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얼룩
저녁을 먹고 카우치에 나란히 앉았다. 서해는 카우치 위에 다리를 올리고 한태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드레스 룸에서 골라준 보트넥 티셔츠를 입고 겨우 사정해 허락받은 드로어즈 아래로 곧은 다리가 뻗어있었다.
TV에서는 들릴 듯 말 듯 낮은 소리로 뉴스거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해는 손을 쭉 뻗어 테이블 위에 있던 과일을 집어 올렸다.
“UT 1팀 만나보니까 어때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책임님들과는 처음 만난 거나 마찬가지고, 이곤 씨랑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요.”
“그렇습니까.”
“대표님이랑 했던 얘기가 있어서 그런지, 모두 마케팅 부서 출신이어서 조금 신경 쓰이기는 한데….”
“평소 하던 대로 하세요. 여차하면 대표실로 도망치든가.”
“…대표님, 진짜 저 그렇게 어린애 아니거든요.”
한태경의 어깨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 서해가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길고 서늘한 손가락이 이마와 관자놀이를 훑고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사라졌다.
아쉬운 마음에 허벅지에 뒷머리를 비비자 손가락이 다시 이마 위에 덮이는 게 느껴졌다. 서해는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조금만 버텨요. 이번 주 지나면 윤선우 팀장이 합류하기로 했으니까 직접 상황을 살필 일은 없을 겁니다. 나도 불안하게 지켜보지 않아도 되고.”
“윤선우 팀장님이랑은 알고 지내던 사이예요?”
“조금.”
TV에 나이브레티 관련 헤드라인이 올라왔다. 서해는 몸을 옆으로 돌려 TV를 바라보다가 볼륨을 올렸다. 뉴스 화면에는 권율기가 기자 회견을 하고 있었다.
서해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권율기 현 나이브레티 상무가 불구속 기소 상태로 경찰 조사를 받은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이브레티 그룹은 비자금 조성과 폭력 조직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게 되어 한숨 돌리는 분위기입니다….
TV에 나와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 서해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증거 불충분과 예외 조항들이 잔뜩 쏟아져 내리고 결국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무릎 위에 올라와 있던 서해의 주먹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서해의 눈에 가증스러운 표정이 클로즈업되어 보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엉킨 실타래가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길게 뱉어지던 숨이 점점 짧아졌다.
한태경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서해의 어깨를 팔로 감싸고 손바닥으로 천천히 팔뚝을 쓰다듬었다. 온기 가득한 손길이 반복해서 같은 곳을 문지르자 팔을 타고 안정감이 전달됐다.
“수사 결과는 미리 알고 있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서 얘기 못 했습니다. 얘기해 봤자 당장 해결 못 할 일로 머리만 아플 일이라… 서해 씨가 원하던 처벌은 아니겠습니다.”
“그렇게 쉬울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미안합니다. 깔끔하게 정리됐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니에요. 저에게는 지금껏 신경 써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회사 일로 대표님과 엮이기 시작한 것 같아서 그게 마음 쓰여요.”
한태경은 손을 뻗어 서해의 턱을 감싸 쥐고 짧게 키스한 뒤 떨어졌다.
“회사 일은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우습긴 합니다만, 권율기 덕분에 서해 씨랑 같이 있을 수 있게 된 건 좋은 일이네요.”
서해는 짧게 웃음 짓고 한태경의 허리를 끌어안아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부터 조금 시끄러울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대표님이랑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지원 사격할게요.”
“그 마음은 고마운데, 서해가 앞에 나서서 할 일은 없으니까 윤선우 팀장이랑 CES 백업이나 잘해 줘요.”
“그건 제 전문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은 어떻게 할 계획이세요?”
“본사 법무팀 TF 지원받기로 했고, 한국 지사에 있는 감사팀이랑 같이 조태용 전무 흔적들 밟아 나가기 시작할 겁니다. 조태용 전 전무 이사가 나이브레티로 옮겼다는 건 이미 업계 내에서는 알려진 사실이라, 권율기와 브리지를 찾아내는 게 관건이긴 합니다. 걱정되는 건 회사가 아니라.”
“그럼요?”
“내가 제일 걱정되는 건 서해 씨네요. 당분간은 출퇴근 때 떨어지지 말고 조심합시다.”
“따로 간다고 말씀드렸을 때 날카로웠던 게 이것 때문이었어요?”
“반은 맞고.”
“나머지 반은 뭐예요?”
“평소에도 떨어지지 말라고 했으니까.”
“어, 저는 회사 일 관련된 줄 알고….”
서해는 한태경이 눕히는 손길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두꺼운 상체가 가슴을 누르고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단단히 옭아맨 다리가 서해를 내리눌렀다. 팔이 접힌 채 품 안에 갇혀 손가락 발가락을 제외하고서는 꼼짝할 수 없었다. 서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해주면 본인 표정이 어떤지 알고 있어요?”
“아니요.”
“좋아 죽겠다는 표정입니다.”
또 들켰다. 카우치에 누워있던 서해에게서 잔잔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눌려 숨 쉬는 게 빠듯해졌지만 상관없었다.
점점 짧게 뱉어지는 숨소리를 듣고 있던 한태경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손가락을 움직인 서해가 어깨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전에 없이 다급하게 잡은 손가락 끝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불안해요?”
“…조금….”
“어떻게 해줄까. 며칠 병가 내고 쉬든가, 아니면 이번 일이 해결될 때까지 휴직하든가.”
“그럼 UT 1팀 업무나 CES는요.”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본인부터 생각해야지.”
“그러고 집에 혼자 있으면 더 불안할 것 같기도 하고… 하던 일도 마무리하고 싶고, CES에도 정말 가고 싶어요.”
“겁은 많은 게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는.”
이마와 눈가에 잔뜩 키스를 남긴 한태경이 다시 몸을 바짝 붙여왔다. 무게감과 구속감이 느껴지자 발밑에서 흔들어대는 것 같은 불안함이 조금은 옅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해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기만을 반복하며 짧은 숨을 내뱉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고 책임님!”
“이곤 씨, 좋은 구경 놓쳤네, 여기 들어오면 호미파이 자동 세팅 되는 거 봐야 하는데. 1등으로 온 사람만 볼 수 있으니까 내일 다시 도전해 봐요. 끝내줍니다, 진짜로.”
“안 그래도 그거 보려고 일찍 왔는데 고 책임님 먼저 와계실 줄 몰랐어요. 내일 더 일찍 오겠습니다.”
“내가 시간 맞춰서 올 테니까 너무 일찍 올 필요 없어요. 실험 설계하기 전에 한 번쯤은 봐두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내일 확인해 봐요. 그리고 커피 머신 앞에 가봐. 어제 어플에 세팅해 둔 대로 아이스 라떼 내려와 있을걸?”
“헐, 진짜요?”
이곤은 자리를 당겨 가방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켰다. 고재욱 책임이 말한 대로 커피 머신 아래에는 이곤이 세팅해 둔 아이스 라떼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있느냐며 감탄한 이곤은 자리로 돌아와 고 책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와, 책임님. 지금 포털 메인에 올라온 기업인 인터뷰 보셨어요?”
“왜요, 어느 회사에 이슈 터졌어요?”
“조태용 전무님이 나이브레티 소속으로 인터뷰한 기사가 올라와 있어요.”
“뭐요? 이곤 씨, 어디 포털이에요?”
