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반격
집으로 돌아온 서해는 씻고 나오자마자 강제로 침대에 눕혀졌다. 괜찮다는 서해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은 한태경은 서해의 옆에 기대앉아 태블릿으로 업무를 봤다. 가만히 누워있자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손도 잡고 싶고 같이 붙어있고 싶은데 바빠 보이는 모습에 가만히 자리에 누웠다. 괜히 귀찮게 했다가 밖으로 나가 버려 얼굴도 보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되는 마음이 컸다.
한태경의 허리쯤에 얼굴을 묻은 서해는 눈을 감았다. 졸리지 않는다는 말이 무색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선잠에 빠져들 때쯤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이 좋아 눈을 떠보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서해가 잠든 것을 확인한 한태경이 방 바깥으로 나가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표정 없이 전화를 종료하고 메시지를 남겼다.
황당하게도 서해가 눈을 뜬 것은 다음 날 오후 시간이었다. 테이블 위의 시계로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 눈이 크게 뜨였다. 크게 피곤한 것은 아니었는데 정말 기절하듯 잠을 잔 것 같아 신기할 정도였다.
살면서 이렇게 길게 잠을 잤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를 더듬어 보다가 포기했다. 잠을 못 잔 적은 많았어도, 이렇게 길게 단잠을 잔 적은 없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손발엔 힘이 없고 등허리가 아픈 것 같았지만 머리는 제법 개운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약 봉투를 집어 들었다. 다행히 오늘부터 시작되는 복약 시간은 저녁 식사 후로 적혀있었다.
서해는 비어있는 옆자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드 벤치에 곱게 접혀있던 티셔츠를 손에 쥐고 화장실로 향했다.
“…하아.”
왼쪽 광대와 쇄골 아래에는 푸른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입술 가장자리에는 하얀 연고가 굳어있었다. 서해는 손을 뻗어 얼굴을 만져보았다. 삼거리의 낡은 집에서는 익숙했던 상처 자국인데 지금은 너무나 어색했다.
여기저기 묻은 하얀색 연고 자국이 보기 싫어 샤워를 마쳤다. 거울을 보며 얼굴 여기저기를 살핀 서해는 티셔츠와 드로어즈를 껴입고 1층으로 내려왔다. 한태경이 카우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잘 잤습니까.”
“네. 잠은 잘 잤는데, 너무 많이 자서 허리 아파요.”
“바지 입고 내려와요. 아플 때는 룰 지키지 않아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아프다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다시 올라가서 바지를 입고 내려와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서해는 그대로 계단을 내려와 카우치에 앉았다. 1층에는 원두 향기가 가득했다.
눈을 뜨자마자 한 잔씩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생각이 났다. 유리컵 안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컵 바깥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보였다.
유리컵을 코스터 위에 올려놓은 한태경이 서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머리는 왜 덜 말리고 내려와서는. 이리 내려와요.”
서해는 엉덩이를 미끄러뜨리고 카우치 아래 러그 위에 쪼그려 앉았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한태경이 수건을 가지고 등 뒤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 위를 기분 좋게 덮는 수건과 커다란 손의 느낌에 서해는 눈을 감고 어깨를 웅크렸다. 머리와 목덜미 전체가 간지러웠다.
“커피 종류는 이제 안 됩니다. 집에 카페인 들어간 티 종류도 다 버릴 거예요. 디카페인 티 주문해 뒀으니까 며칠만 기다려요.”
“네….”
대답은 했지만 아쉬운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한태경이 머리를 닦아주는 동안 손가락을 뻗어 유리컵에 맺힌 물방울을 콕콕 찔렀다. 코스터 위에 흘러내린 물기가 동그랗게 모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한태경은 반 이상 남아있던 얼음 잔과 서해의 손목을 양손에 잡고 아일랜드 식탁 앞으로 이동했다. 조그만 싱크대 속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앉아요. 벌써 몇 끼는 건너뛰었습니다.”
