍이 난 것만 같다. 유진우에게 보이지 못한 얼굴은 근육이 제멋대로 뒤틀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꼴을 전부 보인 사람이 하필 이시훈이라니….

“…….”

시훈은 자신을 무시하고 곁을 지나는 정이수의 등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소멸되지 못한 미련이 잔상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아마… 이쯤 있을 것 같아요.”

인터넷 창을 열면 정보가 다 나오는 요즘 같은 시대에 자료실은 구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된 박물관 같았다. 인사이트가 정산 그룹 계열사로 인수되기 전부터 국내 탑티어 광고 회사로 자리 잡은 지가 벌써 30년이었다. 인하우스 광고 대행사가 아닌 독립 광고 대행사로는 드문 일이었다. 국내외 시장 상황이 바뀌며 전통적인 매체나 서비스만으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기에 결국 정산 그룹 계열로 들어오게 됐지만 인사이트가 남긴 발자국은 자료실에 잘 보관 정리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조민희 대리가 품에 자료 다발을 넘치도록 들고 있었다. 조금만 기울이면 와르르 무너질 기세라 담배를 태우러 가던 시훈이 잠시 손을 빌려주었다. 그렇게 우연히 들어온 자료실에 책자를 반납한 조 대리와 내친김에 오전 회의에서 말이 나온 테이프까지 찾게 되었다.

“와… 테잎.”

서늘한 온도로 유지되는 자료실 한편에는 인사이트에서 제작한 광고들이 정리된 테이프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대부분 자료들은 디지털로 변환되어 구축된 서버에 보관 중이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것들은 심의 문제로 온 에어 되지 못한 광고나 촬영장 비하인드가 찍힌 자료들이었다.

40주년을 맞는 D사의 기업 광고를 기획하기 위해 인사이트에서 90년대에 제작한 광고가 필요했다. 요즘 레트로 트렌드와 결이 맞으리라 판단한 광고주 쪽에서 자료를 찾아보기를 소망한 것이다.

“이거 맞는 것 같은데요. 〈96년, D사 #1〉.”

조민희 대리가 매직으로 적힌 글자를 확인하고 먼지 쌓인 테이프를 품에 안았다.

“팀장님은 처음 와 보시죠? 정산 그룹에 인사이트 매각하기 전에 대표님이 이곳에서 홀로 이 유물들과 함께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셨다는 후문이 있죠.”

작년에 이직한 시훈보다 인사이트에 먼저 입사한 조민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화를 전했다.

자료실은 구색을 잘 갖춰 놓아 생각보다 보는 재미가 있었다. 테이프를 손에 들고 벽을 따라 전시된 〈인사이트〉의 역사를 곁눈질로 휘휘 지나치던 조 대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옆에 선 시훈의 시선이 조민희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갔다.

‘〈인사이트 대학생 광고대상〉 대상 수상자. 좌부터 B 대학교 광고홍보학과 정이수, 안지윤, 홍기석.’

“이거 정이수 팀장님 맞죠? 와….”

비주얼이 아주 난리 난리, 장난 없…. 튀어나온 호들갑에 조민희가 시훈의 눈치를 살피고 입을 다물었다. 타 팀이기는 하나 상사에게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하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사진 속 정이수는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 지금과 별반 다름없는 앳된 얼굴이 무리에서 단연 돋보였다.

“대학생 때 인사이트 공모전에서 두 번이나 대상 수상하셨다더니… 이건 4학년 때 받으셨나 봐요.”

시훈이 사진을 응시하는 사이 조민희가 또 다른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유진우 본부장님. 아… 칸.”

유진우가 담당한 광고가 국제 수상을 한 뒤 매체에 실린 사진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유 본부장님은 이달 말에 출국하신대요.”

“…그래요?”

그래서. 어제 유진우를 뒤에 둔 정이수는 간신히 참아 내는 중이었다. 시훈이 코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정이수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떠나보내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보내기 싫은 건지도 모르겠다. 박제된 유물로 가득한 이곳처럼 자신만 아는 작은 방에 유진우의 잔재를 남겨 놓고 싶은 건지도. 그건 외로운 사람들만 아는 못된 방법이었다. 잊었다 거짓으로 인정하고 이 정도는 괜찮다며 스스로 타협한다. 가장 아픈 부분을 도려내어야 상처는 말끔히 치유될 테지만 정이수에게 그런 여유가 있을지 시훈은 알 수 없었다.

어제 마주친 정이수는 여전히 유진우를 의식하고, 체념 섞인 상실을 무심결에 흘리고 있었다.

조민희가 기사를 훑어보며 새삼 알게 된 사실처럼 중얼거렸다. 이때 참….

“어? 정 팀장님도… TF에 같이 계셨구나….”

국제 광고제 수상 후 유진우와 정이수가 트로피를 들고 찍은 사진이었다. 미소 지은 정이수는 공모전 수상 때보다 성숙하고 차분해 보였다. 아마도 20대 후반이었을 정이수의 확신에 가득 찬 자신감이 사진 너머로 전해졌다. 그리고 한쪽 눈에 진 쌍꺼풀도. 뿜어내는 아드레날린에 피로조차 느끼지 못했을 시간이 한 장의 사진에 담겨 있었다.

“워낙 대형 광고주라 사활을 거네 마네 하던 프로젝트였거든요. 유 팀장님… 아, 유진우 본부장님이 팀별로 사람을 뽑아 갔어요.”

과거를 상기하는 조 대리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영국에 있는 아들이 아프다 그랬었나…. 아무튼 몇 번 오가셔야 해서 다 망했다 싶었는데… 집행되고 나서 매출은 대박에 칸에서 수상까지 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있죠. 그 뒤로 제안서는 비행기에서 쓰셔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다들 우스갯소리로 그랬어요.”

말을 마친 조민희 대리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시훈의 미간에는 주름이 져 있었다. 사진 속 정이수의 외꺼풀을 바라보는 채였다.

제안서를 비행기에서…. 헛소리도 참. 정이수가 수습하느라 몸을 갈아 넣었을 상황이 눈에 훤했다.

조금만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 실무를 뛰고 있는 라인에서 보이는 사실들이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이수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소화되는 제안서와 결과물들에는 의식하지 못해도 시그니처처럼 본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집행된 당시 광고와 인사이트에 들어와 밤새 훑어본 기존의 제안서들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만 가죠.”

좀처럼 사진에서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갈무리한 시훈의 뒤를 조민희가 따랐다.

정이수는 인사이트의 역사와 함께했지만 알아주는 이 없이 늘 유진우의 그늘에 가렸었나 보다. 일에 대한 열정과 유진우에 대한 사랑으로 20대를 보내고 팀장 반열에 오른 지금 빛을 발해야 할 순간에 먼지를 뒤집어썼다.

그래서 부당한 줄 알면서도 저와 이런 관계를 맺는 데 주저함이 없었을까. 돼먹지 못한 발악처럼?

문이 닫히고 실내를 환하게 비추던 불이 꺼졌다. 열어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자료실의 유물처럼 정이수의 역사 역시 다시 갇혔다. 온몸을 휘감은 씁쓸함에 시훈은 하릴없이 담뱃갑을 우그러뜨리고 말았다.

* * *

정이수가 지시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서는 모습을 시훈의 눈동자가 따라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이 순식간에 문에 가렸다.

“씹….”

…하기 싫어 미치겠네. 혼자만 들릴 정도로 욕을 짓씹은 시훈이 책상 위로 볼펜을 던져 놓았다. 누가 뇌를 갉아먹기라도 한 건지 오전 내내 업무에 집중이 안 됐다. 불쑥불쑥 떠오른 정이수 얼굴 때문이었다. 어제 유진우를 뒤에 두고 우연히 제게 보인 모습과 자료실에서 마주한 얼굴들 말이다. 손바닥이 이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훈이 머리를 짚다 문득 오른편에 세워진 파티션으로 의자를 돌렸다. 한쪽 팔꿈치를 책상에 기댄 시훈은 파티션에 붙여 놓은 낡은 엽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전 여 본부장이 언급한 엽서였다.

거대한 폭포의 물줄기가 수면에 세차게 부딪치는 장엄한 풍광이 인쇄된 엽서는 수험생 시절 시훈의 참고서 안쪽에, 대학 작업실에, T 기획 그리고 인사이트에 와서까지 시훈이 부적처럼 달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또한 잊었다고 거짓으로 인정하고 이 정도는 괜찮다며 스스로 타협한 유일한 산물이기도 했다. 시훈의 손이 엽서 아래쪽을 들어 올리자 뒷면의 내용이 거꾸로 모습을 보였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1)

익숙한 글씨체로 휘갈겨 쓴 시는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외울 수 있다. 정신이 흐트러질 때마다,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질 때마다 자신을 다그치기도 다독이기도 하는 방법이었다.

짐짓 미간 사이를 찌푸린 시훈이 손을 내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여 본부장의 집무실에 올라갈 시간이었다.

“시훈이가… 네. 그럼요. 아… 바빠서 아마 못 받았나 봐요. 계속 야근을…. 숙모님, 걱정 마세요.”

타이밍이 이렇게 안 좋아서야. 여민준 본부장은 난처한 표정과 달리 전화 온 상대방에게 성실하게 답을 주었다. 가끔 걸어도 부재중으로 넘어가기 일쑤인 아들보다 꼬박꼬박 받아 주는 조카에게 아들 사정을 묻는 일이 더 빠른 모양이었다.

여 본부장이 눈짓으로 전화 받을래? 묻는 신호에 시훈이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네, 들어가세요. 그럼.”

후우. 크게 한숨부터 내쉰 여 본부장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시훈을 흘겨보았다.

“얼굴이라도 비치라니까 그러네. 멀리 살아? 퇴근하는 길에 잠깐 다녀가.”

“알아서 해요.”

또, 또. 으휴. 지긋지긋한 이시훈 성격 때문에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숙모와의 통화가 지금 몇 번째인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여 본부장이 태블릿 PC로 스케줄을 확인했다. 잠시 후, 시훈이 올린 보고서를 확인하고 오늘 나눈 업무 이야기를 마무리할 즈음이었다.

“진짜 열심히 산다….”

사내 전산망으로 올라온 보고서를 확인한 여 본부장이 기가 찬 웃음을 내비쳤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시훈을 바라보며 태블릿 PC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정이수 말이야. 저번에 너네 팀한테 일 넘겨주고 뭐 하나 던져 줬더니 아주 죽자고 달려드네.”

헛발질하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시훈이 가지고 올라온 서류들을 한데 모아 쥐며 표정을 굳혔다.

“무슨 말이에요?”

그리고 자리를 뜨려다 말고 여 본부장을 향해 묻는다.

“급히 보내야 할 제안서가 하나 있어서 와꾸만 맞춰서 달라고 했거든. 근데 칼같이 보내 놨네….”

화면을 쓱 넘겨 보던 여 본부장이 그만저만한 투로 사정을 설명했다.

“이거 광고주 쪽하고 입 맞춘 업체가 있거든. 정 팀장네야 그냥 들러리지, 뭐. 괜히 잡음 안 나게 하려고.”

시훈에게서 한숨이 쏟아졌다.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에 쉬이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거 너무 나갔네…. 시훈은 핏줄이자 한때는 자신의 멘토이며 롤 모델이었던 여 본부장을 응시했다. 유진우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남았길래 정이수까지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심드렁한 태도로 정이수가 올린 제안서를 읽어 가는 여 본부장의 표정이 흥미로운 빛을 띠었다.

“이것 봐라…. 제법이네?”

자리에 그대로 눌러앉은 시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형, 너무 나갔어.”

“뭐?”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며 무심코 대꾸하는 여 본부장에게 시훈이 가슴에 꽂힐 말을 살벌하게 턱턱 내뱉는다.

“사규 안 봐요? 이거 직무상 고의로 사측에 손해 입히는 거예요.”

시선을 끌어 올린 여 본부장의 입이 딱 벌어졌다. 어이가 없었다. 지금 얘가 뭐라는 거야. 사규 운운하니 여 본부장은 화보다도 황당함이 앞섰다.

“시훈아, 너 말이 좀 그렇다?”

“다른 본부, 다른 회사 아니잖아요.”

“야, 이 팀.”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 여 본부장은 할 말이 막힌다. 저 하고 싶은 말, 가리지 않는 녀석인 건 알았지만 이건 벌써부터 자기 회사라고 관리하는 건지 뭔지. 허리를 세워 앉은 여 본부장이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인사이트에 들어와서 대행이라는 후진 자리부터 앉아서 일은 일마다 회식은 회식마다 챙기던 녀석이었다. 좀 편하게 가라고 등 떠밀어도 눈 흘기며 위아래 따지던 게 누군데…. 시훈이 좋아하는 원칙대로라면 이건 당치 않은 행동이었다.

곧 시훈이 몸을 일으키며 여전히 당혹감이 가시지 않은 여 본부장에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앞으로 2팀이 물고 온 거 우리 쪽으로 넘기지 말아요. 보기 안 좋아.”

거기서 참지 못하고 여민준 본부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나 좋으라고 이래?”

손끝 거스러미들 깨끗하게 떼어 준다는데 얘가 왜 이럴까. 여 본부장은 서운한 마음이 덜컥 들었다. 시훈이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여 본부장에게 불쑥 묻는다.

“내가 시원찮아요?”

“뭐-어?”

이놈이. 끓어오른 화가 주체가 안 돼 뒷머리가 쭈뼛 설 지경이었다.

“형.”

잠시 틈을 준 시훈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팽팽히 당긴 감정의 고삐를 느슨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여기 와서 대행부터 시작한 거 명분 쌓으려는 거 아니야? 그런데 지금 이러면 형이 차려 놓은 밥상 엎는 거랑 똑같아. 나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손발 잘 쓰고 있는데 옆에서 밥 떠먹여 줄 필요 없어. 그러니까 괜히 앞서가지 말자구. 혼자서 일하게 좀 내버려 둬요.”

흥분을 가라앉힌 시훈은 눈을 맞추며 조곤조곤 제가 요구하는 바를 확실하게 내리꽂는다. 말을 잃은 여 본부장의 벌어진 입이 황당함을 토로했다.

“시훈아, 이거… 무슨 새로운 결벽증이냐?”

제 아버지 회사로 데려오는 것도 낙하산이니 뭐니 말 나올까 싫다는 거 설득해 당치도 않은 자리에 앉혀 놓았다. 어차피 갈 길 좀 깨끗하고 편하게 만들어 놓으려는 것뿐인데 그것마저 싫단다.

“형.”

시훈이 기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못마땅한 여 본부장의 얼굴 위에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의문과 서운함이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여 본부장의 욕심까지도.

“뭐.”

인사이트에 단단히 뿌리내려 위치를 공고히 하고 싶은 여 본부장의 밑바닥 욕망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걸 모르고 인사이트로 이직한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정이수와의 거래를 떠나서 이런 저열한 방식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형은 어쨌든 유진우 치웠으면 된 거잖아. 욕심, 너무 부리지 마세요. 체해요, 그러다가.”

“야…!”

문을 열고 나서는 시훈의 뒤에는 서늘함만 남아 있다. 허. 헛웃음을 터트린 여민준 본부장이 소파 위로 털썩 등을 기댔다.

“아… 진짜 황당하네…. 이놈의 자식이….”

여민준은 항상 시훈이 타오르는 불꽃 같다고 생각했다. 눈치 안 보고 척척 내는 기획안이나, 인턴 생활을 할 때도 제작팀까지 쫓아가 아웃풋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 그랬다. 한번은 제작실 실장에게 한 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쫓아간 회의실에서 당시 책임이었던 자신이 중재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인턴에서 잘렸을지 모를 만큼 거침없는 언행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놈이니, 성격이 어디 갈까 싶다가도 여 본부장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거센 바람에 활활 타기만 하던 어릴 때와 달리 이제는 고요히 고온으로 연소하는 불꽃이 된 것 같다. 그 때문에 요목조목 따지는 시훈에게 어버버 황당해하는 제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여 본부장은 생각보다 더 커 버린 녀석이 낯설게 느껴졌다.

* * *

이수가 호텔 주차장에 도착해 조수석 문을 열 때였다.

“앞으로 2팀 업무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일 없을 거예요.”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수가 열린 문을 두고 입을 열었다.

“상관없는데요.”

말 그대로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지만 이시훈의 말에 제 처지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곱씹을수록 속이 쓰렸다.

“…상관없다.”

무표정한 시훈이 입술을 달싹였다. 정이수에게 고맙다는 말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허탈했고 생각만 많아졌다. 발을 내디뎌 호텔 출입구로 향하던 이수는 이시훈이 시간을 두고 차에서 내린 사실을 깨달았다. 딱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호텔까지 오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이수는 할 말이 없었고, 시훈은 할 말을 참는 듯 보였다. 꼭 지금처럼.

