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겨울 지나 봄
주말을 합친 기간이긴 했지만 4일간의 달콤한 휴가 뒤의 출근길은 발이 무거웠다.
서해의 코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선글라스가 마주 보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막아주고 있었다. 드라이브 스루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서 마시고 있는 서해의 눈꺼풀이 반쯤은 감겨있었다.
“많이 피곤합니까. 어제는 일부러 푹 쉬게 뒀는데.”
“휴가를 너무 좋은 곳으로 다녀오니까 기운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주인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휴가 다녀오고 나서 출근하는 기분이 이런 건지 몰랐어요.”
“회사에서도 그렇게 부를 생각입니까. 38층에 둘밖에 없긴 합니다만.”
“콜록. 윽.”
빨대를 타고 올라오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목에 걸려 갑자기 기침이 심하게 튀어나왔다. 서해는 정말 뜨악할 정도로 놀랐다. 사흘 내내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다니던 호칭이 불쑥 튀어나오다니. 말해 주지 않았다면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을 터였다.
차와 옷에 흘리지 않으려 억지로 들이켜 기침은 더 심해졌다. 숨을 들이켤 틈도 없이 튀어나오는 기침에 절절매고 있자 등 뒤로 손이 들어왔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려 주는 손길이 다정했지만 서해는 몸을 웅크리고 기침을 뱉어냈다.
“괜찮습니까? 차 세울까요.”
“콜록, 콜록. 읍. 아니, 요. 콜록.”
“호텔 룸 안에서만 부르라니까 자연스러워지는 데 하루 꼬박 쓰고, 회사 가는 길에 주인님이라고 부르네.”
한태경이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든 서해는 손과 입가를 닦았다.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속으로 ‘대표님’을 연거푸 열 번 불렀다. 차 안에서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호칭이 달라지는 게 아직 적응하기 어려워요….”
“그렇습니까? 그럼 38층에서 지내는 동안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겠네요.”
“…조심하겠습니다.”
손등으로 달아오른 볼을 눌러 진정시켰다. 창밖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자 익숙한 지하 주차장과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마치 언제 휴가를 다녀왔냐는 듯 익숙한 모습이었다.
38층에 도착한 서해와 한태경은 응접실 카우치에 앉아 짧게 미팅 시간을 가졌다.
“월요일 열 시에 있는 임원진 회의는 오늘도 저만 참석하겠습니다. 주주 총회 관련해서 임원들끼리 의논해야 할 내용이 있어서. 이번 주 금요일에 주주 총회 특별 결의가 끝나면 조 전무가 임기 전에 해임될지 말지가 최종 결정될 겁니다.”
“네, 대표님.”
“그 이후에는 인사팀과 본격적으로 연구소로 순환 보직시킬 사람들을 뽑을 예정인데, 아마 5일 동안 인터뷰 시간을 가질 것 같습니다. 형식적인 절차이긴 하겠지만 서 대리도 인터뷰하게 될 겁니다. 인터뷰 날짜는 인사팀에서 서 대리 계정으로 보내줄 거예요. 다른 것 궁금한 거 있습니까?”
“네, 대표님. 그런데 제가 하던 업무는 종료되어 버려서요. 이번 주부터는 뭘 하면 될까요?”
한태경은 다리를 꼬고 카우치 깊숙하게 몸을 기댔다. 서해는 정말 궁금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서해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비볐다. 깜짝 놀란 서해가 한태경의 팔목을 잡고 무릎 위로 끌어 내렸다.
“서 대리 할 일이 없을까 봐 걱정됩니까.”
“솔직히 지난주도 마무리 작업은 거의 대표님이 하셨잖아요.”
“그러네요. 할 일 없으면 내 책상 밑에 와서 좆이라도 빨아주든가.”
“아, 대…표님.”
38층인지, 플레이 중인지 구분되지 않아 머리가 멍해졌다.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이겨내고 무릎 위에 얽혀있는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자 한태경이 서해를 끌어당기고 어깨 위로 팔을 걸쳐 올렸다. 곧이어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과 함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분간 업무가 좀 붕 뜨겠는데. 서 대리가 따로 해줄 일을 찾아보겠습니다. 이번 주는 취합된 최종 보고서 읽어보고 있어요.”
“저….”
“말해요.”
말해도 될까. 서해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업무에 공백이 생긴 지난주부터 드문드문 생각나던 일이었는데 막상 물어보려고 하니 회사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어… 그럼. 저, 대표님. 이게 회사 일이 아닌데, 말씀드리기가 조금 애매해서요.”
“뭔데 이렇게 뜸을 들입니까.”
“저 졸업 논문 CHI에 투고해 보고 싶은데요.”
“괜찮은 생각이네요.”
서해는 생각보다 긍정적인 한태경의 반응에 몸을 틀어 앉았다. 설명하는 동안 꼭 잡고 있던 한태경의 손끝을 몇 차례 짧게 문질렀다.
“남는 시간에 투고 준비를 해도 될지 물어보려고요. 그리고 교신 저자를 교수님들께 부탁드릴 수가 없어서… 혹시 괜찮으시면 대표님께서 해주실 수 있나 하고요. 전에 박사 졸업하셨다고 했던 것 같아서요. 회사 일도 바쁘신데 이런 부탁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내키지 않으시면 없던 일로 해도 괜찮아요.”
“무슨 얘기 하느라 이렇게 뜸 들이나 했네. 좋습니다.”
“진짜요?”
선뜻 나온 긍정적인 대답에 서해의 몸이 한태경 쪽으로 훌쩍 기울었다. 기뻐하는 얼굴을 바라보는 한태경의 표정에도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런데 내가 논문에서 손 놓은 지 한참이라 서 대리가 많이 도와줘야 할 것 같네요.”
“제가 먼저 번역할 테니까 대표님은 이후에 검토해 주세요. 실험 데이터까지 나와 있어서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나도 시간이 생기는 대로 봐줄 테니까, 물어볼 것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요.”
“아, 감사합니다. 대표님.”
서해는 정말 기쁜 나머지 회사라는 것도 있고 팔을 뻗어 한태경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가 떨어졌다.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하네. 앞으로 다시 없을 휴식 시간이 될 수도 있는데.”
“정말 열심히 쓴 논문이라 아까워서요. 서브젝트에도 트랜드가 있어서 바뀌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하고.”
“성격하고는. 접수 기한은 넉넉합니까?”
“네, 하반기에 게재하는 걸 목표로 할 거라서요. 5월까지 접수하면 돼요.”
한태경은 휴대전화에서 캘린더 앱을 켜서 날짜를 검토해 보았다. 앞뒤로 잡힌 굵직한 행사를 살펴본 다음 그는 서해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흠, 마침 잘됐네요. 연구소가 생기면 회사에서도 국내외 학회에 프랙티컬한 포스터 정도는 제출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었는데, 서해 씨랑 먼저 파일럿 테스트해 본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어요?”
“내가 장담컨대 서 대리는 그쪽 일이 더 재미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연구소 소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기회는 더 많아질 겁니다.”
“아… 대표님.”
“아직은 인사팀이나 경영지원팀과 조금 더 이야기해 봐야 하는 문제입니다만, 언제부터 시작할지에 대한 결정만 남았지 시행하는 건 거의 확정됐습니다.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생각입니다만. 서 대리 커리어는 연구소 쪽으로 잡으면 딱 좋을 것 같긴 한데, 서 대리는 어떻습니까?”
서해는 정말 기쁜 나머지 한태경의 손을 꽉 잡았다.
“뭘 이렇게 좋아해. 당장 할 것도 아닌데.”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에요.”
