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9)

13. 인사

에스프레소 트리플 샷을 뽑아 든 서해가 인터뷰 장소로 향했다. 눈을 반쯤은 감은 채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마지막 예상 질문 리스트들을 곱씹었다.

연구소 충원을 위한 인터뷰는 임원 면접을 진행했던 곳과 같은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서해는 어쩐지 모를 반가움이 밀려와 잠시 문고리를 잡고 서있었다.

서해가 회색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삼삼오오 모여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던 말을 멈추고 서해가 대기실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들어서는 서해의 모습은 전혀 긴장한 티가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밤새 짓무른 눈이 잔뜩 부어있는 것도 신경 쓰였고, 눈을 감을 때마다 두껍게 감기는 눈꺼풀도 신경 쓰였다.

사방에서 꽂히는 따끔따끔한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빈자리를 대충 찾아 앉고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뒤적였다. 그러자 옆에서 의자를 당겨 앉는 소리가 들렸다.

“이곤 씨?”

“아, 역시. 서 대리님, 잘 계셨어요?”

깔끔한 검은색 슈트를 입고 얇은 타이를 맨 이곤이 보였다.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컸는지, 덩치가 더 커진 것인지 머리 위를 덮는 그림자가 유독 커다랬다.

자리에 앉은 이곤의 얼굴을 보자 짧았던 머리가 자라나 어색하게 뻗쳐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살짝 웃음 지은 서해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번 타임에 인터뷰해요?”

“네, 지금 인터미션 끝나면 바로 다음 차례가 제 차례예요. 대리님은요?”

“난 5번이니까, 이곤 씨보다는 한참 뒤겠네요. 대표님이랑 인터뷰한다고 긴장하는 사람들 많던데 이곤 씨는 그렇지는 않나 봐요.”

“워낙 이리저리 많이 깨져서 이런 쪽으로는 단련됐어요. 글로벌유니티 입사하기 전에 이력서 낸 회사만 200군데는 되는 것 같거든요. 안 잘리는 게 어디냐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200군데요? 대단하다, 이곤 씨. 힘들었겠어요.”

“면접은 열 군데 정도밖에 못 봤어요. 서류 탈락은 그렇다 쳐도, 임원 면접 떨어지고 나니까 멘탈이 정말 박살 나고 그랬었거든요. 그땐 죽을 것처럼 힘들고 그랬는데 지나고 나니까 또 괜찮아요. 오히려 그때 경험이 지금 많이 도움 되기도 하구요.”

“긍정적이네요, 이곤 씨.”

“제가 안 좋은 일은 금방 잊어서요. 그런데 대리님도 인터뷰 보시는지 몰랐어요. 바로 연구소 가실 줄 알았는데.”

“나도 당연히 봐야죠. 인터뷰 준비는 잘 했어요?”

“네. 그동안 대리님이 보내주신 보고서 확인하면서 스킬셋 맞춘 것도 있고, 이번 일 겪으면서 생각한 것도 나름 정리해 오긴 했어요.”

“어쩐지 준비 많이 한 느낌인데요.”

“대표님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포트폴리오도 가져왔어요.”

“와, 이곤 씨 엄청나네요. 대표님은 솔직한 사람 좋아하니까, 이곤 씨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 무사히 통과할 거예요. 물론 모든 게 이곤 씨가 연구소에 들어가고 싶다는 전제에서지만.”

이곤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나며 금방이라도 서해의 손을 잡을 것처럼 다가왔다.

서해가 몸을 뒤로 물렸다. 일전에 한태경이 이곤에 대해 경고했던 일이 생각났다. 혹시라도 그가 복도를 지나가지는 않을지 눈을 굴려 밖을 바라보았다.

“완전 들어가고 싶어요, 완전. 그리고 대리님이랑 같은 팀 하면 좋겠어요. 대리님 일 잘하시니까 옆에서 보고 배우게요.”

“무슨,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제가 다른 사람한테 많이 배워야죠.”

“대리님 손 빠르고 정확한 거로 회사에 소문이 자자해요.”

“…제가요?”

“네, 마케팅부의 연구 보고서 데이터 전부 대리님이 검토하셨다면서요. 대표님이야 워낙 사기캐니까 그렇다 쳐도, 그런 분이 또 계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저는 그냥 대표님 도와서 일한 것밖에 없어요.”

“대리님도 사기캐였다고 이미 소문 다 퍼졌거든요. 말하다 보니까, 대표님 직속 부서에서 대리님이랑 일하면… 저 퇴근은 할 수 있는 거겠죠? 아, 통과부터 하고 고민해야지.”

서해는 이곤의 입에서 의식의 흐름대로 뱉어지는 말을 들으며 웃음 지었다.

포트폴리오를 넘겨보며 마지막 점검을 하는 이곤을 바라보던 그때, 이곤의 등 너머로 한태경과 인사부장, 신임 마케팅 전무 이사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선이 한태경을 좇아 움직였다. 그의 뒤를 따르는 임직원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올라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회사에서 몰래 바라본 그는 심각할 정도로 건조하고 차가워 보였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투명 유리창으로 대기 중인 인원을 훑어본 한태경은 서해와 시선을 짧게 주고받았다. 부드럽게 풀어진 표정을 캐치한 서해가 손끝을 비볐다. 연애하자고 했지만 달라진 것은 크게 없었다. 다만 마음속이 간지러울 뿐.

그러다 갑자기 창밖으로 보이는 한태경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눈이 얇게 떠지는 것이 보였다. 서해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곤 씨랑은 정말 우연히 만난 건데. 억울한 마음이 잔뜩 밀려왔다. 밥 한 끼 먹었다고 밤새 잡아먹힐 뻔했던 일이 떠올라 등골이 서늘해졌다.

“와, 진짜 저 포스. 대리님은 대표님이랑 단둘이 어떻게 일했어요. 진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아. 대표님 안드로이드설도 있던데요. 워낙 감정 표현이 없으셔서요.”

“대표님이요? 실제로 보면 그런 분 아닌데….”

“대애박. 그렇게 말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역시 대리님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진짜로. 대표님 그런 사람 아닌데, 일도 잘 알려주시고 어떨 땐 다정하게 챙겨주실 때도 있어요.”

“입사한 뒤로 이런 얘기 정말 처음 듣거든요.”

“그럴 리가요. 대표님이 아래층에 잘 안 가셔서 오해들 하시나…?”

“대리님 별명이 대표님 미니미인 이유가 괜히 나온 게 아닌가 봐요. 저 같으면 숨 막혀서 울면서 일했을지도…. 하지 않던 실수도 백 개쯤 더 해가면서?”

서해는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이 들어 찡그리듯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면접장 안으로 사라진 한태경이 아쉬워 물끄러미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먼 테이블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직원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냥 시선을 피하기는 어색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활짝 웃으며 받아주는 모습이 보여 머쓱해졌다.

