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9)

18. CES Summer Show

습관이란 것은 무서웠다. 서해의 소속이 연구 부서로 바뀌어 17층으로 사무실이 이동되었음에도, 무심결에 38층까지 따라 올라가는 것이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었다. 이왕 올라왔으니 차 한잔하고 내려가라는 한태경의 말이 반복되면서 오후 네 시에 가지던 두 사람의 티타임은 자연스럽게 오전 여덟 시로 변경되었다.

응접실 테이블 위에는 디카페인 차와 과일 도시락이 올려져 있었다. 아침에 공복으로 나가려는 서해를 위해 한태경이 특별히 주문한 도시락이었다. 매일 다른 과일이 담겨서 배달되어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칸칸이 나눠진 오늘의 도시락 한쪽에는 딸기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셀러리와 방울토마토, 포도가 잔뜩 담겨있었다.

과일만 쏙쏙 집어먹는 서해를 가만히 바라보던 한태경이 동봉된 포크로 셀러리를 집어 내밀었다.

“편식하지 말아요. 채소는 가리지 않고 먹을수록 좋습니다.”

“셀러리 못 먹는 건 아닌데, 정말 화장품 먹는 것 같단 말이에요.”

입을 내밀고 과일 도시락만 바라보는 서해의 입으로 셀러리가 쑥 들어왔다. 눈치를 살피던 서해는 한태경이 눈을 아래로 내리뜨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몇 번 씹지 않고 삼키려 할 때였다.

“꼭꼭 씹어 먹어요. 급하게 먹으면 체합니다.”

혓바닥에 최대한 닿지 않게 씹어 먹으려던 서해는 결국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꼭꼭 씹어 삼켰다. 할 수만 있다면 업체에 연락해서 제발 다음부터 셀러리는 빼고 보내 달라고 사정하고 싶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딱 두 줄기 들어있다는 점이었다. 텁텁한 입안의 기운을 딸기로 씻어내자 인상이 조금씩 펴졌다.

“…그렇게 싫으면 다음부터는 셀러리는 빼고 다른 채소로 채우겠습니다. 싫어하는 것 억지로 먹이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가만히 차를 들이켜던 한태경이 서해의 오른쪽 뺨에 짧게 키스하고 어깨에 손을 둘렀다. 딸기를 집어 먹다가 깜짝 놀란 서해는 CCTV가 설치되어 있다던 윤선우의 말이 생각나 서둘러 옆으로 떨어져 앉았다.

“어, 대표님 여기 CCTV 있다면서요.”

“있습니다.”

카우치 위로 떨어져 있던 팔이 다시 서해의 어깨 위로 둘렸다. 서해는 화들짝 놀라 옆으로 다시 떨어졌다.

“관제팀에서 보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못 봅니다. 내 디바이스에서만 관리하기 때문에.”

“아….”

“그리고. 팔 두르고 껴안는 거 걱정하기 전에, 출근한 다음에 여기서 나랑 둘이서 차 마시는 것부터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겠습니까.”

어깨를 감싸고 얼굴을 붙여오던 한태경이 다시 뺨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하고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카우치에 눕게 될까 봐 경계하는 서해가 보였다. 꼼지락거리며 옆으로 도망가는 모습을 보던 그가 시원하게 웃었다.

괜히 그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포크에 셀러리를 콕 집어 입속으로 넣어주었다. 아무 말 없이 씹어 삼킨 한태경이 서해의 팔목을 잡아 기어코 옆에 붙여 앉혔다.

“이번 주에 CES Summer Show로 라스베이거스 가는 것 기억하고 있습니까.”

“네, 완전 기대 중이에요. 진짜 떨려요.”

“서해 선임이 왜 떨립니까. 키노트 연사인 내가 떨려야지.”

“키노트 스피치 하세요? 언제인데요?”

“첫날 첫 번째 타임입니다.”

“…개막식에서… 키노트 스피치를 하신다고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IT 제품 박람회에서 기조연설을 맡고도 태연하게 말하는 한태경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서해는 괜히 몸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에 손을 맞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주제로 하시는 거예요?”

“이번 CES Summer Show 키워드가 인공 지능, 자율 주행, 8K입니다. 글로벌유니티 부스가 호미파이를 중심으로 구성되면서 키노트 스피치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인공 지능과 스마트 디바이스의 연결성에 관한 연구 현황을 공유할 예정입니다. 본사에서 진행하던 일부 케이스 스터디도 자료로 공개할 거고.”

“대표님 진짜… 멋있어요.”

“서해 씨한테 그런 말 처음 들어보네요. 이제껏 한 번도 못 듣다가 일할 때 듣게 되는 게 조금 자존심 상하는데.”

서해는 눈을 반짝이며 제 연인을 올려다보았다. 더 놀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또 놀라게 된다.

“기대할게요, 대표님.”

“재미있게 들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럼요. 대표님이 하는 키노트 스피치는 처음 보는 거고…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번에 잘 들을게요.”

“잘 봐뒀다가, 나중에는 서해 선임이 진행해요.”

“…네?”

“계속 선임만 할 건 아니잖아?”

어깨에 둘려있던 한태경의 손이 서해의 뒷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까마득하게 먼 미래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놓고 금방 사라지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금요일 새벽 비행기라서 목요일은 출근하지 않을 겁니다. 캐리어는 그날 챙기는 거로 해요.”

“네, 그럴게요.”

“병원에서 추가로 받아온 약도 잘 챙겨요. 늘 먹던 시간에 알람 올려두고. 시차 바뀌어서 엉뚱한 시간에 먹으면 안 됩니다.”

서해는 며칠 전에 추가로 검사를 마치고 받아온 약을 떠올렸다. 검사 결과는 다행히 몇 개월 동안 복약을 유지하며 지켜보는 것으로 결정됐다.

“네, 시간이 벌써… 저 17층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저녁에 이쪽으로 넘어와요. 이따 봅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서해는 주위를 잘 살핀 다음 로비로 빠져나왔다. 언젠가 이곤이 말했던 것처럼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은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여섯 대나 있었지만 출근 시간에 한꺼번에 몰린 직원들이 가득했다.

출퇴근 시간에 만원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아직까지도 어색했다. 어쩌다가 마지막으로 겨우 타게 되어 문이 아슬아슬하게 닫히는 것을 보거나, 혹은 타이밍을 잘 못 맞추어 문이 다시 열리게 될 때면 바깥에 서있는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하는 어색함을 이겨내야 했다.

그게 싫어서 제일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가 내리겠다는 인사를 연거푸 뱉으며 사람들을 헤쳐 나온 뒤로는 적당히 한쪽 벽에 붙어 서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서해는 어쩐지 그동안의 기간은 진정한 의미로 회사에 다닌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겨우 익숙해진 17층에 도착해 넓게 펼쳐진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유리로 된 자동문이 열리고 좌우에 연속으로 배치된 회의실 복도를 지났다.

넓게 트인 시야로 똑같은 책상이 두 줄씩 가지런히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17층으로 출근한 첫 주는 자리를 찾으려다가 엉뚱한 팀으로 들어가길 반복했다. 아닌 척하며 몇 개의 팀을 오간 다음에야 겨우 원래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게 생각나 멋쩍었다.

UT 1팀의 영역과 자리가 서해의 눈에 들어왔다. 이미 출근한 이곤과 고 책임이 눈에 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선우가 도착했다.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기 이전의 UT 셀의 오전 시간은 화기애애했다. 1팀, 2팀, 3팀 가릴 것 없이 오가며 커피 타임이 수시로 벌어졌다.

