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Anchoring
종합광고대행사 〈인사이트〉.
8층 대회의실.
2월, 설 연휴를 하루 앞둔 목요일 오후 5시. 창밖으로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메시지는 좋아. 그런데,”
툭. 툭. 툭.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영 탐탁지 않았다. 테이블의 끝, 볼을 주먹에 괴고 보고서를 훑던 김지학 전무가 회의 테이블 위로 페이퍼를 툭 밀어 놓았다. 회의실 내 침묵이 흘렀다. 결코 좋은 사인은 아니었다. 김지학 전무는 1본부 기획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버짓 관리를 누가 해. 응?”
시간 차를 준 김지학 전무의 시선이 상대를 향했다.
“정이수 팀장.”
되묻는 언사는 질책을 의미한다. 상사인 유진우 본부장을 눈앞에 두고도 이름이 불린 정이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처음부터 무리한 캠페인이었다는 건 이 회의실에 있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끌고 온 당사자가 바로 김지학 전무이고.
연말이 되면 광고 회사들 대부분이 하루걸러 하루 비딩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년 매출액을 보장하는 연간 단위의 계약들이 줄줄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몸이 축나는 건 물론이고, 반쯤 정신이 갈리는 그 바쁜 틈에 김지학 전무가 1본부 기획팀에 떠맡긴 업무는 실질적으로 영업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비용이 여기저기 왜 이렇게 줄줄 새냐, 새기를. 쯧.”
종종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 온 광고주가 최소한의 비용으로 캠페인을 진행하기 원하면 소규모 대행사에 연결해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김지학 전무는 꼭 그런 일만 끌고 들어왔다. 작년 한 해, 그나마 잠잠하던 이 버릇이 하필 연말에 도진 것이다.
개괄적인 설명은 비슷했다. 향후 잠재적인 대형 고객이 될 수 있다. 당장의 영업 이익이 중요한 게 아니다. 반드시 메이드시켜야 하는 일 중 하나이며, 정이수 팀장을 믿는다.
“매체는. 이거 미디어팀하고도 다 상의한 거야?”
불똥이 미디어팀으로 튀었다.
“네…. TVC는 도저히 불가능한 비용이라 그 외에 릴리즈할 수 있는 매체로 미디어 믹스 제안드렸었고, 광고주 쪽에서도 어쎕하셔서….”
김지학 전무는 미디어팀 담당자의 입에서 나온 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뒤로도 제작본부의 디자인팀, 급기야 방향을 선회해 AP(Account Planner)까지 하나하나 들쑤시던 김지학 전무의 시선이 다시 이수에게로 돌아왔다.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댄 김지학 전무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어느새 화를 누그러뜨린 목소리가 정적인 회의실을 갈랐다.
“유 본.”
“네.”
잠자코 있던 유진우 본부장이 살짝 몸을 기울여 대답한다.
“단발이라 다행이라고. 연간이었으면 장독대 구멍 난 줄 뻔히 알면서도 계속 들이붓고 있었을 거 아니야. 어?”
“네.”
유진우 본부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는 예의를 차려 질책을 달게 받아들인다. 김지학 전무의 기분이나 변덕이 죽 끓듯 변화무쌍하다는 사실은 인사이트의 직원 모두가 알았다. 그리고 유 본부장이 김지학 전무 라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 라인이 요즘 들어 정이수 팀장에서 잘린 게 이 사달의 원인이었지만.
김지학 전무가 1본부 기획팀 보고서를 한쪽에 주욱 밀어 놓았다. 더 볼 일 없다는 듯. 그리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두 손을 맞잡은 그가 의자에서 등을 떼었다. 집중을 요하는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다음은… 자, 이시훈 팀장. 2본부 기획팀 보고 시작하지.”
짧은 순간, 보고를 시작하기 전 시훈의 시선이 정이수에게 머물렀다. 신나게 깨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무던한 얼굴이 앞에 놓인 페이퍼를 훑고 있었다.
“2본부 기획팀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시훈의 낮은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김지학 전무는 회의 말미가 돼서야 유들유들하게 분위기를 풀어놓았다. 회사 생활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지만 월초 정기 임원 보고에서 떨어진 질책은 진을 다 빼놓았다. 김 전무가 나가고 난 뒤 직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르르 회의실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들 끝 무리에서 서 있던 시훈이 승강기 앞에 다다라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핸드폰이 없었다.
“먼저 내려들 가세요. 회의실에 핸드폰을 놓고 왔나 봐요.”
걸어온 복도를 되돌아 회의실 문을 반쯤 열었을 때였다.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 이해를 못 하겠어요. 왜 이렇게 어깃장을 …
너야말로 무슨 경우야, 그쪽 인사과에서 자질이 어떠냐고 묻는데… 이직한다고 광고해? …
… 본부장님 생각밖에 안 하시네요. 저는… 놓으세요.
텅 빈 회의실 안에서 뜻하지 않게 유진우 본부장과 정이수 팀장이 설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두 사람 다 격양되어 있었고, 정이수의 목소리는 떨렸다.
잠시 후, 호칭이 생략된 유 본부장의 말이나 두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묘한 대화를 가르고 작은 소음이 들렸다. 돌아서 있는 정이수 대신 유 본부장과 시선을 마주한 시훈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
예기치 않은 타인의 등장에 대화는 뚝 끊겼다. 정이수의 손목을 그러쥔 유 본부장이 당황하며 급히 손을 놓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평소 여유 넘치는 유 본부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회의 테이블을 돌아 핸드폰을 챙긴 시훈이 다시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몸을 빼다 만다. 그때까지도 정이수는 못이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에 시훈이 문을 쥐고 이수를 향해 몸을 틀었다.
“이만 가죠.”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눈썹 모양이 이지러진 이수가 시훈을 지나다 말고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걷던 방향 그대로 시선을 고정한 정이수의 눈가는 조금 붉었다.
“…….”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없는 적막한 시간이 요요히 흘렀다. 뒤숭숭하고 어수선한 감정을 내리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통 회의를 마치고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정 팀장은 으레 업무나 회사에 관한 짧은 대화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했다. 속내는 모르나 사회생활에 걸맞은 미소와 함께였다. 눈앞의 차가운 태도는 평소 그가 보인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안 가세요?”
시훈이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열린 회의실 문의 각도를 넓혔다.
“…….”
차가운 손을 말아 쥔 이수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이시훈이 인사이트에서 팀장직을 수행한 지 4개월째였다. 이수는 이시훈이 회의실로 들어온 순간, 그에게 설명을 해야 할지, 아니면 변명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이 팀장이 당황했을지 모르나 놀라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유진우 본부장과 저와의 소문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이수가 본 이시훈 팀장은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먼저 가 버리면 나았을 걸…, 당황한 내색 없이 문까지 열어 주는 이시훈의 친절이 달갑지 않았다.
…더군다나 동등한 직급을 달고 이런 구질구질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수는… 자존심이 상했다.
“…….”
정이수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다 말고 싸늘하게 이시훈의 앞을 지나쳐 갔다. 빠른 걸음으로 긴 복도를 걸어간 그가 모퉁이를 돌아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정기 보고에서 찬바람을 풍긴 김 전무의 변덕은 알 길이 없었다. 메신저를 통해 ‘벙개’를 제안한 것이다.
통상적으로 비정기적이지만 한두 달에 한 번씩 김지학 전무의 주도하에 소위 ‘벙개’를 한다. 퇴근이 가까운 시간, 사내 메신저로 김 전무가 ‘가볍게 한잔하실 분들 회사 뒤 대폿집으로 오세요^^’라고 하면 가볍게 한잔하고 싶지 않아도 간부들은 으레 발길을 향하기 마련이었다.
오늘은 본인이 자주 가는 와인 바까지 섭외해 놓는 바람에 간단히 하고 말 자리가 끝도 없이 길어졌다. 자정이 지나고 김 전무가 귀가를 하자 끌려온 개들인 양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 역시 자연스레 술자리를 파했다.
오전부터 내린 비는 빗방울만 약해졌을 뿐이다. 우산을 쓰고 갈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입에서 담배 연기처럼 입김이 새어 나왔다. 시훈은 좁은 와인 바 입구에서 제작실 구영모 팀장과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술자리에서 운전을 이유로 저처럼 술을 삼간 구 팀장과 함께 발레파킹된 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휴… 피곤하네요. 새벽부터 전라도까지 운전해야 하는데.”
본가는 전라도고, 와이프는 경상도라 운전하다 끝나요, 명절이. 구 팀장이 혀를 차고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이 팀장님은 본가가….”
“서울이에요.”
시훈이 담배를 태우지 않은 손으로 미간을 누르며 대답했다. 3일 연속 새벽 출퇴근을 하는 바람에 피곤이 몰려왔다.
“차 막힐 일은 없겠네요. 다행히.”
말을 마친 구 팀장의 앞으로 때마침 차가 섰다. 주차 요원에게서 키를 받은 구 팀장이 인사를 하려다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 시훈의 뒤쪽을 기웃댔다.
“그러고 보니까, 정이수 팀장님 먼저 가셨나요? 좀 전에 화장실 간다 그러더니 안 보이시네요.”
시훈도 구 팀장을 따라 지하로 길게 뻗은 와인 바 입구를 돌아보았다. 오늘 많이 마시는 것 같던데… 오늘 같은 날 대리 기사든 택시든 잡힐지 모르겠다는 볼멘소리를 잇던 구 팀장이 목소리를 낮추고 시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나저나… 정 팀장님 오늘 대미지 좀 세게 입은 것 같던데… 술도 평소보다 엄청 드시구요. 유 본도 뻔히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인 줄 알면서 어쩜 실드 한번을 안 쳐 주죠? 팽 당했다더니… 그 말이 맞나 봐요.”
구 팀장은 사람은 좋은데 말이 많았다. 담배를 태우던 시훈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연기를 내뿜었다.
1본부만 참여한 회의도 아니고 2본부, AP, 미디어, 제작실까지 모인 자리에서 김 전무는 벌집 쑤시듯 정이수 팀장을 찔러 댔다. 그 바람에 오히려 다른 팀들의 보고는 수월하게 마무리될 정도였다. 꼭 작정하고 1본부 기획팀만 물먹이는 것처럼. 그 와중에도 정이수 팀장의 미려한 얼굴은 냉정을 유지했다.
“남자가 남자를, 굳이 애 딸린 유부남을. 이 팀장님은 이해가 되세요?”
그러니까… 구 팀장은 말이 많았다. 작년 가을, 시훈은 이직한 후로 정이수 팀장을 두고 떠도는 소문을 모르지 않았다. 1본부 유진우 본부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그래서 팀장을 달았다더라. 하는.
필연적으로 기획과 제작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관계지만 구 팀장은 그 틈에 사적인 친분을 집어넣고 싶어 했다. 담배를 태우다, 소주를 마시다,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면 자연스레 친분이 쌓이는 것처럼 그는 시훈과 공감대 하나를 가지려 했다. 이런 가십으로 말이다.
시훈은 엷게 웃음이 밴 얼굴로 적당한 대꾸를 해 주었다.
“…뭐, 저한테만 안 세우면 되죠.”
무슨 답을 기대했는지 무신경하고 심드렁한 대답에 구 팀장의 눈썹이 들썩였다.
“아, 네….”
그때 계단 끄트머리를 밟고 선 누군가의 머리가 시훈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안 가셨나 봐요.”
정이수 팀장이었다. 까 내린 상대를 발견한 구 팀장이 헛기침을 하고 말을 끊었다.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 정이수를 보자 아차 싶은 거다. 안경을 고쳐 쓴 그가 입을 싹 닫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씹을 때는 세상 당당하더니 지금 와서 뭐 마려운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시훈은 어이가 없었다. 듣거나 듣지 않았거나 확률은 반반이지만, 구 팀장과 정이수 팀장 사이에 불편한 언쟁이라도 오고 가면 수습할 일이 귀찮았다. 괜히 엮이고 싶지 않은 시훈이 구 팀장에게 살 길을 열어 줬다.
“이만 들어가세요. 새벽부터 운전하셔야 한다면서요.”
구 팀장은 멋쩍은 얼굴로 시훈과 뒤로 선 정이수 팀장에게 “명절 잘 보내세요.” 인사를 남기고 차에 올랐다.
“…하아.”
짧은 한숨 소리와 함께 마저 담배를 태우는 시훈의 옆으로 정이수가 걸음을 옮겨 섰다. 입구가 좁아 간신히 비를 피한 그의 몸이 취한 듯 살짝 기울었지만, 중심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찬 바람에 정신이 드는지 코트를 여미지 않은 정이수가 가볍게 머리를 털었다.
“술 많이 드셨나 봐요.”
시훈은 담뱃재를 바닥에 털며 으레 하는 말을 내뱉는다.
“네. …간만에.”
말끝에 술기운이 돌았다. 하얀 피부가 찬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 조금 붉어져 있다.
미인. 누군가 그를 지칭하며 말하던, 남자에게 붙일 미사여구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말은 정이수를 실제로 본 뒤 납득할 수 있었다. 불빛 아래서 언뜻 창백해 보이는 피부나 콧날과 턱선 같은 것들이 모나지 않아 유려했고, 긴 속눈썹 아래로 아몬드 모양의 눈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다들 가신 것 같네요.”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짚는 정이수 팀장의 한쪽 눈에 쌍꺼풀이 져 있었다. 매번 보이는 건 아니니 아마도 피곤할 때만 나오는 것일 테다.
“네.”
주차장에서는 주차 요원이 다른 차에 가린 시훈의 차를 빼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지체되는 시간만큼이나 정이수 팀장과 서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애써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해 보려 다른 말을 붙이지 않는 건 시훈의 성격이었다. 회의며 광고주를 상대하느라 온종일 고단한 입은 가능할 때는 다물고 있는 게 좋았다. 피곤한 기운이 역력한 정이수 팀장 역시 쉬이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메울 뿐이었다.
툭, 툭, 툭.
정이수 팀장의 코트 위로 차양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정기 보고 때문인지 오늘따라 멀끔하게 갖춰 입은 티가 났다. 다만 단추가 풀린 셔츠 그리고 단정하게 매여 있던 넥타이는 여느 때와 달리 흐트러진 채였다.
어깨로 빗물이 스미는 것도 모르는지 그는 조금 전처럼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어깨 위로 비 떨어지네요.”
시훈이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겨 자리를 만들어 주는데도 답이 없다. 그러자 반보 뒤로 걸음을 옮긴 시훈이 담배가 끼워진 손을 들어 이수의 바깥 어깨를 슬쩍 끌어당겼다.
“…….”
인지하지 못한 정이수의 몸이 무방비한 상태로 이동했다. 고맙다는 둥 여타 아무 말도 없이 그는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가만히 내릴 뿐이었다.
“대리 기사 불렀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정이수가 늦은 호흡으로 답을 주었다.
“차 없어요. 덕분에 편하죠, 이런 날엔.”
이수가 시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꽉 조여 있던 나사가 느슨해진 듯 정이수는 벽에 등을 기대섰다. 그런데도 자꾸만 휘청이는 몸은 바닥에 딛고 선 두 발에 의지해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사무실부터 좀 전의 회식 자리까지 긴장했던 모습과 달리 확실히 정이수는 조금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시훈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졌다.
“…….”
“…….”
대화가 끊기자 침묵이 핑퐁처럼 오갔다.
정이수가 회식 내내 미소를 띠며 김 전무의 옆자리에 앉아 술상무를 자처한 것도, 분위기 따라 이런저런 말을 섞는 것도 평소와 같았다. 다만 이직한 이후 함께한 회식 자리를 떠올려 보면 오늘 정이수가 과하게 마셨다는 건 구 팀장 말이 맞았다.
“차를… 시발.”
만차인 야외 주차장은 폭이 좁았다. 그 때문에 시훈의 자동차 앞 범퍼가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작게 욕을 지껄이던 시훈이 다 태운 담배꽁초를 버릴 때쯤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의 헤드라이트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겨울에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주차 요원이 이윽고 키를 전달했다. 발레비를 건네고 난 뒤 시훈은 아직 고개를 숙인 채 벽에 기댄 정이수를 바라봤다. 차가 없으니 대리 기사를 부를 수도 없고, 연휴 전날 불야성 같은 밤에 웃돈을 준다고 해도 택시가 잡힐 리 만무했다.
“타세요. 가는 길에 데려다 드릴게요.”
어둠에 가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가세요. 알아서 가겠습니다.”
“택시 안 잡혀요. 아침 첫차 탈 생각 아니면 집에 못 갑니다.”
비를 맞으며 조수석 문을 열어젖힌 시훈을 본 이수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지금 이 팀장님 비 맞잖아요.”
“그러니까 타요.”
손목을 들어 확인한 시간은 새벽 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웬만하면 일찍 잠들고 싶은 마음뿐이라 약간의 짜증이 말끝에 스며 나왔다.
조수석에 올라탄 정이수는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른세수를 벅벅 하며 정신을 깨웠다. 그런다고 술이 깨나…. 눈만 더 건조해질 뿐 각성을 하기에는 요원한 방법이었다.
“집 어디라고 했어요?”
서초동이요. 애써 자세를 바로 한 정이수가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봤다. 열린 창문 틈으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어 와 정이수의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렸다. 곧 창문을 올리자 차 안에는 침묵만 가득했다. 회사나 일에 대한 이야기, 신문이나 인터넷만 보면 떠들 수 있을 만한 이슈조차 나누지 않았다. 그저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태운 차가 거리를 내달릴 뿐이었다.
대교를 건넌 직후 내비게이션에서 직진 방향을 알리는 안내음이 떨어졌을 때였다.
“이 팀장님은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술기운이 남은 목소리가 마치 진공 상태의 차 안을 깨우는 듯했다.
“…….”
목적어가 없는 질문에 무턱대고 하는 답은 리스크가 컸다. 시훈이 입을 다물고 있자 이수가 예상한 듯 작게 웃었다. 부정조차 없는 침묵은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알고 있다는 뜻이자 더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작년 하반기 시훈은 인사이트로 이직한 이후,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정이수 팀장과는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내에서 도는 추문이 발목을 잡을 만한데 예상외로 정이수는 태연했다. 그는 쾌활했고, 적절한 호의와 거리를 두고 시훈을 대했다. 타 본부 소속이자 필연적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정이수는 생각보다 세밀하게 조정했다.
그러니 불쑥 꺼낸 주제가 시훈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이수가 맥락 없는 질문을 한 이유는 짐작건대 오늘 회의실에서 유 본부장과의 모습을 보인 탓이리라.
어깨를 틀어 창 쪽으로 몸을 기댄 이수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역시, 다 알고 계시는구나…. 하긴 기획자가 귀를 닫고 살면 일 못 하죠.”
가벼운 정이수의 어조는 묘하게 비틀리고 모가 나 있었다. 굳이 감추고 싶어 하는 기색도 아니라 말을 삼가던 시훈이 무심히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실에서 유 본부장하고 있었던 일, 관심 없어요.”
자세를 바로 한 이수가 눈꼬리를 올렸다.
“아… 그래요?”
대답과 함께 흘린 웃음소리가 잔잔한 엔진음에 섞여 삽시간에 사라졌다.
서초동 소재의 오피스텔에 도착할 때쯤 정이수의 몸은 완전히 시트에 녹아내린 것 같았다. 몇 번을 불러도 쉬이 일어날 기미가 없자 조수석 문을 열어 그를 부축했다. 어깨를 움켜쥐어 승강기에 오르자 정이수가 가늘게 뜬 눈으로 층수를 확인했다. 얼마나 취했는지 11층을 꾹 누르던 손이 9층까지 주르륵 그어졌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말을 추측해 11층 오피스텔 문 앞에 당도한 이시훈이 정이수의 어깨를 추어올렸다.
“정 팀장님. 맞아요, 1107호?”
어깨로 기우는 머리가 말없이 끄덕인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퍽 단순한 패턴으로 나열된 여섯 자리의 번호를 눌렀다.
축 처진 몸을 달래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인테리어에 소질은 없는지 기본적인 가구 외에 장식도 없는 내부는 휑했다. 켜져 있는 텔레비전은 소리도 없이 번쩍이고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잡지, 신문, 태블릿 PC, 리플릿 몇 개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거실 한쪽에 놓인 소파로 정이수를 이끌어 놓자 그는 소파에 앉는 대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발을 뻗었다. 소파 시트에 머리를 뒤로 넘겨 기댄 정이수가 벗은 코트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있었다.
“쉬세요. 갑니다.”
할 일을 끝마친 시훈이 몸을 돌릴 때였다. 눈을 감은 정이수가 입을 열었다.
“…이 팀장님, 물 좀 가져다주세요.”
허공에 눈을 굴린 시훈이 걸음을 멈췄다. 바래다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뻔뻔하게 물심부름이라니. 이런 부탁을 할 정도로 친하거나 편한 사이는 결코 아니었다.
시훈은 차 키를 식탁 끄트머리에 올려놓고 한편에 정렬된 생수 뚜껑을 열었다. 무릎을 굽혀 앉기는 했지만 거스르는 신경을 간신히 누른 채였다.
“받아요.”
“…….”
심부름을 시킨 당사자는 물을 건네받는 대신 나른하게 눈을 내리떴다. 한쪽에만 쌍꺼풀진 눈이 조용히 시훈을 바라봤다.
하…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설마 컵에 따라 줘야 해요?”
시훈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부터 나왔다. 이 이상 불필요하게 머물 이유는 없었다. 이죽거린 시훈이 바닥에 생수병을 내려놓고 기울인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어깨가 밀렸다. 여차하는 사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몸이 중심을 잃었다. 넘어지면서 뚜껑을 딴 생수병이 팔에 치여 도르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정이수의 숨소리가 적나라하게 오피스텔을 울렸다.
소파 아래로 몸을 기대 있던 정이수는 어느새 시훈의 허리 위에 앉아 상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정이수의 얼굴이 맞은편에 켜진 TV 화면에 따라 번쩍였다. 무릎으로 지탱해 허리를 곧추세운 그는 말이 없다. 시훈이 불쾌한 티를 내며 이수를 노려봤다.