고개를 돌린 서해가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인터뷰가 끝나면 거울을 보고 눈이 많이 부어 있는지를 다시 살펴봐야겠다고.

“김이곤 사원, 인터뷰 시작합니다.”

“어, 대리님. 저 다녀올게요.”

이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서해는 테이블 위에 흩어져있던 이곤의 포트폴리오를 모아 건네주었다. 괜찮은 줄 알았더니 긴장한 듯한 손끝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서해의 얼굴에 미소가 담겼다.

“이곤 씨, 이때까지 한 대로만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걱정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대리님!”

시원한 걸음걸이로 대기 장소를 빠져나간 이곤이 맞은편의 인터뷰 장소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서해는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를 넘기며 그동안 해왔던 업무 리스트를 주르륵 훑어보았다. 한태경은 인터뷰와 관련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지만, 그에게 의지해서 부서 이동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서해의 눈빛이 다시 반짝거렸다.

* * *

“안녕하십니까, 김이곤입니다.”

이곤은 당황하며 인터뷰 장소에 들어섰다.

새로운 대표가 앉아있는 회의실의 각진 테이블들은 한쪽으로 다 밀려나 있었고 가운데에 원형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곤이 앉을 자리는 원형 테이블 앞에 놓인 빈 의자가 유일해 보였다.

인상 좋고 서글서글한 인사부장이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이곤을 불렀다.

“이곤 씨,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면접이 아니고 인터뷰니까 본인이 했었던 일 위주로 얘기해 주면 됩니다.”

“네, 부장님. 감사합니다.”

이곤은 밝게 웃는 얼굴로 마주 본 세 명의 인터뷰어들에게 인사했다. 새로 취임한 마케팅 이사는 이곤의 인사를 고개를 까닥이며 받은 뒤 태블릿을 열어 이곤의 이력을 확인했다. 한태경은 상체를 살짝 뒤로 젖힌 채였다.

“김이곤 씨,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좀 빨리 가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니까 꼭 필요한 말 위주로 진행해 주세요.”

“네, 대표님.”

고저 없이 이어지는 한태경의 말에 이곤은 의자로 엉덩이를 바짝 밀어 넣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마케팅 이사와 인사부장은 이미 그런 한태경의 모습에 적응이 된 듯 아무렇지 않게 보였지만 이곤은 긴장을 숨길 수 없었다.

마케팅 이사가 웃음 지으며 말했다.

“신입 사원이 제일 핫한 부서에서 고생 많았겠네요.”

“아닙니다. 마케팅 관련 업무들 수행하면서 많이 배우고 노하우도 쌓고 있습니다.”

마케팅 이사와 인사부장은 적당한 웃음과 함께 이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아이스 브레이킹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건조한 한태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입이 PL로 프로젝트 맡아서 진행한 것도 없었을 테고, 메인으로 한 일이 뭐가 있어서 노하우를 쌓았다는 겁니까.”

전에 없이 까칠한 말에 놀란 마케팅 이사와 인사부장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바짝 마른 입을 들썩인 이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꾹꾹 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입사 후에 회사에서 했던 업무를 간단하게 정리해 온 문서가 있습니다. 보여 드리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태경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가고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이곤을 바라보았다. 제법 긴장한 모습은 보였지만 그 눈빛은 결연하기까지 했다.

“가져와 보세요.”

이곤은 손에 들고 있던 스프링 제본 파일을 인터뷰어들에게 넘겼다. 페이지를 넘겨보던 마케팅 이사와 인사부장의 얼굴엔 작은 미소가 실려있었다. 인사부장은 헛웃음을 짓더니 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인터뷰 3일째인데, 이런 적극적인 지원자는 처음 보네요. 이번 인터뷰 때 보여주려고 준비한 거예요?”

“아닙니다. 그동안 업무 진행하면서 틈틈이 정리해 둔 문서를 출력해 왔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잊어먹지 않으려고 만들었는데, 나름대로 저만의 레퍼런스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곤이 준비한 포트폴리오는 인사부장과 마케팅 이사를 단번에 무장 해제시켰다. 신입 사원으로서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이 담긴 문서에는 그동안 진행했던 서베이, 조사에 대한 방법론이나 필드 리서치, 그리고 실무에 적용한 프레임과 나름의 결과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곤은 인터뷰어들이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파악하는 것을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용을 꼼꼼하게 체크하던 한태경이 물었다.

“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뭐였습니까?”

“아무래도 가장 최근의 업무가 기억에 남습니다. 기획조정실의 서해 대리님이 보내주신 연구 보고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퇴근 후에 별도로 공부했습니다. 덕분에 실무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이나 조사 분석을 선택하는 시각이 넓어졌습니다.”

서해의 이름이 언급되자 한태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스프링 제본의 페이지를 주르륵 넘기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어 섰다.

“…사회조사 분석사 자격증이 있네요?”

“네, 대학 졸업하기 전에 땄습니다. 한동안 쓸 일이 없어서 잊어먹고 있었는데, 주말에 다시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태경은 고개를 들어 이곤을 바라보았다. 마주 보는 눈빛에 담긴 진심을 읽은 그는 태블릿을 내려두었다.

“통계 모르는 사람에게 쉽지 않았을 텐데.”

“사회학과 나오고, 심리학 부전공했습니다.”

“심리학 부전공이라.”

인사부장은 눈을 크게 뜬 채로 이곤의 신상 정보를 되돌려보았다. 앞으로 연구소에서 진행하게 될 사용자 조사나 신규 제품 테스트에 필요한 이력이 부분부분 녹아있는 것이 보였다.

무엇보다 가져온 포트폴리오 곳곳에 녹아있는 꼼꼼함에는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는 세심함이 보였다.

“그럼 조사방법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이 있을 테고. 데이터 분석도 가능합니까?”

“SPSS, AMOS 기본이고 SAS, R 가능합니다.”

“사용자 조사나 인터뷰 경험은?”

“실무 경험은 아직 없습니다. 이론만 알고 있습니다.”

“실무 경험이 없다고 표현한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비슷한 경험이라도 있어요?”

“학교 다닐 때 졸업 논문에서 심리 통계를 다룬 적이 있었는데, 그때 파일럿 테스트 진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요. 연구소에 들어오게 된다면 하고 싶은 업무가 있습니까?”

“네, 사용자 조사로 추출한 데이터를 만들어서 실무에 적용하고 싶습니다. 글로벌유니티에서 확장하려는 인공 지능 사업에 제 이력이 도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태경은 그제야 등받이에 기대있던 상체를 테이블 위로 일으켜 세웠다. 자리 앞에 놓여있던 아메리카노를 들이켠 그가 이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직속 부서에 들어오게 되면 곤란한 일이 많을 수 있습니다. 업무량이라든가 스타일이라든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 기존 마케팅팀에서 일하던 모습이랑은 많이 다를 겁니다.”

