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오리 토끼 (1)
시발, 이 일정에 어떻게 비딩을 들어가냐.
머리가 쪼개질 거 같다. 주 52시간 근무가 법제화됐다는 건 어느 나라 이야기일까.
이른 열대야가 이어졌고 등대처럼 환한 사무실은 며칠째 불이 꺼질 줄 몰랐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따져 봐도 그림이 안 나왔다. 시훈은 근래에 줄여 가던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시간은 10시를 넘겼다. 영 정리되지 않은 제안서 속 커서는 깜박일 뿐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요 며칠간 회의는 황혼에서 새벽까지 이어졌고, 좀비의 몰골로 각자의 자리에서 늘어진 팀원들 눈에는 총기가 없었다. 머리를 쥐어짠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영 입안이 까칠한 게 머릿속도 이러지 싶었다.
[이시훈 팀장] 소주 한잔하러 갑시다.
사내 메신저를 통해 메시지가 뜨자마자 우르르 짐을 챙겨 나가는 팀원들을 보며 시훈은 그제야 머리가 트이는 기분이었다. 누구든 이 꽉 막힌 공기를 빼 줄 필요가 있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사무실과 달리 복도부터 왁자지껄 수다가 시작됐다. 시훈은 한 발자국 뒤따라 걸으며 눈 사이를 손으로 짚어 본다. 팀 전체가 올라탄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다다라 문이 열리자 “어, 안녕하십니까.” 하고 누군가가 예상치 못한 인사를 했다. 이어 말소리가 끊기고 일제히 머리를 살짝 조아린다. 제작실 사람인가. 가장 안쪽에 기대어 있던 시훈이 느릿느릿 내렸다.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 뜻밖에 맞은편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는 정이수 팀장이었다.
“…….”
정이수는 직원들과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이미 출입구 게이트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처진 어깨며 무거운 걸음걸이에 고된 하루가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다. 시훈이 그를 부른 건 한순간이었다.
“정 팀장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이수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우뚝 발을 멈추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시훈과 마주 선 상황이 됐다.
“늦게까지 계시는 줄 몰랐네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는 시훈을 무심결에 바라보다 빛에 반짝이는 메탈 스트랩이 눈에 띄었다. …아, 시계. 돌려줄 타이밍을 놓쳐 버린 시계는 오피스텔에 보관 중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행방조차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광고주 미팅이 늦어져서요.”
이수의 외꺼풀진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호기심과 열의가 넘치는 광고주는 오후 광고 촬영장에 얼굴을 내민 뒤, 이수와 꼭 아이디어를 나누고 싶어 했다. 작년 팀에서 수주에 성공해 제작 진행했던 브랜드의 광고주였다. 기획안을 들고 갔을 때만 해도 확신을 못 했던 광고는 끈질긴 설득 이후 온 에어 되고 나자 소위 말해 대박이 터졌다. 그해 상반기 인사이트 내에서 브랜드 매출 상승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광고였을 것이다.
올해 3분기에 새로이 론칭될 브랜드 캠페인을 정이수 팀장이 담당해 줬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대화는 장장 2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 일방적이고 무모한 아이디어가 대부분이었으나 성심성의껏 대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이수는 입안이 바짝 마르도록 향후 계획에 관한 대화를 이어 가느라 진이 빠져 버렸다.
답을 한 뒤,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거리를 벌려 놓은 경계가 한 꺼풀 벗겨졌다. 며칠 밤을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한 시훈과 저만이 알 만한 동질감 때문인지 뭔지 이수도 알지 못했다.
“요 뒷골목에 소주 파는 집 있는데 안주가 삼삼하게 맛있어. 아님 저 옆의 사케집도 괜찮고.”
시훈의 뒤쪽으로 팀원들이 행선지를 정하며 부산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그 때문에 오늘 퇴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로 내려온 유진우 본부장이 2팀 팀원들을 챙겨 나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승진 턱 겸 다난했던 G사 프로젝트의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라 유 본부장 주도하에 집행되는 회식으로 보였다. 주말을 앞두고 아침 해를 보게 해 주겠다며 웃던 유진우 본부장의 웃음소리가 1팀에까지 들려왔었다.
“회식 안 갔어요?”
“…….”
얼굴을 쓸던 손이 잠시 멈추다 느릿하게 떨어졌다. 짧은 침묵 뒤 긴 숨을 내쉬는 이수는 잠시 할 말을 잃는다. 나쁜 의도가 아닌 그저 으레 묻는 질문이건만, 쓴웃음이 배어 나왔다. 이수는 대답 대신 말에 소질이 없는 사람처럼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때 신 대리가 눈치를 살피며 다가와 시훈의 뒤편으로 몸을 기울였다.
“팀장님, 저희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겠습니다. 소주 마신다구요.”
그리고 총총걸음을 옮겼다. 곧 갈게요. 고개만 돌려 대답한 시훈의 시선이 다시 이수를 향했다. 곧 가라앉은 목소리를 끌어 올린 정이수가 입을 열었다.
“…이만 가세요. 기다리겠네요.”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쌓인 피로 때문에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맥이 풀리는 날이었다. 회식을 피하려 오늘 하루 스케줄을 꽉꽉 눌러 잡은 데다 촬영장을 오가느라 장시간 운전을 했다. 지체 없이 걸음을 떼는 이수를 보며 시훈은 문득 깨닫는다.
“정이수 팀장님은, 집으로 가요?”
“네.”
정이수는 말이 안 되는 스케줄을 감당하며 밤낮으로 G사 캠페인을 이끈 사람이었다. 마땅히 공을 치하받아야 할 사람만 쏙 빠진 자리. 이수를 응시하던 시훈은 유진우를 향한 껄끄러운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 얼마 전, 텅 빈 복도에 서 있던 정이수를 떠올리자… 스킵. 건너뛰기를 하고 싶었다. 불편한 간격은.
그래서 불쑥 그런 말이 나왔다.
“같이 가죠. 무거운 자리 아니니까. 소주 한잔해요.”
“…….”
이수가 뭐라 대답을 하기 전에 시훈이 먼저 돌아서 걷는다. 거절도, 거절의 사유도 듣지 않겠다는 의도가 담긴 움직임이었다.
가게 밖 노상에 놓인 동그란 테이블에 모여 소주를 마시던 팀원들은 시훈이 이수와 함께 등장하자, 너도나도 눈치를 보기 바빴다. 등받이가 없는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 나란히 앉자 신 대리가 눈치껏 소주잔을 더 달라 외쳤다.
테이블 내의 말수는 급격히 줄었다. 곧 의미 없는 국내외 트렌드 현황을 분석하기 시작하며 급기야 사무실에 놓고 나온 제안서 이야기를 술자리까지 끌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술자리에서의 시훈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끝이 날카로운 눈은 이지러진 상태로 느긋하게 술자리를 관망하는 쪽이었다. 그러다가도 진중한 투로 사람들의 농담이나 질문에 성실히 답을 하고 몇 번인가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잔을 기울였다.
반면 정이수에게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라는 말이 어울렸다. 잔을 받고 오랜 시간 동안 술 한 잔 마시지 않은 정이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잔만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다른 세상에 홀로 있는 것처럼 모두가 바쁜 풍경을 뒤로하고 그만이 정적 속에 갇혀 있었다.
시훈은 옆자리에 앉은 이수를 흘깃 바라보다 제 앞에 놓인 소주를 몇 잔 들이켰다. 목이 탔고, 술이 좀체 취하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내도록 생각에 잠겨 있던 이수를 깨운 이는 시훈이었다.
“정 팀장님, 서초동 사신다 그랬죠. 가는 길에 내려 드릴게요.”
30분 넘게 이수에게 말 한마디 안 붙인 시훈이 빈 잔을 채우고 단번에 소주를 넘겼다. 막잔이었다. 말없이 앉아 있던 이수는 비우지 못한 잔을 밀어 놓지 못했다. 옆자리에 앉은 신 대리가 눈치를 살피다 어렵게 따라 놓은 잔이었다. 다른 팀 회식 자리에 불쑥 껴들어 한 잔도 넘기지 않고 일어나기가 마음에 걸렸다. 제가 따라와 이상해진 분위기도 그렇고.
“그거, 못 마시면 마시지 말구요.”
대답도 전에 이수의 잔을 가져간 시훈은 단번에 소주를 제 입에 털고 빈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
“저희는 먼저 일어나죠.”
시훈이 의자를 밀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원들 편하게 마시라고 빠져 주자는 투였다. 두 팀장을 끼고 있는 술자리가 오죽 불편했을까. 별말 없이 이수도 몸을 일으켰다.
“파하고 회사로 돌아가지 말고 집으로 가세요. 맑은 정신으로 월요일에 봅시다.”
시훈은 신 대리에게 법인 카드를 건넨다. 어정쩡하게 일어난 팀원들이 어긋난 속도로 걷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시훈은 이미 몸을 돌린 이수의 뒤를 따랐다.
인적이 없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공용 주차장까지 가는 지름길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켜켜이 쌓인 골목은 노랗고 습한 기운에 더웠다.
뒤쪽으로 돌아가는 좁은 골목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들릴 뿐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피로 때문인지 걸음이 느린 정이수의 뒤를 밟는 시훈의 눈에 더운 날에도 손목까지 떨어지는 재킷을 입은 그의 말쑥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이수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뀐 건 아마도 유진우 본부장의 영국행이 결정되고 난 후였다. 여상하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설프게 추스른 감정이 질질 새어 나왔다. 상처, 슬픔, 뒤숭숭한 미련 같은 감정이었다.
그건 지난 몇 주간, 시훈이 업무 중 담배를 태우러 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문득 시선을 돌려 보면 블라인드 사이로 빛을 받은 정이수는 바랜 종이처럼 시간을 비껴간 듯 보였다. 또는 풍랑이 이는 부둣가에서 우산도 비옷도 없이 오도카니 서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밖으로 새는 정이수의 감정들을 저도 모르게 쫓고 있노라면 그걸 들춰내고 싶었다. 그리고 벌어진 상처를 들쑤시고 조소하고 싶은 낯선 욕구가 불시에 찾아왔다. 시훈은 근래 의미 없는 농담이나 쓸데없는 추근거림을 멈춘 정이수에게 이상한 박탈감을 느꼈다. 그런 그의 어깨를 잡아채고 싶은 막연한 충동이 문득문득 시훈을 저울질했다.
시훈은 정이수가 술자리를 불편해했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행을 제안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처연한 얼굴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시간만 죽인 꼴이지만.
월요일 오전 회의에서 여 본부장에게 보고할 사항을 머리에 그려 본다. 소주를 털어 넣은 머리가, 정이수를 앞에 두고 걷는 머리가 맑을 리 없었다.
집중을 요하는 습관처럼 시훈이 담배를 빼 들 때였다. 앞서서 먼저 걷던 정이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담벼락에 세워진 가로등 불빛을 지난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곧 잠시 뜸을 들인 정이수가 입을 열었다.
“…사실, 술 잘 못 합니다. 좋아하지도 않구요.”
회식 때마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모습을 생각하면 썩 어울리지 않는 고백이지만 지금 정이수가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따라왔어요?”
가만히 묻는 목소리 뒤로 불붙은 담배가 소리도 없이 길이를 줄이고 있었다.
“고마워서요.”
담백한 답이었다. 그게 할 말의 전부인 사람처럼 정이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구불거리는 골목을 앞서 걸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에 가려 정이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긴 재킷 아래 마른 손끝이 조금 움직였던 것 같다. 제법 술이 세다고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게 마지막 잔에 취한 기분이었다. 시훈은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리고 이마를 문지르며 이유 모를 욕을 낮게 짓씹었다. 아마도… 시발, 이라고.
대리 기사에게 키를 주고 먼저 서초동 법원 앞으로 가자는 말을 한 뒤 정이수 팀장과 뒷자리에 앉았다. 검은 밤, 도로를 달리는 여느 차들과 다름없이 두 사람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
후우- 최근 제대로 쉬지 않고 업무를 몰아붙인 탓에 시트에 등을 기대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시훈은 정이수가 앉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모로 돌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라디오에선 나긋한 목소리의 여자 아나운서가 영화 음악을 소개해 주고 있었다. 다음은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한 소년이… 그런 고루한 멘트가 이어졌고, 피곤에 몸이 녹아내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이 시트 가운데께로 풀렸나 보다. 예상치 못하게 맞닿은 상대방의 손등이 취기와 노곤함으로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시훈은 여전히 눈은 감은 채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신호에 걸리지 않는 차가 대교를 지나는 것 같았다. 실내엔 엔진 소리만이 아스라이 들려오는 가만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시훈의 손끝에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그건 제대로 감쌀 만한 용기도 없어 가만히 자신의 손을 올린 것뿐이었다. 마치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물건을 찾는 어린아이처럼 더듬더듬 마지막 손가락만을 둥글게 감싼 손바닥은 노란 불빛이 켜 있던 골목처럼 습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축축한 손바닥에서 미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차갑게 떨리는 손가락들은 인파 속을 함께 걷는 엄마의 손을 붙잡은 아이 같았다.
“…….”
시훈은 자세 그대로 조용히 눈을 뜬다. 제 손가락에 살포시 느껴지는 상대의 떨림에도 초연히 잠든 자세를 취했다.
유혹이라기에는 어린애 장난 같고, 실수라고 치부하기에는 손가락을 감싼 행위가 너무나 분명했다. 시훈은 정이수의 저의를 쉬이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고스란히 느껴진 떨림과 차가운 손이 가련했다. 아마 오늘 정이수가 보인 쓸쓸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대교를 지나 차가 우회전할 때쯤 정이수가 슬며시 손을 거뒀다. 떨쳐 낼 타이밍을 놓친 뒤였다.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손님, 오피스텔 앞에서 세워 드릴까요.”
“네.”
정차하고 난 뒤에야 상체를 세운 시훈이 이수 쪽으로 몸을 틀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내민 정이수는 대리 기사 쪽을 흘깃 바라보다 잠시 뜸을 들였다.
“이 팀장님.”
어둠 속에 가린 시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수는 차를 타고 오며 하루 종일 꼬인 일정, 유진우 본부장에게 느낀 혼란과 분노가 지나는 한강 물에 떠밀려 갔음을 알았다. 이시훈이 오늘도 함부로 내민 친절 때문이었다.
“…….”
“저…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차….”
이수가 드물게 말을 끌었다. 저지른 실수가 있었으니 차마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걸으면서 차라도 한잔하실래요, 라고.
우울했고, 지쳐 있던 오늘, 시훈이 불러 준 자리가 고마웠다. 바래다준 것만 해도 이걸로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슬그머니 빗장이 풀린 이수는 시훈에게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다. 그러다 괜찮으면 빈정대지 않고, 서로 기분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대화를 해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해 봤다. 하나둘 이야기를 꺼내 보면 쌓인 오해가 풀릴지도 모르고.
“…….”
침묵이 길어지자 시훈은 피곤한지 짧은 한숨 뒤 옆으로 목을 기울인다. 그러자 이수의 생각이 삽시간에 접혔다. 벌써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으니 차를 마시기에는 늦었다. 게다가 시훈이 굳이 불편한 상대에게 시간을 내줄지도 의문이었다. 결국, 한참 동안 말을 골라내던 이수가 고비를 이기지 못할 즈음 핸드폰이 울렸다. 우연히 보인 액정 화면 속 발신자는 다름 아닌,
유진우 본부장.
