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파동
언제나처럼 적당한 업무가 이어지던 날이었다. 서해는 아웃룩으로 도착한 요구 사항을 보고 바쁘게 움직였다. 이번 주 목요일에 있을 모임 자리에 필요한 것들을 사전에 세팅하기 위해서였다.
한태경은 몇 군데 장소를 추천해 주고 적당히 얘기할 수 있는 곳으로 예약을 잡아달라는 말을 전했다.
메일로 전달된 리스트에는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재벌 총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덟 명의 참석자를 주르륵 훑어보았다. 명단에는 권율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따라 한태경과 마주치기 어려워 그가 38층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초대장 포맷과 체크리스트를 살피던 중 사무실로 들어오는 한태경이 보였다. 시선을 짧게 교환한 뒤 대표실로 들어가려는 그를 급히 불러 세웠다.
“대표님!”
“음?”
“모임 관련해서 확인해 주실 것들이 있어서요.”
“뭡니까?”
“장소는 바깥 정원이 보이는 룸으로 잡으려고 하거든요. 혹시 빔프로젝터나 영상물 볼 수 있는 디바이스도 필요하신가요?”
“아니,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장소 예약 후에 참석자들에게 메일 돌릴 예정인데요. 오프 더 레코드로 모인다고 하셔서 회사 계정으로 메일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할까요?”
“회사 업무로 사용하게 될 개인 계정 하나 만들어 두세요. 자주는 아니더라도 사용될 일이 있을 겁니다.”
“네.”
서해는 한태경이 사라진 뒤 그가 보내준 링크를 차례대로 눌러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대부분 남산에 있는 5성급 호텔이었다. 사진을 보던 서해는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구경하느라 몇 분을 보냈다. 키가 높은 소나무가 몇 그루씩 있는 고급스러운 정원은 기본이었고 내부 장식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했다.
선뜻 전화하고 물어보기에는 공격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인테리어에 망설이다 겨우 통화를 시도했다. 담당자들은 친절했다. 덕분에 서해는 여러 가지를 꼼꼼히 따져볼 수 있었다. 자리 배치는 물론이고 그날 제공되는 코스 요리 메뉴를 물었다.
알레르기 유발 식품 목록까지 꼼꼼히 체크한 서해는 S 호텔의 소연회장으로 예약을 잡았다. 호텔 연회장이라 발렛 서비스를 제공하겠지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주차장에서 거리가 가장 가까운 곳으로 선택했다.
“네, 아홉 명 참석 예정입니다. 아 그건, 식사하면서 진행될 거예요. 라운드 테이블로 준비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혹시 흡연실도 있나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 통화를 종료한 서해는 새로운 메일 계정을 개설했다. 그리고 수신자 목록에 한태경이 보내준 참석자 목록을 복사해 붙이다가 흠칫했다. 나이브레티의 권율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다.
왜 권율기가 참석하는지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을까, 자신을 왜 데려간다고 했을까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한태경은 이미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고 충분히 설명한 상태였다. 더 이상 물어보면 분명히 불편할 기색을 내비칠 그가 서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공사는 구분하는 직원이 되고 싶었다.
서해는 참석 일시, 안건 등을 적어서 보내준 한태경의 메일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한 후에 여덟 명의 참석자에게 메일을 돌렸다.
* * *
“서 대리, 조금 일찍 출발할까요. 차는 1층에 올려 두었으니까 준비되는 대로 바로 나갑시다.”
“네, 대표님.”
서해는 한태경이 사준 검은색 더블 브레스트 슈트와 반짝이는 구두, 브리프케이스까지 깔끔하게 들고 자리에서 나섰다. 자리를 정리하고 나오니 응접실 카우치에서 한태경이 긴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 이쪽으로 오겠습니까.”
“네, 대표님.”
자신이 무언가 빠트린 게 있었나 고민하던 서해가 한태경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서해는 갑자기 바뀐 그의 시선이 어쩐지 서늘해진 것 같아서 눈치를 보았다.
“대표님, 제가 뭔가 실수라도.”
“왜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까.”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참석자 명단에 권율기가 있었는데 왜 아무 말이 없냐는 겁니다.”
“…그건 제 개인 사정이고, 회사 일이랑은 별도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서요.”
“괜찮겠습니까?”
“네, 대표님도 같이 가실 테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아무런 말씀 안 드린 거예요.”
“좋습니다. 그럼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잘 따라다녀요.”
“…그 정도로 어린애는 아닌데요.”