서해의 책상 위에는 한태경과 38층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물건을 올려두고 쓰는 것이 취향이 아닌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니터 앞에 가지런히 세워진 이런저런 물건들은 서해가 이곳에 있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연구실에서 아무것도 올려두지 않은 채 노트북만 이용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음료를 마실 수 있는 텀블러부터 각종 필기도구와 노트, 평소에 사용하기에 지나칠 정도로 고급스러운 디자인 사무용품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7층 직원들은 가끔 서해의 자리로 놀러와 신기한 디자인 사무용품들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서해와 친분을 쌓았다. 몇 번 대화를 주고받다가 여러 직원의 호감의 눈길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책상 위에 먹을 것이 떨어지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서해는 정말 사무용품을 구경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거나, 혹은 빌려주거나 하기를 반복했다.

아침이면 한 잔씩 하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얼음물을 가득 담아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17층으로 비서실장이 찾아왔다. 입구에 앉아있던 서해와 눈이 마주쳤는데 짧게 묵례하는 비서실장에 놀라 서둘러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의 손에는 여권과 항공권이 가득 들려있었다.

“안녕하세요. 비서실에서 왔습니다. UT 셀 전체 잠시 주목해 주세요. CES Summer Show 앞두고 전달 사항 있습니다.”

“앗! 비행기표 왔다!”

셀 너머로 들뜬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UT 셀은 하던 대화를 멈추고 일제히 비서실장에게 집중했다. 비서실장은 설명을 이어가며 각 팀장에게 소속 팀의 여권을 넘겨주며 말했다.

“가능한 같은 비행기로 예매를 시도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연구 부서가 늦게 꾸려지기도 했고 티케팅이 급하게 이루어져서 이렇게 되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라스베이거스 도착하면 머무를 숙소에 대한 안내는 각자의 메일 계정으로 날아가 있을 겁니다. 2인 1실이고 각 팀당 인원은 자유 배정해 주시면 됩니다.”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이곤이 서해의 옆에서 귓속말했다.

“선임님, 저랑 같은 방 쓰실래요?”

“…네?”

“아니, 솔직히 팀장님이나 책임님이랑 같은 방 쓰면 불편하니까. 괜찮죠, 선임님?”

“아, 어….”

서해는 뭐라고 거절해야 이곤이 덜 상처받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 한태경은 이곤뿐만 아니라 책임이나 팀장과 함께해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 같아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곤과 밥 한번 먹고 나서 서늘하게 화를 내던 한태경의 모습을 더듬어본 서해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노숙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때 윤선우가 다가와 모두에게 여권과 항공권을 나눠주었다.

“UT 1팀 잠시 회의할까요. CES 프로그램 보면서 업무 분장합시다.”

회의실에서 그는 프로그램을 펴놓고 양해를 구했다.

“모두 의견을 들어줄 수 있으면 좋은데… 사람은 한정되어 있고 컨퍼런스 세션은 동시에 여러 군데서 열리니까 서로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2팀과 3팀 팀장과 만나서 단순 분할했어요. 우리는 Tech East에서 열리는 세션에 참석하기로 했고 2팀은 Tech West, 3팀은 Tech South에서 열리는 세션에 참석하기로 했어요.”

“괜찮습니다, 팀장님. CES 가게 되는 거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고 책임님. 그래서 말인데, 우리끼리라도 서로 꼭 듣고 싶은 것 있으면 선택권을 주려고 하거든요. 프로그램 훑어보고 이 자리에서 서로 정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윤선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각자의 관심 영역에 맞는 컨퍼런스 세션을 골랐다.

“나는 안면 인식이랑 행동 인식 쪽 듣고 싶은데, 고 책임은요?”

“저는 헬스 케어랑 모빌리티 듣고 싶습니다. 둘은?”

“저는 보안 이슈 듣고 싶어요.”

“이곤 씨가 보안 쪽 들으면, 저는 감성 지능의 알고리즘으로 들을게요.”

컨퍼런스 프로그램이 사이좋게 나뉘면서 만족한 UT 1팀은 기타 소소한 전달 사항을 주고받았다. CES 일정이 끝나면 개인 재량에 따라 5일 휴가를 써도 좋다는 얘기도 내려왔다. UT 1팀은 모두 휴가를 쓰겠다는 얘기를 남겼다.

“참, 출발 시간대 확인해 봐요. 우리 팀 모여서 갈 수 있으면 만나서 가도 될 것 같아서요. 저는 금요일 오후네요.”

“저도 금요일 오후 비행기예요.”

“저도 금요일 오후입니다.”

“…전 금요일 새벽인데요? 00시 50분.”

UT 1팀의 시선이 일제히 서해에게로 향했다.

“이런, 서해 선임 뽑기 잘못했네. 힘들겠네요.”

“…선임님, 새벽 비행기라니….”

회의가 끝나고 서해는 2팀과 3팀을 돌며 금요일 새벽 비행기를 타는 사람을 찾았다. UT 셀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서해가 유일했다.

서해는 아침에 한태경과 차를 마시면서 했던 얘기가 떠올라 급히 메신저를 열었다.

[대표님, 라스베이거스행 몇 시 비행기 타고 가세요? 10:02am]

[항공권 받았어요? 서해 씨랑 같습니다. 00시 50분 비행기 10:02am]

[아… 다행이다. 혼자 가야 하는 줄 알고 엄청 걱정했어요. 10:03am]

[어디라고 혼자 갑니까. 같이 가야지. 10:03am]

서해는 장거리 비행에 혼자 심심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모든 것이 한태경의 계획과 비서실장의 치밀한 티케팅 덕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메신저로 몇 차례 서로 껴안고 있는 이모티콘을 날려 보냈다.

브리프케이스에 티켓과 여권을 잘 챙겨 넣은 서해는 오전과 오후 시간에 CES Summer Show 세션의 내용을 정리할 문서 포맷을 만들기 시작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몇 가지 타입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윤선우와 싱크를 맞춘 뒤, 문서 포맷을 UT 셀 전체에 공유했다.

“와, 선임님. 고마워요. 이거 또 언제 만들고 있나 했네.”

“별거 아닌 간단한 포맷인데요.”

“그러니까 그 별거 아닌 간단한 일을 먼저 해 주는 사람들이 잘 없어서.”

“맞아. 작은 일들이 모여서 야근이 되고 그러잖아. 일이 어려워서 야근해?”

UT 2팀의 책임들이 복도를 빠져나가다가 서해와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자리를 오가며 전하는 감사 인사를 받으며 서해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이곤이 작성한 장비 대여 목록을 확인하고 임시로 자료를 저장할 드라이브까지 빠짐없이 꼼꼼하게 챙겼다. 소풍 가기 전날 밤에 준비물을 챙기며 들뜬 어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UT 2팀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르르 자리를 뜨는 셀원들과 맞춰 가방을 챙겨 들고 나온 서해는 1층에서 팀원들과 인사했다.

눈치를 보다가 38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서해에게 말을 걸려고 다가서는 이곤을 붙잡는 윤선우가 보였다. 그는 이곤을 서해에게서 떼어놓고 눈을 접어 웃으며 인사했다.

병원에서도 설마 했는데. 당황한 서해가 눈을 깜박거렸다. 아무래도 그는 한태경과의 사이를 알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허둥지둥 인사하고 한쪽에 숨겨진 엘리베이터로 도망쳤다. 고맙다고 인사하기도, 모른 척하기도 애매한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처음으로 가는 해외 출장길에 챙겨야 할 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노트북과 태블릿을 비롯한 회사 개인 물품만 작은 가방에 한가득이었다.

그 옆으로 펼쳐진 캐리어에는 CES Summer Show에서 입을 캐주얼 정장 몇 벌도 가지런히 담겨있었고, 한 주간 지내는 동안 필요한 물품들이 지퍼백에 가득가득 담겼다.

휴대 전화 메모장에 적어두었던 출장/여행 시 챙겨야 할 리스트에서 하나하나 확인하며 짐을 챙기던 서해의 머리 위로 항공권 하나가 쑥 내밀어졌다.