“정이수 팀장님, 지금 취했어요.”
항상 단정히 올려져 있던 앞머리는 눈을 찌를 듯 아슬아슬하게 내려와 흐트러진 채였다. 대답 대신 정이수는 잠겨 있는 셔츠 단추를 풀어낸다. 거침없는 손길은 조금 전 몸을 가눌 수 없던 사람이라고 생각도 못 할 만큼 분명했다. 곧 명치께까지 풀린 셔츠 사이로 보이는 늘씬한 상체가 어둠 속에서 도드라졌다.
“네, 취했는데… 그래서요.”
“이봐요.”
시훈이 팔을 세워 상체를 반쯤 일으키자 단단한 가슴 위로 손을 짚은 정이수가 입술을 비틀어 웃어 보였다.
“…남자랑 안 자 봤죠?”
뭉근하게 허리를 앞뒤로 문지르는 움직임은 노골적이다. 그걸 바라보는 시훈의 미간이 더욱 깊이 패었다.
“지금, 뭐 해요?”
서늘한 얼굴이 화를 누르듯 이를 꽉 깨물었다.
“제가, 되게 잘해요….”
취기에 정이수가 내뱉는 말꼬리가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었다. 치미는 짜증을 눌러 본들 곱게 말이 나올 리가 없다.
“유 본부장 때문에 이래요?”
시훈은 질문의 함의를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구 팀장이 말을 맺지 못한 소문 쪽인지, 아니면 업무상 질책을 뜻하는 것인지.
“…아, 유 본부장님.”
시훈의 언급에 정이수는 인상을 찌푸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미소를 흘렸다. 틈을 놓치지 않은 시훈이 상대의 손목을 잡아챘다. 단번에 자세가 뒤바뀌어 이수의 등이 쿵! 세게 바닥에 닿았다. 그의 머리 옆으로 두 팔을 뻗어 지탱한 시훈이 상대를 내려 봤다.
고아한 얼굴의 정이수는 태평하게 두 눈을 감은 상태였다. 나른하게 몸을 늘인 남자는 한쪽 팔을 올려 눈을 가렸다. 곧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파라.”
장난처럼 가벼움이 날렸다. 시훈은 바닥을 짚고 즉시 몸을 일으켰다.
“술 깨게 잠이나 자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쯧. 식탁에 올려놓은 키를 들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오피스텔 현관까지 걷는 동안 미동도 없던 정이수 팀장이 입구 등이 켜지는 기척에 입을 열었다.
“본인한테만,”
“…….”
현관문을 그러쥔 시훈이 멈칫 몸을 세웠다.
“안 세우면 되신다면서요. 전, 안 세웠으니까… 이제 괜찮죠?”
시훈은 혼잣말을 쏟아 낸 이수를 흘깃 돌아보았다. 소파 아래 길게 뻗은 몸은 움직임이 없고, 술기운이 밴 헛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지듯 사라졌다.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시훈은 입고 있는 코트를 뒷좌석에 던져 놓았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셔츠를 풀어 헤치는 손길, 제 위에서 거만하게 군림하며 지은 조소에 시훈은 드물게 당황했다.
정이수는 쉽게 유혹하고, 장난인 듯 발을 뺐다. 자신을 조롱하려는 의도였다. 시훈은 새것과 다름없는 장초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던져 버렸다. 불쾌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빠듯해진 아랫도리가 모욕처럼 느껴져 결국 욕을 짓씹었다.
…시발.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졌다. 시훈은 불이 꺼진 오피스텔을 올려 본다. 빗물에 젖어 질척이는 찜찜함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 정이수 팀장을 태우지 말았어야 했다.
* * *
벚꽃이 움트기 전 망울진 꽃봉오리가 때를 기다리는 추운 봄이었다. 그처럼 사무실을 차갑게 얼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기획 1본부 기획 1팀 정이수 팀장이었다.
“임 대리님.”
낮고 점잖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앞에 선 직원을 향한 말투는 서늘했다.
“아… 저… 그게.”
“우리가 회의하면서 정리한 방향이, 지금 산으로 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문장 그대로 묻는 건지 아니면 질책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질문 뒤로 따가운 시선이 임 대리를 향했다. 광고주와 미팅을 하기 전 확인차 올린 보고서를 훑은 정이수 팀장이 몇 가지 질문을 해 왔고, 대답은 모호했다. 임순정 대리는 딱 죽을 맛이었다.
파티션으로 공간을 나누었다지만 이 일 때문에 1, 2본부가 함께 사용하는 사무실은 다가올 봄과 달리 여전히 엄동설한 한겨울이었다.
“어휴….”
시훈은 제 앞에 선 신동윤 대리를 올려 봤다. 여린 성격 때문인지 타 본부 팀원이 받는 질책에 안절부절못하던 신 대리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신 대리가 왜 한숨을 쉬어요.”
임순정 대리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힐끔거리던 신 대리가 눈꼬리를 내렸다. 함께 제안서를 살피는 시훈의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돼 있었다. 연말과 새해를 넘기고 간신히 한숨 돌리나 싶더니 며칠 전부터 슬슬 철야의 기미가 보였다. 봄을 앞두고 업무가 쏟아지는 탓이었다.
“중간에 벽을 왜 텄나 몰라요. 진짜….”
흘깃 정이수 팀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책임을 추궁하는 건지 냉한 얼굴로 여태 임 대리의 속을 후벼 파고 있다. 다시 모니터로 몸을 돌린 시훈이 신 대리와 러프하게 작성된 제안서를 검토했다.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짚어 돌려보낸 뒤 담배를 태우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티션 너머 임 대리를 노려보던 정이수가 자리를 박차고 사무실을 걸어 나간 후였다.
선배, 정말 인사이트로 가요?
이직이 고려된 퇴사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후배 녀석이 대뜸 물었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조촐하게 마련된 송별회 자리에서였다. 차마 사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대학 때부터 절친한 선배에게 오퍼가 왔다는 선에서 답을 주었다.
작년 가을. 지금 근무하는 인사이트로 자리를 옮기게 된 건 학교 선배이자 사촌 형인 여민준 본부장의 제안 때문이었다.
지금은 다 같이 만날 수 없지만, 저와 형인 이시영, 그리고 여 본부장은 어린 시절부터 돈독한 사이였다.
‘시훈아, 공부만 하지 말고 형 작업실에 놀러 와.’
시훈이 고등학생일 무렵, 대학에 진학한 여민준이 친구들과 작업실을 만들었다며 지나는 말로 시훈을 초대했었다. 열 때마다 끼익 소리가 나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친구들과 공모전을 준비하며 서치한 자료들이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거나 한쪽 벽면을 가린 화이트보드 위로 빼곡하게 아이디어를 나눈 사투의 흔적이 있었다.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그 모든 것을 집약한 스토리보드나 포스터, 출력된 기획서가 붙어 있었는데, 시훈은 홀린 듯 결과물을 구경하고는 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강렬한 한 줄의 카피나 감각적인 이미지로 표현된 결과물은 온종일 책에 코만 박고 살던 시훈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아버지가 깔아 놓은 뻔한 인생, 계획된 삶을 살게 될 시훈에게 고민해 본 적 없는 꿈이 생긴 것이다.
T 기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그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최근 시훈의 아버지가 인수한 광고 대행사 ‘인사이트’에서 임원직을 맡은 사실은 만난 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외국계 그룹에서 일하던 여 본부장도 결국은 집안 사업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안부를 묻는 술자리에서 뜻밖에 여 본부장이 인사이트 기획팀 팀장 자리를 제안했다.
‘문 대표가 네 이야기 꺼내니까 얼굴이 딱 굳더라고. 떨떠름한 게. 그래서 최 부사장한테 너 말고는 답이 없다 했지.’
다가오는 4월, 인사이트의 공식적인 대표 취임 절차를 밟게 될 내정자는 문동현 부사장이었다. 대표 자리로 취임할 줄 알았던 최 부사장이 미끄러지면서 최 부사장 라인을 잡고 있던 여 본부장은 아차 싶었다.
‘부사장님한테 내가 너 책임지고 데리고 오겠다고 했어. 식사 자리에서 회장님께 네 이야기 꺼내니까 직접 언급은 안 하셔도 내심 기대하시는 것 같더라 하시고.’
경영학 전공이 아닌 다른 진로를 선택한 시훈은 열아홉을 기점으로 아버지와 매번 대척점에 있었다. 결국, 대학을 입학한 직후 집을 나와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거의 교류가 없었다.
‘인사이트 인수하실 때 설마 네 생각 안 하셨을까. 근데 네가 곧 죽어도 숙이고 들어오지는 않을 것 같고… 그러니 일단은 문 대표로 내정된 건데.’
표정 관리를 해 봐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사내 정치 싸움에 동원될 말로 쓰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시훈의 기척을 엿본 여 본부장이 한쪽 입술을 올려 웃는다.
‘그리고 T 기획하고 너랑 상성이 에러야.’
‘…무슨 에러. 직장인이 포트폴리오랑 샐러리만 맞으면 되는 거지.’
시훈은 인사이트 라이벌 회사인 T 기획에 몸담으며 진행한 프로젝트에 큰 불만은 없었다.
‘그래, 알고 있네…! 그게 안 맞다고. 시훈아, T 기획은 콘돔 광고 같은 건 곧 죽어도 안 받잖아. 화끈한 것 좀 만들어 보자.’
소주잔을 비운 시훈은 말이 없었다. 여 본부장의 말처럼 조금 더 잘빠진 프로젝트가 필요하기는 했다. 지루한 공익 광고나 정직한 그룹 광고 같은 것 말고. 뉴욕이나 베이징에 걸릴 만한 캠페인 말이다.
‘어차피 그 회사 사장 아들내미가 네 위에 버티고 있다면서. 걔 땜에 너 몇 번 물먹었다며. 그럼 시원하게 맞다이로 가자, 좀…! 뼈 빠지게 일하면 뭘 해. 결국 남의 집 호주머니 챙겨 주는 것밖에 더 돼?’
자립해서 이만큼 올라왔는데 지금 와서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고민하듯 말이 없는 시훈을 살핀 여 본부장이 담배 머리를 재떨이에 꾹 눌렀다.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카드를 내밀어야 했다. 여 본부장은 시훈의 퍽 아픈 곳을 찔러 왔다.
‘너 명절날 안 간 지도 몇 년 됐다며. 숙모님 많이 편찮으시다는데… 어쩜 자식이 돼 가지고 그러냐. 살아 계실 때 잘해야지. 지금 너랑 시연이밖에 더 있어?’
‘병원 가실 때는 몇 번 찾아뵀어요.’
‘외숙모 소원이시라는데 들어와서 일해. 누가 새파랗게 젊은 너 대표직에 올려놓는대? 후지긴 해도 팀장 대행부터 가자고. 그다음에 네가 좋아하는 실적 쌓아서 숫자로 보여 드려.’
‘…….’
눈을 가늘게 뜬 여 본부장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시훈아, 집 나갈 때 너도 한번 해 보겠다는 오기로 나간 거 아니야? 네 선택이 옳았다는 거, 어쨌든 증명하고 싶었던 거잖아.’
시훈은 소주 한 잔을 더 마셨다. 여 본부장이 도로 잔을 채웠다.
‘T 기획에서 이직해 봤자, 그 밥에 그 나물이야. 그럼 괜히 빙빙 돌지 말고 여기서 승부 봐. 판 깔아 줬는데 뒷걸음질 치지 말고.’
마지막 말이 시훈의 결정을 도왔을 것이다. 판을 깔아 준 마당에 기회를 내치는 건 역시나 한 수 물러나는 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범의 아가리인 걸 알면서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시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방법이었다.
모퉁이 너머의 목소리가 긴 상념을 잘라 냈다. 그들이 태우는 담배 연기가 빈정거림과 함께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근데, 유 본이 정이수를 버린 거야, 아니면 정이수가 먹튀 한 거야?”
상사의 욕을 하는 직장인은 흔했고, 놀랄 일도 아니었다. 지루한 하루 일과 중 시간을 소비하는 일일 뿐. 그런데 정이수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소문은 언제나 적나라하고 편파적이었다.
“시발… 모르지. 유 본도 참… 정이수만 아니었으면 여 본부장 탁 치고 저만치 앞서갔을 텐데. 유 본도 재수 옴 붙은 거지. 어쩌자고 말려서….”
생긴 건 얌전해서… 정이수 눈알 봐 봐, 실실 쪼개면서… 암튼, 말리게도 생겼어. 시발. 아, 맞다. 오후에 미팅 전에 주 실장이 잠깐 들르라던데 …
입사 초기, 우연히 들은 정이수 팀장에 관한 소문은 여전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이라고 여길 무렵, 시훈도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행동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조롱과 비난 섞인 말들은 담배를 피우며 소비하는 단순한 가십거리 이상이었다.
누구나 정이수에게 친절했지만, 막상 사람들은 그와 어울리지는 않았다. 커피를 마실 때 그랬고, 담배를 태울 때 그랬다. 정이수는 팀원들이 일어나기 전에 점심을 먹으러 가고, 출근은 제일 먼저, 퇴근은 제일 늦었다. 소소한 접점이 없는 회사 생활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놀랍게도 그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실적은 나쁘지 않았고, 정이수의 까칠한 태도를 거북해하지만 의외로 기획 1팀에서 이탈하는 인원은 없었다. 그건 단단하게 조직을 관리하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는 정이수가 잡은 라인에 올라타려는 생각인 걸까.
아직 끊지 못한 담배를 태우고 내려가는 길, 막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열린 엘리베이터 안쪽에는 뜻밖에 정이수 팀장이 서 있었다. 손에는 얼음만 남은 테이크아웃 잔이 들려 있었다. 시훈이 가벼운 묵례 뒤 발을 들였다. 각자 모퉁이 하나씩을 잡고 선 두 사람은 층 표시기에서 줄어드는 숫자를 바라봤다. 잠시 후 정적을 가르고 정이수 팀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점심 약속 있으세요?”
“외부 미팅 있어요.”
부러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상대를 두고 시훈은 여전히 숫자만 보는 중이었다.
“제가 식사하자고 할 때마다 항상 바쁘시네요, 이 팀장님은. 몇 번 여쭌 것 같은데….”
그런 시훈을 바라보며 이수가 눈을 접어 웃었다. 오늘 오전 사무실에서 임 대리를 향해 눈을 흘기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1본부 따라잡으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해서요.”
툭 던지는 말은 농담이라기에는 진지하기만 하다.
“영업 비밀이라도 알려 드려야 식사 한 끼 하시려나….”
설 연휴를 앞두고 오피스텔에서 있었던 일을 두 사람 모두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정이수의 행동이 그날을 기점으로 시훈의 신경을 한층 세게 건드리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전 같으면 쉬이 넘길 말들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그래서 거절조차 모가 난 채였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수가 아랫입술을 가만히 깨물다 말고 작게 소리를 내 웃었다. 아닌 척해 봐도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이수는 승강기 문에 비친 이시훈을 흘깃 바라보았다. 상징처럼 신경질적으로 휘어진 눈썹이 여전했다.
이내 볼 안쪽으로 가볍게 혀를 굴린 이수가 씨익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툭 내뱉은 말소리에 시훈의 이마가 구겨졌다.
“뒤끝, 되게 오래가시네요.”
가볍게 치부하기에 이수의 행동은 전혀 유쾌하지 않은 성적 접촉이었다.
“미안합니다. 그날은 제가 실수했어요. 여러모로 일이 겹쳐서.”
그러나 사과를 하는 이수의 어투도 표정도 지나치게 가벼웠다.
“정 팀장님.”
낮은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사람 없는 데서 하시는 뒷말이, 저도 썩 기분 좋지는 않아서요.”
‘뭐… 저한테만 안 세우면 되죠.’
이미 다 털어 버린 사람처럼 웃는 정이수의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시훈에게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구 팀장의 말을 끊어 내는 데 급급했던 말이 화살이 되어 날아올 줄이야. 서로 나눠 봤자 좋을 것 하나 없는 대화에 골치가 아팠다.
“그만하죠.”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은 시훈이 핸드폰으로 업무용 메신저를 확인하며 그대로 대화가 끊겼다. 도착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시훈은 이수를 스쳐 사무실로 들어갔다. 시선을 거둔 이수의 얼굴에 남은 미소 역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설 연휴 전, 정기 보고가 있던 날 마지막 전화에서 헤드헌터는 난감해했다. 연초부터 이야기가 오고 간 이직은 모든 과정이 순조롭고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강력한 브레이크가 걸렸다. 수순대로라면 레퍼런스 체크만 남은 상황이었고, 이수는 그 고비를 결국 넘기지 못했다.
-팀장님, 저 죄송하지만… 이 이상은 진행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P 기획 쪽에서 구체적인 사유는 말씀해 주시기를 꺼려 하시네요. 더 좋은 기회로 …
처음부터 직장 생활이 호락호락한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그렇지만 유 본부장과 관계가 끝난 뒤 남은 잔해들을 모두 감당하기에는 이수의 상황이 녹록지가 않았다. 일을 쉴 수는 없고, 비슷한 수준의 회사라면 이직을 고려해 볼 만했다. 그래서 때마침 들어온 헤드헌터의 제안은 망설이는 이수에게 필연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깃장을 놓은 사람이 유진우 본부장이었다니. 상사이자 한때 연정을 품었던 그에게 감히 따져 묻거나 언성을 높이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유진우의 태도를 참을 수 없었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벗어나려고 하면 다시 잡아채는 고약한 버릇을 그는 버리지 못했다. 그러니 이직 운운하는 이수를 인사이트에 묶어 놓은 것일 테고.
그날 온종일 이수를 짓누른 스트레스는 구 팀장과 이시훈 팀장이 나누는 대화를 계단 밑에서 들었을 때 정점에 달했다. 그래서 완전히 비뚤어졌다. 마주친 눈에서 보인 냉소가, 구 팀장과 조소하며 시훈이 흘린 말이 불씨를 키웠고, 은근한 무시를 담은 친절은 기름이 되어 이수의 화에 불을 질렀다.
그러니까 평소답지 않게 말을 붙인 것도, 시훈의 허리 위에 앉아 그 난장을 벌이며 수모를 되갚아 준 것도 이를테면 화풀이인 셈이었다.
곧 제자리로 돌아온 이수는 도착한 메일 중 의미 없는 메일 몇 가지를 체크해 삭제했다.
[휴지통을 비우면 지워진 메일을 복구할 수 없습니다. 휴지통을 비우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삭제할 항목을 훑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정이수 팀장님, 헤드헌터 민진영입니다.]
두어 달 전 오고 간 메일이 여태 남아 있었다. 삭제 버튼을 누르자 메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업계는 좁다. 유진우 본부장 한 사람에게만 레퍼런스 체크를 했을 리 만무했다. 추문이 인사이트 밖으로 새어 나갔으니 어쩌면 이직을 시도하는 순간마다 이름만 보고 걸러질지도 모르겠다. 잠잠해진 속이 다시금 꽉 막혀 답답했다.
* * *
시훈이 자신의 자리로 가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소회의실에서는 1본부 기획팀 회의가 한창이었다. 문득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뭉툭한 정이수 팀장의 말소리가 전해졌다.
다소 거칠고 직접적인 말들은 대부분 질책성 지시 사항이다. 한쪽 허리에 손을 짚고 선 정 팀장이 손에 든 펜으로 몇 번인가 페이퍼 위를 그어 가며 일일이 체크를 했다. 그 밑으로 앉은 팀원들 역시 하나같이 날이 서 있는 분위기였다.
그 모습을 지나친 시훈이 자리에 앉을 때쯤, 소회의실에서 나온 1팀이 분주하게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잠시 후, 정이수가 광고주와 전화 통화를 마친 시점부터 1팀 분위기는 더욱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 팀장의 미간에 잔뜩 주름이 져 있었다. 일하는 정이수가 딱히 웃는 낯을 보인 적은 없지만 이처럼 오전 내내 험악하게 인상을 쓰는 날도 흔하지는 않았다.
“광고주가 하루에 한 번씩 비딩 일정 바꿔 가면서 지랄하는데… 그럼, 하아… 일정 확인을 해 줬어야죠.”
어이가 없는 실수에 이수에게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제작본부에서 여력이 안 된다니 외주를 돌려 제안 영상을 제작하기로 했다. 기한이 빠듯해 최대한 타이트하게 중간 점검과 검수가 필요했다. 그런데 최종 검수를 위해 올라온 제작물이 형편없었다. 외주사를 관리한 임 대리가 잘못 공유한 일정이 문제였다. 제작사에 알린 마감 기일보다 일주일 먼저 완성본을 달라고 했으니 영상이 제대로 완성됐을 리 없었다. 도저히 제안서에 넣지 못할 퀄리티였다. 임 대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작업을 진행하는 프로덕션에도 면목 없을뿐더러 지금부터 달려가 밤새 버티고 닦달한대도 수습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최근 들어 임순정 대리의 실수가 잦았다. 회의 시간에도 넋을 놓고 있거나 좀처럼 의견을 내지 못했다.
임순정 대리가 신입 시절부터 사수였던 자신을 따라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라는 건 이수가 가장 잘 알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비범한 재능이 있지는 않지만 임순정 대리만의 장점이 있었다. 팩트 체킹에 능했고, 아이디어에서 리스크를 찾아내는 데 탁월했다. 그걸 찰떡같이 알아듣고 비전을 제시하는 건 이수의 몫이기도 했다.
“임 대리, 요즘….”
이수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문다. 조만간 시간을 빼서 따로 대화를 나눠야지 싶었다.
“일단, 지금 바로 외주사 넘어가서 업무 마무리 지으세요. 저도 이쪽 업무 마무리되는 대로 합류할 테니까.”
임 대리가 자리로 돌아가 재빨리 이동하는 사이 이수는 손에 쥔 종이컵을 구겼다. 요즘 들어 내부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원인은…. 생각이 미간에 깊은 골을 파기 전, 이수의 자리로 내선 전화가 걸려 왔다.