“내 눈에는 비슷하게 보입니다. 이쪽으로 가까이 와보세요.”
서해는 한태경의 브리프케이스 안에서 나와 그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보고 난감한 얼굴로 몸을 뒤로 물렸다. 회사에서 보여서는 안 되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서해가 집에서 하고 다니던 초커를 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권율기의 이름을 봤을 때보다 몇 배로 혼란스러운 감정이 온몸을 요란스럽게 흔들어댔다.
“가까이 오라니까.”
“…대표님, 그거 집에서 하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내 마음은 오늘 있을 모임에 업무 목적으로만 가는 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윽….”
한태경의 길쭉한 손이 서해의 넥타이를 당겼다. 익숙한 손길로 넥타이를 풀어낸 한태경은 서해의 셔츠 단추를 풀고 목에 검은색 초커를 꼼꼼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피부가 손끝에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그의 눈꺼풀이 아래로 깜박였다.
서해의 눈이 울기 직전처럼 풀어졌다. 손을 들어 올려 목을 더듬고 있는 한태경의 양쪽 팔목을 잡았으나 그는 물려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전히 초커를 채우는 데 열심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대표님, 이거 빼고 가면 안 될까요.”
“넥타이는 하지 말고 갑시다.”
“금방 들킬 거예요.”
“잠금 부분은 뒤쪽으로 돌려놓으면 셔츠 안에 폴라 입은 것처럼 보일 거예요. 캐주얼 정장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눈치 못 챌 겁니다.”
한태경은 서해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단호한 말투와 손길이 서둘러 셔츠 단추를 잠가주고 옷매무새를 바로잡아 주었다. 아직 팔목을 잡은 손을 떼지 못하고 울기 직전인 서해의 표정을 보는 얼굴이 서늘했다.
억울하게 올려다보는 서해의 표정을 한동안 내려다보던 한태경이 이마 위로 꿀밤을 내렸다.
“앗!”
“눈빛이 불량하네.”
“대표님은 생각이… 아야. 아파요.”
“하여간 말대꾸는.”
서해는 한태경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잡고 있던 그의 손목을 놓고 브리프케이스를 챙겨 들었다. 한 손으로는 목을 크게 감싼 채였다.
38층의 엘리베이터로 다가서는 동안 반투명 문에 비치는 둘의 모습이 서해의 눈에 들어왔다. 희미하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진짜로 캐주얼 정장을 입은 것처럼 보이는지 유심히 살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한태경은 손을 뻗어 서해의 뒷머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가만두면 세상 모든 걱정은 서 대리 혼자 지고 살겠습니다.”
“…….”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서해는 1층을 누르는 한태경을 보고 다시 한번 흠칫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일은 정말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오픈된 공간에서 초커를 하고 돌아다니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심장이 쿵쿵 뛰다 못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은 정도의 긴장감이 휘몰아쳤다.
“1층에 차 빼두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부러 그러신 거죠, 대표님.”
“글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1층 문이 열리고 로비를 가로지르는 순간, 간단한 미팅을 하고 있거나 커피 타임을 가지고 있던 임직원들의 시선이 한 번에 둘에게 집중되었다. 그 따끔따끔한 시선은 타인의 시선에 제법 둔한 편인 서해도 느낄 정도였다. 서해는 어색한 표정을 겨우 관리하며 한태경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진짜로 드… 들키면 어떻게 하죠, 대표님.”
“무슨 소리 합니까. 그걸 왜 들켜요.”
“들키면 대표님이 책임지세요.”
“서 대리가 저 사람들 앞에 가서 직접 보여주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를 겁니다.”
어깨를 잔뜩 위로 올린 채 어색하게 걸어가는 서해의 모습을 내려다본 한태경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로비에서 활짝 웃고 말았다.
“다 쳐다보는 것 같아요.”
“익숙해지세요.”
“뭐에 익숙…해지는 건데요?”
“글쎄. 생각해 보세요.”
서해는 갑자기 속도를 올려 로비를 빠져나가는 한태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따라붙었다. 회사 일보다 몇 배로 어려운 상황 속에 어지러움을 느낄 정신도 없었다.
로비에 대기 중인 그의 차가 보였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조수석 문을 열고 도망치듯 뛰어 들어갔다. 모임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내내 방망이질 치던 심장은 잠깐 진정되는 듯하다가 내릴 때쯤 다시 시끄럽게 쿵쾅댔다.
