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어둠
인터뷰를 진행할 자리에 앉아있던 서해가 고개를 젖히고 눈을 몇 차례 깜박였다.
한 시간 간격으로 뒤척이며 깨어났지만 한태경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아침에도 택시를 타고 출근한 서해의 피로도는 평소와 다르게 높은 상태였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눈꺼풀이 뻑뻑했다.
그 모습을 보던 고 책임이 서해를 바라보더니 인공 눈물 한 팩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선임님, 이거라도 써요. 아직 손 안 댄 새 거예요.”
“아, 책임님. 감사합니다.”
“요즘 얼굴이 왜 이렇게 까칠해요. 어디 아파요?”
“아니요.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동안 야근하느라 고생한 피로 풀라고 일찍 보냈더니. 수면실 가서 조금 쉬다 올래요? 인터뷰 일정 바꿔서 내가 먼저 진행할 테니까.”
“아니, 아니요. 괜찮아요. 시간 바꾸면 고 책임님이 연달아 두 번 진행하셔야 하잖아요.”
“그 전에 서해 선임 쓰러질 것 같아서 그러지.”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첫 번째 인터뷰 그룹이 38층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곤이 참여자들을 인솔하여 38층의 주방 가전 쪽으로 안내하는 것이 보였다. 레코딩을 맡은 민 책임이 서해를 향해 시작해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목소리를 끌어 올린 서해가 인터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다음 타임의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 고 책임과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할 이곤은 서해의 모더레이팅에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인터뷰를 진행하게 될 UT 1팀 서해 선임입니다. 업무도 많으실 텐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려요.”
“안녕하세요. 우와… 우리 회사에 이런 곳도 있었네요.”
“앗, 저게 신제품인가 봐요.”
네 명의 참석자들은 간단히 신제품 라인업을 둘러보고 데스크로 걸어왔다. 서해는 자연스럽게 착석을 안내하고 준비된 설문지를 돌렸다.
“이쪽으로 앉으셔서 설문지 첫 번째 장 먼저 기입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듣고 오셨겠지만, 오늘 테스트는 CES Summer Show에 전시될 신제품 조사에 사용될 예정이기 때문에 보안에 유의해 주셔야 합니다. 해당 내용에 동의하는 경우 사인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 동의하시면 자리 이동하고 테스트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설문지가 내밀어지자 순식간에 조용해진 분위기에 서해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설문지 드리니까 시험 보는 느낌이죠?”
“조금 그러네요. 이런 테스트는 처음 참여해 봐서요.”
“선택 문항의 1점부터 7점까지의 점수는 정답을 찾는 내용이 아니니까 생각나는 대로 편하게 기재해 주시면 되거든요. 부담 갖지 말고 솔직하게 느낀 대로 말씀해 주세요.”
참여자들은 웃음 지으며 얘기하는 서해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적당히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한 발음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참여자들은 그제야 서해를 바라보았다. 아무렇게나 접어 올린 소매와 두세 개는 풀려있는 셔츠 단추가 보였다. 꽉 막힌 인터뷰 자리라고 생각하던 참여자들은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던 허리에 힘을 풀었다.
“여기 저희끼리밖에 없으니까 개선했으면 좋겠다 하는 내용 있으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CES Summer Show 신제품 발표 때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누가 무슨 말 했는지는 절대 비밀에 부칠 거니까 회사분들은 아무도 모를 거고요.”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말하던 서해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테이블에 앉은 참석자들은 서해와 이런저런 사소한 얘기를 나누며 긴장을 풀어갔다. 대화의 틈을 살피던 서해가 중간중간 테스트와 관련된 공지 사항을 적당히 섞었다.
“보안 이슈 때문에 가전과 연결된 앱은 테스트용 휴대전화에 설치해 뒀습니다. 테스트에 참여하시는 동안은 지금 전달하는 휴대 전화를 사용해 주시면 될 거예요. 두 분은 이쪽에서 저랑 진행하시고, 나머지 두 분은 고 책임님이 보조로 도와주실 거예요. 이동 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서해는 사전에 준비된 질문 리스트대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UT 1팀은 첫 번째 인터뷰도 매끄럽게 진행하는 서해의 스킬에 빠져들었다. 서해의 옆에서 노트북으로 인터뷰 내용을 타이핑하던 이곤이 멍하니 그 대화를 지켜보던 것을 고 책임이 툭툭 치며 깨우기가 여러 차례였다.
“집 안의 가전을 관리하는 앱이 다 따로 있으니까 하나하나 확인해야 해서 불편했던 게 가장 컸어요. 이렇게 되면 결국 귀찮아져서 안 쓰게 되더라고요. 처음엔 호기심 때문에 봤었는데, 나중엔 정말 한 달에 한 번 확인할 정도였어요. 그렇다고 리포트가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단순 정보를 확인하고 만족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리포트라고 하시면, 사용 패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비슷해요. 주간, 월간, 혹은 연간 변화나… 사용 패턴을 바꾼다면 얼마나 절약할 수 있는지 정도도 확인되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저희가 사실 올해부터는 전기 사용량을 줄이려고 절전형 탭도 사용하고 있고 그렇거든요.”
“설문지를 확인해 보니까 주중에 요리하는 날이 5회 이상이네요. 평일에도 요리하시는 편이세요?”
“많이 하죠. 집에 초등학생 아이들이 있어서 아침을 꼭 먹여서 보내거든요.”
“요리하면서 힘든 점은 어떤 것들이 있어요? 가전 사용하는 방식이나, 혹은 환경에 대해서요.”
“여름이 가장 힘들죠. 불 앞에 서있기만 해도 땀이 주르륵 나는데, 아침부터 그러고 회사 오면 정말 기운이 다 빠져요. 워킹맘들의 숨겨진 고충이랄까…. 친구들은 주문해서 도시락 받으라고 하는데 아이들이 아토피가 있어서 아무거나 해 먹일 수도 없고. 내가 힘든 게 더 낫다고 생각해서 그냥 참는 거죠.”
몇 차례 질문을 던진 후 끝내 단서를 잡아낸 서해가 세세한 사용 방식을 물어보았다. 긴가민가하며 인터뷰에 참석하던 사람들도 진행 방식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원하는 내용을 술술 뱉어내기에 이르렀다.
인터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진행자는 쉼 없이 내용을 살펴야 해서 피로도가 올라갔지만 새로운 방식의 테스트에 참가한 사람들은 재미있어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길어진 인터뷰는 60분을 가득 채워 진행된 끝에야 종료됐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결과는 소중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이곤 씨가 내려가는 길 안내해 드릴 거예요.”
“선임님만 믿고 가요. 오늘 테스트하면서 불편한 점 얘기했던 거 회사에 소문나면 나 서해 선임 찾아갈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코딩 내용에 개인 정보는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고생 많으셨어요, 들어가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애써 짓고 있던 미소가 걷어졌다. 등 뒤에서 고 책임과 이곤이 어깨를 두드리고 손뼉을 치며 서해를 응원했다.
