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9)

03. 낮과 밤 사이

서해는 대표와의 어색한 사이를 신경 쓸 틈 없을 만큼 바쁘게 일했다. 아웃룩으로 들어오는 업무량은 모니터에 코를 박고 머리를 쉴 틈 없이 굴려야 겨우 일곱 시, 여덟 시쯤 퇴근이 가능한 정도였다.

대표는 단 한 번도 재촉한 적 없었지만 여섯 시가 넘으면 서해는 늘 초조했다. 자신이 야근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그가 자신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아아, 오늘도 벌써 다섯 시야. 금요일인데에….”

시간을 들여 여유 있게 분석하고 다각도로 조사하던 연구실과는 전혀 다른 업무 프로세스였다. 그동안 서해가 경험했던 모든 지식을 순간적으로 판단해 적절한 방법론을 골라내는 것이 중요했고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안 돼, 안 돼. 얘들아, 얘들아.”

병렬로 돌아가고 있던 통계 프로그램이 멈추어 모니터 가운데에 모래시계가 생겨났다. 서해는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잠시 후 다시 살아난 프로그램에 고맙다고 말을 거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권 교수님은 양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해는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흔들고 다시 모니터 속으로 들어갔다.

주중의 업무를 진행하는 동안 서해는 갑자기 증가해 들어오는 업무에 몇 가지 실수를 범했다. 조사 분석 방법론이 다르게 적혀있는 것을 놓친다거나, 수식이 틀린 것을 놓친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서해는 자신의 컨디션 난조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눈을 부릅뜨고 일에만 몰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실수를 한 날, 대표는 문을 열고 나와 지쳐 나부라진 책상 위의 서해를 불러 세웠다.

“서 대리.”

“네, 대표님.”

“프로젝트 개요, 조사 분석 보고서에 채택된 방법론 제대로 보고 분석한 것 맞습니까?”

“…어, 어떤 프로젝트 말씀하시는.”

머리가 핑핑 돌았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온종일 분석한 데이터가 잘못되었나 걱정된 서해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자신이 본 연구 보고서는 단 하나였다는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대표에게 보내진 오류 섞인 보고서는 그대로 다시 서해의 책상에 툭 떨어져 박혔다. A4용지에 가지런하게 인쇄된 보고서에는 곳곳에 체크 표시나 동그라미가 그려져 물음표가 붙어있었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가뜩이나 서늘한 얼굴의 대표가 짧은 숨을 뱉으며 넥타이를 끌러 내렸다.

“서대리, 겨우 이 정도입니까?”

“죄송합니다.”

“가중치빈도 작성 수식도 틀렸고, 전체항목 더해준 값은 아예 엉뚱한 행을 가져다 붙였습니다.”

대표는 잘못 검토된 부분을 조목조목 읊었다. 아주 기본적인, 마이너한 실수들이 연거푸 쏟아져 내리고 서해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정신 바짝 차려요. 마케팅 부서 사람들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서 대리보다 이론적인 부분은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실무는 서 대리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서해는 연거푸 실수한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자신 있던 업무에서 구멍이 생기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금방 수정해서 다시 드리겠습니다.”

“천천히 해요. 대신 꼼꼼하게, 놓치는 부분 없이 다 바로잡아야 합니다. 검증하는 데 오류가 있으면 지금 하는 일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서 대리에게 실망하지 않도록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던 대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서해는 의자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실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서해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눈두덩을 몇 차례 꾹꾹 눌렀다.

의자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마천루가 둘려있는 것이 보였다. 마주 보는 건물들에 드문드문 불이 들어와 있었고 와이셔츠를 걷어붙인 사람들, 블라우스를 입고 업무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늦은 시간의 연구실 모습이 생각나 그리웠지만 추억에 빠져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서해는 양손을 펴고 뺨을 약하게 내리친 다음 대표가 내려두고 간 첨삭 보고서를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보고서를 다시 보자 도대체 이걸 왜 그냥 넘겼는지 스스로 한심한 부분들이 쏟아져 내렸다. 서해는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쓰러졌다. 얼굴을 들고 있기 창피할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38층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한 소리 들을까 봐 걱정된 서해의 몸이 자동으로 움츠러들었다.

사무실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그의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테이크아웃 박스와 커피 캐리어가 들려있었다.

잠시간 말없이 서해를 내려다보던 그가 말했다.

“서 대리.”

“네, 대표님.”

“갑자기 공장처럼 찍어내는 업무 방식이 적응하기 어렵습니까.”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건데요. 다음엔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대표는 서해의 책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도 서해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서해의 시선은 다리를 감싸고 있던 슈트가 사선으로 주름지며 팽팽하게 당겨 올라가는 데 멈춰있었다.

서둘러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본 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재빨리 표정을 숨기고 시치미를 뗀 채 말했다.

“서 대리 성격상 자리 옮겨서 먹고 하자고 하면 흐름 다 깨진다고 싫어할 것 같으니까 자리에서 먹읍시다. 괜찮습니까?”

서해는 축 처진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세상 어느 상사가 부하 직원 성격이나 처한 상황까지 고려해 주며 일을 시킨단 말인지. 심지어 이번 주엔 지갑을 열어본 기억조차 없었다. 돈 받고 일하는 입장에서 민폐를 끼치고 있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수제 초콜릿 박스가 서해의 책상 위에 올라왔다. 열 개의 다크 초콜릿과 밀크 초콜릿이 가지런하게 담겨있었다. 하나하나 다 다르게 생긴 초콜릿 모양이 너무 예뻤다.

서해는 감히 손대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민했다. 빈자리가 생겨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또 사줄 테니까 먹어요. 닳아 없어지겠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서해는 자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대표가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방황하던 서해의 손이 밀크 초콜릿을 집었다. 입속에 서 퍼지는 카카오 향은 그동안 먹어본 초콜릿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감미로웠다. 눈을 감고 황홀한 맛을 즐기고 있을 때 키보드 앞으로 따뜻한 라떼가 놓였다.

“밤이라서 기분만 내라고 디카페인입니다. 들어가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요. 혼자 끙끙 싸매지 말고.”

책상에서 내려온 대표가 서해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는 큰 손을 펴고 등을 꾹꾹 눌러 모니터로 들어갈 것같이 구겨진 서해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세 똑바로 하고 일해요. 직장인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병이 디스크입니다.”

“앗, 아. 네.”

크고 단단한 손이 서해의 헐렁한 슈트 위를 반듯하게 펴 누르기 시작했다. 손바닥과 등 사이로 옷이 몇 겹이나 있었지만 뜨거운 기운이 척추를 타고 훅- 올라왔다. 숨이 막혀서 긴장하고 있던 몸이 더 굳어졌다.

“등이 다 뭉쳤네. 한 번씩 자리에서 일어서서 스트레칭해요. 나중에 쥐 난다고 울지 말고.”

“네, 악, 아파요….”

“힘 빼요. 마사지 안 받아봤어요? 이렇게 힘주면 더 뭉칩니다.”

대표는 짓궂게 서해의 날개뼈 밑에 잔뜩 뭉쳐진 부분을 꾹꾹 눌러대더니 대표실 안으로 사라졌다. 서해는 양쪽 팔을 번갈아 들어 올려 앞뒤로 붕붕 돌리며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서해는 따뜻한 라떼를 들이켰다. 속이 부드럽게 데워지고 다시 달릴 만한 에너지가 채워지는 듯했다. 서해의 눈동자가 다시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이내 키보드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만 들려오기 시작했다.

열 시가 넘어선 시간, 아웃룩에 첨부해서 대표에게 보낸 수정된 보고서에 곧바로 답신이 날아왔다. ‘OK’라는 간단한 답장이었다.

서해는 눈을 감고 만세를 불렀다. 바닥에 놓여있던 책가방을 털어서 등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대표실에서 그가 불을 끄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대표님도 퇴근하세요?”

“네, 누구 때문에 금요일 저녁이 다 지나가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잘할게요.”

“죄송하면 시간 좀 내봐요. 이번 주에 한바탕해서 어색해진 것도 풀 겸 한잔하러 갑시다.”

“술 드시게요?”

“서 대리 환영식 해야지. 가볍게 한 잔만 해요.”

“환, 영식이요?”

대표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서해의 맑은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진심으로 감동한 것 같은 서해의 표정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100% 한국식은 별로고, 서 대리만 괜찮으면 내가 자주 가는 라운지로 가려는데 괜찮습니까?”

“어. 네, 대표님. 좋아요.”

환영식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따끔따끔하게 했다. 서해는 자신도 누군가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것에 얼떨떨했다. 열심히 일했지만 소속감 없이 허공을 맴도는 것처럼 느껴지던 것이 환영식이란 표현 하나에 서해를 들썩이게 했다.

떨리는 입꼬리가 어색한 웃음을 짓고 올라갔는데 이상하게 미소 짓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

둘은 도심 가운데에 있는 라운지로 이동했다. 차에서 내리자 발렛 보이가 뛰어와 대표를 맞이했다. 어색하게 문밖에 서서 그 모습을 보던 서해와 대표의 눈이 마주쳤다.