서해는 손으로 목을 감싼 채 호텔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예약된 장소에 도착해 장소를 먼저 점검한 한태경과 서해가 원형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된 명패에는 내로라하는 회사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서해의 대각선 방향 앞에는 나이브레티 권율기 상무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간단히 식사하는 자리니까 특별히 챙길 건 없을 겁니다. 편한 자리는 아니겠지만 여기 식사가 괜찮은 편이니까 맛있는 것 먹으러 왔다고 생각해요.”
“네, 대표님.”
“혹시나 하는 말인데, 갑자기 혼자 밖에 나갈 일이 생겨도 절대 가지 말고 내 옆에 붙어있어요. 떨어지면 주말 내내 혼납니다.”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한태경을 보고 눈이 커다래진 서해는 누가 소연회장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는지 급히 둘러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서해의 풀어진 셔츠 깃을 정리해주고 떨어졌다.
그때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해는 누군가 한태경이 하는 말을 듣지는 않았을지 걱정하며 주위를 살피다가 억지로 영업용 미소를 끌어 올리며 그들을 맞이했다.
한태경의 말대로 모임에서는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CES Summer Show에 참석하는 대표들은 이미 이런 자리를 여러 번 가진 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사소한 근황이나 일상 얘기 같은 것들을 하며 식사하는 데 집중했다.
서해는 얘기를 듣고, 적당히 화제가 될 만한 것에 대해 질문을 하고, 그들의 호감을 샀다. 단 한 명, 병환 중인 나이브레티 회장을 대신해 참석한 권율기의 표정만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한참 식사 중이던 서해의 무릎이 따끈했다. 원형 테이블 커버 아래로 쑥 들어온 한태경의 손이 서해의 허벅지 위를 쓸어내리고 지나갔다. 소스라치게 놀란 서해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떨어뜨리고 그를 쳐다보다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서해와 몇 차례 대화를 나누었던 회사의 대표가 서해에게 냅킨을 건넸다. 아버지가 있었다면 동년배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서 대리, 괜찮아요?”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놀라셨죠.”
“아니, 우린 괜찮아요. 아, 그래서 내 아들자식이 말이야….”
서둘러 테이블 위를 정리한 서해는 시치미를 떼고 여유롭게 무릎을 쓸어내리고 있는 한태경의 손을 잡아 내리려 했다. 그는 손을 떼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해는 결국 한태경이 앉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사정했다.
“대표님….”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습니까.”
“…….”
잠시 서해를 쳐다보던 한태경은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정도의 미소를 짓다가, 꽉 잡은 서해의 무릎을 두어 번 꽉 쥔 다음에 놓아주었다.
권율기는 몇 주 사이에 활발해진 서해를 보는 것이 못마땅했다. 한태경과 무슨 짓을 하는지. 테이블 아래에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서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과 원만한 대화도 하고, 적당히 웃음 지으며 응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뒤집혔다.
와인을 원샷하다시피 들이켠 다음 잔을 테이블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두었다. 권율기의 시선 끝에 서해의 검은 눈동자가 걸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전과는 다르게 반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참, 박 회장님. 이번 CES Summer Show에 콜라보해 주시는 주방 가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테스트도 거의 마무리 단계라 박람회 때 전시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글로벌유니티에 우리가 감사할 일이지. 덕분에 우리도 박람회 나가고 홍보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한 회장님한테 감사하다고 전해 줘.”
“네, 그리고 다음에 다 같이 라운딩 가자고 하시던데 날짜 잡히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서해는 한 회장이라고 언급된 단어가 생소했다. 대화의 맥락으로 보았을 때 한태경과 관련된 사람 같았는데 정확히 알아듣기 어려웠다.
“좋지, 좋아. 연락 기다림세. 아니, 난 아직도 로건 밀러가 입에 영 안 붙어. 어릴 때 태경아, 태경아 하던 게 있어서 그런가.”
“회장님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그래? 그럼 늙은이 편한 대로 부름세. 아니, 한 대표 아버지는 미국에서 자리 잡으시더니 어떻게 한 번을 안 들어와. 우리가 술친구 그리워한다고 말 좀 해줘.”
서해는 굳어진 얼굴로 천천히 한태경을 돌아보았다. 글로벌유니티의 회장이 한태경의 아버지라니. 자신이 누구 집에서 태연하게 며칠을 보냈는지 생각하다가 숨이 턱하고 막혔다. 글로벌유니티의 1순위 상속자가 한태경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태경은 서해 쪽으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배석한 회장 및 대표들과 업무 이야기를 이어갔다. 서해는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붙들고 물을 연거푸 마셨다.