“아니, 조금 전까지 아파 보이던 사람 맞아?”
“다들 도와주셔서 무사히 끝난 것 같아요. 아, 민 책임님. 혹시 영상 녹화면서 어색한 부분 있었어요?”
“아니, 없었어요.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네요. 고생 많았어요.”
고 책임은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조금 높은 목소리로 팀원을 격려했다.
“자자, 오늘만 더 버팁시다. 다들 조금만 힘내요.”
가운데에 끼여 덩그러니 서있던 이곤이 서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저… 저 실수하면 어떡하죠, 선임님.”
“고 책임님 진행하는 거 한 번 더 보면 패턴이 눈에 보일 거예요. 보조로 서포트하다가 정말 어색하면 옆에서 멘트 추가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선임님. 저 두 번째 그룹 인솔해 오겠습니다.”
“아, 그래요. 다녀와요.”
서해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바쁘게 움직이니 다시 기운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할 수 있다고 속으로 주문을 외운 서해는 테스트 장소를 정리하러 들어섰다. 주방 가전을 정리하고 테이블 위의 설문지를 새것으로 교체했다.
숨 돌릴 틈 없이 두 번째 그룹이 38층에 들어서고 고 책임의 진행에 맞추어 인터뷰를 보조했다. 두 번째 그룹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문제는 세 번째 그룹부터였다. 몇 차례 매끄럽지 못한 이곤의 인터뷰를 보고 있던 민 책임이 서해에게 눈짓을 했다. 크게 거슬릴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 조금 더 두고 보려던 서해는 민 책임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그는 시선을 외면하는 서해를 끝내 불러 세웠다. 인터뷰 도중 모더레이터가 바뀌는 것은 참여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어서 멈칫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이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서해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체력적으로 부담도 있었고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지만 약속된 시간 내에 인터뷰를 끝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서해는 어쩔 수 없이 인터뷰를 이어받아 남은 파트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모두 마치고 난 시간은 여섯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하루 종일 인터뷰하느라 지쳐 나부라진 서해와 고 책임 옆으로 의기소침해진 이곤이 자리에 앉았다. 셋은 더 이상 말할 기운도 남지 않아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그때, 귓가에 텐션이 높아진 민 책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진짜 하루 만에 이렇게도 진행할 수 있네요. 다들 수고했어요. 보고서 빨리 작성해서 개발팀에 공유해요. 내일 초안 작성하고…. 흠, 벌써 주말이네.”
눈을 얇게 뜬 서해와 대각선에 앉아있던 고 책임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해의 표정을 읽은 고 책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화들짝 놀란 서해가 몇 차례 눈을 깜박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천히 눈을 감으며 서해를 바라보던 고 책임의 표정에서 내가 말하겠다는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진정해요, 민 책임. 우리 방금 끝났어.”
“보고서 작성 빨리하고, 대표님께도 한 번 리뷰해서 피드백 받고 그렇게 해야 하잖아요. 개발팀 일정도 살펴야 하고….”
“일정에 문제 있는 것 아니잖아요. 애들 죽어요.”
“아, 아니에요, 고 책임님. 저희 괜찮아요.”
서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막상 고 책임과 민 책임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표정 관리를 못 했던 것이 민망했다. 옆에 앉아있던 이곤도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하잖아요. 내일 와서 바로 초안 잡을 수 있게 보고서 프레임만 잡고 가요.”
“거, 사람 참…. 그럼 오늘까지만 무리합시다. 내일은 다 같이 정시에 퇴근하기로 해요.”
이곤은 익숙하게 편의점으로 내려가 저녁거리를 사 왔다. 테이블 위에 샌드위치와 삼각김밥, 이런저런 영양가 없는 음식들이 펼쳐졌다. 민 책임은 밥 먹는 동안에도 업무와 관련된 일을 중구난방으로 펼쳐놓았다. 서해는 어지러운 머리로 한숨을 삼켰다.
정확하게 목표 설정을 하고 할 일을 배분하던 한태경과 달리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회의가 이어졌다. 아주 어렵게 보고서 프레임이 나오고 업무 분담까지 마친 다음 회의가 종료되었다. UT 1팀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밤 열한 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어디입니까? 10:54pm]
[회사요. 이제 집에 가려고요. 대표님은요? 10:55pm]
문자를 보내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서해는 휴대 전화를 잡고 38층 구석 자리에 들어갔다.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네, 대표님.”
―왜 아직까지 하고 있어요. 오늘 인터뷰 종료일 아닙니까.
“조금 정리할 게 있어서요. 이제 들어가려고 해요. 오늘도 못 오시는 거예요?”
―난 벌써 집입니다. 이렇게 늦게까지 회사에 있는 줄 알았으면 38층에 올라가서 데려오는 건데. 지금이라도 가겠습니다.
“지금 집에 계신 거예요?”
―기다려요. 금방 갈 테니까.
“제가 가는 게 빨라요. 대표님 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택시 타고 금방 갈게요.”
반가운 마음에 너무 빨리 말한 것 같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보고 싶네.
“…저도요.”
―빨리 와.
“네.”
기운 없이 축 처져있던 목소리가 금세 올라갔다. 집에서 누군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종일 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이 달아올랐다.
통화를 종료하고 자리에 돌아오니 UT 1팀이 모여있던 자리는 비어있었다. 오늘도 남아있는 사람은 민 책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인터뷰 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다.
서해는 자리를 정리하고 브리프케이스를 챙겼다.
“민 책임님, 오늘은 저랑 같이 퇴근하세요.”
“녹화본 조금만 돌려보다가 갈게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푹 쉬고 내일 봐요, 선임님.”
“책임님, 제발 같이 들어가세요. 오늘은 진짜 저도 양보 못 해요. 같이 가요. 매번 혼자 남아서 검토하시니까 정말 너무 죄송해요.”
“오늘까지만 할게요. 나는 인터뷰에서 체력 많이 아꼈으니까, 이건 내가 볼게요. 서해 선임 먼저 들어가요.”
“…내일부터는 정말 같이 퇴근하셔야 해요.”
“내일부터는 내가 먼저 퇴근해 버릴 거니까,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
서해는 몇 차례나 민 책임의 팔을 잡아당기다가 결국 포기하고 38층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민 책임은 휴대 전화를 열고 연락처 앱에서 [.]으로 저장된 정보를 눌렀다.
“서해 선임 나갑니다.”
―전화하지 말고 메신저 쓰라고 했잖아.
“서해 선임 나갈 때 연락하라면서요. 혼자 있는 날은 거의 없어요. 지금 나갔으니까 회사 빠져나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시킨 일은 얼마나 남았어?
“50% 정도 남았어요. 3주 내로 넘길게요. 약속한 돈 먼저 선입금해 주세요.”