“팔로워가 리더의 스타일을 파악하고 잘 따르는 것도 업무 능력 중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날카로움이 빠진 한태경의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하는 이곤에게 여전히 긴장한 모습이 담겨 있었지만, 자신감도 함께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한태경이 이곤과 시선을 마주한 채 고민에 빠지자 신규 취임한 마케팅 이사가 인사부장에게 귓속말했다.

“부장님, 저 친구 마케팅에서도 탐나는데요.”

“대표님과 말씀 나눠 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되려나요.”

“이곤 씨 나가고 나면 바로 자리 만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장님.”

마케팅 이사와 인사부장이 귓속말하는 동안 한태경과 이곤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 * *

서해는 인터뷰에서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짧은 스토리텔링을 구상했다. 인터뷰에서 실수라도 하는 날엔 한태경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사고 없이 그저 무사히, 하던 대로만 하고 오자고 몇 차례 주문을 외웠다. 깊은 생각에 빠진 서해는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도, 자기와 조금 떨어진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마디라도 걸어보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30여 분 정도가 지나자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곤의 모습이 보였다. 서해는 지친 표정으로 걸어오는 이곤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먼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고생 많았어요, 이곤 씨.”

“아아… 대표님 정말 무서워요. 마음속에 숨겨두다 못해 내가 모르고 있던 부분까지 다 털어 가시려는 느낌이랄까.”

“면접 볼 때도 그렇더라고요. 인터뷰는 무난하게 진행했어요?”

“네, 그럭저럭하고 나온 것 같아요. 초반에 대표님이 바라보시는 눈빛이 뭐랄까, 잡아먹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랬거든요.”

“그랬어요…?”

“그런데 막상 준비해 온 포트폴리오 보여드리고, 그동안 업무 진행했던 것들 말씀드리고 했더니 그 표현 못 할 서늘한 분위기가 금방 풀리시더라고요.”

“아, 다행이다. 이곤 씨가 인터뷰를 잘했나 봐요.”

“포트폴리오 보면서 이것저것 질문도 하시고, 이번에 대리님이 보내주신 검수 문서들 관련해서 질문도 하시고 그러셨어요. 다행히 잘 알고 있는 부분만 질문 주셔서 무난하게 대답했던 것 같아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그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워낙 표정 읽기도 힘든 분이셔서… 마케팅 이사님이랑 인사부장님 반응은 괜찮았어요. 조금은 기대해 보려고요. 아, 제가 혼자 너무 떠들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덕분에 나도 긴장 풀리고 좋은데요.”

“대리님 인터뷰 준비하셔야 하는데 저 이만 가볼게요. 잘 보고 오세요.”

“고마워요, 이곤 씨. 나중에 봐요.”

“연락드릴게요!”

대기실을 떠나는 이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해의 머릿속에 작은 그림이 그려졌다. 셋이서 연구소에 있는 모습이었다. 매주 주말의 한태경을 감당할 수 없게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고여 들었다. 기운이 쭉 빠질 만큼 시달렸던 것이 다시 생각난 서해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몇 명의 대기자가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기다리고 원래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늦어진 다음에야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인터뷰는 서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평이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서해가 가장 많이 신경 쓰였던 것은 이제 더 이상 회사의 직장 상사나 대표로만 보이지 않는 한태경과 건조한 업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어쩐지 모두를 속이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혼자만 어색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 이상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너무 일반적인 질문을 주고받느라 형식적인 절차가 될 것이라고 했던 한태경의 말이 진짜였다는 것만 실감하고 돌아왔다. 다만 서해의 업무 능력을 뒤늦게 알아챈 마케팅 이사가 서해를 탐내는 질문들이 짧게 이어졌다.

38층에 먼저 돌아온 서해가 카우치로 향해 걸어갔다. 그대로 엎드린 채 뻗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기도 해 서운한 마음이 물씬 밀려왔다. 이제 정말 연구소에 들어갈 일만 남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미 예정된 일이었고 평범하게 입사했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는데,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엎드린 채 얼굴을 팔에 묻고 있던 서해는 주위를 크게 둘러보았다. 이제 겨우 적응하게 되었는데. 불과 두 달 남짓하게 생활한 공간이었지만 잔뜩 익숙해진 공간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처음 응접실에 앉았던 날, 엄청나게 세팅되어 있던 노트북과 사무 공간을 봤던 날, 한쪽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고 티타임을 가졌던 날이 차례로 떠올랐다.

자세를 바꿔 등을 대고 카우치에 누웠다. 머릿속에는 사업부 소속이 바뀌기 전까지 남아있는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다.

* * *

월요일 오전이었다. 서해는 임원진 회의를 마치고 38층에 먼저 복귀했다. 피로를 달래려는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있었다.

자리로 돌아와 마우스를 흔들어 깨웠을 때였다. 모니터 우측 상단에서 작은 메신저 창이 깜박거렸다.

[김이곤: 서 대리님!!]

[서해: 이곤 씨?]

[김이곤: 우아아아아!! ㅓ먖;ㅐㄹ]

[서해: 이곤 씨 왜 그래요ㅋㅋ]

[김이곤: 인사 발령 났어요! 아직 못 보셨어요?]

[서해: 벌써요?]

[김이곤: 저 연구소로 발령 났어요. 정말 좋아요.]

[서해: 축하해요, 이곤 씨. 연구소 가고 싶어 했는데 잘됐네요!]

이곤이 흥분한 모습을 보고 웃음이 터진 서해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두었다.

그룹웨어에 들어가 공지를 확인해 보려던 서해는 메신저가 깜빡이는 것을 보고 이곤과의 대화창을 다시 눌러 켰다.

[김이곤: 대리님, 깜짝 놀랄 소식 또 있어요. 저희 이제 같은 팀이에요!!]

[서해: 저랑 이곤 씨랑요?]

[김이곤: 마케팅 소속이던 과장님 두 분 같이 가시는 것 같고, 팀장님은 처음 보는 이름이라 모르겠어요. 마케팅 쪽에선 아는 분이 안 계시더라고요.]

[서해: 벌써 그런 것까지 알아봤어요? 이곤 씨, 빠르다.]

[김이곤: 과장님 두 분은 다들 좋은 분이거든요. 팀장님만 괜찮으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아웃룩이 동기화되면서 메일이 들어왔다. 서해의 직급은 6월부터 선임 연구원으로 바뀐다고 되어 있었으며, UT 1팀으로 보직 변경된다는 내용이 함께 담겨있었다.

[서해: 그러네요, 이곤 씨. 저도 방금 아웃룩 확인했어요.]

