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9)

19. 후애(後愛)

UT 셀원들과 헤어진 후 스트립 거리를 가로지르며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뜬금없을 것 같지만 정말 멋진 피라미드 형태의 호텔이나, 에펠탑과 개선문 모양의 건물이 보였다.

서해는 영화로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장소를 실제로 보게 된 것이 신기해 카메라에 사진을 몇 장 담았다.

배가 불러서 더는 먹지 못할 때까지 점심을 먹었다. 그다음에는 실내 쇼핑몰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디저트를 먹었다. 입에 넣자마자 녹아서 사라지는 아이스크림과 향기로운 홍차를 마시고 있자니 지난 5일 동안 있었던 지옥 같은 일정이 한참이나 지난 과거처럼 느껴졌다.

밖을 내다보며 기지개를 켜던 서해가 테이블 위로 팔을 쭉 뻗었다. 시원한 대리석 질감이 셔츠를 뚫고 들어와 더위를 식혀주고 지나갔다.

서해의 기준에서 너무 화려한 가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한태경이 카드를 내밀었다.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녀와도 됩니다.”

“아니요. 그냥 신기해서 본 거예요. 그리고 이런 건 안 주셔도 되거든요. 저도 돈 많이 벌어요.”

“귀엽네요.”

“대표님만큼은 아니겠지만….”

정말 재미있는 얘기를 듣는다는 듯 소리 내 웃던 한태경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그는 앞으로 내밀어진 서해의 팔꿈치 근처를 쓰다듬다가 손을 미끄러뜨려 내리고 손을 잡았다.

“…어, 대표님.”

“여긴 자유도가 높은 곳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CES 온 국내 기업도 있잖아요. 우리처럼 여기 보고 가는 분들도 있을 텐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누가 우리만 쳐다봅니까. 가만 보면 안 그럴 것 같은데 다른 사람 시선을 꽤 많이 의식하네요. 설마 내가 부끄러워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우리도 데이트할 때 손 정도는 잡아볼 수 있잖아? 한국 가면 밖에서 이러고 다니는 건 어림도 없습니다. 여기서 즐겨요.”

집에서. 혹은 38층에서. 둘만 있는 공간에서만 가능했던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테이블 위로 꺼내졌다.

갑자기 서해의 눈가가 빨개지더니 호흡이 흐트러졌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감정에 눈썹 사이가 잔뜩 구겨졌다.

“왜 이래.”

“대표님….”

“좋은 생각만 해도 1분 1초가 아깝습니다. 내가 평범한 직장인이 아니라서 해줄 수 있는 게 한정적이네요. 이번 일주일 동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보내는 거로 해요. 제발 그 걱정 좀 내려놓고.”

한태경은 한동안 서해의 손바닥을 쓰다듬었다. 관광지의 소음은 둘만 있던 조용한 공간에 비할 바가 못 되었으나 테이블 위에서 맞잡은 손의 온기로 충분했다.

찻잔이 비워지고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없어진 다음에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꿈같은 시간이었다.

잠시 후 돌아온 한태경과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여느 때보다 여유로웠다. 일주일이라는 넉넉한 휴가 일정에 쫓길 필요도 없었고, 당장 급하게 해결해야 할 회사 일도 없었다. 홀가분한 몸으로 라스베이거스 거리를 거니는 두 사람의 표정이 전에 없이 여유로웠다.

다시 돌아온 호텔 로비에서 짧게 대화를 나눈 한태경은 서해와 함께 엘리베이터 몇 개를 갈아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호텔 옥상에 끌려온 서해는 한쪽에 준비되어 있는 헬기를 보고 멍해졌다. 그리고 귀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헬기를 타고 간다고요?”

“그랜드캐니언 가자고 했잖아요. 설마 빈말이었습니까.”

“그건 맞는데요. 휴가 가자고 하셨잖아요.”

“여기서 차 타고 가면 다섯 시간 넘게 걸립니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휴가에 헬기를 타고….”

“여기서는 다들 이렇게 다녀요. 피곤해 죽겠는데 운전하라는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운전할 체력이 있으면 다른 걸 할 생각이니까.”

서해는 어쩐지 한태경이 정말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 되묻자마자 후회했다.

“저 거기 안 가도 상관없어요. 그땐 꿈에 나와서 약간 충동적으로 얘기했던 건데…. 그냥 룸에서 쉬어도 괜찮아요.”