―50% 먼저 넘겨.
“약속이 다르잖아요. 계약대로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그만두겠습니다.”
―…알겠어. 대신 시간을 당겨. 3주는 너무 늦어. 1주.
“무리예요. 혼자서 서버 일일이 접속하고 흔적 지우고 나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해요. 애초에 UT 1팀에 넣어주기로 한 인원도 두 명이었잖아요. 먼저 조건을 어그러뜨린 건 상무님입니다. 혼자서 될 일이 아니었다구요.”
―2주. 더 이상은 안 돼. 2주 뒤에 노트북과 현금 교환하는 거로. 장소는 별도 공지.
“장소는 미리 얘기….”
―끊어, 지금 나가 봐야겠으니까.
민 책임이 일방적으로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욕을 내뱉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몇 차례나 걸쭉한 욕을 더 뱉어낸 민 책임은 손바닥을 펴고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밤낮없이 일하고 스파이 노릇을 하는 그의 눈 밑은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한숨을 길게 내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해의 의자를 밀어내고 타일을 뜯어냈다. 바닥 깊은 곳에서 노트북을 꺼내는 그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 *
안내 데스크의 사람과 출입구의 가드까지 모두 퇴근을 마친 로비는 한산했다. 서해는 어제와 같이 택시 앱을 켜고 호출 버튼을 눌렀다. 택시를 카운팅하는 숫자와 반경이 커지는 것까지 확인한 후 로비를 걸어 나왔다.
시원한 공기를 쐬고 싶었던 서해는 1층 바깥에서 택시를 기다리려고 회전문을 돌아 나섰다. 드문드문 떨어진 곳에서 택시 호출을 기다리고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 밤기운에 서늘해진 공기가 두 뺨 위를 식혀주었다.
“하아.”
천천히 눈을 감고 폐가 활짝 열릴 때까지 숨을 들이켰다. 힘든 과정은 다 지났고, 남은 것은 이제 눈 감고도 쓸 수 있게 된 분석 보고서 한 건이 전부였다.
휴대 전화 액정을 바라보는 서해의 시선이 흔들렸다. 택시는 여전히 매칭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태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상상하자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졌다. 로딩 화면이 돌아가고 있는 것을 초조하게 살피다가 주위를 서성거렸다.
바깥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직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서해가 혼자 남았을 때였다. 큰 사거리에서 깜빡이를 켜고 들어온 검은색 세단이 어제와 같은 위치에 섰다. 분명 어제 마주쳤던 차와 동일한 종류임이 틀림없었다.
갑자기 천근처럼 무거워진 발을 끌어 옆으로 비켜섰다. 구두 굽이 아스팔트에 긁히는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렸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서해가 검은색 세단에서 멀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소리와 함께 차의 뒷문이 열렸다. 고급스러운 세단에 걸맞게 거슬리는 소음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오랜만이네, 집 나간 개새끼.”
서해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휴대 전화를 쥐고 있던 손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마치 로비 바깥에서 사람들이 없어지기라도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동안 잘 지냈냐는 인사 정도는 해줘야지.”
권율기의 등 뒤로 열려있는 차 문이 보였다. 그 공간은 금방이라도 입을 벌리고 서해를 잡아먹을 것처럼 공격적으로 보였다. 서해는 양손에 쥐고 있던 브리프케이스와 휴대 전화를 꽉 잡았다. 척추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리고 허리 아래부터 기운이 쭉 빠졌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예뻐졌네. 못 알아볼 뻔했잖아.”
“….”
“태경이가 잘해 줬나 봐. 난 엄청 고생했는데. 조금 짜증 나긴 하는데 예뻐진 거 보니까 꼴린다.”
사거리 건너에 드문드문 차가 지나다니는 것이 보였지만 너무 먼 거리였다. 서해는 머릿속으로 탈출로를 그려봤다. 사거리로 나갔다가는 자동차에 금방 따라잡힐 것 같았다.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 비상계단을 오르고…. 38층에는 민 책임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잡히지 않고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태경에게 전화를 걸 수 있을지 생각하던 서해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빨리 돌아가겠다고 서둘러 끊어버린 전화가 생각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리러 오라고 할걸.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이는 얼굴은 여전하네. 내가 좋아하는 그 얼굴. 좆나게 망가뜨릴 생각 하니까 아주 짜릿하고.”
“…가, 가까이 오지….”
자꾸 가빠지는 숨을 애써 누르는데 눈앞이 자꾸 흐려졌다. 서해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과호흡으로 쓰러져 틈을 보였다가는 금방이라도 차 안에 구겨 넣어질 것 같았다.
권율기가 한 걸음 다가오는 만큼 서해는 무거운 발을 들어 뒷걸음질 쳤다. 나름의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우리 일단 차에 타고 얘기할까?”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세요.”
“좋게 얘기할 때 타자, 서해야.”
서해는 시선을 내려 택시 앱을 내려다보았다. 유달리 매칭이 늦어지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때,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택시가 요청을 수락한 것이 보였다. 서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10분만 버티면 벗어날 수 있었다.
“가자. 나 피곤해.”
글로벌유니티 회사 건물 앞에 정차된 자동차의 전조등이 켜져 있었다. 권율기는 뒷문을 열어둔 채 자동차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있었다. 조용한 공간에 불이 붙는 소리, 담배 필터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는 권율기의 시선이 서해에게 향했다. 잔뜩 겁먹고 움츠러든 모습을 다시 확인하자 당장 품에 넣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졌다. 그는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서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사를 얼마나 지랄같이 오래 했는지 아직도 회복이 안 된다고.”
“제가 왜, 상무님이랑 같이 가야 하는데요.”
“왜라니. 넌 내 소유니까 당연히 나랑 가야지.”
“…저는 누구 소유물도 아니에요.”
권율기와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서해의 몸이 떨렸다. 손에 말아 쥐고 있던 출입 카드가 브리프케이스의 손잡이와 얽혀있었다. 그 사이로 이리저리 엮인 서해의 손가락이 하얗게 물들었다.
“너한테 투자한 건 나이브레티지 글로벌유니티가 아니야. 먹여주고, 재워주고 다 키워줬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억지 부리지….”
“너 때문에 지금 일이 얼마나 꼬였는지 알고 있기나 해?”
“그건.”
“오갈 데 없는 놈 챙겨줬더니 한태경이랑 어디까지 붙어먹었어. 다리 벌려주니까 먹여주고 재워준대?”
“…대표님이랑 그런 사이 아닙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겨우 말을 이어가던 서해는 한태경이 언급되자 분명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회사 근처에서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머리끝까지 울렸다.
“잠깐 풀어줬더니 개새끼 위치를 잊었나 본데, 금방 기억나게 해줄 테니까 좋게 말로 할 때 차에 타.”
“싫…습니다.”