[김이곤: 혼자 다른 데로 갈까 봐 엄청 걱정했는데, 대리님 계셔서 너무 좋아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서해: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6월부터 만나겠네요.]

[김이곤: 빨리 6월 되면 좋겠어요. 지금은 다른 팀 업무 보조해 주고 있어서… 아, 이것도 재미있기는 한데, 소속감이 없어서요.]

[서해: 5월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마무리 잘하고 만나요.]

UT 1팀의 명단에는 이곤을 포함한 세 명의 마케팅 직원의 인사 발령이 함께 담겼다. 이곤과 서해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명은 한국 지부 소속의 책임 연구원이었다. 팀장 직책의 수석 연구원에는 본사 소속의 윤선우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서해는 임직원 검색창을 열고 윤선우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김이곤: 아, 대리님. 그 소문 들으셨어요? 보직 해임된 조태용 전무님 나이브레티로 이직하셨대요.]

[서해: …나이브레티요? 이렇게 빨리?]

[김이곤: 나이브레티에 친구가 다니고 있는데, 주말에 연락 와서 알려줬어요. 인력 빼가기까지는 아니지만, 이슈 생길 만한 일 아닌가 싶어서요. 조 전무님 마지막이 조금 안 좋았긴 했지만, 글로벌유니티 진골이셨는데.]

서해는 나이브레티와 조 전무가 엮이는 것이 영 신경 쓰여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앞뒤가 논리적으로 짜 맞춰지지 않았지만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권율기가 아직도 자신에게 요청했던 인공 지능 알고리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관자놀이가 웅- 하고 울려왔다.

[서해: 혹시 다른 이야기 들은 건 없어요?]

[김이곤: 네, 아직은 저기까지만 들었어요. 혹시 다른 이야기 듣게 되면 알려 드릴게요. 빨리 대리님이랑 같은 팀 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얘기 커피 마시면서 하게요!!]

심각한 고민이 이어지려고 할 때 어이없을 만큼 해맑게 올라온 이곤의 메시지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웃고 있습니까.”

“아, 연구소 인사 발령이 벌써 났더라고요. 메신저로 얘기 중이었는데….”

“김이곤 씨 연락 왔습니까.”

“어, 어떻게 아셨어요?”

책상 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한태경을 바라보고 있자 고개가 뒤로 푹 꺾어졌다.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 이곤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화면도 보지 않고 맞추는 것이 신기했다.

고개를 돌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허리를 숙이고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는 모습이 들어왔다.

“대리님이 계셔서 너무 좋다는데, 서 대리.”

“아니 이건, 그냥 같은 팀이라서 좋다고 하는 것 같은데, 으악.”

위로 쑥 끌어 올려진 서해가 밀리듯이 책상 위에 앉혔다.

“회사에서, 그것도 바로 옆에 날 두고 다른 사람이랑 웃으면서 메신저 보내는 것도 화가 나는데.”

“대표님 대표님, 잠깐.”

“좋다는 말을 주고받아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좋다고 한 게 아니라….”

“내가 안 들어왔으면 이제 그 말 할 차례 아니었습니까. 둘을 같이 넣어둔 내가 미쳤지.”

서해의 이마에 제법 따끔한 꿀밤이 내려왔다.

억울한 눈으로 한태경을 바라보던 서해가 책상에서 내려왔다. 눈을 얇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크게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고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하고 멀어졌다.

“…나쁜 짓만 배워서는.”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아직 소문인 것 같긴 한데.”

“뭡니까.”

“전 마케팅 전무 이사님이 나이브레티로 옮기신 것 같다는데요.”

“그 얘기는 나도 들었습니다.”

“괜찮은 건가요?”

“아직 표면적으로 브레이크 걸 만한 사항은 없어서 두고 보는 중입니다. 서 대리에게까지 공유할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는데, 이슈 생기면 알려 주겠습니다. 잠깐 나와요. 몇 가지 요청 사항이 있습니다.”

서해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태블릿과 휴대 전화를 집어 들고 카우치로 향했다.

긴 다리를 쭉 펴고 앉는 모습에 새삼스럽게 눈길이 갔다. 무의식적으로 집에서 하던 것처럼 한태경의 다리 위에 앉으려다 눈이 번쩍 떠졌다.

한태경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앉았다.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태블릿을 꺼내고 일정 관리 앱을 켠 뒤 괜스레 앞뒤를 넘겨보며 헛손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서해의 옆으로 다가온 한태경은 허벅지를 붙이고 앉으며 손에 들고 있던 공문을 휙휙 넘겼다.

“UT 1팀 팀장 윤선우 수석은 본사에 요청해서 2년 기한으로 파견 나오기로 했습니다. 아직 본사에서 업무 인수인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시간 되면 먼저 인사시켜 주겠습니다. 아마 UT 2팀이랑 3팀도 본사에서 파견 나오는 인원이랑 합쳐서 팀 구성할 것 같습니다.”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던 서해가 한태경을 돌아보았다. 6월부터 합류할 팀장과 굳이 따로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다시 물어보려고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곧바로 한태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워요?”

“아, 아니요.”

“그럼 손부채질은 왜 합니까. 이제 보니 얼굴도 달아올랐네.”

“조금, 더운 것 같기도 한데요.”

“앞뒤 안 맞는 말도 정도가 있지. 무슨 소리 합니까, 지금.”

“대표님 얘기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아서.”

“집중해요.”

“…죄송합니다.”

서해는 한태경과 딱 붙어있던 다리를 떼어내고 엉덩이를 슬쩍 옆으로 밀어 앉았다. 약간의 거리가 벌어지자 엉뚱한 생각을 한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조금 안심됐다.

태블릿을 꽉 잡고 마음을 쓸어내리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공식적인 인사이동은 6월부터인데, 사전에 해줄 작업이 있습니다. 원래는 윤선우 수석이 비공식 루트로 먼저 들어와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만, 일정이 여의치 않은 것 같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CES Summer Show에 나갈 가전들 대상으로 사용자 조사를 진행해 주세요. 현재까지 전시 준비는 보고서 수정 이전 버전으로 준비했는데, 연구 보고서가 수정되고 유효한 데이터 정보들이 달라지면서 마케팅 포인트도 수정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UT 1팀을 38층으로 불러서 파일럿 테스트를 준비했으면 합니다.”

“여기서요?”

“사무실 꾸미는 것은 다른 층에 내려갈 수도 있는데, 가전을 테스트해 보려니 실제로 집에서 사용하는 주방처럼 꾸며진 곳이 여기밖에 없네요.”

“아, 네….”

“이번 주에 UT 1팀 자리를 임시로 마련하고 사내 직원 대상으로 테스트를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조사 항목 선정은 UT1 팀에서 의논해서 진행하고 백업이 필요하면 나도 참여하겠습니다. 6월이 되면 내 역할은 윤선우 수석에게 인수인계할 테니까, 팀원이 작업하던 것들은 서 대리가 맡아서 리뷰해 주세요.”

