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곁
한태경이 싱가포르로 출장을 간 첫날이었다.
빈집에 들어서던 서해는 현관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어차피 집에는 한태경이 없었고 초커를 목에 매어두지 않아도 그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늘 하고 있으라던 말을 모른 척하기가 힘들었다.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초커와 한참 동안 눈싸움하다가 결국 익숙한 손길로 목에 둘렀다. 평소 같았으면 초커에 체인을 연결하고 짧게 감아쥔 한태경의 손에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갔을 텐데. 스스로 걸어가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다. 서해는 손끝으로 초커의 가장자리를 쓰다듬으면서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둘째 날인 목요일에도, 셋째 날인 금요일에도 그가 시킨 대로 착실히 초커를 사용했다. 서해는 날짜가 흘러갈수록 텅 비어있는 집이 썰렁하다고 생각했지만, 초커로 목을 감싸는 것으로 허전함을 대신했다.
혼자 있는 자신의 옆을 지키는 것 같은 엉뚱한 기분은 수치심 저 아래에 묻혀있던 감정의 혼란을 느끼게 했다. 그럴 때마다 서해의 검은 눈동자에 난감한 기색이 비쳤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방으로 올라가 슈트를 벗어두고 샤워를 마친 다음 1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냉장고에 준비된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둘이서 식사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끝나버린 식사에 어색하게 숟가락을 내려두었다.
그는 뒷정리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막상 혼자 있게 되니 그냥 두고 보기 힘들었다. 설거지와 뒷정리를 하려 움직였다. 몇 안 되는 접시와 그릇을 씻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용한 분위기를 이겨내지 못한 서해가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벽만큼이나 커다란 검은 판넬에 색과 소리, 움직임이 채워졌다.
채널을 하염없이 위로 돌리다가 소파에 스르륵 쓰러진 서해는 눈만 뜨고 꼼짝하지 않은 채 버튼을 눌렀다. 채널이 수백 개는 있었지만 뭐 하나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을 수가 없었다.
끝까지 갔던 채널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고 서해는 계속해서 버튼을 눌렀다. 혼자 있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는데. 고작 며칠 사이에 찾아온 고요한 정적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서해는 혹시라도 출장 간 한태경이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낼까 봐 휴대 전화를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는 일이 많이 바쁜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먼저 연락해 볼까 고민하느라 메신저를 켜고 텍스트를 입력했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는 아닌 것 같은데.”
[잘 도착하셨어요?]
“아, 이것도 이상해. 뭐 하냐고 물어보는 건 더 이상한데, 으.”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학교에서 업무 처리를 하기 위해서 연락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먼저 연락해 본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할 때는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하는지부터가 고민이었다.
“하아….”
결국 작성했던 메시지를 다 지우고 앱을 종료했다. 바쁜데 괜히 먼저 연락해서 귀찮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넓은 거실에 TV 소리가 웅웅거리면서 돌아가고 있었지만 서해는 소파에 누운 채로 높은 천장만 바라보았다.
다른 생각거리를 떠올리다가 회사 일을 끄집어냈다. 다행스럽게도 몇 가지의 업무가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신나게 이어지던 고민은 결국 한태경과 상의해야 하는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한 뒤 뚝 끊어졌다. 괜히 몸을 굴려 카우치 뒤쪽에 등을 바짝 붙였다.
하릴없이 TV만 돌려보다가 아무런 채널이나 선택해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았다.
서해는 가슴 앞에 떨어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려 목 언저리에 있는 초커를 쓰다듬었다. 잔잔한 소음이 들려오고 규칙적인 손놀림이 몇 차례 이어지자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서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이마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단잠에 빠져들려 할 때였다.
―뉴스 속보입니다. 경찰이 권율기 현 나이브레티 상무가 자사 재단으로 후원 중인 나이브레티 보육원에 대해 압수 수색에 들어갔습니다. 15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서울시에 있는 보육원 일곱 곳에 수사관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서해는 익숙한 이름, 익숙한 명칭이 들려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TV를 돌아보았다. TV 화면의 아래쪽에는 뉴스 헤드라인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스 화면에는 서해가 자라면서 몸서리치게 괴롭힘당했던 보육원 내부를 촬영한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볼륨을 키웠다.
―…경찰청은 권 씨를 세 가지 혐의에 주력하여 수사하고 있습니다. 직원과 원생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구사한 것에 대해서는 강요와 협박으로, 그리고 직원이 보육원생들에게 한 행위에 대해서는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를 검토 중입니다. 검찰에 송치되는 결과에 따라 나이브레티 그룹에 타격이….
뉴스를 듣고 있었지만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리모컨을 쥐고 있던 서해의 손이 떨렸다. 뉴스 내용에 집중하던 상체가 저도 모르게 점점 앞으로 숙여졌다.
―…권율기 상무는 현 나이브레티 권상태 회장의 첫째 아들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인권침해를 비롯한 성희롱을 일삼은 것에 대해 시민과 사회단체 회원들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서해는 눈을 깜박이며 뉴스가 흘러나오는 TV 화면을 주시했다. 잔인할 정도로 익숙한 보육원 건물이 보이고, 수사관들이 파란색 박스를 들고 나와 차에 싣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사법부가 재계와의 고리를 끊고 사법 정의를 실현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에 경종을 울린 이번 사건에 대해서 모두가 돌아봐야….
조금 전까지 본 것을 의심한 서해는 공중파 방송으로 채널을 돌렸다. 기존에 방영되던 프로그램들은 뉴스 속보에 밀려 중단된 지 오래였다. 채널을 바꿔 몇 군데를 더 둘러보았다. 뉴스가 방송되고 있는 채널들 모두가 같은 내용을 뱉어내고 있었다.
서해는 휴대 전화를 켜고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관련 기사들을 확인했다. 포털 메인에는 굵직한 연예 기사들이 터져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누구와의 갑작스러운 열애설, 누구와의 갑작스러운 이혼설 등이 가득 차 있었는데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뉴스 속보가 쏟아졌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자신이 직접 확인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에 놀랐지만 계속해서 찾아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기사 내용을 확인하고 댓글로 분노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가장 이슈화된 기사를 확인하고 댓글을 살펴보느라 페이지를 넘기자 ‘삭제된 페이지입니다’라는 안내 페이지가 노출되었다.
새로 고침을 하니 굵직하게 이슈가 된 기사들이 모조리 내려가고 신생의 작은 회사들이 작성한 기사들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나이브레티에서 언론 플레이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서해는 휴대 전화를 내려두고 흘러나오는 뉴스 속보에 다시 집중했다. 구속과 억압으로 똘똘 뭉친 어린 날의 자신의 모습이 화면에 오버랩됐다. 부모로부터 버려진 것을 슬퍼하기도 이전에 원장과 보육 교사들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 폭력과 학대에 적응해야만 했던 처참한 나날이었다.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던 시절. 잔인한 현실을 인내하고 견디는 법부터 배워야 했던 안타까운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평생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권율기에게서 벗어나다 못해 그가 처벌받을 것을 상상하자 속이 끓어오르고 몸이 떨렸다.
넓은 집의 카우치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서해는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쾌감을 느꼈다.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어 너른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때, 갑자기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렸다. 깜짝 놀란 서해가 휴대 전화를 꽉 잡았다. 메신저 도착 알림에 적혀있는 발신인은 ‘대표님’이었다. 뉴스를 보던 것이나 복잡한 머릿속도 잊고 다급히 메인 화면에 노출된 알림을 눌렀다. 며칠 만의 연락이 반가웠다.
[어딥니까. 23:50]
[집이에요. 대표님은 별일 없으세요? 23:51]
[네, 호텔 뷰가 엄청 좋은데 서해 씨랑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23:52]
서해는 한태경이 보내온 사진을 받아보았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사진과 저녁의 야경이 담긴 사진 두 장이었다. 꽤 높은 층에 머무르고 있는 듯 멀리 아래로 보이는 건물들이 장난감처럼 보였고 넓은 호수 건너편에 높은 빌딩들이 잔뜩 보였다.
[아직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별일 없습니까. 23:54]
서해는 지금 뉴스 속보로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는 나이브레티 그룹에 대해 이야기할까 하다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그대로 마음속에 넣어두었다.
[네, 걱정 말고 잘 다녀오세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주말엔 집에 있을게요. 23:55]
[알겠습니다. 냉장고에서 잘 찾아 먹고 있어요. 돌아가서 살 빠져 있는지부터 볼 테니까. 23:57]
서해는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뭐라고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OK’라는 글자를 들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러다 잘못 보낸 것 같아 허둥지둥 메시지를 삭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밥을 잘 찾아 먹겠다는 메시지에 OK를 한 것인데 어쩐지 대화의 맥락이 이상해져 버린 것 같았다.