프런트에서 카드 키를 전달받은 시훈이 이동하기 전 이수를 돌아봤다.

“저녁은요.”

“생각 없어요.”

언제는 먹고 싶었겠냐마는…. 퇴근하기 전까지 책상에만 박혀 있던 정이수였다. 속이 곯지. 사람이 먹지를 않는데.

적막한 복도를 걸어 룸에 도착하자 시훈은 문을 열고 이수를 먼저 들여보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시훈은 올라간 길을 되돌아 나와 건물 밖 흡연 구역을 찾았다. 이제는 밤공기마저 더웠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밤에 연기는 날아가지 않고 시훈의 눈앞을 뿌옇게 흐려 놓았다. 그래서 안개가 가득한 곳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장님 코끼리 말한다 했나…. 방향을 상실한 듯한 찜찜함이 내내 시훈을 맴돌았다.

가운을 입고 욕실을 나온 이수가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이시훈을 발견했다. 시훈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훔치는 이수를 발견한 참이었다.

“벌써 씻었네요.”

느리게 떨어지는 시훈의 어조에는 예상 못 했다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네.”

일상 소리마저 차단된 룸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간접 조명만 켜진 그 안에서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발을 뗀 쪽은 이수였다. 목덜미에 올라간 손이 떨어지고 이내 정이수가 무심한 발길을 돌렸다.

“오전 일찍 미팅이 있어요.”

“…….”

그러니까…

“빨리 끝냈으면 해요.”

정이수는 간결한 용건을 남기고 침대맡 창가에 서 있었다. 시훈이 느릿하게 재킷을 벗으며 작게 인상을 구겼다. 한숨과 함께 소매를 뺀 재킷을 무신경하게 던져 놓은 시훈이 침대맡으로 성큼 걸음을 옮겨 협탁 위 전화를 들었다.

“룸서비스 취소해 주세요. …네, 상관없습니다.”

창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이수는 창문에 비친 시훈을 바라보다 곧 시선을 돌렸다. 당치도 않은 일을 한 시훈이 못마땅했다. 이런 곳에서 마주 앉아 밥이라도 먹겠다는 건지, 아니면 마른 몸은 본인 취향이 아니니 억지로 입속에 뭐라도 쑤셔 넣을 생각이었는지…. 어느 쪽이든 불편해서 밥 한 숟가락, 물 한 모금도 넘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달칵.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만이 적막한 룸 안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두 개… 아니, 세 개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손가락이 구멍에 푹 꽂혔다 뒤로 천천히 무를 때마다 엎드린 자세로 상체를 시트에 대고 있는 이수의 어깨가 미미하게 떨렸다. 하체에 바짝 붙어 앉은 시훈은 재킷과 느슨하게 매고 있던 타이만 벗은 상태였다.

“아흐… 흑….”

물처럼 녹은 젤이 구멍 사이로 흐르는 감각에 피부가 간지러웠다. 닦아 내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시훈이 손가락을 찌를 때마다 찌걱대는 소리가 호텔 룸 안을 울렸다. 자극은 뒤가 보이지 않는 불안함에 비례해 자꾸만 잇새로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좀처럼 참아 보려 해도 도리 없이 새어 나오는 소리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으… 읏….”

차라리 삽입되는 편이 나았다. 고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수치를 느낄 바에야 그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시트에 파묻어 내리자 다리 사이로 단단히 발기한 제 성기가 아직 손 한번 닿지 않았는데도 프리컴을 툭툭 흘리는 광경이 보였다. 질끈 눈이 감겼다.

시훈의 손이 내벽 안을 힘주어 쑤시자 구멍 안에서 자리다툼이라도 하는지 움직이는 손가락들이 전립선에 닿을 듯 말 듯 짓이겨졌다. 그럴 때마다 이수는 배 속에 뭐라도 있는 건 아닐지 의심스러웠다. 닿을 수 없는 곳을 마구잡이로 긁어내고 싶기도, 또 당장에 도망가고 싶기도 했다. 혼탁한 생각이 머릿속을 메울 때마다 속도를 높이는 손이 박히며 물 같은 젤이 주위로 튀었다.

“흐윽, 아, 아아, …아!”

손가락은 근처만 오갈 뿐 끝까지 닿지 않는다. 일부러 의도한 심술이었다.

“…….”

“…그냥…! 넣, 으면….”

시훈은 대답 대신 이수의 골반을 부여잡고 더 세게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손가락이 안쪽으로 처박힐수록 이수의 허리가 둥그렇게 말렸다. 자각 없이 엉덩이를 앞으로 빼자 묵직한 힘이 허리 위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도망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미약한 저항에 이수의 몸이 단번에 뒤집혔다. 무릎을 거세게 벌려 놓은 시훈의 손이 이미 벌어진 구멍 사이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다리 사이로 자리 잡은 시훈이 제 무릎 위로 둔부를 잡아 올렸다. 적당히 근육이 붙은 동그란 엉덩이 골을 따라 흘러내린 젤이 바지를 적셨지만 시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 세 개를 삼킨 구멍이 요사스럽게 오물대는 모습을 한동안 주시했다.

“으… 흑….”

“잘 먹네….”

바람 빠지는 웃음이 떨어졌다. 시훈은 나머지 손을 뻗어 이수의 발기한 성기를 귀두부터 밑동까지 부드럽게 잡아 쓸었다. 이수의 입에서 헉. 소리 없는 탄성이 터지자 성기를 자극하던 시훈이 속도를 늦추고 문득 입을 뗐다.

“원하는 거 없어요?”

시훈의 물음은 맥락이 없었다. 차분한 목소리가 자칫 다정하게 들릴 정도라 의도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

“바라는 거. 없냐구요.”

시훈이 다시 물었다. 섹스 중 묻는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구멍에 성기를 넣어 달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 건가. …아니, 그딴 치욕을 주기 위한 의미로 들리지는 않았다. 이시훈은 정말 묻고 있었다. 요구하고 바라는 것. 몸에 대한 대가를.

“…….”

시훈은 엄지와 검지로 고리를 만들어 이수의 성기 끝을 압박해 말아 쥐었다. 점점 속도를 올려붙이며 서슬 퍼런 눈을 깔아 입을 다문 상대를 내려 보았다. 그리고 부득부득 끓어오르는 속을 인내하며 느른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찾아다니는 기분이라…. 정이수 팀장은 바라는 게 하나도 없는데, 뭘 좀 바라 주세요. 부탁해 주세요. 그러는 기분이에요, 나는.”

“흐….”

손이 주는 자극과 달리 시훈의 말투는 너무도 평이했다. 그에 반해 이수는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몸을 꿈틀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저변에 깔린 시훈의 어조는 어딘가 심술이 난 사람처럼 억지스러웠다.

“그런데 일 이야기는… 왜 이렇게 벽을 칩니까.”

묵묵하게 물어 온 목소리에는 감정이 거세되어 있었다. 저의를 알 수 없는 말이 이어지는 동안 이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미끈거리는 성기가 뜨거운 손에 농락당하는 내내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감각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결국 포개 놓은 입술 사이로 짓씹힌 말이 엉망으로 새어 나왔다.

“…내버려 두라니까요. 필요하면 내가 알아서…! 아… 흑!”

원하는 답은 아니었는지 내리깐 눈을 들며 정면으로 시선을 던져 놓은 시훈이 요도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게 언젠데.”

이수의 뒤척이는 몸이 시트에 마찰되는 소리에 읊조린 시훈의 목소리는 전달되지 못했다. 건조하나 어딘가 체념 섞인 기색이 묻은 투였다.

매번 대화를 끌어갈 때마다 두 사람 중 누군가 벽을 치고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는 기분이 지속됐다. 오늘 주차장에서 정이수에게 여 본부장과 정리한 상황을 전달한 후 마주한 공허함과 허무함은 시훈을 운전석 밖으로 쉽게 나설 수 없게 만들었다. 텅 빈 정이수의 눈이 저를 비껴가는 것도, 발걸음 속도 하나 맞추지 않는 현실도 거슬리고 불편했다.

“하… 으… 응….”

시훈이 푹 절 정도로 구멍 안에 들어간 손가락을 입구 끝에 걸어 놓자 움찔 허벅지가 떨렸다. 만지면 만지는 대로 착실하게 반응하는 몸만은 어쩌면 정이수가 보이는 모습 중 가장 솔직한 단면일 테다. 싸늘하게 감정을 감춰 낸 시훈이 오기를 부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수의 기둥을 뿌리부터 서서히 훑던 시훈이 바짝 어깨를 낮추며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내가 좀 필요해요?”

발기한 성기 끝에 맺힌 프리컴이 주르륵 흐르는 모습을 눈앞에 두고 시훈이 낮게 중얼거렸다.

“곧 싸게 생겼네….”

…설마.

“정 팀장님 물건 적당히 크고 예쁘긴 한데… 자기 좆 혼자는 못 빨잖아요.”

아랫배에 시훈의 머리카락이 닿았다. 뾰족하게 세운 혀가 음모를 헤집는 느낌 역시 부득이한 착각이라, 설마 그럴 리 없다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던 이수의 배가 한순간에 꺼졌다.

“하… 하지… 마, 아흑…!”

시훈이 이수의 성기를 단숨에 입에 넣었다. 따뜻하고 축축한 입안에 성기가 빨려 들어가자마자 치닫는 쾌감에 이수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틀었다. 자꾸만 모아드는 무릎을 잡아 벌리자 유약한 반항이 뒤따른다. 귀두를 쪽 소리가 나도록 빠는 시훈이 엉덩이로 이어지는 허벅지를 달래듯 부드럽게 쓸었다. 손바닥의 뜨거운 온도는 에어컨 바람에 차가워진 살결 위를 부지런히 매만지며 성감을 끌어내고 있었다.

이수의 눈이 아래로 휘어지며 난감함을 드러냈다.

입술로 성기를 조일 때마다 구멍에 걸쳐 놓은 마디 끝을 내벽이 꽉 물어 왔다. 정이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한 표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허둥대던 두 팔이 시트를 부여잡다 종국에는 두렵고, 애가 타고, 부끄러운 얼굴을 가리기를 택한다.

“아… 흐읏… 응… 으….”

구멍 안의 손이 안팎으로 열심히 드나드는 동안 성기를 빠는 입 역시 쉬지 않았다. 팔 아래로 언뜻 보이는 눈빛에 이수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쭉쭉 성기를 당겨 빠는 시훈의 시선이 줄곧 저를 향해 있는 탓이었다. 남자의 다리 사이에서 성기를 빠는 일에도 자존심을 세워 보려 눈을 내리떴던 저와 달리, 시훈은 마치 벌받는 상대를 관찰하듯 자신을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흐읍… 하아… 흐응….”

끈적한 물기가 시훈의 손바닥을 적시는 동안 이수의 호흡도 점점 가빠졌다. 어딘가 수틀린 사람처럼 이시훈은 끈질겼다. 왜 이따위로 화풀이를 할까. 저질이다. 그런데… 그 손에, 입에 헐떡대는 저는 또 뭐고. 본능 앞에 와르르 무너진 자괴감이 몸과 머리를 잠식했다. 정말 이시훈의 말처럼 유진우에게 데어서 머리가 어떻게 됐을지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몽롱하게 부푼 욕구가 계속해서 부채질한다. 쉬지 말라고, 더 끈질기게 쑤셔 달라고 조르는 구멍이 움찔거렸다. 저도 모르게 시훈의 입안으로 허리를 털고 싶은 강렬한 음욕이 이수를 지배했다.

“나와… 쌀 것 같… 으… 입, 입… 떼요… 흐….”

시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위아래로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능숙하게 혀끝으로 갈라진 틈 사이를 자극한다.

“하… 윽…!”

더 이상 못 참겠다 생각했을 때 그대로 입술이 떨어졌다.

“쌀 것 같다며. 왜 안 싸요.”

아, 책망한 시훈의 입에서 뒤늦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미처 몰랐던 사실을 깨달은 듯.

사정을 참아 낸 이수의 몸이 푸들푸들 떨렸다. 성기는 배에 닿을 정도로 빳빳하게 서 있었고 하반신은 펠라티오를 받는 동안 허리가 반쯤 뜬 채로 끌려가 절반은 제 몸이 아닌 것 같았다.

“…흐… 으.”

시훈의 성기가 불편할 정도로 바지 안에서 부풀어 있었다. 다리를 벌린 이수의 오금을 누르고 빠끔대는 구멍에 느긋하게 손가락 세 개를 넣었다. 정 팀장님,

“여기…, 허전해서 못 싸겠죠? 겨우 만져 주고 빨아 줘서는 안 되잖아.”

입을 벌려 여전히 푸들푸들 떨리는 뽀얀 엉덩이를 한입 가득 베어 물고 가볍게 입을 맞추자 이번에는 꽉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지며 아랫입술을 세게 깨문다.

“읏….”

예민한 몸 위에 시훈이 이상한 감각을 겹겹이 덧씌우는 동안 도무지 얼굴을 가린 팔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입술은 몇 번이나 엉덩이와 구멍 주위를 오가며 이수를 자극했다.

“하으…!”

살살 주위만 맴돌다 간지러운 지점을 스치자 간신히 인내하던 이수의 숨이 터졌다. 앞과 뒤가 차례로 자극당하는 쾌감은 너무나 강력해서 수순처럼 구멍을 조였다. 시훈의 손가락이 인정사정없이 안쪽을 파고들었다.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느끼는 지점만 집요하게 눌렀다. 신음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흐느낌이 무력하게 흘러나왔다.

“…흐응… 하… 하지… 마… 으…!”

“후우… 나는 시작도 안 했는데, 뭘 하라 하지 마라예요.”

미칠 것 같다. 손가락이 오가는 구멍이 더욱더 사정을 재촉했다. 이러다가 울음이라도 터질 것처럼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대책 없이 흔들리는 다리 아래 발끝이 곱아들었다. 더 참을 수… 더 못 참겠어. 팔을 내려 다리를 쥐고 있는 시훈의 손목을 붙잡고 고개를 좌우로 휙휙 돌렸다.

“씹….”

그 순간 지퍼를 내리는 소리와 함께 들린 엉덩이가 풀썩 시트 위로 내려왔다. 빠져나간 손가락에 다물리지 못한 구멍 속으로 시훈의 성기가 끝까지 들어와 박혔다. 단번에 짓눌리는 감각에 이수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아… 윽!”

뭉툭한 성기 끝이 대번에 자리를 잡고 쿵쿵 치받기 시작했다.

“아…! 읏… 아…! 아흑… 아…!”

철썩철썩 시훈이 부딪칠 때마다 이수의 적나라한 신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시훈이 골반을 틀어쥐고 규칙적으로 박아 댈 때마다 잡생각들은 달아나고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었다.

사정하고 싶다. 사정하고 싶다. 싸고 싶어. 싸고 싶어. 싸고 싶어….

이수가 손을 뻗어 허겁지겁 제 성기를 붙들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습한 욕망을 그러쥐며 흔들었다. 싸고 싶다는 절박한 본능과 감추고 싶은 이성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헤매는 눈이 울 것처럼 시훈을 바라봤다. 단정한 얼굴이 열락에 젖어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채였다.

정이수를 바라본다. 땀인지 눈물인지 물기에 엉킨 속눈썹이 허리를 치받을 때마다 뒤집히듯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에 한계까지 다다른 좆에 더 피가 몰렸다.

“…시발.”

이마가 젖어 들 정도로 세차게 허리를 털던 시훈이 쿵! 깊숙이 체중을 실어 박았다.

“아윽…!”

눈앞이 번쩍였다. 온몸을 팽창한 이수가 푸드득 몸을 떨었다. 쏘아 올린 정액이 이수의 목 아래까지 튀어 있었다. 사정의 여파로 무너지는 허벅지를 붙잡은 건 시훈의 손이었다. 잠시 동안 허리를 얕게 움직인 시훈이 곧 거친 숨과 함께 허리를 거세게 붙여 왔다. 비명을 짓이긴 신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하흑…! 아…! 아…! 읏…!”

“읏….”

잔뜩 예민해진 몸에 이수가 고개를 돌려 이로 베개를 물어뜯을 때쯤 온전히 성기를 밀어 넣은 시훈이 가장 안쪽에 사정했다.

“윽…!”