“당분간은 논문 투고할 준비 하고 있어요. 6월에 CES Summer Show 앞두고 해외로 장기 출장 갈 수도 있으니까 미리 써둔다고 생각하고. 그럼 난 회의 갑니다.”
“네, 대표님. 다녀오세요.”
한태경은 서해의 이마에 짧게 키스를 하고 사라졌다. 서해는 그대로 책상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말 오랜만에 학회에 투고한다고 생각하니 기대감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가지고 있던 졸업 논문의 워드패드 파일을 열고 학술지 규정에 맞는 신규 파일을 생성했다. 망설임 없이 타이핑을 시작한 서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의 번역 작업을 앞두고 주요한 워딩을 먼저 리스트업하고 전체적인 내용을 훑어보는 눈빛이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두 시간 가까이 꼼짝없이 앉아 사전 작업을 점검했다. 집중하느라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한태경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온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로비로 내려올래요? 점심 밖에서 먹게 11:35am]
[네, ㄷㅐ표님. 늦게 봐서 죄송해요. 지그 내려갈게요. 11:47am]
메시지가 도착한 지 벌써 10분이 넘게 지나있었다. 급히 보내느라 오타가 섞여 들어갔다.
자리 뒤쪽에 걸려있던 재킷을 손에 들고 로비로 내려갔다. 점심시간이라 로비에는 많은 사람이 오갔다. 서해는 그 가운데에서도 금방 한태경을 찾아냈다.
식사하러 가기 위해 움직이던 직원들은 한태경이 로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주위를 서성거렸다. 좀처럼 보이지 않던 새로운 대표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직원들이 가득했다.
남다른 피지컬에 직원들이 훔쳐보는 듯한 시선이 잔뜩 집중됐다. 그러다 로비 귀퉁이에서 걸어 나오는 서해를 발견한 직원들이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빛을 교환했다. 한쪽에 무리 지어 서있던 여직원 중 일부는 서해를 보고 주먹을 쥔 채 손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
서해가 한태경에게 걸어가기 시작하자 한태경이 고개를 들어 서해를 바라보았다. 소란스러운 로비에서 마치 다가오는 기척이라도 느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말에 진동이 꺼져 있었는데 다시 돌려놓는다는 걸 깜박했어요. 제가 너무 늦게 나왔죠.”
“아니, 괜찮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시간에 로비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서해는 오늘도 뒤통수에 시선이 따끔따끔한 것을 느끼고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섰다. 따뜻해진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왔다.
“날씨 좋네요. 더워지기 전에 많이 나가 봅시다.”
“네, 맛있는 집 찾아볼게요.”
“오늘은 내가 한 군데 찾아놨으니까 그쪽으로 가봅시다. 중국 음식 어때요?”
“좋아요.”
점심 메뉴를 얘기하며 로비를 가로질렀다. 직원들은 한태경이 지날 때마다 인사했다. 가만히 서서 인사를 받을 수 없었던 서해는 계속해서 고개를 가볍게 숙여야 했다.
밖으로 걸어가면서도 한동안 반복되는 인사에 난감해졌다. 큰길을 지나 옆길로 들어서자 한태경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앞뒤 좌우를 살피고 사람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서해가 긴장했던 어깨를 뒤로 쭉 폈다.
“으… 대표님은 익숙하신가 봐요.”
“뭐가 말입니까.”
“대표님이랑 있으니까 인사하시는 직원분들이 많아서요.”
“서 대리가 느끼기엔 그렇겠네요.”
“사실은 지난주에 혼자 식사할 때도 그렇고. 저 혼자 내려갔을 때도 좀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요. 대표님이랑 있을 때처럼 인사하지는 않는데, 뭔가 시선이 집중된달까….”
“나랑 일해서 그런 건 불편하게 되었네.”
“크게 불편한 건 아닌데 아직 적응이 좀. 괜찮아요.”
“지금 회사 분위기 때문에 더 그럴 겁니다. 어수선한 분위기 정리되면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이미 익숙해져 버려서 서 대리 생각을 못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그런데 대표님은 불편하지 않으세요?”
“난 다른 사람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그런가, 불편한 점은 크게 못 느꼈습니다. 그것보다 사람들이 서 대리 쳐다볼 것 생각하니 썩 유쾌하진 않네요.”
“대표님이 생각하는 시선으로 저를 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시선이 뭔데요.”
“…….”
“다 왔네, 올라갑시다.”
한태경은 서해를 보고 웃음 짓다가 길가에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정체불명의 조각들, 그릇들이 전시되어 중국 음식 전문점의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문 앞의 발을 한쪽으로 걷어내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둑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보였다.
“두 명, 로건 밀러로 예약했습니다.”
“네, 고객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룸으로 안내받던 서해는 한태경의 뒤에서 따라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픈형 룸에서 식사하던 글로벌유니티 직원들이 일어서서 한태경에게 인사하는 것이 보였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고만 있을 수 없었던 서해가 다시 엉거주춤하게 마주 보고 인사했다. 언뜻 스쳐본 직원들의 표정에는 대표와 식사하는 평범한 직원을 향한 안타까움과 애잔함 같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그 시선을 읽은 서해는 머쓱하게 웃음 지으며 인사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예약한 메뉴로 준비해 드릴까요?”
“네, 부탁합니다.”
레스토랑 직원은 홀 한쪽에 위치한 오픈형 룸에 서해와 한태경을 안내했다. 아치형의 입구에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발이 드리워져 있어서 홀의 원형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려졌다.
“메뉴도 미리 주문하셨어요?”
“점심시간이 짧으니까, 알차게 쓰려면 예약해야지.”
서해는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앉은 한태경을 향해 웃어 보였다. 업무가 여유로워지니 식사 시간도 즐길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내일은 그럼 제가 준비할게요. 혹시 못 먹는 음식이나 안 좋아하는 음식 있으세요?”
“딱히 없는데… 아, 있네요.”
“말씀해 주시면 앞으로 예약할 때 그런 음식들은 뺄게요.”
“추어탕, 선지, 그리고… 번데기? 이런 건 못 먹습니다.”
“앗, 번데기는 저도 못 먹어요. 으, 상상만 해도 징그러워서.”
“서 대리도 그렇습니까.”
“네, 어릴 때 보육원에서 소풍 갔던 적이 있는데요. 처음 소풍 가는 날이어서 엄청나게 신났었거든요. 그때 일일 도우미 선생님이 리어카에서 뭘 사서 엄청 맛있게 드시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같이 먹겠다고 막 떼를 썼어요. 손을 뻗어서 한 입만 달라고 그랬는데… 선생님이 이쑤시개로 집어서 주신 게 번데기였어요. 정말 그때 저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아, 지금도 소름 돋았어요.”
서해는 어깨를 웅크리며 양팔을 아래위로 쓰다듬었다.
“귀여웠겠는데.”
“귀엽다니요, 대표님…. 어린 나이에 선생님이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울고불고. 선생님은 우는 저를 달래 주시려고 안으려고 하셨는데 저는 울면서 도망가고. 괴물이 쫓아온다고…. 완전 흑역사거든요.”
콧잔등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서해가 한태경을 쳐다보고 웃었다.
“추어탕, 선지, 번데기 싫어하시면 닭발이나 곱창도 안 드실 것 같은데요?”
“먹을 수는 있는데, 일부러 찾아가서 먹지는 않습니다. 닭발이나 곱창은 임원진들 회의 가서 술안주로 먹게 될 때는 많습니다.”
주전자에 담긴 차를 따르던 서해가 고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임원진분들도 회식하시는구나.”
“아주 재미없습니다. 내 나이대는 아무도 없는데 내가 대표라고 다들 눈치 보고 하는 바람에. 최근에는 나도 요령이 생겨서 1차만 같이 하고 2차는 눈치껏 빠집니다.”