한태경이 메시지를 확인하고도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뭐든 다른 말을 대신해야 할 것 같았다.
서해는 카우치에 엎드린 채 거실 유리창 너머 어둑해진 한강의 전경을 찍어 보냈다. 사진을 보내고 나서야 유리창에 자신이 엎드려있는 모습이 담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서해는 괜히 찍어 보냈단 생각에 카우치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반듯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다음 메시지가 올 것 같아서 한참 기다렸는데 그는 답장이 없었다. 서해는 그가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몇 개의 메시지만 보내고 사라진 게 아쉬워 앱을 쉽게 종료하지 못하고 사진을 눌러보았다. 아침 호수 위에 떠있는 요트와 멀리 구름을 헤치고 떠오르는 밝은 햇살 같은 것들이 예쁘게 담겨있었다.
그리고 화면을 넘겨 야경이 담긴 사진을 살펴보려던 순간, 손가락을 멈추고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미 어두워져 캄캄한 호텔 룸 유리창에 내부의 밝은 조명이 반사되어 한태경의 모습이 뿌옇게 보이고 있었다. 그는 금방 샤워를 하고 나온 모양인지 허리에 큰 수건을 두른 채 휴대 전화를 들고 있었다. 흐릿하게 나온 사진이었지만 이상적인 어깨와 허리선을 드러내기는 충분했다.
서해는 저도 모르게 사진을 저장하고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집 안 곳곳에서 가벼운 스킨십을 한 사이였지만 어쩐지 부끄러워져 서둘러 앱을 종료하고 카우치 한쪽에 내려두었다.
끝없이 흘러나올 것 같았던 뉴스 속보는 앵커 브리핑의 엔딩 멘트를 마지막으로 종료되고 기존에 방송 중이던 프로그램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압수 수색과 관련한 내용, 그리고 한태경으로 복잡했다.
카우치에 기대고 무릎을 끌어모아 머리를 묻은 서해는 몇 번 앞뒤로 몸을 움직이다가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TV 소리가 꺼지면 너무 조용할 것 같았고 혼자 2층까지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 * *
혼자 있게 된 지 3일 차. 출근길도 회사 일도 퇴근길도 모두 평소와 같았다. 다만 온기가 없는 집에 혼자 들어서는 것이 썰렁하게 느껴졌다.
서해는 그대로 거실에서 잠들었다. 좀처럼 깊이 잠들지 못하고 두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휴대전화 시계를 봤다가 끄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네 시가 넘어서는 다시 잠들지 못한 채 카우치에서 해가 뜨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이 따끔거리고 머리가 몽롱했다.
잠시 카우치에서 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린 서해는 날이 밝아진 다음에 방 청소를 시작했다. 퇴근 후에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기 때문에 크게 손댈 곳은 없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을 가지런하게 세우고, 드레스 룸 옷장에 순서 없이 걸려있는 옷들을 종류대로 바로 잡아 정리했다.
평생 이렇게 많은 물건을 가져본 적은 처음이었다. 옷장을 정리하다가 아직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슈트가 있는 게 보였다. 다음 주에는 반드시 새 옷을 입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가장 앞에 옷을 걸어두었다. 늘 몇 개 안 되는 옷으로 돌려 입던 서해가 가장 어려워하는 일 중 하나였다. 한태경이 들었다면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잔소리했을 법한 말을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환불은 안 되겠지.”
드레스 룸 문을 닫고 1층으로 돌아왔다. 주방에 마련된 빌트인 머신으로 아메리카노를 내리고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멀리 거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태경의 집에서 서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창밖을 내다보는데 멀리 하늘에서 작은 비행기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괜스레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려 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부정할 수 없게도 한태경이 빨리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보며 서해는 컵을 톡톡 두드리면서 생각에 빠졌다.
삼거리 방에서 웅크린 채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던 가운데 가끔 하던 상상이 있었다. 집에서 누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거나, 혹은 자신이 돌아갈 곳을 바라보거나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 녹아든 모습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자신에게도 앞으로 그런 기회가 주어질지. 그저 막연한 상상이었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하게 된 기이한 계약은 뜻밖의 상황을 가져다주었다. 서해의 시선이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한태경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직 적응이 필요한 기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가 없어진 공간은 이상하리만큼 적막했다.
한가한 토요일이었지만 서해의 마음은 복잡했다. 현관 앞에서 그와 나누었던 키스가 수시로 생각나 서해를 혼란스럽게 했다.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등을 쓸어내리던 손길이 떠오를 때면 몰랐던 세상에 발을 디딘 것 같은 두려움에 마음이 떨렸다.
처음과 미묘하게 달라진 차이를 곱씹지 않으려 거실에 놓인 책을 꺼내 들었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숨을 곳이 필요했는데 그마저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집에 가는 중입니다. 17:49]
서해는 잘못 전달된 메시지가 아닌지 몇 차례나 확인했다. 메시지를 종료했다가 다시 켜도 그대로 남아있는 한태경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빨리 오는 그가 반가워 답장을 보냈다.
[언제 오셨어요. 17:49]
[방금. 내 침대 옆에 있는 박스 가져가세요. 17:50]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박스라는 단어를 인지하자마자 지난 주말이 떠올랐다. 별일 없냐고 물어주던 며칠 전과 달리 메시지에서 묻어나는 명령조의 말투가 신경 쓰였다.
혹시라도 소파에서 누웠던 흔적이 남을까 봐 자리에서 일어나 쿠션과 담요를 정리하고 자리를 손바닥으로 털어 정리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것 같았던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다시 생소하게 느껴졌다. 한태경의 방문 앞에서 몇 차례 주먹을 쥐어 잡다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킹사이즈의 침대 하나, 창가 앞의 멀바우 책상과 조명 그리고 한쪽으로 드레스 룸이 보였다. 침대 옆에 있는 베드 테이블 위에는 지난주 금요일에 서해가 받았던 박스와 똑같은 박스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 집어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한태경의 간결한 메시지는 오늘도 서해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박스를 가져가라고만 한 것인지, 열어 보라고 한 것인지 모호했다.
침대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박스를 열어보니 한쪽에는 한 손에 들어올 정도의 네모난 박스가 들어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목에 걸고 있는 초커와 같은 재질로 된 가죽 수갑이 들어있었다.
단호했던 메시지와는 달리 뚜껑에 적혀있는 메모는 여전했다. ‘내키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시원한 필체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그가 계약서에 합의한 대로 따라주는 것 같아 잠시 안심했다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빛이 한곳으로 고여 들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네모난 박스는 처음 보는 약이었다. 손에 쥐기 쉽게 동그란 실리콘 모양의 물방울 주머니가 들어있었고 캡을 제거하여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삽입하는 부분은 성인 남성의 새끼손가락 절반보다도 가늘어 보였다. 30mL 정도의 물방울 주머니는 크게 거부감 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보였으나 손으로 직접 만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서해는 복잡한 마음을 누르며 박스 뚜껑에 붙어있는 메모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 놓으려는 움직임이었다.
불안한 손으로 가죽 수갑 너머에 연결되어 있을 온기를 찾았다. 꽁꽁 숨겨져 있는 소중한 물건의 자취를 더듬는 듯한 손길이었다. 한 번 더 그 다정한 손길을 느껴보고 싶기도 하고, 눈앞의 현실에서 조금 더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박스 너머를 응시하던 시선이 벽에 붙어있던 시계로 향했다. 인천공항에서 집까지는 한 시간이면 도착이었다. 화장실과 방을 몇 차례 왔다 갔다 한 다음에야 옷을 벗고 겨우 화장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세면대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노즐을 엉덩이 사이에 가져다 댔다. 긴장으로 굳어진 몸으로는 얇은 노즐을 넣기도 쉽지 않았다. 힘을 줘 항문을 비집고 열었다. 세면대를 꽉 잡은 손에 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아…, 윽.”
손가락 하나 정도 길이의 노즐이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힘을 주어 밀어 넣자 겨우 밀리는 게 느껴졌다.
무서움에 숨을 몰아쉬던 서해는 물방물처럼 생긴 실리콘 주머니를 눌러 액체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차갑고 서늘한 느낌이 엉덩이 사이로 싸하게 퍼져나가는 게 느껴져 허리를 구부리고 숨을 들이켰다. 목 뒤편으로 소름이 돋아 솜털이 바짝 서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 하으….”
서해는 텅 빈 실리콘 주머니와 약이 담긴 케이스를 서둘러 쓰레기통에 버렸다.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어보려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쳤다. 지친 손으로 머리를 닦다가 쳐다본 휴대 전화 시계는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화장실에 걸려있던 샤워 가운을 입은 채 방을 나섰다. 평일에는 늘 꽉 닫혀있던 복도 가장 안쪽의 방문은 한 뼘 정도 열려있었다.