박 회장은 계속해서 대화를 주도했다.
“아, 권 상무.”
“예, 박 회장님.”
“권 회장님은 좀 어떠신가, 차도가 있으신가?”
“위급한 상황은 넘겼습니다. 많이 좋아지기도 하셨고요.”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야 할 텐데. 권 상무가 아버지 짐 좀 덜어드려.”
“예, 회장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 나온 김에. 권 회장님이랑 얘기하던 에너지 솔루션 사업이 있는데, 권 상무가 TF 좀 구성해 줘. 여기 최 대표도 몇 개월째 대기 중이고. 재촉하려는 건 아닌데, 우리도 마냥 기다리고 있기는 힘들어서.”
“돌아가면 사업팀에 확인하고, 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권율기는 멀쩡한 모습으로 사업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증스러운 그 얼굴을 마주한 서해는 속에서 올라오는 쓴 물을 삼켰다.
몇 차례의 코스 요리가 지나간 다음에 가벼운 티타임이 이어졌다. 한참 일상 대화가 이어진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서는 대표들이 보였다.
“서 대리, 오늘 자리 마련한다고 고생 많았어요. 다음엔 우리 회사에서 준비할 테니까 태경이랑 같이 나와요.”
“아, 네. 회장님. 살펴 가세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표님.”
자리에 앉아 와인을 들이켜던 권율기는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제법 익숙해 보이는 둘의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회장단이 빠져나간 곳에는 원형 테이블 앞에 서있는 한태경과 서해, 그리고 자리에 앉은 권율기가 남아 있었다.
“…씨발, 둘이 뭐 하자는 거야. 천하의 한태경이 드디어 미쳤나. 얘가 누군지 알고서도 계속 같이 일하는 거야?”
권율기가 욕을 뱉어내자 한태경의 옆에 서있던 서해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권 상무님, 나이브레티 대표로 자리했으면 예의를 지키세요.”
“진짜 데려와서 반쯤 죽여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권율기는 한쪽에 서있던 서해의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일어서서 머리채를 쥐어 잡고 바닥에 메다꽂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태경은 옆에 서있던 서해를 등 뒤로 숨겼다. 원형 테이블로 가까이 걸으며 삐딱하게 앉아있는 권율기를 내려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얽히는 동안 서해는 불안함에 서성거렸다.
“권 회장님께서 지금 모습을 보신다면….”
“지랄하네. 한 회장은 네가 이렇게 나오는 걸 알고 있고?”
권율기는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의자 뒤로 몸을 미끄러뜨려 앉고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연회장을 채웠다.
“지금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동안 권 회장님께서 이너소사이어티에 기여하신 것으로 모임에 초대하는 거지, 당신 보고 모임에 초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는 겁니다.”
“개새끼가 진짜.”
“떨어지는 것 주워 먹으러 왔으면 얌전히 고개 숙이는 게 좋을 텐데.”
권율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로 넘어간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바짝 붙어선 둘의 모습은 잔뜩 날이 서있었다. 권율기는 두 손을 올려 한태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잔뜩 불편한 기색의 한태경이 어깨 위의 손을 털어내고 권율기의 가슴께를 밀쳐냈다.
금방이라도 주먹이 오고 갈 것 같은 분위기에 서해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협박이라도 하시겠다?”
“경우에 따라 그 이상이 될 수도 있고.”
“개새끼가.”
권율기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네트워크에서 빠지게 된다면 승계를 앞둔 나이브레티 입장에서는 한참 손해 보는 장사였다. 서해를 바라보는 그의 미간에 불편함이 가득 들어찼다.
“다른 할 말 없으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갑시다, 서 대리.”
한태경은 서해의 손목을 잡고 소연회장을 나섰다. 서해는 자신을 쫓아오지 않는 권율기를 인지하고서야 알아챘다. 지금의 자리에 참석한 분명한 이유를. 권율기의 서열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 자리였고, 한태경이 말하던 안전의 범주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서해는 들뜬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무던히 애썼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약간 허무해지기까지 했다. 권율기가 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지금까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슬슬 기분 나빠지려고 하네. 권 상무 생각은 이제 그만하세요.”
“대표님, 아까 권 상무님 표정 보셨어요?”
집 주차장의 엘리베이터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앞을 보며 자꾸만 헤실헤실 웃는 서해를 본 한태경이 손을 뻗어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목덜미에 닿은 손길에 화들짝 놀란 서해가 그제야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자신을 오롯이 담은 티 없이 맑은 눈동자가 보이자 만족스러운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 뒤를 바짝 붙어 따라오는 서해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경쾌하게 들렸다.
