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9)

07. 일상

일요일 저녁 식사를 직접 준비하고 싶었던 서해가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1층으로 내려왔다.

“대표님, 저녁 드셨어요?”

“아직 하기 전입니다.”

“오늘 저녁은 제가 해 드리려고요.”

“서해 씨가?”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뭔가를 확인하고 있던 한태경이 서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던 서해 뒤에 바짝 붙어 섰다.

뭔가 어색한 느낌에 뒤를 돌아본 서해는 한태경의 어깨에 코를 박고 멈춰 섰다. 순식간에 품에 가득 안겼다.

“메뉴는 뭡니까?”

“윽, 오므라이스랑 그리고 샐러드인데요.”

“어째서 갑자기 그런 마음이 생긴 겁니까.”

“저만 너무 계속 받아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요.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여튼 잠시만 앉아 계세요.”

한태경은 손을 뻗어 서해의 뒷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에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밤과 낮 시간을 들여 겨우 진정하고 내려온 것이 소용없었다. 서해는 서둘러 그의 손을 잡아끌고 아일랜드 식탁 의자에 앉혀두었다. 자리에서 웃으며 시선을 떼지 않는 한태경 때문에 몇 번이나 손에 쥐고 있던 재료를 떨어뜨렸다.

냉장고로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서해를 바라보던 그가 여러 번 웃음을 터트렸다.

중반 이후로 넘어가기 시작하자 집요한 시선에 적응된 서해가 제법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오믈렛인 줄 알았던 달걀 덩어리를 볶음밥 위에 얹은 다음 젓가락으로 배를 가르자 촉촉하게 익은 속이 벌어졌다.

“아, 성공했다.”

“신기하네요. 이렇게 만들어지는 건지 처음 알았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이렇게 모양이 잘 잡힌 건 처음인데, 이건 대표님 드세요. 다음에도 이렇게 잘 만들 자신이 없어서요.”

“고맙습니다. 누가 직접 해주는 요리 먹어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플레이팅까지 제법 그럴듯하게 담아둔 서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살짝 곁눈질하니 제법 입맛에 맞는지 맛있게 먹는 것 같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 서해는 그제야 자신의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밥을 먹고 자리를 비워내자 한태경은 디저트는 자신이 준비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펜트리에서 홍차 틴케이스를 꺼내고 찻잔과 주전자도 꺼내왔다.

“테이블 위에서 먹게 소파로 가있어요. 금방 갑니다.”

멀바우 테이블 위에 파란색 홍차 잔과 티팟, 그리고 수제 과자 박스가 세팅되는 것이 보였다. 한태경이 티팟을 들고 홍차를 따르자 맑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서해는 길고 단단한 한태경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니트 소매는 팔꿈치 아래까지 밀어 올려져 있었고, 그 아래로 주전자나 찻잔을 들었다 놓을 때마다 꿈틀거리는 근육이 보였다. 서해는 순간 자신을 꽉 잡고 놓지 않던 집요한 손길이 생각나 얼굴을 살짝 붉혔다.

“떫은맛이 많이 느껴지면, 우유를 조금 넣으면 부드러워질 겁니다.”

“잘 먹겠습니다.”

한태경이 말한 것처럼 약간의 떫은맛은 있었지만 삼킬 때 깊은 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이 느껴졌다. 첫 잔은 그가 따라준 그대로를 음미했다. 서해는 쿠키 한 줄을 다 비워내고 우유를 추가한 홍차까지 두 잔이나 마신 다음에야 잔을 내려두었다.

창밖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서해 바로 옆에 다가와 앉은 한태경이 서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처음처럼 놀라거나 옆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본 그의 얼굴에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한태경이 속삭이듯 말했다.

“내일 출근하기 싫어지네요.”

“대표님도 그런 생각 하세요?”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직장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있으니까 주말이 가는 게 더 아쉽기도 하고.”

“저는 아직 출근하는 것도 좋아요. 일하는 것도 재미있고요.”

해가 넘어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있던 노을이 붉은색에서 보라색, 짙은 푸른색으로 변해 갔다. 물감이라도 번지는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에 서해는 가만히 앞만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창문 너머로 흘러가는 구름과 멀리 떠오르는 초승달을 바라보았다. 서해는 머리를 기울여 한태경의 어깨에 기댔다.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 딱 맞는 높이였다.

한태경은 고개를 돌려 서해를 내려다보았다. 서해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겨준 뒤 카우치에 닿을 듯 말 듯 떨어져 있던 손을 잡았다. 곁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얼굴에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읽을 수 있었던 절박함, 초조함, 불안함 같은 것들이 제법 사라져 있었다.

눈을 내리뜨며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젠 내가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부… 불편한 사람이랑 키스하고 그런 사람은 아닌데요.”

한태경은 큰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가, 귓가를 만졌다가, 다시 옆머리를 쓸어내렸다가를 반복했다.

가만히 손길을 느끼던 서해는 한태경과 잡은 손을 더듬었다. 굵직한 손가락 마디를 쓸어 내려온 뒤 반듯한 손톱을 몇 차례 문질렀다. 둘 사이에 얽어져 있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는 서해의 시선이 손끝에 고정됐다.

서해와 한태경은 소파에 앉아서 해가 질 때까지 밖을 바라본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날이 어두워지자 잠시 휴대전화를 열어 일기예보를 살펴본 서해가 말했다.

“날씨가 괜찮은데, 잠깐 나가서 산책하는 건 어떠세요?”

“좋습니다. 옷 가지고 내려올 테니까 잠시 기다려요.”

계단에서 내려오는 한태경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서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산책을 가는 건지 런웨이를 오르겠다는 건지 당황스러웠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는 정말 이상적인 라인의 소유자였다. 슈트를 입든 캐주얼을 입든 훤칠한 비율의 그가 부럽기까지 했다. 키가 작다거나 체격이 작은 것으로 고민해 본 적 없는 서해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한태경이 현관으로 걸음 하자 서해가 옆을 따라나섰다. 그는 서해의 어깨 위로 아우터를 걸쳐주었다. 늘 올려두던 곳에 초커를 내려두는 것을 본 그가 갑자기 서해의 오른쪽 팔목을 들어 올리고 웃음 지었다.