“잘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해주는 게 최고라고 하더라고요. 카드는 남기고, 대표는 자리를 비우고.”
대나무 발을 걷고 들어온 웨이터가 원형 판 위에 음식을 세팅했다. 대나무 찜기 뚜껑이 열리자 가지런하게 놓인 샤오롱바오가 보였다. 한태경은 원형 판을 돌려 서해 앞으로 놓아주었다.
“앗, 이거 저 엄청 좋아하는 건데.”
“그렇습니까. 여기 안내판 보면 들어가 있는 재료 확인하면서 먹을 수 있어요.”
“잘 먹겠습니다.”
서해는 숟가락 위에 샤오롱바오를 올리고 생강 절임까지 야무지게 올린 뒤 한입에 삼켰다.
“마시써요, 대표님.”
“다행이네. 많이 먹어요.”
“대표님도 드세요.”
서해가 돌린 원형 판이 반대로 돌아가 한태경 앞에서 멈췄다. 한태경은 검은색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연이어 들어온 웨이터는 깐쇼새우와 꿔바로우를 놓고 사라졌다. 나무 원형 판 위의 짙은 회색의 접시에 담긴 음식이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서해는 음식을 먹는 데 집중했다. 모든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한태경은 대충 손을 뻗어 입에 음식을 집어넣고 서해가 밥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주문해서 먹는 것보다는 나와서 먹는 게 좋네요. 잘 먹으니까 보기도 좋고.”
“대표님 시간 괜찮으신 날에는 자주 나와서 먹어요. 저 월급 받고 부자 돼서 아무 데나 다 갈 수 있어요.”
“한 달 월급 받고 부자라니. 한국에 부자 아닌 사람 없겠네요.”
“점심 정도는 마음껏 사드릴 수 있게 됐으니까, 부자 된 것 맞는 것 같은데요.”
마주 보고 웃던 둘은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집었다. 서해는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하다가 가끔 웃기도 하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서해는 2층에서 내려와 차광막 아래에서 손으로 햇볕을 가리고 섰다. 오후의 햇살이 벌써 초여름처럼 느껴졌다. 재킷을 벗어서 한쪽 팔에 걸치고 입구에서 비켜 기둥에 기대섰다. 봄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고 어딘가에서 날아온 꽃향기가 느껴졌다.
“갑시다.”
“대표님, 전에 이사님들이랑 갔었던 카페 들렀다가 가실래요?”
“그래요.”
“지금 가면 거의 마지막 벚꽃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앗, 빨리 가요. 자리 없을지도 몰라요.”
거리에는 많은 직장인이 나와 있었다. 서해와 한태경은 햇볕을 쬐려 걷고 있는 직장인 사이를 헤치며 걸어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한태경과 시선이 꽂히는지 모르는 서해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비율 좋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큰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지난번에 갔던 테라스가 있는 카페가 보였다. 벚나무를 잘 볼 수 있는 테이블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 앉아있었다.
아쉬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그때, 테라스 끄트머리에 약간 굽어 들어간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보였다. 서해는 한태경의 등을 밀어 바깥 자리에 앉혔다.
“아, 마지막 자리다. 잠시 앉아 계세요. 오후엔 차 드실 거죠?”
“네, 서 대리 마시는 거랑 같은 종류로 부탁합니다.”
카페는 지난번과 다른 꽃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싱그러움, 꽃향기, 봄 내음이 물씬 올라왔다. 서해는 루이보스를 두 잔 시키고 주문을 기다렸다.
카페 한쪽으로 난 창문으로 테라스 한 귀퉁이에 앉아있는 한태경을 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재킷을 벗고 셔츠를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 올리고 있었다. 양쪽 팔뚝이 드러나고, 철제 의자에서 다리를 꼬아 앉은 그가 멀리 벚나무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시선을 빼앗긴 서해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한태경을 훔쳐봤다.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진동벨이 울려 화들짝 놀랐다. 루이보스 두 잔을 손에 쥔 서해는 한태경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주문하고 보니 뜨거운 차를 마시기엔 날씨가 더워진 것 같아 신경 쓰였다. 서해는 테이블 안쪽으로 들어가 건물을 등지고 앉았다. 자리에 앉고 보니 한태경은 자신만 보고 앉게 되어 어쩐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주문하고 보니까 아이스로 할 걸 그랬나 봐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죠.”
“아직 괜찮습니다. 그리고 차는 따뜻하게 마시는 게 더 좋으니까.”
“아, 벚꽃은 아직 남아있어요?”
“새순이 나기 시작한 것 같긴 하네요. 올해에 벚꽃을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겠습니다.”
“그러네요. 대표님 덕분에 벚꽃놀이 두 번이나 하네요. 저는 사실 사람들이 벚꽃놀이 왜 가는지 몰랐었거든요.”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꽃도 예쁘긴 한데, 같이 보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차를 마시던 한태경의 손이 허공에서 우두커니 멈춰 섰다. 침대 위에서 집요하게 서해를 바라보던 눈빛이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눈빛을 읽은 서해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컵에 담긴 티백을 소서 위에 꺼내 놓았다. 말없이 차를 마시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태경이 바깥 큰길을 향해 등지고 앉은 덕분에 둘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때 테라스 바깥쪽에서 글로벌유니티의 핫이슈에 대한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회사 뒷담화를 듣게 된 둘이 시선을 마주하고 웃었다.
한태경은 입술 위에 둘째손가락을 세워 들고 서해를 조용히 시켰다.
“글쎄… 난 곪은 부분 정리할 필요도 있다고 보는데. 솔직히 속 시원한 것도 있잖아? 새로 온 한국 대표가 젊어서 그런지 일 처리도 시원시원하고. 그 나물에 그 밥 같지 않을 것 같아서 기대도 좀 되는 것 같고.”
한태경이 하는 일에 우호적인 반응이 들려오자 서해는 눈웃음을 지으며 양쪽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 모습을 본 한태경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대표님 뭐라 그러냐.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라인 살피는 건 이전보다 덜해도 될 것 같아서 훨씬 좋지. 난 정말 조 전무님 보직에서 해임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 그래도 잘해 보자고 하신 마음도 있었을 텐데.”
“그렇긴 한데….”
“뭐가 그렇긴 한데야. 야, 솔직히 조 전무님처럼 바닥부터 시작해서 올라간 임원진 몇이나 된다고. 주위를 잘 챙기려고 하시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 아냐. 나는 이걸 라인 챙기기라고 싸잡아서 매도할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해.”
“야, 좀 조용히 얘기해라. 누가 듣겠다.”
“주총에서 등기 이사 밀려나면 이제 끝인데…. 그냥 안타까워서 그러지.”
“우리야 위에서 까라면 까고, 기라면 기고 하는 거 아니냐.”
“씨발, 그 특별 채용인지 그 새끼. 걔가 연구 보고서만 안 들췄어도.”
테이블 위에 서해가 올려지자마자 한태경과 서해의 시선이 마주 보고 얽혀들었다.
당황한 서해가 들고 있던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서둘러 자리에서 피하려 옷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한태경이 서해의 팔목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너 걔 어디서 들어왔는지 들은 것 있어? 도대체 어디 라인이야. 알 수가 없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 그리고 아무리 대표님이 오더 내린 일이라지만, 혼자서 그만큼 파헤쳤는데 그 괴물 같은 속도를 어떻게 감당해.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어. 뭐 하던 놈인지는 나도 궁금하긴 하더라.”
“그 소문 들었냐. 이 팀장이 로비에서 걔한테 통사정했다는데, 대표님한테 한 번만 말해 달라고. 진짜 입 싹 닫고 정색하더라면서. 이 팀장이 오죽하면 나 데리고 하소연하면서 줄담배를 피우더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로열 패밀리인 줄 착각하는 것 같다고….”
