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약속
38층 응접실에는 새로운 물품들이 가득 도착해 있었다. 그중 서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투명한 보드 판이었다.
“어, 대표님. 글라스 보드가 생겼네요.”
“오늘부터 그동안 분석했던 내용 정리해야 해서, 당분간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최종 보고서 프레임부터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자리에서 노트북이랑 포스트잇 그리고 간단한 필기도구 가지고 창가 앞에 있는 큰 테이블로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음 주까지 둘이서 최종 보고서 작성하려면 야근이 많을 거고, 주말에도 일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업무가 종료되면 오버 워킹 한 만큼 대체 휴가가 나올 겁니다.”
“네.”
다시 돌아온 테이블 한쪽 자리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있었다. 서해는 자리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속이 시원해지고 몽롱하던 머리가 개운해졌다.
한태경은 그동안 구상해 온 보고서 작성 양식을 서해와 공유했다. 서해는 중간중간 의견을 보태면서 구성을 바꿨다. 전반적인 프레임은 막히는 부분 없이 생각보다 빠르게 정해졌다.
딱딱한 회의 같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얘기하기 시작하자 열이 올라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해는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치고 팔을 걷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던 한태경은 타이를 풀어내고 글라스 보드에 마킹을 이어갔다.
“여기, 이쪽에 서 대리가 검토한 보고서 요약본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As-Is, To-Be 형태로 한 페이지에 구성할게요. 상세 자료는 별첨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전략 키워드를 구성해야 하는데….”
한태경은 바로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내용을 계속해서 더듬어보는 서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글라스 보드에 집중하고 있는 서해는 한태경의 스킨십도 별로 제지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용을 살피고 있었다.
일에 빠지면 주변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 서해의 모습에 웃음 지은 그는 아예 어깨 위로 턱을 올려두고 말했다.
“서 대리, 오늘 점심때는 임원진 일부랑 점심 약속이 있어서 따로 먹어야겠습니다. 혼자 둔다고 굶지 말아요.”
“…어린애 아닌데요.”
마주친 눈 사이로 장난스러운 웃음이 오갔다. 서해는 손을 뻗어 풀려있던 한태경의 가장 윗단추를 잠가주고 셔츠 둘레에 맞게 타이를 바로잡아 주었다.
“미리 주문해 줄까요.”
“밖에서 먹고 올게요. 오랜만에 주위도 돌아보고요.”
서해는 주름진 셔츠의 어깨선까지 잘 털어준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끄덕거렸다. 한태경이 회사원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넓게 빠진 어깨와 상대적으로 늘씬한 허리가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알겠습니다. 먹은 것 사진 찍어서 보내요. 난 약속 때문에 조금 빨리 나갑니다.”
“네, 오후에 뵐게요.”
서해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한태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 켜져 있는 노트북에 사내 메신저가 도착해 있었다.
[김이곤: 대리님! 저 이곤이에요.]
[서해: 아. 이곤 씨, 안녕하세요.]
[김이곤: 오늘 점심 어떠세요? 지난번 일 사과도 할 겸 제가 오늘 점심은 풀코스로 살게요.]
[서해: 점심 괜찮아요. 마침 오늘 대표님도 점심 약속 있으시다고 하셨거든요 :-)]
[김이곤: 잘됐다!!! 그럼 오늘 점심때 대리님에게 점수 따고 만회할 기회 좀 주세요. 저 그동안 마음이 너무 불편했어요. ㅜㅜ]
[서해: 전 그 일은 벌써 잊어버렸는데. 편하게 점심 먹는 거로 해요. 로비에서 만날까요. 11시 45분 어때요?]
[김이곤: 좋아요, 대리님. 로비에서 기다릴게요.]
서해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약속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오전 내내 진행한 회의에서 미처 떠오르지 않았던 몇 가지 방법론이 머리에 떠올라 포스트잇에 서둘러 적어두고 보드에 붙여두었다. 마음 같아선 계속해서 일하고 싶었는데. 마커로 별표 두 개까지 그려놓은 다음 1층 로비로 향했다.
로비에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이 그룹을 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몇 명의 안면 있는 동기와 마주쳐 짧게 눈인사도 하고 손을 흔드는 사람에게는 적당히 반가움을 느낄 만한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가 서 대리님이 로비에는 웬일이냐는 눈빛과도 여럿 마주쳤다. 서해는 머쓱한 웃음을 건넸다.
50분이 지나가고 있어도 이곤이 보이지 않자 서해는 로비에 마련된 의자에 기대앉았다. 조금 기다리자 출입구에서 카드를 찍고 달려오는 이곤이 보였다.
“대리님!”
“이곤 씨,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요.”
“점심시간이면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정말 너무 많아서요. 대리님은 이런 걱정 없으시죠? 저쪽은 심할 때 네 번은 그냥 보내요.”
“아, 그렇구나. 몰랐어요.”
“만원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사람이랑 눈 마주치는 게 얼마나 민망한지 아세요. 탈까 말까 고민하는 것도 그렇고.”
서해는 이곤과 함께 로비로 걸어 나갔다. 생각보다 키가 큰 이곤과 대화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씩 올려다봐야 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시원시원한 웃음에서 신입 사원의 느낌이 그대로 올라왔다.
서해는 계속해서 조잘거리는 이곤을 보면서 동생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같이 밥을 먹으러 나가는 것뿐인데도 회사에 가까운 동기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웃음이 지어졌다.
“대리님,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오늘은 제가 뭐든 다 쏠게요.”
“아, 생각을 못 했네요. 음.”
“그러실까 봐 제가 메뉴 몇 개 준비했는데요. 퓨전 한정식집, 타이 요리 전문점, 초밥 전문점 이렇게 세 개거든요.”
“퓨전 한정식집도 있어요?”
“네, 얼마 전에 새로 생겼는데 점심 메뉴가 생각보다 잘 나와요. 음식점 내부도 깔끔하고.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데 가보실래요?”
“좋아요.”
서해 옆에 바짝 붙은 이곤은 꼬리가 있었으면 좌우로 흔들렸을 만큼 좋아하며 로비를 가로질렀다. 이곤에게 자신의 롤 모델과 일하는 유일한 사람 정도일 뿐이었던 서해는 몇 번 만나는 동안 이곤의 두 번째 롤 모델이 되어있었다.
이곤은 걸어가면서도 서해를 힐끗 바라보았다. 차갑고 선을 그을 것 같은 성격인 줄 알았는데, 반대였다. 의외로 다가가기 편한 성격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저지른 실례를 쿨하게 덮어주는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동경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곤은 앞만 보고 걸어가는 서해 쪽으로 몸을 돌려 옆으로 걸어가다시피 해 정문을 빠져나갔다.
“…저건 또 뭐야.”
“무슨 일 있으십니까, 대표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연히 누군가와 함께 빠져나가는 서해를 본 한태경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날카롭게 떠진 한태경의 눈에 서해 옆에 바짝 붙은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 * *
서해는 이곤이 어쩜 저렇게 항상 웃는 얼굴인지 신기했다. 그는 퓨전 한정식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저런 시답잖은 연예 뉴스와 가십거리를 이야기하면서 서해를 웃게 했다.
식당에 도착한 이곤은 물컵과 수저, 냅킨까지 모든 것을 세팅해 주었다.
“대리님은 대표님이랑 식사하실 때 항상 하실 테니까 오늘은 제가 할게요.”
“어… 고마워요, 이곤 씨.”
“대리님이 허락하시면 제가 주문해도 될까요. 여기 B 코스가 진짜 맛있어요.”
“그럼 이곤 씨가 추천한 것 먹을게요.”
제법 빠르게 주문까지 들어가고,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2인 룸에 앉아 어색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도 잠시 이곤은 금세 졸업반에 있는 동생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어제 동생이 자소서 봐달라고 하길래 봤거든요?”
“동생이 취업 준비 중이에요?”
“네. 얼마나 까칠한지. 진짜 말로 다 못해요.”
“제일 힘들 때잖아요.”
“그래서 참고 있어요. 근데 자소서가 무슨, 아 대리님도 보셔야 하는데. 구구절절이 그런 구구절절이 없더라고요.”
“하하. 이곤 씨가 도와줘요.”
“도와준다고 하면 또 생색낸다고 얼마나 뭐라고 하게요. 동생만 아니었으면 진짜.”
가만히 듣고 있자니 서해에게는 없는 형제 이야기를 대신 전해 듣는 느낌이 들었다. 소소한 웃음과 일상이 고스란히 넘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차례대로 들어와 놓였다. 퓨전 한정식답게 깔끔하고 정갈한 메뉴가 눈에 들어오고,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도 서해의 마음에 꼭 들었다.
“어때요, 대리님. 음식 깔끔하고 괜찮죠.”
“그러네요, 이곤 씨. 근데 이렇게 좋은 식당 아니어도 괜찮았을 텐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내일 드디어 첫 월급날이잖아요. 괜찮아요, 대리님.”
“벌써 그렇게 됐어요?”
가만히 날짜를 되짚어보던 서해는 벌써 38층에 출근한 지 한 달이 지났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동안 폭풍 같았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업무를 처리하느라 별다른 위기 없이 회사에 적응함은 물론, 어색할 것 같았던 대표와의 같은 층 생활에도 어느덧 완벽하게 적응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들어 서해는 미소 지었다.
“첫 월급 받으면 뭐 하실 거예요? 가족들이랑 여행 아니면 식사?”
“그…러게요. 아직 생각을 못 해봐서. 이곤 씨는요?”
“저는 엄마, 아빠 용돈 드리고 원수 같은 동생 맘에 안 들지만 고생한다고 선물이랑 위로금 좀 주고 그러려고요.”