슬리퍼를 신는 것도 잊은 채 맨발로 조심스럽게 걸어서 작은 방문 앞에 섰다. 용기 내서 손을 뻗어 문을 밀자, 베드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서 태블릿을 확인하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한태경이 보였다.
넓고 적막하기까지 했던 집에서 다시 그의 얼굴을 마주 보자 반가움이 먼저 밀려왔다. 서해는 지금의 상황도 잊고 들뜬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대표님.”
“들어와요.”
“네, 잘 다녀오셨어요?”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려서 일찍 왔습니다. 잘 있었어요?”
“회사는 조용했고 집도 별일 없었어요.”
“다행이네요. 문 닫고 들어와 봐요. 그동안 못 봤던 서해 씨 좀 잔뜩 봐야겠으니까.”
서해가 방에 들어서서 문을 밀어서 닫자 도어 록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반듯하게 넘어가 있던 한태경의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와 이마를 덮고 있었고 짙은 네이비 색깔의 샤워 가운이 그의 몸을 덮고 있었다. 탄탄한 근육으로 덮인 가슴이 드러나 보였고 길고 늘씬하게 빠진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준비는 다 끝내고 왔습니까?”
“네.”
“세이프 워드도 기억하고 있습니까?”
“…어, 네.”
“침대에 올라가서 바른 자세로 누워요.”
세이프 워드를 언급하는 한태경의 목소리에 서해는 살짝 긴장한 채 방 가운데로 이동했다. 침대로 걸어가 모서리에 수갑을 놓은 다음 가운을 걸치고 있는 몸으로 침대 위에 올라갔다.
스스로 침대에 앉았을 때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머리를 침대 헤드 쪽으로 하고 누웠다. 천장을 보고 누운 귓가로 한태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 방향이 아니지. 다리는 내 쪽으로 보이게 하고 어깨너비만큼 벌려서 침대에 붙이고 누워요. 지금 침대에서 누워서 자려고 여기 들어온 거 아닙니다.”
서해는 두 손을 들어 올려 입술 언저리에 가져다 대고 초조하게 비볐다. 천천히 몸의 방향을 돌려 한태경이 앉아있는 쪽으로 다리를 뻗고 누웠다. 부끄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와 머리를 어지럽혔다.
“집에서 하고 있으라고 줬던 건 어디다 팔아먹었습니까.”
서해는 그제야 눈을 크게 뜨고 목을 더듬었다. 관장을 마친 뒤 샤워하느라 잠시 빼놓았던 초커를 화장실에 벗어두고 온 게 생각났다.
“씨, 씻고 오느라 깜박했어요. 진짜예요.”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다리 더 벌려요, 어깨너비만큼.”
사흘 동안 한태경이 없는 공간에서 꼬박꼬박하고 다니다가 막상 지금 착용하지 않고 온 게 억울했다. 입술을 꾹 깨문 서해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발끝을 용기 내 벌렸다.
가운이 벌어지면서 서늘한 바람이 허벅지와 아랫배를 타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좀 더.”
“읏….”
한태경은 한참 동안 베드 테이블 의자에 앉아 서해가 다리를 벌리고 누운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서해의 허벅지가 잘게 떨리는 게 눈에 보였고 작은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걸 감상하며 여유를 즐겼다.
망설일 것 같았던 서해가 단번에 침대로 올라가 얌전히 눕는 모습을 본 한태경은 말아 쥔 주먹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대로 무릎 세워요.”
“대, 대표님.”
멀리서 들리는 한태경의 목소리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무릎을 세우라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목덜미와 귓가를 타고 솜털이 바짝 세워지는 게 느껴졌다.
박스 너머로 보았던 다정함은 지금의 상황 너머에서 보일 듯 말 듯 했다. 서해는 발끝을 세우고 천천히 다리를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허벅지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와 감기는 것 같은 기분에 숨을 들이켰다.
“…흡.”
“착하네.”
처음으로 침대에 누웠던 날에도 들어본 말이었다. 서해는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평생 아무리 노력했어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기가 툭 튀어나와 그를 옭아맸다. 어쩐지 한꺼번에 보상이라도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토록 칭찬받고 싶어서 몸부림쳤지만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 어쩐지 갈증이 났다.
홀린 듯 무릎을 바짝 세우고 발목 뒤편이 허벅지까지 붙도록 다리를 끌어당겼다.
“손깍지 끼고 머리 위로 팔 쭉 뻗어요.”
서해는 침대에 딱 붙이고 있던 손바닥을 가슴 위로 들어올렸다. 손가락을 엇갈리게 맞춰 잡고 깍지를 꼈다. 그리고 엉성하게 들어 올린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허리에 매어져 있던 매듭이 느슨하게 풀어지고 가운이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잘했는데, 팔 바짝 펴고 가슴 열어요.”
서늘하게 울리는 한태경의 목소리만 들릴 뿐 여전히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서해는 허리를 말아 올리며 가슴을 활짝 열고 팔을 쭉 뻗어 올렸다. 아무것도 아닌 자세 같았지만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방금 씻고 나온 것이 무색하게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만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서해의 귓가로 한태경이 침대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한태경은 침대 가장자리에 무언가를 내려놓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의 손끝에 가운의 허리끈이 풀어졌다. 곧 떨어져 내릴 것처럼 덮여있는 가운에서 시선을 멀리 물렸다.
“양옆으로 무릎 벌려서 침대에 붙여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온몸이 활짝 열린 채 그대로 침대에 흩어져 있는 자신을 상상한 서해는 그가 말한 대로 움직이기 망설여졌다.
“말 안 듣습니까?”
“대, 대표님….”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못 견딘 서해가 천천히 무릎을 벌려 침대에 닿도록 내렸다. 허리와 배 안쪽으로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체온이 느껴졌다. 푹신한 매트리스와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어진 다리 바깥이 서늘했다. 언제까지 아무런 말이 없으려는지.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부끄러움에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다. 서해가 쌕쌕 내뱉는 숨결 위로 한태경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도와줄까요.”
침대 바깥에 서서 꼼짝없이 지켜만 볼 것 같던 반가운 얼굴이 보이자 불안함과 무서움이 조금 풀어졌다. 서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이마 위로 서늘하고 큰 손이 덮이더니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떨어졌다. 기다리던 다정한 손길은 찰나에 사라졌다.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쫓았다.
“대답.”
“네, 네.”
한태경은 침대 한쪽에 올려져있던 가죽 수갑을 집어 바짝 들어 올려져 바들거리던 서해의 손목을 채웠다. 가죽 수갑은 두꺼웠지만 부드러웠다. 구속되었다는 생각보다는 안정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서해는 자신의 정신이 벌써 이상해진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벌써 좋아하기 이른데.”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지는 손목 때문에 벌리고 있던 다리가 풀어지고 침대 한쪽으로 몸이 쏠렸다. 당황해서 손을 내리려고 하던 서해는 어딘가에 단단히 묶여 꼼짝도 하지 않는 손목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설프게 벌어진 양쪽 다리 안쪽으로 손바닥이 들어와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침대에 잘 붙이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세 흐트러지면 혼납니다.”
“…흐으.”
활짝 벌려진 서해의 다리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한태경은 상체를 일으켜 왼팔을 뻗고 손을 펼쳐 서해의 입을 막았다. 거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손과 입이 구속된 것을 보고 버둥거렸다.
“읍….”
“쉬, 가만히.”
“흐… 흡.”
서해의 얼굴의 절반은 한태경의 큰 손에 막혔고 팔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긴장한 가슴팍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한태경은 서해를 마주 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목부터 활짝 펼쳐진 가슴 가운데를 천천히 타고 내려왔다. 느리게 움직이는 손끝이 불에 닿은 것처럼 뜨거워서 서해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손에 막혀 억눌린 목소리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작은 방에 울려 펴졌다.
한태경은 배꼽 주위를 문지르며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서해가 다시 시선을 맞춰오자 그제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했어.”
다시 들려온 칭찬이 서해를 도망가지 못하게 옭아맸다. 한태경의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 사이를 건드렸다가 고환 가운데를 천천히 타고 올라와 고개를 들고 있던 성기 밑동을 천천히 건드렸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 느끼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림없었다. 서해는 눈을 깜빡이며 한태경을 마주 보려 노력했다. 끝내 떨리는 눈꺼풀이 아래로 축 처지고 한태경을 바라보던 시선이 흐릿해졌다.
“여기 벌써 이렇게 됐는데? 나 기다렸습니까.”
서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한태경의 나지막하고 거친 목소리가 연달아 귓가를 파고 들어왔다.
“거짓말하면 혼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갯짓하지 말라고도 했고.”
“흐, 흐읍. 읍….”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세워놓고 어딜 고개를 까닥거리고 흔들어.”