“그렇습니까. 그럼 어제 서해 씨가 그만하자고 울어서 못 한 것 보면 되겠네요. 라스베이거스를 대표하는 분수 쇼나….”

“대표님!”

“여기 한국말 알아듣는 사람 없습니다.”

“아, 아…. 정말!”

“혹시 헬기 못 타요? 고소 공포증이라든가.”

“아니요. 탈 수 있어요. 탈게요.”

호텔 지배인이 한태경과 몇 마디 나눈 뒤 둘을 헬기 좌석으로 안내했다. 어깨를 덮는 안전벨트가 꼼꼼하게 매였다. 둘의 머리 위에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던 헤드셋이 씌워졌다. 귓가에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거칠게 퍼지고 헤드셋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옆에 잡아요. 떠오를 때까지 많이 흔들릴 테니까.”

“네, 윽!”

몸이 눌리는 느낌이 들더니 순식간에 떠올랐다. 한태경이 말한 대로 약간 덜컹거리는 느낌은 있었지만 일정 고도로 올라간 뒤에는 안정을 되찾았다.

창밖으로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라스베이거스 풍경이 서해의 눈에 들어왔다. 헬기에 오르기 전 한태경과 돌아다녔던 이곳저곳을 높은 곳에서 다시 보는 기분은 퍽 새로웠다. 로비에서 보였던 커다란 분수와 화려한 호텔들이 장난감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을 반짝이며 내려다보는 서해를 옆에서 보던 한태경이 좌석 옆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 손가락을 겹쳐 잡았다.

“우와, 와.”

“어때요, 타보길 잘했단 생각이 듭니까.”

헤드셋으로 전달되는 기계음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서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의 고급스러운 느낌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고스란히 전달되는 날것 그대로의 거친 느낌이 벅차게 다가왔다. 사막과 같은 넓은 평원 위를 날아가다가 하버댐 너머로 보트를 타고 있는 사람들 위를 스쳐 지났다.

기장은 예전에는 물이 훨씬 더 많았고 몇 시쯤 석양을 볼 수 있다는 말을 짧게 남기고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나타난 콜로라도강과 협곡을 본 순간 서해는 저도 모르게 한태경의 손을 꽉 잡았다.

“대표님, 여기 정말….”

반은 충동적이었다. 서해는 고개를 돌리고 입술에 쪽 하는 소리가 나게 키스하고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한태경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까는 손도 못 잡게 하던 사람이.”

눈앞에서 티 없이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감정이 가슴 벅차오르게 달아올랐다. 한태경은 서해의 턱을 끌어당겨 짧게 키스하고 떨어졌다.

“곧 내릴 겁니다.”

“여기 내릴 수도 있어요?”

“이착륙 포인트가 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둘러보고 근처 호텔로 이동할 거예요.”

헤드셋을 끼고 있던 서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태경은 처음으로 보는 것 같은 서해의 들뜬 모습을 바라보다가 뒷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떨어졌다.

내려가는 것이 아쉬웠던 서해는 창밖으로 협곡을 내려다보았고, 찰나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티 없이 맑은 얼굴이 아쉬웠던 한태경은 서해만 바라보았다.

* * *

헬기 프로펠러의 바람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두 사람은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만들어준 헤드셋을 벗어두고 안전벨트를 풀어냈다.

그리고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주변에서 빠져나왔다. 평소와 달리 갑갑하게 옥죄는 왁스도 없던 한태경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갔다가 가지런히 제자리를 찾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프로펠러가 멈추는 것을 지켜보던 서해가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발아래 펼쳐진 사막의 모래와 거친 돌멩이, 반짝이는 햇살 아래 떠다니는 모래 먼지가 코끝에 섞여들었다. 정형화되고 조그만 곳에서만 살다가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된 광활한 평원은 쉽게 말을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차 타고 조금만 들어갑시다. 5분 정도면 돼요.”

“여기서 보는 게 아니고요?”

“협곡 위쪽에 올라가면 서해 씨가 꿈에서 봤던 걸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이착륙 포인트를 빠져나와 큰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반짝이는 은빛 지프가 준비되어 있었다. 운전사와 가이드가 운전석과 조수석에 타고, 뒷좌석에는 서해와 한태경이 나란히 자리했다.