권율기를 바라보던 서해의 눈꼬리가 찢어졌다. 급하지 않게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꽉 쥔 서해는 눈앞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그를 노려보았다.
눈을 내리깔고 덜덜 떨며 자신의 말에 순응하던 서해의 모습을 예상한 권율기는 황당한 표정으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에 걸쳤다.
“뭐?”
“싫다고요. 상무님이랑 안 갈 거예요.”
권율기는 손가락에 걸친 담배를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손가락 끝에서 튕긴 불꽃이 콘크리트 바닥에 꽂혔다.
권율기는 기다란 다리로 서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성큼성큼 걸어온 그는 휴대 전화를 들고 있던 서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벼락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손목이 부러져도 이상할 것 없을 만큼의 악력이었다.
“윽, 이거 놔요!”
“씨발. 말로 좋게 하려고 했는데. 그러게 네가 자꾸 기어오르니까.”
“싫…다고, 안 간다니까!”
“이게 진짜 미쳤나.”
한쪽 팔을 움켜쥐고 반대쪽 어깨를 쥐어 잡은 권율기는 서해를 힘으로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힘으로 밀리지 않는 서해의 모습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쇄골 위의 움푹 파인 곳을 엄지손가락으로 인정사정없이 짓눌렀다.
“…아윽!”
갑자기 찾아온 통증에 손에 들고 있던 휴대 전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서리부터 떨어진 휴대 전화 액정은 산산조각 난 채로 화면이 꺼졌다.
전화기가 떨어진 것을 바라보던 서해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택시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구명줄이 끊어진 것 같은 느낌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손목을 잡아당기는 힘이 점점 세지고 바닥에서 버티던 서해의 몸이 자동차 쪽으로 끌려갔다. 열려있는 자동차 문 너머로 어두컴컴한 공간이 넘실거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결국 차 입구까지 끌려온 서해는 문 모서리를 잡고 버텼다. 쇄골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길게 이어지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검게 바뀌기를 반복하고 시야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가기… 싫어! 놓으라니까!”
힘으로 버티며 생각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살게 될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권율기에게 처음으로 맞았던 날보다 더 심한 반항을 했다.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려 권율기의 몸을 밀어내다가 힘에 부친 손이 허공으로 밀려났다. 손가락 끝이 어딘가에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권율기의 오른쪽 광대가 붉게 변해 있었다. 간헐적으로 거친 숨을 들이켜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광대에서 빨간 핏물이 배어 나왔다.
손가락으로 상처를 훑어 피를 확인한 권율기의 삼백안이 길게 찢어졌다.
“이 씨발 새끼가.”
서해의 얼굴이 끝까지 돌아갈 정도의 충격이었다. 어딘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둘의 숨소리조차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있는 힘을 다해 서해의 목덜미를 잡아챈 권율기는 뒷좌석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그러나 차 프레임을 잡고 버티는 서해는 좀처럼 힘을 굽히지 않았다. 둥글게 휘어진 로비 바깥 공간에서 둘의 몸싸움 소리가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주위가 점점 소란스러워지자 조수석에서 권율기의 비서가 내렸다. 지하 주차장 출구에서 몇 대의 자동차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권율기의 비서는 눈을 감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짜증이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비서는 구경거리를 보느라 속도를 늦춘 채 빠져나가는 차를 수신호로 안내했다. 그는 권율기를 말리러 다가가느라 바로 뒤쪽에 SUV 한 대가 정차하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상무님, 누가 보기라도 하면 곤란해집니다.”
“좆같은 새끼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차체와 몸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관자놀이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에 찢어진 입술을 베어 물었다. 눈앞에 닥친 차 내부 공간은 어두컴컴한 손을 뻗어 서해를 잡아당기려 하고 있었다.
“흐…윽, 으윽.”
“하… 씨발. 앞뒤 안 보일 정도로 좋았어? 또 붙어먹으러 가는 거면 내가 대신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새끼야.”
권율기는 몸을 웅크리고 팔을 뻗어 버티고 있는 서해의 뒤통수와 목덜미를 구분하지 않고 몇 차례나 내리쳤다.
한참 동안 이어지는 잔인한 폭력에 비서가 뒷걸음질 치며 멀어졌다. 한번 상황에 빠진 권율기는 해결되기 전까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비서는 초조하게 둘이 서있는 곳 근처를 서성였다.
웅크리고 선 서해가 숨을 들이켜는 텀이 점점 짧아졌다. 웅웅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자리에 주저앉았고 권율기는 서해를 차에 강제로 태우려고 팔을 잡아끌었다. 갑갑해진 가슴이 짓눌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끝까지 버텨보려 했는데 결국 쓰러진 서해의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당장 한태경이 보고 싶었다. 아쉬운 대로 부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은 회사 건물 꼭대기였다. 눈앞이 자꾸 흐릿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권율기의 뒤에 정차되어 있던 차의 문이 열렸다.
“거기, 무슨 일 있어요?”
“흡, 으….”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해는 천천히 심호흡을 시도했다. 울음이 가득 들어찬 폐는 숨을 쉬려고 할 때마다 어딘가에 턱턱 걸려 답답했다. 흐릿해진 시야로 새롭게 나타난 인영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점점 더 가까워졌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대치 중이던 서해와 권율기 사이로 끼어들었다. 순식간에 엉망이 된 서해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금세 터진 입술과 부어오른 눈꺼풀이 보였다. 그는 서해를 등 뒤에 숨겨두고 권율기를 마주 보았다.
“누구신데 이렇게 함부로 하십니까?”
“꺼져. 상관하지 말고.”
제3자가 나타나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권율기의 비서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비서는 새롭게 나타난 남자를 저지하려 했는데 단호하게 손을 뿌리치는 손길과 강하게 밀어내는 힘에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권율기와 비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해를 살폈다.
“괜찮아요? 도와줘도 되겠어요?”
“네, 네.”
서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도움을 요청하자마자 남자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씨발, 가던 길이나 가. 괜히 끼어들지 말고.”
“이런 장면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만큼 막 자라진 않아서요.”
“저 새끼 하나 마음대로 하는 게 왜 이렇게….”
권율기는 새롭게 나타난 사람의 등 뒤에 숨겨진 서해를 잡아채기 위해 여러 차례 손을 뻗댔다. 남자는 몇 차례 몸을 돌려 권율기로부터 서해를 보호했다.
뜻대로 되지 않자 권율기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양팔로 있는 힘껏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건 또 어디서 나온 새끼야. 너 뒤로 만나는 다른 놈도 있어? 골 때리네, 누가 개새끼 아니랄까 봐.”
“멍청하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 정도로 앞뒤 못 가리는지는 몰랐네요.”
살살 긁어대는 말에 권율기의 주먹이 내질러지고, 앞에 서있던 남자의 광대로 꽂혀들었다.
“하, 블랙박스. 촬영 중인데.”