“야. 진짜 누가 듣겠다, 좀. 왜 이렇게 흥분해.”
“저도 같은 직원이면서 아주 직원들 찍어 누르는데 무슨 자기가 심판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인가 보지. 대표님한테 존나 딸랑거리느라 다른 직원들한테는 위아래도 없는 것 같던데.”
갑자기 터져 나오는 뒷담화에 서해의 손이 덜덜 떨렸다. 기억을 더듬다가 로비에서 마케팅 3팀의 이 팀장을 만났던 것을 얘기할 타이밍을 놓치고 지나가 버린 것이 생각났다.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려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살짝 젖히고 눈을 감고 있는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잔뜩 퍼져 나왔다.
“…그 정도야? 그런데 이 팀장님이랑 박 부장님 이번에 징계도 안 받으신 것 보면 오히려 그 특채가 이 팀장님이랑 박 부장님 생각해 준 것 같은데.”
“야, 모르는 소리 마라. 회사 다니면서 엿 먹으라고 두는 거지, 그게 이 팀장님이랑 박 부장님 생각해 주는 거냐? 하여튼 옆에서 딸랑거리는 것들이 더 짜증 나요.”
참다못한 한태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의자를 뒤로 물렸다. 붙잡힌 팔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서해의 눈을 바라보았다.
서해는 떨리는 손으로 급히 그의 한쪽 팔을 붙들었다. 온 힘을 다해 꽉 붙은 손끝이 하얗게 물들었다.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놓으세요.”
“…대표님.”
서해와 한태경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등 뒤에서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그냥 그 옆에서 알짱대는 놈이 짜증 난다는 거지. 생고생해서 깔아놓은 라인은 다 뽑혀 나가고. 아, 담배 땡기네. 가자. 들어가기 전에 한 대 태우고 가게.”
테라스 위에 놓여있던 주물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 유리컵이 치워지는 소리가 복잡하게 들려왔다.
한태경은 결국 힘으로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상을 찌푸리고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놔.”
“제가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어요. 그… 그 주에 계속 마주치기 어려워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당장 죽고 싶은 것 아니면 손 떼.”
“얘기가 와전된 것 같아요. 저렇게 심각한 얘기 아니었고, 정말 하소연처럼 하신 이야기라, 윽.”
한태경은 팔목을 꽉 잡고 있던 서해의 손목을 그러쥐고 떼어냈다. 순간이었지만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잡힌 손이 금세 붉어졌다.
“지금은 회사 대표로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까, 손 떼세요.”
“아, 제발. 대표님, 혹시 저 때문이면.”
결국 한태경은 서해의 손을 뿌리쳤다.
테이블 모서리에 내쳐진 손등이 욱신거렸지만 살필 여유가 없었다. 엉거주춤하게 일어서 한태경을 따라나섰다. 재차 그의 팔을 붙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거기, 우리 직원이 있었네요.”
테라스 위에서 컵을 치우던 글로벌유니티 직원 두 명의 얼굴이 하얗게 바래다 못해 파래졌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둘은 급히 인사를 했다. 고개를 한쪽으로 비틀며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고개를 마주한 둘의 시선이 얽혔다. 눈썹이 뒤틀리고 눈가가 잔뜩 찌푸려졌다.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에 바닥만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어디 소속입니까?”
“…마케팅 2팀 김지욱 대리입니다.”
“마케팅 1팀 문영채 대리입니다.”
“첫 만남이 인상 깊네요. 개인 의견들은 곧 있을 인터뷰 자리에서 듣는 자리를 가질 예정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줄 예정이니 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건의 주세요.”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지.”
둘은 눈치 빠르게 서해를 향해 인사했다. 한태경의 뒤에 서있던 서해는 마주 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달리 뭐라고 해야 할지. 손끝이 초조하게 비벼졌다.
“이만 가보세요. 인터뷰 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허리가 무릎에 닿도록 인사한 둘은 부리나케 자리를 벗어났다.
“하아.”
깊게 터져 나오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서해는 등지고 서있는 한태경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테라스에서 벗어났다. 테이블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재킷을 팔에 걸치고 그를 따라나섰다.
기분 좋았던 점심시간이 엉망이 되었다. 한태경의 등 뒤에서 서늘하게 올라오는 기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초조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해는 38층에 들어서자마자 손목을 붙잡혔다.
응접실 카우치 위에 거칠게 앉혀진 다음 정적이 흘렀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눈을 감고 회사 일과 한태경과 계약한 일을 분리해 생각했다.
엉겨 붙은 생각들이 나뉘기 시작하자 서해의 마음이 겨우 다시 차분해졌다.
“대표님, 이 팀장님 만난 것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때 업무에 너무 집중하고 있던 상태이기도 했고, 대표님 뵙기도 어려워서 말씀드리는 걸 깜박했어요.”
“그래서.”
“회사에 미칠 영향에 대한 판단은 제가 할 역할이 아니었는데, 혹시라도 침묵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까 봐… 테라스에서 들었던 얘기처럼 마케팅팀의 이 팀장님이나 박 부장님 보호하려고 비밀로 한 것은 절대 아니에요.”
“지금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까?”
유달리 조용한 38층의 분위기에 찾아온 정적이 서먹했다. 차분하게 설명하는 서해와 반대로 한태경의 말투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서해는 최대한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스렸다. 자신도 모르게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가락 끝이 얽혀있는 게 보였다.
“…죄송해요. 대표님이 그때 너무 바빠 보여서 뭐라도 도와드리려고 했어요. 별것 아닌 사소한 일까지 보고 드려서 마음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고….”
“그게 어떻게 별것 아닌 사소한 일입니까.”
“이사회 앞두고 준비할 것도 많으셨으니까, 그 정도는 제가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이었다. 서해 나름대로 한태경을 생각하고 해줄 수 있는 것을 살핀 뒤 한 행동이었다. 서해는 혹시라도 한태경이 자기 때문에 마음을 쓸까 봐 걱정되어 한마디 보탰다.
“혼자 생각하고 판단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 혹시 저 때문인 거면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나 대신 욕 먹으라고 서 대리 뽑아온 것 아닙니다.”
“…저는 상관없어요.”
의외로 다부진 대답이 계속 들려 나왔다.
한태경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가고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으려고 줄 타는 듯한 서해의 표현이 불편했다.
“뭐가 상관없다는 겁니까. 아무에게나 아무런 대접을 받아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대표님 곤란하신 것보다는 제가.”
어김없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한태경 때문에 울상이 되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우습게도 호감의 눈빛보다 저런 가시 돋친 말에 더 익숙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표정이 영 서늘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을 사내 정치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내부 인력으로 진행하다가 라인 같은 것 만들려고 한다는 소리가 나올까 봐 외부에서 사람을 뽑아온 건데. 지금 보니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씁쓸하네요.”
서해는 자신의 역할을 다 해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 같은 한태경의 말을 곱씹었다.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뒤섞인 영역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밀려들었다. 입속에서 뱉어내지 못한 말이 엉켜 몸이 바닥으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사람이랑 같이 지내고 있는지도 오늘 처음 알았고.”
“…대, 표님.”
서해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안하게 세워진 손끝이 초조하게 꾹꾹 눌렸다. 순식간에 등을 돌려선 한태경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인사팀에서 연락 올 겁니다. 인터뷰 시간 잘 확인해서 나오세요. 나는 미팅 있어서 나가 봐야겠습니다.”
“대표님, 잠시만요.”
“더 들을 말 없습니다. 듣고 싶지도 않고. 저녁에 집에 갈 때 봅시다.”