“그렇게 좋습니까.”
되물은 뒤 말간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부끄러운 듯한 미소였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어 망설임이 담긴 얼굴이었다.
“지금 내 표정은 어때 보입니까.”
“…그냥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어서.”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한 한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해의 말이 더듬더듬 이어졌다.
“농담입니다. 오늘 일은 아무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좋아하나 싶어서.”
서해는 그의 손끝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간지러움에 올라가려는 어깨를 꾹꾹 눌렀다. 어깨를 웅크리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흔들림 없이 마주한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짙었다.
뒷머리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선이 목선을 타고 내려와 어깨를 툭 두드리고 멈췄다. 애꿎은 브리프케이스를 꽉 잡았다. 팔뚝과 척추를 타고 흐르는 서늘함이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인지, 아직 차가운 날씨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잠시 망설이던 서해는 옆으로 어색하게 붙어선 채 그와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 * *
직장인의 평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서해는 한태경과 함께 출퇴근하는 것을 크게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바빠졌다. 저녁 시간에 약한 서해는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에 조수석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한태경과 38층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지만, 어떤 날에는 둘 다 너무 바쁘게 움직여 약속된 티타임을 갖기도 힘들었다. 그런 날에는 출근길과 퇴근길이 되어서야 겨우 얼굴을 마주칠 수가 있었다.
종일 혼자서 38층을 지키는 날도 많았다. 그러다 퇴근길에 그를 만날 때면 아무리 졸려도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한강 변에 남은 가로등 불 너머 반짝이는 거리, 어두운 밤공기 같은 것들을 마주하는 시간은 잔잔하게 흘렀다.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여느 날과 같은 퇴근길이었다. 평소보다 유달리 늦어져 도로는 막힘없이 뚫려있었고 그 위를 시원하게 질주하는 중이었다.
석양으로 덮여있던 한강 다리에는 가로등이 들어와 있었고, 강 건너 작은 빌라들과 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야경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서해는 조수석 창문 너머를 내다보며 마주 잡은 손가락 끝을 톡톡 건드렸다.
운전하다가 신호를 받고 잠시 멈춰 선 한태경이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무릎 위에 놓인 서해의 왼쪽 손등을 포개어 잡았다.
손 하나 잡는 것에 이렇게까지 고민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를 가늠해 보던 그의 얼굴에 어이없어하는 미소가 걸렸다. 운전 중이라 앞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지만 옆에 앉아있던 서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서해는 손등을 가득 덮은 온기를 보고, 한태경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평소와 같은 슈트 차림에 평소와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손등 위로 미끄러뜨려진 따뜻한 손바닥뿐이었다.
“오늘 꼭 할 말이 있었는데, 회의와 외부 업무가 많아 말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네, 대표님. 말씀하세요.”
“급하게 싱가포르를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혼자 업무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업무 처리는 상관없는데. 얼마나 가시는 거예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면 주말 전에 올 테고, 길어지면 일주일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 출발은 언제 하세요?”
“새벽 비행기입니다. 서해 씨 집에 데려다주고 짐 싸서 바로 공항으로 갈 예정입니다.”
한태경의 출국 날이 이렇게 빠를 줄 예상 못 했던 서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어쩐지 아쉬운 생각이 들어 왼손에 덮인 손바닥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문질렀다. 꼼지락거리던 움직임을 한참 동안 즐기던 그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왜요. 내가 없어진다니까 조금 섭섭하긴 합니까?”
“…너무 갑자기 말씀하셔서.”
“최대한 빨리 오겠습니다. 이번 주는 삼 일만 더 나오면 되니까 서 대리 앞으로 넘어오는 일은 먼저 정리하고 문제 있으면 메일 보내세요. 검토해서 연락해 주겠습니다. 혹시 내가 주말 안에 못 돌아오면 다음 주 임원진 회의에 참석해서 안건만 정리해서 넘겨주세요. 서 대리가 발언할 이슈는 없을 겁니다.”
“네, 대표님.”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집에 있어요.”
“예전에 있었던 집에 다녀오면 안 될까요. 청소도 해야 할 것 같고.”
“안 됩니다.”
단호하게 거부당한 서해가 꼼지락거리던 손가락 움직임을 주춤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얽어진 손가락 사이를 톡톡 두드리던 서해가 입을 우물거렸다.