가족이라는 단어가 뱉어지자 서해는 익숙하게 되받아쳤다.
어린 나이에 처음 가족과 관련한 질문을 들었을 때는 요령 없이 답하다가 놀림을 받기도 했고 갑자기 이어진 침묵에 어색해져 버리기도 했었다. 지금은 달랐다. 대답하기 곤란할 때면 다시 질문해서 빠져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서해는 웃으며 이곤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에 놓인 반찬을 집어 들었다.
“대리님은 뭐 하실 계획이세요. 혹시 애인이랑 데이트? 대리님, 사귀는 사람 있어요?”
“콜록….”
서해는 애인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목에 걸린 반찬 때문에 기침을 시작했다.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려 한참 동안 콜록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기침하느라 이곤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했다.
서해를 바라보던 이곤이 티슈를 뽑아 건네며 말했다.
“…있으시구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소문나는 거 싫으세요? 그럼 더 안 물어볼게요. 그래도 나중에 시간 나면 데이트하는 팁 같은 것 좀 알려주세요. 저도 좀 써먹게요.”
한태경과 사이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애인이나 사귀는 사람이라는 단어만 듣고 콜록댄 자신이 한심했다. 서해는 적당히 대화를 주고받으며 화제를 돌렸다.
“와, 여기 음식 진짜 계속 나오네요. 이렇게 맛있는 거 얻어먹어서 어떡하지.”
“맛있어요? 다행이다. 다음에 더 좋은 데 찾아올게요.”
몇 번의 문이 열리고 닫힌 다음에야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받아볼 수 있었다.
“이곤 씨, 정말 잘 먹었어요. 다 먹었으면 일어날래요? 커피는 내가 살게요.”
“정말요, 대리님? 사실 저 가보고 싶은 카페가 있었는데.”
“어디예요? 전 사실 가본 데가 별로 없어서….”
“회사 돌아가는 길에 있는데 꽃집이랑 같이 하는 곳이에요. 내부에는 꽃이랑 나무도 많이 있고 바깥 테라스도 괜찮아요. 자리에 앉으면 멀리 벚나무도 보이고. 지금 나가면 테라스에 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서해는 이곤과 함께 음식점을 빠져나왔다. 쌀쌀하던 날씨는 많이 풀려있었고 제법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아직은 회사로 돌아가는 인파가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38층에서 오랜만에 나와 걸어보는 거리가 새롭고 재미있었다. 서해는 더워지기 전에 한태경과 함께 나와 점심을 먹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리님, 이쪽이에요.”
이곤이 서해의 어깨를 한 쪽으로 돌려세웠다. 큰길 모퉁이에 크고 작은 화분 여러 개가 나와 있고 한쪽에 큰 테라스가 있는 카페가 보였다. 서해의 눈에 아직 텅텅 비어있는 테라스가 보였다.
“앉아있을래요? 주문해 올게요.”
“감사합니다, 대리님. 전 아아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서해는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에 싱그러운 꽃향기가 가득했다. 곳곳에 화분과 꽃바구니가 보였다. 가게 한쪽으로 주문받은 바구니를 제작하는 테이블과 직원도 보였다. 따뜻한 곳이었다.
서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고 커피가 나올 때까지 주문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쪽에 예쁘게 놓인 허브 사진과 카페 내부의 전경을 찍어 한태경에게 보냈다.
[대표님, 점심 먹고 카페 왔어요. 여기 정말 예쁘네요. 12:37pm]
사진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료가 나왔다. 양손에 컵을 쥔 서해가 다시 테라스로 향했다. 가장자리의 가운데에 자리하고 앉은 덩치 큰 이곤이 손을 붕붕 흔들었다.
“대리님, 여기요!”
서해는 웃음이 빵 터졌다. 이곤이 자리에서 일어서 서해의 손에 있던 컵을 건네받았다.
“잘 먹겠습니다.”
“여기 이곤 씨랑 나밖에 없는데, 그렇게 안 불러도 다 보이거든요.”
“대리님 보니까 반가워서요.”
“그런데 진짜 예쁜 카페를 소개받았네요. 회사 주위에 있는 카페 같지도 않고요.”
“그렇죠? 대리님 시간 나실 때 연락해 주세요. 자주 나와서 바람 쐬고 들어가요.”
“그럴까요.”
서해는 활짝 웃으며 얘기하는 이곤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자주는 어렵겠지만 아주 가끔은 이런 곳에서 머리를 식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자리에 앉아 멀리 바라보니 이곤이 말했던 것처럼 거리에 심어진 벚나무가 보였다. 한참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바람이 불 때마다 한 잎씩 떨어져 내리는 것이 너무나 예뻤다.
“아 참, 대리님. 그날 카페테리아 회의실에서 박 부장님이랑 이 팀장님한테 많이 혼나셨죠. 정말 죄송해요.”
“아니에요. 다 지난 일이기도 하고.”
“이 팀장님이 저희 팀 팀장님이시거든요. 회의할 때 몇 차례 말이 나오긴 했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폭발하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대리님께 미리 말씀드렸다면 좋았을 텐데, 제가 잘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정말 괜찮아요.”
“마케팅팀끼리 워낙 말이 많아서 동기들 메신저 단톡방에서도 이런저런 얘기가 많았거든요. 이러다 우리한테까지 불똥 튀는 거 아니냐고 그랬었는데, 결국 저한테 불똥이 튀었네요.”
“…요즈음 전달드렸던 재검토 문서 때문에 일 많으셨겠네요, 이곤 씨.”
“처음에 생소한 스킬셋이라 좀 힘들었는데 적응하고 나서는 괜찮았어요. 수식이나 정해진 방법대로만 분석하면 되니까. 저는 오히려 대리님이랑 대표님이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두 분이 언제 이렇게 다 하시는 건지.”
“아, 아니에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요.”
“누구나 그런 속도로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손이 엄청 빠르신 것 같아요. 저랑 팀에 대리님 두 분은 내려오는 보고서 받아서 하나씩 붙들고 살펴보기도 바빴거든요. 그러다 팀 보고 들어가면, 으으.”
한동안 대화를 주고받던 이곤은 팀 보고 이야기를 꺼내다가 과거가 떠올랐는지 큰 몸을 웅크리고 몸을 덜덜 떨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던 서해가 웃음을 참고 아메리카노에 꽂혀있는 빨대를 입에 물었다.
“요즘 마케팅부를 떠도는 소문이 조금… 뭐랄까.”
“왜요? 무슨 얘기인데요.”
서해는 이때까지 발랄하게 얘기해 오던 이곤이 좀처럼 말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이곤은 서해가 눈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을 느끼자마자 시선을 돌리고 원래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이 조직도를 다시 구성하고 싶으신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와서요.”
“…그런 소문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서해는 문득 한태경이 연구 부처를 신설할 계획이라고 알려준 것이 생각났다.
“어, 대리님도 대표님한테서 들은 게 없어요? 우린 대리님은 다 알고 있을 줄 알았죠. 지금 대표님이 하고 계시는 업무가 검증 관련된 일인데, 크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룹사에서 감사부가 나올 텐데 그런 것도 아니고. 뭔가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건 아닌가 하고 바라보는 동기들이 몇 있어요. 물론 이건 마케팅 소속 동기들 메신저 단톡방에서만 쉬쉬하면서 하는 얘기이긴 하지만요.”
“아, 그렇구나.”
“우리끼리 이런 말 하는 거 대표님한테 전달하시면 안 돼요. 비밀.”
서해는 대단한 비밀을 얘기하는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고개까지 바짝 붙여서 얘기하는 이곤을 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테이블 위로 내려온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고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역광이라 눈을 찌푸리며 누구인지를 살폈다. 앞에 앉아있던 이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서해는 무심결에 이곤을 따라 일어섰다.
“서 대리, 식사 다 했나 봅니다.”
“…어, 대표님?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이 전무님, 김 이사님, 박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서해는 임원진을 향하는 이곤의 인사에 맞춰 다시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이곤은 왼손과 왼발이 같이 나갈 정도로 긴장한 모습으로 쭈뼛쭈뼛 옆으로 이동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 임원진들이 테이블 주위에 설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었다.
둘은 각자의 걱정거리로 골머리를 앓았다. 서해는 며칠 전 카페테리아 회의실에서 있었던 마케팅 이 팀장과 박 부장과의 일을 한태경이 들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숨기는 것 없이 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생각나 얼굴이 파랗게 물들었다.
이곤은 자신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 바람에 마케팅부가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에 대해서 걱정했다. 괜히 자기들끼리 하는 카더라 통신을 입 밖에 냈는데 혹시나 그걸 한태경이 듣지는 않았을지에 대해 곱씹었다. 웃음을 잃지 않던 이곤의 얼굴이 그야말로 흙빛이 되었다.
그때 한태경이 고개를 들어 이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임원진들을 향해 얘기했다.
“괜찮으시면 합석해서 커피 한잔하고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시죠, 대표님. 우린 늘 젊은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라. 하하하.”
서해는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임원진들과 합석에 의자를 끌어왔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직장인들이 각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글로벌유니티 소속의 직원들은 테라스 위에 우르르 몰린 임원진들을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껴있는 이름 모를 직원 둘을 마음속으로 위로하고 지나갔다.
서해는 휴대폰 메모장을 켰다. 임원진들의 주문을 받을 틈을 살피는 서해가 테이블 주위에 서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탄 한태경이 서해의 손을 잡아 자리로 당겼다. 깜짝 놀란 서해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앞을 보고 있었다.
몇 차례 손을 떼려 했지만 실패였다. 서해는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엉거주춤하게 걸터앉았다. 그제야 손이 떨어졌다.