이수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을 손에 쥔 이수가 언뜻 미소를 보이며 난감함을 감췄다.
“…아닙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들어가세요.”
붉게 물든 얼굴로 차에서 내린 정이수가 문을 닫으며 급히 핸드폰을 귀에 댔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시훈은 어둠 속에서 얼굴을 구겼다. 이 시간에….
…네, 본부장님. …아직… 회식 중이십니까? 일정 …
상대에게 깍듯이 예를 갖춘 말소리는 닫히는 문과 함께 뒤가 잘렸다.
시훈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허벅지 위에 놓인 손에는 아직 정이수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차갑고 축축하던 손가락과 떨림.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이 자꾸만 그 감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제법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는 차 안에서 시훈은 흐르는 강을 내려 보듯 지나간 혹은 지나는 정이수를 관조했다. 뚜렷한 형체가 없고 손을 담가도 잡을 수 없는 강 같은 정이수를 말이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담배 한 대만 태우고 가겠습니다.”
창을 조금 열어 시훈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이 한 모금을 빨았다. 열린 창 너머로 담배를 쥔 손을 걸쳤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길에서는 여전히 유진우와 통화 중인 정이수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무언가 대꾸했다. 그러다 아직 출발하지 않은 시훈의 차량을 살짝 돌아보았다. 곧 출입문을 통과한 정이수가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톡, 톡, 톡.
손가락이 일정하게 무릎을 두드렸다. 오늘 좁은 골목길에서 정이수의 뒤를 밟으며 느낀 초조함은 눈앞의 형체가 사라지자 시훈의 가슴속에 음습한 심연을 열어 놓았다.
만약 자신의 손가락을 잡은 정이수의 손을 맞잡았더라면 그다음은 뭘까. 여전히 정이수가 유진우에게 절절매는 이유가 단지 고상한 사랑 하나 때문일까. 품어 본 적 없는 의문이 연속으로 들이닥쳤다.
외꺼풀진 정이수의 얼굴이 그늘 속에서 차례로 단면을 드러낸다. 왼쪽, 오른쪽. 하나씩. 대체 어느 쪽이 진짜 정이수일까.
“손님, 어디로 이동할까요?”
룸 미러를 통해 물어 오는 대리 기사에게 답을 하려는 순간, 시훈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잠시만요.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뜻밖에도 정이수다.
그 순간, 더운 바람이 훅 불어왔다. 가로수들이 스스스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를 흔들고 시훈의 손가락에 끼워진 불씨 없는 담배가 도로 위를 나뒹굴었다. 모든 판단과 선택은 찰나의 순간 이루어졌다. 정이수가 가진 단면 중 하나가 얼굴을 드러낸 것도.
“…하.”
대체 뭐가 뭔지. 시훈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슬아슬하게 평행을 유지한 저울이 한쪽 방향으로 기울었다. 정이수가 풋사랑 소년처럼 잡던 손, 뜸을 들이며 차마 내뱉지 못한 말, 시간 차를 두고 도착한 메시지. 시훈이 눈살을 찌푸린다. 간신히 다시 균형을 잡았다 했더니 정이수는 흘러가며 잡아 보라 손가락 사이를 어지럽게 살랑인다.
이제 모든 것을 분명히 할 때였다. 현실이 꿈의 문을 두드리듯 시훈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 * *
오피스텔 문 앞에 다다라서야 유진우 본부장과의 통화는 끝이 났다. 술기운에 취한 그가 오늘 왜 오지 않았느냐, 다른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다 생색내기용으로 걸어 온 전화는 일방적인 대화로 끝을 맺었다. 유진우는 단지 직원들을 앞에 두고 형식상 몇 마디의 대답을 필요로 할 뿐이었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닫힌 현관문 뒤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시계. 말을 해야 했는데 잊어버렸다. 보관하고 있고, 수리가 필요하다고.
신발을 벗고 재킷을 테이블 위에 대충 올려놓은 이수가 창밖 너머로 아직 오피스텔 앞에 정차해 있는 시훈의 차를 확인했다. 일이 아닌 시계 때문에 전화를 걸기에는 다소 어색했다. 이수는 핸드폰 메시지 창을 열었다.
-이 팀장님
-시계 제가 보관하고 있어요. 가죽 스트랩으로 된 거요
-아직 출발 안 하셨으면 가지고 가실래요
메시지를 보내고 시계 상태를 떠올린 이수가 잠시 손을 멈췄다. 고장이 났고, 수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을 덧붙여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됐다. 따지고 보면 시계를 그 지경으로 망가뜨린 당사자는 이수 자신이었다. 차라리 주말쯤 브랜드 매장에 수리를 맡기는 편이 좋을까…. 고민만 하는 사이 상대에게서는 읽음 표시만 있을 뿐 답장은 없었다.
결국 이수는 한참 동안 메신저 창 위를 맴돌기만 한 손가락을 떼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필요하다면 어떤 식으로든 답을 주겠지. 이수는 리모컨으로 켜진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남은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러다 문득 온기가 남은 손끝을 매만졌다. 차가운 제 손과는 정반대였다. 원래 그렇게 남의 술을 잘 마셔 주나…. 집에 데려다주는 건 몸에 밴 매너인가. 고단했던 오늘 하루 이시훈이 흘린 투박한 친절을 떠올리다 이수는 저도 모르게 흘러간 CM송을 달싹였다.
“…맛있는 건 정말 참을 수 없어…. 누구든 맛을 보면 이렇게….”
이수는 습관처럼 인사이트에서 제작한 광고 몇 개를 확인하고 난 뒤에야 욕실로 들어섰다.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서 있자 몇 주 동안의 일이 슬라이드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유 본부장, 영국, 선물을 전달하던 팀원들, 주 실장, 임순정 대리, 외떨어져 있던 자신의 모습과… 그리고 이시훈 팀장.
이수는 눈앞에 올린 제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해 본다. 뜨거운 물 아래 지워진 감각이었다. 이시훈의 새끼손가락을 쥐었던 손. 바보 같은 짓이었다. 깊이 잠든 시훈의 손이 손등에 닿자 풋내기 같은 어설픈 충동이 일었다. 어딘가 잡고 싶은데 잡을 곳 없는 손이 온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까. 사실, 이수는 오늘 하루가 꽤 벅차고 힘겨웠다. 슬쩍 닿은 그의 손바닥에 제 손바닥을 단단히 맞대고 싶을 정도로.
만약 시훈이 그렇게 맞잡아 주었으면, 그랬다면 그대로 서울 시내를 내내 달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오늘의 위로는 충분하다고. 또 한 번, 함부로 친절해 줘서 고맙다고….
아쉬움이 깃든 상상이 이어졌다. 괜찮으면 차 한잔하겠냐고 바로 말할 걸 그랬다. 혹시 제 잔을 대신 마시느라 더 취기가 오른 것 아니냐, 괜찮냐 묻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다 이시훈이 팀원들에게 그러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면 사실은 유진우와 무슨 사이는 아니었다고 오해를 소명하고, 몇 년간 내가 바보 같았노라는 부끄러운 고백과, 일전의 실수는 미안했다고 사과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오늘 그러면 좋았을 텐데 싶었다. 피식 웃어넘긴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지난 일이었다.
이수가 젖은 머리를 털고 편한 티셔츠와 바지를 막 입었을 즈음 띵동. 벨이 울렸다. 플로어 스탠드만 켜진 거실의 전자시계는 11:51을 가리켰다. 인터폰 앞으로 다가가 버튼을 누르자 방문자는 카메라 옆으로 비켜서 있는지 전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세요?”
-…….
화면 밖에서는 말이 없었다. 야밤에 배송업체나 심부름업체 사람이 실수로 눌렀을 수 있었다. 혼자 사는 세대가 대부분인 오피스텔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카메라가 꺼질 때쯤, 화면 너머 방문자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이시훈입니다.
방문자의 이름을 듣고 언뜻 당황한 이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제 핸드폰을 눈짓으로 찾는다. 그리고 시계를 받으러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 잠시만요.”
짧은 복도를 지나 현관 앞에 다다라 문을 열었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이시훈이 서 있다. 그는 인사도 뭣도 없이 미간을 일그러트린 채였다. 한 발로 타일 바닥을 짚은 이수가 집 안에 몸을 들였다. 가지 않고 늦은 시간에 직접 찾아올 정도라면 어지간히 중요하거나 고가의 시계인 것 같아 바삐 몸을 틀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시계…”
“시계 같은 소리 그만하고….”
시훈의 말에 반쯤 돌아간 몸이 스르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팀장님, 무슨….”
이수는 의문을 품고 시훈을 바라보았다. 취한 건 아니었다. 노기 서린 이시훈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또 분명하게 제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 문제였지만.
“원하는 게 뭐예요?”
“…네?”
시훈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애매하게 굴지 말고 노선 정하죠. 부탁하면서 자존심 세우는 게 정이수인지, 아니면 손가락 하나에 절절매는 게 정이수인지.”
“…….”
이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 안에서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얼마나 자신을 비웃었을지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난감함과 수치심에 이수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잘 가라는 인사를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막 문이 닫히기 전, 시훈은 문틈에 걸어 놓은 손가락을 당겨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강한 힘에 문고리를 잡은 이수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왜 이러지, 아닌 척 꼬리 빼면서. 혹시… 나 간 봐요?”
입안에서 혀를 굴리다 툭툭 뱉는 말 끝이 서늘했다.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처럼 말을 짓이긴 그가 열을 삭이는지 꽉 깨문 이를 풀었다. 이수는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차에서 그대로 손잡았으면, 그다음은 뭔데요.”
이수는 떨쳐 버린 기억을 떠올리다 묻어 둔다. 그건 오늘 밤이 지나면 사라질 비밀이었다.
“묻잖아요, 뭐냐고.”
“…….”
집요하게 대답을 요하는 시훈에게 해 줄 답 같은 건 없었다. 그 때문에 불쾌해서, 쫓아와 사과를 요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짜증 섞인 시훈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마구 뒤섞였다. 몸을 휘감는 위화감이 한꺼번에 밀려들며 팽팽 도는 의식을 붙잡으려 이수는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맨발로 내디딘 현관의 타일 바닥이 눈앞에서 울렁거렸다. 이수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치는 순간이었다.
“나 잡아 보고 싶어요? 그래서 사무실에서도 찾아온 거고. 그게 시원찮으니 답지 않게 내숭 떨면서 몰래 손잡은 거 아니에요?”
슥 밀린 발이 우뚝 멈췄다. 명치에 묵직한 돌 하나가 떨어진 것 같았다. 차라리 남자에게 잡힌 손이 불쾌했노라고 주먹이라도 날렸다면 가뿐히 털어 낼 만한 기운은 남아 있었을 거다. 그런데 이건… 결국, 제가 가진 업보였다. 새겨진 주홍 글씨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구멍 팔아먹는 정이수. 딱 그 취급이었다. 언젠가 뒷골목에서 자신을 욕하던 그치들이 이수를 지칭하던. 헛웃음이 터졌다. 아… 진짜 웃기고 바보 같다.
빈틈을 없애려고 무던히 노력해도 삐끗하는 순간이 있었다. 선택의 순간들이었다. 장학금을 받고 지방 국립대에 입학하기로 결심한 선택이 그랬고, 입사 후 포기한 이직이, 유진우 본부장을 사랑한 일이 그랬다. 모든 선택은 시간이 지나자 전부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지금은 이시훈의 손가락을 잡은 바보 같은 충동이 그랬다.
어이없는 감정을 드러낸 얼굴이 종국에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드문드문 문장을 연결해 중얼거렸다.
“아… 아드님이셨지. 그러니까 갈아타려고… 내가. 아… 그거구나….”
어쩐지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새 나온 이수가 피식거렸다.
“하. 자꾸 또… 이러네.”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시훈이 낮게 욕지기를 흘렸다. 명확한 답 대신 다시 저울질을 시작하는 정이수 때문이었다.
문을 잡은 시훈의 손이 풀렸다. 시훈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이수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매번 예상과 정도를 벗어나는 정이수의 가슴에 갈고리를 박아 넣고 싶었다. 미간에 골이 팬 채로 시훈이 이수를 응시했다.
“이러는 거 재미없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자리 지켜요. 사람 열 받게 하지 말고.”
쯧. 턱을 치든 시훈이 혀를 찬 뒤 어이없는 한숨을 흘렸다.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서로 오물을 뒤집어쓴 꼴이래도 방금 남긴 경고를 끝으로 뭐든 부러뜨려 끝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시훈이 발을 막 돌릴 때였다.
“몰래 손잡은 건… 이 팀장님 취향은 아니신가 봐요.”
바닥 어디쯤을 바라보던 이수의 눈동자가 상대를 향했다. 이수는 열을 내뿜는 응어리를 짓누르고 머리를 차갑게 식힌다. 이따위로 주도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이수의 입술이 가벼이 호선을 그렸다.
“저 자리 좀 보전해 주세요. 내 팀 건들지 말고, 후진 프로젝트는 쳐 주시고… 여 본부장한테도 잘 봐 달라, 말 좀 해 주구요. 아시겠지만… 제 회사 생활이 좀 그렇잖아요.”
“선 지키라잖아요. 지금 본인이 무슨 말 하는지 알아요?”
데구루루 눈을 굴린 이수가 눈을 치떴다.
“아니… 원하는 게 뭐냐고 달려와서 묻고는, 갑자기 왜 빼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웃음을 흘린 정이수가 문가에 나른하게 한쪽 어깨를 기대고 다음 말을 이었다.
“적어도 이 팀장님은 누구처럼 본진 버리고 떠날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우리 같은 직급인데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요?”
자신을 갉아먹을 짓인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유 본부장한테 데어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네.”
시훈이 뇌까리는 말에 이수의 턱이 비틀렸다. 살짝 숙인 얼굴에 드리운 모욕감을 순식간에 묻어 두고 이수가 퍽 가벼운 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연대할까요?”
제 손목을 그어 해방을 맞는 행위처럼 체념 끝에 좌절과 모멸을 끌어안은 이수가 행한 또 다른 자해였다.
그 순간 시훈의 눈이 번뜩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릿하게 관통하는 분노에 열이 올랐다. 정이수는 하룻밤에도 훌쩍훌쩍 손바닥을 뒤집는다. 포장지는 몇 겹이며, 둘러쓴 껍데기는 어느 쪽이 진짜일까.
…이제 상관없나. 활활 타오르던 시훈의 열기가 한계에 치달았다. 빨갛게 색을 피운 불빛이 서늘한 푸른빛으로 돌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정이수 팀장님. 말씀 고상하게 하시네요.”
“…….”
시훈이 눈을 내리깔며 보다 바람 빠지는 목소리로 사실을 전했다.
“지금요, 하려는 그거… 연대 아니에요. 상납이지.”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정이수의 맨얼굴을 어떻게든 들추고 싶은 충동이 끊임없이 마음을 분탕질했다. 시훈은 딱 부러진 말로 뾰족한 갈고리를 박아 넣었다. 어디서 기인했는지 모를 분노를 되짚어갈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 상납. 그럼 언제부터 상납할까요. 오늘부터 시이작?”