도로를 달리던 지프는 어느 순간 오프로드로 들어섰다. 훤하게 뚫려있던 천장 아래로 모래 먼지가 휘몰아치다가 빠져나갔다. 차가 아래위로 요동치고 몸이 흔들릴수록 서해의 얼굴에 맑은 웃음이 걸렸다.

“와, 이런 오프로드는 정말 처음 달려봐요.”

“이런 거 좋아할지는 또 몰랐네. 알고 보면 취향이 좀 거칠다거나….”

“대표님, 여기 진짜 좋아요.”

바퀴에 걸리는 돌부리 소리와 세찬 바람 소리가 귀를 덮었다. 한태경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서해는 눈을 감고 환하게 웃었다.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은 황량해 빠진 사막이 뭐가 그리 좋은지 서해는 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깊게 파인 웅덩이에 차가 한 차례 요동치고 둘의 몸이 기우뚱하고 뒤로 넘어갔다. 맑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프 운전사는 도착 지점에 다다르자 장난스럽게 급정거했다. 몸이 앞으로 쏟아져 앞좌석 등받이에 붙어있던 손잡이를 꽉 잡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앞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으로 엉망이었다. 옆에서 들어온 손이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사라졌다.

“나 참, 그렇게 좋습니까.”

“대표님은 재미없어요?”

“서해 씨 좋아하는 거 보는 게 재미있네요. 내릴까요.”

무거운 차 문을 밀고 높은 차체에서 뛰어내렸다. 먼저 내린 가이드가 그늘과 햇볕이 적절하게 섞인 곳으로 서해와 한태경을 안내했다. 그는 자리에 부드러운 면으로 된 카펫을 깔고 커다란 라탄 바구니를 내려준 뒤 즐거운 하루를 보내라는 주문과 신의 축복을 잔뜩 남기고 사라졌다.

서해는 앞에 펼쳐진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롤러코스터라도 타는 것같이 흔들리며 달려온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바람 소리만 남고 그다음은 둘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오롯이 귓가에 새겨졌다.

“구름이 손에 닿을 것 같아….”

“이쪽으로 들어와요. 여기 바람 많이 불어서 위험합니다.”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한태경은 앞으로 달려가려는 서해의 팔목을 잡았다. 바구니 안에 들어있던 폭신한 담요를 집어 카펫 위에 나란히 올려두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옆자리에 손을 뻗어 담요 위를 팡팡 두드리자 서해가 냉큼 웃으며 자리했다.

등 뒤로 올라와 있던 암석에 뜨거운 햇볕이 가려지고 그 아래로 바람이 머물렀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바깥만 바라보았다.

“어때요. 꿈에서 봤던 거랑 비슷해요?”

“훨씬 더 좋아요.”

정적인 공간에 앉아있자니 느릿하게 떴다 감기는 서해의 속눈썹이 한태경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깨에 걸쳐있던 팔을 당기고 눈꼬리에 엄지손가락을 붙였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손끝에 부드러움이 스쳤다.

바람이 불었다가 잦아들고 서로의 향기가 섞였다가 사라졌다. 카펫 위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있던 서해는 살짝 떨어져 있던 한태경 쪽으로 바짝 몸을 붙여 앉았다.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가 다시 멀리 협곡을 바라보았다.

한태경은 가지런하게 뻗은 서해의 속눈썹을 한참 바라보다가 머리카락 밖으로 볼록하게 솟아있는 귓바퀴를 콕 눌렀다. 앞을 내다보는 데 여념 없는 어깨 위로 팔을 올려두고 그도 구름 저편의 협곡을 바라보았다.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낸 서해가 카메라 앱을 실행했다. 이리저리 돌려본 뒤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지금 이 순간의 분위기를 담아갈 수는 없겠지만 소중한 기억을 담아두고 추억을 꺼내 보고 싶었다.

“이런 풍경은 사진으로 담아가면 지금 느끼는 감정의 절반도 안 담깁니다. 눈으로 보세요.”

사진 한 장을 찍었을 뿐인데 서해는 지난날이 떠올랐다. 멀리서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는 눈은 어딘가를 헤엄치고 있는 듯 초점이 확실하지 않았다.

“대표님, 재미없는 이야기해 드릴까요.”

“서해 씨가 하는 이야기는 다 재미있으니까 뭐든 해도 됩니다.”

