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9)

09. 변화

토요일 저녁, 소파에서 한태경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뉴스를 보고 있을 때였다. 뉴스에서는 나이브레티 압수수색 건의 경과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권율기 현 나이브레티 상무가 자사 재단으로 후원 중인 나이브레티 보육원에 대한 압수 수색 소식을 전달해 드렸는데요. 경찰은 보육원의 폭언과 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을 확보하고 수사에 속도를 올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 서해의 발끝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압수 수색을 통해 확보된 자료에서 차명 계좌를 이용해 권상무에게 비자금이 흘러간 정황이 포착된 것으로 보입니다. 권율기 상무는 불구속 입건되었습니다. 자세한 소식….

너덜너덜하게 해어진 기억의 조각이 TV에 오버랩되었다. 서해는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뉴스를 보려는 사람처럼 담담한 척했다. 한태경이 출장 간 동안 혼자 뉴스를 보던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손끝을 꼼지락거릴수록 맥박이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포토라인에서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는 권율기가 보였다. 불구속 입건이긴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서해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애써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가슴 위로 커다란 손이 툭 올라왔다.

“사건에 배당된 수사관이 우리 라인이라서 당분간 고생 좀 할 겁니다.”

서해는 손을 뻗어 한태경의 무릎 위에 손을 덮었다.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자 큰 손이 서해의 머리카락을 헤집어왔다.

눈앞이 살짝 어두워지고, 보고 싶지 않았던 권율기의 얼굴이 시야에서 가려졌다. 가만히 누워 그의 손가락 움직임을 느끼고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잠에 빠져들고 싶어졌다.

“내일 서해 씨 이전 집 정리하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부드러운 말투로 자신의 의사를 물어주는 그는 평소에 보던 한태경이 맞았다.

“집 정리라고 하시면….”

“어차피 앞으로 계속 여기서 지낼 텐데 그곳은 남겨둘 필요 없지 않습니까.”

허벅지 위에 머리를 얹고 뉴스를 보던 서해의 눈꺼풀이 몇 차례 깜박였다.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 같으면서도 경계 없이 허물어지는 상과 벌 앞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서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전에도 언급했던 적은 있었지만 막상 집을 정리하려니 느낌이 이상했다. 발끝에 걸리는 러그를 발가락으로 말아 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 표님… 저는 여기 있는 게 너무 좋은데, 대표님 불편하실까 봐 걱정돼서요.”

“나는 서해 씨가 내 눈에 안 보여서 신경 쓰는 게 더 불편합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내 걱정은 말고 그 집은 정리하는 것으로 끝냅시다. 내일 아침에 정리하러 가요.”

서해는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면서 한태경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있다가 슬쩍 어깨에 기댔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돌아갈 곳이 달라진다는 것에 손끝이 간지러웠다.

옆에 앉아있던 한태경이 서해의 어깨를 눌러 다시 그의 무릎 위에 눕혔다. 푹신하고 따뜻한 손길이 쏟아졌다.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은 제발 그만하라는 잔소리도 함께 이어졌다.

그의 허벅지 아래로 손을 슬쩍 밀어 넣고 편하게 몸을 말아 눕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받아내지 못한 서해는 결국 눈을 감았다.

* * *

서해의 옷장에는 캐주얼 옷들이 새롭게 걸려있었다. 옷 사이즈를 알게 된 한태경이 봄을 맞이해서 몇 개의 옷을 더 구매한 것 같았다. 곧 매장이라도 차릴 분위기였다.

짧게 숨을 내쉬고 드레스 룸을 둘러보았다. 사방에 옷과 가방, 신발이 가득했고 시계와 넥타이핀 그리고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커프스까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중에 서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한쪽 서랍을 열어보자 평범한 무늬와 색깔의 손수건이 가득했다.

드레스 룸을 몇 번이나 둘러봤다. 집을 정리하러 가면 험한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럴 때 입기에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옷들만 가득했다. 한참 망설이던 서해는 가장 무난해 보이는 검은색 니트를 입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목 한쪽으로 붉게 타고 올라가듯 점점이 박힌 키스 마크들이 보였다. 토요일 새벽에 처음 봤을 때보다 색이 더욱더 짙게 물들어 있었다.

이 모습대로 외출하기엔 힘들어 보였다. 토요일 내내 거울 볼 기회가 없어 목을 드러내고 다녔는데 말 한마디 없었던 그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너무나 적나라하게 박힌 영역 표시가 부끄러웠다. 손으로 목을 감싸고 한태경의 방으로 찾아갔다.

방금 준비가 끝난 듯 드레스 룸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앞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었다.

서해와 비슷한 검은색 니트를 입고 있는 게 보였다. 분명 비슷한 스타일인데 어른이 입은 느낌이었다. 한태경과 눈이 마주친 서해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손이 닿은 것도 아닌데 갑작스러운 증상이었다.

“대표님, 혹시 밴드 있으세요?”

“어디 다쳤습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말로 설명하기 부끄러워 한태경에게 다가가 목을 덮고 있던 손을 떼었다가 다시 덮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그는 허리를 굽혀 서해의 입술에 짧게 키스한 다음 떨어졌다.

“구급상자 안에 있을 텐데. 1층에 먼저 내려가서 기다려요.”

“네.”

휴대 전화와 가위, 쓰레기봉투와 간단한 청소 도구를 챙겨 든 서해가 1층으로 먼저 내려왔다.

카우치에 잠시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곧바로 2층에서 내려오는 한태경이 보였다. 그는 서해의 옆에 앉아 여전히 목을 가리고 있는 서해의 손을 떼어냈다. 목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생각보다 짙은 울혈 자국과 크기에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누가 물어뜯었는지 참 엄청나게도 뜯어놨네요.”

“대표님이 하신 건데요.”

“사실 서해 씨 피부가 이렇게까지 약할 줄 몰랐습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다음부터 뭘 조심한다는 것인지 생각한 서해의 표정이 붉어지다가 멋쩍은 한태경의 표정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그는 이게 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 탓이라며 서해를 나무랐다. 여러 사이즈의 밴드를 펼쳐놓고 사이즈를 가늠해 보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서해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반은 충동적으로 입술을 붙이고 짧게 키스했다. 밴드를 손에 집어 든 그가 잠시 자리에서 멈춰 서는 게 보였다. 멋대로 키스해서 혼날까 걱정했는데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 사이즈가 좋겠네요.”

“네, 감사합니다.”

“자, 됐습니다. 며칠 동안은 밖에 나갈 때 밴드 붙이고 다녀야겠습니다. 내일은 좀 더 작아질 테니까 회사 갈 때는 이걸로 쓰고. 몇 개는 가지고 있어요.”

“이런 건 언제쯤 없어져요?”

“4~5일? 피부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서해 씨는 피부가 약해서 잘 모르겠네요.”

“아… 그럼 회사는, 월요일에 임원진 회의는요?”