시훈이 곧바로 빼지 않은 성기를 두어 번 추어올리고 몸을 물리자 이수의 다리가 맥없이 시트 위로 떨어졌다. 여운에 벌벌 떨리는 허벅지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질척한 정액과 젤이 구멍 사이로 주르륵 흐르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몸을 들어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슴팍이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숨을 고르기 바빴고, 베개에 묻은 얼굴은 절망스러운 쾌감을 어떻게 숨겨야 할지 몰라 추스르지 못한 상태였다.

몸뚱이도 뇌도 모든 것이 너무 더디게 움직이고 있었다.

“후우….”

몸을 일으킨 시훈이 침대 아래로 내려서며 그제야 옷을 벗고 생수로 목을 축였다. 촘촘하게 짜인 균형 잡힌 근육이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곧 카펫 위로 플라스틱 통이 가볍게 튕기는 소리가 이어지고 빈 병이 바닥을 굴렀다.

이시훈은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작은 숨을 몰아쉬는 이수를 옆으로 뉜 시훈이 상대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사정한 정액이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모습에 시훈은 그제야 콘돔을 떠올렸다.

이따위로 흥분해서는….

그럼에도 꺾지 못한 충동이 계속 시훈을 몰아붙였다.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로 번들거리는 구멍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삽입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아…. 이수가 참지 못한 신음을 흘리고 난처함을 베개 위로 감추는 동안 시훈은 이수의 뒤 머리카락을 가만히 쥐었다. 코를 묻자 정이수의 희미한 체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흣….”

시훈은 고개를 비틀어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갔다. 자신이 정이수의 목덜미를 빨고 있다는 자각은 없었다. 행위는 자연스러웠고, 동그랗게 남은 흔적을 보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국은 쉽게 빠지지 않을 테다. 원하는 바였다.

* * *

샤워를 하며 확인한 자국은 희미했으나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시일이 지나도 빠지지 않는 자국 위로 이수가 네모난 살색 테이프를 붙이며 지끈대는 두통을 참아 냈다.

출근하기 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드르륵. 연속으로 몇 번이나 진동했다. 월급날이었다. 월급이 입금됐을 테고 기다렸다는 듯 은행 대출금, 요양원 비용, 보험금, 각종 세금 등이 차례로 빠져나갈 예정이었다.

이수는 거실을 지나 열린 창문을 닫았다. 내내 켜 놓은 텔레비전의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테이블 위로 리모컨을 올려놓았다. 그 옆으로 신문, 잡지, 업무용 스마트 패드, 기억도 안 나는 전시회 리플릿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집안에 남은 빚을 입사 후 7년간 인센티브와 온전한 월급을 쏟아부어 갚고 난 다음에 옮긴 집은 들어온 지 1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휑했다. 주중에는 씻고 난 뒤 잠만 자고 주말에는 소파 위에 앉아 텔레비전과 잡지를 보면서 시간을 죽였다. 가끔 종로에 나가 전시회를 보거나 카페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일이 이수의 취미라면 취미였다. 대학 시절 친했던 동기들이나 선후배들은 대부분 지방에 남아 자리를 잡았고, 비슷한 시기에 함께 서울로 올라온 동기들과는 한창 바쁜 시절 연락이 뜸해지다 안부를 묻기도 쉽지 않아졌다. 그들에게도 이수에게도 타향살이는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

나가기 전 챙긴 핸드폰에 출금 문자가 아닌 발신인 이름이 떴다.

-안녕하세요, 저예요. 요양 보호사.

“네.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부터 연락드려서 미안해요. 다름이 아니라, 어머니가 오늘 새벽에 또 밖으로 뛰쳐나가시는 바람에 발바닥에 상처를 좀 입으셨어요. 많이 다치시지는 않았는데 알려 드리려고 전화드려요.

“아… 다른 곳은 괜찮으시구요?”

-네, 멀리 가지는 못하셨어요. 화단에 흙하고 돌을 잘못 밟으셔서 그래요.

엄마가 작은아버지를 찾는 일에 미친 이유는 어딘가에 몰두할 거리가 필요해서라고 생각했다. 맞벌이를 해도 변변치 않았던 가정이 화목할 수 있었던 건 모두가 제자리를 지킨 덕분이었다. 아빠의 죽음으로 드러난 빈자리가 너무 커서 엄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보증이 집안을 말아먹는 일인 줄 몰랐던 순진한 엄마는 사고로 죽은 아빠도 사실은 자살했을지 모른다며 이게 다 돈과 작은아버지 때문이라고 두 가지 모두에 똑같이 책임을 전가했다.

아빠가 죽고 난 뒤 수령한 보험금과 그나마 남아 있는 세간살이로 빚을 일부 갚고 반지하로 들어갈 때까지 어린 이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의 기억은 참 좋았다. 무슨 일인지 작은아버지를 찾는 일을 그만두고 화목했던 때로 돌아간 엄마와 꽤 평범한 시절을 보냈다. 과자나 말라비틀어진 밥 대신 따뜻한 국이 있는 소담한 밥상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방에서 하얗게 지새운 밤도 피로하지 않고 즐거웠다. 없이 살아도 이 정도면 살 만하다고 느낀 때였다.

아마 전조 증상이었을 것이다. 가끔 뜬금없는 이름을 부르고, 이수는 기억 못 할 옛 시절을 이야기하고, 새벽이면 다시 문밖을 나서는 일들은.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시작된 치매는 또다시 평범한 엄마와 이수의 삶을 앗아 갔다. 그리고 요양원을 탈출하는 일은 잊을 만하면 벌어졌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잘 부탁드릴게요.”

전화를 끊는 손이 맥없이 풀렸다. 이수는 집을 나서기 전 TV장 위에 세워 두지 않고 엎어 둔 액자를 뒤집어 보았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찍은 사진 속 엄마와 자신은 환하게 웃고 있다. 이수는 차마 사진을 세워 두지 못하고 다시 엎드린 그대로 내려놓았다. 보고 싶은데… 막상 보면 속상해서 회피하는 마음만 점점 커질 뿐인 이수의 아침은 오늘도 무겁기만 하다.

이수는 유진우 본부장의 집무 책상 위로 서류를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요즘 들어 사소한 부탁을 내선 전화로 해 오는 일이 잦았다. 업무 협조를 구한다는 명목이었다.

전자 서류화 된 서류들을 일일이 프린트해 달라는 부탁은 유진우가 일부러 보고서를 꼬박꼬박 서면으로 올려 받았던 과거를 상기시켰다. 문서를 되내밀며 자신의 말 한마디에 시시각각 반응하는 저를 기꺼워하던 사람이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바쁜 이수 얼굴 보기가 힘들지.’

“더 필요하신 거 없으시면….”

“그거 너무 티 나지 않아? 사이가 좋긴 좋은가 봐.”

흘러가는 말은 감정 없이 무료했다.

“…….”

멈칫한 손을 다시 움직여 그의 앞으로 서류를 밀어 놓았다.

“목. 그런 거 안 붙이잖아. 보기 안 좋다고.”

근육통에 시달리던 언젠가 뭐라도 붙이라는 유진우에게 바쁘고 힘들다 투정 부리는 것 같다고 마다했었다. 저도 모르게 목덜미에 손이 올라갔다. 일주일 전, 시훈이 빨아들인 자국은 호텔에서 샤워를 할 때 알았다. 얼마나 세게 빨았는지 울긋불긋 동그랗게 자리를 잡고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출근할 때마다 붙여 놓았더니 그걸 유진우가 본 모양이다.

“뻐근해서요.”

변명할 필요가 없는데도 아직 습관이 남아 있었다. 행여 오해를 살까,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까 싶어 전전긍긍한 과거가 만들어 놓은 행동이었다.

“그래?”

“…….”

내려놓은 서류를 거들떠보는 체하며 안경을 추켜올린 유진우가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가기 전에 밥 한번 먹지. 정 팀장.”

“본부장님 바쁘실 텐데… 굳이 저까지 챙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번 회식 때도 일 핑계로 안 왔잖아. 이제 곧 못 볼 텐데….”

유진우 본부장은 잠시 말을 골랐다. 잠깐의 공백이 이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고 있을까.

“식사뿐인데… 불편한가? 아니면, 이시훈 때문에?”

느리고 가만하게 흘러나오는 유진우의 목소리가 퍽 다정하게 들려오는 착각이 일었다. 이수는 대답 대신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 간사한 유진우가 저를 흔들고 있다는 걸 알면서 하마터면 덮어 놓은 감정들이 비집고 나올까 봐 두려웠다. 상처와 배신감, 슬픔과 상실 그리고, 그리고….

더 이상 버텨 낼 재간이 없어 이수가 재빨리 등을 돌렸다.

“…업무 때문에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무시해야 하는데 무 잘리듯 쉽게 되지 않는다. 차라리 눈에 안 보이면 나을까. 기어코 복도 한가운데에 멈춘 이수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유진우를 마주할 때마다 철렁 내려앉는 가슴이 지치고 버거웠다.

숨을 고르는 이수가 시훈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시훈은 같은 층에 있는 여민준 본부장의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치자 이수가 곧장 몸을 돌려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추스르지 못한 감정을 순식간에 무마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또다시 이시훈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덜컹.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수의 오른쪽 어깨가 잡혔다.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이며 벽에 등이 닿았다. 어쩔 수 없이 코너에 몰려 시훈을 마주 보게 된 이수가 어깨를 잡은 손을 끌어 내렸다.

“…놔요.”

팔을 털어 내는 이수의 기운 꺼진 안색이 파리했다. 고개를 기울여 자신을 살피는 이시훈의 눈을 피하며 이수는 시선을 비껴 내렸다. 유진우를 만난 뒤 잠잠했던 두통이 다시 도졌다.

시훈이 보기에 이수의 모습은 지금 딱 쓰러져도 좋을 정도였다. 피로에 진 외꺼풀이나 핏발 선 눈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혈색 없는 얼굴이 제일 걸렸다. 아무래도 잠깐 바람이라도 쐬어야 할 것 같은데…. 생각이 미치자 시훈은 덥석 이수의 손목을 붙잡았다.

“따라와요.”

그대로 비상계단의 문을 여는 시훈에게서 이수가 확 손을 뺐다.

“여기 회산데요. 이렇게 막…! 하아… 됐습니다.”

화를 내려다 말고 이수가 침음하며 도로 벽에 등을 기댔다. 유 본부장을 만난 직후 목덜미에 자국을 남긴 원흉을 만나자 기분이 쑥 가라앉았다. 정사로 뒹군 몸은 며칠째 뻐근함이 가시지 않았다. 잠은 여전히 4시간 이상 자지 못했고, 속절없이 부릅뜬 눈으로 맞이하는 아침 해는 매 순간 이수의 등을 떠밀었다.

자꾸만 잡아채는 이시훈의 손길에 더더욱 기가 찼다. 그만 좀 가 줬으면 좋겠는데 시훈은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그에 이수가 나직이 한숨을 토해 내며 인상을 썼다.

“이 팀장님… 함부로 자국 남기지 마요.”

작은 소리에도 왕왕 울리는 비상계단이라 화를 참아 낮고 건조한 경고를 주었다.

“…….”

그제야 목덜미에 붙인 살색 밴드를 발견한 시훈이 마른 입술을 살짝 훔쳐 냈다. 그날 뭐에 미친 놈처럼 정이수와 몸을 섞고 목덜미를 빨았지만 몇 날이 지나도록 자국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한 발자국 간격을 두고 선 시훈이 목소리를 낮추고 손을 뻗었다.

“…봐요.”

허공을 가른 손이 본능적으로 시훈의 손등을 내쳤다. 손이 부딪히며 탁!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뭐 하자는 거야. 동그랗게 뜬 눈을 일그러트린 이수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시훈을 노려봤다.

“회사라니까요?”

조금 전 내리누른 기색과 달리 날카롭게 내지른 소리에 이시훈의 눈썹이 순식간에 이지러졌다. 남들이 보기에 별것 아닌 스킨십이 불리하게 적용되는 쪽은 이시훈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한껏 예민해진 이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소문은 나도는 순간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수는 그걸 일찍이 경험해 본 사람이었다.

까슬한 밴드 위를 덮은 이수의 손에는 미미한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곧 얼굴과 목까지 열이 오른 정이수가 슬쩍 고개를 빼고 나선형의 계단 아래를 살폈다. 경계와 주의 가득한 눈빛이 눈동자에 아른거리다 금세 사라졌다.

며칠간 이딴 밴드를 붙이고 다니는 것도 일이라면 일이었다. 기분이 나쁠 쪽은 분명히 자신인데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럴까. 이수를 노려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눈앞에 서 있는 이시훈은 자리에 못 박힌 사람처럼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유진우 때문에 지쳐 있었다. 더군다나 회사 내에서 업무 외의 문제로 입씨름은 하고 싶지 않았다.

“먼저 갑니… 아…!”

그 순간 시훈이 고개를 돌린 이수의 턱을 한 손으로 잡아챘다.

“이 팀장님… 좀….”

아프지 않지만 쉬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턱을 고정한 시훈과 눈빛이 짧게 얽혔다.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춘 이수의 귀 아래와 턱이 이어지는 경계에 곧 시훈의 입술이 닿았다. 가볍게 빨아들이는 동시에 이시훈은 목에 올라간 이수의 손을 붙잡아 끌어 내렸다.

살결에 입을 맞추는 행동은 분명 다정하고 어르는 모양새였다. 남자가 피우는 담배, 그리고 향수 냄새가 시훈의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는 이수의 코끝에 닿았다.

반면 부드러운 입술과 달리 자꾸 벗어나려는 손목을 붙든 시훈의 악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해졌다. 거세게 입을 맞추고픈 이시훈의 절절 끓는 욕망이 손으로 옮겨 간 듯했다. 이수는 혼란스러웠다.

“…놔… 놔요.”

숨소리에 섞여 겨우 새어 나온 미약한 목소리에 이시훈은 피부 위로 짧게 입을 맞추고 몸을 물렸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동시에 턱과 손목을 잡은 손 역시 말끔하게 떨어졌다.

재빨리 사선으로 고개를 떨군 이수가 숨이 턱 막힐 듯 짧은 호흡을 삼켜 냈다. 잘게 떨리는 손이 본능적으로 이시훈의 입술이 닿은 자리를 덮었다.

“…….”

촉촉하고 따뜻한 피부 위로 마치 심장이 달린 듯 작은 박동이 느껴졌다.

“걱정돼요? 자국 남았을까 봐?”

한숨을 크게 내쉰 시훈이 이수의 목 위로 올라간 손을 잡아 다시 한번 끌어 내렸다. 못 믿겠냐는 식이었다. 차마 밀어내지 못한 이수의 눈꺼풀이 작게 떨렸다. 부산스럽게 튀는 감정들은 불쾌함과는 분명 결이 달랐다.

“나도 여기 회사인 거 알아요. 옥상에서 같이 바람 좀 쐬려고 붙잡은 게 오해할 만한 상황이에요?”

“말로 하세요. 함부로 덥석덥석… 멋대로 당기고 채고.”

이수는 상한 기분을 숨기지 않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성이 난 이수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문제의 밴드에 저절로 시선이 모아졌다.

“이깟 자국 아무도….”

예민하게 굴지 말라 쏘아붙이려던 시훈은 저답지 않게 문장 끝을 맺지 못했다. 목덜미를 붉히고 서 있는 정이수를 내려 보며 당시를 떠올린 시훈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말끝이 흐릿한 이유를 저 역시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정이수의 뒷목에 흔적을 남기고픈 충동을 느꼈을 뿐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드문드문 맺힌 감정을 연결하지 못한 채 분주히 마음을 헤맸다.

정적만 남은 공간 속에 또각또각 층계를 내려오는 하이힐 소리가 울렸다. 흠칫 놀란 이수의 시선이 소리를 좇았다. 시훈은 이수의 뒤로 손을 뻗어 비상계단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꽉 막혀 정체된 공기 속에 에어컨 바람이 밀려 나오며 작은 바람을 일으켰다. 이시훈이 두툼한 문을 잡아 고정했다. 둘둘 말린 소매 아래로 힘을 준 팔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먼저 가요.”

시훈은 이수의 눈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수는 기댄 몸을 세워 열린 문 안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비상계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벽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방향을 달리한 시훈은 계단을 통해 내려갔으리라.

회의를 마친 무리가 한꺼번에 탔는지 승강기 안은 꽤 빽빽했다. 겨우 남은 자리에 올라타 버튼을 누른 이수는 저도 모르게 시훈이 입술을 붙여 온 귀 아래를 더듬었다. 넋이 나간 사람인 양 멍했다. 두어 층 내려갔을 무렵 사람들이 썰물처럼 쑥 빠지고 홀로 승강기에 남았다. 불식되지 못한 의심에 승강기 표면에 슬쩍 입술이 닿은 부분을 비춰 보았다.

