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낯선 시작
서해는 등굣길, 출근길 모두 포함해서 이렇게 편하게 어딘가로 이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부대끼는 지하철을 비집어 탈 필요도 없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기 위해 길게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
서울 토박이였지만 서울이 이런 곳이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금요일 밤에 정신없어 주위를 잘 살펴보지 못했던 한태경의 집이 한강 변에 위치한 아파트의 펜트하우스라는 사실도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온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조수석 창문에 바짝 붙어 위를 올려다보자 끝없이 솟아있는 건물이 보였다. 서해는 아파트에도 복층형 구조가 있을 수 있다는 걸 한태경의 집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몇 차례의 교통 신호를 받고 올림픽 대로에 들어섰다. 한강 변을 따라 달리는 10여 분 동안은 조수석 창가에 두 팔을 올려놓다시피 하고 밖을 바라보았다. 일출과 닿아있는 한강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때 한태경의 오른손이 서해의 어깨를 천천히 등받이 쪽으로 붙이기 시작했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은데, 앞으로 너무 붙지 말아요. 사이드 미러 안 보이려고 하네.”
“아, 죄송해요.”
“평일엔 어렵겠지만 주말에는 가까운 데 나가서 기분 전환도 하고 그럽시다. 강아지도 아니고 차 타고 밖을 이렇게 집중해서 내다볼 줄이야. 가고 싶은 데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요.”
“…네.”
차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나지막한 재즈 음악과 가끔 움직이는 깜빡이 소리가 전부였다.
회사 근처에 가까이 다가오자 차량 정체가 시작됐다. 서해는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한태경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주말과는 다르게 시원하게 올린 머리카락과 주름 없이 잘 다려진 셔츠 그리고 틈 없이 딱 맞게 조여든 슬림한 넥타이가 보였다. 엉성한 자신과는 다르게 어쩐지 멋져 보이기까지 하는 바람에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그리고 핸들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손이 보였다. 주말 내내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별것 아닌 일에 계속 칭찬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괜스레 부끄러워진 서해는 고개를 돌려 무릎 위에 올라와 있는 책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그 가방은 언제까지 가지고 다닐 겁니까. 학생 같네.”
“아직 이것밖에 없어서요.”
“귀엽긴 한데, 나랑 여기저기 외부로 회의 다닐 때는 못 쓸 것 같네요. 시간 나면 하나 사러 갑시다.”
그제야 내려다본 가방은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을 험난하게 지나온 걸 보여 주기라도 할 것처럼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가방을 두고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부끄러워진 서해가 가방을 품에 끌어안았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가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서해는 회사가 다가올수록 심장이 입 밖에 튀어나올 정도로 쿵쿵대는 걸 느꼈다. 앞 유리 쪽으로 회사가 보이자 저절로 숨이 깊게 들이켜졌다. 고개를 돌려 본 한태경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괜히 자신만 긴장한 것 같아 티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검은색 세단이 회사의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난밤에 한태경이 말한 대로 지하 2층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누가 나와서 왜 같이 출근하냐고 물을까 봐 심장이 쿵쾅거렸다.
누가 봐도 잔뜩 긴장한 서해를 힐끔 바라보던 한태경의 얼굴에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지정 주차 영역으로 이동하다가 결국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그렇게까지 긴장할 일입니까.”
“대표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우리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같은 집에서 같이 자고 같이 출근하는 게 신경 쓰인다면.”
“그만, 그만요. 대표님! 으아.”
서해는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 밖으로 튀어나갔다. 한태경의 집에서 나와서 회사로 왔지만 다시 그의 개인적인 공간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회사에서의 자신의 모습이 지난주처럼 느껴지지 않아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가로지르며 잡생각을 털어내려 애썼다.
한태경은 달려나가는 서해를 붙잡지 않고 바라보았다. 대표실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직장 상사로 돌아온 그는 책상에 앉아있는 서해를 불렀다.
“매주 월요일에는 10시부터 임원진 회의가 있는데, 이번 주부터는 서 대리도 참석해야 합니다. 오늘 준비할 건 따로 없고 회의록만 작성해 주세요.”
“네, 대표님.”
“나는 오늘 조찬 모임이 있어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10시에 37층에 있는 대회의실로 와요.”
“알겠습니다.”
서해는 노트북이 부팅되는 동안 핸드폰의 호미파이 앱을 켰다. 블루투스와 와이파이로 잔뜩 연결된 38층 기기 리스트 중 커피 머신을 눌러 아메리카노를 선택했다.
윙―
반대편에 떨어진 커피 머신에서 원두가 갈리고 압착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 차례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원두 냄새가 사무실 쪽으로 흘러왔다.
서해의 휴대전화 화면 위로 아메리카노가 준비되었다는 알람이 떴다. 서해는 반쯤 감은 눈으로 커피 머신으로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서해. 사고 치지 말자. 똑같은 월요일이야.”
창밖의 마천루를 훑어보며 아메리카노를 들이켠 서해는 자리로 돌아와 회의에 참석할 준비를 했다. 공용 서버에 저장되어 있던 회의록 폼을 복사해서 열어두고, 갑자기 등장할 요구 사항 같은 것들을 급히 적어 내리기 위한 포스트잇 앱을 펴서 노트북 화면 한쪽에 펼쳐놓았다. 빨강, 노랑, 파랑으로 나란히 붙어있는 메모는 서해의 꼼꼼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한태경이 별도의 안건을 알려주지 않아 대회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불안했다. 그가 아무런 말도 없었기 때문에 회의록만 작성하면 될 것이라 생각되면서도 혹시나 2주 동안 발행된 보고서에 대한 질문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남은 시간 동안 몇십 건의 보고서를 훑어보고 내려가는 길이었다.
37층 대회의실의 U자형 테이블에는 자리마다 화면이 붙어있었다. 한태경의 자리는 U자로 휘어진 테이블 가장 가운데에 튀어나와 있는 곳이었다.
회의실을 살핀 서해는 각 임원진 자리 뒤쪽의 벽에 배치된 의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자리를 직감적으로 알아챈 서해는 한태경의 의자 뒤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고 작게 붙어있는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펼치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원진들이 비서나 대표 직원을 대동한 채 자리하기 시작했다. 서해는 그들이 들어올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했다.
특유의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해사하게 웃는 서해에게 공격적인 사람은 없었다. 서해는 연구실 교수님과 임원진이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싹싹하게 굴었다.
“아아, 소문의 특별 채용. 만나서 반갑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서해입니다.”
“이름이 외자야? 독특하네. 자네 소문은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지. 손도 빠르고 일도 엄청 잘한다며? 대표님이 특별 채용할 만하다고 소문이 자자해.”
“과찬이십니다, 김 상무님.”
눈치껏 테이블을 살펴 명패를 확인하고 직함을 붙여 부르자 기분이 좋아진 듯한 김 상무는 주위의 임원진을 불러 모았다.
서해가 정신없이 인사하고 있는 동안 대회의실 문을 열고 한태경이 들어섰다. 임원진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서해를 스치듯 바라본 그는 이내 자리로 걸음 했다. 회의실은 여전히 화기애애했지만 임원진들은 각자의 지정석으로 돌아가 회의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9시 59분, 시간에 딱 맞추어 나타난 마지막 임원을 끝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마침 2분기가 시작되려는 시점에 맞물려 앞으로의 운영 방향이나 목표 설정 같은 개괄적인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해는 정면에 설치된 빔프로젝터에서 나오고 있는 마일스톤과 임원진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기록했다.
부서별 상황이 공유되고 회의가 거의 마지막으로 진행될 때였다.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서야 겨우 들어온 임원이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힌 채 한태경과 서해를 번갈아 보았다. 정확하게는 서해를 바라보았다는 것이 맞았다.
“마케팅 부서에서 요즘 날 죽이려 들어서 이거 참 처치 곤란입니다, 대표님. 요즘 부서로 다시 내려오는 첨삭 보고서들이 너무 정확해서 업무량이 두 배로 늘었다고 아주 난리입니다.”
“조 전무님, 바뀐 프로세스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초반에는 적응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겁니다. 각 부서와 팀들이 새로운 포맷에 적응할 수 있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해는 금방 조 전무의 표정을 읽었다. 조 전무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서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 띤 표정을 잃지 않은 서해가 그를 마주 보았다. 이 정도 기 싸움이야 대학원에서 밥 먹듯이 했던 일이다.
“거기 서 대리라고 했나. 시간 나면 내려와서 마케팅팀에 설명 좀 해줘요. 사람들이 어려워해.”
“네, 전무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해는 자신의 대답이 실수는 아닌지 한태경의 뒤통수를 흘끔 바라보며 그의 기분을 읽으려 했으나 좀처럼 그 기분을 알기 어려웠다. 지독한 포커페이스이기도 했고, 워낙에 서늘하게 생긴 얼굴이라 조금이라도 미소가 사라지면 어떨 땐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좋아, 서 대리. 머리 좋다더니 성격도 시원시원하네. 나중에 자리 마련함세.”
“…조 전무님이 이렇게까지 협조해 주시니 든든합니다. 조만간 서 대리가 준비되면 실무진을 대상으로 하는 리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서해는 자신의 대답이 잘못 뱉어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입안을 베어 물었다. 정말 필요해서 리뷰를 진행하려 했다면 한태경은 ‘준비되면’이라든가 ‘마련할 수 있을지’ 같은 불확실한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님이 새로 취임하셨는데 그 방향 따라서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늙은 사람 소리 듣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
서해가 느끼는 임원 회의실의 내부 공기가 묘하게 팽팽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기 싸움이 이어졌고 회의는 11시 30분이 되어서야 끝났다.
서해는 38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해 걸어가며 한태경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제가 괜히 대답한 것 같아요.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잘했어요. 회사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보다는 톡 쏘는 게 낫습니다. 본인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닌 것 같지만.”