혼자 남겨진 서해는 한동안 엘리베이터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힘이 다 빠진 걸음으로 겨우 자리에 돌아와 앉은 서해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그리고 오후 내내 혼자였다. 애지중지하며 옷걸이에 단정히 걸어두던 재킷도 의자에 대충 걸쳐놓아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엉겨 붙은 것 같았다. 논문 번역 작업은 오전에 손 놓은 상태 그대로였다. 가끔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잔뜩 실망하고 나간 한태경의 모습이 떨쳐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불편하게 느껴진 적 없었던 편안한 가죽 의자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엉덩이를 들썩여 다시 자리를 잡았는데 삐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거슬려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엉망으로 엉킨 실타래가 굴러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키보드 앞에 놓인 얼음 컵에 물방울이 잔뜩 붙어있다가 책상으로 흘러내렸다. 서해는 바닥에 고이는 물방울을 쳐다보았다. 그가 남긴 말들이 응어리져 고였다.
평소처럼 집으로 돌아가면 혼내겠다는 말 없이 냉정하게 돌아서던 모습만 자꾸 떠올랐다. 앞으로 몰려있던 일은 끝이 났는데. 연구소에 배치될 인력을 뽑게 되면 회사에서 한태경의 옆에 있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서해는 고개를 숙이고 눈두덩을 꾹꾹 누르다가 손등으로 눈과 이마를 덮고 책상 위로 웅크렸다.
* * *
현관문이 열리고 조명이 켜졌다. 한태경은 평소와 다르게 서해의 목에서 초커를 확인하지도 않았고, 체인을 걸어주지도 않은 채 복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한태경을 바라보는 서해의 눈빛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발 보폭이 서서히 넓어졌다.
“대표님.”
급히 초커를 손에 말아 쥔 서해는 목에 채우기도 전에 급히 한태경을 불러 세웠다. 평소에 가지런하게 벗어두던 신발도, 소중히 아껴서 들고 다니던 가방도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서해는 급히 복도에 들어서 한태경의 한쪽 손을 잡았다. 금세 떨치고 나가려는 손을 반대편 손까지 더해 양손으로 잡아 세운 숨소리가 살짝 가빠졌다.
“왜 부릅니까.”
“계약할 때 숨기는 거 없게 하겠다고 하고… 말씀 안 드려서 죄송해요.”
“하아, 며칠 지내보니 내가 만만합니까? 가만 보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지나고 나서 사과하는 게 서해 씨 패턴인 것 같네요.”
한태경은 서해를 돌아보지 않고 등을 돌리고 서있었다. 서해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에 금방이라도 힘이 빠져나가 너덜거릴 것 같은 손을 뻗었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이 팀장과 있었던 일에 고의가 있는지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오늘은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올라가세요.”
“대… 대표님.”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한태경에게서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 긴가민가했는데 화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 분명했다.
무섭다고 화내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들썩이는 입술이 몇 차례나 벙긋거렸다. 자신이 부탁해도 되는지가 확실하지 않아 말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서해가 잡고 있는 손을 놓자 한태경의 손이 금방 떨어져 나갔다. 재킷 끝자락을 겨우 붙들고 한태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동안 다정하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말을 듣는 게 없네요. 이럴 거면 나랑 계약은 왜 했습니까? 나랑 한 약속은 아무렇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손 떼요.”
“대표님….”
금방이라도 떨쳐버리고 들어갈 것 같은 한태경의 손을 세게 잡았다. 이대로 영영 등을 돌려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해의 숨이 조금 가빠졌다.
“손 떼라고 했지. 말로 하니까 우스워?”
“아, 윽….”
쿵- 서해의 목과 턱을 한 손으로 잡고 벽으로 밀어붙인 한태경이 팔만 뻗은 채 거리를 벌려두고 있었다. 현관 입구의 조명이 꺼졌다가 움직임 때문에 다시 켜지기를 반복했다. 벽으로 밀려들어 갈 기세로 세게 밀쳐진 서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지금 붙어먹었다가는 집이랑 회사 일이랑 구분 못 할 것 같으니까, 얌전히 방으로 올라가요.”
“저는, 저는 대표님 힘드실까 봐. 그것만 생각하다가. 지… 진짜 다른 건 없었어요.”
꽉 잡힌 목덜미의 악력도 느끼지 못하고 애써 눈을 마주쳤다. 서해를 내려다보는 한태경의 입술은 굳게 닫혀있었고 눈빛은 잘 보이지 않았다. 덜컥 무서워진 서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겨우 닿아있던 재킷 자락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한 허리를 끌어안으려 팔을 휘저었는데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답답함에 눈이 축 처졌다. 귓가에 냉정한 말을 듣는 순간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서해 씨한테 내 걱정해 달라고 했습니까?”
“그렇지만….”
“말 안 듣는 서브는 필요 없습니다.”
“대표님,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안 그럴게요.”
필요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손과 발이 차갑게 식어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찬 기운이 팔다리를 돌아 심장으로 밀려들어 왔다. 팔과 등에 소름이 돋아나고 숨이 가빠졌는데 신경 쓰이는 건 오직 한 가지였다.
목을 가득 잡은 손을 무시하고 눈을 꾹 감은 뒤 품에 파고들었다. 한쪽 허리에 손이 닿은 서해는 막무가내로 한태경을 끌어안았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한태경이 손에 힘을 주고 다시 서해를 떼어놓았다.
“아, 윽.”
“무슨 짓이야. 허락도 없이.”
한태경은 목을 감싸고 있는 자신의 손등과 팔목을 겨우 붙잡고 있는 서해를 내려 보다 한숨을 쉬었다. 온몸을 벌벌 떠는 서해를 본 순간 다시 인상이 찌푸려졌다.
천천히 손바닥에 힘을 빼고 턱을 감싸듯 잡아 올렸다.
“계약서 가지고 와서 내 섹스 취향이나 알아가지 말고, 본인이 어떤 계약을 했는지부터 다시 생각해 봐요.”
“잘못했어요. 저는, 대표님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으면 해서.”
“그 걱정을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은 서해 씨가 아니라 납니다.”
한태경의 말을 듣던 서해의 눈가가 축 처지더니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반쯤 내리감겼다. 현관 조명이 다시 한번 꺼졌다가 켜졌다.
참을 수 없이 초조한 침묵이 흘러갔다. 마음이 조급했다. 가쁜 숨소리를 비집고 긴장한 서해의 목소리가 작게 튀어나왔다.
“…저도 대표님 걱정할 수 있잖아요.”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걱정되고, 마음 쓰여서 한 일인데 이렇게, 까지 하실….”
머리 위의 조명 때문에 표정을 살피기 어려워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턱을 더 들어 올리는 손길이 전에 없이 거칠었다. 움직임을 따라가려던 서해는 까치발을 올리고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혔다.
겨우 말을 이어가던 서해의 눈가가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귓가에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한태경의 나지막한 욕설이 들려 몸이 움츠러들었다.
오후 내내 서해의 머릿속에 엉켜있던 말이 흘러나왔다. 느리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혼자 힘들어할까 봐 대신해 주고 싶고 그럴 수 있잖아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그런 건데….”
뒤로 꺾여있던 서해의 얼굴이 한태경의 눈에 들어왔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와 촉촉한 속눈썹이 머리 위의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말을 끝까지 잊지 못한 서해가 서러운 듯 한태경의 팔꿈치 근처를 꼭 쥐었다.
“저도 대표님이 좋아하는 거 해주고 싶고, 대표님이 좋아하는 모습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만.”
“제가 잘못했어요. 필요 없다고, 흡, 하지 마세요. 이제 안 그럴게요. 계약서대로만 할 테니까….”