“회사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도 당분간 38층 밖으로는 많이 나가지 말아요. 사내 메신저나 전화로만 업무 처리하고.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거울로 목덜미를 살폈다. 밴드가 떨어지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몇 차례나 밴드 가장자리를 꾹꾹 눌렀다.

익숙하게 차에 올라타려 했는데 한태경은 서해를 옆에 주차된 다른 차로 이끌었다. 그레이 빛깔의 스포츠카였다.

저도 모르게 후미등까지 훑어본 서해가 어색하게 차에 올랐다.

* * *

삼거리의 낡은 방은 차로 끝까지 올라갈 수 없는 길에 위치했다. 동네 아래의 작은 공영 주차장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스포츠카가 주차되었다.

서해는 차 밖으로 발을 딛고 내리려다가 멈칫했다. 발을 딛고 내렸다가 구두가 엉망이 될 것 같았고, 돌아와서 다시 차를 타면 차 바닥에 깔린 매트가 지저분해질 것 같았다.

문득 권 상무가 집에 찾아올 때마다 구두에 흙이 묻는다고 뭐라고 하던 게 생각났다. 그리고 한태경이 자신의 집에 찾아온 날 묻어있던 진흙더미도 생각났다. 그와 지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구두에 흙이 묻을까 봐 조심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다.

내리는 것을 망설이던 서해의 모습을 본 한태경이 오해하고 말했다.

“아직 아파요? 컨디션 안 좋으면 다음에 다시 와도 됩니다.”

“아니요. 잠시 다른 생각 하느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내렸지만 앞코와 뒷굽 위로 흙덩어리가 묻는 게 눈에 보였다. 새로 꺼낸 신발이었는데. 한태경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가는 것으로 보였는데, 서해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구두만 쳐다보면서 언덕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인집에 연락해서 방 정리한다고 했어요.”

“잘했습니다.”

“방에 있는 물건들만 비워주면 나머지는 월세 놓을 때 그래도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렇게 하려고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엘리베이터와 평지에 익숙해진 서해에게 언덕길이 가파르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나 익숙한 곳이 나타났다. 언덕배기에 다다라 갈라지는 삼거리와 그 가운데 위치한 낡은 1층짜리 판잣집이었다. 한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낡은 스테인리스 우편물함에는 고지서가 잔뜩 꽂혀있었다.

“고지서 보니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나 싶기도 하네. 서해 씨 돌아가면 주소 이전부터 합시다. 나도 이사는 별로 안 다녀봐서 이런저런 것들 챙기기가 쉽지 않네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연체된 것들이 조금 있긴 하지만 한 달 정도라서 괜찮을 거예요.”

서해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고 문을 열었다. 쇳소리가 거칠게 밀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이 그대로 노출됐다. 문 바로 앞에 보이는 낡고 작은 녹색 싱크대와 누렇게 변한 냉장고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안쪽에 책상과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눅눅한 냄새가 훅 밀려들었다. 한태경이 눈을 얇게 뜨고 안을 둘러보는 게 느껴져 부끄러웠다.

“필요한 건 얼마든지 가져와도 되니까 내 눈치 보지 말고 챙길 건 다 챙겨요.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학술지 논문이랑 포스터, 졸업 논문 이런 것밖에 없을 거예요.”

“여기는 누가 봐도 잠시 머무르는 사람 공간이지 집이라고 부르긴 어렵겠네요. 우리 집에서는 흔적 좀 남겨요. 잔뜩 남길수록 좋습니다.”

“대표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지금이라도… 아야.”

이마에 제법 아픈 꿀밤이 내려왔다. 서해는 억울한 표정으로 한태경을 올려다보았다.

“정리하고 나와요. 천천히 해도 좋으니까 다치지 말고.”

“…네.”

대문 옆의 평상을 보자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났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평상의 모서리에 깔아준 서해가 살짝 웃으며 한태경을 쳐다보았다. 마주 본 그도 웃고 있었다.

“여기 잠시만 앉아 계세요.”

한태경이 집 앞으로 찾아와 같이 일하자고 했던 어느 날 밤의 상황이 생각났다.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사이가 된 것이 신기했다.

서해는 짧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먼지가 꽤 많이 날릴 것 같아 현관문을 열어둔 상태였는데, 평상이 삐그덕거리면서 그가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해는 종이 봉투에서 꺼낸 고무장갑을 끼고, 검은색 비닐봉지를 펼쳐 들었다. 냉장고를 열어 덩그러니 놓여있던 페트병을 꺼내어 담고, 낡은 싱크대 위에 놓여있던 얼마 안 되는 주방용품들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그리고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펼쳐 들었다. 침대 위의 낡은 이불과 베개를 버리고, 책상 위에 놓여서 한참 동안 쓰임이 없었던 물건들도 모두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고무장갑까지 쓰레기봉투에 담아 꾹꾹 눌러 매듭을 매었다. 얼마 없던 물건이 다 버려진 뒤엔 가뜩이나 휑하게 느껴지던 방이 더욱 건조하게 느껴졌다.

종이 봉투에 투고했던 논문들과 학술 대회에서 발표했던 포스터들, 그리고 졸업 논문 한 권을 담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한태경이 평상에 앉아 팔짱을 끼고 인상을 쓰고 있는 게 보였다.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들어 문밖에 세워놓은 뒤 재활용 쓰레기가 담긴 검정 봉투를 연달아 끌어냈다. 마지막으로 손에 종이봉투를 들고 나와 문을 잠그고, 집 한쪽의 낡은 화단 벽돌 아래에 열쇠와 마지막 인사를 쓴 쪽지를 밀어 넣고 손을 탁탁 털었다.

“지루하셨죠.”

“아니, 30분도 안 됐는데. 설마 가지고 돌아갈 물건이 그 종이 봉투가 전부입니까.”

“네, 딱히 가져갈 만한 게….”

“…나중에 나도 버리겠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한태경의 어이없는 말에 서해의 입에서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돌아갑시다. 종이봉투 이리 주고. 쓰레기는 어디다 버립니까.”

“아. 여기 집 코너 전봇대 아래에 두면. 제가 할게요, 대표님.”

“빨리하고 갑시다. 이곳에서 힘들었을 서해 씨 생각하니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한태경은 쓰레기봉투를 뺏어 들었다. 그는 전봇대 아래에 마련된 쓰레기통 안에 봉투를 밀어 넣었다. 쓰레기가 떨어지자 통 안에서 큰 파리 몇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는 손을 크게 흔들어 쫓으며 다시 서해 쪽으로 돌아왔다.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을 보다가 서해는 다시 웃음이 터졌다.

“예전보다 많이 웃으니 좋긴 한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대표님 쓰레기 버리는 거 진짜 안 어울려서요.”

“나도 미국에서 혼자 살 때는 다 하던 일인데.”