따갑고 아픈데 한편으로는 후련하게 숨통이 트였다. 차가운 타일 바닥 위로 발을 내디딘 이수가 몸을 기울여 시훈의 목에 손을 감았다. 현관의 센서 등이 꺼지며 두 사람 다 어둠 속에 각자의 속내를 감추었다. 이수의 집에서 기어 나온 에어컨 바람이 복도의 습한 기운과 뭉근하게 섞였다.
느릿느릿 코끝이 스치며 이마가 마주 닿자 속눈썹을 들어 올린 이수가 시훈과 눈을 맞췄다.
“이시훈. 하자고, 섹스.”
서슴없이 튀어나온 말과 달리 흘러나온 미소는 조롱에 가까웠다. 눈을 마주친 시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다만 시훈이 길게 내쉰 숨이 볼에 닿았을 뿐이다.
“왜… 이 말 듣고 싶어서 득달같이 쫓아 올라온 거 아니야?”
이제까지 불편한 상황 속에 브레이크를 거는 쪽은 매번 시훈이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것 없는 같은 상황의 반복일 테지. 어설프게 시훈의 손가락을 잡으며 부풀린 상상들은 순식간에 바람이 빠져 쪼글쪼글 흉측해졌다. 내가 뭐라고, 답지 않은 생각을 했을까.
“정이수 팀장님.”
화를 참는 한숨처럼 시훈이 이수를 불렀다. 아마도 시훈이 가진 인내심의 한계였을 것이다.
“아. 남자라서 안 되시나, 미안해서 어쩌죠.”
그걸 모르고 받아친 이수가 빈정대며 입술을 비틀었다. 상처가 죽 그어진 가슴에 피가 흘렀다. 출혈은 있지만, 이걸로 어떻게든 일단락될 터였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흐르고 버티면 자국을 남길지언정 피는 멎을 것이다. 이시훈이라면 쪽팔려서라도 어디 가서 정이수와 이랬다고 나불대지는 못할 테고.
이수가 어둠 속에 침묵하는 시훈을 뒤로하고 몸을 물리던 때였다.
“읏…!”
시훈의 손이 이수의 허리를 붙들어 상체를 바짝 당겨 왔다. 움직임에 센서 등이 팟 켜지며 놀라고 당황한 이수의 얼굴이 조명 아래 생생하게 드러났다. 외꺼풀진 눈과 가늘게 떨리는 움직임마저 모두 보이는 가까운 거리였다.
허리를 비트는 무력한 반항은 정이수를 결박하고 바닥을 샅샅이 헤집고 싶은 시훈의 욕구를 부채질할 뿐이었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시훈이 얼굴을 붙여 속삭였다.
“동갑이라고 말을 막 놓네….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살랑이며 빠져나가는 정이수를 잡을 수 없다. 그러니 시훈은 물길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보를 세워 제 안으로 고일 수밖에 없도록.
“…….”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난 남자…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올라간 입술 끝이 한순간 뚝 떨어지고 이수의 얼굴이 구겨졌다.
* * *
몸이 현관에서부터 밀렸다. 짧은 복도를 지나 불 꺼진 침실까지 가는 동안 시훈은 잡아먹을 것처럼 입술을 붙여 왔다. 어마어마한 악력에 팔을 내칠 수 없었다. 블라인드가 절반쯤 내려온 방 안에는 달빛이 만든 그림자가 계단처럼 층을 이뤘다.
이수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자 시훈의 손이 티셔츠 속을 파고들었다. 최근 들어 살이 내렸다 싶었는데 손으로 만져 보니 역시 그랬다. 가슴 위에 솟은 돌기를 손으로 문지르자 호흡을 참아 내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처음부터 솔직하지 못했던 속내처럼 몸도 그랬다. 유두를 두 손가락에 끼워 힘을 줘 비벼 올리자 그제야 탄식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이수의 살결이 손안에서 제 것처럼 감겼다.
일부러 보이듯 티셔츠를 목까지 끌어 올린 시훈은 두 손으로 이수의 유두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화답처럼 한껏 가슴을 내민 몸이 바르르 떨렸다. 시훈은 지체하지 않고 이수의 바지 밴드를 속옷과 함께 내렸다. 무릎까지 내려간 바지 위로 성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수가 몸을 모로 뒤틀어 보려 한들 골반을 잡아 쥔 시훈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의지와 달리 발기한 성기가 꼿꼿이 섰다. 그리고 만지지 않은 성기 끝에서 새어 나온 프리컴에 주변이 번들거렸다. 그걸 본인도 느꼈는지 단번에 목과 얼굴, 그리고 몸을 발갛게 붉힌 정이수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
때를 기다려 잡아먹으라는 것처럼 착실히 반응하는 정이수를 보며 시훈은 작게 실소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번 단단히 동여매던 몸이 이렇게 야살스러울 줄은 몰랐다.
제멋대로인 정이수의 기를 꺾어 주려는 마음과 제 안에서 기묘하게 뒤틀린 오기로 침대까지 밀어붙였지만, 막상 눈앞에서 목도한 상황에 시훈이 이맛살을 구겼다. 돌이킬 수 없을 밤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진 탓이었다.
말도 행동도 멈춘 시훈을 두고 팔 아래 얼굴을 가린 이수가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하아… 구멍에 넣고 싶으면 기다려요. 씻고 올 테니까. …입으로만 빨아 주는 건 상관없을 테고.”
비뚜름한 입술이 난잡한 말을 잘도 했다. 시훈의 이마가 조금 더 깊게 구겨졌다.
“좆 보니까 식었어요? 그럼 입에다 싸고 끝내죠.”
“내가 정이수 팀장, 남자인 거 몰라요?”
성이 난 말투에 시훈의 목소리 끝이 거칠게 갈라졌다. 단번에 이시훈에게 어깨가 붙들렸다. 힘이 들어간 손끝이 강하게 파고들어 아팠다. 저도 모르게 나온 신음 뒤로 뱉은 말이 시훈의 신경을 긁어 놨다.
“…그래서 재밌는 거네….”
빈정대는 말이 우습기만 했다. 팔을 치워 내고 마주한 정이수의 눈빛이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어서였다.
정이수라는 사람은 연주하는 내내 변주하는 재즈 같았다. 예측할 수 없고, 시작과 끝을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돌이켜 보면 저를 유혹하며 허리를 돌리던 날도, 유진우 때문에 상처받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도, 제 목에 손을 둘러 같잖은 도발을 행한 모습 역시 그러했다. 그러니 시훈은 정이수가 함부로 저를 흔들지 못하도록 겹겹이 둘러싸인 막 사이에 단단한 정을 꽂아 넣을 생각이었다.
시훈이 이수의 몸을 뒤집었다. 버둥대는 허벅지를 무릎으로 고정한 뒤 상체를 비틀지 못하게 뒷머리를 손을 감아 잡았다. 적당히 힘을 줘 누르자 베개 위로 왼쪽 볼이 짓이겨졌다.
귀가 물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가까웠고, 또 화가 난 것처럼 시훈의 손길은 거칠었다. 뒤 머리카락을 틀어쥐자 신음이 절로 나왔다. 아파서가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시훈이 제 속마음을 파고든 탓이었다.
“왜 떨어요.”
눈이 크게 뜨였다. 머리카락을 붙잡은 그의 손이 방향을 달리해 저를 바라보게 했다. 모로 뒤틀린 얼굴이 불편했다.
“이것도 내숭인가?”
이수의 머릿속이 새카매졌다.
“…….”
긴 속눈썹이 속절없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건지 힘껏 깨문 입술에 피가 날 것 같다. 시훈은 이수의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었다. 갑자기 들어온 손가락에 헛구역질을 참아 낸 이수가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다. 그런 이수를 내려 본 그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자며. 손가락 하나 못 물어요?”
압도됐고, 두려웠다. 아랫입술에 박힌 이가 힘없이 풀어졌다.
“으… 읍….”
이내 제자리로 돌아온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남자가 물린 검지와 중지가 입안에서 젖어 들었다. 그사이 시훈은 침대 옆 협탁을 뒤지듯 열었다. 가능성은 반반이었지만 혼자 사는 남자라면 이쯤에 뭔가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빠르게 위 칸부터 차례로 열어 본 그가 마지막 서랍을 열었을 때 이수의 몸이 굳었다.
“이 정도가 좋아요?”
이수의 머리 옆으로 젤과 딜도, 콘돔 몇 개가 떨어졌다. ‘겨우’라는 말을 부러 붙이지 않아도 그것이 제 치부를 어떤 식으로든 놀리려는 의도인 걸 알았다.
“빨아요.”
종용하듯 입안의 혀를 지그시 누르자 이수가 다시 손가락을 빨았다.
“잠잘 시간 쪼개 가면서 이딴 걸로 자위해요?”
침대맡에 앉아 콘돔을 씌운 딜도를 구멍에 밀어 넣었을 모습이 그려졌다. 유진우를 생각했을까. 아니, 죄악감에 차마 존경하는 유진우를 떠올리지 못하고 포르노를 보며 신음했을지 모르겠다. 덜렁거리는 실리콘 딜도를 손에 쥔 시훈은 모양과 크기를 가늠하다 이내 바닥에 던져 버렸다. 크기도 모양도 제 것에 한참 미치지 못할 만큼 작고 얇았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뒹구는 딜도를 두고 이수의 입에서 손가락을 뺐다.
“하… 으…!”
엎드린 이수의 허리를 세워 제 쪽으로 무게를 실어 당겼다. 무릎을 굽혀 앉은 시훈의 허벅지에 엉덩이를 붙여 앉은 모양이 되었다.
뒤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이수의 상체를 끌어안은 시훈은 뾰족이 세운 젖꼭지를 젖은 손가락으로 비비고 문질렀다. 소름 돋는 감각이 몰려왔다. 완연하게 모양을 갖춰 선 성기가 꺼덕였고 유두는 간지러웠다.
“…으…….”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자 시훈의 발기한 물건이 엉덩이 사이로 느껴졌다. 단단해진 좆을 엉덩이 사이에 문지르자 천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훈이 감도 체크라도 하는 것처럼 살짝살짝 허리를 쳐올리자 박을 타지도 못하는 이수의 몸은 엇박으로 어긋나기만 했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움직여 봐요. 잘한다며. 앞은 이미 다 젖었잖아.”
가슴을 희롱할 때부터 흘러나온 프리컴이 둥그렇게 시트를 적셔 자국을 남긴 걸 보고 하는 말이었다. 시훈이 있지도 않은 가슴을 쥐었다 펴며 유륜과 유두를 끊임없이 긁어내고 손가락 새로 굴렸다.
“아… 흑….”
남자하고 자 본 적 있냐고, 내가 잘한다고. 언젠가 시훈의 몸 위에서 허리를 흔들었다. 수모를 되갚아 주려던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시훈이 재촉하며 퍽 허리를 쳐올렸다. 이수가 어설프게나마 시훈의 물건 위로 엉덩이를 내리자 회음부와 구멍 사이를 단단한 성기가 쑤시듯 압박해 왔다. 안으로 박히지 못할 감각을 쫓으며 이수는 앞뒤로 허리를 흔들었다.
“흣… 으.”
등이 휘어 있는 이수가 고꾸라지지 않도록 시훈은 결박하듯 열이 오른 몸을 단단히 껴안았다.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아 보려 해도 시훈이 간헐적으로 허리를 쳐올릴 때면 저도 모르게 소리가 새 나왔다.
입술 새로 더운 숨과 숨죽인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이수의 몸짓에 직접 구멍에 넣고 흔든 것도 아닌데 감질났다. 시훈은 손을 내려 이수의 매끈한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오므리는 다리를 제지하려 허벅지 안쪽을 약하게 내치자 다시금 무릎이 열렸다.
“만져 줄 테니까 싸요.”
발기한 성기가 배꼽까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숱이 적은 음모와 함께 뿌리부터 성기를 잡아 쓸어 올리자 휘어 있는 몸이 무너질 듯 바르르 흔들렸다. 이수의 어깨에 턱을 올려 더 바짝 끌어안았다. 내려 본 시선 아래 뾰족하게 선 젖은 유두가 새어 들어온 빛에 반사돼 더욱 야해 보였다.
발기한 성기를 쥐고 위아래로 흔들 때마다 정이수의 몸은 시시각각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 하으… 응.”
“…예민하네.”
혼잣말을 내뱉은 시훈이 어깨를 돌려 이수의 등을 시트에 고정했다. 매트리스에 던져진 몸이 튀어 오르기 전에 시훈이 허벅지 뒤쪽을 들어 무릎을 눌렀다. 다리 사이에 앉은 시훈은 곧장 벨트와 버클을 내렸다. 시훈의 행동에는 주저함이 전혀 없었다. 이대로 삽입까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손에 젤을 들고 있는 시훈의 손을 이수가 붙잡았다. 삽입 섹스라면 너무 오랜만이라 덜컥 겁이 났다.
“안 넣어. 그러니까 죽는 얼굴 그만해요.”
단호한 말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팔꿈치를 세워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시훈이 허벅지를 거세게 끌어당기자 단번에 시트 위로 몸이 넘어갔다.
미지근한 젤이 성기 위로 흐르고 미끈거리는 요도를 시훈의 엄지가 자극해 왔다.
“아… 흑!”
이질감은 쾌감으로 탈바꿈하며 이수의 몸을 뒤틀어 놓았다. 바지에서 성기만 뺀 채인 시훈은 망설임 없이 이수의 것과 제 것을 한 손에 쥐었다. 단단히 발기한 물건이 흉흉하게 모양을 갖췄다. 시훈은 핏줄이 불뚝 선 제 것과 이수의 성기를 함께 쥐고 느릿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젤이 열 때문에 물처럼 흘러내려 시훈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물 터는 소리가 선명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신음과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터졌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시훈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너울져 흔들리고 있었다.
“으흑… 흡, 나와, 그만…!”
“후… 참아요.”
요도를 문지르는 시훈의 엄지손가락에 뒷덜미가 바짝 굳었다. 앞으로든 뒤로든 자위를 한 건 너무 오래전이었다. 애가 탄 몸은 마치 누군가의 손길을 바라고 기다린 것처럼 멋대로 헐떡였다. 호기롭게 시훈을 도발한 정이수는 온데간데없고, 예민한 몸은 만지는 족족 이리저리 움찔거렸다.
성기를 쥔 손이 속도를 올렸다. 힘을 준 손안에서 꺼덕이는 성기는 밀려오는 사정감에 아우성을 쳤다. 더, 더, 더. 아니…, 아니…, 그만…! 제 안에서도 욕정은 끊임없이 변덕을 부린다. 그것이 시훈에게 얼마나 자극으로 다가갈지 상상도 못 하고.
온몸이 절정을 향해 가며 감각이 한곳에 집중됐다. 솟은 핏줄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훈의 기둥에 제 물건이 멋대로 지탱하며 비비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으, 읏! 아, 아흐, 아… 앗, 흑!”
“후우, 읏!”
그리고 더 이상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때 시훈의 손에 의해 동시에 사정했다. 가슴 위로 사출된 정액이 턱과 입술까지 튀었다. 누구 것인지 모르게 섞인 정액이 상반신을 축축하게 뒤덮었다.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사정 직전 엉덩이가 시트에서 들렸다. 전혀 손대지 않은 구멍이 마음대로 움찔거리고, 여전히 힘을 빼지 못한 몸의 떨림 또한 쉬이 멈추지 않았다.
“하아, 하….”
이수의 다리 사이에 앉은 시훈은 여전히 두 개의 성기를 놓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낼 기세로 손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 하며 한껏 예민해진 이수를 자극했다.