“어, 저 항공권 받았어요.”

“올 때는 뭐 타고 오려고.”

그제야 받은 항공권이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한태경이 내밀어 준 티켓에 적힌 귀국 날짜는 CES Summer Show 일정이 끝나고도 일주일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대표님, 이게 뭐예요?”

“라스베이거스 간 김에 휴가 보내고 오려고.”

“진짜요?”

“연구소 본격적으로 바빠지면 일주일씩 날짜 빼기 어려울 겁니다. 이번에 힘들게 멀리 갔으니까 며칠만 더 보내고 올까 하고. 미리 말하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매번 이렇게 결정하고 얘기해서 미안합니다. 습관이 잘 안 고쳐지네요.”

서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티켓과 여권을 손에 쥐고 있다가 캐리어를 뛰어넘어 한태경을 마주 보고 섰다.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하던 서해가 휴대전화를 켰다. 아직 오후 세 시였다.

“저 환전을 더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은행 금방 다녀올게요.”

“서해 씨가 환전을 왜 합니까.”

“가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하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짐이나 빠짐없이 잘 챙겨요.”

“그래도….”

“돈 많은 연인이 있는데 이렇게 쓸 줄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저것 사달라고 말이라도 좀 해보세요. 뭐든 똑같이 반반 내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대답 없는 서해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한태경은 드레스 룸으로 사라졌다. 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서해가 그에게 요청하기엔 난이도가 꽤 높은 항목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넘치도록 받고 있는데 무언가를 더 주겠다고 하는 말이 나올 때면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서해의 캐리어 안에는 일상복이 추가로 담겼다. 2주 가까이 집을 떠나 있으려니 무게가 꽤 많이 나갔다.

캐리어를 끌고 복도로 나가자 계단 앞쪽에 서해와 같은 디자인이지만 사이즈만 조금 더 큰 한태경의 캐리어가 세워져 있었다. 알루미늄 캐리어가 조명을 받아 예쁘게 반짝였다. 사람이라도 들어갈 것 같은 사이즈를 보고 잠시 놀라서 가방 앞에 쪼그려 앉아 보았다.

“…뭐 합니까?”

“가방이 엄청 커서 신기해서요.”

“짐 가득 채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큰 가방 가지고 다닙니다. 다 챙겼어요?”

“네, 저도 끝났어요.”

“거기 두고 잠시 쉬었다가… 열한 시에 출발합시다.”

한태경은 마지막까지도 준비할 것들이 많은지 서재로 들어가 노트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서해는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귓가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뜨자 바깥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몽롱한 상태였다. 입술을 벌리고 약이 들어오고 물컵이 기울여졌다. 아무 생각 없이 주는 대로 먹고 눈을 깜박거렸다. 졸음을 쫓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렁이는 머리 위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 맞춰서 먹으라니까 말 안 듣네요.”

잠들기 직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휴가를 보내고 오자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서해는 그랜드캐니언 절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꿈을 꾸었다. 신기할 정도로 탁 트인 경관을 내려다본 기억이 선명했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아직도 신비로운 기운에 잠겨있는 듯했다.

서해는 잠에 취해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말을 건넸다.

“대표님, 휴가 때 그랜드캐니언 가고 싶어요.”

“가고 싶으면 가야지.”

“…으응…. 감사합니다.”

“귀여워서 그냥 자게 두고 싶은데, 더 늦어지면 탑승 수속 힘들어집니다. 정신 차려요.”

머리 위에서 웃는 소리가 들리자 꿈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조금은 사라졌다. 뺨을 감싸고 눈가를 쓰다듬는 손길에 몸을 기대고 있자니 다시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서해는 손으로 침대를 더듬다가 겨우 일어섰다.

“…깜박 잠들었어요. 몇 시예요?”

“열한 시 십 분. 지금 출발하면 됩니다. 일어나 보세요. 잡아줄 테니까.”

서해는 눈꺼풀을 몇 차례 깜박이고 테이블에 남아있던 물을 들이켰다. 캐리어를 들고 내려와 트렁크에 싣고 집을 나섰다. 평생 이렇게 길게 외지로 나가보는 것이 처음이라 마음이 들떴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자 그제야 머릿속에 남아있던 졸음이 달아났다.

“대표님, 창문 열어도 돼요?”

“됩니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조수석의 창문이 내려갔다. 서늘한 바람이 이마와 머리카락을 휩쓸고 지나갔다.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한밤에 연인과 공항으로 달려가는 상황은 일하러 간다기보다는 여행 가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공항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여객터미널 출발 층으로 향했다. 서해는 늦은 시간임에도 꽤 많은 사람이 있어서 놀랐다. 탑승 수속을 하는 항공사 카운터에는 몇 차례나 휘어진 대기 줄이 보였다.

“우와, 밤에 출국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어요.”

“첫 해외 출국이 출장이라니 내가 다 아쉽네.”

“괜찮아요. 기대하던 CES 가는 건데요. 줄 서서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잠시 앉아 계실래요?”

“이쪽으로 와요. 우리 카운터는 따로 있습니다.”

한태경은 서해를 이끌고 텅 비어있는 끝 쪽 카운터로 갔다. 대기 인원은 한 명도 없었다. 퍼스트 클래스 전용 카운터였는데 옆에 길게 늘어선 줄과 비교됐다. 커다란 알루미늄 캐리어 두 개에 태그가 붙더니 벨트를 따라 가방이 통통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노트북이 담긴 가방 하나만 들어 훨씬 가벼워진 몸으로 보안 검색대를 통과했다. 네모난 센서가 부착된 곳을 통과하려니 괜히 긴장되었는데 서해가 지날 때 삐빅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공항 직원은 손에 든 금속 탐지기로 몸 앞뒤를 훑었다. 몇 차례 바지 주머니 위를 반복적으로 체크하던 직원은 서해의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서해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보안 검색대 위에 휴대 전화를 놓고 다시 돌아왔다.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먼저 통과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태경의 표정이 영 서늘했다.

“휴대 전화를 왜 주머니에 넣습니까. 검색대 위에 올려야지.”

“몰랐어요….”

“기분 나쁘네요.”

“대표님, 저건 그냥 보안 절차인데.”

“시끄럽습니다. 호텔 가서 봅시다.”

옆에 서있던 한태경이 뭐라고 말하려는 서해의 등을 밀어 출국 심사장으로 이동했다. 좌측은 출입국 심사 줄이 이어져 있었고, 우측은 자동 출입국 심사가 가능한 사람들이 지문과 홍채 인식을 마치고 빠져나가는 길이었다.

심사할 줄이 이어져 있던 곳에 웅성거림이 이어지더니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 보였다. 면세 구역으로 들어가는 자동 출입국 심사에 줄 서있던 둘의 시선이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이미 많은 사람이 그 주위를 빙 둘러싸고 구경 중이었다.

한태경은 서해의 어깨에 손을 올려 인파에 휩쓸리지 않게 한쪽으로 비켜 세웠다. 멀리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CES 다녀오려는 거라니까! CES라고 하니까 뭔지 모르나 본데, IT 회사들이 참여하는 박람회예요. 연례행사라고. 나 누군지 몰라요?”

보안 구역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보안 요원들이 달려오고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사람의 양쪽 팔을 잡아 출국 게이트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겨울이 끝난 지 오래된 날씨에 목도리로 목과 얼굴의 하관을 감싸고 있는 사람은 서해와 한태경도 잘 알고 있는 권율기였다.

“…대, 표님. 지금 저기.”

“박람회 같은 소리 하네. 지금 한가하게 CES에 참석할 때인가.”

서해는 저도 모르게 한태경의 팔목을 꽉 잡고 소란이 벌어진 장소로 가까이 다가갔다.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인파를 헤치고 가까이 다가서 확인한 사람은 권율기가 맞았다. 몇 미터 떨어진 거리였지만 서해와 눈이 마주친 그는 한바탕 몸을 뒤틀며 소리를 질렀다.