“그때도 안 어울렸을 것 같아요. 확실해요.”

서해는 올라갈 때보다 훨씬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와 차에 올랐다. 조수석 자리의 매트가 엉망이 될까 봐 조수석에 앉아 두 발을 뻗어 탁탁 터는 모습을 본 한태경이 서해를 따라 했다. 나란히 앉은 둘의 얼굴에 짧게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먹을 것 사러 가기 전에 가고 싶은 데 있어요?”

“아, 대표님. 맛있는 점심 사드릴까요? 저 첫 월급 들어왔는데.”

“좋지. 내가 먹고 싶은 거로 골라도 되나?”

“뭐든 다 좋으니까 말씀만 하세요.”

“그럼 일단 서해 씨부터 먹고, 생각합시다.”

“…그거 말고요. 먹을 것만 받을 거예요. 이번 주말에 한 번 더 하면 저 죽을지도 몰라요.”

“흠… 너무 아쉬운데.”

“대표님….”

“그럼 내가 가끔 가는 레스토랑 소개해 줄 테니까 그쪽으로 갑시다. 음식이 깔끔하고 괜찮아서 좋아하는 곳입니다.”

손을 뻗은 서해는 기어 위에 놓여있던 손을 포개어 잡았다. 한태경이 알고 있던 장소, 서해에게는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굵은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겹쳐 올리고 손등을 감쌌다. 카우치에서 밴드를 붙일 때 했던 키스를 피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 * *

여느 날과 같은 출근길이었다.

서해는 현관에 붙어있던 거울을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슈트와 셔츠 위로 손가락 세 개를 붙여놓은 것 같은 사이즈의 밴드가 반 정도 노출된 것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밴드 떼어내고 출근하라고 하고 싶네요. 사실 누구 보라고 남겨놓은 거라서.”

“…그건 힘들 것 같아요, 대표님.”

손가락을 뻗어 밴드를 문지르고 있자 등 뒤로 다가온 한태경이 밴드 위에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고개 돌릴 때 조심해요. 밴드 떨어지는 것도 확인해 주고.”

거울을 통해 다시 평일의 글로벌유니티 대표가 서해의 눈에 들어왔다. 시원하게 올린 머리와 흐트러짐 없이 자리 잡은 셔츠와 타이가 차례대로 보였다. 그리고 서해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가락을 본 순간,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서해에게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이라면 유달리 한태경의 손에 꼼짝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눈에 한태경의 길게 빠진 손가락과 손등이 들어오는 순간이면 이상할 정도로 의식됐다. 목과 어깨를 감싸던 손길이라든가, 허리를 잡고 움직이던 장면 장면이 서해의 머릿속에 몽글거리며 피어났다.

“아침부터 표정이 또 야한 생각 하는 것 같은데.”

“아니거든요.”

“난 정말 서해 씨가 이런 사람인지는 몰랐습니다.”

서해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올려 뜨고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들켰는지 부끄러워진 서해의 볼이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대로 마음을 읽히고 뜨끔해진 심장이 쿵쿵대며 뛰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도망치듯 빠져나가려는 서해의 등과 어깨에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그렇게 대놓고 내 손만 쳐다보는데 몰라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집에 돌아오면 잔뜩 보여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깜짝 놀란 서해가 숨을 들이켜면서 한태경을 쳐다보았다. 등 뒤를 기분 좋게 감싸며 밀어오는 손길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자신의 몸에 맞게 맞춰진 조수석 의자 높이와 등받이에 몸을 밀어 넣고 살며시 앉았다. 주말에 그랬던 것처럼 기어 위에 올라간 손등을 겹쳐 잡으려던 서해는 괜스레 양손을 꽉 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반짝이는 햇살 때문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왼쪽에서 들어온 긴 팔이 머리 위의 선바이저를 끌어 내렸다. 아슬아슬하게 눈까지 덮인 그림자 덕분에 겨우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다 끝나서 해가 빨리 뜨기 시작하나 봅니다. 봄, 여름 그리고 초가을까지 출근길은 해가 뜨는 시간에 가야 하니까 힘들면 선글라스 하나 사요.”

“대표님은요?”

“난 괜찮습니다. 그러고 보니 차에도 있네. 이거 쓰고 있어요.”

서해는 운전 중인 한태경을 돌아봤다. 자신보다 한 뼘은 더 높이 올라가 있는 것 같은 그의 코끝 언저리에 햇볕이 걸쳐져 있었다.

자동차 천장 어딘가에서 빠져나온 선글라스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코에 걸치고 선바이저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정지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춘 틈을 타 고개를 돌려본 한태경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코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안경과 입이 벌어져 있는 하얀 얼굴이 보였다.

“잘 어울리네요.”

“아, 어색해요. 대표님한테 더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내 안경이 서해 씨한테 가있으니까 느낌이 좀 새롭네요. 이번 주말엔 다른 것도 입혀 봐야겠습니다.”

“…네?”

한태경은 되묻는 서해의 말을 모른 척하고 신호를 받아 출발했다. 웃음 짓던 한태경이 슬쩍 말을 돌렸다.

“서 대리.”

“네, 대표님.”

“이번 주는 회사에서 내가 좀 많이 바쁠 것 같습니다. 마케팅 전무 이사 해임 건으로 이사회도 소집해야 하고, 주주총회도 준비해야 해서. 조 전무가 해임되면 마케팅 부서 조직도 새로 구성해야 하고, 인사팀이랑 마케팅 부서에서 연구소 쪽으로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볼 예정입니다.”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던 직원이 연구소로 넘어올 수도 있어요?”

“지금은 인사팀과 그렇게 논의 중입니다. 적절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어서 몇 명은 데려올 생각입니다. 부족한 인원은 신규 충원할 계획이고, 본사에 2년 기한으로 TF 파견도 요청해 둔 상태입니다.”

서해는 갑자기 크게 바뀌려는 회사 조직도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본사에서 TF 파견을 오면 외국인들이 오게 되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한태경은 서해의 머릿속이라도 들어왔다 나간 것 같았다.

“본사 직원 중 한국 국적 가진 사람 우선으로 선발 예정입니다. 다른 팀이랑 커뮤니케이션 문제도 있어서요.”

“아, 네. 대표님.”

“회사에 도착하면 지난주에 진행하던 업무 중에서 최종 보고서 요약이랑, 중간 데이터 작성 파트 요약 부분 맡아서 작성해 주세요. 이번 주 목요일까지 넘겨주면 됩니다.”

“네, 매일 퇴근하기 전에 선공유 드릴 테니까 방향 수정할 것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그래요. 오늘 오전 임원진 회의는 전무 이사 해임 건 때문에 이사진 소집일을 논의해야 해서 임원진만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서 대리 오전 업무 보다가 식사 먼저 해요.”

“기다렸다가 대표님이랑 같이 먹을게요.”