“제가 보육원 문 앞에 도착해 있던 날, 바구니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서해, 10월 1일. 이렇게요. 감사하게도, 보육원에서는 매월 생일자를 한꺼번에 모아서 1일에 생일상을 차려줬어요. 생일이 오려면 한 달은 넘게 남았는데, 그렇게 10월 1일만 기다리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저만 생일이 1일이라서 저 혼자 특별하게 축하받는 자리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한태경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지고 서해의 어깨에 올라가 있던 팔근육이 굳었다. 그는 어떤 표현이 트리거가 되었는지를 곱씹어 보았다. 실수했다는 생각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지금 말하면 우스운데…. 같이 있던 친구들이랑 우르르 생일상 앞에 몰려있다가, 봉사 나오신 분들이 그냥저냥 손뼉 치는 모습 바라보다가 그랬어요. 케이크도 구경만 했어요. 촛불도 못 켜고, 큰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생일 축하 노래 부르고. 끝나면 원장님이 집에 가져가셨거든요.”

사랑을 잔뜩 받아도 부족할 나이에 겪었을 지독한 외로움의 깊이는 그가 감히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시리고 차가웠다. 한태경은 가만히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담담한 목소리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협곡 아래로 흘러내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나. 오래된 일이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요. 생일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더니 급하게 행사가 있다고, 선생님이 절 씻겨주고 예쁜 새 옷도 입혀 주시더라고요. 정말 좋았어요, 진짜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던 서해의 얼굴에 그때의 감정이 담겼다.

“그때 권 회장님을 처음 봤어요. 매년 구석에서 흘끔 바라보던 생일상이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한가운데 서서 촛불도 껐어요. 사진도 찍었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장님이 1층에 만들어둔 게시판에 커다란 사진이 붙었어요. 촛불이 꽂힌 케이크 앞에서 웃고 있는 게 정말 너무 좋아서 자다가 내려가서 보고 오고 그랬어요.”

한태경은 서해의 어깨를 감싼 손가락을 천천히 비볐다. 한차례 바람이 지나가고, 발끝에서 모래 먼지가 피어났다가 협곡 아래로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는데, 사진이 없어진 거예요. 떨어진 것도 아니고….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서 선생님에게 물었죠. 쓸 데가 있어서 어디론가 보냈다고 하셨는데, 어린 나이에 그런 거 알 게 뭐예요. 사진 달라고 떼쓰고 울다가 혼나고. 그래도 계속 울어서 화장실에 갇히고.”

서해의 어깨를 쓰다듬던 팔이 깊이 들어왔다. 한태경은 서해를 당겨 와 품 안에 내려놓았다. 어깨에 턱을 올려두고 앞에 앉아있는 서해의 양쪽 팔뚝을 손으로 감싸 안고 바짝 끌어당겼다. 작게 떨리는 한태경의 팔 위로 서해의 손이 툭 하고 덮였다.

“한참 뒤에야 나왔어요. 너무 무서워서 이불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었는데. 몇 번씩이나 봤던 그 사진이 정말 조금도 기억나지 않더라고요. 그때 받았던 생일상이 너무 좋아서, 사진을 보면서 설레던 기분을 계속 느끼고 싶었나 봐요.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죠. 그런데요, 대표님…. 여기도 그렇거든요. 혹시 또 생각이 안 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흐릿한 눈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쫓던 서해가 허둥지둥 말을 끊었다. 등 뒤에서 어떤 표정으로 앉아있는지 살피지 못해 몸을 틀어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끌어안고 있는 팔 힘이 점점 세져 돌아보는 것을 포기했다.

“제가 쓸데없는 얘길 해서.”

“서해 씨, 내가 잘못했습니다. 말을…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 아니요. 이상한 얘기 꺼낸 건 저인데요. 조금만 더 찍으면 안 될까요? 저쪽 가서 조용히 찍고 올게요.”

“저쪽이든 이쪽이든 상관없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세요.”

서해의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간지러움에 잠시 몸을 웅크렸다가 다시 뻗어 올린 휴대 전화 화면에는 파란 하늘과 구름, 그리고 협곡의 장관이 고스란히 담겼다.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은 후 사진 앱을 실행하고 차례대로 찍은 사진을 돌려보았다. 등 뒤에 앉아있던 한태경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들렸다.

“사진 잘 찍네요.”

“너무 멋진 곳이라서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도 다 잘 나오는 것 같아요.”

휙휙 사진을 넘겨보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사진에 서해는 서둘러 손을 내렸다. 키노트 스피치가 끝나고 무대 위에서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담긴 한태경의 모습이 나타났다.