서해가 스툴 위에 앉자 자리 앞으로 전복죽이 내밀어졌다. 고소한 냄새를 맡자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한태경은 한 그릇을 다 먹고 자리에서 발을 굴리는 서해를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카우치에 앉아있는데 한태경과 손끝이 닿은 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 깍지를 끼우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떨어진 손끝에 서운할 틈도 없이 벌떡 일어서는 한태경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서해의 손목을 잡아당겨 세웠다.
어쩐지 가만히 앉아있을 틈을 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서해의 눈가가 축 처졌다. 손목이 잡힌 채로 2층으로 올라가던 서해는 차라리 1층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대표님, 저 안 졸려요.”
“이 닦으러 가는 거예요.”
둘은 2층으로 올라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홀더에 나란히 꽂혀있는 칫솔을 뽑아 들고 이를 닦던 서해가 한태경의 등 뒤에서 허리를 껴안았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이를 닦다가 멈추어 서는 게 보였다. 서해는 쭈뼛거리며 옆으로 떨어졌다.
밖으로 나온 한태경은 절취선을 따라 하루 치 약을 분리해 내고 서해에게 건넸다. 냉큼 약을 받아먹고 기다리자 뒷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마주 보고 선 상태에서 손을 뻗어 안으려는데 그가 다시 손목을 잡아당겼다.
서해는 2층 한쪽 방에 마련된 곳으로 끌려 들어갔다. 방 한쪽 벽면에 홈시어터가 마련되어 있었고, 반대편에는 누워서 뒹굴어도 될 것 같은 넓은 침대형 카우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TV에 연결되어 있던 홈시어터를 켠 한태경은 카우치 위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서해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떠올랐다. 서둘러 품으로 뛰어들었다.
“영화 보려고요?”
“나가서 볼까도 생각했는데, 이번 주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보고 싶은 영화 있습니까.”
“있어요. 제가 골라도 돼요?”
서해는 업무가 휘몰아치느라 보지 못하고 놓쳤던 최신 영화를 눌렀다. 히어로가 잔뜩 나오는 액션 영화였다. 영화 소개 페이지를 보던 한태경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애도 아니고.”
“이거 엄청 재미있어요, 대표님.”
“내 취향은 아닌데, 한번 시도는 해봅시다.”
“천만 넘은 영화는 취향이 아니더라도 봐줘야 한다고요.”
서해는 카우치 위에 발을 올리고 무릎을 세워 앉았다. 한태경의 팔이 서해의 어깨 위로 둘림과 동시에 영화가 시작했다. 몸이 기우뚱하더니 뒤로 넘어갔다.
“…시작이 특이하네.”
“연작이라서요. 혹시 대표님, 앞의 시리즈 전혀 안 보셨어요?”
“안 봤습니다.”
“아, 그럼 다른 거 볼래요.”
“상관없습니다. 그냥 봐요.”
상관없다는 것은 서해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붙어있는 것이 더 좋았던 서해는 눈치를 보며 한태경의 허리 위로 슬쩍 팔을 둘렀다. 전과 다르게 밀어내는 손길은 없었다. 다시 찾은 평화로운 시간 앞에서 서해는 하나쯤은 양보하기로 했다.
그리고 의사가 경고했던 것처럼, 거짓말처럼 쏟아지는 졸음 앞에 눈을 감고 말았다.
* * *
서울 근교에 있는, 외따로 떨어진 음식점이었다. 어두워진 길을 따라 한참 들어온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한정식집이 있었다. 예약제로 이루어지는 음식점 주차장에는 세단 두 대만이 주차되어 있었다.
전실 안의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있었다. 검은색 옻칠이 말끔한 테이블 위에는 수십 가지의 요리가 올라와 있었지만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마주 보고 앉은 둘은 그 흔한 인사조차 오가지 않았다.
“조직이라는 곳이 참 신기하죠, 상무님. 아주 사소한 일 하나로 결속력이 생기다가도, 또 사소한 이유 하나로 배타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게.”
