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경계선
큰 건물 로비에 들어서자 꼭대기까지 시원하게 뚫린 건물 천장에서 유리를 뚫고 따뜻한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출근 시간에 맞춰 도착한 출퇴근 버스에서 내린 직장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은 표정 없이 가방과 주머니 등을 뒤져 출입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들은 태그하고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첫 출근이라 출입 카드를 받기 전이었던 서해는 로비 한쪽에 있는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데스크까지 열다섯 걸음은 족히 남아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하는 여직원이 보였다. 서해는 데스크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출근하게 된 서해입니다.”
“안녕하세요. 여기 이름과 소속 부서를 적어주시면 보안 출입문 열어드릴 거예요.”
서해는 안내 데스크 위에 가지런히 놓인 A4용지 테이블에 이름과 소속 부서, 전화번호를 적었다. 펜을 내려놓자마자 여직원은 A4용지를 들어 전산 조회를 하기 시작했다.
정보 조회가 끝난 뒤 여직원의 눈이 모니터를 보았다가 서해를 다시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서 대리님, 대표님 직속 부서 소속이시네요.”
생경한 호칭이 서해의 귓가에 파고들어 와 어쩐지 어색했다. 서 대리님. 서해는 속으로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연거푸 곱씹으며 여직원을 쳐다보았다.
“오늘 오전 10시부터 오리엔테이션이 있으니까, 자리에 계시다가 교육장으로 가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자리가 문제였다. 서해가 이메일로 안내받은 자신의 자리는 38층 대표실이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특별 채용이라고 설마 대표와 같은 자리를 쓰는 것은 아니길 바라며 여직원에게 물었다.
“저, 이메일로 전달받은 자리가 38층 대표실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그럼 그곳에서 계속 일하게 되는 건가요?”
“네, 서 대리님. 별다른 인사이동이 없다면 그쪽에서 일하시게 될 거예요. 아, 서 대리님. 대표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그쪽이 아니라 따로 있거든요. 이쪽으로 따라오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여직원은 서해와 세 걸음 정도 앞서서 걸으며 로비를 가로질러 갔다. 서해는 얘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같이 위장막처럼 세워진 벽 너머의 단독 엘리베이터로 안내받았다.
여직원은 서해에게 출입 카드를 건넸다. 입사 지원서에 첨부해서 제출했던 사진이 출입 카드 한가운데에 박혀있었다.
“위층까지 안내해 드리면 좋을 텐데, 대표실에 출입할 수 있는 분은 두 분뿐이라 여기서부터는 혼자 올라가셔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1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고급스럽게 꾸며진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은 몇 개 없었다. 1층, 38층을 포함한 예닐곱 개의 버튼이 전부였다.
38층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서해는 엘리베이터 양쪽에 난 거울을 보며 넥타이와 슈트가 흐트러지지 않게 다듬었다. 검은색의 단정한 슈트, 기본 모양의 하얀 와이셔츠, 푸른색의 넥타이가 어색해 보였다. 거울을 보며 웃음 지으면서 할 수 있다고 되뇌었다.
—38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38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컴컴한 내부에 소스라치게 놀란 서해가 뒷걸음질 쳐 엘리베이터 벽 쪽에 바짝 붙어 섰다. 엘리베이터의 간접 조명이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조명 밑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38층은 주인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38층을 바라보는 서해의 눈꺼풀이 느리게 오르내렸다. 갑자기 어둠이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은 생각에 숨이 천천히 차오르더니 곧이어 가슴팍이 심하게 요동치는 게 보일 정도로 호흡이 가빠졌다.
빛이 없는 곳에 들어갈 때면 반응하던 공황 발작 증세였다.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이 보육원에서부터의 기억만 남아있는 서해는 밥을 잘 먹지 못할 때나, 아플 때뿐만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날에도 원장의 기분에 따라 어두컴컴한 화장실에 혼자 갇히고는 했다.
원장은 서해가 무섭다고 아무리 발버둥 치고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그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세뇌당하다시피 지내온 서해는 다 자라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화장실에 문을 닫고 혼자 들어가지 못했고, 불이 꺼진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병적으로 꺼렸다.
서해는 회사에서 어둠을 맞닥뜨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러 입구로 다가서는 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겁먹은 서해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어둠 속에 먹혀버릴 것 같은 공포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영원히 어둠과 대치하고 서있을 것 같은 절망적인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서해의 목덜미와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올 때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다시 급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리가 풀려버린 서해는 그대로 엘리베이터 구석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딩동, 지하 2층입니다.
문이 열리기 직전에 엘리베이터 모퉁이를 잡고 겨우 일어선 서해의 눈앞으로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서 대리?”
“대, 표님. 안녕하세요.”
“오늘 출근하는 날인 건 알았는데, 엘리베이터까지 마중 나올지는 몰랐습니다.”
대표의 농담에 겨우 웃은 서해는 자신의 발작 증세를 티 내지 않기 위해 등을 똑바로 펴고 앞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 가득 찬 식은땀을 바지춤에 쓸어내리며 말했다.
“잠시 딴생각하다가, 내릴 타이밍을 놓치고, 지하까지 내려왔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얼굴이 반가웠던 대표의 눈썹이 한쪽 끝으로 올라갔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서해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엘리베이터는 먼저 탑승한 사람이 타고 있으면 그 사람이 내리기 전까지는 문이 닫히지 않게 설계해 두었다.
무엇보다 가쁜 숨을 애써 진정시키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해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말없이 38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빠르게 38층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38층에 가까워질수록 서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서해가 폐소공포증을 가진 것이 아닌지 염려되었다.
—딩동, 38층입니다.
문이 열리기 직전 서해는 자신도 모르게 대표의 어깨 뒤에 숨어 그의 슈트 자락을 살짝 거머쥐었다. 평소라면 차갑게 떼어냈을 그는 모른 척 가만히 서해를 내버려 두었다.
대표가 도착하자 38층에 불이 켜지고 블라인드가 걷혀 올라가기 시작했다. 서해를 잡아먹을 것 같은 어둠도 금방 사라졌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서해의 귓가로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38층에 인공 지능 서비스를 실험하고 있는데, 미리 알려 주었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휴대전화에 APK 파일을 전송해 줄 테니까 설치해 두세요. 미리 설치하고 오면 오늘처럼 불이 꺼져있고 블라인드가 닫혀있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네, 대표님.”
서해를 내려다보는 대표의 표정이 어그러졌다. 아이도 아니고 어두운 것을 무서워한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먼저 38층으로 들어선 뒤 서해를 안내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넓은 이중창으로 메워진 38층은 회사라기보다는 고급스럽게 꾸며진 호텔 라운지 같은 분위기였다.
엘리베이터 맞은편으로 응접실처럼 꾸며진 ㄷ자 모양의 넉넉한 카우치와 두 사람이 족히 누워 잘 수 있을 만큼 넓은 대리석 테이블이 보였다. 카우치 뒤편에 좌우 대칭처럼 들어선 기둥에는 전기 벽난로가 들어와 있었고, 우측으로는 간단한 요리도 해 먹을 수 있을 것처럼 꾸며진 주방 기기들이 보였다.
조금 진정된 서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제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 회사의 닭장 같은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신경 좀 썼습니다. 주방 가전은 우리가 다음에 발표할 신규 브랜드 라인이기도 해서 몇 달 테스트해 볼 예정입니다.”
“…우와….”
“일하다가 기분 전환하고 싶다면 요리를 해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또 오해하지 말고.”