“…그만… 그만해요.”
가라앉은 목 때문에 제대로 나오지 않던 목소리가 숨과 함께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업무를 마친 사람처럼 단박에 손을 뗀 시훈은 시트를 끌어다 제 성기를 닦아 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훈이 매무새를 가다듬는 동안 이수는 탈력감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벨트를 채우고 손에 묻은 정액을 손수건으로 닦아 낸 뒤 시훈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수는 몸을 모로 돌리는 대신 간신히 티셔츠를 끌어 내리고 시선만을 반대로 돌렸다. 이불을 끌어다 하반신을 덮지도 못했다. 힘을 잔뜩 주었다 풀어진 손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해서였다.
시훈은 그런 이수를 내려 보고 발끝에 채는 물건을 집었다. 협탁 위에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버려요.”
딜도였다. 뒤돌아보지 않은 이시훈이 침실을 나가고 잠시 뒤 현관문 도어 록이 열리고 닫히는 익숙한 전자음이 들렸다.
“…….”
완전한 정적만 남은 오피스텔에서는 조금 전 나눈 정사는 애초부터 없던 일처럼 느껴진다. 눈을 도르르 굴려 불이 꺼진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거실 텔레비전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닿은 천장은 시시각각 색과 모양을 달리하며 일렁였다. 소리 좀 켜 둘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은 너무나 적막하기만 하다.
“…이제 정말 구멍 팔아먹게 됐네. 좆같아라….”
어이없이 자조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같은 직책과 직함을 가진 이시훈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러 있었다. 연말 저를 욕하는 무리를 향해 욕을 짓씹던 그였다. 그러니 시작은 낯선 전학생에게 제 신분을 깨끗하게 세탁해 보려는 욕심 같은 거였다. 유진우 본부장이 아니라도 나도 당신처럼 팀을 잘 꾸릴 수 있다고. 개천에서 난 용. 그게 사실은 바로 나라고.
불륜을 저지르다 버려진 첩 같은 비참함을 마주 본 이시훈에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버려지지 않았고, 내가 유진우 본부장을 버린 것이라. 차라리 그렇게 보여지고 싶었다. 그러니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초조함을 감춘 자존심을 자꾸 세웠다.
구겨진 종이는 아무리 펴도 자국을 남긴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다 알고 있었는데… 뭐 하러 부득부득 펴 놓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종이 위로 셀 수 없을 만큼 자국을 남긴 금이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같아서 이수는 숨이 턱 막혔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 * *
어릴 적 이수는 CM송을 자주 흥얼거렸다. 짧고 간결한 멜로디가 귀에 쏙쏙 들어와서 심심할 때마다 불렀다. 그러면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집을 견딜 수 있었다.
몇 살 때부터인지 몰라도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 셋방살이하는 지하 방은 벽지에 곰팡이가 마를 날이 없었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항상 정신이 반쯤 빠진 사람 같았다. 매번 바쁘다고 말하며 허둥댔지만, 어디를 가고 뭘 하는지 몰랐다. 늘 잠을 자지 못해 눈에 벌겋게 핏줄이 터진 엄마는 한번 곯아떨어지면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했다. 엄마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이수는 굴러다니는 빵이나 과자 같은 걸 주로 먹었다. 때때로 맨밥에 김치나 단무지를 얹어 먹었지만 대부분 밥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집을 나서는 엄마가 매번 하는 말은,
‘이수야, 작은아버지만 찾으면 우리 다 해결돼. 작은아버지가… 갚아 주기만 하면, 그러면….’
웃는 엄마는 손바닥을 넓게 펼쳐 이수의 마른 볼을 감쌌다.
‘우리 아들 착해….’
볼품없이 마른 엄마는 꼭 다른 사람 같았다. 그녀는 이수의 손에 리모컨을 쥐여 주었다.
‘텔레비전 보고 놀다가 먼저 자고 있어. 알았지?’
엄마는 이수를 두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행여 이수가 집을 나가 길을 잃어버릴까 염려가 돼서라고 했다.
이수는 텔레비전을 보며 세상을 배웠다. 엄마가 집을 나가면 숨이 죽은 베개 위에 앉아 채널을 죽 돌려 보았다. 텔레비전 속에는 본 적 없는 세상이 많았다. 귀여운 만화 캐릭터들이나 변신 로봇들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깨끗하고 넓은 집, 단란한 가정, 열두 가지도 넘을 반찬이 놓인 밥상 같은 것들이 그랬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는 그들을 보며 이수는 베개에 몸을 뻗었다.
아빠가 죽고 난 뒤 엄마가 작은아빠의 행방을 찾는 일에 미치기 전까지 개중 몇 가지는 비슷했다. 가난해도 그럭저럭 한 밥상에 둘러앉아 같은 국을 떠먹으며 소리 내 웃었고, 가끔 음식을 싸 들고 멀리 소풍을 다녀오기도 했다.
마른 다리를 이리 휘적 저리 휘적대며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그다음에는 광고가 나왔다. 15초짜리 짧은 노래는 어린 이수가 따라 부르기 좋았다.
여섯 살 먹은 이수는 과자를 먹으며 CM송을 따라 불렀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 중 한 가지라도 가지고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왔어요? 지금 식사 마치셨어요.”
병실에서 배식판을 내오던 요양 보호사가 문가에 서 있는 이수를 알아봤다.
“안녕하세요.”
“잠을 많이 못 잤나 봐요? 얼굴이 피곤해 보여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해가 뜬 아침에 간신히 눈을 붙였다. 그리고 오후가 돼서야 요양원에 도착했으니 안 그래도 마른 얼굴이 좋아 보일 리 없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이수를 심란하게 만든 이시훈과의 일은 요양원에 들어오자 까맣게 잊혔다. 불안을 또 다른 불안이 잠식했다.
요양원과 정한 날짜에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지만, 발걸음은 매번 무거웠다. 이제 더운 기운이 느껴지는 밖과 달리 요양원은 언제 와도 서늘했다.
창 너머로 뭘 보는지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미동도 없었다. 이수가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제야 엄마가 이수를 바라봤다.
“엄마, 나 왔어. 밥을… 왜 이렇게 안 먹었어.”
조금 전 보호사 손에 들려 나간 밥은 손도 대지 않았길래 걱정부터 튀어나왔다.
“…아이구!”
“…….”
“삼촌! 조금만 더 말미를 달라니까 또 왔네…! 지금 내가 찾고 있어요…. 여기 어디 주소 받아 놓은 게 있는데….”
“…….”
멍하게 초점 없던 눈이 빛을 보이며 반색했다. 엄마는 침상 옆에 있는 서랍장을 열다 말고 덥석 이수의 손을 잡아끌었다.
“내가 그래도 이자는 꼬박꼬박 넣어 줬잖아. 진짜 다 갚는다니까 그러네. 우리 아저씨가… 우리 아저씨가….”
이수의 손바닥에 제 손을 비비는 엄마는 호들갑을 떨다 아빠 이야기에 낯을 바꿨다. 말없이 고개를 숙여 엄마의 손을 쥐었다. 곧 보호사가 들어와 식사한 테이블과 침구를 정리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에게 이제 됐다고 앉으라며 안색을 살폈다.
“오늘은 못 알아보시나 보네.”
어제는 핸드폰 사진 보고 아들인 거 알아보셨는데…. 미안해 죽겠다고 어찌나 우시는지 아침에 눈이 퉁퉁 부어 혼났어요. 대개 엄마는 이수를 인식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아빠의 이름을 불렀다가 다음은 아빠에게 보증을 세우고 사업을 날려 먹은 작은아버지. 그리고 사채업자나 일수꾼으로 이수를 착각했다.
대화는 길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이수 앞에서 그 인간을 잡아야 한다느니, 아빠는 언제 온다니 하던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배터리가 방전된 사람처럼 힘을 쭉 뺐다.
“그나저나 지난번에는 버스 정류장까지 뛰쳐나가셨어요. 병실 문을 어떻게 잠갔는지 열리지를 않아서 혼났네.”
“아… 네. 죄송합니다.”
엄마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탈출을 감행했다. 바깥문을 꼭 걸어 잠그는 시늉을 하고 무작정 오는 차를 붙잡아 타려 한다 했다. 이수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요양 보호사가 자리를 뜨고 난 뒤 침대 옆에 있는 낮은 서랍장을 칸칸이 열어 보았다. 개별 포장 되어 있는 간식거리와 손톱깎이, 비누, 바르지 못해 굳어 버린 매니큐어, 그리고 어린 이수를 무릎에 앉혀 놓고 찍은 사진을 끼운 액자가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액자를 꺼내자 그 아래 깔린 제 명함 한 장이 보였다.
[인사이트
기획 1본부 기획 1팀 사원 정이수]
입사한 뒤 받은 첫 명함이었다. 기쁜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와 엄마에게 건네니 이수를 안아 줬더랬다. 제정신이 돌아왔나 싶어 ‘엄마’ 하고 부르자 엄마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작은아버지 여기 있대?’
버린 줄 알았는데 용케 가지고 있었나 보다.
“엄마, 밥 잘 챙겨 먹어. 다음에 또 올게.”
오기 전까지는 미루고 미뤄 둔 숙제처럼 불편하다가 막상 보면 슬프고, 돌아갈 때는 왠지 미안했다. 그것이 이수가 엄마에게 가진 마음이었다. 요양원을 나오며 요양 보호사에게는 약간의 수고비를, 간호사들에게는 사 들고 온 음료수를 건네었다. 한 번씩 요양원을 나가겠다 난동을 부리는 통에 얼마나 수고스러울지 안 봐도 선했다.
요양원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나오는 길이 제법 멀었다. 차창 밖으로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오렌지색 하늘이 예쁘다 여기면서도 이수는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회의 결과를 정리해 보고를 마친 시훈은 시계를 내려 봤다. 유난히 몸이 늘어진다 싶더니 점심시간이 지난 것도 몰랐다. 새벽부터 출근해 먹은 것 없는 빈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구내식당은 이미 점심 식사 운영이 끝났을 테고 회사 근처에서 간단히 먹고 올 생각으로 밖으로 나섰다.
해가 제법 뜨거웠다. 사옥 밖 큰길가에는 하늘 높이 뻗어 있는 나무들 아래 짙은 녹음의 그림자가 져 있었다.
회사 뒤 구불구불한 골목에는 직장인을 상대로 하는 식당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시훈은 한식집으로 발을 들였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각이라 한차례 썰물처럼 사람이 빠져나간 홀은 한산했다. 입구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던 시훈의 눈길이 곧 한곳에 머물렀다.
막 서빙된 초당순두부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주말 내내 제대로 입에 넣은 음식이 없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떠오르는 이시훈 때문이었다. 이수는 얼굴을 살짝 찌푸려 저릿한 감각을 애써 지워 봤다. 누군가와 잠자리를 한 것도, 사정을 한 것도 까마득했다.
주말 동안 침대 시트를 세탁기에 욱여넣고 빨래를 하다가 협탁에 버리라 올려놓은 딜도를 재차 아래 칸에 밀어 넣고 애써 무력감을 떨쳐 보려 했다.
그리고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진 건지 시작점을 찾아보려다 그만두었다. 엎질러진 물은 도로 담을 수 없었다. 감정도 뭣도 없이 치기로 시작된 비틀린 관계, 몇 번 대 주고 맞춰 주면 언젠가 나가떨어지겠지. 그때까지만 참아 내면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 냉담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시훈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정이수와 붙어먹는다는 소문 따위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적어도 유진우 본부장에게서 한 가지 교훈은 얻을 수 있었다. 포장이 색달라 재밌는 건 민낯을 마주하는 순간 한편에 밀어 두게 된다는 사실을.
오후 내내 긴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먹고 싶지 않아도 버틸 만큼은 배를 채워 놓아야 했다. 입맛이 돌지 않아 숟가락으로 뚝배기 안을 휘휘 젓기만 하는 이수의 맞은편에 누군가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합석해도 돼요?”
대답하기 전에 앉아 놓고 묻는 심보는 뭘까. 이수는 상대를 흘깃 바라보고 다시 뚝배기로 시선을 내렸다. 시훈은 메뉴판을 보지 않고 물과 수저를 놓아 주는 점원에게 이수와 같은 거로 달라고 했다.
“점심 늦게 드시네요.”
“네. 결재 때문에.”
이수의 단조로운 대답 이후 막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예의 차려 가며 밥 먹자고 할 때는 들은 체도 안 하더니, 이제 와 한 테이블에 앉을 건 뭐람…. 밥을 먹느니 마느니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 우스웠다. 그러잖아도 없던 입맛이 한순간에 달아났다.
시훈은 의자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고 태평하게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는 기어코 벽을 넘어 이수를 헤집어 놓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일어난 짧은 충돌은 불시에 당했으니 반격의 타이밍을 놓친 거로 여겼다. 하지만 지난밤 그렇게 완력으로 밀릴 줄은 몰랐다. 주도권은 순식간에 빼앗겼고 이시훈은 당연히 남자와 섹스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도 와장창 부서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훈의 앞으로 초당순두부를 담은 뚝배기가 차려졌다. 시훈은 수저를 드는 대신 물을 마셨다. 배고파 들어온 곳에서 막상 정이수를 보니 배고픔보다도 목이 말랐다. 재차 빈 잔에 물을 채워 마시는 모습을 본 정이수가 순두부를 뭉개다 말고 문득 시훈에게 물었다.
“낙하산이면 좀 그럴듯한 위치가 좋지 않아요? 실무 간 보는 건 아닐 테고.”
시훈이 빈 물 잔을 밀어 놓았다.
“그렇게 보여요?”
“어차피 앉을 자리는 비어 있으니까 재미로 해 보는 거예요?”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이시훈은 그럴 수 있다. 실수하거나 삐끗해도 그건 그것대로 경험이라 치면 될 테다. 실패해도 성공할 때까지 기회는 얼마든지 보장되어 있을 테니. 빈 잔에 다시 물을 채우며 시훈은 무심히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정말 하라는 건 빠지지 않고 다 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딱 원하시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그러다 대학 원서 내러 가는 길에 광화문 서점 앞을 지나는데, 큰 옥외 광고판 글귀가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소위 말하는 재벌가의 코스라는 것이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유학까지 짜인 대로 잘 걸으면 되는 길 말이다. 그 길을 잘 걷다가 제대로 벗어난 시훈을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조건에 부합하지 못한 또 한 명의 아들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는 시훈의 얼굴에 언뜻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시작하게 됐죠. 감화돼서.”
이수의 숟가락질이 멈췄다. 쉬운 인생이고, 잡지에 실리기 좋은 드라마틱한 스토리였다. 철없는 재벌 집 아들이 적성 찾아 꿈 찾아 선택한 직업. 저는 어땠더라…. 지하 방, CM송, 과자, 남은 부스러기들. 그런 생각에 자연스럽게 넘을 수 없는 벽을 실감하게 된다. 밥 한 숟갈 제대로 뜨지 못한 식사를 깨작이는 이수를 응시하며 시훈은 짧은 침묵 뒤 입을 뗐다.
“퇴사할 생각, 안 해 봤어요?”
누가 봐도 삐거덕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는 꼴인데 버티고 있는 정이수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 팀장님이 할 질문으로는, 좀 안 맞는 것 같은데….”