“이번 주는 식사 같이하기 어려울 겁니다. 주문해 줄 테니까 38층에서 먹어요. 이곤인지 신입이랑 같이 먹지 말고.”

“…네.”

서해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갔던 점심 약속 때문에 보냈던 토요일 새벽을 떠올린 다음 조수석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혹시라도 점심을 먹자고 한다면 적당한 핑계를 대고 피할 셈이었다.

“이번 주는 나 기다리지 말아요. 퇴근도 같이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퇴근은 같이 하면 안 될까요? 집에 혼자 가서 딱히 할 것도 없어서요.”

“마음대로 해요. 대신 책상 앞에만 있지는 말아요. 카우치에 누워있어도 좋으니까.”

한태경은 손을 뻗어 서해의 목덜미를 쓰다듬은 뒤 떨어졌다.

38층에 도착하자마자 한태경은 브리프케이스를 내려놓고 태블릿 하나만 챙겨 들고 나왔다.

잠시 서해를 바라보던 한태경이 다가와 한 손으로 서해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갑작스러웠지만 딱히 큰 내색을 하지 않은 서해는 팔을 들어 넓은 등을 두어 차례 쓸어내렸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 말만 들어도 기분 좋네요.”

“회사 일이든, 다른 일이든 전부 상관없으니까.”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꼬맹이가 못 하는 말이 없네요. 까불지 말고 일 잘하고 밥 잘 먹고 있어요.”

“진짜인데… 다녀오세요.”

서해는 몸을 틀어 온기가 느껴지는 한태경의 품을 끌어안았다가 떨어졌다.

이마에 내려온 짧은 키스를 끝으로 한태경은 임원진 회의가 열리는 37층으로 사라졌다.

맡은 업무를 파악하고 요일별로 해야 할 일을 리스트업 한 서해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작성한 최종 보고서 자료가 한태경의 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생겼으니 원래부터 꼼꼼하게 살피던 서해의 눈이 유난히 더 날카로워졌다.

글라스 보드를 당겨온 서해가 마커를 쥐고 지난주에 논의한 내용을 되짚었다. 데이터를 일일이 대조해 가며 자세하게 작성하던 것과 달리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정보 위주로 구성할 계획이었다.

최대한 주관적인 의견은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위주로 작성하되, 자극적이지 않고 모난 부분 없이 작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주관적 판단은 보고서를 받아든 사람의 몫이었다.

손끝에 펜을 돌려가며 머릿속으로 스토리 라인을 구상해 보고 있을 때 메시지가 들어왔다.

[11시 50분에 로비에서 초밥 배달해 오기로 했으니까 받아요. 도착하면 서 대리 번호로 전화 주기로 했습니다. 09:25am]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09:26am]

짧게 웃음 지은 서해는 다시 보고서에 집중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글라스 보드와 노트북의 내용을 비교하는 것을 반복했다.

11시 45분이 되자 배달 직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배달에 서해는 서둘러 로비로 내려갔다. 점심시간을 알차게 이용하려는 직원들이 로비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손에 초밥 그림이 그려진 종이 봉투를 들고 헬멧을 쓰고 있는 배달 직원이 보였다. 서해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맛있게 드세요.”

“아, 잠시만요. 계산 안 했는데.”

“계산은 주문하신 분이 이미 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주문해 주세요.”

배달 직원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하고 금방 사라졌다.

로비 가운데서 초밥이 담긴 종이 봉투를 손에 들고 있던 서해의 눈에 출입구를 열고 나오는 이곤이 눈에 보였다. 이곤과 눈이 마주쳐 웃으며 인사했다. 그 뒤로 서해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던 이 팀장과 박 부장이 뒤따라 나오는 것이 보였다. 급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둘은 서해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찌푸린 얼굴로 로비 밖을 빠져나갔다. 구내식당으로 내려갈 줄 알았던 이곤이 팀원들에게 뭐라고 말한 뒤 서해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대리님, 오늘 점심은 혼자 드시는 거예요? 임원진 긴급 회의 있다는 소문 듣긴 했는데.”

“네, 이곤 씨. 그렇게 됐어요. 팀원분들 벌써 내려가셨는데 어서 따라가 봐요.”

“대리님 혼자 드시는 거면 저도 같이 먹어요.”

서해는 아쉬운 표정으로 손에 잡고 있는 종이 봉투를 들어 올렸다.

“이번 주는 대표님 서포트할 업무가 많아서요. 다음에 시간 여유로울 때 같이 먹어요.”

“역시 대리님은 너무 바쁘신 것 같아요. 그런데 목은 다치신 거예요?”

이곤의 시선이 서해의 셔츠 위로 올라온 밴드로 향했다. 이곤의 손이 목 언저리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서해는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려 밴드 위를 덮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아, 조금요. 긁혔어요.”

“…목을? 고양이 기르세요?”

“그, 건 아닌데.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이곤 씨, 구내식당 줄 길어지기 전에 빨리 가보세요. 지금 엘리베이터 또 열렸어요.”

“헙. 그래야겠다. 다음에 커피 한잔해요, 대리님. 연락 드릴게요!”

서해는 애써 웃음 진 얼굴로 이곤과 인사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38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보이는 밴드를 보자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목의 키스 마크가 사라질 때까지는 특별히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곤에게 들켰을 리 없겠지만 목에 남은 키스 마크가 신경 쓰여 배고픔이 사라졌다.

서해는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만들어 38층 한쪽에 마련된 주방 가전 앞의 아일랜드 식탁에 앉았다. 키스 마크가 따가운 적은 없었지만 괜히 의식되어 화끈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혹시나 한태경이 돌아오지 않을까 해서 열두 시가 넘을 때까지 기다리던 서해가 결국 자리에 앉았다.

열여섯 피스의 가지런한 초밥은 지난번과 다른 구성으로 담겨있었다. 두꺼운 달걀, 대게 살, 연어, 참치, 광어를 차례대로 살피던 서해는 가운데에 놓인 주황색의 성게 알 초밥을 집어 올렸다.

입에 넣자마자 퍼지는 고소한 맛에 눈을 감고 맛을 음미했다. 요즘 먹는 음식 중에 회사에서 배달시켜 먹는 초밥이 가장 맛있었다. 하나씩 사라지는 초밥을 보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이랑 같이 먹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식사는 하셨나….”

식사를 다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시작할 때까지도 한태경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아무래도 회의가 길어지는 것 같았다.

오후 시간은 적막했다. 서해는 오늘 해야 할 분량까지 모두 마치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다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며 기지개를 쭉 켜고 응접실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오늘 작성해 둔 분량을 처음부터 스크롤 하면서 내용을 다시 살폈다. 요일별로 리스트업 해둔 내용을 파악한 서해는 바로 화요일 분량을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전체 분량을 최대한 빨리 뽑은 다음 한태경과 문서 워싱 작업을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다음 작업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집중했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머리 위의 조명이 하나둘씩 켜졌는데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하던 일을 끊고 일어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했고, 멍하니 한태경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마주 보고 있던 회사의 불이 하나둘씩 꺼져갔다. 그때, 사무실 방향으로 지친 표정의 한태경이 들어왔다.