“할 얘기만 해.”
“상무님께서 회사에서 하셨던 일에는 개인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회사를 이끄는 방법에는 수많은 전략이 있을 수 있죠. 상무님의 선택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을지는 몰라도, 설립 이래로 큰 역할을 해오신 부분까지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굉장히 상투적이네, 한 대표.”
“말씀드렸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무님께 감정이 없습니다.”
“나이브레티로 옮긴 것에 대해 질문하려는 것이면 딱히 할 말 없네.”
“도덕적 선택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습니다.”
한태경은 주전자를 들어 마주 앉은 조태용 상무의 잔을 채웠다. 조태용 상무는 술잔이 채워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한태경의 얼굴만을 주시했다.
“상무님이 나이브레티를 어떻게 하려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그쪽에서 어떤 제안을 했든 선택은 상무님의 몫이니까요.”
“대표 해임안으로 협상하러 온 거라면 늦었어. 주주 총회는 예정대로 요청하겠네. 내가 아니더라도 자네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자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으니까.”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안 될 것 없지.”
조태용 상무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잔을 들어 올리고 단번에 마셨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취임한 새파란 대표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엔 웃음이 가득했다.
“글로벌유니티에 연구소가 생기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저와 회장님이 오랜 시간 동안 계획해 온 사업의 일환입니다. 이곳이 앞으로 개발 검증의 핵심 코어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인공 지능 사업이 들어가 있습니다.”
연구소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자 조태용 상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술잔을 잡은 손끝이 초조한 듯 몇 차례 두드렸다가 사라졌다.
“38층에서 회사 연구 자료를 반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노년을 감옥에서 보내시게 될까 봐 걱정 중이었습니다.”
“나랑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상무님과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을 높이 사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미 증거는 충분히 확보했습니다. 글로벌유니티 본사에서 꾸려진 감사팀, 법무팀이 조사를 마친 상황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여전히 여유로운 한태경의 표정을 바라보는 조태용 상무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아드님과 조카분이 개발 파트에 계시던데, 내년이 과장 진급 심사에 들어가는 해더라고요.”
“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네.”
“글쎄요. 두 직원이 소속된 곳이 개발 파트인데, 엮으려고 들면 그러지 못할 법도 없지요. 고래 싸움에 피해 보지 않게 판을 짜려고 했으면 두 분은 미리 제외하셨어야죠.”
“애들 건드리지 마. 정식으로 채용 절차 밟아서 올라온 애들이야.”
“정식으로 채용 절차 밟아온 분은 조카분이지 않습니까. 아드님은 예정된 일자보다 졸업이 늦어진 것으로 나오던데요. 아드님의 앞날은…. 누구보다 라인을 중요하게 여기셨던 분이니, 굳이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알고 계시겠지요.”
다시 빈 잔을 움켜잡은 조태용 상무의 손이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상무님, 퇴직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퇴직이 정년퇴직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뭐, 요즘은 업종이 워낙 많아서 한 직업을 평생 가지는 사람이 없어지는 추세라고 떠들긴 하던데.”
“너!”
“주식 양도양수계약서 작성하시죠. 아드님과 상무님은 살려 드리겠습니다.”
“주주 총회에서 널 해임하면 안 될 것도 없지.”
“긴 싸움으로 가시겠다면 말릴 방법은 없습니다만, 아드님을 곱게 보내 드리겠다고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조태용 상무는 표정 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협박과 거래를 오가는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이득인지를 고민하던 조태용 상무는 아들의 명예와 자신의 도덕적 결함 사이를 저울질했다.
“평형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상무님께 마지막으로 드릴 제안이 있습니다. 차주에 검찰 측에서 권율기 상무에 대한 보강 수사 지휘가 내려올 겁니다.”
“뭐?”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게 둘 다 건드리지 마시고 하나를 확실하게 드시지요. 온전한 상태로 넘겨지지는 않을 겁니다. 회사를 수습하는 건 상무님 몫이 될 거고요.”