“조 전무님은 별도 라인이 있으십니까?”
“…서 대리 판 읽을 줄 아네. 맞습니다. 나랑 썩 좋은 관계는 아닙니다. 내가 신임 대표로 취임하는 바람에 전무를 연임하게 됐거든.”
“그럼 저는 적당히 모른 척하고 지내겠습니다. 제가 괜히 대답해 버려서 마케팅팀에 자리 만들기로 한 건 어떻게 할까요?”
“정말 필요한 사안이면 조 전무가 나에게 다시 요청할 겁니다. 그동안 마케팅팀이랑 따로 얘기한 것 있습니까?”
“아직은 없어요. 연락 오는 내용 알려드릴까요?”
“마케팅 실무진 쪽에서 서 대리 개인 채널로 연락 오는 것들 있으면 부서와 이름 별도로 기록했다가 나에게 넘겨주세요. 보고서 피드백 관련한 질문에 한해서는 친절하게 알려주도록 하세요. 어차피 앞으로 마케팅팀에서 다 소화해야 할 내용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둘만 사용하는 엘리베이터는 내렸던 그대로 37층에 멈춰있었다. 서해가 버튼을 누르자 한태경이 먼저 들어가 가운데에 자리하고 섰다. 갑자기 눈빛이 바뀐 듯한 그를 보고 서해가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서있자 한태경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안 타고 뭐 합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서해는 노트북을 꽉 움켜쥐고 엘리베이터 안에 올랐다. 한 층만 올라가면 되는 짧은 순간이 제법 길게 느껴졌다. 서해는 문이 열리는 순간 왼손과 왼발이 같이 나갈 것 같은 기분에 속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문이 열리기 직전, 한태경의 큰 손이 서해의 머리를 툭 하고 덮더니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금방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손가락은 서해의 셔츠 안쪽으로 들어오더니 목 아래쪽으로 드러난 척추뼈를 살짝 헤집고 빠져나갔다.
갑자기 등을 타고 흐르는 짜릿함에 화들짝 놀란 서해가 한태경을 올려다보았다.
“왜.”
“아, 아니에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의 한태경이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를 보던 서해는 자신이 손길을 오해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다가 한태경에게 또 한 소리 듣게 될까 봐 걱정된 서해가 엘리베이터에서 후다닥 내렸다. 어지러운 월요일이었다.
* * *
서해는 입사한 지 3주 차에 들어서자 그제야 업무가 안정적으로 처리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한태경과의 손발도 안정적으로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업무 스타일뿐만 아니라 이슈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포인트로 파고들어 가는지, 큰 그림과 디테일은 어떻게 맞춰지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3주 차부터는 아웃룩으로 넘어오는 한태경의 피드백도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어떤 분석 건은 보내자마자 ‘OK’ 사인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서해는 한태경이 보내는 그 ‘OK’라는 짧은 메시지가 주는 새로운 즐거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피드백을 대기할 때면 긴장감에 가슴이 떨리기도 했지만, 한 번에 업무가 끝날 때의 쾌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태경과 워킹 라이프와 스타일이 비슷해지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에 패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간단히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 일정에 대해 회의하고, 오후 네 시쯤이면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강제가 아니면 책상에 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 서해를 위해 그가 억지로 만든 휴식 시간이었다.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도 좋지만, 번아웃이 생기면 결국 의미 없는 일이라는 기분 좋은 잔소리도 빠지지 않았다.
그 외에 새롭게 생긴 일들도 있었다. 한태경이 보내오는 연구 보고서들 외에 메신저로 이것저것 물어오는 담당 직원들이 생겨났다. 대표의 권한하에 직접 검증된 자료를 배포하고 있었지만 감히 그에게 질문할 수 없었던 직원들이 서해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한태경이 언급했던 것처럼 마케팅 직원들이 섞여있었다.
서해에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끝 날리는 회사에 다니는 직원들은 전반적으로 평균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를 설명하면 다섯 개, 여섯 개까지 자동으로 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Q&A는 메신저나 사내 전화로 해결되었다. 그러다 가끔 대화가 길어지면 사내의 카페테리아에 있는 회의실에서 대화가 진행되기도 했다.
서해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시작은 나이브레티 권율기 상무의 압박으로 들어온 회사였지만, 지금은 글로벌유니티가 정말 서해가 소속될 회사라고 여겼다.
주중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벌써 금요일 오후 4시였다. 서해는 대표실 문을 짧게 두 번 두드리고 들어섰다.
“대표님, 저 커피 마실 건데 차 드시겠어요?”
“아, 부탁합니다. 밖으로 나갈게요. 응접실 테이블로.”
서해가 몇 주 동안 지켜본 한태경은 오전엔 카페인 종류의 음료를, 오후엔 디카페인 종류의 음료를 마시는 것을 발견하고 미리 자리에 세팅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나온 그의 손엔 태블릿이 들려있었다.
한태경은 재킷을 벗어 흰 셔츠와 넥타이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몇 번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단단하게 잡힌 근육과 팔꿈치까지 타고 올라가는 선 굵은 핏줄이 보였다.
물끄러미 팔을 바라보다가 서해를 바라보는 그와 시선이 얽어져 서둘러 말을 돌렸다. 몰래 훔쳐보다 들킨 것 같아 괜히 심장이 쿵쿵거렸다.
“바쁘세요? 도와드릴 일 있으면 말씀 주세요.”
“사람이 요령 없기로는 서 대리가 제일이겠습니다. 본인 일 끝났어도 적당히 숨기면서 퇴근 기다리는 법도 좀 배우세요.”
“…어차피 같이 집에 갈 거잖아요.”
“말대꾸는. 서 대리한테 부탁할 만큼 바쁜 일은 없습니다. 좀 살펴볼 게 있어서. 이거 좀 보겠습니까?”
한태경이 내민 태블릿 안에는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인 CES Summer Show 팸플릿이 띄워져 있었다.
“CES 박람회가 여름에도 열려요?”
“올해 한정으로 진행됩니다. 6월 예정이고 우리도 참가할 거예요. 서 대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호미파이로.”
“우와.”
“서 대리도 나랑 같이 참석하게 될 겁니다. 가서 다른 회사는 어떻게 크고 있나 직접 보고 남아있는 펜 냄새도 좀 떨쳐버리고 옵시다.”
“저도요?”
“여기 서 대리 말고 누가 또 있습니까?”
“어… 감사합니다.”
“현지에서 보고서 쓰려면 고생할 겁니다. 해외 학술지 논문들 본인이 번역한 것 맞습니까?”
“제가 직접 썼어요. 박람회 세션 정도는 현장에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잘됐네요. 회사 경영지원팀에 얘기해서 여권부터 만들어 두세요. 언제든 나갈 수 있게.”
“네, 알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부탁할 게 있습니다. 국내 기업끼리 오프 더 레코드로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무거운 자리는 아니고 이번 CES에 참석하는 대표들끼리 서로 가볍게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서해는 흥분된 상태로 38층을 뛰어다니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첫 해외 일정이 뉴스로만 접하던 CES라니.
“다음 주 목요일에 약속이 있는데 서 대리가 내 비서 자격으로 같이 참석합시다. 각 회사 대표들 모이는 자리니까 코디네이팅해 준다고 생각하고 가면 됩니다. 이런 자리 겪어본 적 있습니까?”
“아니요. 설명해 주시면 맞춰서 준비할게요. 미리 세팅할 게 따로 있나요?”
“그럼 다음 주에 아웃룩으로 리스트 전달할 테니까, 차주 업무 1순위는 그걸로 잡고 진행해 주세요.”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네.”
“그 옷 입고, 그 학생 가방 들고 갈 만큼 가벼운 자리는 아니니까 오늘 퇴근하면서 잠시 백화점 들렀다가 집으로 갑시다.”
서해는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한태경과 백화점을 돌아다니고 옷을 고르는 상상을 짧게 한 서해는 눈을 깜박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갑자기 서 대리에서 서해로 돌아와 버렸다.
“까, 깔끔한 거로 제가 가서 사고 집으로 갈게요, 대표님.”
“금요일 퇴근 후부터 월요일 새벽까지는 내 명령에 따르세요. 앞으로 예외는 없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말대꾸하거나 멋대로 행동하면 혼날 테니까 행동 조심해요.”
갑자기 양쪽 귓가에 떨어지는 날 선 명령에 서해가 움찔하고 굳었다.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첫날 약속했던 대로, 서해 씨가 싫어하는 것은 아무것도 추가되지 않을 겁니다. 세이프 워드를 사용하면 언제든 멈추겠다는 약속도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회사에서 갑자기 그날의 작은방으로 소환된 것 같은 느낌에 반사적으로 어깨가 앞으로 말렸다.
한태경은 느긋하게 차를 다 마시고 방으로 사라졌다. 서해는 응접실을 몇 차례 맴돌다가, 창가를 서성이다가 겨우 자리에 가서 앉았다. 갑자기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초조한 기운을 누를 방법이 없었다.
서해는 티타임 이후 퇴근까지 남은 두 시간 내내 한태경이 뱉은 말을 곱씹으며 자신이 뭐에 사인했던가를 더듬었다. 답답했지만 그날 요구 사항에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자신이 하지 않기로 한 플레이는 기억났지만 무엇을 하겠다고 했는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뜯다시피 하던 서해는 퇴근을 위해 대표실 문을 열고 나오는 한태경과 눈이 마주쳤다.
“뭐 합니까?”
“아, 이제 일어서려고 하던 중이었습니다.”
서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흔들고 한태경을 따라나섰다.
언제나처럼 차를 탔지만 평소와는 다른 길로 운전이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건물의 1층 발렛 구역에 차를 내려두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반짝이는 조명과 여기저기 달린 배너 광고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이지 않는 화려한 벽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와 서해가 사는 세상이 분명히 나뉘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서해는 잔고를 더듬어 보다가 난감해졌다.