38층에 들어선 서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리에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 서해를 내려다보던 대표는 둘째손가락으로 서해의 턱을 밀어 올려 닫았다.
어쩐지 반복되는 것 같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워진 서해가 입술을 꾹 다물며 얼굴을 붉혔다.
“책상은 이쪽에 있습니다.”
“네, 네에.”
대표는 긴 팔을 뻗어 한쪽에 있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모던하게 꾸며진 책상과 엄청나게 큰 모니터, 사장님 의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좋아 보이는 의자가 눈에 차례대로 들어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고 대표를 올려다보자 그가 고개는 그대로 들고 눈만 내리깐 채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앞으로 저기서 일하면 됩니다. 사내 메신저는 바탕화면에 깔려 있으니까 신규 가입하고 아웃룩 계정도 같은 거로 생성해 주세요. 업무와 관련된 얘기는 아웃룩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서해 씨 연구 논문이나 이력서에 작성된 스킬셋 위주로 컴퓨터를 세팅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빠진 게 없는지 확인부터 해주세요. 빠진 게 있으면 경영지원팀으로 연락하면 바로 처리해 줄 겁니다.”
“오전 중에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내 명함 받아요. 내가 자리에 없거든 휴대 전화로 연락해 주세요. 그럼 난 저쪽 방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거나 급한 일 있으면 말해요.”
“아, 대표님. 10시부터는 오리엔테이션이 있어서요. 다녀오겠습니다.”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쪽에 위치한 ‘대표실’이라는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엉거주춤하게 가방을 끌어안고 서있던 서해가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업무 환경, 급여 모든 것이 최상이었다.
서해는 책상 옆의 바닥에 책가방을 벗어 내려두고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푹신한 쿠션과 자신의 몸에 딱 맞춘 듯 완벽한 등받이가 느껴졌다. 서해는 의자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려보며 가득 미소 지었다.
책상 위에 놓인 27인치 모니터와 얇고 성능 좋은 17인치 노트북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 가지런하게 놓인 11인치 태블릿과 유명 브랜드의 블루투스 스피커, 고급 필기도구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꿈 같이 느껴졌다.
이런 공간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언제 다시 얻을 수 있을지. 순간일지라도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곳이 있음에 가슴이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새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기분 좋은 시동음이 걸리고 사원 번호를 입력하는 화면이 떠올랐다. 간단한 개인 정보 인증 절차 끝에 가상 데스크에 접속할 수 있었다. 서해의 손끝이 흥분으로 떨려왔다.
컴퓨터 세팅도 완벽하게 끝나있었다. 서해는 대표가 자신이 쓰는 스킬셋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미리 설치해 둔 것에 진심으로 놀랐다. 그가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모든 연구 논문을 살펴본 것인지 궁금했다.
별도로 추가 신청할 프로그램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구매 단가가 비싸 엄두도 못 냈던 여러 통계 툴들과 추가 기능들이 잔뜩 심겨있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를 부를 뻔했다.
서해는 빠른 손놀림으로 사내 메신저에 로그인하고 아웃룩 계정을 생성했다. 아웃룩에는 입사를 축하하는 그룹사 전체 메일이 도착해 있었고 여러 사이트를 이용하는 안내 파일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로건 밀러의 이름으로 도착한 메일을 떨리는 손으로 열어보았다. 그가 보낸 메일은 간결했다. 입사를 축하하고 앞으로 잘해 보자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서해는 아웃룩 폴더를 여러 개 만들어 받은 메일함을 정리해 나누어 담고 시계를 보았다. 10시 15분 전이었다. 메신저를 켜고 로그온 중인 대표에게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오겠다는 쪽지를 남겼다. ‘OK’라는 짧은 답신이 날아왔다.
책상에 놓인 고급 노트와 펜을 옆에 끼고 38층을 나섰다. 5층에 있는 교육장으로 내려가자 수백 명은 족히 넘을 것처럼 많은 인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해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공채 과정을 거쳐 입사한 신입 사원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서로 친한 무리가 생긴 듯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입구에 붙어있는 자리표를 바라보자 자신의 자리가 맨 앞줄 가운데임을 알 수 있었다.
서해는 교육장 가장자리에 난 길을 따라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테이블 위에는 삼각형으로 접혀 세워진 A4용지에 서해라고 이름이 적혀있었다.
연구실에서 자신의 공간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생겨난 소중한 자리였다. 울컥하고 목구멍을 타고 무언가 솟구쳐 올랐다. 학교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반겨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 꼴사납게 눈가가 달아오를 뻔한 서해는 자리에 앉아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오전 시간은 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비전을 나타내는 개괄적인 안내를 받는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교육장 내에 도시락이 건네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생긴 무리 틈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도시락이라고 하기에 고급스러운 반찬들이 가득해 서해는 한 그릇을 몽땅 비워냈다.
점심시간에 수다를 떨며 함께 밥을 먹던 사람들이 서로의 부서를 공개했다. 서해가 자신을 소개하자 테이블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 대리님이 그럼 소문의 그 특별 채용?”
“…대박. 대박 사건. 서 대리님, 나 기억해 줘야 해요. 밥 같이 먹은 거 잊으면 안 돼.”
“돌아가면 메신저 추가부터 해야지. 서 대리님 계정 뭐예요?”
서해가 대표의 직속 부서인 기획조정실에 있다는 말이 밖으로 꺼내지자마자 주위 사람들은 앞다투어 자신을 어필하며 기억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서해는 적당히 웃으며 그들과 대화를 섞다가 부담 없이 가벼운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관심은 금방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오리엔테이션 후반부에는 글로벌유니티의 한국 지사 대표가 축사하러 단상에 올라왔다. 대표는 회사의 비전과 인재상 이야기를 했다.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흔히 오고 갈 수 있는 말이었다.
서해는 축사의 내용보다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그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단상 위에서 하는 축사의 자리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그는 스피치 능력이 남다른 것뿐만 아니라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외모, 말투, 배경을 모두 다 가진 사람이었다.
낡아빠진 평상에서 맥주를 나눠 마신 그는 로열 패밀리였다. 그의 뒤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나 당당함이 눈으로 구분되는 것 같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자신과 닿을 수 없는 존재.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서해는 이런 부류와 지내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적당한 웃음과 적당한 거리, 적당한 동조 그리고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연설이 마무리될 즈음, 서해는 단상 위에서 날아와 꽂히는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대표의 시선이 한가운데 고정되어 이동되지 않자 교육장에 앉아있던 신입 사원들이 서해를 흘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서해는 무릎 위에 올려진 주먹을 꽉 쥐고 단상 너머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38층의 자리로 돌아온 서해는 APK 파일을 휴대 전화에 설치했다.
깔끔하고 단정한 아이콘과 화면이 그를 생각나게 했다. 호미파이라는 이름의 앱은 집 안의 전자 기기부터 공기 컨디션, 에너지 관리까지 모든 것을 한 앱에서 컨트롤할 수 있게 만들어진 앱이었다.
자리에 앉아 앱을 살펴보고 있자니 대표가 서해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APK 파일 받았어요?”
“네, 대표님. 설치 끝났습니다. 연동도 완료되었고요.”
서해는 무사히 설치된 화면을 보여주기 위해 휴대전화 화면을 띄워 대표에게 보여주었다.
“차기 CES Summer Show에 전시할 예정이니까 보안에 특별히 조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기본 세팅 목록 들어가면, 서 대리가 원하는 대로 조명 세팅 가능합니다. 살펴보고 조정하세요.”