“…자네, 제정신인가?”
“제정신이면 이렇게는 못 하겠지요. 거래가 끝날 때까지 아드님은 이쪽 회사에 두는 것이 조건입니다. 고민하실 시간은 길게 못 드립니다. 식사 끝날 때까지 결정하시지요. 계속 이인자로 계실 것인지, 닭 머리라도 되어보실 것인지.”
한태경은 태연한 표정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마주 보고 앉은 조태용 상무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한태경이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젓가락을 내려놓고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 조태용 상무를 본 한태경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떨어지자마자 전화가 다시 끊어지고 문이 열렸다. 비서실 권 실장이 배석했다. 그의 한쪽 손에는 서류 가방이, 다른 한쪽 손에는 거래금이 들려있었다.
* * *
주말을 꼬박 갇혀 있다시피 한 다음의 월요일 출근은 답지 않게 개운했다. 서해는 앞 유리로 들어오는 아침햇살을 그대로 느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빛이 아른거렸다.
운전하던 한태경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루 더 쉬라니까 말은 참 안 듣습니다.”
“…말을 안 들은 게, 그러니까 그건 회사 일이니까.”
당황한 서해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커다란 손이 서해의 허벅지 위를 톡톡 두드리고 사라졌다.
“알고 있습니다. 혼내려고 하는 말도 아니고.”
“아픈 데도 없고, 집에서 혼자 할 일도 없어서요.”
“오늘은 출근해도 업무가 없을 텐데.”
“그럴 리가요. 지난주에 한 인터뷰 자료 정리만 해도 하루 이틀 분량인데요.”
“윤선우 팀장이 금요일에 출근했으니 대충 정리했을 겁니다.”
한태경의 말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흘려들었다. 실제로 38층에서 여유로웠던 적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미뤄둔 일을 어서 하고 싶기도 했고 처음으로 진행한 일의 결과물을 보고 싶기도 했다.
한태경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비서실로 사라졌다. 38층에는 고 책임이 먼저 출근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벌써 작업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고 책임님. 저 때문에 금요일에 바쁘셨죠.”
“서해 선임! 몸은 좀 괜찮아요? 아팠다면서. 얼굴이 반쪽이 됐네.”
“그래도 푹 쉬었더니 많이 좋아졌어요. 죄송해요.”
“아냐. 그래도 금요일에 팀장님 오셔서 업무 분담 후에 보고서 작성했어요.”
“저는 뭐 할까요?”
“하긴 뭘 해. 미안하지만 보고서는 다음 프로젝트에서 써 줘야겠어요. 윤 팀장님까지 붙어서 금, 토, 일 출근해서 끝내 버렸어요. 더 늦어지면 개발이 시간에 쫓겨서 아무것도 못 하게 될 것 같아서요.”
“네? 벌써요?”
“이곤 씨가 데이터 좀 만지던데. 윤 팀장님이랑 이곤 씨가 데이터 파트 진행하고, 민 책임이랑 나는 인사이트 정리하고 손발이 잘 맞더라고요. 어렵지 않게 끝났어요.”
“아….”
“일요일에 퇴근하면서 대표님 계정으로 공유해 드리고, 윤 팀장님이 개발 파트에 보고서 공유했어요.”
“죄송해서 어떡하죠. 제일 바쁠 때 빠져서….”
“괜찮아요. 대신, 우린 이번 주에 대체 휴가 내기로 했어요. 오늘까지는 혹시라도 빠진 부분 있는지 점검하기로 했으니까 모두 출근한 다음에 최종 미팅해요. 서해 선임이 알고리즘 쪽 보완해 줄 부분 있는지 봐주면 좋고.”
“아, 네. 그럴게요.”
“서해 선임, 오늘까지 쉬는 줄 알았는데.”