한쪽에 서서 극도로 긴장하고 있던 이곤이 휴대폰 메모장을 폈다.
“주문받아 오겠습니다!”
“아, 고맙네. 나는 따뜻한 라떼 시켜줘.”
“난 라떼 아이스.”
“난 카라멜 마끼아또. 고마워요.”
이곤은 아직 주문하지 않은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한태경은 이곤의 목에 걸려있는 출입 카드를 유심히 살폈다.
“이곤 씨,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오늘 유난히 덥네요.”
이곤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잠시 뒤 덜덜거리는 손으로 쟁반에 여러 개의 음료를 들고 나타났다.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려고 자연스럽게 파하는 자리를 만들려던 서해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커피는 머그잔과 유리잔에 담겨있었다.
38층으로 돌아와 회의를 이어서 진행했다. 한태경과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있는 상황이 새삼스럽게 어색했다. 노트북의 메신저 알람이 깜박거렸다.
[김이곤: 대리님, 잘 들어가셨어요? 마지막에 임원진들 무서워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어요. ㅜㅜ]
답장을 보내려던 서해는 서둘러 단축키를 눌러 창을 전환했다. 한태경의 시선이 노트북과 서해를 향하고 있었다.
“서 대리, 프레임이 나와도 디테일 나올 때까지는 업무에 집중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눈치 없는 노트북이 그 뒤로도 메신저가 도착했다는 알림을 핑핑 울려대고 있었다. 서해는 키보드 한쪽에 위치한 음 소거 버튼을 눌렀다.
그날 오후 업무는 유난히 힘들게 느껴졌다. 한태경은 정말 필요한 업무에 대해서만 말을 꺼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리고 냉랭한 반응은 금요일 퇴근길까지 쭉 이어져 서해를 불편하게 했다.
* * *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유난히 지친 서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길게 이어진 복도로 발을 딛자마자 팔이 잡혔다. 그대로 벽으로 밀쳐진 충격이 갑작스러웠다.
“읏….”
벽으로 붙은 몸이 어지러워 손바닥으로 뒤를 더듬었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던 한태경은 서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서해의 셔츠 틈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이 닿았다가 떨어져 간지러웠다.
조심스럽게 한태경의 허리 위에 손을 올렸다. 현관에 있는 작은 가구 위에 겨우 가방을 올려두고 손을 더듬어 초커를 집어 올리려고 했다. 엉뚱한 물건들이 손끝에 미끄러져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해가 움직이는 것보다 한태경이 움직이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그는 손을 뻗어 초커를 집어 올리고 한쪽 손가락에 대충 걸쳤다. 서해의 목덜미에 묻은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평소처럼 허리를 세웠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급하게 끌어안겼던 것과 반대로 정적이 흘렀다. 평소 같지 않은 분위기에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었다.
시선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서해는 눈 바로 앞에 보이는 타이 매듭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자 초커를 걸치고 있던 한태경의 손가락이 서해의 턱을 들어 올렸다.
서늘하게 치켜뜬 시선을 이겨내지 못한 서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태경의 심기가 금세 다시 불편해졌다. 그는 서해의 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풀어냈다.
거칠게 움직이는 손 앞에서 얼어붙었다. 서해는 가만히 몇 차례 눈을 깜박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눈꺼풀 틈으로 타이가 복도 어딘가로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게 보였다. 한태경의 집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느끼는 날 선 공기에 몸을 움츠렸다.
길고 서늘한 손가락이 서해의 셔츠 안쪽의 연한 살갗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단추를 풀어 내렸다.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가 손끝에 감겨왔다. 이대로 다 씹어 삼켜버리면 속이 시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한태경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서해는 급하게 다가오는 한태경에게서 떨어지려 하다가 사정없이 벽으로 밀쳐졌다. 거친 손길로 채워지는 초커 앞에서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그는 허락하지 않은 조그만 움직임도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더 풀어 내리고 푹 들어가 있던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흣.”
이를 세워 깨물다가 부드러운 입술이 목 어딘가를 덮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피부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서해는 무릎을 휘청거렸다. 불에 닿은 것 같기도 했고 따갑기도 해 몸을 비틀었다. 한태경은 잠시 입술을 뗐다가 다시 붙여 목선을 타고 올라왔다.
귓불을 깨물던 한태경의 단단한 팔이 서해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빈 공간 없이 들어찬 포옹에 숨이 답답해진 서해가 상체를 살짝 뒤로 물리려 했으나 벽에 막혀있었다. 가빠지는 숨소리가 현관을 가득 채웠다.
입술 아래로 부드럽고 따뜻한 서해의 부드러운 피부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겨우 입술만 닿았을 뿐인데 벌써 아래쪽이 달아오르는 게 우스웠다. 그대로 귓바퀴까지 올라와 짧게 키스하고 얼굴을 묻은 한태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 이번 주에 본인이 잘못한 것 전부 얘기하면 내일 걸어 다닐 수는 있게 해줄 테니까, 말해 봐요.”
“대표님, 갑자기. 윽… 대표님.”
숨기는 것 없이 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이 자신이라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해는 이곤과 테라스에 앉아 나누었던 얘기를 한태경이 들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입안에 고여있던 말이 목 안으로 삼켜졌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계약을 물리자는 얘기를 꺼내거나, 혹시라도 그가 똑같이 약속을 어길 것 같아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시 목선을 타고 내려온 한태경은 서해의 목에 여러 개의 키스 마크를 남기고 나서야 잠시 몸을 물렸다. 평상시와 다르게 초커가 빠듯하게 매여지고 한태경의 손이 목덜미에서 떨어져 나갔다. 금방 목을 조여올 것 같았던 손길이 떨어지자 그제야 숨이 트였다.
서해는 한태경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밀어내고 응해 주지 않았다. 이때까지의 한태경과 다른 분위기에 당황했다. 손이 다시 목덜미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여 서해는 눈을 꾹 감았다.
“옷 벗겨낼 때까지 말 못 하면 시간 끝납니다.”
눈이 번쩍 떠졌다. 서해는 단추를 빠르게 풀어 내리는 한태경의 양쪽 손목을 덥석 잡았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서해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옷을 풀어 내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벌써 벨트 밖으로 빠져나온 셔츠는 아랫부분까지 훤히 열려있었고 한태경은 왼쪽 어깨의 옷을 벗겨내고 있었다.
서해는 꽉 잡고 있는 한태경의 팔목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쪽 어깨로 그를 밀어내며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품에서 도망가려고 한 것으로 오해한 그가 신경질적으로 왼쪽 소매를 벗겨냈다.
현관의 조명을 받아 매끄러운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다. 한태경은 눈을 내리뜨고 서해의 어깨를 사정없이 깨물었다. 잇자국 위로 혓바닥을 넓게 펴 핥아 올리자 단맛이 느껴졌다.
“아, 읏. 잠시만요.”
“오늘은 그런 말로는 안 멈출 겁니다. 죽을 것 같으면 알려준 대로 세이프 워드 외쳐요.”
나지막하게 읊조린 한태경은 벽에 딱 붙어 옷이 벗겨지지 앉게 버티고 서있는 서해를 바라보았다.
서해는 잡고 있던 한태경의 팔목을 놓고 떨어지기 직전의 옷을 어깨에 걸쳤다. 안도하자마자 벨트가 풀리고 바지가 떨어져 내렸다.
서해는 급히 손을 뻗어 틈 없이 몸을 붙여오는 한태경의 허리를 밀어내려 했다. 순식간에 두 손이 머리 옆에 고정되고 꼼짝없이 갇혔다.
“대… 대표님, 제발, 들어가서, 들….”
깜짝 놀란 몸이 튀어 올랐다. 벌어진 상의가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서해는 급하게 밀어붙이는 한태경의 속도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려 했다. 목덜미에 그의 얼굴이 비벼지고 그 온기를 반기기도 전에 긴장해서 돋아난 근육을 깨물렸다.
“아, 아파…. 하으.”
“왜 나만 서해 씨 말을 들어줘야 합니까.”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같이 세우고 달려드는 목소리가 건조했다. 현관 입구에 서해의 옷가지가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어깨를 꽉 잡고 버티는 손이 하얗게 변했다.
갑자기 혓바닥으로 핥아 올라오는 움직임에 몸서리쳤다. 목을 휘감아 빨아들이는 듯한 감각이 그대로 전해졌다. 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뜨겁고 축축한 혓바닥이 끝을 모르고 계속해서 파고 들어올 것 같아 숨이 가빠졌다.
“읏. 으읏.”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는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게…. 윽.”
순식간에 옷이 벗겨졌다. 짧고 강하게 낚아채오는 체인이 빠듯해서 간신히 숨을 들이켰다. 평소와 다르게 너른 보폭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한태경을 따라가기 바빴다. 여유 없이 1층 화장실에서 뒤처리를 하고 나왔다.
계단 아래까지 끌려오다시피 했다. 여러 번 스텝이 꼬여 넘어질 뻔했는데, 짧게 감아진 체인만이 서해를 일으켜 세울 뿐이었다. 평소처럼 다정하게 허리를 감싸주고 손을 잡아주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태경은 서늘한 눈빛으로 서해를 내려다보며 짧게 말했다.
“잘 따라오세요. 여기저기 휘청대지 말고.”
서해는 그의 손바닥에 짧게 감겨있는 체인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상체를 앞으로 세우고 바짝 붙어서 따라 올라갔다.
“대, 표님.”
“시끄럽습니다.”
그는 단칼에 말을 잘랐다. 계단을 겨우 올라선 뒤 참고 있던 숨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발걸음 소리, 숨소리만 들렸다.