뒷문에 붙어있던 네 명의 시선이 일제히 뒤차로 향했다. SUV 앞 유리에 부착된 블랙박스에서 푸른빛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권율기와 비서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춘 순간에 남자는 서해를 품으로 당겨 안고 그들에게서 완전히 떼어냈다.
“저기 뒤 차에 잠시 타고 있어요. 금방 끝내고 갈 테니까.”
“아, 아니. 윽!”
“무슨 미친 소리야, 어딜 간다는 건데?”
서해의 손목이 권율기에게 다시 잡혔다. 발작하듯 뒷걸음질 치는 서해를 바라보던 남자는 권율기의 쇄골 위쪽을 힘으로 눌러 잡았다. 방금 전까지 권율기가 서해의 어깨를 짓누르며 고통을 줬던 곳과 같은 위치였다.
“악! 씨발, 너 뭐야!”
권율기가 움켜잡고 있던 손힘이 풀리자마자 서해는 그대로 뛰어갔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SUV까지 가는 시간이 몇 분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뒤 차의 조수석에 올라타고 떨리는 손이 차 문을 닫았다.
창문 밖으로 세 사람의 인영이 얽혀있는 것이 보였다. 밖에서는 권율기가 남자의 어깨를 밀치며 몇 차례 고성을 뱉는 것이 보였다. 서해는 권율기가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쓰러진 몸 위로 발을 걷어차는 모습을 보고 다시 차에서 내렸다. 자신을 도와주려다가 모르는 사람이 다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도와주려 했는데 자리에 묶여버린 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상무님, 상무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진정하세요. 블랙박스에 녹화 중이라고 하잖아요.”
“놔, 이거 안 놔?”
조수석에서 내린 사람이 권율기의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저지하는 것이 보였다. 바닥에 쓰러져있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서해가 있는 SUV 앞으로 걸어왔다.
“일단 타요. 여기 서서 설명하긴 상황이 좀 그러네요.”
서해가 다시 SUV에 오르자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창문 너머로 비서에게 잡힌 채 몸부림치는 권율기가 보였다. 그는 서해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차는 그대로 회사를 빠져나갔다. 한강 변을 따라 한참을 달렸다. 남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서해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주었다. 덜덜 떨리던 손과 엉망으로 내뱉어지던 호흡은 권율기와 떨어지자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이렇게 허술해요? 잠깐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 차에 의심 없이 오를 만큼?”
“…네…?”
긴장으로 굳어진 목뼈가 뻑뻑하게 돌아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 너머로 아직 뜯지 않은 비닐과 테이프가 차 안 곳곳에 가득한 것이 보였다. 새 차 같은데 뭔가 이상했다. 한번 나쁜 쪽으로 흘러가는 상상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이러니 태경이가 기절하고 싸고도는….”
뒤에 말이 이어졌지만 들리지 않았다. 잔뜩 긴장했다가 풀어진 몸이 다시 겁을 먹기 시작하자 낡은 둑처럼 허물어졌다. 손발이 떨리다 못해 마비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누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아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앞뒤 가리지 않고 차에서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수석을 열었는데 잠겨있는 차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인지하자 죽음 앞에서 맞닥뜨린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다.
서해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경련하듯 떨리는 손이 셔츠를 꽉 쥐어 잡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서해 씨.”
“흐….”
“서해 씨, 내 말 들려요?”
서해는 시야가 어느 한 곳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좌우로 털어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고 바닥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이마에 손을 올렸다. 온몸이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에 숨을 멈추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서해는 결국 어둠 속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다급한 발걸음 소리,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울렸다. 달콤한 잠을 깨우는 듯한 소란스러움이 싫었던 서해는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그때, 양쪽 눈꺼풀이 강제로 번갈아 열리고 날카로운 빛이 들어왔다.
“환자분, 정신 들어요?”
“으…응.”
“평소에 먹는 약 있어요?”
“아….”
“환자분, 대답하셔야 해요. 평소에 먹는 약 있어요?”
“…없…어요.”
전에 없이 무거운 몸에 뒤척이던 서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왼쪽 팔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있었다.
몇 차례 눈을 깜박이던 서해는 머리 위에 주렁주렁 달린 수액 팩들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바뀐 장소에 당황한 서해를 내려다보던 간호사가 수액이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진정제랑 영양제 들어가고 있어요. 심전도, 초음파 검사 결과는 아침에 나올 거예요.”
정신이 몽롱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설명은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상황을 살피던 서해는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가방과 입고 있던 옷은 한쪽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들어 몸을 내려다보았다. 입고 있던 옷은 어딘가 사라지고 없고 환자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예요?”
“과호흡으로 기절해서 병원 오셨어요.”
“병원요? 누가 데려온 건지 알 수 있나요?”
“그런 것까지는 몰라요. 수액 다 맞고 원무과 가서 수납하시면 됩니다.”
굉장히 사무적인 말투로 응대를 마친 간호사는 등을 돌려 입원실을 빠져나갔다.
약 기운 때문인지 계속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거슬리는 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손등에 꽂혀있는 링거 바늘이 쿡쿡 쑤셨다.
침대 옆에 손을 짚고 앉은 서해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기절하기 전 상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로비에 내려와서 택시를 기다리던 것, 검은 세단이 자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섰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권율기가 차에서 내리던 모습과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 도와줬던 일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서해는 숨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파 위에 놓여있는 가방 쪽으로 걸어가려다 손등을 잡아채는 링거줄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다. 링거 폴대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을 이끌고 소파로 다가갔다. 가방 안에서 깨져버린 휴대 전화가 나왔다.
빨리 오라고 했는데. 벽 한쪽에 걸려있던 시계에 새벽 한 시가 넘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는데 화면은 여전히 캄캄했다.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고장 난 것 같았다.
밖에 나가서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자, 권율기와 대치했던 초면의 남자가 문을 열고 서있는 것이 보였다.
“어, 아직 일어나면 안 될 것 같은데.”
서해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의식을 잃기 직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끼리릭거리며 링거 폴대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남자는 문안으로 들어왔지만 문을 닫지는 않았다. 서해는 갇혀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안심했다. 그는 손을 어깨높이 정도로 올려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공격 의사가 없다는 듯한 제스처가 눈에 들어왔다. 서해는 그 모습을 보고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첫인사가 엉망진창이 됐네요. 오늘부터 출근하기로 했던 윤선우입니다.”
“…네?”
“회사에 가져다 놓을 짐이 있어서 갔다가 서해 선임이랑 마주쳤어요. 병원에서 접수가 필요해서 지갑을 좀 살폈습니다. 아, 오해하지 말아요. 신분증만 확인하고 다시 원래 있던 곳에 넣어뒀어요.”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서해를 이해한다는 듯 웃은 윤선우는 카드 지갑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그는 천천히 걸어 들어와 테이블 위에 명함을 올려두었다.