출근해서 자리로 다가오던 윤선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입가에 딱지가 앉아있었지만 크게 의식될 정도는 아니었다. 서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맙고 미안했다.
“무리하지 말아요. 아프면 바로 얘기하고요.”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8층이 북적였다. 팀원들은 모두 서해가 다시 출근한 것을 반가워하고 아팠던 것을 걱정했다. 서해는 누군가의 진심 어린 걱정을 받는 것이 어색했다. 따뜻해지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
서해와 이곤은 회의를 위한 자리를 세팅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자료들 사이로 빔프로젝터가 켜지고 최종 점검을 시작했다. 2주 가까이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서해는 윤선우가 최종 공유하는 내용을 귀담아들었다. 마지막 보고서 작업에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다음을 기대했다.
최종 리뷰와 CES Summer Show 일정을 점검하고 있을 때, 민 책임은 책상 밑으로 휴대 전화를 켰다. [.]으로 표시된 상대로부터 메신저가 도착해 있었다. 민 책임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지금 당장 자료 보내. 10:03am]
[업무 시간이에요. 오늘이면 나머지 모두 넘길 수 있으니까 저녁때 드리겠습니다. 10:04am]
[모두 줄 필요 없어. 그냥 보내. 10:04am]
[계약금 차액과 함께 맞교환하기로 했잖아요. 약속 지키세요. 10:05am]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던 상대로부터 집요한 메신저가 들어오자 민 책임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상대방은 답장이 없었다. 민 책임은 신경이 잔뜩 곤두선 얼굴로 휴대 전화를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띵-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UT 1팀의 고개가 일제히 옆으로 돌아갔다. 출입이 제한된 38층에 처음 보는 직원들이 박스를 들고 우르르 내리는 것이 보였다.
서해와 이곤의 눈이 동그래지고 박스와 직원을 번갈아 보기를 반복했고, 고 책임은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일어나 갑자기 들이닥친 직원들을 살폈다. 윤선우는 그리 놀라지 않은 듯 자리에 앉은 그대로였다.
의자에 기대앉아 내용을 최종 내용을 공유받고 있는 민 책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야, 어디 소속인데 여기 함부로 들어오십니까?”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UT 1팀 직원 중 하나가 나이브레티에 기술 유출을 하려고 한다는 제보가 있어서요. 모두 하던 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서 주세요.”
“누구 허락받고 들어오신 겁니까? 대표 관할의 직속 부서이고, 비밀리에 허락된 프로젝트입니다. UT 1팀을 뭐로 보고 이러시는 겁니까?”
“UT 1팀과 관련된 것이 확실한 제보입니다. 감사팀, 시작해 주세요.”
고 책임이 창가로 밀려났다. 책상 위에 있던 모든 컴퓨터와 자료는 감사팀 직원들의 박스 안으로 사라졌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 책임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초조한 시선으로 감사팀 직원들의 행동을 훑던 그는 자리에 놓여있던 노트북과 자료들이 박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흘끔거리며 살폈다.
감사팀 직원이 모든 자료를 쓸어 담고 한곳에 모였을 때였다. 감사팀의 남 팀장이 UT 1팀의 책상이 모여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그는 각자 자리의 의자와 책상 아래, 서랍 등을 다시 확인했다. 여기저기를 살피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민 책임의 이마에 식은땀이 고였다.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듯 보이던 감사팀 팀장이 서해의 의자를 끌어당겼다. 서해는 갑자기 닥친 상황을 살피기도 전에 영문 모를 감사팀 팀장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는 바닥 여기저기를 두드리다가 타일을 뜯어냈다.
민 책임은 황당할 정도로 빠르게 찾아내는 감사팀 팀장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어디에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정보가 새고 있었던 것을 너무 늦게 알아챘다. 계략을 꾸미려다가 반대로 걸려든 모양새였다. 민 책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닥 아래에서 나온 노트북 가방이 끌어 올려지자 38층에는 정적이 흘렀다. 민 책임은 무릎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동요했다. 서해는 자신의 자리 밑에서 나온 영문 모를 노트북 가방을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서해에게로 향했다.