서해는 자신의 방을 지나쳐 그대로 복도 끝 방의 침대 위에 던져지듯 내려졌다. 잠시 몸을 돌리고 올려다본 한태경의 눈빛이 전에 없이 차가웠고 무언가에 화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서웠다.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떨고 있는 목소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대표님, 갑자기, 왜.”
“서해 씨가 내 말을 잘 들어야 나도 잘 대해 줄 생각이 들 게 아닙니까.”
서해는 덜덜거리는 손을 뒤로 뻗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앉았다.
그때 침대 위로 다가와 한쪽 다리를 올리고 앉은 한태경이 서해의 몸을 돌려 앉혔다. 평소와 달리 거친 손길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서해는 다시 한태경과 손잡고 싶었지만 조금 전처럼 매몰차게 거절당할까 봐 겁나 뒤로 물러섰다.
눈앞에서 무언가 흔들렸다. 한태경의 손에서 금속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얇은 막대가 대어진 팔찌 같기도 했고, 작은 가방에 달린 장식 같기도 했다. 영문 모를 물건에 눈만 깜박이며 지켜보던 서해의 입가에 한태경의 손이 다가와 입을 벌리고 금속 막대를 물렸다.
커다란 손이 서해의 머리 뒤쪽을 감싸더니 무언가가 단단히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에 맞게 둥글게 휘어진 금속 막대가 입가에 빠듯하게 채워졌다.
“읍….”
“약속 안 지키는 서해 씨에게 잘 어울리네요.”
입가에 차가운 금속이 느껴졌다. 흔히 볼 수 있는 팔찌 정도의 두께라 엉망으로 턱을 벌리고 버텨야 하는 일은 없었지만, 입을 완전히 다물 수 없었고 살짝 눌린 입가 때문에 발음이 엉망으로 뭉개졌다.
서해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려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눈앞이 갑자기 뿌옇게 흐려졌다. 손을 들어 올려 눈두덩을 꾹꾹 눌렀는데 갑자기 잡아채진 몸이 침대 위에 눕혀졌다. 적응할 틈도 없이 엎드려 눕게 된 서해의 입에서 억눌린 소리가 들려왔다.
“…흐으.”
한태경은 서해의 허리 아래에 베개를 끼워 넣었다. 선이 예쁜 등이 긴장 때문에 잔뜩 굳어있었다. 침대에 손을 대고 힘주어 버티고 있는지 날개뼈가 툭 튀어나온 게 보였다. 손바닥을 펴 허리부터 어깨까지 척추를 타고 올라가다가 날개뼈를 긁어내렸다.
서해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태경이 혹시라도 자신을 때리려고 할까 봐 몸을 움츠렸다. 몸을 떨면서도 몸을 밀어 도망치지는 않았다. 사실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돌아보는 서해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발음이 엉망으로 뭉개져서 흘러나왔다.
“대표님, 제가….”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지났습니다.”
한태경의 눈치를 보던 서해의 몸이 침대 헤드 쪽으로 기어 올라가려 오른쪽 다리를 구부렸다. 그 모습을 보던 한태경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히 올라갔다.
“자세.”
“흐….”
파르르 떨리는 서해의 눈이 반쯤 내리 감겼다. 차마 다리를 원래대로 돌리지 못하고 가만히 굳어있자 정적이 이어졌다. 서해는 다시 다리를 내리고 얌전히 엎드렸다.
“양쪽 팔 등 뒤로 올려요.”
서해가 등 뒤로 팔을 움직였다. 한태경은 서해의 왼쪽과 오른쪽 손목을 교차시킨 다음에 로프로 감기 시작했다. 왼쪽과 오른쪽을 천천히 교차시켜 감고 그 사이를 몇 차례 오고 간 로프가 단단하게 묶여 조금의 틈도 없이 매였다.
움직임이 제한된 서해가 버둥거리자 목 뒤로 떨어져 있던 체인이 예고 없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콜록. 으… 흐읍.”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요. 진짜 다칩니다.”
“으… 대, 표님. 콜록.”
마음대로 입을 다물 수도 없었다. 서해의 입술에 타액이 촉촉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침대 시트 위로 흘러내릴까 봐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엎드린 서해의 등이 뻣뻣해졌다.
한태경은 서해의 날개뼈 부근을 지그시 눌러 침대로 다시 눕혔다. 서해는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지만 등을 눌러오는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겨우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턱 아래로 타액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숨을 멈춘다고 흘러내리는 타액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자꾸 숨이 들이켜지기만 했다. 등 뒤에 있는 한태경의 얼굴이 보고 싶었고 그와 손을 잡고 싶었다.
서해는 단단히 묶여있는 손을 버둥거리다가 한쪽 손을 뻗어 올려 한태경의 손을 애타게 찾았다. 한참을 들고 있었는데 손끝 하나 닿아주지 않아 버둥거렸다.
들이켠 숨이 뱉어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두려울 때였다. 옆으로 돌아가 있던 서해의 머리카락이 잡히고 얼굴이 베개 속으로 거칠게 파묻혔다.
“흐… 흐읍.”
“숨 쉬어요. 금방 안 끝나니까.”
한태경은 침대 아래로 내려와 선반 쪽으로 다가갔다. 몇 개의 케이스를 열어서 살피던 그는 오른쪽에 있던 플라스틱 케이스를 들고 서해가 누워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머리를 파묻은 채 열기를 식히고 있던 서해의 옆으로 침대가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엉망으로 흘러내린 타액이 부끄러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한태경이 체인을 감아 서해의 목을 천천히 당겨 올렸다. 서해는 턱에 고여있던 타액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 쇄골 뼈에 걸리는 느낌에 눈을 감았다.
“골라요. 마침 주문한 게 어제 도착했는데, 처음 사용하는 거니까 최소한 고를 수 있게는 해주겠습니다.”
눈을 뜨고 박스 안을 바라보았다. 서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손가락보다 작은 플러그부터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플러그까지 열댓 개가 상자에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마치 고급스러운 오브제라도 담겨있는 것처럼 부드러운 실크 위에 올려진 스테인레스 재질의 플러그가 서해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서해는 박스와 한태경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어디에 사용되는 물건인지 알기 어려웠다.
“본인이 고르는 게 나을 텐데. 그럼 내가 골라 주겠습니다.”
한태경은 눈을 내리깔고 가운데에 놓인 사이즈를 집어 올렸다.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엎드려있는 서해의 입가로 플러그를 쑥 내밀었다.
서해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랫입술에 붙은 플러그가 이리저리 매달렸다. 차가운 감촉을 피하려 고개를 물렸다. 긴장으로 다물고 있는 입가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머리카락을 헤집던 손가락이 뒷머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가 떨어졌다. 혹시라도 침대 위에 처박힐까 봐 눈치를 보던 서해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혀 내밀어서 핥아요.”
“흐… 읍.”
서해는 눈을 내리뜨고 입을 가로지르고 있는 금속 막대 아래로 혀를 내밀었다. 통통한 혓바닥이 얇은 금속 막대에 눌려 빠져나왔다. 긴장한 서해의 떨림이 혀끝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고개를 쭉 빼고 한태경이 들고 있는 플러그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닿지 않았다. 서해는 상체를 약간 틀어 어깨로 침대를 밀어 올리며 기어가다시피 다가갔다.
플러그에 혀가 닿자 차가운 기운이 전해졌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느낌에 서해는 혀를 더 빼어 물고 플러그를 핥았다. 아슬아슬하게 눌린 혓바닥도 아프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태경이 플러그를 조금 더 위로 들어 올렸다. 서해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움직임을 따라왔다. 혀가 닿지 않자 동작을 멈추고 한태경을 바라보던 서해의 눈이 보였다.
“좀 더 열심히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뭘 열심히 먹는 게 좋은지 고민하던 서해의 생각이 그대로 흩어졌다. 다리 사이로 손을 뻗은 한태경이 주름을 벌리고 플러그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제야 한태경이 한 말을 다시 생각했다.
“흐… 흐으. 흡. 차가….”
둥글게 깎인 입구까지 밀려들어 간 다음 가장 볼록한 부분이 한동안 들어가지 않았다. 서해는 방금 관장을 마치고 돌아온 구멍이 벌름거리며 받아들이는 느낌에 침대에 머리를 비볐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손을 뻗어 어딘가를 잡고 싶었다. 등 뒤에서 활짝 펼쳐졌다가 주먹을 쥐었다가를 반복하는 서해의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묶여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서러웠다.
한태경은 태연하게 내려다보며 서해의 몸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있었다.
벌어진 다리 끝으로 발가락이 잔뜩 펴졌다가 오므라드는 순간, 플러그가 쑥 하고 들어가 구멍이 다시 닫혔다. 아직 풀어지지 않은 내벽이 플러그를 꽉 조여 물었다가 차가운 감각에 다시 벌어졌다.
벌어진 입 사이로 급히 들이켜진 숨과는 반대로 타액이 턱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흐, 으응… 대표님.”
다리 사이로 건조한 손길이 들어와 반쯤 서있는 성기를 잡아 올렸다. 한태경의 손이 닿자 이미 짜릿한 감각을 알고 있는 몸이 꿈틀거렸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서해의 성기 끄트머리까지 링을 밀어 올려 조였다.
“아, 아, 흐…. 콜록. 대표님, 이거… 뭐, 흣.”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세우고 돌아다니지를 말았어야지. 돌아올 때까지 잘 물고 있어요.”
“대표님, 호, 혼자는, 안 돼요. 흐….”
단호한 손길이 서해의 몸을 다시 바른 자세로 엎드리게 해준 다음 떨어졌다. 주름 위를 덮고 있는 부분의 스위치를 누르자 플러그가 작게 진동을 시작했다.