“…대표님?”

“지금부터 세 시간만 이러고 있을까요.”

순식간이었다. 서해는 한쪽 가죽 수갑에 한태경의 왼쪽 팔목이, 다른 쪽 가죽 수갑에는 자신의 오른쪽 팔목이 채워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태경이 왼손을 들어 올리자 서해의 오른손이 같이 따라 올라가 체인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한태경은 아무렇지 않게 현관문을 열고 나섰는데 서해는 기겁하고 현관문 안쪽에 버티고 섰다. 금방이라도 앞집이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리를 높이지 않고 다급하게 불러 세웠지만 그는 서해의 손을 잡아 밖으로 당겨내고 있었다.

“산책 가자면서요. 나와요. 공원도 한 바퀴 돌고, 30분 정도만 걷고 옵시다.”

“안 돼요. 이러고 어떻게 밖에… 아, 대표님.”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이런 걸 본 적도 없는데요….”

서해의 눈이 눈을 날카롭게 내리뜬 한태경 앞에서 아래로 축 처졌다. 정말 혼낼 기세의 표정에 주춤거리며 집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아, 대표님. 이건 진짜, 진짜 이건.”

“나와요. 혼나기 전에.”

서해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오는 것은 성공했지만, 도저히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를 여러 차례 올려다보았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공원은요.”

“거긴 사람이 있겠지.”

“…대표님.”

“밤이라서 아무도 눈치 못 챌 겁니다. 따라와요.”

서해는 망설임이 가득 담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직 제법 두꺼운 코트의 소맷자락이 넓게 펼쳐져 있어 팔을 내리고 있으니 잘 안 보일 것 같기도 했다.

“진짜 너무하세요. 저 방심하게 만들고서는 갑자기 이렇게.”

“걸어 다니면서 갑자기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들키지는 않을 겁니다. 붙어있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 대표님 불편하지 않다고 했던 거 취소예요.”

“하여튼 요 말대꾸는.”

서해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얇게 떠 한태경을 바라본 다음에 소맷자락을 다듬어 내렸다.

고개를 내린 채 손목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을 내려다보던 한태경이 서해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다정한 손길에도 깜짝 놀라 어깨를 추켜올린 서해가 다시 억울한 눈빛으로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다른 곳 둘러본 적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내려가는 길에 몇 군데만 들렀다 갑시다.”

“다른 데, 어디요.”

한태경은 손을 뻗어 3층을 눌렀다. 어색하게 서있던 서해는 맞잡은 손바닥 사이를 간지럽혀 오기 시작하는 손가락을 애써 무시했다.

3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큰 유리문과 운동 기구가 잔뜩 들어찬 곳이 눈에 들어왔다. 몇 명의 사람들이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었고, 드문드문 파워렉이나 백 익스텐션에서 어설프게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3층에는 헬스장이 있는데 운동하러 가세요. 자세 잡는 건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어제 보니까 운동이라고는 모르는 몸 같던데.”

“대표님, 밖에선 제발.”

“내 말에 이상한 내용이 있었습니까? 받아들이는 서해 씨가 더 이상한 것 같은데.”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삐죽이자 큰 손이 서해의 머리를 툭 덮어왔다. 괜히 다시 허리가 뻐근해져 오는 것 같아 자세를 바로 하고 섰다.

먹고사는 것에 치이고, 여유가 없던 서해가 운동 같은 걸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서해는 유리문 안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었다. 갑자기 몸을 잡아끄는 한태경 과 보폭을 맞추려 몸을 당겨 붙였다. 수갑이 팽팽해지는 소리가 코트 소맷자락 안에서 찰랑거렸다. 진심으로 어지러웠다.

“출입이 지문 인식으로 되는데 혼자서 들어가려면 지금 등록하는 게 낫겠습니다.”

“네? 잠시만요. 잠시… 대표님.”

헬스장 입구에 있던 안내 데스크 앞에 섰다. 안내 데스크는 다행히 가슴 높이만큼 올라와 있었다.

“3302호입니다. 거주자 추가 등록하려고 합니다.”

“네, 카드 키 가지고 계신 것 보여주세요.”

한태경은 아무렇지 않게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어 차 키와 연결되어 있던 조그마한 카드 키를 꺼내어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돌아본 서해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는 것이 보여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손님, 이쪽으로 손가락 올려 주시겠어요?”

서해는 무심결에 늘 사용하려던 오른쪽 손을 들어 올리려다가 멈칫한 뒤, 왼쪽 손을 들어 올려 둘째손가락을 기계에 가져다 대었다. 데스크 직원이 금방이라도 고개를 빼고 수갑이 매어져 있는 팔목을 내려다볼 것 같아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삐빅-

“정상 등록되셨습니다. 헬스장은 지금 당장 사용 가능하시고요, 운동복은 문 앞에 있으니까 꺼내서 사용하시고, 샤워장 안에….”

직원의 헬스장 사용 설명이 이어졌지만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서해의 귀에는 단 한마디의 설명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질 것 같던 직원의 설명이 끝나고 유리문 밖으로 나오자 서해의 얼굴이 목까지 붉어졌다.

“샤워장은 안 됩니다. 집에 와서 씻어요.”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집 밖을 활보하는 사람이 샤워장 사용을 하지 말라고 하는 모양새가 퍽 이상했다.

엘리베이터를 다시 타고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해는 그때까지도 오묘한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대답하지 못한 채였다. 한태경은 서해의 턱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다. 서해는 한태경의 얼굴에 담긴 표정을 금방 간파했다.

“말로 할 때 대답해요.”

“…네.”

그는 대답을 듣자마자 수갑으로 연결된 서해의 손을 꼭 잡았다.

“벌써 벚꽃이 많이 폈던데, 봤습니까?”