“그… 그게 왜 거기서.”
“감사팀에서 UT 1팀 호출이 있을 겁니다. 발언권은 순차적으로 돌아올 거예요.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셔야 하기 때문에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감사팀 직원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을 겁니다. 윤선우 팀장님부터 따라오시죠.”
“그거….”
서해는 자신의 자리 밑에서 나온 가방에 대해 해명하려고 했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억울함을 호소하려는데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자 윤선우가 서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별일 없을 거예요.”
“저거 제 거 아니에요. 진짜예요, 팀장님.”
“알고 있어요. 태경이가 여기 CCTV 설치했거든. 나 먼저 다녀올 테니까 긴장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유달리 밝았다. 서해는 돌아가는 상황을 빨리 이해해 보려고 했다. 주위를 돌아보는 서해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결국 마케팅부에서 올라온 사람 중 한 명은 스파이라는 뜻이었다.
“기술지원팀에서 임시로 사용할 노트북이 지급될 겁니다. 서버 접근 권한은 모든 조사가 끝난 뒤에 허용될 예정이니, 업무 진행 시 참고해 주세요.”
감사팀이 휘몰아치고 나간 38층에 정적이 남았다. 입구에는 몇 명의 감사팀 인원이 남아 UT 1팀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소소한 이야기를 했을 셋 사이는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 고 책임은 서해를 흘끔거렸고 이곤은 둘 사이를 번갈아 살폈다. 서해의 자리 밑에서 나온 노트북이 의심의 방향을 서해로 향하게 했다.
민 책임은 어수선한 틈을 타 휴대 전화를 열어 메시지를 남겼다.
[글로벌유니티 감사팀이 들어와서 자료를 모조리 가져갔는데요. 10:31am]
[다음 계획 알려 주셔야겠습니다. 저도 위험해졌어요. 10:32am]
[상무님. 10:32am]
민 책임은 답장이 없는 상대방에게 계속 메시지를 남기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멀리서 UT 1팀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민 책임은 여차하면 서해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울 생각을 하며 선입금된 돈을 다른 계좌로 이체했다.
방금까지 웃으며 회의를 이어가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어색함이 흘렀다.
한 시간이 지나자 윤선우가 38층으로 돌아왔다. 고 책임과 이곤이 차례대로 불려간 뒤, 서해가 요청받은 장소로 이동했다. 자리에는 감사팀 TF 인원이 단출하게 앉아있었다.
서해는 자신의 자리 아래에서 노트북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손이 덜덜 떨렸다. 윤선우가 귀띔해 주긴 했지만 여전히 당황스럽고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자신을 의심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감조차 서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해명을 해야 할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이 맞을지 어지럽게 생각이 이어졌다.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골랐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 솔직하게 대답하고 나오면 아무것도 아닐 일이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뛰어나올 것처럼 뛰어댔다.
어렵게 들어간 자리에서 들려오는 질문은 당황스럽게도 서해와 관련된 질문이 아니었다. UT 1팀이 생겨나기 이전, 기획조정실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뤘다. 마케팅 이 팀장과 박 부장이 서해에게 어떤 부탁을 했는지, 그에 대해 어떤 대처를 했는지가 주 내용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짧은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고 38층으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서해에게 보인 것은 감사팀원과 함께 걸어오는 민 책임이었다. 그는 서해의 어깨 너머 허공을 주시하며 시선을 피하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민 책임은 몇 시간이 지나도 38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퇴근 시간을 앞두고 민 책임 기다리던 팀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자 윤선우는 카우치로 팀원들을 안내했다.
“우리 모여서 차 한잔할까요?”
UT 1팀은 38층 한쪽에 세팅되어 있던 주방 가전에서 각자의 취향대로 음료를 내렸다. 무의식적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려던 서해는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한 번도 관심 있게 보지 않았는데, 냉장고 안에는 마트에서도 본 적 없는 주스 종류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서해는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라임 주스를 꺼냈다.