“이제 오셨어요?”

“서 대리는 나 없다고 또 종일 자리 지키고 일만 했나 봅니다.”

“…직원이 자리에 있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대표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벌써 열 시 넘었는데 계속 업무 보신 거예요?”

“전무 이사 해임 건으로 이사회 소집하기 전에 한 번쯤 이사진들 만나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외부에서 미팅이 있었습니다. 최종 보고서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대표님이랑 구성했던 대로 작성하고 있어요. 퇴근하기 전에 1차 공유해 드릴 테니까 수정할 것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래요. 지금 먼저 보내줄 수 있습니까? 아웃룩으로 메일 보내고 서 대리는 저기 카우치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있어요.”

“네, 대표님.”

시키는 대로 메일을 보내고 피드백을 기다렸다. 크게 방향을 수정해야 할 내용은 없었다. 이미 한태경의 스타일을 잘 파악해서 녹여내기도 했고, 일전에 있었던 마케팅 부서 팀장과 부장과의 마찰이 오히려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더 도움이 되기도 했다.

카우치에 쓰러져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서늘한 손가락이 이마를 덮어왔다.

“서 대리, 보고서 작성하는 방식이 더 좋아졌네요. 이대로 나머지 작성해서 넘겨줘도 되겠습니다.”

“다행이다. 추가할 것 생기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서포트해 드릴게요.”

“이제 그만 퇴근합시다.”

한태경은 눈을 깜박이며 누워있는 서해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기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서해는 한태경의 얼굴이 전에 없이 까칠해지고 말 수가 줄어든 것 때문에 그가 많이 걱정됐다. 혹시라도 자신의 행동이 보채는 것처럼 느껴질까 봐 조심하기도 했다.

해줄 수 있는 것은 최종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일과 출퇴근길에 짧게라도 손을 잡아주는 일뿐이었다. 그러다가 잠들기 직전에 아주 짧게 스치는 키스라도 하는 순간이면 쿵쿵대는 심장 때문에 한참 동안 잠 못 들어야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 * *

글로벌유니티의 전무 이사 해임 건에 대한 소문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목요일부터 서해와 친분이 조금이라도 있던 사람으로부터 사내 메신저가 밀려들었다. 메신저에는 쪽지와 대화들이 가득 쌓였다.

서해는 읽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느낌에 마우스를 스크롤 해 목록을 주르륵 훑어보았다. 리스트 중간쯤에 이곤이 남긴 메시지가 보였다.

[김이곤: 대리님, 곤란하실 것 같은데 정말 물어볼 데가 대리님밖에 없어요. 저희 팀 정말 없어지나요.]

[김이곤: 저 지방으로 발령 나요? 대리님이 보내주신 보고서 보면서 대리님 따라 스킬셋도 비슷하게 배웠는데. ㅜㅜ]

[김이곤: 서 대리님, 뭐라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대화를 읽은 서해의 입에서 짧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분명하게 아는 것이 없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서해에게 이번 건에 관해서 물어오고 있었다. 난감했다. 뭐라고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한마디 적어서 보냈다.

[서해: 이곤 씨, 걱정 많이 되는 거 알아요. 그런데 나도 대표님에게 확실하게 전해 들은 게 없어서, 미안해요.]

[서해: 대신 소식 듣게 되면 이곤 씨에게는 바로 알려줄게요.]

[김이곤: 대리님, 갑자기 여쭤봐서 죄송해요.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하던 일도 잘 안 되고, 이대로 없어질 팀이면 잘해 보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구요. 제가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서해: 내가 이곤 씨 입장이어도 비슷했을 거예요. 너무 많이 걱정하지 말고 하던 대로 지내고 있어요.]

짧은 대화였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서해는 메신저를 회의 중으로 돌려놓고 눈을 감았다 떴다.

화면 한쪽에 완성된 최종 보고서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당분간은 점심밥을 사러 갈 때도 타이밍을 잘 살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해는 사내 편의점에서 간단히 점심거리를 사 오기로 했다. 지금이면 대부분의 직원이 밖에 나오지 않고 집중 근무를 하는 시간이었다.

서해는 출입 카드를 챙겨 들고 로비로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러 로비를 가로지르던 순간, 누군가 거칠게 손을 잡아채는 바람에 급히 몸이 돌려세워졌다.

“앗.”

“서 대리, 얘기 좀 하지.”

“…이 팀장님.”

마케팅 3팀의 이 팀장이었다. 손목을 놓지 않고 그대로 끌어당기는 힘에 몸이 휘청거리며 끌려갔다. 생각보다 센 악력에 서해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러다 혹시라도 누군가 보지 않을까 주위를 급히 살폈다. 로비에는 안내 데스크의 직원과 외부 사람 몇 명이 전부였다.

서해는 걸음을 빨리 움직여 바리케이드가 쳐진 곳 뒤에 있는 테이블 앞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연락하라던 한태경의 당부가 생각났는데 연락할 틈이 없었다.

바리케이드 뒤에 도착하자 서해의 손을 세차게 내팽개친 이 팀장이 날 선 눈빛으로 자리에 다리를 꼬아 앉았다.

“잠시 얘기하게 앉아.”

“네, 팀장님.”

“사람이 좋게 얘기할 때 알아들어야지. 결국 전무 이사님 해임 건 상정되게 생겼는데 어떻게 할 셈이야. 피해 보는 건 우리가 아니야, 서 대리. 우리 같은 직원들이야 수도권 내 지점으로 발령 나는 게 전부일 테고, 심한 경우 징계위원회 부쳐지겠지만 그것도 그냥 쇼잉하고 끝날 건데.”

“제 수준에서 딱히 드릴 수 있는 말씀이….”

“대표님한테 말 좀 해달라고. 대표님이 서 대리에게 가지는 신임이 그렇게 좋다며. 말 한마디만 해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서 대리, 제발 마지막으로 부탁해. 다음 분기에 계약된 사업에 연관된 업체만 수십이고 사람은 수천이야. 전무 이사 한 명 해임으로 끝나게 되는 일이 아니라고. 그대로, 하던 대로만 하게 말 좀 해줘. 이번 분기만 잘 넘기면 서 대리한테 신세 진 것 꼭 갚을게.”

서해의 말을 잘라먹고 이 팀장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서해를 만나기 직전까지 담배를 피우고 오던 길인 것 같았다. 마주 보고 앉은 입에서 역한 담배 냄새가 올라왔다.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서해는 고개를 살짝 숙여 테이블 위를 쳐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적당히 웃음 짓고 죄송하다는 말을 했을 테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죄송하다는 의미가 자칫 한태경의 직속 부서인 기획조정실의 입장을 대변하게 된다면 곤란했다.