입이 막혀있어서 고개를 흔들었을 뿐이었는데. 억울함에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손바닥 안으로 입을 벙긋거리며 답답함을 어필하자 한태경의 엄지손가락이 알겠다는 듯 턱을 부드럽게 문질러왔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손가락 움직임에 바로 무장 해제된 서해가 눈을 축 늘어뜨리고 한태경을 올려다볼 때였다. 크고 단단한 손이 서해의 성기 밑동을 붙잡아 올렸다. 얇은 피부가 밀려 올라가고 귀두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할 때까지 뿌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불에 닿은 듯 뜨거웠다.
“하, 하윽, 읍.”
서해의 머리가 하얗게 비면서 어깨가 절로 둥글게 말렸다. 침대 속으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의 손이 금방이라도 위로 끌어 올릴 것같이 느껴졌다.
귀두 가운데로 벌어진 틈에서 프리컴이 찔끔찔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태경은 서해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엄지손톱으로 요도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허리 아래에 전기라도 통하는 느낌에 서해는 벌리고 있던 다리를 들어 올려 무릎을 세워 올렸다. 눈이 저절로 꾹 감겼다. 어둠이 찾아오자 화들짝 놀란 서해는 서둘러 눈을 떴다. 서늘한 얼굴의 한태경이 흐트러진 자세를 한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나고 싶지.”
손놀림이 점차 거세졌다. 서해는 절로 감기는 눈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성기를 감싸는 크고 따뜻한 손을 느끼자 속절없이 눈이 감겼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무서웠다. 입을 벌릴 수 없어서 코로 들이켜는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고 허공에 흩어지는 신음이 애처롭게 울렸다.
서해는 무릎으로 사정하듯 그의 허리께를 비볐다. 한태경은 서해의 성기를 세게 움켜쥐었다.
“아, 아윽, 으읍. 흐….”
“자세.”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해는 한참 숨을 몰아쉬다가 떨리는 다리를 어설프게 벌려 침대 위로 붙였다.
그러자 터트릴 것처럼 잡고 있던 한태경의 손길이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졌다. 나락 끝에서 강제로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것 같은 움직임에 뒷머리를 침대에 비비며 녹아내렸다.
“하, 으읍. 응….”
서해의 입을 억누르고 있던 한태경의 단단한 손바닥이 치워지더니 턱을 가볍게 잡아 왔다. 서해는 반쯤 감긴 눈으로 겨우 한태경을 쳐다보았다.
“왜. 할 말 있습니까.”
서해는 고개를 흔들다가 급하게 대답했다.
“아, 아니요. 아, 앗.”
“없어야지. 내가 하라는 거 하고, 하지 말라는 거 하지 말고. 이 방 안에서는 그거면 되는데.”
“흐… 흐아. 아….”
한태경이 작정한 듯 엄지손가락으로 요도를 문지르고 네 손가락으로 귀두를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자세를 잡고 있던 서해의 허리가 파드득 떨리고 머리 위에 고정되어 있던 수갑이 팽팽하게 당겨져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대, 대표님. 저, 저… 하으… 앗. 못 참겠….”
“안 됩니다.”
“하아…. 못, 못 해요. 더, 대, 대표님.”
“허락받고 가야지. 참아.”
“아니, 아, 아윽… 흑.”
서해의 몸이 뻣뻣하게 굳다가 가죽 수갑을 찬 팔이 어깨 쪽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귀두 끝에서 튀어나온 하얀 정액은 한태경이 입고 있던 네이비 색깔의 샤워 가운 위로 튀었다.
그는 손을 움직이는 속도를 천천히 줄이면서 서해가 사정감을 충분히 느끼게 도와주었다.
“응, 으응… 흐… 그만… 흡.”
서해의 두 눈이 깜박거리다가 끝내 꾹 감겼다.
사정이 끝나고 나자 한태경의 두꺼운 몸 옆으로 엉망으로 흩어져 벌어진 다리와 이마 위로 웅크려 든 팔이 보였다. 그리고 서해를 내려다보는 매서운 눈빛의 한태경도 보였다.
“누가 마음대로 싸도 된다 그랬습니까.”
“죄, 죄송해요. 대표님.”
“앞으로는 허락받고 가는 데 익숙해지세요.”
다른 사람 몸에 여기저기 튄 흔적을 보던 서해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닦아내려고 하다가 묶여있는 수갑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서해는 고개를 들어 손목을 쳐다보고 다시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표정을 한 한태경이 서해의 얼굴 앞으로 가깝게 다가왔다. 가늘어진 눈매가 서해를 뚫어져라 바라보자 절로 위축되었다. 그런데 한태경은 바로 표정을 풀더니 서해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어때, 못 견딜 만큼 무섭거나 아픈 데 있었어요?”
“…아니요.”
“따로 있는 동안 나만 서해 씨 생각한 건 아니죠?”
한태경은 계약한 뒤에도 거침없었다. 서해는 차마 대답할 수 없어 입술을 옴짝거렸는데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오늘은 진도 조금 더 나가도 됩니까.”
“…….”
“대답 없으면 긍정으로 알아듣습니다.”
한태경은 서해 위로 몸을 겹쳐 올렸다. 왼쪽 팔을 뻗어 서해의 어깨와 머리를 감싸고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헤집었다. 오른손으로 서해의 도톰한 입술을 좌우로 문지르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눈썹 사이가 살짝 찌푸려졌다.
서해는 한태경이 다시 키스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 그는 금세 몸을 물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금세 사라진 온기에 섭섭함을 느낀 것도 잠시,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순간이었지만 그에게 기대한 것이 생겼다는 것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진짜 온몸이 다 부드럽네. 다시 갑니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이 떨어지자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물끄러미 한태경을 바라보자 어색하게 벌어져 있던 다리 사이 틈으로 자리를 잡는 게 느껴졌다.
한태경은 가늘게 떨리는 서해의 허벅지를 잡고 그대로 허리 위로 접어 올렸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꽉 다물린 주름이 보였다. 한태경은 침대 옆에 열어둔 젤을 손가락 끝에 잔뜩 묻혔다. 서해가 당황할 틈도 없이 곧바로 듬뿍 덜어진 젤이 다시 여기저기 발라졌다.
“하으, 읏… 차가워요….”
“금방 녹을 거예요. 온도에 반응하는 젤이니까.”
한태경은 서해의 다리를 양옆에 가지런히 내려두고 몸을 겹쳐 올리듯 감싸 안았다. 품에 들어온 몸이 긴장으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손을 내려 아주 천천히 꽉 닫힌 항문 위를 쓰다듬었다. 굵은 손가락이 부드럽게 아래위로 문질러지자 서해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내려 도망가려 했다. 그는 서해의 엉덩이 사이를 거칠게 문지르며 명령했다.
“허리 내리지 말고 들어요.”
“흐읍….”
꼼지락거리던 서해가 뒤로 빼고 있던 허리를 앞으로 내밀자 단단한 손가락이 서해의 항문 주위를 본격적으로 힘주어 문지르는 게 느껴졌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한태경은 밀고 들어가려던 손가락을 잠시 물리고 구멍 위를 톡톡 두드렸다.
“구멍엔 힘 빼고.”
“읏!”
한태경은 세 번째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기 시작했다. 꽉 다물린 입구가 침입자를 밀어낼 것처럼 조여들었다. 그는 손가락을 조금씩 돌려가며 손가락 한 마디를 쑥 집어넣었다. 아주 천천히 주름 주위를 눌러서 넓히듯 눌렀다가 문질렀다가를 반복했다.
서해의 입이 벌어짐과는 반대로 놀란 내벽이 한껏 수축했다. 움츠러드는 내벽 위쪽을 부드럽게 문지르자 내벽이 순간적으로 잠시 벌어졌다. 한태경은 천천히 손가락 한 마디를 더 밀어 넣고 내벽 아래쪽을 꾹 눌러 비볐다. 손가락 주위에 내벽이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흐, 흐으, 윽!”
“몸에 이렇게 힘을 주니까 안 들어가지.”
“아, 읏. 아, 아파요.”
“힘 빼라니까.”
서해는 쑥 들어오는 손가락에 기겁하고 몸을 비틀었다. 부드럽고 다정한 움직임을 기대하던 몸이 뻣뻣해졌다.
한태경은 단호한 손길로 한쪽 허벅지를 내리눌렀다. 깜짝 놀란 서해가 몸을 긴장시키고 굳었는데 그가 개의치 않고 몸을 연 뒤 손가락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손가락 마디가 툭툭 걸렸다.
천천히 힘주어 밀어 넣는 손길에 서해의 엉덩이 사이가 저절로 움찔거렸다. 그는 손가락을 빠듯하게 조이며 꿈틀거리는 내벽을 꾹꾹 눌러 이리저리 밀어냈다.