“어…, 네. 감사합니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던 대표는 다시 대표실 안으로 사라졌다.
서해는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뭉쳐진 폴더 가장 구석에 호미파이 앱을 넣었다. 기본 세팅 목록에서 조명 설정을 눌렀다. 응접실과 사무실의 조명이 휴대전화와 연동되어 있는 것을 몇 차례나 확인한 뒤에야 앱을 닫을 수 있었다.
* * *
다음 날,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38층에 올라온 서해는 문이 열리고 환하게 밝아진 상태의 응접실을 본 다음에 크게 안심했다. 밤새 끙끙 앓았는데 두 눈으로 환하게 밝아지는 38층의 모습을 확인한 뒤 마음이 차분해졌다.
서해는 글로벌유니티를 퇴사하기 전까지는 블루투스 버튼을 OFF로 돌리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대표가 서해에게 요청한 일은 자사의 마케팅부나 부설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보고서나 프랙티컬한 연구 논문의 프레임, 조사 분석 방법 등이 제대로 적용되었는지를 검증해 달라는 일이었다.
서해의 전문 분야이기도 했고 석사 과정에서 밥 먹듯이 한 일이라 어려울 것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쏟아지는 업무량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화, 수, 목요일을 지내는 동안은 업무에 적응하기 바빴다.
그래도 오늘만 버티면 주말이라는 생각에 기운을 끌어 올리며 노트북 전원을 켰다. 윈도우에 접속되자마자 아웃룩이 핑핑 울려대기 시작했다.
돈을 주는 만큼 부려먹을 것이라고 경고하던 어느 날 밤 대표의 말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당장 오늘 검토해야 할 데이터 분석 건만 일곱 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서해는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오른손은 마우스를, 왼손은 키보드 위에 올리고 앉았다.
바탕화면에는 SAS, R, SPSS의 통계 프로그램이 모두 열려있었다. 데이터 종류에 따라 사용해야 할 프로그램이 달라져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았다간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대표가 업무를 진행하는 동안 자신에게 별도로 요청하는 잔심부름 같은 것들이 전혀 없었고, 백업을 요청하는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오전에 세 건, 오후에 세 건을 처리한다면 적어도 8시나 9시 정도엔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요일에 12시를 넘기는 야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해의 눈이 모니터에서 어지러운 숫자와 수식을 정신없이 읽어 내리고, 보조 모니터에 띄워진 자료와 비교하는 것을 반복했다. 서해는 다부진 손길로 사실과 다르게 작성된 데이터에 마킹해 나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엉망인 분석 테이블에 서해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누구야, 기본도 없이 이딴 식으로… 이 정도면 조사를 새로 해야겠는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며 화면을 훑어보던 서해의 등 뒤로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려다가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자신의 오른쪽 옆얼굴 아주 가까이 대표의 얼굴이 바짝 붙어서 모니터를 살피고 있었다.
“대, 대표님. 언제 오셨어요.”
“서 대리는 몇 시에 도착했길래 벌써 업무를 진행하고 있습니까. 설명도 없었는데 알아서 잘하네요. 궁금한 것 있습니까.”
“그게… 분석 테이블의 오류 정도가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어떻게 정리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조사 프레임 자체가 아예 잘못된 것이 있는 반면에 몇 가지만 바로잡으면 괜찮아질 보고서도 있어서요.”
“아웃룩으로 테이블 정리해서 넘길 테니까 별도로 작성해 주세요. 귀찮겠지만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해서 공유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기존 보고서에는 오류 난 수식이나 데이터, 잘못된 부분 위주로 마킹만 해주면 내가 검토해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대표는 쭈뼛거리며 자신과 반대쪽으로 멀어지는 서해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놀리고 싶었지만, 진심으로 놀란 것처럼 보이는 서해로부터 떨어지며 몇 가지 소소한 팁들을 더 당부했다.
잠시 서해의 작업을 지켜본 대표는 생각보다 더 똑 부러지는 업무 능력과 주요 이슈들을 금방 짚어내는 서해의 시각에 이번 특별 채용이 아주 만족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런 종류의 업무에는 그저 그런 사람 열 명보다는 똑똑한 사람 한 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는데 생각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서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급하게 할 필요 없어요. 오늘까지만 보내면 되니까 천천히 해서 메일로 공유 주세요. 대신 틀리면 안 됩니다. 엄청 중요한 일 한다는 거 잊지 말고 신경 써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서해는 상사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했다. 대표가 말하는 시간은 눈에 불을 켜고 일해도 여덟 시를 찍을까 말까 할 정도로 빠듯하게 보였다.
짧게 앓는 소리를 낸 서해는 어쩐지 권 교수보다 더한 사람을 만난 것은 아닌지 걱정을 밀어 넣으며 다시 집중했다.
대표는 오전 내내 꼼짝도 하지 않고 일만 하던 서해를 지켜보다가 믿을 만한 정도임을 확인한 뒤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러 방으로 들어섰다. 한국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걱정 없이 자신의 업무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마음이 바쁜 만큼 서해의 머리도 핑핑 돌아갔다. 단축키를 누르는 왼손과 마우스를 잡은 오른손의 움직임이 빠르게 움직였다.
정확히 세 건의 업무를 마치고 네 번째 메일함을 열었을 때였다. 열려있는 미닫이문을 두드리며 종이봉투를 흔드는 대표가 보였다.
“서 대리, 밥 먹고 합시다.”
“네?”
서해는 테이블에 놓인 모던한 모양의 탁상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은 벌써 12시 15분을 지나가고 있었다.
대표는 주방처럼 꾸며진 한쪽에 마련된 큰 월넛 테이블에 종이 박스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것은 고급 일식집에서 포장해 온 것 같은 초밥 열여섯 피스였다.
일하느라 집중할 때는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던 서해의 눈동자에 맛있는 음식이 가득 들어차 담겼다. 대표는 초밥을 내려다보는 서해의 표정을 바라보며 자신이 선택한 메뉴가 적당했음을 직감했다.
“점심시간인데 밥 안 먹어요? 가만두면 계속 일만 하겠습니다.”
“아, 학교에서 딱히 점심시간 없이 지내던 게 습관이 되어서요.”
“여기서는 그러지 말아요. 앉아요. 같이 먹으려고 두 세트 사 왔으니까.”
“…감사합니다, 대표님.”
“나도 이제 같이 밥 먹을 사람 생겨서 좋네요.”
“잘 먹겠습니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서해는 입안에 넣자마자 쫄깃하게 씹히는 회와 탱글탱글한 밥알의 느낌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누군가 포장해 온 식사가 부담스럽다거나 비용 부담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 저 멀리 날아가 버릴 정도의 맛이었다.
“너무 마시써요, 대표님.”
“다행입니다. 맛있게 먹어요.”
대표는 양쪽 입을 가득 부풀려 초밥을 씹는 서해를 바라보다가 초밥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자주 이용하는 일식집 초밥이 다른 가게에 비해 회가 두툼하게 올려지기는 했지만, 성인 남자가 먹었을 때 저렇게까지 입안이 부풀어 오르는 게 정상인지 궁금해졌다.
참치회 초밥을 집어 올려 입안에 넣자 한입에 쏙 들어와 어렵지 않게 씹을 수 있는 걸 느끼고 다시 서해를 바라보았다. 서해의 양쪽 볼은 여전히 빵빵했다.