상납 운운하며 간밤에 몸을 섞은 사람이었다. 그만 수저를 내려놓은 이수가 시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스카우트도 아니고 인사이트에서 팀장직 수행하다 이직이라…. 레퍼런스 체크하면 무슨 말 나올까요? 직원들이 제 소문 다 아는데.”
울컥 치미는 열감을 애써 삼킨 이수는 말을 더 잇지 않았다. 상대를 향해 담담하게 내리 푼 속내가 제 발등을 찧었다. 그런 이수를 알지 못한 시훈이 무심하게 짧은 감상을 전했다.
“아집 부리는 것 같아요. 유진우 본부장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너 없어도 잘하고 있다고 증명하고 싶은 것처럼요.”
그리고 시훈의 말에 더 세게 발등을 찧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이수의 말문이 막혔다.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유진우가 영국으로 발령되기 전까지 필사적이었다. 그 꼴을 안 보이려야 안 보일 수 없는 위치에 이시훈이 있었다.
이수의 골은 깊어지는데 턱을 치켜든 시훈은 아무런 동요 없이 고고한 자태로 이수를 내려 본다. 네 속을 다 읽고 있다는 표정으로. 시훈의 짐작이 사실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몰래 새끼손가락을 그러쥔 비밀이 까발려진 수모를 또다시 겪는 기분이었다.
짧은 정적과 함께 팽팽하게 시선이 얽혔다. 그러다 불쑥 이수가 시훈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러니까 잘 좀 봐주세요, 회장님 아드님께서. 저 같은 흙수저랑 괜한 실적 경쟁 마시구요.”
냉정을 유지하던 시훈의 미간이 좁아졌다. 정이수야말로 라인 잡아 보겠다는 사람치고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 이수는 다시 수저를 들었지만, 음식을 차마 입에 넣지 못했다. 스스로 얼굴에 침을 뱉은 찝찝함에 그나마 누그러진 속이 다시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결국 테이블 위로 수저를 내려놓을 무렵 기다렸다는 듯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했다. 요양원이라 적힌 액정을 확인한 이수의 얼굴 위로 난감함이 덧씌워졌다.
손을 뻗어 화면을 돌려놓은 이수는 의자에 걸어 놓은 재킷을 챙겼다. 이제 신경은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을 향해 있었다. 그런 이수를 두고 한발 앞서 이시훈이 몸을 일으켰다.
“정 팀장님, 식사하세요.”
“됐어요, 생각 없어요.”
계산서를 손에 든 시훈이 이수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말랐어요. 잘 봐줄 테니까 제 취향도 존중해 줘요.”
“…하.”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눈을 치켜올린 이수가 모멸감을 삼켰다. 이시훈이 계산서 모서리로 밀어 놓은 반찬 그릇이 뚝배기 앞에 멈췄다.
“적어도 노력은 해야죠. 지난밤에 킥오프했으니 실전입니다. 이제부터.”
계산하고 나서는 시훈이 가게 문을 열자 더운 열기가 밀려들어 왔다. 받지 못한 전화도 끊겨 버렸다. 엄마가 요양원을 뛰쳐나갔다는 연락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문제일까.
이수는 시훈에 의해 밀린 찬과 식은 음식을 멀거니 바라보다 제 옆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답답한 속이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 * *
“안녕하십니까!”
아침 8시를 조금 넘긴 시간. 요즘 들어 출근 시간을 조금 더 앞당긴 이수가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누군가가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인사를 해 왔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1, 2팀이 함께 쓰는 넓은 사무실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정이수 팀장님, 인턴 고우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청바지와 하얀색 셔츠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임시로 발급받은 방문증이 발랄한 인턴처럼 목에서 대롱대롱 움직였다.
계약직이라도 좋으니 비어 있는 자리는 둘 다 경력으로 뽑아 달라는 부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력직 직원 한 명과 함께 세트 구성처럼 인턴 한 명이 딸려 들어왔다. 상반기에 진행한 공모전의 대상 수상자에게 일정 기간 동안 인턴십 기회가 부여되었고, AE를 희망한다 했다. 저번 주에는 경력직 직원이, 이번 주부터는 인턴이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탐탁지 않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삐걱대는 팀을 모래라도 쌓아 괴어 놓아야 했다.
청춘. 말끔하고 잘생긴 청년. 첫인상이 그랬다. 그리고 언제 만난 적 있던가. 사옥에서 열린 공모전 시상식에 참석한 기억은 없는데…. 오며 가며 봤을지도 모르겠다. 수상자를 대상으로 인턴십을 시작하기 전 일정 기간 교육이 있었으니 말이다.
깨끗하게 정리한 자리 위로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마케팅 서적들이며 사내에서 발행한 1년 치 사보가 월별로 쌓여 있었다. 펼쳐 놓은 사보의 한 페이지에는 사진과 함께 소속과 직책이 기재된 짧은 이수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이수의 눈길을 따라 고우재가 자신의 책상을 돌아보고 눈을 반짝였다.
“탕비실 구석에 있더라구요. 살펴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이 나이보다 더 앳되어 보였다. 게다가 처음 만난 상사를 어려워하거나 낯을 가리지도 않았다. 매번 익숙한 얼굴과 풍경이 자리하던 사무실에 갑자기 싱그러운 화초 하나가 배달된 기분이었다. 곁에 두고 어떻게 키워야 할까 고민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업무는 사수인 김민주 대리가 봐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인턴은 다른 직원들이 사무실로 도착하는 족족 깍듯이 예를 차려 인사했다. 새로이 입사한 경력직 직원과도 인사를 나눈 뒤 9시 반이 되자 두 사람이 인사팀의 부름을 받고 제대로 된 사원증을 받아 왔다. 그럭저럭 다시 구색이 갖춰지고 있었다.
“구 팀장님. 좀 전에 주신 시안 확인했는데요, 자막이 그림하고 잘 안 붙는 것 같다고…. 폰트 문제인지 아니면 레이아웃 문제인지, 네. 광고주가 예민해요. 영어가 한글로 바뀌어 들어가니까 느낌이 안 산다고. 네,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십시오.”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 앞에 섰을 때 누군가 이수를 가볍게 불러 왔다.
“정 팀장.”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주현탁 실장이 이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썩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이수가 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구, 사무실은 여전히 살벌하네…. 요즘 일은 할 만하고?”
주 실장이 1팀 이시훈 팀장 자리로 슬쩍 고개를 빼다 묻는다.
“네, 괜찮습니다.”
외근이 잦은 주현탁 실장은 평소 회사로 출근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지나다 우연히 만난 건지 아니면 저에게 용무가 있어 찾아온 건지 모르겠다. 더 나눌 대화도 없어 인사를 하려는데 사무실 안을 빤히 바라보던 주 실장이 별일 아닌 듯 물었다.
“연초에 P사로 이직하려다가 막혔다며? 아는 후배가 거기 인사과에 있어 놔서.”
요번에 휴가 갔다가 우연히 만났거든. 주 실장이 콧등을 찌푸렸다. 워낙 발이 넓고 정보가 많은 사람이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편하게 나눌 만한 주제도 아니었다. 하물며 상대가 직장 상사라면 말이다. 잠시 뜸을 들인 이수가 “그렇게 됐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입을 다물자 주 실장이 툭툭 가벼운 투로 핀잔을 주었다.
“정 팀. 왜 그러냐, 상도가 있지. 거기 경쟁사잖어. 작년에 우리한테 비딩마다 번번이 밀려서 지금 안달이 났더구만. 위에서 그런 거 아주 싫어한다구. 좆같아도 별수 있나…. 동종업계 이직 금지. 이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아도 걸고넘어지면 아주 귀찮아요.”
어투 때문에 그렇지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느 하나 가볍게 들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사규에 적힌 내용을 누가 모르나. 알면서도 메뚜기처럼 몸값 올려 떠나는 게 이 바닥인걸. 주 실장이 일부러 한참 지난 이야기를 입에 올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내가 또 말이 많다. 이 얘기 하려고 온 거 아닌데…. 정 팀, 나하고 일 하나 하자.”
역시나.
“어떤 일… 말씀하십니까.”
“업체 미팅 가는데, 우리 실 애들이 영… 쯧.”
주 실장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부서 간 협업이라기에는 기획팀 영역과 결이 다른 미팅임이 분명했다. 회식 자리에서 잠 오는 오후 2시 미팅을 농담 삼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이수 팀장 정도면 잠이 확 깨지 싶은데….”
술자리서 하는 너스레였다는 걸 주 실장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의 제안은 생각보다 완고하다. 이러려고 이직이니 뭐니 이수에게 썩 불리한 말부터 꺼내 놓은 것일 테다. 주 실장이 곤란함에 미간에 슬쩍 주름이 지는 이수를 곁눈질로 훑었다. 곧 탈을 바꿔 유들유들하게 목소리를 늘인다.
“지분 좀 챙겨 달라며- 정 팀이 광고주 좀 미리 만나 봐 줘. 여 본부장한테도 내가 말은 다 해 놨거든. 이러면 서로서로 좋은 거 아닌가?”
같은 시간,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한데 모아 든 시훈이 유리 벽 너머의 두 사람을 발견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정이수의 어깨 위로 올라간 주현탁 실장의 손이 거슬렸다.
실실 웃으며 말을 뱉는 주 실장 앞에서 정이수의 표정은 예의를 차리고 있지만 반쯤 굳어 있었다. 주 실장의 시선이나 비릿한 미소, 성적인 의도가 저변에 깔린 손길에 시훈이 이맛살을 구겼다. 툭툭. 파쇄할 서류를 한 손에 말아 쥔 시훈이 발길을 뗐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수고해.”
사무실 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등장한 이는 이시훈이다. 툭. 이수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쥔 주현탁 실장은 스윽 이시훈을 볼 뿐, 인사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주 실장이 자취를 감춘 복도 끝을 보며 시훈이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이수를 불러 세웠다.
“뭡니까?”
“일이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답을 남긴 이수가 시훈을 피해 출입문 태그를 찍는다. 달리 더 물을 수 없었다. 다른 팀 사정을 굳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고. 그저 상대가 주 실장이라 마음에 걸리는 것뿐이었다. 시훈은 어느새 사무실을 가로질러 자리로 돌아가는 정이수를 바라봤다. 턱을 손에 괴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를 바라보던 시훈도 탕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쇄기까지 돌아갈 필요 없는 길을 뱅뱅 돌아가게 됐다.
며칠 뒤, 외근 후 다시 복귀할 생각은 없는 듯 자리를 정리한 정이수가 사무실을 나서며 팀원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당부했다. 곧 사무실을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정이수의 모습은 마치 전장에 나서는 무사처럼 비장해 보였다.
해가 뜨거운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사무실에서 마주치는 정이수는 고개는 숙였지만 입은 열지 않았고, 서로를 반쯤 투명 인간 취급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단 하루였을 뿐인 날을 어쩌면 두 사람 다 기억에서 소각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다시 불씨를 지피기 전까지는.
광고주와 점심 식사를 하고 배웅을 마친 시훈의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미향에 있지? 안쪽에 주현탁 실장이랑 한잔하고 있어. 잠깐 들렀다 가.
미닫이문을 열자 반주를 마시는지 잔을 기울인 여민준 본부장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어, 이 팀장. 왔어? 앉아.”
신발을 벗고 올라선 시훈이 여민준 본부장, 주현탁 실장을 향해 차례로 머리를 숙였다. 여 본부장의 옆자리에 앉을 때까지 주 실장은 슬쩍 눈썹만 들어 올릴 뿐 별다른 인사를 하지 않았다. 시훈에게도 잔을 내어 준 여 본부장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대충 전해 듣기는 했지만 모르긴 몰라도 대폿집 회식 이후로 주 실장이 시훈의 태도를 영 껄끄럽게 여기는 것만은 분명했다. 여민준이 넉살을 떨었다.
“오늘 회가 좋으네. 주 실장님, 한잔하세요.”
발이 넓은 주 실장은 여 본부장에게 말하자면 필요악 같은 존재였다. 계보로 따지자면 저와 척을 지고 있는 사이지만 라인이 대수랴, 그런 것 따지지 않고 안하무인 제 꼴리는 대로 사는 사람이 주현탁 실장이라 살살 달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함부로 가지치기하기에는 주 실장이 발을 걸쳐 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주 실장은 잔을 받아 들고 시훈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않았다. 시훈 역시 입매를 굳히고 제 앞에 놓인 잔만 바라볼 뿐이었다.
안 봐도 훤했다. 남들은 모른 척 넘길 수 있는 걸 여차하면 치받을 각오도 했을 것이다. 아무렴. 누구 아드님인데 꿀릴 게 있으려고. 시훈이 제아무리 평사원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재벌가 자식들이 가진 기질이 드러나는 순간이 이럴 때다. 남들에게는 비범함이나 용기가 필요한 일을 할 때도 눈치 보지 않고, 좋든 싫든 타고난 뒷배에 제 의견을 피력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런 놈이 제 나와바리인 양 회사를 주무르는 주 실장과 상극인 건 생각만으로도 피곤한 문제였다.
빈 잔을 내리고 회를 한 점 집어 먹는 주 실장의 미간에 여전히 심지가 도드라져 있다.
“에이… 실장님,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시구요. 우리 다 인사이트에서 오래오래 일할 사람들인데….”
잔을 넘겨 마신 시훈에게 여민준 본부장이 눈짓을 주었다. 시훈은 인상을 짐짓 구기다 술병을 들었다. 일종의 화해의 제스처였다. 그 모습에 질겅질겅 회를 씹던 주 실장이 못 이기는 척 잔을 들었다.
“내가 언제 이 팀장하고 마시고 싶댔나요. 사람 빌려 쓴 게 미안해서 식사 대접하는 거지.”
조소를 삼킨 시훈이 술병을 거뒀다. 인사는 끝이 났고 아랫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도 뭣 같지만 해낸 것 같다. 아무래도 표정 관리를 더 하다가는 얼굴에 경련이라도 일어나지 싶었다. 시훈이 자리를 뜰 적당한 기회를 보고 있을 때 여민준 본부장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어땠어요, 정이수?”
회 한 점을 입에 넣은 여 본부장이 태연하게 물었다.
“걔네 브랜드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 입혀 갔는데 어땠겠어요.”
“사비로요?”
“진행비는 뒀다 뭐 해요.”
상황을 보자면 주현탁 실장의 우스갯소리처럼 정이수가 얼굴마담으로 동행했다는 뜻이었다. 그걸 승인하고 묵인한 쪽은 여 본부장이고.
“회의실에 정이수 들어가니까 뻑이 가서는…! 미팅하는 내내 얼굴 뚫어지는 줄 알았어요.”
말을 잇는 주 실장은 당시에 느낀 희열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떠들어 댄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는 둥. 정이수가 제법이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말이다.
“북미 쪽 애들인데, 아시아 시장 잡으려고 공격적으로 투자한단 말이에요. 조만간 연락 올 거예요, 아마.”
대뜸 방으로 들어와 업무 협력 좀 하자더니 거하게 일을 물어 왔다. 정이수한테 말은 다 해 놨으니 반나절만 빌려 달랬나. 여 본부장이 감탄 섞인 헛웃음을 보인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시훈이 이를 까득 깨물었다. 도저히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사람 없는 자리에서 빌려 가니 빌려주니. 얼마 전 복도에서 주 실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굳어 있던 정이수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았을 정이수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이 팀장, 한잔하지?”