“…네, 네. 아닙니다.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이수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우 본부장의 호출이었다.
유 본부장이 제안서 마지막 장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정 팀장, 긴장 좀 해야겠다.”
‘이수야’가 아닌 정 팀장이라고 불린 것은 그가 선을 그은 직후부터였다.
“요즘 제안서가 왜 이렇게 매가리가 없어. 어째 팀장 달고 긴장이 풀린 것 같아.”
무슨 꿍꿍이인지 유 본부장이 가져오는 일 대부분이 까다로웠다. 깐깐한 광고주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뒤바꾸는 요구 사항을 맞추느라 본질 자체가 흐려졌다. 그 바람에 뒤죽박죽된 제안서는 수정 안 한 부분을 찾아볼 수 없고, 이수의 정신마저 너덜너덜해졌다.
그에 반해 유 본부장의 방은 언제 봐도 간결하고 세련되었다. 정해진 위치에 필요한 물건들이 자리했다. 한때는 이수도 그에게 그런 존재였다. 책상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인.
얇은 안경테를 매만지며 유 본부장은 뼈 있는 말 뒤로 이수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본부장 유진우. 집무 책상 위에 놓인 명패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대리로 진급을 앞뒀을 무렵 유진우의 팀에 합류했다. 손발 맞춰 가며 업무에 익숙해질 때쯤 철야로 밤을 지새우는 사무실에 단둘이 남은 어느 날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유진우가 돌아와 이수에게 커피를 건넸다. 그때 네 번째 손가락에 문득 시선이 닿았다. 일반적인 결혼반지와 달리 디자인이 특이해서 매번 눈길을 끌던 반지였다. 얼결에 눈이 마주치자 묻지도 않았는데 이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죄송합니다. 디자인이 특이해서요.’
귀가 빨개진 이수를 잠잠히 내려 본 그가 슬쩍 웃으며 민망한 듯 반지를 매만졌다.
‘사실은… 이혼했어요.’
생각지 못한 고백에 딱히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빼고 다니면 사람들이 물어볼까 봐. 이혼 사유, 그런 거 설명하기도 그렇고…. 내 결혼식에 온 사람들이 우리 회사만 해도 꽤 되거든요. 정이수 씨, 비밀 지켜 줘야 해?’
볼을 붉힌 건 뜻하지 않게 직장 상사의 비밀을 알게 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음을 빼앗긴 건 순식간이었다. 그것이 동경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유진우는 대기업에 입사하기까지 앞만 보고 달린 이수를 상사이자 선배로서, 때로는 다정한 큰 형처럼 이끌어 주었다.
사는 게 녹록지는 않았다. 서른이 넘은 지금 변명을 덧붙이고 싶지 않지만, 지긋지긋하고 불우한 가정사에 마음에 결핍이 있다는 건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거나, 상대방을 좋아하고 애정을 드러내는 것도, 표현하는 법도 서툰 이수에게 남자이고 상사인 그에 대한 연정을 감추고 인내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손 한번 제대로 잡아 보지 못했어도, 사랑한다 좋아한다 말이 없는 유진우를 의심한 적은 없었다. 맹목적이었고, 미련하게 순진했다. 유진우는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여전히 유부남 딱지가 붙어 있는 그에게 그늘에 가린 그림자처럼 머무는 이수를 유진우는 대견하고 기특하게 여겼고, 이수 역시 그것이 제 사랑의 방증이라 굳게 믿었다. 그래서 이수는 지난 몇 년간 유 본부장의 아래서 지독하게 살았다. 줄기가 잘려 꽃이 말라비틀어지면 버려질 신세라는 것도 모르고, 그가 끌어 주는 손을 혹시라도 놓쳐 버릴까 봐.
그사이 이혼했다는 말은 준비 중이라는 말로 둔갑했다. 도장 하나만 찍으면 끝날 사이가 아이 때문에 쉽지 않다고. 조정이 길어지고 있다며 힘들어하는 유진우를 버리지 못한 실수이자 죄가 너무 컸다. 유 본부장은 이수를 괴롭게 만들었다. 손목을 잡았다가도 다가가면 손을 놔 버리고, 포기하고 돌아서는 순간에 이수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이수가 팀장으로 승진하던 날, 그는 가정을 지키겠다는 말로 관계의 종지부를 찍었다.
“뭔가 보여 줘야지, 이제.”
“네.”
알맹이 없는 질타는 무관심의 반증. 마지막으로 종이를 후루룩 넘겨 보는 유 본부장은 점잖은 투로 이수를 다그쳤다. 곧 제안서를 책상에 내려놓은 뒤 그가 뜻밖의 질문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이시훈 팀장하고는 사적인 대화 좀 나누나?”
“네?”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회의실에서 시훈에게 보인 상황이 썩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몇 번인가 이시훈과 대화를 나누는 이수를 봤다면 웃는 얼굴이 고깝게 느껴질 만도 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묶어 놓은 주제에….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했던가. 유진우가 말하는 사적인 대화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나 이수의 마음은 타인에게 열린 적이 없었다.
“그런 말… 나누는 사이 아닙니다.”
말아 쥔 이수의 손이 차갑게 식었다.
본부장실 문을 닫자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렸다. 올라올 때부터 이미 주머니 안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던 전화였다. 긴 복도를 걸어 승강기가 아닌 비상구 계단으로 걸음을 옮긴 이수가 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여전히 웅웅대며 진동하는 핸드폰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유 본부장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시훈은 광고주 미팅을 마치고 여민준 본부장과 함께 느지막한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일식집 고급 코스 요리를 주문한 여 본부장이 조직도가 띄워진 핸드폰을 내밀었다. 조직도를 살펴보니 비로소 팀장 대행이라는 직함에서 ‘대행’이 지워졌다.
여 본부장이 시훈을 스카우트했노라는 표면상 배경 스토리에 오랜 시간 대행을 달고 있었다. 본부장 이상 주요 임원들이야 시훈의 실체를 알고 있다지만, 고매한 도련님이 낙하산 타고 착륙하셨다는 인상을 주는 건 서로가 곤란했다. 게다가 실무를 뛰는 쪽까지 이야기가 들어가면 편견 때문에라도 귀찮아질 테고.
“조만간 인트라넷에 공고 뜰 거야. 대행을 반년이나 하는 게 말이 되냐. 회장님한테 가서 떼 달라고 땡깡이라도 부리지 그랬어. 네 고집도 참….”
“아직 배울 게 많아서.”
웃기고 있어, 자식이. 여 본부장이 중얼거리며 입안에 회를 한 점 넣었다. 절벽에서 제 새끼 던져 놓고 어떤 놈이 살아남나 두고 보는 호랑이 같은 회장님이나, 살아남겠다 악착같이 일하는 놈이나 핏줄은 못 속이지 싶었다.
“회장님, 최근에도 뵌 적 없어?”
“네.”
“회장님 회사 세우실 때야 도로 깔고, 자동차 만들고, 건물 뚝딱뚝딱 올리는 게 중요했다지만, 요즘은 마케팅, 광고 집행 비용이 어마어마하잖아. 다른 기업들 죄다 산하에 광고 회사 하나씩 만드실 때 고집부리시더니… 한참 뒤에 인사이트 인수하시고. 근데 너 온다는 거 뻔히 아시는데도 아무 말 안 하시는 거 보면 뭐겠어.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이기냐. 눈 딱 감고 한번 찾아봬.”
“아직 좀… 그래요. 껄끄러워.”
너도 참. 여 본부장이 혀를 찼다.
“어쨌든, 첫걸음 뗐네. 너 정도면 팀장을 진즉 달았어야 했는데. 안 그러냐, 이 프로? 이제 임원까지 쭉 가자.”
여 본부장이 인사이트에서 임원을 달기 전, 한창 현역으로 일할 때 굵직하게 히트 친 광고가 제법 많았다. 그는 영리하고 현명하게 광고주를 관리하고 광고를 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말한 것처럼 시류를 읽는 혜안이나 눈치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그가 단 하나, 잘못 탄 라인만큼은 뼈아픈 일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시훈을 데리고 왔으니 그조차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다만 저와 같은 직급인 유진우 본부장이 매번 눈에 걸렸다. 문 대표 심복이랍시고 뻑하면 자신의 의견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는데 몇 개월간 은근한 기 싸움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조만간 여기도 판이 한 번 바뀔 거야. 원래 집주인 바뀌면 리모델링 새로 하고 싶잖아. 입맛에 맞게. 그럼 곁가지 걷어 내고 건실한 몸통만 세워 둬야 탈이 없지.”
곁가지라 하면 여 본부장 입장에서는 아마도 문 대표부터 이어지는 유 본부장 라인을 지칭하는 것일 테다. 그중에서도 눈엣가시인 유 본부장은 1순위 목표일 테고.
여 본부장이 불붙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 연기가 자욱했다.
“유 본이 고인물은 고인물인데 쉽지가 않아. 참… 운도 좋아. 회장님 현역으로 계실 때 집행했던 광고 책임자가 죄다 문 대표라니. 여하튼 문 대표 라인에 유 본이 있단 말이지.”
여 본부장이 반주로 놓인 사케를 한 모금 삼켰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눈썹을 들썩였다.
“근데, 너도 알고 있지?”
“뭘요?”
“소문. 뭐, 소문이라고 하기에는 기정사실이기는 해. 좀 추잡해서 그렇지.”
잠시 뜸을 들인 여 본부장이 입술을 비틀었다.
“유 본한테 아픈 손가락이 있어요.”
그가 새끼손가락을 펴 보였다.
* * *
젊고 감각적인 업계 이미지와 달리 광고계 역시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거만한 꼰대들이 교집합처럼 얽혀 있는 곳이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반이 넘었다. 오늘도 벙개를 주도한 김 전무는 귀가한 지 오래지만 술자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팅이 오후 2시야, 점심 먹고 한숨 늘어지게 잘 시간이구만. 그 시간에 미팅 들어가면 클라이언트가 끔뻑끔뻑 반쯤 눈을 감고 있다고.”
김 전무가 떠나고 대화를 주도하는 주현탁 실장은 대표 직속 부서인 전략실 소속이었다. 주 실장은 돈 냄새를 맡는 기막힌 재주가 있다며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인맥이 넓고 트렌드를 읽는 눈 또한 밝은 사람이라 사측에서는 능력을 의심할 필요 없이 신망받는 존재였다. 게다가 벙개를 주도하는 전무와 동향이라는 사실은 그가 입지를 다지는 데 한몫을 했다.
그런 주 실장이 두 본부장을 저울질해 가며 될 만한 일을 기획팀에 꽂아 준다는 건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래서 시훈 역시 불붙지 못한 담배만 손가락에 끼운 채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정이수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주 실장의 옆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외부 미팅을 나가면 남자나 여자나 비주얼이 좀 받쳐 줘야 주목이 된다고. 다들 알지?”
무리에서 어색한 맞장구와 수긍이 이어졌다. 매번 이런 술자리에서 남자가, 여자가로 시작하는 말이나 성적인 농담을 던지는 주 실장 앞에서 모두 눈치만 볼 뿐 짐짓 불편한 기색은 감춘 채였다.
“아니, 우리 실은 어떻게 인물이 하나 없어?”
소주를 털어 넣은 그가 문득 정이수 팀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맞다! 우리 정 팀장이 있었네!”
정이수가 표정을 굳혔다. 어깨에 손을 올린 주 실장이 얼굴을 바짝 붙이고 말을 이어 갔다.
“요번 A사 미팅 말이야, 우리 정 팀장이 비주얼이 되잖아, 정 팀장이 깔쌈하게 입고 눈웃음 슬슬 치면 아마 그것도 볼만할걸?”
막돼먹은 농담은 술자리의 싸구려 안줏거리만도 못했다. 소주잔을 만지며 상황을 지켜보는 시훈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주 실장 곁의 다른 이들도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 팀장, 어때?”
어깨를 내려간 손이 정이수의 허리까지 내려가나 싶었다. 그동안 술자리에서 주 실장의 헛소리나 종종 정이수의 외모를 두고 꺼낸 말들은 참아 줄 만한 구석이 아주 조금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선을 넘겼다. 끈 떨어졌다 이건가. 그동안은 유 본부장의 눈치를 보느라 조절되던 말의 수위가 넘실대다 못해 흘러넘쳤다.
“…….”
정이수가 앞에 놓인 소주잔을 단번에 비워 내고 살짝 이를 사리문다. 필시 화가 났거나, 그도 아니면 모멸감에 자리라도 박차고 나갈 분위기, 딱 그런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정이수는 주 실장을 향해 느물거리며 낯을 바꿨다.
“일 따면 저희 팀 지분도 넣어 주셔야죠.”
“어어- 그럼, 그럼.”
꽉 죄여 있던 긴장이 일시에 풀렸다. 정이수는 비어 있는 사람들 잔에 소주를 채우기 바빴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헛소리에 맞장구를 친 주변 사람들과 막역한 사이라도 되는 양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이수의 소주병이 시훈에게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시훈이 못마땅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담배를 내려놓았다. 분위기도 그랬지만, 정이수 팀장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자니 이게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 광고 회사의 현주소인가 싶어서였다.
“아이, 씨….”
시훈의 입에서 튀어나온 짜증에 당사자만 무덤덤할 뿐 소주잔을 입에 댄 주 실장마저 인상을 팍 구겼다. 덕분에 또다시 한바탕 찬물을 들이부은 듯 술자리가 조용해졌다.
“돛대를….”
태우지 않은 장초가 두 동강 나 있었다. 시훈이 라이터 끝으로 담배를 툭 밀어 놓았다. 도르르 구른 담배가 안주 그릇 아래에 박히자 정이수와 짧게 눈이 마주쳤다. 빈 잔 위를 맴도는 술병이 방향을 잃었고, 입은 당황한 듯 작게 벌어져 있었다.
“하이고… 이 팀장. 담배 어지간히 태우나 보다. 요즘엔 전자 담배 많이들 피우잖아. 그게 낫잖어?”
단박에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인 사람은 주 실장이다. 소주를 주욱 마신 주 실장이 생글거리며 시훈에게 술을 권했다.
“제가 좀 골초라… 이걸 피워야 일이 되네요, 꼭.”
시훈이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건강 생각도 하셔야지… 여 본부장이 모셔 온 귀한 몸이신데.”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서 눙을 쳐. 곧 찰랑찰랑 넘칠 듯 소주가 담긴 소주잔이 시훈 앞에 놓였다. 빤히 눈을 마주치며 여상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에게 기가 빨리는지 다들 모른 체하고 있을 때 이수가 비어 있는 주 실장과 제 잔에 소주를 채웠다.
“다들, 한잔하시죠.”
잔을 들어 주위 사람들을 주목시킨 이수가 건배를 제안했다. 시훈을 빤히 노려보다 코를 찌푸린 주 실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잔을 들었다. 자,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건배! 소주를 넘기고 나자 대폿집에서 틀어 놓은 텔레비전 소리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프리미어 리그를 뛰는 한국인 선수의 골 때문이었다. 얼큰하게 달아오른 사람들은 어느새 넋을 놓고 경기를 관전하는 중이었다.
담배도 없겠다, 불판과 소주에 엉킨 공기 말고 시원한 바람이 쐬고 싶었다. 곧장 의자를 빼고 일어나는 시훈에게 제작실 구 팀장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 팀장님, 다음 주 컨퍼런스 참석하세요?”
“네, 본부장님이 같이 가자고 하세요.”
…1본부도 간다고 하던데. 회의 시간 다시 잡아야겠네. 구 팀장이 중얼거린다.
“먼저 가시게요?”
“담배 사러요. 앞에서 한 대 태우고 있을게요.”
우그러뜨린 빈 담뱃갑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새 담배를 반쯤 피웠을 때 어느새 대폿집에서 자리를 정리한 무리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요란하게 높은 직책부터 차례로 택시를 태워 보내고 팀장급 역시 속속 퇴근을 서둘렀다. 반쯤 태우다 만 담배를 뒤로 뺀 시훈이 몇몇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를 고했다. 회사에 잠깐 들러야 한다는 인원을 제외하고, 주위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대리 기사를 부를 생각에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낼 때였다. 누군가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잽싸게 채 갔다.
“손가락 데겠어요.”
바닥에 떨어진 담배는 몽당연필처럼 작았다. 불이 꺼진 담배꽁초를 지켜본 이수의 시선이 이내 시훈을 향했다. 그러고는 주 실장에게 보인 미소처럼 살며시 웃는다. 그런 얼굴에 시훈은 어쩐지 껄끄러운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지분 좀 챙겼어요?”
시훈이 곧바로 핸드폰을 내려 보며 이수에게 물었다. 무슨 의미인지 영문 모를 표정이던 정이수가 곧 기억을 떠올렸다.
“아…, 주 실장님. 술김에 하는 말이죠. 사회생활 하려면 적당히 장단 맞추는 거고.”
장난스레 웃는 얼굴이 네온사인 아래서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였다. 알록달록 비치는 불빛이 드리울 때마다 색이 바뀌는 게, 마치 정이수 같았다. 사회생활…. 시훈이 익숙한 단어를 굴려 본다.
“저는 그렇게 일 안 해서요.”
실소처럼 내뱉은 말이 시끌벅적한 거리 한가운데서도 또렷이 들렸다.
“…….”
“이건 제 생각이구요. 정 팀장님 스타일 존중합니다.”
정이수와 눈을 마주한 시훈의 시선이 무심하게 다시 핸드폰을 향했다. 일식집에서 여 본부장이 보인 새끼손가락이 뭘 의미하는지 시훈은 모르지 않았다. 애인이나 섹스 파트너를 지칭하는 은유나 비유 같은 건 좀 더 세련되게… 어떻게 안 되나. 그런 생각을 했다.
두어 달 전, 구 팀장이 와인 바 앞에서 황급히 입을 닫아 말하지 않은 난잡한 소문은 회의실에서 본 두 사람의 관계가 사실임을 복기했을 뿐 제게는 휘발될 가십 정도에 불과했다.
여 본부장이 핸드폰 화면을 가리켰다.
‘대표부터 해서 이사, 전무, 유 본부장까지 라인 보이지? 강남 3구 출신에 G 고교, K 대 라인이란 말이야. 거기에 영국 유학파 출신이면 더 좋구.’
사다리 타기처럼 흐른 여 본부장의 손가락이 1팀에서 멈췄다.
‘근데 여기에 정이수가 있네? 걔가 서울도 아니고 지방대 출신인데 어떻게 라인을 잡고 있냐구. 유 본이 겉으론 양반 같아 보여도… 알지? 원래 그런 놈들이 더 밝히는 거. 품위 유지 위반. 딱 이건데… 부사장님이 좀 곤란해하시더라고.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고 싶냐는 거지… 젠장. 추잡해서 까발릴 수가 없대요. 쪽팔린대. 근데, 정이수 걔가 지금 유 본하고 좀 싸해.’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듣는 시훈에게 여 본부장이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기울였다.
‘걔 요즘 너한테 생글거린다며… 냄새를 맡은 건지, 그냥 엉덩이가 가벼운 건지는 관심 없는데. 괜히 구설수 안 오르게 조심하라구. 입단속들 시켜 놓기는 했어도 모르는 거니까.’
식사 자리를 마치고 오늘 회식에서 정이수를 보기 전까지 시훈의 머릿속에 남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주 실장을 대하는 그를 본 순간 일종의 혐오감이 불시에 똬리를 틀었다. 자신에게 건넨 어쭙잖은 농담들, 수치마저 없는 태연한 태도가 뻔뻔해 보이기까지 했다.
목요일이라 그런지 가까운 거리에 매칭될 대리 기사가 없었다. 왜 꼭 이런 날.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시훈이 담배 한 개비를 더 빼 물었다.
“제 스타일이라…. 우리 같은 AE는 간하고 쓸개 정도는 적당히 빼고 살아야죠.”
이수가 제법 유쾌한 투로 답하며 주머니에서 꺼낸 담뱃갑을 손바닥에 툭툭 쳐 낼 때였다. 이어진 이시훈의 물음에 우뚝 행동이 멈췄다.
“사내 성교육 프로그램 이수 안 했어요?”
시훈이 고개를 비틀어 입술 새로 연기를 내뿜었다. 빈정거리는 말 속에는 언뜻 서늘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수가 하.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다음에는 소리를 내 잠시 웃었더랬다. 직접 운운하지는 않았어도 주 실장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명백히 짚어 준 꼴이었다. 웃음을 멈춘 이수가 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발갛게 불이 붙은 담배를 손에 옮겨 쥔 이수의 입술에서 길게 연기가 새어 나왔다. 그가 웃음기 남은 얼굴로 시훈을 향해 섰다.
“와… 내일 인사과에 상담할까 봐요. 주 실장님 상대로 여기저기 주물렸다고. 언어폭력도 추가해서.”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시훈이 두 볼이 움푹 패도록 담배를 빨았다. 그리고 불쑥 거리를 좁힌다. 그 때문에 살짝 굽은 이수의 등이 저절로 세워졌다. 어느새 한 보도 되지 않을 거리에 선 그가 나지막이 목소리를 낮췄다.
“정 팀장님.”
“…….”
자신을 응시하는 시훈의 까만 동공에 제 모습이 또렷이 비쳤다. 그 때문에 그를 올려 보는 뒷덜미가 경직됐다. 팽팽히 얼굴을 맞댄 침묵은 묘한 긴장을 만들었다. 곧 고개를 외로 돌린 그가 담배 연기를 뱉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분주한 말소리와 자동차 소음이 물에 잠긴 듯 먹먹했다. 시훈은 아랫입술을 혀로 훔치다 말고 이수를 향해 느릿느릿 물었다.
“뭘 그렇게까지 해요?”
툭. 피우다 만 담배를 버린 시훈은 남은 재를 구두코로 비벼 껐다. 은근한 멸시와 경멸이 담긴 힐난은 제법 묵직하게 이수의 속을 때렸다.