38층에 마우스 스크롤 소리와 클릭 소리만 울렸다. 웃으며 대화하던 고 책임과 이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고 책임은 화면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조태용 전무님 인터뷰 읽을수록 소름 돋는데. ‘2000년도에 IT산업에 뛰어들 때부터 인공 지능 사업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고민해 온 것은 기술 혁신의 가치에 사용자를 중점으로 두고자 한 것이었다…. 나이브레티의 비전이 나의 가치관과 부합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분 글로벌유니티 진골로 뼛가루까지 갈아 바칠 기세였던 그분 맞나?”
“…책임님, 저 소름 돋았어요.”
“나이브레티 후계자인 권율기 상무가 검찰 조사 건으로 전면에 나오기 어려우니까 당분간 조태용 전무가 얼굴마담으로 나오려나 본데… 이해가 안 가네요. 오너가도 아니고 나이브레티에서 조태용 전무를 왜 이렇게까지 데려가서 밀어주는 거지?”
고 책임은 이곤에게 하는 듯 혼잣말을 하는 듯 중얼거렸다. 기사를 계속해서 읽어 내리던 고 책임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됐다.
“그리고 인공 지능 사업은 대표님이 미국 계실 때부터 랩실 꾸려서 기반 설계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 회장님 지원도 어마어마하게 들어갔고.”
“저도 그렇게 들었거든요. 새로 조직하려는 연구소도 대표님 생각인 걸로 알고 있는데….”
“회사 나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저러시나. 나이브레티가 인공 지능 사업에 관심도 없던 건 업계에선 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 상도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뭔가 찝찝하네요.”
뭐라고 대꾸하지 못한 이곤이 조용히 스크롤을 내렸다. 몇 개 없는 댓글에는 CES에서 기대된다는 내용과 나이브레티를 응원하는 내용이 있었고, 해당 인터뷰를 스크랩해가는 관련인들이 보였다.
“굿 모닝!”
“민 책임, 이거 좀 봐봐. 링크 보내줄게. 조태용 전무님 나이브레티 갔어.”
“…그래요?”
“우리랑도 연관되어 있어. 읽어봐. CES 기점으로 기세 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럴게요. 서해 선임은 아직 안 왔어요?”
“왔어. 오자마자 대표님이랑 새로 생긴 비서실 갔어. 인수인계하고 온대.”
자리에 앉은 민태영 책임이 노트북을 펴고 데스크 위를 업무용으로 세팅했다.
“그럼 서해 선임 오면 바로 회의 시작할까요? 일정이 촉박해서 그런가 마음이 조금 급하네요. 다들 어때요?”
“넵. 전 좋습니다, 민 책임님.”
“이곤 씨, 글라스 보드랑 포스트잇 그리고 마커 같은 회의 물품들 좀 챙겨줄래요? 우린 찾아온 자료 뽑아올 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곤은 책상 한쪽에 쌓여있던 포스트잇과 메모장을 모아 글라스 보드 앞에 세팅했다.
의자를 밀어 가까이 모인 셋이 조태용 전무와 관련한 가십들을 얘기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한태경과 서해가 들어왔다.
“서해 선임, 우리 회의 시작하려는데요.”
“아, 네 책임님. 지금 가겠습니다.”
UT 1팀은 기다렸다는 듯 서해를 불러 회의를 시작했다.
급하게 꾸려진 팀이었고 처음으로 손발을 맞춰보는 프로젝트였지만 생각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한태경이 얘기했던 것처럼 고 책임과 민 책임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해 보였다. 둘은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 제법 시원하게 방향을 잡아주었다.
가만히 내용을 듣고 있던 고 책임이 의견을 종합해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럼 인터뷰 메인 타깃은 가전을 사려는 혹은 산 신혼부부들, 그리고 세컨드 타깃은 가전을 10년 이상 써서 교체 주기가 찾아온 중장년층. 이렇게 잡고 진행하는 데 동의하시는 거죠?”
“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호미파이 앱 사용성 테스트도 함께 해보면 좋은데 외부인을 부를 수 없다는 점이네요. 중장년층 IT 기기 사용 능숙도에 따라서 집단 나눠서 비교해 보면 좋을 텐데요.”
“그건 서해 선임 말이 맞는데, 우선은 내부 테스트 먼저 해보는 수밖에.”
“그럼 적어도 사업부라도 가전 쪽에 안 계신 분들을 참여시켰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주방에서 능숙하게 요리하시는 분들, 잘 모르시는 분들도 반반 섞고요.”
고 책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해의 의견에 동의했다. 둘 사이에서 대화의 핑퐁이 오갈 때마다 이곤의 고개가 좌우로 왔다 가기를 반복했다.
“좋아, 그렇게라도 해보자. 민 책임 생각은 어때?”
“좋아요. 그럼 작업 부하 유형이나 평가 척도 관련 자료 찾아서, 보자. 세 시까지 여기서 모이는 건 어때요?”
“네, 알겠습니다. 아, 이곤 씨. 따라오고 있어요?”
“…아니요, 선임님….”
머쓱해진 이곤이 난감한 표정으로 웃자, 서해가 이곤이 앉아있던 의자를 당겨 제 옆에 앉혀놓았다.
“서해 선임이 이곤 씨 좀 챙겨줘요. 큰 줄기 나오면 작은 것들은 이곤 씨에게 리서치시키고. 그 뒤엔 참여자 리쿠르팅 하는 법 알려주세요.”
“네, 그럴게요.”
이곤은 큰 덩치에 맞지 않게 몸을 웅크리고 서해 옆에 바짝 붙었다. 대충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한 내용이 있어 하나씩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선임님 시간만 뺏는 것 같아요.”
“괜찮아요.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스칼라 사이트에 우회 접속하는 방법 알려줄게요. 이건 거의 매일 사용해야 할 거예요. 논문 검색하는 방법은 알고 있어요?”
“네.”
“지금 책임님들이 찾아달라고 한 건 실험 설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모형이에요. 설문지 응답 같은 건 해봤어요? 타 사업부에서 설문해 달라고 요청 왔던 적이 있다거나.”
“네, 있어요.”
“잘됐네요. 그런 문항들 만들려고 조사하는 건데, 우린 가전을 직접 사용해 본 사람들에게 평가를 부탁해야 하니까 단순 설문지 작성이랑은 조금 달라질 거예요. 작업 부하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와 평가 가능한 설문 척도가 함께 올라와 있는 논문이 있으면 가장 좋고, 각각 따로 올라와 있는 논문도 상관없어요. 찾아낸 관련 자료들 전부를 모아주면 돼요. 걸러내는 건 다 같이 모여서 진행할 거니까.”
“아, 네.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요. 작업부하 관련 도구나 평가 측정 설문이 들어간 논문 위주로 찾아보겠습니다.”
“샘플 한두 개 정도만 같이 찾아보고, 그다음 흩어져서 찾아보는 거로 할까요?”
“넵, 선임님.”
서해는 자료 조사는 어디에서 들어가는지, 빠르게 검색하기 위해서 사전 세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찾아놓은 자료 분류는 어떻게 해 두었을 때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서해의 설명을 제법 빠르게 이해한 이곤은 금방 자리로 돌아가 제 몫의 역할을 해냈다.