서해는 뭉개지는 발음으로 한태경을 붙잡았다. 귓가에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금세 다시 문이 세차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돌아온다는 말 없이 사라진 한태경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입안에 고인 타액이 밖으로 흘러내렸다.
발버둥 칠 때마다 내벽이 쓸려나갔다. 입구와 가까이 붙어있던 내벽의 성감대가 뭉개졌다. 성기가 점점 부풀어 올랐는데 사출을 막고 있는 링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앞뒤로 막혀있는 것들을 빼내고 싶었지만 등 뒤로 묶여있는 손목은 아무리 비틀어도 풀리지 않았다. 서해는 입술을 깨물고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었다. 가빠지는 숨을 진정하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잔뜩 예민해진 성기가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허리 아래를 받치고 있는 베개에 앞을 문질렀다. 기분 좋은 건 잠깐이었고 성기를 꽉 물고 있는 링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아랫배에 힘이 꽉 들어갔다. 조여지는 내벽 속에 꽉 찬 플러그가 어딘가를 스쳤다. 서해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급히 숨을 내뱉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웅크리려던 서해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른 사람처럼 변한 한태경의 마음을 다시 돌려놓고 싶었다. 다시 따뜻한 칭찬이 내리던 그때가 절실했다.
* * *
무릎을 세우고 허리를 추켜올렸다. 침대 시트에 닿아있던 어깨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등허리엔 식은땀이 가득했다. 꼼짝할 힘도 없어진 서해의 이마는 침대 위에 맥없이 떨어져 있었다. 입가를 가로지르는 금속 막대는 타액에 젖어 흥건했고 침대 시트도 축축했다.
무서웠다. 엉망으로 묶여 방치된 몸도 무서웠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는 침대 밖의 상황이 더 무서웠다.
그러다가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서해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소름이 돋아 올랐다.
그동안 여러 차례 손목 위에 채워지던 가죽 수갑이 생각났다. 등 뒤에 묶인 손은 여전히 이곳에 있어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인 같기도 했다. 약속을 어겼다고 계약을 물리려고 했다면 그는 이렇게 자신을 묶어두지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 방에서 처음 마주하게 된 수치스러운 상황 속에서 견디고 버텨내면 결국 다시 마주하게 될 그의 손길을 기대했다. 몸은 여전히 묶인 채로 침대 위에 쓰러져 있었지만 그가 내리고 간 체벌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몸을 뒤흔드는 성감이 찾아와 생각이 끊어졌다. 잠시간 머릿속을 찾아온 세이프 워드도 다시 저편으로 넣어둔 다음이었다. 성급하게 말했다가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를 꽉 깨물고 침대 시트에 이마를 비볐다.
서해는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 없이 빠듯하게 옥죄는 성기를 다시 베개에 비볐다. 짜릿한 감각은 순간처럼 지나갔다. 밑동을 꽉 잡고 사출을 막는 링 때문에 숨이 거칠게 내뱉어졌다. 척추를 타고 올라온 서늘한 감각이 다시 허리로 내려가면서 어딘가로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느낌에 몸서리쳤다.
“흐, 하아….”
서해는 입에 물린 금속 막대를 꽉 베어 물고 등 뒤에 묶인 손을 둥글게 돌려 잡았다. 겨우 닿은 손가락 끝마디가 교차되었다.
이러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느낌에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내 가만히 버티기조차 힘들어졌다.
“대, 표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침대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몰랐다. 그때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해는 숨을 들이켜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도어 록이 열리고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한태경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반가운 얼굴이 보이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침대 근처에 서있는 한태경은 샤워를 마치고 온 듯 가운을 입고 있었다. 온몸이 빨갛게 달아올라 자신만 기다리고, 자신만 바라보는 서해를 건조하게 내려다보았다.
서해는 꾸물거리고 기어가 한태경의 허벅지 어딘가에 이마를 대고 비볐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담아 온몸으로 사정했다.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봤습니까.”
서해는 이마를 허벅지에 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닿지 않아도 좋았다.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든 목소리만으로 충분했다.
서늘한 손끝이 다리 사이로 쑥 들어오더니 플러그를 잡아 돌렸다. 한동안 흔들린 내벽이 움찔거리고 플러그를 조여대고 있었다. 서해는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목요일, 오전에. 읏. 마케팅.”
숨이 차올라 말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입가를 누르고 있는 체인이 말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다.
서해는 눈을 축 내린 채 한태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무슨 말을 내뱉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고백했다. 몸이 계속 떨려와 말을 이어가는 것이 힘들었다.
“팀장님이랑, 부장님이, 보고서 검증 건으로 절 부르셨는데…. 흡.”
다시 한태경의 허벅지에 이마를 콕 박자 머리 뒤를 옭아매던 체인이 풀어지며 입가를 누르던 금속 막대가 떨어져 나갔다. 사실을 고백하자 침대가 출렁이며 그가 서해의 근처로 앉는 게 느껴졌다.
“왜 말 안 했습니까. 내가 계속 몰랐으면 또 혼자서 버티려고 했어요?”
“아, 으. 최종 보고서, 까지는. 흐….”
“어떻게 할지는 내가 판단할 일입니다. 앞으로 회사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미팅 모두 나에게 보고해요.”
“네, 대표, 님. 흐으, 이거… 이거 못.”
서해는 한태경의 품을 계속 파고들어 왔다. 잘못을 고백한 서해는 한태경이 빨리 남은 것들을 풀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머리 위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목 묶인 것을 제외하고, 이번 주에 잘못한 것 하나에 하나씩입니다.”
“…네?”
“두 개 더 남았어요.”
서해는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몸을 틀다가 베개 위에 놓인 성기를 문지르고 말았다.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느낌에 깜짝 놀란 서해는 엉덩이를 위로 치켜들고 머리를 굴렸다. 허리를 들어 올렸다가 서늘한 공기가 닿자마자 허공에다가 실수라도 할 것 같은 느낌에 급히 다시 허리를 내렸다.
“술. 수, 요일에. 읏… 술 많이 마셨어요.”
“그것만은 아닙니다.”
다리 사이로 손을 뻗은 한태경의 손이 플러그를 짓눌렀다. 억울했다. 설마 취해서 기억나지 않는 것을 뭐라고 하는 것일까. 고민하던 서해의 머릿속으로 초커가 떠올랐다.
“술 마신 날 집에서 초커, 안, 응, 흐으….”
갑자기 떠오른 정답에 상체를 들어 올렸다. 아랫배가 찌르르하게 당기더니 절정감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는데 잘게 떨리는 진동이 계속됐다. 짧게 호흡이 겨우 이어지다가 탄성과 같은 긴 숨이 흩어졌다.
다시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온몸을 가득 덮쳤다. 서해는 한태경과 닿은 부분이 자신을 구해 주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져 이마를 콩콩 찍다가 끝내 이마를 붙이고 잘게 떨었다.
“집에서 빼지 않기로 했는데, 술 취한다고 예외는 없습니다.”
“으응! 흐, 흐아… 흡.”
그리고 뒤에 빠듯하게 물려있던 플러그가 한순간에 뽑혀 나갔다. 빠져나간 플러그가 다시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뻐끔거리던 구멍에 한태경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도 맞추면 바로 빼 주겠습니다.”
한태경은 엎드린 서해의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벌어진 하얀 엉덩이 사이로 검붉은 성기가 천천히 비벼졌다. 서해는 몸을 치고 올라오는 강한 쾌감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다시 몸을 열고 들어오려는 움직임에 긴장했다.
그때, 서해의 등 등 뒤에 있던 손 위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벗겨서 꺼내 들어요.”
정사각형 모양의 비닐 안에서 둥그런 형태가 만져졌다. 콘돔이었다.
자꾸 감기려는 눈을 겨우 뜬 서해가 콘돔을 손가락으로 옮겨 쥐었다. 막 모서리를 뜯어내려고 할 때, 엉덩이 사이로 차가운 젤이 쏟아져 내렸다. 손에 들고 있던 콘돔을 등 위로 떨어뜨렸다. 엉덩이 사이를 비비고 있는 성기가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 같았다.
“빨리.”
“으, 읏….”
서해는 손을 뻗어 다시 콘돔을 겨우 잡았다. 귀두가 주름 위를 쿡쿡 찌르는 게 느껴졌다.
마지막 남은 게 뭔지 생각해야 하는데. 도저히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모서리를 찢어 콘돔을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 낚아채는 손길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은 무심하게 몸을 열고 들어오는 침입자를 반겨댔다. 몇 차례에 걸쳐 들어오는 깊은 삽입에 등 뒤로 묶인 주먹을 꽉 쥐었다. 양쪽 어깨로 침대 위를 버티고 있던 서해의 입이 벌어지고, 숨이 들이켜졌다.
한태경의 넓은 품이 서해의 등을 덮을 듯이 안아왔다. 한쪽 팔로 허리를 휘감고 계속해서 성기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긴장한 서해의 몸이 뻣뻣해졌다. 다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몸이 열어젖히길 반복했다.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엉망이었다.
그때 갑자기 목덜미 뒤에 짧은 키스가 내려앉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따스한 스킨십이 그리워 한태경의 가슴께에 뒷머리를 비비며 재촉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번의 키스는 없었다.
서해는 목에 걸린 타액을 겨우 삼키고 꽉 쥔 주먹을 펴 한태경의 배를 살짝 밀어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너무 빠르게 밀고 들어오는 속도를 조절하려는 것이었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고 그대로 꾹꾹 눌러 들어오더니 한 번에 내려찍었다.
서해는 등 뒤에 묶인 손을 한쪽으로 움직여 겨우 손바닥을 펴 한태경의 허리께를 잡았다.
“손 떼요.”
“흐….”