겨우 벽에 몸을 기대고 버티던 서해의 무릎이 푹 꺾이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목 뒤에 나있던 솜털이 바짝 곤두설 정도로 어려웠다. 서해는 손을 뻗어 한태경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처음으로 마음을 담아 내민 손이 잘게 떨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에 꾹꾹 눌러 참던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일어나요.”
“저도, 안 그러려고 했는데. 흐… 대표님이 먼저 잘못한 거예요. 저한테 자꾸 잘해 주니까 착각하게 만들고. 이제 와서 필요 없다고, 흡, 하지 마세요.”
꿋꿋하게 얘기하던 서해는 결국 눈물을 쏟아놓고 말았다. 소리 내서 울고 봐달라고 몸부림치는 방법 따위는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참고 또 참고, 버티고 또 버티는 것에 익숙했던 서해의 두 뺨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는 손이 떨렸다.
금방이라도 문밖으로 밀려날 것 같아 불안한 손끝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온몸을 맞고 또 맞아 날카로운 고통을 버틸 때보다 몇 배로 더 두려운 침묵이 이어졌다.
“일어서라니까.”
다리에 힘이 풀린 서해가 앞으로 기우뚱하고 바닥에 무릎과 손을 짚었다. 손등으로 대충 뺨을 닦아내고 목으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눌렀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벽에 손을 짚으며 겨우 일어섰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머리 위에서부터 느껴지는 냉랭한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서해는 시선을 셔츠 가운데 고정했다. 종일 입고 있었는데도 구김 없는 화이트 셔츠와 어두운 타이, 그리고 매끈한 슈트가 눈에 들어왔다. 숨을 고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머리 위에서 짧게 한태경의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해는 시선을 내리고 한태경의 어깨 아래를 바라보았다.
“고개 들고.”
“흡….”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서해의 얼굴이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계약서대로만 하겠다는 말조차 거절당할까 봐 무서웠다.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시키는 대로 고개를 들어 올리긴 했지만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자꾸 눈꺼풀이 내리 감겼다.
그때 서해의 눈꼬리에 한태경의 엄지손가락이 닿았다. 무서운 마음에 손가락이 닿은 쪽의 눈꺼풀이 짧게 떨렸다.
“다른 사람 입에서 내가 모르는 서해 씨의 이야기를 듣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서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한 허리에 손을 올리려던 손이 허공에서 뚝 멈춰 섰다. 양손의 손가락을 교차시키고 가만히 얼굴로 다가오는 손가락을 느꼈다. 느리게 움직이는 엄지손가락이 서해의 눈꺼풀을 훑어 내고 엉망이 된 양쪽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내가 모르는 곳에 가서 내가 아닌 사람에게 상처받고 오지 마세요.”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던 서해의 눈가가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콧잔등이 들썩이며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코끝까지 빨개진 서해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한태경의 입가는 여전히 일자로 닫힌 상태였다.
“들어가고 싶어요?”
“…네.”
“지금부터 룰 추가합니다. 집에 오면 현관에서 옷 벗고 들어와요.”
곁을 얻는 대가로 수치스러움을 감당하라면 응당 그럴 일이었다. 입을 다물고 감정을 추스르던 서해의 턱이 잘게 떨렸다. 발끝부터 무릎, 허벅지와 등을 타고 소름이 돋아 올랐다. 여전히 무표정인 한태경은 금방이라도 돌아설 것처럼 무감흥했다.
망설이던 손이 재킷을 벗어낸 다음부터는 순식간이었다. 여전히 그늘져 있는 한태경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서해의 근처로 타이와 셔츠, 재킷과 속옷 등이 순서 없이 떨어져 내렸다.
움찔거리며 몸을 웅크리던 서해는 손에 쥐고 있던 초커를 목에 둘렀다. 머리 위로 덮인 짙은 그림자를 올려다보고 다음을 가만히 기다렸다.
“따라와요.”
한태경은 여전히 서해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지만, 한결 누그러진 그의 모습을 보는 서해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아무렇게나 들이켜지는 숨을 고르며 복도를 따라 들어갔다.
익숙한 거실에서 생소한 모습으로 들어선 서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와 박히는 순간 후회가 밀려오고 귀가 빨개졌다.
조금만 더 참고 속으로 숨길걸. 그냥 잘못했다고 할걸.
되돌릴 수 없는 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목 뒤가 쿡쿡 쑤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가슴이 답답했다. 2층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이 집에서 자신에게 오롯이 허락된 공간으로.
“앉아있어요. 따뜻한 물 가져올 테니까.”
마치 처음 한태경의 집에 왔던 날처럼 어색한 모습으로 카우치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눈두덩이에 손을 올리자 열기가 느껴졌다. 손등으로 눈썹뼈와 눈두덩을 살짝 눌렀는데 벌써 부어올라 있는 듯해 난감했다.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온 한태경이 서해가 앉아있는 쪽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사선으로 내리 꽂히는 그의 시선이 빨갛게 달아오른 서해의 눈가로 향했다.
서해는 자신의 자리 앞으로 내밀어지는 머그컵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릴 수도 없이 부끄러웠다. 티 없이 깨끗한 집에 벗은 몸으로 앉아있는 자신을 내려다본 순간 정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은편 카우치 가죽이 미끄러지는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마주하고 앉은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둥글게 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전 일은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대표님께 괜한 얘길 해서….”
“이성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니, 감당하지도 못할 일은 왜 자꾸 하는 겁니까.”
눈앞으로 적당하게 미지근한 머그컵이 쑥 들어왔다. 서해는 떨림이 남아있는 두 손으로 컵을 받아들었다. 물을 마시려면 몸을 바로 펴고 앉아야 했는데 자신이 없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슈트 차림의 한태경이 보였다. 착각은 자유라더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그어놓은 명백한 선이 서해의 심장을 쿡쿡 쑤셨다.
“천천히 절반 이상 마셔요.”
“…감사합니다.”
거절할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절반 정도의 물을 마신 다음 테이블에 머그컵을 내려두었다. 따뜻한 물이 입속에 고였다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다시 한태경의 영역으로 들어온 서해의 마음이 조금은 안정됐다. 사과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카우치에 기대어 맞은편에 앉아있던 한태경이 손바닥으로 왼쪽 허벅지 위를 두어 차례 두드리는 것이 보였다.
손동작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한 순간 짧게 숨을 들이켜고 마른침을 삼켰다. 서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 사이에 멈춰 서고 왼쪽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한태경은 그제야 서해의 목에 걸려있던 초커에 체인을 다시 걸어주었다. 가슴 위로 떨어지는 금속이 차가워 몸을 움찔거렸지만 손가락 끝을 꾹꾹 누르며 버텼다.
느린 동작으로 체인을 말아 쥐는 소리가 들렸다. 서해는 아무 말 없이 느릿하기만 한 그의 움직임에 머리카락이 바짝 설 정도로 긴장했다.
몇 차례 손바닥을 돌려 체인을 바짝 감아쥔 한태경이 서해의 등허리에 손바닥을 올렸다.
열이 올라있던 등에 얼음처럼 차가운 셔츠 소매의 커프스와 재킷에 붙어있던 단추가 닿았다. 엉덩이에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긴장한 유두가 올라왔다.
자꾸 움츠러드는 몸을 애써 바로 하며 초조하게 손끝을 비볐다. 한태경은 옆을 보고 있던 서해의 몸을 마주 보는 방향으로 돌려 앉혔다.
어색하게 끌려온 다리를 들어 올리고 한태경의 허벅지와 허리 옆에 무릎 꿇린 상태로 겨우 말아 넣었다.
같은 공간에서 완벽하게 갖춰 입은 한태경과 초커 하나만 목에 걸치고 있는 서해의 모습에서 서로의 위치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왜 이렇게 뻣뻣하게 굴어.”
“윽.”