“아, 흣! 하으으.”
“뭐가 이렇게 뜨거워.”
“으, 흐으….”
손가락이 안쪽으로 쑥 들어가더니 주름진 내벽 사이를 더듬기 시작했다. 놀란 내벽이 손가락을 꽉 옥죄어오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한태경은 서해가 적응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느긋하게 찔렀다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손의 움직임이 제한된 서해는 자유롭게 움직임이 허락된 다리를 들어 허우적거렸다. 한태경의 양쪽 허리에 서해의 무릎이 다급하게 붙어왔다.
그 모습을 본 한태경은 손가락을 조금 빼 들었다가 휘어진 모양으로 밀어 넣으며 내벽 위쪽을 더듬었다.
잔뜩 긴장했는지 좀처럼 느끼지 못하고 고통을 참아내는 서해의 표정을 내려다보다가 한태경은 얼굴을 바짝 붙여 코끝을 마주 대었다.
“흐, 흡… 대, 대표님. 대표님.”
“긴장하지 말고.”
“흡… 윽.”
한태경은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찾는 서해의 이마 위로 짧은 키스를 여러 번 남겼다. 서해는 넘어갈 듯 숨을 헐떡이며 눈앞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그는 다정하게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를 남겨 주었지만 내벽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리는 행동은 그만두지 않았다.
천천히 서해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선 그는 혓바닥을 밀어 넣었다. 갑자기 따뜻한 키스를 받은 서해는 턱을 들어 키스에 응했다. 입천장과 혀 아랫부분까지 핥아오는 움직임에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온몸에 가득했다. 한껏 헤집을 것 같던 손가락의 움직임도 키스하는 동안은 혓바닥 움직임을 따르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한태경은 제법 앞까지 나와 같이 키스에 응하는 서해의 부드러운 입술을 잔뜩 느꼈다. 한동안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절절한 키스를 하며 내벽에 박혀있는 손가락을 조금씩 돌려보다가 손끝에 툭 하고 걸리는 부분을 발견했다. 서해의 혓바닥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손가락에 걸린 지점을 집요하게 눌렀다.
서해는 아랫배와 허리 뒤쪽으로 연결된 신경이 잔뜩 곤두서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밀어 빠져나오려 했다. 몸을 눌러오는 힘이 점점 세졌다. 꼼짝없이 몰아치는 감각을 그대로 받아냈다.
허리와 골반을 지나 척추를 타고 오르던 찌릿한 감각은 등허리를 지나 성기까지 이어졌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눈가가 흐릿해져 오더니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
“아, 앗, 흐… 윽.”
한태경은 제법 풀려 조금씩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내벽 안으로 손가락을 가득 밀어 넣었다. 품 안에서 파드득 튀어 오르는 서해를 가슴으로 꾹 누르며 입구까지 손가락을 물렸다.
덜덜거리는 몸 안에서 뜨거운 내벽이 손가락을 가득 조였다가 풀어지는 게 느껴짐과 동시에 서해의 머리 위로 잠겨있던 수갑 체인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났다.
“아, 아흐….”
“입도 조그맣더니 여기도 좁아서는.”
정신을 바로 추스를 틈도 없이 손가락이 쑥 다시 들어왔다. 끊어지는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서해의 가슴이 짧게 오르내렸다.
그리고 목덜미를 핥아 올리며 뱉어지는 숨결이 서해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치고 빠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 손가락을 돌려 반대쪽 내벽을 자극했다.
고개를 저으며 정신없이 사정했지만 한태경은 혀를 내밀어 쇄골을 간지럽히며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천천히 꿰뚫은 손가락 전체로 어딘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부분을 짧게 끊어가며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문지르던 손놀림이 점차 빨라지고 거칠어졌다.
“대표님, 흐, 흑.”
“앞이 다시 바짝 달아올랐는데.”
“으, 흡. 그, 그만. 흑….”
“이제 시작인데.”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새하얀 절정감이 머릿속을 때렸다. 침대 위에서 허락된 것이라고는 침대 시트에 뒷머리를 비비는 것밖에는 없었다.
겨우 숨을 고르며 몇 차례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짓궂은 손끝이 내벽 어딘가를 털어대듯이 흔들어 어깨를 심하게 들썩였다.
고개를 들고 있던 성기는 사출하지 못한 채 쿠퍼액을 흘려댔다. 떨리는 몸을 꽉 붙들어주는 한태경의 단단한 몸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찾아 들어가 안겼다. 제대로 삼키지 못한 타액이 목에 걸리는 소리, 서둘러 기침하는 소리가 다급히 들려왔다.
“흐, 윽. 콜록, 콜록.”
한태경은 내벽에 들이친 손가락을 빼내지 않은 채 나머지 손으로 서해의 머리카락과 엉망이 된 입가를 정리해 주었다. 잔뜩 웅크려 올라붙은 어깨를 몇 차례 부드럽게 쓸어주자 조금씩 안정되는 게 보였다.
손을 뻗어 잔뜩 부풀어 휘어진 자신의 성기를 몇 차례 쓸어 올렸다. 무심한 손놀림이 오르내릴 때마다 크기가 달라졌다.
검붉은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굵다란 핏줄이 손바닥에 스칠 때마다 꿈틀거렸다. 큰 손에 가득 잡히고도 성기의 나머지 부분이 손 밖으로 한참 빠져나와 있었는데, 숨을 고르고 있던 서해는 미처 보지 못한 채였다.
“서해 씨, 듣고 있습니까?”
“으…읏, 대표님….”
“어깨는 어때요, 괜찮습니까.”
“아파, 아파요.”
“그렇게 무식하게 힘을 주고 버티니까 아픈 겁니다. 이리 와요.”
한태경은 손을 뻗어 가죽 수갑 사이를 구속하고 있던 체인을 풀어주었다. 천천히 어깨를 문질러주며 팔을 앞으로 내려주고 서해의 코끝과 한쪽 뺨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입술에서 멀어지자마자 서해가 아쉬운 듯 한태경을 쫓아왔다. 눈을 내리깔고 서해를 내려다보던 한태경이 다시 서해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가 입안을 헤집어놓았다. 단단하게 세워진 혓바닥이 붉은 입안을 드나들었다.
입가에 흘러내린 타액을 대충 닦아내고 다시 입술을 씹어먹었다. 맞붙은 입술 사이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으응…. 대표님….”
“그래. 나 여기 있으니까 그만 부르고 그대로 힘 빼고 있어요. 한 번에 넣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서해의 위에서 안정감 있게 덮여있던 가슴이 멀어지더니 무릎을 세운 다리가 양쪽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몸을 밀고 들어오는 한태경을 바라보는 서해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한태경은 베드 테이블에 있던 젤을 급하게 성기 위에 아무렇게나 짜 내렸다. 한쪽 팔로 서해의 어깨 옆에 있는 침대 옆을 짚고 나머지 한 손으로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잡은 채 서해의 몸에 바짝 붙었다.
살짝 풀어져 있던 주름 앞에 붙은 귀두가 구멍을 열고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 번에 넣을 거라던 말이 무색하게 잘 벌어지지 않은 주름 때문에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고 억지로 서해의 몸을 열어젖히며 들어섰다.
“흐, 읏.”
급하게 팔을 짚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서해는 가죽 수갑에 묶여 휘청이다가 다시 침대로 쓰러졌다. 손가락이 몸을 열고 들어오던 것과 다르게 빠듯하게 벌리고 들어오는 움직임에 놀라 허리를 비틀며 빠져나가려 했다.
“미치겠네. 힘 좀 빼보세요.”
“아, 흐으….”
서해를 바로 눕힌 한태경은 양쪽 어깨를 눌러 침대에 고정시켰다. 불규칙적으로 뱉어내던 숨과 달아오른 눈가를 한 서해가 한태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서해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서해의 어깨를 꽉 누른 채 내벽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서해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가쁜 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한태경은 눈을 덮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뒤로 넘겼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고 양쪽 허리를 가득 잡은 뒤 천천히 아래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서해는 앞으로 단단히 묶인 팔을 가슴께로 끌어모으고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한계까지 아슬아슬하게 벌어진 주름 사이로 굵은 기둥이 계속해서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오고 어딘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서웠다.
들숨만 겨우 들이켜고 있자, 서해의 허리를 잡고 있던 한태경의 엄지손가락이 톡 튀어나온 골반 주위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온 간지러운 감각이 허리 아래로 천천히 피어나왔다. 침대 위에서 마구잡이로 힘주어 굽히고 있던 발가락이 절로 활짝 펼쳐졌다.
“아, 흐윽, 흡.”
“구멍에 힘 빼라니까. 이러다 다칩니다.”