38층 창가 앞에 마련된 데스크에서는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스크롤하는 소리 그리고 가끔 이곤이 무언가를 물어보는 목소리만 잔잔히 울렸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칼같이 의자를 붙이고 앉은 UT 1팀은 하루 만에 끝장을 볼 기세로 회의를 진행했다. 넓은 공간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없이 자료를 찾던 서해의 어깨가 한 차례 들썩거렸다.
“쉬었다 합시다. 서해 선임만 그런 줄 알았는데 UT 1팀 전부 성격 비슷하네. 지금 네 시 넘은 건 알고 있습니까?”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대표님.”
테이크아웃 캐리어에는 프라푸치노 음료가 담겨있었다. 집중하느라 당이 떨어지는지도 몰랐던 넷은 손에 음료를 하나씩 쥐고 달콤함을 음미했다. 음료에 집중한 UT 1팀은 한태경이 음료를 놓고 사라진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대표님은 혼자 드시나……?”
“잠깐, 여기 음료가 다섯 개인데?”
서해는 캐리어에 덩그러니 남겨진 프라푸치노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드리고 올게요.”
“서해 선임, 하나 더 가져가서 대표님이랑 먹고 와요. 우리끼리 먹는 것 같아서 좀 그런데 그렇다고 우르르 가서 먹으려니까 그것도 좀 모양새가 이상해서.”
“그럴까요?”
“그래도 우리 중엔 제일 대표님이랑 익숙해졌을 것 같아서. 부탁해….”
“전 괜찮아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렵게 부탁하는 고 책임을 마주하고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서해는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는 걸 막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셋은 얼굴을 마주하고 그동안 찾은 논문과 자료에 관해 이야기하느라 정신없었다.
똑똑―
“네.”
“대표님, 음료 놓고 가셔서 가져왔어요. 저도 같이 먹고 가려는데, 바쁘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서해는 양손에 프라푸치노를 들고 한태경이 앉아있는 책상 앞쪽으로 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서해를 바라보다가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어제처럼 책상에 앉아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한태경의 옆으로 다가섰다.
“아주 신났지.”
“네?”
순식간이었다. 업무에 집중하느라 풀어진 재킷 사이로 떨어진 넥타이가 잡아채졌다. 음료를 손에 든 채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넘어질까 봐 다리에 힘을 줬는데, 무릎 옆에 가해진 타격감에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아슬아슬하게 쏟아지지 않고 바닥에 놓인 음료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핏줄이 툭 붉어진 커다란 손이 눈앞으로 쑥 들어왔다. 넥타이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상체가 어디론가 끌려갔다.
서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책상 가운데를 향해 무릎으로 기어갔다. 한태경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벌린 채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윽.”
“모르면 모르게 두고 깨지면서 배우게 둬야지, 뭘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조곤조곤 설명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던데.”
“가… 가르쳐줘야 일을 나눠서…. 잠깐만요. 대표님.”
“조용히 하세요. 밖에서 듣습니다.”
한태경은 서해의 넥타이를 짧게 말아 쥐고 목을 바짝 당겼다. 뒤로 물러서려는 서해를 잡아채고 기어코 다리 사이에 앉혀놓았다.
그는 나머지 손으로 서해의 목덜미를 잡은 뒤 그대로 다리 사이로 잡아당겼다. 지퍼와 벨트 근처에 코와 입이 엉망으로 비벼졌다.
“흐읍….”
“당장 묶어놓고 엉덩이가 빨갛게 될 때까지 때리면 기분이 풀릴 것 같기도 하고.”
서해는 급히 한태경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잡고 머리를 물렸다. 의외로 쉽게 몸을 물리고 한 차례 휘청거린 뒤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빙 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몸을 천천히 뒤로 빼자 한태경이 다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그는 근처에서 훔쳐 듣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여기서 잘하면 오늘 밖에서 있었던 일은 없던 거로 해 주겠습니다.”
서해의 두 눈이 아래로 축 내려가고 입술이 움찔거렸다. 끝까지 버티고 있자 의자가 앞으로 기울여지는 소리가 났다. 한태경은 서해가 시키는 대로 하기 전까지는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주말까지 기다렸다가 눈물 콧물 쏙 뺄 생각을 하니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누가 들어오기 전에 끝내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나가면 모르지 않을까. 서해는 무릎을 접고 바닥에 앉았다. 손을 뻗어 지퍼를 잡아 내리자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손 쓰지 말아요.”
“대표님, 넥타이 때문에 잘… 안 보여서.”
고개를 돌려 서해를 내려다본 한태경이 바짝 당겨 잡고 있던 넥타이를 여유 있게 풀어주었다.
서해는 턱을 앞으로 내밀고 이를 세워 지퍼를 끌어 내렸다. 코끝이 지퍼에 닿아 톡 쏘이는 느낌이 났다. 급한 마음에 얼굴을 좌우로 비비며 파묻었다.
다시 이를 세워 드로어즈 사이를 앞니로 벌렸다. 코끝이 닿자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성기를 서둘러 틈으로 꺼냈다. 선단 옆으로 툭툭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핏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동안 몸을 헤집던 기둥을 마주하고 있자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 눈을 감고 입을 벌려 물고 혀로 귀두를 핥아 올렸다. 다 커진 것 같았던 기둥 끝에 혀가 닿을 때마다 부풀어 올랐다.
서해는 잠시 얼굴을 물렸다가 입가를 핥았다. 그대로 머금었다간 찢어질 것 같았다. 고민하는 동안 자꾸 크기를 키워가는 성기를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그동안 힘들었던 섹스의 이유를 대면하는 순간 머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목덜미에 커다란 손이 덮이고 얼굴이 다리 사이에 비벼졌다. 재촉하는 듯한 그의 움직임에 천천히 입을 벌리고 전체를 머금었다. 혀를 둥글게 말고 머리를 물렸다가 다시 들어갈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를 들은 서해는 끝을 입에 문 채 한태경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기분에 몸이 바짝 웅크려졌다. 서해는 짧게 끊어질 정도로 가빠지는 숨을 애써 눌러 참았다.
“네.”
“흐, 흐윽….”
“쉿. 조용히 해야지.”
무릎과 손으로 기어 뒤로 물러나려 했는데, 한태경은 서해의 목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척추를 타고 돋아 오른 소름이 팔과 다리로 가득 솟았다. 서해는 입에 귀두를 머금은 채로 겨우 무릎을 움직여 책상 밑으로 숨어들었다.
몸을 숨기자마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한쪽 손으로 잡고 있는 목덜미를 놓아주지 않아 서해는 두 손을 들어 가쁘게 흘러나오는 숨소리를 막았다. 손으로 코와 입 주위를 둥글게 감싼 다음 몸을 웅크렸다. 목덜미를 내리누르던 손이 토닥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대표님, 김이곤입니다.”
“들어오세요.”
“어… 서해 선임님 여기 안 오셨나요?”
“글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숨도 제대로 들이켜지 못한 서해는 그대로 굳었다. 책상 안쪽 바닥에 아슬아슬한 각도로 놓인 음료가 보였다. 저도 모르게 혓바닥을 굴려 타액을 삼켰다. 그러자 목덜미를 잡은 손바닥 힘이 세졌다가 약해졌다.