“…….”
이수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맞받아칠 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탓이었다.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본 시훈이 몸을 물리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그가 등을 돌려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발 앞에 단 한 모금 피운 담배가 떨어져 짓이겨진다. 이수의 얼굴 위에는 씁쓸함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일하는 책상을 보면 대개 주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하루 중 공식적으로는 8시간, 실상 하루의 절반을 앉아 생활을 하니 분명한 취향을 드러내는 곳이었다. 이수의 자리는 자신의 집과 꽤 비슷했다. 팀장에게 주어지는 널따란 책상에는 데스크톱과 노트북 그리고 태블릿 PC가 놓여 있고, 나머지는 내선 전화, 간단한 필기도구, 그리고 프린트된 수십 장의 제안서가 있을 뿐. 생기를 주는 작은 화분이나 하다못해 자주 쓰는 머그잔도 없었다.
이수의 집 역시 그랬다. 깨끗한 오피스텔 내부에 기본 옵션으로 붙어 있는 가구 외에는 더 들여놓은 것도 장식도 없었다. 이전 집도 다르지 않았다. 빚을 갚고 어머니가 머무는 요양원 비용과 생활비를 제하고 나면 제로베이스로 돌아가는 통장도 이유였지만, 무엇보다도 이수의 마음이 매번 버석한 사막인 까닭이 가장 컸다.
한때는 그런 책상이나 텅 빈 집에 주홍빛 조명이 반사돼 따뜻해 보이는 착각이 들 때가 있었다. 유진우 본부장을 사랑한 지난날이 그랬다. 그런데 이제 조명이 꺼지고 드러난 민낯에는 음울한 기운만 남아 있었다.
이수는 놀라지 않았다. 저를 따라다닌 것들이 잠깐 모습을 감췄다 다시 돌아온 것뿐이었다. 한마디로 이수의 삶은 삭막했다. 그런 재미없는 삶이 최근에는 피곤하게 느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유 본부장에게 내쳐진 때부터였을 테다. 겹겹이 저를 둘러싸고 있던 유 본부장을 걷어 내자 순식간에 알몸이 된 제가 있었다. 사랑은 눈을 멀게 했다. 저열한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걸 알면서도 그가 있어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살았다.
맹목적인 사랑을 원동력 삼아 인사이트에서 수행한 프로젝트들은 유진우의 이름을 달고 승승장구했다. 이수는 그 그림자에 가려지는 줄도 모르고 뒤를 따랐다. 남은 것은 없었다.
마케팅 컨퍼런스의 마지막 세션이 마무리되고 업계 종사자들이 애프터 파티에 모였다. 이런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업계 흐름이나 시장 상황을 편하게 이야기하고, 임원진뿐 아니라 각 회사의 실무자끼리 인사를 하거나 고객사를 만나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러다가 종종 실무와 인접한 업무가 이어지는 터라 인사이트에서는 임원들에게 조직도상 제 휘하에 있는 팀장을 각기 대동하게 했다. 유진우 본부장은 정이수 팀장을, 여민준 본부장은 이시훈 팀장을.
홀 중앙에 마련된 케이터링 테이블 한쪽에서 유 본부장과 여 본부장이 컨퍼런스 구성이 전반적으로 괜찮았다는 둥, 이번에 전무 이사가 한 기조연설은 온라인으로 생중계되었다는 등 겉핥는 대화를 나눴다.
서로 발톱을 숨긴 앙숙이면서 둘도 없는 동료인 체 구는 건 임원의 필수 사항인가. 시훈이 표정 관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유진우의 뒤에 선 정이수가 여 본부장 어깨 너머의 시훈을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시훈은 예의를 차리는 대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아이구, 유 본부장, 여 본부장-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이사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인사를 나눈 광고주는 두 사람과 오랜 인연이 있었다. 사측에도 중요 인사라 두 본부장 모두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사는 쌓인 시간만큼 사적인 친분이 있는지 주변인들의 안부를 묻다 자연스레 이수와 시훈에게로 관심을 보였다.
그 틈에 눈치 빠른 여 본부장이 재빨리 시훈을 제 옆으로 당겨 왔다.
“T 기획에서 일하다가 작년 말에 스카우트해서 지금 2본부 기획팀 맡고 있습니다. 이번 L사 아트 시리즈를 이 친구가 기획했어요.”
등등. 여 본부장은 조금 과하다 싶게 시훈을 띄운다. 이사에게, 라기보다는 유 본부장을 견제하는 눈치였다.
안녕하십니까. 인사이트 기획 2본부 1팀 이시훈 팀장입니다. 예의 있게 인사를 마친 시훈에게 아트 시리즈를 아주 눈여겨봤다며 재능이 있는 친구라는 덕담이 오고 갔다.
당연한 수순처럼 유 본부장도 지지 않고 정이수를 제 입을 빌려 소개해야 맞았다. 그런데 유 본부장은 슬쩍 시선을 돌려 이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제야 의도를 눈치챈 이수가 반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기획 1본부 기획 1팀 정이수 팀장입니다.”
손을 내미는 이사와 악수를 한 뒤에도 유 본부장이 가타부타 덧붙이는 말이 없자 고객사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일전에 유진우 본부장하고 우리 회사 캠페인 촬영장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네, 맞습니다. 파주에서요.”
유진우는 평온했지만 시훈을 소개한 여 본부장과의 확연한 온도 차를 고객사에서 모를 리 없었다.
“유 본부장 밑에서 일하고 있으면, 정이수 팀장도 K 대 김원영 교수에게 사사받았겠어요.”
그때 이수의 얼굴이 묘하게 얼어붙었다.
“…저는 타 대 출신입니다. B 대학.”
“아… 그래요.”
밝히기 싫은 비밀을 밝힌 것처럼, 그리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은 것처럼 질문을 한 사람도 답을 준 사람도 겸연쩍은 상황이 되었다.
아, 그나저나 이번 전무님 기조연설이 아주 좋았어요. 유진우 쪽으로 방향을 튼 이사의 대화는 마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새로이 시작되었다. 곧 뒤로 한 발짝 물러난 이수가 작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이탈했다.
잠시 후, 장내 조명이 어두워지고 유명 뮤지션의 공연이 시작됐다. 라이브로 연주하는 피아노와 함께 노래 두어 곡이 이어질 즈음 여 본부장에게 누군가 인사를 하자 시훈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섰다.
무대 앞쪽의 무리를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봤다. 케이터링 테이블 앞으로 이제 막 잔을 비우고 새로이 샴페인 잔을 들고 있는 정이수 팀장이 홀로 서 있었다. 피로가 깃든 얼굴, 바지 주머니 한쪽에 찔러 넣은 손, 목적 없는 시선. 어딘가 정이수 팀장만이 겉도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원 샷.
곧 정이수 팀장 앞으로 다가온 유진우 본부장이 무슨 말을 전하고 떠나자 그가 잠시간 눈을 내리뜬다. 그리고 다시 샴페인 잔을 순식간에 비웠다. 어둑한 조명에 반쯤 얼굴을 가린 정이수를 응시하며 시훈이 볼 안으로 혀를 굴렸다. 입이 썼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여 본부장의 차를 보고 시훈도 제 차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빈자리 없이 주차된 차들 건너 정이수가 누군가의 차 앞에서 꾸벅 인사를 했다. 차는 지체 없이 그의 앞을 지났다.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이수는 차가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허리를 편다. 오늘 아침 촬영장을 들렀다 곧장 이쪽으로 온 건지 렌트한 회사 차량 앞에 선 그가 키를 꺼냈다. 느릿하게 움직인 그는 운전석 문을 열다 말고 차체에 팔을 대어 이마를 괴었다. 아마도 한참 뒤에 술기운이 올라오는 모양이다.
“대리 기사 불렀어요?”
“…….”
이수가 못 들은 척 운전석 문을 열었다.
“술 마셨잖아요. 대리 불러요. 아니면 택시 타고 가든가.”
결국 시훈이 그의 어깨를 돌려세우고 운전석 문을 닫았다. 힘 빠진 몸이 쉽게 따라와 마주 보자 시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꼭 선생님께 반항하는 소년처럼 말간 얼굴을 한 정이수 때문이다.
“그냥 가세요. 제가 저번처럼 또 실수하면 어쩌려고.”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정이수가 조소하며 지친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피로와 수면 부족으로 눈 밑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고집을 피우며 차에 타려는 걸 결국 시훈이 열쇠를 빼앗아 막았다.
“사고 나면. 혼자 죽어요?”
한숨과 함께 정이수의 팔을 잡아끄는 순간이었다. 브레이크를 잡는 소리가 지하 주차장을 빼곡히 울렸다. 정이수의 인사를 뒤로하고 멀어진 세단이 출구를 앞두고 멈춰 서 있었다. 유진우 본부장의 차였다. 차는 미동 없이 엔진음과 함께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실랑이를 벌이던 시훈이 차량 쪽으로 몸을 틀자 차는 거친 소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출구를 빠져나갔다.
두 사람을 의식해 유진우의 차가 정차했다는 확신은 없었다. 적어도 시훈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정이수가 아니더라도 키를 뺐었을 테니까.
마지못해 시훈의 차에 오른 정이수는 도로를 달리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가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시훈은 딱히 물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꽉 막힌 도로를 벗어났을 때쯤 시훈이 확인하듯 물었다.
“집으로 가죠?”
남아 있는 술기운에 온몸이 나른했다. 자세를 바로 한다고 했는데 처진 몸이 바람 빠진 풍선 인형인 양 힘이 풀려 있었다.
“…네.”
정이수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자존심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을 그는 생각보다 담담해 보였다. 창문 틈으로 밀려온 바람에 정이수의 앞머리가 흐트러졌다. 그 모습을 흘깃 바라본 시훈이 창을 올리고 에어컨 버튼을 누르자 과거 어느 때처럼 묘한 정적이 흘렀다.
바람 한 점 없는 시원한 공기에 뜨거운 몸이 차차 식어 갈 때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정이수가 느릿하게 운을 뗐다.
“…이 팀장님. 제가 생각해 봤는데,”
차들이 빼곡한 금요일 밤이었다. 차가 신호를 받고 정차했을 때, 소란스러운 불빛과 다르게 차 안은 더없이 조용했다. 마른침을 삼킨 이수가 엷은 웃음 뒤로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이 팀장님은, 좀… 함부로 친절하신 것 같아요.”
대충 얽어 놓은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 어색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불쑥 꺼낸 지금 상황도. 아마도 술에 취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쪽 팔을 창에 기댄 시훈이 습관처럼 핸들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춘 것도 그래서였다. 뭔가 어색해서.
“…….”
말을 한 사람도 듣는 사람도 섣불리 대화를 이을 수 없는 침묵이 길어질 때쯤,
“말이 좀, 이상했죠?”
이수가 웃음을 터트리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농치는 목소리가 손바닥 뒤집듯 쾌활했다. 그러고는 피곤을 이기지 못한 눈을 나른하게 감았다 뜨며 혼잣말처럼 힘없이 읊조렸다.
“솔직히, 기분은 나쁜데… 꼬박꼬박 데려다줘… 성희롱이라고 화내질 않나… 츤, 츤. 츤. 아닌가….”
뭉그러진 말끝에는 분명 취기가 묻어 있었다.
“근데… 그러지 마세요. 제가 애정이 고픈 사람이라 막 오해하고 그래요.”
유진우 본부장과도 그렇게 시작됐을까. 예기치 않은 다정에 기대다 지금처럼 장난스럽게 애정을 갈구했을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런 쪽은 본인 취향이 아니지만.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고 차선을 바꿔 달리자 핸들을 움켜쥔 손에 힘이 풀렸다. 이수의 술주정을 듣고 있던 시훈이 입을 열었다.
“후우… 그런 농담,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 안 해요? 회사 동료 상대로…. 제 성적 취향이나 정 팀장님에 대한 감정은요.”
책망은 권태로웠다. 이맛살을 구긴 시훈의 물음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작정하고 불쾌함을 토로하기에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굳이 에너지를 쏟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긴, 남자든 여자든, 농담으로 하기에 귀여울 나이는 지나긴 했죠. 그래도 저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다들 저보고 인물값 한다던데… 아, 남자라서 싫으시려나.”
정이수가 웃음을 흘렸다. 몇 분 전, 어색한 침묵 뒤로 정이수는 취기 묻은 시답지 않은 말들을 남발했고, 그것이 후루룩 바람에 날리도록 멋대로 두었다. 서먹한 분위기를 털어 보고 싶은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그걸 미처 알아채지 못한 시훈의 침묵은 이수에게 단 하나의 빌미도 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흔들리는 일 없이 이수의 돌발적인 고백에 의미 따윈 두지 않겠다고. 다만 모난 시훈의 태도에도 이수에게서 불쾌한 기색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차가 법원사거리를 지나고 정이수가 신호등 앞에서 내리겠다고 한다. 2차선으로 진입해 속도를 늦춘 시훈이 창문을 열었다. 참고 있었는지 깊은숨을 내쉰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이내 불을 붙였다.
“연애 안 해 봤어요?”
“…설마요.”
그 말을 뒤로 차가 멈췄다. 정이수의 표정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연초를 쥔 손으로 눈썹께를 쓸어 내며 시훈이 한숨처럼 말문을 열었다.
“정 팀장님,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섹스할 순진한 나이, 지난 건 맞는데… 이렇게 가볍게 포장하면 아무렇게나 다루고 싶어져요. 가판에 깔린 물건 집어 가라는 식 말고, 광고 만드는 사람이면 스스로 포장도 잘해야죠.”
시훈의 부러진 어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말 한마디 지지 않으면서 저를 이리저리 쥐고 흔들려 하는 정이수의 경솔한 태도가 거슬렸다. 이렇게 일일이 짚어 가며 설명하지 않아도 모를 리 만무하건만 왜 이렇게 가볍지 못해 안달일까. 내려요. 잠금장치가 열리고 창밖으로 재가 털렸다. 채 태우지 못한 담배는 또 길이만 훌쩍 줄었다.
“…포장.”
얌전히 앉아 있던 정이수가 픽 웃으며 입안에서 단어를 굴려 본다. 출발하기 전 새로 장초를 빼 들자 차 문을 열고 바닥에 발을 내디딘 정이수가 조수석 문을 닫기 전 허리를 숙였다. 할 말이 남은 건지 시훈이 눈을 맞출 때까지 기다린 이수가 곧 입을 열었다.
“내가,”
“…….”
멈춘 말 뒤로 입술 끝을 올린 그가 자조했다.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요.”
“…….”
한쪽만 쌍꺼풀진 두 눈이 휘어지며 시훈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인다.
“자꾸 기사 노릇 하게 만드네요. 조만간 제가 밥 한번 살게요.”
꾸벅 머리를 숙인 정이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 팀장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인사 뒤로 지체 없이 조수석 문이 닫혔다. 사이드 미러로 바라본 정이수 팀장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차는 곧바로 떠나지 않았다. 불이 붙은 담배는 한 모금 빨기만 했을 뿐 다시 손가락 끝에 걸렸다. 모퉁이를 돌아 정이수 팀장이 사라진 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시간만 죽인 시훈의 차는 담배가 필터까지 타오른 뒤에야 자리를 떠났다.
* * *
“아메리카노 괜찮죠?”
“정 팀장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시훈은 우연히 사내 카페테리아에서 정이수 팀장을 만났다. 거절할 틈도 없이 주문이 들어갔고 곧 손안에 차가운 커피가 들렸다. 마지못해 받아 들었지만, 한여름에도 마시지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다 그걸 권한 상대가 불편하기만 했다.
정이수는 어젯밤 참석한 컨퍼런스나 차 안에서 나눈 대화는 없던 일인 양 오전 회의를 주제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었다. 때문에 시훈은 거리를 두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이어진 대화는 멀지 않은 곳에 괜찮은 한식당이 있다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수가 기사 노릇에 대한 감사 표시라고 퍽 다정한 목소리로 의중을 물을 때였다.
“어때요, 오늘 갈래요?”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며 뜻밖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유진우 본부장이었다.
“…….”
유 본부장은 정이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시훈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느긋하게 올라탄 그에게 두 사람이 묵례를 했고, 그 앞으로 유 본부장이 등을 보이고 섰다.
미묘한 공기가 세 사람 사이를 짓눌렀다. 웃고 있던 이수는 입을 다물었고, 시훈은 문에 비친 정이수를 유 본부장이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 번은 우연, 두 번째에는 의심이 따랐을 것이다. 지금 유 본부장의 표정이 딱 그랬다. 의심.
시훈은 숨 막히는 분위기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다짜고짜 정이수와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라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훈이 마뜩잖은 상황에 난감해하던 차 유 본부장의 집무실이 위치한 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팽팽한 긴장이 느슨해지는 순간이었다. 예의를 차려 턱을 당긴 두 사람이 몸을 바로 했다. 곧 열린 문 사이로 걸음을 옮기던 유 본부장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요즘 두 팀장 사이가 좋네요. 수고해요. 그럼.”
우연. 의심. 그리고 틀에 박힌 오해. 닫힌 문에 비친 정이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진우의 심사가 단단히 뒤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오후 5시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보통 내선이나 방으로 불러 지시를 내리는 유 본부장이 평소와 다르게 직접 1본부 기획팀 사무실로 내려왔다. 앉으려던 임순정 대리가 어설픈 자세로 유 본부장에게 인사를 하자 그제야 존재를 알아챈 이수 역시 곧장 상사를 맞았다.
“정 팀장. P사 제안서 금일 중으로 올려요.”
“네?”
라이선스 이슈로 법무팀에 자문을 의뢰한 상황이었다. 유 본부장의 지시에 팀원들 역시 어리둥절했다. 어제 열린 주간 회의에서 분명 보고한 문제였다. 물론 유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였었고.
“죄송하지만, 법무팀 측 답변이 다음 주 월요일에 확인이 돼서요. 회의 시간에 전달드…”
말을 맺기도 전에 유 본부장이 정이수의 대답을 잘랐다.
“픽스된 제안서를 달라는 게 아니잖아…!”
내지른 말에는 억눌린 역정이 배어 있었다. 좀처럼 큰소리를 낸 적 없는 유진우 본부장의 목소리가 벽이 트인 2본부 사무실까지 들릴 지경이니 달리 방법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등을 돌려 나가는 유 본부장 뒤로 보이지 않는 눈들이 정이수를 향했다. 정적이 감도는 1본부 기획팀을 파티션 너머로 바라본 시훈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이 상황이 좀 전의 삼자대면 때문이라는 추측이 더해지자 머리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다.
이런 식으로 엮인 게 껄끄럽고 당치 않았다. 눈 사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던 시훈이 모니터를 보자 창 아래 사내 메신저 알림이 깜박이고 있었다.
[정이수 팀장] 식사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야근이라… 시간 언제 괜찮아요?
[정이수 팀장] 다른 뜻 없는데:-) 정말 미안해서 그러는 거예요
[정이수 팀장] 이 팀장님-
[정이수 팀장] 메신저 확인되시면 편할 때 말해주세요
[정이수 팀장] 수고하십시오
읽음. 올라가는 메신저 창에는 커서만 깜박이는 중이었다. 정이수 팀장은 잡지도 않은 약속을 취소하고 몇 차례 재촉해 보다 다시금 모니터 너머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마우스를 툭툭 두드린 시훈은 결국 답 없는 창을 내려 버렸다.
그 뒤 이틀간 정이수 팀장이 메신저로 저녁 약속을 물을 때마다 시훈은 번번이 창을 내렸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는 바쁘다는 말로 약속을 미뤘다. 정이수에게 할애할 시간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 * *
평범한 월요일이었다. 오전 9시 정각. 인사이트 인트라넷에는 인사 발령에 관한 공지가 게시되었다. 동시에 문동현 대표가 취임한 후 공식적인 첫 업무 시작을 알리는 메일이 전사 직원에게 발송되었다. 주요 내용은 개혁과 혁신을 강조하고 비효율적인 업무 시스템을 개선하겠다는 공언이었다.
여민준 본부장과 유진우 본부장은 눈에 띄게 바빠졌다. 며칠간 쉼 없는 회의가 이어졌고 비공식적으로 주요 광고주들을 찾아 얼굴을 비쳤다. 사내 분위기 역시 뒤숭숭하긴 마찬가지였다. 직접적인 영향이 있을지 없을지 모를 ‘비효율적인 업무 시스템의 개선’이 인사이동과 궤를 같이하리라는 짐작은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정이수 팀장과 이시훈 팀장 역시 진행 중인 프로젝트 현황 보고를 위해 지난 한 주간 정신없이 바빴다. 새 대표 취임으로 임원진의 인사이동이 예상된바, 보고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조찬 회의부터 이어진 간부 회의는 점심시간이 지난 직후 대회의실에서 발표할 보고를 끝으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긴 보고가 마무리된 후 김지학 전무가 내민 프로젝트 파일을 여 본부장과 유 본부장 두 사람이 각각 집어 들었다.
“이거 이번에는 단발인데, 아주 중요한 광고주라고. 나중에 덩치 좀 키워서 물어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서류를 빠르게 훑은 여 본부장이 최근 히트를 친 L사의 아트 시리즈가 재계약 승인만 남은 상태라며 에둘러 프로젝트를 미뤘다.
김 전무가 못마땅한 얼굴로 유 본부장에게 시선을 돌리자 여 본부장이 옆자리에 앉은 시훈의 메모지에 재빨리 펜을 놀렸다.
鷄肋! ‘계륵’이라는 두 자가 한자로 휘갈겨 쓰였다.
“1본부에서 진행해 보겠습니다.”
서류 상단에 쓰인 제작 기한을 들여다본 시훈은 기가 찼다. 제작까지 완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에 예산은 진행비를 빼기도 빠듯할 정도였다. 사적인 친분으로 끌어온 프로젝트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유 본부장의 옆자리에 앉은 정이수의 피곤한 안색이 더없이 가라앉았다.
“정 팀장, 할 수 있지?”