서해의 손바닥에 치골을 감싸는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손바닥에 가득 차있던 땀 때문에 미끄러트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는데 한태경은 무심하게 손을 치워냈다.
“힘 풀어요. 해본 건데 왜 이래.”
“대, 표님. 아으… 아파, 앞에, 풀어주세요. 흑.”
“무슨 소리야. 뭘 잘못했는지 얘기해야 풀어주지.”
“윽….”
성감대와 전립선을 뚫고 들어왔다가 천천히 비벼나가는 감각이 뜨거웠다. 신음이 목구멍 안에 눌려 끅끅댔다.
할 수 있는 대로 쫙 펼쳐진 손이 애타게 한태경을 찾았다. 손을 잡아줬으면 했는데 허공만 휘저어질 뿐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서해의 엉덩이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몸속을 드나들고 있었다. 한 차례 미간을 구긴 뒤 허리를 붙잡았다.
“흐, 대, 대표님. 대표니…. 흐, 으응.”
제법 세차게 박아 넣자 내벽이 빠듯하게 움찔거리며 한태경의 성기를 물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움직이던 허리 짓에 점차 속도가 붙었다. 서해가 침대 위로 밀려 올라갈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금방 끝낼 생각 없으니까, 하아…. 힘 빼.”
어깨로 침대 위에서 겨우 버티던 서해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등 뒤에서 뻗어온 팔에 허리가 잡아채졌다. 건조하고 억센 손길은 엉망으로 흔들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처음 했던 날이 덜 고통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멈춰달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다시 엉덩이와 꼬리뼈, 척추를 타고 서늘한 절정감이 휘몰아쳤다.
순간의 짧은 감각이 지나면 다시 뻐근하게 조여오는 성기의 고통을 알게 된 서해가 몸을 물리려 발버둥 쳤는데 꽉 잡힌 허리는 꼼짝하지 않았다.
높게 치켜든 엉덩이가 부끄럽다거나, 등 뒤로 묶인 팔을 참을 수 없다거나, 가슴 아래의 침대 시트가 축축한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도망가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아, 아아, 우으….”
벌어진 입 사이로 울음과 요령 없는 소리가 뭉개져 흩어졌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절정감이 사라지지 않고 다시 금세 차올랐다. 정말 한계까지 몰아붙여지는 기분에 서해는 가쁜 숨을 뱉어내고 침대 시트에 가슴을 바짝 붙였다.
절정감이 계속되면 더 이상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괴롭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결국 입가로 뜨거운 숨이 터지고 울먹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윽, 읍. 그만….”
“회사에서 엎어져서, 박히지 않은 게, 다행인 건데, 그만이라니.”
정신없이 흔들리던 몸이 갑자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해의 숨소리가 겨우 다시 잦아들었다. 서해는 잘 움직이지 않는 무릎을 미끄러트리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한태경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다리 사이로 집어넣었다. 뜨거운 손이 링을 끼운 채 잔뜩 열이 올라있는 성기 밑동부터 귀두를 쓸어 올렸다.
“자, 잘못. 대표님. 힉….”
“뭘 잘못했는지 알아야 풀어준다니까.”
“흐… 아, 안 돼. 잘못, 했어요. 잘못. 대표님.”
“서해 씨가 약속을 먼저 어겼으니까, 나도 약속을 어겨도 되지 않겠습니까.”
“흡…. 아니, 안. 아, 으응.”
한태경은 짓궂게 서해의 성기를 훑어 내리며 요도 끝을 꾹꾹 눌렀다. 손가락이 끝을 스칠 때마다 내벽이 꽉꽉 움츠러드는 걸 내려다본 한태경의 표정이 굳었다. 마지막엔 요도를 막은 엄지손가락을 부드럽게 좌우로 문지르자 꽉 묶인 틈으로 투명한 액체가 찔끔 새어 나왔다.
한껏 달아오른 얼굴에서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왜 서해 씨만 약속을 어겨도 되고,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합니까.”
“안 그럴게요. 흡, 아윽. 제발, 이거, 흐… 대표님.”
“말해 봐요. 마지막으로 잘못한 걸 말하면 그때 풀어주겠습니다.”
“진짜, 모르… 읏.”
“모르면 혼나야지. 엉덩이가 터질 때까지 맞아도 모자란 걸 봐주고 있는데, 이 정도면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 겁니다.”
한태경은 둥글게 말린 서해의 등을 눌러 자세를 바로잡아 준 다음 다시 내벽을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벽 안쪽이 다시 성기를 받아들이며 꿈틀거렸다.
서해는 결국 다시 몸에 힘을 가득 주고 버텼다. 꽉 묶인 성기를 시작으로 골반과 무릎 뒤쪽, 발바닥까지 모두 저릿했다. 이대로 정말 몸이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꽉 묶인 로프를 비틀어대기 시작한 것을 바라본 한태경은 약하게 허리를 치받다가 안쪽 깊숙이 때려 넣는 동작을 반복했다. 끈적한 몸이 부딪치는 소리만 방을 가득 채웠다.
“으, 윽. 대표님, 잘못… 흡 콜록. 안 그럴, 게요. 이제, 이제 안….”
“서해 씨.”
“읏, 말 잘 들을 테니까….”
“반칙인데, 이런 건.”
“흐으…. 으, 응.”
서해는 대답인지 신음인지 애매한 소리를 뱉어냈다. 경련하듯 몸을 떨어대는 서해를 내려다보던 한태경은 눈을 낮게 내리뜨고 서해의 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톡톡 불거진 척추 아래로 동그랗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았다. 부드럽게 감겨오는 촉감이 중독될 만큼 좋았다. 한태경은 몇 차례나 엉덩이를 쓸어내렸다.
“잘 버티고 있어요.”
순간 몸을 끝까지 물린 한태경이 귀두를 주름 밖까지 꺼냈다가 몸을 구겨 넣을 정도로 세차게 구멍을 밀고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입구의 내벽이 밖으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밀려들어 가는 게 반복될 정도로 깊은 삽입이었다.
서해는 등 뒤에 묶인 손을 쫙 폈다가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발가락까지 한껏 웅크린 채 넘어가는 숨을 고른 채 버티고 있자 한태경의 손이 성기를 다시 훑어 내려 밑동을 죄고 있던 링을 겹쳐 잡았다.
“흐, 아… 아윽! 흡….”
서해는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지를 것 같아 침대에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내벽을 휘젓는 성기의 맥박이 느껴짐과 동시에 링이 빠져나가고 꽉 막혀있던 성기 바깥으로 사정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무서울 정도로 몸을 가득 옭아매는 절정감에 허덕였다. 그리고 서해의 허리 위로 빠져나온 한태경의 성기가 정액을 뱉어냈다.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정신없이 떨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휙 하고 돌려졌다. 서해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깜박였다. 입을 벌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턱이 잡히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이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서해는 손으로 한태경의 얼굴을 끌어당기고 키스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묶여있는 손 때문에 잠시 버둥거렸다. 턱 끝을 끌어 올리고 축 처진 눈으로 한태경을 올려다보았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가쁜 숨소리가 뱉어졌다. 한태경은 키스해 달라는 듯 입술을 내밀고 있는 서해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주 봤지만 한태경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짐작 가는 것이 전혀 없던 서해가 갑자기 불안해졌다. 서해는 혀를 베어 물고 닿을 듯 말 듯 한 한태경의 아랫입술과 윗입술 사이를 문질렀다.
양쪽 팔을 서해의 어깨 옆에 내리고 몸을 바짝 붙인 한태경이 인상을 쓰고 서해를 바라보았다.
“오냐오냐하니까, 아주 기어오르네.”
“이제 안 그럴게요….”
한태경은 서해의 눈을 찌를 것같이 달라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서해의 옆에 편하게 누운 다음에 서해를 자신의 몸 위로 끌어 올렸다.
맞닿은 가슴이 터질 듯 빠르게 뛰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한태경은 손을 내려 품에서 도망가려는 서해의 엉덩이를 가득 잡았다.
단단한 손이 서해의 목덜미를 잡고 어깨와 목덜미 사이쯤으로 얼굴을 내리눌렀다. 긴장감으로 몸이 굳어지자 뻐근한 어깨와 말하기 어려운 곳에 찌르르한 감각이 사정없이 피어올랐다. 방금 떨어진 몸이 금세 다시 이어질 것 같아 무서워 몸이 떨렸다.
미간에 주름이 팬 한태경은 양손으로 엉덩이를 잡고 벌렸다. 잔뜩 부은 구멍이 다시 강제로 벌어지자 서해는 얽혀있던 다리를 버둥거렸다.
한태경은 손을 뻗어 서해의 팔목에 단단히 묶인 매듭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매듭이 사라지자 팔을 앞으로 뻗어 한태경을 밀어내려던 서해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으, 아… 아파.”
“갑자기 움직이면 안 됩니다. 천천히 움직여요.”
커다란 손이 어깨와 팔뚝, 팔꿈치를 부드럽게 만져왔다. 품에 안기고 들어오는 몸을 쓸어내리며 진정시켰다.
망설이던 서해는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것을 멈추고 몸에 힘을 뺐다.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감싸는 것을 느끼고, 한태경의 어깨 위로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는 휑하니 드러난 서해의 등을 큰 손으로 덮어 천천히 쓸어내렸다. 힘들게 버틴 것을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달콤했다.
“대표님, 저 마지막은 정말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 손 타는 거 싫다고 했던 건 벌써 잊었습니까?”
한태경은 서해의 뒷머리에 있던 손으로 서해의 고개를 돌리고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누구랑 만난다는 말도 없이 밥 먹으러 가서 예쁘게 웃고 그러면 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이곤 씨랑은 아무 사이도 아닌, 흡.”