“아니요. 아직 못 봤어요. 평소에도 잘 안 보고 다니기도 했고.”

“그럼 오늘 보는 게 올해 처음 보러 가는 겁니까.”

“올해가 아니라… 평생 처음일걸요.”

한태경은 아무 말 없이 서해를 내려보다가 로비 바깥으로 나섰다.

“잘됐네요. 공원으로 가면 벚꽃 길이 있습니다. 낮에는 사람이 많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어두울 때 보는 것도 꽤 괜찮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이미 어두워진 아파트 단지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끔 멀리서 사람이 한둘 보이긴 했지만, 먼 거리에 있었다. 둘 사이를 묶어주고 있는 체인이 눈에 띌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서해는 평화로울 수도 있었던 산책이 주는 긴장감 때문에 한태경과 묶여있는 손을 펴서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뭘 이렇게 꽉 잡습니까. 또 긴장됩니까.”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해는 코트 소맷단을 끌어 내리며 한태경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해가 떨어지고 나니 밤공기가 조금은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한태경은 잡고 있던 서해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고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당겨 넣었다. 서해는 손을 잡고 걸어간다는 부끄러움보다 가죽 수갑이 어딘가에 숨겨져 안 보일 거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짙은 어둠이 내린 하늘 아래로 올려다보이는 나뭇가지 끝에서 봄 향기가 가득 올라왔다. 누군가의 옆에 서서 봄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정말 평생 처음인 일이었다.

“이제 잘 둘러봐요. 다음 주에 봄비라도 내리면 벚꽃은 금방 사라집니다.”

“…네.”

조용히 길을 걸어가던 서해가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누군가에게 들킬 것 같다는 걱정은 이내 사라졌다. 머뭇거리다가 손을 한 차례 쥐었다 놓았다. 답이라도 하듯 맞잡아오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순간들이 일상의 조각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부딪치는 손목에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머니 속의 수갑이 서로를 묶고 있었다. 조용한 곳에서 더듬어 본 물리적인 구속은 서해가 느끼는 근원적인 외로움을 조금씩 채우고 있었다.

스스로 꿰뚫어 본 마음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갑작스럽고 미묘한 감정을 알아챈 서해가 손을 꿈틀거리며 비틀어 빼려고 하자 한태경은 부드럽게 손등을 쓰다듬으며 서해를 진정시켰다.

“왜 또.”

“…자, 잠시만요….”

“꽃놀이를 왔더니 엉뚱한 데 신경 쓰네.”

좁은 코트 주머니 속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코트 주머니 속의 그의 손이 장난스럽게 손을 꽉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벌써 익숙하게 닿아오는 온기가 어색하지 않고 따뜻했다.

몸부림은 아주 짧게 끝났다. 벚꽃길을 맞이하러 갈 때까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써야 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마주하게 된 자신의 모습 속에서 서해가 할 수 있는 것은 옆에 있는 한태경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 * *

마케팅팀의 감사가 진행될수록 업무량이 증가했다. 메신저로 대화하기 번거로워진 한태경과 서해가 아예 문을 열어두고 작업하던 중이었다.

서해의 책상 위에는 출력물이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표에 들어간 수치와 그래프 곳곳에 형광펜이 마킹되어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서해가 보내온 보고서를 다듬고 증빙 자료를 검토하는 한태경이 보였다.

“서 대리, 오늘까지는 메일함에 있는 검토 건 완성해서 넘겨주세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요. 늦은 오후가 될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내일 내가 확인할 수 있게만 해주면 되니까.”

금주 초에 한태경은 연구 보고서들을 검토하는 일정을 약간 앞당겨 서해에게 다시 요청했다. 업무가 많아져 봐야 비슷할 정도일 거로 생각한 서해가 알았다고 수락하자마자 정신없이 야근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다행인 점도 있었다. 특정 기간에 작성된 보고서를 중심으로 검토하여 일에 끝이 있다는 것과 한태경이 약간의 업무를 덜어가 줬다는 것이었다.

열려있던 문 안에서 텐션이 높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까지만 고생해 주세요. 내일부터는 조금 괜찮아질 겁니다.”

“네.”

보고서에 코를 묻고 있던 서해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했다.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분주했다. 데이터 여기저기를 마킹하고 적어 내리는 것을 반복했다.

그때 사내 메신저가 도착했다. 손을 뻗어 마우스를 흔들고 대화창을 켰다. 동기 중 가끔 만난 적이 있는 마케팅 3팀 소속 김이곤 사원이었다.

[김이곤: 서 대리님 :-)]

[서해: 이곤 씨, 오랜만이에요.]

[김이곤: 바쁘세요?]

[서해: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김이곤: 지난주에 보내주신 보고서 검토 건 때문에 여쭤볼 일이 있어서요. 메신저로 대화하기 어려운데, 잠시 35층 카페테리아에 있는 회의실에서 뵐 수 있을까요?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서해는 시계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오전 10:55분, 설명이 길어진다고 해도 30분 정도로 잡으면 점심 먹기 전까지는 지금 검토 중인 보고서를 마무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서해: 내려갈게요. 회의실 예약하셨어요?]

[김이곤: 감사합니다! 3501호에 예약해 뒀어요.]

서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이 열려있는 대표실로 다가갔다. 방 안에서 영어로 무언가 대화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인공지능 주제를 두고 의논하는 게 들려왔는데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시력 보호 안경을 쓰고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한태경이 기척을 느끼고 서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전화를 끊지 않은 상태였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한태경의 눈동자가 한결 더 날카로워 보였다. 서해는 안경 하나로 달라진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전화기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서해를 바라보던 그가 물었다.

“뭡니까?”

“저 잠시 35층에 다녀오겠습니다. 마케팅팀에서 보고서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요. 그렇게 길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다녀와요. 너무 오래 붙잡혀 있지는 말고.”

“네, 대표님.”

35층에 내려가는 발걸음이 바빴다. 오전 집중 근무 시간이라 그런지 내부는 텅텅 비어있었다. 3501 회의실 문밖에 서있는 마케팅 3팀의 김이곤 사원이 보였다. 서해는 언제나처럼 웃으며 걸어가다가 유리문 안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이곤 씨.”