“그렇게 할게요.”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기분은 이상했다. 서해는 38층 공간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올라오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지라 한태경이 얘기하는 말을 인지하는 데 약간의 버퍼링이 걸렸다.

“자리는 어디로 마련할까요.”

“업무지원팀에 요청해서 창가 앞에 책상 세팅해 둘 테니까 내일 퇴근 전에 자리 옮기라고 하세요.”

“넵, 알겠습니다.”

“팀원들부터 조사에 참여하는 대상까지 모두 보안 유지 서약서를 받도록 할 생각입니다. 업무지원팀에 요청해서 해당 문서 몇 부 받아 놓으세요.”

“…보안 유지 서약서가 신제품 출시 때문만은 아닌 거죠?”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으니. 조태용 전무가 나이브레티로 이직한 것에는 도의적인 문제만 있을 뿐 불법적인 일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회사에 남아있는 조 전무 라인을 하나씩 털어보는 수밖에.”

“설마 마케팅 1팀에 이 팀장님과 박 부장님 남겨두신 것도. 그럼 UT 1팀은 믿을 수 있는….”

“끄나풀은 남겨놔야 모조리 털어내지. 조사는 감사팀과 함께 할 테니 서 대리는 UT 1팀에서 사용자 조사만 잘 진행해 주세요. CES Summer Show 전시만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게 해주면 됩니다. 보고서 검토했던 것처럼 크리티컬한 오류를 잡아낸다고 생각해요.”

서해와 나란히 앉아있던 한태경이 팔을 뻗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주 건조한 업무 얘기를 이어서 하다가도, 갑자기 어깨나 머리에 손이 올라올 때면 심장이 쿵쿵 뛰어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6월부터는 내 비서실도 같이 구성하게 될 텐데, 서 대리가 월요일 오전마다 참석하던 임원진 회의는 비서실에 배치될 인력이 소화하게 될 겁니다.”

기분이 묘했다. 서해는 어쩐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아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은 회의 하나 덜어낸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표정이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은 표정이 아닌데?”

“그냥, 대표님이랑 둘이 지내던 곳인데 직원들 자리가 생길 거라고 하니까 어색해서요.”

“연구소에 가기 전에 적응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해요.”

업무를 언급하는 한태경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건조했다. 어깨에 올려져있던 팔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커다란 손이 서해의 어깨를 잡고 몇 차례 쓰다듬었다.

서해는 분위기에 휩쓸려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기 싫어 허리를 바로 펴고 다시 대화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비서실에 인력이 배치되면 그동안 있었던 회의록 인수인계하겠습니다. 말씀하신 사용자 조사는 기한이 언제까지예요?”

“CES TF에게 데이터 전달해 주려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UT1 팀 자리 세팅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2주. 조사 프레임은 프랙티컬하게 구성해서 무조건 2주 안에 넘겨주세요. 또 궁금한 것 있습니까?”

“시간이 좀 빠듯한 것 같은데. 혹시… 저 말고 다른 팀원분들도 비슷한 경력이 있으신 분들이신가요?”

“과장 둘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랑 HCI 석사 출신입니다. 서 대리가 석사 때 하던 연구랑 교집합이 있어서 팀으로 같이 일하기 좋을 거예요. 이곤 씨는 스펙으로 따지면 한참 밀리는데, 인터뷰나 실전 경험이 비슷하게 닿아있는 부분이 많아서 가능성 보고 뽑았습니다. 일하면서 대화가 안 돼서 어려운 일은 없을 겁니다.”

“넵, 그럼 자리 배치 마치고 바로 업무 시작하겠습니다.”

서해는 일정 관리 앱 여기저기에 핀을 꽂아둔 다음 화면을 종료시켰다. 그러다 문득 스치듯 생각난 것에 화들짝 놀라 한태경을 돌아보았다.

“대표님.”

“왜.”

서해의 생각을 읽은 듯한 그의 대답이 어느새 짧아져 있었다.

“집에 갈 때는 어떻게 해요?”

“무슨 소리 합니까, 차 타고 가지. 예전에도 같은 얘기 했던 것 같은데.”

“그… 그러니까 팀원분들이 계시니까요. 매일 같이 나갈 수 없을 것 같은데.”

한태경의 얼굴이 갑자기 잔뜩 찌푸려졌다.

“따로 갈까요. 저는 지하철 타고 가도 되는데.”

“안 됩니다.”

“바로 집으로 갈게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같이 나가면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같이 가기 싫다는 게 아니라….”

한태경이 서해를 바라보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한 서해가 웅얼거렸다. 눈치를 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빠르게 낚아채듯 손을 잡은 그가 서해의 손바닥을 문질렀다.

“집에 가서 스페어 키 줄 테니까 가지고 있어요. 퇴근할 때는 둘 중 한 명이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는 거로 합시다.”

“그럼 출근할 때도 둘 중 한 명이 먼저 올라가요?”

“그렇게 해야겠네요.”

“…갑자기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요원이라도 된 기분이에요.”

“그럼 작전 잘해 봅시다, 서 요원.”

팀원들 몰래 사무실을 오르내릴 상상을 하자 웃음이 터졌다. 서해는 허리를 굽히고 무릎에 이마를 붙였다. 커다란 손이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등 위로 손을 뻗어 올리자 손바닥을 바짝 맞잡혔다. 짧게 이어졌던 걱정은 허공에 흩어지고 순간 찾아온 손길를 더듬었다.

* * *

아침에 받아온 자동차 스페어 키가 바지 주머니에 볼록하게 올라와 있었다. 슈트 주머니가 얕게 있어 스페어 키를 눕혀 잘 갈무리했다. 고급 승용차 로고가 떡하니 박혀있어 책상 위에 꺼내 놓기도 어려웠고 서랍에 넣기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른한 오후 시간, 서해는 사내 메신저 단톡방을 만들었다.

[서해: 안녕하세요, UT 1팀 서해입니다. 메일로 미리 공지드렸던 것처럼 오늘 오후 네 시부터 자리 이동 요청하려고 합니다 :-)]

[김이곤: 넵!]

[고재욱: 예.]

[민태영: 네, 선임님.]

[서해: 출입 카드 변경 등록 때문에 1층에서 먼저 만나야 할 것 같아요. 네 시에 로비에서 뵐 수 있을까요?]

갑자기 챙겨야 할 인원이 늘어나 각자의 대답을 체크하기도 어려웠다.

잠깐 생긴 텀에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 앞으로 이동했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안경을 쓰고 결재 서류를 검토하는 한태경이 보였다.

“대표님, 보안 유지 서약서 책상에 올려둔 거 보셨죠? 저는 네 시에 UT 1팀 출입 카드 등록하러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15분 뒤에 다녀올게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잠깐 들어와요.”