“누가 침대에서 다른 사람 이름 불러도 된다 그랬습니까.”
반듯한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굵직한 손가락 두 개가 겹쳐져 서해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굵은 성기가 드나들던 구멍이 별 무리 없이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다만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찌릿한 감각이 금세 다시 찾아왔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한태경이 서해가 잘 느끼는 부분을 꾹꾹 누르더니 짧게 끊어치기 시작했다.
“흐, 흐으. 그, 그만….”
“속상하네. 엉뚱한 사람 이름 부르고.”
“아으, 그런, 거….”
볼록하게 다시 부어오른 부분이 손끝에 금세 만져졌다. 가운뎃손가락으로 인정사정없이 눌러대자 서해가 몸을 일으키며 한태경의 몸 위에서 내려가려고 발버둥 쳤다.
“어디 가.”
“하아, 으윽… 읏.”
황당하게도 다시 서해의 성기가 찌르르해 왔다. 다만 한참 동안 눌려있던 성기가 평소와 다르게 따끔따끔했다.
서해는 한태경에게서 벗어나려 손을 뻗고 몸을 물리려 했다. 뜻대로 되지 않자 팔을 천천히 뒤로 돌린 서해는 다시 사이를 헤집고 있는 팔목을 다급히 움켜잡았다.
“아, 따… 따가워, 따가워요.”
“그럴 리가. 여기 다 풀어져서 손가락 두 개쯤은 잘만 먹는데.”
“아파, 앞에… 앞에. 흐윽.”
“아픈 것도 좋은 것도 내가 주는 것만 받아요.”
“아으, 흡… 으응. 대, 표님… 그만…. 그마안… 흐으.”
서해는 다시 아래로 피가 몰리는 기분을 느끼며 몸을 굴려 옆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금세 무릎이 잡히고 다시 몸이 반으로 접혀 올라갔다. 오해라고 하기에 지나치게 서늘한 표정이 무서워 긴장한 다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니까, 새파란 신입 사원을 대상으로 이렇게 기분이 나쁠 일인지 모르겠는데.”
“아윽….”
“벌려.”
서해는 낮고 짧게 울린 목소리를 거부할 수 없어 딱 붙이고 있던 다리를 살짝 벌렸다.
한태경은 신경질적으로 성기에 덮여있던 콘돔을 벗겨내고 그대로 서해의 주름 위로 다시 조준해 들어갔다. 고개를 젖히고 숨을 뱉어냈다. 몸을 그대로 짓눌러 한 번에 뚫고 들어간 내벽이 바짝 조였다. 손을 뻗어 서해의 허리를 쓰다듬다가 다시 몸을 뒤로 움직였다.
엉망으로 녹아내린 젤과 콘돔이 떨어져 나가면서 남긴 정액이 마찰되며 물기 어린 소리가 울렸다. 자신의 성기를 빠듯하게 물고 있는 주름 주위의 불그스름한 살갗 위로 하얀 거품이 피어올랐다.
한태경은 손가락을 펴 거품을 훑어 내리고 회음과 엉덩이골을 문질렀다.
“아, 대, 대표님. 너무….”
서해의 허리가 파드득 튀어 올랐다. 갑자기 엉뚱한 곳을 찔린 서해가 터져 나오는 앓는 소리를 억눌렀다. 잘 느끼는 부분이 스쳐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자세 바로 하세요. 다칩니다.”
“깊… 흑, 흐으…. 깊어요.”
“똑바로 안 해?”
서해는 따갑고 간지러운 성기 끝을 어쩔 줄 모르고 아랫배 위에 올린 손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한태경은 서해의 발목을 잡아 벌리고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렸다.
몇 차례 입구를 왔다 갔다 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던 한태경은 자세 때문에 깊은 삽입이 이루어지지 않자 서해를 옆으로 돌려 눕히고 한쪽 다리만 높이 들어 올렸다.
서해는 손을 뻗어 한태경의 무릎을 잡았는데, 한태경의 큰 손이 반쯤 일어서고 있는 서해의 성기를 터트릴 것처럼 잡고 강하게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태경은 서해의 온몸을 손에 꽉 쥐고 흔들면서도 부족함을 느꼈다. 발목과 성기를 움켜쥔 손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갔다.
“아윽. 소, 손. 흐으.”
“뭘, 잘한 게, 있어야, 상을 주지.”
서해의 머리가 더 이상 젖혀질 수 없을 만큼 꺾이고 허리가 엉망으로 틀어졌다. 벌어진 입에서 울먹거리는 소리, 숨넘어갈 듯 자지러지는 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애처롭게 허벅지에 닿았는데 그걸 본 한태경은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허리를 움직여댔다.
퍽퍽 들어와 박히는 소리가 점차 빨라지고 사정 봐주지 않는 삽입이 이어졌다. 물기가 비벼지는 소리, 젤이 달라붙는 소리가 사방에서 난잡하게 들려왔다.
서해의 다리 사이로 찌르르한 감각이 휘몰아치고 꽉 잡힌 성기 사이로 찔끔 무언가 흘러나왔다. 서해는 결국 아기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너무 무서웠다.
“악, 흐읍. 흑… 으응, 깊, 깊어요…. 대표님.”
“이걸, 품에 계속 넣고 다닐 수도 없고. 사람 미치게 하지 마.”
머리가 빙글 돌더니 다시 맞이하고 싶지 않은 감각에 온몸이 경련했다. 내벽이 꿈틀거리며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서해는 겨우 손끝에 닿는 한태경의 다리를 급히 쓰다듬었다. 아직 꽉 잡혀있는 성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손… 대표님, 손… 흑.”
“앞으로 약속 있을 때는 미리 허락받으세요. 보내줄지는 모르겠지만.”
“아, 하윽!”
“대답.”
“네, 으응. 아, 아!”
허리를 다시 뒤로 한껏 물린 한태경이 서해의 한쪽 다리를 어깨에 걸쳐두고 고환을 잡아 눌렀다. 기절할 듯 짧은 비명이 방을 울렸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더 세게 잡아오는 움직임에 숨이 컥컥 넘어갔다.
작은 움직임에도 바르르 떨리는 몸을 내려다본 한태경이 결국 중얼거렸다.
“이리 내. 잡아줄 테니까.”
“흐… 읏.”
서해는 겨우 팔을 뻗어 그토록 원하던 한태경의 손을 맞잡았다.
* * *
머릿속이 몽롱했다. 일주일 내내 회사에서 머리를 풀로 쓰기도 했고, 금요일에 퇴근하고 지금까지는 체력을 바닥까지 당겨쓴 느낌이었다. 처음과는 다른 과격한 섹스에 눈을 뜨는 것도 힘들었다.
밀려오는 잠에 빠져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서해는 그대로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옆에서 서해를 지켜보던 한태경이 서해를 안아 들고 복도 끝 방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방에 내려줄 것으로 생각했던 서해는 반대 방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으로 가겠다고 하려다가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한태경은 서해를 방 안쪽에 달린 화장실에 내려주고 돌아섰다. 당황스럽게도 한태경의 방에 있는 화장실 문도 유리로 바뀌어 있었다. 박스 가지러 들어온 적이 있었지만 서둘러 나가는 바람에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이었다.
“내가 내려놓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쭉 발도 안 디딜 것 같네.”
“여, 여긴 대표님 방인데….”
“집처럼 편하게 지내세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집…이요?”
보육원, 하숙, 자취방. 그동안 서해가 지나왔던 곳에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바라보던 한태경이 서해의 코끝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오늘 서해 씨랑 같이 자야겠으니까 그렇게 알아요.”
“대, 표님.”
“먼저 씻고 와요.”
서해는 한태경에게 등 떠밀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하면서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방을 들여다보았다. 가운을 입고 테이블에 앉아있는 한태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같은 침대를 쓰자는 의미가 새삼스럽게 부끄러워졌다. 누군가와 함께 잠들었던 기억은 아주 어린 유년 시절의 보육원 생활, 그 뒤로는 없었다. 그 흔한 수학여행이나 대학교 MT에도 참여할 수 없었고, 대학원 생활에서도 쪽잠을 잘 수 있는 곳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지 집과 같은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따뜻한 물을 맞고 서있는 서해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목 뒤쪽을 쓸어내렸다.
샤워를 마치고 몸을 닦아내려 허리를 굽히자 다리 사이가 쓰라린 느낌이 가득 밀려왔다. 대충 물기를 털어냈다. 거울 너머로 목덜미에 가득 남은 붉은 자국이 보였다. 셔츠 위쪽으로 한참 올라와 있는 자국 때문에 난감했다.
큰 타월로 몸을 두르고 어색한 감각에 쭈뼛거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 지나가는 한태경이 보였다.
“베드 벤치에 갈아입을 옷 올려뒀으니까 입고, 머리 말리고 있어요.”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드라이기, 그리고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스킨과 로션이 보였다.
손바닥을 펴고 스킨을 조금 따라내자 손바닥 가득 한태경에게서 맡을 수 있던 향기가 올라왔다. 서해는 손바닥을 비벼 뺨을 두드렸다.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말리려던 서해는 고개를 짧게 흔들고 서서 드라이기를 잡았다. 엉덩이를 어딘가에 붙이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주말 내내 침대에서 지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슬퍼졌다.
서해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중얼거리며 초커를 목에 채웠다.
등 뒤로 물소리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서해는 고개를 돌려 보려다가, 화장실 문이 유리인 것을 기억해 내고 책상 위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은 집에서 지낸 지 몇 주가 지났는데 침실 안에서 함께 움직이는 느낌은 새삼 새로웠다.