“으악.”

“뭐야, 내 사진도 있습니까.”

“안 돼. 안 돼요.”

“허락도 없이 몰래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었네. 이리 줘보세요.”

“아, 잠깐. 대표님, 지우지 마세요.”

“서해 씨에게 사진의 의미는 좀 남다른 것 같아서 지우고 싶은데.”

서해는 아예 몸을 틀어 앉아 빼앗긴 휴대 전화를 되찾으려 손을 뻗었다. 앉은 채로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아 팔목을 잡아 내리다가 아예 무릎으로 딛고 일어섰다.

“이건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안 돼요, 대표님. 저만 볼게요.”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싸움하다가 그대로 한태경의 몸 위로 쓰러졌다. 기어코 기어 올라가 휴대 전화를 빼앗아온 서해가 몸을 굴려 옆으로 내려왔다.

갑자기 몸 위를 덮어오는 온기에 양손으로 잡은 휴대 전화를 가슴 아래로 끌어 내려 숨겼다. 눈가에 키스가 쉴 새 없이 날아왔다.

“카메라를 사줘야겠네.”

“카메라요?”

“그리고, 휴대 전화 이리 줘보세요. 사진 지우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

머뭇거리던 서해가 폰을 내밀자 무언가 이것저것을 만진 한태경이 메신저 앱을 열어서 서해의 눈앞에 내밀었다.

“요즘은 게시판 대신 이런 거 사용합니다. 메신저 보면 뭐 바꿀 줄도 모르고 매번 똑같은 기본 프로필 사진 쓰는 사람이니 바꿔 주겠습니다.”

“…어….”

한태경은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고 서해가 찍어 둔 사진 몇 개를 전송받았다. 조금 다른 각도의 그랜드캐니언의 사진이 메신저 프로필에 나란히 걸렸다.

휴대 전화를 돌려받자마자 콧잔등을 들썩이려는 서해의 콧대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편 한태경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눠 가지고 싶지는 않았는데.”

“…….”

“나도 추억으로 밀려나기 전에 서해 씨 묶어 놔야겠습니다.”

“…네?”

느릿하게 움직이던 머리 위의 태양이 서쪽을 향해 기울기 시작했다. 시원한 그림자를 만들어주던 등 뒤의 암벽 머리 위가 석양을 받아 마치 다른 색을 입은 것처럼 변했고, 협곡에 붉은빛이 가득 차올랐다.

“…떨리네요. 무대에 올라갈 때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손에 올려진 박스가 잘게 떨렸다. 박스 귀퉁이를 밀어 올리는 그의 엄지손가락이 여러 차례 미끄러지고 몇 번의 시도 끝에야 뚜껑이 열렸다. 한태경의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반지 두 개를 차례로 집어 올렸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만 몇 번을 했는데,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네. 그냥 편하게 하겠습니다.”

“대, 표님.”

“뭘 준비해도 그냥 그런 것 같아서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생각났어요. 그동안 서해 씨에게 준 거라곤 식어 빠진 체인이나, 손가락 하나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가죽 수갑이나 뭐 그런 거밖에 없더라고.”

서해를 덮고 있는 몸은 익숙했지만 그 무게는 평소와 달랐다.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에 집중하고 싶은데 심장 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 애써 숨을 골랐다. 서해는 한태경의 손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결국 아무 모양도 없는 흔한 반지 하나 가져왔습니다. 이야기 듣고 보니 이딴 걸 가져온 게 후회될 정도네요.”

“대표님, 이게 다….”

“서해 씨가 아니었다면 생각조차 못 했을 겁니다. 사랑을 할 수 있게 허락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 작은 세계를 깨트려주고 새롭게 채워준 유일한 사람에게… 돌아가서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무슨 말….”

“허락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연인으로… 그리고 가족이 되어서 함께 있겠습니다.”

잔뜩 흐려진 눈 위로 입술이 부드럽게 내려왔다가 떨어졌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서해의 손이 한태경의 어깨 위에 올려진 채 부르르 떨렸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룰은 그러라고 두고, 우리는 이렇게 지내요.”