“서 대리님, 왼쪽 분은 마케팅 3팀 이 팀장님이시고, 오른쪽 분은 박 부장님이세요.”

“보고서 관련해서 문의하실 것이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게, 제가 물어본다고 말씀드렸는데 팀장님과 부장님께서 직접 서 대리님 불러 달라고 하셔서 그만. 죄송해요. 도저히 피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금방이라도 무릎 꿇고 사죄할 기세였다.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고해해 오는 김이곤을 마주한 서해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곤 씨 잘못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죄송해요… 서 대리님.”

서해는 짧은 사과를 남기고 사라지는 김이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유리문 너머로 테이블 위에 있는 보고서가 보였다. 표지에 검토 완료라는 태그가 붙어있었고, 그 아래로 마케팅 전략 보고 장표 파일이 출력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를 깨물고 손잡이를 잡고 서있다가 문안에 앉아있는 타 팀의 상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서해는 금세 영업용 미소를 띠고 회의실로 들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기획조정실 소속으로 일하고 있는 서해입니다.”

“아, 유명 인사 오시는구먼. 앉아요.”

“감사합니다. 부장님, 팀장님.”

서해는 김이곤이 사라지기 전에 얘기해 주고 간 직함을 떠올리며 그들의 목에 걸려있는 출입 카드를 살폈다. 이름과 소속이 간단히 적혀있었고 김이곤이 얘기한 것처럼 마케팅부 소속이었다.

“서 대리,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그런데 서 대리가 소속된 곳이 다른 팀이랑 구성원이 조직되어 있는 방식도 다르고 하니까 별 방법이 있나. 원래 같았으면 팀장급이나 못해도 과장을 불렀을 텐데 지금 기획조정실에 서 대리밖에 없잖아. 우리가 대표님 불러서 물어볼 수도 없고.”

“…말씀하십시오, 부장님.”

좋은 소리가 쏟아져 나오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서해는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속으로 여러 시나리오를 그려보고 있었다.

“서 대리, 입사한 지 얼마나 됐지?”

“이번 주 지나면 한 달 됩니다, 부장님.”

“벌써 그렇게 됐어?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면 시간 참 잘 가. 너무 일만 하지 말고 회사도 좀 둘러보고 그래. 동기들이랑 소통하면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얘기도 좀 듣고. 일 좀 쉬엄쉬엄하고 그래.”

“…….”

“요즘 기획조정실에서 내려오는 보고서 검토 건들 살펴보느라 업무가 거꾸로 흘러가고 있어. 지금 우리가 때 지난 2분기 마케팅 전략 보고 장표를 다시 만들어야 할 분위기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해 앞으로 몇 권의 파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지난 분기에 선발표된 마케팅 전략 보고 장표로 보였다. 서해가 입사하기 전의 내용이기도 하고, 데이터를 먼저 살펴봤던 서해는 실제로 그 내용이 어떻게 쓰였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서해는 자신의 앞에 떨어진 파일의 타이틀만 계속 쳐다보았다.

“서 대리 입장 곤란한 것 이해해. 고작 들어온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런 새파란 직원 데리고 이야기하는 우리 기분도 좀 이해해 줘. 오죽 답답하면 서 대리를 이렇게 불렀겠나. 대표님이 시키면 해야 할 것 같고 그런 거 이해하는데 정도껏 해야지 말이지.”

본론이 튀어나왔다. 박 부장이 테이블 위의 파일을 집어 올렸다가 책상을 툭툭 내려쳤다. 회의실 내에 불편한 기운이 감돌았다. 제법 조곤조곤 얘기하던 박 부장의 목소리가 점차 날이 서기 시작했다.

박 부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서해에게 꽂혔다. 몸을 굽힌 어정쩡한 자세로 테이블만 바라보았다.

“2분기 마케팅 전략 보고 장표 만든 3팀이 회사에서 책상 다 빼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작정이야? 서 대리, 눈치껏 대표님한테 잘 좀 말해 줘. 우리 요즘 전무님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야.”

책상을 다 뺀다고 표현한 게 마음에 걸렸다. 지금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누군가 타격을 받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해는 순간 지난 검토 건들에 너무 모나게 표현했던 부분이 있지는 않았는지를 더듬어 보았다.

서해는 자신이 누군가를 심판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회사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나쁜 것을 바로잡는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고개 숙이고 있던 서해의 머리 위로 이런저런 불만이 계속 쏟아져 내렸다. 큰소리치며 얘기하는 그들의 가시 돋친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마케팅팀만 표적이 되어 조사를 받는 것 같아서 불편해. 우린 떳떳하지 못한 일은 한 적이 없어. 차라리 그룹사의 감사를 받을 테니까, 그렇게 하시라고 해.”

서해는 일전에 임원진 회의에서 마주쳤던 마케팅 사업부의 조 전무가 생각났다. 그가 사내에서 별도의 라인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과 한태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던 것도 그제야 기억났다.

한태경은 서해에게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던 것 같기도 했다. 결국 그들의 뜻에 따라주지 않는 한태경을 옭아매려는 주도권 싸움이었다.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야. 오해하지 말게. 대표님이나, 서 대리나 모두 학교 출신이다 보니 조직 사회에 대해서는 조금 둔감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보고서에 그런 게 보여. 관점이나, 사고방식 자체가 실무를 하는 사람과는 다른 게 확 느껴진단 말이야. 현실과 이상은 다른 게 많거든.”

순식간에 사내 정치의 한가운데로 소환된 듯한 느낌이 들면서 진짜 직장인이 된 기분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순간에는 말 한마디도 신중해야 했다. 조직 사회에서 직급과 경험을 떼어놓고, 가진 패를 모두 드러내놓고 싸우는 멍청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해는 억울하지만 인내하고 다음 기회가 올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서 대리, 지금 대표님 직속 부서인 기획조정실에서 일하느라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를 수도 있어. 그런데 거기서 평생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

“순환 보직 돌아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 짐작이라도 좀 해봐. 똑똑한 사람이니까 더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하겠네.”