회의실을 나가기 전 유진우 본부장은 이수의 가슴팍에 파일을 안겨 주었다. 시훈이 보란 듯이. 거절 못 할 얄궂은 질문은 따갑기만 하다.
윗선부터 차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이제 로비에는 시훈과 이수만 남아 있었다. 온종일 회의를 뛰어다니느라 피곤했다. 흘깃 바라본 정이수는 넋이 빠진 얼굴이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줄도 모르고 서류를 손에 쥔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안 타요?”
결국 열림 버튼을 재차 누른 시훈의 채근에 그제야 정신이 깨인 듯 외꺼풀진 눈을 들어 올렸다.
“전 계단으로 갈게요. 하루 종일 앉아 있었더니.”
휙 몸을 튼 정이수의 안색이 창백했다. 긴 회의 시간 내내 1본부 업무 현황을 캐묻는 김지학 전무의 질문 세례에 일일이 대응을 한 사람은 정이수였다. 간간이 유진우 본부장이 맥락을 짚어 가며 답을 보태기는 했지만, 얼마나 불친절했는지는 같은 팀장 자리에 있는 시훈만이 눈치챌 수 있었다. 유진우의 답변에는 내용이 없었다.
시훈은 비상구 계단으로 향하는 이수의 뒤를 따랐다. 등을 보인 정이수가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딛는 순간 휘청하고 몸이 기울었다. 재빨리 팔을 붙들자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종이가 엉망으로 쏟아졌다.
“괜찮아요?”
스스로도 놀란 듯 잡힌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시훈이 꽉 힘주어 잡은 팔을 빼낸 정이수가 몸을 물리며 중얼거렸다.
“바닥이… 미끄럽네요.”
이수가 무릎을 굽혀 앉고 바닥에 우수수 떨어진 서류를 주워 모았다. 슬쩍 입꼬리를 올린 정이수가 당황한 얼굴을 감췄다.
“…일복이 아주.”
민망함에 이수의 입에서 의미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여 본부장이 에둘러 프로젝트를 거절하던 모습과 제 직속 상사가 패대기치듯 일을 던져 놓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교되어 우스워 보일 만했다.
시훈은 발아래에 떨어진 서류를 모아 정이수에게 건네며 속눈썹 아래에 드리운 피로를 보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 모두 줄곧 야근을 했다. 시훈이 잠깐 눈을 붙이고 온 틈에도 정이수는 자리를 비운 적이 없으니 저보다 체력이 더 달릴 것이다. 시훈의 손에 들린 서류를 받은 이수가 자각도 없는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곧 흐트러진 셔츠 깃을 매만진 이수가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등 뒤의 시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정 팀장님.”
“…….”
“괜찮으면, 저녁 같이 먹죠.”
내려가던 정이수의 걸음이 천천히 멈췄다.
“…….”
동지애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잠깐 숨 돌릴 틈을 주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뒤를 따라온 이유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정이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등을 돌린 채다.
뚜벅뚜벅 계단을 되올라온 정이수가 제 목덜미에 손을 올리고 뻐근한 목을 늘였다. 감은 눈이 스르르 뜨인 그늘진 얼굴 위로 어울리지 않는 엷은 미소가 걸렸다.
“이거… 좀, 좆같은 프로젝트긴 해요. 유 본부장님이 그래요. 욕심이 많으셔서….”
“잠깐 머리 좀 식혀요. 7시에 같이 나가는 거로 하죠.”
시훈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그에 바닥을 내려 보며 계단 모서리를 발로 슥 비벼 낸 이수가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밥 먹자고 할 때마다 미팅에, 메신저로는 대꾸도 없으시더니….”
그러다 불시에 눈을 들어 자신을 바라본다. 정이수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제가 말했죠, 이 팀장님 함부로 친절하다고. 그런데요, 지금 와서 ‘밥 먹자’ 이러면… 제가 좋다 그러겠어요? 적선하는 것도 아니고.”
이 팀장님이야말로 좀 무례하신 것 같은데? 내도록 짓고 있던 미소가 한순간 걷힌다. 등을 돌린 정이수는 인사조차 없었다. 소용돌이처럼 뱅글뱅글 돌아가는 계단 아래로 내딛는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 * *
‘근데… 정산 회장 아들내미가 전략실 들어와 있는 거 맞아? 조직도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자리 만들어 주기 전에 주 실장하고 바깥으로 도는 거 아닌가. 괜히 말 나올까 봐… 그림 만들어 놓으려고.’
‘그런가…. 이번에 조직 개편하면 알겠지, 뭐. 아… 이따가 뭐 먹냐. 요 앞의 칼국숫집이나 갈까? 오늘은 면이 땡기네.’
소란스러운 누군가가 손을 털고 나간 뒤 이수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작년 말부터 모회사인 정산 그룹 오너 자제가 인사이트에 입사했다는 소문은 잊을 만하면 사람들 입을 오르내렸다. 정산 그룹 마케팅팀 총괄도 아니고 대행사에 들어올 이유가 있을까. 광고주가 아니라 굳이. 그렇다면 임원직으로 내정됐겠지….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겠냐마는.
세면대에서 손을 닦는 사이 화장실에 들어온 누군가가 알은체를 해 왔다.
“정 팀장. 오랜만.”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옆으로 자리한 주현탁 실장이 거울 속 이수를 보며 픽 웃었다.
“나는 애들이 저런 말 하면 좀 웃기더라.”
아까 걔네들 말이야. 회장 아들내미가 어쩌구 하던 거. 턱짓이 출입구를 향했다. 딱히 동조를 구하는 건 아니었다. 이수 역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는 척하잖어. 지들이 그래 봤자, 대리급인데.”
“…….”
이수 앞을 가로지른 주 실장이 실실 웃으며 페이퍼 타월을 뽑았다. 젖은 손을 닦는 주 실장의 작은 동공이 기분 나쁘게 이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신입으로 입사했을 때부터 종종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이수는 애써 무시했다.
“요즘 깨지느라 바쁘다며. 아이, 참… 우리 유 본부장이 왜 그러지.”
그러니까, 유 본부장이 점잖은 체를 했다면 주현탁 실장은 노골적으로 이수를 긁는 쪽이었다.
“…아닙니다, 일이 좀 많아서요.”
에이… 기획팀 일 많은 건 상시고. 직속 상사의 흉이라도 보라는 건지 눈을 흘긴 주 실장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수는 입을 다물었다. 주 실장이 유 본부장과의 추문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 사람이 드리운 낚싯대에 순순히 입을 벌릴 이수가 아니었다. 손가락 끝까지 닦아 낸 타월을 휴지통에 구겨 넣으며 주 실장이 비릿한 웃음을 띠었다.
“정 팀장은 안 궁금해? 우리 실 애들도 지들끼리 네가 아들이냐, 네가 딸이냐 그러고 자빠졌어요.”
어휴, 모지리들. 주 실장이 크게 한숨을 쉬며 한탄했다. 딱히 궁금할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비딩이 내일모레 하나, 그리고 완료된 제작물을 다음 주까지 매체에 태워 보내야 했다. 답이 없는 이수를 두고 주 실장이 거울에 비친 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하기는… 그럴 정신도 없지, 뭐.”
이수를 스쳐 지나는 그가 어깨 위를 한 손으로 꽉 붙잡았다.
“아무튼 일 달리면 말해. 내가 우리 정 팀장 챙겨 줘야지?”
툭툭. 파이팅을 외치는 손에는 조롱을 담은 힘이 실려 있었다. 입술을 깨문 이수가 주 실장의 등 뒤로 고개를 숙였다.
최근 여민준 본부장의 얼굴이 밝게 개었다. 시훈이 기획한 L사 광고의 재계약 도장을 찍었고, 매스컴을 통한 몇 차례 인터뷰도 있었다. 반대로 최근 보고 때마다 마주하는 유진우는 어딘가 골이 난 것처럼 굴었다. 그 골을 정이수에게 풀었고 주간 회의에서는 가끔 다른 본부 사정인 양 난감한 상황을 관조했다.
오늘 회의만 해도 임원 보고에서 이미 확정된 PPM북(Pre Production Meeting Book)에 딴지를 거는 김 전무를 유진우 본부장은 설득하지 않았다. 그 역할을 고스란히 떠맡은 이수의 설득은 전후 사정 없이 묵살되었고, 함께 배석한 제작팀마저 난감해했다. 자칫하면 날밤을 새운 수고가 단번에 어그러질 판국이라 정이수가 광고주 컨펌을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하고 난 뒤에야 김 전무의 고집은 수그러들었다.
조금 전 회의실을 나선 유진우 본부장이 코너를 돌아 사라지자 여 본부장이 시훈의 쪽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지가 일 잘못 받아 놓고 속도 편해. 가끔 소시오패스 아닌가 싶어.”
평소 무난한 일만 쏙쏙 골라 간다며 유 본부장을 벼르던 여 본부장마저 이번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니 실상 업무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는 짐작이 뒤따랐다. 고개를 내저은 여 본부장이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사이 슬쩍 뒤를 돌아보니 이제야 회의실을 나서는 정이수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미간에 주름이 팬 정이수가 시훈을 향해 예의상 고개를 숙인다. 대충 ‘수고하셨습니다.’ 같은 의미 없는 인사였다. 곧 벨 소리가 울린 핸드폰을 받은 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 바뀐 것 같던데. 시사 날짜 다시 잡아서 올려 줘.”
“…….”
“이 프로. 들었어?”
“…네. 오늘 중으로 정리해서 드릴게요.”
잠시 넋을 빼고 있던 시훈이 재빨리 답을 하고 여 본부장을 따라붙었다.
탁! 내쳐진 손이 따가웠다. 유진우 본부장에게 대화를 요구했고, 무시한 그를 주차장까지 따라갔다. 그리고 운전석에 타려는 그를 단지 돌려세우려 했을 뿐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몸이 굳었다. 작게 벌어진 입이 한동안 다물리지 못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인적 없는 지하 주차장의 서늘함이 이수의 셔츠 속을 파고들었다. 손등을 감싼 이수가 유 본부장을 올려 보았다.
“정 팀장, 지금 뭐 하는 거야?”
경멸과 환멸을 담은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이수를 보고 있었다. 못마땅해서, 혹은 더럽다거나.
“…제 팀이에요. 그리고 본부장님 소속이구요. 그러니까 감정적으로 대하지 마시라구요.”
입사 이래 유진우 본부장이 이런 식으로 이수를 몰아붙인 적은 없었다. 공격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회사 성격과 달리 오히려 느긋하고 안정적인 프로젝트를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이수는 단지 최근 저를 대하는 행동과 막무가내로 진행되는 업무에 관한 이유를 듣고 싶었다. 정당한 요구였다.
“족보도 없는 자식 거둬 줬더니. 뭐?”
이수가 물었다.
“책임도 못 질 거… 왜 거두셨어요?”
“어디서 건방을 떠는 거야, 여기까지 쫓아와서…!”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손짓 하나, 눈짓 하나에 웃고 울던 강아지를 싫증이 나서 버렸다. 그런데도 다른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모습에 짜증이 솟구쳤다. 더군다나 주제를 모르고 잔뜩 날이 선 눈동자며 어금니를 꽉 깨문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항상 웃는 낯으로 타인을 대하던 유 본부장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우연, 의심을 맴돌던 불편한 상상은 이수의 돌발적인 하극상으로 인해 이제 확신이 되었다.
“이봐, 정 팀장. 갈아탔어?”
정이수가 바라는 대가 없이 제게 사랑과 헌신을 보인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유진우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런데 가질 것도 아니면서 남 주자니 아까운 생각에 심사가 뒤틀렸다.
“…무슨….”
이수는 말을 잃었다.
“지금 이시훈 믿고 이러냐고.”
임원들에게 입을 단단히 걸어 잠그라고 한 사항이지만 평생 숨길 일도 아니고, 이미 두 갈래로 갈라진 라인을 따라 도열한 사람들 틈에 말이 새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감히… 정이수 네가. 이수와의 관계를 킬링 타임용 게임 정도로 여긴 유 본부장의 상상은 가장 저열하게 귀결되었다.
이시훈 팀장과 자신을 사이에 둔 오해는 어딘가 맥락이 어긋나 있었다. 저보다 직급이 아래인 이시훈을 자신과 견주어 갈아탔다느니, 이 팀장을 믿고 이러느니 하는 유 본부장의 말이 특히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수에게는 그런 맥락을 짚어 낼 감정적 여유가 없었다. 그가 언급한 상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저를 한낱 싸구려 취급 하는 유진우의 비난에 비참함이 가슴을 난도질했다.
“저한테… 왜 그렇게.”
목구멍이 막혀 뒷말은 나오지 못했다. 이러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털어 버리지 못해 안달일까. 관계가 틀어진 후 비참함과 수모를 끌어안은 사람은 저뿐이었다. 지난 몇 년, 당장 몇 개월만 돌아봐도 그랬다. 아무도 유 본부장을 비난하지 않았다. 동정하고 안타까워할 뿐. 누구나 추문을 쑥덕대지만, 주홍 글씨가 새겨진 사람은 이수뿐이었다.
그때였다. 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을 비춘 건. 유 본부장의 맞은편에 주차된 SUV 차량이 시동을 걸었다. 차는 출발하지 않고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뜻밖에 이시훈이었다.
“하. 타이밍 좋네.”
유진우 본부장의 이죽거림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이시훈이 가벼운 묵례 후 상사인 유 본부장이 먼저 차를 타고 가길 기다렸다.
“…….”
참을 길 없는 모멸감이 칼을 갈고 있었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이 방향을 찾지 못하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수가 칼자루를 쥐어 본다. 여전히 목표를 찾지 못했다. 칼날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
유진우가 반쯤 닫힌 운전석 문을 열고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말없이 유 본부장을 노려본 이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칼자루를 쥔 채로 보란 듯이 시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 팀장님, 같이 가요.”
시훈은 정이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같이 가자니. 무슨 말인지 다시 되묻기도 전에 그가 걸음을 옮겨 조수석에 올랐다. 그걸 본 유 본부장이 실소하며 차에 올랐다. 차는 시끄럽게 바퀴를 굴리며 멀어졌다. 이윽고 상황을 짐작한 시훈이 한숨과 함께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정이수를 향해 물었다.
“뭐 해요, 지금?”
“저녁 먹자면서요. …밥도 괜찮고, 술도 괜찮아요.”
자정이 넘은 시간, 그걸 정이수가 모를 리 없었다. 고약한 속내가 시훈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조수석 창으로 얼굴을 감춘 이를 지켜보던 시훈이 허리를 세우고 차체에 팔을 기대섰다. 답답함에 셔츠의 위 단추부터 풀어냈다.
“어이가 없는 사람이네, 정말….”
조금 전 상황을 유추해 보자 단박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백번 양보해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건 정이수가 저를 이용한 것일 뿐이었다. 편리한 도구처럼. 얼마 전 엘리베이터에서 유 본부장과의 조우로 시작된 묘한 기류만큼이나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반대편으로 넘어간 시훈은 지체 없이 조수석 문을 열고 이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려요.”
외꺼풀진 눈이 바닥을 향해 있다 시훈을 올려 본다.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음울한 두 눈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이윽고 발을 내려 몸을 일으킨 정이수가 시훈과 마주 섰다. 가깝고 가깝게 마주한 정이수가 자신을 올려 보자 시훈이 인상을 쓰며 조수석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오늘 같은 일, 더는 없었으면 합니다. 불쾌해요.”
혐오. 일그러진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같은 회사 같은 직급, 같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동료를 상대로 이수의 갈린 자존심이 버티지 못했다. 이수는 아랫입술을 피가 맺힐 듯 깨물었다. 마음속에서 부지런히 날을 갈아 방향을 찾던 칼날이 드디어 목표를 잡아 살을 그어 냈다. 아. 옅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소문날까 봐 그래요? 정이수랑 이렇고 저런 사이라더라. 그런 거.”
대꾸를 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뭐라고 생각하든 그건 정이수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하. 시훈이 어이없는 한숨을 터트리고 보닛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심사가 뒤틀린 정이수의 이죽거림이 등 뒤로 쏟아졌다.
“뭐 묻어요, 나한테? 아니면 아닌 거지… 이게 뭐라고 불쾌까지 해요. 유 본이 혼자 착각하는 거 가지고.”
사람 속을 뭉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적당히 하죠.”
휙 어깨를 틀며 시훈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입 털어 먹는 직업이라지만 정이수는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적나라한 조명 아래 정이수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서늘했다. 기다렸다는 듯 비딱한 입술을 열고 정이수가 몸을 붙였다.
“회사 동료끼리 같은 차 못 타요? 이 정도로는 소문 안 나죠? 그럼, 어디 가서 커피라도 한잔할래요?”
“정 팀장님. 뭐 하는데요, 지금.”
힘주어 내뱉은 말은 싸늘했다.
“그것도 약하네. 그럼 입이라도 한번 맞출래요? 그래야 소문 좀 나겠네.”
코앞까지 다가온 이수가 시훈을 올려 보며 느물거렸다. 마구잡이로 그어 대고 나니 후련했다. 완고하게 주름진 미간이며 언짢은 얼굴을 보자 차라리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모두 저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니까. 이시훈 팀장이라면 적어도 위선을 떨 가증스러운 인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실수이자 무례인 줄 알면서도 머저리 같은 고집이 시훈을 향했다.
이런 식의 자해는 꽤 고전적인 방식이었다. 타인이 흠집을 내기 전에 저 스스로 속을 갈라 놓으면 남이 주는 상처로 아플 일은 없었다.
“아니면 이 앞의 호텔이라도 갈까요?”
독기 가득한 시선은 탈주한 사춘기 소년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게 기폭제가 되었다. 이수를 피하지 않고 응시하던 시훈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섹스할 나이는 지났…!”
…다면서요. 이수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멱살이 잡힌 이수의 몸이 무지막한 힘으로 끌렸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좌석 등받이에 둔탁하게 등이 닿았다. 이게 무슨…! 당황한 이수가 얼굴을 돌리자 시트를 지탱한 팔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손목과 턱을 단단히 붙잡는다. 거칠었다. 시훈이 완력을 이용해 취한 자세는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결박된 얼굴 앞으로 시훈의 코끝이 스쳤다. 너무 가까웠다. 단번에 집어삼킬 듯. 저도 모르게 숨을 참은 이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
조금만 각도를 달리하면 입술이 맞닿을 거리. 분노로 잠식된 시훈의 눈동자가 구멍이라도 뚫을 듯 이수와 눈을 맞췄다. 내쉬지 못한 숨에 가슴이 부풀었고, 입이 바짝 말랐다.
눈앞, 가까운 거리에서 시훈은 미동도 없이 허리를 숙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휘어진 눈썹이 날카로웠다. 혼란한 이수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결국 이수가 시선을 떨궜다. 통제를 벗어난 상황과 맞닥뜨린 불안이 그렇게 만들었다. 당혹감에 모든 근육이 삽시간에 굳어 버린 듯 손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심장만이 빠르게 뛰었다.
“윽….”
순식간에 모로 돌아간 턱이 잡혔다. 신음이 터져 나왔다. 힘이 들어간 시훈의 손이 양 뺨을 한 번에 잡아 얼굴을 고정했다.
“왜.”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짧은 물음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딴 말을 지껄이고, 원하는 대로 입까지 맞춰 주려는데 이제 와 얌전을 빼는 이유를 묻는 힐난.
차갑게 얼어붙은 눈에는 짜증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분노를 넘어선 이성이 이수의 본질을 꿰뚫듯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이시훈이 저를 불쾌해하고 있다면, 이수는 이시훈이 불편했다.
우악스럽게 양 뺨을 틀어쥔 시훈의 손목을 잡아떼려 힘을 줬다.
“…놓으…!”
곧바로 시훈이 다른 손으로 이수의 손목을 아플 정도로 잡아챘다.
“아…!”
이시훈의 시계 버클에 걸린 손가락이 마지막 발악처럼 손목 안쪽을 긁어내리자 주차장 바닥에 둔탁한 소리가 닿았다. 실랑이 끝에 턱뿐 아니라 손마저 구속된 상황에 이번에는 신음마저 나오지 않았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감정을 추슬러 보려고 해도 기이한 흥분이 멋대로 넘실거렸다. 이수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흘렀다.
정이수는 여전히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외꺼풀진 눈이 파르르 떨리는 줄도 모르고 노려보는 모습이 볼만했다. 그런 이수를 두고 시훈은 시선을 내렸다. 이수의 다리 사이를 확인한 그가 나지막이 빈정거렸다.
“좀 거친 게 좋은가 봐요.”
안 세우신다면서… 잘도. 벌어진 다리 사이에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발기한 이수의 성기가 존재를 보였다. 이마 위 흐트러진 머리 가닥 아래로 가로로 긴 시훈의 눈이 서서히 이수 앞으로 다가왔다. 시훈이 틀어쥔 이수의 손은 마디 끝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내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좁힌 시훈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봐요, 정 팀장님.”
“…….”
낮은 한숨을 내쉰 그가 이윽고 이수와 눈을 맞췄다. 느릿느릿 입이 열렸다.
“품위 좀 지켜요. 애먼 사람한테 애꿎은 화풀이 하지 말고.”
“…….”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말을 끝으로 시훈이 팔을 억세게 잡아 이수를 일으켰다. 튕기듯 조수석 바깥으로 밀려 나간 몸이 휘청거렸다. 조수석 문이 거칠게 닫히고 보닛 앞을 돌아간 시훈이 운전석에 타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찾아든 한기에 미세하게 몸이 떨렸다. 어떻게 두 발을 딛고 서 있는지 모를 만큼 얼어 버린 감각에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한심했다. 찌꺼기 같은 감정 하나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이시훈에게 밑천만 드러냈다. 참담한 자괴감이 이수를 바닥까지 끌어 내렸다.
타이어가 주차장 바닥을 긁는 소리가 지하 주차장을 울렸다. 공허한 눈을 한 이수는 시훈의 차를 등진 그대로였다.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발치에는 표면에 균열을 일으킨 남자의 시계가 떨어져 있었다.