기분이 퍽 풀렸는지 주 실장이 술병을 기울였다. 술을 받고 잠시 고민하던 시훈이 잔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일 때문에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무표정하지만 시훈의 저조한 기분을 두 사람 다 느낄 수 있었다. 때마침 연속해서 울리는 핸드폰 진동음이 아니었다면 주 실장이 다시 한번 혀를 찼을지 모를 정도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여민준 본부장이 눈치를 살피며 짐짓 모르는 척 시훈을 올려 봤다. 어디가 또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정확한 포인트를 잡을 수 없어 이쯤에서 시훈을 빼놓았다.
“오후에 회의랬지? 가 봐, 늦겠네.”
결국 주 실장의 잔에는 여 본부장이 잔을 부딪치는 걸로 유야무야 상황이 종결됐다. 시훈이 잔뜩 굳은 얼굴로 식당을 나섰다. 가문 여름, 오늘은 비가 당장이라도 내릴 듯 하늘이 궂었다. 그리고 시훈의 기분도 못지않게 잔뜩 무거웠다.
* * *
-주차장입니다. 일 끝나면 내려와요.
방금 전 퇴근한 이시훈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메시지를 보낸 시간은 9시. 30분 뒤 업무를 정리한 이수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상향등을 켜는 차가 있었다. 이시훈이었다.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자 그가 창을 반만 내렸다.
“타요.”
“렌트한 차가 있어요. 외근 때문에.”
“내일 가져가면 될 일이고. 일단 타죠.”
시훈의 어조는 건조했다. 조수석에 올라타자 그르릉 엔진음을 낸 차가 곧바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도착한 곳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의도를 눈치채고 머뭇거리는 이수가 로비 한쪽에 서서 눈을 굴렸다. 프런트에서 카드 키를 전달받은 시훈은 이수와 속도를 맞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곧 이수를 지나 무신경하고 또 불친절하게 앞서 나간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수는 망설였다. 로비를 환히 밝히는 불빛 아래 단정한 얼굴 위로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 해요?”
버튼을 누른 시훈의 채근에 안쪽으로 발을 디디자 그는 안전 바에 몸을 기댄 채 층수를 알리는 모니터를 올려 볼 뿐이었다. 발소리도 나지 않는 복도를 걸어 카드를 댄 그가 들어가지 않고 문을 열었다. 시훈은 두어 발자국 뒤에 서 있는 이수를 돌아봤다.
아가리를 벌린 야수가 어서 발을 들이라 떠미는 기분이었다. 이수는 ‘상납’이라 지칭한 관계가 현실임을 상기했다. 그리고 그동안 섹스를 하지 않은 건 이시훈의 선택일 뿐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착잡한 기분을 감추며 룸 안으로 들어선 이수의 뒤로 새까만 문이 닫혔다.
“저녁은, 먹었어요?”
“아뇨. 생각이 없어서.”
시훈은 재킷을 벗어 소파에 올려 두었다. 생수 뚜껑을 돌려 물을 한 모금 마신 그가 이수를 향해 물었다.
“안 더워요?”
생수병 끝이 이수의 셔츠를 가리켰다. 이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집처럼 구는 시훈과 다르게 이수는 룸 가운데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의중은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좀처럼 모르겠다. 숙맥처럼 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이시훈의 연락과 이어진 호텔행은 이수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시원하게 트인 통유리 창 너머로 도시의 아경이 보였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이동하는 차들은 흐린 밤하늘 아래 뿌연 빛을 발했다.
“요전번에 주 실장은 왜 따라갔어요. 도와주면 뭐라도 챙겨 준다고 해요?”
이시훈이 이미 풀린 타이의 한쪽 끝을 쭉 잡아끌며 무미건조한 투로 물었다. 여 본부장에게 들었나. 뾰족한 가시가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네. 뭐.”
“우리 영업직 아니잖아요. 기획자가 책상 앞에서 머리를 굴려야지, 왜….”
시훈에게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
“왜… 몸으로 때우려고 하냐구요?”
말을 마무리하는 쪽은 이수다. 완성된 문장은 흔해 빠진 레퍼토리였다. 그래서 타격감 따위는 없노라며 스스로를 애써 달래 봤다. 시훈은 이수를 향한 담담한 시선을 유지하며 물을 마셨다. 어디 더 해 보라는 식이었다.
“…….”
“밥까지 떠먹여 줄 거예요?”
미니바 위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생수병이 놓였다. 대꾸하지 않아도 이시훈은 온몸으로 언짢은 기색을 표하고 있었다.
이시훈과는 소위 말하는 상납 관계였으나 이수는 제 모든 걸 의탁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시훈이 어떻게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기에 더 그랬다. 팀장 자리를 유진우가 쥐여 줬다고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능력만은 제 것이었다. 다만, 기울어진 운동장 대신 평평한 운동장에서 공도 차고 달리기도 하고 싶은 작은 욕구를 이시훈이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는 이미 다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니까. 허무한 웃음으로 속을 감춘 이수가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저 많은 거 바라는 거 아닌데…. 있죠, 회사에서 쫓아낼 생각 말고, 엿 먹이지 말고, 내 팀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말고. 일하게 내버려 두라구요.”
정이수는 회사 생활 중 아무것도 아닌, 당연한 것들을 열거한다. 그런 부탁이 너무 형편없어서 시훈은 비딱하게 되물었다.
“정이수 자존심 때문에?”
멍이 든 가슴 한쪽이 꾹 눌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찌 되었건 제 몫은 하고 싶었다. 들판에 매어 놓은 허수아비가 되기는 싫었다. 이수는 시훈을 쏘아보았다.
“본인 팀 관리나 잘하죠. 같은 직함 달고 있으면서 괜하게 여기저기 들쑤시지 말구요. 필요할 때는 부르지 말래도 찾을 테니까.”
거기까지였다. 시훈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그는 피로를 물리듯 느릿하게 목을 돌렸다.
“…….”
섬뜩할 만큼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잠시 후, 이시훈은 셔츠를 벗으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수를 배려할 생각이 없었다.
이수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유리창을 바라본다. 너머에는 인사이트에서 진행한 옥외 광고와 광고주의 사옥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프로젝트 내내 속을 끓였던 터라 익숙해지다 못해 질릴 법한 카피나 이미지가 오늘따라 낯설어 보였다. 그건 자신이 조금 긴장하고 있다는 뜻일까.
슬리퍼 쓸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아슬아슬하게 가운을 여민 시훈이 젖은 머리를 털며 이수를 스쳐 지났다.
“씻어요.”
요구는 무심했다. 그때까지 재킷 하나 벗지 않은 사실도 몰랐다. 이수는 욕실 앞에서 옷을 벗었다. 샤워기 아래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복잡한 생각은 애써 배수구로 흘려보냈다.
가운을 여미고 나오자 이시훈은 침대 끄트머리에 반쯤 엉덩이만 걸쳐 앉아 있는 상태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춘 이수를 시훈은 답이 하나뿐인 시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 말까요?”
“…….”
벌어진 다리 사이로 이시훈의 성기가 반쯤 발기해 있었다. 제대로 털지 못한 이수의 머리카락에서 툭 물방울이 떨어졌다. 망설이거나 혹은 겁먹었거나… 혹은 둘 다였다. 그렇대도 처음 그날같이 불에 덴 사람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곧 의무를 행하듯 무표정하게 걸음을 옮긴 이수가 이시훈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머리에 순서를 그렸다. 입에 넣고 혀로 핥고 목구멍을 조이면 되는 일이었다. 일. 이것은 일. 입안이 말랐다. 적절한 온도로 자동 조절 된 호텔 룸 안에서 제 손끝만 이렇듯 차가웠다.
아직 완전한 형태도 아닌데 이시훈의 성기는 꽤 버거워 보였다. 이수가 손으로 성기 뿌리를 잡고 살살 쓸어 올렸다. 그리고 기둥에 몇 차례 입을 맞추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수는 주저 없이 단번에 귀두를 입에 넣었다. 서로 목적을 가진 관계에서 망설임은 어울리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싸게 하면 그만일 터였다.
정이수가 막대 사탕을 먹는 것처럼 볼이 패도록 빨아들이자 순식간에 아래쪽으로 피가 몰렸다. 조금 전만 해도 창백했던 입술이 붉게 변해 있었다. 성기를 입에 문 이수의 시선은 줄곧 아래를 향했다. 여름의 습한 기온처럼 이수의 입안이 그랬다. 입 안쪽까지 성기를 넣은 정이수는 이가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목구멍을 열었다가 입천장 끝까지 성기가 닿을 때쯤 머리를 물렸다. 다시 귀두를 입안에 삽입하듯 넣고 조이며 서서히 앞뒤로 머리를 움직였다. 간간이 성기가 입에서 빠질 때는 이수의 혀가 귀두의 갈라진 틈을 찾아 핥았다. 프리컴과 침이 뒤섞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호텔 룸을 울렸다.
정이수는 시훈의 허벅지가 아닌 바닥에 두 손을 내렸다. 높이를 맞추려 세운 무릎에 바닥을 제대로 짚지 못한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 앞에 앉은 상대의 허벅지만 잡으면 수월할 텐데 정이수는 그러지 않았다. 남의 성기를 빨고 있는 상황에서도 고집스러운 성격이 티를 내었다.
본인의 생각과 달리 복종을 요하지 않아도 마치 순순히 꼬리를 내린 개와 같은 정이수의 자세는 시훈에게 강렬한 시각적인 자극을 주었다. 마른 듯 플로어 스탠드의 역광에 도드라진 어깨 위로 손을 올리자 이수가 반사적으로 움찔 몸을 떨었다.
“흐, 응….”
그 작은 움직임이 기폭제가 되었다. 이수의 뒤통수를 감싸 안은 시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으… 웁.”
약하게 그러쥔 뒷머리를 깊숙이 누르자 미약한 반항과 함께 정이수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입술 끝이 발개질 정도로 시훈의 성기가 흉흉하게 크기를 더했다.
머리카락을 쥐고 앞뒤로 흔들었다. 정이수는 속도에 맞춰 머리를 움직였다. 마치 유효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처럼 뒤틀린 자세를 바로 하며 눈을 치켜 시훈을 올려 봤다. 정이수는 이런 순간에도 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내리깐다. 혀 위에 성기를 놓고 이가 닿지 않게 입을 오므렸다.
“우… 읍! 으, 우…!”
시훈이 갑작스럽게 속도를 높이자 불규칙하게 몸이 튀며 단정하게 내린 손바닥이 단단한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버티려고 힘을 준 이수의 차가운 손이 어쩔 수 없이 시훈의 허벅지를 꽉 붙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시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릎을 세워 착실하게 위치를 맞춰 온다. 거칠고 빠른 추삽질에 이수의 입에서 컥컥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튀어나왔다.
성기가 드나드는 입에서 흐른 침이 턱까지 흥건하게 늘어졌다.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이시훈이 깊게 귀두를 쑤셔 넣자 순간적으로 목구멍이 확 죄어들었다. 코로 숨을 쉴 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호흡이 정지된 이수의 몸이 바짝 굳었다 파득 떨렸다.
“허윽, 컥, 컥…! 후, 웁…!”
좆을 뺀 시훈은 이수의 뒷머리를 잡고 얼굴을 고정했다.
“후우… 혀 내밀어요.”
물기 어린 눈이 시훈을 올려 보다 금세 시선을 내렸다. 말랑한 혀가 번들거리는 입술 새로 얌전히 나왔다. 시훈이 손으로 제 성기를 흔들었다. 이윽고 사정한 시훈의 정액이 얼굴 위로 쏟아지며 눈과 뺨에 흩뿌려졌다. 열기에 숨을 고르기도 전에 이수의 혀 위로 귀두가 꾹 눌려 비벼졌다.
비릿한 정액을 혓바닥에 종지부처럼 짓이기고 몸을 떼자 입이 곧 다물렸다. 긴 속눈썹이 아래로 감기며 그림자를 만들었다. 오르내리는 어깨가 잠시 숨을 멈추는가 싶었다.
“…….”
이수는 입안의 정액을 한데 모아 바닥에 퉤 뱉었다. 침과 섞인 정액이 실처럼 길게 늘어지다 끊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 시훈의 눈이 일그러졌다.
“맛없어서요.”
상대를 올려 보는 정이수의 눈은 시작도 전에 끝나 버린 여름밤 축제 같았다.
두 어깨를 잡힌 이수가 침대 위로 내팽개쳐졌다. 튕겨 나간 몸이 자리를 잡기 전에 시훈은 이수가 입은 가운을 벗겨 바닥에 패대기쳤다. 곧장 골반을 짚은 손이 가슴까지 올라와 유두를 잡아당겼다. 여기가 성감대라는 건 지난밤 정이수의 몸을 만지며 알게 됐다. 본능적으로 움츠러든 몸과 달리 꼿꼿이 선 돌기 끝을 손가락으로 굴렸다.
“정이수 씨 지금 섰어요. 빨면서.”
다리 사이에 심을 세운 이수의 것을 손에 쥐었다.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이런 순간에 발기한 성기가 달가울 리 만무했다. 목덜미에 오른 열과 달리 룸은 미약한 에어컨 바람에 서늘했다. 그 때문에 이수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시훈은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그리고 문을 틀어 잠근 이수의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가져갔다. 입술을 깨문 이수가 애써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외로 돌렸다.
왼쪽 허벅지 뒤를 눌러 가슴까지 붙이자 적나라하게 드러난 구멍에 찬 공기가 닿았다. 그 위로 젤을 짜낸 시훈이 제 엄지손가락으로 구멍을 문질렀다. 차갑다가 금세 손가락이 만지는 주변만 뜨거워졌다.
주름진 구멍 주변을 원을 그리며 매만지는 손길은 꽤 조심스럽고 은밀해 저를 침대로 패대기친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 위로 팔을 올려 감춘 이가 살점을 약하게 물며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을 때였다.
“흐… 흡….”
미끄덩한 구멍 속으로 엄지의 끝마디가 쑥 들어왔다. 그 바람에 엉덩이를 움찔대자 시훈이 남은 한 손으로 둔부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버렸어요?”
앞뒤가 생략된 질문에 답이 없자, 시훈이 엄지손가락을 빼고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는 것이 느껴졌다.
“버렸냐고. 이만한 거.”
손가락 두 개 정도의 굵기였을 것이다. 형편없는 모양의 딜도를 두고 비웃었었다. 이수는 그제야 질문의 뜻을 이해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근래에 삽입한 적 없는 구멍은 쉬이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입구에서 진퇴를 반복하며 길을 틔우자 빠듯하게 조여 오는 압박감이 대단했다. 시훈은 인내를 더해 손목에 힘을 줬다.
“으흥… 으, 읏….”
가슴이 들뜬 이수는 끝끝내 새고 마는 신음을 참아 내 본다. 아직까지는 이물감이 더 컸다. 시훈이 안쪽에서 가위질하듯 벌리고 들어오는 감각이 선연했다. 손가락 끝까지 박아 넣은 채로 젤을 쏟은 그가 앞뒤로 움직이며 관절을 굽히고 있었다. 이리저리 찌르며 더듬는 감각이 싫었다. 저조차도 잘 모르는 곳, 제대로 경험해 본 적 없는 곳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 타인의 손가락을 집어삼킬수록 얕은 신음이 뭉개졌다. 펠라티오를 하며 발기한 성기가 불편한 이물감에 반쯤 힘이 빠졌을 즈음이었다.