귓가에 날카롭게 파고드는 목소리를 새겨듣다가 문득 이런 일을 매번 혼자 감당해 왔을 한태경이 생각났다. 그가 글로벌유니티를 위해 고민하는 새로운 비전과 그에 상응하는 책임감, 무게감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서해는 갑자기 찾아온 달의 뒷면을 마주했다. 넋이 빠진 채로 박 부장의 외침을 듣다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한태경과 지내는 동안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업무에 이런 것도 포함된다면 이 정도쯤이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평생 겪어오면서 가장 익숙해진 감정은 억울함을 눌러 삭이는 것과 지금 상황이 지나가길 인내하는 것 그리고 적당히 상대방의 감정에 맞장구치며 그들의 기분을 맞추는 것 따위였다.

자신의 처참한 경험들로 한태경을 도울 수 있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귓가에 계속 내리꽂히는 험한 말 뒤로 답답하게 가슴을 눌러오던 것들이 오히려 걷어지는 것을 느꼈다. 서해는 그가 지금 검토하고 있는 건들을 완벽하게 잡아낼 때까지는 머리를 숙이기로 했다.

“알아들었지? 서대리?”

“아이고, 박 부장님도 참. 이렇게까지 하는데 서 대리도 알아들었을 겁니다.”

“답답하네. 서 대리, 진짜 부탁하고 가요.”

끊어지지 않을 것같이 이어지던 둘의 목소리가 점점 톤 다운됐다. 이 팀장은 서해의 어깨를 툭툭 몇 차례 내리쳤다.

박 부장은 서해를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끝내 대답을 들어내려 하다 이 팀장에게 이끌려 회의실에서 사라졌다.

“부장님, 오늘 점심 제가 내겠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밥이 넘어가겠어? 속이 터지는데.”

“이럴 때일수록 잘 드셔야죠.”

살짝 열린 문틈으로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카페테리아 테이블 위에 이마를 내려놓았다. 동그란 이마가 테이블 위에 콩콩 소리를 내며 몇 차례 닿았다가 떨어졌다.

하얀 이마에는 빨간 자국이 남았다. 쏟아지는 잔소리를 듣고 있을 때는 몰랐으나, 생각보다 꽉 쥐고 있던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패어있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삭히느라 이런저런 것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38층, 대표의 직속 부서라고 하지만 일개 대리. 회사 생활에 아주 약간의 도움이 되는 대학원 생활.

그들이 말하고 사라진 서해의 태그에 거짓은 없었다. 대표 직속 부서에서 계속 있을 수 있을 것 같냐고 하던 부장의 말이 서해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멍하니 책상만 바라보고 있던 서해가 화들짝 놀라 휴대 전화 시계를 켰다. 오전 11시 45분이 찍혀있었다.

“아… 안 돼.”

서해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38층으로 올라갔다. 오전 시간을 알차게 쓰지 못하고 오후로 업무가 넘어가게 생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서해의 손끝이 초조하게 비벼졌다.

문이 열리자 38층 응접실을 걸어 나오는 한태경의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오래 붙잡혀 있다가 오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은 업무 지원 요청받지 말고 하던 일부터 끝내주세요. 메신저는 회의 중으로 돌려놓고.”

“죄송합니다.”

한태경은 어쩐지 굳어진 것 같은 서해의 표정을 주시했다. 서둘러 자리에 앉는 서해를 딱히 터치하지는 않았다. 붙잡고 물어보기에는 오늘 이어진 일정만 셀 수 없이 가득했다.

서해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에 시동을 걸었다. 장문의 사과문이 메신저에 도착해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구구절절하게 적혀있는 나머지 서해의 입에서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은 평범한 신입 사원이 감당하기엔 좀 벅찬 일로 보이긴 했다.

[김이곤: 서 대리님, 기분 나쁘셨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도저히 자리를 피할 방법이 보이지 않아서 무례하게 메신저로 속여서 35층으로 불러낸 것 사과드립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언짢으시겠지만 다시 한번 죄송하단 말씀 드립니다. 죄송해요….]

[서해: 이곤 씨도 곤란한 상황이었을 거라는 것은 저도 충분히 이해 갑니다. 괜찮으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김이곤: 제가 다음에 점심 살게요. 정말 죄송해요.]

[서해: 맛있는 거로 사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서해는 가볍게 머리를 털어내고 다시 하던 일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전보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했다. 검토한 보고서에 구멍이라도 생겨 트집이라도 잡혔다간. 실수를 상상해 본 서해의 눈이 바짝 달아올랐다.

* * *

한태경이 대표실에서 나와 서해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앉아있는 서해가 보였다.

“눈에서 아주 불이라도 나오겠네.”

“거의 다 했어요. 메일 보내 드릴게요.”

“생각보다 빠르네요. 지금 일곱 시 조금 넘었는데.”

서해는 서둘러 문서를 저장하고 한태경의 아웃룩 계정으로 문서를 첨부해 전송했다.

같은 자세로 한참 동안 꼼짝하지 않고 일하느라 어깨가 잔뜩 뭉쳐있었다. 어깨를 붕붕 돌렸다가 앞을 바라보았다. 집에 갈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서있는 한태경이 보였다.

“그럼 메일 보내고 퇴근합시다. 나머지는 내가 살펴볼 테니까. 내일부터는 요약 보고서 작성할 겁니다. 나랑 같이 보고서 프레임 구성하고, 각자 파트 맡아서 내용 채워서 다음 주 수요일까지 완성하는 거로 합시다. 일정 어때요?”

“네, 문제없어요.”

한태경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굳은 근육을 푸는 서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팔을 흔드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인상이 잔뜩 찌푸려진 것이 보였다.

어깨 한쪽으로 고개를 젖히고 주먹으로 두드리던 팔목을 잡아 내렸다. 엄지손가락과 손바닥을 이용해 어깨를 꾹꾹 눌러주자 기분 좋게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아….”