* * *
피곤한 몸을 소파 위로 뉘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텔레비전에서는 작년 연말 이수의 팀에서 진행한 은행 광고가 송출되고 있었다. 믿음. 사랑. 약속. 영상 따라 자막들이 페이드인, 페이드아웃 되었다.
세 가지 전부 소중하지만 한번 깨지면 티가 나지 않게 붙일 수 없는 그런 것들. 그래서 또 귀한 것들이었다. …지랄.
“후우….”
하도 깨물어 부은 아랫입술이 아팠다. 다시 큰 숨을 끌어 올리고 내뱉으며 이수는 감은 눈 위에 손등을 올렸다. 그러자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이 이수의 머리를 둥둥 떠다녔다. 조금 전 내린 택시의 룸 미러에 부적처럼 붙어 있는 문구였다. 오늘 이수의 하루는 무사하지 못했다. 이수는 침음했다. 유진우에게 내쳐진 손등의 통증은 희미해졌다지만 대신 짙게 남은 쓰라린 기억이 떠올랐다.
팀장으로 승진 발표가 났던 날, 근사한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그와 룸으로 올라갔다. 유 본부장의 말을 빌리자면 정식으로 하는 첫 데이트였다. 설렜고, 아마도 그런 말을 기대했던 것 같다. 아내와는 끝이 났다고.
자신에게 먼저 샤워를 권한 그를 두고 욕실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재킷 하나 벗지 않은 유진우 본부장은 영국에 있는 와이프와 아이들과 차례로 통화를 마치고 있었다. 분위기를 읽지 못한 이수가 가운을 입은 채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문고리를 잡은 유 본부장이 예의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수가 얼마나 잘 따라오는지 궁금했는데 팀장까지 올랐으니, 클라이맥스는 막 지난 건가?’
‘…클라이맥스요?’
‘응. 제일 재미있는 부분 말이야.’
웃는 얼굴은 소년처럼 천진했다. 이수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지…. 침대 밑으로 발을 디뎠을 때 문을 연 그가 말했다.
‘아, 그리고 우리 앞으로 선은 지키자. 뭐랄까… 내가 좀,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아.’
그는 사소한 실수를 한 것처럼 멋쩍어했다.
‘…본부장님.’
‘아이 때문에. 헤어지면 와이프하고 나는 남이지만 애는 죄가 없잖아.’
말을 잃은 이수를 두고 그가 시원스레 걸린 미소를 앞세워 축하 인사를 전했다.
‘승진 축하해, 정 팀장.’
무겁게 닫힌 문 뒤로 이수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존재가 무료한 그의 일생에 일탈이었다는 사실을. 5년 동안 전전긍긍하는 저를 보는 일이 지루한 회사 생활을 이기는 드라마였음을.
그 뒤로 유진우는 착실하게 또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이수에게 벽을 쳤다. 팽 당했다는 말은 이수가 유진우를 꾀었다는 소문처럼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전해졌다. 마지막 선물처럼 씌워 준 팀장이라는 감투는 이수가 피눈물 나도록 행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유 본부장이 아니면 네까짓 게 감히 그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을 거라는 수군거림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분노나 슬픔은 갖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완벽한 유 본부장에게 흠집을 낸 탕아는 정이수였다. 그를 사랑한다는… 아니,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주홍 글씨가 새겨졌다. 그리고 그걸 지우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그래서 이수는 버티고 싶었다. 아무 일 아닌 듯 저도 유 본부장처럼 성공해 보려고 라인을 잡아 본 거라고, 차라리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상실이 그렇게 하라 스스로를 다그치고 채찍질하도록 만들었다.
15초 만에 넘어가는 광고가 끊임없이 재생되고, 텔레비전 화면이 이수의 얼굴에 덧씌워졌다. 온몸이 피로를 토로해도 감긴 눈은 손만 치우면 도로 뜨일 기세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잠이 안 올까. 흔히 말하는 피로, 스트레스, 그런 것들은 평생 안고 살았는데….
인사이트에 들어와 3년쯤 됐을 때 눈 딱 감고 이직을 해야 했다. 첫 회사라는 게 뭔지… 이상한 감상에 사로잡힌 게 문제였다. 유진우 본부장도.
몸을 늘어트린 이수의 입술이 달싹였다. 들릴 듯 말 듯. 주문처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남자가 했던 말을 습관처럼 떠올리고 만다. 그저 평범한 새해 인사였다.
“…시발, 이거 너무… 하.”
자존심 상하네. 혼잣말과 함께 조소가 새어 나왔다.
‘뭘 그렇게까지 해요?’
얼마 전, 냉소하던 시훈의 물음이 떠올랐다. 오늘 그가 던진 질문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말은 어느새 주인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그 음성을 배경으로 이수가 답을 했다.
잠이 안 오니까요. 그럴 때면 한번 해 봐요. 잠이 올까 싶어서. 듣는 사람은 없지만 맴도는 말이 우스워 눈을 감고 자조했다.
‘안녕하세요, 이시훈입니다.’
팀장 대행이라는 직함을 단 그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여민준 본부장이 새 팀을 꾸린다는 소식은 이수가 팀장으로 승진한 직후 전해졌다. 유진우 본부장과 적의를 둔 여 본부장을 비롯해 다수가 제 승진을 못마땅해하는 분위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인사 공고는 불시에 예고 없이 이뤄졌으며 벽을 터 나눈 공간에는 1본부와 2본부 기획 1팀이 나란히 자리를 틀었다. 동일한 출발선에 세워 둔 말처럼 말이다.
이시훈은 겉으로 보면 분명 냉소적이고 자신의 바운더리를 분명히 가진,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금세 기획팀 팀장 자리에 녹아든 것도, 팀원들이 스스럼없이 그를 대하는 것도 분명 이시훈이 가진 능력이었다.
그때쯤 유진우와의 관계가 끝이 나며 앞뒤 재지 않고 넘어오는 업무량이 상당했다. 계속되는 야근과 철야, 그리고 이별의 후유증으로 이수는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그 와중에 작년 늦가을 인사이트로 이직한 이시훈이 추수하듯 대부분의 비딩에서 일을 따고, 여 본부장과 막역한 그가 내부적으로 신임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 이수를 조금 초조하게 만들었다.
간부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술을 이시훈은 마다하지 않고 곧잘 마셨다. 그는 애써 웃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일 없이 차분하며 여유로웠고, 마치 이 자리가 익숙한 듯 다른 이들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방인처럼 테이블에 놓인 잔만 만지작거리는 이는 말하자면 박힌 돌인 정이수 자신이었다.
유 본부장과 그런 관계라더라 하는 두루뭉술한 소문이 싹튼 이후로 이수의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일부러 모르는 척 자리를 지키는 일은 회식마다 반복됐지만, 저와 이시훈을 나란히 앉혀 두고 하는 연말 회식은 좀처럼 견디기가 어려웠다. 결국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찬 바람이라도 쐴까 싶어 슬쩍 자리를 빠져나왔다.
회식 장소를 빠져나오자 겨울바람이 제법 날카로웠다. 건물 옆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 선 이수가 코트 깃을 여미고 핸드폰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연말이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급하게 회신이 필요한 메일을 작성하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가락이 얼얼했다. 날 선 바람에 얼굴마저 얼어 버릴 것 같은 추운 날씨였다.
‘…아, 담배.’
내년에는 반드시 담배를 줄여 보겠다는 의미 없는 계획을 세운 탓에 하필이면 주머니가 비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이수가 난감한 얼굴로 코트를 여몄다. 감기라도 걸리는 날에는 줄을 서고 있는 일들이 하나같이 만만찮았다. 1시간 정도만 버티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실내로 발길을 돌리는 참이었다.
‘이야… 진짜 정이수가 팀장이랍시고 상석에 앉아 있더라.’
‘안 쪽팔리나?’
모퉁이 너머로 모인 무리에서 들리는 제 이름과 스캔들은 진저리가 났다. 코트 밖 차가운 두 손을 꽉 쥐어 보았다. 잠시 눈 감고 큰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번졌다. 그냥 넘길 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 감은 눈을 뜰 무렵, 제 뒤쪽으로 누군가가 한 발자국 다가선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담배 태워요?’
이시훈이었다. 입에는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담배가 물려 있었고 이수에게 내민 장초 하나가 손가락 사이에 삐딱하게 걸려 있었다.
‘금연 중이에요.’
자신도 모르게 슬쩍 몸을 돌렸다. 그에 대한, 혹은 타인에 대한 무의식에서 오는 방어 기제이자 딱히 말을 섞기 싫어 보인 행동이었다.
이시훈은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술자리에서 멀쩡해 보인 모습은 착각이었는지 제법 취한 듯 두 눈이 멍해 보였다. 앞에는 뒷말하는 무리가, 뒤로는 이시훈이 서 있는 상황이라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예의상 말이라도 붙여야 하나 이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흔한 레퍼토리가 흘러나왔다.
‘여 본부장님 기대가 크시겠어요.’
쾌활한 어조로 다음 말을 덧붙이려 할 때, 찬 바람처럼 앞에 선 무리의 말소리가 훅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야, 쪽팔리긴 뭐가…. 정이수가 지 쪽 팔아서 유 본이랑 붙어먹은 건데. 지방대 출신이 팀장이라…. 유 본부장 아니면 미스터리 아니야? 정이수도 참 대단해. 뽑아 먹을 거 뽑아 먹고 유 본 버린 거 맞지?’
‘정이수만 아니었으면 상무 달았을지도 모르지. 문 대표 라인이라며…. 대체 걔가 뭘 어쨌길래 홀딱 넘어간 거야?’
‘처음 자빠트리는 게 어렵지. 위에서 허리 돌리면 볼만할걸. 쓰읍. 정이수 라인이… 큭큭큭.’
‘아, 맞다. 들었어? 정산 회장 아들내미가 우리 회사 다닌다는데? 이번에 전략실 들어간 앤가?’
‘거긴 여직원 들어갔을걸? 뭐, 제작팀이나 기획팀 가서 뺑이 칠 것 같지는 않고….’
좆같은 타이밍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잘못한 것도 없는 이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손이 차고 볼이 차고, 그리고 구멍이 뻥 뚫린 마음에는 찬 바람이 지나갔다. 여태 담배를 물고 있던 시훈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 모퉁이 너머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곧 벽에 등을 기댄 이시훈은 말없이 담배만 두어 번 빨고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
제법 길이가 짧아진 담배를 손에 들고 이시훈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을 앞둔 시간, 이제 곧 올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여하튼 구멍 팔아먹는 새끼나 금수저 물고 태어난 놈이나 세상 참 편하게들 살아요.’
배경음처럼 들려오는 소리에 시훈의 미간이 좁아졌다. 곧 피우던 담배마저 바닥에 내던졌다.
‘거참, 시끄럽네….’
이시훈은 구두 앞코를 이용해 아직 타고 있는 불을 비벼 끄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시발, 지들은 개천에서 용 났나…. 쥐뿔 좆도 아닌 새끼들이.’
확실히 술에 취한 듯 이시훈의 말소리는 꼬여 있었다. 기댄 몸을 세운 그가 이수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권한 담배를 다시 한번 이수에게 내밀었다. 그게 위로인 것처럼.
물끄러미 이시훈이 내민 손을 바라본 이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랫입술을 난감한 듯 깨물었다. 곧 이시훈이 본인의 입에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어둠 속 동그랗게 빨간 불이 번졌다.
“…….”
불붙은 담배는 멍하니 서 있는 이수의 입술 앞으로 돌려 내밀어졌다. 저도 모르게 빠끔 입을 열어 담배를 물자 저보다 키가 큰 이시훈이 고개를 비틀고 눈을 맞췄다. 그 때문에 이수가 살짝 턱을 당겼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나치게 가까운 이시훈에게서 미미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
입술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담배와 곧은 코를 거쳐 올라온 시선이 이수의 눈에 다다랐을 때 이시훈은 오래도록 그 자세를 유지했다. 아마 한… 5초 정도.
고개를 사선 방향으로 비틀어 픽 웃음을 흘린 그가 허리를 세우며 말을 뱉었다.
‘…금연은 내일부터 하죠.’
다정함도 배려도 없는 투로 ‘그냥 한 대 태우고 무시해요.’ 하는 투박한 위로였다.
이수는 제게 한 일련의 행동들이 이시훈의 고상한 술버릇임을 깨달았다. 아마도 내일이면 기억조차 없을…. 등을 돌린 시훈은 벨이 울린 폰을 받아 ‘네, 잠깐, 이 앞이요.’라고 대답했다. 아마 안쪽에서 행방을 찾는 전화였을 테다.
멍하니 서 있던 이수가 뒤늦게 담배를 손으로 옮겨 쥐며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입술은 달싹거리기만 했다. 둘 사이로 쌩하게 지나가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진 구겨진 전단지가 도르르 제자리를 굴렀다. 이수는 간단한 안부 인사 하나도 못 하나 싶어 잠깐 속을 끓였다.
그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이시훈이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명쾌한 답을 주었다.
‘아,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하고. 입술 끝이 올라간 엷은 미소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평이한 인사는 이수의 핸드폰과 메일에 12월부터 지겹도록 쓰인 문구였다. 이수는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찬 바람이 숭숭 지나던 속이 찌르르 울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타인의 안녕을 바라는 말. 불면증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던 때였다. 살면서 몇십 번, 아니, 몇백 번은 주고받았을 흔하디흔한 상투적인 그 말이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잠들기 전 몇 번이나 곱씹어 봤더랬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든 걸 다음 날 1월 1일, 새해 아침 눈을 뜨고서야 깨달았다.
* * *
최근 2주간 두 명의 팀원이 퇴사 의사를 밝혔다. 김지학 전무가 전가한 G사의 광고주 시사가 끝난 뒤였다.
그리고 유난히 조용한 늦은 오후, 임순정 대리가 면담을 요청했다. 자리에 앉은 임 대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앞에 놓인 종이컵만 만지작거릴 뿐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이수와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이었다. 한때 이수는 임순정 대리의 사수였고, 임순정 대리의 포트폴리오는 전부 이수와 함께 시작하고 끝낸 프로젝트였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윽고 마른침을 삼킨 그가 이수에게 ‘퇴사하겠습니다.’라고 의사를 밝혔다.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곧 이수가 임 대리에게 물었다.
“이유가 뭔가요.”
임 대리는 깨문 입술을 풀고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수는 상대를 다그치지 않았다. 잠시 후, 임 대리가 큰 숨과 함께 떨리는 목소리로 답을 주었다.
“…지쳤습니다. 저 정신과 다니면서 약 먹고 있어요.”
이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봇물 터지듯 임 대리가 그동안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넘어가고. 회사 올 생각만 하면 죽고 싶어요. 그냥 눈을 안 떴으면 좋겠습니다.”
“…업무 강도를 조정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고개를 젓는다.
“업무, 중요하게 여기시는 거 잘 아는데요. 어떻게 매번 질책만….”
정이수 팀장과 수많은 밤을 다독이며 보냈다. 그는 사수였을 때부터 사적인 농담을 건네거나 사람과 어울리는 유형이 아니기는 했다. 그래도 업무를 핑계로 괜한 술자리에서 시간을 죽인다든가, 마음에도 없는 입에 발린 소리로 상사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동기들보다 훨씬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들이 쑥덕대는 추문에도 임순정 대리만은 귀를 닫고 살았다.
번아웃은 한순간이었다. 이수의 승진을 기점으로 제 역할 역시 커졌다는 자각은 더뎠다. 성장의 고비를 넘기지 못한 실무자의 아이디어는 고갈되고, 좀처럼 회의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발에 땀이 나도록 뛰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상 시간을 뭉개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몸만 고되고, 축났다.
업무에서 손을 놓자 쓸데없는 소리가 귀에 잘도 꽂혔다. 정이수 팀장이 유진우 본부장과 틀어져 짜치는 일만 물어 온다더라. 라인이 잘렸으니 1본부 기획팀이 산으로 가게 생겼다 등등.
게다가 정이수 팀장은 왜 이렇게 예민한 걸까. 한때 기민하고 카리스마 있어 보인 행동들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니 극한의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신경이 쇠약해진 탓에 모든 책임이 정이수 팀장에게 있는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너무 힘들어서 더 못 다니겠습니다.”
이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두 입술을 꽉 붙였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될 리 없었다. 팀원 건강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관리자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어쩌면 따뜻한 말 한마디나 격려가 필요했을 임 대리를 추스르지 못한 후회가 뒤따랐다.
“일단은… 휴가부터 내요.”
“…….”
“임 대리. 병가 처리 해 줄 테니 쉬고 와요. 제가 인사팀에는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복귀해서 불이익 없다고 약속할게요. 그리고… 그 후에 다시 한번 이야기하죠.”
“…….”
묵묵부답인 임 대리를 바라보는 이수의 마음이 착잡했다.
얼마 뒤 비정기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이었다. 문동현 대표가 취임한 뒤로 사내를 긴장하게 만든 결과가 곧 드러나는 셈이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던 시훈에게 집무 책상 앞에서 자신을 찾는 여 본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라인드 틈을 벌리자 눈을 마주친 여 본부장은 한걸음에 달려와 열린 탕비실 문부터 닫았다.
“너 저거, 맞지? 시영이가 보낸 엽서.”
“…….”
커피를 머그잔에 따르던 시훈은 더 이상 언급하기 싫은 듯 입을 다물었다. 서로 좋을 것 없는 말을 여 본부장 역시 굳이 들추고 싶지는 않았다. 눈치를 보던 여 본부장이 화제를 돌려 핀잔 어린 질문을 던졌다.
“너 설마 아직도 본가에 안 찾아뵀냐?”
또 묵묵부답. 시훈은 종이컵 하나에 커피를 채워 건네줄 뿐이다.
“저번에 숙모님이 나한테 웬 안부를 여쭈시나 했다. 너 때문이었네. 네가 하도 연락을 안 하니까.”
무감한 표정의 시훈이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 문제 때문에 사무실까지 행차하신 건 아닐 거 아니야. 빨리 말해요, 나도 바빠.”
그제야 퍼뜩 정신이 돌아온 여 본부장은 행여나 소리가 새어 나갈까 열려 있는 블라인드까지 내리며 수선을 떨었다. 그리고 어이가 없는지 혀부터 찼다.
“‘될놈될’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내, 참. 영국 지사 상무보? 유진우가 여유 넘치는 이유가 있었네. 하도 깽판을 치길래 오퍼 들어온 줄 알았더니 내정된 자리가, 영국 지사 상무보?”
문 대표가 유 본부장에게 직접 자리를 제안했다고 한다. 해외 에이전시를 인수하며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는 후문이었다. 영국통이기도 했고.
“와이프랑 애까지 이미 가 있다고 하니까, 이건 뭐.”
여 본부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시훈에게 물었다.
“정이수 쟤는 어때 보여?”
“뭘요.”
유 본이 말 안 한 것 같지? 지 영국 가는 거. 뒤돌아선 여 본부장이 벌린 블라인드 너머를 바라보았다.
“라인 잡으면 뭐 해. 줄기를 잘라 버리는데.”
여 본부장의 시선을 따라가자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는 정이수가 보였다. 끈 떨어진 신세일.
“유 본부장 영국으로 뜨면 정이수도 완전 나가리네.”
시훈이 들고 있는 머그잔을 내려 보았다.
“그 후에는… 정이수 팀장 팀도 본부장님 밑으로 배속되죠?”
“아마도?”
“바빠지시겠네요.”
“힘줄 때 딱, 주고 풀 때 풀어야지. 어떻게 다 똑같이 봐줘.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건 핏줄일 때나 하는 말이고… 회사에서 무슨.”
명확하게 시훈만 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정이수 팀 사람 빠지고 있다며. 애들이 뭔 냄새를 맡아 그런 거야, 아니면 정이수가 인력 관리 능력이 없는 거야.”
여 본부장이 커피를 마시며 뻐근한 몸을 늘어뜨렸다. 시훈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돌아가는 흐름을 보면 누가 보아도 유진우 본부장이 정이수에게 거리를 둔 후부터 1본부 기획 1팀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용케도 팀을 끌어가는 정이수 팀장이 몇 배로 개고생을 하고 있을 건 뻔했다.
“유 본 영국 넘어가고, 구색 갖춰지면 정이수 팀 정리해서 네 밑으로 보낼 거야. 이 프로 네가 정산 광고 담당해야지. 외부 광고주는 그다음에 생각할 일이고.”
회장님이 인사이트를 인수한 뒤 시훈이 실무에서 뛰고 있는 사실을 묵과하는 이유야 뻔했다. 언젠가 인사이트의 정점에는 시훈이 서게 될 것이다. 그걸 날로 먹이려는 생각도 없고 날로 먹을 생각도 없는 부자간의 기 싸움이 여 본부장으로서는 이해가 안 될 뿐.
“정 팀장은요?”
“글쎄. 알아서 정리하지 싶은데. 쪽팔려서 회사 못 다니지. 유 본한테 팽 당하고 같이 팀장 달고 있다가 네 밑에서 일하라는데.”
남은 커피를 마신 여 본부장이 종이컵을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그러다 시훈의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엿본다.
걸리적거리는 거 없이 제 팀으로 만들어 준다는데 왜 생각이 많아 보일까. 다른 건 몰라도 시훈은 회장님께 제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다. 아마 일생의 숙제일 테지. 여 본부장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 프로.”
“네.”
“너도 욕심 없는 건 아니잖아.”
인사이트로 이직을 결심한 후부터 시훈이 걷는 길이 회사의 미래였다. 본인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테고. 침묵이 긍정의 뜻임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새벽 출근길은 퇴근길보다 몇 배는 더 고되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집에서 회사로 복귀한 시훈의 손에는 메일을 확인 중인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광고주가 출근하기 전 자료를 취합 정리 해 메일로 보내 놓아야 했다. 다행히 최근 시리즈로 제작한 L사 광고가 큰 주목을 받아 매출이 긍정적이었다. 작년 말 인사이트로 이직한 이후 첫 비딩에서 따낸 쾌거가 흐름을 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시훈의 팀 분위기가 좋았다.