“보직 이동 후에 아직 명함이 안 나와서, 본사에서 쓰던 거예요.”
“…….”
“난 여기 있을 테니까 확인해 봐도 좋아요. 의심스러우면 그쪽에 연락해 봐도 좋고.”
서해는 천천히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명함을 집어 들었다. 짙은 파란색 바탕의 하얀색 로고가 선명했다. 영문 버전의 명함이었지만 회사에서 제공하는 명함이 확실했다.
“아, 안녕하세요.”
지나치게 경계한 뒤 머쓱해진 서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명함에는 한태경이 여러 차례 언급했던 그 이름이 적혀있었다. 다시 바라본 그의 입술 위에는 딱지가 말라붙어 있었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네.”
“고맙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그, 팀장님 얼굴이.”
“사과는 제가 먼저 해야겠네요. 차에서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조심했어야 했는데 제가 큰 실수 했어요.”
“아, 아니에요. 제가 너무, 긴장해서….”
“병원에 와서 상황 설명하느라, 문진할 때 의사에게 기절하기 직전의 증상 얘기했어요. 문진이 제법 구체적이었는데 상세한 증상을 몰라서 대답을 정확하게는 못했습니다. 의사가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냐고 물었는데 아침에 회진 오면 다시 확인할 거예요.”
“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괜히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드문드문 끊어진 말이 서해의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흘러나왔다. 윤선우의 한쪽 얼굴엔 벌써 파랗게 멍 자국이 올라오고 있었고 입술 위에는 딱지가 보였다.
“나중에 맛있는 밥 사줘요. 아, 서해 선임 의식이 빨리 안 돌아와서 제가 보호자로 접수했어요. 태경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조금 걸려서요.”
“감사합… 네?”
“입원실 잡고 검사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어서 조금 늦게 했는데. 바로 온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한태경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서해는 몹시 당황했다. 그대로 굳어진 서해를 바라보던 윤선우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시원하게 웃으려던 그는 입술이 당기는 고통에 한쪽 얼굴을 찌푸렸다.
“미리 만나서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일정이 도저히 나와야 말이죠. 나, 태경이랑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예요. 나는 서해 선임 얘기 많이 들었는데 태경이는 내 이야기 안 했나 봐요.”
이야기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해석하느라 서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회사 앞에서 쓰러져서 한태경에게 전화한 건가?
서해는 손에 들고 있던 고장 난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연락처를 확인할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조금 이상했다.
설마.
“태경이 오면 인사만 하고 갈게요.”
“어, 네. 알겠습니다.”
서해의 표정을 바라보던 윤선우가 다시 웃었다. 상황을 살피려는 서해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 게 느껴졌다.
“월요일에 결근계 올리면 처리해 줄 테니까 병원이든 집이든 푹 쉬어요.”
“아, 내일부터 보고서 써야 하는 날인데….”
“UT 1팀에 서해 선임밖에 없는 거 아니니까 쉬어요.”
“…팀장님 오시면 리뷰해 드리기로 했는데.”
“나머지 팀원들은 같이 일 안 했어요? 진행하고 있을 테니까 월요일에 출근해요. 피로 풀고 와서 전력으로 해주는 게 모두에게 더 좋아요.”
“그… 그럼 지금이라도.”
“서해 선임이랑 나랑 나란히 입술 터져서 출근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러다가 태경이한테 내가 먼저 죽어요.”
“…네?”
“서해 선임 얼굴 보니 그날이 오늘인가 싶기도 하네요. 아, 정말 차에서 괜한 소릴 해서.”
병실 복도 너머로 바쁘게 걸어오는 소리가 울렸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리고 그 너머로 다시 못 보게 될 줄 알았던 얼굴이 보였다. 서해는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느라 입안을 베어 물었다.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집에서 편하게 입고 있던 옷차림 그대로였고, 가지런히 내려와 있는 머리도 밖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헐렁한 병원복을 입고 링거를 꽂은 채 소파에 앉아있는 서해를 본 순간 한태경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이마를 감싸 쥐었다. 잠시 입구에 서있다가 그대로 달려 서해를 당겨 안았다.
그는 서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켰다. 등을 끌어안고 있는 손이 재차 서해를 쓰다듬으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윤선우와 눈이 마주친 서해의 얼굴이 빨개졌다. 더는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눈을 꽉 감았다. 부서질 듯 안고 놓아주지 않는 한태경 때문에 몸이 뒤로 꺾여질 정도였다.
“대, 대표님. 잠시만요.”
“…하아.”
“대표님, 윤 팀장님 계세요, 대표님.”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서해를 놓아주지 않던 한태경이 두 손으로 서해의 귓가와 뺨을 감쌌다. 핏기 없는 얼굴에 남은 멍 자국과 터진 입술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였다. 정확히 부어터진 입술을 꾹 누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서해는 품에서 벗어나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굳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미쳤냐고 했을 것 같은데, 순간 얼마 전에 한태경이 모르는 곳에서 그가 아닌 사람에게 상처받고 오지 말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가 연인으로서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인지, 명령을 어겨서 화가 난 것인지 구별되지 않아 멈칫했다. 동공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화가 난 것은 확실한데 같은 공간에 앉아있는 윤선우가 신경 쓰인 서해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했다.
“태경아, 서해 선임 아직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어.”
“…젠장.”
조심스럽게 얼굴을 살피는 다정한 손길이 좋았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달콤했다. 당장이라도 한태경을 껴안고 싶었던 서해는 애꿎은 손가락 끝을 미끄러트렸다.
한태경은 서해의 어깨를 감싸고 침대로 걸음 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그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자신에게 묻는 것으로 생각한 서해가 입을 옴짝거리자 커다란 손이 서해의 입술을 잠시 덮었다가 떼어냈다. 한태경의 손이 붙었다가 떨어진 직후, 서해는 저도 모르게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였다.
“회사에서 나오다가 마주쳤어. 로비 밖에서 보란 듯이 난동 부리는 걸 봤는데, 설마 했지. 그냥 운이 좋았어. 그 뒤엔… 전화로 얘기했던 것처럼 내 실수. 정말 미안해.”
“…그래.”
한태경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있었다. 서해는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겹치려다가 급히 침대 모서리를 잡았다. 윤선우가 둘 사이를 이상하게 바라보게 될까 봐 조심스러웠다. 두 사람의 얼굴을 돌아보기만을 반복할 때였다.
“선임님, 저 갈게요. 월요일에 봐요.”
“네, 팀장님. 아, 대표님 잠시만요, 인사만 하고….”
“괜찮아요. 푹 쉬다가 봐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려던 서해는 링거 바늘이 꽂혀있지 않은 손목을 꽉 잡혔다. 눈과 고갯짓으로 윤선우에게 겨우 인사했다.