서해는 그저 시선을 내리고 이 팀장의 타이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불편한 정적이 이어졌다.

“…….”

“끝까지 이렇게 나올 거야, 서 대리. 대표님이랑 둘만 지내다 보니 로열 패밀리에 입성한 기분이라도 드는 모양인데. 같은 직원들끼리 심판하는 잣대 들이대고 하는 거,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니야. 그래, 전무 이사 해임되고 회사 분위기 어떻게 되나 지켜봐. 어린놈이 벌써 줄 타는 맛만 알아서는.”

귓가가 차갑고 축축했다. 대리석 바닥 위에 놓인 의자가 신경질적으로 밀려나는 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 팀장의 입에서 몇 마디가 더 떨어졌다. 서해는 눈을 내리뜨고 애써 가볍게 듣고 넘기려 했다. 대꾸 없이 조용한 서해를 내려다보던 이 팀장이 혀를 차며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테이블 아래로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다. 서해는 이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손목을 들어 올려 혹시라도 자국이 남지 않았을까를 살폈다. 다행히 조금 지나면 붉은 기가 가라앉을 것처럼 보여 안심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리케이트 위로 고개를 빼어 들고 주위를 살폈다. 로비는 여전히 조용했고 한태경도 보이지 않았다. 서해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큰 숨을 뱉었다.

며칠만 참으면 있을 이사회와 주주 총회를 앞두고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팀장이 서해에게 뭔가 엄청난 것을 요구했다기보다는 사실 푸념에 가까운 말만 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서해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들고 계산을 마쳤다. 김밥과 과일, 샐러드가 담겨있었다.

점심시간에도 여전히 혼자였고 오후 시간 내내 조용히 업무를 마무리하는 데 집중했다. 서해는 퇴근길에야 겨우 한태경을 만날 수 있었다.

“서 대리, 고생했네요. 최종 보고서는 이제 그만 작성해도 됩니다. 나머지 내가 정리하고 다시 공유해 주겠습니다.”

“네, 대표님. 추가로 도와드릴 것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내일 출근하면 최종 보고서 20부 출력해서 약식 제본해 주세요. 다음 주 월요일에 예정인 이사회에 공유할 예정입니다.”

“네.”

“퇴근했는데 회사 일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 다음 주 정도면 상황이 정리될 것 같습니다.”

괜찮다며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남긴 서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태경은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카우치에 앉아 한동안 자료를 살폈다. 회사에서 업무를 가져오는 일은 한 번도 없어 서해에게 생소한 모습이었다.

그는 여러 자료를 비교하다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내용을 확인하고 자료 요청을 별도로 하기도 했다. 통화 중에도 그는 서해의 팔목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서해는 따뜻한 물을 마셨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손목은 여전히 그에게 잡힌 상태였다.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채로 내려다보자 그가 부드럽게 손을 잡아당겨 소파 아래로 앉혔다.

“네, 이사님. 부탁드립니다. 주주 총회 전에 자리만 한번 만들어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엉덩이 아래로 푹신한 러그가 느껴졌다.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카우치에 살짝 기대앉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보트넥 티셔츠를 비집고 가슴 앞쪽으로 손이 쑥 밀려들어 왔다.

“흡….”

“네, 차주 월요일에 있을 이사회에서는 이사님께서 잘 이끌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 이사님. 아버지께서 조만간 한국에 오신다는데, 그때 라운딩 한번 가자고 하십니다.”

엄지손가락이 서해의 쇄골 주위를 쓸어내렸다. 옆으로 천천히 이동하다가 초커 끝에 걸렸다. 한태경이 손가락을 세워 서해의 목덜미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통화 중인 상황에서 영문 모를 행동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서해는 어깨를 둥글게 말고 한태경을 쳐다보았다. 툭 튀어나온 쇄골 뼈를 손가락 사이에 걸고 태연하게 시선을 마주하고 전화 통화를 이어가는 목소리는 대표의 목소리였다.

“흐… 앗.”

손가락이 점점 타고 내려오더니 긴장해서 바짝 올라선 서해의 유두를 톡톡 건드렸다. 서해가 테이블 옆으로 기어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한태경은 서해의 어깨를 잡고 아예 다리 사이에 내려두었다. 머리를 헤집던 손이 목덜미와 어깨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손이 다시 금방이라도 목을 타고 내려올까 봐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손은 어깨에 머물러 있었다.

고민하던 서해는 몸을 돌려 앉아 한태경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 턱을 올려두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손동작을 시야에 확보하고 난 뒤에야 안심이 되었다.

한 손으로 전화기를 잡은 채 서해를 바라보고 있던 한태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서해의 이마와 귓가로 단단한 손가락이 스쳐 지나가자 저절로 눈이 스르르 감겼다가 떠졌다. 한태경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네, 이사님. 듣고 있습니다. 그렇게 준비해 주세요.”

귓가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뺨을 타고 내려와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서해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쓰다듬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한태경의 손등과 손목을 겹쳐 잡았다.

서해는 입을 벌려 한태경의 엄지손가락 끝을 아슬아슬하게 입술에 물었다. 눈을 올려 뜨고 바라본 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

서해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혓바닥을 베어 물고 한태경의 손가락 끝을 핥아 올렸다. 그러자 아랫입술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거칠어졌다.

“네. 내일 뵙겠습니다, 이사님. 늦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쉬세요.”

전화가 종료되고 휴대 전화의 불빛이 꺼졌다.

한태경은 몸을 숙여 테이블 위에 휴대 전화를 올려두고 서해를 끌어 올렸다. 한태경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게 된 서해가 민망한 듯 살포시 웃었다.

“당장 혼낼 수도 없고.”

“대표님이 먼저 하시길래.”

“왜 억울한 표정이야. 겁도 없이 덤빌 때는 언제고.”

“주말에 또 혼내시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합니다.”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당장 혼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건 좀 억울한 것 같아요, 대표님이 먼저….”

서해의 허리에 손이 쑥 들어오더니 위에 움푹 팬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던 서해가 몸 옆으로 팔을 바짝 내려 붙이고 몸을 웅크렸다. 한태경은 서해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악. 대표님, 떨어져요.”

“2층까지 체인 안 감고 올라가는 날은 1년 중에 거의 없을 겁니다. 예쁜 짓 해서 주는 상이라고 생각해요.”

“앗, 진짜 떨어. 악.”

“이러다 진짜 떨어지겠네, 그만 꼼지락대고 꽉 잡아요.”

“대표님, 설마 지금 그 방으로 가는 건 아니죠…?”

“글쎄.”

한태경의 어깨를 바짝 끌어안고 몸을 붙이자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손이 토닥였다.

그대로 2층까지 올라와 서해의 방에 들어서고 침대 위에 몸이 눕혀졌다. 테이블 위의 조명이 켜졌다. 서해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몸을 편하게 뻗었다.