적막에 싸인 복도를 지나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 출입문 태그를 찍으려 할 때였다. 좌우로 열린 출입문 안으로 정이수 팀장이 서 있었다. 상대 역시 예상을 못 했는지 놀란 얼굴로 시훈을 올려 봤다. 정적이 자리한 어색함은 잠시였다. 능숙하게 불편함을 미루어 둔 이수가 시훈에게 사무적인 인사를 건넸다.
“일찍 오셨네요.”
“정 팀장님이야말로 일찍 오셨네요.”
“…네, 아침 일찍 보고드릴 사항이 있어서요.”
소매를 걷어붙인 팔이나 주름진 셔츠를 보면 일찍 온 게 아니라 아주 철야를 한 모습이었다. 잠을 자기는 한 건지 두 눈이 충혈돼 있었다.
“유진우 본부장님께 말입니까?”
유 본부장이 영국 지사로 간다는 건 여민준을 통해 시훈만 아는 상황이었다. 그걸 알 리가 없으니 유 본부장이 변덕을 부려 지시한 무용지물인 보고서를 밤새 만든 모양이다.
“네. 그럼.”
살짝 고개를 숙이는 상대에게 시훈이 몸을 비켜 통로를 열어 주었다. 곧 정이수가 제 앞을 지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시훈은 자리로 돌아오는 정이수를 모니터 너머로 바라보았다. 세수를 했는지 조금 흐트러졌던 머리카락이 매끈하게 넘어가 있었다. 팔목 끝 말려 있던 소매는 단정하게 내려갔고, 타이 역시 목을 바짝 조여 느슨한 구석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준비를 마쳤다. 유진우 본부장의 전화가 울리면 언제라도 튀어 나갈 사람처럼. 절박함이 아슬아슬하게 정이수 팀장의 사지를 묶은 듯했다.
* * *
비정기 인사이동이 인트라넷 공지에 게시되고 난 뒤 기획 1본부와 2본부가 통합되며 공식적으로 여 본부장 책임 아래 1본부 1팀에는 이시훈의 팀, 2팀에는 정이수의 팀이 배속되었다. 이하 따로 독립되어 있던 레이블이 통합되며 2, 3, 4, 5본부가 조직도 내로 흡수됐다. 당분간 유진우 본부장은 영국으로 넘어가기 전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신규 TF팀을 관리할 예정이었다.
현 기획 1본부 기획 2팀, 그러니까 유진우 본부장 산하에 있던 정이수 팀장이 지휘하는 팀은 내내 조용했다.
임순정 대리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차를 냈다. 퇴사 의사를 밝힌 직원들 역시 면담 후 붙들어 놓은 듯하지만, 이번 조직 개편으로 인한 뒤숭숭한 기운이 터놓은 벽을 넘어 시훈의 팀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유진우라면 당장 며칠 전 정이수에게 보고서에 관한 질책을 하면서도 영국행에 대한, 혹은 조직 개편에 대한 기척도 내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변함없이 업무를 보는 정이수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담담했고, 묵묵했다.
“이 팀장님, 제작실에서 기한 관련해서 협의를 좀 했으면 한다구요. 1본부, …아, 그러니까 2팀 제작물 있잖아요. 전무님이 챙기시던 G사.”
제작팀과 회의를 마치고 온 신 대리가 이슈 사항을 구두로 읊었다.
“네. 완료된 걸로 아는데.”
“온 에어가 코앞인데 추가 요청 사항 때문에 마무리를 해야 한다나요.”
시훈은 보고서에 올린 기한을 확인해 본다. 그 옆에서 자리를 지키는 신 대리가 말하기 껄끄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G사 캠페인이 그렇게 힘쓸 건 아니지 않나요. 근데 정이수 팀장님이 직접 제작실까지 와서 퀄 업이니… 아웃풋 챙기신다고 해서 좀 난감해하더라구요.”
추가 요청 사항이라는 건 막상 열어 보면 온 에어 된 이후에 순차적으로 진행해도 무관할 가능성이 크다. 그걸 붙잡고 있는 정이수 팀장도 모르지 않을 테고.
저도 그럴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턴 시절 초조함에 밤새도록 사무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물에 전전긍긍하고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던 때였다. 지금 정이수 팀장이 그런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도 책잡히지 않으려고 말이다.
“저희도 기한이 여유 있는 건 아닌데, 협의가 잘 안 돼서요.”
“제가 구 팀장 만나서 조정해 보겠습니다. 가능하면 오늘 중으로 회의 다시 잡죠.”
신 대리에게 답을 주고 난 후 시훈이 이마를 짚었다.
퇴근 전 여민준 본부장으로부터 호출이 있었다. 집무실에는 정이수 팀장이 먼저 와 착석해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운을 떼기로는 그랬다. 여 본부장이 담당하는 1본부가 내년부터는 정산 그룹의 캠페인을 맡게 될 것이며, 외부 광고주는 아마 다른 본부에서 진행할 것이라 했다. 그때까지는 1, 2팀이 유동적으로 업무를 진행해야 한다는 당부가 덧붙었다.
“정 팀장, G사 캠페인은 언제 태워 보내나?”
“일주일 뒤에 온 에어 됩니다.”
“그래요, 전무님이 관심이 많으셔서 보고서는 따로 한번 챙겨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추후에 리포트받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표면적이고 일반적인 보고 후, 시훈은 앞서 걷는 정이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바쁜 듯 걸음이 빨라진 그가 벽을 짚고 복도 중간에 있는 화장실로 급하게 몸을 수그려 들어갔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따라 들어가자 화장실 문을 닫고 나온 정이수는 입구에 서 있는 시훈을 발견하지 못하고 세면대 앞으로 이동했다. 비척거리는 걸음에 기운이 없었다. 눈을 잠시 감았다 뜬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레버를 올렸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 안을 바라본 정이수가 그제야 시훈의 존재를 발견했다. 젖은 얼굴을 손으로 훔쳐 낸 그의 안색은 여전히 파리했다.
“괜찮아요?”
“점심이 좀 얹힌 모양이에요.”
거짓말. 오늘 정이수 팀장은 책상 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페이퍼 타월로 얼굴을 꾹꾹 누른 그가 입구에 장승처럼 자리한 시훈 앞에 섰다. 길을 터 달라는 의미인데 시훈은 미동도 없이 이수를 내려 봤다.
“야근해요?”
“네. 보고서… 아, 마무리해야 할 일이 좀.”
이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제가 모시던 상사에게 언질도 받지 못한 채 조직 개편이 된 탓에 팀 전체가 공중으로 붕 떠 버렸다. 마치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니 업무가 손에 잡힐 리 없었다.
“무리할 필요 없잖아요. 급한 업무도 아니고…. 그것도 유 본부장한테.”
일주일 전, 유 본부장에게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철야를 하던 정이수가 떠올랐다. 의도는 없었지만, 그날을 빗대어 말한 꼴이 되었다.
“…이 팀장님은 알았나 봐요, 유진우 본부장 영국행 내정된 거.”
큰 의미 없이 던진 말이었다. 사무실 출입문 앞에서 마주친 그날 시훈에게서 느낀 위화감을 떠올린 이수가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이었다.
“…….”
답이 없었다. 아마도 긍정의 의미겠지.
배신은 공고히 신뢰가 쌓인 사람에게나 쓰는 말이니 어울리지 않았고, 그저 이수는 외딴 방에 홀로 갇혀 있는 자신을 떠올렸다. 팀장씩이나 돼서 아등바등 유 본부장 눈치를 보느라 지난 몇 달간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는 데만 골몰한 결과였다.
자신이 사내 정치를 할 만한 위인은 못 되니, 눈치껏 알아서 앞가림을 했어야 했다. 그걸 놓치고 등신같이 초조해한 제가 이시훈 눈에는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을까.
“재밌었겠네요. 유 본부장 비위 맞추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거 보면서.”
“그런 적 없어요.”
단호한 시훈의 음성이 공간을 울렸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이수에게서 씁쓸한 웃음이 이어졌다.
“그래서 제작실 구 팀장이… 이 팀장님 제작 건 먼저 진행해야 할 것 같다고 그랬구나. 열 받아서 제작실까지 따라 올라갈 참이었는데… 저는 회의 다시 잡을 필요도 없겠네요.”
이수가 미간을 누르며 며칠 전 일을 복기했다. 다시 생각해도 열이 뻗쳤다. 시훈의 눈이 혈색 없는 얼굴을 지나 마른 목덜미에 닿았다. 세수를 하며 튄 물이 셔츠 깃을 적셔 형광등 아래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었다.
“일찍 퇴근해요. 컨디션 안 좋아 보이는데.”
누그러진 시훈의 말이 걱정씩이나 담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
대답 없는 정이수가 말을 따를 리 없었다. 보란 듯이 구겨진 페이퍼 타월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이수가 시훈의 어깨를 물리고 나가려 했다. 꼬여 버린 정이수가 어떤 식으로 오해를 하는지는 몰라도 엿 먹일 생각만큼은 없었다. 이맛살을 구긴 시훈이 순간적으로 이수의 손목을 잡아챘다. 충동적이었다.
“퇴근하라니까.”
잘라먹은 말에는 여유가 없었다. 정이수를 볼 때마다 때때로 이유 없는 짜증이 울컥 치미는 탓이었다. 아직 세수한 기색이 남은 눈 밑이 발갛게 티를 내었다. 그때까지 그늘져 읽을 수 없던 표정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물에 젖은 긴 속눈썹이 바짝 들리며 이수가 시훈을 쏘아 보았다.
“퇴근, …하라니까?”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
이수의 손목을 잡은 시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베일 듯 날카로운 정적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왜 이래요, 무섭게.”
시훈이 지하 주차장에서 불시에 가한 공격을 상기하는 목소리는 조소를 담고 있었다. 이윽고 신음을 짓이기고 입술을 깨문 이수가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자국이 남은 손목을 다른 손으로 잡아 문지르는 정이수의 입술은 어느새 균형을 맞춰 웃고 있었다. 시훈은 이를 꽉 깨물고 솟구치는 열을 내리눌러 본다. 입과 달리 웃지 않는 정이수의 눈은 여전히 시훈과 얽힌 채였다. 피곤에 핏발이 선 눈에는 오기와 독기가 가득했다. 그걸 한 꺼풀 감추려 웃고 있는 거겠지.
“이 팀장님이 왜 화가 났어요. 정작 뒤통수 맞은 사람은 난데.”
“…….”
“그리고 함부로 말 자르지 마시구요. 아이… 씨. 동갑이라고 말을 막 놓으시네….”
정이수가 어깨를 부딪치며 재빨리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얼얼했다. 당혹감에 시훈의 맥이 쑥 빠졌다. 정이수의 손목을 그러쥐었던 손은 얼마나 힘을 줬는지 열기가 남아 화끈거렸다.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정이수는 야근을 했다. 팀원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자리를 지키는 그에게 할 일이 남았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정이수는 밤새 일을 했다.
같은 사무실에 출입구는 하나뿐이라 오며 가며 정이수와 마주쳤지만, 화장실에서의 실랑이는 잊은 듯 그는 태연하게 인사를 했다. 무심해 보였고, 어느 때에는 방종의 탈을 뒤집어쓴 껍데기가 정이수를 흉내 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더러 비치는 초조함만은 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잠을 이루지 못한 눈 밑이 피로해 보였고, 자꾸만 지는 외꺼풀이, 마른 입술과 어지러운 듯 관자놀이를 눌러 대는 손이 그랬다.
늦은 오후, 적막한 사무실에 앉아 울리지 않는 내선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정이수가 고개를 들면 우연히 시훈과 눈이 마주치고는 했다. 그럴 때면 평이하게 인사를 나누던 사람은 어디 가고 불시에 약점을 들킨 사람처럼 정이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유진우 본부장이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훈은 정이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매번 담배를 태우고 싶었다.
* * *
이수는 2팀이 담당한 G사의 광고가 온 에어 된 후 리포트를 살폈다. 동영상 사이트에서 누적 조회 수만 천만 뷰에 달하고 광고 전문 사이트에서 선정하는 당월 인기 CF에 선정되었다. 누가 봐도 무리하게 밀어붙인 기획이 이렇게 예상치 않게 터질 때가 있다. 유 본부장의 노림수 때문인지 아니면 제 몸을 갈아 만든 결과인지 모르겠다.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면 신이겠지.
임순정 대리를 병가 처리 하며 인사팀과 필요한 인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퇴사자 한 명, 병가 한 명. 난감해하는 인사 담당자는 일단 알겠다고만 한다. 인사팀에 다녀오는 길, 이수는 복도에서 유리 벽 너머 업무 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 있는 임순정 대리를 지켜봤다. 퇴사가 아닌 병가에 얼굴이 반은 폈지만 반은 여전히 우울감이 공존해 있었다. 이수는 면담 뒤로 일부러 업무 강도를 조정해 주었다. 쉬러 가기 전 마음이 무겁지 않았으면 했다.
“정 팀장, 오랜만.”
주현탁 실장이 슬렁슬렁 이수의 곁으로 걸어왔다. 그는 평소 물밑에서 클라이언트나 투자자를 만나러 다니느라 회사에 출근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조직 개편으로 뒤숭숭했던 지난주만 해도 주 실장만큼은 그 모든 사달에서 논외인 양 여유롭지 않았나.
“안녕하십니까.”
한 발자국 거리를 물린 이수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덥다고 몸이 축났네. 인사팀 다녀오나 봐?”
나도 방금 다녀오는 길이라. 친근함을 가면처럼 둘러쓴 주 실장이 제 얼굴을 부담스러우리만큼 들이밀었다.
“네.”
“저 친구구만? 병가 냈다는 대리가.”
안부를 묻던 주 실장은 그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사무실 너머의 임순정 대리를 용케 찾아낸다.
“그나저나… 사무실 겁나게 살벌하네. 1팀, 2팀 나란히 두고 재는 거야, 뭐야. 쯧.”
너무들 한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주 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그러다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무덤덤한 이수에게 어깨를 기대 왔다.
“유 본부장 영국 간대서 서운하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건 팀이나 이수나 매한가지라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뻔히 소문을 알고 있는 뱀 같은 주 실장이 묻는 의도가 뭐든 낯을 감춘 이수의 담담한 목소리가 입 새로 흘러나왔다.
“이해합니다.”
주 실장이 짧은 침묵 뒤 슬쩍 눈썹을 올렸다. 어딘가 비웃는 표정이 역력했다.
“정 팀.”
“네.”
“내가 좀 답답해서 그러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주 실장이 과장된 한탄을 자아냈다. 이거, 이거. 아는 게 하나도 없네. 그리고 이수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 바짝 힘을 줬다. 주 실장이 틀어 낸 방향으로 몸을 돌리자 1팀 이시훈이 자리를 비운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수의 귀로 얼굴을 바짝 붙인 주 실장이 낮게 목소리를 죽였다.
“쟤, 저거. 누구 아들인지 몰라?”
손가락은 어느새 소회의실을 나온 이시훈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시훈? 머리가 더디게 돌아갔다.
“지금 정 팀네 애매-하게 됐잖아. 작년 하반기부터 유 본은 후달리는 프로젝트만 물어 가지, 그 바람에 비딩마다 줄줄이 미끄러지고. 근데 유 본은 영국으로 영전한대고. 좀, 이상하지 않어?”
돌이켜 보면 쉽게 이해가 갈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유진우 본부장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매몰된 탓이었다,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건. 주 실장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이수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유 본이 밉보일 일 없게 눈치껏 판 깔아 놓은 거란 말이야. 정 팀네가 힘이 좀 빠져 줘야 스무스하게 이시훈이 밑으로 헤쳐 모여가 될 거 아냐.”
주 실장의 말이라면 때때로 걸러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쉽게 무시할 수가 없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지만 주 실장만큼은 예외였다. 주 실장이야말로 회사 돌아가는 상황을 줄줄 꿰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주 실장이 어안이 벙벙한 이수를 스윽 바라보며 검지로 유리 벽을 짓눌렀다.
“정산 회장님 아들이라고. 둘째 아들.”
이해됐어?
“…….”
“여 본이랑 유 본 두 사람 상극인 건 알 테고…. 그럼, 여 본이 정 팀장네 팀 내비 둘까? 팀원들 죄다 찢어 놓지 싶은데…. 그러다 보면 어중이떠중이 돼서 애들이 붕- 뜨지.”
유 본, 차암… 얄밉다, 그지? 실실 웃는 주 실장이 손가락을 거둔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두고 보는 호사객 같았다.
“내가 좋은 거 하나 알려 줬으니까, 조만간 우리 정 팀장도 나 좀 도와줘. 응?”
“…네.”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해도 이수는 입이 말랐다. 아마 옳다구나 싶었을 거다. 이수와의 추문이 차츰 부담스러웠을 테고… 여 본이 시훈을 앞세워 팀을 꾸리겠다 했을 때, 위기를 기회로 둔갑시킬 묘안을 찾아냈을 테다. 주먹 쥔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 안에서 놀아났다. 유진우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주현탁 실장이 허리를 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책상을 정리 중인 임순정 대리를 향해 혀를 찼다.
“돌아오면 책상 엎어질 판인데. 팔자 좋네, 저 친구.”
멍하게 주 실장을 따라 임 대리를 바라보던 이수의 눈이 이시훈에게로 옮겨 갔다. 복잡한 머리만큼이나 울렁이는 속이 생각을 앗아 갔다.
임순정 대리의 업무 인수인계서 결재를 앞둔 오후께 여민준 본부장의 호출이 떨어졌다. 이수에게 임 대리의 상황을 묻고, 인력 충원에 관해 물을 때만 하더라도 이수의 답은 막힘이 없었다. 인원이 자리를 비우기는 했지만, 3개월 정도는 어찌어찌 버틸 수 있으리라.
“면담 후에도 퇴사 의사를 밝힌 팀원은 한 명입니다.”
집무 책상을 돌아 나오는 여 본부장이 이수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근데 사람 하나 더 비잖아. 그건 어떻게.”
태블릿 PC로 리포트를 넘겨 보는 여 본부장이 심드렁한 지시를 내렸다.
“인사팀과 협의해서 계약직이든 뭐든 일단 굴러가게 채워요. 업무 구멍 나서는 안 되잖아.”
“…네, 알겠습니다.”
손발을 맞춰 일해도 매번 버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계약직이든 뭐든이라니. 의식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제게 불리한 것 같다. 여민준 본부장의 아래로 팀이 재편되고 정기적인 업무 보고 외에 따로 자리가 마련된 적은 없었다. 이시훈 팀장이 이끄는 1팀에 들러 편하게 진행 상황을 공유하는 모습들이 종종 보일 때면 주 실장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이시훈의 팀이었더라도 계약직 운운했을까.
“이거… 사이즈가 좀 큰데, 지금 정 팀 인력으로 비딩 가능해?”
“네. 가능합니다.”
화면에 고정돼 있던 여 본부장의 시선이 문득 이수에게 닿았다. 그러다 별것 아닌 양 본론을 내밀었다.
“그러지 말고, 1팀이랑 같이 해 보면 어때요. 지금 이 팀장네 아마 여유 좀 있을 건데.”
“…….”
이수의 입이 꾹 다물렸다. 타 팀에서 인력을 업어 올 만한 덩치는 분명 아니었다.
“광고주와 일전에 TVC 제작 경험 있습니다. 팀 내 인원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구요.”
표정 관리를 한다고 하는데도 입매가 굳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이수를 흘긋 바라본 여 본부장이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며 머리 뒤로 깍지를 꼈다.
“누가 뭐래. 새로운 시각으로도 보자는 거지. OT하고 아이데이션까지는 공유 가능하잖아.”
상사가 하라면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했던가. 대답 대신 시선을 떨군 이수의 머릿속에 경고의 사이렌이 울렸다. 선례를 남기면 그다음 물꼬를 트는 건 순식간일 테다. 수순을 밟아 가는 여 본부장의 제안은 양의 탈을 뒤집어쓴 늑대처럼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학연, 지연, 혈연에 얽매이지 않는다 열렬히 광고하던 공채 신입 사원 공고가 무색했다.
‘돌아오면 책상 엎어질 판인데. 팔자 좋네, 저 친구.’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도가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있다, 무조건 믿어 달라, 그렇게 설득하기에는 여민준 본부장의 입장이 가벼워 보이지만 완고했다.
여 본부장은 어떻게든 정이수를 흔들 만한 구실을 만들고 있었다. 유진우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족들이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 들리는 걸 보면 인사이트와 별개로 다시 한국 땅을 밟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유진우가 남겨 놓은 꼴같잖은 부스러기를 닦아 낼 때였다.
더 이상 말릴 새도 없이 쭉 뻗은 여 본부장의 손이 내선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어, 이 팀장. 바쁜가? 잠깐 1팀 스케줄 확인 좀 해 봐.
허벅지 위에 놓인 주먹 쥔 손만이 미약하게 떨릴 뿐이었다.
‘벌써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오늘 서울은 한낮 31도까지 기온이 올랐고 …’
광고 촬영장을 확인차 들르고 퇴근하는 길. 렌트한 차의 시동을 끄자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뉴스도, 에어컨도 꺼지며 더운 기운이 차 안을 메웠다. 시트에 풀썩 등을 기댄 이수가 촬영장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묵직한 재킷 주머니를 더듬어 물건을 꺼냈다.
아… 시계.
실랑이 끝에 시훈의 손목에서 떨군 시계를 아직 돌려주지 못했다. 표면에 균열이 간 시계는 시침과 분침이 멈춰 있었다. 엄지 손끝으로 깨진 부분을 더듬어 보다 당시 느꼈던 굴욕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도로 제자리에 넣어 버렸다.
‘정산 회장님 아들이라고. 둘째 아들.’