“옷이라고는 사본 적 없는 것 같으니 내가 추천하는 곳으로 갑시다. 오늘은 내가 사줄 테니까 입사 축하 선물 정도로 생각하고 받아요.”
서해는 머리 위에서 낮게 울리는 한태경의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아본 적이 언제였던가를 더듬다가 문제는 그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백화점에서 옷을 사 입어본 적도 없었고 그런 것을 기대한 적도 없었다. 한태경은 서해의 표정을 읽었는지 이마에 손가락을 튕겨 꿀밤을 날렸다.
“앗!”
“감사하게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즐거움을 망치지 말아요.”
“그렇지만….”
“따라와요. 서 대리는 체격이 작아서 고를 수 있는 브랜드가 몇 개 없습니다.”
한태경은 1층 옆으로 위치한 통로로 걸어갔다. 울기 직전인 표정의 서해는 통로 문을 열고 들어선 다음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다. 베이지색 마블 대리석으로 꾸며진 사방 공간에 이름 모를 외국 브랜드가 몇 군데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는 게 보였다.
중앙을 가로질러 대각선 쪽에 있는 D 브랜드로 걸어갔다. 가는 동안 몇 개 매장의 매니저가 한태경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오늘은 자신의 옷을 사러 온 게 아니라며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매장 직원은 입구까지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편히 둘러보다가 도와드릴 것 있으면 말씀 주세요.”
“블랙, 네이비, 그레이로. 더블 브레스트랑 싱글 브레스트 각각 하나씩 부탁합니다. 다른 디자인이 있으면 똑같이 더 챙겨주세요.”
“네, 고객님. 사이즈는 어떻게 드릴까요?”
“본인 사이즈 알아요?”
뭔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서해가 대답을 망설이자 판매 직원이 눈치껏 가늠하더니 한태경을 보고 말했다.
“작은 사이즈 드려야 할 것 같아요. 42랑 46 둘 다 드릴 테니까 입어보시고 결정하시는 게 어떠세요.”
“부탁합니다.”
“자, 잠깐만요. 대표님.”
큰 목소리를 낼 수 없어 속삭이듯 말하며 한태경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매장 한쪽에 마련된 카우치에 가서 앉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서해는 야무진 매장 직원의 손에 이끌려 피팅 룸으로 들어갔다. 직원은 셔츠와 타이까지 하나씩 쥐여준 다음에야 피팅 룸을 빠져나갔다.
서해는 큰 거울 앞에 서서 옷걸이에 주르륵 걸려있는 슈트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슈트였다. 손으로 만지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바람에 옷을 바라보고 한참을 서있었다.
밖에서 매장 직원이 노크하며 불편한 것 없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모두를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서둘러 손에 잡히는 더블 브레스트의 네이비 슈트를 집어 옷을 갈아입었다.
서해는 몸에 딱 맞으면서도 부드럽게 감겨오는 옷감과 핏에 신기한 듯 거울을 쳐다보았다. 몸을 이리저리 돌려 거울을 보다가 고개를 쑥 돌려 뒷모습도 확인했다.
아빠 옷을 빌려 입은 것같이 어색하던 신입 사원의 모습은 없었고 부잣집의 도련님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다.
단정한 자세로 거울을 마주 보자 지금까지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벽을 넘어 그가 사는 세상에 들어온 듯 느껴지기도 했다.
왼손, 왼발이 같이 나가려는 것을 겨우 눌러 참으며 피팅 룸 밖으로 빠져나왔다. 매장 직원과 매니저가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해를 보자마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와, 너무 예쁘다. 우리 옷 잘 소화하시네요. 비율이 좋아서 바지 길이만 맞추면 되겠어요.”
“어, 네. 그런데, 그게.”
한태경은 고개를 돌려 서해를 바라보았다. 제법 잘 다듬어진 듯한 모양새가 되어 보였다. 서해를 바라보는 시선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옷을 뚫고 들어올 것 같은 느낌에 서해가 먼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이게 몇 사이즈입니까?”
“아, 잠시만요. 46사이즈네요.”
“그럼 46사이즈로 담아주세요. 셔츠도 개수 맞춰서 기본 화이트로 같이 넣어주시고 넥타이도 옷에 맞게 부탁합니다. 기본 티셔츠랑 캐주얼 스타일도 네다섯 개 주세요. 디자인 심플한 것으로, 컬러는 화이트나 블랙 계열로.”
“대, 대표님….”
“갈아입고 와요. 바지 수선하는 동안 구두 사러 가야 하니까.”
매니저는 피팅 룸으로 돌아가는 서해 옆에서 선물 받는 거냐고, 너무 부럽다며 재잘댔다.
서해는 대답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피팅 룸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차례대로 가격표를 뒤집어본 순간 턱- 하고 막히는 숨에 자리에서 얼음처럼 굳었다. 재킷 하나 가격이 자신의 월급과 맞먹는 가격이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간 서해는 이런 건 받을 수 없다고 말하려 했으나 이미 계산을 마친 한태경은 서해의 손목을 잡아끌고 매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마터면 매장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칠 뻔했다.
“대표님, 너무 비싸요. 이런 건 못 받아요.”
“여기서 혼나고 싶습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
서해의 눈썹이 어쩔 줄 모르고 양쪽 아래로 축 처졌다. 벌써 잔뜩 혼난 강아지 같은 모습에 한태경은 올라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 이마에 꿀밤을 다시 남겼다. 무거운 체벌을 두려워할지도 모를 서해에게 딱 맞는 정도였다.
“앗!”
“지금 몇 번째 거절인지 알고 있습니까? 잘 세고 있으세요. 집에 가면 그대로 혼날 테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랑 같이 다닐 때는 내가 사준 대로 입고 다니세요. 자리에 맞는 복장을 갖춰야 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그냥 사주는 옷이 아니에요. 비즈니스 모임이 많아질수록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
“…네.”
“다 이해했으면 따라와요. 구두랑 운동화 몇 개 사고, 브리프케이스랑 백팩 몇 개 사면 급한 쇼핑은 끝납니다.”
2층과 3층을 한 바퀴 돌고 나자 한태경의 양손에는 몇 개의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그와 함께 마지막으로 들어간 언더웨어 매장에서 서해는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안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물끄러미 서있는 동안 무더기로 쏟아지는 드로어즈를 눈만 끔벅이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1층에 돌아오자 스무 개는 되어 보이는 쇼핑백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고객님, 수선 완료해서 담아 두었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어요?”
“갈아입고 갑시다. 다녀와요.”
서해는 매니저가 쥐여주는 가먼트백 두 개를 들고 피팅 룸으로 다시 들어갔다. 검은색의 더블 브레스트 슈트였다. 자신이 입고 있던 검은색 슈트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잘 잡힌 라인과 부드러운 원단이었다.
구두를 신자 딱 맞게 떨어지는 바지 길이가 놀라웠다. 서해는 쭈뼛거리며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어머, 하얀 피부라서 검은색도 잘 맞는다. 모델 같으세요, 고객님. 자주 오세요. 다음 달에 신상 나와요.”
한태경은 매장 매니저가 서해에게 건네는 명함을 가로채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명함을 받으려던 서해의 손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췄다. 매니저는 아쉬운 표정으로 웃음 짓다가 물러섰다.
서해는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매장 바닥에 잔뜩 놓여있는 쇼핑백을 훑어보았다. 둘이서 들고 가는 것이 가능할지 고민하던 중, 매니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와 트렁크에 올려주고 사라졌다.
돌아가는 매니저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는데, 서해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30분이 채 되지 않아 발생한 매출액 앞에서 어떤 매니저가 기쁘지 않을 수 있을지.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올라탄 다음엔 어색한 기운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주 말 안 듣기로 작정했지. 나랑 같이 다니려면 입고 왔던 옷은 다 정리해요. 새로 채워 주겠습니다.”
“이렇게 비싼 줄 알았으면 들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내 지갑 사정 걱정은 내가 할 테니까, 서해 씨는 오늘 집에 도착하면 본인 혼날 거부터 걱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내 말 안 듣고 버틴 게 몇 번인지 모르겠네.”
서해는 기어를 바꾸어 속도를 올리는 한태경의 표정을 보며 그의 말이 진심인 것 같아 다시 울고 싶어졌다.
집으로 달려가는 길에는 그 흔한 교통 체증 한번 없었다. 마주 잡은 손가락 끝에서 초조함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수석에 우두커니 앉아 혼날 거라던 말을 곱씹자 관자놀이가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긴장감이 이어졌다.
* * *
“드레스 룸 비워 뒀으니까 오늘 산 것만 정리해 두고 바로 복도 끝 방으로 들어오세요. 시간 충분히 줄 테니까 급하게 올 필요 없습니다. 옷은 지금 입고 있는 그대로 입고 오고.”
서해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한태경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혼날 거라고 서늘하게 말하던 사람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한태경의 집에 온 이후 처음으로 명령을 받고 방에 들어서는 날이었다. 아직 실감 나지 않은 이야기에 서해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문 열어둘 테니까 준비되면 들어오면 됩니다.”
방문 앞에 가득 놓인 쇼핑백을 낑낑거리고 들어선 서해의 머리 위로 박스가 날아와 침대 위로 떨어졌다.
옷을 감싸고 있는 비닐 팩을 뜯을 정신도 없이 부리나케 옷장에 걸어두었다. 다시 다가와 침대 위에 떨어진 양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박스를 뜯은 서해는 손에 든 물건을 그대로 침대 위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흥분해 날뛰었다.
박스 안에는 검은색 가죽으로 된 초커 그리고 체인이 들어있었다. 멀리서 박스를 공격적으로 쳐다보던 서해는 천천히 손을 뻗어 초커부터 손에 잡았다. 박스 안에 따로 포장되어 있던 체인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박스 뚜껑 안에는 시원시원한 필체로 ‘내키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한태경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강요당하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선택은 서해의 몫이었다.