금방이라도 서해에게 달려와 찢어놓을 것 같은 눈빛에는 격렬한 분노가 담겨있었다. 서해는 담담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려워하는 기색 없고 흔들림 없는 서해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은 권율기는 날 선 눈빛을 쏘아댔다.

몸싸움을 벌이던 보안 요원이 권율기의 양쪽 팔을 잡고 다시 바깥으로 연행했다.

“출입국 관리 소속 공무원입니다. 긴급 출국 금지가 내려져 출국 허가가 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깥으로 모시겠습니다.”

“밀지 마. 아, 씨발! 놓으라니까!”

사람들은 둥그렇게 둘러서서 보안 검색대 바깥으로 끌려나가는 권율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원래대로 줄을 서고 면세 구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불과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온 공간에 서해가 덩그러니 서있었다.

“서해 씨,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이렇게 마주칠 거라고 생각을 못 해서.”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요. 좀 황당하기까지 한데. 우선 들어가서 앉아서 얘기합니다.”

서해는 약간 멍한 정신으로 지문 인식과 홍채 인식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의 면세 구역은 대부분 한산했으나 딱히 시선이 가지는 않았다.

한태경은 서해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면세 구역을 지나 탑승 게이트 앞에 있는 의자로 이동했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둘 앞으로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검찰에 보강 수사 지휘가 떨어진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권율기가 피내사자로 전환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사를 받을 줄 알았는데… 저렇게 막무가내로 출국을 시도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네요. 정말 예측 불가네.”

“…대표님이 하신 거예요?”

“나이브레티로 간 조태용 상무와 거래했어요. 나는 조언만 했고, 정확히는 조태용 상무의 그림입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권율기는 이제 구속 수사될 것 같네요. 나이브레티 이사회에서 곧 권씨 일가 해임안을 상정하고 경영권 박탈을 위한 과정에 들어갈 겁니다.”

“대표님. 이건… 이건.”

“왜요.”

“저 때문에 이런 일 하지 마세요. 예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약을 먹은 덕분인지 서해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권율기와 관련된 일이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대고 손이 떨려오던 것과 다른 자신의 모습에 잠시 신기해했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올려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어떤 건데.”

“…대표님이 저 때문에 이런 더러운 일에 휘말리는 거…”

“아직 멀었습니다.”

한태경은 검찰 구형대로 법정 최고형을 받게 만들고, 나와서는 한 푼도 못 가지게 만들겠다는 말을 속으로 눌러 삼켰다. 차차 뉴스를 통해 알게 될 일을 굳이 미리 얘기해서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마세요. 제 지난 일로 대표님의 지금이 힘들어지는 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힘든 것 없습니다.”

“…계속 잠 못 자고 바빴던 거 다 이거 때문이죠?”

“요즈음에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 뭔지 알고 있습니까? 내가 서해 씨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다행이라는 겁니다. 반대의 상황이었으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서해 씨는 나보다 더했을걸. 대놓고 집요한 성격이잖습니까. 틀리고 비뚤어진 것 하나 못 보고 지나치는.”

“벌어지지 않은 상황 가정하지 마세요.”

고개를 들어 올리자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한태경의 한쪽 눈썹이 쑥 올라갔는데, 때마침 공항에서 파이널 콜이 울렸다. 깊은 생각에 빠지고 대화하느라 비행기에 타야 하는 시간도 잊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제법 무섭게 쏘아보던 서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말하는 게 아주 요 입을 막아버리고 싶네. 올라갑시다.”

서해는 아예 한태경에게서 등을 돌리고 탑승 게이트로 걸어갔다. 짧은 숨을 뱉어내고 어이없는 웃음을 지은 한태경이 서해를 따라가 어깨를 끌어당기고 반대편 입구로 이끌었다.

“그쪽은 이코노미석이고, 우린 이쪽입니다.”

입구에 서있던 승무원이 서해와 한태경을 좌측으로 안내했다.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올라탄 서해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풀어졌다.

내부는 황당할 정도로 넓었다. 앞에는 와이드 스크린이 붙어있었고, 옆에는 개인용 바가 붙어있어 승무원을 부르지 않아도 언제든 음료를 마실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 준비된 개인 침대를 봤을 땐 자리 앞에 준비된 어메니티나 파자마는 오히려 이해가 가는 수준에 이르렀다. 여기가 비행기인지, 어디 호텔에 왔는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 * *

라스베이거스까지는 11시간 20분이 소요됐다.

비행하는 동안 통로 좌우로 찢어져 앉은 서해와 한태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태경은 키노트 스피치를 최종 검토하느라 등을 붙이고 쉴 틈이 없었고, 서해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소리를 높였던 것이 신경 쓰여 속으로 생각하던 중이었다.

멀리서 커튼을 걷고 사무장이 나타났다. 서해는 비행기에서도 코스 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지만 두 번째 메뉴가 나온 뒤부터는 크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에피타이저가 지나가고 넓은 그릇에 잘 구워진 스테이크가 나왔다.

“와인 드시겠습니까?”

“네.”

습관적으로 대답했는데 통로 건너에 앉아있던 한태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술 마시면 안 됩니다. 약 먹고 있잖아요.”

“…아.”

사무장은 신기할 정도로 눈치가 빨랐다. 서해를 짧게 쳐다보고 웃음 지은 뒤 한태경을 향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메인 요리에 맞는 무알콜 샴페인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대신 드릴까요?”

“네, 저쪽 자리는 카페인, 알코올 종류는 금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사무장의 정중한 제스처에 기분 나쁠 수 있는 상황도 매우 부드럽게 넘어갔다. 서해의 테이블 위에는 샴페인 잔이 올려지고 몽글몽글한 탄산이 피어올랐다.

식사를 마치고도 한동안 대화가 없는 게 민망했던 서해가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고도가 높아지기 시작하자 추위가 찾아왔다. 발끝에 이리저리 걸쳐있던 담요를 당겨 올렸다. 꼬물거리고 자리에 누운 서해는 몸 위에 덮인 담요를 손끝으로 당겨 코 아래까지 덮었다.

보안 구역에서 마주쳤던 권율기의 모습이 서해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탑승 게이트 앞에서 한태경이 했던 말도 엉켜서 돌아다녔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고맙다고, 너무 속 시원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걱정됐다. 혹시라도 권율기가 다시 나와서 자신을 괴롭혔던 것처럼 한태경을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

퍼스트 클래스를 밝히고 있던 조명이 어두워졌다. 자리를 정리하던 사무장도 공간을 빠져나가고 없었다. 그때 서해의 자리 옆에 누군가 걸터앉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돌려보자 한태경이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뾰로통한 모습도 귀여운데, 이제 그만하지. 내가 집중이 안 돼서 일을 못 하겠네.”

“…죄송합니다. 아까는 말이 너무 심했던 것 같아요.”

“죄송하단 말 들으러 온 거 아닙니다.”

“그래도 죄송해요, 대표님. 권 상무님 일만 끼어들면 계속 이런 식이 되는 것 같아서….”

“사과받을 일을 한 기억은 없고, 칭찬받을 일을 한 것 같은데 이상하네요. 그리고 이제 죄송하단 얘기는 하지 말아요. 애랑 어른 사이 같으니까.”

멀리서 뻗어온 손이 서해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손가락 마디가 툭툭 걸리다가 손가락이 끝까지 얽혀들고 손바닥이 바짝 맞닿았다.

“다른 일도 바쁠 텐데 저 때문에 쓸데없는 데 신경 쓰게 한 것 같아요.”

“쓸데없지 않습니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벌을 받아야 서해 씨 마음도 조금이나마 치료가 되지 않겠습니까.”

“치료는 병원에서 약으로 하는 거예요.”