“…….”

이수는 거울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재빨리 시선을 떼어 냈다. 발갛게 달아오른 난처한 얼굴이… 마치…. 이수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지. 이건…. 부정을 하다 언뜻 곤란한 기색을 띤 시훈의 얼굴을 떠올렸다. 뒤를 흐린 말도. 어딘가 망설임을 느꼈다면 착각일 테다. 승강기에서 내린 이수는 애써 남은 생각을 정리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서류를 확인하던 시훈이 흘깃 눈을 올렸다. 소회의실에서 팀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팀원들 뒤로 정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 회의에 지쳤는지 한숨을 내쉰 그가 머리를 쓸어 올리자 창백한 안색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잠시 제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뜬 정이수가 자리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줄곧 따라가던 시훈의 날카로운 시선이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막을 내렸다.

“어, 잠깐만. 사무실이라 나가서 받을게.”

층 로비에서 습관적으로 더듬어 본 안주머니가 텅 비어 있었다. 계단에서 정이수와 그 일이 있고 난 뒤 며칠째 신경은 날이 서 있었다. 덕분에 줄줄이 피운 담배는 사는 족족 금세 동이 났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시훈이 짜증을 삼키고 카페테리아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어, 웬일이야?”

광고업계에서 일하는 대학 동기 중 하나였다. 가벼운 안부 인사가 오고 간 뒤 주변인의 소식이 대화의 주제로 이어졌다.

-주홍 선배 연남동에 회사 차렸다던데, 가 봤어?

“시간 안 맞아서 못 가고 오픈할 때 화분만 보냈어. 잘나가는 것 같아. 매체에 기사도 줄줄이 나오고…. 이번에 뉴욕에서 수상도 했더라고.”

-그러게, 실무 안 뛰는 줄 알았는데…. 선영이가 요번에 갔다 왔는데 회사도 딱 백 선배답대. 강남 아니고 연남동이라니 왠지 잘 어울리지 않냐? 그나저나 너네 회사는… 아, 맞다. 너 알겠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시훈이 흘깃 층수를 확인하는 사이 대학 동기가 예상치 못한 이름을 불쑥 입에 올렸다.

-정…이수, 맞나? 기획팀.

무슨 연관인지…. 시훈이 생각을 더듬는 사이 핸드폰 너머로 말이 이어졌다.

-그 사람 연초에 우리 쪽 기획팀 팀장으로 오네 마네 하다가 흐지부지됐다는데. 아직 인사이트 다녀?

“…어, 같은 본부 산하에.”

-그래? 인사팀 후배하고 술 한잔하는데 인사이트 이야기 나오다가 그 이야기까지 흘렀네? 걔가 말을 하다가 말긴 했는데, …여하튼, 여기 기획팀 상반기에 너네한테 번번이 깨지다가 하반기에 간신히 체면치레했거든. 그래서 그쪽에서 사람 온대서 기대한 것 같던데… 뭐가 안 맞았나 봐. 페이가 안 맞았나?

일전 정이수에게 퇴사나 이직을 고려해 본 적 없느냐 물은 적이 있었다.

‘스카우트도 아니고 인사이트에서 팀장직 수행하다 이직…. 레퍼런스 체크하면 무슨 말 나올까요? 직원들 제 소문 다 아는데.’

그때 정이수가 일말의 감정 없이 내뱉은 말은 아마도 가정이 아니었으리라는 짐작에 시훈이 허공을 바라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아집 같다고 했다. 유진우에게 인정이라도 받고 싶은 거냐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넘겨짚었다.

-우리가 좀 짜냐. 씹… 명절에도 모회사가 건설사라 가가호호 쌀 보내 준다. 진짜 돌아 버려.

때마침 승강기 문이 열렸다. 그 뒤로 시훈은 귀에 딱히 들어오지 않는 이야기를 반쯤 흘려들으며 시답지 않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 다음에 한번 보자…. 그래.”

퇴근 시간이 가까운 사내 카페테리아에는 사람이 없었다. 커피를 주문한 뒤 텅 빈 공간 속에서 시훈은 두 눈 사이를 짚고 눈을 감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심란한 마음이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정말이지 용케 버티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직이 무산된 이유가 커리어가 아닌 다른 이유라면 몸을 사릴 이유로는 충분했으니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가까운 곳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주문했다. 시훈은 자세를 바로 하고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안경을 한번 추켜올린 유 본부장은 불편한 기색도 없이 시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예의상 인사는 했지만 말을 걸어온 유진우에게 시훈은 애써 짜증을 숨겼다.

“야근?”

“네.”

“L사는 내년도 아트 시리즈로 나가요?”

“광고주 판단이 1순위지만 매출만 본다면, 아마도요.”

의례적인 질문과 답이 오고 가는 대화는 겉핥는 내용이 주를 이뤘지만 이야기를 끊어 낼 만한 이유도 없었다. 잠시 후, 주문한 커피를 들고 대화의 물꼬를 튼 유 본부장을 따라 전면이 유리로 된 창가 앞에 섰다. 불편한 간극을 자연스럽게 엮어 나가는 유진우 본부장의 스킬은 그가 얼마나 능숙한 AE였는지 보여 주는 것 같다.

시훈은 앞으로 열흘 후면 서울을 떠날 유진우 본부장과 일대일로 말을 섞은 것도 나란히 창밖을 바라보는 상황도 이질적이라 생각했다. 이렇다 할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시훈은 빛을 받아 반사되는 빽빽한 빌딩 숲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 말이 없는 채로 도시를 바라보는 유진우가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어때요, 정이수는?”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시훈이 커피를 마시려다 말고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직함이 생략된 질문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언젠가 전후 사정 없이 정이수가 물은 질문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유진우가 가는 길마다 뒤따라 다녔으니 이 또한 습자지처럼 배운 것일까.

“뭘 여쭈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짐짓 감정을 감춰 사무적인 답을 하자 유진우 본부장이 빙긋 웃는다.

“정이수… 가끔 지나간 CM송 흥얼거리는 거 알고 있어요? 기분 좋을 때 하는 버릇인데.”

“…….”

“신기할 정도로 옛날 CM송을 줄줄 읊거든요. 우리 같은 사람도 기억 못 할.”

미소를 머금은 유진우 본부장은 플라스틱 컵 안의 얼음을 빨대로 헤집는다. 그리고 입을 다문 잠잠한 상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모를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

정이수와 이시훈의 관계가 몸뿐이라고 단정하는 유진우의 말에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게 되는 관계는, 아무래도 좀 위험해지잖아요?”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을 텐데 그는 사려 깊은 표정으로 의도를 감추고 있었다. 정말 시훈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투가 그랬다. 비록 안경 아래 눈은 웃고 있지 않지만.

“처음 봤을 때 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심하고 서늘해 보이다가도 한 번씩 당황한 눈으로 사람을 보면 꼭 어린애 보는 것 같거든. 굳이 예의를 차리자면 재미있는 사람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

“여우 같고.”

정이수를 향한 냉혹한 평가는 흡사 심야 라디오의 DJ처럼 부드러운 유진우 본부장의 음성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욕심도 많죠.”

자신의 앞에서 추억이라도 되짚을 생각인지 저딴 말을 지껄이는 유진우 본부장의 저의를 알 수 없다. 다만, 자신과 함께 있던 정이수를 향한 눈빛을 떠올렸다. 이건 치정 끝 지저분한 감정의 찌꺼기였다. 갖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을 주고 싶지도 않은 생떼 같은 마음. 시훈은 가식을 떠는 유 본부장에게 장단을 맞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화가 나세요? 정이수 팀장이 본부장님을 버린 것 같아서?”

다소 모욕적인 언사에 살갑게 휘어진 입술이 굳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평정을 유지했다. 업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마저 습관처럼 다져진 사람이었다. 여 본부장의 말마따나 소시오패스 같은 이기적인 종자 말이다.

상대에게 훅을 날렸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허공을 가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유진우가 가슴을 부풀려 내쉰 숨 때문이었다.

“이 팀장. 나는 우리가 가진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맛살을 찌푸린 시훈의 물음 뒤로 유진우 본부장은 차분하고 또 여유 있게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을 이었다. 공격적이고 무례한 시훈을 누그러트리려는 행동이었다.

“…….”

“어차피, 우리 두 사람 다 정이수가 원하는 건 줄 수가 없거든.”

시훈은 일그러진 눈 그대로 몸의 방향을 유 본부장 쪽으로 틀었다.

“…….”

뜸을 들인 유진우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건 없는 것들 말예요.”

이를테면… 사랑이나 신뢰 같은.

침묵이 흘렀다. 정이수와의 관계에서 유진우 본부장이 주지 않은 것이며, 이미 조건을 나눠 가진 시훈 역시 줄 수 없는 것이었다.

“…….”

턱에 힘을 준 시훈은 겨우 흐트러진 표정을 감추었다. 유진우가 자신과 정이수의 자세한 전후 사정을 알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재벌가 아들인 저와 소위 소파 승진이라 꼬리표가 붙은 정이수의 사이가 적어도 애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는 아닐 거라 짐작한 유진우의 한 방이었다.

시훈을 흘깃 바라본 유진우는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여유 있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요즘 참 더워요. 그따위 한가한 말을 흘리고서 말이다.

때마침 정적을 뚫고 유진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확인한 그의 눈이 흥미롭게 변했다.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누를 무렵 카페테리아가 있는 층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리고 짜 맞춰진 상황처럼 모습을 보인 사람은 정이수다.

그의 손에는 태블릿 PC와 인쇄된 보고서 몇 부가 들려 있었다. 유진우의 부탁이었을 테지. 정이수가 귀에 댄 핸드폰을 내리자 유 본부장의 수신음 역시 끊겼다.

멀리서 두 인영을 본 정이수가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묵례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진우가 번지르르한 미소를 띠며 시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수고해요.”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서 있는 정이수는 유진우 본부장이 올라타자 버튼에서 손을 뗀다. 유진우의 어깨 뒤로 선 정이수가 문이 닫히기 전 몸에 밴 습관처럼 의식적으로 그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시훈은 입도 대지 않은 커피를 쓰레기통에 통째로 버린 뒤 뒷목을 쓸어 내렸다. 참은 욕지기가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튀어나온 건 그다음이었다.

‘이수야, 너는 좀… 특별해.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만드네. 네가.’

야근을 하고 데려다주겠다는 유진우 본부장의 차에 올라탔을 때 시동을 걸지 않고 한참 동안 앉아 있던 그가 건넨 말이었다. 혼자만 꾹꾹 감춰 둔 애틋함을 알고 있었구나. 또 완벽한 그를 번민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그가 가진 사회적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혼을 했다손 치더라도 곤란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욕심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포기할 무렵이었으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불쾌함을 토로하고 그 자리에서 털어 냈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볼을 물들이기만 했을 뿐, 자신을 품에 안아 등을 토닥이는 유진우를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이렇게밖에 못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목소리가 너무 따뜻하고 다정했다. 무너져 내린 건 순식간이었다.

‘이수야.’

-시간 언제가 괜찮겠어?

정이수 팀장, 정이수, 이수야.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붙여 부르지 않았지만 아마도 예전처럼 이수야, 라고 불렀을 유진우 본부장의 메시지에 손가락이 움직이지 못했다.

설레지는 않았다. 다만 슬픈 무력감이 물먹은 솜처럼 온몸을 스몄다. 이제 일주일. 집, 집무실, 그리고 정이수를 정리할 차례였다. 유진우 본부장이라면 호텔 라운지에서 회식의 대미를 장식하는 고상한 타입이니 제게도 그런 예의를 차리려는 사람인 건 분명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핸드폰에는 발신인이 다른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퇴근하고 봐요.

이마를 짚었다. 엉켜 있는 실타래가 더 엉킨 것 같은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오늘은 힘들 것 같은데요.

-아니요, 오늘 보죠.

-오늘은…

메시지 창 속 움직이는 커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결국 글자를 지웠다. 이시훈은 일방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상납하고 상납받고. 벌리고 박고.

이수는 사무실 안에서 태우지 못할 담뱃갑을 손안에서 몇 번 쥐어 보았다. 정신을 빼고 창밖만 보는 이수를 깨운 이는 김민주 대리였다.

…팀장님.

“팀장님?”

“아… 네.”

“팀장님, A사 OT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인천 공항에 있는 아트 월이요, 고우재 씨 보내서 확인 영상 찍어 오게 하려구요.”

“…네, 좋네요. 그렇게 하세요.”

김민주 대리보다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고우재가 이수를 보고 놀란 듯 입을 벌렸다. 김민주 대리 역시 잠시 망설이더니 목소리를 죽여 묻는다.

“팀장님, 안색이…. 어디 안 좋으세요?”

꺼진 모니터의 귀퉁이에 모습을 비춰 본들 안색이 어떤지 알 리 없지만 핏기 없는 얼굴에 창백함은 배가되었으리라 짐작한다.

“…복귀해서 마무리할 일 없으면 그대로 퇴근하시구요.”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자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김민주 대리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사적인 부분만큼은 민망하리만치 선을 긋는 태도에 입술이 뾰족해졌다.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자리에서 소지품을 챙겨 나가는 김 대리의 뒤로 고우재가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갔다가 되돌아왔다. 이내 고우재의 희고 예쁜 손이 불쑥 책상 위로 올라왔다.

“…팀장님. 이거 비타민 성분 피로 회복제인데요.”

“…….”

자그마한 알약 하나를 이수 앞으로 밀어 준다. 무표정하게 속눈썹을 들어 올리자 표독스럽게 날 선 인상이 몰골을 드러냈다. 그에 당황한 고우재가 얼른 머리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느새 김민주 대리를 따라잡은 녀석은 밝게 웃고 있다. 고우재의 뒷모습이 닫힌 문에 가리자 이수가 쥐고 있던 마우스를 거칠게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같이 일하는 어린애 앞에서 감정조차 컨트롤하지 못한 자괴감 때문이었다. 이수는 손바닥으로 건조한 눈두덩이를 깊게 눌러 본다. 차가운 손바닥이 뜨거운 얼굴을 가려 본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 * *

정이수와 각자 호텔로 이동한 적은 처음이었다. 제안을 거절한 정이수에게 다시 답장이 왔을 때는 호텔 이름과 호수가 적힌 메시지만 적혀 있었다. 그 뒤로 자신이 보낸 메시지와 거는 전화는 확인도, 받지도 않는 통에 시훈은 결국 찜찜한 마음을 달고 호텔로 오는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룸에는 어둠 속 희미한 텔레비전 소리만 들렸다. 재킷을 벗을 생각조차 없는 시훈이 침대 위의 이수를 발견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은 이수는 인기척에도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시훈이 그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젖은 머리나 가운만 입은 꼴을 보니 준비를 하고 기다린 모양이다. 시훈이 날카롭게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뭐 해요, 지금?”

“…….”

흘깃 시훈을 향한 눈동자가 도로 굴러 텔레비전에 꽂혔다. 빛을 받은 정이수의 얼굴 위로 겹겹이 천연색이 드리워졌다. 고집스럽게 닫은 입술을 노려본 시훈이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전원 버튼을 눌러 껐다. 그럼에도 한참 동안 자세를 유지하는 정이수는 꺼진 텔레비전만 멍하게 응시할 뿐이었다.

“내가 지금… 씹….”

시훈이 순간적으로 욕을 짓씹었다. 정이수가 가운을 벗고 나신이 된 몸을 시트 위로 뉘고 있었다.

“빨리 끝내라고 하면… 계속하고, 그렇다고 천천히 하랠 수도 없고….”

엎드려 느릿느릿 말을 뱉는 정이수의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섹스만 끝내고 빨리 갔으면 싶은 적나라한 자세에 오히려 모욕감을 느낀 쪽은 시훈이었다. 오늘 보자는 말이 섹스와 동일시된 이 좆같은 상황의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으니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내가, 섹스하자고 했어요?”

시훈이 화를 꽉 내리누르며 질문을 내쏘았다. 의자에 뭐라도 붙은 건지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꼬박 일만 하는 정이수의 얼굴은 최근 창백하다 못해 못 봐 줄 지경이었다. 오늘 사무실과 복도에서 마주친 정이수는 몇 번이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그래서 억지로 약속을 잡았다. 맛있게는 아니래도 뭐라도 욱여넣을까 싶어서. 그랬더니 하는 짓거리가 고작….

이 이상 같이 있다가는 좋은 말이 나오기 글러 먹은 상황이었다. 오늘은 더 볼 일이 없었다. 저녁은 물 건너갔고, 섹스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으니.