“들어갑시다.”

“우와, 이런 곳은 처음 와봐요.”

라운지 안에 들어서 계단에 올라서자 넓지 않은 공간 테두리에 수백 개의 병이 장식된 바 테이블이 보였다. 그 가운데 드문드문 놓인 소파와 테이블에 손님 몇 명이 앉아있었다.

대표가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함께 서있는 서해에게 이목이 쏠린 것도 순식간이었다.

둘은 라운지 안쪽에 있는 가장 아늑한 자리에 앉았다.

“술 잘합니까?”

“소주는 조금 마시는데. 세 병은 마셔요.”

“서 대리 이미지랑 안 맞는데, 의외네요.”

“제 이미지가 어떤데요.”

“하하, 또 그렇게 쳐다봅니까. 딱 그날 밤에 서해 씨 집 앞에서 봤던 표정인데.”

“대표님!”

“알겠습니다. 여기까지만 할게요. 첫 잔은 내가 추천해 줄 테니까 먹어보고, 그다음엔 서 대리가 먹고 싶은 것 마음껏 시켜요.”

대표는 서해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후회하지 마세요. 저 진짜 잘 먹고 잘 마셔요.”

“서 대리 먹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서해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 너머의 그를 떠올렸다. 일할 때면 불같고 끝나면 뒤끝 없는 상사. 완벽한 외모, 남자로서 멋진 체격, 부드러운 목소리, 금수저. 서해는 그도 못 하는 것이 있는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시 기다리자 웨이터가 파란색 칵테일 잔과 스트레이트 잔을 들고 나왔다. 대표는 스트레이트 잔을 자신 앞에 가져다 두고 파란색 칵테일 잔을 서해 앞쪽으로 밀었다.

역삼각형 모양의 칵테일글라스가 라운지의 조명을 받아 파란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서해는 자신이 마치 대표가 속한 반짝이는 세상 속에 잠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나는 늘 먹던 게 있어서 그걸로 시켰습니다. 서 대리는 달콤한 것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래스호퍼라고, 생크림 들어간 칵테일입니다. 이렇게 보여도 브랜디가 들어가 있으니까 천천히 마셔요.”

“…대표님.”

대표의 두 눈에 조금 전까지 반짝이던 눈을 한 서해의 두 눈이 아래로 축 처지는 것이 보였다.

“왜요.”

“…….”

“할 말 있으면 취하기 전에 말해요. 회사 일이 많이 어렵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일단 마셔요. 금요일엔 쓸데없는 생각 하는 거 아닙니다. 직장인에게는 금요일 저녁이 제일 소중한 법이거든. 건배나 합시다.”

쨍-

글라스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대표는 서해의 눈을 빤히 주시하며 웃어 보였다.

서해는 대표와 가까이 지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나이브레티의 권율기 상무가 내뱉고 간 날카로운 말에 찔려 괴로워했다.

물끄러미 대표를 바라보다가 좀 더 버텨보기로 했다. 산업 스파이 짓 따위를 해서 순순히 권율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지 않았다. 어렵게 다시 찾아온 것 같은 기회를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고, 자신을 받아주고 인정해 주는 회사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입사 축하해요, 서 대리.”

“정말, 감사해요, 대표님.”

“나랑 일해 줘서 고맙습니다. 솔직히 나도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은 처음이라.”

“제가 드릴 말씀인데요.”

서해는 처음으로 대표를 향해 진심을 담은 웃음을 활짝 지어 보였다. 가볍게 술 한잔할 수 있는 자리는 서해의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서해는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턱을 괴고 아예 눈을 마주친 채 대표에게 얼굴을 드러냈다.

“서 대리 웃을 줄도 아네.”

“회사에서는 크게 웃을 일이 없어서… 웃지 않는 건 대표님도 마찬가지신데요.”

대표는 처음으로 보는 티 없이 맑은 표정의 서해를 내려다보다가 스트레이트 잔을 들어 올려 한 번에 들이켰다.

몇 차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고 간 뒤에는 빠른 속도로 잔이 비워졌다. 서해와 대표가 앉은 테이블 위에는 가벼운 과일 안주와 온더록 잔이 놓였다. 벌써 예전에 한쪽으로 밀려난 듯한 스트레이트 빈 잔과 칵테일 빈 잔을 웨이터가 거둬들이고 사라졌다.

“서 대리가 권 교수랑 부딪칠 게 없지 않습니까. 알아서 척척 일하고 알아서 논문 다 써오고. 권 교수가 서 대리를 모시고 다녔으면 다녔지.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요. 제가 2년을 그렇게 지냈거든요. 전화기 붙들고 3초 대기조로. 왜 3초냐면, 3초 안에 전화를 받아야 해서. 저 마지막 날은 진짜 섭섭했어요. 미리 말 못 한 게 잘못이긴 하지만, 그렇게 화내실 것까지는 없잖아요.”

어느새 같은 대학의 선후배 사이로 돌아간 듯한 서해와 대표가 술기운을 빌려 각자가 속해 있는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물론 서해의 라이프 깊이 박힌 권율기는 잘 발라내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아, 너무 제 얘기만 잔뜩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요. 원래 이런 얘기 잘 안 하는 편인데.”

“서 대리 이야기 재미있으니까 더 해줘도 됩니다.”

“…대학원 얘기가 재미있으면 그것도 이상한 거 아닌가요, 대표님.”

“비슷하게 살았으니까 공감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회사는 다닐 만합니까?”

“그럼요. 엄청나게 좋은 책상도 생기고, 맛있는 것도 잔뜩 사주시는데요. 돈 걱정도 필요 없고. 박사 뭐, 조금 아쉽긴 하지만. 괜찮아요.”

“서 대리 박사 과정 진학했어도 잘했을 것 같은데, 내가 다 아쉽긴 합니다. 날 믿고 회사로 와줘서 고맙습니다.”

“아, 저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대표님 미국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전 해외는 나가본 적 없어서 너무 궁금해요.”

서해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왔다. 서해는 대표를 향해 다시 웃어 보였다.

“괜찮겠어요? 조금 취한 것 같은데.”

“대표님, 저 화장실 가는 것까지 컨트롤하시려고.”

“서 대리 취했네. 다녀와요.”

서해는 테이블 모퉁이를 잡고 주위를 살피다가 라운지 구석으로 향했다. 화장실 안에 사람이 드문드문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입구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지만 문으로 닫혀있는 곳은 아니었다. 터덜터덜 걸어 들어가 가장 구석 즈음에 서서 급한 볼일을 해결했다.

돌아서서 손을 씻고 난 다음 페이퍼 타월 한 장을 뽑아 들고 손에 묻은 물기를 가볍게 닦았다. 눈앞의 거울을 보니 양쪽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서해는 눈을 찌푸리고 서늘해진 손등으로 꾹꾹 눌러 홍조를 가라앉히려 했다.

이상할 정도로 잘 통하는 대화 때문에 한참 이야기를 이어간 서해는 갑자기 자신이 너무 수다스럽지는 않았는지 걱정했다. 다시 돌아가면 대표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을 생각이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을 때, 거울에 비친 권율기의 모습이 보였다. 잘못 본 것인지 눈을 깜박여도 없어지지 않는 잔상에 서해는 기겁하고 화장실을 빠져나오려 했다.

“아, 아윽.”

“개새끼 아니랄까 봐 동네방네 꼬리 흔들고 다니는 게 지랄 맞네.”

권율기는 서해의 목을 틀어막고 벽으로 밀쳤다. 사정없이 목을 조르는 손길을 떼어내려 발버둥 쳤지만 그는 서해를 벽 안으로 밀어 넣을 기세였다.

망설이다 뜬 눈으로 술에 취해 풀어 헤쳐진 셔츠와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권율기가 보였다. 역한 술 냄새가 느껴졌다.

숨 쉬는 것을 망설이던 순간에 목이 잔뜩 짓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술에 전 듯한 권율기는 평소보다 더 힘 조절을 하지 못했다. 홍조를 띠고 달아올라 있던 서해의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어지러운 시야 너머로 역한 술 냄새가 섞인 숨 내음이 밀려들었다. 잔뜩 화나있는 권율기의 표정이 눈에 보였다. 서해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동시에 손발이 급속도로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원래 자신이 살던 세계로 소환된 기분은 처참했다. 어둡고, 축축하고, 나락으로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원래의 자신이 속한 세상이었다.

“컥…. 윽.”

“시킨 건 어떻게 됐어. 아직 넘어온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처놀고 다녀.”

권율기는 불편한 심기를 가득 담아 말을 끊을 때마다 손끝에 힘을 실어 서해를 들어 올렸다. 낡은 구두 끝이 바닥에 닿아 겨우 지탱하고 있었지만 그는 사정 봐주지 않은 채 남은 손으로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서해는 자신과 권율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 힘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문이 닫힌 화장실에 서있는 것 같은 끔찍한 공포가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자신의 목을 붙들어 단단히 옭아매고 있는 사람이 권율기인지 보육원 원장인지 구분이 어려워졌다. 속이 뒤집히고 머리가 윙윙 울리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남아 구경하던 사람들은 심각해지는 둘의 모습을 보고 하나둘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 입구를 빠져나가던 그들은 서해와 권율기를 쳐다보며 웅성거렸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 심기 불편하게 만들지 마.”