강한 힘으로 손을 쥐어 잡은 한태경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다면. 손이 세게 잡힐수록 서해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출장 다녀오면 나랑 같이 가서 정리합시다. 이제 그 집에 다시 들어갈 것도 아닌데 청소가 아니라 처분을 해야지.”
한태경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뛰고 있던 심장이 손끝으로 내려와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집을 처분하게 된다면 자신이 언제까지 이곳에서 머무를 수 있을까. 마음속에서 돌아다니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럼 저는 나중에 어디로.”
“어디라니. 어디 갈 생각입니까. 내 집에 계속 있어야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평일엔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들어가고, 주말엔 집에 있어요.”
“…….”
“지금 내가 운전 중인 걸 다행으로 아세요. 면허는 있습니까?”
“…네.”
“보험 올려두고 갈 테니까 타고 다녀요. 거절은 안 받습니다.”
서해는 금세 냉랭해진 분위기에 어깨를 움츠리고 앞만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한 소리를 뱉은 것은 한태경인 것 같았는데 말대꾸라도 했다간 정말 혼날 것 같은 느낌에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말이 없던 둘 사이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서해는 현관에 놓여있는 작은 가구 위에 놓인 초커를 집어 목에 둘렀다. 단추를 채우고 버클에 끼워 넣는 속도가 빨라진 게 제법 익숙해진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한태경은 서해가 초커를 다 채우기만 기다렸다가 무심하게 내려 뜬 눈으로 체인을 연결했다. 그리고 손에 체인을 두 바퀴 감아쥔 다음 천천히 서해를 끌어당겼다. 버티지 않고 순순히 끌려오는 모습을 확인한 뒤 눈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내가 집에 없을 땐 초커만 하고 올라가고, 초커에 달린 체인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혼자 현관에 서서 초커를 두르는 상상을 하던 서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러웠고,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한태경은 체인을 쥐었다. 서해의 목에 손이 바짝 붙을 때까지 체인을 말아 올렸다. 그는 거실을 가로질러 2층 계단으로 바로 올라섰다. 처음으로 체인을 걸었을 때 스텝이 꼬여 몇 차례나 넘어졌던 것과는 달리 제법 능숙하게 쫓아 올라오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고 방문 앞에 도착한 뒤 한태경은 서해의 목에서 체인을 풀어주었다. 분리된 체인이 차르르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문고리에 걸렸다.
꾸벅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서해의 팔을 붙잡아 닫힌 문 위로 바짝 몰아붙였다. 갑자기 세게 밀쳐진 데 놀란 서해가 어깨를 움츠렸다.
“어디 벌써 빠져나갈 생각부터 하는지. 이대로 잡아먹었으면 좋겠네.”
“윽.”
“내 일정만 아니었으면 서 대리는 내일 출근 못 했을 겁니다.”
한태경의 손이 서해의 목과 가슴을 지나 다리 사이로 들어와 엉덩이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복도 끝 방을 벗어난 곳에서의 스킨십이 처음이었던 서해는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는 서해가 뒤로 물러선 만큼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태경의 손이 아랫배를 타고 올라와 허리를 꽉 잡았다. 서해는 숨도 못 쉬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점점 세게 움켜쥐는 손목을 다급히 겹쳐 잡았다. 한 손에 몸을 틀어 잡힌 것 같았다.
“아, 대표님….”
“다녀와서 봅시다.”
영영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손이 떨어졌다. 벌써 바짝 마른 입술을 들썩거리는 사이, 그가 문을 열어주었다. 서해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계약서를 작성했지만 조금 잠잠해진 다음에는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한태경에게는 아니었던 것인지. 출장을 앞둔 그의 기분을 망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방 안에서 초조하게 걸음을 옮겼다. 건너편 방에서 한태경이 캐리어에 짐을 옮겨 담고 있는지, 혹은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리지는 않을지 귀를 잔뜩 기울였다. 등 뒤에 서해에게 오롯이 허락된 공간이 있었지만 서해가 바라보고 서있는 쪽은 그가 있는 방향이었다.
맞은편 방에서 한태경이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해는 급히 뛰어가 문을 열었다. 복도를 지나 내려가고 있을 거로 생각한 그는 서해의 방문 앞에 서있었다.
캐주얼 차림의 복장에 알루미늄 재질로 된 캐리어,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머리 위의 조명을 받아 그늘이 져 있었다. 서해는 그가 어떤 표정으로 서있는지 알지 못해 초조해했다.
“…나쁜 의미로 드린 말씀이 아니었어요. 진짜예요.”