서해는 속눈썹이 묻혀들어 갈 정도로 눈을 꽉 감았다. 입안 가득 밀고 들어온 성기가 입천장을 훑고 들어와 목젖을 꾹 눌렀다. 기침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에 입 주위를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그 순간 벌어진 다리 사이로 티 없이 잘 닦인 구두가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허벅지 안쪽을 느릿하게 쓸어 올리는 구두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서해는 꾹 감고 있던 눈을 크게 떴다가 감았다. 끝까지 밀고 들어와 성기를 짓밟는 구두를 무력하게 느끼는 방법 말고는 피할 길이 없었다.
고개가 급히 뒤로 젖혀지고 책상과 의자 사이에 난 틈으로 한태경을 올려다보았다. 앉아있는 각도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좌우로 비벼지는 무심한 발길에 서해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머릿속이 빨갛게 변한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의 아슬아슬함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다시 멈췄다.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낸 서해는 한태경의 무릎 근처를 꽉 잡았다.
“어… 음료 들고 이쪽으로 가시는 것 같았는데, 제가 잘못 봤던 것 같습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
분명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한 서해가 보이지 않자 이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태경을 향해 인사하고 다시 나가 보려고 시선을 들어 올린 순간, 모서리에 놓여있는 자동차 키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서해에게 주워줬던 차 키와 같은 브랜드였고 심지어 같은 모양이었다.
이곤의 시선이 차 키로 들어가 박혔다. 최신형 기능이 탑재된 최고급 자동차 키가 한 사무실에서 발견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던 이곤은 몇 차례 눈을 깜박거렸다.
시선을 들어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좀처럼 웃는 얼굴을 본 적 없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시선이 다시 차 키로 내려가 꽂혔다.
“잠시 나갔나 봅니다. 전화라도 해줄까요?”
태연하게 전화하겠다고 말하는 한태경의 목소리를 들은 서해는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무릎에 붙어있던 손을 떼어내고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 전화를 더듬거리며 찾았다. 전화가 오기 전에 전원을 끄려는 손이 덜덜 떨렸다.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던 버튼의 위치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아닙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대표님.”
“그래요.”
이곤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서해는 천천히 입을 벌리고 들어오는 성기를 가득 베어 물었다. 다시 둘만 남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워 다른 것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부풀어 오른 귀두 끝이 입천장의 주름을 훑고 지나가길 수차례였고 목젖을 툭툭 건드리길 반복했다.
“읍….”
서해는 허벅지 안쪽을 꽉 잡고 턱을 벌렸다. 미끄러지는 소리와 어딘가 끈적이며 달라붙는 소리가 이어졌다. 혀를 들어 올려 귀두 끝의 갈라진 틈을 파고들다가 혓바닥으로 기둥을 쓸어 올리길 반복했다. 머리 위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서해가 반쯤은 감긴 눈으로 겨우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태경의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이 사정하듯 무릎 안쪽을 몇 차례 쓰다듬었다.
서해는 도망치는 대신 눈을 감고 한태경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절반 정도 들어와 있던 성기가 아주 느리게 목구멍을 벌리고 들어섰다. 헐떡거리는 혓바닥을 애써 납작하게 만들었다. 목구멍 안쪽이 깊이 밀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잘했다는 듯 뒷머리를 토닥이던 한태경은 목구멍을 찢어 벌릴 듯이 누르고 몇 차례에 걸쳐 사정했다. 커다란 손이 서해의 귓가를 감싸고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쓰다듬었다.
입술을 둥글게 모은 서해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성기에 붙은 타액과 점성이 흘러내리지 않게 빨아올렸다.
입술에 고여있던 타액을 엄지손가락으로 훑어낸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여상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있던 티슈를 몇 장 뽑아냈다. 억눌린 기침 소리가 몇 차례 터져 나왔다.
“세상 억울한 표정이네요. 본인이 했던 행동에 비하면 많이 봐준 건데. 뱉어요.”
“으….”
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눈가가 순식간에 목 아래까지 번졌다.
책상 아래에 놓여있던 쓰레기통에는 그 흔한 휴지 한 조각 들어있지 않았다. 타액에 젖은 휴지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상상해 본 서해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뱉으라니까.”
고개를 붕붕 저은 뒤 힘주어 꿀꺽 삼켰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대표실 안에 크게 올렸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한태경은 서해의 이마에 꿀밤을 내린 뒤 서해를 일으켜 세웠다. 물티슈와 티슈로 주변을 정리하고 다시 옷을 갖춰 입은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자신만 엉망으로 헝클어진 것 같다고 생각한 서해가 옷을 당겨 내리며 옷자락을 정리했다. 알 수 없는 방향제 향에 묻은 타액이 결국 쓰레기통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청소해 주시는 여사님이 보시면 조금….”
“누가 쓰레기통을 뒤져가면서 버립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물티슈를 더 뽑아 든 한태경이 서해의 입가를 정리해 주고 떨어졌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시계를 확인했다. 서해는 그의 눈썹 사이가 찌푸려지는 것이 자신이 말을 듣지 않은 것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앉아있다가 진정되면 나와요. 최소 10분 이상.”
“대표님은 어디 가세요?”
“난 회의가 있어서 내려가 봐야 합니다.”
“다녀오세요. 저도 회의 마저 마치고 기다릴게요. 혹시 늦어지면 연락 주세요.”
서해는 금주 들어 바빠진 한태경의 얼굴이 급격히 까칠해진 것 같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래도 높게 솟아있던 콧대가 유난히 더 높아진 것 같았고, 턱선이 더 날카로워진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등을 돌리고 밖으로 향한 그는 단번에 대표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의자 옆에서 덩그러니 서있던 서해는 혹시라도 밖에서 직원들이 들어올까 봐 책상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다가 눈앞에 덩그러니 놓인 두 잔의 음료를 보고 난감해졌다. 양손에 음료를 들고 번갈아 한 입씩 마시던 서해는 아쉬운 눈으로 음료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 * *
37층 대회의실 옆으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 비서실이 보였다. 비서진들의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모니터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새롭게 부임한 비서실장과 다섯의 비서진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업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진 비서실장의 재킷이 그가 걸어 다닐 때마다 펄럭거렸다.
“김 비서, 홍보팀에 연락해서 보도 자료 준비 어디까지 됐나 확인해 주고. 늦어도 오늘 퇴근 전까지는 언론에 넘겨야 하니까, 필요하다면 재촉해요.”
“네, 실장님.”
“박 비서는 10분 뒤에 대표님과 감사팀이랑 회의 때 검토할 자료 최종 확인해 주세요. 권 비서는 오전 회의록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주세요. 다듬어서 전송할 시간 없으니까 마무리하고 아웃룩 전송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직 뜯지도 못한 박스가 비서실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비서실 가운데 아무렇게나 놓인 화분은 실장의 기분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사방 구석구석에는 비어있는 책장이 놓여있었고 그 앞에는 정리되지 못한 자료들이 가득했다.
비서진은 박스 사이를 지나다니며 바쁘게 움직였다. 좁은 틈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도 부딪히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권 실장님, 대표님 벌써 도착하셨답니다.”
“급한 일 있으면 메신저 보내주세요.”
비서실장은 바쁜 걸음으로 비서실을 나섰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회의실에는 한태경과 법무팀 팀장, 감사팀에서 꾸려진 TF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표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권 실장님. 제가 조금 일찍 도착했습니다.”
인사할 시간도 없이 권 실장은 빔프로젝터를 켜고 경영에 대한 중대 사항을 정리한 PPT를 노출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시작하세요.”