꽉 깨물고 있는 서해의 입술 위를 손가락으로 몇 차례 쓸어주자 입술이 살짝 열렸다. 눈을 감고 있는 서해를 기다리는 시간은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품 안에 있던 왼손이 빠져나와 둘의 얼굴 사이에 멈춰 선 뒤에야 한태경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누군가의 허락을 구하고 대답을 기다린다는 게 이렇게 긴장되는 일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한태경의 손가락에 걸려있던 반지가 서해의 손가락 끝에 걸렸다. 반지는 천천히 손가락을 타고 내려와 제 자리를 찾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해가 그의 손가락에 걸려있던 반지를 빼앗았다.

“대표님은… 매번 저를 놀라게 만들어요. 면접에서 처음 봤을 때나 삼거리 집으로 직접 찾아왔을 때도 그랬고, 대표님 방에서 계약서를 쓸 때도 그랬어요. 그리고 지금도 그래요.”

서해의 손가락 끝에 걸려있던 반지가 석양빛을 반사해 반짝이고 지나갔다. 한태경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는 반지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평생 가지고 싶었던 것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어떡하지… 저 너무 떨려요.”

“가지세요. 다 내어줄 테니까.”

서해의 얼굴 앞으로 커다란 손이 쑥 내밀어졌다. 그의 손가락 끝을 잡고 몇 번이나 손톱 끝을 비비던 서해는 한참 만에 반지를 미끄러뜨렸다.

가족, 친구, 연인. 그 무엇 하나 허락되지 않고 발아래 깊숙한 곳에서부터 흔들리던 것을 애써 참아온 날의 끝에서, 마침내 허락된 온 세상이었다.

마주 잡은 손가락에 걸려있던 반지를 쳐다보는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해의 몸 위에 포개져 있던 한태경은 옆으로 굴러 내려와 등 뒤에서 껴안고 앞으로 펼쳐진 협곡을 바라보았다. 막힘없이 탁 트인 시야는 둘 사이에 펼쳐진 시간과 같았고,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석양은 둘을 감싸주는 온기와 같았다.

아무렇게나 펼쳐진 카펫 위에서 한태경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던 서해의 발끝으로 조각난 석양빛이 기적처럼 내려왔다. 다가오기까지는 아주 느린 속도였지만, 그 뒤는 찰나였다. 석양은 매끄럽게 빠진 서해의 발등을 덮고 올라가 둘에게 찬란한 빛을 선사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오랜만에 출근하니까 삭신이 쑤시네요.”

“안녕하세요, 고 책임님.”

“아, 지난 2주가 꿈 같네요.”

회사에 가장 먼저 도착해 있던 서해는 두 번째로 출근한 고 책임과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등 뒤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책임님, 선임님.”

“안녕, 이곤… 씨…. 얼굴이 왜 이래요. 무슨 일 있어요?”

가방을 내려놓으며 인사를 건네던 고 책임이 자리에서 굳었다. 서해는 자리에 앉은 채 멀리 서있는 이곤을 바라보았다.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한 이곤의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아니요. 잠을 잘 못 자서요. 얼굴이 잘 붓기도 합니다.”

“와, 눈에 뭐라도 올려 둬야겠는데. 앞은 보여요?”

“네… 책임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해는 옆자리에 툭 걸터앉는 이곤을 잠시 바라보다가 텀블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 사이사이를 헤쳐 17층 끝에 있는 휴게실에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 마련되어 있는 토스트 몇 장을 굽고, 정수기에서 얼음을 받아 시원한 물을 채웠다. 일회용 딸기잼과 버터 몇 개도 집어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시원한 아메리카노 석 잔을 내렸다. 정수기 위에 놓여있던 쟁반에 음료와 토스트를 올려 들자 무게가 묵직했다. 자리로 돌아온 서해는 팀 가운데 놓인 테이블로 고 책임과 이곤을 불렀다.

“책임님, 이곤 씨. 오랜만에 출근했으니까 먹고 시작해요.”

“서해 씨, 고맙습니다. 센스하고는.”

“다들 벌써 출근했네요. 이 팀은 지각하는 사람 한 명이 없어.”

“팀장님 오셨어요.”

긴 다리로 걸어 들어와 가장 안쪽에 있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둔 윤선우도 테이블에 합석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팀원들을 돌아보다가 이곤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옆에 앉아있던 고 책임이 말했다.

“이곤 씨 얼굴이 잘 붓는다는데, 저렇게까지 얼굴 붓는 사람은 정말 처음 봐요. 아, 이곤 씨. 한약 먹어봐요. 체질 문제일 수도 있거든요.”