“앞으로 서해 씨가 지낼 곳은 이곳이고, 다른 옵션은 없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서해는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은 마음에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가 들고 있던 브리프케이스를 받아들었다. 한태경은 그런 서해가 싫지 않은 듯 순순히 가방을 넘겨주었다.
캐리어를 들고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2층 계단을 내려오고, 현관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 적절한 인사말을 고민했다.
한태경이 신발을 신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서해는 문이 열리기 전에 그를 불러 세웠다.
“대표님.”
“왜.”
“…잘 다녀오세요.”
인상을 찌푸린 한태경이 다시 서해 쪽으로 다가왔다. 서해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가방을 한쪽에 내려둔 그가 손을 뻗어 서해의 양쪽 얼굴을 감싸고 금방이라도 키스할 만큼의 거리로 다가왔다. 긴장한 서해가 숨을 들이켜며 한태경의 손목을 급히 잡았다.
“집에 누군가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인지는 몰랐는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한태경은 얼굴을 기울이고 서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닿을 듯 말 듯 망설이던 그는 서해가 눈을 내려 감는 것을 보고 천천히 입술을 맞붙였다. 어색한 듯 꾹 다물린 마른 입술 위로 혀를 내밀어 쓸어내리다가 입술 끝을 깨물었다.
“아, 으응….”
가만히 서서 눈을 내리깔고 있던 서해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서해의 눈동자를 덮고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림자가 드리운 눈가를 바라보던 한태경의 눈도 감겼다. 슈트 너머로 척추뼈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온 그가 서해의 허리를 툭 두드렸다. 뜨거운 혓바닥이 얽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꼈던 차갑고 서늘했던 공기와는 다르게 따뜻하고 다정한 키스였다.
“하아, 가기 싫어지네요.”
“읏, 으읍.”
“이대로 2층으로 올라가 버릴까… 입 벌려봐요. 그렇게 다물지 말고.”
허락된 시간은 짧았다. 목덜미가 꺾일 것 같아 까치발을 들어 올리자 한태경은 팔을 뻗어 서해의 허리를 깊게 감쌌다.
입술이 삼켜질 것 같은 키스가 급작스럽게 멈췄다. 서해는 아쉬운 마음에 입을 벌리고 그의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마주한 얼굴에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머지는 다녀와서 해야겠는데.”
빈 공간 없이 서해를 가득 끌어안은 한태경은 몇 차례나 등허리를 쓰다듬고 뺨을 맞붙였다. 숨을 가다듬고 있는 서해의 입술, 코, 뺨, 그리고 이마까지 버드키스를 날려 주고서야 서해를 놓아주었다.
그는 등을 돌리고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현관에 있는 작은 가구 위에 올려두었다.
“타고 다녀요.”
“네. 아! 대표님, 공항까지 태워 드릴까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서해 씨는 내일 출근해야지. 마음만 받겠습니다. 다녀와서 봐요.”
쿵-
서해는 입술에 손을 올린 채 문이 닫힌 뒤에도 한참 동안 문 앞에 서있었다. 손끝이 화끈거렸다.
* * *
회사에 갈 준비를 다 마친 서해는 1층 거실에 내려왔다. 텅 비어있는 카우치에 저절로 눈길이 쏟아져 잠시 서서 눈을 끔벅이다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목에 하고 있던 초커를 풀어서 작은 가구 위에 내려두고 한태경이 놓고 간 차 키를 들어 올렸다. 늘 그가 지니던 물건이라 그런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차에는 여전히 그의 향기가 남아있었다. 시동을 걸고 좌석 거리, 백미러와 사이드미러 조절까지 다 마치고 나자 마치 처음 운전을 해봤던 날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두 시간이나 일찍 출근길에 올랐다. 늘 고생하던 한강 변의 상습 정체 구간도 시원하게 뚫렸다.
한태경이 없는 38층은 너무나 고요했다. 메일함을 열어 보았지만 검토할 보고서도 아직 넘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유달리 평화롭기까지 한 아침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조용히 38층을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사내 메신저에 알림이 깜박였다.
[김이곤: 서 대리님!]
[서해: 네, 안녕하세요. 김이곤 씨.]
[김이곤: 오리엔테이션 때 같이 밥 먹었었는데, 기억하세요?]
[서해: 아, 네. 잘 계셨어요?]
[김이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그때 밥 같이 먹었던 사람들이랑 카페테리아에서 잠시 만나려는데, 35층으로 오실래요?]