“콜록, 윽.”

“아, 씨발. 시키는 일이나 잘할 것이지, 왜 어울리지도 않는 데 나와서 술을 처먹고 지랄이야.”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서해의 얼굴을 좌우로 살폈다. 터질 것 같은 서해의 얼굴을 보던 권율기는 손의 힘을 풀고 엉망으로 구겨진 서해의 옷을 바로잡아 주기 시작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다정한 손길이었다.

“네가 꼴리는 얼굴이긴 한가 보다. 로건 밀러가 누구랑 사적인 자리에 나온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사, 콜록, 상무님.”

“쟤 알고 있어? 네가 내가 기르는 개라는 거.”

서해의 불안한 눈빛이 화장실 안을 급히 살폈다. 누군가 듣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 때문에 글로벌유니티의 대표가 구설에 오르는 것은 원치 않는 바였다.

“너, 알고리즘 가져올 때까지는 못 벗어나.”

“…….”

“아, 새끼. 얌전한 줄 알았는데 더럽게 개기네. 너 설마 저 새끼한테 관심 있어?”

“그런 거 아니에요. 회식 온 거라서….”

“회식 같은 소리 하네. 지랄 맞게 가벼운 엉덩이 흔들어대는 게 한눈에 보이던데.”

“사, 상무님. 제발.”

“부족하면 내가 직접 뚫어주면서 때려줄 테니까 다음엔 엉덩이 까고 기다리고 있어. 진작에 박아줄 걸 그랬잖아.”

서해의 머릿속에 지난번에 찾아온 권율기가 침대 위에 널어놓았던 물건들이 떠올랐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술기운에 몇 차례 휘청이며 머리를 흔들던 권율기의 몸을 보던 서해는 도망갈 틈을 노렸다.

“늦어도 다음 달까지… 이 새끼가, 어디 가! 발목을 부러뜨리든가, 씨발.”

서해는 권율기와 떨어지자마자 뒷걸음질 쳐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무언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넓지 않은 라운지였지만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가 어딘지 기억나지 않아 숨이 가빠졌다.

금방이라도 목덜미가 잡아채지고 바닥에 뒹굴 것 같은 불안함에 좌우를 살피며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서해의 손목을 잡아왔다. 권율기가 쫓아와 자신을 끌어내는 것으로 생각한 서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을 털어내려 했다.

“흐… 이, 이거.”

“서 대리?”

“대, 대표님.”

서해는 서울 바닥에서 권율기를 마주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대표가 알게 될까 봐 미친 듯이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권율기가 찾아와 사실은 내가 심어놓은 스파이가 서해야, 라고 말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차갑게 식는 대표의 얼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음악 소리, 주변의 소리 등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서해의 가슴팍이 급작스럽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아 가파르게 숨이 내뱉어지고 있을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대표는 서해의 팔을 당겨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던 소파 바깥쪽에 주저앉혔다. 손바닥 아래로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덜덜 떨리는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서해를 바라보고 있던 몸을 붙여 앉아 등을 쓰다듬었다.

“서 대리, 갑자기 왜 이래요. 취했나?”

“대, 표님. 저 먼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갑자기 무슨 소리 합니까. 급한 일 생겼어요?”

테이블 위에서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하게 움직이던 하얀 손이 테이블 아래로 내려져 다시 거스러미를 뜯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대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는 팔을 뻗어 서해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어깨와 팔을 쓰다듬었다.

“우선 진정해요.”

“저 지금, 가야 해요. 이거….”

그때, 테이블 앞으로 누군가 와서 서는 것이 느껴졌다. 대표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취객인가 했는데 어딘가 낯익었다.

“한태경, 한국 왔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누구십니까?”

“뭐야, 나 기억 안 나? 중학교 동기잖아. 나 권율기야.”

“율기?”

나이브레티의 권율기 상무였다. 과거를 더듬어 권율기의 기억을 끄집어낸 그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학교에서 일주일을 멀다 하고 학교폭력위원회를 열리게 했던 문제 학생이었으나 늘 그 끝은 허무할 정도로 흐지부지되곤 했던 것이 떠올랐다. 여러 사건으로 졸업조차 겨우 할 수 있었던 권율기. 한태경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아. 기억나지. 오랜만이다.”

“반갑다, 태경아. 그동안 너랑 연락하고 싶었는데 사는 게 영 바빠서. 나이브레티 상무 달고부터는 뭐 틈이 나야 말이지. 여기서 만날지는 몰랐는데 잘됐다. 하는 일도 비슷한데 같이 얘기하고 그럼 좋잖아.”

권율기는 한태경과 서해를 슬쩍 흘려보더니 서해가 앉아있는 쪽 소파 끄트머리로 다리를 꼬며 앉았다. 예상은 했지만 동행인이 한태경이었다는 데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어느새 품에 안겨있는 서해를 보자 배알이 꼴렸다.

권율기는 웃음 진 얼굴로 한태경과 서해를 훑어보았다.

“같이 오신 분이 있는지 몰랐네.”

시치미를 뗀 권율기의 목소리가 뱉어지자마자 한태경의 품에 살짝 기대있던 서해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한태경은 인상을 쓰며 서해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는데 소용없었다.

서해가 품에 파고들 것처럼 밀려와 당황스러울 때였다.

“안녕하세요. 권율기입니다?”

권율기의 인사가 전해지자 서해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한태경이 서해를 번쩍 들어 그가 앉아있는 반대쪽으로 방향을 옮겨 앉혔다. 한태경의 재킷 자락을 꾹 잡은 서해의 손끝이 그의 허벅지에 닿았다.

“우리 사이가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 나누고 서로의 지인을 소개해 줄 정도는 아니지 않나? 술 취했으면 얌전히 돌아가.”

“여전하네, 그 성격.”

한태경은 발작적으로 떨고 있는 서해의 어깨를 쓰다듬다가 팔을 타고 내려와 손을 꽉 거머쥐었다. 괜찮을 거라는 듯 힘주어 잡아오는 그의 손 위로 서해의 손가락이 초조하게 얽어졌다.

“태경아, 옆에는 누구야?”

“내가 물어볼 말 같은데. 내 직원이랑은 무슨 사이지?”

“직원.”

“둘이 아는 사이야?”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닌데.”

“무슨 말이야.”

권율기는 평생 자신이 소유했던 서해가 누군가와 재잘거리듯 대화하는 모습을 본 순간, 감춰두어야 했을 패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그는 한태경의 등 뒤로 숨어 앉은 서해를 끌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술기운에 이리저리 흩어지는 시야에 서해의 팔뚝을 잡으려던 손이 허공을 내찔렀다.

“서 대리, 이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대, 대표님. 그게, 그게….”

서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심장이 빨리 뛰다 못해 터질 것 같다고 느꼈다. 바보같이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버벅거리는 모습이 한심했다.

서해는 연달아 나오는 권율기의 목소리를 듣고 한태경의 손에 잡혀있던 손을 빼내려 움직였다. 하지만 오히려 더 세게 잡아오는 악력에 피가 통하지 않은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시키는 건 안중에도 없이 엉뚱한 데 정신이 팔려서는 개새끼가.”

“…….”

“내놔. 발목을 부러뜨려서라도 옆에 앉혀 놓으려던 참이니까.”

한태경은 서해 쪽으로 다가오는 권율기의 손등을 쳐냈다. 음악 소리에 묻혀 큰 소음은 나지 않았지만 제법 날 선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등 뒤로 서해를 숨겨 권율기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한 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다가 이내 차갑게 굳어졌다.

“너였어?”

“내가 뭘.”

“여전하네, 그 더러운 손.”

“씨발, 너나 나나.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서 대리,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네, 네.”

서해는 혹시라도 자신을 놓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재킷 아랫단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심장이 터져나갈 것처럼 뛰어댔고,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인 잔들과 과일이 자신을 덮칠 것처럼 공격적으로 보였다.

넓은 공간 안에서 의지할 곳이라는 한 사람밖에 없는 사람처럼 간절하게 그를 잡았다. 당장 욕을 듣고 버려져도 뭐라 할 수 없는 사람을 붙잡고 의지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한심했다.

“갑시다.”

“걔가 좀 꼴리긴 하는데, 못 줘. 그건 놓고 가.”

저질스러운 표현이 귀에 틀어박히고 서해의 팔뚝을 타고 소름이 돋아 올랐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목에 무거운 추라도 붙은 것처럼 무기력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한태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해의 어깨를 감싸고 권율기를 지나쳤다. 권율기는 밖으로 나서는 그들을 따라 술기운에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몇 걸음 따라 옮기던 그는 자리에서 급작스럽게 일어선 한 테이블의 사람들과 부딪혔다. 사람들은 한태경을 쫓아 나가는 권율기를 둘러싸고 사과를 요구했다. 결국 시비가 붙어 서해를 따라나서지 못하게 되자 권율기는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가드들이 달려와 소란을 부리는 권율기를 제지하고 나섰다.