“…네, 책임님.”

토스트를 손에 들고 버터를 쓱쓱 바르던 윤선우가 업무 이야기로 대화를 돌렸다.

“이번 주부터는 팀 단위로 같이 움직이기는 어렵고, 프로젝트 배정될 거예요. 고재욱 책임이랑 서해 선임은 단독으로 프로젝트 진행할 예정입니다. 구매팀에서 협력업체 선정 끝나면 아웃룩으로 연락 올 거예요. 협력사 첫 미팅까지는 나랑 같이 진행하고 그다음부터는 월요일에 정기 보고하고 이슈 생기면 그때그때 보고해 주면 돼요.”

“예, 팀장님. CES Summer Show 세션 정리는 언제까지 드리면 됩니까.”

“이번 주 금요일까지 넘겨주세요. 서버에 폴더 만들어뒀는데 그쪽에 올려주시면 됩니다. 링크는 이따가 아웃룩으로 넘길게요.”

자리에 앉아 얼음물을 홀짝이던 서해는 연달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이곤 씨는 당분간 저랑 프로젝트 같이 진행할 거예요. M/M 산정이 애매하게 되어서 선임이나 책임급으로 구성하기 힘든 프로젝트가 생겼네요. 우리 팀 공식 첫 프로젝트는 이곤 씨랑 나랑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미팅 가는데… 눈이 이래서 어떡하지.”

“와, 벌써요? 무슨 프로젝트 시작하십니까.”

“개발팀에서 진행하던 VR 헤드셋 프로젝트가 있나 본데, 고도화를 진행한다고 하네요. 나도 자세한 건 미팅 가봐야 알 것 같아요.”

“대표님 취임하고 회사 분위기가 엄청 달라지는 것 같네요. 새로운 시도도 많고. 우리도 실리콘 밸리 느낌 낼 수 있으려나요.”

테이블 위에 소소한 웃음이 내려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테이블 위에 준비된 토스트와 커피가 싹 비워지자, 윤선우가 이곤을 불러 세웠다.

“이곤 씨, 우리 미팅 열 시에 5층 개발팀에서 진행되거든요.”

“네, 팀장님.”

이곤은 자리에 어질러져 있던 컵과 쟁반을 한데 모으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열 시까지 5분여밖에 남지 않은 것이 보였다. 멀리서 윤선우가 벌써 노트북을 챙겨 들고 팀을 나서려는 모습이 보였다.

“어, 선임님. 이거 제가 치우려고 했는데 시간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이곤 씨.”

“빨리 따라와, 솜사탕.”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서해와 이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귀가 빨개진 이곤은 서해와 고 책임에게 짧게 인사하고 서둘러 노트북을 챙겨 들고 나섰다.

윤 팀장은 복도를 걸어 나가면서 이곤을 바라보다가 제법 눈치도 있고 매너도 있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휴가 동안 잘 쉰 것 같지는 않네.”

“…팀장님, 오늘 점심은 밖에서 드실래요.”

“그럴까요. 우리 팀비도 많이 남았는데, 점심 회식합시다.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테이블에 앉아 윤 팀장과 이곤이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해가 고 책임에게 물었다.

“…솜사탕요?”

“아니, 팀장님이 라스베이거스에서 귀국할 때부터 이곤 씨를 솜사탕이라고 부르시더라고. 재미있는 분이셔. 저 덩치에 솜사탕이 가당키나 하냐고…. 근데 서해 씨, 세션 정리 어떻게 했어요. 이런 거 너무 오랜만이라서 다른 사람 어떻게 했는지 보고 좀 맞춰야 할 것 같아서요.”

“네, 아직 초벌이긴 한데 먼저 보여 드릴게요. 제 자리에서 보실래요?”

“어, 고마워요. 좀 봐봐.”

UT 1팀 셀에 서해가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해의 설명을 듣던 2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다가 서해의 자리 뒤로 몰려들고, 멀리 떨어져 있던 3팀이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몰려들었다.

설명이 끝난 뒤 뒤를 돌아본 서해는 가득 서있는 셀원들로부터 몇 개의 질문을 받고 답하기를 반복했다.

17층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 * *

퇴근 후 38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해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에는 곧 만날 사람과 함께할 시간에 대한 기대가 가득 담겨있었다. 몇 개월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이 보였다.