“조태용 전 이사의 비서가 저희 우호 세력에 접근했습니다. 주주 총회를 개최하고… 대표님의 해임안을 거론한 뒤 경영권 간섭을 시작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태용 전 이사가 등기 이사로 초임할 당시에는 퇴사할 때 주식을 양도하겠다는 별도 계약이 없었기 때문에 강제로 수취할 수 없습니다.”
“계속하세요.”
“조태용 전 마케팅 전무 이사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글로벌유니티 주식은 7%입니다. 경영이 안정권에 들기 위해서는 35%를 소유해야 합니다. 현재 회장님이 소유하고 계신 주식, 대표님이 소유하고 계신 주식 그리고 우호 지분을 합치면 29.94%입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5.1%의 지분 매수가 필요합니다.”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경영권 분쟁에 따른 주식 매수 가능성이 지라시로 번지면서 주가가 10% 상승했습니다. 기관과 외국인이 매수로 들어서서 이끄는 상황입니다.”
“자금이나 매수 방안은?”
“예비비는 충분합니다만, 시장에 풀린 지분을 모두 매수해도 최대 2.3%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다른 대책을 살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팀 남 팀장님, 제가 조사 부탁드린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서실 권 실장은 빔프로젝터에 노출되어 있던 화면을 종료시키고, 감사팀 소속의 남 팀장으로부터 전달받은 PPT로 교체했다. 남 팀장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2014년 채용 과정에서 유달리 배수를 높여 서류 합격이 진행된 정황을 파악했습니다. 예년보다 다섯 배 높은 정원이 서류 합격했고, 1차 면접에서는 예년보다 네 배 높은 인원수가 참가했습니다.”
“조사 중에 특별히 발견된 것이 있습니까?”
“조태용 전 전무 이사의 첫째 아들이 입사한 해가 2014년 상반기이고, 조카가 2014년 하반기 채용에서 입사했습니다. 두 직원 모두 특채입니다. 조태용 전 전무이사의 아들은 석박사 통합 과정 졸업을 전제로 입사했습니다. 확인 결과 입사 후 2년 동안 수료 상태였고 졸업은 예정보다 2년 뒤에 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채용 청탁으로 엮을 수 있습니다.”
“2014년까지만 해도 회사로 가족을 불러올 정도로 애착이 있었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나이브레티로 옮기게 되었는지 여전히 의문이네요. 혹시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개인사가 엮인 부분은 아직 연결 고리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밝혀내시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하셔야 할 것 같은데… 추천해 드리지는 않습니다. 정석대로 가시죠.”
“흠… 알겠습니다. 조사해 주신 부분으로도 충분합니다.”
회의실 내부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한태경은 눈두덩이를 몇 차례 꾹꾹 누르고 비서실 권 실장을 바라보았다.
“권 실장님, 언론 보도는 예정대로 나갑니까?”
“네, 오늘 자정까지 보도자료 넘기면 내일부터 언론에 공표됩니다. 연구소 설립과 CES에 참가할 프리미엄 라인 위주로 보도될 예정입니다.”
“네, 당분간 특별히 신경 써주세요.”
“예, 대표님.”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한 한태경을 바라보는 보좌진들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별다른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에 미끄러질 수도 있는 상황을 앞둔 그들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남 팀장님, 한 가지 더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습니까. 법무팀도 배석 부탁드립니다.”
“그럼 저는 비서실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대표님.”
“네, 실장님. 고생하셨습니다.”
권 실장이 문을 닫고 회의실을 나서자 법무팀과 감사팀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한태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감사팀 TF 팀장은 눈치 빠르게 한태경의 생각을 읽었다.
“대표님, 채용 비리 건 덮어둘까요.”
“…고민 중입니다.”
“어떤 선택이든 대표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시죠. 저희는 두 방향 모두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법무팀, 나이브레티 쪽에선 별다른 움직임 없습니까?”
“아직까지 조용합니다. 조태용 전 전무 이사가 나이브레티에서 상무로 취임한 걸 보면 당분간은 셋업에 집중할 것 같습니다. 권율기 상무가 받은 타격이 회복되기엔 이른 시간이니까요.”
“저쪽에서 움직이기 전까지 얼마나 여유가 있습니까?”
“권 회장님이 노환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상황에서 헤더는 권율기인데… 권율기 상무는 예측하기에 너무 충동적인 유형이라 변수를 모두 고려하기는 어렵습니다. 남 팀장님은 정석대로 가자고 하셨지만 저는 반대입니다. 차라리 조태용 상무와 접촉하고 거래하시죠. 이분은 최소한의 시나리오는 마련할 수 있습니다.”
“최 팀장님, 법무팀에서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저라고 이런 말씀 드리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경영권 방어를 한 뒤에 그다음도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한태경은 불필요한 언쟁이 벌어질 것 같아 손을 들어 올려 모두를 조용히 시켰다. 한 번에 두 마리의 사냥을 끝내려는 그의 눈빛이 짧게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 * *
서해는 잠결에 몸을 돌려 누웠다가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눈을 떴다. 조심스럽게 돌아본 자리는 비어있었다. 화장실에서도 인기척이 없는 것을 살핀 서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계절이 바뀌어 얇아진 시트를 걷어내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도 한태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 두 시. 운동하러 갔다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자다 깨어 몽롱한 상태였지만 혼자서 다시 잠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서해는 웹서핑을 시작했다.
메인에 노출되어 있는 뉴스, 연예, 스포츠 기사의 헤드라인을 훑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관심 뉴스를 자동으로 추천해 주는 영역에는 글로벌유니티의 소식이 가득 담겨있었다. 헤드라인에는 글로벌유니티의 경영권 방어 관련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지분 매수와 관련한 싸움이 시작되려는 움직임과 그로 인한 주가 변동 소식 등이 너저분했다.
서해는 베드 벤치에 걸쳐있던 티셔츠를 주워 입었다.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바지에 손대다가 엉덩이 아래까지 겨우 덮이는 티셔츠를 괜스레 몇 차례 끌어당겼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2층 복도에 간접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서해는 한태경이 혹시 1층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계단을 내려갔다.
1층의 아일랜드 식탁 위의 조명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서해는 그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다시 계단을 올라가려고 했는데, 계단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깼습니까.”
그냥 올라가기 머쓱해진 서해는 계단을 내려왔다.
가까이 다가선 아일랜드 식탁 위에는 이름 모를 위스키와 스트레이트 잔이 올라와 있었다.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꺼내두긴 했지만 손조차 대지 않은 치즈 몇 조각, 비스킷 등을 바라보다가 한태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방해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옆에 안 계셔서 저도 모르게.”
“괜찮아요.”
“같이 잠든 줄 알았어요. 계속 혼자 마신 거예요?”
“잠이 잘 안 와서 한 잔만 하고 자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이따 출근할 때는 서해 씨가 운전해야겠습니다.”
“앞으로는 혼자 마시지 말고 저도 불러주세요.”
한태경은 서해의 손목을 잡고 자신이 앉아있던 스툴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스킨십은 한결같았다. 두 팔을 크게 뻗어 몸과 팔을 옭아매고 강한 힘으로 틈 없이 안았다.