초밥을 먹는 서해를 보다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사람 참 한결같네요. 이력서나, 면접이나, 업무 스타일이나.”
그는 뒤따라 나오는 말을 눌러 참느라 입을 꾹 다물었다. 상대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성향의 대표가 서해를 본격적으로 주시하기 시작했다.
서해가 침대 위에서도 분명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응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작은 입을 벌리고 들어서 마음껏 혀를 문지르는 상상을 하자 허리 아래쪽이 뻐근하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상상을 숨긴 대표는 서해에게 이것저것 권했다. 초밥을 다 먹은 다음에는 호미파이 앱을 열고 아메리카노를 내려 서해에게 가져다주었다.
젓가락을 놓고 두 손이 머그컵을 감쌌다. 스칠 듯 말 듯 한 손끝을 내려다보다가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그컵 가장자리에 닿은 입술이 보였다.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조그마한 입을 보자 충족감이 차올랐다.
“대표님, 잘 먹었습니다.”
“…나도 잘 먹었습니다.”
“이건 제가 치울게요.”
서해는 초밥이 담겨있던 종이팩, 일회용 반찬통 등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사실 무슨 정신으로 밥을 먹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맛있는 걸 먹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대표와 눈이 마주칠 때면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식사할 때도 이전에 작업하던 것들을 생각하면서 먹는 편인데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식사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충분히 복잡했다. 젓가락질을 고민할 정도였으니까.
평소보다 밥을 빨리 먹은 서해는 테이블 정리와 양치를 빠른 속도로 끝낸 뒤, 다시 자리에 앉아 네 번째 파일을 열었다.
* * *
오후 일곱 시가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예정된 일곱 개의 데이터 분석을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대표에게 아웃룩으로 첨부파일을 전송하자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몇 가지 마이너한 수정 사항들을 받아들게 되었다.
서해는 그를 닮아있는 업무 스타일을 숙지하며 수정 사항을 반영하고 여덟 시에 재차 데이터와 정리된 자료를 넘겼다. ‘OK’라는 짧은 답신을 확인한 서해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라고 입력해 보낸 뒤 회사를 나섰다.
생각보다 업무량은 빠듯했지만 그와 업무 스타일이 크게 다르지 않아 일하기 어려운 점은 없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일에 이바지하는 기분이 들어 조금은 뿌듯하기까지 했다.
서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직장인에게 찾아온 주말을 만끽하는 금요일 밤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행복해졌다.
언덕길을 오르는 서해의 귀에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이제 8천 원을 걱정하지 않아도 다음 달을 살아갈 수 있게 되어 감사했다.
학교 외에 자신을 반갑게 맞아줄 곳이 있을까에 대한 염려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대표가 아웃룩으로 서해에게 보낸 짧다 못해 무뚝뚝하기까지 한 ‘OK’라는 답신이 서해의 머릿속에 몽글몽글하게 피어올랐다. 실없이 미소가 지어졌다.
살짝 들뜬 서해의 발걸음은 삼거리 앞에서 어김없이 멈춰 세워졌다. 집에 불이 들어와 있었고 대문 양쪽으로 권율기의 가드들이 서있었다.
그동안 대표와 일하면서 권율기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평범하다 못해 최상위 계층에 사는 그 옆에서 마치 자신이 계층을 이동한 것 같은 대단한 착각에 빠져 옷이 젖는지도 모르고.
이대로 모든 걸 버리고 도망가 버릴까 생각하던 찰나에, 서해를 발견한 권율기의 가드가 육중한 몸으로 서해의 뒷덜미를 잡아채 집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억지로 방에 밀려 들어온 뒤에는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침대 앞에 서있는 권율기가 느껴졌다. 서해는 눈을 내리깐 채 현관에 덜덜거리며 서있었다. 손끝을 얽어 잡으며 초조하게 손톱을 맞부딪쳤다.
“왔어?”
침대 위에는 무언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발목을 묶는 가죽 구속구와 그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차가운 금속 기둥, 알 수 없는 체인, 그리고 투명한 액체가 담긴 주사기 같은 것들이 보였다.
권율기가 종종 집에 찾아오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침대에 여러 물건을 깔아놓고 기다린 적은 처음이었다. 문득 최근 들어 성기가 입을 벌리고 들어오는 텀이 짧아진 것을 떠올렸다. 소름이 돋았다.
“일찍 다니라는데 말은 참 안 처들어요. 빨리 들어와.”
서해는 신발을 벗고 현관 끄트머리에 겨우 올라섰다. 권율기는 서해의 손에 투명한 액체가 담긴 주사기와 박스를 쥐여주며 어두컴컴한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갑자기 찾아온 비극의 순간은 지독하게 절망스러웠다.
달칵-
화장실 바깥에 서있던 권율기는 불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덜덜 떨어대며 자신만 바라보고 서있는 모습을 보자 그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장난처럼 문을 닫으려는 그의 움직임에 점점 거칠어지는 서해의 숨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하나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큼의 틈을 남기고 기어코 불이 꺼졌다.
좁은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 한 줄기가 구원이라도 해줄 것 같아 손가락을 무작정 밀어 넣었다. 억지로 밀려 들어간 하얀 손가락의 피부가 벗겨졌다. 서해는 필사적으로 문틀을 잡고 버텼다.
“사, 상무님. 안, 안 돼요. 흐….”
문틀 너머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번졌다. 금방 꽝 닫힐 것 같은 틈이 한 뼘으로 벌어졌다. 그 틈이 뭐라고 기절할 것같이 가슴을 옥죄던 느낌이 조금씩 사라졌다. 문이 닫히지 않게 양손을 다 붙인 서해의 눈이 감겼다 뜨기를 반복했다.
“15분 줄 테니까 빨리하고 나와. 시간 초과하면 화장실 불 꺼버릴 거야. 늦어질 때마다 한 대씩 늘어나는 거 잊지 말고.”
그 말을 듣자마자 서해는 가방과 재킷을 문밖으로 내던졌다. 열린 문틈 사이로 어설픈 슈트가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다.
동봉된 설명서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지만 서투른 손길이 버거웠다. 다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15분 동안 끙끙거리는 서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유 있는 동작으로 옷을 벗어 창가의 옷걸이에 걸어둔 권율기는 화장실의 열린 문틈으로 살짝 보이는 서해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새끼. 아직도 문 못 닫나 보네, 귀엽게.”
권율기는 왼쪽 손목에 채워진 문페이즈 시계 안의 스톱워치가 2분 남은 것을 보고 외쳤다.
“서해야, 5분 남았어.”
권율기는 화장실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서해의 소리를 들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눌러 참았다. 3분 오버하게 된 줄 모르는 서해를 놀려먹을 상상을 하는 권율기의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60초면 180대인가.”
권율기는 침대 발끝에 놓인 가느다란 패들을 손에 잡고 허공에 휘둘렀다. 그의 입에서는 알 수 없는 허밍이 들려왔다.
“새로 산 아이템이나 테스트해 볼까.”
허공을 몇 차례 가격하듯 휘두르던 권율기의 다리 아래로 허겁지겁 달려온 서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동그랗게 말아 쥔 서해의 주먹이 무릎 위에서 마구잡이로 떨려오고 있었다.
바들거리는 서해의 시선에 권율기가 들고 있는 검은색 패들과 침대 위에 흩어진 기구들이 눈에 보였다.
“사, 상무님. 하고, 하고 왔어요.”