권율기로부터의 안전함을 보장받고, 회사에서의 자리도 보장받은 상황 앞에서 또다시 흔들렸다. 짧은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이대로 가지 않으면 언제까지 기다린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오묘한 메시지에 다시 고민했다.
방으로 들어서면 기다리는 것이 다정한 손길이 될지, 매서운 손길이 될지 모르지만 생각의 끝은 결국 한태경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서해는 새로 산 옷의 셔츠 단추를 풀고 목을 쓰다듬었다. 분명 초커를 걸고 들어오라고 보낸 것 같았다. 초커를 들고 아래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결국 방향을 찾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목에 걸어보았다. 다행히 틈이 넉넉한 것 같았고 가죽도 부드러웠다.
몇 차례 목을 쓰다듬어 보다가 침대 위에 초커와 체인을 나란히 내려두었다. 어중간하게 서있다가 침대 위의 물건과 눈싸움을 15분간 한 다음에야 겨우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스스로 초커를 목에 걸자 스스로 선택하고 마주하게 된 부끄러움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해는 화장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양 뺨을 살짝 두드렸다. 찬 기운이 올라오자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을 때 결국은 아무 소용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목에 걸린 초커가 주는 심리적인 압박감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울을 보며 초커를 잠그는 스스로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저절로 숨이 들이켜졌다.
거울 앞에서 몇 차례 심호흡을 반복했다. 흩어진 셔츠 자락을 정리한 뒤 손에 체인을 감아쥔 서해는 한태경이 기다리고 있을 복도 끝 방으로 걸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진 복도에는 간접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복도 끝에 있는 새카만 문이 공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 한 뼘 정도 열려있는 문틈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대, 대표님.”
서해의 잠긴 목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열렸다.
한태경은 베드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서해를 바라보았다. 초커는 하고 왔지만 엉성하게 얼기설기 엮여있는 그 모습을 본 한태경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서해를 불렀다.
“문 닫고 와야지.”
서해는 한태경의 말에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뒤 문을 닫았다. 등 뒤에서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테이블 위는 말끔하게 비어있었고 침대 위에도 별다른 것이 나와 있지 않은 것이 보였다.
서해는 쭈뼛거리며 아주 조금 더 다가섰다. 종일 일해서 피곤했던 것도, 조금 전에 백화점에 다녀와 그에게 너무 비싼 물건을 받게 되었다고 툴툴거린 것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모든 상념이 사라진 작은 공간 안에는 오롯이 둘만 존재했다.
한태경은 문 앞에 바짝 붙어서서 다가오기를 망설이는 서해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검은 눈동자, 상기된 뺨, 하얗게 드러난 목이 보였다. 평균보다 약간 마르긴 했지만 슈트가 제법 잘 어울리는 몸이었다.
한태경의 시선은 살짝 풀어 헤쳐진 셔츠 사이로 향했다. 긴장해서 위로 올라붙은 어깨가 아래위로 들썩이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그렇게 경계하지 말고.”
서해는 한태경이 가리킨 곳과 그의 시선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의자 위에 앉은 한태경은 어깨너비만큼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의 손가락이 왼쪽 허벅지를 가리키다가 그 위에 내려앉는 게 보였다.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켠 서해는 손에 들고 있던 체인을 만지작거렸다.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다면 앉을 곳은 의자가 아니라 저 다리 위라는 의미였다. 팔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숨소리가 가빠졌다.
“말 안 들을 거면 지금이라도 다시 문 열겠습니다.”
발끝에 힘을 주고 한태경의 앞에 가서 섰다. 한태경은 서해의 손에서 체인을 받아들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서해와 맞닿은 한태경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시도는 좋았는데 엉망진창이네요. 착하게 하고 왔으니 한 번은 봐주겠습니다.”
“앗.”
한태경은 서해의 오른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왼쪽 허벅지 위에 앉혔다. 서해는 갑자기 바뀐 눈앞의 시야에 적응하기도 전에 엉덩이가 뒤로 흘러내릴 것 같아 당황했다. 그러자 그가 서해의 두 손을 잡아 가슴 앞으로 모아주며 단단히 그러쥐었다.
“새로 채워줄 테니까 이쪽으로 봐요.”
“…네.”
“엄청난 거 하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걱정 말고 긴장 풀어요.”
알겠다고 대답한 것이 무색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예상되지 않아 무서웠다. 얼굴을 마주 보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엉덩이에 스치는 감각이 생경했다. 다리를 조금 더 벌리는 한태경의 행동에 엉덩이가 비벼지는 듯해서 급하게 바닥에 까치발을 디뎠다.
“윽.”
한태경의 손가락이 서해의 목덜미로 들어와 엉성하게 매여진 초커를 풀어 내렸다. 막상 목에 풀려있던 것이 빠져나가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서해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초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잘 봐요. 위아래도 바뀌었고 단추는 투 버튼이라 안쪽에 채워야 합니다. 버클은 그 바깥쪽에 붙은 거고. 흠, 서해 씨 목에 맞아 보이는 거로 새로 주문했는데 사이즈는 다행히 잘 맞네요.”
서해는 한태경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목을 파고들어 오자 어깨를 움츠리고 그의 품에서 멀리 떨어졌다.
갑자기 다가오던 손이 멈춰진 걸 보고 고개를 돌리자 그가 무표정하게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부터는 피하면 혼납니다.”
한태경은 서해의 목 뒤로 초커를 둘렀다. 가죽의 차가운 감각이 목을 휘감자 서해가 어깨를 살짝 떨었지만 아까처럼 몸을 물리거나 피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죽 줄과 서해의 목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버튼을 채웠다.
“아, 윽….”
서해는 자신이 했을 때보다 훨씬 더 타이트하게 맞아들어 가는 초커 때문에 잠시 숨을 멈추며 눈을 깜박였다. 목에 넉넉하게 감아두었을 때는 몰랐는데 숨을 크게 들이켜자 빠듯하게 맞아오는 게 느껴졌다.
다시 숨을 골라내는데 한태경의 손가락이 휙 하고 움직이더니 버클을 단단히 채우고 몇 차례 흔들었다.
“딱 맞네요. 불편한 데 있습니까.”
“아니요.”
“따갑거나 많이 조이지는 않습니까.”
“어, 괜찮아요.”
“집에 있을 때는 항상 하고 있어요.”
“…네?”
한태경은 서해의 동그란 이마를 튕기면서 단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시원한 눈매가 반쯤 내리감겨 있었고 입이 일자로 굳게 닫혀있었다. 덜컥 겁이 난 서해가 가슴 앞에서 흩어져 있던 손을 교차시켜 잡았다.
“말대꾸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세요.”
초커에 달려있던 버클을 몇 차례 쓸어내리던 한태경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체인을 연결했다.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체인 끝의 가죽 줄을 손에 감아쥐고 서해를 바라보다가 체인을 몇 차례 잡아당겨 잘 연결되었는지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던 서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 보니까 또 야한 생각 중인가 봅니다.”
“…아닌데요.”
“회사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적응력이 빠르네요.”
한태경은 서해를 들어 올려 침대로 데려갔다. 갑자기 시야가 요동치고 주위에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서해가 눈을 떠보자 그가 자신이 누워있는 자리 옆에 걸터앉아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방에 들어와서는 내가 하는 말에 그대로 따라요.”
한태경은 한쪽 손에 체인을 몇 차례 감아쥔 뒤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뻗어 서해의 상체를 덮고 있는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한태경의 손끝이 목덜미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긴장하지 말고.”
“대표님….”
“싫으면 얘기해요. 언제든지 멈출 테니까. 그런데 나는 서해 씨가 조금 참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중요한 일을 할 예정이라.”
셔츠가 순식간에 두 번째 단추까지 풀어지자 서해는 한태경의 손을 덥석 잡고 그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옷이 벗겨질 것 같았다.
서해를 내려다보던 한태경은 단추를 풀어 내리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마주 보고 얼굴을 바짝 붙였다.
깜짝 놀란 서해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한태경의 코끝이 서해의 코끝에 닿자마자 서해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자리에 누워서 몰아쉬는 숨결에 따라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초조한 가운데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거울 보고 왔습니까? 목선이 예뻐서 잘 어울리는데.”
“흣.”
한태경의 손끝이 초커 가장자리를 천천히 왕복하자 서해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서해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앉았다. 서해의 표정을 잘 살핀 뒤 체인을 침대 아래쪽에 있는 기둥에 고정했다.
서해는 눈을 들어 체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누워있는 자리에서 더 벗어나기 어려울 만큼 팽팽하게 묶여있었다. 다급히 체인이 묶인 기둥과 자신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눈동자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꿀을 머금은 듯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있는 걸 그대로 썼다간 서해 씨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서 몇 개는 새로 주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체가 앞으로 조금 쏟아진다 싶더니 한태경의 손가락이 벌어진 셔츠 틈으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찾아온 낯선 느낌이었다. 한태경의 손가락이 오른쪽 유두를 천천히 비벼 누르기 시작했다.
서해가 침대 위로 파드득 튀어 올랐지만 그는 가슴을 누른 손의 힘을 더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간지러운 느낌에 몸이 자꾸 한쪽으로 틀어졌다. 생소한 감각이 몸을 뒤덮었다.
“갑자기 움직이면 목 다칩니다.”
“아, 흡.”
“색깔이 예쁘네. 피부도 얇고. 누가 만져준 적은 없습니까?”
입을 벌렸다가는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서해는 숨을 겨우 뱉어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둘째손가락을 좌우로 빠르게 비벼대던 한태경은 엄지와 검지로 오른쪽 유륜을 쥐어짜듯 들어 올려 눌렀다. 손으로 집어 올릴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숨어 들어가는 유두를 기어코 잡으려는 움직임에 서해의 몸이 저절로 틀어졌고, 억눌러 참는 요령이 없는 신음이 그대로 방 안에 흩어졌다.