꼼짝없이 갇힌 서해는 손목을 움직여 한태경의 무릎을 살짝 쓰다듬었다. 티셔츠 아랫단으로 커다란 손이 들어오고 등허리에 올라온 손이 다시 힘주어 서해를 끌어안았다. 서해는 한태경의 품으로 파고들며 어깨에 턱을 올리고 가만히 기댔다.
반복해서 등을 누르듯 쓰다듬던 그는 드로어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엉덩이를 꽉 잡았다.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에 잠에서 금방 깨어난 몸이 느리게 반응하며 움직였다.
어깨를 틀고 벗어나려다가 멈칫했다. 어쩐지 가만히 있는 게 그를 위로하는 한 방법이 될 것 같기도 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말 잘 듣네.”
“날씨도 많이 따뜻해졌고, 어….”
“착하네, 서해는.”
어린아이 대하듯 칭찬하면서 엉덩이를 잡아오는 손길에 귀가 빨갛게 타올랐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다. 그 소리를 듣고 다시 부끄러워지고 심장은 더 빠르게 뛰기를 반복했다. 귓가에서 한태경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잠 깼으면 잠깐 앉을래요? 피곤하면 올라가도 상관없고.”
“저도 옆에 앉을게요.”
슬그머니 스툴에 올라앉고 빈 유리컵에 물을 채워 넣었다. 분위기라도 맞춰보려는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잘못된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잘 해결되면 좋겠는데.”
“충분히 잘하고 계시잖아요.”
“조태용 전 전무 이사가 나이브레티와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회사 창립과 함께하신 분이라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있을 거라고 혼자 생각한 잘못도 있고.”
서해는 조용히 테이블 위로 떨어져 내리는 그의 목소리를 담담하게 들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저는 대표님 편이에요.”
순간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서해의 목소리를 들은 한태경의 표정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조태용 전 전무 이사가 나이브레티에서 상무 이사로 취임한 걸 보면 분명 당분간은 권율기 대행 역을 할 거예요. 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서해 씨 상처를 헤집을 수도 있고. 그동안 봤던 내 모습과는 많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서해는 스트레이트 잔을 잡은 한태경의 손을 겹쳐 잡았다. 축축해진 감정이 전이되는 것 같았다. 섣부르게 위로하고 싶은 생각은 감히 할 수가 없었고, 옆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얼룩덜룩한 새벽의 공기 아래에서 서해는 차분하게 스스로의 감정을 읽었다. 지금 순간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 모르고 지나칠 뻔한 그의 고민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 모두 다행스럽다고. 그리고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데 대단한 발견이라도 해낸 것 같아 차오르는 숨을 골라냈다.
“저는… 저는 괜찮아요.”
짧은 문장에 담긴 의미를 금방 해석한 한태경이 잔에 남은 위스키를 털어냈다.
“본인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아주 나쁜 습관입니다. 고치세요.”
한태경은 위스키를 들어 올려 잔을 채우는 대신 스트레이트 잔을 내려두었다. 한밤중에 마주한 선물 옆에서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는 너무 자연스러워진 손길로 서해의 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더듬었다.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감싸는 고요한 순간이 이어졌다.
* * *
서해를 회사 지하 주차장에 내려준 한태경이 그대로 차를 몰고 회사를 빠져나기를 반복했다. 주말을 반납하고 일에 매달릴 정도로 바빴고, 평일엔 자정을 넘겨 퇴근하기 일쑤였다. 며칠이 지나도록 서로의 얼굴 한 번 마주하기 힘들었다.
다만 상사가 사라진 UT 1팀들의 활력은 넘쳤다. 실험 설계와 인터뷰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지만, 서해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 때문에 좀처럼 집중하는 것이 어려웠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곤이 눈치 빠르게 서해의 기분을 캐치하고 말했다.
“책임님, 오늘 점심은 나가서 먹으면 안 됩니까? 저… 여기서 계속 갇혀있는 기분인데요.”
“음? 벌써 점심시간이야?”
“네, 11시 30분입니다. 조금 빨리 나가면 안 될까요, 고 책임님, 민 책임님.”
이곤이 웃으며 말하자 고 책임은 싫지 않은 듯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럴까요? 하던 설계도 얼추 다 끝냈으니까… 대표님도 안 계신데 콧바람도 좀 쐬고.”
“좋지. 더 더워지기 전에 밖에 나가서 먹고, 주변도 한 바퀴 돌고 그럴까? 주말 내내 엉덩이에 쥐 나도록 앉아있었더니 오늘이 월요일인 것도 모르겠고 이제는 아주 엉덩이가 없어지려 해.”
넷은 자리에서 지갑과 휴대 전화 등을 챙겨 들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아, 민 책임. 그래도 여긴 엘리베이터 타는 걱정 없는 건 좋지 않아?”
“그러게요. 전 샌드위치 층이라 매번 꼭대기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왔어야 했는데.”
“우리 이번 사용자 테스트 끝나면 사무실 내려가야 하지?”
“그렇지 않을까요. 여기 환경은 좋은데 대표님이랑 지내는 게 조금… 전 지금도 여기 있는 거 많이 신경 쓰이는데. 나만 그런 거 아니죠?”
웃으며 말하는 민 책임의 말에 서해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해는 어설프게 따라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갈비탕 어때? 요즘 머리를 써서 그런가 기력이 아주 허한데.”
“좋아요, 고 책임님.”
“크, 역시 고 책임님 메뉴 선정 진짜 좋아요. 갑시다, 빨리 안 가면 줄 서야 해요.”
넷은 회사 앞에 있는 갈비탕 집에 자리하고 앉았다. 목에 출입 카드를 걸고 있는 회사원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식사하고 있었다.
서해와 이곤은 적당히 테이블을 세팅하며 고 책임과 민 책임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근데 요즘 포털에 우리 회사 너무 물어뜯기던데, 보고들 있어요? 연구소 설립 날짜 당겨야 하는 건 아닌지 내가 다 걱정될 정도던데.”
“경영권 방어 소리 나오는 거 보면 우리 이직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고 책임님 어디 좋은 데 알고 있으면 나도 좀 소개해 줘요.”
“전 경영 관련해서는 영 젬병이라. 며칠째 대표님 자리에 안 계신 거 보면 해결하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데.”
서해와 이곤은 민 책임과 고 책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투박하지만 대표에 대한 신뢰가 섞인 고 책임의 말을 듣고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그동안 있었던 위기들도 잘 지내왔잖아.”
“그건 아무도 모르죠, 고 책임님. 회장님 손 떠나고 처음 벌어지는 일 아닙니까.”
점심 식사의 안주로 적당한 회사 이슈가 하나씩 올라왔다. 이야기는 주식으로 이어졌다.
“그나저나, 경영권 방어 뉴스 터지고 우리 주식 폭등했던데 가지고 있었어요?”
“아니, 난 돈 관리 잘 못해서… 와이프가 해. 민 책임은?”
“저 집 산다고 다 팔고 없잖아요. 그때 대출하자고 했더니 와이프가 엄청 화를 내서는. 팔지만 않았어도 최소 두 배인데.”
“그래서 인생이 타이밍이란 말이 있는 거지. 낮맥이라도 시켜야겠는데?”
“아, 돈이 뭔지. 출입 카드 주머니에 넣고 한 잔씩 합시다. 내가 살게요.”
서해는 출입 카드를 벗어드는 책임 둘을 따라 했다. 주머니에 넣고 맥주를 시키자 주방에서는 이미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맥주 한 병을 네 컵에 나누어 들고 왔다.