지금도 겨우 버티고 있는데 한태경의 서늘한 시선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요령 없이 흩어진 다리를 모으던 서해는 힘 빼라는 의미를 잘못 알아듣고 덜덜 떨리는 다리를 조금 더 벌리며 움찔거렸다.
다리 사이에서 단단히 버티고 선 한태경은 물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대로 끝없이 밀고 들어올 것 같은 무서운 느낌에 관자놀이와 눈가 주변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말 못 알아듣지. 여기, 힘 빼라고.”
“흐, 윽.”
한태경이 서해의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쑥 집어넣고 내벽에 갇혀있는 기둥 주위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손가락이 닿자 반대로 더 조여들며 헐떡이는 서해를 내려다보던 한태경은 미간에 인상을 가득 쓴 채로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경험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몸이었다. 내리는 명령에 겨우 따라오는 서해의 구멍과 내벽이 유달리 좁기도 했고, 굵기로 따지면 어디서 빠진 적 없는 한태경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크기가 아니었다.
서해의 허리를 쓰다듬다가 옆에서 떨리고 있는 다리를 양쪽 팔로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마음 같아선 밀어붙이고 마음대로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대였다. 무서운지 작게 경련하는 다리가 느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서해의 무릎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톡 튀어나온 양쪽 무릎에 번갈아가며 짧게 키스할 때마다 잔뜩 긴장한 구멍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게 느껴졌다.
잠시 패턴을 살피던 한태경은 무릎에 입술을 길게 붙이는 척하면서 그대로 허리를 쭉 밀어 올렸다. 아래에서 서해가 사정하는 목소리에 대꾸해 주면서도 움직임은 조금도 물려주지 않은 채였다.
“읏, 아앗. 대표님, 흡.”
“왜. 어떻게 해줄까.”
“조, 금만, 읏. 그만… 들.”
“…아직 반도 안 들어갔습니다. 너무 조이면 나도 힘듭니다.”
절반 가까이 들어선 다음부터는 오히려 더 수월하게 들어갔다. 한태경은 서해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힘주어 잡은 뒤 허리를 좌우로 비비면서 천천히, 계속해서 치고 들어왔다.
어느 정도 적응할 시간을 준 다음 나머지를 밀어 넣으려던 그는 손을 뻗어 상처가 난 곳이 없는지를 꼼꼼하게 살폈다. 빠듯하게 벌어져 겨우 물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남아있는 젤을 서해의 엉덩이 사이에 뿌린 다음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다시 삽입했다.
“흐으… 흡.”
“응, 지금처럼 먹으면 됩니다.”
시간을 들여 기어코 장이 꺾여져 더는 들어가지 않는 부분까지 다 밀어 넣은 한태경이 그제야 몸을 숙이고 서해의 눈가에 키스를 남겨주었다. 슬쩍 내려다본 성기는 아직 덜 들어간 상태였지만 그는 더 이상 무리하게 허리를 밀어 넣지는 않았다.
“쉬. 숨 크게 쉬고 내쉬어요.”
“흐… 흡. 아파.”
“금방 적응될 겁니다. 몸에 힘 빼는 거 기억하고 있어요.”
날카롭게 찌를 것 같은 통증이 지나가고, 불규칙적이고 엉망으로 가쁘게 내뱉어지던 서해의 숨소리가 조금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한태경은 다시 몸을 일으키며 자신에게 딱 붙어있는 서해의 무릎 뒤쪽을 침대 위로 눌러 내리며 천천히 허리를 물렸다. 긴장해서 배어 나온 식은땀에 맞닿은 부분이 미끈거렸다.
엉덩이 사이에 물려있던 귀두가 끝까지 빠져나갔다. 서해는 한태경에게 꽉 달라붙어 있던 내벽이 그가 허리를 뒤로 물리자 그대로 함께 빨려 나가는 것 같은 기분에 몸서리쳤다. 몸 안을 헤집을 것처럼 가득 채우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자 순간적으로 풀어진 내벽이 배 속을 간지럽혔다. 발끝이 저절로 오그라들고 가슴 위에서 수갑에 묶인 채 흩어져 있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날 선 감각에 적응하기도 전에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움직임에 풀어졌던 내벽이 다시 꽉 조여졌다. 긴장하다 못해 뭉쳐져 배 속을 두들겨 맞는 느낌이 들어 숨을 급히 들이켜고 멈췄다.
배 속에 길을 만드는 것처럼 강렬한 삽입이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삽입하던 한태경은 또다시 아주 느릿한 속도로 몸을 다시 물렸다. 그는 여유 있게 몇 차례나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안이 이렇게 뜨거우면 내가 참기가 힘든데. 움직입니다. 꽉 잡아요.”
한태경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서해의 몸을 열고 들어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굵게 둘린 귀두 부분이 빠져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하면서 서해가 느끼던 지점을 스쳐대기 시작했다.
“아, 잠깐만, 대표님… 흡.”
서해는 발을 밀어 올려 거리를 조금 띄우려 했다. 품에서 도망가려는 것으로 오해한 한태경은 서해의 발목을 양쪽 손에 잡고 높이 들어 올린 뒤 안쪽을 내리눌렀다. 마주 붙는 속도가 올라가자 아래에 깔려있던 몸이 위쪽으로 점점 더 밀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못 갑니다. 뭐가 이렇게 부드러워, 하아.”
“아, 아. 너무, 깊어요. 윽!”
“4일 만에 겨우 왔는데, 또 떨어져 있으라고는 하지 말아요.”
서해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말을 끝까지 뱉어내는 데 실패했다. 이내 허리 아래로 피어오르는 간지러운 느낌을 꾹 눌러 참으면서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내벽이 한차례 꿀렁이고 지나갔다. 숨을 쉬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태경은 활짝 벌려 들고 있던 서해의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두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서해에게 잠시간의 틈을 주고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간지럼을 많이 타더니 몸이 엄청 예민하네.”
한태경과 접합된 부분의 온도가 계속 올라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천천히 내벽을 헤집던 단단한 성기가 빠듯하게 밀고 들어오더니 다시 속도를 올려 내벽의 한 곳을 짓누르듯 치대며 자극하기 시작했다.
서해는 자유롭지 못한 손을 겨우 뻗었다. 자신의 다리 어딘가를 잡고 있던 한태경의 손 위를 덮었다. 한참 등을 쓸어내리는 듯한 격한 절정에 빠진 다음에야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벌름거리는 내벽에 힘을 주고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것을 깨달은 서해의 눈이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배 앞쪽이 축축하게 젖어 엉망이 된 것 같았는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참 비벼지던 내벽을 타고 성기가 쭉 뽑혀나가고 서늘한 공기가 들어차는 게 느껴졌다. 서해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눈을 꼭 감았다.
“으응, 읏. 흡… 흐읍.”
“좋아 죽겠다는 것 같네. 좀 세게 가고 싶은데, 서해 씨.”
서해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귀를 의심하고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한태경을 쳐다보았다.
한태경은 서해의 무릎 뒤쪽을 눌러 침대 옆으로 눌러 내렸다. 몇 번 확인해 보듯 서해의 몸을 반으로 접어 무릎을 꾹꾹 눌러보던 그가 꽤 만족스러워하며 허리를 뒤로 뺐다.
몸이 반으로 접힌 서해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마주 봤다. 그는 손에 콘돔 포장지를 들고 뜯어내고 있었다. 한태경은 손을 뻗어 서해의 수갑 채운 손목을 들어 올리고 자신의 목 뒤로 넘겨주었다.
서해가 바뀐 자세를 인지하기도 전에 손가락을 세워 엉덩이 사이를 노골적으로 문질러오는 움직임에 얼굴과 목이 화르르 타올랐다. 젤이 녹아 끈적거리는 소리, 그리고 뻐끔거리는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붉게 부어올랐지만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한태경이 성기에 콘돔을 말아 넣고 그 위로 젤을 넉넉하게 발랐다.
“잘 잡고 있어요. 함부로 움직이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또 품에서 벗어나지 말고.”
미처 대답하기도 상체를 올리고 무릎으로 침대 위에 서있는 한태경을 보는 순간 서해는 숨을 들이켜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찢어질 것 같았다.
“대표님, 저… 너무.”
“이때까지 아무 일 없이 서해 씨 구멍 잘 먹었으니까 찢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흐, 읏.”
“정 힘들면 주말 내내 내가 서해 씨 안고 다니든가.”
한태경은 서해의 몸 안에 천천히 성기를 삽입했다가 곧바로 다시 빼냈다. 몇 차례 테스트하듯 막혀있는 곳을 사정없이 누르는 강도에 서해는 한태경의 목에 둘린 손을 마주 쥐고 버텼다. 꼭 맞게 채워져 있던 가죽 수갑의 이음새가 맞부딪치는 금속 소리가 들려왔다.