내벽을 돌아다닌 손가락이 어느 튀어나온 지점을 눌렀을 때 이수의 아랫배가 훅 꺼지며 의도하지 않게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하윽…!”
입을 막은 팔목은 소용도 없이 거친 숨과 함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흑, 아, 앗! 으, 흡….”
시훈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더듬어 찾은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대놓고 안쪽을 눌러 대자 이수가 몸을 틀며 상반신을 들어 올렸다. 시훈의 손목을 잡으려 하니 심술처럼 단번에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상황을 인지할 틈은 없었다. 다리 사이로 시훈이 자세를 잡아 앉았다. 한차례 사정한 뒤에도 시훈의 성기는 이미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발기한 성기에 핏줄이 선명했다. 펠라티오를 할 때보다 길이와 굵기가 더 커진 듯했다. 전초전을 치른 후 본게임을 준비한 것처럼 말이다.
이로 콘돔 포장지를 벗겨 낸 이시훈이 다리를 가슴께에 붙이고 이수의 손을 끌어 놓았다.
“잡아요.”
협조를 명한 시훈은 단호했다. 불필요한 말 대신 꺼덕이는 좆을 잡아 이수의 구멍에 대가리를 맞췄다. 엄지손가락과 두 손가락, 그리고 정이수 집에서 본 딜도가 우스웠다.
“으… 훕…!”
귀두만 들어왔는데도 버거웠다. 구멍이 얼마나 벌어졌을지 짐작이 안 됐다. 허벅지를 잡은 손이 일시에 풀리며 침대 시트를 쥐어 잡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외면한 채 시훈은 제 좆을 진득하게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잠시 적응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제 아래서 숨을 고르는 이수를 가만히 내려 볼 뿐이었다.
뻑이 가더라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시훈은 그 순간 주 실장의 턱에 주먹을 날리는 상상을 했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불티가 이수에게로 순식간에 옮겨붙었다.
일 이야기. 저를 같잖게 이용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주 실장을 따라나선 게 분명했다. 기가 찼다. 농담을 던지는 얼굴 아래 겹겹이 가린 맨얼굴은 바람이 날려야 보일지, 아니면 볕을 쬐어야 드러날지 짐작을 못 하겠다.
정이수는 눈앞에서 얼쩡대다 무시하면 처연한 얼굴을 보이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다 불시에 상처받은 눈을 했다. 순식간에 감춘 꼬리에 매번 물음표가 남았다. 왜, 정이수는 항상 이런 식으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까.
“흐으… 읏….”
숨을 고르는 소리가 불규칙했다. 정이수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옆으로 돌려 베개 속에 파묻은 상태였다.
“숨 쉬어요. 힘 빼고.”
퍽. 기다린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시훈은 단번에 이수를 꿰뚫는다.
“아… 앗! …흑!”
움직인다. 단번에 뿌리 끝까지 박아 넣고 다시 귀두까지 뺐다가 엉덩이가 눌릴 만큼 성기를 쑤셔 넣었다. 손가락에 의해 자극을 경험한 몸이 눌려 짓이겨질 때마다 의지와 다르게 허벅지부터 바르르 떨렸다. 침대 위로 주먹을 딛고 체중을 실은 시훈의 좆이 빠르게 드나들 때마다 엉덩이와 맞닿아 찰박대는 소리가 났다.
“…읏, 왜, 안 버렸어요.”
이시훈은 집요했다. 별것 아닌 것에. 이수는 신음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시훈이 부리는 심술이 싫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아, 흡! …으…!”
“유진우가, 사 줬어? 아니면…! 그만한 게, 좋아요?”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 오르는 질문은 모욕적이었다. 퍽! 박아 넣듯 단번에 안으로 살덩이를 들이민 시훈이 울퉁불퉁한 내벽을 느끼며 구멍 끝까지 귀두를 천천히 빼고 다시 천천히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그 바람에 멋대로 흔들리던 몸이 허리를 휘었다. 사지에 힘이 들어갔다. 몰아칠 때 정신을 쏙 빼놓은 것과 달리 느긋한 움직임에 오싹할 정도로 도리가 없는 쾌감이 밀려왔다.
협탁 위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 아래로 보이는 정이수의 눈은 발갛게 달아올라 곧 눈물이라도 흘릴 듯 젖어 있었다. 쾌감을 이기지 못해 턱을 치켜들고 가늘게 눈을 뜬 정이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까지 이시훈은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아…, 흑.”
늘어진 팔이 느릿하게 허리 짓을 하는 시훈을 애써 밀어내려 한다. 이기지 못할 반항이라는 걸 알면서도 의미 없는 손짓에 짜증이 솟구쳤다. 시훈이 두 팔목을 이수의 허벅지 옆으로 붙여 잡았다. 단단한 손아귀에 결박된 손목을 비틀어 보아도 시훈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런 뒤에 연결된 상태로 천천히 몸을 뒤로 빼다 퍽! 단번에 치켜올렸다.
“…아!”
눈앞에 번쩍 섬광이 터졌다. 요의가 느껴질 정도로 무릎을 움츠려 들 때를 기다린 시훈이 다시 한번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퍽!
쾌감이 덮쳐 오는 파도 같았다. 피할 수가 없었다.
“내가 못 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던데… 후우… 어때요.”
첫날 오피스텔에서 쏟았던 말을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발가락이 단숨에 곱아들었다.
“아… 흐… 흐응….”
엉덩이 사이로 젤이 흐르는 감각이 선명했다. 시훈은 반복해서 같은 곳을 짓이기고 있었다. 빈틈없이 몰아붙이자 이수가 곧 터질 것처럼 몸을 휘었다.
“그… 그만! 으… 흥! 흐…!”
물기가 진득한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다. 팔자로 휘어진 눈썹 아래로 젖어 엉킨 속눈썹이 속절없이 깜빡였다. 이따위 질문에 절대 답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걸 알고 있으니 울리고 싶은 가학심이 활활 불타올랐다.
시훈은 허벅지 옆으로 붙들어 둔 이수의 팔을 들어 올려 한데 모아 틀어쥐었다. 그리고 허리가 반절로 접힐 듯 이수의 구멍에 제 좆을 박아 넣었다.
“너무… 깊… 아흑…!”
너무 깊었다. 너무 깊어서 어떻게 돼 버릴 것 같았다. 뱃가죽이 내벽을 찌르는 좆 모양대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상상이 더해졌다.
땀에 흐트러진 시훈의 머리카락이 이수의 가슴팍에 닿았다. 갈급함에 물이라도 찾는 사람처럼 가슴을 빨아 당겼다.
턱이 들린 채 뒷머리를 시트에 짓이기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손도 대지 않았는데 사정감이 몰려왔다. 시훈의 성기가 쑤셔 대는 안쪽이 뜨거웠다. 설명할 수 없는 성감이 바늘을 앞에 두고 커져 가는 풍선처럼 아찔하고 위험하게 크기를 더해 갔다.
퍽퍽 시훈이 치댈 때마다 밀려 올라간 몸에 정수리가 쿵 침대 헤드에 부딪혔다. 그러다 문득 잡힌 팔이 풀리고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 대신 딱딱한 침대 헤드와 자신의 머리 사이에 시훈의 손이 들어왔다.
“…….”
저와 짧게 눈을 맞추고 시선을 돌린 시훈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이수의 빳빳한 성기를 쥐었다. 시훈이 움직일 때마다 가슴 위로 땀방울이 떨어졌다. 유두를 빨리는 가슴 언저리가 불타는 거 같다. 쾌감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이수의 감각을 깨웠다. 너도 몰랐을 거라고, 이렇게 느끼고 이토록 신음을 흘릴 수 있는지. 몇 번이나 되새기며 이수를 몰아붙였다.
성기를 문지르는 손길은 거침없다. 갈라진 부분에서 흐르는 액이 시훈의 손에서 번들거렸다.
“읏, 으! 아, 아, 앗! 으흥, 아… 흑!”
“…하아!”
엉덩이가 짓이겨지며 시훈이 몸에 바짝 힘을 주었다. 안쪽에서 울컥 사정액을 쏟아 낸 성기가 크게 꺼덕였다. 그리고 몇 번의 움직임에 이수의 성기 역시 정액을 쏟아 냈다.
“하아… 아, 흡… 하아….”
탈력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고 고갯짓 한번 할 수 없다. 순식간에 타오른 열기만큼 빠르게 몸이 식었다. 이어서 밀려드는 자괴감과 수치가 스멀스멀 이수의 이성을 잠식했다.
무릎을 지탱해 몸을 일으킨 시훈은 젖은 머리카락을 넘긴 뒤 미련 없이 제 성기를 곧장 구멍에서 빼냈다. 그 때문에 사정 후 한껏 예민해진 이수의 몸이 떨렸다.
“흐으….”
본능적인 신음 뒤로 얼얼한 두 다리가 풀썩 시트 위로 떨어졌다. 시훈은 성기를 감싼 콘돔을 벗겨 바닥에 던져 버렸다. 침대 아래로 몸을 내린 그가 다시 욕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훈은 옷을 갖춰 입고 침대 끝에 떨어져 서 있었다.
“앞으로 그런 일 하지 말아요. 아랫사람들이 배웁니다.”
참 좋은 충고다. 팔을 교차해 가린 얼굴 아래로 이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대답할 기운도 없거니와 어떤 답을 해도 이시훈이 무시할 걸 안다. 그 무시를 제가 또 무시할 테고.
“…….”
얼마 뒤 이시훈이 나가는 문소리가 들리고 룸에는 지독한 정적만 남았다. 싫다. 또 너무 조용해.
고개만 돌려 옆을 바라보자 창문 너머 옥외 간판에는 눈을 감은 모델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위로 주룩주룩 내리는 비 때문에 꼭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 * *
점심시간. 평소와 달리 이수가 이끄는 2팀 전체가 다 같이 업무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새로 입사한 두 사람과 얼굴도 익힐 겸 며칠 전 점심 회식을 공지한 대로 예약한 식당으로 삼삼오오 짝을 이뤄 이동했다.
여럿이 둘러앉은 원형 테이블 위로 코스 요리가 줄줄이 나올 때마다 고우재는 사진을 찍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김민주 대리가 고우재의 핸드폰 화면을 슬쩍 들여다봤다.
“고우재 씨 사진 잘 찍네요.”
며칠간 옆자리에서 업무를 가르친 김민주 대리와는 제법 편해졌나 보다. 고우재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이자 다른 직원들 역시 이 집 메뉴판에 올려놓으면 매상 좀 뛰겠다며 한마디씩 덧붙였다.
“고우재 씨, SNS 팔로워 장난 아니던데. 그 정도면 인플루언서 아닌가? 사진 봐 봐요. 연예인 같아요.”
자신의 핸드폰으로 계정을 찾아낸 김민주 대리가 직원들을 향해 내밀었다. 고우재는 쑥스러운 미소를 보였지만 부인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그 덕분에 기획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공이 시각디자인이라 제작실로 보내실 줄 알았거든요.”
“그러게. 공모전 수상작 보니까 비주얼을 기깔나게 뽑아서 제작실에서 기대했던 것 같은데…. 근데 왜, 기획팀으로 지원했어요?”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음식을 먹으며 누군가가 물었다. 고우재는 손에 든 핸드폰을 내리고 눈을 접어 웃는다.
“아, 그게,”
고우재는 제 이야기를 꺼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밝고 옳게 자란 티가 났다. 조용하고 묵묵한 새로 들어온 경력직 직원부터 나머지 팀원들의 시선도 모두 고우재에게 몰렸다. 입맛이 없어 차만 몇 잔째 마시고 있는 이수만 신경이 다른 곳에 기울다 말다를 반복하며 고우재의 이야기를 흘려듣고 있었다.
“제가 어렸을 때 텔레비전을 진짜 많이 봤거든요. 부모님이 맞벌이셔서. 근데 CM송이 너무 재밌어서 달달 외우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부모님이랑 백화점 갈 때, 마트 갈 때 CM송을 부르면 물건 파시는 분들이 귀엽다면서 뭘 막 챙겨 주시는 거예요.”
어머, 너무 귀엽다. 김민주 대리가 입으로 손을 가리며 웃었다.
“시간 좀 내주오, 갈 데가 있소. 거기가 어디요, 안녕마트.”
고우재가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CM송을 부르는 통에 모두 폭소했다. 술술 나온 CM송 하나에 매번 조용하기만 했던 식사 자리가 편하게 풀어졌다. 고우재의 반대편에 앉은 이수의 얼굴에도 그제야 슬쩍 미소가 번졌다. 나랑 같은 이유로 광고 회사에 들어온 사람도 있구나.
“그럼 음대로 진학했어야 하지 않아요?”
“아… 그게, 이런 건 누가 만드나… 타고, 타고, 타고 올라가 보니까 기획자가 하는 거래서. 그때부터 나는 기획자가 되어야겠다 싶었죠.”
“그럼 미대는 왜?”
“어머니 치맛바람에요. 미대 아니면 인서울 못 한다고 해서.”
콧잔등을 구기며 웃는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경력직 직원에게로 질문이 골고루 나눠졌다. 우리 회사 분위기는 어떤지, 이직 전 회사에서는 어떤 일을 주로 했는지 등등. 식사 내내 고우재의 수다에 테이블 위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우후죽순 사람이 빠지고 휘청이던 팀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거리에는 완연한 여름을 티 내는지 더운 공기가 절절 끓는 중이었다. 이수는 사무실로 향하는 무리의 뒤에서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 회신 부탁드립니다.
광고주가 보낸 메시지에 간단한 답문을 보내고, 방금 도착한 메일을 확인하는 이수의 옆으로 누군가 붙어 섰다.
“팀장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뜻밖에 고우재가 서 있다.
“드실래요?”
계산대 옆에 있는 바구니에서 한 움큼 사탕을 집어 왔는지 펼친 손에 자두 맛, 레몬 맛, 박하 맛 등 사탕이 종류별로 한가득 있었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고우재가 박하 맛 사탕을 불쑥 내밀었다.
“왠지 단건 잘 안 드실 것 같아서요.”
받고 안 먹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일단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난 고우재는 레몬 맛 사탕을 까서 제 입에 넣고 볼 한쪽에 밀어 둔다. 요즘 애들은 다 이러나…. 좀만 더 보태면 저와 10년 차이가 나는 인턴에게 직장 상사에 대한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너 인도 위로 발을 디딜 때였다. 뒤따라온 고우재가 머리 위에 손을 올려 그늘을 만들었다. 오늘 진짜 더워요. 손부채질을 하며. 그런 뒤 제게 던진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수는 더욱 세대 차이를 실감했다. 아니면 넉살 좋은 고우재의 성격이든지.
“팀장님, B 대학 졸업하셨죠?”
“네. 어떻게 알았습니까? 사보에 그런 것도 나와요?”
졸업한 지 까마득하기도 했고 지방 소재 대학을 고우재가 알고 있으니 의아함이 더해졌다.
“친구가 B 대학 광고홍보학과 다니거든요. 제가 인사이트 입사했다고 하니까, 팀장님이 전설이라고 그러던데요. 메이저 회사 공모전에서 그랜드 슬램 하셨다고요. 그리고 참가하신 공모전에서 수상 안 하신 적 없다는 말도 덧붙여서요.”