두려움이 가득 담긴 서해의 눈을 내려다보는 권율기의 시선에 즐거움이 가득 묻어났다.
“어쩌냐. 3분이나 지났는데.”
* * *
서해는 아주 어릴 때 보육원을 지원하는 나이브레티의 회장의 눈에 들었다. 권 회장은 똑똑하고 예쁘기까지 한 서해를 재단의 얼굴로 사용했고 그 대가로 서해는 학업 지원을 받기로 했다. 원장은 보육원에 지원금이 들어오게 되는 것을 반겼다.
그러나 권 회장이 서해의 학업 지원금으로 사용되는 금액을 철저하게 감시하기 시작한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보육원에서는 툭하면 어린 서해를 화장실에 가두고 때리며 폭력을 가하기 일쑤였는데, 권 회장이 보육원을 방문하기 일주일 전부터는 손찌검이 날아오지 않곤 했었다. 권 회장과의 기념사진 때문이었다. 어린 날의 서해는 권 회장이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서해가 중학교에 입학했던 어느 날이었다. 나이브레티의 권 회장과 함께 학교를 찾아온 권율기를 처음 만나게 되었고 서해의 악몽 같은 나날은 그때부터 계속되었다.
권 회장이 물려준 재단의 대표가 되어 보육원을 찾아온 권율기는 서해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어린 나이에 습관과 낙인처럼 새겨진 공포에 대한 순응은 서해가 어른이 된 다음에도 반항할 생각조차 가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서해는 권율기를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눈빛이 매섭게 변한다 싶더니 이내 서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 그럴 리가, 없, 없, 아윽.”
서해에게 머리카락이 뽑혀나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바닥에 질질 끌리다시피 해서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진 몸이 다시 침대 밖으로 쑤욱 끌어당겨졌다.
권율기는 서해를 침대에 눕히고 가느다란 양쪽 발목을 잡아채 가죽 구속구를 채웠다. 하얀 발목에 채워진 검은색 가죽이 퍽 잘 어울렸다. 모난 곳 없이 뻗어 올라간 종아리와 허벅지를 보는 권율기의 눈동자에 흥분이 가득 찼다.
“씨발, 그럼 내가 헛소리라도 한다는 거야? 존나 웃기는 놈이네, 이거. 움직이지 마, 자꾸 풀어지잖아.”
“그게, 아니라. 상무님… 그게, 하, 윽….”
권율기는 두려움에 가득 찬 서해의 발목을 잡아챘다. 발목에 서늘하고 딱딱한 가죽이 닿는다 싶더니 이내 조금의 틈도 없이 팽팽하게 감겼다.
무릎을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침대 끝에 걸쳐두었다. 그는 침대 아래에 주저앉아 발목 사이에 쇠파이프를 고정하고 서해의 다리가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옭아맸다.
“시간을 15분이나 줬는데 잘 나눠서 썼어야지. 구멍 쑤셔대느라 정신 팔려서 늦게 나온 게 누군데 내 탓을 해.”
서해는 난폭하게 조여드는 발목을 버둥거리려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단단히 감긴 쇠파이프 때문에 다리를 벌린 채 그대로 권율기를 바라보았다. 벌써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하얗게 변한 발끝이 차갑게 식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줄 걸 그랬잖아.”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짜증 나게 자꾸 아니래, 이 새끼가. 봐줬더니 기어오르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화장실에 다시 처넣어 줄까?”
화장실이라는 단어를 뱉자마자 덜덜거리는 서해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권율기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서해의 발목 주위를 쓰다듬었다. 발목 사이의 쇠파이프가 잘 고정되었는지 몇 차례 흔들어 본 뒤 침대에 걸터앉아 서해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엎드려 눕게 했다.
서해의 몸이 발작적으로 튀어 올랐지만 거칠게 목덜미를 잡아 내리누르는 그의 손길에 그대로 침대에 얼굴을 처박았다.
“우리도 진도 좀 빼자. 요즘은 엉뚱한 데 가서 풀려고 해도 잘 안 풀려.”
“…아… 안 돼요, 상무님, 제발….”
소름 끼치는 말이 귀에 들어와 박혔다.
꿈틀거리며 허벅지에서 내려온 서해의 정수리를 두꺼운 손이 몇 차례 내리쳤다. 머리가 윙윙 울리고 이명이 생겨날 정도의 충격이 뒷머리를 강타했다.
정신을 차리자 침대를 뚫고 들어갈 것처럼 강한 손의 악력이 서해의 뒷머리를 침대 위로 비벼대고 있었다.
권율기는 침대 끝에 흩어져 있던 구속구를 가져와 서해의 입 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눈을 깜빡이며 버티고 있자 머리카락이 움켜잡히고 뺨을 후려치는 매서운 손길이 느껴졌다. 머릿속이 웅웅 울려댔다.
느릿해진 움직임으로 입을 벌리고 고무 재질의 공을 베어 물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씨발, 멍청한 새끼. 내가 한 말 잊어버렸어? 전에 알려준 거 잊어먹었냐고!”
“웁.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주인님.”
“그래, 내가 네 주인이잖아. 존나게 말 안 듣는 네 주인.”
서해는 힘으로 내리누르는 그의 손을 피해 고개를 겨우 돌렸다. 눈을 내리깔며 권율기가 알려준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그래,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자꾸 그러는 거야. 혼나고 싶어서 그래?”
다시금 누그러든 권율기의 말투에 서해가 안심하자마자 입을 벌리고 구속구가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뒷머리까지 단단하게 매어진 가죽 벨트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흘러내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매어졌다.
“변태 새끼랑 놀아주는 주인이 흔한 줄 알아? 감사하다는 인사를 꼬박꼬박 잘해야 내가 너랑 계속 놀아줄 거 아냐.”
“읍. 으으.”
“그래, 알았으니까 얌전히 엎드려. 끙끙대지 말고.”
권율기는 자신의 한쪽 다리를 세워 들어 서해의 엉덩이가 위로 올라오게 자세를 잡았다. 그는 양쪽 엉덩이를 번갈아가며 문지르면서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살갗이 손에 착 감기자 날뛰던 권율기의 마음이 조금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1초당 한 대씩 하면 180대야, 서해야.”
서해의 고개가 좌우로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권율기는 서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척했다.
“어떡하냐. 오랜만에 엉덩이 다 터지겠네.”
“흐, 으으, 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해의 엉덩이 위로 패들이 연달아 날아들기 시작했다. 고통에 몸을 뒤채는 서해의 등을 반대쪽 손으로 내리누른 권율기는 열 대씩 끊어진 매질을 세 번 연거푸 반복했다.
한 군데만 집중적으로 내리친 서해의 엉덩이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침대에 이마를 비비며 소리 지르는 서해의 다물지 못하는 입가에 타액이 흘러내려 끈적하게 고였다.
망설이는 서해의 손이 엉덩이를 덮지 못하고 허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손으로 덮었다가 처음부터 맞았던 어느 날의 기억이 벼락처럼 떠올랐다.
“서해야, 오늘은 이렇게 할까? 손으로 만지면 죽도록 터진 다음에 그리고 화장실로 가는 거야.”
서해는 무섭게 날아오는 권율기의 협박에 바로 손을 얼굴 앞으로 가져와 얌전히 포개었다.
권율기는 손에 들고 있던 패들을 침대 옆에 내려두고 둘째손가락을 세워 상처를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부풀어 오르는 피부 끝에서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래에서 터져 나오는 억눌린 비명을 듣는 손길이 점점 거칠어졌다.