“하아… 잠이나 자고 가요.”

한숨과 함께 짜증 섞인 말을 남기고 돌아서려는 찰나, 정이수가 느슨하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남아도나 보네….”

시훈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혼잣말로 읊조린 말들에 날카롭게 가시가 섰을 뿐. 정이수가 손을 딛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음험한 목소리는 그간 정이수가 내뱉은 빈정거림보다 한층 더 시훈의 신경을 더 건드렸다.

“한가하게 잠이나 처자라고….”

“정이수 팀장.”

한걸음에 거리를 좁혀 침대 위에 있는 정이수의 팔을 끌어당기자 힘없는 몸이 딸려 왔다. 반항도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고 침대 어디쯤엔가 시선을 고정한 이수는 시훈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보니 마니….”

비딱하나 어딘가 얼빠진 말에 미간이 더욱 좁혀 들었다. 머리통에 대체 뭐가 들었길래 매번 사람 속을 박박 긁어 놓을까. 눈에 치이고 걸리고. 힘없이 풀린 두 눈이 시훈을 스윽 올려 봤다. 잠 못 들고, 피곤과 스트레스에 핏발 선 두 눈은 그야말로 오기로 버티고 있을 뿐 분노마저 기계처럼 답습할 뿐이었다.

“왜… 그냥 가려니까 서운해요?”

“오늘….”

목이 잠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이수가 입을 여는 족족 이맛살을 구겼지만 더 올려붙일 말도 오늘 밥을 먹이려 했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기력한 상대는 밟혀서 멍이 들고 찔려서 피가 나도 상관없어 보였다.

“오늘, 뭐요. 이 팀장님이 보자면서요. 오늘…, 꼭 봐야겠다면서요.”

룸 안에 긴 정적이 내렸다. 천천히 눈동자를 돌린 정이수는 시훈에게 대거리할 일말의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끌어당긴 손을 놓자 힘 빠진 몸이 털썩 시트 위로 무너져 내렸다. 몸을 일으키기 전처럼 시트 위로 뺨을 대고 누워 눈을 껌뻑이기만 할 뿐 의식은 정이수를 자꾸 다른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차마 시훈은 짐작도, 감히 파고들지도 못할 곳으로.

“빨아 주기라도 해요? …아니면… 갈 길 가시지. 귀찮게….”

마음을 정리해 상자 속에 넣고 뚜껑은 닫았지만 차마 상자를 불사르지 못한 나약함이 오늘 하루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한 회의, 올라오는 보고서, 분석해야 할 리포트, 회신해야 할 메일, 메신저를 통해 전달되는 이슈들, 울리는 전화기. 모든 것이 귀찮았다. 유진우에게 답하지 못한 메시지 창을 몇 번이나 다시 보고 고민하는 자신이 믿기지 않아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대체….”

차라리 아득바득 이를 갈면서 쏘아붙였다면 착잡한 마음은 들지 않았을 테다. 그런데 모난 말과 달리 세상 끝난 사람처럼 구는 정이수 때문에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뭐가 문젠데. 유진우가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등골이나 빼먹은 그런 인간이.

털썩 침대 옆에 걸터앉은 시훈이 반대 방향으로 얼굴을 돌린 정이수의 누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긴 목 아래 늘어진 팔. 날개 뼈 옆으로 옴폭 팬 등을 내려가면 엉킨 이불이 엉덩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모를 복잡한 심경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정이수는 틈을 보이지 않는다. 단단히 벽을 쌓고 가시를 세웠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앞으로 괜찮아질 거라느니, 잊힐 거라는 말은 생각만으로도 어이가 없어 우스울 지경이었다. 유진우를 사랑한 지난날이 인생을 좀먹었다는 걸 알면서도 이토록 허우적대는 정이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시훈은 긴 숨을 내쉬고 잠시 동안 정이수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살을 뚫고 돋아난 가시 아래에 피가 흐르는 몸뚱이는 유약하고 외롭고,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고민은 짧았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뻗은 손은 공중을 배회하기만 할 뿐 상처를 쓰다듬어 주지는 못했다.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거리를 남겨 두고 손이 멈췄다.

“…구멍에 넣고 싸기 싫으면… 제발 좀 가시라구요….”

시트에 얼굴을 묻은 정이수가 귀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갑니다. 얼핏 체념이 깃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몸을 반도 가리지 못한 이불이 어깨 위로 끌어 올려졌다. 손은 그것을 끝으로 말끔히 떨어졌다. 기울었던 침대가 다시 수평을 유지하고, 뭉툭한 발소리가 멀어졌다. 곧 무거운 문이 닫히고 이수는 홀로 남았다.

텔레비전이 꺼진 룸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귀찮은 존재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마음껏 우울해할 차례였다. 몸을 뒤집어 천장을 보고 누운 이수는 바스락 소리가 나는 시트 위로 힘없이 팔을 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평소대로 섹스를 했다면 이런 불순물이 남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맺지 못한 말이나 침대 끝에 묶어 놓은 이시훈의 발걸음이 침전하는 이수를 방해하고 있었다.

‘내가, 섹스하자고 했어요?’

분명 화가 나고 어이없어하는 투였다.

“…웃기고 있네.”

…인정하기 싫지만, 오늘 이시훈은 섹스를 하려던 게 아니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양팔로 얼굴을 덮었다. 뒤죽박죽 엉켜 버린 감정들이 이제는 누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팀의 사무실로 들어오는 유진우 본부장의 곁에는 직원들 여럿이 모여 있었다. 출국 이틀 전이었다. 답문을 보내지 않은 자신을 일부러 찾아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본부장님, 런던 가게 되면 연락드려도 되죠?”

“그럼요, 언제든지 환영이지.”

이수는 인사를 나누는 무리와 외떨어져 업무를 핑계로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간혹 유진우 본부장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꼭 예전처럼 이수를 대하는 눈빛이었다. 아쉽고 미안해 애달파하는.

차례로 악수를 하며 모두와 인사를 마친 유진우 본부장이 사무실을 나서기 전 막 통화를 끝마친 이수를 따로 불러냈다.

“정 팀장, 잠시만.”

“…네.”

사무실을 벗어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로비까지 유진우 본부장을 따라가는 동안 업무와 관련한 사항들을 전달한다. 대부분 지나가고, 이제는 관련 없는 사항들이었다. 시간만 갉아먹는 지시를 한 귀로 흘려듣는 동안 머리가 어지러웠다. 소모적이고 불편한 감정들이 여전히 찰랑였다. 그래서 뒤편으로 누가 서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거기 좋아했잖아. 내일 예약해 뒀어. 7시.”

“본부장님, 저는….”

왜… 이렇게. 마지막이라고 인심이라도 쓰려는지 유진우 본부장의 목소리는 예전 자신이 사랑한 그때와 같았다. 이수가 말을 못 잇고 마른침만 삼킬 때였다.

“유진우 본부장님.”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이시훈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한 이수의 눈동자가 바닥 어딘가를 헤맸다. 한 번도 유진우에게 이시훈과의 관계를 인정한 적 없지만 그가 멋대로 넘겨짚은 예전과 지금의 처지는 너무도 달랐다. 그의 말대로라면 갈아타고 갈아탄 사람이었다, 이시훈과 자신은. 가슴이 조여들며 한순간 긴장이 닥쳐왔다.

유진우는 입은 웃지만 눈을 휘지는 않았다. 반면 시훈은 습관처럼 날 선 눈썹을 들어 올려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건승하십시오.”

담담하게 예의를 차린 인사 뒤로 시훈은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잠자코 인사를 받은 유진우가 한쪽 입술을 끌어 올리며 헛웃음을 쳤다. 이렇게 티를 내서야….

승강기 문이 열리고 안쪽으로 이동한 유진우 본부장이 정 팀장도, 정이수도 아닌 지나간 어느 때처럼 이름을 불렀다.

“이수야.”

여유 있고,

“늦지 마.”

다정하게.

스르륵 닫히는 문 너머로 눈을 맞추자 그가 싱긋 웃으며 사라지고 있었다.

어지럽다. 유 본부장이 사무실로 내려왔을 때부터 내내 들쑤셔진 감정들이 마구 날뛰었다. 이수가 답답한 숨을 내뱉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게 밥 먹을 수 있겠어요? 가지 말죠.”

고압적인 말투가 귀에 꽂혔다. 이수가 감은 눈을 서서히 뜨며 방향을 틀었다. 발을 뻗자 그 앞을 이시훈이 벽처럼 막아섰다. 답을 듣고 싶은 건가. 좀처럼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상관 말아요.”

목줄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은 건지 여기까지 나와 굳이 불편한 각을 만드는 상황이 싫었다. 딱 잘라 말하자 어이없어하는 나직한 한숨이 상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 때문에 이수의 눈썹이 쭉 올라가며 모난 말이 튀어나왔다.

“왜요, 내일은 하고 싶을 것 같아서?”

뾰족한 마음이 멋대로 뻗어 나갔다.

“말 가려서 해요.”

“아니면 내가 유 본부장한테 한번 대 주고 올까 봐?”

이런 말을 하기에 좋은 장소는 결코 아니었다. 예민하게 주위를 살피던 평소와 달랐다. 핀트가 엇나간 정이수가 툭툭 내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형편없었다.

“자꾸 사람 말 넘겨짚지 말아요. 듣기 싫게.”

턱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불거진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였다. 시훈을 노려보던 이수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뻗은 손이 한쪽 어깨 위로 올라왔다. 손을 뿌리치기도 전에 시훈이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을 낮게 중얼거렸다.

“가지 말라면, 가지 마요.”

더 볼일 없는 사람처럼 돌아선 시훈이 사무실 안으로 사라진 뒤 이수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한 손이 무릎을 짚어 간신히 몸을 지탱하는 사이 다른 손으로 입을 막아 보아도 토기를 참을 수 없었다. 벽을 짚고 정신없이 화장실로 뛰어가 변기 뚜껑을 열었다.

“우웁…! 웁…!”

먹은 것도 없는 속에서 결국 주르륵 쓴 위액만 게워 냈다. 가슴팍을 쿵쿵 친 이수가 물을 내리고 벽에 기대섰다. 손끝이 차갑다. 얼굴은… 또 형편없겠지. 식은땀이 흐르는 몸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숨을 차분하게 골라 쉬고 눈을 감아 진정해 보려 해도 쉽게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시훈은 오전 내내 광고주 미팅을 마치고 점심이 지나서야 회사로 복귀했다. 오락가락하던 날씨는 이제 비를 멈추고 해를 보이고 있었다. 갖춰 입은 정장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핸드폰으로 도착한 몇 가지 메시지를 확인하며 승강기를 기다리는 사이 시훈의 앞쪽에 서 있는 직원들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오늘 기획에 정이수 팀장 봤어요?”

“나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았어요.”

“그러게, 오늘 비딩 들어가시나. 우리 패션 브랜드 고객사 어디 있죠?”

“아닌데… 뭐지…. 아무튼, 눈 돌아가게 생겼어요. 그러니까 그 소문 있죠? 그럴 만도…. 어머, 이 팀장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우연찮게 뒤를 돌아본 두 사람의 대화는 시훈을 보자 뚝 끊겼다. 대체 뭐가 어떻다는 건지 정확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시훈이 손목시계를 내려 봤다. 오후 회의까지 10여 분 정도밖에 여유가 없었다.

어제 정이수는 자신이 퇴근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초연해 보였고, 전처럼 창 너머나 내선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지도 않았다. 가지 말라는 경고에 대한 확답은 없었다. 하지만 이 관계가 유지되는 한 정이수는 제 말을 따라야 했다. 이미 끝나 버린 유진우가 아니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시훈은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들을 되짚어 보았다. 오늘도 회의, 보고서 작성, 또 회의가 줄 서 있었다. 문 열린 사무실로 들어서며 손으로 미간 사이를 눌러 피로를 죽인 시훈이 급히 걸음을 멈췄다.

“…아…! 안녕하십니까.”

출입문 앞에서 얼빠진 얼굴로 2팀 쪽을 보고 있던 신 대리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얼른 자세를 바로 한 신 대리가 머리를 숙이고 비켜서자 시훈의 시선이 자연스레 상대가 보고 있던 방향으로 옮겨 갔다.

“카피가 후킹이 없네요. 그리고 시선이 자꾸 분산되는 거 같아. 제작실에 말해서 수정 요청하시고, 가능하면 오늘 중으로. 네.”

정이수가 직원의 책상 위로 숙인 얼굴을 드러낸 순간, 시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이수.”

작정하고 온 사람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은 모습이 그랬다. 무난한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은 단정했던 평소와 달리 오늘 정이수는 조금 아슬아슬한 면이 있었다. 풀어낸 위 단추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검은색 셔츠가 묘한 상상을 자극했다. 같은 방향으로 고정돼 있던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와 이마 위를 덮은 탓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꼭 맞춰 입은 옷 대신 느슨하게 힘을 푼 모습은 이상야릇한 감각을 자극했다.

집무 책상으로 돌아간 시훈이 손가락을 벌려 관자놀이와 턱을 괴었다. 결재 서류에 빠르게 사인을 한 뒤 흘긋 시선을 올려 정이수를 좇는다. 쥐면 한 줌에 안길 만한 늘씬한 허리를 매끄러운 셔츠가 감싼 것도, 길게 뻗은 다리가 사무실을 오가는 것도 신경을 좀먹었다.

“팀장님. 지금 미디어팀 회의실로 출발한다구요.”

“…네, 갑시다.”

소리가 나도록 결재 서류를 덮은 시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금 시간이 3시. 정이수의 약속 시간까지 4시간이 남았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시계가 6시를 가리키자 사무실 사람들이 하나둘씩 퇴근을 시작했다. 소회의실에서는 간단히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운 1팀이 시훈을 기다리며 회의를 준비 중이었다. 오늘 중으로 부러뜨려야 할 사항을 정리한 시훈이 회의실로 이동하기 위해 제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정이수가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같은 사무실을 쓴 이래로 정이수가 정시에 퇴근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유진우를 만나러 가는 길이리라. 손에 쥐고 있는 펜이 책상에 놓인 서류 위 같은 지점에 무수히 많은 점을 찍고 있었다. 입안이 마르고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명시되지 않은 두 사람 사이의 룰은 명확한 기준이 없으니 무턱대고 정이수를 묶어 놓을 수 없는 답답함이 치솟았다. 결국 시훈이 핸드폰을 들었다.

막 출입문에 태그를 찍으려던 정이수가 난데없이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조금 고민하더니 슬쩍 얼굴을 돌려 멀리 떨어진 시훈을 바라본다. 하루의 번잡함이 가라앉은 텁텁한 사무실에서 시훈은 초연한 정이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만 있을 뿐 정이수는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연결음이 울리는 전화기를 끄지 않은 상태로 시훈이 책상 위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눈은 뚫어져라 정이수를 향한 채였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

곧 불투명한 유리문이 닫히며 흐릿한 실루엣이 안개 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사라졌다. 시훈은 의자를 뒤로 돌려 빼곡히 솟아 있는 빌딩 숲을 바라보았다.

“…후우… 정이수, 정이수, 정이수, 정이수….”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소리가 달싹이는 입술 새로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강처럼 흐르는 정이수는 따라잡을 수 없이 또 손가락 사이를 지나는 것 같다. 그래서 매번 화가 나는 걸까. 손을 담그고 있는데 잡을 수 없어서. 밑바닥부터 설명할 수 없는 초조함이 밀려 나왔다. 창밖으로 해가 비치던 하늘은 어느새 잔뜩 흐려져 있었다.

가진 집중력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40여 분 동안 의견을 주고받은 회의는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보통 적절히 강약을 조절해 가며 회의를 끌어갔던 시훈은 오늘따라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막바지가 돼서야 정리된 시안을 조 대리가 간략하게 브리핑했다. 그동안에도 시훈은 어딘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느른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앉은 모습 역시 평소 시훈과는 달랐다.

“…이렇게 진행할까 싶은데 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회의 테이블 위로 담뱃갑을 쥐고 있는 손이 바스락 구겨질 때마다 말이 끊기던 조민희 대리가 살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심지를 세운 시훈의 미간 때문이었다.

“그건….”

툭, 툭, 툭. 담뱃갑 모서리로 책상을 두드리던 시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회의실 문을 열었다.

“…잠깐 쉬죠. 10분 후에 다시 시작합시다.”