“대답해야지. 누가 만져준 적 없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없, 없어, 요. 없어요, 대표님.”
“다행이네요. 앞으로 내가 잔뜩 만져 주겠습니다.”
잔뜩 비벼대던 손가락을 떼어내자 긴장한 오른쪽 유두가 볼록하게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한태경은 유두 끝을 튕기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움직이지 말고 손바닥 아래로 해서 침대에 붙여요.”
아무렇지 않은 일상적인 얘기를 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서해의 귓가를 파고들어 왔다. 서해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깐 채 손바닥을 아래로 내린 상태로 침대에 붙였다. 그러자 가슴을 꾹 누르고 있던 손이 잘했다는 듯 가슴을 토닥여왔다.
그 모습을 본 서해가 안심하면서 몸에 긴장을 푼 순간, 다시 홧홧한 감각을 느낄 정도로 세게 짓이겨지는 유륜을 쳐다보다 버틸 수 없는 감각에 고개를 뒤로 젖히고 넘어갔다. 앞서서 짧게 끊어가며 자극하던 것과는 달리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반사적으로 튀어 오르는 어깨를 눌러 내리느라 무던히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움직이지 말라니까.”
“아, 앗, 흡….”
서해는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눌러 참았다. 무서웠다. 허공으로 솟아오른 손을 다시 침대로 가져다 붙였다. 그러자 이대로 없애버릴 것처럼 문지르던 한태경의 손끝이 거짓말처럼 다시 부드러워졌다.
살짝 볼록하게 올라와 있는 유두를 손톱 끝으로 톡톡 건드리던 한태경과 눈이 마주쳤다. 믿을 수 없게도, 가슴 위로 달콤한 칭찬이 쏟아져 내렸다.
“착하네.”
오른쪽 유두 뒤편에 신경 다발이라도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엉덩이까지 연결된 것 같은 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거칠어진 숨소리를 다스릴 방법이 없어 입술을 깨물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겨우 숨을 고르는 서해를 바라보던 그는 오른쪽 유두 끝을 쥐어짜듯 들어 올렸다. 그러자 흔들리는 눈동자가 한태경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금방 커지네. 귀엽게.”
“으, 아읏.”
몸부림쳤지만 허벅지 위에 올라타고 양팔로 내리누르는 한태경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애초에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배꼽 아래쪽까지 연결된 이상한 느낌이 짜릿짜릿했다.
그는 가슴을 누르던 손을 떼고 왼쪽 유두도 동시에 집어 올리기 시작했다. 몸을 뒤채는 서해의 양쪽 유두에 꿀밤을 때리는 것처럼 손가락을 튕기던 움직임이 멈췄다.
“가만히.”
“아… 흡.”
“둘 다 예쁘게 부어올랐는데, 한번 보겠습니까?”
눈을 감고 있던 서해는 고개를 저었다.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그렇게 매너 좋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갑자기 노골적이고 집요해진 사람이 서해를 누르고 있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돌기를 손끝을 살살 돌려가며 서해를 애태웠다.
가볍게 돌리던 손길이 점차 멈춰들더니 제법 센 강도로 다시 꼬집어오기 시작했다. 들썩거리는 가슴이 정신없이 아래위로 움직였고 손과 발이 뻣뻣하게 경직됐지만 여전히 꼼짝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나중에 보든가. 지금은 내가 보는 게 더 중요하니까. 평소에는 어느 정도인지, 한계까지 자극하면 얼마나 커지는지 모두 살펴볼 겁니다. 그래야 플레이하는 중에도 다치지 않을 테니까.”
“하아, 아윽. 대, 대표님.”
“왜.”
한태경은 몇 차례 자극을 가하자 제법 도톰하게 올라오는 유두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손끝에 감겨오는 감도나 색깔 모두 만족스러웠다. 그는 양쪽 유두를 넉넉하게 쥐어 잡은 뒤 혀로 핥아 올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서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발버둥 쳤다. 입을 크게 벌리고 호흡하려 했지만 자꾸 간지러워지는 아랫배에 턱턱 걸리는 숨을 겨우 몰아쉬었다.
침대 시트에 붙어있던 손이 허공 여기저기를 휘젓다가 한태경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단단하고 넓은 어깨는 손에 잡히지 않아 손을 펴고 올려놓은 수준에 가까웠다.
한태경의 혓바닥이 왼쪽 유두 끝을 콕콕 찌르다가 넓게 핥아 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한입에 쑥 먹혀들어 갈 때는 등이 옆으로 몇 차례나 틀어졌다. 떨어져 나갈 것처럼 빨아들여진 유두가 다시 입 밖으로 빠져나온다 싶더니 이 끝에 걸려든 게 느껴졌다.
“흐, 흐으… 대표님.”
“쉬. 가만히.”
“오늘, 안 하신다고, 앗.”
“맞습니다. 근데 중요하게 할 일이 있다고는 하지 않았습니까.”
한태경은 서해의 왼쪽 유두를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것처럼 앞니로 씹어댔다. 울먹거리는 서해의 목소리가 거칠게 걸려 올라왔지만 그럴 때면 그는 다시 부드럽게 머금고 서해를 달랬다.
“힘 빼요.”
“흐으. 아, 앗.”
“왜. 반대쪽도 해달라고?”
말을 끝까지 마칠 수도 없었다. 불같은 자극이 이내 오른쪽 유두에 내려앉았다. 한태경은 이를 세워 아주 살살 달래듯이 잘근잘근 씹어대기 시작했다.
서해의 가슴팍이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는 다시 혓바닥으로 연거푸 쓸어 올렸다. 생각보다 더 부드러운 피부가 입술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참을 수 없는 감각에 서해의 발끝이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이 닿아있는 한태경의 슈트가 엉망으로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화들짝 놀란 듯 손을 떼어내고 어깨에 팔목을 가져다 댄 채 주먹을 쥐었다. 서해는 품 안에서 빠져나오려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그는 몸으로 서해를 압박하며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만져주니까 좋아 죽겠습니까?”
“흐, 흐읏. 응….”
갑자기 입에서 빠져나온 유두 위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양쪽 엄지손가락을 펴고 유두 주변을 돌려가며 서해를 애태웠다. 이미 부풀어 오른 돌기가 손가락 좌우에 치여 여기저기 비벼졌다.
“지금 당장 클립 꽂아놓고 실컷 빨고 싶네요. 서해 씨가 울고불고할 때까지.”
“아, 읏, 흑.”
그는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으로 서해의 양쪽 유두를 몇 차례 가볍게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꼼짝없이 품 안에 갇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을 벌렸지만 숨을 들이켜기 바쁜 서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주문해 놓을 테니까 다음에 써봅시다.”
“흐읏!”
“대답.”
“…네. 흐, 읍.”
서해가 대답이 없자 한태경은 양쪽 유두를 세게 쥐어 잡았다. 서해는 어지럽게 빙빙 도는 것 같은 느낌에 숨을 헐떡이며 겨우 대답했다.
기어코 알았다는 대답을 들은 한태경이 손을 떼는 게 느껴졌는데, 척추를 타고 찌르르한 감각이 흘러내려 발가락을 접었다 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밭은 숨을 내뱉는 서해의 얇은 뱃가죽이 아래위로 흔들리며 가운데부터 옆구리까지 벌어져 내린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났다. 서해는 명치부터 옆구리까지 손가락 끝을 세우고 천천히 내려오는 한태경의 노골적인 손놀림에 그의 어깨를 누르며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다.
“가만있어야지. 말라빠진 줄 알았더니 선이 예쁘네.”
“앗, 아, 아….”
한태경의 손가락이 갈비뼈 아래쪽을 꾹꾹 누를 때마다 서해의 숨소리가 짧게 끊어졌다.
“로프는 새로 준비해야겠습니다. 서해 씨 피부가 너무 얇아서 지금 있는 걸 그대로 사용하다가는 금방 빨갛게 피부가 다 까지겠습니다.”
“흐, 흐읍.”
“쉬, 쉬. 이러다 넘어가겠네. 숨 천천히 쉬어요.”
부드럽게 달래는 목소리가 무색하게 그는 명치와 갈비뼈 끝 라인을 따라 짧은 키스를 연달아 남겼다. 온몸을 뒤덮는 간지러운 느낌이 계속됐다.
“원래 체온이 높은 편입니까. 엄청 따뜻하네.”
“모르겠, 으, 흐윽….”
한태경은 갑자기 서해의 갈비뼈 중간 어디쯤을 약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살짝 입을 떼고 본 피부가 빨갛게 올라와 있었다.
“이렇게 자국이 잘 남으면 보이는 데는 손도 못 대겠네. 허리 한쪽으로 뒤틀면 다치니까 자세 바로 하세요.”
한태경이 긴장을 풀라는 듯 양손을 넓게 펴고 양쪽 옆구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해는 한쪽 팔을 꽉 잡고 그를 불렀다. 양쪽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단정하던 검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서해의 이마를 덮고 있었다.
“대, 대표님.”
“왜.”
“…너무 간지러워요.”
“미치겠네.”
가뜩이나 낮은 편인 한태경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는 서해의 목 뒤편을 단단히 고정한 채 몸 위로 쓰러졌다. 촉촉한 눈동자가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혀를 내밀어 도톰한 아랫입술을 핥아 올렸다. 서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도 진득하게 아랫입술을 한 차례 더 핥았다.
“하아… 읏.”
“눈도 예쁘고.”
서해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걸 보았지만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을 본 한태경이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키스하고 싶은데.”
“…너무 세게만 하지 않으시면.”
서해의 눈꺼풀이 반쯤 내려옴과 동시에 손이 한태경의 어깨에 올려졌다.
큰 손이 서해의 목부터 뺨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에 부드럽게 걸리는 귓바퀴를 밀어 올리며 다시 아랫입술을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다. 도톰한 입술이 들어 올려지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서해는 한태경에게 아랫입술을 내어준 채 웅얼거렸다.