카우치에 모여앉은 넷은 말없이 음료를 홀짝였다. 쉽게 말을 떼기 어려운 분위기이기도 했고,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는 민 책임을 기다리는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
그때 윤선우와 고 책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UT 1팀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팀장님도요. 한국 오신 지 며칠 되지 않았을 텐데.”
“팀장 부임하고 이렇게 스펙터클하게 보내는 건 처음이네요.”
서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주말부터 어쩐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얘기를 이어갔다.
“민 책임은 돌아오기 힘들 겁니다.”
UT 1팀의 시선이 일제히 윤선우에게로 향했다. 어제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했다.
“민 책임이 나이브레티에 인공 지능 알고리즘을 건네주려는 정황이 포착됐는데…. UT 1팀이 퇴근하고 나면 서버에 접속해서 자료를 복기한 것 같아요. 곧 사측에서 공지할 거고, 법적 절차에 들어갈 겁니다.”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특히 입사 후 마케팅팀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시간을 보냈던 고 책임의 표정은 한껏 일그러져있었다.
“어떻게 그런. 팀장님, 민 책임이 그런 것이 확실합니까?”
“38층에 직원들이 함께하게 되면서 CCTV를 설치했다고 들었습니다. 정황이 발견되면서 감사팀이 급파되었고요.”
“민 책임이 업무 진행할 때 앞뒤 살피지 못하고 직진할 때는 있지만 그래도 저와 입사 동기인데…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합니다. 저도 소속이 바뀐 지 며칠이 채 되지 않아 모든 히스토리를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감사실 TF에서 마케팅 비리 조사하면서 일부 라인을 찾아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38층에 UT 1팀을 구성한 것은 대표님이 생각한 미끼였고요.”
“…믿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회사 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니까요. 감사팀에서도 엉뚱한 곳 흔들지 않으려고 한참 지켜본 것 같습니다. 여기에 CCTV 설치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요. 조사는 감사팀과 경찰에서 맡아서 진행할 거예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뜬소문 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추측성 멘트는 최대한 자제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혹시, 민 책임에게 연락해 봐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연락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죠. 민 책임 자리는 곧 다른 인원으로 채울 예정입니다. 당분간 업무 로드는 없을 예정이니 개발팀 서포트해 주면서 대기해 주세요.”
턱이 떨어져라 입을 벌리고 앉은 서해와 이곤 옆으로 혼란에 빠진 고 책임의 표정이 보였다. 윤선우는 애써 팀원을 추슬렀다.
“금주에 38층 정리하고, 차주부터는 사무실로 내려갈 거예요. 연구 부서 소속은 17층 사용하기로 했거든요. 본사에서 파견 오는 TF랑, 마케팅에서 이동하는 인원이랑 어수선할 테니까 크게 옮길 것 있으면 업무지원팀에 미리 요청하고요.”
“네, 팀장님.”
“힘들고 긴 하루네요.”
단출하게 모여 앉은 네 명은 크게 말이 없었다. 서해와 이곤, 고 책임은 민 책임의 자리 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입사 이래로 몇 년을 함께한 동기에게서 뒤통수를 맞은 고 책임의 얼굴은 어두웠고, 잘 따르던 선배가 하루아침에 산업 스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서해와 이곤도 힘들어했다.
UT 1팀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서해가 한태경을 기다리며 사무실에 남아 괜히 포털을 뒤져볼 때였다. 메인 기사에 뉴스 속보가 밀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해는 나이브레티 권율기 상무에게 검찰 보강 수사 지휘가 내린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기존의 폭행·특수협박, 아동복지법 위반에 더불어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가 추가되었다.
다시 팀으로 돌아오지 않을 민 책임이 나이브레티의 권율기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 소식을 찾아보는 손길이 빨라졌다.