“오늘 점심도 자리에서 먹는 것 같던데, 많이 바빴습니까?”

“마케팅팀과의 대화가 길어져서 시간 맞추려고 그랬어요. 점심 뭐 드셨어요?”

메일 전송이 완료된 것이 보였다. 서해는 생각보다 시원한 한태경의 손끝을 느끼다가 노트북을 종료했다. 아예 고개를 젖히고 대답 없는 그를 올려보았다.

“서해 씨가 일만 하는데 나만 먹으러 가면 회사에 내 소문이 어떻게 나겠습니까.”

“…설마 점심 안 드셨어요? 마… 말씀하셨으면.”

“말했으면. 바쁜데 왔다 갔다 하면서 먹을 거라도 사 오게?”

서해는 눈을 크게 뜨고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바빠서 정신없긴 했지만 점심 식사에 대해서 먼저 물어봤어야 했던 것일까.

“식사 빠트리지 말아요.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고치세요.”

“네. 다, 음엔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잠시 버벅대던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한태경은 손을 내밀어 서해를 쑥 끌어 올렸다. 어깨를 감싸 안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38층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직전에 비친 둘의 모습이 보였다. 한태경은 블랙 재킷을 팔에 걸치고 팔꿈치 아래까지 접어 올린 흰색 셔츠와 타이를 매고 있었고, 서해는 그레이 재킷을 입고 브리프케이스를 손에 들고 있었다.

서해는 한동안 거울에 비친 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삼스럽게도 같이 서있는 둘의 모습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함께하는 것이 의식된다기보다 점점 편안해지는 것이 신기했다.

여러 일이 유난히 많았던 날이었다. 드디어 퇴근이었고 생각보다 빨리 집으로 갈 수 있어서 좋았다. 서해에게 남아있는 검토 건들은 마이너한 정리만 남아있는 상태라 그렇게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다음 프로세스부터는 한태경이 메인이 되어갈 예정이었다. 업무 분담만 잘 진행된다면 이때까지처럼 힘들지는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한태경이 불쑥 말했다.

“밖에서 간단하게 먹고 갈래요? 지금 집에 가서 요리하긴 둘 다 너무 피곤할 것 같고.”

서해는 한태경의 제안을 듣자마자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오전에 받은 스트레스를 조용히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서해는 눈을 반짝이며 운전 중인 한태경을 쳐다봤다.

“…대표님, 술 한 잔도 가능해요?”

“당연하지. 집이랑 가까운 곳에 괜찮은 음식점이 있는데 그쪽으로 갑시다.”

“감사합니다.”

* * *

외부가 조명으로 장식된 자그마한 주점이었다. 나무와 짙은 타일로 꾸며진 내부가 적당히 분위기 있게 어둑했다.

직원이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가자 둘만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나타났다. 서해와 한태경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겸할 수 있는 안주 몇 가지와 따뜻하게 데운 청주를 주문했다.

한 모금 들이켜자 몸의 피로를 싹 씻어주는 것 같은 맛이 느껴졌다. 눈가를 살짝 찌푸린 서해는 맛을 음미했다.

“지난번에 망친 서 대리 환영식 다시 하는 기분이네요. 이제 입사한 지 조금 지나니까 술 생각이 나고 그럽니까.”

“그, 그런 건 아니고요.”

서해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말문이 막혔다. 한태경은 흔들림 없이 서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해와 눈이 마주친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손가락 끝이 맞닿았다. 서해의 손을 잡은 한태경이 손등과 손바닥을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틈만 나면 서해의 손을 잡았다.

가죽 수갑을 끼우고 아파트 단지와 공원도 걸어 다닌 사이였다. 어느새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서해는 자신을 손바닥 위에 놓고 바라보는 듯한 한태경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고자 말을 돌렸다.

“대표님도 한잔하실래요?”

“난 서 대리 취하면 집에 데려가야지. 미안하지만 오늘은 혼자 마셔요.”

“아… 네.”

서해는 물끄러미 맞닿은 손을 바라보았다. 언제 익숙해져 버렸는지 어색함은커녕 따뜻하고 기분 좋은 느낌까지 들기 시작했다.

“거의 한 달 동안 재미없는 일 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고급 인력 데려와 놓고 단순 노동만 시켜서 미안합니다.”

“그런 일 아니었는데요. 재미있었어요.”

“사회생활이 늘었네. 조금만 기다리면 서 대리 능력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부서가 생길 예정입니다. 현재 최종 검토 단계에 있는데, 조사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부처를 신설할 예정입니다.”

“조사 연구요?”

“연구소에서는 신규 사업이나 신제품 출시 전에 데이터 분석을 진행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맡게 될 겁니다.”

“진짜요?”

“지금 마케팅에서 겸하고 있는 일부 업무를 분리해 낼 생각입니다. 몇 개 부서로 구성될 예정인데 평가 부서와 안전성 분석 부서, 연구 개발 부서 등을 메인으로 할 거예요. 서 대리도 연구소 소속으로 배치될 겁니다. 지금 서 대리랑 내가 하는 업무는 거의 마무리 단계라.”

앞으로의 업무를 상상해 본 서해의 눈이 동그래졌다. 38층으로 더 이상 출근할 수 없게 되면 한태경과는 회사에서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것일까. 때를 놓치면 다시 질문하기 어려워질 것 같았다.

“그럼 대표님은요?”

“연구소는 내 직속 부처로 들어오게 될 겁니다. 초반에는 한꺼번에 대규모 채용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내가 업무를 같이 볼 예정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전문 인력이 배치될 거고.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회사에서 자주 보게 되는 건 어려울 겁니다. 잊었는지 모르겠는데, 명색이 내가 한국 지부 대표라서.”