팽팽하게 곤두서서 한태경을 괴롭히던 신경이 서해의 피부와 맞닿으며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품 안에 온전히 들여놓고 나서야 속에서 들끓던 열기가 차츰 가라앉았다.
천천히 다리를 떼어내고 자리를 고쳐 앉으려는데 서해의 초커에 연결된 체인이 당겨졌다. 서해는 한태경의 가슴팍에 코를 박았다.
찡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카우치에 편하게 기댄 한태경의 몸 위에 엉거주춤하게 기대어 있는 자신이 보였다. 서해는 어색하게 카우치의 등받이에 손을 올리고 시선을 마주했다.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해요. 여기서 있을 땐 계약서대로, 대표님이 시키는 대로 할게요.”
“계약서 같은 소리 하네.”
“…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놓고. 방금 한 말은 다 어디 가고 다시 원점입니까. 나한테 더 할 말 없어요?”
서늘하게 손도 못 닿게 하던 한태경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차분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금세 경계를 풀었다. 손이 닿았다 사라질 때마다 한태경이 사용하는 향수 냄새가 짙게 풍겼다가 사라졌다.
어느 날 그랬던 것처럼, 서해는 다정한 손길에 다시 한번 녹아내렸다.
“어… 대표님이랑 여기서 더… 있고 싶어요.”
“또?”
“이제 말 잘 들을게요.”
“그건 당연한 거고.”
한태경의 큰 손이 서해의 뒷머리를 헤집고 들어와 품으로 끌어당겼다. 서해는 살짝 움직여 한태경의 한쪽 어깨 위에 머리가 닿게 자리를 잡고 목덜미 쪽으로 얼굴을 묻었다.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뒷머리를 눌러오는 속박감에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거 해주고 싶어요?”
“…네.”
“나한테 힘든 일 있으면, 서해 씨가 대신해 주고 싶고?”
“네.”
“왜 그럴까.”
서해의 귀가 갑자기 빨개졌다. 입술을 말아 넣으며 망설이는데 머리를 헤집던 손이 천천히 등을 타고 내려가 느리게 허리를 쓰다듬었다. 생각에 잠긴 듯 같은 자리에 작게 원을 그리며 머무르는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나도 오늘 처음 알게 된 게 있습니다.”
“…….”
“요즘 내 기분을 들었다가 놨다가 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는 거 같은데. 서해 씨 때문에 화가 나다가, 서해 씨 덕분에 가라앉습니다.”
“대표님, 화나신 거 아니었어요…?”
“그랬었지, 그런데.”
서해는 한태경의 말에 집중하느라 커다란 손이 등에서 더 내려가 엉덩이를 쓸어내리고 있는 것을 한참 뒤에나 알게 되었다. 깊게 숨을 내쉰 서해가 몸을 웅크리고 천천히 한태경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대표님, 제가 더 잘할게요.”
“지금도 잘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 나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네요.”
한태경은 서해의 허리에 움푹 들어간 곳에 엄지손가락을 걸치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어떤 순간엔 서해 씨가 실수하는 것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내고 싶은데. 그러다가도 날 바라보는 눈을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아무렇지 않아지고.”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대표님 마음대로 대하셔도 괜찮아요.”
“둘 다 엉망이네.”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한태경의 말투에 서해의 입에서 웃음 섞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서해의 눈을 덮고 있었다.
한태경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눈가를 몇 차례나 쓰다듬어 주었다. 빨갛게 무른 눈가와 코끝이 보였다. 그는 서해의 목에 연결된 체인을 잡아당겨 카우치에 누웠다.
무릎과 팔을 세우고 한태경을 내려다보던 서해는 팔과 다리에 힘을 빼고 몸을 굴려 한태경의 위로 올라갔다.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자 단단히 허리를 고정하고 목덜미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렇게 차가웠던 단추와 체인은 어느새 몸의 온도에 데워져 아무렇지도 않았다. 몇 겹으로 가려져있는 슈트 너머로 잡힐 듯 말 듯 한 따스함이 느껴졌다.
“서해 씨가 내 말대로만 행동하는 걸 보거나, 내 손에서 잘 느끼는 걸 보는 것도 물론 좋습니다.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인데. 요즘은 서해 씨가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서해는 천천히 손을 뻗어 한태경의 어깨를 잡았다. 다행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 균형이 깨어지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한태경은 무릎을 세워 올리고 서해의 몸을 추켜 올렸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서해가 고개를 들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서해의 귓바퀴와 옆머리를 감쌌다. 서로의 이마와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할 만큼 가깝게 붙어있었다. 몇 차례 콩콩 찍고 물러나는 것을 보다가 멀어지지 못하게 뒷머리를 끌어당겼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넓은 공간을 채웠다.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인데.”
서해는 한태경의 입에서 잠시 떨어져 있자든가,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말이 흘러나올까 봐 다시 몸을 굳히며 긴장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가슴팍이 쉼 없이 오르내렸다. 긴장한 상태로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늘 거침없이 말하던 한태경의 입술이 들썩이는 모습이 보였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져 깜빡거렸다.
“자, 잠시만요, 대표님. 잠깐.”
“아직 안 끝났습니다. 끝까지 듣고 얘기하세요.”
“나, 나중에요. 지금 말고, 나중에.”
“이런 얘기를 나중에 어떻게 또 합니까. 또 언제 이렇게 표현해 줄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얘기하지 않으면 분명 더 도망가겠지.”
고저 없는 서늘한 목소리가 몸을 감쌌다. 차가운 말이 쏟아지지는 않을까. 겨울바람을 맞은 것처럼 몸이 떨렸다. 다시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조여들었다.
“사실, 우리 관계는 처음부터 엉망이었습니다. 계약서는커녕 제대로 된 플레이 한 번 안 해봤다는 사람 앉혀놓은 것부터가 제대로 된 상황이 아니었지.”
서해는 눈을 깜박여 흐릿한 시야를 일깨웠다. 두 팔을 한태경의 어깨에 올리고 꽉 움켜잡았다.
“…그때, 그때는 아무것도 안 하셨잖아요.”
“내 변호를 왜 서해 씨가 합니까?”
가까이 붙어있던 뺨이 떨어졌다. 서늘하게 밀어낼 것 같았던 한태경의 손이 목과 어깨를 쓰다듬었다.
“서해 씨 성향이 서브미시브에 가깝다는 것은 집에 오기 전, 아니 계약하기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확신했어요, 내 컨트롤 아래에 들어올 거라는 거. 알았기 때문에 계약하자고 했고, 망설일 틈도 주지 않고 밀어붙였습니다. 이건 내가 정확하게 봤는데.”
한태경은 짧게 숨을 뱉어내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권율기를 떼어 내려고 했던 건, 내게 있어서는 거슬리는 것을 치워내는 것 정도였습니다. 내 파트너는 오롯이 나만 봐야 하니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는데…. 서해 씨에게 계약의 보상 정도를 제공하려고 했다면 나는 완전 실패했습니다.”
“…….”
“우리 관계에 대해서 설명했던 것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가 서해 씨를 통제하면, 서해 씨는 내게 복종하면 된다고 했던 것.”
고개를 끄덕이던 서해는 눈을 감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목덜미를 쓰다듬던 손길이 양쪽 허리를 잡아왔다.
“그게 일반적인 DS의 관계성입니다. 내가 저 기준을 철저하게 지켰다면 서해 씨는 내게 먼저 키스를 하려고 하거나 끌어안으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겁니다. 당장 끌려가서 죽도록 혼났을 테니까.”
한태경의 어깨에 올라와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가 말하는 통제의 범위는 어디까지인 것일까. 어색하게 가슴 앞에 멈춰선 양 손이 차가웠다. 손가락 끝으로 맥박이 느껴질 정도로 긴장했다. 눈을 감고,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자, 잘 몰라서…. 싫어하는 줄 알았으면….”