그러다 주현탁 실장의 말이, 여민준 본부장의 태도가 줄줄이 꿰인 구슬처럼 떠올라 이수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서… 그래서….”
저 혼자만 들릴 작은 소리로 마른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그렇게 말할걸…. 혹은 내선 전화 수화기를 잡아채 끊어 버렸으면 좋았을걸….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본다. 이수는 핸들 위로 두 팔을 올리고 이마를 대었다.
임순정 대리가 그랬지, 회사 올 생각만 하면 죽고 싶다고. 그래서 약을 먹는다고. 그때 침묵하던 이수는 사실 묻고 싶었다.
약 먹으면 좀 나아져요?
* * *
책상을 정리한 이수가 어두운 사무실 속 불 켜진 이시훈 팀장의 자리를 확인했다. 이내 넓은 공간 안에 스포트라이트처럼 불이 켜진 두 사람 자리 중 한쪽의 불이 꺼졌다. 출입문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민과 번민이 질척거렸다.
오늘 오후, 여 본부장은 기어코 이시훈을 한자리에 불렀다. 스케줄을 묻고, 사정을 설명하고, 2팀과 함께 일을 진행해 보는 것이 좋겠다며 일방적인 지시를, 아니, 설득을 이어 갔다. 적어도 이시훈의 존재를 알게 된 이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난감해하는 이시훈이 프로젝트에 관해 몇 차례 물었고, 결국 사안을 확실히 부러뜨리지 못하고 회의는 끝이 났다.
매듭짓지 못한 오늘 일은 조만간 결론이 날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프로젝트 참여 여부의 키를 쥔 쪽은 이시훈 팀장이었다.
“네, 물론입니다. 저희가 저작권 문제는 검토 중에 있습니다. 시일 내로 정리해서 그 부분까지 함께 회신드리겠습니다.”
통화를 하며 모니터 속 기획안을 살피던 시훈은 자세 그대로 시선만을 올려 책상 앞에 서 있는 정이수를 바라보았다. 퇴근을 하려는지 팔에는 얇은 재킷이 반으로 접혀 걸려 있었다. 애써 감추고 있지만, 표정 아래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정이수는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을 터 같은 사무실을 나눠 쓴 지 반년쯤 됐지만 정이수가 파티션을 넘어온 적은 없었다. 그런데 불쑥 그가 선을 넘은 이유는 아마도 오늘 오후에 있었던 회의 때문이리라.
이수는 시훈을 기다리며 그의 책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간결하게 정리된 책상 위는 이시훈의 모습과 같다. 같은 브랜드의 볼펜들이 가지런히 꽂힌 펜 꽂이와 바인더, 명함, 홀더 등이 차례로 놓여 있었다. 시훈의 우측에 세워진 파티션에는 전설적인 그래픽 포스터 몇 종과 유명 사진들 그리고 이과수 폭포가 인쇄된 오래된 엽서 한 장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네, 고맙습니다.”
“…….”
통화를 마친 핸드폰이 집무 책상 위에 놓였다. 그런데도 손끝으로 턱을 괴고 올려 보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는 상대의 모습에 이수의 자존심에 작게 금이 갔다. 결코 유쾌하지 않았던 몇 번의 대화와 설전은 서로에게 불쾌함만 남긴 상태였다. 그러니 고작 예의를 차리는 몇 마디 말조차 쉽게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시훈의 검은 동공이 다시 모니터로 돌아가자 초조함이 이수의 등을 떠밀었다. 이수는 퇴근을 준비하며 어떤 식으로 운을 떼야 할지 고심한 방향 중 한 가지를 입 밖으로 꺼냈다.
“늦게까지… 계시네요.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나가실래요.”
눈동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사이 마우스 버튼을 조작하는 소리만 들렸다. 10여 초. 단위로 세기에는 짧지만, 사람을 무턱대고 세워 놓기로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시훈의 답을 기다리는 이수의 입술이 말랐다.
“오늘은 제가 좀 바빠서요.”
고민을 한 흔적은 없었다. 고저 없는 평범한 어조였다. 마치 상사에게 결재 사인을 기다리는 듯한 초조함이 10여 초 동안의 침묵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살짝 금이 간 자존심이 조금 더 틈을 벌렸다.
“…네.”
스스로 걸어 놓은 제한선에 닿자마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식사 자리에서 술이라도 한잔하며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으려는 계획 따위, 역시 어울리지 않았다. 이수가 제 감정을 갈무리하며 반쯤 몸을 돌렸다.
“…….”
자연스럽게 시선은 반대편, 2팀. 자신의 팀이 모여 앉은 사무실에 닿았다. 제 자리부터 시작해 그 아래로 머리를 맞댄 책상들은 어둠 속에서 불빛도 생기도 없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마지막 책상부터 다시 위를 올려 보니 포도알처럼 엮인 그 끝에는 꼭지를 틀어쥔 자신의 자리, 팀장 정이수의 자리가 있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까. 주현탁 실장이 베풀듯 흘린 정보는 쥐고 있다고 해서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의식하며 의심을 품고 수많은 선택지를 만들어 놓았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이수가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제 노력으로 결과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한정적이었다. 요즘에는 그런 사실을 절절히 실감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1팀과의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여 본부장이 힘을 실어 주는 쪽으로 추는 기울게 돼 있다. 맨파워 운운하며 치받을 수도 없었다. 이수에게는 그만한 강수를 띄울 여유가 없었다. 연초에 어그러진 이직을 떠올리자 다시금 속이 쓰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이수가 사리문 이를 풀어냈다. 그리고 고민을 짊어진 채 다시 이시훈의 책상 앞에 섰다.
“…오늘 여 본부장님이 제안하신 프로젝트. 못 하겠다고… 아니, 안 하겠다고 하셨으면 합니다.”
“…….”
“…이번 일, 굳이 1팀하고 같이 진행해야 할 이유가 없는 프로젝트예요. 굳이 따지자면 광고주가 믿고 따라온 쪽은 저니까요.”
시훈이 박힌 듯 모니터를 향해 있던 시선을 짐짓 아래로 떨어뜨리다 헛웃음을 흘렸다. 부탁과 협조 요청 사이의 애매한 태도가 망설임의 정도를 짐작게 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듯 짧은 한숨을 내쉰 그가 단조롭게 입을 열었다.
“제가 결정할 사안은 아니죠. 본부장 지시를 함부로.”
이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훈의 말이 맞다. 본부장 지시를, 상사의 지시를 딱히 거스를 수 없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냉대하는 시훈의 앞에서 쉬이 걸음을 물리지 못하는 이유를 이미 서로가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자존심이 긁히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이수는 명치 아래서 저미는 열을 꾹 눌렀다.
“저는, 1팀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나 여타 비딩 관련해서 경쟁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정산 그룹 계열사 광고니, 아니니 그런 거 따져 가며 일 받을 생각도 없구요. 앞으로도 1팀은 1팀대로, 제 팀은 제 팀대로… 그렇게 업무 가져갔으면 합니다.”
팀장이 되고 난 후 어그러지기 시작한 건 유진우 본부장과의 관계만이 아니었다. 이수가 쌓은 커리어는 오해와 편견이 거머리처럼 따라붙은 탓에 민낯을 보기가 힘들었다.
사방이 덫이었다. 그걸 피하느라 앞을 보지 못하고 발밑만 살피는 상황이 반복됐다. 코너에 몰린 채로 주어진 일을 완수하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미봉책이라는 걸 안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최선책은 아니더라도 차선책이 있다면, 차악이라 한들 그 선택이 가능한 전부라면 팀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했다. 유진우 본부장처럼 내뺄 게 아니라.
“여 본부장도 아니고… 같은 직급 달고 있는 사람한테 좀 안 맞는 것 같은데….”
시훈이 마우스를 놓고 설핏 이마를 구겼다.
“…이 팀장님, 여 본부장님과 막역한 사이시고, 또…”
“정 팀장님.”
불편한 대화를 끊으려는 의도였으나 이수의 입장에서는 끝까지 가져가야 했다. 내가. 부탁이라는 걸. 하고 있는데. 당신에게.
“무엇보다, 본부장님께서는… 이 팀장님이 거절하면 받아들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결코 쉽지 않은 부탁을 끝마친 뒤, 사무실 안의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발아래로 드리운 그림자가 시훈의 대답을 기다리며 꼼짝없이 얽매여 있는 동안 이수의 주먹 쥔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시훈이 코로 긴 숨을 내쉬었다. 복잡했고, 약간은 화가 났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주변을 시끄럽게 만든 추문을 제하고 정이수를 같은 직급자, 기획자로서 존중해 온 시훈으로서는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저를 경계하던 정이수가 이따위 너절한 부탁을 해 올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으니 더 그랬다.
달라진 말의 어미, 정이수의 누그러진 태도가 여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언젠가 여 본부장과 식사를 나누며 그가 펴 보인 새끼손가락처럼, 주 실장의 저급한 농담도 실실 웃어넘기던 그날처럼.
“…….”
“저에 관해서 무슨 말 들었나 봐요.”
썩 듣기 좋은 투는 아니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도 아니었고.
정이수는 침묵했다. 긍정의 의미였다. 피곤이 서린 얼굴과 그 아래로 길게 뻗은 목덜미가 조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참담하고 부끄러워할 만했다. 시훈이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정이수를 응시했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 자세였다.
“…쉽게, 말씀드린 거 아닙니다.”
자처한 수치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버거운 이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얼마나 자존심을 갉아먹으며 버티고 서 있는지 그조차도 모를 것이다.
시훈은 입을 굳혔다. 건조하게 흘러나온 답은 명료했다.
“그 부탁 못 들어 드리겠어요.”
여기까지. 이수는 오늘 사무실 내에 사람이 텅 비도록 시간을 죽이며 기다린 것도, 사내 메신저나 핸드폰 문자를 이용해 간단히 물어도 될 저녁 식사 자리를 직접 제안한 것도, 기다리는 내도록 몇 번이나 말을 다듬고 곱씹어 보며 팀의 존립을 지켜보려 했던 것도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꼭 쥐고 있던 주먹이 일시에 풀렸다. 아랫입술을 훔쳐 낸 이수의 얼굴은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처음부터 선택지를 잘못 택했다. 금이 간 자존심이 더 틈을 벌리지 않도록 이쯤에서 봉합해야 했다.
결국 인사를 생략한 이수가 몸을 돌릴 때였다.
“유진우 본부장한테도 이랬어요?”
걸음을 멈춘 이수의 등 뒤로 비난의 화살이 뾰족하게 내리꽂혔다. 시훈이 읊조리는 말은 겨우 기워 낸 상처 난 자존심을 활짝 벌려 놓았다.
“그러다가 겨우 팀장 자리 하나 받은 거고, 이제는 지키느라 아등바등하는 거고.”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시시각각 미묘하게 변하는 정이수의 표정을 읽고 있었고, 한계에 다다른 것 역시 뻔히 보였다. 벽을 실감한 정이수가 자책하며 뱉은 말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이수가 돌아서면 끝났을 해프닝에 발을 걸고넘어진 쪽은 시훈이었다. 정이수의 추문 때문인지, 아니면 낙하산 취급 때문인지 치밀어 오른 짜증을 참지 못했다.
시훈은 열이 오른 목덜미부터 단정한 셔츠 아래로 감춘 이수의 어깨와, 팔 밑으로 긴 손가락을 말아 쥔 떨리는 주먹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관자놀이를 짚은 두 손가락 아래로 작은 진동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조금, 빠르게.
하. 정이수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어느새 성큼 제 앞으로 다가와 양팔을 뻗어 책상을 넓게 짚었다. 깊게 허리를 숙인 정이수의 경계는 이제 시훈의 책상을 넘어왔다.
코끝에 이시훈의 향수, 그리고 담배 냄새가 닿았다. 당기면 당장이라도 부딪힐 만한 거리를 두고 이수가 입술을 들썩였다.
“네.”
“…….”
“덜하지는 않았어요. 성의 있게… 아주 정중하고 예의 있게 여쭸더니 덜컥 팀장 자리 하나 주시던데요.”
“아, 그래요.”
팽팽하게 얽힌 시선에 두 사람 다 물러남이 없었다. 피곤이 깃든 외꺼풀진 눈. 창백한 피부와 비틀린 입술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리였다.
“그런데… 이 팀장님은 좀 박하시네.”
아직 감추지 못한 화를 여실히 드러낸 정이수의 호흡이 거칠었다. 숙인 허리를 일으키는 모습은 매끄러웠다. 턱을 살짝 치켜든 정이수가 눈 아래로 시훈을 내려 보았다. 고고하게 올라간 턱 끝이 휙 방향을 바꿔 사무실을 벗어났다. 시훈은 의자를 당겨 전과 같이 모니터 앞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얼굴 위로 드리운 짜증만큼은 쉽게 떨치지 못한 채였다.
* * *
유진우 본부장이 김민주 대리의 부탁에 2팀의 사무실을 찾았다. 소회의실에서 열릴 회의에 잠시만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겠냐는 간곡함에 그가 시간을 비운 것이다.
부산스러웠다. 사무실 입구에서부터 유진우 본부장이 오는지 살피는 팀원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수는 편치 않은 속이며, 머리가 아팠다.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다 문득 감은 눈을 뜨니 파티션 너머로 이시훈 팀장이 사무실을 걸어 나가는 모습이 시야에 걸렸다. 얼마 전 이시훈에게 부탁을 거절당한 뒤로 드러난 바닥에는 피곤과 무력함만 남았다. 이수는 쓸쓸하고 조금 외로워졌다.
“…본부장님 오세요! 다들 준비하시구요.”
누군가가 말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입증을 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유 본부장이 들어섰다.
“유진우 본부장님, 축하드립니다!”
갑작스러운 축하 인사에 놀란 유진우 본부장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본부장님, 놀라셨죠?”
김 대리가 승진을 축하하는 꽃다발을 한아름 그에게 안겼다. 저번 주 주간 회의 말미에 누군가가 유 본부장의 영국행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다 승진 축하라도 하는 게 도리가 아니겠냐는 말을 임순정 대리가 꺼내자 이수는 차마 반대 의견을 내비치지 못했다. 하는 일마다 질책만 하시냐는 말을 한 임 대리가 낸 의견이라 더 그랬다.
‘그러네요.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이수는 개인 카드를 들려 줬다. 팀원들 역시 유진우 본부장과 저 사이의 소문을 알고 있을 테다. 이수는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 연기를 했다.
막내 사원이 고른 선물은 타이였다. 날아온 문자 내역을 보니 H사 제품을 구매한 것 같지만 그가 수제로 제작하는 K사 제품만 매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제 그런 것들을 따질 이유가 없었다.
“고마워요. 언제 이런 걸.”
유진우 본부장이 자신을 둘러싼 무리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이수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촌극. 참 마지막까지 뻔뻔한 사람이었다.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우습게도 가슴이 요동쳤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간신히 무심한 낯으로 일관하고 있건만 먹은 것도 없는 속이 울렁거렸다. 포커페이스로 무장한 이수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유진우 앞에 섰다.
“…승진 축하드립니다. 언제,”
저도 모르게 숨을 잠시 멈췄다 다시 들이쉬었다.
“출국하십니까?”
“당분간은 런던하고 서울 오갈 것 같고, 정리되는 대로 출국합니다. 이렇게 돼서 미안합니다. 워낙 갑작스럽게 추진된 일이라. 다들 정 팀장 많이 도와주고, 우리 임순정 대리는 꼭 건강 회복해서 돌아오고 말이야.”
그런 말들이 술술 나왔다.
“오늘 일도 고맙고, 애쓴 G사 광고도 무탈하게 온 에어 되었으니, 다들 조만간 시간 잡아요. 내가 한잔 사지.”
무리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여름밤에 어울리는 좋은 호텔 라운지가 있다고 하자 팀원 모두 반기는 눈치였다. 그곳에서 환호하며 웃을 수 없는 사람은 이수뿐이었다. 유 본부장이 꽃다발과 선물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사무실을 나선 이후 팀원들에게 이수가 짧은 공지를 했다.
“다들 참석할 수 있는 날로 상의해서 날짜 잡으세요. 제가 전달드리겠습니다.”
그러겠다 답을 한 팀원들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걸렸다.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보는 팀원들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분주한 걸 보니 아마 사내 메신저를 통해 날을 잡는 눈치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모니터 하단에 창이 띄워졌다.
[김민주 대리] 팀장님은 언제 가능하세요?
[정이수 팀장] 상관없습니다. 협의 되면 전달해주세요.
[김민주 대리] 넵 알겠습니다.
이수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유진우 앞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웃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이 모든 건 저 혼자만 느끼는 것이리라. 그런 지저분한 감정들이 슬프고 서러워졌다.
“촬영장에서 강아지가 계속 잠이 들어 가지고 걔 일어날 때까지 다 진 치고 있었잖아요. 스튜디오 렌트한 시간은 끝나 가지, 뒤에 대기하고 있는 촬영팀은 지네들 장비 세팅하고 있지…. 딱 죽겠는데 다행히 CG팀하고 쇼부 쳐서 끝냈어요.”
회의를 끝내고 옥상에서 마주친 제작실 구영모 팀장과 담배를 태웠다. 시훈은 구 팀장이 늘어놓는 몇 년 전 제작한 프로젝트에 관한 비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하루 종일 회의실에 갇혀 있어 입이 아플 지경인데 구 팀장은 열렬히 과거의 추억에 젖어 있었다.
“합성이 낫죠. 테이크 날아가면서 시간이랑 돈도 날아가는데.”
시훈은 담뱃재를 손끝으로 툭툭 털어 내며 구 팀장이 수긍할 정도의 심드렁한 맞장구를 쳐 주었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 시훈이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전에도 이런 적 있지 않나…. 묘한 기시감을 더듬던 시훈을 두고 구 팀장이 양해를 구했다.
“밑에서 찾네요. 이 팀장님, 그럼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구영모 팀장이 떠난 후 마천루 사이 해가 기우는 모습에 오늘도 하루가 이렇게 지나는가를 실감한다.
“…후우….”
시훈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담배를 빨았다. 그러다 생각이 났다. 정이수가 설 연휴 전 화가 났던 이유. 그때도 구 팀장의 수다가 적잖이 짜증이 나 대충 뭉개려 했을 뿐이었다. 대화를 끊어 내기 딱 좋은 의미 없고 졸렬한 말로. 그걸 들었을 줄이야.
난간에 등을 대고 두 팔꿈치를 기대선 시훈의 머리 위로 더운 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정이수….”
표면적으로 정이수 팀장과는 그럭저럭 일상을 이어 가고 있었다. 선을 넘어오던 다음 날, 사무실 앞에서 마주치자마자 정이수는 까딱 고개를 숙였다. 그간 해 왔던 인사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을 삐딱하게 보던 시훈을 남겨 두고 출입문을 통과한 그는 재킷을 벗고, 자리에 앉아 익숙하게 업무를 시작했다. 그 일련의 행동으로 정이수는 다시금 아슬아슬하게 간격을 벌려 놓고, 무언의 합의를 종용하고 있었다.
부유하던 연기가 걷히고 현실로 돌아온 시훈이 손에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잔에 담배꽁초를 던져 넣었다. 한번 입을 대고 만 커피는 맹맹한 보리차 맛이 났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까지 수주한 몇몇 캠페인을 태워 보내야 했고, 휴가 시즌 전에 들어갈 비딩은 줄줄이 줄을 서 있었다. 그런고로, 여 본부장이 2팀과 같이 덤벼들어 보라던 제안은 흐지부지되며 없던 일이 됐다. 당연하게 정이수 팀장과 마주 볼 일이 뜸해졌다.
사무실에서는 매일 조용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리포트 분석, 자료 조사, 아이디어, 팩트 체킹, 광고주, 프로덕션, PPM, PPT, 스케줄, 예산, 회의, 회의, 회의, 끝없는 회의. 모든 것을 조율해서 결과를 뽑아내야 하니 가끔은 하루를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으로 늘려 놓고 싶었다. 여름이 오기도 전에 틀어진 에어컨의 차가운 공기는 뜨겁게 달궈진 목덜미를 식혀 주지 못했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 나온 시훈이 메일과 메시지 창을 번갈아 확인하며 머리를 넘겼다. 긴 복도 끝 네모나게 트인 창 너머의 해가 시훈의 앞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J사 강지운 책임입니다. 보내 주신 제안서는 …
주말을 앞두고 월요일까지 수정된 제안서를 달라는 건 아무래도 전 세계 광고주들의 협약 사항인가. 시훈이 습관 같은 한숨을 쉬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
반대편 복도 저 멀리, 언제부터였는지 정이수 팀장이 벽에 팔을 괴고 이마를 기댄 채로 서 있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듯 곧장 몸을 바로 세우고 느릿하게 뻐근한 목을 뒤로 늘어뜨린다. 복도를 침범한 노을빛에 흠뻑 젖은 몸은 피로를 토로하고 있었다. 각도에 따라 뒤로 넘어간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단정한 이마가 드러났다. 그 모습을 목도하던 시훈은 잘 닦인 원목 선반 위 단 한 점 올려진 백자를 떠올린다. 그 정도 그림이라면 멘트도 자막도 없이 내보내도 좋을 이미지라고.
의자도 쉴 만한 공간도 딱히 하나 없는 빈 복도에 홀로 서 있는 정이수가 자신을 위해 쪼개 놓은 시간은 너무도 짧다. 만성적으로 매일이 바쁘고 경쟁하는 삶을 사는 그가 가진 찰나의 휴식 시간일 터였다.
시훈이 막 발을 떼자 정이수가 타인의 존재를 인지하고 눈을 떠 넘어간 고개를 바로 세웠다. 뜻하지 않은 조우에 놀라 눈을 키우는 당황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넓게 벌어진 공간 속 에어컨에서 나온 찬 바람이 습한 밖과 달리 공기를 건조하게 만들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 중 시훈이 먼저 묵례를 하자 목덜미에 올라간 손을 내린 정이수 역시 어느새 무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직까지 무언의 합의는 유효했다. 위태로울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