“대표님도 대답, 해주세요.”
“알았어.”
한태경은 혀를 길게 빼어 물고 서해의 입술을 몇 차례 더 두드렸다. 금방 도톰하게 부어오른 입술을 쳐다보다가 그대로 서해의 입술 전체를 삼켰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놀란 서해는 숨을 들이켜려 입을 벌렸는데 한태경이 그 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어 왔다.
“읍.”
두꺼운 상체가 서해를 꼼짝하지 못하게 누르고 있었다. 가지런한 치열과 통통한 혓바닥, 위로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천장까지 꼼꼼히 살피듯 둘러본 한태경은 방황하듯 가운데 서있는 혀를 감아 세게 빨아들였다.
혀가 빠질 것 같은 강렬한 키스에 서해는 잡고 있던 한태경의 어깨를 세게 밀어냈다.
“아, 읏….”
“하아.”
갑자기 찾아온 서늘한 느낌에 서해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한태경의 품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등 아래로 단단한 팔이 들어와 허리를 꽉 잡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끌어내렸다.
목에 하고 있던 초커가 침구 어딘가에 걸려 잠시 목을 옥좼다. 답답해진 서해가 몸을 물리려 하자, 한태경의 긴 손가락이 체인을 정리해 주며 다시 입술을 잡아먹을 듯 덮어왔다.
“흐, 흐읍. 대, 대표님…. 읍.”
혓바닥이 엉망으로 얽어지고 윗입술이 찢어질 것처럼 빨아들여지더니 서해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최대로 벌리고 있던 동그란 입 한쪽으로 서로 주고받던 타액이 흘러내렸다.
서해는 한태경의 어깨를 밀어내다가 두드리기를 반복했다. 서해의 손길이 다급해지자 키스는 잠시 부드러워졌다. 두 손으로 어깨를 밀어내기 시작하자, 한태경은 서해의 양쪽 손목과 손바닥을 잡은 뒤 침대로 내리눌렀다.
밭은 숨이 내뱉어지는 소리를 들은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해의 입술에 연달아 버드 키스를 날렸다. 품 안에서 가파른 숨을 내쉬고 있는 서해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맛있네.”
“콜록. 하아, 아. 흑.”
서해가 짧은 기침을 뱉어내고 숨을 고르는 동안 서해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한태경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틈이라고는 조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페이스를 따라가려는 서해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느낌에 몸을 웅크리며 흐느꼈다.
그때 벌어진 셔츠 사이로 한태경의 큰 손이 들어와 허리 가운데 움푹 들어간 척추 라인을 훑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 흣.”
갑자기 등을 더듬는 한태경의 손을 피하려 몸을 뒤로 밀어 도망치려 했다. 어깨 바로 아래까지 깊이 파고들어 온 그는 서해의 몸을 들어 올릴 것처럼 꽉 껴안았다. 맞닿은 단단한 가슴 아래로 엉망으로 흐트러진 다리가 서로 엉켜있었다.
꼼짝조차 할 수 없었던 서해가 다급하게 한태경을 불렀다.
“조금만 천천히….”
“하아…. 천천히 같은 소리. 목은 불편한 것 없습니까.”
“네. 으, 응.”
“입 벌려요.”
한태경은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서해의 입술을 좌우로 문지르다가 엄지손가락에 힘을 줘 서해의 입을 살짝 벌리게 했다.
두 번째 손가락이 입안으로 쑥 밀려들어 왔다. 갈 길을 잃고 멍하니 서있는 혓바닥을 누르자 부드럽게 내려앉은 혓바닥 좌우가 한태경의 손가락을 따뜻하게 감싸왔다.
“흐… 읏.”
“무슨 혓바닥이 이렇게 통통해.”
한태경은 혓바닥 앞뒤를 왔다 갔다 하며 서해의 입속을 가늠했다. 둘째손가락만큼의 길이가 겨우 입안에 물리는 게 보였다.
혓바닥에서 손가락을 떼고 동그란 입천장과 입안을 꼼꼼하게 헤집던 손가락이 다시 혓바닥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여기저기를 누르는 그의 손가락을 의식한 서해의 입속에 타액이 가득 들어찼다.
개의치 않고 혓바닥을 꾹꾹 누르는 한태경의 손길에 입 옆으로 타액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입을 꽉 다물자 한태경의 손가락이 밖으로 쑥 빠져나갔다.
“서해 씨 입에 좆 밀어 넣는 상상 여러 번 했는데, 입이 작아서 다 넣지는 못하겠습니다.”
“…….”
침대에 누워 한태경을 올려다보는 서해의 얼굴과 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노골적인 말에 손끝까지 빨개진 서해가 입을 조금 벌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손가락으로 서해의 입 가장자리를 천천히 살피던 그는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입술이 다 터지겠는데.”
목소리를 들은 서해의 눈이 금세 축 처졌다. 회사에서의 모습은 어디 가고 여상하지 않은 말을 내뱉는 한태경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달콤하던 스킨십은 결국 이전과 같은 종착역에 도달하기 전에 스쳐 가는 찰나의 순간 같은 것인지 두려웠다.
한태경은 손을 뻗어 빨갛게 달아오른 서해의 눈가를 쓰다듬어 주고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드러나 보이는 표정을 보고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걱정 말아요. 진짜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정말… 진짜로.”
이마에 약하게 꿀밤이 내려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자마자 보게 된 한태경의 눈빛이 더욱더 서늘해져 있었다.
“서해 씨는 날 믿는 것부터 연습해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것 알고 있으면 가만히 따라오세요.”
한태경은 서해가 누워있는 자리 옆에 걸터앉아 서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서해의 다리가 서늘해진 건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던 서해는 그가 쭉 잡아당긴 다리 때문에 침대 위에 그대로 눕게 되었다.
손을 뻗어 한태경을 저지하려던 서해를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 건 목에 걸린 체인이었다. 그는 서해의 한쪽 가슴을 누른 채 배꼽을 지나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드로어즈 안으로 반쯤 일어서 있는 성기가 보여 한태경은 손을 펴고 그 위를 짓누르듯 문질렀다.
“흐, 흐으… 읏.”
“주인 닮아서 여기도 첫날이라고 마중 나왔습니까.”
한태경은 망설임 없이 서해의 드로어즈를 끌어 내렸다. 잠깐 발버둥 치던 서해는 퉁- 하는 소리와 허공에 빠져나오게 된 자신의 성기를 본 순간 그대로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긴장으로 굳어진 목소리가 끊어져 나왔다.
“대, 대표님. 자….”
“손 내리고 가만있어요.”
한태경은 전시된 상품을 고르듯 손을 펴고 반쯤 솟아오른 성기와 귀두를 살피기도 하고, 뭉툭하게 내려앉은 고환을 손바닥 위에 놓고 가늠해 보기도 했다. 엄지손가락이 둥근 귀두를 돌려가며 둘레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그 중간으로 움푹 파인 곳을 벌렸다 닫기를 반복하며 문지르기 시작했다.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 맞닿아진 손길이 너무 어색했던 나머지 서해는 양쪽 발가락을 잔뜩 오므린 채 손길이 걷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한태경이 무엇을 살피는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혔다.
“아, 흐으….”
“여기 만지면 기분 좋은가 본데, 알고 있었어요?”
서해는 한태경의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세를 바로 하려 했지만 무릎이 저절로 오므라져 붙더니 쭉 펴져있던 다리가 반으로 접혀진 채 세워져 있었다. 한태경은 서해의 다리 사이를 툭툭 치며 부드럽게 얘기했다.
“다리 내려요.”
“읏. 응!”
“내리라니까.”
“못, 못 하겠….”
“내려. 뭘 봐야 어떻게 할지 정할 거 아냐.”
“흐, 흐아.”
귀두 사이에 난 구멍을 꾹꾹 누르며 무심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미웠다.
서해는 다리를 뻗대고 침대 위로 도망쳤다. 그러다 양쪽 발목을 잡아 내리는 힘에 그대로 다시 딸려 내려왔다.
그는 서해의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침대로 잡아 눌렀다. 침대에 붙어있던 손으로 다리 사이를 가리자 단호한 손길이 다시 원래의 자세로 되돌려 놓았다.
“악! 대, 대표님, 대표님….”
“가만있어요. 별거 안 합니다. 사이즈만 보려는 거예요.”
“흐, 흐읍. 흡.”
서해는 손을 들어 올려 입 주위와 눈썹 주위를 꾹 눌렀다. 크고 단단한 손이 다리 사이를 꼼꼼히 살필 때마다 숨이 저절로 덜컥 들이켜졌다. 귓가로 들어오는 자신의 숨소리가 타인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 뒤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느긋한 손길이 기둥을 쓸어 올리기 시작했다. 서해는 기겁할 것처럼 위로 물러섰다.
“자, 잠시만요, 잠깐. 잠깐만.”
“길이를 봐야 나중에 이런 거 저런 거 다 할 거 아닙니까. 서해 씨 좆보다 긴 거 가져와서 쑤셔대다가 회사에서도 질질 흘리고 다니고 싶습니까.”
“콜록…. 흡, 아, 하으으.”
한태경은 서해의 성기를 꾹 잡았다가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귀두 가운데 움푹 파인 곳에서 끈적한 체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서해는 발버둥 치며 허리를 뒤챘지만 꼼짝없이 붙잡힌 몸에서 자유로운 발끝을 세워 올리는 게 전부였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자신의 숨소리를 다듬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손을 뻗어 한태경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한태경은 서해를 내려다보더니 별말 없이 손을 움직이는 속도를 더 빠르게 하기 시작했다.
움직임을 제지하려던 것을 포기한 서해는 침대 시트 위에 뒷머리를 비비며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기둥을 쓸어 올리며 구멍을 꾹꾹 누르는 손길에 몸서리치던 순간 머릿속이 윙윙거리더니 하얗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허리부터 골반까지 찌릿찌릿한 감각이 가득했고 손과 발을 타고 힘이 쭉 빠져나갔다.