서해는 대표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서 무언가 업무요청이 흘러나올 것을 기다렸다.

“문 닫고 이쪽으로.”

그동안 문을 닫으라는 말을 듣지 못했던 서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을 돌리고 서자 바깥과 연결된 유리창에 블라인드가 빼곡하게 닫혀있는 것이 보였다.

멀바우 소재의 문을 부드럽게 밀어 닫고 책상 앞으로 다가서서 한태경을 마주 보고 섰다. 책상 모서리를 두어 차례 두드리는 그의 손길을 보았다. 책상 끝으로 다가가 엉덩이를 걸터앉을 때에는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앞으로 블라인드는 내려져 있을 테니까, 여기 들어올 때는 문 닫고 들어오세요.”

“…대표님.”

대표로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눈가가 축 처지고 옴짝거리는 입술이 무슨 얘기를 하려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고개를 돌려 한태경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찌푸린 얼굴 같기도 했다. 한 얼굴에 담긴 상반되는 표정을 읽은 서해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억울했다.

“표정이 왜 그래.”

“두… 둘이서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 하셨으면서!”

“아무것도 안 해줘서 아쉬웠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네.”

긴장한 허벅지 위에 큰 손바닥이 펼쳐졌다. 서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둘러 한태경의 손목을 끌어 올렸다.

“관객이 있어야 연극을 할 맛이 나지.”

“저 곧 내려가야 하는….”

대각선으로 말려 올라가 있던 슈트의 바짓자락이 거칠게 비벼졌다. 손은 좀처럼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태경은 버둥거리는 서해의 허리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쉽게 딸려 올라온 와이셔츠 안으로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책상 위에 걸터앉아 벌어진 서해의 다리 사이로 스칠 듯 아슬아슬하게 얼굴이 파고 들어갔다. 아침에 사용한 샤워 젤 향기가 여전히 은은했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서해의 허리와 갈비뼈 사이에 입술을 붙였다. 눈을 감고 따뜻한 체온을 느끼다가 천천히 입술을 비볐다. 움찔거리며 뒤로 도망가려는 서해의 허리를 꽉 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내일부터는 셔츠 안에 티셔츠도 같이 챙겨 입어요.”

“흐… 간지러워요.”

“대답.”

“네. 10분 남았는데, 저 가봐야….”

“10분이면 아직 시간 많은데. 한 번 끝내고 갈래요?”

한태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서해의 어깨를 잡아 눕혔다. 갑자기 바뀐 시야에 대표실 천장에 붙어있던 간접 조명이 들어와 박혔다.

서해는 한태경의 손목을 덥석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치골이 느껴질 정도로 하체를 바짝 붙인 몸을 물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래에서부터 풀려나가는 단추를 느낀 서해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천천히 셔츠를 양쪽으로 벌리고 버둥거리는 손을 책상 위로 찍어 눌렀다. 망설임 없이 유두에 입술을 붙이고 따뜻함을 잔뜩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에 깔려있던 서해의 가슴팍이 불규칙적으로 들썩였다.

“응? 로비까지는 3분 만에도 내려가잖아.”

“갑자기, 왜 이러, 세요. 흡….”

말할 때마다 혓바닥이 유두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가만히 숨어있던 유두가 조금씩 올라오고 허리 아래가 찌르르했다. 서해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꼼짝없이 몸을 굳히고 눈을 내리떴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팀에 넣어두고 다른 사람이 서 대리 옆자리 차지할 것 생각하니까 핀트가 살짝 나가는 느낌이네.”

“하, 하으….”

“나는 혼자 두고 밖에서 재미있을 거 아냐.”

간지러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눈꺼풀이 깜박거림을 반복하고, 기어코 아랫배가 뻐근하더니 바지 앞이 볼록하게 솟아올랐다.

서해는 허리를 비틀고 귀까지 달아오른 얼굴을 한쪽으로 숨겼다. 장소를 따지지 않고 흥분하는 몸이 부끄러웠다.

“여기서는 안 돼요.”

“되고 안 되고는 내가 결정합니다.”

“대표님… 여기서 말고 집, 집에서 해주세요.”

거부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한태경의 눈썹 사이가 잔뜩 찌푸려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한태경은 혀로 몇 차례 유두를 핥다가 볼록하게 올라온 부분을 앞니로 깨물었다.

“벌써 나랑 딜하려고 드는 겁니까.”

“딜…이 아니, 으윽… 흡.”

더듬거리며 좇은 서해의 시선의 끝에 탁상시계가 보였다. 네 시까지는 13분이 남아있었다. 마음이 급해져 몇 차례 한태경의 어깨를 밀어냈는데, 기어코 타이 아랫부분까지 단추가 다 열린 게 느껴졌다.

“하아, 그만 버둥거려요. 서류 떨어지면 정리하는 데 오래 걸립니다.”

“대표님이 자꾸… 만지니까.”

“말만 그렇게 하고 여긴 바짝 섰는데. 이런 거 기다렸던 사람같이.”

“그만… 흐, 읍!”

물어뜯을 것처럼 깨물고 놓아주지 않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책상 아래로 떨어진 다리를 동동거리자 발끝에 걸려있던 슬리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급하게 들이켠 숨과는 별개로 얕게 뱉어지는 숨이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짧게 끊어졌다.

“뭐 했다고 얼굴이 이렇게 빨갛게 됩니까.”

“지금 가야, 되는데.”

“이 얼굴로 어디를 간다는 겁니까.”

“…다들 기다려요.”

“나만 걱정해야지. 아니면 지금 책상 위에서 잡아먹히게 생긴 본인 걱정을 하든가. 누구 걱정해요, 지금.”

“윽!”

고개를 들어 올려 주위를 살피던 서해의 몸이 급하게 눕혀졌다. 곧이어 머리에 크게 찾아올 것 같은 통증에 눈이 꾹 감겼다. 아픔은 없었다.

커다란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태경을 바라보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손을 들어 한태경의 가슴을 밀어내고 어깨를 내리쳤다. 이러다 정말 끝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어지러웠다.

눈을 내리뜨고 있던 한태경이 가슴 한쪽에 키스 마크를 잔뜩 남겼다. 활짝 열린 셔츠를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자 서해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것이 보였다.

입술을 떼고 몸으로 서해를 내리눌렀다. 별것 아닌데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려다보다가 한발 물러섰다. 팔까지 품에 가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한태경은 손을 뻗어 헝클어진 서해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붉어진 얼굴은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구속감을 기대하는 심장이 멋대로 쿵쿵거렸다. 서해는 정확하게 3분이 남을 때까지 힘으로 옭아매인 채 말없이 가만히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한태경은 서해를 놓아주기 직전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버드 키스를 남기고 떨어졌다.