“읍… 윽. 흐, 흐윽.”
“그래, 이제 시작인데 벌써 엄살 부리면 안 되지. 150대 남았어.”
서해는 몸을 굴려 빠져나가려 했지만 등을 눌러오는 권율기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굵게 나있는 상처 위로 빨갛게 피 맺음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권율기는 패들을 세게 쥐어 감고 바로 아래를 연거푸 후려치기 시작했다. 다리를 버둥거리고 싶었지만 단단하게 묶여있는 수갑이 그러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잔인하게도 서해의 앞에 허락된 온기는 그가 유일했다. 부끄러움 따위 생각할 겨를 없이 엉망으로 무너져 내린 서해가 권율기의 허벅지 위에 몸을 비비며 헐떡였다. 눈을 감고 따뜻함을 더듬어 찾을 때마다 체인의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권율기는 서해의 하얗고 통통한 엉덩이 위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자국을 만족스럽게 쓰다듬어 내렸다. 발작하듯 튀어 오르는 몸이 권율기의 몸 쪽으로 달라붙자 그는 싫지 않은 듯 서해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씨발… 왜, 맞으면서 뒷구멍이 간질간질해?”
“흡, 으읍….”
“엉덩이에 하나 물고 있으면 조금 깎아줄 수도 있는데.”
“마, 맞는 게, 흐… 맞, 악!”
벌어진 입에 물린 구속구를 이로 밀어내며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라리 때려달라고 애원하는 기분은 비참하고 또 비참했다.
권율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서해의 엉덩이를 벌리고 꽉 다물린 구멍의 위아래를 쓰다듬었다. 속이 뒤틀리면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몸을 잡아채는 거친 손길에 다시 끌려왔다.
“변태 새끼 아니랄까 봐. 어디서 발정 난 개가, 얌전히 다니라는 회사에서 꼬리를 흔들고 다닌다는 소리가 기어 나오게 만들어. 입사한 지 일주일 만에.”
“흐으…. 읏, 으읍.”
“주인이 먼저 교육했어야 했는데. 기르던 개 때문에 내가 욕먹고 다니면 좋겠어?”
권율기의 손바닥이 엉덩이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서해는 침대 시트를 구겨 잡으며 고통을 참았다. 급하게 휘젓던 손바닥이 사라진다 싶더니 엉덩이뿐만 아니라 허리 뒤쪽, 허벅지 아래 가리지 않고 손찌검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입으로 숨을 들이켜고 싶었지만 꽉 막힌 구속구 때문에 코로 숨 쉬는 방법밖에 없었다. 침대 위에 손톱을 박아 넣고 바닥을 긁자 손끝이 하얗게 뒤집혔고 몇몇 손톱 끝에는 빨갛게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컥컥거리며 넘어가는 숨소리에도 권율기의 손길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다리를 벌리고 있던 수갑이 팽팽하게 벌어지는 소리를 만족스럽게 듣고 있던 권율기는 손바닥을 거두고 패들을 들어 다시 매질을 시작했다.
서해의 발목 주위가 마찰되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매끄럽지 못하게 마감되어 빠져나온 실밥에 문질러진 발목이 까져 따끔거렸지만 그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미 맞은 엉덩이의 피부가 터져나갔고 하얗고 깨끗하던 곳에 새로운 자국이 남기 시작했다. 고통을 눌러 참는 서해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정없이 날아오는 고통에 익숙하지 않아 숨을 고르며 헐떡거렸다. 부족한 산소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숨소리에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리자 물속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똥개면 똥개답게 시키는 일 적당히 하면서 얌전히 있어. 동네방네 휘젓고 다니면서 사람 골치 아프게 하지 말고. 침대 밑에 내려가서 무릎 꿇고 앉아.”
꾸물거리던 서해는 침대 아래로 내려가 권율기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리를 벌린 채 무릎을 꿇고 앉아있자 무릎이 시큰했다. 공포감에 휩싸인 서해는 부끄러움도, 수치스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이 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짝-
세차게 내려온 타격감에 몸이 한쪽으로 휘청거리자 권율기가 뺨을 톡톡 두드렸다. 떨리는 몸을 바로 세우자마자 입을 막고 있던 구속구가 풀렸다.
“으, 읍…. 윽.”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이 들렸고 입가로 생채기가 생겨난 것이 보였다. 침대에 주저앉아 서해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서해를 보며 권율기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시커멓게 올라온 성기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너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건 딱 이 정도 수준이야. 이 세우지 말고 턱에 힘 빼.”
권율기가 서해를 잡아 흔드는 행위는 한참 동안 계속됐다. 끝내 기절하듯 까무러친 서해가 새벽녘에 눈을 떴다. 침대에 누워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잠든 권율기를 마주 본 서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해는 권율기가 깨어날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숨죽이고 누워 그가 다시 깨어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는 동안 발목을 옭아매는 거친 가죽의 통증을 꾹 눌러 참았다. 한참 동안 같은 자세로 고정된 서해의 골반과 무릎이 뻐근하게 아려오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 살포시 선잠에 빠져들었던 서해는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누군가의 손길에 억지로 눈을 떴다. 퉁퉁 부은 눈과 엉망인 컨디션에 열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어른거리는 눈가로 권율기가 보였다.
“앉아봐. 앉으라고.”
서해는 서둘러 손을 짚고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간밤에 발목을 옥죄던 가죽 구속구는 풀려나가고 없었다.
“너 편하게 다니라고 글로벌유니티에 쑤셔 박은 거 아니야. 잘 들어. 너, 로건이랑 같이 일하고 있지?”
“…네.”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권율기는 서해의 어깨를 꽉 잡아 흔들며 재차 다그쳤다. 간밤에 이리저리 쓸려 멍들고 까진 목덜미가 따끔했다.
“정신 차려. 글로벌유니티에 차기 신제품에 탑재될 인공 지능 알고리즘이 있을 거야. 너, 그거 빼내 와.”
“상무님, 지금 산업 스파이 짓이라도 하라는 말씀입니까. 학교에서 몰아냈으면 됐지, 회사에서도 발 못 붙이게….”
억울함에 내뱉어지는 서해의 말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두꺼운 손이 서해의 뺨을 내리쳤다. 겨우 앉아있던 딱지가 찢어져 입가에 다시 피가 고였다.
“…못 합니다.”
“개기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너 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왜냐면, 외우는 것 말고는 빼내 올 수 있는 방법이 없거든.”
“…….”
“하나하나 가져오기엔 너무 오래 걸려. 무사히 가져온 걸 확인한 다음에는 너에게도 선물을 줄게. 하는 거 봐서 네가 그렇게 원하는 소원 하나쯤은 들어줄 수도 있고.”
서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 정도면 좋은 거래 아니야? 시간은 충분히 줄 테니까 알고리즘만 가져와.”
권율기의 믿을 수 없는 제안에 서해의 손끝이 떨려왔다. 영원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 것 같았던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것이 보였다.
서해는 그러다 문득 글로벌유니티가 생각났다. 다시는 생겨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자리와 책상도 떠올랐다. 그리고 대표도 떠올랐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해 준 사람을 배신해도 될까.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을 속이고 정보를 빼내어 도망친다고 해서 자신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짧지만 그를 속이는 상상을 한 자신의 모습이 역겨워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씨발,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잡생각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손해 볼 거 없이 잘 챙겨줄 테니까. 알아들었어?”