지방 대학에서 메이저 회사 공채로 입사하는 건 학점이나 토익 점수가 높아도 가능성이 낮았다. 유학이나 들이밀 만한 인턴 경력을 쌓기가 힘들어 1학년 때부터 부지런히 공모전에 목을 맸다. 과와 동아리 선후배들과 함께 치열하게 날밤을 지새우고 아침 해를 보며 웃던 때였다. 순수했고, 재미있었다. 동기들과 공모전을 준비하다가 잠이 올 때면 메이저 회사의 BI를 그리며 잠을 깨웠던가…. 그중에 인사이트를 가장 많이 그렸던 것 같다.
“옛날 일입니다.”
이수는 추억이 돼 버린 기억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내 걸음을 재촉하는 이수를 향해 문득 제자리에 선 고우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팀에 받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알려 주시는 것 다 받아먹을게요.”
그리고 웃는다. 눈부시게. 고우재는 스물다섯 청춘이었다. 여름 햇살에 반짝이는 얼굴을 바라보다 이수는 깨달았다. 익숙하다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스물넷 인사이트에 입사한 정이수를 떠올렸기 때문이라는 걸.
집무실 회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수가 아슬아슬하게 채운 예산을 조목조목 따져 묻는 여민준 본부장의 인상은 회의 내내 펴지지 않았다. 일부러 다리를 걸고 넘어트리려는지 평소 이시훈에게 관대한 결재 창 사인과 달리 확연한 온도 차가 느껴졌다.
고민하는 여 본부장을 두고 시훈의 눈길이 이수에게 잠시 머물다 떨어졌다. 호텔에서 보낸 밤 이후, 제대로 얼굴을 보는 참이었다. 두 사람 다 바빴고, 책상 앞에서 돌부처처럼 자리를 지킨 이수와 달리 시훈은 최근 외근이 잦았다.
“정 팀장, 나는 이거 확신이 없는데…. 걔네 산하에도 대행사 하나 붙어 있잖아요.”
“저번 분기 실적이 좋질 않았어요. 잡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안서 요청이 들어온 거구요.”
흐음. 결론을 내지 못한 여 본부장의 고민은 고착 상태였다. 일을 물어다 뿌리는 쪽이기는 하나 영 탐탁지 않은 프로젝트에 정이수가 덤비겠다고 하니 고, 스톱 둘 중 어느 쪽을 외쳐야 할지 여 본부장이 오히려 갈팡질팡하게 됐다.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맥을 끊듯 여 본부장이 한숨을 크게 내쉰다.
“일단은,”
이수의 예산 창을 미루어 둔 여 본부장은 손을 뻗어 집어 온 자료를 테이블 위 시훈의 앞으로 내밀었다.
“1팀에서 이걸 좀 진행했으면 하는데. 중요해. 이번에 단발로 진행하고, 실적 봐서 장기로 계약할 것 같아. 규모도 크고.”
제안이 아니었다. ‘1팀에서 이 건을 꼭 진행해야 한다.’라는 뜻이었다. 그때 묘하게 이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여 본부장은 그걸 알면서도 다리를 꼬아 앉아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일전에 정 팀장이 주 실장하고 애쓴 거 알아요…. 그런데 이쪽에서 L사 아트 시리즈를 꼭 찝어서 말이야.”
“1차 미팅에서는… 2팀 포트폴리오를 전달드렸는데요.”
자기들 브랜드 옷까지 갖춰 입은 이수가 기획팀 팀장이라고 소개를 올리자 호전적으로 일을 진행하려 한 기억이 선명했다.
“홈페이지 있잖아. 정 팀장, 서운해? 크게 보면 같은 기획 본부 식구끼리 협업하는 거잖아. 게다가 정 팀장은 비딩 들어가겠다며.”
단박에 묵살된다.
“…네. 괜찮습니다.”
자료를 챙겨 눈으로 훑는 시훈의 낯빛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회의실에서 시훈과 여 본부장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개괄적인 방향을 논의하는 동안 이수는 허벅지에 올려놓은 주먹을 꽉 쥐었다.
종이에 각서를 받아 놓은 것도, 녹음을 해 놓은 것도 아니었다. 주현탁 실장 역시 유진우 본부장이 떠난 빈자리를 알아챈 것뿐이었다. 광고주가 직접 선택했다고 하니 이수는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패배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럼, 그건 그렇게 정리하고, 어디 보자… 정이수 팀장. 정말 이렇게 가?”
예산이 기입된 전자 결재 창과 이수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여 본부장이 물었다. 짓이겨진 어깨가 불쑥 솟았다. 여기서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회사에 돈을 벌어다 줘야 살길이 트이는 건 자명했다. 비딩에서 물먹은 것도 아닌데… 이 정도로 약해 빠지면 안 됐다.
“네.”
“자신 있어?”
결과에 책임지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덥석 잡아 물거나 괜히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이수는 속으로 제 뺨을 후려치는 상상을 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자신 있습니다.”
여 본부장이 태블릿 PC 위를 클릭했고, 그로써 예산이 책정됐다.
찝찝한 회의가 끝이 난 후 시간 차를 두고 두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수의 호출에 곧바로 2팀이 회의실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난 뒤 시훈은 경계 너머 사무실에서 낯선 얼굴 둘을 발견했다.
“쟤 되게 싹싹하죠?”
“그러게. 아침에 우리 팀까지 와서 머리 꼬박 숙이며 인사하던데.”
신동윤 대리와 조민희 대리가 나누는 대화는 새로 온 인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기어이 경력직 하나에 혹을 붙여 놨네….
시훈은 털썩 앉아 의자를 창 쪽으로 돌렸다. 해가 길어진 밖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한낮처럼 환했다. 괜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정이수가 나가고 난 뒤 여 본부장이 일부러 그 건을 제게 밀어 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훈은 집무실에 앉아 있던 정이수의 얼굴을 떠올린다. 짐짓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문드러진 속이 빤히 보였다.
사방에서 정이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눈엣가시처럼 어떻게든 뽑아내려고… 아우성들을. 의자 팔걸이를 짚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팀장님, 저희 저녁 먹으러 가는데, 같이 가세요.”
야근이 예정된 신 대리가 조 대리와 같이 간다며 시훈에게 의중을 물었다. 회의 때문에 점심도 걸렀으니 뭐라도 입에 넣어야 했지만 영 생각이 없었다.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히 요기만 할 생각으로 두 사람을 먼저 보냈다.
카페테리아 옆 구내식당에서는 석식을 운영 중이었다. 식당에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이 띄엄띄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덧 노을 진 하늘이 마천루 사이로 색을 달리했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같은 자리를 맴돌던 시훈은 한편에 식사를 놓고 앉은 정이수를 발견했다. 수저를 들지 않고 핸드폰을 확인하는 정이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동안 언뜻 본 정이수는 대부분 외부에서 미팅을 겸한 식사 자리를 갖는 듯했다. 그래서 구내식당에서 여느 직원들과 다름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새로웠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시훈은 커피를 들고 이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후 회의에서 여 본부장이 넘긴 일은 독단이었다고 말해야 했다. 그리고 원한다면 당연히 쳐 낼 의사가 있다고.
회신을 하는지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정이수가 살짝 넘겨 짚듯 앞머리를 미약하게 그러쥐다 한숨을 내쉰다. 길게 뺀 목을 풀썩 숙이며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시훈의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갔다. 지금 모습만 본다면 팀장이 아니라 제안서 마감을 앞둔 신입 사원처럼 문득 어려 보여서다.
시훈은 관조하며 거리를 좁혔다. 아무래도 밖에서 저녁을 같이 먹고 들어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전 회사 바깥에서 먹고 있던 음식을 떠올리며 근처 괜찮은 식당 몇 군데를 그려 보았다. 순두부라…. 한식 타입인가. 마침내 테이블 하나를 남겨 놓고 거리를 좁혔을 때였다.
“팀장님,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태그가 잘 안 돼서.”
누군가 맞은편에 정이수를 가리고 등을 돌려 앉았다. 누구더라. 아… 인턴.
“아닙니다. 먹죠.”
분명 정이수의 말투가 살갑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시훈은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입안이 썼다. 입사한 이후로 정이수가 누군가와 밥 먹는 꼴을 본 횟수가 손에 꼽았다. 하물며 구내식당이라니.
작게 코웃음을 치는 사이 젓가락을 쥔 정이수와 시훈의 눈이 예기치 않게 마주쳤다. 이수는 자신을 빤히 바라만 보는 시훈이 제게 용무가 있는지 궁금해하며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
미간을 찌푸린 시훈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맞은편에 앉은 인턴이 정이수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렸을 때 시훈은 카페테리아를 나가고 있었다.
“안 들어가요?”
모니터를 끄고 자리를 정리한 이수가 아직 퇴근하지 않은 고우재를 발견했다. 사수까지 퇴근한 마당에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우재는 무슨 할 일이 많은지 여전히 마우스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서치한 자료만 취합해 놓고 가겠습니다.”
뒤돌아보는 모습에 지친 기색은 없었다. 얼마나 창을 켜 두었는지 작업 표시줄이 빽빽했다. 자료실에서 가져온 디자인 잡지에는 페이지마다 포스트잇이 가득 붙어 있고, 프린트해 놓은 자료에 책상 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무조건 야근한다고 일 잘하는 거 아니에요. 시간 효율적으로 관리하세요.”
“넵!”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가십시오.” 하고 90도로 인사하는 고우재에게 이수가 고개만 살짝 숙였다. 그리고 출입문 태그를 찍기 전, 흘깃 돌아본 이시훈의 자리는 주인도 없이 덩그러니 스탠드 라이트만 켜져 있었다.
이수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을 제작실 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가 움직일 줄 몰랐다.
“퇴근해요?”
이시훈이었다. 뒤에서 걸어온 그는 늘 그렇듯 소매를 걷어붙이고 셔츠의 위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둔 채였다.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고 묶인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구를 통해 내려온 듯했다.
“네.”
이만하면 인사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시훈은 완전히 몸을 틀어 이수를 향해 선다. 옆으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선 이시훈은 쉽게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깜박인 숫자가 차례로 줄기는 했으나 약속이라도 한 듯 층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늦다. 다시 한번 이수가 의미 없이 버튼을 누를 때였다. 시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오늘 일. 여 본부장님이 일방적으로 처리한 거예요.”
짐작은 했었다. 회의실 안에서 설명을 전해 듣던 시훈이 몇 차례 짧은 침묵으로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고, 일정상으로도 좋은 퀄리티를 뽑아내기는 힘들 거라는 쉽지 않은 거절도 했으니까.
“알아요.”
정이수의 대답은 덤덤하고 무신경했다. 이미 흥미가 떨어진 주제를 대하듯 체념마저 털어 버린 무심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 건지, 대답만 했을 뿐 여전히 오해를 하는 모양이다.
경쟁 관계이기는 하나, 같은 기획 본부 안에서 차려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일 처리는 시훈의 방식이 아니었다. 시훈 역시 전 직장인 T 기획에서 사장 아들내미가 날름날름 좋은 일만 채 가는 엿 같은 상황을 경험해 본 터였다.
“괜한 오해 말아요. 우리 팀도 바빠서 지금 이 일 끼워 넣을 여유 없었으니까.”
오해? 이수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어느덧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반쯤 몸을 튼 이수는 그제야 시훈과 눈을 맞췄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상사가 까라면 까고, 하라면 해야지…. 별수 있나요, 팀장 나부랭이가.”
정이수 팀장 나부랭이. 그리고, 잘난 이시훈 팀장 나부랭이.
이렇게 먹일 수도 있나. 담뱃갑을 쥔 시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고생하세요. 들어가 보겠습니다.”
살짝 미소를 보이는 얼굴은 예쁘나 고약했다. 잠자코 듣고 있으려니 오해가 풀린 것도 아니었다. 자존심도 뭣도 아닌 속을 살살 건드린 상대를 이대로 보내기에는 시훈의 이가 갈렸다.
깍듯이 고개를 숙인 이수가 발을 떼고 안쪽으로 몸을 들인 순간, 팔이 잡혔다. 텅! 시훈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끼우는 바람에 덜컹이는 소리가 복도와 로비를 크게 울렸다. 이수의 손목을 붙들어 잡은 시훈의 턱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잡힌 손목이 아픈 건 둘째 치고 아직 사무실에는 고우재가 남아 있었고, 반대편 엘리베이터 역시 가동 중이었다. 제작실에서 업무를 이유로 빈번하게 기획팀을 드나드니 여차하면 누군가 내릴지도 모른다.
“회사예요. 놔요.”
분노는 구긴 담뱃갑으로 끝나지 않고 이수의 손목을 움켜쥐는 쪽으로 전이되었다. 일개 팀장 따위가 뭘 할 수 있냐는 꾸짖음은 시훈의 성질을 긁기에 충분했다.
“슈퍼 을이라도 됐어요?”
“을?”
“그래, 을. 지금 무능하다고 남편 타박하는 마누라 같아요.”
“웃기지도 않아. 이 팀장님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수가 깨문 아랫입술을 풀어내며 시훈에게 이죽거렸다. 조소하는 이수를 향해 시훈이 눈썹을 구기며 보다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안하무인 재벌 3세 코스프레라도 해요? 여 본부장한테 나 정이수랑 떡 치는 사이니까, 지금이라도 물리라고 할까?”
크게 뜨인 정이수의 동공에 스치는 모멸감은 눈을 감았다 뜨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느새 눈동자에는 차가운 냉기만이 서려 있었다.
“…….”
“내버려 두라며. 눈치껏 굴어 달라고 한 건 정이수 당신이잖아.”
감정 없이 시훈을 바라보는 눈빛은 이상의 대화는 묵살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시훈은 오늘 구내식당에서 고민하며 고개를 저어 흔들던 정이수를 떠올렸다. 생기 있고 스스럼없던 모습을 보이던 사람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과 다른 이 같다.
공중에서 맞닿은 시선이 두 사람 모두 날카로웠다. 가슴에 메다꽂는 말만 하는 시훈이다. 제 쪽에서 정리하고 덮으려던 일이었다. 그런데 반나절이 지나서야 변명처럼 여 본부장의 독단이었다고 전하자 간신히 진정된 속이 부지깽이로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강제로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삐- 하는 경고음이 울렸다. 그 소리를 배경으로 한동안 시훈은 여전히 자세를 유지한다. 억지로 빼낸 이수의 손목에 언뜻 발갛게 자국이 남았다.
“…떡 치는 사이.”
헛웃음을 흘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른 손으로 제 손목을 감싸 쥔 이수가 태연자약하게 입을 열었다.
“말하든 말든, 그것도 마음대로 하시구요.”
이수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시훈은 여전히 발로 문을 괸 채로 이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화가 났다. 차라리 정이수가 제 책상 앞으로 찾아온 그날처럼 부탁을 해 왔다면 이렇게 몰아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이수는 관심조차 없이 또 손가락 사이를 흘러 빠져나갈 뿐이었다. 말은 어긋나고 접점은 찾을 수도 없이 서로 인상만 구기고 말았다.
고개를 숙이다 말고 거칠게 한숨을 내쉰 시훈이 발을 무르자 순식간에 닫히는 문 사이로 창백한 얼굴이 사라졌다. 시훈은 미간을 누르며 지끈대는 머리를 진정시켜 본다.
오늘 저녁, 의미 없는 야근을 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