“세상 혼자 사는 척하는 건, 씨발, 놓고 가라니까!! 이거 놔! 안 놔?”

* * *

한태경은 천천히 걸으려 했지만 자꾸 빨라지는 서해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올렸다. 비틀거리며 빠져나가는 발걸음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가득 들어갔다.

발렛 보이가 라운지 정문에 주차해 둔 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서해를 앉히고 안전띠까지 꼼꼼하게 매준 한태경은 뛰다시피 해 반대편 자리에 올라탔다.

하얗게 질린 서해의 얼굴을 보던 한태경은 부드럽지만 빠른 속도로 서해의 목을 감싸고 있던 넥타이를 끌러 내리고 첫 번째 단추를 풀어주었다.

운전석의 대리 기사와 목적지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나눈 그는 옆에 앉은 서해를 내려다보았다. 목에 남은 손자국이 그를 불편하게 했다.

“서 대리, 출발합니다.”

목적지가 불분명했지만 라운지를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서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익숙해진 향수 냄새와 칼칼한 시가 냄새 같은 것이 서해의 몸을 감쌌다. 안전한 공간에 들어섰다는 안도와 함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저릿한 손과 발끝에 그제야 피가 돌기 시작하고 손끝이 덜덜 떨렸다. 양 손가락 끝을 얽어맨 서해는 손톱을 초조하게 두드렸다.

“…죄송해요, 대표님.”

“다친 데는 없습니까?”

사정 다 들킨 마당에 들려오는 첫마디가 엉뚱했다.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속절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꼴사나운 모습을 그대로 내보인 서해가 눈가를 눌러 눈물을 참았다.

“죄송해요. 일부러, 일부러 말씀 안 드린 건, 아니고. 아무, 아무것도….”

“묻는 말에 대답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정말이에요.”

“서 대리, 다친 데 없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없, 없어요.”

“몰랐는데, 서 대리는 거짓말을 잘하네요.”

두려운 마음만이 가득했다. 잠시 즐거웠던 상황이 막을 내리고 찾아온 현실 앞에 들떴던 마음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한태경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서해는 입술 안쪽을 베어 물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고민했다.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 집에 보내기는 그렇고 마땅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네요. 우선은 내 집으로 갑시다.”

“…네?”

“토 달지 말고 따라와요. 확인할 게 있으니까.”

“도망가려는 거 아니에요. 집에 갔다가 내일 출근하면, 회사에서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대표님….”

한태경은 대답이 없었다. 검은색 세단이 속도를 점점 올려 달릴수록 어쩔 줄 모르는 서해의 고민이 깊어갔다.

* * *

서해는 결국 한태경의 집에 들어와 따뜻하게 데워진 물컵을 들고 카우치에 앉았다.

떨림이 잦아든 다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던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 무서울 정도로 그와 똑같이 닮아있는 집 안의 가구, 인테리어, 오브제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공간 자체가 한태경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서해는 컵을 감싼 손을 꼼지락거리며 멀리 창가에 서있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어깨너머로 한강의 전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였다. 조금 전 일만 아니었다면 그와 함께 창가에 붙어서 주위를 살피며 정말 예쁜 집이라며 좋아했을 것 같았다.

서해는 팽팽하게 당겨진 그의 어깨와 등허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서늘한 눈매를 한 한태경이 몸을 돌려 서해를 마주 봤다. 그의 시선을 피해 무릎을 내려다보자, 한태경은 서해가 앉아있는 카우치로 걸어왔다.

바짝 등을 곧추세운 그는 고개를 들고 눈만 내리깐 채 서해를 내려다보았다. 서해의 하얀 얼굴에는 여전히 흔들리는 눈동자가 들어차 있었지만, 발작적으로 무서워하던 기운은 제법 사라져 있었다.

그는 서해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서, 내 도움을 받아서 권율기에게서 일단 도망쳤으니 이제 내가 서 대리 사생활을 궁금해해도 될 자격이 생겼습니까?”

“…대, 대표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부터 말해 봐요.”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진심이에요.”

“그리고 빠지겠다? 괘씸한데, 서 대리. 그럼 순서를 바꿔서 묻겠습니다. 질문에 빠짐없이 답해요.”

“…….”

“나이브레티가 글로벌유니티에서 가져가고 싶어 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 그건….”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대답해요. 서 대리 안전은 내가 책임지고 보호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회사 차원에서 대비라도 해야지, 수백억 털어 넣은 프로젝트를 허공으로 날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차기 신제품에 탑재될 인공 지능 알고리즘요.”

한태경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나이브레티에서 인공 지능 사업에 뛰어들 거라고 했습니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나이브레티 회사 일은 뉴스 말고는 접할 기회가 없으니까요. 다만, 권 상무님이 유난히 알고리즘에 집착하고 있긴 했어요. 늦어도 다음 달까지는 꼭 가져오라고 했는데.”

“CES Summer Show라도 생각하고 있나. 그래서, 가져오라는 정보를 안 가져다줘서 그렇게 얻어터지고 다닌 겁니까?”

“그것만은 아니에요.”

“그것만은 아니면, 정말 상호 합의된 관계하에 진행된 플레입니까? 답답하니까 이건 좀 대답해 봐요. 미쳐 버리겠으니까.”

“아니에요, 대표님.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다만, 어, 어릴 때부터 좀, 폭력이랑….”

“누가, 권율기가?”

“…네.”

“어디서 만난 겁니까. 서 대리랑 부딪칠 접점이 없는 사람인데.”

“보육원 재단을 지원해 주시던 회장님 아들이셔서요.”

“그런 식으로 지낸 건 언제부터입니까.”

“…중학교….”

“하, 미치겠네. 앞으로는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서 대리 혼자 몸만 축내면서 버티려고 했어요? 계속해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한태경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서해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둘이 합의된 관계일 경우 조금 더 두고 보려 했지만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상황에서 더는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는 서해의 머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 구해 준 대가로 뭘 주겠습니까.”

“대, 대표님.”

“내가 없는 말 했습니까?”

서해는 당황스러운 눈을 들고 한태경을 쳐다보았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눈동자를 피하지 못하고 겨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서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떨어트렸다. 권율기의 강제가 더해졌다고 해도 발칙한 상상을 짧게 한 대가는 시리고 차가웠다.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뭘까, 회사를 그만둬야 할까, 화가 풀릴 때까지 맞으면 될까 등의 생각이 어지럽게 흩어질 때였다.

“나부터 얘기할까요. 서 대리만 OK 하면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네?”

“서 대리가 내 영역에서 나가면 당장 권율기가 찾아올 텐데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한태경의 날카로운 말에 서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단, 도와주겠다는 말이 직장 상사로서만은 아닙니다. 서 대리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난 서 대리한테 관심 있습니다. 애초에 그 집으로 찾아가 합격 소식을 직접 전한 것부터가 글로벌유니티의 대표로 찾아간 게 아니었습니다. 서 대리 좋아하는 표정을 보러 간 거지.”

“대표님, 저는….”

한태경은 무언가 말하려던 서해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올려 저지시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해는 다시 입을 다문 채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뭔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관심이라고 했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다면 이 당황스러운 순간에 받아든 것은 호감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관심을 표현하는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서늘할 것까지 있는지 의문스러울 때였다.

“현재 서로 파트너도 없고. 내 손만 잡으면 다 해결해 주겠습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표정이 일그러지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파트너로서의 관심임을 듣게 된 직후 크고 거칠게 밀려온 불안이 서해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이 가졌던 착각이 원망스러웠다. 잠깐 봤던 모습만으로 바보같이 속을 뻔했다고 생각하자 속에서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대표님은, 뭐가 그렇게 쉬우세요? 그동안, 그동안 제가….”

“조금 전에 내가 서 대리에게 관심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자신을 깎아 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감사하게 받으면 됩니다.”

“저한테 왜 이렇게 해주시는 건데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서로 스타일도 크게 다르지 않고. 24시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뭘 더 참고 버텨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대표님, 그렇지만.”

“서해 씨, 권율기처럼 엉망진창으로 만들지 않을 거라고 약속합니다. 날 믿고, 나랑 계약해요.”

서해의 떨리는 손끝이 양쪽 눈두덩과 눈썹을 연달아 문질렀다. 계약을 운운하면서도 주저함 없이 당당한 그의 모습에 위축되는 것은 오히려 서해였다.

“…계약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제 안전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대표님이 원하시는 건 뭔데요.”

한태경은 자리에서 일어서 카우치에 웅크리고 앉은 서해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푹 숙이고 있는 서해의 턱 아래에 손을 집어넣은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해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서해 씨 전부.”

서해는 빨갛게 짓무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하는 말이나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의미를 모를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만약 제가 거절한다면요?”

“서해 씨 선택을 존중하고 집에 데려다주겠습니다.”

“…….”