“말대꾸하는 거 보니까 많이 좋아진 것 같긴 하네요.”

비행기가 잘게 흔들릴 때마다 맞닿은 다리가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서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틈 없이 맞닿은 손을 꽉 붙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한태경이 서해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고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크게 나쁜 짓 한 것은 없습니다.”

“거짓말. 조태용 상무님이랑 거래했다면서요.”

“흠… 똑똑한 사람이랑 사귀니까 이런 건 좀 힘드네요.”

“…대표님.”

“가만히 둬도 처벌받는 날이 올 테지만, 내가 조금 당겨놓은 것뿐이에요.”

“그래도… 그래도 마음이 쓰여서 그래요. 아! 권 상무님이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권율기를 신경 쓴다는 게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설명해 줘야 할 만큼 이해력 달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서해는 몸을 바짝 당겨 앉고 한태경이 걸터앉아 있는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난기류를 만나 짧게 흔들린 비행기가 금세 안정을 찾았다.

“대표님, 저는요. 저 때문에 혹시라도 대표님이 힘들어지면 그때는 정말….”

“서해 씨.”

“이러다 대표님까지 다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저 때문에 그렇게 되면, 그런 건 정말… 상상하기도 싫어서.”

“나 그렇게 형편없지 않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서해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해는 권 상무가 처벌받게 될 순간을 상상하며 피어난 기쁜 마음 너머로 잠자고 있는 불안을 엿보았다. 행복한 지금의 순간이 깨어지는 것을 그려본 것만으로도 그 무게에 짓눌려야 했다.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 참, 무슨 걱정 하고 있는 겁니까.”

“과거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건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까…. 이번 일로 권 상무님이 처벌을 받게 되면 전 이제 더 이상 권 상무님도, 나이브레티도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대표님도 이제 더 이상 이런 위험한 일에 휩쓸리지 마세요. 그게 저 때문이라면 더욱요.”

“서해 씨 걱정 범위에는 벌어지지 않을 미래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어머니 아버지도 다 크고 나서는 이렇게 걱정해 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약속해 주세요. 다시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

“대표님이 전에 그러셨죠. 제가 권 상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난다고. 저도 대표님이 권 상무님 떠올리면서 나쁜 생각하는 거 싫어요.”

“알겠습니다. 앞으로 권율기의 처벌 과정에서는 내가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됐습니까.”

“그렇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대표님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 너무 안 좋게 듣지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할 말은 다 하고 나서 이제 와서 눈치 보는 건 뭡니까.”

“눈치 본 적 없어요.”

서해는 화내지 말라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죄송하다는 얘기를 하지 않기로 했으니 화내지 말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눈가와 귓가를 덮는 커다란 손이 몇 차례 피부를 쓰다듬고 떨어졌다.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 손을 풀고 싶지 않았지만, 한태경은 짧은 비행 시간에도 마음대로 쉴 수 없는 한 기업의 대표였다.

“이제 마음 쓰지 말고 좀 쉬어요. 벌써 이륙한 지 세 시간 지났습니다. 서울이면 곧 해 뜰 시간이네.”

“휴가 가서는 쉴 수 있는 거죠, 대표님?”

“아마 그렇지 않을까. 난 휴가 가서까지 일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걱정 말고 눈 감아요. 잠들 때까지 기다려줄 테니까.”

한태경은 서해의 손을 잡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서해는 잠드는 순간에도 곁을 지켜주는 그에게 점점 익숙해져 갔다. 깊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잠에 빠진 서해의 손가락이 한 차례 꿈틀거리고 몸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 * *

먼저 호텔에 도착한 한태경과 서해는 캐리어를 풀어뒀다. 창문 밖으로 라스베이거스를 대표하는 분수가 보였지만 피로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나란히 놓인 퀸사이즈 침대 두 개 중 하나에 자리한 한태경은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쳐서 서해를 불러들였다. 집에서 사용하던 침대보다 좁았지만 항상 붙어서 자던 둘에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침내 편하게 잠에 빠져드는 순간이 달고 아늑했다.

서해는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처음 눈을 떴을 때는 한태경이 옆에서 자고 있었고, 두 번째 눈을 떴을 때는 멀리 테이블에 앉아 자료를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열두 시간이 지난 다음 UT 1팀의 단톡방이 핑핑 울리는 소리에 서해가 눈을 떴다. 시차가 생겨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한태경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마주 보고 앉았다.

[윤선우 팀장: 우리 공항 도착했어요. 08:30am]

[고재욱 책임: 아… 비행기 진짜 너무 힘들어서 죽을 뻔했습니다. 무릎 부서질 것 같아요. 08:31am]

“대표님, 윤 팀장님 오셨대요. 고 책임님이 비행이 너무 힘들었다는데… 이상하네요. 전혀 안 불편했는데.”

“UT 셀 티켓은 회사 측에서 부담한 거고, 서해 씨랑 내 항공권은 사비로 지출한 거라 좌석이 다릅니다.”

“아… 실수할 뻔했어요.”

“도착하면 같이 식사하게 씻고 와요. 오늘 지나면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을 겁니다.”

“네, 금방 다녀올게요. 잠시만 계세요.”

서해는 테이블 위에 휴대 전화를 두고 샤워하러 들어갔다. 단톡방으로 몇 개의 메시지가 더 오갔다. 괜히 소리가 울리자 메시지 내용에 신경 쓰이기 시작한 한태경의 시선이 휴대전화로 향했다. 그는 단톡방에 남겨진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김이곤: 선임님! 호텔이세요? 금방 갈게요. :-) 08:31am]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추스르던 한태경은 노트북을 테이블 저편으로 밀어냈다. 그의 손에는 서해의 휴대 전화가 들려있었다.

대화 리스트 가장 위에는 UT 1팀의 읽지 않은 메시지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호텔로 금방 간다는 김이곤의 마지막 메시지가 그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바로 아래 라스베이거스로 출발하기 전날 오후에 김이곤과 주고받은 1:1 메시지가 보였다. 숨을 짧게 뱉어낸 한태경은 홀리듯 목록을 누르고 대화를 거슬러 올라갔다.

[김이곤: 선임님, 잘 쉬고 계세요? 저 이곤인데요. 17:34pm]

[서해: 아, 이곤 씨. 안녕하세요. 짐 다 쌌어요? 17:34pm]

[김이곤: 네, 대충요. 이제 출발할 시간만 기다리고 있어요, 진짜 너무 떨려서 어제 잠도 잘 못 잤어요. 17:34pm]

[서해: 저도 그래요 :-) 17:35pm]

[김이곤: 그런데 선임님, 비행기 혼자 타고 가세요? UT 셀에서 그 시간에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요. 17:35pm]

[서해: 아, 저 대표님이랑 같이 가게 됐어요. 17:35pm]

[김이곤: 헐, 두 분이서 같이 가시는 거예요? 17:35pm]

[서해: 티케팅이 그렇게 됐나 봐요. 17:36pm]

[김이곤: 선임님 힘드시겠다 :-( 그럼 잠이라도 편하게 자게 더욱 룸을 사수해야겠네요:-p 선임님은 대표님 피하고, 저는 팀장님이랑 책임님 피하고 :-) 17:37pm]

[서해: 아, 저는 괜찮은데…. 17:37pm]

[김이곤: 선임님 먼저 도착해서 체크인하면 룸 넘버 알려주세요. 윤 팀장님이랑 고 책임님보다 먼저 올라갈게요!! 그리고 밤새 맥주 마셔요!!! 요기 근처에 분위기 좋은 펍도 엄청 많은 것 같아요. 제가 몇 군데 알아 놨거든요. 17:38pm]

한태경의 앞에는 아직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자료가 남아 있었지만, 서해의 휴대 전화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두었다. 멀리 떨어진 샤워실에서는 쏟아지는 물소리, 서해가 작게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는 걸어가면서 입고 있던 옷을 신경질적으로 벗어 침대에 내던졌다. 샤워실 문을 열어젖히는 어깨 근육이 잠시 꿈틀거렸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샤워 부스 문이 열리자 머리를 감고 있던 서해가 벽으로 바짝 붙어 섰다.