옥상으로 올라와 담배에 불을 붙일 때만 해도 이유를 몰랐다. …젠장. 제 속내만큼 빨갛게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시훈은 같은 자리를 반복해 오갔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는 벌써 두 개비째였다. 날리는 연기 사이로 정이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랑이던 오늘의 정이수가. 무슨 생각인 걸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입고, 그런 얼굴로, 그런 눈으로, 그딴 식으로, 그렇게, 그렇게, 왜, 왜, 왜. 질문만 가득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상념을 뚫고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재빨리 화면을 확인한 시훈은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여민준이었다. 왜 아직도 본가를 안 찾아갔냐는 둥, 숙모님 말소리보다 한숨 소리에 땅이 꺼지겠다는 둥 쓸데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형. 회의 있어. 끊어요.”

기다리는 전화는 없고,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전화 때문에 한층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담배를 쥔 손으로 힘껏 난간을 잡은 시훈이 손목시계를 내려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 태운 담배가 벽에 짓눌렸다. 뭐든 부러뜨려야 했다. 일도, 정이수도.

엉망이 된 회의가 수습되고 직원들 모두가 퇴근한 불 꺼진 사무실. 시훈의 책상 위에만 스탠드 불빛이 켜져 있었다. 초조함이 인정하기 싫은 분노를 넘어서자 차가운 이성이 돌아왔다.

10시. 시훈은 관자놀이를 짚고 있던 손가락을 내려 핸드폰 속 정이수의 번호를 찾았다. 화면 안 번호를 응시하며 시훈은 차분하게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볼 안쪽을 혀로 꾹꾹 눌러 가며 넘실대는 감정을 절단하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쯤 액정 위로 뜻밖의 이름이 떠올랐다.

정이수 팀장.

먼저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말이 없었다.

-…….

“지금 어디예요.”

-…….

“정 팀장님, 지금…”

시훈의 말을 끊고 정이수가 목소리를 냈다.

-…왜요.

이마를 짚어 낸 시훈이 한숨과 함께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같이 있어요?”

-…같이. 같이… 그러려고 했죠. …그러려고.

분명 취한 것 같다. 늘어지는 말과 전해지는 호흡이 그랬다. 유진우를 만났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분명치 않은 말은 그 뒤로 뚝 끊겼다. 시훈이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을 삼키는 사이 수화기 너머로 번잡한 사람들의 말소리며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가 넘어왔다. 아마도 길 위, 술집들이 늘어진 곳일 테고 들어 본 적 있는 익숙한 소리들이었다.

“지금… 회사 근처예요?”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시훈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전화는 끊겨 있었다.

금요일 밤 회사 뒷골목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여름이라 가게마다 거리에 테이블을 내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대폿집들이 줄지은 거리는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습한 날씨와 숯불 위로 구워지는 안주 때문에 정신없고 후덥지근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직장인들이 웃고 떠들며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골목은 부산하기 그지없었다.

통화를 마치고 정이수를 찾아 나선 시훈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등으로 땀이 흘렀다. 골목 안으로 들어갈수록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욕을 짓씹은 시훈이 아마 오해한 것이라 생각할 때였다.

좁은 틈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쌩 지나가고 어깨동무를 한 샐러리맨 둘이 눈앞을 지나자 그 너머로 초라한 등이 보였다. 촌스러운 빨간색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에 홀로 앉은 정이수의 늘어진 팔 아래 긴 손가락에는 담배가 걸려 있었다. 뛰어가던 시훈이 속도를 줄여 가며 이윽고 정이수의 앞에 섰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저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이수는 스윽 올려 보고 말 뿐 가타부타 말이 없다. 담배를 쥔 손으로 가득 채운 소주잔을 그대로 넘겨 술을 마시는 정이수가 취한 건 분명했다. 시훈이 아무 말도 없이 내려 보고 있자 재차 빈 잔에 소주를 따르는 이수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와…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내려간 속눈썹을 들며 시훈을 올려 보았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낮은 목소리 뒤로 정이수가 슬쩍 미소를 띠고 태평한 답을 건넸다.

“…술 마시기 적당한 시간부터요….”

“…….”

화가 나는데 정이수의 얼굴을 보자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잔하세요. 자리도 비었고… 시간도 많은데….”

테이블 맞은편에 빈 소주잔이 놓였다.

“정 팀장님, 이미 많이 마셨어요.”

안주는 손댄 흔적 없이 줄줄이 세워진 빈 소주병만 보였다. 얼굴을 구긴 시훈이 이만 일어나라 입을 떼려는 때 갑자기 정이수가 잔을 채우다 말고 실실 웃기 시작했다. 웃음을 참기 힘든지 담배를 끼운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킥킥대며 말을 이었다.

“큽… 근데… 진짜 웃긴다. 제가요… 한잔하고 싶어서, 여기… 연락처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우욱 내려 봤는데… 와… 전화할 사람이… 이시훈밖에 없네…?”

“…….”

“무지하게 친절한 우리 이 팀장님…. 좆같이 친절한 우리 이시훈 팀장님…밖에….”

소주를 단번에 넘긴 정이수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은 채였다.

나눌 수 없고 나눌 이 없는 제 처지가 이렇게 궁상맞을 수 없었다. 회사 근처를 벗어나지도, 멀쩡하게 밥을 처넣지도 못하고 찌질하게 소주나 마시고 앉은 꼴이라니. 제 꼬락서니는 삼류 멜로 영화보다도 우스울 게 분명했다. 그런데 싸구려 동정인지 또 뭐에 화가 났는지 입이 붙은 이시훈은 꼼짝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어울리지 않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러니 꼬일 대로 꼬인 속에서 비틀린 말이 튀어나왔다.

“…안 갔잖아. 원하는 대로 안 갔는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네?”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긴 이수가 잔을 채우며 시훈에게 되묻는다. 패잔병 같은 몰골로 창과 칼을 휘두른들 허공을 가를 뿐 시훈의 가슴에 꽂히지 못했다. 긴 속눈썹 아래로 언뜻 보이는 정이수의 눈빛은 불이 꺼진 것처럼 공허했다.

“…….”

소음처럼 웅웅대는 무리 속에서 대체 얼마나 홀로 있었을까. 심해 깊숙이 가라앉은 듯한 정이수의 눈빛이 처연해 보였다. 얼룩덜룩 덧칠해진 우울이 누구 때문인지 알고 있지만 그 깊이를 헤아릴 수는 없었다. 시훈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손을 대면 바스러질 것 같고,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막연한 충동만 있을 뿐이었다. 갈피를 쉬이 잡지 못하며 소주만 묵묵히 마시고 있는 이수를 내려 볼 때였다.

툭.

툭.

아스팔트 바닥 위에 동그란 자국이 하나둘씩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짙은 색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에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요란하게 허둥거리는 동안 그 가운데 정이수만이 비와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손님이 가득한 대폿집 안에서는 문밖에 있는 테이블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이 다 젖도록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수의 곁에서 같이 비를 맞고 있는 시훈이 그의 팔목을 들어 올렸다.

“일어나요. 데려다줄게.”

“…놔요.”

손을 뿌리치며 이미 빗물로 가득 찬 소주잔에 다시금 술을 콸콸 붓는다. 출구가 없는 감정들은 쏟아 낼 수 없었다. 비참함을 이렇게라도 달래야 했다.

회사에서 나와 유진우와의 약속 장소를 확인하고 택시를 기다렸다. 제 앞에 멈춰 선 택시 기사가 조수석 너머로 행선지를 물었을 때 이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통나무처럼 서 있기만 하는 자신을 두고 가 버린 택시의 뒤꽁무니를 바라만 봤다.

보내고, 보내고, 또 보내고… 몇 대를 그냥 보냈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옷을 입고, 머리를 매만지는 동안 우습게도 조금은 비장했던 것 같다. 그 사람을 만나면 보여 줘야지. 그리고 웃어 줘야지. 그리고 또….

가득 채워진 술잔을 들자 불쑥 튀어나온 손이 잔을 채 갔다. 천천히 손을 따라가니 이시훈이 빗물과 소주가 뒤섞인 잔을 제 입에 한 번에 털어 넣고 테이블 위로 빈 잔을 내려놓았다.

“…….”

곧 5만 원권 두어 장이 잔 아래에 놓였다. 빗물을 머금은 지폐 두 장이 순식간에 엉기어 달라붙었다. 이수가 눈을 들어 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넘긴 시훈이 이수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비 때문인지 흐려진 시야 사이로 뭐가 뭔지 모를 감정의 파고가 일렁였다.

“…또 비 맞잖아요, 이 팀장님.”

늦겨울 와인 바 앞에서 조수석 문을 열어 주고 비를 맞던 이시훈이 겹쳐 보였다. 그때도 아마 지금처럼 못마땅한 얼굴이었지. 해야 할 일 목록에 정이수 집에 데려다주기라도 있는 건지…. 어이가 없어 이수가 비죽 웃음을 흘렸다.

곧 고개를 풀썩 떨어트린 이수의 손목을 뜨거운 손이 붙잡았다. 이수는 기력이 쭉 빠진 몸을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두었다. 쓰러진 플라스틱 의자를 뒤로하고 시훈은 흐트러짐 없이 비를 뚫고 길을 걷는다.

난장판이 된 골목, 여전히 여기저기 뛰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이수는 시훈을 의지해 걷고 있었다. 빗물에 희석된 술이 입가에 미미한 잔향을 남겼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정차한 차 내부는 히터 열기 때문에 따뜻했다. 술기운과 비에 젖어 지친 이수는 조수석에 눈을 감은 채로 겨우 기대앉아 있을 뿐이었다. 파리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습한 차 안의 공기가 걷힐 때쯤 정이수가 문을 열고 인사도 없이 발을 내렸다. 현실에 없는 사람처럼 흔들리는 몸이 주차장에서 이어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1층부터 9층까지 버튼을 주르륵 눌렀다.

정이수는 나사가 빠진 사람 같았다. 표정이 없고, 소리가 없고, 감정을 거세해 버린 것 같았다. 말없이 이수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탄 시훈은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착잡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복도식 오피스텔의 긴 통로를 지날 때마다 정이수의 머리 위로 센서 등이 켜지다 꺼졌다. 복도 좌측으로 여전히 세차게 내리는 비가 난간에 부딪혀 멋대로 튀어 올랐다.

1107호. 문 앞에 선 이수가 문고리를 잡아 돌리다 여전히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시훈을 의식하고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고리를 잡은 그대로 문에 이마를 기댄 이수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이 팀장님, 오늘은 제가… 좀 힘들어서요, 다음에… 다음에 많이 해요, 섹스. 제가 두 배로… 아니, 세 배로… 잘해 볼게요.”

겨우 한다는 말이…. 헛웃음을 보인 시훈이 라이터를 돌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연기는 눅눅한 공기 속에 부유하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담배를 빼어 문 사이 솟아오른 화는 순식간에 휘발됐다. 비에 쫄딱 젖어 여기까지 쫓아온 이유가 정이수의 몸 때문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바닥에 내버린 시훈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왜 안 갔어요? 일부러 신경 쓰고 왔으면서.”

“…….”

정이수를 찾고 난 후 내내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제 경고가 이유일 리는 없었다. 그러니 알고 싶었다. 정이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도록 입안을 맴돌던 질문을 내뱉고 시훈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차마 더 다그치지 못하고 잠잠한 상대의 모습에 마음을 졸였다. 비에 젖은 몸도 슬픔에 겨운 마음도 충분히 지쳐 보였다. 문에 기대 있는 정이수는 숨도 쉬지 않는 사람처럼 침묵했다. 사정없이 떨어지는 비만 길게 벌어진 시간을 메울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말하기 싫으면…”

답을 기대하기를 포기할 때쯤 메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구차해질 것 같아서요.”

“…….”

서러운 숨을 토해 내며 이수가 머리를 떨구었다. 앞으로 쏟아 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감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냥… 지금처럼 있어도 좋으니까, 여기 있어 달라고… 그럴 것 같아서요.”

정이수는 웃고 있었다. 진짜 우습죠? 돌본 적 없어 아물지 못한 상흔 위에 피어난 웃음이었다. 들썩이는 어깨가 떨고 있었다. 어쩌면 받아들이지 못했나 보다. 처음부터 시작한 적 없으니 끝도 없을 거라고. 전처럼 연정을 숨기고 들키지 않으면 상관없다 여겼을까. 그렇게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었나. 바닥을 박박 긁어내고도 들어내지 못한 감정들은 이제 영영 볼 수 없는 사람 앞에서 초라하고 또 초라해질 뿐이었다. 애초부터 얄팍한 자존심은 지킬 것도 없는데 차마 버리지를 못했다. 그깟 하나를.

시훈의 인상이 더없이 구겨졌다. 불쑥 내민 충동이 정이수의 두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기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마주한 두 눈에는 차마 흘리지 못한 눈물이 망울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발개진 눈과 얼마나 깨물었는지 아플 정도로 이를 사리문 모습이 시훈의 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

“…흔들…렸을까요? 오늘 날 봤다면….”

말을 막고 애처롭게 미소 짓는 입술이 묻는다. 시리도록 투명하게 단 하나 궁금했던 질문을.

말문이 막혔다. 애원하는 얼굴은 답을 원하고 있었다. 밑바닥까지 내보인 무너진 자존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정이수가 희미하게 웃으며 시훈의 눈동자를 바쁘게 쫓았다.

“…아쉽다고 생각했을까요?”

뺨 위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답을 갈망하는 눈과 시선이 얽히는 순간 시훈은 충동적으로 젖은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흐느끼는 이수의 이마를 어깨에 묻어 둔 시훈이 다른 한 손으로 허리를 끌어안고 마구잡이로 일렁이는 충동을 내리눌렀다. 고요한 복도에는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만 들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떨리는 몸을 더욱 끌어안은 시훈이 이수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달싹였다.

“네… 나라면요.”

진실인지 위선인지 모를 답은 경계가 모호했고, 유진우의 생각까지 헤아려 볼 아량은 없었다.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풀고 시훈이 정면에 보이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얼굴을 마주할 틈도 없이 품에 안긴 정이수를 돌려세워 현관 안으로 들여보내자 등을 보인 몸 위로 센서 등이 켜졌다.

“…쉬어요.”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마른 등을 바라보던 시훈은 복도에서 현관문을 조용히 밀어 닫았다. 아마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뿐이었다. 기묘한 박탈감과 무력함이 찾아왔다. 정이수가 손에 쥔 모래처럼, 그렇게 빠져나갔다.

오늘 밤은 모든 것이 예상을 빗나가고 있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시훈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발을 물려 몸을 돌렸을 때, 또 한 번 예상은 빗나갔다.

문을 열고 나온 정이수가 목에 팔을 둘렀고, 입술이 맞붙은 건 순식간이었다.

* * *

정이수의 셔츠를 잡아 벌렸다. 후드득 단추가 떨어졌다. 시훈은 이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뺨, 턱, 입술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입을 맞췄다.

“하아….”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엉켜들었다. 걷어차인 신발이 현관을 올라 나뒹구는 걸 내버려 두고 침실까지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거실 러그 위에 몸을 뉜 정이수의 셔츠를 마저 벗기고 버클을 풀어낸 바지와 속옷을 다리에서 단번에 빼냈다.

시훈이 머리맡을 짚고 이수의 가슴으로 입술을 내렸다. 작은 유두를 입에 넣고 빨아올리자 탄식과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시훈은 가슴 주변을 헤집듯 입술을 붙였다 떨어트리며 점점이 자국을 남겼다. 뜨겁고 단단한 손이 서늘한 이수의 몸을 허벅지에서부터 옆구리까지 쓸어 올렸다. 달아오른 이수의 몸이 밭은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

명치부터 입을 맞춰 내리며 얄팍한 배에 얼굴을 비볐다. 움푹 파인 배꼽에 축축한 혀가 파고들자 숨죽인 신음이 터졌다. 이수의 다리 사이에 앉은 시훈이 허리를 펴고 제 허벅지 위에 둔부를 올려놓았다. 프리컴이 맺힌 이수의 곧게 발기한 성기를 시훈이 입을 벌려 빨았다.

“아윽…!”

둔부를 받치고 위아래로 머리를 움직이자 떨리는 손이 시훈의 어깨를 밀어낸다. 부끄럽고 당혹스러운 감정을 다 느끼기도 전에 기둥을 샅샅이 핥았다. 갈라진 끝부분에 혀가 닿을 때마다 배가 훅 꺼지며 물밀듯 쾌감이 밀려왔다.

입으로 집요하게 빨아 댄 성기가 더없이 축축해질 즈음 참기가 힘든지 이수가 끙끙대며 몸을 뒤틀었다. 시훈이 물고 있던 성기를 놓고 테이블 위를 뒹구는 핸드 로션을 가져와 손에 짜냈다.