서해는 사정없이 밀어 올리는 삽입과는 반대로 금세 온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감각에 벌벌 기었다. 내벽이 비워지고 채워지는 것을 반복할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고 허리 뒤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쑥- 하고 완전히 밖으로 빠져나간 성기가 연거푸 몇 차례 서해의 몸을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하게 삽입된 뒤에는 장이 꺾어져 들어간 부분을 열어젖히고 들어와 서해는 알아듣지 못할 신음을 겨우 짧게 내지르며 한태경의 어깨를 꽉 잡았다.
“읏! 흐읏. 흐… 응, 흡. 살살, 대표님, 조금, 만.”
“살살하다가, 밤새 나랑 좆질하고, 서해 씨 구멍이, 다 풀어지면.”
“너무, 깊어요. 흐, 흐윽.”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녹진하게 녹아내린 내벽이 끔벅거리며 몸을 열고 들어오는 한태경의 성기를 물었다 놨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고개가 한껏 뒤로 넘어가고 허리가 반사적으로 틀어졌다.
눌러오는 몸을 피할 수 없었던 서해는 숨이 넘어갈 것같이 찾아온 격한 절정감에 경련했다. 소리를 내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순간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윽, 흐아아… 으응. 흡.”
겨우 숨을 몰아쉬고 한태경의 어깨를 잡고 버티자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 위로 지잉- 하고 어지러움과 이명이 찾아왔다.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절정감이 사라지지 않고 다시 찾아와 서해를 괴롭혔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 때문에 빨갛게 짓무른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방금 있었던 삽입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센 강도로 서해의 내벽을 가르며 들어서던 한태경의 성기가 단단해지면서 귀두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껏 부풀어 오른 성기를 거칠게 문지르던 한태경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짧은 숨소리를 뱉어냈다.
사출의 시간이 끝난 다음까지도 여전히 끔벅거리는 내벽 안으로 세차게 고동치는 한태경의 성기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아쉬운 듯 몇 차례나 더 서해의 내벽을 느낀 다음에야 밖으로 몸을 물렸다.
콘돔을 빼내고 끝을 묶어 휴지에 내려놓자마자 아직 벌어져서 꿈틀거리는 서해의 붉어진 입구를 꼼꼼히 살폈다. 피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빠듯하게 벌어져 한동안 비벼진 곳에 열상이 생겨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한태경은 여전히 파르르 떨리는 서해의 엉덩이를 토닥거린 뒤 다리를 바로 펴주고 옆자리에 누웠다.
서해는 겨우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팔을 뻗어 안을 수가 없어 아쉬움에 앞이마를 가슴에 묻자 한태경이 팔을 뻗어 서해를 가득 안아왔다.
물어볼 것이 많았고 궁금한 것이 산더미 같았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더 했다간 정말 머리가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던 서해가 떨리는 손으로 겨우 다시 파고드는 한태경의 어깨를 밀어냈다.
“…대표님.”
“미안합니다. 서해 씨 몸이 너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허리 많이 아플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손부터 내밀어요, 풀어줄 테니까. 얘기했으면 풀어줬을 텐데 고집은.”
한동안 집에서 맡을 수 없었던 향수 냄새가 한태경이 집에 돌아왔다는 걸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서해는 몸에 남아있는 쾌락이나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그가 쓰다듬어준 손길과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의 손길 아래에 보살핌이라도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껴줘야 할 대상이 된 것처럼 느껴질 만큼 조심스러운 손길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서늘했던 이 집에서 묘하게 겉도는 것 같았던 자신의 모습이 따뜻한 그의 품 안에서는 그렇지 않은 듯 느껴졌다. 서해는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어김없이 어깨 위에 머리를 올려주고 등과 허리를 토닥여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 * *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서해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다리를 뻗다가 몇 차례 시큰한 감각을 느끼고 숨을 들이켰다.
그 작은방에서 나오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한태경은 복도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서해 옆에 붙어서 안절부절못했다.
“넘어지겠습니다. 손이라도 잡아요.”
“괜찮아요. 저 혼자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그렇게 매너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제가 부끄러워서….”
작은 관심이 섞인 잔소리가 서해의 귀에 들어왔다. 가만뒀다가는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올 그의 모습을 본 서해가 괜찮다고 웃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한태경의 표정은 더 굳어졌다.
결국 화장실까지 에스코트를 받은 것 같은 이상한 상황 앞에서 서해의 마음이 다시 뒤흔들렸다.
한참 동안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 서있다가 손목을 들어보았다. 오랜 시간 동안 묶여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상처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자리만 눌려 살갗이 돋아난 부분을 손끝으로 쓰다듬자 조금 전까지 한태경과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바꿔둔 유리문이 살짝 열려있는 게 보였다. 서해는 가죽 수갑의 흔적이 남은 팔목에서 서둘러 손을 떼어냈지만 그를 생각하는 마음까지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벌써 옷을 다 갈아입은 한태경이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서해의 방으로 들어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평소처럼 벗고 나왔던 서해는 다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머리를 쏙 내밀어보자 웃고 있는 한태경이 보였다.
“그… 옷을, 입어야 할 것 같은데요.”
“조금 전까지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에 뭘 부끄러워합니까.”
“…대표님.”
“그럼 뒤돌아서 있을 테니까 옷 입어요.”
서해는 한태경이 등지고 앉은 것을 확인한 다음에도 화장실 안에 서서 그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뒷모습을 주시했다.
손에 들려있던 타월로 몸을 두른 다음 작게 마련된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고 드로어즈를 입고 긴팔 티셔츠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아니, 그거 말고 이거 입어요. 그레이로.”
갑자기 옆에서 불쑥 들어오는 목소리에 움찔하고 손에 들고 있던 V넥 티셔츠를 놓치고 숨을 뱉어냈다. 정말 깜짝 놀란 서해는 숨을 들이켜 쉬며 한태경을 밀어냈다.
“악! 진짜, 깜짝 놀랐어요.”
“나만 볼 건데 이왕이면 내가 좋은 대로 입어주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한태경은 서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어색하게 서있는 서해의 몸을 끌어안았다. 금방 샤워를 마치고 나와 더 따뜻해진 몸이 품에 들어왔다.
잠시 꼼지락거리던 몸이 순순히 안기고 허리에 손까지 올려오는 것을 확인한 한태경이 서해의 등과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정말 아픈 데는 없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확인하고 싶은데.”
“그건 싫어요.”
“알겠습니다. 아프면 언제든 나 불러요.”
“…견딜 만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괜찮아요.”
한태경은 손을 뻗어 열려있는 서랍에서 그레이의 보트넥 티셔츠를 꺼내 들었다. 여전히 허리를 붙잡고 서있는 서해를 내려다보다가 목부터 팔까지 티셔츠를 입혀줬다. 얌전히 따라오는 모습이 마음에 쏙 들었다.
눈을 들어 올려다보는 서해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인 뒤 다시 입술을 벌리고 들어섰다. 이리저리 뱉어내는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까치발로 고개를 젖히고 키스에 응해 오는 모습을 보던 그가 서해의 등허리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짧게 끊으려던 키스가 점점 길어졌다. 서해는 숨을 더 많이 들이켜려고 입을 벌렸다. 마음에 드는 듯 작정하고 붙어선 그는 떨어질 줄 몰랐다. 턱을 잡고 집요하게 밀고 들어오는 움직임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결국 서해의 머릿속이 다시 핑핑 어지러워질 때가 되어서야 놓아주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한태경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그대로 침대로 올라가 잠들려고 하는 서해를 불러 세웠다. 서해는 바로 전까지 살을 맞대고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오히려 당당한 한태경의 페이스에 말려 결국 1층으로 다시 내려오고 말았다.
아일랜드 식탁 앞에 마련된 의자에 올랐다. 다리를 흔들며 음식을 준비하는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가 오기 전과 같은 공간인데 따뜻함이 채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냉장고에 있던 등심과 채소, 소스를 꺼내더니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 적당히 달궈진 올리브유 위에 올려진 두툼한 고기가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버터 한 스푼과 월계수 잎이 들어가자 향긋한 냄새가 퍼졌다.
식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있던 서해는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요리가 완성되어 가는 것을 구경했다. 프라이팬과 집게를 들고 있던 한태경의 손길은 무심한 듯했지만 제법 여러 번 해본 듯 익숙해 보였다.
눈앞에 준비되는 저녁 식사와 한태경을 번갈아 바라보며 얘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그게 그렇게 억울했습니까.”
“…지금도 조금 억울한데요. 대표님 안 계신 3일 내내 하고 다녔는데.”
“그럼 뭐 합니까. 내가 오자마자 본 건 약속을 어긴 서해 씨 아닙니까. 다음부터는 봐주는 것 없을 거예요.”