“그대로 각자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난 더 이상 서해 씨 사생활에 관여하지도 않을 거고. 다만 그 뒤에 이어질 일은 혼자 감당해야 할 겁니다. 권율기가 서해 씨를 시켜 정보를 빼내려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이상 회사에 계속 다니게 두는 것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넓은 공간에 침묵이 가득했다.

서해는 한태경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무릎 위로 몸을 웅크렸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는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서해는 믿지 않았다. 삼거리의 평상에서 나눴던 말이 떠올랐다. 비슷한 부류. 그가 권율기와 비슷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날 글로벌유니티에 면접을 보지 않았다면, 같이 일하자고 찾아왔던 날 맥주 한 캔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면, 그날의 흔적을 들키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환영식이라도 다른 날에 했다면. 부질없는 생각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답이 없는 고민에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다.

서해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태경의 모습을 더듬었다. 팩트와 요점 중심의 보고서 작성 패턴, 목표를 빠르게 치고 나가는 업무 스타일, 상대방을 솔깃하게 하는 스피치. 그에 대해서 떠오르는 것은 오직 회사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모두 다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패턴은 있었다. 적어도 권율기처럼 충동적이지는 않았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도 아직 보지 못한 모습이 있을 텐데. 갑자기 사적인 선을 넘어와 계약하자는 대표를 보며 유일하게 남은 소중한 공간이 일그러지게 될까 봐 두려워졌다. 서해는 말로 하는 약속의 효력이 가지는 부질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해의 대답을 기다리던 한태경이 시계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좋습니다. 대신 결정할 때까지 이 집에서 지내는 것이 조건입니다. 나랑 계약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 손 타는 건 질색이니까 혹시 모를 일이 일어나는 것은 방지하고 싶습니다. 내일 오후 아홉 시까지 결정하세요.”

“대표님.”

“계약할 때까지는 서해 씨 손끝 하나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나도 더 이상은 양보 못 해요.”

아래로 내리깐 서해의 눈꺼풀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 서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게스트룸 데려다줄게요. 일어나요.”

서해는 한태경의 뒤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져 그를 따라갔다. 1층 구석 어딘가에 있던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무광택의 마블 타일이 발가락 끝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계단 벽면에 부착된 나무 장식이 차갑게만 보일 수도 있는 공간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머리 위로 어디에서 나오는지조차 찾을 수 없는 간접 조명이 가득했다. 계단을 앞서 오르던 한태경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1층엔 주방이랑 거실, 2층에는 침실이랑 서재 그리고 게스트룸이 있습니다.”

2층 복도 좌우로 방이 여러 개의 방이 보였다. 한태경은 그중 하나의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요. 갈아입을 옷은 드레스 룸에 있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내일 봅시다.”

건조한 인사를 남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게스트룸에 들어선 뒤로 서해는 침대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새벽이었지만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이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바로잡을 수 있을지 순서조차 꼽을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무기력함만 가득했다. 무엇 하나 의지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묻는 것이 전부였다.

밤새 쪼그리고 있다가 침대 한쪽에 머리를 붙이고 쪽잠에 빠진 것은 새벽녘이 다 되어서였다.

* * *

창문 너머로 들어온 햇살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방에 있는 작은 창문으로 해가 들어올 리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려 누울 때였다.

깜짝 놀란 서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을 부릅뜨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오후가 훌쩍 지나있었다. 침대 위엔 언제 올라온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쳤어. 미친 게 분명해. 미쳤나 봐.”

간밤에 있었던 폭풍 같은 일들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서해는 침대 위에 엎드렸다가 굴렀다가를 반복하며 방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문을 열고 나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닌가. 좋은 아침…입니다. 아닌데에. 어떡해….”

한참을 침대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서해는 한 시간이 훌쩍 지난 다음에 서늘한 물로 샤워를 마쳤다. 한태경의 드레스 룸에 있던 티셔츠와 바지는 손등과 발등이 덮여 몇 차례 걷어 올린 다음에야 그럭저럭 입을 만했다. 서해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한 다음 게스트룸에서 빠져나왔다.

토요일 저녁 시간이 지나서야 계단에서 내려오는 서해를 발견한 한태경의 얼굴에 어이없는 미소가 걸렸다. 자신이 건넨 옷을 입고 이리저리 뻗친 머리로 내려오는 모습에 시선이 머물렀다. 어색한 슈트를 벗은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 어려 보였다.

“적응력이 빠른 건 알고 있었지만 내 집에서도 그럴지는 몰랐습니다.”

“아, 죄송해요, 대표님. 저도 이렇게 늦게 일어난 적은 정말 손에 꼽는데.”

“따라오세요.”

서해는 허둥지둥 식탁으로 내려와 그의 옆에 섰다. 평소와 같은 목소리,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다. 어제까지 계약 운운하던 대화는 술기운에 잊어먹었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식탁에는 부드럽게 풀어진 계란국과 여러 반찬이 올라와 있었다. 다른 사람이 차려준 밥을 마지막으로 먹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더듬기 어려웠다.

“앉아요. 술 많이 마셨는데 따뜻한 국이랑 같이 간단하게 먹읍시다.”

“…네, 대표님. 잘 먹겠습니다.”

음식 냄새를 맡자마자 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식사하는 내내 침묵이 흘렀지만 서해는 이상하게도 그 고요함이 어색하지 않았다.

서해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터치가 없을 거라는 말은 진짜였다. 한태경은 서해와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 서로 대화도 나누었지만 특별한 요구를 하거나 명령을 내리는 행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편안하게 대해 줘서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의 집에 놀러 온 듯한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한태경의 집에 있는 동안 서해가 한 것은 먹고, TV 보고, 쉬다가 가끔 그와 마주치면 짧은 대화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른 저녁을 먹고 밤 시간이 되자 불편하게 있지 말고 방으로 들어가라는 그의 말에 쭈뼛거리며 게스트룸으로 올라왔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분위기였다.

게스트룸으로 돌아온 서해는 침대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손끝으로 눈썹을 꾹꾹 눌렀다.

계약만 따로 떼놓고 본다면 객관적으로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조건이었다. 자신의 능력이 최상으로 빛날 수 있는 직무였고, 무급으로 봉사하던 학교와 달리 보너스 테이블까지 고려된 월급이 수백이었다.

다만 자신의 선택으로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계약한다는 의미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거절한 뒤 삼거리의 집으로 돌아간 모습을 상상했다. 한태경과 다시 서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고 나락에 떨어진 삶의 시나리오를 그렸다.

유일한 도피처였던 학교는 돌아갈 수 없는 공간이 되었고, 글로벌유니티에서 자신의 자리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없어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을 바닥까지 갉아먹는 권율기만이 전부인 세상.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조차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처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서해는 삼거리의 낡은 집에 있는 동안 권율기가 언제 들어올지 몰라서 시도 때도 없이 불안함을 느꼈던 게 생각났다. 그는 함께하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충동적으로 행동하던 사람이었다.

무기력하게 그가 내리는 폭력을 받아들인 후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쳐왔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계약 운운하는 한태경의 목소리는 서늘했지만 적어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휴대전화에서 오후 8시 55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약속한 아홉 시가 되기 전까지 한태경은 정말 서해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현실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약속을 앞두고 계단을 내려가는 서해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카우치에 앉아있는 한태경은 오후에 보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앞으로 꺼내놓을 이야기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서해는 한태경과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카우치 끝에 엉덩이를 붙이자 가죽이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생각해 봤습니까.”

“계약…할게요. 대신, 정말로 약속하신 거….”

“불편하네요. 안전에 대한 걱정을 하는 거라면 이제 다시는 묻지 않는 것으로 하세요.”

“저 회사도 계속 다닐 수 있는… 건가요?”

“이 상황에서 회사를 먼저 물어보다니 엉뚱하네. 크게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일하세요.”

한태경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서해의 턱 아래를 들어 올렸다. 불안함과 초조함이 엉킨 눈빛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서해는 여전히 도망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과 시도 때도 없이 공포감에 휩싸이는 일이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계약과 동시에 그가 다른 사람처럼 변하지만 않아주길 간절하게 바라고 또 바랐다.

“결정했으면 2층으로 올라오세요. 나랑 지내기 전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한태경은 2층 복도 맨 끝에 있는 방으로 서해를 데려갔다. 검은색 문에 문고리는 없었고 터치형 도어 록이 달려있었다.

도어 록이 한태경의 손가락 지문을 인식하자마자 부드럽게 열렸다. 서해는 아무 생각 없이 한태경을 따라 방으로 들어섰고 서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이 닫혔다. 그의 허락 없이는 방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다.

“대, 대표님.”

“들어와요.”

작지만 무서운 곳이었다. 정면에 보이는 침대의 네 귀퉁이에는 튼튼한 기둥이 장식되어 있었다.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침대 헤드의 기둥에는 수갑이 달려있었다. 서해는 침대 기둥 양쪽에 한쪽 팔씩 묶여 엉망으로 흐트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뒷걸음질 치다가 등 뒤에 닿은 문을 더듬어 만졌다. 문고리가 없던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태경의 허락이 떨어지는 것밖에는 없었다.