이수의 무릎을 벌리고 한쪽 발목을 잡아 어깨에 걸쳤다. 로션이 묻은 시훈의 손가락이 회음부를 따라 미끄러졌다. 몸을 맞춘 지 시일이 지난 구멍은 꽉 다물린 채 쉬이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훈은 발기한 이수의 성기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주름을 따라 넓게 손을 문질렀다.

손길에 따라 파득거리는 몸에 차차 힘이 빠질 무렵 미끄러운 중지와 약지가 이수의 구멍 속으로 쑥 들어갔다. 입구에서 가볍게 진퇴를 반복하는 손가락을 내벽이 익숙하게 물어 왔다. 숨을 죽인 시훈의 입술이 어깨에 걸쳐 있는 이수의 발목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손가락 한 개를 더 밀어 넣고 구부려 내벽 안의 튀어나와 있는 부분을 건드리자 엉덩이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으흐….”

어깨를 내린 시훈이 이수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였다.

“좋아요, 여기?”

“흐응… 으….”

곤란한 질문에 당황한 이수가 움찔 몸을 떨었다. 답을 줄 생각이 없는 입술이 꾹 맞물렸다. 시훈이 성기를 흔들며 손가락을 느릿하게 앞뒤로 움직이자 설핏 엉덩이가 입구까지 빠져나가는 손가락을 따라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시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몸이 원하는 바를 말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대번에 안쪽을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몸이 믿기지 않아 이수가 고개를 모로 저었다.

“하윽…!”

푹푹 찌를 때마다 번들대는 로션이 찰박거렸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더해지고 발가락이 곱아들다 종국에는 참을 수 없는 사정감에 성기를 쥐고 있는 시훈의 손을 허겁지겁 붙잡았다.

“…나, 나올 것 같…아요.”

팔자로 내려간 두 눈과 시선을 맞추자 시훈의 손이 더없이 빨라졌다. 꼿꼿이 선 성기를 문지르며 한곳만 집중적으로 찌르는 움직임을 참지 못한 이수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아… 아앗…! 으흑…!”

곧은 이수의 성기 끝에서 정액이 툭 터졌다. 사정으로 예민해진 이수의 성기를 쥐고 시훈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낼 기세로 귀두 부분을 문지르며 푹 풀어진 구멍 속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붉은 점막이 속절없이 움찔거렸다.

시훈은 중간까지 풀어놓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버클을 내렸다. 여운에 숨을 몰아쉬는 정이수를 바라보며 드로어즈를 내리자 완전하게 모양을 갖춘 성기가 퉁 튕겨 나왔다. 치덕치덕 로션이 묻은 손으로 성기를 잡은 시훈이 귀두 끝으로 이수의 회음부부터 구멍 사이를 느릿느릿 문지르자 무릎을 세운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민감한 몸이 만든 반사적인 행동을 오해한 시훈의 손이 정강이를 지나 매끄럽게 무릎에 당도했다. 당장에라도 무릎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정을 꽉 내리누른 입에서 조용한 물음이 떨어졌다.

“…싫어요?”

머리맡을 짚어 정이수의 달뜬 얼굴을 내려 본다. 외꺼풀진 눈이 열기에 일그러지고 곧게 뻗은 코 옆 창백한 두 볼에는 수채화처럼 붉은 기운이 번져 있었다. 시훈의 얼굴 위로 확신을 얻은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말해 봐요. 넣어도 되는지….”

옆구리부터 올라온 손이 성감대인 유두를 문지르며 다시 한번 이수를 재촉했다. 어르는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초조한 기색을 숨길 수는 없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는 이수는 끙끙대기만 할 뿐 시훈의 물음에 두 팔을 들어 눈을 가려 버렸다. 뭉근하게 구멍 주위를 맴돌며 입구를 찌를 때마다 젖꼭지를 발딱 세운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숨을 몰아쉬었다. 들어와도 좋다고 이수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시훈은 답을 듣고 싶었다.

가린 팔 아래로 코와 입만 드러난 정이수가 입술을 달싹였다. 코끝이 스칠 정도로 시훈이 어깨를 내려 귀를 내주었다. 그러자 가린 팔 아래로 꽉 깨문 입술이 풀리며 이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고, 싶어….”

전율이 일었다. 이수의 정수리를 감싸 안은 시훈이 얼굴을 가린 이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가슴을 맞대고 깊은 곳까지 쑤욱 삽입한 성기가 자리 잡기 무섭게 시훈이 허리를 뒤로 뺐다. 그 바람에 성기를 감싼 내벽이 밀리며 예민한 감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옴폭 휜 허리 아래로 이수의 엉덩이가 발발 떨렸다.

“으….”

시훈은 여태 떨리는 허벅지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매만지다 다시금 귀두 끝만을 구멍에 찔러 온다. 마치 빨리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움찔대는 구멍을 시훈도 이수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줘. 넣어….”

애달프고 달콤한 목소리에 몸을 일으킨 시훈이 성기를 잡아 이수의 구멍에 맞춰 서서히 삽입했다. 따뜻하고 좁은 내부가 좆을 삼킬 때마다 파드득 경련했다. 넣는 족족 성기에 쩍 달라붙어 빠듯하게 조여 오는 감각에 시훈의 입에서도 낮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아….”

굵은 성기가 밑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들어찼다. 완벽하게 맞물린 채로 시훈은 잠시 움직이지 않고 뜨겁게 열이 오른 내부를 온전히 느꼈다.

“…아….”

낮은 신음이 저도 모르게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이수는 시훈에게 양쪽 허벅지가 눌려 고간과 구멍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삽입하는 것만으로도 배 속에 꽉 들어찬 느낌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시훈이 슬슬 허리를 움직였다. 얼굴을 가린 이수의 손목을 붙잡자 그가 두 눈을 감았다. 방은 앞다투어 뱉어 내는 달뜬 숨과 비에 젖은 살 내음으로 가득 찼다. 천천히 허리를 뒤로 빼며 치받는 힘이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시훈이 턱턱 허리를 움직여 찌를 때마다 뒷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머리 양옆으로 가볍게 결박한 상태로 손목을 그러쥔 시훈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눈 감지 말고.”

소리를 죽여 속삭인 명령은 부탁과 같다. 스르르 뜨인 눈이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과 마주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흐트러진 남자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이시훈은 빠짐없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비 오던 골목에서처럼 나를 따라오라고. 지금 내가 당신과 함께 있노라고. 잡생각은 사라졌다. 지금만큼은 남자와 같은 비를 맞고 다시 온몸이 젖는대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달뜬 신음이 자꾸만 잇새로 흘렀다. 동시에 뿌리 끝까지 가득 치받힌 만족감에 더운 숨을 내뱉듯 짧은 감상을 흘렸다.

“……좋아….”

그 순간 시훈의 움직임이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흥분에 반쯤 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뜨이자 집요할 정도로 눈동자를 꿰뚫는 시선이 느껴졌다. 정적은 길지 않았다. 곧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시훈이 강하게 몸을 붙여 왔다.

“하… 아…!”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충격에 턱이 들리며 벌어진 입술로 혀가 밀려 들어왔다.

“우웁…! 으….”

입구까지 빠진 귀두가 한 번에 깊은 곳으로 쑤셔 박혔다. 방금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했다는 듯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시훈이 아랫입술을 빨아올리며 입술을 떼자 이수에게서 탁한 숨이 터졌다. 빠르게 움직인 성기가 살짝 방향을 바꿔 치받자 이수의 성기가 다시 서기 시작했다. 시훈이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발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엉덩이가 바들바들 떨리며 쾌감을 쫓아 성기를 조였다.

“후우… 지금 여기가….”

시훈 역시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성기를 감싸는 내벽이 전립선을 스쳐 찌를 때마다 달라붙어 쥐어짜는 것 같다.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으로 이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뜰 때에는 흥분으로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시훈은 얼굴을 내려 솟아오른 유두를 입술 사이에 넣고 진득하게 빨아올리며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 좋았다. 움찔거리며 생동하는 움직임이, 울퉁불퉁한 내벽을 찌를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도, 입안에서 굴려지는 작은 돌기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깨끗한 피부를 빨아들여 가슴 주위에 자국을 남겼다. 이수가 화를 내며 남기지 말라 했던 경고는 잊힌 지 오래였다.

그동안 정이수의 몸을 가르고 들어갈 때마다 마주한 공허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에는 상대가 드러내지 않은 감정을 흔들어 보려 정이수의 바닥을 헤집는 데 몰두했다면 오늘 밤은 모든 것이 달랐다. 목 아래 신음하는 소리를 온전히 듣고, 눈물이 흐르는 뺨을 핥고, 밭은 숨을 모조리 제 입속에 가두고 싶었다. 애타고 안달 나게 목이 말랐다.

“하… 윽! 흐으….”

몸을 뒤척이며 고양되는 사정감을 애써 참아 보려는 몸짓이 부질없었다. 체중을 실어 이수의 안쪽에 힘껏 삽입하자 깊은 곳까지 귀두가 박혔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절절 끓는 만큼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살 부딪히는 소리가 오피스텔을 적나라하게 울렸다.

액을 흘리고 있는 성기가 올라붙은 채로 시훈이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배에 닿았다. 속절없는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학! 흐… 흡!”

사정하고 싶은 욕구가 머리끝까지 다다랐을 때 시훈의 몸이 거세게 몸을 찧어 올렸다.

“윽…!”

손 하나 대지 않은 이수의 성기가 두 번째 사정을 했고, 푹 처박힌 시훈의 성기도 같은 속도로 뜨거운 정액을 쏟아 냈다.

소파에 등을 대고 다리를 벌린 이수의 몸에 소리 없이 켜진 TV 불빛이 닿았다. 허벅지 뒤를 누르자 뻐끔대는 구멍 사이로 시훈의 성기가 쑤욱 들어갔다. 민감한 몸은 삽입만으로도 신음을 흘렸다. 이수는 헝클어진 뒷머리를 소파에 비비며 허리를 휘었다. 내려 보지 않아도 움직임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시훈은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느리게 왕복한 성기를 빼 일부만 걸친 채로 몸을 움직였다. 시훈은 아슬아슬하게 전립선 주위만 꾹꾹 눌렀다.

“으… 흑….”

러그 위에서 시훈이 몰아붙인 감각을 몸이 기억했다. 일부러 비켜 가며 찌르는 행동에 몸이 달았다. 이수는 차라리 제 손가락을 넣어 휘젓고 싶을 지경이었다. 시훈은 한 손으로 이수의 두 손목을 머리 위로 틀어쥔 채 허리를 붙여 왔다.

TV 화면을 등지고 있는 시훈의 얼굴이 어둠 속에 가려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저를 바라보고 있는 눈빛만은 또렷했다. 살짝 벌어진 입이 신음 섞인 호흡을 내뱉었다. 다 들어오지 않은 성기를 구멍이 빨아 당기듯 죄었다. 손을 내려 접합 부위를 매만지자 이수의 허리가 퍼뜩 튀어 올랐다. 이윽고 시훈이 내벽 안쪽 살짝 튀어나온 부분을 꾹 눌러 왔다.

“흡…! 하윽…!”

크게 눈을 뜬 이수의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백지 위로 날것의 흥분이 마구 흩뿌려지는 느낌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정신없이 나뒹구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시훈은 마치 포식자처럼 이수의 반응을 낱낱이 살폈다. 하얗고 말갛게 드러난 이마며 이목구비가 섬세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부드러운 턱선 아래 긴 목을 따라가면 울긋불긋 자국이 남은 가슴이 보였다. 뾰족하게 선 유두에 잠시 머무른 시선은 우물처럼 팬 배꼽까지 이어졌다. 허리를 붙이면 양쪽으로 벌어진 허벅지 안쪽 근육이 가련하게 경련했다.

“하아… 누를 때마다… 얼마나 조이는지 모르죠.”

좆은 좆대로 짓이겨지고 있는 데다 정이수가 곧 울 것처럼 흥분에 못 이기는 모습에 아랫배가 더욱 묵직해졌다. 반복해 찧어 넣자 엉덩이가 움푹 팰 정도로 근육이 조여들었다.

“아흑…! 이, 이거… 그만, 그…만…!”

눈물을 매단 눈이 시훈을 올려 본다. 애걸하는 목소리를 쥐어짜 봐도 오싹오싹 감겨 오는 감각만은 어쩌지 못했다. 시훈이 빠르게 허리를 털었다. 다분히 의도된 움직임이 전립선만을 중점적으로 찌르고 짓이겼다.

두 번이나 사정한 성기에서 몽글몽글 프리컴이 나왔다. 손을 붙잡혀 좆을 잡고 흔들지도 못하는 괴로움에 신음하는 사이 시훈이 쾅 허리를 쳐올렸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이며 신음조차 내뱉지 못한 이수가 눈을 홉뜬 채로 입을 벌렸다.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푸들푸들 허벅지가 떨렸다. 사정하지 못한 성기는 여전히 꼿꼿이 발기한 상태로 꺼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정액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르가슴을 느낀 이수가 충격으로 허리를 잔뜩 휘었다. 저절로 내밀어진 가슴 위로 시훈의 입술이 따라왔다. 유두를 머금어 자국을 남긴 시훈이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가뿐히 이수를 들어 올렸다.

“하아….”

소파에 앉은 시훈의 몸 위로 올라탄 자세가 되자 이수가 몸을 내리며 연결된 부분이 더욱 깊숙이 삽입됐다. 완전히 풀어진 울퉁불퉁한 내벽은 굵은 성기가 뚫고 지날 때마다 꽉 죄어 왔다. 계속된 정사에 이수도 시훈도 온몸이 끈적였다. 시훈의 미끄러운 어깨 위로 이수의 손톱이 콱 박혔다. 익숙해지지 않는 이물감과 깊숙이 삽입된 탓에 느껴지는 약간의 통증, 그리고 소름 끼치는 야릇한 쾌감에 작게 머리를 털어 냈다.

“…흐응… 으….”

성기가 삽입된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이수를 다독였다. 안쪽 허벅지를 스쳐 간 손은 사타구니 쪽을 피해 날씬한 배 위로 미끄러지며 세운 허리를 붙들었다. 이내 이수가 숨을 쉴 때마다 언뜻 드러나는 갈비뼈를 지나 등허리를 감싸 안은 손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몸을 쓸었다. 빗소리가 숨을 죽인 두 사람 사이로 부지런히 창을 두드렸다.

어쩐지 부끄러워 숙인 얼굴 아래로 시훈이 어르듯 이마를 맞대자 불쑥 마주친 시선에 이수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본 적 없는 온화한 눈빛이 가만히 이수를 응시했다.

“왜, 우리… 처음에 이랬잖아.”

기억이 남자의 몸 위에 군림하듯 앉았던 그날로 이수를 이끌었다. 시훈에게 행한 쓰디쓴 복수가 이내 달콤한 추억처럼 그윽하게 스며들었다.

둥글게 말린 이수의 등을 누른 시훈은 뾰족하게 유두를 세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짐짓 여유 있는 체해 봐도 짐승처럼 이수를 파고들고 싶은 욕망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젖은 몸을 핥고, 끌어안아 정이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었다. 시훈이 깊게 숨을 내쉬고 유륜 주변을 살짝살짝 빨아들이다 놓았다. 높게 뻗은 코끝에 유두가 스치며 간지러웠다.

“으흥… 흐… 응….”

세게 빨아 줬으면 좋겠다. 애태우지 말고, 혀로 마음껏 희롱하고 입술 새에 넣고 당겨 줬으면 좋겠다는 불순한 바람이 천박하게 이수를 재촉했다. 입술을 감쳐문 이수의 손이 시훈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빨아 줬으면… 좋겠어요, 여기?”

시훈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몽롱한 정이수와 눈을 맞췄다. 요구하는 몸짓은 분명한데 도리질하는 모습에 시훈이 미소 지었다.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 아래로 일그러진 입술이 망설이는 기색을 띠었다. 항상 정이수가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인다 생각하기는 했지만 예기치 못한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무언가를 고민하고 당황하는 낯을 볼 때였다.

“…움직여 봐요.”

“흐….”

속삭이는 시훈의 부탁에 느릿느릿 허리가 움직였다. 뒤로 접힌 매끈한 다리에 힘을 주고 유연하게 흔드는 몸을 훑어가는 시훈의 입에서 더운 숨이 상대의 이름을 대신해 쏟아졌다. 정이수, 정이수, 정이수. 드라이 오르가슴 이후로 사정하지 못한 이수의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시훈의 배에 비벼졌다.