문이 닫히고 입원실에는 둘만 남았다. 한태경은 침대 위로 한쪽 다리를 접어 올리고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서해를 바라보았다. 늘 가까이에서 맡던 향수의 잔향이 물씬 올라왔다. 멀리 떨어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던, 서해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대표님….”
“빨리 오라고 했는데, 예정보다 훨씬 늦어지고.”
“…….”
“늦어져서 전화했더니 전화는 꺼져있다고 하고.”
“…죄송해요.”
“회사로 갔더니 사람은 안 보이는데, 도무지 어디 갔는지 모르겠고.”
“…….”
“병원이라고 연락 오면.”
“…죄송해요. 권 상무님이 갑자기 찾아오실 거라고는…. 화내지 마세요.”
“서해 씨에게 화난 거 아닙니다. 지금 화가 나는 건.”
마주 보고 앉은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침대 안쪽으로 접힌 무릎 끝이 맞닿았다. 여전히 무서울 정도로 서늘한 표정이었다.
고민하던 서해는 양손을 들어 올려 한태경의 귓가와 뺨을 감쌌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온기가 기분 좋아서 그대로 손가락을 움직여 귓가를 몇 차례 문질렀다.
하루에도 컨디션이 이렇게도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덜덜 떨리는 몸을 감당할 수 없어 기절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괜찮아진 몸 상태가 황당하기까지 했다.
허리를 앞으로 빼고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당장 손바닥을 맞잡고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연인이라면 해도 되지 않을까.
“대표님, 키스해도 돼요…?”
한태경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대답이 없었다. 그는 서해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걷어냈다.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안 돼요?”
“지금 본인 모습이 어떤지는 알고 그런 말 합니까.”
가까이 붙어있던 얼굴이 살짝 떨어지고 서해의 얼굴이 빨개졌다. 빼꼼히 빠져나온 혓바닥이 터져서 따끔따끔한 입술 가장자리를 몇 차례 훑고 지나갔다. 부어오른 입술 끝이 어색해 반복적으로 입술을 훑었다.
생각해 보니 어떤 모습으로 병원으로 오게 되었는지가 그제야 떠올랐다. 서해는 입술을 베어 물고 등을 둥글게 말아 몸을 뒤로 물렸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어떤 기분으로 회사까지 찾아갔는지 알면.”
“윽.”
“겁도 없이 그런 말을 뱉고 그러진 못할 겁니다.”
기다란 손가락이 등 뒤에 묶여있던 환자복의 매듭을 차례대로 풀어냈다.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어진 환자복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한태경은 서해를 침대 위로 눕혔다. 갑자기 바뀐 시야에 아래에서 올려다본 그의 눈빛이 조명을 받아 일렁거렸다.
철제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병원 침대는 한태경이 서해의 몸 위로 겹쳐 올라오자마자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느릿하게 병원복을 끌어 내리고 아까부터 보일 듯 말 듯 하던 쇄골 위에 남겨진 멍 자국을 끄집어냈다.
기다란 손가락이 멍 자국 위를 스치듯 오갔다. 다른 사람이 서해의 몸에 남긴 흔적은 한태경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대, 대표님.”
옅은 통증이 찾아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서해는 자꾸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들어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 터진 입술로 키스해 달라고 보챌 때는 언제고, 왜 또.”
“이거는, 여기 병원인데요.”
“그거나 이거나.”
“의사 선생님이 회진 온다고 했어요.”
“이 시간에 누가 회진을 옵니까.”
어깨 아래로 둥글게 맺힌 멍 자국을 바라보던 한태경은 헐렁하게 풀린 환자복을 끌어 내리고 입술을 붙였다.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움직임이었다.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서해의 어깨가 자꾸 앞으로 말렸다. 이대로 환자복이 풀어지고 패팅이라도 이어질까 봐 무서웠는데, 화난 것 같은 한태경의 모습에 쉽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허리 근처에서 펼쳐져 있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낀 한태경이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좌우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이 보였다.
“말했잖아요. 서해 씨에게 화내는 거 아닙니다.”
“…….”
“나랑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얘기했는데, 약속한 것 못 지킨 스스로에게 화나서 그러는 거예요. 서해 씨가 무서워하는 사람 다시 마주치게나 만들고.”
“괜찮아요. 대표님이 잘못하신 게 아닌데요. 그리고 권 상무님 마주쳐서 무서운 것보다, 대표님 다시 못 보는 줄 알고….”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요.”
한태경은 서해와 입술을 맞붙이려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마음 같아선 남아있는 상처 위에 새로운 흔적을 남겨서라도 권율기가 남긴 흔적을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붉은 기가 올라오고 점점 더 부어오는 입술 앞에서 물러섰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내려다보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입술이 닿기를 기대하던 서해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스쳤다.
“그래서 말인데요. 또 이렇게 되면 안 되니까 갑자기 든 생각인데요.”
“응.”
“저, 이제 택시 말고 차 사려고요.”
“차?”
“대표님은 다른 일도 많은데 괜히 저 때문에 시간 쓰시는 것 같아서요. 회사랑 아파트 단지 안쪽으로는 외부인이 들어오기 힘드니까, 제가 직접 운전하고 다니면 덜…. 대표님….”
조용히 말을 이어가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어지다가 끝내 흩어졌다. 서해는 손을 뻗어서 마주한 허리 위에 손을 얹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태경의 한쪽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팔을 굽히고 다리와 치골, 가슴까지 바짝 붙이고 있던 한태경이 서해의 턱을 감싸듯 잡았다.
“매일 타겠다는 거 아니고 대표님 바쁠 때만….”
“꼬박꼬박 데리러 갈 테니까 갈 때까지 기다려요. 내가 바빠서 늦어지면, 서해 씨가 기다려요.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늦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땐 윤선우가 죽는 거지.”
어쩐지 복잡해질 것 같은 회사 생활이 서해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있는 한태경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커다란 몸을 움직여 서해의 시선을 외면한 한태경이 옆으로 비스듬히 떨어져 내렸다. 한쪽 팔을 뻗어 서해의 가슴과 어깨를 감싼 그는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몇 시간 동안 불안하게 찾아 헤매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는 것 같았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것들이 정리되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서해 씨가 다치게 될지도 모르고, 쓸데없는 고민 같은 거 하느라 일 처리가 늦어졌네요. 차는…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불편해도 조금만 더 참아요.”
“고민요?”
“갑자기 졸리네.”
“말 돌리지 마세요.”
“진짜입니다. 며칠 동안 법무팀, 감사팀이랑 예상 시나리오 그려보느라 얼마나 야근을 했던지. 나도 내일 결근계 써야겠습니다.”
“어디 아프세요?”
“아프긴…. 설계가 끝났으니 사냥을 해야지. 그리고 나는 서해 씨 옆에서… 돌봐주고….”
“어, 저는 괜찮은데.”
갑자기 졸린다는 그의 말은 정말이었는지 금방 말끝이 늘어졌다. 한태경은 서해의 가슴 위로 팔을 올려둔 뒤 반대쪽 어깨를 잡고 잠이 들었다.