“앗, 깜짝…. 대표님, 저 덜 씻었어요. 금방 나갈 테니까 편하게, 악!”

“시끄럽습니다.”

“대표님, 갑자기 왜. 잠시만요, 팀원들 곧 온다고… 했는데에….”

“가만있어요. 진짜 끝까지 해버리기 전에.”

“윽, 목에…. 안 돼요, 밴드 안 가져… 아, 하윽.”

한태경은 벽을 타고 미끄러져 바닥으로 주저앉는 서해를 몇 번이나 추켜세웠다. 따뜻한 물을 맞아 부드러워진 서해의 등과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약한 피부에는 입술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붉은 자국이 새겨졌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귀 아래쪽의 옷 바깥으로 드러나는 부분까지 바짝 물어뜯은 자국을 화려하게 새겨놓고 나서야 떨어졌다.

서해는 샤워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을 맞아 달아오른 몸과 열 오른 얼굴을 진정시키느라 한참을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머리가 핑핑 돌아 어지러웠다.

한태경의 손에 잡힌 서해의 휴대 전화가 허공에서 짧게 흔들거렸다.

“앞으로 김이곤 이랑 메시지 주고받을 때는 내 옆에서 하세요.”

“아까 도착한 메시지는 팀방이고, 이곤 씨는….”

“이렇게 시그널이 오면 그 이전에는 몇 번이나 사인이 있었단 얘긴데, 우리 둔해 빠진 서해 선임이 못 느낀 거겠지.”

“그럴 리가 없는데요.”

“내 앞에서 다른 사람 편들어요?”

“회사 출장 관련된 이야기 짧게 했고, 그럼 회사 일은 어떻게 해요. 이곤 씨랑 같은 팀인데.”

“그건 다녀와서 꼬박꼬박 보고해요. 하나도 빠짐없이.”

침대에 누워 축 처진 눈으로 겨우 한태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치 없는 메신저가 다시 핑핑 울었다.

[윤선우 팀장: 서해 선임, 우리 1층 레스토랑 도착했는데 왜 안 와요. 같이 먹어야 맛있게 먹지. 태경이 데리고 빨리 내려와요.]

“누구야.”

“…윤 팀장님요.”

“윤선우가 서해 씨에게 왜 연락하는데요.”

“UT 1팀 전부 로비에 있는 레스토랑에 도착했대요….”

서해는 38층에서 있었던 평화로운 시간이 간절하게 그리워졌다.

* * *

두 사람이 레스토랑으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모두가 한창 식사하고 있을 때였다. 건너 테이블에는 UT 2팀과 3팀이 식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직원들은 대표 옆에 따라온 서해를 굉장히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테이블로 걸어오는 서해는 잔뜩 물어뜯긴 목을 손수건으로 감고 있었다. 삼각형 모양으로 접힌 손수건은 귀 아래까지 덮여 있었으나 움직일 때마다 벗겨질까 봐 신경 쓰여 자리의 가장 끄트머리에 앉았다. 손으로 몇 차례나 손수건이 잘 덮여 있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테이블에 앉아있던 UT 1팀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서해와 마주 보고 앉아있던 이곤이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 서해는 짧게 눈인사를 보낸 뒤 서둘러 메뉴판에 얼굴을 묻었다. 손수건을 보고 감기라도 걸린 것인지 안부 인사를 하려던 이곤이 머쓱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다들 긴 시간 넘어오느라 고생했습니다. 내일 오전부터 약속된 일정만 소화해 주면 되니까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보내도 좋습니다. 다들 어른이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넵, 대표님. 감사합니다.”

아침을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던 서해와 한태경은 간단한 음료와 브런치 메뉴를 주문했다.

높게 세워진 격자무늬 창문 밖으로 커다란 분수 물줄기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마치 파도를 타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음악 소리에 맞춰 모양이 바뀌는 물줄기를 구경하기 위해 그 주위는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대표가 UT 셀에 합석하면서 불편할 뻔했던 분위기는 윤선우 덕분에 부드러워졌다. 마주 보고 앉은 한태경과 윤선우는 본사의 이슈를 공유하거나 연구소의 미래 계획을 논의했다.

둘의 대화가 깊어지기 시작하자 고 책임과 이곤이 서해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니, 서해 선임. 어떻게 된 거예요. 대표님이랑 같이 온 거예요?”

“네, 그렇게 됐어요.”

“그 새벽에 만나서? 00시 50분인가, 이륙 시간이 그렇지 않았어요?”

“네, 하하. 공항에서 만나고 보니 새벽이더라고요.”

서해는 입에서 술술 나오는 거짓말에 깜짝 놀랐다. 테이블 아래로 맞잡은 손이 손톱을 꾹꾹 눌렀다. 그러자 옆에서 윤선우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을 것 같았던 한태경이 손을 꽉 잡았다가 떨어졌다.

“…무슨 고생이야, 이게. 그럼 이때까지 대표님 룸에서 쉬다가 온 거예요?”

“네, 입국하고 호텔에 도착해서 한숨 자다가 나왔어요. 시차 때문에 조금 힘들더라고요.”

“그렇죠. 시차가 정말 힘들어요. 나이 들어갈수록 더해.”

식사를 이어가던 이곤이 서해에게 물었다.

“…선임님, 대표님이랑 같은 룸에 있어요?”

“비…행기를 같이 타고 와서 내렸는데, 이게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아니, 잘했어요. 대표님 혼자 두는 것보단 옆에서 같이 있어주는 게 더 좋긴 한데, 서해 선임 힘들겠네요.”

고 책임이 포크로 고기를 집어 올리며 서해를 칭찬했다. 그는 서해에게 의외의 모습도 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짐은 올려 두셨어요?”

“우린 일단 한방에 몰아두고 왔어요. 배고픈 게 급해서.”

“저, 고 책임님…. 그럼, 룸은 어떻게 할까요.”

“서해 선임이 대표님이랑 짐 풀었는데 다시 챙겨서 나오는 것도 웃기고. 윤 팀장님이 방 혼자 쓰고 나랑 이곤 씨랑 같이 쓰고 그러지 않을까요?”

고 책임의 말을 들은 이곤의 인상이 살짝 굳어졌다가 펴지는 것이 서해의 눈에 보였다. 서해는 한태경과 한방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쏟아놓고 나자 끙끙대던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졌지만, 이곤이 5일 동안 고 책임과 한방을 사용하게 된 것에는 미안해졌다.

때맞춰 나온 브런치 메뉴에는 팬케이크와 베리 콤포트가 올려져 있었다.

“…이곤 씨, 이거 좀 먹어볼래요. 책임님도 드셔보세요.”

“네, 선임님. 저 팬케이크 좋아하는데. 잘 먹을게요.”

서해는 이곤에게 팬케이크를 권하며 사과를 대신했다. 그러자 금세 웃으며 팬케이크 끄트머리를 콕 집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서해는 둘과 앞으로 있을 CES Summer Show 주제에 대해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를 마치고 한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셀원들은 다음 날 키노트 스피치를 기다리겠다는 인사를 건넸다.

본격적으로 서해와 라스베이거스 명소를 둘러보려던 이곤이 상체를 바짝 앞으로 끌어당기고 대화를 시도했다.

“선임님, 여기 앞에 분수대 쇼가 있는데요. 저녁에 한다고 들었거든요. 이따 같이 보실래요?”

“서해 선임, 뭐 해요.”