힘이 드는지 색색대는 숨소리가 가까이 닿아 있는 시훈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눈물에 엉킨 속눈썹이 올라가며 보인 야릇한 두 눈이 시훈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인상을 쓴 울 듯한 얼굴이 짜증을 내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하아… 움직이고… 움직이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제… 이제, 빨리….”

애원은 황홀했다.

땀이 아롱아롱 맺힌 턱을 빨았다. 붉은 뺨을 핥아 올리고 젖은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통통하게 물기를 머금은 입술 속으로 혀를 밀었다. 허리와 머리를 끌어당기자 저항 없이 안겨 온다. 긴 키스를 마치고 난 뒤 정이수의 허리를 단단히 쥐고 하체를 쳐올렸다. 더 이상 참지 않고 터트린 신음이 시훈을 자극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망과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정이수를 시야에 가득 채운 시훈이 이수의 성기를 잡았다. 몇 번 움직이지 않은 손안에 묽은 정액이 울컥 쏟아졌다. 배가 훅 꺼진 이수가 사정한 여운을 느끼기도 전에 퍽퍽 올려치는 힘에 몸이 둥글게 곱아들다 순간적으로 허리를 뒤로 젖혔다.

“하윽…! 응… 으읏…!”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시훈의 성기가 콱콱 박히는 구멍 안이 까마득한 쾌감을 이끌어 냈다. 간신히 붙잡은 단단한 어깨에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발딱 선 유두가 시훈의 입술 안에서 굴려졌다. 퍽퍽 엉덩이를 때리는 소리가 점점 끝을 향해 갔다. 이수는 어깨를 그러쥔 손을 놓고 시훈의 머리를 껴안았다. 그에 이수의 어깨 위로 턱을 올린 시훈이 으스러질 듯 이수를 당겨 안았다.

그 순간 닫힌 문을 열고 안정과 충만함이 이수의 마음속에 빠듯하게 차올랐다. 그리고 깊숙이 자리를 틀고 있던 낡은 상자가 화르르 불타올랐다. 더 이상 열어 보지도, 보고 싶지도 않을 유진우의 상자가.

“…흑… 흐읍….”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젖은 뺨을 단단한 어깨 위로 비비자 흐느낌이 시훈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때 온몸을 욱여넣을 것처럼 쳐올린 시훈이 아마도 입을 열었던 것 같다.

…이수야.

혼몽한 정신이 마지막 절정과 함께 불린 이름을 인지하지 못한 사이 뿌리 끝까지 성기가 박히며 몸 안에 왈칵 정액이 쏟아졌다. 정이수. 이수야. 이수. 정이수. 둥둥 떠가는 의식 너머로 반복해 불리는 이름의 주인은 제가 아닌 것 같다. 다만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의도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울지 말라고… 아니, 마음껏 울어도 좋다고.

탈진하다시피 몸을 축 늘어뜨린 이수는 시훈의 어깨 위로 뺨을 기댄 채 눈을 감은 상태였다. 미동도 없이 기절하듯 잠이 든 상대에게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렸다. 시훈은 자신의 품 안에 무너진 이수의 등을 가만히 다독였다. 손이 닿을 때마다 제 품을 파고드는 이수의 살결에 시훈은 몇 번이고 입술을 문지르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시훈이 긴 숨을 내쉬었다.

“…정이수.”

흐르는 강인 줄만 알았던 정이수가 순식간에 범람해 제 발목을 적시고 목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이수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은 시훈이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어떡하냐… 빠지면….”

창밖으로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 * *

몸을 닦고 뒤처리를 하는 동안 잠든 정이수는 가끔 신음과 함께 뒤척이기만 할 뿐이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한눈에 봐도 살이 내린 몸은 유약했다. 다른 남자가 남긴 그늘을 보고 있는 건 분명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시선 끝에 정이수가 있는걸.

욕실에서 씻고 나온 후 주인 허락 없이 빌린 티셔츠를 꿰어 입은 시훈의 눈에 그제야 거실 풍경이 들어왔다. 우연히 방문한 그날처럼 텔레비전은 소리 없이 켜져 있고, 테이블 위로 몇 종류의 잡지와 스마트 패드, 노트북, 그리고 전시회 리플릿 몇 가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리모컨으로 전원 버튼을 누르던 시훈은 TV장 위에 엎어져 있는 액자를 발견했다. 뒤집힌 액자에는 교복을 입은 정이수와 짐작건대 어머니일 여성이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말간 얼굴이 해사하게 웃는 모습은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어머니와 꼭 닮았다.

“…어머니를 닮았네.”

어린 이수를 눈에 담은 시훈이 텔레비전 옆으로 액자를 세워 놓고 집 안을 살폈다.

단순히 인테리어에 관심이나 소질이 없다고 치부하기에 오피스텔은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벽에 걸린 그림이나 하다못해 액자에 끼워 놓은 사진도 한 장뿐인 집은 텅텅 빈 박스처럼 보였다.

냉장고 문을 열어 본 후에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게 뭐야….”

생수 열댓 개와 먹다 만 숙취 음료, 언제 넣어 뒀는지 모를 숨이 다 죽은 샌드위치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냉장고 문을 닫고 바닥에 널브러진 이수의 옷을 다용도실에 넣어 둔 시훈이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잠든 얼굴을 빤히 내려 본 시훈이 침대 옆 협탁을 열어 본 건 단순한 충동이었다. 혹시나 하는.

“음….”

탱탱한 실리콘 덩어리 끝을 잡고 좌우로 흔들어 본 시훈이 눈을 굴리며 몸을 일으켰다.

느리게 눈꺼풀이 올라갔다. 익숙한 천장이 보이고 습관처럼 벽시계를 확인하고 나서야 10시간이 넘게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한낮을 알리고 있었다.

숙취에 머리를 짚어 보다 맨살이 닿는 느낌에 이불을 걷었다. 티셔츠 한 장뿐이지만 멀끔하게 갈아입혀진 옷이나 조금 쓰리기는 해도 깨끗하게 닦인 다리 사이가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타지 못한 택시, 빗속에서 마신 소주, 이시훈을 붙잡은 손과 거실에서 나눈 섹스. 그리고 이수야, 라고 부르던 목소리.

“…….”

이마를 짚은 손 아래로 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바탕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아픈 몸도 문제였지만 단편적으로 잘린 기억이 더 문제였다.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리자마자 꺾이는 허리와 무릎에 간신히 힘을 줘 거실로 나갔다.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보는데 화면은 꺼져 있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물건들이 한쪽에 가지런히 모여 있다. 당혹감에 드문드문 끊긴 기억을 더듬어 보다 눈앞의 소파 때문에 그마저도 포기했다. 소파와 러그 위에 정사의 흔적이 그대로였다. 세수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쓸어 내다 식탁 위로 몸을 짚었을 때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숙취 음료와 생수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겨울이 아니면 뭐든 몽땅 냉장고로 집어넣는 자신의 습관과는 다른 그림이었다. 숙취 음료를 끌어다 손에 쥐어 보는 사이 식탁 위에 놓인 핸드폰에 메시지 알림이 떴다.

-티셔츠 좀 빌립니다.

-냉장고에 죽 있어요. 용기째로 데워 먹으면 됩니다. 그리고 쉬는 게 좋겠어요. 무리했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이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핸드폰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텅 빈 집이 익숙해서 시훈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하아….”

무슨 생각으로 시훈을 잡았는지 모르겠다. 문이 닫히자 물밀듯 밀려오는 상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긴 밤을 홀로 지새울 자신도 없었고, 약속 시간을 목전에 두고 가지 않은 선택의 이유를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야 했다. 가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당신이 그런 당위를 나에게 주었노라고 따져야 했다. 인사조차 못 한 이별에 이시훈 당신에게도 조금의 책임은 있노라고.

그런데 뜨거운 몸을 끌어안고 차마 그러지 못했다. 모든 것은 태풍처럼 몰아쳤다.

아픈 머리를 짚어 내고 있을 때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다. 캘린더에 예약해 둔 알림 기능이었다.

요양원 방문.

날을 가늠해 보면 마지막으로 다녀온 지 벌써 두어 달이 지났다. 오늘이 지나면 한동안 방문이 어려울 테다. 재빨리 몸을 씻고 되는대로 옷을 주워 입었다. 오피스텔을 나서는 이수의 뒤로 식탁 위의 숙취 음료와 냉장고 속 죽은 그대로였다.

한바탕 비가 쏟아진 뒷날은 청량했다.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나무들은 이전에 방문했던 때보다 잎이 더 푸르렀다. 데스크에 인사를 하고 병실로 들어가자 엄마가 있어야 할 침상이 비어 있었다. 당혹감에 주위를 둘러보는 이수에게 옆자리의 요양 보호사가 창밖을 가리킨다.

“좀 전에 산책 가셨어요. 요 앞에 있죠? 정원하고 연결된 길.”

고맙습니다. 인사를 한 뒤 정원과 이어진 길을 밟았다. 소담하게 가꾼 길 안쪽으로 등나무가 드리운 벤치에 엄마가 요양 보호사와 함께 등을 지고 앉아 있었다. 옷을 정리해 주던 요양 보호사가 이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왔어요? 여기 와서 앉아요. 오늘 날이 좋아서 좀 걸었어요.”

“네.”

당연하게 이수를 먼저 맞는 이는 요양 보호사다. 요양원으로 모신 엄마가 아들을 알아본 적은 거의 없던 터라 서운하지는 않았다. 티셔츠를 펄럭이며 이수가 엄마 앞으로 허리를 숙인 순간이었다.

“이수 왔어?”

눈이 크게 뜨였다. 엄마 목소리로 너무 오랜만에 불리는 이름이었다.

“…엄마.”

또렷한 눈동자가 이수를 마주 보며 웃는다. 가지런히 정돈된 머리카락이나 생기가 도는 입술이 보기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식사도 맛있게 하시고, 오늘 봉사자들이 와서 머리도 다듬어 주셨거든요. 오랜만에 기운이 도시나 봐요.”

옆자리에 앉은 이수의 손부터 잡은 엄마가 손바닥 전체를 꾹꾹 눌러 보더니 걱정 어린 눈으로 얼굴을 바라본다. 걱정을 잔뜩 매단 손이 얼굴이며 팔을 쓸어내렸다.

“이수야, 왜 이렇게 말랐어?”

“마르긴…. 여름이라 그렇게 보이나 보다.”

신경 좀 쓰고 올걸. 빠듯한 시간 때문에 거울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한 게 후회가 됐다. 오늘처럼 엄마 정신이 맑은 날은 흔치 않아 더 그랬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한 이수가 집을 떠났을 때 엄마가 쓰러졌다. 전부터 더디게 진행된 치매가 그쯤부터 더 악화되기 시작했고, 간혹 정신이 돌아올 때는 미안하다는 말만 수십 번 했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자 엄마를 돌볼 사람은 저뿐이었다.

“보호사님이 봐도 우리 아들 말랐죠?”

“그래도 인물이 훤칠해서 연예인 같아요.”

“하기는 우리 이수가 정말 예뻐요. 엄마가 이 모양 이 꼴인데… 어쩜 이렇게 잘 컸는지….”

자칫하면 또 울지 싶어 이수가 맞잡은 손을 살살 흔들었다.

“그럼 두 분이서 잠깐 시간 보내세요. 저는 조금 있다가 올게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죄인인 걸 알고 있으니 정신이 돌아오면 이렇게밖에 해 줄 수 없다. 지금 와서 엄마 노릇을 흉내조차 못 내는 몸뚱이는 늙고 쇠약하기만 할 뿐이다.

“미안해서 어쩌니…. 엄마가 또 사고 쳤지?”

“안 그랬어.”

정신이 드문드문 돌아올 때 눈치챘지 싶었다. 그래도 끝내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이수가 얼굴도 못 드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등나무 아래로 새어 들어온 햇살이 엄마의 얼굴 위로 생기를 불어넣었다.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이수가 엄마의 허리를 끌어당겨 마른 가슴 위로 얼굴을 묻었다. 제정신에 안아 본 기억은 대학교 졸업식 때가 마지막이었나. 이수뿐 아니라 엄마 역시 놀란 듯 몸이 잠시 굳었다. 곧 등 위로 마른 손이 와 닿았다. 조금 지친 탓이리라. 해진 둥지라도 파고드는 건.

이수는 온기를 느끼며 2년 전, 제가 만든 광고 문구를 살짝 빌려 왔다.

“전선자 씨, 오늘… 참 예쁘십니다.”

부려 본 적 없는 애교를 어떻게 부려야 할지 고민한 이수가 생각해 낸 묘안이었다.

“…얘가 뭐래.”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싫지 않은지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마의 웃는 얼굴을 봤으니 됐다. 뿌듯한 기분을 느낀 것도 오랜만이었다.

“일이… 힘들지? TV 보면 서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밥 먹을 시간도 없다는데… 너가 다니는 회사도 그래? 그래도 굶지 말고 챙겨 먹어야지. 요즘은 뜯어서 레인지만 돌리면 되는 것도 많잖아.”

응. 응. 살살 다그치는 잔소리가 싫지 않았다.

이상한 날이 있다.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내 삶을 편집하는 것 같은 날들. 힘들어 미칠 만큼 가혹한 상황들이 내내 이어지다 오늘은 한숨 쉬어 가라 다독이는 것처럼 숨 쉴 틈을 틔어 준다. 그래도 아직 살 만하다고. 살아야 한다고. 엄마의 배에 얼굴을 묻은 이수가 머리 위로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편안히 눈을 감았다.

늦은 저녁,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오자 거실 한 귀퉁이가 주홍색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꺼진 그대로였다. 그 모습을 조용히 응시한 이수가 냉장고를 열었다.

“아… 이거 뭐….”

냉장고 안에는 포장된 죽과 함께 날이 지나도 먹을 수 있는 간편식이, 다른 칸에는 소분되어 포장된 과일이나 야채가 열 맞춰 정리되어 있었다. 짧은 한숨이 나왔다. 언제, 무슨 꼴로 이걸 사다 날랐을까. 꼬리를 문 생각에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열린 냉장고에 얼굴이 차가워질 즈음 이수는 복잡한 생각은 일단 접어 두기로 했다. 이걸 먹으세요. 딱 봐도 그렇게 보이는 용기에 포장된 죽과 반찬을 식탁 위로 내놓았다. 전자레인지를 열고 죽을 용기째로 넣어 타이머를 맞췄다.

불빛을 뿜으며 천천히 돌아가는 기계를 보고 있다 시간에 맞춰 용기를 꺼냈다. 차례로 뚜껑을 열고 일회용 수저를 뜯어 나란히 정렬했다.

“…….”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멍하게 내려 본 이수가 문득 비어 있는 식탁 앞자리를 바라봤다.

“…….”

그리고 흠. 목을 가다듬는다. 삐죽 솟은 생각이 아무래도 불편했다. 숟가락으로 죽을 떠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망설이다 첫 술을 넘기고 나니 다음부터는 입맛이 돌았다. 슥슥 긁어 바닥을 비우고 옆에 놓인 숙취 음료까지 까득 뚜껑을 따서 단번에 넘겼다. 배가 불렀고, 다음은… 미루어 둔 일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해가 떨어진 오피스텔 안에 노을이 지고 저녁 빛이 내려앉았다. 이수는 핸드폰 잠금을 풀고 쌓인 메시지를 확인했다.

유진우 본부장, 유진우 본부장, 유진우 본부장, 유진우, 유진우, 유진우. 부재중 통화 목록에 유진우 본부장이 남긴 기록이 한가득이었다. 이수는 망설임 없이 메시지와 부재중 통화 목록을 지우고 마지막으로 그의 번호를 지웠다.

식탁 위로 팔을 괴고 엎드려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생각보다 담담했고,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더니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헛헛한 속에 들어간 죽이 따뜻한 열을 피워 기운을 불어넣었다. 혼자 있는 집이 싫어 일을 핑계로 켜 두었던 텔레비전이 꺼진 오피스텔은 고요하고 어색했으나 나쁘지 않았다.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난 이수가 옷장 문을 열었다. 한편에 고이 모셔 놓은 슈트 한 벌과 중요한 날에만 아껴 입던 셔츠도 옷걸이에서 당겨 뺐다. 품 안에서 굴려 뭉친 옷을 들고 다용도실 문을 열었다. 제일 큰 봉투를 펼쳐 옷들을 전부 밀어 넣고 끝을 단단히 여몄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바닥을 비운 용기를 들고 쓰레기봉투를 펼친 이수가 어금니를 슬쩍 밀었다.

“하… 이시훈.”

쓰레기봉투 안에 딜도가 처박혀 있었다.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실리콘 덩어리를 쏘아본 이수의 얼굴에 피식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이수가 그대로 다용도실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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