서해는 따뜻한 청주를 들이켜고 눈앞에 보이는 동그란 어묵 한 조각을 입에 집어넣었다. 한쪽 볼이 빵빵하게 차오르고, 입안 가득 우물거리는 게 보였다. 한태경의 길고 곧은 눈가와 입가에 웃음이 담겼다.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요. 장담하건대 연구소에서의 일이 지금 하는 일보다 더 재미있을 겁니다.”

“…네.”

표정이 금방 읽힌 서해는 입을 꾹 다무는 대신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왼손으로 잡고 있는 한태경의 손이 오른손이라는 것을 알고 서둘러 손을 놓으려 손가락을 펼쳤다. 그는 오히려 손을 더 꽉 잡아왔다. 분명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고 다정한 눈매가 보였는데, 이곳의 조용한 공간이 2층의 작은방을 생각나게 했다. 왜일까. 서해의 눈가가 아래로 처졌다.

“대표님은 안 드세요? 점심도 안 드셨다면서요.”

“그럼 하나 집어 주든가요.”

노란 테이블 조명 아래로 반듯한 얼굴이 쑥하고 들어왔다.

가만히 지켜보던 서해는 아주 천천히 어묵 한 조각을 집어 들고 한태경의 입가로 가져갔다. 시원하게 빠진 긴 입가가 벌어지더니 젓가락 끝을 물었다가 빠져나갔다. 혀끝이 빠져나와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서해는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한참을 바라보았다. 마치 슬로 모션처럼 느껴졌다.

“맛있네요.”

주어가 없는 서술어가 묘하게 느껴졌다.

분명 맛을 표현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젓가락을 까딱거리다가 남은 청주를 들이켰다. 눈앞에 어묵꼬치가 담긴 냄비가 보글거리면서 익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해는 집게로 채소와 고기를 들어 올려 그의 앞접시에 덜어주었다. 그는 식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애가 타는 마음이 생긴 것은 서해 쪽이었다.

서해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한태경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 줄 법도 한데 시선을 마주한 그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웃을 듯 말 듯, 말을 할 듯 말 듯한 오묘한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서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왜요.”

“…개인적인 질문 또 해도 되나요?”

“이렇게 선 그어놓고 물어보지 않아도 언제든지 대답해 줄 테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요.”

“원래 이렇게, 원래 모든 계약자한테 이렇게 잘….”

맺어지지 못한 말이 테이블 위에 흩어지고 공간을 채우는 잔잔한 음악 소리만 들려왔다. 요령 없이 뱉어지려는 말을 꾹꾹 주워 담으려 노력했다.

가만히 맞닿아있던 손 등 위로 한태경의 엄지손가락이 부드럽게 비벼지기 시작했다.

“아니. 나 그렇게 헤픈 사람 아닌데.”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내가 벌써 여러 번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관심 있는 사람한테 잘해 주고 싶고 다정하게 해주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뽀뽀하고 싶고, 안고 싶….”

서해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내려두었다. 몸을 테이블 위로 잔뜩 기울여 겨우 닿은 손끝으로 한태경의 입을 막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혓바닥이 튀어나왔다. 손가락을 핥으며 떨어질 줄 모르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서해는 짧은 숨을 뱉어내며 테이블 뒤로 몸을 물렸다.

“악, 대표님!”

“그렇게 소리 높여 부르면 여기서 대표와 직원이 싸우는 줄 알겠네.”

“…그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한데요.”

바깥에서 이런저런 소음이 들려왔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너무 조용하지 않음에 감사했다.

서해는 테이블 아래로 가지런히 놓인 발끝을 세워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켜보려고.

“생각이 많은 게 서 대리가 하는 업무에는 도움이 되는데, 우리 사이에는 썩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네요. 뭐가 그렇게 고민입니까.”

“…이것저것… 다요.”

서해는 얽히고설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속마음을 뱉어내는 대신, 그의 앞접시에 놓인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려 한태경의 입속으로 넣어주었다. 별말 없이 입을 벌리고 받아먹는 한태경을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가만히 잘 먹는 모습을 쳐다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랑 계약한 이후부터 서해 씨의 하루하루는 어땠습니까.”

“…그건.”

“내가 약속했던 안전함을 충분히 느끼고 있습니까?”

맞닿은 손이 끌려가더니 한태경의 오른쪽 뺨과 귓가 언저리에 올려졌다. 손바닥 가득 온기가 전해져 시선을 들어 쳐다보았다. 서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감사해요, 대표님.”

“감사할 사람은 이쪽인 것 같습니다. 조용했던 내 공간에 서해 씨가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계속 잘해 주고 싶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어요.”

서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깊은 절망과 어둠이 가득한 나락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갑자기 찾아온 한태경은 서해를 그 밖으로 꺼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짧게 흘러온 서해의 인생에는 늘 자신을 이용했던 사람들, 배신했던 사람들, 학대했던 사람들만이 있었다. 늘 속마음을 읽기 위해 애써야 했고, 앞서서 수를 파악하기 위해 고민해야 했고, 싫은 것들을 인내하며 살아와야 했던 것과 정반대의 상황 앞에서. 서해는 지금의 순간이 전에 없이 따뜻하고 소중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애써 눈을 가리고 마음을 틀어막고 있던 벽이 무너지자 감정이 엉망으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아 두려웠다.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이 익숙한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해 보려고 한 순간, 마주한 벽 앞에서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일상, 연애 방식, 회사 그 무엇 하나 자신과 비슷한 것 없는 사람과 그려볼 수 있는 미래는 없었다. 그것조차 한낱 계약서의 의존한 관계였다.

서해는 이 끝에서 나가떨어질 자신을 생각해 보려다가 포기했다. 시작도, 끝도 움켜쥐고 있는 것은 한태경이었고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하찮은 계약서 몇 장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내리는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지금 순간을 받아들였다.

“대표님, 저도….”

끝을 맺지 못한 서해의 대답이 작은 공간을 울렸다. 깔끔하게 맺어지지 못한 말이 허공에 흩어지고 손목이 꽉 잡혔다.

당황스럽게도 그의 손길이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는 자신을 꾹 눌러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해는 애써 손을 떼어내지 않고 잔에 남은 술을 들이켰다.