눈가가 붉게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그가 머리채를 잡고 수갑을 채운 다음에 엉망으로 내려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드럽기만 하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들려왔다.

“주말 끝날 때까지 여기서 나랑 계속 이러고 있고 싶다면 그렇게 서있어요. 오늘은 처음이라 많이 봐주겠습니다. 걱정 말고 들어와요.”

한태경은 방 한쪽에 마련된 베드 테이블로 걸어가서 앉았다. 간단한 규칙을 정하기 위해 머릿속을 그려보던 한태경이 카우치 깊숙하게 몸을 기대며 서해와 시선을 맞추어왔다.

“뭐 합니까. 와서 앉아요.”

“네.”

처음 접하는 상황에 자꾸 겁먹게 되는 서해는 그의 눈치를 보며 손에 들린 태블릿을 흘끔 바라보았다. 한태경은 테이블 위에 태블릿을 두고 서해 앞으로 돌려놓았다.

“지금부터 제일 중요한 일을 할 테니까 신중하게 고민하고 선택해요.”

“…이게 뭐예요, 대표님?”

“좋아하는 플레이, 싫어하는 플레이 모두 숨기지 말고 선택해요. 테이블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게 있다면 마지막에 추가로 얘기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설명만으로 다 이해하지 못한 서해의 가느다랗고 하얀 손이 태블릿을 넘겨보며 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서해는 못 만질 것을 만진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의자 뒤로 몸을 물렸다. 계약하면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애매모호함 따위는 남겨두지 않으려는 그의 생각이 엿보였다. 문서 마지막에는 사인하는 영역까지 보였다.

“사인 때문에 신경 쓰입니까. 법적인 효력이 있는 문서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관계성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하자는 의미로 넣어둔 거니까.”

“…….”

“잘 읽어보고 선택해요. 같이 지내다 보면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씩 물어가면서 진행할 수 없을 거예요.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거부감이 있는 항목에는 절대 체크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이건. 이건 너무.”

“왜. 너무 적나라해서?”

“원래 다, 이렇게, 확인을. 그러니까 원래라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니라.”

부끄럽고 당황한 서해가 문장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드문드문 단어를 뱉어냈다.

“시간 충분히 줄 테니까 꼼꼼하게 읽어봐요. 이 자리가 지난 다음에 싫다고 하는 건 부정의 의미로 듣지 않을 겁니다.”

태블릿에 깔끔하게 정리된 내용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 가득 적혀있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나누어진 카테고리와 하위 분류들로만 한태경이 직접 정리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권율기와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말뿐이던 허황된 약속보다는 차라리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계약서 앞에 오히려 담담해졌다.

어차피 계약에 응하겠다고 한 이상 서해는 정말 견딜 수 없는 몇 가지만 빼고 모두 다 한태경이 원하는 대로 맞춰 응할 셈이었다. 사람이 바뀔 뿐 상황이 달라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고 그동안 지나왔던 순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첫 줄부터 막혀서 그를 쳐다보고 말았다.

“대표님.”

“궁금한 게 있습니까?”

“…도미넌트가 서브미시브를 24시간 내내 컨트롤한다고 적혀 있는데요.”

“그건 가장 기본 원칙이라서 물려줄 수 없습니다.”

“그럼 회사에서는 어떻게….”

“집인지 회사인지가 중요합니까?”

“네?”

서해는 38층에서 한태경에게 매 맞고 난 뒤 그와 거칠게 섹스하는 상상을 했다. 최악이었다. 똥을 피하겠다고 똥통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아닌지 가슴이 턱 막혔다.

얼굴이 새파래진 서해가 축 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굉장히 억울하고, 부당한 것을 받아들고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우리 관계는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서해 씨를 통제하면 서해 씨는 내게 복종하면 됩니다.”

“그, 그렇지만 회사에서 누가 보거나 들키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는 건데요. 그리고 제 업무 시간은 그러면.”

“무슨 상상 하는 겁니까.”

“네?”

서해는 자꾸 되묻는 자신이 앵무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태경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서해를 마주 보고 웃다가 갑자기 심각해졌다.

“서해 씨, 나랑 계약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왔습니까?”

“그거야… 제가… 맞, 맞고 난 다음에.”

“내가 얘기하면 그 자리에서 홀딱 벗고 뒹구는 거. 그것만 상상했어요? 집이나 회사에서나? 미치겠네. 이렇게 음란한 상상하는 사람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렇게 설명하셨잖아요.”

“변태 바닐라들이 나오는 삼류 영화 같네요. 날 그런 사람들과 동일 선상에 두지 말아요. 내가 서해 씨한테 관심 있다고 한 건 어디로 들었습니까?”

“대표님이 계약하자고 하셨잖아요….”

“서해 씨, 실례되는 질문 해서 미안합니다만, 이전에 계약했던 적 있습니까?”

“…아니요.”

마주한 시선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서해는 대표가 무슨 말을 이어갈지 몰라서 마른침을 삼켰고 대표는 할 말을 잊고 잔뜩 긴장한 모습의 서해를 내려다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그 검은색 손수건은 뭐였습니까? 그것 때문에 내가 완전히 속았네.”

“그건, 그냥….”

“…뭔지도 모르고 계약하겠다고 따라온 거였습니까? 사람 참 대책 없네. 지금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에 빠질 뻔했다는 건 인지하고 있습니까?”

서해는 손끝을 말아 쥐고 마주 앉은 대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덮은 채 이마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펼쳐진 손 뒤로 살짝 찌푸린 두 눈이 감겨있는 것이 보였다. 한참 만에 이어진 말이 답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이걸 어디서부터 물어봐야 해. 혹시, 이성에게만 관심이 간다거나.”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

“이리 와요. 같이 보면서 설명해 주겠습니다. 듣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세요. 서해 씨 거취는 그 뒤에… 다시 생각합시다.”

“어, 네.”

“여기서 나가면 검은 손수건은 당장 버려요. 밖에서는 꺼내지도 말고.”

“네….”

서해는 한태경의 얼굴에 담겨있는 알 수 없는 표정을 보다가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섰다.

한태경은 서해의 손을 잡고 그의 자리 바로 옆에 앉혔다. 서해가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자 그는 잠시 시간을 주며 기다렸다.

“우선 이 태블릿부터 설명해 주겠습니다. 내 설명을 다 듣고 계약에 응할 마음이 생기면 플레이 가능 여부를 옆에 있는 라디오 버튼에 체크해요. 바로 아래에 각 항목에 대한 플레이 강도를 선택하는 게 7점 척도로 들어가 있을 테니까 같이 선택하면 될 겁니다.”

“네.”

“아주 좋으면 7점, 아주 약하게 하고 싶으면 1점을 주는 겁니다. 나에게 서해 씨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게 설명해 준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예요. 단, 여기서 확인된 사항은 플레이 도중에 절대 물리는 법 없을 테니까 신중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생소한 포맷을 받아든 서해의 눈동자가 태블릿을 아래위로 급하게 살폈다. 다섯 장 정도 되는 페이지 모두가 비슷한 형태로 되어있었다.

한태경은 서해가 잘 볼 수 있도록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그의 팔이 팔꿈치 언저리에 닿자 서해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지만 그는 태연하게 팔을 내려놓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첫 줄부터 막힐지는 몰랐는데. 오해하지 말아요. 이건 시도 때도 없이 때린다거나 섹스하겠다고 표현한 게 아니라, 서해 씨의 일상생활에도 관여하고 싶다고 쓴 내용에 가깝습니다.”

“일상…요?”

“검은 손수건 때문에 서로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내 기본 성향은 도미넌트입니다. 가학성이나 폭력성이 갑자기 튀어나올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피가 나고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플레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소한 일상의 명령을 따르는 서해 씨를 보면 충족감이 높아지는 스타일이지. 밥 먹고 일하자는 내 말에 얌전히 밥 먹는 서해 씨를 보면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

서해는 입사한 이후로 그가 점심때 사준 밥과 디저트들을 떠올렸다. 혼자 지낼 때는 사 먹지 못할 만큼의 고급 음식들이 패스트푸드 먹듯 휘리릭 지나가던 게 생각났다. 모두 한태경이 어딘가에서 사 와서 38층에 펼쳐놓았던 것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었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덧붙입니다만, 업무 하면서 발생하게 되는 일 처리와는 별개니까 회사에서는 이때까지 일하던 대로 해주면 됩니다. 잘못된 것 바로 얘기하고,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으면 제안하고. 여기까지 이해 안 되는 것 있습니까?”

한태경의 설명을 이해한 서해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혼자 엉뚱한 상상을 앞서서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서해는 한태경과 나란히 앉아 그가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 게 아주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플레이는 상호 합의 후에 진행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가진 지배 욕구를 숨길 수는 없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이걸 내려두고 서해 씨와 만난다고 해도 관심 있는 사람과 지내면서 섹스를 배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서해 얼굴에 남아있던 붉은 기운이 목까지 내려왔다. 더 이상 고개를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어진 서해가 읽히지 않는 태블릿 화면을 넘기며 내용을 살피는 척했다.