“아… 가, 갈 것 같….”
“참아요.”
한태경의 손끝에 제법 격하게 벌름거리기 시작하는 성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성기 끝에서 하얀 액체가 터져 나오는 것을 힐끔 쳐다보았다. 서서히 힘이 빠져가는 서해의 성기에 묻은 하얀 액체를 손바닥으로 감싸듯 말아 쥐고 천천히 성기를 밀어 올렸다.
서해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다른 사람 손에 사출하고 멀쩡한 정신을 할 만큼 뻔뻔하지 않았다.
다리 사이로 어이없어하는 한태경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다시 성기를 쓸어 올리기 시작했다.
“뭐가 이렇게 빨라, 토끼도 아니고.”
“앗, 그, 그만. 대표님, 주, 죽을 것, 같아요. 윽.”
“안 죽을걸. 그러게 참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을 잘 들어야 예뻐해 줄 마음도 생기지.”
“하, 아윽… 그만, 윽.”
한태경은 사출 후 말랑거리는 기둥을 계속 자극했다. 무릎이 모이고 손이 침대 위에서 떨어져 자세가 엉망이 된 것이 보였다.
버둥거리던 서해의 모습을 내려다본 뒤 침대 옆에 있던 테이블에서 티슈를 꺼내 손을 닦았다. 서해는 옆으로 몸을 돌린 채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몸을 돌려 엎드린 다음 한태경의 품에서 기어 나가려던 때였다. 단단한 손이 서해를 완전히 엎드리게 한 다음 다시 다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허리와 다리에 힘이 빠지고, 그대로 침대에 엎드린 채 다시 그에게 끌어당겨졌다.
“어디 가.”
“흐, 흡….”
“등이나 엉덩이에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도 봅시다.”
“어, 없어요. 없어요, 대표님.”
“그건 내가 확인합니다.”
한태경의 손바닥이 서해의 허리 바로 위에 움푹 들어가 휘어진 부분을 살짝 눌러 내렸다.
서해는 떨리는 팔을 끌어당겨 손등으로 이마와 관자놀이를 초조하게 눌렀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오히려 덜덜 떨리는 손이 이마를 타고 들어와 더 긴장하게 만들고 말았다.
“아으… 흡. 잠깐, 만요. 대표님 제발….”
“이제 서해 씨 주인인 내가 직접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해는 덜덜거리는 손을 펴고 귀를 막았다. 한태경이 하는 이상한 소리를 듣다가 같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갑자기 손가락을 세우고 허리를 따라 내려오는 서늘한 손길을 느꼈다. 절로 가슴 안쪽으로 말리려는 어깨를 겨우 침대에 붙이고 엎드린 서해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입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떼 입을 틀어막았다.
“피부가 약해서 자국이 많이 남겠습니다.”
“읏.”
“엉덩이에 멍 자국이 있는데.”
한태경은 서해의 양손으로 서해의 허리를 감쌌다. 손을 천천히 내리며 엄지손가락으로 훑어 올리는 손길에 서해의 발목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하얗고 통통하게 올라붙은 양쪽 엉덩이에 손을 올린 한태경은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는 엉덩이의 멍 자국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침대에 붙은 서해의 숨소리가 넘어갈 듯 헐떡이고 있었고 도드라진 날개뼈가 아래위로 흔들리고 있었다.
“앞으로는 어디 가서 이런 자국 남겨오면 정말 죽고 싶을 때까지 혼내겠습니다.”
“…흐….”
“대답.”
“…네.”
서해의 대답을 받아낸 한태경은 서해의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고 천천히 그 사이로 들어섰다. 그동안 얌전히 따라오는 것 같았던 서해가 온몸으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목을 뚫고 올라오는 거친 숨소리나 불안하게 떨리는 발놀림이 그대로 한태경에게 전해졌다.
인상을 쓰고 서해를 달래다가 손을 떼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빼고 숨을 몰아쉬는 서해를 다정하게 다독였다.
“대표님, 이거 말고. 이거 말, 흡, 흐윽. 흐 제발.”
“서해 씨가 여기서 할 일은 나만 믿고 맡기는 겁니다.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다… 다른 거 할게요. 다른 거… 말씀, 흐으.”
엎드려있던 서해의 등이 전에 없이 불규칙적으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눈가에 기어코 눈물이 가득 들어찼다. 마구잡이로 내뱉어지는 단어가 문장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여기저기 뭉개졌다.
한참을 기다려도 진정되지 않는 모습에 그는 서해의 옆에 자리하고 누웠다. 한태경은 자신의 몸 위로 서해를 끌어 올렸다.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얼굴을 묻게 하고 서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한 것은 또 잊었습니까.”
“…흑.”
무섬증이 가득 올라온 서해가 한태경의 단단한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아프게 하려는 게 아니고 잠깐 살펴만 볼 겁니다. 아프다고 하면 바로 손 떼겠습니다.”
서해의 얼굴 위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 폭력의 잔상이 잔인하게 서해를 괴롭히고 있었다. 엉덩이를 맞던 기억이 몸을 가득 덮쳐오고, 거절하다가 혹시라도 불이 꺼진 이 방에 남겨지게 되었을 때 버틸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서해의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부드럽기만 하던 한태경의 슈트가 까칠하게 느껴지면서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해의 몸이 전기라도 통한 듯 정신없이 떨렸는데, 한태경은 가만히 그를 껴안고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서해가 진정될 때까지 계속해서 등을 토닥였다. 귓가에 나지막한 한태경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괜찮다고, 진정하라는 속삭임이었다.
맞닿은 가슴 위로 온기가 다시 전해지고 엉망으로 떨리던 서해의 몸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부드러운 손길인데 여전히 무섭게 느껴지는 상반된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억지로 하려는 게 아닙니다. 서해 씨 성향에 억지로 찍어 누르면 따라올 것 같은데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위험한 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아픈 것도 없을 거예요.”
서해는 꽉 끌어안고 있던 한태경의 어깨 아래로 팔을 집어넣고 나무에 매달린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한태경의 한쪽 다리가 서해의 다리 사이를 벌리고 들어섰다. 서해는 슈트에 감싸진 근육질의 다리를 느끼며 그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회사와 차에서 계속해서 맡았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묻어났다.
한태경은 서해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로 등허리를 감싸 고정하고, 나머지 한 손은 엉덩이 사이를 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몇 차례 앞뒤로 문질러보던 가운뎃손가락이 입구를 몇 차례 꾹꾹 눌러보며 조이는 정도를 가늠해 보았다. 꽉 닫힌 항문 주위의 주름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이건 다 새로 사야겠네. 꼬맹이 사이즈로.”
“흐….”
서해는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숨을 죽였다. 서해의 맨다리가 슈트를 다 챙겨 입은 한태경의 긴 다리에 얽혀들었다. 한태경은 엉덩이 사이를 살피던 손을 거두어 양쪽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도무지 따라가기 어려웠다. 갑자기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그의 단단한 손길에 겁에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버둥거렸다. 묶여있던 목이 다시 바짝 끌어당겨지고 허리가 곧추세워졌다. 한태경이 다른 손을 들어 올려 등 가운데를 꾹 눌러 서해의 몸을 품으로 끌어 내렸다.
다시 울먹거리며 숨이 가빠지는 서해를 바라보던 한태경은 서해의 목에 팽팽하게 묶여있던 체인을 분리했다. 서해는 숨을 뱉어내며 잔뜩 긴장하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있는 서해의 눈이 촉촉했고 눈가가 빨갛다 못해 짓물러져 있었다. 한태경의 어깨에 매달린 손은 아직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눈을 내리깔고 한참 동안 서해를 내려다보던 그가 갑자기 자세를 바꾸고 서해를 침대에 눕게 했다.
“다리 들어봐요. 짧게 갈 테니까.”
“…네?”
“이렇게.”
갑자기 서해의 무릎 아래로 쑥 들어온 손이 가지런히 양쪽 다리를 모아 한태경의 한쪽 어깨에 걸쳐놓고 사라졌다. 겨우 눌러 참고 있던 눈가가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허벅지를 토닥이는 한태경의 손길은 다정하고 따뜻해 어지러웠다.
“무릎 붙이고.”
한태경은 천천히 마주 붙는 서해의 무릎을 바라보다가 허벅지에 살이 없어서 완전히 붙지 않는 모습을 보고, 서해의 무릎을 앞뒤에 나란히 붙이고 발목을 교차시키는 것으로 자세를 바꿔주었다.
“다음 주부터는 식단 조절 좀 합시다. 섹스하다가 부러질 걱정부터 하겠습니다.”
서해는 다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벨트 풀어내는 소리와 지퍼 내리는 소리 등을 가만히 듣다가 침대로 얼굴을 숨겼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침대 위에 바르게 놓여있던 팔이 떨렸다.
“다리 잘 붙이고 있어요.”
잘 붙이고 있으라는 말과는 반대로 오히려 두 다리를 단단히 고정해 준 한태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딱 붙은 다리 사이로 무언가 쑥 들어오는 것을 본 서해의 몸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허벅지 뒤로 천천히 들어오는 열기가 전해졌다. 서해는 침대에 붙이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서둘러 얼굴을 가렸다. 부드러운 옷이 닿는 느낌, 차가운 지퍼와 단추가 닿는 느낌, 그리고 뜨거운 성기가 마찰되는 느낌이 동시에 밀려왔다.
“흐으… 읏.”
서해는 다리가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두 발로 어깨를 밀어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리 사이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질 때마다 마치 삽입 섹스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몸이 절로 떨려왔다.
다리에서 힘이 조금이라도 풀어지면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자세를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무릎을 붙이다가 풀어지지 않게 다리를 꼬아 올리자 한태경이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닌 손길에 바짝 긴장한 허리가 틀어지고 엉덩이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몸에서 긴장 풀어요.”