* * *

보통의 날이면 문이 열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여야 할 서해의 방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셔츠까지 입고 타이를 매며 문을 바라보던 한태경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노크했다.

“서해 씨.”

팔목을 돌려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한태경이 노크를 하며 서해를 재차 불렀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문을 열고 서해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침대에서 포근한 이불에 싸인 채 만세를 하고 잠에 빠져있는 서해의 모습이 보였다.

간밤에 있었던 무리한 음주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잠에 빠진 서해를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헝클어져 있었는데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샤워는 하고 잠들었는지 이리저리 뻗쳐있는 머리카락이 보여 웃음 지었다.

“출근하려면 지금 일어나야 됩니다.”

“응….”

“정신 차려요.”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서해는 옆머리로 다가온 서늘한 기운을 쫓아 이마를 비볐다. 갑자기 목덜미가 뻐근하면서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늘한 기운을 따라가다 못해 어딘가에 머리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으으, 머리 아파.”

“그러게 어제 한 잔만 했어야지. 본인이 몇 잔이나 마셨는지 기억납니까.”

“오늘 무슨 요일인가요.”

“무슨 소리야. 목요일입니다, 서 대리.”

“…네?”

머리 위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목소리인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하얀 침대 시트와 반대되는 블랙 슈트를 입고 걸터앉은 한태경의 다리가 보였다.

서해는 서둘러 이마를 떼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건 기억납니까. 20분 안에 준비해야겠는데.”

“죄송합니다, 대표님. 금방 준비할게요.”

어느덧 익숙해진 손길로 초커를 풀어내려 했는데, 목에 걸리는 게 없었다. 서해는 당황해서 몇 차례 목을 쓸어내렸다. 아무 말도 없는 그가 더 무서웠다.

서해는 후다닥 뛰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등 뒤로 한태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탁 위에 숙취 해소제랑 따뜻한 꿀물 올려둘 테니까 차 타기 전에 마셔요.”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 바쁘게 치약을 짜고 서둘러 머리를 감았다. 머리가 웅웅거리며 울렸다. 씻는 동안 어제의 기억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청주를 한 잔 마시고, 두 잔째 시키고, 그리고 뭔가를 더 시켰는데. 그때부터 기억이 사라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고민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정말 순식간에 샤워를 마친 서해는 빠른 속도로 머리를 말리고 옷을 챙겨 입고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재킷과 브리프케이스를 대충 들고 1층에 내려오자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서 자신을 기다리는 한태경이 보였다.

서해는 빠른 발걸음이었지만 얌전히 다가가 식탁에 놓여있는 숙취 해소제와 꿀물을 들이켰다. 빈속에 뭔가 들어오자 속이 더 울렁거렸다. 한태경의 서늘한 분위기 때문에 내색조차 못 하고 그대로 원샷하고 씩씩하게 현관으로 나섰다.

작은 가구 위에 덩그러니 놓인 초커가 눈에 보였다. 큰일 났다 싶었지만 눈을 깜박이며 애써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늘 편안했던 출근길 승차감이 유난히 나빴다. 파도가 치는 것 같은 속을 누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평일에 술은 금지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게, 어제는 여러 가지로 술 생각이 나던 날이었어요.”

“일이 한가하면 오전 반차라도 허락해 주겠는데 지금 상황이 급박해서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술이 금방 깨는 편이라 곧 괜찮아져요. 출근해서는 문제없을 거예요.”

옆에 앉은 한태경의 눈치를 보다가 괜히 부끄러워진 서해는 끝에 핑계를 붙였다. 조용할 것 같던 차 안에 한태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장황한 고백을 쏟아놓고 쓰러지는 건 좋은데, 서해 씨 잡아먹지도 못하는 평일에는 사양하겠습니다. 엉망으로 술 취한 사람이랑 섹스하는 취미도 없고.”

“고백…요?”

“기억 안 납니까. 본인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다 안 나는 건 아닌데…. 으으.”

서해는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니까 그 세 번째 추가 주문 이후부터의 기억이 모조리 끊어져 있었다. 그다음엔 비틀거리는 자신의 허리를 잡고 차에 태우는 장면,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장면 같은 것들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자신이 뭐라도 실수한 건 아닐까.

서해는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어진 경우는 처음이라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상대방이 술 한 모금 하지 않은 경우엔 더욱더.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을까 기억을 더듬는 동안 어느새 회사 지하주차장이었다. 안전띠를 풀고 내리려는 순간 서해의 왼쪽 팔이 덥석 잡혔다. 고개를 돌려보자 한태경이 웃고 있었다.

“이거 봐. 기억 못 하네요. 어제 우리가 한 약속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쪽으로 가까이 와보세요.”

서해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한태경이 앉아있던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갑자기 입술 위에 짧은 키스가 내려왔다.

“대, 대표님.”

“매일 아침에 하기로 약속했는데, 설마 잊은 겁니까.”

당황한 서해가 주위를 돌아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안 뒤에서야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아니요. 기억나요. 기억납니다.”

서해는 기억을 더듬느라 미간에 약간의 주름이 생겨났다. 그 표정을 유심히 보던 한태경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아닌 것 같은데.”

서늘한 손가락이 서해의 목덜미를 감싸 쥐고 다시 입을 맞추려고 하자 서해는 허둥지둥 한태경의 손을 떼어내며 밀어냈다.

“대표님, 이런 건 제발 집에서.”

부끄러운 듯 웃으며 한태경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봐도 시원하고 기분 좋은 미소가 보였다.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으려던 서해는 지금 있는 곳이 회사인 것을 알고 심장이 쿵 떨어졌다. 분명 주차장 어딘가에 달려 녹화되고 있을 CCTV를 떠올린 서해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집에서는 괜찮겠습니까?”

“…네.”

서해는 한태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벌써 한참 앞을 내다보는 것처럼 서해의 목덜미에 꽂혀 있었다. 애써 고개를 돌리고 차 밖으로 두 발을 내려섰다. 다시, 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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