며칠 만의 스킨십에 떨어지기 싫은 서해의 손이 한동안 한태경의 목을 감싸고 있다가 떨어졌다. 오늘 있었던 일로 내려가 있던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그가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주자 눈이 뻑뻑한 게 느껴졌다.

“옆에 있어주는 것도 좋은데 이번 주에는 먼저 올라가서 자는 게 좋겠습니다. 이제 보니 눈에 잠이 가득하네.”

“대표님은요?”

“난 조금 더 살펴볼 게 있어서. 아침에 봅시다. 잘 자요.”

“대표님도 어서 주무세요. 요즘 새벽에 계속 다른 일 하시는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눈 감아요.”

떨어지기 아쉬운 것처럼 꽉 잡고 있던 손이 금세 스르르 흘러내렸다.

* * *

결국 사내 게시판에 전무 이사 해임 건으로 이사회가 소집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신임 한국 대표가 한국에 온 이유가 회사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겉으로는 사내 분위기가 위축된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직원들이 체감하는 분위기와는 온도 차가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쉬쉬했던 안건이 수면 위로 올라와 회사 전체가 떠들썩했다. 업체 선발 과정에서 있었던 뒷돈 거래나 지원금 횡령 같은 각종 비리에 대한 카더라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모든 논란의 가운데에는 2분기 마케팅 전략을 주도한 마케팅 3팀이 있었다. 전무 이사 해임과 함께 이어질 징계 위원회 소집에 마케팅 3팀이 소환될 것인지 관심이 쏟아졌다.

글로벌유니티 직원들은 마케팅 3팀의 책상이 빠질 것이냐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마케팅 3팀을 이 상황까지 끌고 온 팀장과 부장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같은 층을 사용하고 있는 직원들의 시선은 그 팀원이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오전에 진행된 긴급 이사회 개최에 온 회사 임직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새롭게 선임된 젊은 한국 지사 대표의 성격처럼 안건 논의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글로벌유니티의 마케팅 전무 이사 해임에 관한 안내문 전문이 사내 게시판에 공고된 것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글로벌유니티 사과문 전문]

최근 일부 임원진의 비리 혐의에 대한 내부 조사로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하여 임직원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글로벌유니티 임원진은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긴급 이사회를 개최하고 아래와 같이 의결하였습니다.

이번 비리 혐의에 관련된 조 모 전무 이사 등 세 명의 글로벌유니티 이사의 사내 모든 직위와 보직을 해임 조치하였습니다. 추후 내부 감사 기관의 조사를 거쳐 징계를 확정 짓고 주주 총회 결의 후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마케팅 전무 이사의 직무를 대행할 인사로 도덕성과 전문성에 흠이 없는 민영규 전 글로벌유니티 마케팅 부장을 선임하였습니다. 해당 인사로 여름에 있을 CES Summer Show를 대비한 라인업을 재정비하고, 곧 있을 인사 조직 개편을 차질 없이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마케팅에서 수행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연구 과제 및 검증들은 별도의 연구소를 설립하여 그곳에서 수행할 예정입니다. 투명하고 공정한 검증 절차를 도입하고, 자격이 있는 관련 업체에는 누구나 협업할 기회를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부 주관하에, 이번 비리 혐의의 진상 조사가 진행되어 법적으로 상벌 여부가 판단될 경우 이번 사태와 관련된 임직원, 협력사 등 관련자 모두를 사법 당국에 고발하고 엄정한 징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글로벌유니티의 적폐를 씻어내고, 투명하고 공정한 기업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임직원분들께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글로벌유니티 임원 일동

서해는 모니터 속 글자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한 달 남짓 서해가 한태경과 함께 진행해 온 업무의 결실이었다. 마케팅 3팀 직원들의 앞날이나 이번 결정으로 다치게 될 일부 죄 없는 업체와 그 직원들이 생각났다. 다행스러우면서도 심란했다. 며칠 전에 마케팅 3팀의 이 팀장이 서해에게 했던 말처럼 자신이 누군가를 심판한 것 같아서.

서해는 조 전무와 그의 라인 일부가 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직 해임을 받아든 임원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임직원 통틀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주주 총회의 특별 결의가 확정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소송을 준비하지 않겠냐는 소문, 비리를 덮어주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지 않겠냐는 소문 등이 무성하게 떠올랐다.

임원진이 사내에서 사라진 것과는 별개로 아직 마케팅 3팀 소속의 직원들에게 내려진 징계는 없었다. 오히려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고 되묻는 것처럼 너무 조용한 상황에 당사자들이 당황할 정도였다.

징계가 내려오지 않자 사라졌던 3팀 팀장과 부장이 돌아왔다. 항상 까칠하기로 유명했던 둘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지고 얌전해졌다는 소식이 블라인드 앱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케팅부 소속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댓글이 연달아 달렸고 가십거리가 끊이지 않고 쏟아졌다.

공식적인 업무가 종료된 서해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사내 게시판을 살폈다. 글로벌유니티 마케팅부 소속의 직원들은 곧 있을 조직 개편을 두고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의 앞날을 예측했다. 이번 사건으로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 대표의 성향이 드러나 무서워하면서도 그 리더십을 따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자유 게시판에는 벌써 연구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살아남고 싶은 사람들의 수다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해는 오후 시간을 때울 겸 게시글들을 하나씩 읽어보았다.

그리고 게시판 글 사이사이 본인의 이야기가 끼어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놀림이 서서히 빨라졌다.

[기획조정실에서 대표님이랑 일하는 분 말이야]

그분 어떻게 입사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이번 일도 그분이랑 대표님이랑 둘이서 검토한 거라며. 나 마케팅에서 조사 분석하느라 매일 업무 외 일을 더 하는데, 그 대리님이랑 일해보고 싶다.

└[나는 소문만 들었는데, 검토 보고서 받아본 사람?]

└[우리 과장님이 작성한 보고서에 빨간펜 선생님이 다녀가셨잖아. 내가 다 부끄럽더라.]

└[나도 받아봤어. 난 내가 처음으로 작성한 보고서였는데, 이불킥했다.]

└[정체가 궁금하네. 다들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만에 가능한 양이라고 생각해?]

└[대표랑 친인척일지도 몰라. 능력치가 비슷해...]

└[같이 일하고 싶다. 지금 팀은 나만 죽어라 일하고 있는데.]

서해는 글을 대강 훑어보다가 크게 의미 없는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 난 뒤 그룹웨어 창을 축소해버렸다. 다수의 사람에게 거론되어본 경험이 없었던 서해는 관자놀이가 콕콕 쑤시는 것 같았다. 책상 위의 시계가 벌써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점심도 결국 편의점이었다.

로비로 내려와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걸어갈 때였다. 서해의 옆을 스쳐 가던 사람이 묵례하는 것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는 줄 알고 슬쩍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닮은 사람과 착각한 것인지.