서해는 메신저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마침 처리해야 할 업무도 없었고, 한태경도 자리에 없으니. 입사한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사적인 모임으로 자리를 비워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해: 네, 이곤 씨. 금방 내려갈게요.]
[김이곤: 우와! 기다릴게요, 대리님!]
메신저를 자리 비움으로 설정하고 35층으로 내려갔다. 카페테리아에 앉아있는 동기들은 세 명이었다. 그들은 서해가 다가오자 손을 흔들며 맞이했다.
“서 대리님, 여기예요! 아아 시켜놨어요!!”
“아, 이곤 씨 감사합니다. 다음번엔 제가 살게요. 다들 그동안 잘 계셨어요.”
서해는 해사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넷이 앉은 테이블에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서로의 상사에 관한 이야기, 평일에 자기 시간이 없어진 이야기, 취미 생활을 하고 싶지만 이제는 정말 사치가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서해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곤이 말했다.
“아니, 평소에는 38층에 따로 대표님이랑 계시니까 대리님은 못 불렀어요. 대표님 출장 가셨다길래 이때다 싶어서.”
“하하.”
“38층 밖으로는 두 분이 통 나오시질 않으니까. 연락드려도 되나 싶은 생각도 있었고요. 괜찮으신 거죠?”
“그럼요. 오히려 연락해 줘서 제가 고맙죠.”
“그럼 자주 연락드려도 되죠?”
이곤은 서해를 보며 미소 지어 보였다. 시선을 마주한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켜더니 말했다.
“회사 근처는 좀 돌아보셨어요? 여기 지하에 사내 헬스장도 있고, 네일 아트나 마사지 받을 수 있는 곳도 있어요.”
“아, 아직 못 돌아봤어요. 다음에 가 봐야겠네요.”
“서 대리님 짠해…. 대표님 언제 오신대요?”
“빠르면 이번 주, 늦으면 다음 주 초쯤이라고 하시던데요.”
“그럼 그때까지 좀 쉬었다가 하고 그러세요. 서 대리님 일만 그렇게 한다고 이미 사내에 소문이 자자해요.”
“제가요?”
“서 대리님 불쌍해하는 동기들이 얼마나 많으신지 모르시죠. 동기들을 만나야 무슨 얘기를 듣는지 알지.”
한참 웃으며 얘기하던 중 여자 동기들이 서해를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서 대리님 뭔가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러게. 뭔가 분위기 있어진 것 같기도 하고?”
“…네?”
“멀리서 걸어오는데 뭔가.”
“대표님 미니미 같지 않아요?”
“맞아, 나도 그 생각했어. 매일 같이 다녀서 닮아가나 봐.”
서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꽂혀있던 빨대로 커피를 쪽쪽 빨아 먹다가 코로 넘어가 기침을 뱉어냈다. 매일 같이 다닌다는 말의 의미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콜록… 콜록. 죄송, 콜록.”
“헐, 어떡해. 괜찮으세요?”
“콜록… 큼. 흠.”
“서 대리님, 많이 힘드신가 봐요. 대표님 말 꺼내자마자 이렇게.”
“아, 아니에요.”
대표님 미니미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마시던 커피의 맛도, 마주 보고 앉은 동기들과의 수다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애써 웃음 지으며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자 이상한 표정이 나와버려 동기들이 오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끼린데 뭐 어때요. 거기 소문은 저희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위문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
“나중에 한잔해요. 직장인들은 술 마시면서 회사 까고 그러는 재미로 다니는 거예요. 만나야 해, 만나야!!”
“어, 나 똘 과장 연락 왔어. 가야겠다. 나 먼저 간다.”
“그럼 나도 가야지, 옆 팀인데 눈치 보이잖아. 같이 가, 같이. 서 대리님, 미안해요. 우리 먼저 갈게요. 다음에 또 봐요!”
“괜찮아요. 다음에 봐요.”
“대리님, 저도 가봐야겠어요. 저희 셋이 같은 층이라서요.”
서해의 머리 위로 이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보자는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서해는 손으로 소주잔을 들이켜는 제스처를 취하며 사라지는 동기들을 보았다. 자신이 지내는 38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어 그들을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꽂혀있는 빨대를 휘휘 저으며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동기들이 남기고 떠난 말이 신기했다. 닮은 점이 있는지 곱씹어 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와 맺은 기이한 계약을 제외하고서는 접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대였다.
어리석은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얼음을 뒤적이자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한숨을 내쉬고 바쁘게 휘젓던 손을 차분히 내려두었다. 도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경관이었지만,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대표님 미니미라는 단어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