매끄럽게 윤기가 흐르는 양쪽 뺨을 살피고, 일하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활짝 열린 문으로 한태경이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틈도 없이 그대로 문이 닫혔다.

“어, 대표님.”

“언제 오나 한참 기다렸네. 앞으로 여섯 시 넘으면 셧다운을 시켜야겠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바쁠 땐 진짜 고개 돌릴 시간도 없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럼 일하는 시간을 바꿀까, 9 to 5로.”

“…네?”

“흠. 권 실장님이랑 얘기해 봐야겠네요.”

서해는 한태경이 하는 말이 웃자고 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하는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유리문을 열고 나오자 바로 앞에 주차된 익숙한 검은 세단이 눈에 보였다. 서해에게 맞춰진 조수석 자리에 올라타고 뒷자리에 브리프케이스를 올려두었다. 조금 급하게 출발하는 차에서는 안전띠 미착용 알림이 울었다. 급히 안전띠를 착용했다.

“17층은 별일 없었습니까.”

“복귀 첫날이라서 조금 바빴어요. UT 셀원들이랑 CES 세션 정리 건으로 회의가 길어져서요. 가볍게 시작했는데, 이것저것 정책 세울 것들이 많아져서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거기서도 잘하고 있나 보네.”

“윤 팀장님이랑 이곤 씨는 개발팀과 신규 프로젝트 들어갔어요. 점심 식사만 겨우 같이하고 퇴근 때 얼굴만 봤어요. 그… 메신저 따로 보내고 받은 건 없어요.”

지하 주차장에서 빠져나오자 앞 유리창에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기분 좋게 울리는 빗소리가 재즈 음악 소리에 섞여들었다.

“비가 오고 있었네요.”

“따로 있다고 또 종일 책상에 앉아있었나 봅니다. 비는 오전부터 왔습니다.”

퇴근길에 몇 차례 들어본 적이 있는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에 맺힌 물방울을 따라 그리던 서해는 저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보닛과 앞 유리창에 들이친 빗소리와 섞인 목소리가 차 안을 맴돌았다.

제법 잔잔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핸들을 잡고 있던 한태경의 손끝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차 안에서 갑작스럽게 시작된 작은 공연을 음미했다. 곡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워진 한태경의 손끝이 애꿎은 핸들을 미끄러뜨리다가 떨어졌다.

서해의 허벅지 위에 한태경의 손등이 닿은 순간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멈췄다.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리던 것을 그제야 눈치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운전 중인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손을 잡아달라는 듯 활짝 펼치고 있던 손등이 허벅지 위를 두어 차례 탁탁 두드렸다. 가만히 왼손을 겹쳐 올렸다.

“손 괜히 잡았네요. 듣기 좋았는데.”

늘 그랬던 것처럼 깍지를 꼈는데, 반지가 조여 손가락 사이가 아파졌다. 크게 겉으로 내색하지 않은 서해의 시선이 다시 앞 유리창 밖으로 향했다. 조용한 가운데 와이퍼 움직이는 소리가 가끔 섞여들었다.

달리던 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정지선에 맞춰 섰다. 비에 젖어 어른거리는 앞 유리 너머로 붉은빛이 보였다. 세찬 빗줄기에 시야가 흐릿해질 때면 와이퍼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금방 바뀐 초록불 신호에 차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갔다.

“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걸 보니 기분 좋은가 봅니다. 이런 모습은 또 처음 보네.”

“아… 비가 와서 그랬나 봐요. 빗소리는 정말 언제 들어도 좋은 것 같아요. 특히 여름비요. 정말 시원하게 내리잖아요.”

“창문 열면 집에서도 좋아하는 빗소리 잔뜩 들을 수 있습니다. 가서 열어줄게요.”

서해는 얽혀있던 엄지손가락으로 한태경의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가 운전하는 동안 서해가 부릴 수 있는 작은 사치였다.

“여름비의 다른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 게 있어요?”

“여름에 내리는 비는 잠비라고 부릅니다. 비가 오면 일하는 대신 잠을 자면서 쌓인 피로를 푼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더라고.”

“낭만적인 표현이네요.”

“우리도 여름비 즐기러 갈까요.”

“좋아요.”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날카로운 기억들이 하나둘 스러져갔다.

맞잡은 손바닥 사이로 전하는 마음이 부디 서로에게 닿길 바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대표님의 작은방 완결)

대표님의 작은방 3권<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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