다리를 꽉 붙든 채 허리 짓을 이어가던 한태경은 잔뜩 긴장한 무릎 뒤편에 짧게 키스를 날렸다. 하늘로 얌전히 올라가 있던 다리가 쑥 접히고 한태경의 어깨에 걸쳐졌다.
한태경은 점점 위로 밀려나는 서해를 쑥 잡아당겨 몸 쪽으로 바짝 붙였다. 엉덩이 아래로 부딪히는 물컹한 느낌이 어색해 숨을 들이켠 순간, 다리 사이로 다시 단단한 성기가 밀고 들어왔다.
허벅지 너머에서 밀려 들어온 검붉은색 귀두가 다리 사이로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가능한 사이즈인지 생각해 보다가 한태경과 눈이 마주쳤다.
“대표님. 오, 옷이….”
“내 옷 걱정해 줄 정신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서해는 오른쪽 손을 뻗어 한태경이 있는 쪽으로 내밀었다. 서해는 다리 사이를 사정없이 밀어 올리는 움직임을 멈추기 위해 손을 뻗은 것이었는데, 오히려 다정하게 손을 잡아 오는 그 때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정도는, 하아…. 서해 씨가, 양보해요.”
“으, 읏.”
이리저리 흔들리던 다리가 단단한 팔로 꽉 고정되고 전에 없이 크게 흔들린 다음 서해는 아랫배와 성기 위로 쏟아져 내리는 정액에 몸서리쳤다.
멀리까지 날아온 정액은 가슴께를 덮다가 이내 배꼽과 성기 위로 쏟아져 내렸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느낌에 손 등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꽉 잡고 있던 다리가 풀어졌다. 한쪽에 걸쳐져 있던 다리가 덜덜거리며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몸을 옆으로 돌리고 웅크리려다가 배를 타고 흐르는 액체 때문에 다시 똑바로 누울 수밖에 없었다.
웅웅거리며 흔들리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 다리 사이로 쑥 들어온 긴 손이 여기저기 흩어진 정액 더미를 훑어 올리며 서해의 배 위를 쓰다듬었다.
“이제 겨우 볼 만하네.”
한 손으로 눈가를 겨우 가리고 있던 서해는 꽉 잡힌 손을 빼내어 얼굴 전체를 가리려고 했지만 꽉 잡고 허락하지 않는 한태경 때문에 한참을 누워있어야 했다. 충분히 마음에 들 때까지 분위기를 즐긴 그는 서해의 옆에 올라가 누웠다.
한태경은 침대 가운데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서해의 동그란 머리통을 자신의 한쪽 어깨 위에 올려두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손을 뻗어 서해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정리해 주고 품에 온기를 전달해 주자 엉망으로 짓무른 눈가가 들어왔다.
“이런, 많이 힘들었습니까. 난 한 게 없어서 억울한데.”
“…….”
“앞으로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게 있었다면 말해요.”
“…….”
“무슨 생각 하고 있습니까.”
“죄, 죄송해요. 대답, 하려고, 했는데….”
서해의 표정을 살피려는 한태경이 몸을 물렸다. 그러자 코앞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어색하게 붙여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 싶은 듯했다.
팔을 뻗어 서해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리자 굳어있던 몸의 긴장이 풀어진 듯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피부를 몇 번이나 확인하던 그의 표정이 몇 차례 꿈틀거리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소프트하게 한다고 엄청 신경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간 들여서 잡아먹는 것도 나름 재미있네요.”
감사하다는 말이 이렇게 부끄러운 표현이었던가를 더듬던 서해는 꼼지락거리며 한태경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몸을 구속하고 있던 체인이 사라지자 긴장이 한 번에 풀렸다.
서해는 슈트에 코를 박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한태경의 온기, 그가 사용하는 향수 냄새, 약하게 남아있는 시가 냄새 모두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큰 손이 자신의 뒷머리를 단단히 감싸는 것을 느꼈을 때, 서해는 코끝이 찡해지는 감각에 코를 찡그렸다. 아픈 것도 없었고 늘 몸을 괴롭히던 폭력도 없었다는 것이 그제야 서해를 안심하게 했다.
“딱히 불편한 것 없었으면 오늘은 그만합시다. 내 생각보다는 서해 씨가 많이 버텼습니다. 마지막엔 멈춰달라고 하면 그만할 생각이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했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말하면 혼날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냥 괜찮을 것 같기도 해서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한태경과 서해의 숨소리만 들렸다.
늘 혼자였던 서해는 누군가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자마자 마치 자장가라도 들은 것처럼 급속도로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눈을 깜박이던 속도가 줄어들고 마지막에는 다시 들어 올리기 힘겨울 정도였다.
선잠에 빠지려다가 깜짝 놀란 서해가 움찔 놀라며 눈을 떴다가 다시 한태경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피곤합니까? 잠깐 눈 붙일래요.”
“네, 갑자기….”
“긴장 풀렸나 보네.”
“잠…깐만.”
한태경은 옷을 벗고 있는 서해 위로 얇은 침대 시트라도 덮어주기 위해 몸을 일으켰는데, 슈트 자락을 꼭 잡은 채 잠에 빠진 서해를 발견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는 서해의 머리를 자신의 한쪽 어깨 위로 잘 올린 다음 팔로 서해를 단단히 감쌌다.
“이렇게 열심히 따라오면 앞으로 너무 기대하게 되는데.”
“…으응….”
“경계심이 전혀 없네요, 서해 씨.”
서해가 잠에 빠져들자마자 한태경의 얼굴에 나타난 서늘한 표정에는 이때까지 서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소유욕이 가득 담겨있었다.
* * *
서해는 갑자기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선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눈을 떴다. 한태경이 침대 시트로 자신을 감싸 안고 조심스럽게 복도를 걸어가는 것이 보이자 잠이 그대로 달아났다. 남다르게 느껴질 정도의 친절은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한 느낌을 주어 당황스러웠다.
“아, 대표님. 제가 걸어갈게요.”
“깼습니까. 욕조에 따뜻한 물 받아 놨습니다. 데려다줄 테니까 편하게 씻어요.”
서해는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의 옷깃을 잡고 발끝에 힘을 줬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한태경의 웃음소리가 낮게 들렸는데 서해는 몸을 둥글게 말고 가슴에 이마를 살짝 비볐다. 남아있는 졸음을 쫓으려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어느덧 익숙해진 자신의 방에 들어온 순간, 그제야 어제와는 묘하게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서해는 고개를 빼 들고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방 한쪽에 있던 화장실 문을 본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어… 화장실 문이.”
“어차피 서해 씨 혼자 쓰는 화장실인데 별 상관없을 것 같아서 유리로 바꿨습니다. 말없이 바꿔서 미안합니다만, 서해 씨에게 얘기하면 분명 괜찮다고 얘기할 것 같아서 묻지 않았습니다. 안팎으로 블라인드 달려있으니까 불편하면 원래 방법대로 쓰세요.”
“대, 표님 집인데 왜….”
갑자기 숨이 차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대며 뛰는 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한태경의 품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딛고 섰다.
깔끔한 유리문 안으로 화장실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조심스럽게 걸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서해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는데, 유리문 밖에서 고개를 젖히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한태경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온 서해는 오른손으로 왼쪽 심장 위를 꾹 누른 채 한태경 앞으로 다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표님.”
“맘에 듭니까? 아까 방에서 내가 물고 빨고 할 때보다 더 좋아하는 표정이네.”
“언제 바꾸신 거예요.”
“오늘 출근한 동안 사람 불러서 바꿨습니다. 그때 했던 말이 계속 머리에 남아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런 건 생각조차 못 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좋아하니까 나도 기분 좋네. 침대 시트는 바구니 안에 내려두면 됩니다.”
한태경의 큰 손이 서해의 뒷머리를 쓰다듬더니 몸을 돌려세우고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서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시트를 끌어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 대표님. 시간이 좀 늦긴 했는데 저녁 드실래요?”
“좋습니다. 오늘부터 당장 서해 씨 살부터 찌워야겠으니까, 냉장고에 남아있는 재료가 있는지 봐야겠네요.”
“오늘은 저도 도와드릴게요.”
“쉬고 있어요. 나도 요리하는 거 꽤 즐기는 편입니다.”
“그래도….”
“그럼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있어요. 요리하는 동안 서해 씨 얼굴 보면서 하게. 씻고 나와요. 1층에서 만납시다.”
서해는 한태경이 나가고 난 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갔다. 가득 들어찬 따뜻한 물이 주르륵 흘러넘쳤다. 욕조 가운데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던 서해의 눈이 감기고, 다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가락 끝이 이리저리 얽혔다.
웅크리고 앉은 채 살짝 열린 유리문을 쳐다보았다. 유리문은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문은 여전히 한 뼘 정도 열려 있었지만 따뜻한 배려가 고마웠다. 계약하며 반쯤은 분위기에 휩쓸리듯 고백한 말 한마디에 그가 이렇게까지 귀 기울여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새로운 곳에서 보내게 될 시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가 보내온 무심한 위로에 불안감이 아주 조금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조차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에서 오롯이 혼자였다.
다리를 쭉 펴고 욕조에 팔을 걸쳤다. 두 팔 위에 턱을 걸쳐놓은 채 유리문 너머의 방 안을 바라보았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여기저기 올려놓은 제 물건들이 보였다. 집 안 전부가 깔끔하고 티 없는 분위기인데 유독 이 방만 자신 때문에 어수선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흩어져 있는 물건을 정리해야겠다고 다짐하다가 문득 한태경이 지내는 방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거실의 분위기처럼 모던하고 고급스러울 것 같았다. 그 인테리어와 잘 어울리는 한태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다 갑자기 작은 방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생각나 얼굴이 붉어진 서해는 눈만 남긴 채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