“여기 아래에 적혀있는 것들은 플레이,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섹스 도중에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이나 도구, 신체 부위가 적혀 있습니다만… 서해 씨에게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계약하게 된다면 앞으로 조금씩 알아가게 될 거예요.”

서해는 두근거려 오는 심장을 오른손으로 내리눌렀다. 오늘 당장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란 한태경의 말에 크게 안심되었다.

“당장 벗겨지고 맞아도 될 신체 부위를 고르라는 게 아닙니다. 절대 할 수 없고, 하기 싫은 것을 잘 살펴요. 서해 씨가 할 수 있는 플레이 범위 내에서만 선택하는 겁니다. 플레이가 들어가게 되면 일일이 확인받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다시피 나는 명령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걸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서해 씨를 기대할 테니까.”

태블릿을 플리킹해 내려갈수록 하드한 항목들이 적혀있었다. 중반 아래부터는 거의 아무것도 체크할 수 없었다. 관장부터 시작해 나이프 플레이, 피어싱, 스카톨로지, 피스트퍽같이 하드한 플레이들은 텍스트로만 확인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나마 선택한 항목들의 7점 척도조차 대부분 평균 아래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서해는 천천히 내려가며 옆에 앉아있는 한태경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묵묵하게 서해가 선택하는 항목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못 믿겠습니까. 그럼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해 주겠습니다. 평균치에 대한 감이 없으면 계약서를 수정할 수 있는 시간도 주고, 막상 해봤는데 생각보다 어려운 게 있으면 변경할 수 있게도 해 주겠습니다. 이 정도면 덜 불안하겠습니까.”

“…네. 그렇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내 눈치 보지 말아요. 우리 관계는 내가 시작했지만 계약한 뒤의 주도권은 서해 씨가 가지게 될 겁니다. 플레이 중일 때는 내가 서해 씨에게 강자가 되겠지만 현실적인 관계에서 주도권은 서해 씨가 가지는 거예요. 이 계약서 전체가 그런 의미입니다. 서해 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플레이는 시작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주도권을 잡는다구요?”

“조금 안심됩니까? 그러니까 계약한다고 해서 처음부터 한계까지 몰아붙여질 걱정은 이제 그만하세요.”

한태경의 설명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갑을 관계가 모호한 계약서였다.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겠다는 말이 안심되면서도 정말인지 의문스러웠다.

서해는 다시 문서의 가장 위로 올라가 천천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빠트리지 말고 꼼꼼하게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충분히 생각하세요. 궁금한 것 있으면 다시 물어보고. 나 참, 파트너 구하면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영업해 본 기억이 없는데.”

서해의 손끝이 멈춰 설 때마다 디테일한 설명이 이어졌다. 계약서를 설명해 주는 말을 곱씹을수록 어쩐지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과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을 억지로 강요할 생각이 없다면 조금은 지켜볼 의향이 있었다.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대전제가 설명된 약관에 동의한다는 버튼을 체크했다.

“그, 그럼 다 했어요, 대표님.”

“다시 확인하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제일 마지막이 남았는데. 혹시 여기 있는 것 말고 본인이 무서워하는 게 있습니까?”

서해는 태블릿 모서리를 미끄러뜨리며 대답을 주저했다. 자신이 버틸 수 있지 않을까를 잠시 고민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한태경은 서해의 몸을 돌려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얼굴을 보자 더욱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진 서해가 눈앞에 보이는 한태경의 셔츠 단추만을 주시했다. 달콤한 말로 설득해 죽음과 같은 공포를 틀어쥘 그의 모습을 상상하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서해는 서늘한 눈매가 단호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아 절로 위축되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세차게 뛰었고 입이 바짝 말랐다.

그때 서해의 뺨 위로 커다란 손이 덮이며 목덜미와 귓가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화들짝 놀랐다. 따뜻함이 느껴질 만큼 느릿한 손길이었다.

“괜찮아요. 얘기하기 어려운 거 알고 있습니다. 약점 잡으려고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미리 조심하려고 알아두려는 겁니다.”

아무에게도 고백한 적 없었던 자신의 두려움을 처음으로 입 밖에 뱉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어렵고 힘든 일 앞에서 정적이 한참 이어졌는데 한태경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오히려 빨리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은 서해였다. 망설이던 서해는 그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담담히 얘기하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몸을 숨길 수 없었다.

“…화, 화장실에서… 문을 못… 닫거든요. 조금이라도 문이 열려있어야, 마음이. 대, 대표님 불편하시면 닫고….”

한태경은 바닥만 내려다보며 정신없이 고백하는 서해가 보지 못하게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동자에는 서늘한 기운이 가득했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불안해하는 서해를 달랬다.

“괜찮아. 또?”

그는 서해에게서 태블릿을 받아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덜덜거리며 떨려오는 몸으로 말하는 서해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품 안에 들어온 몸이 따뜻했다.

서해는 반짝거리던 화면이 꺼지는 것을 초점 없이 바라보다가 어깨를 살짝 말았다. 한태경에게 끌어안겨 품속에 갇혀있던 손끝이 초조하게 맞부딪쳤다.

서해는 가슴으로 맞닿은 체온을 느끼며 눈을 몇 차례 깜빡였다. 따뜻한 손이 서해의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혼자 이겨내려 무던히 애썼던 지난날과 달리 자신을 위로하는 듯한 온기가 가득 느껴졌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엉망으로 엉킨 것 같았던 머릿속이 조금 진정되었다.

“캄캄한 데… 혼자 있는 거요. 불 꺼진 곳이나 어두운 데 잘 못 들어가요. 잘 때도 그렇고.”

“그래서 38층에 온 첫날에 엘리베이터에서 못 내리고 지하 2층까지 내려온 겁니까?”

한태경이 큰 손을 뻗어 서해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깜짝 놀란 서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코가 부딪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날의 비밀을 들켜버려 놀란 서해가 눈만 깜박이며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앞으로는 숨길 것도 없어야 하고 부끄러울 것도 없어야 합니다.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나도 서해 씨 함부로 다루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또 있습니까?”

한번 고백한 다음부터는 어렵지 않았다. 서해는 기억을 더듬다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순간이 지나면 부정의 의미로 듣지 않겠다던 그의 말에 망설이던 말이 작게 튀어나왔다.

“갑자기 맞는 거…. 뺨을 맞으면 너무, 무서울 것 같아요. 어, 그리고 엉덩이도.”

“엉덩이는 좀 아쉬운데.”

“…대표님.”

“알겠습니다. 손이 아무 데나 올라붙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둘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서해는 애꿎은 옷자락을 움켜쥐고 한태경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렸다.

“빠짐없이 다 얘기했습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앗.”

한태경은 서해의 엉덩이 밑으로 팔을 쑥 집어넣더니 황당할 정도로 쉽게 서해를 안아 올렸다.

“내가 좀 많이 억울하게 된 그림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으니 당분간은 일상을 보내는 동안 그게 뭐가 됐든 서해 씨가 멈춰달라고 하면 멈추겠습니다. 나중이라도 플레이에 들어가게 되면, 못 견딜 만큼 힘들 때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해요. 따라 해봐요. 비가 올 것 같다고.”

“비가, 올 것 같아요.”

“잘했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요. 서해 씨가 비가 올 것 같다고 하면 바로 그만둘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럼 아무 일도 없이 평소처럼 지내는 거예요.”

베드 테이블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던 서해는 엉덩이에 침대가 닿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것 같은 한태경의 행동 때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서해는 침대에 앉게 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을 옴짝거리려다 참았다. 그가 먼저 얘기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한태경은 침대 밖에 우두커니 선 채 서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나는 서해 씨 몸 상태부터 보고 싶습니다. 특히, 그날 이후로 아주 날 거슬리게 하던 그 목이랑 발목.”

“…….”

“침대 위로 올라가서 앉아요.”

“…네.”

한태경이 서해의 옆자리로 따라 들어와 서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그는 급하지 않게 손을 뻗어 서해의 상체를 덮고 있는 티셔츠 목 부분을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급하게 손목을 잡는 서해의 손길에 하던 것을 멈추고 서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깐 보겠습니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서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데도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당황했다.

내려온 티셔츠 틈 사이로 한태경이 손가락을 집어넣고 서해의 턱을 들어 올렸다. 한태경의 팔목을 잡고 멈춰 세운 서해의 눈빛이 금방 일렁거렸다.

그 눈빛을 바라보던 한태경의 표정이 단숨에 바뀌었다. 금방이라도 서해를 잡아먹을 것 같은 강렬한 눈빛이 그대로 내려꽂혔다.

두려움을 느끼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여전히 한태경의 팔목을 잡은 손을 뗄 수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긴장감에 아랫입술이 말려들었다.

“손 떼요.”

단호한 그의 말에 서해의 숨소리가 들이켜졌다. 서해는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에 천천히 손을 떼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올려두었다.