“다녀와요. 그렇게 쳐다봐도 여기서는 못 묶어 줍니다.”

“…아, 제발 회사에서 그런 말….”

다시 책상 위에 앉은 서해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떨어지라고 했었는데 막상 손이 떨어져 나가자 아쉬웠다. 정신이 나간 건 아닌지. 눈앞도 어지럽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선 서해의 셔츠 단추가 하나씩 다시 채워졌다. 흐트러진 넥타이까지 바로 잡아주고 나서야 한태경이 서해에게서 손을 물렸다.

맨발로 걸어 나올 뻔한 서해는 슬리퍼를 겨우 찾아 신었다. 서둘러 옷을 추스르고 대표실을 빠져나올 때였다.

“신발 갈아 신고 내려가요.”

“…….”

슬리퍼를 신고 로비까지 내려갈 뻔했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에 괜히 심술이 났다. 서해는 아무런 말 없이 문을 닫고 나왔다. 자리에서 구두를 신는 발끝이 떨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고 흥분해서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거울을 바라보던 서해가 몇 차례나 옷매무새를 살폈다. 혹시라도 옷차림이 흐트러져 오해받을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이 가득했다.

몇 차례의 심호흡이 이어지던 중,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오후 시간의 로비는 텅 비어있었고 한쪽으로 모니터와 박스를 들고 있는 네 명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책임님. 이곤 씨. UT 1팀 소속으로 발령받은 서해입니다.”

“서해 선임? 만나서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선 데스크로 가서 출입 카드 재등록부터 할게요. 38층 출입하려면 별도 등록이 필요해서요. 출입 카드 벗어주시면 일괄 처리하겠습니다.”

서해는 출입 카드를 하나씩 받아들고 데스크로 이동했다. 이곤이 서해에게 따라붙어 옆을 지켰고 책임 둘이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드문드문 들렸다.

38층에 올라와서 창가에 박스를 내려둔 셋은 내부를 돌아보며 감탄했다.

“우와….”

“응접실은 마음대로 사용하시면 되고, 정면에 보이는 창가 앞에 임시로 데스크 마련해 뒀어요. 원래 제가 사용하던 사무실은 저쪽이고, 안쪽에 보이는 문이 대표실이에요.”

“우와. 선임님, 여기 진짜 대박 좋네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한태경이 밖으로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뒤쪽에 서있던 서해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스킨십 때문에 얼굴이 다시 붉어졌는데,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표정의 그가 얄밉게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하던 업무도 있을 텐데 급하게 불러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서해 선임에게 대략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오늘 세팅 끝나면 바로 업무 진행할 수 있게 준비해 뒀습니다.”

“잘됐네요. 이쪽이 고재욱 책임, 이쪽이 민태영 책임이죠? 여긴 김이곤 씨랑 서해 선임이고.”

“맞습니다.”

“그럼 오늘은 자리만 세팅하고 정시 퇴근들 하세요. 내일부터는 야근이나 철야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예, 대표님.”

“집에 가기 전에 여기 보안 유지 서약서에 사인해 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빠지고 싶은 사람 있으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니까 얘기하세요.”

CES Summer Show에 소개될 신규 라인업을 검토하는 자리에 빠지고 싶어 하는 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태경은 웃으며 UT 1팀을 바라보았다.

“그럼 모두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사인 다 되면 서해 선임이 모아서 가져와요.”

한태경은 보안 유지 서약서를 두고 대표실로 사라졌다. 책임들은 자리를 정리했다. 다년간 회사에 있으며 이동에 익숙해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 세팅을 마치고 38층을 둘러보았다.

주방 가전을 살펴보며 인터뷰 동선에 대해 얘기하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고 책임과 민 책임은 벌써 어느 정도 실험 설계를 마치고 인터뷰 프레임을 구성해 온 상태였다.

“선임님, 아까 대표님이 말씀하신 거 제가 할게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내가 해도 괜찮아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아요, 이곤 씨.”

“그래도요. 그런 건 원래 막내가 하고 그러는 건데.”

“정말 필요한 일은 요청할 거니까 마음 쓰지 말아요.”

서해는 한 번이라도 한태경과 둘이 있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눈을 반짝이며 서해를 바라보는 이곤에게 웃어 보이고 책임 둘을 돌아보았다.

“고 책임님, 민 책임님. 여기가 말씀드렸던 장소예요. 사용자 조사도 이곳에서 진행할 거고요. 아까 전달 드렸던 호미파이 APK 설치하면 바로 앱 연동 가능할 거예요.”

“네. 와, 선임님 이런 데서 일하다가 사무실 내려가면 회사 다니기 싫겠는데.”

“그래도 팀원이 생긴다고 생각하니까 좋아요.”

“하긴… 대표님이랑 둘이서 일한다고 고생 많았지. 그동안 정말 수고 많이 했어요.”

“아, 지금 APK 파일 설치하지 않으시면 내일 출근했을 때 38층 전력이 대기 상태일 거예요. 가능하면 사내망에 계실 때 설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구나. 고마워요, 서해 선임.”

“짐은 다 가져오셨어요? 아직 가져올 것 남았으면 가서 도와드릴게요.”

“아니, 우리 짐은 이게 전부예요. 어차피 임시 자리라서 자리 배치 정해지면 그때 전부 옮기려고. 자리는 아무 데나 앉아도 되나?”

“네, 편하신 자리로 앉으세요. 이곤 씨도 자리 골라요.”

대부분의 자리 배치가 그래왔듯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실을 마주 보는 자리에 고 책임과 민 책임이 나란히 자리하고, 대표실을 등지는 자리에 서해와 이곤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

서해는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한태경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도 볼 수 없게 된 게 아쉬웠다.

* * *

서해가 팀원의 세팅을 도와주고 자리에 앉으니 어느덧 퇴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

바로 옆에 앉은 이곤의 책상 위와 서해의 책상이 사뭇 대조적이었다. 노트북과 모니터, 간단한 필기도구만 가져온 서해의 공간은 더욱 건조해 보였다.

옆자리에는 이곤의 덩치와 맞지 않는 아기자기한 사무용품들이 여럿 올라와 있었다. 모니터에는 서류 홀더가 부착되어 있었고 색색의 포스트잇과 펜, 스케줄러까지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이곤이 가습기에 물을 받아와 전원을 켜는 모습이 보였다. 건조하던 책상 위에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덩어리들이 보기 좋게 흘러내렸다. 손가락을 뻗어 수증기를 콕콕 찔러보던 서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곤 씨, 가습기도 써요?”

“사무실이 너무 건조해서요. 겨울엔 얼굴이 아플 정도더라고요. 여긴 테이블이 붙어 있으니까 중간에 놓고 쓸게요.”

서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책상 위에 있던 휴대 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자 ‘대표님’이라는 이름이 잠금 화면에 떠있었다.