어쩐지 속이 좋지 않았다. 서해는 자리 앞에 놓여있는 갈비 몇 점을 먹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서해 선임, 벌써 더위 타요? 왜 이렇게 못 먹어요.”
“아, 먹고 있어요. 맛있는데요.”
“그렇지? 여기가 갈비탕 맛집으로 소문난 집이긴 해. 자, 조용히 한잔들 합시다. 실험 설계하느라 고생들 했어요. 조금만 더 힘냅시다.”
민 책임은 방금까지 하던 대화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반주까지 곁들이며 맛있게 식사했다. 서해는 결국 몇 숟가락 밥을 먹지 못하고 그대로 점심 식사를 마쳐야 했다.
38층으로 돌아온 UT 1팀은 내일 있을 인터뷰와 실험의 최종 점검을 마쳤다. 주방 가전 앞에는 레코더가 세팅되어 있었고, 이곤의 책상 위에는 인터뷰 진행 멘트와 설문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여기 CCTV 없는 게 의외네요. 그거 있었으면 탑 뷰에서 사용하는 패턴도 분석할 수 있어서 쓸모 있을지도 모르는데.”
“대표실에 CCTV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아쉽지만 레코더로 대신해야지, 뭐.”
“그럼 예정대로 내일 오전 열 시부터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응, 이곤 씨. 번거롭더라도 참석자들한테 메시지 남겨서 일정 리마인드 해줘요. 이게 항상 결원이 생기더라고.”
“넵, 메시지 보내겠습니다.”
“대표님 오늘 안 오시려나 본데. 그럼 다들 퇴근합시다. 내일 인터뷰 진행하려면 푹 쉬다가들 오세요. 하루에 인터뷰 연거푸 진행하면 기가 쭉쭉 빨릴 겁니다.”
“넵, 고 책임님. 들어가세요. 저도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곤 씨, 내일 봐요.”
의자에 기대앉은 서해가 인사하자마자 휴대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에는 한태경이라고 적혀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빠르게 메신저를 켰다.
[혹시 윤선우 팀장 만났습니까? 회사에 짐 내려둔다고 하던데. 19:15pm]
[아직 안 오셨는데요. 19:16pm]
[흠, 생각보다 늦어지네. 미안한데, 오늘 택시 타고 가야겠습니다. 외부 미팅 계속 있어서요. 집에서 봅시다. 19:16pm]
[제 걱정하지 말고 업무 보세요. 19:17pm]
[택시 타요. 타고 나서 사진 보내고. 19:17pm]
[네, 그럴게요. 19:18pm]
서해는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 책임과 이곤이 퇴근한 빈자리 사이로 민 책임이 여전히 무언가를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민 책임님, 오늘도 야근하세요? 그동안 너무 무리하셨는데 오늘은 같이 퇴근하세요. 이러다 쓰러지시겠어요.”
“괜찮아요. 먼저 퇴근해요.”
“매번 늦게까지 남아서 검토하시니까 너무 죄송스러워서요.”
“오늘은 일하려는 게 아니라 약속이 있어서 그래요. 조금만 기다렸다가 가려고 하니까 걱정 말아요.”
“아, 그러시구나. 내일 뵙겠습니다, 책임님.”
“들어가요, 선임님.”
서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마자 민 책임은 얼굴에 남아있던 미소를 거둬들였다. 그는 자리에 앉아 휴대 전화를 열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로건 밀러 대표는 오늘 출근하지 않았고, 서해 선임은 19:20분에 퇴근했습니다. 19:20pm]
상대방의 프로필 사진은 기본 이미지였고 이름도 [.]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메신저의 대화창에는 민 책임이 38층에 들어온 이후 반복적으로 보낸 서해와 한태경의 출퇴근 기록이 보였다. 둘의 퇴근 시간은 최대 15분을 넘기지 않는 선에서 맞닿아 있었다.
민 책임이 보낸 가장 마지막 메시지는 두 사람이 떨어진 유일한 날짜로 기록되어 있었다. 메시지를 보내고 1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각에 상대방이 내용을 확인했다. 민 책임은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 전화를 구겨 넣었다.
모두가 퇴근하고 아무도 남지 않은 38층 주위를 돌아본 민 책임은 서해가 앉아있던 의자를 밀어냈다. 허리를 숙이고 서해의 책상 아래 바닥의 사각 타일을 뜯어낸 그는 책상 안쪽에 뜯어낸 타일을 비스듬히 세워두었다.
바닥 아래로 어지럽게 흩어진 전선들이 보였다. 그는 타일 안쪽으로 손을 더듬어 숨겨진 노트북 가방을 꺼냈다. 허공에 날리는 먼지를 신경질적으로 휘젓고 난 뒤,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용한 38층에 지퍼 여는 소리가 들리고 노트북이 켜졌다.
새롭게 꺼낸 노트북 화면에 워드 파일을 펼쳐놓은 민 책임은 자신의 회사 노트북에서 확인 가능한 정보를 타이핑하여 옮겨 적기 시작했다. 이번 인터뷰를 기반으로 새롭게 업데이트할 인공 지능 알고리즘에 관한 내용이었다.
* * *
어둑해진 저녁 시간이었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한곳에서 만난 차들로 붐비던 곳도 한산했고,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길게 이어져 있던 대기 줄도 모두 빠져나가고 없었다.
로비 안에 서있던 서해가 회전문을 돌아 밖으로 나갔다. 이너 포켓에 손을 넣으면서 웃음 지었다. 드레스 룸에서 한태경과 마주 보고 주저앉아 이너 포켓과 칼라의 봉제선을 뜯던 모습이 떠올랐다.
손끝에 닿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자 홈 화면에 택시 앱의 알림이 떠올랐다. 택시가 도착하기까지는 5분여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택시 위치를 확인하느라 화면에 집중하는 동안 검은색 세단이 서해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정확히 서해의 바로 옆에서 뒷문이 열릴 수 있게 멈춰 선 차를 바라보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내릴 것 같은 기분에 공간을 만들었는데 자동차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대로 정차한 상태였다. 선팅이 진하게 덮여있어 차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실례가 될까 봐 옆으로 몇 걸음 옮겨 서자 멀리서 주황색 택시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서해는 휴대 전화 화면과 비교해 택시의 번호를 확인했다. 같은 택시였다. 앞 창문이 내려오고 기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택시 부르셨죠?”
“네, 기사님. 입력된 장소로 부탁드립니다.”
“예, 출발하겠습니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던 세단과는 승차감이 달랐다. 급히 출발하는 속도에 몸이 들썩였고 가다 서기를 반복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점심 식사 때 억지로 먹은 갈비탕이 명치에 걸린 듯했다.
가슴에 손을 얹었다가 몇 차례 주먹으로 콩콩 두드린 서해는 심호흡하며 애써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 안으로 시선을 조금이라도 돌렸다가는 멀미를 시작할 것 같았다.
늘 이동하던 경로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서해는 손에 쥐고 있던 가방을 옆에 두고 휴대 전화를 켰다. 택시 앱에 노출된 자동차 번호와 기사 정보와 이동 경로가 노출된 화면을 찍어 한태경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택시 타고 가고 있어요 :-) 19:58pm]
흔들리는 자동차 안에서 작은 화면을 보고 있자니 결국 멀미가 밀려왔다. 아무래도 점심 먹은 게 체한 것 같았다. 서해는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 사이를 꾹꾹 누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달리 검붉게 남은 하늘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한참을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자 조금 늦게 메시지가 들어왔다.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요. 난 많이 늦을 것 같습니다. 20:14pm]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서해는 손을 들어 올려 가슴을 몇 차례 쓸어내렸다. 거울 너머로 움직임을 바라보던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가 말했다.