검찰이 나이브레티를 압수 수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권율기 상무(이하 권 상무)의 기술 유출 정황이 포착되어 업계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검찰에 따르면 권 상무는 수백억으로 추산되는 글로벌유니티의 핵심 기술 자료를 무단으로 반출하도록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권 상무는 빼돌린 기술을 신제품 개발에 활용하고 곧 개최될 예정인 가전 박람회 CES Summer Show에 공개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이브레티 관계자는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있다는 답변만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글로벌유니티의 관계자는 해당 직원의 거취를 고민 중이라는 답변과 함께 모든 공식적인 입장은 법원 판결 이후 보도 자료로 발표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연관 뉴스 기사에는 글로벌유니티의 대표로 한태경이 기자 회견하는 모습, 나이브레티의 조태용 상무가 대리인으로 공식 입장을 발표하는 모습 등이 연이어 붙어있었다. 서해는 떨리는 손으로 뉴스 기사를 확인했다.
며칠 동안 몰아치는 일이 도무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서해는 눈을 감고 새삼 몇 개월 동안 있었던 일을 돌아보았다. 권율기가 요구하는 대로 일을 진행했더라면 뉴스에서 떠들고 있는 산업 스파이의 주인공은 자신이 되었을 터였다.
38층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잔뜩 지친 얼굴의 한태경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고갯짓하고 서해를 대표실로 불러들였다. 서해는 천천히 걸어가다가 대표실 안으로 들어선 다음에는 뛰어들다시피 달려들었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니요.”
“기자회견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시간이 너무 늦어졌네요.”
“…어떻게 저에게는 한마디도 없이.”
“감사팀 일은 혹시 모를 보안 때문에 말 못 했습니다.”
한태경은 슈트 재킷을 벗어 책상 가운데 아무렇게나 올려두었다. 목을 딱 맞게 감싸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긴 그가 서해를 바라보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한태경이 말했다.
“서해 씨가 권율기와 연관된 일을 생각하는 것조차 화가 납니다. 할 수 있다면 서해 씨 머릿속에 남은 흔적도 다 지워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는데, 옆에서 계속 신경 쓰이게 하니까.”
화가 난다거나, 다 지워버리고 싶다는 말은 모두 많이 둥글게 표현된 것이었다. 마주한 눈동자 아래로 낮게 깔린 그의 마음이 발아래까지 흘러내렸다.
“나와서 돌아갈 곳 없게 만들고 아무 데도 발 못 붙이게 할 겁니다.”
“대표님….”
서해의 표정이 이상해지는 것을 바라보던 한태경이 한숨을 쉬었다. 눈을 깜박이던 서해가 고요한 무게에 불안을 느낄 때쯤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다시는 엉뚱한 생각 못 하게 만들어야지.”
한태경의 목소리는 평상시 같았는데 서해의 손끝만 뜨거워졌다. 그는 딱 붙어있던 서해의 턱 끝을 들어 올리고 한쪽 뺨을 톡톡 두드린 뒤 떨어졌다.
“앞서하는 상상은 이제 그만하세요. 받아요. 통화나 메시지가 안되니까 답답해서.”
작은 종이봉투에는 그와 똑같은 최신의 휴대 전화가 들어 있었다. 손잡이를 건네받는 동안 손가락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불시에 찾아온 손길이 찰나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서해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 담겼다.
“감사합니다. 제가 바꿔도 되는데.”
박스에는 포스트잇으로 번호가 적혀있었다. 뒷자리는 1221. 한태경의 생일이었다. 어색하던 상황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퇴근합시다. 너무 피곤하네.”
“이게, 뭐예요. 대표님.”
“번호는 바꿨습니다. 혹시 연락 오고 그럴까 봐.”
책상에 뭉쳐진 슈트 재킷을 집어 든 그는 서해를 등 뒤에 세워두고 먼저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오래된 번호 같은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는데. 들뜬 것같이 간지러운 가슴을 꾹 누르던 서해는 그를 쫓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