서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책감이 온몸을 감싸고 올라와 자신을 괴롭혔다.
권율기가 창가에 걸려있던 옷을 탁탁 털어 먼지를 떼어낸 뒤 현관에 가지런하게 벗어둔 구두를 신고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옷을 챙겨 입을 겨를도 없이 서해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내렸다. 아무렇지 않게 비윤리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그의 모습 너머 찰나처럼 스쳐 지나간 해방감을 맛보았다.
금방 부서질 것처럼 얇은 양심의 가책 속에서 피어났던 추한 감정이 마음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자괴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비참한 얼굴이 힘없이 일그러지고 눈이 스르르 감겼다.
지칠 대로 지친 서해는 일요일 새벽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
* * *
주말 내내 열이 펄펄 끓어올랐지만 서해의 집 안에 있는 것이라곤 얼마 전에 사둔 2리터짜리 생수가 전부였다. 주말 이틀을 생수 한 병으로 버틴 서해의 얼굴은 더 핼쑥해져 있었고 몸에 얼마 남지 않은 살이 더 빠져있었다.
가뜩이나 커서 헐렁거리던 단벌의 슈트가 유난히 더 커져서 펄럭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넓은 로비를 가로지르는 서해의 발걸음은 전에 없이 힘겹게 보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무거운 손을 들어 올려 38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올라가는 동안 벽에 붙은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모습이 처참했다.
거울을 통해 본 셔츠 칼라 깃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멍 자국을 가리려 옷을 추켜올렸다. 조심한다면 대표에게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서해는 목을 가리는 데 집중하느라 젖혀지고 피맺힌 손톱을 못 보고 지나쳤다.
애써 머리를 정리하고 혓바닥을 빼내어 입술을 축여봤지만 말라버리다 못해 사라진 생기를 채워 넣을 수는 없었다.
“흠, 아아.”
생기가 없는 것은 하얗게 질린 입술뿐만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억눌려 있었다. 단어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목이 따갑게 긁혀 힘들었다. 마른침을 몇 차례 삼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38층 문이 열리고 응접실 카우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대표의 모습이 보였다. 서해는 억지로 목소리를 끌어 올리며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주말 잘 보내셨어요?”
“서 대리도… 잘, 보냈습니까.”
좀처럼 말을 씹거나 반복하는 법이 없던 대표가 서해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말을 끊어먹었다. 주말 내내 무슨 짓을 했는지 반쪽이 되어 겨우 걸어 들어오고 있는 서해를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대표는 사무실로 돌아 들어가려던 서해를 불러 세웠다.
“서 대리,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사람은 둘밖에 없어도 주간 회의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대표님.”
“이번 주부터는 마케팅팀 감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네, 대표님.”
“서대리가 지난주에 하던 업무가 계속 이어질 테지만 업무량은 증가할 수 있으니까 꼼꼼하게 살펴주세요.”
“알겠습니다.”
서해의 귓가에 이번 주에 해야 할 일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눈을 크게 뜨고 테이블을 내려 보자 면접을 보던 날처럼 자신의 자리 앞쪽에는 따뜻한 커피가 내려져 있었다.
이상하게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와 머리가 어지러웠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축축한 자신의 세상 속에 다시 찾아온 달콤한 순간이었다.
“어디 아파요? 안색이 안 좋은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서해는 자신의 앞에 놓인 따뜻한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서 들어 올렸다. 커피 한 잔이 뭐라고 울컥하는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아서 하겠지만, 아프면 미리 얘기하고 연차 당겨서 사용해요. 월요일부터 컨디션 조절 실패해서 한 주 업무에 지장 주지 말고.”
“자, 잠이 덜 깼나 봐요. 죄송합니다. 금방 정신 차릴게요.”
대표는 뭔가 이상한 서해의 반응을 주시하다가 숨을 탁 뱉어내었다. 이리저리 교차된 서해의 손가락 끝은 지난주와 다르게 피가 맺히고 젖혀진 손톱으로 엉망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서해의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자세히 살펴본 서해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목덜미로 새파란 멍 자국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 보였고, 카우치에 앉아서 말려 올라간 바짓단 아래로 발목의 생채기도 여럿 드러나 보였다. 어중간하게 한쪽 엉덩이에 힘주어 앉은 것으로 보아 엉덩이에도 큰 상처가 남아있을 것이 분명했다.
대표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임원진 회의 다녀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네, 대표님.”
서해는 집요한 눈빛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무실로 도망가듯 사라져 업무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다행스럽게도 아웃룩에 검토 요청이 들어와 있는 분석 건이 보였다.
서해는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힘껏 도망쳤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복잡하고 초조한 감정은 일에 집중하면서 조금씩 가라앉았다.
오전 내내 꼼짝없이 앉아 부지런히 업무를 처리하던 중 엘리베이터를 열고 나오는 대표의 모습을 보았다. 서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해와 눈을 마주친 그는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점심은 조금 조용한 곳에 가서 먹을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아, 네. 대표님. 잠시만요.”
“천천히 해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프로그램들을 저장하고 잠금 화면으로 돌려놓은 서해는 휴대전화와 지갑을 챙겨 들고 대표를 따라나섰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지하 2층을 눌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려가는 동안 침묵이 계속 흘렀다. 서해는 흘끗 바라본 거울 틈으로 비친 멍 자국에 뜨악하며 옷을 추켜올렸다.
임원 전용 주차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조작하자 멀리 주차되어 있던 검은 세단에 불이 들어와 주차장을 비추기 시작했다.
서해는 어색한 걸음으로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았다. 고급스러운 가죽과 나무 장식으로 이루어진 내부에 유일하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이었다.
엉덩이를 붙이고 안전띠까지 맸지만 불편한 분위기에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못한 채 몸을 바로 세우고 앉았다. 아직 덜 아문 엉덩이가 시트에 쓸려 따가웠다.
시동 걸린 세단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부드럽게 앞을 향해 나갔다. 회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왔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오늘 점심은 좀 여유 있게 먹읍시다. 서 대리 표정 보니 곧 쓰러질 사람 같기도 하고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대, 대표님. 저 진짜 괜찮아요.”
“거울은 보고 그런 소리 합니까? 같이 있는 사람까지 불안하게 할 계획이었다면 아주 성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서해는 손가락을 얽어 잡으며 손끝의 거스러미를 뜯었다. 묘하게 날카로운 대표의 말투와 행동이 서해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침묵 속에서 십여 분을 더 달렸다가 내린 곳은 정원이 딸린 사찰 음식 전문점이었다. 서해는 앞서서 걸어가는 대표를 따라 들어갔다.
음식점 내부는 정갈하고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직원은 서해와 대표를 밀폐된 룸으로 안내했다. 서해는 테이블 아래의 서랍을 꺼내 수저와 냅킨을 세팅하고, 테이블 위에 있던 주전자를 들어 올려 물을 따라 앞으로 건넸다.
대표는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서해의 팔목, 목덜미 사이로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멍 자국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해의 앞으로 작은 그릇에 담긴 죽이 놓였다. 정갈하고 깨끗한 음식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먹어요. 부드러워서 소화하기 좋을 겁니다.”
숟가락을 들고 하얀 죽을 조금 떠올렸다. 대표의 말대로 매우 부드러웠다. 엉망으로 난도질당한 서해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 따뜻한 식사였다.
서해는 차례대로 올라오는 음식을 천천히 먹었고 대표는 그런 서해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안심했다.