“속이 안 좋아요? 토할 것 같으면 세울 테니까 말해요.”
“아, 죄송합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집에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참아봐요. 신입 사원이에요?”
“…네.”
“우리 아들도 올해 취업했거든요. 손님 보니까 아들 생각나네요.”
“축하드려요, 기사님. 많이 뿌듯하시겠어요.”
“응, 그럼. 내가 뭐 해준 것도 없는데 알아서 취직하고 그런 것 보니까 너무 기특하더라고.”
몇 마디 대꾸하지 않았는데 얼굴도 모르는 아들의 자랑이 쏟아졌다. 서해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택시 기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입학했던 일, 한 학기 성적 전체가 A+였던 일, 다섯 번 남짓한 면접으로 대기업에 입사한 일 등이 잔잔히 쏟아졌다.
평범한 가정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라 제법 흥미 있게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이 회사에 들어간 뒤부터 전화 오는 텀이 점점 줄어든다는 푸념을 듣고 있을 때였다.
“아니, 뭘 이렇게 바짝 붙어서 쫓아와. 상향등까지 켜고.”
“…네?”
“아니, 요즘은 운전 버릇 엉망인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택시 운전하다 보면 별별 놈들을 다 만나요.”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회사 앞에서 보았던 차와 비슷한 검은색 세단이 보였다. 멍하니 뒤차를 바라보던 서해는 새파랗게 질려 몸을 웅크렸다.
권율기가 무혐의 처분을 받고 풀려난 것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누군가 따라붙은 것은 아닐까. 갑자기 한태경과 떨어져 있다는 것에 불안해졌다.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함께 지내면서 잊고 있었던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체한 듯한 기분이 점점 심해지고 머리가 웅웅거렸다. 상체를 웅크리고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을 때였다.
“많이 안 좋아요? 다 왔어요, 코너만 돌면 집인데. 조금만 참아요.”
“기, 기사님….”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불안함과 초조함이 느껴졌다. 심장이 크게 뛰어 머리 속까지 울릴 기세였고 입안이 순식간에 바짝 말랐다. 손끝이 덜덜 떨리고 숨이 짧게 끊어졌다. 서해는 가방 손잡이를 꽉 잡고 몸을 웅크렸다.
“왜 그래요. 세울까요?”
“아니요, 아니요. 안 돼요. 정말 죄송한데, 귀찮으시겠지만 입력된 주소까지… 아파트 단지 안으로….”
운전석의 기사가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았는데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가방을 꽉 잡고 있던 손끝까지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손바닥을 펴 눈썹뼈와 이마를 덮고 택시가 멈춰 서기만을 기다렸다. 몇 차례 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다 왔습니다, 손님.”
서해는 지갑을 열고 대충 손에 잡히는 만 원짜리 지폐를 건네며 도망치듯 택시를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잔돈을 받아 가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대로 무시했다.
지갑에 꽂혀있던 세대 출입 카드를 태그하고 몸을 밀어 넣었다. 초조한 손끝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거푸 눌러댔다.
1층까지 내려오는 숫자를 바라보는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출입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이닥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입고 있던 슈트가 온 몸을 눌러 내리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몸을 밀어 넣은 서해는 반복적으로 닫힘 버튼을 누르고 가장 위층의 버튼을 눌렀다.
당황스러웠다. 어두운 곳에 있을 때나 화장실에 갇혀있을 때와 비슷한 느낌 같기도 했고, 어쩌면 삼거리의 낡은 집에서 권율기가 올까 봐 가슴 졸이며 기다릴 때 같기도 했다. 사정없이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이 체기가 있어 몸이 좋지 않은 것인지, 계속된 야근 때문에 체력적으로 무리가 온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시간은 평소에 둘이서 올라가던 시간에 비해 몇 배는 길게 느껴졌다. 허리를 구부리고 가슴을 몇 차례 때린 서해는 애써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공간과 익숙한 냄새가 느껴졌다.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났음에도 문이 열릴 것 같은 불안함에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두고 거실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옷을 벗기로 약속했던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 서해가 변기 뚜껑을 열자마자 소화가 덜 된 음식들이 역류해 쏟아져 내렸다.
눈을 감은 채 버튼을 더듬어 눌렀다. 물이 맑게 채워짐과 동시에 다시 구역감이 올라왔다. 노란 위액까지 토해 낸 서해는 윙윙 울리는 머리에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욱, 으….”
세면대 끝을 잡은 손가락이 하얗게 변했다. 속을 비워내자 몸이 뒤집힐 것 같던 울렁증이 조금 잦아든 것 같기도 했다.
입을 헹궈내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얗게 변한 얼굴이 보였다. 서해는 혹시라도 화장실이 더러워진 곳은 없는지를 꼼꼼하게 살피고 밖을 빠져나왔다.
카우치까지 걸어가는 발목에 모래주머니라도 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등 뒤로 흘러내린 식은땀과 함께 오한이 찾아왔다. 늘 옆에 있던 그가 사라지고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현실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카우치 모퉁이에 앉아있던 서해는 몸을 미끄러트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 있게 괜찮다고 고백한 것이 며칠 전이었는데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려운 감정은 여전했고 어떻게 할 수 없어 무력한 것 또한 변함없었다.
무릎을 세우고 이마를 붙인 채 한참을 자리에서 숨을 고르던 서해가 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택시에서 한태경에게 보낸 메시지에 적힌 숫자 1은 사라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불이 꺼진 휴대 전화에 이마를 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빨갛게 변한 눈가가 가볍게 떨렸다. 무혐의로 풀려난 권율기가 금방이라도 머리채를 잡을 것 같았다. 회사 일을 잘 해낼 수 있었던 것도, CES Summer Show에 가겠다고 한 것도 모두 그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태경이 다시 바빠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자신을 생각해서 메시지를 보내준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혼자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인 것도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언제 오느냐고 물어보는 메시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제 겨우 연애를 시작하는데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어딘가 온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항상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한태경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옆에 있을 정도는 되고 싶었다. 그것이 회사에서 보여주는 능력이 되었든, 연인으로서 그의 옆에 있는 것이 되었든.
머리를 감싸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심호흡을 이어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발밑을 삼킬 것처럼 커져 오던 불안함이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았다. 빨갛게 부은 눈두덩 아래로 자신이 안정감을 느끼는 공간이 들어왔다.
서해는 눈꺼풀을 몇 번 깜박이고 끊어질 듯 말 듯 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전히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메시지를 입력했다.
[저 집에 도착했어요 :-) 21:09pm]
[잘했어요. 샤워ㅎ고 먼저 자요. 21:10pm]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짧은 답장에서 그에게선 좀처럼 볼 수 없던 오타가 보였다. 서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 손으로 휴대 전화를 꽉 잡고 손등으로 눈썹 언저리를 꽉 눌렀다. 사소한 메시지였지만 한태경이 요구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카우치 등받이를 꽉 잡고 일어선 서해는 느린 걸음으로 2층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