서해는 서둘러 휴대 전화를 집어 들고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품 안에 숨겼다. 팀원들이 눈치채기 전에 이름을 바꿔 저장해야지. 누가 보지는 않았을지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 먼저 내려갑니다. 18:30pm]

[네, 저도 금방 갈게요. 18:31pm]

서둘러 메신저를 주고받고 주머니에 들어있던 자동차 스페어 키를 더듬어 확인했다. 자리에 앉아 이리저리 열려있는 창을 종료시키고 있자 모니터 위로 민태영 책임의 얼굴이 쑥 올라왔다.

“서해 선임, 우리 정말 정시에 퇴근해도 되는 거예요?”

“네, 대표님이 정시 퇴근하라고 한 날은 하루도 빠짐없이 정시 퇴근했어요. 대신 업무 시작되면 또 다르셔서… 그땐 야근 많이 할 수도 있어요.”

“그 정도야 뭐. 여긴 무슨 천국이 따로 없네. 그럼 고 책임이랑 나랑 이만 정리합니다?”

“네, 책임님. 저희도 들어가 보겠습니다.”

“민 책임… 그렇게 좋아할 일이 아니야. 내일부터 우리 정말 죽어 나갈걸요. 일정을 좀 봐요. 기술팀 검토할 일정까지 챙기려면 2주보다 빨리 줘야 해.”

“그건 내일 생각해요. 고민한다고 해결되나. 브레인이 넷이나 모여있는데 어떻게든 되겠죠.”

“도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말만 이렇게 하는 거죠, 뭐.”

고 책임과 민 책임은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대표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네 명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쏟아졌다. UT1팀이 한태경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받는 내가 더 불편하네요.”

“…넵, 내일 뵙겠습니다.”

고 책임은 머쓱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내일 봅시다. 바로 퇴근해요. 회사에서 괜히 시간 보내지들 말고.”

괜히 시간을 보내지 말라는 표현은 분명 서해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남겨진 말이 틀림없었다. 서해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시선으로 팀원을 돌아보았다. 고 책임과 민 책임은 노트북을 덮고 있었고, 이곤은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닫고 있었다.

“편하게 하라니… 난 우리 대표님 왜 이렇게 어렵지. 솔직히 나이도 우리 또래인데 묘하게 어렵단 말이야. 대표라서 그런가.”

“솔직히 대표가 편하면 그것도 이상하잖아요. 우리도 퇴근이나 합시다.”

“같이 가, 민 책임. 서해 선임, 이곤 씨. 내일 봅시다.”

“네. 들어가세요, 책임님!”

민 책임과 고 책임은 백팩을 메고 사라졌다. 서해는 옆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이곤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을 한태경이 생각나 조금씩 초조해졌다.

“이곤 씨, 퇴근해요.”

“선임님은 퇴근 안 하세요?”

“난 약속이 있어서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먼저 퇴근해요.”

“아, 넵 알겠습니다. 그럼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서해는 가죽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벌어진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가 흘러내렸는데 눈치채지 못하고 모니터만 주시했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 이곤이 바닥에서 액정이 붙어있는 최신형 차 키를 주워 들었다.

“우와, 선임님. 좋은 차 타시네요. 차 키에 액정 붙은 모델은 보도 자료에서만 봤는데.”

“…네?”

커다란 손 위에 가지런히 놓인 스페어 키를 보는 순간 주머니를 급히 더듬었다. 손발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민할 틈 없이 재빨리 낚아챈 스페어 키가 주머니 안으로 숨겨졌다. 악 소리가 날 정도로 놀랐다.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였다.

일부러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 발 뒤로 물러선 서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곤을 바라보았다.

“대박, 선임님 멋지다.”

“아, 그게. 이곤 씨.”

이곤이 서해의 표정을 금방 읽었다. 난처해하는 서해를 본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서해를 안심시켰다.

“알았어요, 윗분들 눈치 보는 거죠? 비밀로 해드릴게요.”

“고… 고마워요, 이곤 씨.”

“저 입 무거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내일 봬요, 선임님!”

휘휘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이곤을 보며 가죽 의자 위로 몸이 쏟아져 내렸다. UT 1팀과 처음 만난 날부터 이렇게 조마조마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휴대 전화를 열어 연락처 앱을 열었다. 대표님이라고 입력되어 있던 부분을 지우고 몇 차례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한태경이라고 덮어쓴 뒤 저장했다. 새롭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둘이 아닌 것 같아 어지러웠다.

지하 2층에 내려온 서해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재빨리 차에 뛰어들었다. 한태경과 처음 함께 출근했던 날만큼 긴장되어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대표님, 저 따로 갈래요.”

“무슨 소리 합니까. 같은 얘기 반복하게 하지 말아요.”

“주머니에서 스페어 키가 떨어져서… 이곤 씨가 주워줬어요.”

“첫날부터 사고 쳤습니까.”

“이 옷에 주머니가 너무 얕아서….”

“재킷 이너 포켓에 넣든가.”

“저는 그런 거 없던데요.”

“봉제선 안 뜯었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갑은 어디 넣고 다녔습니까.”

“그동안 대표님이 사주시니까 잘… 휴대 전화 케이스 안에 카드만 들고 다녔는데요.”

서해를 바라보던 한태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자동차 시동을 걸고 짧게 숨을 뱉었다.

“나 참, 집에 가면 뜯어줄게요. 이너 포켓 하나 정도는 열어두면 편합니다. 가만, 그러면.”

한태경의 손이 쑥 들어와 옷깃을 들춰보았다. 이음새의 봉제선들이 그대로 붙어있었다. 당장 의자를 밀어 서해를 안아 올리고 싶은 것을 눌러 참았다. 한태경의 시선이 센터페시아에 붙어있던 화면으로 이동했다. 차는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여기도 붙어있는 것 보니 소맷단이나 재킷 트인 부분도 다 붙어있겠네.”

“…몰랐어요.”

“옷 입는 것도 챙겨줘야 하나.”

“이런 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이제 알았으니까, 제가 할게요.”

“엉뚱한 곳 잘라낼 것 같은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네요.”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한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해가 기어 위에 올려진 손등을 덮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 같기도 하고. 길게 잘 빠진 손가락 사이사이를 겹쳐 잡았다.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이 간지럽고 따뜻했다.

가만히 손을 내어주고 있던 한태경이 손등을 덮고 있던 서해의 손바닥을 기어코 풀어냈다. 아쉬움 가득 담긴 채 돌아가려는 손을 허벅지 위로 당겨왔다. 그는 서해의 손등을 덮고 한 손 가득 움켜쥐었다.

꽉 잡힌 손등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대로였다. 손바닥을 뒤집고 맞잡으려던 시도는 그대로 흩어졌다. 그저 닿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해는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손바닥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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