머리 위로 들리는 목소리에 서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곤 씨, 저 내일 개막식에 있을 키노트 관련해서 대표님 도와드릴 게 남았거든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해서 어쩌지.”

“아… 일정 있으시구나. 괜찮아요. 어서 가보세요.”

이곤의 눈썹이 아래로 쭉 내려가는 것을 보던 윤선우의 입가에 웃음이 터졌다. 서해가 한태경에게 어깨를 잡히다시피 해 레스토랑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던 이곤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가 사라졌다.

“이곤 씨.”

“네, 팀장님.”

“잠깐 나갑시다. 여기 핫도그 맛집이 있어요.”

“…예?”

“아침 식사가 입에 안 맞네요. 따라와요.”

이곤은 서해가 밥만 먹고 사라진 아쉬움도 잊고, 윤 팀장의 식성이 엄청나게 까다로운 것 같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5성급 호텔의 로비 식당에서 제공하는 식사가 입에 맞지 않는다면 앞으로 회사에서 점심시간 메뉴는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아찔했다.

* * *

개막식 키노트 스피치가 열리는 홀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올해의 최신 트렌드를 담아가려는 취재진만 몇백 명이 몰려있었다. 카메라를 테스트하는 기자들의 손놀림에 따라 무대 위에 플래시가 터졌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서해는 UT 1팀과 함께 오른쪽 구역 가운데쯤 자리하고 앉았다. 홀에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서로를 소개하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마치 아는 사람들인가 했는데, UT 1팀에게도 몇 장의 명함이 날아왔다. 교류가 자연스러운 컨퍼런스였다.

무대에는 마지막 준비가 한창이었다. CES Summer Show의 기조연설이 가지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몇 년 만에 바뀐 판도의 한 가운데에는 새로운 인물이 서있었다.

키노트 스피치를 위해 준비된 TF가 무대를 세팅하고 내려가고, 무대 한쪽에서 캐주얼 정장 차림의 한태경이 올라왔다.

홀을 가득 메운 참석자들은 큰 박수 소리로 그를 맞이했다. 반짝이는 구두, 그레이 슬랙스, 블랙 셔츠. 그리고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와 높은 콧대는 조명을 받아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조그마한 블루투스 헤드셋이 한태경의 한쪽 귀에 걸리고 무대를 세팅하던 인원들이 모두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무대에 서있는 것은 한태경인데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는 것은 서해였다. 그는 마치 원래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서해의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윤선우가 서해에게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키노트 스피치를 들으려는 사람의 눈빛이 아닌데.”

“…티, 팀장님.”

“태경이가 사람 휘어잡는 매력이 있죠. 어느 무대나 상관없이 자기 스타일로 소화하고. 이전에 저런 자리에 서는 거 본 적 있어요?”

“오리엔테이션 때 빼고는 처음요.”

“그럼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요. 어어 하다 보면 끝나있을지도 모르니까.”

무대 뒤편의 스크린에 Artificial Intelligence 단어 하나만이 떴을 뿐인데 청중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키워드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홀 안에 한태경의 목소리가 울렸다. 인공 지능과 스마트 디바이스의 연결성에 관한 연구가 소개되고, 시장에 대한 비전 등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한태경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글로벌유니티가 연구해 왔던 인공 지능 기반 가전 서비스를 소개했다.

서해는 윤선우가 말했던 게 어떤 의미인지 키노트 스피치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잠시 주위를 돌아본 서해는 좌중이 오직 그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신기해 그가 했던 이야기도 잊고 주위를 살폈다.

이렇게나 반짝거리는 사람인 것도 모르고 집과 사무실만 오갔던 지난 몇 개월이 신기할 정도였다. 한태경이 소개하는 내용은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건조한 사람들에게는 색깔을 입히는 것 같았고, 이제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꿈을 심어주는 것 같기도 했다.

40분 정도의 키노트가 끝난 다음은 단상 앞에 있는 취재진과의 Q&A로 인산인해였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 정도는 하려 했던 서해는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뒤로 물러섰다.

단상 옆에 작게 나있는 공간에 올라선 서해는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카메라 앱을 열고 줌을 당기니 화면에 허리 아랫부분까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활짝 웃고 있는 한태경의 모습을 몇 장 몰래 촬영한 뒤 도망치듯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서해는 UT 1팀과 홀을 빠져나와 Tech East의 세션장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시간이 꽤 길었다. 중얼거리듯 뱉어낸 이곤의 말에 윤선우가 미소 지었다.

“…대표님 너무 멋있긴 하네요.”

“이곤 씨, 대표님한테 반했나.”

“원래부터 롤 모델이셨으니까요.”

“롤 모델 따라잡으려면 분발해야겠네요.”

이곤은 손에 들고 있던 노트북을 허리에 끼우고 눈을 깜박였다. 고 책임이 휴대 전화 화면을 쓱쓱 넘기며 말했다.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대표 보면 포스가 남다르다는 말 정말 실감하고 갑니다. 벌써 기사 뜨고 난리 났어요.”

“링크 보내주세요. 저도 궁금하네요.”

“저도요, 책임님.”

“UT 1팀 단톡방에 공유할게요. 이렇게 보니까 또 새롭네요.”

국내 포털에서는 CES Summer Show 기조연설을 한 최연소 기업인으로 연달아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해는 포털 메인에 걸려있는 사진 중 잘 나온 사진 하나를 몰래 저장했다.

언론의 긍정적인 반응에 상기된 UT 1팀은 세션장으로 이동하면서 포스터들을 훑어보고 지나갔다. IT 트렌드가 한곳에 모여있는 박람회 장소는 그야말로 활기가 넘치는 사람들만 가득한 것 같았다.

Tach East에는 세계 곳곳의 기업들의 부스가 가득했다. 그 자리에는 신기술을 소개하고 살펴보는 관계자들로 붐볐다. 비즈니스 자리가 즉석에서 만들어지기도 하고, 명함을 나누며 사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하자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였다.

학교와 달리 에너지가 가득한 모습에 서해는 깜짝 놀랐고, 이제 회사에서 막 일을 배워가기 시작한 이곤도 눈이 커다래졌다.

“제 세션장은 이쪽이라서 가볼게요. 다들 저녁에 봐요.”

윤선우가 한쪽으로 사라진 다음 고 책임도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덩그러니 카펫 위에 서있던 서해와 이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와, 진짜 규모가 엄청나요. 새삼 제가 이런 일을 하고 있었나 싶고요.”

“보도 자료로 보이는 것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것 같아요. 이래서 다 못 보고 간다고들 하는 거구나. 관심 있는 것 정도는 보고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5일밖에 안 된다는 게 아쉽네요.”

“선임님은 어느 쪽으로 가세요?”

“저는 East홀 끝에 있는 세션장이라서 더 가야 할 것 같아요. 이곤 씨는요?”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저녁때 봬요, 선임님.”

“네, 이따 봐요.”

이곤과 헤어지고도 5분 가까이 더 걸어서야 겨우 세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션장에는 감성 지능의 알고리즘 테마를 듣기 위한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었다.

빈 곳으로 찾아가 노트북을 열고 대화로 이루어지는 세션 내용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오랜만에 관심 분야의 컨퍼런스를 듣자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기분 좋게 올라왔다. 시간이 흘러가고 세션이 종료되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인터미션 동안 머리를 식히던 서해는 한태경을 몰래 촬영한 사진을 열어보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사진 속의 그는 시원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평소에 잘 볼 수 없는 모습이 사진에 담긴 것에 만족스러워진 서해는 누가 볼까 봐 서둘러 앱을 닫고 다시 시작되려는 세션에 집중했다.

세션이 종료되고 오후 시간이 되자 Tech East 내부도 조금씩 한산해졌다. 서해는 벽면에 부착된 포스터나 크고 작은 부스를 살펴봤다. 조금만 다른 시각을 보태면 괜찮은 논문이 나올 것 같은 연구도 있었고, 정말 재미를 위한 엉뚱한 연구도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연구자들은 서해가 관심을 보일 때마다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주고는 했다. 영미권이 아닌 사람들끼리 부딪히는 단어가 아주 가끔 나오기는 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은 아니었다.