마침내 마지막 요리가 나오고 식혜와 수정과, 간단한 과일이 테이블 위에 깔끔하게 차려졌다. 포크를 집어 드는 손목에서 다시 멍 자국이 보였다 사라졌다.
“서해 씨.”
회사에 입사한 이후로 서 대리라고 부르던 대표가 서해 씨라고 부르자 눈이 동그래진 서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표는 단호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으며 서해를 마주 보면서 물었다.
“서해 씨, 혹시 원치 않는 플레이 중입니까?”
서해의 손에 들려있던 포크가 테이블 위로 떨어져 내렸다. 입안을 돌아다니고 있던 과일을 서둘러 삼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침묵하는 짧은 순간이 몇 분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말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플레이 강도가 서해 씨가 감당하기엔 지나친 것 같아서 묻는 겁니다.”
서해의 얼굴이 파랗게 물들었다. 단번에 과거를 관통하는 그의 시선에 몸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적당히 잘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머리가 하얗게 비워져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서해는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서 테이블 아래로 급히 손을 내렸다.
대표는 대답을 듣지 않았지만 들은 것 같은 서해의 표정에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누가 봐도 바짝 긴장한 모습이 대표의 시야에 들어와 박혔다.
“사적인 영역은 터치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온몸에 덕지덕지 묻혀와서 전력으로 봐달라고 아우성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면 잘 설명해 보세요. 원래부터 이렇게 하드한 타입의 플레이를 즐기는 성향입니까?”
“아, 아니, 아니에요.”
“애초에… 서해 씨 본인이 무슨 성향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대표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성향 같은 걸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권율기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헤집으면 헤집는 대로 가만히 있는 게 평생 해온 서해의 역할이었으니까. 서해는 집요하게 파고드는 날카로운 눈빛에 어깨가 저절로 앞으로 말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뜨거움이 끌어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을 녹여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가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것인지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타인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그대로 들킨 뒤에 남은 것은 저열한 감정의 찌꺼기였다.
서해는 가빠지려는 숨을 꾹꾹 눌러 담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대표님이 제 성적인 취향까지 아셔야 회사 일이 진행됩니까.”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사적인 선 넘어오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서해 씨야말로 선 넘지 말아요. 그 꼴로 회사에 들어와서 모른 척하고 있는 게 더 우습지 않습니까.”
“회사 업무는 지장 없이 처리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컨디션으로 지난주와 같은 속도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습니까? 누가 봐도 아닌 것 같은데. 어디 가서 물어보고 싶네.”
속이 뒤틀렸다. 들으라는 듯이 어디 가서 물어보고 싶다는 대표가 원망스러웠다. 테이블 아래로 꽉 쥐어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잔뜩 경계하고 몸을 웅크린 상태였지만 그와 마주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겨우 버티고 있는 서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대표의 이성이 끊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회 초년생이 공사 구분 못 하고 달려드는 모양새처럼 입 밖으로 쏟아지는 말을 참을 수 없었다.
“서해 씨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본데, 적어도 본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알고 덤비세요. 침대에서나 회사에서나 다 같이 해당하는 말입니다.”
“대표님이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내 밑에서 일하는 직원을 내가 챙기겠다는 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바짝 날 선 대화가 오가고 서해의 초조함도 더 짙어져 갔다. 테이블 아래에 숨은 손끝이 잘게 떨려왔다. 서해는 손끝의 거스러미를 거칠게 뜯어내고 손톱을 비벼댔다.
대표는 보지 않고도 그걸 금방 알아챘다.
“테이블 위에 손 올려요.”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테이블 위에 손바닥 펴서 붙여요. 피 날 때까지 뜯을 생각이 아니라면 시키는 대로 해요. 사람 열받게 하지 말고.”
단호한 명령조에 말에 당황한 서해는 저도 모르게 시키는 대로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살짝 겁먹은 얼굴로 그를 힐끔 쳐다봤다. 뭐라고 계속 쏘아붙일 것 같던 대표는 서해 앞으로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네었다.
“지금 모시는 주인님한테도 이렇게 발톱 바짝 세우고 달려듭니까? 그래서 이렇게 죽기 직전까지 맞고 다니는 거예요?”
서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어진 몸을 숨기지 못하고 당황했다.
“그, 그런 사람 없어요. 대표님이 뭔데, 대표님이 뭔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시는 건데요!”
“없으면 뭡니까, 질펀하게 원나잇이라도 하고 다녀요?”
“대표님, 제발!”
더 이상 대표를 쳐다볼 수 없어진 서해가 고개를 숙였다. 정신이 한계까지 몰아붙여지는 기분이 들었고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없을 것같이 컨디션이 떨어져 내렸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 곳에서 마주한 낭떠러지 앞에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표는 비뚜름하게 앉아 서해를 내려다봤다. 불안정한 상태에서도 시키는 자세를 유지하고 앉아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피어났다.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착실하게 안 떼고 있네요. 내가 서해 씨 주인님도 아닌데.”
화들짝 놀란 서해가 고개를 들어 대표를 쳐다보았다. 테이블에 붙은 손바닥을 타고 소름이 돋아나 서해의 온몸에 퍼졌다. 머리카락 아래에서 누군가 머리를 쥐었다 폈다 하는 것 같은 끔찍한 감각에 몸서리쳤다.
반듯한 얼굴에 걸린 웃음을 읽은 서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앉아요. 얘기 덜 끝났습니다.”
“…저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으십니까. 이러려고 채용하신 겁니까?”
“앉아.”
탐색전은 쉽게 끝나고 말았다. 대표는 태연하게 차를 마시며 서해에게 명령을 내렸다. 굳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서해가 자신의 명령을 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해는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짓누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두 손은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채였다. 대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차를 들이켰다.
“따뜻한 차 마시면서 진정하고 들어요. 불편하면 손은 편하게 올려둬도 좋습니다.”
완패였다. 서해는 피할 수 없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표의 말대로 따뜻한 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자 날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렇게나 떨려 나오는 호흡이 룸 안에 뱉어졌다.
“나쁜 의미로 몰아붙이려던 게 아닙니다. 직장 상사로서 서 대리 업무 능력 좋은 거 인정합니다.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내 업무를 덜어주기에 충분했어요. 나이나 경험보다 아웃풋도 좋고 직관 자체가 날카로워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
“그런데 너무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걸 놓게 되는 때가 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서 대리가 이렇게까지 절박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어디가 됐든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말아요.”
담담한 목소리가 룸 안에 울려 퍼졌다. 대표는 재킷 안쪽에서 약 봉투를 꺼내 들었다. 허공에 내밀어진 서해의 손끝은 엉망진창이었다.
“받아요. 몸살이랑 근육통에 잘 듣는 약으로 받아 왔으니까.”
“…감사합니다.”
서해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던 사람이 내미는 약 봉투를 받아들고 얼떨떨했다.
“뭐 합니까.”
“네?”
“약 먹어요. 지금 당장.”
잔뜩 굳은 얼굴로 서해가 약을 먹는 것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대표는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창백하고 핼쑥해진 서해를 보던 그가 되물었다.
“오후 근무는 할 수 있겠어요?”
“…네. 문제 없습니다.”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 그가 등을 돌려 밀폐된 룸을 빠져나갔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자꾸 내보이게 되는 상황 앞에서 온몸에 힘이 빠지고 현기증이 났다. 잠시 몸을 웅크리고 앓는 소리를 뱉어낸 서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나섰다.