서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올라오고 있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해를 바라보았다. 뒤에 따라오던 여직원들은 서로 손을 잡으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뒤에 누가 따라오고 있는 것일까. 돌아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제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길 빌었다.

편의점까지 도착하는 짧은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인스턴트 메뉴였지만 조금 자세히 둘러보고 고르려고 했던 생각은 그대로 허공에 흩어졌다. 걸어갈 때 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뭔가 이상했다.

손에 집히는 것을 대충 잡아들고 38층으로 도망치듯 올라왔다. 서해는 모두가 쳐다보는 게 자신이 과민하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찝찝함을 금세 떨쳐버린 서해가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떠들썩한 전사의 분위기와는 달리 38층에 오고 난 뒤 처음으로 느끼는 여유로움이었다. 시간에 쫓겨 처리해야 할 업무도 없었고, 한태경에게서 딱히 요청받은 사항도 없었다.

해가 잘 들어오는 창가 앞 테이블에 앉아 샐러드와 과일, 그리고 샌드위치를 꺼내 들었다. 평범한 편의점 음식들이었지만 38층 테이블 위에 세팅되자 제법 그럴싸했다.

여유 있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왔다. 그룹웨어 공지에 ‘NEW’ 태그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인사부에서 마케팅부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부서 이동 간담회에 대한 공지가 올라옴과 동시에 사내 메신저가 터져나갈 것처럼 울려댔다. 자신이 과민한 것이 아니었다.

서해는 살짝 억울했다. 마케팅 3팀 팀장이 로열 패밀리 운운한 것도 그렇고, 직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쩐지 평범하지 않게 보여 불편하기도 했다.

서해는 키보드 앞에 놓인 컵에 담긴 얼음을 빨대로 콕콕 찔렀다.

‘…이러다가 사무실 밖에 혼자 못 다니게 될 것 같아. 대표님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버티시는 거야.’

서해는 책상 위에 한쪽 뺨을 붙이고 누웠다. 몇 차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휴대 전화 메신저를 켰다.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대화창은 한태경과 보낸 내용이었다. 키패드를 꾹꾹 눌렀다.

[대표님, 오늘도 늦으세요? 16:41pm]

[아니, 이제 외부에서 처리할 일들은 거의 끝났습니다. 지금 복귀하는 중입니다. 10분 뒤 도착. 16:44pm]

[이제 우리도 조금 쉽시다. 목요일이랑 금요일 특별 휴가 기안서 써 올려요. 사인해 줄 테니까. 16:45pm]

[넵, 대표님. 감사합니다. 16:45pm]

10분 뒤 도착이라는 그의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 소리 없는 아우성 중에 단비같이 내려온 휴가가 너무나 감사했다. 유달리 콕콕 찌르는 듯한 시선을 잠시 피해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서해는 그룹웨어에 들어가 처음으로 휴가계를 써 올렸다.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주말까지 붙여서 4일을 쉬게 된 서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난 주말에도 겨우 스치듯 얼굴을 본 게 전부였던 한태경과 꼼짝하지 않고 붙어있을 생각이었다.

38층 구석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흐트러진 머리를 흔들어 바로 내리고 손을 씻어 엉망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거울 속에 비친 단정한 슈트와 가지런한 머리카락의 자신이 이제 조금씩 적응되는 것 같았다.

비뚤어진 타이를 바로잡고 응접실로 나왔다. 마침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사이로 한태경의 모습이 보였다. 서해는 열흘 가까이 보기 힘들었던 사람의 모습이 보이자 반가운 마음에 쪼르르 달려가 안기려다가 급히 앞에 멈춰 섰다.

“대표님, 사내 게시판에 올라온 안내문 봤어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서 대리가 수고 많았습니다. 마케팅 소속 직원들이 서 대리 괴롭히지는 않았습니까?”

“어, 그… 사내 메신저로 이것저것 물으시는 분들이 많긴 한데, 뭐라고 답변해 드려야 할지 몰라서….”

“답장하지 마세요. 차주에 인사팀에서 간담회 진행할 예정입니다. 특별 휴가 기안서 올렸어요?”

“네, 조금 전에요.”

“그럼 사인만 하고 바로 퇴근합시다. 서 대리 사흘 동안의 근무 시간이 52시간을 넘은 건 알고 있습니까.”

고개를 흔들었다. 일을 하면서 근무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맡은 일을 무사히 끝내자는 생각을 해본 적은 많았지만.

다시 사무실로 들어간 서해와 한태경은 각자 자리에서 짧게 할 일을 마치고 나왔다. 해가 떠있을 때 퇴근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차에 다시 올라탈 때까지 서해는 한태경을 몰래 훔쳐보듯 살폈다. 며칠 사이에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한참 지쳐 보이던 때보다는 컨디션이 훨씬 좋아 보였다.

따뜻해진 날씨 때문인지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접혀있는 셔츠 소맷자락이 보였다. 구겨진 셔츠의 단추 위로 떨어져 내린 얇은 타이 그리고 두꺼운 상체에 비해 가늘게 보이는 허리선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돌리지 않고 계속 바라보자 오른손이 서해의 머리 위에 내려와 목덜미를 짧게 쓰다듬고 사라졌다.

차를 타고 집으로 이동하는 동안 익숙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서해는 창문을 열고 엉덩이를 앞으로 뺀 뒤 편하게 앉았다.

“대표님, 휴가 때 일정 있으세요?”

“음, 이게 일정인지는 모르겠는데.”

“…약속 있으세요?”

서해는 의외의 대답이 들려오자 자세를 바로 세우고 운전 중인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한태경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서해는 한태경과 같이 있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가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서해 씨랑 같이 자고, 같이 씻고, 같이 섹스하려는 게 일정이라면 일정이네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담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용을 듣지 않고 어조만 살핀다면 전혀 야한 이야기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건조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목소리였다.

서해는 한 박자 늦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느라 고개를 돌려 애꿎은 앞 유리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냥 별일 없다고만 해도 충분한데. 괜히 손등으로 뺨을 찍어 눌렀다.

“호캉스라고 들어 봤습니까.”

“네, 휴가를 호텔에 가서 즐기는 거라고…….”

“주말까지 하면 4일인데, 마지막 날은 집에서 쉬고 딱 3일만 보내고 오는 건 어떻습니까. 친구들이 원래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그런 데 자주 가고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네?”

“흠, 말하다 보니까 지금 당장 가고 싶어지네요. 집에 잠시 들러서 간단한 짐만 챙겨서 나옵시다. 아직 여섯 시도 안 됐으니까 저녁은 도착해서 먹으면 되겠네요.”

갑자기 쏟아진 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한태경의 말을 곱씹었다. 호캉스, 친구들, 만남. 단어가 끊어져서 서해의 머릿속 여기저기를 날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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