노트북을 끌어안고 천천히 홀 가운데로 걸어 나올 때였다. 입구에서 취재진과 관계자에 둘러싸여 인사를 나누고 있는 한태경이 보였다. 그 옆으로 비서실장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홀 가운데 물끄러미 멈춰 섰다.

서해가 홀에 있다는 것을 먼저 눈치챈 것은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한태경에게 다가가 짧게 귓속말하고 떨어졌다. 몇 미터 떨어져 있던 서해와 한태경의 눈이 마주쳤다.

다시 비서실장에게 무언가 요청한 그는 취재 인파를 헤치고 한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서해를 향해 살짝 고갯짓했다. 따라오라는 그의 제스처에 걸어가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몇 개의 모퉁이를 지나 마지막 코너를 돌아섰다.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뒷문이 보였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뒷길이었고 머리까지 키가 높이 자란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했다.

조그맣게 나있는 돌멩이를 딛고 들어서자 손이 쑥 들어와 서해의 팔을 끌어당겼다. 머리 위로 키가 높은 식물들이 가득 덮였다. 고개를 들어 한태경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손을 뻗어 가득 끌어안았다.

“그렇게 눈을 반짝거리면서 쳐다보면 어떻게 합니까. 당장 내려갈 수도 없는데.”

“저 보셨어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무대 위에서 아래가 잘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반대입니다. 조명이 밝은 곳에서는 오히려 사람들 얼굴이 더 잘 보입니다. 그리고 요런 얼굴이면 한눈에 보이고.”

뺨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주위를 둘러싼 이삭이 부딪히는 소리,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끝을 들어 올린 서해가 한태경의 어깨 위로 턱을 올려두었다. 손 닿을 수 없던 곳에 있던 그가 이끌어 멈춰 선 자리와 지금 이 순간.

서해는 등을 꽉 끌어안는 손길에 눈을 감고 내리쬐는 햇살만큼이나 달콤한 순간을 만끽했다.

* * *

라스베이거스에서 5일간의 일정이 끝나고 호텔 회의실에서 UT 셀 모두가 모였다. 체크아웃을 앞두고 각자의 캐리어와 노트북 가방을 소지한 상태였다.

UT 셀이 팀마다 같이 움직인 것과 달리 따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서해가 캐리어를 끌고 마지막으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누가 봐도 첫날보다 뺨이 핼쑥해 보이는 모습에 UT 셀의 선임급 직원들이 짧게 말을 나누었다.

“…서해 선임 결국 대표님이랑 5일 같이 있었대?”

“어제 펍에도 못 나왔잖아. 두 분이 마지막으로 정리할 거 있다고.”

“극한 직업이다, 미니미. 저 정도면 연구소 소속이랑 비서실 소속이랑 겸직 아니냐. 월급 두 배로 줘야 해.”

“난 못 해. 즉시 퇴사 각이야.”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있던 이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UT 1팀이 모여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서해가 보였다.

윤선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UT 셀 다 모인 것 같네요. 준비됐으면 간단히 최종 리뷰 하겠습니다.”

이곤이 서해를 주시하는데 첫날처럼 여전히 목에 둘린 손수건이 보였다. 매듭이 지어진 반대쪽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얇게 뜨며 자세히 보려 움직였다.

“이곤 씨, 빔프로젝터 세팅 좀 봐줄 수 있어요?”

“네, 팀장님.”

“CES Summer Show 해단식 시작하겠습니다. 5일 동안 열일곱 명의 인원이 총 108개의 세션에 참석했습니다.”

이곤은 꼼짝없이 그를 보조했다. 어두워진 회의실 한쪽에 앉은 서해의 눈은 잠이 가득해 보였다. 윤선우가 정리 멘트를 읊어댔지만 이곤은 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각 팀장은 팀원들이 흩어져 작성한 컨퍼런스 세션 요약본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가상 드라이버에 모든 자료가 잘 올라갔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UT 셀은 공식적으로 모두가 만나게 되는 일주일 뒤부터 자료를 정리하기로 했다.

짧은 해단식을 마친 UT 셀은 로비로 향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캐리어를 끌고 카우치에 모였다. CES Summer Show 공식 일정을 종료하고 선택 여하에 따라 개인 휴가에 들어가게 된 팀원들은 서로의 일정을 공유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UT 1팀은 카우치 한쪽을 차지하고 앉았다. 이곤과 서해가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는 윤선우와 고 책임이 앉았다. 고 책임은 집에 전화하느라 바빴고, 서해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더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곤은 윤선우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팀장님, 이런 데 또 올 수 있을까요? 트렌드도 한눈에 볼 수 있고, 세션도 다 너무 알차서 정말 좋았거든요. 덕분에 제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도 확실하게 알게 됐고요.”

“자주는 어렵겠지만, 기회 만들 수 있게 대표님에게 건의드릴게요.”

“앗, 아닙니다, 팀장님. 그냥 하는 말이에요.”

“이곤 씨 연차에 경험하고 나면 식견이 확실히 넓어지게 되긴 하니까요. 대표님도 알고 있으니까 기회는 또 생길 거예요. 그나저나 한국 바로 돌아가요?”

“네, 저는 부모님이랑 같이 휴가 보내기로 했어요. 팀장님은요?”

“저도 집에 갑니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쉴 거예요. 영화도 보고 책도 보고, 취미 생활하면서요.”

“그럼 팀장님도 두 시 비행기 타세요?”

“네, 이따 공항 갈 때 같이 가요.”

로비의 카우치에 흩어져 가벼운 수다를 떨던 사람들의 시선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한태경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곤은 그가 끌고 오고 있는 캐리어가 어쩐지 익숙한 모양이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잡지에서 자주 보던 디자인이긴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고개를 돌리자 옆쪽에 앉아있던 서해의 캐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둘의 캐리어는 동일한 디자인에 사이즈만 달랐다. 훨씬 큰 가방을 끌고 오는 한태경과 그보다 약간 작은 사이즈의 캐리어를 앞에 두고 카우치에 앉아있는 서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곤은 순간 짧게 숨을 들이켰다. 38층에서 일하다가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최신형 기능이 탑재된 최고급 자동차 키가 한 사무실에서 발견될 가능성과 더불어 같은 캐리어를 쓰는 직장 상사와 직원.

고개를 돌려 서해를 주시했다. 여전히 목에 둘린 손수건이 보였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기 전 회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서해는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매듭이 지어진 반대쪽으로 고개를 쭉 빼고 있을 때 앞에서 윤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곤 씨.”

“아, 네. 팀장님.”

“공항 가기 전에 솜사탕이나 먹고 갑시다.”

“…예?”

“애들 울기 전에 단 거 먹이면 좀 낫더라고. 체크아웃 끝났으니까 우리 먼저 갑시다. 가요, 고 책임님.”

옆에 앉아 와이프와 통화하던 고 책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주한 움직임에 잠에서 깨어난 서해가 반쯤 감은 눈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윤선우는 서해를 바라보고 웃었다.

“서해 선임, 여기서 휴가 보낸다면서요. 우리 먼저 가요.”

“아, 죄송해요. 시차 때문에 졸려서.”

“선임님, 라스베이거스에서 휴가 보내세요?”

“갑시다, 이곤 씨. 빨리 따라와.”

깜짝 놀란 이곤이 서해에게 되물었지만, 윤선우는 이곤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밖으로 내몰았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귀국하고 정확히 3일 뒤였다. 이곤은 그랜드캐니언을 찍은 사진이 서해와 대표의 메신저 프로필로 나란히 설정된 것을 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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