서해는 한태경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하고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팔을 들어 올렸다. 팔을 굽혀 어깨 근처에 손을 올렸다. 어깨를 감싸고 있는 한태경의 손끝에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키스는 해주지 않았지만, 손 정도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서해는 팔을 굽히고 손가락 끝을 구부렸다. 한태경의 손가락 사이에 겨우 엄지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은 서해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둘은 평소와 다르게 아침 시간이 될 때까지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서해가 온기를 찾아 파고들자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눈을 찌푸렸지만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에 잠에 빠져들었다. 복도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다시 눈을 떴다.
“대표님, 일어나셔야 할 것 같아요. 밖에 간호사들 온 것 같아요.”
“응.”
잠꼬대인지 대답인지 모호했다.
서해는 손을 뻗어 몸을 끌어안고 있는 한태경의 팔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천천히 눈을 뜬 한태경은 눈을 잔뜩 찌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늘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움직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자리에 누운 채 엉망으로 뒤집힌 한태경의 머리카락을 올려다보는 서해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담겼다.
서해는 손을 들어 이리저리 뻗친 머리카락 끝 여기저기를 훑었다. 손끝의 간지러운 감각 때문인지, 아침이라 그런 것인지, 옆에 한태경이 있기 때문인지 허리 아래가 뻐근해졌다. 맞붙어있던 배와 가슴이 간질간질해서 저도 모르게 품으로 파고들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천천히 밀어내는 손길에 멀리 떨어졌다. 서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다가 한태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마 앞으로 꿀밤이라도 날아올 것 같은 서늘한 표정에 눈이 감겼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눈을 다시 떴다.
“언제 일어났습니까.”
“방금요.”
“몸은 괜찮아요?”
“네.”
“난 잠시 나가서 씻고 올 테니까 회진 기다리고 있어요.”
“…네.”
서해는 이불 끝을 말아 쥐었다.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 자신이 먼저 다가간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빴나 아니면 실수했나. 저도 모르게 삐죽거리는 입술을 말아 넣었다. 계약이 먼저인지 연애가 먼저인지를 생각해 보다가, 계약을 먼저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그래도 마음은 서운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옆자리에 손을 밀어 넣다가 아예 몸을 굴려 한태경이 누워있던 자리로 이동했다. 처음엔 손이, 그다음엔 팔이 그러다 아예 엎드리고 잔열감을 느꼈다.
자리가 식어버릴 때까지도 한태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간호사가 들어와 링거 바늘을 빼고 그 자리에 밴드를 붙여주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주치의와 그 뒤를 따르는 전문의 몇 명이 들어왔다. 가장 앞에 서있던 주치의 선생님이 웃으며 서해가 누워있던 침대 발끝으로 걸어왔다.
“환자분, 의식 찾으셨네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몸은 어때요?”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평소랑 같아요.”
“다행이네요. 검사 소견은 이상 없고. 보호자가 증상을 설명한 거로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가 힘들어요. 과호흡 증후군이나 불안 발작일 수도 있고 이게 공황 발작으로 이어질 수도 있어요. 전에도 이런 증상 있었어요?”
“어… 가, 끔요. 자주는 아니고 가끔.”
“응급실 온 적은 많아요?”
“아니요, 처음이에요. 의식을 잃은 적도 처음이고요.”
“발작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거예요, 아니면 예상 가는 이유가 있어요?”
“예상 요인이 있습니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포인트들이 있어요.”
서해가 대답하지 못하고 멈칫하자 언제 돌아왔는지 한태경이 대신 대답했다. 간단히 세수만 하고 온 듯한 그의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예상된 요인이 공포증으로 이어지면 외부적 스트레스 요인에 의해서도 공황 발작이 일어날 수 있어요. 신경정신과 상담 예약하시고 검사받으시는 게 좋습니다. 치료받으면 증상은 심각해지지 않을 거예요. 접수하시는 걸 권유 드립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태경이 대답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해는 손끝을 미끄러트렸다. 이런 검사는 받아본 적이 없어 무서웠고, 검사 결과가 많이 안 좋게 나와서 그가 신경 쓸 일이 더 생길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접수과 가셔서 진료 예약하시고 당분간은 처방해 드리는 약 드세요. 항불안제 관련 약이라 몸이 나른하고 피곤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술 그리고 담배는 절대 금지입니다. 카페인도 섭취하시면 안 돼요. 커피, 에너지 드링크도 마시면 안 되고 녹차도 마시면 안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퇴원하셔도 좋습니다. 당분간은 무리해서 일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세요.”
의료진이 우르르 빠져나간 자리는 조용했다.
서해는 침대에서 내려와 옷장 문을 열었다. 회사에서 퇴근할 때 입고 있던 슈트와 셔츠가 그대로 걸려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던 서해는 등 뒤에 나란히 묶여있는 매듭 때문에 손을 이리저리 뻗다가 한태경과 눈이 마주쳤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려다가, 어제부터 이런저런 요청을 거부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나 몸을 반대로 틀었다.
겨우 손끝에 걸린 매듭을 잡아당기려고 할 때였다. 서해와 떨어져 서있던 한태경이 다가왔다. 괜히 긴장되어서 하던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합니까.”
“옷이 잘 안 풀려서요.”
“이리 와요.”
서해는 쭈뼛거리며 걸어갔다. 한태경은 서해를 끌어안고 어깨너머로 보이는 매듭을 하나씩 풀어냈다. 등 뒤로 손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긴장한 몸이 움찔거렸다.
매듭이 풀어진 옷은 양쪽 팔에 떨어져 내렸다. 옆으로 피하듯 떨어져 옷장 앞으로 도망갔다. 구겨진 셔츠를 입고 슈트까지 다시 껴입은 뒤 거울도 보지 못한 채 재빨리 머리를 다듬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태경의 곁으로 다가가자 서해의 등 뒤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그는 서해를 데리고 접수과로 가서 추가 진단과 상담을 예약했다. 일정을 조절하다 보니 당장 검사는 불가능했고 2주 뒤에서야 가능했다.
수납을 마치고 약을 받자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진료 날짜에 같이 와요. 혼자 올 생각 하지 말고.”
“네, 대표님.”
“이번 주 금, 토, 일은 회사 일, 개인 일 다 금지입니다.”
“…저 괜찮은데.”
“괜찮은 사람 얼굴이 참 볼만하네요.”
몸을 틀어 한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걸어가던 서해는 서둘러 그의 옆에 붙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어보자 광대 쪽이 살짝 시큰거렸다. 그래도 입술이 회복되는 속도는 꽤 빨랐다. 손가락으로 입가를 만져보다가 생각했다.
집에 돌아가면 내가 먼저 키스해 줘야지. 그동안 대표님 보고 싶었던 만큼 잔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