침대 위로 쓰러지고 싶었는데 한태경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 기다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한태경이 그 모습을 보고 서해를 안아 들어 침대 위에 눕혀주었다. 같은 침대인데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저 혼자 자도 되는데.”
“안 됩니다.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
서해는 침대가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옆에 있는 사람의 단잠을 방해할까 봐 걱정됐다.
“자다가 떨어지겠네. 그만 눈치 보고 어서 누워요. 이러다 해 뜨겠습니다.”
“지금 몇 시예요?”
“세 시 반.”
“늦잠 자도 될까요, 대표님.”
“알람은 꺼둘 테니까 편한 대로 해요. 보고서 프레임도 생각보다 빨리 나왔고, 주말에는 푹 쉬어도 됩니다.”
서해가 코 아래까지 이불을 덮고 눕자 한태경도 옆으로 들어와 나란히 누웠다. 이불 사이의 뻥 뚫린 공간이 어색해 손을 가슴 위로 올리다가 코 아래의 이불 끝을 잡았다.
한태경은 휴대 전화를 켜서 이것저것 만지더니 테이블 등만 남겨두고 조명을 껐다. 어두운 것을 무서워한다는 자신 때문에 괜히 불을 켜고 자게 된 것 같아 신경 쓰였다. 평소의 그라면 불을 끄고 자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저 때문에 괜히 불 켜고 주무시는 것 같은데.”
“이 정도 조명은 괜찮습니다. 서해 씨가 어둡다고 느낄까 봐 걱정되는데.”
“저도 이 정도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노랗고 은은한 테이블 조명은 눈을 감고 있어도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서해는 몇 차례 눈을 깜박거리다가 눈만 도르륵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베개를 세우고 등을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한태경의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앉아있던 그가 스르륵 내려와 서해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깜짝 놀란 서해가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고 눈만 깜박였다.
“서해 씨.”
“네?”
“세이프 워드 잊어먹었습니까.”
“기억하고 있어요. 비가 올 것 같다고.”
“그런데 왜 안 씁니까.”
“제가 먼저 잘못한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리고?”
고민됐다. 감정을 고백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서해가 이불 끝을 말아 올리며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결핍된 마음을 뱉어냈다가 자신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을까. 피곤함에 머리가 몽롱했었는데 잠이 달아났다. 양손 끝을 다시 맞잡고 손톱을 문질렀다.
“…….”
“말해 봐요.”
한태경은 손을 뻗어 서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지며 대답을 기다렸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지 눈동자가 다시 여기저기로 흔들리고 있었다. 서해에게 다가가 한쪽 팔을 뻗어 머리를 어깨 위에 올려두었다. 다시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자 가슴 앞으로 따뜻한 몸이 가득 안겨왔다.
“대, 표님이 저 방으로 불러서, 그, 플레이라는 걸 하면.”
“응, 그런데.”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하고 떠돌아만 다니던 저를, 여기 있어도 된다고, 그렇게 해주시는 것 같아서요.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세이프 워드를 사용하면 그게 다 날아가 버릴까 봐….”
“…….”
가만히 서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품 안에서 눈치를 보며 겨우 말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대로 허리를 끌어당겨 꽉 안았다. 말을 이어가던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하게 작아졌다.
한태경은 서해의 동그란 이마 위로 턱을 올려놓으며 눈을 내리떴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고, 다 꿈일 것 같아서 불…안해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죄송해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 거 알아요.”
“나만 안절부절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오늘 말씀하셨던 건, 앞으로 조심할게요.”
서해는 한태경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몸을 웅크렸다. 등 뒤로 큰 손이 토닥거리는 손길이 따뜻했다.
“그것 때문에 조금 지나쳤던 건 맞는데…. 나는 서해 씨가 어떤 기분인지 말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싫다거나 그만하라고 하는 게 그냥 플레이 도중에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정말 본인의 한계라고 느낄 때는 반드시 세이프 워드 사용해요. 세이프 워드 사용한다고 내가 뭐라고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 네에.”
“이리 와, 다 끝났는데 왜 이렇게 떨어요.”
손끝 하나 닿게 해주지 않던 무서움 때문인지, 깨어나면 꿈일까 봐 두렵기 때문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서해의 이마에 짧은 키스가 내려앉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지자 서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선이 한태경의 입술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한태경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서해의 몸을 끌어당겼다. 가만히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그러다 키스하려고 동시에 입을 벌린 두 사람의 이가 부딪히며 잔잔한 웃음소리가 침대 위를 채웠다.
“주말에는 나랑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는 게 어때요.”
“…좋아요, 대표님.”
서해는 한태경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벌어지는 입술을 따라 혀를 밀어 넣고 따뜻한 혓바닥을 쓸어내렸다. 어설프게 핥아 올리는 혓바닥을 가만히 느끼고 있던 그가 서해의 입술을 삼키고 다시 키스했다. 깜박거리던 서해의 눈꺼풀이 편안하게 닫히고, 마주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감겨오자 한태경은 저도 모르게 헐렁하게 벌어진 티셔츠 사이로 손을 넣고 허리를 쓸어내렸다. 서해의 목구멍 안쪽으로 작게 웅얼대는 소리,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다가 정말 죽는 수가 있어요. 이리 와요. 잠들 때까지 안아줄 테니까.”
포근한 것만으로도 너무나 좋았던 침대에 온기가 더해지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서해를 휩쓸고 지나갔다. 잠들기 어려울 정도로 쿵쿵대는 심장 때문에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했다.
“대표님.”
“왜.”
“손… 잡고 자도 될까요.”
“이렇게?”
떨어진 두 사람 사이에 마주 잡은 손이 놓였다. 갑자기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 서해가 대답하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해는 그날 처음으로 자는 동안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 *
먼저 눈을 뜬 한태경이 옆으로 누워 서해를 바라봤다. 침대에 뺨을 붙이고 엎드려있는 서해의 눈가가 아직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길게 뻗어 나온 속눈썹을 지나 귀 아래로 남겨놓은 자국이 가득했다.
온몸에 남은 흔적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을 뻗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쥐었다 놓길 반복했다.
꼼짝하지 않고 한참 응시하던 눈이 천천히 감기며 생각에 잠겼다. 눈도 못 뜨고 손을 잡아달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쫓아오던 모습이 선명했다. 매끄럽게 떨어지는 이마 위에 손가락이 닿았다가 떨어지고,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동그란 어깨 위에 올라갔다.
“서해 씨.”
서해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는데, 현실인 것 같기도 하고 꿈인 것 같기도 했다.
아직 일어나고 싶지 않았던 서해가 푹신한 침구 속으로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 어딘가에 머리를 몇 차례 비비고 자리를 잡았다. 머리 위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등 뒤를 포근하게 감싸는 손길을 느끼며 그대로 다시 짧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뜨고, 어딘가로 파고들어 갔을 때 서해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벌써 진작에 잠에서 깨어나서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태경과 눈이 마주쳤다.
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는 것 말고는 너무나 멀쩡한 모습에 이불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얼굴이 빨개져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대표님, 왜 옷을 안 입고 주무세요. 어제까지 분명.”
“그랬는데, 바꿨습니다. 부드러운 서해 씨랑 끌어안고 잠들기에는 이게 더 좋은 것 같아서.”
“아, 윽.”
금세 다시 끌어당겨진 서해의 몸이 침대 위에 누워있던 한태경의 몸 위로 포개졌다. 허리 아래쪽과 등 근육이 시큰하게 당겨와 잠시 숨을 멈췄다.
어깨 위에 한쪽 얼굴을 내려놓자 등과 허리를 단단히 감싸는 팔이 반가웠다. 어제와는 다른 다정한 손길이었다.
“너무 오래 자면 밤에 힘드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요.”
“네….”
등과 허리 사이쯤에 올려져있던 손이 허리 근육과 꼬리뼈, 엉덩이를 시원하게 눌러오기 시작했다.
“아으.”
“점점 나아지는 것 같긴 한데, 섹스할 때 힘 꽉 주고 버티는 건 버릇되기 전에 고칩시다.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건데 그걸 왜 힘주고 버텨서는.”
“저, 저한테는 너무. 아야.”
“여긴 내가 그런 게 아니라, 회사에서 매일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서 뭉친 겁니다.”
“아, 잠시만요. 대표님.”
“손을 뗄 수가 없네.”
“추워요…. 이불 덮어주시면 안 될까요.”
서해는 눈을 감고 꼼지락거리며 한태경의 어깨 위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가슴 아래쪽과 등 위에 덮어진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자리에 누워있었다.
침대 위에서 얽혀진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다시 커다란 손이 들어와 등을 쓸어내렸다.
“지금 점심 먹을 시간 훨씬 지났습니다. 잠들지 말아요.”
“밥 먹는 것보다 이게 훨씬 좋아요.”
“밥을 먹어야 이런 것들 저런 것들 다 해볼 거 아닙니까. 체력 좀 길러요. 회사에서 전력으로 일하는 건 좋은데 집에 와서 나랑 놀아줄 기운도 좀 남겨두고.”
“그럼 나중에 내려가서 운동하는 거 알려주세요.”
“그럽시다. 10분 더 줄 테니까 그땐 정말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두 시 넘었어요.”
맞닿은 뺨을 비비며 눈을 감았다. 허리 아래로 포근한 이불이 덮이고 통째로 끌어안겼다. 무섭게 달려들던 한태경은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과 확연하게 달랐던 간밤의 섹스가 머릿속을 스쳐 가고, 그와 계약하던 날의 약속한 내용도 드문드문 떠올랐다. 약속을 어긴 뒤 찾아온 것은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을 만큼 따끔한 체벌이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내밀어진 손길 앞에서 속없이 무너졌다. 벗어나기 힘든 따스함이 품 안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