“숨 크게 내쉬어요. 몸 상태만 확인한다는데 이렇게 긴장할 일입니까. 온몸이 다 쪼그라든 게 여기까지 느껴지네.”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한태경은 순식간에 서해의 양쪽 어깨 옆으로 티셔츠를 밀어 내렸다. 한 손에 가득 들어와 잡힐 것 같은 목이 가장 먼저 보였고 다음으로는 좌우로 가지런하게 뻗어 나간 쇄골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 목 좌우와 어깨를 세심하게 살폈다. 주중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멍 자국이 목에 올라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둘째손가락을 들어 그 위를 쓰다듬었다.

움찔하고 놀란 서해가 몸을 웅크리자, 한태경은 나머지 한 손을 크게 펴고 등을 내리누르며 서해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손가락을 곧게 편 채 목 앞쪽에 날 선 근육 라인을 따라 쇄골로 내려왔다.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고 티 없는 피부가 그대로 느껴졌다.

서해의 목 근육을 따라 V자 형태로 느릿하게 움직인 그는 멍 자국을 내려다보며 화를 삭였다.

너무나 느리게 움직이는 손 때문에 서해의 팔과 등에 소름이 돋아났다. 이유 모르게 가빠지는 숨소리를 누르기 위해서 서해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야 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절대 없게 하겠습니다.”

“대표님, 정말, 정말로….”

“나만 믿어요. 그게 오늘부터 서해 씨가 할 일이니까.”

서해는 한태경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간지러운 느낌에 어깨를 자꾸 앞으로 말며 오그라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손바닥으로 등을 누르며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반복해서 자세를 잡아 주었지만 어김없이 말려오는 어깨 때문에 한태경은 양손으로 서해의 동그란 어깨를 감싸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어깨 앞으로 말지 말아요. 힘주고 있으면 근육이 긴장해서 다칠 수 있습니다.”

한태경은 서해의 목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다시 티셔츠를 어깨 위로 끌어 올려주었다.

멀쩡히 돌아온 목선을 만지며 그를 바라보자 멀리서 다가온 손이 서해의 발목을 쑥 끌어당겼다. 오른쪽 다리가 한태경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는 걸 마냥 바라보았다. 종아리 아랫부분으로 부드러운 홈웨어가 닿으면서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

서해는 한태경이 자신의 발목을 들어 올린 순간 화들짝 놀랐다.

“대, 대표님.”

“왜.”

한태경은 서해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발목을 이리저리 살폈다. 단단한 손이 서해의 아킬레스건을 받치고 들더니 여기저기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발목 주위에는 이미 오래된 상처가 남아있기도 했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딱지가 남아있기도 했다.

한태경은 손에 발목을 올려두며 한숨을 뱉으면서 그제야 서해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잔뜩 올라가서 긴장하고 있는 어깨가 보였다.

“가… 간지러워요.”

그는 서해의 한쪽 발목을 손에 든 채 다른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웃었다. 반듯한 얼굴에 보기 좋게 걸려있는 웃음을 바라보던 서해는 자신이 하는 말 어디가 그렇게 웃긴지 이해하지 못해 입이 살짝 삐져나왔다.

“내가 진짜.”

“…왜 웃으시는 건데요.”

“지금 상황이 어이없어서 웃습니다. 사기꾼한테 된통 당한 기분이네요. 내가 얼마나 많은 걸 양보하고 있는지 알면 좋겠는데.”

서해의 두 발을 침대 아래로 가지런히 내려준 한태경은 벽 한쪽의 서랍장에서 동그란 통에 담긴 연고를 건네주었다.

“갑시다. 여기 더 있어봤자 나만 바보가 되는 기분입니다.”

한태경은 미련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도어 록에 손을 뻗어 문을 열어주었다.

작은방에서 빠져나와 복도에 들어서자 마치 다른 곳으로 순간 이동이라도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멍하니 서있는 서해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금방 따라 걸어오는 서해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만족스러운 마음이 가득 드러났다.

“내가 지내는 곳 바로 맞은편에 있는 방으로 바꿔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요. 바로 나올 테니까. 아니면 서해 씨가 내 방으로 들어와도 좋고.”

“네.”

계약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에 긴장이 풀렸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내려치던 손찌검도 없었고, 정신을 끝까지 갉아먹을 듯 몰아세우던 날 선 말투 하나 들은 것이 없었다.

세이프 워드를 말하면 바로 그만둔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차갑게 굳어있던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서해의 얼굴도 평소와 같이 풀어졌다.

한태경은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서해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 손길에 맞춰 눈꺼풀이 아래로 몇 차례 흔들리는 걸 보다가 아예 뒷머리 전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서해는 한태경의 손길이 이어지는 동안 몇 번이고 심장을 누르며 숨을 골라야 했다.

“온몸이 다 부드럽네.”

“대표님은 온몸이 다 단단하신 것 같아요. 운동 엄청 많이 하셨나 봐요.”

“그런 말은 꼬맹이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제 나이가 몇 살인데 그렇게 부르시는 건데요.”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사람 시험에 들게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네요. 들어가요.”

복도 중앙에 나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사이즈의 침대와 여러 가구 그리고 방에 같이 붙어있는 화장실이 보였다.

“한동안 비어있던 곳이라서 조금 어수선한데 차차 정리해 주겠습니다. 이번 주말엔 그냥 사용해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청소나 빨래 이런 거 신경 쓰지 말아요. 출근한 동안 헬퍼가 와서 처리해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대표님.”

“감사할 거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즘 회사에서 자신 보면서 아직 느낀 점 없어요? 나중에 다 받아 내겠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알겠어요. 이번 주말은 편하게 쉬어요.”

한태경은 양손으로 서해의 눈썹과 눈가를 쓰다듬으며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몇 차례나 부드럽게 만져주고 활짝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은 뒤 마주 보고 있는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 * *

주말 내내 한태경과 같은 공간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다가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출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진 ㄱ자 모양의 소파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책을 읽던 서해가 눈치를 살폈다. 그는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리고 타이핑을 길게 이어가던 중이었다.

타이핑이 잠깐 끊어진 틈을 타 그를 불렀다.

“대표님.”

“왜 그럽니까.”

“출근은 어떻게 하나요.”

“무슨 말입니까. 차 타고 하지.”

“저도요?”

“따로 갈 생각이었습니까?”

한태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무릎 위에 있던 노트북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서해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서늘해진 시선 때문에 서해는 손을 좌우로 흔들며 크게 당황했다.

“아니요, 대표님.”

“그럼 방금 질문은 뭡니까.”

“혹시 같이 출근하다가 누가 볼까 봐서요.”

“쓸데없는 걱정은.”

“…그래도 걱정되는데요.”

“지하 2층 주차장 사용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일찍 출근하지도 않을 테고.”

서해는 우리라는 단어를 듣고 눈을 깜빡였다. 혼자가 아니라는 단어가 새삼 따뜻했다. 우리. 서해는 마음속으로 단어를 몇 번 곱씹었다. 갑자기 바뀐 일상뿐만 아니라 관계성을 표현하는 사소한 단어에 혼란스러워졌다.

한태경은 한참 대들 것 같던 서해가 갑자기 어느 포인트에서 녹아내렸는지 찾지 못하고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는 분명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때 나오는 눈빛이었다.

눈을 내려 뜬 그는 무엇 때문인지 알아내 보려다가 한 걸음 물러섰다.

“토 달지 말아요. 앞으로 같이 출근할 겁니다. 굳이 따로 다닐 이유도 없고. 약속만 아니었으면 혼내는 건데.”

“…….”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올라갑시다. 내일 출근해야지.”

“네.”

자리에서 일어난 한태경은 서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해는 그 손을 거부하지 않고 꽉 잡고 일어섰다. 쑥- 하고 위로 당겨지는 몸이 어색하게 그의 품 가까이 당겨졌다. 계약 이후 내내 스킨십이 없다가 갑자기 닿는 따뜻한 온도에 서해는 자신도 모르게 꽉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서있었다.

“더 만져달라고 하는 강아지 같네요.”

서해는 서둘러 손을 놓으려 했는데 반대로 팔과 손을 얽듯이 잡아오는 한태경을 뿌리치지 못했다.

한태경은 그대로 그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앞서서 서해를 잡아당기듯이 올라가는 발걸음은 느릿했지만 안정적이었다.

“아직은 안 됩니다. 오늘은 그냥 잘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네, 네.”

놀리는 듯 이어지는 목소리가 얄미워 팔을 비틀어 빼내려 했지만 손을 잡은 악력을 쉽게 풀어낼 수 없었다.

서해가 손을 풀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한태경의 걸음을 따라 걷자 그의 엄지손가락이 서해의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괜히 간지러워진 느낌에 서해는 일부러 맞잡은 손을 앞뒤로 붕붕 흔들며 걸어갔다.

어떤 정신으로 2층까지 올라왔는지, 방 안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서해는 아무것도 아닌 짧은 스킨십에 화끈거리는 손등을 부여잡고 문에 등을 댄 채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믿을 수 없게도 서해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채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바닥에 앉은 채 넓은 방과 고급스러운 가구들을 둘러보았다. 단순히 예쁘고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었다. 서해와는 영영 관련 없을 것 같은 편안함, 안전함, 안락함 같은 것들이 마음을 간질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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