“틀에 맞게 가두려고 했으면 진작 그랬을걸.”
“알려주시면 조심할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대표님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요. 뭐든 상관없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파트너로서의 관계를 얘기 하려는 게 아니에요.”
“…….”
“오히려 반대 상황에 빠진 건 나인 것 같네요. 정신 차리고 보니 서해 씨에게 끌려서… 막상 지배당하는 건 내 쪽인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신지 잘.”
한태경이 가슴 앞에 덩그러니 올라와 있던 서해의 양팔을 잡아 올렸다. 떨리는 팔목 안쪽에 번갈아가며 입술을 붙였다.
“오해로 시작한 계약을 바로 잡아 볼까 합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가 입술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망설이던 그는 팔목에 붙은 입술을 떼지 않고 그대로 서해를 바라보았다.
“서해 씨랑은 DS와 연애를 구분하고 싶지 않아요.”
불규칙적으로 들썩이던 숨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빨갛게 짓무른 눈이 둥글게 떠지더니 눈꺼풀이 몇 차례 깜빡였다.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듯 가만히 있자 한태경의 엄지손가락이 귓가를 부드럽게 쓸어왔다.
“우리 연애할까요, 서해 씨.”
서해가 의식적으로 짧은 숨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더니 목덜미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귓가에 들리는 말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혹은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따라가다가 시선을 내려 한태경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생각에 빠져 서해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연애.
서해는 자신과는 영영 접점이 없을 것 같았던 단어를 곱씹었다. 두어 차례 단어를 되뇌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맞붙은 가슴이 아래위로 들썩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을 숨기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었다.
한태경의 손이 서해의 등허리를 덮은 뒤 몇 차례 쓸어내렸다. 따뜻한 손바닥이 주르륵 미끄러져 꼬리뼈를 덮고 귓가에 닿아있던 손가락이 몇 차례 움직임을 반복했다.
서해는 한태경과 붙어있던 상체를 들어 올리고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평소처럼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더 깊게 주름이 패는 모습을 보던 서해가 손을 뻗어 둘째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렀다. 그러자 생각에 잠겨있던 동공이 다시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돌아왔다.
한태경이 자꾸 멀어지는 서해의 목덜미를 눌러 뺨을 맞대고 중얼거렸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대표님….”
짓물러서 따끔거리는 눈꺼풀을 내리깔고 응석 부리듯 몸을 비볐다. 그와 맞닿은 얼굴로 웅웅거리는 진동이 느껴지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손을 더듬어 어깨를 꽉 쥐고 끌어안자 괜찮다는 듯 계속해서 토닥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서해가 한참 동안 대답을 못 하자 결국 한태경이 다시 물었다.
“나랑 연애하는 건 별로예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머리와 마음이 복잡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이쯤에서 그만두라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댔다. 힘이 다 풀린 다리는 감각을 잃은 것 같았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도 어딘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막상 기회가 주어지자 두려움이 왈칵 몰려왔다.
정말 대답해도 될까. 들숨과 날숨이 교차할 때마다 꼭 맞게 움직이는 가슴의 움직임이 좋아서, 가만히 들려오는 낮은 숨소리가 좋아서, 등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커다란 손이 좋아서. 이유 같은 건 셀 수 없이 많았다.
서해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움직여서 손을 뻗었다.
“…할래요, 대표님이랑. 연애.”
몸이 끌어안긴다 싶더니 금방 위아래가 바뀌었다.
한태경은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품 안에 갇히듯 들어찬 서해를 내려다보았다. 짓무른 눈가와 빨간 코끝,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손을 뻗어 깨물린 입술을 빼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손길을 느끼던 서해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요, 대표님.”
“응.”
“제가 금방 잘 배우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연애는 배워본 적이 없어요.”
“그걸 누가 가르쳐줘서 합니까.”
헛웃음을 뱉어내던 한태경이 서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없이 진지한 모습 때문에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반짝거리는 서해의 눈이 몇 차례 깜박거리다가 재킷 안에 감춰져 있던 타이의 매듭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잘 못할까 봐 걱정돼서요.”
“잘 못해도 됩니다.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잘 못해도 화내지 마세요. 대표님 화나면 무서워요.”
“오늘 있었던 일은 서해 씨가 약속을 어겨서 그런 거고, 말 잘 들으면 화낼 일이 없지.”
“그렇지만 그건.”
“하여튼 말대꾸는.”
서해는 빠듯할 정도로 상체를 붙여오는 몸이 버거웠지만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접혀있는 팔이 단단한 품 안에 들어가 꼼짝할 수 없어 손가락을 움직여 겨우 어깨를 잡았다.
서해의 허락을 구하는 듯 느릿하게 움직인 한태경이 입술을 붙였다. 열이 올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벌어지고 혓바닥이 빼꼼히 올라왔다.
“더 내밀어요. 이걸로 뭐 하라는 거야.”
혓바닥이 조금 더 밀려 나오자 턱이 아래쪽으로 벌어졌다. 금방이라도 키스해 줄 것처럼 말하던 한태경은 서해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서해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태경은 서해의 뒷머리에 손을 밀어 넣고 입술을 혀끝에 붙였다.
“대표님, 빨리….”
“아까워서 그러지.”
느릿한 움직임에 애가 탄 서해가 등을 들썩이며 혓바닥을 밀어 넣었다. 입술이 닿았지만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한태경의 모습에 서해는 손가락 끝으로 어깨를 바짝 끌어당겼다. 바로 앞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읍.”
따뜻한 혓바닥이 감기는 순간, 느긋한 줄 알았던 한태경의 움직임이 언제 그랬냐는 듯 거칠어졌다. 서해의 손가락이 쭉 펼쳐졌다가 다급하게 쥐어졌다. 급히 빨아들여진 혀뿌리가 고통스러워 숨을 짧게 들이켰다.
조용한 거실에서는 혓바닥이 얽히는 소리,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만 가득 울렸다. 서해에게는 숨 쉬는 것조차 가쁜 키스가 연달아 이어졌지만 그런 버거움쯤은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빠듯할 정도로 몸을 눌러오는 무게도, 도망갈 수 없게 뒷머리를 잡고 있는 손도 아무 상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몸을 묶어서라도 붙어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긴장한 상태로 있었던 것, 집에 도착하자마자 눈물을 쏟아놓은 것, 베드인하기 전까지 정신을 쏙 빼놓을 것처럼 이어진 패팅까지 겹쳐 머리가 몽롱할 지경이었다.
서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한태경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 물었다.
“내일 인터뷰 있는 건 기억하고 있습니까?”
“아. 깜박했어요.”
“잠을 조금이라도 자야 컨디션 조절이 될 것 같은데.”
서해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이런 기분으로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쳐질 것 같은 불안함에 허우적거리다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은 또 가슴을 가득 채우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일어나요, 올라가게.”
“네, 대표님.”
2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손을 맞잡았다. 서해가 내미는 손을 거부하지 않은 한태경은 순순히 손바닥을 내어주었다. 깍지를 끼고 도착한 곳은 그의 방이었다.
각성제라도 마신 것처럼 맑아지는 머리 때문에 서해는 새벽 네 시가 넘어서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깨어나게 되어 새벽부터 헬스까지 다녀온 길이었다.
다행이었던 점은 쉽게 잠들지 못하는 동안 바로 옆자리에 누운 한태경의 모습을 실컷 볼 수 있었다는 점 한 가지였다. 반듯하게 오른 콧날이나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온 귓바퀴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신기하게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대표님의 작은방 3권에서 계속)
대표님의 작은방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