서해는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숙이고 억울함을 삼켰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자 꼬리뼈 부근이 찌르르했다. 눈을 내리깔고 속으로 통증을 삼켰다.
요리가 다 되어가는 것을 눈치껏 살핀 서해가 한쪽에 흩어져 있던 칼과 나이프를 자리에 놓고 와인 잔도 세팅했다. 테이블 위의 와인 거치대에 놓여있는 레드 와인이 보였다.
“싱가포르 갔다가 사 오신 거예요?”
“네, 출장 갔다 오는 길에 괜찮아 보이는 와인 하나씩 사 오는 게 취미입니다. 매번 혼자 먹다가 같이 먹으려니까 기분이 새롭네요.”
“맛있을 것 같아요. 디켄터로 옮겨둘까요?”
“가벼운 와인이라 그렇게까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분위기만 내봅시다. 와인 많이 먹어 봤습니까? 익숙해 보이네.”
“그냥, 여기저기서 본 거예요.”
서해는 코르크 마개를 따고 디켄터로 와인을 옮겨두었다.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하자 제법 근사한 분위기가 났다. 때맞춰 서해 앞으로 내밀어진 접시에는 맛있게 구워진 고기가 올라와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요. 많이 먹고 살 좀 찝시다.”
“이건 체질이라서 그런 거예요. 저도 많이 먹어요.”
적당히 구워진 고기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나온 고급 요리보다 맛있었다. 눈이 동그래진 서해는 입으로 조각난 고기를 옮겨 놓으며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한태경은 서해를 바라보았다. 서해가 꽤 만족한 표정으로 식사하는 게 보였다.
“대표님, 정말 맛있어요. 나가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유학할 때 할 줄 아는 건 고기 굽는 것밖에 없어서 많이 먹다 보니까 실력이 좀 늘었습니다.”
서해는 와인의 마리아주로 손색없는 스테이크 맛에 감탄하며 잔에 약간 남겨진 와인을 쭉 들이켰다. 입안에 감도는 향기로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밥을 잘 먹어야지 술을 잘 마시네. 천천히 마셔요.”
“한 잔만 더 주세요.”
“알겠습니다.”
한 그릇을 다 비워낸 서해는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서 굴리며, 한태경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까 말까를 계속 고민했다. 한태경은 앞에 놓인 테이블 식기를 싱크볼에 내려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앞을 바라보고 창밖만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꺼낼 적절한 순간을 살피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그만 고민하고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봐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마에 다 쓰여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게 그렇게 다 드러나 보이면 협상 능력은 아주 제로겠습니다. 회사에서는 일만 잘한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연습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하세요.”
“저는 대표님이 신기한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시는지.”
“관심 있는 사람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때도 있습니다.”
어느덧 시선을 빼앗겨 한태경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려 얘기하던 서해는 툭 뱉어지는 고백과 함께 마주 보는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질문해도 돼요?”
“우리 사이가 이미 회사 대표와 직원 사이는 아닌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궁금한 게 생겼다니까 기분 좋네요. 뭡니까?”
“대표님 한국 이름이 한태경인데 왜 회사에서는 외국 이름 쓰세요?”
“로건 밀러라는 이름은 미국에서 쓰던 이름입니다. 사실, 한국에 장기로 머무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거의 10년 가까이 이렇게 불렸더니 이게 더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한국에는 조금만 있다가 가시는 거예요?”
“사업 진행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내 취임의 목적은 한국에 글로벌유니티 사업의 진행 방향을 점검하고, 확장하고, 안정화하는 것까지입니다. 지금 서해 씨가 회사에서 하는 업무가 사업의 진행 방향을 점검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연구 보고서들이 요 근래 들어 데이터마사지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것과 그걸로 마케팅 방향을 전환한다는 이슈 보고가 들어와서, 그거 살펴보려고 한국에 온 거예요.”
서해는 한태경이 하는 대답을 듣고 순간 멈칫했다. 그가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다른 의미가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한국을 떠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려 와인 잔을 둥글리다가 한 모금 들이켰다.
“그날 모임에 계셨던 분들은 워낙 어릴 때부터 봤던 회장님들이라 한태경이란 이름이 더 익숙하신 모양입니다.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불러요. 그렇다고 서해 씨 성격상 내 이름을 불러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그냥 대표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편한 대로 하세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한태경은 와인 잔을 들고 있는 서해의 얼굴 앞으로 쑥 다가오더니 이마에 짧게 키스를 하고 멀어졌다. 그의 얼굴에는 정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서해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음 질문은 뭡니까.”
“대표님, 혹시 어제자 뉴스 확인하셨어요? 싱가포르 가 계신 동안 한국에서 뉴스 속보가 나왔는데.”
“나이브레티 재단 말하는 겁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왜 놀라야 합니까. 죄를 지었으면 조사받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게 당연한데.”
“대표님.”
“서해 씨는 이제 더 이상 그 일에는 신경 쓰지 말아요. 글로벌유니티에 육성 사업이나 복지 사업은 없지만,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둔 글로벌유니티 라인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한 처벌이 내려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 라인이 있어서 수사권을 쉽게 내주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기소 유예로 풀려날 가능성이 더 커요.”
서해는 아무렇지 않게 ‘우리’라는 단어를 내뱉는 한태경의 말을 듣고 주먹을 꽉 쥐었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렇게 하지 마세요.”
“이제 시작인데 뭘 하지 말라는 겁니까.”
“그러지 마세요. 시작이라뇨.”
“서해 씨 하나만 놓고 이러는 건 아닙니다. 그 보육원 자체에 문제가 많았던 건 사실로 밝혀졌으니까.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보다는 경고 메시지 날린 것에 가깝고요.”
“대표님, 잠시만요.”
“그래도 권율기가 더는 서해 씨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기업 승계 과정에서 재단의 알짜 기업을 날리게 된다면 저쪽도 타격이 클 테니까.”
한태경은 정신없이 바빴던 지난 일주일을 돌이켜 보다가 인상을 쓰고 와인을 들이켰다. 그는 적어도 권율기를 서해로부터 서서히 떼놓기 시작했다는 데 작은 의의를 두고자 했다. 종일 집 안에 묶어둘 수 없다면 서해가 다닐 수 있는 공간을 넓게 열어주면 그만이니까.
“…싱가포르는 왜 가신 거예요. 설마 그것도 관련되어 있어요?”
“그건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서해 씨 덕분에 나이브레티에서 인공 지능 알고리즘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저쪽이 딴생각 못 하게 조금 손만 쓰고 온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덕분에 아버지한테 오랜만에 혼나긴 했습니다만.”
전혀 평범하지 않은 말이 아무렇지 않게 전해졌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한태경이 다시 서해로부터 멀어졌다. 38층을 함께 오르내리고, 밥을 같이 먹고, 차를 같이 마셔도 그는 자신이 서있는 곳과는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서해의 앞으로 내어준 요리는 어느 순간 빈 그릇이 되어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사소한 한 가지도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가질 수 있는 서해와는 전혀 다른 곳에 있는 존재. 지나버린 허름한 순간을 비웃기는커녕 아무렇지 않게 건져내려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간에 가득 들어찬 주름을 펴지 않은 채 서해를 돌아본 한태경이 여상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솔직히 얘기한 건데 도망가지 말아요. 몸은 여기 있는데 머릿속은 저 멀리 뛰어가는 게 훤히 보이네. 도망가면 잡아 올 겁니다.”
“…제가 뭘… 어떻게 해야.”
서해는 입에 고여있던 와인을 꿀꺽 삼키고 한태경을 쳐다보았다. 이마 위로 흩어져 있는 짙은 머리카락 사이로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서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 잘했다고 키스나 해주면 되지.”
“…그건 계약서에 이미 있는 내용이잖아요.”
“그런가. 그럼 회사에서 잘 도와주든가.”
“그것도 고용 계약서에 있는 내용인데요.”
“그러네. 그럼 날 좀 더 자주 봐주는 건 어떻습니까.”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듣게 된 서해는 코끝을 찡그리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평생 뭐 하나 제대로 선물 받아본 적은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주고받는 법 따위는 더욱더 몰랐다. 아무렇지 않게 툭 뱉어지는 한태경의 고백에 손끝이 서늘해지더니 심장이 쿵쿵 뛰어오기 시작했다.
고작 계약서로 유지되는 관계에 저런 진심이 가당키나 한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서슴없이 벽을 허물고 들어오는 그를 막을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아일랜드 식탁 아래에서 한태경과 맞닿아있는 무릎이 느껴졌다. 서해는 떨리는 몸을 숨기려고 무릎을 살짝 떼어냈다. 그리고 한태경이 한쪽 팔을 길게 뻗어 서해가 앉은 등받이 위에 걸쳐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표님의 작은방 2권에서 계속)
대표님의 작은방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